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지음 / 가톨릭출판사
구약의 역사 설화는 룻, 토빗, 유딧, 에스테르처럼 구약 시대에 배척받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럼 왜 구약 성경에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구약 시대에 배척받았던 이방인, 유배자, 과부, 고아의 이야기를 통해 힘든 삶 속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 준다. 그리고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느님이 함께하심을 알려 준다.
구약의 역사 설화
▣ Short Summary
구약 성경의 작은 책들인 룻기,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를 읽어 보려 합니다. 네 권 모두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 책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들의 주인공들에게는 어떤 공통점도 있는 듯합니다. 과부와 고아, 전쟁, 유배, 죽음, 이국땅에서 사는 삶. 이러한 삶의 쓰라림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룻기,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는 성경 안에서 보통 역사서로 분류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책은 아닙니다. 역사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작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토빗이나 에스테르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삶의 진실들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를 비교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성경이 낯선 땅에서 외롭게, 어려움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삶이 저자와 독자가 살고 있는 시대와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차례
머리말 구약의 이야기들: 룻기,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
제1부 | 룻기 | 삶의 쓰라림 속에서도 모압 / 작품 / 나오미 - 마라 / 보아즈 / 룻 / 다윗
제2부 | 토빗기 | 낯선 땅에서도 타향살이 / 선행 / 기도 / 유언 / 여행 / 결혼 / 가족
제3부 | 유딧기 | 멸망의 위기에도 정복 / 교만 / 시련 / 계획 / 찬양
제4부 | 에스테르기 | 죽음의 위험에도 본문과 역사 / 계획 / 음모 / 개입 / 축제
맺음말 함께 계셨던 하느님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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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역사 설화
| 룻기 | 삶의 쓰라림 속에서도
모압 낯선 사람. 룻은 아주 낯선 사람입니다. 모압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 “암몬족과 모압족은 주님의 회중에 들 수 없고 그들의 자손들은 십대손까지도 결코 주님의 회중에 들 수 없다.”(신명 23,4)라고 할 만큼 이스라엘은 모압을 멀리했습니다. 왜 하필 그런 인물을 이 책의 주인공으로 삼았을까요?
더구나 룻기 마지막에 실려 있는 족보에 따르면 룻의 아들이 오벳, 오벳의 아들이 이사이, 이사이의 아들이 다윗입니다. 모압 여자인 룻이 이스라엘의 족보에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다윗시대?: 어떤 이들은 룻기가 아주 오래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룻기가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 다.”(4,22)라는 말로 끝나는 데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저자가 룻기를 쓴 목적이 이스라엘 임금인 다윗의 조상 가운데 모압 여자가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룻이 비록 이방인이었어도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보여 줌으로써 다윗을 옹호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룻기를 썼다면, 이 책을 쓴 것은 아직 다윗 왕조의 권위가 확립되지 않았던 기원전
10~8세기여야 합니다. 근래에는 룻기가 다윗시대에 작성되었다고 보는 이들의 거의 없습니다.
아무 시대라도 상관없다?: 룻기의 경우 많은 이들이 지지하는 것은 에즈라 · 느헤미야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해석입니다. 룻기가 던지는 도전의 내용을 보면 언제 누구에게 도전을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모압 여자 룻은 자신을 배척하는 이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는 아직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해석들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 해석들에서 모두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움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 다윗의 족보?: 다윗의 실제 족보에는 룻이 들어 있었을까요? 일단, 제가 검색을 해 보았는데 구약 성경에서 룻이라는 이름은 룻기에만 등장합니다. 룻기의 저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다윗의 족보로 끝나게 하면서 룻을 다윗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의 등장인물 가운데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 언급된 사람은 보아즈뿐입니다(1역대 2,11,12). 더구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상징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나의 감미로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나의 하느님은 임금’, 나오미의 아들 마흘론은 ‘질병’, 킬욘은 ‘허약함’을 뜻하고, 며느리 오르파는 ‘목덜미’를 뜻합니다. 룻이라는 이름의 뜻은 분명치 않은데, ‘원기 회복’을 뜻하는 듯합니다. 이것이 실제 인물들의 이름일까요? 또한 룻기에서, 객관적으로 말해서 너무나 가능성이 적은 우연한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것도 룻기가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합니다. 결론적으로, 룻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저자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이 이야기를 다윗의 족보로 끝나게 한 것은 그가 다윗의 권위에 의지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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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 - 마라(룻1장) 나오미 - 마라: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었고 생명을 유지할 양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타향살이 끝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 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 나오미는 ‘나의 감미로움’이고 마라는 ‘쓰라린 여자’를 뜻합니다. 나오미의 삶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그런 나오미에게 하느님은 나를 치시는 분,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는 분이십니다.
오르파: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가 있습니다. 유다인인 마흘론과 킬욘이 모압 여자들과 결혼했다는 것은 이미 율법에 어긋납니다. 며느리들의 이름은 오르파와 룻입니다. 그 이름들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르파’라는 이름은 ‘목덜미’와 연관되어 시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간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오르파는 나오미의 말을 따라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룻기는 오르파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르파의 선택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룻: ‘룻’이라는 이름은 더 어렵습니다. 과거에는 ‘친구’라는 의미로 여겨졌지만, 근래에는 ‘충족시키다, 만족시키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 이름을 지닌 룻은 나오미 곁에 남기를 선택합 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룻1,16) 룻의 이러한 행동을 가리켜 보아즈는 ‘효성’(3,10)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효성’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헤 셋’입니다.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이지요. 룻기 안에서도 3,10 외에는 ‘자애’로 번역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오미의 삶 안으로 들어온 이 낯선 사람을 통하여 나오미를 돌보십니다. 나오미는 이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았을까요? 나오미는 자신이 며느리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이 낯선 사람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낯선 사람과 함께 머물 때 그 낯선 사람은 나오미에게 하느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보아즈(룻2장) 호의: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추수하고 남은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본래 구약의 율법에서는 수확할 때에 떨어진 이삭이나 포도 등은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두 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은 그 지방에 자기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 남의 땅에 몸을 붙이고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인 모압 여자 룻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가장도 없고 주민등록도 없고 의료 보험도 없고, 오늘날의 불법 체류 이주 노동자 같은 처지입니다. 나중에 보아즈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물을 마시라고 할 때에도 룻은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2,10)라고 말합니다.
자애: 보아즈의 축복, 그리고 이어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자애. 그것은 과연 하느님의 자애일까요, 보아 즈의 자애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자애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자애를 통하여 구체화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룻을 율법에서 정해진 것 이상의 배려로, 룻이 기대할 수 없는 호의를 베풀어 보호해 준 보아즈의 호의는 글자 그대로 룻과 나오미가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세상살이가 그런 모양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살 수 있게 해주고, 다른 누군가가 또 나를 살수 있게 해줍니다. 룻을 그 자리에 있게 하시고 보아즈를 그 자리에 있게 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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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룻3장) 구원자: 이삭을 주우러 갔던 룻이 나오미에게 돌아와 보아즈의 밭에서 호의를 입었다는 것을 전했을때 나오미는, “그분은 우리 일가로서 우리 구원자 가운데 한 분이시란다.”(2,20)라고 말했었지요. 여기서 ‘구원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고엘’은 한 가정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그 가정의 가족들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빚 때문에 가족이 종으로 팔려 갔으면 그를 속량하고, 집안에 속한 땅이 다른 집안에 넘어가게 될 경우에는 그것을 다시 사들여 집안의 재산을 지켜 주어야 하고, 친족이 살해되었을 때에는 피의 복수까지도 하는 것이 구원자의 역할입니다. 룻은 보아즈에게 그 고엘 역할을해 주기를 청합니다.
주님의 날개: 주님의 날개(히브리어 ‘카나프’) 아래로 피신한 룻에게, 보아즈는 자신의 옷자락(카나프) 을 덮어 줍니다. 다시 한번 그는 하느님 ‘헤셋’의 도구가 되어, 한철의 양식을 마련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후손을 마련해 주는 것을 통하여 나오미와 룻의 삶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룻의 도전장은 예수님의 도전장과 닮았습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3,4)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이들의 완고함을 몹시 슬퍼하십니다(마르3,5).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윗(룻4장) 축복: 온 백성과 원로들은 롯을 축복하여, 하느님께서 룻을 “둘이서 함께 이스라엘 집안을 세운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주시기를”(4,11) 기원합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모압 여자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어머니에 비견됩니다. 이것은 룻의 ‘헤셋’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오르파와 같이 모압의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어머니 곁에 남기를 선택했던 룻의 헤셋,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려 하지 않고 엘리멜렉 집안을 위하여 고엘인 보아즈를 찾아간 헤셋, 그리고 이에 응답한 보아즈의 헤셋, 율법의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규정된 의무를 넘어서는 룻과 보아즈의 율법 해석. 이것이 모압 여자를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합니다.
다윗: 룻이 낳은 오벳이 “다윗의 아버지인 아사이의 아버지”(4,17)라는 점은 특별히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족보가 없었더라면 룻과 보아즈의 이야기는 한 평범한 집안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4,22)라는 마지막 말은 룻기 전체를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 놓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지니는 전무후무한 의미 때문입니다.
보아즈는 룻이 모압 여자라고 해서 내치지 않고, 또 자신이 행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 규정의 본 정신을 따라, 그 규정의 의도를 온전하게 살아 내기 위하여 땅을 상속받을 아들을 낳아 주기까지 합니다. 서로를 지켜 주는 가족을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이 표현되고, 죽음, 굶주림, 자녀 없음으로 그늘져있던 나오미가 생명, 풍요로움, 후손, 충만함을 되찾을 수 있게 됩니다.
| 토빗기 | 낯선 땅에서도
타향살이 언제?: 토빗기에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법령”, “모세의 책에 있는 규정”, “율법”을 말합니다 (6,13;7,11-13). 또한 토빗 14,4에서는 “나훔이 니네베를 두고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을 나는 믿는다.”
라고 말합니다. 작성연대는 보통 기원전 225~175년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빗기가 제2경전에 속하고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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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들이 이 책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 책의 작성 연대가 늦은 편이라고 추정하는 이유가 되지만, 쿰란에서는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된 토빗기의 단편도 발견되었습니다.
토빗의 이야기: ‘토비엘’은 ‘하느님은 나의 선’, ‘하난엘’은 ‘하느님이 은혜를 베푸셨다’, ‘가바엘’은 ‘하느 님이 나를 들어 높이셨다’, ‘라파엘’은 하느님은 치유하신다‘를 뜻합니다. 대대로 이러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심이 깊은 집안이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토빗이 처해 있는 타향살이의 처지는, 외세에 침략을 당해 아시리아로 또는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에만 벌어지는 상황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에 일치하지 않는 주변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썼던 토빗의 타향살이는,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라고 말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선행(토빗1-2장) 타향에서 신앙생활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토빗기 1장입니다. 토빗1,3에서 토빗은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나와 함께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토빗의 자화상 이라고 하겠습니다.
포로: 토빗의 충실함은 갚음을 받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내가 살만에세르에게서 호의와 귀염을 받도록 해주셨다.”(1,13) 토빗은 살만에세르 임금 때에, 말하자면 외교 통상부 장관과 같은 자리에 오릅니다. 토빗1,15에서는 살만에세르에서 산헤립(재위, 기원전704~681년)으로 임금이 바뀌는데, 역사적으로는 그 둘 사이에 사르곤2세(재위, 기원전722~705년)가 있습니다. 임금이 바뀌면서 메디아로 가는 길이 막히고 은행 거래가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산헤립은 유다에서 돌아온 다음 많은 유다 인들을 죽였습니다(토빗1,18). 이 상황 속에서 토빗은 유다인들의 시신을 묻어 주는 거룩한 의무를 다하였습니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은 중요한 자선 행위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토빗은 위험을 무릅쓰고 죽은 이들을 묻어 줍니다(토빗2,4-7;12,12-13).
자선: 토빗기에서는 자선을 매우 중시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자선’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책이 토빗기입니다(토빗기22회, 집회서13회, 잠언8회 등). 이스라엘 땅에서 살 때에 신명기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고 십일조를 바쳤던 토빗은, 유배지에서는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는 입을 것을 주며, 죽어서 던져져 있는 동족을 보면 묻어 주는 것으로 그의 신앙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선행의 결과: 그런데 토빗에게는, 신명기에서 율법에 충실한 이들에게 약속된 축복은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당에서 잠을 자던 중에 뜨거운 참새 똥이 두 눈에 떨어져 눈이 멀게 된 것은 어떻 게도 설명할 수 없는, 아무런 이유 없는 고통을 나타냅니다. 선하게 살아온 그가 이런 불행을 겪게 되자 그의 아내까지도 그에게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2,14)라고 말하며 그의 길을 반박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선에 대한 갚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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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토빗3장) 토빗의 기도: 토빗 3,1-6에서 토빗은 하느님께, 곤궁과 모욕을 벗어날 수 있도록 차라리 죽음을 주시 기를 청합니다. 그가 단순히 자신의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하고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하느님께 목숨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은 이웃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슬픔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3,6)
사라의 기도: 같은 시기에 토빗의 친척인 라구엘의 딸 사라는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살고 있었는데, 일곱 번 결혼을 했지만 매번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남편들을 죽였습니다. 사라 역시 이러한 불행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종은 사라에게 “당신 남편들을 죽이는 자는 바로 당신이에 요.”(3,8)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이 죽은 불행이 여자의 탓으로 돌려집니다. 상당히 남성 중심적인 관습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사라는 처음에는 스스로 목을 매려고 했지만, 자기가 불행을 못 이겨 목숨을 끊는다면 그것이 아버지에게 모욕이 되고 너무 큰 불행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목숨을 거두어 가시기를 청합니다. 토빗과 사라, 둘이 모두 죽기를 바랐지만, 그리고 이것을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생각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그들은 고통 때문에 하느님과 벽을 쌓고 자신 안에 갇히거나 하느님도 나를 버리셨다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결혼(토빗9장) 지금까지 “형제, 동포”가 강조되었다면 이제 토비야와 사라가 혼인을 맺게 되면서 이 부부에게 초점이 맞춰집니다. 토빗기의 중심에는 이들의 결혼이 있습니다. 평화롭고 행복하기만 한 결혼은 분명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앞서 사라와 결혼했던 이들이 모두 죽었음을 이야기 했고, 사라의 아버지도 토비야에게 이를 숨기지 않습니다.
치료 약: 그날 밤의 장면은 강렬합니다. 먼저 토비야는 물고기의 간과 염통을 태워 악귀를 쫒아냅니다.
토비야는 라파엘의 도움으로 그 악귀를 쫓아냄으로써 사라에게 ‘하느님의 치료’를 베풉니다. 그 태우는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아스모대오스는 이집트 끝 지방까지 도망쳤지만 라파엘이 쫓아가서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버렸다고 합니다. 토비야와 사라는 밤중에 일어나 하느님께 간청했습니다. 라파엘이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먼저 둘이서 함께 일어나 하늘의 주님께 기도하며 그대들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하시오.”(토빗 6,18) 이것을 보면, 하느님의 치료 약은 물고기의 간과 염통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라파엘이 알려 준 치료 약은 그날 밤에 신랑과 신부가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가족(토빗10-14장) 니네베: 토비야는 라구엘의 집에 머물면서 라파엘을 보내어 아버지가 라게스에 있는 가비엘에게 맡겨 놓은 돈을 찾아오게 하고(9장), 돈을 찾은 다음 열나흘 동안의 혼인 잔치를 마치고 니네베로 돌아갑니다(10장). 이제는 행복한 결말만이 남았습니다. 토비야가 니네베에 돌아와 라파엘이 말한 대로 물고기의 쓸개를 아버지에게 발라 주자 토빗은 시력을 되찾았습니다(11장). 토비야가 니네베로 돌아온 다음 라파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하느님께 올라갑니다(12장).
예루살렘: 토빗은 다시 복을 누리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토빗은 토비야에게만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토비야의 후손들에게도 같은 가르침을 전하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여라. 너희 자식들도 잘 타일러서, 의로운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게 하여라.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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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그리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게 하여라.”(14,9)
가족: 성경 본문에 따르면 토빗기의 가족도 많은 불행을 겪었으며, 어쩌면 그 가족이 유지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이 이 책들의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은, 분명 많은 어려움 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이 같은 배를 타고 삶을 헤쳐 나가는 바로 그가족이 함께 있음으로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토빗 시대만의 일일가요? 가족보다 더 진실하게 “영 원히 네 곁에” 있겠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가족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그래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동안만”이 아닌 “영원히” 네 곁에 있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 가족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 유딧기 | 멸망의 위기에도
정복(유딧1장) 유딧의 이야기: 유딧기 역시 정확한 역사 기록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 전체가 아무 근거 없이 허구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유딧기의 줄거리를 한줄로 말한다면, 포위된 배툴리아에서 과부 유딧이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논개 같은 이야기이지요. 만일 유딧이 실제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페르시아 시대의 인물이었을 수 있고, 그에 관한 전승이 변모를 겪은 다음 지금과 같은 유딧기로 완성된 것은 대략 마카베오 시대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히브리어에서 ‘유다’의 여성형이 ‘유딧’이기 때문입니다. 상징적인 이름이거나 아니면 유다 민족 전체를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와 아티오코스4세: 네부카드네자르는 엑바타나에서 승리한 후 백이십 일간 잔치를 열며 (유딧1,16) 복수를 계획합니다. 이 임금의 모습은 다니 4장에 나타나는 네부카드네자르의 모습과 겹쳐 집니다. 다니 4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는 “이것이 대바빌론이 아니냐? 내가 영광과 영화를 떨치려고 나의 강력한 권세를 행사하여 왕도로 세운 것이다.”(다니 4,27)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모든 업적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 영화를 누리던 네부카드네자르는 모든 것을 잃게 되고 그 후에 비로소 왕권이 오직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매우 인상 깊은 장면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인간은 결국 그 영광을 잃고서야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너희는 더 이상 인간에게 의지하지 마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무슨 가치가 있느냐?”(이사 2,22)
교만(유딧2-5장) 보복: 유딧기 1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는 메디아의 아르팍삿과 전쟁을 하면서 주변 민족들에게 동맹을 맺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그 요구를 거부하였으므로 임금은 분노하여 그들을 치기로 합니다. 아르팍삿을 꺾은 후 잔치를 벌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보복을 계획 합니다. 그는 “내가 내린 명령에 불복한” 이들에게 항복을 명하고 주민의 이주와 영토의 정복, 약탈, 학살, 재산 몰수를 명합니다. “내 목숨과 내 왕국의 힘을 걸고 말하는데, 나는 한번 말한 것은 내 손으로 이루고야 만다.”(2,12)
전투 준비: 다가오는 위험 앞에서 “유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들”(유딧 4,1)은 항전을 준비합니다. 높은 산꼭대기들을 점령하고 마을들에 성을 쌓으며, 양식을 저장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서와 달리 이스 라엘에게서는, “여호야킴 대사제”와 “예루살렘에서 회의를 한 온 이스라엘 백성의 원로단”(4,8)이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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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갖습니다. 여호야킴의 계획은 간단합니다. 유다로 들어가는 관문인 산악지방의 좁은 고갯길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랍사케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랍사케는 “히즈키야가 ‘주님께서 우리를 구해 내신다.’하면서, 너희를 부추기는 일이 없게 하여라. 뭇 민족의 신들 가운데 누가 제 나라를 아시리아 임금의 손에서 구해 낸 적이 있더냐?” 그 이야기의 결말은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이 모두 죽어 주검뿐이었다.”(이사 37,36)라는 것입니다.
시련(유딧6-8장) 시험: 16장으로 되어 있는 유딧기에서, 8장에 이르러 처음으로 과부인 유딧이 등장합니다. 보통 과부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 속하지만, 유딧은 용모가 아름다웠고 남편이 남긴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 습니다. 유딧은 세 해 넉 달 동안 자루옷을 두르고 과부 생활을 하며 축제일 외에는 늘 단식했던, 한마 디로 “하느님을 크게 경외하는 사람”(유딧8,8)이었습니다. 그런 유딧이 나타나, 우찌야가 닷새를 기다린 다음 성읍을 아시리아인들에게 넘기기로 한 일에 대해 듣게 됩니다. “도대체 여러분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오늘 하느님을 시험하시고, 사람에 지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자리에 서시는 것입니 까?”(8,12)
불 같은 시련: 유딧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이스라엘을 쉬운 길로만 이끄시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유딧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시험하시려고 보내신 불 같은 시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계획(유딧9-11장) 이제 유딧기의 후반부는(9-16장), 유딧이 적진에 들어가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들고 나오는 줄거리가 전개됩니다. 유딧은 그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 사건을 치르고 나서도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기도: “제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려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유딧8,34) 유딧의 계획을 알 수 없으니, 다른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유딧이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유딧 자신은 그 도구가 되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어떻게 드러납니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 자신의 약함을 없애 주시기를 청했지만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 다.”(2코린 12,9)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당신의 능력은 수에 달려 있지 않고 당신의 위력은 힘센 자들 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유딧9,11)라는 유딧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네부카드네자르나 홀로페르네스가 생각한 ‘위력’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심을 말해 줍니다.
대화: 유딧은 이제 향유와 화사한 옷, 신발과 온갖 패물로 단장하고 아시리아 진영으로 갑니다. 특이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유딧이 자루에 음식을 담아 들고 간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음식 규정 때문입니다. 이교인들에게 갔을 때 율법에 금지된 음식들을 먹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아시리아 군사 들은 유딧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습니다. 홀로페르네스 앞으로 인도된 유딧은 마치 하느님 앞에서처럼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10,23) 홀로페르네스에게 절합니다. 홀로페르네스는 유딧이 자신을 도와
?9 ? 구약의 역사 설화
배툴리아를 정복하게 해 주리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유딧은 용감합니다.
찬양(유딧12-16장) 나흘째: 지난 사흘 동안 유딧은 밤마다 밖으로 나가 하느님께 기도하며 이날을 준비했습니다. 긴장이 고조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긴장과는 정반대로 홀로페느네스는 유딧의 아름다움에 빠져 잇습니다.
그가 유딧을 부르는 것은 그가 멸망할 ‘기회’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유딧은 그 부름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연회는 길어지고 시종들은 모두 물러가 잠이 듭니다. 유딧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들뜨고 정신이 아뜩해진(12,16) 홀로페르네스는 술에 취해 침상 위에 쓰러져 있습니다(13,2) 유딧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마음을 모으고 있는데, 홀로페르네스는 마치 나무토막처럼 무력합니다.
유딧은 그의 목을 베고 몸뚱이를 굴려 버립니다. 이렇게 허망할 수가. 성경에 왜 전쟁 이야기가 있을 까요?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깨우침을 줄까요? 유딧이 네부카드네자르나 홀로페르네스처럼 자신의 업적을 자랑했다면 이 책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시자 생겨났으니 모든 조물은 당신을 섬겨야 합니다.”(16,14)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이 놀라운 일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네부카드네자르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 주권은 오직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에스테르기 | 죽음의 위험에도
에스테르기의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 해도 독자가 살고 있는 상황은 역사적 사실이었고,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역사를 해석하는 실마리를 찾게 해 줍니다. 그래서 역사 설화들은 역사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계획(에스1-2장) 총애: 와스티, 모르도카이, 그리고 에스테르. 그들 각자에게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역할이 있습니다. 와스티가 잔치에 나가지 않았다고 임금이 분노하는 것, 에스테르가 헤게와 크세르크세스의 눈에 들게 되는 것, 모르도카이가 궁궐 대문에 근무하게 되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실행하시려고 결정하신 바”(에스1.1)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하면 우연이겠고, 섭리라고 하면 섭리이 겠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실행하시려고 결정하신 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인간의 역할 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이렇게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화답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음모(에스3-4장) 히브리어 에스테르기에서는, 3장에서 “유다인들의 적”(에스3,10)이라고 일컬어지는 하만이 등장하여 모르도카이와 맞섭니다. 그리스어 에스테르기에서는 처음에 첨가된 단락에서 이미 하만이 언급되었지요.
침묵을 지킨다면: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에게 하만의 음모와 임금의 명령을 알려 주고, “하느님께 간청 하고 임금님께 우리 사정을 말씀드려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시오.”(4,8)라고 말합니다. 에스테르는 임금이 부르지 않았는데 임금 앞에 나설 수는 없으며, 그랬다가 임금이 황금 왕홀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면 사형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결정적인 대화가 이 시점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르도카이가 에스테르 에게 말합니다. “그대가 이런 때에 정녕 침묵을 지킨다면, 유다인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은 다른 데서 일어날 것이오. 그러나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 집안은 절명하게 될 것이오.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10 ? 구약의 역사 설화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4,14) 에스테르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래도 하느님은 유다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다른 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에스테르가 지금 왕비 자리에 이르러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때를 위해서였습니다. 모르도카이의 이 말은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라는 요셉의 말과도 비슷합니다.
축제(에스 8-10장) 하느님의 계획: 어떤 이들은 에스테르기가 굳이 하느님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역사를 인도해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전제하는 다른 설화들과 같은 노선에 있다고 봅니다. 룻기와 토빗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형태를 볼 수 있었지요. 이 책은, 순전히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같이 보이는 사건들 속에서도 하느님은 섭리하고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모르도카이의 기도와 에스테르의 기도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이 명백히 표현됩니다. 이렇게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볼 수 있다면, 독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 안에 서도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눈으로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우연이고, 어쩌면 운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들의 이야기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 안에서 작용했던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작용한다는 것을 믿게 합니다. 낯선 세상 안에서 외롭게 삶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십니다.
?11 ? 구약의 역사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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