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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골목 인문학

by Casey,Riley 2020.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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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자라 가장 익숙한 서울의 골목, 여행으로 혹은 일로 다녀온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아름다운 골목, 그리 많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몇몇 나라의 숨겨진 골목 등을 통해 골목의 풍경과 역사를 그려낸다. 그 풍경과 역사에는 사람 이야기가 있고, 동네 이야기가 있고, 도시 이야기가 있다. 인문학이란 궁극적으로 사람 이야기이며 사람의 자취라고 보면, 골목이야말로 사람의 자취와 사람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는 나이테와 같은 장소다.

골목 인문학

 

건축은 땅이 꾸는 꿈이고, 사람들의 삶에서 길어 올리는 이야기다. 임형남, 노은주 부부는 땅과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둘 사이를 중재해 건축으로 빚어내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동문으로, 1999년부터 함께 가온건축을 운영하고 있다. ‘가온이란 순우리말로 가운데, 중심이라는 뜻과 집의 평온함이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가장 편안하고, 인간답고, 자연과 어우러진 집을 궁리하기 위해 이들은 틈만 나면 옛집을 찾아가고, 골목을 거닐고, 도시를 산책한다. 그 여정에서 집이 지어지고, 글과 그림이 모여 책으로 엮인다. 홍익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고, 2011금산주택으로 공간디자인대상을, 2012년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생각을 담은 집 한옥,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이어주다, 사람을 살리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나무처럼 자라는 집, 이야기로 집을 짓다, 서울 풍경 화첩, 집주인과 건축가의 행복한 만남등이 있다.

 

Short Summary

골목이란 장소와 장소 사이의 틈이며, 그곳 역시 하나의 장소입니다. 장소의 속성은 머무름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골목은 흘러가는 길이면서, 또한 머무는 장소입니다. 조금 특이한 곳이죠. 큰길에서 꺾어 들어가면 만나는 그 골목은 집으로 이어지는 그냥 경로가 아닌, 소통이 이루어지고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그곳엔 시간이 담기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깁니다.

 

저는 일과 중에도 걷고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많이 걸어 다닙니다. 어디론가 여행을 가서도 어떤 특별한 장소를 찾기보다는 그냥 이 골목, 저 골목을 걸어 다닙니다. 걷는 속도로 도시를 보고 자연을 보는 것이 가장 즐겁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특별한 목적을 정하고 걷기 보다는 이 골목, 저 골목 들어가서 헤매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별히 원하는 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예상도 못한 풍경들을 보는 즐거움과 혹은 어떤 여행 책자나 어떤 정보에도 없는 그 장소의 민낯 또는 속살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있는 풍경을 만나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세상 사는 일이 다 그렇듯 큰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가장 빠른 길이 있지만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 길을 찾아가며 느끼고 배우고 그러다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가본 골목으로 들어가서 무작정 헤매다가 아는 길을 만나며 길과 길의 연관을 깨우치는 그런 과정은, 세상을 사는 지혜 혹은 지식을 익히는 것과도 아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골목은 모든 사람의 삶에서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배경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골목에서 나고 그곳에서 자라며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도시화가 진행되며 효율성과 개발 이익을 위해 우리의 배경은 허물어지게 되었고, 이제는 다소 희소하고 과거 회귀적인 정서의 배경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골목을 찾아가서 즐기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생활은 없습니다. 생활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없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죠.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도 않고 대단한 지식을 얻는 것도 아니지만 골목을 걷는 것, 골목을 생각하는 것은 저 멀리 떨어져버린 우리의 원초적인 무언가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는 속도로 편안하게 이야기를 듣는 것, 골목에서 만나는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란 궁극적으로 사람 이야기이며 사람의 자취라고 보면, 골목이야말로 사람의 자취와 사람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는 나이테와 같은 장소일 것입니다. 이 책에는 저희가 나고 자라 가장 익숙한 서울의 골목, 여행으로 혹은 일로 다녀온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아름다운 골목, 그리 많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몇몇 나라의 숨겨진 골목 등에 대한 기억을 담았습니다.

 

차례

책머리에

 

부 골목에 삶을 두고 왔다

내 유년의 골목에는 아름다움이 번져 있다 / 여러 집이 얼굴 비비며 빼곡히 차 있다 / 화석 같이 남아 있는 그 시절의 골목 / 세월에 따라 달라지는 온도와 색깔 / 거닐고 싶어도 거닐 수 없는 그만의 공간 / 피 끓는 청춘들로 가득한 골목 / 수탈의 흔적을 감춘 채 과거와 현재가 마주하다 / 어부 가족들은 바다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 실향민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오랜 양조장의 깊어가는 술맛처럼 / 흉터 같은 삶의 흔적들 / 시간의 골을 따라 흐르는 물길은 도시의 삶이다 / 소수민족의 애환이 담긴 골목 / 구속 없이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다

 

부 풍경을 굽이굽이 담다

낙원으로 가는 나만의 통로 /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삶의 터전 / 남산의 넉넉한 품 안에서 피어난 골목 / 소박한 골목 어딘가에 핀 매화 / 시간이 멈춘 채 달팽이처럼 느리게 걸어가는 골목 / 꽃이 피어났다 시든 자리에 삶이 드러나다 / 구불거리는 물길 따라 흐르는 느림의 미학 / 고요함 속에서 500년 된 옛이야기를 듣다 / 수채화 물감이 스며들듯 사람들이 보인다 / 느린 걸음으로 걷고 싶은 골목 / 사시장철 피어 있는 단정한 골목 / 기찻길과 서점 사이로 달콤하게 녹아든 풍경 / 고요와 경건과 예술이 고여 있다 /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카프카의 도시

 

부 기억을 오롯이 품다

대문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기억의 조각들 / 잃어버린 시간 속을 걷다 / 묵묵히 이어가는 마을의 전통 / 현대와 근대가 혼재된 골목 / 역사의 기억이 씨줄과 날줄처럼 엇갈리다 / 세상의 모든 색과 언어가 쌓인 문화와 예술의 거리 / 골목마다 숨겨진 서민들의 소박한 꿈과 땀 /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든 가장 완벽한 골목 / 잠자리가 놀다 간 골목 /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언덕 / 두 집안의 오래된 살림집이 품은 이야기를 듣다 / 메타세쿼이아 그늘 아래 스며든 시간의 풍경 / 돌담이 숨어 있는 바람의 골목 / 화려한 문명과 한때의 영광을 만나다

골목 인문학

임형남, 노은주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10/ 372/ 17,000

 

부 골목에 삶을 두고 왔다

 

여러 집이 얼굴 비비며 빼곡히 차 있다_ 서울 남창동과 북창동 골목

남산과 서울시청 사이에 남창동과 북창동이 있다. 버스를 타고 명동과 한국은행을 지나 숭례문 쪽으로 접어들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인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동차가 많이 정차해 있는 곳이 나온다. 왼쪽은 남창동이고 오른쪽은 북창동이다. 남창동에는 남대문시장이 있다. 낮에도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이곳은 사실 새벽에 가면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생의 활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면 새벽시장에 간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새벽에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 대부분은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도매상을 통해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상인들인데, 새벽시장을 누비는 그들의 모습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계곡을 굽이쳐 흐르는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새벽에 몇 번 가보았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도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거렸고, 시장 주변의 노점에는 다양한 먹거리도 많이 있었다. 시장이 아니라 마치 축제의 현장 같았다.

 

남창동은 남산 아래에서 남대문시장을 향해 뻗어 있고, 북창동은 남대문시장과 서울시청 사이에 끼어 있는 동네다. 이 근처에는 대동법이 시행되었던 조선시대에 만든 창고가 있었다고 하며, 그 터가 남창동에 남아 있다. 남창동은 남대문시장뿐 아니라 남산 쪽으로 사람이 제법 살고 있는 동네다. 그러나 북창동은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낮에만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동네다.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원년(1608)에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되어 있던 공물제도를 쌀로 통일하는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그때 대동미를 전국으로 출납하는 기관인 선혜청이 설립되어 용산에 별창인 만리창을, 삼청동에 북창을, 옛 장용영 자리에 동창을, 남대문 안에 남창을 두었다. 선혜청이 있다 보니 남대문 인근을 창동이라 불렀고, 그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쌀 미자가 붙은 남미창정, 북미창정이 되었다가 다시 남창동과 북창동으로 정리된 것이다.

 

선혜청에 보관되었던 대동미는 관리들의 급여로 지불되기도 하고 국가의 여러 비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때 지급받은 쌀을 다른 식량이나 의류 등의 생활필수품으로 교환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위치로 서울의 제일 관문인 숭례문 인근이고 국가의 창고가 있었으니, 그런 흥청거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지금의 봉래동에 있었던 칠패시장이 이곳으로 옮겨오며 더욱 큰 시장으로 거듭나게 된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3대 시장이 있었는데, 종로통에 있던 운종가, 지금의 동대문시장인 이현시장, 그리고 칠패시장이다. 운종가는 그야말로 국가 공인 시장이었고, 이현시장은 청과물 등 농산물이 주종이었다. 칠패시장은 마포나 서강 등이 가까운 영향으로 수산물이 주로 거래되었다.

 

이후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은 서울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군림했다.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에는 당시에는 아주 귀했던 외제 물건들도 있었다. ‘미제일제물건을 하나 갖고 있으면 어깨에 힘을 주었던 시절, 사람들은 남대문 도깨비시장에 가서 카메라도 사고 화장품도 사고 양담배도 구입했다. 물론 정식으로 수입되었던 것은 아니고 미군 부대나 해외 주재원, 비행기 승무원들이 가지고 들어온 물건들이었다. 도깨비시장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그 당시 물건을 판매대에 늘어놓고 장사하다 단속반이 들이닥치면 순식간에 철수하는데, 그 모습이 도깨비장난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양담배가 특히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또한 허리춤에 붙어 있는 가죽 패치에 말 두 마리가 청바지를 당기는 그림이 있는 쌍마청바지라 불렸던 리바이스사에서 만든 청바지는 젊은이들의 로망이었다.

 

한편 북창동은 임오군란 이후 중국인이 많이 들어오면서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울의 차이나타운으로 무척 특색이 있는 동네였는데, 1970년대 초에 재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중국인들이 거의 빠져나갔다. 몇 년 전 남창동에 집을 지을 일이 생겨 오랜만에 그 동네를 찾았다. 번잡한 시장 뒤 남산으로 향하는 조용한 주택가는 사람 사는 집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길 건너 북창동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1990년대 이후 퇴폐적인 유흥업소가 많이 들어서면서 북창동은 이상하게 변색되고 덧칠되었는데, 요즘은 그 유흥업소들도 썰물이라고 한다. 대신 늘어나는 관광객 수요에 맞춰 호텔이 급격히 늘어나며 동네가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런데 주 고객이 관광하러 찾아온 중국인들이라 하니 참으로 묘한 역사의 인연이 느껴진다.

 

좁은 골목길과 그 골목에 얼굴을 비비며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집들, 그 동네 끄트머리의 소공동 경계에 한국은행이 있었고 시경이 있었다. 지금은 내자동으로 옮기고 이름도 서울특별시 경찰국에서 서울특별시 지방경찰청으로 바뀌었지만, 시경은 1950년부터 1989년까지 39년 동안 남대문시장과 마주하는 북창동 외곽에 있었고, ‘시경 앞이라는 지명도 오랫동안 꽤 익숙했다. 시경은 없어졌는데 아직도 시경 앞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려나간 신체 부위의 감각이 여전히 살아남아서 존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경 앞에는 시간과 국적과 양식이 모호한 2층짜리 상가건물이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건물이 헐리며 갑자기 드러난 옆구리를 멋쩍게 내보이며 서 있었다. 종로나 서울의 대로변에 많이 있었던 2층 한옥 양식의 상가인데, 목조가 아니라 벽돌을 쌓아 지은 조적조 건물이다. 지붕의 틀도 대들보와 서까래 등으로 이루어지는 전통 가구 방식이 아닌 서양식 목조 트러스 구조로 만들어 자료적 가치도 높은 건물이라고 한다. 그런저런 역사적 사실을 다 떠나서 100년이 넘는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건물이다. 고치고 덧붙이고 하면서 그 건물이 겪었던 풍상이 그대로 느껴졌다. 늘 지나다니며 아직도 있구나 하며 안도했고, 재개발이라는 무서운 파도가 언제 덮칠까 조마조마하며 지켜보았다. 그러다 얼마 전 남대문시장에 갔을 때 들르니, 주변의 풍경이 많이 바뀌었고, 그 건물도 달라져 있었다. 그사이 역사 자료로 지정되면서 시간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성형수술을 통해 젊음을 다시 찾은 얼굴처럼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지워진 시간의 흔적이 아쉬웠다.

 

흉터 같은 삶의 흔적들_ 부산 초량동 골목

광안대교를 건너 해운대 방향으로 바다를 건너갈 때 미래도시를 방불케 하는 초고층 호텔과 주상복합 건물군이 보여주는 다이내믹한 풍경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역동성을 대변해준다. 부산이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라는 생각은 부산 출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더 확실해진다. 어떤 모임에서 처음 보는데도 유난히 살갑게 다가와 싹싹하게 인사를 하고 자기주장을 잘하면서 쉽게 가까워지는 멤버가 있다면 십중팔구 부산 사람이다. 매사에 적극적이면서도 붙임성이 좋은 기질은 그곳 사람들 모두 타고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2017년 봄 일 때문에 부산에 갔다가 우연히 역 바로 건너편에 있는 초량동이라는 동네에 가보게 되었다. 예전에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625전쟁 이전부터 원주민이 많이 살았던 오래된 곳이라는 것은 이번에 알았다. 단지 길을 건너 한 겹 안을 들추었을 뿐인데, 방금 부산역 광장에서 본 떠들썩하고 복잡한 풍경과는 조금 다른, 부산의 생살을 만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사실 원래 가려던 목적지는 따로 있었다. 그날 볼일을 생각보다 일찍 마치고 모처럼 생긴 여유 시간에 둘러볼 곳을 찾다가, 먼저 그 유명한 보수동 책방 골목으로 향했다. 몇 개의 중고책방과 카페와 그 밖의 가게 몇 개가 늘어선 길은 생각보다 깔끔하고 좁고 짧았다. 혹시 좋아하는 루이스 칸(미국 건축가)이나 카를로 스카르파(이탈리아 건축가) 같은 건축가의 작품집이 있나 싶어 그중 가장 책이 많아 보이는 대우서점에 들어갔다. 예술건축 분야 서가가 제법 큰 편이었는데 한 시간 정도 머물렀지만 역시 마땅한 책은 없었다.

 

별 성과 없이 책방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가니 건너편에 국제시장이 있었다. 깡통시장을 지나 국제시장으로 접어드는데 별다른 감회는 없었다. 평일 낮이라 그랬는지 길은 한산했고, 노점들이 늘어선 교차로에 서서 보니 한쪽으로는 부산타워가, 한쪽으로는 목 언저리까지 집들이 차오른 보수산이 가까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에 중고 레코드 가게 간판을 보고 혹시나 절판된 음반이 있나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다. 젊은 점원은 컴퓨터로 검색을 하며 요즘은 자기들도 들어오는 목록을 홈페이지에 그때마다 올리고 있으니, 원하는 음반이 있으면 자주 사이트를 확인해보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모든 것은 간편해지고 단순해져서 오래된 가게를 뒤져 먼지 쌓인 선반에서 소위 레어템을 찾는 일이 이제는 없을 거란 이야기였다. 처음 찾아간 부산의 유명한 시장들은 하드웨어는 얼핏 보기에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듯하지만, 과거의 향수만으로 유지되고 기억되는 공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딱히 무엇을 사려던 생각은 없었지만, 시장을 한참 돌고도 빈손으로 택시를 타고 역으로 돌아가자니 왠지 허전한 감이 들었다. 택시기사와 몇 마디 말을 나누다 보니, 돌아가는 길에 산복도로를 한번 보고 가라고 했다. 내륙에서 달려 나온 산맥의 힘줄들이 뻗어가다 해안에 이르러 급하게 멈춘 듯, 가파르게 바다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부산의 산줄기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일컫는다. 언덕길을 돌아올라 산복도로 중에서도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망양로에 내렸다. 망양로 아래가 바로 초량동이고, 그 언덕배기에 어깨를 붙이고 자리한 집들을 훑고 내려가면 부산역이 나온다.

 

원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들은 초입에 양민들의 집이 지어지고, 경치가 좋고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마을 어르신 역할을 하는 반가가 자리 잡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근대 이후 발전한 부산이나 목포 같은 개항기 항구도시들은 부두나 시장에서 일하기 위해 찾아든 노동자들이 기존의 주거지보다 점점 위쪽으로 숨 가쁘게 올라가 산동네에 정착했다. 경사지에 빼곡하게 채워진 집들은 625전쟁 이후 폭발적으로 유입되는 인구를 도시 인프라가 미처 감당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초량동 언덕에서 가장 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시인 유치환이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을 두 번 지낸 인연을 모티브로 만든 유치환의 우체통이 있었다. 모두가 들어 알 만한 명사의 태어난 곳, 살았던 곳, 세상을 뜬 곳들이 저마다 이름을 빌려 사업을 벌이는 것도 참 어색한 일이지만, 그 작은 우체통은 제법 정감이 갔다.

 

요즘은 어느 도시나 주거와 상업 공간이 잘 짜인 도시계획 하에서 만들어지는 신도심으로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유서 깊은 원도심이 쇠락하게 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의 성공 이후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오래된 길에 이름을 붙여 의미를 만들고 관광지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산 역시 초량이바구길에 이어 산복도로 주변 지역 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인위적으로 무엇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장소의 가치가 굳이 예산을 들여 시행한 불필요한 덧칠로 훼손될까 봐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다.

 

부 풍경을 굽이굽이 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삶의 터전_ 서울 북아현동 골목

아현동에서도 특히 신촌 방향으로 이화여자대학교와 경기대학교 사이에 있는 북아현동은 그 규모와 경사도, 복잡한 정도로 볼 때 우리나라 모든 골목을 통틀어 최고라 할 만하다. 무악재 안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산의 흐름이 금화터널을 품고 마포 쪽으로 가는 중간에 생긴 북아현동은 그렇게 언덕과 골짜기를 메우며 집들이 들어섰던 동네다. 워낙 자유롭게 자리 잡고 지어진 덕에 북아현동 골목의 표정은 정말 재미있다. 다양한 형태의 집과 대문,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계단과 예상할 수 없는 골목길 등 언제 거닐어도 그 안을 다 알 수 없고 흥미가 닳지 않는 곳이다.

 

을지로에서 태어나 서울 한복판에서 자란 나에게 골목이란 아주 편안한 안식처였으며 세상에 다시없는 놀이터였다. 그러다 아현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때 골목 안에 여전히 초가와 판자로 지은 집들이 남아 있는 모습을 생전 처음 보았다. 아현동 골목은 그 형태가 을지로와는 사뭇 달랐다. 을지로 골목도 복잡하다고는 하지만 나름의 질서와 방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지였다. 그러나 아현동은 골목이 다양한 경사로 이루어져 사뭇 삼차원적이며 입체적이었다. 그리고 방향성이나 체계가 아주 달랐다. 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은 경사로 이어지다가 급기야 하늘에라도 오를 듯 솟구쳐 있는 계단을 만나 한참 기어 올라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 경사로를 올라 위에 올라갔을 때 시원하게 도시를 내려다보는 맛이 을지로 골목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었던 특이한 경험이었다.

 

아현동은 애오개 혹은 아이고개라는 이름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라고 한다. 고개가 높아서 올라가며 아이고해서 그렇다는 말도 있고, 아이의 무덤이 많아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예전에 북아현동에 어린 나이에 죽은 사도세자의 큰아들 의소의 무덤인 의령원이 있었다고 한다. 두 가지 설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었는데, 모두 들어보면 그럴듯하고 재미있다. 동네의 이름은 단순히 명칭일 뿐 아니라 상징이며 상상이며 무엇보다 어떤 장소의 실존적 증명이다. 이런 이름들을 도로명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입체를 평평한 판 위에 올려놓고 평면적으로 펴고 두들겨서 그 성질을 없애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로 위주로 구성된 서양의 도시 체계와 다른 우리나라의 도시 체계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물론 북아현동 골목이 아주 오랜 역사를 품고 있거나 그곳에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집을 짓고 길을 만들고 했던 우리의 근대와 현대의 시간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서울 사대문 안 동네들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체계를 조금씩 개선하며 유지되었지만, 성 밖 동네들은 근대화 시기에 서울로 인구 유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질 때 생겨난 동네가 많다.

 

박완서의 소설을 보면 그 당시 서울의 성 밖 동네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엄마의 말뚝이라는 작품을 통해 현저동 언덕 동네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과 골목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개성에서 서울로, 언덕 끝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 들어온 이야기를 듣노라면 우리의 근대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알 수 있다. 근대화 시기 영국 런던의 골목길과 서민의 애환을 보여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는 듯하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북아현동이나 현저동 골목길은 우리의 기억이며 추억이기도 하지만 어두운 과거이기도 하다. 지대가 높아서 물이 들어오지 않아 물을 퍼서 머리에 이고 양손에 들고 고갯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고, 날이 추워지거나 눈이라도 오는 날은 엉금엉금 기어서 오르내려야 했던 경사진 삶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되면 미련 없이 그 동네들을 깔아뭉개고 기억을 지워버리고 치부를 감추어버리는 재개발을 한다. 물론 그런 불편을 감수하라고 누구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현저동은 이미 그 기억이며 자취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고, 북아현동은 지금 개발이 진행 중이다. 반은 깨끗이 지워졌고, 반은 아직 남아 있으며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

 

골목길이 좁고 복잡한 것은 아주 일반적인 특징이긴 하지만, 북아현동 골목길은 그중에서도 도드라져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고 가지를 뻗고 그 진행을 예상할 수 없이 흘러나간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다. 그런데 어떤 길이건 그 길을 따라가면 끊어질 듯 절대 끊어지지 않고 흐르지만, 그 골목의 끝은 늘 앞의 툭 트인 호쾌한 전망을 볼 수 있는 정상이다.

 

내가 이사 갔던 1969년 무렵 시민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서울의 여기저기에 아파트가 지어졌다. 1969년 아현동에도 금화시민아파트가 들어섰고, 마포구 창전동에 와우시민아파트와 중구 회현동에 회현시민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금화시민아파트는 1969년 준공 이후 꾸준히 확장해서 가장 많이 살았을 때는 2,000세대 정도 살았다고 한다. 북아현동 고갯길 끄트머리에 있어서 첨탑처럼 보이던 금화시민아파트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2015년 완전히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금화시민아파트가 그렇게 높은 곳에 지어진 것은 달동네를 아파트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 때는 아르바이트로 화장지 대리점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작은 트럭에 화장지를 가득 싣고 천연동 쪽으로 올라가든지 아현동 쪽으로 올라가든지 마지막 방문지는 늘 금화시민아파트였다. 3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2009년 북아현동을 답사했던 적이 있다. 골목을 두루 살피고 마지막으로 금화시민아파트에 갔는데 벽의 칠이다 벗겨지고 사람 대신 길고양이들이 살고 있었다. 건물은 모두 야금야금 새로 지은 아파트로 대체되고 언덕 위로 건물 두 동만이 남아 있었다. 옥상에 올라 주변을 보니 인왕산, 북악산, 안산, 남산 등 서울의 모든 산이 같은 높이에서 보였다. 연탄아궁이가 있었던 구시대의 유물 같은 아파트들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도시의 흉물이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가 일고의 가치도 없이 허물어진다. 이런 일들은 모두 어떤 시대와 그 시대의 가치가 역사에 의해 평가받는 형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아현동에는 능동길, 농방길, 금화장길, 호반길 등의 크고 작은 길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다. 능동길은 의령원이라는 능의 기억이고, 금화장길은 백범 김구 서거 후 백범의 유품을 옮겨 모셨던 금화장이라는 집과 연관이 있고, 호반길은 작은 호수가 있었던 기억이고, 농방길은 지금은 많이 쇠퇴했지만 l과거에 촘촘히 자리하고 있던 가구와 가게들의 기억이다. 한때 가구점들이 번성했고 나중에는 굴레방다리(아현고가도로) 쪽에 웨딩숍들이 생기며 혼수를 준비하는 예비 신랑 신부들의 필답 코스였던 적도 있었다. 이 골목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람을 찍어 전시를 하고 인근에 있는 예술대학 학생들이 구석구석에 예쁘고 재기 발랄한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여전히 마을버스가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며 사람을 실어 날라주고, 골목 어귀에는 여전히 동네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이런저런 이야기와 소문을 퍼나르고 있다.

 

부 기억을 오롯이 품다

 

잃어버린 시간 속을 걷다_ 서울 돈암동 골목

조선시대의 한양 지도인 <수선전도>를 보면 지금의 돈암동 부근을 적유현(狄踰峴)으로 적고 있다. 적유현이라는 이름을 직역하자면 오랑캐가 넘은 고개이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 즉 되놈이 그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쳐들어왔다고 하여 붙여진 되너미고개의 한자 표기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지명을 일괄적으로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의미보다는 소리를 성의 없이 한자로 표기하는 바람에 돈암동으로 변했다고 한다. 결국 돈암동은 되너미고개’, 즉 지금의 미아리고개에서 유래된 동네다.

 

1976금과 은이라는 남성 듀오가 <빗속을 둘이서>라는 앨범을 발표해 크게 성공했는데, 그 앨범에는 오래된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이 몇 곡 들어있다. 그 중에서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가사 내용처럼 참으로 절절했다. 단장(斷腸)이라는 표현은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슬프다는 표현인데, 아마 우리가 아는 슬픔에 대한 표현 중 가장 강하다고 생각한다. 오랑캐가 넘어온 고개이고 같은 민족끼리 무언지도 모르는 이념으로 싸움을 하고 가족이 헤어지는 정경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나는 금과 은<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노래하던 해에 만원버스에서 온 몸이 압축되는 고통을 받으며 그 고개를 매일 넘어 다녀야 했다. 수유리에서 돈암동으로 가자면 그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북한산 백운대가 훤히 보이는 수유리에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로 진학을 할 때, 나는 집 바로 옆에 고등학교가 있었는데도 멀리 돈암동 어귀에 있는 학교로 배정되었다. 학교에 처음 가던 날, 미아리고개를 넘는 버스를 타고 돈암동 비탈길에서 내렸다. 복잡한 길을 지나고 약간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자로 금을 그어놓은 듯 가지런하게 정리된 주택가가 나왔다. 니스(바니시)를 곱게 입히고 철판을 오려서 장식한 대문과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문양을 만들어 새긴 담장이 있는 근대 한옥들이 갓 삶아낸 옥수수 알처럼 가지런하고 따끈하게 정렬하고 있었다.

 

그 한옥들은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이 일대에 가장 먼저 주거지역 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면서 지어진 집들이었다. 1930년대에는 인구가 서울로 대거 몰리면서 주택 부족이 심각했다. 그때 가회동, 익선동 등 성내에 있는 큰 집을 쪼개서 작은 필지로 나누고 반듯하게 한옥들을 앉힌 것이 당시로는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이후 서울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땅의 효율을 높이는 주거 형태들이 실험된다.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 다세대, 연립 등의 가족 중심의 형태와 원룸, 셰어하우스, 혼자 사는 가구를 위한 주택 형태 등과 같이 이곳에 있는 한옥들도 아마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진 모던 라이프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곳은 마포, 영등포, 청량리 등과 같이 전차 종점이 있던 곳이었다. 다시 말해 역세권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살기에 아주 적합한 접근성을 확보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주택 개발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의 버스 정류장 부근이 전차 종점이었다. 원래는 충무로에서 창경궁까지 가는 노선의 연장이었는데, 혜화문을 헐어버리고 길을 넓힌 다음 성 밖 돈암동까지 전차를 연장한 것이다.

 

전차는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30년 정도 있었다는데, 성 밖 외진 곳이었던 돈암동에 사람이 몰리게 된 것은 전차가 개통되면서라고 한다. 지금도 역세권으로 사람이 몰리는 것처럼 당시에도 전차가 개통되고 필지가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서울의 부도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돈암동 전차 종점 부근에 태극당이라는 큰 빵집이 있었는데, 그 일대의 명소였고 더불어 예식장까지 겸해서 늘 사람들로 붐볐다. 그 건물의 형태는 지금 장충동에 그대로 남아 있는 태극당과 건축적으로 쌍생아였다. 이제 돈암동 태극당은 새로 지어져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고갯길이 나왔다. 한옥의 행렬은 고갯길을 가득 메웠고, 언덕을 한참 오르고 산을 조금 돌았을 때 붉은 벽돌로 지어진, 딱 우리나라 학교의 전형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 나타났고, 그 학교 앞으로는 우리가 세느강이라 부르던 개천이 흘렀다. 서울에는 세느강이 여러 군데 있다. 예전 대학로의 서울대학교 인문대 앞으로 흐르는 개천도 세느강이라고 불렀고, 예전 서라벌예술대학교가 있던 길음천도 세느강으로 불렀다. 하고많은 강 이름 중 왜 하필 세느강을 선택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 앞인 성북동에서 흘러나와서 돈암동과 보문동을 거쳐 용두동 쪽으로 내려가는 그 개천도 세느강이라고 불렀다. 하긴 인형처럼 예쁜 여자를 보면 불란서 인형, 불란서 여배우 같다는 표현을 쓰던 시절이었다. 불란서는 당시만 해도 막연한 이상향의 다른 이름이었다. 서울의 여러 세느강이 모두 뚜껑을 덮고 땅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동안, 돈암동의 세느강은 살아남아서 여전히 힘차게 흐른다.

 

아주 오랜만에 돈암동을 찾은 날은 장맛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었다. 한옥들은 거의 다 크고 작은 건물들로 바뀌었고, 주택가는 상업 지역으로 바뀌어 예전의 장소들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돈암동의 세느강은 아직도 그대로 나를 환하게 반기며 방향 감각을 찾아주었다. 개천을 따라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길은 미아리고개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부근에는 점을 치는 집이 많이 있었다. 고개를 오르는 도로 옆으로 축대 아래 집집마다 대나무에 깃발이 달려 있었고 다양한 신의 이름이 펄럭거렸다. 점집들은 1960년대 말부터 이곳으로 모여들어 198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고,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여러 군데 남아 있다.

 

미아리고개에 올랐다. 그런데 정상에 도열하고 있었던 호떡을 팔던 가게들도 다 없어졌다. 나는 플라타너스가 풍성하게 그늘을 드리우는 성신여자대학교 앞으로 난 길을 걸었고, 한옥이 그득했던 골목길을 빗속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걸었다. 물론 많은 것이 없어지고 풍경이 많이 변했다. 그러나 나의 기억은 돈암동이라는 공간 위로 예전의 풍경을 복원해 환등기처럼 펼쳐 보여주었다.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해내며 예전에 친구들과 벨을 누르고 도망쳤던 한옥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골목마다 숨겨진 서민들의 소박한 꿈과 땀_ 서울 종로 피맛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이문설농탕이라는 곳이다. 1902년에 우리나라 요식업 1호로 등록했다고 하니 개업한 지 110년이 넘었다. 이문설농탕은 음식 맛도 좋지만 연륜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들락거렸고, 특히 일간지에 연재되었고 후에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의 원본이 되었던 홍성유의 소설 인생극장에서 혈기 방장하던 시절의 종로 주먹김두한이 자주 들락거렸던 식당으로 여러 번 나와 그 이름이 귀에 익숙하다. 그런데 그 식당은 종로에 있다. 이름으로 얼핏 생각되기는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정작 이문설농탕은 종로2가에 있다. ‘좀 이상하다. 이문동에 본점이 있어서 그런가?’ 하고 추측해보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이문설농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식당이 이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문(里門)’이란 조선시대 세조 시절에 방범 목적으로 동네 입구에 세운 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 11(1465)에 한성부에 경성의 여항에 이문을 지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구절이 나온다. 경성은 서울이고, 여항이란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말한다.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네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이문을 여러 곳에 설치했는데, 이문설농탕 근처가 바로 종로 이문의 자리였다고 한다. 집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종로의 뒷골목 어딘가에 동네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니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 문을 통해 들어가는 동네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그 이름이 피어내는 상상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이문설농탕은 헐리고 (원래 자리인 공평동에서 한 블록 건너인 견지동으로 옮겨갔다) 그 자리에 큰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종로 부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북적거린다. 한때는 고관대작들이 지나다니는 명실상부한 서울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그 중심이 여기저기로 많이 옮겨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의 길은 넓고 자동차는 많다. 큰 틀에서 보면 종로의 가로 구조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그대로인데, 종로변 남북으로 길게 나라에서 허가받은 물품을 파는 시전이 있어서 지금의 땅의 모양을 유지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구한말 사진을 보면 동대문 어림까지 한없이 이어진 기와지붕의 건물들이 바로 그 시전의 행랑이었는데, 구름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여 이곳은 운종가(雲從街)라 불렀다고 한다.

 

종로1번지 교보문고 뒤 청진동은 광화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의정부, 한성부에 육조에 있는 육조거리와 시전이 교차되는 곳으로, 정치와 경제가 한자리에서 만나는 곳이었다. 특히, 교보문고 후문 근처는 복원되다 만 듯 흔적만 남은 중학천이 예전에 광화문 북쪽에서부터 시작되어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중간에 놓였던 혜정교라는 다리가 있던 자리다. 혜정교는 원래 조선시대에 부정부패를 행하던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이 시행되거나, 궁 밖으로 행차를 나서다 잠시 길을 멈추는 임금에게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호소하던 곳이다. 그곳이 공교롭게도 시민들의 뜻을 모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촛불집회가 소규모로 처음 시작되었던 지점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몇 년 동안 진행된 대규모 재개발로 인해 흔적도 찾기 어렵지만, 원래 이곳에서부터 시작되는 피맛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길이 있었다. 종로의 한 켜 뒤로 대로와 평행하게 좁은 길이 동대문 인근까지 뱀처럼 구물구물 길게도 이어져 있는데, 그 길에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라고 한다. 참 오래된 길이다. ‘양반들이 탄 말을 피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피맛길이라고 불렀고, 그 길 양쪽으로 형성된 뒷골목 동네에는 피맛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 길은 서민들을 위한 소박한 먹거리인 해장국, 생선구이, 빈대떡 등이 익으며 피워내는 연기와 냄새로 그득했고, 그곳에서 시민들은 무척 푸근하고 얼콰해졌으리라. 비록 그 길이 600년 동안 역사의 뒤편에 자리해서 찬란한 햇살이나 영광을 누리지 못해 남루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어 사람들에게는 위안을 주었고, 역사 도시로서 서울의 위상을 튼튼히 해주었다.

 

우리가 종로통이라고 부르는 곳은 대로변의 길게 난 상점가뿐이 아니다. 당시 조선의 상업을 대표하는 곳이었고 막강한 힘을 가진 곳이었던 만큼 그 주변으로 엄청나게 두터운 경제적 영향권에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종로 큰길에 면한 수백 간에 이르는 상점들 뒤로 난 좁고 긴 길에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피맛길이 있었고, 그 뒤로 미로 같은 골목들이 이어지며 상점과 연계되는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터전이 있었다. 그러니 종로의 화려함 뒤로 숨겨진 골목마다 서민들의 소박한 꿈과 땀이 고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한양에 세운 숭례문이 서울의 정신이라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피맛길은 서울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0년 전 어느 날 서울의 정신은 하룻저녁의 불꽃에 사그라졌다. 서울의 관문인 숭례문에 불이 났으니 큰일이었으며 사람들은 애통해하며 흰 천을 두르고 통곡을 하며 다시 살려냈다. 그러나 바로 지척에 있는 서울의 마음은 비슷한 시기에 조용히 사라졌다. 개발 사업에 대한 보상이 마무리되자 사람들을 몰아내고, 피맛길에 면했던 작은 필지들을 한꺼번에 모아 거대한 상업 건물로 세우기 위해 길을 둘러싸고 있던 건물들을 중장비로 간단히 허물어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가림막 뒤로 집들을 허물고, 땅을 파헤치고 문화재 지표 조사를 하고, 다시 지하를 앉히고 건물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 길고 긴 피맛길의 단지 한 귀퉁이가 없어지는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광화문 네거리 부근은 피맛길이 시작되는 상징적인 위치라는 생각에 무척 안타까웠다. 원래의 피맛길은 종로1가 청진동에서 종로 6가까지 이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거칠게 지워낸 지우개자국처럼 여기저기 지워진 채 아주 희미한 자국만 조금 남아 있다. 건물은 없어져도 복원이 가능하지만 길은 없어지면 복원이 어렵다. 그리고 길이 없어지면 도시의 정체성은 점점 없어진다. 불에 탄 숭례문 앞에서 울고불고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지, 600년 만에 없어지는 저 길에 술 한잔 권하는 사람이 없다.

 

사람의 몸은 무수히 많은 혈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맥과 정맥이라고 부르는 굵은 줄기의 핏줄이 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실핏줄이 있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이 모든 피의 길이 조화로워야 하고 건강해야 한다. 도시도 사람의 몸도 똑같다. 큰길이 굵은 핏줄이라고 보면 큰길 뒤로 뻗어 있는 길들 혹은 집까지 이어지는 길들은 가는 핏줄일 것이다. 큰길 뒤로 이리저리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그 길을 우리는 골목이라고 부른다.

 

도시에는 무수한 골목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몸처럼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골목이 잘 살아 있고 건강해야 도시 또한 생기 있게 살아나는 것이다. 큰길이 과시와 소비와 속도를 위한 것이라면, 골목은 그 도시의 맨얼굴이며 그 도시의 정체성이며 또한 삶의 여유를 주는 공간이다. 뒤늦은 개발로 얼마나 큰 이익이 생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 있는 골목들이 사라지는 사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수도라는 서울의 역사성과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 손해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날이 조만간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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