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지음 / 이새
우연히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사막 레이스에 마음을 빼앗겨 17년째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거침없이 달려온 직장인 모험가 김경수 씨. 2003년 사하라 사막을 시작으로 2019년 8월, 몽골의 고비 사막까지 그 동안 그가 달린 극한의 레이스 거리는 족히 6,400㎞가 넘는다. 이 책은 그가 뛰고 뒹굴며 넘다든 사막과 오지에서의 경험을 생생하게 소개한 감동의 기록이자 인생 지침서이다.
꿈이 없는 청춘, 꿈을 잃은 중년 그리고 현실의 무게에 눌리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이책은 달라진 자신을 보상받는 가이드러너가 되어줄 것이다. “일어서지 못한 자는 그곳이 한계이고, 일어선 자에게 그 한계는 경계일 뿐이다.” 저자가 힘주어 강조하는 말이다.
나는 아직 멈추고 싶지 않다
▣ Short Summary
과거 인류는 생존과 수렵을 위해 더 높이 올랐고, 더 깊은 곳을 찾아 헤맸습니다. 진화된 인류는 영토 확장을 위해 더 멀리 달렸습니다. 지금도 국가 간 전쟁과 무역 보복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잠재된 과거 인류의 DNA가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사막과 오지로 향하는 저에게 역마살이 꼈다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기 곤란합니다.
저에게 특권이 있습니다. 그건 형편이나 능력을 떠나 ‘도전’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저는 용기와 자신 감을 얻기 위해 일상 밖 사막과 오지로 눈을 돌렸습니다. 2003년 사하라 사막을 시작으로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달렸습니다. 길고도 먼 여정 끝에 2019년 8월, 광활한 초원을 품은 몽골의 고비 사막 250km를 달리고 족적만 남기고 왔습니다. 거리로 치면 6,400km는 족히 넘습니다. 오지에 서면 저는 늘 제 안의 다른 나와의 어긋남이 격렬해집니다. 길들여진 나와 길들여지지 않은 나. 이성적인 나와 막무가내인 나. 주저앉으려는 나와 일어서려는 나. 이 갈등은 저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안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눈이 번뜩 뜨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의 본래 모습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강해지려면 오랜 담금질이 필요했던 것이죠.
물론 당신에게도 도전의 특권이 있습니다. 도전의 의미가 무엇이든 사막과 오지로 뛰어든 선수들은 반드시 경계, 관계, 한계 그리고 설계의 사계를 거쳐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벽, 주변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선수들은 험난한 여정을 두 발로 밟으며 울고 웃고 서로 격려하지만 임계점의 목전에서 무릎을 꿇거나 대범하게 거듭나기도 합니다. 주저앉아 포기할 것인가, 참고 견뎌낼 것인가의 선택은 순전히 자신들의 몫인 것이죠. 더 멀고 더 깊고 더 높은 곳으로의 도전은 한계를 넘어선 자의 전유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도 실패도 없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이렇게 말한 돈키호테가 어쩌면 허황된 꿈을 좇는 미친 존재 같지만, 사실 그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차 이룩할 세상을 꿈꾸며 숨을 거둘 때까지 무사 수업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 2 ? 나는 아직 멈추고 싶지 않다
저에게 다시 찾아온 인생의 골든타임, 중년! 때는 찾아온다고 하지만 저는 그 때를 만들어 갔습니다.
지금은 내일을 설계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그간 저의 몸은 사막과 오지에서의 모든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의지와 이성이 나약하고 희미해질 때, 제 몸이 기억하고 있는 사막에서의 투혼과 용기는 저를 다시 강하게 이끌어 주었습니다. 17년 전, 마흔은 늦었다고 포기했다면 찬란한 새 봄을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제 안의 열정이 생각에만 머물렀다면 저는 여전히 먹고살기 급급한 인생을 살고 있을 겁니다.
‘도전은 기록이다’ 제 안의 저는 그간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길 것을 저에게 명령했습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장석주 ‘대추 한 알’ 중) 대추 한 알, 쌀 한 톨에 이렇게 깊은 사연이 담겨 있는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대추한 알 입에 물면 아삭한 식감에 달달한 맛이 배어나오듯 이 책의 한 꼭지 글을 읽고 눈 감을 때… 살아 숨 쉬는 대자연과 잠시나마 동화될 수 있다면 저는 더 이상의 바랄 것이 없습니다.
▣ 차례
프롤로그 저에겐 특권이 있습니다 추천의 글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즐기며 살자 - 소설가 김홍신
PART 1 설계 : 긍정은 역경을 이겨내는 힘 01 내 생애 최고의 순간 / 02 처음처럼 -내가 달리는 이유 / 03 당신의 열망은 무엇인가 04 영어완전정복 -포기할 것인가, 넘어설 것인가!/ 05 요즘도 달리십니까? / 06 너무 잘 산 인생이란
PART 2 경계 : 도전, 일상의 틀을 벗어나라 01 고단한 사막의 하루, 어디 일상만 할까 / 02 누구에게나 사막은 필요하다 03 열정의 중년, 히말라야 임자체에 서다 / 04 거인의 인도에 온전히 내 몸을 05 세상 가장 아름다운 섬에 내가 있어야 한다 / 06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07 사하라에는 어린 왕자가 없다
PART 3 한계 :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다 01 세상의 끝 우유니 사막에 내가 섰다 / 02 인간의 한계를 넘어 울룰루로 03 Big Dune, 절망의 장벽 희망의 언덕! / 04 오토릭샤의 유혹 / 05 메달 없는 완주 06 지금 나를 이기는 힘 / 07 지구 속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 / 08 가자! 부시맨의 고향으로 09 동행 / 10 눈물주 -긍정의 힘
PART 4 관계 : 그럼에도 불구하고 01 낙타의 꿈 / 02 그럼에도 불구하고 / 03 질긴 놈이 이긴다 / 04 투슬루코타크 마을의 추억 05 나눔이란 ‘선뜻’보다 ‘고민 끝에’ 해야 / 06 변장한 천사를 만난 곳, 부탄
PART 5 다시, 봄 : 사막에서 길을 찾다 01 사막을 건너는 법, 인생을 사는 법 / 02 사막의 사계 / 03 나는 사막의 서바이버다 04 나는 때론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 05 당신의 손끝에 기적이 / 06 사막을 꿈꾸는 이들에게 07 적자생존 / 08 사막에서 길을 묻다
- 3 ? 나는 아직 멈추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 멈추고 싶지 않다
김경수 지음 이새 / 2019년 10월 / 280쪽 / 16,200원
설계 : 긍정은 역경을 이겨내는 힘
내 생애 최고의 순간 바람이 지배하는 땅, 굽이치는 광활한 대지, 지구상 가장 넓은 사막, 열사 위로 내리쬐는 태양열에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점차 동력을 잃어갔다. 모두가 나를 미친놈 취급했지만 나는 기어코 이곳 사하라 사막에 발을 들였다. 거친 모래바람이 방향을 잃고 거세게 몰아쳤다. 쇳소리를 품은 바람에 모래 능선이 꿈틀거리며 맥없이 뒤로 밀려갔다. 사막 레이스 4일째 정오, 모래와의 사투 끝에 그야말로 가관인 몰골로 빅듄을 기어 올라 정상에 섰다.
어린 시절 내겐 두 가지 꿈이 있었다. 하나는 화가, 또 하나는 제임스 본드 같은 국제적인 첩보원이 되는 것이었다. 서로 연관성이 없지만 나는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 꽤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어른이 되니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살 거란 기대와 다르게 먹고사는 데 급급했다. 세상의 쓴맛과 현실의 무서움을 겪고 나니 적지만 또박또박 월급 받고, 정년이 보장된 9급 공무원의 길을 선택했다. 꿈을 접은 후 또 다른 꿈을 품지는 않았다. 그저 성실한 직장인으로, 가장으로, 그렇게 보통의 남자로 살아갔다.
그러던 2001년 가을 어느 날, 휴일에 남편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별 감흥 없이 브라운관에 그저 눈만 주고 있는데, 갑자기 프로그램이 바뀌면서 화면 가득 황량한 사막이 펼쳐졌다. 카메라가 서서히 클로즈업되자 멀리 짐승처럼 보이던 물체는 점차 사람의 형체를 갖췄다. 이들은 장딴지에 힘줄이 불끈 선 한 무리의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가슴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들며 굳게 잠긴 빗장이 ‘삐걱’하고 풀린 느낌 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곧 격한 압박으로 변했다. 사막의 잔상은 가을이 다 지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겨울이 오자 가슴앓이는 막연한 꿈으로 그려졌다. ‘그래, 저길 가는 거야~. 사하라 사막에…’ 청춘이 지난 39세, 중년의 목전에서 현실의 무게에 눌려 사그라졌던 꿈과 열정이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인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듬해에 나는 거짓말처럼 사하라 사막 아주 깊은 곳에 있었다.
종일 내 무릎을 꿇리려 안간힘을 쓰던 태양이 제풀에 지쳐 모습을 감췄다. 끝없는 사구 지역을 뒹굴다 시피 달려 빅듄 정상에 올라서서 장엄한 사하라를 가슴으로 품었다. 온몸은 흙먼지와 땀으로 찌들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다. 통증 때문에 잠깐 발목이 잡힌 듯했지만 다시 저녁노을을 향해 내달렸다. 내 안의 열정은 태양보다 뜨겁게 들끓었다. 광야 건너편 계곡 모서리에 걸친 저녁노을을 눈에 담았다.
그간 사막과 오지를 수없이 넘나들었지만, 지도책에서만 보아왔던 사하라와의 첫 대면의 기억은 17년째인 지금도 생생하다. 미국과 이라크 간 전쟁이 발발하고 사스가 창궐해 전 세계가 흉흉했던 2003년 4월, 사하라로 가기 위해 모로코 카사블랑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도착한 사하라에서 오금이 늘어나는 고통을 안고 달리고 또 달렸다. 사막의 밤에 흙먼지와 콧물로 뒤범벅이 된 채 길을 잃고 헤맸다. 5박 7일 동안 243km를 달려 피니시 라인에 들어섰을 때의 감흥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 4 ? 나는 아직 멈추고 싶지 않다
사하라는 내 삶의 축을 뒤흔들어 버렸다. 사하라를 달리던 그 열정은 직장으로 뻗쳐 2007년 공무원 최고의 영예인 청백봉사상을 내게 안겼다. 남 앞에 서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지난 경험담을 하나둘 풀어내다 대한민국 명강사 칭호를 얻었다. 매 순간이 영광의 순간이었지만, 단연 최고의 순간은 사하라 사막에 첫발을 내디딘 그 순간이다. 사하라를 다녀와 일상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열병을 앓았다.
‘내 인생에서 사하라 사막은 어떤 의미일까.’ 빈손으로 갔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안고 돌아온 건 분명했다. 사하라와 인연을 맺은 후 시작된 나의 40대는 직장인과 모험가라는 두 축이 공존했다. 지금까지 17년째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달렸다. 지금도 여전히 달리고 있다. 사하라의 마력에 빠진 것이다. 거친 대자연 속을 달릴수록 나는 더 강해졌고, 나는 잘 익은 홍시처럼 무르익었다.
터키의 서정시인 나짐 히크메트는 <진정한 여행>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말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며,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라는 시구를 남겼다. 그는 퓰리처상까지 받았지만 그의 가치는 가장 마지막에 쓴 기사라고 했다.
유난히 무더웠던 2017년 여름, 무턱대고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주로에서 엄청난 고통의 5시간을 보내야 했다. 왕년의 기록만 믿고 자만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을 달릴 때도 훈련 없이 갔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기억이 난다. 히말라야 임자체 정상 목전인 5,985m 설서면에서 정상을 마저 오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던 건 여전히 마음 한 켠에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엔 주체할 수 없는 갈급함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그렇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준비하는 현역이다. 나는 ‘러너’다."
너무 잘 산 인생이란 대부분 남편이 그렇지만 나 역시 월급은 모두 아내에게 넘어간다. 나는 별도로 받는 수당 중의 일부를 용돈으로 쓴다. 이걸 개미처럼 아끼고 아껴서 사막이나 오지로 가는 밑천으로 삼는다. 그러니 웬만한 자린고비 짓도 마다치 않는다. 옷이나 신발은 출정에 필요한 것 외에는 거의 사지 않는다. 기분 내키는 대로 뭔가를 사들이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그래도 나는 크게 불만이 없다. 비록 일면은 궁박해도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1월, 인도 남서부 케랄라 깊숙한 곳 뮤나에서 펼쳐진 <The Ultra INDIA Race> 대회도 마찬가 지였다. 각국에서 모여든 선수들 틈에 끼어 지친 숨을 몰아쉬며 주로를 따라 달렸다. 그간 용돈을 아껴 경비를 마련하고, 직장 상사 눈치를 살피며 휴가를 얻었지만 연일 계속된 송년 모임과 겨울 한파로 운동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회가 설 연휴에 껴서 간신히 아내의 제가를 받았지만 호화로운 관광도 넉넉한 유람도 아니다. 오로지 극한을 쫓아 터진 발바닥 물집의 고통을 씹으며 달리고 또 달리는 여정 이다.
밀림에도 태양이 이글거리지만 대기는 건조한 사막과 판이했다. 태양이 체내의 수분을 몽땅 뽑아낼 기세로 열을 뿜어내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오듯 뿜어져 나왔다. 갈증이 가시질 않아 연신 물을 들이켠 나머지 물 조절에 실패했다. 벌레 떼가 머리카락 속까지 헤집고 다녀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선수들 모두 비슷한 몰골이었다. 원주민들은 일그러진 얼굴에 다리를 절뚝거리며 마을을 지나가는 선수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마 그들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미친놈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 5 ? 나는 아직 멈추고 싶지 않다
주로에서 CP(Check Point)까지 남은 거리를 잘못 체크하면 물 부족으로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레이스 셋째 날 CP1을 2km 정도 앞두고 물이 거의 바닥이 났다. 물통에는 한 모금 정도만 남았다.
2005년 고비 사막에서는 조금 남은 물을 시각장애인에게 먹이고 나는 목을 두른 버프에 밴 물기를 입술로 빨며 사막 한가운데서 4시간을 버틴 적이 있다. 지금 상황이 그때보다 녹녹하다고 속단할 수 없었다. 땀 배출과 갈증을 줄이기 위해 속력을 줄였다. 오전 10시 35분, 간신히 물통 뚜껑 정도의 물을 남겨놓고 CP1에 도착했다.
내 인생에서 무탈하고 안락한 시절은 인왕초등학교 3학년 때로 일찌감치 막을 내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은 당시 서울의 달동네 중 하나였던 삼양동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주식은 수제비가 되었지만, 우리 5형제는 아무도 불행하지 않았다. 회색빛으로 점철된 나의 젊은 시절, 기울어진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오방떡 장사를 시작했다. 기왕에 시작한 사업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오방떡을 만들고 싶었다. 그해 겨울, 장사 시작 전에 서울 명동에서부터 동대문까지 걸으며 시장조사를 했다.
특별한 맛이나 향이 나는 오방떡이 있으면 주인에게 비결을 꼬치꼬치 물으며 비법을 꼼꼼히 메모했다.
그리고 나서 10만 원의 자본금으로 오방떡 주물과 리어카, 반죽에 필요한 재료와 파라솔을 샀다. 수십 번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나만의 오방떡이 세상에 나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요즘 말로 대박이 난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도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후 소집영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인도 뮤나의 밀림 한복판에 내가 서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제껏 꿨던 꿈 중에 변변히 이룬 것 하나 없었다. 바닥까지 떨어지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목표 했던 걸 이루기보단 목표 주변에 떨어진 낱알을 주우며 만족해했다. 화가의 꿈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고, 검정고시도 과락의 쓴맛을 봤다. 피 끓는 청춘의 대부분을 허비하다 간신히 대학에 들어 갔지만, 남들보다 6년이나 늦었다. 국정원에 들어가려던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 설 때마다 좌절과 실패의 흔적만 남겼다.
순탄하기만 한 삶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좌절과 실패의 경험을 불행한 인생과 동일시한다. ‘꿈을 이룬 사람은 행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라는 명제를 설정해놓고 모두 거기 빠져 허우적거 리며 산다. 과연 그게 맞는 걸까? 인도 뮤나의 밀림 한가운데 서서 나는 나에게 물었다. ‘꿈을 이뤄야만 행복한가? 좌절을 겪으면 불행한가?’ 나는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다. 좌절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불행한가?’ 아니, 나는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행복하기까지 하다. 누구든 올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인도 뮤나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밀림을 달리며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나는 과거 여행도 함께 다녀왔다. 우리가 한평생 가장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한 삶이 아니다.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아니며, 좌절하지 않는 삶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 때문에 행복했다거나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삶이다. 누구 때문에 행복했다거나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삶이다. 그럴 때 그 인생은 너무나 잘 산 인생이다.
경계 : 도전, 일상의 틀을 벗어나라
고단한 사막의 하루, 어디 일상만 할까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날 저녁,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아침 6시 기상부터 출발선상에 설 때까지 할 일이 많다.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나서기까지의 일과보다 더 복잡하다. 기지개 펴고 눈곱 떼기, 일어나 냉수 마시고 대변 보기, 아침 식사와 식기 세척, 양치하고 짐 챙기기, 선크림 바르기. 당연히 대변을본 후엔 물티슈로 배설구 주위를 깨끗이 닦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일 똑같은 몸동작과 흐르는 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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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피부가 쓸려 레이스 중에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서양 선수들은 고열량 초경량의 식량과 장비로 무장하지만, 밥심으로 달리는 내 배낭의 레이스 첫날 무게는 10kg을 훌쩍 넘긴다. 레이스는 대략 5박 7일 동안 260km를 달린다. 더구나 꼭 필요한 장비라면 불편을 감수해서라도 레이스 내내 갖고 다녀야 한다. 간혹 배낭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식량을 모래 속에 묻어버리는 선수도 있다. 하지만 잘 먹고 싶다면, 그 배낭의 무게를 견디는 건 오로지 선수 자신의 몫이다. 코스에 관한 정보도 미리 체크해야 한다. 레이스 거리는 얼마 되는지, CP는 몇 개인지, 구간별 거리와 난이도는 어떤지, 혹은 강물을 건너는지, 급경사의 산악이나 빅듄이 있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각 구간별 제한 시간과 전체 구간의 제한 시간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부상이 아닌 정보 부족으로 제한 시간에 걸려 탈락한다면 이보다 원통할 수 없다. 내가 갈 길을 알고 길 위에 서는 것과 멋모르고 쫓아가는 건 천지 차이다. 우리 인생사도 마찬가지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서 대자연과의 가혹한 교감이 시작된다. 엄청난 모래 산 빅듄, 끝이 보이지 않는 자갈밭 광야, 급경사의 산악지역, 무릎까지 차는 협곡 물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대자연에 압도된다. 50 도에 육박하는 태양의 열기,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새벽 한기, 3000m가 넘는 고도를 달리면서 체력의 한계를 넘나든다. 그때 나는 가장 힘들었던 과거의 순간이나 소중한 사람과의 재회를 떠올리며 그순간을 이겨낸다.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다. 하지만 물이 떨어지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다. 물은 생명 이다. 그러니 출발 전에 충분히 챙겨야 한다. CP마다 물이 공급되지만, 체력과 난이도에 따라 CP와 CP 사이를 이동하는 시간이 1~2시간에서 3~4시간까지 되기도 한다. 주로에서 다른 선수에게 물을 구걸하는 건 강도 짓이나 다를 바 없다. 2005년 고비 사막 한가운데서 물이 떨어진 상태에서 2시간 넘게 헤맨 적이 있다. 그 후 나는 덤으로 배낭에 작은 물통 하나를 챙기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마실 게아니라 비상용이다. 2010년 인도 뮤나의 밀림에서 물이 떨어져 흐느적거리는 독일 여자선수에게 그 물은 생명수였다.
주로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푯대가 꽂혀있다. 하지만 한눈을 팔거나 딴생각을 하다가는 주로를 벗어나기 십상이다. 특히 갈림길에선 눈을 더 부릅떠야 한다. 예전에 북아프리카 모로코 지역 사하라 사막에서 길을 잃은 선수가 보름 만에 알제리에서 구조된 적도 있다. 물론 주로에는 7~12km 간격으로 CP 가 설치된다. CP는 이탈 선수를 파악하고 물 공급, 기록 체크 그리고 선수들의 휴식 공간이다. 그런데 요즘은 선수들이 CP에서 물 보충하느라 잠시 머뭇거리긴 해도 쉬어가는 모습은 보기 드물다.
너무 힘들면 만사가 귀찮고 입맛이 없다. 체력의 한계는 외부환경 보다 어깨를 찍어 누르는 배낭의 하중 때문에 더 크게 느껴진다. 선수들이 하루 2000kcal 열량이 포함된 7일 치 식량과 생존을 위한 나침반, 칼, 라이터, 안티배넘 펌프, 응급세트 킷, 침낭, 깜빡이, 랜턴, 서바이벌 블랑켓, 선크림, 코펠, 방한모, 치약과 칫솔, 여벌의 옷과 양말 같은 선택장비를 레이스 기간 내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기면 패널티를 받거나 실격 될 수 있다.
종일 달리다 캠프에 들어오면 2L 물통 3개를 받아 들고 배정된 텐트로 찾아간다. 첫날부터 고된 일정을 소화하느라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어깨가 부서질 듯 아프다. 그렇다고 누워만 있으면 낭패 보기 십상이다. 온몸에 찌든 흙먼지와 소금기를 닦아내고, 발가락 물집도 치료해야 한다. 그날 레이스의 강평과 다음 날 코스에 대한 브리핑도 들어야 한다. 숨 돌릴 겨를이 없다. 다음날 필요한 식량을 챙기고, 장비도 재정비해야 한다. 레이스는 체력 싸움이다. 저녁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 먹히지 않으면 억지로 라도 욱여넣어야 한다. 그래야 내일 또 달릴 수 있다. 사막에서 취사 연료는 마른 낙타 똥이나 잡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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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격이다. 온종일 일정한 자세로 달리느라 굳은 근육을 풀어주는 스트레칭도 빼놓을 수 없다.
석양이 붉게 물들고 나면 금세 캠프 주변에 어둠이 깔린다. 이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온다. 지금 캠프에 무사히 들어온 것에 감사하고 다음 날 레이스를 상상한다. 이제 막 달리기 시작했건만 집으로 돌아 가는 여정과 일상의 단면이 머리에 맴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내게 묻기도 한다. 절대 고독에 빠지면 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피로가 엄습할 때 나는 이미 잠에 빠져 있다. 사막의 하루가 길고 고단하지만 어디 일상만 할까. 사막의 환경이 위험하지만 어디 우리 사는 사회만 할까. 사막을 달리는게 힘들지만 그래도 어디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 할까.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고층 빌딩 숲, 넘쳐나는 차량,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인파들로 북적이는 대도시는 늘 활기차고 생명력이 넘친다. 하지만 두 얼굴의 야누스처럼 그늘진 도시 뒷골목에 발을 들이면 초라한 빈민의 모습과 인면수심의 사건 사고가 판을 친다. 레드카펫 행사에 초대받은 명배우의 환한 웃음, 에베레스트 정상에선 산악인의 포효,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든 취업준비생의 감격에 찬 모습은 하나같이 환희가 넘치지만, 그들이 지나온 과거의 이면에는 처절했던 인고가 배어있다.
그간 17년 동안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다녔다. 사하라 사막을 시작으로 고비 사막을 건너 그랜 드캐니언과 피쉬리버캐니언을 넘었다. 호주 대륙과 부탄 파로계곡을 넘고 우유니 사막과 아타카마 사막을 건넜다. 인도와 스리랑카 정글을 뚫고 히말라야 임자체 목전까지 올랐다. 어림잡아 6,400km가훌쩍 넘는 거리를 달렸다. 장도에 오를 때마다 매번 완주하고 왔지만 대가 없이 피니시 라인을 밟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뿌린 만큼 거둔다. 체력 유지를 위해 때로는 억지로 운동을 하기도 하고, 회식 자리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로 술잔을 피할 때도 있다. 휴가를 얻기 위해 상관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참가비와 항공료 등 경비 마련 부담도 만만치 않다.
사막과 오지, 정글과 고지에서 겪는 여정은 더 가혹하다. 모래와 오아시스가 어우러진 사막의 석양 노을, 녹음 짙은 밀림과 거대한 협곡, 입이 떡 벌어지는 대자연의 장엄한 풍광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황홀하다. 하지만 그곳에는 늘 예상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무원고립의 주로를 달리다가 수시로 찾아오는 체력의 한계와 물집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건 오로지 나만의 몫이다. 완주의 목전에 피니시 라인을 향해 뛰는 사진은 만인의 부러움을 사지만 사진을 확대해 보면, 검게 그을린 피부에 흙먼지와 땀으로 찌든 몰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010년 10월, 15명의 한국 선수들을 이끌고 출전했던 이집트 사하라 사막 260km 레이스는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무대였다. 단 한 명의 낙오 없이 출전자 모두를 완주시키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미션 완수 후 환호 속에 피니시 라인을 밟았지만 나는 그만 녹초가 되고 말았다. 쌓인 피로는 레이스 내내 발목을 잡았다. 레이스 4일과 5일째인 95km 롱데이 구간에서 졸음에 취해 휘청거리며 잠꼬대까지 하다 벼랑으로 떨어질 뻔했으니 말이다. 출국 전 수개월 전부터 레이스 종료 마지막 순간까지 출전자들의 궁금증에 답해주고, 무사 완주에 대한 책임감은 큰 부담이었다.
2013년 11월, 7년 만에 시각장애인 이용술 씨의 손을 잡고 캄보디아 정글 220km를 달렸다. 밀림 속늪지에서 폐허가 된 유적지의 돌무더기와 지면 위로 드러난 거대한 나무뿌리를 수시로 넘나들어야 했다. 레이스 둘째 날부터 용술 씨의 발바닥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휘청거릴 때마다 그의 손목을 더욱 굳게 움켜잡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로를 인도하고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정도였다. 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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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 전체로 퍼져가는 그의 물집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도 용술 씨는 지옥의 길을 뚫고 피니시 라인이 있는 시엠랩의 앙코르 와트로 들어섰다. 고난의 여정을 이겨낸 그의 모습은 너무 당당했지만 핏물로 가득한 물집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두 아들의 아버지이고, 아내의 남편이다. 회사에선 어느덧 관리자가 됐지만, 이따금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평범한 직장인이자 소시민이다. 사막과 오지의 당차고 용감한 모험가이지만 일상에서 나는 종종 이유없이 슬프고 외롭다. 주변에 을은 없고 갑만 존재한다. 다 큰 아들 녀석의 눈치를 봐야 하고, 가정보다 직장의 업무 일정에 맞추는 것에 익숙하다. 강인함 뒤엔 두려움이 있고, 웃음 뒤엔 씁쓸함이 있다. 늦은 저녁 밥상에 반주 한 잔을 이해 못 하는 아내의 눈총에 의기소침하는 참 소심한 슈퍼맨이다. 여전히 누군가의 을의 처지인 건 변한 게 없다.
그래서일까. 인생은 힘들고 늘 벅차다. 학업도 생계도 심지어 쉬는 것도 힘들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라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불평할 필요는 없다. 현실을 견뎌내는건 목표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 일이 힘들어도,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 와도 문제는 대부분 지나가기 마련이다. 최선을 선택할 것 같지만 차선을 택하고, 어떤 순간에는 포기도 한다. 때론 포기도 지혜로운 선택일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처한 현실에 합당한 대안을 찾아내는 본능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지나온 인생은 하나하나가 소설이고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힘들었던 일도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추억에서 얻은 힘은 오늘의 시련을 이겨내는 용기와 선택의 원천이 된다. 사막과 오지를 달리기 위해 시간과 돈과 체력을 들였지만 나는 용기와 인내와 사랑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얻었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만 진짜 소중한 순간들은 가까이서나, 멀리서 보나 감동이 짙게 밴 희극인 것이 분명하다. 발바닥 전체를 덮은 용술 씨의 물집이 흉측해 보이기보다 나는 그 모습에서 용기와 희망을 보았다.
한계 :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울룰루로 힘들면 누구나 요령을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 혹은좀 더 쉬운 길을 찾아 이리 저리 몰려다니기도 한다. 오지 레이스의 단면에도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 있다. 경기가 진행되면 코스와 여정이 너무 힘들다 보니 선수들은 주로를 이탈해서 지름길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정해진 룰을 부정하며 경기 운영진에게 되레 화를 내기도 한다. 때로는 애써 경기를 포기할 핑계를 찾기도 한다.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았기에 강해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피니시 라인에 도착한 완주자에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2011년 5월, 호주 노던준주 엘리스 스프링스에 전 세계 오지 마라톤 분야 23명의 최강자가 모여 열흘간 560km를 달리는 지구상 최장의 레이스가 열렸다. 11개 국가에서 모여든 선수들은 토트 몰에서 합류해 비박(텐트를 사용하지 않고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밤을 지새는 것) 장소로 함께 이동했다. 코스는 엘리스 스프링스에서 호주의 정중앙에 있는 에어즈 록까지 광활한 대지와 능선, 호수와 협곡을 가로질러 열흘 밤낮을 달려야 했다. 레이스 첫째 날,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선수들은 마치 스프링처럼 전방을 향해 튕겨나갔다. 레이스는 가파른 산 능선과 협곡을 오르내리는 마운틴 코스로 시작됐다. 멀리 보이는 호주의 산야는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가까이 다가선 즐비한 암벽과 잡풀들은 칼날처럼 독이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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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을 위협했다. 종아리가 날카로운 바위에 스칠 때마다 살점이 사정없이 긁혀 나갔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하중에 선수들은 휘청거렸다. 걸어서는 제한 시간에 걸려 결코 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낮에는 살을 녹이는 열기와 파리 떼로, 밤에는 추위와 들짐승들의 엄습에 몸을 사렸다. 레이스가 계속될수록 몸은 부서지고, 인간의 감성은 사라져 생존 본능만 남았다. 출발 이틀 만에 네 명의 선수가 제한시간을 넘기거나 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했다. 탈락 자가 속출하자 운영본부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레이스 거리를 530km로 단축했다.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로 온 대지가 뜨겁게 타들어 가고, 목덜미와 종아리도 함께 익어갔다. 임도와 계곡, 강변과 하상을 따라 푸석한 흙먼지가 끊이지 않는 Bed River 코스가 이어졌다. 선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먹고, 살아남기 위해 달렸다. 레이스 8일째에는 대지가 화염에 휩싸였다. 자연발화로 산불이 난것이다. 메케한 연기가 산야를 뒤덮었다. 불길은 주로 양옆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나는 두려움 조차 상실한 채 불기둥 속을 뚫으며 오로지 지평선 반대편에 있는 캠프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호주의 산야를 울리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거세게 울렸다.
매일 밤 캠프는 물집과 인대가 늘어난 부상 선수로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과욕이 부른 선수들의 최후는 극심한 고통과 상처로 얼룩졌다.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선수는 눈물을 머금고 레이스를 멈춰야 했다. 내 왼쪽 엄지발가락과 새끼발가락도 진작 죽어 발톱이 흐물거렸다. 진물이 흘러 양말이 흥건히 젖었다. 어디로 장소를 옮기든 캠프 주변은 늘 생쥐와 개미 떼로 들끓었다.
레이스 9일과 10일째, 지난 8일 동안 400km를 넘게 달린 터라 체내의 모든 진이 빠져버렸다. 이제 피니시 라인이 있는 에어즈 록을 향한 무박 2일의 129km만이 남았다. 에어즈 록은 호주 원주민들이 매우 신성하게 여기는 곳으로 ‘그늘이 지난 장소’라는 뜻인 울룰루로도 불렸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작두 위를 걷는 듯한 고통이 전신으로 전해져왔다. 포기하고픈 유혹이 다시 꿈틀거렸다. 비틀거 리는 내 안에는 ‘이만 포기하자’는 목소리와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가자’고 격려하는 또 하나의 내가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실낱같이 남아 있는 희미한 의식마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높은 빅듄을 기어오르거나 울퉁불퉁한 광야의 자갈길을 달릴 때 머리는 곧게 가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다리는 좀 더 편한 길을 좇아 갈 지(之) 자로 왔다 갔다 했다.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니 지렁 이가 기어 온 것처럼 가관이었다. 편하게 걸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오래 걸리고 힘들게 달려온 것이다. 배낭 속 장비와 한 톨 남은 잡념까지 모두 던져버리지 않고는 완주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마지막 남은 침낭과 태극기 중에 침낭을 덜어 냈다. 그래도 덜어낼 때의 간절함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았기에 힘들지만 정도(正道)를 선택했다.
이제껏 이보다 더 혹독한 레이스는 없었다. 23명의 출전 선수 중 17명만이 완주를 이뤄낸 죽음의 레이스. 선수 모두 냉철한 자기 통제와 절제가 없었다면 완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한계는 넘어 서라고 존재하는 경계일 뿐이다. 기다리는 자의 몫은 없지만 저지른 자의 몫은 분명 있다. 그러니 무엇이든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도전하는 자, 인내하는 자 그래서 한계를 넘어서는 자 만이 그에 걸맞은 결실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봄 : 사막에서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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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건너는 법, 인생을 사는 법손을 씻다 세면대 앞에 걸린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에 비친 얼굴 뒤로 끝없는 사하라의 모래언덕이 펼쳐졌다. 몸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데 모래와의 사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2010년 10월, 3명이 팀을 꾸려 도전을 감행했던 260km 사하라 레이스 5일째 밤, 김지산 기자가 잠에 취해 비틀거 리는 나를 부축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사막의 밤 한가운데 맥없이 주저앉았다. 더 지치기 전에 미쳐야 한다. 미치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아무나 올 수 있지만 누구나 건널 수 없는 곳이 사막임을 실감했다. 누구든 사막과 오지로 뛰어들 때는 자신감이 넘친다. 하지만 대자연에 묻혀 오지를 넘나드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체력의 한계에서, 예측할 수 없는 대자연 광기 앞에 초라해지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니 사막이나 오지를 온전히 건너고 싶다면 다음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
쉬어가라: 레이스가 시작되면 대부분의 선수는 혹독한 대자연에 압도되어 첫날부터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다. 호기를 떨거나 자신의 체력을 과신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2013년 5월, 6일 동안 빗속을 뚫으며 히말라야 동부의 부탄, 푸나카의 산야 200km를 오르내렸다. 고통은 겪어봐야 이겨낼 수 있다. 길은 잃어봐야 찾을 수 있다. 수시로 찾아오는 근육경련에 온몸은 오그라들었다. 기어오르는 길목 에서 수없이 개울에 몸을 처박고 다시 일어섰다. 주로에 10~15km 간격으로 CP가 설치되어 있는 건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주로를 이탈한 선수를 확인하고, 부상과 피로에 지친 선수들의 쉼터이다. 조금 빨리 가려고 CP를 무시하고 지나치면 화를 자초한다. 해발 3,100m의 파로 계곡 건너편에 주저앉아 거친 호흡을 토해냈다. 앞질러 가는 선수들의 뒷모습이 계곡 아래로 멀어져갔다. 목 위까지 찬 숨을 고르자 계곡을 휘감은 물안개가 갈리면서 장엄한 타이거네스트 사원이 위용을 드러냈다. 자신의 체력을 인정해야 한다. 앞서가는 선수에 의기소침할 필요도 없다. 빨리 가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함께 가라: 사막이 좋은 이유는 홀로 온밤을 지새우며 절대고독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때론 자신을 성숙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혼자 갈 수 있어도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사막이고 오지다. 위기의 순간을 만날 때, 홀로 견디기보다 동반자를 만나 함께 가라. 힘들 때 누군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격려가 된다. 때로 누군가의 어깨에 잠시 머리를 기대는 것이 흠은 아니다. 2012년 그랜드캐니언에서 나는 어깨에 기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거인을 만났다. 그랜드캐니언과 시온캐니언의 대협곡을 넘나들던 270km G2G 레이스에서 나는 급격한 체력 소진으로 경기를 포기할 뻔했다. 하지만 70세 고령인 이무웅 어르신을 만나 용케 무박 2일의 76km 롱데이 구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27시간 동안 그는 나를 재촉하지도, 내버려 두고 떠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 옆을 지켜줄 뿐이었다. 그러니 사막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손을 뻗거든 조건 없이 그의 손을 잡아줘라. 그는 당신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포기하지 마라: 사막 레이스에서 선수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점점 커지는 발가락 물집과 예측할 수없는 대자연의 엄습, 그리고 특히 어깨를 찍어 누르는 배낭의 무게다. 배낭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 선수는 몰래 자신의 식량을 모래 속에 버리거나 경기를 포기할 궁리를 찾는다. 위험해서 포기하고 겁이 나서 포기한다. 나도 때론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2009년 시각장애인 송경태 씨와 갔던 나미브 사막에서 된서리를 맞은 적이 있다. 무박 2일 동안 100km를 달리던 구간에서 제한 시간에 걸려 탈락 위기를 맞았다. 기다시피 80km지점까지 왔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3시간 남짓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도 포기하지 않았다. 저승사자처럼 그의 손목을 움켜잡고 사력을 다해 내달렸다. 신은 분명 인간이 극복할 만큼의 고난을 준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으면 못 이룰 것도 없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 숨고를 여유가 필요하다. 멈춤은 결코 안주가 아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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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도약이다. 불능독성(不能獨成), 세상에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험난한 여정에서 서로 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동반자가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피할 수 없는 위기의 순간과 맞닥뜨릴때 포기하지 않고 잘 견뎌낸다면 훗날 성공한 모험가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막 이든 일상이든 살아남는 방법은 매한가지다. 어쩌면 일상이 사막보다 더 가혹할지 모른다. 남은 인생에 곁눈질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진짜 퇴보다. 굳이 사막을 건너지 않더라도 이 세 가지 방법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막에서 길을 묻다 사막 한가운데서 밤을 지새우며 달릴 때 나는 북극성을 주로 본다. 북극성을 보고 길을 나서면 잠시 길을 벗어날 수 있어도 방향은 잃지 않는다. 그러니 길이 없는 사막에도 무수한 길이 있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이라도 내가 갈 방향을 잃지 않으면 더디 가거나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 대자연에 몸을 맡기면, 아등바등 살았던 일상의 나는 잠시 거인이 된다. 나를 관조하는 여유까지 생긴다. 멈추면 보이는 것이 훨씬 많다.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사막의 모랫바닥을 조금 유심히 들여다보면 문명사회만큼이나 냉혹한 약육강식의 세계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살기 어린 전갈, 종족을 뜯어먹는 메뚜기 떼, 불개미 머리에 알을 낳아 자양분을 빨아먹고 머리를 잘라버리는 기생파리, 건기의 사막은 미물들의 생존을 더욱 위협한다.
거북 등짝을 드러낸 우물, 곳곳에 널브러진 동물 사체, 뿌리째 드러낸 관목들. 하지만 그 속에서 생명은 태동한다. 그러니 생존의 기술을 터득한 생명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사막이고 오지다.
진정한 인내: 2003년 4월, 난생처음 찾아가 맞닥뜨린 사하라 사막은 설렘과 두려움 그 자체였다.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모래폭풍을 견뎠고, 밤에는 추위와 졸음을 참아내며 자갈밭 광야와 모래능선을 따라 5박 7일 동안 243km를 달렸다. 쏟아지는 태양열에 종일 전신에 땀 줄기가 흐르고,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하중으로 터진 발가락 물집이 늘어났다. 이쯤 되면 선수들은 그늘을 찾고, 지름길을 찾는데 온 신경이 집중된다.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식량과 장비를 내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캠프에 들어오면 힘겹게 달려온 만큼 풍성한 만찬을 즐길 수 있다. ‘네 어깨의 짐을 쉽게 내려놓지 마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갖가지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내면 그에 걸맞은 소중한 결실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다.
선택의 지혜: 처음 사막으로 향할 때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미친 짓을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아내마저 이해하지 못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사막의 밤에 주로를 이탈하게 되면 극도의 긴장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2005년 7월, 시각장애인 이용술 씨와 함께 찾아 들어간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252km 레이스는 지옥의 길이었다. 지구상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소금사막, 표식도 없는 갈림길에서 생존을 위해 숱한 고민에 빠져야 했다. 하지만 내가 믿고 내가 선택한 길을 갔다. 신념이 때론 진리 위에 설 수도 있다. 인생의 매 순간도 선택의 문제에 직면한다. 셰익스피어는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최대한 주변 사람의 말에 경청하라! 하지만 결정은 스스로 하라’고 했다. 물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될 경우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설사 그 결과가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더라도 후회 없는 삶과 더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정도를 가라: 암벽에 긁혀 종아리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자연발화로 화염에 휩싸인 호주 대륙의 산야를 뚫고 달렸다. 2011년 5월, 세계 각국에서 출전한 23명의 최강자와 함께 호주 엘리스 스프링스에서 울룰루까지 8박 10일 동안 530km를 달렸다. 레이스가 계속될수록 부상 때문에, 혹은 지름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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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경기를 포기하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레이스가 종착점으로 치달을수록 발바닥은 작두 위를 걷는 듯한 고통이 따랐다. 작은 돌멩이만 밟아도 찢어지는 발바닥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레이스 10일째 새벽녘, 멀리서 울룰루가 위용을 드러냈다. 이제껏 500km를 넘게 달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주로 위에 있었다. 순간 가까워 보이는 길을 선택하고 싶은 유혹이 일었다. 하지만 한계의 경계에서 몸이 흔들릴 때마다 희미한 울림이 귓전을 때렸다. ‘그래도 정도를 가라!’ 남보다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힘들고 버거워도 나는 정도를 갔다.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신이 우리 사회의 네비게이션입니다!’라는 주변의 격려는 나를 올곧게 살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모래뿐인 황량한 사막에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건 무척 많다. 모래에서 사금을 걸러내기도 하지만 사막에는 황금보다 더 소중한 지혜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누구든 인생을 살다 보면 크게 낙담하거나 좌절을 경험한다. 사막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의 단면을 보면 사막이나 일상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어쩌면 문명사회가 더 치열하고 처절할지도 모른다. 힘겨웠던 사막 레이스의 기억은 차츰 희미해져 가지만 그 여정에서 얻은 삶의 지혜는 나의 삶을 더 강하고 풍요롭게 하는 밑거 름이 되었다.
사막과 오지에서 펼쳐지는 극한의 레이스는 올림픽 경기처럼 온 국민을 열광시키지 않는다. 대회 규모가 성대하지도 않다. 언론과 방송에서도 별반 관심이 없다. 목숨을 담보로 혼신을 다해 목에 걸린 묵직한 완주 메달도 올림픽 메달처럼 부와 명예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달려온 이 레이스를 아직은 멈추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달려갈지 그 끝도 알 수 없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 도전과 열정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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