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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쥘 르나르] 홍당무

by Casey,Riley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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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당무 

쥘 르나르


      (저자 및 역자 약력)

    * 쥘 르나르(jules renard: 1864--1910)
  쥘 르나르는 1864 년 프랑스 중부에 있는 라바울에서 태어났다. 이 작품 '홍당무'는
그러한 르나르 자신의 소년시절에서 소재를 얻은 작품이다. 시와 소설을 쓰면서 5 년
동안 피가로지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한 그나르는 홍당무를 발표,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된다. '홍당무'는 곧 희곡으로 각색되어 파리에서 상연되자마자 대단한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어로 번역이 되었다.
르나르는 홍당무 외에도 '포도밭의 포도농사', '박물지'등도 큰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자연주의 전통을 계승했으나 감상을 배제한 냉혹한 눈으로 바라본
현실의 섬세한 인상을 간결하고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암탉

  "글세 그렇다니까"
  르삑 부인이 말했다.
  "또 오노리느가 닭장 문 닫는 걸 잊었지."
  창 너머엔 그 말대로 넓은 뜰 저편 구석에 조그마한 닭장 지붕이 보이는데, 활짝
열어 젖힌 문이 어둠 속에서 시커멓고 네모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웨릭스야, 네가 가서 닫지 않겠니?"
  러삑 부인은 3남매 중에서 맏아들에게 말했다.
  "닭의 시중이나 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게 아냐."
  훼릭스는 투덜거렸다. 핼쓱한 얼굴의 겁많고 게으른 소년이다.
  "그럼 넌 어떠냐, 에르네스띤느야?"
  "아이 엄마는 , 무서워서 죽겠는데!"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모두 제대로 얼굴을 쳐들지도 않고 대답을 한다.
둘 다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괴고 이마를 맞대듯이 하고 독서에 빠져 있다.
  "아참, 나 좀 봐!"
  르삑 부인이 말했다.
  "깜빡 잊었었네. 얘 홍당무야, 네가 가서 닫아라!"
  부인은 막내 아들에게 이런 애칭을 붙인 것이다. 빨간 머리카락에 얼굴은 온통
주근깨투성이기 때문이다. 테이블 밑에서 할 일 없이 혼자 놀고 있던 홍당무는
일어서서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엄마, 나도 무서워 죽겠는데."
  "뭐야? 다 큰 녀석이 뭐가 무섭다고 그러니! 자, 어서, 갔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말했다.
  "이 세상에는 무서운게 있나."
  형 훼릭스도 맞장구를 쳤다.
  이런 부추김에 홍당무는 우쭐해진다. 칭찬을 듣고도 하지 않는다면 수치가 될 것
같아 약한 마음과 싸우고 있었다.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가지 않으면 그 보답으로
따끔한 맛을 보여 주겠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 길을 비춰 줘야지."
  홍당무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르삑 부인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고, 훼릭스는 깔보는 듯이 픽
웃음을 띤다. 인정이 있는 것은 그래도 에르네스띤느 뿐, 촛불을 들고 복도 끝까지
데려다 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게."
  에르네스띤느는 말했다.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곧 달아나고 말았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촛불이 껌벅껌벅 흔들이다 꺼지고 말았기 때문에 무서워졌던 것이다.
  홍당무는 겁에 질려 달아나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질 않아서 꼼짝도 못하고 어둠
속에서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바로 앞도 보이지 않아서 갑자기 장님이 된 듯
싶었다. 때때로 바람이 느닷없이 불어와 싸늘하게 식은 담요처럼 그를 감싸서
낚아채어 간다. 여우나 늑대가 나타나서 손가락과 뺨에 입김을 불어대는 게 아닐까?
이렇게 되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어둠을 뚫을 것 같은 결심으로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짐작만으로 닭장 쪽을 향해 내닫는 수밖에 없다. 손으로 더듬어서 열쇠를 집었다.
발자국 소리에 놀란 암탉들이 횃대 위에서 꾸꾸꾸 하고 울면서 푸드득거렸다.
홍당무는
소리를 질렀다.
  "쉿, 조용해 해, 나야!"
  문을 닫자마자 단숨에 달아났다. 팔 다리에 날개라도 달린 듯 마구 달려 따뜻하고
환한 집안으로 돌아오자, 진흙과 비를 맞아 더럽혀진 누더기 옷을 벗고 가벼운
새옷으로 갈아입은 듯한 기분이었다. 빙긋 웃으며 장한 듯한 얼굴로 우뚝 선 채
칭찬해 줄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집안 식구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셨을까, 하고 두
사람의 얼굴에서 불안스러워 한 기색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형인 훼릭스도
누나인 에르네스띤느도 조용히 책만 읽고 있었다. 르삔 부인은 늘 하는 말투로
홍당무에게 말했다.
  "홍당무야, 이제 밤마다 네가 닭장 문을 닫으러 가거라." 
        자고새

  르삑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테이블 위에 사냥 보따리를 쏟아 놓았다. 자고새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형 훼릭스가 벽에 걸린 석판에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아이가
맡은 일이다. 3남매에게는 저마다 맡은 일이 있다. 누나인 에르네스띤느는 사냥감의
껍질을 벗기거나 털을 뽑는다. 한편 홍당무는 상처난 사냥감의 마지막 숨을
끊어버리는 일을 맡고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아이라는 평판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두 마리의 자고새는 피덕거리며 목을 움직인다.

  르삑 부인: 빨리 잡지 않고 뭘 하고 있니?
  홍당무: 엄마, 이번에는 석판에 적는 일을 하면 안돼요?
  르삑 부인: 네 키로는 석판에 쓸 수 없어.
  홍당무: 그러면, 털 뽑는 걸 할래.
  르삑 부인: 그건 남자가 하는 일이 아니야.

  홍당무는 할 수 없이 두 마리의 자고새를 손에 들었다. 르삑 부인은 자상하게 그
방법을 가르쳐 준다.
  홍당무는 한 손에 한 마리씩 쥐고는 손을 등 뒤로 감추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르삑 씨: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니? 대단하다, 대단해!
  홍당무: 빨리 해치우려니 이럴 수밖에요.
  르삑 부인: 괜히 하지 싫은 척하지 마. 속으론 좋으면서 뭘.

  자고새 두 마리는 몸을 비틀면서 버티었다. 날갯죽지를 푸드득거려서 날개털이
사방에 날렸다. 쉽사리 죽을 것 같지 않았다. 한 마리뿐이라면 간단히 한 손으로 쉽게
졸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무릎 사이에 자고새를 꼭 끼워 누르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려는
듯 위쪽을 쳐다보면서 더욱 힘껏 졸랐다.
  자고새도 질세라 끈질기게 버틴다.
  빨리 끝내려고 후끈 달아올라서 이번에는 자고새들의 두 발을 붙잡고 새의 머리를
구두 콧등으로 냅다 후려친다.
  "아니, 저럴 수가! 저런 냉혈동물 같으니라고!"
  형 훼릭스와 에르네스띤느 누나가 소리질렀다.
  "아주 대단한 솜씨로구나."
  르삑 부인은 말했다.
  "생각만 해도 가엾은 새들이구나! 저 애의 손에 걸려 저 새처럼 죽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해."
  노련한 사냥꾼인 르삑 씨도 가슴이 섬뜩해져서 방에서 나갔다.
  "진작에 뺏을걸."
  르삑 부인은 말했다.
  "너무도 지저분하게 죽였어."
  형 훼릭스가 말했다.
  "확실히 딴 때보다 잘 안됐어." 
        개

  르삑 씨와 누나인 에르네스띠느는 등 밑에서 테이블에 팔을 괴고서 르삑 씨는
신문은, 누나는 상품으로 탄 책을 읽고 있었다. 르삑 부인은 뜨개질을 하고, 형
훼릭스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난로를 쬐고 있다. 홍당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겨 있었다.
  그때 별안간 발 닦개를 덮어쓰고 자고 있던 개 뼈람므가 으르렁댔다.
  "쉿!"
  르삑 씨가 말했다.
  삐람므는 더한층 으르렁댔다.
  "멍청이!"
  르삑 부인이 말했다.
  그런데도 삐람므가 요란스럽게 마구 짖어대자 모두 깜짝 놀랐다. 르삑 부인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르삑 씨는 이를 악물고 개를 노려본다. 형 훼릭스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자 서로의 말이 안 들릴 만큼 떠들썩해졌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니, 닥치라니까, 이 새끼야!"
  삐람므는 더욱 심하게 짖어댄다. 르삑 부인은 마구 매질을 했다. 르삑 씨는
신문으로 때리다 못해 발로 찼다. 삐람므는 매가 무서워서 엉금엉금 가면서 코를
바닥에 대고 짖는다. 발 닦개에 입을 갖다대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보면, 자기
소리를 산산조각으로 부러뜨리는 것 같다.
  르삑 씨네 집안 식구는 화가 나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모두들 한 번씩 일어나서
개를 차고 때리건만 개는 엉금엉금 기면 막무가내이다. 유리창이 울리고 난로의
굴뚝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는데, 누나인 에르네스띤느마저 악을 쓴다.
  한편 홍당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을 둘러보러 나갔다. 아마도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뜨내기 품팔이꾼이 큰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거나 누군가가 도둑질을
하려고 안마당으로 담을 넘어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홍당무는 어두컴컴하고 긴 복도를 걸어갔다. 두 팔을 문쪽으로 뻗어서 빗장을
더듬어 찾아서는 와지끈 소리를 내면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을 열지는 않았다.
  전 같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뛰어나가,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발까지
쾅쾅 굴러가며 오히려 상대편을 서늘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꾀를 부린다.
  부모님은 홍당무가 용감하게 바깥을 구석구석 살피면서 충실한 경비원처럼 집
주위를 돌아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약아빠져서 문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꼬리를 잡히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벌써 꽤 오래 전부터 이 꾀는
잘 들어맞았다.
  갑자기 딸국질을 하거나 기침이 나올까봐 걱정이다. 숨을 죽이고 눈을 들어보니, 문
위의 작은 창으로 별이 서넛 보였으며, 그 맑게 반짝이는 별빛 속에서 오싹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슬슬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연극이 너무 길어지면 안된다. 왜냐면 의심을
사게 된다.
  또 한 번 가냘픈 손으로 무거운 빗장을 흔들어댄다. 빗장은 녹슨 꺽쇠 속에서
삐걱거린다. 덜컥덜컥 소리를 내면서 빗장을 흠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런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두들 그가 멀리까지 돌아보고 왔으며 자기의 의무를 다한 걸로
생각하겠지! 누가 등뼈를 시원하게 긁어 주기라도 한 것 같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는 식구들을 안심시키려고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데 홍당무가 없는 동안에 삐람므가 짖기를 그쳤으므로 마음을 놓은 르삑네
가족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홍당무는 늘 하듯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개가 잠꼬대를 한 거야!" 
        무서운 꿈

  홍당무는 집에서 묵고 가는 손님이 싫었다. 여러 가지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침대도
빼앗기고, 싫더라도 어머니와 자야 했다. 그런데 낮에도 내내 나쁜 점 투성이인
홍당무였지만, 밤엔 밤대로 코를 고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심술을 부리느라고 일부러
코를 고는 것인지도 모른다.
  8월인데도 썰렁한 큰 방에는 침대가 2개 놓여져 있다. 하나는 르삑 씨의 침대이고,
또 하나에는 홍당무가 어머니와 나란히 벽 쪽에 누워 자게 된다.
  잠들기 전에 홍당무는 홑이불을 뒤집어 쓰고 몇 번이나 가볍게 기침을 했다.
목구멍의 이물질을 떼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코를 고는 것은 코에 문제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혹 코가 막혔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조용히 콧구멍으로 숨을
내보내 본다. 그리고 나서 너무 세게 숨쉬지 않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도 잠이 들자마자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곤다. 습관이란 어쩔 수 없다.
  그러자 당장 르삑 부인은 엉덩이의 가장 살이 많은 부분을 피가 맺힐 만큼 손톱을
세워 꼬집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수단을 쓰고 있다.
  홍당무는 비명을 듣자 르삑 씨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물었다.
  "왜 그러니?"
  "무서운 꿈을 꾸어 놀랐나 봐요!"
  르삑 부인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유모처럼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흥얼거린다. 인도의 자장가 같다.
  홍당무는 이마와 무릎으로 벽뚫기 시합이라도 하듯 벽에다 꼭 붙였다. 그리고 다시
코고는 소리가 나기만 하면 반드시 덮쳐올 어머니의 손톱을 피하려고,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고는 큰 침대 속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어머니 옆의 벽 쪽에 누워서.

    좀 지저분한 이야기라 죄송합니다만

  이런 걸 이야기해도 좋을까? 해야 할까? 다른 아이들 같으면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벌써 영세를 받을 나이인데도, 홍당무는 아직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어느 날 밤은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 그대로 참았던 것이 불찰이었다.
  그는 몸을 점점 꼬며 그것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짓이었다.
  또 어떤 날 밤은 밭의 경계선을 나타내는 돌 옆에 기분좋게 웅크리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넉살좋게도 깊이 잠든 채 홑이불 속에 냅다 깔기고 말았던 것이다.
잠이 깼다.
  어느새 옆에 있던 돌이 사라져 버렸다.
  르삑 부인은 발끈 화를 낼텐데, 그날은 그렇지가 않았다. 조용히 너그럽고 인자하게
뒤처리를 했다. 그뿐인가, 그 다음날 아침에 홍당무는 귀염둥이처럼 침대에서 식사까지
했다.
  어머니가 침대로 수프를 갖다 바쳐 주는 것이었다. 아주 야릇한 수프로, 르삑 부인은
수프에다 나무 주걱으로 그것을 약간 풀어 넣었던 것이다. 뭐, 아주 약간 뿐이다.
  베갯머리에는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얄궂은 얼굴로 홍당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호만 하면 와 하고 웃음을 떠뜨릴 기세다. 르삑 부인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서 아들의 입에 수프를 넣어 준다.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에게 눈짓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어서 준비를 해!"
  "알았어요, 엄마."
  벌써부터 이제 곧 찌푸린 얼굴을 보게 될 거라고 모두들 들떠 있다. 이웃 사람들도
초대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좋겠지?"
  천천히 마지막 수저를 들어서 입을 벌리고 있는 홍당무의 목구멍까지 수프를 집어
넣었다. 자꾸 강제로 먹여 놓고 나서 홍당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웃듯이, 그리고
역겨운 듯이.
  "에이! 너는 똥을 먹었어. 그것도 제 것을, 간밤에 싼 것을."
  "그럴 줄 알고 있었어."
  홍당무는 심드렁히 대답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얼굴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건 예사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예사롭게 대하게 되면, 우스운 것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요강

    1
  벌써 몇 차례나 침대에서 곤란한 일이 생겼기 때문에 홍당무는 매일 저녁 조심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름에는 일이 편했다. 9시에 르삑 부인이 가서 자라고 하면,
홍당무는 스스로 나가 밖을 한바퀴 돌고 온다. 그러면 밤새도록 안심이다.
  그런데 겨울에는 이 산책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해가 지면 닭장문을 닫고 나서 첫
번째의 예방을 해두지만, 그것도 헛일이 되어 이튿날 아침까지는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자지 않고 있으면 9시를 친다. 컴컴해진 지 오래인 데도
밤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홍당무는 두 번째의 예방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날 밤에도, 여느 때의 밤처럼 자기 마음에 물어 본다.
  "마렵니? 마렵지 않니?"
  대개는 "마렵다"고 대답한다. 물론 마려워서 못 견딜 때가 있는데, 그것은 달빛이
환히 비치고 있어 용기다 무럭무럭 솟아나는 날밤이다. 때로는 르삑 씨와 형 훼릭스가
시범을 보여 준다. 게다가 마렵다 해도 큰 것일 때 말고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들
한복판에 있는 큰길의 도랑까지 갈 필요는 없다. 대개 집의 계단 밑에 내려가면 된다.
어쨌든 때와 경우에 따라서 다르다.
  그런데 오늘 밤은 비가 유리창을 체처럼 구멍 투성이로 만들 것 같은 기세로 내리고
있고, 바람은 별빛을 꺼버리고, 호두나무는 목장에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
  "괜찮겠지!"
  홍당무는 서두르지 않고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안 마려워!"
  식구들에게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하고 나서 촛불을 켜들고 복도 맨 구석
오른쪽에 있는 을씨년스럽고 텅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누워서 르삑
부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부인은 홍당무의 이불자락을 침대 가장자리에 꾹 찔러
여미고는 촛불을 끈다. 초는 두고 갔으나, 성냥은 절대로 남겨 두지 않았다. 홍당무는
겁쟁이이기 때문에 문을 닫고 열쇠로 채웠다. 홍당무는 우선 혼자 있는 기쁨을
맛보았다. 어둠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면서 줄기고 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고는, 몇 번이나 어려운 고비를 용하게도 빠져 나왔구나 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내일도 역시 같은 행운이 있기를 빌었다. 이틀 동안만이라도,
르삑 부인이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 주지 말았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랐다. 이런
일들을 꿈꾸면서 잠들려고 했다.
  그런데 눈을 감기가 무섭게 곧 여느 때의 불쾌한 기분이 된다.
  (역시 안 되겠는걸.) 홍당무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곧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홍당무는 침대 밑에 요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일을 결코 없다고 르삑 부인은 우기지만, 늘 그것을 가지고 오는 것을
잊고 있다. 하긴, 요강 같은 것 갖다 둘 필요가 어디 있다. 홍당무는 잠들기 전에 미리
조심하고 있는걸 뭐, 하고 말했다.
  그래서 홍당무는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실수는 하게 되어 있어. 그런데 참으면 참을수록 더욱 괸단 말야. 하지만
지금 당장 해버리면 조금이면 돼. 젖은 홑이불도 이내 내 체온으로 마르게 될 거야.
이때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엄마는 틀림없이 그 얼룩을 눈치채지 못할 거야.)
  홍당무는 마음을 놓았다. 안심하고 다시 눈을 감고는 푹 잠들었다.

    2
  깜짝 놀라 잠이 깬 홍당무는 뱃속이 어떤가 하고 귀를 기울였다.
  "아이쿠! 이거 야단났는데!"
  홍당무가 중얼거린다.
  아까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 엊저녁에 게으름을
피운 것이 잘못이었다. 혼날 때가 다가왔다.
  침대 위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를 해 보았다. 문은 열쇠로 잠겨져 있고,
창문에는 창살이 붙어 있다. 밖으로 나갈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그는 벌떡 일어나서 문과 창문의 창살을 만져 보았다. 바닥에 배를 깔고는
노를 젓듯 허위적거려서, 침대 밑 여기저기에 손을 뻗쳤다. 뻔히 없는 줄 알면서도
요강을 더듬어 찾는 것이다.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또 일어났다. 잠을 자느니보다는 몸을 움직이거나 걸어다니며
마루를 꽝꽝 구르는 것이 편했다. 두 주먹으로 불룩한 배를 꼭 움켜잡았다.
  "엄마! 엄마!"
  맥없는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엄마에게 들리면 곤란하니까. 왜냐하면 만약에 르삑
부인이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홍당무는 시치미를 때고 어머니를 놀려
주는 시늉을 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엄마를 불렀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게끔 부르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어떻게 큰소리를 낼 수 있을까? 재난이 닥쳐오는 것을 늦추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데.
  이윽고 견딜 수 없는 심한 고통 때문에 홍당무는 껑충껑충 춤을 추기 시작했다.
벽에 부딪쳤다가는 펄쩍 뛰고, 침대의 쇠붙이에 부딪치고 의자에 부딪쳤다. 난로에
부딪쳤다가 후다닥 통풍판을 열고는 장작 걸치는 틈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몸을 비비꼬고 더 이상 못 참고, 온몸의 힘이 다 빠져 버린 나머지 도리어 꿈꾸는
듯한 행복에 잠기면서.
  침실의 어둠은 점점 더 짙어갔다.

    3
  홍당무는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 바람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르삑
부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얼굴을 찌푸렸다. 입을 삐죽거리고는 아무데서도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는 모습으로.
  "어머나, 무슨 고약한 냄새가 나는구나!"
  르삑 부인은 홑이불을 걷어 젖히고는 방 안 구석구석을 맡아보고 다닌다. 그리고
잠시 뒤에 찾아냈다.
  "난 배가 아팠어. 더구나 요강이 없었는걸."
  홍당무는 황급히 변명했다. 그것이 가장 멋진 핑계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르삑 부인은 소리쳤다.
  그녀는 방에서 뛰쳐나가 요강을 보이지 않게 치마로 가리면서 가지고 왔다. 재빨리
침대 밑에 밀어놓고는 홍당무를 일으켜 세워 찰싹 때린다. 온 식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 소리를 쳤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아이를 낳았을까?"
  당장 걸레와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들고 와서 불이라도 끄는 듯한 기세로 난로에
물을 끼얹었다. 이불을 털로 호들갑을 떨면서 호소하는 듯한 말투로
  "바람을 넣어요! 바람을!"
  하고 모두들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해놓고는 홍당무의 코 앞에 바싹 대고 몸짓을 해가면서 악을 썼다.
  "한심한 아이로구나. 신경이 망가지기라도 했니? 점점 더 별스러워지는구나. 이
애는 정말 짐승이야. 요강을 갖다 바치면 짐승이라도 거기다 오줌을 눌텐데 말이야.
그런데도 너는 난로 안에 들어가질 않나, 하느님도 증인이 되어 주실 거야. 네놈 댐에
미치겠어. 그래, 미치광이가 되어서 죽어 버릴게."
  홍당무는 셔츠 바람으로 맨발인 채 요강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없던 요강을 보고 있으려니 눈이 뱅뱅 도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여 주었는데도
없었다고 우겨대면 뻔뻔스러운 녀석이라고 말하겠지.
  가족들은 기가 막혀 하고 있다. 놀려 대기를 좋아하는 이웃 사람들은 줄을 지어 서
있다. 때마침 우편 배달부가 왔다. 이들은 홍당무에게 귀찮게 질문을 퍼부었다.
  "거짓말이 아냐!"
  이윽고 홍당무가 요강을 보면서 대답했다.
  "나도 이젠 모르겠어, 맘대로 해요." 
        토끼

  "이젠 네 몫의 메론은 없다."
  르삑 부인이 말했다.
  "게다가 넌 날 닮아서 메론을 싫어하지?"
  "참, 잘도 꾸며 대는군."
  홍당무는 중얼거렸다.
  좋고 싫은 것도, 이런 식으로 늘 강제적이다. 주로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치즈가 나왔을 때도
  "틀림없이 홍당무는 안 먹을 거야."
  르삑 부인이 앞질러 말한다. 그러면 홍당무는 이렇게 생각한다.
  '엄마가 저렇게 말하니, 먹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지."
  더욱이 섣불리 먹기라도 하는 때에는 호되게 당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메론 찌꺼기를 토끼에게 갖다 줘라."
  홍당무는 슬금슬금 걸어서 심부름을 갔다. 메론 찌꺼기를 한 조각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접시를 반듯이 받쳐 들고서.
  토끼장으로 들어서자 장난꾸러기처럼 토끼들이 귀를 늘어뜨리고 콧잔등을 위로
치켜올려 북이라도 치는 모습으로 앞발을 빳빳이 내밀고 홍당무를 둘러쌌다.
  "자, 좀 기다려 주. 사이좋게 나눠 먹자구나."
  홍당무는 말했다.
  우선 토끼 똥이며 뿌리까지 갉아먹는 스느송 풀이며 양배추 속이며 접시꽃 잎사귀
등이 뒤범벅되어 쌓여져 있는 그 위에 털썩 앉았다. 토끼들에게는 메론씨를 털어주고,
자기는 국물을 쭉쭉 빨았다. 발효하기 전의 포도물 못지 않다.
  그런 다음 가족들이 먹다가 남긴 껍질에 붙은 살을, 말하자면 아직 입안에서 녹일
수 있는 것은 조금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리고 파란 껍질은 쪼그리고 앉아 있는
토끼들에게 주었다.
  토끼장의 문은 닫혀 있다.
  모두 낮잠 잘 시간에 햇빛이 토끼장 지붕 틈으로 새어 들어와 그 밑을 시원한
그늘로 만들고 있다. 
        곡괭이

  형 훼릭스와 홍당무가 나란히 일을 하고 있다. 둘 다 손에 곡괭이를 가지고 있다.
형 훼릭스의 것은 특별히 대장간에 주문해서 만든 쇠로 된 것이지만, 홍당무의 것은
손수 만든 나무 곡괭이다. 둘은 밭을 일구고 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돌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재난이 생기는 것은 언제나 이런
순간이지만) 홍당무는 이마 한가운데를 곡괭이로 얻어 맞았다.
  그런데도, 형 훼릭스를 침대로 옮겨 살며시 눕혀야만 했다. 그는 동생의 피를 보고
까무러쳤기 때문이다. 온 식구가 그리로 몰려와서, 발돋움을 하고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듯이 한숨짓고 있다.
  "정신차리게 하는 약은 어디 있지?"
  "찬물을 조금 줘요, 머리를 식혀 줘야겠어."
  홍당무는 의자 위에 올라가서 모두의 머리 사이에서 어깨 너머로 내려다 보았다.
이마에 헝겊을 감고 있는데, 벌써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가 스며 나와 번진 것이다.
  르삑 씨가 홍당무에게 말했다.
  "혼났구나!"
  헝겊을 감아 준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말했다.
  "푹 파였어요. 버터에다 구멍을 뚫어 놓은 것 같아요."
  홍당무는 올지 않았다. 왜냐면 그래 봤자 별수 없다고 모두가 말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형 훼릭스가 한쪽 눈을 떴다. 그리고 다른 한쭉 눈도 떴다. 무서웠을
뿐이지 아무 일도 없었다. 얼굴에 차차 핏기가 돌아오자, 걱정과 불안이 모두의
마음에서 사라져갔다.
  "밤낮 이렇다니까."
  르삑 부인이 홍당무에게 말했다.
  "왜 조심하지 않았니, 이 바보야!" 
        엽총

  르삑 시가 두 아들에게 말했다.
  "엽총은 두 사람에 한 자루만 있으면 돼. 사이좋은 형제는 뭐든지 같이 쓰는 거다."
  "좋아요, 아빠.'
  형 훼릭스가 대답했다.
  "번갈아 쓰겠어요. 홍당무에게 이따금 빌려주기도 하고요."
  홍당무는 갑자기 말이 없다. 왜냐면 형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르삑 씨가 푸른 자루 속에서 엽총을 꺼내들고 물었다.
  "누가 먼저 가지겠니? 그야 형이 먼저 써야겠지?"

  형 훼릭스: 홍당무한테 양보하겠어요. 네가 먼저 가져라!
  르삑 씨: 훼릭스야, 오늘 아침은 아주 기특하구나, 잊지 않겠다.

  르삑 씨: 자, 사우지 말고 놀다 오너라.
  홍당무: 개를 데리고 갈까요?
  르삑 씨: 필요없어. 너희들이 번갈아 개다 되면 되. 게다가 말이야, 너희들 정도의
솜씨 있는 사냥꾼은 사냥감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법이다. 한발로 쏘아 죽이는 거야.

  홍당무와 형 훼릭스의 모습이 멀어져 갔다. 옷차림은 간단하게 평소 그대로이다.
장화를 안 신은 것이 유감스럽지만 르삑 씨는 늘 진짜 사냥꾼은 그런 건 개의치 않는
거라고 말했다. 진짜 사냥꾼은 바짓자락을 발목까지 질질 끌고 있다. 절대로
바짓자락을 걷어 올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런 모습으로 진흙탕 속이든 발 가운데는
예사로 걸어간다. 그러면 곧 진흙탕 장화가 저절로 생긴다. 무릎까지 오는 단단한
자연의 장화다. 하녀는 이 장화를 각별히 다루도록 분부를 받고 있다.
  "너는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테지."
  형 훼릭스가 말했다.
  "자신 있어."
  홍당무가 대답했다.
  어깨 밑의 움푹한 데가 근질근질해서 총신이 제대로 놓여 있지 않는다.
  "자!"
  형 훼릭스가 말했다.
  "얼마든지 실컷 갖게 해 줄게."
  "역시 우리 형이야."
  하고 말하는 홍당무,
  한 떼의 새가 공중으로 날아 올라가자 홍당무는 발을 멈추고 형 훼릭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신호를 했다. 세 떼는 나무 울타리에서 나무 울타리로 날았다. 몸을
굽혀서 두 사냥꾼은 슬그머니 다가갔다. 마치 졸고 있는 새를 깨우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그런데 새 떼는 날쌔게 날아올라 지지배배 지저귀며 다른 곳에 가서
앉았다. 구 사냥꾼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형 훼릭스는 욕을 퍼부어댔다. 홍당무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지만, 그다지 성미가 급해 보이지 않았다. 솜씨를 보일 순간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맞히지 못한다면! 그 순간이 미루어질 때마다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 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형 훼릭스: 하직 쏘지 마, 너무 멀어.
  홍당무: 그럴까?
  형 훼릭스: 물론이지! 몸을 숙이고 있기 때문에 가까워 보이는 거야. 바로 옆이라고
생각해도 사실은 퍽 먼 거야.

  이렇게 말한 형 훼릭스는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느닷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새들은 깜짝 놀라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구중 한 마리가 작은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는 휘어져서 새는
흔들거리고 있다. 꼬리를 흔들고 머리를 움직이고 배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홍당무: 됐다, 조놈 같으면 쏠 수 있어. 확실해.
  형 훼릭스: 비켜 봐, 정말 이놈은 근사한데, 이건 꼭 맞을 거야. 빨리 총을 이리 줘.

  그러자 벌써 총을 뺏겨 빈털터리가 된 홍당무는 하품을 하고 있다. 그 대신
홍당무의 눈앞에서, 형 훼릭스가 총을 어깨에 대도는 겨냥을 하더니 탕 하고 한 발
쏘았다. 새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마치 요술 같았다. 홍당무는 아까까지 총을 소중하게 가슴에 껴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을 빼앗겼다가 다시 눈깜짝할 사이에 되돌아왔다. 형 훼릭스는 총을 돌려
주자 몸소 사냥개 노릇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5,5,5^.
  "꾸물거리지 말고 좀 서둘러."

  홍당무: 천천히 서두를게.
  형 훼릭스: 아니, 너 화난 얼굴이구나.
  홍당무: 물론이지. 그럼, 좋아서 노래라도 부르란 마리야?
  형 훼릭스: 새를 잡았으면 그만 아냐? 놓쳤을 때를 생각해 봐.
  홍당무: 하지만 난 말이야^5,5,5^
  형 훼릭스: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오늘은 내가 잡았으니, 내일은 네가 잡아.
  홍당무: 또 내일이라고?
  형 훼릭스: 꼭이야. 약속할게.
  홍당무: 알 게 뭐야. 언제나 전날에는 그렇게 약속하는 걸 뭐.
  형 훼릭스: 하느님께 맹세하겠어! 그럼 됐지?
  홍당무: 좋아 ^5,5,5^ 그보다도 곧 다른 새를 찾아야지. 이번에는 내가 쏘아 볼게.
  형 훼릭스: 안 돼, 벌써 늦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한테 이놈을 구워달라고
하지. 옜다, 너 줄게. 주머니에 넣어 둬, 심술꾸러기야. 주둥이는 내놓아야지.

  두 사냥꾼은 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가끔 농부를 만났는데, 모두 말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설마 아버지를 쏜 건 아니겠지?"
  홍당무는 기분이 좋아져서 아까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둘은 아주 사이좋게
우쭐대면서 돌아왔다. 르삑 씨는 두 아들의 모습을 보자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홍당무야, 아직도 총을 메고 있구나. 그럼, 네가 죽 가지고 있었니?"
  "네, 대부분^5,5,5^."
  홍당무가 대답했다. 
        두더지

  홍당무는 길바닥에서 두더지를 보았다. 굴뚝 청소부처럼 새까맣다. 실컷 가지고
놀다가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돌멩이 위에
떨어 지도록.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되어 갔다.
  이미 두더지는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와 등이 터져 곧 죽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홍당무는 깜짝 놀랐다. 두더지가 좀처럼 죽지 않으려는 것을 눈치챘다.
지붕까지 높게, 하늘 높이 던져도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굉장한데, 아직도 안 죽다니."
  홍당무는 중얼거렸다.
  사실 피로 얼룩진 돌 위에 두더지는 엉겨 붙어 있었지만, 기름진 배는 족편처럼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 떠는 것이 아직 살아 있는 증거라고 착각하게 했다.
  "이건 정말 놀랄 일이야!"
  홍당무가 기가 나서 소리쳤다.
  "이래도 못 죽겠니!"
  다시 주워 올려 욕을 하면서 방법을 바꾸었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두더지에게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힘껏 돌에다 메어쳤다.
  그런데도 그 보기 흉한 배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홍당무가 약이 올라 메어치면 칠수록 두더지는 더욱 죽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같이
보였다. 
        말먹이 풀

  홍당무와 형 훼릭스는 저녁 예배를 끝내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4시가
간식 시간이기 때문이다.
  형 훼릭스는 버터나 잼을 바른 빵이 돌아갈 테지만, 홍당무의 빵에는 아무것도
발라져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홍당무는 너무 일찍 어른스럽게 점잔을 부리려고
식구들 앞에서 나는 먹보가 아니라고 뽐내었기 때문이다. 홍당무는 자연 그대로의
것을 좋아하여 여느 때에도 아무것도 안 바른 빵을 으스대며 먹었다. 그날도 역시 형
훼릭스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제일 먼저 간식을 먹기 위해서이다.
  아무것도 안 바른 빵을 가끔 퍽 단단했다. 그럴 때면, 홍당무는 마치 적이라도
공격하듯 빵을 물어 뜯는다. 빵을 꽉 쥐고 우악스럽게 뜯어먹는다. 박치기를 몇
번이나 해서 잘게 깨느라고 빵가루가 사방에 흩어졌다. 그의 둘레에 앉아 있는 부모와
형제들은 신기한 듯이 이 아이를 보고 있었다. 아무튼 타조처럼 단단한 위니까 돌이건
녹슨 동전이건 상관없이 소화해 낼 것이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어떤 고약한 음식이라도 받아들였다.
  홍당무는 대문의 걸쇠를 벗기려고 했으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틀림없이 아빠도 엄마도 없어. 발로 차 봐, 형!"
  홍당무는 말했다.
  형 훼릭스는 "제기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못이 잔뜩 붙은 육중한 문에 몸을
부딪쳤다. 한참 동안 탕탕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 그런 다음 둘이서 힘을 합하여
어깨로 밀어 보았지만 어깨만 아플 뿐, 아무 효과도 없었다.

  홍당무: 분명히 없나 봐.
  형 훼릭스: 도대체 어딜 가셨을까?
  홍당무: 그런 것까지는 알 수 있나. 아무튼 앉아.
  싸늘한 계단에 엉덩이를 대고 있으려니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을 만큼 시장기가
느껴진다. 하품을 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허기증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형 훼릭스: 엄마나 아빠는 내가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가는 큰
잘못이지.
  홍당무: 하지만 달리 좋은 방법이 없잖아.
  형 훼릭스: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굶어 죽고 싶지 않아. 난 지금 당장 먹고 싶어.
뭐든지 좋아, 풀이라도 말이야.
  홍당무: 풀이라고? 그거 좋은 생각인데. 아빠와 엄마를 골탕먹이자는 거지?
  형 훼릭스: 물론이야! 누구나 샐러드를 작 먹잖아?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말먹이
풀도 샐러드처럼 연하거든. 기름도 초도 안 친 샐러드인 셈이지.
  홍당무: 샐러드처럼 뒤섞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형 훼릭스: 내기를 할래? 나는 말먹이 풀을 먹겠어. 하지만 넌 못 먹을걸.
  홍당무: 왜, 형은 먹을 수 있는데 나는 못 먹는다는 거야.
  형 훼릭스: 너 정말 내기할 테냐?
  홍당무: 그런 것 하지 전에, 옆집에 가서 빵 한 조각 하고 요구르트를 얻어 오는 게
어떨까?
  형 훼릭스: 난 말먹이 풀이 더 좋겠는데.
  홍당무: 그럼, 가.

  이윽고 말먹이 풀밭이 두 사람의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파란빛을 펼쳤다. 그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둘은 재미가 나서 일부러 신을 질질 끌어 부드러운 줄기를 짓밟아
좁다란 길을 만들기도 했다. 이 길을 본 사람은 틀림없이 불안해져 먼 뒷날까지도
이렇게 말할 것이 틀림없다.
  "도대체 어떤 짐승일까?"
  냉기가 바짓자락을 지나 종아리에 스며들었다. 종아리가 조금씩 저려왔다.
  둘은 밭 한복판에서 엎드려 누웠다.
  "기분 좋은데."
  형 훼릭스가 말했다.
  잎새가 얼굴을 간지럽게 했다. 둘은 웃었다. 옛날 한 침대에서 함께 자던 시절처럼.
그 무렵에는 곧잘 르삑 씨가 옆방에서 호령을 하곤 했다.
  "이제 그만 자거라!"
  그들은 배고픈 것도 잊고 뱃사람 흉내며 개 흉내, 그리고 개구리 시늉을 하며
헤엄치기 시작했다. 두 개의 머리만이 풀 위에 나와 있다. 쉽게 부서지는 파란빛의
잔잔한 물결을 손으로 헤치고, 발로 눌러 차기도 했다. 잔잔한 물결은 한 번 흩어지자
다시는 일어서지 않았다.
  "턱까지 왔다."
  형 훼릭스가 말했다.
  "이것 봐 형, 난 이렇게 죽죽 나가잖아."
  하고 말하는 홍당무.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서 잠깐 쉬었다가는 좀더 조용히 자기들의 행복한 기분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팔을 괴고 두더지가 파 놓은 봉긋한 길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이 좁다란 길은 땅바닥 위에 잘 지자 모양으로 뻗쳐 있는데, 마치 늙은이의 힘줄이
살갗에 불거져 올라와 있는 것과 비슷했다.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빈터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 빈터에는 온갖 풀과 나무의 영양분을 가로채어 뺏어먹는
새삼덩굴이 불그스름한 섬유 수염 모양의 줄기를 뻗치고 있었다. 이것은 악질적인
기생풀로서 미끈히 자란 말먹이 풀을 말려 버리고 만다. 두더지 집은 거기에
인도식으로 세워진 움막을 몇 채나 가지런히 세운 작은 마을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야."
  형 훼릭스가 말한다.
  "자, 먹자. 시작! 내 몫을 건드리면 안돼."
  형은 팔을 안으로 꺾어서 활 모양을 만들었다.
  "난 나머지만으로 충분해.'
  하고 말하는 홍당무.
  두 개의 머리가 사라졌다. 설마 이런 곳에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바람이 부드러운 입김으로 말먹이 풀의 얇은 입새를 흔들자 그 창백한 뒷면이
보였다. 그리고는 온 밭의 잎새에 차례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형 훼릭스는 말먹이 풀을 한아름 뽑아서 머리에 덮어쓰고는 입에 쑤셔넣는 체를
하며 송아지가 풀을 뜯어먹을 때 내는 턱의 소리를 흉내내어 보였다. 송아지는 말먹이
풀을 너무 먹어서 곧잘 배불뚝이가 되는데, 조금 세상을 알고 있는 훼릭스는 뿌리까지
모조리 먹어 버리는 시늉을 했다. 홍당무는 형이 하는 짓을 정말로 알았다. 형보다도
신경질적으로 깨끗한 잎새만을 골라서 먹었다.
  코끝에서 잎새를 굽혀 입으로 가져가 천천히 씹고 있었다.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담?
  테이블을 시간제로 빌린 것도 아니다. 서두를 것은 없다.
  사각사각 씹어서, 혓바닥이 쓰고 속이 뒤집힐 것 같지만 홍당무는 꾹 참고 꿀꺽
삼켰다. 제딴에는 진수성찬을 받은 셈이다. 
        술잔

  홍당무는 이제부터 식사 때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로 했다. 2,3일 동안에 간단하게
마시는 버릇을 없애 버렸으므로 집안 식구나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사연인즉 이렇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르삑 부인이 여느 때처럼 포도주를 따라 주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필요없어요, 엄마, 난 목이 안 말라요."
  저녁 식사 때도 또 말했다.
  "필요없어요, 엄마, 난 목이 안 말라요."
  "얘, 아주 알뜰해졌구나."
  르삑 부인이 말했다.
  "네 덕분에 다른 사람이 먹을 게 많아지겠구나."
  그리하여 홍당무는 그 첫날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지냈다. 날씨도 포근해서 목이
안 말랐기 때문이다. 이튿날 르삑 부인이 상을 차리면서 물었다.
  "오늘은 마시겠니, 홍당무야?"
  "글세, 잘 모르겠어요."
  홍당무는 말했다.
  "좋을 대로 해라."
  하고 말하는 르삑 부인.
  "잔이 필요하거든 찬장에서 가지고 오너라."
  홍당무는 가지러 가지 않았다. 기분이 내키지 않아서인지,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제
발로 가지러 가는 것이 쑥스러워서였는지.
  "훌륭하구나."
  "네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니 신통하구나."
  "보기 드문 재주야."
  그삑 씨가 말했다.
  "그건 나중에 필시 큰 도움이 될 거야. 낙타도 타지 않고 혼자서 사막을 헤맬 때
말이다."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내기를 했다.

  누나 에르네스띤느: 틀림없이 일주일은 안 마실 거야.
  형 훼릭스: 흥, 일요일까지 사흘만 견뎌도 제법이지.

  "그렇지만."
  홍당무가 히죽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목이 안 마르면 난 언제까지라도 안 마실래. 토끼나 모르모트를 봐, 굉장한 일은
아니잖아."
  "너는 모르모트와 다르잖아."
  형 훼릭스는 말했다.
  홍당무는 두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졌다. 르삑 부인은 여전히 그의 술잔을
내놓지 않았다. 홍당무도 잔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비꼬는 칭찬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도 무관심하게 들어 넘길 따름이었다.
  "저 애는 병이 났거나, 아니면 미쳤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틀림없이 몰래 마시는 걸 거야."
  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신기한 것은 처음 한때 뿐이므로, 입 안이 통마르지 않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홍당무가 혀를 내미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부모님도 이웃 사람들도 예사로 여기게 되고 말았다. 다만 영문 모르는 몇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란 듯이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럴 수가 있나. 누군들 자연의 욕구를 참을 수가 있을까요."
  의사에게 의논하니 그런 예는 극히 희안한 일이지만, 요컨대 세상에는 어떤
증세이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한편 홍당무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는 동안에 고통스러워지겠지 하고 걱정했었는데,
고집이나 인내로 꼭 지켜 나가기만 하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쓰라린 괴로움을 스스로 떠맡아서 모험을 해볼 작정으로 시작했었는데,
괴롭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몸도 오히려 좋아졌을 정도였다. 목마른 것뿐만 아니라,
배고픈 것도 견뎌 보이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밥 같은 건 먹지 않고 공기로만
어떻게 살아갈 수 없을까.
  벌써 술잔 같은 것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벌써 오래 전부터 술잔은 필요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하녀 오노리느가 그 속에다 촛대를 닦는 붉은 가루약을
가득 담고 말았다. 
        빵조각

  르삑 씨는 기분이 좋을 때면 자진해서 아이들과 함께 논다. 뜰 안의 작은 길을
거닐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동안에, 형 훼릭스와 홍당무가 곧잘
땅바닥을 뒹구는 일이 생긴다. 너무나도 우스워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와서 점심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자 겨우 진정했다. 그러나 가족이 모두 모이면 언제나 모두들 찌푸린
얼굴들이다.
  모두들 여느 때처럼 급하게 숨도 쉬지 않고 먹었다. 이것이 만일 식당이라면 이제
다른 손님한테 자리를 물려주어도 조금도 지장이 없게 되었다. 그런 때가 되어 르삑
부인이 말했다.
  "빵조각 좀 집어줘요. 과일 설탕조림을 먹어치워야겠으니."
  누구한테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대개의 경우, 르삑 부인은 남에게 부탁하지 않고 먹을 것은 손수 가져다 먹곤 했다.
그리고는 개한테 밖에 말을 걸지 않는다. 개에게 야채 값을 일러주고, 요즈음은
쥐꼬리만한 예산으로 여섯 식구와 한 마리의 개를 먹여 살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
  그녀는 어리광부리느라 코를 실룩거리면서 꼬리로 구두 닦는 매트를 두들기고 있는
삐람므에게 말한다.
  "이 집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는 괴로움을 네가 알 알 까닭이 없지. 틀림없이 너도
남자들처럼, 요리를 맡고 있는 주부는 모두 거저 사 온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버터
값이 오르건, 계란이 손도 못 내밀 만큼 비싸지건, 그런 건 관심도 없지."
  그런데 르삑 부인이 오늘만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희안하게도 르삑 씨에게
직접 말을 건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많았는데, 르삑 씨를 향해서 설탕조림을
먹어치워야겠으니 빵조각을 하나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젠 아무도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우선 첫째로, 르삑 부인의 눈은 남편 쪽을 보고 있었다. 둘째로, 빵은
르삑 씨 곁에 있다. 르삑 씨는 깜짝 놀라 한순간 망설였다. 그리고 접시 위의 빵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들자 정색을 하고 우울한 얼굴빛으로 르삑 부인에게 던졌다.
  장난으로 그렇게 했는지, 싸움의 시작인지 그것은 모른다.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모욕당한 기분이 들어 겁에 질렸다.
  (아빤, 오늘 기분이 좋은데!) 형 훼릭스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의자를 자꾸
삐걱거리며 덜컥덜컥 말 달리는 시늉을 했다.
  홍당무는 입술이 벽돌처럼 굳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에는 음식
찌꺼기를 더덕더덕 붙이고서 윙윙 울리는 귀울림 속에 구운 사과를 잔뜩 입에 넣은 채
꾹 참고 있었다. 르삑 부인이 테이블 위에서 벌떡 일어서지 않았더라면, 필시 긴장한
나머지 방귀라도 뀌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르삑 부인이 아들과 딸의 눈앞에서 인간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팔

  르삑 씨는 오늘 아침 파리에서 막 돌아온 길이었다. 큰 트렁크를 열었다.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에게 줄 선물이 나왔다. 훌륭한 선물로서, 그것도(이
얼마나 신통한 일일까!) 두 사람이 밤새도록 꿈꾸었던 바로 그 선물이었다. 그런 다음
르삑 씨는 등 뒤로 두 손을 감추고는 짓궂게 홍당무 쪽을 보고 말했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나팔이냐, 아니면 권총이냐?"
  홍당무는 개구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나팔을 갖고 싶을
것이 뻔했다. 나팔은 손 안에서 폭발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늘
주위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 나이 또래의 사내 아아는, 총이라든가
허리에 차는 긴 칼이라든가 전쟁놀이의 장난감이 아니면 진짜 노는 기분이 안 난다고.
그러니까 알맞은 선물을 사 오신 것이다.
  "난 권총이 좋아요."
  홍당무는 당돌하게 말했다. 아버지의 기분은 확실히 알아맞추었다는 듯이. 그리고
조금 들떠서 이런 말까지 했다.
  "숨겨도 소용없어요. 보이는 걸, 뭐!"
  "아 그래!"
  르삑 씨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권총 쪽이 좋니! 너도 그렇게 변했구나."
  얼떨떨해진 홍당무는 즉시 바꾸어서 말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아빠. 장난 삼아 말했을 뿐이에요. 걱정 안하셔도 돼요. 난
아주 싫어요, 권총 같은 건. 자, 빨리 나팔이나 주세요. 난 나팔 부는 게 제일 좋아요."

  르삑 부인: 그렇다면 왜 거짓말을 했니? 아버지를 골탕 먹이려고 그랬지. 나팔이
좋으면서 권총이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게다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권총이
보인다고 거짓말한 것은 좋지 않아. 거짓말을 한 벌로, 권총도 나팔도 주지 않겠다. 이
나팔을 잘 봐라. 빨간 술 세 개와 금빛 술이 있는 깃발도 하나 달려 있지? 잘 봤지?
자, 방해가 되니 가봐라. 저리로 가란 말이야. 그리고 손가락을 대고 휘파람이라도
불렴.

  하얀 속옷을 개켜 둔, 벽장 꼭대기 서랍 속 위에 빨간 술 세 개와 금빛 술이 있는
깃발에 싸인 홍당무의 나팔은 나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당무의 손에 닿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은 채 숨도 쉬지 못하고 마치 마지막 심판날의 나팔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카락

  일요일이면 르삑 부인은 아이들한테 꼭 미사에 가라고 한다. 아이들을 깨끗하게
단장시키는 일은 누나인 에르네스띤느가 맡는다. 그 때문에 그녀의 치장은 곧잘
늦어진다. 그녀는 넥타이도 매주고 손톱도 깎아 주며, 기도책을 챙겨주고 한다. 가장
두툼한 기도책은 홍당무가 가지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형제들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는 일이다. 그녀는 이 일에 아주 열성이다.
  홍당무는 얌전히 하라는 대로 가만히 서 있지만, 형인 훼릭스는 가만히 있지 않고,
"나 화낼 거야."하고 미리 에르네스띤느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면 그녀도 이런
말로 구슬린다.
  "오늘도 깜박 잊어버리고 발랐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다음 일요일부터는 꼭
조심할게."
  이런 말을 하면서도 언제나 슬쩍 발라 버리는 것이었다.
  "두고 보자."
  훼릭스는 말한다.
  오늘 아침에도 목욕을 한 뒤 수건을 걸치고는 머리를 숙이고 있는 동아네
에르네스띤느가 또 몰래 발랐으나 아마도 모르는 모양이다.
  "자."
  에르네스띤느는 말한다.
  "시키는 대로 했으니 투덜거리지마. 난로 위를 봐. 포마드의 뚜껑이 덮여 있잖아?
나 참 신통하지? 더구나 오빠 머리는 발라 보아야 별수 없거든. 홍당무한테는
시멘트가 필요할 정도지만, 오빠는 그럴 필요 없어. 저절로 곱슬거리면서 말을 잘 듣는
걸, 뭐. 오빠 머리카락은 꼭 양배추 같아. 이 가리마도 저녁 때까진 견딜 거야."
  "고마워."
  형 훼릭스는 조금도 의심하는 기색 없이 일어섰다. 여느 때처럼 머리를 만져보고
사실 여부를 알아 보지도 않는다.
  에르네스띤느 누나는 형의 옷차림을 차근차근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흰 비단
장갑을 끼워 주었다.
  "이제 됐어?"
  형이 말하자,
  "멋져, 마치 왕자님 같아."
  에르네스띤느 누나는 말한다.
  "이제 모자만 쓰면 되겠군. 장롱 안에서 가지고 와요."
  그러나 형 훼릭스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장롱 앞을 그냥 지나쳐 찬장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꺼내더니 천연덕스럽게 물을 주르르 머리에
부었다.
  "미리 말했잖아? 바보 취급은 그만둬. 너 같은 계집아이가 나 같은 도사를 속이려고
들다니. 이래도 정신 못 차리고 도 발라 봐라. 포마드 병을 아주 강물 속에
집어던지고 말 테니."
  머리는 납작해지고, 일요일의 나들이 옷에서는 물이 뚝뚝. 그리고 흠뻑 젖은 채,
옷을 갈아 입혀 주거나 햇빛이 말려 주거나 둘 중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쳇, 저게 무슨 꼴이야!"
  홍당무는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감탄해서 꼼짝도 않고 서 있다.(형은 무서운 것이
없다. 내가 저런 짓을 했다간 큰 웃음거리가 될 거야. 포마드를 싫어하지 않는 척하고
있는 게 상책이지.)
  하지만 홍당무가 단념한 나머지 예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머리카락한테
앙갚음을 당하고 있었다.
  포마드 때문에 머리카락은 잠시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끈끈한
기름기를 슬슬 밀어젖히고 빤질빤질한 골을 파기 시작하더니, 머리카락 전체에 금이
가서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마치 초가지붕에 얼음이 녹듯 한다.
  그러다가 얼마 못되어 첫째 다발이 벌떡 일어섰다. 꼿꼿하고 자유롭게! 
        수영

  이제 곧 4시가 되려고 하자 홍당무는 안절부절을 못하고 마당의 개암나무 밑에서
자고 있는 르삑 시와 형 훼릭스를 깨웠다.
  "가는 거지요?"
  홍당무가 물었다.

  형 훼릭스: 응, 가자. 수영 팬티 좀 갖고 와.
  르삑 씨: 아직 더워서 못 견딜 거야, 틀림없이.
  형 훼릭스: 나는 해가 쨍쨍 내리쬐는 편이 좋아요.
  홍당무: 그리고 아빠도 여기보다는 강가가 기분이 좋을 거예요. 풀밭에 누워 계세요.
  르삑 씨: 먼저 걸어라, 천천히, 더위 먹고 죽어버리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말하지만, 홍당무는 빨라지는 걸음을 억지로 늦추고 있었다. 빨리 걷고
싶어서 발이 근질근질했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것은, 무늬가 없는 수수한 자기의 수영
팬티와 웨릭스의 파랑과 빨강빛의 수영 팬티다. 신나는 얼굴로 혼자서 지껄이기도
하고 또 노래도 부른다. 나뭇가지에 뛰어올라 공중에서 헤엄치는 흉내를 내고는 형
훼릭스에게 말했다.
  "물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을 거야. 실컷 헤엄쳐야지."
  "건방진 소리 하지마."
  물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형 훼릭스가 깔보듯이 대답했다.
  맨 먼저 바짝 마른 나지막한 돌담을 사뿐 뛰어넘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언뜻 강이
모습을 나타내어 눈앞을 흐르고 있었다. 벌써 쓸데없이 떠들어 댈 기분은 사라지고
말았다.
  햇빛이 물 위에 반사되어 보석같이 차갑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물은 마치 톱니를 맞물린 것 같은 소리를 내어 출렁이면서 김 빠진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 속에 뛰어들 것이다. 그리고 르삑 씨가 시계를 보면서 정한 시간을 재고 있는
동안, 강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어야 한다. 홍당무는 오싹해졌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해치우고 말겠다고 용기를 북돋워 보았으나, 막상 닥치고 보면 언제나 마음이 꺾이고
만다. 먼 데서부터 자기를 끌어당기고 있는 물을 보니 겁이 나서 오금을 펴지 못했다.
  홍당무는 좀 떨어진 곳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발과 깡마른 몸을 모두에게 보이는
것도 싫었지만, 그보다도 혼자서 누구를 꺼릴 것도 없이 떨고 싶었다.
  입고 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어, 줄 위에 차곡차곡 챙겨 놓았다. 구두끈도 풀었다가는
다시 매고, 풀었다가는 다시 매고 하면서 좀처럼 벗지 않았다.
  수영 팬티를 입었다. 짧은 셔츠를 벗었다. 그러나 봉지 속에서 진득진득해진 사과나
과자처럼 땀에 젖었으므로 잠시 동안 기다렸다.
  형 훼릭스는 벌써 강물 속에서 제 세상인 양,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다. 팔을
휘둘러서 힘껏 물을 치기도 하고 발꿈치로 물을 쳐서 물방울을 튀기기도 한다. 강물
한가운데 우뚝 서서 굽이치는 파도를 강가 쪽으로 몰아오고 있는 중이다.
  "홍당무야, 너는 벌써 포기했니?"
  르삑 씨가 물었다.
  "몸을 말리고 있어요."
  홍당무가 대답했다.
  이윽고 그도 결심을 하고 강가에 앉아 엄지발가락을 물에 넣어 보았다. 그
엄지발가락은 구두가 너무 작아서 까져 있다. 그렇게 하면서 위(위)를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틀림없이 아직 먹은 것이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다음, 나무 뿌리를 따라
몸을 미끄러뜨려 넣었다.
  종아리와 허벅지와 엉덩이를 나무뿌리에 긁혔다. 배까지 물이 차자 얼른 강가로
올라와서 도망치려고 했다. 젖은 끈이 팽이에 감기듯 착착 몸에 감기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그대 몸을 의지하고 있던 흙더미가 무너졌다. 홍당무는 물 속으로
미끄러져 한참 동안 버둥거리다가 간신히 일어섰다. 기침을 하고 침을 뱉었지만, 숨이
막히고 눈이 흐려지며 머리가 뻐근했다.
  "물 속에 잠기는 건 잘 하는구나."
  르삑 씨가 홍당무를 칭찬했다.
  "네, 하지만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귓속에 물이 들어가고, 틀림없이 머리도
아찔한 걸요."
  홍당무는 헤엄 연습을 할 수 있는 장소, 즉 모래에 무릎을 짚고 걸으면서 팔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너무 서두르는 것 같구나."
  르삑 씨가 주의를 주었다.
  "주먹을 쥔 채 휘둘러선 안돼. 그렇게 하면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것 같아. 발을
써라, 발을! 통 움직이지 않고 있잖아."
  "발을 안 쓰고 헤엄치려니까 아주 어려워요."
  홍당무가 대답했다.
  그런데 열심히 하고 있으면, 형 훼릭스가 쉴새없이 방해를 놓는다.
  "홍당무야, 이리 와. 더 깊은 데가 있어. 이것 봐, 발이 닿지 않고 가라앉지? 자,
자세히 보라니까. 내가 보이지? 하지만 곧 안 보이게 될 거야. 자, 이제 저기 버드나무
쪽으로 가봐. 움직이면 안돼. 열 번 물장구를 치는 동안에 틀림없이 네 옆까지 갈
테니까."
  "내가 셀게."
  홍당무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어깨를 물 밖으로 내놓고는 마치 말뚝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헤엄치려고 다시 몸을 굽혔다. 그런데 형 훼릭스는 동생의 어깨에 올라가서 똑바로
거꾸로 다이빙!
  "이제 네 차례다. 하려면 내 등에 올라가."
  "나 혼자 연습하고 있으니까 내버려 둬."
  홍당무가 말했다.
  "이제 그만!"
  "물 속에서 나오너라. 둘 다 럼주를 한 모금씩 마시렴."
  "벌써, 나가야 하나요?"
  홍당무가 말했다.
  지금, 그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 실컷 헤엄도 쳐보지 못했는데^5,5,5^ 이제는
물이 무섭지도 않았다. 아까는 납덩어리처럼 물 속으로 가라앉았지만, 지금은 날개가
달린 듯 미친 듯한 기세로 물 속을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위험 같은 건
아랑곳없다. 누군가를 구조하지 위해서는 목숨을 내던져도 상관없다는 각오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물 속에 잠겨서 물에 빠진 사람들의 고통을 몸소 맛보려고
했던 것이다.
  "빨리 나와!"
  르삑 씨가 외쳤다.
  "빨리 안 나오면 훼릭스 형이 럼주를 다 마시고 만다."
  럼주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홍당무는 이렇게 말했다.
  "내 몫은 누구한테도 안 줄래."
  그리고 마치 고참병(고참병)처럼 꿀꺽꿀꺽 들이켰다.

  르삑 씨: 씻지 않았구나. 아직 복숭아뼈에 때가 그대로 있는데.
  홍당무: 아빠, 이건 진흙이에요.
  르삑 씨: 아냐, 때다.
  홍당무: 다시 물에 들어가서 씻고 올까요, 아빠?
  르삑 씨: 내일 씻어라. 또 올 테니까.
  홍당무: 좋아요! 내일도 날씨가 좋아야 할텐데.

  홍당무는 젖지 않은 수건의 끝 쪽을 골라서 손가락에 감고 몸을 닦았다. 끝 쪽만은
형 훼릭스가 적시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는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띵하고 목은
깔깔했지만, 즐겁게 떠들어댔다. 형과 르삑 씨가 홍당무의 구두가 작아서 부르튼
발가락을 보고 우스운 농담을 했기 때문이다. 
        오노리느

  르삑 부인: 당신은 이제 몇 살이나 되었지요, 오노리느?
  오노리느: 이번 만성절(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성인을 추모하기 위한 축제일로서
10월 1일)로 예순 일곱이 되었답니다, 마님.
  르삑 부인: 어휴, 굉장한 나이군요.
  오노리느: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죠.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걸요. 한 번도 병을 앓아
본 적이 없습니다. 말도 나처럼 튼튼하지는 못할 거예요.
  르삑 부인: 그렇다면, 한마디만 하겠어요, 오노리느. 당신은 틀림없이 갑작스럽게
죽을 거예요. 저녁 때 강에서 돌아올 때 등에 진 바구니가 무거워서 어깨가 무너지는
듯 느껴지거나, 손수레가 천근 무게로 무겁게 느껴질 거예요. 그리고는 틀림없이
손잡이 사이에 무릎을 꿇고, 젖은 빨래 위에 얼굴을 틀어박고 쓰러질 거예요. 사람들이
곧 달려가서 일으켜 보면 벌써 숨이 끊어져 버렸겠지요.
  오노리느: 방정맞은 소리는 그만해 두세요, 마님. 걱정 마세요. 다리며 팔이며 아직
멀쩡하니까요.
  르삑 부인: 허리가 조금 굽었군요. 정말이에요. 하긴 등이 굽으면, 빨래할 때 허리가
편해서 좋을 거예요. 그렇지만 눈이 잘 안 보인다면 곤란한데요! 그렇지 않다는 말은
못하겠지요, 오노리느? 얼마 전부터 나는 눈치채고 있었어요.
  오노리느: 천만의 말씀을! 갓 시집왔을 때와 마찬가지죠. 똑똑하게 보인답니다.
  르삑 부인: 좋아요! 그렇다면 찬장을 열고 접시를 한 장 꺼내와 봐요.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어요. 당신이 말끔히 행주질을 했다면 이 얼룩은 어째서 생겼나요?
  오노리느: 찬장에 습기가 있습니다.
  르삑 부인: 찬장 속에 접시 위를 산보하는 손가락이라도 있다는 말인가요? 이
자국을 봐요.
  오노리느: 도대체 어딜 말입니까? 저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르삑 부인: 그러니 딱할 수밖에요, 오노리느. 아무튼 잘 들어 봐요. 당신이 꾀를
부린다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런 말을 한다면 잘못이니까요. 이 고장에서 당신만큼
열심히 일하는 여자는 없을 거예요. 다만 당신은 나이가 너무 많아요. 우리는 모두
늙었어요. 열심히 일하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안되지요. 때로는 당신은 눈에 헝겊이
가려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가끔 있을 거예요. 아무리 비벼봤자 헛일이에요. 눈에
씌워질 헝겊은 떼어버릴 수가 없는 거니까요.
  오노리느: 하지만 나는 언제나 눈을 크게 뜨고 있습니다. 물통 속에 머리를 처박은
것처럼 뿌옇게 보이는 일을 없습니다.
  르삑 부인: 그렇잖아요, 오노리느. 내 말이 틀림없어요. 어제만 해도 주인한테
더러운 컵을 내드렸단 말예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공연히 말썽을
일으켜서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주인 어른도 아무 말씀 안하셨지요.
그이는 언제나 말이 없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셔요. 무관심한 사람같이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이지요. 온갖 일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뭣이든 정확하게 머리 속에 새겨
놓고 있다오. 손가락으로 그저 그 컵을 밀어냈을 뿐, 꾹 참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은 채
식사를 끝내셨지요. 나는 당신과 주인 어른 모두를 생각하고 가슴이 아팠어요.
  오노리느: 정말 놀랍습니다. 주인 어른께서 하녀한테 격을 두시다니!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당장 컵을 바꾸어드렸을 것을!
  르삑 부인: 그렇게 생각하겠지, 오노리느. 하지만 당신보다 훨씬 더 빈틈없는
여자라도 주인 어른의 입을 열게 하진 못해요. 입을 봉해 두자고 각오하고 계시니까.
나도 이젠 단념했어요.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오.
간단하게 말하자면 당신의 눈은 날마다 조금씩 어두워져 가고 있어요. 허드레 일이나
빨래 같으면 실수도 눈에 띄지 않지만 세세한 일은 이제 당신에게 알맞지 않아요.
돈이 더 들겠지만 당신을 도울 사람을 하나 구하고 싶은데^5,5,5^.
  오노리느: 매사에 걸리적거리기나 하는 여자와 함께 일할 수는 없습니다, 마님.
  르삑 부인: 그러게 말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솔직히 말해서 어떻했음 좋겠어요?
  오노리느: 죽는 날까지, 이제까지처럼 훌륭하게 해나갈 수 있습니다, 마님.
  르삑 부인: 죽을 때까지라고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요, 오노리느? 당신이
우리들의 장례를 치러주게 될 것이며,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인데, 당신이
먼저 죽는다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오노리느: 행주질을 조금 잘못했다고 해서 설마 나를 내보내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나를 내쫓지 않는 한 댁에서 나가지 않겠어요. 그리고 한 번 쫓겨나면
길바닥에서 죽을 뿐입니다.
  르삑 부인: 누가 내보낸다고 했나요, 오노리느? 얼굴을 붉히고 그러게. 우리는
의논을 하고 있는데, 당신은 쓸데없이 화를 내다니^5,5,5^.
  오노리느: 정말 그래요. 어떻게 할지, 누가 압니까?
  르삑 부인: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당신 눈이 나빠진 것은, 당신
탓도 내 탓도 아니잖아요.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 고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말이에요, 딱한 것은 당신 쪽인가요, 아니면 내 쪽인가요? 당신은 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생각지도 앉지요. 그 때문에 우리 식구가 모두 애를 먹거든. 나는 인정상
이런 말을 하는 거라오. 여러 가지 딱한 일이 생겨서는 안되겠기에 말이에요.
나에게도 사태를 온당하게 판단하고 이야기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5,5,5^.
  오노리느: 무슨 말씀이건 하세요. 좋도록 처리하세요, 마님. 아까 같아서는 당장
거리에 내쫓긴 듯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접시 닦을 때 조심하겠습니다, 다짐하겠어요.
  르삑 부인: 그 밖에 할 말은 없어요. 나는 이래 뵈도 소문보다는 훨씬 마음이
좋아요. 오노리느, 당신 쪽에서 꼭 내보내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내보내지
않겠어요.
  오노리는: 그럴 때는, 마님, 아무 말씀 안하셔도 됩니다. 지금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만인 마님이 내쫓으신다면, 이럴 수가 있느냐고 큰소리로
고발하겠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남에게 짐이 되고, 냄비의 물조차 끓일 수 없게 된
것을 알았을 때는 두말 없이 나가겠습니다. 누가 말하지 않더라고 제 발로
나가겠습니다.
  르삑 부인: 이것은 잊지 말아요, 오노리느. 언제라도 우리 집엘 찾아오면 수프의
나머지쯤은 나눠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오.
  오노리느: 아뇨, 마님, 수프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빵만으로 훌륭합니다.
마이엣트 할멈은 빵밖에 먹을 수 없게 되고부터 좀처럼 죽을 것 같지 않거든요.
  르삑 부인: 당신도 알고 있나요, 그 할멈을? 나이가 아무리 안돼도 백 살은 된 것
같더군요. 또 이런 것도 알고 있나요. 오노리느? 거지란 우리들보다 행복하다는 것.
정말 내 말이 틀림없거든.
  오노리느: 마님이 말씀하시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냄비

  홍당무에게는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기회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재빨리 이 기회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막상 그런 기회가 왔을 때는 곧 구석에서
뛰어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는 감정이 결렬해져 있는 사람처럼, 사건 처리를 자기
손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홍당무는 어머니가 눈치 빠르고 착실한 조수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콧대가 센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입밖에 낼 리는 없다. 따라서 계약은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 홍당무는 누구의 칭찬이나 상을 바라지 않고 무조건
일해야만 했다. 그는 벌써 결심이 되어 있었다.
  아궁이 위의 갈고리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냄비가 하나 걸려 있다. 겨울에는 뜨거운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몇 번 냄비에 물을 가득 넣었다가 펄펄 끓는 물을 퍼낸다.
냄비는 활활 타오르는 불 위에서 펄펄 끓고 있다.
  가끔 휘파람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오노리느는 몸을 굽히고 귀를 기울였다.
  "다 졸았군."
  오노리느가 말했다.
  그녀는 냄비에 물통의 물을 가득 붓는다. 장작 두 개비를 겹쳐서 재를 휘저었다.
이내 그 기분 좋은 노래가 시작되었다. 안심한 오노리느는 다른 볼 일을 보러 갔다.
그녀는 이런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오노리느, 이젠 소용없는 물은 왜 끓이지? 냄비는 내려놓고 불을 꺼 버려요. 거저
생긴 것처럼 장작을 태우고 있군요. 추워지면 뼈까지 싸늘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당신은 알뜰한 여자일텐데, 오노리느."
  그런 말을 들어도 오노리느는 싫다고 머리를 가로 저을 것이다.
  그녀는 1년 내내 갈고리에 냄비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아왔던 것이다.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의 소리를 들어 왔었다. 냄비가 텅 비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해가 쨍쨍 쬐거나 어김없이 냄비에 바가지로 하나 가득 물을 부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손을 대보거나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보지 않아도 환히 알고
있었다. 냄비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물 끓는 노래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물통의 물을
붓는다. 마치 구슬에 실을 꿰듯 아주 능란하므로 이때까지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처음으로 실수를 저질렀다.
  물이 온통 불 속으로 쏟아졌기 때문에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구름 같은 재가, 마치
훼방을 받아서 화가 난 짐승처럼 오노리느에게 덤벼 들었다. 몸을 둘러싸서
질식시키고는 화상을 입혔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 오노리느는 비명을 지르고 재채기를 하며 침을 뱉었다.
  "아이구, 나 죽겠네! 땅속에서 악마가 튀어나온 줄 알았지."
  눈은 부르터서 따끔따끔 아프지만, 시커멓게 더러워진 손을 뻗어 불이 꺼진 난로
속을 더듬거렸다.
  "아, 옳거니."
  깜짝 놀란 오노리느는
  "아니, 냄비가 없어졌잖아."
  하고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아까까지는 있었는데. 그렇고 말고, 갈대피리처럼 삐삐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5,5,5^."
  등을 돌리고 야채 찌꺼기 투성이인 앞치마를 창 밖으로 털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냄비를 치운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도대체 누굴까?
  르삑 부인이 정색을 하고 침착한 얼굴로 침실의 신발 닦개 위에 나타났다.
  "몹시 시끄럽군요, 오노리느!"
  "몹시 시끄럽다니요?"
  오노리느가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뻔했습니다. 하마터면 전 타죽을 뻔했지요.
보세요, 내 슬리퍼며, 치마며, 손을. 윗저고리는 흙탕투성이고, 주머니 속에는 숯
조각이 몇 개가 들어 있잖아요."

  르삑 부인: 내가 보고 있는 건 아궁이에서 더러운 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에요,
오노리느. 깨끗이 치워요.
  오노리느: 누가 내 냄비를 한마디 말도 없이, 왜 가지고 갔을까요? 마님이
가져가셨죠?
  르삑 부인: 오노리느. 그 냄비는 이 집 식구 모두의 것이예요. 그런데도 나나 주인
어른 또는 아이들이 냄비를 쓸 때에 일일이 당신한테 물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요?
  오노리느: 욕을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척 화가 나 있으니까요.
  르삑 부인: 우리들한테인가요,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인가요, 오노리느? 자,
어느 쪽에 대해서지요? 호기심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난 그것 알고 싶은데. 기가
차군요. 냄비가 없어졌다고 불에다 아무렇게나 물통에 가득 찬 물을 퍼붓다니.
그리고도 자기 잘못은 제쳐놓고 고집을 부리며 다른 사람, 아니 내 탓으로 돌리려
드니 당신 하는 짓은 너무 한심하군요, 정말!
  오노리느: 홍당무 도련님, 내 냄비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르삑 부인: 그 애가 뭘 알아요? 그 아이한테 책임은 없어요. 당신 냄비라는 말은
그만 해요. 그보다도 어제 한 말을 생각해 보세요. "냄비의 물조차 끓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지요? 당신 눈이 나쁘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토록 형편없는
줄은 미처 몰랐군요. 이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오노리느.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요. 나 못지 않게 사정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잘 생각해서 결단을 내려오.
아아, 조금도 꺼릴 것 없어요, 울 테면 울어요, 울만한 일이니까. 
        시치미

  "엄마! 오노리느!"
  "^5,5,5^."
  홍당무는 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모든 것을 망쳐 놓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르삑 부인의 싸늘한 눈과 마주치자, 굳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오노리느에게 이렇게 말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야, 그 냄비를 가져간 것은 나야, 오노리느!"
  무슨 짓을 해도 이 할머니를 구할 수는 없다. 벌써 눈이 안보인다. 어쨌든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엾은 할머니. 그러므로 언젠가는 오노리느도 물러나야만 할
것이다. 지금 홍당무가 그것을 고백한다 해도 그것은 그녀를 더욱 괴롭힐 뿐일
것이다. 그만두고 이 집을 나가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홍당무가 범인이라는 것은
아예 모르는 채, 오직 피할 길 없는 불행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행복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르삑 부인에게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엄마, 내가 그랬어요!"
  큰 공이라도 세운 듯 자랑스럽게 일러 바치고는 칭찬하며 웃는 얼굴을 기대해 본들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칫하면 엉뚱한 꼴을 당할 염려가 있다. 르삑 부인은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를 야단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짓을 하기보다는 자기 일만
하고 있는 편이 영리한 일이다. 그보다도 어머니와 오노리느가 냄비를 찾는 것을
자기도 거드는 척하는 게 훨씬 더 좋은 일일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잠시 동안 세 사람이 함께 냄비 찾는 일을 할 때 가장 열성적으로
보이는 것은 홍당무였다.
  르삑 부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는지라, 맨 먼저 단념하고 말았다.
  오노리느도 단념하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하마터면 혼이 날 뻔했던 홍당무는 재빨리 자기 껍질 속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된 정의의 칼날이 칼집으로 쑥 들어가듯이. 
        아가뜨

  오노리느 대신에 오게 된 사람은 소녀 아가뜨였다.
  신기한 듯이 홍당무는 이 새로 온 아가씨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 덕분으로 르삑
씨 집안의 관심은 2,3일 동안 자기한테서 떠나 이 아가씨 쪽으로 옮겨갈 것 같다.
  "아가뜨, 방에 들어올 때는 문을 두드려야 해요. 그렇다고 망아지 같은 힘으로
주먹을 휘둘러서 문을 부수라는 말은 아니야."
  어머니가 말했다.
  "또 시작이로군. 점심 때가 되면 볼만하겠지."
  하고 홍당무는 생각했다.
  모두들 커다란 부엌에서 식사를 한다. 아가뜨는 팔에 냅킨을 걸고 아궁이에서
찬장으로, 찬장에서 테이블로 언제라도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조용히 걷는다는
것은 아예 이 아가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볼은 빨갛게 물들이고는 헐레벌떡
달리기를 좋아하였다. 게다가 말이 너무나도 빠르고 웃는 소리도 너무 컸다. 무엇을
하건 지나치게 열중하는 것이다.
  르삑 씨가 맨 먼저 자리에 앉았다. 냅킨을 펴서 앞에 걸고는 앞에 있는 요리접시
쪽으로 자기 접시를 내밀어 고기를 덜고 소스를 친 다음 그 접시를 자기 앞으로
당겼다. 손수 포도주를 따른다. 어깨를 새우등처럼 굽히고 눈을 내리깐 채 여느
때처럼 조금씩,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먹고 있다.
  다음 요리가 나올 때까지는, 의자에 낮은 채 몸을 뒤로 젖히고는 궁둥이를 살살
움직인다.
  아이들의 몫은 르삑 부인이 담아 준다. 우선 형 훼릭스부터.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홍당무. 그는 식탁 맨 끝에 앉아 있다.
  홍당무는 절대로 더 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마치 더는 못 먹게 되어 있는 것 같다.
한 그릇으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줄까?" 하고 물으면 더 받는다.
포도주는 마시지 않고 그는 좋아하지도 않는 밥으로 배를 채운다. 집안에서 단 한
사람, 밥을 좋아하는 르삑 부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훨씬 더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었다. 더 먹고
싶으면, 르삑 씨가 하듯이 자기 접시를 요리접시 쪽으로 가지고 가서 더 담아 온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도대체 이분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상스러울 것도 없다. 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런 것 뿐이다.
  아가뜨는 누구 앞에서나 두 팔을 허리에 얹은 채 하품을 참지 못한다.
  르삑 씨는 유리 조각이라고 씹듯이 천천히 먹는다.
  식사 때 이외의 르삑 부인은 까치보다도 더 수다스럽지만 식사 때는 손짓과
표정만으로 신호를 하여 이것저것 시켰다.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눈길을 천장에 보내고 있다.
  형 훼릭스는 손가락으로 빵 조각을 주무르고 있다. 그러나 홍당무는 포도주를
거절했기 때문에 굶주린 듯이 너무 빨리 접시의 소스를 혓바닥으로 핥은 듯 깨끗이
먹어치워도 안되겠고, 그렇다고 흐느적거리며 꾸물거려도 안되므로 거기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다. 이 목표를 향해 복잡한 계산에 몰두하고 있었다.
  갑자기 르삑 씨가 일어서서 주전자에 물을 담으러 갔다.
  "제가 가겠어요^5,5,5^."
  아가뜨가 말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속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벌써 모두가 어색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혀는 묵직해져
입을 열 기운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잘못이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함으로 더욱
조심한다.
  벌써 르삑 씨의 빵이 거의 없어졌다. 이번에야말로 아가뜨는 기선을 빼앗겨서는
안될 것이다. 거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르삑 씨의 행동만을 지켜보고 있으므로 다른
가족들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르삑 부인이 쌀쌀맞게 말했다.
  "아가뜨, 네 몸에서 나뭇가지라도 생기는 게 아니냐?"
  "네, 마님,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가요?"
  아가뜨가 대답했다.
  그래서 마음을 여러 식구들에게 돌리지만, 역시 르삑 씨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능한 하녀로 인정받겠다고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르삑 씨는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먹기 시작했다. 이때다 하고 찬장으로 뛰어간
그녀는 다섯 근이나 되는 칼로 자르지도 않은 바퀴 모양의 왕관 빵을 가지고 와서
냉큼 내놓았다. 주인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미리 눈치챘다는 생각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지만 르삑 씨는 냅킨을 접고는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모자를 쓰더니 담배를
피우러 뜰로 나갔다.
  그는 식사를 끝내면 더는 먹지 않는 편이었다.
  아가뜨는 다섯 근의 커다란 바퀴 모양의 빵을 안고 그 자리에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바퀴 만드는 회사의 선정용 인형과 똑같은 모습으로. 
        예정표

  "어때, 질렸지?'
  부엌에서 아가뜨와 단둘이 되자 홍당무는 곧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낙심하면 안돼, 이런 일은 늘 있는 거니까^5,5,5^. 그런데 병을 여러 개
가지고
어딜 가는 거지?'
  "헛간에요, 홍당무 도련님."

  홍당무: 잠깐 기다려. 헛간에는 내가 갈게. 계단이 낡아서 여자는 미끄러져 목을
부러뜨리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용케 그 계단을 잘 내려가지 때문에, 전부터
헛간 볼일은 내가 맡아 하기로 했어. 나는 그 안에서 빨간 딱지와 파란 딱지를 분간할
수도 있거든.
  헌 술통을 팔면 약간의 돈이 생기게 되, 토끼 가죽도 마찬가지야. 돈은 엄마한테
맡겨 놓지. 그러니까 잘 짜 놓자, 서로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말이야.
  아침에 나는 개장을 열어 개에게 수프를 줘. 저녁 때도 역시 내가 휘파람을 불어서
자러 오게 하고. 한눈을 파느라고 좀처럼 안 돌아올 때는 기다리고 있어야 해.
  그리고 나서 엄마와의 약속으로 닭장 문은 언제나 내가 잠그게 되어 있어.
  풀을 뽑는 일도 내가 해. 풀 종류를 잘 알아야 하거든. 풀에 붙어 있는 흙은 털어
버리고 그 구멍을 메워 놓아야 해. 그리고 뽑은 풀은 가축에게 먹이는 거야.
  운동 삼아서 아빠를 도와 장작을 패기도 하지.
  아빠가 잡아온 사냥감이 살아 있으면 내가 목을 비틀지. 너는 에르네스띤느 누나와
함께 털을 뽑는 거야.
  생선 배도 내가 가르지. 창자를 빼내고 공기주머니는 발로 밟아서 터트리지만,
비늘을 벗기고 샘에서 물을 긷는 것은 네가 할 일이야.
  실타래를 풀 때도 내가 도와 줄게. 커피도 내가 빻아.
  아빠가 더러워진 구두를 벗어 놓으면 복도로 가지고 가는 것은 나야. 그러나
실내화를 가지고 오는 권리는 에르네스띤느 누나가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않거든. 손수
수를 놓았기 때문이지. 중요한 심부름은 내가 도맡아서 하는 거야. 먼 곳이라든가,
약국이나 의사한테 가는 일도 말이야.
  아참, 그렇지. 주의해 두지만, 빨래는 절대로 과일나무 위에다 말리면 안돼.
아버지는 잔소리는 하지 않지만 느닷없이 그것을 땅바닥에 냅다 던져버릴 테니까.
하지만 조금이라도 얼룩이 지면 마님은 다시 빨래하러 보낼 게 뻔해.
  구두 손질은 네가 해야 해. 사냥 구두에는 기름을 많이 발라 쥐. 그렇지만 장화에는
구두약을 살짝 바르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장화가 상한단 말이야.
  진흙으로 더럽혀진 바지는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아버지는 진흙이 묻어 있는
바지가 더 오래 간다고 우기시니까. 아무튼 바짓자락도 걷어올리지 않고 밭 가운데를
마구 걸어다니시거든. 사냥에 따라가서 잡은 것을 가지러 갈 때 나는 바짓자락을
걷어올리고 싶은데 말이야.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홍당무야, 너는 진짜 사냥꾼은 절대로
못되겠구나."
  하지만 마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바지를 더럽히기만 해봐라, 귀가 떨어져 나갈 줄 알아라."
  이걸 취미의 차이라는 거야.
  다시 말해서 모든 것 너무 슬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지. 방학 동안에
둘이서 일을 나눠 하자. 누나와 형과 내가 기숙사로 돌아가면 너의 일도 줄어들 거야.
말하자면 언제나 똑같다는 뜻이지.
  그리고 네가 정말 진저리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은 이 집에 단 하나도
없어. 이웃 사람들한테 물어 봐. 모두들 그렇게 말할 테니. 에르네스띤느 누나는
천서처럼 상냥하고, 훼릭스 형은 훌륭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아버지는 사리판단이
분명한 성격이며, 어머니는 보기 드문 요리 전문가이고 말이야. 가족 가운데 가장
말썽꾸러기는 틀림없이 날 거야. 하지만 사실은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어.
어떻게 나는 다룰 것인가 하는 요령만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게다가 나도 모든
일의 이치는 생각할 줄 알거든. 나쁜 점은 고치기도 하지. 거리낌없이 말해 주기만
하면 차츰 좋아질 거야. 만일 조금만이라도 그럴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아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마. 다른 사람들처럼 "홍당무"라고 불러
줘. "홍당무 도련님" 하고 부르는 것보다 간단해서 좋잖아. 하지만 너의 할머니
오노리느처럼 주책없이 말을 걸지는 마. 오노리느가 늘 그렇게 그렇게 말을 거는 건
질색이었어. 그래서 나는 그녀를 몹시 싫어하지. 
        장님

  지팡이 끝이 살며시 문짝을 두드린다.

  르삑 부인: 또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걸까, 저 사람은?
  르삑 씨: 그걸 모르겠나? 여느 때처럼 10수우의 돈이 필요한 거야. 오늘은 그
사나이가 올 날이잖아. 어서 열러 줘.

  르삑 부인은 시무룩하게 문을 열었다. 장님의 팔을 잡아 그저 냅다 끌어당겼다.
추웠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두 분이 다 계시는군요."
  장님이 말했다.
  장님은 앞으로 걸어 나온다. 지팡이가 쥐를 쫓듯이 톡톡 돌바닥 위를 걷다가 의자에
부딪쳤다. 장님은 의자에 걸터앉아 난로 쪽으로 언 손을 내민다.
  르삑 씨는 10수우의 은화를 꺼내들더니 말했다.
  "받아요!"
  그리고 다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읽던 신문을 계속 읽는다.
  홍당무는 은근히 재미가 난다. 여느 때처럼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장님의
나막신을 바라보고 있다. 나막신에 붙은 눈이 녹아서 벌써 발밑 언저리에 도랑을
이루고 있다.
  르삑 부인은 그것을 눈치챘다.
  "할아버지, 나막신을 이리 줘 봐요."
  르삑 부인이 말했다.
  나막신을 난로 아래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바닥에는 물이 괴어
흥건하였다. 장님은 얼떨떨한 모양이다. 발이 축축해지니까 연방 한쪽씩 발을
들어올린다. 그리하여 진흙 투성이의 눈을 이리저리 짓뭉게고 있다.
  홍당무는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 더러운 물이 자기 쪽으로 흘러오라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는 금이 간 돌바닥 틈새로 흘러내리게 했다.
  "10수우를 받았으면 됐지."
  들으라는 듯이 르삑 부인은 이어서 말했다.
  "또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런데 장님은 정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마음놓고 떠벌린다. 말이 막히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바람에 난로의 연통에 주먹이
닿아 데이고는 당황해 하곤 했다. 그리고는 의심스러운 듯이, 눈물이 마른 적이 없는
하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따금씩 르삑 씨가 신문을 뒤적이며 맞장구를 쳐준다.
  "그렇겠지요, 띠씨에 영감., 그럴 거요. 그러나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냐구요?"
  장님은 외쳤다.
  "거참 지독하십니다! 아무튼 들어 보세요, 나리. 내가 장님이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구먼."
  르삑 부인이 말했다.
  과연 장님은 느긋한 기분으로 자기가 당한 재난을 털어놓았다. 마음껏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으며 몸도 마음도 방안의 따스한 공기로 확 풀렸다. 그때까지는 혈관
속에서 얼음덩어리가 녹아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풀려서 옷과 손발이
진땀으로 흠뻑 젖은 것 같았다.
  바닥에 질펀하던 물이 점점 퍼져서 홍당무 옆으로 흘러왔다.
  홍당무는 신이 났다.
  그것 가지고 장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르삑 부인은 교묘한 꾀를 부렸다. 장님의 옆을 스쳐 다니면서 몇
번이나 팔굽을 부딪치거나 발 등을 밟고 다니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장님은 조금씩
뒷걸음질쳐 끝내는 불기가 미치지 않는 찬장과 옷장 사이에 틀어 박히고 말았다.
장님은 엉거주춤 하며 손으로는 연신 더듬으며 몸짓을 했다. 손가락이 마치
짐승들처럼 땅을 기어간다. 굴뚝 청소라도 하듯이 어둠 속을 더듬는다. 또 얼음덩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얼어 붙을 것만 같다.
  이윽고 장님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기의 신세타령을 멈추었다.
  "그래서 여러분, 이제 끝났습니다. 눈앞도 이젠 볼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아궁이 속처럼 캄캄한 어둠뿐이랍니다."
  지팡이가 손에서 떨어졌다. 르삑 부인은 바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른
다가가 지팡이를 주워서 장님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나 정말은 달려 주는 게
아니었다.
  장님은 받은 셈이지만, 정말은 받지 않는 것이다. 교묘하게 꾀어 가지고 그녀는 또
장님을 움직이게 했다. 나막신을 신게 하고는 조금씩 문 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장님의 살을 꼬집음으로써 조금이나마 앙갚음을 했다. 그렇게 해 놓고는
거리로 밀어 냈다. 거리는 솜털 같은 회색 구름에 덮여 있었다. 바람이 거리로 쫓겨난
개처럼 울부짖으며 휘몰아쳤다.
  그때 르삑 부인은 문을 닫기 전에 장님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마치
귀머거리에게라도 말하듯이.
  "또 와요, 아까 준 돈 잃어버리지 말고요. 이번 일요일에요. 날씨가 좋아지고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말이에요. 정말 그래요! 당신이 말한 그대로예요, 띠씨에 영감님.
구가 살고 누가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거든요. 누구한테나 고통은 있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도와 주실 거예요!" 
        설날

  눈이 내리고 있다. 설날이 한결 복된 날이 되기 위해선 눈이 내려야 하는 법이다.
  르삑 부인은 조심스럽게 안마당 문의 빗장을 걸어 두었다(가난한 집 아이들은
설날에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세배를 하고 돈이나 과자를 얻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르삑 부인은 그들을 맞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벌써 개구쟁이들이
문고리를 흔들고 있었다. 문 아래쪽을 톡톡 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조심조심
두드리더니, 나중에는 화가 났는지 나막신으로 걷어 찼다. 끝내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르삑 부인이 바깥 사정을 살피고 있는 창문 쪽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가
뒷걸음질을 치면서 멀어져 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홍당무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비누도 안 가지고 마당의 여물통으로 세수하러
갔다. 여물통은 꽁꽁 얼어 있었다. 얼음을 깨야 한다. 이 한 번의 운동으로 난로의
온기보다도 더 강한 열이 온몸에 퍼졌다. 하지만 얼굴을 적시는 시늉만 하고 말았다.
언제나 모두로부터 더러운 아이로 찍혀 있다. 멋을 부렸을 때도 역시 그런 말을
듣는다. 그러므로 가장 더러운 곳을 닦아 내는 정도로 그친다.
  명절 의식에 어울리게 그는 상쾌한 기분으로 의젓하게 형 훼릭스의 뒤에 선다.
훼릭스는 누이동생인 에르네스띤느 뒤에 서 있다. 셋이서 주르르 부엌으로 들어갔다.
르삑 부인도 부엌으로 들어오는 참이었으나, 이렇다 할 새삼스러운 기미는 없었다.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부모님에게 키스를 하고 인사말을 한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엄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후세에는 천당에 가시기를^5,5,5^."
  형 훼릭스도 똑같은 말을 한다. 몹시 빠른 말투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누나와
마찬가지로 키스를 했다.
  그런데 홍당무는 모자 안에서 편지를 한 장 꺼내는 것이다. 겉봉을 붙인 봉투에는
"사랑하는 부모님께"라고 씌어져 있다.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 희한한 새 한 마리가
빛깔도 산뜻하게 그 한쪽 모서리에서 재빠르게 날아가고 있다.
  홍당무는 그것을 르삑 부인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봉투를 뜯었다. 활짝 핀 꽃
그림이 편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편지지 가장자리에는 이러한 꽃이 레이스처럼 빙
돌려져 있기 때문에 홍당무의 팬은 몇 번이나 레이스 구멍에 꽂힌 모양이다. 옆의
글자까지 망가져 있다.

  르삑 씨: 그럼 난 아무것도 없구나!
  홍당무: 그걸 두 분께 드리는 겁니다. 다 읽으시고 나면 엄마가 아빠한테 넘겨 드릴
거예요.
  르삑 씨: 그래 나보다 엄마가 더 좋단 말이구나. 그렇다면 조금 있다 너의 주머니
속을 뒤져 보렴. 그 속에는 10수우 짜리 새 돈이 없을 거야!
  홍당무: 잠깐만 기다려요, 아빠. 엄마가 곧 끝날 테니.
  르삑 부인: 문장은 좋지만, 글씨가 서툴러서 읽지 못하겠구나.

  "여기 있어요, 아빠. 이젠 아빠 차례예요."
  홍당무는 황급히 말했다.
  홍당무는 잔뜩 긴장한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에 르삑 씨는 편지를 한 번
읽고 다시 연거푸 읽었다. 늘 하는 식으로 오랫동안 이것저것 뒤척이면서 "흠!
흠!"하고 끄덕였다. 잠시 뒤 편지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할 일을 다 해 버린 편지는 벌써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젠 모든 사람의 것이다.
누구나 보고 만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누나 에르네스띤느와 형 훼릭스는 번갈아
집어 들고는 맞춤법이 틀린 것을 찾아 낸다. "여기서 틀림없이 홍당무는 펜을
바꾸었을 거야.","알아보기가 쉬워졌는데."이런 말을 하고 두 사람은 편지를
홍당무에게 되돌려 주었다.
  홍당무는 그것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어색한 웃음을 띠고 이렇게 묻고 싶은
모양이다.
  "누구 읽을 사람 없나?"
  결국 편지를 모자 안에 다시 넣었다.
  선물이 나누어졌다. 누나 에르네스띤느에게는 자기 키만한, 아니 키보다 훨씬 더 큰
인형을, 형 훼릭스에게는 전투 준비를 완전히 갖춘, 장난감 병정 한 곽을 주었다.
  "너한테는 깜짝 놀랄 만한 굉장한 선물이 준비되어 있단다."
  르삑 부인은 홍당무에게 말했다.

  홍당무: 아아, 그렇군!
  르삑 부인: 또 그런 말을 하니? 벌써 알고 있다면 보여 줄 필요도 없겠구나.
  홍당무: 내가, 그걸 안다면 벼락을 맞아도 좋아.

  자기 말에 틀림이 없다는 듯이 엄숙한 모양으로 한쪽 손을 높이 들었다. 르삑
부인은 찬장을 열었다. 홍당무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어깨까지 찬장 속으로 집어
넣고는 천천히 사뭇 거드름을 피우면서 노란 종이에 얹은 빨간 설탕으로 만든
파이프를 꺼냈다.
  홍당무는 다소곳한 기쁨으로 얼굴을 빛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눈 앞에서 한 대 피워 보려고 생각했다.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의 부러워하는 눈초리를 받으면서(어쨌든 사람이란 모든 걸 독차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빨간 설탕으로 만든 파이프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고서
몸을 뒤로 젖히고는 왼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입을 오므리고 두 뺨이 쏙 들어가도록
힘껏 소리를 내며 빨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하늘까지 닿도록 크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이거 찬 좋은데. 연기가 아주 잘 통하는군." 
    가는 길 오는 길

  르삑 씨네 집 도련님들과 아가씨가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역마차에서
뛰어내려 저 멀리 부모님 모습을 보자, 홍당무는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두 분을 맞이하러 달려가야 할까?)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아직 너무 빨라. 여기서부터 달려가면 숨이 가쁠 거야. 게다가 무슨 일이든 너무
야단스럽게 굴어서는 안되거든.)
  조금 더 가다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달리까^5,5,5^. 아니야, 저기서부터 하자^5,5,5^.)
  이런 의문도 생긴다.
  (모자는 언제 벗으면 될까? 아빠와 엄마, 어느 분에게 먼저 키스 해야 할까?)
  그런데 형 훼릭스와 에르네스띤느는 먼저 달려가서 부모님의 따듯한 손길을 둘이서
나누어 가지고 말았다.
  홍당무가 갔을 때는 벌써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뭐라고?'
  르삑 부인은 말했다.
  "나이가 몇이기에 아직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니? '아버지'라고 부른 다음 똑바로
악수를 해라, 그러는 것이 더 점잖다."
  그렇게 말하고는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꼭 한 번만, 비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홍당무는 방학이 되어 돌아오니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만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일을 종종 있는 일이다. 곧잘 마음과는 정반대의 표정을 짓는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기숙사로 돌아가는 날(10월 2일 월요일 아침이다. 새 학기는
성령 미사로부터 시작된다), 멀리서 역마차의 방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르삑
부인은 아이들한테 달려들어 두 팔로 한꺼번에 꼭 껴안는다. 그런데 홍당무만은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는 참을성 있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한쪽
손은 마차 손잡이 끈을 쥐고는 작별 인사말도 생각해 두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이 슬픈 나머지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낮은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안녕히, 어머님!"
  의젓하게 인사를 하는 홍당무.
  "아니."
  르삑 부인이 말했다.
  "이 녀석이 제법 뭐라도 된 것 같구나. 이상한 아이야. 왜, 딴 애들처럼 엄마라고
부르기가 거북하니? 이런 아이가 또 어디 있을까? 아직 코흘리개 애송이가 남과는
다르게 굴려고 하다니!"
  그러면서도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꼭 한 번만, 비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펜대

  르삑 씨가 형 훼릭스와 홍당무를 넣은 상 마르크 기숙사 학생들은 이 기숙사에서
중학교를 다니며 수업을 받는다. 그래서 학생들은 하루에 두 번 같은 길을 오가게
된다. 날씨가 좋은 철에는 아주 기분이 상쾌하고, 또 비가 올 때라고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학생들은 비에 젖는 것을 싫어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운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왕복길은 1년 내내 학생들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오늘 아침도 그들은 천천히 걸으면서 양 떼들처럼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땅을 보며 걷고 있는 홍당무의 귀에 이런 말이 크게 들려왔다.
  "홍당무야, 저질 봐라, 저기 너의 아버지다."
  르삑 씨는 이런 식으로 아들들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을 좋아했다. 편지도 하지
않고 찾아온다. 그래서 아이들은 생각지도 않을 때에 건너편 길모퉁이에서 두 손을
뒤로 끼고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서 있는 아버지의 보습을 가끔 보게 된다.
  홍당무와 형 훼릭스는 줄에서 빠져 나와, 아버지 쪽으로 달려갔다.
  "정말이야."
  홍당무가 말했다.
  "설마하니 아빠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너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전혀 내 생각을 안 하는구나."
  르삑 씨가 말했다.
  홍당무는 뭔가 애정이 담긴 대답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만큼 가슴이 뿌듯했다. 그는 뒷꿈치를 들고 아버지한테 키스하려고 했다.
입술이 수염에 닿았다. 그런데 르삑 씨는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이 홱 머리를 뒤로
젖혀 버렸다. 볼을 노리고 있던 홍당무는 콧등을 스쳤을 뿐, 허공에다 키스한 꼴이
되고 말았다. 키스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이제는 어리둥절해져서 어째서
이런 대접을 받게 됐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아빠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 나는 보았단 말이야. 아빠는 훼릭스 형한테는
키스했잖아. 뒷걸음질도 안 치고. 어째서 나만을 피하는 거야. 나를 삐뚤어지게
하려고? 언제나 그런 데가 보이거든. 석달이나 부모 곁을 떠나 있으면 못 견디게
아빠와 엄마가 보고 싶어지는데. 강아지처럼 아빠 엄마는 내 기분을 꺾어 버리고 만단
말야.) 이런 슬픈 생각에 잠겨 있었으므로, 르삑 씨가 그리이스어는 얼마나 알게
되었느냐고 물었는데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홍당무: 내용에 따라 달라요. 글짓기보다는 해석하는 것을 잘해요. 해석이라면
짐작으로 알 수 있으니까.
  르삑 씨: 그럼, 독일어는?
  홍당무: 발음이 너무 어려워요, 아빠.
  르삑 씨: 이 녀석아, 전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프로이센 사람한테 이길 수 있겠느냐.
놈들이 지껄이는 말도 못 알아듣고서 말이야.
  홍당무: 아아, 그렇지. 그때까지는 알게 돼요. 아빠는 언제나 전쟁 전쟁하며 겁을
주시지만, 난 자신 있어요. 내가 졸업할 때까지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르삑 씨: 지난 번 시험 떼에는 몇 등을 했지? 설마 꼴찌는 아니겠지?
  홍당무: 꼴찌도 한 사람은 어차피 필요해요.
  르삑 씨: 이 녀석이! 난 너희들에게 점심을 사주려고 왔다. 오늘이 일요일이라면
말이야! 하지만 평일이라서 너희들의 공부를 방해하고 싶지 않구나.
  홍당무: 나는 그다지 할 일이 없는데, 형은 어때?
  형 훼릭스: 아주 다행스럽게 말이야, 오늘 아침 선생님이 숙제 내주는 걸
잊어버렸어.
  르삑 씨: 그렇다면 더욱더 복습을 해야지.
  형 훼릭스: 괜찮아요, 벌써 모두 외워 버렸어요, 아빠, 어제 것과 똑같으니까.
  르삑 씨: 아무튼 오늘은 다른 애들과 같이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나는 되도록
일요일까지 여기 있기로 하겠다. 그때 점심을 사주마.

  형 훼릭스가 뿌루퉁하게 화를 내건 홍당무가 입을 삐죽거리건, 헤어질 시간은
물리칠 수가 없다. 헤어질 때는 왔다.
  홍당무는 걱정스럽게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키스하는 것을 아버지가 싫어하는지 어쩐지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고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위쪽으로 내밀면서 다가갔다.
  그러나 르삑 씨는 손으로 가로막아 홍당무를 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얘야, 귀에 꽂고 있는 그 펜대로 끝내는 내 눈알을 빼 버리고 말겠구나. 내가
키스할 때는 그것을 어딘가 다른 데에 치워 둘 수 없니? 나는 봐라. 담배를 입에서
빼들지 않았느냐.'
  홍당무: 아아! 아빠, 죄송해요. 정말이에요, 이렇게 부주의하게 굴다가는 머지 않아
엉뚱한 일이 생길 거예요. 전에도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군요. 하지만 이 펜대는
그야말로 내 귀에 딱맞게 꽂혀 있기 때문에 끼워 둔 채 그만 잊어버리곤 하거든요.
적어도 펜촉은 뽑아 놓았어야 할 걸 그랬지요! 아빠, 난 아주 기뻐요. 아빠가 이
펜대가 겁났었다는 것을 알아서^5,5,5^.

  르삑 씨: 이 녀석이! 웃고 있네. 하마터면 나를 애꾸눈으로 만들 뻔했으면서도.
  홍당무: 아니예요. 아빠. 그게 아니고, 전 다른 일로 웃고 있어요. 또 내 멋대로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붉은 뺨

    1
  날마다 하는 점호가 끝나면, 상 마르크 기숙사 사감 선생님은 학생들의 큰 침실에서
나간다. 학생들은 모두 상자에라도 들어가듯이, 조그맣게 웅크리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바깥으로 밀려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다. 방 감독인 비올론느는
빙 둘러보고 모두 잠자리에 들어갔는지 확인한다. 그런 다음, 발끝으로 들어가 가만히
가스등의 심지를 작게 줄인다. 그러면 곧 이웃끼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이 베개에서 저 베개로 오가고, 움직이는 입술에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소리들이 커다란 침실에 가득 찬다. 그 속에서 이따금씩 짤막한 휘파람 소리 같은
잡음이 똑똑히 들려온다.
  이 미련스럽고도 끊임없는 이야기 소리는 마침내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정말
이러한 잡담은 쥐처럼 모습도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 모든 것이
방안의 침묵을 부지런히 갉아먹고 있는 것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비올론느는 헌 슬리퍼를 끌고 한참 동안 침대 사이를 걸어다녔다. 여기서는 한
학생의 발을 간지럽혀 보기도 하고, 저기서는 딴 학생 나이트 캡의 술을 당겨 보기도
했다. 그리고 마르소의 곁에서 멈추어 섰다. 그 애와는 매일 밤이 깊어질 때까지 긴
이야기에 열중하여 모두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개의 학생들은
이불을 조금씩 얼굴 위로 덮어 가듯이 차례차례로 이야기 소리를 작게 하다가,
마침내는 뚝 그치고 잠들어 버린다. 그런데도 방 감독은 언제까지나 팔꿈치를 침대의
쇠막대기에 힘껏 눌러댄 채, 마르소의 침대에 몸을 굽히고 있다. 팔이 저리고 피부
위를 손가락까지 스쳐 가는 근질근질한 느낌 같은 것도 아랑곳 없다.
  비올론느는 그 나름대로의 동화를 이야기하며 즐기고 비밀 이야기나 자기의
어린시절 이야기 같은 것을 거리낌 없이 하여 상대방의 잠을 깨워 버린다. 마르소와
알게 되자, 그는 이 아이가 귀여워 졌다. 이 아이의 얼굴빛이 안쪽으로부터 조명을
받은 것처럼, 부드럽고 산뜻한 붉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피부라고 말할 수 없으며, 살찐 과일과도 같았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공기의 변화로도
마치 먹지를 댄 지도의 선처럼 가드란 핏줄이 서로 얽혀 있는 게 똑똑히 보였다.
게다가 마르소는 아무 까닭도 없이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매력 있는 점을 지니고
있으므로 친구들로부터 소녀처럼 귀여움을 받고 있다. 친구 가운데 누가 곧잘 손가락
끝으로 마르소의 한쪽뺨을 눌렀다가 얼른 떼면 하얀 자국이 남는다. 이 자국은 곧
고운 분홍빛으로 물들어서 마치 맑은 물 속에 포도주를 떨어뜨린 것처럼 확 퍼져
아름다운 색깔로 바뀐다. 장미빛 콧등에서 보라빛 귀까지 미미한 색조를 나타낸다. 이
실험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마르소는 선선히 실험에 응해 주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마스소에게는 "꼬마 전구"라느니 "램프" 또는 "붉은 뺨"이니 하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런 게 마음대로 빨개질 수 있다는 능력 덕분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그와 침대를 나란히 하고 있는 홍당무는 특히 그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얼굴을
횟가루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데다 허약한 체질에 후리후리하고 괴짜인 이런 홍당무가
아프도록 힘껏 핏기 없는 피부를 꼬집어 보았댔자 헛수고다. 그런 짓을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상한 짙은 갈색 자국이 생길 뿐이며 그것도 언제 까지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가능하다면 마르소의 붉은 뺨에 밉살스러운 손톱자국이나 가득 내어,
마치 오랜지 껍질이라도 벗기듯이 확 벗겨 버리고 싶은 기분일 것이다.
  오래 전부터 매우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그날 밤은 비올론느가 오자 곧
귀를 귀울였다. 수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도 아니다. 방 감독 비올론느가 왜
저렇게 남의 눈치를 보는 모습을 하는지 그 진실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꼬마
탐정의 솜씨를 남김없이 발휘하여서 건성으로 코를 골곤 하며, 의심을 받지 않게끔
주의하며 일부러 몸부림을 치기도 했다. 마치 가위 눌린 듯 외마디 소리를 지름으로써
온 방안의 학생들 깜짝 놀라 눈을 뜨게 하였으며 홑이불을 젖히는 심한 동요를
일으켰다. 그리고 비올론느가 방을 나가자, 곧 윗몸을 일으켜서 숨을 헐떡거리며
마르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변태! 변태! "
  대답이 없다.
  홍당무는 무릎으로 서서 마르소의 팔을 잡더니 힘껏 흔들면서
  "안 들리니, 이 변태야!"
  변태에게는 안 들리는 모양이다. 홍당무는 신경이 곤두서서 또 말했다.
  "잘들 노는구나! ^5,5,5^ 내가 못 본 줄 아니? 그 녀석에게 뽀뽀를 하게 했지!
그런데도
그 녀석의 남자 첩이 아니란 말이야!"
  그는 약이 오른 흰 거위처럼 목을 앞으로 내밀고서 두 주먹을 침대 위에 얹어
놓으며 몸을 쭉 뻗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허리를 굽히고 홍당무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방 감독이 돌아온 것이다. 느닷없이 모습을 나타내며!

    2
  "그렇다."
  비올론느가 말했다.
  "나는 너한테 뽀뽀를 했다. 이봐. 마르소, 그렇게 똑똑히 말해도 괜찮아. 너는
아무것도 나쁜짓을 한 게 없는 걸. 나는 이마에 뽀뽀를 했어. 그런데 홍당무란 녀석은
저 나이에 불순하기 때문에 모르는 거야. 그 뽀뽀가 깨끗하고 순순하다는 것을
말이야.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는 그런 뽀뽀로, 내가 너를 자식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네가 바란다면 동생 같다고 말해도 좋아. 내임이 되면 저 녀석은
여기저기에 어처구니 없는 말을 퍼뜨릴지도 몰라. 저 바보 꼬마 녀석!"
  이 말을 듣고, 비올론느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사방에 울리고 있는 동안, 홍당무는
자고 있는 체한다. 그러면서도 머리만은 쳐들어서 그 다음을 더 들어 보려고 했다.
  마르소는 숨소리를 죽이고서 방 감독의 말을 듣고 있다. 방 감독이 하는 말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비밀이 탄로날까봐 겁이 나는 듯 벌벌
떨고 있다. 비올론느는 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또렷하지 않은,
멀리서 들려오기라도 하는 것 같은 아주 애매한 말투이다. 홍당무는 돌아 누울 용기가
없어서 허리를 가볍게 움직이며, 조금씩 몸으로 다가 갔으나 이미 아무말도 들리지
않았다. 주의력을 너무도 기울여서 긴장했기 때문에 귀에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깔때기 모양으로 펼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런 힘든 기분을 전에도 이따금씩 경험한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문밖에서 엿보느라 한쪽 눈을 열쇠 구멍에 딱 붙여 놓고 있었다. 그리고 열쇠
구멍을 좀더 크게 하여 갈고리 못처럼 해서, 보고 싶은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보고 싶었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비올론느는 이런 말을 아직도 되풀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이지, 내 애정은 정말 순수한 것이야. 저 바보 꼬마 녀석은 모른단 말이야."
  이윽고 방 감독은 그림자처럼 살며시 마르소의 이마 위에 몸을 굽혀 뽀뽀를 하고는
붓으로 쓰다듬기라도 하는 듯이 짧은 수염 끝을 이마에 비벼 댔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서 그 자리를 물러 났다. 홍당무는 침대 사이를 빠져 나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비올론느의 한쪽 손이 어느 긴 베개에 닫자 잠이 깬 그 학생은
숨을 깊게 쉬면서 돌아누웠다.
  홍당무는 오랫동안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또 별안간 비올론느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벌써 마르소는 침대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는 담요를
눈 위에까지 덮어쓰고 있지만, 사실은 조금도 자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자신도 분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건 조금도 꺼림칙한 짓이 아니다. 걱정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지만, 한 편 홑이불을 뒤집어 쓴 어둠 속에는
비올론느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이때까지 여러 가지 꿈속에서 본 그를
흥분시킨 여자처럼 상냥했다.
  홍당무는 기다리다 지치고 말았다. 양쪽 눈꺼풀이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딱
달라붙었다. 꺼져가는 가스등의 불을 가만히 있으라고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가스등의 심지에서 피식피식 튀어나오는 작은 거품 같은 불빛을 세 개째 세고
나서,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3
  이튿날 아침, 모두가 세면실에서 수건 끝을 약간만 찬물에 적셔서 추위에 약한
광대뼈를 살짝 살짝 닦고 있을 때 홍당무는 심술궂은 눈초리로 마르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가장 잔인한 말투로, 잇소리를 내면서 또다시 그를 욕하기 시작했다.
  "변태! 야, 이 변태야!"
  마르소의 뺨이 빨게 졌다. 그러나 화도 내지 않고,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
  방 감독이 손 검사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두 줄로 서서 처음에는 손등, 그 다음에는
재빨리 뒤집어서 기계적으로 손바닥을 보였다. 그리고는 곧 호주머니 안이며 바로
옆에 있는 털이블 밑의 미지근한 곳이나 따뜻한 곳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여느 때의
비올론느는 자세히 조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무조건 홍당무의 손이
깨끗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 번 더 수도에 가서 씻고 오라는 말에, 홍당무는 버럭 화를
내었다. 과연 푸르죽죽한 얼룩 같은 것이 눈에 뛰었다. 그러나 홍당무는 그것이 손이
트기 시작하는 징조라고 우겼다. 틀림없이 그는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비올론느는
홍당무를 사감 선생에게 데리고 가야만 했다.
  일찍 일어나는 사감 선생은 틈틈이 낡은 녹색 서재에서 상급생에게 가르칠 역사
수업준비를 하고 있다. 테이블 덮게 위에 굵직한 손가락 끝을 꾹꾹 누르면서, 그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로마 제국의 몰락, 가운데가 터어키 사람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그 앞이 근대사 인대 이것은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며 또
언제까지라도 끝나는 일이 없다.
  헐렁한 실내복을 입고 있는데 수를 놓은 장식끈이 늠름한 가슴을 휘감고 있어서
마치 둥근 기둥을 졸라맨 밧줄 같은 느낌이다. 이 사람은 과식하는 버릇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얼굴은 살이 쪄서 통통하며 늘 기름기가 번지르르하다. 부인에게도 거센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 할 때는 목둘레의 주름이 칼라 위에서 느릿한 율동으로
굽이치고 있다. 그리고 둥근 눈과 짙은 콧수염도 이 남자의 특성이다.
  홍당무는 그의 앞에 서 있다. 모자는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있는데 이것은 행동이
자유롭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감은 무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볼일이냐?"
  "선생님, 방 감독이 내 손이 더럽다고 선생님께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거짓말
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한 번 더 양심에 맹세한다는 태도로 홍당무는 두 손을 뒤집어
보였다. 처음에는 손등, 다음에는 손바닥, 다시 다짐하듯이 두 번째로는 먼저 손바닥,
다음은 손등.
  "뭐라고! 거짓말이라고."
  사감은 말했다.
  "근신 사흘이다. 알겠나!"
  "선생님."
  홍당무는 말했다.
  "방 감독은 저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뭐? 미워하고 있다고! 근신 팔 일이다. 알겠나!"
  홍당무는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다. 이런 부드러운 방법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어떠한 맞설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다. 꿋꿋한 자세로 두 다리를 딱 붙이고 서서 따귀
한 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대담무쌍한 얼굴이다.
  왜냐하면 사감 선생에게는 이따금씩 완강하게 반항하는 학생을 손등으로 한 대
후려치는 악의 없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이 주먹질을 미리 눈치채고 살짝 몸을
굽힌다. 이것이야말로 얻어 맞게 된 학생이 자신의 솜씨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감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게 되며 학생들은 킥킥 웃는다. 하지만 사감은 한
대 더 후려 갈기려고는 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는 하고, 앙갚음을 하면 그의
위신이 허락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렸던 뺨을 똑바로 때리거나 아니면 손찌검을
전혀 안하거나 그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생님."
  홍당무는 정말 대담하고도 의기 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방 감독과 마르소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사감의 눈이 두 마리의 날 벌레라도 뛰어든 것처럼 껌벅껌벅 하기
시작했다.
  두 주먹을 테이블 끝에 힘껏 눌러 대고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홍당무의 가슴
한복판에 머리가 부딪칠 만큼 쑥 내밀고 목구멍에서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홍당무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앙리 마르탱씨가 쓴 두툼한 한 권의 책,
예를 들면 이런 물건이 정통으로 날아올 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자세하게 물어온 것이다.
  사감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목의 주름살은 한 가닥도 남지 않고 한군데로 모여서
가죽으로 된 두툼한 고리처럼 단 하나의 살덩이가 되어 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머리가 비스듬히 얹혀 있다.
  홍당무는 망설였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까지,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들을 굽히고는 누가 보아도 부자연 하고
어색한 모습으로 다리 사이에 낀 모자를 찾았다. 찌그러진 모자를 꺼내어 더욱더 몸을
굽혀 움츠렸다. 모자를 턱 밑까지 가져가,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가엾을 만큼
조심스럽게 그 원숭이 같은 얼굴을 솜이 든 모자로 덮어 씌우고 말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4
  그날 간단한 조사가 있은 뒤에 비올론느는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비장한 출발 광경이었다. 의식이라고 해도 상관 없을 정도였다.
  "또 돌아오겠다."
  비올론느는 말했다.
  "좀 쉬어야겠어."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이 기숙사는 자주 직원을 갈아
치웠다. 곰팡이라도 피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 감독도 자주 갈아
버린다. 비올론느도 다른 방 감독과 마찬가지로 밀려난 것이다. 그리고 우수한 만큼
나가는 것도 빨랐다. 그는 대부분의 학생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었다. "그리이스 말
연습장, 이름 xxx"이라는 노트 겉면의 표제를 쓰는 솜씨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큰 글자는 간판 글자처럼 균형 있게 쓰여졌다. 걸상을 모두 비운 채 학생들은 방
감독의 책상 주위에 빙 둘러섰다. 녹색반지가 끼워진 그의 깨끗한 손이, 종이 위를
화사하게 맴돈다. 페이지 밑에 기분 내키는 대로 사인을 한다. 이 사인은 잔잔한 물에
돌을 던졌을 때처럼 규칙적이면서도 거침없는 아름다운 선으로 이루어진 물결과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물결과 소용돌이는 꽃무늬 도장이 되기도 하는 멋진
걸작품이 되었다. 꽃무늬의 꼬리는 구불구불 굽이 쳐서 꽃무늬 도장 속으로 사라진다.
이 꼬리를 찾아내려면 바로 그 옆에서 바라보면서도 오랫동안 시간이 걸리지 않으면
안된다. 꽃무늬 도장 모두가 펜을 떼지 않고 단숨에 그려진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떤 때 비올론느는 복잡하게 선을 이리저리 얽히도록 멋지게 그려 놓고는
이것에 송진 장식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이들은 오랫동안 감탄하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쫓겨 갔으므로 학생들은 무척 슬퍼했다. 모두들 기회만 있으면 사감에게
불평을 털어 놓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즉 뺨을 볼록하게 하여 입술로 붕붕 벌떼 나는
소리를 내면서 마냥 불만의 의사 표시를 하자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들은 꼭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다 같이 슬퍼했다. 학생들이 섭섭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비올론느는 보라는 듯이 일부러 쉬는 시간에 떠났다. 그가 트렁크를 짊어진
사환을 데리고 운동장에 나타나자 아이들을 우르르 몰려들었다. 비올론느는 악수를
하고 모두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면서 애정을 표현하곤 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둘러싸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미소 띤 얼굴에 눈물을 글썽이며, 프록코트 자락을
찢기지 않으려고 앞자락을 끌어 당기느라 애쓰고 있었다. 철봉에 매달려 있던 몇
학생은 공중회전을 도중에 멈추고는 땅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입을 멀리고 이마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진땀으로 흠뻑 젖은 손가락을 잔뜩
벌리고 있었다. 운동장 안을 그냥 뛰어 다니던 얌전한 아이들은 작별인사의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사환은 트렁크가 무거워 몸을 굽히고는 비올론느와의 사이를 조금
벌리기 위해 멈추어 섰다. 이것을 보자 잘됐구나 하고 아주 작을 학생이 사환의 흰
겉옷에 젖은 모래 속에 처박았던 손가락을 덥석 문댔다. 마르소의 뺨은 그림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장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처음으로 마음의 괴로움이라는 걸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 감독에 대하여 사촌 여동생이 느끼는 정도의 아쉬움을
얼마만큼 느끼고 있는 걸 감출 수가 없었으며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울렁거려,
모두들로부터 불안스러운 듯이 수줍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비올론느는 서먹서먹한
빛은 조금도 없이 마르소 쪽으로 향해 갔다. 바로 그때 와장창 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모든 학생들의 눈길이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홍당무의 천연덕스럽고도
야만스러운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울안에 갇힌 파리한 작은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에 띄었으며 흰 이빨이 온통 드러나
있었다. 오른손을 삐죽삐죽한 유리창의 깨진 조작 사이로 내밀고는 피투성이가 된
주먹으로 비올론느를 위협했다.
  "바보 꼬마 자식!"
  방 감독은 소리쳤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
  "왜?"
  홍당무는 소리 질렀다. 힘껏, 또 주먹으로 유리창을 한 장 더 깨면서,
  "그 녀석한테는 뽀뽀를 하면서 왜 나한테는 뽀뽀를 안했지?"
  그리고는 베인 손에서 흐르는 피를 얼굴에 문지르며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말이야, 이렇게 하면 붉은 뺨이 될 수 있다는 말이야!" 
        이

  형 훼릭스와 홍당무가 상 마르크 기숙사에서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 르삑
부인은 곧장 둘에게 발을 씻게 했다. 그럴 필요는 석달 전부터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발을 한번도 씻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숙사 규칙의 어느 항목에도 그런
경우에 대해서는 규정이 없다.
  "네 발은 보나마나 새까맣겠지, 홍당무야!"
  르삑 부인은 말했다.
  정말 그녀가 말한 그대로였다. 홍당무의 발은 언제나 형 훼릭스의 발보다 새까맣다.
왜 그럴까? 둘이는 나란히 언제나 같은 규칙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맡으며 생활하고
있는데^5,5,5^ 물론 석달이 지나면 형 훼릭스도 남에게 깨끗한 발은 보일 수는 없다.
그런데 홍당무는 스스로도 시인하듯이 이미 자기 발인지 아닌지 조차도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는 요술쟁이처럼 잽싸게 물 속에 발을 집어 넣는다. 언제나
양말을 벗었는지, 양동이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형 훼릭스의 다리 사이로 언제
끼어들었는지 모를 만큼 재빨랐다. 그러자 얼마 안가서 땟국이 네 개의 발 위로 헝겊
조각처럼 퍼져 갔다.
  르삑 씨는 어느 때처럼 방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다. 아들들의 성적표를, 특히
교장선생이 직접 쓴 소견을 몇 번이나 연거푸 읽고 있다. 형 훼릭스에 대해서는
  "경솔하지만, 머리가 영리해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또 홍당무에 대해서는
  "하겠다는 생각을 갖기만 하면 곧 뛰어난 성적을 나타낼 것이다. 다만 하겠다는
생각을 항상 보여주지 않는다."
  홍당무가 꼬래 뛰어난 성적을 나타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족들은 모두
우스워졌다. 한 편 홍당무는 무릎 위에 팔을 괴고는 물 속에 담금 두 다리를 쭉 뻗어
때가 붇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모두가 자기를 살펴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검 붉은
머리카락이 너무 길게 자라서 오히려 더 추해 보였다. 르삑 씨는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성품이어서 아들을 다시 만난 기쁨을 장난으로 밖에는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쪽으로 갈 때는 홍당무의 귀를 손가락으로 툭 퉁겼다.
돌아올 때는 팔꿈치로 툭 쳤다. 그러자 홍당무는 깔깔 웃었다.
  그러다가 르삑 씨는 홍당무의 '더벅머리'속에 손을 쑤셔 넣어 이라도 잡겠다는 듯이
손톱을 탁탁 퉁겼다.
  르삑 씨가 가장 즐겨하는 장난인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손톱으로 정말 이를 한 마리 죽였다.
  "야! 신통하게도 들어 맞았다."
  르삑 씨는 말했다.
  "잡았다, 잡았다."
  그러나 조금 기분이 언짢아져 홍당무의 머리카락에 손을 닦고 있는데 르삑 부인이
화가 난 듯이 양팔을 번쩍 쳐들었다.
  "그럴 줄 알았지."
  하도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말했다.
  "아아! 이렇게 더러울 수가 있담? 에르네스띤느, 빨리 대야를 가지고 오너라. 이제
네 일거리가 생겼다."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대야와 참빗과 접시에 가득 담은 식초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이 사냥이 벌어졌다.
  "내 머리부터 빗겨 줘!"
  형 훼릭스가 외쳤다.
  "틀림없이 저놈한테서 옮았을 것이 뻔해."
  그는 손가락으로 미친 듯이 머리를 긁어 대면서, 머리를 몽땅 담글 테니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다 달라고 보챘다.
  "오빠, 조용히 하지 못해?"
  시중들기를 좋아하는 에르네스띤느는 말했다.
  "아프게 하지 않을게."
  그녀는 훼릭스의 목에 타월을 두르고는 어머니처럼 차분한 솜씨와 끈기를 보여주고
있다. 한 손으로 머리를 헤치고는 다른 한 손으로 살며시 빗어 갔다. 그리고 입을
삐죽거려 비웃는 태도도 없고 이 사냥을 무서워하는 빛도 보이지 않으며 열심히 이를
찾고 있다.
  그녀가
  "여기, 또 한 마리"
  라고 말할 때마다, 형 훼릭스는 양동이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홍당무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홍당무는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오빠는 끝났어."
  에르네스띤느는 말했다.
  "일곱 마리인가 여덟 마리 밖에 없었어. 세어 봐. 홍당무의 것은 우리 모두 세어
볼 테니."
  빗을 한 번 대자마자, 홍당무는 그 이상이 되었다. 에르네스띤느는 마치 이의 집을
만난 것처럼 생각했지만 정말은 이가 우글거리고 있는 곳의 일부분을 아무렇게나
빗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 홍당무를 둘러쌓다. 에르네스띤느는 점점 신이 났다.
르삑 씨는 뒷짐을 지고서 구경꾼처럼 호기심에 찬 눈으로 보고 있다. 르삑 부인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다간 삽과 갈퀴를 가지고 와야겠구나."
  형 훼릭스는 몸을 굽혀 대야를 흔들면서 떨어지는 이를 받고 있다. 이는 비듬에
섞여서 떨어졌다. 잘린 속눈썹처럼 가느다란 다리가 꼼지락거리는 것이 똑똑히
보인다. 대야의 물이 흔들리는데 따라서 이리저리 밀려 다니다가 끝내는 식초 때문에
죽어 버린다.

  르삑 부인: 홍당무야, 우리는 네가 어떤 배짱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그 나이에
다 큰 아이가 부끄럽지도 않니? 까마귀 같은 발은 봐 줄 수도 있어. 여기서 처음
보았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이야 물어 뜯는데도 선생님한테 부탁에서 잡아 달라고도
하지 않고, 가족한테도 잡아 달라는 말도 안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산
채로 이한테 뜯어 먹히는 기분이 어떠냐? '더벅머리' 속이 온통 피투성이구나.
  홍당무: 빗에 긁혀서 그런 거예요.
  르삑 부인: 어머나, 빗에 긁혔다니. 그게 누나한테 하는 고맙다는 인사말이야.
그렇니? 에르네스띤느야. 이 양반은 성미가 아주 까다로우신 분이어서 이발사인
누나에게 까탈을 부리는 구나. 얘야, 에르네스띤느, 자기가 좋아서 고생하고 있는
아이니까 이 한테 잡아 먹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구나.
  에르네스띤느: 엄마, 오늘은 그만하죠. 가장 큰것들은 잡아 버렸으니 내일 한 번 더
뒤져 보겠어요. 하지만 저는 오데코롱이라도 뿌려야겠어요.
  르삑 부인: 홍당무야, 너는 대야를 뜰에 가져다가 담 위에 올려놓아라. 온 마을들이
모두 구경하고 나면 너도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될 테니까.

  홍당무는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것을 햇볕 아래 놓고는 지켜보고 있다. 맨
처음 가까이 온 것이 마리 나넷드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홍당무를 보기만 하면
언제나 멈춰 서서 근시의 심술궂은 눈으로 뚫어지게 살펴 본다. 검은 모자를 흔들며
뭔가 알아내려고 든다.
  "도대체, 이제 뭐야?"
  나넷드 할머니가 말했다.
  홍당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대야 속을 들여다 보았다.
  "팥이냐? 나는 이제 눈이 똑똑히 안 보인다. 우리 아들 삐에르가 안경을 사다주면
좋으련만."
  손가락으로 만져 본다. 맛이라도 보려는 듯이 하지만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니? 잔뜩 부어 가지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이야. 틀림없이 꾸중을 듣고 벌을 서고 있는 게지. 알겠니, 나는 너의 할머니는
아니지만 생각하기는 하고 있단다. 얘야, 나는 네가 가엾다. 틀림없이 식구들이 너를
못살게 구는 모양이지?"
  홍당무는 힐끗 주위를 둘러보고 어머니가 못들은 것을 알자. 마음을 놓고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예요. 할머니한테 상관 있는 이야기 인가요? 할머니
일이나 걱정하세요. 내 일은 상관 말고요."


        브루터스처럼

  르삑 씨: 홍당무야, 너는 지난 해에는 내가 기대한 만큼 공부를 안했구나. 성적표에
좀더 하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쓰여 있다. 너는 공연히 공상에 잠기거나, 읽어서는
안되는 책을 읽고 있단 말야. 기억력이 좋아서 시험에는 꽤 좋은 점수를 따고 있지.
그러나 숙제를 게을리 하고 있어. 홍당무야, 좀더 열심히 해보려는 생각을 가져라.
  홍당무: 두고 보세요, 아빠. 아빠 말대로 지난 해에는 내가 조금 게으름을 피웠어요.
하지만 올해는 열심히 하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전과목 다 일 등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예요.
  르삑 씨: 아무튼 열심히 해라.
  홍당무: 참 아빠도! 너무 기대가 커요. 지리와 독일어와 물리와 화학은 가망이 없을
것 같아요. 아주 잘하는 녀석이 두세 명 있거든요. 그 아이들은 다른 과목은
형편없으면서도 그 과목만은 뛰어나요. 그 애들만은 도저히 앞지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아빠, 프랑스어 글짓기로는 우리 반에서 첫째가 될 작정이에요. 그리고는 계속
유지할 생각이에요. 만일 노력해서 첫째가 못되더라도 조금도 나를 나무라지는
마세요. 그래도 나는 부루터스처럼 자랑스럽게 외칠 수가 있어요.
  "오오 미덕이여! 너는 한갓 이름에 불과하도다."라고 말이예요.
  르삑 씨: 그래, 홍당무야. 너는 틀림없이 모두를 휘어잡을 것이다.
  형 훼릭스: 아빠, 홍당무가 뭐랬지?
  누나 에르네스띤느: 나는 못 들었어.
  르삑 부인: 나도야. 어디 한 번 더 말해 보렴, 홍당무야.
  홍당무: 응, 아무것도 아냐.
  르삑 부인: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하지만 너는 우쭐해서 한참 동안 열을
내어 이야기하지 않았니?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휘둘러 대며 말이야. 그 목소리는
동구 밖까지 들렸겠다. 그 말을 한 번 더 되풀이해 보렴! 틀림없이 모두를 위한 좋은
말일 테니.
  홍당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엄마.
  르삑 부인: 천만에. 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했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홍당무: 엄마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르삑 부인: 그렇다면 더 듣고 싶구나. 자, 똑똑한 척은 그만 하고, 내 말을 들어라.
  홍당무: 그렇담, 말하겠는데, 엄마, 나는 아빠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했어요. 아빠가
나에게 친절히 충고를 해 주시기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던 거예요. 고맙다는
표시로, 부루터스라는 로마 사람처럼 미덕에 호소해 보겠다는 생각 말이에요.
  르삑 부인: 무냐, 시시하게시리^5,5,5^. 제발 아까 말한 그대로를 한 구절도 빼지
말고 한 번 더 말해 보려므나. 나는 뭐 페루 나라를 달라듯,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엄마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잖니?
  형 훼릭스: 내가 말해 볼까, 엄마?
  르삑 부인: 아니다, 홍당무가 먼저 하고 나서 네가 해야지. 양쪽을 비교해 볼 테니.
자, 홍당무야, 빨리 해라.
  홍당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머뭇거리면서) 미, 미, 미덕이란 한갓 이름에
불과하도다.
  르삑 부인: 형편없구나. 이 개구쟁이한테서는 아무 얘기도 못 듣겠어. 엄마를 기쁘게
해주기보다는 얻어맞는 편이 낫겠다.
  형 훼릭스: 저, 엄마. 얘는 이렇게 말했어요(눈알을 휘둥그리면서 모두에게 도전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 만일 내가 프랑스어 글짓기를 일등을 차지하지 못하면(볼을
잔뜩 부풀리고 발을 구르면서) 나는 부루터스처럼 외칠 것이다.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오오, 미덕이여! (들었던 팔을 허벅다리 위에 탁 내리며) 너는 한갓 이름에
불과하도다,
이렇게 말이에요.
  르삑 부인: 잘했다, 잘했어. 정말 근사하구나. 홍당무, 축하한다. 하지만 남을
흉내내는 일은 결코 진짜만 못한 것이란다. 그런만큼 난 네가 고집을 부린 게
언짢구나.
  형 훼릭스: 하지만 홍당무, 그렇게 말한 것이 정말 부루터스였니? 카토가 아니었니?
  홍당무: 틀림없이 부루터스였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친구 하나가 내민 칼에
몸을 던져 죽은"거야.
  누나 에르네스띤느: 홍당무 말이 맞아. 나도 이제 생각인 난다. 부루터스는
미치광이 흉내도 내고, 지팡이 속에 황금을 숨기기도 했어.
  홍당무: 틀려, 누나. 얘기가 뒤죽박죽이 되잖아. 누나는 내가 말하는 부루터스와
다른 부루터스를 혼동하고 있는 거야.
  누나 에르네스띤느: 그랬었나? 하지만, 소피 선생님이 하시는 역사 강의는 절대로
너희 중학교 선생님보다 뒤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
  르삑 부인: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떠냐. 싸움은 그만 해요. 중요한 것은 우리 집에도
한 사람의 부루터스가 필요하다는 것이야. 그런데 이때까지 조금도 이런 명예로운
일을 통 모르고 있었지 뭐냐. 자, 새로운 부루터스를 존경해다오. 주교님처럼 라틴어로
말씀하시지만, 귀머거리가 있더라도 미사의 말을 두 번 되풀이해 주지는 않는단다.
뒤로 돌아 보아라. 앞에서 보니 오늘 갈아입은 새 옷에 얼룩이 져 있어. 뒤에서 보니
바지가 찢어졌구나. 오오, 하느님, 도대체 쟤는 또 어디에 틀어박혀 있다가 왔을까요?
아무튼 저 부루터스 홍당무의 괴상한 모습을 차근차근히 바라보세요! 정말 감당해 낼
수 없는 개구쟁이(부루터스)란 말예요. 정말! 
    홍당무가 르삑 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인, 르삑 씨가 홍당무에게 보낸 답장"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상 마르크 기숙사에서)
  아빠
  방학 동안의 고기잡이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여 내 온몸의 피가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허벅다리에 큰 종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반듯이
누운 채로 간호원이 찜질을 해줍니다. 종기는 터질 때까지는 아프지만, 터지고 나면
아주 깨끗하게 나아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병아리새끼처럼 자꾸만 늘어갑니다.
하나가 나으면 새 것이 세 개나 생기는 판입니다. 하지만 대수롭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홍당무 올림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너는 첫 영성체를 앞두고 교리문답을 배우고 있으니, 사람이 종기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다만 너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지. 예수 그리스도는 두 손과 두
발을 못으로 박혔는데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못은 종기가 아닌
진짜 못이었다. 기운을 내라!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아빠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금니 한 개가 또 났습니다. 아직 나이로 말하면
이릅니다만, 이것은 분명히 조숙한 사랑니입니다. 나는 한 개만으로 그치지 않지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 품행을 단정히 하여 열심히 공부를 함으로써 늘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홍당무 올림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네 사랑니가 나오고 있을 바로 그 무렵에 나의 이가 한 개 흔들리기 시작했단다.
어제 아침, 드디어 빠지고 말았구나. 이리하여 너의 이가 한 개 새로 나오면 내 이는
한 개 빠진다. 그러니까 아무 변화 없이 가족들 이의 합계는 언제나 같은 셈이다.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아빠
  상상해 보세요. 어제는 우리에게 라틴어를 가르치시는 작크 선생님의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은 의논해서 만장일치로 반 전체의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나를
대표로 뽑았습니다. 이 영광이 너무도 자랑스러워 나는 긴 연설문을 준비했습니다.
적당히 라틴어도 인용해서 짜넣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족할 만한 연설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큼직한 양면괘지에 깨끗이 정서를 했습니다. 이윽고 그날 친구들이
"빨리 해, 빨리!"하고 속삭이는 바람에, 나는 작크 선생님이 학생들을 보지 않고 있는
때를 틈타 교단 쪽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종이를 펼치고, 소리를 높혀서
  "존경하는 선생님!"
  하고 시작한 순가, 작크 선생님이 벌떡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빨리 자리로 돌아가지 못할까!"
  내가 어떻게 도망쳐서 자리로 돌아갔는지 상상하실 수 있겠지요. 친구들은 모두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작크 선생은 발끈 화를 내어 나에게 명령했습니다.
  "연습 문제를 번역해 봐."
  아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네가 장래 국회의원이라도 되면 틀림없이 그런 일을 많이 당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제 구실이 있는 법이다. 선생님이 교단에 서는 것은 분명히 연설을 하기
위해서지, 결코 너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아빠
  이제 막 그 토끼를 지리 역사의 르그리 선생님께 전해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이 선물을 기뻐하시는 모양으로 아빠한테 매우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비에
젖은 우산을 그대로 들고 들어갔더니, 선생님은 얼른 내 손에서 그것을 받아 손수
현관으로 가져가시더군요. 그리고 나서 선생님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학년 말에는 틀림없이 일등상을 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빠, 좀처럼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죽
서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르그리 선생님은 다른 점에서는 매우 친절했지만, 한
번도 나에게 의자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잊으신 것일까요, 아니면 예의를 몰라서 그랬을까요?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빠, 아빠의 의견을 꼭 듣고 싶습니다.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너는 언제나 불평만 하고 있구나. 작크 선생님이 제자리로 돌아가랬다고 해서
투덜거리고, 르그리 선생님이 세워 두었다고 해서 또 투덜거리니 말이다. 너는 어리기
때문에 어른 대접을 받기에는 아직 무리야. 그리고 르그리 선생님이 너한테 의자를
권하지 않았더라도 이러쿵 저러쿵 해서는 못 쓴다. 틀림없이 네가 꼬마이기 때문에
벌써 의자에 앉아 있으리라고 착각하셨을 것이다.

  홍당무로부터 르삑 씨에게
  아빠
  파리로 가신다교요? 아빠와 함께 파리 관광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습니다. 파리는
나도 구경하고 싶은 곳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만이 따라가겠습니다. 학교 공부
때문에 이번 여행은 단념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회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책을 한두 권 사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갖고
있는 책은 벌써 모두 외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 책이라도 좋으니 아빠가 골라
주세요. 사실 책이란 어느 것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내가 특별히 갖고
싶은 것은 후랑소아 마리 아루에 드 볼떼르의 "앙리아드"와 장자크 루소의
"누벨르엘로이즈" 입니다. 아빠가 이 두 권을 사다 주시더라도(파리에서는 책값이
아주 싸답니다.) 방 감독이 빼앗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르삑 씨의 답장
  홍당무야
  네가 편지에 써서 보낸 작가 역시 너나 나와 다름없는 인간이란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 역시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도 책을 써서 그것을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르삑 씨로부터 홍당무에게
  홍당무야
  오늘 아침에 받은 너의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지만,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우선 문장도 여느 때와 다르고 말하고 있는 내용도
괴상망측해서 너에게나 나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언제나 너는 자세히 온갖 일들을 가족들에게 알려 주었지. 성적 순위라든가 선생님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점과 단점, 새로 온 반 친구의 이름, 속옷 같은 게 해어졌다든가,
잘 잤느니 못 잤느니 식욕이 없느니 하는 것들을 써보내곤 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일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의 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대체 어째서 이 한겨울에 봄 이야기를 썼니? 날짜도 없고, 내게 부친 것인지,
아니면 개한테 보낸 것인지 그것마저 알 수가 없구나. 글씨체도 어쩐지 여느 때와는
다르고 행수라든가 그 많은 대문자 등. 나로서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요컨대
너는 누군가를 놀릴 작정인 모양 같구나. 그러나 놀림을 받는 것은 너 자신이 된 것
같다. 나는 너를 크게 나무랄 생각은 없다. 다만 주의를 시킬 뿐이다.

    홍당무의 답장
  아빠
  지난번의 편지에 대해서 먼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신 것 같은데,
그것은 "시" 입니다. 
        헛간

  이 조그마한 헛간은 닭이나 토끼나 돼지가 번갈아 가며 살아왔는데, 지금은 텅 비어
있어 여름 방학 동안은 홍당무가 전적으로 소유권을 쥐고 있다. 그는 쉽게 거기로
들어간다. 헛간에는 이제 문이 없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오르띠 풀이 우거져서 입구를
가로막고 있으므로 홍당무가 엎드리면 꼭 숲같이 보인다. 잔잔한 먼지가 땅바닥을
덮고 있다. 벽의 돌들은 습기로 번지르하게 빛나고 있다. 홍당무의 머리카락은 천장에
닿는다. 거기 있으면 참으로 마음이 편하다. 귀찮은 장난감 같은 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직 공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친다. 그가 즐겨하는 놀이는 헛간의 네 구석에
엉덩이로 둥지를 파는 일이다. 흙손 대신 먼지를 긁어모아 그것으로 둥지와 엉덩이
사이의 빈 곳을 메워 둥지 속에 옴폭 들어앉는 것이다.
  미끈미끈한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오그린 채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고 둥지 위에
앉아 있으면, 아늑한 기분이 된다. 정말 이보다 더 자리를 작게 잡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는 세상 일을 잊어버린다. 이제 세상 같은 건 두렵지 않다. 그의 마음을
헝클어 놓는 것은 우르릉 번쩍 하며 벼락치는 소리뿐일 것이다.
  어떤 때는 그릇 씻은 개숫물이 바로 옆 수채구멍으로 폭포처럼 쏴아쏴아
흘러내리고, 어떤 때는 뚝뚝 한 방울씩 흘러간다. 그리고 그에게 찬바람을 보내 준다.
  그런데 느닷없이 경보가 울린다.
  "홍당무는 어디 있나? 홍당무는 어디 있어?'
  누군가의 머리가 기웃거리며 나타난다. 홍당무는 작은 공처럼 몸을 웅크려서
땅바닥과 벽 사이로 틀어박힌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입을 벌린 채, 시선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두 개의 눈이 어둠 속을 살피고 있는 것을 느낀다.
  "홍당무야, 게 있니?"
  홍당무는 관자놀이를 울툭불툭이며 겁을 먹고 있다. 하마터면 나지막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올 뻔했다.
  "없구나, 그 개구쟁인, 대체 어디 갔을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멀어져 갔다. 홍당무의 몸은 긴장이 조금 풀려서 다시 편한
자세가 된다.
  고의 공상은 또다시 긴 침묵의 길을 마구 달린다.
  그러자 떠들썩한 소리가 귀에 가득 들이닥친다.
  천장에서 날벌레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서 퍼덕거리고 있었다. 거미는 줄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내려오고 있다. 배는 빵 속처럼 하얗다. 잠깐 동안 거니는 불안한 듯이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있다.
  홍당무는 엉덩이를 살짝 들고는 거미의 동정을 살피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마지막
장면을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이 비극을 자아내는 거미가 덤벼들어 별 모양의 다리를
오므려서 먹이를 죄기 시작하자, 홍당무는 정신없이 벌떡 일어섰다. 마치 자기 몫을
내놓으라는 듯이.
  그러나 아무 일도 없다.
  거미는 다시 위로 되돌아갔다. 홍당무도 다시 제자리에 앉아서 공상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어렴풋한 토끼의 마음 같은 영혼 속으로 .
  잠시 뒤 모래를 품어서 무거워진 한 줄기의 냇물처럼 그칠 줄 모르는 그의 공상은
경사진 곳이 없어지자, 물결이 멈추어 물웅덩이를 이루면서 괴고 만다. 
        고양이

         1

  홍당무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가재를 잡는 데는 고양이 고기만큼 좋은 것이
없다. 닭의 내장보다도 소, 돼지의 고기 조각보다도 가장 좋다.
  그런데 그는 고양이를 한 마리 알고 있었다. 늙고 병들어 골골하며 여기저기 털이
숭숭 빠져 아무도 상대를 하지 않는 고양이다. 홍당무는 우유를 한 잔 대접하겠다고,
그 고양이를 자기 헛간으로 초대했다. 거기라면 주인과 손님 단둘뿐이다. 쥐가 한
마리쯤 위험을 무릅쓰고 벽 밖으로 모험을 하러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홍당무는 우유
한 잔밖에는 내놓지 않을 작정이다. 우유잔을 헛간 구석에 놓고 고양이를 그쪽으로
떠밀며 말했다.
  "자, 실컷 먹어라!"
  등을 쓸어 주면서 여러 가지 다정스러운 이름으로 불러 주기도 했다. 혓바닥의
재빠른 움직임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가엾은 녀석.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마냥 즐겨라."
  고양이는 우유잔을 바닥까지 깨끗이 핥고는 가장자리까지도 말끔하게 싹싹 핥았다.
그리고는 달콤한 입술을 혀끝으로 샅샅이 쪽쪽 빨았다.
  "벌써 다 먹었니, 정말 배가 부르냐?"
  홍당무는 연거푸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아마, 한 잔 더 먹고 싶겠지, 하지만 이것밖에는 못 가지고 왔어. 어차피 조금
빠르거나 늦는 것의 차이 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고양이의 이마에 엽총의 총부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에 홍당무 자신도 아찔해졌다.
  헛간마저 날아간 듯 싶었다. 연기가 사라진 뒤 자세히 보니 고양이가 한쪽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다. 머리의 절반은 어디론가 날아갔다. 피가 우유잔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죽지 않은 모양이구나."
  홍당무는 말했다.
  "제기랄, 똑바로 정확하게 겨누었는데."
  홍당무는 꼼짝도 할 수 없다. 한쪽 눈만이 노랗게 빛나고 있어 몹시 불안스럽다.
고양이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아직도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전혀
달아나려고는 하지 않는다. 피를 한 방울도 땅으로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우유잔 안에만 철철 흘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홍당무도 풋내기는 아니다. 이제까지 몇 마리나 되는 들새와 가축을
죽였으며, 개도 한 마리 죽인 적이 있다. 장난 삼아 한 적도 있고 다른 사람을
돕느라고 같이 죽인 적도 있다. 그러므로 요령은 잘 알고 있다. 만약 짐승이 좀처럼
죽지 않을 때에는 재빨리 처치해 버려야 한다. 용기를 내어서 거칠게, 필요하다면
맞붙을 위험도 무릅써야 한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잘 알고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동정심이 선뜻 머리를 쳐든다. 그래서 겁쟁이가 된다. 때를 놓쳐
끝내 해치우지 못하게 된다.
  우선 조심스럽게 여러 모로 건드려 본다. 그리고는 꼬리를 잡고 총의 개머리로
목덜미를 여러 차례 내려친다. 내려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 한 대다 하고 여겨질
만큼 세게 친다.
  죽어가던 고양이는 미친 듯이 다리로 허공을 긁는다. 동그랗게 몸을 움츠렸는가
하면 다시 몸을 쭉 뻗는다. 그러나 소리는 지르지 않는다.
  "도대체 누구야? 고양이는 죽을 때 운다고 자신만만하게 나한테 말한 사람은?"
  홍당무가 말했다.
  그는 몹시 안타까웠다. 너무 오래 걸렸다. 엽총을 내던지고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발톱에 긁히면서 더욱 흥분되어 이를 악물고 핏줄을 불끈 세워 간신히 졸라 죽였다.
  끝내는 홍당무도 숨이 막혀 버린다. 기진맥진하여 비실비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고양이와 얼굴을 맞대고 두 눈으로 고양이의 외눈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5,5,5^.

      2

  홍당무는 지금 자기의 쇠침대에 누워 있다.
  부모님과 급한 연락을 받고 달려온 친구들이 헛간의 낮은 천장 밑에 허리를
구부리고 그 잔인한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요?"
  어머니가 말했다.
  "글쎄 으스러지게 목을 졸라 죽인 고양이를 가슴에 꼭 껴안고 있잖아요. 그걸
억지로 떼려니, 여느 때의 몇 배나 되는 힘을 내야만 했다오. 정말이에요. 나를 그토록
힘껏 껴안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잔인한 이 이야기는 뒷날 가족들의 이야깃거리로 전해지게 되겠지만, 그 소행을
어머니가 이러니 저러니 설명하고 있는 동안 홍당무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냇가를 따라 거닐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으레 달빛이 몇 갈래나 흔들리면서
마치 뜨개질 바늘처럼 서로 얽혀 흔들린다. 가재 잡는 그물 위에는 고양이의 살덩이가
몇 개나 맑디 맑은 물에 비쳐 불타듯이 반짝이고 있다.
  하얀 안개가 목장의 땅바닥에 자욱하다. 어쩌면 둥실둥실 떠다니는 유령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홍당무는 뒷짐을 지어 유령들에게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 준다.
  소가 한 마리 다가와서 우뚝 섰다. 그리고 음매 하고 우는가 싶더니 쏜살같이
달아났다 발굽 소시를 하늘에 울려 퍼지게 하고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만약 시냇물이 종알거리거나 소곤대어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으면 얼마나 조용할
것인가. 냇가뿐인데도 할머니들이 모인 거처럼 수다스럽고 귀찮았다.
  홍당무는 냇가를 후려 갈겨서 조용하게 하려고 생각했는지, 그물 막대기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우거진 갈대밭에서 엄청나게 큰 가재가 여러 마리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가재는 계속 늘어났다. 곧추서서 번들번들 번쩍이며 물 속에서 나온다.
  홍당무는 괴로움에 몸이 천근같이 무거워져 달아날 수도 없다.
  가재는 그를 에워쌌다.
  목을 향해서 몸을 뻗쳐 온다.
  재깍재깍 소리를 낸다.
  벌써 집게발을 활짝 벌리고 있다. 
        양

  맨 처음에 홍당무는 어렴풋이 공 같은 것이 튀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한꺼번에 뒤섞여서 귀를 찢는 것 같은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마치 학교의
실내 체육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같기도 하다. 공 하나가 홍당무의 다리 사이로
뛰어든다. 어쩐지 섬뜩해진다. 또 하나가 천장 들창에서 들어오는 햇빛 속으로
뛰어오른다. 새끼 양이다. 홍당무는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 우스워서 빙그레 웃었다.
눈이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자, 잔잔한 데까지도 분명하게 부였다.
  양의 새끼치는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침마다 농사꾼인 빠졸이 헤아려보면, 두서너
마리씩 늘어나 있다. 어미양들 틈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는 갓난 새끼 양이 눈에 띈다.
작달막하게 못생긴 모양으로 네 다리를 힘껏 딛고는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 다리
모양은 마치 아무렇게나 깎아 세운 네 개의 나무 막대기 같다.
  홍당무는 아직 쓰다듬어 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새끼 양들은 훨씬 대담하게 벌써
홍당무의 구두를 핥기도 하고 입에 풀을 한입 물고 앞발을 그에게 걸치기도 한다.
  태어난 지 일주일쯤 된 약삭빠른 녀석은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어 몸을 쭉 뻗치고는
허공에 떠서 갈지자 걸음을 걷는다. 하루밖에 안된 녀석은 아주 말라서 앙상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가도 기운차게 벌떡 일어선다. 갓 태어난 새끼가 땅바닥을 기고 있다.
아직 어미가 핥아 주지 않아서 몸이 반지르하다. 어미 양은 물에 부풀어 뒤룩거리는
태주머니가 귀찮아서 머리로 새끼를 밀어젖힌다.
  "못된 어미로군."
  홍당무가 말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빠졸이 말했다.
  "이건 틀림없이 유모에게라도 맡기고 싶은 거야."
  "그럴지도 몰라.'
  빠졸이 말했다.
  "젖꼭지로 길러야 할 새끼가 많이 있어 약방에서 팔고 있는 그 젖꼭지 말이야.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아. 어미한테 정이 생기지. 게다가 어미한테 젖을 달라고
새끼들이 보채니까."
  빠졸은 어미 양의 어깨를 붙들어 우리 안으로 넣는다. 우리에서 달아나면 알아볼 수
있게 양의 목에 짚으로 목걸이를 매어둔다. 새끼 양이 뒤따라왔다. 어미 양은 강판을
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풀을 먹고 있다. 새끼 양은 덜덜 떨면서 약하고 여린 다리로
서 있다. 덜렁덜렁한 젤리 같은 것을 잔뜩 묻힌 코를 비벼대면서 처량한 모습으로
젖을 빨려고 한다.
  "이런 어미도 정이라는 게 생길까요?"
  홍당무가 말했다.
  "물론이지, 엉덩이가 나으면 알이지.'
  빠졸이 말했다.
  "아무튼 낳는 게 힘들거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게 좋을 텐데."
  홍당무가 말했다.
  "왜 잠시 동안만이라도 다른 어미 양한테 새끼를 맡기지 않지?"
  "저쪽에서 거절하거든."
  빠졸이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헛간 구석구석에서 어미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와 젖 주는
시간을 알린다. 홍당무의 귀에는 어느 것이나 똑같이 들리건만 새끼양들에게는 저마다
다르게 들리는 모양이다. 모두 실수 없이 제 어미 젖꼭지를 향해 똑바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새끼를 훔치는 어미는 없단다."
  빠졸이 말했다.
  "이상한데."
  홍당무가 말했다.
  "이런 양털로 뭉쳐진 것 같은 녀석들한테도 가족의 본능이 있다니,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틀림없이 코로 냄새를 맡는 거겠지."
  시험삼아 어느 한 마리의 코를 막아 보고 싶어진다.
  사람과 양을 자세히 비교해 본다. 그러다가 새끼 양들의 이름이 알고 싶어졌다.
  새낀 양들이 열심히 젖을 빨아먹고 있는 동안, 어미들은 옆구리를 쿡쿡 코로
찔리면서도 한가롭게 풀을 먹고 있다. 홍당무는 여물통의 물 속에 쇠사슬 조각이며
수레바퀴의 테며 닳아빠진 삽 같은 게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여물통은 더럽구나!"
  홍당무는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다.
  "아니, 이런 쇠붙이를 넣어서 양의 피를 보자는 셈인가!"
  "맞았어!"
  빠졸이 말했다.
  "너도 곧잘 알약을 먹지?"
  그는 홍당무에게 그 물을 마셔 보라고 한다. 물에 훨씬 더 영양가가 많아지게 그는
닥치는 대로 뭐든지 던져 넣고 있다.
  "진드기 한 마리 줄까?"
  빠졸이 말했다.
  "기꺼이 받겠어. 고마워!"
  홍당무는 영문도 모르고 대답했다.
  빠졸은 어미 양의 푹신푹신한 턱 속을 헤쳐서 노랗고 둥글둥글하게 살찐, 피를 잔뜩
빨아먹은 큼직한 진드기를 한 마리를 손톱 끝으로 잡아 냈다. 빠졸의 이야기로는
이민한 진드기 두 마리만 있으면 어린아이 머리쯤은 자두 먹듯 갉아 먹어 버린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홍당무의 손바닥에 놓아 준다. 그리고 장난이 치고 싶다거나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싶을 때는 형이나 누나의 목이나 머리카락 속에 그 녀석을 넣어
두라고.
  벌써 진드기는 꿈틀거리기 시작하여 살을 물기 시작했다. 홍당무는 손가락에
싸라기눈이라도 내리듯이 따끔따끔한 아픔을 느꼈다. 그 느낌은 손목 그리고 팔꿈치로
옮겨져 마치 진드기의 수가 늘어난 점점 팔에서 어깨 쪽까지 갉아먹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홍당무는 그 녀석을 힘껏 쥐어서 죽여 버렸다. 그 손을 어미
양의 등에 문질러 닦았다. 빠졸이 눈치채지 않도록 살며시.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그만이지, 뭐.
  한참 지나서 홍당무는 차츰 조용해지는 양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귀기울여 듣고
있다. 이제 곧 천천히 놀리는 턱 사이로 풀을 씹는 둔한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겠지.
  풀 시렁에 걸려 있는 무늬가 바랜 농사꾼의 외투가 홀로 양의 망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부

  가끔 르삑 부인은 홍당무에게 대부(이름을 지어준 사람)를 만나러 가도 좋으며 자고
오는 것까지도 허락해 준다. 이 대부라는 사람은 성미가 까다로운 고독한 노인으로,
낚시를 하거나 포도밭을 손질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홍당무만은 귀여워해 준다.
  "왔구나, 이 개구쟁이!"
  대부가 말했다.
  "네, 아저씨."
  키스도 하지 않고 홍당무가 말했다.
  "내 낚싯대도 준비해 두셨어요?"
  "둘이서 하나만 있으면 돼."
  대부가 말했다.
  그러나 홍당무가 헛간문을 열어 보니 자기의 낚싯대도 고스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부는 늘 그를 놀린다. 하지만 홍당무는 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다. 노인의 이런 버릇이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 일은 결코
없다.
  이 노인이 "예스"라고 말할 때는  "노우"라는 뜻이며, "노우"라고 할 때는 "예스"인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 된다.
  (아저씨가 이런 걸로 재밀 삼고 있다면, 나는 상관없어.)홍당무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래서 두 사람은 늘 의좋은 친구이다.
  대부는 언제나 일주일에 한 번씩 일주일 분의 식사를 만들어 두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홍당무를 위해서 완두콩을 큰 라드 덩어리와 함께 넣어 커다란 냄비에다 끓여
주었다. 그리고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진한 포도주를 한 잔 억지로 홍당무에게
먹인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낚시를 하러 간다.
  대부는 강가에 앉아서 낚시줄을 날렵하게 풀어간다. 그는 놀랄 만큼 긴 낚싯대의
손잡이를 무거운 돌로 눌러 놓고 큰 고기만 낚아 올린다. 낚은 물고기는 그늘에 펼쳐
둔 수건으로 갓난아기처럼 감싸준다.
  "주의해 두지만."
  홍당무에게 말한다.
  "낚시찌가 세 번 가라앉기 전에는 낚싯대를 올려서는 안 돼."

  홍당무: 어째서 세 번인가요?
  대부: 맨 처음은 아무것도 아니야. 물고기가 툭툭 쳐보는 것뿐이지. 두 번째는
진짜다. 먹이를 삼킨 거야. 세 번째는 틀림없지. 도망치려고 해도 꼼짝 못하지. 아무리
천천히 끌어 당겨도 문제없단 말이야.

  홍당무는 망둥이를 잡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구두를 벗고 물 속에 들어가 발로
모래 바닥을 휘저어서 물을 흐려 놓는다. 그러면 바보 같은 망둥이가 얼른
몰려나온다. 홍당무는 낚싯대를 던질 때마다 한 마리씩 낚아 올린다. 대부에게
큰소리로 일일이 알릴 틈도 없을 정도다.
  "열 여섯, 열 일곱, 열 여덟^5,5,5^."
  대부는 해가 머리 위에 왔을 때 점심을 먹으러 돌아가자고 한다.
  그는 홍당무에게 흰 완두콩을 배불리 먹인다.
  "이렇게 맛있는 건 없어."
  대부가 말했다.
  "하지만 난 삶은 게 더 좋아. 딱딱한 완두콩은 씹으면 마치 자고새 날개 속에 박힌
탄알처럼 이빨에 깨물리거든. 그런 것을 먹을 바에는 차라리 곡괭이의 쇠끝을 깨무는
편이 낫단 말이야."

  홍당무: 이건 정말 입안에서 슬슬 녹는걸. 엄마가 늘 만들어 주는 것도 맛없지는
않지만, 요즘은 나빠졌어요. 틀림없이 크림을 아껴서 그럴 거야.

  대부: 얘, 네가 잘 먹는 걸 보니 즐겁구나. 엄마 앞에서는 틀림없이 배부르게 먹지
못할 테지?
  홍당무: 모든 것이 엄마의 식욕에 달렸어요. 엄마가 배고프면 엄마의 배가 부를
때까지 먹게 해줘요. 엄마는 자기 접시에 담을 때, 나한테도 덤으로 주니까요. 엄마가
이제 그만 하면 나도 그만 일어서는 거예요.
  대부: 더 달라고 말하려므나, 바보 같으니.
  홍당무: 말하기는 쉽지요. 아저씨, 하지만 언제나 배는 덜 차는 게 좋은 거예요.
  대부: 나한테 자식은 없지만 원숭이 엉덩이라도 핥아 주겠다. 만약에 그 원숭이가
내 자식이라면 말이야. 이런 기분 알겠지?

  두 사람은 그날의 일과를 포도밭에서 끝냈다. 홍당무는 대부 아저씨가 땅을 파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그 뒤를 따라가기도 하고, 포도덩굴 위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버드나무의 새순을 씹기도 했다. 
        샘터

  홍당무는 대부와 함께 자는데,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방은 춥지만) 털이불은
대부의 늙은 손발에는 부드럽고 기분이 좋을 듯했으나, 홍당무는 곧 땀에 흠뻑 젖었다.
하지만 어쨌든 엄마 곁을 떠나서 잘 수 있게 된 셈이다.
  "엄마가 그렇게도 무서우냐?"
  대부가 물었다.

  홍당무: 그렇다기보다 엄마한테는 내가 그다지 무섭지 않나 봐요. 엄마가 형을
때리려고 하면, 형은 빗자루의 손잡이에 올라타고 엄마 앞에서 버티는 거예요. 그러면
엄마는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그래서 엄마는 형을 정으로 다스리려고 해요. 엄마도
말해요. 웨릭스는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때려서는 안된다고요. 홍당무는 때려야
하지만 하고 말예요.
  대부: 너도 빗자루로 해 보았더라면 좋았을걸, 홍당무야.
  홍당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어요! 훼릭스와 나는 곧잘 싸움을
벌였어요. 진짜  할 때도 있고, 장난으로 할 때도 있지만 말예요. 나는 형하고 맞먹을
만큼 힘이 세요. 그래서 형처럼 맞지 않고 막아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엄마를
상대로 빗자루를 들기라도 한다면 엄마는 틀림없이 엄마는 나를 때리기 전에 고맙다고
말할 거예요.
  대부: 자아, 얘야, 그만 자자!

  둘 다 잠이 오지 않았다. 홍당무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돌아눕는다. 숨이 답답해서
허덕였다. 대부 아저씨는 그것을 측은하게 여겼다. 홍당무가 깜박 잠이 들려고 할 때,
대부는 별안간 그의 팔을 잡았다.
  "아, 거기 있구나, 얘야."
  대부는 말했다.
  "꿈을 꾸었구나. 네가 아직도 샘터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너는 그 샘터를
기억하고 있니?"

  홍당무: 아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아저씨, 따지는 건 아니지만, 그 이야기는
벌써 여러 번이나 들었어요.
  대부: 얘야, 가엾게도 나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곧 온몸에 소름이 끼친단다. 나는
풀밭에서 자고 있었어. 너는 샘터에서 놀고 있었지. 그러다가 미끄러져 샘 속으로
빠지고 말았어. 너는 큰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을 쳤어. 그런데 딱하게도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를 못했단다. 물은 고양이가 빠질 정도도 못되었는데 너는 일어서지
못했어. 그것이 탈이었단 말이야. 너는 대체 일어설 생각조차 못했었니?
  홍당무: 샘물에 빠져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요?
  대부: 네가 물장구를 치는 소리에 겨우 잠이 깼지. 그래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애야. 가엾게도 너는 펌프처럼 물을 토했단다. 옷을 갈아 입혔지, 베르나르의 나들이
옷을 말이야.
  홍당무: 네, 그 옷은 따끔따끔했어요. 온몸이 쓰라렸지요. 그건 말털로 만든
옷이었지요.
  대부: 그렇지 않아. 하지만 베르나르는 너한테 빌려 줄 만한 깨끗한 속옷이
없었단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1초만 늦었더라도 내가 끌어올렸을 때
죽었을 거야.
  홍당무: 지금쯤은 먼 곳에 있겠지요.
  대부: 방정맞은 소리 말아라. 하긴 나도 공연한 말을 했구나.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하룻밤도 편히 자 본 적이 없단다. 이것이 천벌이겠지. 마땅한 벌이야.
  홍당무: 하지만 아저씨, 나는 그런 벌은 아 받아도 돼요. 졸려서 죽겠는걸요.
  대부: 그래, 자거라, 얘야. 잘 자거라.
  홍당무: 내가 자기를 바란다면 , 아저씨. 이 손을 좀 놔주세요. 한잠 자고 나면
되돌려 줄께요. 다리도 치워 주세요. 누군가의 살이 닿으면 털이 까칠까칠해서 나는
잠을 못 자요. 
        살구

  한참 동안 잠을 못 이룬 채, 둘은 털이불 속에서 뒤척거리고 있었다. 대부가 말했다.
  "얘, 잠들었니?"

  홍당무: 아니오, 아저씨.
  대부: 나도 그렇구나, 차라리 일어나자. 어떠냐, 지렁이라도 잡으러 갈까?

  "그게 좋겠군요."
  홍당무가 말했다.
  둘은 침대에서 뛰어내려와 옷을 입었다. 초롱불을 켜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홍당무는 초롱을 들고, 대부는 진흙을 절반쯤 담은 깡통을 들고 있다. 그는 그
깡통에 낚시질에 쓸 지렁이를 담아 둔다. 그리고 위에는 젖은 이끼를 덮어 둔다.
그렇게 해두면 절대로 달아나지 못한다. 온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면 수확이 많다.
  "밟지 않도록 조심해라."
  하고 홍당무에게 말했다.
  "살며시 걷는 거야. 감기만 안 걸린다면 운동화를 신고 오는 건데. 조금만 소리가
나도 지렁이는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린단다. 지렁이란 놈은 구멍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면 잡기가 어려워. 얼른 잡아서 힘을 들여서 쥐고 있지 않으면
안돼. 미끄러져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말이야. 절반쯤 구멍 속으로 달아난 놈은 놓아
줘라. 잘라진단다. 잘라진 지렁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거든. 다른 놈까지 썩게 한단다.
더구나 예민한 물고기는 그런 건 거들떠 보지도 않거든. 물 속에서 몸을 움츠리는
지렁이를 통째로 쓰지 않으면 싱싱한 물고기는 낚을 수 없어. 물고기를 그놈이
도망치는 줄 알고 쫓아가지, 그리고는 마음 놓고 덥석 삼켜 버려."
  "난 실수만 하는걸."
  홍당무가 투덜거린다.
  "그놈들의 더러운 침으로 손가락이 이렇게 더러워졌잖아."

  대부: 지렁이는 더러운 게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거야. 흙밖에 먹지 않으니
몸을 꾹 눌러 보면 나오는 것은 진흙뿐이지. 나는 먹기도 하는걸.
  홍당무: 그럼, 내 것도 아저씨한테 드릴 테니 잡숴 봐요.
  대부: 이놈은 너무 큰데, 우선 불에 구워서 빵에 발라야지. 하지만 작은 놈이라면
날것도 먹지. 살구나무에 붙어 있는 벌레 정도라면.
  홍당무: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집 식구들이 아저씨를 싫어하는군요. 특히
엄마는 특히 더 그래요. 아저씨를 생각하기만 해도 속이 언짢아진대요. 하지만 나는
아저씨가 하는 일에 찬성이에요. 흉내는 안 내겠지만 말이에요. 왜냐하면 아저씨는
잔소리도 안하고 우리는 서로 잘 통하니까요.

  홍당무는 초롱을 치켜 들고 살구나무 가지를 당겨서 열매를 몇 개 땄다. 좋은 것은
제 몫으로 떼어 놓고 벌레먹은 것을 대부에게 주었다. 대부는 한입에 통째로 씨까지
삼키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놈이 가장 맛있는데."

  홍당무: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할 거예요. 아저씨처럼 그런 것을 먹겠어요. 다만
냄새가 나서 키스해 줄 때 엄마가 알아차릴까봐 걱정이에요.
  "냄새는 무슨 냄새냐?"
  대부가 말했다. 그리고 홍당무의 얼굴에 입김을 분다.

  홍당무: 정말 담배 냄새밖에는 안 나네요. 하지만 너무했어요, 아저씨. 담배 냄새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아요. 그렇지만 난 아저씨가 좋아요, 담배만 피우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아저씨가 좋아질텐데.
  대부: 꼬마야, 그런 소리 마라. 이건 몸에 좋은 거야. 
        마틸드

  "엄마."
  누나인 에르네스띤느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서 르삑 부인에게 일러 바친다.
  "홍당무가 또 목장에서 마틸드와 신랑각시 놀이를 하고 있어요. 웨릭스가 둘에게
옷을 입혀 주고 있고요. 하지만 분명히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되지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목장에서는 조그만 마틸드가 흰 꽃이 핀 사위질빵 덩굴로
옷을 삼고서 얌전하게 서 있다. 한껏 멋을 부린 마틸드는 오렌지 화관을 쓴 신부와 꼭
같다. 더구나 한평생 배앓이를 모두 고칠 만큼 많은 오렌지 가지를 온몸에 매달고
있다.
  그런데 이 사위질빵 덩굴은 먼저 머리 위에서 관 모양으로 틀어져 있으면서 턱 밑과
등과 두 팔을 따라 축 늘어져 있다. 서로 얽히면서 허리에 휘감겼다가 끝내는
땅바닥으로 처졌다. 그것을 형인 훼릭스가 극성스럽게 끝없이 늘어 놓는다.
  훼릭스가 뒷걸음치면서 말한다.
  "이제 움직이면 안돼! 자, 홍당무 차례다."
  이번에는 홍당무가 신랑 차림을 하게 된다. 역시 사위질빵 덩굴을 잔뜩 감았는데,
군데군데에 양귀비꽃, 쓰넬르꽃, 노오란 민들레꽃들이 산뜻한 색깔을 보이고 있다.
마틸드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웃지도 않는다. 세 사람 모두 아주 진지하다.
모두가 어떤 의식에 어떤 모양이 어울리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장례식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슬픈 표정을, 또 결혼식에서는 미사가 끝날 때까지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놀이건 재미가 없어진다.
  "서로 손을 잡고!"
  형인 훼릭스가 말했다.
  "앞으로 사뿐히, 사뿐히 걸어가라!"
  두 사람은 조금 떨어져 나란히 보통 걸음걸이로 걷는다. 마틸드는 앞자락의
사위질빵풀이 엉켜 붙어, 앞자락을 걷어 올려 손가락으로 집었다. 그 동안 홍당무는
한쪽 발을 든 채 다정스럽게 신부를 기다리고 있다.
  형인 훼릭스는 두 사람을 목장의 이곳 저곳으로 끌고 다니면서 양팔을 휘둘러
박자를 맞추어 준다. 마치 읍장이라도 된 것처럼 두 사람에게 축하인사도 하고
신부님처럼 축복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또 두 사람의 친구인 듯 축사를 하고 그것이
끝나자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두 개의 막대기를 비벼 대어 끽끽 소리를 냈다.
  "잠깐!"
  훼릭스가 말했다.
  "화관이 비뚤어졌어."
  그리고 마틸드의 화관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고는 곧 또다시 나란히 서게 하여
이리저리로 끌고 다닌다.
  "아야!"
  마틸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 질렀다.
  사위질빵 덩굴 마디 한 개가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훼릭스는 머리카락째
그 덩굴을 뜯어 냈다. 행렬은 다시 계속되었다.
  "됐다!"
  훼릭스가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 결혼을 했어. 자, 서로 뽀뽀를 해라!"
  두 사람이 머뭇거리자
  "아니! 왜 이러는 거야, 뽀뽀를 하란 말이야. 결혼하면 누구나 뽀뽀를 해야 하는
거야. 서로 정답게 마주 서서 뭐라고 한마디 해. 말뚝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거니?"
  자기는 잘난 듯이 두 사람을 비웃고 있다. 틀림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여 본 경험이
있는 모양이다. 본보기를 보이는 척하면서 자기가 먼저 마틸드에게 뽀뽀를 했다.
  홍당무도 대담해졌다. 얽혀 있는 덩굴풀 사이로 마틸드의 얼굴에 뽀뽀를 했다.
  "장난이 아니야."
  홍당무가 말했다.
  "난 정말 너하고 결혼할래."
  마틸드는 홍당무가 한 그대로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 다 어색한 듯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훼릭스는 양쪽 손 둘째 손가락으로 뿔 보양을 해보이면서 놀려 댔다.
  "야야, 빨개졌구나, 수줍은 모양이지!'
  그는 두 손가락을 마주 비비고, 입술에 침을 바르면서 발을 동동 구른다.
  "야, 이 바보들아! 진짜로 된 줄 알고 있어."
  "첫째."
  홍당무가 말했다.
  "나는 부끄러울 게 없어. 그리고 놀리고 싶으면 놀려도 좋아. 엄마만 허락해 준다면
내가 마틸드와 결혼하는 것을 형이 막지는 못할걸."
  그러나 바로 그대 엄마가 "허락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하러 왔다. 목장의 나무문을
밀어 젖히며 고자질한 에르네스띤느를 데리고 들어섰다. 울타리 옆을 지나는 길에
마른 나뭇가지를 동여매어 놓은 가운데서 가시나무 가지를 꺾었다. 잎사귀는 떼어
버리고 가시만 남겼다.
  어머니는 곧장 내달아 온다. 폭풍우와 같아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
  "조심해, 회초리가 날아간다."
  훼릭스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는 목장 끝까지 달아나 버렸다. 거기라면 숨어서 엿 볼 수 있다.
  홍당무는 결코 도망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겁쟁이나 빨리 끝장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더구나 오늘은 웬지 용기가 솟아올랐다.
  마틸드는 발발 떨면서 흐느껴 울고 있다.

  홍당무: 무서워 하지 않아도 왜. 난 엄마의 성질을 잘 알고 있어. 엄마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나한테 뿐이야. 꾸중은 내가 듣는 거야.
  마틸드: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네 엄마가 틀림없이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엄마한테 매를 맞는다 말이야.
  홍당무: 매를 맞는 것이 아니라, 버릇을 고쳐 준다고 말하는 거야. 여름 방학 숙제를
선생님이 고쳐 주는 것과 같이 말이야. 너의 엄마도 네 버릇을 고쳐 주니?
  마틸드: 가끔, 경우에 따라서야.
  홍당무: 난 늘 그래.
  마틸드: 하지만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
  홍당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자, 조심해라.
  르삑 부인이 다가온다. 이젠 두 사람을 붙잡은 거나 다름없다. 시간은 넉넉하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머니가 바짝 다가서자, 에르네스띤느는 회초리가 자기
쪽으로 잘못 날아올까 두려워 곧 무대 중심 지대가 될 장소의 경계선 근처에서 멈추어
섰다. 홍당무는 "신부" 앞을 가로막고 선다. "신부"는 더욱 흐느껴 운다. 사위질빵
덩굴의 흰꽃이 흐트러졌다. 르삑 부인의 가느다란 회초리가 번쩍 쳐들어져 막
후려갈기려는 순간, 홍당무는 파랗게 질려서 팔짱을 끼고 목을 움츠렸다. 매를
얻어맞기도 전에 벌써 허리가 화끈하고 종아리가 따끔거렸다. 그런데도 기세 등등하게
이렇게 소리쳤다.
  "이런 걸 가지고 뭘 그러세요, 장난으로 그랬는데요!" 
        금고

  이튿날 홍당무가 마틸드를 만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모두 말했단다. 그래서 난 엉덩이를 많이 맞았어. 너는
어땠니?"

  홍당무: 난 어땠는지 다 잊어버렸는걸. 하지만 네가 맞을 까닭은 없잖아?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마틸드: 정말 그래.
  홍당무: 난 분명히 말하지만 너하고 결혼해도 좋다고 말한 건 사실이었어.
  마틸드: 나도 너하고라면 정말 결혼해도 좋다.
  홍당무: 내가 너를 깔보아도 이상할 것은 없어. 왜냐하면 너의 집은 가난하고
우리집은 부자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너를 존경하고 있으니까.
  마틸드: 부자라니, 얼마나 있는데, 홍당무야?
  홍당무: 우리 집에는 적어도 백만 프랑은 있단다.
  마틸드: 백만 프랑이면 얼마나 되니?
  홍당무: 무지무지하게 많지. 백만장자가 되면 아무리 써도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쓰지 못해.
  마틸드: 우리 집에는 돈이 조금도 없다고 아빠와 엄마가 늘 한탄하고 있단다.
  홍당무: 그거야, 우리 집도 마찬가지야. 누구나 남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괜히 그러는
거야. 더구나 시기심이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말이야. 하지만 우리 집이
부자라는 걸 난 다 알고 있어. 매달 초하루에는 우리 아빠가 한참 동안 혼자서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단다. 그러면 금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저녁때이기 때문에 꼭
청개구리가 우는 것처럼 들리는 거야. 아빠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서
중얼거린단다. 엄마도 형도 누나도 아무도 몰라. 알고 있는 건 아빠 뿐이야. 그러고는
끼익 하며 금고가 열리고 아빠는 돈을 꺼내어 그걸 부엌 테이블 위에 갖다 놓는 거야.
아무 소리도 않고 그저 돈을 짤랑짤랑 울려서 아궁이 앞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한테
알리지. 아빠가 밖으로 나가면 엄마는 돌아서서 얼른 돈을 거두어 가시는 거야. 매달
그래. 벌써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는 걸. 금고 속에 백만 프랑 이상이 있는 건
틀림없단 말이야.
  마틸드: 그래서 금고를 열 때 뭐라고 하니 응, 뭐라고 하셔?
  홍당무: 묻지 마, 물어 봐도 소용없어. 우리가 결혼하면 가르쳐 줄게.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남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말이야.
  마틸드: 지금 당장 가르쳐 줘.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홍당무: 그건 안돼. 아빠하고 나하고의 비밀인걸.
  마틸드: 너도 모르지? 알고 있다면 왜 말을 못하니?
  홍당무: 미안하지만, 알고 있습니다요.
  마틸드: 모르는 거야. 그래, 모른단 말이야. 아아, 꼴 좋다.

  "그럼, 내기하자."
  홍당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슨 내기를?"
  마틸드는 주춤한다.
  "내가 만지고 싶은 데를 만지게 해줘."
  홍당무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면 그 말을 가르쳐 줄게."
  마틸드는 홍당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무슨 말인지 잘못 알아 들은 모양이다.
잿빛 눈을 실처럼 가늘게 뜬다. 알고 싶은 것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 셈이다.
  "먼저 그 말을 가르쳐 줘, 홍당무야."

  홍당무: 가르쳐 주면 내가 만지고 싶은 데를 만져도 된다고 맹세해.
  마틸드: 엄마가 함부로 맹세하면 안된다고 말했는데.
  홍당무: 그럼, 안 가르쳐 줄 테야.
  마틸드: 좋아, 이제 안 가르쳐 줘도 괜찮아. 그 말이 뭔지 알았단 말이야. 벌써 다
알았어.

  홍당무는 조마조마해져서 저도 모르게 서둘렀다.
  "이봐, 마틸드. 네가 뭘 안다고 그러니? 하지만 맹세하겠다면, 가르쳐 줄게. 아빠가
금고 열 때 하는 말은 "얼빠진 놈아!"라는 거야. 자, 이제 만져 보아도 되지?"
  "얼빠진 놈아! 얼빠진 놈아!"
  마틸드는 말했다. 비밀을 알아 낸 기쁨과 그것이 엉터리가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주춤해진다.
  "정말, 나를 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홍당무가 대꾸도 않고 한쪽 손을 내밀며 다가오자 마틸드는 달아난다.
그녀가 킥킥거리며 헛웃음을 웃고 있는 소리가 홍당무의 귀에 들린다.
  마틸드의 모습이 사라지자, 뒤에서 놀려대는 소리가 들린다.
  홍당무는 뒤돌아 보았다. 마구간의 들창에서 머슴이 얼굴을 내밀고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다 봤다, 홍당무야."
  하고 소리쳤다.
  "모두 네 엄마한테 말해 버릴 테다."

  홍당무: 장난한 거예요, 삐에르 아저씨. 그 아이를 속이려고 한거예요. "얼빠진
놈아!"라고 말한 건 내가 엉터리로 꾸며 댄 말이었어요. 사실은 난들 아나 뭐.
  삐에르: 걱정 마라, 홍당무야. "얼빠진 놈아!" 같은 건 아무래도 괜찮아, 다른 일을
말하겠단 말이야.
  홍당무: 다른 일이라니요?
  삐에르: 얘, 넌 나이치고는 제법 능란하던데. 하지만 단단히 각오해라, 오늘밤엔 네
귀가 찢어질 만큼 비틀릴 테니.

  홍당무는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날 때부터의 빨강머리가 무색할 만큼 얼굴을
붉히며 멀어져 갔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코를 훌쩍이면서 절뚝절뚝 물러간다. 
        올챙이

  홍당무는 마당 한복판에서 혼자 놀고 있다. 한복판에 있으면 르삑 부인이 창문으로
이 아이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당무는 얌전하게 노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 친구인 레미가 나타났다. 같은 또래의 남자 아이인데, 절름발이인 데도
언제나 달음박질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절름거리는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 뒤에 질질 끌릴 뿐, 도저히 상대방을
따라가지 못한다. 손에 소쿠리를 들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 가겠니, 홍당무야, 아빠가 강에 그물을 치고 있어. 아빠의 심부름을 가면서
소쿠리로 올챙이를 건지는 거야."
  "우리 엄마한테 물어 봐라."
  홍당무는 말했다.

  레미: 왜 내가 물어 봐야 하니?
  홍당무: 내가 물어 보면 허락을 안해 주니까 그렇지 뭐.

  바로 그때 르삑 부인이 창가에 나타났다.
  "아주머니."
  레미가 말했다.
  "올챙이를 잡으러 홍당무와 함께 가도 괜찮아요?"
  르삑 부인은 유리창에 귀를 바싹 갖다 댔다. 레미는 큰소리로 되풀이했다. 그제서야
르삑 부인이 알아챘다. 입을 놀려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두 아이들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자 르삑
부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히 "안된다"라는 신호다.
  "안된대."
  홍당무가 말했다.
  "아무래도 곧 나한테 심부름을 시키려나 봐."

  레미: 그럼 어쩔 수 없구나. 아주 재미있는데, 못 가는 거지, 안된다 말이지?
  홍당무: 가지 말고, 여기서 놀자.
  레미: 싫어, 올챙이 잡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단 말이야. 오늘은 날씨도 따뜻하니
소쿠리로 마냥 건져 낼 거야.
  홍당무: 잠깐만 더 기다려 봐. 엄마는 언제나 처음에는 안된다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곧잘 생각이 바뀌니까 말이야.
  레미: 그럼, 15분만 기다릴게. 그 이상은 안돼.

  둘은 거기에 선 채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시치미를 떼고, 계단 쪽을 유심히 보고
있다. 잠시 뒤, 홍당무가 팔꿈치로 레미를 쿡 찔렀다.
  "어때, 내가 말한 그대로지!"
  마침내 문이 열리며 르삑 부인이 층계를 내려온다. 홍당무에게 줄 소쿠리를 손에
들고 있다. 그러나 수상쩍은 눈으로 멈춰 섰다.
  "아니, 아직 있었니, 레미야? 벌써 간 줄 알았는데, 아빠한테 말해 주어야겠다.
여기서 빈들거리고 있었다고 말이야. 틀림없이 야단을 맞을 거야."

  레미: 아줌마, 하지만 홍당무가 기다리라고 그러는 걸 어떡해요.
  르삑 부인: 뭐, 그게 정말이냐, 홍당무야?

  홍당무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시치미를 떼고
있기로 작성했다. 홍당무는 르삑 부인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또 어머니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레미가 일을 망쳐
놓았기 때문에, 홍당무는 이제 될 대로 되라 하고 발 밑의 풀을 지그시 밟으며 얼굴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말이야, 나는 한 번 말 한 것을 돌이켜 본 적은 없단다."
  르삑 부인이 말했다.
  그 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려온 층계를 다시 올라갔다. 홍당무가 올챙이를 잡으러 가지고 갈 소쿠리를
그대로 손에 든 채. 일부러 날호도를 비우고 가지고 온 소쿠리였는데.
  레미는 벌써 멀찍이 가고 있었다.
  르삑 부인은 거의 농담을 안한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조심들을 한다. 학교
선생님만큼이나 무서워하고 있다.
  레미는 도망가 저편 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주 빠른 속력이다. 그래서 언제나
뒤에 처진 그 왼쪽 다리가 큰길의 먼지에 한 가닥의 줄을 그어 뒤뚝거리면서 요리
냄비가 끓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날을 헛되이 망쳐 버린 홍당무는 이제 놀고 싶은 기분도 나지 않는다.
  멋지게 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슬슬 억울한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기다릴 뿐이다.
  외롭고 서글픈 기분으로 지루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자기가 못나서 받게 되는
벌이라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극적 변화

    1

  르삑 부인: 너 어딜 가려는 거냐?
  홍당무: (새 넥타이를 매고, 침을 뱉어 반들반들하게 구두를 닦고 있다.) 아빠하고
산책할 거예요.
  르삑 부인: 가면 안돼. 알겠지? 가기만 해봐라^5,5,5^ (오른손이 날아올 듯이 뒤로
간다).
  홍당무: (낮은 목소리로) 알았어요.

      2

  홍당무: (벽시계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매를 안
맞는 일이다. 아빠는 엄마보다는 덜해. 정확하게 계산해 보았단 말이야.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3

  르삑 씨: (홍당무를 귀여워하고 있기는 하나 조금도 돌봐 주지 않는다. 일이 바빠서,
언제나 일에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 가 볼까!

  홍당무: 응, 나, 안 갈래.
  르삑 씨: 왜, 가기 싫으냐?
  홍당무: 왜, 가기 싫으냐?
  르삑 씨: 까닭을 말해 봐라. 왜 그러느냐?
  홍당무: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지만 집에 있을래.
  르삑 씨: 아아, 그렇군. 또 그 변덕이 시작된 게로구나. 아무튼 넌 당해낼 수가 없는
아이다. 너한테는 정말 두 손 다 들었어. 언젠 가고 싶다고 졸라대더니, 벌써 가고
싶지 않다니^5,5,5^ 그래, 집에 있거라. 네 마음대로 울상이 되어서 말이다.

      4

  르삑 부인: (부인은 언제나, 문 옆에 서서 남의 말을 엿듣는 나쁜 버릇이 있다.)
정말 가엾게시리! (징그러운 목소리로 홍당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면서
쥐어뜯는다.) 눈물이 글썽거리는구나. 그래, 아빠가^5,5,5^ (르삑 씨 쪽을 살며시 본다.)
^5,5,5^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시든? 엄마는 그처럼 매정하게 들볶지는
않는단다. (르삑 씨 부부는 서로 등을 돌린다.)

      5

  홍당무: (벽장 안. 입 안에 두 개의 손가락을 넣고 있다. 코 안에는 손가락 하나)
아무나 되고 싶어서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니로구나. 
        사냥

  르삑 씨는 아들들을 번갈아 사냥에 데리고 간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뒤를 조금
오른쪽으로 뒤쳐져서 따라간다. 총 끝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잡은 것을 등에
짊어지고 간다. 르삑 씨는 지칠 줄 모르는 단단한 다리를 가졌다. 홍당무는 불평도
하지 않고 기를 쓰고 아버지 뒤를 쫓아간다. 구두가 꼭 끼어 아프지만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다. 발가락 끝이 부풀어 올라 마치 자그마한
망치같이 되었다.
  맨 처음의 사냥에서 토끼라도 잡으면 르삑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가까운 농가에 맡겨 두거나, 울타리 속에 숨겨 두었다가 저녁 때 가지고 가는
게 좋겠지?"
  "아니예요, 아빠. 내가 가지고 다니겠어요."
  홍당무가 말한다.
  이래서 온종일 토끼 두 마리와 자고새 다섯 마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수도 있다.
홍당무는 손이나 손수건을 사냥 망태기의 멜빵 밑에 넣어 어깨가 직접 닿지 않도록
함으로써 아픔을 덜어 보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나면 자랑스럽게 등을 돌려 보인다.
그러는 동안은 잠시 무거운 것을 잊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싫증이 났다. 특히 한 마리도 못 잡았을 때는 허영심이니 뭐니 다
없어지고 그저 힘들기만 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르삑 씨는 가끔 이렇게 말한다.
  "저 밭을 훑어 보고 오마."
  홍당무는 혼자서 속을 태우며 햇빛 속에 가만히 서 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행동을
바라본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흙덩이를 밟아가며, 마치 쇠스랑으로 땅을
고르듯이 샅샅이 뒤지고 있다. 총대로 울타리며 덩굴이며 엉겅퀴 같은 것을
후려갈긴다. 그러는 동안에 사냥개 삐람므까지도 지칠 대로 지쳐 그늘을 찾아 잠깐
누워서 혓바닥을 쑥 내놓고는 헐떡거린다.
  "저런 데 뭐가 있을 것 같아서^5,5,5^."
  홍당무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마음대로 후려갈겨 봐요. 쐐기풀이나 때려 눕히며
이리저리 뒤져 보세요. 만일 내가 풀잎이 덮인 구덩이에 굴을 파놓고 있는 토끼라면,
이런 더위 속을 무엇 때문에 뛰어 다니겠어?)
  이렇게 그는 속으로 르삑 씨를 원망했다.
  르삑 씨는 또 다른 밭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옆에 있는 말먹이 풀밭을 뒤지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토끼 두세 마리쯤은 있으리라고 단단히 점을 찍고 있다.
  "아빠가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지만."
  홍당무가 중얼거린다.
  "이쯤되면 쫓아가야지. 시작이 나쁜 날은 끝까지 엉망이거든. 실컷 달려, 땀에 흠뻑
젖어서 말야. 개가 녹초가 되고 내가 쓰러진들 상관 있나? 어차피 결과는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오늘밤은 틀림없이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왜냐하면 홍당무는 꽤 미신을 믿는 순진파였기 때문이다.
  (홍당무가 모자의 가장자리를 만질 때마다) 삐람므는 사냥감을 발견하여 털을
곤두세우고, 꼬리를 번쩍 쳐들고 우뚝 선다. 르삑 씨는 엽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메고는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사냥감에게 다가간다. 홍당무는 멈춰선 채 꼼짝하지
않는다. 솟구쳐 오르는 첫 번째의 감동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홍당무는 모자를 벗는다.)
  그러면 자고새가 날거나, 토끼가 불쑥 튀어 나온다. 그리고 홍당무가 다시 모자를
쓰거나, 모자를 들고 경례하는 흉내를 내든가 하는데 따라 르삑 씨는 실수를 하거나,
용케 맞히거나 한다.
  이 방법이 백이면 백 다 들어맞는 게 아니라는 것은 홍당무도 잘 알고 있다. 너무
자주 여러 번 되풀이하면 효과가 없어진다. 운명의 여신도 똑같은 신호에 그때마다
대답하기가 싫증나기 때문이다. 이래서 홍당무는 적당하게 간격을 두고 가끔 써먹으면
그런대로 효과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쏘는 것을 보았느냐?"
  르삑 씨가 묻는다. 아직 체온이 따뜻한 토끼를 번쩍 쳐들어서 블론드 빛의 배를
눌러 마지막 똥을 짜냈다.
  "왜 웃지?"
  "아빠가 이놈을 잡은 게 내 덕이니까 그렇죠."
  홍당무가 말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것이 자랑스러워서 침착하게 자기의 비밀 방법을 설명한다.
  "너는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르삑 씨가 말했다.

  홍당무: 아니예요. 늘 들어맞는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5,5,5^.
  르삑 씨: 그래 알았으니 썩 입을 다물어! 바보 같으니라고. 말해 두겠지만, 나는
네가 머리 좋은 아이라는 평판을 잃게 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말을 안하는 게 좋을 게다. 기껏해야 비웃을 뿐일 테니까. 그런데 너는 나를 놀리는
게 아니냐?
  홍당무: 아니예요, 아빠. 하지만 아빠 말이 맞아요. 미안해요, 난 아직도 철이 덜
들었나 봐요. 
        파리

  사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홍당무는 뉘우쳤다는 뜻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이 바보스럽게 여겨져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도 다시 기운을 내어, 새로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싹 따라갔다. 르삑 씨가 왼쪽 발로 디딘 곳을 열심히, 조금도
어김없이 왼쪽 발로 디디려니 몹시 바빴다. 마치 사람 잡아먹는 귀신에게 쫓기는
것처럼 크게 다리를 벌려서 걷고 있다. 쉬는 것은 다만 오디며 똘배며 산사자열매를
딸 때이다. 산자사열매를 먹으면 입 안이 죄고, 하얗게 말랐던 입술이 본디의 붉은
빛으로 되돌아가 갈증을 없애 준다. 더욱이 그가 짊어지고 있는 사냥 망태기의 주머니
속에는 꼬냑이 한 병 들어 있다. 한 모금씩 마시다 보니 홍당무 혼자서 거의 다 먹어
버렸다. 르삑 씨는 사냥에 열중해서 자기에게도 한 모금 달라는 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빠, 한 모금 드릴까요?"
  바람결에 돌아오는 대답은 "필요없어."라는 말뿐이다. 홍당무는 방금 권했던 한
모금을 마저 마시고는 병을 비운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다시 아버지의 뒤를
쫓아가다 갑자기 멈춰서서 귀에 손가락을 넣어 힘껏 후벼낸다. 그리고는 그 귀로
무언가 들어 보려는 듯이 르삑 씨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빠, 귓속에 파리가 들어갔나 봐요."

  르삑 씨: 꺼내면 되잖느냐?
  홍당무: 안으로 쑥 들어갔어요. 손가락이 안닿는 걸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르삑 씨: 내버려 둬, 저절로 죽을 테니까.
  홍당무: 하지만 아빠, 혹시 알이라도 낳거나 집을 지으면 어떻게 하지요?
  르삑 씨: 손수건을 쑤셔 넣어서 죽여 버리려므나.
  홍당무: 꼬냑을 조금 넣어서 빠져 죽게 해볼까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아무거나 부어 넣어라."
  르삑 씨가 소리쳤다.
  "하지만 빨리 해라."
  홍당무는 병 주둥이를 귀에 대고 빈 병을 다시 흔드는 척한다. 르삑 씨가 갑자기
술을 달라고 할 때에 대비해서 미리 잔꾀를 부린 것이다.
  얼마 뒤 홍당무는 달리면서 쾌활하게 외친다.
  "아빠, 이젠 파리 소리가 안 들려요. 틀림없이 죽었나 봐요. 그런데 그 파리 녀석이
꼬냑을 모두 마셔 버렸어요." 
      첫 번째 도요새

  "거기 있어라."
  르삑 씨가 말했다.
  "제일 좋은 사냥터이니 나는 개를 데리고 숲속을 돌고 오겠다. 도요새를 몰아올
테니 삐삐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리거든,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고 있거라.
도요새는 네 머리 위로 날아올 테니까."
  홍당무는 두 팔로 엽총을 비스듬히 안고 있다. 처음으로 도요새를 쏘게 된 것이다.
전에도 르삑 씨의 총으로 메추리를 한 마리 잡은 일과 자고새의 날개를 스친 일,
토끼를 놓친 적이 있기는 하다. 메추리는 땅 위를 걷고 있었는데, 사냥감을 발견하여
멈춰서 있는 개의 코앞에서 쏜 것이다. 처음에  그는 잿빛을 한 이 동그란 공 모양의
작은 새를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뒤로 물러서라, 너무 가깝다."
  르삑 씨가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도 홍당무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총을 어깨에 대고 바로
옆에서 방아쇠를 당겼더니 잿빛의 둥근 공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가루가
되다시피 하여 흔적도 없어진 메추리의 시체는, 다만 몇 개의 깃털과 피투성이가 된
주둥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젊은 사냥꾼이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는 도요새를 잡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이야말로 홍당무의 생애에서 기념할 만한 밤이 되어야 한다.
  저녁놀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사람의 눈을 잘 속인다. 여러 가지 물체의 윤곽이
연기처럼 흔들린다. 모기가 한 마리 날아와도 마치 천둥이 다가오는 것처럼 마음을
동요시킨다. 그래서 홍당무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눈앞에 다가올 그때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목장에서 돌아온 지빠귀의 한 무리가 참갈나무 사이에서 확 흩어져 둥지로
돌아간다. 홍당무는 먼저 눈을 익히기 위하여 그것을 겨누어 본다. 총대에 서리는
습기를 소매로 닦는다. 낙엽이 여기저기서 굴러 다니고 있다.
  이윽고 두 마리의 도요새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길다란 주둥이 때문에 둔하게
날고 있다. 빈틈없는 애정을 보이면서 서로 쫓고 쫓기며 법석거리는 숲 위를 빙빙
돌고 있다.
  도요새들은 르삑 씨의 말대로 삐삐 삐삐 하며 울고 있다. 그러나 너무도 희미한
목소리여서 홍당무는 과연 이쪽으로 날아올지 얼마쯤 걱정되었다. 줄곧 눈을
움직였다.
그러자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개머리판을 배에
대고 어림잡아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 마리의 도요새 가운데 한 마리가 주둥이를 아래로 내밀고 떨어진다. 메아리가
숲속 구석구석으로 무서운 총소리를 흩뜨린다.
  홍당무는 날개가 부러진 도요새를 주워들고 자랑스럽게 흔들면서 화약 냄새를
맡는다.
  삐람므가 르삑 씨보다 앞서서 달려왔다. 르삑 씨는 여느 때보다 꾸물거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틀림없이 깜짝 놀랄 거야."
  칭찬해 줄 것을 기다리며 홍당무가 생각했다. 그러나 우거진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타난 르삑 씨는 덤덤한 목소리로 아직도 화약 냄새에 싸여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왜 두 마리 다 잡지 않았느냐?" 
      낚시 바늘

  홍당무는 잡아 온 물고기의 비늘을 한창 긁고 있는 중이다. 모래무지며 잉어며
게다가 농어까지 섞여 있다. 칼로 배를 갈라 두 겹으로 된 투명한 공기주머니를 발로
밟아 터뜨린다. 고양이에게 주기 위해 내장을 한데 모은다. 곁눈질도 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거품이 일어 하얗게 된 물통 위에 기대어 일을 하면서도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조심을 한다.
  르삑 부인은 잠깐 살펴보러 온다.
  "수고했다."
  르삑 부인이 말했다.
  "오늘을 맛있는 튀김거리를 잡아 왔구나. 하려고만 하면 서투른 솜씨는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는 홍당무의 목과 어깨를 다정스럽게 쓰다듬어 준다. 그러나 손을
떼는 순간 커다랗게 소리쳤다. 손가락 끝에 낚시 바늘이 꽂힌 것이다.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달려왔다.
  형 훼릭스도 뒤쫓아 달려왔다. 얼마 뒤 르삑 씨도 왔다.
  "어디 좀 봐요."
  세 사람이 말한다.
  그런데 부인은 손가락을 스커트의 양쪽 무릎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 바람에 낚시바늘은 더욱이 깊이 꽂힌다.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어머니를 부축한다. 그러는 동안 르삑 씨는 그녀의 팔을 작고 치켜든다. 그래서
모두가 손가락을 보게 된다. 낚시 바늘은 손가락을 꿰뚫어 꽂혀 있다.
  "안돼요, 그렇게 하면!"
  르삑 부인은 쇳소리로 고함을 친다.
  과연 낚시바늘은 한쪽이 구부러져 있고 그 끝에 고리가 달려 있어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르삑 씨는 코걸이 안경을 썼다.
  "야단났군, 바늘을 부러뜨려야지 하는 수 없어."
  르삑 씨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부러뜨린단 말인가!
  아무튼 손가락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남편이 조금만 힘을 주어도 르삑 부인은
질겁을 하며 비명을 질러댄다. 도대체 심장이나 목숨을 빼앗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이
야단인가? 게다가 성가시게도 이 낚시바늘은 고급 강철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르삑 씨는 말한다.
  "살을 찢을 수밖에 없겠군."
  코걸이 안경을 단단히 고쳐 쓰고는 창칼을 꺼내어 잘 갈아지지 않은 칼날로
손가락의 살집을 슬쩍슬쩍 문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너무 살살 문지르기 때문에
칼날이 살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힘을 주고 땀을 흘려서 겨우 피가 조금 나왔다.
  "아유, 아파! 아프다니까요!"
  르삑 부인이 소리친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고 있다.
  "아빠, 좀더 빨리 하세요."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말했다.
  "그렇게 엄살을 부리면 안된다니까요."
  형 훼릭스가 어머니에게 말한다.
  르삑 씨는 이제 더 참지 못하게 되었다. 칼을 마구 살을 째고 톱질을 한다. 르삑
부인은 "백정 같으니! 이 백정 같으니!" 하고 악을 쓰다가 다행스럽게 정신을
잃어버렸다.
  르삑 씨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얼굴이 창백해지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살집을 뜯어
낸다. 이리하여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거기서 낚시바늘이 떨어졌다.
  "후유우!"
  그러는 동안 홍당무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자마자
달아나고 만 것이다. 계단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날벼락 같은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언젠가 낚싯줄을 멀리 던졌을 때 낚시바늘만 등에 걸려서 그대로 꽂혀
있었던 거겠지.
  "물고기가 걸리지 않은 것이 수상했어."
  홍당무는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 아무리 듣고 있어도 별로 슬프지 않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이번에는 홍당무 쪽이 어머니 못지 않게 큰소리를 지르며 목이
쉬어라고 울어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당장 복수한 셈이 됐다고 생각하고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 틀림없다.
  몰려든 이웃 사람들이 홍당무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홍당무?"
  하지만 홍당무는 대답하지 않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빨간 머리가 손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층계 밑에 줄지어 서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는 동안 마침내 르삑 부인이 밖으로 나왔다. 어린아이를 낳은 여자처럼 핼쓱한
얼굴빛이었지만, 매우 위험한 일을 당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지, 정성들여 붕대를 감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픔을 꾹 참고 있다. 그 자리의 사람들에게 미소지으며
몇 마디의 말로 안심시키고는 홍당무에게 다정하게 말한다.
  "너는 엄마를 정말 아프게 했구나. 하지만 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네가 잘못한
것을 아니니까."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가 이토록 상냥스럽게 홍당무에게 말을 건넨 적을 없다.
깜짝 놀란 홍당무는 얼굴을 들러 보니, 어머니의 손가락은 헝겊과 실로 둘둘 감겨
깨끗하고 굵직한 네모가 되어 있다. 가난한 아이들의 인형과 꼭같다. 홍당무는 맑은
두 눈이 눈물로 가득 찼다.
  르삑 부인은 몸을 굽혔다. 홍당무는 팔굽으로 그것을 막으려 한다.
  버릇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런데 부인은 너그럽게도 모두의 앞에서 홍당무에게 입을
맞춘다.
  홍당무는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 그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운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니 용서해 주겠다고 했잖느냐! 아니면 엄마를 심술궂다고
생각하고 있니?"
  홍당무는 더욱더 흐느껴 운다.
  "바보예요, 이 아이는. 남이 들으면 목이라도 조르는 줄 알겠어요."
  그녀의 애정에 감동된 이웃 사람들은 르삑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낚시바늘을 그들에게 건네주자, 모두들 신기한 듯이 자세히 본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건 8호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차츰 말이 여느 때처럼 자유로이 나오게
되자, 어머니는 비참한 그때의 모양을 모두들에게 수다스럽게 늘어 놓았다.
  "정말 그 순간만은, 어쩌면 얘를 죽였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귀여워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작은 낚시바늘이지만^5,5,5^ 나는 정말 죽는 줄로만
알았다니까요."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이 바늘은 멀리 마당 한구석에 구덩이라도 파고 묻어 진흙으로
덮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아냐, 그냥 둬!"
  형 훼릭스가 말했다.
  "내가 맡아 두겠어. 이것으로 낚시질을 해보고 싶군. 굉장할 거야. 엄마의 피에 젖은
바늘인걸. 낚시에는 안성맞춤이겠지! 많이 낚아야지, 물고기를 말이야! 멋있을 거야.
허벅다리만큼이나 큰 놈을 몇 마리나 말이야!"
  그리고는, 형은 홍당무를 흔들어 댔다. 아직도 벌을 받지 않는 까닭을 몰라 멍하니
있던 홍당무는 뉘우쳤다는 표시를 더욱더 크게 나타내어 쉰 목소리를 짜내면서 보기
흉한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을 눈물로 씻고 있다. 
        은화

      1

  르삑 부인: 너 뭐 잃어버린 것 없니, 홍당무야?
  홍당무: 없어요, 엄마.
  르삑 부인: 찾아보지도 않고 없다는 말하니? 자, 먼저 네 주머니를 뒤집어 봐라.
  홍당무: (주머니 속을 뒤집는다. 그리고 헝겊이 당나귀 귀처럼 늘어져 있는 것을
본다.) 아, 그렇구나. 엄마, 되돌려 주세요!
  르삑 부인: 되돌려 달라니, 뭘 말이냐? 그럼, 뭔가 없어졌니? 한 번 물어 보았더니
들어맞았구나. 뭘 잃어버렸느냐?
  홍당무: 몰라요.
  르삑 부인: 저것 보게! 거짓말을 할 작정이로구나. 벌써 정신나간 잉어처럼
얼떨떨해지는구먼. 당황하지 말고 대답해 봐, 뭘 잃어 버렸니? 팽이냐?
  홍당무: 네, 팽이에요. 깜빡했어요. 그래요, 엄마.
  르삑 부인: 그렇지 않아요, 엄마겠지. 팽이는 아니다. 팽이는 지난 주일에 내가
빼앗았잖니?
  홍당무: 그럼, 나이프예요.
  르삑 부인: 어떤 나이프? 누가 나이프를 주던?
  홍당무: 아무한테서도 얻지 않았어요.
  르삑 부인: 형편없는 아이로구나. 이러다가는 언제까지라도 끝이 없겠다. 마치 내가
너를 미친 사람으로 몰고 있는 꼴이 아니냐. 하지만 여기는 나와 너뿐이다. 나는
너한테 친절하게 묻고 있는 거란다. 엄마를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모든 것을 털어
놓아라. 틀림없이 은화를 잃었을 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아마 분명히 그럴
거다. 그렇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할걸. 그것 봐라, 코가 벌름거리지 않니.
  홍당무: 엄마, 그 은화는 내 것이에요. 대부 아저씨가 일요일에 주셨거든요.
잃어버려서 정말 속상해요. 마음이 아프지만 단념하겠어요. 더욱이 그다지 미련은
없어요. 은화 하나쯤 있으나마나니까요. 나한테는 마찬가지인 걸요.
  르삑 부인: 어머나, 이 무슨 건방진 말버릇이냐. 내가 사람이 좋기 때문에 물어 본
거야. 그럼, 너는 대부 아저씨의 기분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단 말이지? 그토록 너를
귀여워 하지만 틀림없이 화를 낼거야.
  홍당무: 하지만 엄마,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나요? 내가 좋아하는 일에 그 돈을
썼다고 말이에요. 평생 그 돈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르삑 부인: 이제 그만 해 둬, 누가 물으면 시무룩한 얼굴만 하면서! 준 사람이
그렇게 해도 좋다는 말을 안했다면 그 돈은 잃어서도 안되고, 허락을 받지 않고는
써서도 안되는 거야. 너는 그 돈을 잃어버렸어. 대신 내 놓을 돈이 있어야 해. 자,
빨리 가 봐. 쓸데없는 말 그만 하고.
  홍당무: 응, 엄마.
  르삑 부인: "응, 엄마."라는 말은 이제 안 해주었으면 좋겠다. 괴짜인 척하는 것도
정말 싫으니까. 그리고 또 말해 두겠지만, 콧노래를 하거나 잇사이로 휘파람을 불며
한가로운 마부 흉내를 내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다. 나한테 그래 봐야 하나도 이로울 것
없다.

      2

  홍당무는 마당의 좁은 길을 어정거리고 있다. 징징거리는 소리를 낸다. 잠시
찾다가는 몇 번이나 코를 훌쩍인다. 어머니가 감시하고 있는 듯한 기색이 있으면
가만히 멈춰 선다. 아니면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 끝으로 수영풀 뿌리나 모래를
후벼판다. 르삑 부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더 찾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코를 쳐들고
왔다갔다 할 뿐이다.
  그 은화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저 높은 나무 위의 꼭대기에 있을까?
  아무것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금화를 줍는 일이 흔히 있다. 실지로 그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홍당무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무릎과 손톱이 닳도록 찾아
헤매어도 핀 하나 줍지 못할 것이다.
  르삑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불러 본다.
  "엄마, 엄마!"
  대답이 없다. 이제 막 어디로 어디로 나갔는지 바느질 탁자의 서랍이 열려 있다.
보니, 털실이며 바늘이며 흰색, 붉은색, 검정색의 실에 섞여서 은화가 몇 개 뒹굴고
있다.
  은화는 그 속에서 묵은 돈이 되어 버린 듯했다.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잠이
깨는 일은 어쩌다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곧잘 이쪽 구석에서 저쪽 구석으로 밀리곤
해서 뒤섞이는 바람에 제대로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세 개인가 하면 네 개이고, 또 여덟 개가 되기도 한다. 헤아리려면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서랍을 책상 위에 뒤엎어 놓고 실꾸러미를 해쳐 보지 않으면 안되리라.
그러나 어떤 흔적이 남지 않을까?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돌보아 주지 않는 그 기회를 이번만은 잡아야지,
하고 홍당무는 굳게 각오하며 팔을 뻗쳐 은화 한 닢을 훔쳤다. 그리고는 도망쳤다.
  그 자리에서 잡혔다가는 큰일난다고 생각하자 망설임도 후회도, 또 바느질 책상으로
되돌아가는 위험도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
  홍당무는 쏜살같이 달아난다. 너무 무섭게 내달아서 멈춰 설 수 없다. 마당의 좁은
길을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곳을 찾아 거기에 은화를 떨어뜨렸다. 발뒤축으로 힘껏
밟아서 땅바닥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는 엉금엉금 기어서 콧등으로 풀잎을 헤치고
마구 기어다니면서 되는 대로 동그라미를 몇 개 그린다. 그 모습은 눈을 가린 한
어린아이가 숨겨 놓은 물건을 찾느라고 그 둘레를 빙빙 돌아 다니는 장난과 꼭 같다.
이 어린아이의 장난에는 으레 장단을 맞추는 아이가 속이 타는 듯이 다리를 두드리며
이렇게 외친다.
  "야, 큰일났다! 창고에 불이 붙었다. 창고에 불이 붙었어!"

      3

  홍당무: 엄마, 엄마, 찾았어요!
  르삑 부인: 나도 찾았다.
  홍당무: 네? 이것 보세요, 여기 있잖아요.
  르삑 부인: 여기도 있단다.
  홍당무: 좀 보여줘요.
  르삑 부인: 네 것도 좀 보여 주려므나.
  홍당무: (은화를 보인다. 르삑 부인도 자기 것을 내보인다. 홍당무는 두 개의 은화를
손에 들고 비교해 본다. 할 말을 준비한다) 이상한데요, 엄마. 엄마는 어디서
찾았지요? 난 이 좁은 길의 배나무 뿌리에서 찾았어요. 찾아 낼 때까지 스무 번도 더
그 위를 밟고 다녔어요. 그랬더니 반짝이는 게 있잖겠어요. 그래서 주워 볼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틀림없이 내 주머니에서 떨어졌을 거예요. 언젠가 풀 위를 뒹굴고
법석을 떨면서 논 적이 있거든요. 엄마, 조금 몸을 굽혀 이 약삭빠른 몸이 숨어 있는
곳을 들여다 보세요. 녀석이 숨어 있던 집 말이에요. 놈은 나를 골탕먹인 것을
자랑해도 괜찮을 거예요.
  르삑 부인: 골탕먹이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네 것은 너의 다른 웃옷 주머니
속에 있었단다. 그렇게 일러도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는
일을 잊어 버리더구나. 성실한 버릇을 가르쳐 주려고 본보기 삼아 찾아 내도록 한
거야. 그런데 찾으면 으레 나온다는 게 정말이로구나. 왜냐하면 네 은화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되었거든. 큰 부자가 된 셈이다. 끝이 좋으면 모든 일이 잘 된다.
하지만 돈만으로는 행복해질 수가 없는 법이지.
  홍당무: 그럼, 놀러 가도 괜찮겠지요, 엄마?
  르삑 부인: 그래, 놀다 오너라. 하지만 어린애 같은 장난은 하지 말아라. 네 은화를
두 개 다 가져 가거라.
  홍당무: 아이예요, 엄마. 한 개면 돼요. 그것도 필요할 때까지 엄마가 갖고 계셔요.
엄마, 그렇게 해주시겠지요?
  르삑 부인: 아니다, 계산은 정확히 해야지. 네 은화는 네가 가져라. 두개 다
네거니까. 대부 아저씨한테서 얻은 것과 배나무 밑에서 찾은 것. 배나무 밑의 은화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말이다. 하지만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르겠구나.
너는 짐작이 가니?
  홍당무: 정말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누구든 상관없어요. 그런 건 내일에나 생각해
보겠어요. 그럼, 엄마, 잠깐 놀다 오겠어요. 고마워요!
  르삑 부인: 잠깐만, 어쩌면 정원사의 것이 아닐까?
  홍당무: 지금 곧 물어 보고 올까요?
  르삑 부인: 아니, 여기서 나를 도와다오. 같이 생각 좀 해보자꾸나. 아빠는 그
나이에 돈을 떨어뜨리는 부주의한 일은 안하실 것이고, 누나는 동전을 저금통에
넣으며 형은 돈을 잃어버릴 겨를도 없다. 돈을 얻기가 무섭게 써 버리니까 말이다.
그리고 보면 아마도 내가 떨어뜨렸을 거야.
  홍당무: 엄마, 그럴 리는 없어요. 엄마는 무엇이든 꼼꼼하게 정돈해 놓으시잖아요.
  르삑 부인: 어른들도 때로는 아이들처럼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단다. 좋아,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아무튼 이건 내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다. 걱정할 건 없어. 빨리 놀다
오너라. 하지만 너무 멀리 가면 안된다. 그 동안에 내 바느질 탁자의 서랍을 좀 뒤져
볼 테니까.
  벌써 뛰어나갔던 홍당무는 홱 돌아서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간다. 이윽고 어머니를 앞질러 뛰어가 그 앞을 가로막아서는 아무 말도 않고
한쪽 뺨을 내밀었다.

  르삑 부인: (오른손을 든다. 홍당무는 얻어 맞기 직전) 네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구나.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덧붙이다니.
언제나 그런 식으로 해봐라.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될 테니.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
어미를 잡아 먹을 게다.

  뺨을 후려갈기는 첫 번째 따귀가 무섭게 홍당무의 얼굴에 떨어졌다. 
        자기 의견

  르삑 씨와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 그리고 홍당무. 이 네 사람이 난로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난로 속에는 뿌리가 붙은 통나무 하나가 활활 타고 있다. 네
사람은 의자에 걸터앉아 배를 젓듯이 그 의자를 끽끽 앞뒤로 흔들고 있다. 모두들
토론을 하고 있다.
  홍당무는 르삑 부인이 없는 틈에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내 생각으로는."
  홍당무가 말했다.
  "가족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져요. 하지만 내가 아빠를 몹시
좋아하고 있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나는 아빠가 우리 아빠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기 때문에 나도 좋아하는 거예요. 사실 아빠에겐
아버지의 자격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하지만 나는 아빠의 애정을 굉장히 큰 호의하고
보고 있어요. 나에게 베풀어야 할 의무가 없는 호의도 아빠가 기분 좋게 선심을
베풀어 준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으흠!"
  르삑 씨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나는 어떠니?"
  "나는?"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묻는다.
  "같은 이치야."
  홍당무가 말한다.
  "우연이라는 것이 두 사람을 나의 형과 누나로 했을 뿐이지. 그것을 내가 형이나
누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까닭은 없잖아? 또 우리들 세 사람이 한 집안 식구가 됐다
해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야. 두 사람 다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던 거지.
그렇게 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형제가 된 데 대해서 고마워 할 필요도 없어. 형,
다만 형에게는 나를 여러 모로 보호해 주는데 대해서, 그리고 누나, 누나에 대해서는
하찮은 일에까지 마음을 써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천만에."
  형 훼릭스가 말한다.
  "그런 꿈 같은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니?"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말했다.
  "더욱이 내가 하는 말은."
  홍당무가 덧붙인다.
  "일반적으로 분명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거야. 다만 매력적인 표현을 피하고
있는 셈이지. 만일 엄마가 여기 눈앞에 있더라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어."
  "두 번 다시 못할걸."
  형 훼릭스가 말했다.
  "내 말의 어디가 잘못됐다는 거지?"
  홍당무가 물었다.
  "내 의견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애정이 아쉬운 사람은
아니야. 뿐만 아니라 보기보다도 훨씬 더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하지만 내 애정은
평범하고 본능적이 판에 박은 게 아냐. 정확히 의식한 이성적이며 논리적이 애정이지.
그래요, 논리적, 이것이 바로 내가 찾고 있던 단어야."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함부로 쓰는 버릇은 언제 버릴 거냐?"
  벌떡 일어서서 침실로 가려던 르삑 씨가 물었다.
  "더구나 네 나이에 벌써 남을 설교하려는 그 버릇도 말이다. 만일 내가 돌아가신
너의 할아버지에게 방금 네가 한 것과 같은 그런 헛된 소리를 조금이라 비췄다간,
당장 매를 맞거나 뺨을 맞아. 내가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할 것이 뻔해."
  "심심풀이 삼아 해본 말인데 뭐 어때요."
  홍당무는 벌써 불안해져서 변명한다.
  "잠자코 있는 것이 더 좋겠다."
  촛불을 손에 든 르삑 씨는 이렇게 말하고 나가 버렸다. 형 훼릭스가 따라 나갔다.
  "그럼, 안녕, 함께 사는 어린 친구야."
  그는 홍당무에게 말했다.
  그런 다음 누나 에르네스띤느가 일어서서 엄숙하게
  "잘자!"
  라고 말하고는 나갔다.
  홍당무는 외톨이로 남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어제 르삑 씨는 홍당무에게 모든 일을 잘 생각하는 것을 배우라고 타일렀었다.
  "사람들은 무엇이냐?"
  르삑 씨는 말했다.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라는 말은 아무도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너는 귓전으로 얻어들은 남의 말을 성경을 읽듯이 외쳐대는구나.
조금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려고 애써 보아라. 자기 생각을 말하도록 하려므나.
처음에는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말이다."
  그런데 큰 마음 먹고 해본 첫 번째 의견이 호되게 얻어 맞았으므로, 홍당무는
난로불에 재를 뿌리고는 의자를 벽가로 옮겨 놓았다. 벽시계에다 절을 하고 침실로
갔다. 이 방은 헛간의 계단과 통해 있었으므로 헛간방이라고 불리고 있다. 여름에는
시원해서 기분 좋은 방이다. 사냥에서 잡아온 짐승도 이곳이라면 일주일은 충분히
간다. 요즈음 잡은 토끼가 코에서 피를 흘리며 접시에 얹혀 있다. 암탉에게 줄
싸라기로 가득 찬 바구니도 몇 개 놓여 있다. 홍당무는 두 팔을 걷어 붙이고
팔꿈치까지 집어넣고는 쉬지 않고 싸라기를 휘저었다.
  여느 때라면 외투걸이에 걸려 있는 온 집안 식구들의 옷이 묘한 느낌을 준다. 마치
자살한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반장화를 윗선반에 나란히 얹어 놓고 막 목을 졸라맨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밤에는 무섭지 않다. 침대 밑을 들여다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달빛에도,
그림자에도,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사람한테 알맞게 만들어진 것 같은 마당의
우물에도 겁을 먹지 않았다.
  무섭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이 무서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젠 무섭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셔츠 하나만으로도 붉은 바닥의 차가움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 것처럼,
발뒷축으로 걷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침대 속에서 바람벽 여기저기에 생긴 습기로 부풀어 오른 곳을 쳐다보면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펼치고 있다. 역시 자기 가슴속에 간직해 두어야만 하므로
"자기 의견" 이라고 말해야겠지. 
      나뭇잎의 폭풍

  벌써 오래 전부터 홍당무는 물끄러미 높다란 포플러나무 꼭대기의 잎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멍하니 공상에 잠기면서 그 잎이 흔들리기를 있다.
  그 잎은 나무에서 떨어져 오직 혼자 따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줄기도 없이
자유롭게.
  날마다 그 잎은 동이 틀 때와 마지막 햇살에 황금빛으로 빛난다.
  정오를 지나면 꼼짝하지 않는다. 잎이라기보다는 얼룩이라는 편이 좋겠다. 그렇게
되면 홍당무는 초조해져서 침착성을 잃고 만다. 바로 그때 겨우 그 잎이 신호를 한다.
  그러자 그 바로 밑의 잎이 같은 신호를 한다. 다른 잎도 이 몸짓을 되풀이하며
그것을 옆의 잎에 전한다. 그 잎이 얼른 또 다른 잎에 전한다.
  그리고 이것은 정보의 전달이다. 왜냐하면 지평선에 둥그스름한 같색 모자
가장자리가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포플러나무는 벌써 떨고 있다. 몸을 움직여서 방해가 되는 묵직한 공기층을 밀쳐
내려고 한다.
  포플러나무의 불안은 느티나무며 참갈나무며 마로니에나무로 옮겨진다. 그리고 온
뜰 안의 나무가 몸을 떨면서 서로 속삭인다. 하늘에 그 둥근 모자가 펼쳐져서 뚜렷한
검은 가장자리를 이쪽으로 밀어붙여 오면^5,5,5^.
  맨 먼저 나무들은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흔들어서 새들의 노래의 노래를 멈추게
한다. 날완두콩을 던지는 것 같은 소리로 변덕스럽게 가끔 노래를 부르는 지빠귀,
페인트칠을 한 것 같은 목구멍에서 꾸르륵 꾸르륵 울음 소리를 짜내는 것은 홍당무가
조금 전에 본 산비둘기, 게다가 연미복(제비꼬리같이 된 예복)같은 꼬리를 달고 있는
아니꼬운 까치.
  이윽고 나무들은 굵직한 팔을 휘둘러서 적에게 겁을 주려고 한다.
  납빛의 둥근 모자는 여전히 서서히 쳐들어오고 있다.
  둥근 모자는 차츰차츰 하늘을 덮는다. 푸른 하늘을 밀어젖히고 하늘에서 공기가
통하는 구멍을 막아 끝내는 홍당무의 숨통까지도 막으려 든다. 이따금씩 모자는
자신의 무게 때문에 휘청거리며 마음 위로 떨어질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종각의
뾰족한 끝까지 오자 걸려서 찢길까봐 얼른 멈춰 선다.
  벌써 먹구름이 가까이 다가왔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혼란한 사태가 벌어져
소동이 일어난다.
  나무란 나무는 모두 얽히고 설켜서 성난 둥지를 서로 비벼댄다. 홍당무는 그 잎사귀
속에 둥근 눈과 하얀 부리를 한 새 둥우리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나뭇가지가 축 늘어지는 듯싶더니, 별안간 잠이 깬 사람처럼 번쩍 쳐든다. 나뭇잎은
떼를 지어 날아갔다가 이내 무서워서 얌전하게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본디의 나무에
매달리려 한다. 아카시아의 가느다란 잎새는 한숨을 짓고 껍질을 벗긴 벚나무의 잎은
애처로운 소리를 내고 있다. 마로니에의 잎은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고 덩굴진
아리스똘로쉬 잎은 담벽 위에서 차례차례로 잎을 나부끼며 파도처럼 출렁댄다.
  아래쪽에서는 무성한 사과나무가 사과를 흔들고 있다. 땅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둔한
땅울림이 들린다.
  훨씬 더 낮은 곳에는 구즈베리나무가 빨간 핏방울을 , 검은 구즈베리나무가
잉크빛의 시커먼 핏방울을 흘리고 있다.
  그보다 더 낮은 곳에서는 주정꾼 같은 양배추가 당나귀처럼 귀를 흔들고 있다. 또
상기된 양파가 서로 맞부딪치면서 씨앗으로 불룩한 둥근 머리를 터뜨리고 있다.
  왜 그럴까?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천둥도
치지 않고, 우박도 내리지 않는다. 번갯불도 번쩍이지 않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폭풍 같은 시커먼 하늘이, 대낮에 닥친 소리없는 어둠이 주위의 초목을
미치게 하여 홍당무를 겁먹게 하고 있다.
  바야흐로 둥근모자는 해를 덮고 그 밑에 쫙 퍼져 있다.
  이 먹구름은 움직이고 있다. 홍당무는 그것을 알고 있다.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덩이는 언젠가는 지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해를 볼 수
있겠지. 큰 먹구름은 하늘 가득히 천장을 메우고 있다. 그리고는 홍당무의 작은
이마를 힘껏 죄어든다. 홍당무는 눈을 감는다. 그러자 홍당무의 눈까풀을 따갑게
누르면서 눈을 가린다.
  양쪽 귀를 손가락으로 틀어 막는다. 그런데 폭풍의 고함과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든다.
  큰길의 종이쪽지를 빼앗듯이 그의 심장을 붙잡는다.
  그 심장을 마구 쥐어짜서 자그마하게 뭉쳐 버리고 만다.
  얼마 안 되어, 홍당무는 자기 심장이 이젠 눈깔사탕 만큼이나 줄어든 듯싶었다. 
        반항

      1

  르삑 부인: 홍당무야, 너는 착하지? 제발 부탁이니 물방앗간에 가서 버터 한
파운드만 사다 다오. 빨리 갔다 오너라. 네가 올 때까지 식사를 안하고 기다리마.
  홍당무: 싫어요, 엄마.
  르삑 부인: 왜 또 싫다고 하니? 아무 말 말고 갔다 오너라. 자, 기다릴게^5,5,5^.
  홍당무: 싫단 말이에요, 엄마. 나는 물방앗간에는 안 가요.
  르삑 부인: 뭐라고? 물방앗간에는 안 가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부탁한 게
누구니? ^5,5,5^ 무슨 농담을 하는 거냐?
  홍당무: 그렇지 않아요.
  르삑 부인: 어머나, 홍당무야.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구나. 당장 물방앗간에 가서
버터를 한 파운드 사 오너라!
  홍당무: 듣고 있어요. 하지만 난 안 갈래요.
  르삑 부인: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어떻게 된 거냐? 내 말을 안 듣겠다니, 네가
태어난 뒤 처음 있는 이이 아니냐.
  홍당무: 엄마, 그래요.
  르삑 부인: 친엄마의 말을 안 듣겠다는 말이지?
  홍당무: 친엄마라고요? 그래요, 엄마.
  르삑 부인: 이건 정말 놀랄 일이로구나! 어디 정말인지 아닌지 좀 볼까? 잔, 냉큼
갔다 오라니까.
  홍당무: 싫다는 대두. 엄마는^5,5,5^
  르삑 부인: 시끄러워, 빨리 갔다 오라면 갔다 와.
  홍당무: 입 다물겠어요. 하지만 난 안 가요.
  르삑 부인: 이 접시를 가지고 갔다 오라니까.

      2

  홍당무는 입을 다문 채 꼼짝도 않는다.
  "이건 혁명이로구나!"
  르삑 부인이 소리쳤다. 계단 위에서 두 팔을 번쩍 들고.
  사실 홍당무가 어머니에게 "싫어요!"하고 거절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를테면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방해를 했다거나, 한창 놀고 있는 중이라면 또 모르지만!
그런데 지금 홍당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 엄지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심심해서 못
견디는 참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거만한 태도로 얼굴을 번쩍 쳐들고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도움을 얻으려는 듯이 가족들을 불렀다.
  "에르네스띤느, 훼릭스,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빠와 함께 나와 봐라. 아가뜨도
오너라.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보렴!"
  그래서 마침 큰길을 지나가던 사람도 멈춰 서게 된다.
  홍당무는 모두에게서 뚝 떨어져 마당 한가운데 앉아 있다. 눈앞에 위험이 닥쳐오는
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 홍당무 자신도 놀라고 있다. 그리고 르삑 부인이
때리는 걸 잊어버리는 것에 더욱 놀라고 있다. 너무도 무서운 순간이어서 르삑 부인
자신도 어쩔 줄 모르는 참이었다.
  새빨간 칼날처럼 불타는 저 홍당무의 눈초리에 여느 때의 위협도 단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무리 잠자코 있으려고 애를 써도 그녀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만다.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와는 씩씩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온다.
  "여러분, 좀 들어 보세요."
  르삑 부인이 말한다.
  "나는 홍당무한테 잠깐 심부름을 갔다 와 달라고 상냥하게 부탁했어요. 산책 삼아
물방앗간까지 갔다 와 달라고 말이예요. 그랬더니 이 아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저 아이한테 한 번 물어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마치 내가 꾸며 대는 줄로
생각하실 테니까요."
  모두들은 곧 짐작이 갔다. 홍당무는 태도로 미루어 보아 새삼스럽게 대답을
되풀이시킬 필요가 없었다.
  마음씨 착한 에르네스띤느가 다가와서 살며시 홍당무에게 귀띔한다.
  "조심하는게 좋아. 너 혼난다. '네'라고 대답해라, 너를 사랑하는 누나가 시키는
일이니 잘 들어야 해."
  형 훼릭스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다. 누가 와도 이 자리는 내주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홍당무가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심부름의 일부는 으레 형인 자기가
하게 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홍당무를 응원하고 싶을
정도이다. 어제까지는 동생을 얕잡아 보고 바보 취급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와
엇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 존경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손뼉을 치고
있다.
  "세상이 뒤집혀졌어요. 이젠 말세라오."
  더욱 놀라며 르삑 부인이 말했다.
  "이젠 내 힘으로도 벅차서 어쩔 수가 없군요. 난 물러가겠어요. 누가 말을 해서 저
짐승 같은 아이를 순종하도록 해줘요. 그럼,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만나 얘길 해
가지고 해결을 지어요!"
  "아빠!"
  흥분할 대로 흥분한 홍당무가 목을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까지
어머니한테 대든 적이 없었던 터이라 잔뜩 흥분되어 있다.
  "아빠가 제발 물방앗간까지 가서 버터를 한 파운드 사 가지고 오라고 하면 난
사오겠어요. 아빠를 위해서라면, 오직 아빠를 위해서라면 말이에요. 하지만 엄마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로 안 가겠어요."
  이렇게 자기편을 들어 주는 데 대해, 르삑 씨는 기분이 좋아지기보다는 오히려
난처한 모양이다. 기껏 버터 한 파운드를 사는 것쯤으로, 주위의 구경꾼들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권유를 받고 아버지의 위신을 앞세운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너무도 어색해 그는 풀밭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어깨를 움츠리고 홱 돌아서더니
얼른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은 잠시 이것으로 중단되었다. 
        최후의 말

  저녁 때 르삑 부인은 기분이 언짢아서 누워 있었으므로 식사하러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들 잠자코 먹고 있는데, 이것은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서로가 거북했다.
식사가 끝나자 르삑 씨는 냅킨을 접어 테이블 위에 던지고는 이렇게 말했다.
  "옛 큰길의 언덕까지 산책을 하겠는데, 누가 같이 가지 않으련?"
  홍당무는 아버지가 이런 방법으로 자기를 데리고 나가려는 것을 눈치챈다. 그래서
자기도 일어선다. 여느 때처럼 의자를 벽가로 옮겨 놓고 얌전하게 아버지를 따라간다.
  처음에는 두 사람 다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러다가 틀림없이 아버지가 이것저것
묻겠지만, 당장은 그런 기색이 없다. 홍당무는 머리 속에서 무슨 말을 물을지, 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그것을 이모저모로 궁리해 본다. 얼마 안되어 준비가 끝났다.
몹시 마음이 괴로웠으나 이젠 아무것도 후회할 건 없다. 낮에 그토록 엄청난 사건을
맛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결심한 듯한 아버지의
말투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르삑 씨: 뭘 우물쭈물하고 있느냐? 엄마를 슬프게 한 아까의 행동은 어떻게 된
이이냐. 까닭을 말해 보려므나.
  홍당무: 아빠,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제 분명히 해둬야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난 엄마를 좋아하지 않아요.
  르삑 씨: 흐음! 그래 어떤 점이, 언제부터?
  홍당무: 모든 것이 싫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르삑 씨: 흐음! 그거 참, 야단났구나. 하지만 나한테만은 엄마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지 말해 다오.
  홍당무: 이야기하려면 끝없이 길어져요. 그런데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나요?
  르삑 씨: 눈친 챘지. 네가 토라진 것을 자주 보았으니까.
  홍당무: 토라졌다는 말을 들으니 더 화가 나는데요. 그야 홍당무라는 아이는
진심으로 남을 원망하지는 못해요. 다만 토라져 보일 뿐이지요. 토라졌을 때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되는 거예요. 토라질 만큼 토라지고 나면, 마음이 풀려 명랑한게 구석에서
나오는 거예요. 특별히 그 아이한테 관심을 가진 척해서는 안돼요. 아무래도 좋다라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어요. 아빠, 미안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건 그저
아빠나 엄마나 다른 사람들한테 아무래도 좋다는 거예요. 나는 가끔 겉으로만 토라져
보일 때가 있어요.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두는데, 마음속으로부터
분개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에 받는 모욕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르삑 씨: 그건 못 써. 남에게 놀림받은 건 곧 잊어버려야 한단다.
  홍당무: 그게 안돼요, 정말 안돼요. 아빠는 잘 몰라요. 집에 잘 안계시니까요.
  르삑 씨: 사업 관계로 자주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
  홍당무: (흥분된 말투로) 아빠, 사업을 사업이에요. 아빠는 사업 걱정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어요. 하지만 엄마는, 이제 이렇게 된 바에는 모두 말하지만, 나를 때리는
것 말고는 화풀이할 데가 없는 거예요6. 아빠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스파이처럼 몰래 아빠한테 일러바치면, 그야 물론 아빠는 꼭 내 편이 되어 주겠지만
말이에요. 그럼 조금씩 옛날 이야기를 해볼까요. 내가 허풍을 떠는 건지, 또
얼마만큼이나 기억하고 있는지 알아챌 테니까요. 하지만 아빠, 우선 의논할 일이
있어요. 나는 엄마하고 헤어져 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간단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까요?
  르삑 씨: 일년에 두 달, 방학 때 만날 뿐이잖니?
  홍당무: 방학 때도 기숙사에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틀림없이 성적도 오를 거예요.
  르삑 씨: 그건 가난한 학생들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이야. 그런 짓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너를 버린 것으로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너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돼.
그렇게 되면 나도 너와 만나지 못하잖니?
  홍당무: 면회하러 오시면 되잖아요, 아빠.
  르삑 씨: 그런 여행을 하게 되면 돈이 너무 들어서 감당해 낼 수 없단다, 홍당무야.
  홍당무: 꼭 해야 할 여행을 이용하면 되잖아요. 조금만 돌아서 오면 되는 거예요.
  르삑 씨: 나는 이때까지 너를 네 형이나 누나와 똑같이 대해 왔다. 누굴 특별히
어떻게 한다든가 하는 일은 결코 안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작정이다.
  홍당무: 그렇다면 학교를 그만두겠어요. 기숙사에서도 나와 버리고요.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핑계로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뭔가 일거리를 구해야겠지요.
  르삑 씨: 무슨 일거리? 이를테면 구둣방에라도 들어가겠다는 거냐?
  홍당무: 구둣방이건 뭐건 다 좋아요. 그렇게 되면 밥 걱정 없이, 또 자유롭게 있을
테니까요.
  르삑 씨: 이미 때가 늦었다, 홍당무야. 구두 바닥에 못을 치게 하기 위해서 너를
교육시키느라 큰 희생을 치르진 않았어.
  홍당무: 하지만 아빠, 난 자살한 뻔했던 일도 있어요.
  르삑 씨: 너무 허풍을 떨지 말아라, 홍당무야.
  홍당무: 정말이에요, 아빠. 어제만 해도 나는 목을 매려고 했었어요.
  르삑 씨: 하지만 넌 멀쩡히 있지 않니? 그러니 그런 생각은 없었던 것이 틀림없어.
그런데도 자살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고 잘난 척 으스대고 있구나. 죽고 싶은 건 자기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홍당무야, 너무 제멋대로 굴면 자신을 그르치게 된단다.
너는 자신의 논에만 물을 끌어들이고 있어. 이 세상에 오직 너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홍당무: 아빠, 형도 행복하고 누나도 행복해요. 그리고 엄마가 아빠 말처럼 재미
삼아 나를 놀리는게 아니라면,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끝으로 아빠인데, 아빠는 우리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이므로 모두들
쩔쩔매거든요. 엄마까지도 말예요. 아무도 말예요. 아무도 아빠를 불행하게 하지는
못해요. 그게 바로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도 있다는 증거예요.
  르삑 씨: 이 세상의 고집쟁이 꼬마인 홍당무야, 너는 보잘 것 없는 이치만 내뱉고
있어. 사람의 진심이 너에게도 똑똑히 보인단 말이냐? 네 나이에 모든 일을 다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홍당무: 적어도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요, 아빠.
  르삑 씨: 그렇다면 알겠느냐, 홍당무야. 행복 같은 건 아예 단념해라! 일러두겠지만,
지금보다 절대로 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단 말이야.
  홍당무: 그런 건 몰라요.
  르삑 씨: 단념해라, 너의 마음을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하는 거야. 어른이 되어 네
자신을 너 스스로 다스려서 자유를 얻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과
인연을 끊고, 비록 너의 성격이나 기질을 바꾸지 못한다 할지라도 집을 바꾸어서 새
가정을 만들 수는 있다. 그때까지는 언제나 떳떳하게 행동하도록 해라.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아라. 너의 식구들까지도 말이다. 아마
재미있을 거다, 생각지도 못한 기분전환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
  홍당무: 틀림없이 다른 사람도 나름대로는 저마다 고민이야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동정하는 것은 내일이나 되어야지, 오늘 당장은 나 자신을 위해서 정의를
요구할 뿐이에요. 어떤 운명도 나보단 나을 거예요. 나한테는 엄마가 있어요. 그런데
이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나 역시 싫어해요.
  "그럼, 나는 너의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줄 아니?"
  참다 못한 르삑 씨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이 말을 듣자 홍당무는 눈을 들어 아버지를 쳐다본다. 수염이 더부룩한 아버지의
무뚝뚝한 얼굴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 수염 속에 입이 너무 지껄인 것을
수줍어하는 듯 숨어 버렸다. 주름진 이마, 눈까풀이 축 늘어져 마치 걸어가면서 졸고
잇는 것 같다.
  얼마 동안 홍당무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맛보고 있는 남모를 기쁨과, 힘껏 마주보고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듯한 아버지와 아들의  손. 이런 것이 모두 날아가 버리지마
않을까 걱정스럽기만 했다. 이윽고 홍당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멀리 어둠 속에 고요히
잠드는 마을을 향해 번쩍 쳐들고 을러댄다. 그리고는 그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심술궂은 여편네! 흥, 빈틈없는 심술쟁이 여편네! 난 정말 싫어."
  "그만둬!"
  르삑 씨가 말했다.
  "그래도 역시 네 엄마가 아니냐."
  "아아!"
  홍당무는 조심스럽게 여는 아이로 되돌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이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예요." 
      홍당무의 앨범

      1

  만일 르삑 씨네 집 앨범을 들춰 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놀라리라.
  누나 에르네스띤느와 훼릭스는 온갖 자세로 찍혀 있다. 서 있는 모습, 앉아 있는
모습, 좋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 또 반나체로이거나 즐거운 듯이, 또는 얼굴을
찌푸리거라도 하며 저마다 멋진 배경 속에 찍혀 있다.
  "그런데 홍당무의 사진은 그다지 없군요."
  "아주 어렸을 때의 사진은 몇 장 있었는데."
  르삑 부인이 대답한다.
  "너무 귀여워서 사람들이 모두 가져가 버렸어요, 그래서 한 장도 남아 있질 않아요."
  정말은: 홍당무를 찍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2

  가족들은 언제나 홍당무라고만 부르고 있으므로, 이 아이를 본명으로 부르려 해도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하필이면 홍당무라고 부르지요? 머리털이 불그스름하기 때문인가요?"
  "성격은 더 불그스름하다오."
  르삑 부인은 말한다.

      3

  그 밖의 개인적이 특징으로.
  홍당무의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남의 호감을 할 수가 없다.
  홍당무의 콧구멍은 마치 두더지 굴처럼 크고도 깊다.
  아무리 후벼 주어도 홍당무는 언제나 빵부스러기 같은 귓밥이 잔뜩 들어 있다.
  홍당무는 혓바닥 위에 눈을 얹어 놓고는 쭉쭉 빨면서 녹인다.
  홍당무는 뒷굽을 서로 맞부딪치면서 볼썽사납게 걸어간다. 난장이로 알 정도이다.
  게다가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난다. 절대로 사향 냄새는 아니다.

      4

  홍당무는 신구들 가운데서 가장 빨리 일어난다. 하녀와 같은 시간이다. 겨울에는
날이 밝기 전에 침대에서 뛰어내려 손으로 시간을 본다. 손가락으로 시계바늘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커피나 코코아가 나오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얼른 입에 집어 넣는다.

      5

  누군가에게 소개를 하면 홍당무는 외면을 하고 손을 앞으로 내민다. 따분한 듯이
다리를 꼬꼬는 옆 벽을 긁어 댄다.
  그때
  "키스해 주겠니, 홍당무야?"
  하고 부탁하면 이렇게 대답한다.
  "싫어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6

  르삑 부인: 홍당무야, 대답 좀 해라. 너를 부르고 있지 않니.
  홍당무: 네, 아빠(네, 엄마).
  르삑 부인: 그렇게 타일렀는데도, 애들은 입에 뭘 잔뜩 넣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말이야.

      7

  홍당무는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고는 못 배긴다. 르삑 부인이 가까이 오면 급히
손을 빼지만, 그래도 미처 못 뺄 때가 있다. 어느 날 이윽고 르삑 부인은 홍당무의 두
손을 넣은 채 주머니를 꿰매고 말았다.

      8

  "남에게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거짓말만은 결코 해선 안된다."
  대부가 상냥하게 말한다.
  "그건 천한 결점이야. 더욱이 거짓말을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단다. 반드시
드러나거든."
  "네."
  홍당무가 말했다.
  "하지만 시간을 벌 수가 있어요."

      9

  게으름뱅이 형 훼릭스가 간신히 학교를 졸업했다.
  기지개를 켜며 홀가분한 듯이 숨을 내쉬고 있다.
  "너는 뭘 좋아하지?"
  르삑 씨가 묻는다.
  "너의 생활을 정해야 할 나이다. 뭘 할 작정이냐?"
  "뭐라고요? 또 뭔가 해야 합니까?"
  형 훼릭스가 묻는다.

      10

  모두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베르뜨 양이 소문의 대상이다.
  "베르뜨 아가씨는 파란 눈이기 때문에^5,5,5^."
  홍당무가 말했다.
  모두들 감탄하여 소리친다.
  "멋지다, 멋져! 정말 멋진 시인이야!"
  "아니야."
  "그 아가씨의 눈은 보지도 않았어. 아무 생각없이 말했을 뿐이야. 상식적인 말이지,
듣기 좋게 꾸며 댄 말이라구."

      11

  눈싸움을 할 때면 홍당무는 혼자서 한쪽을 맡는다. 상대편에게는 무서운 적이다.
  그의 소문은 멀리까지 파다하게 퍼져 있다.
  아무튼 눈 속에 돌을 넣어 던지기 때문이다.
  언제나 머리를 노린다. 이렇게 하는 것이 승부가 빠르다.
  얼음이 얼어 다른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고 있어도, 청개구리인 홍당무는
모두들에게서 뚝 떨어져 얼음판 옆의 풀밭에 조그마한 빙판을 만든다.
  말타기 놀이를 할 때면 언제나 자기가 말이 되겠다고 우긴다.
  붙들기 놀이를 할 때는 얼마든지 붙잡혀 준다.
  자유 같은 것에는 전혀 미련이 없다.
  또 숨바꼭질을 할 때는 너무 꼬꼬 숨기 때문에 마침내는 모두가 그를 찾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12

  아이들이 키 자랑을 하고 있다.
  형 훼릭스와는 경쟁이 안될 것은 보기에도 뻔하다. 그는 두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그러나 홍당무와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재어 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에르네스띤느는
얄밉게도 발끝으로 서서 키를 높인다. 그런데 홍당무 쪽은 누구의 비위도 거스르고
싶지 않아 살짝 몸을 굽힌다. 누나와 자기의 키 차이를 조금이라도 더 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13

  홍당무는 하녀 아가뜨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마님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내 욕을 하면 돼."
  하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이를테면 르삑 부인은 여자가 홍당무를 건드리는 것은 도저히 참지 못한다.
  이웃의 어떤 여자가 서슴없이 홍당무를 혼내 주는 일이 있다. 르삑 부인은 달려가서
화를 내며 아들을 구해 준다. 아들은 감격스러워 밝은 얼굴이 되지만
  "자, 이번에는 내가 너를 혼내 줄 차례다."
  르삑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14

  "어리광을 부린다는 건 어떤 것이지?"
  홍당무는 삐에르에게 묻는다. 삐에르는 엄마의 귀염둥이다.
  그러면 삐에르는 큰소리로
  "나는 오직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감자튀김을 접시에서 손가락으로 듬뿍 집어 먹어
보고 싶어. 그리고 복숭아를 절반쯤 씨가 붙어 있는 그대로 먹어 봤으면 좋겠어."
  그는 속으로 생각해 본다.
  (만일 엄마가 깨물어 먹고 싶도록 나를 귀여워 한다면, 틀림없이 불쑥 나온 이
코부터 먹기 시작하겠지.)

      15

  가끔 누나 에르네스띤느와 형 훼릭스는 놀다가 싫증이 나면, 자기 장난감을 선선히
홍당무에게 빌려 준다.
  이래서 누나와 형의 행복을 살짝 맛보게 된 홍당무는 조심스럽게 행복을 꾸며 본다.
  그러나 홍당무는 장난이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을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장난감을 되돌려 달라는 말이 나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16

  홍당무: 그럼, 내 귀가 너무 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지?
  마틸드: 좀 이상한 것 같긴 해. 이리로 좀 와 봐. 그 귀에 모래를 넣어서 "파이"를
만들고 싶어.
  홍당무: 엄마가 먼저 귀를 당겨서 뜨겁게 열을 내놓으면 반죽한 파이도 잘 익을
거야.

      17

  "잔소린 집어치워! 한 번만 더 말해 봐라. 그럼, 너는 나보다 아빠가 더 좋단
말이지?"
  르삑 부인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곧 그만두겠어요. 이젠 아무 말도 안하겠어요. 맹세하지만 어느 쪽이 어느 쪽보다
더 좋다는 생각은 절대로 없어요."
  마음 싶은 곳에서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로 홍당무는 대답한다.

      18

  르삑 부인: 홍당무야, 뭘 하고 있니?
  홍당무: 몰라요, 엄마.
  르삑 부인: 그럼, 또 보나마나 바보짓을 하고 있었구나. 일부러 또 그런 짓을 하는
거지?
  홍당무: 전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예요.

      19

  엄마가 자기를 보고 웃고 있다고 생각한 홍당무는 흐뭇해서 자기도 미소짓는다.
  그런데 르삑 부인은 막연하게 혼자서 빙글빙글 웃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 얼굴간 그 얼굴이 검은 구즈베리나무의 열매 같은 어두운 눈을 한 음흉한
얼굴로 바뀐다.
  홍당무는 어리둥절해져서 쥐구멍을 찾는다.

      20

  "홍당무야,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웃을 수는 없니? 그리고 울 때는 왜 우는지
까닭을 알아야 해."
  르삑 부인이 말한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이 아이는 뺨을 아무리 때려도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으니 말이야."

      21

  르삑 부인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어딘가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거나 길바닥에 똥이 떨어져 있으면, 그 아이는 꼭
그런 것을 묻혀 온다니까. 아무튼 고집쟁이여서, 머리 속에 뭔가 생각하기만 하면 끝내
풀 줄을 모른단 말이야. 자존심이 꽤 강해서,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자살이라도
할 거예요."

      22

  사실 홍당무는 양동이에 찬물을 가득 부어 넣고 자살하려고 한다. 양동이 속에
코와 입을 용감하게 담근 채 가만히 있는다.
  바로 그때 귓바퀴를 후려 갈기는 손이 있어 양동이가 구두 위에 뒤집혔다.
하지만 그 덕분에 홍당무는 목숨을 건진다.

      23

  이따금씩 르삑 부인은 홍당무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걘 나를 닮아서, 악의라곤 통 없어요. 심술궂다기보다는 바보스럽지요. 아주
느림보라서 눈에 띌 만한 짓은 못해요."
  또 어떤 때는 이렇게 생각하며 기뻐하기도 한다. 만일 그 아이가 별일 없이 잘
자라기만 하면 끝내는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24

  "만일 어쩌다가"
  홍당무는 공상에 잠긴다.
  "훼릭스 형이 선물 받은 것과 같은 목마를 나도 받게 된다면, 나는 그 목마를 타고
도망쳐 버릴 거야."

      25

  밖에 나가면 홍당무는 휘파람을 분다.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마음이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르삑 부인의 모습을 보자 휘파람을 딱 그친다. 너무도 애처로운
이야기이다. 마치 어머니가 홍당무의 입안에 있는 싸구려 피리를 부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어머니가 별안간 나타나면 나오려던 딸꾹질이 딱 멎어 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26

  홍당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락병 구실을 한다. 르삑 씨가 이렇게 말한다.
  "홍당무야, 이 단추가 하나 떨어졌구나^5,5,5^."
  홍당무는 셔츠를 르삑 부인한테 가지고 간다.
  그러면 부인은
  "이상한 아이로구나, 네 명령은 안 듣겠다."
  그러면서도 받짇고리를 꺼내어 단추를 단다.

      27

  "만일 아빠가 살아 있지 않다면."
  큰소리로 르삑 부인이 말한다.
  "아득한 옛날에 너한테 혼이 났을 게다. 너는 이 칼로 내 심장을 찔렀을 테고, 나는
틀림없이 거리를 헤맸을 거야!"

      28

  "코를 푸는구나!"
  쉬지 않고 르삑 부인이 말한다.
  홍당무는 줄곧 손수건 가장자리로 코를 푼다. 그러나 자칫 잘못 풀고는 콧물이
보이지 않게 다시 접는다.
  감기에 걸리면 르삑 부인은 언제나 홍당무의 얼굴에 친절하게 초를 발라 준다. 너무
많이 바르기 때문에 에르네스띤느와 훼릭스가 샘을 낸다. 그러나 이 아이를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덧붙인다.
  "이건 너 같은 아이에게는 잘 듣는 약이다. 아무튼 감기도 고치고, 너의 나쁜 머리도
산뜻하게 해주니까."

      29

  오늘 아침부터 르삑 씨가 너무 놀려 대는 바람에, 홍당무의 입에서 이런 심한 말이
튀어나왔다.
  "시끄러워, 개망나니 같으니라구!"
  이렇게 말한 순간 둘레의 공기가 험악해져 양쪽 눈에 불덩어리가 타오르는 것 같다.
  입 안으로 머뭇거리며, 위험하다 싶으면 땅속에라도 파고들 준비를 한다.
  그러나 르삑 씨는 그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빤히 쳐다볼 뿐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30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곧 결혼한다. 그래서 르삑 부인으로부터 약혼자와 산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 내렸다. 다만 홍당무의 감시 아래이다.
  "먼저 가거라, 힘차게 뛰어서 말이야!"
  에르네스띤느가 말한다.
  홍당무는 앞장서서 걸어간다. 뛰다가 달리다가 개처럼 빨리 달음박질쳐 보기도
한다. 그러나 자칫 발걸음을 늦추게 되면, 들을 생각이 없는 데도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남의 눈을 피하는 키스 소리, 그는 헛기침을 한다.
  신경일 날카로워진다. 마을의 십자가 상 앞에서 모자를 벗었다가 그 순간 모자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발로 지근지근 밟아 대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아무다 나 같은 건 사랑해 주지 않을 거야. 나 같은 건 말이야!"
  그 순간 귀가 밝은 르삑 부인이 담 뒤에서 불쑥 얼굴을 내민다. 입가에 무서운
웃음을 띤 오싹해지는 얼굴로^5,5,5^.
  홍당무는 어리둥절해져서 이렇게 한마디 덧붙여 말한다.
  "엄마만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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