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부
이재운
----- 차 례 -----
<작가 소개>
<작가의 말>
천장(天章)
11. 해도 안 된다
12. 갑부(甲富)의 도(道)
13. 귀인(貴人)
14. 소개장
15. 갑부에게 돈을 꿔 주다
16. 부적으로 싼 돈
17. 이상한 죽음
18. 천부(天符)
택장(澤章)
21. 운명이 바뀐 김대평
22. 돈을 담는 그릇
23. 비결의 값 천만 원
24. 보증서
25. 내기
26. 미래의 김대평
27. 갑부가 되는 비결
28. 속임수
화장(火章)
31. 기술과 사기
32. 부적의 비밀
33. 돈은 신앙이다
34. 갑부가 되는 첫걸음
35. 1년 목표
36. 단숨에 2천만 원을 벌다
37. 내면의 왕국
38. 6년 뒤의 갑부
뇌장(雷章)
41. 역신(易神)
42. 너를 가장 믿지 않는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다
43. 함정
44. 만트라의 힘
45. 대평그룹
46. 잠재 의식을 깨워라
47. 갑부 설계도
48. 전망과 실현
* 주역의 괘사를 표시하는 차례 번호는 11은
'일일', 18은 '일팔'이라고 읽는 것이다. 또한
8진법으로 나가기 때문에 10이나 19 따위는 없다.
역의 64괘는 삼라만상의 변화를 나타낸다. 64괘의
음과 양은 무수히 입장을 바꾸며 끝없이 흘러다녀야만
그 의미가 있듯, 역에서 물로 상징하는 돈 역시 계속
변위(變位)하지 않으면 병들고 썩는다. 돈이라는 것은
변화를 일으키는 에너지이며, 갑부란 이 변화의
도(道)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이다.
이 소설이 64괘의 변위(變位)로 차례(목차)를 놓은
것은 부(富)가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늘 움직이고,
바뀌고, 달라진다는 易(역) 본래의 의미를 상징하기
위함이다.
天章
天은 乾이니 곧 하늘이라.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땅이 보인다.
재물이 가득 차 있으니 담아야 할 곳간이
필요하구나. 땅이 넓어야 하늘이 높으니 어서 너의
곳간을 열어라.
11. 해도 안 된다
乾爲天
정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낄 때는 욕심을
거두어라.
완벽한 소설은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조차 잊게 하듯
뛰어난 갑부라면 그가 단지 돈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잊도록 해야 한다.
"그 얼굴 가지고는 아무것도 못해먹어."
꼭 도둑놈같이 생긴 늙은 점쟁이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 마음껏 지껄이고 있었다.
삐딱하게 열린 창문 틈으로 붉은 노을이 새어들어
와 점쟁이의 얼굴을 비쳤다.
'그래, 너는 막걸리 한잔에 김치 한 조각 입에 문
놈처럼 혈색은 좋구나. 네 놈 상판대기는 잘나서 이
짓 해먹고 사냐?'
"허. 내 말에 심기가 불편해졌나 보군. 엇나갈 것
없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고 해서 돈이고, 또
돌았대서 돈이야. 돈이란 놈은 한군데에 엉덩이
붙이고 오래 있질 못해. 그리고 이 놈은 인격 따위는
애초에 보질 않아. 개새끼처럼 주인이면 무조건
따르지. 만 원짜리는 만 원어치 충성하고, 천
원짜리는 천 원어치 충성을 해."
'너 같은 놈한테 관상보겠다고 찾아온 내가
잘못이다, 내가 잘못이야. 내 나이가 몇인데 함부로
반말이야. 너, 저녁 먹을 돈은 있냐?'
"그러니까 남의 돈도 길만 잘 들이면 내 것처럼
부릴 수 있지. 돈이 개하고 다른 점은 말이야, 특히
이 진돗개라는 놈은 첫주인 아니면 아무도 안
따르는데, 이 돈이란 것은 그 뭐냐, 창녀 같다고나
할까. 하여튼 주인이 바뀌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고, 다만 뭣이냐, 역마살(驛馬煞)이 있어서 정조가
돌아다니는 걸 좀 좋아한다고나 할까."
'오줌이 마렵구나. 이따위 철학관에 딸린 화장실은
보나마나 더러운 휴지 조각이 널려 있고, 냄새도
심할거야. 참자. 본론이나 물어 보고 가자. 그런데 이
점쟁이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아저씨? 도사님?
아니야, 그래도 들은 풍월은 있을 테니 선생이라고
해야 좋아하겠지. 기왕이면 재수 없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저, 선생님. 그래서 제 얼굴에 돈복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있으면 몇 억짜리 돈이
있습니까?"
그러자 점쟁이는 제 무릎을 탁 치면서 웃어제꼈다.
그것도 목구멍을 막아대는 가래를 캑캑 뚫어가면서.
"자넨 참 바보 같은 소릴 하고 있네그려. 눈이라는
것은 마음의 창이라고 안 하던가? 그러니 자네 지갑
속에 돈이 많이 들어 있으면 자네 눈이 그걸 척
보여줄 것이고, 아니면 궁짜를 보이겠지. 부도(不渡)
내고 찾아오는 놈 눈깔을 보면 열이면 열 다
똑같더라. 자네 눈이 바로 썩은 동태 눈깔이야. 그거,
남 원망하지 말고 자네 스스로 창고를 열어. 아니,
문은 다 꼭꼭 걸어 잠그고 돈이 왜 안오시나 모가지를
빼고 기다리니 올 턱이 있나? 하다 못 해 산간 벽지에
주막을 열어도 불을 때고 등을 밝혀 놓은 다음에야
손님을 기다리는 법이야. 자네 창고를 보아하니
넉넉하기는 한데 아직 텅 비어 있어. 따라서 지금은
별 볼 일 없어."
"그래, 난 희망 없다, 이 말씀입니까?"
점쟁이 말에 부아가 치민 김대평은 거칠게
대들었다.
"희망 있고 없고를 왜 나한테 따지나? 내가 자네를
망하게 했어? 자네한테 사기친 적 있어? 남 탓하지
말라구."
"나한테 얼마나 큰 창고가 있는지 모르지만 난
창고업 따위는 안 할 겁니다. 그놈의 창고가 배
터지도록 돈이나 한번 쌓아 봤으면 좋겠네."
"그럼그럼, 그래야지. 진술축미(辰戌丑未) 네 창고
중에 자네는 세 개나 있어. 다 때려부수라고.
우하하하! 이 친구, 돈벼락 맞아 죽을 상이로구나!"
'개새끼, 칭찬이야 빈정대는 거야? 웃기는 왜
웃어.'
"얼마요?"
"원래 하늘에 뭘 물어 보는 사람은 자기 그릇에
맞게 돈을 내는 거야.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내잖아?"
'그래, 내 십일조는 단돈 천 원이다.'
김대평은 구겨진 채 호주머니에 쳐박혀 있던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점쟁이놈은 그 돈을 집어들어 이마에 한 번 대어
보더니 침을 퉤 뱉았다.
"귀여운 내 새끼, 어디 갔다 이제 왔니? 네
친구들은 왜 안오냐?"
'술수를 늘어놓는군. 미안하지만 일 없네. 다행히
차 시간이 다 되었다네.'
"젊은이, 터미널까지 온 걸 보니 어딜 가는
모양인데, 왕복 차비에 최소 이틀치 밥값, 그러고
약간의 비상금까지 치면 모르긴 해도 자네 지갑에 5만
원은 넘게 들어 있을 거야. 따라서 아무리 적게
잡아도 5천 원은 내가 받아야만 하겠네. 얘야, 네
친구 4천 원은 어디 들어앉아 나오질 않는거냐!"
'이 늙은이가 정말?'
점쟁이는 벌린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짐짓 딴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김대평은 하는 수 없이 지갑을 꺼냈다. 천 원짜리
넉 장이 다 안 됐다. 다행히 5천 원권이 있어서
김대평은 그걸 끄집어 내밀었다. 그러자 점쟁이는 5천
원권을 받아들고는 친절하게도 조금 전에 김대평이
주었던 천 원짜리를 돌려주었다.
"잘 가라, 아가. 네가 큰돈을 불러 주고 가는구나.
복 되거라."
점쟁이는 김대평이 건넨 5천 원을 잘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기왕 5천 원을 받았으니 한마디 일러 주지. 참기
힘든 역경에 빠지거든 일단 5일만 참아 보게. 그래도
잘 안풀리면 15일을 견뎌 봐.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한 달, 또 안 되면 석 달을 참아 보게. 작은 일이라면
이 사이에 다 풀릴 것이고, 좀더 크다면 1년이나 10년
대운(大運) 안에 다 풀려. 10년은 대운이라, 1년은
세운(世運). 석달은 계(季), 한 달은 절(節), 15일은
기(氣), 5일은 후(候)라. 그러니 때가 되었나, 안
되었나 그걸 가만히 생각해 봐. 그나저나 자네
말일세. 부적 한 장 쓰지? 만 원이면 척 그려줄
테니까."
'미친놈. 5천 원도 아깝다!'
김대평이 일어서자 소파에 앉은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30대 여인이 재빨리 점쟁이한테 가 앉았다.
"저, 제 남편이 조그만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데요.
그만 부도를 내고 도망갔어요. 직원들 월급도 몇 달째
밀려 있고, 빚쟁이는 새벽부터 몰려들어 진을 치고.
저더러 돈을 해내라니 무슨 수로 빚쟁이들을
상대합니까? 도대체 언제나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까요?"
"자기들이 일 저질러놓고 왜 나한테 해결해
달라는거야? 그런 건 내가 알 거 없고, 댁하고 댁의
남편 사주나 불러 보셔. 난 내 업무만 하면 되니깐."
철학관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만 모여드는
데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김대평은 녹이 슬어
끽끽거리는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김대평은 철학관 앞 시멘트 계단을 황급히 뛰어
내려갔다. 철학관에서 나오는 모습을 혹 아는
사람한테라도 들키면 창피하다 싶었다.
대합실에 들어서서 전광판 시계를 올려다보니 탑승
시각 10분 전이었다.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넣자
버스표가 손에 잡혔다.
대구, 도대체 이 김대평이가 왜 대구를 가려고 하는
거지? 오늘 아침만 해도 대구에 간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래, 어제 병원에만 가지 않았어도
그는 오늘도 방구석에 배 깔고 엎드려 포르노
소설이나 번역하고 있었을 것이다.
"후......"
김대평은 또다시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요즘은
오래된 습관처럼 걸핏하면 한숨이 나오곤 했다.
"얘, 땅 꺼지겠다. 그 한숨 때문에 될 일도 안
되겠다. 젊은 애가 한숨은......"
어머니마저 그렇게 타박했다.
'그래,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해? 이제부터라도
잘해 보자. 그렇지만 실업자가 뭘 잘할 수 있담?
그나저나 집에 생활비 가져온 지가 몇 달이나 된
거야? 생활비는커녕 빚 독촉이나 안 받았으면 좋겠네.
폐업하고도 주지 못한 직원들 월급이며 사무실 임대료
갚을 일이 아득하군.'
"여보."
아내는 거울 앞에 서서 벌써 네댓 번이나
돌아가면서 옷맵시를 다듬고 있었다.
영어 사전을 뒤적이며 번역을 하고 있던 김대평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오늘, 지훈이 예방 접종하는 날인 거 잊지
않았지?"
"나, 번역하던 거 이번 주까지는 끝내서 갖다줘야
하는데......"
김대평은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럼 어떻게 해? 난 시간을 낼 수 없는데......
어머니 오실 때까지는 당신이 좀 해. 나, 내버려둬도
힘들어. 제발 알아서 좀 해줘."
"오늘 꼭 접종해야 돼?"
"하나밖에 없는 핏줄 지훈이의 건강이 달린 일인데
당신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당신 하나만 모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마누라를 거리로 내몰면서 뭐가
그렇게 잘났어?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난
창녀가 된 기분이야!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살할
생각도 하질 않는 거지! 장하다, 그게 장해."
아내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김대평은 아내의
가시 돋친 말투에 슬그머니 시선을 거두었다.
"알았-어."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병원이야. 알았지? 아가,
엄마 갔다올게."
아내는, 아침부터 보행기를 끌고 다니느라 바쁜
아들 지훈이에게 입을 맞추고는 바삐 집을 나갔다.
김대평은 방바닥에 널브러진 아내의 잠옷을 챙겨
장롱 속에 집어던져 놓고는, 우유병에 우유를 채우고
애를 붙잡아다 외출복으로 갈아입혔다. 기왕에 다녀올
거라면 아침 일찍 다녀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침 시간이 한가할 것 같아서였다.
"찌찌. 아빠 빠."
"오냐, 우리 지훈이, 너까지 포르노 소설을
번역하게 할 순 없지. 힘내자, 아가. 아이구, 힘은
내가 내야 하는데."
김대평은 벨트로 아이를 가슴에 매달고 손에는
우유며 기저귀가 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약간 낯이 익은, 위층 어디엔가
사는 젊은 여자가 김대평을 보더니 빗질하듯 시선을
흔들어댔다. 김대평은 애써 그 여자의 눈길을
외면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빠져나갔다. 하지만 뒷꼭지는 여전히 간지러웠다.
"에이, 어머닌 하필 이런 때 여행을 떠나실 게
뭐람."
김대평은 며칠 전 큰형이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동남아로 효도 관광을 떠난 어머니가 옆에 있기라도
한 듯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는 무슨 일이냐는듯 김대평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이구, 벌써부터 애비 눈치나 보냐? 하기야
할머닌 또 무슨 죄가 있겠니? 괜히 아들 하나 잘못
두어 뒤늦게 너 키우느라 고생하시고 며느리 눈치까지
보고 있으니......"
김대평은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채 자신의
품에 매달려 있는 아이를 어르며 혼잣말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이 모양인데 효도 관광이 다 뭐냐며
한사코 마다했었다. 여행을 떠나긴 했어도 어머니
마음이라고 편할 리는 없을 것이다.
'편하다면 어머니도 아니지. 그나저나 어머닐
생각해서라도 뭔가 하긴 해야 할 텐데, 자본금이
있어야 뭘 해보지. 장인한테 또 손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큰형이 요즘 경기가 좀 좋은 모양인데 나만
보면 매일 죽는 소리니 운도 떼볼 수 없고...... '
생각해 보니 여동생 말마따나 김대평이 '온돌
왕자'가 되어 방구들을 진 채 살아온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어서고 있었다.
거창한 꿈을 안고 시작했던 '오른손기획'의 문을
닫아버린 후, 김대평은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단
생각에 또 다른 사업에 손을 대었다. 그 사업이란
다름 아닌 다이어트 식품 총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땐 무언가 눈에 씌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사업을 벌이자면 요모조모 꼼꼼히 따져
보고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땐 왜 그리 조급하게 앞뒤
재지 않고 덤벼들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동생이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몇 끼
내리 굶는 것을 보곤 '아하, 이거다!' 하고 무릎을
치곤 그 날로 사업이랍시고 시작을 했으니......
누가 그랬던가.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김대평이 꼭 그 짝이었다.
퇴직금과 전세금은 '오른손기획'의 문을 닫는 순간
쾅 하고 모두 날아가 버리고, 아버지를 졸라 얼마간의
돈을 얻어내고 아내의 옆구리를 찔러 장인한테서
끌어온 돈을 자본금 삼아 시작한 다이어트 식품 총판
사업마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가게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문과 방송 여기저기서
다이어트 식품의 폐해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이어트 식품을 먹으며 무리하게 살을 빼던 어느
여대생이 심장마비와 극심한 영양실조로 숨진 사건이
그 발단이었다.
-20여 만 원짜리 다이어트 식품의 주성분은
밀가루와 미숫가루. 원가는 불과 오천 원.
비만 해소용 중국차 속에서 납 성분 다량 검출.
'먹으면서 살을 빼 준다'는 다이어트 식품들의
위험한 유혹.
다이어트 식품 수입 딱지는 대부분 가짜.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럴 때 뒈지냐! 개 같은 년!
에이 씨팔!'
하여튼 스트레스를 확 날려 보내는 이런 험한 욕을
만들어낸 조상들한테 김대평은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했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지랄 같은 욕'의 막강한 힘 덕분이었다.
웬만한 신문들은 그런 파격적인 제목으로 사회면을
장식했고, 방송사의 한다 하는 시사 프로그램들도
특집 편성을 하여 다이어트와 다이어트 식품, 나아가
선식이니 죽염이니 하는 건강 식품까지 한꺼번에
때려잡을 태세로 대들었다. 그 방향이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정해질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수십만 원씩 하는 다이어트 식품엔 가짜도 많고 설령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해도 일시적일 뿐이며,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여 살을 빼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그러니 천장이 닿도록 쌓아 놓았던 물건이 빠져나갈
리가 없었다. 결국 김대평은 빚만 잔뜩 진 채 두 번째
사업에서도 손을 털었다. 비싼 돈 주고 들여놓았던
다이어트 식품은 고향에서 농사 짓고 있는 그의
사촌에게 다 주어 버렸다. 그 사촌은 돼지 새끼한테
섞어 먹이면 좋겠다며 신이 나서 그걸 실어갔다.
'아이고, 속 터져. 그거 처먹은 돼지새끼들 죄다
설사나 해라.'
아내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며 보험설계사로
나섰다.
처음 아내가 젖먹이 아이를 떼어놓고 밖으로
나가겠다고 말했을 때 김대평은 펄쩍 뛰며 반대했다.
"걱정 마. 내가 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한 번
불붙으면 이까짓 고생은 한 순간의 추억이야. 조금만
더 참아."
"내 자신이 모멸스러워서라도 더는 못 참아! 이
순간, 나는 내가 증오스럽다! 김대평 씨, 큰소리 그만
치고 집에서 애나 봐. 어떻게 우리 아기 우유값을
부모님께 대 달라고 말해. 당신한테는 친부모님이니까
얼굴에 철판깔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못 해.
나한테는 시어머니이고 시아버지란 말이야."
"번역료 가지고도 지훈이 우유는 살 수 있어! 제발
좀 가만히 있어."
"그래? 포르노 소설 번역해 번 돈으로 자식한테
우유 사 먹일래? 나도 애기 우유나 나눠 먹을까? 내
인생 이만큼 망쳐 놓았으면 충분하지 않아? 더 이상
허풍 치지 마. 제발 소원이다, 닥치고나 있어."
아기 우유값이라도 제 손으로 벌겠다는 아내가 내심
반가웠다. 그래서 김대평은 아내의 취직을 인정할
만한 그럴 듯한 명분이 없을까 궁리하느라 애를
먹었다.
'아기 우유값.'
진작에 이 말의 위력을 실감했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아기
우유값'이란 말처럼만 누군가 김대평을 실감나게
가르쳤다면 말이다.
아기 우유값.
김대평은 혼자 있을 때면 이 말을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가만 소리를 내어보곤 했다. 그 말은
마치 주술(呪術) 같은 효과를 내는 듯했다.
김대평은 부모님 뵙기도 민망하고 처가집
어른들이며 아내 보기도 수치스러워 다시 취직을
해볼까 싶어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밀어 보았다.
그러나 '직접 내사(來社)'라는 주문이 있는 회사에는
한 번도 가질 않았다. 30대에 들어선 나이가
구차스러워 일부러 우편이나 인편으로 냈다. 인편의
경우는 아내가 늘 그 심부름을 했다. 그렇게
소극적이다 보니 재취업도 쉽지가 않았다. 사회
경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임자가
되기엔 경력이 너무 짧아서 도무지 입맛에 맞는
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당신이 잘하는 게 뭡니까?"
어쩌다 서류가 통과되어 면접을 보게 되는 날이면
한 번쯤은 결국 듣게 되는 말이었다. 어느 것도
전문가가 되기에는 김대평의 경력이 너무 짧았다.
그렇다고 신입 사원이 되기에는 어설프게 주워들은 게
너무 많은 데다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나이만 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 이틀 집에서 뭉개다 보니 눈깜짝할
새에 몇 개월이 지나 버렸고, 어느 사이엔가 괜찮은
자리가 있다며 연락해 주던 선배나 동료들의 전화도
뜸해졌다.
젊은 놈이 집에서 뒹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언제까지 그러고만 있을 수 없어 김대평은 다시 한번
재기하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연구했다. 방구석에
배 깔고 엎드려 있자면 별의별 사업 구상이 다
생각났다. 그냥 한 손 뻗치기만 하면 수억 원쯤은 턱
나꿔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본금이었다.
어디서 융통할 돈이 없었다. 아니, 돈이 없다기보다는
그 돈에 닿을 줄이 없었다. 게다가 여동생까지 조만간
결혼할 의사를 비춰 더 이상은 집에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처가집에다 또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여보, 언제까지 이러고 지낼 거야? 그러지 말고
어디 작은 회사라도 취직을 하는 게 어때?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 취직해 다니다 좋은 자리가 나면 옮기면
되잖아?"
허구한 날 맞지도 않는 복권에 목을 매는 김대평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아내가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작은 회사 취직도 수월한 게 아니라는 말은
아내에게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명색이 사장 해본 사람이 어떻게 그런 회사에..."
제 나름대로 알아보기는 다 알아보면서도 김대평은
아내에게 늘 큰소리만 쳤다.
하는 일 없이 마냥 집 안에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어, 김대평은 출판사에 다니는 선배며 동료들한테
부탁해 번역거리를 물어다 그런 대로 끄적거리고
있었다.
번역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음만 먹으면,
손만 뻗으면 언제나 일감이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소설 시장이 워낙 불황이다 보니
번역 의뢰 건수도 드물고, 번역 문투가 이렇네저렇네
까다롭게 굴면서 입맛대로 고쳐 달라는 편집부의
요구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잡는 원고라고는
대부분 저급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엉터리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노느니 이 잡는다 싶어 꾹 참고
해오고 있었다. 마침내 김대평과 구들장의 지겨운
대련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것저것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병원 앞이었다.
김대평은 아이를 다시 한 번 들쳐안으며 병원으로
들어섰다.
아침부터 서둘렀건만 병원은 아이들과 젊은
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김대평이 들어서자 사열하는
군인들처럼 여자들의&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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