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프리드먼 지음 / 비즈니스북스
이 책은 광범위한 문헌을 통해 인류가 어떻게 미래의 전쟁을 예측해왔으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고, 또 실제로 벌어진 전쟁의 양상을 되돌아본다. 아울러 수많은 패배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이 저지른 전략적 오판과 실수의 원인에 대해 심도 있게 탐구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실제 전쟁 수행의 어려움에 대해 경고하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 저자 로렌스 프리드먼
전쟁학 및 군사전략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맨체스터 대학교와 요크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이후 세계적인 싱크탱크인 영국 국제전략연구소와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킹스칼리지 런던의 전쟁연구학부의 교수와 부학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뛰어난 지성과 식견을 인정받아 1995년 영국학술원 특별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96년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으며 1997년에는 포클랜드 전쟁의 공식 역사기록관으로 임명되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외교정책 자문관을 지내기도 한 그는 2003년에 영국 연방과 외국과의 관계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을 받았다. 2009년부터는 이라크 전쟁의 공식 조사단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군사전략과 정치에 관한 수많은 글을 집필한 저자는 지금도 현대 안보 문제에 관한 글을 활발히 기고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핵 전략의 발전』, 『전쟁 억지력』, 『걸프전』, 『전략 연구의 변화』, 『냉전』 외 다수가 있다. 『적들의 선택: 미국이 직면한 중동 세계』로 2009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논픽션 작품에 주는 라이오넬 겔버상을 수상했으며 군사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인 저작물에 수여하는 웨스트민스터 공작 메달을 받았다. 『전략의 역사』는 2013년 《파이낸 셜타임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2014년 영국정치학회가 주는 매켄지상을 수상하였다.
▣ Short Summary
다가올 전쟁은 어디에서 발발할 것인가? 적은 어떠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가?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은 국가지도자, 정치가, 군지휘관, 외교관, 전략가들의 생각을 사로잡았는데, 이들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평화를 지켜 내거나,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광범위한 문헌을 통해 1870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어떻게 미래의 전쟁을 예측해왔으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고, 또 실제로 벌어진 전쟁의 양상을 되돌 아본 후, 지난 150년간 제대로 예측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예로 1차 세계대전 때 결정적인 전투가 되리라고 생각한 서부전선은 대포와 라이플총의 사거리 향상으로 참호전으로 고착되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군사력을 얕잡아본 미국은 진주만 습격을 당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전쟁의 미래를 예측한 대부분의 글이 예언하려는 의도보다는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전쟁을 막기 위해 이러저러한 군사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정부에 촉구하는 목적으로 쓰였듯이, 이 책을 통해 실제 전쟁 수행의 어려움에 대해 경고하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 2 - 전쟁의 미래
아울러 군사전문가 및 국제정치학자, 소설가들이 왜 수많은 패배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기습작전과 선제공격, 최첨단기술을 맹신하고, 상대 전력이나 적국의 국민적 저항을 과소평가했는지 등 전문가들이 저지른 전략적 오판과 실수의 원인에 대해 심도 있게 탐구한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 네트워크 정보, 인공지능, 로봇공학, 드론이 어떻게 전쟁의 모습을 바꿔놓았는지도 살펴본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냉전 종식까지 사람들이 앞으로의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상상한 내용을 다루고, 제2부에서는 냉전 이후에 일어난 내전과 외부의 개입, 새롭게 부상한 갈등을 분석한다. 그리고 제3부에서는 사이버 전쟁, 로봇공학, 드론, 인공지능과 같이 오늘날의 미래학자와 군사전략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과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 차례
한국어판 서문 서문
제1부 전쟁의 기술 : 19세기 중반~냉전 종식제1장 결정적 전투 / 제2장 결말을 보지 못한 전투제3장 싸움의 집 / 제4장 잔인함으로 얻은 승리제5장 실패한 평화 계획 / 제6장 총력전제7장 공포의 균형 / 제8장 핵무기 시대에 빠지다제9장 갑자기 찾아온 평화
제2부 전쟁의 원인 : 냉전 종식~21세기 초반제10장 전쟁학 / 제11장 사망자의 집계제12장 민주주의와 전쟁 / 제13장 새로운 전쟁과 실패한 국가들제14장 오래된 증오와 광물의 저주 / 제15장 개입제16장 대반군 활동에서 대테러 활동으로 / 제17장 대테러 활동에서 대반군 활동으로제18장 만행의 역할 / 제19장 예방이 아니라 치유
제3부 전쟁의 미래 : 과거와 미래의 존중제20장 하이브리드 전쟁 / 제21장 사이버 전쟁제22장 로봇과 드론 / 제23장 거대도시와 기후변화제24장 다가오는 전쟁 / 제25장 미래 전쟁의 미래
감사의 말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 3 - 전쟁의 미래
전쟁의 미래
전쟁의 기술 : 19세기 중반~냉전 종식
결정적 전투 1870년 9월 1일 프랑스의 어느 군대는 메스 지역에 갇혀 공격을 받는 다른 부대를 구출하러 가던 중포위되어 스당 전투에서 궤멸했는데, 한 기사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 전투는 오전 5시에 시작되었고, 오후 5시에 스당의 흉벽 위에서 깃발을 흔드는 한 프랑스 장군의 모습이 독일군에게 그들의 놀라운 승리를 선언했다.” 그 기사는 뒤이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에게 보낸 각서를 전했다. “형제여, 내 군대의 선두에 서서 죽지 못했으니 당신의 발치에 나의 검을 내려놓겠소.”
이 기사는 교과서에 나오는 고전적인 군사적 승리를 묘사한다. 하루 만에 결판난 전투에서 정점에 달한 무력 충돌로 유럽 내부의 세력 균형이 변했다. 패배한 쪽은 그 결말과 정치적 귀결을 수용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 3세는 곧 빌헬름과 한 약속을 실행하지 못한 채 폐위되고, 1870년 9월 4일 제3공화 정이 선포되었다. 새로 들어선 정부는 전투의 평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싸우기로 결정했다. 독일이 파리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프랑스인들은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았다. 그중에 포함된 저격병, 즉 프랑티뢰르는 적군에 침입해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보급선의 방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끈질기게 저항하자 다른 나라가 프랑스 편에 설까 봐점차 걱정되어 무자비한 처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1871년 1월 말 두 달에 걸친 포위공격 끝에 파리가 함락되자 그곳은 혁명적 봉기의 무대가 되었다. 프랑스 정규군이 파리코뮌을 진압했다. 그때 가서야 프로이센은 프랑스 공화정 정부와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다. 가혹한 협정이었다. 최초의 전투 결과가 수용되었다면 협정이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당 전투는 모든 군사학자의 주목을 끌었다. 프로이센의 승리는 인상적인 병력 동원 덕분에 가능했으며, 병사들을 전선으로 수송한 철도의 역할이 높이 평가받았다. 반면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부추김에 말려들어 전쟁을 선포했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지리멸렬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찍 공세에 나설 기회를 잃었음을 뜻한다. 최신식 대포의 위력은 완전히 발휘되었다. 프로이센 육군원수 헬무트 폰 몰트케가 보여준 근대 군대의 기동방식은 후세대 군사전략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스당 전투에 뒤이은 혼란 속에서 질서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다르게 기억되었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두 가지 중대한 교훈을 끌어냈다. 첫째, 훌륭한 전략은 정규전의 신속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 둘째, 무자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패배한 국민이 비정규전 저항에 나서 승리를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저항은 실패했다. 그것은 또한 그 나라의 반란 전통을 반영하는, 프랑스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한동안 주된 결론은 프로이센이 강력한 국가이자 완성된 전투 국가로서 대담하게 움직이고, 적에 맞서 가차 없이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독일의 장기적인 의도는 불분명했지만, 세력 균형이 독일에 유리하게 바뀌면서 유럽의 질서는 불안정해졌다. 폰 몰트케의 빛나는 승리는 전투의 한계를 암시하긴 했지만 고전적인 모델을 강화시켰다.
- 4 - 전쟁의 미래
두려움이 만들어낸 전쟁관: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프랑스ㆍ프로이센 전쟁이 끝난 1871년 5월, 런던의 《블랙우즈 매거진》에 익명으로 짧은 소설 『도킹 전투』가 실렸다. 육군공병대 대령 조지 톰킨스 체스니가 쓴 이 소설은 큰 화제가 되어 곧 별도의 책으로 간행되었다. 소설은 8만 부 넘게 팔렸으며 영국의 전쟁 준비 태세에 관한 국민적 논쟁을 촉발했다. 이것이 저자의 의도였다. 체스니가 출판사에 제출한 원문에서 설명했듯이, 그는 영국이 어떻게 침공 당할지,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날 국력과 상업의 몰락을 입증함으로써 영국 군사제도의 재편을 권고하려 했다. 그의 주장이 얼마나 효과 있었는지는 당시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그러한 이야기는 불안을 유발하여 불필요한 군사비 지출을 초래하고 공공재정을 파탄시킬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불평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로 측정할 수 있다.
체스니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소설을 통해 설명했다. 누가 승리할 것인지는 적어도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이 결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미래에 관한 그러한 이야기들 덕분에 옛 군사 활동에 관한 깊이 있는 논증이나 해부를 통하지 않고도 더 생생하게 논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도킹 전투』의 성공은 그것이 단지 1871년의 사건에 그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애국적 염원을 자극하고 민주주의를 키우고 군사적 혁신을 설명하고 대비 태세를 평가하는 수단을 제공한 새로운 문학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전쟁의 미래에 관한 글은 정부가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보여주려 한 것이다.
『도킹 전투』와 뒤이어 나온 모방 작품은 학살극이나 연장된 고통스러운 충돌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패배를 묘사한 것들이었다. 기습당한 국민은 최초의 좌절에서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일단 패하면 자비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곧 주권과 생활방식, 교역의 상실을 의미했다. 이 멜로드라마 같은 전경 속에서 국제관계는 전투 결과에 따라 바뀐다. 글래드스턴은 체스 니의 책은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요 공격 재원을 허비하게 하려는 음모라고 비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류 전체로 보면 이처럼 우리를 증오 대상으로 만들려는 놀라운 성향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결국 보수당 의원이 된 체스니는 글래드스턴 같은 자유무역주의자들의 낙관론을 공유하지 않았다. 글래드스턴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쟁을 기피하게 만들어 평화를 촉진하리라고 기대했다. 반면 군부의 다수가 공유한 체스니의 세계에서는 한 번 잘못 판단한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체스니의 책과 비슷한 책자들에서 끌어낼 교훈은 강국들이 경제를 늦추지 말고 다가올 시험에 적절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 전쟁의 성격이 전부 변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고전적인 전쟁 모델: 이것이 당대 정치인과 장군, 해군 제독, 평자가 공유한 고전적인 전쟁 모델이었다.
도대체 전쟁이 무엇인지, 어떻게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삼았기에 고전적 이었다. 이러한 견해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형이기에 실제로 모든 전쟁이 그 모델에 들어맞지 않을 수 있고, 몇몇 경우는 그 모델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다고 이해되었다. 그런데도 이 모델은 전쟁에 대비하는 최고의 지침이었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할 경우 정부의 이익을 가장 잘 지킬 것이라는 점에서 규범적이었다.
전쟁을 짧게 끝낸 뒤 억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파괴적인 사회적ㆍ경제적 효과의 폭넓은 확산을 제한 하면서, 유익한 정책수단으로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험상 그 유효함이 확증되었다.
독일의 스당 전투 승리로 그 모델의 지속적인 타당성이 돋보였으며, 당시 과학과 산업의 방식, 정치적 참여 형태, 대중 매체의 발전에서 진행된 엄청난 변화에 비추어 그 모델이 어떻게 조정될 것인지는 가
- 5 - 전쟁의 미래
볍게 다루어졌다. 한편 독일 통일 전쟁, 즉 1870년의 프랑스ㆍ프로이센 전쟁은 물론, 1864년 덴마크, 1866년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쟁도 폰 몰트케의 신속한 승리가 미래의 전쟁을 위한 전략적 선례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독일군 참모본부는 이 확신을 강력히 고수했으며, 미래의 전쟁은 적군을 궤멸하는 신속한 전투가 아니라 격렬한 소모전을 치른 후에야 승리를 얻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 자들에게 화를 냈다. 이러한 믿음은 유럽 다른 곳에서도 미래의 전쟁에 관한 시각을 지배했다. 전쟁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독일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수있는지 증명했고, 따라서 이를 되풀이하는 것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전쟁 이론: 당대의 유력한 전쟁 이론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는 나폴레옹이 구현한 전투 원리를 가장 명민하게 설명했다고 인정받은 앙투안 드 조미니 남작이 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의 군사 활동을 탐구한 초기 저작에 이어, 1838년에 발표된 『전쟁학 개론』은 유럽 군대에서 가장 널리 채택된 교과서였으며, 미국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생전의 조미니는 오늘날 가장 위대한 이론가로 여겨지는 프로이센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조미니는 자신의 책에서 전쟁의 동력을 그 정치적 배경과 분리하여 탐구했다. 그의 조언은 장군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약한 적군을 겨냥해 병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설명하는 데 맞춰졌다.
독일에서 영향력이 더 컸던 클라우제비츠는 계획이 실패하는 이유와 전투가 띨 수 있는 다양한 형태를더 예리하게 이해했지만, 그의 조언은 본질적으로 전투의 이론이요 전투가 결정적일 수 있는 상황에 관한 이론이었다. 나폴레옹에서 시작해 조미니를 거쳐 클라우제비츠가 확증하고 이어 폰 몰트케가 증명한 핵심 가정은 위대한 지휘관이라면 전투에서 적군을 궤멸하고, 승전국이 적국에 적절하다고 판단 하는 굴욕과 처벌을 모조리 안겨주리라는 것이었다. 한편 고전적 형태의 전투는 동이 트자마자 시작해 날이 저물 때 끝나는 것이었다. 그때는 전장을 점유한 쪽이 승자가 된다. 진정으로 결정적인 승리는 패한 군대가 많은 사상자와 포로로 병력이 심하게 고갈되어 더는 실전을 치를 여력을 갖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패전국이 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51년에 에드워드 크리시가 발표한『15개의 결정적인 세계 전투: 마라톤에서 워털루까지』는 제목과 전제에서 몇몇 전투는 군사학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원천이 라는 견해를 확인했다. 크리시는 “단련된 용기의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함과 전투원들이 고통과 파멸에 맞서게 한 명예의 흠모”라 하며, 최고로 유능한 지휘관들의 지적 능력과 담대함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불운하게도 이러한 자질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자들뿐만 아니라, 가장 비열한 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크리시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전투가 인과 사슬의 일부인가 여부였다.
역사의 전환점은 종종 전쟁에 의해 매듭지어졌다. 이러한 유형이 미래에도 계속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전투가 매력적인 것은 두 개의 육군이나 해군 사이 획기적인 충돌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한 재원을 소비해 불과 몇 시간 만에 역사의 진로를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운명이 무기와 용맹함, 몇몇 사람의 전술적 예지에 좌우되면서 전투는 모질고 격한 드라마를 낳았다.
역사의 전환점이 된 것처럼 보이는 특정한 전투가 있었다. 1805년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에서 러시 아와 오스트리아에 거둔 눈부신 승리가 다른 결말을 맞았고 그 후 일어난 거의 모든 일이 다르게 보였 다고 가정해보라. 또는 게티즈버그 전투가 북부연방의 패배로 끝났다고 가정하고 북부연방이 회복할수 있었을지 생각해보라. 그러나 진정으로 결정적인 전투는 예사롭지 않았다. 한 번의 충돌로 결정되
- 6 - 전쟁의 미래
는 드문 전쟁이었다. 개별 전투 간의 차이는 흔히 더 폭넓은 전쟁 수행 노력을 배경으로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매우 중요한 몇몇 전투는 신속하게 끝날 수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방어 전투여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다른 전투들은 누적 효과를 가져왔다. 어느 한 편이 연이어 패배하면서 그들의 자원과 예비 병력, 사기가 꾸준히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전투는 포위공격이나(잠재적으로는 실제 전투만 큼이나 전쟁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 중요했다) 비정규 유격전과 관련지어 영향력을 얻었다. 전투는 군사적 우위를 결정한다고 인정된 다른 모든 요인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언제나 존재했던 능력을 입증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몇몇 전투는 ‘이정표’가 될 만했다. 역사에 특별한 것을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폭넓은 문화적ㆍ물질적 우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음 전투는 다른 것을, 아마도 패배한 자가 동맹을 찾거나 국민의 사기를 되살릴 능력을 증명할지도 모른다. 핵심 질문은 개별 전투가 만들어내는 차이가 아니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가 여부였다.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것은 전쟁을 시작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희망사항이었고, 몇몇 경우에는 예상 하는 바였다. 적군의 회복력이 좋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비군사적 요인들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전쟁에 앞서 이론적 가능성이나 계획의 지침으로서 결정적인 전투가 고려되었을 때, 염두에 둔 것은첫 번째 전투, 정교하게 설계하고 신중하게 계획한 전투이자 열심히 의무를 다하려는 두려움 없고 기운찬 병사들이 수행하는 전투였지, 지치고 겁 많은 병사들, 최후의 충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 하는 병사들이 수행하는 전투가 아니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적을 기습적으로 타격해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면 장기전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로 이런 ‘전투의 유혹’ 때문에 여러 나라가 공격해 모든 것을 내건다. 장기적 소모전이 될 것을 알면서 전쟁에 뛰어드는 나라는 없다. 그렇지만 장기적 소모전은 종종 일어나고, 따라서 그런 나라들은 고초를 겪었다.
핵무기 시대에 빠지다 초강대국 체제에서의 군축 문제: 이 세상 지도자들이 엄중한 선택에, 즉 국제적 행동을 통해 원자폭탄을 통제할 것인가 완전한 비극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는 확신은 핵무기 시대가 시작될 때부터 있었다. 원자폭탄을 제조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기획이 분명코 나치 독일이 이 가공할 무기를 먼저 획득하지 못하게 하며,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어 세계 정부라는 절박한 명령을 수용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일단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이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했다. 1946년 웰스 에게서 착상을 얻어 제목을 붙인 책 『하나의 세계 아니면 전무』에 그 목적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1946년 6월 미국은 국제연합에 핵에너지를 오로지 민간 용도로만 개발하고 군사적 사용을 금지하자는 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소련은 음모를 탐지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은 역량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미국이 교묘히 빠져나가 핵에너지를 독점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 편에서는 강력한 이행 강제 장치가 없으면 소련이 다른 모든 나라가 무장을 해제한 뒤 숨어 있는 병기고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속임수를 쓸 거라고 걱정했다. 이 단계에서 더 나은 제안이 있었다면 핵무기 경쟁을 방지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어쨌든 그 노력은 곧 사라졌다. 최근의 끔찍한 전쟁 경험과 무서운 신무기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각국 정부는 서로 차이를 극복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할수 없었다. 그래서 정말로 하나의 세계 아니면 전무를 선택해야 할 때, 세계정부와 진지한 군축이 아닌 다른 암울한 미래가 서서히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 7 - 전쟁의 미래
선제타격에 대한 환상: 핵전쟁에서 확실하게 승리할 유일한 방법은 선제타격으로 적의 보복을 불가능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막는 방법은 두 번째 타격 능력을 개발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많은 병력이 선제타격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받은 대로 되갚아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양측 다 선제타격 능력을 추구한다면, 오판에 따라 전쟁이 일어나는 위험천만한 위기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따라서 선제 타격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양측이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하며 외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셸링이 오판으로 인한 전쟁을 피하는 열쇠로 확인한 것이 바로 핵무기 관계의 이 측면이었다.
선제타격 방안을 쓸 수 있는가 여부가 당시 긴급한 문제였다. 1954년 앨버트 월스테터가 이끄는 랜드 연구소의 한 연구팀은 미국 전략폭격기 전력을 위한 최적의 기지 배치를 연구해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들은 기습공격의 취약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꼽았고, 그로써 미국이 어떻게 빈틈없는 소련에 선제타 격을 당하는지 증명했다. 보고서는 등장인물과 서사적 긴장이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현대판 전쟁소설 이었다. 연구팀은 가용한 자료를 최대한 수집해 엄밀하게 분석하는 방식을 취했다(소련의 능력에 관해 알려진 것이 불충분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줄거리는 악랄한 외적이 어떻게 미국을 불시에 습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보고서는 강력한 힘을 지녀 안전해 보이는 나라가 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했는지를 가정에 가정을 더해 증명했다.
미국이 이런 식으로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1957년 소련이 최초의 대륙간탄도탄(ICBM) 개발과 뒤이어 최초의 인공위성(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믿음을 얻었다. 월스테터는 연구를 바탕으로쓴 「아슬아슬한 공포의 균형」이라는 글에서 단지 양측이 상대방을 파멸시킬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핵무기 교착상태를 추정하지는 말라고 경고했다. 어느 한쪽이 현실적인 승리 방식을 알아낸다면 그때 위험이 찾아올 수 있다. 어느 편이 핵무기로 선제타격했을 때 실패하면 그들에게 섬뜩한 결과가 찾아 오겠지만, 그것은 또한 명백한 성공이 될 수도 있다. 보복 수단을 갖추지 못한 나라는 항복 외에 달리 선택할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제가 안정적인가 여부는 경계경보와 핵무기 발사 절차 문제와 핵무기의 사거리와 출력, 정확성, 표적의 견고함과 이동성 같은 여러 요인에 의존한다.
이 분석은 대중이 아니라 정책입안자를 위한 것이었다. 칸의 『열핵전쟁론』에서 그랬듯이, 이런 식으로 핵전쟁을 상상하고 논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이 오싹했다. 대량 파괴 관념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분석틀은 이후 몇 십 년간 전문가 집단에서 핵전쟁과 억지력 문제를 논의하는 기본 방식이 되었다. 그 분석틀은 정치적 동기와 결과에 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반면, 어느 정도 기술적 능력을 요구했다. 또한 그것은 핵무기 영역 밖의 여러 정치적 문제가 논의되는 방식 에도 영향을 미쳤다. ‘확증파괴’ 같은 더욱 명료한 의미의 용어는 물론, ‘최악의 시나리오’와 ‘피해 축소’ 까지 전문 용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분석적 문헌은 관료 사회의 안일함을 비판하는 방식이기에 『도킹 전투』와 뿌리가 같지만, 이 경우에 그 분석으로 확립된 틀은 새로운 정보가 들어옴에 따라 위험 정도를 측정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처음에는 장거리 폭격기를 기습공격에 파괴되지 않도록 상시경계태세로 유지해야 했다. 대륙간탄도탄이 전면적으로 생산되는 1960년대 초가 되면, 장거리 폭격기는 경식 구조물로 엄폐된 지하로 들어갔다. 장거리 폭격기를 파괴하려면 직접적인 타격이 필요한데, 지하로 들어가면 그것이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은 공격당할 가능성이 훨씬 적었다. 넓은 대양을 온전히 이용해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고, 따라서 두 번째 타격 능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한편 핵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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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비해 효과적인 방어수단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쓸데없는 짓으로 판명되었다. 핵무기 시대에 대공 방어 기준은 재래식 무기의 공습에 비해 훨씬 높았다. 방어막이 뚫리면 방어군은 궤멸할 수 있기 때문 이었다. 지대공 미사일(SAM)을 이용해 폭격기에 방어를 펼치는 방식으로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충격 이전 경고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인 대륙간탄도탄으로의 이행은 방어 임무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민방위 조치는 핵폭발에서 민간인을 거의 보호하지 못했고 기껏해야 핵 낙진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기회를 제공할 뿐이어서 양측이 축적한 압도적인 파괴력에 직면해 지극히 미진해 보였다.
전쟁의 원인 : 냉전 종식~21세기 초반
새로운 전쟁과 실패한 국가들 새로운 형태의 무력 충돌: 많은 신생국이 만성적 불안정과 그로 인한 폭력에 시달렸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이 폭력은 유례없이 강렬하고 폭넓게 확산된 듯했으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강대국 간 전쟁 위험은 줄어들었지만, 다른 유형의 전쟁이 뉴스를 지배했다. 좋은 소식은 미국 해군의 퇴역 장군이 1999년 대회에서 말했듯이 “국민국가 간 무장 충돌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쁜 소식은 이와 더불어 유별나게 역겹고 사악한 싸움이 급증했다는 것이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90년대 확인된 108건의 무력충돌 중 92건에서 조직을 갖춘 공동체 집단이 연루되었고, 이들은 서로 싸우거나 정부에 맞서 싸웠다. 1980년대 이후 특정 시점에 15~25개 나라가 내전을 겪고 있었다.
메리 캘도어는 내전의 목적 및 자금 조달과 관련해 그러한 싸움을 앞서 지나간 옛 전쟁들과 비교한 뒤단조롭게 ‘새로운 전쟁’이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전쟁은 “민족이나 씨족, 종교, 언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근대국가 구조의 해체나 침식” 때문에 가능해졌다. 또한 유격전과 폭동으로 싸움이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표현을 달리했을 뿐 변화를 야기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 전임 사령관 루퍼트 스미스는 “전장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기계의 전투”나 “국제적인 분쟁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결정적 사건”으로서 “전쟁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대신 ‘인간간 전쟁’으로 전환되었다. 이 전쟁은 흔히 비국가 행위자를 끌어들였고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마르틴판 크레벨트는 “훨씬 작고 덜 강력한, 여러 면에서 1648년 이전에 존재했던 것과 유사한 더 원시적인 정치적 실체들”이 특징인 “새로운 형태의 무력 충돌이 발전하고 있다”고 썼다.
과연 새로운 현상인지 이의를 제기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과거 많은 분쟁은 분열되거나 허약한 국가 내부에서 벌어졌고, 취약한 집단이 대량학살에 이를 정도의 고초를 겪는 것을 목격했으며, 통상적이지 않은 군사적 방법이 사용되었다. 게다가 1990년대 두드러진 여러 분쟁은 냉전 종식 이전 시기에 원인이 있었고, 1945년 이후 식민지 해방이 남긴 약점을 반영했다. 캘도어가 주장했듯이 이러한 전쟁들이 유례없을 만큼 잔혹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20세기 전환기 전쟁에서 군인 대 민간인의 사상자 비율은 8대 1이다. 오늘날 이 비율은 거의 정확히 역전되었다. 1990년대 전쟁에서 군인 대 민간인의 사상자 비율은 대략 1대 8이다.
그러나 최근 내전과 이전 내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전 내전은 대개 마치 국가 간 전쟁과 같이 정규군처럼 조직된 군대가 수행했다(미국 남북전쟁과 에스파냐 내전이 그러한 경우였다). 매복과 테러에 의존하는 자발적 의용군으로 시작한 군사행동도 특정 시점이 되면 국가의 군대를 물리칠 정도로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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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훈련받고 장비를 잘 갖춘 군대로 변모하려고 노력했다. 교전 당사자들은 아주 드문 경우에만 외부 인의 중개를 통해 마지못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정부는 협정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다. 그것은 당연히 반군과의 타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적을 분쇄하기를 선호했다. 반군도 똑같이 정당성 없는 정권을 지지할 생각이 없었다. 어느 계산에 따르면, 1946년에서 1989년 사이 12건의 내전만 평화협정으로 끝났고, 82건은 정부나 반군 어느 한편의 군사적 승리로 끝났다. 1990년에서 2005년 사이 에는 변화가 급작스럽지는 않지만 27건이 평화협정으로 끝났다면, 이것은 대개 전쟁 당사자가 갑자기 이성을 찾았다거나 유혈극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지쳤기 때문이었다. 협정 유지 기록은 초라하고 종종 폭력이 재개되었다. 1990년대에 두드러진(그리고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여러 전쟁의 뚜렷한 특징은 긴 기간에 행해졌다는 점, 당사자들이 좀처럼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는점, 국제사회가 전쟁을 끝내려고 애썼다는(성공하기도 했고 실패하기도 했다) 점이다.
내전의 요인들: 처음에 대부분의 논평을 이끌어낸 것은 새로운 전쟁의 피상적인 특징, 즉 야만성과 민족적 양극화, 범죄행위와의 연계였다. 그 결과, 국가의 분열을 초래한 요인들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1992년 6월 국제연합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는 『평화를 위한 과제』를 발간했는데, 이 책은 여러 문제 중에서 특히 ‘분쟁 종결 후 평화 구축’ 문제들을 다루면서 “분쟁 재발을 피하기 위해 평화를 보강하고 공고히 하는 데 이바지할 구조를 확인하고 뒷받침하는 행동”을 모색했다. 이듬해 제럴드 헬먼과 스티븐 래트너는 분명코 잘 대처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들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국제연합 신탁통치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극적인 경고로 글을 시작했다.
‘아이티에서 유럽의 유고슬라비아의 잔해까지,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수단, 라이베리아에서 동남아시 아의 캄보디아까지, 골치 아픈 새로운 현상이 출현하고 있다.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는 실패한 국민국가다… 그러한 나라들이 폭력과 무정부상태에 빠져 자국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난민 이동과 정치적 불안정, 마구잡이 전쟁으로 이웃 나라를 위협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지만 실패한 국가들을 구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으로, 그리고 많은 점에서 어려운 도전으로 드러날 것이다.’
‘무너진 국가들’, ‘난처한 국가들’, ‘허약한 국가들’, ‘위험에 처한 국가들’, 아니면 그저 ‘약한 국가들’에 관한 글이 쏟아졌다. 각각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따지면 미세하게 구분할 수 있겠지만, 자기 국가와 이웃 나라에 위험이 되고, 따라서 국제적으로 집중치료에 상당하는 조치가 필요한 나라들이 있다는 기본적인 관념은 동일했다. 2002년 미국 국가안보전략(NSS)에서는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의 여파로 “미국은 정복하는 국가보다 실패한 국가들 때문에 더 큰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한 나라가 실패하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막스 베버가 제시한 국가의 정의에 따르면 폭력을 독점 하고 일정한 영토에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합법적인 폭력의 독점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거나 식량 폭동이나 파업 같은 비폭력적 저항을 군대가 진압하기를 거부하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어느 체제가 대중 소요나 노골적인 반란, 쿠데타 시도, 분리주의 운동 때문에 곤란에 처할 때는 군대의 충성이 곧 핵심 문제로 전면에 부상할 수 있다. 정부군의 주된 임무가 국가에 대한 폭력적 도전을 격퇴하는 것이 되는 그 순간에 내전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란은 성공하거나 진압되었다.
이 방정식의 영토적 측면과, 전쟁이 국가 간에 발생했는지 아니면 국가 내부에서 발생했는지는 국경을 어떻게 긋는가에 달렸다. “이전에 존재한 내부의 행정 경계나 외부적 행정 경계에 따라 그어지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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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은 “국제법에 따른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계선을 따라”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유달리 높았다. 모니카 토프트가 말했듯이 국민은 영토와 동일시되었고 다른 종류의 땅보다 조국을 더 걱정했기에 “영토를 둘러싼 전쟁은 다른 문제를 두고 벌어진 전쟁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해결하기가 더 어려운 경향을 보인다.” 이런 연유로 ‘새로운 전쟁’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 1945년 이후 국경선이 정해지고 국가가 형성된 방식에 집중되었다.
국제연합이 채택한 기본 원리는 국경선은 고정되어야 하고, 식민지 해방으로 태어난 새로운 국가는 물려받은 식민지 국경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뚜렷한 공동체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자 나라를 분할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는 권장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예를 들면 1947년에 영국에 책임이 있고 국경선 문제를 미결로 남긴 두 개의 식민지 해방 법률이 있었다. 영국령 인도를 인도와 파키스탄 으로 분할한 것과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과 아랍으로 분할한 이 두 결정은 즉각 충돌을 초래했고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일련의 전쟁을 낳았다.
그리고 독일과 한국을 이데올로기에 따라 친서방 정권과 친소련 정권으로 분할한 결과, 냉전 유럽의 가장 위험한 문제와 동아시아의 맹렬한 전쟁이 초래되었다. 동아시아의 이 전쟁은 휴전이 이루어진 지 60년이 넘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에서 공동체 간의 긴장은 국가 간의 전쟁으로 비화 했다. 기존 국경선 안에서 긴장을 조정해야 할 때 내전의 위험성이 드러났다.
전쟁의 미래 : 과거와 미래의 존중
미래 전쟁의 미래이 책은 정치인들과 평론가들이 전쟁의 성격에 관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지와 어떻게 전쟁을 억제할 수 있을지에 관해 공통된 생각을 지녔던 시기를 논의하면서 시작했다. 고전적 전쟁 모델에 따르면, 정치적 투쟁은 전투라는 수단에 의해 결정되었다. 근대의 큰 전쟁들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교전 상대들은 전투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으며, 승리와 패배가 전쟁의 끝을 알렸고, 세력의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국제 체제가 새로운 진로에 정착하기에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희생과 무서운 참화가 따르는 길고 고된 싸움이었다. 그것은 19세기 전략가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최대한 신속하게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미래의 전쟁에 관한 사고에서 기습공격이 그토록 중대하게 느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속한 승리의 필요성 때문에 최초의 일격이 가장 중요시되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된 뒤에 시험 삼아 기동하 거나 적에게 임박한 공세 신호를 보여 대비하고 방어할 기회를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기습에는 언제나 약간의 이점이 있었다. 기습의 목적은 적을 당황하게 하고 난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일격이 결정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결과가 불확실한 길고 고된 싸움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
전쟁의 미래에 관한 글이 언제나 희생자에게 패배를 안기는 가상의 최초 일격으로 가득한 이유는 전쟁의 시작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세 번째 타격은 많이 언급되지 않았고, 교착상태에 도달해 사상자만 늘고, 돌파는 이루어지지 않아 전투가 헛도는 뒷부분에 관한 글은 더욱 없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전략가들은 전차와 항공기 덕분에 다음번 전쟁은 분명코 더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들이 훨씬 더 길고 더 치명적인 전쟁 가능성에 천착했을 때는 영리한 전쟁 수행 계획을 꾸며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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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적응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핵무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은 한 번 더 추진력을 얻었고 전략적 계획은 일종의 추상적 이론으로 바뀌었다. 이제 전쟁 계획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최초의 공격에 모든 것을 내걸어야 했다. 적의 핵 역량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면 나라가 끔찍한 보복을 당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군대가 거의 필요하지 않은 사이버 공격을 포함해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출현했지만, 미래 전쟁의 문헌을 지배한 것은 여전히 기습공격이었다. 미래 전쟁에 관한 글에서 통렬한 일격이 두드러진 이유는 그 잠재적인 전략적 영향이나 드라마의 결과뿐만 아니라, 통렬한 공격이 성공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은 대체로 어느 한편이 결과를 확신할 때 시작되었다. 존 스토싱어는 전쟁이 가능했던 것은 적에 대한 오해, 무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오해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전쟁 직전에는 “저마다 단기간에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승리를 얻을 것으로 확실히 기대한다.” 결정을 내릴 때 함정을 인식하고 있던 지도자들조차 사실상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더욱 확신을 갖고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자신한다. 바르바로사 작전과 진주만 기습공격 모두 그 점을 강조했다. 두작전은 공격을 당하는 쪽에는 매우 큰 충격이어서, 두 경우 모두 기습에는 성공하고 승리하지 못했지만, 이후 그들의 전략적 상상력에 놀라울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 작전은 공격의 어리석음과 무용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았다. 오히려 방심하면 어떻게 당할 수 있는지 경고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기습은 전쟁을 시작할 때 핵심이었기에 1945년 이후 여러 차례 통렬한 공격 시도가 있었다. 1950년 여름 북한의 남한 공격, 1982년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점령,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모두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군 기지 파괴에서 보듯이 최초의 공격이 성공했을 때도 이후 결과가 실망스러울 수 있었다. 패한 쪽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복당한 주민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의 오류: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한 가지 가정은 신기술의 결과로 성공 확률이 결정적으로 변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흑색 화약에서 머스킷 총까지, 증기 터빈에서 항공기까지, 미사일에서 디지털 네트워크까지 전부 다른 가능성을 닫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기술은 좀처럼 독점되지 않았고 비록 어느 한편이 우세를 누리더라도 적은 그 효과를 제한할 방법을 발견했다. 현대 서구 군대에서도 기술은 빠르고 손쉽고 결정적인 전쟁의 환상을 조장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느리고 혹독하고 결말이 나지 않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
허버트 레이먼드 맥매스터는 “미래의 분쟁은 모든 역사적 경험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라는 확신에 따라 ‘뱀파이어 오류’를 찾아냈다. 죽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현혹되기 쉬운 이름의 신개념들”은 “미래 전쟁에서 비용이 적게 드는 신속하고 효율적인 승리”를 약속했다. 의심하는 자들은 “옛 사고방식에 젖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정보통신기술”이 어떻게 ‘첫째의 속성’으로 이어지는지 얘기했다. 그러한 속성에 의해 군대는 “먼저 보고 먼저 결정하며 먼저 행동해 결정적으로 끝낸다”는 것이었다. 오류는 “전쟁의 정치적ㆍ인간적 차원”을 무시하고 “목표 설정을 전술과 작전, 전략”과 동일시한 데 있었다. 그것은 “전쟁의 불확실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궤적이 단호하고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적과의 다양한 상호작용에 의해 부단히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는 쉽게 죽일 수 없다. 새로운 발전을 그 잠재적 영향력의 극단까지 밀어붙여 탐구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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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워졌다. 다른 큰 전쟁이 엄중한 가능성으로서 크게 나타나면, 모든 형태의 공격 시나리오는 실행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고 어려워도 신중한 주목을 받을 것이다. 콜린 그레이는 한동안 강대국 간전쟁을 피했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무한정 지속되리라 추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또한 새로운 유형의 전쟁에 현혹되어 고전적 전쟁을 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한 무리의 하버드 대학교 연구자들이 20세기 초 독일이 강국으로 성장한 것과 중국의 발흥 사이 유사성을 탐구할 때, 이들은 서투른 외교와 불합리한 동맹, 불충분한 경제적 상호의존, 국내의 격변, 공세적인 신조, 한 국가의 발흥은 불가피하게 다른 국가를 희생시킨다는 논리를 고려했다.
그러나 이 비교에서 끌어낸 주된 결론은 미래에 중국과의 전쟁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하는 하나의 지침으로서, 서로 다른 길을 갈 수 있지만 합쳐지면, 관리할 수 있는 위기를 파국으로 몰아갈지도 모르는 “작은 것들”, 상황에 부수하는 특징들, 우연의 요소들, 구체적인 결정들을 주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예방을 염두에 둔 미래 전쟁에 관해 고려할 때, 누구든 군사적 전략만큼이나 외교의 혁신과 국제적 의사소통에도 주목해야 한다. 문제는 과감한 공격과 함께 불시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툼의 대상인 영토의 권리 주장, 경쟁자를 당혹하게 만드는 원칙적인 태도, 힘에 대면한 약점을 탐구 하려는 조사 활동,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군사적 기동, 또는 실제적인 충돌로 전환해 빠르게 강도를 더해가는 결의의 표출에서 나올 수 있다.
뜨뜻미지근한 전쟁: 군사기술 상태에 천착한 이들의 공통된 주제는 경계가 희미해졌다는 점이다. 전쟁과 평화, 군대와 민간인, 재래식 전쟁과 비재래식 전쟁, 정규군과 비정규군, 국내적인 것과 국제적인것, 국가와 비국가, 정당한 자들과 범죄자들 간 경계가 흐려졌다. 그 이야기는 평화와 전쟁 사이에서 발견되는 ‘회색지대’ 분쟁에 관한 것으로, 그곳에서 선택된 행동은 큰 전쟁을 일으킬 만한 문턱 아래에서 유지되었다. 동일한 현상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로 ‘뜨뜻미지근한 전쟁’(Cool War)이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차가운 것보다 약간 더 따뜻하다. 실제 전투에는 못 미치지만 주기적으로 주권을 침해하거나 방어망을 침투함으로써 경쟁국을 파괴 또는 약하게 만들려 하거나,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공격적인 조치를 거의 늘 포함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냉전 시기에 사용된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분쟁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는 방식으로, 최첨단 기술이 따른다는 점에서 ‘뜨뜻미 지근한’이라는 다른 정의를 취한다. 이는 결국 잠재적인 구식 총력전을 예상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구식 지정학적 책략에 관한 문제였다.’
큰 전쟁에 따르는 위험 때문에, 그리고 작은 분쟁에 대규모 병력 투입을 주저했기 때문에, 주요 강국은 부담을 줄이고 위험을 관리하면서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방법을 모색했다. 정치 과정의 전복이든 경제적 강압이든 사이버 공격이든 뻔뻔한 역(逆)정보전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이 많은 것을 수습할 것 같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방법들은 어느 시점에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이 발견되거나, 아니면 어떤 불꽃이 일어 그 문제를 회색 지대에서 벗어나게 해 다시 열린 전쟁으로 몰아넣을 때까지 짜증스럽게 지속되는 분쟁을 부추겼다.
그러므로 전쟁에는 미래가 있다. 전쟁은 격한 논쟁과 모종의 폭력이 결합하면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국제 체제에는 국가 간에 혹은 국가 내부에 알려진 단층선이 있으며, 언제든지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 폭력은 지엽적인 문제, 나아가 사사로운 문제와도 결합될 수 있으며, 종종 범죄와 연결되어 있고 들끓는 사회적 긴장과도 연결될 것이다. 폭력은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전쟁과 별로 닮은 점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전쟁이 이론상으로 종결되었을 때도 늘 흔적을 남기듯이, 지속되는 폭력은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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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더 큰 것으로 비화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병력이 유지되고 무기가 발전하며 계획이 계속 경신되는 한, 과거의 정규전과 닮은 무력충돌 위험성은 있다. 한편 미래 전쟁의 발생과 형태를 예측하는 것은 이 책의 정신에 어긋난다. 수많은 요인이 미래 예측을 어렵게 한다. 한 가지는 예측이 종종 의도적 이고, 특정한 행위 지침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미래만큼이나 현재에 관한 일이라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옹호되는 행동 방침을 따르면 더 낙관적인 결과가 실현되는 동안 가장 비참한 결과를 피할 것이다. 전쟁을 재촉하는 문제로 말하자면 이것은 적의 풍부한 자원을, 예비 병력을 찾고 동맹을 확보할 적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국민의 자만과 타락, 줏대 없음을 한탄하는 이들은 자국민이 위급한 시기에 회복할 수 있는 힘을 낮게 평가한다. 그러한 과소평가는 전쟁에서 가장 놀라운 일들이 왜 첫 교전 후에 발생하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찬가지로 특정 군사 부문, 이를테면 신무기 시스템이나 평화 제안을 위해 일하는 로비스트들은 자신 들의 논거가 수용되는가 아니면 무시되는가에 따라 미래의 그림을 다르게 그린다. 목적은 운명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전략과 투자, 행동을 확인하는 것이다. 요즈음 안보 논쟁은 프레임과 우선 순위를 갖추어, 몇 가지 문제는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반면, 몇 가지 문제는 매우 두드러져 보였다. 정부가 소련이 붕괴할 때나 대량 살상 테러의 경우처럼 불시에 허를 찔리거나, 1990년대와 2000년대의 개입처럼 준비가 덜된 활동에 관여하는 것은, 대체로 그런 일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을 안보 의제의 최우선 과제에 올려놓을 주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경향은 최근 과거를 미래 속에 끼워 넣을 수 있다고, 전쟁이 하나의 제도로서 불가피하게 퇴조할 것이라는 주장처럼 이런 추세가 한동안 지속될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매우 다른 또 하나의 경향은 우리가 거대한, 변화의 불연속성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많은 것이 이전처럼 계속되리라는 전망은 이제 덜 흥미롭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평화의 경험을 잊고 있던 나라들에서 볼 수있듯이 전쟁의 연속성은 현저하다. 얼마나 많은 현대의 살인이 앞선 세대들도 알아보았을 비교적 구식인 무기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살펴보아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인공지능의 약속만큼이나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끝없는 전쟁들도 미래에 대한 지침을 많이 제공한다.
그러므로 미래 전쟁의 역사에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난 이러한 경향들은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전개에 직면하고 새로운 사고에 대한 갑작스러운 요구와 함께 일련의 예측 시나리오와 불안한 경고가 이어질 것이다. 진지한 학술 논문의 언어나 군사적 평가, 스릴러 소설, 어느 것으로 표현되었든, 이는 전부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다.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미래는 미리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언은 너무도 어렵다. 잘 이해하고 있는 난제들에 관해서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 많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일어나는 우연한 사건들과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발전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상력의 작품들은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하는 선택을 명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때때로 예지력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많은 작품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의심의 눈초리도 거두지 말아야 한다.
- 14 - 전쟁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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