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중세 시대의 인문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자는 기존 세계사 속의 중세란 오직 서
양의 중세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서양 중심 세계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인도,
이슬람, 중국, 한반도의 중세 인문을 서양 중세 인문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면서, 암흑시대
라고 알려진 서양 중세와 달리 비(非)서양 중세는 개명시대였음을 주장한다.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 Short Summary
우리는 인문학의 빈곤 시대에 살고 있다. 인문학은 타락했고, 탐욕과 배신과 욕망에 물들었다. 이렇게
가짜 인문학이 성업 중인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특히 동서양의 지배문화에 대
해 비판적인 관점 없이 무조건 찬양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적 연대 의식과 사
회적 연대 의식이 이렇게까지 빈곤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인문학을 읽을 것인가?
이 책은 중세 시대의 인문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자는 기존 세계사 속의 중세란 오직 서양의 중세였
고 비서양의 중세가 있어도 그것은 서양이 바라본 중세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서양 중심 세계관
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인도, 이슬람, 중국, 한반도의 중세 인문을 서양 중세 인문과 같은 비중으
로 다루면서, 암흑시대라고 알려진 서양 중세와 달리 비(非)서양 중세는 개명시대였음을 주장한다.
저자는 중세에 중동에서는 이슬람 문명이 탄생했고, 중국에서는 수 당 송의 불교문화 등이 다양하게
꽃을 피웠으며,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그 못지않은 찬란한 문명이 개화되었는데, 그야말로 개방
과 관용의 문화였다고 말한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도 찬란한 문화가 나타났는데, 조선시대보다 그 이
전인 중세에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관용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 차례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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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제1장 중세 이야기
제2장 인도는 지금도 중세인가?
제3장 인도 중세의 사상
제4장 인도 중세의 문학
제5장 인도 중세의 예술
제6장 이슬람 중세 이야기
제7장 이슬람 중세의 사상
제8장 이슬람 중세의 문학
제9장 이슬람 중세의 예술
제10장 서양 중세의 제국주의
제11장 서양 중세의 사상
제12장 서양 중세의 문학
제13장 서양 중세의 예술
제14장 중국 중세 이야기
제15장 중국 중세의 사상
제16자 중국 중세의 문학
제17장 중국 중세의 예술
제18장 한반도 중세 이야기
제19장 한반도 중세의 사상
제20장 한반도 중세의 문학
제21장 한반도 중세의 예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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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박홍규 지음
중세 이야기
재조명되는 중세
중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단적으로 2016년 4월부터 2017년 2월까지 《한겨레》에 연재된「박
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를 들 수 있다. 철학 교수인 박승찬은 연재 시작 두 달 전에 사망한 움베르토
에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에코가 4권, 4,000쪽에 이르는 『중세』시리즈 1권 서문에서 “중세는 어둠
의 시대 혹은 암흑기가 아니다”라며 중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박승찬 교수의
연재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고, 그 전후로 비슷한 내용의 책과 글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중세학자라고 하는 에코는 중세를 과연 긍정적으로만 보았을까? 에코는
그를 세계적 작가로 만들어준 『장미의 이름』에서 중세적 맹신을 비판한 것을 비롯해 중세의 문제점을
항상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가 유행시킨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라는 명제도 포스트모던의
의의를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그 보수성이 중세의 문제점과 연관된다고 비판한 것이었다. 1977년 쓴
글로, 국내에는 1993년 출간된 책에서 에코는 중세가 “페스트의 물결, 대량 학살, 불관용, 죽음으로
점철되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개방과 관용을 거부한 폐쇄와 불관용의 시대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30
여 년 뒤에 쓴 『중세』시리즈에서는 그런 비판의 칼날이 좀 무뎌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에코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무종교인으로서 특히 종교전쟁을 비판하는 태도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굳이 에코를 들먹이지 않아도 중세의 십자군전쟁 이래 최근까지 무수한 종교전쟁과 종교 갈등
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종교 사이의 대화, 특히 세 일신
교(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사이의 대화가 앞으로 긴요하다. 게다가 그 셋은 뿌리가 같지 않은가?
형제, 아무리 다르게 보아도 이복형제 정도의 관계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우리가 중세를 다시 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 종교 사이의 화해, 즉 개방과 관용에 있다. 물론 현대의 기독교권과 이슬람권
의 대립은 종교보다 정치, 특히 제국주의 탓이므로 종교로 제국주의를 덮어서는 안 된다.
중세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최근의 언론이나
출판 경향처럼 학교에서도 중세를 암흑이라고 가르치지 않는 듯해서 다행이지만, 내가 방문한 기독교
권이나 이슬람권에서는 각각의 종교를 더욱 강조하는 경향도 생겨나고 있어 걱정이다. 이슬람국가(IS)
를 비롯한 과격파 원리주의자들의 소행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업 등으로 인한 세계적인 우경화 경향과
도 무관하지 않다. 저마다 절대자를 내세운 중세적 폐쇄와 불관용이 부활하고 있어 걱정이다.
개방과 관용을 향한 새로운 중세관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하는 6~16세기에 서양은 그 앞뒤의 시대에 비해 낙후된 반면, 비(非)서양은 그
어떤 시대보다 앞선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중동에서는 이슬람 문명이 탄생했고, 중국에서는 수ㆍ당ㆍ
송의 불교문화 등이 다양하게 꽃을 피웠으며,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그 못지않은 찬란한 문명이
개화된 시대였다. 그야말로 개방과 관용의 문화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찬란한 문화가 나타났다. 조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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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대보다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관용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창조되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조선시대
가 더 서양 중세처럼 암흑으로 보인다. 최근 조선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는
물론 학계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그전 시대를 좋아한다고
해서, 에코가 서양 중세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려고 노력하면서도 그 시대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보려
고 했듯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쳐서는 안 되고, 당연히 그 시대의 문제점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어떤 과거로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재조명은 필요하다.
종래 서양에서 세계사를 고대-중세-현대로 구분한 점에는 문제가 많다. 특히 중세만 500년경에서
1500년경으로 획정하고 암흑이라고 한 뒤 그전은 고대, 후는 현대라고 하는 점도 문제다. 서양인들은
서양 중세는 1492년 스페인에서 무어인을 추방한 것으로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 즉, 서양은 이슬람교
도를 추방한 것으로 암흑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시
작한 단테가 이슬람교의 시조인 무함마드를 연옥에 빠졌다고 묘사한『신곡』에서도 같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은 그 뒤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았고, 특히 최근에 그 갈등은 최고조
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인류가 ‘새로운 중세’로 가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그런 우려는
이슬람과의 단절을 중시한 종래 서양의 역사관에 대한 반성으로 제거될 수 있을지 모른다. 서양이 암
흑이라고 한 중세는 사실 서양이 중심이 아니라 이슬람과 인도와 중국이 중심이었던 시대였다.
나는 서양 중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가톨릭 신학자들, 중세 건축을 비롯한 예술, 봉건제나 대
학 등에 대한 설명은 대폭 줄이고, 대신 그동안 거의 다루지 않은 『코란』과 이슬람 사상과 예술, 인
도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명에 대해 쓸 생각이다. 물론 중세에 대해 검토해야 할 점은 결코 적
지 않지만, 세계사적 차원의 인문 이야기를 쓴다면 나는 중세에 대한 부분은 고대-중세-현대라는 3분
법처럼 3분의 1이 아니라, 10분의 1 정도에 그친다고 본다. 그만큼 중세는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적
어도 미술을 제외하고는 그렇다. 그리고 종래 ‘중세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다루어진 것들
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간단하게 다룰 생각이다. 반면 종래 무시되었던 중세인이라도 지금 우리가 생
각해볼 필요가 있는 사람은 재조명해야 한다. 가령 펠라기우스가 있다.
펠라기우스는 원죄설을 부정하고, 누구나 착하게 살면 영혼은 구제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
누스는 펠라기우스를 반박해 바울의 편지에서 숙명론, 즉 예정조화설을 이끌어냈고, 이를 종교개혁 때
장 칼뱅이 채택했다. 나는 러셀처럼 가톨릭에서 그것을 폐기한 것을 매우 현명한 것이었다고 보고, 츠
베탕 토도로프처럼 그 둘의 논쟁이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도 『코란』을 중심으로 한 아랍의 이슬람문화를 비롯한 비서양의 중세 인문을 적극적으로 이
야기할 것이다. 그 목표는 하나다. 새로운 개방과 관용의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이슬람 중세 이야기
오리엔탈리즘과 이슬람
이슬람과 서양의 갈등은 십자군전쟁으로 시작되었다. 그전에는 갈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11세기부
터 13세기까지 근 200년 동안 지속된 그 전쟁은 이슬람과 서구의 중세를 끝장냈다. 그 시작은 이슬람
의 예루살렘 장악이었다. 그 뒤 지금까지, 트럼프가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그곳을 이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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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엘의 수도로 인정한 후 예루살렘은 이슬람과 서구 사이 갈등의 핵이다. 최초의 십자군부터 유대인과
무슬림을 무참하게 학살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슬람에 대한 서양인의 증오를 결
정했다. 서양인에게 이슬람은 사악하고 폭력적인 종교라는 한 가지 이미지만 뿌리내렸다. 지금까지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세계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십자군은 최초의 식민주의로 그 뒤 유럽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그 뒤 새뮤얼 헌팅턴의『문명
의 충돌』까지 서구인에게 그 이데올로기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런데 유럽이 이슬람을 지배하게
된 것은 기술과 산업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문명에서 받아들인 지식의 결과이며, 이미 이슬
람이 구축한 방대한 세계 무역권에 서양을 받아들인 결과다. 그런데도 유럽은 일찍부터 이슬람문명을
퇴폐와 미신, 여성 차별의 종교로 비난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했지만, 그 침략은 산업혁
명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유럽 경제를 철저히 보호하면서 식민지 산업은 파괴해 유럽의 자원 생
산 기지로 전환하면서 이루어진 산업혁명으로 유럽은 세계를 지배했다. 그 뒤 이슬람권을 비롯한 비서
양권은 모두 서양의 식민지나 준식민지로 타락했다. 그것이 소위 근현대 세계다.
식민 권력은 정치ㆍ경제ㆍ사회만이 아니라 이슬람의 학문과 교육도 파괴했다. 서양보다 훨씬 빨리 시
작된 대학을 비롯한 모든 학교를 폐쇄하고 이슬람 의료를 법으로 금지했으며 의사들을 처형했다. 이슬
람 과학은 미신과 독단에 불과하다고 선전했다. 그 대신 식민 권력과 피지배층 사이에서 지배를 원활
하게 할 중간 매체를 만들기 위한 식민지 교육체계를 수립했다.
그 중간 매체란 몸은 원주민이되 머리는 식민지인인 통역ㆍ경찰ㆍ군인ㆍ교사 등인데, 그들을 통해 소
수의 식민 권력은 다수의 피지배자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했다. 이는 당연히 전통 지배계급의 반
발을 야기했다. 전통적인 법과 문화가 개인과 가정사로 축소되자 현대의 삶에 절박한 문제를 전통으로
해결할 힘은 더욱 축소되었다. 이에 전통적 지식인은 즉각 반발해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으나,
현실과 전통의 괴리를 더욱 촉진하고 결국은 전통의 화석화를 초래했을 뿐이다.
십자군시대 이래 식민지를 더욱 확고하게 굳히는 이데올로기로 오리엔탈리즘이 학문과 예술의 이름으
로 군림했다. 이를 에드워드 사이드는 동양을 지배하고 개조하며 억압하는 특정한 서양의 양식으로 정
의한다. 그것은 십자군전쟁 이전부터 나타났다. 가령 8세기의 다마스쿠스 존은 이슬람이 이단 종교이
고, 그 선지자 무함마드는 타락하고 방탕한 인간이라고 했다. 그 후 수많은 문헌으로 무함마드는 사기
꾼, 무슬림은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미치광이이자 타락하고 나약한 색정광, 이슬람 땅은 오로지 서양인
의 성적 모험의 안식처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가 확고하게 굳어졌다. 이는 이슬람 연구자만이 아
니라 볼테르ㆍ몽테스키외ㆍ파스칼ㆍ헤겔ㆍ랑케ㆍ르낭ㆍ마르크스ㆍ슈펭글러 등도 마찬가지였다.
무슬림이 싫어하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번역한 리처드 버턴을 비롯한 근대 이슬람학자들이 만들어낸
이슬람 이미지도 마술과 비술로 가득 찬 보물의 나라, 초자연적 신앙과 천문학과 연금술의 신비가 가
득한 곳, 대마초와 아편과 코브라, 곡예사와 매춘부, 댄서와 동성애자와 범죄인의 천국 등이었다. 그것
을 앵그르와 들라크 루아는 그림으로, 모차르트와 베르디는 음악으로 표현했다. 게다가 영화 〈아라비
아의 로렌스〉(1962)로 영웅화된 영국 스파이는 그런 이미지를 정책에 반영했다.
이처럼 오리엔탈리즘은 중세부터 지금까지 식민지 삶의 모든 부분에 침투했고, 식민지가 해방된 뒤에
도 여전히 깊게 박혀 있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을 정당화하고 피식민지 사람들의 무능과 불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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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을 내세워 합리화한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특히 많은 할리우드 영화는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를 넘어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악당으로 묘사해 오리엔탈리즘을 더욱더
강화했다. 나아가 이스라엘을 비롯한 서양은 선량한 반면 이슬람은 폭력적인 악당이라고 보도하는 뉴
스부터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같은 소설에 이르기까지 오리엔탈리즘은 끝없이 반복된다.
나의 슬픈 이슬람 이야기
유럽의 중세가 몽매의 암흑기고 그것이 끝나면서 계몽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와는 반대로, 이
슬람의 중세는 유럽의 계몽 이상의 계몽으로 유럽의 근대를 시작하도록 자극했을 정도로 근대적이었는
데, 이슬람의 근대는 도리어 암흑기가 되어 지금까지 무지몽매에 빠져 있다는 게 이슬람에 대한 내 생
각이다. 그것이 슬픈 이유는 이슬람의 근대가 서구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으로 타락한 점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이슬람 근본주의에도 몽매의 원인이 있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도 지금의 동양을 찬양할
생각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였다는 500년 조선을 찬양할 생각도 없다. 왕들 중에서도 최고였
다는 세종조차 찬양할 생각이 없다. 왕조나 왕은 다 독재다. 어떤 독재도 찬양할 생각이 없다.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점은 이슬람이 서양식 중세에 머물러 있다는 잘못된 비판이다. 민족주의와 인
권의 부재가 서양 중세의 특징이라면 이슬람의 중세는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처음 정의와
평등, 인간 존엄성과 법의 지배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나타났다. 문화ㆍ부족ㆍ인종의 차이를 넘어선 형
제애를 창출했고, 소외된 사람들을 예우하고 존중했다. 세습 통치가 아닌 선거 체제가 도입되기도 했
고, 논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하기도 했다. 관용과 정의와 공공선에
근거해 지식과 배움과 창조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학문과 겸양을 갖춘 이슬람문명을 건설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수준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아니었지만, 서구의 중세 1,000년에 해당하는 시대에
이슬람은 서구보다는 훨씬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달한 진보적인 모습이었다. 이슬람이 그 탄생 이래 세
계 종교로 급속하게 성장한 배경에는 그런 진보성이 있었다. 단적으로 힌두교의 카스트와 달리 이슬람
은 만민 평등을 주장했기에 인도에 쉽게 정착했다. 따라서 이슬람이 무력으로만 다른 민족들을 정복했
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슬람이 다른 나라에 『코란』이냐 항복이냐를 요구했다는 것은 서구 제국
주의 침략 방식을 이슬람에 대입한 것일 뿐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중세 이슬람이 예술과 과학의 꽃을 피워 인류의 사상적 유산에 공헌을 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8세기부터 16세기까지 바그다드ㆍ다마스쿠스ㆍ카이로ㆍ사마르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음)ㆍ통북투(지금의 아프리카 말리에 있음) 등은 도서관ㆍ책방ㆍ공중목욕탕ㆍ병원들이 광대하고도
정교한 그물망을 형성한 도시로, 그 시대 세계의 어느 나라 도시보다도 선진적이었다. 한반도에는 그
런 도시가 19세기 말까지도 거의 없었다. 중세 이슬람에서 과학과 실험적 방법이 시작되었고, 철학이
확장되고 진보했으며, 문학과 미술과 음악이 찬란하게 꽃피웠다. 물론 근대 이후 모든 것은 후퇴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슬람의 모든 문제를 서구 제국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한반도의 모든 문제를 일본
제국주의나 친일파 탓으로 돌리는 것 이상으로 황당무계한 책임 전가다. 이슬람 사람들의 이슬람 최고
성에 대한 이야기도 황당무계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들은 다른 나라나 민족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는
어느 나라나 민족에서나 들을 수 있지만, 그것이 결국은 평화 공존을 해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민주주의가 근대 이후 이슬람에서 쇠퇴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구의 중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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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끝날 무렵 이슬람에서는 중세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사상과 교육과 이성을 존중하던 이슬람의 전통은
파괴되었다. 그 단적인 증거가 기계적인 암기 교육과 편협한 사고방식이고, 광신만 가르치는 학교와
그곳에서 배출되는 로봇 같은 인간들이다. 나는 이처럼 이슬람의 슬픈 이야기를 한반도의 역사에서도
읽는다. 한반도에서도 조선 이전 시대에는 불교와 유교와 전통 종교가 공존하고 다양성이 존중되었지
만, 조선에서는 유교, 그것도 성리학만이 강요되었다. 게다가 소중화주의라는 쇼비니즘(chauvinism)이
아큐식 정신 승리법으로 지배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중세 이야기
중국의 중세
퍼트리샤 버클리 에브리가 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가 있다. 이 책은 중국사를
11장으로 나누는데, 종래 서양식의 고대-중세-근대라는 3분법과 달리, 왕조 중심으로 보는 것이어서
그런 왕조사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보아온 우리에게는 낯설다. 그러나 이 책은 왕을 중심으로 한 ‘왕조
실록’류 드라마 역사와는 전혀 다르다. 즉, 시대를 왕조로 나눈다고 해서 왕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를 중심으로 삼은 장점이 있다. 가령 한자가 표의문자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해 중국이나
중화문화권이라는 통합이 가능했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신선함이다.
중국에서는 3~9세기의 600년을 중고라고 하고, 서양사의 중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전을 고대, 그 후를 근세와 근대로 다시 나눈다. 근세란 10~19세기의 900년간이고, 근(현)
대란 20세기를 말한다. 근세는 송 왕조와 요ㆍ금ㆍ원 왕조, 명 왕조와 청 왕조를 포함하는 것으로 우
리의 고려와 조선에 각각 대응한다. 나는 이와 달리 우리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가 중세에 해당하는
것처럼 중국사에서 중세를 3~6세기 분열의 시대(220~589)부터 당 왕조(581~907), 송과 요ㆍ금ㆍ원
왕조까지로 본다. 중국 중세의 시작인 3세기는 『삼국지』로 알려진 난세의 삼국시대로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투기와 권모술수, 모반과 모해의 전문가들인 조조ㆍ유비ㆍ손권ㆍ제갈량 등이 영웅으로
등장하고, 내가 좋아하는 반(反)영웅들인 죽림칠현이 나오는 자유분방한 시대가 이어진다.
에브리가 3세기를 ‘불교, 귀족제, 이민족 군주들’이라고 명명했듯이, 중국 중세는 외래문화인 불교의
전래로 시작한다. 정부를 믿기 어려운 어지러운 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고통과 죽음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전통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결과 중국 고유의 생
활과 다른 불교의 삭발과 맨발, 가계 승계가 아닌 출가 해탈, 황제가 아닌 부처에 대한 예의, 현세가
아닌 윤회와 지옥 등의 관념이 새롭게 등장해 본래의 중국 문화와 공존했다. 특히 이민족 군주들은 중
화주의의 유교와 달리 보편적인 불교를 좋아했다. 불교가 평등을 가르친 탓에 여성이나 하층민에게도
매력적이었다. 물론 저항도 만만찮았다. 특히 독신 생활과 삭발과 화장이 문제였다.
유교가 국교화되었음에도 그것은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지배 계층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의 전제정치에
불만이 있는 대중에게는 도교가 중심 종교였다. 농사를 이상으로 여긴 도연명과 같은 시인에게도 도교
의 영향은 뚜렷하다. 도교는 지금까지도 중국 사상의 핵심이다. 심지어 유교는 한국이고 중국은 도교
이며 일본은 불교라는 비교론도 있다. 일본에서는 도교가 금지된 반면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가 있었
고, 한반도에는 도교 대신 선교(仙敎)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들이 샤머니즘과 애니미즘과 신선
사상에 수많은 신을 모시는 신앙인 도교와 본질적으로 얼마나 다른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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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에브리는 중세 중기인 당 왕조를 ‘세계적인 제국’으로 부른다. 당나라의 개방적이고 세계주의적인 분위
기 때문에 불교는 중국인의 생활을 더욱 깊이 지배했다. 절은 서양 중세의 수도원처럼 학교를 운영하
고 나그네에게 숙소를 제공했다. 절은 마을 생활의 중심이자 경제의 중심이었다. 또한 당나라 시대에
불교는 완전히 중국화되었다. 서민 사이에서는 아미타불을 믿는 정토교가 퍼졌고, 지식인 사이에서는
선이 유행했다. 선종에서는 그 개조(開祖)인 달마대사와 혜능이 유명했다. 당대 저술된 책 중 최고의
고전은 혜능의 『육조단경』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내게 그 책은 너무나 어려운 선문답이다.
당 왕조 시대를 ‘세계적인 제국’이라고 함은 당나라만이 아니라 신라와 발해를 포함한 그 주변의 나라
들, 티베트와 일본, 지금의 중국 남부에 있던 남조(南朝)까지 포함해 모두가 당나라 수준의 문명국이었
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국가 형태를 갖추고 보편적 종교를 도입했으며 문자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
런 변화에 최강국이자 최대국인 중국이 모범이기는 했지만, 단순히 중국 모방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
니었고 각국이 나름의 독자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그러한 독자성은 그 뒤에도 이어졌으나, 중세가 끝
난 뒤 중국이 폐쇄적으로 변하면서 동아시아권도 폐쇄화되었다.
송 왕조에 와서는 남부를 중심으로 농업과 산업이 발전하고 현대 중국인의 일상생활인 탁자와 의자 사
용이 정착되어 편리해지는 등 생활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수나라 때 시작된 과거가 사람들의
생각을 꽉 막히게 해서 창조력을 약화시키며 확고부동한 사대부 계층이 형성되었다. 유교를 사상의 중
심으로 만든 것은 송 왕조 이후였으나 그것이 굳어진 것은 청 왕조에서였다. 새로운 유교로 대두한 성
리학은 주희를 중심으로 발전해 관학(官學)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그것은 몽골족의 위협에 대응해
한족 문화의 위신을 세우고자 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것을 유일한 진리인 양 숭배한 조선이
라는 나라에서 벌어진 비극은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에브리는 중국 중세의 마지막을 요ㆍ금ㆍ원이라
는 ‘이민족의 통치’라고 하면서도 중국 문명은 보전되었을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반응해 중국의 전통에
풍요로움을 더하는 표현 수단과 대처 양식을 발전시켰다고 정리한다.
21세기는 새로운 중세의 시작
나는 지금까지 중세란 서양의 시대가 아니라 인도와 아랍의 시대라고 주장해왔다. 지금부터는 중세가
중국과 일본과 고려의 시대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우리를 한국이 아니라 고려라고 부르는 것에 반감을
품을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이름은 모호하다. 남한만을 말하는지 남북한 모두를
말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까지의 이름인 고려라고 부르겠다. 물론 우리의 중세에는
삼국시대의 후기도 포함되지만 중심은 고려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는 한반도 통일국가를 고려민주공화
국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내 희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세 세계의 중심은 동양이지 서양이 아니었다. 중세만이 아니라 18세기까지도 그러했다. 그래서 18세
기까지를 중세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지금까지 서양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령 우리
에게『로마제국 쇠망사』로 알려진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그러했다. 기번은 로마를 고대
최대의 제국이라고 보았지만 그것도 잘못된 판단이었다. 고대 최대의 제국도 서양이 아닌 동양에 있었
다. 그러니 유럽 중심의 서양이 세계사의 중심에 선 것은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정도다. 그리고 그런
서양 중심의 세계사는 이제 끝나고 있다. 21세기 세계는 더는 서양 중심이 아니다.
중국은 중세 이후 서서히 무너졌다. 조선이 종주국으로 삼은 명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폐쇄
국가로 이슬람을 비롯한 이민족을 탄압하고 불교를 억압했다. 조선의 척불론은 그런 명나라에서 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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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이었다. 반면 청나라는 개방적이었다. 만주어ㆍ몽골어ㆍ티베트어ㆍ위구르어ㆍ중국어라는 5개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했으며 황제는 티베트 불교의 최고 시주(施主)를 자처하고 이슬람교를 보호했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한족화, 즉, 폐쇄화되면서 결국 멸망했다. 지금 중국이 다시 그런 길로 가고 있다는 비판
이 있다. 대안은 중세로 회귀하는 것이다. 특히 당나라의 개방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중국 민주
화의 기본이다. 그렇게 되어야 티베트도 위구르도 몽골도 만주도 기타 독립을 원하는 모든 민족이 독
립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이 보장될 수 있다.
한반도 중세 이야기
모두가 양반의 후손이라는 나라
오랜만에 참석한 교수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는 어떤 성씨가 양반이니 아전이니 쌍놈이니 하는 것이었
다. 국사학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공학이나 경영학 같은 첨단 현대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의 자리였다.
그런 이야기는 내가 약 40년 전 대학원생으로 교수들의 술자리에 처음 불려갔을 때부터 들었고, 교수
가 되어서는 회식 때마다 들었다. 20여 년 전 학장이 되어 회식을 폐지하고 나서부터는 듣지 않아 살
만 했는데, 다시 20여 년 만에 듣게 되어 그동안 끊다시피 했던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조선시대 이래,
아니 골품제의 신라 이래 인간을 신분이나 계급으로 구분하는 반인간적 차별은 21세기에도 변하지 않
았다는 절망감에서였다. 그것도 명색이 최고 교육을 받은 소위 지성인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교수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양반 명문가 출신이었다. 어쩌다 찾은 그들의 집에는 왕이 자기 조상에
게 내린 교지를 비롯해 명문가 출신임을 증명하는 많은 골동품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양반 가정에는
그런 물건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한국은 박물관이 매우 적고 그 소장품도 빈약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각
가정에는 엄청난 보물이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라의 역사는 빈곤하지만 각 가정의 역사는 찬란
할지 모른다. 조상 수만 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족보가 몇 천만 명의 집에 있다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국에서는 보물 중의 보물, 역사 중의 역사가 족보이고 인물 중의 인물은 위대한 조상이다.
미국의 저명한 한국사학자인 유진 Y. 박에 의하면 족보와 관련된 인터뷰를 했을 때 중국인이나 일본인
은 수 대에 걸쳐 농사를 지었거나 심지어 살인을 해서 감옥에 간 조상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언급한 반
면, 한국인은 누구나 자신의 조상이 위대한 인물이고 최소한 양반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 조상을 욕하면 원수가 되듯 자기 나라를 욕하거나 외국, 특히 일본을 조금이라도 좋게 말하면 매
국노 취급을 당한다. 무조건 애국이어야 한다. 가문 자랑이 나라 자랑으로 이어진다. 내 나라, 내 집안
이 최고라고 한다. 물론 나라보다 집안이 앞선다. 충보다 효가 앞선다. 왕도 중국의 황제 앞에서는 하
나의 가문 출신에 불과했기에 사대부는 왕과도 맞먹었다. 율곡이나 퇴계도 그랬다. 그래서 왕이 불러
도 거절하고 벼슬길에 올라도 쉽게 돌아섰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의병 대장으로 나섰으나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기 직전 부친상을 당했다고 귀향한 선비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무슨 민족
타령이냐? 내 집안의 우월을 자랑하기 위한 가설 정도가 민족이냐?
어디까지나 집안이 먼저다. 그래서 과거에는 가문 단위로 당쟁도 했고 지금도 정쟁을 일삼고 있는 것
이 아닌가? 그것이 대학에서는 학벌 가족주의, 관료 세계에서는 관벌 가족주의로 확대되어 어디서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가 울려 퍼지고, 각 집단마다 죽고 살기의 결사주의로 나아간다. 좌우를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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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지 않고 선후배, 형님 아우의 의리는 모든 가치를 압도한다. 어디에나 개인은 없고 집단이 우선한다.
한국은 그래서 분단되었다. 철저히 갈라섰다. 그런데 무슨 통일이냐?
한반도의 중세
내가 ‘한반도’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보통은 남한을 뜻하는 ‘한국’이라는 말을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글의 지리적 범위는 고구려나 발해를 포함하는 것이므로 한반도라는 말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 모
두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지리적 명칭이 없어 한반도라는 말을 현재의 남북한 영토 또는 경우에 따라서
는 만주 지역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중세라는 말에도 문제는 있다. 한국사에서 중세
란 보통 고려를 말하는데, 나는 불교가 전래된 4세기 삼국시대부터 중세로 보기 때문이다.
대일본제국이라는 말에서 나온 듯한 대한제국이라는 말을 바꾼 대한민국이라는 말이나 그것을 줄인 한
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한반도 역사에서 최근을 말하고 그 영역도 보통은 남한에 국한되는 것이므로 고
대나 중세는커녕 근대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편의상 한반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국명이
아니라 지명이다. 나는 국명보다 지명이 중요하고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는 영원하지만 그 위에
세워지는 나라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외에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지역으로 만주나 랴오닝 등이
있다. 고구려나 발해가 그곳을 지배했다는 이유에서다.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는 없지만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그런 생각이 숨어 있어서 만주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뿌리 깊다. 고구려 이전에 고조
선을 세운 단군이 그곳을 정복했으므로 우리 민족의 발상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조선이 있던 당시 만주에는 다양한 종족이 살았고 고조선은 그중 하나였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에 망하고 한사군이 세워졌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반도냐 랴오닝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고조선을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국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과연 지금 우리가 아는 국가와 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나아가 고구려를 국가를 넘어선 제국으로 볼 수 있을까? 고구려가 오늘날
의 만주 등을 지배했다고 하지만 당시 만주에는 다양한 지배 세력이 공존했다. 고구려나 발해나 다종
족 국가이지 않았을까? 신라나 백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단일 민족이기는커녕 하나의 국가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역사를 국가에 권력이 집중되는 과정으로 본다거나 고대부터 국
가를 이루었다고 보는 방식에 의문이 있었다. 다른 나라의 역사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방식이 왜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일까? 국가를 잃은 일제 시대에 역사학이라는 것이 만들어진 탓이 아닐까?
한반도의 역사를 서양식으로 고대-중세-근대로 나누는 경우 중세는 보통 고려에 해당한다. 즉, 918년
부터 1392년까지를 뜻했다. 그러나 나는 통일신라시대(676~935)도 중세라고 본다. 통일신라가 세워
진 676년 이전은 분단국가였으나 그 이후는 통일국가였다. 장보고가 활약한 통일신라 이후 고려까지,
또는 적어도 임진왜란 전까지 한반도는 아시아는 물론 세계로 뻗어나간 개방적인 국가였고 유불선의
공존을 인정하는 다양성의 국가였다. 그런 개방성과 다양성은 조선,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에는 인정되
지 못했다. 그 뒤 조선은 폐쇄적인 유교(성리학) 일색의 나라로 변해 결국 망하고 말았다.
개방성과 다양성을 고려시대의 특징으로 인정하는 박종기 교수의 견해는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가 통일신라를 골품제라는 하나의 원리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점은 나의 견해와 다르다. 통일
신라는 물론이고 삼국시대에도 고려와 같이 유불선의 공존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성골이니 육
두품이니 하는 골품제는 신분에게 불과한 것이다. 그런 신분제는 고려는 물론 조선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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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동아시아의 중세
나는 통일신라와 고려를 포함한 우리 중세를 개방과 다양과 통일의 시대로 본다. 그리고 그 개방의 영
역은 적어도 동아시아를 포괄한 것이었다. 중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인도 등 남아시아, 이슬람권의
서아시아까지 포함한 모두가 함께한 찬란한 중세였다. 그 중세에 유일하게 정체된 유럽이 중세 이후
득세해 16세기 이후에 아메리카, 19세기 이후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를 지배했지만, 이제 그 시대는
끝나고 있다. 21세기가 새로운 시대라고 하면 그것은 아시아의 시대다. 동아시아의 시대다.
한반도의 중세는 고대의 봄을 이은 찬란한 동아시아 여름이었으나, 그 세월은 조선의 유교에 의해 망
각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동아시아와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사는 시골에도 동아시아에서 온 여인
들이 함께 살며 많은 ‘완득이’를 낳았고, 내가 일한 시골 대학에도 많은 동아시아 유학생이 함께 공부
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에도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동아시아에는 문제가 많다. 내가
30여 년 전부터 구상한 동아시아의 인권과 평화의 공동체는 아직도 요원하지만 분명히 희망은 있다.
그 출발은 중세 동아시아의 인문 공동체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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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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