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철 지음 / 빈티지하우스
이 책은 스포츠 브랜드 기업인 나이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비즈니스 통찰을 소개한다. 저자는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변화는 이전보다 훨씬 거대하면서도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올 것이기에, 우리는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처럼 앞으로 계속해서 스스로 학교를 짓고, 스스로 학생이 되어,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해나 가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그러한 과정의 예로 나이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통찰을 소개한다.
나는 하버드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나이키에서 배웠다
▣ Short Summary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가 수백 년에 걸쳐 이뤄온 변화를 단 70년 만에 이뤄낸 나라다. 때문에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변화에 대해 학습하고 대처 해나가야 했다. 문제는 앞으로 변화가 계속될 것이고, 우리에게 닥칠 변화는 이전의 변화보다 훨씬 거대하면서도 더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때, 과거의 기억이나 학교에서 받은 교육 또는 기존 선배의 경험 등에만 의존하여 새로운 지식 정보의 습득과 자기학습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 역시 시대가 바뀔 때마다 사라져갔던 많은 것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한편 폭넓은 지식과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된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저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는 2~3년의 기간을 두고 관심이 가는 주제를 택해 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기분으로 공부를 합니다. 통상 그 정도면 대학생들이 자신의 전공을 듣고 학부를 마치는 기간이지요. 그렇게 수십 년째 저는 ‘스스로 학교를 짓고, 스스로 학생이 되어’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해왔습니다.”
참고로 번트 슈미트 컬럼비아대학교 교수는 마케팅3.0 시대에 기업의 성공은 ‘얼마나 많은 고객을 기업의 경영에 참여시키느냐’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즉, 더 큰 마케팅 효과를 거두려면 고객들을 적극 적으로 기업의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하는데, 그의 주장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가 바로 나이키다. 나이키를 나이키의 직원보다 더 잘 알고, 아끼고, 사랑하는 수백만 명의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유통업자, 1인 매장이 되어 전 세계에 나이키 제품을 알리고, 판매하고, 유통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스포츠 브랜드 기업인 나이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비즈니스 통찰을 소개한다. 저자는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변화는 이전보다 훨씬 거대하면서도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올 것이기에, 우리는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처럼 앞으로 계속해서 스스로 학교를 짓고, 스스로 학생이 되어,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해나 가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그러한 과정의 예로 나이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통찰을 소개한다.
- 2 - 나는 하버드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나이키에서 배웠다
▣ 차례
Prologue 세상 모든 곳의 MBA
첫 번째 강의 - 나이키를 택한 이유 : 나는 홰, 하필, 나이키를 택했을까?
두 번째 강의 - 나이키 히스토리 : 그 대단한 운동화 회사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세 번째 강의 - 나이키의 현장 증시 제품 전략 : 탁월한 제품과 서비스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네 번째 강의 - 나이키의 협업 전략 : 에어조던의 전설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다섯 번째 강의 - 나이키의 고객 활용 마케팅 전략 : 도대체 쓸 만한 물건은 누가 만드는 걸까?
여섯 번째 강의 - 나이키의 고객 동기화 전략 : 그들이 고객과 나누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곱 번째 강의 - 나이키의 고객 활용 전략 : 왜 멀쩡한 손님들끼리 싸우게 만들까?
여덟 번째 강의 - 나이키의 브랜드 전략 : 왜 Just Buy It이 아닌 Just Do It를 강조했을까?
아홉 번째 강의 - 나이키의 광고 모델 전략 : 왜 누구에게는 사람이 몰려서 난리, 누구에게는 사람이 없어서 난리일까?
열 번째 강의 - 나이키의 조직 관리 : 나이키 팀은 왜 특별히 더 강했을까?
열한 번째 강의 - 나이키의 스토리텔링 마케팅 : 그들은 위기의 순간에 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 었나?
열두 번째 강의 - 나이키의 가치 창출 경영 : 남들 다 빠진 함정에 어떻게 그들은 빠지지 않았을까?
열세 번째 강의 - 나이키의 변화 경영 : 그들은 왜 현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칠까?
열네 번째 강의 - 나이키의 잠재고객 확보 전략 : 왜 잘 보이는 고객을 두고, 애써 보이지 않는 고객을 찾아 헤맬까?
열다섯 번째 강의 - 나이키의 공간을 활용한 경영 전략 : 그 넓은 땅에 왜 사옥 대신 개학을 지었을 까?
열여섯 번째 강의 - 나이키의 디지털 활용 전략 : 왜 애써 쌓은 담장을 무너뜨렸을까?
열일곱 번째 강의 - 나이키의 미래 준비 전략Ⅰ : 그들은 왜 경쟁의 판을 뒤집었을까?
열여덟 번째 강의 - 나이키의 미래 준비 전략Ⅱ : 왜 굳이 4차 산업혁명, 그 맨 앞에 섰을까?
열아홉 번째 강의 - 나이키의 지속가능 경영 전략 : 그들은 왜 또 세상을 뒤바꾸려 하는가?
스무 번째 강의 - 수료식 : 운동화 한 켤레만 있다면, 나만의 MBA를 만들 수 있다
참고 문헌
- 3 - 나는 하버드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나이키에서 배웠다
나는 하버드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나이키에서 배웠다
세상 모든 곳의 MBA
내 어머니는 건강체에 만능 스포츠우먼이셨다. 그랬던 어머니가 수영을 마치고 잠실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 쓰러지셨다. 이 무렵 내겐 계획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미국의 경영대학원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입사 후 바로 MBA 진학 준비에 착수했는데, 당시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저녁 9시 30분까지 귀가해서는 씻고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3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새벽 1시에 일어나 4시까지 월, 수, 금요일은 어학 테스트인 토플을 준비하고, 화, 목, 토요일은 미국이나 유럽 등지의 MBA 입학을 위해 필수적인 시험인 GMAT를 준비했다. 이후 잠깐 허리를 좀 폈다가 새벽 4시부터 30분간은 오답노트를 작성했다. 이후 30분간 출근 준비를 한 뒤, 5시 21분에 집 앞 구의역에서 출발하는 2호선 첫차를 타고 강남역 IKE이익훈 어학원으로 갔다. 6시에 학원 강의실에 도착해서는 30분정도 기출단어 중심으로 영어단어 공부를 한 뒤, 1시간 50분간 토플 종합반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는 뛰어서 사무실에 출근하면 대략 8시 40분쯤이 되었다. 오전 업무를 본 뒤 아침에 사온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고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GMAT 과목 중 수리영어 문제를 집중적으로 풀었다. 그리고 오후 일과를 본 뒤 9시 30분까지 퇴근하고 10시에 잠들었다 그렇게 1년하고 6개월을 살아냈다.’
그 결과 꽤 괜찮은 미국 MBA에 진학할 수 있을만한 토플과 GMAT 점수를 확보했고, 그 성적표들을 들고 막 “엄마, 저 유학 다녀올게요!”라고 말하려는 즈음에 엄마가 쓰러져버리신 거였다. 그런 엄마를 두고 유학을 다녀오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학 포기하자. 그리고 MBA가 별거야? 지난 1년 반 공부한 것처럼만 하면 독학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책은 구해서 읽으면 되고 케이스 스터디거리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널려있고…. 토론이 필요한 건 대학 교수든 기업체 회장이든 찾아가서 인터뷰도 하고 그러면 될 거 아냐. 또 커리큘럼은 인터넷에 다 떠 있잖아.’
그렇게 하여 상위 10개 MBA의 커리큘럼을 참고하여 나만을 위한 2년, 4학기 분량의 커리큘럼 시간표를 완성했다. 다음은 각 과목별로 공부 방법을 정하는 일이었다. 그건 생각보다 더 간단했다. 해당 과목별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 그들에게 편지를 적어 보냈는데, 어느 교수님은 학습에 필요한 도서와 논문을 추천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수업에 사용했던 케이스 스터디 자료집을 페덱스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그런 세계적인 석학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다시 2년, 4학기를 더 공부 했다. 그런 그 동안의 공부를 통해 내가 습득한 놀라운 능력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 학습해야 할 콘텐츠, 활용할 수 있는 정보들을 뽑아내는 능력이다.
덕분에, 20년간 취미 삼아 방문했던 전 세계 수백 군데의 미술관들로부터 경영학적 지식과 교훈을 뽑아내 『미술관 옆 MBA』라는 책을 집필했고, 동양고전 『중용』을 갖고도 비슷한 작업을 해서 『중용의 연장통』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관련 내용을 기업체 등에 강연할 수 있었으며, 비슷한 작업을 통해 국내는 물론 중화권을 포함해 스물 하고 몇 권 더 되는 책들을 출간할 수 있었다. 이제, 그 촉을 새로운 곳에 꽂으려 한다. 30여 년간 내 마음속 최고의 운동화였고, 마이클 잭슨, 코카콜라와 함께 우리 일상에 늘 함께하면서도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이름, 나이키가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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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히스토리 - 그 대단한 운동화 회사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본격적으로 나이키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필 나이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태어난 그는 달리기를 잘하는 소년이었다. 학교 코치의 눈에 띈 그는 육상부로 유명했던 클리 블랜드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중거리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고, 지역 명문이자 강한 육상팀을 보유했던 오리건대학교에 진학해서도 그는 계속 육상 선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사실 이게 맞는 것일 수도…) 나이트는 공부도 열심히 했다. 육상 훈련과 대회 출전을 병행하면서도 1959년 오리 건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프랭크 쉴렌버거 교수의 ‘소규모 창업론’이었다. 평생토록 트랙 위에서 경쟁자보다 단 1초라도 먼저 결승점에 들어오는 것을 목표로 살았던 그에게, 정해진 코스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승점을 정하고, 트랙 자체를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살아야 하는 기업가의 삶에 대한 강의는 감동 그 자체였다.
1962년에 경영학 석사를 마친 후 공인회계사 겸 포틀랜드주립대학교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던 나이트의 석사 논문 주제는〈일본의 카메라가 독일의 카메라에게 했듯이(경쟁하고, 넘어섰듯이) 일본의 운동 화도 독일의 운동화에게 그럴 수 있을 것인가?〉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일단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오니츠카타이거 본사를 찾아가 자신을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딜러 중 한 명이라고 허풍을 떤 뒤 오니츠카타이거의 판권을 달라고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미국 전역에 대한 독점 판권을 취득한 그는 1964년 블루리본스포츠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이 거창해서 창업이지, 일본에서 보내준 물건을 받아다가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파는 행상에 지나지 않았다.
패전국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고정관념 탓에 초기에는 판매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나이트가 들여온 질 좋은 일제 운동화는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첫해 8,000달러를 벌어들인 그들은 2년 뒤에 첫 번째 단독 매장을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열게 되었고, 그 성장 속도는 이후 그들 스스로가 무섭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나이트와 동업자들, 그리고 블루리본스포츠는 독자적인 브랜드의 신발을 조금씩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고, 그런 움직임을 눈치 챈 오니츠카타이거는 계약 위반을 들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이때가 기회’라는 듯 먼저 계약 해지를 선언하고 1971년 독자적인 브랜드를 내세운 회사로 변신했다. 그 회사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학습하게 될 나이키다.
나이키의 현장 증시 제품 전략 - 탁월한 제품과 서비스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와플 팬으로 신발을 굽다 현재 나이키의 밑창은 고성능 컴퓨터를 활용해 정교하게 디자인되고, 실제 제품화에 앞서 첨단 3D 프린터를 활용해 시제품을 만든다. 그 뒤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한 실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만족할만한 데이터 값을 얻은 제품만이 대량생산되어 시장에 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 첫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런 대단한’ 나이키의 밑창은 ‘누군가의 집’ 주방에서 시작됐다. 1970년 어느 아침이었다.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기다리던 나이키의 공동창업자 빌 보워만의 눈에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 보워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내의 손에 들려있던 주방기구를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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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달라고 해서는 그 길로 회사 작업실로 뛰어갔다. 그 무렵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신발 밑창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단거리 선수들은 폭발적인 가속도를 내기 위해 스타트 후 최초 열 걸음 이상은 발에 엄청난 부하가 걸릴 정도로 내딛어야 했고, 장거리 선수는 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발에 무리를 가하며 뛰어야 했는데, 이들에게 보다 완벽한 쿠션을 주고 싶었던 보워만은 온갖 종류의 소재로 이런저런 디자인의 밑창을 만들어봤지만 영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아내의 손에 쥐어진 주방도구, 바로 와플을 만드는 무쇠 팬을 발견한 것이었다.
보워만은 아내에게 빌려온 와플 팬을 틀 삼아 여러 가지 소재를 녹여 부어 밑창을 만들어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냥 평범한 밑창 소재를 발 모양으로 잘라서 만든 밑창에 비해 올록볼록한 와플 팬에 재료를 부은 뒤 굳혀서 만든 밑창은 훨씬 덜 미끄러웠고, 발에 가해지는 충격도 훨씬 덜했다. 몇 가지 소재를 더 구해 실험을 거친 뒤 밑창의 모양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밑창은 이후 나이 키에서 출시된 대부분의 신발에 장착되었다.
나이키의 역사는 곧 중력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1979년 당시, 나사 엔지니어 출신 신발 개발자였던 프랭크 루디는 인체, 특히 발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온갖 소재들을 사용 해서 이리 겹쳐보고 저리 더해봤지만 원하는 수준의 충격 흡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충격을 흡수하는 소재들은 많았지만 그 재질이 대부분 말랑말랑해서 그 소재로 만든 밑창을 달고 조금만 오래 달려도 밑창이 찢어지거나 내려앉아 두께가 반으로 줄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루디는 풍선을 깔고 앉으면 푹신푹신한 기분이 드는 것에서 착안하여 ‘탄성이 좋은 튜브 안에 공기를 주입한 뒤 밀봉해서 충격을 가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험대로라면 충격을 흡수 분산한 뒤 다시 원상대로 복귀할 것이며, 그것을 신발의 밑창으로 사용한다면 원하는 수준의 쿠셔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루디는 곧바로 시제품 제작에 착수했다. 질긴 비닐로 튜브를 만든 뒤, 그 안에 질소 가스를 충전시키고 입구를 밀봉하는 방식으로 밑창을 제작했다.
테스트 단계에서 튜브가 터지는 바람에 개발이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열경화성 수지가 아니라서 지나치게 단단하지도 않으면서 유사한 3차원 구조를 지니고 있어 질기고 화학약품에 잘 견디며, 신축 성까지 좋은, 그러면서 값도 비싸지 않은 폴리우레탄이라는 최상의 재료를 찾아내면서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결국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러닝화인 테일윈드 제품의 밑창에 처음으로 이 쿠셔닝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밑창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공기(air)’가 들어간 ‘밑창(Sole)’이라는 뜻의 ‘에어솔(Air Sole).’이었다. 이후 40여 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쿠셔닝 시스템이자 진화를 거듭해 현재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쿠셔닝 시스템으로 평가받고 있는 ‘나이키 에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스포츠는 진화한다. 쿠셔닝도 함께 진화한다 초기에는 뒤꿈치 부분에 작은 크기의 에어솔을, 그것도 잘 보이지 않도록 밑창 안쪽에 적용한 제품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에어 시스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에어솔을 바깥에서 보이도록 하거나 아예 밑창 전체에 에어 시스템을 적용한 제품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진화를 거듭하던 에어 시스템은 1993
년이 되자 더욱 극적으로 발전했다. 다소 납작한 형태였던 에어 튜브를 더 크게 만들고 보다 고압의 압축 공기를 밀어 넣어 쿠셔닝을 극대화시킨 맥스에어(Max Air)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1987년도에 최초의 라인업이 등장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에어맥스 제품 라인은 맥스에어 시스템을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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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에 적용한 제품들을 선보이면서 그야말로 초대박을 치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까지도 나이키가 만들어낸 제품 중 가장 히트한 제품을 꼽으면 늘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에어맥스95’였다.
보다 나은 쿠셔닝을 제공하기 위한 나이키의 노력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95년 나이키는 줌에어(Zoom Air)라는 신기술을 선보였다. 맥스에어가 두꺼운 튜브에 고압의 공기를 주입하다 보니 더많은 쿠셔닝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반대로 신발이 발에 밀착되지 못하고 조금은 붕 뜬 느낌을 준다는 소비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두께는 얇으면서도 충분한 쿠셔닝을 얻을 수 있도록 한 기술이었다. 그인기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96년도 미국에서 치러진 애틀랜타 올림픽이었다. 줌에어를 장착한 농구화, 러닝화를 신은 미국 대표 선수들이 연일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연승 끝에 금메달을 획득하자 줌에어의 인기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줌에어가 시장에 완벽하게 안착한 1999년에는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쿠셔닝 시스템이 등장했다. 샥스(Shox)라고 불리는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러 개의 플라스틱 스프링이 신발의 밑창을 받치고 있는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스프링은 아니고 스프링처럼 기능할 수 있도록 탄력이 있는 소재를 기둥 모양으로 만들어 신발의 밑창을 지탱하는 방식이었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다소 이질적인 디자인 탓에 초기에는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지만, 기존의 줌에어를 더한 모델들이 출시되면서 나이키 쿠셔닝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쿠셔닝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변화를 거듭하던 나이키의 쿠셔닝 시스템은 최근 들어 밑창에 별도의 시스템을 삽입하는 형태에서 밑창을 이루는 소재 자체를 변화시켜 쿠션을 제공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탄력이 좋으면서도 어느 정도 강성을 지니고 있고 무게는 가벼운 루나 라이트 폼(Luna Light Form)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발바 닥의 특정 부위에 몰리는 압력을 발 전체로 고르게 퍼뜨려줌으로써 발의 부담을 줄이고 기능은 빠르게 회복시켜 주는 기술은 달을 뜻하는 라틴어인 ‘luna’에서 그 이름을 따온 이유를 설명해주듯 중력이 없다시피 한 달에서 걷는 것 같은 부드러운 쿠셔닝을 제공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신발은 공장이 아닌 운동장에서 만들어진다 나이키의 신발은 공장이 아닌 운동장에서, 기술자에 의해서가 아닌 실제 신발을 신고 뛰는 운동선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신발이 운동장에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는 믿음은 필 나이트와 빌 보워만이 처음 나이키를 세웠을 때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확고하게 지켜지고 있는 나이키의 믿음이다.
나이키의 협업 전략 - 에어조던의 전설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지금이야 나이키 농구화를 신지 않는 조던, 조던이 광고 모델이 아닌 나이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대학 재학 시절만 하더라도 조던은 아디다스 농구화를 주로 신었다고 한다. 그랬던 조던이 나이키의 모델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소니 바카로 라는 인물이다. 1939년 펜실베이니아 주 트래퍼드에서 태어난 그는 나이키의 농구 담당 마케터로 근무 하고 있었는데, 그의 주 업무는 향후 스타성이 엿보이는 농구 선수들을 발굴해 싼값에 모델로 기용하 거나, 나이키의 신발을 신고 경기에 나서도록 주선하는 역할이었다.
1984년 말, 나이키의 농구화를 신길 새로운 농구 스타를 구해오라는 지시를 받은 바카로는 지시를 내린 필 나이트 회장에게 “금액은 얼마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물음에 나이트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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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 “50만 불”이라고 대답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는 그다지 큰돈이라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 스타 마케팅이나 거액의 광고비용 집행에 인색했던 나이트 회장이었기에 ‘50만 불’은 대단히 큰금액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바카로가 나이트 회장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아직 학생 티도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선수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마이클 조던이었다. “프로 무대에서 아직 채 한 경기도 뛰지 않은 선수에게 50만 불을 지불하라니….”라며 나이트 회장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바카로는 단호했다. “이 선수는 지금 지불하는 돈의 몇 배, 아니 몇백 배의 수익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선수입니다. 그러니 50만 불을 몽땅 들여서라도 그와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결국 바카로의 실력을 신뢰했던 나이트 회장은 ‘풋내기’ 조던과 5년간 총 250만 불의 광고 모델 계약을 추진했고, 1985년 에어조던1 발매를 시작으로 ‘나이키의 광고 모델 마이클 조던’이라는 역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사실 에어조던1은 신발 공학적으로 혁신적이라거나 디자인적으로 뭔가 차별화된 특별한 신발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던이 그 신발을 신고 85년 데뷔 시즌 첫해 28.2점의 평균 득점을 쏟아 부으며 리그 신인왕까지 거머쥐자,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방영된 TV 광고도 인기에 불을 붙였다. 항공기가 이륙할 때 나는 엔진 소리를 배경음으로 조던이 코트를 질주한 뒤 높이 날아올라 덩크슛을 성공시키고서는, ‘누가 인간이 날 수 없대(Who said man was not meant to fly?)’라는 멘트로 끝나는 이 광고는 수많은 청소년들이 흉내를 내다가 부상을 당해 어른들이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지만, 나이키와 조던의 인기를 더욱더 치솟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에어조던1은 첫해에만 1억 3,000만 달러라는 매출을 올렸고, 나이키의 매출 역시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덕분에 1980년대 초반 리복에 밀려 고전했던 아픈 기억들을 잊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었다. 2년뒤인 1987년 에어조던2가 출시되었고, 다시 1년 뒤인 1988년도에 에어조던3이 출시되었다. 에어조던 3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에어조던1과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제품인데, 바로 나이키 팬들 사이에서 ‘에어 조던의 어머니’로 불리는 팅커 햇필드가 나이키에 합류해 처음으로 선보인 제품이기 때문이다.
이후 에어조던 시리즈는 광고 모델인 마이클 조던의 엄청난 활약, 디자이너인 햇필드의 천재적인 감성 으로 빚어낸 멋진 디자인에 힘입어 나오는 모델마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에어조던9가출시될 무렵인 1994년에 조던이 농구를 접고 야구 선수가 되면서 에어조던의 운명도 거기에서 끝날듯 싶었지만 이듬해 ‘다시 돌아온’ 조던이 새로 출시된 에어조던10을 신고 복귀전을 치르면서 다시금 에어조던 시리즈는 그 명맥을 잇게 되었다. 아니, 이전보다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조던은 2003년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했지만, 에어조던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고, 2008년 에어조던23을 끝으로 더이상의 에어조던 시리즈는 없을 거라는 예상이 팽배했지만, 2013년에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넘버링으로 에어조던28이 등장한 뒤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새로운 에어조던이 출시되고 있다.
초기에는 그저 단순한 유망주 광고 모델과 그를 고용한 광고주의 관계로 시작했던 조던과 나이키는 이후 경기장에서 그의 맹활약과 스포츠화시장에서 에어조던의 성공에 발맞춰 최상의 협업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나이키는 조던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어떻게 하면 그를 광고 모델로 잘 써먹을지’가 아니라, 그가 최상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도록 ‘어떻게 하면 그에게 적합한 농구화를 만들어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디자인을 총괄했던 햇필드가 “우리는 모두 마이클 조던을 위한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라고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에어조던 시리즈를 만들어갔다.
최상의 협업을 발휘한 것은 조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어조던3을 발매할 때까지도 여전히 조던은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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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화의 디자인에 불만을 품고 대학 시절 내내 신고 뛰어서 익숙했던 아이다스로의 이적까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후 생각을 고쳐먹은 뒤 디자이너들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자신의 생각을 에어조던의 기능과 디자인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에어조던은 단순히 유명 스포츠 스타의 이름만을 따서 상표로 붙인 제품이 아니라, 조던의 농구에 대한 생각과 정신이 담긴 명품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처럼 나이키는 협업의 가치를 잘 아는 기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협업에 성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역할을 하는 데 매우 헌신적인 기업이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제품에 담긴 가치를 광고 모델, 일반 소비자 들과 함께 공유하고, 그들이 제품에 바라는 욕구에 공감하고,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 공조했던 나이키는 조던과 함께 지금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나이키의 브랜드 전략 - 왜 Just Buy It이 아닌 Just Do It를 강조했을까?
많은 이들이 기업의 슬로건을 단순히 광고문구 정도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 개인의 좌우명이나 가정의 가훈, 학교의 교훈과 마찬가지로 기업에 있어서 슬로건은 그 기업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이키의 슬로건 ‘Just Do It’ 역시 그들 자신이 어떠한 기업이고,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매슬로에 의하면, 욕구라는 것은 위계를 갖춰 작용한다. 하위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 상위의 욕구는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신이 꿈꿔오던 삶, 자신이 원하는 육체적 능력을 갖추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려면 ‘자아실현의 욕구’가 발휘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존경의 욕구’가 먼저 충족되 어야 하고, 그전에 ‘애정과 소속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며, 그러려면 ‘안전의 욕구’는 이미 기본적으로 충족된 상태여야 하고, ‘생리의 욕구’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충족되어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떤가? 아침에 운동을 한번 시작하려면 가뜩이나 부족한 수면 시간을 단 몇 십분 이라도 줄여야 하고(생리), 위험천만한 어두운 새벽길을 달려야 할지도 모른다(안전). 새벽에 일어나려면 전날 무리를 하면 안 되니 술 한 잔 더 하자는 친구들에게 “의리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일찍 귀가 해야 할 수도 있고(애정과 소속), 땀으로 범벅이 된 운동복을 입고 걷다 보면 곁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수도 있다(존경). 그러한 대부분의 욕구들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자아실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운동을 시작하려면 무언가 자극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이키의 슬로건 ‘Just Do It!’은 바로 그 자극이 되어주었다. 만일 나이키가 단순히 물건을 많이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많이 파는 데만 혈안이 된 회사였다면 자신들의 슬로건을 ‘Just Do It’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가장 싼 신발’이라거나 ‘나이키, 지금 신으세요’라거나, 혹은 ‘아마도 세계 최고의 신발일 겁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키는 달랐다.
자신들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고객들이 끊임없이 나이키 자신은 물론, 운동이라는 가장 고차원적인 욕구 단계의 영향을 받는 일에 끊임없이 도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히 자신들의 신발을 사라고 하기보다는 고객들이 자신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함에 있어 머뭇거릴 때 그런 그들을 위해 힘이 되어주는 말 한마디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눈앞의 이익과는 조금은 상관없어 보이는 ‘Just Do It’이라는 슬로건을 과감하게 선택했고, 수십 년간 지켜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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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의 스토리텔링 마케팅 - 그들은 위기의 순간에 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나?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1996년도의 재앙 1996년, 나이키의 경영진들과 직원들은 이 해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비주얼 영향력을 지녔던 잡지가 한 권 있다. 미국의 잡지왕 헨리 루스가 발행한 〈라이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라이프〉1996년 6월호에 사진 하나가 게재되었다. 사진에는 낡고 남루한 아랍 전통 복장을 하고 있는 한 소년의 손에 축구공 하나가 쥐어있었다. 배경은 허름하고 좁고 지저분한 창고 같은 곳이었다. 소년의 손은 그 나이 또래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험하게 메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소년이 손에 쥔 공업용 바늘이었다.
한마디로 소년이 공을 품고 있는 이유는 그 공을 갖고 놀기 위함이 아니라 ‘선진국의 어느 행복한 소년’이 웃으며 갖고 놀 공의 가죽을 꿰매는 작업을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그 사진이 전해준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 공에는 나이키의 상징과도 같은 로고, 스우시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직 노동시장에 뛰어들기에는 한참 먼 나이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대기업, 특히 자본주의의 본거지처럼 여겨지던 미국의 대기업을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그 사진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 갔다. 그와 함께 나이키는 저개발 국가의 값싼 아동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 기업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서구 유럽 선진국에서는 나이키의 제품을 구입하지 않겠다는 불매 운동이 시작됐으며, 아랍문화권 에서는 종교 문제로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였다. 전 세계에서 일어난 불매 운동의 여파로 나이키의 매출은 급감했고, 실적 부진 우려로 주가 또한 급락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보다도 가장 뼈아팠던 것은 기존에 수십 년간 지켜온 나이키 브랜드의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가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나이키의 반격, 가장 솔직한 이야기로부터 〈라이프〉의 최초 보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불매 운동 열풍에 나이키는 발 빠르게 대처 하기 시작했다. 우선 국제노동기구에서 ‘아동 노동 근절을 위한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던 아만다 터커를 수석부장으로 영입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해나갔다.
‘확인 결과, 사진 속에 등장한 어린이는 나이키의 하청 업체 중 한 곳에서 고용한 어린이가 맞다. 나이 키가 직접적으로 해당 어린이를 고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청 업체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점에 대해 서는 머리 숙여 사과한다’, ‘나이키는 절대로 아동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않을 것이며, 일부 국가의 문제가 된 OEM 업체들과는 거래를 중단하겠다’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 번 불붙은 소비 자들의 나이키에 대한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쩌면 창사 이래 최악일지도 모를 위기에 직면한 나이키는 결국 스토리텔링의 권위자로 인정받던 데이비드 보제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이키 본사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 참석한 보제 박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고심하고 있던 고위 임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기업은 여러 이야기가 이리 저리 얽혀있는 서사 조직입니다. 상호 대립적이거나 보완적인 이야기 간의 끊임없는 대화의 장이죠.” 이전까지 기업 또는 기업 활동을 단순히 ‘물건을 생산하고 그를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정도의 범위에서 바라보던 관점을 ‘고객과 함께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범위까지 확대해서 해석한 보제 박사의 이 발표를 통해 나이키는 단순히 물건(스포츠 용품)을 잘 만들어내는 회사에서 벗어나, 그 물건을 사용하는 소비자와 함께 멋진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회사로 변모하게 된다.
먼저 나이키와 보제 박사는 ‘나이키는 아동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이다’라는 스토리를 대체할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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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표현대로 기존의 기업에 불리한 서사를 다른 서사로 대체 혹은 밀어내는 작업이었다. 그를 통해 태어난 것이 지금까지 전 세계인의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나이키와 함께 하는 여러 ‘스토리들’이다. 이전까지 나이키는 ‘에어’라고 하는 탁월한 성능의 쿠셔닝 시스템과 ‘에어조단’으로 대표되는 스타플레이어 광고 모델만을 앞세워서 마케팅을 했었다. 하지만 이때 이후 나이키는 ‘상대적으로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여성을 운동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그를 통해 시작된 것이 전 세계 도시에서 펼쳐지는 ‘나이키 우먼 레이스 (Nike Woman Race)’ 대회였다. 또 나이키를 신은 축구 스타만을 보여주던 광고 방식을 탈피해, 그런 스타플레이어들을 후원해 그들의 이름을 단 축구 교실을 저개발 국가에서 열고 그에 참여한 가난한 아이들의 밝은 표정이 자연스럽게 노출이 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그것들이 하나의 스토리를 이뤄가도록 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나이키로부터 시작된, 나이키와 연관된 ‘멋진 스토리’들이 엄청나게 만들어졌고, 그 스토리들은 보제 교수의 예상처럼 아동 노동력 착취 등과 관련한 나이키의 ‘나쁜 소식’ 을 사람들의 기억 저만치로 ‘밀어내고’, 그 빈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야기로 지은 집, 이야기로 만드는 세상 시대가 변했다. 이제는 이야기가 고객을 부르고, 이야기가 돈을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 앞으로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현대는 웹2.0 시대, 마케팅3.0 시대라고 한다. 즉, 소비자는 과거의 소비자처럼 단순히 생산자가 공급하는 제품을 구입하여 소비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눈부시게 발달한 웹 환경을 기반으로 ‘사용 후기’, ‘구입 리뷰’ 등 다양한 방식의 ‘스토리’라는 무기를 들고 생산자의 영역으로 진입 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기업들은 아직 그런 소비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반면에 나이키는 비록 1996년도에 끔찍할 만큼 치명적인 실수와 그로 인한 지독한 생채기를 겪기는 했지만, 그것이 예방 주사가 되어서일까. 이제는 세계 어느 기업보다 훨씬 더 이야기, 스토리를 능수능 란하게 다루며, 소비자와 함께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가고,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그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퍼뜨리도록 하는 데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이키의 변화 경영 - 그들은 왜 현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칠까?
세상은 눈부시게 변화하고 있다. 제품만 잘 만들면 알아서 팔리던 시대에서,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서 파느냐까지도 까다롭게 따지는 고객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뿐만 아니다. 기존에는 전혀 경쟁자로도 생각하지 않았던 신흥국의 기업들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서 새롭게 경쟁 속으로 뛰어드는 현상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자원과 자본시장의 변화로 인해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약자로 변하고,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로 변하며, 어제 불리했던 이가 오늘은 유리해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지고 있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 속에서 이제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매출 규모 면으로 보나, 영업이익으로 보나, 브랜드 인지도로 보나 수십 년째 스포츠 용품회사 중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이키지만, 그들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지금 이 순간도, 다가오는 미래에도, 절대로 현재에 안주하고 혁신을 등한시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것 같다.
몇 해 전 미국의 유명 경영 월간지〈패스트 컴퍼니〉는 전 세계 기업을 대상으로 혁신성, 개선 의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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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조사해 ‘세계 50대 혁신 기업’을 발표했는데, 그 조사에서 나이키는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2위부터 10위까지의 기업이 대부분 아마존과 같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첨단 기업이었고, 50위권 순위 내의 기업 대부분이 우버, 핀터레스트 등과 같이 생긴 지 10년 내외의 젊은 기업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렸을 구글이 11위, 애플이 13위였던 것을 보면, 나이키가 받은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는 평가가 얼마나 의외이면서도 대단한 결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나이키는 자신들의 브랜드를 단 신발을 미국시장에 출시하여 시장을 석권한 뒤로도 단 한 순간도 멈춤 없이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소재, 새로운 서비스 방식의 제품들을 시장에 지속적으로 출시하며 변화해왔고, 시장의 변화를 주도해왔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보통 5년 또는 10년 주기로 유행이 돌고 돌아, 심지어 요즘은 1년 내에 떴다가 지는 브랜드들이 수십, 수백 개가 넘는 패션, 스포츠 용품시장에서 나이키는 수십 년째 소비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으며 왕좌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변화는 시장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스포츠 용품 업계 전체의 공진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수료식 - 운동화 한 켤레만 있다면, 나만의 MBA를 만들 수 있다
한 시대가 시작되면 무르익어 전성기를 누리다가 여러 가지 내외부의 모순에 따라 새로운 시대로 대체가 된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크게는 농경사회가 시작되어 전성기를 누리 다가 산업혁명을 거쳐 산업사회에 바통을 돌려주기까지 대략 3만 년, 산업사회가 전성기를 거쳐 정보 화사회에 자신들의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대략 2~300년, 그리고 정보화사회가 지금과 같은 전성기를 맞이하기까지 대략 3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가 3만, 300, 30년에 걸쳐 이뤄온 변화를 단 70년 만에 이뤄낸 나라다.
때문에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변화에 대해 학습하고 대처해나가야 했다. 또 그 변화의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통해 변화에 뒤처지지 않고, 그를 기회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미리미리 대비할 것을 강요받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받고 있다.
문제는 변화는 계속될 것이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변화는 이전의 변화보다 훨씬 거대하면서도 더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때, 과거의 기억이나 학교에서 받은 교육 또는 기존 선배의 경험 등에만 의존하여 새로운 지식 정보의 습득과 자기학습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 역시 시대가 바뀔 때마다 사라져갔던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는 배의 고집스러운 선원이나 불과 단 5년 만에 인터넷의 바다에서 행방불명이 된 넷스케이프의 ‘항해자’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영학의 구루’로 꼽히며 존경과 추앙을 함께 받고 있는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그 명성에 비해 젊은 시절 그가 다닌 학교 학벌이나 이후의 학업 이력은 변변치 못한 편이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세계의 대중들에게 혜안과 방향성을 제시해왔고, 심지어 그러한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가 한 매체와 했던 인터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폭넓은 지식과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된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저는 2~3년의 기간을 두고 관심이 가는 주제를 택해 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기분으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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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합니다. 통상 그 정도면 일반적인 대학생들이 자신의 전공을 듣고 학부를 마치는 기간이지요. 그렇게 수십 년째 저는 ‘스스로 학교를 짓고, 스스로 학생이 되어’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렇게 딴 전공 학위가 여러 개이지요.” 우리 역시, 앞으로 계속해서 ‘스스로 학교를 짓고, 스스로 학생이 되어’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이미 우리는 운동화 한 켤레를 갖고 학교를 짓고 경영학의 몇몇 핵심적인 사항에 대한 공부를 마쳤다. 앞으로도 세상의 모든 관심 가는 분야에 대해 과감하게 스스로의 학교를 지어나가기를 기대한다.
이제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를 들고 시작한’ MBA 수업을 마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더 이상 공부를할 수 없으리라 낙담했던 순간,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얻어 공부를 시작할 무렵이었던 2002년어느 봄날, 스타벅스 이대입구점의 창가 자리에서 오답 노트 뒷면에 쓴 낙서 일부분으로 수업의 마지 막을 대신할까 한다. “어떻게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사소한 사물 하나에서도 세상(의 진리)을 발견할 수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방식으로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나는 어디에서고 세상(의 진리)을 배울수 있다. 글로벌 플레이어 기업에서도, 런던의 금융가를 누비는 벤틀리에서도,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레고 블록 브릭 하나에서도, 그리고… 나의 발에 신겨진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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