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은 왜 생겼을까? 이 문제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뜨거운 감자로 불
린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중동 갈등의 핵, 더 나아가 전 세계 분쟁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
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평화롭게 공존
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지 살펴본다.
이슬람 바로 보기
▣ Short Summary
9.11테러는 겉으로 볼 때 이슬람의 극단적인 반미 감정의 표출, 기독교 문명에 대한 증오로 보이지만,
그 핵심을 들여다보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슬람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
온 상황에서 저자가 뒤늦게 『이슬람 바로보기』의 집필을 시도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역사 인식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슬람 문명과 이슬람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돕기 위함이
다. 둘째, 오늘날 벌어지는 중동 문제의 뿌리를 찾고 그 해결책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기 위함이
다. 셋째, 중동 지역 갈등의 핵인 예루살렘 현지에 살면서 느낀 내부자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함이다.
이 책은 이슬람 탄생 이전의 숨겨진 역사를 시작으로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의 현장까지
약 1,500년 이슬람 역사를 현지에서 피부로 경험하면서 느낀 저자가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매뉴얼로 집필하였다.
▣ 차례
프롤로그_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이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01 중동은 정확히 어느 지역을 가리킬까?
이슬람 역사 여정을 위한 준비 작업
02 무엇이 이슬람 탄생을 가능하게 했을까?
이슬람 탄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
03 무함마드는 왜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인들을 모두 쫓아냈을까?
무함마드와 유대인
04 이슬람 전사들은 어떻게 순식간에 3개 대륙을 정복했을까?
정통 칼리프 시대
05 아랍인은 왜 우마이야 세습 왕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을까?
우마이야 왕조
06 압바스 왕조는 어떻게 찬란한 이슬람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2유대인 바로보기
압바스 왕조와 유대인
07 유럽 최초의 반격인 십자군 운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셀주크, 파티마-아이유브, 십자군의 삼파전
08 칭기즈칸의 몽골족은 왜 이슬람 제국을 초토화시켰을까?
몽골 제국, 이를 막아낸 이집트의 맘루크
09 최후이자 최대의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오스만 터키의 발흥
10 초강대국 오스만 터키는 왜 무너졌을까?
격동의 16~18세기
11 ‘동방 문제’란 무엇인가?
서구 열강들의 먹이가 된 오스만 터키
12 1차 세계대전은 왜 오스만 터키 제국의 파멸을 가져왔을까?
1차 세계대전, 오스만 터키 제국의 파멸
13 유엔은 왜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을까?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1917~1947년
14 왜 이스라엘 독립선언과 함께 전쟁이 일어났을까?
1차 중동전쟁, 독립전쟁
15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은 왜 전쟁을 초래했을까?
2차 중동전쟁, 수에즈 전쟁
16 이스라엘은 어떻게 불과 6일 만에 국토를 5배나 확장할 수 있었을까?
3차 중동전쟁, 6일 전쟁
17 아랍의 맹주 이집트는 왜 졸지에 왕따가 되었을까?
4차 중동전쟁, 대속죄일 전쟁
18 냉전 붕괴와 걸프 전쟁으로 중동국가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레바논 전쟁과 걸프 전쟁
19 왜 아랍의 인티파다는 계속되고 있을까?
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에필로그_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날을 기대하며
참고문헌
-3유대인 바로보기
이슬람 바로 보기
중동은 정확히 어느 지역을 가리킬까?
‘중동’이란 지역적 개념은 영국이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세계를 지배하는 대영제국으
로 탄생하면서 등장했다. 오랫동안 유럽인들이 놀던 물은 지중해 바다가 그 한계였다. 그들은 지중해
를 세계의 전부로 인식하며 수천 년을 살아 왔다. 그러다가 15세기 말 신대륙 발견을 시작으로 유럽인
들에게는 신비 속에 가려져 있던 동방의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아울러 땅 끝으로 생각한 동방의
지평선도 점점 넓어지게 되었다. ‘근동’(Near East)은 그리스 발칸 반도를, ‘극동’(Far East)은 중국, 한국,
일본을 그리고 ‘중동’(Middle East)은 그 중간에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오늘날 중동은 북아프리카, 아
라비아 반도, 이란, 터키, 아프가니스탄 등 상당히 넓은 지역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무엇이 이슬람 탄생을 가능하게 했을까?
이슬람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 그 출발점을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탄생 지점인 570년으로 보
는 경우가 많지만, 시대를 몇 세기 앞당겨 이슬람교 탄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 상황을 최대한 복원해
보는 것은 신선한 출발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무지의 시대(이슬람 탄생 이전의 아라비아 역사): 선사시대부터 아라비아 사막은 목축을 하던 ‘베두인
족’과 오아시스 주변의 도시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대상무역을 하던 ‘쿠라이시 족’의 고향이었다. 비록
이들만의 자체적인 문명은 없었지만 5,000년간 아라비아 셈족 여인들은 수많은 자녀들을 근방의 수메
르, 아카드, 바벨론 등의 도시국가로 보냈고 이들의 타고난 원시적 용맹은 무기력한 도시 문명에 활기
를 불어넣곤 했다.
아라비아 반도(비잔틴과 페르시아 사이의 샌드위치): 이슬람교 탄생 이전의 아라비아 역사는 한마디로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으로 불리는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역사로 표현할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은 395년에 로마가 ‘동서’로 나뉜 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된 후 홀로 남은 동로마 제
국을 가리킨다. 서로마와 달리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무려 1,000년 이상 질긴 목숨을
연명했고, 1453년 오스만 터키 제국에 멸망당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주전 313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
왕에 의해 멸망당한 페르시아 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주후 224년에 등장한 제국이다. 제국의 이름
은 같지만 알렉산더에 의해 멸망당한 원조 페르시아는 조상의 이름을 따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라
하고, 비잔틴 제국과 경쟁한 페르시아는 ‘사산조 페르시아’라 한다.
무함마드는 왜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인들을 모두 쫓아냈을까?
아라비아 반도로 유입된 유대인: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핍박
이 이어지면서 아라비아 사막으로 유대인들의 유입이 줄을 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국가가 된 비잔틴
-4유대인 바로보기
제국은 ‘메시야를 죽인 민족’이라며 유대인들을 줄기차게 핍박했다. 한편, 종교적 관용을 보이던 파르
티아 제국과는 달리 그 뒤를 이은 사산조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면서 그동안
제국 내에서 자치를 누려오던 유대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동쪽 아라비아 사막으로 깊숙이 들어간 유대인들은 그곳을 자신들을 강제 개종시키려는 비잔틴 전투
병력이 여간해서는 미치지 못할 ‘안전지대’로 여겼고, 메카와 메디나 두 오아시스 도시를 중심으로 정
착했다. 대상들이 머물고 가는 작은 오아시스 도시에 불과하던 메카는 유대인들이 정착하면서 단기간
내에 국제도시로 발전했고, 메디나는 유대인들이 사막의 ‘무’에서 새롭게 만든 신도시였다.
무함마드의 어린시절: 570년, 무함마드는 메카의 명문 상업귀족인 쿠라이시족 하심가(家)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압둘라는 무함마드가 뱃속에 있을 때 여행 중 죽고, 어머니마저 6세 때 죽자 무함마드는 할아
버지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8세 때 할아버지마저 죽자 다시 삼촌에게 맡겨졌다.
부잣집 과부와의 결혼으로 인생이 역전되다: 25세의 성인 무함마드는 대상단(隊商團)의 리더가 되었고,
대상단의 소유주인 과부와 결혼하면서 인생의 놀라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 과부의 이름은 하디자 였는
데, 그녀는 엄청난 부자였지만 무함마드보다 15세가 많은 40세였고 이미 네 번이나 이혼한 경력에 아
이도 딸려 있었다. 쉽지 않는 결혼이었지만 이 결혼은 분명 유복자로 태어나 힘들게 살아온 무함마드
의 인생이 한순간에 역전된 계기가 되었다.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 이슬람교 탄생: 610년, 무함마드가 40세 되던 해에 여느 때처럼 메카 근교의
히라산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중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가 임했다. 이로써 당시까지 문맹이었던 무함마
드는 하루아침에 글을 깨우치고 이슬람교를 창시하게 된다. 하지만 메카에서의 전도활동은 신통치 않
았고, 메카의 중상류층인 쿠라이시족은 무함마드를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급진주의자로 여기고 핍박하
기 시작했다.
헤지라, 이슬람력의 시작: 전도를 시작한 지 9년째 되던 619년, 무함마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
던 아내와 삼촌이 세상을 떠나면서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이후 무함마드는 전도 대상을 메카 주민들
에서 메카를 찾아오는 순례자로 바꾸었다. 이때 유대인들이 세운 도시인 메디나에서 온 카즈라즈 부족
의 순례단이 무함마드에게서 이슬람에 대한 설교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갔다. 메카에서 성과가
없어 고심하던 무함마드는 개종자 70명과 함께 622년, 메디나로 이동하는데 이 해는 이슬람 역사에서
무척 의미 있는 해가 된다. 바로 622년을 기준으로 이슬람 달력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메디나 이주를 ‘헤지라’(거룩한 천도)라 하고, 이때 무함마드와 함께 이주한 70명을 ‘무하지룬’(이주한
자)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기독교의 12사도와 같은 최고의 존경과 권위의 대상이 된다.
메디나에서의 첫해, 유대인 포섭작전
메디나에서 거대한 아랍 부족들을 개종시킨 무함마드는 곧 유대인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렸다. 무함마
드는 유대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면 이들의 재력과 잘 정비된 신학이 이슬람 전파에 엄청난 도움
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슬림들이 기도할 때 유대인처럼 예루
살렘을 향해 기도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개종자는 소수
에 불과했다. 이후 유대인에 대한 무함마드의 태도와 전략은 점차 적대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
고 적대감은 624년 1월, 무슬림들의 기도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바꾸면서 공식화되었다.
-5유대인 바로보기
이슬람 전사들은 어떻게 순식간에 3개 대륙을 정복했을까?
메디나로 이주(622년)한 지 10년 후, 그리고 메카를 정복(639년)한 지 2년 후인 632년 6월 8일, 무함
마드가 젊은 아내인 아이샤의 무릎을 벤 채 죽자 엄청난 혼란이 찾아왔다. 무함마드가 아들을 3명 낳
았지만 3명 모두 어린 나이에 죽은 탓에 마땅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진짜 능력은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사후에 드러났다. 혼란은 컸지만 일시적이었고, 이들은 ‘무함마드의
대리자’를 뜻하는 ‘칼리프’ 제도를 확립하면서 빠르게 혼란을 수습해 나갔다. 네 명의 칼리프는 다음과
같다.
아부 바크르: 632~634년 / 오마르: 634~644년 / 오스만: 644~656년 / 알리: 656~661년
아브 바크르(아라비아 반도의 통일): 초대 칼리프로 선출된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절친한 친구로서
무함마드 아내인 하디자에 이어 두 번째로 무슬림이 된 사람이다. 그는 짧은 통치기간인 2년 동안 무
함마드에 의해 완성된 계시인 ‘꾸란’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무함마드가 알
라를 위한 ‘세상 정복의 말’이었다면, 그의 후계자인 아부 바크르는 ‘세상 정복의 칼’이었다. ‘꾸란이냐
칼이냐’를 슬로건으로 시작된 이슬람 대정복 운동의 불씨가 그로 인해 점화된 것이다.
오마르(이슬람 제국의 실질적 건설자): 아부 바크르에게서 통일된 아라비아를 인수받은 오마르는 정복
전쟁의 화살을 외부 세계인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을 향해 정조준했다. 몇 번의 약탈로 탐색전을 펼
치던 오마르는 늙은 두 제국의 허점을 곧바로 파악하고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오마르는 635
년 비잔틴의 다메섹을 점령했고,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5만의 비잔틴 최정예부대가 절반도 안 되는
무슬림군에 대패함으로써 제국의 절반을 고스란히 아랍 제국에 헌납해야 했다. 638년 팔레스타인, 640
년 시리아, 641년 비잔틴 제국의 최고 곡창지대인 이집트가 도미노처럼 무슬림 군대의 손에 떨어졌다.
한편 나름대로 선전한 비잔틴 제국과 달리 페르시아 제국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
제인 야즈데게르드 3세는 메르브까지 도망갔지만 651년 방앗간 주인에게 암살되면서 1,200년 전통의
페르시아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오스만(친족 중심의 중앙집권 정치): 오스만은 전임 칼리프인 오마르에게서 물려받은 거대한 이슬람 제
국을 통치하기 위해 친족들을 지방 총독으로 파견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아울
러 이슬람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다양한 사본이 돌아다니던 꾸란의 정본을 편집
했고 나머지 사본들을 모두 불태웠다. 이에 대해 오스만의 반대파인 알리 진영은 오스만의 통치를 ‘족
벌정치’라고 맹비난했고, 독실한 무슬림들은 오스만이 꾸란 사본을 불태운 것에 격분했다. 정복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운 베두인 부족전사들은 오스만의 인사이동에 불만을 느꼈고, 결국 이집트에 주둔한 군
대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위하여 메디나로 왔고, 이 가운데서 이탈한 항명집단에 의해 오스만은 암살되
었다.
알리(수니파와 시아파 갈등의 시작): 오스만을 암살한 항명집단은 알리를 새로운 칼리프로 옹립했다.
그러나 알리는 오스만 암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었고, 복수를 외치는 오스만의 친족인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와 657년 시핀 전투를 벌이게 된다. 역사는 이 전투를 무승부로 기록하고 있고 그 결과 이슬
람 제국은 동쪽의 쿠파를 중심으로 한 알리와 서쪽의 다메섹을 중심으로 한 무아위야의 세력권으로 양
-6유대인 바로보기
분되었다. 그러나 661년 알리가 살해되면서 힘의 균형이 무아위야에게 기울었다. 무아위야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프위에 올라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무아위야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에게 칼리프위를 세습했으며, 야지드에게 위험한 인물이었던 칼리프
알리의 차남 후세인을 견제하고자 했다. 후세인은 자신을 칼리프로 추대하려는 지지자들의 초청으로
메카를 떠나 은밀히 이라크의 쿠파로 향했으나, 카르빌라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충복 우바이둘라 빈 지
야드에게 살해당했으며, 그 일가족이 몰살당했다(680년 10월). 이러한 후세인의 비참한 최후가 알려지
자 이라크 지방은 알리 가문에 대한 동정과 반(反)우마이야 정서가 고조되었으며, 결국 이들은 후세인
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며 하나의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을 '시아 알리(알리의 추종자)' 혹은 '
시아'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결국 무슬림 종파가 수니와 시아로 나뉘는 분기점이 되었다.
압바스 왕조는 어떻게 찬란한 이슬람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우마이야 왕조의 뒤를 이은 압바스 왕조는 이슬람 제국의 진보 과정에서 최고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750년에 시작된 압바스 왕조는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로 불리는 현란한 이슬람 문명을 꽃피운
황금기였다. 이때 이슬람이 꽃피운 문명은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최고의 문명이었다.
유대인, 이슬람 문명 탄생의 위대한 조력자: 이슬람 제국의 탄생과 함께 이슬람 문명이 계속 꽃피울
수 있었던 데는 유대인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유대인들은 이슬람 제국 내에서 이슬람으로 개종
하지 않은 비무슬림 그룹이었다. 이들은 ‘지즈야’로 불리는 고율의 인두세를 이슬람 제국에 납부하는
대신, 제국으로부터 생명과 재산, 외적의 침입으로부터의 보호를 받았다. 또한 이들은 월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도 했는데, 능력에 따라서는 제국의 ‘와지르’(총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이슬람 제국 내
에서 기독교인들은 수적으로 유대인보다 훨씬 우세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위대한 인물이나 문화를 그
다지 만들어 내지 못한 반면,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철학, 의학, 과학, 수학 등 거의 전 분야에서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며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흔히 ‘문예부흥’을 뜻하는 프랑스어 ‘르네상스’는, 유럽보다 이슬람 제국에서 수백 년 먼저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당시 유대인들을 통하여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하던 새로운 직종들이
생겨났는데 유대인들은 천문학자, 수학자, 화학자, 건축가, 번역사, 또한 금융전문가로서 바그다드, 카
이로, 코르도바에 지사를 둔 국제경영인으로서, 당시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던 이슬람 제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10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 도시인 코르도바는 인구가 80만 명에 이르는 국제 도시
였고 70개의 도서관과 1,600개의 이슬람 사원이 있었다.
유럽 최초의 반격인 십자군 운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셀주크조(동부의 혼란을 통일하다): 수도인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 지방은 압바스 왕조의 중앙
무대였다. 하룬 알-라쉬드(786~809) 통치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압바스 왕조는 그가 죽은 뒤 칼
리프 자리를 놓고 두 아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 후 제국의 동쪽은 여러
왕조들이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로 넘어갔다. 그러던 중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목민인 터키족
출신의 왕조인 셀주크조는 제국 동부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200년간 이어지던
제국 동부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셀주크조의 통치자는 자신을 이슬람 세계의 왕을 의미하는 ‘술탄’
-7유대인 바로보기
으로 선포하며 정복전쟁에 나선다. 1071년 반(Van)호 전투에서 셀주크조는 비잔틴의 주력군을 대파했
고 비잔틴 황제인 로마누스 4세까지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유럽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십자군원정(이슬람을 향한 유럽의 반격): 비잔틴 대군을 격파한 1071년 반 호 전투를 기점으로 그동안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소아시아는 이슬람을 앞세운 셀주크군으로 인해 터키화가 시작된다. 술탄 말
리크 샤(1072~1092)는 1079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빼앗고 소아시아 징벌을 계속 감행한 결과
1092년 니케아 정복과 함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바로 물 건너의 적과 마주보는 상황
이 되었다. 결국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우스는 같은 기독교 세력인 로마 교황청에 구조 요청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로마 교황 우르반 2세는 비잔틴 황제인 알렉시우스의 구원 요청에 화답했고, 이로써 1096년 1차 십자
군 대원정이 시작되었다. 1차 십자군은 1097년에 니케아를, 1098년에 안디옥을 회복하고, 1099년 최종
목표인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불과 3년만에 놀라운 대승을 거둔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과 그 북
쪽으로 4~5개의 소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라크 상부의 모술에서 세력을 얻은 이마드 알-딘 장기가
1144년 십자군 왕국인 에데사와 알레포를 차례로 탈환하게 된다. 이 위험이 유럽에 알려지며 20만 대
군의 2차 십자군이 출병하지만 계속된 참패만 맛보다가 초라하게 퇴각했다.
3차 십자군은 또 다른 영웅인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를 탄생시켰다. 종교는 달랐지만 진정한 기사도 정
신을 알고 있던 리처드와 살라흐 알-딘(살라딘)은 1192년 휴전 협정을 맺는다. 조건은 예루살렘에 대
한 무슬림의 권리를 인정하는 대신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십자군 소왕국들의 영토와 기독교인들의 예
루살렘 순례를 보장하는 것이다. 살라흐 알-딘은 이듬해인 1193년 다메섹에서 병사한다. 4차 십자군은
이슬람과는 아무 상관없이 같은 기독교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약탈한 가장 추악한 십자군이며, 5차 십
자군은 무슬림의 심장부인 이집트 본토를 향한 대반격의 성격으로 진행된다. 살라흐 알-딘이 죽고 술
탄이 된 동생 알-아딜은 십자군의 진격을 막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아들 알-카밀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나일 강의 범람을 이용해 1221년 십자군을 이집트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6차 십자군은 과학과 수학을 사랑한 합리주의자인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역시 과학을 사랑한
알-카밀 사이의 종교를 초월한 우정을 통해 1229년 희대의 협상을 발표하면서 끝이 났다. 7차 십자군
은 교황 빰치는 경건함으로 존경을 받던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참전했다. 이슬람의 술탄 알-살리흐는
중병임에도 십자군을 막다가 사망했다. 이때 이집트의 역사를 바꾼 새로운 군대 세력이 등장하는데,
바로 ‘맘루크’로 불리는 터키족 노예 용병들이었다. 이들은 1,500명의 십자군을 사살하면서 수도 카이
로의 함락을 막아낸 전쟁의 일등공신이었다. 결국 루이 9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전쟁은 끝났다.
칭기즈칸의 몽골족은 왜 이슬람 제국을 초토화시켰을까?
이슬람 세계의 중동과 기독교 세계의 유럽이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으로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을
때 유라시아 대륙의 구석진 몽골에서는 양쪽 세력을 덮칠 치명적인 먹구름이 일고 있었다. 드넓은 유
라시아 대륙의 초원에 흩어져 살던 몽골족이 칭기즈칸으로 알려진 테무친에 의해 통일되고 세계 정복
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8유대인 바로보기
풍운아 칭기즈칸의 등장: 12세기의 몽골 고원은 군웅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였다. 부친이 어릴 적에
독살되어 힘들게 자란 테무친은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 45세의 나이에 오논 강변에서 몽골 제국의
‘칸’(군주)에 오른다. 테무친은 유목민의 관습대로 농업을 천대했지만 상업을 우대했고 특히 동서 교역
로인 실크로드의 지배에 관심이 많았다. 1218년까지 동북아시아를 장악한 그는 서쪽으로 관심을 돌리
고 서요 제국을 멸망시킨다. 이로써 완충지가 사라지고 이슬람 세계의 최강자가 된 호라즘과 동쪽의
야생마인 칭기즈칸이 국경을 맞대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호라즘의 술탄 무함마드는 세계 최강의 군대
가 된 칭기즈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바보같은’ 무모한 도발을 하게 된다. 호라즘의 국경 도시인
오트라르에 450명의 몽골 대상단이 머물렀는데, 그곳의 총독은 이들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모두 처형하
고 상품을 모두 압수했다. 징기즈칸은 항의하는 사절단을 보내고 총독의 신병을 요구하지만 무함마드
는 오히려 사절단을 모두 죽임으로써 두 번째 실수를 범했다. 이로 인해 1220년 10만의 칭기즈칸 군
대는 40만 군대가 지키던 호라즘의 주요 도시인 오트라르, 부하라, 사마르칸트, 메르브, 니샤푸르를 차
례로 정복했다. 이로써 호라즘은 순식간에 공중분해 되었다. 이때 몽골은 러시아까지 진군하여 1222년
오합지졸인 러시아군을 격파하게 된다. 이로써 서구와 이슬람은 세계 최강인 몽골군의 위력을 한 번씩
맛보게 된다.
유럽의 초토화: 몽골 제국의 2대 칸이 된 오고타이(1229~1241)는 1235년 러시아와 유럽 원정을 결의
하고 원정군 총수로 칭기즈칸의 장남인 주치의 아들인 바투를 임명했다. 바투는 12만 원정군을 이끌고
1237년 볼가 강을 건너 유럽에 진입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도시들은 몽골 기마군단의 말발굽에 추풍
낙엽처럼 떨어지고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1241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은 2만 명의 폴란드-독일 연
합군과 조우했으나 연합군은 순식간에 궤멸되었고 몽골군은 적군 중 전사자들의 귀를 잘랐는데, 9개의
큰 부대가 가득 찰 정도였다고 한다.
바그다드 함락, 압바스 왕조의 최종적 멸망: 4대 칸이 된 몽케(1251~1259)로부터 이집트 정벌의 명령
을 받은 훌라구는 1253년 다시 이슬람 세계에 나타나게 된다. 이슬람은 1258년에 바그다드가 점령되
고 구차하고 질긴 목숨을 연명해 오던 압바스 왕조 칼리프의 숨통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이슬람 세계
에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훌라구를 초대 칸으로 하는 ‘일 한국’이라는 몽골 왕조가 세워졌다. 훌라구의
일 한국은 친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했는데 훌라구의 어머니인 도쿠즈 카툰이 네스토리우스파 기
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최후이자 최대의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오스만 터키의 발흥: 몽골군의 말발굽이 사나운 먼지를 휘날릴 때 터키족의 한 일파가 소아시아 지방
깊숙이 피신해 들어왔다. 에르토그릴을 지도자로 하는 이 그룹은 룸 셀주크의 술탄에게서 작은 영지를
하사 받고 정착했다. 한때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이슬람의 수호천사가 된 셀주크조는 몽골 침입으로 맥
없이 무너졌고, 몇 개의 분파 정권 가운데 하나인 룸 셀주크조가 소아시아 지방의 ‘코니아’를 수도로
삼으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1281년 에르토그릴이 죽고 그의 아들 오스만(1281~1326)이 뒤를 잇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훗날 제
국의 이름이 ‘오스만 터키’로 불리게 되었다. 오스만은 1308년 자신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룸 셀주크를
무너뜨리고 초대 술탄이 되었고, 1326년 비잔틴 제국의 강력한 성곽도시인 부르사를 점령하고 죽는다.
-9유대인 바로보기
그 후 무라드 1세(1360~1389)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비잔틴 제국의 본토인 발칸에 상륙했고,
1362년 비잔틴의 2대 도시인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를 정복했다. 내친김에 그는 1366년 소아시아에
서 비잔틴 세력을 일소하고 1371년 마리차 강 전투, 1389년 코소보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발칸 반도
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비잔틴 제국의 최종 멸망: 1451년에 19세에 술탄으로 즉위한 메머드 2세(1451~1481)는 베네치아 상
인들을 통해 유럽에서 수입한 화약과 대포로 1453년 두터운 성벽을 자랑하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
였다. 수세기 동안 이슬람이 갈망해 오던 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오스만 터키는 이슬람 세계에서 엄
청난 특권과 명예를 누렸다. 정복한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개명되었고, 기독교의 자랑인 성 소
피아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지붕에 있는 돔에는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이 걸렸다.
맘루크조의 멸망과 오스만 터키제국의 탄생: 1520년 ‘대왕’(Magnificent)칭호를 얻게 된 술래이만 2세
가 즉위하게 된다. 그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유럽을 향하여 정복의 방향을
잡은 술래이만 2세는 1526년 모하치 전투 승리로 헝가리 제국을 정복하고 1529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인 빈을 3주간 포위하기도 한다. 술래이만은 해적 출신인 바르바로사를 터키 해군의 제독으로 삼
고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 연합함대를 격파해 지중해의 해상권마저 장악하게 된다. 1534년 바그
다드마저 점령하고 이슬람 세계를 통일한 술래이만은 그의 단순한 헛기침만으로도 유럽 대륙을 벌벌
떨게 한 세계 최강자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왜 오스만 터키 제국의 파멸을 가져왔을까?
발칸반도(사라예보 사건): 보스니아를 기습 합병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
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암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범인은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는 세르비아 청년으로서
보스니아를 세르비아 땅으로 합병하자는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다. 황태자 부부의 암살을 구실로 오
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같은 슬라브족 맏형인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같은
게르만족인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독일을 경계한 영국과 프랑스가 세르비아를 지원함으로써
황태자 부부를 죽인 총알 몇 방이 순식간에 세계대전의 화염으로 발전했다.
오스만 터키도 느지막이 발칸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욕심으로 오스트리아 편에 섬으로서 오스트
리아-독일-터키로 이루어진 ‘추축국’과 영국-프랑스-러시아로 이루어진 ‘연합군’의 진영이 짜여졌다.
1918년까지 이어진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오스만 터키는 막판에 줄을 잘못 섰다가
패전국의 멍에를 쓰고 현재의 소아시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는 수모를 당한다. 결국 터키는 ‘장고
끝에 악수’를 두었고 몇 세기를 미뤄 온 제국의 완전한 파산을 초래했다.
유엔은 왜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을까?
시오니즘, 유대인들의 이주 물결: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의미하는 ‘시오니즘’ 운동은 그 창시자인 테
오도르 헤르쩰의 정력적인 활동에 힘입어 유대인들의 이주 물결을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린 것을 가리
키는 말이다. 1860년 다수의 아랍인들 틈에서 고작 1만 2,000명 내외의 유대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땅은 크게 네 차례의 이민 파동으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특히 2차 이민 파동은 1900년에서 1차
- 10 유대인 바로보기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로, 이때 이주자들은 시온주의 운동에 헌신한 선구자들이 많았고, 건국
후 초대 수상이 된 벤구리온, 2대 대통령 이츠하크 벤쯔비, 초대 국회의장 요셉 스프린자크 등이 활약
하였다. 현대 이스라엘의 수도 역할을 하는 텔아비브도 이때 건설되었다.
영국 앨런비 장군의 예루살렘 회복: 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7년 11월, 영국 외무부 장관
인 밸푸어는 ‘유대국가 창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게 된다. 밸푸어 선언 한 달 후 영국의 중동 사령관
인 에드먼드 앨런비 장군은 터키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했다. 이로써 638년 이슬람의 통치권으
로 넘어간 팔레스타인 땅은 1917년 기독교의 영국군에게 넘어감으로써 1300년 가까운 이슬람 통치에
종말을 고했다. 1917년부터 영국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떠넘긴 1947년까지를 ‘영국의 위
임통치’(British Mandate)기간으로 부른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잠시 주춤하던 유대인들의 이주 물결은 시온주의 열풍이 다시 달아오르면서
1918~1936년 사이에 15만 명의 이민자들을 탄생시켰다. 유대인 사회는 풍부한 자금력으로 아랍인들
로부터 해안 늪지의 황무지를 사들였고, 그곳에 텔아비브와 같은 현대적인 도시를 건설했다. 유대인들
의 이주와 투자로 인해 지중해 해변의 쓸모없는 늪지는 4배 이상 폭등했고 당시 땅을 갖고 있던 지주
들을 중심으로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형성되었으며 최하위 임금을 받던 아랍 농노들의 생활수준이 놀
라운 속도로 향상되었다. 하지만 정치의식도 비례적으로 높아졌고, 이로 인해 중동 전역에서 봉건제도
가 포괄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적 지위가 상실될 것을 우려한 아랍 봉건 제후들
은 유대인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추진했고, 이를 위해 교묘하게 아랍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자신들의 아랍국가에 대한 위임통치가 붕괴되는 현실을 보게 되고 서둘러 ‘39년
백서’를 발표했다. 백서 내용을 보면 향후 5년간 7만 5,000명의 유대인 이주만 허락하고 이후로는 유
대인 이주를 완전히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 위임통치 정부는 ‘39년
백서’를 밀어붙였다. 영국의 노골적인 아랍 편향 정책으로 벤구리온과 베긴은 영국군에 맞서는 전투를
선언하게 되고, 1946년 위임통치 총독부가 있던 예루살렘의 다윗왕 호텔을 폭파하는 테러를 감행해 80
명의 영국 장교를 살해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대규모의 유대인들을 검거해 무장해제시키고 지도자들
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에 대해 베긴도 ‘동해同害 보복’의 원칙에 따라 유대인 하사관이 처형되면 영국
장교를 살해하고 유대인 장교가 살해되면 영국군 고위 장교를 살해함으로써 응수했다.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진 기회의 창문: 결국 영국은 골치 아픈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UN)에 떠넘겼
고, 1947년 11월 29일 유엔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국제적인 관리 지역으로 정하고 팔레스타인 지
역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양분하는 분할안을 통과시켰다(찬성 33, 반대 13, 기권 11).
왜 이스라엘 독립선언과 함께 전쟁이 일어났을까?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의 로스차일드 거리에 있는 미술관에서 국민평의회 의장인 벤구리온은 히
브리어로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서를 천천히 낭독했다. 그리고 모두 거리로 뛰어나와 얼싸안고 애국가인
‘하티크바’(희망)를 불렀다. 그러나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이튿날 이스라엘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아
랍 연합군의 대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총 세 차례에 걸쳐 치러진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기적적인 승리
를 하게 되고, 이듬해인 1949년 이집트를 시작으로 요르단, 시리아와 개별적인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 11 유대인 바로보기
전쟁은 끝났고, 이때 맺은 휴전선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국경이 되었다. 1947년 유엔이 할당해 준 이스
라엘의 영토는 팔레스타인 땅의 56%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80%까지 확장되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불과 6일만에 국토를 5배나 확장할 수 있었을까?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 국토는 5배 이상이나 확장
되었다. 사방에 압도적이고 적대적인 아랍 세계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불과 6일 만에 상대를
제압하고 오히려 광범위한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PLO등장: 이스라엘 독립선언과 함께 시작된 1948년, 1956년 두 차례의 중동전쟁
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남게 된 아랍인들은 스스로를 주변의 아랍 형제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 아립
인’으로 인식하며 고유한 정체성을 갖기 시작하였다. 결국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아랍인 스스로 해
방시킬 수밖에 없다’는 목표를 가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1964년 카이로에서 열린 1회 아랍
정상회담에서 아랍연맹의 지원을 받으며 창설되었다. 이 조직이 바로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파타’
였다. 파타의 리더인 아라파트가 1968년 제3대 PLO 의장에 선출되면서 PLO는 국제 사회와 이스라엘
을 대상으로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공식 기구로서 발돋움했다.
고조되는 전쟁의 기운: 두 차례의 전쟁에서 맥없이 패배한 시리아는 작전을 바꾸어 이스라엘의 최대약
점인 물 문제로 이스라엘을 괴롭히기로 했다. 1964년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최대 수원지인 갈릴리 호수
로 유입되는 요단 강 상부 수원의 흐름을 변경하는 수로 공사를 개시했다.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
이루어지는 시리아의 수로 건설 현장을 수차례 파괴했는데, 이는 6일 전쟁을 초래한 대표적 긴장 요소
중 하나였다.
이즈음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배출한 최고의 스파이인 엘리 코헨이 시리아에서 활동했다. 시
리아에 침투해 국방부 차관까지 올라가 시리아 내 최고급 군사정보를 이스라엘 측에 넘겨준 코헨은 결
국 간첩행위가 발각되어 1965년 수도인 다메섹 노상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 발
발한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코헨이 넘겨준 골란고원 내 시리아군의 진지와 벙커, 탱크 은닉처 등의
자료를 통하여 ‘난공불락의 요새’인 골란고원 전체를 불과 10시간 만에 정복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애꾸눈’ 모셰 다이얀 장군은 후에 골란 고원 정복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엘
리 코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골란 고원을 함락시키기 위해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입니다. 아
니, 어쩌면 골란 고원의 점령은 영원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불과 6일 만에 끝난 3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 영토는 무려 5배나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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