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담로슈 지음 / 아이템하우스
이 책은 18세기 영국의 지성인과 문화인이 한데 모여 자연스런 소통과 정보교류, 그리고 논쟁을 벌이던 ‘더 클럽’이라는 이름의 모임과 관련된 인물과 시대상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오랫동안 서로 관계를 맺고, 때로는 논쟁과 경쟁을 하면서, 그리고 서로 도와가면서 위대한 작품과 이론, 정책을 비롯한 다양한 결과물들을 완성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탐구한다.
더 클럽
▣ 저자 레오 담로슈
하버드 대학교 문학과 어니스트 버봄 명예교수다. 그는 『조너선 스위프트 : 그의 삶과 세계』로 미국 도서비평가상을 수상했고 『영원의 일출 : 윌리엄 블레이크의 상상의 세계』를 출간했다.
▣ Short Summary
1764년,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 총장이자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조슈아 레이놀즈는 영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비평가이자 걸출한 시인으로 꼽히는 절친 새뮤얼 존슨의 우울한 심산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함께 모임을 만들게 된다. 매주 금요일 밤마다 선술집에서 각자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러운 소통과 정보교류, 그리고 논쟁을 벌이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이 모임은 어느덧 ‘더 클럽’이라는 이름을 갖추면서 정치, 경제, 역사, 예술, 문학 등 다방면의 지성인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경제학을 확립한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스코틀랜드 출신의 걸출한 전기 작가 제임스 보즈웰, 영국 보수당의 토대를 이룩한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 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 등등. 18세기 해가 지지 않는 근대 영국의 기초를 환성한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이 모임 출신이었다.
이 책은 18세기 영국의 지성인과 문화인이 한데 모여 자연스런 소통과 정보교류, 그리고 논쟁을 벌이던 ‘더 클럽’이라는 이름의 모임과 관련된 인물과 시대상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오랫동안 서로 관계를 맺고, 때로는 논쟁과 경쟁을 하면서, 그리고 서로 도와가면서 위대한 작품과 이론, 정책을 비롯한 다양한 결과물들을 완성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탐구한다.
▣ 차례
추천의 글프롤로그더 클럽 화보
CHAPTER 1 새뮤얼 존슨: 역경의 시절 CHAPTER 2 새뮤얼 존슨: 마침내 얻은 명성 CHAPTER 3 제임스 보즈웰: 넓은 세상을 향하여 CHAPTER 4 제임스 보즈웰: 자아를 찾아서 CHAPTER 5 운명적 만남 CHAPTER 6 유학길에 오른 제임스 보즈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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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더 클럽의 탄생 CHAPTER 8 조슈아 레이놀즈 CHAPTER 9 에드먼드 버크 CHAPTER 10 데이비드 개릭 CHAPTER 11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리처드 셰리든 CHAPTER 12 새뮤얼 존슨과 스레일 부부 CHAPTER 13 스코틀랜드와 제임스 보즈웰 CHAPTER 14 스코틀랜드 고지대와 헤브리디스 제도로의 여행 CHAPTER 15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 CHAPTER 16 대영제국과 식민지 CHAPTER 17 애덤 스미스 CHAPTER 18 에드워드 기번 CHAPTER 19 불신자와 신앙인 CHAPTER 20 말년의 존슨 CHAPTER 21 내리막길 위에 선 보즈웰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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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클럽
새뮤얼 존슨 - 역경의 시절
새뮤얼 존슨은 1709년 스태퍼드셔 리치필드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점을 운영하던 아버지 마이클 존슨은 52살이었고 어머니 사라포드는 40살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난산으로 고생을 했고, 유모에게 그를 맡겼는데, 존슨은 유모 때문에 연주창에 감염되었다. 연주창은 몇 년 뒤에 자연스럽게 나았지만, 그의 목에 흉측한 흉터를 남겼고, 존슨은 연주창 때문에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존슨은 7살부터 15살까지 리치필드 그래머 스쿨을 다녔는데, 라틴어가 뛰어났다. 한편 아버지의 서점은 그가 탐독할 라틴어 책들로 가득했고, 어린 새뮤얼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국 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옥스퍼드 대학은 학비가 비쌌지만, 그의 어머니가 상속 받은 약간의 유산과 가족 친구가 빌려준 돈으로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옥스퍼드 대학 교에 입학하게 된 부유한 학교 친구가 도움을 주기로 했는데, 안타깝게도 학비를 도와주겠다던 학교 친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얼마 뒤 존슨은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옥스퍼드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존슨은 극심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러다가 그는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불안에 대한 최고의 대처법은 불안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참고로 그는 틱을 가지고 있었고 강박적으로 행동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는데, 이런 행동들은 그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줬다.
옥스퍼드를 중퇴한 이후 5년 동안 그의 자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후 그는 버밍엄으로 이사했고, 외과 전문의로 일하던 오랜 학교 친구인 에드먼드 헥터와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존슨은 포목 도매상인 해리 포터,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딸 루시를 알게 된다. 이들과 알고 지낸 지 1년 뒤에 해리 포터가 죽는다. 해리 포터가 죽은 지 채 1년이 안 된 어느 날 존슨은 엘리자베스와 결혼했고, 자신 보다 6살 어린 루시의 계부가 되었다. 당시 그는 26살이었고 엘리자베스는 46살이었다.
존슨은 엘리자베스를 테띠라고 불렀는데, 테띠는 600파운드라는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 돈으로두 사람은 리치필드에서 3마일 떨어진 에디얼이라는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세운 학교를 찾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는데, 왜냐하면 리치필드 그래머 스쿨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한편 존슨과 테띠의 학교를 다니던 몇 안 되는 학생 중에 십대 초반의 데이비드 개릭이 있었는데, 데이비드 개릭은 흉내를 잘 냈다. 그는 존슨의 스태퍼드셔 억양을 흉내 내길 좋아했다.
이후 에디얼 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한 돈은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고, 지금부터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 아야 할지를 존슨은 고민했다. 참고로 이 어려운 시기에 사귀었던 한 친구는 “존슨은 먹고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고, 전문직을 가질 수 없었기에 필요에 의해 작가가 됐다”고 했다. 작가가 되려면 런던으로 가야했다. 1737년 새뮤얼 존슨은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데이비드 개릭과 함께 런던으로 간다. 테띠는 그가 런던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개릭은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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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빨리 이뤄진다. 존슨은 비극 무운시 〈아이린〉원고를 들고 런던으로 갔다. 하지만 그 시를 발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개릭과 달리 존슨이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참고로 1731년 에드워드 케이브는 《젠틀맨즈 매거진》이라는 월간지를 출판했는데, 《젠틀맨즈 매거 진》에는 이것저것 다양한 글이 실렸고, 1737년 널리 알려졌다. 존슨은 미리 《젠틀맨즈 매거진》에 실을 글을 써놨었다. 그의 글을 본 케이브는 단숨에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는 매거진에 다양한 글을 기고했다. 사실상 새뮤얼 존슨이 매거진 편집장이나 다름없었다.
1737년 새뮤얼 존슨이 런던으로 간 지 몇 달 뒤에 테띠도 런던으로 올라왔다. 1740년대 초반에 이르러 새뮤얼 존슨은 거의 총각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테띠는 그와 함께 친구들의 모임에 나가지 않았고 절대 자신의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지도 않았다. 테띠는 점점 술과 아편에 의존했다. 그리고 신선한 바람을 쐰다는 핑계로 작은 집을 빌려 햄스테드에서 머물렀다. 1752년 테띠는 6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런던 교외의 브롬리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존슨은 여생 동안 아내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편 새뮤얼 존슨은 글을 잘 썼다.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이른바 ‘존슨 스타일’은 호소력 짙고 정도를 지키려는 정신적 용기로 가득했다. 하나의 사례가 존슨이 1738년 익명으로 발표한 〈런던〉이다. 이는 새뮤얼 존슨이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의 여섯 번째 풍자시를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압운이 있는 쿠플레 형식으로 작성한 시로 힘 있고 격정적이다.
한편 새뮤얼 존슨의 첫 번째 성공작은 1744년 발표한 『리처드 새비지의 인생』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뒤, 그때까지 존슨을 알지 못했던 조슈아 레이놀즈는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벽난로 위 선반에 기대어 읽기 시작했다. 후에 레이놀즈는 보즈웰에게 “깊이 빠져들어 끝낼 때까지 그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다 읽고 난 뒤 자리를 옮기려고 하자 팔에 아무 감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새뮤얼 존슨 - 마침내 얻은 명성
1750년대 존슨은 문인으로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오르게 되는 걸작을 연달아 발표했다.
새뮤얼 존슨은 십여 년간 익명으로 글을 쓰다가, 1749년에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압운이 있는 쿠플레 형식의 시와 무운시 형식의 희곡을 발표했다. 한편 〈욕망의 공허〉는 존슨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발표한 첫 번째 시다. 〈욕망의 공허〉는 그가 익명으로 발표한 〈런던〉처럼 유베날리스의 풍자시를 각색한 것이었지만, 〈런던〉보다 힘이 넘쳤다. 그리고 존슨의 유일한 장편 시였다.
새뮤얼 존슨은 작가로서 유명해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장 유망한 듯 보였던 시와 희곡이란 두 장르는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후에 그는 간략한 중편소설 『라셀라스』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시, 희곡 그리고 소설 외에 유망한 장르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기간행물이었다. 새뮤얼 존슨은 출판인들 몇몇을 설득했고, 《더 램블러》를 발간했다. 본래 《더 램블러》는 6쪽의 팸플릿으로 출간됐는데, 그 뒤 다양한 형식으로 출간됐고, 하나의 수필집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더 램블러》에 실린 그의 글에는 그만의 개성이 있는 스타일이 생겨났다. 새뮤얼 존슨은 복잡하고 과장된 산문체를 선호했는데, 그의 문체는 ‘존슨체’로 잘 알려져 있다.
1746년 출판인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사전 편찬을 하기 위해 새뮤얼 존슨과 계약을 체결했고,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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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편찬을 위해 꾸준히 작업했다. 마침내 1755년 사전 편찬이 완료됐고, 그의 사전은 출판 즉시 기념비적 성과로 인정받았다. 초기 전기작가는 그것을 ‘새뮤얼 존슨의 단어 세상’이라 불렀다. 존슨 사망 200주년에 『더 타임즈』의 논설위원은 “영국 사람의 주요 자랑거리는 그들의 언어와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이다. 이 지구상에서 천재적인 작가가 사전을 편찬한 유일한 언어가 영어다.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덕분에 이 언어의 영예가 드높아졌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과찬이 아니다.
제임스 보즈웰 - 넓은 세상을 향하여
제임스 보즈웰은 1740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제임스 보즈웰의 아버지 알렉산더 보즈웰은 오킨렉 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호칭은 세습 작위가 아니라 최고의 판사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칭호였다.
오킨렉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부동산의 이름이었고, 보즈웰의 할아버지가 그 부동산을 소유했다. 제임스 보즈웰은 지배적인 아버지와 유약한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아버지보다 10살 어린 어머니는 소심 하고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했으며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녀의 독실함은 자녀들에게 고통스러운 영향을 미쳤는데,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칼뱅주의를 엄격하게 따랐고 운명과 지옥 불을 강조했다.
13살 때 보즈웰은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고, 강의실을 들락날락거리며 6년을 다녔다. 그는 교육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즐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조금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사교생활에 빠져들었다. 한편 보즈웰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 하게 일기장에 기록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를 효과적으로 기록하는 방법을 익혀나갔는데, 이것은 그의 문학적 성취의 아주 중요한 자산이 된다. 이후 그의 방탕한 생활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고
1759년 아버지는 아들에게 글래스고 대학교로 가라고 명령했다.
글래스고는 칼뱅파의 전통에 따라 극장은 허용되지 않았고, 글래스고 대학교의 교칙은 교수진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엄격했다. 당시 애덤 스미스는 10월부터 6월까지 일주일에 한 번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철학과 수사학을 가르쳤고, 오후에는 학생들과 개별 지도 시간을 가졌는데, 제임스 보즈웰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글래스고로 간 지 6개월이 흐른 뒤에 보즈웰은 학교에서 무단이탈해서 런던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아들 에게 당장 에든버러로 내려오라고 명령했다. 그 이후 보즈웰은 글래스고로 되돌아가지 않았고 학위도 따지 못했다. 대신 그는 혼자서 법을 공부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민법 시험을 통과하면, 런던으로 돌아 가도 좋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네덜란드에서 계속 공부할 계획이었다.
이후 보즈웰은 22살이 되기 직전에 민법 시험에 합격했고, 1762년 11월 15일 에든버러를 떠나 런던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즐겁게 사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는 런던을 처음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친구들 몇몇과 재회했다. 앤드루 어스킨, 조지 뎀스터, 에글린턴 백작 등이었다. 이들 외에도 에든버러에서 알았던 친구들과도 재회해서 우정을 다시 이어나갔는데, 그중 한 명이 40대 초반의 아일랜드인인 토마스 셰리든이었다. 셰리든은 얼마 동안 더블린에서 극장을 운영했는데, 극장이 망했을 때, 그는 런던에서 배우가 됐고 웅변술을 가르쳤다. 셰리든에겐 매력적인 아내 프랜시스가 있었는데, 데이비드 개릭이 드루어리 레인에 올린 연극 몇 편은 프랜시스 셰리든의 작품이었다. 한편 보즈웰은 오가다가 스치면서 토마스와 프랜시스 셰리든의 막내아들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리처드 셰리든이다. 리처드 셰리든은 뛰어난 극작가로 성장했고 더 클럽의 회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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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만남
보즈웰이 런던에서 지낸 지 6개월이 지났다. 보즈웰은 『더 램블러』와 『라셀라스』를 읽고 존슨을 지혜의 대가로 존경했다. 한편 에든버러에서 보즈웰에게 웅변술을 가르쳤던 토마스 셰리든은 존슨의 친구였다. 런던에서 셰리든과 재회한 보즈웰은 셰리든에게 존슨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셰리든은 자신은 더 이상 존슨과 연락하지 않는다고 매몰차게 이야기했다. 셰리든 외에도 보즈웰과 새뮤얼 존슨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연기를 하던 토마스 데이비스는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가까운 러셀 스트리트에서 서점을 운영했는데, 그는 보즈웰과 친구가 되었다.
데이비스는 존슨이 자주 자신의 서점을 찾는다고 보즈웰에게 말했다. 운이 좋다면 보즈웰은 그의 서점 에서 존슨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고 새뮤얼 존슨은 자신의 전기를 쓸 운명을 타고난 보즈웰을 만났다. 1763년 5월 16일은 보즈웰에게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시작됐다. 오후에 데이 비스의 서점에서 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존슨이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보즈웰은 『존슨전』에서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극적인 전환점이었다고 썼다.
데이비스는 보즈웰에게 존슨을 소개했다. 보즈웰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곧장 말실수를 했고, 자신의 실수와 새뮤얼 존슨의 응수에 기가 죽을 만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기가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그들과 함께 있었고 아주 가끔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후 존슨이 떠난 뒤 데이비스는 “불안해할것 없어. 자네가 마음에 쏙 든 눈치였어”라고 말했다. 일주일 뒤 보즈웰은 용기를 내서 존슨을 찾아갔다. 아마도 데이비스가 그에게 존슨이 집으로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 줬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고 3개월이 채 안 됐을 무렵 보즈웰은 네덜란드로 떠났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은 서로 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였고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21년 동안 지속됐다. 1784년 존슨이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우정도 끝이 났다. 우정을 나누는 동안 보즈웰은 끊임 없이 존슨에게 의지했다. 보즈웰은 그에게서 아버지로부터는 받지 못한 조언, 격려, 그리고 사랑을 받았다. 이렇게 『존슨전』은 두 사람의 오랜 우정에서 시작됐다.
더 클럽의 탄생
1763년 새뮤얼 존슨이 제임스 보즈웰과 함께한 기간은 3개월 남짓이었다. 이 기간 동안 보즈웰과 나눈 애정 어린 우정은 그에게 삶의 활력소였다. 하지만 그해 가을 보즈웰이 네덜란드로 떠난 뒤에 존슨은 끔찍한 우울감에 빠졌다. 7년 전에 계약했던 셰익스피어에 관한 원고를 완성하지 못한 것도 원인이 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혀온 치밀어 오르는 강박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극심한 우울감에 빠진 존슨이 걱정된 스레일 부부는 그를 자신들의 저택에서 지내도록 했다. 조슈아 레이놀즈가 한 일도 존슨에게 아주 도움이 됐다. 1764년까지 두 사람은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레이놀즈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자신의 친구를 고통스러운 우울감으로부터 구할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1764년 초반에 레이놀즈는 존슨에게 유쾌하고 매력적인 친구들을 모아서 클럽을 만들고,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클럽 회원으로 9명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전원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활발히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수라고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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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했다. 더 클럽의 규모가 커지면서 신입회원은 기존회원이 만장일치로 뽑는다는 규칙이 만들어졌다. 1766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보즈웰은 더 클럽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1773년이 되어서야 그는 더 클럽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이후 런던에 생겨난 클럽들과 달리, 더 클럽은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더 클럽이 창설되고 거의 20년 동안,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스트랜드에서 조금 떨어진 제라드 스트리트 9번지에 위치한 터크즈 헤드 태번에서 만났다.
한편 존슨과 레이놀즈는 평판에 상관없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클럽을 만들었다. 에드 먼드 버크는 하원 의원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2년 뒤에 그는 의회에 입성했다. 크리스토퍼 뉴전트 박사는 에드먼드 버크의 장인이었다. 앤서니 채미어는 증권 중개인이었지만,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올리버 골드스미스는 글을 쓰는 작가였는데, 새뮤얼 존슨은 항상 그를 ‘골디’라고 불렀다. 마지막 3명은 존슨이 특히 더 클럽에 들어오기를 바랐던 친구들이었는데, 토펌 보우클레어와 베넷 랭턴이라는 두 청년과 치안판사이자 음악학자였던 존 호킨스였다. 존 호킨스는 고루하고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몇 년 뒤에 호킨스는 버크와 말다툼을 했고, 그 뒤로 더 클럽의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더 클럽의 초대회원들의 면면을 보면, 9명 모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회원들은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았고, 회장으로 뽑힌 회원은 그날 모임을 주도했다.
무엇보다 더 클럽은 대화를 위해 존재했다. 시시콜콜한 잡담이 아닌, 온갖 종류의 주제에 대하여 진지 하게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존슨은 카리스마 있게 대화를 주도했고, 특히 에드먼드 버크와 지혜를 겨루는 것을 즐거워했다. 버크는 논거를 제시하고 설득력 있게 주장을 펼치는 재능 있는 논객이었다.
더 클럽의 회원이 된 이후에 보즈웰은 『존슨전』에서 그 모임에서 들었던 대화의 일부를 여러 차례 인용했다. 더 클럽의 회원들은 자신들이 나눈 대화를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는 독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존슨전』에서 회원들의 정체를 교묘하게 숨겼다.
다음 대화는 1778년 4월 3일에 있었다. 보즈웰은 『존슨전』에서 화자를 알파벳으로 처리했다. 가령 ‘P’ 는 화가였던 조슈아 레이놀즈이고 ‘E’는 에드먼드 버크이다. 하지만 보즈웰의 일기 원본에는 화자가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그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첫 번째 화자는 오서리 경이다. 그는 누군가가 1,000기니를 주고 구입한 고대 로마의 개 조각상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조각상의 모델이 된 개는 알키비아데스가 키우던 개였다고 덧붙였다. 존슨이 끼어들었다. “개 꼬리는 바짝 잘려 있었을 겁니다. 알키비아데스가 기르던 개의 특징이죠”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권위적이었고 문학적이었다. 이 내용은 플루타르크의 『고결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삶』에 나온다.
한편 에드먼드 버크는 가격에 놀란다. “1,000기니!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동물상은 없습니다.” 존슨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철학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이보게, 그것은 그 조각상의 값이 아니라네. 그 조각상을 만든 기술이 높게 평가받은 거지. 인간의 힘을 극대화하고 누군가 불가능한 일을 해냈음을 보여주는 것들은 모두 가치가 있지. 가령, 코 위에 지푸라기를 올려 균형을 맞춘 최초의 사람이나 한 번에 말 3마리에 올라탄 존슨(유명한 기수)처럼 무언 가를 최초로 해낸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어.’
그 자리에 조슈아 레이놀즈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승마 기술과 지푸라기 균형 잡기와 비교하며 순수 미술을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존슨이 상대를 도발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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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발언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대화의 주제는 ‘식민지로의 이주’라는 이슈로 넘어갔다. 회원들은 본국의 인구가 위험할 정도로 감소하고 있느냐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버크는 사실상 이민은 본국의 인구를 증가시킨다고 주장했다. “아주 역설적인 발언이네요”라고 기번이 말했다. 아마도 버크는 상대방을 도발해서 논쟁을 일으키고 싶었던 것 같다. 버크와 존슨은 이렇게 논쟁을 부추기는 것을 즐겼다. 이어서 그들은 당대 여행작가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더 클럽은 점점 커져갔다. 1760년대 더 클럽은 4명의 신입회원을 뽑았고 1770년대는 21명의 신입회원을 선발했다. 존슨은 더 클럽의 규모가 커지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처음처럼 친밀하게 운영되는 더 클럽을 더 선호했다. 하지만 그는 더 클럽의 다양한 업적을 자랑스러워했다. 1777년 그는 헤스터 스레일에게 “우리의 클럽은 이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집단입니다. 레이놀즈는 그림을 그리고, 골드스미스는 시를 쓰죠. 퍼시는 골동품에 조예가 깊고, 뉴전트는 의학에 대하여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죠. 채미어는 무역, 정치 그리고 금융에 정통하답니다. 버크는 뛰어난 연설가이고, 보우 클레어는 순수문학을 추구합니다. 다이어의 전문분야는 현대사와 여행이고, 체임버스의 전문분야는 법이랍니다. 랭턴은 기독교 역사를 비롯해 여러 학문 분야에 뛰어나답니다. 그리고 호킨스는 사법 제도와 고대 음악의 전문가죠”라고 말했다.
더 클럽 회원들의 사회계급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류층이 더 클럽의 회원 으로 선출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777년 오서리 경이 더 클럽에 들어가기 전까지, 더 클럽의 회원들 중에는 귀족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더 클럽이 창설된 이후 첫 20년 동안 선출된 회원 42명 중에서 오직 3명만이 귀족이었다. 당시에는 중산층이란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회원들 대부분은 중산층에 속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존 웨인은 새뮤얼 존슨의 전기에서 런던 클럽은 20세기 파리의 카페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더 클럽에는 여성 회원이 없었다.
그 누구도 여성을 더 클럽의 회원으로 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슨은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이것이 헤스터 스레일이 자신의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열던 만찬이 일종의 그림자 클럽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조슈아 레이놀즈
더 클럽의 회원 대부분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더 클럽의 창립자인 조슈아 레이놀즈만큼 자신의 힘으로 엄청난 명성과 부를 쌓은 인물은 없었다. 레이놀즈의 아버지는 데번셔의 성직자이자 교사였는데, 그는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눈치 채고 런던 화가의 견습생으로 보냈다. 하지만 당시 화가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직업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초상화가를 노예같이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기술 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레이놀즈는 20대 중반에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의 자화상은 ‘미술가의 목표와 야심의 선언’이었다. 레이놀즈는 과거의 미술을 이용해 미래를 지향하고자 했다.
당시 가장 명망 있는 예술 장르는 고대 역사나 신화 속 장면을 재창조하는 역사화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역사화에는 철학이 담겨 있다고 여겼고, 역사화는 교양 예술이었다. 레이놀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역사화 대신 초상화를 선택했다. 그는 세속적으로 성공하려면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놀즈는 초상화가로 자리를 확실히 잡은 뒤에 머리만 그리면 35기니를 받았고, 전신을 그리면 150기니를 받았다(1기니는 1파운드 1실링이다). 1755년 그는 12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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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초상화를 그렸고, 1758년에는 150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1년에 무려 6,000파운드의 수익을 올렸다.
레이놀즈는 위대한 화가는 모델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는 대신, 그에게서 이상적인 모습을 창조해 낸다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화가는 사람을 대강 그리지만, 초상화가는 사람만을 그린다. 그래서 초상 화가는 뭔가 결함이 있는, 혹은 개성이 넘치는 인물을 주로 화폭에 담는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부분 적인 해결책이 존재했다. “최대한 실제 모델과 유사하게 그리기보다 모델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화폭에 옮기면 초상화에도 품위를 느낄 수 있다”고 레이놀즈는 말했다. 그는 모델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더 라도 그 초상화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게 그렸다. 이런 재능 때문에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찾아 오는 사람들로 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편 레이놀즈는 저택 뒤에 건물을 증축했고 그곳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주문량을 소화하기 위해서 사실상 초상화 공장을 차린 것이다. 그곳에서 그가 모델의 얼굴과 머리를 그리면, 조수들이 나머지를 그렸다. 그는 수년 동안 20여 명의 조수들을 고용했다. 그 중 몇몇은 일당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었다. 나머지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은 레이놀즈 밑에서 그림을 배운 대가로 그의 작업을 도왔다. 휘장, 커튼, 가구 등 초상화의 배경을 그리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사실상 머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레이놀즈의 조수들이 그렸다.
레이놀즈는 자신은 머리만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조수들에게 맡기는 작업방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로렌스 리프킹은 “이 기발한 작업방식은 성공적이었다”고 평했다. 조수들에게는 다른 역할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팔 수 있도록 그의 작품을 복제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레이놀즈가 그린 개릭의 초상화는 무려 5점의 복제품이 있다. 자신의 작품을 보다 널리 퍼트리기 위해 레이놀즈는 숙련된 판화 가들과 메조틴트(요판 인쇄 기법 중 하나. 선이나 점으로 음영을 표현하지 않고 직접 중간 톤을 인쇄할 수 있는 기법) 미술가들을 고용해서 자신의 작품을 흑백으로 찍어냈다.
레이놀즈는 존슨과의 우정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그는 보즈웰에게 “그를 존경한다네. 그는 내가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올곧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 벗이지”라고 말했다.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존슨의 관점을 대단히 신뢰했던 레이놀즈는 학문으로서 미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미술에 보편성을 적용하여 이론을 만들어냈다. 한 강의에서 그는 이 보편성을 ‘미술의 이론’이라 불렀다. 요즘이야 특별할 것 없는 표현이지만, 당시에는 미술이라는 분야의 지적 가치를 단언하는 도전적인 표현이었다.
새뮤얼 존슨과 스레일 부부
1765년 새뮤얼 존슨의 삶이 예기치 않게 180도 변한다. 1765년은 더 클럽이 창설되고 1년이 지난 해였다. 그는 극작가 아서 머피의 소개로 스레일 부부를 만나게 된다. 당시 헨리 스레일은 존슨을 만나 자마자 마음이 통했다. 스레일 부부는 매주 목요일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만찬을 열었고, 항상 존슨을 초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트레텀 대저택은 존슨에게 더 클럽과는 조금 다른, 여러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활기찬 분위기의 또 하나의 새로운 모임 명소가 되었다.
스레일 부부와 새뮤얼 존슨의 만남은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우정의 시작이었다. 그와 헨리 스레일은 항상 서로 예의를 갖추며 상대방을 존경했다. 이와 달리 새뮤얼 존슨과 헨리 스레일의 아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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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터 스레일에겐 깊은 정서적 유대감이 존재했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유대감은 존슨의 정신 건강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년 뒤 존슨은 죽기 바로 직전에 헤스더 스레일에게 “20년 동안 자신의 비참한 삶을 달래준 다정함”에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1776년 얼마간 스레일 부부는 존슨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걱정이 되기 시작할 때쯤, 존슨이 거의 10년 동안 끌었던 셰익스피어 희곡 모음집을 마침내 발표했다. 하지만 이 일로 존슨은 스스 로를 경멸했다.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작업을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그의 런던 숙소를 찾았을 때, 지독한 우울감에 빠져 있는 그를 보고 스레일 부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즉시 두 사람은 조치를 취했다. 부부는 존슨을 스트레텀 대저택으로 데려왔다. 그날 이후 존슨은 스레일 부부의 스트레텀 대저택에 머물렀다.
스트레텀 대저택 안에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이 정자에서 존슨은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스트레텀 대저택을 떠날 무렵, 그는 많은 이들이 최고의 걸작이라 꼽는 『영국 시인전』을 발표했다. 존슨에게 스트레텀 대저택에서의 생활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스레일 부부는 그를 존경했고 사랑 했다. 그리고 테띠와의 결혼으로 잠시 행복했지만 오랫동안 외로웠던 존슨도 자신이 그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하루 종일 한가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냈다.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는 52살이었던 1775년에 더 클럽에 선출됐다. 당시 그 누구도 그를 경제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참고로 그는 1759년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도덕감정론』을 발표했다. 이어 1776년 걸작인 『국부론』을 발간한다. 더 클럽의 회원으로서 애덤 스미스는 이상하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는 보즈웰의 『존슨전』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는 그런 생각들을 문서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교모임에서 말로 전달하면 오해가 생기기 쉽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과 섞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즈웰은 “스미스는 책으로 내도 될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꺼려했다. 그는 조슈아 레이놀즈에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겠다는 규칙을 만들었다고 말했 다”라고 덧붙였다. 딱 봐도 그가 존슨이나 보즈웰이 어울리던 부류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와 새뮤얼 존슨은 기질과 종교적 신념뿐만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방식도 달랐다. 존슨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고민하는 도덕주의자였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자였다. 존슨은 기회만 생기면 이런저런 잡다한 글을 많이 발표하는 수필가였지만, 애덤 스미스는 이론가였고 수년 동안 공을 들여 공식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말년의 존슨
1777년 68번째 생일날, 존슨은 헤스터 스레일에게 “나이는 정말 고집스런 병이랍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 여기저기에서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1782년 존슨은 보즈웰에게 보내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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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에 “1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단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어. 여기가 괜찮으면 저기가 아파”라고 썼다. 현존하는 기록은 현대 의사들이 존슨의 상태에 대하여 명확한 진단을 내리기에 충분하다. 존슨은 류마티스성 관절염, 천식과 만성 기관지염을 앓았고 후에 폐기종과 울혈성 심부전까지 얻었다(당시에는 울혈성 심부전은 수종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의사들도 이 질환들에 친숙했지만, 그들이 할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1782년 버니는 존슨에게 “아주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가엾게도 조슈아 경이 마비성 뇌졸중을 일으켰습니다. 입이 완전히 돌아갔고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레이놀즈는 완전히 회복했다. 이것은 흔히 ‘미니 뇌줄중’이라 불리는 일과성 허혈성 발작이었다. 이듬해 존슨도 뇌졸중을 일으켰지만 다행히도 완전히 회복했다.
이 시기에 존슨은 다량으로 아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편 사용은 합법이었고 불면증과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아편을 사용했다. 말년에 존슨은 아편 사용량을 줄이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에게 아편을 덜 사용하려고 자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 속에서 그가 아편에 의존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니, 고독하거나 한가하거나 우연히 혹은 어두운 생각 때문에 아편 생각이 날 때, 나는 엄청난 공포심으로 오그라든 다네.” 당시 중독은 병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분명 존슨은 약물 중독자였다.
다음은 에바 개릭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처음 개최한 만찬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보즈웰과 존슨은 에바 개릭의 집을 나서면서 잠시 아델피 빌딩을 바라봤다. “나는 감정적으로 존슨 박사에게 세상을 떠난 친구 2명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 저 빌딩에서 살았던 보우클레어와 개릭이었다. ‘그렇지.
그렇게 좋은 친구들은 또 없을 거야’라고 그는 상냥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매일 밤 존슨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던 안나 윌리엄스가 제일 먼저 그의 곁을 떠났다. 로버트 레벳도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무면허 의사였지만, 실제로 의학적 지식이 풍부한 이였다.
헨리 스레일의 죽음은 존슨에게 가장 가슴 아픈 죽음이었다. 그의 나이는 고작 52살이었다. 헨리 스레 일을 기리기 위해 스트레텀 교회에 대리석 기념비가 세워졌다. 새뮤얼 존슨이 비문을 작성했다. “그는 기발하고 개방적이며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부질없는 기교나 지나친 보살핌으로 스스로를 과시하는 법이 없었다. (중략) 가족, 동료, 친구와 손님들은 그의 편안하고 상냥한 태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는 아무하고나 자유롭게 대화를 했고, 아첨하지 않고 모두를 즐겁게 했다.”
헨리 스레일이 죽은 뒤에 헤스터 스레일이 양조장을 떠맡게 되었다. 다행히 그녀에겐 유능한 관리인인존 퍼킨스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퍼킨스와 일하면서 양조장을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 빠르게 익혔다.
하지만 그녀는 사업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바클레이란 이름의 양조업자에게 13만 5,000파운 드에 양조장을 팔았다. 그녀는 크게 안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거래로 평화와 안정적인 미래를 샀다. 본래 신분을 회복했고 상업적 용어와 사기로 어지럽고 오염된 삶에서 자유로워졌다.” 바클레이는 존 퍼킨스와 손을 잡았고 19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큰 양조장으로 성장했다.
생전에 스레일 부부는 금슬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부부 관계를 기대한 적은 단한 번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서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헨리 스레일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런 삶이 사라졌다. 헤스터 스레일은 40살에 생애 첫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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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녀는 새뮤얼 존슨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 존슨이 헤스터와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헨리 스레일이 죽은 뒤에도 자신들의 관계는 변함없이 친밀하고 강력할 것이라 생각했다.
1783년 존슨은 헤스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가장 오랫동안 사랑한 이들이 최고의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죠. (중략) 20년의 우정이 우리의 인생과 얽히고설켜 있죠.” 하지만 존슨의 바람과는 달리 헤스터 스레일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가르비엘 피오치였다. 그는 1778년 딸 퀴니의 음악 선생으로 스트레텀 대저택을 처음 찾았었다. 1783년 헤스터는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허나 딸들의 후견 인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격렬히 반대했다. 피오치는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헤스터는 체념했다. 그러나 결국 헤스터는 용기를 냈고, 딸들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오치에게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결국 1784년 7월 헤스터와 피오치는 이틀 간격으로 각각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의 예법과 절차에 따라 결혼했다.
결혼을 목전에 두고 그녀는 새뮤얼 존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존슨의 회신은 그답지 않게 잔인했다.
‘부인, 그대의 편지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대는 불명예스러운 결혼을 하는구려. 만약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우리 한번 함께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대가 아이들과 종교를 버렸더라도 신은 그대의 나약 함을 용서할 것이오. 그대의 명성과 국가를 빼앗겼다면, 그대의 어리석음이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오. 아직 결혼이 거행되지 않았다면, 그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숭배하고 섬기는 제가, 오랫동안 그대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제가 그대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되기 전에 그대를 한 번 더볼 수 있기를 간청합니다. - 한때는 그대의 진정한 벗이었던 샘 존슨 올림’
이에 그녀는 품위 있게 답장을 보냈다. ‘나의 두 번째 남편의 신분은 첫 번째 남편보다 비천하지 않습 니다. 그리고 그의 감정들과 직업 역시 비천하지 않습니다. (중략) 제가 저의 명예를 박탈했다고 하셨 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들어온 모욕적인 말 중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었습니다. 저의 명예는 눈처럼 순수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저의 명예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중략) 전 항상 그대를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전 단 한 번도 가혹한 말로 우리의 우정을 유린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피오치에 대한 생각을 바꿀 때까지 그대를 만나지 않겠습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하지만 존슨은 헤스터와의 절교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4개월 뒤에 프랜시스 버니가 존슨에게 헤스터와 연락을 하는지 물었다. “아무것도 없다네. 이젠 편지도 보내지 않는다네. 그녀는 나의 마음에서 거의 몰아냈어.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켰지. 그리고 친구들과 지인의 명예도 실추시켰고 그녀와 같은 여성들의 명예도 훼손시켰어. 나아가 인류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렸어! 만약 그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그 즉시 편지를 태울 거야! 가지고 있는 그녀의 편지를 모두 불태웠지. 그녀와 다신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네. 그리고 그녀의 소식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답답함과 억울함을 담아 존슨이 소리쳤다. 존슨은 버니와 이 대화를 나누고 나서 3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죽을 날이 다가오면서 그는 아편을 거부했다. 죽는 날까지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12월 13일 저녁 그는 2층 밀실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뒀다. 그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무런 고통 없이 존슨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이 보즈웰에게 전해졌다.
물론 그는 존슨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사망 소식에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망연자실했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중략)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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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충격을 받았고 인사불성이 됐다. 나중에 더 고통스러워질 것임을 알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존슨의 장례식이 열렸다. 더 클럽의 회원들이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많은 마차가 필요했다. 레이놀즈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 존슨의 동상을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적절한 절차 였다. 하지만 존슨은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됐다. 토마스 타이어스는 “개릭과 존슨이 같은 곳에 누워 마지막 안식을 얻으리라고 그 누가 생각했을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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