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국가라는 조직의 성패가 담겨 있다. 특히 고구려는 조직의 번영과 몰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주몽부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연개소문까지 고구려 700년의 역사를 기업가 정신과 조직 경영의 시각에서 살펴본다. 기업에 활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역동성은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한 도전 정신에서 나온다. 우리 역사에서 기업가 정신이 가장 강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별다른 자원도 없고 입지 조건도 좋지 않았던 고구려는 뛰어난 리더들과 특유의 목표지향적 풍토, 다물 정신을 기반으로 동북아시아 최강자가 되었다.
▣ Short Summary
어떤 조직이든 도전정신을 빼면 남는 것은 안주와 퇴보뿐이다. 도전 정신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역동성이 일어난다. 이것이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폐터가 언급한 기업가 정신이다. 그는 인간의 삶은 파괴적 혁신으로 진보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기업가 정신이 가장 강한 나라는 어디일까?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는 바로 한국이라고 했다. 한국은 해방 이후 1세기 이상 뒤떨어졌던 산업화시대를 단숨에 이룩해내고 또다시 디지털시대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고는 방심한 탓인지, 글로벌 기업가정신지수가 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가 정신은 한국의 5,000년 역사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데, 그중 고구려 역사야말로 대표적이다. 사방을 에워싼 중원과 남방, 북방세력의 교차점에서 700년 역사를 지켜냈고 동북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하기도 했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고구려는 온달, 을지문덕 등 서민부터 연개소문 등의 귀족과 주몽, 미천왕, 광개토대왕 등 28명의 왕에 이르기까지 불굴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부강한 국가의 비책을 고구려에게 자주 찾았다. 다음은 성종이 인정전에서 선비들에게 책문한 내용이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는 남방과 북방에서 늘 침략을 받아왔다. 그런데 어떻게 고구려는 수 양제와 당 태종에 대항하고 천하강국이 되었는가? 어떤 인물이 어떤 계책을 내놓았던가?”
창조적 도약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고구려를 볼 때마다 흡사한 의문을 가진다. 별다른 자원도 유리한 입지 조건도 없던 고구려가 어떻게 웅비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모색하고 있다. 국가 간 경계가 모호해 격심한 다툼이 잦았던 고구려시대와 산업간 경계가 지워지고 있는 디지털 사회의 공통분모는 ‘도전’과 ‘응전’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드는 것이 도전이라면, 기왕에 있던 길도 새롭게 만들거나 버리고 더 나은 길을 만드는 것이 응전이다.
▣ 차례
여는 글
1 고구려인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2 고구려는 룰메이커였다
3 고구려 다이내믹의 근원
4 고구려 700년 투쟁의 축-주권의식
5 하늘에 태양은 하나다
6 당 태종, “두 번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지 마라”
7 고구려 왕들에게서 배우는 전략적 인내
8 권력의 정당성을 묻는다
9 리더십은 방향이다
10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긴 후에 싸운다
11 정복형 경제군주, 광개토대왕
12 금수저 장수왕의 번영 전략
13 전략의 지존, 연개소문의 리더십
14 동업, 승계, 첩보전의 방정식
15 리더와 2인자의 관계
16 연개소문의 죽음과 조직 리바이벌
참고 문헌
고구려에서 배우는 경영 전략
석산 지음
북카라반 / 2018년 7월 / 304쪽 / 14,000원
고구려인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상상의 공동체 형성하기
꿈은 단기적인 목표가 아니라 장기적인 목적이다. 개인의 목적이 개인이 평생 추구해야 할 신념이라면 조직의 목적은 조직이 존재하는 한 추구해야 할 가치다. 조직의 꿈인 비가시적인 목적이 가시적인 목표를 움직여야 조직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주몽 이후 고구려가 창건 목적을 잊지 않을 때는 어떤 강적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망각한 왕이 들어설 때는 나라가 퇴보했다. 이를 미리 내다본 고구려 건국 세력이 세팅해둔 상징이 주몽신화와 삼족오였다. 이 두 가지가 고구려의 존립 목적인 다물 정신을 꾸준히 상기시키고 고취시켰다. 다물 정신이란 옛 조선의 땅과 정신을 다 물려받는 나라가 되겠다는 각오라 할 수 있다. 먼저 주몽신화를 살펴보자.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아리수(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아리따운 아가씨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인연을 맺는다. 그녀는 강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였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화백이 크게 노해 유화를 쫓아낸다. 정처 없이 헤매던 유화를 동부여의 금와왕이 발견하고 궁중으로 데려간다. 그 뒤 유화가 큰 알을 낳자 불길하다며 알을 버렸는데 태양이 언제나 알을 비추어주었고 공중의 새와 들짐승들까지도 정성스럽게 알을 지켜주었다. 금와왕이 알을 깨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하자 유화에게 돌려준다. 유화가 알을 따뜻하게 품어주자 주몽이 태어났다. 7세쯤 주몽이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을 화살 하나로 꿰뚫었다. 동부여 백성들은 주몽을 존경하기 시작했고 금와왕의 아들들은 시기하기 시작했다. 주몽이 20세가 되자 어머니 유화가 불렀다. “왕자들이 너를 해칠 궁리를 하고 있으니 이곳을 떠나 큰일을 도모하라.” 이른 새벽 주몽이 도망친 것을 안 왕자들이 추격하기 시작했다. 엄사수 앞에 이르러 주몽이 외쳤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자다.” 그러자 무수한 물고기와 자라 떼들이 올라와 강물 위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주몽은 무사히 강을 건너 고구려를 건국한다.
이 신화의 핵심은 무엇일까? ‘일자(日子) 고주몽’이다. 고조선이 해체되면서 해모수가 부여(북부여)를 세웠고, 여기서 나온 무리를 중심으로 금와가 동부여를 세웠다. 그 해모수의 아들이 주몽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를 향해 있다. 바로 고조선은 태양의 나라이고 이를 계승한 사람이 주몽이며, 그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주몽신화는 700년 고구려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호출되었다. 주몽 사후 400년이 지난 광개토대왕비에도 주몽신화가 각인되어 있다. 고구려의 두 번째 신화적 상징인 삼족오 역시 주몽신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주몽을 탄생시킨 태양 안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 이 삼족오신화는 동이족이 고조선에 전래했다. 태양에 아른거리는 흑점을 세 발 달린 까마귀로 본 것이다.
주몽 등 고구려 설계자들은 고구려의 꿈을 상기시켜준 상징으로 주몽신화와 삼족오신화를 설정해놓았다. 조직의 역동적인 힘은 물리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그들을 하나 되게 묶어주는 관념과 어떤 이미지, 즉 특유의 언어가 필요하다. 이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조직이 곧 ‘상상의 공동체’다. 조직의 역동적인 롱런 여부는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고구려는 룰메이커였다
창조적 파괴
미리 정해진 틀을 따라가는 것이 룰테이커(rule taker)다. 이들은 결코 크리에이터가 될 수 없다. 룰메이커(rule maker)가 되어야만 기존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물론 많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이를 무릅쓸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고구려의 발흥지인 압록강 중류 일대는 중원과 북방, 그리고 한반도의 교차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숙명적으로 다양한 유목민족들과 교섭해야 했다. 그래서 고구려는 백제, 신라, 일본과 중국, 돌궐 말갈 등 북방민족들과 다각도로 관계를 맺으며 서진정책과 남진정책을 번갈아 전개했다. 주몽 때부터 고구려는 주변과는 다른 룰을 세우며 성장해나갔다. 고구려는 일단, 주변 국가들을 수동적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중국의 정책을 거부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중원 중심의 국제질서를 여러 차례 고구려 중심으로 변경시켰다. 당시 동북아 질서의 주요 변수는 중국이 아니었다. 고구려와 선비, 거란, 돌궐, 유연, 말갈 등 북방민족들의 관계였다. 특히 광개토대왕 때처럼 고구려가 북방민족을 주도할 때 중원은 국제정치에서 상수가 아니라 변수로 전락했다. 북방민족도 수시로 고구려를 침입했지만 고구려는 화전양면작전으로 이들을 관리했다. 북방 민족들이 약할 때는 고구려와 수ㆍ당 간의 전쟁 때처럼 고구려의 용병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은 강해지면 중원 진출을 시도했고 그 전에 반드시 고구려와 제휴해야만 했다.
일찍이 동북아 정세는 고구려-북중국-신라가 동맹을 맺고, 백제-남중국-왜가 동맹을 맺은 동서 대립 구도였다. 그러다가 6세기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신라와 동서로 연결하며 고구려를 압박했다. 이에 고구려의 영양왕이 수나라를 선제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수나라가 패배해 중국 대륙은 일대 혼란에 빠졌고 수나라는 멸망했다. 이처럼 고구려가 왕성할 때 중원은 힘을 잃었고 고구려가 약해질 때만 중원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정리되었다. 이처럼 고구려는 자체적인 룰메이커로 중국과 꾸준히 대결했다. 고구려는 룰메이커로서 전형적인 기업가 정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에 태양은 하나다
고구려와 중국의 천하관 충돌
천하를 어떻게 보느냐가 천하관이다. 일종의 세계관이지만, 천부적 소명감 같은 것까지 내포되어 있어서 세계관보다 훨씬 근원적이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고구려 왕의 존재 의미에서 비롯된다. 개국 시조 주몽은 태양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후손들도 태양의 후예가 된다. 그래서 장수왕이 만든 광개토대왕비에도 고구려의 천하관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은택흡우황천 위무불피사해 恩澤洽于皇天 威武拂被四海
(은택이 황천에 골고루 미치고, 위엄은 사해에 떨치셨다.)
황천은 하늘이고 사해는 온 세상이다. 광개토대왕의 위무가 온 세상과 하늘까지 두루 도달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구려 왕이 곧 천하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고구려와 인접해 용호상박의 다툼을 벌이던 중국도 이와 대응한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로부터 자국 황제를 주몽처럼 하늘의 아들이라 일컬으며 주변 이민족을 오랑캐라 칭했다. 이런 중국의 천하관을 한 무제 때 동중서가 중화주의로 정립한다.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 중에서 유가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것이다. 중원을 중심으로 놓고 변방을 주변으로 수렴하는 차별적 구도를 설정하고, 변방의 이민족에게 한나라 중심으로 군신의 예의를 다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한나라는 물과 기름처럼 상극이 되어야만 했다. 한나라는 결국 고구려를 꺾지 못한 후유증 속에 멸망했다. 그 후 400년 정도 남북조시대의 혼란이 지속되는데 수나라가 중국 역사상 세 번째로 통일을 이룬다. 이 시기의 고구려 왕이 26대 영양왕(재위 590~618)이다. 중원을 정리한 수 문제가 시선을 북쪽으로 돌려 돌궐과 고구려를 주목했다. 우선 고구려의 지형과 내부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 사신을 수차례 보냈다. 영양왕도 사신을 보내 수나라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말갈족, 거란족과 연대를 강화했고 수나라에 위협적이던 돌궐과도 좋은 관계를 모색했다. 그런 가운데 수나라도 말갈과 거란을 포섭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영양왕이 598년 말갈 기병 1만 명을 휘하에 거느리고 요서를 선제공격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수나라 문제가 길길이 날뛰며 30만 대군을 동원해 공격했다. 하지만 마침 장마가 시작된 데다가 보급선마저 고구려군에게 차단당했다. 게다가 수나라 수군까지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의 탁월한 전략에 말려들어 상당수가 바다에 수장되었다. 이 1차 고ㆍ수 전쟁 후 중국이 고구려를 두려워해서 교역을 재개하는 등 양국 사이에 십 수 년간 소강상태가 이어진다. 그러나 문제 이후 양제가 즉위하며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며 대제국을 이루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의 첫 목표는 당연히 고구려 정벌이었다. 결국 2차 고ㆍ수 전쟁이 터졌지만 을지문덕에게 대패하고 만다. 다시 전열을 정비해 3차 고ㆍ수 전쟁을 벌였지만 요동성을 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후에도 네 번째로 고구려를 공격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내분 상태에 접어든 자국 사정 등으로 물러나야 했다. 결국 수 양제는 618년 피살되었다. 이를 지켜보며 고구려를 재건하는 데 동분서주하던 영양왕도 같은 해 9월 승하했다.
기존의 패권국가는 신흥강대국의 부상을 위협으로 간주해 전쟁이 일어나곤 한다. 우리 고대사에서도 먼저 동북아 패권을 차지한 고조선에 한나라가 도전했고, 당시 한나라에 고구려가 도전했다. 특히 정복 전쟁이 주요 사업인 고대국가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두 나라가 양립하기는 불가능했다.
두 왕의 상반된 비전
한 시대의 숙적이었던 수 양제와 고구려 영양왕이 똑같은 천하관을 품고 같은 해에 죽었다. 그 후 고구려와 중국은 어떤 관계로 나아갔을까?
수나라를 정복한 당나라는 중화주의를 더욱 강화한다. 이에 비해 영양왕을 승계한 27대 영류왕의 천하관은 흔들리고 만다. 리더의 천하관이 다르면 대외 대응 전략도 다르게 나타난다. 영양왕과 영류왕이 중국을 대하는 자세는 완전히 상반되었다. 수나라로부터 위협을 감지한 영양왕은 전쟁에 대비해 말갈족, 거란족, 돌궐족과 안정적 관계를 모색했다. 서북의 북제가 모체인 수나라가 고구려와 인접한 동북의 북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북제의 유민들은 수나라에 악감정이 있었다.
영양왕은 이를 십분 활용해 고도의 첩보 전략을 수행했다. 그러자 수나라도 고구려를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어 수시로 사신을 보내 정탐을 시도했다. 그러나 영양왕은 수나라 사신들을 한적한 곳에 머물게 하고 감시자를 세워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치열한 첩보전을 통해 수나라가 최신 무기를 개발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빼내기 위해 태자를 수나라의 태부까지 밀파해 기술자를 데려왔다. 그리고 말갈 기병을 거느리고 수나라를 선제공격해 수나라의 말갈포섭정책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역사서를 편찬하게 해서 고구려인들에게 국가의 천하관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에 비해 당나라와 맞서야 했던 영류왕은 전혀 다른 대응을 한다. 고구려에 패전한 후유증에 헤매던 수나라는 당나라를 세운 이연, 이세민 부자에게 멸망했다. 당이 건립되던 해에 영류왕도 즉위했다. 당 고조가 즉위한 이듬해 사신을 보내고, 그 후 매년 사신과 조공을 바치며 당나라를 다독였다. 당나라에서 고ㆍ수 전쟁의 포로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자 1만 명을 송환했다. 또한 젊은이들을 당나라 문화를 배우라며 파견하기도 했다. 그 후 이세민은 당 태종으로 등극했고 돌궐의 국왕까지 사로잡았다. 당 태종을 크게 의식한 영류왕은 당 태종의 집권을 축하한다며 고구려의 지도인 봉역도까지 바쳤다.
최고 군사기밀인 지형도를 당나라에 내주었다는 것은 영류왕이 고구려의 천하관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다. 앞으로 당나라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고ㆍ수 전쟁의 승전 기념물인 경관(수나라 전사자의 뼈로 만든 탑)마저 허물었다. 꾸준히 저자세로 나오는 영류왕을 바라보는 당 태종은 고구려 왕이 저 정도라면 쉽게 정복할 수 있으리라 보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고구려는 원래 한사군의 영토가 아니더냐. 내가 군사를 내어 요동을 친다면 반드시 국력을 기울여 반발할 것이다. 그때 산동반도에서 수군을 동원해 바다 건너 평양으로 가면 된다.”
영류왕은 당 태종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는 고구려의 저자세에 만족할 수 없었고. 반드시 고구려를 정복해야만 했다. 이런 정황을 지켜보던 고구려의 강경파들이 반발한 것이 ‘연개소문의 정변’이다. 대당 굴욕외교로 일관하는 영류왕을 제거하고 고구려의 근본인 천하관을 유지하기 위한 혁명이었다. 영류왕 시대는 리더의 비전이 조직의 정체성과 다를 때 조직이 겪는 혼돈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리더는 항시 우리 조직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고 무엇이 바람직한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리더와 구성원이 서로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곧 조직 발전의 기초인 것이다.
당 태종, “두 번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지 마라”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88일 만의 승리
중원에 당나라가 들어선 618년 9월에 고구려에서는 영양왕이 죽고 그의 이복동생 건무가 27대 영류왕으로 즉위하면서 선왕과는 달리 북수남진(北守南進)정책을 편다. 이때 을지문덕이 북진남수(北進南守)를 주장하다가 파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중국 강경파인 연개소문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가 되어 중앙 정치무대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얼마 후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집권자가 되었다.
연개소문의 집권은 북진남수정책으로의 회귀를 뜻했다. 이를 빌미로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당 태종은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투력이 뛰어난 정예부대로만 편성했다. 육군 6만 명과 해군 4만 3,000명, 전함 500척으로 편성하고 육군 총사령관에 이세적을, 해군 총사령관에 장량을 임명했다.
각 부대에 고구려의 성을 공략할 최신 무기 발차도 구비했다. 과연 수나라 군대보다 응집력이 강한 당나라 병사들은 초반부터 고구려 여러 성을 차례로 함락했다. 그렇게 승기를 잡으며 드디어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간판격인 요동성에 도착했다. 수나라 100만 대군이 저지당했던 요동성을 바라보며 당 태종은 직접 흙가마니를 나르고 성 아래 물을 채워놓은 참호를 병사들과 함께 메웠다. 당나라군이 발차를 동원해 거대한 돌을 쏘아 성의 한쪽 벽을 무너뜨리면 고구려 병사들이 다시 성을 쌓아올렸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데 12일째 마침 요동성 쪽으로 강풍이 불자 태종이 화공을 명령해 요동성을 태웠다. 그 여세를 몰아 백암성으로 향했는데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했다. 당나라의 기세 앞에 다른 성들도 차례차례 무너져가는 가운데 당나라군은 안시성으로 향했다. 당군이 도착해보니 안시성은 산악으로 둘러싸인 요새 중의 요새였다. 남녀노소 합해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안시성을 마침내 당나라의 정예군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해진에게 15만 명의 구원군을 주어 돕도록 했다. 그러나 구원군은 당 태종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패했고, 고연수와 고해진은 당 태종에게 항복하고 벼슬을 받았다.
이제 안시성은 완벽하게 고립무원의 성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성주 양만춘과 군사들은 물론 주민들까지도 혼연일체가 되어 완강하게 저항했다. 당군은 안시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한 후 매월 5~6회 공격했다. 발차로 성을 파괴하면 성안의 고구려인들이 목책을 세워 막기를 반복했다. 이렇듯 양쪽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자 마침내 당 태종이 새로운 계책을 냈다.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라. 그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보고 보이는 대로 다 죽이면 된다.” 그날부터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어 안시성 동남쪽에 밤낮없이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구려군도 성 위에 흙을 퍼부어 성을 더 높였다. 드디어 성보다 훨씬 높은 토성이 쌓아졌다.
태종이 토산 수비대장으로 도종을 임명했다. 도종은 부하 부복애에게 병사들을 데리고 토산 꼭대기에 올라가 고구려를 감시하라고 했다. 그런데 부복애가 자리를 비운 사이 토산의 한 쪽이 붕괴되며 성벽 일부가 무너졌다. 그 틈을 타 고구려 병사들이 몰려나와 토산을 점령해버렸다. 잔뜩 화가 난 당 태종이 그 자리에서 부복애를 처형하고 토산 탈환을 위해 사흘 밤낮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이 참호를 파서 서로 연결하고 그 속에 숨어서 불을 던지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서서히 요동 벌판에 맹추위가 몰려오고 있었고 식량도 바닥이 나고 있었다. 계속 안시성만 공격하고 있다가 동사자와 아사자가 속출할 것이 자명했다. 마침내 당 태종이 퇴진을 명했다. 안시성 혈투 88일째 되는 날이었다. 연전연승을 구가하던 당 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평소 고구려와의 전쟁을 반대했던 위징을 그리워하며 통탄했다. “위징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당나라는 이 시기 대당성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고구려는 연이은 고ㆍ수 전쟁 이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 있었다. 대성당세를 구가하던 당나라와 고구려의 안시성 전투는 한마디로 말해 글로벌 기업과 중소기업의 전쟁이었다. 양만춘은 이런 전쟁에서 이겼다. 경영 자원이나 경쟁력이 훨씬 떨어지는 소기업이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양만춘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정복형 경제군주, 광개토대왕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라-교동도 관미성 전투
고구려 특유의 리더십을 온 몸으로 실천한 왕이 광개토대왕이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간직하고 이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현했다. 주몽 때부터 면면히 내려온 건국이념인 다물을 구현한 것도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고조선의 강역이었던 요동반도와 만주 벌판, 러시아 연해주까지 회복했다. 주몽과 고조선 유민의 꿈이 광개토대왕 때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세운 약 7미터 높이의 광개토대왕비가 통구시에 우뚝 서 있다. 그의 웅대한 업적 앞에 초라해진 일본과 중국이 비문을 조작할 정도였다.
사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할 즈음 고구려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서쪽으로는 중국이 5호16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위쪽에서는 북방 민족들이 사납게 준동하고 있었다. 만일 고구려에 허약하거나 어리석은 왕이 들어섰다면 필시 북방민족의 말발굽에 짓밟혔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래쪽의 백제는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18세에 왕이 된 광개토대왕은 22년 치세 동안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를 만들었다.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는 국력만 강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도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를 그냥 대왕이 아니라 왕 중 왕이라며 ‘태왕’이라 불렀다.
광개토대왕의 원래 이름은 담덕인데 담덕이 태어나던 해, 묘하게도 백제를 해양강국으로 만든 정복왕 근초고왕이 죽는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고구려는 서방 정벌에 앞서 배후가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고구려 못지않은 확장 욕구를 지닌 백제를 먼저 정리해야 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은 즉위 초부터 백제를 맹렬하게 공격한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주요 전선은 예성강과 임진강 유역이었다. 광개토대왕은 392년 7월 친히 4만 대군을 이끌고 황해도 지역의 백제 성 10개를 빼앗았다. 백제와 고구려의 전반적인 전세가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이전의 대부분 전쟁에서는 백제가 크게 우세했다. 고국원왕까지 비명횡사했으며 소수림왕과 고국양왕도 부왕의 복수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고국원왕의 손자가 이런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뀌어놓는다. 이어서 그해 9월 북으로 올라가 거란을 정벌한 후, 곧바로 교동도의 관미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 지점에 있는 관미성은 사방이 험준한 천연 요새였다. 백제는 이곳을 지켜야만 한성으로 들어오는 경기도 이남 지역의 생산물과 세금 수취선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
광개토대왕의 함대가 강화도 근처에 내려와 머물다가 밀물을 타고 관미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일곱 방향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관미성의 백제군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고구려군에 돌돌 굴리고 화살을 쏘아 바다에 수장시켰다. 그런 식으로 공방전을 벌이며 20여 일이 흘렀다. 그날 밤 광개토대왕이 새로운 작전 지시를 내렸다. “일곱 공격부대 중 성문 앞을 지키는 부대만 남고 나머지 여섯 부대는 오늘 야음을 이용해 배를 타고 북쪽으로 퇴각하라. 적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멀리 돌아오되 은밀한 곳에 배를 숨겨두고 병사들은 성문에서 가까운 지역에 다섯 부대는 매복하고 나머지 한 부대는 먼 지역에 매복하라. 절대로 적이 눈치 채면 안 된다.”
관미성의 백제군은 고구려군이 어둠 속에 퇴각하는 것을 보았다. 관미성 성주가 성문을 열고 기별을 몰아 성문 밖의 고구려군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이 말을 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쫓아가는데 뒤쪽이 소란스러워 돌아보니 성문 위에 백제의 황색 깃발 대신 고구려의 적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성주가 성문을 열고 나온 틈을 타서 성 근처에 매복해 있던 다섯 부대가 성으로 들어가 함락한 것이다. 그제야 속은 줄 알고 군사를 돌이키려 하자 근방에 매복해 있던 한 개 부대가 막아섰다.
이렇게 관미성을 빼앗긴 백제 진사왕은 패전 책임론에 휘말리며 백제인에게 살해되고 아신왕이 즉위한다. 그만큼 관미성은 백제에 중요한 요새였다. 광개토대왕의 장점 중 하나가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알고 미리 장악한다는 것이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열정의 화신이기도 했다.
열정에는 2가지 힘이 있다. 첫째, 지치지 않고 계단을 오를 수 있는 힘이다. 광개토대왕은 20대와 30대를 정복 현장에서 보냈다. 말하자면 생산 현장에서 젊음을 보낸 것이다. 소수림왕이 체제 정비 등 고구려의 비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주었지만 어디까지나 기초공사만 겨우 끝난 상태였다. 국제 정세는 여전히 고구려에게 불리했다. 5세기 동아시아 최강 국가 고구려는 온전히 젊은 광개토대왕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탄생했다. 둘째, 지지자를 모으는 힘이다. 광개토대왕이 다른 왕들과 달리 백성들과 함께 동아시아 최강국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열정이 백성에게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기업가가 되려면 우선 자신부터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열정은 타고나는 것만은 아니다. 열정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있다. 먼저 평소 자신의 열정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만일 그 열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모적인 충동으로 흐르고 있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신을 믿고, 자신이 하는 일을 믿고, 자신이 열망하는 목표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신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동업, 승계, 첩보전의 방정식
리더십 승계 방정식-미천왕과 모용외의 차이
성공적인 리더십의 화룡점정은 성공적인 리더십 승계다. 그래야만 조직의 비전이 지속된다. 많은 리더가 비전과 지속가능 경영을 강조하면서도 후계자를 양성하는 업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 공격적 카리스마형 리더인 연개소문도 별다른 준비 없이 죽고, 세 아들이 권력 나눠먹기를 하다가 나라가 망했다. 이에 비해 미천왕과 모용외(전연의 시조)는 나름대로 승계 작업을 완수했다. 모용외는 능력 위주로 리더십을 교체했고 미천왕은 문화와 민심 위주로 리더십을 교체했다.
모용외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큰아들 모용한과 셋째 아들 모용황, 둘 다 지략과 담력이 뛰어났다. 그런데도 별다른 이유 없이 셋째 아들 모용황을 태자로 선택했다. 아마도 모용황이 모용한보다 능력과 권력욕이 더 컸던 것 같다. 이에 비해 미천왕의 승계 과정은 달랐다. 장남 고사유는 낙마가 무서워 사냥도 조심스럽게 할 정도였지만 차남 고무는 아버지를 닮아 용맹했다. 대신들이 능력이 출중한 차남 고무가 태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미천왕은 장남인 고사유를 태자로 세웠다.
이런 승계 구도가 두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사서에 보면 모용황이나 모용한은 모두 뛰어난 인물이라고 나온다. 둘 다 전쟁 때면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모용황이 형인 모용한을 심하게 질투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이 부왕에게 사랑을 받는다 싶으면 시샘했다. 만일 형이나 다른 형제에게 왕위를 주면 모용황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키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필시 이를 우려한 모용외가 모용황에게 권좌를 주었을 것이다. 모용황이 왕이 되자 다른 형제들이 두려워 도망가거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면 세간의 예측과는 달리 왕이 되지 못한 고무의 행보는 어떠했을까? 고무는 형 고사유가 고구려 고국원왕이 된 후에도 모용황의 형제들과 달리, 형인 고국원왕의 통치를 도왔다. 즉 형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며 고구려를 성장시키는 데 주력했다.
미천왕 시대 고구려가 그토록 추진하던 요서 진출이 매번 좌절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모용외의 건재 때문이었다. 이를 잘 아는 고국원왕도 모용외를 제거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모용황과 치열하게 다투던 후조의 석호왕이 배 300척에 양곡 30만 석을 실어 보냈다. 후조는 고구려와 함께 모용황의 전연을 정복하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크게 기뻐하며 전연을 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후조 왕가에 엄청난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전연 정복 시도는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중원 석권을 노리고 있던 모용황은 마침내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342년 모용황은 고구려를 평탄한 북도와 험준한 남도의 두 방향으로 나누어 침략했다. 고구려에서는 고국원왕이 남도를 방어하기 위해 나갔고, 북도 방어를 위해 왕의 아우 고무가 정예병 5만 명을 데리고 나갔다. 고구려는 전연의 주력부대가 북도로 쳐들어올 줄 알고 주력군을 그 방향에 집중한 것이다. 이를 간파한 모용황은 역전략을 선택했다. 모용황이 4만 군사로 남도로 진격했고 별동대 1만 5,000명은 북도로 진격했다. 고무의 부대는 선방했으나 고국원왕의 부대가 대패했다. 환도성까지 밀고 온 모용황이 미처 피신하지 못한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까지 붙잡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북도로 간 고무의 고구려 주력군 5만 명이 전연의 별동대 1만 5,000명을 궤멸시켰다. 이들이 퇴로를 차단할까 두려워 모용황은 왕비와 왕모 등 인질 5만 명을 끌고 돌아갔다.
고국원왕과 모용외의 리더십 교체 방식은 차이가 있었다. 모용외는 능력 위주의 리더십 교체를 추구했다. 리더십 승계 원칙이 장자 중심인 농경 사회와 달리 유목민 사회는 장자 승계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모용외는 첫째 모용한 대신 셋째 모용황을 택했다. 셋째가 첫째보다 능력이 출중해 모용한이 왕이 되어도 모용황을 당해내지 못하리라 본 것이다. 반면에 모용한은 동생인 모용황이 왕이 된다 해도 일시적으로 분노하겠지만 결국은 나라에 충성하리라고 내다본 것이다.
반면에 미천왕은 문화와 민심 위주의 리더십 교체를 추구했다. 고구려의 승계 문화가 장자 중심인데, 미천왕 자신의 등극이 창조리의 반란으로 인한 비상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자신도 장자 승계가 아닌데 능력 위주로 승계한다고 장남을 버리고 차남을 선택하면 정통성 시비가 일 것이 분명했다. 당시 정황에서는 능력보다 정통성 확보가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능력은 차남인 고무가 장남인 고사유보다 훨씬 출중했다. 하지만 고사유는 태종 이방원 같은 야심가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개인의 야망보다 충과 효를 중시했다. 동생인 고무가 왕이 되더라도 충분히 수용하고 왕과 국가를 위해 변함없이 충성할 왕자였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조직 리바이벌
한국사의 가장 아쉬운 장면-연개소문 승계자들의 내분
당 태종은 연개소문에게 패배한 치욕을 떠올리며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뒤이어 즉위한 고종은 전략을 바꾸어 대규모 전쟁보다 소규모로 고구려 변경을 치고 빠지며 고구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동시에 당나라는 고구려 정복 작전의 일환으로 배후의 신라를 도와 660년 7월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후 소정방의 백제 정벌 주력부대를 고구려 공격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소정방은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고 “대설이 왔다.”는 핑계를 대는 등 자꾸 후퇴했다.
적어도 연개소문이 건재하는 동안은 당나라의 공격이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죽은 665년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일단 장남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어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기 위해 잠시 평양을 비우고 두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국정을 맡겼다. 그때 남생의 반대파가 남건과 남산을 찾아와 이간질시키는 말을 했다. “형이 두 동생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두 동생은 믿지 않았다. 그러자 또 남생의 반대파가 사람을 시켜 남생을 찾아가서 꼬드겼다. “당신이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두 동생이 막고 있습니다.” 남생이 의심이 들어 첩자를 보내 두 동생의 동태를 살펴보게 했다. 그런데 이 첩자가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형을 의심하기 시작한 두 동생이 남생의 아들 헌충을 제거하고 왕명을 빌어 남생을 불러들였다.
겁이 난 남생은 평양에 들어가지 않고 국내성에 웅거하며 아들 헌성을 보내 당나라에 투항했다. 당 고종이 크게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헌성을 우무위장군에 임명하고, 남생은 평양도행 군대총관으로 임명했다. 단 고종이 자신을 후대하자 남생은 가물성, 창암성, 남소성까지 당나라에 바쳤다. 당나라가 그토록 피를 흘리며 공격했던 철옹성들이 우수수 당나라로 넘어갔다. 고구려의 상황이 점차 불리해지는 가운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마저 남쪽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 문무왕에게 투항했다.
고구려가 내부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자 당나라는 거국적으로 다시 침략한다. 고구려에서도 대막리지가 된 남건이 수장이 되어 맞섰다. 667년 당나라 이세적이 지휘하는 대군이 요동 너머 각 성을 차례로 정복하며 평양성을 향했다. 이에 신라도 호응하며 아래에서 평양성을 공격한다. 668년 고구려와 나당연합군의 싸움이 절정을 이룰 때 시어사 가언충이 일시 당나라로 돌아가 고종에게 전황을 아뢰었다. “지난날 고구려에 틈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남생 형제의 다툼으로 내부 사정을 훤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고구려를 이길 것입니다.” 가언충의 말처럼 고구려의 마지막 몇 년 동안에는 내부 기밀을 당나라와 신라에 빼돌리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고구려의 평양성이 무너진 것도 그 때문이다. 나당연합군이 아무리 협공해도 1년 이상 버티던 평양성이 남건의 신임을 받아 주요 군무를 맡았던 승려 신성이 이세적과 내통하면서 성문을 열어준 것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 묘하게도 연개소문과 악연이 있던 당 태종의 말이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잡고 대당 강경정책을 펴며 일단 고구려라는 하드웨어를 잘 지켜내었다. 천하무적인 것처럼 보였던 연개소문의 유일한 실책은 불분명한 후계 구도였다. 진정한 성공은 현실성 있는 후계 구도의 완성이다. 그런데 현 상황과 역사 인식에 정확했던 연개소문이 지나친 자식 사랑 때문에 후계 구도를 흐트러뜨렸다. 연개소문은 수직적 질서에 대단히 민감한 고대 사회의 특성을 외면하고 남생, 남건, 남산 세 아들에게 권력을 분산시켜주고 군사 요직도 고루 맡겼다. 이것이 권력투쟁의 빌미가 된 것이다. 남생, 남건, 남산 형제는 서로를 신뢰하기보다 간교한 자의 세 치 혀에 넘어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고구려의 자체 붕괴 장면을 보며 자연히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만일 연개소문의 승계자들 사이에 내분이 없었다면, 그들이 힘을 합해 나당 연합군을 잘 막아냈다면 어땠을까? 이에 대한 가상의 답은 이렇다. 고구려가 붕괴될 당시 당나라 황제가 고종이었다. 그는 매우 심약한 황제였으며 워낙 비만해 가마를 타야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실세는 측천무후였다. 고구려의 후계 승계만 제대로 되었다면 주몽의 다물 정신을 광개토대왕에 이어 다시 한 번 실현시킬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목 인문학 (0) | 2020.04.13 |
---|---|
고백록 -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0) | 2020.04.13 |
경계인의 시선 (0) | 2020.04.13 |
결정을 못해서 고민입니다 - 스기우라 리타 (0) | 2020.04.13 |
겨울 이야기(The Winter's Tale) - 윌리엄 셰익스피어 (0) | 2020.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