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가 요게슈바어 지음 / 에코리브르이 책은 과학이 가져올 미래,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새롭고 신선한 시각을 제공한다. 저자는 모든 것이 달라질 미래에 대해 많은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강조한다. 과거의 시각에서 보면 많은 것의 손실을 의미하지만, 새로운 전망을 기회로 보면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변화와 연계할 기회를 인지하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제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 말고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과학으로 쓰는 긍정의 미래
랑가 요게슈바어 지음
▣ 저자 랑가 요게슈바어
1959년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1987~2008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공영방송 WDR에서 과학 프로그램 팀장으로 일했다. 이후 프리랜서 언론인이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쿼크스 앤드 코〉, 〈놀라운 자연〉, 〈8시 직전의 지식〉 등은 직접 진행하기도 했다. 과학 저널리스트에게 수여하는 게오르크 폰 홀츠브링크 상(1998)을 비롯해 그리메 상(2009), 과학부문 올해의 언론인상(2007), 독일 텔레비전 상(2011) 등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사소한 질문에 과학으로 답하다』, 『질문?!』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미래의 세계가 대체적으로 지금보다 더 나을지 묻는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이와 관련한 한 조사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응답자 중 4퍼센트만이 미래에 자신의 삶이 더 향상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미국인, 프랑스인, 영국인, 덴마크인도 비슷하다. 그럼 우리의 미래는 이렇듯 형편없는 시대일까, 아니면 이런 암울하기 짝이 없는 시각은 오로지 한정된 우리의 견해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일까?
이 책은 과학이 가져올 미래,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새롭고 신선한 시각을 제공한다. 저자는 먼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디지털화로 인해 일종의 과도기 상태에 놓인 현재 상황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적인 변화는 우리 삶에 근본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전반적인 삶의 영역과 삶의 모델, 그리고 구체적인 일상까지 바꾸고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저자는 모든 것이 달라질 미래에 대해 많은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강조하면서, 과거의 시각에서 보면 많은 것의 손실을 의미하지만, 새로운 전망을 기회로 보면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변화와 연계할 기회를 인지하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제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 말고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 차례
머리말
01 새로운 것: 미래 - 시각의 문제 - 고장 난 커피머신 / 디지털 혁명 / 하지만 그들은 오류를 범한 거야 / 소가 끄는 수레와 슈퍼컴퓨터에 대하여
02 발견: 지식의 한계는 있을까 - 낙타 워낭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은 결코 이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 나는 어떻게 달 탐험가가 될 결심을 했을까 / 인간에게 무엇이 남을까
03 잘못된 길: 원자 - 어제의 미래 - 쪼개진 원자 / 체르노빌: 촬영을 위한 여행 기록 / 후쿠시마: 대참사 속에서 전하는 소식 / 우리 아버지들의 꿈
04 더불어 살기: 자국민 및 외국인과 함께 - 사람들은 몇 가지 언어로 키스를 할 수 있을까 / 공평함 / 마리아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05 마법: 디지털 마법에 대하여 - 자율적인 기계 / 인과관계의 끝 / 인간과 컴퓨터: 누가 누구를 프로그래밍하는가
06 사생활: 낡은 콘셉트인가 - 책은 독자가 누구인지 폭로해준다 / 내 디지털 기계의 배반: 직접 실험해본 감시 /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07 공포: 공포감 조성과 위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 시리얼은 모두 먹어버리고 없었다 / 고글을 착용해야만 해
08 지식: 교육과 문화의 역사 -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 / 더 많이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 / 우리는 책을 그리워하게 될까
09 교환: 현실은 어떠한가 - 무거운 장미: 그림의 미래 / 기계는 숨을 쉬지 않아요: 목소리의 미래 / 거짓말하는 언론: 정보의 미래
10 진화: 반짝이는 물고기의 기계 인간에 대하여 - 두 번째 본성 /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
11 행동하기: 안정성과 변화 - 우리에겐 딱 하나의 행성밖에 없다 / “당신들은 시계가 있고, 우리는 시간이 있지요”
맺음말: 찾고 발견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의 글 / 부록 / 주 / 찾아보기
과학으로 쓰는 긍정의 미래
랑가 요게슈바어 지음
에코리브르 / 2018년 8월 / 416쪽 / 20,000원
새로운 것 : 미래 - 시각의 문제
고장 난 커피머신
“이 멍청한 커피머신이 뭣 때문에 마이크로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거야?” 내 아내는 커피머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자 또다시 수리 센터에 보내야 해서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전기 오븐에 물을 끓였다. 커피용 주전자에 물을 담아 종이 필터에 부었다. 이렇게 해도 되었다! 커피 향이 느껴지는 동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전자동 기계를 만들었을까? 이런 커피머신은 멋져 보인다. 원두는 그 자리에서 신선하게 갈리고, 그러면 버튼 하나로 우리는 진한 커피를 마실지 연한 커피를 마실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커피 잔을 머신 밑에 갖다 두면 끝이다.
하지만 우리 집 커피머신은 이런 요술을 부릴지도 모르고 평범한 커피조차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는 수동으로 준비한 커피 필터에 물을 부었다. 물이 필터를 통과하면서 내는 소리는 예전부터 익숙하다. 처음에 물은 재빨리 흘러들지만 이내 점점 느려지고, 마침내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물에 젖은 커피가 필터를 통과해 흘러나온다. 이때 커피는 꽃을 재배하는 축축한 옥토(沃土)처럼 보인다.
그런데 전자동 커피머신의 경우는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언뜻 떠올랐다. 원두를 갈고, 물을 데우고, 일정한 양을 필터로 거르는 이 모든 과정이 우리에겐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마지막에 나오는 결과물일 뿐이다. 아무튼 커피머신은 지극히 편리한 물건임에도 나는 옛날부터 해오던 방식이 더 좋다. 직접 커피를 내리는 핸드드립을 해보면, 커피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커피머신의 경우는 그냥 버튼만 누르면 그만이다.
주체와 객체라는 질서가 문득 떠오른다. 즉, 전자동 커피머신이 명령을 내리고, 나는 복종해야만 한다. 기계는 물을 더 채우라는 요구를 할 때도 많다. 그런 요구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만, 녹색 디스플레이에 이런 문구가 뜰 때면 슬프다. ‘찌꺼기를 비우시오.’
전자동 커피머신은 점점 과도한 기술에 포위당하고 있는 우리의 세계를 보여주는 단순한 예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자동차 엔진은 나사를 풀 수 없는 케이스에 담겨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체에 가야 한다. 스마트폰 역시 나사 같은 것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기술 발전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수리를 할 필요도 없다. 플라스틱 부분이 깨지거나 막이 찢어져도 수리하기 힘들다. 우리 소비자는 진보가 일어나는 내면의 세계로부터 배제되어 있으며, 버튼을 누르거나 마우스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생겨난다.
우리는 그야말로 1세대 혹은 2세대 만에 독자적이고 자급자족에 능한 사람에서 종속적인 소비자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진보가 보여주는 하나의 특징이며, 세계는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심도 있게 발전한 경험이 지금껏 없었다.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는 미래를 천천히 진행되는 과정으로 체험했다. 그들의 세상은 과거에 뿌리를 두었고, 현재와 미래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부터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적응할 시간이 충분했다. 그런데 어제만 하더라도 우리의 그리움과 희망을 투시하던 미래로부터 그사이 ‘파괴적’ 변화가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혁신이라는 것이 현실을 그야말로 급격하게 몰아내고 있다. 그 누구도 이런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듯 우리의 현실을 때릴 때에야 비로소 인식한다.
우리는 이처럼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견해의 고수와 갱신 사이에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끔찍한 불협화음을 경험하고 있다. 오래된 규칙과 관례는 사회적 토론을 거치지 않은 채 타당성을 잃어간다. 우리는 수많은 전통과 관습으로 이뤄진 믿음직한 집에서 쫓겨나 갑자기 방향을 잃고 진보라는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새로운 인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피카소), 많은 사람은 그와 같은 모순적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노동 과정 또한 점점 양적으로 계산 및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경쟁을 펼치는 가운데 점점 통제권을 양보하고 있다. 우리는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이 일해야만 하고, 철저한 투명성을 지향하는 까닭에 우리와 기계를 구분해주던 마지막 특징마저 사라질 지경이다. 우리는 자유가 중요하다는 계몽도 그만두고, 개인에게 변화를 창조할 힘이 있다고 계몽하는 노력도 그만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와 같은 계몽이 자체의 법칙을 주장하며 우리를 훨씬 차원 높은 논리의 포로로 만들까?
디지털 혁명: 빅 데이터의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21세기의 빅 데이터는 18세기의 증기 기관이나 19세기의 전기와 그 의미가 같다. 요컨대 근본적 혁명이라는 얘기다. 현재 우리는 시대가 바뀌는 시점을 경험하고 있다. 한때 중세 시대가 르네상스로 인해 해체되고, 모던하다고 부르던 시대가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듯 말이다. 이처럼 역사적인 시대에는 새로운 기술이 사회를 바꾸고, 또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견해, 곧 자화상이라는 것도 바꾼다. 디지털 혁명은 우리 자신도 바꾼다. 이런 진보를 수동적으로 맞이하느냐, 아니면 능동적으로 참여해 함께 만들어나가느냐는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어쩌면 우리의 후세는 이런 변혁의 시기를 경험한 우리를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르네상스를 떠올리면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을 경탄해마지 않듯이 말이다.
마법 : 디지털 마법에 대하여
인간과 컴퓨터 - 누가 누구를 프로그래밍하는가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생겨나기 전에 사람들은 여행을 가면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바로 편지를 썼다. 이런 방식의 대화는 지금의 방식과는 어느 정도 차원이 달랐다. 다시 말해, 편지를 쓰면 사람들은 평범하고 세속적인 일은 표현하지 않고 한층 심오한 생각과 감정에 집중했다. 여행을 떠나면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로부터 해방되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기회도 생긴다. 모든 여행은 그 자체로 선택한 고독이자 자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처럼 침묵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우리는 결코 완전히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내 아내는 어디에 있든 늘 4명의 아이들과 왓츠앱을 통해 대화를 나눈다. 온갖 장점에도 언제 어디서든 대화가 가능한 이런 삶은, 다른 사람과 떨어져서 나 스스로를 경험하는 일을 방해한다. 즉,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받는 인상, 나에게 생긴 일을 직접 이해하는 작업, 대화를 나누지 않고 기다리는 동안 생기는 긴장감 등은 흔히 내적으로 성숙해지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소외된 채 이루어지는 깊은 사고는 순간순간의 인상을 필터로 거르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는 대화의 물결에 밀려나고 말았다. 개인적 체험은 집단에 소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과정으로 인해 멀어졌고, 각자가 겪는 현실은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체험하는 가상현실이라는 냄비에 통합된다. 따라서 우리는 체험하는 순간 다른 사람을 위한 현실을 생산해내는 셈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혹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전한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멀리 떠났다가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까? 모든 사연을 이미 교환하지 않았던가?
가상 세계와 지속적으로 교환함으로써 일상의 질서가 무너졌다. 언제라도 연락할 수 있으므로 일과 여가 사이를 구분하기도 힘들어졌다.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늘 ‘on’ 상태에 있다. 여가 시간인지 휴가 중인지도 무시하고 우편물 또한 끊임없이 온다. 일에 휴식이 없다면, 도대체 휴가의 의미가 뭐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매우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휴가 중에 이메일이 오면 다음과 같은 답장을 하도록 자동으로 설정해둔 것이다.
“나는 휴가 중이며 이메일을 일부러 ‘오프라인’으로 설정해두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메일도 읽지 않을 테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도착한 메일은 모두 삭제합니다! 중요한 일이라면, 당신의 메일을 xx년 yy월 zz일 이후에 보내주십시오. 그때부터 내 전자메일은 다시 정상으로 가동될 것입니다. 이런 행동이 당신에게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하는 시대에 나도 집중을 하고 거리를 두는 게 정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계와 맺은 협정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최적화하다보면 직선이 아니라 우회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삶의 흥분을 무시할 것이고, 우리의 다양성은 적절한 단일성으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이런 과정이 지닌 규범적 힘이다. 컴퓨터와 인간 중 결국 누가 누구를 프로그래밍할지는 우리가 인간으로 남아 있고 인간이 지닌 부족함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알고리즘이 결코 알 수 없을 모든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지식 : 교육과 문화의 역사
더 많이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
내 아이들은 그야말로 ‘디지털 원어민’ 세대에 속한다. 그들은 디지털 세계가 제공하는 온갖 편리함을 누리며 자랐다. 인터넷, 내비게이션, 스마트폰 그리고 인터넷에서 무슨 질문이든 하면 답을 해줄 앱이 있다는 독특한 상상을 하는 세대다. 이들은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하는 이른바 ‘엄지족’에 속하며, 궁금한 것은 물론 친구들과의 대화도 휴대전화로 해결한다. 그들의 세계는 스카이프, 페이스북, 왓츠앱, 유튜브, 위키피디아 혹은 스포티파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세계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그러니까 겨우 20년 되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이 세대들이 늘 이용하는 기술처럼 놀라운 발전을 한 분야는 없다.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을 대체하고, 출시한 지 몇 년밖에 안 되었음에도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등장하면 성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 컴퓨터를 폐기하곤 한다. 우리의 과거도 미래와 비교해보면 성능이 떨어지는 것일까? 인식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흥분되고도 힘든 과정을 거친 뒤 얻는 결과다. 우리의 과거를 살펴보면, 조상 세대들이 오늘날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박물관과 문서 보관실에 들어가면 우리는 늘 현재로 끝나는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독일 드레스덴의 츠빙거 박물관에 있는 ‘수학-물리학 살롱’의 전시물을 근거로 나는 어떻게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설명해주고 싶다. 번쩍번쩍 빛나는 아스트롤라베(Astrolabe), 혼천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천구와 오래되었으나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황동 시계는 우리에게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해준다. 이런 진열품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발명품이고 세부적인 것까지 신경을 쓴 흔적이 담겨 있다. 이런 진열품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그 천재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우리 조상의 열정적인 지식욕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사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었고, 지식에 대한 욕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측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트 선제후와 그 후계자들이 1560년부터 과학 기구, 천문 관련 도구와 정교하게 만든 기계를 예술품으로 수집했고, 그 후 1728년 드레스덴의 츠빙거에서 아우구스트 2세(1670~1733) 집권 때 ‘수학 및 물리 도구를 모아두는 왕실의 전시실’이 독자적인 박물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덕분에 우리는 이런 발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선제후는 1587년까지 수십만 개의 물품을 수집했고, 그중 450여 개가 과학 도구였다.
이런 전시품 가운데 하나가 특히 내 마음에 든다.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으며, 가장 오래 보존되어 있는 천구 중 하나다. 이것은 오늘날 이란 북부에 위치한 마라가 천문대에서 나온 것 같다. 이 천구에는 48개의 별자리와 1000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황동으로 된 천구 표면에는 천문학자 무하마드의 아들 무아이야드 알딘 알우르디라는 이름이 있다. 우르디는 당시 통용되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보다 행성의 궤도를 훨씬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수학 모델을 개발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우르디는 지리적 모델에서 출발했지만, 그가 내린 해석은 가히 근본을 흔드는 파괴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봤을 때 그의 계산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발표함으로써 천체학의 전환기를 이끈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상응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악의 축’ 같은 표현이 나돌고 있지만, 사실 별을 정확하게 살펴보면 정반대의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스-라틴어 이름이 붙은 오리온자리(Orion), 백조자리(Cygnus), 큰곰자리(Ursa Major) 혹은 독수리자리(Aquila) 같은 별이 빛나는 가운데, 아랍 이름을 가진 밝은 별들도 빛나고 있다. 알데바란(Aldebaran), 알골(Algol), 알타이르(Altair), 데네브(Deneb) 혹은 리겔(Rigel)처럼. 이렇듯 오래된 천체 지도와 천구가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희망을 선물하며 모범을 보여준다. 하늘에서는 2개의 문화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르디의 천체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천체의가 있는데, 1515년 밤베르크 출신의 요한 쇠너가 완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사는 지구, 아니 좀 더 자세히 표현하면 그 당시 알고 있던 지구가 그려져 있다. 이로부터 4년 후 페르디난트 마젤란은 다섯 척의 배와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춘 함대를 이끌고 세비야를 출발했다. 향료 생산지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이로써 그는 태평양에 발을 내디딘 최초의 유럽인이자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본 사람이 되었지만, 요한 쇠너의 천체의는 이와 같은 역사적 발견 여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태평양을 여행해본 사람이 없어 미국 서부 해안은 완전히 미지의 장소였다. 천체의를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대단한 발견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작은 표시 하나하나는 인류가 인식의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였음을 의미한다.
1568년 뉘른베르크에서 완성된 요하네스 프레토리우스의 천체의에는 경도의 기준인 본초자오선이 마드리드를 통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권력의 중심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체험할 수 있다. 1718년에는 파리가 세계의 배꼽이었지만, 1738년부터는 그리니치가 본초자오선이 지나가는 중심이었다.
세계를 측량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과학 도구는 어두운 세계에 빛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부와 명예도 안겨준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한때 나침반을 통해 막강한 제국이 되었듯, 오늘날에는 디지털 서버와 플랫폼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오래된 물건이 우리에게 보내는 핵심 메시지는 본질적 성격을 띤다. 즉, 오늘날의 세계 질서 역시 변화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대한 제국도 결국은 멸망해 다른 나라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천체의를 전시한 방 옆에는 피스톤 진공 펌프들이 있다. 오래된 도시 마그데부르크의 시장 4명 중 한 명이던 오토 폰 게리케는 펌프의 새로운 역사에 몰두했다. 1649년 피스톤 진공 펌프를 발명한 그는 이때부터 진공 기술이 창시자로 여겨졌다.
놓쳐버린 기회: 전 세계가 뛰어들어 펼치는 경쟁에서 혁신이 일어나는 장소에 대한 의문 역시 새로운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오토 폰 게리케는 진공 펌프를 발명함으로써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이상 기체 법칙을 연구하고 확립하는 실험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압력, 가스의 부피와 온도 사이의 확고한 관계를 연구하는 것 말이다. 이는 기술적으로 당시의 도구들로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요소의 근본적 관계를 알아낸 사람은 1662년 아일랜드 사람 로버트 보일이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보일-마리오트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왜 작센 출신의 남자 게리케가 아니었을까? 작센에는 당시 상당히 현대적인 도구가 많았지만, 계속 연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근본적 요소를 본다. 과학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그것이다. 참고로 런던의 로열 소사이어티와 파리의 아카데미 데시앙스 - 모두 국립 과학 아카데미 - 는 똑똑한 과학자들이 쑥쑥 자라날 수 있도록 배양했다. 그리고 이런 아카데미를 발전시키기 위해 투입하는 국가의 지원을 바탕으로 좀 더 나은 지식 경영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탁월한 경제부 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와 함께 1666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를 창립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이러한 국가적 노력과 우선적 지원이 프랑스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의미와 권위를 부여해준 것이다. 이와 반대로 독일은 이 기간에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있었다.
과학이 발전하려면 좋은 도구, 기술적 완성도, 새로운 장비를 조심스럽게 잘 다루는 수공업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창의적 정신, 공개적으로 논쟁을 펼칠 수 있는 분위기, 발전하기 위한 자유도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 로열 소사이어티의 슬로건은 “그 누구의 말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였다. 과학적 맥락은 실험으로 드러나지 의견 일치를 통해 나오는 게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당시의 독일은 프랑스나 영국과 차이가 있었다. 당시의 가스 법칙 가운데 단 하나도 독일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300년 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독일이 발전할 수 있을 때, 또 다시 국가의 통찰력과 지원은 없었다. ‘고속 정보망(information highway)’이라는 개념은 독일의 책임 있는 자들로부터 처벌받아 마땅할 정도로 무시당했다. (‘초고속 정보망’과 관련해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 당시 총리이던 헬무트 콜은 이렇게 대답했다. “고속도로 건설 사업은 기업 외에 주로 각각의 주가 담당해야 하지요!” - 초고속 정보망(Datenautobahn)을 고속도로(Autobahn)로 이해했던 것) 기억하건대 나는 다른 과학 부문 기자들과 함께 1994년 본에서 열린 과학부 기자 회의에 참석한 전(前) 교육 및 개발 연구 장관에게 인터넷을 구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메일을 이용하시죠. 그게 최소한 하나의 신호가 될 것입니다!” 장관은 이렇게 대답하며 우리의 요구가 터무니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와 반대로 미국에서는 부통령 앨 고어가 일찌감치 인터넷의 잠재력을 알아차렸다. 그는 상원의원이던 1991년에 이미 ‘고성능 정보 처리법’을 발의했고, 이어서 또 다른 법안들도 제정했다. 그는 뛰어난 전문가들의 모임을 조직하고, 1994년 1월 11일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이런 강연을 했다. “우리에겐 꿈이 있습니다. ……초고속 정보망에 대한 꿈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젊었든 늙었든 모든 미국인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수학-물리학 살롱’의 과학 관련 예술품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마법이 드러난다. 황동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이런 물건의 배후에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향수가 숨어 있는 까닭이다. 밤베르크 출신의 요한 쇠너가 만든 천체의를 기억하는가? 지상에 있는 대륙을 표시한 윤곽은 1515년경 부분적으로만 알려져 있거나 아니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여기에 당시와 오늘날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 망원경을 보며 당시와 동일한 질문을 한다. 물질의 속성은 어떠하고, 우주의 구조는 어떠하며,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런 물건이 세상을 점차 바꾸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만들었다. 내 딸의 스마트폰 앱들 역시 과거 황동으로 만들었던 장치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에 대해 알면 우리는 놀라운 관점을 선물 받을 수 있다. 지식과 관련한 역사적 도구와 발전이 현재까지 이르게 된 경위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가올 세상을 좀 더 잘 파악하고자 하는 바람이 생겨난다.
행동하기 : 안정성과 변화
우리에겐 딱 하나의 행성밖에 없다
1990년 2월 14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무인 우주 탐색기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64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를 바라본 것이다. 보이저 1호는 우리의 태양계를 사진으로 찍었다. 요컨대 태양과 그 태양을 둘러싸고 있는 행성들의 사진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먼 곳의 아주 작은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개별적으로 찍은 다른 행성의 점과 비교하면 거의 10분의 1 크기에 불과하다. 더렵혀진 얼룩이나 오류로 인한 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파란색 작은 부스러기처럼 생긴 것이 바로 우리 지구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말이다. 우주에 있는 하나의 점, 미미한 먼지덩이 같은 이곳이 우리의 꿈과 희망의 무대이자 우리 아이들과 부모님이 태어난 곳이며, 어떤 민족은 전쟁을 치르고 또 다른 민족은 서로 온기를 나누는 곳이다.
이 행성은 선물이며, 차갑게 죽어 있는 우주 공간 한가운데에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섬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즉, 선물 꾸러미를 찢어 내용물을 꺼내고는 이것저것 시험해보고 실패한 다음에야 비로소 사용법을 읽기 시작하는 아이와 같다. 우리는 지금 이 단계에 있다. 우리는 주의하지 않고 많은 숲을 파괴했다. 기후가 변하고 많은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우리 집을 지킬 기회가 있다.
참고로 수많은 협상을 거친 끝에 마침내 2015년 말 195개국이 파리에서 유엔 기후 협약에 서명했다. 이 협약의 목표는 일련의 구체적 조치를 통해 지구 평균 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2도 이상 낮추는 데 있었다. 그런데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악명 높은 전략가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2017년 6월에 드러났다. 미국 대통령이 파리 기후 협약을 일방적으로 깨버린 것이다. 미국 대통령은 그보다 몇 달 전 석탄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상징적인 협약에 서명했다. ‘석탄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법령에 서명한 것이다. 탐욕에 가득 찬 산업계를 위해 일하는 로비스트는 이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소수의 이득을 나머지 국민의 이익보다 우선시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도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2016년 8월 루이지애나주에 폭우가 내려 홍수 재해가 발생했다. 14만 채 넘는 주택이 부분적으로 파손되고, 손해액은 100억 달러에 달했다. 진행 중인 기후 변화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 결코 아니다. 이런 현상은 점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극지방의 얼음이 서서히 녹고, 알프스 빙하가 점점 줄어들고, 극단적 기후 사건이 점점 늘어난다. 처음에 우리는 보험 지불금이 올라가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대규모 산불에 대해 자주 듣거나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장소에서 부족한 눈을 보충하기 위해 인공 눈을 점점 더 많이 투입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더라도, 그런 것이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기후로 인해 도망친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울타리를 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자체적인 설명이나 사과를 시도할 것이다. 폭풍이 치고 폭우가 퍼부어도 이런 표어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원인은 기후 변화 때문입니다.” 우리는 둑을 점점 높게 쌓아 해안을 보호하려 할 것이고, 수확 감소로 인해 생필품 가격이 올라간다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많은 개별 사건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한쪽에서는 기후 변화를 여전히 체계적으로 부인하고 자연 파괴를 경시하는 반면, 또 다른 부류는 우리의 탐욕이 저지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언젠가 신과 같은 존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희망은 착각에 불과하다. 그 어떤 낯선 힘도 우리 지구를 고쳐주는 일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의 가장 혁신적 기술조차도 점차 파괴되는 우리의 생활권을 변상해줄 수 없다.
“당신들은 시계가 있고, 우리는 시간이 있지요”
물리학적 사고에서 아주 많은 경우에 안정성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여러 실험을 통해 하나의 시스템이 외부의 방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밝혀내려 한다. 원래의 상태로 다시 돌아오는지, 아니면 과도한 반응을 하게 되는지? 안정성과 평형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자연은 항상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상태가 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시스템이 평형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만약 누군가 이를 방해하면, 그것은 원래의 안정적인 상태가 되려 한다. 이와 반대로 불안정한 시스템은 아주 사소한 방해를 받더라도 궤도에서 이탈하고 다른 평형점에서 안정을 찾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하게 반응한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사소한 변화일지라도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론물리학에서는 수학적 도구를 이용해 추상적 시스템의 안정성을 검사한다. 즉,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기 위해 시스템을 ‘흔들어놓고’ 평형 상태를 방해함으로써 실험을 하는데, 이를 방해 이론이라고 한다. 이 방법으로 과학자들은 비행기가 측면에서 부는 바람이나 소용돌이에 유연하게 반응하는지 계산할 수 있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시스템이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지 검사할 수 있다.
이 기회에 나는 발전뿐 아니라 경제 및 생산 시스템의 기본 특징이 안정적인지 검사하고 싶다. 흥미롭게도 많은 국가의 헌법은 그 헌법이 안정적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기초를 구축해줘야 한다고 명시한다. 국가에 작용하는 다양한 힘은 균형이 잡혀야 하며, 미리 정해둔 절차나 규칙을 통해 극단적 사건을 예방하고자 한다. 독일 기본법에서도 안정화를 도모하는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예로 권력을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에 분산해놓은 게 그것이다. 그 밖에 경제 분야에서 독점을 방지하기 위한 카르텔 권리도 보장하고, 특정 기관에 종속되지 않고 보도할 수 있는 미디어 권리도 보장하고 있다.
경제나 금융과 관련해서도 안정화를 위한 조항이 있다. 예로 반덤핑법은 독점 업체가 등장하는 것과 시장에 참여한 다른 기업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다. 따라서 국가가 차지하는 위치, 경제, 정치 등으로 형성된 복잡한 형태는 세부적으로 마련한 조항이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제정한 많은 규칙으로 이뤄진 거대한 기계와 비슷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이와 같은 기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글로벌화와 디지털 혁명은 기본적인 규칙을 바꾸어놓았다. 즉, 디지털 인터넷 경제는 소수의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독점화의 길로 나아가더니 다양한 경쟁을 지향하던 고전적인 개념을 무력화시켰다.
인터넷 경제를 한 번 주시해보라. 사실 단 하나의 검색 엔진 구글, 단 하나의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 단 하나의 비디오 채널 유튜브, 단 하나의 숙박 플랫폼 에어비앤비, 3개의 운영 체계 공급회사 마이크로소프트ㆍ애플ㆍ구글, 단 하나의 짤막한 소식 전달 매체 트위터, 단 하나의 온라인 상점 아마존이 있다. 독점화한 원인은 디지털 논리에서 찾을 수도 있고, 시스템 그 자체에서 찾을 수도 있다. 요컨대 네트워크에서 직접 사용한 후 비교해보면 항상 좋은 품질의 제품이 이길 수밖에 없다. 아무튼 ‘승자 독식’이라는 슬로건에 따라 게임의 규칙이 변해버렸다. 이와 동시에 글로벌 대기업인 이들은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조세 회피처를 이용하거나 수익을 교묘하게 분할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한때 성장이라는 신조는 우리의 번영을 보증해준다고 여겨졌다. 경제가 성장하면 이로부터 모두가 이득을 챙길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1957년에 출간된 『모두를 위한 복지』는 ‘독일 경제 기적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쓴 책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경제 성장과 전체 국민 복지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디지털화와 자동화를 통한 기술적 발전은 분명하게 노동자와 회사원으로부터 기업가와 자산가에게로 돈이 옮겨가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자본주의와 성장률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깨어짐으로써 더욱 강화되고 있다. 참고로 파리경제학교의 교수 토마 피케티는 20개국의 데이터를 철저하게 분석한 끝에 18세기부터 시작된 이른바 ‘경제 수치’라는 것을 관찰했다. 자본에 의한 이득이 성장률을 앞선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만일 어떤 나라에서 자본 수익이 성장률보다 더 크다면, 재산이 소득보다 빨리 늘어난다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해, 많은 돈을 소유하고 이를 투자하는 사람은 힘들게 노동해서 소득을 얻는 사람에 비해 더 많은 수익을 올린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에 나타나는 이런 경향은 거의 모든 산업 국가에서 대두하고 있다. 2017년 3월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의회 연설 도중 예산 부족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미래의 한계를 명시하기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어졌던 오류를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중산층이 축소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우리가 일자리와 부를 외국으로 옮겼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전 세계에 프로젝트를 구축하고 재정 지원을 했지만, 정작 시카고, 볼티모어, 디트로이트에 사는 우리 아이들의 운명은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의 진단은 옳다고 할 수 있으나 이를 위한 해결책은 틀렸다. 불안정한 사회적 상황을 흔히 포퓰리즘과 국수주의 같은 트렌드로 다루는 것은 참으로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복잡한 세계를 위험할 정도로 단순한 처방전으로 설명하며, 적을 설정하고 갑자기 자유가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내에서도 활짝 열려 있던 경계가 닫히고 울타리가 세워진다. 수십 년 동안 오로지 경제 성장에만 집중하던 발전 방향에 대한 복수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자유 무역 협정을 폐기하겠다고 통보하고, 영국은 유럽연합에서 탈퇴했다. 아울러 이민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편협함이 무섭게 증가하고 있다. 시민의 불안은 터무니없을 만큼 퇴보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과거의 인민당은 위축되고, 극단주의가 늘어나고 있다. 세계가 불안정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예외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상황은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이런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면 대부분 독재자들이 등장하고 전쟁이 일어났다. 지극히 독특한 예외는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보인 반응이었다. 1933년 3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오로지 이기주의자들 세대의 법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그려보는 힘도 지니지 않았으며, 미래상을 그려볼 수 없는 사람들은 망하기 마련입니다. 환전상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높은 지위에서 문명의 사원으로 피신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원을 과거부터 내려오는 진리에 돌려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과제를 어느 정도 성공하게 될지는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더 고상한 사회적 가치를 우리가 얼마나 창조하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행복은 돈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행복은 이뤄낸 성과와 창의적 작업을 했을 때 얻는 기쁨 속에 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통해 무엇보다 자본 수익과 성장률 사이의 균형을 다시금 회복해놓았다. 경제의 핵심이 성장 중심에서 안정으로 옮겨갔으며, 시민의 자유를 폐기하지 않고서도 이와 같은 변화를 이뤄낸 것은 바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역사적 공로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태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한층 더 막대한 요구에 직면해 있다. 즉, 경제적 안정 외에도 우리는 생태학적 균형 또한 이뤄내야 한다. 자원의 남용, 생물 다양성의 급격한 소멸과 온난화는 근본적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정과 지속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야만 한다.
나는 몇 년 전 취재 도중 부시먼족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에 속하는 부시먼은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몇몇 지역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사냥과 채집 문화를 영위하고 있으며, 사회 질서는 평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도 없고 위계질서도 없다. 부시먼족은 소유물을 나눠 갖고, 거래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모든 물건은 그룹 내에서 선물 받거나 빌리면 된다. 그들과 함께 있자 강렬한 영감이 생겼다. 우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 문화를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먼족은 문을 잠그지 않으며, 울타리도 없다. 자신과 타인의 재산을 분리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했을 뿐인데도 갈등이 거의 사라졌다. 부시먼족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매일 2~4시간만 일한다. 따라서 이들은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소비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40시간 혹은 그 이상을 일하고 있다. 노동을 덜어주고 힘들지 않게 하려고 기계도 개발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시간이 별로 없다. 케냐의 속담에 이런 게 있다. “당신들은 시계가 있고, 우리는 시간이 있지요.” 요즘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우선순위를 새롭게 정하고자 하는 바람을 품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물질적 부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만일 우리가 자원을 지금처럼 다룬다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을 얻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전혀 필요하지 않고 심지어 잠시 후에 버릴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노동 시간의 일부를 투자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식품을 생산해 소비하는 단계까지 1800만 톤의 재료가 사라진다. 이는 우리가 소비하는 식품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아울러 우리가 구입한 과일, 채소, 빵 가운데 5분의 1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이런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경작지 260만 헥타르를 절약할 수 있다. 식량 생산을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와 이와 관련한 자원은 차치하고 말이다.
행복하기 위해 우리에겐 이산화탄소 몇 킬로그램이 필요할까? 어쩌면 이런 질문이야말로 지속성과 안정으로 나아가는 길에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다. 물질의 과잉과 소비 지향적 사고는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면, 해결책을 반드시 찾을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주어진 적이 예전에는 없었다. 우리는 각종 혁신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 이런 사고의 전환에 대한 조짐을 엿볼 수도 있다.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발전을 위한 역사적 기회가 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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