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by Casey,Riley 2020. 4. 13.
반응형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이 책은 광개토태왕을 단순히 영토를 확장한 정복군주로서가 아니라, 세계질서를 능동적으로 재편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며, 태왕이 꿈꾸었던 고구려적 세계와 국가발전전략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매력적인 인물 모델의 또 하나의 전형을 제시한다.

 

 

Short Summary

21세기 우리 민족의 발전 모델로 가장 적합한 역사생명체인 고구려. 그 고구려의 가장 튼튼한 초석을 놓고 대들보를 올린 우리 시대 최고의 리더는 광개토태왕이다. 이 책에서는 광개토태왕을 단순히 영토를 확장한 정복군주로서가 아니라, 세계질서를 능동적으로 재편하고 정치, 외교, 경제, 문화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아울러 태왕이 꿈꾸었던 고구려적 세계와 이를 실천해 가는 국가발전전략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매력적인 인물 모델의 또 하나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를 관념이나 지식이 아닌 삶 그 자체로,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내포한 살아 있는 현실 그 자체로 이해하고 다가올 미래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의 활동을 분야별로 유형화하여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언어와 상황으로 재해석하여 발전적 모델로 삼고, 21세기의 우리가 당면한 국가적, 현실적 과제들의 한계와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차례

프롤로그 : 한고려국과 중국의 충돌

1. 21세기 역할모델, 광개토태왕

2. 혼돈의 동아시아와 광개토태왕의 등장

3. 정치외교의 중핵(core) : 균형과 조정

4. 군사력 : 정책화와 수륙양면작전

5. 경제 물류의 거점(hub) : 집산과 중개무역

6. 문명의 터전 IC : 융합과 재창조

7. 고구려의 중핵조정역할이 지닌 21세기적 의미

에필로그 : 21세기 통일한국, 혹은 한고려국의 꿈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윤명철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 200511/ 156/ 5,000

 

 

1. 21세기 역할모델, 광개토태왕

 

개방과 만남, 변화의 중심에 선 한국 / 왜 광개토태왕인가

강소국인 우리 민족이 생존하고 발전하려고 할 때, 실제적인 모델로 삼을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동아지중해(East Asian Mediterranean Sea) 중핵조정역할인데, 이를 실현시켜 성공한 나라가 고구려이고, 그 틀을 만든 사람이 광개토태왕이다. 참고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의 상황은, 21세기의 상황 -세계질서와 동아시아질서가 급변- 과 거의 흡사한데, 광개토태왕은 우리에게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해결 방법론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태왕의 삶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생생한 자료는, 붕어한 지 2년 후인 414년에 아들인 장수대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릉비인데, 이를 보면 시호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18세에 즉위하였고, 연호가 영락(永樂)”이라고 하였다. 또한 은택은 마치 황천과 같았고, 위무(威武)가 널리 사해(四海)에 떨쳤다. []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아가게 했다.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들도 많아지고, 오곡이 잘 익었다.”라고 하여 태왕이 국내외적으로 정치를 잘한 성군이었음을 알렸다. 하늘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돌아가셨도다.”라고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려 비를 세운다고 하였다.

 

미리 말하자면, 태왕은 고구려를 그 시대 세계의 중심에 확실하게 자리 잡게 할 목적으로 다양한 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였고, 성공시켰던 위대한 정치가였다. 이제부터 태왕이 살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벌인 활동들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찾아보고, 그의 인품, 능력, 세계관, 그리고 그가 꿈꾸었던 고구려적인 세계와 이를 실천해 가는 국가발전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혼돈의 동아시아와 광개토태왕의 등장

 

혼돈에 빠진 동아시아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 무렵은, 국제질서가 혼란스러웠던 데다가, 민심이 흉흉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여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었다. 참고로 중국대륙에서는 위를 이어 진이 북부지역을 통일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바로 516국 시대가 전개되었는데, 북부지역에서 혼란스럽게 명멸하는 각국들은 나름대로 살아가기 위한 방도를 찾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남쪽으로 도망간 동진과 외교 교섭을 하여 실리와 명분을 얻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연나라와 동진은 남북 대결구도를 보이고 있었고, 고구려와 연은 국경을 마주한 채 일촉즉발의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와 동진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우호구도였지만, 연 및 후조와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복잡 미묘하게 경쟁 구도를 연출하고 있고, 한국과 일본은 우호협력 내지 경쟁관계이지만, 과거 청산과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국은 북한과 적대관계에 있으나 북한의 혈맹인 중국과는 우호적인데, 물론 중국은 우리의 통일을 기본적으로 방해하는 세력이고, 앞으로도 우리와 갈등 내지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많다. 중국과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갈등 혹은 경쟁관계인데, 한시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고 있지만 연해주 영유권과 두만강 하구를 놓고 갈등을 빚을 것이 분명하다.

 

이 외에도 일본과 러시아, 일본과 북한, 북한과 미국, 중국과 미국 등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중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미묘하다.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4세기경에도 아수라장과 불가시성 속에서 고도의 외교행위들이, 그것도 비밀리에 행해졌는데, 고구려 또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기에, 현재 우리도 깜짝 놀랄 정도로 부단하게 고도의 세련된 외교행각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과감하게 군사행동을 실천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시아세계가 이러한 혼란과 불확정성, 무질서로 차 있었지만, 고구려에게는 실로 오랜만에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하였다. 즉 다른 유목 종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하(遼河)를 넘어 중원을 점령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광개토태왕이 즉위하기 전,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었고, 사회 전체에 분노와 허탈감, 슬픔이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은 왕위에 오르자 우선 불안감에 떠는 백성들을 위무하고,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까지 된 기아상태에서 벗어나 잘 먹을 수 있도록 경제를 발전시키고,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문화도 융성시켜야 했으며, 또 그의 등극에 대한 백성들의 우려도 불식시켜야 했는데, 이때 가장 중요하고 기본 토대가 되는 것은 고구려를 크고 건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생적인 환경 속에서 그가 내세운 목표비전은 지리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고, 급하게 판 갈이 하는 전환기의 국제질서를 기회로 삼아,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그리고 심지어 문화 등 모든 상황의 가운데에서 관계를 조정하는 역할 -동아지중해 중핵조정역할- 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태왕의 정책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고구려가 위기를 어떻게 타개하고 어떻게 꿈을 실현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3. 정치외교의 중핵(core) : 균형과 조정

 

광개토태왕의 탁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국제질서의 변화를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이었다. 그는 우선 영토확장정책을 펼치고, 외교노선을 다변화하는 한편 군사력을 강화했는데, 방향은 남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을 동시에 지향하는 전방위 정복활동이었다. 태왕이 22년 동안 벌인 광대하고 복잡한 정책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다소 순서가 겹치더라도, 공간을 기준으로 크게 두 가지 -북방정책과 남방정책- 로 유형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북방정책 - 요동, 부여, 만주 등

태왕은 즉위한 해에 거란을 정벌하여 500여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이 승리는 국내정치에서도 그렇지만 군사적으로도 의미가 매우 컸는데, 무엇보다 고구려는 이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상당히 유리한 위치 -요동을 경영하는 데 필수적인 교두보를 차지했고, 잠재적인 적대 관계인 화북 세력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위치- 로 격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태왕은 보다 확실하고 적극적으로 요동 확보작전을 펼쳐 요동성과 현도성을 점령하였다.

 

고구려에 있어 요동지방의 장악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가치 -중국을 북부에서 압박할 수 있고, 북방 종족들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1차 방어선이며, 북방 종족들과 결탁하면 중국 북부를 협공하거나 쉽게 견제할 수 있는- 가 있었다. 소위 전략적으로 가치 있는 을 장악한 것이었다. 그 외에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가치 -풍부한 지하자원의 매장지, 물류거점과 생산지- 가 있었고, 해양적 관점으로도 요동만, 서한만, 대동강 하구, 그리고 경기만을 잇는 황해 동안의 연근해항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태왕은 북부여의 원토도 자국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켰는데, 이로서 육지뿐만 아니라 연해주 남부바다의 일부와 동해 항로의 일부까지도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시켜 경제적으로도 많은 혜택을 얻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삼핵(三核) 혹은 삼극(三極) -북방, 중국, 동방- 이라는 체제의 한 부분을 확실하게 차지할 수 있었다.

 

남방정책 - 백제, 신라, 가야,

당시 대내외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북방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 시급하였지만, 때때로 태왕은, 그의 정책기조를 남진정책으로 오해할 만큼, 남쪽을 향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고, 군사작전을 빈번하게 실행에 옮겼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태왕이 영토를 확대할 목적으로 남쪽으로 진출했다고 말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좀더 거시적으로 판단해서 동아질서를 재편하려는 전략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면 해양활동과도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태왕은 한반도 남부 전체를 대상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백제 공략이라는 1단계 목표를 달성한 후에는 바로 다음 목표인 신라를 향해 신속하게 움직였으며, 곧 이어 백제왜와의 관계를 빌미로 삼아 임나가야를 공격했다. 이렇게 해서 한민족 내부에선 고구려와 신라를 한편으로 하고, 백제와 왜, 가야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묘한 힘의 축()이 형성되었다.

 

동아지중해 중핵조정역할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태왕의 정책들을 살펴보면 큰 틀이 있어, 그것이 차근차근 입체적전략적으로 추진됐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당시 고구려만이 중핵으로서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와 접할 수 있었는데, 고구려는 곳곳에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하여 질서의 축()을 세우고,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여 단계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거대한 망()을 구성하여, 동아시아 삼각 축의 하나로서 명실 공히 중핵국가가 되어, 조정능력을 갖고 한민족 질서의 패자가 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목표 외에도 원조선과 부여의 후예인 한민족 국가들을 통일하고, 잃어버린 원조선의 영토를 회복하여 그 이상과 정신을 재현하려는 국가목표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 군사력 : 정책화와 수륙양면작전

 

전술을 넘어선 전략적인 전쟁

태왕은 내부에 만연해 있는 두려움과 패배감을 극복하고, 위축되어 있던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했는데, 그가 정한 가장 확실하고 단호한 목표는 전쟁에서의 완벽한 승리였다. 고구려를 무시하던 주변국들은 고구려의 이런 기습에 놀라 속수무책 패퇴를 거듭했고, 태왕의 연전연승에 태왕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을 것이다. 한편 태왕은 군인처럼 땅을 넓히는 전술적인 전투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영역거점을 확보하는 전략 전쟁을 벌였는데, 첫째는 요동 확보전쟁이었고, 두 번째는 경기만 장악 전략이었으며, 세 번째는 두만강 하구의 장악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완벽한 승리를 가능케 한 실질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유목민들의 이동성(mobility)을 지닌 고구려가 정착적인 성격을 받아들여 적절하게 조화시켰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이동-정주(mo-stability)형 문화를 이룩해갔고, 그러한 성격이 전술에서도 발휘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전술의 핵심, 기마군단과 보병 / 수군과 상륙작전

태왕은 전선에서, 고정하는 진지전이 아니라, 기동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이동전을 구사했다. 즉 움직이는 사령부에서 지휘를 하면서, 남에서 북으로, 다시 남으로 이어지는,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하여 적의 허를 찌르는 예측불허의 작전을 사용하였는데, 그가 즐겨 활용한 전술 가운데 하나는 기마병과 기마전술이었다. 아울러 태왕은 기동력을 강화시키고 정복대상지의 자연환경과 전세에 걸맞게 대응하기 위해, 또 다른 하나의 전술을 병행하여 구사하였는데, 바로 수군을 전쟁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해양작전은, 보병을 동원하여 면과 선에서 한정된 작전을 펼 수밖에 없는 육지전과는 다른 몇 가지 특성이 있었는데, 첫째는 기동성(속도와 운반량)이고, 둘째는 잠행성(潛行性)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반전성(反轉性)인데, 이는 수군으로 하여금 원거리를 이동하여 적의 후방에 기습 상륙케함으로써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킬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륙국가의 군주답게 태왕은 강력한 기마군단과 수륙양면작전이라는 독특하고 유효적절한 군사작전을 펼쳤고, 농경, 유목, 해양문화 시스템이 결합된 전략을 구사하여 단순한 승리가 아닌, 정치적인 상황은 물론 국제질서의 변전(變轉)까지도 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공수 병진정책과 해양력

당시 농경민들은 수비를 목적으로, 유목민들은 공격을 목적으로, 해양민들은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성을 쌓았는데, 해양 국가들은 모두 그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성은 바로 이러한 성격 -수비거점이지만 동시에 전진거점- 을 지니고 있었고, 전략가인 태왕은 동아시아세계의 이러한 메커니즘을 잘 알고, 선대의 국가적인 경험도 풍부했으며, 성의 양면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태왕에게 성은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하는 공간이었다.

 

5. 경제 물류의 거점(hub) : 집산과 중개무역

 

고구려의 삶과 경제 / 경제영토의 확대와 물류거점의 확보 / 동아지중해 거점과 중계무역

태왕은 결과적으로 보면 경제정책에서도 성공한 군주였다. 그렇다고 해서 태왕을 단순하게 농업을 발전시킨 군주로, 혹은 일부 사람들의 오해대로 침략을 통한 약탈 경제를 영위한 군주로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경영과 관련하여 태왕이 펼친 경제정책을 2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는데, 하나는 경제영토의 확대이고, 다른 하나는 물류거점의 확보였다.

 

당시 전쟁의 경우 군사행위와 경제활동이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군대가 진출하고 점령하면 상인들이 뒤따르듯이, 영토가 넓혀지면 물자가 오고갔다. 즉 영토, 혹은 영역 그 자체가 경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태왕은 물류거점 확보를 목적으로 영토확장정책을 추진했는데, 크게 나누면 세 지역 -요동지역, 압록강 하구 일대, 경기만 일대- 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리고 태왕은 고구려를 동아지중해의 한가운데, 즉 거점으로 자리 잡게 하였는데, 산동반도에 세워진 남연에서 물소나 앵무새 등을 수입하기도 하였고, 북방의 말이나 모피 혹은 화살 등을 수출하기도 하였다. 결국 태왕은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경제 영토를 확대하고, 전략적인 3개 지구를 확보해서 물류거점으로서 해양로와 육상로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물류체계를 원(circle)으로 연결시켰으며, 중계로 역할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한 경제지리적인 위치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무역망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현실적으로 활발한 해양활동능력과 해상권의 장악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는데, 광개토태왕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6. 문명의 터전 IC : 융합과 재창조

 

제국화와 문화의 혼란 / 정체성 강화와 조선공동체의 부활 / 동아시아문명의 재창조와 IC역할론

태왕이 동서남북으로 벌인 정복활동은 제국의 건설과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자연환경과 혈연적으로 다른 종족들의 흡수과정이기도 했고, 문화 융합 활동이기도 했다. 참고로 고구려가 국제적인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내부를 위한 정책 -다양성을 확대하고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했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가능하면 다양성과 정체성에 모두 충실하면서도 세계국가 혹은 고유문명을 이룩할 수 있는 문화적인 힘과 역량을 갖추어야만 했다.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의 발전과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고 긍정적인 역할을 해야만 했다. 일종의 역할론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태왕시대는 힘과 논리와 이상을 지닌 독자적인 문명을 창조했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조화를 이루어 상생의 사회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문명과 공존할 뿐 아니라 다른 문화를 수용하고 융합하여 자기문명과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문화의 소통통로

태왕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정치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큰 질적인 변화 -북방과 한족 간에 본격적인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으며, 고구려 또한 이 변화와 혼란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간파- 가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였다. 때문에 그는 다문화적이고 다종족적인 신문화를 수용하여 보편성을 획득하면서도 정체성에 충실하여, 중국문명이나 북방문명과는 또 다른 동방문명을 창조하였고, 동아시아문명의 발전과 성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질성이 강한 동아시아 세계의 문명들이 공존하고, 상호 발전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을 제공하는 통로와 터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북방문화는 동방문명에 발전적으로 융합되지 못했고, 고구려 문화의 상실로 인한 빈 공간에도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동아시아는 중국문명을 중심으로 주변부의 군소문화로 재편되었고, 이러한 상태의 지속은 결국 아시아 문화의 정체성을 낳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과 결과는 고구려의 역할이 무엇이었고,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가를 역설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고구려의 이러한 가치와 역할은 우리의 지향모델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7. 고구려의 중핵조정역할이 지닌 21세기적 의미

 

21세기 한민족의 역할론

그러면 이러한 동아시아의 지중해적 질서와 성격 속에서 우리의 위치는 어떠하며,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가운데 하나는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내지 경제블록을 구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지정학적으로도, 두 강대국의 갈등과 충돌의 개연성이 많은 신질서의 편성과정에서, 통일한국은 우연스럽게도 중간역할을 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심코, 또 당연한 듯이 사용하는 한반도라는 용어와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한반도와 대륙의 일부를 차지했던 우리 영토는 지리적으로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로 이루어진 동아지중해의 중핵에 위치하고 있어, 고구려와 장보고 시대에는 주체적으로 거점 역할, 중핵 역할을 잘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이익을 얻었고, 또 중간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양 지역이 직접 충동하는 것을 막은 경험이 있었다.

 

이제는 연결과 협력의 시대이다. 남북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통일될 경우, 한반도야말로 대륙과 해양을 공히 활용하여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 전체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그리고 통일한국이 중요한 해로를 장악하고, 해양 조정력을 갖는다면, 우리가 교류의 주도권을 점하는 것은 물론, 각국 간의 해양 충돌 및 정치적 갈등을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통일한국이 중핵연결지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경우,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정치 군사적인 비중이 상승함은 물론, 경제적인 주도권도 넘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통일한국은 TCR(Trans China Railway), TSR(Trans Siberian Railway)과 해로를 한꺼번에 장악해 항선을 일원화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건설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경제적으로도 동아시아에서 하나뿐인 물류체계의 거점으로서 교통정리가 가능하고,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경제구조나 교역형태를 조정하는 역할까지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태왕과 장수대왕은 이와 유사한 경제정책을 실현한 바 있다.

 

또한 최근에 동아시아는 물론 아시아 사람들을 놀라게 한 한류현상에서 확인했듯이, 문화면에서도 우리는 핵심IC로서,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다.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 문화가 만나고, 자본주의 문화와 사회주의 문화가 만나고,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만나며, 유교, 선교 및 불교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만나고, 또 동아시아 정통 문화와 서구 문화가 만나는 접점이다. 이러한 다양하기도 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만나면서 공존을 모색하고 상생을 이룩한다면 동아시아 문명, 나아가 인류 문명이 지향하는 상태와 실현 방식에 대하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구려는 중핵에서 정치 외교적으로는 균형과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동아시아의 평화구도를 만들었고, 물류체계와 문화체계의 거점과 중계로 역할을 통해 강국이 되었다. 태왕은 자신의 꿈을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여 그 토대와 초석을 마련한 대정치가요, 경영자였다고 할 수 있다.

 

 

 

 

반응형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가 정체 - 플라톤  (0) 2020.04.13
구운몽 김만중  (0) 2020.04.13
관상 경영학  (0) 2020.04.13
과학으로 쓰는 긍정의 미래 - 랑가 요게슈바어  (0) 2020.04.13
공채형 인간  (0) 2020.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