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브 고시 지음 / 에코리브르
이 책은 기후변화의 규모와 위력을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을 문학·역사·정치 차원에서 탐구한다.
저자는 문학·역사·정치에서 기후변화를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이 야기하는 위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면서,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라고 말한다. 아울러 세계적 차원
의 집단적 실천과 인간 존재를 새롭게 그리는 우리의 상상력 복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대혼란의 시대
아미타브 고시 지음
▣ 저자 아미타브 고시
1956년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이 외교관이어서 인도ㆍ방글라데시ㆍ스리랑카 등지에서 성
장했다. 인도 델리 대학,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사회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ㆍ미국ㆍ영국의 여러 유수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했으며, 현재는 인도와 미국
을 오가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피카레스크 소설(악당 소설)로 분류할 법한 첫 장편소설 『이성의 순환』으로 메디치상을, 영국이 식민
지 인도에서 철수한 때부터 어느 인도인 가족과 영국인 가족의 뒤엉킨 역사를 다룬 서사적 내러티브
『섀도 라인스』로 인도 최고 문학상 샤히타아카데미상을, 의학 스릴러라 할 만한 『캘커타 염색체』로
아서C.클라크상을 수상했다. 고시의 문학적 성취 가운데 백미는 『유리 궁전』이다. 5년의 현장 취재와
치밀한 고증을 거친 이 작품은 제국주의 침략, 식민지 지배, 양차 세계대전, 독립과 독재를 중심으로
인도와 미얀마의 역사적 격동을 조명한 대서사시다. 영국에서만 50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가 되면서 그를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이 책은 200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인터내
셔널 e-book 어워드를 수상했다. 2018년 미국 작가 리처드 포드에게 영예가 돌아간 제8회 박경리 문
학상의 최종 후보에 들기도 했다.
그 밖에 『굶주린 조수』를 비롯해 아편전쟁 직전인 18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아이비스 3부
작(Ibis Trilogy: 아이비스는 이 소설에서 대부분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처음 만나게 되는 노예선의 이
름)’, 『양귀비의 바다』, 『연기의 강』, 『쇄도하는 불』 등 소설과 에세이집 『캄보디아에서 춤을』,
논픽션 『고대의 땅에서』 등을 펴냈다.
▣ Short Summary
우리는 정말로 ‘대혼란(Great Derangement)’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인도 출신 소설가 아미타브 고시
는 아마 미래 세대는 당연히 그렇게 여길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 시대의 문
화가 지구 온난화에 맞서는 데 실패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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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한편 최근에 수많은 활동가와 관심 있는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도덕적 이슈’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
는 수많은 다른 종류의 호소가 기후변화와 관련해 일치된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도무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점차 개인의 양심이, 전 세계 대중의 문제로서 집단행동이 필요한 갈등을 위
해 선택된 전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기후변화의 규모와 위력을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을 문학·역사·정치 차원에서 탐구한다.
저자는 문학·역사·정치에서 기후변화를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이 야기하는 위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면서,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문학을 향
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위기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안을 고민하도록 촉구하는데, 해법은 세계적 차원
의 집단적 실천과 인간 존재를 새롭게 그리는 우리의 상상력 복원에 있다고 역설한다.
▣ 차례
1부 문학
2부 역사
3부 정치
감사의 글
주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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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대혼란의 시대
아미타브 고시 지음
문학
내 조상들은 생태 난민이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 출신인 그들이 살던 마을은 그 지역에서 가장 장대
한 수로 가운데 하나인 파드마강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바에 따르면 사연인
즉슨 이랬다. 1850년대 중반의 어느 날, 그 거대한 강이 느닷없이 진로를 바꾸면서 마을을 집어삼켰다.
거주민 가운데 일부만이 가까스로 높은 지대로 피신할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제가 살던 보금자리
를 떠나게 만든 게 바로 이 재앙이었다. 그 여파로 그들은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주 물결은
그들이 다시 비하르주의 갠지스강 강둑에 정착한 18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쳤다.
내가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우리가 증기선을 타고 파드마강을 따라 여행할 때였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는 소용돌이치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거대한 폭풍우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녀자와
아이들이 미친 듯이 달려드는 물을 피해 도망치는 장면을 그려보았다. 또한 나의 조상들이 튀어나온
바위에 앉아서 방금 전까지 살았던 마을이 물에 잠기는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오
늘까지도 내 삶에 영향을 끼친 환경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언제나 우리 조상들을 삶터에서 내몰고
일련의 여정에 나서도록 이끈 자연의 힘을 떠올린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 강은 마치 “어디에 있
든 너는 나를 인식하는가?”라고 묻는 양 나와 눈을 맞추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것 같다.
인식(recognition)은 모름에서 앎으로의 전환이다. 따라서 인식한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다는 것과는
다르다. 게다가 말의 주고받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대체로 우리는 말 없이 인식한다. 또한 인식
한다는 것은 결코 무엇이 눈에 보이는지 이해하는 게 아니다. 이해는 인식의 순간에 아무 역할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인식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거의 무언가, 즉 모름에서 앎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과거의 의식을 상기시키는 그 단어의 첫 번째 음절(re)이다.
요컨대 우리 앞에서 과거의 의식이 번쩍 살아나며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이해하는 데 즉각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 바로 그때가 인식의 순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점화가 저절로 이루어질 수는 없
다. 따라서 인식을 통한 앎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앎이다. 그것은 오히려 마
음속에 깔린 잠재성을 새롭게 알아차리는 데서 비롯된다. 나는 이것이 강물이 불어나서 마을을 집어삼
킨 날 우리 조상들이 경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제 삶을 형성해주었으나 마치 매일 호흡하는
공기처럼 더없이 당연하게 여겨온 존재를 새삼스레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공기 역시 느닷없이 지극히 폭력적으로 살아 움직일 수 있다. 1986년 카메룬의 사례가 그러하다.
니오스 호수에서 갑자기 분출한 대량의 이산화탄소가 인근 마을을 뒤덮어 주민 1,700명과 막대한 수
의 동물을 죽음으로 내몬 사건이다. 하지만 더 흔하게 공기는 은근슬쩍 제 존재를 과시한다. 뉴델리와
베이징(둘 다 대기 오염이 심각한 대도시의 예)의 거주민들은 익히 알고 있다시피, 폐와 부비강의 염증
은 다시 한 번 안과 밖이, 사용하는 것(using)과 사용되는 것(being used)이 별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
다. 이 역시 인식의 순간으로,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통해 분명하게 깨닫는다. 우리 발밑으로나 내벽에
내장된 전선을 타고 흘러서 자동차를 굴러가게 만들고 방의 조명을 밝혀주는 에너지가 우리로서는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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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길 없는 저만의 목적을 지닌 채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임을 말이다. 내가 비인간 존재들 역시 그와
대단히 유사하다는 걸 인식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게 강제
한 인식의 순간을 거치면서 말이다. 나는 마침 벵골만 삼각주의 드넓은 맹그로브 숲인 순다르반스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다. 벵골만 삼각주에서는 물과 토사의 흐름이 어찌나 활발한지 보통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되는 지질학적 과정이 마치 주나 달 단위로 달라지는 듯 보인다. 그렇게 되면 하룻밤 사이에
일대의 강둑이 사라지면서 가옥을 집어삼키고 사람들 목숨을 앗아간다. 하지만 다른 곳에는 얕은 모래
톱이 솟아오르고 몇 주 내로 해안이 몇 미터가량 넓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대개 주기를 띤다. 그러나 우리는 21세기가 시작되는 처음 몇 년 동안에조차 해안
지대가 점차 줄어드는 현상, 전에 경작지이던 땅에 바닷물이 들이닥치는 현상 따위를 통해 서서히 늘
어가는 비가역적인 변화의 조짐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더없이 역동적인 풍경이라서 바로 그 풍경의
변화 가능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식의 순간을 낳는다. 나는 당시 이런 순간 가운데 몇 가지를 포
착해 기록해두었다. 2002년 5월에 적어놓은 다음 글귀가 그중 한 가지 예다. “나는 확실하게 믿는다.
이곳 땅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살아 있다는 것을, 그것이 오직, 혹은 심지어 우연히, 인간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또 다른 날의
기록은 이랬다. “이곳에서는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할머니에게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읊조릴 것이다.
‘당시에 강은 여기 있지 않았고, 마을도 지금 있는 데가 아닌 장소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뜻밖의 만남을 인식의 예로 언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 가족의 조상들이
살던 마을을 돌아보러 갔던 어릴 적 경험, 다카에서 집 뒤쪽의 작은 방죽이 갑자기 호수로 변해 우리
집을 덮치게 만든 사이클론에 대한 기억, 혹은 힘차게 흐르는 강의 가장자리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벵골의 풍경이 그 지역 예술가와 작가 그리고 영화 제작자에게 끼친 영향 등을 통해
내가 목격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과거 인식이 내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각을 창작자로서 삶의 매개, 즉 소설로 번역해내는 문제와 관련해 나는 나 스스로가
이전 작품에서 마주한 도전과는 전혀 다른 유의 도전에 직면했음을 발견했다. 그때 당시 맞닥뜨린 도
전은 내가 과거에 쓴 책 『굶주린 조수』에만 해당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
금, 즉 점점 더 심화하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순다르반스 같은 저지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 자
체를 위협하기 시작한 시대에, 내게는 그 문제들이 훨씬 더 큰 함의를 지니게 된 것 같다.
나는 기후변화가 오늘날의 작가들에게 제기하는 도전은, 비록 어느 면에서 특수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좀 더 유구하고 좀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이 초래한 결과임을 깨달았다. 또한 그 도전이 궁극적으로는
대기 중에 쌓여가는 탄소가 지구의 운명을 새로 쓰고 있는 바로 그 시대에, 이야기 창작에 영향을 미
친 문학 형식과 관습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기후변화가 심지어 공적 영역에보다 문학 소설 세계에 훨씬 더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저 〈런던 리뷰 오브 북스〉,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 〈리터러리 저널〉 등
높이 평가받는 문학 저널과 북 리뷰를 몇 쪽만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들 출판물에서 기후
변화 주제를 다룰 때면 그것은 거의 언제나 논픽션과 관련이 있다. 장편소설이나 단편소설은 이 영역
에서 도통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기후변화를 다루는 소설은 거의 그 정의상 순수 문학 저널이 관심
있게 다루는 그런 유의 소설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장편소설이나 단편소설이 그 주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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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언급하기만 해도 그 작품은 흔히 공상과학 소설 장르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문학 창작 영역에서 기후
변화는 마치 외계인이나 행성 간 여행 비슷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듯하다.
이 특이한 피드백 순환 고리에는 혼란스러운 뭔가가 있다. 삶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위험에 눈감
은 진지함의 개념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어떤 주제의 시급성이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기준이라면, 기후변화가 실제로 지구 미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려하는 것은 전 세계의 작가들이
깊이 고민해볼 주요 관심사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왜 그럴까?
온난화 추세가 너무 거세어서 기존의 내레이션이라는 익숙한 배를 타고서는 항해를 할 수 없기 때문일
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엄연히 거센 지구 온난화 추세가 ‘새 기준’으로 자리 잡은 시대에 접어들었다.
만약 특정 문학 형식이 이러한 추세를 반영할 수 없다면, 그것들은 실패하게 될 테고, 그 실패는 기후
위기의 핵심을 이루는 좀 더 광범위한 창작적ㆍ문학적 실패의 한 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문제가 정보 부족에서 비롯된 게 아님은 확실하다. 오늘날 기후 시스템이 혼란을 겪고 있음을 모르
는 작가는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가가 기후변화에 관한 글을 집필하기로 결정할 때, 그
것은 소설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이 분명하다. 거기에 들어맞는 사례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업이다.
그녀는 우리 시대의 가장 걸출한 산문 작가 중 한 사람일 뿐 아니라 기후변화 문제에 정통하고 그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다. 하지만 그녀가 이 주제와 관련해 쓴 글은 모조리 다양한 형태의 비문학이다.
좀 더 분명한 예는 역사 소설 『더 웨이크』의 저자 폴 킹스노스다. 그는 자신의 생애 몇 년을 기후변
화 운동에 헌신했고, 그런 다음 “우리의 문명이 스스로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 작가ㆍ예
술가ㆍ사상가 네트워크”인 영향력 있는 ‘다크 마운틴 프로젝트’를 창립했다. 그런데 그는 저항 운동에
관해 강력한 비문학 저술을 집필했지만, 아직까지 기후변화를 전면에 내세운 소설은 출간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기후변화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온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내가 쓴 소설에는 그 주
제가 오직 간접적으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나의 개인적 관심사와 내가 출간한 작품 내용 간의
괴리에 대해 곰곰이 따져본 나는 그 간극이 개인적 선호의 결과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순수 소설로 간주되는 것이 기후변화에 대해 드러내는 독특한 형태의 저항 탓이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자신의 에세이〈역사의 기후〉에서, 사가들은 인류세(Anthropocene)라 불리는
이 시대, 즉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체가 됨으로써 지구의 가장 기본적인 물리 과정을 변화시키고 있는
시대”에 그들이 지닌 근원적 가정과 절차를 상당수 수정해야 할 거라고 주장한다. 나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인류세가 예술과 인문학뿐 아니라, 우리의 상식적 이해와 그를 넘어선 오늘날의 문화 전반
에도 도전을 제기한다고 덧붙이려 한다. 물론 이 도전이 일면 우리가 기후변화를 이해하도록 돕는 창
문 역할을 하는 기술적 언어의 복잡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도전이 예술과 인문학을 안내하는 관례와 가정에서 기인하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의심의 여
지가 없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규명하는 일이 우리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것
은 아마도 오늘날의 문화가 왜 기후변화에 대해 다루는 일을 그토록 어려워하는지 이해하는 데서 핵심
열쇠일 것이다. 실제로 이는 가장 넓은 의미의 문화와 맞서는 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분명하게 말
하건대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고, 따라서 상상력의 위기이기도 하다. 문화는 욕망 - 자동차나 기
기에 대한 욕망, 그리고 어떤 유의 정원과 주택에 대한 욕망 - 을 창출하는데, 바로 그 욕망이 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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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된 추동력이다. 우리가 속도 빠른 컨버터블 자동차에 흥분하는 것은 금속이나 크
롬 도금을 좋아하기 때문도, 자동차공학에 대한 추상적 이해 때문도 아니다. 대신 그 자동차가 원시적
풍경 속에 길게 뻗은 도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자유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머리를 가르는 바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수평선을 향해 돌진하는 피터 폰다와 제임스 딘을 머릿
속에 그린다. 그리고 아부다비나 캘리포니아주 남부 혹은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사람들이 푸른 잔디밭
에 담수화한 바닷물을 마구 뿌려대는 광경을 볼 때, 우리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산파역을 맡았을
갈망의 표현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갈망이 만들어낸 인공물과 상품은 어느 면에서 그 욕망을 낳
은 문화적 기반의 표현물이기도 하고 그 은폐 장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는 물론 그간 세상을 주조해온 더 넓은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역사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
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다 해도 여전히 그 토대가 다양한 양식의 문화 활동 - 시, 미술, 건축, 영화,
산문 소설 등 - 과 상호 작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알 길이 없다. 전 역사에 걸쳐 이러
한 여러 문호 영역은 전쟁, 생태계 재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위기에 반응해왔다. 그런데 기후변화는
어째서 그러한 관례와 그토록 특이하다 할 만치 불화하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직면한 문제는 탄소 경제의 정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상당수는 좀 더 넓은 문화의 은폐에 연루되도록 만드는 우리의 관례나 방식과도 관련이 있
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오늘날의 건축 추세가 심지어 탄소 배출량이 급증하는 시기임에도 유리와
금속으로 장식한 으리으리한 고층 빌딩을 선호한다면, 우리는 응당 이런 태도에 의해 충족되는 욕구
유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만약 소설가인 내가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요소로서 상표명을 사용하기
로 결정한다면,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나를 어느 정도로까지 시장의 조작에 가담하도록 만드는지 물
어야 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변화라는 주
제는 순수 소설 영역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또한 이것이 광의의 문화와 그 회피 형태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해수면 상승으로 순다르반스의 맹그로브 숲이 물에 잠기고, 콜카타ㆍ뉴욕 같은 도시가 거주 불능 장소
로 전락하는 등 몰라보게 바뀐 세상에서 책을 읽는 독자나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우리 시대의 예술
과 문학에 기댈 때, 그들은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시급하게 제가 물려받게 될 세상이 달라지리라고 말
해주는 조짐과 흔적을 찾지 않을까? 그런데 만약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우리 시대
가 대다수 예술 및 문학 형식의 은폐 양식에 의존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가 처한 곤경의 실상
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자
기 인식을 더없이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시대는 ‘대혼란’의 시대로 알려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
인류세와 오늘날의 기후 위기를 기술하는 데 자본주의가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중심축이 되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다. 이에 대해 시비할 생각은 없다. 내가 보기에 나오미 클라인을 비롯한 이들은 올바르게
도 자본주의가 기후변화를 추동하는 주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내러티브가 흔
히 그만큼이나 중요한 인류세의 또 한 가지 측면을 간과하곤 한다고 믿는다. 바로 제국과 제국주의다.
자본주의와 제국은 분명 단일한 실재의 양면이긴 하지만, 둘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으며 과거에도 단순
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지구 온난화와 관련해 자본과 제국의 명령이 더러 상반된 방향에서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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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박을 가함으로써 이따금 직관에 반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제국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기후 위기를 바라보면, 아시아 대륙이 지구 온난화의 모든 측면 - 온난화의
원인, 그것의 철학적ㆍ역사적 함의 - 에, 그리고 전 세계가 그에 대해 반응할 가능성에 결정적임을 알
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니는 함의는 지금껏 거의 무시되다시피 했다. 이는 아마도 인류세,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후 문제를 둘러싼 담론이 유럽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
이 바로 아시아가 기후 위기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좀 더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다.
아시아가 지구 온난화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그곳에 거주하는 인구수 때문이다. 기후변화의
잠재적 피해자 대다수는 아시아에 있다. 그렇다 보니 지구 온난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파급력이 크게
증폭되고 있다. 가령 벵골 삼각주를 예로 들어보자. 벵골 삼각주는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다. 벵골의 범람원은 예컨대 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처럼 그렇게 빠르게, 그렇게 완
전하게 물에 잠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투발루 인구는 채 1만 명이 되지 않는 데 비해 방글라데시
에서는 단 한 개 섬 - 볼라섬 - 의 일부가 범람했을 때 50만여 명이 전치(轉置)를 겪은 일도 있었다.
계속되는 기후변화는 아시아의 내륙에도 무시무시한 위협을 가한다. 그곳은 가뭄, 잦은 홍수, 기상 이
변 사건 때문에 수백만 명의 거주민과 그들의 생계가 위기에 처해 있다. 인도의 경작지 가운데 24%가
사막으로 바뀌고 있으며, 지구의 평균 기온이 섭씨 2도 상승하면 그 나라의 식량 공급량은 25%나 줄
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그리고 세계 경작지의 7%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재배한 식량으로 세계 인구의
20% 이상을 먹여 살리는 중국에서는 이미 사막화로 인해 연간 650억 달러를 손해 보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을 안겨줌에도, 그 위협은 아시아에서 가속화하는 물 위기 탓에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
다. 중국과 아시아의 남부 및 남동부를 지탱해주는 강들은 티베트와 히말라야산맥에서 발원한다. 축적
된 얼음 형태로 거기에 저장되어 있는 물이 세계 인구의 47퍼센트를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이 지역에
서는 온난화가 세계 평균 속도보다 갑절이나 빠르게 진행된다. 게다가 히말라야 빙하는 2008년에 이
미 1940년대 중반 이후 형성된 빙하를 모두 잃은 것으로 드러났다.
히말라야 빙하의 용융 속도가 빨라지면 거기서 발원한 강물의 유속 변화도 커진다. 그에 따라 건기에
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유속이 느려지는 반면, 우기에는 대규모 범람이 초래될 수 있다. 게다가 만약
빙하가 계속 지금과 같은 속도로 줄어들면, 아시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들은 10~20년 내
에 재앙과도 같은 물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또한 세계 강의 25퍼센트가 바다까지 닿기도 전에
말라버릴 것이다. 그 강들의 - 대부분은 아니라 해도 - 상당수가 아시아에 있다.
인구수라는 측면에서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살아가는 5억 명의 목숨
과 생계가 위험에 처해 있다. 달리 덧붙일 필요도 없는 말이지만, 그 파급 효과로 인한 부담은 주로 그
지역의 가장 가난한 이들이 떠안는다. 그 가운데는 여성이 불균형할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어떤 기후 전략도 아시아에서 효과를 보고 수많은 아시아인이 그것을 채택하지 않는 한 전 세계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은 외면하기 어렵다.
아시아 인구의 취약성은 그들이 지구 온난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 실제로 아시아 대륙은 오늘날의 기후변화 주기를 이끌어가는 일련의 결과를 촉발하는 데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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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게 기여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에서도 결정적 요소는 인구수다. 기후 위기를 막다른 길로 몰아간 것이
1980년대에 인구 밀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시작된 급격하면서도 광범위한 산업화이기 때문이다.
서구가 온실가스 축적에 가장 크게 기여한 측면은 20세기 총 세계 인구 중 약 30%를 차지하는 이들
의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이 꾸준히 증가한 데 따른 결과다. 반면 아시아의 기여는 20세기 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 - 즉 급증한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 - 이 만들어낸
탄소 발자국이 작은 규모지만 급작스럽게 팽창한 데 따른 결과다.
설사 아시아 본토의 역사가 이 길을 걷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구 행성은 끝내 기후 위기를 맞았을 것이
다. 어쨌거나 기후변화의 조짐이 일어난 시기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말이다. 그리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 집적은 찰스 킬링이 하와이주 마우나로아 관측소에서 측정을 시작했을 때 이미 300ppm을
넘어섰다. 이는 아시아 본토의 여러 국가에서 경제가 급속한 발달을 시작하기 한참 전인 1950년대 말
의 일이다. 심지어 그때조차 서구의 탄소 발자국은 가파르게 상승해서 대기 중에 온실가스가 계속 축
적되도록 내몰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그러나 아시아 본토가 1980년대 말 지속적인 경제 팽창기에 접
어들지 않았다면 온실가스가 그토록 가파르게 증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는 주인공이자 피해자로서 이중적 역할과는 무관하게 ‘대혼란’이 전개되는 데서 또 한 가
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 서툴게 굴어대는 과정을 통해 그 음모의 핵심 비밀을
우연히 알아차린 얼간이 역할이다. 인구가 어마어마한 유일한 대륙에서 경험적 테스트를 거치지 않았
다면 근대성의 중요한 측면들이 명료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실험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것은 근대성이 잉태한 생활 유형은 세계 인구 가운데 오직 소수만이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대혼란’이라는 무대에 오르도록 자신을 꼬드긴 유령의 가면을 찢어발긴 것도 다름 아닌
아시아였다. 하지만 아시아는 제 스스로가 벌인 짓에 놀라 움찔하게 된다. 흠칫 놀란 아시아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조차 말하지 못한다. 그 무대에 오르게 되면 다른 모든 존재처럼 ‘덫에 갇히기’ 때문이
다. 아시아가 무대에서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무리에게 할 수 있는 얘기라곤 고작 “하지만
여러분은 약속했고 …… 우리는 여러분을 믿었다!”라는 말뿐이다. (서구 선진국들이 아시아 국가에 “여
러분도 서방 국가들이 누리는 것 - 가령 무한한 에너지, 번영, 자주성, 이동성 등 - 을 누리게 해주겠
다”는 허울뿐인 약속을 했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 공포에 질린 얼간이 역할에서 아시아는 그 자신의
침묵을 통해 오늘날 세계 통치 체제의 중심에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는 침묵을 드러내 주었다.
만약 아시아 본토가 세계 경제의 주도적 메커니즘을 수용한 결과 기후 위기가 촉발되었다는 주장이 사
실이라면, 인류세의 역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왜 인구 밀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은 그 이전이 아니라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산업화했는가? 이상하게도 이 질문은 지
구 온난화 역사에 대한 설명에서 명시적으로 제기된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역사는 왜 비서구 세
계가 탄소 경제에 돌입하는 데 굼떴느냐는 질문에 암묵적인 답변을 제공해준다. 즉 단순히 탄소 경제
를 창출한 테크놀로지(예컨대 다축방적기나 증기 기관)가 영국에서 발명되었고, 따라서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는 그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산업화는 서구에서 다
른 곳으로 퍼져나간 테크놀로지의 확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이 같은 내러티브는 서구의 탄소 집약 경제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온실가스를 대기 중에 배출한
시기인 19~20세기의 지구 온난화 역사와 일치한다. 따라서 아닐 아가르왈과 수니타 나라인이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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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기후 정의(climate justice)에 관해 발표한 영향력 있는 에세이에서 밝혔다시피 “온실가스의 대기 중 축
적은 주로 선진국, 특히 미국에서의 어마어마한 소비가 빚어낸 결과다.” 하지만 이 사실 때문에 탄소
경제가 대단히 복잡한 전사(前史)를 지녔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한편 아시아 출신의 수많은 주도적 인물들은 놀랍게도 서구에서 환경주의가 주로 반(反)문화적인 이슈
였을 때조차 그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유엔 사무
총장을 지냈으며 유엔환경계획의 창설에 결정적 역할을 한 버마 정치인 우 탄트다. 1971년 그는 묘하
게도 오늘날을 미리 점친 것 같은 예지력 있는 경고문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우리는 매일 저녁 지
구의 오염된 바다 전역에 깔린 스모그 사이로 해 지는 광경을 바라볼 때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또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미래의 어떤 우주 역사가가 우리에 대해 ‘그들은 천재성과 빼어난 솜씨로
선견지명과 대기와 식량과 식수와 사상을 모조리 고갈시켰다’고, 혹은 ‘그들은 자기네 세계가 끝내 붕
괴하고 말 때까지 부단히 권모술수를 부렸다’고 말하기를 정녕 원하느냐고 말이다.”
중국에서는 인구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 힘입어 결국 최근에 종결되긴 했지만 ‘한 자녀 정책’을 실
시했다. 이 조치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면서 그 나라 인구를, 만약 그것을 시행하지 않았을 경우 예
상되는 정도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안정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류세에 대한 그와 정반대 관점에
서 보면 이러한 정책은 의심의 여지없이 가혹하고 억압적이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거기에 대해서는 대
단히 중요한 완화 조치였다는 평가가 나올지 모른다. 만약 기후 위기가 아시아 본토의 산업화에 의해
가속화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수억 명의 소비자가 그 방정식에 포함됐을 경우 우리가 대기 중 이
산화탄소 농도 350ppm이라는 랜드마크 수치를 훨씬 더 이른 시기에 넘어섰을 것임은 자명하다.
기후 정의 문제를 염두에 둘 때는 이러한 역사도 진지하게 다루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기후 위기를
촉발했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두들겨 맞고 있는 두 나라 - 인도와 중국 - 에서는 기후과학자들이 데이
터를 제시하기 훨씬 전부터 적잖은 사람이 산업화한 문명은 규모의 한계에 부딪히기 쉽다는 사실, 그
리고 지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에 의해 채택되면 이내 붕괴하고 말 거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들은 비록 동포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국에서 소비주의적이고 산업화한
경제 모델의 전면적 채택을 얼마간 늦추는 데는 분명 성공했다. 탄소 집약 경제가 부를 보상으로 제공
한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물질적 손해로 여겨질 게 틀림없다.
따라서 ‘기후 배상금’에 대한 요구는 역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흔들림 없는 토대 위에 서 있다. 하지
만 탄소 경제 계보의 복잡성은 지구 온난화와 관련해 ‘우리’와 ‘그들’ 사이를 명확하게 가르는 글로벌
사우스 거주민에게도 교훈을 안겨준다. 기후 위기가 서구에서 탄소 경제를 발달시킨 방식 탓에 초래된
거야 어김없는 사실이지만, 그 문제가 수많은 상이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후 위기를 우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타자(他者)’가 야기한 문제라고 여길 수 없다.
그러므로 2015년 기후변화에 관한 파리협정 기간에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문구, 즉 ‘공동의, 그러나 차
별화된 책임’은 적절하고도 정확한 관료적 어법의 드문 예다. 차크라바르티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지
적했다시피, 인류가 발생시킨 기후변화는 종으로서 인간 존재 자체가 빚어낸 의도치 않은 결과다. 상
이한 인간 집단들이 더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후변화에 기여했음에도, 지구 온난화는 궁극적으로 오
랜 기간에 걸쳐 모든 인간 행동이 이루어낸 총체적 결과물이다. 지구에서 살다 간 모든 이는 인간이
이 행성의 지배 종이 되도록 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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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존재했든 지금 존재하든 오늘날의 기후변화에 기여하고 있다.
정치
기후변화의 공적 정치는 그 자체로 도덕적ㆍ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해서 마비 상태에 이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최근에 수많은 활동가와 관심 있는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도덕적 이슈’로 규정하기 시
작했다. 이는 수많은 다른 종류의 호소가 기후변화와 관련해 일치된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도무지 먹
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점차 개인의 양심이, 전 세계 대중의 문제로서 집단행동이 필요
한 갈등을 위해 선택된 전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모든 민주적
통치 자원이 동나고 오직 그 찌꺼기인 ‘도덕’만 남은 듯한 형국이다.
기후변화 이슈에 대한 이러한 틀 지우기는 한 가지 커다란 미덕을 지닌다. 그것은 국제적 기후변화 관
료주의가 그 이슈에 부과해온 경제적 언어(비용ㆍ이익 언어)를 단호히 배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러한 접근법은 그와 동시에 결국 반대편 사람들에게 이롭게 작용할 소지가 있는 ‘진지함의 정치’를 소
환한다. 만약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주로 개인의 양심에 제기하는 문제로 바라본다면, 진지함이나 일관
성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입장을 판단해줄 시금석이 된다. 이는 다시 부인론자로 하여금 활동가들이 개
인적으로 선택한 생활 방식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을 위선자라고 몰아붙이게끔 만들 수 있다. 틀을 이런
식으로 짜면 진정성과 희생 같은 것이 그 이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면 앨 고어(미국의
정치가 및 환경 운동가)가 집에서 사용하는 전구 수가 몇 개인지, 시위 참가자들이 행진 대열에 합류
하기 위해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했는지 따위의 문제로 이슈가 변질된다.
나는 그에 딱 들어맞는 예를 어느 저명 활동가가 2014년 9월 뉴욕에서 기후변화 시위에 참가하고 난
뒤 응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뷰 진행자의 질문은 이런 식이었다. “당신은 기후
변화 때문에 무엇을 포기하셨죠? 당신이 감수한 희생은 뭔가요?” 문제의 활동가는 화가 치밀어 두서
없이 허둥대는 지경에 몰렸다. 그러므로 그가 일순 얼어붙음으로써 분명한 것마저 제대로 말할 수 없
게 된 것은 정치와 도덕이 손잡은 결과였다. 기후변화의 규모는 더없이 방대하므로 집단적 결정을 내
리고 그것을 행동하지 않으면 개인의 선택은 거의 무용지물이다.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주에서처럼 진지
함은 가뭄이 났을 때 물을 배급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에 맡길 수 있
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전제를 받아들이는 꼴이다.
그런가 하면 도덕성의 척도는 사회마다 다르기도 하다.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그리고 특히 영어를 사
용하는 나라들에서, 수많은 이슈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전히 스코틀랜드 계몽주의가 낳은 독특한 경제
ㆍ종교ㆍ철학 개념의 융합체에 의존한다. 케인스가 말했듯 이러한 사상 체계의 핵심 교리는 “자연법의
작용에 따라 자유를 누리는 상황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계몽된 개인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공공의 이익
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케인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19세기의 일상적 정치철학’은 미국
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정치 스펙트럼의 오른쪽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런 사상은 개인주의, 자유 무역, 전체의 일부를 이루는
신 같은 천년왕국적(millenarian) 특성을 띠는 뭔가를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철학에 영향을
받아 자기 신념을 구축한 것은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미국에서 윤리학에 관한 지배적
인 세속적 패러다임 존 롤스의 정의론 같은 역시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 빌려온 개인의 합리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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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가정 위에 정립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빠르게 기후변화에 대응해온 인문학의
한 영역을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기후윤리학자들이 표방하는 철학의 하위 학문이다. 이 분야에서 지
배적인 접근법은 자유롭게 사익을 추구하는 이성적 행위자에 맞추어져 있다. 이런 전통에 입각한 철학
자는 기후변화의 도덕적 명령은 아시아ㆍ아프리카에서 살아가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할 필요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데이비드 흄의 말을 인용하는 식으로 응수할 것이다. “세계 전체가
파괴되는 것보다 내 손가락의 상처가 더 아픈 것은 전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만큼
도덕성에 호소하는 기후 활동가들의 노력이 꼭 많은 지지를 얻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후변화는 흔히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라고 표현된다. 그것의 가장 사악한 측면 가운데 하나
는 기후변화가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 미덕과 관련해 우리가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일부 생각을 포기
하도록 촉구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세상에서 보기를 바라는 변화, 당신은 스스로 그 변화가
되어야 한다.(간디가 한 말)” 같은 생각 말이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갇혀 있는 개별화
한 상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미래 세대는 ‘대혼란’의 시대를 돌아보면서 필경 기
후 위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우리 시대의 지도자와 정치인을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 예술가와 작가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괘씸하게 여길 것이다.
한편 기후변화라는 영역이 제아무리 척박하다 할지라도 그 안에는 희망의 조짐으로서 도드라지는 특성
도 얼마간 존재한다. 각국 정부와 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긴박감, 현실적 대안 에너지 해법의 출
현, 세계 전역에서의 활동주의 확산, 그리고 환경 운동에서 거둔 몇 가지 소중한 승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유망한 상황 전개는 종교 집단과 종교 지도자들이 기후변화 정책에 개입하는
현상의 증가다. 당연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저명한 예지만, 최근 몇몇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
타 종교 집단과 기관도 저마다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이것이 희망의 신호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공식적 정치 체제가 지기 힘만으로는 위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 보이는 탓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 체제를 이루는 기본
적 구성 요소는 국민 국가인데, 그 국민 국가의 고유한 특성이 특정 인구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는 너무나 강력해서 심지어 유엔 같은 초국가적인 국민 국가들의 모임조차
그것을 무시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이는 물론 부분적으로 지정학 및 권력의 경쟁 관계에 기인한다. 하
지만 기후변화가 그 본성상 근대 국가의 생명 정치적 임무, 그에 따른 통치 관례와 관련해 근대 국가
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세속적 저항 운동이 교착 상태를 깨뜨리고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다만 관건은 시간이다. 기후변화가 ‘정상적인(normal) 문제’가 아니라 ‘사악한
(wicked) 문제’인 것은 효과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시계(時界)가 대단히 좁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과감한 세계 차원의 탄소 배출 감축 없이 한 해 한 해를 그저 흘려보낸다면 재앙은 점점 더 심
각해질 것이다. 대중의 저항 운동이 이처럼 좁은 시계 내에서 어떻게 충분한 추동력을 얻어낼 수 있을
지 알아내기란 어렵다.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기까지는 대체로 몇 년, 심지어 몇 십 년이 걸릴 것이다.
오늘날 상황에서 그런 운동을 구축하는 것은 한층 더 어렵다. 세계 전역의 안보 기관이 진즉부터 활동
주의를 감시하는 작업에 광범위하게 착수해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려면, 즉 기후변화의 안보화와 기업화를 막으려면,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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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중 조직이 투쟁의 최전선에 나서야 한다. 이러한 조직 가운데 종교적 연결 고리가 있는 기관은 다른
기관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다. 더욱이 종교적 세계관은 기후변화를 현존하는 통치 기
관에 심각한 도전으로 만들어준 제약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한 세계관은 국민 국가를 초월하며
세대를 뛰어넘는 장기적 책무를 인식한다. 게다가 경제학자 같은 사고방식을 취하지 않으며, 따라서
오늘날의 국민 국가가 사용하는 추론 형식을 허락지 않는 식으로 비선형적 변화 즉 재앙 를 상상
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만약 한계와 제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
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다시 신성함이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연관
된다. 사람들이 신성함을 두고 저마다 무엇을 떠올리고 싶어 하든 간에 말이다.
세계 각지의 종교 집단은 만약 대중 운동을 통해 서로 협력한다면 당연히 세계가 평등에 대한 고려를
희생하지 않고도 과감하게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길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추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수많은 기후 활동가들이 이미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또 한 가지 희망의 조짐이다.
실천을 위한 투쟁은 분명 지난하고 벅찰 것이며, 그 투쟁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든 기후변화로 인한 몇
몇 파괴적인 결과는 돌이키기에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투쟁을 통해 이전 세대보
다 더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세대가 출현하리라고 믿고 싶다. 또한 그들이 지금 인류가
빠져 있는 ‘대혼란’을 뛰어넘으리라고, 다른 비인간 존재들과의 유대 관계를 재발견하게 되리라고, 마
지막으로 이처럼 새롭고도 유구한 전망을 달라진 예술과 문학 속에 담아내리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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