초원의 향기
이인화
제 1부 되살아난 아란두
1
싸늘한 겨울밤이었다. 바람도 없는 밤하늘엔 연기처럼 희미한 구름이 걸려 있고 그 사이
로 뭇볓들이 반짝였다. 별들은 영원히 드높은 천자의 별, 북극성을 에워싸고 조용히 자기 길
을 걷는 듯이 보였다. 당나라 장안성 밖 용무영의 병영은 밤의 요요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이곳은 수도 장안성을 지키는 군부대들의 주둔지였다. 전국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병만 2
만 5천여명. 통나무로 만든 울타리 위에 촘촘히 뻗어간 40여 개의 망대가 자못 철통 같은
경비를 말해주고 있었다. 설령 보초가 없다 해도 누가 감히 이곳을 범할 것인가. 때는 고종
황제의 총장 원년(668년) 섣달 스무여드레였다. 겨울이었지만 천하는 보이지 않는 평화의 봄
기운이 완연했다. 몇 달 전 그토록 오래 전쟁을 치른 고구려가 완전히 정벌되었기 때문이다.
당조의 치세는 반석 위에 올려진 것 같았다. 용무영 앞 장안성으로 통하는 큰길은 아침마
다 밀려드는 수레며 마차로 미어터졌다. 수백년 계속되던 전란이 씻은 듯이 사라진 거리. 사
람들은 어깨를 펴고 밖으로 나와 개명천지 밝은 세상을 노래했다. 백세, 천세, 만만세, 이 세
상 만기를 주재하시는 우리 황상과 황실을 찬양할지라.
그러나 모두가 단꿈에 취한 이밤. 정체를 알 수 없는 네 명의 괴한들이 용무영에서 100걸
음쯤 떨어진 허름한 오두막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들은 농기구를 넣어두는 창고로 들어가
땅바닥의 볓짗들을 치웠다. 볏짚 아래 감춰져 있던 나무판대기를 들어내자 조막하게 만들어
진 땅굴이 나타났다.
"그대로 있었군! 발각되지 않았어!"
"문제는 반대편이지. 그쪽 출입구가 무사해야 돼......"
네 명은 불안한 눈길을 나누더니 차례차례 좁은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네 명의 괴한들은 용무영 안 임시막사 구역의 잡목 숲에서 기어
나왔다. 그들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고양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완전히 미친 짓
이었다. 외부인이 이런 식으로 용무영에 침투한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었
다. 그런데도 이들은 용케 좁고 어두운 통로만을 골라 돌며 순시병의 눈을 피해갔다.
이윽고 괴한들은 곡물창고를 지나 병기고 옆에 있는 감옥에 도착했다. 감옥 앞에는 세 발
이 달린 둥그런 쇠접시 같은 화로에 불이 지펴져 있고 언월도를 든 병사 둘이 있었다. 그들
은 전혀 졸지 않았고 무슨 말인가를 수군거리며 화로 옆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괴한들은 병기고 그늘에 엎드려 서로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병기고
에서 감옥까지는 너무 멀었다. 달이라도 없다면 몰래 기어가서 어떻게 하겠는데 그것이 불
가능했다. 네 사람의 이마엔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난 몇 달 사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유
린되었다. 나라도 재산도 가족도 그리고 신앙도. 이제 그들이 더 잃을 것이라곤 목숨밖에 없
었다. 저 감옥 안에 있는 사람만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괴한들은 등에 짊어졌던 보따리를 끌러 이상하게 생긴 활을 꺼내었다. 천보목노였다. 고구
려군이 사용하던 일종의 석궁으로, 활에 직각으로 나무받침대를 달고 놋쇠로 만든 방아쇠
장치를 장착한 것이었다. 품속에 숨길 만큼 작은 석궁이면서도 글자 그대로 1천보를 날아갔
다.
그러나 비명소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급소를 명중시키지 못한다면 병사들은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러면...... 온갖 절망적인 상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괴한들은 두 발바닥으로 활을
누르고 두 손으로 안간힘을 다해 시윗줄을 당겨 방아쇠에 걸었다. 그리고 화살을 장전하면
서 저마다 신들의 가호를 빌었다.
달이 검은 구름 뒤로 들어갔다. 순간 투둑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몸이 소스라쳤
다. 두 병사가 거의 동시에 창을 떨구고 무릎을 꺾으며 쓰러졌다.천보목노의 위력은 무시무
시했다. 한 병사는 목과 몸통을 관통당했는데 두 대 모두 화살촉이 등뒤까지 튀어나와 있었
다. 비명조차 못 지르고 즉사했던 것이다. 다른 한 병사는 화살이 쇠로 된 투구를 뚫고 머리
를 관통해버렸다. 그 병사는 눈동자를 허옇게 뒤집은 채 쓰러져 괴한들이 달려갈 때까지 거
의 뇌수를 흘리며 사지를 떨고 있었다.
괴한들은 재빨리 시체를 끌어 숨겼다. 그리고 조용히 감옥의 문 앞으로 돌아와 칼을 뽑았
다. 괴한들의 우두머리가 문을 두드리며 간수를 깨웠다.
"뇌사님, 뇌사님, 일어나세요. 누가 순찰 나왔습니다."
한참 후에 감옥 안이 부스럭거렸다. 한 사람이 문 빗장을 열며 잔뜩 잠기가 묻은 목소리
로 투덜거렸다.
"아아, 또 뭐야아? 숙부장도 아까 다녀갔는데에......"
커다란 빗장과 자물쇠가 달린 철문이 열리는 순간 네 명의 괴한들이 거의 동시에 뛰어들
었다. 문을 열던 간수는 앗 하는 사이에 목이 잘려 날아갔다. 목을 잃은 간수의 몸이 비틀비
틀 쓰러지기도 전에 괴한들은 간수장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이 자들은 감옥 안까지도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었다. 설마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간수장
은 어, 어,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 옆에서 자고 있던 두 사람의 간수도 순식간에 살해되
었다.
두 명이 언월도를 들고 감옥 밖으로 나가 보초 행세를 했다. 다른 두 명은 열쇠꾸러미를
들고 감방으로 향했다. 감옥의 석벽은 창문이 없어서 복도 좌우로 들어간 감방들은 캄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축 우리에서 나는 것 같은 지독한 악취가 풍겨왔다. 다급해진 우두머
리가 목소리를 낮추어 외쳤다.
"고복사님, 고복사님 어디 계십니까?"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불안에 떠는 대답이 들렸다.
"누, 누, 누구신가?"
두 괴한은 나는 듯이 달려갔다. 서둘러 열쇠를 맟줘 옥문을 열고 갇혀 있던 중년의 남자
를 구해냈다.
"아란두님은 어디 계십니까?"
"저기 저 방일세."
또 하나의 옥문이 열렸고 늘씬한 키의 젊은 처녀가 걸어나왔다.
열여섯 살쯤 되었을까. 옅은 보라색의 화려한 비단 저고리에 인동초 무늬 장식을 단 허리
띠를 매고 극히 미세하게 주름들을 만든,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를 입었다. 의복은 감옥 안
에서 더러워지고 머리칼도 흐트러졌는데 그녀의 얼굴은 기적 같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고구려 왕녀 특유의 기품과 위엄을 갖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향기처럼 단숨에 보는 이
들을 사로잡았다. 괴한의 우두머리가 무릎을 꿇었다.
"소인은 대염모라 하옵니다. 돌아가신 제사장님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아란두님을 뫼시러
왔사옵니다."
처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으로부터 어
떤 신비한 힘이 대염모를 향해 부어졌다.
"고마워요. 고생이 많았겠어요. 여기는 위태로우니 빨리 나갑시다."
처녀의 얼굴은 침착하고 평온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겪은 모든 고난과 모욕을 삼켜버
린 거대한 강물 같았다. 대염모는 걷잡을 수 없는 감격에 가슴이 북받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처녀의 이름은 아란두, 본래 주몽왕을 낳으신 모든 고구려인들의 어머니와 같았다. 진정
그 이름이 욕되지 않으실진저. 진정 신들이 약속하신 새로운 광야의 어머니실진저. 대염모는
처녀를 우러러보며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는 신들이 이 지상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시는 날이 오리라. 그러나 아직은 아니리
라. 나라는 망하고 신전은 불탔다. 조상들의 땅에 다시 어둠의 권세가 찾아왔다. 그러나 아
직 하늘님 당고르와 동방의 지고한 신들이 살아 있도다. 멸망의 날에 신들께서 약속하신 그
어머니가 우리 곁에 있도다. 이 아름다우신 모습을 보라! 이 다정하고 성스러운 목소리를
들어보라! 신들께서 이분을 보내셨도다. 아란두가 부활하셨도다!
2
고문간은 열아홉 살이었다. 키는 좀 큰 편이었지만 얼굴은 귀염성이 있었다. 정부물자 조
달청인 소부감에서 관리로 근무했는데 기억력이 비상해서 상사들의 총애를 받았다.
요근래 고문간은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보름 전 길에서 우연히 어던 고구려 여
자를 만나고부터였다. 겨우 한두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가정환경상 어릴때부터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들을 신물이 넘어오도록 보아왔지만 이런 일
은 처음이었다. 팔깍지베개를 하고 누워도 계속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다시 만날까? 무슨 수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오만가지 전략을 세우다
보면 어느새 뿌옇게 동창이 밝아오곤 했다.
일에 집중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 며칠 전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 그의
주의를 간신히 본연의 직무로 돌려놓았다.
그날은 관리들의 잘잘못을 감시하는 어사대의 감찰사가 소부감에 들렀다. 소부감이 관할
하는 방직공장과 염색공장의 부정에 대한 고발 때문이었다. 태감 이하 소부감 사람들 모두
가 무릎을 떨었다.
감찰어사는 몇 가지 의문을 서슬 푸르게 추궁했는데 한동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때 장부를 뚜르르 꿰고 있는 문간이 나와서 정확하게 해명을 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문간의
명석함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감찰어사는 소부감을 떠나기 전에 문간을 조용히 불렀다.
"자네, 어사대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
"예에?"
"우리 어사대에는 유능한 회계사가 부족해. 그래서 각 관청을 규찰하는데 애를 먹고 있
어."
"소인은 나이가 어립니다. 소부감 외의 일은 아무것도 모르구요."
"자네 같은 인재가 소부감에서 썩고 있으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 자네 조정의 세수가 얼
만지 아나? 동전 3천억 관, 쌀 600억 석, 비단 740만 필을 거둬들여야 이 나라가 돌아간다
네. 그런데 관청에 비축된 쌀은 6천706만 3천520석뿐이야. 1억석도 안되는 예비비로 늘 간당
간당하게 나라살림을 꾸려간다구. 조금만 방심했다간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그런데도
회계사 놈들은 점점 더 놀고 먹을 궁리만 한단 말야."
"전들 뭐 다르겠습니까?"
"최소한 투자(주사위노름)는 안하겠지! 자넨 아직 나이도 어리고 순진해보이니까. 내 밑의
옘병할 자식들은 허구헌 날 그 짓이거든. 지난달엔 노름빚 많은 놈들을 찾아 넷이나 내쫓았
다네. 하지만 소용없어. 안하는 놈이 없는걸."
"저는 아직 품관도 없는 말단이에요. 그저 여기서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하게 해주세요."
"에잇, 맹한 소리 그만두게! 내 감찰반에 오면 당장 승진시켜줌세. 자네를 서령사로 발령
해서 회계사들을 지휘하게 할 생각이야."
너무나 파격적인 제의에 고문간은 이게 꿈이냐 생시냐 싶었다.
서령사가 된다는 것은 지금의 직급에서 두 단게나 특진하는 것이다. 더구나 어사대의 서
령사는 말이 품관이 없는 유외지 실질적으로는 9품관, 8품관보다도 더 권한이 큰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어사대의 서령사가 되면 종7품 도사까지의 승진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문간은 서류에 코를 박고 찍소리도 하지 않았
다. 몰래 어사대와 약조를 하고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건 또 의리상 찝찝한
일이었다. 괜히 소부감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눈길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오늘은 섣달 스무아흐렛날. 문간은 수판과 토끼털 붓을 들고 장부와 씨름하고 있었다. 소
부감의 공인 1만 9천 150인의 품삯에 대한 결산작업이었다. 견습공, 방직공, 염색공, 소목공,
금은세공사 등 직종과 경력에 따라 계산은 복잡했다. 막 검산까지 마치고 드디어 총장 원년
의 연말결산을 끝냈을 때 급사 아이가 태감의 집무실로 오라는 전갈을 가져왔다.
어사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드디어! 쿵쾅쿵쾅 가슴이 뛰었다. 문간은 빗을 꺼내어 옆머리를 고르고 관모를 고쳐 썼다.
미래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아닌가. 어머니와 외삼촌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런데 책상을
치우고 결산서류를 상자에 넣었을 때였다. 난데없이 한 무리의 감찰사들이 들어오더니 문간
을 에워쌌다.
그들의 선두에는 깡마르고 이마가 넓은 낯선 고관이 서 있었다. 문간은 그의 손에서 어사
대를 상징하는 검은 대나무의 지휘봉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종4품 어사중승의 신물이
었다. 문간은 황급히 오른발을 뒤로 빼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쥐었다.
"네가 감사 고문간이냐?"
"그러하옵니다."
어사중승의 입에서 추상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이놈을 포박해라!"
문간은 경악했다. 거칠게 넘어뜨려져 오랏줄에 묶이면서도 문간은 믿을 수가 없었다.
"대, 대, 대감,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닥쳐라!"
"소인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소인의 죄가 무엇이옵니까?"
"모반죄다."
모, 모, 모, 모반...... 문간은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가 뻣뻣해졌다. 그는 눈을 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문간은 돌벽으로 된 좁고 긴 감방에 처넣어졌다. 잠을 잘 수 있도록 별을 따라서 한 자
높이의 나무로 된 마루가 있었는데 죄수는 그 혼자밖에 없었다. 마루 틈에서는 빈대가 들끓
었고 구석구석 썩어가는 음식찌꺼기와 배설물에서 생긴 악취들이 고여 있었다 문간은 미친
듯이 감방을 서성이다가, 창살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다가 어헝허엉 울기 시작했다.
모반죄라니? 모반죄를 범한 자는 허리를 자르고 시체를 3일 동안 거리에 전시한다. 부모
형제도 연좌시켜 가혹하게 처벌한다. 차라리 지금 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것이 좋지 않을
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문간은 시험을 치지 위해 외웠던 법조문(명례율 십악대죄
조3항 '모반')을 생각했다. 모반은 <나라를 등지고 거짓을 좇는 것> <조정을 배신하고 장차
다른 나라에 투항하고자 도모하는 것> 이었다. 이 무슨 환장할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한참 울고 패앵 코를 풀자 마음이 좀 후련해졌다.
문간은 성질이 급하고 덤비는 면이 있긴 하지만 본래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문간은 감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생각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설마 이렇게 재수없이 죽을 수야 있겠나. 대체 왜 죽는지는 알아야
죽을 것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없었다. 문간은 자신의 가족들까지 더듬어
보았다.
문간의 아버지는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젊었을 때는 군인이었다.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이
있었을 때 요동성에서 포로로 잡혀 중국에 들어왔다. 고씨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왕족은 아
니며 중국에 들어온 뒤에 가짜로 갖다 붙였다고 하는 사람도 잇다. 그의 아버지능 어찌어찌
하여 당나라 군대의 통역장교가 되더니 얼마 뒤 한밑천을 들고 퇴역해서 장안성 밖에서 객
잔을 차렸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고구려 처녀를 얻어 결혼했다. 바로 그의 어머니다.
문간이 태어나자 아버지는 군대 행정관을 구워삶았다. 문간은 분대장으로 등록되어 다 자
랄 때까지는 멀리 평주의 부대에 파견된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
다.
"이렇게 해서 이놈을 열네 살에 여수(중대장)로 만드는거야. 그래, 군인이란 게 세상에서
제일 고약한 일이긴 해. 하지만 이놈한테 이 물장사 안 시키려면 달리 뭘 시키겠어? 다행히
이 나라는 군인한테 아주 잘해주거든. 누가 알아. 나중에 이놈이 대장군 나으리가 될지."
그러나 아버지의 꿈은 그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나버렸다 문간이 세 살 되던 해 어
떤 염상의 아내에게 혹해서 어찌하였다가 격노한 소금쟁이 패거리들에게 맞아죽었던 것이
다.
그 뒤 객잔은 어머니와 외삼촌에게 맡겨졌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시장에서 여자들을 사모
으고 집을 수리해서 객잔을 아예 <명옥원>이라는 기녀원으로 바꾸었다. 여자들 중에는 고
구려 여자도 있었고 돌궐 여자, 거란 여자, 말갈 여자, 토번 여자, 머리칼이 붉은 파사(사산
조 페르시아)여자도 있었다. 어떨 때는 나라가 망해서 헐값이 된 고창(투르판 분지에 있었던
코초국) 여자들이 무더기로 들어오기도 했다.
장사는 아주 잘 되었다. 명옥원은 부패한 관리들, 부잣집 망나니들, 멀리서 온 장사꾼들로
밤마다 흥청거렸다. 문간은 싸움소리와 노랫소리, 불 꺼진 방마다 들리는 <이모>들의 이상
한 신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라났다. 문간이 그런 환경에서 공부하여 열일곱 살에 관리가
된 것은 정말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그가 합격한 <유외고과(일명 소전. 상서성의 이부낭중
이 주관하여 서, 계, 시무의 3가지 시험을 봄.)>라는 것은 하급관리 임용시험이긴 했지만 능
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승진이 가능했다.
"댁의 아드님은 머지않아 현위가 되겠군요."
누가 이런 말만 하면 문간의 엄마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어렸을 때 현위 집에서 하
녀 노릇을 했던 그녀에게는 세상에 현위만큼 좋은 벼슬이 없었다. 문간의 엄마는 마흔이 가
까웠지만 예쁘장한 얼굴에 눈이 민첩하게 움직이고 말소리는 사근사근한, 수완이 좋은 여자
였다. 엄마는 백방으로 운동을 해서 문간을 가장 실속 있다는 소부감에 배치받게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문간의 부모들은 명색만 고구려 출신이지 실상은 누구보다도 충성스론
한인이었다. 누구나 실력만 있으면 발탁되는 이 나라에서 새삼스럽게 그의 출신을 트집잡아
모함을 할 사람도 없었다...... 문간은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뒤척거렸다.
날이 밝기 무섭게 심문이 시작되엇다. 네 명의 위병들이 문간을 아무런 장식도 없는 넓은
방으로 데려갔다. 문간은 낮고 긴 책상 앞에 꿇어앉혀졌다. 책상에는 세 사람이 나란히 좌정
하고 있었다. 문간은 그들의 관복으로 자신이 연루된 사건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책상 중앙에는 어깨가 딱 벌어진 마흔 살쯤 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지적으로 생긴 각진 얼굴에 코가 뾰족하고 얼굴선을 따라 턱수렴을 가느다랗게 기르고
있었다. 그는 금실로 호랑이를 수놓은 자색 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허리에 오연히 두른 옥대
에는 뿔 없는 용을 번쩍이는 금패와 화려한 장식용 칼이 달려 있었다. 이것은 종3품 대장군
의 복색이 아닌가. 문간은 뜻밖이었다. 법에 의하면 관리인 문간은 어사대나 대리사(중앙최
고재판소. 관리들의 범죄를 수사하며 전국의 사법기관에서 내려진 징역형과 유배형의 판결
을 번복할 수 있다.)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왜 군지휘관이 나를 심문한단 말인가?
어쨌든 그 왼쪽에는 어제의 어사중승이 앉아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호화로운 비단옷을 입
은 귀족이 앉아 있었다. 귀족의 용모는 옷차림과는 달리 여태까지 마구간에서 굴러먹은 듯
한 천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거만하고 의심이 많아보이는, 비웃는 듯한 두 눈 밑에는 흐
물흐물한 살주머니가 늘어졋고 얼굴빛은 거무튀튀했다. 통이 넓은 비취색 바지를 입고 금으
로 장식된 허리띠에 긴 칼을 차고 있어서 지위가 높은 군인임을 알 수 있었지만 킁 킁 하며
콧구멍을 후비는 품이 무척이나 더럽게 보였다. 이 세 사람의 옆에는 두 개의 작은 책상이
놓여져서 서기들이 배석하고 있었다.
심문관은 더럽게 생긴 귀족이었다. 그는 먼저 문간의 부모에 대해 물었다. 문간이 자신 있
게 부모의 이력을 진술하자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집실아육이라는 돌궐 놈이 누구야?"
문간은 당황했다.
"저희 집 하인입니다. 18년째 저희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너희 집에서 무슨 일을 했나?"
"저를 키우면서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줬습니다. 아육은 돌궐 사람이지만 한문을 잘합니다.
견문이 넓고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놈이 탈영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문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탈영병을 숨겨주는 것은 중죄였다.
"몰랐습니다."
"거짓말 마, 이 자식아!"
심문관은 꽥 고함을 쳤다. 순간 그는 옆에 앉은 대장군을 의식했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고
경멸어린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네놈은 일찍 아버지를 잃고 집실아육의 손에 양육되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놈에게서
부정 같은 것을 느꼈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그 자가 왜 18년 동안이나 하인으로 숨어지내
는지 몰랐단 말이야?"
문간은 진땀을 흘렸다. 간신히 변명의 말을 찾아내었을 때 심문관은 또 다음 질문으로 넘
어가고 있었다.
"23일 그러니까 7일 전에 집실아육은 네놈 집으로 고구려인 넷을 데리고 왔다. 그놈들을
알고 있지?"
문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반>이라는 것의 꼬투리가 이것이었나 싶었다.
"오가는 길에 보긴 했습니다만 말을 나눈 적은 없습니다."
"이 자식아! 절구에 넣어 빻아버릴 테다! 자꾸 덜떨어진 수작 늘어놓을 거야? 짜식아, 그
별채의 주인이 네놈 아냐? 닷새 동안 낯선 놈들을 넷이나 먹여살리면서 말 한마디 없었다는
것이 말이 돼!"
"별채에는 항상 객식구들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돈 얻으러 온 기녀의 아버지도 자고 가고
손님을 따라 온 하인들도 자고 갑니다. 그래서 일일이 신경을 쓸 수가 없습니다."
별채는 어머니가 문간에게 <조용하게> 글공부를 하라며 내준 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었고 평소 무전취식자, 뚜쟁이, 기둥서방, 행패부리고 배상해줄 사람을 기다리는 난동
꾼들이 들끓었다. 어떨 때는 방이 셋인 별채에서 두 방을 내놓고도 모자라 문간과 아육이
같이 자는 방에까지 손님이 들기도 했다. 아육이 자기 방에 네 사람을 묵게 했을 때도 문간
은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바쁜 연말이라 문간은 눈만 뜨면 소부감에 달려가야 했고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 네 명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명옥원에서 그들은 극단적
으로 조용했고 모든 행동을 자제했다. 낮동안 아육의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해가 지면 한
사람씩 교대로 나와 담장 안에서 바람을 쏘이는 눈치였다. 언제나 혁대를 두르고 모자를 쓰
고 있어서 금방 어디로 떠나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때 아무 말이 없던 책상 중앙의 대장군이 심문에 끼여들었다.
"일단 넘어가! 너, 그놈들의 생김새부터 말해봐!"
문간은 진땀을 흘리며 고구려인들의 용모를 설명했다. 두 명의 서기는 열심히 진술을 받
아 적었다. 탐문의 화살이 돌려지자 문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
대장군은 흥 하고 싸늘한 코웃음을 날리며 책상을 탕 쳤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눙치고 넘어가려느냐! 뚜쟁이질이나 하는 놈이! 그 따위 수작 부
리면 손톱을 뽑고 정강이를 분질러버리겠다!"
문간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는 그만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렸다.
"말씀 삼가십시오!"
문간은 대장군을 사납게 노려보며 벌떡 일어났다.
"기녀원을 하는 건 내 모친이지 내가 아닙니다. 대장군께선 지금 권한을 남용하고 계십니
다. 저는 정식으로 임명된 관리이니 절차를 밟아 문초해주십시오! 관리인 제가 군인인 여러
분께 잡혀온 이것부터가 불법입니다. 공연한 희롱은 더욱 사절하겠습니다!"
대장군과 심문관, 어사중승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위병이 다가와 문간의 어깨와 등을 방망
이로 갈겼다. 문간은 다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야 했다. 대장군은 위병을 제지하더니 껄걸
웃었다.
"으하하하하, 뼉다귀가 굵은 놈이군. 조정의 문무백관 중에 나 배행검에게 그렇게 고함을
지른 놈은 네놈이 처음일 것이다. 으하하하."
이번에는 문간이 놀라 자빠질 차례였다.
배행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신책군의 총수, 그 유명한 신책대장군이었다. 신책대장군
은 전국 보안부대의 총사령관으로 국가기밀에 속하는 모든 사건을 황제로부터 직접 지시받
고 보고하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사람들은 배행검을 재주와 배짱을 함께 가진 일세의 효웅
이라고 했다.
수양제 시대의 명장 배인기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배행검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
이 자자했다. 그는 당고종이 황후 왕씨를 내좋고 무조를 황후로 만들 때 끝까지 반대함으로
써 자신의 <뼉다귀>를 증명했다. 훗날 측천무후라 불리는 불세출의 여걸 무조는 일단 황후
가 되자 눈 깜짝할 사이에 반대파를 축출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반대파들은 대부분 자살하
거나 무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 배행검은 용케 여기서 살아남았다.
무후는 무자비한 권력의지로 무장한 교활하고 잔인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신상
필벌에 엄격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발탁할 줄 아는 미덕도 있었다. 무후는 배행검을 잠시
서주도독부의 장사(군단 참모장)로 좌천시켰다가 이부시랑(내무성 차관)에 복귀시켰고, 곧
완전히 구워삶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군략에 통달하고 문장에도 뛰어난 배행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때의 정적이었던 배행검은 지금 무후의 권력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의 책임자로 군말 없이 일하고 있었다.
배행검이 기분좋게 웃자 금방이라도 문간을 씹어먹을 듯 눈을 부라리던 심문관도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심문관은 알아두라는 식으로 한마디 던졌다.
"이봐, 잘난 관리 나으리, 당신의 별채에 머물던 자들이 어떤 놈들인지 아나? 열흘 전 장
안성에서 고구려의 귀족들을 살해하고 도망친 바로 그놈들이란 말이야."
"예에? 어떻게 그런 일이......"
"그뿐만이 아니야. 그 자식들은 이틀 전에 더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다. 넌 고여락의 딸을
알고 있지? 그 딸년에 대해 아는 것을 다 말해봐."
이 대목에서 대장군과 어사중승의 눈빛이 반짝였다. 문간은 어깨를 떨었다.
"딱 한번 만났을 뿐입니다. 고여락이 처형당한 다음날이었습니다."
문간은 그녀의 용모와 그녀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그날의 상황을 더듬거리며 진술했다.
문간은 애가 타서 한 번 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놈들이 그 여자를 죽였나요?"
"바보 같은 자식, 그년이 바로 이 사건의 주범이야!"
심문관이 코방귀를 뀌며 잘난 척을 했다. 그때 배행검이 심문관의 팔을 쳤다. 더이상 말하
지 말라는 뜻이었다. 심문관은 얼굴빛이 확 바뀌며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조서에 코를 박았
던 심문관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년이 체포되는 대로 대질을 시킬 거야. 바른 대로 대지 않으면 네놈은 물론 네놈의 가
족들도 살아남지 못해! 여봐라, 이놈을 데리고 갓!"
심문관은 문밖에 시립한 병사들을 불렀다. 그들이 문간의 양팔을 붙들고 일으켜 세웠을
때 문간은 허리 아래가 뭉청 끊어져 나간 것처럼 맥이 풀려 있었다. 병사들은 문간을 다시
감옥 안에 처넣었다.
3
첫 심문을 받은 고문간은 사흘이 지나도록 불려가지 않았다. 철창 밖을 엿들으니 그말고
도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온 것 같았다. 그것은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아직도 수사가 진행중
이며 자신의 혐의는 확정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밥을 넣어주는 위병에게
이곳이 신책군에 속한 감옥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암시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 문간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감옥 복도로 질질 끌려오는 사람
을 보았다. 문간은 깜짝 놀라 쇠창살에 매달렸다.
"아저씨!"
다름아닌 문간의 하인 아육이었다. 아육은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지 아무리 불러도
죽은 듯이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두 병사에게 두 팔이 하나씩 잡혀 아육은 그렇게 복
도 끝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저씨! 아저씨!"
문간은 창살을 흔들며 아육을 부르다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심문관의 예리한 추궁처럼 아육은 단순한 하인이 아니었다.
아육은 본래 명옥원의 허드렛일꾼으로 채용되었는데 나중에는 문간만을 맡아 돌보게 되었
다. 문간의 어머니가 너무 바빠 아들에게 거의 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육은 철이 들 때
까지 문간을 세수시키고, 머리도 빗기고, 밥도 먹이며 글을 가르쳐 주었다.
아육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요리도 잘했고 술도 잘 빚었다. 어쩌다 술에 취하면 호비
파를 튕기며 구슬픈 중국노래도 곧잘 불렀다. 그중에는 자신이 직접 노랫말을 짓고 곡을 붙
인 것도 있었다. 꽃이 피면 비바람이 많고 사람으로 나면 이별이 많다네. 만리에 헤어진 아
내 생각에 말 탄 채 뜯어보는 비파소리여.
알고보니 아육은 군대에서 도망친 탈영병이었다. 당시 돌궐 사람들이 거의 그랬듯이 당나
라 군대에 징용되어 많은 싸움터를 떠돌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모든 것이 먼지처럼 흩어져
갔다고 한다. 명예로웠던 돌궐 <쭈스> 부족의 <아르틴치(여섯째)>는 <집실아육>이라는 우
스꽝스런 이름의 중국인이 되었다. 고향은 황폐해졌고 사랑하던 아내는 오구츠의 습격을 받
아 납치되어버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육의 시선은 먼 북쪽에 붙박여 있곤 했다. 도망쳤지만 고향의 초원
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곳엔 당나라의 주둔군 사령부(선우도호부)가 있어서 아육과 같
은 탈영병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뭘 할 것인가. 어디 가서
아내를 찾을 것이며 찾아도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아내와 함께 무르익은 초록의 들판을 말
을 타고 달리던 오르혼 강변의 여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벌써 어
느 오구츠 사내의 아낙이 되어 자식들을 낳았을 것이다.
문간이 공부에 마음을 붙인 것은 전적으로 아육 때문이었다. 그만큼 문간은 온 마음을 기
울려 아육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책을 읽는 것, 그와 단둘이 외출하는 것,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문간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아육은 늘 책 한 권을 겨드랑이에 끼고 문간을 불렀다. 그리곤 이상
스럽게 눈을 껌뻑이면서 그 기다란 손가락으로 샛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면 둘이는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갔다. 집 뒤편은 양지바른 언덕과 숲이었다. 아, 거기서, 두견새의 쫑알
거림 속에서, 마르고 보드라운 풀 위, 은빛 백양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둘은 얼마나 많은 이
야기를 나누었던가. 아육은 자신의 기구한 생애를 자세히 들려주었고 문간은 눈물을 글썽이
며 동정을 아끼지 않았었다.
아육은 자주 말했다.
"죽기 전에 고향에 가고 싶어. 꿈을 꾸면 밤마다 그 아늑하고 정겨운 초원을 본단다. 먼
지평선에는 항가이산맥이 검은 띠처럼 이어져 들과 하늘을 잇고 있어. 굽이굽이 초원을 감
돌아 흐르는 오르혼강엔 푸른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주변엔 흰구름같은 양떼들과
한가로운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지. 그 초원의 강기슭, 늙은 느릅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곳에 하얀 천막으로 된 나의 집이 있어.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더라. 옛날 그대로......
꿈속에서 나는 말을 타고 집으로 달려가지. 그러면 그 곳에서 쿠란이, 쿠란이 바느질을 하다
가 활짝 웃으면서 뛰어나오는 거야."
언젠가 한번은 눈치 없는 문간의 어미나가 아육을 장가들여주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다.
큰 키에 몸매가 가냘픈 아육은 하루종일 어딘가 사라졌다가 나타나 우울한 얼굴로 문간을
불렀다.
"어머님에게 생각해주셔서 고맙다고 전해다오. 하지만 나는 다시 처자를 거느리고 싶지
않구나. 기분 상하시지 않게 잘 말씀드려다오."
그리고 아육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제사장이 되어 있을 거야."
전혀 앞뒤도 맞지 않는 소리였지만 문간은 얼른 알아들었다. 군대로 끌려오기 전에 아육
은 가한정(칸 발리크. 7세기초 돌궐제국의 대가한이 살던 거대한 유목도시. 지금의 몽골 아
라항가이 지방 외퇴갠산 기슭에 있었음.)에서 율법학교를 졸업하고 견습사제로 일하고 있었
다. 돌궐의 옛 법과 전통이 지속될 수 있었다면 그는 곧 옥새 담당 사제(탐가치. 돌궐 각 부
족의 공식 인장인 <탐가>를 관리하고 제사를 주관하며 외교사절로 파견되기도 함)가 되었
을 것이다. 그리고 머리가 반나마 센 지금쯤에는 대제사장(테프 탱그리. 천신인 <탱그리>를
숭배하는 투르크-몽골 고대종교의 대제사장)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로부
터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쿠란과의 사이에서 문간과 같은 아들도 태어났을 것이다. 그 모든
행복의 약속들을 아육은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아육의 비극이었다.
아육은 언제나 학구열에 불타는 사제였다. 문간의 집에서 하인 노릇을 하면서도 그의 관
심은 신앙에 있었고 여러 나라의 신앙을 공부하려고 했다. 그는 틈만 나면 문간을 데리고
장안성 안 <사해서사>라는 책방에 놀러 갔다. 대진국(비잔틴(동로마) 제국) 사람이 주인인
그 책방에는 온갖 나라의 경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육이 문간에게 경
교를 가르쳐준 곳도 그곳이었다.
"이 아기님이 신야호화(여호와)의 아들 야소님이다."
아육은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 책을 펼치고 삽화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
사람의 도사들이 야소님이 태어난 마옥으로 별빛의 인도를 받아 찾아갔다는 전설을 재미있
게 얘기해주었다.
돌궐 사람들은 유목민족이지만 대진과 정식으로 수교하고 파사와 왕래하며 천방국(아라비
아)과 교역하던 국제적인 교양인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 <투르크 룬 문자>라고 부르
는 표음문자까지 만들었다. 알타이어족 가운데 최초로 자신의 문자를 발명한 민족인 것이다.
이들은 이 글자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많은 비문을 남겼고 소그드어(속특어. 7세기 중앙아
시아 초원지대의 공용어.)로 번역된 온갖 나라의 책들을 읽었다.
아육이 이런 치명적인 재앙을 가져온 고구려인들과 친하게 된 것도 교양과 신앙의 욕구
때문이었다. 아육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고구려는 원래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졌던 종족이야. 우리 돌궐은 전쟁과 유목으로 너무
많은 지역을 옮겨다녀서 신앙이 혼란스러워졌지. 그렇지만 고구려는 일찍 동쪽으로 가서 한
곳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잊어버린 초기 경전들이 거의 다 보존되어 있단다. 100년
전 타름탈간이라는 우리 율법학자가 고구려에 가서 경전들을 가져오기도 했어. <당고르 오
르캄(단군왕검)> <해모수칸인 카인릭(해모수 칸의 예언)> <추모닌 미라스(주몽왕이 남긴
것)> 같은 것이 다 타름탈간이 가져와서 번역한 경전들이야. 기회가 닿으면 나도 고구려 학
자들을 만나서 그런 경전들을 토론하고 싶구나."
그런데 한 달 전 아육과 문간은 장안성으로 가다가 우연히 고구려인들과 사귀게 되었다.
바로 처형당한 고여락의 딸과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아란두님>이
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아육의 지적 호기심이 다시 불붙은 듯했다. 아육은 그때부
터 아침만 먹으면 어디론지 나갔다가 밤이 이슥해야 들어왔다. 그러다가 열흘 전엔 아예 고
구려인들을 데려와 자기 방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그놈들이 이렇게 큰 횡액이 될 줄이야.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문간은 아육을 원망할 수 없었고 다만 그 네 고구려인들을 저주할
뿐이었다. 감방에 갇힌 문간은 쇠창살로 얼굴을 내밀고 아육이 다시 지나가지 않을까 기다
렸다. 그러나 그날 밤은 더이상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꿈자리가 몹
시 뒤숭숭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자 육모방망이로 무장한 세 명의 위병들이 와서 문간을 끌고 갔다. 문
간은 곧바로 감옥 밖으로 끌려가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태워졌다. 둘은 마차 밖에서
고삐를 잡았고 숫염소처럼 짧고 억센 털이 잔뜩 난 야수 같은 얼굴의 위병 하나가 그와 함
께 탔다. 마차의 내부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두려움이 문간의 목을 조여왔다. 어디로 데려가
는 것인가? 신책군에 끌려가면 재판도 없이 처형당한다고 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마차가 멎자 곧 문이 열렸다. 송진냄새가 코를 찌르는, 지은 지 얼마 안되는 커다란 건물
이었다. 하늘을 향해 치켜들린 추녀 끝에서 맑은 햇살이 나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딥니까?"
"병신아! 어디긴 어디야. 어사대지."
감찰사 둘이 문간을 안으로 데려갔다. 커다란 나무기둥들이 길게 이어진 회랑을 따라 계
속 걸었는데 건물 안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문간이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아늑하게 꾸며진 접객실이었다. 옥으로 장식한 다탁 옆에
푹신한 보료와 안석을 댄 평상이 있고 등받이가 있는 외국풍의 안락의자가 여러 개 있었다.
칸막이 벽의 설주 위에는 종달새와 방울새 따위가 든 황금빛 창살의 작은 새장들이 걸려 있
었다. 잠시 후 시녀에게 차를 들려 두 사람의 고관이 나타났다. 한 사람은 사흘 전의 그 기
분 나쁜 ㅅ미문관이었다. 문간은 그의 옆에 선 사람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감찰어사님!"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는 얼마전 문간을 소부감에서 어사대로
끌어주마고 약속한 감찰어사 엄숭이었다.
"감찰어사님, 어흐흐......"
감격하기 잘하는 문간은 눈물을 흘렸다. 엄숭은 만면에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문간을 위
로하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심문관을 소개했다.
"이분은 신책군의 송막부 중랑장(본래는 궁궐 정문 수위장의 명칭. 신책군에서는 연대장.)
이다조님일세."
"송막부라면......"
"그래. 말갈과 거란, 고구려에 관련된 사건들이 다 내 관할이다."
이다조는 사흘 전과는 딴판으로 씨익 웃었다. 그러다가 들뜬 어조로 황급하게 덧붙였다.
"난 말갈족이지만 네놈이 젓 빨 때부터 중국에 있었다. 군댓밥 먹은 게 20년도 넘었다아
이 말이야."
시꺼먼 피부에 단단한 몸집, 나이는 마흔 안팎인 것 같았다. 그는 또 킁킁 하며 손가락으
로 코딱지를 후벼내더니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리고 거만하고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새벽 아육이 감옥 안에서 죽었다고.
문간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이다조의 목소리는 계속 되었는데 문간의 귓속에선
웽 하는 소리만이 들렸다.
"문초는 내가 하지 않았어. 어쨌든 안됐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놈의 자식이 완강하
게 자백을 거부했다드만......"
"야, 이 새꺄아아!"
문간은 머리꼭대기까지 분노가 피밀어 다탁을 뒤엎었다. 그리고 나는 듯이 달려들어 이다
조의 목을 졸랐다. 문간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이 백정 같은 새꺄아아!"
목이 졸린 이다조는 버둥대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문간은 오른 손으로 이다조의 관자놀
이께에 난 머리터럭을 움켜쥐고 그의 머리통을 바닥에 짓찧었다. 엄숭이 뜯어말리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의자를 차 뒤집으며 방안을 때굴때굴 뒹굴었다. 이다조는 문간의
고환을 걷어차서 간신히 그를 뿌리쳤다.
"이런 개자식!"
화가 난 이다조는 주먹을 번쩍 들어 문간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문간은 아랫도리를 잘리
기라도 한 사람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이다조는 발 밑에 나둥그러진 문간의 얼굴을 두어 번
이나 걷어차고 다시 배를 걷어찼다. 엄숭이 달려들어 두 팔로 간신히 이다조를 끌어 안았다.
이다조는 씨근덕거리며 욕설을 퍼부으며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엄숭의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온 감찰사들이 칼을 뽑아 문간을 찌르려는 이다조를 붙들어 간신히 밖으로 데리고
갔다.
피투성이가 된 문간은 부서진 의자 위에 쓰러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격심
한 충격과 타박상 때문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
렸다.
"그럴 리 없어...... 아저씨가 죽었을 리 없어......"
4
문간은 코가 부어오르고 입술이 찢어지고 왼쪽 눈썹 위의 이마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런 상태로 어사대 감옥에서 이틀을 보냈다. 신책군의 감옥보다는 대우가 좋았다. 엄숭이
두터운 이불과 냉수찜질을 하라며 물수건까지 들여보내주었다. 바깥은 새해가 시작된 지 오
래였다. 쇠창살이 달린 창문으로 깔깔거리며 정초의 나들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어
른과 아이들이 화목하게 조잘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문간을 슬프게 그리고 두렵게
만드는 소리들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새벽. 문간은 어사대의 후미진 골방으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이다조와 신
책군의 다른 고급장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간은 검은 옻칠을 한 책상에 앉혀졌다.
이다조는 입술을 씰룩씰룩거리더니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는 문간에게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자기가 문간의 입장이었다해도 똑같았을 거라고
도 했다. 문간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무슨 거머리를 쳐다보듯이 이다조를 건너다보았다. 이
백정놈이 왜 이런단 말인가. 이다조는 화를 참고 문간을 달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혹은
그렇게 명령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느쪽이든 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이다조의 옆에 있던 다른 중랑장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내가 설명하겠소."
중랑장은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진가도라고 신설된 신책군 고려부의 책임자요. 원래는 백제 사람인데 8년 전에 귀
화했소. 나와 여기 있는 두 압아(아전들의 책임자. 신책군에서는 수사를 담당한 순위병들의
위장)도 모두 당신과 같은 해동 사람이니 잘해봅시다."
나이는 20대 후반쯤이었고 얼굴에는 어딘가 병적인 구석이 있었다. 광대뼈가 나오고 볼은
움푹 꺼져 들어가 있었으며 두 눈은 음산한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나 말씨나 행동은
이다조보다 훨씬 점잖았다. 신책군 중랑장은 종6품상이다. 문간보다 훨씬 직급이 높은데도
무관과 문관이 다름을 따져서 존대말을 써주는 것이었다. 그는 한 꾸러미의 조서를 집어들
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요점만 말하겠소. 어제부로 당신 사건은 나에게로 이첩되었소. 지금 우리
신책군은 모두 흩어져서 한 여자를 찾고 있소. 바로 당신이 아는 고여락의 딸이오. 우리가
확보한 사람 중에 여자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오. 당신을 석방할 테니 여자를 찾는
데 협조해주기 바라오. 엿새 동안 시간을 주겠소. 6일 안에 여자의 행방을 알지 못하면 당신
은 다시 체포될 것이오."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이 문간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당신은 모반자들을 집에 은닉한 혐의를 받고 있소. 당신이 알았든 몰랐든 당신의 하인
아육이 공범이오. 당신은 명백히 모반에 연루된 것이오. 모반죄는 주종을 불문하고 사형이라
는 걸 잘 알지요? 당신의 모친과 외숙, 외사촌들도 연좌의 율로 다스려질 것이오. 당신의 가
족들은 이미 우리가 전부 체포했소."
진가도는 여기까지 을러대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고감사, 엄어사에게서 당신 이야기를 잘 들었소. 나는 개인적으로 당신을 동정하고 있어
요. 이래봬도 나는 전쟁터에도 갔었고 포로수용소에도 있었고 노예로 팔렸던 적도 있소. 그
래서 어떻게 급작스럽게 평범한 인생이 완전히 뒤집혀버리는지를 알아요. 당신은 운이 나빳
소. 그러나 당신이 잘만 하면 우리는 당신의 죄를 최대한 가볍게 해주겠소."
"어떻게 모반죄를 가볍게 할 수 있습니까?"
문간이 묻자 진가도는 조용히 웃었다. 문간은 이다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압감을 이
청년에게서 느꼈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눈동자는 불속에 넣어진 숯처럼 형형하게 반짝였
고 이마에는 깊은 사려와 분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협조를 해준다면 우리는 당신을 모반을 알 수 있었으면서 밀고를 게을리 한 죄로 기소하
겠소. 그러면 당신은 형부로 넘어가 장 100대로 끝나게 될 거요. 재산도 몰수되지 않고, 가
족들도 연좌되지 않을 것이오."
옆에 앉은 이다조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다. 진가도가 아니고워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똑똑하게 굴어 얼마나 더 잘하나 보자, 안되기만 해봐
라, 엎어버릴테다 하는 꿍심 같았다.
문간은 막연한 꿈속을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어제까지 전도유망한 관리였던 내가 신책군
의 끄나풀 노릇을 하게 되다니. 이것은 악몽이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건들로 충만
해 있는 악몽이었다. 그러나 무작정 절망스러워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될 대로 되라지.
"내 가족들을 석방하고 아육 아저씨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시오...... 그러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소."
고문간은 감옥에서 풀려나 아흐레 만에 모화리로 돌아왔다.
모화리는 사이리라 하여 중국의 주변 민족들이 사는 장안성 남쪽 네 개의 소도시 가운데
하나다.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때 잡혀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주로 고구려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얼마 전부터는 백제인들과 신라인들도 많이 들어왔다. 이들은 이곳에서 피
해의식과 자존심이 뒤섞인 태도를 가지고 악착스럽게 살았다. 그들은 동이족 특유의 오기와
똥배짱으로 이곳이 마치 저희들의 세습봉토나 되는 듯이 으스대었기 때문에 중국인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문간은 천천히 자신이 나고 자란 거리를 걸었다. 진가도 휘하의 1개 소대가 직물장수나
서생으로 변장하고 그 뒤를 미행했다. 모화리의 아침은 한창 열기를 띠고 있었다. 상점 여주
인들은 시끌벅쩍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으며 채소장수와 생선장수들이 부지런히 골목을 돌아
다니고 있었다.
문간은 먼저 집으로 가보았다. 대문에는 널판자가 박혀 있고 자순군(지역경찰)이 발행한
봉금 딱지가 붙어 있었다. 뒷문으로 들어가자 하인 긍보가 뛰어나와 문간을 끌어안고 울었
다. 문간의 어머니와 외삼촌, 외사촌들이 모두 잡혀갔다는 것이다.
"군인들이 다 잡아갔어요. 우리집에서 카수미들을 숨겨주었대요. 기녀들이랑 연놈들도 다
달아났어요. 어흐흐......"
"카수미가 뭐야?"
"몰라요. 그냥 나쁜 놈들이래요. 고구려 귀인들을 죽인 놈들이래요. 흑흑......"
긍보는 그 동안 겪은 봉변이 새삼 서러운 듯 눈물 콧물을 그치지 못했다.
집 안은 글자 그래도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문짝이며 화분들이 엉망으로 부서져 마당에
나뒹굴고 있었다. 장롱들은 텅 비었고 돗자리는 짓밟혔으며 옷가지들이 갈가리 찢겨 사방에
널려 있었다. 집에서 일하던 기녀와 하인들은 제각기 값나가는 물건들을 훔쳐 모두 달아난
뒤였다. 넓은 집에 긍보 혼자 남아 있었다. 어릴 적에 외삼촌이 주워다 기른 긍보는 돈으로
도 살 수 없는 정직한 하인이었지만 아직 열다섯 살로 이런 사태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
다.
문간은 망연자실 앉아 있다가 긍보가 데워준 더운 물에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앗다. 새로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으니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문간은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긍보와
함께 집 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한참 청소를 하고 있는데 진가도가 들어왔다.
"시간이 없는데 이러고 있으면 어떡하오?"
"내 가족은 언제 풀어줄 거요?"
"그 계집만 찾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풀어주겠소."
"아육의 방에 숨어 있던 놈들이 카수미라니...... 카수미가 뭐요?"
"카수미? 미친놈들이지......"
진가도는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참 만
에야 그는 침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기가 살던 나라가 망해버리면 말이오. 가끔 그렇게 미친 놈들이 생겨나지요. 망하면 망
하는 거지 그게 저희들하고 무슨 상관이오? 어차피 나라가 있었어도 별로 이로울 것도 없었
을 주제에. 이래도 마찬가지고 저래도 마찬가지인 바에야 자기 살가죽이나마 잘 간직해야
하는 게 옳지 않소? 이젠 천하가 한 나라고 사해가 일가인 새 세상이오. 그런데도 촌무지랭
이들은 나라 따위가 없어진 걸 무슨 하늘이라도 무너진 줄 안단 말이오."
진가도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흥분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눈은 번쩍이며
입술은 경련하는 듯이 떨고 있었다.
진가도의 말에 의하면 <카수미>란 일명 결사당이라고 하는 고구려 과격분자들의 집단이
다. 이들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부터 당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는 귀족들을 살해하여 악명
을 떨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카수미들은 항상 단검을 품고 군중 속에 숨어 있다가 암살할
귀족들을 찌르고는 잽싸게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오히려 어느 놈이 이런 짓을 했느냐고 군
중들과 함께 펄펄 뛰었다. 이처럼 술수에 능해서 골수 항전론자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언제
살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벌벌 떨었다고 한다.
<카수미파>라는 이름은 고구려의 대막리지 이리카수미에서 나왔다. 이리카수미는 중국
글자로 연개소문(연은 연못을 뜻하는 고구려어 <이리>의 의역. 개소문은 ,카수미>의 음역.)
이라 쓴다. 그는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데다 독재와 권력남용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간 당에 대한 결사항전을 주도했기에 <죽음으로 나라와 신앙을
지키자>는 과격분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었다.
진가도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문제는 그런 무뢰배들이 아니오. 카수미들은 본래 고구려의 하층민 내지 천민들이오. 그
것들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대다수의 고구려인들에게는 남의 일이고 천한 것들의 한풀이로
여겨질 거요. 정말 무서운 것은 그놈들의 배후에 있는 동방교지요."
"동방교라뇨?"
"오래 전부터 내려온 고구려인들의 신앙이라오. 고구려에는 동맹이라고 하늘에 제사를 지
내는 큰 행사가 있소. 이 제천의식을 주관하는 사제들은 하늘이 보낸 세 인신들의 가르침을
천년 가까이 보존해왔소. 바로 단군과 해모수와 주몽을 숭배하는 동방교라오. 그들이 암송하
고 설교하는 동방삼경, 즉 <단군경> <해모수경> <주몽경>은 고구려인들의 신앙과 도덕과
법을 관장하고 있소. 고구려의 사제들은 동방삼경으로 나라 전체를 교육하려고 했어요."
"그게 카수미들과 무슨 상관입니까?"
진가도는 부관을 부르더니 자신의 서류함을 가져오게 했다. 진가도는 그 서류함을 열고
두툼한 한 권의 책을 꺼내었다.
"이것은 수문제 때 위자춘이라는 학자가 쓴 <동이전장전>입니다. <삼국지> <위지,동이
전>에 대한 주석서이지요. 여기부터가 동방교이고...... 자, 여기 이곳이 <해모수경>을 설명
한 곳이오. <해모수경>은 네 개의 문헌으로 이루어져 있소. 해모수의 일대기와 예언을 담은
<예언서>, 대무신왕 시대의 재상이었던 을두지가 해모수의 계시를 받고 쓴 <을두지 1서>
와 <을두지2서>, 그리고 고국원왕 시대의 서기관 아리수타지가 해모수의 행적을 전하여 부
여족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쓴 <아리수타지서>이오. 자 이 부분이 <을두지 2서>요. 이 부분
을 읽어보시오."
문간은 진가도가 가리키는 부분을 소리내어 읽었다.
"태평의 때에 왕은 현명하고 재상과 신하들은 모두 충량하여 나라에는 싸움이 없고 백성
들은......"
"거기말고. 그 밑엣줄."
"종말의 때에 왕실은 어지러워지고 귀족들은 난폭한 야수가 되어 폭력이 판을 치고 마을
은 더러운 먼지로 뒤덮이리라. 요마의 힘이 닥쳐오리니 1천개의 성으로도 나라를 보존하지
못하리라. 이때 천군이 의로운 어머니 앞에 모이리라. 천군과 어둠의 권세가 서로 사우리라.
죄악의 집에서 나온 자들이 착한 제사장을 산채로 매달리라. 그러나 의로운 어머니를 범하
지 못하리니 어머니가 다시 태펴으이 왕을 낳으리라...... 무슨 소립니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예언서>에서 해모수는 아들인 해부루가 보낸 군대에 의해 사지가 찢겨져 죽어요. 죽기
직전 그는 주몽이 태어날 것과 주몽의 자손이 해부루의 동부여를 멸망시킬 것을 예언했지
요. 그러면 동부여가 멸망한 뒤에 주몽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계시를
받은 것이 을두지(대무신왕 8년에 우보(우승상), 10년에 좌보. 11년에 한나라 요동태수의 군
대를 물리침.)예요. 특히 <을두지 2서>는 주몽왕으로부터 정확히 700년 뒤 어둠의 권세에
의해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어요. 그런즉 <종말의 때>란 바로 지금이지요."
"아니, 그렇다면......정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당과 망해버린 고구려 사이에?"
"정말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문제는 동방교도들이 이렇게 믿는다는 거지요.
더 공교로운 것은 한 달 전에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죄악의 집에서 나온 자들
이 착한 제사장을 산 채로 매달리라.> 이게 바로 고여락의 사건입니다. 요동호행 군대총관
이적 장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킨 것이 지난 9월 12일이었어요. 장군은 고구려 왕과 왕족, 대
신 등 포로 2천여 명을 앞세워 12월 1일 장안성으로 개선했지요. 포로들은 황상의 알현이
있을 때까지 용무영에 수용되었는데 그 포로들이 통역 겸 교섭자로 내세운 사람이 고여락이
었어요.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고여락은 산채로 살점이 뜯겨져 죽는 해형을 당하고 말았어요.
산채로 말뚝에 매달려서 말입니다."
"저도 그 일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여락이......?"
"그래요. 고여락이 바로 동방교의 마지막 제사장이었어요. 이제 알겠습니까? <그러나 의
로운 어머니를 범하지 못하리니 어머니가 다시 태평의 왕을 낳으리라.> 고구려인들은 그 의
로운 어머니라는 여자를 중심으로 모여 태평의 왕이 나타날 때까지 싸울 거다 이거죠."
"태평의 왕이 뭡니까?"
"여기, 아니 여기...... <주몽경> 안에 있는 이 <다섯 족장들의 증언>을 보시오. 태평의 왕
이란 계루 소노 절노 순노 관노의 다섯 족장들이 주몽왕에게 바친 칭호입니다. 그러니 태평
의 왕은 주몽과 같은 인물이고 의로운 어머니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 같은 여자지요."
"유화부인......"
"유화라는 것은 한자로 의역한 말이고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요. 고구려인들은 아란두(유
화부인의 본래 이름은 문헌에 전하지 않는다. 아란두는 알타이어족 가운데 가장 먼저 자기
들의 문자를 발명했던 돌궐족의 말 <아라>와 <안디즈>를 합해서 만든 이름. <아름다운 버
들금불초(금불초)>라는 뜻. 버들금불초의 잎이 버드나무와 꼭같이 생겼기 때문에 그 꽃을 <
버들꽃>이라 불렀다고 추정했음.)라고 부르지요."
문간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랐다. 아란두! 한 달 전 아육과 함께 우연히 만난 고여락의
따님. 문간의 심장을 그토록 쿵쾅거리게 했던 그 가인의 이름이었다.
"이제 알겠지요. 우리가 왜 고여락의 딸을 찾으려고 하는지. 고여락이 죽은 뒤 제사장의
지위는 그 딸에게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 이름
까지 똑같은 아란두라는 여자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불만에 가득 찬 고구
려인들에게 최후의 성전을 선포할 것입니다. 고구려 정벌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갈 판입니
다."
아란두를 떠올리자 진가도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한달 전 그녀는 단 한번의 시
선만으로 문간의 마음을 통째로 빼앗아 갔으며 가슴에 뻥 뚫린 구멍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그녀가 동방교의 새 제사장? 성전을 선포해?문간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
름답고 매혹적인 그녀에게는 신과도 같은 마력이 있었다. 첫 대면에서 문간은 감히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녀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스럽고 감미로웠다.
"그 사실을 조정의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까?"
"무후마마가 알고 계십니다. 마마의 특명으로 지금 신니책군과 용무군, 각 지역의 자순군
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그 여자가 고구려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체포하려는 것이지요. 동쪽
으로 가는 모든 국도가 봉쇄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여자는...... 고감사, 이건 엄중한 비밀입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안됩니
다. 그 여자는 용무영 감옥에 갇혀 있다가 탈옥했습니다."
"뭐라구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이야기가 좀 복잡합니다. 고여락을 처형한 뒤 용무영에 있던 고구려 포로들이 석방되었
습니다. 그런데 포로들이 석방된 지 닷새 만에 카수미파가 나타났습니다. 당나라 군대를 고
구려로 끌어들이는 데 큰 공을 세웠던 불덕과 염유가 장안성 한가운데에서 살해된 겁니다.
무후마마는 대로하였지요. 범인들을 체포하는 한편 동방교도들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엄명
이 떨어졌어요. 신책군이 모든 행인들의 공험(주민등록증)을 검사하고 미심쩍은 자들을 체포
했지요. 고여락의 딸도 그때 같이 체포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카수미들이 용무영에 잠입해서 뇌옥을 부수고 고여락의 동생과 딸을 탈
취해 달아났어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요."
사건 직후 용무영은 부랴부랴 봉수대에 불을 피워 장안 인근의 모든 부대에 비상을 걸었
다. 그러나 카수미들은 허둥대는 관군을 비웃기다로 하듯 유유히 마차까지 몰며 달아낫다.
북쪽의 검문소를 박살내었고 회창 나루터에 이르러 마차를 버렸다. 카수미들은 거기서 배를
잡아타고 수양제가 개수한 대운하를 따라 위수로 달아났다.
"그 직후 우리는 카수미들이 명옥원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신과 아육을 체포했
던 겁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사건의 해결을 낙관했습니다. 우리는 사건의 열쇠를 쥔
아육을 붙잡았고 용무군은 놈들의 배로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었으니가요. 그런데 아육은 끝
내 입을 열지 않고 죽었고 배는...... 배는 1월 4일, 그러니까 사흘 전에 위수와 낙수, 그리고
대운하가 교차하는 화음지구에서 발견되었소. 그러나,"
거기서 말을 끊은 진가도는 허허허 하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 속에 한 오라기
잔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배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화음에서 갓 고용된 선원들과 카수미들에게 인질로
끌려간, 바보 같은 용무영의 중랑장 하나뿐이었단 말입니다. 이 일로 용무군은 완전히 똥이
되었소. 애초에 고구려 놈들을 너무 얕본 것이 잘못이었지요."
"그렇다면 여자는 어디로 간 겁니까?"
"세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요. 하나는 위수 어딘가에서 배에서 내렸을 경우, 둘은 위수에
이르기 전에 대운하에서 내렸을 경우, 셋은 배는 눈속임에 불과했고 여자는 처음부터 배에
타지 않았을 경우요. 이 가운데 세 번째가 가장 가능성이 높아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무엇보다도 인질이 되었던 중랑장의 증언이지요. 그는 5일 동안이나 배에 붙들려 있었는
데 여자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거요. 둘째는 수로 주변의 상황이요. 놈들이 회창에서 배를
탄 뒤에는 운하 전지역에 비상이 걸려 자순군과 수사(해상경찰)들이 수로 주변에 까맣게 몰
려들었소. 말씨며 행동거지가 이상한 고구려놈들이 있었다면 반드시 잡혔을 겁니다. 셋째는
고용된 선원들의 증언이지요. 그들은 돈을 받고 빈 배를 몰아 황하로 나아가서 골주에서 다
시 대운하를 따라 북상하여 탁군(지금의 북격)으로 갈 예정이었답니다. 돈을 준 사람들이 탁
군에서 뭘 실어오라고 했었다나요? 탁군까지 가면 고구려땅이 지척 아닙니까. 놈들은 고구
려로 도망가는 듯이 위장해서 우리를 속인 겁니다."
"육로로 도망갔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여산 기슭에 있는 용무영에서 아이를 빼내서 요동으로 도망치려면 반드시 동북쪽의 신풍
을 거쳐야 해요. 사건 직후 신풍가도에는 2개 연대가 출동해서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어요."
"그렇다면......"
"그 여자는 바로 여기 장안 어디에 있어요. 온갖 나라에서 몰려든 이민족들이 북적대고
고구려인들도 많아 얼마든지 몸을 숨길 수 있는 이곳에 말이오. 우리는 지금부터 당신 집에
있던 그 카수미들을 본 사람을 찾아서 놈들의 행적을 찾아야 합니다."
"장안성 안에만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엿새 만에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건을 널리 알리고 목격자를 찾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진가도는 한참 동안 문간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안됩니다."
"왜요?"
진가도는 눈을 내리깔고 매서운 어조로 뇌까렸다.
"이 모든 사건은 무후마마의 사민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마는 많은 고구려인들을 중국
으로 강제이주시키려고 했어요. 고여락은 이 영에 대해 무엄하게 항변하다가 처형당했습니
다. 또 그 보복으로 카수미들이 나타나 친당파 귀족을 죽이게 되었구요. 그래서 이 사건이
알려지면 마마의 위신이 추락합니다. 당신은 어제까지 포로였던 고구려인들이 장안 한복판
에서 단독으로 사람을 죽이고,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빼내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카수미들의 배후에는 분명히 상당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 있습니다. 무후마마에 대해 역모를
꿈꾸는 조정의 고관일 수도 있겠지요."
"여, 여, 역모......"
문간은 두 손으로 볼을 비볐다. 온몸의 피가 모두 머리로 솟구쳐 올라 두 볼이 빨갛게 물
들었다.
"그, 그렇다면 중랑장님은 왜 내가 협조할 거라고 믿는 것입니까? 내가 그런 고관의 하수
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진가도는 차갑게 웃었다.
"그렇다면 더욱 다행이지요. 그 여자와 카수미들이 어디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을 테니가
요. 당신이 하수인이라면 반드시 배신할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리석게 죽는 것보다는 어
리석게 계속 사는 걸 좋아하거든요. 자, 나가봅시다."
문간은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진가도에게 끌려 집을 나왔다.
행인들이 고구려말로 거침없이 수다를 떨며 저마다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모화리의 고
구려인 거리는 정원과 연못이 있는 부자들의 으리으리한 저택과 서민들의 자그마한 집들이
뒤섰여 끝도 없이 뻗어가고 있었다. 문간은 어디부터 찾아가야 할지 전혀 생각나는 것이 없
었다. 앞으로 찾아야 할 사람을 생각하자 더욱 아득했다. 한 달 전에 자신의 혼을 빼놓았던
그 아리따운 처녀. 문간은 아란두를 만났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5
한 달 전 서리가 내려 풀잎이 더욱 희게 바래진 아침이었다. 그날은 노는 날이어서 문간
은 아육과 사해서사에 놀러 가고 있었다. 모화리의 명옥원에서 장안성까지는 5리 남짓. 돌로
포장된 큰길을 따라 새로 지은 주택들과 잡하점과 지물포, 선술집들을 낀 성밖거리가 이어
지고 있었다.
길은 손가락 한 마디 깊이의 눈가루로 서늘한 융단이 덮여 있었지만 바람이 없어서 날씨
는 푸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마른 갈대들이 사운대는 파수의 모래톱을 지나 살하가 내려
다 보이는 언덕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두 사람은 북쪽 대로로부터 다가오는 이상한 행렬
을 만났다.
100여명의 군인들이 커다란 항아리를 실은 수레 하나를 호위하여 장안성으로 가고 있었
다. 그 후미에는 500여명 쯤 되는 무리들이 이상한 주문을 읊으며 수레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 무리들은 고깔처럼 생긴 모자(절풍. 고구려의 평민들이 쓰던 관모. 옆에 새의 깃을 꽂는
다.)를 벗어 손에 들고, 시커먼 머리채를 풀어헤치고, 허리띠를 끌러 목에 두른 망측한 모습
이었다.
"고구려인들인데...... 앞코가 저렇게 올라간 장화는 고구려 신발이야."
아육이 중얼거렸다. 문간은 그들의 음침한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퍼런 곰팡내가 배어나올 것처럼 여윈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손을 앞으로 모
으고 허리룰 숙여 걸으며 뭔가를 웅얼거리는데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저주하는 주문 같았
다. 넋을 잡아끄는 것처럼 으시시한 가락, 시골이 썩어내리는 것 같은 어둡고 탁한 음성이었
다.
일월동방, 봉천지조 명조우주 일월동방 핵소만신 권화생물 일월동방 성령강지 재세이
화...... (동방의 해와 달 하늘의 소명을 받들어 광명으로 온 우주를 비추네. 동방의 해와 달
온갖 신령들을 불러 부리며 권능으로 만물을 살리네. 동방의 해와 달 그 성스러운 영 내려
와 인간세상을 도리로 다스리네......)
행렬은 살하를 건너는 돌다리 앞에서 멈추어 섰다. 말을 탄 늙은 장군이 후미로 와서 썩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그의 하얗게 센 눈썹이 노여움으로 꿈틀거렸다.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
려들어 말채찍으로 고구려인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더 수레에
달라붙으며 울부짖었다.
"제사장니임! 우리 제사장님!"
"고대가(고구려에서 부족장급의 대귀족에게 붙이는 경칭) 고대가!"
고구려인들은 갖은 악다구니를 쓰며 막무가내로 수레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 바람에 수레
를 끄는 말들이 놀라 발광했다. 말들은 벌떡 일어서서 발길질을 하며 콧소리 요란하게 울어
댔다. 병사들은 수레 위에 실린 항아리를 붙들어야 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멈춰서서 이 희
한한 드잡이질을 지켜보았다.
문간은 행렬을 이끄는 늙은 장군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후웅번 장군이 아닌가. 문간은 어머니에게 자랑할 말이 생겼다고 속으로 좋아했다. 후웅번
장군은 용무영의 근위사단장이었고 한번 행차하시면 명옥원에서 강아지까지 다 자지러지는
상객 중의 상객이었다.
이 영감은 몇 달 전부터 장안성 안의 기녀원을 마다하고 명옥원만 찾았다. 명옥원에만 나
오는 지주가 내 입맛에 꼭 맞거든 하며 열심히 헛기침을 했다. 고구려의 전통술인 지주는
도수가 그다지 높지 않으면서도 맛이 쌉싸름한 발효주로 중국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영감의 진짜 이유는 문간의 어머니를 소실로 들여앉히려는 것이었다. 영감은 두 모자에게
곰살맞게 굴며 별의별 사연들을 다 읊어댔다.
"난 소싯적에 산서땅 태원에서 숯장수를 했지."
먼 산골에서 싼값에 숯을 떼어 태원부에 갖다 팔아 노모와 동생들을 봉양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호밀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원군장이란 토호의 군대에 붙잡혀 강제로 병
졸이 되었다. 원군장이 당태종 이세민에게 항복하자 후웅번은 자연히 관군에 편입되었다. 그
뒤 돌궐 토벌전에서 공을 세워 장교가 되었고, 티베트, 코초, 쿠차의 전쟁터를 정신없이 흘
러다녔다.
한번은 그의 군대가 산서땅 삭주를 지날 때 상관의 허락을 얻어 고향을 찾아갔다고 한다.
불시에고향을 떠난 지 15년 만이었는데 대들보가 무너진 고향집엔 쑥대가 우거져 있었다.
이웃 노인이 나와 하는 말은 어머니는 기근때 병들어 죽었고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식
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뒤 설연타의 침략이 있었을 때 후웅번은 하주절도사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뒤 태
종황제의 눈에 든 후웅번은 장안에 머물게 되었고 좌위중랑장, 용무장군을 거쳐 용무통군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는게 뭐 이런거지. 꿈처럼 뒤숭숭한 거야. 너와 네 모친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는구
나."
이러면서 눈시울을 붉히는데 문간은 물론 그의 어머니까지 감동하여 꼴깍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알아보니 그 댁 마나님 성질이 보통이 아니어서 벌써 소실이 둘이나 죽어나갔다는
소문이었다. 문간 모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여태껏 결정을 미뤄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의붓아버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어찌 지나칠 수 있겠는가. 문간은
가던 길을 멈추고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말들이 발광을 하자 후웅번 영감은 머리끝까기 화가 치민 것 같았다. 부들부들 떨면서 칼
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장군의 박차 곁에
따라붙으며 "우리 제사장님을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모습이 너무 비참했던지 영감은 최
후의 순간에 분을 참았다. 그는 말머리를 홱 돌려 다시 행렬의 선두로 달려가면서 부하를
불렀다.
"웬푸! 웬푸!"
그러자 귀가리개가 달린 전투모를 쓴 장교 하나가 예! 하고 행렬 옆으로 튀어나왔다. 반
달처럼 휘어진 칼을 차고 말갈기가 검은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커다란 말을 탄 젊은 청년이
었다.
"들어가서 보고할테니 모두 여기서 기다리게 해. 그리고...... 저것들!"
후웅번은 말 위에서 허리를 돌려 고구려인들을 손가락질했다.
"저 자식들 다 쫓아보내. 내가 갔다올 때까지. 알았어?"
"알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후웅번 장군은 단숨에 행렬의 선두로 나아갓다. 날렵한 기마술이엇다. 머리와
수염이 온통 하얗게 센 노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말을 몰아가는 동작에 탄력
이 있었다. 영감은 말을 탄 두 사람의 장교를 데리고 바람처럼 말을 달려 언덕을 내려갔다.
그 세 필의 말은 그대로 살하의 돌다리로 짓쳐나가 눈깜짝할 사이에 강 건너편으로 사라졌
다.
후웅번 장군이 사라지자 웬푸라 불린 장교는 말에서 내려 부하들로부터 엄청나게 큰 그의
창을 받아들었다. 굵은 창자루에 세 갈래 삼엄한 창날이 뻗어나온 80근 당파창. 웬푸는 오른
손으로 스윽 창자루를 훑더니 눈빛을 번뜩이며 고구려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 웅맹한 기
세에 고구려인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웬푸는 쿵 하고 창을 곧추세웠다.
"잘 들어라! 더 이상의 소란은 나 아시테 웬푸가 용서못한다. 모두 처소로 돌아가라!"
옴몸이 쇠힘줄로 만들어진 것처럼 단단하고 깡마른 청년이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검은 얼
굴, 정기가 번뜩이는 눈에 눈썹이 그린 듯이 시원스러웠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꼼짝도 하
지 않았다. 웬푸는 벽력처럼 고함을 지르며 휙 하고 창을 들어 맨 앞줄에 선 자를 겨누었다.
주변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행인들은 잔인한 호기심을 돋우고 눈빛을 반짝였다.
그때 고구려인들 속에서 한 여인이 걸어나왔다. 여인은 웬푸가 창을 내지르면 찔릴만한
거리까지 거침없이 다가섰다.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놀랐고 아육 아저씨와 나도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가을날 은하를 흐르는 별빛처럼, 막 봉오리를 여는 희디흰 목련꽃처
럼, 신새벽의 강물에서 반짝이는 금빛 물비늘처럼 아름다웠다. 눈물 때문에 눈자위가 붉었지
만 그것조차 애처로운 아리따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머리 뒤쪽을 옥이 박힌 머리핀으로 한
번 쪽지고 나머지를 양쪽 뺨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잘 하지
않는 <드리운 쪽머리>였는데 그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는 칠흑처럼 검고 부드러웠고 피부는
희고 깨끗했다.
웬푸는 그 미모에 잠시 혼이 뒤흔들렸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아녀자가! 써억 물러가지 못해!"
"나는 고여락의 딸 아란두예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문간은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신열과도 같은 감동에 온몽이 후끈 달아
올랐다 온몸이 간덩이란 말인가. 여자가 어쩌면 저렇게 당찰 수가 있을까. 웬푸를 마주보는
처녀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나오는 것 같았다.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 시신만 돌려주면 우린 돌아가겠어요."
"에잇, 천치같으니!"
웬푸는 발을 굴렀다.
"해형을 당한 시체는 성으로 가져간다! 돌려줄 시신이 어딨느냐!"
행인들은 그제서야 이 이상한 드잡이질의 전모를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어깨를 덜
덜 떨며 눈을 크게 뜨고 수레 위에 실린 항아리를 가리켰다. 바로 저 항아리에 해형을 당한
고여락의 시체가 담겨있는 것이다.
아니, 시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고여락은 해형을 당한 것이다. 땅에 말뚝을 박아
사지를 묶어놓은 상태에서 날카로운 칼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살점이 하나 하나 찢어발겨진
것이다. 그 발겨진 살점들이 지금 소금과 양념에 절여져, 먹기좋은 육장이 되어 항아리에 담
겨 있는 것이다.
문간은 사늘한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해형은 은나라 때부터 계속된 유서 깊은 형벌이었
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로도 그 살점이 잘게 토막내어져 <해>가 되지 않았던가. 인육을 먹
는 관습이 없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충격적인 형벌이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오랑캐>를
다스릴 때 살점을 찢어발기는 해형과 아예 통째로 살가죽을 벗겨 말리는 포형을 빈번히 행
했다. 사람고기로 만든 육장은 장안성 안의 감옥으로 가져가 죄수들에게 먹였다.
언젠가 아육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오랑캐라는 소리를 들으면 구역질을 느낀다네. 도대체 누가 이적이고 누가 야만
이란 말인가. 나는 동서로 흘러다니며 온갖 종족들을 다 만났네. 그러나 아직까지 중국인들
만큼 불결하고 추잡하며 도의가 없는 족속들을 본 적이 없네. 조금만 흉년이 들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시장의 푸줏간에서는 몰래 사람고기를 한 근에 500전씩 팔
지 않는가. 모든 약방에서 사람의 간과 쓸개를 팔고 있네. 언젠가 하북의 한 객잔에서 고기
만두를 먹다가 썰다 만 사람의 손가락을 뱉은 적도 있다네......
웬푸는 거듭 발을 구르며 처녀를 위협했다.
"네 애비는 오랑캐 주제에 상국을 모욕했다. 죽어 마땅해서 죽은 것이니 무슨 군소리가
있으랴. 당장 물러가!"
"시신 전부를 돌려줄 수 없다면 뼈만이라도 돌려주세요. 유골이 있어야 장례를 치를 것
아니에요."
"닥쳐!"
웬푸는 한 손으로 처녀의 가슴을 밀었다. 가볍게 민 것이지만 워낙 가냘픈 처녀인지라 비
틀거리면 서너 걸음이나 뒤로 밀려갔다. 순간 참고 참던 고구려인들이 으아아 소리치며 일
부는 처녀를 부축하며, 일부는 돌멩이를 집어들며 우르르 앞으로 나섰다. 이를 본 병사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두 무리 사이에 유혈이 빚어지려는 그 일촉즉발의 순간, 아육이 갑자기 두 팔을 벌리며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다냐이즈! 욜다ㅜ시라, 다야니즈! (참으시오! 형제들이여, 참으시오!)"
난데없는 돌궐말이었다. 행인들은 입을 딱 벌리고 이 당돌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너무 놀
란 나머지 문간의 입에선 가느다란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순간 병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육을 주시했다. 웬푸와 그의 병사들은 모두 용무
영 막남부 소속의 돌궐인들이었던 것이다. 아육은 웬푸를 향해 소리쳤다.
"존경하는아시테 씨족의 타르칸(달간. 돌궐족의 군 지휘관.)이여, 내 말을 좀 들으시오. 나
는 쭈스 씨족의 아르틴치요, 내 할아버지는 초르 칸의 오른팔이었단 아타달리크요. 내 아버
지는 키르기스와의 싸움에서 용명을 떨친 <붉은 갑옷의 굴로반> 바로 그 사람이오. 타르칸,
나는 당신의 형제요."
웬푸의 얼굴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웬푸는 눈살을 찌푸리고
아육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하인의 허름한 장삼을 입은 아육의 행색은 어쩌면 돌궐 민족
의 영락을 웅변하는 본보기였는지도 모른다. 웬푸는 물었다.
"당신은 성직자의 말투를 쓰는구려. 당신은 베킬(사제)이었소?"
아육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웬푸는 존경심이 섞인 목소리로 "말해보시오 사제여"라고
했다. 아육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나 가슴엔 형제들을 걱정하는 한가닥 붉은 마음이 있소이다. 형
제들을 위해 말하노니 저사람들을 죽이지 마시오. 타르칸이여, 저사람들은 우리의 친구였던
고구려인들입니다. 저 사람들은 부민 칸이 죽었을 때 문상을 와서 우리의 슬픔을 위로해주
었고 타파르 칸의 시대에는 서로 손을 잡고 중국에 대항했었소. 타르칸이여, 옛시절의 우의
를 생각해서 본의 아닌 원한을 만들지 마시오. 간악한 중국인들의 이이제이에 말려들지 마
시오."
"그러나 나는 명령에 따라야 하는 몸이오?"
"타르칸이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은혜를 베풀어주시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오."
아육은 웬푸에게 다가가 한참 귓속말을 했다. 아육의 말을 들은 웬푸는 착잡한 얼굴로 침
을 탁 뱉더니 길가에 있는 집 한 채를 징발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집으로 수레를 몰고
들어가서 고여락의 두개골을 내주었다. 처녀는 울면서 네 번 절하고 부친의 두개골을 비단
주머니에 쌌다. 그것으로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았던 사태는 조용히 끝났다.
그런데 아육과 문간이 떠나려 할 때 아까의 처녀가 한 사람의 남자와 함께 다가왔다. 남
자는 정중히 포권하여 아육에게 인사했다.
"저는 고구려 사람 오이라고 합니다."
오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이상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백옥처럼 희고 우아한 얼
굴엔 한 터럭의 수염도 없었다. 나이도 알 수 없었다. 27,8세인가 싶은데 자세히 보면 아주
늙은 노인 같기도 했다. 그 커다란 눈 속에는 무량수의 보래바람이 불고 있는 듯 이유 없이
마주보기가 무서웠다.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돌아가신 주인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적멸의 고요 속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묘한 여운을 갖고 있었다.
"사람도 들판의 볍씨와 같아서 죽으면 땅에 묻혀야 훗날에 다시 싹틀 수가 있습니다. 땅
에 묻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대인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아육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팔자 사나운 천민이외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육은 두 손을 휘휘 젓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문간을 가리켰다.
"이분은 나의 소주인입니다. 양친이 댁과 같은 고구려인이라 하인인 나를 시켜 몇 마디
거들게 하신 것입니다. 인연이 있다면 이분을 기억해주십시오."
아육의 거짓말에 문간은 속으로 무척 놀랐다. 오이와 처녀는 아육의 말을 그대로 믿고 문
가에게 인사를 걸어왔다. 문간은 열적게 웃으며 답례하지 않을수 없었다. 처녀는 자신이 걸
고 있던 목걸이를 벗어 문간에게 내밀었다.
"은공, 고맙습니다. 이것을 고마움의 표시로 받아주세요."
"예에......"
문간은 머뭇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녀를 더 가까이서 보고 더 가까이서
그녀의 향내를 맡고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갈 용기가 없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으리
라는 사실을 깨달은 아란두는 자신이 가까이 다가서서 문간의 손에 목걸이를 쥐어주었다.
문간은 온몸이 쩌릿쩌릿해지는 이상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잉꼬 오이와 아란두는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문간의 손바닥에는 그녀가 주고
간 목걸이가 남았다. 가느다란 쇠줄에 둥근 해와 초승달 모양의 장식이 달린 이상한 목걸이
였다. 그것을 들여다보던 아육은 신음소리 비슷한 한숨을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6
오옴 미기미기 야야미기 사바하 사바하......
범패사(범패를 부르는 승려)의 청아한 목소리에 실려 정교한 리듬을 가진 산스크리트어의
노래가 금당 밖으로 울려퍼졌다. 또 다른 강찬이 시작된 것이다. 대자은사 동쪽 별원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무후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합장하며 육자진언을 염했다.
옴마니반메훔......
무후는 잠시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돌아가신 태종황제를 추선공양하는 법회가 오늘로
열흘째였다. 당금의 최고 권력자인 무후 이하 모든 황족들이 참석하고 있어서 정문부터 사
찰의 경내까지는 천우위(황실경호대)의 창날이 도산검림을 이루고 하얀 햇살을 튕겨내고 있
었다. 강사가 칭불을 하고 신도들이 계향 정향 해탈향을 화창할 때 무후는 비로소 합장을
풀고 좌대에서 일어섰다.
황후 무조.
어느덧 서른 아홉의 중년이었지만 그녀의 눈부신 미모는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있었다.
요요정정 화용월태라고 할까.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 산봉우리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처럼 우
미한 눈썹, 가을날의 호수처럼 맑고 큰 눈...... 곁에 앉으면 그것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미인이었다. 입술은 여름날의 앵두처럼 붉었고 콧날은 바르고 깨끗했으며 뺨은 막 껍질을
벗긴 수밀도처럼 탐스럽고 부드러웠다.
서쪽으로 파미르고원부터 동으로 발해만 너머까지, 남으로 보르네오해협으로부터 북으로
고비사막 너머까지. 이 광대한 세계에 사는 모든 생령들이 이 여인의 통치하에 있다. 황제가
두통과 현기증으로 정무를 포기하면서 그녀는 대명전의 휘장 뒤에서 남편 대신 이 방대한
제국의 산더미같은 국사를 처리해 온 것이다.
법회가 계속되는 이 기간에도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이 남아있었다. 무후는 시봉하는 자들
을 모두 물리치고 열 칸 정도 떨어진 내실로 들어갔다. 누군가를 부르자 잠시 후 휘장으로
가려진 부속실 툇마루에 늙은 승려 한 사람이 조용히 나타났다. 승려는 휘장 뒤편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마마, 찾아게시옵니까?"
"고여락이라는 놈이 문제로구나......"
무후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눈썹이 하얗게 센 늙은 승려는 순간 휘장을 건너 방안을
응시했다. 승려의 얼굴은 지극히 창백하여 마치 탈색한 뼈로 조각한 것 같았다. 그 강렬한
눈빛은 마치 해골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고여락은 마마께서 죽이셨사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무후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본 후가 너무 성급했느니......"
무후는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고구려 포로들의 대표였던 고여락은 아주 독특한 인물이었다. 20년전 머리를 깍고 중국에
들어와 곳곳을 편력하며 불교와 오두미도(중국 후한말 장릉이 창시한 종교. 일명 천사도. 태
평도와 함께 도교의 원류가 됨. 당대에는 강서성 용호산을 본거지로 전국에 종단을 가졌음.)
를 배웠다고 한다. 고국으로 돌아가 벼슬길에 올랐는데 평양성이 함락될 당시 대부사자였던
것을 보면 상당한 왕족이었던 것 같다. 대부사자는 고구려에서 외교를 전담하는 네 번째 서
열의 대신이다.
첩자들은 무후에게 고여락의 위험성을 알려주었다. 고구려는 크게 북쪽의 국내성을 중심
으로 한 세력과 남쪽의 평향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분여로디어 있었다. 이같은 지역적
알력과 왕족, 귀족, 무사, 평민, 천민 등의 계급적 갈등이 더해져 민족 내부의 분열이 극심했
다. 고구려 멸망의 원인도 이같은 내부분열이었고 중국이 편안하려면 이런 분열이 지속되어
야 했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이 갈가리 찢겨진 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도 있는 위험한 구심점이 있
었다. 바로 고여락이 이그는 동방교였다. 동방교는 불교와 도교에 비해 교세가 미약하다고는
하나 그 제사와 예배에 참여하는 신도들이 아직도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하는 무시못할 전통
종교였다. 고여락은 시급히 제거되어야 했다.......
늙은 승려는 툇마루에 닳을 듯 이마를 조아리며 말했다.
"마마의 책벌은 지당하혔사옵니다. 고여락과 같은 놈은 나중에 심복지환이 되옵니다. 진작
에 살려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놈이 결국 제 무덤을 팠지요. 감히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혔
으니 백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그날 고여락은 황궁의 대명전에 불려와 태위로 승진한 이적 장군으로부터 사민령의 교지
를 전달받고 있었다.
사민령이란 반란의 가능성을 뿌리뽑기 위해 고구려의 부유한 호족 6만 호를 중국 본토로
강제이주시키려는 정책이었다. 장안성으로 끌려온 자들은 당나라의 벼슬을 받고 돌아가 사
면령에 적극 협력하라는 교지였다. 고여락은 화를 내면서 완강하게 이 교지의 수령을 거부
했다. 고구려인들을 조상이 묻힌 땅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은 그들을 정복하는 일보다 몇십
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대담한 항변 끝에 고여락은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히 사민을 하셔야겠다면 6만호 대신 차라리 10만 호쯤 명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적 장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그럼 10만 호도 가능하단 말인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편이 일을 빨리 마무리지을 것입니다. 10만 호라고 하시면 고구려인
들은 당장 들고일어나서 죽을 때가지 싸울 테니까요."
그제서야 우롱당하고 있음을 깨달은 이적 장군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적보다 먼저
그가 앉아 있던 교자 뒤의 휘장에서 격노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영국공(이적의 작위) 집어치워! 위사들은 저 방자한 것을 끌어내 용무영에 넘겨라! 저것
을 산 채로 껍질을 벗기고 살점을 발겨서 죽이라고 일러라!"
그것이 바로 무후의 목소리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보장왕이 몸소 황제의 어전에 나와 사면을 탄원했다. 고여락은 고구
려인들이 믿는 전통종교의 대제사장이니 제발 용서해달라는 것이었다. 보장왕은 "소신의 어
리석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와 태고 때부터 전해온 제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
옵기를" 간절히 탄원했다.
황제는 감동했다. 특히 머리가 허옇게 센 보장왕이 "이제 소신이 백성들에게 해줄 수 있
는 일은 폐하께 빌면서 간청하는 것뿐"이라고 눈물을 흘릴 때는 진심으로 동정을 감추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장왕이 황제에게 올린 탄원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황제의 부탁은
무후에 의해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폐하, 고구려 오랑캐들에 대한 조치는 엄열함을 요합니다. 고구려는 제 강함을 믿고 수백
년 동안 조명을 거역해왔습니다. 고구려는 돌궐이니, 설연타 따위가 아니에요. 저들이 한창
강성할 적엔 평양성에만 21만 508호가 살았습니다. 지금의 이 장안성의 호구보다도 많았단
말입니다. 망했다지만 고구려땅에는 아직 176개 성에 69만 7천여호의 오랑캐들이 살고 있습
니다. 인구는 418만여, 노비들까지 합치면 500만이 넘는 대국입니다. 이런 오랑캐들을 그대
로 두면 반드시 후환이 생기옵니다."
"그렇지만 곤전, 해형은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지금은 우리 황실의 관용을 보여주어야 해
요."
"폐하, 고구려 오랑캐는 금수와 같습니다. 강해지면 반드시 대들고 약해지면 비굴하게 숙
이고 들어오니 어찌 은의를 알겠사옵니까? 덕으로는 회유할 수 없고 오로지 위로써 굴복시
켜야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대입니다. 이 기회에 솥바닥을 깨끗이 긁어내고 풀을 뿌리채
뽑아야지요. 아무 소리 마십시오. 소첩은 고여락뿐만 아니라 그 무리들을 모두 심문해서 반
항의 정적이 드러나는 것들은 용서 없이 처단하고 그 일당을 샅샅이 토멸할 생각이옵니다."
무후는 이렇게 고여락의 처형을 강행했다. 이렇게 채찍을 갈긴 뒤 당근을 주었다. 황제의
이름으로 장안에 끌려온 보장왕 이하 모든 고구려의 귀족들에게 봉작을 내리고 식읍과 주택
을 주어 석방했던 것이다. 고구려 정벌에 가장 공이 큰 연남생은 우위대장군 변국공에, 보장
왕은 사평태상백에, 연남산은 사재소경에 각각 봉해서 장안성에 거주하게 해주었다. 끝가지
항복을 거부한 연남건만은 사천성 긍주로 유배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민령에 대한 거부반응을 고려하여 특례법(부역령 외번인 투화자조항.)도 널리 선전했다.
중국 내륙으로 이주되는 자들에 대해서는 10년간 면세헤택이 주어진다. 10년후 과세를 시작
할 때에도 민호를 9등분 하여 1등호와 2등호에게만 세금을 징수하고 그 밑으로는 면세할 것
이다. 물론 이같은 혜택은 군사적 이용가치 때문이었다. 무후는 귀하한 고구려인들을 장차
단결병으로 편성해 북변 방위에 충당할 생각이었다. 무흐는 이로써 고구려에 대한 조치가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무후는 입술을 깨물며 늙은 승려에게
물었다.
"너는 동방교의 무뢰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못 들었느냐?"
"들었사옵니다. 하오나 지금은 신책군이 저들의 여당을 남김없이 색출하고 있지 않사옵니
까? 심려하실 일이 아닌 줄로 아뢰옵니다."
"바보 같으니! 이 일을 신책군에게 맡긴 것이 잘못이었느니!"
늙은 긍려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쳐들엇다. 그제서야 무후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용무영 파옥 사건은 조정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고여락의 딸을 한 달 전까지 고구려
인들이 임시로 수용되어 내부구조를 잘 아는 용무영에 다시 가둔 것부터가 실수였다. 그러
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파옥의 정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밤중에 소식을 듣고 뇌옥
으로 달려온 용무통군 후웅번은 일생일대의 불명예에 경악한 나머지 입에 거품을 물고 졸도
했다고 한다. 후웅번 장군은 그 다음날로 파직되어 금주로 유배되었다. 뒤이어 용우대장군
유중윤도 파직되었다.
어지간히 운이 나쁜 그날밤의 당직사령은 돌궐인으로 막남부의 중랑장인 아시테 웬푸엿
다. 웬푸는 그날 밤 100여명의 기병으로 추격대를 만들어 카수미들을 뒤쫓았다. 그러나 회창
인근의 숲에서 길 양편의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림줄까지 묶어놓고 활을 쏘아대는 카수미들
의 매복을 만나 부하들을 거의 다 잃고 자신은 사로잡혀 인질이 되었다. 웬푸는 관군에 의
해 화음에서 구출되었으나 파직되고 재산을 적몰당했으며 태형 100대에 유배판결을 받았다.
이런 일련의 문책으로 신책군과 함께 군대의 권부였던 용무군은 완전히 기가 꺾였다. 상
대적으로 신책군은 조정과 군대 모두에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무후는 자책에 찬 목
소리로 말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구구려 항로들이니라. 그런 것들이 지리도 잘 모르는 이곳에서 사람
을 죽이고 감옥을 부수고도 깜쪽같이 달아날 수 있겠느냐? 이번 사건에는 반드시 배후가 있
느니라."
"하오시면 신책대장군 배행검을 의심하시옵니까?"
"배행검은 잠시도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인물이니라. 권력을 쥐어주면 휘두를줄
아는 인물이지. 할 수 없어서 신책군을 맡겨놓았는데 너무 위험하게 되었어."
"하교를 내려주소서."
무후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곧 결단을 내렸다.
"신책군은 지금 고여락의 딸년을 뒤쫓고 있다. 아이들을 동원해 신책군을 뒤쫓아라. 그래
서 신책군보다 먼저 그년을 죽여라. 그것을 배행검이 동방교도와 결탁했다가 나중에 살인멸
구했다는 증거로 삼겠다."
"알겠습니다."
늙은 승려는 나타났을 때와 똑같이 조용히 사라졌다. 승려로 가장한 이 노인은 자객단 의
아방의 우두머리였다. 훗날 무후는 이런 조직을 전국적인 밀고체계로 운영되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 고밀사로 발전시켰다.
늙은 승려가 물러가자 무후는 손뼉을 쳐서 시중드는 사람들을 불렀다. 그들이 들어오자
무후는 환관을 시켜 내실의 창문을 열게했다.
겨울 한낮의 청랭한 공기가 싸하게 코 끝에 서려왔다. 무후가 앉은 이곳, 동쪽 별원의 4층
짜리 누각에서는 대자은사 경내가 한눈에 보였다. 거대한 본당 가람만 열채, 승려가 3천여
명, 딸린 행자며 노복이며 공양주가 2천 명이 넘는 대사찰이었다.
무후는 별원으로부터 시내 쪽을 향해 난 외줄기 길을 바라보았다. 바삐 물결치는 속세의
바다 위에 대자은사는 외로운 섬처럼 조용했다. 은은한 강경소리, 범패소리, 코 끝에 와 감
기는 향연의 잔해가 삶의 그 모든 시끌벅적한 비극을 지우고 있었다. 무후는 자신의 호흡을
헤아리며 시시각각 그녀를 괴롭히는 불안들을 잊으려 했다. 시선을 창밖에 둔채 무후는 조
용히 사람을 불렀다.
"보명!"
"예, 마마"
순간 무후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살기가 스쳐갔다.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쏘아보았다. 뼈가 가
늘고 얼굴이 해사하게 생긴 젊은 승려 보명이 딱딱하게 얼어붙은 자세로 서 있었다. 무후는
그 내면의 보이지 않는 격동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지금 흥분, 공포, 불안, 부끄러움으로 다
리를 후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보명은 어젯밤 무후와 같이 잔 승려였다. 두 차례 그의 수컷을 탐하고 곤하게 잠이 들었
는데 무후는 새벽녘에야 보명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을 알았다. 오늘
아침 예불에도 넋이 나간 것 같더니 점심공양을 할 때가지도 저 골이었다. 강요당한 파계.
그래서 허망감에 치를 떨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늘같은 황후와 동침한 두려움에 가위눌
려 있는 것인가. 어느쪽이든 무후는 비밀의 누설을 걱정해야 했다.
살려둘 수 없다...... 무후는 먼저 주위의 환관들을 내보냈다. 동침을 후회하는 남자의 소심
한 얼굴이 무후에게 걷잡을 수 없는 증오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런 증오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무후는 얼굴색을 더욱 부드럽게 하고 물었다.
"보명, 돌아가신 선황께선 극락에 가셨을까?"
"예?"
"우리가 이렇게 극락왕생을 비는 선황폐하 말이야. 정말 극락에 가서 아미타불의 곁에 앉
으셨을까?"
"이,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선황을 추선회향하시는 황후마마의 효성이 이토록 극진하신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선황께서는 틀림없이 괴로운 삼세의 업화를 떠나시어 아미타의 정토에
이르셨을 것입니다."
"그래? 지난날 선황계선 현무문에서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처단하시고 제위에 오르셨지.
만년에 무모한 고구려 정벌을 행하시어 산동과 산서에 사람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그래
도 틀림없이 왕생극락하셨단 말이군."
무후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오색영롱한 진주를 박은 쪽을 쓰고 나래를 펼
친 봉황새 문양의 비녀를 꽂은 무후의 머리장식이 버들가지처럼 천천히 흔들렸다. 무심하게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투였다. 보명은 말이 막혀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그러나 보명도 대자
은사의 경학원을 나온, 총명하기로 소문난 학승이었다.
"아뢰옵기 외람되오나 현무문의 일은 주공이 형제 관숙과 채숙을 죽이고, 이우가 형 숙아
를 독살하여 나라를 바로잡은 고사와 같사옵니다. 고구려 정벌 또한 무도한 오랑캐를 친정
하시어 변방을 편히 하고자 하신 것이니 이는 세속의 선악으로 논할수 없사옵니다."
그러자 무후의 눈이 벼르고 벼른 칼날처럼 빛났다.
"그래? 그러면 나는 어떠냐? 네가 보기에 나는 극락에 갈 것 같으냐?"
"예?"
"어떤 놈들은 나를 선황폐화와 금상폐하 두 부자에게 몸을 주어 황실의 인륜을 그르친 천
한 종년이라고 한다더군. 그런 내가 왕생극락할수 있겠느냐? 또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모함
해 죽이고 관어의 위(황후의 지위)를 찬탈한 도둑년이라고도 한다더라. 그런 내가 왕생극락
할 수 있겠느냐?"
보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것은 무후가 괜히 입에 담는 소리가 아니다. 보명은 그제
서야 무후의 마음 끝에 뵤족하게 날을 세운 적의를 느꼈다. 그러자 입이 얼어붙어 말이 나
오지 않았다.
"십악오역을 범한 죄인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떠들더구나. 그런데 돌아보면 나는 살생, 투
도, 사음, 망어, 양설, 악구...... 십악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범하지 않은 것이 없구나."
"마마, 부, 부처에 귀의하시어 법담게 참회하시고 불보살의 맑은 이름을 일념으로 외우시
면 죄업은 소멸되옵니다."
"닥쳐!"
격정을 못이긴 무후는 몸을 떨며 돌아섰다. 운남비단으로 만든 청색 용봉대수의의 소맷자
락이 망토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 서슬에 탁자 위에 있던 자기 물병이 쓰러지고 <고해자항
>이라 쓴 벽의 족자가 떨어졌다.
"참회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참회! 차모히를 하라면 골백번이라도 하지. 하지만 그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오늘도 밉살스런 놈들을 갈가리 찢어죽이지 않을 수 없어. 도저히
악한 짓을 저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런 오탁악세에 중생을 던져놓고 죄업이니 공
덕이니, 불타께서 일일이 장부에 그거나 적고 계실 리가 있나, 이 돌중 놈아!"
"......"
"십악오역이니, 지옥이니 떠드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구제의 대업은 오로지 불타
만이 능히 하실 수 있는 것이야. 미흡한 인간으로 구제를 말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지.
너희 승려를 비롯해 인간들은 모두 풍덩, 번뇌의 큰 바다에 빠져 있는 악인들이야. 이 사바
세계는 악으로 만들어진 거다. 무거운 세금은 백성을 근면하게 하고, 엄한 법률은 백성을 선
하게 하며, 모반에 대해 가해지는 잔혹한 형벌은 백성들에게 정의가 뭔지를 알게 하는 거야.
그렇다면 사바세계의 선은 옥좌에 앉아 백성들을 개돼지처럼 부리는 악인, 나같은 대악인이
만들지 않겠느냐. 불타께선 다른 중생들을 쳐다볼 필요도 없어. 불타께서 구제해야 할 인간
은 바로 나, 나 한사람이야!"
순간 보명은 무후의 눈동자에 명멸하는 무서운 광기의 불길을 보았다. 무후의 아름다운
얼굴은 살갗을 한 꺼풀 벗겨낸 듯 아수라의 모습 그것이었다. 보명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
파옴을 느끼며 무후 곁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나무아미타불......"
이 얼마나 처절한 지배욕인가. 무후는 이승의 지배의 끝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끝에서
허무를 느끼고 참회하는 대신 그녀의 영혼은 아승기겁을 뛰어늠을 또 다른 비상을 꿈꾸고
있었다. 아미타에게 극락왕생해야 할 자신의 권리를 들이대고 있다.
무후에겐 극락왕생까지도 권력이며, 투쟁이며, 지배였다. 무후는 선악의 모든 현세적 계울
을 무시하고 오직 아미타의 자비심만을 믿으며 그 힘에 의지할 때 구원이 있다는 철저한 타
력본원의 신앙을 갖고 잇었다. 보명은 갈증이 솟구쳤다.
나무아미타불...... 보명은 속으로 끝없이 아미타를 부르며 합장했다. 그런 보명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무후는 다시 말했다.
"너희 놈들의 계율 따윈 듣지 않겠다. 돌중 놈아, 따뜻한 방에서 흰쌀밥 먹고 염불이나 하
는 너희들은 중생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아느냐? 군인은 살인을 해야하고 창녀는 사음계를
범해야 하고 농민은 땅을 갈아 풀과 벌레를 죽이고 가축을 잡아야 살아갈 수 있다. 싫든 좋
든 죄를 지어 자비를 저버려야 한다.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번뇌의 바다에 시달리고
죽어서 지옥의 업화에 몸을 태워야 한단 말이냐?"
무후의 모습은 마치 성난 갈기털을 휘날리며 포효하는 사자와 같았다. 보명은 전신을 덜
덜 떨며 이빨을 딱, 딱 맞부딪쳤다. 그 얼굴을 본 무후는 속이 뒤집혀버렸다.
"아악, 악, 아흐흐"
무후는 돌연 비명을 지르며 배를 감싸쥔 채 비틀거렸다. 감정이 치밀어오른 나머지 위경
련을 일으킨 것 같았다. 무후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리곤 이빨로 아랫입술을 깨
문 험악한 얼굴오 온몸을 덜덜 떨었다. 깜짝 놀란 보명은 자기도 모르게 무후를 구하러 다
가갔다. 그의 손이 막 무후의 어깨에 닿았을 때였다.
"무엄한 놈!"
무후의 호통소리와 함께 보명은 아랫배에 화끈한 감각을 느꼈다. 순식간에 숨이 막히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한 자쯤 되는 칼이 그의 배를 깊숙이 찌른 것이다. 칼날의 혈조를 따라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피를 본 무후의 영혼은 그 저주스런 마성의 눈을
떴다. 무후는 칼을 뽑았다.
"무엄한 놈!"
이때부터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태였다. 무후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보명의 목을 자르고 그의 가슴과 어깨, 팔다리를 무수히 난자했다.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오
던 환관들은 질겁을 하고 고개를 외면했다. 가끔씩 겪는 무후마마의 <진노>였다. 환관들은
무릎으로 기어서 방 밖으로 달아났다.
환관들은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방안의 광란이 그치기만 기다렸다. 벌써 저렇게 죽어나
간 남총들, 무후의 하룻밤 정부들이 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입밖으로 내는 날은 그날이 곧 죽는 날이라는 사실만은 모두 똑똑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어떤 모진 놈의 불운이었고 어차피 무후마마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윗사람이었다.
무후는 미모와 학식을 겸비한 재녀였다. 사서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도 뛰어나서 그녀가
쓴 <여훈>은 식자들 사이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게다가 일찍부터 불교에 심취해서 아미
타불을 독실하게 믿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가 방해받았을 때 그녀에겐 완전히 다른 얼굴
이 나타났다. 그녀의 영혼 어딘가에 숨어있던 악귀의 힘이 쏟아지는 물처럼 폭류했다. 그것
은 막는 것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광란의 물보라를 튀기며 기세를 더했다. 이 폭류 앞에는
자식들까지도 용서되지 않았다.
잠시 후 방안의 폭풍우가 그쳤다.
무후가 냉정을 되찾는 데는 몇 분이 걸렸다. 무후의 얼굴에 튀긴 보명의 따뜻한 핏방울이
그녀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녀를 질식하게 하고, 귀를 윙윙거리게 하고, 가슴이 터질 것
처럼 만들었던 광기와 격정이 서서히 식어갔다. 그녀는 옷자락에 칼날을 닦아 감추고 창가
의 교의에 앉았다. 수령태감이 눈치를 살피며 무후의 수족과 같은 환관들을 지휘했다.
"마마께서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와라."
"안식향을 피워라."
"안돼! 다른 걸로 가져오너라"
이윽고 머리를 맑게 하는 향로가 교의 옆의 탁자에 놓여졌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더운 공기가 방안을 감돌고 있었다. 무후는 교의의 팔걸이를 잡
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손수 창문을 열었다. 그때 담장의 기와에서는 눈 녹은 물이 방울방
울 창문으로 떨어져내렸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무후의 가슴을 휘어잡았다.
무후는 환관들의 시중을 받아 천천히 피에 젖은 용봉대수의를 벗었다. 은서피로 안을 대
고 공작과 봉황을 금실로 수놓은, 품이 좁은 저고리가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여러 가지 꽃
무늬가 아로새겨진 비취색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수령태감이 새 옷을 바쳤다. 무후는 시
선을 창밖에 둔 채 환관들이 입혀주는 옷을 받아 입었다.
원왕생 원왕생 원생극락견미타 획몽마정수기별.....
얼굴을 할퀴는 불티처럼 금당에서는 다시 염불소리가 울려왔다. 무후는 그 소리를 들으며
보이지 않는 눈물을 삼켰다. 무후가 첫 순결을 바친 남자, 태종 이세민을 공양하는 염불이었
다.
태종은 남자 중의 남자였다. 무후가 자신의 모든 것을 접고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며 섬길
수 있었던 유일한 남자였다. 백성들에서 <전륜성왕>(차크라바르틴. 인도신화에서 하늘로부
터 금, 은, 동, 철의 네가지 수레바퀴를 얻어 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시키고 천
하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군사적 메시아)의 현신으로 숭배되었던 총명신무한 군주였다. 그러
나 태종은 이내 세상을 떠났고 무후는 이제 그의 며느리가 되어 그를 기리는 법회를 열고
있다.
당신의 뜻을 이으리라. 이 사명감이 무후를 떠받치고 있었다. 모든 오랑캐들을 진멸하고
저 하늘 끝까지 치세를 펴리라. 권문세족들을 철저히 탄압하여 혼란의 싹을 자르리라. 과거
를 공정하게 시행하리라. 유능한 관료를 등용하리라. 그리하여 이 드넓은 천하는 동일한 법
령, 동일한 문서, 동일한 행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리라. 힘으로 사해가 하나가 될 때
아미타가 바라시는 평화가 찾아오리라.
창밖의 저 아름다운 태평성대를 다스리는 군주는 살인자이어야 한다는 것. 그 잔혹한 진
실이 그녀의 가슴을 쳤다. 사람들은 고립을 무서워하며 끊임없이 서로를 찾아 살을 부비고
사랑을 갈구한다. 그런 축군본능이 도덕을 만들고 사람을 선인과 악인으로 분별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이 초라한 선악을 초극해야 한다. 무후는 자신의 피 묻은 손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거기서 이 방대한 제국의 운명을, 그 천변만화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무한한 힘을 느
꼈다.
7
모화리로 돌아오고 이틀이 지나갔다.
아무 소득이 없었다. 문간은 그동안 신발이 닳도록 모화리와 장안성을 돌아다녔다. 집 안
에 출입하던 사람들을 다 찾아다니며 아육과 함께 지내던 자들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 자
들에 대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문간의 집이 모종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슬금슬금 피하기만 했다. 나, 나, 나는 그때 자네 집에 없었던 걸루 하세. 아니 없
었네.
사흘째 되던 날 문간은 아란두가 탈옥하던 날의 정황을 알기 위해 아시테 웬푸를 만났다.
웬푸는 당직사령이면서 탈옥을 막지 못했을뿐더러 탈옥자들에게 거꾸로 사로잡혀 인질까지
되었다는 죄를 지고 있었다. 이미 파면되고 가산이 적몰되었으며 지금은 장안성 남쪽에 잇
는 신책군 본영에 연금되어 태형 100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형을 치르고 나면 그는 먼 남
쪽 바닷가 애주로 유배될 예정이었다.
신책군 본영은 곡강지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밖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숲 사이
로 난 좁은 오솔길을 한참 올라가서 영문 안으로 들어서면 여기 이런 땅이 있었구나 할 만
큼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각 건물의 출구에는 청룡도를 든 병사들의 경비가 삼엄했다. 문간
과 진가도는 웬푸가 갇혀 있다는 옥사 건물안의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널따란 방 한쪽에는 중국식 온돌인 캉이 수수줄기를 듬뿍 머금고 활
활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편편한 천장을 떠받친 길고 검은 들보 아래에는 똥똥한 배
에 헐렁헐렁한 통바지를 입고 눈이 도토리처럼 볼록 튀어나온 청년이 앉아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문간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돌연 두 사람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
다.
"원진이? 사원진이 아니냐?"
"문간이......구나."
"이게 얼마 만이야. 그런데 너 여기 근무하니?"
"아니......"
"그럼 여긴 어쩐 일이야?"
원진은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발끝만 꼼지락거렸다. 문간은 열여섯 살 때, 그러니까 임용
시험 직전에 족집게처럼 잘 가르친다는 장안성 안의 학당을 1년간 다닌 적이 있었다. 사원
진은 그때 만난 친구였다. 그런데 3년 만에 만나는 이 동창녀석은 어딘가 이상했다.
원래는 이런 놈이 아니었다. 원진은 공부는 지지리도 못했지만 학당에서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수선스러운 소년이었고, 늘 음담패설을 늘어놓아 좌중의 흥을 돋우던 녀석이었
다. 학당을 마치고 친구들이 어울려서 수상쩍은 패거리를 만들 때면 언제나 원진이 최후의
결정을 내리곤 했다. 불사 올리는 대웅전에 똥개 풀어놓기, 나들이 나온 기녀들 치마 들춰보
기, 남의 가게에서 현판 훔쳐오기 따위의 저열한 바보짓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술집에만 가면 진탕만탕 술을 퍼먹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끝없이 노래를
불러제꼈다. 그럴때면 언제나 기운이 불끈불끈 솟고 하늘이 돈짝만하다는 얼굴이었다. 또 언
제가는 엄청나게 비싼 곤륜노(곤륜노는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흑인 노예다. 고려노, 돌궐노,
토번노 등 보통 노예 한 명의 값은 비단 21필, 돈으로 4천400문이었다. 파사노, 즉 페르시아
노예도 7천600문이었는데 비해 아라비아 상인들이 파는 곤륜노는 1만 2천문이 넘었다.)를
사서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친구들이 그 검둥이 옆에서 법석을 떨고 행인들이 놀라 구경하
자 미친 듯이 좋아하던, 약간 모자라고 쾌활한 놈이 아니었던가.
그런 녀석의 침울한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문간은 물었다.
"원진아, 너 감옥에 갇히게 되었냐?"
"아니...... 넌 하나도 안 변했구나. 신수가 다 훠언하다야."
"속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신세 조졌다."
"무슨 소리야?"
원진은 진가도를 힐끔거리더니 자기 옆에 둔 음식 보자기를 가리켰다.
"나 사식 들여보내러 온 거야. 맏형이 죄를 짓고 여기 갇혔거든. 우리 집이 망조가 들었다
는 거 아니냐. 형 때문에 나라에서 가산을 몽땅 적몰했어. 거기다가 형은 또 매를 100대나
맞고 귀양살이가지 해야 된다."
"아니, 그러면 네 맏형이...... 아시테 웬푸가 네 형이야?"
"어? 네가 우리 형을 어떻게 알아?"
문간은 사원진이 돌궐 출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원진은 아주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자라 행동거지며 말씨가 전혀 이민족 같이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원진이라는 이름은 집안에서 제일(톤) 귀중한 자(유쿠쿠)라는 뜻을 가진 <톤
유쿠크>를 한자로 옮긴 것이었다. 원진은 막내아들이었다. 농경민족과는 반대로 유목민족은
아버지 곁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막내가 집안의 지위와 재산을 계승하기 때문에 막내에
게 이런 이름이 많았다. <사>라고 하는 성씨도 <아시테>를 중국식 성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의 맏형인 아시테 웬푸는 돌궐에서 쓰던 성씨를 그대로 쓰고 막내인 원진은 중국식으로
바꿔쓰고 있었던 것이다.
듣고 보니 원진의 사정도 딱했다. 원진의 아시테 씨족은 본래 한미한 신분이었다. 돌궐인
가운데 가장 존귀한 신분은 알타이산맥에 거주할 때부터 민족을 영도했던 아시나씨였다.(아
시나씨만이 <칸>을 배출할 수 있으므로 군장씨족, 가한씨족이라 한다.) 그 밑에 귀족계급으
로 세리토리씨, 추오씨, 코오로씨, 호오루씨의 4대 명문이 있었다. 그 밑에는 또 사제계급으
로 쭈스씨, 눌라이씨 등이 있었다.
아시테씨는 원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단순한 호족이었다. 너무 가난해서 돌궐이 당의
식민지가 된 뒤에는 남자들이 군대에 들어가서 받는 월급으로 고향의 씨족들이 먹고 살았
다. 그런데 이 씨족 중에 차츰 전쟁에 공을 세워 출세한 <인물>들이 나타나면서 세력이 커
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4대 명문을 능가한다는 소리도 듣는, 일종의 신흥귀족이 되었다.
족장의 맏아들인 웬푸가 용무군의 중랑장이 된 것은 이 씨족 최대의 경사였다. 용무군에
배속된 변방 출신의 장교들은 중국 본토인들보다 몇 배 많은 월급을 받으며(현경 3년(658
년)부터 실시된 귀항관품령 특별요전 조항.) 고향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귀덕중랑장이 된 웬
푸의 월급은 매월 35관, 3만 5천 문이었다. 원진이 곤륜노를 사서 호기를 부린 것도 바로 이
런 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웬푸의 파직은 곧 그의 부대에 배속된 아시테 씨족 전체
의 파산이었다.
"너 용무군에 우리 형 밑에 딸린 식구들이 얼만지나 아니? 자그마치 570명이다, 570명. 이
제 우리 씨족은 몽땅 쪽박차는 거다."
"엄살떨지 마. 너 내 신세는 어떤지 아냐? 네거리에서 처형당할 판이다."
문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주었다. 원진은 여간 놀라지 않았
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진심으로 문간의 불행을 원통해했다.
"우리 둘 다 첩첩산중이구나. 어쩌면 그럴 수가 있느냐? 난 네가 소부감에 다니며 잘사는
줄 알았어."
"너도 어딘가 다닌다고 들었는데?"
"작년에 경조부(장안시청)에 취직하긴 했어. 하지만 그게 형의 연줄이었거든. 이 일이 터
지니까 나도 짤렸지. 빌어먹을! 내가 말야...... 어떤 서령사의 약혼녀와 잘 지내고 있었거든.
정말이야! 두 번이나 같이 잤어. 그런 여자는 생전 처음이었어. 궁둥이는 봄날의 강언덕처럼
뽀송뽀송하고 다리는...... 어휴, 나는 죽는줄 알았어 죽는 줄 알았다고. 이 꼴만 안됐어도 그
여자는 내거였어."
"너, 이 판국에 그런 소리가 나오냐?"
문간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원진은 어느새 옛날의 유쾌한 얼간이로 다시 돌
아가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마음이 정말 따끈따끈했다. 이런 처지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때 덜컹, 하고 방문이 열리더니 칼을 찬 위병 두 사람이 아시테 웬푸를 데
리고 나타났다.
웬푸는 수염이 엉망으로 자라 초췌했지만 태도가 지극히 조용했고 어딘가 사람을 쭈뼛거
리게 만드는 기품이 있었다. 얼마 전 장안성 가는 큰 길에서 고구려인들과 드잡이질을 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진가도와 문간, 그리고 웬푸 형제들 네 사람은 방석을 마주하고 둘러앉았다. 웬푸를 데리
고 온 두 위병은 다섯 발짝쯤 떨어진 곳에 버티고 섰다. 진가도는 그의 군경력에 경의를 표
하는 의미에서(같은 중랑장이지만 귀덕중랑장 웬푸는 종4품하로 종6품상인 진가도보다 다섯
계급이 높음.) 약간 절을 하고 말했다.
"중랑장님, 우리는 고여락의 딸을 찾고 있습니다. 수고스럽지만 그날 밤의 정황을 한번만
더 들려주십시오."
웬푸는 조용하면서도 약간 느린 음성으로 대꾸했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그런데 그때 원진이 갑자기 불쑥 끼여들었다.
"형님!"
웬푸는 천천히 동생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마치 북극의 얼음이 그의 혼 속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냉정한 눈빛이었다.
"형님, 욜루그더라 모두 초원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면서요?"
"......"
"미치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초원으로 돌아가다뇨? 우리 씨족이 중국에 내려온지 벌써
20년이오. 죽으나 사나 여기서 비비대야지 소똥 말똥으로 불때는 그 촌구석으로 어떻게 돌
아가냐구요."
"시키는 대로 해라."
"아, 초원에는 누가 오라고 한답디까? 우리는 장정만 500명이 넘는 대식구요. 이 많은 식
구들이 어디서 뭘 먹고 살거요? 카라톤에 천막 치고 들쥐나 잡아먹고 살자 이거요? 형님,
마음 약하게 먹으시면 안됩니다. 이까짓 유배형 얼마든지 감형받을수 있어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제가 뛰겠슴다. 예? 요로 요로에 운동을 하겠다구요."
"이봐요, 동생분, 어서 사식을 드리고 가세요. 우리는 지금 수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다 못한 진가도가 말꼬리를 가로챘다. 그러자 원진은 어떤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그는 눈꼬리를 치켜뜨더니 맹렬히 대들었다.
"내가 당신네들보다 먼저 와서 기다렸잖소! 이건 우리 식구들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
요. 우리가 몽땅 굶어죽으면 당신이 책임질거요?"
"아니, 보자보자 하니까 이사람이!"
분기탱천한 진가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웬푸가 나서서 진가도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웬푸는 돌궐말로 동생을 꾸짖기 시작했다.
"톤유쿠크 이놈! 이방인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이냐? 기왕지사 집과 전답 다 몰수
되지 않았느냐. 여기서 가난하게 사느니 초원에서 당당하게 사는게 뭐가 나빠. 그동안 푼푼
이 저축한 돈이 있어. 그걸로 우리 씨족이 유목할 가축쯤은 충분히 장만할 수 있다. 살 곳은
걱정 마라. 야실 쿠유(초록빛 샘터)에 초지가 비어 있단다. 원래는 눌라이 씨족의 땅이지만
지금은 주인이 없다니 일단 그곳에 가면 돼.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내자. 한번만 더 거론하면
패죽여버리겠다."
악을 쓰던 원진이 금방 마른 호박처럼 쭈그러들었다. 원진은 목을 움츠리고 우물쭈물 하
더니 모기만한 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형님은 지금 유배지로 떠나잖아요. 누가 씨족들을 지휘합니까?"
"누구긴 누구야, 너지!"
"예에? 마, 마, 말도 안돼. 난 사냥 한번 나가본 일이 없어요."
"지금 집안에 너말고 누가 있어? 아버지는 앞응ㄹ 못 보시고 둘째 세빔은 죽었고, 셋째
아즈만은 고구려땅에 출정해있고 넷째 툴루이는 폐병이 들었잖아. 이킨치 숙부와 의논해서
당장 떠나라."
"차라리 날더러 죽으라고 하쇼!"
원진은 진정으로 절망하고 있었다. 원진은 술, 도박, 여자라면 밥을 먹다가도 달려가는 사
람이었다. 특히 여자는 치마만 둘렀다 하면 그 궁둥이에서 코를 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살결이 희고 냄새도 향기로운 중국 여자들을 버리고 돌궐 여자들만 있는 초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우욱, 그 거무튀튀한 얼굴, 그 고약한 냄새, 남자들 찜쪄먹을 것처럼 힘만 센
그...... 우욱,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
그러나 감히 맏형에게 항거할 수는 없었다. 원진은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완전히 흙빛
이 되어 대기실을 떠났다. 진가도는 흡족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씨족 모두를 초원으로 돌아가게 하시다니 큰 결심을 하셨군요."
"하룻밤의 생각에도 인생은 금방 변하지요. 누가 그런말을 하더군요. 우리는 계속 훌륭한
오랑캐로 살아가야 한다구요. 그러기 위해서는 본바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구요."
"본바닥이라...... 혹시 탈옥한 고여락의 딸이 어디로 갈지 짐작이 가지 않으십니까?"
웬푸는 반쯤 졸리는 것 같은, 초연하기 그지없는 눈을 들어 진가도를 보았다.그토록 가혹
한 징계와 전락을 겪었지만 그는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물론 진가도의 조바심에 대해
웬푸는 하등 걱정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소소한 타산을 넘어서 그의 모습은
침착 바로 그것이었다. 마치 무언의 목소리로 이제는 더 바랄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
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웬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짐작하는 그대로지요. 아직 요동에는 당나라 군대에 항복하지 ㅇ낳은 성들이
많다면서요? 그 여자는 그리로 가고 있거나 갈 기회를 노리고 있겠지요. 그 여자는 부름을
받았으니까요."
"부름이라니요?"
"성스러운 부름 말이외다. 배에 잡혀 있을 때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웬푸는 담담한 얼굴로 그날 밤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8
비상사태를 알리는 요란한 종소리에 뛰어나가보니 캄캄한 어둠 속에 병사들이 우왕좌왕하
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웬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병사들을 따
라 같이 달려가보니 병기고 옆에 있는 뇌옥이었다. 소매가 좁은 호복을 입고 <사비>라 불
리는 가죽 허리띠를 맨 돌궐병들이 둥그렇게 무너가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뭐야, 뭐 하며
병사들을 헤치고 다가간 웬푸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뇌옥 앞에 입초하던 병사 둘이 화살을 맞고 죽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쏜 화살인지 그
위력이 너무 끔찍했다. 병사들은 머리, 목, 몸통을 관통당해 화살촉이 등뒤까지 튀어나온 것
이다. 웬푸는 전신에 맥이 쭉 빠지면서 분노와 공포에 턱이 덜덜 떨렸다. 뇌옥 안으로 들어
가 칼에 찔려 살해당한 네 명의 간수들을 보자 기가 막힌 심정은 더욱 그의 열울 돋구었다.
난 이제 죽었다.
근무태만으로 참수형을 당할 사태였다. 웬푸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싸매고 감옥 안에
주저앉아버렸다. 한참 만에야 제정신이 들었다. 웬푸는 부하를 장군부로 보내 후웅번 장군을
데려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봉수대에 연락해서 국도봉쇄를 명령하는 신호를 올리라고 했다.
예, 예 하며 달려가는 부하들을 보고서야 웬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웬푸는 교위(대대장) 카살을 불러 부하들을 집합신키라고
명했다.
"말을 있는 대로 끌고 와! 탈옥한 놈들을 추격한다. 군장은 필요없어. 무기만 들고 집합하
라고 해. 자 빨리! 빨리!"
웬푸 주변으로 사람들이 달려와 보고를 하고 다시 명령을 받아 부챗살처첨 흩어졌다. 그
리하여 고야락 일족의 탈옥소식이 모든 병영안에 알려졌다. 반 시진도 안되어 연병장에 탈
옥자를 추격하기 위한 100여명의 기마대가 대형을 갖추었다. 대부분 칼등이 초승달 처럼 휘
어진 만도를 찬 막남부의 병사들, 웬푸 휘하의 돌궐병들이었다. 횃불을 준비하고 연병장에는
모닥불을 피웠다.
"쭈, 쭈, 중랑장니임!"
이날 밤의 숙부참군인 교위 아브라함(우둔위대장군 겸 금성군공이었던 이아브라함 장군의
맏아들.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았고 훗날 보국대장군에 봉해졌음.)이 달려왔다. 용무영 안서
부 소속인 이 페르시아인은 서툰 중국말로 탈옥자들이 북쪽 위병소를 박살내고 회창가도로
간 것 같다고 전해주었다.
회창? 아브라함의 말에 웬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산의 용무영에서 고구려 오랑캐들이
도망칠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동북쪽의 신풍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신풍으로 가서
위수를 따라가다 황하를 건너 분수를 거슬러올라 태원에 이르고 진주, 정주, 탁주, 유주, 소
주, 평주를 거쳐 영주에 이르면 고구려로 갈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장안 쪽으로 가는 것이
다. 장안성 밖 고구려인들이 많이 사는 사아리에 몸을 숨기는 것이다.
그런데 회창은 여산의 서북쪽이었다. 운하의 폭도 넓지 않고 장안과 너무 가까운 보안상
의 이유도 있어서 선박의 왕래가 드문, 자그마한 나루터이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그리로
달아나서어쩌겠단 말인가? 그러나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웬푸는 훌쩍 말에 뛰어올라
추격대를 향해 호령했다.
"횃불에 불을 붙여라. 놈들은 회창으로 달아났다. 나를 따르라!"
웬푸의 한혈마는 쏜살같이 용무영의 정문을 지나 북쪽 위병소를 향해 짓쳐나갔다. 그 뒤
릉 용감하기로 소문난 정예 중의 정예, 돌궐 기병대가 일제히 말갈기를 날리며 달려갔다. 모
든 군장을 벗어버린 기병대는 놀라운 속도로 뻗어갔다. 문자 그대로 질풍신뢰의 추격이었다.
달담의 도깨비불 같은 추격대의 횃불이 회창가도를, 달린다기보다 화살처럼 날고 있었다.
추격대는 두 시간여를 달리고 멈추고 달리고 멈춘 끝에 멀리 회창 나루터가 굽어보이는
언덕에서 마차의 바퀴소리를 들었다. 바퀴소리는 나루터로 이어지는 백양나무 숲을 향해 가
고 있었다. 그때 구름에 가려있던 달이 삐져나왔다. 달빛에 백양나무 숲 사이로 난 고샅길로
쏜살같이 사라지는 마차가 보였다.
웬푸는 추격대를 둘로 나누었다. 하나를 카살에게 맡겨 숲을 우회해서 곧장 회창 나루터
로 직행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웬푸 자신이 이끌었다. 웬푸는 부하로부터 두꺼운 느릅나무
방패 폐로를 받아들었다. 감옥에서 본 석궁 때문이었다.
웬푸는 굳은 얼굴로 폐로를 가슴 앞에 쥐고 맨 앞에 서서 캄캄한 백양나무 숲으로 돌격했
다. 그러나 두 마장쯤 달려갔을까. 웬푸의 한혈마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웬푸의 몸이 허공을 날아 길바다게 패대기쳐졌다. 웬푸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옆의 풀섶으로 몸을 굴렸다. 아니나다를까, 뒤에 오던 말들이 웬푸가 나뒹군
자리에 연쇄적으로 쓰러졌다. 말게 깔린 부하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고구려인들이 길 양편의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림줄을 묶어놓은 것이었다. 말들이 쓰러지
자 어둠 속에서 석궁의 화살들이 팽 패앵 강맹한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비명소리, 달아나
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달아나는 자기 말을 부르는 소리, 뒤에 오는 대열에 상황을 알리는
소리......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추격대를 엄습했다.
"횃불을 풀섶으로 던져라!"
웬푸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횃불을 쥐고 있어봤자 표적밖에 안되니 아예 던져서 불
을 지르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 큰소리는 어둠 속에서 웬푸의 위치와 신분을 드러내었다.
다음 순간, "으악!"하며 웬푸 옆에 있던 부하가 다래끼 속의 물고기처럼 펄쩍 뛰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고구려인의 칼에 찔린 것이다. 이어 웬푸의 뒷덜미에 싸늘한 칼바람이 날아왔
다. 웬푸는 몸을 던지다시피 엎드리면서 몸을 풍차처럼 크게 돌렸다. 첫칼을 실수한 상대방
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웬푸의 발길질에 맞아 쓰러졌다. 허리에 찬 칼을 뽑을 겨를도
없었다. 웬푸는 돌멩이를 쥐고 달려들어 왼손으로 적의 목을 조르며 세 번 네 번 내리쳐서
머리통을 부수어 죽여버렸다.
이렇게 숲의 입구에서 시작된 난전은 쫓고 쫓기면서 세차게 얼크러져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칼 부딪히는 소리가 숨가쁘게 일어났다. 석궁을 다시 장전할 겨를이 없었다. 10여명
쯤 되는 고구려인들은 좌충우돌하며 끝까지 항거하다가 우르르 한꺼번에 달려드는 돌궐병에
의해 하나씩 난도질뙤어 죽어갔다. 이윽고 숲의 반대편 시꺼멓게 번쩍거리는 시냇물 속에
마지막 고구려인이 돌궐병들에게 포위되었다.
오른팔이 잘려나간 그 고구려인은 보기에도 끔찍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몇 군
데나 창칼에 찔려도 굴하지 않고 왼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다부지게 싸웠다. 그러나 결국 기
력이 다하였다.
"항복해라!"
웬푸의 호령을 듣자 그는 이빨을 드러내고 씨익 웃으며 칼을 떨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아압!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날려 자신을 겨눈 창에 스스로 찔려 자결했다.
"찢어죽일 고구려놈들!"
대열을 정비한 웬푸는 증오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머지 고구려 놈들을 보이는 대
로 박살내겠다고 이를 갈았다. 부하가 아홉 명이나 죽고 10여명이 심한 부상을 당했던 것이
다. 만리타향에 와서 고락을 같이한 금쪽같은 부하들이었다. 웬푸는 고구려인들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묶게 한 뒤 부대를 이끌고 숲을 빠져나왔다.
웬푸의 부대는 금방 회창의 객점거리가 보이는 큰 길에 이르렀다. 하늘에는 새벽의 흐릿
한 여명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느 집 마당에선가 닭이 꾹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문 여닫
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한 촌락의 왼쪽에 차가운 어둠을 머금은 운하의 강물이 길을 내고
있었다.
안개가 낀 운하의 제방에서 카살의 부대가 웬푸를 소리쳐 불렀다. 천만 뜻밖에도 카살의
부대는 닭 쫓던 개꼴의 암담한 몰골이었다. 카살부터가 군복이 갈가리 찢어진 피투성이가
되어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놈들은?"
카살은 다 죽어가는 얼굴로 강물 위를 가리켰다. 강물에는 돛이 세 개 달린 커다란 판옥
선이 떠 있었다. 커다란 주등이 앞뒤로 세 쌍씩 달리고 다섯 가지 색깔의 비단이 돛대에 매
달려 드리워져 있었다. 화려한 깃발이 달린 의장용 창까지 꽂아 신랑신부를 태운 놀잇배처
럼 보였다.
저 배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배를 잡아타고 쫓아야 하겠지만 경비선은 탁지전운사에나 가
야 빌릴 수 있고 강가에는 전부 노로 젓는, 천으로 둥그렇게 뜸을 씌워 선실을 만든 조각배
들 뿐이었다.
카살의 부대는 운하 입구에서 마차를 따라잡았으나 마부석 옆에서 긴 쇄채찍을 귀신처럼
휘두르는 놈이 일어나 달려드는 기병들을 파리처럼 떨구었다는 것이다. 카살은 채찍에 감겨
10여보나 끌려갔다고 한다. 목이 졸려 두 눈의 흰자가 완전히 뒤집혀지고 온몸이 넝마가 되
었다. 몇 보만 더 끌려갔다면 질식해서 죽었을 것이다. 마차는 유유히 운하의 부교에 대놓은
범선 앞에 도착했고 범선 안에서 10여명의 활잡이들이 이쪽을 향해 맹렬히 화살을 퍼부었다
고 한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웬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렇다구 이러구 있으면 어떡해! 강가의 작은 배들을 당장 징발해. 모두 배에다 태워!"
"중랑장님, 어쩌시려구요?"
"기껏 다섯 자쯤 되는 뱃전이야. 작은 배로 다가가서 배 위로 기어오른다."
병사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본래 유목민인 돌궐병들은 야
전에는 능해도 수전의 경험은 없었다. 노도 한번 잡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자 웬푸
와 친한 분대장 무카리가 동료들을 설득했다.
"이 보드라고, 저것들은 우리 용무영에서 놓친 놈들이여. 짓금 저놈들 못 잡으면 다른 부
대가 잡아도 우리가 문책받아. 만에 하나 저놈들이 영영 도망가부리면 어쩔 것이여? 그땐
우린 이거여."
올해 마흔둘인 무카리는 손바닥으로 자기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자, 빨리 배에 타드라고. 나두 몸 성히 고향에 가고 싶은 사람이여."
제일 연장자인 무카리가 이렇게 나오자 필사적인 활기가 일어났다. 병사들은 강둑에 매여
있는 배에 보이는 대로 올라탔다. 그리하여 아침의 찬란한 금빛 광선이 빛날 무렵엔 얼추
10여척이 넘는 배들이 짙푸른 강물 위에 떴다. 돌궐병들은 활을 넣는 딱딱한 가죽주머니를
노로 삼아 미친 듯이 배를 저어갔다.
조각배들은 금방 범선을 따라잡았다. 고구려인들이 탄 범선이 좀처럼 속력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범선은 동북쪽을 향하고 잇엇꼬 바람은 마침 서북풍이었다. 범선은 갈 지자로 꼬
리를 틀며 나아가고 있었다.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역풍을 받는 범선은
돛대르 회전축으로 삼아 돛을 좌우로 흔들며 키를 또 좌우로 틀며 가야하는 것이다.
웬푸의 조각배들은 범선을 50칸 거리(88m)까지 바싹 따라붙었다. 그런데 그때 고구려인들
이 탄 범선이 갑자기 마룻줄을 당겨 돛을 마지막 활대까지 폈다. 키를 돌려 오른쪽으로 나
아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범선은 돛폭 가득 바람을 안고 순식간에 웬푸들의 조각
배로 덮쳐왔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범선은 불과 10칸(17m) 앞으로 다가들었다. 기습을 당한
조각배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배를 돌려! 한쪽으로만 노질을 하란 말야!"
얼른 배를 돌려 범선의 진로에서 비키면 되지만 돌궐병들에겐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
다. 말을 타면 호랑이처럼 무서운 돌궐병도 물에서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부질없이 범선
에다 대고 활을 쏘는 자, 벌떡 일어나 조각배를 온통 흔들리게 하는 자, 놀라서 활집을 놓치
는 자...... 그러는 사이 배의 이물 위까지 높이 튀어나온 범선의 용골은 바로 코앞에 닥쳐왔
다.
맨 앞에 있던 웬푸의 배가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모면했다.
범선에는 노련한 키잡이가 타고 있음이 분명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범선의 용골은 웬
푸의 뒤에 있던 조각배를 박살내었다. 이어 범선은 크게 왼쪽으로 선회하여 그 뒤의 조각배
를 또 전복시켰다. 뱃전에는 활잡이들이 나타나 불화살을 맹렬하게 쏘아대었다. 기름헝겊을
단 불화살은 배뜸에 불을 붙여 두척의 배가 불길에 휩싸였다. 웬푸는 분노로 몽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따라가! 왼쪽에 바짝 배를 붙여."
웬푸의 조각배는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저어 범선을 따라붙었다.
"갈고리 밧줄!"
웬푸는 외쳤다 그 목소리는 마치 쥐어짜는신음소리처럼 들렸다. 웬푸의 뒤에서 병사 하나
가 갈고리 밧줄을 쥐고 일어섰다. 그는 밧줄을 머리 위로 빙빙 원을 그리며 돌리다가 범선
의 갑판 선실을 향해 힘껏 던졌다. 갈고리가 상갑판의 어딘가에 걸렸다. 밧줄을 당기자 조각
배와 범선이 바짝 붙여졌다.
웬푸는 가죽 허리띠에 만도 한 자루를 끼우고 밧줄을 잡았다. 웬푸는 뱃전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절벽을 타는 등반가처럼 배 몸체의 삼판에 매달린 웬푸는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범
선의 갑판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좌우를 살펴볼 사이도 없이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오는 적
이 있었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철삿줄 같은 머리를 머리띠로 질끈 묶은 선원이었다. 웬푸는 윗몸을
틀어 도끼날을 피하며 재빨리 두 팔로 상대의 허리를 감아쥐었다.
이얍! 하는 기합과 함께 웬푸는 상대의 오른쪽 다리를 감으면서 한바퀴 몸을 돌렸다. 그
리곤 그대로 상대를 들어 갑판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나 도끼를 든 자가 떨어져 풍덩 하
는 물소리도 들리기 전에 도 한사람이 달려와 창끝을 홱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이놈잇!"
웬푸는 껑충 뛰어 뒤로 물러서면서 허리띠의 칼을 뽑아 창끝을 후려쳤다. 그러나 이번엔
웬푸의 칼이 한 발 늦었다. 상대의 창은 칼에 맞아 조금 아래로 빗나갔을 뿐이었다. 날카로
운 창날이 웬푸의 허벅지에 박혔다. 불에 달군 쇠가 와닿은 것 같은 아픔이 찡하게 온몸으
로 번져왔다. 그러나 웬푸는 굴하지 않고 아수라 같은 소리를 지르며 칼을 힘껏 옆으로 후
렸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웬푸의 칼은 상대의 창과 무릎을 잘라버렸다. 상대는 엉덩방아를 찧
으며 절단된 다리를 안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웬푸가 아픔을 참으며 넘어진 상대를 향해 칼
을 치켜들 때였다. 한줄기 뜨거운 선혈이 웬푸의 얼굴에 뿌려졌다.
공교롭게도 부릅뜬 눈에 핏물이 튀긴 걳이다. 웬푸는 당황했다. 소매로 눈을 비비려 했으
나 거기엔 옷소매를 감아 고정시킨 딱딱한 가죽수갑이 있었다. 웬푸는 다시 두 손바닥을 눈
으로 가져갔다. 그때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웬푸의 압이가 날아가며 무시무시한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강편이었다. 웬푸는 의식을 잃고 밑둥이 잘린 거목처럼 갑판 위로 쓰러
졌다.
9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웬푸의 이야기에 끌려 자기도 모르게 무릎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그러나 진가도는 한결 냉정했다.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추리는 여산 용무영에서 사라진 마차와 회창가
도에서 다시 발견된 마차가 꼭같았다는 오류에서 출발했습니다. 사실은 그사이에 두 시진이
나 지났는데 말입니다. 추격하던 중랑장님께서 깜쪽같이 속았던 것처럼 수사를 하는 우리도
똑같이 속았던 것입니다."
웬푸는 겸연쩍게 웃으며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진가도가 말을 이었다.
"용무영에 침입한 자들은 분명 소수였습니다. 갇혀있던 두사람을 포함해서 마차 한 대에
다 탈 수 있는 인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회창가도에서 마차는 10명이 넘는 다른 집단과 함
께 있었습니다. 바로 백양나무 숲에서 추격대를 저지하다가 죽은 고구려인들 말입니다. 그사
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사이에 아란두는 마차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는 거군요."
문간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추격대는 121명이었습니다. 늑대 울음소리도 잘 들리는 캄캄한 한밤중에, 무
려 121필의 말이, 횃불까지 들고 뒤쫓아갔습니다. 그 불빛이며 말발굽소리는 20리 밖에서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범인들의 마차가 그냥 꾸벅꾸벅 회창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데는 이
유가 있었습니다. 그 마차는 추격대에 의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추격대를 유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불찰이었습니다."
웬푸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가도는 외경심을 느끼며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는 얼른 구변 좋은 동정자로 돌아갔다.
"용서하십시오. 절대 중랑장님을 비난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라도 속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랑장님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문책
에 부당한 점이 많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중랑장님께 모든 책임을 덮어 씌운 것은 파
렴치한 일입니다."
웬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로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고문관과
진가도는 서로 쳐다보았다. 100대의 태형은 매를 맞는 도중에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형벌
이었다. 웬푸의 담담함은 도저히 그런 혹형을 기다리는 죄수 같지 않았다. 진가도는 기가 꺾
이어 물었다.
"말씀을 중단시켜 죄송합니다. 그 배에 탔던 자들의 얼굴은 보셨습니까?"
웬푸는 피곤한 표정으로 한참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봤지요. 고구려인들은 내 상처를 치료해줬습니다. 나는 그들과 같이 먹고 자며 엿새 동안
그 배에 있었습니다......"
웬푸는 눈자위에 명멸하는 강한 빛줄기를 느끼며 깨어났다. 깨어나자 웬푸는 팔을 쭉 뻗
고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허공에 떠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떻게 된 거지.
빛줄기는 웬푸의 발목께에서부터 얼굴로 비스듬하게 쏘여지고 있었다. 몸은 마치 물에 빠
진 것 같은 야릇한 중력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퀴퀴한 악취를 머금은, 음습한 공기가 어둠
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때 길게 뻗어오는 빛줄기 속에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형체는 거꾸로 서 있었다.
그제서야 웬푸는 자신이 발가벗긴 채 거꾸로 묶여있음을 알았다. 그는 푸줏간에 걸린 고
깃덩이처럼 갑판 밑의 가룡목에 발목이 묶여 머리를 아래로 처박고 매달려 있었다. 웬푸는
자기 앞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눈이 따가워서 시야를 집중할
수 없었다. 창날에 찔린 허벅지로부터 피가 흘러내려 얼굴이 피범벅인 것이다. 뒷머리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몸을 숙여 웬푸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에 심한 칼자국이
나서 살점이 뺨의 한쪽으로 뭉쳐진 으스스한 인상의 선원이었다.
"풀어줘라."
웬푸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구려말이 들리고 선원은 허리띠에서 예리한 단검을 뽑았다.
웬푸는 놀라 몸부림치며 허리를 뒤틀었다. <칼자국>은 발목을 매단 밧줄을 끊었고 웬푸는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웬푸는 화살 맞은 늑대처럼 상처가 난 뒤통수를 쥐고 울부짖었다. 다음 순간 웬푸는 다시
비명을 토하며 구석으로 튕겼다. 칼자국이 웬푸의 옆구리를 걷어찬 것이다. 무서운 힘이었
다. 웬푸의 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더니 배의 삼판에 부딪혀서야 간신히 멈추었다.
그때 뒤에 서있던 사람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칼자국을 제지했다. 검은 두건(복두)을 쓰고
수수한 유삼을 입은 준수한 얼굴의 서생이었다. 그 사람은 웬푸의 목과 등을 주물러 경혈을
풀어주었다. 얼굴이 벌겋게 되어 거품을 토하던 웬푸는 간신히 밭은숨을 몰아쉬며 소생했다.
서생은 칼자국에게 웬푸를 부축하여 선실로 데려가게 했다.
서생은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웬푸의 더러워진 몸을 쌀겨와 무환자나무
껍질을 가루로 빻아서 소기름과 함께 버무려 만든 당나라 비누로 깨끗이 씻었다. 그런 다음
독한 술로 상처를 소독하고 소의 내장에서 뽑은 매우 가는 외과용 실로 찢겨진 머리와 허벅
지를 꿰매주었다. 꿰맨 곳에는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단단히 감았다. 치료가 끝나자 웬푸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보살펴주는 거요?"
"한 달 전에 당신도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었지 않소? 내 이름은 오이라고 하오. 당신은
아시테 중랑장이지요?"
그제서야 웬푸는 서생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장안성 가는 길에서 아란
두와 함께 고여락의 두 개골을 받아갔던 사내였다. 신비한 눈빛을 가진 사내였다. 그의 눈동
자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 해변에, 세상의 막바지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웬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오이는 선실 밖으로 나갔다가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귤껍질과 생강을 넣어 깨끗한 참기름과 꿀을 바르면서 약한 불에 구운 소고기 구이와 녹
두가루를 섞은 흰 죽, 회를 떠서 청주에 넣고 병에 봉한 잉어고기, 잉엇국 등이었다. 하루종
일 물 한모금 먹지 못한 휀푸는 염치불구하고 볼이 미어터지도록 열심히 먹어치웠다. 밥을
먹자 참을 수 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웬푸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에 침대에 쓰러졌다.
아무도 웬푸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내처 잔 웬푸는 선실 밖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한줄기 새벽빛이 비쳐드는 어두운 강물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갑판 위
에 모여있었다. 스무 명쯤 됨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열을 지어 앉아 ㅎ나결
같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후 사람들의 눈앞에 무수한 어둠의 자락을 걷어내는 거
칠고도 장려한 태양이 금빛 물비늘을 반짝이며 올라왔다.
한 사람이 은은한 뿔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제일 앞줄에서 눈처럼 희고 빳빳한 변을 쓰고
품이 넓은 흰색 도포를 입은 제관이 앞으로 나가 향로에 불을 붙였다. 고개를 치켜든 용 모
습의 기단부에 달걀 모양의 향받침이 얹힌 금빛 향로에서 하늘하늘 세줄기 향연이 피어올랐
다.
강바람에 아련한 사라라향이 흩어져 뱃전의 공기를 휘저었다. 그 향기는 너무 청아하고
너무 섬세해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제관은 동쪽의 태양
을 향해 네 번 절하고 경건히 두 손을 모았다.
"박다르여. 빛의 신이시여. 모든 신들의 신이시여. 별의 길을 정한 분이시며, 달이 차고 기
울게 하신 분이시여. 당신께오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도다."
그러자 그 뒤로 앉은 신도들이 일제히 화답하였다.
"나는 박다르, 밝으신 신명을 따르옵니다.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영광되시고 숭경스러우
신 신명께 맹세하옵니다. 나는 추모(주몽)님과 같은 길을 걸어 악의 무리와 싸우겠습니다.
나는 죄없는 이를 죽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음란하지 않겠
습니다. 제가 아노니, 신성한 이여, 당신이 항상 나의 곁에 계시옵니다. 저에게 힘이 남아있
는 한 의로움을 지키겠습니다."
제관이 새벽햇살 앞에 경전을 펼쳐 한 구절을 봉독했다.
"추모께서 말씀하셨도다. 마음의 길을 따를지어다. 박다르에 속한 이들이여. 신들은 의인
을 알아보시리라.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할지어다. 박다르에 속한 이들이여. 고난 속에 지혜의
기쁨이 샘솟으리라."
이어 신도들은 조용히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동방의 찬가를 불렀다. 웬푸는 이들의 모든
의식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출의 빛무리 앞에서 펼쳐지는 이 경건하
고도 고상한 예식은 그를 감동시켰다. 예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흩어졌고 제관은 웬푸가 있
는 선실로 걸어왔다. 그 제관은 오이였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저 날마다 올리는 <해돋이 예배>지요."
오이는 목에 걸었던 금빛 신부를 벗었다. 그리고 제관의 예복을 벗어 깔끔하게 개어놓은
뒤 어제의 유삼으로 갈아입었다. 그를 지켜보던 웬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이 와중에 에배를 올리다니...... 관군이 쫓아온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지금쯤 이 배는 전
국에 수배되었을 겁니다."
"운하를 오가는 배들은 관내도에만 1천척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쉽게 잡히지는 않겠지
요."
"하지만 위수나 낙수는 이렇지 않습니다. 이 물길로 쭉 내려가면 십중팔구 잡힐 겁니다."
"그 경우도 대비하고 있습니다......."
오이는 아래도 내리깔았던 눈을 들고 다시 한번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찌보면 그
는 몹시 낙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이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허공의 한구석을 바
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신들의 가호를 확신합니다."
"귀하의 나라는 정벌되었습니다. 천자의 명령을 거역하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땅의 권세가 신들의 정의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시테님, 저 태양을 보십
시오. 그리고 저 빛을 통해 전해오는 신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오이의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에 이끌려 웬푸는 선실의 창으로 비쳐드는 햇살을 보았다.
태양은 어느새 어둠을 물치지고 천지를 제압하고 있었다. 그 빛을 마주하자 웬푸는 자신의
내면에서 하나의 이방인이 자라는 것을 느꼈다. 뭔가 강하고 힘찬 것이, 타오르는 듯한 불길
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둔 돌궐 독립의 꿈, 세월의 물보라를 거슬러 그가 늘
젖어드는 옛 돌궐제국의 꿈이었다. 웬푸는 그 위험천만한 꿈을 뿌리치려는 듯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신의 정의도 종족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당나라는 검고 고구려는 희다ㅣ고 무
자륻스이 자를 수 없지요. 나는 돌궐 사람인데 당신들의 탈옥으로 아무 상관도없이 경을 치
게 생겼습니다. 이게 신들의 정의입니까?"
"당신도 그 형장에 있었습니다. 우리 제사장님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목격하지 않았습니
까? 그분이 뭘 잘못했습니까? 고구려인들은 조상의 땅을 떠나기 싫어한다고 말한 것이 잘
못입니까? 망국의 와중에 최소한의 자존심과 신앙을 지킨 것이 잘못입니까? 그런데도 그분
은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천자 한 사람이 혹형을 휘두르며 사람을 버러지처럼 짓밟는 것이
중국입니다. 한없이 많은 사람들을 나라라고 하는 외양간 속에 가둬놓고 개돼지처럼 부려먹
다가 마침내는 잔인하게 죽여서 잡아먹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습니다. 그런 살인으
로 천하를 유지합니다. 이것이 불의가 아니면 무엇이 불의란 말입니까?"
웬푸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여락이 처형되던 장면이 들끓는 용암의 거품처럼 기억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예리한 칼날이 고여락의 얼굴에 엷게 칼집을 내었다. 정수리에서부터 이
마, 콧날, 입술, 턱까지. 그리곤 좌우로 면도하듯이 껍질을 벗겨 푸들거리는 살점을 드러내었
다. 그렇게 온몸의 살갗을 벗긴 뒤 형리는 어깨에서부터 하나하나 살점을 떼내기 시작했다.
웬푸는 그 모든 과정을 남김없이 지켜보았다. 고여락은 지옥이 아니고서는 겪을 수 없을, 그
런 극한의 고통에 울부짖다가 죽었다. 그의 살은 모두 해가 되어 죄수들이 먹었다.
웬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나를 부추기지 마십시오. 나는 먼 초원으로부터 씨족을 데리고 와서 이곳에서 어렵사리
기반을 잡았습니다. 일족의 운명을 짊어진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해 준엄해야 합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몽상가와 궤변가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요. 나는 규율과 절도를 아는 군인입니
다. 당나라의 장교라구요."
오이는 조용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웬푸는 그 웃음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오
이가 더욱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아시테님, 우리를 적대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의 신앙은 머지않아 만개될 화평한 세상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돌궐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뭉흐 탱
그리(영원한 푸른 하늘님)를 경배하는 그 가르침을 기억해주십시오. 비천한 인간이 되지 마
십시오. 신성한 왕국이 가까웠습니다.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신의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당신네 고구려인들은 꿈속에 갇혀 살고 있어요. 우리 돌궐 사람들은 당나라 덕에 가난한
유목민의 땟국을 벗었습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우린 중국의 지붕 밑에서 더 잘살게 되었다
이겁니다. 이걸 알아야 해요."
"중국에서 누리는 모든 호사에는 죽음이 묻어있지요. 부귀영화를 누리며 평생을 사는 것
보다 신들을 섬기는 한순간이 더 값집니다. 아시테님의 조상들도 모든 예속을 거부하고 위
험해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이리의 삶(박해자들을 피해 으르 이쉬의 깊은 동굴로 달아나
그곳에서 모든 돌궐족의 조상이 되는 열 명의 아들을 낳았다는 성스러운 암이리를 말함.)을
택했지요. 이릴리 칸(이름은 아시나 부민. 오구츠 민족을 정복하고 552년 아바르(연연)를 격
파하여 돌궐 제1제국을 건설했다. 돌궐 제1제국은 5대 무칸 칸에 이르러 중앙아시아 전지역
을 석권했으며 중국 북조의 황제들이 조공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올릴 만큼 부강을 자랑했
다.)을 잊지 마세요. 조상들의 기억 속에 신들에게로 가는 비밀의 문이 있습니다. 지금은 태
양이 아침을 기다리며 어두운 미지의 세계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밤은 결코 영원하지 않
을 것입니다."
오이는 웬푸의 곁을 떠나 선실을 나갔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웬푸는 갑자기 늙어버린 얼
굴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사로잡힌 나흘째 되던 날 웬푸는 다시 손발이 묶여 갑판 밑
으로 처넣어졌고 낯선 중국 선원들이 들어왔다. 오이와 고구려인들은 어딘가에서 또 다른
배로 갈아타고 사라진 뒤였다. 5일째 되던 날 웬푸는 화음 지역에서 해상경찰의 수색정에
의해 구출되었다.
10
웬푸와 면담한 뒤 진가도는 휘하의 500명을 동원했다. 회창의 백양나무 숲 인근지역을 집
중적으로 수배해서 목격자를 찾기 시작했다. 포상금도 내걸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가 없이
약속한 6일이 다 가고 상부에 보고해야 할 날이 내일로 닥쳐왔다.
사형을 면치 못할 문간도 문간이었지만 진가도의 실망도 컸다. 6일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다니던 진가도는 문간을 명옥원 별채에 두고 술집으로 가버렸다. 물론 문간이 도
주할 것을 우려하여 별채에 엄중한 감시를 붙여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문간은 별채의 자기 방에 틀어박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문간의 방에는 아육 아저씨가
놓아둔 몇 개의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육 아저씨가 수집한 현교(조로아스터교. 일명
배화교.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이란 지역의 고대종교.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의 국교가 되었고 기원후 6세기 중국에 전파되었다.)의 부적들, 배성교(일명 칼데아교. 기원
전 6세기 바알교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성신 신앙. 시리아로부터 서돌궐까지 중근동 아시아
에 널리 퍼졌음.)의 예언서들, 경교의 나무십자가 목걸이, 빈랑수 열매, 청동 면도기 따위가
잔뜩 놓여 있었다.
이제는 유품이 되어버린 물건들. 문간은 새삼 눈알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
개를 숙였다. 아육 아저씨처럼 자신도 결국 죽을 것이다. 한참 후 문간은 코를 풀고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크게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촛불을 켜고 붓과 먹물통을 꺼내들었다. 이제
까지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종이에 적었다. 그러면서 단서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문간은 아란두를 신책군의 손에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녀
를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이것이 문간이 그녀의 행적을 추리하는 묘한 이유였다. 그
녀를 생각하면 이런 파멸적인 운명으로나마 그녀와 계속 얽혀있다는 사실까지 감미로웠다.
스스로도 미쳤다 싶은 감정이었다. 그녀를 바라보기만 해도 가장 뜨거운 정열을 불사르며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과 같을 것이고 극락정토가 따로 없을 것이었다......
문간은 간신히 몽상에서 깨어났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그리곤 충혈
된 눈으로 책상 위의 종이를 읽어내려갔다.
9. 12. 평양성 함락. 고구려 멸망.
12. 1. 고구려 포로들 장안성에 도착.
12. 9. 고려락 처형됨.
12. 10. 아육과 장안성으로 놀러가다가 아란두를 만남.
12. 15. 고구려 포로들 용무영에서 석방됨.
12. 21. 카수미파 고구려의 귀족 불덕과 염유 살해.
12. 22. 무후, 동방교도 체포를 명함. 아란두 용무영에 투옥됨.
12. 23. 아육이 수상한 고구려 남자 넷을 데려옴.
12. 28. 카수미파 용무영 감옥을 습격. 아란두를 빼냄.
12. 29. 신책군에 체포됨.
12. 30. 아육과 가족들도 체포됨.
1. 3. 아육 감방에서 사망.
1. 4. 용무군 화음에서 추적하고 있던 빈 배를 발견함.
1. 7. 임시로 석방됨.
문간은 12월 23일 부분을 매만지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육이 고구려인들을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 모든 사건들은 문간과 아무 상관이 없었을 일들이었다.
한 나라의 멸망, 원정군들과 포로들, 포로들의 이상한 종교, 살인사건, 탈옥사건, 날벼락과
같은 투옥, 심문, 내정상의 음모와 암투...... 소부감 임금장부의 좁은 세계에 갇혀있다가 갑자
기 이런 엄청난 세계로 끌려온 것이다. 문간은 자신의 무력을 절감했다. 저항할 수 없는 숙
명에 내맡겨져버렸다는 생각이 문간을 괴롭혔다. 세상은 갑자기 낯설어졌고 타향이 되어버
렸다.
아육이 데려왔던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생겼더라? 그러나 그 얼굴은 변덕스러운 운명만큼
이나 모호하고 흐릿했다. 문간이 똑똑히 본 사람은 둘이었다.
한 사람은 도회지 출신 같은 조용한 풍모의 젊은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털이 북실북실한
검푸른 피부에 체중이 250근도 더 나가게 보이는 비대한 중년사내였다. 문간은 중년사내의
몸피 때문에 겨우 그들을 눈여겨보았다. 그 뚱보 사내는 조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온몸을
흔들며 숨쉬기도 힘들다는 듯이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아육은 어디서 이런 이상한 자들을 만났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아란두와 오이를 만난 날부터 아육은 아침만 먹으면 어디론가 나갔다가 밤이
이슥해야 들어왔다. 그 무렵에 아육은 대체 어디에 갔던 것일까?
문간은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너무 값싼 것이어서 누가 훔쳐가지도 않은 아육의
옷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문간은 옷들 중에서 아육이 그 무렵에 입었던 장삼을 찾아냈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던 아육의 성품처럼 낡았지만 깨끗하게 손질된 옷이었다. 촛불을 켜고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옷에는 아무 특징도 없었다.
그런데 그 옷을 제자리에 걸다가 문간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문간은 아육의 옷을
다시 벗겨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게 무슨 냄새지? 옷의 한쪽 소매 끝에서 코에 익은 아육의
체취 외에 이상한 냄새가 하나 더 나고 있었다. 그것은 콕 쏘는 것처럼 독하고 역겨운, 뭔지
모를 광물성 용액의 냄새였다. 그 냄새를 맡자 엉망으로 엉켜있는 기억의 실타래 속에서 미
미한 보푸라기처럼 숨어있던 한 개의 실 끝이 흔들렸다.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았지? 어떤 장소가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나 의식의 표면으
로 고개를 쳐들었다. 문간은 무릎을 치며 일어났다. 그리고 달려가 벌컥 방문을 열었다. 문
간을 감시하기 위해 별채 정원에 배치된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쳐들었다.문간은 더듬거리
며 말했다.
"진가도를...... 당신네 중랑장을 빨리 불러오시오! 단서를 잡았소! 내가 단서를 잡았다고
하시오!"
장안성 동쪽의 신풍은 거대한 하진도시다. 중국의 5대 하천인 황하, 백하, 회하, 양자, 전
당으로부터 장안으로 올라오는 거의 모든 선박들이 여기서 닻을 내린다. 선착장에는 항상
크기가 들쭉날쭉한 상선 수백 척이 정박해 있고 즐비하게 늘어선 창고 구역에는 수천 명의
짐꾼들이 분주하게 물품들을 나른다.
"아육이 잘 가던 그곳이 어디란 말이오?"
돈 많은 상인으로 변장한 진가도가 물었다. 그 뒤에는 점원으로 변장한 신책군의 군관 열
두명이 따르고 있었다.
"잠자코 따라오시오. 북쪽 구역이오."
문간은 진가도를 안내해 가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만약 자신이 점찍은 그곳에 정말 아란
두가 있다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거듭해도 무슨 수가 없었다. 이미 약속한 6
일이 다 지났고 이게 아니라고 하면 문간은 곧장 감옥으로 끌려가야 할 판이었다. 그의 계
산을 알기라도 하듯 두 명의 건장한 점원이 문간의 왼쪽과 뒤쪽에 바짝 따라붙었다. 오른쪽
에는 진가도가 있었다.
신풍의 북쪽 구역은 가난하고 시끄러운 동네였다. 일자리를 구하려는 외국인들, 한밑천 잡
으려 장안에 상경했다가 곧 환상이 깨진 농부들, 이 어수룩한 풋내기들을 마지막으로 갈취
하려는 사기꾼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소시장과 노예시장에는 각양각색의 범죄자들이 저
마다의 능력과 재주를 겨루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문간은 그 한구석 4층쯤 되는 시커먼 목
조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목책 가까이 다가서다가 진가도와 문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육의 옷에서 풍기던 바로
그 광물성 용액의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죽을 무두질하는 부식제의 냄새
였다.
"고감사, 여기가 어디요?"
"안만수라는 사람의 마구공장입니다."
안만수는 아육 아저씨와 한 고향에서 자란 친구로 원래는 <우준야싸막>이라고 하는 돌궐
사람이었다. 중국에 귀화한 뒤 말장수로 한 재산을 모았다. 곧 마구 제조업에 손을 대었고
군대의 납품을 따낸 뒤부터는 장안성 안에 가게를 낼 만큼 크게 성공했다. 남의 집 하인으
로 전락한 아육과는 자연 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아육은 회창에 올 때마다 꼭 이 마구공장
을 찾았다.
이 공장의 젊은 관리인인 <오쓰 시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오쓰 시보도 돌궐인이었는
데 중국식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냥 <욱사시부>라고 썼다. 진가도는 고개를 갸웃거렸
다.
"욱사시부?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신풍호한 욱사시부?"
"맞습니다. 그 사람입니다."
욱사시부는 신풍 일대를 주름잡는 <뱃놀이파>의 두목 모십팔의 <형제분>이었다. 그래서
인지 다른 도시에서 노는, 한가락씩 하는 똘마니들도 이 근처만 오면 오금을 못 펴고 <따꺼
(큰형님)>가 계시는지 그 눈치부터 살폈다.
욱사시부는 뱃놀이파가 소매치기, 들치기 같은 초잡한 일을 할 때부터 같이 고생했다. 한
창때는 욱사시부가 형제들의 우두머리였고 지금의 모십팔 두목은 그가 아끼는 동생이었다는
말도 있다. 3년전 뱃놀이파는 도기와 쇠몽둥이가 난무하는 대접전 끝에 장가보파를 몰아내
고 신풍을 장악했다. 그들은 매춘과 불법도박을 하는 자기들의 배에 <승선유광(뱃놀이)>이
라는 깃발을 내걸었고 이때부터 뱃놀이파라는 이름이 강호를 진동시켰다.
어찌된 일인지 욱사시부는 이무렵 강호를 떠났다. 그리고 이 마구공장에 묻혀 손수 바늘
과 무두질 가죽을 쥐고 조용히 살아갔다. 짐작컨대 뱃놀이파가 커지면서 오랑캐 출신의 두
목은 아무래도 곤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욱사시부는 인물이었다. 은퇴했지만 수많은 똘마니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는데 두 눈썹이 검고 얼굴색은 불그레하며 귀가 큰 것이 풍채부터가 듬
직했다. 요시협은 이란 말처럼 짐짓 시끄러운 저잣거리에 묻혀 살면서 임협의 길을 걷는 자
같았다.
"왜 진작 그 얘기를 하지 않았소!"
진가도가 버럭 화를 냈다. 술 때문에 평소의 신중함을 잃고 열두명만 데리고 온 것을 후
회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신책군은 자사 이하의 모든 지방수령들에 대해 병량 징발권이 있
었다. 진가도는 부하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압아 한사람에게 신책군 중랑장의 신분을 증명
하는 자신의 금군문부를 건네주었다.
"도미, 자네는 이 지역 자순군에 가서 지원을 요청하게. 이곳으로 병력을 있는 대로 다 데
려오게."
"알겠습니다."
도미를 보내고 진가도는 목책안을 살폈다. 그러나 진가도는 자신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
는 수십개의 눈들을 알지 못했다. 그 눈들은 길 맞은 편의 닫힌 문과 창 뒤에서 나직나직하
게 귓속말을 속삭이며 진가도와 그 일행을 감시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자순군을 찾아간 도
미의 뒤로 신속하게 따라붙었다.
도미를 기다리는 동안 진가도는 점점 신경이 예민해졌다.
이 악명높은 우범지역은 오후의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악다구니를 떠는 소
리, 그릇이 깨지는 소리, 누군가를 사정없이 패는 듯한 소리, 또 누군가가 목구멍에 피가 걸
려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 진가도의 육감이 그런 아수라장의 틈바구니에, 주위의추레
한 울타리 사이에,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대변이 흩어져 있는 더러운 집들의 문과 창 뒤에
도사리고 잇는 어떤 위협을 가르쳐주었다.
또 한명의 압아인 부분노도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진가도에게 다가서면서 나직하게 물
었다.
"중랑장님, 공기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조바심이 더해진 진가도는 결심했다. 그렇다. 이런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도 위험하다.
"부분노, 자네는 세 명을 데리고 뒷문을 지켜. 나머지는 일단 한번 나와 같이 들어가보자.
고감사, 당신이 앞장서시오."
마구공장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잠시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각 공방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에는 바깥의 떠들썩함으로부터 절연된 묘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마두공방과 안장공
방, 장식공방, 마갑공방 그리고 안채 어디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진가도의 턱짓에 문간은 가장 큰 건물인 안장공방으로 들어갔다. 안장, 등자, 안장 밑에
바치는 언치, 뱃대끈, 가슴걸이끈, 껑거리끈을 만드는 공방이었다. 안장틀 위에 가죽을 입히
거나 옻칠을 하던 공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문간을 쳐다보았다. 불행히도 공방장 외에
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안장틀의 엉덩이받이에 무늬를 조각하고 있던 공방장이 일
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공방장은 대답 대신 냉랭하게 문간을 쏘아볼 뿐이었다.
공방장은 검진천이라고 하는 고구려 사람으로 깡마른 체격에 눈매가 날카롭고 언제 봐도
무뚝뚝하기가 참나무 같았다. 몇번 자리도 같이했지만 절데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검
진천의 눈빛에 질린 문간은 우물쭈물 뒷걸음질쳐서 마두공방으로 갔다. 마두공방은 말머리
에 매는 말굴레, 재갈, 고삐, 채찍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다행히 만만한 얼굴이 있
었다.
"신형, 잘 있었소? 욱사시부님은 어디 계시오?
문간이 반갑게 어깨를 친 것은 투실투실한 얼굴에 발갛고 둥글어 꼭 혹시를 얹어놓은 것
같은 코를 가진 신보구였다. 신보구는 고막해족(코마글린 타타비. 키타이(거란족)와 함께 7
세기에 지금의 북경, 대동 일대에 거주했던 민족. 10세기 거란족이 요를 건국하면서 거란에
복속되어 사라짐.)이었는데 이 공장에서 가장 얼빠진 녀석이라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고 다
알고 있었다.
허리도 부실한 주제에 여자를 어지간히도 밝혀서 늘 돈에 쪼들렸다. 월급만 타면 조악한
비희집(당대의 음화집)을 사거나 유곽으로 달려가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손님인 문간도 돈
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물론 돌려받을 생각은 아예 없었다. 신보구는 영주에서도 남의 돈을
떼먹었다가 네거리에서 형틀에 묶여 연 사흘동안 채찍을 맞아 허리를 다친 위인이었다. 다
행히 참연사(형리)를 잘 만나 귀를 잘리지는 않았지만 노예로 팔렸다가 어찌어찌 이 공장에
붙어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보구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문간을 보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쁜 숨을 몰
아쉬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마구 문지르더니 그는 갑자기 흥분하며 남의 목소리를 빌려온 듯
한 야릇한 음성으로 고함을 쳤다.
"앙이, 그런 걸 와 하필 내한테 묻능기요? 아요? 내는 모르요! 내가 누구한테 고자질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이오? 하아, 하아, 와이카노, 참말로."
신보구는 이렇게 터무니없이 악을 쓰더니 공방 안쪽으로 들어가버렸다. 그통에 말갑옷을
만드는 마갑공방과 말머리장식, 가슴걸이장식, 껑거리장식, 말방울을 만드는 장식공방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문간과 진가도 일행을 쏘아보았다.
문간은 어색하게 목례를 하며 마당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런데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
진가도가 문간의 소매를 붙들었다. 진가도의 예리한 눈짓은 마두공방의 한쪽 방 앞에 놓인
신발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짚신이었는데 다만 그 크기가 보통 신발의 두배는 되어보였다. 진가도는
턱으로 재빨리 원을 그린 뒤 문간을 쳐다보았다. 이 공장에 평소에도 저렇게 큰 사람이 있
었느냐는 의미의 질문이었다. 문간은 진땀을 흘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진가도의 손가
락이 단호하게 방문을 가리켰다. 세 명의 군관이 등짐에 숨기고 있던 칼을 뽑아들고 일제히
그 방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문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이쿠! 억! 하는 소리가 잇달아 들리
는 가운데 그 세 명이 차례차례 방 밖으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닌가. 이어 커다란 곰이 동굴
을 기어나오는 것처럼 털이 북실북실한 뚱보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숨쉬기도 힘들다
는 듯이 겨우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간은 다리가 떨렸다. 뚱보는 바로 문간의 별채에 묵고 있던 그 카수미, 피부가 시커먼
그 비대한 몸집의 중년사내였기 때문이다. 진가도가 품속에서 한쌍의 판관필(혈도를 찌르는
무기)을 꺼내며 앞으로 나섰다.
"신책군이다! 조사할 일이 있으니 너는 우리를 따라가야겠다. 반항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
다."
뚱보는 나른한 눈매로 픽픽 웃었다. 이럴 수가! 군관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기겁을 했다.
공방의 공인들이 칼과 도끼, 몽둥이를 들고 그들을 포위했기 때문이다. 진가도는 분노한 음
성으로 부르짖었다.
"이놈들이 감히! 감히 금군에게 칼을 겨누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게로구나!"
뚱보는 또한번 히죽 웃었다. 진가도는 기합을 지르며 비스듬히 몸을 날렸다. 그리곤 벼락
같이 판관필을 뻗어 뚱보의 종아리를 찍으려 했다. 뚱보는 몸을 솟구쳐 그 공격을 피하면서
진가도의 머리를 걷어찼다. 문간은 그 무거운 육체가 발휘하는 족제비처럼 날쌘 거동에 기
절할 만큼 놀랐다. 진가도는 끈 떨어진 연처럼 튕겨가 가죽을 널어둔 건조대에 머리부터 꺼
꾸러졌다.
"저 역적을 잡아라!"
진가도의 부ㅠ하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뚱보는 몸을 바람개비처럼 돌려 물구나
무를 서더니 두 다리로 뒷발차기를 내질렀다. 두 명이 수장 밖으로 날아갔다. 고구려의 수박
도 <택견>의 한 초식이었지만 문간으로선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예였다. 뚱보는 떨어
진 칼을 쥔다 싶더니 다짜고짜 앞에 있는 신책군을 향해 칼을 올려쳤다. 그 군관은 한 칼에
목이 뎅겅 잘려졌다. 그 목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뚱보는 다시 칼을 휘둘러 또 다른 한
군관을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두 동강 내버렸다.
공인들이 달려들어 진가도와 쓰러진 신책군들을 모조리 옷을 벗기고 묶엇다. 문간도 같이
벌거숭이가 되어 오랏줄에 묶였다. 마두공방 뒤에는 가죽과 나무틀, 염색통 따위를 쌓아두는
커다란 물품창고가 있었다. 공인들은 고문간과 살아남은 여섯 명의 신책군을 이 창고에 처
넣었다.
일은 급박하게 되었다. 뚱보와 공인들은 모두 마두공방에 모여 대책을 의논하는 눈치였다.
신책군들은 그들대로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았다. 모두 손발이 뒤로 돌려져 묶여 있
었다. 그러나 몸을 굴려서 등을 마주대면 서로의 손발을 묶은 오랏줄을 어떻게 풀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신책군들은 필사적으로 결박을 풀려고 했다. 그러나 채 성공하기도 전에 창고
문이 열리며 많은 공인들이 삽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다짜고짜 흙바닥으로 되어있는 창
고 밑을 파기 시작했다.
신책군들은 안색이 새파래졌다. 진가도가 소리쳤다.
"대, 대, 대역무도한 놈들!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그러자 뒷짐을 지고 공인들의 땅파기를 지켜보던 사람 가운데 한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몰라서 묻는 거요? 당신들 묫자리를 파고 있지 않소."
소년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였다. 열다섯쯤 되었을까? 짱구 머리에 얼굴이 동글납작한
소년이었다. 진가도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감히 네놈들이...... 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이분들이 중국말을 잘 모르니 내가 소개하지요. 아까 여러분들이 일장을 겨룬 이 근수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걸걸중상이라고 하지요. 남들이 수박도의 명인이라들 하는데 바로 내
엄마의 남편이라오. 그 옆에 있는 얼굴이 해쓱한 사람은 송새별이라고 원래 송막도독부에서
땅이나 쓸고 찻물이나 끓이고 요강이나 비워주던 녀석이지요. 연전에 내 엄마 남편의 고제
자가 되겠다고 들어왔어요. 하나밖에 없으니 고제자고 저제자고가 있겠소만."
소년의 발음은 거친 동북 사투리가 섞여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 말투는 완전히 망
나니 같았는데 다만 그 무섭도록 영악하게 반짝거리는 눈빛이 문간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소년은 말을 이었다.
"또 이 옆에 있는 예쁘고 뽀송뽀송한 누님은 달래나리라고 하는데 활을 귀신같이 잘 쏘지
요. 풍신이 훌륭한 저분이 대염모라고 우리들의 대장님이오. 주몽왕께서 성별하신 홀승골산
의 제사이시고 동명제에 참여하는 17인 신찬사 가운데 한 분이시며, 고구려 왕실의 11인 복
점관 가운데 한분이셨지요. 나라가 망했으니 이도저도 다 꽝이지만 말요. 요즘은 <카수미파
>라는 수도단을 맡고 계시지요."
"이, 이놈들...... 네놈들이 바로!"
"히히히...... 용무영 감옥을 부순 사람들이 아니냐고? 바로 그렇소. 저 네분이 땅굴을 통해
들어가고 나는 밖에서 마차를 지켰소. 지옥에 가거든 누가 보내서 왔는지 잘 얘기하시오. 내
이름은 걸걸조영이라고 하오."
"방자한 놈! 이 방자한 노옴!"
진가도는 분통을 터뜨렸다.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어디 밖으로 나가봐라. 지금쯤 자순군이 이 집을
개미처럼 에워싸고 있을 것이다."
소년은 눈을 치뜨고 고개를 발딱 젖히며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아이구, 이걸 어떡하지? 다, 다, 당신이 자순군을 불렀단 말이오? 이거 큰일났군. 큰일났
어. 여보게들, 우리 머리통이 아무래도 옮겨질 것 같애."
소년은 궁둥이를 뒤로 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쉴새없이 지껄였다.
"우릴 만나보지도 않고 자순군부터 불렀더란 말이오? 꼼짝없이 잡히게 생겼으니 우리들은
어떡하란 말이오! 이런 금군문부가 있다고 함부로 그래도 되는거요?"
소년은 품속에서 딱딱한 종이로 된 금빛 명첩을 꺼내었다. 진가도의 신분증이었다. 소년은
중국어와 부여어를 섞어 호들갑스럽게 울부짖었다.
"아이구머니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신책군 고려부의 대장님이시구나. 형제들, 쭈, 쭈,
쭈, 중랑장 나으리시네."
지켜보던 카수미들과 공인들이 잔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그것을 너희들이...... 도미는, 도미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 사람은 바쁜 일이 있다고 먼저 갔소. 풍도(저승의 수도)에 간다더군. 아참, 나으리께서
뒷문으로 보낸 네 명이 있었지! 그사람들도 따라갔소."
그때 창고문이 열리며 건장한 사람이 들어왔다. 공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절망에
빠져있던 문간은 눈이 번쩍 뜨였다.
"욱사대가! 욱사대가! 나요, 나 고감사요. 날 좀 살려주시오."
네모난 얼굴에 턱수염을 기른 욱사시부는 조용히 문간을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서 한때
신풍의 암흑가를 장악했던 자의 위엄과 냉혹함이 느껴졌다. 욱사시부는 눈을 조금 내리깐
채 말했다.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고감사. 당신은 의리를 배신했소. 이곳으로 신책군을 끌어들이지
않았소?"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오. 당신들 때문에 내 가족이 죽게되었단 말이오."
문간은 카수미파들이 자기 집에 가져온 불행과 자신의 처지를 누누이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욱사시부에 의해 잘려졌다.
"닥치시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요. 가족 때문에 친구를 밀고하다니. 당신은 당신의
스승을 욕되게 했소."
"이 모든 일들을 언제 한번 귀띔이라도 해줬소? 그런데 이제 와서 의리를 묻다니 조리가
안 맞지 않소?"
욱사시부는 움찔해서 대염모를 돌아보았다. 대염모는 걸걸조영의 통역을 듣더니 알아서
하시라고 했다. 문간은 때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더 내쏘았다.
"이곳에 아란두님이 계시다면 여쭤보시오. 나를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욱사시부는 문간을 풀어주고 옷을 입혀서 데리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신보구가 비틀거리
는 문간을 부축해서 나가자 그와 엇갈리듯 욱사시부의 부하 하나가 창고로 뛰어들었다. 이
곳을 찾는 자들이 또 있다는 첩보였다.
"뭣이?"
"자순군은 아닙니다. 지금 동쪽 큰길에 있어요. 처음 보는 자들인데 기도가 심상치 않습니
다."
욱사시부는 원숭이처럼 몸을 날려 창고안의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들창을
열고 지붕 밖으로 나갔다. 동쪽 큰길에 똑같은 차림을 한 세 사람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
다.
그들은 가장 화려한 복장을 한 여행자처럼 보였다. 동그랗게 머리 꼭대기를 드러내고 챙
만 남겨둔, 얼굴을 거의 덮는 검은 비단의 삿갓을 쓰고 걸을 때는 바람에 너울거리는 검은
외투를 걸쳤다. 질긴 흑색 아마포를 누빈 신발을 신고 역시 검은색의 각반을 찼으며 양어깨
에는 금빛의 장식용 수술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등에는 휘어진 모양으로 보아 외날칼이 분
명한 긴 칼을 지고 있었다.
범죄세계의 정보에 훤한 욱사시부는 금방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경찰과 군대와 법의
보호를 받지만 스스로는 법을 지키지 않는 무법자들. 황실과 밀약을 맺은 해결사들. 강호의
사람들이 가장 무어숴하는 무후의 자객단, 의아방이었다. 욱사시부는 창고 안으로 뛰어내리
며 소리쳤다.
"빨리 파묻어라. 모두 샛문으로 나가라."
검진천과 걸걸조영이 도끼를 들었다. 그들은 발가벗기운 신책군 다섯 사람을 두어 번씩
도끼로 찍어서 파놓은 구덩이에 차넣었다. 공인들은 아직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리는 진가도
와 그의 부하들 위에 흙더미를 쓸어부어 순식간에 덮어버렸다. 생매장이었다.
문간은 욱사시부와 대염모의 부하들에 이끌려 빠른 걸음으로 좁은 골목길을 걸어갔다. 한
칸의 민가가 열려서 그들을 받아들이고는 눈깜짝할 사이에 대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렸다.
그들은 다시 어떤 민가로 들어갔고 역시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몇 번 모퉁이를 돌더
니 일행은 한 커다란 저택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느새 북쪽 구역을 벗어난 것 같았다.
일행은 눈치를 보면서 담장 두 개를 지나 저택의 조용하고 외진 독채로 들어갔다. 문간은
못박인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란두였다. 대청마루 앞에 바지를 입고 장화를 신은 아란
두가 서있었다. 남장 차림에도 불구하고 여성적인 것의 어떤 눈부신 빛이 그녀의 온몸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옥과 같은 피부, 넓은 이마, 고귀함과 줏대가 엿보이는 짙은 눈
썹과 맑고 큰 눈. 문간이 항상 꿈에서 그리던 그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문간은 숨이 막혔다. 아란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간을 보고 웃었기 때문이다.
그 웃음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랑의 중심을 이루는 자상한 이해를 보여주
는 것 같았다. 문간은 무한히 비합리적인 화해와 포용의 우주를 참배하는 기분이었다. 그 순
간 문간은 그의 성스러운 마음의 모든 격렬한 힘으로 그녀와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리라 맹세했다.
문간이 걸린 마법을 깨우며 대염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13개의 신책군 금군문부를
아란두에게 보였다. 진가도와 그의 부하들로부터 빼앗은 것이었다. 이 문부 앞에는 어떤 검
문도, 어떤 지방권력도 무의미했다. 대염모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란두님, 기뻐하십시오. 이제 무사히 고구려땅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2부 사랑의 불꽃
1
이윽고 해는 기울었다. 깃발도 땀에 젖는 늦여름, 함형 2년(671년) 음력 7월의 밤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안시성(지금의 요령성 해성시 동남방 영성자.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굴하지 않았고 645년 당태종의 대군도 4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물리친 독립불기의 신화적
요새지. 668년 고구려가 망했을 때도 당에 항복하지 않았던 압록강 이북 11개성 가운데 하
나였음. 671년 음력 7월 동주도행군 총관 고간의 부대에 의해 함락.) 네거리는 웅성대는 백
성들로 시끄러웠다. 이런 저물녘에 당나라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번 공격은 또 달랐다. 대기를 찢어놓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포차에서 발사된 묵직
한 돌덩이들이 성안의 상가와 주택으로 날아들었다. 조금 전 실골천을 건너 안시성의 외곽
진지에 교두보를 마련한 당나라 군대의 포차였다. 그와 함께 열병에 걸린 듯 1만 명이 넘는
대군이 노을에 물든 요동벌을 달려 성 정면으로 돌진해왔다.
"또 온다! 어서 모여라!"
"포노부대애! 포노부대, 앞으로!"
"철질려 가져와! 동문으로 철질려를!"
여기저기 탈진해 쓰러져 있던 고구려 군인들이 다시 일어나 아수라같이 소리지르며 분전
했다. 그러나 포차의 공격이 어지간해졌다 싶었을 때 동문 쪽에서 맹렬한 불화살들이 날아
들었다. 몇 채의 집에 불이 붙자 백성들의 동요는 걷잡을 수 없어졌다. 제각기 집에서 길가
로 나온 남녀노소들은 넋나간 듯이 흙 위에 주저앉기도 하고, 무엇인가 큰소리로 떠들어대
기도 하면서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뛰어다녔다.
"돌아갓! 이 길이 아냐! 동명사묘로 가라! 신전으로 갓!"
거구의 뚱보 걸걸중상이 칼을 뽑아들고 달아나는 군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악귀처
럼 날뛰며 성 밖의 토성과 진채로부터 동문으로 패주해 들어오는 군인들을 서북쪽에 있는
동명사 신전광장으로 보냈다. 거기서는 아란두와 동방교의 사제들이 부상병을 간호하며 결
사항전을 독려하고 있었다.
엎치락뒤치락 들썩거리던 주민들은 몇 개의 대열로 집결되어 성의 서문으로 인도되었다.
그러나 아녀자들은 울고불며 날뛰었고, 아이들은 엄마를 찾으며 대열을 벗어나 이리저리 돌
아다녔다.
이 같은 인마의 물결을 거슬러 동문을 향해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말 위에는 여기
저기 화살이 꽃힌 푸른 갑옷의 장수가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도 말도 온통 화살과 창상으로
피칠갑을 한 끔찍한 모습이었다. 패잔병과 드잡이질을 하던 걸걸중상은 그 장수를 보고 달
려가 말재갈을 붙잡았다.
"대장님!"
말 위의 장수는 다름아닌 대염모였다.
2년 전인 총장 2년(669년) 아란두와 함께 중국에서 탈출하여 요동으로 돌아온 대염모. 요
동에서 고구려인들의 항당복국 운동이 불처럼 일어나자 이 지역 부흥군의 상장군으로 추대
되었던 그였다. 사제의 신분이면서도 사지마다 몸을 던져, 이날 이때까지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온 카수미파의 대장. 걸걸중상의 눈엔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였다.
"대장님......"
말갈기에 파묻혀 있던 대염모의 얼굴이 서서히 들렸다. 머리께에 철퇴를 맞은 듯 으깨진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처참했다. 거의 시력을 잃은 대염모의 눈자
위가 고통스럽게 찌푸려졌다.
"누구냐?"
"접니다. 걸걸중상이옵니다."
"아란두님, 아란두님은?"
대염모는 쥐어짜는 듯이 중얼거렸다.
"동명사묘에 계십니다."
"아, 안돼......"
대염모의 몸이 활대처럼 휘어지더니 말에서 떨어졌다. 걸걸중상이 몸을 날려 낙마하는 대
염모를 껴안았다. 대염모는 힘겹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눈은 더 붉어
졌다. 철퇴를 맞은 이마 내부로부터 출혈된 피가 좌우 양쪽의 안와에 고여 이제 각막에까지
스미고 있었던 것이다. 대염모는 이를 악물더니 걸걸중상의 팔목을 꽉 잡았다.
"걸걸형제...... 배신자들이 안시성주를 죽이고 정문을 열었네...... 당나라군을 끌어들였네."
"뭐, 뭐라구요?"
"아란두님이 위험......해. 빨리 아란두님을 피신시켜, 윽......"
대염모는 자신의 마지막 숨을 모으면서도 아란두를 걱정했다.
"아란두님을, 아란두님을..... 지켜주......어."
대염모의 몸이 크게 흔들렸고 입이 딱 벌여졌다. 그 입에서는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
지 않았다. 그의 부릅뜬 눈은 영원히 순결한 조국의 하늘을 응시한 채 못박이듯 정지했다.
걸걸중상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에 전율했다. 걸걸중상은 본래 고구려인이 아니
라 고구려에 복속된 속말말갈인이었다. 대염모는 그런 그를 차별하지 않고 잘해주었다. 동방
교에 입도시켜주었고 예쁜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게 해주었으며 생활이 어려울 때 돌봐주
었다.
"상장군님이 돌아가셨다아! 헝허엉...... 상장군님이 돌아가셨다아!"
서른일곱 살의 걸걸중상은 울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외침을 듣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당나라 군대가 성안으로 난입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혼비백산 비
명을 지르며 큰길을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주위에 고구려 군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성안에는 난장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나라군은 온갖 민족들이 싸질러놓은 온갖 종류
의 모험가와 무뢰한들로 구성된 혼성군단이었다. 군기 빠진 군대의 모든 악덕들을 발명하고
번성시켜 세상에 길이 악명을 떨친 <당나라 군대>인 것이다.
술집과 양조장은 개미떼처럼 새카맣게 몰려든 군인들로 울타리가 무너졌다. 낯짝이 새파
래지도록 술을 퍼마신 군인들은 거친 소리로 악을 쓰며 민가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저항
하던 남편들은 죽임을 당했고 여자들의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터져나왔으며 전리품을 서로
나누지 않으려는 약탈자들 사이에 승냥이 싸움과도 같은 격투들이 일어났다. 약탈과 강간이
끝난 집에는 불을 질러 밤의 어둠을 무색하게 했다.
동방교도가 많았던 안시성에는 죽음으로 자존심을 지키는 고구려인들도 드물지 않았다.
푸줏간 주인 마로의 젊은 아내 이불란을 덮치려 했던 들개들은 그야말로 임자를 만난 경우
였다. 마로는 정육용 도끼를 휘둘러 집에 들어온 네 명의 머리통을 차례차례 박살냈다. 당나
라 군대가 집을 포위하자 마로는 대대로 물려받은 맥궁의 광대싸리나무 화살을 쏘며 격렬하
게 저항했다. 마지막 한 대가 남자 마로와 이불란은 흑요석 돌화살촉에 맹독이 묻은 그 화
살로 자기들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
걸걸중상은 이런 아수라장을 뚫고 아란두를 찾아다녔다.
"야! 뚱보! 뭐야, 이 자식아?"
술 취한 당나라군이 그렇게 몇 번 칼을 들이대다가 일격에 격살되곤 했다.
아란두는 이미 동명사묘를 떠나고 없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걸걸중
상은 걱정이 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동주도 행군총관 고간 대장군 에하의 모든 부대에 아란두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져 있
었다. 무후로부터 파견된 시어사 가언충이 사령부에 머물며 아란두의 체포를 직접 감독하고
있다고 했다.
약탈사태는 삼경이 지나자 서서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걸걸중상은 성 북쪽의 야장 마을로 들어섰다. 아들 걸걸조영이 거기 있었다. 헝겊을 대고
누추한 장삼을 둘러쓰고 눈치를 살피며 어디론가 달려가던 조영은 아버지를 보더니 살았다
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장삼을 훌쩍 벗더니 아버지의 무공을 믿고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개새끼들! 당나라 놈들은 법도 없구나, 법도 없어! 니기미, 아부지, 어디
밥 좀 없으까? 나 하루종일 물 한모금 못 먹었어."
"이 자식아, 조용히 좀 해."
걸걸중상은 아들을 부서진 벽 아래로 데려와서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먹밥 한 덩이를 먹였
다. 그리고 허위허위 골목 안 우물로 달려가 물을 떠왔다.
조영은 걸걸중상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걸걸중상은 고구려 여인인 애루에게 장가를 들었
는데 조영은 애루가 고구려인이었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사회적 지위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한층 윗길인 여자와 앙혼을 했다는 이유도 있어서 걸걸중상은 처음부터
이 의붓아들에게 잘해주었다. 애루는 작년에 병으로 죽었지만 정도 들었고 불쌍하기도 해서
지금도 조영에겐 매사를 양보하는 편이었다. 하긴 양보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조영은 웬만
한 어른 열 명은 찜쪄먹을 만큼 대담하고 머리가 잘 돌아갔기 때문이다.
"아란두님을 못 보았느냐?"
"여기 숨어 있어. 일루 와."
두 사람은 골목의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화로와 풀무가 설치된 대장간 안에 많은 사람들
이 있었다. 찢겨진 군복을 되는 대로 걸친 군인들과 맨발에 때묻은 옷을 입은 경황없는 피
난민들이었다. 그들은 한 귀인의 시체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바로 저물녘 배신자들에 의해
살해된 안시성주였다.
시체의 머리맡에 아란두가 앉아있었다. 아란두는 몹시 지쳐보이지만 아직 흰색 전통의상
의 여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진혼의식이 베풀어지고 있었다.아란두는 먼저 죽은 자의 머리
위에 등잔불을 세 번 돌려 <지상에서의 마지막 햇볕 쪼임>을 상징한 뒤 <사자의 노래>를
읊었다.
"...... 한 모랭이, 두 모랭이, 삼세 모랭이 지나가노라.녹은 쇳물의 강을 건너가노라. 창날과
칼날의 광야를 넘어가노라. <갈라짐의 다리>에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가노라. 내 평생 하
늘의 주인 당고르를 믿고 추모왕의 정의를 지켰으니 악령이여 물러가라. 어머니 아란두께서
내 혼을 붙드시니 나는 조상들의 천국에 들어가노라. 내 영원히 그곳에서 지순한 기쁨에 살
겠노라."
울음을 삼키는 아녀자들의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들의 뒤에 고
문간과 검진천이 서 있었다.
"고군사와 검선인이 용케 찾아왔군."
걸걸중상이 중얼거렸다. 고군사란 당나라에서 함께 탈출한 고문간이었다. 당나라 관리 노
릇도 해서 견식이 넣ㅂ고 생각하는 것이 치밀하다 하여 대염모에 의해 반란군의 군사로 임
명되었던 것이다. 검선인이란 옛날 신풍 마구공장의 공방장이었던 검진천이었다. 그는 고구
려의 무관직인 선인을 제수받아 부흥군의 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대장간 밖에서 의식
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걸걸중상은 아들에게 대염모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대장님의 유언을 지켜드려야 해."
"어떻게 말이우? 지금 길마다 보초가 서서 피난민들을 막고 있어. 한 사람도 성을 빠져나
가면 안된대. 그게 다 아란두를 잡자는 수작이지."
"일단 아란두님을 숨겨야지."
"아부지도 참, 어디로 숨겨? 방귀만 한번 뀌어도 훤히 알 이 바닥에서 어딜 숨는단 말야?
내일 아침만 되면 당나라 군대에 꼬질러 바칠 놈들이 줄줄이 나올걸?"
"그렇다면 죽기를 무릅쓰고 길을 뚫어서 도망쳐야지."
"하앙, 어디로 도망쳐? 이 일대는 모두 당나라군 천지고 평양성의 검모잠(대형의 관직에
있었던 고구려의 귀족. 나라가 망하자 평양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켜 1차(668년), 2
차(670년)에 걸친 반란을 주도했다. 그러나 왕으로 추대했던 안승과의 사이에 내분이 생겨
안승에게 피살되었다.) 패는 아란두의 적이란 말야."
"이 자식아, 그럼 어쩌잔 말이야?"
조영은 제기랄, 하는 얼굴로 말이 없었다. 걸걸중상은 물끄러미 아들을 보다가 한숨을 쉬
었다. 의는 너무 박하고 지모는 너무 많은 아들이었더. 그가 이참에 아란두를 팔아넘기자고
덤비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조영은 조영대로 속이 쓰렸다. 아란두의 목에는 당화 10만 문이 걸려 있었다. 신을 믿는다
는 것은 어쩌면 이다지도 손해가 막심하단 말이냐. 동방교에 입도하고 카수미파가 되었을
때 영원히 신의 제단과 그 사제를 지키기로 맹세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의식이 끝나자 두 부자는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하나밖에 없는 온돌방에 아란두와 고문간
과 검진천, 그리고 걸걸중상 부자가 모여 앉았다. 방안의 분위기는 가까운 장래에 있을 수색
과 체포에 대한 긴박감이 감돌았다. 그리 멀지 않은 동네로부터 고함지르는 소리와 뭔가가
깨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지금 떠나야 합니다. 차라리 망나니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지금이 안전합니다. 내일 아
침이 되어 수색이 시작되면 도저히 빠져나갈수 없습니다."
검진천의 말이었다.
"검형제의 말씀이 옳을 것 같습니다. 듣자니 배신자들의 우두머리는 사부구라고 합니다.
그 자는 이 기회에 아란두님을 당나라에 넘겨서 죽이려고 할 겁니다."
고문간의 말이었다. 모두들 앞으로 몇 시간 안에 닥쳐올 일들을 생각하고 낯빛이 달라졌
다. 사부구는 같은 동방교도이면서도 아란두를 미워하는 <미추홀파>의 한사람이었다. 게다
가 그 성품은 지방귀족 특유의 질투와 독선으로 똘똘 뭉친, 무슨 짓이든지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아낙네가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아란두님, 마을에 당나라 놈들이 들어왔어요."
피난민들이 일제히 일어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란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이 성을 떠납시다. 형제님들, 필요한 물건을 챙겨주세요."
아란두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얼굴에는 아직 침착한 미소가 서려있었다. 그 미소는 어떤
명령보다도 강하게 사람들을 단결시켰다. 걸걸조영조차 딴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아란두가 숨어 있던 대장간에서 두 명의 당나라군 장교가 나타났다. 군인들이 입
는 풍성한 난포(외투)를 걸친 두 사람은 고문간과 아란두였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골목을
따라 걸었다. 그들의 뒤를 창을 든 사병 차림의 한 사람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르고 있었
다. 검진천이었다. 다시 그의 두를 걸걸중상 부자가 따르며 은밀히 경호했다.
헐렁헐렁한 난포, 군인 외투는 편리하게도 멀리서 보면 고문간과 아란두를 보통 군인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가까이서 본다고 해도 술에 취한 장교가 어느 고구려 여자에게 군복을 입
혀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는 줄 알 것이었다. 여자가 군복을 입는 일도 물자가 귀한 이런 시
국에는 보통 있는 일이었다.
도중에 몇 번 소부대를 만났지만 고문간의 술 취한 척하는 연기로 무사히 넘겼다. 이날
밤도 유난히 달이 밝았고 멀리 보이는 산들은 마치 산더미처럼 올라오는 은빛 바다의 물결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가 성벽 너머로 이어지는 숲 어귀에 당도했을
때였다.
"거기 두 사람 꼼짝마라!"
숲 속에서 등에 칼을 멘 세 명의 무사가 갑자기 나타나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그들 뒤에
는 10여명의 분견대가 따르고 나타났다. 세 명의 무사는 일반 군인과 매우 달랐다. 군인들의
압이 대신 검은 비단으로 된 삿갓을 썼고 바람에 너울거리는 검은 외투 위에는 시어사부의
금빛 오룡영패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키가 작달막하고 여윈 몸매에 얼굴이 까무잡
잡한 무사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고문간은 떨면서도 취한 척 서툴게 대답했다.
"왕표라고 합죠. 공성단 소속이구요 충차(거대한 통나무룰 뾰족하게 깎아 성문을 부수게
고안된 마차.) 담당입니다요."
"이 여자는 누군가?"
"서, 서, 성안에서 줏은 여자죠. 히히히."
"아니지. 이 여자는 아란두야. 너는 반란군이고."
다 틀렸다. 고문간은 몸을 날리며 요 1년 동안 익힌 발도법으로 무사를 힘껏 후려베었다.
그러나 무사는 코웃음을 치며 그 공격을 피하고 오히려 한 손으로 고문간의 손목을 쳐서 칼
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이어 무사의 손가락이 왼쪽 어깨를 꽉 쥐자 문간은 마치 무쇠로
만든 집기로 어깨가 조여진 듯 악 소리를 지르며 옴짝달싹도 할수 없었다.
이때 어둠 속에서 걸걸중상이 비호처럼 튀어나와 무사를 향해 위력적인 옆차기를 날렸다.
그 힘은 너무도 엄청나서 다른 한 손으로 질풍같이 쳐내어 발길질을 막으려 했던 무사는 뼈
가 부러지는 아픔을 느끼며 비틀비틀 밀려갔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걸걸조영과 검진천이
칼과 창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걸걸중상은 집채만한 몸을 번개처럼 움직이며 삽시간에 세 명의 사병들을 쓰러뜨렸다. 검
진천과 걸걸조영 역시 사력을 다해 무사들의 강맹한 검기를 막아내었다. 그러나 세 무사들
의 검술은 대단했고 수적으로도 우위에 있었다.
"어서 도망치시오!"
걸걸중상이 고문간을 향해 벽력처럼 소리를 질렀다. 고문간과 아란두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서 눈앞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2
새벽은 소나무로 뒤덮인 산봉우리 위로 기는 듯이 다가왔다. 서쪽에는 요동벌이 동쪽에는
만주 내륙의 험한 산줄기들이 펼쳐진 이곳은 안시성 북쪽의 천산이었다. 글자 그대로 수없
이 많은 봉우리가 첩첩이 둘러싼 이곳. 잠시도 쉬지 않고 밤을 새워 이 산을 기어오른 고문
간과 아란두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산꼭대기 가까이 올라가자 나무가 성겨지면서 공지
가 나왔다.
"잠시만 서요."
아란두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무릎을 꿇고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문간은 멍하니 그대로 서서 아란두의 해돋이 예배를 지켜보기만 했다. 몸과
마음이 함게 지치고 피로했다.
장안을 떠난 3년 전부터 문간은 어떤 막연하고 기묘한 꿈속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건들로 충만해 있는 꿈이었다. 세상은 온통 서글프리만큼
혼란스러웠고 어떨때는 전혀 무의미해 보였다. 확실한 것은 다만 끝없이 움직이는 군인들과
피난민들, 전투와 약탈과 강제이주였다.
아란두와 함께 요동으로 들어온 총장 2년(669년) 5월.
무후의 사민령은 가차없이 실시되었다. 당나라군은 평양성과 국내성, 요동성, 신성 지역의
부유한 집 2만 8천200호를 솎아내어 중국 내륙으로 압송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마차
들, 소떼들, 말떼들, 그리고 낙타들의 끝도 없는 행렬. 이것은 고구려인들의 엄청난 분노를
야기했다. 평양성이 점령되었다지만 압록강 이북에만 아직 북부여성, 풍부성, 안시성 등 11
개의 큰 성들이 항복하지 않고 <고구려>를 자칭하고 있었다. 사민령은 이런 저항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나라를 되찾자는 부흥당과 참고 살자는 귀화당으로 이 지역은 두 조각이 났
다.
어떤 곳에서는 부흥당이 왕을 추대하여 고구려 재건을 선포했고 또 어떤 곳에서는 귀화당
이 <반란군>들을 잡아 당나라에 넘기기도 했다. 여기 이 마을은 부흥당이었고 저기 저 성
은 귀화당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지방적 사건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지를 알고 싶었지만 아무도 속시원히 대답할 수 없었다. 고구려땅 전체가 이런 지방적 사건
들로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고문간의 이 어둡고 슬픈 꿈 속에는 다른 이름의 꿈이 섞여 있었다. 아란두였다.
고구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이 꽃떨기같은 여인이었다.
문간은 이것이 말도 안되는 감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토록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결합할 수 있단 말인가? 평양성의 경건한 신전에서 시작된 왕녀의 운명과 중국으
로 흘러가 밑바닥을 기며 간신히 출세의 문턱을 짚었다가 되굴러떨어진, 미천한 색싯집 아
들의 운명이 어떻게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나라가 망했다고 해도 고구려
사람들이 다 죽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미래였다.
문간은 날마다 그녀를 붙들고 자신의 절망을 얘기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신책군에
붙잡혔던 가족들은 어찌되었는지 생사도 모르고, 정들었던 친구들이며 동료들과도 헤어져서
산 설고 물 설은 요동땅에 떨어졌다. 전쟁으로 날이 새고 날이 저무는 이 아수라장에서 평
생 붓과 수판만 쥐고 살아온 그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문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아란두 곁을 얼쩡거렸다. 그에겐 누군가
의 위로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답고 오연한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그의 갈증은 번
번이 짓눌려버렸다. 사랑은 문간을 너무도 피로하게 만들어서 미래를 생각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엉겁결에 그녀와 단둘이 남게 된 이 상황도 막막할 뿐이었다.
드디어 찬란한 태양이 두 사람을 환히 비추었다.
멀리 지난 1년간 머물렀던 안시성이 보였다. 성은 불타고 있었다. 두려움과 노여움이 문간
으로 하여금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게끔 만들었다. 잠시 후 어떤
견디기 어려운 마음이 문간의 시선을 들어올려 더 높은 하늘을 향하게 했다. 거기엔 무수한
어둠의 자락을 걷어내고 승리하는 영원한 태양이 있었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마음의 족쇄들
이 녹아흘렀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삶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심각하고도 안정된 열정이 생
겨나는 듯했다.
그런데 문간은 두 손을 모으고 땅에 엎드렸던 아란두가 그 자세 그래도 고꾸라진 것을 발
견했다. 문간은 그녀가 극심한 피로 때문에 까무라치듯 잠이 들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문간은
깨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란두님......"
그러나 그때 문간은 아란두가 잠이 든 것이 아니라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강물이 또 문간을 그녀
에게로 데리고 갔다. 문간은 조용히 옆에 앉아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문간은 마음속
으로 고르고 고른 말들을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란두님, 아란두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안시성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
습니다."
아란두는 얼굴을 들었다. 눈가가 붉게 변한 그녀는, 그러나 경멸과 분노가 담긴 잔인한 표
정으로 문간을 쏘아보았다. 감히 친근한 척 함부로 아란두를 위로하려 들다니. 문간은 자신
의 잘못을 깨닫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란두는 사나운 눈초리로 얼굴을 돌리더니 결연하게
말했다.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올라가서 일단 추격을 벗어나기로 해요. 그런 뒤에는 영주(지금의
요령성 조양시. 당시에는 당나라 하북도 소속 중국으로 강제이주당한 고구려 유민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도시이며 돌궐, 거란, 고막해, 말갈 등 동북아의 수많은 민족들이 교역하는 요
서의 중심지이자 동북아 최대의 국제도시였음.)로 가겠어요."
"예에, 다시 당나라로? 너무 위험합니다."
"겁이 나면 여기서 헤어져요. 나 혼자 가겠어요."
문간은 아란두의 외면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란두의 어두운 얼굴, 선이 분명한 입술, 어
깨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검고 긴 머리카락, 그리고 사람들의 기를 질리게 할 정도로
강한 광채를 발하는 눈. 아란두는 그런 눈을 저 멀리 불타는 안시성에 던져둔 채 오만한 침
묵에 잠겨 있었다.
사제는 신도들과 함께 있어야 하겠지. 이곳 안시성에서 붙잡힌 동포들도 영주로 압송될
것이다. 영주는 중국 내륙으로 압송되는 고구려인들의 중간 집결지였다. 신도들 대부분이 영
주로 끌려갔으니 아란두도 그리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주까지는 너무 멀고 위험했
다.
"차라리 신성(지금의 요령성 무순시 서쪽. 혼하 중류의 전략적 요충지. 667년 망국 직전
당나라에 항복했고 사민령이 내리자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나 669년 4월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곧 진압되었다. 같은 해 점령군 사령부인 안동도호부가 평양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으로
가시지요 영주보다는 훨씬 가깝고 우리 교의 회당들도 있지 않습니까."
아란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이미 동쪽 하늘을 휘황하게 밝
히고 있었다. 태양이 비침과 동시에 위험은 더욱 커질 것이다. 아란두는 갑자기 발을 옮겨
산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위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르게 걸어서 문간으로부터 멀
어졌다. 문간은 갑자기 온 세상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아란두는 떠나고 문
간은 아무 의미도 없는, 넓고 텅 비고 소름끼치는 세상 한가운데에 홀라 남겨지는 것이다.
"잠깐만요. 아란두님, 같이 갑시다. 같이 가요."
아란두는 신비로운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아란두가 중심에 있었던 일련의 사태들
은 어제 저녁 한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요동에서의 싸움은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이다. 점점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은 명분에만 매달릴 수가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나라
군대가 주둔한 지역은 막대한 물자와 돈이 풀리면서 생활이 윤택해졌다. 부흥운동의 거점이
었던 11개 성은 차례차례 무너졌다. 안시성 함락은 그런 흐름의 분수령이었다.
문간이 숨을 헐떡이며 아란두를 따라붙었다. 산꼭대기를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두 사
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길이 넓어졌다. 아란두는 계속 앞만 바라보고 걸으면서 말
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는 없어요. 요동의 신도들은 완전히 사분오열되어 서로 미워하고
있어요. 이러다간 같은 신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게 되겠지요. 영주로 가서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겠어요."
"그게 다 미추홀파의 농간 때문이 아닙니까. 그 자들을 응징하지 않고 도망간다는 인상을
주시면 안됩니다."
아란두는 뒤로 몸을 물리면서 문간을 노려보았다.
"그 사람들은 나의 적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우리 신도들이에요. 제거해야 할 것은 어리
석음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문간은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느끼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기로 결심했다.
미추홀파는 아란두를 적대시하는 동방교 종파였다. 아란두는 동방교의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요동 일대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사민령에 반대하다가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 부친,
동맹의 대제사장이라는 지위, 그리고 장안에서 체포되었다가 도망쳐왔다는 모험담 등이 누
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녀의 권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권위는 동방교 내부의 다른 종파
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다. 바로 가홀파, 소수니파, 미추홀파였다.
이 갈등의 뿌리는 아주 깊고 오래된 것이었다.
동방교는 원래 평양성에 사는 왕족과 귀족과 사제들이 주로 믿는 <선택받은 소수>의 종
교였다. 아란두의 부친 고여락은 이런 동방교를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대중의 종교로
바꿔놓았다. 이 과정에서 고여락은 고구려인들의 민족주의와 결별했으며 평양의 단군성전에
서 드리는 제사만을 중시하는 성전제사주의와도 결별했다.
고여락의 종교개혁은 평양성의 중앙귀족들을 싫어하는 요동의 북부 귀족들에게 크게 환영
받았다. 또 속말말갈을 비롯하여 백산말갈, 해, 남실위(치치하를 중심으로 한 눈강 유역에
거주하던 민족.), 지두우(만주리를 중심으로 한 동몽골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 달막루(하얼
빈 대안에 있는 해란강 유역에 거주하던 민족.) 등 고구려 사회에서 마치 천민처럼 여겨지
던 여러 약소민족들의 공감도 얻을 수 있었다. 귀족들에게 눌려 지내던 보장왕도 왕권의 신
성성을 강조하는 새 교리를 지지했다. 수천 명 정도로 유지되던 동방교가 고여락의 대에서
수만명의 신도를 모은 것도 이런 종교개혁의 결과였다.
고여락의 제자들은 심지어 돌궐인들이 사는 대초원까지 들어가 동방교를 전도했다.
......아득한 옛날 동방에 하늘의 가르침을 처음 전한 위대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
은 <당고르 오르캄>이었다. 당고르는 그대들 돌궐의 <탱그리>와 같은 말로 하늘님을 일컬
으며 오르캄은 그대들 돌궐의 <오르드캄>과 같은 말로 군대를 통수하는 자라는 뜻이다. 하
늘님의 군대를 이끄는 자, 당고르 오르캄은 동방에 신성제국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당고르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8조의 정결계명을 가르쳤다.
당고르의 신성왕국은 중국에서 들어온 <훅색의 키즈>라는 마법사와 그를 추종하는 악의
무리에 의해 멸망했다. 은성했던 수도는 불타고 당고르 오르캄은 아사달에서 살해되었다. 경
건했던 3인의 최고신관, 학식있고 엄숙했던 15인의 복점관, 4인의 성처녀, 7인의 신찬사, 성
별된 토지마다 주재했던 33인의 제사들도 모두 죽었다. 사랑과 지성에 의해 시작되었던 문
명은 가장 비참한 광란 속에 막을 내렸다. 이로써 예언자의 핏줄은 절멸되고 동방은 중국인
들의 거짓말로 더럽혀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주인 당고르께서는 이것을 가슴 아파하셨다. 당고르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 다
시 한 왕국을 세우게 하셨으니 이것이 해모수 칸의 북왕국이었다......
이러한 동방국의 교리가 고구려를 넘어 당나라의 침략을 미워하는 많은 민족들 사이에 널
리 퍼져갔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 팽창은 내부의 강력한 적들을 만들어내었다.
첫째는 평양성의 전통적인 제사장계급 가홀파였다. 이들은 성전제의의 중요성을 부정한
고여락을 신성모독자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고여락은 한때 신도들에게 자신을 <박수>라
고 부르게 함으로써 다른 제사장들과 자신을 구별하려 하기도 했다. <박수>는 남자 사제로,
신의 율법을 받느는 사람이라는 신성왕국시대의 고대어였다.
둘째는 우봉산에 당고르를 숭배하는 제단을 만들고 엄격한 수도단을 조직한 신앙공동체
소수니파였다. 소수니파는 대중포교를 강조하는 고여락의 교리가 동방교가 가진 밀의종교로
서의 신성성을 훼손시킨다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셋째는 중앙귀족들과 무사계급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 미추홀파였다. 미추홀파는 수적으
로 가장 많은 사제들을 가진 종파였다. 미추홀파는 항상 <순수한 고구려인>을 강조했고 고
구려에 대한 긍지를 독실한 신앙심과 동일시했다. 고여락은 그런 선민의식에 근거한 민족주
의를 통렬히 비난했다.
...... 어떻게 고구려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신들의 가호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탐욕을
버리고 정의의 길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조상들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미추홀파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성스러운 추모와 그의 자손들에게 칼을 겨누었던 자들, 경건치 못한 자들, 죄업에 물든
자들을 어떻게 우리와 똑같이 취급할 수 있는가? 그 모든 너저분한 족속들이 다 조상들의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미친소리다.
끝도 없는 교리논쟁이 계속되었고 미추홀파와 고여락파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 유혈충돌까
지 일어났다. 아란두의 부흥운동이 평양지역의 검모잠 일파와 협력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검모잠은 미추홀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어제도 문제의 그 미추홀파가 아란두를 배
신하고 당나라 군대를 성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찬찬히 비춰오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뛰듯이 계속 걸었다.
고엽에 파묻힌 냇물이 졸졸 흘러 내려가는 협곡을 지나 작고 쓸쓸한 골짜기를 내려와서
산기슭을 돈 다음 또 앞으로 걸어갔다. 산기슭의 나무줄기 사이로 보일락말락 드러나는 안
시성의 연기는 사뭇 멀리 떨어진 듯도 하고 또는 아주 위험할 정도로 가깝기도 했다.
정오가 지났을 때 두 사람은 무려 50리 남짓이나 걸어서 울창한 숲에 깊숙이 들어섰다.
이즈음 아란두는 몹시 지쳐서 얼굴이 창백했다. 아란두는 잠깐 쉬자고 하면서 침착하게 넘
어져 있는 나무등걸에 기대고 앉았다. 그러나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그대로 죽은 듯이 잠
들어버렸다. 문간 역시 땅에 길 정도로 피로했지만 잠들지 않으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쯤 토막잠을 자게 하면 아란두는 다시 20, 30리는 걸어갈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난 이 짧은 사이에도 추격자들은 그들을 바짝 따라잡고 있는 것이다. 안시성에
는 걸걸중상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다시 잡힌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젯밤에도 증명되었듯
이 문간의 무공은 한심했고 이제는 그나마 변변한 무기도 없었다.
문간은 아란두 옆으로 돌아와 보따리를 풀었다. 어젯밤 짐을 싸면서 있는 대로 챙겨넣은
비전(당대에 발달한 고액권 어음. 일명 변환, 수표, 첩자라고 한다. 주로 차, 설탕, 비단 거래
를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불기일은 1년짜리와 6개월짜리가 있었다.)을 1천문씩 묶어서 여차
하면 집어줄 수 있도록 주머니 여기저기에 나눠넣었다. 뇌물이 통할지는 모르지만 믿을 것
은 이런 것뿐이었다.
문간은 당나라군이 사람을 잡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먼저 곳곳에 방이 나붙어 범인에
대한 현상금이 선전된다. 그러면 소수의 관병에 온갖 날건달들, 깡패들, 심지어 산적들까지
가담한 추격대가 결성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아예 껍질을 벗기려 들기 때문에 뇌물도 통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시성을 갓 점령한 당나라군은 그런 자들을 모을 여유가 없다. 추격대
는 정규군일 것이고 정규군이라면 뇌물에 희망을 걸 수 있었다.
보따리에는 비전말고도 관청에서 하부된 문첩(공증서)까지 첨부된, 완전무결한 집문서, 토
지문서가 있었다. 이것 역시 크게 찔러줘야 할 때 유용할 것이다. 더 큰 것으로는 영주의 전
포에 입금하고 받은 법정이율 월 6푼의 2만문 짜리 입금증서가 있었다. 장안에서 파는 비단
1필이 200문이니 비단 100필의 거액이었다. 그외에 소소한 식량과 물자를 구입하고 숙박비
를 지불할 때 쓸 동전과 은붙이들이 따로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때 돌연 멀리서 매우 작은 소리지만 뿔피리소리가 들렸다. 문간은 숨을 죽였다. 잠들었
던 아란두는 깨우지 않았는데도 눈을 떴다. 잠시 뒤 아까에 답하는 것 같은 더욱 작은 다른
뿔피리소리가 들렸다. 추격대가 가까이 온 것이다.
"어서 가요."
아란두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피로와 공복과 갈증과 졸음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솔길을 한참 달리다가 덤불이 밀생한 풀숲으로 기어들어갔다. 그곳은 우거진
숲 뒤쪽에 감춰진 우묵한 곳으로 마른 나뭇잎과 이끼의 향기로운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문간과 아란두는 헐떡거리며 거기 누워 빽빽히 뻗은 나뭇가지들을 통해 쥐구멍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푸른 하늘을 보았다.
아까의 뿔피리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가까이 들렸다. 그때 아란두의 손
이 문간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형제, 신들은 형제에게 시련을 이겨낼 힘을 주실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내가 자결할 기회를 놓치면 형제가 나를 죽여주세요. 꼭 죽이세요."
아란두는 자신의 보따리를 풀어 칼집에 든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었다. 아란두는 한 자루
를 자기 옷에 숨기고 다른 한 자루를 문간에게 주었다.
"맹독이 묻은 단검입니다. 아무데나 한번만 찌르면 됩니다."
문간은 불에 달군 쇳덩이가 가슴을 지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란두님의 목숨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아란두님이 살아야 동
방의 신앙을 전할 수 있습니다."
아란두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곤 그전에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설고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여사제가 하나 죽는다고 해서 신들의 가르침이 절멸되지는 않습니다. 더 두려운 것은 내
가 체포되어서 신도들이 느낄 절망입니다. 이 추격대는 내 얼굴을 잘 아는 미추홀파 사람들
이 길잡이를 맡고 있을 겁니다. 체포되면 나는 같은 사제인 그 사람들의 손에 목이 매달리
거나 장살되겠지요. 그러면 신도들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완전히 신앙을 버리고 말 것입니
다."
아란두는 파랗게 질린 가련한 얼굴 위에 억지로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상을 찡그린 듯한
그 웃음은 너무도 강렬하게 문간을 끌어당겨서 전율케 했다. 그것은 바로 장안의 큰 길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 느꼈던 바로 그런 전율이었다. 아란두는 이 실제의 세상이 보여줄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닮은 점이 없는 그런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신앙과 예지, 자존심과 오만
함, 사랑과 분노, 그 모든 것을 함축한 웃음이었다. 아란두는 말을 이었다.
"주몽왕께선 내분이 우리 고구려인들을 멸망시키리라 하셨습니다. 형제들이 서로를 자기
몸에 난 상처처럼 불쌍하게 여겼을 때 고구려는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삶을 신들의 정의에 내맡긴 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들이 강자와 약자로 갈
려 서로를 구박하고 미워하게 되자 보잘 것 없는 외침에도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같은 형제에게 처형된다면 신들이 얼마나 슬퍼하겠습니까? 저는 체포되기 전에 미리 죽어야
합니다."
"아닙니다, 아란두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문간은 호소하는 듯한 얼굴로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문간의 머리에 어둡고 신비로운
계시처럼 경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아란두님, 어쩌면 이 모든 시련은 이미 경전에 예언된 대로 자애로운 어머니 아란두의
고난을 다시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란두님은 모든 고구려인들을 낳으신 강물의 정
령, 자애로운 어머니의 환생이시지 않습니까?"
"에언은 신들의 의지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곧 신들의 뜻은 아닙니
다."
"그러나 아름다운 아란두께서 알을 낳으시고 그 알에서 주몽이 태어나시고 이에 놀란 금
왕이 두 모자를 광야로 추방하셨을때 하늘은 어떠하였습니까? 수많은 신령들을 보내 아란두
님과 그의 아드님을 보호하지 않으셨습니까?"
문간은 혹시라도 잘못 말할까 조바심치며 최근에 공부한 경전을 열심히 떠올렸다.
"수레바퀴를 굴리는 제륜의 신 안두하, 풍로와 쇠망치를 든 야철의 신 보로굴, 아기를 날
개로 덮어 액귀들로부터 지켜주는 신조 아리아애, 머리는 황소이며 몸은 사람으로 한 손에
는 벼이삭을 다른 한 손에는 쟁기를 든 농경의 신 가루달, 좌우로 불의 옷자락을 날리며 마
치 종이가 불타며 떠오르는 것처럼 움직이는 노화의 신 부슬란...... 모두 107명의 크고 작은
신령들(중국 길림성 집안현 우산리의 통구오괴분 제 4호분에서 출토된 그림에서 묘사된 고
구려 신화의 신인들.)이 아란두와 그의 아드님을 지키지 않으셨습니까? 아란두는 푸른 야루
로 돌아갔으나 매정한 아버지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토막나 곳곳에 버려진 남편의
시체를 거두어 온전히 장사지내려 했으나 그녀가 찾은 것은 남편의 머리뿐이었습니다. 아란
두는 아기를 엎고 눈물을 흘리며 동왕국의 광야로 돌아갔고 시기하는 이들을 피해 외진 곳
을 골라 다니며 아기를 키우지 않았습니까. 사내아이는 몸과 마음이 굳세게 자랐으며 당고
르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문간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돌연 뿔피리소리가 아주 크게, 아주 가까이에서, 불과
열 발짝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꼭
껴안았다.
그 다음의 뿔피리소리가 들릴 때까지는 매우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잇는지 그것은 알수 없었지만 추격대가 두 사람이 있는 덤불 근처에 와 있다는 것은 확실했
다. 아, 드디어는 뿔피리소리 뿐만 아니라 말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잘 들리지
않아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한 명 이상의 추격대가 와 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문간은 문득 이곳이 발견되리라는 에감에 사로잡혔다. 자신들에게 숨기에 알맞은 곳이라
고 여겨진 이곳은 추격대에게도 똑같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발자국소리가 덤불 속 불과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문간은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문간은 아란두를 약간
땅이 들어간 곳에 눕히고 주변의 낙엽을 긁어모아 그 위에 덮었다. 문간의 예감은 옳았다.
따닥 딱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문간은 속삭였다.
"아란두님 가만히 계세요. 절대 움직이면 안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꼼짝도 하지 마세
요."
이윽고 바로 앞의 가시덤불이 헤쳐지면서 추격대가 나타났다.
3
그 군인은 머리가 흐트러지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덥고 짜증스러
워 압이를 벗어 목뒤로 넘긴 그는 소리 없이 문간과 마주치자 크게 놀랐다. 문간도 놀라는
척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저쪽에서 뭐라고 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놀랐다는 듯이 외쳤
다.
"어라, 여기 다른 부대가 있네? 이봐, 너 어디 소속이야?"
상대는 사병이었고 문간은 장교의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사병은 비교
적 순진한 사람이었다.
"내주 외부(내주는 오늘날의 산동성 연대 일원, 외부는 당나라 부병제도에서 출신지별로
조직된 연대)요. 그러는 장교님은 어디 계시는 분입니까?"
사병은 약간 미심쩍다는 듯 창자루를 꼬나 잡았다. 의심은 당연했다. 아란두와 한 남자가
안시성을 탈출할 때 군인 외투로 변장했다는 사실은 모든 추격대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
교옷을 입은 고문간은 너무 태연자약하고 또 혼자여서 긴가민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
가 장안 출신의 흠잡을 데 없는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사병은 목을 쭉 빼서 고문간 뒤쪽의 덤불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같은 편인가? 문간은 그 망설임을 놓치지 않고 얼굴을 더 험악하게 찡그리며 소리쳤다.
"에잇, 제길, 아무 소득도 없이 이게 무슨 지랄이야?"
문간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자네도 들었나? 어제 싸움에 참가한 양평수착군(안시성에서 300리 북쪽에 떨어진 양평
지역, 옛 고구려의 요동성 지역에 배치되었던 지방수비대) 새끼들이 뇌물을 먹고 우리가 쫓
는 놈들을 놓아주었대……"
"예에? 그게 정말입니까?"
"개자식들! 우린 죽을 고생하며 예까지 물 한 모금 못 먹고 달려 왔는데 적을 놓아줘? 이
건 그냥 넘어가면 안돼! 안 그래? 개자식들! 그런데 자네 물 좀 있나?"
"저는 없구요……"
사병은 수통을 감추면서 말끝을 흐렸다. 문간은 단박에 눈치를 알아차렸다.
"오오라. 네 부대에 막걸리 분대장이 있는 모양이군. 호병(안주로 쓰는 일종의 빈대떡) 분
대장, 조개 분대장도 있나?"
"막걸리는 한 잔에 3문입니다."
"뭐가 그렇게 비싸?"
"비싼 게 아니죠. 이 더위에 여기까지 감춰온 걸 생각해 봐요."
"제길 할 수 없군. 어디 있나? 거 좀 불러보게."
사병은 뿔피리를 두 번 힘껏 불었다. 멀리 북쪽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한참 숲 속을 헤치고 나가 잠시 후에는 공지로 나왔다. 거기에는 한 명의 분대장과 두세 명
의 다른 병사들이 기분 개 같다는 얼굴로 널브러져 있었다. 사병은 분대장에게 손으로 잔을
쥐고 들이켜는 시늉을 했다. 분대장은 히벌쭉 웃으며 문간에게 손짓했다.
문간은 동전 여섯 개를 내고 술 두 잔을 사 마셨다.
문간은 잠시 앉아서 그와 잡담을 했다. 막걸리 분대장은 쾌활한 산동 사람으로 쉽게 친해
질 수 있는 친구였다. 그는 말린 고기와 호병도 팔았다. 문간은 의심을 사지 않게 하나씩만
사서 먹는 척하다가 소매에 감추었다. 분대장은 이런 저런 말을 떠벌려서 문간은 가까운 장
래에 크게 소용이 될 정보들을 얻어들을 수 있었다. 분대장은 아란두의 목에 걸린 상금이며
오늘의 수색일정을 얘기하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장교님은 어디 소속입니까?"
문간은 어젯밤의 경험을 떠올리며 얼른 주워섬겼다.
"대장군부 직속이야. 씨팔, 시어사 밑에 분견대로 보내지는 바람에 이 지랄이지."
"시어사 놈이 그렇게 까탈스럽다면서요?"
"말도 마."
숲 속을 뒤지던 다른 부대도 공지로 와서 막걸리 분대장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먹고 싶은
데 돈이 없는 눈치들이었다. 장교 하나가 공지 끝에 나와 엄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들은
다시 어딘 가로 수색을 하러 갔다. 얼마 후 소리가 좀 다른 뿔피리소리가 다른 장소에서 났
다.
문간은 천연덕스런 얼굴로 어, 저거 우리 부대네 하며 일어났다. 병사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문간은 일단 소나무 향기의 찬 공기가 감도는 숲 속 그늘에 숨어 동정을 살폈다. 한참 뒤
또 한 무리의 군인들이 공지로 들어오자 막걸리 분대장과 그의 부하들은 일어서서 어디론가
로 가버렸다. 일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지에 모이는 병사들의 동태로 보아 오늘의 수색
이 그럭저럭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문간은 들키지 않기 위해 끈덕지게 그늘에 숨
어 기다렸다. 이윽고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문간은 숲 속을 헤치고 다시 아란두가 있는 덤불로 돌아갔다. 숲 속은 어두웠지만 달빛이
흐릿하게 비쳐들고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아란두님, 제가 왔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생전 처음으로 아란두가 이젠 여기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문간은 다시 한번 아란두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매우 피곤한 듯한 조용한 목소리
가 답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어둠 속에서 아란두가 나와 그의 팔에 매달렸다.
"돌아왔군요……"
문간은 평생 이날 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란두로부터 처음으로 사심 없는 반김을 받았
던 밤이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도 아란두의 얼굴이 재회의 기쁨으로 발갛게 상기된 것
을 알 수 있었다. 문간은 얼얼한 도취감, 설명할 수 없는 멍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의
심장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살의 감옥을 부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격렬하게 쿵쾅거렸
다.
"제, 제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아셨나요?"
문간은 말을 더듬었다. 아란두는 바로 그의 앞에서, 손을 뻗으면 만질 수도 있는 아주 가
까이에서, 깊고 빛나는 눈으로 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무것에도 구애받는
것이 없는 듯한, 있는 그대로의 기쁨 같은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란두를 이렇게 가깝게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문간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가슴
에 와 닿았다. 아란두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심장은 이제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아란두의 가슴이 문간의 호흡과 똑같
은 박자로 오르내리는 것을 느꼈다. 문간은 그녀의 입에 입을 맞췄다. 그것은 꿈과 같은 감
촉이었다.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젖히고 그녀의 목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그러자 문간을 껴
안은 아란두의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문간의 손이 치마를 쥐었을 때 그녀는 조용히
그의 두 팔을 붙잡았고 문간은 복종했다.
문간은 아란두와 선 채로 미동도 하지 못했다. 달빛이 아란두의 머리카락 위에 부서지고
그녀의 눈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문간은 방금 겪은 그 타오르는 기쁨이 꿈인지 생시인지
어지러웠다. 아란두에게 더 무엇인가를 바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눈앞의 아란두에겐 어머
니 같은 것이 있었다. 문간을 다시 완전히 충족한 어린아이로 바꾸어놓는 기묘한 무엇이었
다.
두 사람은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았다. 문간은 숨겨온 호병과 말린 고기를 내놓았다. 자신은
많이 먹었으니 이건 아란두의 몫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란두가 음식을 먹는 것을 기쁨을 느
끼며 지켜보았다. 하루종일 술 두 잔밖에 마시지 않은 문간은 몰래 침을 삼키다 정신이 어
지러워졌고 곧 낙엽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 잔 뒤 문간은 일어나 아란두를 깨웠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밤에는 걷
고 낮에는 숨는 것이 좋았다. 둘은 어느새 천산 지역을 종단하여 산아래 안개 낀 평지가 드
넓게 뻗어 있는 북쪽 봉우리에 도착했다. 멀리 더 북쪽으로 수산이 보였다. 그 산너머에 요
동성이 있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나아갔다. 산세를 의지해 서쪽으로 가는 데까지
가다가 평지로 내려가 혼하와 요하를 건너고 백랑수를 거슬러 올라가 영주에 도착할 생각이
었다.
무거운 책임감이 문간을 짓눌렀다. 그는 귀를 곤두세우고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나 잠시
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행히 밤동안은 추격대가 따라붙지 않았다. 그들은 길이 없
는 산등성이로 질러가기도 하며 되도록 길을 피해 두 개의 산을 넘었다. 달이 지고 태양의
입김이 동쪽 하늘을 뿌옇게 할 때 문간은 아란두를 산기슭 덤불에 남겨두고 혼자 계곡 아래
로 내려갔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는 골짜기에는 그러나 도무지 동리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도
이곳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곳이었으며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야 50리는 가야 있을 것이
었다. 문간은 조심스럽게 구석진 비탈을 내려가다가 회색빛 바위 위를 수정처럼 맑게 흘러
가는 냇물을 보았다. 그 얼음처럼 찬물을 얼굴과 머리에 끼얹고 물배를 채우자 그나마 살
것 같았다.
그 냇가에서 문간은 통나무를 쪼개 만든 움막집 한 채를 발견했다. 문간은 흥분했다. 어느
곳에나 흔한 반농, 반 수렵의 산골 움막이었다. 바깥벽에 기대서서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
니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단검을 빼들고 살그머니 문짝을 열어보니 매우 더럽고 지
저분한 방 한 개 짜리 움막에 농사꾼 부부와 새까맣게 탄 계집애 둘이 늦여름 더위에 거의
벌거벗다시피 하고 잠들어 있었다.
문간은 문안에 상당한 은자가 든 주머니를 놓았다. 그런 다음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가 횃
대에 걸린 옷과 시렁 위의 궤짝, 먹다 남긴 노루고기가 담긴 그릇, 대나무로 만든 물통 등을
깨끗이 싹쓸이해 들고 나왔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의 살림을 털어가는 것이 미안했으나
이쪽의 사정이 워낙 급했다. 조심스럽게 냇가를 벗어난 문간은 옷과 그릇들을 다른 물건과
함께 궤짝에 넣은 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기어올라갔다.
아란두는 문간이 훔쳐온 옷을 보고 소리내어 웃었다. 문간이 내민 수통에서 기분 좋게 물
도 마셨다. 그리고 훔쳐온 궤짝에서 가위를 발견했을 때 아란두의 눈빛이 빛났다.
두 사람은 산등성이를 하나 더 넘어가 한적한 냇가로 내려갔다. 아란두가 잘 들지도 않는
녹슨 가위로 그 길고 숱이 많은, 탐스런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남
자 모자를 쓰기 위해서 과감하게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각각 멀리 떨어져
서 말끔히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때 가까운 능선에서 갑자기 새들이 날아올랐다.
두 사람은 위험을 예감하고 급히 냇가를 떠났다.
한참을 달려서 두 사람은 울창한 숲 속 잘 자란 송백나무 아래에 관목들이 우거진 으슥한
곳에 도착했다. 더 움직이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곳
에 숨기로 했다. 둘은 움막에서 훔쳐온 고기를 먹었다.
아란두는 태연했지만 볼품없이 잘린 그녀의 머리를 보는 문간은 묘한 서글픔에 휩싸였다.
서둘러 걸쳐 입은 더럽고 초라한 옷, 도둑질해온 차가운 식사, 언제 느닷없는 죽음으로 끝날
지 모를 이 막막한 여로……안시성에서 죽은 사람들과 생사를 모르게 된 사람들이 자꾸 떠
올랐다.
숲의 공기는 차가워서 두 사람은 따뜻하게 하려고 두 장의 외투를 위에 걸치고 서로 꼭
껴안았다. 생쥐 한 마리가 이상한 눈으로 두 사람을 살펴보다가 가까운 숲으로 뛰어 달아났
다. 그때 아란두가 파리하게 지친 얼굴로 문간을 돌아보았다.
문간은 가슴이 찢어지는 연민을 느끼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꿀 같은 감촉이었다. 조
금씩 태양의 열기가 그의 몸에서 흐르는 수액을 뎁히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땅 위에 펼쳐
진 보자기 위에 앉았다.
"당신을 사랑하오, 아란두……"
"……"
"당신에게 나의 삶을 맡기고 싶소. 내 인생엔 오직 당신뿐이라오."
아란두는 손을 들어 문간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문간을 밀어 보자기 위에 눕혔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앉은 채로 자신의 젖은 속살을 문간이 받아들였을 때 아, 하고 목을 비틀
었을 뿐이다. 잠시 후 아란두는 문간을 일으켰다. 문간은 아란두의 하얀 배에 자신의 배를
올려놓았다. 신비롭고도 불가해한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긴 다
리가 허리를 죄어오자 문간의 온몸은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떨렸다. 문간은 아란두의 욕망
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위험의 한복판에서 신들의 축복을 느꼈다.
4.
해가 기울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심받을 만한 군인 외투를 관목 밑에 파묻었다. 나머
지 짐은 조심스럽게 추려서 등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저물녘에는 허름한 삼베옷을 입고
등짐을 진 한 쌍의 전형적인 피난민 부부가 혼하의 나루터로 가는 큰길을 터벅터벅 걷게 되
었다.
지난 몇 주간 비가 내리지 않아 메마른 길은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이 시간에도 날은 후덥지근했고 꼭 한차례 비가 뿌릴 듯했다. 길은 온통 떠돌아다니는 피
난민들 투성이였다. 대개는 자신들의 전 재산을 등에 걸머지고 어딘 가로 헤매어 가는 평범
한 민초들이었다. 싸움을 피해 가는 사람들, 강제이주를 피해 가는 사람들, 반대파의 박해를
피해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두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길옆
어느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길을 걸어 밤늦게야 화개라는 나루터 마을
로 들어갔다.
나루터는 역시 검문 중이었고 마을은 안시성 싸움의 여파로 피난민들이 우글거렸다. 배들
은 모두 군대에 징발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엄청난 값을 주고 산 귀리떡 말고는 아무 음식
도 구할 수가 없었고 평상이 있는 제대로 된 방(고구려인들은 구들을 깐 온돌방에 다시 방
한과 방습을 위해 여러 종류의 깔개를 깐 평상을 들여놓고 거기에서 잠을 잤다. 이것은 가
난한 평민들도 마찬가지였다.)은 모두 꽉차 있었다. 여름이라 자갈 위에 보따리를 펴고 누워
서 찬 공기를 마시며 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몇백 명은 될 것 같은 피난민들이
노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룻밤을 잔다고 해도 내일 배가 생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발이 묶이면 끝장이었다.
문간은 한 젊은이로부터 500문을 주면 빈 움막을 하룻밤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아
직 거의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젊은이였는데 매우 총명해 보였다. 문간은 일부러 귀리떡을
꺼내 씹으며 여유를 가장했다.
"괜찮아. 자갈밭에서 자지 뭐. 어디에 징발되지 않은 배가 있는지 가르쳐준다면 500문을
주겠지만 말야……"
"우리 집에 바닥에 구멍이 난 배 한 척이 있어요. 강 중간까지는 그럭저럭 뜰 거예요. 그
다음에는 헤엄을 치세요."
"어디 가보자."
"가르쳐드렸으니 일단 500문 주세요. 그 배를 빌리겠다면 1천 500문을 더 내야 해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문간은 야박하고 말고를 따질 처지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랬
다. 세 사람은 마을을 벗어나 어두운 갈대밭 속으로 들어갔다. 가보니 그 배는 구멍이 난 정
도가 아니라 밑바닥이 거의 주저앉아 있었다. 젊은이는 틀림없이 뜨기는 뜬다면서 싫으면
관두라고 했다. 문간은 돈을 냈다. 젊은이는 갈대 속에 감춰둔 노와 물 퍼낼 바가지를 주고
유유히 떠나갔다.
문간은 노를 젓고 아란두는 물을 퍼내는 악전고투 끝에 두 사람은 간신히 혼하를 건넜다.
혼하를 건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 한발에 종지부를 찍는 비였다. 비는 금방 온몸을
흠뻑 적실 만큼 세차게 내렸다. 둘은 작은 마을을 찾아들어 원두막처럼 만든 헛간(부경. 고
상식 주거형식을 창고에 응용한 고구려의 전통적 헛간.)을 빌리자마자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잠들어버렸다.
아침이 되었지만 날은 밤처럼 어두웠다. 바퀴벌레들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바닥에 스미는
더러운 물은 심한 악취를 풍겼다. 아란두는 기침을 하며 오한에 떨었다. 외투의 물을 짜서
아란두를 덮어 주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전 내내 일기는 나빠질 따름이었다.
문간은 가슴을 졸이다 못해 비참하고 우울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낮에는 뜨거운 햇볕을
피하면서 나무그늘에서 잘 수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아란두가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멀
리서 우렛소리도 약간씩 들려왔다.
누구도 이 비 내리는 강변의 허허로운 적막을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진흙탕이 된 강
물은 10리, 또 10리를 뻗어가고 보이는 모든 풍경은 빗속에서 흐리멍덩해졌다. 문간은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찾아갔다. 또 큰돈을 치르고 주인집 한 방을 빌려
불을 때게 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묽은 죽도 준비시켰다.
둘은 참으로 오랜만에 끓인 음식을 먹고 마시고 될 수 있는 한 편안히 젖은 몸을 말렸다.
문간은 은붙이를 주고 마른 옷 두 벌을 샀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그 집에서 묵고 비가 개
인 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 기온은 갑자기 뚝 떨어져서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고 있
었다. 아란두는 몹시 지치고 신열이 심했으나 이제야말로 있는 힘을 다해주었다.
두 사람은 하루종일 마치 흙탕물 속에 침몰되어가는 것 같은 진창길을 걸어갔다. 신열이
있는 아란두에게 그것은 위험한 여행이었다. 오후에는 다시 한차례 세찬 비가 퍼부었다. 두
사람은 단 몇 발짝도 더 갈 수 없을 정도로 피로에 찌들어 버둥거리면서 고력진이라는 요하
의 나루터 마을에 도착했다. 고력진 교외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벌써 어두웠다. 아란두는 어
떻게 보아도 금방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에 문간은 마을 입구에 있는 한 채의 큰 창고로 들
어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10여 명의 피난민들이 들어와 하룻밤의 잠자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어떻게 끼여 잘 수는 있겠지만 바닥의 짚더미가 몹시 축축했다. 피난민들은 너무도 피곤해
있어서 말을 할 수도 없었으며 아란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세요."
아란두는 억지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문간은 마음을 굳게 먹고 동리로 들어갔다. 고력진은 촌단위의 행정조
직인 진가와 나루터를 지키는 외진군까지 있는 꽤 큰 마을이었다. 몇 집을 방문했는데 오가
는 군인들, 거지들, 피난민들, 도적떼들에게 번번이 곤욕을 치른 마을사람들은 도무지 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거듭 실패한 뒤에 하룻밤을 재워준다는 집이 걸려들었다. 숙박과 식
사 등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숙박비는 무려 1천 문이었다.
문간은 창고로 돌아와 아란두를 안아 일으켰다. 미리 약속한 집으로 아란두를 부축해가던
문간은 마을에 새로운 군부대가 들이닥치는 것을 보았다. 얼쩡거리던 피난민들이 일제히 길
가로 달아났다. 군기를 든 선두의 기병이 소리쳤다.
"바나박(비켜)! 바나박!"
돌궐 기병대였다. 하나같이 보기만 해도 무서운 무리들로 다 떨어지고 어디 군인인지도
알아볼 수 없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진흙 범벅이 된 말들은 추레했고 사람들은 더럽고 텁
수룩했으며 피로에 지쳐 있었다. 백수산 일대의 고구려 부흥군들을 토벌하러 왔다가 철수하
는 부대라고 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집주인은 더운물을 내주었다. 아란두는 머리를 감다가 쓰러졌다. 문간
은 업어와 방에 누인 채로 그녀의 발을 씻겨주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새로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힌 문간은 죽을 구해 반쯤 혼절한 그녀의 입에 억지로 떠 넣었다. 아란두는
잠시 후 그 죽을 다 토했고 심하게 열이 나기 시작했다. 문간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는 새벽이 되어서야 그쳤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문간은 강가로 나가보았다. 이곳 요하의 하류는 비 때문에 물이 불어
완전히 탁한 갈색의 바다로 변해 있었다. 갈대 숲과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구불구불한 구릉
을 빼면 강은 거의 수평선에 가깝게 뻗어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수량과 거센 물살을 보자
혼하를 건널 때와 같은 임시방편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란두를 태울 교자와 교자꾼을 구해 대낮에 정식으로 배를 타고 건너자. 그러나 그러려
면 주민증인 공험이나 촌락단위의 통행증명서인 압아첩이 있어야 한다…… 문간은 집주인을
구워삶아서 고력진의 방두(면장)를 찾아갔다.
"압아첩? 거어, 큰일날 소리 하지도 마슈. 안동도호부에서 공문이 내려왔어요. 이 일대에
모반죄를 범한 죄인이 도망중이니 도진이나 역에서 압아첩을 위조해준 자는 교수형에 처한
다는 거요.('당률소의' 직제율 역사조 규정)"
방두는 500문을 내미는 문간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문간은 통사정을 했다. 거짓
말도 자꾸 하다 보니 이력이 났다. 난리 통에 공험을 잃어버렸으니 어떡하겠는가? 동생이
몸이 아파서 곧 죽을 것 같으니 한시바삐 강건너에 있는 친척집에 가야 한다고 잘 얼버무려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까의 500문 위에 슬그머니 1천 문을 더 얹었다. 방두의 목소리가 금방
낮아졌다.
"당신들은 그냥 선량한 농사꾼들이니 말이지…… 법을 지키는데도 남의 딱한 사정은 좀
봐줘야 하는 것이거든."
"확실히 그렇습니다요."
압아첩 두 장을 끊어서 집으로 돌아오자 아란두는 깨어 있었다. 그녀는 열로 인해 완전히
초췌했고 보기에도 위태롭게 보였다. 문간은 경과를 설명하고 곧 교자를 구하겠다고 하자
아란두는 혀를 찼다.
"교자라니요? 걸어가겠습니다. 돈을 낭비하면 안됩니다. 안시성에서 챙겨온 그 돈은 형편
이 어려운 신도들이 신들의 제단을 위해 헌금한 돈이에요."
문간은 화를 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신들의 제단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습니다. 내가 고심하는 단 한가
지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란두 당신을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뿐입니다."
"무책임한 말씀이군요."
"아란두님,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기를 버
리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그 사랑의 뜨거운 힘으로 세상만물이 나고 자라고 살아간
다고 했어요. 사랑의 불꽃이야말로 세상의 마음속에 깃들인 가장 위대한 비밀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사랑은 당신입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신열이 오른 아란두의 눈은, 그러나 침착하게 빛나고 있었다. 며칠 전 숲 속에서 그녀가
그의 팔에 안겼던, 그의 보호 밑에 누워 있었던 일이 마치 꿈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한번 성
희를 같이 했다고 해서 위엄을 포기할 여인이 아니었다.
"누구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과 나만을 생각하는 것은 신들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습
니다."
"저에게 그렇게 큰 걸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너무도 불행한 일들이 많아서 저 같
은 사람이 그 전부를 향해 눈을 돌린다는 것은 애당초 되지도 않는 일이에요. 또 그러고 싶
지도 않습니다. 아란두님, 당신은 제 기쁨의 비밀을 알고 계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또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그토록 많은 방랑과 고독
과 고통이 있었지만 당신이 있어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아란두의 손가락이 조용히 문간의 입술을 눌렀다. 그녀의 둥글고 깊은 눈이 문간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우리의 살이(생)는 단 한번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비굴하고도 이기적인 불
길 때문에 신들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도록 이 한 살이를 크고 의로운 것을 위해 살
아야 해요."
갑작스런 소음이 아란두의 말을 그치게 했다. 그때까지 거의 행인이 없던 길이 갑자기 급
한 걸음으로 달려가는 사람들로 꽉찼기 때문이다. 문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피난민들은 전부 진가 앞으로 나와라! 외지에서 들어온 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진가
앞에 나와 정렬해라! 조사할 일이 있다!"
순간 문간의 얼굴은 백지창처럼 창백해졌다.
예기치 못했던 돌발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압아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아란두와 몇
마디 언쟁을 하던 짧은 사이. 말발굽소리도, 고함소리도 없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진흙을
묻힌 한 부대가 조용하게 고력진에 입성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안시성에서 온 추격대였
다!
문간은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말을 달려가는 가늘고 긴 콧수염을 기른 한 사람을 보는 순
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배신자 사부구였다. 사부구일당이 안시성의 추격대와 함께 나타
난 것이다. 고력진을 봉쇄하기에는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추격대는 본래 이 마을에 있는 외
진군과 미리 마을에 들어와 있던 돌궐 기병대의 지원을 얻었다.
세 부대는 구역을 나누어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 외곽을 포위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군인
들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또 무슨 난리가 난 줄 알고 자기들의
물건을 한껏 주섬거려 싸가지고 길로 나왔다. 그러나 좁고 질척대는 길로 정신없이 달려가
던 피난민들은 곧 붙잡혀 길가에 억류되었다.
문간은 아란두를 부축하여 집을 나왔다. 추격대가 집집마다 뒤지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
을 것 같았다. 아란두 역시 별로 겁을 내지 않았고 다만 조금 얼굴이 상기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리의 외곽에 도착해보고 기가 죽어버렸다. 창칼을 든 군인들이 모든 길
목마다 막아서서 한 사람이라도 고력진을 빠져나가선 안된다고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상금이 걸린 모반죄인을 찾는 군인들의 서슬은 시퍼랬다. 이런 길목에서 흥정을
걸어 지나가게 해달라고 한다는 것은 도저히 안될 일이었다. 두 사람은 일단 눈에 띄지 않
기 위해 길가에 늘어앉아 떨고 있는 너저분한 차림의 피난민들 사이에 앉았다.
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중에 법을 어기고 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국 내륙
으로 압송된다는 소리에 놀라 도망치는 사람, 당나라 주둔군의 부역에 동원되기 싫어 도망
치는 사람, 아니면 단순히 전쟁에 휩쓸리기 싫어 허가 없이 이주하는 사람…… 이 가운데
유난히 겁이 많은 몇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궐 기병들
이 나는 듯이 달려가 몽둥이를 휘둘렀다. 도망치던 사람들은 모두 붙잡혀 빈사상태가 될 때
까지 매를 맞았다.
"보슬이 아버지! 아이고오, 보슬이 아버지……!"
머리가 터져 피를 쏟는 사내의 아낙 하나가 돌궐 기병들을 밀어 제끼며 뛰어들었다.
"이 개자식들아아! 이 쌍노무 자식들아아!"
아낙네는 남편 앞에 버티고 서서 몽등이를 든 기병들에게 말똥을 집어던지며 악을 썼다.
이 소동은 아란두와 고문간에게 짧은 틈을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은 슬그머니 큰길을 벗
어나 초라한 판잣집들이 늘어선 골목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몇 발짝 못 가서 둘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온 한 무리의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둘은 늘씬하게 얻어맞았다. 아란
두를 몸에 덮어 감싼 문간은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문간은 어린 시절 아육에게 배운 돌
궐말로 소리쳤다.
"쿠타르막(살려주세요)! 쿠타르막!"
그 소리에 매질이 멈추었다. 한 군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꿈벅거리며 물었다.
"킴 겔디(너 뭐 하는 놈이야)?"
혹시 돌궐 사람인가 하던 군인들은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 않자 둘을 길가로 끌고 갔
다. 그래도 매질은 더하지 않았다. 그런 둘 옆으로 말을 탄 대장이 지나가면서 낄낄 웃었다.
"등신 같은 자식들! 시키는 대로 대가리 처박고 있지 왜 튀고 지랄이야."
이젠 도리 없다.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자. 문간은 단검을 뽑으려고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언뜻, 방금 소리친 대장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문간은 뒤를 돌아보았다. 우스꽝스
런 가죽갑옷을 입은 눈이 도토리처럼 튀어나온 사내가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원진아……"
대장은 똥똥한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 자리에 우뚝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안장에 앉은
채로 힘겹게 그 풍만한 허리를 돌렸다.
"어느 놈이 날 불렀어?"
"나야. 나, 문간이라구!"
"고, 고문간…… 야, 너희들, 그 사람 일루 데려와!"
5.
과연 문간이 만난 것은 왕년의 학당 동창 사원진, 아시테 톤유쿠크였다.
전에도 뚱뚱했던 사원진은 그사이 몸이 열 근은 더 붙은 것 같았다. 볼따귀는 터질 듯이
튀어나오고 턱은 세 겹으로 접혀졌다. 돌궐군의 지휘관을 상징하는 황동제 탐가(씨족의 문
장) 패찰이 술통처럼 불룩한 배 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깨는 쩍 벌어지고 피부는
구리빛으로 그을렸으며 얼굴은 한결 늠름하고 분별 있어보였다. 그 모습에서 3년 전 장안의
그 멀컹한 얼간이를 찾기란 어려웠다.
"이야, 너 정말 고문간이구나. 으하하하…… 이런 촌구석에서 널 만나다니. 하 하 하……
반갑다. 정말 반가워."
웃을 때마다 그의 배와 거대한 체구가 흔들렸고 몸의 모든 살덩어리들이 그와 함께 웃었
다. 숱이 많은 머리카락과 콧수염과 세 겹진 턱의 비곗살도 웃었고 배 위에 늘어진 주머니
며 금줄 달린 장식용 단도, 가죽 구두도 모두 웃는 것처럼 보였다.
원진은 백인대장(유즈바쉬. 돌궐군의 편제는 일반 당나라군의 편제와 크게 다르다. 십인대
장(온바쉬), 백인대장(유즈바쉬), 천인대장(붕바쉬)으로 구성됨.)으로 돌궐 기병대의 한 부대
를 지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를 따라 기병대가 마을 안에서 징발한 어떤 한 기와집으
로 들어갔다. 원진은 조용한 방에 두 사람을 앉힌 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고 문
간은 친척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중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다행히 원진은 문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기자랑을 하기에 바빴다.
"말도 마라. 우리 그때 초원에 돌아가서 고생 엄청했다. 첫해엔 4월에도 눈보라가 열흘이
넘게 들이치는 거 있지. 우리 씨족들 숱하게 얼어죽었다. 그래도 이젠 사람도 엄청 불어나고
막남 한복판에 널찍허니 목초지도 얻고, 돈도 엄청 벌었어. 완조온히 기반 잡았찌이."
원진은 삶은 닭고기를 대접하며 정신없이 떠들었다. 그는 왕년에는 머리가 좀 나빴지만
이제는 위치가 뒤집혀서 공부 잘했던 동창을 도와줄 수 있는 신분이 된 것을 기뻐하고 있었
다.
문간은 바깥을 경계하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렇게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사부구 일당들은 억류되어 있는 피난민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닐 것이다. 여기 이러고 있
으면 안전했다.
"그런데 돈을 벌다니? 너희 씨족이 다시 군대에 취직했니?"
"에이, 아니야. 옛날 장안의 근위사단에서 받던 월급 생각하면 이까짓 거야 완조온히 날품
팔이지이."
"그럼 어떻게?"
"장사다. 장사. 우리 큰형님이 요즘 장사를 하고 있지 않냐."
"너희 큰형님이라면 옛날에 중랑장이시던 웬푸 형님 아니냐? 그 분이 장사를 해? 유배에
선 언제 풀렸어?"
"아, 반년 만에 째깍 풀렸찌이. 내가 누구냐. 힘있는 데다가 팍팍 쇳가루를 뿌렸잖냐. 형님
은 초원의 고향으로 돌아와 잠시 쉬다가 차장사를 시작했어. 요샌 아주 돈을 끈다 끌어. 아
마 막남일대에서 우리 씨족이 제일 부잘걸. 그때 그렇게 벼슬 떨어지고 월급 끊어진 게 행
운이었다니까."
원진은 장안의 다른 동창들에게 자신의 출세담이 전해지기를 앙망하며 온갖 이야기를 다
했다.
웬푸는 막남에서 몇천 마리씩 말을 끌고 장안 북쪽으로 이틀거리에 있는 정안에 내려와
팔고 그 대신 수십 수레의 차를 사간다고 했다. 바로 다마무역이었다. 이즈음 대초원 지역
전역에 걸쳐 차의 수요가 가히 폭발적으로 늘고 있었다.
이 무렵 대초원 지역은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인구가 네 배로 늘었다. 바로 차 때문이었다.
곡물과 채소를 먹지 않는 유목민들은 그 동안 고혈압과 심장병, 구루병이 많았고 유산과 사
산이 많았다. 그런데 아침마다 차를 끓여 우유에 섞어 마시는 <스티차이>의 풍습이 생겨
나면서 이런 병들이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들이 건강해졌고 집집마다 아이들이 늘
었다.
이렇게 차가 좋다는 것이 알려지자 중국에서 사오는 차는 없어 못 팔 지경으로 값이 뛰었
다. 그러나 누구도 웬푸처럼 대규모로 말을 팔고 차를 사들일 수는 없었다. 웬푸만이 인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안에 있는 관내도의 관청들에는 과거 용무영 중랑장이었던 시절
웬푸의 동료들이 많이 재직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불운하게 옷을 벗은 웬푸를 동정해서 중
국 관리들의 농간을 피할 수 있게 여로모로 돌봐주었다.
웬푸와 그의 아시테 씨족은 이렇게 대규모로 사들인 차를 수레에 나눠 싣고 대초원 곳곳
을 누볐다. 그의 상단은 오르도스 지역(막남)을 넘어 고비사막 북쪽 셀렝가 강유역까지 진출
했다. 거기서 다시 동서남북으로 뻗어가 토구즈 오구츠(철륵), 키르키스(힐알사), 튀르기쉬
(돌기시), 위그르(회홀), 타타비(해), 아바르(유연), 키타이(거란), 마자르(말갈), 쏠릭(실위),
뵈클리(고구려)등 돌궐을 적대시하는 많은 이민족에게까지 차를 팔았다.
"야, 정말 대단하구나.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군대에 있니? 형님의 사업이 그 정도라면
네가 할 일도 많을텐데."
문간이 자못 미심쩍다는 듯 되물었다. 원진의 신바람나는 이야기는 거기서 뚝 끊어졌다.
"으으응…… 나? 나야 뭐…… 나도 장사를 같이했지. 형님이랑 뜻이 안 맞아서 잠시 나
와 있는 거야. 나 아직 젊지 않냐. 군대에서 수양을 하려고. 사람은 수양을 해아 하거든."
원진은 시선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더듬거렸다. 그리고 한참 딴전을 펴면서 술통처럼 튀어
나온 자기 배를 북북 긁다가 결국 털어 놓았다.
"내가 도박을 했거든. 승주(지금의 내몽골 자치주 동승시. 황하의 남쪽 연안으로 당시 돌
궐족 거주지역과 한인 거주지역의 경계에 위치했던 국경의 대도시. 동수항성이 있었음.)에
서."
"아니, 노름 좀 했다고 깉이 고생한 동생을 내쫓아? 너희 형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 어떻
게 그럴 수가 있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대체 얼마나 잃었기에 그래?"
"으응?으으응…… 5, 5천 관(500만 문)."
문간은 입이 딱 벌어졌고 나중에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외면했다. 그런 거금을 날려버
렸다면 사정을 알 만했다. 웬푸에게 뼈가 부러지도록 얻어터진 뒤 인간이 되라고 군대에 보
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늘 이렇게 바보스러운 원진의 성품이 문간을 편안하게 해주
었다. 원진의 덜떨어진 순진함에는 묘하게도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문간은 화재를 돌려 난리통에 영주로 가는 길이 막혔는데 좀 데려다 줄 수 없겠느냐는 이
야기를 했다. 원진이 영주엔 왜 가느냐고 물었다. 문간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결국
친구를 믿고 싶은 마음에 지고 말았다.
"원진아, 이 난리가 사람들을 모두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살려고 너나없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잖아? 그렇지만 난 너를 믿어."
"야 임마, 왜 그래 갑자기? 사람 머쓱하게."
문간은 아란두를 곁눈질했다. 아란두는 딱딱하게 긴장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눈치도 주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아란두는 사실 아까 돌궐병에게 붙잡힐 때부터 다시
신열이 올라 간신히 앉아 있는 상태였다.
문간은 자기들 두 사람이 당나라군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또 가능
한 한 미묘한 말투로 자기들이 안시성의 고구려 부흥운동에도 관련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원진은 금방 알아들었다. 3년 전에도 문간이 고구려 모반자들에게 연루되어 곤경에 처해 있
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문간은 최악의 경우 원진이 무섭게 화를 내면서 자기들을 체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친분니 어떠했건 현재 그는 고구려 부흥군과 싸우고 돌아온 전투부대의 장교였기 때
문이다. 그러나 원진은 매우 조용한, 양심적이고 용의주도한 이해를 가지고 이야기를 들어주
었다. 원진은 아무 말 없이 문간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둘은 벽에 몸을 기대고 원진을 기다려다. 신열이 심해진 아란두가 짐들어서 문간의 마음
은 이중으로 불안했다. 한 시간 후 원진은 돌궐 기병대의 군복 두 개를 가지고 다시 나타났
다.
"자, 이 옷으로 갈아입어. 너희 둘을 우리 부대에 넣어서 영주로 데려다 줄게."
안시성에서 온 부대는 시어사부의 세 무사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들은 피난민 조사에서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어젯밤 두 사람이 잠시 머물렀던 마을 입
구의 창고에서 목격자가 나선 것이다. 무사들은 사부구 일당을 데리고 그 일대의 민가를 샅
샅이 조사했다. 두 사람을 묵게 한 집주인은 완강히 부인했지만 무사들은 상당한 심증을 잡
았다. 그들은 두 사람의 얼굴을 잘 아는 사부구 일당들을 데리고 고려진의 도선장에 대기했
다. 그리하여 요서로 건너가는 거의 유일한 출구인 그곳은 이제 완전무장을 하고 눈을 번득
이는 군인들이 밤낮없이 감시하게 되었다.
도선장에서 그들은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영주로 귀대하는 돌궐 기병대까지 조사하려 들었
다. 깡마르고 이마에 큼직한 흉터가 있는 돌궐 기병대의 사령관 아시테 팽치는 펄쩍 뛰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일렬로 서라구? 어제는 병력 좀 빌려달라더니 오늘은 또 일렬로 서서
조사받으라구? 이 새끼가 누굴 호구로 아나?"
시어사부의 검은 삿갓도 얼굴이 벌게졌다.
"사령관! 왜 이래? 이건 그냥 다 검문하는 것 아니오. 시어사부의 명령에 불복할 작정이
오?"
"불복? 야 이 색꺄, 우릴 검문하는 건 내 부하들 중에 모반자가 있다 이 소리 아냐?"
"아, 그런 뜻이 아니고. 모반자 놈들이 슬그머니 댁의 끼여들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 말이 팽치를 더 흥분시켰다. 그는 뭐야 하며 말채찍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차마
시어사부 사람을 때리지는 못하고 대신 도선판 위에 세워져 있던, 식수가 담긴 장독을 발길
질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있나? 슬그머니 끼여들다니? 슬그머니 끼여들다니? 우리 애들
이 장님이야? 감히 내 부대를 모욕해? 씨발놈, 너 지금 우리가 돌궐인이라고, 번국군이라고
차별하는 거지?"
사령관의 말에 장교들도 흥분했다. 이때를 놓칠세라 사원진은 상스런운 욕지거리를 퍼부
으며 달려들어 검은 삿갓 옆에 서 있던 부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기병대도 술렁거렸다. 새
파랗게 질린 검은 삿갓은 마침내 굴복했다.
기병대는 검문자들의 면전에서 침을 뱉고 발을 구르며 도선판을 지나갔다. 고문간과 아란
두는 짐수레를 운반하는 치중대 병사들에 섞여 뗏목들을 길게 엮어 만든 마량 운반선에 올
라탔다.
물이 불어난 요하 위엔 구불구불한 많은 곡류를 피해갈 수 있는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길을 떠난 많은 콩알배들이 떠 있었다. 지붕 하나와 돛 하나를 가진 그 올망졸망한 배들 사
이로 말과 수레들을 실은 길다란 마량 운반선이 천천히 나아갔다. 돌궐병들은 마유주를 마
시거나, 상희(장기)를 하거나 잠을 자면서 아란두와 고문간에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햇볕이 잘 비치는 장소에 앉아서 가을 강변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요하는 강폭
은 매우 넓었고 별다른 동력이 없는 이 뗏목 운반선은 물의 흐름을 따라 한참 내려가면서
차츰 반대쪽 강안에 이를 것이었다. 문간은 뱃전에 찰싹거리는 강물소리를 듣다가 문득 아
란두에게 물었다.
"영주에 도착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요?"
신열로 초췌해진 아란두의 얼굴에 착찹한 표정이 떠올랐다.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말씀드리면 안될까요?"
"우리는 이미 몸을 섞었소. 나는 당신 없는 생활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
"아란두, 나랑 고구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도망갑시다. 내 평생을 바쳐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어요. 평생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맹세하겠습니다. 이 보따리엔 지금 큰돈이 있어요.
우리 둘이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지요. 물론 동방교의 돈이지만…… 결국은 당신의 돈이나
다름없지 않소? 원한다면 내가 장사를 해서 원금은 꼭 동방교에 돌려주겠소."
문간은 어린 시절의 동화에서 배운 그 위태롭고도 아름다운 열정에 젖어 말했다. 아란두
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줄곧 먼 물새들을 좇고 있었다. 문간은 마음을 졸이며 미
다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강바람에 나부끼는 커다란 수목의 잎사귀처럼 잔잔하고 맑고 깊었
다. 언제나와 같은 어머니의 눈, 주위를 하나로 부드럽게 감싸는 조용한 열정의 눈이었다.
문간은 절망했다. 그녀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자신에게 얼마나 절실한지. 그러나 그녀는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문간은 온 세상이 전혀 믿을 수 없어지고, 인생이 마치 눈앞을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만화경처럼 느껴졌다. 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기대가 살아 있었던 안시성
으로부터의 여로는 그 마지막 불꽃을 사르었다. 이 여로의 끝에는 둘을 다시 가두어둘 감옥
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국의 신앙과 의무와 신분과 직책과 생계와 세월이.
그리고 10년이 흘러갔다.
제 3부 고독한 땅끝
1.
당나라 영릉 원년(680년) 3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많은 수의 군대가 눈 날리는 음산산맥 남동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 달씩 영하 20도 이하의 혹한이 계속되던 쿠즈부치시막을 막 빠져나온 부대들이었다.
눈앞은 풀이 마른 겨울의 대초원. 떨어지는 해는 때묻은 군기를 비추는데 말은 울고 바람
은 매서운 쓸쓸한 저물녘이었다. 대열의 선두에서 한 무리의 기병을 인도하던 연대장(절충
도위)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부대 정지이!"
군령은 각 단의 대대장, 각 려의 중대장, 각 대의 소대장, 각 화의 분대장들에게 부챗살처
럼 퍼져갔다.
"부대 하마이! 체지인!"
8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우르르 말에서 내렸다.
기병은 고달프다. 야영지를 정하고 각 분대별로 군막을 풀자마자 숨돌릴 여유도 없이 말안
장부터 풀었다. 자기 밥은 못 먹어도 말먹이만은 제때 챙겨야 했다. 말은 보통 까다로운 짐
승이 아니기 때문에 손질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저마다 걸레를 꺼내 말발굽과 다리를 깨
끗이 닦은 다음 솔로 말의 온몸을 말끔히 쓸어줘야 했다.
그 작업이 끝나자 버팀목을 세우고 불을 피웠다. 대대장들이 각 려를 돌아다니며 부산하
게 점호를 했다. 음산산맥 일대에 이 같은 부대가 100여 개. 눈 덮인 설산과 설산 사이 야영
지가 동서로 900여 리, 남북으로 100여 리나 뻗어 있었다. 1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애애한
달빛 아래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호병이며 양고기 같은 여러 민족의 다양한 야전식량들이 구
워지고 있었다.
방금 야영을 시작한 이 부대, 영주군 소속의 고구려 기병대는 밤하늘에 휘영청 달이 걸린
다음에야 겨우 호병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식사가 시작되었을 때 동쪽 벌판에서
늙수그레한 장교 하나가 말을 달려왔다.
"고도위는 어디 있느냐? 나는 본부의 욱사시부이다!"
올해 마흔 살의 욱사시부. 어느덧 수염주머니를 달아야 할 만큼 긴 수염과 희끗희끗해지
기 시작한 머리가 무상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감찰도위님. 우리 도위님은 저 군막에 계시옵니다."
욱사시부는 말고삐를 졸병에게 넘겨주고 도위의 군막으로 들어갔다. 군막 안에 있던 장교
들이 반갑게 일어나 그를 맞았다. 연대장과 얼굴이 익은 고구려인 장교 두 명이 술병을 앞
에 두고 앉아있었다. 술병을 보자 욱사시부는 큰소리로 혀를 찼다.
"어이, 문간이, 오늘은 안돼. 지금 대총관이 이 일대를 순시하고 있어. 빨리 술병 치워."
"대총관이?"
고문간은 씁쓸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이 10만 대군의 총사령관, 정양도 행군대총관 배행검. 12년 전 40대 중반의 한창나이였던
그의 얼굴이 머리를 스쳐갔다. 12년 전에는 문무백관들을 쥐고 흔드는 신책대장군이었는데
지금은 이 위험한 최일선 부대의 군단장이었다. 관위는 어떤지 몰라도 권력으로 보면 형편
없는 좌천. 그나마 이 원정이 실패하면 목숨도 위태로운 자리였다.
늙기도 많이 늙었겠지…… 열아홉 살 때 만났었는데 이제는 내가 서른한 살. 문간은 불현
듯 배행검이 한번 보고 싶었다. 편제상으로는 자신들의 총사령관이었지만 한번도 만나지는
못하였다. 이 부대는 서쪽의 토번(티베트) 전선으로부터 차출되어 왔고 총사령관인 배행검은
남쪽의 장안으로부터 올라왔기 때문이다.
별로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도 몰락했다고 생각하니 애틋했다. 장안에서 한번 만난
두 사람의 운명이 세월의 소용돌이에 돌고 돌아 여기서 또 묶이는 것이다. 문간은 가슴을
얼려버린 그 신산한 12년 동안 옛날의 그 거만하고 위세등등했던 배행검도 자기 나름대로
내리막길을 걸으며 마음고생을 했으리라. 문간은 자기 앞의 술잔을 쭉 들이켜고 욱사시부의
어깨를 툭툭 쳤다.
"형님, 괜찮아요. 군령에 대어오느라구 이쪽 부대들은 쿠즈부치의 흑사풍(검은 모래바람)
을 뚫고 왔어요. 작년부터 한번도 쉬지 못한 행군이 이걸로 3만 리는 될걸? 내일 낮이면 또
싸움인데 이까짓 술 가지구? 대총관은 다 알 만한 사람이에요. 자, 걱정말고 한잔하세요."
문간은 작은 술잔에 철철 넘치게 화주를 따라 욱사시부에게 건네주었다.
"고도위 말이 맞아."
옆에 앉은 교위가 맞장구쳤다. 상관인 고문간을 사석에서 <고도위>라고 부르는 이 사람
은 검진천이었다. 욱사시부의 마구공장에서 공방장을 했고 고문간과 함께 안시성에 있었던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스스럼없는 사이였다. 그도 이젠 마흔을 넘겨 눈 밑에 주름이 깊었
다.
"형님은 장안에서 오셨으니 우리 사정을 모를 거야. 쿠즈부치에선 정말 죽는 줄 알았다오.
난데없이 모래가 해를 뒤덮으면서 순식간에 캄캄한 밤처럼 어두워지는 거요. 숨도 못 쉬고
천지가 뒤죽박죽, 나중에 수습해보니 열네 명이나 모래에 묻혀 없어졌어요."
"그건 정말 심했군. 우리 왕족 어른도 혼이 났겠는걸?"
욱사시부의 말에 검진천 옆에 있던 또 다른 교위가 씨익 웃었다.
이 사람은 고공의라고 하는 의젓하게 생긴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고문간처럼
족보도 없는 가짜 고씨가 아니고 평양성 남쪽 백성 주변에 식읍을 갖고 있던 진짜 왕족이었
다. 키가 크고 건장하며 눈썹이 짙고 눈매와 코가 크고 시원스러운 것이 고구려 왕손들 특
유의 체형적 특징이 너무 또렷해서 보는 사람들마다 목소리를 낮추고 어렵게 대했다. 그러
나 실제로는 그 허우대만큼 위엄이 따르지 않아서 집에서 매일 부인에게 얻어맞았다고 한
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결혼한 부인은 고구려 귀족의 딸이었는데 그의 말로는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미인데다 완력 또한 여간 세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견디다 못한 고공의는 어느 날 밤 괴나리봇짐 하나만 들고 길을 나와 그 길로 군대에 들
어왔다. 몇 번이나 집에서 사람이 데리러 왔으나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작년에 토번
의 전선에서 아내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는 향불을 사르며 꺼이꺼이 며칠씩이나 울
던, 참 알다가도 모를 친구였다. 고공의는 언제나처럼 조금도 왕족티를 내지 않고 예의바르
게 물었다.
"그런데 이거 지나간 얘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서역 짠물에 갑옷을 씻고 음산
눈 녹은 물에 말을 먹인다더니, 우리 신세가 꼭 그 짝이에요. 두 달 전까지 토번의 험한 산
에서 싸우고 내일부터는 또 돌궐의 거친 초원에서 싸우다뇨. 너무 무리예요. 사람과 말이 다
같이 지쳤는데 어떻게 내일 싸우지요?"
"옳은 말씀이오. 안 그래도 그 얘길 해주려고 왔는데 내일 싸움이 만만치 않아. 우리가 이
승에서 서로 얼굴을 보는 것이 이게 마지막인지도 몰라."
좌중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감군인 욱사시부의 말인 만큼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막남
의 돌궐인들이 선우도호부의 관리들을 내쫓고 소란을, 하는 정도로 듣고 있던 고문간도 술
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하투는 음산산맥을 지나면서 북쪽으로 크게 휘도는 황하 상류부터 만리장성 사이에 위치
한 초원지대로 예로부터 천혜의 유목지대로 알려졌다. 현재는 <오르도스>라고 부르는 이
지역에 당태종은 친당적인 돌궐인들을 많이 유치함으로써 고비사막 북쪽에 사는 여러 유목
민족의 기습남침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해주는 일종의 완충지대를 만들어놓았다. 그러니만큼
작년 6월 이곳에서 돌궐의 반란이 일어난 선우도호부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는 완전히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반란의 주모자는 아시테 씨족의 대족장인 아시테 웬푸와 아시테 팽치. 이 둘이 아시나 니
샤오푸를 칸으로 추대하고 돌궐제국 부활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아시테 웬푸? 아시테 팽치? 이거 뭐 하는 놈들이야! 당장 이놈들의 도목(인사기록)을 가
져와!"
무후는 책상을 뒤엎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고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무후는 그토록 바라던 임조칭제(공식적으로 조정에서 천자
를 대신하여 정사를 맡음.)를 시작하고, 조정의 모든 대권을 손에 쥔 뒤였다. 그러나 공교롭
게도 이 해부터 5, 6년 동안 당나라는 기근과 불황,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녀의 권력은 정적들에 의해 전복될 위험이 있었다.
무후는 밤잠을 못 자고 세제개혁과 생산증진에 매달려야 했다. 변경 구석구석까지 둔전개
발을 독려하고 19개 지역에서 수리사업을 일으켰으며 당대 최고의 농업기술서인 『조인본업
기』를 친히 편찬했다. 그녀는 매일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읽으며 전국의 농사현황을 일일
이 점검했다. 농사를 잘 지은 지역의 관리는 승진시키고 농사를 못 짓고 유랑인구가 많이
발생한 지역의 관리는 파면했다.(측천무후 통치기에 당나라는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
했다. 그녀가 죽던 705년 당나라의 호구는 615만 6천 141호로 50년 전보다 두 배나 증가했
다. 식량비축량은 네 배나 증가했으며 역참제도가 완비되었고 상업과 채광업, 건축업이 비약
적으로 발전했다. 일반 백성의 조세부담이 줄어들었으며 여성의 권리도 크게 신장되었다.)
이 같은 그녀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저리 같은 장군들은 국경을 엉망으로 만들어놓
고 있었다. 안서 지역의 대규모 원정군이 토번에 연전연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나라 번국
군의 핵심인 돌궐병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무후는 화대지와 이경가에게 5만의 정예군을 맡겨 막남으로 급파했다. 그런데 이 두 밥통
들은 반란군에게 대패, 전멸당했고 반란은 더욱 확대되어 급기야 돌궐 24개 부족이 모두 호
응하게 되었다…… 이젠 정말 유능한 장군이 필요했다. 불안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
후는 멀리 페르시아 전선으로 좌천시켰던 배행검을 불러 다시 대군단의 지휘를 맡겼다.
이러한 경과를 설명한 욱사시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알겠나? 적은 이미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어. 어디로든 진퇴가 자유롭지. 그런 적의 병
력은 전원 기병으로 3만 기. 이쪽은 숫자만 10만 대군이지 기병은 자네들을 포함해서 4천
300명 뿐이야."
"뭐라구요,3만! 그게 정말입니까? 1만 7천이라고 들었는데요?"
"우리도 어제 아침까지 1만 7천인 줄 알았지. 그런데 아니었어. 3만일세. 정찰대가 오늘
저녁에 정확히 확인했네."
아군의 일곱 배가 많은 기병. 모두 기가 막혔고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평원의 대
회전은 기동력이 강한 기병대가 적진의 좌익이나 우익으로 돌파하여, 혹은 적진을 아예 우
회하여 배후를 포위하면 그것으로 싸움은 끝난다. 말하자면 기병이 쉴새없이 기동하여 적진
을 무너뜨리고 적의 주력을 포위하는 것이 전법의 요점이었다.
그런데 무려 3만 기의 기병대라니, 문간은 새삼 아시테 웬푸라는 사나이를 다시 보았다.
옛날 신책군의 감옥에서 만났을 때도 범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얼마나 치밀하고 용
의주도한 사람인가. 수레에 차를 싣고 10년이 넘게 초원의 온갖 부족들을 누비고 다닌다던
웬푸는 자신의 거미줄 같은 거래망을 따라 인맥을 만들어 마침내는 이런 엄청난 인원을 불
러모았을 것이다…… 욱사시부는 벗었던 투구를 챙겨서 일어났다.
"몸조심들 하게. 임자들은 내일 새벽에 동쪽으로 이동하게 될 거야. 포진을 의논할 때 내
가 임자들을 특별히 아군의 제일 오른쪽에 배치하게 했거든. 그쪽이…… 그쪽 방면이 적의
카라쿰 사단에서 가장 멀어."
"카라쿰 사단이 그렇게 쎈가요?"
고공의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
욱사시부는 목구멍에 무엇이 걸리기라도 한 듯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고문간과
검진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군막을 밀치고 그냥 나가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카라쿰 사단엔 임자들이 잘 아는 동방교 사람들이 있어서. 아란두님도 거기 있다는군."
2.
사위는 고요했고 초원의 밤공기는 살을 에일 듯이 찼다.
욱사시부와 사람들을 보내고 혼자 자리에 누운 문간은 짐이 오질 않았다. 당번병이 빨갛
게 달궈진 숯화로를 들여보내주었다. 유령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화로를 바라보던
문간은 주전자를 들고 군막을 나왔다.
그는 굳이 찬바람을 쐬며 군막들 사이에 지펴진 모닥불 위에 물을 끓였다. 물이 끓자 허
리의 쌈지에서 말린 찻잎을 꺼내 손가락으로 가늘게 찢어 주전자를 집어넣었다. 잠시 후 문
간은 대나무 속에 끼워넣어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든 찻잔으로 차를 한 모금씩 홀짝거리고 있
었다.
한밤의 찻잔 속에서 까마득히 잊고 있던 어떤 향기가 후려치듯 온몸을 휘감아왔다. 아란
두…… 안시성의 새벽 산봉우리의 바람결에 흩날리던 아란두의 탐스러운 머리카락, 그 머리
카락의 향기가 두터운 망각의 저편으로부터 피어올라 그를 아프게 했다. 마음을 편하게 가
지려고 했지만 생각은 자꾸 심란한 기억의 갈피를 헤집었다. 그것은 차츰 어떤 미신적인 공
상으로 뭉쳐져서 문간을 짓눌렀다.
내일 전투에서 나는 죽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중한 시간들을 너무 쓸모없이 보내버렸다.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되는대로 살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탕진한 죄로 나는 죽는
것이다. 그러자 일렁이는 모닥불 속에 지나온 10년이 주마등 불빛처럼 하나하나 떠올랐
다……
안시성을 탈출한 뒤 문간이 아란두와 함께 도착한 영주는 동방교가 재기를 꿈꾸는 도시였
다. 한인은 소수에 불과했고 거란, 돌궐, 말갈, 고구려 등의 이민족들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서 제각기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오이 사제는 이곳에 동방교의 새 근거지를 만들
었다. 그는 불과 몇 년 사이에 1만 명에 가까운 신도를 재조직했고 영주성 안팎의 12군데에
도교사원으로 위장한 동방교의 비밀회당을 마련했다. 죽은 고여락의 방침대로 이방전도에
힘써서 많은 이민족을 신도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간에게 영주는 곧 아무 희망도 없는 낡아빠진 도시였을 뿐이다. 영주로 오고 얼
마 되지 않아 아란두가 오이 사제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 결혼식이 있던 일주일 동안 문
간은 밥 한술 뜨지 않고 지신의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일주일 후 영주의 길거리를 걸었
을 때 그의 퀭한 눈에는 공허가, 그의 가슴에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정신의 허기가 생겨
있었다.
그때부터 문간은 사람들을 피해 우울한 삶을 꾸려갔다. 동방교에서는 그 동안의 공로와
자질을 인정하여 그에게 <성사>의 성직을 수여했다. 성사란 원칙적으로 입도한 지 20년이
넘는 신도가 맡을 수 있는 직책으로 신전을 수호하는 일종의 호법관이었다. 41인의 종단 최
고회의에도 참석하는 명예로운 직책이었으나 문간은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문간은 영주도독부가 있는 중국인 구역에 방 하나를 얻어 혼자 살았다. 생계에 필요한 약
간의 돈은 전직을 살려서 주민들이 여러 가지 세금이라든가 부역에 대해 도독부에 제출하는
서류들을 대필해주고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간은 신상에 큰 변화가 생겼다. 세금 문제의 청원을 대신해주기 위해
도독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영주도독을 만난 것이다. 도독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이 사람아! 자네, 소부감에 있던 고감사가 아닌가? 자네가 여기 웬일이야?"
그는 소정원이라고 옛날 소부감에서 모시던 상관이었다. 한때는 명옥원의 손님이어서 문
간의 어머니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문간은 이 동북 변방의 영주까지 흘러들게 된 과
정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소도독은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가 잡혀갔다는 소릴 듣고 나도 깜짝 놀라서 그 뒤에 경위를 좀 알아보았지. 자네 사
건은 신책군으로 넘어갔는데 결국은 자네 외삼촌이 범인들을 은닉한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
다네. 자네는 모반죄에 연루되었지만 정식으로 기소되기 전에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되어
있더군. 자네 모친은 유 3천 리에 처해져서 저 남쪽 하음까지 내려갔는데 유배가 풀리자 그
곳에서 어떤 상인과 재혼을 했어. 하지만 1년 뒤에는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릴 들었네."
몇 년 만에 듣는 가족들의 소식에 문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불로 지져지는
듯 한동안은 정신마저 몽롱했다. 천고의 가난도 한번의 죽음보다 가볍다고 하지 않는가. 외
삼촌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니 그 도안의 모든 일들이 허무해지고 살아 있는
자신이 죄스러울 뿐이었다. 소도독은 문간의 비통을 보자 동정을 금치 못했다.
"일이 그리 되었으니 장안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고…… 내 밑에 데리고 있고 싶지만 그렇
다고 정식으로 관리를 만들어줄 수도 없구먼."
"생각해주시는 것만도 고맙습니다. 소인은 그냥 이대로 살겠습니다."
"아니, 아니, 가만있어 봐. 자네 혹시 군적이 있나?"
"군적이요?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평주에 뭔가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만……"
"그래? 거 참 잘됐군! 중앙의 통제가 잘 먹혀들지 않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
하북군은 자기네들의 막관과 군직의 임명에 절대 간섭을 받지 않아요. 여기서 군관이 되어
버리면 나중에 설령 신책군이 알아도 어쩌지 못하지. 군관이 되도록 하게. 평주라면 바로 이
옆이 아닌가. 그곳 부대에 소개장을 써줄테니 임관하게. 내 얼른 이리로 다시 불러줌세."
"군관이라고요? 저는 화살 한번 쏘아본 적이 없는데요."
"누구는 날 때부터 그런 걸 배운 줄 아나. 다들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걱정하지 말게."
이리하여 문간은 팔자에 없는 군인이 되었다. 평주에서 대지(소대장)가 되었다. 1년 뒤 영
주 북쪽에서 발생한 거란족 반란의 토벌전에 참가하고 돌아오자 금방 교위로 진급했다. 교
위가 된 문간은 검진천과 송새별 같은 동방교 사람들을 자신의 부대로 끌어들였다. 소도독
과 상의해서 그 가운데 몇 명을 어렵지 않게 장교로 임관시킬 수 있었다.
소도독의 배려가 사사로운 인정만은 아니었다. 영주도독부는 동북방의 송막도독부와 갈등
이 많았다. 원칙적으로는 당나라의 정식 관리인 영주도독이 거란족이 임명되는 송막도독을
감독해야 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당태종이 이굴가를 발탁한 이래 거란의 대족장들은
대대로 시라무렌강 유역을 다스리는 송막도독의 직위를 세습했다. 이렇게 토착적 기반을 다
진 거란의 족장들은 거꾸로 자기 동족들이 사는 영주까지를 지배하려 들었다. 소도독은 고
구려인을 중용함으로써 거란족을 견제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장안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문
간을 연대장으로 진급시켜 티베트(토번)로 보냈다.
"나는 곧 임기가 끝나네. 새로 오는 도독은 내 임기중에 빨리 진급한 자네를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다 방법이 있지. 마침 토번 전선에 일개 외부(연대)를 차출
하라고 하니 자네가 다녀오도록 하게. 그러면 모든 구설수를 피할 수 있을 걸세."
그것이 4년 전의 일이었다.
별 생각 없이 떠난 토번 원정은 끔찍했다. 그곳은 워낙 고산준령이라 불을 피워도 타지
않고 먹을 것을 끓여도 잘 끓지 않았다. 산봉우리를 넘을 때는 송곳으로 이마를 찔러서 피
를 내어 혈압을 조금이라도 내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어지러워 행군을 할 수가
없었다. 론친링 장군의 티베트 기병대는 막강해서 당나라군은 고전을 거듭했다. 이경현 장군
의 18만 대군이 전멸당한 코코노르 전투에서는 문간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러나 문간은 나름대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영주에 그냥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전쟁터
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날 그날의 존명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아프게 거절당했건만 문간은 아란두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전생애를
휘감았던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그것은 달콤한 희생이었고 눈물로 산 행복이었다. 인간의
하잘것없는 미움과 질투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보석이었다.
그런 아란두의 괴로움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고통. 아란두가 동방교에서 쫓겨나 초
원으로 추방되던 날의 가슴 찢어짐.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떠올리며 영주성을 배회하는 것.
그보다 더 슬프고 비참한 일이 어디 있으랴.
10년 전 오이 사제와 결혼했을 때 아란두의 지위는 더할 수 없이 확고해진 것처럼 보였
다. 오이 사제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리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 불사자
였다. 『주몽경』에 따르면 주몽께서 동부여를 탈출했을 때 그분을 따라 개사수를 건넌 세
사도가 바로 오이, 마리, 협보였다. 나중에 주몽께서는 하늘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면서
오이를 불러 너는 영원히 죽지 말고 꺼지지 않는 지상의 별이 되어 신들의 제단을 수호하라
고 말씀하셨다.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오이는 700년 동안 죽지 않고 신전의 한곳에서 살았다. 오이로부
터 구전 율법을 배운 소년은 환갑이 지난 뒤에 50년 전과 똑같은, 조금도 늙지 않는 자신의
선생님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렇게 환상적인 일이 가능한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동방교
안에 완전히 비밀에 싸인 승계자 집단이 있어서 오이가 늙으면 그와 똑같이 생긴 청년이 후
계자가 된다는 해석도 있었다. 실제로 오이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거의 평신도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세대마다 <오이>라 불리는 사제에게는 어떤 신
비한 영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란두가 그런 오이 사제와 결혼하자 동방교 사람들은 들뜨고 감격했다. 오이와 아란두는
현실의 부부이자 동시에 신화 속의 부부였다. 모두가 이 신비스러운 남녀로부터 언젠가 해
모수께서 계시한 <태평의 왕>이 태어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 동방교는 너무도 빨리 내분과 암투에 휩쓸렸고 아란두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분열의 씨앗은 동방교가 고구려 유민사회의 구심점으로 떠올랐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다.
동방교의 사제는 다른 공직을 겸임할 수 있었기에 그 사제집단에는 언제나 야심만만한 귀족
들이 있었다. 유민사회의 지배권을 탐내는 귀족들은 아란두의 권위를 시기했다.
정치적으로도 아란두의 입장은 어려워졌다. 애초에 아란두는 요동의 북부 귀족들과 대염
모를 위시한 카수미파의 지지를 받아 <천군>이라 불리는 대제사장이 되었다. 망국 직후의
혼란기였던만큼 함락에 이어 672년 백수산 지역의 반란이 진압되고 673년 발로하의 반란이
진압되자 아란두를 지지했던 두 세력이 결정적으로 몰락해버린 것이다.
한편 무력항쟁을 강경하게 진압한 당나라는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유화책을 펼쳤다. 관계
가 악화된 신라에 대해 유인궤를 계림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전면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신라 전선의 측후방에 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우대할 필요가 있었다. 676년 당은
강제이주시켰던 유민들을 요동으로 귀환시키고 보장왕을 요동도독으로 임명해서 사실상의
자치를 허용했다.
이렇게 되자 인심은 크게 변했다. 아란두가 그 중심에 있었던 무력항쟁세력들은 비난받게
되었고 처음부터 친당적이었던 가홀파와 미추홀파가 여론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676년 영
주의 고구려인 자치기관인 구당고려소의 장관에 미추홀파가 선출되었을 때 아란두의 적대세
력들은 모든 사제가 참석하는 <명당공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아란두는 거부할 명분이 없
었다.
이것이 바로 아란두가 영주에서 쫓겨나는, 유명한 노노아공회였다. 토번으로 떠나기 직전
이었고 종단의 분규에 대해서는 오불관언하기로 결심한 문간이었지만 이 회합만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동방교 역사상 마지막으로 모든 종파의 사제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회
합이었으며 고문간의 인생에서 가장 참담한 추억으로 기억될 하룻밤이었다.
그날 영주성 북쪽 200리 지점에 있는 노노아산(현재 요령성의 서북부와 내몽골자치구의
경계에 있는 노노아호산) 구리지봉에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망국과 강제이
주, 무력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동방교의 거의 모든 장로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당의 사민령으로 양자강 남쪽 멀고먼 중국 내력까지 끌려갔다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고여락과 아란두의 직계인 <박수파>는 물론, 정통 제사장계급인 <가홀파>, 중앙귀족 출
신인 <미추홀파> 그리고 신실한 수행에만 힘쓸 뿐 좀처럼 종단에 관여하지 않는 <소수니
파>까지 동방교의 모든 종파가 모였다. 그러나 <카수미파>는 항쟁 과정에서 이름있는 장로
들이 죽었기 때문에 걸걸중상 한 사람만이 참석하고 있었다.
이날의 회합을 위해 아란두와 오이 사제는 미리 사람들을 보내 일출이 가장 잘 보이는 구
리지봉 정상에 방 5개짜리의 띠풀집 명당(명당은 『예기』『월령장』『주례』『효경』『맹
자』에서 보듯이 본래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띠풀집이다. 중국의 동북부와 고대 한반도에
성행했던 이 <명당>신앙은 나중에 풍수설로 발전하면서 집이 아닌, 지세가 좋은 땅에 대한
숭모로 변한다.)을 지었다. 이런 명당 앞에서는 수백 년 동안 항상 동방교의 운명을 좌우하
는 가장 중요한 사안들이 토의되고 결정되었었다.
200여 명의 장로들은 도착한 순서에 따라 명당 앞에 돗자리를 깔고 둘러앉았다. 공회는
아란두가 이곳을 신들의 영지를 받들어 신성한 의사결정이 내릴 장소로서 성별하는 의식으
로 시작되었다.
공회를 선포하는 부드러운 뿔피리소리가 길게 울렸다. 하얀 제복을 입고 대제사장의 금빛
성부를 목에 건 아란두는 명당에 아홉 번 손뼉을 쳤다.
"눈부신 명당을 마주하라! 거룩한 빛의 집이여! 신성한 박다르의 집이여! 신들의 영지가
세상만물을 밝히 보이시도다!"
축수가 끝나자 아란두는 신성한 문지방을 지나 복도를 겸한 중앙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녀는 이제 현세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신들의 지혜가 머무는
지고한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중앙의 방에서 몸에 걸친 모든 것을 벗었다. 인간 세
상에서 가진 모든 지위와 역할의 가식들을 벗고 영적인 인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방은
문으로 가리워져 있었지만 명당 밖의 문간은 유난히 다리가 긴 아란두의 흰 속살을 추억하
고 가슴이 저렸다. 그 기억은 영원히 닿지 못할 낙원의 향기처럼 슬프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사계절을 상징하는 네 개의 방을 아홉 번씩 들러 서른여섯 번 문지방들을 통과했
다. 그것의 의미는 영원이었다. 우주의 영원한 순환을 겪음으로써 삶을 통과하여 신들의 위
대한 지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이 끝나고 다시 옷을 입은 아란두가 명당
밖으로 나왔다.
아란두는 태양의 빛을 맞이하는 달을 상징하는 반원을 그리고 둘러앉은 장로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녀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긴장한 목소리로 토의의 시작을 알렸다.
"10여 년간 열리지 못했던 공회가 미추홀파 장로님들의 제청으로 소집되었습니다. 공회의
소집을 요구한 분들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미추홀파의 장로 연남모가 일어났다. 이 사람은 한때 평양대신전의 제사장을 역임한 바
있는 풍채가 당당한 노인이었다. 그는 먼저 지루하리만큼 장황하게 명당공회의 전통과 중요
성을 설명했다. 이어 그는 현재의 대제사장이 이 공회 없이 선출되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8년 전 고여락님께서 갑작스럽게 타계하셨을 때 우리는 망국 직후의 혼란으로 경황이 없
었습니다. 그래서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종단의 최고 책임자가 승계되었던 것입니
다."
"우부르왕(미천왕)께서는 그 같은 세습에도 명당공회의 사후 승인이 필요하다고 정하셨습
니다. 이는 탐욕에 물든 아들은 부모가 얻은 영광의 관을 쓸 수 없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규정은 아들에 한합니다. 현재의 대제사장은 딸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란두님은 이미 8년 동안이나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사후 승
인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적법한 절차가 아니면 종단에 대한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지루한 논쟁이 옥신각신 계속되었다.
미추홀파는 박수파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았지만 의외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젊은 사제들과는 달리 나이든 미추홀파의 장로들은 자기 종파의 약점을 곤혹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중앙귀족의 주류를 이루는 미추홀파는 자기들의 내분으로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원죄를 짊어지고 있었다.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자 불만을 품은 둘째아들 연남건과
셋째 연남산이 큰형이 지방에 있는 동안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장악한 것이 고구려 망국의
시초였다.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달아나 동생들에게 항거하였다. 이에 나라 안은 두 파로 갈
라져 싸우게 되었고 당나라 군대는 이 틈을 이용해 기습침공, 평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연남생 같은 귀족들은 당나라에 붙어 조국 침공의 길안내를 맡았다. 그 뒤에도
이들은 당나라로부터 식읍과 벼슬을 받아 유복하게 살았다. 때문에 미추홀파는 최근까지도
고구려 유민사회에 발언권이 없었다.
"사제들은 남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먹고살아야 하며 인간은 널리 이
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고르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란두님이 가난한 신도들을
구휼하고 무도한 당나라 군대와 싸우는 동안 여러분은 당고르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
니까? 여러분들은 어려운 동포들을 외면하고 저마다 망명도생을 구하다가 이제 와서 종권을
탐내고 있습니다. 나는 우부르왕의 그 말을 여러분 자신께 돌려드립니다. 화 있을진저. 탐욕
에 물든 아들이여, 부모가 얻은 영광의 관을 쓰지 못하리라."
"말씀이 지나치지 않소! 우리도 조상의 율법을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소."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란두님은 적법한 동방교의 대제사장이시오. 여러분이 이 명
명백백한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본인은 한치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고정부는 열광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마치 심장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후려치는 고정부의
논변 앞에 가홀파와 미추홀파는 혼란에 빠졌다. 연남모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우리가 오래 뵙지 못했던 소수니파 형제들이 오셨습니다. 특히 수
행과 학덕으로 이름 높으신 소수니파의 갈사수 장로께서 와 계십니다. 우리들은 이 어른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잠시 밝아졌던 박수파들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와 반대로 미추홀파의
눈동자는 노골적인 기쁨의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모든 사제들의 시선이 공회의 첫 번째
열에 앉은 머리가 허연 노인을 향했다.
노인은 공회가 진행되는 동안 조금도 흔들리는 빛이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이
미 그의 심안에 비치고 있는 이 설왕설래의 경과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응시하고 있었는지
도 몰랐다. 노인의 깡마른 얼굴에는 오랜 세월 절대적인 인내심을 가지고 구도에 매진한 사
제의 위엄이 엿보였다.
이 노인은 당금의 동방교 사제 가운데 가장 연배가 높은 갈사수 사제였다. 그의 나이는
80이라고도 하고 90이라고도 했다. 70이 넘은 것은 분명했다. 그가 이끄는 소수니파는 독실
하고 엄격한 수행으로 유명했다.
소수니파의 세 경전 가운데 『단군경』을 가장 중요시해서 모든 전쟁을 죄악시하고 사람
이 겁박하는 것은 하늘에 대한 모독이라고 가르친 단군왕검의 계율을 목숨을 걸고 따르는
종파였다. 그들은 환락을 악으로 간주하였으며 감정의 절제와 금욕을 선으로 여겼다. 이들이
거주하는 신앙공동체에는 신비로운 정적이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했
으며 행실을 더럽히는 소란이나 언쟁을 멀리했다. 또 그들에게 남보다 부자란 있을 수 없었
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가 각자의 재산을 서로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소수니파는 모두 독신이었고 가난하고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골라 양육하며 그들 나름
의 풍습으로 교육시켰다. 그들은 일찍이 고여락을 동방교에 온갖 이민족과 온갖 분란을 끌
어들였다고 비판했다. 그의 딸 아란두 역시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가 대제사장이라
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겐 내심 당혹스러웠다. 그들은 결혼과 출산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여자들의 유혹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했다. 모든 여자는 남자의 힘을 빼앗아가는
요녀이며 평생 한 남자에게만 정절을 바치는 여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오랜 믿음
이었다.
이윽고 갈사수 장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경건하고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소수니파는 아란두 대제사장의 적법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할 필
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들은 저분이 대제사장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사제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모두들 이 비범한 원로가 어떻게 말을 이어나갈 것인가
를 듣기 위해 목을 길게 빼었다.
"우리들은 아란두님이 어려운 시기에 종단을 맡아 신도들은 이 끌어온 노고를 잘 알고 있
습니다. 따라서 이 소중한 공회는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긴박한
일들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좌중에는 이제 침 삼키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형제 여러분, 우리 소수니파는 당고르에 대해 믿음만으로 모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종단의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헤아려서 외람되이 형제들께 왈가왈부 권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무리를 무릅쓰는 것은 종단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과 같고 재앙을 면할 길이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걱정을 뿌리치지 못한 나머지 저는 우리
소수니파 전체의 의견을 모아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그러므로 내 말이 여러분의 마
음에 들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잠시만 너그럽게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관심의 농도를 제고하기 위해 또다시 말을 끊었다. 그는 어눌하게 들리는 목소리
와는 정반대로 아주 능란하게 청중들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당나라는 지금 10만 문이라는 큰 현상금을 걸고 우리 대제사장을
찾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형제들은 혹시라도 관헌에 체포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동방교는 정식 회당도 갖지 못하고 매 계절마다
올리는 번제도 임시변통으로 지내며 매년 거행해야 하는 동맹의 제전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
는 형편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계속된다면 우리 동방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앞으로 우리 동방교에
어떤 일들이 닥치겠습니까? 대제사장은 젊었고 그 옆에는 신중하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
는 나이든 장로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분은 망해버린 나라를 되찾아보겠다는 무모한 희
망에 부풀어 부흥단의 선두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단은 결국 실패했고 우리 종단
전체가 당나라의 범법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나라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계속 항당복국을 외치는 대제사장을 받들고 있다면 그것은 조정의 토벌을
자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아란두님의 신심과 진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분에게 허물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나라가 망한 데서 비롯된 비극일 것입니다. 그러나 괴롭고 민망스럽게도 아란두님이 대당에
맞선 일은 우리 동방교 사제의 본분에서 크게 벗어난 일탈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5천 년 전에 단군왕검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겸허한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힘 중에서 비길 것이 없을 만큼, 가장 강하고 가장
무서운 힘이니라. 사람을 미워하지 말며, 힘으로 응징하지 말며, 다만 겸허한 사랑으로 사로
잡을지라.>
형제 여러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상기해주십시오. 우리 민족은 전쟁의 승리자한테서 시작
되지 않았습니다. 남을 핍박하고 지배한 자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주인 당고르
께서는 원한을 잊고 극기와 인내의 긴 시련을 거쳐 해가 뜨는 동방에서 밝은 빛의 사랑을
일구려 했던 우리의 조상 당고르 오르캄, 단군왕검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으로부
터 우리 모든 자손들이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고구려가 망한 일은 다시 반추하기도 싫은 괴롭고 괴로운 기억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 단군왕검께서는 그보다도 더한
천년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셨습니다. 『단군경』『한박기』에 무어라 하셨습니까?
<악한 영 제준의 무리는 작당과 배반을 거듭하며 무수한 소왕국들을 만들었다. 젊고 아름
다운 초원에 하얀 성벽과 통나무 성채들이 나타났다. 소왕국들이 서로 싸움을 벌였고 승리
와 패배가 있었으며 성벽은 무너지고 성채는 불타올랐다. 죽은 시체들의 백골 밑에서 풀이
자랐고 염소들이 그 풀을 뜯으며 뛰놀았으며 이윽고는 백골도 스러져 먼지가 되었다. 그렇
게 천년이 흘러갔다>고 하셨습니다.
『단군경』『동천기』에는 또 무어라 하셨습니까?
<환인의 천국이 멸망하던 날 하늘이 떨리고 땅이 갈라지며 바다와 파도가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목베임을 당한 자들의 원혼이 피섞인 불과 벼락이 되어 땅으로 쏟아졌다. 초원은 불
에 타 사위고 산봉우리마다 거대한 풀무의 연기 같은 불길이 치솟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환인의 둘째아들 환웅께서는 불사의 힘을 가진 보물 천부인 셋을 가지고 해가 뜨
는 동쪽으로 탈출하셨습니다. 천국의 중신 풍백, 우사, 운사와 살아남은 3천의 무리들이 그
분을 따랐습니다. 환웅께서는 삼위태백산에 이르러 해와 달의 광휘를 받아 빛나는 영생의
박달나무를 발견했습니다. 환웅께서는 멸망한 신들의 사랑이 이 생명의 푸른 나무처럼 부활
했음을 가르치시고 그 나무를 <신들의 박달나무>라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신들의
도시를 세웠습니다.
환웅께서 <뵈클리의 곰 어머니>(<뵈클리>. 7세기 돌궐족이 투르크 룬 문자로 새겨진 비
문들에서 <동이족의 나라>를 가리키는 말. <맥+일(소유격 조사)+리>의 의미로 <맥족의 땅
>, 즉 곰을 숭배하는 민족들의 땅이라는 뜻.)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으셨으니 이분으로
인해 천신족의 혈통이 인간들에게도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단군왕검께서는 아버지 대의 모
든 원한을 잊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주어진 동쪽 나라는 비옥한 초원이 아니라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은 가난한 땅이었습니다. 거대한 나무들이 바다처럼 울창한 숲을 이루고 곳곳에
무서운 짐승들이 숨어 있는 땅이었습니다. 단군왕검께서는 친히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갈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망해버린 환인의
천국을 되찾겠다고 싸움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그분은 평화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생명받은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으로
당고르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널리 행복으로 인도되
는 유덕한 통치가 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군왕검께서는 오늘날까지는 우리들이 준행하
고 있는 8개의 정결계명을 창시하시고 모든 전쟁을 금하셨으며 사람이 사람을 겁박하는 것
은 하늘에 대한 모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늘의 지고한 존엄성과 우주의
위대하고도 신비로운 영지에 대한 신앙만으로 지켜지는 <당고르의 신성왕국>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민족의 고대사에 대한 생생한 회고에 흠뻑 빠져 있던 공회는 차차 긴장했다. 갈사수 장로의
이야기가 핵심에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제 여러분, 5천 년 뒤 이 신성한 가르침을 보존해야 할 우리의 대제사장은 어
떠했습니까? 아란두님, 저분은 무모하게도 대당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한번 전쟁을
시작하게 되면 쉽사리 그만 둘 수 없으며 피해를 보지 않고 끝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나라를 되찾는 것도 시간적으로 너무 늦었습니다. 지난날 나라를 가지고 있었을 때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야 했을 것입니다. 한번 대국에 종속되었다가 다시 나라를
복국시키겠다고 나서면 천자에 반역하는 자라고 하지 나라를 사랑하는 자라고 하지 않습니
다."
갈사수 장로는 마지막 말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공회는 여전히 그
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아니, 빠져 있을 뿐 아니라 그의 학식과 능란한 언변에 깊은 감명
을 받고 있었다.
"형제 여러분, 저는 저 자신의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는 괴로운 심정으로 참으로 어렵고 아
픈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란두님, 저분이 저질러놓은 불장난을 우리 동방교의 모
든 형제들이 다같이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아란두님이 우리 동방교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한 이곳 영주의 신도들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모든 도시에 거주하는 우리 신도들에게 큰 화
가 미칠 것입니다."
갈사수 장로는 서서히 몸을 돌려 아란두를 쳐다보았다. 명당 앞 공회장의 의자에 앉은 아
란두는 핏발이 선 눈으로 그 눈길을 마주보며 팔을 떨고 있었다.
"아란두님, 모든 형제들을 대신해 청원합니다. 대제사장직을 내놓고 영주를 떠나주시기 바
랍니다. 종단과 모든 신도들을 위해 그렇게 해주십시오."
아란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갈사수 장로, 당신은 신전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대제사장의 사임을 요구할 수
는 없습니다. 자신의 불안정한 견해로 형제들에게 혼란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아란두님, 저희들은 이미 공회에 제출할 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갈사수 장로는 옆에 있던 장로로부터 고대 신성문자(몽골초원에 바위 그림으로 남아 있는
선사 시대의 상형문자(룬 문자). 엡(집)은 집 그림으로, 오크(화살)는 화산 그림으로 표현하
는 소박한 형식이었음. 이 몇 가지 음소들과 소그드 문자의 음절체계가 결합되어 7세기 투
르크 룬 문자가 만들어짐.)로 봉인된 성전문서 한 통을 건네받았다. 갈사수 장로는 그 문서
를 높이 쳐들고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소수니파의 장로 서른아홉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대제사장 아란두님에 대해 명당공
회 최종권고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아란두는 새파랗게 질렸다. 박수파 사람들 사이에서는
흥분과 적대감이 뒤섞인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입장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소수니파가
설마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명당공회 최종권고.
그것은 동방교를 떠나라는 최후의 통첩이었다. 최종권고를 받은 사람은 동방교에서 쫓겨
나며 아내와는 이혼, 자녀와는 절연을 당하게 된다. 이런 파문자는 현실적으로 고구려인들의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대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만약 떠나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사제들이 즉시 돌로 쳐죽이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최종권고의 판결은 매우
신중하게 내려진다. 즉 장로 100명 이상이 지지해야만 최종권고가 가결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최종권고의 뜻을 금방 깨달았다. 동방교는 아란두를 그냥 물러나게 할 수가
없었다. 아란두는 교리상 동방교에 없어서는 안되는 오이 사제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동방교
는 오이 사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녀를 반드시 이혼시켜야 했던 것이다.
문간은 진땀을 흘리며 오늘 참석한 장로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가망이 없었다. 가홀파, 미
추홀파, 소수니파는 이름만 알고 있던 은자들까지 거의 모든 장로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세
종파를 합치면 120여 명. 아란두 쪽은 박수파와 그밖의 군소종파들을 다 합해도 90여 명에
불과했다.
공회장으로서 갈사수가 내미는 성전문서를 받는 아란두는 손을 떨었다. 아란두는 그 성전
문서를,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기소장을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 동안이나 내려다보
고 있었다. 그녀는 공회장의 자격으로 이것을 표결에 부쳐 판결을 물어야 했다. 박수파들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서서 삿대질을 하고 돗자리를 걷어차며 분노에 참 욕설을 소수니파에 퍼
붓고 있었다.
이윽고 아란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먼저 흥분한 박수파 사람들을 제지했다. 겨우
공회가 진정되자 아란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공회장으로서 이 제안에 대한 판결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율법에 따라 고
발된 자의 마지막 말을 하겠습니다. 갈사수 장로는 저를 당나라의 범법자라고 하셨습니다.
당나라 관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동방교의 모든 형제들을 위해 내가 떠나야 한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감정이 복받치는 얼굴로 집단에서 집단으로, 원로로부터 중진으로, 그리고 비교적
젊은 장로들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적대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차마 그녀의 시선을 마
주보지 못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음성은 간신히 가라앉아
있었다.
"형제 여러분, 도대체 중국의 통치를 받아들여 그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동방의 신앙을 보
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신들의 뜻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가
령 장로의 그 말은 옳습니다. 저는 범법자이고 이미 8년 전부터 체포령이 내려진 몸입니다.
만약 내가 종단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내쫓긴다면 나는 그 즉시 당나라 관헌에 체포되어 죽
임을 당할 것입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저도 민족의 역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당고르의 신성왕국이 멸망한 뒤 우리 민족은 무수히 작은 소왕국들로 갈라져 혼란스러웠
습니다. 사람들은 차츰 당고르를 잊었고 키즈가 들여온 중국의 신들을 섬겨 동방의 혼이 담
긴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당고르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해와 달이 두 개 뜨는
이변을 일으키시고 해모수님을 보내 서쪽의 해와 달을 죽여 없애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해모수님은 인간 세상을 도우려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간절한 바람 말입니다. 그래서 해모수님은 혼자 열흘 낮 열흘 밤을 달려 먼 북녘의
땅끝, 빙하의 대평원에 이르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해모수님은 기도하셨고 당고르의 음성을
들으셨으며 당고르의 활을 받으셨습니다. 해모수는 그 활로 사악한 해와 달의 힘과 싸우셨
고 마침내 그들을 쏘아 백설이 애애한 눈벌판의 끝, 깊이를 모를 벼랑 밑으로 떨어뜨리셨습
니다. 혼돈은 황황히 도망쳐 달아났고 천지에는 다시 질서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런 해모수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백성들은 자신의 왕을 내쫓았습니
다. 해와 달을 없애버렸으니 반드시 신들이 노하실 것이다. 왕의 그런 불장난을 우리가 다같
이 책임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모수님은 백성들을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해모수경』「예언서」에서 그분은 무어라
하셨습니까?
<두려움에서 깨어나라, 당고르의 백성들이여. 오직 하나뿐인 하늘님 당고르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인간의 비참함을 신들의 징벌이라 부르지 마라, 당고르의 백성들이여.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지 않는 하늘에 대한 순종은 있을 수 없다.>
『해모수경』「을두지 1서」에서는 또 무어라 하셨습니까?
<혼돈과 악을 징치하여라. 인간의 낙원을 위해 싸우고 또 싸워라. 너희 앞에는 당고르의
영광이 넘치고 있다. 어찌하여 너희는 치욕 속에 살면서 이 아름다움과 행복을 외면하려 하
느냐.>
"그러나 여러분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해모수
님을 거절했습니다. 해와 달을 쏘아죽인 것을 역천의 대죄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해모수
의 만행이야말로 신의 지고한 존엄성에 대한 다시없는 범죄라고 했고 선동자들은 해모수가
홀로 땅끝을 방황한 나머지 미쳐버렸다고 했습니다. 이 망령된 무리들은 해모수의 아들, 해
부루를 부추겼습니다. 결국 자신의 아들이 보낸 군대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가홀파 사람들 가운데 한 장로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신성모독이다! 여러분, 대제사장은 자기의 처지를 감히 해모수님에 비유하고 있소."
그 말에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아란두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다. 그
녀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고통스러워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주먹을 움켜쥐고 쾅 소리가 나도
록 발을 굴렀다.
"무엇이 신성모독이란 말입니까? 인간적인 자존을 포기하고 중국의 노예가 되는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고구려를 창조하신 당고르께서 고구려를 멸하시는 것이 정녕 그분의
뜻이라면, 나는 기꺼이 당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여 목숨을 연명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입니
다. 그러나 당고르께서는 혼돈과 악을 징치하라고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당고르
의 영광이 있다고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어제까지의 적을 천자라고 부르며 그
적이 무서워 지도자인 나를 내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당고르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맹세한 사제들의 행동입니까? 바다가 잠잠하고 고요할 때 배를 탔다가 폭풍이
분다고 해서 그 배를 버린다면 그 사람은 물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아란두의 목소리는 격렬했지만 흥분한 사람의 연설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 뒤 아란두를 비난하는 다른 장로의 연설과 최종권고의 제안을 무효로 돌리려는 박수파의
연설이 이어졌다. 논쟁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날이 저물어 공회는 모닥불을 피우고 계속
되었다. 말할 수 없이 심각하고 험악한 갑론을박 끝에 새벽이 올 무렵 최종권고의 제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결국 100명이 넘는 장로들이 아란두에 대한 최종권고를 지지했다. 아란두
는 모든 것을 잃었다.
"신들에게로 나아가는 사람은 가슴 안에 쓰라린 회한을 안고 가야 합니다. 승리는 언제나
패배와 더불어 있지요."
이튿날 말을 타고 영주를 떠나던 그녀는 고삐를 붙잡는 문간에게 그렇게 의연하게 말했
다. 문간은 그때 자신의 군대에 숨어 토번으로 달아나자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란두
는 끝내 그 말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최종권고가 가결된 그 시간부터 아란두는 오리 사제의 아내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오이 사제였다. 문간은 몇 번이나 오이 사제를 주시했다. 그러나 그는 공
회 내내 토론이 소음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돌로 깎아 만든 부처인 양 영원히 그렇게 앉아 있을 듯싶었다. 최종권고가 가결되는 순간에
도 아무런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란두가 영주를 떠나던 날 오이 사제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고정부를 포함한
일곱 사람의 사제들만이 아란두를 따라갔다. 그녀는 노노아산을 넘어 막남의 초원으로 들어
갔다. 그것만이 체포를 피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돌궐족의 땅은 광활했고 고여락이 일궈놓은
순수한 박수파만의 동방교가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문간도 토번으로 떠나갔다.
3
동이 틀 무렵 거센 바람이 불어와 누렇게 바랜 풀잎들을 흩날렸다. 독한 술을 퍼마신 데
다 밤늦도록 잠을 설친 문간은 혼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당번병이 군막으로 들어와 산양가
죽을 둘러쓰고 꼬부라져 있는 문간을 깨웠다.
"도위님! 도위님, 빨리 일어나세요! 대총관 합하께서 납시셨어요!"
"으응, 뭐?"
"대총관께서 오셨다니까요!"
문간은 가죽을 차 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부리나케 신발을 신고, 압이를 쓰고, 연대장을
상징하는 진홍색 목수건(반령)을 했다. 칼을 들고 군막을 뛰어 나가보니 아니나다를까. 배행
검 총사령관과 10여 명의 지휘관들이 모닥불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 주위에는 코가 크고 눈빛이 파란 기병 60여 명이 말을 타고 창을 든 채 경호하고
있었다. 문간은 나는 듯이 그 앞으로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진천, 고공의 같은 교위
들은 벌써부터 문간을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무릎을 꿇었다.
문간은 두 손으로 포권을 하며 외쳤다.
"영주군 고려외부의 절충도위 고문간, 대총관 합하를 배알합니다."
배행검은 왼쪽 소매를 가볍게 들어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 옆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문산은 군례에 따라 두 손바닥을 펴서 배앞에 모으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못 보던 12년
사이 배행검은 몰라보게 늙어 완전히 노인이 되어 있었다. 얼굴엔 깊은 주름이 가득 했고
허리는 굽었으며 턱수염도 희끗희끗한 반백이었다.
배행검의 옆에 서 있던 가늘고 길게 째진 눈을 가진 장군이 지도를 펼치고 문간을 불렀
다. 이 원정군의 군부총관(총참모장)인 상장군 연타마지였다.
"고도위!"
"예."
"이 지도를 잘 보게, 적의 총대장 아시테 웬푸의 본진은 북쪽으로 17리(당대 척관법에 의
하여 1리는 1천296자, 즉 0.392킬로미터로 약 0.4킬로미터. 17리는 약 7킬로미터)되는 이곳에
있네. 그대의 고구려 기병대는 지금 즉시 동북방으로 10리를 이동해서 한 시진 안에 여기
이 지점에 포진한다. 알겠나? 그대들은 아군의 최우익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그대들은 적 기
병대의 돌격을 우회해서 웬푸의 배후를 찌르도록. 아군의 보병대가 그대들을 엄호할 것이
다."
"예, 알겠 습니다."
속전속결. 적의 코앞에서 포진하고, 포진 즉시 개전한다. 총사령관의 뜻이 최일선의 부대
장에게까지 선명하게 와 닿았다. 배행검에게 맡겨진 부대는 총 30만 대군이었다. 이 가운데
영주 지역에서 출발한 18만 대군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고 막남 지역의 동쪽으로부터 이곳으
로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배행검은 토번과 하북, 하동 등지에서 차출한 10만 대
군만을 활용했다. 그는 이 10만을 20여 개의 소부대로 나누어 각기 독자적으로 진군시킨 뒤
어제 오후 순식간에 이 전장에 집중시켰다. 그 즉시 회의를 열어 작전을 하달했고 고문간처
럼 저녁에 도착한 부대에는 이렇게 직접 달려와 병력배치를 지시하는 것이었다.
적이 패퇴전술로 나올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배행검은 앞서 화대지와 이경가의
토벌군이 왜 패했는가를 면밀히 연구했다. 결론은 패퇴전술이었다. 돌궐군은 기병 특유의 기
동력으로 계속 치고 도망침으로써 토벌군의 보급로를 끝없이 늘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토
벌군의 전열이 토막토막 끊어지고 선봉에선 군량미가 떨어지자 폭풍처럼 공격해 들어와 각
개 격파했던 것이다. 900년 전 천재적인 기병 지휘관이었던 흉노의 묵토르 선우(묵토르 선
우: 아버지 투르마나 선우를 살해하고 등극한 뒤 남만주의 동호와 북방의 정령, 서방의 키르
기스를 정벌하여 북아시아전지역을 영유하는 유목제국을 건설했다. 한고조를 살려준 대가로
매년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조공을 받았고 동투르기스탄의 오아시스 제국을 지배하면서 높은
통상보호세를 취해 흉노의 전성기를 꽃피웠다. 중국의 견직물과 페르시아의 모직물이 함께
사용된 이 시대의 화려한 복식이 1924년 노인-우라 고분에서 발굴되었다.)는 바로 이 패퇴
전술로 한의 대군을 괴멸시키고 한고조 유방을 1년씩이나 포위망에 가둬놓았었다.
그렇지만 고문간은 불안해서 연타마지의 배치도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적군은 정
말 3만 명이었다. 웬푸의 돌궐군은 북쪽, 초원 한복판의 평지에 본진을 두고 배행검의 당나
라군은 그 남쪽 <파수대>라 불리는 돌산의 고지대에 본진을 두게 된다. 양 진영의 거리는
약 3킬로미터.
적의 공세가 눈에 선했다. 적은 막강한 기병대를 바다처럼 넓게 전개시켜 짧은 시간에 승
부를 결정지으려 할 것이다. 이런 적에 대해 아군은 보병이 버티고 있는 동안 기병이 적진
뒤로 우회하여 포위한다는 교과서적인 전법을 구사하고 있다.
기병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평야에서 아군의 기병이 과연 일곱 배나 많은 적의 기
병 뒤로 우회할 수 있을까? 아군의 우익인 고문간의 800기 앞에는 적군의 좌익인 세리토리
군 3천기가 맞서고 있었다.
"고도위, 너무 걱정하지 말게."
고문간의 동요를 꿰뚫어본 대총관 배행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배행검은 자기 옆에
있는 두 명의 도위를 문산에게 소개했다.
"여기 이 유융풍도위의 발도대가 2천, 왕사인 도위의 궁수대가 또 2천이야. 충분히 그대의
돌격로를 엄호해 줄 거야. 유도위, 왕도위, 그대들은 책임지고 적시에 기병대가 발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네."
"예, 저희들은 고도위의 신호를 따르겠습니다."
배행검은 만족했다. 지시를 마친 그는 다시 자신의 말을 타고 떠나려 했다. 그런데 페르시
아 용병들이 지키고 있는 말 쪽으로 걸어가던 배행검은 갑자기 무엇에 놀란 듯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돌아서서 눈을 크게 뜨고 고문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간은 고
개를 숙이고 다시 두 손바닥을 배앞에 모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옛날에 어디서 본 얼굴인데? 옛날에 내 부하였던가? 아니, 한번도 영주
군을 예하에 거느린 적은 없는데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 새삼스럽게 꿈틀거리는 과거의
잔영은 워낙 생생해서 좀처럼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고문간의 얼굴은 첫 대목을 잊어
버린 어떤 이야기의 계속처럼 여겨졌다. 계속임에는 틀림없는데 그것이 무엇의 계속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10년전, 아니 그보다 더 전에 어디선가 시작된 이야기 같았다. 배행검
은 기억의 실마리를 붙잡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늙음에 장사가 없구나
젊은 날의 배행검은 천재였다. 경사자집을 수백 권씩 줄줄 외우고, 사람을 한번 보면 10
년, 20년이 지나도 잊어먹지 않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런데도 이제는 모든 것이
안개 낀 밤의 등불처럼 가물가물하기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막 몸을 돌려 가려고
할 때 12년 전의 어떤 일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고도위!"
"예."
"그대는 어디 사람인가? 영주군 소속이라는데 본래부터 영주에 살았는가?"
문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언젠가 한번은 닥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대면이었다.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문간은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
국 대답했다.
"아닙니다, 합하. 소직은 본래 경조인(장안 출신)이옵니다."
배행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나와 스산한 북방 초원의 하늘로 피어올랐다. 이윽고 그는 천천
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망나니 아들과 다시 상면한 아버지
같았다.
"12년 전에 아시테 웬푸는 용무영의 중랑장이었지 나도 그때는 삼책대장군으로 장안에
있었고 "
두 손을 뒷짐진 배행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수행하던 장군들은 영문을 모르고 갑자
기 회고에 잠긴 대총관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돌궐인이었지만 워낙 용력이 출중하고 성실해서 지금쯤은 상장군이 되어 있을
인물이야. 연타마지 장군, 아마 당신도 보면 기억이 날 거야. 나한테도 몇 번 인사하러 왔었
으니까. 그런데 고구려가 평정된 해 겨울이었지. 웬푸가 당직을 서던 날 밤에 용무영에 갇혀
있던 고구려 죄수들이 탈옥을 해버렸다네. 웬푸는 죽기살기로 놈들을 추적했지만 오히려 자
신이 인질이 되고 말았지. 웬푸는 그 길로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네. 얼마 있다가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지난해 뜻밖에도 반란군의 수괴가 되어 나타난 거야. 나는 깜짝
놀랐지."
배행검은 자기 말에 취해 허허 웃었다. 고문간은 고개를 숙여 흙빛으로 변한 얼굴을 감추
었다.
"석정난추라는데 옛일을 떠올려 뭘 하겠나. 왕년의 그 촉망받던 사람은 역적이 되고 나는
또 그를 토벌하러 왔구먼. 그때 용무영의 포로 신세였던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또 아군의
선봉이 되어 있고 다 그런 거지, 뭐. 뜬세상 운명의 부침이 이런 것 아니겠나?"
누구에게랄 것 없이 그렇게 술회하고 난 배행검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먹으로 자
신의 엉치뼈를 두드리며 엉거주춤 말에 올랐다. 올해 나이 예순하나. 말을 타고 삼군을 호령
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다. 일행이 고려외부의 숙영지를 벗어나자 나란히 말을 몰던 총
참모장 연타마지가 물었다.
"대총관님, 저 고도위가 옛날에 아시던 사람입니까?"
배행검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행군총관 정무정 장군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저 고문간이라는 사람, 제가 시어사부에 있을 때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만 "
배행검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배행검 예하에서 군단장(행군총관)을 맡고 있는 이 정
무정은 실상 배행검을 감시하기 위해 배치된 무후의 심복이었다. 의아방의 자객 출신인 이
자는 꼭 이렇게 미운 털이 박힐 소리만 하고 있었다. 배행검은 무뚝뚝한 얼굴로 연타마지와
잠시 후에 벌어질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정무정은 자기 혼자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따라갔
다. 그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9년 전 안시성이 함락되던 날 밤 아
란두와 함께 허겁지겁 산 속으로 달아나던 고문간의 모습이었다.
4.
캄캄한 광야의 끝에 새순 같은 빛이 돋아났다. 햇빛의 문이 열리자 서리 맞은 마른 풀의
망망대해가 가뭇없이 펼쳐졌다. 이곳은 선우도호부로부터 서쪽으로 400리 지점, 돌궐 사람들
이 초록빛 샘터(야실 쿠유)라 부르는 겨울 목초지였다.
어제 저녁까지 이 둔영지에 들어차 있던 수만 호의 천막들은 오늘 새벽 빗자루로 쓴 듯이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천막을 접어 마차에 실은 노약자와 아이들, 여자들은 동이 트기 전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초가이쿠지를 향해 떠났다. 어제 오후 엄청난 수의 당나라군이 땅에서
솟은 듯이 급작스럽게 남쪽 초원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달라붙은 듯한 목초지의 지평선. 그 위에는 세 채의 커다란 천막만이 남아
있었고 천막 좌우로는 3만 명이 넘는 기병들이 횡대의 진형으로 포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놀랍게도 큰 들소 가죽으로 덧문을 댄 중앙의 천막 앞에는 아홉 갈래의 하얀 말꼬리를 드리
운 높은 깃발(도크)이 꽂혀 있었다.
50년 전 11대 힐리 칸을 마지막으로 끝난 돌궐제국 본영(가한정)의 깃발이었다. 깃발 옆에
는 담비털로 장식한 가죽투구를 쓴 수백 명의 10대 소년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도열해 있었
다. 이들은 <오르도>라 하요 칸과 총사령관을 경호하는 어장친군, 돌궐의 소년들이 가장 영
예롭게 생각하는 칸의 친위대들이었다. 물론 이 어장친군 역시 다시 부활시킨 것이었다. 이
오르도들의 한 가운데, 가한정의 깃발을 등진 등받이 없는 의자에는 위엄이 넘치는 장년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바로 돌궐 부흥군의 총사령과 아시테 웬푸.
햇볕에 그을려 피부는 무두질한 가죽 같이 변했지만 옛날 용무영 중랑장 시절의 그 우아
한 기품은 여전했다. 건장한 어깨 언저리엔 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중후함이 있었
고 반쯤 조는 듯한 눈에는 폭풍 전야의 긴장이 담겨 있었다. 이윽고 지평선에서 한 마리 말
이 나타나더니 풀이 붙은 흙을 튀기며 쏜살같이 달려왔다. 화살통을 등에 메고 허리에는 긴
칼을 찬<비린치>라는 젊은이였다.
"아파 타르칸(총사령관님)! 적의 본진이 파수대 돌산에 나타났습니다."
웬푸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아까 땅에 귀를 대고 다가오는 말발굽의 진동을 들었던
것이다. 웬푸는 조용히 물었다.
"비린치, 적의 기병은?"
"우익에 있습니다. 우리 편 좌익 앞에 있습니다. 제일 앞에 뵈클리(고구려) 기병, 그 뒤에
키타이(거란) 기병, 그 뒤에 타브가치(당나라)기병입니다."
웬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에는 절대 돌파당하지 않는다. 우리
편 좌익은 세리토리군 3천 기, 설령 그것이 무너져도 그 뒤에 추오군 2천 기가 또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바가 타르칸(부사령관)아시테 팽치도 따라 일어서며 껄껄 웃었다.
"정신나간 새끼들 아니냐고. 배행건이가 노망이 들었어. 돌지 않고서야 이렇게 코앞까지
달려들 수사 있어? 기병은 전부 오른쪽으로 보내놓고."
이제 양 진영의 거리는 불과 3킬로미터. 말을 탄 기병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육박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일단 접전이 붙으면 보병은 기병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원거리에서 화살을
날리며 기병의 접근을 막아야 할 보병대가 거꾸로 날 죽여줍쇼 하며 코앞까지 육박하고 있
다는 뜻이었다.
웬푸는 반드시 그렇게 낙관하지는 않았다. 접근거리가 짧다는 것은 좋은 점도 있지만 아
군의 기병들이 충분히 전개할 만한 공간이 없다는 약점도 있기 때문이다. 3만 기나 되는 기
병이 충분히 전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넓이가 필요하다. 배행검이 이렇게 바짝 전진한 것
은 돌궐 기병에게 활동할 만한 거리와 공간을 주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전술인 것이다.
말이라고 하는 동물은 성미가 아주 까다롭다. 돌진할 공간이 충분하지 못하면 신경질을
낸다. 발길에 무엇이 채이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해서 길 앞에 토끼가 웅크리고 있어도 멈
춰서버린다. 서투른 기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느닷없이 멈춰선 말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당나라군은 10만에 가까운 보병 사단으로 물고기 비늘 같은 어린진을
만들어 배행검의 본진을 지키고 있다. 만약 당의 보병대가 의외로 선전을 한다면 아군의 기
병은 적진에 뛰어들다가 포위되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무조건 싸워야 한다.
웬푸와 팽치가 싸울 시기를 선택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배행검의 작전은 일단 성
공하고 있었다. 배행검은 교묘한 용병술로 결전을 미루어 유목민들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
운 이 3월에 전단을 연 것이다. 전세는 몰라도 전기만은 당나라군에 유리했다. 겨울에서 봄
으로 넘어가는 지금은<챠간 주드>라 불리는 폭설이 내려 풀이 썩고 그것을 먹은 가축들이
폐사하여 유목지역 전체가 위축되는 시점이다. 지금 돌궐군이 초록빛 샘터의 목초지를 포기
하고 달아나면 어디서도 이런 3만 대군을 모을 수가 없을 것이다.
"뿔나팔을 불어라!"
웬푸의 명령이 떨어지자 곁에 서 있던 웬푸의 아들 유라르가 뿔나팔로 전투준비의 군호를
알렸다. 돌궐군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라르가 다른 소년병과 함께 웬푸의 80근 당파창을 끙끙거리며 들고 왔다. 웬푸는 한 손
으로 창을 받아들고 다른 손을 뻗쳐 아들의 볼에 갖다 대었다. 아들은 깜짝 놀라더니 그것
이 애정의 표현임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아들의 얼굴 위에 죽은 아내 아우란치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용서해라, 아우란치. 이 전쟁만 끝나면 유라르를 더 이상 버려두지 않으마.
유라르는 웬푸의 피를 받은 아들이 아니었다. 아시테 씨족이 초원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닥친 불행은 토구즈 오구츠의 습격이었다. 이 습격에서 웬푸의 아내 아우란치가 약탈
당했다. 그때 웬푸는 아직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중국에 붙들려 있었다. 간신히 고향
에 돌아온 웬푸는 즉시 부족을 이끌고 복수전에 나섰다. 힘겨운 전쟁 끝에 아내를 찾았으나
그사이 아우란치는 오구츠 사내와의 사이에서 젖먹이 사내아이를 낳고 있었다. 웬푸는 사내
를 죽이고 아우란치와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우란치는 차라리 자신을 버려달라고 애원
했다.
"저는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나머지 오구츠에게 몸을 주고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제가 무
슨 낯으로 이르킨(족장)의 정실로 돌아가서 일족들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웬푸는 듣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살뜰하게 대하지도 못했다. 가슴속엔 아내
를 향한 한결같은 사랑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상처받은 자존심과 타는 듯한 열패감은 웬푸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사내아이의 이름은<유라르>라 지었다. <유라르>란 돌궐말로 말고삐란 뜻. 다른 아이가
태어나면 유라르에게는 일절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하인으로 말고삐나 쥐게 하겠다는 냉혹
한 뜻이 들어 있는 이름이었다. 아우란치는 행복하지 못했다. 고향에 돌아온 아우란치는 새
들새들 여위어가더니 2년 후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웬푸는 그쯤에서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쓰라린 회상들을 다 털어버리고 유라르로부터
번쩍이는 황동투구를 받아 썼다. 말에 올라 군막 앞에 카한을 향해 군례를 올린 웬푸는 큰
소리로 명령했다.
"전군 상보로! 넓게! 넓게 퍼져라!"
돌궐군은 드디어 파도처럼 밀려가기 시작했다. 웬푸는 아군을 전개시키기 위해 잇달아 좌
우익에 명령을 내렸다.
"세리토리군, 속보로! 적의 우익을 찔러라!"
"카라쿰군, 속보로! 적의 뒤로 우회하라!"
"과연 돌궐 기병이로다. 3만 기가 달려드는데도 저토록 대역이 정연하구나!"
돌산에 서서 적군을 바라보던 배행검이 솔직하게 감탄했다.
"거, 거, 겉보기일 뿐입니다. 며칠 동안 부족 모두가 배를 곯았지 아, 않습니까. 정찰병 말
로는 어제도 아녀자들이 들판을 돌아다니며 쥐를 자, 자, 잡아먹었답니다."
연타마지는 코웃음을 치려 했지만 혀가 얼어붙어 자꾸 말이 헛나왔다.
돌궐군은 뜨겁게 달아오른 말들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부챗살처럼 산개했다. 그들의 칼이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번쩍거리기 시작하였다. 대지는 말발굽소리로 신음하기 시작했고, 말
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며 전사들은 들은 등자를 밟고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발밑으로
대지가 쏜살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배행검은 더 지체하지 않고 군선을 치켜들었다.
"선봉대 공격!"
바우우웅
사슴뼈로 만든 살촉에 구멍을 낸, 소리내는 화살(효시)이 공기를 찢으며 고구려 기병대 쪽
으로 날아왔다. 공격 개시 신호였다. 고문간은 압이를 쓰고 가슴의 엄심갑을 졸라매었다. 그
리고는 흥분해서 말발굽을 껑충거리는 말들을 억누르며 적들이 바로 코앞에 육박할 때까지
기다렸다. 적의 선봉이 1킬로미터 안으로 들어오자 고문간은 궁수대에 신호를 보냈다.
"쏘아!"
그러자 하늘을 향해 45도 각도로 조준한 궁수대의 활이 일제히 튕겨졌다. 고문간의 기병
대를 지원하는 왕사인의 궁수대는 석궁부대였다. 석궁의 짧은 화살이 빗발처럼 하늘을 뒤덮
으며 적을 향해 날아갔다. 세리토리군의 말과 병사들이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혀 쓰려졌다.
"개색끼드을!"
돌권군의 부사령관 팽치는 아시테군의 선봉에 서서 배행검의 본진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화살이 참새처럼 가슴의 가죽갑옷에 빗맞아 튕기며 뺨 옆을 스쳐갔다. 또 하나의 화살이 그
의 목을 스쳐 뒤에 오던 부하를 말에서 떨구었다. 다음 순간 팽치의 말은 창을 겨누고 있는
당나라 보병대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칼을 휘두르던 보병 장교가 말의 가슴팍에 부딪혀
튕겨져나갔다.
흥분한 팽치의 말은 길길이 날뛰며 빙빙 돌더니 갑자기 수레와 마차들로 쌓아놓은 엄폐막
을 펄쩍 뛰어넘어 적 장창대의 한 가운데로 주인을 실어갔다. 그러자 섬광의 무지개를 그린
팽치의 칼리 번쩍하면서 순식간에 다섯 명의 머리통들을 날려버렸다. 돌궐군은 그렇게 광포
한 강물처럼 보병대를 유린했다. 번쩍거리는 수백 개의 군도가 허공을 줄무늬 모양으로 자
르며 단말마의 비명들을 피워올렸다.
좌익과 우익과 중앙, 모든 전선에서 격렬한 난전이 시작되었다. 자욱한 모래먼지가 일어나
는 가운데 긴 칼과 창끝이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고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퍼졌다. 화살
을 맞은 수많은 말들이 격렬하게 울부짖으며 폭주하고 말발굽에 밟힌 병사들이 단말마의 비
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왕사인의 석궁부대는 3열 횡대로 번갈아 후퇴하며 아군의 머리너머로 계속 화살을 나렸
다. 석궁부대와 엇갈려서 발도대가 칼과 말다리를 후리는 긴 낫을 들고 앞으로 전진했다. 이
때 기병대가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궁기병 쏘아!"
"창기병 나를 따르라!"
고문간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난전의 아수라장 속에 한 줄기 돌격로를 뚫었다. 그의 고
구려 기병대는 서서히 전장 오른편으로 우회하기 시작했다.
5.
돌산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배행검은 눈살을 찌푸렸다.
돌궐군의 우익과 중앙이 당나라군의 전열을 차례차례 돌파해 돌산 앞의 넓고 완만한 비탈
가지 쳐올라왔기 때문이다. 과연 돌궐군은 세 배가 넘는 적을 맞아 너무 잘 싸우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한다. 더구나 이 쥐는 야전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고 하
는 돌궐군이었다.
작은 각궁을 쏘며 달려온 돌궐 기병들은 재빨리 긴 칼이나 창으로 바꾸어 들고 용감하게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긴 칼이 부러지면 한 손으로 잡고 쓰는 손잡이가 짧고 칼등이
휜 만도를 빼들고 아수라처럼 싸운다. 화살을 몇 대나 맞고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서도 물러
서지 않았다.
그 기세에 겹겹으로 포진한 당나라군은 여지없이 유린되었다. 그러나 전열이 완전히 무너
진 것은 아니었다. 보병대는 대부분 토번과 서역에서 많은 전쟁 경험을 쌓은 노련한 병사들
이었다. 돌궐군의 돌격에 못 견뎌 일단 흩어졌던 보병들은 금방 중대별로 전투 대형을 만들
어 돌궐군의 배후로 돌아갔다. 돌궐 기병은 계속<중앙돌파>를 감행하며 배행검의 본진으로
육박하고 있었지만 당나라군 또한 <포위>를 감행하여 계속 기병대를 창검의 울타리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때가 당나라 시간으로 병시(오전 11시)
돌궐군의 눈에도, 그리고 당나라군이 눈에도 전황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결정적인 순간으
로 치닫고 있었다. 이 순간 가장 유리한 상황과 가장 불리한 상황은 너무도 똑같아 보인다.
돌궐 기병이 막 결승점을 돌파하여 적진을 완전히 깨어버릴 것 같은 순간 적진 깊숙이 들어
간 이들의 측후방은 지극히 위태롭다. 그러므로 막 중앙돌파가 성공하려는 가장 유리한 상
황은 거꾸로 적에게 사면으로 포위되어 괴멸될 것 같은 단말마의 상황과 똑같아보이는 것이
다.
중앙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배행검은 무서운 눈빛으로 명령했다.
"흑치상지장군, 중군 앞에 독전대를 만드시오. 전장 이탈자들을 군령으로 처단하시오!"
좌무위장군 흑치상자는 즉각 군령을 상징하는 도끼가 그려진 커다란 독전기를 들고 언덕
을 내려갔다 그리고 도망쳐오는 아군을 가차없이 긴 창으로 찔러죽였다.
"돌아가라! 전장에서 도망치는 놈은 죽인다!"
그러나 이렇게 중앙을 막는 사이 돌궐군의 우측 선봉을 맡은 카라쿰군이 아군의 좌익을
무너뜨리고 돌산의 턱 밑까지 육박해왔다.
"배행거엄, 이리 나와아!"
카라쿰군의 선두는 말도 사람도 무지무지하게 큰, 붉은 말가죽 갑옷, 100근이 넘는 환두대
도(칼자루에 짐승 문양을 장식한 황동제 둥근 고리가 달린 양수대도)를 팔랑개비처럼 휘두
르며 막아서는 아군을 짓이긴다. 칼날만 해도 아홉 자(2.7미터)는 될 것 같다. 하늘과 땅을
제압하는 찌렁찌렁한 고함소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를 뒤집어쓴 지옥의 악귀와 같
은 모습, 배행검 옆에서 벼루상자를 메고 있던 종사관 한 사람은 부들부들 떨더니 그대로
졸도해버렸다.
"아, 아, 아, 아시나 쿠틀룩입니다."
돌궐족과 가장 사이가 나쁜 오구츠족 출신의 계필명장군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열네 살 때 맨손으로 곰을 때려잡았다는 아시나 쿠들룩. 오르도스 초원에서는 모르는 사
람이 없는 용사 중의 용사였다. 정통 아시나 씨족으로 존귀한 가문의 장남이었고 반란 전에
는 당의 운중도독부로부터 정식으로 투둔초르(돌궐제국의 관직명. 하나의 대도시를 가진 지
방장관)의 관직을 받은 카라쿰 지역의 지방장관이었다. 올해 나이 겨우 스물세 살로 이 반
란에 가담하지만 않았다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을 사람이었다.
저게 사람이냐? 귀신이냐? 온갖 전쟁을 다 겪은 백전노장 배행검도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팔, 다리, 목, 몸통 쿠틀룩의 칼이 춤추는 곳에 풀이 베어지듯 피와 살덩이가
날아갔다. 예까지 진격하는 동안 말이 두 번이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마다 부하가 끌
고 온 말에 나는 듯이 옮겨 타고 싸운다. 배행검의 본진을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감주군
3개 연대가 순식간에 박살났다. 삼엄한 장창대도 쿠틀룩의 칼 앞에서 거의 무인지경 같았다.
이제 배행검 옆엔 쿠틀룩의 용전을 흘린 듯이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는 페르시아인 용병
60명과 막료들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행검은 등받이 없는 야전사령관의 의자에 버
티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그마한 몸이 태산처럼 보이는 놀라
운 정력이었다. 이 무언의 명령이 막 무너지려는 당나라군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용병대장 쉘릭이 배행검을 지키기 위해 맞붙었다. 그러나 쉘릭은 쿠틀룩의
일격에 창, 사람, 말까지가 무처럼 두 동강이 났고 나머지 용병들은 쿠틀룩의 부하들에게 죽
거나 달아났다.
"나무아미타불!"
배행검의 오랜 전우인 설연타족 출신의 연타마지 장군이 이화창을 겨누며 나섰다. 말을
탈 겨를도 없이 도보였다. 계필명 장군과 다른 막료 몇 명도 죽음을 각오하고 칼을 뽑아들
었다. 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순간 능선의 왼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번
쩍 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몰아쳤다.
다음 순간 불과 대여섯 걸음 앞까지 달려온 쿠틀룩의 말이 어이없이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검은 그림자가 다시 한 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말을 치달리자 배행검에게 달려들던 돌궐군
여섯 기가 가랑잎처럼 쓰러졌다.
"흑치상지 장군!"
막료들 모두가 살았다며 환성을 질렀다. 1천 명의 독전대를 이끌고 중군으로 내려갔던 흑
치상지가 배행검이 위태로운 것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죽은 말에 깔린 쿠틀룩은 다리와 허
리를 크게 다쳐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이 틈에 흑치상지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온 자신의 독전대를 정비했다.
흑치상지는 독전대의 긴 세 갈래 창, 극삭을 든 자신의 부대를 4열 횡대로 다다히 밀집시
켰다. 첫 번째 열은 창을 수평으로 꼬나잡고 둘째 열부터는 창을 세우는 각도를 조금씩 늘
여서 고슴도치 같은 방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밀집대형으로 아시태군을 밀어내며 조금
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승패의 갈림길이었다.
흑치상지 부대의 창 울타리는 그토록 무서웠던 아시테군의 공격을 돈좌시켰다. 보병이 기
병의 집단 돌격을 가로막는 이 비현실적인 일은 흑치상지의 부대가 돌산 고지대로부터 낮은
평지로 내려가는 위치에 있고 그 병사 하나하나가 대장과 한께 죽겠다는 각오와 담력을 가
진 고참병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원도경략부사로 토번 전성에 있다가 급히 돌궐 토벌군에 투입된 흑치상지는 원래 백제
사람이다. 백제가 멸망하자 임존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한때 200여 개의 성을 수
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부흥운동세력의 내분으로 뜻이 꺾이어 당에 귀순하게 되었다.
그의 병사들은 수십 년 동안 흑치상지를 따라 이역만리의 전장을 전전해온 옛 백제의 정예
병들이었다. 이 노련한 병사들이 정면에서 돌궐 기병을 밀어붙이자 이제까지 느슨하게 벌려
서 있던 포위망이 단번에 조여졌다.
백제의 고참병들이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물러서지 않고 버티자 다른 부대들도 이것을 본
받았다. 3만 기나 되는 기병들인 만큼 이렇게 되면 말들이 도움닫기 거리를 얻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도 노련한 돌궐 기병들은 곳곳에서 포위망을 무너뜨리며 분전했다. 그러나
이쪽은 10만 대군이다. 깨도깨도 겹겹이 포위망이 버티고 있다. 이때 두 번째의 극적인 전환
이 찾아왔다.
와아아 하는 함성이 뒤쪽 돌궐 기병대의 본영에서 들려왔다. 저지선을 뚫고 우회한 고
구려인들이 영주 기병대와 중국인들로 구성된 이주 기병대가 아시테 웬푸의 본진을 치는 소
리였다. 적과 아군이 동시에 놀라는 순간이었다. 돌궐군의좌익을 맡았던 세리토리군 3천 기,
그 후미의 유군이 되었던 추오군 2천 기가 너무도 어이없이 돌파당한 것이다.
원래 세리토리 씨족과 추오 씨족은 이번 거사에 가장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아시나 씨족,
코오로 씨족, 호우루 씨족과 나란히 놓이는 전통적인 귀족임에 비해 이번 거사를 주도한 아
시테 씨족은 훨씬 격이 떨어지는 신흥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위계 서열에 불만이 많
던 이들의 소극성은 결국 곳곳에서 돌파로를 열어주는 결과로 나타났다. 거란인들의 숭주기
병대만이 아직도 이들에게 발목이 잡혀 있었다.
퇴로가 끊어졌음을 깨달은 돌궐군들은 당황했다. 돌궐군의 대역은 이제 한 필, 두 필의 파
편으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기병은 한 덩어리를 이루지 못하면 전력이 되지 않는다. 이 전열
의 와해는 곧 패주로 이어졌다. 전황이 극적으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이때가 미시(오후 2시).
아침부터 계속된 싸움은 이제 대세가 기울었다. 곤시(오후 3시)가 되자 돌궐군의 모든 부
대가 패주하기 시작했다. 전사했는지, 한 줄기 혈로를 뚫고 달아났는지 쿠틀룩의 모습도 보
이지 않았다.
망할 자식들! 이 망할 자식들!
정신없이 도망치는 돌궐군 속에서 웬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이미 전신이 피투성이였
다. 그러나 내장이 쏟아져나올 것 같은 육신의 상처보다 아군의 패배가 더 사무치게 아파온
다. 웬푸는 여기서 살아 돌아간다 해도 분통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세리토리군과 추오군의 배반.
궐기할 당시부터 그들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경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설마 싸움터에 등을 돌리고 떠나버릴 줄이야. 적 기병대의 어이없는 돌파를 허용했고 전세
가 불리해지자 가장 먼저 전장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 그 두 부대였다.
이번 봉기에서는 전통적인 명문인 두 씨족이 확실히 아시테 씨족의 예하로 들어갔다는
것. 노련한 배행검은 이런 기득권 세력의 갈등을 놓치지 않았다. 배행은 작년부터 수없이 밀
사를 파견하여 이 두 씨족에 대한 회유공작을 폈다. 그 결과 두 씨족은 오늘 전투가 시작되
기 전부터 마음이 흔들리고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게 섰거라, 아시테 웬푸!"
난마처럼 얽힌 싸움터에서 웬푸는 돌궐말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둘려보
니 고구려 기병대의 압이를 쓰고 연대장의 목수건을 두른 기마무사가 갈고리창을 휘두르며
오고 있었다. 배에 창을 맞고 어깨와 등에 세 대의 화살이 꽂힌 웬푸는 자시의 최후를 생각
했다.
"웬놈이냐?"
웬푸가 신음 섞인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당파창을 들고 필사적으로 의연한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갈고리창을 겨누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 내가 아시테 웬푸다. 헉, 헉, 내 목을 가져가면 그 상으로 평생 당나라의 똥을 핥을
수 있을 거다. 이, 당나라의 개자식아!"'''
"웬푸 중랑장 "
약간 잠긴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려던 고문간은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 마당에 세월
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옛일을 들춰서 무엇하나. 나는 별수없이 군인이고 이 자는 이제 적
장인 것이다.
어디 죽어봐라.
이미 온몸에 적의 피로 미역을 감고 있던 문간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창자루를 고쳐 쥐
었다. 그러나 그런 한동안의 머뭇거림이 화근이었다. 웬푸를 찾던 오르도 하나가 두 사람의
대치를 발견했다.
"빠빠(아버지)! 위험해요!"
하는 소리와 함께 앳된 얼굴의 소년 오르도가 문간에게 칼을 휘둘렀다. 문간은 능숙하게 우
측으로 피하며 갈고리창을 내질렀다. 다급한 마음에 허둥대던 소년은 창의 갈고리에 걸려
말에서 떨어졌다. 문간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웬푸에게 내달렸다. 문간도 이젠
옛날의 고문간이 아니었다. 토번 원정을 포함해서 무려 50여 차례의 백병전을 치른 군관이
었다.
웬푸와 고문간의 큰 창들이 눈부신 햇살을 튕겨내며 챙 하고 부딪혔다. 당파창의 힘에 밀
려 튕겨지려는 순간 갈고리창은 윙 소리를 내며 안으로 돌더니 웬푸의 목을 걸어 잡아당겼
다.
앗, 하고 웬푸의 육중한 몸이 마상에서 제껴지더니 그대로 한바퀴 돌아 땅으로 굴러 떨어
졌다.
웬푸가 땅에 떨어졌을 때 문간에겐 어떤 잡념도 없었다. 오직 틈을 노려 뛰고 찌르는 전
장의 본능만이 문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적의 총대장을 죽일 일생일대의 호기. 문간의 온몸
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전신이 힘을 실은 고문간의 창이 벼락처럼 웬푸에게 떨어졌다.
"악!"
창은 몸을 뒤틀어 피하는 웬푸의 배를 스쳐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내며 땅에 박히면서 부
러졌다. 웬푸가 고통을 참지 못해 피가 쏟아져 나오는 옆구리를 쥐고 떼굴떼굴 뒹굴었다. 놓
치면 안된다. 부러진 창자루를 버리고 피 묻은 칼을 뽑으면서 문간은 홱 하고 말에서 뛰어
내렸다.
"죽엇!"
고문간의 칼은 인정사정없이 크게 호를 그리며 내리 꽂혔다. 그때였다.
"빠빠!"
문간의 칼날이 그리는 반원 속으로 노란 물체가 뛰어들었다. 순간 고문간의 망막 가득 피
보라가 일어났다.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문간은 반 발짝 뒤로 물어섰다. 다음 순간 웬푸의
비명소리가 애절하게 터져나왔다.
"유라르야! 유라르야! 유라르야!"
웬푸의 아들 유라르가 아버지를 몸으로 덮쳐 막은 것이다. 웬푸는 자신의 피, 아들의 피가
쏟아지는 그 자리에 아들을 안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고문간의 칼은 소년의 두 팔과 머
리를 박살내었다. 유라르는 투구가 두 쪽나고 관자놀이가 으스러져 터진 머리로 왈칵왈칵
피를 뿜어내며 숨져갔다.
으 아버지에게 안긴 유라르는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울
컥 목이 부풀어 오르더니 입으로 많은 피를 토하고 그대로 목뿌리에 힘이 빠져갔다. 웬푸는
아들의 피 묻은 얼굴에 자기 얼굴을 부비며 목놓아 울었다. 전쟁도, 적도, 아니 세상 모두를
잊고 울었다. 그러다가 문득 바로 두 발짝 옆에 칼을 쳐들고 있는 문간을 발견했다. 문간의
눈과 웬푸의 눈이 마주쳤다. 웬푸는 이미 전의를 잃고 있었다. 복잡한 오뇌가 문간의 얼굴을
스쳐갔다.
결국 문간은 몸을 돌리더니 다시 자기 말을 붙잡아 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웬
푸를 떠나갔다. 멀리서 다른 오르도들이 자기들의 총대장을 발견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6.
<초록빛 샘터>의 대회전은 배행검이 이끄는 원정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살아남은 돌궐군
은 사분오열되어 음산산맥의 카라 이쉬로 달아났다. 시체의 귀를 잘라 전과를 계산하니 적
의 전사자 3천여 명. 유복지역의 전투에서는 유례가 드문 대승리였다. 귀검사가 끝나자 원정
군은 지체없이 추격전을 전개했다.
도망치는 돌궐군은 굶주림과 악천후로 말들이 속속 죽어갔다.
마침내 오리티 강가에서 새로운 돌궐제국의 카한으로 추대되었던 아시나 니샤오푸가 자결
했다. 돌궐군의 부사령관 아시테 팽치는 카라 이쉬 어귀에서 추격대에 따라잡혔다. 그는 처
와 어린 자식을 모두 죽인 뒤 추격대를 향해 최후의 돌격을 감행,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시테 웬푸. 그러나 웬푸만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음산산맥을 이 잡듯이 뒤져서 웬푸를 찾아라!"
원정군 사령부는 거듭 군대를 독려했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 3월 말부터 오르도스의 봄
폭풍이 시작되었다. 완전히 봄이 오기 직전 약 일주일 동안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뒤덮는
뿌우연 회색 바람이다. 이 봄폭풍에 추격대의 발이 묶여버렸다. 원정군은 더 이상의 수색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개선했다.
이때 웬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놀랍게도 웬푸는 음산산맥을 넘어 몇 명의 부하와 함께 고비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다
른 사람 같으면 일어서기도 어려운 중상을 입은 웬푸였다. 탈진하여 퀭하게 변한 얼굴은 마
치 귀신과 같았다. 실로 초인적인 의지로 웬푸는 자기만이 아는 사막의 길을 따라 추격병들
이 따라올 수 없는 필사의 도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비사막을 건너, 쥐옌하이호수를 지
나, 하서회랑을 통과하여 웬푸는 알타이산맥 남쪽에 사는 카를룩 부족으로 달아났다. 배행검
이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넉 달이 지나 있었다.
카를룩부족은 원래 돌궐 5대 씨족의 하나인 코로씨에서 나온 부족이다. 고비사막 서쪽의
초원을 따라 알타이산맥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반농 반유목의 강대한 부족, 그 자신 북쪽
으로부터 키르기스족의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만큼, 돌궐제국 부흥운동을 열렬히 성원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 대신 새로운 칸으로는 카를룩 부족으로 장가든 아시나 부얀을
추대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아시아 부얀은 돌궐제국의 마지막 칸이었던 힐리 칸의 자손이
었다. 웬푸는 수락했다.
그리하여 그 해 7월, 천산이 불을 토하고 사막의 모래가 지글지글 끓는다는 하서의 여름.
아시테 웬푸는 넉 달 만에 불사조처럼 다시 나타났다. 하서회랑 서쪽에서부터 카를룩 부족
의 대부대를 이끌고 와 다시 운중성 일대를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돌궐의 2차 반
란이다. 초록빛 샘터의 패전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돌궐군은 순식간에 다시 결집했다. 오르도
스는 다시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 병력은 오히려 1차 반란을 능가했다.
이 무렵 웬푸는 완쾌되지 않은 부상과 계속된 행군으로 몰라보게 여위어 있었다. 높이 도
드라진 광대뼈와 깡마른 볼, 퀭하게 패인 눈자위에는 속으로부터 형형히 번뜩이는 눈이 있
었다. 부하들은 모두 그의 앞에서 숨을 죽이고 감히 그의 눈빛을 마주보지 못했다.
달빛이 교교한 밤이면 그의 눈빛은 신들린 것처럼 보였다. 그 눈은 흩날리는 모닥불의 연
기 속에서 죽은 아들 유라르를 보고 있었다. 바람 속에서 어머니의 혼을 그리며 우는 유라
르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인간사의 불가해한 정애가 웬푸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유라르야, 너는 왜 나를 살리려고 죽었더냐.
철도 들기 전에 제 어미를 여의고 정에 굶주린 나머지 제 생부를 죽인 나를 아비라 부르
며 자란 유라르. 언제나 하인처럼 키웠던 유라르. 헐은 옷 여미고 주린 배 움켜쥐며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이 아비를 따라다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죽어버린 유라르. 유라
르의 발그레한 볼이 한밤내 웬푸의 눈앞을 아른거렸다. 체진한 군막 옆 시냇물의 물소리는
온갖 소리를 담아 흐르고 웬푸의 폐부 깊숙이 패인 빈 공간에도 어두운 물소리가 쌓여 올랐
다.
웬푸는 밤의 어둠에 감싸인 망망한 초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람소리, 자신의 뼛가루
를 날리는 아득한 날의 바람소리가 들렸다. 웬푸는 그 바람에 자신의 영혼을 널어 말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비정한 광야의 신이 웬푸를 불렀다.
신은 웬푸의 안에서 모든 인간적인 감정의 물기를 말려버리고 다시금 지펴지는 반란의 불
속으로 웬푸를 밀어넣었다. 모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된, 황야와도 같은 비정한 정신으
로, 보다 먼 모험, 보다 깊은 고난, 보다 심한 고통으로 그렇게 새벽이 왔다. 그렇게 아침
이 되면 웬푸는 더욱 퀭해진 눈으로 돌아다니며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햇살이 따뜻한 장안성의 초겨울 오후. 비서감의 중심이시며 그 이름도 거룩한 청후님(무
후는 674년 자신의 호칭을 청후, 즉 <하늘과 같이 존귀한 황후>로 바꾸었다.)의 친조카분이
신 무승사대감은 노복들만을 대동한 채 친히 걸어서 퇴청하고 계셨다. 해가 지려면 좀 이른
시각이었지만 긴요한 볼일이 있었다.
젊은 무대감은 걸으면서도 혼자 뻥싯뻥싯 웃었다. 그는 요즘 무후의 신임을 얻어 제정신
이 아니었다. 대궐에서나 집에서나, 자나깨나 앉으나서나 국사에 몰두했다. 막 출세길이 열
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뼛골이 빠지게 쏘다녀도 피로를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콧
노래를 흥얼거리며 영숭방 구역에 이른 무대감은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아, 배행검 장군이다. 배행검 장군."
"뭐어? 어디? 어디?"
꼭 먹다 만 쑥떡 같은, 재수없는 것들이 우르르 군신각 네거리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멀리 네거리에는 세 살 난 사내 아기를 안은 머리 허연 호호야가 행인들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외아들 배광정을 안고 있는 배행검이었다. 무승사는 울컥 하는 마음에 달려
가는 머슴애 하나를 다짜고짜 후들겨 팼다.
"야 이 농땡이 새끼들아! 하라는 장사는 안하고 왜 몰려다니고 지랄이야 지랄이. 누가 색
시 배급 나왔어? 한푼이라고 더 벌어야지 일손 놓고 놀면 저 영감이 돌궐 계집이라도 하나
주냐? 돌대가리같은 색꺄!"
"씨팔, 왜 때려요! 좇같이!"
무승사의 노복들이 화를 내며 잡으려 하자 머슴애는 침을 탁 뱉고 부리나케 달아나버렸
다. 장안의 각다귀들은 당할 재간이 없었다.
무승사는 기분을 확 잡쳤다.
쌍놈의 자식들. 내가, 이 귀하신 어른이, 왜 번쩍번쩍하는 교자놔두고 이러허게 걸어다니
는가. 이게 다 제놈들 보라고 하는 짓 아닌가. 무승사 대감은 청렴해. 게다가 겸손해, 이래주
면 얼마나 좋으냐. 그런 소문이 돌고 돌아 고모의 귀에 들어가야 점수 좀 딸 것 아니냐. 흉
물스런 자식들아. 걸어서 등청, 퇴청한 것이 벌써 엿새째건만 어리친 개새끼 하나 봐주는 놈
이 없었다. 그런데도 배행검이는 죽은 제 할애비가 살아온 것처럼 떠받들지 않는가. 이 점잖
은 어른 입에서 욕이 안 나오겠느냐? 똥물에 튀길 새끼들.
무승사는 이를 박박 갈다가, 궁시렁궁시렁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마지막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다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무승사는 무후의 오빠인 무원상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무후에 의해 코 흘릴 때 먼 오지로
추방되어 나 죽었습네 하고 살아오느라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몇 년 전에야 간신히
귀한이 허락된 그에게 고모는 염라대왕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무후만큼 친인척을 엄격하게 관리했던 권력자는 드물다. 무수한 친정붙이들이 황후의 친
인척입네 하고 날뛰다가 그녀의 손에 무참하게 죽었다. 언니의 딸 호란국주는 독살당했으며
아들인 호란민지는 유배되는 도중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 두 오빠 무원경과 무원상은 지
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다. 오빠의 다른 아들들인 무위량과 무
회연은 처형당했다.
측천무후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는 역대 유학자들도 이런 엄격함만은 <음란했으나 어지
럽지는 않았다>는 말로 평가해주고 있다. 다른 태후들은 친정의 세도를 엎고 그 자리에 올
랐고 나중에는 방자한 친정붙이들이 나라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오로지 자신
의 능력만으로 권력을 쟁취했고 그 권력을 사사로 보게 나눠주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하고
비정하고 냉철하게 인간의 무게를 재었다. 인간에 대한 그녀의 판단은 엄정했다. 설령 친조
카가 아니라 매일밤 봉사하는 애인이라 할지라도 그녀로부터 동정심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무승사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집도 자그마한 곳에 살았을 뿐만 아니라 누가 선물
을 주면 완전히 사색이 되어 되돌려 주었다. 한동안은 글자도 잘 모르는 서류들을 듣고 밤
늦게까지 일해보았다. 그런데도 좀처럼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여론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에야 든 생각인데 이런 좀스러운 방법으로는 백년하청일 것 같다. 뭔가 큼직한 건수가 필요
했다. 뭔가 큼직한 것
무승사는 영숭방 주택가의 한 아담한 집으로 들어갔다.
"아아, 무승사 대감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깡마르고 근엄하게 생긴 늙은 선비 한 사람이 정중하게 무승사를 맞았다. 이 사람이 유명
한 배염이었다. 천자의 명령을 전달하는 중서성 시랑(차관)으로 있다가 두 달 전 황태자의
역적모의 사실을 밝혀내어 시중(장관)으로 승진한 어마어마한 고관이다.
"아핫 !녠, 녠, 녜 "
무승사는 황송해 죽을 지경이라는 표정으로 허리를 새우처럼 꾸부리며 수도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배염은 무승사를 조용한 접객실로 데려갔다. 접객실에는 군부의 무후파 장성들인
정무정 장군과 누사덕 장군, 왕본립 장군이 와 있었다. 다섯 사람은 곧바로 시급한 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바로 2차 반란이 발생한 지 넉 달이 지나도록 결정하지 못한 돌궐 토벌의 지휘관 문제였
다.
이 무렵 고종의 병은 도저히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고종이 죽은
뒤의 후계자가 문제였다. 조정은 이제까지처럼 무후가 계속 통치를 맡아야 한다는 무후당과
당연히 새로 황제가 될 태자가 친히 정무를 봐야 한다는 태자당으로 갈려져 있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관념을 굳게 믿는 유학자들은 최근 형성된 황후 섭정체제의
부당성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유교적 교양이 체질화된 관료의 대다수도 태자당이었
다. 무후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받은 권문세족들, 황족들, 역대공신 가문들 역시 태자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태자당의 앞날은 순탄치 못했다. 덕망 높은 태자였던 홍은 무후가 있던 낙양의 궁
전에서 갑자기 죽었다. 사람들은 무후가 자신의 친자식을 독살했다고 수군거렸다. 둘째아들
현이 새로 태자로 즉위했다. 그러나 두 달 전 무후는 배염을 보내 태자의 궁궐을 수색했고
그 마구간에서 갑옷 수백 벌을 비롯한 신고하지 않은 무기들이 나오자 태자에게 역적모의의
혐의를 씌워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는 아마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또 쥐도 새도 모르
게 살해될 것이 뻔했다.
이렇게 되자 이제까지 아무 소리 없던 군부까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건 아예 이씨의 씨
를 말리겠다는 수작 아냐. 이러다간 그 여편네 황제까지 하겠다고 설치겠네. 군에 이런 소리
가 돌기 시작하니 무후당은 배행검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후의 오랜 정적이었던 배
행검은 이번 봄의 대승리로 군의 안팎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과연 배행검에게 막강한 야
전군을 맡겨도 되는가? 이 걱정 때문에 아직 돌궐 토벌의 사령탑인 정양도행군대총관이 결
정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무후당은 이 문제 때문에 벌써 몇 번이나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배행검은 절대로 안돼요. 그 영감은 이제 위험천만한 인물이오. 그가 종친을 하나 엎고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쩌란 말리오? 한쪽엔 오랑캐, 또 한쪽엔 반란군, 그땐 정말 돌 틈에
낀 가재꼴 나는 거지."
무승사는 손사래를 치며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배행검 대장군말고는 돌궐을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먼젓번처럼 제가 행군총관으
로 따라가면 되지 않습니까? 역심을 품는 기미가 보이면 제가 막겠습니다."
봄의 대회전에서 배행검의 지휘를 지켜본 정무정의 말이었다. 무승사는 미심쩍다는 얼굴
로 되물었다.
"정장군은 왜 자꾸 배행검을 싸고도는 거요? 배행검이 아니면 막을 수 없다니. 그런 겁쟁
이 같은 말이 어디 있소? 그게 무장으로서 할 말이오? 꼴불견 아니오, 꼴불견! 배행검은 도
대체 뭘 먹고 자랐기에 그렇게 처음부터 잘났답디까? 다 주상과 천후께서 중임을 맡기셨기
에 공을 세울 기회도 생긴 거요. 그럭저럭 나이를 먹으니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그
러다 보니 저렇게 훌륭해보이는거 아니겠소?"
정무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 순 깡패 같은 논다니가 황제의 척족이라니! 그러나
이 상스러운 인간의 박력은 산전수전 다 겪은 장군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줄곧 침묵을 지키
고 있던 시중 배염이 말했다.
"무대가의 말씀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런 장한 말씀을 듣고 보니 이 사람도 아주 혼벼락
을 맞은 것 같군요."
배염의 말에 불똥 맞은 족제비 같던 무승사의 기세가 약간 주춤했다. 배염이 사이를 놓치
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배행검이 위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장군의 말씀도 야전군의 입장에선 일리가
있습니다. 배행검이 아니라면 토벌군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배행검을 제쳐놓는다면 군부를 자극할 우려가 있습니다. 군부에 배행검의 사람들이 너무 많
은 것이 병통이오. 최지변, 왕방익, 당금비, 유경동, 곽대봉, 이다조 일선에 있는 이런 무
장들이 다 배행검의 편장, 비장 출신들 아니오."
배염의 말은 그 특유의 권위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배염은 과묵하고 함부로 웃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사생활도 청렴했고 짐짓 고매한 유학자인 척하는 기교에 통달해 있었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의 선비는 아니었고 의심할 바 없이 야심에 찬 사람이었다. 배염은 무승사 쪽으
로 몸을 기울이며 양해를 구하듯이 말했다.
"그런즉 이 사람이 복안은 이렇습니다. 일단 배행검에게 군권을 맡깁시다. 그리고 돌궐
의 반란이 어느 정도 진압될 때까지는 잘 감시만 하십시다. 그러다가 반란이 고비를 넘기면
그때 그 자의 비리를 들춰내어 제거하도록 합시다."
"비리라뇨? 배행검에게 무슨 비리가 있겠습니까?"
무승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배염은 정무정 장군에게 넌지
시 눈짓을 했다. 정무정이 대신 대답했다.
"지난 봄 배행검 휘하에서 참전한 장교 중에 고문간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본래는 고구려
기병대를 맡은 절충도위였는데 그때 공을 세워서 배행검이 승진시켜주었지요. 지금은 원외
좌기위장군(종5품하로 장군 계급의 최하위. 대개 작은 주의 자사나 큰 진의 진알사를 겸임
했음)이 되어 고구려인들로 이루어진 5개 연대를 거느리고 성주 일원을 수비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요?"
"그 고문간의 내력이 재미있습니다. 12년 전 그 자는 소부감의 관리였는데 반란을 획책
하는 고구려인들과 연루되어 신책군에 체포되었었습니다. 당시 배행검은 신책장군이었구요.
얼마 뒤 고문간은 역도들과 함께 행방불명되었고 신책군은 그 일을 묻어버렸지요."
"허, 그런 일이?"
무승사는 부쩍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정무정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정무정은 빙긋이 웃으
며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당시 천후마마께서 배행검을 의심하고 계셨습니다. 그가 몰래 고구려의 반역도들을 후원
하고 있지 않은가 하여 그 문제를 은밀히 내사하도록 하셨지요. 그 내사를 맡은 사람이 바
로 저였습니다. 저는 전쟁이 난 안시성까지 쫓아가 고문간과 그 반역도들을 체포하려고 했
는데 그만 놓쳐버렸습니다. 그런데 12년 후 고문간이 절충도위로 전공을 세워 배행검의 논
공행상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런, 괘씸한 일이! 고구려 오랑캐들과 결탁하다니. 과연 그 사실을 밝히면 "
"하 하 하, 아닙니다. 대감.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무정은 손을 흔들며 깔깔 웃었다. 무승사는 자존심이 상했다.
"뭐가 아니란 말이오?"
"이제는 그 일을 들춰봐도 배행검은 다치지 않습니다. 12년 전의 그 사건은 천후마마의
사민령 때문에 일어났지요. 그 사민령으로 큰 반란이 일어났고 자칫하면 고구려 정벌 자체
가 물거품이 될 뻔했기 때문에 이젠 마마도 무척 후회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지금은 보장왕
을 요동도독으로 만들어 어떻게든 고구려 유민들을 달래 보려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 일을
문제삼을 수 있겠습니까?
"나 원,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이오?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좀 말하시오."
"예, 죄송합니다. 그 일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약 그 고문간이라는 자가 고구려 군
대를 이끌고 돌궐에 투항하기라도 한다면 그건 큰 문제가 됩니다. 12년 전의 일까지 소급해
서 배행검이 오랑캐들과 연계하여 계속 변란을 도모해온 증거가 되니까요."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뭣
하러 토벌군의 지휘관이 돌궐에 투항한단 말이오?"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 고문간이라는 자를 투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자신이 있습니
다. 그런 다음 그 자가 투항하려 할 때 체포하는 거지요. 그 뒤엔 배행검과 연루시켜서 처형
하면 그만입니다. 저에게 맡겨주세요."
무승사는 무슨 괴이한 변고라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정무정은 누사덕과 왕본
립에게 의미심장한 눈짓을 했다. 두 장군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염은 하인을 부르더니 손님들의 식사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7.
새해인 개요 원년(681년)정월 배행검은 황궁의 대명전으로 불려들어가 무후로부터 다시
정양동행군대총관의 군권을 제수받았다
이번엔 정무정, 누사덕, 왕본립 등 전적으로 무후파 장군들만이 행군총관에 임명되었다.
공식적인 의식이 끝나자 무후는 장군들을 따로 내전으로 초치하여 친히 술을 따라주며 앞으
로의 수고를 위로 했다. 배행검은 머리를 숙이며성은이 망극하다고 답례했다. 50대 후반에
접어든 무후는 약간 감상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말로 자리를 정리했다.
"장군, 아시다시피 본 후는 한낱 아녀자일 뿐 나랏일을 마음에 품어야 할 책임은 없었소.
그런데도 30년 이상 나라 걱정으로 피곤해하시는 폐하를 도와왔소. 생각해보면 장군과 나는
그 동안 나랏일에 이견이 없지 않아 있었소. 장군은 아마도 나를 존경을 갖고 섬기지는 않
았을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변방에서 충성을 다해 나라에 평화를 안겨주었소. 나
도 내정을 잘 이끌었다고는 감히 자부하오. 나라의 살림은 날로 살찌고 있소. 농사꾼들은 평
화롭게 논밭을 갈고 있고, 모든 군인들이 제때 봉급을 받고 있으며, 상인들은 천하를 자유롭
게 다니며 장사를 하고 있소. 장군과 내가 만든 이 화이일통의 세상을 자손들도 꼭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시오."
배행검은 머리를 조아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배행검은 떨리는 목소리로 진충
갈력하겠다고 대답하고 자리를 물러나왔다. 배행검과 세 장군들은 내전을 나와 대명전을 거
쳐 궁궐 정문으로 통하는 하얀 판석의 보도를 같이 걸었다. 정무정이 배행검에게 말을 걸었
다.
"대장군님, 천후마마의 말씀은 인신에게 내릴 수 있는 치하의 극치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치하의 말씀은 널리 알려질 것입니다. 마마께서 장군을 이 화이일통의 태평천하를 만든 주
석지신이라고 하신 일은 마땅히 책에 적어 남겨야 할 것입니다."
배행검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이일통……중국과 오랑캐들이 하나가 되긴 되었는데, 토번이 침공하고, 돌궐이 반란하
고, 지난 겨울엔 거란까지 소요를 일으켰지. 요동의 고구려도 심상치 않고. 20년 전부터 타
오른 봉화가 지금까지 계속 타오르고 토벌이 그칠 날이 없어."
"대장군께서 건재하신 머지않아 모든 변경이 평정될 것입니다."
"절대 평정되지 않아. 우리는 오랑캐들을 군대로 정복하고 벼슬과 월급과 비단과 식량으
로 회유하네. 그러나 그런 우대는 오히려 오랑캐들의 자존심만 키워주지. 전쟁이 일어나서
군비가 더 늘고 세금이 무거워지고. 백성들은 자꾸 세금 부담이 없는 변방의 미개간지로 이
주하려고 하고. 그래서 또 거기 사는 오랑캐들과의 갈등을 빚지. 그래서 또 전쟁이 일어나는
거야."
"하오면 앞으로는 어찌해야 하는지요?"
"세상에는 하나의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네. 호천상제의 하늘(무후가 제정한 현경례에
서 제사하는 하나의 하늘. 그 이전의 정례는 정현의 북학파 학설에 따라 호천상제와 다른
오제의 여섯 하늘을 제사지냈다. 즉 하늘은 여러 개였다. 그러나 현경례는 왕숙의 남학파 학
설에 따라 하늘은 오직 호천상제의 하늘 하나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을 수용, 중국 황제권의
지고한 지위를 상징하고자 했다)밖에는 토번의 하늘이 있고 돌궐의 하늘이 있고, 또 고구려
의 하늘이 있지."
배행검의 말은 놀랄 만큼 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이었다. 이미 오랑캐들에 대한
지배는 시작되었다. 힘만이 이 지배를 그만두게 할 수 있으리라. 반성은 무의미했다. 정부정
은 그 말을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으나 참았다. 그리고 배행검의 뒤를 좇아 출정준비에
부산한 병영으로 말을 몰아갔다.
오르도스에서 다시 돌궐군과 토벌군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웬푸의 돌궐군은 신속
하게 운중성과 정양성을 점령하고 선우도호부의 중국인들을 모조리 인질로 잡아 기세를 떨
쳤다. 돌궐군의 병력은 한때 10만에 육박했다. 그러나 전쟁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반년이
넘게 계속되자 전황은 차츰 토벌군에게 유리해졌다.
배행검의 용병은 어디까지나 신중하였다.
배행검은 형구에 본영을 설치하고, 지난번 토벌에 동원했던 토번 원정군과 영주군 위에
하북으로부터 항주군과 유주군을 차출했다. 이것만 해도 30만이 넘는 대군. 배행검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고비사막 북쪽으로부터 바즈 칸이 거느린 위구르 기병 4만을 불러들였다.
북쪽에 위구르 군대, 동쪽에 항주군과 유주군, 남쪽에 배행검의 중군. 이렇게 3면으로 협
격당한 돌궐군은 보급로를 차단당하고 궁핍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여름이 지나가자 굶주
림을 참지 못한 돌궐군들이 반란집단으로부터 속속 이탈하기 시작했다. 웬푸와 부얀이 이끄
는 반란군들은 1만여 명으로 쭈그러들어 음산산맥의 흑산(카라 이쉬)으로 들어가 농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해 9월. 고문간은 흑산을 포위한 당나라군의 전초요새인 우고산 진채에 있었다. 고문간
이 지휘하는 고구려 기병 사단은 이 산 능선의 진채에 2개 연대, 산 어귀에 3개 연대가 배
치되어 있었다. 문간은 사단장의 거처인 진채 안의 통나무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멀리서 반란군들이 부르는 '오르도의 노래'가 들려왔다.
늑대처럼 외롭게
새처럼 자유롭게
인생의 근심 잊고
초원의 향기 마시며
북소리, 피리소리
뜨거운 전쟁의 함성 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리라.
늑대처럼 외롭게
새처럼 자유롭게
늘씬한 말을 타고
용감하게 말을 휘두르며
맛좋은 마유주, 따끈한 양고기
위대한 칸의 깃발을 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리라.
늑대처럼 외롭게
새처럼 자유롭게
단단한 대열을 짓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죽음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리라
해 뜨는 카르디한 이쉬에서
해 지는 테미르 카피그까지
이 세상 끝까지 가리라……
창밖을 내다보니 애처로운 조각달이 비구름을 헤치고 열심히 제갈 길을 가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지겹도록 들었지만 최근 돌궐군의 노랫소리는 어딘가 기가 꺾인 느낌이었다. 기
근에다 전염병까지 겹쳐 반란군들의 정황이 참혹하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3년째 계속되는 전쟁은 오르도스를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돌궐군들은 부득이 주민들의 식
량을 징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이 통과한 마을에는 다시 비적들이 들이닥쳐 약탈을 자
행했다. 토벌군 지휘관들은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고 훈방하기도 했다. 전투는 일
진일퇴를 거듭하며 계속되었다. 음산산맥은 총연장 60킬로미터의 광활한 험산준령이었다. 수
적으로 우세한 토벌군도 좀처럼 저의 주력을 찾아 분쇄할 수가 없었다.
아란두가 있는 카라쿰군도 저 포위망 속에 있었다. 그 생각이 자꾸 마음을 괴롭혔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미구에 닥칠 옥쇄로부터 그녀를 구할 수는 있을까? 문간은 요사이
은밀하게 그녀의 소재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문간은 술 두 병을 다 비우자 얼얼하게 취기가 올랐다. 진채를 순시하러 나가볼까 하는데
불침번을 서던 초병들의 중대장이 통나무집의 문을 두드렸다.
"장군님, 산 밑 초소에서 보초들이 이상한 놈을 하나 잡아왔는데요……"
"이상한 놈이라니?"
"고구려 사람인 것 같긴 한데 복색은 돌궐 놈이고, 제말로 옛날에 장군님을 잘 알았다고
합니다요."
"뭐라고? 당장 데려와."
중대장이 데리고 들어온 30대 남자는 소매가 좁은 저고리에 가죽 혁대, 가죽 장화를 신은
영락없는 돌궐인이었다. 그러나 모자를 벗자 금방 고구려인임을 알 수 있었다. 돌궐 남자들
은 변발로 머리를 길게 땋지만 고구려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대충 자른 뒤 사방의 두발을 가
지런하게 위로 올리고 흩어지지 않게 책(머리띠)으로 묶기 때문이다. 남자는 벗은 모자를 가
슴 앞에 쥐고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고성사형제,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얼굴을 쳐다보니 옛날 동방교에서 같이 일하던 고정부. 고문간은 매우 반가웠지만 일단
같이 들어온 중대장과 보초들부터 내보냈다.
"아, 고제사형제, 이게 얼마 만입니까? 돌궐군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포위를 뚫고
오셨습니까?"
"야음을 틈타서 간신히 나왔습니다. 형제님께 전할 말씀이 있는데…… 죄송하지만 먼저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형제께선 아직도 저의 형제이십니까?"
고문간은 당황했다. 동방교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느냐는 물음이었는데 문산은 기도 한
번 드리지 않은 지가 5, 6년이 넘었다. 문간은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형제님, 나는 그 동안 당나라의 군인으로 살았습니다. 신전의 일을 잊었고 율법을 지키지
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형제님을 나의 형제로 믿고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
니다. 나의 진심은 당고르께서 아실 것입니다."
고정부는 문간의 솔직한 대답에 감동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자리에 앉았다. 문간은 어서 전할 말을 듣고 싶어 온몸
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고정부는 자꾸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화제를 빙빙 돌렸다. 좀더 고
문간의 진의를 탐색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돌궐인들 사이에 동방교는 특권적인 위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토착종교보다 더 우대받는
이방종교라고나 할까요. 이번 부흥운동의 지도자들도 모든 사제들에게 군복무의 면제, 포교
의 완전한 보호, 성전 세금의 보호를 약속했습니다. 우리 사제들은 경전을 돌궐문자로 옮기
고 있지요. 물론 이전에도 약간의 번역이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만드는 경전이 원전 그
대로 된 완역본이지요."
"동방교 사제들은 이번 봉기에 몇 명이나 참여했습니까?"
"아란두님이 소문을 듣고 초원으로 찾아온 고구려인들이 500여명 있습니다. 동방교의 신
도들이지요. 그 사람들과 사제들이 모두 부흥군에게 싸우고 있습니다. 돌궐에서 포교의 근거
지가 된 곳이 카라쿰이었고 그 카라쿰 사람들이 부흥군의 주력군이 되고 있으니까요.?"
"걱정이군요. 고전을 하고 있을 텐데."
"그래서인데…… 아란두님이 고성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 하셨습니다."
"아란두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문간은 갑자기 온몸이 확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내일 아란두님을 만나주시겠습니까?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다고 하셨습니 다."
"만나겠습니다! 그런데 이 엄중한 포위망 사이에서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시간은 자정으로 합시다. 만날 장소는……"
고정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8.
다음날 밤 임시(11시). 흑산의 동남방에 포진한 우고산 고구려군 진채에 검은 그림자 하나
가 나타났다. 이를 발견한 초병이 창을 겨누며 버럭 소리질렀다.
"웬놈이냐? 암호는?"
밤의 정적 속에서 그 말의 메아리만이 울렸다. 검은 그림자는 숨을 헐떡거리다가 고구려
말로 물었다.
"헉, 헉, 고, 고문간 장군은 어디 계시냐/"
"암호는?"
"몰라, 임마! 나 걸걸조영이다. 빨리 너희 도위 깨위. 큰일 났다!"
거란군에서 교위로 일하고 있는 고구려인 걸걸조영은 고문간의 부하들도 얼굴을 알고 있
었다. 그가 가져온 소식은 화살처럼 사령부로 전해졌다. 중앙의 군막에서 흩옷 하나마나 걸
친 청년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이제는 도위(연대장)로 승진한 고공의였다.
"걸걸교위, 대체 이 밤중에 무슨 일이오?"
"고장군 어디 있소?"
"장군님은…… 본영에 볼일이 있어서 가셨소. 지금 안 계시……"
"거짓말하지 마시오. 다 알고 왔소. 고장군 지금 아란두님을 만나러 나갔지요? 그것 함정
이오."
"함정?"
"고정부는 배신자요. 나흘 전에 산을 몰래 내려와 우리 거란군에 귀순했답니다. 그놈은 아
란두님과 고장군을 같이 엮어서 거란군에 넘기려 하고 있소."
항상 침착하고 의젓한 고공의도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고공의는 걸걸조영을 기
다리게 한 뒤 부리나케 옆의 연대로 달려가 검진천을 데리고 나타났다. 검진천 역시 연대장
으로 승진해 있었다. 검진천은 다급한 얼굴로 좌우를 살피더니 걸걸조영에게 속삭였다.
"아니, 함정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확실하오? 고정부는 우리 고장군을 어디로 데
리고 간 거요?"
"잘은 모르지만 고정부가 동방교를 배신한 것은 확실하오. 고정부가 고장군을 여기서 멀
리 떨어진 돌궐군의 전선 근처까지 유인하면 거란군들이 고장군을 죽이기로 되어 있소. 본
영에는 고문간 장군이 적과 내통하려 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할 거요. 고장군은 한밤중에 자
기 진채를 이탈한만큼 변명의 여지가 없을 거요."
"망할 놈들!"
고공의가 띠도 묶지 못해 산발에 가까운 머리칼을 떨며 부르짖었다. 그는 검진천을 돌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검도위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본영에 전령을 보냅시다. 거란 놈들을 말려달라고
합시다."
"소용없을 거요."
걸걸조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용없다니?"
"이만한 거사를 거란 놈들 단독으로 할 수 있겠소? 본영에도 무슨 연락을 하는 눈치던데.
그리고 시간이 없어. 거란 놈들은 두 패로 나뉘어 하나는 고장군을 죽이고 다른 하나는 이
진지를 직접 습격할 거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적진을 코앞에 두고 같은 편의 진지를 습격하다니?"
"이 진지는 적과 내통하고 있으니까…… 핑계는 충분하지. 거란놈들은 마침 잘 걸렸다고
설치고 있소. 야습으로 여기를 짓밟고 고구려군의 전리품을 약탈할 생각이오. 거란 놈들, 지
난번 논공행상후로 계속 당신들에게 이를 갈아왔지 않소."
들을수록 기가 막힌 소리였다.
이충명의 거란 기병대는 고구려 기병대와 똑같은 영주군 소속이었다. 그런 거란군이 고구
려군에게 양심을 품게 된 것은 작년의 일 때문이었다.
웬푸의 1차 반란을 진압된 뒤 고구려군은 과분할 정도로 큰 포상을 받았다. 장병 모두가,
극히 지위가 낮은 병졸까지 훈급을 받았다. 훈급이 아무리 이름뿐이라지만 모든 사병에게
수여된 것은 10년에 한번 있을까말까 한 영예였다. 뿐만 아니라 양 1만 두, 말 800필의 은상
이 고구려군에 내려졌다.
그런데 거란군은 양 500두뿐 말은 한 필도 받지 못했다. 거란군은 억울했다. 거듭 은상이
불공평하다고 탄원했으나 고구려 기병대가 적 본진의 배후로 우회하여 싸움에 크게 기여한
반면 거란 기병대는 아무런 전공이 없었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원한의 화살이 고구려 쪽
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구려 놈들이 야실 쿠유의 싸움에서 전과를 가로챘다는 말이 거
란군 사이에 쫘악 돌았다. 귀검사를 할 때 거란군이 죽인 적군의 귀를 베어갔다는 것이다.
사실이고 아니고가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논공행상 뒤 거란군과 고구려군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거란
인들은 무슨 꼬투리만 생기면 트집을 잡으려 들었고 자존심 강한 고구려인들은 잠자코 참아
주지 않았다. 자연 패싸움이 끊이지 않아서 쌍방의 사상자만도 10여 인이었다. 문책을 당할
까 봐 서로 쉬쉬 감추면서 감정의 골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러던 끝에 결국 오늘의 사태가
닥친 것이다.
고공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래도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형구의 대총관께 전령을 보내 직접 호소하겠소."
"그건 알아서 하시오. 아무튼 더럽게 걸렸군. 돌궐군과 고구려군의 내통이라니. 변방 여러
민족 가운데 제일 큰 족속들 둘이 내통한다면 모두 경악하겠지. 일단 죽여버리고 나중에 보
고해도 괜찮을 거야."
"상황이 그렇다고 해도 거란군이 과연 배짱이 있을까?"
역시 연장자인 검진천이 가장 침착했다. 그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리자 걸걸조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조영은 옛날부터 검진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늙어빠진 무말랭이 같으니! 이
마당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수염을 몽땅 뽑아버릴까 보다…… 그러나 검진천의 말은
거란군의 입장을 냉정하게 저울질한 것이었다. 거란군이 고문간을 내통자로 몰아서 죽이면
고구려군은 눈이 뒤집힐 것이다. 적진 앞에서 아군끼리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거란군도
그걸 예상하고 있을 것이니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거란군도 그걸 예상하고 있을 것이니
타협의 여지가 있으리라. 일단 임전태세를 갖추고…… 검진천은 눈빛을 번득이며 소리쳤다.
"비상을 걸게. 봉화를 피워 다른 여대들도 부르고, 이 진채에는 모닥불을 대낮같이 밝히
게. 거란 놈들이 몰려오는 고공의 자네가 나서서 담판을 짓게. 우리 부대에 있는 양이나 말
을 나눠줄 테니 서로 피 터지게 싸우지는 말자고 해보게. 이쪽의 대비가 단단하면 놈들도
정말 공격하기는 싫을 거야. 절대 송새별이나 을지조서 같은 친구들을 내보내지 말게. 그 사
람들은 되레 싸움을 붙여버릴 테니."
"검도위님은 어쩔 겁니까?"
"나는 100명의 결사대를 데리고 고장군을 구하러 가겠네."
고문간은 고정부를 따라 우고산을 방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를 내려갔다. 직접 말을
끌고 갔다. 아군의 경계망을 피해 완만한 평야를 통과하여 흑산으로 이어지는 긴 산허리로
접어들자 천천히 비안개가 밀려왔다. 나뭇잎에 걸렸던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져 내렸다. 별
하나 없는 하늘과 안개 속에 얼어붙은 것 같은 나무들 사이를 통과하여 두 사람은 계속 걸
었다.
"고문간 형제, 나는 알고 있었어요."
문득 고정부가 말을 꺼냈다. 고정부는 무척 창백했고 얼굴 주위에는 미열이 있는 것처럼
땀으로 번들거렸다.
"뭘 말이오?"
"형제가 아란두님과 한때 깊은 사이였다는 것을 말이오."
문간은 걸음을 멈추었다. 고정부가 뭔가 비참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문간
은 그의 찡그린 얼굴에서 공포나 불안보다 훨씬 나쁘고 깊은 무엇을 느끼고 놀랐다. 고정부
는 말을 이었다.
"안시성이 함락되고 영주로 탈출해올 때 아란두님은 오이 사제와 결혼해버린 거요. 당신
을 차버리고 말이오. 오쟁이진 남자의 그 사악하고도 지탱할 수 없는 질투와 갈망 속에 당
신을 버려두고 말이오. 그녀는 당신을 배신했소."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문간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뭐가 전혀 그렇지 않은지 문간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무의식적인 마음의 흔들림이 그런 대답을 이끌어냈을 뿐이었다. 문간은 더듬거리며 말
했다.
"그녀에게…… 아란두님의 내부에는 나와는 다른 것이 있어요. 아주 단단한 무엇인가가
있어요. 그건 아주 강력하고 나와는 잘 섞일 수 없는 것이지요. 나는 우유부단하고 나약하며
줏대가 없는 남자요. 그래서 아란두님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던 거요. 결과적으로 그녀가 옳
았소."
그런 말을 하자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묘한 상실감이 문간을 다시 옥죄어들었다. 밤의 어
둠이 사방에서 문간의 내부로 섞어들며 검은 구름과도 같은 하나의 형태를 갖추었다. 문간
은 억지로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옛날에 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온 세상이라도 갖다 바쳤을 거요. 하지만 나
는 알고 있었어요.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
오. 그녀는 나에게 환멸을 느꼈을 거요. 서로 마음의 상처를 받아 영영 보지 못할 사람이 되
느니 차라리 이게 좋지 않소. 이렇게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말이오."
"형제는 거짓말을 하고 있소. 내가 아란두님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형제는 마음의 평정을
잃었지요. 형제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그녀에 대한 사랑이 머물고 있소."
문간은 그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에 짜증이 났다. 문간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둡시다. 약속한 장소는 아직 멀었소?"
"바로 저 숲이오."
두 사람은 울창한 숲 속으로 접어들었다. 숲 한가운데 공터의 그루터기에 앉아 아란두를
기다렸다. 시간은 자정을 지나 계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르도스 초원 지역의 밤하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한다. 어느새 비안개가 걷히고 보름을 갓 지난 달이 부드러운 빛을 떨
구었다. 나뭇잎 풀잎 위로 소금을 뿌린 듯 반짝이는 달빛의 편린은 만월의 어머니 아란두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거기 오신 분이 고문간 형제십니까?"
문간이 대답하자 오른편의 수풀이 움직였다. 기마복을 입고 묵직한 활을 맨 두 명의 돌궐
전사가 나타났다. 한 사람은 아란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훤한 얼굴에 뽀송뽀송한 얼굴을 한
열아홉 살쯤의 청년이었다. 고정부는 주위를 경계하겠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청년
도 멀찌감치 떨어져 섰고 문간은 조용히 그녀 앞에 마주섰다.
아란두의 도저한 아름다움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스물아홉 살이었지만 그녀의 몸
은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와 몸에 착 달라붙는 기마복 때문인지 젊을 때보다 더 유연하고 가
벼워보였다. 그녀의 그윽한 눈과 입술의 선과 빛나는 볼에는 아직도 열정적인 무엇인가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문간은 시간의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흥분을 느꼈다. 마치 그녀와 함께 산길을 도망
치던 그 언젠가의 달밤 같았다. 문간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없었던 몇 년 동안의 욕망과 사
건과 사물들을 꿈결처럼 덧없이 스러졌다…… 나는 아란두의 이 타오르는 듯한 시선 속에
있던 그때에만 진정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떠난 뒤에는 그날 그날 맥없이 꿈을
꾸듯 살아왔으며 나의 인생은 하찮고도 따분하게 낭비되었다.
"뵙고 싶었습니다."
"네 저도. 아주 좋아보이는군요. 군대에서 성공하셨다고 들었어요. 결혼은 했는가요?"
"아니오. 아직."
문간은 아란두를 따라갔던 사제들의 근황을 물었다. 셋은 죽고 셋은 떠났으며 나머지 둘
은 아직 같이 있다고 아란두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숨기 수 없는 쓸쓸함이 배어나고 있었
다. 아란두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제님,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돌궐군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돌궐
군에 있는 우리의 신도들, 고구려인들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지역을 빠져나가고 싶지
만 그래도 식량이 필요합니다."
문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란두님, 나는 토벌군의 장군입니다. 저더러 반란군의 군량을 대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지만 형제님은 고구려인이고 동방교의 성사이기도 하지요."
"옛날 얘깁니다. 저는 신앙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닙니다. 저는 동방의 신앙을 소생시킬 임무가 있어요. 그것이 제 삶의 유
일한 목적이지요. 조상이 물려준 신들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 말이예요. 돌궐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은 저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도와주세요. 우리가 죽는다면 동방교는 사라질것입니다."
"영주와 요동에 다른 사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소식을 못 들으셨나요? 제가 축출하고 얼마 안되어 많은 박수파 사제들이 반란을 음모한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미추홀파의 무고 때문이었지요. 나머지는 신전을 떠났습니
다. 또 1년 전에는 우봉산에 있던 소수니파 마을이 거란족의 습격으로 초토가 되었지요. 살
아남은 소수니파는 한 명도 없어요."
문간은 충격을 받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란두는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고 말
을 이었다.
"지난해에도 100여 명의 사제와 신도들이 나를 찾아오다가 전쟁에 휩쓸려 모두 죽었습니
다. 형제님, 이제 당나라땅의 동방교 신전에는 소수의 가짜 제사장들과 불경건한 무리들이
남아 있을 뿐이에요. 초원으로 탈출한 우리가 유일하게 남은 순수한 동방교인들입니다."
문간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란두님, 저도 동방교를 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모한 방식으로는 안됩니다.
반란군으로부터 나오십시오. 제가 한적한 곳에 정착하실 때까지 돌봐드리겠습니다."
"이미 진정한 신앙을 구하기 위해 너무 많은 눈물과 피가 흘렀습니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형제님, 동방의 신들이 영광스럽던 시대에 천하는 평화롭고 아름답고 부유하
고 행복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을 섬겼고 인생을 즐겼으며 현자들은 인생의 의미를 가
르쳤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지배하는 지금 이 세상을 보세요. 이 세상을 보라구요. 끝도
없는 전쟁 속에 너무도 비참해지고 착취당하고 폐허가 된 이 세상을 말입니다. 세상은 하루
하루 죽음으로 배를 채우고 있지요."
"고구려라는 나라는 살찐 까마귀 울부짖고 도깨비불 번쩍이는 전쟁터에서 일어났습니다.
고구려도 요동, 현도, 낙랑, 옥저, 동예, 양맥, 숙신…… 물가의 자갈처럼 많은 나라들을 정복
했어요. 건국부터 멸망까지 고구려의 역사는 항상 전쟁이었지요."
"그 대부분은 신앙과 정의를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고구려는 망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법
을 따르셔야 합니다. 아란두님이 반란군에 있는 한 식량은 드릴 수 없습니다. 제 부하들도
다 고구려 동포들입니다. 어떻게 제가 반란군이 먹고 힘을 내서 제 부하들을 죽이라고 식량
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형제님, 식량을 이곳이 아닌 초가이쿠지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형제님을
믿고 초가이쿠지로 탈출하겠습니다. 그런뒤에 다시 산 능성을 따라 카라쿰으로 들어갈 생각
입니다. 형제님의 군대와 싸우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우리라뇨? 우리가 누굽니까?"
아란두는 소개할 사람이 있다며 같이 온 돌궐 청년을 손짓했다. 청년이 다가왔다. 키가 크
고 변발로 땋은 풍성한 흑발에 얼굴이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아란두는 그의 손을 잡고 자신
의 곁으로 끌었다. 아란두의 모습은 마치 청년의 다정한 누님처럼 보였는데 문간은 날카로
운 칼이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을 느꼈다.
"아시나 쿠이예요. 쿠틀룩의 동생 쿠이. 형님과 함께 카라쿰의 아시나 씨족을 이끄는 대장
이지요. 이 사람이 우리 동방교를 보호하고 있지요. 카라쿰에 있는 이 사람의 일족들은 모두
우리 신도들입니다. 카라쿰은 동방교의 마지막 보루예요."
청년은 나이가 어렸지만 당당하고 강인해 보였다. 그는 문간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신중
한 목소리로 존경과 우정을 표했다. 문간은이 청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투둔초르였던 형
과 더불어 당으로부터 북초르(투둔초르보다 더 작은 지방의 장관)의 관직을 받은 사람으로
형 못지않게 영용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문간은 침울한 시선을 옆으로 던졌다. 청년을 곁
눈질하는 아란두의 얼굴에서 매혹된 자의 가벼운 흥분이 느껴졌다.
문간은 아란두의 잔인함에 새삼 치를 떨었다. 그리고 아까 고정부의 이상한 언동과 그의
눈에 가득 담겨 있던 고통의 빛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정부도 아란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여자인가. 문간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
움, 그녀의 순진한 겉모습, 작은 은방울처럼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문간은 미워할 수 없었
다. 이윽고 문간은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당장 식량이 필요해요."
"내일 밤 흑산을 탈출하십시오. 모래 아침까지 초가이쿠지에 양 1천 두를 보내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때였다. 청년이 갑자기 놀라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고문간의 눈빛도 번득였다. 문간은
전장에서 단련된 감각으로 땅에 엎드려 바닥에 귀를 대었다. 그것은 꽤 큰 거리를 두고 숲
을 향해 달려오는 말발굽소리였다.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말발굽은 사방에서 지축을 울리
며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숲은 포위된 것이다!
"이리로! 빨리!"
고문간은 말을 버렸다. 그리고 말발굽소리가 가장 멀리 들리는 북쪽을 향해 치달렸다. 아
란두와 쿠이도 뒤따랐다. 숲을 빠져나오자 밤의 어둠 위에 둥둥떠다니고 있는 횃불의 바다
였다. 쿠이는 어둠 속을 향해 작고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숲 입구에 풀어놓았던 말들이
달려왔다.
두 사람이 말에 올라타자 횃불들이 우왕좌왕 갈라지더니 한쪽에서 격렬한 돌궐말들이 들
려왔다.
"테프 탱그리(대제사장님)! 테프 탱그리! 쿠이! 쿠이!"
아란두와 쿠이를 경호하려 온 돌궐인들이었다. 두 사람은 그쪽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문간은 뒤쳐졌다. 몇 걸음 달려가다가 포기하고 숲의 어두운 더불 밑으로 돌아가 엎드렸다.
횃불들이 가까이 다가왔고 적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작은 키에 동그랗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꾀죄죄한 얼굴, 관자놀이 좌우에 서 두 가닥으로 땋은 변발…… 몽고계와 퉁구스
계 혼혈의 너절한 쌍통. 거기다 다 떨어진 삼베 바지에 맨발, 안장도 등자도 없는 말을 타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창을 들고 있었다.
키타이(거란) 새끼들……
고문간은 이를 갈았다. 시라무렌강 유역에 처박혀서 초라한 유목과 조야한 농경으로 먹고
살던 거란인들. 남자들은 벌거벗고 멧돼지 잡는다고 뛰어다녔고 여자들은 칡뿌리를 캔다고
산을 헤발아다녔던, 한마디로 개처럼 살아가던 야만족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벗긴 머리가죽
으로 말갈기를 치장하는 모습은 애교에 가까웠다. 적의 잘린 목에서 가죽을 벗겨낸 뒤 그
두개골에 손잡이를 박아 술잔을 만들어 마시기 일쑤였다.
이런 거란인들이 팔자 고치게 된 것은 순전히 고구려 때문이었다.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
해 당태종이 이들의 추장을 송막도독으로 임명하고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기 때문
이다. 당과 고구려의 전쟁이 격화되자 거란족은 좋아서 통곡하고 싶은 일들이 점점 더 많아
졌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들은 아주 한 꺼풀을 벗었다. 송막도독부에서 수많은 민족들을
호령하며 요동과 요서의 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저 새끼들 소소한 고막해족 앞에서도 벌벌 기었어. 근데 이
젠 당나라 위세를 등에 엎고 다 제껴버리겠다고 설레발을 치는 거야. 우리 심정이 좇 같지
않겠냐?"
영주에 살면서 고문간이 늘 듣던 말이었다.
거란군은 구석구석 횃불을 들이대면서 숲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문간은 그 한 시
간 동안 1년은 산 기분이었다. 횃불은 점점더 가까워졌다. 문간은 이를 악물고 칼자루를 잡
았다. 들키면 뛰어나가 몇 놈이라도 작살내고죽을 각오였다. 그런데 그때 숲의 한 쪽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장군니임!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왔습니다. 장군니임!"
이젠 고구려말이었다. 검진천의 결사대가 고문간을 구하러 달려온 것이다. 그 소리가 가까
워졌을 때 문간은 덤불을 헤집고 달려나갔다.
"여기다! 나, 여기 있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거란군 하나를 용케 베어넘기고 문간은 제일 앞에 말을 달려오는
결사대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근육질의 땅딸막한 부하 하나가 문간의 팔을 붙들어 끌어올려
주었다. 순간 옆에서 한 사람이 날카로운 피리소리를 연달아 불어댔다. 철수하라는 신호였
다. 거란군과 싸우고 있던 결사대는 일제히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넌 누구냐?"
문간은 같이 말을 탄 부하의 실팍한 허리춤을 붙잡고 헐떡거리며 물었다.
"예, 화장(분대장) 천소부임다."
"소부, 너는 오늘부터 대지(소대장)다!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
"예엣, 꼭 붙드십쇼."
그러나 결사대가 거란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우고산이 보이는 들판에 이르렀을 때였다. 텅
빈 들판의 대기를 가르며 불길한 진동이 일어났다.
막 동이 터오는 시간이었다. 햇무리가 어둑어둑한 대지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고문간은
긴장한 표정으로 들판 저편에 움직이는 거뭇한 반점들을 바라보았다. 우고산 진채가 있는
곳이었다. 밤의 어둠이 녹아내리는 그곳에서 한 무리가 이쪽으로 똑바로 말을 달려오고 있
었다.
"거란 기병들입니다. 1천 명도 넘는 것 같습니다."
천소부가 말했다.
사방이 툭 터진 망망한 초원이었다. 잡목 몇 그루만 서 있는 이 헐벗은 평원은 어디로 피
할 곳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수많은 기병들의 창끝이 새벽의 여명에 벌판에 은가루
를 뿌린 듯이 반짝거리며 나타났다. 두 무리의 기병대는 서로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벌써 우리 진채에 들이닥쳤다가 돌아가는 것 같은데요."
고문간의 말 옆으로 다가온 검진천의 중얼거림이었다. 기병대의 대열 한가운데 굼실굼실
한 양털의 무리가 일렁이고 있었다. 바로 아군의 진지에 사육되고 있던 양 4천 두였다. 검진
천이 귀띔한 대로 고공의가 말썽부리지 않도록 못 이기는 척 거란인들에게 선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밉살스런 눈으로 거란인들의 대열을 쏘아보았다.
그때 거란의 기병들이 이 100여 명의 고구려군을 목격했다.
이곳 저곳에서 말들이 울어대며 앞발로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하나 둘 대열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100여명의 패거리들이 대열로부터 떨어져 나와 화살을
쏘며 이쪽으로 내달여왔다. 거란족들은 이 부대를 목격자라고 생각하고 덮어놓고 죽이려 들
었다. 군령을 어기고 아군 진채에서 양을 빼앗아가는 저희들의 조를 덮어버리려는 것이었다.
고문간의 얼굴에 고뇌와 흥분이 명멸했다. 열 배도 넘는 숫자였다.
"할 수 없군. 도망가세!"
문간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결사대는 재빨리 말을 돌려 오른쪽으로 달아나기 시작
했다. 추격자들은 기사에 능한 것 같았다. 화살 한 대가 맹렬한 소리로 공기를 가르며 문간
의 귀밑을 스치고 날아갔다. 간담이 서늘해진 문간은 자기방어를 위해 화살을 매겼다. 그리
고는 별로 조준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자마자 쏘았다.
소 뒷걸음치다 쥐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평소 활쏘기에는 영 신통치 못하던 고문간의 화
살이 이 날은 어쩐 일인지 선두에 달려오던 백마 탄 사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담황색의 두
툼한 호복위에 황금빛 금속 허리띠를 두른 사내였다. 사내는 즉사하여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말을 달려오던 다른 사내들이 일제히 고삐를 당겨 추격을 멈추었다. 고문간이 어찌
알았으랴. 이 한 개의 화살로 일을 더욱 그르칠 줄을.
9.
고문간 일행은 추격대를 멀리 떨구고 벌판을 우회하여 아침나절에 우고산 진지로 돌아왔
다. 진지는 아무런 피해 없이 말짱했다. 고공의로부터 양 4천 두를 주고 거란족을 무마했다
는 얘기를 듣자 고문간은 크게 칭찬했다.
"잘했네. 잘했어. 거란족 따위와 다투어서 뭘 하겠나. 자은 것을 희생해 큰 화를 피한 거
지."
그리고 고문간은 곧바로 자신의 부대를 따라 다니는 소그드 상인 카멜을 불렀다. 카멜은
전쟁터를 종군하며 노예를 사고 생필품을 파는, 이 시대에는 아주 흔한 노예상인이었다. 머
리가 벗겨진 깡마른 얼굴에는 온갖 전장에서 이편 저편을 넘나들며 돈벌이를 해온 장사꾼의
만만치 않은 관록이 배어 있었다.
"우리 부대에 있는 양 1천 두를 내줄 테니 내일 아침까지 초가이쿠지로 몰고 가주게. 그
리고 거기 가서는 돌궐군을 만나 양을 다 빼앗기는 거야. 내가 시켰다는 것은 비밀일세. 얼
마면 되겠나?"
카멜은 금방 말귀를 알아들었다. 그는 한마디도 더 묻지 않았다.
"2천 문만 내십시오."
문간은 그 자리에서 1천 문을 선불했다. 카멜이 나가자 문간은 자신의 침상에 곯아떨어졌
다. 그리고 오후까지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해가 기울 무렵 문간은 참모들의 다그
침에 억지로 일어났다.
"거란 을실부의 젊은 추장 이송욱이 죽었답니다."
"으응, 이송욱이…… 그 검교 벼슬 하는 핏덩어리? 응, 알지. 그런데 왜?"
"오늘 아침 장군님의 화살에 죽은 겁니다."
고문간은 악몽을 꾸고 있나 싶어 자신의 볼을 쥐어뜯었다.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 안색
이 변했다.
이송욱은 당으로부터 이민호란 이름을 하사받은 거란의 족장 야우리엔 바가투르의 아들이
었다. 이 시기 거란 24개 부족은 야우리엔 씨족 8부, 다샤 씨족 8부, 고오 씨족 8부로 삼분
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가장 강성한 것이 야우리엔 씨족이었다. 100년 뒤 요나라를 건국
하는 야율아보기의 야율 씨족이 바로 이 야우리엔 씨족이었다.
저녁이 되자 고문간 휘하의 5개 고구려인 연대로부터 많은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송막도
독부에서 편성된 거란군 안에는 시라무렌강 유역에 사는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도 있었
다. 이 부대의 검교로 일하는 걸걸중상 노인이 특별히 와주었다. 문간은 매우 반가워했다.
손을 끄다시피 상석에 모시고 술과 안주를 권한 뒤 거란족 진영의 분위기를 물었다.
"발칵 뒤집혔네. 모두가 격앙해서 난리지 뭐. 고장군을 죽이자 살리자 입씨름들이야. 그러
나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야. 이 일은 먼저 저희들이 잘못한 데다 이송옥의 아
비 이민호가 여기 없거든."
문간의 부하들은 나직한 한숨을 흘리며 말이 없었다. 묵묵히 짧은 칼을 들고 돌궐식으로
나무접시에 담기 삶은 양고기를 베어 먹거나 도수가 낮은 마유주를 들이켤 뿐이었다.
시라무렌강 북쪽의 송막도독부는 영주도독부를 아우르며 영주, 평주 일대를 호령하고 있
었다. 모두 영주에 집이 있는 문간의 부하들은 귀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새벽
고문간의 화살에 죽은 이송욱의 아버지 이민호는 송막도독부의 장사이자 야우리엔 씨족의
대족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너무 비비 꼬여들어서 공식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고구려군의 장군이
돌궐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거란 기병이 출동했다. 현장에 갔지만 양 4천 마리
의 선물도 받고 해서 그 제보는 가짜였던 것으로 합의했다. 신이 나서 돌아오는데 문제의
그 고구려 장군과 마주쳤다. 장군의 화살에 거란족의 젊은 추장이 죽고 말았다.
이런 공교롭고도 우스꽝스런 일이 하필 고문간에게 일어난 것이다. 문간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그의 잘못이라곤 거란군이 돌아가는 길에서 얼쩡거렸던 것뿐이다. 병신 같은 자
식이 괜히 쫓아와 화살을 쏘아대다가 얼결에 맞아죽은 것이 아닌가.
문간은 군막에 모인 지휘관들에게 술잔을 돌리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그
러자 넓은 이마에 눈썹이 시원스러운 연대장이 일어났다. 지난번 전투까지 군마 양육 담당
관으로 있다가 이번에 새로 절충도위가 된 송새별이었다.
"저는 이 문제를 더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도대체 거란 놈들이 아우성친다고
양을 4천 마리씩이나 내준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거란 놈들 따위가 뭐라고 우리가 우리의
은상을 나눠줘야 합니까? 장군님, 무책임하게 일을 처리한 고공의 도위를 군법으로 처벌하
십시오, 거란 놈들 또 무슨 시비를 걸어오면 강경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그 진
지로 쳐들어가 박살을 내야 합니다."
검진천이 냉혹하게 고개를 저었다.
"송도위 이 사람아, 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적과 대치하고 있는 전선에서 아군의 진지
를 공격해? 군법으로 처단되고 싶은가."
"대총관부가 우리를 군법으로 처단해요? 어림도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반란이지
요. 각자 연대를 이끌고 탈출하여 저 흑산의 돌궐 부흥군과 합류하는 겁니다."
너무도 대담한 말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고문간은 가슴이 뜨끔했다. 새별이
어디서 자신과 아란두가 만난 일을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흥
분할 리가 없었다.
송새별은 왕년에 카수미파의 한 사람으로 걸걸중상의 수박도 제자였다. 그는 안시성이 함
락될 무렵에는 요동성에 파견되어 있었고 명당공회가 열렸을 때는 멀리 하남에 내려가 있어
아란두를 따르지 못했지만 매우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었다. 산적이 되어서라도 부흥운동
을 계속하겠다는 그를 억지로 군대에 끌어들여 토번 원정에 데리고 간 것은 다름아닌 고문
간 자신이었다. 송새별은 혀로 입술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주몽왕께서 졸본부여의 게딱지만한 땅에서 궐기하셨을 때 따르는 무리는 불과 수백여 인
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병력의 십분지 일도 안되는 소수였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한 나라를
세우고 불퇴전의 의지로 지켰습니다. 약한 나라는 겸병하고 강한 나라는 교란하여 나라를
넓혔습니다. 하여 그 강역은 단번에 1천여 리에 이르렀고 그 왕명은 자자손손 서른 임금에,
700녀 년을 전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위로 여러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고 아래로는 권토중
래의 뜻을 가진 4천500여 명의 고구려 병사들이 있습니다. 초원으로 나가 한 나라를 세워도
아쉬울 것이 없는 터에 어찌 키타이(거란)따위에게 능멸당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송새별의 말은 점점더 위험 수위에 접근하고 있었다. 문간은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송도위는 말을 삼가라. 그리고 고도위가 양을 내준 것은 내가 시킨 일이야. 지난해부터
불화하는 거란인들을 무마해볼까 하여 시킨 일이야. 더 거론하지 말게."
문간은 천천히 일어서서 자신의 부하들과 걸걸중상 부자들을 일별했다.
"우리 고구려 기병대는 5년 전 영주에서 출병하여 거칠고 험한 전쟁터를 전전해왔소. 그
리하여 병력은 대여섯 배로 늘었고 우리만의 진채를 갖게 되었소. 나, 고문간은 정말 이 성
공이 자랑스럽소. 그대들 중에는 과거 동방교인이었던 사람도 있고, 지금도 동방교인인 사람
도 있고, 또 그것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도 있소. 그러나 우리가 여기 같은 군복을 입고
한 진채에 머무는 이상 우리는 똑같은 고구려 기병일 뿐이오."
송새별 얼굴이 일그러졌다. 걸걸중상은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고 걸걸조영은 재
미있다는 듯이 생글거리며 문간의 말을 경청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흩어져 고구려 백성들을 어떤 땅에 다시 모으고, 망해버린 조국
을 다시 세워, 하늘의 신성한 혈통과 조상의 거룩한 조법을 회복하고 싶어할 것이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과 인간의 세 가지 힘이 있어야 하외다. 하늘을 다스리는 아버지
해모수님의 이법, 땅을 생육하는 어머니 아란두님의 가호, 그리고 두 분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국조 주몽왕과 같은 권세이외다. 우리 고구려 사람들이 낯선 땅에서 남의 수자리 지키
는 병졸이 되어 겨울이면 휘몰아치는 눈 속에 얼어자고, 여름이면 군율 때문에 이와 벼룩이
들끓는 군복도 못 벗고 쪄자며 고생한 것이 벌써 10여 년. 많은 것이 갖춰졌으나 아직 빛과
수확의 때에는 이르지 않았소. 아버지 해모수님의 천시가 오지 않은 것이오. 아직까지 당은
무서운 병승의 힘을 갖추었소. 지금 저 돌궐 부흥군이 겪고 있는 참호간 시련을 우리는 타
산지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오."
문간은 말을 멈추고 좌중을 쏘아보았다.
"거란 사람들과의 화해는 결자해지, 나 자신이 책임지고 처리할 것이오. 시비도 내분도 있
을 수 없소. 각 도위들은 거란군을 자극하는 행위를 일절 삼가도록 각별히 부하들을 단속하
시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엄하게 문책하겠소."
문간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검진천이 일어나 앞으로 열흘 안에 전황의 변화가 없으면 대
총관이 파직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소문을 전해주었다. 봉쇄작전을 고집하는 배행검은 요즘
즉각적인 결전을 주장하는 총관 정무정, 왕본립과의 불화로 심각한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
이다. 그것 또한 좋은 소식이 못되었다.
"배행검의 처지가 그렇게 고약한가?"
"배행검은 태자당과 무후당의 암투에 더럽게 걸렸어. 배행검 위하의 장군 중에 왜 왕방익
이란 자가 있지 않아. 알고 보니 그 자가 무후에게 맞아 죽은 왕황후의 친척 오래비래요. 누
가 그걸 또 무후에게 찔렀다느만."
그런 숙덕거림 속에 밤이 깊었고 회의는 파하여 흩어졌다.
회의가 있은 다음날은 을씨년스럽게 흐린 날이었다.
바람은 점점 세게 불고 하늘엔 먹구름이 몰려와 초원을 어둡게 뒤덮었다. 오전 내내 흑산
의 돌궐군 진지 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떠들썩함이 바람소리에 실려왔다. 뭔가 심상찮은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후에는 멀리 흑산의 산 정상으로부터 천둥 번개가 치
면서 억센 빗발이 듣기 시작했다. 고문간은 고공의를 대장으로 하는 척후대를 적 쪽으로 보
냈다. 빗소리에 파묻혀버린 소란의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다.
비바람과 함께 천둥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불의 혓바닥 같은 번개가 고구려 단결병들의
진지 근처에 떨어졌다. 저녁에는 개울 바로 옆에 있는 나무가 번개를 맞고 쓰러져 개울에
거대한 증기가 피어올랐다. 고문간은 뒷짐을 지고 비에 흠뻑 젖은 채 우울한 생각에 잠겨
증기가 이는 개울가를 걸어다녔다.
천시를 기다린다? 고문간은 스스로의 말을 생각하고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내가 기다려야 할 천시란 무엇인가. 돌궐의 반란, 키타이와의갈등, 배행검의 음모, 태자당과
무후당의 암투, 점점 멀어지는 영주…… 운명은 늘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폭풍처럼 다
가왔었다. 또 운명의 작은 돌멩이들이 하나 하나 구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산사태를
촉발하는 그 작은 돌멩이들이 하나 하나 구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산사태를 촉발하
는 그 작은 돌멩이들을 따라 나는 흔들리다가 조만간 또 어딘가로 굴러가리라.
문간은 항복하는 반란군들 사이에서 아란두를 구출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아란두와
결혼하여 이곳에 계속 주둔한다면 아란두의 사제와 신도들을 불안에서 해방시킬 수 있으리
라. 그 결혼은 내 인생 최대의 축제가 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안전을 약속할 수 있다. 그
녀는 얌전히 진압당한 돌궐족과 고구려인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포교를 할 수 있으리
라. 제발 그 고집만 꺾어준다면……
서른두 살. 남을 다스리는 일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나이였다. 그러나 문간은 아직까지 자
기 스스로를 다스리지는 못했다. 아란두만 결부되면 문간은 존재의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지금도 아란두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저 반란군들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왈
칵 가슴에 열이 오르고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눈앞에 적의 포로라도 있다면 갈기갈
기 찢어발겨 죽일지도 몰랐다. 마치 10대의 소년과도 같은 질투와 초조함이 고문간을 지글
지글 볶아대고 있는 것이다.
척후로 나갔던 고공의가 돌아온 것은 먹구름 속에 밤이 섞여드는 무렵이었다. 척후대는
혼자 돌아오지 않았다. 고공의는 온통 흥분에 휩싸인 얼굴로 고문간에게 달려와 고함을 질
렀다.
"장군님, 적의 총대장 아시테 웬푸와 아시나 부얀을 데려왔습니다!"
"뭐라고?"
고문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뚝뚝 끼익 끼익.
세찬 비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음산한 비명을 지르며 흔들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빗줄기말
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흥분한 고문간은 물거품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개울을 가로질
러 단번에 진지의 입구로 달려갔다. 군막들을 친 넓은 진지 사면에는 돌궐 기병의 기마돌격
을 막을 울타리가 있었다. 통나무 방책 뒤에 진흙을 이겨 쌓아 만든 두께 두 자, 높이 여섯
자의 울타리에는 사방 네 개의 영문이 있었다. 그 동쪽 영문에 300여 명 가량의 돌궐군이
서 있었다. 그 무리들의 한가운데에는 피투성이가 다 된 스무 명 남짓한 돌궐족이 꿇어앉아
있었다. 선 자나 앉은 자나 한결같이 여위고 병든 몰골이었다.
고문간이 다가가자 무리로부터 보석으로 장식한 군청색 관을 쓴 30대의 사내가 걸어왔다.
날카로운 콧날에 인중이 긴 얼굴을 가진 위엄이 넘치는 사내였다. 사내는 칼집째로 뽑더니
질퍽거리는 땅위에 던졌다. 야크와 표범과 매 등 복아시아 스텝민족 특유의 토테미즘 문양
을 새긴 화려한 은제칼집이었다. 이어서 무리로부터 두 사람이 걸어나와 영양의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안장을 칼 옆의 땅바닥에 던졌다. 한참 동안 문간과 중정관을 쓴 사내는 서
로 말없이 노려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중정관을 쓴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늘과 땅이 낳고 해와 달이 세워준 튀르크의 대가한 아시나 부얀, 삼가……대당의 조정
에 귀……순한다."
유창한 중국말이었다. 문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핏발이 서 있었다. 눈물이 흐르는 얼
굴을 몰아치는 빗발이 가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고문간은 그의 불끈 쥔 주먹이 굴욕감에 부
들부들 떠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군은…… 배행검 공에게…… 전령을 보내주도록."
부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필사적으로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고문간은 자신의
내면과 힘겨운 고투를 벌이고 있는 부얀의 모습이 밉살스럽게 느껴졌다. 고문간은 지난해
전쟁 때 배운 서툰 돌궐말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부얀 칸. 그런데 아시테 웬푸는 어디 있습니까?"
부얀은 아무 말 없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기의 뒤에 꿇어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고문간은 깜짝 놀랐다. 피투성이가 되어 오랏줄에 묶인 웬푸가 빗물이 튀기는 진흙탕 위에
앉아 고문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문간은 입술을 깨문 채 부얀을 돌아보았다.
"칸, 이게 어찌된 일이오?"
부얀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인생의 잔혹함과 살아남은 일의 남루함이 가슴을 철
썩철썩 때려오는 것이다. 부얀은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하기 싫은 말을 내뱉었다.
"지난번 비가 내린 뒤 바람이 차서…… 말들이 다 죽고 병사들은 병들고 굶주렸소. 얼마
전부터는 참다 못해 죽은 전우들의 인육을 뜯어먹는 형편…… 세궁역진이었소.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아파 타르칸이…… 웬푸가 들어주지 않아서. 도리없이…… 도리없이 항전을 주장
하는 무리들을 제압하지 않을 수 …… 없었소. 이 모두가…… 배행검 공의 권유에 따른 것.
장군은 우리의 처우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되오."
험상궂은 눈초리로 부얀을 노려보던 고문간은 그 마지막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배행
검의 무거운 지모에 새삼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얀과 웬푸를 서로 이간질하여 돌궐의 2차 반란을 자멸하도록 한 것. 개요 원년(681년)
10월의 이 대목은 『구당서』「배행검전」의 절정이다. 배행검은 수많은 간첩들을 통해 시
종일관 부얀의 심리를 읽고 있었다. 배행검의 밀사에 마음이 움직인 부얀은 온건파가 되어
버렸고 웬푸와 대립하게 되었다. 두 지도자의 암투에 회의를 느낀 족장들이 속속 이탈해버
렸고 돌궐군의 세력은 갑자기 위축되었다. 마침내 부얀이 웬푸를 잡아 투항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고문간은 성큼성큼 웬푸에게 다가갔다. 웬푸는 오랏줄의 끝을 부얀의 부하에게 잡힌 채
진흙탕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파리하게 여윈,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신열 때문인지
기갈 때문인지 마른 입술이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웬푸의 쓸쓸한 눈과 마주치는 순간 고문
간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찔끈 감고 돌아섰다. 어쩌면 나는 이 사내와 똑같은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순간 잡은 자와 잡힌 자의거리가 너무도 가깝게 느껴졌다. 고문간은
모여드는 부하들에게 걸어가며 악을 쓰듯 명령했다.
"당번병들을 깨워라! 양부터 스무 마리 잡아! 쌀을 한 섬 헐어서 죽을 쑤고! 내 군막과 그
옆의 군막 비워! 이분들을 어서 막소로 모셔라!"
681년 10월 웬푸와 부얀을 앞세운 배행검이 장안으로 개선했다.
장안은 온통 흥분과 연민, 전승의 기쁨으로 들끓었다. 남북조 시대와 수, 당 초기까지 전
란이 얼마나 무섭고 잔혹한 재앙인가를 신물나도록 맛본 민중들이었다. 돌궐 반란이 일어난
정양과 운중 지역이 수도 장안에서 불과 3천 리 거리였던 만큼 그 동안 민중들의 동요는 심
각한 것이었다.
반란이 진압되고 웬푸, 부얀을 비롯한 54명이 압송되었다고 전해지자 사람들은 거리로 몰
려나와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만세를 불렀다. 중세의 민중들이 가진 격한 도취와 쉽게 감동
받는 성향이 배행검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배행검의 위명은 이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
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문간은 극히 곤혹스런 처지에 빠져 있었다. 문간의 고구려 기병대는 새
로 선우도후부의 장사로 임명된 상장군 왕본립의 휘하로 들어갔다. 쿠틀룩의 부대와 아란두
는 예정대로 반란군이 투항하기 직전 총재산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이제 수백 명 정도로 줄
어든 잔당을 데리고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고문간 부대의 임무는 바로 이 반란군의 잔당
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이제 아란두에게 직접 칼을 겨누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문간은
매일 아침 비틀거리며 일어나 충혈된 눈으로 총재산 능선을 응시했다.
고민은 또 있었다. 행군총관 정무정은 잔당 토벌을 위해 고문간 부대와 함께 선우도호부
에 거란군 1만 명도 남겨두고 떠났다. 이미 고구려군과 거란군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불화
가 팽배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정무정이었다.
"참아라. 키타이들이 무슨 짓을 해도 참아야 해. 이건 우리더러 놈들과 사고를 치라고 얽
어놓은 행군총관의 덫이야."
고문간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흥분하는 부하들을 달래며 이런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 그
때 선우도호부 안의 모든 민족들을 격동시킬 놀라운 소식이 장안으로부터 전해졌다. 웬푸는
물론 스스로 귀순한 부얀과 그의 부하 54명이 모두 장안의 동시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이었
다.
이것은 정치적 책략이 국가적 이해를 앞서버린 당조의 결정적인 악수였다.
"마마, 배행검은 부얀과 웬푸에게 투항하면 조정의 용서를 받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만약 마마께서 이 투항을 승인하시면 돌궐에 대한 배행검의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
옵니다. 이 기회에 배행검을 견제해야 하옵니다."'
정치에는 귀신이지만 외교에는 병신이었던 시중 배염은 계속 무후를 졸랐다. 영명한 무후
도 그만 순간의 판단을 그르치고 말았다. 일찍이 손자는 전쟁에는 이겼을 때 더 투구끈을
졸라매고 조심해야 한다고 누누이 경고했다. 예상밖의 행운을 잡아 승리했을 때 마음의 평
정을 잃으면 그 승리가 오히려 몇 배 더 큰 패배를 가져온다. 무후는 돌궐에 이기고 있었고
이 승리는 무후를 들뜨게 했다.
"10월 병인에 장안성 안에서 모두 처형하라. 웬푸와 부얀은 살가죽을 벗기고 나머지 50여
인은 목을 베도록 하라."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내도에 사는 수많은 민중들이 모반한 오랑캐들에 가해질 가혹한 고
문과 처형을 구경하러 도시락을 싸들고 장안으로 모여들었다. 민중이란 잔혹한 살인을 구경
하면서 맛보는 동물적인 쾌락에는 영원히 물릴 줄을 모르는 법이었다. 축제 전야와도 흡사
한 분위기가 장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것은 배행검이었다. 조정으로부터의 큰 은상을 받아주겠다고 부얀에게 약속하고
웬푸를 잡아 투항하도록 사주했던 그였다. 그 약속은 돌궐 사람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수차 조정에 들어가 형집행의 취소를 주청했다. 돌궐 사람들에게 이 최소한의 신뢰를 잃는
다면 장차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
았다.
드디어 당나라 개요 원년(681년) 10월. 운명의 날은 왔다. 동시 한가운데 모든 사람이 구
경할 수 있게끔 높은 단상의 처형대가 설치되었다. 돌궐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말로만
듣던 아시테 웬푸의 최후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증오에 찬 욕설을 퍼
부어대는 한족 군중들 속에 파묻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처형이 시작되었다. 먼저 웬푸와 부얀이 나무 목자로 생긴 처형대에 대못으로
양 손바닥과 발등이 못박혔다. 그리곤 회자수들에 의해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졌다. 가죽이
벗겨질 때마다 두 사람은 사지를 뒤틀며 끔찍한 울부짖음을 토해내었다. 회자수들은 군중들
이 보다 오래 즐기게 하기 위해 출혈량을 조절하며 형집행을 한없이 질질 끌었다. 고통에
찬 단말마의 비명이 한 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마침내 태양이 머리 위에 머물러 처형대의 그림자가 가장 짧아진 정오. 기진하여 절규할
힘마저 다 잃어버린 웬푸의 눈동자에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빛이 돋아났다. 그때 웬
푸는 군중들 속에서 자기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노인을 보았다.
"카살!"
웬푸가 고통에 뒤틀린 입을 열러 그를 불렀다. 그러자 눈물을 흘리던 노인은 얼굴이 새파
랗게 질려서 얼른 고개를 숙이고 대열의 뒤로 사라졌다. 틀림없이 15년 전 같이 용무영의
금군으로 있던 부하 카살이었다. 그제서야 웬푸는 잔혹한 군중들 속에 자신의 마지막을 배
웅하러 온 동족들이 섞여 있음을 알았다.
웬푸는 출혈 때문에 풀무처럼 헐떡거리는 가슴과 배에 마지막 기력을 모았다. 그러자 급
한 맥이 고동치면서 갈빗대가 울먹거리고 악다문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길게 뻗어나왔다.
"즈…… 쟈아(여, 여러분……)"
그러나 군중들 속에 끼여 있던 돌궐 사람들이 일제히 진저리를 쳤다. 도무지 사람의 소리
같지 않은, 찢어지고 깨지는 소리였으나 그것은 돌궐말이었다.
"여러분…… 보시오. 이것이…… 타브가치 놈들의…… 참 모습이오…… 속지 마시……오."
웬푸는 말하고 싶었다. 당의 전쟁에 용병으로 끌려다니느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돌궐
의 비극을. 별빛마저 낯선 이역에서 겪어야 했던 그 수많은 패배와 헛된 승리를. 당나라, 그
거대한 제국의 재앙이 어떻게 우리를 괴롭혀왔는가를. 고요한 대초원과 순박한 사람들의 잠
자리에 어떻게 해야 평화가 깃들일 수 있는가를. 그러나 그 모든 사설들은 거의 다 꺼져가
는 목숨의 가물거림 속에 도저히 정리될 수 없었다.
막 숨이 넘어가는 그의 눈에 대초원에 나부끼던 장엄한 아홉 개 말꼬리의 깃발이 다시 보
였다. 거 깃발 아래 수많은 족장과 용사들이 모여들었던 제 1제국 시대의 영광이 보였다. 중
국의 말재갈에 옥죄여 사육당하지 않고 자존심과 위엄을 지키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스스
로를 사랑하며 살 수 있었던 시대의 전설이 눈에 보였다. 이윽고 그 황홀경의 환각은 가장
자리부터 서서히 어두워졌다. 웬푸는 열에 떠서 가물거리는 눈을 찡그리며 마지막 말을 간
신히 토해내었다.
"여러분, 이 원수를…… 갚아주오!"
그리고는 웬푸의 목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목을 치기 위해 형리가 그의 변발을 뒤로 잡아
당겼을 때 이미 그의 넋은 조상들의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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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향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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