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향기 2
이인화
1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겨울이었다. 당나라 영순 원년(682) 1월 오르도스에는 저녁까지
말짱했던 바위가 밤사이 쩍쩍 갈라지는 무서운 한파가 몰아닥쳤다. 가는 곳마다 얼음장이 하이얀
이빨을 드러내고 날을 세웠다. 살이 떨어져나가는 추위 때문인지 고문간의 토벌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초가이 쿠지까지 진군하여 진영을 설치한 고구려 기병 사단은 두 달째 쥐죽은 듯이 거기
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선우도호부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카라쿰을 토벌하라는 독촉이 날아왔다.
문간은 멍청히 총재산의 군막에 앉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정신을 차려라. 정신을 차려, 고문간. 아란두는 천성이 교활하고 음탕한 여자란 말이다. 얼굴이
야 천사 같지. 하지만 그 얼굴로 시치미 뚝 떼고 오이 사제에게 시집가던 날을 벌써 잊었느냐. 이
제는 또 쿠이라는 풋내기를 유혹해서 좋아지내고 있지 않느냐.
고문간, 네가 지금까지 혼자 산 것이 고작 돌궐 놈에게 간릉을 떨고 알랑수나 부리는 계집을
못 잊었기 때이날 말이지? 미친놈. 당장 카라쿰으로 쳐들어가 불을 싸질러라. 그래서 저 오만하고
앙칼진 암코양이가 길들인 마지막 둥지를 박살내는 거다. 아란두는 아마 자결하겠지. 아무려면 어
때. 암, 조금도 미련을 둘 필요가 없지... 그러나 몇 번이나 반복한 이런 결심은 도무지 실천에 옮
겨지지 않았다. 문간은 밤마다 괴로운 한숨만 내쉬며 술만 퍼마셨다.
드디어는 선우도호부의 군사령관 왕본립 장군이 직접 고문간의 진채로 달려왔다.
"고문간 장군, 왜 카라쿰(흑성, 또는 흑사성이라 불렸음. 지금의 내몽골 자치주 후러하오터시 근
교)을 공격하지 않는 거요? 엉? 내 명령을 듣지 않겠다 이거요? 이것이 심각한 반역행위가 된다
는 걸 모르시오? "
선우도호부가 있는 운중성에서 300리 눈길을 뚫고 달려온 왕본립은 비쩍 마른 곰보 얼굴을 붉
히며 다짜고짜 고함부터 질렀다. 지휘관의 군막으로 들어서서도 콧김을 킁킁대며 문간을 사납게
흘겨 보았다. 문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 우선 좀 앉으시지요. "
고문간은 손수 부삽으로 눈을 펐다. 그리고 그 눈을 밥상만큼이나 널찍한 돌을 올려놓은 아궁
이 위에 부었다. 아궁이에 불을 떼어 돌판을 달군 뒤 거기다 눈을 부어 뜨거운 증기를 내는 엉성
한 난방장치였다. 방안은 안개가 낀 듯 더운 김이 자욱하게 일어났다. 군막마다 바람을 막기 위해
이중으로 가죽을 덮고 바람이 많이 부는 서북쪽은 3중으로 막고 있었다. 침상에는 두꺼운 낙타가
죽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어린 양이 생가죽을 깔았다. 그런데도 손이 곱고 발이 시려웠다.
" 보시다시피 불가항력인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운중성으로 철수 해야겠어요. 이러다간 얼어죽
겠는 걸요."
문간은 오히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왕본립은 이 뻔뻔스런 놈을 당장 처벌할 권한이 없다는
사실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부병제에 따르면 보병들을 3년간 위사로서 서울 장안에 상번하고 다시 3년간 방인으로 변방에
근무하면 의무 복무가 끝난다. 위사나 방인 어느 쪽이든 6년을 채우면 된다. 그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집에서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만 훈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고문간과 그의 부대는 토벌 원
정에서 4년을, 다시 돌궐 원정에서 2년을 싸웠기 때문에 이제 영주로 귀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 이곳에 잡혀 있는 이유는 전시에는 행군대총관 밑에서 복무가 연장될 수 있다는 특례조항 때
문이었다.
따라서 고문간은 선우도호부 지역에 주둔하며 왕본립의 지휘를 받긴 하지만 명령계통상으론 장
안에 있는 행군대총관 배행검의 부하였다. 선우도호부 지역의 전후처리를 돕기 위해 파견된 형식
이 되어 있던 것이다. 고문간은 이 점을 악용하고 있었다.
" 누가 전군을 이끌고 가라고 했소? 1천명 정도로도 충분히 토벌할 수 있는 잔당들 아니었느냔
말이오 한 달 전만 해도 쿠틀룩의 반란군들은 700명도 안되었는데... 그런데도 장군이 시기를 놓
쳐 이 지경이 된 거란 말이오. "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지요. 누가 가기 싫어서 안 갔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동사자가 속출하
는데 어떻게 출정하란 말입니까. 숟가락을 물고 막사밖에 나가면 숟가락이 혓바닥에 얼어붙어요.
가래를 뱉으면 그냥 얼음 조각이 돼서 떨어지고 얼굴에 돼지기름을 바르지 않으면 낯짝이 쩍쩍
갈라진단 말이에요. 우리 애들 얼굴을 좀 보세요. 저게 어디 얼굴입니까 상통이지."
" 듣기 싫소! 지금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저런 식으로 나가면 놈들은 다시 칸이라도
추대할 거요. 그, 그땐 어, 어, 어떻게 책임질 거요? 당장 출정하시오. 당장 전력을 다해 토벌하지
않으면 장군은 군령에 따라 처단될 것이오."
왕본립은 지휘봉으로 달군 돌 판을 후려갈기며 부들부들 떨었다. 왕본립이 이렇게 까지 흥분하
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지난해 10 월 아시테 웬푸의 장렬한 최후. 그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 스텝지역의 유
목민들을 달아오른 석탄처럼 격앙시켰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를 잡아 투항했던 아시나 부얀
과 그의 부하 54명이 처형되었다. 당나라가 돌궐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았다는 것. 당
나라의 달콤한 회유는 언제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번복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선우도호부 지역에 폭풍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반란이 진압될 당시 탈출
했던 쿠틀룩 부대의 증가였다. 돌궐 독립운동의 모든 연장자들이 처형된 지금, 스물다섯 살의 쿠
틀룩보다 더 널리 알려진 지도자는 없다. 선우도호부에 살던 여러 돌궐 부족들이 집단으로 탈출
하여 총재산으로 들어갔다. 초원에 흩어져 있던 부족들도 이를 갈며 자발적으로 합류했다. 웬푸의
처형 전 70 여명에 불과하던 <잔당> 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700 여명이 되더니 다시 7천명이 되
었다.
깜짝 놀란 선우도호부는 총재산을 포위하고 소탕전에 나섰지만 쿠틀룩은 유유히 포위망을 뚫고
자신의 본거지인 카루쿰에 입성했다. 쿠틀룩은 토이(모든 씨족장들이 모이는 돌궐제국의 국가회
의, 이 시기에는 명목상으로만 <토이>였을 뿐 실상은 아주 작은 규모였음)를 다시 열었다. 그는
토이에서 곰의 넓적다리 만한 그 엄청난 팔뚝을 흔들며 후일 그 일부가 <빌개 칸 비문(현재 몽골
공화국 아라항가이 아이막 호쇼 차이담 솜에 있음. 빌개 칸은 쿠틀룩의 맏아들. 비문 첫 머리에
아버지의 사적이 적혀 있음) >으로 남은 유명한 연설을 했다.
" 형제 여러분 탱그리께서 꿈에 나타나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투르크 백성들이 없어지지 않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으로 되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탱그리의 신성한 왕국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용기 있는 의인들만이 그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충만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악한 타브가치들이 웬푸와 부얀을 어떻게 죽였는지 들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에게 어떤 위기가 닥쳤는지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께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지금 승리
자처럼 보이는 적들은 서서히 힘을 잃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신들의 손안에 있을 것이며 신들의
영광만이 우리의 유일한 근심일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50 년 전 찬란하게 나부끼던 일리그 카한의 깃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풍요로운 초원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잘 살던 우리가 어떤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까? 기개 있
는 용사들은 모두 타부가친 칸(당나라 황제)에게 학살당했습니다. 벡(돌궐의 고관)이 될 만한 늠
름한 사내아이들은 타브가친의 노예가 되어 전쟁터에 끌려갔습니다. 에시(귀부인)가 될 만한 어여
쁜 처녀들은 타브가친의 몸종이 되어 능욕당했습니다. 우리가 또다시 그 공포와 암흑 앞에 굴복
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초원은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줍니
다. 초원은 자유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줍니다. 신들이 창조하고 조상들이 물려준 이 초원
을 우리는 지켜야 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카델(운명)입니다! "
이제 돌궐 반란은 다시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운중성으로 돌아가는 왕본립을 고문간과 고공의, 검진천, 송새별 등 훠하의 연대장들이 진채 바
깥까지 나가 배웅했다. 왕본립은 떠나는 그 시간까지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정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잔소리가 많은 위인이었다.
"나오지 마시오! 배웅할 필요 없으니 빨리 출정준비나 하란 말이오. 알겠소? 나흘간 시간을 준
다고 분명히 말했소. 나흘 안에 쿠틀룩을 토벌하도록 하시오. 아, 한창 혈기방장한 나이에 왜들
그래? 이까짓 추위가 무슨 대수라고, 늙은 나도 이렇게 다니는데... 사흘 안에 토벌 못하면, 내 그
땐 이 부대를 가만두지 않겠소?"
왕본립 일행이 떠나자마자 부하들은 일제히 그 뒤에 대고 눈을 부라렸다.
"니기미, 늙기는 ! 몇 살 더 처먹지도 않은 새끼가 족보 따지네"
"지가 가만 안 두면 어쩔 거야?"
"좆뿌리까지 다 얼었는데 이까짓 추위라니? 거 정말 좆같은 자식이네..."
문간은 못 들은 척 연대별로 출정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다음날 고문간은 검진천에게 500명을 맡겨 총재산을 지키도록 한 뒤 4천 기의 기병을 이끌고
카라쿰으로 떠났다. 겨울 하늘은 지나칠 정도로 파아랬으며 이따금 눈 덮인 벌판 끝에서 후드득
꿩이 날아올랐다.
기병들은 상당한 거리를 말에서 내려 걷고 있었다. 이런 혹한에는 말들의 체력이 극히 약해지
기 때문에 계속 타고 달리면 말이 죽기 일쑤였다. 또 바람을 피할 수 잇는 산의 남쪽 기슭들을
피해 일부러 추운 북쪽으로 가야 했다. 비교적 따뜻한 남쪽 길목에는 매복이 있을 수 있기 때문
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90킬로미터 정도 동남쪽인 카라쿰으로 진군하는 부하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특히 송새별은 어제부터 얼굴이 몹시 어두웠다. 문간은 일부러 그의 연대로 내려가서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아갔다.
"임자를 군대에 끌어들인 게 새삼 미안해. 어리구, 돈도 고향도 없이 이렇게 명령에 따라 헤매
다니는 신세라니. 따듯한 구들목에서 한 번 자지도 못하고. 게다가 군공이란 건 노름과 꼭같지.
땄는가 하면 금방 먼지처럼 날아가고 말거든. 내가 토번에 있을 때 말야..."
문간은 새별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계속 쓸데없는 소리들을 지껄였다. 새별은 눈자위가 움푹
패인 얼굴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에야 부대는 구릉 아래의 바람을 피할 만한
곳에 행군을 멈추었다. 이곳은 구릉이 몇 개 가리고 있어 카라쿰에서 불꽃을 볼 수 없었고 밤이
되면 연기도 보이지 않아 안전할 것 같았다.
카라쿰까지는 약 40 킬로미터. 문간은 척후병을 내보내고 말들이 감기 몸살을 앓지 않도록 소
금을 먹이라고 했다. (혹한기에 말은 염분과 미네랄 부족으로 죽기 쉽다. 그래서 모래소금이 많은
호수에서 퍼온 염분 많은 흙을 핥아먹게 한다.) 삽으로 누울 자리의 눈을 치운 뒤에 어두워지면
언 땅에 불땀을 놓게 했다. 문간은 빠른 행군을 위해 일절 군막을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병사들
마다 통나무 서너 개씩을 가지고 왔는데 그걸로 불을 지퍼서 불에 놓은 땅을 두 자 깊이로 파고
그 속에 누워 가죽을 덮고 자도록 했던 것이다. 이렇게 체진준비를 마친 문간은 소대별 연대장을
다시 찾았다.
새별은 장작에 물을 끓여 차와 동결육을 먹고 있다가 문간이 오자 먹던 것들을 발밑에 내려놓
았다. 문간은 무해무익한 옛날 얘기를 하며 장작불을 쬐었다. 새별은 별로 대꾸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더니 갑자기 문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문간이... 내 한 번만 더 그대를 문간이라고 불러도 되겠소? "
" 무, 물론이지, 이 사람아. 새삼스럽게 왜 이래? 내 이미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는
우리 옛날처럼 지내자구."
새별은 더욱 침울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나는 내 직속상관인 원외좌기위장군에게는 말씀드릴 수 가 없지만 내 절친한 친구인 고문간
이에게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소. 어쩌면 내 직속상관은 이 말을 듣고 내 목을 베려고
할지 모르겠소이다. "
문간은 뭐가 잘못되어간다고 느끼며 식음땀을 흘렸다. 그러나 말해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 문간이... 지금은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 때 나는 카수미였어. 침략자를 몰아
내고 고구려의 신들과 신들에게 봉헌된 대지와 그 신들의 사제를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맹세한
사람이었지. 나는... 아란두님에게 화살을 쏠 수가 없어. 용서해 주게. 내일 새벽에 나는 탈영하네.
멀리 보이지 않을 곳으로 떠나겠네."
"... "
" 더 이상 이렇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살 수는 없어. 동방교만이 나에게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힘을 주었지. 세월이 흘렀지만 그래도 나는 동방교를 배신할 수 없네. 이 전장을 멀리 벗어
났다가 싸움이 잠잠해지면 아란두님을 찾아가려네. 아란두님께 가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야. 그
중간은 없어."
문간은 비참해졌다. 놀라움과 두려움, 서글픔과 황당함은 빠르게 스쳐 사라졌고 차가운 시냇물
같은 절망만이 그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며 오래 머물렀다. 그가 여전히 발휘할 수 있는 감정이
라곤 자기 혐오밖에 없는 것 같았다.
새별의 말이 옳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이렇게 살 수는 없지. 문간은 왜 아란두가 자기를 차버렸는지 그 어
느 때보다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모양이니까 여자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아란두에게 화
살을 쏠 수 없어서 이날 이 때까지 출정을 회피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결국은 이렇게 출정하고
말았다. 상관의 닦달에 밀려서. 나라는 인간의 고질병인 이 우유부단. 이 나약함, 이 소심함. 이
영원한 눈치꾼 근성, 이 치사하고도 멍청한 분별력, 이 얼빠진 무신경.
이 모든 바보 같은 성격들이 문간을 지금의 자신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그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후회로 끔찍하게 변해갔다. 장군의 근엄한 얼굴을 지탱하던 통제가 풀어
지면서 내면의 고통이 절박하게 다가와 스스로 조절 할 수 없는 감정들을 노출시켰다. 자신의 인
생을 만들어온 그 모든 너절한 수동성들이 문간의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동방교인들의 포로가 되자 나는 그냥 꾸벅꾸벅 아무 생각 없이 영주까지 따라갔다. 열아홉까지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내가. 관리가 되어 출세의 문턱에 턱걸이를 하려 했던
내가.
고구려 부흥당의 한 사람이 되었다가 금방 또 당나라의 군인이 되었다. 동방교의 성사였던 내
가. 요동성에서, 신성에서,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인들과 싸웠던 내가. 아란두의 사랑을 원했던 내
가 아란두가 가장 증오하는 편에 서서 싸웠다.
야실 쿠츄에서 웬푸를 살려주었다. 그러고도 잘했다고 장군으로 승진했다. 흑산에선 아란두에게
식량을 대주었다. 그러고도 이젠 토벌하겠다고 군대를 끌고 가고 있다. 가서 어쩌겠단 말인가. 아
란두의 목을 베어 선우도호부로 개선할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인생이란 것은 정말 이렇게 뭐가 뭔지 모르는 소용도리 속에 돌고
도는 것인가. 적과 편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집착이며 낭비란 말인가. 전쟁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허망하고 쓸모 없는 미친 짓이란 말인가. 고구려는 무엇이고 당나라는 무엇이며 돌궐은 또 무엇
이란 말인가. 남은 신생이 지나온 만큼밖에 남지 않는 이 나이에 언제까지 이런 미친 짓에 휩쓸
려다녀야 한단 말인가.
문간은 보았다. 단단하게 죄어진 쇠가죽 갑옷에 씩씩한 준마를 타고 깃발을 나부끼며 달려오던
초원의 병사들을. 그리고 또 보았다. 구더기와 파리가 뒤끓던 무수한 주검들과 폐허들을. 끈적끈
적한 피웅덩이 속에 잠겨 있던 해골들을. 쭉 뻗어 있는 시체의 귀를 베기도 하고, 교수대에 사람
들의 목을 걸기도 했다. 인간의 두 개골을 가득 실은 마차를 끌고 가기도 했다. 엄청나게 많은 사
람들이 이렇게 섬뜩하도록 무심한 행진을 하며 끝없는 폐허 위를 가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아내
와 아이들과 친구들의 가슴을 태우는 한화위를. 이렇게 우리의 한평생이 흘러가는 것인가...
그러나 문간의 회한은 초원의 밤하늘로 녹아 흘러갔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송새별의 연대에서
연대장과 네 명의 병사들이 사라졌다는 소동이 일어났다. 문간은 그들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어
적진에 침투시켰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문간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닥치면 또 닥치
는 대로 해나간다. 확실하게 아퀴 짓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다. 문간이 해결해 주겠지.
이것이 나, 고문간이라는 인간의 방식이다.
송새별의 연대에는 선임 도위인 을지칠숙을 연대장 대리로 임명했다. 문간의 기병대는 계속
눈벌판을 진군했다. 그리하여 해가 막 기울기 시작할 무렵 멀리 카라쿰의 토성이 보이는 언덕에
이르렀다.
2
카라쿰은 전형적인 유목도시였다.
한복판에 사방 2킬로미터 가량의 정사각형으로 높이 12미터의 성벽을 두른 토성이 있고 토성
바깥으로 300여 미터쯤 떨어진 벌판에 흙으로 토대를 만들고 그 위에 나무로 뼈대를 올린 망대가
동서남북 각 성벽마다 여섯 개씩 서 있다. 성에는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종교의 사원들이 있고 시
장이 있고 외국인들을 위한 주택가가 있다. 성에는 외국 상인들, 승려들, 농경지대에서 온 이민자
들,나그네들 같은 이방인만 살며 정작 주인인 돌궐인들은 그 외곽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겔이라는
둥근 천막을 치고 지낸다. 물론 요즘 같은 전시엔 성안으로 대피해 있겠지만.
갑갑한 <흙집> 에 붙박여 살기를 싫어하는 유목민들. 이방인들을 환대하고 자기 것을 내세워
이방의 종교와 습속을 거부하지 않는 초원의 문화가 이런 독특한 도시들을 만들었다. 돌권인들은
과년한 딸이 어쩌다 애를 베게 되면 사위에 손자까지 일꾼이 둘이니 늘었다고 기뻐하며 경교의
야화이든, 불교의 부처든, 도교의 옥황상제든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싸우지 않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 신 저 신 가리지 않고 다 잘 믿었다. 아란두는 거의 무한대의 수용력을 갖는 이 유목도시에
신전을 세우고 동방교의 마지막 보루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 카루쿰의 토성이 하얀 눈을 덮고 구름송이들이 흘러가는 겨울 오후의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눈꽃이 탐스럽게 핀 송백의 겨울 숲에서 보는 초원의 도시는 매혹적인 정취를 풍기고 있
었다.
문간은 새삼 무상성의 매혹으로 무장한 유목도시의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카라쿰을 이루는
모든 것은 토성의 성벽에서 부터 성문, 그 안에 있을 고구려식 가옥의 벽돌 하나 하나까지 초원
의 야생으로 부터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사나운 야생은 언제든지 이 연약한 도시를 집
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 수백 배, 수천 배에 달하는 무인지경의 광야로부터 들이닥치는 설해(챠
간 주드. 백생의 재난이라고도 함. 눈보라가 몰아쳐 1미터 정도 눈이 쌓이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고 풀들이 썩어 초원엔 기근이 닥친다)와 한해(하라 즉, 검은 재난이라고 한다. 물이 말라 가축
들이 폐사한다.)와 낭재(늦은 봄부터 여름 사이에 닥치는 늑대떼들의 습격)와 태풍이 끊이지 않고
이 작은 인간의 도시를 침식시킨다. 이 영원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자연 앞에 카라쿰은 절망적
으로 연약하다. 그래서 카라쿰은 실제라기 보다느 차라리 그 안에서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상
상하는 하나의 꿈처럼 보인다. 너무 연약해서 아름다운 인간의 꿈.
" 장군님, 관목들이 모두 속대만 남았습니다."
문득 고문간의 상념을 깨우며 연대장인 손거루가 말했다.
"양들이 굶주려서 나무껍질을 벗겨먹은 것입니다. 양들이 이 만큼 굶주릴 정도면 말들은 거의
건초를 못 먹었습니다. 아직 눈에 덮이지 않은 남은 초지들을 갈아엎고 적들의 남은 건초더미를
불살라버리면 적들을 성 밖으로 끌어낼 수 있습니다. "
올해 서른 아홉 살인 손거루는 유목을 많이 하는 고구려의 서부무려라(지금의 요령성 신민시)
출신으로 유목민들의 생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또 다른 연대장 극대일도 동조했다.
" 지난해 채금꾼이었던 저의 부하 하나가 카라쿰에 들어갔더니 고구려인들은 그 때 벌써 식량
이 모자라 쩔쩔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중국 상인도, 소그드 상인도 들어가지 못했어요.
지금 성엔 곡물도 건초도 거의 없는 게 확실합니다. 근처의 초지만 봉쇄하면 금방 끝낼 수 있습
니다. "
그 때 멀리 카라쿰에서 먼 파도소리처럼 들리는 희미한 북소리가 울렸다. 성안에서도 아군의
접근을 알아차린 것이다. 문간은 곰곰이 생각했다. 두 연대장의 헌책은 매우 온당했다. 초지를 찾
아 점령하기만 해도 토성 안에 들어간 돌궐군은 경악할 것이다. 나와서 대항하지 않을 도리가 없
다. 그러면 성을 공격하는 수고를 한결 덜 수 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문간이 별로 이기고 싶지 않다는데 있었다. 전투란 살아 있는 맹수 같다. 이쪽의
의도가 어떠하든 그 자체로 굴러가 버리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야전이 되어버리면 정말 죽
을둥살둥 싸워야 한다. 쌍방의 희생도 클뿐더러 잘못하면 정말 이겨버릴 수가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은 자꾸 다른 쪾으로 쏠렸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하던 문간은 고개를 저었다.
" 보시다시피 무시무시한 한파야. 목초지를 점령하는 건 좋지만 그러다가 눈보라라도 닥치면
들판에 있는 우리가 얼어죽을 위험이 있네. 시간이 없다는 거지. 즉시 공성을 시작하세."
성문을 정면으로 돌파할 장비들은 없었다.
숙달된 기병들은 말을 버리고 보병과 공병으로 변했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만들었다.
사다리가 다 만들어지자 해가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공격이 개시되었다. 선두에는 화살통
에 화살을 잔뜩 꽂은 2개 연대가 일제히 사격을 퍼부으며 토성으로 접근했다. 돌궐군 역시 북소
리 뿔피리소리를 요란하게 울리고 맹렬하게 활을 쏘며 저항했다. 그러나 돌궐군 쪽 궁수들의 수
자가 고구려군이 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에는 부족했다.
저항이 뜸해진 빈틈으로 사다리를 맡은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막 병사들이 사다리에 달
라붙을 무렵 사방에서 함성소리가 들리며 말발굽소리가 일어났다. 토성 바깥에 주둔하고 있던 돌
궐군들이 성을 구원하러 온 것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별로 많지 않다고 느꼈지만 문간은 포위당
할 위험이 있다면서 공격을 중지시켰다. 그리곤 예비로 돌렸던 1개 연대에서 일제히 불화살을 퍼
붓게 하여 후퇴를 엄호시켰다. 부하들이 모두 화살의 사정거리 밖으로 빠져나오자 문간은 냉큼
부대를 10리 밖으로 철수했다.
고문간의 부대는 이튿날도 공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에 대군을 우회하여 적의 본진을 찌르
던 그 박력과 꿋꿋함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눈치가 귀신 같은 부하들은 금방 지휘관의 뜻을 간
파했다. 고구려군은 다가가서 공격을 퍼붓기보다는 이리저리 말을 달리며 고함을 지르면서 시간
을 보냈다. 해가 기울자 그야말로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소극적인 공격을 한 번 시도했다. 공격은
금방 격퇴되었고 문간은 미련없이 다시 군대를 뒤로 물렸다. 사흘 째 아침 고구려군은 총재산으
로 되돌아 갔다.
카라쿰에서의 패전은 왕본립을 펄펄 뛰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부하 장교들까지도 문간에게
화를 내게 만들었다. 그렇게 싸울 거면 아예 나가지를 말지 이게 뭐냐는 불만이었다. 여덟 명이나
전사했다. 송새별을 포함한 다섯 명은 수색중 행방불명으로 보고되었다. 장교들은 내막을 다 짐작
하고 있는 눈치였다. 문간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자기 군막에서 술만 퍼마셨다.
고문간이 이끄는 고구려 기병대는 5개 외부(연대) 18대 단(대대)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 5개
의 연대를 이끄는 연대장들이 검진천, 고공의, 손거루, 극대일, 그리고 행방불명된 송새별이었다.
검진천과 송새별은 동방교 사람으로 문간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고공의는 동방교인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우정을 쌓은 사이였다. 그러나 손거루와 극대일은 분명 당나라에서 직업군인으로
출세하고 싶은 포부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송새별 대신 연대장이 된 을지칠숙도깊은 속내 얘기를
들어보진 못했으나 비슷할 것이었다.
며칠 뒤 왕본립의 군부참군(참모장) 인 거란인 손만영이 달려와 패전을 따졌다.
" 우리 왕상군님께선 고장군님의 인격을 믿고 감군도 딸려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4천
기가 출정해서 고작 전사장 8명을 내고는 졌다 하고 철수했단 말입니까? 군령을 이렇게 가볍게
여기셔도 되는 겁니까?"
" 이봐요, 손도귀, 귀관이 말하는 요지가 뭐요? 전장에서 나아가야 할 떄와 물러서야 할 때는
실병을 움직이는 장수만이 아해할 수 있는 거요. 알겠소? 나 혼자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나 혼자
결정했다고 해서 당신이 나를 비난한단 말이오?"
문간은 스스로 생각해도 사리에 맞지 않는 억지를 쓰며 화를 내었다. 막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었다. 손만영은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렇다면 절충도위 송새별이 실종된 사유도 장군님만이 이해할 수 있겠군요?"
"..."
" 보고서에는 카라쿰 성으로 척후대를 조직해서 침투했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절충되위가 직접 척후에 나서야 할 만큼 심각한 사태가 있었습니까?"
" 내가 있었다면 있었던 거요."
문간은 심드렁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도호부의 젊은 참모장은 호락호락 물러
서지 않았다.
" 상부에서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런 식으로 답변하실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이것이 허위 보고라면 얼마나 중대한 과오가 된다는 걸 모르십니까?"
" 닥치시오. 감히 본관을 의심하다니! 이건 상관에 대한 모독이오. 모독. 전선은 귀관이 도호부
에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열악하오. 썩 돌아가시오."
문간은 얼굴 가득히 불쾌한 빛을 띠고 자기가 생각해도 치사하게 계급장을 앞세워 상대를 찍어
눌렀다. 손만영은 쥐눈을 뜨고 문간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겨우 물러갔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문간은 술이 더 늘었다. 처음에는 긴장으로 멍해져서 곧 들이닥칠 문책만
생각하며 이런 저런 초라한 변명을 궁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어떤 영웅적인 자포자기가 문간
을 사로 잡았다.
될 대로 되라지. 파면시키려면 파면시키고 그래도 성이 안 차면 감옥에 처넣으라지. 이제까지
내가 작정한 대로 해치운 일이 하나라도 있었더냐. 항상 운명의 미로 속에서 예상치 못했던 어떤
줄이 나를 끌어당겼다. 내가 줄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다. 그 줄이 나를 당기고 있었다. 송새별의
말이 옳아. 사람이 이렇게 얼렁뚱땅 살수는 없는 거지. 하지만 이제까지도 이렇게 산 걸 어떡해.
이왕 잘 못살았으니 계속 잘못 살아보는 거지. 다들 이렇게 세월을 죽이며 살아간다. 이런 것이
인생이다.
날이 가고 달이 갔다. 2월로 접어들자 추위는 약간 수그러들었으나 초원지역의 기근은 절정에
달했다. 보급도 신통찮았다. 고문간의 사단은 건초가 없어 쩔쩔 매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말들
은 유달리 사나워져 종종 앞다리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어떤 때는 주인의 말도 듣지 않고 들판으
로 뿔뿔이 달아나 전 부대가 진땀을 뺴게 만들었다.
"빌어먹은 말 새끼들 ! 캭 죽여서 구워 먹어버릴 거야. "
기병대는 지치고 짜증이 나 있었다. 말이라는 것은 정말 참을성 이라곤 손톱만치도 없는 동물
이었다. 아무리 굶는다고 어떻게 저지랄들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양들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사단
에서는 지나해 은상으로 말을 1만 두나 받아 이리저리 나눠주고도 5천 두나 남겨 기르고 있었다.
이 양들은 온순하고 착해서 아무리 배고파도 보채지 않고 심지어 굶어죽어가면서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식량을 위해 도살되는 것은 언제나 양이었다. 문간은 그런 양에게서 문
득 문책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몸을 떨었다.
3월로 접어든 어느 날 고문간의 사단에 선우도호부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부하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전령의 말을 들으니 비쉬 발리크 지역(서부 몽골에서 신강성으로빠지는 길목에 위치한 북정 5
개성 지역)에서 아시나 처푸가 반라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아시나 처푸는 토번의 지원을 받는 서
돌궐의 대족장으로 처비시 부복을 이끌고 있었다. 호시탐탐 부흥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웬푸와
부얀이 처형된 후 돌궐인들의 민족 감정이 고조되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반란으로 서역 공
략을 위한 다의 전초기지였던 궁월성이 함락되고 성주 두회보 장군이 전사했다. 그 뿐만 아니라
토하라(파미르고원 서쪽 현재의 타지그스탄 지역) 지역의 중국인들이 대식국이라 부르는 사라센
제국의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은 지금 오르도스 반란의 뒤처리에 신경 쓸 떄가 아니었다. 일선의 군단들에게 서역 전선으
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고문간의 기병 사단은 일단 선우도호부로 귀환했다가 병력이 대
거 빠져나간 음산산맥 서쪽 서수항성에 수비대로 배치될 것이라고 했다. 고구려군 대신 거란군이
카라쿰 지역의 작전을 맡아 총재산에 진주해왔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카라쿰의 반란군이 수만 명
으로 늘어나 거란군만으로는 토벌할 수 없는 세력이 되어 있었다.
문간은 고공의를 얼싸안고 껑충껑충 뛰었다. 그의 기병 사단은 새로이 서역 정벌을 위해 편성
된 금아도 행군대총관부에 소속되었다. 금아도행군대총관은 배행검이었다. 카라쿰을 평정하지 못
한 죄가 난리통에 날아가버린 것이다.
고문간의 기병 사단은 보무도 당당하게 선우도호부로 귀환했다. 문간은 소그드 상인에게서 산
화려한 검은색 종마를 타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귀환한 것을 신고할 때 왕본립이 그 번들번
들한 곰보 얼굴을 쓰다듬으며 기분 나쁘게 웃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또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잔대가리 굴려보라지. 이제 난 알 바 아니네. 문간은 혀를 쑥 빼물고 연대장들
과 술집으로 달려갔다. 선우도호부가 있는 운중성의 술지마다 고구려말을 쓰는 사병들로 미어터
지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술 마시고 노래부르는 일이라면 제정신을 잃어버릴 만큼 좋아한다. 평소에는
위계질서가 엄격하지만 놀 때는 윗 사람 아랫사람, 남자와 여자가 자리를 가리지 않고 당장 내일
아침에는 세상이 끝장나는 것처럼 논다. 술집들은 종류가 많기로 유명한 고구려의 현악기와 타악
기 소리, 술상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노래에 반주를 넣는 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온갖 노래가 끝
없이 불려졌다.
"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한 쌍 다정해. 외로워라 이 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
" 둥근 돌 곧게 하늘로 솟구치고 너른 호수는 사방이 트였네. 바위는 씻기운은 파도에 의연하
고 나뭇가지는 흔들리는 바람을 잠재우네..."(고구려 후기의 승려 정법사가 지은 <외로운 돌을 노
래함>)
고구려 노래의 호선무에 맞춰 석국(지금의 타쉬켄트. 당시 돌궐족의 땅)에서 온 앳된 술집 여자
가 석국의 호선무를 추었다. 고구려의 땡땡이북이 으다다다 두드려지고 열기로 볼이 뻘개진 석국
여자는 날렵하게 양손을 감아 올리면서 허리를 비틀며 몸을 돌렸다. 빙글빙글 돌자 그녀의 화사
한 치마가 부채처럼 위로 치켜 들리고 다리가 드러났다.
문간도 춤판에 뛰어들었다. 길고 부드러운 종이를 접어 머리의 두건에 끼우고 소매가 손을 다
덮을 만큼 풍성한 도포를 걸친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문간은 팔을 펼쳐 소매를 흩나리며 머리
를 타원형으로 빙글빙글 돌려 머리의 종이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구당서> <양재사전>에 나오
는 고구려 춤의 묘사. ) 부하들은 깔깔깔 웃으며 손뼉을 쳤다.
자정이 넘자 검진천은 먼저군영으로 돌아간다며 비틀비틀 술집을 나갔다. 일등품 밀주를 진탕
만탕 퍼마신 손거루와 극대일은 술로 떡이 되어 술집 골방에 널브러졌다. 고문간은 그래도 굴하
지 않고 삼경이 될 때까지 사병들과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삼경이 조금 지났을 때 문간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히벌쭉 웃음을 흘리며 술집 뒷문으로
나왔다.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소피를 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였다. 골목 담벼락에 대
고 소피를 보는 문간을 누군가가 툭툭 쳤다. 뒤를 돌아본 고문간의 오줌줄기가 갑자기뚝 끊어졌
다. 문간은 바지를 추스르는 것도 잊은 채 물에 들어갔다 나온 개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술
이 취했나 하고 눈을 비벼도 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헛것이 아니었다. 문간의 얼굴이 백짓장처
럼 하얗게 질렸다.
문간의 어깨를 친 사람은 신책군 중랑장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은... 그 얼굴은 바
로 14년 전에 죽은 진가도를 닮아 있지 않은가. 아니 좀 여위고 늙긴 했지만 영락없는 진가도였
다. 귀신이다... 그때 귀신이 입을 열었다.
" 10년도 더 지났는데 내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나 보군. 정말 고마워. 고감사. 아니, 이젠 고문
간 장군이지."
문간은 오줌을 지릴 만큼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술집에 소리를 질러서 부하들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10여명의 산책군들이 튀어
나와 그의 입을 막고 팔을 뒤로 꺾었다. 그리곤 골목길에서 문간을 끌어내어 그대로 대기시켜 놓
은 마차에 쳐넣었다. 마차 안에서 술이 확 깬 고문간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악을 썼다.
" 이 자식들아,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고문간이야! 고문간! 좌기위장군 고문가안!"
" 닥쳐."
진가도의 싸늘한 목소리가 문간을 제압했다.
" 발밑을 봐. 좀전에 너처럼 지랄하다 죽은 놈이야. "
문간은 발바닥 앞에 길게 누워 있는 시체를 보았다. 그러자 문간은 갑자기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쳤다. 옆에 있던 신책군이 이 문간의 목을 틀어쥐고몽둥이로 뒤통수를 갈겼다. 문간
은 위기 잃었다. 그의 발밑에 있는 시체는 검진천이었다.
3
이틀날 아침 어렵사리 잠에서 깨어난 고구려 병사들은 불벼락을 맞은 개미떼처럼 경악했다. 갑
자기 천지가 뒤집혀 있었다. 장안에서 온 금군(신책군)들이 군영을 장악하고 점호를 실시했던 것
이다. 고구려 기병 사단의 장교와 병사들은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느라 쓰린 속과 띵한 머리로 연
병장을 우왕좌왕하다가 모두 무장해제 되었다. 고문간 장군과 검진천 연대장은 이미 간밤에 체포
되어 선우도호부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이었다.
" 석달 전에 요동성의 어라하(고구려의 국왕 칭호)께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셨대."
" 뭐야? 아니 어떻게?"
병사들은 그제서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 환란의 시대를 눈치 하나로 살아남은 고구려 출신
들이었다. 떠도는 공기의 냄새만으로도 금방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는 풀뿌리 백성들의 지혜가 여
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들이 오르도스의 허허벌판에서 돌궐군을 쫓아다니
고 달아난 말들을 잡으러 뛰어 다니는 동안 4천 리 밖 요동성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년 전 요동도독 겸 조선군왕으로 봉해진 보장왕이 안동도호부로 밀파된 금군에 의해 체포되었
던 것이다. 이유는 반란음모죄. 보장왕이 옛날 고구려의 복속민이었던 속말말갈과 통모하여 일으
키려 했던 요동 일대의 반란계획이 발각된 것이었다.
무후는 진노했다. 이 음모를 철저히 파헤쳐 관련자를 색출하라는 지시가 신책군에 떨어졌다. 고
구려 유민들에 대한 유화책은 모두 취소되었다. 요동에 사는 고구려인들은 걷지 못하는 늙은이만
빼고 모조리 내륙으로 이주하라는 포고령이 내렸다. 다시 강제이주였다. 목적지는 황하 이남의 하
남도와 오르도스 서북쪽의 농우도. 벌써 10만여 명이 요동에서 쫓겨났다. 경악한 고구려인들은 남
쪽의 신라로, 말갈로, 돌궐로 달아나서 요동 일대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때 무후에게 결정적인 헌책을 한 사람은 지난해 11월 신책대 장군으로 승진한 정무정이었
다.
" 마마, 고장(보장왕) 은 전날의 고구려 국왕으로 그 유민들이 크게 의지하는 바가되었사옵니
다. 하여 그의 당여(잔당)는 요동 일대는 물론 먼 전선에 나가 있는 고구려 부병 속에도 구석구석
숨어 있사옵니다. 손신이 알기로 지금 돌궐과 싸우고 있는 고구려군 가운데로 고장의 당여가 있
어 언제 적과 야합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옵니다."
" 저런, 저런 무엄한 놈들이 있나 ! 당장 잡아들이도록 하시오."
" 옛날부터 그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금군 장령이 있었사온데 지금은 관직이 없사옵니다. "
"사실에 필요한 인물이라면 알아서 복직시키시오."
이리하여 장안성 남쪽 한적한 시골에 살던 진가도는 다시 신책군 중랑장으로 복직되었다. 14년
전 진가도는 다시 신책군 중랑장으로 복직되었다. 14년전 진가도는 고문간을 앞세워 욱사시부의
마구공장을 수색하다가 거꾸로 동방교도들에게 포위되어 마구공장 창고에 생매장되었다. 그러나
그 창고엔 곧바로 무후의 자객들이 들이닥쳤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젊은 날의 정무정이었다. 정무
정은 급히 파묻은 흔적이 역력한 땅바닥을 다시 파헤쳐 도끼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신책
군을 꺼내었다. 모두 목숨이 끊어졌지만 진가도만은 머리와 어깨와 등에 치명상을 입고 간신히
숨이 붙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진가도는 은퇴하여 10년이 넘도록 와병해야 했다. 처음 몇 년
간은 침상에서 고개를 들 수도 없는 중환자였지만 차차 걸어다닐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러
나 긴세월 병석에 누워 절치부심해야 했던 세월은 진가도라는 인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4년
전 그토록 예의 바르고 똑똑하던 청년장교 진가도는 이제 잔인한 혹리로 변해 있었다.
" 그날 나를 이꼴로 만들고 너를 납치해서 영주로 데려간 놈들! 그놈들은 누구며 지금 어디에
있느냐? 빨리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 아악! 으아아악! "
문간은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도저히 동방교 사람들의 근황
을 밝힐 수는 없었다. 이제 당나라군의 절충도위가 되어 있는 욱사시부. 거란족 부병의 검교가 되
어 있는 걸걸중상과 걸걸조영. 누구를 댄단 말인가. 문간은 돌궐군과의 내통은 솔직히 다 인정했
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죽을 만한 죄가 되었다. 그러나 진가도는 동방교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했
다. 문간은 자기가 아는 사람은 죽은 검진천과 돌궐전에서 실종된 송새별밖에 없다고 끝까지 우
겼다.
선우도호부 내영 옥사에 있는 지하 2층의 중죄인 감방은 쇠창살에 돌벽으로 둘러싸인 좁고 긴
방이었다. 이 감방에는 문간 보다 먼저 들어온 사형수 하나가 있었다. 벌써 1 년이 넘게 혼자 갇
혀 있었던 웬푸의 막내동생 톤유쿠크였다.
문간이 처음 이 감방에 던져졌을 때 두사람은 잠시 서로를 알아 보지 못했다. 전쟁터를 전전하
며 문간도 많이 변했지만 톤유루크, 왕년의 사원진도 아주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푸라기 검불
이 묻은 산발한 머리에 새까맣게 땟국이 낀 얼굴이야 그렇다고 해도 살집이 형편없이 줄어 있었
다. 도토리 같이 툭 튀어나온 눈에다 지나치게 비대한 몸피 때문에 항상 좀 바보스러워보였던 원
진이 아니었다. 침착한 시선과 주름살마다 고뇌가 깊은 골을 남긴 이마에는 흑인 노예를 데리고
희희덕 거리며 아가씨들을 쫓아다니던 장안성 시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가 없었다.
한참 후 얼굴을 알아본 둘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껴안았다. 어쩌면 이토록 절박한 상
황에서 이토록 오래 못 본 불알친구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운명이 둘을 저승길의 동무로 만들
기 위해 이런 재회를 마련했다는 섬뜩함이 문간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첫날은 무간이 원진을 위
로했다.
" 1년 동안이나 이 끔찍한 방에 갇혀 있었다니... 고생이 많았겠다."
" 괜찮아. 닷새 후에는 처형된다더군."
톤유쿠크는 남의 얘기를 하듯이 말했다. <처형>이란 말을 <석방>이라는 말로 잘못 들을 만큼
덤덤한 말투였다.
그는 군에서 제대한 뒤 선우도호부의 검교 벼슬을 하다가 형 웬푸가 주도한 1차 반란에 참가하
였다. 그러나 야실 쿠유의 패전 직후에 생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까지
처형이 미뤄졌다. 반란 초기엔 인질 교환에 이용할 까 해서였고, 웬푸와 부얀이 잡힌 직후엔 반란
가담자 전원을 관대하게 처분하겠다는 배행검의 약속 때문이었다. 웬푸와 부얀이 처형된 뒤엔 또
격앙된 돌궐족의 감정을 덧낼까 두려워 처형을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닷새 후로 형집행이 결정
된 것이다.
" 야실 쿠유에서 깨졌을 때 난 팽치 아저씨랑 같이 있었어. 팽치 아저씨가 처자식을 죽이고 추
격대와 싸우다 죽는 것을 봤지. 난 싸우지 않고 그 옆에 풀더미를 덮고 엎드려 있었어. 무서워서.
전우들은 북쪽으로 가는데 나는 혼자 남쪽으로 도망쳤어. 이 운중성 근처까지 걸어와서 친구 집
에 숨었지. 같은 꿈을 몇 번이나 꾸었어. 붙잡혀서 살가죽이 벗겨지는 꿈을. 죽고 싶었지만 그걸
스스로 실행할 용기는 없엇네. 그러다가 결국 수색대에 붙잡히고 말았지. 난 비겁한 놈이야. 닷새
후에 죽여준다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
" 원진아. 넌 요동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나와 아란두의 모숨을 구해주었어. 하늘이 무너져도
넌 비겁한 놈이 아니야. 넌 원래 정이 많은 놈이라서 안해도 될 자책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둘째날부터는 사정이 뒤바뀌었다. 문간이 감방 밖으로 끌려가 진가도의 고문을 받은 뒤
피떡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원진은 인사불성이 된 문간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상처를 싸매주
고 밥을 먹여주었다. 그 다음날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원진은 곧 목이 잘릴 자신의 처지도 잊
고 문간의 고초에 눈물을 흘렸다. 추위와 고통으로 덜덜 떠는 문간을 껴안고 재우며 원진이 말했
다.
" 문간아, 생각나냐? 우리가 하얀 복두를 쓰고 번쩍번쩍하는 비단 착수포를 입고 말을 타고 장
안성 밖 살하 벌판으로 타구(폴로 경기. 페르시아에서 전래되어 당태종 시절부터 장안에 크게 유
행했다.) 하러다니던 것. "
" 그래... 축구도 하고, 씨름도 하고..."
" 우리가 떼거지로 주작대로에서 말을 달리다가 사고친 거 생각나?"
" 임마, 그거 너 때문이었어. 니가 미친 듯이 달리는 바람에 좌판을 셋이나 부수고 사람하나 죽
이고 우리까지 경을 친 거 아녀."
" 그 때 자순군의 그 영감, 우리를 몽땅 군대에 처넣어 북변으로 보내겠다고 했지. 애비 에미들
등골이 빠지도록 돈 벌어서 공부시켜 놓으니까 이따위 사고나 친다구. 너희 같은 놈들은 고생을
좀 해야 한다구. 너 그 때 잔뜩 쫄아서 찔찔 울었짢아?"
문간은 피투성이가 된 입술로 희미하게 웃었다.
" 우리 그 때 졸병으로 군대에 끌려갔으면 아마 곧 터진 고구려 정벌전에서 죽었을 거야. 그
때 운이 좋아서 이렇게 16 년이나 더 살았잖니. 나야 뭐 대충대충 건성으로 살아버렸지만."
" 나도 마찬가지야."
" 그래도 그 때 죽는 것보다는 나았지. 운이 좋았어. 그렇지?"
" 그래..."
대답을 하다가 문간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야실 쿠유 전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문간은 힘겨
운 목소리로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이야기한 뒤 솔직하게 고백했다. 야실 쿠유에서 돌궐군과 싸
웠고 원진의 조카 유라르를 죽였고 하마터면 원진의 형 웬푸를 죽일 뻔 했다고. 원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문간을 용서했다.
" 괜찮다. 명령이 떨어지면 고향 마을도 짓밟아야 하는 것이 군인 아니냐. 다 난세 탓인데 이제
와서 어쩌겠니. "
넷째날부터 문간은 의식을 잃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펄펄 끓어 오르면서 헛소리를 했다. 그
동안의 과음, 고문으로 인한 상처와 추위가 겹쳐 급성폐렴이 걸린 것이다. 원진이 마지막 부탁 이
라며 사정 사정해서 감방 안에 화로가 들어왔다. 원진은 그 옆에 문간을 눕히고 뜨거운 물과 죽
을 끓여 문간을 간호했다. 그나마 그럴 수 있는 시간도 하루뿐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원진도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을 것이었다.
문간의 귀에는 이 감방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을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해가 저물 무
렵에는 아육 아저씨도 찾아왔다. 아육 아저씨는 살아 있을 때처럼 소리내어 웃으며 배화교에서
가르치는 저승세계에 대해 얘기했다. 그런데 아저씨의 머리에는 허옇게 서리가 내려 사나운 북풍
에 백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검진천이 찾아와 어서 일어나라고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시커먼 돌벽 속에서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대염모가 튀어나와 푸른 날개를 달고 감방 안을 떠다녔다. 그러자 무슨 소리가, 처음에
는 먼 파도소리 같더니 그 다음엔 둥둥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점 커졌
다. 그것은 생사의 기로에 처했을 때 동방교도들이 외치는 구난주문이었다.
하늘에서 온 해모수의 자손, 강물을 다스리는 요정왕의 외손입니다.
괴로운 난리를 피해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불쌍하고 불쌍한 이 외로운 자손의 마음.
황천과 후투의 신령이여, 차마 버리시나이까.
주문소리는 점점 커져서 청각뿐만이 아니라 문간의 모든 감각을 울렸다. 입술, 손가락, 관자놀
이, 심지어 혈관 속까지를 북소리처럼 둥둥거리며 채우는 것이었다. 둥둥, 둥둥... 문간은 죽음을
맞는 사람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원진이 깜짝 놀라 문간을 흔들었다. 순간 문간은 이 지상
의 모든 것들이, 산 자건 죽은 자건 모두 그와 함께 있고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존재들임을 깨달
았다.
그러자 갑자기 귀에서 들리던 모든 소리가 멎었다. 지극히 괴괴하고 지극히 농밀한 침묵 속에
서 아주 조용하고 가까운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 문간아... 문간아, 내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문간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어떤 현실 속에서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밝은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문간은 태양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 자기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우러러보았
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나는 박다르. 동방의 빛이니라. 괴로운 날에 너에게 힘을 주는 신명이니라."
문간은 누니 까무룩히 잦아들며 의식을 잃었다.
바로 그 시간. 태양이 서쪽 산 너머로 사라지면서 선우도호부가 있는 거대한 운중성엔 땅거미
가 깔리고 있었다.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햇살이 성벽 위로 잔광을 비추는 저물녘. 한떼의 상인 들
이 흙투성이의 윗도리를 걸친 한 사내를 오랏줄에 묶어 도호부관아가 있는 내성으로 들어가고 있
었다.
선두에 선 중년 사내의 입초한 병사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스스럼없이 깊은 해자 위에 놓
인 잔교를 건니 성안으로 들어섰다. 일행은 성문 안 흰 돌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했
다. 녹음이 울창한 구릉을 타고 앉은 성 서쪽은 갈수록 점점 높아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민간의
불빛이 밝아지면서 언덕 전체가 별빛의 바다인 양 반짝였다.
일행은 드디어 선우도호부의 내영 감옥에 도착했다. 돌을 쌓아 성벽의 일부처럼 보이는 감옥
입구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육중한 철문이었다. 철문 좌우의 꽂을대에 횃불이 여러 개 걸려 있
었다. 내일 톤유쿠크의 처형이 있는 만큼 정문의 감시는 두 배로 불어 있었다. 철문 앞의 입초병
만 10 여 명이었다. 돌궐인들이 어떻게든 톤유쿠크를 구하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돌궐인들은 부흥운동을 지도하다 비운의 죽음을 맞은 그의 형 웬푸를 열렬히 흠모하고 있
었다.
중년의 사내는 일행을 멀찌감치 기다리게 하더니 철문 앞의 감시초소로 들어갔다.
" 여어, 유나으리, 오랜만이야! 요새는 손이 좀 붙나?"
초소에 들어선 사내는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안에 있던 옥사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관이 좁
고 눈이 음침해보이는 옥사장은 씨익 웃으며 사내의 손을 맞잡았다.
" 웬걸. 형편없어. 끗발이야 마대인랑 놀 때가 좋았지."
두 사람은 몇 달 전에 사귄 노름 친구들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킬킬거리며 잡담을 나누
었다. 이윽고 옥사장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 아까 얘기는 들었는데 무슨 일야? 민간인 하나를 여기 하루만 가둬달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린감? 그러다가 들키면 안되는데..."
마대인이라 불린 상인은 오랏줄에 묶인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 저 자식이 내 노름빚을 생짜루다 떼먹었단 말야. 정양성으로 달아난 걸 그쪽에 특별히 부탁
해서 잡았어. 그런데 저 개놈의 자식이 아무리 윽박질러도 돈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생각다 못해
데려온 거야. 하룻밤 이 감옥에 썩혀서 겁 좀 주자는 거지. 아주 포기하고 죽여버리려는 것처럼
말야. 특별히 사형수들이 있는 으시시한 방에 처넣어서 잘 좀 얼러달라구. 알았지?"
마대인으로부터 은전이 짤랑대는 주머니 하나가 옥사장에게 건너 갔다. 뇌물을 받아 옥사장은
그 값을 했다. 마가 데리고 온 사내는 늘씬하게 두들겨맞은 뒤 지하 2층의 사형수 감방에 입감되
었다.
한밤중이 되자 옥사장은 안에 있던 간수들은 불러 마대인과 셋이 주사위 노름을 시작했다. 그
런데 이게 웬일일까! 오늘은 어쩌자고 이렇게 재수가 좋단 말이냐! 공짜로 노름 밑천이 들어오더
니 손끝에는 조자건(조조의 아들. 도신이라 불리며 후대 노름꾼들이 숭배했던 주사위 노름의 대
가.) 의 귀신이 붙었나 보다. 마는 연거푸 돈을 잃었고 간수들은 철문 앞 감시초소에 모여 신나게
주사위를 던졌다. 그런데 이 마라고 하는 중국인 호상, 자세히 보면 돌궐 사람 욱사시부를 닮아
있었다.
4
나흘 전, 그러니까 검진천이 죽고 고문간이 잡혀가고 신책군이 고구려군 군영을 접수하던 날이
었다.
민간인들의 관모와 신발을 훔쳐 신고 군복을 뒤집어입는 어설픈 옷차림의 청년들이 선우도호부
의 남쪽 농경지대로 숨어들었다. 황하의 지류가 흘러가는 이곳에는 측천무후가 개간하게 한 검고
비옥한 둔전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즈음에는 벌써 매해 수천 곡(1곡은 10말) 의 조를 수출하고 뽕
나무들이 양잠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란 밭들이었다. 청년들은 강에 잇닿아 있는 드넓은 밭을 지
나 관나라고 하는 고구려 여인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 청년들은 술집에서 자빠져 자느라 귀대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신책군에 의해 연금되지 않은
고구려 기병 사단의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뒷골목을 우왕좌왕하다가 자기네 같은 낙오병들이 이
곳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오는 길이었다.
관나는 마흔이 넘은 요동성 출신의 과부로 중국인들에게까지 소작을 주고 있는 이 일대의 대지
주였다. 신앙이 돈독한 동방교도이고 성품이 시원시원한 여장부여서 도호부에 사는 많은 고구려
인들이 그녀의 집에 드나들었다.
낙오병들이 관나의 집에 도착하여 창고로 들어가보니 40, 50 명이나 되는 전우들이 모여 있었
다. 이들은 관나가 들여보내준 된장국(고구려 사람들은 된장을 잘 만든다)에 조밥을 먹으며 대책
을 의논했다. 그러나 대책이 있을 리 없었고 미칠 듯한 울화만 치밀었다. 소대장들부터 밥알을 튀
기며 펄펄 뛰었다.
" 이 새끼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안하네. 우리가 반란군이야? 우리가 반란군이냐 고오? 반
란군과 맞짱뜨느라 죽을 고생을 하다가 돌아왔는데 은상은 못 내릴 망정 이게 무슨 좆같은 짓들
이냐 고오."
눈썹이 짙고 턱이 억센 손모례수였다. 모례수는 고구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만리장성 부
근 은주 출신으로 열네 살에 벌써 뚜쟁이 짓을 했을 만큼 힘이 세고 오만한 소대장이었다. 은주
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 다니다 군대에 들어온,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는 스무 살짜리였다. 그
러자 <으으리를 지키기 위해> 모례수를 따라 군대에 들어왔다는 같은 은주 출신의 소대장 우괴
유가 왈왈거렸다.
" 야, 왜 손만영이라고 도호부에서 군부참군하는 난쟁이 좆자루 만한 새끼 있지 않냐. 그래, 그
킷따이 새끼! 그 새끼가 이 참에 아주 우릴 뭉개려고 코발랐다느만. 우리가 요동성 어라하의 지시
를 받고 돌궐 놈들과 짝자꿍을 했다는 거야."
" 야, 씨발, 가자. 가! 저 자식들 군영에 불을 싸질러버리자고."
좀 떨어진 곳에서 한 명이 칼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얼마전 흑산에서 고문간을 구출한 공
으로 소대장으로 승진한 검진천 연대의 천소부였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이 검진천의 연대와 송새
별의 연대의 장병들이었다. 사병들이 그의 바지를 붙들고 말렸다.
모두 마음 같아서는 정말로 불을 싸지르고 싶었다. 고문간 장군은 사람이 좀 꺼벙하기는 했지
만 돈 욕심은 없었다. 그는 원정이 시작될 때부터 은상과 전리품이 생기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장병들에게 똑같이 분배하겠다고 말했다. 고구려 기병 사단은 이 3년간의 원정으로 주체하기 어
려울 만큼 많은 양과 말과 돈과 모피와 페르시아산 모직물을 챙겼다. 고문간은 이것을 미리 계산
해서 사병들 앞으로 일일이 장부를 만들어주었다. 토벌 원정부터 종군한 병사들은 정말로 큰 재
산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가면 가족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사병들은 영주로 돌아가면 번듯한 농가 한 채와 밭뙈기와 가축과 마누라, 하녀 한 명을 사서
재미있게 살아보리라는 달콤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번 일로 이 소박한 꿈들이 물거품이 된 것
이다. 조사가 끝나면 반란 음모죄에 연루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전쟁터에서 모은 그 눈먼 전리품
들, 초원 곳곳에 유목민들과 상인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하고 있는 가축들은 공중으로 떠버릴
것이다.
그러나 무슨 수로 보복을 한단 말인가? 모두 술집으로 몰려갔다가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허리
에 찬 칼말고는 전혀 무기가 없었다. 설사 무기가 있어도 이 정도의 인원으로야 섶을 지고 불을
뛰어는 격이었다. 그런데 자정이 지났을 때 이 과부집에는 새로운 인물이 10 여 명의 장교, 사병
들과 함께 나타났다. 실의에 빠져 있던 낙오병들은 환성을 질렀다.
" 고도위니임!"
연대장인 고공의였다. 조사가 진행되자 손거루와 극대일은 카라쿰 패전을 둘러싼 모든 혐의를
고문간과 가장 친했던 고공의에게 뒤집어 씌워버렸다. 이런 공기를 간파한 고공의는 신뢰하는 부
하들과 함께 군영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도망쳐온 것이었다. 연대장이 나타나자 널브러져 있던 낙
오병들은 아연 힘이 솟았다. 스물아홉살의 고공의 눈빛을 번쩍이며 일장 연설을 했다.
" 잘 들어라! 나라가 패망한 지 올해 벌써 14년이다. 그 동안 나나 너희들이나 망국민으로 피눈
물나는 세월을 겪었다. 당나라 너희들은 거란이나 돌궐은 투항자(항호)라고 하며 막대한 사물을
내리고 병장기도 뺏지 않고 부족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세력을 보존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처음
부터 우리 고구려 사람들은 전쟁포로(부로)라고 하며 아비와 아들, 아내와 남편을 뿔뿔이 찢어놓
고, 수만 명의 사람들을 양주 서쪽 한 포기의 풀도, 한 곳의 샘물도 발견 할 수 없는 인적미답의
황무지로 끌고 갔다. 너희들은 그 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때 그 비통하고 억울한 심정
들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병사들은 고개를 쳐들고 열심히 들었다. 연대장은 역시 왕족 출신이라 뭔가 좀 굵직굵직한 말
을 했다.
"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당나라 군대에서 수년을 같이 싸워준 우리들에게도! 달라진 것은 아
무것도 없다. 알겠나? 지금 당나라 놈들은 생떼 같은 트집을 잡아 우리 어라하를 압송해갔다. 요
동성에서 많은 지도자들이 반란음모죄로 처형당했다. 백성들은 강제로 보따리를 싸서 또 다시 산
설고 몰 설은 하남땅, 농우땅으로 추방당하고 있다. 이미 10여만 명이 추방당했다. 이 가운데는
토번 원정길에서 옛날 양주 서쪽으로 추방당해서 돌아오지 못한 우리 유민들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더냐? 지금도 노비와 같은 예속민으로 그냥 지내며 초근목피
로 연명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고공의는 병사들의 흥분한 숨소리 하나하나를 들을 수 있
었다.
" 이 와중에 우리는 당나라의 군인이라고, 그래서 무사할 거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착각
이다. 지금 당나라의 정규군에 기병대로 편입되어 있는 우리들은 고구려 유민사회에서 가장 정예
화된 무력이다. 이 중국 천지에 우리 같은 부대는 어디에도 없다. 4천 500명이나 되는 우리는 새
로이 고구려인들을 천사 시켜야 하는 당에게 큰 위협이다. 그래서 당나라 놈들은 우리를 핍박하
여 분산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알겠나? 이번 조사로 반당적인 성향을 가진 장교와 사병들은 모두
파면해서 멀리 유배시킬 것이다. 남은 자들은 단 단위로 쪼개서 먼 서역 전선에 뿔뿔이 흩어놓을
것이다. 너희들은 모두 전리품들을 잃고 알몸뚱이로 최일선에 배치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다
죽어 없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너희들은 이래도 좋겠는가?"
흥분한 고구려 병사들은 창고가 떠나갈 듯이 고함을 질렀다. " 아닙니다." "당나라 놈들에게 죽
음을!" "당나라에 붙어먹는 거란 놈들에게 죽음을!" "군영에 불을 지르자!" 온갖 외침이 중구난방
으로 터져나왔다. 고공의는 한동안 말을 끊고 병사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옛날 영용했던 고구려의 군인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이제 군대에는 우리들만이 남았다. 사
방 1만리에 고구려 사람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 사람들은 우리들일 뿐인 것이다. 우리
는 쫓기고 있고, 숫자도 적고 가진 것도 없다. 우리의 유일한 재산은 거룩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
은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 그것 하나뿐이다. 너희들 그래도 좋으냐? 나와 같이 죽어주겠는냐?"
고공의의 물음은 곧 열렬한 대답으로 되돌아왔다. 이 창고에 모인 50 여명은 이판사판의 심정
이 되어 충심으로 신종하겠다는 결의를 표한 것이다.
" 고맙다. 그렇다면 나에게 계획이 있다. 지금 선우도호부 내영 감옥에는 우리의 고문간 장군과
죽은 웬푸의 동생 톤유쿠크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감옥을 깨부수고 두 사람을 구해서 우리 다
같이 카라쿰으로 들어가자. 어떤가?"
병사들은 순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고공의의 계획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신책군 놈들에
대한 복수가 될 것 같았다. 감옥을 깨부수는 것. 그리고 놈들이 우려하는 대로 반란군에 가담해버
리는 것. 과연 감옥을 깨부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군영에 불을 지르는 것보다는
덜 위험할 듯했다. 병사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 조옿습니다아!"
" 고맙다. 안심해라. 감옥을 부수는 일은 절대로 안전하다. 계획 대로만 되면 우리는 한 명도
죽지 않고 카라쿰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자, 너희들에게 소개해줄 분이 있다. 몇 달 전까지 대
총관부의 감군으로 있던 욱사시부 도위시다. "
고공의는 창고 밖을 향해 큰소리로 욱사시부를 불렀다. 욱사시부는 검은 담비털 모자에 무명으
로 안감을 댄 붉은 서역식 외투를 걸치고 나타났다. 부유한 상인처럼 보였는데 그 얼굴은 군인으
로 있을 떄보다도 오히려 더 당당해 보였다.
지난해 욱사시부는 배행검 장군의 밀사로 둘궐 반란군과의 막후 교섭을 담당했었다. 대총관부
와 반란군의 지휘부를 오가며 아시나부안을 회유하여 당에 투항하도록 설득한 사람은 바로 그였
다. 그런 욱사시부인 만큼 부안과 웬푸가 잔인하게 처형되자 누구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다.
욱사시부는 그런 불의를 조정의 잘못으로 돌리고 체념할 사람이 못되었다. 중국에 살 때도 돌
궐식 이름을 고집할 만큼 자존심이 강했던 욱사시부다. 일평생 신의를 아는 사람, 신풍호한 욱사
시부라는 명예를 지키고 싶었던 그가 갑자기 가장 야비한 배신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동족을 진압해야 하는 처지에 고민이 많았던 격이었다. 욱사시부는 몇 달 전 소수의 부하들을 데
리고 부대를 탈영해 버렸다.
" 반갑습니다. 저는 지금 카라쿰의 명령을 받고 여기 왔습니다. 우리 돌궐 사람들은 지난 두 달
동안 톤유쿠크님을 구출하기 위해 모종의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에 부딪혀서
작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구려 기병 사단에는 군대에 오기 전에 채금꾼, 채철꾼으로 일
하던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 중에도 그런 분 안 계십니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소대장 천소부였다.
" 고맙습니다. 저희들을 좀 도와주십시오. 이 욱사시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 글쎄요, 제가 도울 수 있을지..."
천소부는 욱사시부와 함께 과부의 집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바로 사흘 전의 일이었다.
마대인의 돈을 떼먹었다는 사내는 감방으로 던져지자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매질에 못 이
겨 기절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간수들이 사라지자 금방 몸을 일으켰다. 당나라의 형옥률은
매우 관대해서 후대처럼 허리를 부러뜨릴 듯이 온몸을 짓누르는 큰 칼을 목에 채우지 않았다. 그
는 고양이처럼 잽싸게 다가와 인사불성이 된 고문간의 상태를 살피더니 곧바로 원진에게 말을 걸
었다.
" 바나박. 아시테 이르킨! (이보시오. 아시테 족장님!)"
청년이 나직한 돌궐말로 원진을 불렀다. 문간의 안색을 살피고 있던 원진은 그제서야 청년을
쳐다보며 눈을 꿈벅거렸다.
" 저는 고구려 기병대의 천소부라고 합니다. 어르신과 고문간 장군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
톤유쿠쿠의 눈에 미묘한 긴장이 떠올랐다.
" 우릴 구하다니 어떻게?"
" 지난 두 달동안 돌궐 사람들은 어르신을 구하기 위해 이 지하감방으로 토굴을 파왔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암반에 부딪혀 그걸 우회하느라 그만 방향을 잃고 말았지요."
" 그랬었군! 요즘 벽에서 계속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니..."
" 제가 나서서 해결을 했습니다. 이제 이 근처까지 거의 다 왔습니다. 정확하게 돌관시키기 위
해 제가 들어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부는 감방 안에 있는 밥그릇에 물을 붓더니 거기에 가느다락 대나무 조각에 묶은 얇은 지남
차(자기 나침반이 실제의 진남북을 가르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것
은 11 세기 심괄의 <몽계필담> 부터이지만 그것의 사용은 2, 3 세기 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된
다. ) 를 띄웠다. 그리곤 감방의 바닥과 벽에 귀를 대고 잠시 소리를 들었다. 소부는 드디어 확신
을 갖고 미리 약속한 신호대로 돌멩이를 들어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8시간 동안 계
속했다. 희끄무레하게 날이 밝기 직전 지하감방의 돌벽이 뚫렸다.
5
치익, 치이익.
마치 꿈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따뜻한 말소리가 방안을 훑고 올라갔다. 배행검은 차주전자
에서 나오는 따뜻한 수증기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하얀 수증기에 무덤과도 같
은 방안의 어둠이 웅성거렸다.
영순 원년(682) 4월. 파교의 버들가지 아래 아가씨들의 비단옷 나부끼고 초롱불이 영롱한 거리
거리에 복사꽃 오얏꽃이 흩날리는 장안의 봄밤이었다. 창문을 통해 거리를 지나는 아가씨들의 웃
음 소리를 들으며 늙은 배행검은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불을 지르고 타죽을 것인가, 아니면 칼을 물고 엎어질 것인가.
낡은 배에 스며드는 물처럼 그의 초췌한 얼굴에는 우울이 차올라 있었다. 사흘 전 그가 무후의
무서운 안배를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만리의 전쟁터를 달리며 온갖 싸움을
치러온 배행검에게 진짜 무서운 적이 나타난 것이다.
엿새 전 장안성 영숭방에 위치한 배행검의 자택은 무승사가 지휘하는 비서감의 밀사(비밀경찰)
1천여 명에 의해 개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이 포위되었다. 몇 달 전부터 소리소문 없이 배
행검의 웃집들을 점검한 비서감 요원들은 배행검에게 무후의 밀서를 전달하던 이날 행동을 개시
한 것이다. 뒷문, 샛문, 골목길은 물론 하수구까지 완벽하게 봉쇄해버렸다. 금아도대총관에 임명되
어 하서로 출정할 준비를 하던 배행검은 완전히 기습을 당한 꼴이었다.
" 대총관께선 지금 신병 위중하시오. 황제께서 특별히 어의를 보내 치료하고 계시니 일절 손님
을 받을 수 없소."
무승사는 아예 골목 입구의 집에 붙박여서 이런 말로 배행검에게 오는 손님들을 돌려보내게 했
다. 부하들이 막기 힘든 고위장성이 오면 자신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그러면서 매일 배행검을 찾
아가 밀서에 대한 답장을 내놓으라는 수수께끼 같은 협박을 계속했다.
배행검은 무후의 밀서를 읽고 미친 듯이 분노했다. 뼈에 사무치는 배신감이 가슴 밑바닥으로부
터 부글부글 끓어 올라왔다. 그러나 밤새 잠 못 들고 몸을 뒤척인 배행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비정하리만큼 철저하고 영악한 무후가 이렇게 발톱을 드러낸 이상 그 수배에는 빈틈이 없을 것
이다. 이 연금상태를 빠져나가 어떻게 해 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확실히 계산이 되었
다. 길은 막히고 운은 다하였다. 여기서 발버둥을 치면 실로 준열가흑 그 자체인 무후의 보복이
그의 나이 어린 처와 아들에게 떨어질 것이었다. 이제 배행검에게 남은 길은 무후의 마지막 <권
유>를 받아들여 조용히 자살하는 것뿐이었다.
배행검은 의자에서 일어나 벌겋게 달아오른 두 눈을 손으로 부볐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고
노의 빛이 그의 눈동자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잉걸불 속에서 자신의 마르고 주름
진 손가락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은 차 주전자를 화로에서 내려 놓고는 방을 천
천히 가로질러 복도로 나갔다.
집사도 종복도 부르지 않고 배행검은 혼자 조약돌이 깔린 아름다운 정원을 걸어 맞은편 누각으
로 향했다. 배행검이 손수 나무를 심고 돌을 옮겨 가꾼 정원이었다. 뒤뜨락 담벽 밑둥에 구멍난
곳으로는 한 줄기 시냇물을 만들어 너비 한 자 가량 되는 도랑을 통해 정원 한복판을 흐르게 했
다. 배행검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며 옷깃을 들고 그 냇물을 건너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세상 모르고 진종일 집안을 돌아다니며 놀던 배행검의 다섯 살 난 아들 광정이 자고 있
었다. 배행검은 조용히 이불을 여투어 주고 아이의 침상 옆에 앉았다.
아이는 들릴 듯 말 듯한 숨을 쌔끈 거리며 혼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혼갑이 다되어 얻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이었다. 배행검은 7년전 토번 원정 때 강간하려는 병사들을 때린후
도망치고 있는 귀족 처녀를 구한 적이 있다. 그 토번 여자가 고적씨로 바로 이 외아들의 모친이
었다 휘영청 영창에 걸린 달빛이 아들을 내려다보는 배행검의 각진 얼굴을 비추었다. 파사와 하
서와 토번과 하투, 실로 실크로드 전역을 종횡하며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영웅의 풍모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보이는 것은 골 깊은 주름에 인생의 번뇌가 편편이 스며든, 그저 사랑하는 자신
의 앞날을 걱정하는 외로운 노인의 얼굴이었다.
배행검은 조용히 누각을 빠져나와 자신의 서재로 돌아왔다. 무후의 밀서는 탁자 위에 엿새 전
에 펼친 그대로 불길한 동물처럼 놓여 있었다. 배행검은 차 주전자 앞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
고 눈을 감았다. 수십 번 읽고 또 읽은 무후의 말이 무슨 환청처럼 귓전을 울렸다.
" 대당 금아도대총관 배공께 짧은 글월을 전합니다. "
이렇게 시작하는 무후의 밀서는 그녀 특유의 화려하고 감각적인 문장으로 직접 쓴 사신이었다.
무후의 서두는 이러하였다.
... 봄이 지나가면 모든 꽃이 지고 꽃구경하던 사람들도 각기 제 길을 찾아갑니다. 이순을 앞두
고 보니 과연 사람의 한 살이가 이와 같아서 궁통과 진퇴, 희비와 생사를 함께 하기 어려움을 알
겠습니다.
공은 그 동안 소진, 장의 같은 지략과 오자서, 곽거병 같은 용맹으로 변경을 토평하시고 넓은
도량과 후한 덕으로 조정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도산검림에서 부처님을 본 듯 공을 흠
모하고 대신들은 이를 모아 공의 공적을 칭송합니다. 본후 또 한 늘 공의 녹위를 더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더니 지난해 공의 아들 광정을 불러보고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광정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익힌 어린 나이에도 과묵하고 침착하여 장차 대성할 그릇입니다.
공께서는 평소 장부란 충성과 의기에 몸바치는 것, 구구이 공명 따위를 논해선 안된다고 하셨습
니다. 그러나 본후는 공의 대에 가지 못한 공명이 장차 자식의 대에 보태진다면 그 또한 아름다
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본후는 어려운 일에나 위급한 때나 항상 공을 의지했고 공은 진심갈력으로 황실을 받들었습니
다. 공이나 나나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은 불과 10여 년입니다. 본후는 참으로 유덕한 공과 더
불어 여생을 즐기고 조정에서 서로 안부를 물으며 지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천분이 박복
하여 그 같은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보위의 입후는 천하의 중대사입니다. 유능한 군주가 아니면 천하는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본후
가 내 뱃속으로 낳은 자식 홍을 폐하고 현을 세운 것, 그리고 다시 현을 폐하고철을 세운 것은
오로지 천하 만백성의 앞날을 걱정한 것입니다. 지금 조정의 유치한 배면서 생들은 태자를 싸고
돌며 본후의 임조를 비판하고 병석에 누운 폐하의 양위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 사악한 무리들
이 뜻을 모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백만 야전군의 장령인 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후의 밀서는 여기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공은 아실 것입니다. 이 나라는 본후가 아니면 다스려지지 않
습니다. 날마다 황제의 식탁에 90근(54kg) 의 서류가 올라오는 방대한 제국입니다. 신상필벌의 칼
을 쥐고 신하가 부리면서 매상에 명찰선단하는 군주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폐
태자 홍과 현 그리고 당금의 태자 같은 자들은 내 자식이지만 인정에 좌우되는 소인배들로 도저
히 군주의 그릇이 아닙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훌륭한 군주는 우연한 선을 기대하지 않으며 오직 필연의 도를 행한>고 했
습니다. 선이란 예로부터 세상에 드문 것이라서 군주는 그런 것을 기대하며 일을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절대 사람을 믿지 않으며 엄격하게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군주 앞에서만 신하는 무
고나 아부로 출세할 생각을 버리고 다투어 직무에 충실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구천(천자의 자리)에는 구천의 고독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믿지 않는 자의 고독입
니다. 정무를 재가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천자는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외로운 제 그림자만
아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가혹한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자는 처음부터
천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공은 이런 문리를 훤히 알 나이에 서생 나부랭이들의 부추김에 들떠서 우유부단한 어린애를 싸
고 돌았습니다. 돌궐의 반란군들을 옹호했고 고구려의 불측한 무리들은 동정하여 장차 큰 변란의
씨앗을 키웠습니다.
넉넉함을 알면 욕을 면하고 머물 줄 알면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몰랐단 말입니까? 이제
공의 길은 끝나고 공의 운은 다했습니다. 본후는 공이 세속의 근심 걱정과 영욕을 잊으시고 빈산
에 들어가 하늘로 이웃을 삼고 해와 달로 벗을 삼기 바랍니다.
무후의 밀서는 이렇게 끝났다. 이것은 얼핏 보면 초야로 은퇴하라는 소리같지만 그렇지가 않았
다. 제일 마지막 문장에서 <빈산에 눕다>라는 표현은 죽을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이다. 무후
는 태자당의 구심점이 되고 북방과 동방의 오랑캐들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배행검을 위험시한
나머지 자결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외아들 광정을 들먹이면서 조용히 죽어주면 후사를 돌봐주
겠다는 암시도 하고 있었다.
배행검은 차 주전자를 기울여 마지막 차 한잔을 따랐다. 찻잔을 코 앞에가져오자 맑은 차 향기
가 잔인하게 감각을 자극했다. 조용한 서재에는 그의 심장이 내지르는 소리만이 윙윙 현기증을
일으키며 번져갔다.
살고 싶지 않은가?
가슴 밑바닥에 꾹꾹 눌러 처박아두었던 질문이 또 떠올랐다. 그러자 온몸을 싸늘하게 하는 전
율이 찾아왔다. 배행검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들고 있던 차를 쏟아버렸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칼
걸이에 놓인 애장의 소도 무경을 잡자 지체없이 오른손으로 칼을 뽑았다. 배행검은 이를 악물었
다 그토록 잔인한 불면의 고뇌를 거듭해 도달한 결론이다. 이젠 더 미룰 수 없었다.
애초부터 죽음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바보같이 죽다니... 그 억울함이 여태까지 결행을 미루게 했던 것이다. 군문에 발을 들여
놓은 이래 배행검은 언제나 무인다운 죽음을 생각해왔다. 칙명을 받들어 국가의 흥망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수많은 부하들의 생명을 맡게 되면 무인은 그 책임의 중차대함에 자신의 생사 따위는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저 묵묵히 주어진 칙명을 수행하며 자기 생애의 마지막 전장을 찾아갈 뿐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궐이 반란하고 대식국이 밀어닥치는 이 난국에 이런 바보 같은 전쟁에 휘말려서... 배
행검은 칼끝을 자기 쪽으로 돌리고느 석상처럼 굳어졌다. 지나온 60여 년이 만등회의 불빛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나는 당조의 치세를 위해 내 일생을 바쳤다. 한 점 사심도 없이 성심성의를 다
해왔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예로부터 와석종신한 충신이 있었더냐... 배행검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싸늘한 칼날을 입에 문 배행검은 고목이 쓰러지듯 땅바닥으로 엎어졌다.
이튿날 아침 배행검의 집을 포위했던 밀사들이 철수했다.
그 뒤를 쫓아 배행검의 갑작스런 병사를 알리는 부고가 장안성 곳곳으로 달려갔다. 향년 64세.
장례는 배행검이 미리 자택의 집사에게 알려놓은 대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칙명을 봉행하던 도중
신병으로 죽었으니 불충이라, 일절 조문객들을 받지 말라는 유언이 있었다고 했다.
장례식이 끝나던 날엔 비서감 무승사가 다시 배행검의 서재로 들이닥쳐 <선보> 10권을 비롯한
배행검의 저술들 일체를 압수해 황궁으로 돌아갔다. 한 달 뒤 조정은 그에게 유주도독을 추증했
다.
" 그만한 대공을 세운 대총관에게 고작 유주도독이 뭐야!"
평소 배행검을 존경하던 부하들이 펄펄 뛰었지만 곧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렸을 때 소정방에게 병법을 배운 배행검은 나아가면 변방을 평정하고 들어오면 조정을 안정
시킨 일대의 거인이었다.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여 무수한 명장
들이 길러냈다. 백제인으로 후일 연연도대총관 연국공의 지위에 까지 오른 흑치상지, 말갈인으로
안동도안무사 요양군왕까지 출세한 이다조를 비롯하여 왕방익, 왕거, 당금비, 유경동, 곽대봉, 최
지변 등 현종조까지 군에 남아 당의 국경을 지켰던 기라성 같은 명장들이 모두 배행검의 참모요
제자들이었다.
배행검의 불행은 시종이로간 무후 반대파의 구심범이었다는 데 있었다. 소실적에 그는 왕황후
의 충실한 지지자였고 오랫동안 수십만의 대와 원정군을 지휘하면서 무후의 권력을 견제하였다.
그가 데리고 있던 가장 중요한 장군인 왕방익은 왕황후의 사촌 오빠였다. 무후는 배행검의 능력
과 충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조정의 정치적 갈등 때문에 그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었다.
무후는 약속을 지켰다. 배행검이 남겨두고 간 외아들 배광정은 무후의 각별한 배려로 약관의
나이에 태상승(황제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몇 번의 무고와 좌천이 있었으나 현종조가 되자 병부
낭중 등의 청요직을 거쳐 마침내난 시중이 되었다. 배행검이 삼공의 최고위로 당조에서는 최고의
명예직인 <태위>에 추증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먼 훗날의 일. 배행검의 갑작스러운 죽음 당장 당이 대외전쟁에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손실을 가져왔다. 무후가 마지막까지 배행검의 제거를 망설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결국 돌궐제국의 재흥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6
문간의 일행은 구릉 위에 나란히 서서 망망한 고비사막을 내려다 보았다.
누가 여기를 사막이라고 했는가. 이제까지 지나온 것은 시커먼 돌들이 물결치는 바다였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도 그랬다. 모래는 거의 없었다. 길은 이 구릉에서 천천히 내려가다가 다시 완만
한 오르막을 이루면서 풀 한 포기 없는 돌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멀리서 있는 둘쭉날쭉한 암석들
은 마치 일제히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죽은 자들의 풀어헤친 머리처럼 보였다. 문간은 깊이 한숨
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문간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이런 장소, 이런 순간을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귀방의
침묵과 고독과 영원과 공허가 가슴 한 구석을 깊이 찔렀다. 갑자기 몸을 괴롭히던 통증이 사라지
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그 쓸쓸함 까지도 사랑스
러웠다.
" 장군님, 조금만 참으세요. 저 돌산만 지나면 어머니의 호수(에지 노르)에요. 2시간도 안 걸립
니다. "
손무례수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문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숨결은 여
전히 거칠었고 앙상하게 마른 뺨에선 끊임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천소부가 다가와 무
에 적신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훔쳐주었다.
부하들이 이런 환자를 데리고 한 달이나 관군의 추적을 피해온 것은 기적이었다.
선우도호부에서 탈옥한 뒤 고문간과 고공의의 일행은 즉시 세 개의 부대로 나뉘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적의 수비망을 뚫기 위해서였다. 욱사시부와 톤유쿠크를 따라가는 부대, 고공의를 따
라가느 부대, 그리고 고문간을 데리고 갈 가장 위험한 부대. 감옥에서 나온 고문간은 계속 고열과
기침에 시달렸다 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모기 소리만한 신음 소리를 내며 앓았다.
천소부, 손모례수, 우괴유의 세 소대장들과 무불, 안류, 보주홀, 을파우태의 네 하사관들이 고문
간을 맡았다. 모두 열다섯, 열여섯에 군에 들어와 지금 10대 후반이거나 갓 스물인 한창 나이들이
었다. 이들은 소그드 상인들로 변장했다 욱사시부가 붙여준 돌궐인 안내자를 따라 멀리 서쪽으로
우회하여 음산산맥을 타고 카라쿠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여정은 금방 교란되었다. 선우도호부의 진가도와 왕본립이 손만영을 대장으로 하는
거란 기병대의 추격조를 10여 개나 조직하여 고문간과 톤유쿠크를 체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추
격대를 피해 동쪽으로 북쪽으로 도망치느라 좀처럼 음산산맥으로 접근할 수 가 없었다. 엿새 전
에 갑자기 들이닥친 추격대를 뿌리치고 달아나다가 돌궐인 안내자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고문간 일행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추격대를 피해 카라쿰에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
다면 위구르족을 막기 위해 얼마전 카라쿰에서 고비사막의 <네링 고비>(지금의 내몽골 자치주
신묘진 부근) 로 출동했다는 아시나 쿠이의 사단을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3년 전 부대를 따라
네링 고비 근처를 지난 적이 있다는 손모례수가 앞장섰다. 그리하여 고문간 일행은 사흘 전 고비
사막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모례수는 문간을 다시 말 등에 엎드리게 하고 이제까지와 같이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팔과 허
리를 단단히 묶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간은 손을 젓더니 자신이 말고삐를 잡았다. 문간이 직접 말
을 몰 수 있을 만큼 회복된 것을 보고 부하들은 크게 기뻐했다. 일행은 모두 말 위에 올라 최대
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밤중이 되기 전에 물이 있는 곳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고비사막은 사람이 전혀 살지 못하는 땅이 아니다. 소금기가 짙은 것이 흠이지만 군데군데 오
아이시스가 있고 그 옆에는 빈약하나마 초지도 있고 자크나무도 자란다. 지하수가 풍부해서 풀이
자라는 지역에는 유목이 가능하다. 고비사막의 풀은 아주 질이 좋고 영양가가 많아서 부족에 따
라서는 고비를 가장 이상적인 여름 야영지로 치기도 한다.
하늘에 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달리던 말들이 보폭을 좁히며 히이잉, 힝 울었다. 물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일행은 드디로 <어머니의 호수>에 도착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의 호수
는 말만 호수일 뿐 실제는 그저 오래된 진흙탕의 음습한 지층 속에 갇힌 그렇고 그런 짧은 하천
이었다. 일행은 갈라진 바위 틈사이에 고인 썩은 물, 복통과 구토를 일으키는 탁한 물들이 고인
구덩이들을 지나 마침내 우물에 도착했다.
우물 옆에 있는 가난한 유목민들의 천막에서 몇 명인가의 사람들이 나왔다. 모례수가 다가가
돌궐말로 인사를 했다. 유목민들은 사막의 예법대로 손짓을 하면서 갈증부터 푸시라고 권했다. 유
목민의 아이들이 돌을 던져 우물가의 가축들을 쫓아주었다. 일행은 우물물에 각자 얼굴을 담그고
오랫동안 물을 마셨다.
문간은 부하들이 그릇에 물을 떠오자 먼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 저희를 가엾게 여기시는 만월의 어머니 아란두님의 눈물이여, 땅을 적시어 저희를 소생시키
시나이다. "
부하들은 처음엔은 얼떨떨했지만 이제는 장군의 변덕에 익숙해졌다. 고문간은 감옥에 갔다오고
나서 사람이 아주 달라졌다. 거의 말이 없어졌다. 신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도 새벽마다 일어나 해
돋이 예배를 했고 무엇이든 먹을 때마다 기도를 했다. 잘 때는 또 달과 별빛에 밤의 안녕을 빌었
다. 뜬금없이 신앙열이 일어난 것 같았다. 부하들은 한결같이 동방교를 전혀 몰랐고 실제로 신앙
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지만 워낙 위험한 여로를 가느니만큼 신들의 가호를 비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해돋이 예배에 같이 꿇어앉아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문간에게 이것저것 동방교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럴 때만은 문간도 무거운 입을 열어 더듬더듬 자신이 아는 교리들을 설명해
주곤 했다.
문간은 물을 마셨다. 물은 무미건조하게 탁한 맛이 났다. 암석 투성이의 황량한 사막이 물 속에
녹아든 듯했다. 물과 함께 사막의 고독과 침묵이 문간의 육신 밑바닥에 고여들었다. 몸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맑았다. 캄캄한 사막의 별빛 아래서 영혼이 건조되
어 파랗게 불이 지펴지는 것 같았다. 하늘과 땅에 충만해 있는 빛의 말들이 무인지경의 광야 속
에서 생생하게 울리어 왔다.
은은한 달빛을 만나거라. 만물의 욕심과 상처를, 갈망과 고뇌를 잠재우는 어머니의 지혜를 들어
라. 자기를 버린 길고도 가벼운 잠이 삶의 환희를 길러내도다.
삶은 나이를 먹는다. 그러하니 삶을 존경하여라. 세상과 시간을 통틀어 네 앞에 있는 오직 한
번뿐인 이 삶은 아름답도다. 마음은 변하고 세월은 흘러가며 목숨의 모래는 쉬이 없어지나니 곧
잃어버릴, 그래서 더 아른아른한 이 순간을 찬미하라. 달빛에 젖은 이 세상을 언제나 처음 만나는
양 다시 만나거라.
빛의 말들은 아침이 되면 더욱 강렬해졌다.
동쪽을 향해 선 자손들이여, 아버지 해모수님의 억센 오른손이 밤의 칼집으로부터 뽑아내는 저
태양의 빛나는 칼을 보아라. 어머님의 달빛이 흣뿌린 아침 이슬이 아버님의 저 번쩍이는 칼을 기
다려 빛나는 도다. 이것이 신들이 너희에게 허락한 세상이니라. 너희는 이 대지의 주인, 이 하늘
의 주인, 이 삶의 주인이니라. 예속과 굴종 앞에서 너희는 너희의 머리 위에 밝게 머무는 아버지
의 칼을 기억하라.
감옥에서 박다르의 신명을 만난 뒤 문간은 매일매일 경전의 말씀들을 묵상하고 기도했다. 옛날
문간에게 동방교의 교리를 가르쳐준 사람은 아란두였다. 문간의 스승이었고 문간의 대제사장 이
었으며 문간의 단 하룻밤의 연인이었던 아란두. 잊고 있었던 아란두의 목소리가 매일밤 문간의
가슴에 새록새록 되살아 났다.
" 오늘 망국에 처하여 우리 민족이 받는 이 고통은 우리를 망각과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
는 당고르의 뜻입니다. 하늘의 주인이시며 모든 신들을 낳은 아버지이신 당고르의 신령은 아득한
옛날 그의 아들을 지상에 보내 가르침을 펴시었습니다. 그분들이 단군왕검이셨고 해모수님이셨으
며 주몽왕이셨습니다. 주몽왕을 마지막으로 신성시대는 끝났고 더 이상 세 분과 같은 신인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고르는 더 이상 우리들에게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하늘 높은 곳에서 표
징을 보이시며 땅에서 구원을 행하시는 것은 신명인 박다르입니다. 신령과 신인과 신명은 하나이
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입니다. 매일매일 해와 달을 우러르며 신명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빛의 말씀이요 사랑의 말씀이며 평화와 기쁨과 진실의 말씀입니다. "
에지 노르의 밤은 조용히 깊어갔다.
부하들은 모닥불 곁에서 말안장에 준비해온 낙타 가죽을 덮고 잠이 들었다. 문간 또한 차갑고
도 아늑한 사막의 별들을 헤아리다가 천천히 휴식의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고통스럽게 몸을
들볶던 병이 한결 잦아든 것을 느꼈다.
달이 지평선 너머로 기울었다. 사방은 더욱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불침번을 맡은 모례수는 꾸
벅꾸벅 졸고 있다가 문득 유목민 집의 개가 짖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모례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벌판 속에서 무슨 소린가가 들렸다.
모례수는 어깨를 덮고 있던 모피를 벗고 조용히 활에 화살을 메겼다. 다시 소리가 났다. 에지
노르를 둘러싼 암서의 구릉 위에서 돌멩이가 구르는 소리였다. 모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늑대
일까? 아니면 추격대일까? 모례수의 긴장한 심장이 꿈틀거리며 서서히 손발들이 피가 데워졌다.
그때 모례수의 예리한 눈이 밤의 어둠 위에 더 어둡게 돋을 새김된, 거무스름하게 뭉쳐진 하나의
그림자를 집어내었다. 벙거지치럼 낮은 거란족의 모자라고 생각되는 순간 모례수의 화살을 주저
없이 핑 하고 울리며 날아갔다. 모례수의 발이 말안장을 베고 잠든 우괴유를 걷어찼다.
" 적이다 일어나아!"
동시에 모례수는 늑대처럼 칼을 휘두른다기 보다 칼과 함께 몸을 내던졌다. 그의 발은 어둠을
박차며 허공에서 허공으로 도약했다. 거센 질풍이 일어났다. 야숭의 일격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파
공성을 날리며 모례수의 칼은 순식간에 네 명을 거꾸러 뜨렸다.
다음 순간 그를 향해 달려들던 거란군들이 잠에서 깨어난 우괴유와 천소부르의 화살에 잇달아
쓰러졌다. 남은 거란군들은 왁자지껄한 외침과 함께 구릉 위로 달아났다. 그러나 구릉 위에는 떼
거지로 부산하게 말에 올라타는 추격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쪽을 짓밟으려는 거이다. 모례수는
정신없이 모닥불 옆으로 달려오며 고문간을 불렀다.
" 장군님 어서 말에, 말에!"
문간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기민함을 발휘해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양손에 일곱 마
리 말들의 고삐를 쥐고 화살을 쏘고 또 쏘고 있는 부하들에게 달려왔다. 사람들은 천막도 식량도
팽개치고 대충 손에 집히는 것만을 걷어 말에 올라탔다. 여덟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의 배를 걷
어찼다.
주인들의 위기를 느낀 말들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란군의 군마들이 바짝 뒤쫓아왔
다. 물웅덩이에서 괴를 조이자 말들은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데 그때 문간의 등에 벌겋
게단 숯불을 지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뒷골이 깨지는 것 같은 통증이 엄습해 왔다. 추격병이
쏜 화살이 꽂힌 것이다. 위잉 하는 환청과 함께 기혈이 끓어올라 현기증이 일어났다.
문간은 자기도 모르게 고삐를 놓쳤다. 그러나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끝장이었다. 문간은 아슬아
슬한 순간에 양손으로 말갈기를 움켜쥐었다. 아수라 같은 투혼이 일어났다.
" 나쁜 놈들 !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문간은 등에 흥건히 피를 적시며 미친 듯이 한나절을 달렸다. 멀리 탕로가이산과 챠간산의 산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때 모례수의 말에 땅에 풀썩 쓰러졌다. 천만다행으로 모례수는 앞으로 날아
가 말에 깔리지 않을 수 있었다. 모례수의 말은 경련을 일으키며서 부들부들 떨더니 네 다릴를
뻗고 죽어갔다.
일행은 최후의 결전을 각오해야 했다. 문간의 상처도 상처였지만 이제는 말들이 더 달릴 수가
없었다. 말들은 모두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코로는 거품을 내뿜고 넘어갈 듯 숨을 몰아쉬고 있
었다.
문간의 일행은 자크나무의 덤불이 무성한 언덕에 마지막 포진을 했다.
천소부가 문간의 화살을 뽑고 지혈을 해주었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으나 문간 자신 워낙 쇠
약한 몸이었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온몸에 신열이 오른 문간은 또 쓸데
없이 감상에 젖어들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무수한 파란이 있었지만 이토록 비참해 보기는 처음
이었다.
천신만고를 겪으며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부하들. 이 의리 있고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놈
들을 어떻게 하나.
" 장군님, 용기를 내십시오. 상처는 얕습니다. 상처가 아주 얕아요!"
천소부의 위로가 참을 수 없는 애절함으로 고문간의 가슴을 더 쥐어뜯었다. 고문간은 엎드리고
등을 맡긴 채로 논물을 흘렸다. 그것은 절망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미안함이었다.
" 너희들, 그냥 선우도호부에 있었어도 아무 뒤탈이 없었을 텐데..."
" 예에?"
목이 메인 문간의 말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소부가 반문했다.
" 나 하나를 구하려다 이 지경이 되었..."
그런데 그때 문간은 머리를 뒤로 홱 젖히며 헐떡거렸다. 숨이 컥 막히면서 눈알이 빠질 듯이
아파왔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상한 몸에 화살의 상처, 한 달 내내 아슬아슬한 도주를 해온 무리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문간은 자신의 혼이 불에 삼켜져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의
식을 잃었다. 그의 헐떡거리는 의식은 죽음의 강을 넘보고 있어다.
천소부는 눈물을 흘렸다.
거란군이 달려오고 있는 저 망망한 사막이 마치 거친 풍랑이 뱃전을 때리고 있는 검은 바다처
럼 보였다. 그의 상관은 이제 막 생의 바다에서 난파하여 미지의 물밑으로 가라앉으려 하고 잇었
다. 고문간 장군이 죽어버리면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아니 당장 거란군들이 우리를 따라
잡을 것이고 똑같은 운명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열아혼 살의 천소부는 인간이 죽는 것이
충격적이라는 것을 생전 처음으로 느꼈다.
그런데 그때였다.
거란군이 언제 들이닥칠까 귀를 세우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귀에 설은 가축의 울음소리가 들
려왔다. 소부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무엇이 들린 사람처럼 달려가 언덕 뒤의 높
은 바위로 올라갔다.
이 언덕에서 탕로가이산 협곡으로 통하는 자드락길에 사람의 키만한 바퀴를 달고 네 마리의 낙
타가 끄는 커다란 이동막사(유르트) 하나가 오고 있었다. 그 뒤를 여러 개의 작은 이동막사가 뒤
따르고 있었다.
" 여봐들! 돌궐족 같애! 돌궐족이야"
소부는 전우들에게 소리치고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소부는 이 마당에 더 잃을 것이 없었
다. 그는 웃옷을 벗어 흔들며서 적인지, 편인지도 모를 그 이동막사를 향해 정신 없이 다가갔다.
" 킴 겔디!(웬놈이냐!)"
행렬을 호위하던 맨 앞의 말이 달려왔다. 말에서는 금방 시커면 사내 하나가 팽팽하게 당여긴
활로 소부를 겨누며 뛰어내렸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변발의 긴 머리타래를 둘둘 감아 목에 두른
돌궐인이었다. 소부는 허리띠의 칼을 풀어 사내 쪽으로 던졌다. 그리곤 땅바닥에 엎드려절하고 돌
궐말로 크게 소리쳤다.
"쿠타르막!( 살려 주세요!)"
그 목소리는 쥐어짜는 듯 절박하게 들렸다.
" 나의 장군님이 화살을 맞아 죽어 가고 있습니다. 키타이 놈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가 적습니다. 제발 도와 주세요."
소부는 이런 내용을 손짓과 함께 세 번 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흉맹한 기세는 수그
러들지 않았다. 소부의 돌궐말이 너무 어설퍼서 더 수상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완전
히 활을 겨눈 채 다가와 소부가 풀어놓은 칼을 멀리 차던졌다. 그리곤 앞에 버티고 선 채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어디서 온 놈이야?"
" 예?"
" 아무리 봐도 우리 씨족은 아닌데. 어디 출신이냔 말야!"
그 말을 듣자 소부의 가슴엔 섬뜩한 두려움이 일었다. 사내의 험상궂은, 의혹에 찬 눈초리와 마
주치자 등골에서 식은땀이 주루룩 흘렀다.
"저, 저희는 쿵 북초르님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
" 어느 씨족이냐니까!"
" 저, 저희들은 뵈클리들입니다."
" 뭐어, 뵈클리?"
놀라는 것도 잠시. 사내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퍽, 하는 모진 발길질이 턱으로 날아왔다.
사내는 활을 내던지고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뵈클리 군인이라고? 뵈클리 군이라고?"
이빨이 부러져 나가 입이 피범벅이 된 소부를 사정없이 짓밟으며 사내는 미친 듯이 떠들었다.
누런 이빨 사이로 마구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 이 쌍놈의 자식들! 작년 야실 쿠유에서 네놈들 손에 내 형제들이 다 죽었다. 쥑일 놈들!"
눈이 뒤집힌 사내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소부의 멱살을 틀어쥐고 땅바닥에 짓찧었다. 그래도
성이 안 풀린 사내는 소부의 배 위에 타고 앉아 줙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대로 소부를 요절낼 기
세였다. 소부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때였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쓰러졌다.
고개를 들자 네 마리 낙타의 이동막사에서 진홍색 비단옷을 입은 여자가 긴 채찍을 들고 걸어
오는 것이 보였다. 소부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가 납으로 된 추가 달린 늑대 사
냥용 채찍을 휘둘러 아까이 사내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웃통을 벗은 사내의 살갗이
터지며 참혹한 상처가 났다. 사내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싹싹 빌었지만 여자는 듣지 않았다.
사내는 모진 매질을 못 이겨 기절해 버렸다.
" 무엄한 놈 ! 제 맘대로 사람을 때리다니..."
여자는 혼자말처럼 그 한마디를 던지고 소부 쪽으로 돌아섰다 거친 다조짐에도 불구하고 그녀
의 눈은 깊은 호수의 물처럼 차분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키가 컸고 가냘픈 허리에는 전
투시에 쓰는 금속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스무 살이 갓 넘었을까. 아니 어떻게 보면 20대 중반
인 것 같기도 했다. 윤기가 도는 긴 머리칼은 검은색이었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감
히 눈을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위엄이 풍겼다.
" 너는 뵈클리 군인이라고 했느냐?"
여자의 목소리는 안개 낀 봄날의 아침처럼 아름답고 차가웠다. 소부는 얻어맞은 목을 힘겹게
추슬러 그녀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 그러하옵니다 "
" 너의 장군이 화살에 맞아 죽어간다고? 네 장군이 누구냐?"
" 저의 장군님은, ... 고문간 장군이라고 하시옵니다. "
" 뭐라고?"
순간 여자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나타났다 여자는 손소부로부터 자세한 경위를 물었다. 그리고
는 이동막사를 경호하는 백부장(우즈바쉬)을 불렀다. 백부장은 다리 사이에 요령소리가 나게 달려
왔다. 여자는 오만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 너는 즉시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키타이 놈들을 쫓아버려라. 그리고 이 자의 일행과 그 대장
을 데려오너라."
7
여기가 어디지?
의식이 돌아오자 문간은 먼저 살 짝 눈을 뜨고 눈꺼풀 틈새로 사방을 살펴보았다. 실내였고 그
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일으키는 심장의 고동만이 부러진 날갯죽지처럼 불안정하게
퍼덕거렸다. 고문간은 입을 앙다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망연자실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와 자
신이 덮고 있던 사슴 가죽 이불을 내려다 보았다. 어리둥절한 문간의 시선이 방안을 이리저리 날
아다녔다.
사방이 펠트천으로 둘러싸인 천막이었다. 침대 여픙로 청동제 주전자가 걸려 있는 화덕이 있고
화덕 앞에 의자가 달린 작은 붙박이 탁자가 있으며 그 건너편에 또 하나의 침대가 있었다. 침대
는 비어 있었다.
침대의 발치 쪽에는 바닥에 쌍발이 받침대를 박고 받침대의 두 걸쇠에 팽팽하게 끈을 달아 고
정시킨 마유주통이 있었다. 마차가 이동하면서 지형에 따라 흔들려도 마유주통이 이동하면서 지
형에 따라 흔들려도 마유주통이 계속 수평을 유지하게 하는 장치였다. 그 옆에는 역시 바닥에 고
정시킨 세면대가 있었다. 고문간은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와 그 세면대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세면
대 옆에는 맑은 물이 든 청동제 물통이 있었고 시커먼 비누가 있었다.
고문간은 끙끙거리며 세면대에 물을 붓고 얼굴과 손을 씻었다.
세면이 끝나자 고문간은 출입구의 펠트천을 걷어 밖을 엿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눈부시도
록 푸른 초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고비사막이 아니란 말인가? 멀리 또 하나의 유르트가 멈추
어 있었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고문간은 몸을 돌려 얼굴을 씻은 비누를 들여다 보
았다. 비누를 쓸 정도라면 예사 유목민이 아니었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것일까? 입에 침이 고이게 만드는 야릇한 냄새에 생각
이 끊어졌다. 그 냄새는 세면대와 출입구 옆 취사용 식탁, 그 위에 놓인 나무 그릇에서 나고 있었
다. 고문간은 비틀거리며 식탁으로 다가갔다. 접시에는 <불츠>라고 불리는, 한겨울에 냉동시켜
잘게 찢은 돌궐식의 동결육이 먹음직스럽게 마유주에 부풀려 있었다.
고문간은 맹렬하게 꼬르륵 거리는 배에 강제되어 허겁지겁 그것을 집어 먹었다. 졸아들 대로
졸아든 유게차가 입에 녹을 것처럼 부르더운 육질에 환서을 질렀다. 그것을 거의 먹어치웠을 때
나무 그릇에 버터처럼 가공한 유제품을 들고 들어오던 소부바 놀라며 소리질렀다.
" 장군님이 일어나셨다아! 장군님이 일어나셨다!"
그 소리에 떠들썩한 반응이 일어나며 잠시 후 천막의 문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소부! 모례수! 우태! 안류!"
문간은 죽은 형제들을 다시 본 듯 부하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부하들은 앞을 다투어 말
했다.
" 이번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 꼬박 열사흘 동안이나 앓으셨습니다 "
" 어서 뭘 드셔야지요. 그 동안 잡수신 것이라곤 입술 사이로 흘려넣은 마유주(아이락 혹은 쿠
미스라고 함. 누룩을 넣은 큰 소가룾 주머니에 말전을 넣어 4~ 5일간 발효시켜 먹는다. 알코올 도
수가 낮고 단백질과 각종 영양소가 픙부하다.필자는 1996년 8월 16일 몽골 셀렝게 아이막에서 20
년이 넘게 마유주만 마시고 다른 음식은 일절 먹지 않았다는 노인도 만났다. 결핵과 위장병에 특
효가 있어 약용으로도 마신다.) 밖에 없는데..."
문간은 잔득 쉰 목소리로 물었다.
" 대체 여기가 어딘가"
" 아시나 씨족의 막사입니다. 바로 우리가 만나려고 했던 아시나쿠이의 본영입니다. 저걸 보십
시오."
천소부가 화덕 위의 청동제 주전자를 가리켰다. 양의 머리를 조각한 주둥이에 만리화 꽃잎 위
에 정교하게 토조된 뚜껑 손잡이를 가진 호화로운 주전자였다. 과연 그 주전자에는 <활쏘는 사람
>을 상형한, 영어 알파벳의 H자와 비슷한 아시나 씨족의 탐가가 새겨져 있었다.
소부는 고문간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다시 침대로 데려가 뉘었다.
" 아직 열이 심하십니다. 한잠 더 주무십시오. 주무시고 나서 여주인께 인사를 드리러 가십시
다."
" 여주인이라니?"
" 이 본영의 여주인이고 아시나 쿠이의 부인이지요. 아주 무섭고 기품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기뻐하세요. 그분도 고구려인이십니다. 이름을 <아란두님>이라고 하시는데 장군님의 목숨을 구해
주셨지요. 장군님을 꼬박 사흘 동안 간호했어요."
문간은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부하들은 문간의 심중에 번지는 충격을 알지 못하고 문간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신나게 이야기
를 늘어놓았다. 소부가 하마터면 맞아죽을 뻔하다가 아란두에게 구출된 이야기, 지금 쿠이는 군대
를 이끌고 멀리 출정했으며 이 본영은 부인이 맡아 다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쭉 했다. 문간은
이야기를 듣다 말고 비틀비틀 다시 일어났다.
" 당장 가세. 그 여자를 만나겠네."
고문간은 침대에 걸터앉아 관자 놀이를 한참이나 양손으로 매만졌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파
왔다.
정말, 정말 쿠이의 마누라가 되었단 말이지. 아란두가 자그마치 아홉 살이나 어린 쿠이의...소부
는 가지고 다니던 행낭을 뒤지거나 쩔렁거리는 비단 주머니를 꺼내었다.
" 투르크 돈(AD 6세기 투르크 제 1 제국의 타르두 칸 시대부터 쓰인 동전. 위구르 문자로 <투
루크 카한>이라고 적혀있었다.) 가지고 가십시오."
" 돈?"
" 오늘이 이 집 맏딸의 돌잔치랍니다. 마리치치카 공주라니요? 빈손으로 가는 법이 아니랍니다.
"(돌잔치를 <우수 아바푸>라 한다. 돌궐인들은 결혼식과 장례식뿐만 아니라 출산과 돌잔치에도
반드시 현금 또는 물건으로 부조를 했다.)
돌잔치? 아란두의 딸이 돌?
문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그제서야 부하들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문간은 보이
지 않는 화살이 또 등에 날아와 꽂히는 것을 느꼈다. 아니 화살을 맞아 빙글빙글 돌며 곤두박치
는 새가 된 기분이었다. 딸이라구! 그렇다면 흑산에서 만났을 그때도 이미 쿠이와의 사이에 딸이
있었단 말이지!"
" 장군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장군님! 장군님!"
흐려져가는 문간의 눈에 천막이 서서히 옆으로 뒤집히는 것이 보였다. 문간은 옆으로 쓰러져서
다시 의식을 잃었다.
쿠이의 본영은 병든 고문간을 싣고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 행렬은 마침내 카라쿰 동북방에 새로이 마련된 칸 발리크(가한정)에 도착했다. 문간은 막사
밖을 내다보고 깜짝 놀랐다. 몇 달전까지만 해도 양떼만이 노닐던 텅 빈 초원에 당에서 솟아난
것 같은 인구 20만의 거대한 유목도시가 생겨 있었다.
돌궐 기마군단의 짐마차군이 사방 40 여 리에 방대한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기마병의 수 4만
여명. 병사 한 사람이 대개 군마 5마리, 목가 30 마리, 양 300 마리, 그리고 수백 마리의 소데와
염소떼, 낙타데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수천만 마리의 가축들이 초원을 뒤덮은 장관이란 뭐라 표현
할 수 도 없을 지경이었다.
문간이 체포되고 탈옥하고 도주하고 부상을 입어 앓고 있는 동안 상황은 급변했던 것이다. 복
수와 독립을 외치며 카라쿰으로 몰려든 돌궐조의 수가 수십만에 달했다. 고구려군 대신 총재산에
진주했던 거란군들은 돌궐에 대패하여 도주했다 선우도호부는 이제 카라쿰을 토벌하기는커녕 거
꾸로 돌궐 부흥군에 포위되어 맹공을 받았다. 왕본립은 지금 장아느올 구원군을 애걸하고 있었다.
문간이 도착하자 쿠틀루을 비롯해 아란두의 남편인 쿠이, 먼저 이곳에 도착한 톤유쿠크와 욱사
시부 등 돌궐 부흥군의 지도자들이 잇달아 문병을 왔다. 이때 가한정에는 고공의도 도착해 있었
고 선우도호부에 갇혀 있다가 다른 전선으로 분산 배치될 예정이었던 다른 장교들과 사병들도 들
어와 있었다. 고문간의 휘하에 있었던 옛 고구려 기병 사단의 병사들만 1 천명이 넘었다 강제이
주를 피하기 위해 요동에서 돌궐로 넘어온 옛 고구려의 민간인들도 근 1만여 명에 달했다.
문간은 황당하고 얼떨떨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한정에 들어온 고구려 유민들의 대
표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아란두를 따라 미리 돌궐로 들어온 고구려인들도 흑산에 있을
때 먹을 것을 준 고문간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었다. 이 당혹스러움은 며칠 뒤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문간이 가한정에 열린 돌궐의 국가회의, 토의에 참석했을 때 절정에 달햇다.
가한정의 한복판에 나무기동 수백 개와 수천 폭의 가죽으로 짜맞춘 거대한 장막이 건설되어 있
었다. 토의가 열릴 회의장이었다. 그동안 몇 번의 토의가 있었지만 돌궐 24개 씨족의 족장들이 모
두 참석한 명실상부한 국가회의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토의가 시작되자 돌궐제국이 테프 탱그리, 대제사장이 제단 위에 섰다. 그는 아시나 쿠틀룩이
모든 씨족장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칸이 되었음을 선언했다. 흰머리가 성성한 늙은 대제사장은
황금 늑대 머리가 새겨진 왕홀을 엄숙하게 양손으로 받들었다.
쿠르크 칸을 상징하는 황색 옷을 입은(이 때문에 투크르족의 군주를 사릭칸이라 부름) 쿠틀룩
과 그의 아내 엘데니가 나란히 그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대제사장이 역대 돌궐 군주의
지혜와 유더이 남긴 기도문, <칸을 위한 신탁> 을 읊기 시작했다.
" 이것은 지고한 권력의 표장이로다. 그대는 이것을 인간이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에
의해 받으리로다. 마음은 변하고 세월은 흘러가며 목숨이 모래는 쉬이 없어지나니 지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도다. 그대는 항상 영원한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탱그리의 뜻을 두려워하리로다.
그대는 항상 영원한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탱그리의 뜻을 두려워하리로다. 탱그리를 경배하고 그
대의 미미함과 그대의 비소함을 생각하리로다.
이러매 그대는 모름지기 피에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사사로운 복수를 하지 않으리라. 그대가
지난날에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기억하고 지금은 어떤 사람인가를 명심하리로다. 지상에서 얻은
모든 것은 바람이요 먼지라. 고결한 영혼만이 탱그리의 천국에서 나와 탱그리의 천국으로 돌아가
는도다.
아, 어떤 이는 칸의 광휘에 눈이 어두웠으나 그대는 현명하고 겸허하리라. 백성을 자기자신과
똑같이 사랑하고 만인의 아버지로서 권위와 애정을 잊지 않으리라. 스스로의 청빈으로 군대를 실
종시키며 태산 같은 용기로 규율을 지키게 하리라. 부유한 형제들의 재산을 보호해줄 것이며 가
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구제해줄 것이라..."
쿠틀룩은 경건한 태도로 아홉 번 절하고 왕홀을 받았다. 일곱 가지 보석으로 자식한 대가한의
중정관이 쿠틀룩의 머리에 씌워졌다. 엘데니의 머리 위에도 옥수슬을 드리운 화려한 치포관이 씌
워졌다. 두 사람이 일어서서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자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쿠틀룩에
게 큰절을 하고 무릅을 꿇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 이제 당신은 칸이시니다 칸께 허락하신다면 나는 살것이요 칸께서 추방하신다면 나는 멀리
떠나겠나이다. 칸께서 명령하신다면 나는 죽겠소이다."
사람들은 다시 일어나 엘데니에게 큰 절을 하고 소리쳤다.
" 이제 당신은 카툰이십니다. 카툰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먹을 것이요 카툰께서 노하시면 나
는 굶겠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어머니이시니 항상 믿고 사랑하고 따르겠나이다."
이어 모든 씨족장들을 대표하여 가장 나이가 많은 키를룩 씨족의 이르킨(족장) 다로빈이 일어
났다. 그는 공손하게 사람들 아프오 돌아서서 양피지를 펼쳤다. 쿠틀룩에게는 <일태리수칸(나라를
모은칸이라는 뜻)> 이라는 조호가 바쳐졌다. 그의 아내 엘데니에게는 <일발개카툰(나라의 지혜를
모은 카툰이라는 뜻)> 이란 존호가 바쳐졌다. 이로써 이 젊은 부부는 하늘의 율법과 인간의 총의
로 새로이 부흥한 돌궐제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쿠틀룩의 나이 스물다섯. 엘데니의 나이 스물둘
이었다.
새로운 칸은 곧바로 제국의 통치계급들을 구성했다. 일태리수칸은 제일 먼저 자신의 동생 쿠이
와 그의 아내 아란두를 일으켜 세웠다. 일태리쉬 칸은 쿠이를 <타르두쉬 샤드(우친왕)> 에 임명
하고 아란두를 <엔울룩 에시(친왕비)> 로 임명했다. 이로써 쿠이와 아란두는 돌궐제국의 2인자라
는 공인의 신분이 되고 말았다. 성장을 한 아란두는 아름다웠고 그 태도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
다. 문간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문간은 한 번 더 놀란 눈을 치켜떠야 했다. 일태리쉬 칸이 문간의 친구 톤유쿠크를 일으켜 세
웠기 때문이다. 칸은 사람들에게 1차 반란에 종군했으며 선우도호부 감옥에 갇혔다가 착출하여
카라쿰으로 들어온 웬푸의 동생 톤유쿠크에게 가장 존엄한 임무를 맡기는 것이 어떤가라는 형식
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 물음은 열렬한 찬동으로 되돌아왔다. 칸은 톤유쿠크를 그의 형 웬푸가 맡
았던 제국의 최고위직에 다시 임명해다. 톤유쿠크는 군의 총사령관 <아파 타르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장안에서 처형된 열사 웬푸에 대한 돌궐인들의 절대적인 존경의 표시였다.
이어 부흥 운동에 공로를 세운 씨족장들, 장군들, 용사들이 속속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런 다음 칸은 고문간과 고공의의 이름을 불렀다. 어리둥절하여 꿈뻑거리던 문간은 고공의가 옆구
리를 찔러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태리쉬 칸이 말했다.
" 여러분, 이 두 분은 뵈클리 알태베르 이르킨(고구려 대족장)고문간 장군과 고구려의 장군입니
다. 최근 우리 제국으로 들어온 많은 뵈클리 사람들의 대표자들이십니다."
박수와 환성이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엔 존경심과 원한이 함께 담겨 있었다. 5세기 부터 우수한
철기제품을 초원지대에 수출해온 뵈클리. 타브가치의 영웅군주였던 탱그리 칸(당태종)을 굴복시킨
뵈클리. 그러나 부흥전재 동안 당나라의 편이 되어 많은 동족들을 살상했던 뵈클리였다. 문간은
뵈클리라는 말이 이 순바한 유목민들에게 일으키는 복잡한 반응을 서글픈 눈으로 지켜보았다. 뵈
클리 사람들의 대표자이긴 커녕 뵈클리에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고문간이었다. 문간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춤판으로 끌려나온 어릿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 특히 고문간 장군은 우리 부흥군이 흑산에서 포위당했을 때 우리에게 은밀히 식량을 대어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나는 고문간 장군을 고구려군의 이쉬바라 타른칸(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합니
다. 앞으로 우리 제국에 귀복하는 모든 고구려인들은 고문간 장군의 지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고
공의 장군을 고구려인들이 살게 될 고울링 발리크의 투둔바르(행정관)로 임명합니다. 고공의 장군
은 고문간 장군을 보좌하게 될 것입니다. "
토이를 마치고 장막 밖으로 나왔을 때 문간은 하늘이 노랗게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꼈다.
8
" 가시다니요? 장군님, 이 마당에 어디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
고공의와 송새별이 사색이 되어 문간의 소매를 붙들었다. 돌궐제국듸 토이가 있은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눈앞의 초원에는 여름의 신록이 한창이었다. 한 가닥 개울이 은빛 실처
럼 이슬에 촉촉하게 젖은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개울을 따라 버드나무의 이파리가 파릇파릇
했다. 이 무렵에는 문간도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했다. 문간은 봇짐을 등에 진
채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 영주로 가겠어 . 오이 사제를 찾아가서 경전 공부나 하려네. "
" 이러지 마십시오. 아이구, 누가 봅니다. 자, 자, 막사에 들어가서 애기합시다. 이리 좀 오세요.
제발. "
두 사람은 버팅기는 문간의 허리을 안고 억지로 막사 안으로 끌고 갔다. 문간은 난처한 표정으
로 두 사람을 설득했다.
" 난 돌궐을 내 한 몸의 망명지라고 생각하고 들어왔네. 그런데 고구려 대족장이라니? 이런 거
창한 직책이 떨어질 줄 알았다면 아예 오지도 않았어. 자네들도 잘 알지만 난 남을 거느릴 만한
위인이 못돼. 옛 부하들에게도 미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저 민간인들까지 다 책임지다니.
난 못하네. "
고문간이 돌궐제국에서 받아들여지자 더 많은 옛 부하들이 가한정으로 들어왔다. 카라쿰 정벌
때 탈영해버렸던 송새별이 서역 전선으로 이동한는 자신의 연대를 찾아가 부하들을 몽땅 데리고
찾아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땅은 얼마든지 있었다. 일태리쉬 칸은 고구려 사람들에게 가한정
동쪽 (어흔아홉 개의 샘터) 자욕에 동서로 500리, 남북으로 300리의 땅을 내주었다. 사람들은
지금 희망에 부풀어 그곳에 흙벽돌로 고울링 발리크를 건설하고 이었다. 송새별은 화가 난 목
소리로 소리쳤다.
"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런 어리석은 넋두리나 하고 있을 텐가. 우리는 이 돌궐땅말고는 갈
곳이 없다구. 싫든 좋든 여기서 살아야 한다니까. "
" 그래도 돌궐제국의 신민이 되는 이런 방식으로는 안돼. 고구려 사람들은 쟁기 들고 농사를
지어 보리밥, 기장밥에 나물을 먹던 사람들이야.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초원에서 소젖과 양젖에
말고기를 먹으며 살아간단 말인가. "
그러자 고공의가 끼여들었다.
" 너무 소심한 생각이세요. 옛날 고구려 안에도 유인들은 많았어요. 이런 대규모 유목은 아니지
만 말갈 사람들이나 실위사람들도 다 유복을 했잖아요. 그런데도 고구려 사람들과 서로 고기와
곡식을 맞바꾸면서 아무 문제없이 잘살았어요. "
" 나도 다 알아보았네? 옛날에도 유민들과의 관계가 늘 불편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이미 수확
이 끝난 밭에 가축을 놓아먹이는 것과 그 밭을 망쳐버리는 것은 한 발짝 차이에 불과한 걸세. 그
한 발짝만 넘어서면 1년의 종사를 망치는 거야. 옛날 권세를 고구려 사람들이 꽉 잡고 있을 때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이제는 저들이 권세를 쥔 나라에 우리가 빌붙어 살아야 할 판이야. "
" 그러니까 고울링 발리크를 만들어서 우리 영역을 확실히 하려는 것 아닙니까? "
" 돌궐제국은 대지 위에 확실하게 기반이 잡힌 그런 나라가 아니에요. 당나라가 가만히 있지
않아. 반드시 다시 토벌전이 일어난단 말일세. 돌궐 사람들이야 유목을 하니까 아침저녁으로 영토
를 옮기며 싸월갈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해? "
" 그래도 사람들은 끝까지 싸울 겁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이렇게 관대한 나라를 만나겠습니
까? 일태리쉬 칸은 우리의 자치를 보장해주었습니다. 독자적인 군대도 가질 수 있게 했구요. 알아
서 좀 내면 되는 곡식과 채소 외엔 세금이라고 할 것도 없단 말입니다. "(돌궐 제 2 제국은 다른
유목제국과 마찬가지로 세금이 아주 가벼웠다. 3년 1공, 10인 1포, 즉 3년 한 번, 10명당 1포 1필
을 납세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 그 대신 당나라와의 전쟁에 나가야 하지 않는가. 나 원, 다 죽어버릴 텐데 세금이고 자치고
그게 무슨 소용이야. "
문간은 막무가내였다. 돌궐제국? 황하의 흙탕물에나 먹혀버리라지. 아무리 더러운 대지도 사람
이든 짐승이든 다같이 먹고 살게 해주지 않느가. 나라 따위가 무슨 대수람. 인생의 존귀함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싸안고 다정하게 살아가는 데 있다. 꼴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이 귀
중한 인생을 전쟁과 살육과 눈물로 보내다니. 문간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저으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고공의는 지심으로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머리를 싸쥐었다. 그러나 송새별은 문득 팔짱을 끼며
빙글빙글 웃기 시작했다.
" 고문간 장군, 난 임자가 돼 기를 쓰고 떠나려고 하는지 진짜 이유를 알아. 자꾸 말도 안되는
소리를 갖다 붙이지 말게. "
고공의가 깜짝 놀라 송새별을 쳐다보았다. 새별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문간이,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이 사람 고공의가 알아도 할 수 없겠지. 이봐 공의, 당신
의 장군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란두님을 사모하고 있었어요. 두 사람 다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사실은 보통이 아닌 사이라네."
" 왜 이래! 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 이 사람 아주 미, 미, 미쳤구만."
얼굴이 벌게진 문간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새별은 아랑곳없이 말을 계속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 옛날에 아란두님이 오이 사제에게 시집갔을 때 저 장군님이
불알 까진 수말처럼 궁상을 떨던 것을 내가 다 보았거든. 지난해 돌궐군에게 몰래 식량을 대주고,
카라쿰을 공격하러 가서 일부러 져주고, 죽을둥살둥 돌궐로 들어온 것도 아란두님 때문이란 말야.
그런데 와봤더니 이게 뭔가? 아란두님은 이번에 쿠이의 아내가 되어 있더란 말야. 그래서 당신의
오쟁이지고 뿔 돋친 수놈이 된 거지. 이런 말 하기는 좀 망측하지만 옛 마누라가 자기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새서방을 끼로 사는 걸 차마 곁에서 지켜볼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송새별의 말은 중간에서 끊겼다. 문간이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탁자 위에 있던 술병을 집어던
졌기 때문이다. 술병은 송새별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아 박살났다.
" 망할 자식! 나가! 나가라고! 그 따위 마친 소릴 하려거든... 아, 아니, 내가 나간다. 어차피 갈
사람은 나니까."
문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막사 밖으로 걸어나가려 했다. 송새별은 뒤집어쓴 마유
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문간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문간도 주먹질을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멱살을 쥐고 버둥거리며 어린애들 닭싸움처럼 주먹을 교환하고 발길질을 교환했다. 중간에 끼여
서 둘을 듣어말리는 고공의가 죽을 지경이었다.
한참 뒤 터진 입술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송새별이 말했다.
" 야, 남자가 그렇게 속이 좁아서 무슨 일을 하겠어? 엉? 넌 도대체 언제 철이 들 거야? 적어
도 아란두님은 말야. 이 제국이 막북을 아우르게 되었을 때 케룰렌강 동쪽부터 바일호수와 후룬
호수를 거쳐 대흥안령산맥에 이르는 사방 4천 리의 영토를 가질 생각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물
론 그곳엔 지금 파야크족이 살고 있지. 하지만 숫자가 적은 파야크족을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러면 그 땅의 동쪽에 사는 만만한 쏠리족의 땅까지를 포함해서 우리 고구려인들은 옛날 고구려
나라를 능가하는 큰 영토를 갖게 될거야. 아란두님은 거기에 동방교의 신서왕국을 세우려고 하시
는 거야. 알아?"
" 몰라, 이 자식아. "
문간은 멍든 얼굴을 돌리며 관심도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아란두가 더
천박하게 여겨졌고 미워졌다. 신들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남편을 헌신발 갈 듯이갈아치워? 창녀
와 다를 것이 없다. 야심과 타산을 빼면 그녀에게 도대체 진실은 무엇이더란 말이냐.
신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을 모르는 여자인 것이다.
사랑의 세계는 하나이면서 전부인 어떤 것이다. 사랑에 빠질 때만큼 자신의 존재가 거대하게
느껴질 때는 없다. 사랑을 느끼면서 문간은 사람들이 모든 시대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고구려땅에서 흐느껴 우는 유랑민들과 자기와는 전혀 다른 돌궐의 유목민들에게 완벽하게
연결된 자신을 느꼈었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 모든 세계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녀로부터
돌아선다면 나는 누구의 친구가 되겠는가.
그런데 아란두는 도대체 누구를 사랑하는가. 이미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옛 신들의 잔해를 사랑
해? 자기 앞에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그런 사랑이 진실이라고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문간은 눈알이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끼며 다리 사이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러면 안 된
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가눌수가 없었다. 문간은 그렇게 주저앉은 채 깊은 오뇌에 빠져 들었
다. 고공의와 송새별은 머슥하여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막사 밖에서 다급 말발굽소리가 났다.
" 고문간 장군님! 고문간 장군님!'
멀리서 부터 누군가가 문간을 부르며 가한정이 고구려인들 구역으로 달려왔다. 고공의와 송새
별이 손짓을 하여 그 사내를 맞았고 문간도 칼을 들고 막사 밖으로 뛰어나왔다. 한 근위대 병사
가 말발굽으로 아침이슬을 튕겨내며 단숨에 다가와 고문간의 앞에 털썩 떨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품속에서 투르크 룬 문자로 <위령>이라 새겨진 전령의 신패를 꺼내보였다.
" 일빌개 카툰의 부르심입니다. 고문간 장군은 지금 즉시 어막으로 와주십시오."
스물두 마리의 수소가 끌게 되어 있는 대가한의 이동막사, 어주장막은 위압적이었다. 어막을
경호하는 근위대 장교는 문간을 정중하게 안내했다. 나무로 만들어 조립하게 되어 있는 계단을
올라간 문간은 자기도 모르게 망설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일빌개 카툰과 함께 군사지도가
펼쳐진 거대한 탁자 앞에 서 있던 아란두가 단호한 목소리로 문간을 불렀다.
" 어서 들어오세요. 고문간 장군!"
두 여자가 등지고 선 침대 위에는 유모 두 사람이 아란두의 딸 마리치키카인가? 오모의 품에
안겨 사지를 꼬물거리는 그 아기는 아란두처럼 피부가 희고 말꼬름 했다. 유모들이 광목으로
안감을 대고 송아지 뱃가죽 조각으로 바깥천을 낸 아기 기저귀를 채우자 아란두가 눈짓을 보
냈다. 유모들은 세면기와 아기를 안고 침대 뒤편의 문으로 사라졌다.
두 여자 앞에 서서 문간은 자신의 공식적인 입장을 디새겼다. 문간은 정중히 푸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 일빌개 카툰, 그리고 친왕비님, 그 동안 공경에 빠진 불초와 정치를 잃은 고구려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
일빌개 카툰은 치러치렁한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면서 우아하게 웃었다. 그는 웬푸와
톤유쿠크를 배출한 아시테 씨족 출신이었다. 형의 아내지만 아란두보다는 여덟살이나 어린
스물둘. 까무잡잡하면서도 단아한 얼굴이 일빌개 카툰은 첫눈에도 총명해 보이는 눈빛을 반짝
이며 입을 열었다.
" 고문간 장군, 나는 당신의 쟁쟁한 위명을 일찍부터 들었어요. 당신은 야실 쿠츄에서 우리
돌궐군을 크게 무찌른 영웅이었지요. 당신 같은 분이 와주신 것을 정말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서로 과거의 일을 잊고 새로운 우정을 맺기로 해요."
" 서로 서로 잘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문간은 짤막하게 답례했다. 곧이곧대로 나는 곧 떠나로나 일일이 보고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일빌개 카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렇게 오시라고 한 것은 우리의 처지가 몹시 고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경황없이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우리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저희들은 장군께서 5천명의 기병을 동원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문간은 충격을 받았다. 일빌개 카툰과 아란두는 지금 전탱터에 나가 있는 남편들을 대신하여
내정고, 보급, 관리의 임명, 지원군의 파견을 포함한 모든 문제를 결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이렇게 심각한 명령이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카눈은 고문간의 눈치를 살피며
아란두의 설명을 들어달라고 말했다.
일빌개 카툰이 뒤로 물러서고 아란두가 문간을 탁자 앞으로 오도록 했다. 아란두의 얼굴은
사무적인 긴장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란두는 군사지도를 짚어가며 현재의 전황을 설명했다.
" 지금 일태리쉬 칸께서는 1만 명의 병력으로 여기 이 서쪽의 튀르기쉬(지금의 알마이타 공화
국의 일리 강변에 거주하던 돌궐족의 한 지파. 당시 우첼레 칸이 이끄는 대부족으로 <온_오크 부
족연맹>을 주도하던 서돌궐 지역의 패자였음. 민족의 정치적 통일 위해 돌궐제국이 가장 정벌
해야 했던 정치세력.)를 정벌하고 있습니다. 우친왕 쿠이님 역시 1만명으로 이곳 북쪽의 고비사
막에서 위구르족의 기병 4만 명을 막고 있어요. 문제는 이 세 번째 원정군입니다. 이 원정군은
당의 대군이 직접 이 카라쿰으로 닥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의 북동부를 선제공격했습니다. 바로
여기, 대주(지금의 산서성 원평시)로 남하했다가 동북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하동도 운주(지금의
산서성 대동시로 쳐들어가던 총사령관 톤유쿠크 원수의 원정군 1만 5천 명입니다. 그런데 이
원정군이 당나라군에 포위도이 괴멸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즉시 톤유쿠크 원수를
지원해주셔야겠습니다."
문간은 군사지도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과연 톤유쿠크나 욱사시부처럼 당의 고위 장교였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돌궐의 군사지도는 그 명료함이 당나라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지도 위 1만 리 대초원지대에 흩뿌려진 돌궐 군단은 <남쪽을 괴롭히고 북쪽을 달래며 동쪽과
친하고 서쪽을 정벌한다>는 돌궐제국 부흥기의 대외정책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남은 당나라
이며북은 위구르, 동은 옛 고구려이며, 서는 튀르기쉬였다. 그런데 그 기롭혀야 할 남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섯 곳에서 발진한 당의 토벌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톤유쿠크군을 포위해버린 것이다.
토벌군은 톤유쿠크가 점령했던 대주를 탈환하고 북항하여 돌궐군의 주력이 있는 운주로 죄어들고
있었다. 상황은 극히 위험했다. 문간이 물었다.
" 토벌군의 대총관은 누굽니까? 배행검 장군은 서역 전선에 가 있을 테고..."
아란두는 고개를 저었다.
" 배행검은 죽었습니다."
" 예? 뭐라구요?"
" 공식적으로는 병사로 발표되었지만 사실은 측천무후가 자살하도록 했습니다. 무후당과 태자
당의 당쟁에 희생된 거지요."
그럴 수가... 고문간은 숨을 들이켜며 굳어버렸다. 배행검과 맺어온 긴 인연들이 천천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그 옛날의 모반죄 연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해주었던
고마운 배려를 잊을 수 없었다. 그처럼 훌륭한 장군이 그렇게 불운하게... 가슴에 만감이 교차하고
눈시울이 따가왔다. 문간은 잠시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곧 이성을 회복하고
말했다.
" 우리에게는 다행한 일이군요. 누구도 배행검 장군을 대신할 수는 없지요. 그게 사실이라면
무후는 바보짓을 했어요. 진위에야 어떻게든 그런 음모를 죽었다는 소문은 모든 군인들의 전의를
꺾어놓을 것입니다. "
아란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 처음 얼마간은 확실히 장군의 말씀대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의 탈주병들이 늘어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정양도행 군대총관에 배행검보다 훨씬 크고 비중
있는 인물이 등장했으니까요."
" 세상에 배행검을 능가하는 무장이 있단 말입니까?"
" 설인귀 대원수입니다. "
고문간은 아연실색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인귀! 고구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신출귀몰하는 용병으로 백제와 고구려 원정을 승리로 이끌었고 마침내는 초에
안동도호가 되어 한강 이북에 당의 군정을 시리했던 명장 설인귀. 그러나 설마 그때도 노인이었
던 설인귀가...
" 설인귀가 아직 살아 있단 말입니까?"
" 살아 있습니다. 올해 정확히 일흔 살입니다. "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문간은 일빌개 카툰과 아란두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홀로 서서 새 군령을 세우면 천
개의 병영이 하나같이 호응한다> 는 옛말처럼 유능하고 명망 있는 장군은 그 존재만으로도
승패를 좌우한다. 설인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설인귀는 8년 전 무고를 받아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상주로 유배되었다. 그때가 벌써 환갑이
지난 나이였고 사람들은 그의 공직생활이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나자 부박한 세상의
인심 속에 그의 이름도 잊혀졌다. 작년에 겨우 사면되어 과주 도호부의 장사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경력을 생각하면 모욕적인 벼슬이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사람,
무후만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돌궐군이 하동을 침략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무후는
과주로 어사를 달려가게 했다. 설인귀는 우령군위대장군 겸 저양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어 즉시
토벌군을 조직하도록 명령받았다.
문간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가지요. 톤유쿠크는 나의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두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주었지요. 한 번은
10여 년 전 영주로 가는 길에서였고 또 한 번은 최근 선우도호부의 감옥에서였지요. 그래요.
가서 그 친구 옆에서 죽어주겠습니다. "
일빌개 카툰과 아란두의 안색이 달라졌다. 둘 다 문간의 신랄한 빈정거림을 못 알아들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톤유쿠크의 원정군은 백에 하나도 승산이 없다. 그러나 톤유쿠크를 저대로
죽게 내버려 둔다면 모처럼 충성을 맹세하고 합류한 사람들의 민심이 이반하다. 가한정이 나름
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변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변명을 위해 이미 잃어버린 셈치고 보내지는
것이 고구려군이 아니냐고 문간은 노골적으로 꼬집고 있는 것이다.
아란두의 얼굴에 노기가 번져갔다. 아란두는 아픙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오른손으로 문간의
팔뚝을 꽈악 붙잡았다. 일빌개 카툰도 문간도 깜짝 놀랐다.
" 장군에게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아란두는 거침없이 문간을 끌고 나갔다. 문간은 마치 누나에게 매를 맞기 위해 끌려가는 아이
같았다. 아란두는 사람들의 이목도 아랑곳없이 문간을 끌고 어막을 나가 그 가까이에 있는 자신
의 이동막사로 들어갔다.
" 저 침대 위의 침상을 들어내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아란두는 시녀에게 명령했다. 유르트에 놓이는 것치고는 지나치
크고 무거워 보이는 침대였다. 시녀가 양모를 넣은 침구를 걷어내고 풀더미를 넣은 침상을 드러
내자 그 밑은 놀랍게도 초원지역에서는 구하기 힘든, 아주 크고 두터운 박달나무 궤짝이었다.
아란두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꺼내 궤작의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궤짝의 뚜껑을
옆으로 밀어제꼈다.
" 이, 이게 다 무엇입니까?"
문간은 놀란 눈으로 아란두를 쳐다보았다. 궤짝 안에는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가 가득 차
있었다. 아란두는 얼굴을 꼿꼿이 들고 문간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 동방교의 모든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들입니다. 돌궐 문자로 옮겨서 모두 백마흔다섯 권
이지요. 서른 일곱 권의 동방삼경, 서른 권의 주서서, 쉰네 권의 경외성경, 스물네 권의 구전
율법들입니다. "
문간은 압도 되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 하나하나를 만져보았다. 두루마리의 겉표지
에 제목이 씌어져 있었다. <당고르 오르캄>이 여섯권, <해모수칸인 카인릭>이 열아홉권, <추모
닌미라사>가 열권... 두루마리 가운데는 문간도 제목을 생전 처음 들어본 문서들이 많았다.
문간은 그 가운데 하나를 빼들어 펼쳐보았다. 영양왕 시대의 율법학자 이문진의주서서 <예니덴
봇차>였다.
신시는 당고르 오르캄의 성으로부터 어느 방향이건 반나절 거리를 넘지 못했던 아주 작은
지역이었다. 그곳은 외부인들에게는 그저 동쪽에 위치한 많은 성전도기 중 하나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아, 얼마나 귀중한 기록들이란 말인가. 고구려인들은 자기들만의 문자가 없었기에 동방교의
많은 경전들은 사제들에게 분담되어 기억과 구전으로만 전해졌다. 한자가 있긴 했지만 많은
사제들이 신들의 가르침을 글자로 써서 전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한자는 동방교에서 야만인들이라고 경멸하던 중국인들의 글자였다.
나라의 멸망과 신앙의 위기를 맞아 아란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맴돌다 사라지고 말 동방교의
가르침을 이 방대한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조금 전까지의 불쾌했던 감정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히려 감격하기를 잘하는 문간은 아란두에게 형언할 수 없는 존경심 마저 느겼다.
" 아란두님, 돌궐로 와서 이런 큰일을 하셨군요."
"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망국과 추방 속에서도 우리 사제들에게이일을 할 용기를
주신 당고르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합시다."
문간은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아란둥의 손을 잡았다. 시녀들은 이미 막사 밖으로 물러가고
없었다. 문간은 막을 수 없는 열망에 쫓기어 입을 열었다.
" 아란두님,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문간의 감동을 보자 아란두도 벅찬 가슴을 억누를 수 없는 듯했다.
" 우리 사제들은 군인조차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흑산에서의 굶주림을 이겨냈습니
다. 사제들은 말오줌을 마셨고 짐승들이라도 토해버릴 만큼 지저분한 웅덩이의 물을 마셨습니다.
그래요. 나도 그런 것을 마셨습니다. 눈 덮인 초원을 헤매는 양뗴들처럼 나무껍질마저 먹었습니
다. 온갖 이상한 날고기들을 먹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고난 속에서 번역한 경전들입니다. 그리고
이 넓은 세상에 문서로 남겨진 유일한 동방교의 경전들입니다. "
아란두의 목소리는 떨렸다. 문간은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아란두의 눈물을 볼 수 있었다. 아,
아란두가 눈물을 흘리다니. 뺨을 타고흐르는 그 눈물에는 하늘나라의 청초함이 풍겼다. 아란두는
말을 이었다.
" 나와 함께 돌궐로 들어왔던 사제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쳤습니다. 듣자니 요동에 남았던 사제
들도 거의 다 보방왕 어라하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더군요. 처형되지 않은 사제들도 강
제이주 되는 길에서 대부분 죽었습니다. 그러나 고문간님, 우리에겐 이 경전들이 있습니다. 이 경
전들을 지켜주세요. 제가 이 경전들을 지키게 해주세요. 이 제국은 아직 어립니다. 이 나라 안의
모든 것은 아직 위대한 일출의 시간처럼 청순하고 젊디젊은 빛으로 싸여 있습니다. 이 젊은 빛
속에서 사람들은 더단순해지고 더 강해지고 더 깊고 거칠고 진지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겨울
의 북풍이 무서워도 보드라운 봄의 어린 싹은 북풍이 얼려놓은 두터운 얼음장을 이겨냅니다. 이
나라는 우리와 똑같은 당고르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 아무리 겨울의 북풍이 무서워도 보드
라운 봄의 어린 싹은 북풍이 얼려놓은 두터운 얼음장을 이겨냅니다. 이 나라는 마침내 대초원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나는 모든 신민들에게 이 경전을 가르칠 것입니다. "
문간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강하고힘찬 불길을 느꼈다. 그것은 신들에 대한 사랑이며 동시에
눈앞에 있는 이 신비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하나였다. 문간은 죽음을 넘어선듯한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모든 신분과 의식과 결혼의 벽을 뛰어넘는 달콤한 독. 문간은 아란두를
껴안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 지켜드리지요.그러나 저는 아마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억울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신들을 잊고 제멋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신들은 자비롭게도 이렇게 당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
었습니다. 아란두님, 당신은 이 삶이 내게 주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
아란두의 눈에 고통이 어렸다. 문간은 아란두의 목을 껴안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저항할 사이도 없이 문간은 아란두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아란두는 문간의 팔을 부리치려고 했다.
" 이러시면 안돼요. 이것은 신들의 뜻이 아닙니다. 내가 나편과 백성들에게 맞아죽기를 원합
니까?"
" 아란두님,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죄는 아닐 거입니다. 나는 신들에게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원합니다. 내 생명을 바치고 당신을 원합니다. 사랑하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내
친구 곁으로 달려가 죽겠습니다. 신들도 나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
아란두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인생의 무대 위에 올려져서
스스로를 표현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위험한 사랑, 가장 괴로운 욕망과 가책,
가장 감미로운 고통이 될 것이었다.
아란두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육신 구석구석에 신들의 사랑이 깃들였
다.
제 5부 불타는 초원
성스러운 추모께서는 하늘나라에서 해모수님과 아란두님을 모시고 동방의 신령 107위와 함께
고구려의 역대 군주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배풀었다.
만월의 어머니 아란두께서 여회장 입구에 큰 거울을 두시어군주들이 통과할 때마다 그들이 나
라를 다스리면서 범했던 악덕과 결점과 어리서음들이 나타나게 하셨다.
해애루 칸(모본왕)이 겅루에 떠오른 자신의 폭정들을 다시 보고 부그러움을 아기지 못해 돌아
갔다. 샤부시루 칸(봉상왕)과 또다른 몇몇 군주고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뒷걸음질쳐 돌아갔다.
연회장으로 드렁온 군주들은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생전에 각자가 이룩한 위엄과 영광을 이야
기 했다. 특히 타이가주루 칸(대무신왕)과 탐덕 하칸(광개토대왕)이 높은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그러나 신령들은 시종일관 한구석에서 얌전하게 침묵을 지킨 우루르 칸(미천왕)의 이름을 불렀고
발언을 청했다. 우부르 칸은 공손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 저는 신들의 덕성을 본받기에 힘썼으나 인간으로서도 매우 불완전했던 사람이옵니다. 소년에
불우하여 여러 곳을 떠돌았사옵고 남의 집 머슴살이, 소금 장수, 거지노릇을 하기도 하였스옵니
다. 가난 했을 때나 옥좌에 있을 때나 항상 남에게 죄를 짓지 않고 살다가 삶을 마치기를 원했습
니다. 오늘 이곳에 돌아올 때에 저의 일생이 청백했음을 돌아보고 그것을 한 없는 기쁘믕로 생각
하며 조상들과 신령들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직이 신들꼐서는 부패와 폭정, 대국의 전제
를 타기하시고 백성들을 널리 행복으로 이끌 숭고한 율법을 세우셨스빈다. 저는 지고한 신들의
향기가 아직도 저희의 손에 순결하게 쥐여져 있음을 확신합니다. 신들꼐서는 저희에게 대지와 창
공에 가득한 큰 생명의 목소리를 따라 자유롭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가슴에 타는 생명의 불곷이 무한으로 이어지는 더 큰 생명의 불꽃과 똑같
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들의 가르침에 감사의 공물을 바치고 싶습니다."
- 돌궐의 쿠르크 룬 문자로 씌어진 외경<탱그리닌 지야펫(하늘나라 잔치)> 중에서
1
오르도스의 대초원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다가 막 농경지대와 만나려 하는 삭주 북방의 황화
퇴 평원. 모기를 쫓는 젖은 청초 향기와 함게 여름밤이 찾아왔다. 밤하늘에는 쏟아져 내릴 것 같
은 별떨기들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무수한 화톳불을 피워놓고 둘러 앉은 고구려 사람들은 밤하늘의 한구석, 깊고아득한 골짜기를
쳐다보았다. 그곳엔 아름다운 어머니 아란두의 항아리로부터 흘러나온 은빛 별의 물결(은하수)이
눈부시도록 투명한 강을 이루고 있었다. 별들은 물방을 같은 눈을 뜨고 근심어린 목소리로 수런
대면서 피로와 불아에 지친 아란두의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적군의 수가 우리 열 배는 될 것 같애."
" 맞아. 더럽게 걸렸어. 게다가 적 대장이 흑치상지라잖아. "
" 니기미, 왜 꼭 여기서 싸우겠다는 거야? 우리편은 남쪽으로 처져서 아직 다 도착하지도 못했
는데. 지금이라고 냉큼 잔을 걷어서 떠나야지"
병사들은 불 위에 철판을 올려놓고 브릿가루나 수숫가루를 물에 이겨 떡을 구워먹으면서 멋대
로 씨부렁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불쑥 천인대장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고함을 지
렀다.
" 야, 어느 놈이 쇠파리 같은 소리 하는 거야! 엉? 도망가자고 한놈이 누구야? 일루 나와!"
병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처박았다. 두 천인대장은 병사들 사이로 들어와 눈을 부라렸다. 올려다
보니 자기들의 대장 우괴유와 옆부대의 손모례수였다. 병사들이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 잽싸게
가는 꼬챙이에 수수떡을 두 개씩 꿰어 올렸다. 그리고 술을 갖다 바쳤다. 한 병사는 쥐고 있던 작
대기를 움직여 열심히 사위어가는 모닥불을 되살렸다. 우괴유가 수수떡을 먹으면서 말했다.
" 시간이 남아돌면 잠이나 한판 꿀리지 무슨 쓸데없는 사설이야. 열배는 무슨 열 배? 어떤 새
끼가 그랬어? 하아, 야,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냐. 알어? 5년 전에 내가 운주에서 설인귀와 붙었
을 땐 어땠는지 알어? 운주성에 갇힌 톤유쿠크 원수를 구하려고 내가 천신만고 끝에 신고산을 점
령해서 피로를 뚫었다는 것 아니냐. 그땐 적이 얼마나 많던지 산에서 내려다 보니 흙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
골백번도 더 들은 우괴유의 무용담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억지로 재미있는 척 말을 걸었다.
"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이렇게 되무어 주지 않으면 난리가 난다. 5년 전의 운주공방전이야 말로 우괴유가 백인대장에
서 천인대장으로 승진한, 평생 기념하기로 작심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그 전투는 막 부흥한 돌궐제국에게도 잊지 못할 시련이었다. 운주에서 설인귀의 대군에 포위된
톤유쿠크 군은 전사자와 포로가 1만 명을 넘는 괴멸적 타격을 입었따. 고문간이 이끄는 고구려
군이 달려가 죽기를 무릅쓰고 싸워주지 않았다면 필경은 전멸했을 대패전이었다. 이때 투창에 옆
구리를 꿰뚫린 톤유쿠크 원수를 자기 말에 태우고 적진을 돌파한 사람이 우괴유였던 것이다. 우
괴유는 손짓 발짓을 하며 열을 올렷다.
" 먼저 있는 대로 다 쏘아서 화살의 비를뿌렸지. 그 다음에 일제히 칼을 뺴들고 맹렬한 돌격전
으로 나간 거야. 당나라 놈들 쪽은 쏘는 무기가 아주 무섭거든. 그래서 우리 쪽은 단김에 육박전
을 걸어서 쏠 틈을 안 준 거지. 그리고 나서 어쨌냐구? 그리곤 칼로 깨작살을 낸 거지. 깨작살.
이렇게 이렇게 좆나게 내려치다가 내가 칼을 따악 잡고 설인귀를 노려보았다는 거 아니내. 바로
이렇게 말야. 바로 이 눈빛에 놀라서 설인귀가 죽었다는 거 아니냐. 잘 봐, 이 새끼야! 너, 그리고
너, 그런 걸레 씹은 것 같은 쌍통으로 누굴 죽이겠어!"
옆에 있던 손모례수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친구의 체면을 생각해서 잠자코 있었다.
그토록 무서웠떤 설인귀가 갑자기 병사한 것은 패주하던 돌궐군에게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당의 공격이 아주 극적인 순간에 추춤했다. 운주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돌궐군은 이 틈을 이용
해 전력을 회복 할 수 있었다.
우괴유는 언죽반죽 계속 떠들었다.
" 흑치상지가 뭐 별건 줄 알아? 짜식들아. 말꼬랑지도 물에 적시면 뱀대가리처럼 보이는 거야.
내가 당나라군이 있을 때만 해도 그 자식 콧물 줄줄 흘리면서 이경현 장군 뒤를 훌짝훌짝 쫓아
다녔지. 그런데 이번에 보니 대총관이잖아. 하아, 그 자식 참 많이 컸어..."
" 야 됐다. 가자."
참다 못한 모례수가 벌떡 일어나며 우괴유를 잡아 끌었다. 불안한 표정을 감추기 못하던 병사
들이 살았다는 듯이 얼굴을 폈다. 그런데 그때였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몇 마리 말의
말발굽 소리가 들였다. 외곽을 지키던 초병들이 수하를 했고 대답소리가 들렸다. 말들은 곧장 화
톳불 쪽을 향해 달려왔다.
" 고문간 장군은 어디 계시는가?" 고려성(고울링 발리크)에서 왔다."
말 위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외쳤다. 모례수가 소리쳤다.
" 어이, 거기 천소부 아니냐?"
" 모례수냐?"
" 그래. 무슨 일이야"
" 좋은 일이야. 장군님꼐서 아들을 얻엇다. 고려성에 계신 영부인(에시)께서 아들을 낳았다."
천소부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화톳불 곁에 모여앉앗던 병사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기뻐
했다. 모례수가 다가가 천소부의 말고삐를 잡아주었다. 먼길을 달려와 땀을 뻘뻘 흘리는 천소부를
보자 모례수는 마음이 짠했다.
4년 전 선우도호부 전투에서 천소부는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절름발이가 되는 바람
에 그의 출세길은 끝나고 말았다. 5년 전 다 죽어가는 고문간을 데리고 고비사막을 횡단했을 때
는 일곱 명 가운데 가장 전도가 유망했었는데... 요즘 그는 고려성에 머물면서 고문간 장군댁의
집사일을 하고있었다. 천소부와 함께 온 호위병들을 뒤따르게 하고 두 사람은 천소부의 말 평에
서 달빛에 젖은 초원을 나란히 걸었다.
모계수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 거 참, 이상하지. 고려성에서 편안하게 지낼 때는 아무 생각도 없다가. 꼭 전쟁터에 나오기만
하면 고구려땅이 생각난단 말야."
그러자 옆에 있던 우괴유가 웃었다.
" 야, 모례수. 니가 고구려를 떠날 때 몇 살이었다고 자꾸 고구려, 고구려 하는 거야?"
" 나 원. 이 너절한 촌놈은 늘 나랑 맞먹으려 한다니깐. 얌마, 이래봬도 난 평황성 출신이야. 우
리 아버지가 영명사 남쪽의 구제궁 경당(경당은 경학과 문학과 무예의 3과를 가르치는 사립대학)
을 나왔다고 몇 번 말했냐. 나도 일곱 살 때까지 평양성에 살았단 말이다. 나라가 망했으니 이렇
지, 내가 너 같은 촌놈하고 같이 놀 어른이 아니다. 동맹제 때 을밀대에서 씨름 구경하던 것이며,
반월성 성벽 위에서 처녀들이 긴 소매를 나부끼며 오신무 추던 것이 어제 일처럼 눈앞에 선하단
말야. "
모례수는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두르리며 말했다. 천소무는 웃다 말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
다.
" 다시 한 번 평양성을 보고 싶어. 내 고향은 패강(대동강)하고 있는 금물내라네."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우리는 다시 평향성의 하늘을 몰 수 있을까? 아니 당장 내일
도 이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을까? 압도적인 적군과 대치한 채 궁박한 처지에 몰린
고구려 사람들은 이 괴로운 물음에 사로잡혓다. 멀리서 모닥불의 불티가 미친 듯이 춤추며 바람
에 불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문간이 있는 고구려 군단의 사령부에 도착했다. 경비병이 천소부 일행을 고문간 장
구에게 안내했다.
고문간은 군막 앞의 모닥불에 손수 차를 끓이고 약간 부패해가는 고기 한 조각을 구워 때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군의 포진을 점검하고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군마긍로 돌아온 것이다.
푸른색으로 물들인 낡고 빛바랜 두라면(페르시아산 무영)제복만이 고귀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유
일한 특징이었다. 천소부가 득남의 희소식을 전하자 문간은 잠시 눈만 꿈뻑거렸다. 한참이나 혼자
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문간은 부하들의 시선을 깨닫고 나서야 쾌활하게 웃어보였다. 문간은 소
부의 어깨를 두드리며 노고를 치하한 뒤 참모를 불렀다.
" 보급대로 가서 내 사용으로 등기된 마유주를 다 가져오게. 아들을 얻은 축하로 부하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전투를 앞두고 있으니 석 잔 이상은 돌리지 말게."
그리고는 모례수와 괴유, 소부를 자신의 군막으로 데리고 가서 고려성에서 만든 지주를 대접했
다. 군단 사령부의 갑자기 활기가 돌았다. 출진중에 고문간이 술을 돌리는 일을 처음이었기 때문
이다.
문간은 돌궐제국에 들어온 뒤 사람이 씻은 듯이 달라졌다. 우괴유는 가끔 옛날의 그 널푼수 없
는 술주정뱅이였던 고문간을 회고하곤 했지만 병사들은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고문간은 아
예 술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고문간은 온갖 역경을 의연하게 견디며 솔선수범하는 장군으로 변해갔다. 그가 입은 하늘색 군
복은 최하급 병사들의 군복과 똑같이 물과 진흙으로 더럽히져 있었으며 아군이 위기에 처하는 곳
에는 반드시 그가 직접 나타나 용감하게 전투를 지휘했다. 아침저녁으로 박다르께 기도를 울리는
그의 신실하고 엄숙한 모습은 많은 부하들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켰다. 부하들은 그러한 문간의
내면에 깊은 자책과 죄의식, 공허감이 쌓여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고구려인들은 그뒤에도 계속 돌궐로 망명해 와서 호구가 2만여호에 달했고 고문간 휘하이 병력
은 1만 5천여명을 넘고 있었다. 군율도 엄한 고문간의 군단은 어느새 돌궐제국에서 가장 정강한
군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난 5년 동안 고문간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투를 지휘했다. 낮에는 한곳에 머물 시간이 ㅇ벗었
고 밤에는 긴 자을 청할 시간이 없엇다. 돌궐 사람들보다도 더 열심히 돌궐제국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전쟁터의 먼지로 초췌해진 고문간이 가한정에 나타나면 일태리쉬 칸은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엉덩이를 제자리에 붙여놓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고문간은 이제 군단사령관이 아니라 돌궐 사람들에게 <뵈클리칸>으로 불렸다. 올해 봄 토이가
열렸을 때 고문간은 군장씨족인 아시나 씨족의 바로 옆자리에, 왕비씨족인 아시테 씨족과 나란히
앉았다. 세리토리, 소농, 쮸스, 눌라이, 추오, 바옌, 카를룩 등 누대의 명문거족들도 시기심을 누르
고 고문간의 특별 대우를 인정하기 않을 수 없었다.
고문간과 측근의 참모들, 두 천인대장들은 천소부로부터 산모와 아기 얘기를 들으며 담소를 나
누었다. 고문간은 4년 전 결혼한 돌궐인 영부인과 금술이 좋지 않아서 부하들은 걱정을 하고 있
었다. 영부인은 다름아닌 일태리쉬 칸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천소부는 닷새 전 아기를 출산하
던 날 영부인이 얼마나 애특하게 고생했는가를 성의를 다해 설명했다. 고문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천소부는 이야기를 마치려다 말고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 참, 열흘 전에는 가한정의 친왕비님도 첫 왕자님을 낳으셨습니다. 그 동안 마리치치카 공주,
두리치치카 공주, 따님만 두 분이었지 않습니까? 큰 경사가 났지요. 이름을 모테긴(왕조에게 붙는
존칭) 이라고 지으셨습니다."
고문간은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렸다. 옆에 있던 참모가 얼른 술잔을 주워주었다. 다행히 군
막 안이 어두워서 문간은 당황한 얼굴을 감출 수 있었다. 문간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 그 소식을 우친왕도 알고 있는가?"
" 그러믄요 아드님이 나자마자 쏜살같이 전령이 달려잤지요."
문간은 벌떡일어났다. 그리곤 소피를 보고 오겠다고 군막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무엇에 쫓기듯이
한참 걸었다. 어떤 적 앞에서도 끄덕하지 않던 문간의 심장은 긴자으로인해 문 두들기는 쇠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문간은 참기 힘든 고뇌를 조금이라도 억누르기 위해 몇 번으로 숨을 들이 쉬
었다. 주위의 공기는 무더웠지만 풀향기가 맴돌았다. 정중하게 경례하며 다가오는 경비병들을 손
을 휘저어 쫓아보내고 문간은 혼자 초원이 바위 위에 앉았다.
열흘 전이라면 아기는 대체로 290 일 전에 잉태되었다.
약 9개월하고도 스무 날 전. 그런데 문제는 그 시기에 쿠이는 가한정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라면 쿠이는 군대를 이끌고 타클라마간 사막을 지나 거대한 톈산산맥을 넘고 있었다. 튀르기수의
본영을 쳐부수고 그 잔당을 추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이는 그로부터 두 달이 더 지난 뒤에 가
한정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가축의 교배와 출산으로 시간을 보내는 유목민들은 사람의 임신에 대해서도 놀랍도록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달이 다찬 아기를 두 달 일찍 조사된 아기라고 속이는 것은 어림도
ㅇ벗는 일이었다. 아기의 체중과 발육상태, 산모의 체격과 배의 상태를 비교해본 쿠이으 측근들은
진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아기는 십중팔구 팔삭동이가 아닐 것이다. 9 개월하고도 스무 날 전. 그
때 후방에 있었던 것은 가한정 부근의 고려성으로 돌아온 고문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간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 장군님, 득남을 축하드립니다. 왜 여기 혼자 계십니까?"
작년부터 투툰바르(지역행정관)에서 투둔초르(지역장관)로 승진한 고공의였다. 고려성의 인구가
늘어난 결과였지만 아무튼 이로써 고공의도 돌궐의 다른 씨족장과 똑같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 제가 장군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술을 더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장군님의 득남은 전투에 이길
길조이니 예하부대에 전부 석 잔씩 돌리라고 말입니다. 노래를 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고문간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공의를 노려보다가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그덕였다. 평소 같으며
고문간이나 고공의나 길조니, 흉조니 하며 유치한 전장심리에 호소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열악했다.
이곳 황화퇴에 집결한 아군은 쿠이 군 1만 기, 톤유쿠크 군 1만기, 고구려군 7천 기로 모두 2만
7천 기였다. 이 돌궐군을 인연도 행군대총관 흑치상지의 12만 대군이 중무장 기병대, 경지병대,
창기병대, 석둥부대, 노궁부대, 포노부대, 장창대, 발도대 등으로 겹겹이 포위해버린 것이다. 7년
전 야실 쿠유보다도 더 상황이 나빴다. 그때 배행검의 당나라군은 보병이 주력이엇지만 지금 흑
치상지느 무려 3만 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흑치상지는 토번의 무적 기병대를 기병
으로 무찌른 장군이었다.
승산이 없으면 도망쳐야 하지만 하루는 더기다려야 했다. 대주 방면으로 부터 후퇴해오는 아군
들이 아직 도착하지 못했기 때무이다. 지금 본대가 도망치면 1만여 명이나 되는 그 후위 부대는
낙오되어 전멸할 것이 뻔했다.
고문간은 기분이 찝찝했다. 공교롭게 적의 대장들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5천 명의 기병을 이끌
고 선봉을 맡은 것은 흑치상지의 연줄로 좌령군원외장구능로 승진한 같은 백제 출신의 진가도.
말갈족 부병 4만 명의 대군단을 이끌고 좌익을 맡은 행군총관은 말갈족 출신의 이다조. 19년 전
문간이 열아홉 살 때무터 약연으로 얽힌 사람들이었다.
" 만만치 않겠는걸. 내일은 날씨가 무더워도 흉갑을 벗지 말아야겠어."
고문간이 말했다.
" 흉갑도 하시고 등에는 배갑을 하십시오."
고공의가 고문간의 눈길을 피하며 재빨리 중얼거렸다. 고문간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고공의
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 여덜 달 만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우친왕의 기색이 심샃치 않습니다. 조심
하십시오. 만약 후퇴하게 되면... 여러 부대가 섞이니까요."
문간은 더할 수 없이 기로운 얼굴이 되어 한숨을 쉬었다. 문간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올해 스물 여섯 살인 쿠이는 강렬한 눈빛과 체취를 지닌 과묵하고 여성적인 청년이었다. 술자
리를 싫어하고 말갈기처럼 기른 머리를 휘날리며 혼자 사냥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대군을 지휘
하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외톨이로 만드는 것을 다분히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거대한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기를 원하는 사
람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 불손해보이는 이 청년은 평소 문간을 좋아했다. 인생의 수많은 파란과 굴
절이 문간에게 선물한 지혜들을 존경했고 겸손하게 조언을 청하기도 했다. 문간과 아란두에게 거
ㅔ게 타오르는 애욕의 불길을 어느 선에서 자제하게 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쿠이의 성격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 청년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작전 회의에 참석하는 쿠이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했다. 문간을
피하는 태도도 예전같지 않았따. 문간은 남자의 얼굴이 저렇게 변할 때를 스스로의 체험으로 알
고 있었다. 그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잘 감춰왔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비밀이란 없었다.
2
짧은 여름밤은 추호의 용서도 없이 흐르고 또 흐르는 시간에 밀려 사라져 다. 남족의 상간수
하류로부터 마치도 변덕스러운 운명처럼 여명의 빛이 일어나 춤을 추더니 새벽의 대평원을 열어
젖혔다. 고구려군 진영의 모닥불은 벌써 꺼진 지 오래였다.
간밤엔 어지간한 고문간도 마음이 들볶이어 눈을 붙이지 못했다. 새벽녘 자기도 모르게 잛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고문간은 엄청나게 거대한 황소에 짓밟혀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지는 꿈을 꾸
고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침낭에서 일어나 피로와 고민과 상심된 마음을 새벽 찬공기라도 쏘여
식힐 요량으로 비척비척 천막 밖으로 걸어나왔을 때 고문간은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적진 한복
판에 휘날리는 거대한 군기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당연연도행군대총관
흑치상지였다. 밤새 흑치상지의 본진이 아군의 코앞에까지 이른 것이다. 초원이 풍경이 변해
있었다. 적군의 포위망은 이제 눈에 보일 만큼 죄어들어오고 있었다. 사방의 지평선이 모두 적군
의 기치였고 삼엄한 창검으ㅢ 숲이었다. 오늘 안에 결전을 벌이겠다는 의도가 너무도 분명했다.
아군도 상당수가 이미 깨어 있었다. 고문간은 이를 으드득 갈고 소리쳤다.
" 자야, 나팔을 불어라! 부대별로 포진ㄴ해! 오늘 놈들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자!"
돌궐 진영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시작될 무렵 당나라군의 본진에서 금빛 찬란한 대장군의 표장
을 휘날리며 몇 필의 말이 앞으로 쭉 뻗어나왔다. 그 선두에는 7척이 넘는 키에 호랑이 눈, 가슴
이 독수리처럼 튀어나온 반백의 대장군이 손을 눈 위에 붙이고 유유히 적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백전백승의 상승장군 흑치상지.
쉰 살이 넘었으나 맹수처럼 우뚝선 그의 육체는 아직도 천부적인 강기와 용맹을 발산하고 있었
다. 설인귀 이후 누구도 손을 대지 못했던 돌궐군에게 드디어 강적이 닥친 것이다.
살인귀가 죽자 돌궐의 대군단은 평원을 가로질러 질풍처럼 남쪽으로 선우도호부로 쇄도해갔다.
683년 6월의 이 원정은 오르도스 지역에서 돌궐의 패권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선우도호부
를 함락시켰을뿐더러 사마 장행수를 전사시켰고 불을 지른 뒤에 성곽 전체를 완전히 파괴해버렸
던 것이다. 운중성은 흔적도 없이 무너져 일직이 그런 도시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사라져버렸다.
불길이 그치자 선우도호부는 돌더미와 잡초와 가시덤불만이 뒤덮인 평야로 변해 있었다.
설인귀의 자리를 좌무위대장군 정무정이 계승했다. 그러나 정무정은 이미 강성해진 돌궐을 공
격할 능력이 없었고 오로지 방어와 지연전술로 일관했다. 돌궐제국의 행운은 게속되었다. 684년에
는 무후를 축출하려는 황족들이 이경업의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고종이 죽자 무후는 일곱째아들 현을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워 조정을 장악했다. 아버지를 닮아
세상에 둘도 없는 공처가였던 젊은 황제 중종은 아내의 꼬드김에 넘어가 장인에게 사중 벼슬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신하들이 거절하자 펄펄 뒤며 화를 내었다. 무후는 황제의 자리가 아들의 머
리를 돌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중종은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문무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폐
위되어 유배지로 끌려 갔다. 그의 동생 단이 예종으로 즉위했다.
예종은 정말로 이름뿐이 황제였다. 죽은 고종은 신하들 앞에서 하다 못해 옥좌에라도 앉아 있
었으나 예종은 가장 중요한 국사가 논의될 때도 나타나지 못했다. 그는 내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사회적 통념을 뒤엎는 대혁명이었다. 합벅적으로 즉위한 황제를 사소한 이유로 폐
위시키고무후가 실질적인 여제로서 통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명한 이적 대장군의 손자 이경업이 남녘의 대도시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죽은 배행검이
아껴주었던 시인 낙빈왕은 이 반란에 뛰어들어 입에 거품을 물로 소리쳤다.
" 무씨는 살모사와 같은 계교와 승냥이 같은 마음으로 많은 충량한 사람들을 해쳤다. 자신의
친언니를 죽였으며, 친오빠를 죽였고, 어머니를 독살했으며, 마침내는 주상을 시해하였다. 이는 사
람과 신들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도 용납하지 않는 바이다. 그럼에도 무씨는 더욱 흑심을 품고 나
라의 주인자리까지 훔치려 하고 있다. 주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별궁에 유폐시키고 도적질을 도울
자신의 친정붙이에게 중임을 맡겼다. 주상의 무덤을 덮은 흙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거늘, 주상의
외로운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후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조정 안의 반대세력을 일소했다. 이제까지 무후에게 붙어 출
세가도를 달려온 중신 배염이 역모죄로투옥되었다. 배염은 늘 무후를 감금한 뒤 예종의 권력을
회복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최고 대신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적수를 오판
한 나머지 배염은 이경업의 반란을 계기로 야심의 일단을 드러내고 말았다.
" 본래 일의 사단은 황제께서 이미 장성했는데도 친정을 하시지 못하기 때문이오니다. 태후께서
곧 황제께 대권을 넘겨주겠다고 선언하신다면 굳이 대군을 움직이지 않아도 이경업의 반군들은
궐기한 명분을 잃게 되고난은 자연히 평정될 것이옵니다."
무후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으나 며칠 후 배염을 체포했다. 그리고 문무백관들의 탄
원과 상소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처형해 버렸다. 평소 배염과 친했던 문무백관들도 준열한 처
단을 받았다. 그때까지 돌궐을 잘 막고 있던 정무정 장군은 갑자기 어명을 받들고 들이닥친 좌응
양위대장군 배소업에 의해 진중에서 목이 배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돌궐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떠들썩한 잔치를 벌였다. 관대한 일태리쉬 칸은 정
무정을 위로하는 진혼제를 올려주기도 했다. 이때부터는 돌궐의 독무대였다. 사방으로 파견된 원
정군은 연전연승했다. 무수한 이민족들이 돌궐제국에 복속되었다. 양들은 살찌고 말은 불어났으며
시장은 번창했다...
우익이 톤유쿠크 군에서부터 중군이 쿠이 군, 좌익의 고구려군까지 쭉 정찰한 흑치상지는 드물
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동안의 승리가 돌궐군의 긴장을 해이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 부대가 서로 전초전을 미루고 있는 듯한 머뭇거림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돌궐군들은 한 달 전 상간하를 건너 대주로 밀어닥쳤다가 대주성을 포위하고 있는 사
이 흑치상지의 대군에 의해 역포위된 부대들이었다. 돌궐군은 기병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포위
망을 뚫고 안문관과 하옥산을 넘어 북쪽으로 달아났다. 전군을 일단 황화퇴까지 철수시킬 생각이
었다. 그러나 이다조의 말갈군이 집요하게 따라잡으면서 대열이 궤란되어 많은 부대들이 아직까
지 황화퇴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후속 부대가 속속 합류하여 돌궐군이 더 증강되
기 전에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좋았다.
흑치상지는 마지막으로 우익의 고구려군 진영을 일별했다.
같은 동이족인 고구려인들은 그에게 향수어린 친근감과 함께 묘하게 강렬한 증오심을 불러일으
켰다. 돌궐로 탈출하여 당나라에 항거하는 고구려인들에겐 못 견디게 흑치상지의 자존심을 자극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배반이란 무엇인가.
배반이란 밥을 먹는 것과 같아서 한 번 삼켜버린 뒤에는 그 맛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자신이
배반하고 떠나온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 비비적거리는 무리들은 다시금 배반의 그 쓰디쓴 맛을
싱기시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밉살스런 인간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과 똑같이 닮은
존재, <또 한 번 자기와 같은 존재> 였다.
이 만리 이역의 새로 고구려를 만들겠단 말이지. 미친놈들...
저 고구려인들은 흑치상지에게 한때 정열을 불살랐던 백제 부흥운동이 주도세력 내부의 갈등으
로 괴멸되었던 쓰라린 기억을 상기시켰다.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 흑치상
지에게 이제 고토수복의 대의란 쳐다보기도 싫은 환멸의 대상이었다.
흑치상지는 이글거리는 호랑이 눈으로 자기 옆의 참모장을 쏘아 보았다.
" 큰 북을 울려라! 어젯밤의 계획대로 공격한다."
대총관의 큰 부이 울리자 각 예하부대의 노고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투대형을 짠 병사들의 서
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맨선두에는 노승부대와 노포부대의 병사들이 요란란 소리를 나며 무기
가 장착된 수레를 끌로 노도처럼 달려갔다.
돌궐군의 진영에서도 급박한 뿔나팔소리와 함께 기병들이 독수리 날개처럼 넓게 산개하며 돌격
해왔다. 자휘관의 군호와 함께 노궁부대로부터 가공할 만한 긴 화살의 비가 돌궐군의 머리 위로
뿌려졌다. 화살의 그림자로 하늘이 새까맣게 변할 지경이었다. 곧이 돌궐군인 전열을 이룬 곳에
노포부대의 돌덩이들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갔다. 그 사이를 석궁부대가 메우며아직
도 전열을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석궁의 강력한 조준사격을 퍼부었다. 아직 충분히 대열을 전개
하지 못한 돌궐군은 당황했다. 흑치상지군은 너무나 노련하게 돌궐의 예봉을 분쇄하고 있었다.
" 이때다 ! 나가라!"
흑치 상지는 조금도틈을 주지 않고 기병대의 돌격을 명령했다.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한 덩어
리가 된 3만 기의 기병대가 일제히 발진했다. 전투는 곧 피아의 기병대가 창칼을 부딪치는 난전
의 소용돌이로 몰려갔다.
사방 60리로 펼쳐진 황화퇴 평원, 그 드넓은 저선이 피아 15만의 대군이 격돌한 황화퇴 전투.
폭염이 작열하는 한여름의 대지 위에 이 대회전은 곳곳에 피의 긴 개울을 이루며하루종일 계속되
었다. 황진만장. 말들이 날뛰어 누우런 모래먼지기 하늘을 가릴 듯이 일어난 하늘 위로 핏빛 석양
이 걸렸건만 전황은 더욱더 격렬해갔다.
요란한 함성과 함께 화살과 돌들이 더욱 거세게 휘날렸다.
고구려군의 병사들은 마치 큰 강이 흐르듯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나타나는 라갈족의 대부대를
맞아 고전을 치르고 있었다. 고문간은 그 선두에서 화살이 비오듯 날아드는 고전을 치르고 있었
다. 고문간은 그 선두에서 화살이 비오듯 날아드는 적진을 뚫고 말을 달리며 정신없이 철사모를
짓찌르고 있었다. 한순간 뒤쪽에서 뇌성과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뿌우연 먼지가 솟아오르며 철갑
을 입은 장수가 벼락 같이 청룡도를 휘둘러 왔다. 번개처럼 몸을 뒤틀어 한 창에 그를 꿰어버린
고문간은, 그러나 청룡도의 일격을 허리에 맞고 자신의 말고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 장군님!"
고문간의 뒤를 바짝 쫓아오던 천소부가 그를 구했다. 고문간을 말 위로 끌어올린 천소부는 죽
이고죽어가는 전장의 물결을 거슬러 옆으로달렸다. 완만하게 펼쳐진 언더긍로 올라서자 소부는
갑자기 주위가 넓어진 것을 느꼈다. 이제 막 살육의 아수라장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이다.
그제서야 소부는 얽히고 설킨 주변의 전황이 차츰 눈으로 들어왔다.
아군은 이제 좁디좁은 국지로 몰려 우왕좌왕할 뿐 제대로 전열을 제정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병대가 주력인 돌궐군이 능수능란하게 기동하지 못하고 자꾸 좁은 국지로 몰려간다며 승부는
정해진 것이다. 적들은 갈수록 대오 정연한 새 부대를 내보내며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때 소부는 깜짝 놀랐다. 쿠이 군의 깃발이 신호도 없이 후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문간 군
의 오른쪽에서 싸우고 있던 쿠이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적의 압력이 양
면에서 한꺼번에 밀려들어 고문간 군은 전멸한다.
" 저럴 수가! 장군님, 장군님, 큰일났습니다..."
붕대로 묶어 지혈한 허리를 한 손으로 누르며 문간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걱정하고 있던
사태가 드디어 닥친 것이다.
배를 문지르며 등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복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쿠이는 자기
칼을 자기가 먹어버릴 만큼 우직했다. 고문간의 우익을 엄호해야 한다는 그의 이성을 그의 감정
이 잡아먹어버린 것이다. 문간은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자신의 잘못으로 같이
죽어야 하는 부하들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그때 문간의 옆으로 손모례수가 1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문간은 일그러진 얼굴
로 명령했다.
" 나팔을 불어라. 침단산으로 철수한다."
처참을 극한 패전이었다.
해가 떨어진 뒤의 어둠도 뿔뿔이 흩어진 고구려군을 표독스런 석궁의 화살로부터 감추어 주지
못했다. 전쟁터는 탁 트인 평원이었고 고구려군은 모두 기병대였으나 그 우세한 기동력으로도 당
나라 군대의 포위망에 얽혀들었다. 고구려군은 필사적으로 한 줄기 혈로를 뚫고 빠져나가보려 했
으나 곳곳에는 퇴로를 차단당했다. 창기병대를 무찌르면 장창대가, 장챙대를 짓밟으면 모갑대가,
한결같이 맹렬과감하게 공격해왔다. 낫처럼 생긴 석 자 길이의 과창이 사방에서 날아와 고문간의
뒤를 따르던 부하들은 속속 말에서 떨어졌고 곧이어 쇠그물에 걸린 짐승처럼 무수히 창칼을 맞고
산산조각이 나서 죽어갔다.
" 장군님, 살려주세요!"
10여 장 밖에서 천인대장 우괴유가 끔찍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랄려나간 팔을 흔들며 외쳤다.
문간은 그의 그 튀어나온 광대뼈와 벌려진 입과 엉망으로 헝클어진 콧수염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칼등이 도끼처럼 두꺼운 외날칼이 뒤쪽에서 날아와 우괴유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문간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렷다.
" 괴유야! 괴유야!"
문간은 퇴로를 버리고 우괴유의 부대를 구하려 적진으로 뛰어들려 했다.
" 안됩니다. 장군님! 그리 가시면 죽습니다."
천소부가 눈물을 흘리며 문간의 허리를 끌어안고 문간의 말고삐를 잡아챘다. 질주하는 성난 군
마들, 고함을 지르며 장검을 흔드는 기병들, 달빝을 받아 뽀얗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아수라
장 속에서 다행히 고공의의 부대가 달려와 었다. 화살을 두 대나 맞은 고공의와 그의 부하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길을 열어 문간은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침단산에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으니 고구려군의 군기 아래 다시 선 사람은 불과 1천 300여
명. 흩어져 도망친 부하들도 있었지만 5천 명에 가까운 장병들이 죽거나 재기불능의 중상을 입은
것이었다.
사정은 톤유쿠크 군도, 쿠이 군도 비스했다. 황화퇴 전투에서 죽은 돌궐군 장교의 숫자는 돌궐
부흥의 기치를 세운 이래 발생한 이전까지의 모든 전사자들보다 더 많았다. 백인대장만 130 여
명이 죽었다. 천인대장 48명, 아르킨 1명과 타르칸(사단장급 지휘관)1명, 투둔바르 4명이 죽었고
세리바르(군행정관)는 11명이나 희생당했다.
흑치상지는 바둑을 두듯이 냉정하고 철저하게 돌궐군을 몰아붙였다. 이다조의 말갈 기병대에게
추격전의 선봉이 맡겨졌다. 돌궐군은 한여름의 폭염아래 기갈과 피로와 상처로 초췌해질 대로 초
췌해진 채 가축들을 다 잃고 굶지림에 시달리며 정끼 왕성한 적에게 쫓겨 간난신고의 후퇴를 거
듭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건장한 노병 중에도 무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실신하는 사람이 나왔
다. 이에 더하여 행군과 전투의 끊임없는 반복은 돌궐군의 사기를 크게 저상 시켰다.
흑치상지의 추격은 돌궐군을 전멸 직전까지 밀어붙였을 뿐만아니라 그들이 후퇴하고 있는 가한
정까지 쳐들어갈 기세였다. 일태리쉬 칸이 직접 5천 기의 구원군을 이끌고 나와서 적에 응전하고
아군의 도하를 엄호해야 할 만큼 사태는 갑박했다.
그러나 돌궐군이 금하를 건넜을 때 심한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하동고 북쪽을 강타했다. 하늘
에 구멍이 뚫린 듯 엄청난 비가 하루종일 쏟아졌다. 이틀이 지나가 금하, 지하의 지류가 범람하면
서 오르도스의 대초원을 꾸불꾸불 흘러 하동도의 경계를 이루며 수천 리를 남류하는 황하에까지
홍수가 일어났다. 집은 떠내려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급조한 뗏목에 겨우 몸둥어리 하나만을 싣고
남쪽으로 흘러갔다. 비옥한 하동의 곡창지대들이 갈색 초가지붕과 웃자란 수숫대만 남긴 진흙강
으로 변해버리더니 또 며칠이 지나자 그것마저 누런 황톳물 아래 잠겨 버렸다.
돌궐군은 전멸 직전에서 이 대홍수에 의해 구원되었다. 금하를 건너 돌궐군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던 흑치상지는 진흙탕의 파도치는 바다와 폭우 쏟아지는 시커먼 하늘 앞에 발이 묶여 버렸
다. 마바리들이 물에 떠내려 갔고 걸쭉한 젖은 말들이 콧물을 흘리다 죽어가기 시작했다. 흑치상
지는 더 견디지 못하고 군대를 삭주로 되돌렸다.
5
" 전장 한복판에 아군을 두고 혼자 도주하다니! 네가 정신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네 꼬
락서니를 보자니 내 눈이 으스러질 지경이다. 내 평생에 이런 수치는 처음이야. 직계 황족(오글란
투르키예. 돌궐 칸의 직계가족을 뜻함)의 명예를 이렇게 더럽히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이렇
게 더럽고 부끄러운 본보기를 보이다니!"
일태리쉬 칸은 믿었던 아우에게 분노를 넘어 비통함을 느꼈다. 쿠이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
아 있었지만 한마디도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다. 일태리쉬 칸은 고문간과 톤유쿠크 같은 신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이기지 못해 동생 앞을 미친 듯이 오락가락했다.
일태리쉬 칸의 군율은 준엄하기로 유명했다. 병사들은 마땅히 검소하고 겸허해야 했고 전쟁중
에는 모든 것을 잊고 전적으로 군무에만 힘써야 했다. 무기는 항상 반짝반짝 빛나도록 손질하고
예리하게 갈아두어야 했으며, 군복과 마필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끔 준비해놓아야 했다. 다른
부대의 가축이나 식량, 전리품을 훔친다거나 출전중에 부녀자를 농락하는 일은 사형이어다. 쿠이
의 같은 전장 이탈의 죄는 물을 것도 없이 죽음으로 보상해야 했다.
이런 경우는 칸의 판결이 내리면 누구도 왈기왈부 할 수 없었다. 쿠이가 처형당한다고 생각하
자 문간의 심장은 갈비뼈가 부서져라 펄덕거렸다. 문간은 일태리쉬 칸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칸이시여, 우친왕만을 문책해선 안됩니다. 저도 함께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우친
왕이 먼저 후퇴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저 역시도 도망치는 중이었습니다."
"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요. 뵈클리 칸! 경과 톤유쿠크 원수가 분전하는 중에 쿠이의 부대가 도
주했다는 것을 모든 지휘관들이 증언했소. 그대는 사사로운 인정 때문에 내게 감히 거짓말을 할
생각이오?"
" 설사 그렇다고 해도 간발의 차이였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칸이시여, 이미 일어난 일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제 와서 황화퇴의 패전에 얽매여 아군의 전력을 더 악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사옵니다. 지금은 적들이 우리의 목줄을 노리고 있는 비상시국
이옵니다."
문간은 정신없이 쿠이를 위해 변명했다. 그러나 정작 쿠이의 얼굴은 차을 수 없는 굴욕감으로
더 일그러졌고 일태리쉬 칸은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톤유큐크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문간을 쏘
아보고 있었다.
" 톤유쿠크 원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 군율이 지켜지지 않으면 정의에 대한 사랑도 사라집니다."
톤유쿠크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톤유쿠크는 문간이 측은의 정에 좌우되어, 말도 안되는 사
면을 요구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군의 총사령관으로 많은 부하들의 희생을 목도한 그는 그
런 헛소리에 잠자코 귀를 기울일 인내심이 없었다.
" 지금은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을 때입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지내던 시절에도 이런 과오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친왕의 과오를 처벌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병사들을 지휘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장 우리의 투구를 아낙네들에게 주어 냄비 대용으로 쓰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어막에 모여 있던 장군들은 겁이 나서 숨을 멈추었다. 감히 칸의 동생을 처단하겠다는 톤유쿠
크의 준엄한 눈빛 앞에는 번갯불도 오금을 못 펼 지경이었다. 톤유쿠크는 일태리쉬 칸을 쏘아보
며 말했다.
" 이 마당에 저희들이 우친왕의 거취를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망극한 일입니다. 칸께서는 최고
지휘관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내일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일태리쉬 칸은 괴로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쿠이는 누구보다는 우애가 두터운 형제
였다. 두 사람은 먼 지평선을 향해 거침없이 펼쳐진 광활한 초원에서 함께 말을 타며 자랐다. 커
서는 초원을 위해 온갖 전쟁터에서 함께 싸웠다... 칸의 고뇌를 헤아리자 모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칸은 옥좌로 돌아가 구부정한 자세로 웅크리고 앉았다.
" 총사령관, 저 비겁한 놈에 대한 판결을 내일 회의에서 내리겠소. 저놈의 처형에 대해 군소리
가 없도록 내가 여러 지휘관들 앞에서 직접 논죄할 생각이오."
일태리쉬 칸은 근위병들에게 쿠이를 데려가 가두라고 명령했다.
그 다음날, 바람이 심하게 부는 가을밤이었다.
천막의 테두리를 묶어 고정시킨 밧줄이 팅팅팅 거칠고 새된 소리를 내며 튕겨졌다. 대낮부터
일태리쉬 칸의 어막으로 다들 눈 주위가 움푹 들어간 지휘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군진생활에
서 겪는 고통으로 초췌해지고 담과 먼지에 범벅이 되어 소몰이꾼처럼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어
막에 와서 앉았으나 불꽃이 깜빡거리는 화로처럼 사람들의 마음은 활기를 잃고 있었다.
제국은 지금 동서남북에서 협격을 당하고 있었다. 폭우로 추격은 중단했지만 흑치상지는 그대
로 물러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북으로 오구츠에게, 서로 튀르기쉬에게 동으로 거란에게 계속
전령을 보냈다. 전령들은 돌궐군이 처한 곤경을 알리고 만약 실력으로 돌궐군의 땅을 점거한다면
흑치상지 대총관은 이를 인정할 것이라고 했다.
즉각적인 반응이 올봄 큰 눈으로 재해를 입었던 고비사막 북쪽에서 나타났다. 이 막북의 투르
크계 부족들은 당의 꼬임에 넘어가 서서히 남하하고 있었다. 오르도스를 영유하고 있던 동족들이
곤경에 처했다니 그 땅을 빼앗아 살 길을 찾겠다고 야비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속속 도착하는 지휘관들에게 술과 양고기와 안주가 대접되었다. 이런 안주인 역할은 이제까지
일빌개 카툰와 아란두가 맡았으나 오늘 아란두는 보이지 않았다. 카툰 옆에서 시녀를 지휘하여
손님을 접대하고 있는 것은 칸의 여동생이자 문간의 아내인 <싸른토야> 였다.
싸른토야는 작은 키에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여자였다. 얼굴은 거무스름했지만 치아는 진주처
럼 희고, 크고 새까만 눈동자는 처분한 광채를 띠고 빛났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이 핼
쑥했다. 얼핏 보면 일빌개 카툰과 비슷했지만 <달빛>이라는 이름처럼 훨씬 더 가냘프고 여성스
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고문간은 일태리쉬 칸 옆에 진흙과 피와 땀으로 더럽혀진 군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아무렇게
나 자란 수염 아래 입을 꽉 다물고 미동도 하지 앉아 그의 모습도 돌궐제국이 처한 곤고를 무언
으로 웅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실 문간은 자기만의 고뇌에 골몰해 있었다. 쿠이가 이렇게 죽
는다면 문간은 아마 일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어젯밤 술을 마셔보았으나 죄책감이
깊어질 뿐이었다. 하룻밤이 지나는 사이 문간은 폭삭 늙어버린 것 같았다.
29인의 군 지휘관들이 모이는 동안 일찍 온 사람들은 각양각생의 사연은 들먹이며 자기 부대와
자기 씨족의 곤경을 호소했다. 맨 마지막으로 키가 작고 왜소한 체구에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중년의 사내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 고문간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다스럽기로 유명한 눌라이의
족장 알프 살치였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알프 살치는 일태리쉬 칸을 보자 그 자리에 넙죽 엎
드리더니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 아악, 거룩하신 칸이시여, 우리 눌라이는 이제 끝장입니다.! 튀르기쉬 개자식들이 우리 가축과
재산을 몽땅 약탈해갔어요. 아욱, 아욱, 아흐흐윽, 우린 끝장입니다. 끝장! 여자들이 수도 없이 끌
려갔어요. 그중에는 제 마누라도 있습니다. 아아, 여러 이르킨들, 제 마누라는 이제 겨우 열아홉이
란 말입니다. 우리 마누라처럼 고귀하고 예쁜 여자는 투르크에도 없습니다. 밤낮 튀르기쉬 잡년들
과 붙어먹던 그 똥개 같은 자식들이 우리 마누라를 보기만 하면 무, 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
까? 그, 그 짐승 같은 놈들이! 그 막돼 먹은 불한당 놈들이! 우리 마누라한테 무슨 짓을 하겠습니
까? 흑, 흑! "
알프 살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침을 튀기며 울부짖었다. 얼굴을 허물고울고불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다 못해 숨을 헐덕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용감하다는 뜻이 <알
프>라는 이름이 우스꽝스러울 만큼 완전히 이성을 잃은 중늙이였다. 상좌에 앉아 있던 고문간이
참다 못해 꾸짖었다.
" 칸의 어전이오!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 부꾸럽기는 뭐가!"
알프 살치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엉덩이로 털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았다. 그리고 추한 얼굴
이 눈물로 범벅된 채 고문간에게 삿대질을 했다.
" 부족이 다 결딴나고 마누라는 잡혀가고 자식들은 줄줄이 굶어 죽을 판인데 뭐가 부꾸럽단 마
야! 수치가 뭐 말라비틀어진 거야?"
서열을 무시하고 고문간에게 맞고함을 지르는 알프 살치의 추태는 일태리쉬 칸이 나서서야 겨
우 진정되었다.
" 제발 진정하기 바라오, 알프 살치. 마음을 가라앉히고 먼저 카툰이 주는 술로 마음을 가라앉
히시오. 우리 투르크는 모두 형제입니다. 나와 이곳에 모인 여러 이르킨들은 누구도 당신의 불행
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 아아, 거룩하신 칸!"
알프 살치는 후다닥 일어나서 칸의 손을 쥐고 자신의 머리 위에 갖다 대었다. 일태리쉬 칸은
그에게 자리를 권했꼬 카툰은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칸이 늑대머리 장식이 달린 왕홀을 들고 막 회의를 주재하려고 할 때였따. 어막 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소리가 나더니 근위대 장관 욱사시부가 달려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문간은 즉각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욱사시부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지만 눈동자는 푸른빛을
번뜩이며 빛나고 있었다.
" 아뢰오. 우친왕 전하께서 탈옥했사옵니다. "
" 뭣이!"
일태리쉬 칸은 벌떡 일어났다. 칸은 연극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바
보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동공을 열어놓은 그의 얼굴을 보자 사람들은 일태리쉬 칸이 진
심으로 놀라고 있음을 알았다. 문간은 시원한 물줄기가 뜨거운 이마에 퍼부어지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 근위대 장관,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분명 그놈을 가둬놓으라고 했거든 어떻게 탈옥했단 말
이냐?"
" 한 시간 전에 모래 감옥 문을 열고 간수들을 때려눕히고 멀리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욱사시부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 감시를 소홀히 한 죄 죽어 마땅합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지휘관들이 일제히 술렁거렸다. 일태리쉬 칸은 간수들이 군율을 어겼으니 그들을 처형하겠다고
했찌만 욱사시부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 간수들도 다 달아났습니다. 간수들은 저의 부하들이니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일태리쉬 칸도 지휘관들도 모두 어쩔 줄을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쿠이를 데리고 어딘가로 도망쳐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 해선 안될 생각을 마음 한구석
에 담어두고 있던 일태리쉬 칸이었다. 그래서 쿠이의 처형을 하루 미룬 것이리라. 그런데 뜻밖에
누군가가 욱사시부였다. 직책상 칸의 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었던 그는 쿠이를 혼자 탈옥시키고
자신이 대신 죽으려고 하고 있었다. 칸은 인간사의 괴로운 뒤얽힘에 새삼 화가 치솟았다.
" 총사령관, 추격대를 조직해서 달아난 쿠이놈을 찾으시오. 모두 잘 들으시오. 지금 이 순간부
터 우친왕의 모든 권하과 명예를 박탈하는 바이오. 그놈은 이제 제국의 죄인이오. 과인은 놈이 잡
히는 대로 처형할 것이오. 또 명령을 소홀히 한 근위대 장관은... 근위대 장관은..."
모두의 가슴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어막을 경비하던 근위대 병사들이 어막
밖에서 일제히 기다려달라고 소리쳤다. 근위대의 천인대장 카쓰가 두 명의 부하를 시켜 손을 뒤
로 돌려 오라를 지운 한 백인대장을 데리고 나타났다. 카쓰는 백인대장에게 꿇어앉앗, 하고 날카
로운 목소리로 명령하고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 칸이시여, 이놈을 처형해주십시오. 이놈이 달아난 감옥책임자 입니다."
문간은 금방 사태를 알 수 있었다. 잡혀온 백인대장은 파이타이라고, 20년 전 신풍이 마구공장
시절부터 욱사시부와 함께 지내온 오랜 부하였다. 욱사시부를 구하기 위해 대신 죽으러 온 것이
다. 일태리쉬 칸은 성큼성큼 걸어가 덮어씌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 네가 우친왕을 감시하던 간수냐?"
파이타이는 고개를 꾸벅하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 그러하옵니다."
욱사시부가 벌떡 일어나 아니라고 외쳤다. 그는 화를 내며 파이타이를 꾸짖고 일태리쉬 칸의
소매를 붙들었다. 칸은 근위대 병사들을 불러 욱사시부를 끌고 나가게 했다. 그리고 파이타이를
즉각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욱사시부가 벌떡 일어나 아니라고 외쳤다. 그는 화를 내며 파이타이를 꾸짖고 일태리쉬 칸의
소매를 붙들었다. 칸은 근위대 병사들을 불러 욱사시부를 끌고 나가게 했다. 그리고 파이타이를
즉각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욱사시부와 파이타이가 끌려나가자 장막 안에는 괴괴하 정적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공허하고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고 문간은 장막 밖으로 나가 해가 뜰 때까지 초원을 걷고 싶은 충동을 억
눌러야 했다. 일빌개 카툰이 무표정한 얼굴로사람들의 자에 술을 채워주었다. 멀리서 처형되는 파
이타이가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가 들려왔다.
하늘에는 별이 많다.
땅에는 이름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각
자기들의 전설을 갖는다.
그 가운데 하나를 노래부르자.
아하, 내가 부르는 노래 모린 쿠르를 들어라.
하늘에는 천둥 번개가 치고 있었다.
땅에는 많은 전쟁과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없애려고 하는
위험한 적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해 노래부른다.
아하, 내가 부르는 노래 모린 쿠르를 들어라.
하늘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땅에는 북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장 먼 북소리를 따라
멀리 멀리까지 갔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그때의 일을 노래부른다.
아하, 내가 부르는 노랜 모린 쿠크를 들어라...
4
고려성에 사는 고구려 사람들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시끄럽게 떠들면서 성문 앞으로 모여들
었다. 이른 아치이었지만 성문 앞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군중들의 얘기를 듣고 놀란
아낙네들은 경악에 휩싸여 집으로 달려갔고 집에 있던 남정네의 팔목을 붙들고 다시 성문으로 달
려왔다. 고려성은 마치 들쑤셔놓은 벌집 같았다.
드디어 초라한 마차가 나타났고 군중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아이들과 함께 내렸다.
" 아, 아, 아란두니임... 아리구, 아란두니임..."
늙은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울었다. 남자들은 흥분한 나머지 주먹을 불끈 쥐고 휘두르며 가한
정 쪽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친왕비 아란두가 평민으로 강등되어 가한정에서 쫓아난 것이다.
" 아이구, 원통해라아. 이게 뭔 일이다요. 이게 무슨 날벼락이다요오."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이 당한 모욕처럼 분개했다. 아란두는 매년 가을마다 전통적인 대제사장
의 흰 옷을 입고 금빛 성부를 목에 걸고 열여덟 마리의 낙타가 끄는 거대한 이동막사를 타고 고
려성에 나타났다. 그리고 전통적인 예법에 따라 동맹의 의식을 주관했다. 만리 타향에서 그녀가
주관하는 동맹의 번제와 감사제를 바라보는 고구려인들은 향수와 감격게 잠겨 눈물을 흘렸었다.
10만이 넘는 고려성 사람들에게 아란두는 종교와 도덕을 포함한 모든 고차원적인 삶의 책임자
였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거의 자리에 없는 고문간 대신 가한정의 <친왕
비님께> 달려갔다. 사람들은 늙었던 젊었던 그녀를 어머니처럼 의지하며 그녀의 손에 자신의 영
혼을 맡기고 그녀의 칭찬이나 비난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했다. 귀족 출신들 중에는 그녀를 미워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녀를 존경했다. 그녀는 나라가 망한 뒤 온갖 풍파
에 시달리며 돌궐까지 흘러온 사람들의 닻이요, 안정이었다.
그런 아란두가 하루아침에 모든 지위와 명예를 잃고 허름한 세마포의 사제복 한 벌만 걸친 채
고려성에 나타난 것이다.
불우한 대제사장은 두 딸을 걸리고 갓 태어난 아기를 안은 채 슬픈 발자국을 옮겨노았다. 그녀
의 얼굴은 처연하도록 창백했으나 그 이빨을 사려문 입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성문
앞에 모였던 사람들은 잠자코 그녀가 지나갈 길을 터줄 수밖에 없었다. 아란두는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늙은 여자들의 그녀의 옷을 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아란두는 성 한복판 동방교
의 신전에 딸린 사제관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 걸었다.
그런데 그녀를 호송해온 병사들로부터 더 충격적인 소문이 전해졌다.
" 돌궐제국 안의 모든 신민들은 내일 안으로 짐을 싸서 이 지역을 철수한대. 남쪽으로부터 흑
치상지의 대군이 밀고 올라온다느만."
고려성 사람들은 경악과 공포로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냐. 바람
부는 것도 비가 오는 것도 모두가 팔자 소관이라지만 어쩌자고 우리에게 날마다 폭우만 쏟아진단
말이냐.
철수하다니!
고려성은 하루종일 술렁거렸다. 고려성 사람들은 돌궐인들처럼 툭하면 목초지를 옮기는 유목민
들이 아니었다. 오르도스에 온 뒤 양과 말고 소와 염소와 낙타 등을 조금씩 길러 유목도 하지 않
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자신들을 유목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고려성 주변 구
십구천지역의 땅을 개간하여 보리와 채소, 조, 기장을 심고 농사를 지어왔다.
그 땅을 갈아 수확을 거두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던가! 첫수확을 거두어 하늘에 계신
당고르께 동맹의 제사를 올릴 때는 모두 흐르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었다. 이제야말로 지긋지긋한
강제이주로부터 벗어나 살 땅을 찾았다는 생각에 손발이 닳도록 일을 했떤 것이다. 그런데 철수
하다니? 이 땅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낙?
고문간 장군과 그의 영부인 싸른토야는 아직 가한정으로부터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삼삼오
오 모여서 메부수수한 얼굴로 걱정과 울분을 털어놓았다.
" 남쪽에서 흑치상지가 쳐들어온다니 더 북족으로 가겠지 뭐. 아마 고비사막 북쪽으로 가지 않
을까?"
" 아이, 막북? 아니, 여기서 더 북쪽으로 가면 어떻게 농사를 지으라는 거야?거기 사람들은 무
슨 농사를 짓는감?"
" 에잇, 맹꽁이 같으니. 바로 같은 소리 좀 작작해. 네놈은 머리통이란 걸 남이 쥐어박으라고
가지고 다니지?"
일찍이 쿠이의 군단을 따라 북방 대초원을 다녀온 적이 있는 울파우태는 화를 냈다.
" 농사가 다 뭐야. 비는 병아리 오줌만큼 내리고 날씨는 미친년 널뛰듯이 지랄 맞아. 비가 오지
않으면 한발이 생기고, 가을에 비가 오면 마른 풀이 썩어서 가축들이 죽지. 겨울에 눈이 한 자만
와도 작은 가축들은 움직일 수 없어서 얼어죽고, 겨울에 기온이 떨어지면 물이 얼어 마실 것이
없어서 키 큰 가축들이 죽지. 농사가 될 턱이 있나."
" 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굶어죽기 딱 좋대요. 올해도 막북엔 눈보라가 닥쳐서 가축이 열에 일
곱은 죽어나갔다던데."
이런 걱정은 일이 제대로 안 풀릴 때 무리가 모이면 항상 생기게 마련인 불평과 불만으로 발전
했다. 평탄할 때도 파벌싸움이 심했던 고구려인들이다. 무리가 10만이 넘는 데다가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북방 대초원으로 이주한다고 하니 잠자코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불만은 아란두와 고문간을 미워하던 두 유력 인사들에게로 접수되었다. 그들은 바로 영주 지역
이주민들의 대표자 격인 연달고와 고려성의 행정관 송새별이었다.
연달고는 지난날 영주에서 아란두를 추방했떤 미추홀파 장로인 남모의 아들이다. 연남모는 그
뒤 새 대제사장이 되어 박수파 사제들을 당에 고발하여 죽이고 득의의 세월을 누렸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였다. 영주 지여의 지도자로 행세하던 연남모는 본의 아니게 보장왕의 반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재산이 적몰되고 유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은 그의 아들 달고는 돌궐
로 망명했다. 달고는 아란두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애원한 끝에 간신히 용서를 받아 고려성
에 살게 되었다.
연달고는 상당한 재산가인 데다가 군중을 교묘하게 선동할 줄 아는 달변가였다. 자리가 잡히자
추종자들이 생겼고 그의 추종자들은 고문간과 아란두가 돌궐인들에 붙어서 고구려 사람들을 죽음
의 전쟁터로 내몰고 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또 두 사람이 간통하고 있다는 소문도 퍼뜨렸다.
연달고는 이런 식으로 고려성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식시켜나갔다.
한편 송새별은 그 무렵 고문간과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 5년 전 돌궐에 못살겠다며 난리를 피
우던 문간의 한심한 꼴을 기억하고 있는 새별은 그가 10만 고구려 사람들의 지배자가 되어야 하
는 운명을 납득할 수 없었다. 문간 역시 자신이 <칸> 이라고 불린 뒤에도 사람들 앞에서 반말을
하는 이 부담스러운 친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새별은 최근 문간 때문에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
고 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어린 고공의가 <투둔초르(지방장관)> 로 씨족장의 반열에
오른 반면 새별은 <투둔바르>로 행정관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 단번에 해치워 끝장을 볼 수 있다면 당장 해치우는 것이 좋소. 고문간도 설마 자기 둥지에서
당하리라곤 생각 못할 거요."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렸다. 고문간 부부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소수의 경
비병만을 거느리고 고려성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이 때는 이미 제각기 추종자와 부하들을 거느린
두 사람의 음모를 꾸민 뒤였다.
반역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문간의 군대는 고려성 바깥에 주둔하고 있었고 고려성에 배치되어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송새별의 병사들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 인적이 끊긴 거리를 따라 300 여명이 움직여 갔다. 송새별의 백인대 3개
부대가 소리도 없이 고문간의 집을 포위한 것이다. 최초의 공격은 경비병들이 자고 있는 숙소에
가해졌다.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보초병에게 다가간 송새별의 부하 하나가 그의 목에 단검을 손잡이 끝까
지 찔러넣었다. 칼을 뽑아든 돌격대가 곧바로 숙소로 뛰어들었다. 먼길을 달려와 곤한 잠에 빠져
있던 경비병 스무 명은 갑자기 들이닥친 음모자들에 의해 손 쓸 틈도 없이 살해되었다. 고려성
한복판에서 일어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야습이었다. 마침 고공의는 가한정에 있어서 참변을 모면
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고문간과 그의 아내는 사지가 묶인 채 감금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고려성이 주인이 바뀐 것
이다.
아침이 되자 소의 대롱뼈로 만든 음침한 골소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고려성 사람들의 총회를
알리는 신호였다. 사람들은 눈을 꿈뻑거리며 영문을 몰라 하다가, 그러나 곧 긴장한 얼굴이 되어
저마다 칼을 차고 성의 북쪽 구역 동방교 신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성벽 위의 교통로와 성벽 주
변, 성문에는 송새별의 부하들이 배치되어 이 사태의 정보가 30리 바깥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으
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고울링 발리크, 즉 고려성은 세 개의 넓다란 간선도로에 의해 여섯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가장 넓은 것이 남북으로 통하는 <박다르의 길> 이며 다른 둘은 동서로 통하는 해모수로와 그
북쪽의 주몽로이다. 주택가와 곡물창고, 저수지가 남쪽의 두 구역에 있고 시장과 행정관의 관저가
중앙의 두 구역에 있으며 군사지휘소와 고문간의 집과 망루, 무기고 그리고 동방교 신전이 북족
구역에 있다. 바같족은 거의 수직에 가깝고 안쪼은 사라들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완만하게
만든 토축 성벽이 이 여섯 개의 구역을 널따랗게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은 남쪽의 주택가로부터 시장을 거쳐 북쪽으로, 북쪽으로 몰려갔다.
동방교 신전은 <신들에게 열려진 문>을 상징하는 커다란 두 개이 놋쇠 기둥이 있고 그 뒤에
테두리를 놋쇠로 장식한 굵은 나무 기둥을 양 측면에 20개씩 박고 휘장을 두른 신전의 뜰이 있
다. 뜰을 지나면 돌로 만든 신전이 있고 그 안에는 또 신도들이 참배하는 예배소와 신상과 경전
을 모신 지성소가 있었다.
군중들은 정문의 두 놋쇠 기둥 앞에 멈춰섰다.
그 기둥 옆에 두 팔이 꽁꽁 묶인 고문간이 삼엄한 칼날 아래 꿇어 앉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벌
써 어지간히 얻어맞은 듯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고문간의 몰골을 보 사람들은 아연실색했고, 고려
성의 권력구조가 뒤집혔음을 실감했다. 송새별과 연달고의 지시를 받은 자들은 중구난방으로 떠
들며 선동했다. 그들의 성화를 업고 연달고가 신전 뜰 앞의 커다란 하마석위로 올라갔다. 연달고
는 특유의 능변으로 군중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 여러분, 저는 잠을 자면 늘 잉런 꿈을 꿉니다. 우리 고구려 사람들이 저마다 말잔 등에 비단
을 묶고, 수례마다 금화를 가득 싣고 노래를 부르며 요동성으로, 졸본성으로, 또 평양성으로 들어
가는 꿈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벅이란 결국 뭔가 좋은 것을 많이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쳤을까요? 우리는 지금 이러지
도 못하는 막막한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곳곳으로 강제이주디고 유리걸식하다가 간신히 살아보
겠다고 찾아온 이곳에서 그 한가닥 실오라기처럼 부여잡고 있던 꿈마져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군중들은 숨쉬는 것조차 잊고 연달고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연달고는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굴렀다.
" 바로 이 고문간이라는 자가 우리를 이곳 정든 고려성에서 끌어내어 먼 북쪽으로 이주시키려
고 하는 것입니다. 먼 북쪽입니다. 여러분! 고비사막을 지나서 더 북쪽! 아득한 벌판을 가로질러
오르혼강이 흐르는, 우리의 옛 땅에서 수만 리 떨어진 곳입니다. 우리의 옛 당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떼놓은 것이 우리가 뼈저리게 고생한 보답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북쪽으로 가기를
원합니가?"
" 아니오! 아니오!"
연달고의 물음은 이구동성 입을 모은 격렬한 부정의 소리로 돌아왔다 연달고의 추종자들은 손
에 돌을 들고 선동했다. 저놈을 돌로 쳐죽이자! 부추김에 힘입어 연달고의 연설은 더욱 고조 되었
다.
" 돌궐인들은 저희 멋대로 이 자를 우리의 지도자로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는 우리 젊은
이들을 무수한 전쟁터로 끌고 갔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부당한지도자는 공공연한 폭군보다도 더 악한 것입니다. 이 자는 다시 우리를 우리가 밭갈이한
이 땅으로부터 떼내어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막북으로 끌고 가려 하고 있습니다."
연달고는 주먹을 치켜들고 소리 높이 외쳤다.
"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 땅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지배했던 돌궐인들은
이제 힘을 잃었습니다. 지금 남쪽에서는 흑치상지 장군의 대군이 우리의 코앞까지 와 있는 것입
니다. 돌궐에 붙어 우리를 지배했던 이 사람과 아란두를 묶어서 토벌군에 넘깁시다. 그러면 우리
는 살 수 있습니다. "
추종자들이 부추긴 열렬한 박수소리가 연달고의 말에 호응했다. 군중들도 열이 올라 박수를 치
기 시작했다. 그토록 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이런 일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문간은 두려움에 심장
이 얼어붙었다.
5
흥분한 청년들과 송새별의 부하들이 놋쇠 기둥 옆으로 달려가 다시금 고문간을 때려눕혔다. 고
문간을 쳐죽이려고 돌을 휘두르는 자도 있었다. 평소 문간에게 아낌없는 신뢰와 존경을 보내던
고려성 사람들이 정말로 하루 아침에 표변해서 분노의 맹렬한 불길로 뛰어 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군중들 속에서 신중하고 사려깊은 노인들이 있어 날뛰는 청년들을 말려주었다.
노인들은 고문간 장군의 말도 한 번 들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달고는 거부했으나 군중들의
시리가 노인들의 의견에 찬동하는 쪽으로 기울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군복을 피와 흙으로 더럽힌 문간이 두 팔이 결박된 채로 하마석 위로 올라갔다. 문간은 착잡한
표정으로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문간은 이런 날벼락 같은 사태를 꿈에도 예기치 못한 자신의 멍
청함이 한스러웠다. 문간은 지난 사흘 동안 가한정에서 오로지 군사작전의 성공 여부만을 토론하
고 논쟁하고 고민했던 것이었다.
" 우리는 지금 사각 포위망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우리는 전멸당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포위망의 가장 약한 고리인 북쪽의 오구츠를 격파하면서 막북으로 쳐올라가는 것뿐입니
다. 그래서 위구르의 본영을 직격하는 것입니다."
톤유쿠크가 이 제안을 내놓자 많은 지휘관들이 물끓듯이 흥분하여 반대했다. 이 빈사상태의 군
대와 아녀자들을 데리고 어떻게 1천 900 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을 한단 말인가? 더구나 위구르
를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현재 위구르의 바즈 칸은 9개 부족의 오구츠족(토구즈 오구츠. 돌궐
제 1제국이 멸망한 뒤 북몽골 고원의 토라강 연안, 천산산맥, 알타이산맥, 소그디아나, 아랄해, 카
스피해, 볼가강 연안, 중가리아 분지 등 옛 돌궐제국의 변방 9개 지역에 있던 부족들이 분리 독립
하여 성립된 연방제 유목 국가. 원래는 투르크족이었으나 돌궐 제 2제국 시기에는 투르크의 본류
와 대립하는 별개의 민족 단위가 되었다. )을 지배하여 정병 10 만을 거느리고 있는 북방 대초원
의 맹주였다.
고문간도 열심히 반대했다. 고구려인들의 책임자로서 막북행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부담응ㄹ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그 방법 말고는 살 길이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간은 한바탕 긴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 여러분, 본인은 누구처럼 멋있는 말을 할 줄은 모릅니다. 나는 사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
고 판단을 여러분에게 맡기려 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이 나를 묶어서 당나라에 항복하겠
다고 한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본인은 한때 나마 여러분을 통솔했던 칸의 명예를 더럷히지 않고
당장이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이곳
에 머물러 있으면 이 지역이 온전히 우리 고구려 사람들의 땅이 될 것이라는 저 선동가의 말을
믿지 마시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연달고는 고함을 질렀고 군중들은 웅성거렸다. 문간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 지금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당나라 군대 외에도 튀르기 쉬는 벌써 눌라이 부족의 목초지
를 점령하고 서북쪽으로부터 이곳으로 죄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북쪽에선 위구르가 쳐들어오고
있고 동쪽에선 쭈스 부족이 키타이의 공격을 받고 쫓겨왔습니다. 돌궐은 지금 동서남북에서 동시
에 공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문간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당당해졌다.
" 여러분, 이 같은 사태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흑치상지가 우리의 적들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이 점령한 땅을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각서를 써 주겄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고려성
은 곧 키타이들이 점령할 것이고 당나라는 그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스스
로 피땀 흘려 가군 이 고려성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살기를 바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
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차차리 죽을지언정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는 고구려 사람들이라는 것
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동방의 신들은 우리에게 대지와 창공에 가득한 큰 생명의 목소리를 따라
자유롭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정녕 키타
이들의 노예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군중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문간은 말을 이었다.
" 여러분, 마음을 크게 가지셔야 합니다. 사람이란 운수가 나빠 이렇게 지독한 곤경에 빠져 있
으면 다음엔 항상 더 나아지리란 희망이 있는 것이니 두려울 것도 없는 법입니다. 막북이 낯설다
해도 마음 붙이고 살기 나름입니다. 천하는 지금 수십 개, 수백 개의 민족들이 자륜(톱니바퀴)처
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방차(방직기계)가 되어 있습니다. 이 마당에 나라도 없는 우리
고구려인들이 농사에 연연하여 첫바퀴를 돌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여
러분,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농사를 짓지 못한다면 유목을 하면 됩니다. 죽거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그것이 낫습니다. 새 땅에서 새 나라를 만듭시다. 우리가 여태까지 몰랐던 숨겨진 대지
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문간의 설득은 너무 성급했다. " 유목을 하자" 는 말에 군중들은 앞뒤를 다 잊고 흥분했다. "
그렇게는 못해!" " 저 놈을 끌어내려!" 하는 욕설이 터져나왔다. 젊은이들이 달려가 문간을 끌어
내려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들의 성난 발길이 문간을 짓이겼다. 송새별은 날카로운 칼을 뽑았
다.
" 이 병신 같은 자식아아!"
야망을 실현할 때는 지금이었다. 송새별은 달군 쇠를 삼키는 심정으로 발로 고문간의 배를 힘
껏 짓밟으며 두 손으로 칼자루를 거꾸로 틀어쥐었다. 그의 두 손이 하늘 높이 번쩍 치켜들렸다.
그런데 그 때였다. 40개의 기둥에 걸려 마치 담처럼 신전을 둘러 싸고 있던 천으로 된 휘장이
갑자기 일시에 코앞에서 떨어지자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숲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놀란 군중들
의 눈에 물을 열어 제친 신전의 모습이 들어왔다.
열 폭의 앙장도 남김없이 걷어져 신전의 내부는 절대 드러나지 않았던 지성소까지 환하게 들여
다보였다. 소란이 일시에 멎었다. 돌연한 사태에 송새별의 살의도 안개처럼 흩어졌다. 고려성 사
람들은 지성소의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았다. 한때 동방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지혜와 영광이 나
타난,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벽화들.
열두 자 짜리 큰 문이 활짝 열린 신전의 천장에는 해를 상징하는 세발 까마귀와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수놓아진 노란 비단으로 된 천개가 늘어져 있고 그 안쪽에는 박달나무로 정성껏 만든
제단이 있었다.
제단 중앙의 벽에는 왼편에 달의 여신 <아란두>가 두 손으로 달을 머리에 이듯이 받쳐들고 동
족을 향해 날고 있었다. 아란두는 보는 이를 녹일 듯 눈꼬리치며 웃고 있었고 그녀가 입은 초록
색 삼려의 소맷깃은 날개처럼 하늘로 뻗어 있었다.
신전을 가호하듯 하늘을 나는 해모수와 아란두. 그 사이에 빛의 신 박다르를 상징하는 신단수,
영생불사의 박달나무가 환상적인 주홍빛 이파리를 뒤틀며 서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나무
였다. 해와 달의 빛이 동시에 그 주홍빛 이파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앞에 제단이 있고 제단 좌우, 사방의 벽에는 주몽왕의 자손들을 지키는 107명의 신들이 그
려져 있었다. 수레바퀴를 굴리는 제륜의 신 <안두하>, 칼을 벼르고 있는 야철의 신 <보로굴>,
알고 태어난 추모를 날개로 덮어 보호했다는 신조 < 아리아애>, 머리는 황소에 몸은 사람의 몸
을 하고 한 손에는 벼 이삭을 들고 달리고 있는 농경의 신 <가루달>, 좌우로 불의 옷자락을 날
리며 마치 종이가 불타며 떠오르듯 승천하고 있는 노화의 신 <부슬란>... 그늘이 진 그 신전 벽
의 한구석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여러 벽에 그려진 여러 신들 가
운데 하나가 살아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아란두였다.
아란두는 대제사장의 제의를 입고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목 뒤로 드리운 채 신전 뜰로 걸어나
와 거침없이 열린 문 밖에 모인 군중들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란두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을 치
켜뜨고 소리쳤다.
"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송새별은 자기도 모르게 칼 든 손을 감추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송새
별만은 아란두에게 칼을 휘두를 수 없었따. 왕년에 신들의 제단과 그 대제사장을 위해 죽겠다고
해모수의 신전에 피로써 맹세했던 송새별이었다. 그는 그녀의 발치께로 눈을 떨구었다.
아란두는 이번엔 연달고를 쏘아보았다. 연달고와 그의 추종자들은 험악한 얼굴로 다가서며 칼
자루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아란두를 난자할 기세였다. 아란두는 모슨 돌메이들이라도 보는 듯이
잔인할 정도로 푸표정하게 그들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리곤 군중들을 노려보며 성큼성큼 걸어갔
다.
마치 그녀의 손에 보이지 않는 늑대사냥 채찍이 들려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어쩌면 좋을지
몰라 쩔쩔매며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젊은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온 아란두의
위엄에 몸을 떨었고 늙은 사람들은 이런 얄궂은 소란에 끼여들어 아란두에게 면목을 잃어버린 것
을 슬퍼했다. 이윽고 아란두는 큰소리로 말했다.
"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고르께선 우리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무
수한 난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어 이렇게 큰 마을을 일구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당고르의 가
호하심을 기억한다면 왜 이토록 안달하며 형제끼리 피를 흘린단 말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이것
밖에 안된단 말입니까?"
아란두는 단호하게 군중들을 꾸짖었다. 모든 권력과 지위를 잃어버렸건만 역시 한 인간의 타고
난 무게와 기품은 사라질 수 없었다. 등뒤에는 막 칼로 찌르려는 음도자들, 눈앞에는 언제라도 난
동에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추호도 흔들임이
없었다.
그녀는 오른손 손바닥을 쫙 펴서 하늘을 가리켰다.
" 형제 여러분, 잘 들이시오. 당고르께서 나에게 임하셨소. 하늘과 땅과 바다 가운데 사는 모든
피조물들의 주인이신 당고르께서는 우리의 혼란을 통촉하시고 우리의 갈 길을 알려주셨소. 나 아
란두는 당고르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하리니 이를 부정하는 자는 당고르와 그분의 신명 박다르와
그분의 신인 당고르 오르캄과 해모수와 추모를 멸시하는 자요. 그런 자들은 영원히 지옥의 악령
들과 더불어 살 것이오."
주위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아란두는 쾅쾅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형제들이여 똑똑히 들으시오. 우리 고구려 사람들은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당나라
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오. 사람의 고기를 먹는 그런 망구수들(<인육을 먹는 마귀>라는 말. 이
시기 투르크나 고구려의 종교지도자들이 보기에 중국인들은 추악한 식인종족이었다. 은나라 때부
터 1960년대 문화혁명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은 식인을 약간 혐오스럽긴 하지만 일상적인 일로
여겨왔다. 측천무후 시대는 사실 주욱 식인문화의 절정기였다.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위로는 황실
로부터 아래로는 굶주린 빈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행했다. <철경록><조야첨재> 등에 나오는,
친구를 해로 만들어 먹은 설진, 첩을 삶아먹는 고찬,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상식한 독고장
등이 모두 측천무후 시대이 사람들이다. 이 시대 유명한 악질 관리였던 내준신도 식인형을 당했
다. <민중들이 다투어 달려들어 내주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마침내 진흙 같은 찌
쩌기만 남았다>는 기록이 <자치통감> <당기> 에 전한다. 당나라 말깅 가면 너무 많은 사람 고
기가 시장에 나오는 바람에 인육의 가격이 폭락하여 1근에 100전으로, 1 근에 500전 하는 개고기
보다 훨씬 헐값에 매매되었다.), 그런 야만인들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북
방 초원으로 나아가 끝까지 침략자들과 싸울 것이오."
군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연달고가 도끼눈을 뜨고 항변했다.
" 돼먹지 않은 수작 집어치우시오! 그러면 결국 우리도 돌궐 사람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
아니오? 당신을 여왕처럼 떠받들고 우리는 소똥, 말똥을 만지면서 유목을 하고 살아야 한단 말이
오?"
연달고는 유목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그는 계속 칼자루를 만지고 있었다. 군중들은
모두 칼을 치고 있었다. 그런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아란두를 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흥분
시킬 수 있는 꼬투리가 필요했다. 백성들은 조마조마해하며 아란두를 돌아보았다. 어떤 이들은 기
회를 보아 아란두를 베려고 잔득 고대하고 있었으나 또 어떤 이들은 서서히 혼란과 무질서를 야
기할 것이 분명한 이런 반역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두 부류 모두 귀를 세우고 아란두의 말을
경청하려 했다. 아란두는 연달고의 보이지 않는 칼끝을 교묘하게 피해갔다.
" 여왕이라니? 연달고! 너는 망령된 말로 당고르의 영광을 더럽히고 있구나. 우리 고구려 사람
들이 이 초원까지 들어온 것은 모든 일이 당고르의 섭리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아무것도 우연에
의해 일어난 것이 없느리라. 이 초원은 가난하지만 공정하다.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이 그것을 겪
어서 알고 있다. 저기 저 사람을 보아라!"
아란두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손가락을 들어오라에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된 고문간을 가리켰다.
" 형제 여러분, 저 사람을 좀 보시오. 저 사람은 여러분들의 칸입니다. 당나라의 말로 하면 여러
분들을 다스리는 왕인 것이오. 그러나 저 사람이 여러분에게 요역을 강요한 일이 있었습니까? 오
히려 저 사람은 이곳 고려성으로 귀환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오. 왜냐하면 그 자신의 식
량과 가축을 헐어서 사방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하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자를 잃은
불운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했기 때문이오. 저 사람이 전쟁에 나가 얻은 전리품들이 그렇게 쓰여
졌소. 여기 이 자리에도 그렇게 대접받은 분들이 있을 것이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수십 명이 손을 들었다. 맞습니다... 고문간 장군은 의인이오 ... 고문간 장군 집에는 양식이 떨
어질 때가 더 많이... 고문간 장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우리 식구들은 굶어죽었다.(초원의 정치문
화는 칸이 대인으로서 백성들에게 시혜적 자선행위를 배풀 것을 강요한다. 손님 접대와 빈민 구
제로 인해 부족해지는 재원은 주로 칸이 전쟁에서 획득한 노예의 노동으로 벌충된다. 칸의 노예
들은 활, 화살, 안장, 말고삐, 칼 등을 만들고 가죽에 자수를 하여 문양을 넣고, 모직물을 짠다. 칸
들은 이렇게 만든 상품을 백성들에게 팔고 중국 변경에 설치된 호시에 내다 팔아 계속 칸 노릇을
할 돈을 번다) 고문간 장군을 풀어줘라... 풀어줘라. 군중들 속에서 앞을 다투어 그런 소리들이 일
어났다. 연달고의 무리들은 크게 당황했고 아란두는 용기를 얻어 말을 이었다.
" 형제 여러분, 초원은 가난하지만 순결합니다. 당고르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순결합니다. 이곳
은 당나라의 탐욕과 폭정에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어려움이 닥치면 각자 알아서 견디고
견디지 못할 때는 더 좋은 곳으로 떠나면 그만입니다. 어디에 살건 어디로 가건 모두 자기 의지
에 따라 결정합니다. 칸이 마음에 안들면 여러분은 유목하는 가축들을 데리고 다른 칸에게로 떠
나면 됩니다. 어떤 칸도 자기 손으로 스스로 유목을 해서 살아가야 하는 여러분의 이웃일 뿐입니
다."
군중들 사이에서 찬동의 소리가 커져갔다. 연달고와 송새별의 무리들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갔고 아란두의 얼굴에는 여유만만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 여러분, 초원에는 위구르나 키타이처럼 당나라의 악습에 물든 나쁜 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사로이 처결 할 수 있는 큰돈을 가지고 호의호식 하면서 당의 황제와 똑같은 인간 쓰레기가 되
어 있습니다. 후궁의 분바른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백성들에게 거둔 세금으로 이기적인 열락과 무
의미한 사치를 일삼고 있습니다. 빛나는 금, 아름다운 은, 부드러운 비단, 종자 보리, 살찐 말과
종우, 검은 담비털과 푸른 타르바간(다람쥐) 털을 터질 듯이 쌓아놓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백성
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고문간이나 가한정에 있는 일태리쉬 칸은
어떠합니까? 이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까?"
군중들은 일제히 아니라고 입을 모아 외쳤다.
" 나쁜 칸 밑에 있는 백성들은 원한이 날로 커져서 노예의 반란, 비천한 무리들의 폭동이 만연
할 것입니다. 칸은 불안에 떨며 당의 황제와 똑같이 사람을 화형에 처하고, 난도질을 하고, 심장
을 잡아 뜯고, 뼈를 붓는 잔혹한 고문으로, 악업의 극한을 다해 자기를 보호하려 할 것입니다. 한
주먹의 흙덩이를 가지고 미쳐 날뛰는 해일을 막으려 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 아란두와 여기
있는 고문간 장군은 그런 나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우리의 자식
들을 낳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손들이 어떤 나라에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나를 믿어주시겠습니까? 나와 같이 새 나라, 새 하늘 밑에서 살겠습니까?"
대세는 기울었다. 신전 앞은 발을 구르며 아란두를 지지하는 군중들의 환호소리로 떠나갈 듯했
다. 반역을 자행한 무리들은 완전히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 그 모든 일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연달고가 칼을 휘두르며 아란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문간도 사람들도 모두 비명을 지르며 얼어
붙었다. 아란두는 몸을 굴려 아슬아슬하게 칼을 피했다. 연달고가 고함을 지르며 다시 칼을 치켜
들었을 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그를 쓰러뜨렸다.
북쪽 구역의 네거리에 서 있는 그 여자는 싸른토야였다.
갇혀 있던 집에서 혼자 묶인 밧줄을 푼 싸른토야가 남편과 올케를 구하기 위해 활을 쥐고 달려
온 것이다. 싸른토야는 두 번째 화살을 날려 또 한명의 음모자를 쓰러뜨렸다. 가까이 있던 송새별
의 병사 하나가 창을 던졌다. 싸른토야는 창자루를 안고 쓰러졌다. 그 다음은 아수라장이었다. 머
뭇거리고 있던 군중들이 칼을 뽑아들고 음모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연달고와 송새별의 무리
들은 일변 싸우면서 일변 도망쳤다. 달아나고 쫓고 역습하고 불을 질렀다. 싸움은 신전과 사제관
에까지 번졌다. 신전이 불타기 시작했다.
잠시 수 살아남은 음모자들은 말을 타고 일제히 고려성을 빠져 나갔다.
6
막북행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고려성의 반란은 그날 당장 진압되었다.
그러나 반란의 피해는 뜻밖에 컸다. 신전에 보관하고 있던 소중한 경전들이 불타버렸다. 이문진
의 연대기 <신집> 같은 경전의 원본들은 아직 가한정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원본이 없는 경전
들, 아란두가 여러 동방교 사제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억을 되살려낸, 그때까지는 암송에 의
해서만 전수되던 많은 구전율법들과 외경을은 영영 복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차후
에 걱정할 문제였다.
고문간과 아란두는 죽어가는 싸른토야 옆에서 통한과 자책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창은 그녀
의 배를 궤뚫어 등으로 삐져나왔고 쏟아지는 피는 땅을 흥건히 적시며 고여 있었다. 문간이 소리
내어 울면서 그녀의 머리를 안아 일으켰다. 싸른토야는 문간을 보자 목을 떨었다.
"코자, 카르니 아씨(서방님, 배가 아파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눈은 커다랗게 떠졌고 눈꺼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급보를 받은 고문간의 군대가 달여왔고 그들은 곧장 송새별을 추격했다. 가슴에 싸른토야의
화살을 맞도 쓰러졌던 연달고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튿날 달아났던 송새별의 부하들이 송새
별을 묶어서 추격대에 자수했다.
다음날 고문간은 두 반역자와 싸른토야의 시신을 가한정으로 데려갔다. 잠깐 사이에 사랑했떤
동생을 둘씩이나 잃은 일태리쉬 칸의 비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아아, 내 몸에서 팔다리가 떨어져나갔구나. 나엑 누구보다도 소중했던 네가 이렇게 죽다니.
점잖은 고구려 사람들의 마을로 시집을 간다고 좋아하던 네가 이렇게 죽다니. 항상 5월의 하늘
같던 네가 이렇게 차가운 시신이 되었구나."
연달고와 송새별은 즉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들은 팔다리와 머리가 각각 5마리의 말을에
묶여 찢겨지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뿐으로 다른 가담자들은 고문간의 처분에 맡겼고 고려성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절 책임을 묻지 않았다.
" 고문간 장군, 장군은 우리나라의 큰 기둥이고 사사로운 정리로는 나의 매제였소. 이 불행한
일로 우리의 우정을 깨뜨리지는 맙시다. 싸른토야는 나의 동생이었지만 장군에게도 사랑스런 아
내였으니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이 같이 견뎌야 하는 비극이 아니겠소."
문간은 자기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일태리쉬 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소.
체포되거나 자수한 송새별의 부하 중에는 옛날 돌궐로 망명할 때 문간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안
류와 을파우태가 있었다. 그러나 눈물을 머금고 모두 참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한정에서 장례
가 치러지는 동안 문간 대신 모든 짐이 꾸려지자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성벽을 헐고 성안의 모
든 집에 불을 질렀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고 가꾼 고려성을 불태우고 사람들
은 갈기갈기 찢어진 가승을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고구려 사람들은 가한정 북쪽에서 이동하며 이미 수백 리에 걸쳐 뻗어가고 있는 돌궐의 대군
뒤로 따라붙었다. 문간도 대열에 합류했다. 총사령관 톤유쿠크는 적들의 내습을 피하기 위해 밤에
도 행군하게 했다.
비탄에 떠는 인간의 숨결을 외면하며 밤하늘의 별빛은 비정하리 만큼 총총했다. 별빛은 고비사
막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더 청명했다. 여로는 옛날 망명길에서 헤매던 고비의 시커먼 자갈밭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눈앞에 명멸하는 어떤 풍경도 문간의 의식에 와닿지는 않았다.
고려성의 사건이 있은 뒤 고문간은 말을 잃었다.
싸른토야의 죽음은 그의 얼굴에서 피와 혈색을 앗아가벼렸다. 진한 흑색을 띤 움푹 들어간 뺨
은 지저분하리만금 주름 졌고 양손은 전장의 불길에 그을려 흉측한 상처가 생겼다. 그 얼굴에는
어느새 대초원의 흙, 바위, 그리고 엄혹한 기후가 그려내는 비극의 원시적인 풍경이 스며들어 형
언할 수 없는 우울의 깊이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주위에 슬픔과 혼란을 퍼뜨리는 바보다.
내가 아란두를 임신시켰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닌 쿠이. 그런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한결같이 정숙하고 충실한 아내였던 싸른토야.... 나는 대체 언제쯤에나 나
이값을 할 것인가. 설령 당고르께서 어떤 고통으로 나를 벌하신다 할지라도, 온갖 고난과 치욕이
내 머리 위에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해도 나는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겠다. 차라리 내가 세상 사름
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끊임없이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마음이 편하련만. 무슨 낯으로 일태리쉬 반
을 대한단 말인가. 아란두는 또 얼마나 마음이 괴로울 것인가.
문간의 이동막사에는 엄마를 잃어버닌 갓난 아들 원유가 있었다. 대열을 지나다가 짐승가죽으
로 된 되투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마차 밖으로 빼꼼히 눈만 내밀고 있는 아낙네와 아이들을 보
면 가슴이 저려왔다. 문간은 꿈에서 싸르토야가 하얀 신을 신은 발로 종종거리며 우유차(스티차
이)를 끓이는 모습을 보았다.
문간은 나이가 지긋하고 교양 있는 부인에게 아들을 맡겼다. 아란두의 이동막사에도 식량과 마
차 한 대, 유모 둘을 보냈다. 안아줄 때마다 아들은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란두에게는 먼발치에서
몇번 인사를 할 뿐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아란두도 낸내 침통한 얼굴이었다.
고비의 북부에 있는 모래사막 지대에서 돌궐군은 엄청난 모래바람을 만나기도 했다. 아이들을
마차 안으로 다 집어넣기도 전에 엄청난 모래바람이 정면으로 들이 닥쳤다. 땀에 절어 소금기가
현연 발잔등이 다시 누런 모래을 뒤집어썼다. 몇 대의 이동막사가 모래에 파묻혔으며 사람의 입
안에도 모래가 자금 자금 씹혔다.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모래바람은 무려 이틀 동안이나 돌궐군의 대열을 강습했다. 마창의 천막이 금방이라도 찢겨질
듯 바르륵 바르륵 펄럭였다. 하늘과 땅 사이 생명을 받은 모든 것들을 짓누르는 죽음의 공포를 ,
실제로 주어서야 끝이 날 그 거센 압력을 느꼈다.
모래바람이 끝나고 고비사막을 벗어난 돌궐의 대군이 <헬 타라>라고 하는 고비와 막북위 접경
지대(<헬 타라> 지역은 남북으로 약 300 킬로미터 정도로 양들이 먹을 짧은 풀만 자란다. 이 지
역을 통과해야 툴강, 오르혼강, 셀렝가강 등 큰 강들이 흐르고 풀과 수목이 함께 자라는 막북의
비옥한 목초지대에 이를 수 있다.)를 통과했을 때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군데군데
목초지가 많았지만 위구르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철저히 황폐한 지역만을 골라 행군했기 때문이
다. 진중에 식량이 줄어듦에 따라 양식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햄든 행군을 따라오는 아이
와 여자들의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도 없었다.
문간의 절제심은 그 극기의 정도가 지나쳐 자학처럼 보였다. 문간은 굶주린 병사들조차 기피하
는, 쓰러져 죽은 가축의 고기로 조악한 식사를 하면서 자신 앞으로 돌아오는 양식을 계속 병사들
을 위해 돌리고 있었다. 이런 고투 끝에 돌궐군은 드디어 양식을 계속 병사들을 위해 돌리고 있
었다. 이런 고투 끝에 돌궐군은 드디어 툴강을 지나고 오르혼강에 이르렀다. 소의 방광으로 만든
공기주머니를 달아 부상력을 만든 마차와 뗏목으로 오르혼강을 건너자 바로 그 동쪽이 위구르의
본영이었다.
도하에 성공한 돌궐군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공격에 나섰다.
반드시 적의 본진을 괴멸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위구르 군대는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외곽의 부대가 전멸할지라도 칸의 본진이 달아난다면 금방 전열을 정비하고 사정없이 반
격해올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전쟁이 길어지면 식량이 바닥나다시피 한 돌궐군은 전투에 이기고
도 스스로 공중분해될 위험이 있었다. 오르혼강 상류의 북쪽 골짜기에 아녀자들의 이동막사와 얼
마 남지 않은 가축들을 안돈시킨 뒤 돌권군은 오후 늦게 발진하여 밤새도록 동쪽으로 진군했다.
위구르의 본영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녘. 새들과 짐승들의 숨결도 모두 멎은 듯 바람 한 점 움직
이지 않는 들판엔 희미한 여명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돌궐군의 내습을 알아차린 위구르군은 본영으로부터 달려나와 강행군을 하여 지칠 대로 지친
돌궐군을 단숨에 섬멸하고자 했다. 고문간은 고공의에게 천인대 5개를 주어 별도의 사단을 편성
해주고 천인대장 손모례수를 행정관으로 승진시켜 천인대 5개를 맡기고 역시 별도의 사단을 편성
했다. 남은 5개의 천인대는 자신이 직접 거느리고 선봉을 맡았다.
"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고공의 장군이 나를 대신하시오."
누구의 눈에도 고문간 장군이 결사의 각오로 임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굳이 명예로
운 전사를 원하지 않더라고 누구도 목숨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전투에는 대제사장 아란두
까지 따라왔다.
고구려군이 포진하자 아란두는 전쟁을 관장하는 추모왕의 신령 앞에 전승을 빌어주었다. 대제
사장은 위구르군이 육박해오는 가운데 1만 5천의 고구려군 앞에서 하늘을 향햐 두 손을 들고 큰
소리로 기도했다.
주문왕은 성스러운 불꽃이요 신인이시다.
하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한없는 턱을 베푸사
동방의 빛이 되신 분이시다.
흩어졌던 당고르 오르캄의 아홉 지파를 하나로 모으시고
거룩한 땅들을 되찾으시어.
새로이 신성왕국을 일으키신 분이사다.
그러자 병사들은 저마다 무기를 쳐들고 호태왕(광개토 대왕) 시대부터 불려진 동방교의 군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월동방 천추만세 공명무진
일월동방 문성무덕 동방진주
...
아란두는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신의 화살을 드신 주몽왕이여
적들의 잔혹한 손길을 물리치시는 주몽왕이여
생에 몰아치는 풍우를 없이 하시고
엉킨 운명의 실타래를 푸시는 주몽왕이여.
이 괴로운 자손들이 영원히 당신을 기억하나이다.
주저없이 따르리니 당신이 정해놓으신 곳으로 인도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불꽃이 이 무섭고 떨리는 가슴 위에 자라나지이다.
오 주몽왕이여
위대한 시대의 조상들이여
고구려를 지켜주시는 신령들이여
당신들의 경지로 우리를 끌어올려 주소서.
하늘과 땅에 충일한 당신들의 다정한 힘이여
우리와 함께 있어주소서.
아란두가 하늘로 치켜들었던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내렸다. 그러자 병사들의 군호가 더 짧게 바
뀌며 거대한 함성으로 이어졌다.
동방지존 동명성제 추모현신,
동방지존 동명성제 추모현신,
와아아아아아...
고문간이 칼을 뽑아들고 공격을 명령했다. 아란두의 좌우로 성난 고구령의 기마 군단이 제방이
터진 봇물처첨 쏟아져나가다. 총대장인 고문간이 기병들의 제일 앞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본거지
를 불태우고 무려 1천 900 킬로미터 이상 북상한 고구려군이다. 여기서 지면 처자식과 함께 다
죽는다는 생각에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부하들이 행여 뒤질세라 미친 듯이 대장을 뒤따랐다. 그
왼편에는 톤유쿠크가 지휘하는 돌궐의 대군이 역시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말을
달려갔다.
위구르군은 여지없이 참패했다. 북방 대초원, 전 몽골고원을 지배하는 패자요 당나라부터 한해
도독의 직위끼지 받은 위구르의 바즈 칸은 어이없게도 첫 전투에서 사로잡혔다. 고구려군에 사로
잡힌 바즈 칸은 필사적으로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일태리쉬 칸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문간
은 소원대로 해주었다. 그러나 칼을 달려와 바즈 칸을 알현한 일태리쉬 칸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
었다.
" 바즈 칸, 신들은 비열함을 미워하십니다. 귀하는 배행검 시절 부터 네 차례나 당나라의 편을
들어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또 귀하는 얼굴에 수치를 이겨 바르고 당나라군의 꽁무니를 따라가
장안에서 관직까지 받았습니다. 위구르족이 투미투 칸(603년 돌궐 제 1제국이 망한 뒤 몽골고원
을 장악한 것은 설연타였다. 그러나 645년 설연타의 도미 칸은 하주를 공격하다가 집실사력에게
대패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설연타는 붕괴되고 일태베르 투미투의 위구르가 등장한다. 투미투
칸은 타쉬켄트를 영유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의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위구르를 대초원의
확고한 정치적 지배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투미투 칸이 죽자 당은 친당적인 성향을 가진 바즈 칸
을 원조하여 반당적인 성향을 가진 투미투 칸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위구르의 대권을 잡게 하였
다. ) 때에 받았던 존경과 명예는 귀하로 인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운명을 받아들이십시오."
일태리쉬 칸은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나를 정복한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는 것
을 증명하며 자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적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즈 칸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계속 자비를애원하다가 결국은 목이 베이고 말았다.
수령을 잃어버린 위구르군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사방 100여 리에 걸쳐 있던 위구
르의 거대한 본영은 불에 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돌궐군은 사분오열되어 무질서하게 대항하
는 위구르군을 셀렝가강 유역까지 몰아붙여 거의 모두를 전멸시켰다. 살아남은 위구르군은 멀리
남쪽의 외튀갠산으로 달아났으나 거기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오르혼강과 셀레가강의 사이. 흉노, 유연, 돌궐, 몽고 등 역대 대유목제국을 출현시켰던 사통팔
달의 땅, 유라시아 초원 벨트의 중심지가 돌궐제국의 손에 들어왔다. 위구르 정벌에 대한 소문은
눈덩이 처럼 부풀려지고 뻥튀겨져 사람들을 떨게 만들었다.
"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이고 항복한 남자들은 모두 다리를 잘라 말젖 짜는 노예로 만들었대
요."
" 바즈 칸은 뵈클리 군대에게 사로잡혀 죽었대요. 뵈클리들이 창을 적당한 위치에 모아 겨눈
뒤에 바즈 칸의 손과 발을 양쪽에서 잡고 흔들다가 공중으로 던져 창에 꿰뚫려 죽게 했대요."
애수에 찬 뿔피리소리와 함께 이 유목세계의 <천하>가 뒤집혔다는 소문은 초원 전역으로 퍼져
갔다. 돌궐군은 외튀갠간이 보이는 따뜻한 남쪼긍로 내려가 다시 두 번쨰의 가한정을 세웠다. 일
태리쉬 카이 위령을 발하자 유목민족들은 바람에 풀잎이 쓸려 넘어지듯 일제히 공물을 보내어 구
복해왔다. 이제까지 반세기 동안 돌궐을 괴롭혔던 9개의 오구츠 부족들도 항복해왔다. 이듬해가
되자 돌궐제국은 이렇다 할 공방전 한 번 없이 몽골고원을 석권해 버렸다.
제 6부 초원의 향기
이 예연을 기억하라. 당고르의 백성들이여.
멸망의 날에 태평의 왕이 있어 너희를 어둠응로부터 끌어내리라.
비탄과 재앙의 땅에서 당고르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리라.
너희는 그 땅에서 잡신과 잡귀를 섬기는 무리를 모두 멸하라.
이것은 당고르께서 정하신 운명이니 망각하지 말라.
불은 공기의 죽음으로 살고 공기는 불의 죽음으로 사나니.
죽지 않는 신은 죽어가는 신들과 함께 살 수 없나니.
- 돌궐의 투르크 룬 문자로 씌어진 <해모수칸인 카인력> 중 <을두지 2서> 마지막 부분
1
조용한 가을 아침이었다. 문간은 별ㅌ이 좋은 곳에 의라를 놓고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문간은 강아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고래를 들었다. 저 멀리 부드럽게 굽이치
는 언덕 위에서 말 한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말 위에는 여덟 살 난 새까만 사내녀석이 타고
있었다. 손모례수의 아들 무루였다.
" 장군님, 장군님, 고려성에 대상들이 왔어요. 대상들이에요. 낙타가 100 마리도 넘어요. 수백
마리예요."
무루는 양의 오줌보로 만든 축구공이 뒹기듯이 달리는 말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문간은 짐짓
노여운 척 화를 내었다.
" 이 녀석이 ! 또 장군님이야? 그냥 어르신이라고 부르라고 했잖느냐."
" 아참, 그렜지."
그러거나 말거나 무루는 제 할 얘기가 급했다. 녀석은 콧구멍을 발씸발씸 연방 숨을 몰아쉬면
서 이러마나 굉장한 대상들이 왔는지 입에 침을 튀겼다. 몰랑몰랑한 농환에 예쁜 호극, 희한하게
생긴 오리병, 유리구슬,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혈훈장, 남지장, 슬슬 목걸이, 안식향, 모치, 성전, 아
저씨들이 좋아하는 암마륵에 빈검까지(농환은 공. 오극은 신발, 혈훈장은 볼연지, 남미장은 아잇
도, 슬슬은 에메말드, 모취는 모직물, 성전은 페르시아산 카펫. 암마륵은 아몰라 포도주. 빈검은
서역 철로 만든 칼)...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올눌제(해구신)도 있어요. 어르신, 그거 먹고 새장가가봐요."
" 예끼! 이 고얀 놈!"
" 아참, 얘들아, 환인(마술사)들이 왔어. 입에서 불을 뿜고, 칼로 마악 자기 배를 가르고 팔다리
를 마악 뗐다 붙였다 하더라."( 불을 뿜는 것은 토화라고 부르던 묘기, 배를 가르는 것은 도인, 팔
다리를 뗐다 붙였다 하는 것은 지해라 불렀음. 모두 당대에 유행한 서역인들의 서커스 묘기.)
어느새 아이들이 집에서 달려나와 손짓 발짓을 하며 떠벌리는 무루를 보고 있었다. 환인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두 주먹을 바들바들 떨며 흥분했다. 여섯 살 난 아들 원유가 문간의 눈치를 살피
며 말을 꺼냈다.
" 아버지, 우리도... 환인들... 구경하러 가요."
" 오늘 분 숙제는 다 베껴 썼느냐:?"
문간은 엄격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문간의 아들 원유와 아란두의 맏딸 마라치키카
와 둘째딸 두리치치카, 옜날 쿠이가 우친왕이었을 때 모테긴이라 불리는 아란두의 아들 호라, 아
이들은 모두 쭈뼛거렸다. 문간은 요즘 <당고르 오르캄>에 나오는 간단한 기도문들을 교재로 아
이들에게 투르크 문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원유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 가, 가, 갖다 와서 쓸꼐요."
" 안된다. 공부란 시간을 잘 지켜야 하느리라. 점심 먹을 때까지 계속 쓰거라,"
문간이 고개를 젖자 아이들은 울쌍이 되었다. 이이들의 유모인 을나 부인까지 낙심천만한 표정
이 되었다. 그때 아란두의 아들 호라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 아, 아저씨. 점심은... 말타고 가면서 먹어도 되는데요."
그러자 문간은 갑자기 멀컹한 얼굴이 되었다. 눈을 꿈벅거리던 문간은 입꼬리를 삐죽 거리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들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 너 거기 가서 소부 아저씨더러 나들이 가자고 해라. 아주머니도 오시라고 하구, 들판ㅇ 낙 거
연에, 해두, 막근이보고도 오라고 해라."
아이들과 유모가 함께 소리를 지르며 팔짝팔짝 뛰었다. 열두 살인 마리만이 엄마를 쏙 빼닮은
냉정함으로 체면을 차리고 있었다.
잠시 후 문간은 아이 넷과 유모 두 사람, 천소부 부부와 그 아기들, 문간의 가축들을 맡아 일하
는 청년 거연, 해두, 막근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망망한 지평선 위에 천층 만층 구름이 피어오르
고 가을 하늘은 푸른 물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맑았다. 날씨는 따뜻했고 멀ㄹ 바라보이는 오르혼
강 하류의 초원은 가을 아지랑이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키 큰 사시나무들이 서 있는 숲을 돌
아가자 평탄한 공지에서 열서넛 살쯤 되는 오르도들, 소년근위병들 한 부대가 훈련을 받오 있었
다.
말을 탁 도열한 300 명 가량의 소년들 앞에는 들창코를 가진 백인대장 한 사람이 고래고래 소
리를 지르고 있었다.
" 단단히 쌓아올린 성벽같이 옆사람과 밀착해라! 말을 타고 싸울 때는 턱을 쳐들고 눈을 반쯤
감아서 아래를 본다! 이 자세는 말에서 내려서 싸울 때는 턱을 아래로 당기고 어금니를 꽉 깨물
고 눈을 치켜떠서 적을 노려본다! 이 자세는 적이 칼로 목을 치는 공격을 어렵게 한다. 알겠나!"
" 예에."
" 너, 부상자가 생겼을 때는 어허게 한다고 했나?"
" 예셋, 부상자는 후미로 빠지고, 상처입지 않은 자가 전위를 맡아 전열 유지합니다."
" 쭈우와. 모두 잘 들었지? 알았으면 함성을 질러라!"
아우우웃, 우웃, 우웃...
멋진 검은 담비털 모자를 쓴 오르도 소년들은 일제히 주먹을 들고 늑대의 포효소리를 내질렀다
얼굴이 시뻘갛게 되도락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푸른 하늘을 향해 전설의 은빛 늑대, 만리의 광
야를 건너와 돌궐의 조상들을 낳은 어머니 늑대의 혼을 부르는 것이다. 바그레하게 물든 홍안의
얼굴, 진주처럼 하얀 이빨들이 햇살을 튕겨내며 빛났다.
문간은 백인대장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게 그곳을 멀찌감치 우회하여 지나갔다.
고문간은 재작년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모든 공적에서 사퇴했다. 고공의를 고구려 대족장(뵈
클리 일테베르 이르킨)으로 승진시켜 군을 맡겼고 손모례수를 고려성 장관(뵈클리 투둔초르)으로
승진시켜 고구려 사람들을 책임지게 했다. 잠시 고구려족의 대변인겸 연락관(뵈클리 탐가치)으로
일했던 천소부는 문간과 같이 은퇴했다. 두 사람은 일태리쉬 칸이 하사한 넓고 아름다운 목초지,
치치크 초원으로 들어왔다.
퇴역한 늙은이가 군대 근처에 얼쩡거리는 것은 우스광 스럽지 않나.
올해 마흔네 살이었고 평균수명이 짧았던 이 시대에도 아직 노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이였
다. 그러나 문간은 스스로를 늙은이라고 하고 있었따. 치치크 초원에서 보낸 지난 2년은 온통 무
겁고 칙칙한 색깔들로 채색된 그의 일생에 드물게 화사하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삼나무처럼 쑥
쑥 자라는 아이들을 보는 것도 커다란 기쁨이였지만 열아홉 살 이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독서
와 몽상의 시간이 있었기에 더욱 즐거웠다. 자신의 아이들과 아란두의 아이들을 기르며 언젠가는
돌아올 아란두를 기다리는 시간은 고적하고 평화로웠다.
아란두는 4년전 불타버린 경전을 복구해줄 사람을 찾아 당나라로 떠났다. 이 세상에 동방교의
그 방대한 경전들을 다 암송하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그녀의 첫남편 오이 사제였다. 당
나라에 남아 있었던 동방교 사제들은 거의 모두 처형되었거나 병사했다. 그러나 아란두는 오이
사제만은 어딘가에 살아서 신앙을 보존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문간은 아란두를 붙잡아두려는 것이 어리석은 욕심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란두는 그런 여자였
다. 그녀는 남자를 위해 살기에는 너무나 강렬한 지성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
기 시작한 최초의 순간에도 문간은 이미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크고 힘센 암사슴을 피해가려
는 약한 수사슴의 본능처럼 문간은 그녀를 향한 이끌림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사랑
이 곧 열병이었던 젊은 시절에는 그런 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문간은 늙었고 기
다림에 익숙해졌으며 나름대로 사랑과 사람 살아가는 일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그녀를 향한 사랑은 더욱더 뜨겁게 타올랐지만 문간은 더욱 조용해졌고 유순해
졌다. 4년 전 문간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녀의 아이들을 대신 맡았고 그녀를 위험한 국경
너머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리곤 얼마 뒤 벼슬을 그만두고 그녀가 남기고 간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의 시선은 항상 먼 지평선에 머물며 있었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 신들이 점지해두신 재회를 기
다렸다.
<치치카>는 돌궐말로 꽃이라는 뜻이다. 이 초원에는 한곳에 넓게 군락을 이룬 꽃들이 많았다.
말입술꽃, 바람꽃, 환양털꽃... 문간은 멀리 가까이에 나부끼는 꽃들을 보며 사라져버린 청춘의 아
련한 흔적들을 더듬었다. 최초의 가슴떨림, 첫 입맞춤, 한 여자를 영혼 속에 받아들인 환희. 그녀
의 향기가 쏟아지고 그녀의 뺨이 와닿을 때, 그때의 결심. 이여자와 함께 머리를 누울 수 있다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결심, 그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전쟁, 재회, 망명, 또 전쟁, 결혼,
아내의 죽음.
초원이 저녁빛 속에 만경창과 북은 풀파도가 넘실거리면 가끔 죽은 싸른토야가 생각났다. 저
황홀한 노을 위 하늘 어딘가에서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싸른토야가 자신을 구하
기 위해 용감하게 활을 쏘던 모습이 떠오르면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에게 진실하지 못
했던 죄... 죽어 성스러운 당고르의 옥좌 앞에 나갔을 때 나는 어떤 천벌을 받게 될까.
" 막리지 어르신, 평안하셨어요?"
회상에 잠겨 있던 문간은 인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강변
에 있는 대상들의 천막으로 가고 있었다. 문간을 본 사람들은 모두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했
다. 문간은 또 멀겋게 웃으며 말 위에서 목례를 했다.
가한정에서 멀지 않은 오르혼 강변에 재건된 고려성은 옜날 오르도스의 그것보다 그것보다 훨
씬 작았다. 이제는 다들 흩어져서 유목을 해야 했기에 고려성에 사는 사람들은 1만 명 남짓했다.
고려성 사람들은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초원에 사는 문간을 <막리지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이 호칭은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었다. 돌궐제국으로부터 <뵈클리 칸>의 작위를 받은 문간은
엄밀히 말하면 <어라하>라고 불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임금이라 불려지다니, 문간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징그러웠다. 그래서 나는 원래 족보도 없는 가짜 고씨라고 끔찍하고 징그
러웠다. 그래서 나는 원래 족보도 없고 가짜 고씨라고 스스로 공언하고 다녔다. 그렇다고 돌궐인
들처럼 <칸>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했던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 고구려의 수상직이었던 막리지
였다.
<막리지 어르신>. 문간과 고구려 사람들은 그쯤에서 서로 타협했다. 후일 <신당서>와 <구당
서> <책부원구>에 적히게 될 고문간의 우스꽝스런 호칭 <고려왕막리지> <고려막리지>는 이렇
게 만들어졌다.
" 야아. 저것 봐. 만등이다. 만등!"
원유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기름을 넣고 마조각으로 심지어 받은 색색의 유리벼이 줄에 걸려
있었다. 대상들이 차려놓은 시장의 입구였다. 멀리 고려성이 보이는 호르혼 강변. 100 리 라도 넘
는 낙타들이 초원에 가지런히 늘어서고 그 앞에 천막들을 치고 향료, 옷, 신발, 일용품, 보석, 술,
칼과 방패, 약품에 장난감까지 온갖 잡화들을 펼쳐놓은 은성한 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들 주위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수십 개의 구덩이를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커다란 솥들을 끊이
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누군가. 억척스런 아줌마들이 귀라나 면류, 양고기를 요리해서 상인
들이며 오가는 손님들에게 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물품 견본을 가지고 온 아저씨들
이 대상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석국, 강국(사마르칸드), 안국(부하라)등에서 온 이 소그드
새상들은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목민들로부터 수만필의 말들과 모피와 양털을 사서 중국으
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문간은 나무 기둥에 천으로 벽을 둘러친 환인들의 천막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 누가 환술 구경을 하겠느냐? 응, 그래. 그럼 막근이는 아이들에게 구경을 시켜주어라. 우리는
술집에 가 있으마."
문간은 관람료와 군것질할 용돈을 막근에게 주고 아이들과 부인네들을 떠맡겼다. 그리곤 천소
부와 다른 두 청년들고 함께 술집으로 향했다. 밤에는 잠잘 시간이 없고 낮에는 앉을 시간이 없
었지만 도궐제국의 시련기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서 문간은 페르시아에서 빚어온 암마륵, 아
몰라 포도주에 맛을 들였다. 시련기의 엄격한 절제가 몸에 익어 이제는 과음하는 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포도주가 있다면 지나치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 술집에는 감철관 제곡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낯익은 사람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 뵈클리 칸! 이야, 오랜만인걸."
" 형님! 아이구, 어쩐 일로 여기까지..."
문간은 반갑게 두 손을 맞잡으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오랫동안 생사동안 생사고
락을 같이 하면서 너무 많은 재난을 같이 겪은 욱사시부였다.
의리를 지키며 짧고 굵게 살다 죽겠다던 왕년의 신풍호한 욱사시부는 어느덧 쉰두 살이나 먹고
있었다. 6년 전 근위대 장관으로 있다가 우친왕 쿠이를 도망시킨 죄로 태형을 당하고 추방되었던
그는 작년 대사면령으로 복권되었다. 그 직후 제국의 수석감찰관(괴제티베기)에 임명되어 지금까
지고 현직에 있었다.
" 툴라부(툴라강 연안 지역. 현재 몽골공화국의 수도인 울란바토르 근처.) 에 일이 있어 가는
길이지. 안 그래도 이 근처를 지나니까 임자 생각이 나던데 공무가 좀 바빠서..."
" 조정엔 별일이 없죠?"
" 아무 일 없어. 임자가 그만두니까 나라가 더 잘되는 것 같아. 으하하하"
" 그 말은 맞아요."
문간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서력 693년. 중국은 측천무후의 장수 2년. 동서 4만 리의 돌궐제국의 화사한 봄날처럼 평화로웠
다. 돌궐제국의 판도는 이제 알타이 산맥을 넘고 중가리아분지를 종단하여 실크로드의 담벼락인
천산(텐산) 산맥에 이르고 있었다. 100 여 년 전부터 도서로 분열되어 같은 민족이면서도 분쟁을
거듭해온 서돌궐도 이제 막 평화리에 흡수통일되려는 찰나였다. 일태리쉬 칸은 지금 그 교섭을
위해 직접 천산산맥까지 가 있었다.
그 동안 돌궐제구을 짓밟기 위해 갖은 공략을 다해온 당나라는 내부의 갈 등에 휩싸여 있었다.
30년 간 권력을 향한 활화산 같은 집념을 불태워온 무후가 3년 전 마침내 <혁명> 을 단행하여
국호를 주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의 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측천무후의 나이 쉰여섯 살. 5천 년 중국사의 유일한 여제의 성신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의 정착을 우해 측천무후는 밀고와 고문의 공포정치로 정적들을 숙청해야 했다. 7
년 전 돌궐제국을 패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명장 흑치상지도 무고를 당했다. 그는 조회절의 역모
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외치를 향한 무후의 꿈은 이 같은 내정의 급박함에 자리를 내주었다. 사실 당은 더 이상 돌궐
을 공격할 장군도, 전비도, 의욕도 고갈된 상태였다. 당나라는 돌궐제국에 밀려 막북이 있던 안북
도호부, 막남의 선우도호부, 서역에 설치한 안서사군을 차례차례 철수 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튀르기쉬를 앞세워 서쪽에서 돌궐을 압박해오던 사라센제국도 더 이상의 팽창이 불가능해
졌다. 동로마제국과의 관계가 악화 될 대로 악화되어 690년에 마침내 다시 전면전에 돌입했기 때
문이다. 이로써 동쪽의 대흥ㅇ란령산맥으로부터 몽골의 대초원을 거쳐, 하서회랑, 텐산산맥, 파미
르고원에 이르는 비단길(실크로드)과 초원딜(스텝로드)은 온전히 돌궐젝국의 보호 아래 들어왔다.
돌궐제국은 이 지역이 막대한 주액 차이과 통사오호세를 거둠으로써 유쾌없는 번영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태리쉬 칸은 각국의 사신들에게 나는 당나라 황제보다 가난하지만 내 백성들은 당나라보다
더 잘산다고 자랑했다. 돌궐 제 1개국, 돌궐 제 2개국,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도 이어지면
서 1천 300년 동안이나 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돌궐인들의 비결. 즉 군대에서 길러진 사회지
도층의 용맹함과 청렴함이 이 무렵 순백의 눈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술잔을 나누며 중국에 말을 팔고 비단을 사서 서역인들에 넘기는 견마 무
역의 시세에 대해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래가 수판쟁이 출신인 고문간은 그런 문제에 항상
관심이 많았다. 욱사시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문간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아란두님은 중국에서 돌아오셨나?"
문간은 씁쓸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그때 그러시는 게 아니었는데. 아란두님이 설마 자네를 파문하실 줄 누가 알았나. 그것도 모
자라 당나라로 가버리시다니. 너무 욕심이 과하셨어."
욱사시부는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문간은 날카로운 창 끝으로 가슴이 꿰뚫리는 아픔을 느꼈다. 그 자신 기를 쓰고 잊어버리려 하
는 일을 욱사시부가 우연히 건드린 것이다. 문간의 얼굴이 창백해짖 욱사시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5년 전 북방 대초원으로 들어왔을 때 모든 것은 희망에 차 있었다. 아란두는 행복해보얐다. 30
대에도 그녀의 생명력은 초원의 싱그러운 바람과 거치없이 펼쳐진 광활한 지평선 위에서 강렬하
게 비찼다. 아란두는 유목을 하느라 점점이 흩어진 신도들을 찾아 말을 타고 곳곳을 누비며 동방
교의 재건을 꿈꾸었다. 그러나 동방교는 곧 무수한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돌궐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은 광활한 영토에서 고구려인들은 정복전쟁을 시작했다.그러나 옛 고
구려당에 필적하는 사방 5천 리가 넘는 영토 안에는 피야크족, 나우족, 페르간족, 톨고이족, 타가
르족, 아다이족, 마사케트족, 구론족 등 수많은 종족이 살고 있었다. 이 종족들을 복속시키는 과정
에서 아란두와 고문간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아란두는 잡신과 잡귀를 섬기는 이 부족들을
모두 죽여없앨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란두는 <온곤(온곤 숭배는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에 널리 퍼진 사령 숭배. 흔히
넓게 벌린 다리와 커다란 가슴을 가진 뚱뚱한 여성의 조각 등을 상자 안이나 한적한 장소에 보관
하면서 이 <온곤>에게 제물을 받침)> 을 숭배하는 아다이족과의 전투를 직접 지휘한 뒤 포로로
잡힌 2천여 명을 모조리 처형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초원 지역에서 귀중한 노동력인 전
쟁의 포로를 이렇게 죽여없애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전설로 전해지던 불의 여신관 <에뚜겐(몽골 고대종교에 등장하는 여신의 이름이자 여자 샤먼의
이름. 이보다 더 후대에는 탱그리와 결합하는 대지모신으로 숭배된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
졌다. 대초원의 벌판과 산들과 숲의 사잇길에는 죽음이 공포에 떨면서 달아나는 군소 부족들의
어리저운 발자국이 새겨졌다. 탈주자들은 스스로를 변명할 겸 아란두와 고구려인들의 잔인성을
있는 대로 과장하여 이웃에 전했다.
" 뵈클리들 사이에 아란두라는 에뚜겐이 나타났어요. 그 에뚜게은 포로들의 팔을 자라 하늘 높
이 던져서 그 땅바닥에 떨어지는 피의 모양으로 길흉을 점친다고요."
" 나도 그 에뚜겐이 포로를 찔러죽인 뒤 그 상처에 이을 대고 생피를 빨아먹는 것을 보았습니
다. 보기에도 기쁨에 넘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란두의 이름은 이렇게 으시시한 악마의 형상으로 초원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소문을 듣고
아란두보다 더 괴로워한 것은 고문간이었다. 문간은 아란두에게 달려나가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란두는 오히려 문간의 불철저성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 해모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그 땅에서 잡시과 잡귀를 섬기는 무리를모두 멸하라>라고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당고르께서 정하신 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하신 당고르께선 죽어가
는 신들, 저런 잡신과 함께 거하힐 수 없습니다. "
" 아란두님, 그것은 현실적으로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교리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항상
사랑을 가르치신 당고르께서 그토록 처참한 처분을 하실 리 없지 않습니까. 살려주고 충분히 교
화하면 될 사람들을 왜 죽여야 합니까?"
" 한계가 있는 인간의 지혜로 당고르의 멀고 심오한 뜻을 재고 헤아리려 하지 마십시오. 경전
엣 이르신 대로 행해야 합니다."
" 저는 못합니다."
" 당고르의 지시를 거역하겠다면 형제를 파문하겠습니다."
"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저 사람들이 왜 잡신가 잡귀를 섬기는 무리들인지 납득할 수 없습
니다. 저 사람들도 탱그리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나 저들은 말과 사슴과 늑대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 할 수 없는 이단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란두였지만 문간은 이런 억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간의 현실주의적인
눈으로 보면 그것은 광신이고 독선이었다.
대초원의 모든 종족들이 믿는 탱그리와 동방교의 당고르는 애초에 같은 신이었다. 초원의 탱그
리는 많은 신들이 평등학 공존하는 원시종교 특유의 상대주의적 조화 속에 있었다. 그 ㅌㅇ그리
를 믿던 민족들 가운데 하나가 동방으로 내려와 정주해 살면서 고구려라는 고대국가를 이루게 되
자 나타난 것이 당고르였다. 당고르는 모든 신들의 신으로 격상되었으며 더 나아가 여타의 신령
들과는 차원이 다른 유일신에 가까운 존재로 발전해갔다.
그러나 이것은 원시종교와 보다 고등한 종고의 차이일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진정한 신과 잡
신의 차이라고 차별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같은 생각 때문에 아란두와의 갈등은 격력하게 계속되
었다. 문간은 자신의 권한으로 군대에 대한 아란두의 지시를 거절했으며 아란두는 대제사장의 권
한으로 문간을 파문했다.
이렇게 되녀서 아란두는 점점 더 한계에 부딪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고구려인들이 농경민족에서 유목민족으로 전환하면서 신앙의 열기기 식었다는
것이다. 봄 여름에 놀고 가을 겨울에 일하는 유목생활은 농경생활과 너무나 달랐기에 동방교의
모든 율법과 의식이 뒤흔들렸다. 더구나 끝없는 이동, 고리분사된 각 가정, 생전 처음 겪는 자연
재해들, 수천 마리의 가축들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 계속되는 전쟁이 적응기에 있는 고구려인들
을 괴롭혔다. 궁핍에 시달리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을 이런 곳으로 데려온 아란두를 원망하기 시
작했다.
이런 가운데 톨고이족과의 전쟁에서 50 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
화되었다. 고구려인들의 불만은 절정에 달했다.
" 아란두님, 저희는 저희의 힘으로 이 당을 정복하리라 믿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아란
두님이 당고르께서 이 땅을 저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리가 하셨기에 그 말을 믿고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뜻바에도 전쟁에 패하고 전사자까지 생겨났습니다. 저희들은 당신이 예언한
모든 것이 거짓인 것 같아 괴로워 견딜 수 가 없습니다."
" 형제 여러분, 세상에 대가 없는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신들의 채찍
을 맞아야 합니다. 자유는 하나의 저주오 같이 위험합니다. 그러나 이 저주를 안고 일어설 때 우
리는 비로소 당고르의 영광과 사랑에 다가 서는 것입니다. "
아란두는 열심히 설득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신도들은 썰물처럼 이탈해갔다. 그녀가 평
민으로 격하되어 현실적인 권력의 구심점이 되지 못한 탓도 있었다. 아란두는 밤잠을 못 자고 기
도하며 고뇌했다. 그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피가 마르고 입술이 타들어가는 고뇌였다. 결국 그녀
는 중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유목민으로 전환하면서 발생한 고통들은 시간이 지나면 호전되겠지만 동방교과 기록된 경전없
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다. 궁궐과 나란히 서 있는 신전, 사계절의 농사에 따라 이어지
는 제의, 밀집된 마을에서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신앙생활은 이제 불가능
해진 것이다. 동방교는 이제 문서종교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구려 시대에도 경전은 있었
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제사장들에게만 있는 성물이었다. 이제는 모든 사제와 신도들이 가질 수
있는 새 경전이 필요했다.
아란두는 몇 명의 제자들만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떠났다. 본의 아니게 그녀에 대한 박해자의
한 사람이 된 고문간의 괴로움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가 없었다. 말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란두를 배웅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날은 평생을 두고 잊
지 못할 비참한 날이었다... 문간은 긴 한숨을 쉬고 말했다.
" 아란두님이 오이 사제를 찾아 새 경전을 마련하게 되면 동방교는 다시 부흥할 겁니다. 저는
아란두님을 믿어요."
그러자 욱사시부는혼자말처럼 중얼거럈다.
" 그렇지만 벌써 4년씩이나. 이젠 쿠이님도 돌아왔는데..."
" 예에? 뭐라구요?"
" 쿠이님이 돌아왔다고 했네. 몇 달 전에 서돌궐 지역에 있는 하칸의 어군막에 나타나셨다는군.
지난해 대사명령 때 쿠어님의 죄도 사면되지 않았나. 하칸께서도 반갑게 맞으셨다는군."
문간은 팔을 늘어뜨린 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죽지 않았다면 당연히 돌아올 사람이었는데도
충격은 컸다. 문간은 갑자기 목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그, 그 동안은 어디 계셨는지..."
"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야. 가한정에서 도망친 뒤 하서땅으로 갔는데 금방 당나라 관헌들에게
쫓기게 되었대요. 더 서쪽에 있는 처비시 부족의 비쉬 발리크로 도망쳤는데 무슨 사연이 있었는
지 거기도 못 있고 더 서쪽으로 흘러가 발하슈호수(카자흐스탄 동남부에 있는 동서 길이 605Km,
최대 너비 74 Km의 거대한 호수, 이리, 카라탈, 레프사, 아야구즈의 네 개 하천이 흘러든다.) 까
지 갔다더군. 거기서 3년 동안 뱃사공 노릇을 하느라 일태리쉬 칸의 사면령도 금방 못들었대."
잠시 후 욱사시부는 감찰관들을 데리고 떠났다. 환술 구경을 마친 아이들이 찾아왔을 대 고문
간은 전에 없이 침울한 얼굴로 포도주를 세 병이나 비우고 있었다.
2
욱사시부를 만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겨울에 대비한 양 살찌우기가 시작되어 문간의 목초
지도 부산해졌다. 일손이 모자라 문간도 손수 양떼를 몰고 오톨(양을 살찌우기 위한 가을의 빈번
한 이동. 여름에 생긴 양의 수지방을 유지방으로 바꾸어 추운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 '뭉게'와 '토
모'라고 하는 영양가가 많은 풀이 있는 곳을 찾아가 간단한 천막에 노숙하면서 집중적으로 풀을
먹인다)에 나섰다. 그런데 집에 남아 있던 아란두의 맏딸 마리치치카가 문간이 오톨을 나간 먼 들
판까지 말을 타고 찾아왔다.
"아저씨, 어서 돌아가요. 가한정에서 전령이 왔어요. 일빌개 카툰이 빨리 오시래요." "왜" "몰라
요. 전령도 모르는 눈치던걸요." 문간은 수백마리의 양떼를 데리고 마리치치카와 나란히 말을 타
고 집으로 향했다. 문간은 이렇게 마리와 함께 초원을 가는 것을 좋아했다.
마리치치카는 마리꽃 같은 아이라는 뜻의 돌궐말. 문간은 마리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꽃
은 아주 예쁠 것이다. 마리는 아란두를 쏙 빼닮은 외모에 엄마만큼이나 영리했다. 문간은 사물과
사람들에 대한 이 아이의 통찰이 책에서 읽거나 누구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 혼자마의 관찰을 통
해 얻어진 것임을 알고 번번이 놀라곤 했다. 지난 4년 동안 곁에서 기르면서 문간은 마리에 대해
친딸 이상의 부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마리야, 네 얼굴이 왜 그러냐?" "며칠 전에 사온 화
장품을 발랐어요. 이젠 저도 시집갈 나이잖아요." 문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고개를 뒤로 젖히
고 으하하 웃었다. 아이의 말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의 다음 말을 듣고는 사나운 비바
람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어깨를 떨어야 했다.
"저는 아저씨한테 시집갈 거예요. 아저씨한텐 지금 부인이 없잖아요." "이 녀석이! 무, 무,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문간은 할말을 잃었다. 키 작은 어린 말을 타고 있던 마리는 등자를 밟고
발딱 일어서더니 말고삐를 잡은 문간의 손 등에 입을 맞추었다. 문간이 뭐라고 꾸짖으려 했으나
마리는 깔깔깔 웃으며 말을 몰아 달아나버렸다. 멍청히 아이의 나풀거리는 머리채를 보다가 문간
은 홀애비로 혼자 살고 있는 고공의의 말을 생각했다. 여자는 늙으나 젊으나 다 무섭다. 거연이를
데리고 가한정으로 달려가면서 문간은 자신이 소환된 이유가 궁금했다. 아마도 당나라에서 또 문
슨 사신이 찾아왔으리라. 문간은 자신의 명성을 망각의 강물에 흘려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일빌개 카툰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문간은 올해 정월에도 오르도스를 둘러싼
영토분쟁 때문에 당나라 측과의 담판에 불려간 적이 있었다. 일빌개 카툰은 그때도 문간의 발언
을 두고 두고 칭찬했다.
그때 문간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돌궐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여름날에 멋진
말을 타고 대초원을 달리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사는 것말고는 아무런 욕심도 없습니다.
금방 먹고 쓸 것 외에 재산을 모으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먹고 살기가 어려우면 더 좋은 목초지
로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우리가 침탈자입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침탈자는 바로
귀국입니다." "말도 안되는 억지요. 항상 당신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걸어오고 있지 않소!" "귀국
이 우리 땅을 도적질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귀국에서 슬
금슬금 들어와 괭이를 꽂고 둔전을 개발한 땅은 모두 우리의 목초지였습니다. 우리에게 목초지가
얼마나 귀중한 줄 아십니까? 부족마다 여름 겨울로 이동하는 구역이 다 정해져 있어서 남의 구역
을 침범하면 우리끼리도 칼부림이 납니다. 그런데 여름에 북쪽의 하영지로 올라갔다가 겨울을 나
기 위해 남쪽의 동영지로 돌아와보니 귀국이 농민들을 올려보내어 농사를 짓는답시고 땅을 다 갈
아엎어버렸습니다. 풀이 하나도 없어요. 귀하께서 우리라고 생각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야 우리도 농토가 부족해서..." "겨울에 가축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면 우리의 심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말들이 무리를 지어 주인을 둘러싸고 주인의 옷에 자꾸 코를 비비면서 먹이를 달라고
애걸하는 그 모습을 보면 가엾고 괴로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속수무책인 주인은 풀이 자
라는 표토가 다 날아가버리고 흙밖에 없는 황무지에 선 채 피눈물을 흘립니다.
농토가 부족하다는 건 귀국의 사정 아닙니까? 그렇다고 남의 밥줄을 끊어도 되는 것입니까? 귀
국은 우리를 막남에서 몰아내고 그 땅을 농토로 만들었습니다. 농토로 바뀐 땅에 다시 가축들이
먹을 수 있는 좋은 풀이 자라려면 40, 50년이 걸립니다. 우리는 평생이 다 가도 보상받지 못할 손
해를 입은 것입니다. 귀국이 우리라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문간은 사신들 앞에 장부를 펴고 자
신의 특기인 수판을 꺼내었다. 그리고 무후의 둔전개발로 지난 10년간 유목민들이 입은 손해와
돌궐이 농민들을 쫓아내고 그들의 한 해 수확을 몰수함으로써 벌충한 금액을 장부를 짚고 수판을
놓아가며 자세하게 비교했다. 당나라 사신들은 혀를 내둘렀다. 돌궐에도 이런 사람이 다 있구나...
"따라서 귀국은 우리에게 40만 관을 배상해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보시다시피 이건 우리의
전쟁비용을 모두 뺀 가장 관대한 금액입니당." 문간이 결론을 내렸을 때 사신들은 슬금슬금 나가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아예 문간과는 얘기를 하려 들지 않았다. 이번
에는 당나라에서 또 무슨 생떼를 쓰고 있을까. 전쟁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도발해놓고 이
쪽을 호전적인 오랑캐라고 비난하는 위선자들. 문간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을 재촉했다. 가한
정(칸 발리크)은 오르혼강 상류에 있는 외튀갠산 기슭에 있다. 흙으로 쌓은 단단한 성벽 안에 흙
담을 두른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돌궐인들과 돌궐 정부에서 행정과 통상의 실무를 맡은 토번인,
고구려인, 위구르인, 한인들이 같이 살고 있었다. 많은 이질적인 문화들을 끌어안은 유목도시답게
거리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활력과 풍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참 걸어가자 도성 중앙의 널찍한 광장이 나타나고 칸이 도성 안에 머물 때 사용하는 궁전의
날아갈 듯한 기와지붕이 있었다. 지금 그 곳에는 일빌개 카툰이 좌정하고 있었다. 문간이 궁전으
로 들어가자 문간을 따라온 거연은 방책 밖에 세워진 대기소를 어슬렁거리다가 돌궐인 친구 오눈
치를 만났다. 오눈치는 발하슈호수를 건너 카자흐고원까지 진군해 있는 일태리쉬의 태자 벡치렌
의 원정군에 속해 있었다. 이번에 원정군의 전령으로 근 1년 만에 가한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거
연은 오눈치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야, 넌 진짜 좋겠다. 세상 구경도 하고, 전리품도 챙기
고, 또 공을 세워서 출세도 할 거 아니야... 내 꼬락서닌 이게 뭐지. 완전히 촌놈 다됐어. 우리 형
님이 날 치치크 촌구석에다 처박아버린 거야. 처음엔 막리지 어르신 댁에서 일하라기에 얼씨구나
하고 따라 나섰지 그런데 웬걸. 우리 어르신은 매일 빈들빈들 만고강산이야. 도무지 전쟁터에 나
갈 희망이 없어. 젠장, 품삯이야 받지.
하지만 전쟁에서 떨어지는 노다지에 비할 수 있나. 너에 비하면 쓰레기통을 뒤져먹고 사는 구
더기만도 못하지 뭐야" 거연은 쭝얼쭝얼 주인 욕을 하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오눈치가 으
쓱해져서 카자흐고원의 풍광이며 전쟁터의 일화를 허풍을 섞어 늘어놓는데 갑자기 대기소 밖에서
거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문간이었다. 거연이 뜨끔하여 달려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어르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문간은 거연을 데리고 빠르게 걸으며 말했다. "너, 나랑 같
이 한탱그리에 좀 가야겠다." "하, 한탱그리까지나요? 두 달도 더 걸릴 텐데요. 대체 무슨 일입니
까요?" "20일 만에 가보도록 하자." 문간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 말만을 했다. 그들은 역참부로 가
서 지친 자기네들의 말을 맡기고 군마 다섯 마리씩을 빌렸다. 그리곤 다시 병참부로 가서 활과
화살, 칼을 받고 각반에, 뒤축에 쇠를 댄 갓신까지 받았다.
거연은 아이구 이게 웬일인가 싶어 가슴이 뛰었다. 두 사람은 우유를 딱딱하게 굳힌'호로다'와
미숫가루, 동결육, 둥그런 가죽 술통에 넣은 마유주 등을 싣고 즉시 가한정을 떠났다. 그로부터
20일 동안 두 사람은 온몸에 누우런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땀범벅이 되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
려갔다. 말 다섯 필을 끌고 달리면서 말이 지칠 때마다 다른 말로 옮겨탔다. 엿새 정도에 한 번씩
역참을 만나면 방에 들기가 무섭게 옷도 벗지 못하고 까무라치듯 잠에 빠져버리곤 했다. 역참마
다 말을 갈았지만 다섯 마리에 한두 마리씩은 과로를 못 이겨 말이 죽었다. 그렇게 20여 일을 달
리자 먼지를 막기 위해 머리에 뒤집어쓴 두 사람의 면포는 너덜너덜하게 찢겨졌다. 23일 때 되던
날, 두 사람은 드디어 해발 6천995미터의 한탱그리산 남쪽 기슭에 도착했다. 문간은 생전 처음 보
는 설산준령의 웅맹함에 가슴이 서늘했다. 투르판분지와 타림분지, 타클라마간사막을 한 팔에 끌
어안고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을 꿈틀거리는 거대한 용, 텐산산맥이 하늘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깎아지른 듯 험한 산줄기가 천 갈래 만 갈래로 뻗고 눈과 얼음이 골짜기마다 뒤덮은 텐산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이 한탱그리산이었다.
문간이 돌궐 근위사단의 군영에 도착하자 보초병들이 우렁찬 뿔나팔을 불었다. 잠깐 사이에 군
영의 정문에서 아홉 개의 말꼬리를 단 큰 기치가 펄럭이는 천막까지 자루가 긴 정쟁용 도끼와 장
창을 든 오르도들이 도연하여 뵈클리 칸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들은 침통한 얼굴은
어군막안의 상황을 무언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장막 입구의 펠트천이 열리고 한 남자가 문간을
영접하기 위해 나왔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문간은 날카로운 가시
에 찔린 것 같은 아픔을 느꼇다. 그 남자는 바로 쿠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우친왕 전하" 쿠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리고는 마치 발길을
돌려 어디 먼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는 듯한 우수에 찬 눈빛으로 문간을 바라보았
다. 그사이 쿠이도 30대의 장년이 되어 있었다. 말갈기처럼 나부끼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여전했
지만 세상 풍파를 많이 겪은 그을린 얼굴에는 북풍의 슬품과 들짐승의 고독이 스며 있었다. 백인
대장 두 사람이 문간에게 물수건을 주고 옷과 바지의 먼지를 털어주었다. 물수건으로 손발을 닦
자 쿠이가 어군막의 문을 열고 문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두 개의 휘장을 지나 칸의 방으로 들
어간 문간은 충격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칸이시여..." 일태리쉬 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열 때문에 농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 있었고 의식을 잃은 채 아주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사라센인 시의가 붙어서서 칸의 가슴에 뜨거운 물수건으로 찜질
을 하고 있었다. 그 침대 아래에는 이제 '카를룩 칸'의 작위를 받은 카를룩 부족의 대족장 다로빈
노인과 제국의 대제사장과 근위대 장관이 않아 있었다. 문간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근위대 장관 카라치가 조용히 다가와 설명해주었다. 50일 전 첫
회담을 만족스럽게 끝낸 일태리쉬 칸은 서돌궐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칸은 그날 술을 많이 마셨고 특별히 마련한 돼지고기 요리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그날 밤 갑
자기 높은 열이 나면서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2,3일이 지나자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시의들
은 과음과식한 상태로 자다가 위의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서 폐에 고름이 생기는 병(흡입성 폐
렴. 20세기 전반까지는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이라고 했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했으나 칸은 병상
에서도 진행중인 평화회담을 챙기려 들었고 산사태가 일어나고 튀르기쉬의 대부대가 쳐들어오는
등 나쁜 상황이 잇달았다. 병은 갑자기 위중해졌다.
고열이 조금도 내리지 않고 계속되어 강용한 체력의 일태리쉬 칸이 아니라면 살아 있는 것이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근위대 장관은 유조를 받들 중신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이르킨(씨족장)
이상의 중신들은 거의 모두 소환되었다. 가한정에서 고문간이 달려온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톤유
쿠크 등 다른 중신들은 어주장막과 아치형의 통로로 이어진 접견실에 있다고 했다. "뵈클리 칸..."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 옆에서 깊은 수심에 잠겨 있던 고문간은 침상에서 들려오는 일태리쉬 칸의 숨가쁜 목소리
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예, 하칸, 접니다." 일태리쉬 칸의 떨리는 손을 마주잡자 감격하기 잘하
는 고문간의 가슴이 금방 격탕되었다. 고문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일태리위
칸이 깨어났음을 알리기 위해 카라치가 중신들이 있는 접견실로 달려갔다. "존경하는 뵈크리 칸...
이제 우리의 우정도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 외주시니 안심이 됩니다. 억, 어윽..." 일태리쉬
칸은 피가래를 토하며 괴로워했다. 문간은 할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바보처럼 울기만 했다. 그러
는 사이 돌궐군 총사령관 톤유쿠크와 부사령관 바가간, 카를룩 칸 다로빈과 여러 족장들, 군사령
관들이 침대의 오른편에 모여들었다.
태자 벡치렌과 둘째왕자 퀼테긴, 동생 쿠이와 막내동생 토시푸등의 황족들은 침대 왼편에 섰다.
근위대 장관 카파치는 시의와 상의하더니 잔뜩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유조를 받들
어주십시오." 그러자 국법에 따라 제위 계승자가 될 수도 있는 왕자와 종친들은 모두 침실 밖으
로 물러나 앉았다. 다른 족장과 신하들도 침상에서 다섯 걸음 밖으로 물러섰다. 칸의 작위가 수여
된 두 중신, 고문간과 다로빈, 그리고 제위 승계를 책임질 대제사장, 이 세 사람만이 일태리쉬 칸
의 머리맡에 섰다. "뵈클리 칸..." 다시 눈을 뜬 일태리쉬 칸은 고문간을 불렀다. 일태리쉬 칸의 뺨
은 붉다 못해 푸르죽죽했고 눈언저리는 벌겋게 짓물러 있었다. 사신이 찾아온 얼굴에는 눈동자만
이 마지막 한 가닥의 열띤 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예예, 하칸..." 울음을 참느라 문간의 입꼬리
는 아래로 쳐져 입은 반달처럼 휘어졌다.
일태리쉬 칸이 두어 번 손짓을 한 다음에야 겨우 그 뜻을 알고 다가가 일태리쉬 칸을 부축했
다. 일태리쉬 칸은 문간의 손을 잡고 안간힘을 다해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머리맡에
서 대가한(하칸)을 상징하는 황금 늑대머리의 왕홀을 찾아 쥐었다. "여러분은... 오랫동안 이 사람
과 고락을 함께해주신 전우들이십니다..." 일태리쉬 칸의 말은 끊길 듯 끊길 듯 힘겹게 이어졌다.
"나는 지고한... 초원의 향기가 이 왕홀처럼 아직도 우리의 손에 순결하게 쥐어져 있음을 확신합
니다. 우리는 타브가치의... 폭정을 물리치고 백성들이... 초원과 창공에 가득 찬 큰 생명의 목소리
에 따라 살 수 있는 새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영원한 푸른 하늘... 탱그리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
는 초원의 향기를 위해 싸웠습니다. 첸헤르 투르키예(푸른 투르크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초원의 풀이 마르듯이 나의 생명도 시들어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
타브가치에 반대하여 궐기했을 때는 창칼에 의한 죽음이 나의 숙명이라 생각했습니...다" 일태
리쉬 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무거운 신음소리를 토해내었다. 입술도 자유를 잃어가는지 바른쪽
입가에서 침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탱그리의 뜻이겠지요. 여러분... 내가 죽은 뒤에도...
이 초원이 변함없이 용기와 정의로 지켜지게 해주십시오. 뵈클리 칸, 카를룩 칸, 그리고 여러분...
부디 나의 후임자를 잘 보좌해주십시오. 내 뒤를 이을 후임자는..." 한순간 어군막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태리쉬 칸의 얼굴은 그 대목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목의 대동맥이 불거지며 애처롭게 고동쳤다. "나의 후임자는 우친왕입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
았다. 일태리쉬 칸이 사랑하는 맏아들 벡치렌 대신 불과 몇 달 전까만 해도 나라에 없었고 오랜
세월 추방자 신분으로 살았던 아우 쿠이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다. 벡치펜이 칸이 되고 그의 어
머니 일빌개 카툰이 섭정이 되어 고문간, 다로빈, 톤유쿠크 같은 중신들이 이를 보좌하게 될 줄
알았던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간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6년 전 쿠이를 군법에 따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톤유쿠크는 더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여기엔 병상에 누운 일태리쉬
칸의 고심참담한 결단이 숨어 있었다 "태자 벡치렌은 아홉 살입니다...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린 이
나라를... 아홉 살짜리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나라가 아직 건국기라는 것. <적장자 상속>의 원
칙론보다는 능력 위주로 제위를 잇는 <적임자 상속.의 현실론을 택했다는 논리였다. 맏아들 벡치
렌은 아홉 살, 둘째아들 퀼테간은 여덟 살이었다. 그래서 벡치렌의 군단도 명목상이 대장만 벡치
렌일 뿐 아이들의 사부이자 독군인 쑤농 세르 장군이 대신 지휘하고 있었다.
이런 편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엔 섭정 역할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일태리쉬 칸의 생각이었
다. 일빌개 카툰은 착하고 영리하지만 전쟁을 지휘할 만한 카리스마는 없었다. 다로빈은 이미 60
대 후반의 노인이었다. 고문간은 정직하고 일을 시키면 잘하지만 여러 권력자들을 다스리며 정치
적인 조율을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총사련관 톤유쿠크는 능력도 있고 배짱도 있지만 말
썽 많은 건국기에 군을 주도하다 보니 종친들이나 씨족장들과 감정이 많았다. 그가 섭정이 되면
반드시 누군가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다로빈도 고문간도 곧 이태리쉬 칸의 판단을 이해했다.
마지막 순간이나마 칸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했다.
"거룩하신 칸이시여. 마음을 편히 가지소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칸의 유지를 바들어 우친왕 전
하를 잘 보필할 것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일태리쉬 칸은 베개에 기대어 한참 동안 눈을 감
았다. 기력이 다해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러나 일태리쉬 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마지막 기력을 모
으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번쩍 뜬 일태리쉬 칸은 자세를 바로 하고 동생을 불렀다. "타르두쉬
샤드(우친왕) 아시나 쿠이..." "예." "내 앞으로 나와 무릎을 끓어라." 쿠이는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이 달갑지 않은 잔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그의 마음속에선 아
직도 고통이 가시지 않은 채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도저히 망설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쿠이는 일태리쉬 칸의 침대 옆으로 걸어가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었다. 다시
고문간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일태리쉬 칸은 황금 늑대머리가 새겨진 왕홀을 양손으로 받들
었다. 너무나 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모두 머리가 화끈하게 뜨거워졌다. 그러나 천막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쿠이를 따라 무릎을 끓었다. 대제사장이 일태리쉬 칸으로부터 왕홀을 받아 조심스
럽게 머리 위로 쳐들었다. 10년 만에 다시 <칸을 위한 신탁>이 낭송되었다. "이것은 지고한 권력
의 표창이로다. 그대는 이것을 인간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에 으해 받으리로다. 마음
은 변하고 세월은 흘러가며 목숨의 모래는 쉬이 없어지나니 지상의 모든 것은 헛되도다. 그대는
항상 영원한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탱그리의 뜻을 두려워하리로다. 탱그리를 경배하고 그대의 미
미함과 그대의 비소함을 생각하리로다..." 모두 엎드려 쿠이에게 절하고 절대적인 신종을 맹세했
다. 다음날 아침 일태리쉬 칸은 세상을 떠났다.
3
서력 693년 11월 일태리쉬 칸 서거. 향년 35년. 비보를 알리는 뿔삐리소리가 중앙아시아 전역을
메아리쳤다. 그 최후의 땅 한탱그리산엔 보기드문 가을비가 내려 봉우리마다 찬연한 무지개가 걸
렸다. 일태리쉬 칸의 유해는 돌궐사람들의 애도속에 외튀겐산으로 운구되어 그 곳에 묻혔다. 십년
전 민족절멸의 위기에서 몸을 일으켜 백사천고를 이겨내고 돌궐제2제국을 건국한 아시나 쿠틀룩.
궐기할 때엔 단지 용감한 대장이었으나 칸으로서 죽을 때는 온갖 시련으로 닦이고 닦인, 산봉우
리처럼 크고 유덕한 통치자였다. 젊은날 꿈꾸었던 초원의 향기와 이를 점점더 가멸차게 한 신들
의 채찍이 한 인간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동생 쿠이가 그 뒤를 이어 돌궐제국의 두 번째
대가한(학한)으로 즉위했다. 엄숙한 즉위식이 따로 거행되었다. 쿠이에게 카파간 칸(나라의 머리
가 되는 칸)이라는 존호가 바쳐졌다. 쿠이는 일태리쉬 칸의 맏아들 벡치렌을 일으켜세워 우친왕에
임명하고 그가 보유하고 있던 군단을 그대로 승인했다. 그리고 막내동생 토시푸를 일으켜세워 좌
친왕에 임명하고 또 다른 군단을 맡겼다. 사람들은 누가 카툰인지가 제일 궁금했다. 발하슈호수의
뱃사공이었을 때 쿠이는 <다차>라고 하는 위구르 여자와 동거하면서 보쿠라고 하는 아들까지 낳
았기 때문이다.
가한정으로 돌아올때도 쿠이는 이 여자와 아들을 데리고 왔었다. 그러나 쿠이는 자리에 없는
아란두의 이름을 불렀다. "봐클리 칸은 당나라로 밀사를 보내 친왕비 아란두를 찾으시오. 이제 그
년는 카툰이니 즉시 모셔오도록 하시오." 아란두에게는 미리 이티바르 카툰이라는 존호가 바쳐져
쿠이와 함께 돌궐제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또 쿠이는 자진해서 사임한 근위대 장관 카라치
의 자리에 6년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욱사시부를 복직시켰다. 이 정도에서 즉위식은 끝났
다. 카파간 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국정의 방침을 정리했다. "다른 직관과 법제는 선대의 유지를
그대로 따르겠소이다. 과거의 일을 들춰서 특정한 사람을 고발하는 것은 일절 듣지 않겠습니다.
나는 칸이 되면서 좋았던 일도 슬펐던 일도 다 물에 띄워버렸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니 여러분이 모두 잘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말도 많
고 탈도 많은 건국기의 정원교체가 이 정도로 그칠 리 없었다. 특히 톤유쿠크를 미워하던 사람들
은 환호작약 기뻐날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잊었다고 했지만 카파간 칸도 사람인 이상 옛날 자신
의 목을 베려고 했던 톤유쿠크를 좋아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절친했던 친구들도 슬금슬금 톤유쿠
크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와는 반대로 치치크 초원의 고문간에게는 자꾸 손님들이 찾아왔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6년 전 카파간 칸이 추방될 때 문간은 눈물을 흘리며 변호했던 일을 들추면서
흉물을 떨어댔다. 뵈클리 칸은 당연히 중용되셔야 하며 총사령관과 같은 권세를 누리셔야 한다고
주절거리는 것이었다. 정말 울고 싶은 놈 뺨 때리는군. 문간은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해가 바뀔 때까지 문간은 딱 한 번 가한정을 찾았다. 아란두의 아이들을 쿠이에게 돌려주
기 위해서였다.
냉정한 쿠이도 엄마 없는 자식들을 보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문간은 생전 처음 쿠이의
눈물을 보았다. "아빠가 곧 엄마를 찾아주마. 애들아, 조금만 기다려다오." 그러나 사실 이제까지
도 엄마의 정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었다. 아리들은 아버지에게 안겨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며
문간을 찾았다. 순간 문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상실감을 맞보고 있었다. 문간은 호
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쿠이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문간은 그 뒤 죽을 때까
지 무한한 고통으로 이 순간을 회상했다. 그때 오른손을 뻗어 호라의 어깨를 잡아당기면서 이 아
이는 내 자식이니 내가 키우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 문간은 아들 원유만을 데리고
치치크 초원으로 돌아왔다. 원유도 정들었던 외사촌들과 헤어진 것이 슬퍼서 엉엉 울었고 문간은
세상이 온통 텅 빈 것 같았다. 땅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끝없는 나락 속으로 빠져버린 것 같은 무
력감이 그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나와 아란두의 자식 호라... 그 아이는 아란두를 향한 그의 일평
생에 걸친 사랑이 낳은 유일한 증거였다. 내 자식을 자식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인생을 이토록 멍
청하게 살아버린 바보가 또 어디 있을까. 문간의 슬픔은 자학과 분노의 문턱을 오락가락하며 점
점 더 깊어졌다.
술을 마셔봐도 자식에 대한 죄책감만 깊어질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귀찮은 손님들
을 응대하던 마지막 인내심마저도 사라져버렸다. 문간은 손님들이 오는 기적만 나면 모든걸 천소
부에게 맡기고 들판으로 달아나버렸다. 나중엔 그것도 귀찮아서 아예 보따리를 싸서 몇 달을 지
내려고 콘유쿠크의 집으로 놀러갔다. 톤유쿠크는 눈살을 지푸리며 화를 내었다. "이 사람아, 자네
정말 정신이 없군. 지금 내 처지가 얼마나 위태로운데 여길 오면 어떻게 해! 괜히 자네까지 얽혀
서 경을 치지말고 어서 돌아가." "자네가 위태롭다면 더 자주 와야지. 난 정치 같은 거 몰라. 골치
아픈 소리 그만두고 우리 낚시나 가세." "이봐. 이제 자네는 왕비씨족의 수장이야. 자네의 고울링
씨족(고구려 사람들)은 우리 돌궐에서 제일 사람수가 많아. 거기다 이번에 카툰까지 나왔으니 나
라 안의 이목이 모두 자네에게 쏠려 있단 말야. 자네를 업고 나를 몰아내려는 놈들도 많은데 자
네와 내가 붙어 있으면 어떻게 해. 잘못하다간 둘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리가 나올 판이야." "사실
은 바로 그런 놈둘이 싫어서 자넬 찾아온 거야. 쥐새끼 같은 놈들! 우리 둘이 밤낮없이 전쟁터를
뛰어다닐 때는 식은 죽 모양 밍밍하게 않아서, 입장구나 꽝꽝 치던 놈들이 이제와서... 그런 모사
꾼들 때문에 나라가 멍드는 거야." "이 참에 나도 은퇴하고 싶어."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나랑
같이 장사나 하자구. 난 지금부터 당나라로 비단을 사러 다니려고 해. 자, 이 포도주나 한잔하지.
내가 다 애기해줄 테니..." 얼마 후 톤유쿠크의 집에서 돌아온 문간은 정말로 재산을 정리해서 말
을 사기 시작했다.
오래 염두에 두고 있었던 말장수로 나선 것이다. 말 1만 필을 오르도스로 끌고 가서 팔고 거기
서 비단을 사다가 구사국(카유가르. 한나라 때는 소륵국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돈황, 샨샨, 체르첸,
호탄, 야르칸드를 따라가는 천산남로와 중국에서 하미, 투르판, 카라샬, 쿠차를 따라가는 천산북로
가 교차하는 실크로드의 중심도시.)에 갖다 팔 생각이었다. 그렇게 돌궐을 떠나는 일만 생각하면
서 문간은 간신히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말을 사 모아둔 툴강 유역에 들러 상단을
조직하고 중국으로 출발하던 날이었다. 문간은 멀리서 말을 달려오는 천소부를 보고 불길한 예감
에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그랬다. 걱정하고 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톤유쿠크가 반역죄로 체
포된 것이다. 세리토리 씨족 가운데 아밤이라고 하는 감찰관이 있었다. 명문가의 자제였고 젊은
시절엔 서역 불교의 도래지인 토하라에 유학하기도 했던 지식인이었다. 돌궐이 부흥된 후 돌아와
천인대장까지 올라갔으나 톤유쿠크에게 화를 내고 군대를 그만두었다. 어는 술자리에서 톤유쿠크
가 불교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아밤은 독실한 불교 신도였다. "불교 따위를 믿
는 놈들을 데리고 어떻게 전쟁을 하겠나, 엉? 절에 끓어앉아서 중놈들의 훈계나 듣고 있는 놈들.
그런 놈들은 용기와 투지, 인내심과 자존심,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다 잃어버린 놈들이야." 자존심
이 강했던 아밤은 칼자루를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톤유쿠크는 술만 먹으면 막
가버리는 어릴 때 버릇이 또 나왔던 것 같다. 톤유쿠크는 안하무인으로 계속했다. 불교는 왜 나쁜
가를 자신의 공적비(톤유쿠크 비문. 몽골공화국 터부 아이막의 툴라 강변에 있다.)에까지 적고 있
는 그인만큼 제법 논리도서 있었다.
"세상에 그런 냄새나는 위선자들이 어디 있담. 무조건 자비를 베풀어라. 죽이지 마라. 용서해줘
라... 그런 거지 같은 소리로 먹고 사는 중놈들이 있다니. 대부분의 인간들은 용서를 받거나 은덕
을 입을 자격이 없어. 사랑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야 해. 무능하고 우열한
데다 탐욕까지 심한 것들에게 낭비되어서는 안된다 말야. 사람이 가진 시간과 애정이란 한계가
있어. 그걸 모든 인간에게 나눠주면 어떻게 해? 내가 부하인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애정도 쪼개
지고 쪼개져서 병아리 눈곱만큼 될 것이 아닌가. 중놈들이 말하는 대자대비란 고상하고 건강한
인간들을 비난하려는 약자의 말장난이야. 결국 배도 먹고 이도 닦자는 속셈이지. 그놈들은 잘살아
가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뭉개버리려고 하거든. 중놈들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다른 사람들도
다 저희들마냥 요 모양 요 꼴 살게 마련인 버러지라는 거야" 아밤은 분을 참지 못해 칼을 뽑아
장막의 기둥을 후려베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군대를 뛰어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술이 깬
톤유쿠크가 사람을 보내 사과했으나 듣지 않았다.아밤은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1년 전인가부터
감찰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톤유쿠크가 운이 없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아밤에게 걸릴 게
뭔가. 없던 일도 무고할 만큼 사이가 나쁜 사람에게 꼬투리를 주었으니..." 가한정으로 달려가 구
명을 의논하는 문간에게 몇 달 전까지 수석감찰관이었던 근위대 장관 욱사시부는 곤혹스런 표정
을 지었다. 톤유쿠크는 술도 술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중국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약점이 있었
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건국 초기에는 톤유쿠크도 건실했다. 그런데 제국이 안정되고 실크로드로
부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입이 생기자 사정은 달라졌다. 톤유쿠크는 양주 감주 같은 국
경 도시에서 자꾸 중국 여자를 들여왔다. "아파 타르칸은 정말 못 말려. 영부인말고도 당나라 여
자만 다섯인데 또 들여와?" "정말. 옛날엔 갑옷을 입은 군신처럼 눈빛이 매서우셨는데 요즘은
영..." 톤유쿠크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이런 얘기를 수군거렸다. 톤유쿠르와 그의 아시테 씨족을 미
워하는 옛 명문씨족들, 세리토리, 추오, 눌라이 등에 이르면 말은 더 험악해졌다. "오는 계집마다
샛서방질을 해서 그 자식이 미쳐 죽는 꼴 좀 봤으면 한이 없겠다. 색골 같은 자식. 여자에 푸웅덩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저런 놈이 총사령관이라니. 이래서야 나라꼴이 제대로 되겠어?" "누가
아니래나. 이제 왔으니 말이네만 전쟁터에서 그놈이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 마구 내뱉을 땐 정말
부아를 삭이려고 간장깨나 썩였지. 새 하칸이 그놈의 갈빗대에 칼을 푹 찔러 쑤셔주실 거야. 내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지." 이런 상황에서 감찰관 아밤은 톤유쿠크의 첩 하나가 양주로 보내는
편지를 압수하게 되었다. 톤유쿠크의 집에 들렀다 떠나는 소그드 상인이 수상해서 일단 체포했는
데 뜻밖에 대어가 걸린 것이다. 양주는 하서절도사의 대장군부가 있는 당나라의 군사적 요충지이
다. 양주의 어머니에게 보낸다는 그 편지에는 돌궐군의 군비와 편제, 각 군단의 배치, 앞으로의
작전계획 등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총사령관의 소실이 당나라의 세작(간첩)이다." 아밤은 아연
긴장했다. 이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 두 달전인 694년 1월 카파간 칸이 된 쿠이는 1개 군단
을 이끌고 최초로 친정에 나서서 하서회랑에 있는 대도읍 영주를 점령했다. 영주를 지키던 좌응
양위대장군, 그 인상이 더러운 말갈족 출신의이다조는 부하들을 다 잃고 혼자 장안으로 달아났다.
그리하여 카파간 칸은 영주를 거점으로 슬금슬금 돌궐의 목초지를 침탈해 들어오던 당의 둔전들
을 모두 불태우고 개선했다. 다소 소강상태에 있었던 당과 돌궐은 이로써 다시 전쟁에 돌입한 것
이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톤유쿠크가 당나라와 내통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톤유쿠크
는 요즘 사면초가의 처지였다. 어릴 때부터 나고 자란 당나라로 돌아가 다시 <사원전>이 되고
싶어한다면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가. 아밤은 다른 감찰관들과 의논하여 카카간 칸에게 이 사
건을 보고했다. 톤유쿠크는 즉시 체포되었다. 톤유쿠크는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었으나
곧 심문이 끝나면 국가회의의 재판에 넘겨질 예정이었다. 문간은 욱사시부에게 사정했다. "형님이
그 아밤이라는 자에게 압력을 좀 넣어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님의 부하였잖소." "아밤은 아
무도 못 말리는 꼴통이야. 같은 감찰관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네." "10여 년 전 바로 형님이
운중성 감주에서 나와 톤유쿠크를 구해내었잖아요. 톤유쿠크를 이대로 죽일 셈이오?" 욱사시부는
묵묵부답. 괴로운 얼굴로 말이 없었다. 결국 카파간 칸에게 직접 탄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간은
칸의 어막을 찾아갔다. "현명하신 하칸이시여. 통촉해주시옵소서. 우리나라는 아직 대지 위에 고
요하고 확고하게 군림하고 있지 못하옵니다. 나라의 권위가 민중 속에 자리잡고 해를 거듭하면서
더욱더 신성화되어 경건한 애국심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아직도 세월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세월을 낚기 위해 나라의 지도층이 절대적으로 단합해야 합옵니다. 단합을 생각해주옵소서." "경
은 지금 톤유쿠크의 일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하칸이시여, 아시테 씨족은 지
금까지 돌궐 부흥에 큰 역할을 했던 건국의 주도세력입니다. 다른 어떤 씨족도 아시테 씨족처럼
헌신적이지는 못했습니다. 15년 전 아시테 웬푸가 <아시나 니샤오푸>를 칸으로 추대하고 돌궐
부흥의 기치를 든 이래 아시나 씨는 군장씨족으로, 아시테 씨는 왕비씨족으로, 두 씨족의 단합은
언제나 유지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지금 카툰이 바뀐 데가 톤유쿠크마저 처형된다면 두 씨족의 단
합은 깨어집니다. 소신은 나라를 위해 이것을 슬퍼하옵니다." "고문간 경, 날더러 어떻게 하란 말
이오? 톤유쿠크는 반역죄를 저질렀소..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법을 어길 수는 없는 것 아니오?"
쿠이의 말은 어디까지나 신중했다.
문간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옛날의 쿠이가 아니라 신중하게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캐물
으며, 불의 앞에서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는 준엄한 하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쿠이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옛날부터 경의 분별을 존경해왔소. 경도 알다시피 법과 정의는 하칸
인 내 개인의 판단보다도 지고한 것이 아니오? 이 나라의 미래와 행복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나라는 혼란과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오." "하칸이시여, 톤유쿠크는
옛날부터 색사에 탐닉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당나라가 이를 이용해 세작을 첩으로 들여놓은 것
입니다. 적에게 속았을 뿐,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잘못된 기소이옵니다. 이 나라가 설 때 그
가 과로로 피오줌을 누고 검은 땀을 흘리며 전쟁터를 뛰어다닌 것을 부디 헤아려주시옵소서. 사
람이란 신들처럼 완전하지가 못하옵니다. 그래서 누구나 한 번씩은 실수를 하게 되옵니다. 부디
하칸의 관용을 베풀어주시옵소어." 옥좌에 앉은 카파간 칸은 괴로운 듯 손가락을 펴서 이마를 짚
었다. 아마도 그의 마음속에는 개인적인 원한과 칸으로서의 공평무사한 통찰이 싸우고 있으리라.
톤유쿠크뿐만 아니라 문간 자신도 그의 개인적인 원한을 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
거웠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카파간 칸은 자세를 바로하고 입을 열었다. "톤유쿠크의 충성심
을 경이 보장한다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하칸." "그에게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주도록 하겠
소. 톤유쿠크를 경의 밑에서 일개 병사로 종군하게 하시오." "예... 하오나 소신은 은퇴한 몸이옵니
다." "오늘부터는 아니오. 오늘부터 경은 아파 타르칸이오." 문간은 가슴 언저리를 얻어맞은 것 같
은 둔중한 통증을 느끼며 카파간 칸을 쳐다보았다. 카파간 칸의 얼굴은 엄숙했다. 톤유쿠크의 생
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임명을 수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간은 눈앞이
캄캄했다. 20만 돌궐군의 총사령관이 되는 순간이었고 동시에 돌궐 탈출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4
토이에서 고문간이 총사령관으로 취임하던 날 카툰께서 국경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욱사시부가 근위병 2개 연대를 이끌고 카툰을 영접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리하여 열흘 뒤 카툰
일행이 도착하던 날 가한정 안팎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길가의 나무에는 아이들이 매달리고
성벽 위에도 그 유명짜한 카툰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한때는 그 표한한 잔인
성으로 초원을 떨게 했던 불의 여신관, 그뒤에는 남편도 없이 먼 남쪽 타브가치를 여행하고 돌아
왔다는 이티바르 카툰이었다. "오신다. 카툰께서 오신다." 4월의 따뜻한 봄볕 아래 기다리다가 지
쳐 사람들이 졸도를 하기 직전 향도병의 말 울음소리가 카툰의 도착을 알렸다. 곧이어 수많은 군
사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고문간은 80여 명의 대신들과 장군들을 거느리고 가한
정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아란두는 카툰의 신성문자가 수놓아진 깃발을 든 2천여 기병들의 선두
에서 직접 말을 타고 나타났다. 문간은 아란두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동방교 대제사장의 긴 흰
색 제의를 입고 그 위에 카툰의 화려한 진홍빛 비단 예복 <푸푼데이 텔>을 걸친 아란두는 5년
전보다 오히려 더 젊어진 것 같았다. 바람결에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늘씬한 군마 위
에 말고삐를 잡은 아란두는 완전히 20대였다. 신들의 불가사의한 힘이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영
원한 젊음을 그녀에게 부어준 것만 같았다. 주름살 하나 없이 백옥처럼 흰 살결이 눈부신 이 여
자를 누가 마흔두 살이라고 할 것인가! 아란두는 말에서 내려 문간 앞으로 걸어왔다. "뵈클리 칸
..."
아란두는 권세와 위엄을 갖추어 문간을 불렀다. 그녀의 비단 예복위에 카툰의 상징인 암이리가
새겨진 황금 브로치가 번쩍거렸다. 문간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끓고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답답
하고 기운이 빠졌다. 얼마나 자아가 강한 여자인가. 문간의 앞에선 아란두는 날 때부터 카툰인 그
런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카툰이라는 지위를 가벼운 브로치처럼 걸치고 있었다. "경의 충성에 어
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경은 나의 아이들을 맡아 길러주셨어요." 문간은 할말을 잊
어버렸다. 고공의가 옆구리를 찔러서야 정신을 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당연히 해야 할 도
리를... 하며 웅얼거렸다. 아란두는 밝은 목소리로 반가운 사람을 데리고 왔다며 자신의 대열에서
누군가를 불렀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문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는 오이 사제였다. 그
러나 문간이 놀란 것은 그의 정체가 아니었다. 문간이 오이 사제를 처음 보았을 때는 열아홉 살
이었다. 지금 문간은 마흔다섯 살, 26년이 흘렀는데 오이 사제는 털끝 하나 변하지 않은 20대의
오이 사제 그대로였다. 아란두는 가한정 한복판 새롭게 개축된 궁전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만났다.
그날 저녁 가한정에서는 카툰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낮에 맑았던 하늘은 저녁이 되
면서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큰비가 쏟아졌다. 빗방울은 가한정 서쪽 축축한 늪지대로부터 불어오
는 청 안은 수 많은 왕공, 대신, 장군들로 북적거렸고 서역의 무희가 추는 화려한 춤으로 떠들썩
했다.
아란두는 쿠이와 나란히 옥좌에 앉아 계속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접견하고 있었다. 유병,노병
(유병은 군만두, 노병은 양고기와 밀가루를 주원료로하여 삶고 구워 만든 일종의 피자.)같은 토번
음식들로 차려진 새 상이 들어오고 악사들과 엷고 가벼운 천을 앞뒤로 칭칭 감은 듯한 옷을 입고
포도넝쿨 같은 띠를 늘여 맨 토번 여자 다섯이 나타났다. 제일 앞의 여자가 맑고 고운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호등을 춤추는 이 몸은 양주의 아이, 살갗은 옥과 같고 코는 오똑한 송
곳과 같네, 흰 동화포 가벼운 옷 앞뒤로 감고, 포도 무늬 긴 띠를 한편으로 늘였네...' 뒤의 네 여
자들은 대단히 빠른 템포로 한 쌍의 신발을 움직이며 허리를 굽혔다가 우아하게 도약하는 격렬하
고도 흥겨운 춤을 추었다. 문간은 술잔을 들고 무희들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어떤 움직임도,
그의 귀는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옥좌에 앉은 쿠이와 아란두에게 불길한 무엇을 예고하는 서
늘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란두는 지나치게 즐거워했고 쿠이는 지극히 침울하고 과묵하였다.
문간은 자신의 예감을 애써 무시했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참고 살아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문간은
아란두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느새 춤은 끝나고 중국에서 온 기생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별은 밝게 빛나며 가을 은하에 걸
려 있고, 바람은 향기로워 새벽 종소리에 실려오네. 아, 애달파라. 부생의 짧음이여. 쓸쓸한 근교
묘지길은 저물어간다...' 젊은 날의 사랑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문간은 스스로에 대한 복받치는
연민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존재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나와 오이 사제와 고정부와 쿠이, 도대체
아란두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는 누구일까? 어째서 인간의 사랑은 함께 타오르지 못하고 서로
어긋난 채 상처를 주고 또 받게 만드는 것일까? 문간은 연회가 끝나자 혼자서 궁전을 나섰다. 그
때 본영 참모장(아킨샤드) 천소부가 내일 튀르기쉬로 파병할 원정군에 대한 급한 사안을 상기시
켰다. 어제 처리했어야 할 일이건만 문간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문간은 꾸룩거리는 배를 만지며
내키지 않는 듯이 중얼거렸다. "소부, 내일 하면 안되겠나?" "안됩니다. 지금 하칸의 재가를 받아
주셔야 합니다. 내일 새벽에는 원정군이 출정해야 하니까요." 전쟁이 일상화된 유목국가에서는 침
소에 든 칸을 불러내는 일이 드문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문간은 비가 오고 뇌성벽력이 치는
거리를 걸어 다시 궁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전에는 카파간 칸이 없었다. 문간은 양손에 천소
부가 준 양피지 두루마리를 들고 더욱 가기 싫은 발걸음을 떼어 내전으로 향했다. 내전으로 들어
간 문간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늦은 밤에 카파간 칸 대신 오이 사제가 아란두와 함께 앉아 있었
기 때문이다. 두 사람도 비를 맞아 옷을 흠뻑 적시고 요란하게 내려치는 번갯불로 온몸에 창백한
명암을 아로새긴 문간을 보고 놀라워했다.
"하칸께서는 날더러 피곤할 터이니 그냥 쉬라고 하셨소. 내일 날이 밝으면 오시겠다고. 정 급하
시면 다차 왕비의 처소로 가보시오." 아란두는 입가에 가득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나는 지금 오
이 사제와 경전을 번역하는 일을 얘기하고 있었소. 경도 좀 앉아서 얘기를 하고 가시오." 문간
의 혈관이 전류를 맞은 듯 경련을 일으켰다. 오이 사제를 보는 순간 연회 도중에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마..." 문간은 가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아
란두는 그의 흙빛 얼굴과 격정에 떨고 있는 입술을 볼 수 있었다. "마마, 아니 아란두님. 우리는
벌써 세상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들입니다." 문간의 눈에 불덩어리 같은 빛이 떠올랐다. 지금 그
의 가슴은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란두님도 저도 지금 하칸께서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지 익히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칸은 우
리 두 사람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두 사람을 다 용서해주었
습니다. 하칸은 착하고 훌륭한 분이십니다. 더 이상 그분께 상처를 주지마십시오." "무슨 말을 하
는 거요?" "이런 야심한 밤에 어쩌자고 여봐란 듯이 내전에 남자랑 단둘이 계시는 것입니까? 더
구나 이분은 아란두님의 옛 부군이 아니십니까? 이런 모습을 하칸이 본다면 그땐 어떤 일이 일어
나겠습니까?" "고문간 형제,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오이 사제! 난
지금 아란두님께 얘기를 하고 있지 않소!" 문간은 주먹을 떨며 오이 사제를 질타했다. 아란두 앞
에서 이렇게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문간은 거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란두님께서는 일평
생 신들의 제단을 부흥시키겠다는 큰 뜻을 품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마치 그 옛날의 해모수나 주몽왕처럼 스스로의 운명
을 만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란두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란두님만큼 강하지 않다는 걸 모르십
니다. 아란두님에게 반했다가 파멸하지 않은 남자들이 있었습니까? 대염모 장군은 안시성에서 전
사했습니다. 고정부는 배신자가 되었다가 나중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지금의 하칸은 도
망자가 되어 6년 동안이나 세상을 떠돌아야 했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는 이 나는..." 문간의 얼
굴은 흥분과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그만두시오. 봐클리 칸!" 아란두는 문간의 탄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일갈했다. 순간 카툰의 위엄이 그녀의 전신에 빛났다. "경은 오늘 술을 너무 많이 하신
것 같소. 우린 어린애가 아닙니다. 내일을 책임지지 못할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란 말이오." 그
러자 문간의 얼굴에도 결연한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아란두님, 당신이야말로 내일을 책임지지
못할 바보이십니다. 아란두님, 당신이 꿈꾸는 신들의 향기가 우리가 서 있는 초원의 향기와 얼마
나 다른지 모르십니까? 동방교는 그 가슴을 언제나 고구려에 남겨둔 채 눈만 샛길을 바라보고 있
었지요. 그 샛길을 따라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 이 푸른 투르크제국까지 말입니다. 한
번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시란 말입니다. 아득해요! 이젠 우리 자신의 말발굽이 만든 아득한
절벽이 고구려로 돌아갈 우리의 귀로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나를 모독하지 마시오, 고문간 경.
신들의 향기와 초원의 향기는 둘이 아닌 하나요. 이 초원은 우리가 잊고 있던 고향이오. 당고르
오르캄도 태어나지 않았던 아득한 고대에 우리 고구려인들은 이 초원으로부터 동방으로 왔소. 우
리는 이곳에서 하늘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져왔소. 왜 이곳에서 동방교가 부흥할
수 없단 말이오! 멸망의 날에 당고르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은 바로 이곳이요!" "현실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1년에 한 번 모이기도 힘든 이 망망한 초원에서 동방교가 무슨 소용ㅇ이 있단 말입니까? 수많
은 민족들이 아침저녁으로 목초지가 뒤바뀌는 이 초원에서 동방교의 그 수많은 제사를 어떻게 지
낸단 말입니까? 경전은 또 무슨 의미가 있습니 ? 고구려 나라에서 나타난 그 많은 기적과 시련
과 신탁들이 이 망국민들과 이방인들을 어떻게 감동시킨단 말입니까? 아란두, 당신은 정말 바보
요." 고문간은 처음으로 일체의 존칭을 버리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닥쳐! 파문자 같으니!" 아
란두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나는 이제 이 제국의 카툰이야. 내가 나의 제국
에서 내 백성들에게 동방교를 전도하는 거야. 감히 어떤 놈이 나를 방해해?" "당신은 카툰이지
테프 탱그리가 아닙니다. 돌궐제국에는 돌궐제국 나름의 탱그리 숭배가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하신
다면 당신은 수많은 돌궐의 사제계급들과 분쟁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문간을 빤히 노려보면
서 아란두는 냉정을 회복했다. 그녀는 침착한, 그래서 더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던 사태도
겁나지 않소. 나는 할 것이오." 문간은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이 오늘밤 또 무슨 바보짓을 했는가
를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사랑을 꽃피우지는 못할지라도 아란두가 돌아오면 나름대로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던 오랜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늙었지만 아란
두는 아직 너무 젊었다. 그녀는 할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문간은 아란두의 갑
작스런 사랑이 어리로부터 발원한 것인지를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란두가 원한 것은 남녀
의 사랑이 아니며 행복도 미적지근한 화해도 아니었다. 그녀의 욕망은 자신의 운명에 맞서보는
것이었다. 사랑이란 미명하에 남자를 유혹함으로써, 아란두는 자신의 일생을 지배해온 숨가쁨, 고
통, 신음, 감정의 광적인 고양을 동반하는 영혼의 싸움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 싸움에 오이 사제
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또 오이 사제와 함께 지낼 것이다. 쿠이가 필요하다면 쿠이의 여자임을 확
인시킬 것이다. 그녀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누구도 그녀를 말릴 수는 없으리라. "가보겠습니다."
문간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쓸쓸히 돌아섰다. 이제 더 이상 아란두에게 자신이 필
요 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문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퍼렇게 번득이는 신들의 불칼 밑에서 눈
물에 젖고 엉망으로 일그러진 문간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날 밤 군영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간은
두 번이나 말에서 떨어졌다. 그날 이후 문간은 병들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5
아란두가 돌아온 그 해 돌궐제국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칸도, 카툰도, 아파 타르칸도 마치 지상
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각기 자기 집에만 틀어박혀 살았기 때문이다. 문간은 군영에서 치치
크 초원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옮겼다. 문간은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하필 이면 아란두를 사랑한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 세월이 체념을 선물하고 운명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은 지금에 와서도 갈
수록 정념의 아득한 흔들림으로 더욱더 깊어가는 자신의 사랑을 한탄했다. 폐렴인가 싶던 병세는
좀 호전되었으나 가슴을 좀먹는 절망만은 치유할 수가 없었다. 어느 가을날 뵈클리 칸이 병들었
다는 소문을 듣고 가한정에서 마리치치카가 낙타를 타고 병문안을 왔다. 문간은 따뜻한 들소가죽
을 덮고 안락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다가 마리가 오는 것을 보았다. 누런 사시나무 잎사귀들
과 바랜 풀들의 메마른 초원 위에서 마리의 하얀 장옷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문간은
문득 아란두를 처음 만났던 그 어느 초겨울 아침을 떠올렸다. "아저씨, 이렇게 아프시면 어떻게
해요. 어서 툭툭 털고 일어나서 나랑 낚시하러 가요." 마리, 상냥하게 다시 태어난 아란두... 문간
은 그녀를 항상 딸이라고 생각했고, 딸처럼 사랑했다. 아육 아저씨가 그에게 했듯이 문간은 마리
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쳐주었었다. 나무 밑에서 [문선]을 낭송하며 당나라의 장안에서 보낸 자신
의 어린 시절을 얘기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마리에게서 아란두를 느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힘이 없구나... 책이나 좀 읽어주렴..." 문간이 말했다. 마리는 문간의 장막으로 들어가 양피지 두
루마리들이 있는 책장에서 [당고르 오르캄]을 가져왔다. 그리고 어두운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
고 시련을 견디어 마침내 어여쁜 여자로 변한 아이카딘이 호안바투르에게 청혼하는 부분을 낭송
하기 시작했다. [아이카딘은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준 호안바투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젊은 영혼은 신비롭고도 험난한 섭리의 굽이들을 뛰어넘어 마침내 자신의 짝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카딘은 당고르께 혼자 기도를 드리고 있는 호안바투르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밤의 깊은 곳에서도 번갯불처럼 빛나는 님이여. 어두운 허공에 걸린 저의 차디찬 잠자리를 알아
주세요. 인간의 세상엔 저를 불어줄 피리가 없답니다. 저의 부푼 두 가슴 속에서 백 마리의 말이
울고 있어요. 낮과 밤을 주관하시는 당고르께 물어보셔요. 자비로우신 당고르께. 새들을 꿈꾸게
하시는 당고르께. 어서 당신의 눈부신 새벽으로 저의 밤을 지워주겠다고 말해보셔요.' 호안바투르
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늘 껴앉았다. 그녀의 꽃에서 이슬 방울을 거둬들였다. 지순한 사랑이 두
사람을 어루만져 삶의 마지막 비밀을 푸는 기쁨을 함께 맛보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몸에 당고르
오르캄이 잉태되었다.] 책을 읽는 마리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열네 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침착하고 고전적인 빛이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그러자
책 속에서 어떤 힘이 일어나 문간에게 옮아왔다. 예전에 문간을 몸부림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느
낌들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문간은 목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목소리를... 새해가 되
자 모두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고문간이 칸의 맏공주인 마리치치카에게 청혼을 한 것
이다. 마리치치카의 나이 열네 살, 고문간의 나이 마흔여섯으로 일찍 장가든 사람이라면 손녀뻘의
처녀였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평생 여자에 무관심하던 뵈클리 칸이 웬일이냐, 총사령관이 되면
사람이 전부 노망든 색골이 되나 보다 하고 낄낄거렸다. 그러나 정작 쿠이와 아란두는 웃을 수가
없었다. 마리가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난 어릴 때부터 결심한 것이 있다, 고문간이 아니면 절
대 시집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란두는 딸을 윽박지르고 달래다 못해 때리기까지 했다. 성질이
불같은 마리는 엄마가 아끼는 종마 한 마리를 끌어내어 다리뼈를 분질러 죽여버렸다. 쿠이는 두
모녀만 보면 얼굴이 심한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변했다. 이때 중매인으로 나선 욱사시부는 쿠이
에게 칸의 관용을 촉구했다. 쿠이에겐 생명의 은인인 욱사시부는 못할 말이 없었다. "하칸이시여,
혼사 문제란 대책이 없다고 체념만 하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칸툰께서도 아홉 살이나 어린 칸과 결혼했는데 맏공주께서 서른두 살 많은 남자와 결혼
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핏줄이 그렇게 별난 걸 어떡하겠습니까? 예로부터 도망가려는
딸년을 막는 장사는 없었습니다. 딸도둑한테는 그저 시원시원하게 내주고 다른 뭣인가를 빼앗으
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한 달여의 진통 끝에 하칸의 맏공주와 뵈클리 칸의 국혼이 5월로
발표되었다. 문간은 군영에 칩거한 지 1년 만에 기력을 회복하여 대군단을 이끌고 출격했다. 이때
가 서력 695년. 고문간은 돌궐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삭방도행군대총관 왕효걸의 대군을 교묘
하게 인적미답의 황무지로 유인하여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어 천산산맥으로 군대
를 돌려 실크로드의 치안을 위협하던 위구르족의 잔당들을 양주, 감주등 당의 하서지역으로 쫓아
버렸다. 이윽고 5월이 왔다. 영하 30, 4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혹한의 겨울, 주야로 강풍이 불어
목지가 황폐해지는 기아의 봄을 지나 유목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밝고
따듯한 초원을 향해 피가 술렁거리는 이 계절에 성대한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가한정과 고
려성 사이에 있는 외튀갠산 동쪽 기슭은 활기가 넘쳤다. 국혼 기간 동안 사용될 새로운 유목도시
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동시라 이름지어진 이곳으로 모자에 두 개의 긴 꿩깃털을 꽂고 통이 넓은
바지 위에 검은색 옷깃의 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모두 자기네 <막리지
어르신>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온 고구려 사람들이었다. 마치 마법사가
요술 방망이를 두들기자 튀어나온 듯 면직물, 가죽, 토기, 수산물 등 온갖 잡화를 파는 시장이 급
조되어 있었다.
국혼의 성수기에 한 대목 보려고 곳곳에서 상인들이 몰려온 것이다. 그런데 결혼식 행사를 책
임진 고려성 장관 손모례수는 부하들과 함께 시장을 순시하다가 수상한 나그네들을 목격했다.
"저기 저 자들... 좀 수상한데?" 모례수가 부하들에게 속삭였다. 모례수가 주목한 것은 아까부터
거기서 마유주에 담근 양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는 한 소년이었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희희낙
락 웃으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그 소년의 주위에는 용의주도하게 그를 경호하는 네 명의 노인들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상인 같지가 않았다. "가서 알아보고 올까요?" 몇 달 전 백인대장으
로 승진한 거연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하게. 정중하게 조사해야 해." 돌궐제국은
상인들을 우대했다. 비단을 중심으로 하는 중개무역의 이익으로 재정을 꾸려가기 때문이었다. 비
단을 중심으로 하는 중개무역의 이익으로 재정을 꾸려가기 때문이었다. 가한정의 시장에는 일본
에서 온 빈랑수 부채와 비잔틴에서 온 금제 브로치가 나란히 팔리고 있었다. 고구려인, 중국인들
로부터 사라센인, 페르시아인, 호탄인, 소그드인, 위구르인 등 온갖 인종들이 북닥거리는 시장에서
유독 저 소년이 눈에 띈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례수 스스로도 그 점을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거연이 백인대장의 계급장을 번적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소년은 퉁명스럽
게 거연을 응대했고 거연이 화를 내며 소년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다음 순간. "무엄한 놈!" 한 노
인이 중국말로 외치며 손바닥으로 번개처럼 거연의 가슴을 쳤다. 그러자 거연을 전속력으로 달려
가는 충차에 부딪힌 것처럼 허공으로 붕 뜨더니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당나라 세작이다!" 거연이 당하는 것을 본 모례수의 부하들은 일제히 소리지르며 칼을 뽑았다.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썰물처럼 갈라졌다. 거연을 해치운 흰 수염의 노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람처럼 몸을 움직이며 맨 손으로 칼을 휘두르는 관리들을 때려눕혔다. 세 명이 혈도를 찍
히고 급소를 차여 비명조차 못 지르고 잇달아 쓰러졌다. "잠깐! 잠깐! 노인장은 손속을 멈추시오!"
모례수가 중국말로 외치며 두 팔을 활짝 벌려 노인을 막아섰다. 노인이 행동을 멈추자 모례수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부하들을 꾸짖었다.
"어째서 내 명령없이 칼을 뽑았느냐! 모두 엄벌에 처할 것이다." 모례수는 정중히 포권의 예를
갖추고 노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부하들이 결례를 범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아마도 저분 공자
께서는 북방을 유람하고 계시는 왕공의 자제이시겠지요?" 뜻밖의 부드러운 응대에 네 노인들은
서로 당황한 시선을 교환했다. 모례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돌궐의 가한정에
서 벼슬을 하고 있는 고려성 장관 손모례수라고 합니다. 지금 귀국과 전쟁중에 있으나 저희 대가
한께선 상인이나 유람하고 있는 중국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호하십니다." 국초부터 당나라에
는 돌궐을 여행하는 북방주유가 유행이었다. 당태조의 황태자였던 승건은 아예 황궁 안에 돌궐식
천막을 치고 거기서 살 정도였다.
군자는 어떻고 소인은 어떻고, 끊임없이 쥐 잡는 소리를 하는 중국식 전통의 속박에 지친 젊은
이들이 유목민족의 자유와 남성다움을 동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례수는 이런 북방주유를 들먹
여 이들이 발뺌할 여지를 주었다. 모례수가 사과도 드릴 겸 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자 노인들은
더욱 당황한 눈치였다. 노인이 막 포권을 하며 초대를 사양하려는 찰나. "좋다! 안내해라!" 돌궐
복색의 소년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송충이같이 짙은 눈썹, 어딘가 귀티가 넘
치는 얼굴이었다. 네 노인이 깜짝 놀라 뭐라고 말리렸으나 소년은 위엄있는 목소리로 그들을 물
리쳤다. "괜찮다. 난 돌궐 관리들의 천막도 보고 싶어! 더구나 이 자는 고려성 장관, 투둔초르라지
않아! 우리가 만난 돌궐인들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 아닌가." 모례수는 소년의 방자한 말에 화가
났으나 그만큼 호기심도 커졌다. 소매가 짧은 때묻은 가죽옷에 팔뚝에는 매를 올려놓는 수갑까지
낀 돌궐족 차림의 소년이었다. 도대체 이 아이새끼는 누구란 말인가. 당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보나 수행하는 네 노인의 무공으로 보나 절대 예사로운 신분은 아니었다. 모례수는 소년과 난처
하다 못해 울상이 된 네 노인을 안내하여 자신의 천막으로 데려왔다. 화려한 페르시아산 카펫 위
에 곰가죽 장식을 걸어놓은 모례수의 천막은 넓었다. 곰가죽 위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동방교의
성부, 둥근 해와 초승달이 엇갈린 박다르 문양이 걸려 이었다. 계집종이 중국에서 수입한 녹차를
끓여 내어왔다. 소년은 찻잔을 거뜰떠보지도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박다르 문양을 가리켰
다. "여봐라! 저게 뭐냐?" 여전히 반말이었다. 모례수는 더욱 화가 났으나 내색하지 않고 공손하
게 대답했다.
"예, 저것은 동방교의 일월신을 나타내는 표식이옵니다. 새 카툰이 동방교의 사제라서 요즘 많
은 사람들이 저 신명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번엔 모례수가 물었다. "죄송하오나 공자님의 관품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소년의 얼굴에 어린애답지 않은 신중함이 명멸했다. 흰 수염 난
노인이 소년의 어깨를 짚으며 모례수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행여 소년이 먼저 입을 놀릴까 두려
워하는 눈치였다. "투둔초르 대인께 아룁니다. 이분 소주인의 증조부께서는 정관연간에 경조참군
이셨고 조부 대인께서는 비서성 교서랑을 지내셨습니다. 선친께선 황궁의 지제고를 지내시다가
올해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네 늙은이들은 소주인의 슬픔을 달래드리고자 동방유람을 나선 길입
니다. 소주인이 연소하시어 결례가 많았사오나 부디 너르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문벌사회
인 당나라에서는 남이 관품을 물을 때는 이렇게 증조부의 관품부터 차례로 말하는 것이 법도였
다. 노인의 대답은 그럴 듯 했으나 모례수는 믿지 않았다. 노인이 을퍼대는 관직들은 모두 하대부
들이었기 때문이다. 모례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랑캐 땅이라고 사람을 그렇게 허술
히 보시면 안됩니다. 다른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해코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제 생각에 여러분들은..." 모례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네 노인을 보며 뜸을 들였다. "이가
도(위진남북조부터 당나라 대까지 유행한 도교의 일파. 노자를 영생불사의 신으로 숭배하며 그가
하늘에서는 천제가 되고 땅에 머무를 때는 황제, 혹은 황제의 스승이 되어 세상을 구제한다고 믿
는다. 이 같은 노자 재림신앙과 노자가 이씨라는 교리 때문에 이가도는 당나라에서 황실종교로
변모된다. 당 황실은 <당의 이씨 황제는 노자의 재림>이라는 선전을 위해 정책적으로 이가도를
보호하고 장려했다.)의 고인들이십니다. 그렇지요?" 노인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갔다. 모례수는
말을 이었다. "아까 제 부하를 쓰러뜨린 노인장의 장법을 이제야 생각해냈습니다. 틀림없이 이가
도 사람들이 쓰는 청성권이었습니다. 네 분이 이가도의 고인들이시면 이분 공자께선 아마도..." 소
년은 반항기 서린 얼굴로 모례수의 시선을 맞받아 노려보았다. 모례수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공자의 관품은 어떻게 되십니까?" "내 관품..." 소년의 입가에 나이답지 않은
자조의 웃음이 스쳐갔다. "증조부 천자, 조부도 천자, 아버지는 상왕, 나는 임치왕. 이름은 이융기
하고 한다." 모례수의 손에 들려 있던 녹찻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과연 이제까지 히히덕거리던 소
년의 얼굴에 한 가닥 늠름한 위엄이 서리는 것이 아닌가? 모례수는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요 쬐그만한 놈이... 이 자식이 임치와 이융기라고? 당태종의 증손자.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친손
자. 한때 예종 황제로 즉위했다가 어머니 무후에 의해 폐위되어 상왕으로 강등된 이단의 아들이
었다. 훗날 현종황제로 즉위하여 중국사의 최전성기라 일컬어지는 <개원의 치>를 이루었던 이융
기. 그는 벌써 이즈음부터 인중룡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황손 가운데 단연 우뚝한 존재였다. 당대
의 세도가 무유기가 여섯 살 난 꼬마 이융기에게 당한 이야기는 이 돌궐에까지 알려져 있다. 무
후가 낙양에 무씨의 5묘를 세워 황실과 똑같이 제사지내고, 아들 이단까지도 성을 무씨로 바꾸도
록 한 기가 막힌 시대였다. 무후의 일족이요 태평공주의 남편인 무유기는 조정의 인사권을 쥐고
흔들었다. 어느 날 그런 무유기가 무후도 임석한 자리에서 늙은 대신 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
었다.
이 장면을 본 이융기는 당당하게 무유기를 꾸짖었다고 한다. "이 조당(조정)은 우리 집안의 조
당이다. 무씨들이 목소리를 높일 데가 아니야!" 여섯 살 난 꼬마의 이 당찬 말에 무유기는 기겁을
했다. 곁에 있던 천하의 무후도 놀랄 만큼 소년의 기백은 굳센 데가 있었다. 그런 이융기가 지금
아홉 살의 미소년이 되어 이 돌궐에 와 있는 것이다. 모례수는 탁자로부터 세 걸 음 뒤로 물러나
큰절을 했다. "어리석은 이 사람을 용서하소서. 곧 저의 상관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소년은 고개
를 저었다. "안돼! 난 임자를 군자라고 믿고 내 본색을 털어놓은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
할머니의 진노를 피해 도망 다니는 몸이야. 내가 돌궐땅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정말 난처해. 우
리를 그냥 이 천막에서 쉬었다가 떠나게 해줘." 말은 이엏게 하면서도 소년은 전혀 애절한 기색
이 아니었다. 오히려 등을 의자에 턱 기대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모례수는 이 쾌활하고 용감한
소년왕에게 호감을 느꼈다. 중국 사정에 밝은 모례수는 소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태평공
주는 남편이 모욕을 당한 후 이 소년을 미워하며 어머니인 무후에게 사사건건 소년을 무고하고
있었다. 아버지 상왕은 걱정 끝에 아들을 장안으로부터 빼돌려 국경 너머 돌궐땅으로 피신시킨
것이었다. 그제서야 네 노인도 모례수에게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았다. 이들은 역시 이가도의 도사
들로 상왕부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무림인들이었다. "이 후배는 고려인으로 은주에서 자랐
습니다. 어릴 때부터 강호를 동경하며 네 분 같은 고인들을 존경해왔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
고 유하시다 가세요." "투둔초르 대인께선 식견이 대단하시군요. 노부의 한 초식을 보고 금방 이
가도를 알아보시다니 놀랍습니다. 새외에 고인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입니
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내일 고문간 원수의 결혼식이 시작되면 장막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음껏
즐겨주십시오." 5월의 봄밤이 깊었다. 높푸른 외튀갠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은 방울방울
모여 시내를 이루고 잡초들이 웃자란 산중턱에서 도랑을 만들며 안개 낀 초원으로 경쾌하게 달려
갔다. 바위를 튀어 돌고 숲을 에두른 물은 이곳 동시의 원만한 구릉지대에서는 푸른 강물이 되어
있었다. 아득한 북녘, 바이칼호로 흘러가는 오르혼강이었다. 가한정에서 오르혼 강변을 따라 동쪽
평원은 울긋불긋한 시장의 천막들이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었다. 내일 있을 국혼에 참석한 하객들
과 상인들이었다. 모례수는 떠들썩한 밤시장의 인파를 헤치고 희고 높은 신랑의 천막으로 들어갔
다. 천막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고 낯선 두 손님이 고문간, 고공의와 함께 앉아 있었다. 거란족의
복색을 한 머리가 완전히 센 노인과 서른이 넘은 장년의 사내였다. 이상한 것은 고문간도 두 사
람도 모두 눈가가 붉게 젖어 있는 것이었다. "장관님이 오셨군. 어서 이리 앉으시오. 멀리 시라무
렌강에서 반가운 손님들이 와서 술을 나누던 참이오. 그대도 이름은 들었겠지. 10여 년 전 선우도
호부에서 헤어진 뒤 소식을 모르던 걸걸중상 걸걸조영 두 부자분들께서 내 결혼식에 와 주셨소."
"아, 그러십니까." 모례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거란족 지역에 사는 고구려인들이라면 사정을 듣
지 않아도 왜 이 멀리까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거란족 문제는 보통 미묘한 것이 아니었다. 생전
나 몰라라 하고 있다가 찾아와 난제를 떠안기는 손님들을 눈물을 흘리면서 반기는 고문간이 위태
롭게 느껴졌던 것이다. 대대로 거란족이 지배하는 송막도독부 지역에는 최근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제까지 고구려인들과 친했던 다샤 바가투르가 죽고 당으로부터 각각 우옥령위장군과 송막도독
의 작위를 받은 손만영과 이진충이 등장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6만 명에 달하는 고구려인들에게
무거운 공출을 강요하고, 여자를 빼앗아가는 등 행패가 심했다. 참다 못한 고구려인들은 결혼식을
핑계로 돌궐의 고문간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온 것이다. "반 년마다 비단 2천 필, 동전 1천 민을
내야 한단 말이에요. 완전히 죽을 맛이죠. 당나귀처럼 죽도록 일만 해도 이건 목구멍 타작이 안된
다니까요. 영주성에서 고구려 사람들은 다 쫓겨나고 날샌 올빼미 신세가 되었어요. 부디 군대를
이끌고 오셔서 이 무도한 놈들을 응징해주십시오. 우리들이 안에서 내응하겠습니다." 걸걸조영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코맹맹이 소리로 떠들었다. 문간은 그의 어깨에 다정
하게 손을 올리고 말했다. "여러분이 정직하게 대했는데도 그놈들이 여러분들을 적대했다면 그놈
들은 곧 나의 적이 될 것이오.
나라 없는 백성들은 늘 그런 불행을 겪게 마련이니 일단 참으시오. 놈들은 곧 정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오. 부족한 공출은 내가 빌려줄 테니 한 1년만 참아보시오. 막근아, 이분들을 모시고 가
서 비단 2천 필을 내어드려라." 걸걸중상과 걸걸조영은 고마워하면서도 고문간의 약속에 대해서
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물러갔다. 문간은 고공의, 손모례수만을 남게 하고 다른 측근들을 다 내
보냈다. "아무래도 당나라와는 화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는걸..." 문간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고공의와 손모례수는 놀라서 서로를 쳐다 보았다. "우리는 영토를 넓히고, 목초지를 지키고, 전리
품을 얻기 위해 당나라와 싸워왔어. 그러나 이제는 나라의 판도가 커질 대로 커졌어. 다른 방식으
로 싸워야 해. 돈이 없으면 나라의 안정도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하지. 정기적인 재정 수입만이
통치와 격률, 기강을 보장해주는 거야. 돌궐 백성들은 평화시엔 각자 멋대로 유목생활을 하다가
인기있는 장군이 나타나 승리를 거듭하면 혀를 쏙 빼물고 그의 깃발 밑으로 달려가지. 아직도 이
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전리품더미를 나눠가지는, 그 재미에 의지하고 있어.
심지어 제 몫이 적다고 칸에게 대드는 놈이 있을 정도야.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나라의 질서를
도모할 수 있겠나?" "그래서요?" "이제는 당나라에서 돈을 받으면서 주변 민족들을 정벌하는 더
실속있는 전쟁이 필요하단 말일세. 당나라의 전쟁대행료와 전리품, 전쟁의 성과를 두 배로 늘리는
거지. 방금 왔던 사람들의 말을 잘 생각해보게. 우리는 아마 거란을 정벌하게 될 거야. 사람의 됨
됨이란 참 제각각인데 손만영, 그 자는 내가 잘 알아. 야심가지. 옛날에 그 자가 선우도호부에서
군부참군(참모장)을 할 때부터 그랬어. 소문을 듣자니 이번에 암습과 독살로 많은 족장들을 죽이
고 거란 16부를 깔고 앉은 모양이더군.
이진충은 그 자의 매부고. 둘 다 욕심이 다락 같은 효웅들이야. 내 장담하건대 거란은 앞으로 1
년 안에 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거야. 내기를 해도 좋네." 고공의와 손모례수는 정말 놀랐다.
고문간이 이런 소리도 할 줄 알아? 사람은 정말 오래 두고 볼 일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완전히
싯멀건 등신이 되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 알 바 아니라며 살아온 문간이었다. 어느 한구
석 짭짤하지가 못하고 싱거워 빠져서 세상은 으레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며 꼴값을 하던
명물이었다. 그런 고문간이 장가를 가게 되더니 갑자기 빠릿빠릿해져서 옛날의 박력과 치밀함을
완연히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고공의는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과연 원수님의 생각이 신묘하십
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고토 회복의 대의를 이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거란족이 사라지면
영주땅에 있는 고구려인들이 독립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고구려 부흥을 도모할 수
도 있겠지요." 고구려 부흥! 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간에게 절실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소박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간은 얼굴에 깊은 수심을 떠올리며 중얼
거렸다. "하칸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래. 하칸에게 빚이 너무 많아. 그를 장인으로 만들다니... 그
마음고생의 만분지 일이라도 갚고 싶으이." 손모례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문간의 손 등을 쥐었
다. "제가 마침 좋은 사람을 알았습니다. 당나라와 화해하기 위해 연줄이 되어줄 사람이 있습니
다." "연줄이라니?" "아홉 살 먹은 소년이 하나 있는데 지금 좀 만나보십시오." 모례수는 문간을
자신의 천막으로 안내했다.
6
아란두는 잠을 못 자서 충혈된 눈으로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백 병이 앉은 넓은
장막 안은 구석구석까지 웃음소리가 퍼지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넘실댔다. 막 신랑이 들어와 자리
에앉았기 때문이다. 낯익은 유령들... 삶에 대한 불경스런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현실은 문득
슬픈 사기였고 하객들은 시끄러운 유령들이었다. 뭔가를 특별히 주목하는 것도 아닌 그녀의 눈매
와 새침한 입가에는 누구에게랄 수 없는 모멸의 빛이 감돌았다. 아란두의 눈은 사실 아주 먼 곳
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처녀를 잃던 어느 먼 숲속을. 그녀가 첫날밤의 사랑을 베풀었던 그 남자
가 막 그녀의 딸과 결혼하려 하고 있었다... 아란두는 흠칫 주위를 둘러본다. 결혼식이 치러지는
장막 안에는 맛좋게 구운 어린 숫양 고기의 냄새가 자욱했다.
잔칫상에는 쌀밥과 우유. 호박과 과일, 서역에서 들어온 대추야자, 꿀, 생선, 소고기 각종 요리
가 즐비했다. 고문간은 산해진미를 다 두고 궁상스럽게 말고기를 사이에 넣은 밀개떡(햄버거의
원조. 13세기 몽골군의 서정에 따라 이 식품이 엘베강 하류의 함부르크에 전래되면서 양파와 겨
자가 첨가된 <햄버거>가 나타남.)을 먹으면서 좋아라 웃고 있었다. 장막 밖에서 당, 당, 당 하는
징소리와 함께 오르도의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부와 가마대가 도착한 것이다. '늑대처럼 외
롭게 새처럼 자유롭게, 인생의 근심 잊고 초원의 향기 마시며, 북소리, 피리소리, 뜨거운 전쟁의
함성 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리라...' 나팔고 마두금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다. 신부의 부모를 대
신해 일빌개 카툰이 말을 타고 달려가 신부를 인도했왔다. 99명의 신부 들러리들이 신부의 순결
을 상징하는 99필의 백마를 타고 장막 앞으로 행진해왔다. 그 선두에는 안장 위에 부드러운 비단
을 펴고 고삐에 오색영롱한 유리구슬을 박은 신부 마리치치카 공주의 흰 말이 은방울소리를 내며
걷고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온갖 장식과 사치를 다한 100명의 처녀들은 초원에 가득 핀 꽃송
이들이었다. 그 뒤를 가슴에 번쩍이는 은장식을 박고 저마다 자기 씨족의 탐가를 아로새긴 오르
도들이 안장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따라왔다. 그 뒤로 특별히 하얗게 씻겨 목에 분홍빛 비단
띠를 묶은 100마리의 양과 붉은 비단 띠를 묶은 100마리의 말, 신부의 혼수를 실은 낙타들이 따
라왔다. 신부가 말에서 내리자 신랑측의고구려 사람들이 초원의 예법대로 붉은 비단 수건을 흔들
며 꽃을 뿌렸다. 마상고, 발랑고, 사현금, 탄쟁, 추쟁, 와공후 등 용케도 이제까지 보존해온 고구려
의 악기들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비단 예복을 차려 입은 천소부가 신랑측을 대표하여 신부에게
열두 잔의 술잔을 올렸다.
신부는 술잔을 하나씩 받아 좌우 방향으로 초원에 술을 뿌렸다. 초원의 모든 생명들이 번성하
기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앉고 합환의 예식이 시작되었다. 흥겨운 분위
기, 떠들썩한 하객들과는 달리 식장에 있는 주인공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아란두는 내내 침울
했고, 고문간은 그런 아란두의 눈치를 살폈다. 쿠이만이 감개무량한 듯 평소보다도 밝고 즐거운
얼굴로 딸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는 예식을 지루해하면서 그러나 용케도 얼굴을 지푸리지 않고
앉아 있었다. 예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신랑의 천막으로 돌아오자 본격적인 술추렴이
벌어졌다. 모두들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며 왕성한 식욕들을 자랑했다. 수천 통의 마유주, 100여
마리의 삶은 양고기가 하객들뿐만 아니라 멀리 가한정과 고려성에까지 나누어졌다. 훈훈한 봄바
람에 새들이 노래했고 아득한 들판은 남풍에 싱그러운 풀파도를 일으켰으며 강 건너 숲 위로는
양털 같은 흰구름이 한가로이 떠갔다. 노래와 춤이 시작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환호하고 우레와같은 갈채를 퍼부으며 신랑 신부를 축복했다. 시장에는 돌궐인과 고구려인
들은 물론이고 불에 달군 쇠로 가슴에 노예의 낙인을 찍은 위구르인, 오구츠인, 아바르인들까지
나와 흥청거렸다. 이들은 내려준 술을 코가 삐뚫어질 때까지 퍼마시고는 난장판에 가까운 춤판을
벌이며 놀았다. 신랑의 천막에는 작금의 돌궐을 움직이는 고관들이 모두 초대되었다. 바닥에 모피
를 깔아놓은 호화로운 천막. 상아로 장식한 원형의 식탁 위에 진귀한 음식들이 은으로 된 접시에
차려져 있고 그 앞에 50여 명의 귀빈들이 옻칠을 한 중국식 의자에 앉았다. 최근 수석부사령관
(보일라 바가 타르칸)으로 복직된 톤유쿠크가 있었고 일빌개 카툰의 아버지인 카라쿠 아파칸도
있었다. 일태리쉬 칸의 맏아들인 열한 살의 우친왕 벡치렌이 일어나 건배를 제의했다. "용기와 무
운이 함께하는 뵈클리 칸, 고문간 원수께서 우리 집안의 사위가 되셨으니 이 나라는 그야말로 반
석에 올라섰습니다.
위대하신 하칸과 카툰, 그리고 고문간 원수와 나의 사촌 마리를 위해 건배합시다." 모두 앞을
다투어 잔을 쳐들었다. 축하의 말을 건네는 소리가 어지러이 일어났다.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초원의 지혜들이 노인들의 덕담으로 피어났다. "공주님의 몸에서 백단향기가 나는걸. 마음씨가 고
운 분이라는 증거지." "남자의 기쁨은 사랑하는 여자를 품에 안고 밤새도록 환희의 소리를 지르게
하는 데 있지. 히히히, 축하해. 뵈클리 칸!" "좋은 아내가 곧 집이고, 좋은 아내가 방패고, 좋은 아
내가 울타리라네. 정은 아군이고 미움은 적군인 게야." 날이 저물자 신랑과 신부는 강변에 마련된
<기쁨의 방>으로 옮겨갔다. 초원 곳곳에서 예쁜 꽃모를 떠다가 옮겨심은 꽃밭 한가운데 신랑 신
부가 첫날밤을 보낼 새 장막이 있었다. 꽃밭 둘레에는 수많은 장대에 걸린 등불이 영롱한 꽃그림
자들을 만들고 있었다. 1천여명의 오르도가 장막을 에워싸고 신랑 신부를 괴롭히려는 장난꾸러기
들을 막았다. 동시는 아직도 웃음소리와 박수소리, 음악소리로 진동하고 있었다. 신랑 신부의 장
막은 곧 정적에 잠겨 조용해졌고 오색의 장식천만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 일은 바로 이날밤. 좀처
럼 보기 드문 아름다운 봄밤에 일어났다.
아란두는 조용히 동시를 벗어났다. 딸과 고문간이 신방으로 들어가고 손님들이 여기저기 모닥
불을 피우기 시작하는 저물녘이었다. 아란두는 오르혼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한적한 느릅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숲 한가운데 서서 나뭇가지에 머리를 얹었다. 그리고 세계와 시간을 통
틀어 무엇이 자기 앞에 놓여 있을까 생각했다. 이티바르 카툰 아란두. 대초원과 다섯 개의 사막과
열여덟 개의 강물과 백여든여섯 개의 산봉우리를 다스리는 돌궐제국의 공동통치자.
그러나 그녀는 권력과 영광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들의 은총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전에 거대하던 도시들은 이제 작아졌다. 우리 시대에 득의한 인간들도 얼마 안 가 미미
해질 것이다. 대초원은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길이었다. {{
}}누
구
의 집도, 누구의 영토도 아닌,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땅. 사람들은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바람과 풀과 모래 속으로... 초원에 무더기로 핀 개양귀비꽃은 이즈음 짙은 향기를 내뿜고 있다. 이숲속까지도 은은하게 퍼져오는 그 시큼하고 순수한 숨결.아란두는 꽃들의 숨결에서도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당고르와 동방의 신들은 항상 이 환희에 찬 봄의 향기처럼 그녀의 인생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 밤. 당고르를 향해 걸오온 그녀의 길은 짐작도 할 수 없는 여러 겹의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열아홉 살 때 당고르는 더할 수 없는 쾌락과 가장 달콤한 죄악으로 그녀를 시험하셨다. 경전에 나오는 아득한 신성시대의 여성들은 그런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위선일 뿐임을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남자의 육체에 깃들인 신의 영광에 빠져들었다. 그년는 다른 남자를 껴안았고, 또다른 남자를 껴안았고, 또 또다른 남자를 껴안았다. 그녀는 한 남자의 몸에서 자신이 겪은 모든 남자들을 발견했다. 그녀의 잦은 사랑이 색탐이며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난하는 바보들도 있었다. 그들은 삶을 나른하고 미적지근한 무력감에 빠뜨림으로써 신에게 가까이 가기를 바란다. 사랑할 줄도 증오할 줄도 모르는 얼간이들.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떠는 바퀴벌레가 감히 신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신들은 거의 송장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바라지 않는다. 아란두는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써
신을 사랑했다. 서른이 넘었을 때 당고르는 첫날밤의 남자를 다시 보내셨다. 초췌한 얼굴의 망명
자였던 고문간. 당고르는 이번엔 그녀를 가슴 저린 연민과 동정으로 시험하셨다. 그리고 그녀를
불륜의 위태로운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둘은 연인이 되어 몸의 구석구석을 서로 나누었다. 이
런 밤, 강변에 있는 이런 숲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많은 파란들이 있었고 그녀는 고문간을 떠났
다. 그리고 이제는 고문간이 그녀를 떠나려 하고 있다. 그녀의 딸과 함께. 그들은 서로의 고집으
로 벽을 세웠다. 언제이던가. 아란두가 문간을 파문하고 문간이 아란두로부터 군대를 빼앗아가던
날이었다. 이런 숲에서 아란두는 중국으로 가겠다며 소리쳤다. "두 번 다시 당신을 만나지 않겠어
요." "알고 있소." "당신이 꼭 알아줬으면 해요. 당신이 하나도 그립지 않을 거예요. 예전에도 그
랬으니까." 지금 아란두는 다짐한다. 아직은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그녀는
나뭇가지를 밟고 미끄러지면서 덤불에 쓰러진다. 인상을 찌푸리고 아픈 무릎을 만지며 그녀는 생
각한다. 모든 것이 지워지고,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신만이 그녀의 곁에 남았다. 초원의 고독과
사제의 고독만이. 아란두의 마음은 지워지고 사라져간 사람들을 더듬는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소
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면서 인생을 배워야 했다. <아란두>라고 그녀의 이름을 친밀하게 불
러줄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죽었거나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때 우거진 숲이 흔들렸다. 한 사람
이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왔다.
"아란두..." 오이 사제였다. 아란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원으로 들어온 뒤 언제나 그림자처럼 아란두의 곁을 떠나지 않은 오이. 그들은 줄곧 서로의 존
재 속에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20년 전 처음 결혼을 했던 그날 밤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약속으로 맺어졌던 남자. 예전의 순간들이 가
슴으로 밀려왔다. 절벽 위에서 떨고 있을 때 누군가의 팔을 잡은 느낌이었다. 오이 사제는 말했
다. "아란두, 집착은 가장 슬픈 낭비라오..." 아란두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조용히 웃었다. "당
신은 영원히 사는 분이니 그렇겠지요. 내겐 모든 것이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모래 같아요." "당신
의 영혼은 언제나 바위처럼 단단했소.
그런 당신이 왜 과거의 가시덤불을 헤매는 거요? 지난날의 인연은 죽은 정인에게 바치는 꽃다
발과 같소. 그냥 그 자리에서 색이 바래가게 하시오.." "오이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수습사제가
아닙니다. 신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인간의 기쁨과 환멸을 멀리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인간
적인 삶에 초연함으로써 다시 인간에게 다가서는 더욱 진실한 자리가 우리의 자리이겠지요. 그러
나 오이님, 당신과 나의 가장 큰 상실이 무었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평범이예요." "..." "여자
들은 정말 마음에 드는 한 남자에게 순결을 바치지요. 그리고 그 남자를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평생을 바치고 죽고 또 살아도, 또 바칠 수 있는 것이 여자예요. 그런 여자들의 정직과 사랑과 헌
신 때문에, 그 위대한 평범 때문에 세상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나는 신을 사랑하기 위해 내 속에
사막을 만들었어요. 많은 사람을 사랑했지만 남자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시간을 늦추고 있는 배
신이었지요." "당신은 지쳐 있군요, 아란두. 어머니 아란두의 달빛에 안겨 잠을 청하시오. 그러면
내일의 해가 뜰 거요." 두 사람은 어두운 숲을 걸어 나왔다. 나란히 서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강
을 따라 걸었다. 강줄기가 껶여지는 지점은 약간 언덕져 있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키 큰 엉겅퀴 덤불 사이 평평한 자갈밭 위에 앉은 외따로 떨어진 장막
이 있었다. 카툰의 어막과는 별도로 아란두가 개인적인 용무를 위해 쓰는 장막이었다. 아란두가
신임하는 경호병들이 멀찌감치 서서 하루종일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장
막으로 들어갔다. 장막 안에는 박하꽃과 백리향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시원한 촉감의 물소 가
죽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아란두가 수집한 여러 가지 조각품과 장신구들, 칼과 단검, 술잔 등이
금은 보석으로 장식된 긴 문갑에 진열되어 있었다. 박달나무로 만들어 아름답게 세공한 책상 위
에는 동방교 대제사장의 직인이 든 함과 문방구, 박다르를 상징하는 성부와 금으로 만든 손바닥
만한 당고르 오르캄의 신상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깨끗한 요가 깔린 작은 침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책상 앞의 방석에 나란히 앉았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둘은 문틈 사이로 윙윙거리는 나지막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어쩌다 높은
소리로, 때로는 낮은 소리로 울어대는 그 소리는 그러나 결코 멎지 않았다. 아란두가 혼자말처럼
입을 열었다. "당신과 이렇게 앉아 있으니 편안하군요." "..."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지 않을
땐... 언제나 혼자 있어야 하지요. 남편이 있지만 내 곁에 아무도 함께 있을 수가 없지요. 나의 자
리는 너무나 먼 곳이어서... 나 홀로 있지요. 다른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지
요." 아란두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오이 사제는 생전 처음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아란두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다. 그 옛날 명당공회에서 아란두의 추방이 결정되던 때에도 초연
했던 오이 사제였다. 두 사람은 인간 세상을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지친 사제들의 순화된 외로움
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어깨를 껴안았다. 육체적인 욕망은 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깊고 잔잔한 슬픔에 몸을 맡기고 다만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오이 사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
이 아란두를 이해했다. 한 남자에게, 한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제의 고독을. 스스
로가 만든 사막의 광막함이 스스로를 집어삼키고 추위에 온몸이 오그라드는 고독을. 오이 사제는
그렇게 아란두의 어깨를 안고 옛일들을 생각했다. 추억의 잎사귀들이 슬픈 발자국소리를 내며 떠
올랐다...
문득 오이 사제는 장막으로 다가오는 현실의 발소리를 깨달았다. 무례한 접근자에게 호통을 치
려 했던 아란두의 몸은 갑자기 돌조각처럼 굳어졌다. 오이 사제는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
을 느꼈다. 장막의 펠트천을 열고 불쑥 들어선 사람은 바로 쿠이였다. 쿠이는 분노보다 먼저 뻐근
하게 목이 메어왔다. 아란두는 자신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다른 남자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기억의 피딱지들이 한꺼번에 터지며 오랜 세월을 두고 아물려 온 상처들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오이 사제는 조용히 아란두의 어깨를 놓고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아란
두는 쓰디쓴 비애에 젖은 얼굴로 쿠이을 쳐다보았다.
"나가주세요." 아란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쿠이는 그녀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수치심
과 분노는 이미 그녀가 고문간의 아들을 낳을 때 다 타서 재가 되었다. 꺼진 재 속에서 다시 붉
은 불길이 피어올랐다... 쿠이는 땅이 꺼지는 둣 하늘이 무너지는 둣 눈앞이 온통 어지러웠다. 그
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숨결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다, 당신... 다, 당신
의 장막에... 침입한 이 자를 내게 넘기시오."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에요." 쿠이의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더럽고 몰인정한 것... 언젠가 아란두는 말했었다. 내가 딴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면 당신도 딴 여자와 자라고. 세상은 캄캄한 혼돈 속으로 빠져들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쿠이는
억지로 발을 움직여 아란두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뒤에서 아란두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함숨소리가. 그러자 쿠이의 내부에 있던 어떤 것이 폭발했다. 다시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의 눈은 온통 붉은 핏발로 서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칼자루를 잡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칼
을 뽑아 아란두를 베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마치 그의 외부에 있는 어떤 사람이 그를 조종하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느린 동작으로 일어나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한 순간의 일이었다. 나중에 쿠이는 자
신이 아란두를 난폭하게 짓밟은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때는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을 전혀 몰랐
다. 그는 어떤 것을 계속해서 재차 때려부수었다. 갑자기 악귀에 그의 전체가 들씌운 듯했다. 무
언가를 때리면서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이것을 기다려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완전히
다른 하늘의 저편에서 어떤 비명소리가 들렸고 이윽고는 그 비명소리도 사라졌다. 핏발이 눈에서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자 그는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영원히 나오지 못할 구렁속에 처박혔음을 볼
수 있었다. 장막안은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고 그의 앞에는 사지가 떨어져 나간, 난자된 남녀의 시
체가 뒹굴고 있었다.
7
"하아, 하아, 이를 말씀입니까. 천하만민들이 카파간 칸을 존경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네에, 넨 넨 녜에... 카파간 칸께옵소는 북방의 무한한 천하의 값지고 소중한
평화를 가져오신 분이시옵니다. 저희 성신황제 폐하께옵소는 소직을 보내시어 카파간 칸이 흉노
의 묵토르 선우 이래 가장 위대한 북방의 영주라는 존호를 올리라 하셨사옵니다. 녠 녠 녜에에...
소직의 하찮은 숨결과 아둔한 말재주로는 저 태양의 광명과 같이 눈부시고 저 하늘의 별빛처럼
드높으신 칸의 위덕을 차마 다 아뢸수 없사옵니다." 당의 사신 염지미는 이말을 하면서 근위대장
관 욱사시부에게 열두번도 더 고개를 숙였다. 마치 절하는 인형같았다. 욱사시부는 그 너무도 노
골적인 저 자세에 눈쌀을 찌푸렸다. 염지민은 명문가의 자제요 그 자신 우표도위대장군이라는 종
삼품의 고관이 아닌가. "염대인, 귀하와 귀국의 호의는 잘 알겠으나 하칸을 만나실 수는 없습니
다. 하칸께선 지금 몹시 편찮으시다니까요" "하아, 하아, 욱사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말씀이십니까? 천하만민의 존경을 모아 저희가 이렇게 존호와 예물을 들고 만
리를 멀다않고 찾아왔사옵니다. 저희를 어여삐 여겨 주셔야지요. 이대로 돌아가면 저희의 머리를
없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요. 그렇고 말구요. 녠 녠 녜에... 반 시진이면 됩니다. 반 시진. 소직을
살려주시는 셈치고 반시진만 칸을 알현하게 해 주십시오. 네에?" 들창코에 메기입을 한 염지민은
염치불구하고 욱사시부에게 매달렸다. 황궁이 무서우면 장안성 바깥에서부터 긴다고 카파간 칸
때문에 근위대 장관인 욱사시부가 호가호위를 하는 형국이었다. 사람됨이 근직한 욱사시부는 정
나미가 떨어졌고 들볶이다 못해 정청을 나와 칸의 궁전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딛는 발걸
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때는 696년 12월. 냇물이란 냇물은 다 말라버려서 말과 양들은 깨끗한 물을 찾아 기갈을 푸는
한겨울 이었다. 얼어붙은 겨울 하늘로 욱사시부의 한숨이 허옇게 피어올랐다. 늙은 중신의 근심은
끝이없었다. 지난해 5월 카툰이 죽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나라안이 온통 충격과 고뇌에 휩싸여있
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착하고 관대했던 카파간 칸은 그날이후 딴사람처럼 난폭해졌다. 가한정에
있을때면 실성한 사람처럼 술만 퍼 마셨고 밤에는 차마 눈 뜨고 볼수 없는 황음에 빠져들었다.
어느날밤 여자들의 비명소리에 궁전으로 달려간 욱사시부는 10여명이나 되는 남녀 종들을 발가벗
기고 숨이 끊어질때까지 채찍질을 해대는 카파간 칸을 보고 기절할 뻔 했다. 카파간 칸은 채직을
쥐고 희번뜩 흰자위가 가득한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자, 이 년놈들아, 빨리 흘레
를 붙어보란 말야! 왜 하지 않는 거냐? 가랭이사이가 눈같이 깨끗한 척하는 귀부인 년들도 다하
는 짓인데 네깟 놈들이 뭐가 부끄러워 못하는 거냐. 그 갈보년들은 밤만되면 입에서 단내가 나도
록 음탕하게 해악질을 해대면서도 낮이 되면 비단예복을 차려입고 세상에 다시 없는 정숙한 여자
인척 새침을 떨어대지. 계집이란 다 그런것이야. 그년들의 구멍을 들춰보라지. 밤낮 남자를 탐해
서 찔끔찔끔 물을 흘리고 있지. 악취가 코를 찌르고 열이 올라 썩어 문드러지고 있어. 세상의 모
든 구멍에 불을 싸질러야지. 배은망덕하는 년들이나 싸질러 남자들의 생피를 빨아먹게 하는 그
구멍에 칼을 쑤셔 박아야지. 박아라. 빨리 박아. 이 새끼야! 빨리 하란말야. 모조리 쑤셔. 죽여, 죽
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어어어!" 납으로 만든 마름모꼴의 무거운 추를 달고 마디마다 삐쭉삐쭉
한 송곳이빨이 달린 늑대사냥용 채찍은 치명적인 무기였다.
욱사시부가 달려들어 채찍을 빼앗았으나 다섯사람의 종들이 죽은 뒤였다. 욱사시부는 절망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렸다. "하칸이시여, 차라리 신을 죽이십시오. 아무리 종들이라지만 사람을 이
렇게 때려 죽이시다니. 이 무슨 경솔하고 해괘한 처사이옵니까! 초원에 이런 법은 없습니다. 중국
의 야만인들도 이러지는 않습니다." 돌궐에서 종이라는 신분은 중국의 그것과 전혀 달라서 주인
의 의형제 내지 양자처럼 대접받는다. 주인에게 과년한 딸이 있으면 사위가 될 수도 있고 주인이
전쟁에 나갔을 때 공을 세우면 백인대장, 천인대장이 되기도 했다. 카파간 칸이 자신을 시봉하는
종들을 때려죽였다는 소문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종들은 달아났으며 평민들은 물론 씨
족장들까지도 칸을 피했다. <카파간 칸의 폭정>은 곧 중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올해 봄 친히
전쟁에 나서 하서지역의 둔전과 마을들을 모두 불태우고 그 농민들을 사로잡아 학살했기 때문이
다. 이때도 욱사시부가 그의 말고삐를 붙잡고 죽기를 무릅쓰고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카파간
칸은 살인귀처럼 냉정했다. "흙에 코를 박고 농사를 지으며 황제에게 보호를 애걸하는 이런 것들
은 버러지와 같다. 투르크의 칸은 누구의 고삐에도 매이지 않는 늑대같은 사람만을 사람으로 대
접한다. 살고 싶다면 독립불기의 인간으로 살았어야 했다고 말해줘라." 카파간 칸은 핏발이 선 눈
을 번뜩이며 침착하고 단호하게 학살을 지휘했다. 하서지역은 한 폭의 거대한 지옥도로 변했다.
신하들은 자신들의 군주가 괴물로 변했음을 알았다.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조심하
지 않으면 안된다. 너무 오랫동안 인간성의 심연을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의 넋 속으로 들어온다.
이런 대가한을 말려 줄 중신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나라의 불행이었다. 이미 카를룩 칸 다로빈은
노령으로 죽었으며 뵈클리 칸이자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고문간은 아란두가 죽던 그 날로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 었다. 고문간. 고문간이라도 있었으면... 욱사시부는 일년 전의 고통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 밤 욱사시부는 불이야하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느릅나무 숲으로 달려 갔을 때 욱사시부는 그 자
리에 얼어붙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불타 버린 카툰의 장막 앞에 모여 있었다. 장막의 재위에는
새까맣게 탄 채 오그라붙은 남녀의 시체두구가 있었다. 칼로 난자된 후에 불태워진 너무도 끔찍
한 시체들이었다. 그 하나에서, 시체의 타다남은 피로 얼룩진 옷 조각위에서 평소 아란두가 늘 걸
고 다니던 해와 달의 황금목걸이를 보았을 때 욱사시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얼마 뒤 얼이 빠진 모습으로 나타난 고문간은 재위에 몸을 던지다시피 엎드리더니 몸부림을 치
며 통곡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존재의 전부가 찢어진 사람의
울부짖음이었다. 그리고 그날밤 고문간은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야 말았다... 욱
사시부는 이를 갈았다. 어떤 놈이 카파간 칸에게 아란두를 무고했을까? 그것이 지금까지도 풀리
지 않는 의문이었다. 아란두와 오이 사제의 사이가 각별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특
별히 불륜의 관계는 아니었다. 많은 공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카툰에게 개인적으로 내밀한 일들을
자문하는 남자 하나쯤은 얼마든지 양해될 수 있었다. 또 설사 불륜이 있었다해도 그런일이란 으
례 세상사람들이 모두 다 안 뒤에야 남편이 알게 마련이었다. 결혼식장에 앉아 있던 카파간 칸이
누가 고해바치지 않은 다음에야 뭐하러 그 멀리 떨어진 카툰의 장막까지 간단 말인가? 아무튼 욱
사시부는 당나라 사신의 일을 보고하러 칸의 궁정으로 들어섰다.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건만
궁정은 마치 귀신이 출몰하는 폐가처럼 괴괴하기만 했다. 욱사시부는 불안의 파도에 밀리면서 내
실로 들어섰다. 카파간 칸은 독한 고량주에 절은 악취를 풍기면서 자고 있다가 어렵게 일어나 욱
사시부를 맞았다. 뜻밖에도 광태를 부리며 화를 낼 줄 알았던 카파간 칸은 조용했다. "일태리쉬
타이타뉴? 입공보국가한? 대체 그게 뭐요? 거만한 타브가치의 여자황제가 왜 내게 이런 관호를
바치는 거요?" "우리더러 거란의 반란에 동조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원병도
얻어보자는 속셈입니다." 욱사시부는 차분한 목소리로 당과 거란, 그리고 돌궐의 역학관계를 아뢰
었다. 일곱 달 전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은 마침내 영주도독 조홰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이 병으로 죽자 거란인들은 손만영을 무상 칸으로 추대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거란군은 손
만영의 지휘 아래 영주로부터 발진하여 당의 동북 지역으로 쇄도해들어갔다. 손만영은 뛰어난 작
전가였다. 그의 거란군은 단숨에 하북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으며 당이 파견한 대규모의 토벌군들
을 잇달아 궤멸시켰다. 당은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등 당의 기라성같은 장군들이 차례로 사로잡
히는 치욕을 당했다. 당년 예순두 살의 측천무후는 불면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스스로 <만세통천
원년>이라 개원한 이 해 측천무후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3월 서쪽의 조주에서 숙변
도행군대총관 왕효절이 토번에세 협격을 당하고 있었다. 당의 방어력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막 물이 넘쳐 터지려는 제방처럼 국방이 아슬아슬하게 위험수위에 육박하고 있는 이때 만약 북쪽
에서 돌궐까지 남침한다면 국호까지 <주>라고 갈아치운 그녀의 왕조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궐을 달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주도면밀한 판단 아래 파견한 사신
이 바로 염지미였던 것이다... 욱사시부로부터 저간의 설명을 들은 카파간 칸은 숙연해졌다.
카파간 칸은 자의식도 있으려니와 지성도 갖춘 사람이었다. 한 번 정신을 돌이키자 자기가 바
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 음울한 궁전에서 자신이 술에 떡이 되어 널브러져 있는 사이 제국
과 제국의 거대한 운명이 뒤집히고 있었던 것이다.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나라의 무거운 책임이
다시금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카파간 칸은 가슴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면서 세면대로 걸어갔다.
그는 한 양동이의 물을 머리에 쏟아 붓더니 욱사시부에게 좀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잠시 후 염
지미는 칸의 궁정 안에 있는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카파간 칸은 붉은색 휘장 위에 황금으로 만든
거대한 늑대머리의 문장이 붙어 있는 접견실의 옥좌에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비단에 검은 담비
털을 댄 칸의 정장을 입고 머리까지 말끔히 손질한 빈틈없는 모습이었다. 톤유쿠크를 비롯한 조
신들이 모처럼 궁정에 불려와 칸의 좌우에 늘어섰다. "하아, 하아, 그 이름 드높으시고, 고결하시
고 존엄하신 하칸이시여...." 염지미는 파리처럼 납죽 엎드려 큰절을 한 뒤 온갖 아첨을 늘어놓았
다. 카파간 칸은 사신에게 의자를 갖다 주도록 했다. 알현은 두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당
의 사신이 껍데기뿐인 존호와 <양국간의 화해와 우호>라는 그럴싸한 미사여구밖에 가져오지 않
았다는 것을 안 카파간 칸의 얼굴은 칼로 오려낸 듯이 싸늘해졌다. "사신은 잘 들으시오. 귀국의
여자 황제는 평화와 선행의 적이었소. 그녀의 손은 늘 황금으로 더럽혀져 있지 않으면 선혈로 더
럽혀져 있었소. 그동안 우리가 귀국으로부터 입은 피해와 모욕은 열손가락으로 꼽아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오. 짐은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우리로부터 빼앗아간 막남의 대초원을 돌려주고 풍주,
승주, 영주, 하주, 삭주, 대주에 억류된 약 6만 명의 투르크인들을 고국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요청
한 바 있소. 그런데 짐의 요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회답도 없이 존호랍시고 이런 종이쪽이나 보
내다니! 이는 귀국의 여자 황제가 짐을 희롱하는 것이 아니오!" 염지미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
게 변했다. 걱정하고 걱정하던 일이었다. 대가한이 노한 것이다.
이 대가한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온 염지미였다. 바지 속
에 자기도 모르게 오줌이 찔끔거렸다. "짐이 가진 인마와 전비는 우리 땅을 방위하고 침략자들을
징벌하기에 부족함이 없소. 귀국의 늙은 여자 황제는 짐의 정당한 요청을 묵살함으로써 짐에 대
한 적의를 공언하고 있지만 짐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소. 왜 우리 돌궐만이 토번에도, 거란에도
연전연패하는 귀국의 비루먹은 말과 메뚜기 같은 병사들을 두려워하겠소? 귀국은 앞으로 짐으로
부터 귀국의 분수와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의무를 배우게 될 것이오. 당장 짐의 눈
앞에서 사라지시오. 그러면 귀하의 생명만은 보장하겠소." 염지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겁도 많고 말도 많고 소심하기는 했지만 염지미는 충신이었다. 마침내 돌궐까지 침공, 이라는 최
악의 사태가 예견되자 조국의 암울한 미래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하칸이시여, 자비로우신 하칸
이시여..." 염지미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한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예? 조금만
말미를 주시면 소직이, 이 미천한 것이 저희 폐하께 목숨을 걸고 빌어서 꼭 하칸의 말씀을 들어
드리도록 하겠사옵니다. 하칸이시여..." 염지미는 울면서 카파간 칸 앞으로 기어가 칸의 신발에 입
을 맞추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걸했다. 중국과 유목세계사이에 많은 외교분쟁이 있었지만
중국의 정사가 네발로 기어가 신발에 입을 맞춘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어지간한 카파간 칸도 어안이 벙벙했다. 줄지어 늘어선 대신들이며 장군들도 너무 어이가 없어
눈만 꿈뻑거릴 뿐이었다. 다음 순간 조신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카파간 칸이 목을 뒤로 제치고
허공을 향해 괴이한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아아 하하하하하 크 크 크 크 크... 키 키 키 킬
킬 킬... 조신들은 광증의 발작을 예견하고 몸을 떨었다. 카파간 칸은 성가신 강아지를 뿌리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르드베기, 고문간경은 지금 어디 있소?" 느닷없이 질문을 받은 욱사
시부는 눈을 크게 뜨면서 칸을 쳐다보았다. "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장 사람을 풀
어 찾도록 하시오. 그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소." 카파간 칸은 몸을 돌려 톤유쿠크를 쏘아 보았
다. "톤유쿠크경, 경은 짐의 사신으로 타부가치에 가주어야겠소. 짐의 요구사항을 서면으로 적어
서 타부가치의 여자황제에게 정식으로 갖다 주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톤유쿠크가 머리를 조
아리자 카파간 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접견실을 떠나버렸다. 조신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 갑
작스런 사태를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톤유쿠크는 더할 나위없이 오싹한,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
다. 이로써 제0국은 중국과 완전히 제휴하게 된 것이다. 전에도 측천무후는 카파간 칸을 좌위대장
군에 임명한다느니, 귀국공에 임명한다느니, 표기대장군에 임명한다느니,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시
킨다느니 혼자 지랄을 떨어댔다. 제국에선 그러렴하고 웃어넘겼을뿐 누구하나 진지하게 중국과
손을 잡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은 자기 나라의 공경대신에 의해 국경이 짓밟히고 둔전이 불
타고 장군들의 목이 베어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거란의 반란을 계기로 양국의 관계는 완전히 바뀐 것이다. 아란두님이 살아있었다면 상
상도 못할 일인데... 이제부터 이나라에는 중국적인 전제의 위협이 마치 한밤중에 불어나는 강물
처럼 부지불식중에 스며들지 않을까? 카파간 칸의 광기는 때맞춰 그것을 불러 들이려는 나팔소리
처럼 느껴졌다. 권력을 얻고자 할 때는 노예처럼 비루하게 아첨하다가 권력을 얻고나면 모든 사
람들을 깔아뭉게고 왕후장상으로 행세하는 중국의 배덕.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중국
의 기만술. 정복자로서 국가를 통치할 것인가 반역자로서 들판에 매장될 것인가 하던 건국기의
불안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압제를 벗어나 초원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자 했던
건국의 뜻까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일태리쉬 칸의 자비롭고 올바른 통치는 영영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만 것은 아닐까? 톤유쿠크는 좀처럼 깨뜨려지지 않을 번뇌의 안개에 싸여 궁정을 나섰
다. 욱사시부의 명령을 받은 오르도들이 고문간을 찾아나서기 전부터 <뵈클리 칸>을 보지 못했
느냐면서 초원 곳곳을 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남편을 찾으려는 마리치치카 공주의
사람들이었다. 마리치치카의 하인 위친치는 바람결에 전해지는 소문을 따라 동으로 동으로 달려
갔다. 한 달 가까이 말을 달려 케롤렌강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강을 따라 또 동쪽으로 갔다. 투르
크인을 만나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다. 초이발산을 지나자 거기부터는 완전히 다른 말을 쓰는 쏠
릭족의 땅이었다. 너무 가난한 나머지 철을 살 수가 없어 물고기 뼈로 화살촉을 만들어 쓰는 사
람들이었다. 유목할 가축도 없어서 사냥이 주업이었다. 그런 쏠릭족들 가운데 몽올부라고 특히 더
찢어지게 못 사는 부족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소년이 위친치에게 이상한 사람의 소문을 전해
주었다.
"얼마 전부터 바일호수에 산대요. 고울링족 남자라는 것 같았어요. 사람들에게 사금 모으는 방
법을 가르쳐준대요. 그 사람을 다라갔다가 돈을 벌어온 사람들이 있어요." 위친치는 자기도 사금
모아 한몫 잡겠다는 소년을 안내인으로 삼아 바일호수를 찾아갔다. 대초원과 만주평원의 경계선
인 대흥안령산맥은 만주 쪽으로 절벽을 이루고 있지만 서쪽은 완만한 산맥으로 뻗어 있어 고원을
이룬다. 이 대흥안령 서쪽의 고원이 호롱바일 초원이다. 호롱과 바일 두 개의 큰 호수가 있고 그
호수에 물을 대는 하르하강과 우르순강이 있다. 북쪽에 있는 호롱호수와 남쪽에 있는 바일호수둘
의 이름을 합해 호롱바일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호롱바일 초원. 그곳은 이 세상의 끝인 것 같았
다. 인간의 의식 영역을 뛰어넘는 휑휑한 공간. 인간의 의식 따위의 하찮은 것으로 동서남북 어디
에도 의짓ㅁ을 것이 없는 광야였다. 위친치는 멍한 저승길을 둥둥 떠가는 느낌에 머리가 어지러
웠다. 말도 그러한 것 같았다. 대초원에서 나고 자란 위친치였건만 이런 광야는 또 난생처음이었
다. 단지 풀이 무성한 낮은 구릉이 이어지고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을 뿐이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멍한 위친치의 머릿속에는 돌궐의 테프 탱그리가 웅얼거리는 <
망자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세상의 서쪽 끝에는 태미르 카피그가 있다. 세상의 동쪽 끝
에는 카르디한 이쉬가 있다. 아들아, 태미르 카피그로 가지 마라. 너는 숨이 막혀 죽으리라. 아들
아, 카르디한 이쉬로 가지마라. 너는 넋이 빠져 죽으리라.' 세 번 하늘이 어두워졌고 세 번 땅끝에
서 빛줄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대평원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물쟁반이 나타
났다. 물쟁반. 멀리서 보면 그것은 정녕 물쟁반이었다.
주변에는 산도 나무도 강도 없다. 호수 물기슭은 높이가 10미터 정도의 모래로 되어 있고 그
주위는 호수보다도 더 낮고 평평한 초원이었다. 물기슭에는 갈색마노인양 보석처럼 반짝이는 돌
들이 아름답게 흩어져 있었다. 바일 호수에 도착한 것이다. 위친치와 소년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
럼 호수로 다가갔다. 물에 씻겨 표면이 매끈하고 사탕처럼 반투명한 아름다운 자갈들의 물기슭.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저것이 혹시 사금아닐까? 물결은 발목에 격하게 부딪혀 부서졌다. 자갈들
사이에는 조개껍질이 있었는데 손바닥으로 한 뼘이 넘는 큰 것도 있었다. 이것은 또하나의 황야
였다. 물로 만든 황야. 맑디 맑은 바일호수의 물빛은 하늘색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갔다. 녹색이
되기도 하고, 청색으로 보일때도 있고, 바람이 불면 흐린 녹갈색을 띄기도 하고 햇빛이 나면 하얗
게 보이기도 했다. 호수를 따라 말을 몰아가던 위친치는 오죽잖은 나뭇가지와 천조각으로 얽어만
든 움막하나를 볼수 있었다. 사금꾼들의 움막이었다. 움막주변에는 햇빛탓에 지면에 닿은 공기가
은색파도를 일으키며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공기의 파도는 초원의 풀들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먼 수평선에 까지 일렁이며 흘렀다. 그런 파도의 끝간자리 어느 자갈밭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맨발의 노인. 고문간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뒤 톤유쿠크
가 찾아왔다. ...그렇게 머리를 절레절제 젖지마. 나를 비난하지 말라구. 나도 알고 있어. 이러구
다니는 것이 미친짓이라는 것을. 하지만 제정신이든 아니든 내겐 다 똑같애. 이제 그딴일은 생각
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불행한 미치광이야. 그뿐이야... ...바람소리라고 하지만 원래 바람 그 자체
는 소리가 없지않나. 강물이 흘러 돌에 부딪혀 소리를 내듯이 바람도 나무나 움막에 닿아 소리를
내는 거지. 하지만 여긴 풀밖에 없고 부딪힐 나무도 집도 없으니 아무 소리도 없지. 그저 구름이
흐르는 것을 보고 바람을 짐작하는 것이지. 사는 것이 꼭 바람같아. 여기 이러구 있으니 삶이 참
잘 보이는군... ...뵈클리 칸? 내가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백가지도 넘는 이
름으로 불렸어. 이름들과 떠나온 것들을 다 지우고 싶어. 난 이제 늙었어. 그러니 날 잊어달라고
해. 난 이제 아무에게도, 아무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늙은이야. 내가 왜 군대를 끌고 다니며 바보
짓을 해... 뭐라구? 모테긴?
8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갔다. 문간은 늙어갔다. 환멸과 고독과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에 사로잡히
기도 했고 과거의 덤불숲을 더듬으며 자잘한 행복을 맛보기도 했다. 호롱바일 초원에서 또 불려
나와 돌궐군 총사령관의 우스꽝스런 배역을 다시 맡은 그해는 험하고 울퉁불퉁한 추억의 내리막
길, 그것의 시작이었다. 똑똑하고 정신나간 왕년의 손만영 도위. 그때는 대거란 무상 칸이라고 불
렸던 손만영 원수. 그는 그해 삼월 왕효걸과 소굉휘가 이끄는 당나라 토벌군 십칠만을 앞은 만길
낭떠러지, 뒤는 천길 골짜기인 동협석곡으로 몰아넣었다. 거기서 십칠만 대군이 전멸하고 배총관
왕효걸 역시 전사했다. 거란군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바야흐로 거란의 독립이 목전에
달했다고 여기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달. 고문간이 이끄는 돌궐의 대군단이 거란군
의 근거지인 영주를 침공했다. 당시 손만영은 폐주하는 당나라군을 추격해서 수천리 남쪽 기주까
지 진격하고 있었다.
그가 남기고 간 수천명밖에 안되는 수비대가 어떻게 돌궐군을 이길 수 있겠는가. 거란인들은
공포에 질려 큰소리로 떠들며 우왕자왕했고 성벽으로 올라가 싸울 태세를 갖추는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남문을 열고 백랑산을 향해 달아나던 영주성 사람들. 그 속엔 손만영의 처자도 있었는데
결국은 손모례수의 부대에 몽땅 생포되고 말았다. 문간은 토번 원정 때문에 떠났던 옛영주성으로
20년 만에 돌아왔다.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버드나무들이 줄지어선 정
든 거리. 문간은 금방이라도 어느 골목에서 젊은날의 아란두가 나타날 것같아 옆을 돌아보지 않
았다. 시체들에서 나는 느끼한 냄새, 가죽이 타는 냄새, 나무가 타는 매캐한 연기, 피냄새들이 무
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들꽃의 향기, 젊은날에 꿈꾸던 그 냄새는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렸다. 문
간의 군대는 영주로부터 요하까지 진군했다. 문간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해저무는 저녁과 달지는 새벽 불타 허물어진 폐허를 혼자 걸으면 아픈 기억들이 온몸을 죄어왔
다. 일찍이 요하는 우리의 강물, 아란두의 강물이었다. 사랑은 흘러가고 회한만이 나의 것이다...
돌궐군의 침공은 거란군에게 경악과 광란의 격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근거지를 빼앗기고 남과 북
에서 적들의 협공을 당하게 된 것이다. 궁지에 몰린 손만영은 자포자기적인 폭거로 나왔다. 그는
기주성에 맹공을 가하여 이를 함락시키자 자사 육보적을 비롯한 관민 1만여명을 학살했다. 다시
기세를 되찾은 거란군은 점령지 곳곳에 불을 지르고 양민을 죽이며 지옥도를 연출했다. 정신나간
손만영. 요동을 평정한 고문간은 군대를 돌려 파죽지세로 거란군을 무찌르며 유주를 점령했다. 급
기야 거란의 동맹군이던 타타비족이 항복해 왔다. 타타비족의 투항을 계기로 거란전쟁은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후방에서 돌궐의 공격을 받고 전방에서는 당의 대군과 싸우던 손만영은 타타비의
배신으로 모든 퇴로가 차단되었다. 손만영의 거란군 본지는 기주 서북방에서 포위되어 격멸되었
다. 손만영의 부하인 낙무정과 하아소 두 장군은 항복했다. 손만영은 심복부하 한사람만을 데리고
노수 동쪽까지 도망쳤다. 강변의 모래밭에서 말을 내려 간신히 숨을 돌린 손만영은 괴롭고 비분
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의 항복하자니 죄가 너무 크고 돌궐에 가자니
고문간에게 죽을 것이다. 신라로 가도 필경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흉노로부터 천년을 이어온 거
란의 넋이 내대에서 끝났구나. 요리야, 이제 쉬고 싶다. 너는 내 목을 베어서 살 길을 찾도록 해
라." "주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요리라 불린 부하는 개구리처럼 엎어지더니 모래밭에 얼굴
을 부비며 억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손만영은 정수리에 고정시킨 머리타래를 풀고 칼과 혁대를
끄르더니 그 자리에 꿇어 앉았다.
그리곤 노수를 바라보며 조용한 얼굴이 되었다. 요리는 손만영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유주 북방에 진을 친 당나라군의 진영에 다 떨어진 옷
을 걸친, 거지같은 거란사내가 나타났다. 며칠을 굶어 눈앞이 어질어질한 요리였다. 사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리에 꿰어찬 보자기를 끌러 보초에게 내밀더니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대, 대거
란 무상가한 손만영의 수급이오." 손만영의 머리를 넘겨준 요리는 병사들로부터 기장밥 한 그릇
을 받아 정신없이 퍼먹었다. 배가 불러지자 정신이 돌아오고 오장육부가 다 무너지는 것 같은 슬
픔이 몰려왔다. 뭔가 뜻있고 거대한 것이 짓밟혀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주군 손만영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천년거란의 넋인지도 몰랐다. 거란이 그 유구한 역사를 딛고 막 나라로 일어
서려는 찰나 돌궐군을 이끌고온 고문간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혀버린 것이다. 눈이 퀭하게 변하도
록 울고난 요리는 허공의 한 점을 노려보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 "고문간, 이 철천지 원
쑤놈. 두고 보자! 복수하겠다. 복수하겠다. 반듯이 이 원한을 갚고 말겠다..." 과거 거란의 송막도
독부에 복속되었던 많은 군소민족들이 돌궐의 통치아래 들어왔다. 그러나 이 지역의 고구려인들
을 이끌고 있는 걸걸중상과 걸걸조영 부자가 문간을 찾아와 백성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고 싶다
고 말했다. 당나라도, 거란도, 돌궐도 없는 옛 고구려땅을 찾아가 살고 싶다는 것이다. 문간은 가
라고 했다. 카파간 칸의 문책이 두려웠지만 아란두도 평생을 바쳐 이루려고 했던 꿈들을 허사로
만들수는 없는 일이었다. 돌궐군은 추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었다. 며칠 뒤 거란잔당에 대한 토
벌을 끝내고 막 철수를 준비하다 돌궐군 진영은 발칵 뒤집혔다. 고려성의 장군이자 고구려군의
군단장인 손모례수가 일천여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본진의 경종이 요란하게 울리고 많은 장군들고 장교들이 고문간의 본영으로 달려왔다. 사람들
의 놀람과 혼란은 이루말할수 없었다. 그러나 문간의 얼굴은 심두렁했다. "척후대를 조직해서 손
장군을 찾아보시오." 고문간의 눈꺼풀은 말할 때 힘을 주느라 떨리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들썩이
며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무력하게 떨구었다. "손장군을 발견하면 내가가서 설득하겠소." "가한정
으로 보고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다시 지시하겠소. 자, 이젠 나를 혼자 있게 해주시오." 문간
은 괴로운 얼굴로 손 등을 내져었다. 장군들과 막료들은 실망한 얼굴로 문간의 장막을 나갔다. 문
간은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누루며 번민에 빠져들었다. 손모례수의 부대는 걸걸중상과 걸걸조영을
뒤따라 요동으로 가고 있으리라. "원수님, 저는 돌궐제국의 전도의 희망을 버렸습니다. 고구려인
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들어가십시다. 고구려 부흥이 코 앞에 있습니다." 이틀전 모례수는 한밤중
에 고문간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자네 미쳤군." "미친 사람은 카파간 칸입니다. 아란두님이 죽
고부터 제정신이 아니예요. 이 몇 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습니까? 그는 이제
폭군이에요. 그자 밑에서 불안에 떨며 살바엔 차라리 고향에 가서 죽고 싶습니다. 한 번이라도 평
양성을 보고 싶어요." "나는 하칸을 떠날 수 없네. 그리고 네 고향은 고구려가 아니야." 문간은 모
례수를 돌려 보냈다. 그리고 오늘 모례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탈영해 버린 것이다... 문간은 한숨을
쉬며 장막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경비병들을 제지하고 어두운 벌판을 혼자 걸었다. 척후대를 보낼
것도 없이 문간은 모례수들이 가는 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추격해서 붙잡아올 생각은
없었다.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우정을 나누었던 세 사람을 돌궐의 군법에 넘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간은 다만 당나라 군대를 걱정하고 있었다. 많은 고구려인들이 요서로
부터 요동으로, 고구려의 옛땅으로 향하는 것을 당나라 군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항복한 거란군을 앞세워 고구려인들을 추격할 것이다. 그들의 손에 모두 맞아죽지나 않
을는지... 문간은 배꼽아래에 힘을 주고 크게 숨을 들이켜며 군막들이 들어찬 자신의 군영과 벌판
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그의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경비병이나 참모들이려니 했는데 아니
었다. 문간은 자칫하면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 했다. 어두운 벌판에 뒷짐을 진채 서있는 그 사람은
오이 사제였다. 일년전에 아란두와 같이 죽은 오이 사제. 어두운 밤이었지만 문간은 오이의 하얀
얼굴과 신비한 눈빛을 몰라볼수 없었다. 그는 풍성한 검은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언제나 처럼 흠
잡을데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그의 잘 생긴 얼굴에는 뺨과 이마의 섬세한 피부를 자르며 예전에
는 없던 흉터가 생겨있었다. 바로 일년전 카파간 칸이 만든 선명하고 두터운 칼자국들이었다. "오
이사제... 귀, 귀, 귀신이오?" 그러자 오이는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오. 고문간 형제." 문간은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릿속이 다 휑휑해졌다. "나는 당신의 시체를 보았는데... 어떻게 되살아났소?" "그럼, 당
신은 그 많은 신선과 영선과 진인들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셨나요?" "하지만 그건... 그렇다
면 당신은 정말 700년 동안이나 살아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이는 한숨을 쉬
며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는 90년 전 평양성의 어느 마을에서 불사자로 선택되었습니다. 바로
내 전대의 오이 사제에게 말입니다. 나의 용모가 그와 매우 닮았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은 140년
을 살았습니다. 나를 찾은 그 사람은 이제 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너무나 기뻐했지요. 그 사람 앞
에 4명의 오이사제가 더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얼마든지 더 살 수도 있었는데 삶에 지쳐 죽
었지요." "삶에 지치다니요?" "당고르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죽음을 인간의 몫으로 정해놓으셨
습니다. 생명은 신들의 몫이었지요. 우리 같은 인간에게 장생불사란 태양이 져버린 산봉우리를 향
해 아무도 없는 길고 긴 길을 가는 것과 똑같아요.
사람들은 흔히 신선이 되어 폭포가 떨어지는 심산유곡에서 부채를 쥐고 유유자적하고 싶어합니
다. 어리석은 소망이지요. 부모형제도, 친구도 정인도 다 늙어죽은 세상에서 언제까지 그렇게 살
고 싶겠습니까? 한 30년만 지나면 신선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곤
하지요." 오이는 허허롭게 웃으며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의 귓바퀴에도 미처 아물지
않은 칼자국이 보였다. "아란두가 죽었을 때 나도 그냥 죽으려고 했습니다. 더 살고 싶지가 않았
어요. 나의 전임자들과는 달리 고구려땅을 떠나고 보니 지켜야 할 신의 제단도 보호해야 할 신도
들도 별로 절실하지 않더군요. 아란두를 향한 나의 사랑에 비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문득 해
야 할 일이 하나 있다는 걸 깨닫고 죽음을 뿌리쳤습니다." "해야 할 일?" "경전입니다, 고문간 형
제. 일찍이 아란두는 돌궐로 오자마자 동방교의 모든 가르침을 담은 경전들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돌궐문자로 옮겨진 백마흔다섯 권의 경전들이었지요. 삼십일곱 권의 동방삼경, 삼십 권의 주석서,
쉰네 권의 경외성경, 스물네 권의 구전율법들. 그 경전들이 불타버린 뒤 아란두는 나를 찾아왔습
니다. 우리 두 사람은 불타버린 경전을 복원하고 그 위에 <태원지> 열 권과 <신통기> 스무 권,
고구려의 <열왕기> 팔십 권을 더해 모두 이백쉰다섯 권의 경전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 동방의
지혜를 문서로 남기기 위해 아란두는 평생을 바쳤습니다. 내가 그것을 묻어버리고 죽는다면 그녀
의 정성을 배신하는 일이 아닙니까? 고문간 형제, 그 경전들을 형제에게 맡깁니다. 동방교는 이제
더 이상 사제도 믿을 만한 신도도 없습니다. 경전을 지켜주실 분은 형제뿐입니다." 오이 사제는
품속에서 대나무로 만든 문서통을 꺼내 문간에게 내밀었다.
"그 이백쉰다섯 권의 경전을 감추어둔 외튀갠산 동굴의 지도입니다. 언젠가는 형제께서 이것을
세상에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문간은 땀에 젖은 손바닥으로 그 대나무 통을 받아들었다. 오이 사
제는 문간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고맙습니다. 형제. 나는 너무 메마르고 아픕니다. 이
젠 죽어야겠어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한 달 뒤 고문간은 손모례수의 사건으로 총사령
관에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아란두가 남겨놓은 경전을 찾으러 갈 수는 없었다. 격노한 카
파간 칸의 광기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은망덕한 고구려 놈들! 이제까지 나라 없는 제놈들
을 그토록 존중해주었거늘. 말 한마디 없이 출분해?" 고문간은 독직, 월권, 탈영방조 등의 죄목이
붙어서 파직과 함께 태형100대가 가해졌다. 아내 마리가 달려와 항의하지 않았다면 문간은 그 잔
혹한 형벌에 목숨을 잃고 말았으리라. 매를 맞은 문간은 오논강 서북쪽의 춥고 척박한 초원으로
추방되었다. 카파간 칸의 폭정은 해가 갈수록 도를 더해갔다. 시대의 은총은 빠른 속도로 돌궐제
국을 떠나 총총히 동쪽을 향해 사라져갔다. 퇴각하는 밤의 어둠이 동쪽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새벽
의 여명을 장식하며 스러지듯이 고문간의 인생도 그렇게 꺼져갔다. 그러나 요하를 건너 새벽의
동쪽으로 나아갔던 손모레수와 걸걸중상, 걸걸조영의운명은 달랐다. 이 패들은 요동성 부근의 말
갈족과 합류하여 파도같이 이어진 산악지대를 따라 동으로, 동으로 나아갔다. 이해고의 기병대가
걸사비우의 말갈인 부대를 몰살하고 이들의 뒤를 맹렬한 기세로 추격해왔다. 그러나 천문령의 험
한 산악지대를 넘던 이 추격대는 매복하고 있던 걸걸조영 부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완전히 섬멸되
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걸걸중상이 늙어죽었다. 고구려인들은 성을 <클클>에서 <대>라고 바꾼
대조영의 지휘 아래 마침내 장백산맥과 장광재 산맥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동모산에 이르렀
다. 대조영 집단은 <동방의 추모왕>을 뜻하는 이 산에 큰 산성을 쌓고 근거지를 마련했다.
남북으로 산맥에 둘러싸인 천험의 방벽 가운데 유유한 홀한하가 가로지르며 동북으로 뻗어가는
비옥한 분지 동모산. 성을 완공하자 대조영은 어릴 적에 귀동냥한 동방교의 예식을 대충 얽어 동
방의 신령에게 고토회복을 고하는 엄숙한 제사를 올렸다. "할배검 해모수여, 위대한 동방의 영이
여. 산을 잠깨우고 대지를 떨게 하시는 해의 권세여. 삼라만상을 흐르는 충만한 생명의 힘이시여.
크신 어머니 아란두여, 모든 고구려인을 낳으신 강물의 정령이여. 당신의 아들과 딸을 깃들이게
하시는 달의 환희여. 만만리를 흘러 그치지 않는 자애로운 생명의 젖줄이시여. 들으소서!" 동모산
산정에 올라 제단을 우러러보던 고구려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렀다. 대조영의 목소
리가 이어졌다. "할배검 해모수님의 고원하신 섭리와 크신 어머니 아란두님의 자애로운 가호로
외로운 자손들,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불초손, 천지의 변화를 타고 대기를
잡아 아득한 엣날 동명성제 동방지존 추모님의 자취가 어린 이 산에서 감히 쓰러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중흥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옵니다. 당의 찬적, 하늘이 비정하고 할배검께서 일구신 신성한
영토를 범하고 지고한 왕통을 민멸시킨 지 어언 30년. 지옥의 나락을 헤매다 돌아온 자손들은 몽
매하고 약하나이다. 아아, 영생불사하시는 어버이여! 동방의 신령들이여! 저희들의 약한 손이 왕홀
의 무게를 지탱하게 하소서. 저희를 도우소서!" 말을 마친 대조영은 백성들을 향해 돌아서며 허리
에 찬 칼을 뽑았다. 그리곤 의기 충천한 목소리로 <동방의 새벽 나라> 진의 건국을 선포했다. 백
성들은 일제히 일어서 손을 들고 발을 구르며 환호했다. 고구려의 후계자, 발해가 태어난 것이다.
다시 30년이 흘렀다.
제 7부 아란두의 별
<이방이 동방을 짓밟으니 삶의 쇠락함은 가을날의 잎사귀와 같았다. 당고르 오르캄은 핍박을
피해 아사달로 들어갔으나 마침내 잔인한 폭풍의 날이 있어 키즈의 무리에게 잡힌 바 되었다. 쇠
사슬에 묶인 당고르 오르캄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 말라. 당고르의 백성들
이여. 신들은 다시 오시리라. 세상에 이길 수 없는 자가 하나 있나니 지혜롭게 사랑하는 자이니
라.
저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여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무정하
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언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며 친구를 팔며 조급하며 죽이는도다. 너희는 남을 사랑하며 베풂을 사랑하며 생각하며 겸
허하며 관용하며 부모께 순종하며 다정하며, 원한을 잊으며 나쁜 말을 하지 아니하며 참으며 순
하며 약한 것을 미워하며 깨끗하며 신실하며 실다우며 살림을 사랑할지라. 용기를 가지고 참고
견디라. 당고르께서 다시 오시리라. 착한 자식들을 낳고 서로를 아끼며 진심으로 당고르를 경배하
라. 당고르께서 너희에게 불멸을 주시고 시간의 모래밭에서 구하시리라. 이 말을 마친 당고르 오
르캄은 목이 베어 죽었다. -돌궐의 투르크 룬 문자로 씌어진 [당고르 오르캄(단군왕검)]중에서>
1
폭풍우를 예고하는 세찬 바람이 잔물결 이는 오르혼강을 휘몰아쳤다. 잎이 떨어진 버드나무 위
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던 독수리들이 힘차게 깃을 치며 서쪽으로 날아올랐다. 선두에 선 늙은
독수리 주둥이를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강의 한 지류가 흘러드는 계곡쪽으로 천천히 선회했다.
독수리의 날개 그림자가 스치는 땅 위에 문득 초원을 걸어가는 한 떼의 대상들이 나타났다. 10여
명의 대상들은 말과 낙타에 짐을 싣고 마른 강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 앞에 촘
촘히 세워진 사람 형상의 돌들이 나타났다. 발바르. 고인이 생전에 승리한 적장들의 모습을 새겨
무덤이나 사당 옆에 세워놓는 것이다.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수백 개의 발바르가 야트막한 모래구릉 너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발바르를 따라가자 하얀 석
재로 만들어진 사당이 나타났다. 돌궐의 가한정에서 500여 리 떨어진 오르혼강 동쪽이었다. 상인
들은 사당 앞에서 말을 내렸다. 곧이어 끌고 온 낙타의 등에서 무거운 나무상자들을 내렸다. 이
근처에서 비바람을 피할 생각이었다. 사당 안으로 들어갔던 젊은이가 나와 막 말에서 내리는 두
노인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안에 아무도 없는데요? 새로 지은 사당인데... 사당지기가 없어요."
아버지라고 불린 노인은 장님이었고 그가 부축한 다른 노인은 절름발이였다. 눈먼 노인은 숨을
헐떡이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잘됐구나. 먼저 아저씨부터 좀 눕히자꾸나." 눈먼 노인은
바닥에 양털 요를 깔게 하고 부축한 노인을 뉘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나무상자들을 사당
안으로 옮기고 낙타와 말을 돌봐주라고 말했다. 여윌 대로 여위어 겨울나무처럼 삐쩍 마른 노인
이었다. 모자도 쓰지 않은 맨머리에는 검은 터럭이라고는 한 가닥도 섞이지 않은 긴 백발이 어지
럽게 날리고 있었다. 노인은 주춤주춤 걸음을 옮기며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사당 안을 더듬었다.
그러나 밋밋한 벽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노인은 아들을 불렀다. "원보야, 이게 누구의 사
당이냐? 냄새를 맡으니 정말 갓지어졌는걸..." "가만있어 보세요." 원보라고 불린 젊은이는 사당
안마당에 선 거대한 두 비석을 읽고 있었다. 이 부근에는 볼 수 없는 진귀한 대리석 비석이었다.
연꽃 무늬로 장식한 넒은 능대석을 깔로 머리에는 각각 산과 독수리를 아로새긴 가첨석을 얹고
있었다. 비신에는 사면을 빼곡히 무려 62행이나 새겨넣은 투르크 룬 문자의 글이 아로새겨져 있
었다.
원보는 제일 첫 줄을 찾아 소리내어 읽었다. "아아, 이거네요. 현자 톤유쿠크는 타부가치에서
자라났다. 그때 투르크 백성들은 타부가치에 복종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눈먼 노인은 벼락
을 맞은 듯 파르르 떨었다. "토, 톤유쿠크? 톤유쿠크라고?... 아아, 톤유쿠크가 죽었구나." 노인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돌궐제국의 명제상 아시테 톤유쿠크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었다. 노
인은 굽이쳐 오는 추억의 물이랑에 어찔 현기증을 느꼈다. 노인은 비척비척 돌비석을 벗어나 사
당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기와지붕을 얹은 사당안에는 공물대와 상아를 깍아 만든 톤유쿠크의 조
각상이, 그리고 사방 벽에는 전쟁의 모습을 돌에 새긴 부조가 있었다. 노인은 손을 더듬어 그 부
조의 어디쯤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공물대앞에 꿇어앉아 두 손을
합장한 그는 곧 어깨를 늘어뜨리고 사당밖으로 나왔다. 사당밖의 먼 지평선에 희미한 말울음소리
가 들렸다. 노인은 즉시 손을 들어 그쪽을 가리켰다. "막근아, 저것이 누구냐?" 그러자 숙영할 장
비를 끓으던 젊은이들이 놀라 활과 칼을 들고 달려나갔다. 잠시후 젊은이들은 멀찌감치 다섯명의
나그네를 뒤따르게 하고 사당으로 돌아왔다. 젊은이들은 인솔하는 머리가 반백이된 중년사내가
노인을 향해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어르신, 위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나라로 가는 경교승들
이랍니다." "경교승들(기독교 수도사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의 교리를 믿는
수도사들을 가리킨다.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그 교리가 이단으로 규정되자 많은 수도사들이
탄압을 피해 동방으로 향했다. 페르시아를 거쳐 당으로 들어온 이들은 역대 황제의 보호속에 중
국 각지로 널리 퍼졌다. 당 고종때는 10도 258주에 최소한 하나씩의 교회가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오라고 해. 우리도 똑같은 나그넨데, 뭘... 원보야, 내 장옷을 다오." 원보가 말 안장에서 보드라
운 담비털을 댄 검은 모피외투를 가져왔다. 노인은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축대에 앉아서 경교승
들을 기다렸다. 경교승을 구경한지도 오래되었다. 최근 초원에는 기독교 수도사들의 발길이 뚝 끊
어졌었다. 사라센 제국의 동방총독 이븐 무슬림이 705년에서 715년까지 동방으로의 통로를 막았
기 때문이다. 몇 년전 이븐 무슬림이 새로운 칼리프에게 파면당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멸망했기
때문에 비로소 발길이 다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경교승 일행이 사당안으로 들어와 노인에
게 다가왔다. 길잡이인 듯한 돌궐인 세사람이 금발의 나이든 수도사 한명과 그를 시봉하는 소년
수도사 하나를 안내하고 있었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잘 오셨습니다. 바
람도 차가운데 같이 사당안에 겔(천막)을 칩시다." "하룻밤 같이 신세지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
립니다." 그런데 길잡이인 듯한 늙수그레한 사내 하나가 눈먼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사내
는 허리를 굽히고 노인을 좌우로 살펴보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뵈클리칸!" 그러
자 눈먼 노인곁에 서있던 사람들 사이에 낭패와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곧 신경질적인 살
기가 되어 파동쳤다. 노인 역시 만면에 노기를 띄며 반걸음 앞으로 다가들었다. "나를 알아보는
당신은 누구요?" 사내는 뜻밖에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컥 울음을 터뜨렸다. 사내는 자신의 뒤
에 벌벌 떨고 서있는 두 청년을 돌아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오글란(황족)이시
다. 무릎을 꿇어라." 사내는 넙죽 땅바닥에 엎드리더니 어깨를 떨면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멍해진 것은 노인과 노인의 부하들, 그리고 세사람을 따라온 두 수도사들이었다.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누군데 내 얼굴을 알고 있는가?" "칸이시여, 어쩌다가 눈이 머
셨습니까? 소인입니다. 위친칩니다." "아, 위, 위친치!" 노인, 아니 늙은 문간은 신음소리를 내며
두손을 뻗었다. 과연 여느사람보다 훨씬 큰 머리통하며 튀어나온 광대뼈, 조브장한 눈매가 틀림없
는 위친치였다. 옛날 호랑바일 초원까지 자신을 찾으러 왔던 아내 마리치치카의 충복 위친치. 그
뒤 군인이 되어 바이칼호 북쪽으로 출정하면서 문간의 집을 떠났었다. 문간은 눈물을 흘리며 위
친치를 껴앉았다. "이 사람아, 이 사람아, 이게... 이게 얼마만인가?" 저녁이 가까워지자 심상치 않
았던 바람의 예고대로 빗발이 듣기 시작했다. 오르혼 강변의 드넓은 평원 가득히 바람에 날리는
빗줄기의 장막이 쳐졌다. 서편하늘에서는 천둥이 일며 어둠이 깔려왔다. 톤유쿠크 사당의 반들반
들한 편마암 돌바닥위에 모닥불이 지펴지고 주위에 모피가 깔렸다. 위친치는 자신의 짐보따리에
서 좋은 술을 꺼내 문간에게 권했다. 문간의 얼굴은 어두운 수면처럼 조용했고 파들거리는 불빛
이 골깊은 주름살 위에 명멸하고 있었다. 위친치는 의문에 가득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칸이시
여, 10년전에 칸께서는 타브가치에 항복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지. 4만여명의 군인들을 데리
고 당나라에 항복했지." "칸께서 항복하시다 타브가치 황제가 높은 벼슬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
다. 마리 마님께서는 요서군 부인이 되셨다구요." "응, 그랬었지." 문간은 자신의 구부정한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좋은 곳을 두고 이 초원에는 또 왜 오셨습니까? 빌개 칸
이나 퀼테긴이 알면 칸을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안그래도 어제 저녁 퀼테긴의 군대에게 쫓겨
혼이 났다네. 저 사람, 천소부는 정강이에 칼을 맞았어. 그 놈들, 지금도 우릴 찾고 있을거야."
"저, 저런, 그랬군요! 그랬겠지요! 여긴 위험합니다. 저희 일행이랑 같이 당나라로 가십시다."
"허허, 그럴까?" 문간은 손바닥으로 시린 어깨를 치며 허허롭게 웃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한다
는 투였다. 백발이 흐트러진 그 얼굴에는 너무 일찍 여생에 편승해버린 자의 달관이 서려 있었다.
거란 원정 직후 모든 관직을 박탈당했을 때 고문간은 40대 중반의 한창 나이였다. 그 뒤 몰락과
망각, 당의로의 투항으로 이어진 30년은 어쩌면 그에게 여생, 떠돌며 남아돌며 썩어가는 생이었는
지도 모른다. 고문간은 위친치가 따라준 술잔을 들고 파란만장했던 지난 30년을 떠올렸다. 오논강
유역으로 추방되었지만 문간은 아직도 자신이 카파간 칸에게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무리 관직이 없어도 문간은 10만이 넘는 고을링 씨족, 고구려 사람들의 수장이었고 카파간 칸의
사위였다.
고공의가 그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멀렁멀렁하고 씀씀이가 헤픈 고문간을 더 좋아했
다. 돌궐사람들은 카파간 칸의 후계를 둘러싸고 세 파벌로 갈라져 시끄러웠다. 일태리쉬 칸의 아
들이요 우친왕인 벡치렌을 태자로 옹립해야 한다는 파, 카파간 칸과 위구르인 다차왕비 사이에서
난 보쿠를 옹립해야 한다는 파, 카파간 칸과 죽은 이티바르 카툰 사이에서 난 모테긴을 옹립해야
한다는 파들이었다. 카파간 칸은 노골적으로 보쿠를 편애하고 있었고 고문간은 말할 것도 없이
모테긴을 지지했다. 문간은 자신을 닮아 심약한 모테긴이 하칸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세 파벌의 감정이 점점 험악해지자 장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라도 모테긴이 태자
가 되어야 한다고 공언하지 않을수 없었다. 말을 하고 또 말을 하다보니 확신이 되었고 확신이
되다 보니 모테긴에 대한 애끓는 부정에 이성을 잃어갔다. 마리치치카 역시 친동생인 모테긴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가장 상처를 받은 것은 문간과 싸른토야 사이에 태어난 그의 맏아
들 원유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자기보다 <호라>라고 불리던 모테긴만 편애한다고 느끼고
있던 원유였다. 아버지가 의붓어머니와 함께 밤낮 모테긴 걱정에 미쳐돌아가자 원유는 점점더 삐
뚤어져 갔다. 17살이 되던 해 원유는 사람을 죽이는 큰 죄를 짓고 부모곁을 떠났다. 그 뒤 지금까
지 문간은 원유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대흥안령산맥 너머 어딘가를 떠돌아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번 사람을 보냈지만 찾지 못했다. 그 일은 문간의 가슴에 박힌 못이 되어 죽는 날까지
고통을 안겨 주었다. 모테긴을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카파간 칸의 폭정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은 벡치렌을 지지하는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죽은
일태리쉬 칸의 은덕과 벡치렌과 퀼테긴의 어머니 일빌개 카툰의 정치력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보
쿠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돌궐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위구르인을 싫어하는데다
다차 왕비는 신경질이 많고 앙칼진 여자였다. 이런 위구르 여인의 피를 받은 보쿠는 선천적으로
약점을 안고 있었다. 보쿠의 앞길을 닦아주려는 카파간 칸의 노력은 자꾸 꼬여갔다. 서력 712년
카파간 칸은 보쿠를 예종황제의 손녀 금상공주와 혼인시키려 했으나 어이없는 돌발사고로 좌절되
고 말았다. 705년 측천무후가 죽은 뒤 영도자를 잃고 문약과 퇴폐에 허덕이던 당은 감히 카파간
칸의 청혼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듯 억지결혼을 강요당한다는 불만이 당사자로부터 터
져나오고야 말았다. 예종황제는 장가들기위해 장안에 온 보쿠를 안복문 누상으로 안내하여 큰 환
영연을 열고 금상공주를 소개했다. 이 때 금상공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슬프고 처
량한 모습으로 장래의 신랑앞에서 계속 눈물만 흘렸다. 엄마의 성마른 성격을 빼닮은 보쿠는 당
장 술상을 엎어버리고 질타했다. "그렇게도 우리나라에 시집오는 것이 싫다면 우리도 이따위 며
느리는 필요없소. 이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귀국의 경멸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소." 보쿠는 찬바
람소리가 나게 돌궐로 돌아갔다. 모든 일이 안좋게 돌아갔다. 격분한 카파간 칸은 돌궐에 복속하
고 있던 타타비군을 보내 유주를 짓밟았다. 타타비족은 유주 일대를 휩쓸고 2만 8천명의 포로를
잡아 돌아왔고 카파간 칸은 이 포로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성을 잃은 카파간 칸. 카파간 칸
은 자꾸 악수를 두었다. 사라센 제국에 싸움을 건 것이다. 친히 군대를 이끌고 도주하는 튀르기쉬
를 쫓아 소그디아에 침공했던 카파간 칸은 사라센의 동방총독 이븐 무슬림의 반격을 받아 철저히
격파되었다. 무기도 장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쳐야 했을 만큼 참담한 패전이었다. 이를 계기로 카
파간 칸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예하 부족들이 이반하기 시작했다. 카파간 칸은 가장 숫자가
많은 고울링 씨족부터 다독거려야 할 필요를 느꼈다.
고문간은 오논강 유역에서 갑자기 가한정으로 소환되어 하서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
리곤 숨돌릴 겨를도 없이 당과의 전투가 치열해지는 중가리아 분지로 보내졌다. 이렇게 어려워진
돌궐과는 반대로 이무렵 당나라는 상하를 일으키고 국가를 중흥할 영맹한 새 군주를 맞이하고 있
었다. 바로 당 현종 이융기였다. 측천무후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중종이 죽고, 중종을 독살한 황후
위씨가 열세살짜리 막내아들을 앞세워 군림하던 격변기. 이융기는 큰 뜻을 감추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712년 8월, 이융기는 남몰래 양성한 군대를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가 위황후를 척살하
고 아버지인 상왕을 예종황제로 추대했다. 그리고 곧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현종황제로 즉위했다.
자신과 대립하던 태평공주일파들을 제거하자 현종은 사치와 퇴폐로 흐르던 조종과 군대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개원의 치>가 시작된 것이다. 새롭게 흥기하는 제국과 폭정으로 어지러워진
제국. 하서지역에서 벌어진 두 나라의 격돌은 이미 그 승부를 예견할 수 있었다. 714년 2월 북정
도호 곽건관의 대군당과 맞붙은 고문간은 첫 전투에서 휘하에 거느린 통아테긴을 전사시켜버렸
다. 통아테긴은 카파간 칸과 다차 왕비 사이에 태어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막내아들이었
다.
군령을 무시하고 돌격하다가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고혼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 번째 전투
에서 고문간의 군대는 대패하여 수천만의 전사자들을 내고 패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곽건관의
맹렬한 추격을 뿌리치며 중가리아의 사막을 지나 울룽구르호까지 달아난 고문간의 군단은 마침내
식량도 떨어지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전. 돌아가면 카파간 칸에게 처형당할 것이 뻔했
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죽으면 모테긴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지세력을 잃은 모테긴은 살벌한
계승분쟁의 와중에서 죽게 될 것이다. 재수없게 나의 휘하에서 싸우게된 친구들은 어떻게 될 것
인가? 총사령관 고문간 밑에는 3개의 군단이 있었고 욱사시부와 고공의가 각각 하나씩의 군단을
맡고 있었다. 나머지 한 군단장은 모용도노였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고문간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당으로 들어가 보쿠파와 벡치렌파를 견지하는 것이 모테긴을 살리는 길이 아닌
가? 그리고는 피로와 상심과 굶주림으로 기진맥진한 부하들을 이끌고 온 길을 되짚어가 당에 항
복하고 말았다. 이때 고문간이 거느렸던 돌궐군은 욱사시부의 돌궐군단, 모용도노의 토욕혼군단,
그리고 고공의의 고구려 군단등 1만여호, 5만여명의 대군이었다. 부대는 즉시 무장해제되고 고문
간을 비롯한 간부들은 장안으로 안내되어 당의 관복을 입고 입궐했다. 귀복의 예를 올리기 위해
꿇어 엎드렸을 때 문간은 문득 눈물이 나왔다. 황제의 옥좌에는 20년전 그가 마리와 결혼하던 날
가한정의 시장에서 양고기를 사먹던 그 소년이 당당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2
저물녁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누르칙칙하게 빛이 바랜 사시나무에 부딪쳤다. 떨어진 잎사귀들
을 붉게 물든 지평선을 날아 길게 꼬리를 끌며 사라져갔다. 문간은 새삼 자신이 죽은 아버지보다
두배도 더 살았다는 것을 생각한다. 문간은 톤유쿠크 사당의 뜨락을 거닐었다. 젊은 시절 문간은
아버지를 어리석은 오입쟁이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많은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
며 인생을 배운 뒤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어리석은 것은 무엇이고 만년의 만년에 이르는 지혜란
또 무엇인가. 세상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갓난아기인 나를 평주의 군적에 올려 분
대장으로 만들었던 아버지. 갓 태어난 자식을 위해 그토록 치밀하게 계산을 했던 아버지가 어째
서 어리석었을까. 언젠가 오이사제는 이런 말을 했다. "선인은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지요. 너무
오래 살아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허물들을 뼛속 깊이 느끼고 겪고나서 어떤 경지를 깨달
은 것이지요. 어리석음은 그 시간을 늦추고 있는 깨달음입니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나는 과
연 어떤 경지를 깨달았는가? 문간은 문득 입맛이 씨거워지면서 어린 이융기에게 바보처럼 모멸당
하던 노년의 한때를 추억했다. 당에 투항했을 때 옥좌에 앉아 고문간을 굽어보던 청년 황제 이융
기. 그에겐 먼 훗날 양귀비에 빠져 사치와 방탕으로 국고를 탕진하고 나라를 내우외환으로 몰고
가게 될 늙은 오입쟁이의 모습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겐 오로지 신정의 의기에
불타는 청년 군주의 팽팽한 긴장과 빈틈 없는 책략만이 빛나고 있었다. 고문간은 그 자리의 대화
를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고려가한 고문간! 그대에게 좌위대장군 겸 요서군왕을
제수하고 식읍 3천호를 내린다. 고공의에게는 좌령위장군 숭주자사 겸 평성군공을 제수한다." "성
은이 망극하나이다." "물론 이것은 임지에 부임하지 않는 가봉이다. 그대들은 그대로 하서에 머물
면서 관품에 따라 저택과 월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대를 따라 내항한 모든 부하들에게 비단 다
섯 필과 장포 한 령을 하사하겠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래....망극한가?" 예? 황제의 비꼬
움에 꿇어 엎드린 고문간은 몸을 떨었다. 거기에는 노여움을 자제하는 장중한 위협이 스며 있었
다. "망극할 것이다. 망극해야 하고말고. 그대들은 약해지면 비굴하게 숙이고 들어왔다가 강해지
면 다시 노략질을 하러 오는 야비한 오랑캐들이야. 그 동안 그대들이 지은 죄는 이루 헤아릴 수
도 없어. 짐이 곤궁한 우리 백성들의 피땀어린 세금으로 그대들과 같은 적악의 오랑캐를 왜 이렇
게 우대한다고 생각하나?" 고문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서북방을 침입하는 오랑캐들은 말타
기에 능해 바람처럼 달려오고 번개처럼 흩어지며 귀신처럼 기사를 하니 맞붙어 싸워도 이기기 어
렵다. 그대들과 같은 항호들을 우대하는 것은 다 이런 오랑캐들을 막기 위함이야." 현종과의 알현
이 끝난 고문간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태극전을 걸어
나왔다. 황혼녘의 황궁은 비를 머금은 듯 눅눅하고 잿빛이었다. 신무문으로 향하는 황궁의 큰 길
은 더 어둡고 무서운, 더 알 수 없는 우여곡절의 세계로 뻗어 있었다. 고문간은 한숨을 쉬고는 치
수가 맞지 않는 복두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고공의의 핏기 없고 누런 얼굴을 쳐다 보았다.
문간의 입술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배신감과 열패감 때문이었다. 의리 없는 놈...
모든 인간적인 감정의 허망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20년 전 아홉 살의 소년으로 돌궐에서 만났
던 이융기. 그때 그는 태평공주 일파의 음해를 피해 북방을 떠돌아다니던 외로운 처지였다. 그때
그는 실력자도, 황위계승자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상왕 이단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문간과 모레수는 소년의 당찬 모습에 호감을 느껴 진심으로 환대했던 것이다. 가한정을 떠
날 때 손을 흔들며 소리치던 소년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슴아슴했다. "고대인, 기회가 닿으면
꼭 장안으로 놀러와. 금성방의 상왕부로 찾아와. 제가 잘해드릴게. 꼭 와, 응?" 그로부터 세월이
흘렀고 이날의 싸늘한 대면이 있었다. 약해지면 숙이고 들어왔다가 강해지면 다시 노략질하는 야
비한 오랑캐라고? 우리가? 높디높은 옥좌에 앉은 황제와 그 밑에 꿇어 엎드려 용서를 애걸하는
오라캐. 마치 20년 동안의 모든 일들이 스스로 이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느껴졌다. 인생이란
희극의 모든 순간에 깃들여 있는 교활함과 불결함이 고문간과 고공의의 마음을 짓눌러 왔다. 그
들은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 신무문 밖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당에 투항한지 여섯 달 만에
문간의 오랜 친구 욱사시부가 죽었다. 일흔넷의 고령이었던 욱사시부는 이미 하서 지역에서 대패
한 직후부터 노환으로 앓아누워 당에 투항할 때도 나무판자로 얽은 들 것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귀복의 에식을 위해 장안으로 갔던 문간은 아슬아슬하게 친구의 임종에 대어올 수 있었다. "내
평생은 대체 뭐였지... 내가 정말 신풍호한 욱사시부인가? 젊은 날 신풍의 의리남아, 그게 나인가
..." 고열에 신음하던욱사시부는 문간이 손을 잡자 신기하리만치 눈빛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말
소리가 너무 조용해서 바로 뒤에 그가 지른 고통의 신음소리는 한층 괴기스럽게 들렸다. 문간은
그의 손을 흔들며 말해주었다. "그렇구말구. 형님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이지. 의리를 지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소. 일찍이 강호에 형님 같은 사람은 없었소. 중원에서나 삭북에서나
일흔네 해를 바위처럼 굳세게 사셨소." "아니야..." 욱사시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바위
틈에 물이 스며... 그 물이 얼면 바위는 부서진다네. 나의 의리는 충실하지 못했어. 나는 자네를
배신하고 있었네. 용서해주게나..." "그게 무슨 소리요. 나를 위해 이 몸으로 당나라까지 따라온 형
님이 배신이라니." "나는 벌써부터 아란두님을 죽게 만든 사람을 알고 있었다네..." 문간은 독사에
물린 사람처럼 온몸이 뻣뻣해졌다. 한동안 심장의 핏소리만이 귓전을 울렸다. 문간이 와락 욱사시
부의 어깨를 잡고 그게 누구냐고 묻자 욱사시부는 생전 처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눈물을 흘렸
다. 아란두와 오이사제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카파간 칸에게 간통을 하는 것처럼 고해바
쳐 그의 눈먼 질투심에 불을 지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일빌개 카툰이었네," 문간은
온 세상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충격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아란두님이 죽으면 형사취수(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과부가 된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유목사회의 관습)의 관례에 따라 자신이 다
시 카툰이 되리라 믿은 거지. 자신이 카툰이 되어야 아들 벡치렌이 다음대의 칸이 될 수 있을 테
니까... 몇 해 전 나는 이 무서운 비밀을 캐내고야 말았네. 그러나 너무 엄청난 일이라 감히 누구
에게도 진실을 밝히지 못했지. 미안하네... 나는 아란두님에게도, 자네에게도, 카파간 칸에게도 의
리를 지키지 못했네. 나는 죄 많은 겁쟁이일세..." 욱사시부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친 듯 문간의 옷
을 움켜쥐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눈을 부릅뜬 채 외마디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이 욱사시
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욱사시부의 장레를 치른 뒤 문간은 가끔 아내 마리치치카와 함께 하서
의 들판으로 말을 달려가 떠나온 돌궐의 대초원을 바라보았다. 당년 예순다섯 살. 이 무렵부터 문
간은 안질을 앓아 시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대초원은 비옥한 초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막지대
다. 멀리서 바라보면 푸른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풀뿌리 주변은 온
통 모래뿐이고 늘 강한 바람에 모래가 풀잎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초원이 아름다
운 이유는 척박한 모래땅에 수십 길의 깊고 가는 뿌리를 박고 강하게 홀로 피어 어떤 바람과 가
뭄에도 말라죽지 않는 풀꽃들 때문인 것이다. 그 푸른 생명의 의지가 사라지는 날 초원은 다시
누우런 모래밭으로 변한다. 초원의 향기는 사라지는 것이다. 초원엔 때를 가리지 않고 바람이 분
다. 문간의 눈은 음모와 탐욕의 강한 바람이 죽음의 모래를 하늘로 끌어 올리는 것을 본다. 모래
바람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해를 덮고 마침내는 모든 생명 받은 것들을 덮을 것이다. 웬푸와 일
태리쉬 칸과 아란두와 오이... 헤아릴수 없이 많은 고결한 사람들이 이루었던 그 나라는 이렇게
사리지고 있는 것이다. 문간은 자신의 내부에 깊이 뿌리내린 소름 끼치는 공포를 느꼈다. 인간의
의지와 진실이 이룬 모든 것의 허망함. 문간은 자신의 인생이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좌초해
버렸음을 알았다. 후세의 이야기군이 쓰면 열두 권은 족히 될 자신의 인생 역정은 화가 날 정도
로 허무하기만 했다. 문간은 눈을 돌려 온화함과 두려움이 뒤얽힌 표정으로 자신의 젊은 아내를
쳐다보았다. "안질은 곧 나을 거예요. 나이가 많다느니 죽음이 어떻다느니 하는 소리 하지 마세
요. 당신은 아직 늠름해요." 아직 서른세 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랑스런 아내는 그의 목에 두팔을
감고 수도 없이 이마에 입을 맞춘다. 고문간이 살아온 중에 가졌던 유일한 호사. 운명이 빼앗아가
지 않았던 유일한 것. 그녀가 문간을 살아가게 해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더할수 없이 깨끗한 사랑
을 주고 아들 원보를 낳아 주었다. 아란두를 닮은 이 거칠고 아름답고 달콤한 바다에 기대어 문
간은 간신히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욱사시부가 죽고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세상은 또 시끄러
워졌다. 돌궐과의 국경으로 나갔던 막근이가 문간이 사는 군왕부로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왔다.
"아뢰오! 지난달에 통라강에 사는 파야르쿠 부족이 모반!" "그래서?" "이 달 초엿새 카파간 칸 별
세..." "뭐,뭣이!" 파야르쿠 부족은 가한정 인근에 사는 불과 수천명의 작은 부족이었다. 그런 부족
이 대초원을 호령하는 유목제국의 천자를 시해한 것이다. 그 배후에 움직이고 있는 작고 섬세한
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란두의 죽음에서 시작된 초원의 모래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문
간은 하루종일 향을 피웠다. 아란두가 죽은 뒤의 카파간 칸을 잊고 그 옛날 착하고 아름다웠던
우친왕시절의 청년 쿠이만을 생각했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아픔만 안겨 주었던 쿠이. 칸의
옥좌에서 영혼을 편히 쉬기에는 너무나 섬세했던 쿠이. 나중에는 광기에 몸을 맡겨 모두가 싫어
하는 폭군이 되었던 쿠이... 모래바람은 계속되었다. 새로운 대가한을 선출하기 위해 토이가 열리
고 유목 수령들이 모였을 때 일빌개 카툰은 발톱을 드러내었다. <퀼테긴의 정변>이 일어난 것이
다. 일빌개 카툰은 둘째아들 퀼테긴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한밤중에 가한정을 습격했다. 최초의
신호와 더불어 퀼테긴의 부하들은 가한정의 한복판으로 쏜살같이 달려들어가 잠기운을 떨치지도
못한 카파간 칸의 아들 보쿠를 단칼에 죽여버렸다. 그리고 가한정의 목책을 나가는 모든 문들이
봉쇄된 가운데 카파간 칸 일가들과 반 벡치렌파로 지목된 제국 최고의 대관들이 무자비하게 살
해되었다. 그 숫자는 무려 400여 명에 달했다. 이날 밤의 학살극에서 일빌개 카툰이 죽이지 못한
것은 모테긴 뿐이었다. 이것은 카파간 칸이 죽은 직후 문간이 은밀히 돌궐로 사람을 보내 모테긴
에게 즉시 가한정을 떠나라고 일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대세와 무관했다.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자 방화와 폭력, 광란의 학살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가운데 살아 있는 대신과 씨족장들이
불려와 토이가 열렸다. "덕망 높으셨던 일태리쉬 칸의 장남이시며 타르뒤쉬 샤드이시고 인자한
장군이신 나의 형님 벡치렌 공을 새로운 하칸으로 추대했으면 합니다. 존경하는 여러 이르킨 제
위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온몸을 피로 뒤집어쓴 퀼테긴이 이렇게 말하자 벌벌 떨고 있던 사람
들은 앞을 다투어 벡치렌을 향해 꿇어 엎드렸다. 일빌개 카툰이 머뭇거리는 맏아들의 어깨를 떠
밀어 북쪽을 향해 꿇어앉혔다. 대제사장이 황금 늑대머리가 달린 왕홀을 공손히 양손에 받쳐들고
<칸을 위한 신탁>을 낭송했다. 이렇게 돌궐제국의 새로운 대가한, 빌개 칸(Bilga Quagan. <현명
한 칸>이라는 뜻.)이 즉위한 것이다. 퀼테긴의 정변이 있은 직후 모테긴은 사막을 정처없이 헤맨
거지꼴로 북정도호부에 귀순해왔다. 요서군왕부를 찾아온 모테긴은 문간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매형, 존귀한 황금씨족이던 우리 일가가 이제는 가장 비천한 유목민의 신세까지도
부러워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카파간 칸의 직계는 모조리 죽었고 시집간 누이 공주들도 남
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여 더러운 노예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도록 강가되었습니다." 문간은 눈물
을 흘리며 피골이 상접한 모테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일평생 아들이라 불러보지 못했던 아들,
모테긴. 이제는 쓰디쓴 비애만으로 남은 아란두와의 사랑이 남긴 단 하나의 결실. 문간은 아직도
차마 말을 못하고 혼자 괴롭게 오열할 뿐이었다. "처남... 내가 그대에게 나라를 찾아줌세." 문간은
중얼거렸다. 그리곤 허공을 바라보는 막연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테긴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그게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정말이구말구. 카파간 칸이 피땀 흘려 일구어놓은 나라에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퀼테긴은 찬적이야. 찬적이구말구. 아무 걱정말고 내 집에
서 조금만 기다리게.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용을 좀 달여 먹어야겠어..." 애끓는 부정이 고문간
은로 하여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게 하고 있었다. 일개 군왕에 불과한 고문간이 어떻게 군사를
일으켜 돌궐의 하칸을 갈아치운단 말인가. 그런데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문간의 말도 안되는 소
리가 현실로 실현될 기회가 곧바로 찾아왔다. 정변의 파문은 구릉과 강을 따라 대초원 구석구석
까지 퍼져가면서 갖가지 움직임들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당의 패기만만한 청년황제 이융기는
대초원을 온통 들끓게 하는 돌궐의 이 계승분쟁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북방의 화근을 뿌리뽑
을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닌가. 이융기는 후군일을 삭방도대총관에, 고문간을 삭방도행군총관에 임
명하여 정예병 20만을 데리고 돌궐 정벌에 나서게 했다. 그러나 일빌개 카툰은 예사 인물이 아니
었다. 맏아들을 새로운 대가한으로 추대하고 둘째아들을 이쉬바라 타르칸으로 만든 일빌개 카툰
은 혼란스런 정국을 단 두 달 만에 안정시켰다. 반대파의 씨족장들은 단숨에 영지가 몰수당하고
황야로 추방되었다. 곧이어 일빌개 카툰은 민심을 수습할 거물을 전면에 내세웠다. 다름아닌 아시
테 톤유쿠크였다. 일빌개 카툰의 친정 오빠뻘이 되는 아시테 씨족의 톤유쿠크가 카파간 칸의 등
장과 더불어 실각했다가 21년 만에 다시 아파 타르칸에 복귀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문간과 톤유
쿠크. 열여섯 살 때부터 반 세기가 넘도록 우정을 나눠온 이 두 동갑내기 친구들은 서로 적이 되
어 군대에서는 거의 전설적인 나이인 예순일곱 살에 각각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일생일대의 전
쟁에 임하게 된 것이다.
3
꿈인지 상념인지 모를 광경들이 모닥불 위를 떠돌았다. 아란두의 죽음, 당으로의 투항, 욱사시부
의 죽음, 카파간 칸의 죽음, 톤유쿠크와의 전쟁, 고공의의 죽음, 그리고 마리치치카와 모테긴의 죽
음... 길고 쓰라린 추억을 더듬던 문간은 뭔가 이상해진 것을 깨달았다. 싹싹 하는 발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바람소리가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50년이 넘게 전쟁터를 겪어온 그의 예감은
남달리 예민하게 반응했다. 문간은 살며시 누워 있던 자리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용히 걸어 불빛이 새나가지 않게 세 장이나 방장을 쳐놓은 사당의 입구로 걸어갔다. 조용
히 방장을 들치자 바깥세상의 차가운 공기와 함께 근 20년 만에 다시 와보는 이곳의 밤하늘이 고
요히 다가왔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풍경은 금방이라도 그릴 듯이 느낄 수 있었다. 항가이산맥에
서 내려와서 먼먼 북녘으로 흘러가는 오르혼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기름진 초원. 대초원의 별
들은 하얗게 반짝이는 찬란한 빛으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무거워 떨어질 듯 나직하게 떠서 춤추고
있으리라. 문간은 보이지 않는 눈을 쪼프리고 밤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다
잠재운 차가운 어둠. 그가 누구이든, 어디로 가든, 앞으로 무엇을 하든 아무런 의미도 묻지 않을
저 무한하고 캄캄한 세계. 마치 그도 빨리 저 끝없고 이름도 없고 말도 없는 세계로 오라고 부르
는 것 같은 조용한 세계였다. 한참을 그렇게 방장을 들치고 서 있던 고문간은 문득 불길한 예감
의 정체를 깨달았다. 불침번들! 아까까지 울타리 밖에서 경계를 서던 돌궐출신의 두 부하들, 쿠두
쿠와 뚜시의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문간은 사당을 빠져나가 초승달이 뜬 캄캄한 밤중의 초원을
향해 두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향기롭던 대지는 갑자기 숨결을 멈추었다. 문간은 가슴에 찌
르르한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별도, 밤의 창공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젠 다만 운명이, 실
현 직전에 있는 가혹하고 돌이킬 수 없는 운명만이 음산한 정적 속에 흐르는 시간과 함께 익어가
고 있을 뿐인 것이다. 문간은 투구의 끈을 단단히 죈 것같아 눌려오는 목덜미를 쓸며 조용히 다
시 자리로 돌아와 누웠다. 아들 원보가 잠기 묻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더
주무시지 않구..." 고문간은 손깍지 베개를 만들어 베며 대답했다. "더 자거라..." 도망친 두 놈...
추격대가 무서워 가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예 밀고하러 간 것일까? 아니, 도망치다가 붙들려 밀
고할 수도 있으리라. 착잡한 고뇌가 고문간을 죄어왔다. 여기서 강을 따라 상류로 반나절만 달리
면 가한정이다. 그 사이에도 몇 곳이나 병사들의 주둔지가 있다. 여기 그냥 이대로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 어서 떠나야 하는데... 그러나 어디로? 초원에 들어서면서부터 문간은 내내 돌궐군의 이
목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716년부터 시작된 돌궐 정벌이 만들어놓은 운명이었다. 그 이후부터 고
문간은 빌개 칸과 퀼테긴에게 자신들을 죽이고 모테긴을 옹립하려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버렸
기 때문이다. 716년 고문간은 전장을 항가이산맥의 좁은 골짜기로 묶어두어 대군의 위력을 발휘
할 수 없게 하려는 톤유쿠크의 계략에 말려들어 한 달 여를 허비했다. 그리고 이 한 달이 승패를
결정했다. 멀리 타쉬켄트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카를룩 부족의 원군이 톤유쿠크를 구하러
달려온 것이다. 카를룩 기병대의 내습에 후미를 짓밟히고 동서로 협공당한 고문간의 부대는 홍수
에 무너지는 방죽처럼 궤멸되어버렸다. 간신히 삼수항성까지 후퇴했을 때 그의 군단은 절반 이상
죽거나 흩어져 있었다. 당나라의 정벌군은 이후 4년 동안 연전연패했다. 특히 당이 바스밀, 타타
비, 거란과 연합, 사각의 포위망으로 돌궐을 공격했던 720년의 전쟁은 고문간에게 재기불능의 좌
절을, 톤유쿠크에겐 불멸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톤유쿠크는 포위망이 가장 약한 고리인 바스밀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고문간의 본거지인 북정도호부를 불바다로 만든 다음 양주 일대를
휩쓸고 고장을 점령했다. 이때 북정도호부를 수비하던 고공의가 전사했다. 마차를 타고 북정도호
부에서 사주로 피난가던 고문간의 일가족은 사주의 경계선에서 돌궐군 한 부대의 습격을 받았다.
마리치치카와 모테긴은 함께 칼을 맞았다. 마리치치카는 관군이 반격하여 돌궐군을 격퇴한 뒤까
지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만을 찾았다. 그리고 [여보!] 하고 비명처럼 외치고는 죽어
갔다고 한다. 바로 그날 문간은 삭방도행군총관에서 파면되었다. 문간으로부터 완벽한 승리를 거
둔 톤유쿠크는 고장의 군진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일흔두 살이었다. 톤유쿠크의 시신은 모든
돌궐인의 애도 속에 운구되어 지금 고문간이 있는 이 오르혼강의 사당 밑바닥에 누워 있었다. 문
간은 오른팔을 베고 모로 누워 사당의 돌바닥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건만 옛
친구가 미워지지 않는 것은 정말 이상했다. 문간은 지금 속으로 중얼거린다. 여보게, 톤유쿠크, 이
곳인가? 내 인생의 종점이? 지금이... 내가 마지막을 노래할 순간인가? 옛날엔 아무리 외롭고 절
말스러웠을 때도 돌에다 대고 말을 걸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짜 고독이 그의 온몸을 후
려치고 있었다. 그것은 초원의 비바람이 아니라 그의 내부에 자리한 어떤 눈벌판으로부터 불어오
는 폭풍우였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운명의 계략을 좌절시키기엔 너무
늙고 지쳐 있었다. 일흔이 넘어 인생에서 얻은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문간은 아란두가 남긴 경
전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는 누군가 믿을 신도를 찾아 지도만을 전하려 했던 경전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당고르는 그를 보고 계셨다. 벼슬도 잃고 집도 불타버려
일흔세 살에 빈털터리가 된 문간이 돌아가 누울 자리조차 찾지 못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밤의 꿈
속에서 당고르는 당신의 빛이신 박다르를 보내셨다. 박다르께서는 아란두를 데리고 계셨다. 아란
두는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말오줌을 마시고 나무 껍질을 벗겨 먹
었습니다. 우리 사제들이 그런 고난 속에서 번역한 경전들입니다. 이 넓은 세상에 문서로 남겨진
유일한 동방교의 경전들입니다. 이 경전들을 지켜주세요. 세상에 전해주세요." 그 말을 하는 아란
두의 얼굴에는 하늘나라의 청초함이 풍겼다. 잠에서 깨어난 문간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
러내렸다. 늙은 그의 육신에 어떻게 이 많은 물이 고여 있었는지. 그러나 눈물이 흐를수록 생각은
더 맑고 분명해졌다. 어리석은 비탄은 필요없다. 내 인생에 가장 귀한 행복이었던 젊은 날의 아란
두. 그녀의 기억은 다 떨어진 삶 한가운데에서 아직도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그녀의 뜻을 간직해
야 한다. 이 무렵 안질은 악화되어 문간은 완전히 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그의
곁에 남은 유일한 친구 천소부가 큰 힘이 되어주었다. 문간은 가지고 있던 무기와 금붙이들을 모
두 팔았다.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돈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낙타와 말, 식량과 장
비와 일꾼들을 사서 경전이 묻혀 있다는 외튀겐산으로 출발한 것은 바로 올해 여름이었다. 문간
의 일행은 대상으로 가장하여 몰래 외튀갠산으로 접근했다. 항가이산맥의 주봉이며 돌궐제국이 3
년에 한 번씩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보그트 오라>. 그 풍광장대한 외튀갠산으로 들어간 문간
일행은 지도를 들고도 열흘 동안이나 산을 헤메었다. 이윽고 그들은 서쪽 산기슭의 절벽에 뚫여
있는 동굴들 가운데 하나로 들어갔다. 입구는 폭이 두 척에 높이가 일곱 척. 지도에 나타에 나타
난 그 동굴 같았다. 캄캄하여 빛 하나 새어들지 않는 동굴이었다. 횃불을 들고 동굴벽을 두드리며
전진하던 문간은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긴 나무막대기 여러 개를 걸쳐 세우고
그 사이 사이에 돌을 끼운 뒤 진흙을 칠해서 막은 곳이 소리로 드러났다. 벽을 허물자 빼곡이 들
어찬 배꼽 높이 정도의 항아리들이 있었다. 항아리에 한 아름씩의 다발로 뭉쳐져 천에 쌓인 255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을때의 감격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다. 두루마리를 쥐자 아란
두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았고, 멀리 흘러간 젊은 날이 한꺼번에 돌아오는 것 같았다. 경전들
은 준비해간 궤짝으로 옮기기 전에 문간은 긴 기도를 드렸다. '엎드려 비옵건대 해모수님과 아란
두님, 영생불사하시는 해와 달의 어버이와 동방의 신령님들은 도와주소서. 열아홉 살에 만난 어여
뻤던 아란두님, 살아생전 당신이 만드신 이 경전들은 먼 동쪽 동모산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의
새나라로 옮기려 합니다. 그곳에서 이 경전들을 길이길이 지켜지고 거듭거듭 다시 피어나 이 세
상 모든 근심과 병고를 구하리니 부디 이 늙은이의 좋고 착한 뜻을 허락하소서.' 상념에 빠져 있
던 문간은 날이 새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출발을 재촉했다. 두 보초병의 도망이 마음에 걸렸다.
모처럼 곤한 잠에 곯아떨어졌던 일행들은 힘들게 일어났다. 그런데 모피를 개어 챙긴다, 말과 나
무상자를 확인한다 바쁘게 오락가락하는 사람들 틈에서 서너 명의 일꾼들이 근심스런 얼굴로 모
닥불 옆자리에 오종종히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고문간을 불렀다. "어르신, 큰
일났습니다. 천대인의 몸이 불덩이 같습니다." "뭐라고?" 천소부는 그저께 있었던 돌궐 경비대와
의 싸움에서 정강이에 칼을 맞았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일흔이 가까운 노구인지라 무리한 행
군에 덧난 것이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헝겊을 동여매고 쩔뚝거리며 잘 다녔는데 밤사이 신열
이 끓어오른 모양이었다. "여보게, 소부, 이게 원일인가! 정신차리게. 정신차려!" 고문간은 천소부
를 일으켜세워 자신의 외투로 그를 싸매며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천소부는 힘없이 눈을 뜨더니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까무러치는 것이 아닌가. 온 얼굴에 식은땀이 맺히고 허옇게 말라버린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며 떨고 있었다. 곤핍하던 젊은 시절에 군대의 상관과 부하로 만나 40여 년.
반평생이 넘게 친형제보다 더 깊이 정들었던 천소부가 이렇게 다 죽어가자 고문간은 놀람과 비탄
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던 위친치 일행이 고문간에게 다가왔다. "어르
신, 이분께서 근처에 잘 아는 신도의 천막이 있다는데요. 아무래도 이곳은 놈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니 일단 천나으리를 그리로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잘 아는 신도? 아까 저 경대승은
대진국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나?" 문간은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위친치 대신 파란 눈
에 노란 머리를 한 수도사가 대답했다. 뜻밖에 유창한 돌궐말이었다. "빈도는 돌궐에 몇 년 살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보기가 따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수도사는 순박한 시
골아저씨처럼 생겼다. 고문간이 먼저 돌궐말로 통성명을 하자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빈도는 프로코피우스라고, 부하라 교회의 수도승입니다. 6년전 비잔틴에서 당의 황제께 테리아카
환약(담즙, 몰약, 아편을 섞어 만든 8세기 동로마의 해독제)을 보내는 사신을 따라 동방에 왔습니
다. 그런데 저도 그만 도중에 병이나서 여기 돌궐에 머물고 말았답니다. 재작년 완쾌하여 돌아갔
으나 교회로부터 새로운 소명을 받고 다시 장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문간이 수도사와 얘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천소에게 환약을 개어 먹인다, 팔다리를 주무른다 수선을 피웠다. 그러나
한참 지나도 아무 효과가 없었고 의식을 잃은 천소부의 몸은 점점 더 숯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
랐다. 문간이 이윽고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노사께서 아시는 집이 어딥니까?" "여기서 동쪽으로
부르칸산을 향해 가다 보면 타르쿠시강이라고 오르혼강의 작은 기류가 나옵니다. 그 강가 느릅나
무 숲이 우거진 언덕에 10여 호가 모여 사는 작은 유목부락이 있는데 바로 그곳입니다." 문간은
천소부를 외투에 싼 채 말에 태웠다. 그의 두 팔로 말목을 두르게 하고 떨어지지 않도록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일행은 서둘러 짐을 챙겨 말에 올랐다. 한 사람의 청년이 천소부가 매달린 말고삐
를 잡자 일행은 빠르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대초원의 9월은 월동준비로 바쁜 계절이다. 가축을
살찌우고 체력을 키워주기 위해 좋은 물을 따라서 이동하는 오톨, 가축 막사의 수리, 월동식량을
위한 가축의 도살, 유사시에 쓸 풀 비축, 각종 유제품의 제조 등 조금도 한눈 팔 사이 없이 바삐
돌아간다. 문간이 발해로의 여행을 이즈음에 맞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쩌다 왕년의 뵈클리 칸
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도 제 앞가림에 바빠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런데 이제 남의 집을 찾아가 병자를 의탁해야 할 처지가 되고 보니 사정은 전혀 다르게 다가왔
다. 받아주지 않겠다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곱씹고 있을 때 드디어 타르쿠시 강가의 검푸른
느릅나무 숲이 나타났다. 더 가까이 가자 숲을 등진 유목민들의 천막이 그림처럼 오종종히 모여
있었다. 위친치가 앞서 달려가 프로코피우스 수도사의 부탁을 전했다. 다행스럽게도 얼마든지 쉬
었다 가라는 시원시원한 회답이 되돌아왔다. 고문간 일행이 말을 몰아 다가가니 머리가 하얗게
세고 키가 작은 노인 하나가 나와 손을 흔들었다. 삭도로 밀었다가 다시 자란 듯 머리카락은 밤
송이처럼 짧았다. 프로코피우스 수도사는 팔을 벌리고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요리형제,
이게 얼마 만인가?" "어서 들어오세요. 여편네도 좋아할 겁니다요." "바쁜텐데 친절하게 환대해주
니 고맙기가 한량없네그려." 노인은 고문간 일행 쪽으로 눈을 돌리자 문간의 아들 원보가 앞으로
나가 중국식으로 포권하며 절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들은 가한정으로 비단을 팔러온 중국
상인들입니다. 영주로 돌아가는 길에 도적떼를 만나 저희 행수 한 분이 다리에 칼을 맞으셨습니
다. 행수님의 용태가 워낙 위독해서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중국을 떠나기 전부터
일꾼들과 미리 입을 맞춰둔 거짓말이었다. 원보는 다시 포권을 하고 일행에게 눈짓을 했다. 뒤에
있던 한 사람이 말안장의 보자기에서 검은 담비 모피 두 장을 꺼내와서 노인의 발치에 놓았다.
"도적떼에게 재물을 많이 빼앗겨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약소하나마 이것을 예물로 바치오니
거두어주십시오." 노인의 입이 히벌쭉 벌어졌다. "아이구, 뭘 이런 것까지..." 노인의 주름진 얼굴
은 눈웃음치며 쪼그리고 앉아 모피를 살폈다. 문간이 퍼뜩 의심이 든 것은 이때였다. 노인의 말씨
며 응대가 보통 돌궐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궐인들은 <집 앞에 늘 손님의 말이 매어져 있
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다>고 하며 손님 환대를 강조한다. 자기 자신이 언제 어느 때 잃어버린 말
을 찾아서 수십,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하는 입장에 처할지 모르는 유목생활이 이런 인간미
넘치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 노인은 제대로 된 돌궐사람이라면 손님이 내미는 예물을 이렇게 선
뜻 받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밤송이 머리의 노인은 노인대로 또 긴장하고 있었다. 모피에서 백
반냄새가 난다... 모피를 살피는 노인의 눈은 반짝였다. 동물의 몸에서 벗겨낸, 자연 그대로의 모
피는 털이 빠지기 때문에 약을 먹인다. 돌궐에서는 이런 약침 작업에 백반을 쓰지 않고 동물성
기름을 쓴다. 백반을 써서 모피 이기기를 하는 것은 중국인들이다. 이건 가한정에서 가져온 모피
가 아니다... 강한 의구심을 갖고 손님 일행을 둘러보던 노인의 눈은 천소부의 말옆에 서 있는 우
두머리인 듯한 늙은이에게 가서 멈추었다. 노인은 숨이 컥, 막히는 것을 느꼈다. 노인은 얼른 고
개를 숙여 부릅떠진 눈을 감추었다. 그러자 30년 가까운 세월을 격한 원한의 기억이 마른 벌판의
들불처럼 격하게 일어섰다. 노인은 콧구멍으로 확확 불덩이 같은 화기를 내뿜으며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이리...이리로 오시지요." 앞장서서 자신의 천막으로 걸어가며 노인은 문간 일행을 불렀
다. 그러나 그것은 기어들어갈 듯 작아서 문간조차도 그 목소리의 떨림을 감지하지 못했다. 노인
이 소리치자 부락 사람들이 달려와 마을의 제일 큰 천막을 치우고 천소부를 눕혔다. 유목민들은
모두가 수의사인만큼 수천년간 전승된 민간의 외과학이 있다. 사람들은 부리나케 화로를 부채질
한다 싶더니 금방 마유주를 증발시켜 치료용 알코올을 뽑아내었다. 그것으로 상처를 닦아낸 뒤 <
타라구>라고 부르는 발효우유에 <카지루>라고 부르는 해독제를 듬뿍 뿌려 헝겊으로 싸매었다.
그리고 계소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열이 나는 얼굴에 <사리드미(냉찜질)>를 했다. 다 죽어가던
천소부의 얼굴에 차차 회색이 돌아왔다. 천소부가 좀 호전되자 문간들은 다른 천막으로 물러나왔
다. 그리곤 향기로운 중국차에 우유를 섞은 스티차이을 마시며 그들 일행을 위해 양을 잡는 것을
지켜보았다. 뒷다리가 묶인 살찐 양이 끓는 가마솥 곁으로 끌려나왔다. 아까의 노인이 작은 칼로
횡경막 아래를 10센티 정도 자르고 재빨리 두 손가락을 집어넣어 심장 근처의 대동맥을 손톱으로
끊었다. 양은 1분도 안되어서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어갔다. 요리는 싹싹한 목소리로 말했
다. "이렇게 죽이면 체내의 피는 복공으로 역류하고 고기에서 피가 빠져 고기맛이 아주 좋지요.
모인 피는 소금과 밀가루를 섞어 따로 순대를 만들구요." 잠시 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양고기가
술과 함께 문간의 일행에게 내어져왔다. 노인이 성의를 다해 천소부를 간호하고 음식을 만들어오
는 것을 본 문간은 이때쯤 경계심을 풀었다. 손수 고기를 썰어 먹으며 잔을 들어 소리쳤다. "자,
어서들 먹지, 그동안 매일 소금에 절인 고기만 먹느라 고생했어. 하 하 하." 행복한 얼굴로 고기
를 뜯는 사람들은 그들의 등뒤에 선 노인의 입가에 교활한 웃음이 번져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4
다시 밤이 되었다. 하루종일 먼길을 달려온 고문간 일행은 술과 식사 뒤의 포만감에 취해 이리저
리 쓰러져 코를 골았다. 밤송이 노인과 부락사람들도 잠들었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배
반이 낭자한 술상에는 고문간만이 혼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시커먼 느릅나무 숲에서
싸아아 하는 바람소리가 일어났다. 펄럭이는 장막 사이로 드러나는 초원은 온통 텅 비어 달빛만
깊어가고 있었다. "노인, 왜 자지 않으시오? 환자도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오." 문간이 혼자 앉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쉴 때 문득 장막 밖에서 프로코피우스 수도사가 말했다. 문간은 밤공기를
쏘이고 싶어 밖으로 나갔다. 귀를 기울여보니 사위는 고요했다. 하늘엔 별이 총총할 것이다. 문간
은 수도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도사는 신의 천지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
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문간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다가 중얼거렸다. "그래요, 신들은 하늘에 계
시고 우리 인간들은 땅위에 있지요. 사람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여름 한철 나무 그늘의 꿈과 같
군요." "마음이 괴로우시면 야훼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시지요. 야훼께서는 모든 절망을 사라지게
하시지요." 수도사의 말에 문간은 씁씁히 웃었다. "나는 빛으로 나타나신 신을 두 번이나 보았습
니다. 나의 신 박다르께선 나를 줄곧 지켜주시고 괴로울 때마다 힘이 되어주셨지요. 그러나 성스
러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나는 전혀 신들을 닮지 않았습니
다. 나는 가을날의 가랑잎처럼 먼지에 휩쓸려 있습니다." 프로코피우스는 이제는 친근해진 문간에
게서 남모르게 간직하고 있는 애수를 느꼈다. 문간은 묵묵히 장막 틈 사이 달빛에 물든 초원을
보고 있었다. 지나온 날들이 꿈만 같이 느껴지는 아련한 비애위에, 그 운명의 시간이, 요동의 어
두운 산 속에서 아란두와 함께했던 시간이, 신들의 가호가 자신에게 내리고 또 떠나가던 젊은날
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술상옆에서 쓰러져 자던 아들이 갑자기 입술을 뒤틀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문간과 수도사는 뜻밖의 일에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문간의 아들 원보는 일그러진 얼굴
로 배를 안고 버둥거리더니 마침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원보야, 정신차려라! 왜 그러느냐?"
"배가, 배가 아파요! 으흑, 윽" 수도사가 천막 밖으로 달려가 찬물을 떠왔다. 그러나 아들의 상태
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반 시각쯤 지났을까. 원보의 발작에 눈을 비비고 일어났던 고문간 일행
들이 하나 둘 똑같은 비명을 지르며 배를 거머쥐었다. 천막은 순식간에 땅바닥에 뒹굴며 발버둥
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문간마저도 뱀이 몸 안을 물어뜯는 것 같은 선명한 통증을 느꼈다. 문
간 역시 털썩 하고 한쪽 무릎을 끓으며 배를 감싸쥐었다. 그제서야 문간은 사태를 깨달았다. 문간
은 고통스러워하는 일행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음식에 독이 들었다! 어서 목안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뱃속에 든 것을 다 토해내야 해." 그러나 문간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희미하게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난다 싶은 순간 밖으로부터 천막을 뚫고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병석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천소부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가슴에 화살을 맞은 것이다. 문간의
옆에 있던 프로코피우스 수도사도 허벅에 화살을 맞고 고통에 찬 심음을 토했다. 원보는 한 손으
로 칼을 다른 한 손으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문간이 만류할
겨를도 없었다. 원보는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져버렸다. 그런 뒤에야 칼과 몽둥이를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천막을 짓밟으며 쳐들어왔다.
그들은 천막에 있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타살했다. 문간은 날카로운 이빨이 창자를 깨무는 것 같
은 격렬한 통중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칼자루를 쥐어보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문간은 전투용 도끼의 두꺼운 날등으로 머리를 얻어 맞고 의식을 잃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문간은 자신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있고 누군가가 자신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것을 알았
다. "워, 원보야. 소부야..." "닥쳐! 네놈만 빼놓고 다 죽였다. 잘린 목이라도 가져다 주라?" 주인이
라고 하던 그 밤송이 노인의 목소리가 소리쳤다. 그리고보니 공기 중에는 짙은 피비린내가 떠돌
고 있었다. 문간의 보이지 않는 눈에서 피눈물이 솟았다. "비열한 놈!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에
게 독을 먹이다니! 비열한 놈!" 문간은 욕설을 퍼부으며 절규했다. 밤송이 머리의 노인은 몸을 홱
돌리더니 들고 있던 도끼 자루로 다짜고짜 문간을 후려쳤다. 노인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고문간, 이 악귀 같은 놈아,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네놈에게 가족도,
친구도 모두 죽고 영주에게 쫒겨냐야 했던 사람들이야!" 노인은 당장이라도 문간의 목을 따버릴
듯 입에 거품을 물었다. "뻔뻔스러운 놈, 네놈을 몰라볼 줄 알았더냐? 30년 동안 복수를 하고 죽
이려고 기다려온 나다. 하늘의 그물이 넓고 넓은데 하필 내 부락에 뛰어들어? 으흐흐흐... 으 하
하 하." 밤송이 머리의 노인, 30년 전 문간의 거란 정벌에 가족과 주군 손만영을 잃고 대초원으로
흘러들어온 거란인 야율요리는 통쾌함을 못 이겨 턱을 젖히고 양천대소를 터뜨렸다. 문간은 머리
로부터 피를 흘리며 찬찬히 자신을 둘러싼 증오의 원진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르
고 얼이 빠진 듯이 보였던 그도 역력히 진상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거란 무상가한의 가치를 세
웠던 이진충과 손만영. 자신의 돌궐군에 의해 봉기가 진멸되고 난 뒤 대초원으로 흘러와 숨어살
았던 거란의 잔당. 그리고 30년 뒤, 그들의 복수... 문간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희죽희죽 웃었다. 그
리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공포를 참으며 이를 악물고 피할 수 없는 그의 운명을 껴안았다. 다음
날 정오. 요리와 그 일당들에 의해 말안장에 실린 문간은 가한정으로 끌려와 돌궐제국의 최고 통
수, 빌개 칸의 어막 앞에 팽개쳐졌다. 문간이 고생스럽게 운반하고 있던 경전이 든 나무상자들도
전리품으로 하칸에게 바쳐졌다. 한때 대초원에 위명이 쟁쟁하던 왕년의 뵈클리 칸이 잡혀왔다는
소식은 곧 가한정에 널리 퍼졌다. 가한정 근교에 나가 있던 중신들이 잇달아 달려왔다. 이윽고 죽
은 톤유쿠크의 아들 아시테 토니스가 도착하자 문간을 논죄할 제국의 최고 법정이 열렸다. 오르
혼강의 양쪽 둑을 따라 무수한 횃불들이 모여들어 움직였다. 문간의 재판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이었다. 개중에는 돌궐에 귀화한 고구려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종일 말몰이 기둥에 밧줄과 쇠사슬
로 묶여 있던 문간은 어둠이 깔리자 어막 안으로 끌려왔다. 어막 앞 광장에는 모닥불이 크게 피
어 있었고 경비병들은 바싹 마른 질 좋은 말똥을 아낌없이 지펴서 먼 구석까지도 훤하게 비쳐주
고 있었다. 드디어 빌개 칸이 나타나 그 풍신 좋은 몸을 옥좌에 파묻었다. 토니스가 문간을 심문
하기 시작했다. 문간은 조용히 침착한 목소리로 발해에 동방교의 경전들을 가져가고 싶어 길을
떠났다고 말했다. 당나라 내지를 뚫고 가기보다 지리도 훤하고 감시망도 느슨할 것 같은 대초원
을 질러가기로 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빌개 칸 곁에 늘어선 장군들은 상을 찌푸리며 아
우성쳤다. 어떤 자는 말채찍으로 자기 신발을 탁탁 치면서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저런 역적놈의
말은 들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문간은 또 전쟁을 일으키려고 내정을 염탐하러 온 것이 틀림없다
는 것이었다. 문간은 씁쓸히 웃으며 상좌에 앉은 빌개 칸과 토니스에게 말했다!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마음대로 하시오." 빌개 칸은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토니스를
쳐다보았다. 말할 수 없는 착잡함이 그 눈동자에 떠올랐다. 일종의 무력감이 이 온화한 칸을 짓누
르고 있었다. 뵈클리 칸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흥겹게 춤추며 놀던 여름밤이 머리에 떠올랐다.
<벡치렌>이라고 불리던 어린 시절에는 문간에게 안겨 무 등을 타기도 했었다... 이런 착잡함은
톤유쿠크의 맏아들인 토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국에는 법이 있었고 문간은 변명의 여지
가 없는 반역자였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잠시 숙연한 기색으로 말이 없었다. "법대로...
처형하라!" 드디어 빌캐 칸은 문간을 외면한 채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 말이 떨어지자 그
때까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왔다갔다하던 요리와 그 부락민들이 달려들어 문간의 머리를
휘어잡고 광장으로 질질 끌어내었다. 그리곤 가한정 남쪽,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한 광장 한가운데
미리 땅에 박아놓은 말뚝 앞에 문간을 눕혔다. 빌개 칸의 근위병들이 걸어와 익숙한 솜씨로 문간
의 상투를 풀어 말뚝에 매고 팔다리를 각각 네 개의 말뚝에 묶었다. 곧 그의 사지를 찢을 네 마
리의 말을 끌고 올 것이다. 반역죄에 대한 형벌은 능지처참이었다. 문간의 사지가 묶이자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들 사이에서 응성웅성하는 동요가 퍼지기 시작했다. 히히덕거리며 웃는 사람이 있
는가 하면 눈을 내리깔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간담이 서늘한 표정으로 두 손을 가슴에 모으는 아
녀자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길길이 날뛰며 악다구니를 떨어대는 자도 있었다. "어서 그 개놈을 찢
어 개들에게 던져줘!" 그 소리와 함께 한 망나니 같은 녀석이 달려들어 문간을 걷어차고 그 얼굴
에 침을 뱉었다. 그러자 더 많은 근위병들이 달려와 몽둥이와 말채찍으로 구경꾼들을 문간으로부
터 떼어내었다. 그 침방울의 차가움이 공포에 떨고 있던 문간을 일깨웠다. 그의 눈앞에는 너무나
짧은 미래가 있었다. 죽음은 장난같이 비현실적인 야단법석 속에 너무나 현실적으로 걸어오고 있
었다. 문간은 그 발자국소리를 외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끝이다. 무엇이
두려우냐. 운명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힐 방법이 남아 있지 않은 거다. 불우한 말년에 문간은 항상
죽음을 그 모든 한탄과 회오를 가져갈, 신들의 은총이 빛나는 순간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막상 이
렇게 사지가 묶여 공포에 떠는 하나의 살덩어리가 되자 세상과 생명에 대한 미련이 산사태처럼
문간을 뒤덮었다. 정말 무서웠고 살고 싶었다. 마치 회오리바람에 시달리는 것처럼 격렬한 공포에
뒤흔들린 그는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살려달라는 애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왔다. 또 한순간 자신
이 정말로 왜소하고, 가치없고, 어쩌면 가증스런 인간이라는 혐오감이 일어났다. 군중들의 환성과
함께 한 무리의 근위병들이 말 네 필을 끌로왔다. 그들 몰래 프로코피우스 수도사가 화살에 맞은
다리를 쩔뚝거리며 문간 곁으로 다가왔다. 수도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정
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원한다면 마지막 참회를 듣고 기도를 올려주겠다고 했다. 문간은 떨리는
입술로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했다. 근위대장관이 다가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문간은 일그러진 얼굴로 하칸에게 마지막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내가 가졌던 경전들은 세상에
다시 없는 보물입니다. 하칸께 부디 소중히, 소중히 다뤄달라고 부탁해주시오." 근위병들이 문간
의 팔다리를 밧줄로 네 말리 말에 단단히 결박했다. 그러자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의 소용돌이로부
터 한사람의 얼굴이 환영처럼 떠올라 눈이 보이지 않는 문간 앞으로 걸어왔다. 아란두였다. 아란
두는 눈부신 빛의 박다르와 함께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가지 끝이 창공을 뚫고 나뭇잎들은 별의
배를 스치고 부리는 아득한 땅 밑 물의 기쁨을 느끼는 영원한 생명의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란두 내 죄를 용서해주시오. 경전을 지키지 못했소. 우리의 신앙은 사라지지 않아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했던 것은 하늘에서 이루어질 거예요. 이제 동방의 신들은 지상을 떠나지만 우리의
신앙은 머지않아 꽃필 우리 자손들의 영광과 사랑을 잉태했어요. 당신을 사랑하오, 아란두. 당신
을 사랑했던 때가 지상에서 내가 가졌던 단 하나의 진실한 시간이었소. 문간, 저도 당신을 사랑해
요. 문간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며 헐떡거렸다. 그는 이제 그 자신의 죽음보다 훨씬 더 가
슴 아픈 한 세계의 멸망을 보고 있었다. 모래바람에 덮여 죽어가는 들꽃. 밤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는 지상의 황금빛. 대초원의 달은 그 거대한 세계의 소멸을 예감하며 떨고 있었다. 달은 아득한
구름 속으로 잠겨들었다. 바람은 대초원 수만리를 불어 요하를 건너가고 이제 문간의 넋도 그 바
람에 부칠 것이다. 구경꾼들의 아우성은 차차 문간의 귓전에서 잦아들었다. 그의 일생을 지배한
소리들이 환청이 되어 문간을 따라오고 있었다. 동방지존 추모현신, 동방지존 추모현신... 주몽왕
을 부르는 인간의 복받침은 어둠 속으로 흩어져갔다.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광야를 헤매던 유목
민들의 혼과 혼이 바람에 밀려가는 시간의 안개가 되어 멀고 어두운 천저를 흘렀다. 이제 사람들
은 추모와 해모수와 아란두를 기억하지 못하리라. 당고르의 모든 성사는 촌늙은이들의 이빨 빠진
입에서 떠돌다 한낱 지어낸 이야기로 멸렬해가리라. 지상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는 신들의 마지막
목격자는 사지를 묶인 채 아득한 날의 해와 달을 떠올렸다. 일월동방 천추만세 일월동방 영생불
사... 태양의 크고 정의로운 권력, 만월의 자애로운 사랑. 동방에 세계의 의미를 밝혀주던 그 신화
의 해와 달이 적의에 찬 시선에 쫓겨 어디론가 황황히 달려가고 있었다. 문간은 북극광과도 같이
파르스름한 일월의 빛을 느끼며 보이지 않는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었다. 문간의 사지를 묶고
있던 말들이 그 움직임에 놀라 발을 굴렀다. 말들이 날뛰면 문간의 사지는 분수같은 피를 뿜으며
찢겨지리라. 그러나 이미 문간에겐 모든 불안이 그쳐 있었다. 시간의 캄캄한 바깥, 영원의 강가로
달려가는 해와 달, 그 강가의 갈대밭에 아란두가 서 있었다. 문간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뜨겁게 달구어진 그의 피가 울울한 날갯소리를 내었다. 아름다운 아란두, 모든 고구려인
을 낳으신 강물의 어머니... 그때 빌개 칸의 어막에서 나온 오르두베기가 이쪽을 향해 턱짓을 했
다. 타앙 하는 징소리와 함께 말고삐를 잡고 있던 경비병들이 일제히 들고 있던 말채찍을 후려갈
겼다. 그러자 벽력과 같은 고통이 살을 찢고 뼈를 부수며 문간의 온몸을 관통했다. 문간은 느꼈
다. 모든 숨구멍에서 피가 터져나오며 잊혀졌던 깃털이 어깨 위로 찾아오는 것을. 다음 순간 문간
은 땅을 박차고 환한 천정을 향해 솟구쳤다. 푸른 울음소리를 토하는 새 한 마리 구름 껴안으며
동방의 해와 달을 따라가고 있었다. (끝)
작가후기
소설을 쓰기위해 한참 몽골의 초원을 다니다가 나는 이 모든 답사가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결론
에 도달했다. 초원에는 어떤 소설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거의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존
재하는 한편의 시뿐이었다. 나무도, 집도, 사람도 없는 초원은 역설적으로 너무 화려했다. 거칠 것
없는 지평선과 더할 나위 없이 밝고 투명한 햇살 아래 모든 사람들은 단지 색채로만 존재하고 있
었다. 겉으로 조용해보이는 초원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언어들, 그 색채들은 너무도 현란해서
소설거리를 얻기는커녕 머리속에 있던 소설조차 날아가버릴 지경이었다. 푸른 초원 위로 흩날리
는 분홍빛 말입술꽃의 애조 띤 색채. 겨울 아침 하늘 가득히 마치 은가루룰 뿌려놓은 듯이 반짝
이며 떠 다니는 우수어린 은빛 안개의 색채. 2킬로미터 밖에서 땅으로 내려앉는 독수리가 소만한
크기로 보여 놀랄 때 그 형채의 암갈색 찬란함. 대평원 위에 지프 한 대만 덩그렇게 서 있을 때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소나기. 그 천둥치는 비바람의 단말마 사이 번뜩이는 번개의 창백한 색채.
아니, 거기엔 실제로 있지도 않은 색채들까지 있었다. 여름날 자주 햇살에 반짝이는 있지도 않은
물의 물빛. 반가운 마음으로 알셀을 밟아 달려가보면 물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모래와
풀뿐이었다. 이리하여 애초에 역사소설을 썼던 나의 초고는 점점 사랑의 이야기로 변해갔다. 주홍
빛 고독이 어리는 시간. 우리의 성황당 돌무더기와 비슷한 오보 옆에 서서 해 저무는 초원을 바
라보면서 나는 인샌을 한 편의 시로 읽는 법에 길들여진 것이다. 세상엔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이
너무 많았고 나는 자주 비통한 무감각 속에 낸가 왜 사는 지 모르겠다고 푸념해왔다. 그러나 세
상은 본래부터 제정신으로 살기에는 너무 어지럽고 비현실적인 것인지 모른다. 제멋대로 생겨나
우리의 눈물로 씻기워지는 혼돈의 자갈밭. 그래서 사람들은 시를 통해서만 간신히 현실을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아름
다운 거짓말. 나는 거기에 매달렸다. 사실주의를 버리고 시에 매달렸다. 결국 [당신을 사랑했던 삶
에서 내가 가졌던 단 하나의 진실한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한 남자에 도달하기 위해 나의 소설은
아주 먼길을 둘러온 셈이다. 나의 주인공 고문간은 왜소하고 소심하고 성급한, 운좋게 걸맞지 않
은 지위를 누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몰락하는 보잘 것 없는 남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남자에게 가장 눈부신 인간적인 영광을 주었다. 사랑에 빠진 만큼 거대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면서 문간은 모든 시대와 고구려와 돌궐의 유목밀들에게 완벽하게 연결된 자신을 느
낀다. 나아가 신까지도 사랑하게된다. 그는 한 여자를 사랑했기에 모든 세계를 사랑할 수 있었다.
가까이 있을 때나 멀리 있을 때나, 삶과 죽음으로 갈려 있을 때도 아란두를 향한 문간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사랑의 세계는 하나이면서 전부인 어떤 것이다. 아란두를 사랑하면서 문간은 자신를
넘어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것과 하나가 된다. 고독하게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넘어 영원
에 가닿았다. 나는 이 이상의 인간적인 영광은 없다고 생각한다. 고문간의 이야기와 씨름한 지난
3년 11개월은 내 인생에 가장 즐겁고 기쁜 나날들이었다. 광활한 대초원의 지평서 위로 피어오르
는 찬란한 구룸과 그 아래 펼쳐지는 두 남녀의 길고 슬픈 사랑 이야기는 누구보다 먼저 쓰고 있
는 나 자신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재초원의 청청한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을 본 적이 있는가?
광대무변한 지평선 위에 천층 만층 피어오르는 찬란한 구름. 그것은 삶과 죽음을 넘어 우리 인간
들의 저편에 존재하는 신비였다. 그것은 절대적인 초월이었고 무한한 영혼이었으며 신이었고 뭉
흐 탱그리(영원한 푸른 하늘)였다. 그 구름의 깊이를 들여다본 사람들은 영원히 자신의 혼을 사로
잡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뇌를 빨아들이는 아편처럼 사랑을 통한 불멸의 영원한 의지를
혈관의 핏속에 불어넣어 돌돌흐르게 한다. 이 소설을 탈고한 지금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소재와
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과 근심에 쫓기고 있다. 이 소설을 위해 나는 주로 터키, 러시아,
몽골에서 자료를 모았다. 고문간과 아란두의 사랑을 고구려 신성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고대의 밀
의 종교, 동방교의 운명 속에 전개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동아시아적 가
치를 부정하며 동아시아적인 인맥자본주의(크로니 캐피털리즘)를 비판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는
중국문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동방교는 고구려의 고대신화를 유목문명의 눈
으로 재구성한 고대종교이다. 나는 이 동방교를 통해 <고구려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독자적
인 가치관의 원천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것이 만약 투르크, 몽골의 유목문명과 강한 친연성을 갖
는 하나의 독자적인 문명 시스템이었다면 그 고유한 문화와 전통과 아이덴티티와 세계관과 역사
해석의 근저에는 신에 대한 사상으로서의 종교가 있어야 했다. 그것이 동방교였다. 나는 동방교를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그려내고 싶었다. 이 과정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학들의 도움
이 있었다. 알타이어족 가운데 최초로 자기들의 문자를 창제했던 투르크 민족의 7세기 돌궐 제2
제국 비문들은 나의 소설에 기본적인 착상과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특히 탈랴트 테킨 교수의 꼼
꼼하기 이를 데없는 고대 투르크 비문의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받았다. 탈랴트 테킨의 저작을 직
접 우송해주신 계명대의 김영일 교수의 배려에 깊이 감사드린다. 끌랴시도르느이 교수, 하자노프
교수를 비롯하여 대초원의 유목제국에 대한 다방면의 연구를 진행하여 이 소설에 풍부한 내용과
디테일을 제공해준 러시아 학자들께 경의를 표하고 싶다. 돌궐제국에 대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개설서 [고대유목제국](중앙공론)을 써서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내내 들춰보게 했던 모리 마사오
교수께도 깊은 존경을 표한다. 잊혀진 돌궐제국을 찾아가는 나의 답사를 도와준 몽골국립역사연
구소장 오치르 박사, 통역을 맡은 감볼트 씨, 참으로 근직한 몽골인의 모습을 깨닫게 한 운전사
얌다우씨의 노고와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몽골의 지역전문가이신 이평래 박사와 많은 조언을
해주신 국내 유일의 돌궐-위구르사 전공자 정재훈 선생님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나의
소설에는 중국의 전제주의와 식인문화를 노골적을 비판하고 상대적으로 유목제국을 부각시킨 편
향성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중국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당나라에
의해 조국이 망한 뒤 돌궐로 들어갔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혜량해주시기 바란
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많은 연대기적 사실들은 돌궐제국에 대한 가장 상세한 통사를 쓰신 첸쭝몐
교수 등 중국학자의 연구에 크게 빚지고 있다. 또한 중국인들밖에는 기록하지 않은 당시의 생활
상들은 전적으로 중국의 원전들에 도움을 받았다. 이밖에도 필자는 서울대 노태돈 교수, 김호동
교수, 이성규 교수를 비롯한 많은 국내 선학들의 연구에 감사드린다. 이 소설을 계기로 동양 고대
사를 전공하는 거의 모든 국내 연구자들과 책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으며 이
분들의 연구를 길잡이로 삼아 산더미 같은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연구 성과와 정보를 아낌
없이 공개해주신 이 분야의 학자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가령 하이텔에 올려주신
경북대 임대희 교수의 방대하고 상세한 번역들이 없었다면 나는 당대의 법률제도와 행정조직, 세
제 등에 대해 일일이 원전을 뒤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도움받은 분들의 함자를 일일이 적어 감사드리지 못함을 사과드리며 만약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
부분이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소설을 쓴 나의 책임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1998년 9월 이인화
책,영화,리뷰,
초원의 향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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