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안 지음 / 파람북
이 책에 답답한 일상을 견디라며 어깨를 토닥이는 격려와 용기를 북돋워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 따위는 없다. 끝내 우울증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드라마틱한 결말이나, 드디어 나를 사랑하는 법을 찾았다는 가슴 뭉클한 깨달음 또한 없다. 그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죽음을 떠올리고, 오늘도 여전히 비겁하게 삶을 연명하고 있다는 좌절감에 휩싸인 한 청춘의 서툰 일상과 솔직한 아픔과 그에 대한 덤덤한 고백이 담겨 있을 뿐이다.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 Short Summary
이다안의 에세이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는 2020년 오늘의 시간을 아프게 통과하고 있는한 청춘의 민낯을 그저 솔직하게 드러낸다. 글 속에 담긴 슬프고 고단한 일상은 저자 개인의 경험이지만, 아주 낯설지만은 않다. 인스타그램 속에 차고 넘치는 행복한 사진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며 상대적 박탈감을 맞닥뜨리거나 ‘배고픈 시절을 모른다’는 기성세대의 질타 속에서 사회 공포증과 우울증을 속절없이 키워가는 동생 혹은 조카,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어린 여고생과 동반 자살을 시도하고, 자살을 막으려는 경찰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그녀의 행동은 미성 숙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내뱉는 절박한 고백은 곪을 대로 곪아 터진 삶의 향한 외침에 가깝다.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죽지 못해 산다는 게 싫다는 서른세 살의 눈물을 마주하고도 과연 “라떼는 말이야” 식의 무책임한 훈계를 늘어놓을 수 있을까? 철학자 셸리 케이건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던 것처럼 “결국 이후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박탈 하는 행위이므로 자살은 죽는 이 자신에게 나쁘다”라는 이론적 명제를 들이민다고 설득당할 리 없다.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흔한 격려는 충분히 공감을 나누지 못한 상황에서 누구나 내뱉기 쉬운 폭력 이자 오만한 조언이며, 서글픈 위로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책에 대단한 반전은 없다. 저자의 자살 충동은 잦아들지 않았다. 사회 공포증과 우울증도 여전하다.
세상의 외면을 타파하며 긍정적인 삶을 살아 보겠다는 ‘정신 승리’ 따위는 없다. 저자 이다안은 어제의 유서를 곱씹어 읽으며 살아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확인할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는 어려운 한 발짝을 떼었는지 모른다. 무엇이라도 꿈꿀 수 있는 정도의 작은 행복을 향해. 우리가 그녀의 아픔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갈증을 느끼며 함께 화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저자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 차례
프롤로그 : 버티는 삶에 대한 고백
우리는 반드시 집을 찾아서 불행이 운명이라면
- 2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Hello, Stranger
사라진 스무 살
House Mate
학교 앞 고시원 불치병의 그림자 관계의 부재 살아야 하는 이유 영원한 결핍 자살 계획 그것은 잔인한 폭력 오만한 사명감 남겨진 풍경 벼랑 끝에서 본 새벽 누추한 삶의 편린들 어떻게든 되겠지 언니, 잘 지내죠?
모든 게 귀찮았다 자궁에 관하여 글로 만난 이야기들 가스라이팅 조증과 울증 나는 여전히 괜찮지 않아
- 3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불행이 운명이라면
우리 가족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불행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 보자면, 부모님이 싸우자 동생과 붙박이장에 숨어 울었던 일이 떠오른다. 아빠와 엄마는 고작 5살이던 우리 앞에서 서로를 때리고, 욕하며, 할퀴는 장면들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어느 날은 아빠가 자신에게 맞고 친정으로 짐을 싸서 나간 엄마를 데려오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난그때 스스로 머리를 묶지도 못할 만큼 어렸는데, 산발이 된 머리와 잠옷 차림으로 외할아버지 댁 벨을 누를 때 생애 첫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아빠가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를 자처했다. 해고를 당한 건지, 자진 퇴사한 것인지는 아직도 확실히 모르지만, 아빠는 항상 자신이 스스로 나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둘 중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이라는 굴레까지 뒤집어 쓰고 걷잡을 수 없이 피폐해졌다는 사실이다.
아빠는 가족들이 돈 못 버는 자신을 무시한다 여겼고, 그 자격지심을 폭력을 행사하여 굴복시키는 것으로 해소했다. 엄마는 항상 아빠가 우리의 인생을 망쳤다고 여기며 분노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 했다. 가난에서 기원한 증오가 우리 가족 불행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 물살은 나와 아빠에게로, 나와 엄마에게로, 나와 동생에게로 번져 결국 나로 하여금 가족 모두와의 관계를 뒤틀리게 했다.
아빠는 속 좋은 사람처럼 허허 웃다가도 문득 심사가 뒤틀리면 고함과 함께 손부터 올라가는 다혈질이 었다. 난 그런 아빠를 무서워하기보다 경멸했다.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고, 가까이하기 싫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하루는 초등학생이던 내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아빠가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나를 안으려 했다. 난 짜증을 내며 저리 가라고 소리쳤고, 아빠는 그 순간 버럭 화를 내더니 내 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잡아 뜯었다. 꼬집은 게 아니라 잡아 뜯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난 너무 아파서 악을 쓰며 울었고, 아빠는 벌을 준다는 듯이 내게 훈계하며 계속해서 엉덩이를 잡아 뜯었다. 내가 아빠와 한 이불 속에서 마주 보고 누워 무방비 상태로 엉덩이를 뜯기고 있는데 그 모습을 엄마가 방문 너머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아빠가 내 방을 나가자, 엄마는 나를 주사맞을 때처럼 엉거주춤 서서 바지를 내리게 한 후 피가 철철 나는 엉덩이에 약을 발라줬다. 나는 이 기괴하고 역겨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한동안 나사가 빠진 듯 패닉 상태로 지냈다.
고등학생으로서 첫 등교를 하던 날이었다. 가족은 모두 자고 있었고, 난 교복을 챙겨 입은 뒤 아침밥을 먹기 위해 전날 끓여놓은 김치찌개 냉장고에서 꺼내 데웠다. 홀로 정적 속에서 먹히지 않는 밥을 억지로 먹고 서둘러 학교에 갈 채비를 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빠듯했다. “야, 밥 차려.” 그때 안방에서 아빠가 잠에서 막 깬 얼굴로 나와 내게 말했다. 난 고등학교 입학식 날 따뜻한 아침밥을 차려주는
- 4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엄마나, 학교까지 태워주며 잘 다녀오라고 등을 두드리는 아빠는 언감생심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혼자 등교 준비를 하는 딸에게 밥 차리라고 명령하는 아빠는 꼴 보기 싫었다. “나 학교 가야 돼. 늦었 어.”
내 표정을 보더니 아빠는 고함을 지르며 김치찌개가 담긴 대접을 내 얼굴로 던졌다. 순간적으로 피했 지만, 이마와 콧등을 타고 김치찌개 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새 교복이 더러워질까 무서워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아빠가 속옷도 입지 않은 나체의 몸으로 달려들어 내 교복을 잡아당겼다. “이년 이거 교복 다 찢어 버려야 돼! 너 같은 건 학교 갈 필요가 없어!”
나는 교복을 찢으려 하는 것보다 나체인 아빠가 달려드는 것에 더 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자 엄마가 아빠를 말리며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닫힌 안방 문틈으로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입학 첫날부터 지각한 나는 눈치를 보며 빈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가스가 차듯 뱃속이 부글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심각해졌다. “입학 첫날부터 실수 하면 어떡하지. 아, 안 돼….”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고 손에서 흐른 땀 때문에 교과서가 축축해졌다. 선생님이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는 듯 던진 농담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나 혼자 웃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배를 움켜 쥐었다. 악몽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던 그때,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주위가 다시 소음으로 산만해졌고, 순간 거짓말처럼 배가 평온해졌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뱃속은 알람이라도 맞춘 것처럼 곧바로 부글거리기 시작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정체 모를 고질병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는 처음에 이 병이 다분히 내과 질환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타인과 조용하고 고립된 공간에 있을 때’만 복통이 시작된다는 점이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배가 아픈 것이니 내과에서 관련 약을 처방받아 먹으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내 병은 낫지 않았다. 내과에 서는 ‘과민성대장증후군’이라며 마음을 편안히 유지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나는 ‘불안’을 치유하는 방법은 알려주지 못했다.
후에 난 이 병이 우울증에 따른 ‘사회 공포증’의 증상임을 알게 되었다. 내과가 아닌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으며 치료하려 애썼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병원에서조차 원인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내탓’으로 돌리니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만 쌓여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이 병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면접을 볼 때, 회의실에 들어갈 때, 애인의 차에 탔을 때, 심지어 친한 친구와 조용한 방 안에 같이 있을 때도 배가 아팠다.
관계의 부재
나는 학교에 다니며 호프집을 비롯해 콜센터, 마트 시식 코너, 카페, 옷 가게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학점 은행제 편입을 하겠다는 의지로 모든 과목의 성적을 A 이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5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하루하루 생활비가 빠듯한 내가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몇 년을 더 공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 능했다. 2년의 학자금 대출로 난 이미 언제 갚을 수 있을지 모를 빚이 쌓여있는 상태였다. 매달 이자를 내는 것만 해도 벅찬 날들의 연속이었고, 내가 이곳을 졸업할 때쯤이면 집안 사정도 조금은 괜찮아져 있을 거라 믿었던 기대와 달리 엄마는 여전히 내 학비를 보태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했다.
편입을 위한 발판이라 생각하고 들어온 대학이었는데, 생활고에 떠밀려 나는 어이없게도 우리 과에서 가장 먼저 취업을 했다. 그나마 꿈에 가까워지려 택한 이름 없는 중소기업의 패션 잡지사였다. 10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나는 에디터로서 잡지에 글을 쓸 수 있는 이 직업에 감사하며 열정을 다해 다녔다. 능력도 없으면서 히스테리만 가득했던 편집장의 갖은 공격을 받고 화장실에서 수도 없이 울었지만, 그래도 잡지가 출간되면 가슴 한구석이 뿌듯했다.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여러 루트를 통해 다양한 나이대의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어느 집단에서나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며 사교성 좋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일방적인 평가였다. 나는 내 진짜 모습, 이를테면 가난, 가정불화, 우울증, 사회 공포증, 학벌 콤플렉스, 낮은 자존감, 쉽게 상처받는 예민함 등을 숨기고 또 숨기느라 철저히 가짜 얼굴을 하고 살았으니까.
그래도 내가 조금은 솔직해지고 편안해질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초ㆍ중ㆍ고를 모두 같이 나온 동창 3명이었는데, 나의 진정한 친구들은 영원히, 오로지, 이 셋뿐이라는 생각을 강박처럼 여기면서 그아이들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찾으려 무던히 애쓰곤 했다. 이 때문인지 학년이 올라가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아이들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때마다 극심하게 우울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여전히 그아이들뿐인데, 내가 그들 세계의 자장권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나를 미치도록 두렵게 만들었다.
3명 중 특히 친했던 S에게는 연인에게 바랄 법한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다. S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가정 폭력과 부모의 역할 부재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던 유일한 아이였다. S 는 화목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애지중지 자란 외동딸이었기에 나의 결핍은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 지만, 그래도 내 치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곁에 친구로서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큰 위안이 됐다.
하지만 내가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박봉의 직장인이 되어 고시원에 살면서부터 우리 사이는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3명의 아이들이 나와 다르게 부모님이 주는 용돈을 받으며 캠퍼스 생활과 처음 사귄 남자 친구, 해외여행과 명품 등에 푹 빠져 있을 때, 나는 궁핍한 생활에 찌들어 매일 청춘을 좀먹고 있는 현실이 씁쓸했다. 자격지심에 파묻힌 나는 아이들이 무심히 던지는 모든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크게 자극받으며 절망과 같은 아픔을 느꼈다.
소설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가 말했듯이,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힘들고 지쳐있는 나의 마음을 아이들이 진심으로 어루만져주길 바랐다. 자신의 행복을 조금 숨기고 내게 관심을 쏟아주길 원했다. 그 서운함을 퉁명스러운 말투와 행동으로 표현하면 후회하고 미안해하며 내 전부가 되어줄 줄 알았다. 나의 우울함을 안아줄 줄 알았다. S를 비롯한 아이들은 서서히 나와의 연락을 끊었다. 20여 년간 나를 외로움 속에서 지탱시켜 주었던 위태로운 울타리는 그렇게 어느 순간 보잘것없이 허물어졌다.
- 6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자살 계획
SNS에 ‘동반 자살’을 검색하자 나온 계정은 꽤 여럿이었다. 많은 사람이 ‘장난 사절’, ‘진짜로 죽을 사람만’ 같은 글로 자신의 자살 계획이 진심임을 어필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불신이 생겨 섣불리 아무 계정에다가 메시지를 보내진 않았다.
혼자 죽는 것이 아닌 동반 자살을 생각하게 된 것은 오로지 ‘확실하게’ 죽고 싶어서였다. 내가 서툰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불구가 되어 다시 깨어나거나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가 가장 최악의 시나리 오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자살 방법을 구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고, 행여나 죽음의 순간에 공포심이 생겨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마음을 다잡아주며 반드시 자살을 추진시켜 줄또 다른 누군가가 필요했다. 더불어 나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타인과의 약속이 되면 책임감과 도의 감이 생겨 억지로라도 끝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살에 ‘도의’라는 말이 어울리는진 모르겠지만, 그때의 내겐 그것이야말로 진짜 도의였다.
한참 동안 스크롤을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하다가 가장 담백하게 글을 써놓은 계정에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내가 나이와 성별을 말하자 상대는 18살의 여고생이라고 회신했다. 고등학생이라니, 너무 어린 나이라는 인식이 든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어른으로서 학생에게 몹쓸 짓을 시키는 느낌이었다. ‘나이가 많이 어리네요.’ 내 말에 상대는 ‘문제가 되나요?’라고 되물었다. 생각해보면 자살에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생일 때도, 중학생일 때도, 고등학생일 때도 간절히 죽고 싶었 으니까. 숱하게 옥상을 올라가던 10대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는 내가 여자이고 언니여서 더욱 좋았다고 했다. 행여나 이상한 남자들이 불순한 목적으로 연락을 해올까 봐 걱정되고 무서웠다고 했다. 바보 같은 아이는 내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이 아이에겐 맨 처음 연락한 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매우 적은 양의 대화로도 금세 친해졌다. 서로가 버릇처럼 말하는 죽음에 대한 욕망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우리를 강하게 결속시켜 주었다. 18살 소녀와 내가 택한 동반 자살 방법은 연탄가스를 이용한 질식사였다. 일정 기간 방해받지 않고 타인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다 독채로 지어진 에어비앤비 숙소를 장소로 정했다. 번개탄과 갈탄을 섞으면 유독가스가 강력해 확실히 죽을 수 있다는 글을 보고, 나는 마트에서 갈탄과 번개탄을 하나씩 구입했다. 창문을 완벽하게 밀봉할 청테이프도 여러 개 준비했다.
마지막 준비물은 수면제였다. 우리가 이 자살 방법을 선택한 것은 고통 없이 죽기 위한 게 컸으므로 수면제가 반드시 필요했다. 약국에서 파는 수면 유도제는 효과가 약해 정신과에서 직접 처방받은 수면 제를 구해야 했다. 한 곳에서 일주일 치 이상 직접 처방받는 수면제를 구해야 했다. 한 곳에서 일주일치 이상 처방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정신과를 다섯 군데 넘게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모았다. 잠이 오지 않아 죽을 것 같다고 말하며 최대한 강력한 수면제를 달라고 호소했다.
같이 죽기로 한 상대가 학생이었기 때문에 숙소 예약부터 약을 구하는 일까지 모두 내 돈으로 해결했다. 전라남도 여수에 산다는 그 여고생은 매번 보탬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며, 죽기 위해 고속 버스를 타고 내가 있는 서울까지 오겠다고 했다.
- 7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누군가에게 의지해 계획을 세우려고 동반 자살을 택한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모든 것을 리드 하고 있었다. 아이는 수동적이었으나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자살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것.
나 역시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혹시나 실패할 만한 요소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 놓치지 않고 방어를 해두었다. 나는 그 아이와 자살 계획을 세우며 점점 안정을 찾았다. 죽는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됐다는 희망이 우울감과 불안감을 해소해 주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며 우리가 약속한 그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언니는 유서 가지고 가실 거예요?”죽기로 한 날을 하루 남기고 그 아이가 내게 물었다. 나는 매우 정성스럽게 유서를 작성했었다. 자살이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나의 고통들을 낱낱이 써두었다. 내가 죽은 뒤에 타인으로부터 섣부른 비난이나 알량한 동정을 받기 싫어서였다. “나는 프린트해서 가져가 려고, 너는?” 노트북으로 쓴 길고 긴 내용은 근처 PC방에서 출력한 뒤 가지고 가려 했다. 유서를 PC 방에서 출력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그래도 마지막 편지는 문서 파일이 아닌 종이로 남겨두고 싶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지만 단 한 번도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나는 몇 번씩 그 아이의 이름이 궁금했으나.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이 아이는 정말 자신의 죽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후회나 두려움은 없을까. 혹시나 마음이 약해져서 내 계획을 틀어지게 하면 어쩌지.
나는 그 아이와 꽤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불쑥불쑥 생겨나는 불신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그래도 확실했던 것은 그때의 내 심정이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설레었다는 점이다. 나의 오랜 숙원이었던 죽음을 드디어 이룰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시계를 보니 내일까지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다. 내일 이맘때쯤이면 난 죽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안식 속에서 비로소 행복해지겠지. 나와 그 아니는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이어갔 다.
그것은 잔인한 폭력
드디어 죽기로 한 날이 밝았다. 함께 죽기로 한 아이는 저녁쯤 터미널에 도착한다고 했다. 나는 일단 근처 PC방에 들러 유서를 출력한 뒤, 예약해둔 숙소에 미리 가 있기로 했다. PC방에 도착해 저장해둔 유서를 열었다. 출력하기 전에 한 번,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유서를 쓰던 날처럼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저 오점이 절대 남아선 안 되는 서류를 검토하듯 무덤덤했다. 배가 고픈 건지 마음의 허기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에 한참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서둘러 출력을 하고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신골르 받아서요. 모니터 보니까 유서를 쓰고 계셨네요?”
내 자리 뒤로 경찰 서너 명이 와 있었다.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내가 자살하려는 걸 경찰이 어떻게 알았지? 대체 누가 신고를 했다는 거지?’ 혼란스러움에 벙찐 표정으로 있다가 일어나라는 경찰의 독촉에 정신을 차렸다. “유서 아니고 그냥 소설을 쓰고 있었어요. 이런 걸누가 참견하고 신고했다는 거예요?”
그때 경찰 중 한 명이 내 가방을 허락도 없이 들췄다. 나는 신경질을 내며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쳤다.
- 8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가방에 연탄이 있네요. 일단 여긴 사람들이 많으니 잠시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시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PC방에 있는 모든 이가 나와 경찰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범죄자가 된 것같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경찰서로 들어가자 여경은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테이블 위에 놓기 시작했다. 번개탄, 갈탄, 수면제, 청테이프 등이 나오자 가방에 담배를 숨겨놓다 선생님에게 걸린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행여나 휴대폰도 강제로 뒤져볼까 봐 여경이 안 보는 틈에 얼른 SNS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문제가 생겼어. 내가 자살하려는 걸 누가 신고했대. 지금 경찰서에 붙잡혀 있어서 못 나가.
내가 이따 다시 연락할게.’ ‘네? 그럼 저는 어떡하죠?’ 답장을 보내려는 찰나 여경이 내 쪽을 쳐다봐서 황급히 SNS 앱을 지워버렸다. 그 아이가 걱정됐지만. 나는 이 계획을 망칠 생각이 없었으므로 경찰들이 집으로 보내주면 다시 숙소로 갈 생각이었다. 아이가 숙소 주소를 알고 있었으니 거기로 가 있으리라 믿었다.
경찰들은 나를 안전하게 귀가시킬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아까부터 의무 타령만 하는 경찰의 말이 같잖아 헛웃음이 나왔다. “가족이 없으면 친구라도 부르세요. 그 전에는 못 보내 드려요.” 여경의 말에 분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얼른 이 경찰서를 빠져나가야 내 자살 계획을 다시 실행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B룸의 지민이에게 연락했다. 아르바이트 중이었던 지민이는 내가 경찰서에 있다는 말에 지금 당장 오겠다고 했다. 비참했다. 셰어하우스 친구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게 만든 경찰들이, 나를 신고한 PC방의 누군가가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PC방에서 신고한 그 오지랖 넓은 인간은 내가 오늘한 생명을 살렸다고 뿌듯해하고 있겠지.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결코 모른다.
누추한 삶의 편린들
‘다인아,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는 내 소중한 딸이야. 다시 같이 살자. 엄마 불안해서 너 거기에 못 두겠어. 이제 절대 너 힘들게 하지 않을게. 약속해.’ 내가 또 언제 자살 시도를 할지 몰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임을 알았으나 다시 그 집 안으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거기서의 끔찍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며 분명 또다시 불행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참 동안 답이 없자 엄마는 초조한 듯문자를 다시 보냈다. ‘그럼 엄마가 원룸 얻어줄까? 집 근처에 있는 원룸으로 알아봐 주면 올 거야?’
어디서 빌리지 않고서야 원룸을 구해줄 돈이 없는 엄마, 아빠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다. 자살하겠다고 그 난리를 치고 혼자 살 집의 보증금과 월세까지 내 달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염치가 없었다. 이미 지금 살고 있는 그 허름한 임대 아파트 월세도 버거워하던 엄마였다. 한참을 골몰했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직장을 다니지 않으니 내 이름으로 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다. 돈도 마음도 빈털 터리인 내가 지금 갈 수 있는 곳은 잡동사니로 가득 찬 그 쪽방뿐이었다. 결국 마음에 불안감을 가득 품은 상태에서 나는 가족과 다시 매일의 삶을 공유하기로 했다. 1년 전 인천 집을 떠나던 그날처럼, 나는 셰어하우스의 아이들에게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고 서울을 떠났다.
내가 집을 나간 사이에 반려견 봉봉이는 뒷다리를 아예 쓸 수 없는 앉은뱅이가 되어있었다. 이제 오줌도 똥도 가족이 도와줘야만 눌 수 있고, 밥과 물도 입에 가져다줘야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아빠는 그동안 건강을 완전히 회복해 환갑이 넘은 나이에 건물 관리소장으로 일하며 거의 20년 만에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엄마도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온라인 원격 수업을 파트타임으로 다시 시작한 덕분에
- 9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전보다 조금은 여유 있게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애물단지였던 동생도 드디어 취업해 인천의 한 원룸에서 스스로 앞가림을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가족 중 유일한 직장인이었던 나는 이제 유일한 백수로 그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휴대폰 번호를 바꿔 모든 지인과의 연락을 차단했다. 누군가와 별 의미 없는 짧은 메시지를 주고 받는 행위마저도 나에겐 힘겹고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친구와의 간단한 대화도 쉽지 않은 내가 다시 취업해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사회 공포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져 있었고, 나는 잠시의 외출도 두려워했으며, 아는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이 잡듯 뒤져 찾아낸, 편당 4000원짜리 채팅형 소설 원고를 작성해 메일로 전송하는 재택근무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거리였다. 원고를 계속해서 새롭게 창작하고 수시로 평가당해야 한다는 점이 스트레스였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꾸역꾸역 써냈다.
외부로부터 스스로 철저히 고립된 나에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폭식이었다. 하루 세끼 챙겨 먹는 걸 철저하게 지켰고, 끼니때가 아니어도 냉장고와 찬장을 뒤져 수시로 무언가를 입에 집어 넣어야 마음이 편해졌다. 엄마는 내가 집에 오고 나서부터 한동안은 어색하리만치 다정한 태도로 나를 대했지만, 폭식하는 모습이 영 신경에 거슬렸던지 금세 예전의 짜증 섞인 말투와 표정을 드러냈다.
폭식이 계속되자 나는 한순간에 몸무게가 25kg이 넘게 증가해 말랐던 체구가 비만의 체형으로 변했다.
갑자기 찐 살로 인해 온몸에는 빨간 실지렁이 같은 튼살 자국이 넘실댔고, 가지고 있던 옷들은 단 하나도 맞는 게 없어 잠옷 같은 실내복마저 커다란 남자 사이즈를 구입해야 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웨이브 머리마저도 거추장스러워 화장실에서 부엌 가위로 귀밑까지 듬성듬성 잘라버렸다. 지저분한 더벅머리에 피부 곳곳이 튼살 자국으로 뒤덮인 거대한 몸뚱이의 내가 거울 속에 보였다. ‘이 괴물이 정말 내가 맞나?’ 싶어 멍하니 보다가도 이런 생각 자체가 귀찮고 짜증나 얼른 거울에서 시선을 거뒀다.
한순간에 외모를 가꾸는 모든 것에 아예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더 나아가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뚱뚱한 여자가 되는 것을 자처하는 중이다. 그건 내가 더는 가면 속에 갇혀 인생을 집요하고 전투적으로 살아내고 싶지 않다는 시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위에 충격을 받은 건 다름 아닌 엄마였다. 엄마는 항상 딸의 외모는 경쟁력이자 자신의 면을 세우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명절 때나 결혼식 같은 곳에 나를 데려갈 때면 화장과 옷 코디까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모두 자기 뜻대로 꾸며야만 직성이 풀렸다.
엄마의 그런 집착의 배경에는 내가 외모를 이용해 경제 능력이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가난한 집안에 보탬이 되길 원하는 속물적인 바람도 깔려 있었다. 그러니 결혼 적령기가 훨씬 지난 내가 이렇게 외모를 망가뜨리고 사는 것에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한 번은 엄마가 밥을 먹고 있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면서 “쟤는 맨날 무슨 입맛이 저렇게도 좋을까” 라고 중얼거렸다. 불안정하고 공허한 마음속을 음식으로라도 채우려고 발악하는 이 비참한 상황에 대해선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나를 그저 눈치 없는 속편한 식충이로 치부하는 엄마에게 서러움이 복받쳐 순간 또 눈물이 났다. 엄마는 내 정신보다 오로지 망가진 외모에만 집착하며 자꾸만 다이어트 약과 절식만 강요하던 중이었다.
- 10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엄마는 내가 지금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지? 오직 살찐 내 몸End이만 신경쓰여서 못마땅해 죽겠지?” 억눌렀던 감정을 폭발하며 소리 지르자 엄마는 짐짓 당황하며 어린애 달래듯 말했다. “그게 아니라, 살찌면 네가 자존감도 낮아지고, 그럼 더우울해질까 봐 그런 거지.” 거짓말. 내 자존감을 깎아 먹은 건 엄마의 비아냥거리는 말과 경멸하는 표정이었지 살찐 껍데기가 아니다. 그런 가식적인 말로 나를 기만하는 엄마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났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내 앞가림도 하지 못하고 빌붙어 사는 지금 처지를 지각하면, 이렇게 매일 밥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진 못할망정 감히 화낼 자격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한 할 일이었던 원고 작성 아르바이트는 고료를 지급받을 날짜가 한참 지나도 입금이 되지 않아 나를 불안하게 만들곤 했다. 업무 담당자와 메일로만 소통하는 게 사회 공포증을 앓는 나에겐 큰장점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오자 연락처도 알아두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측에선 내 원고가 표절로 판정되어 고료를 줄 수 없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표절이라니. 고작 4000원짜리 원고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던 내 노력이 어이없는 모함을 받자 화가 치밀었다. 나는 대체 내가 어떤 작품의 어느 부분을 표절했는지 정확한 증거를 제시하라고 했고, 답이 없을 경우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고소 같은 걸 할 여력이 있을 리 없으니 걱정이 됐다.
회사 측은 그 부분에서는 아무런 답변을 주지 않고 말없이 고료를 입금해주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연락이 두절됐다.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없이 해고당한 게 억울했지만 더 따지고 싶은 마음도, 기운도 없었다. ‘난 역시 뭘 해도 안 되는구나’ 그 일로 나의 침체된 자아는 더욱더 맥을 못 추고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또 천장만 바라보며 시간을 잡아먹는 시체가 되었다. 30대의 나이에 미래 없는 삶을 부모이게 의지하며 ‘그래도 살아있으니 됐다’라고 자위하는 것은 자존감이 사라진 지 오래인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존재 자체가 역겹고 한심해 모든 생각이 자꾸만 자살이라는 물꼬로 흘러가서 괴로웠다.
- 11 -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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