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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제임스 처치워드 아틀란티스

by Casey,Riley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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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
제임스 처치워드

  잉카의 <잊혀진 도시> 마추피츠
  이 고대의 도시는 안데스 산맥의 가파른 산등성이에 건설되어 있다.
  왜 이런 고산지대에 도시를 지었으며 왜 갑자기 폐허로 변해버렸는가.
  (그림있음)

 

  까마득한 상공이 아니면 분간할 수 없는 도형. 나스카의 지상회화는 현대의
측량기구를 사용하더라도 수정할 여지가 없을 만큼 정확한 고대인의 솜씨다.
  (그림있음)

 

  (그림있음)
  지각의 대변동이 창조해낸 이과수 폭포의 위용. 다시 지각이 변동된다면 이 
폭포가 언젠가는 까마득한 산으로 변하고 말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림있음)
  빙하로 인해 파인 U 자형 골짜기는 조륙 운동으로 가라앉아 바닷물이 흘러 
들어와 있다. 가이랑게르 피요르드의 장관이다. 먼 훗날 이곳이 완전한 바다가 
되어버린다면...


  (그림있음)
  이집트를 지키는 성스러운 짐승 ㅅ크스.
  사막 한가운데 까마득한 과거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이 괴수야말로 불가사이한 
이집트 문명의 전부를 대표한다.


  (그림있음)
  1963년 아이슬란드 남쪽 바다 속에서 폭발한 서트세이 화산. 지구는 수시로 
변하고 있다. 용암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 바닷물이 끓고 있다.


  차 례
    1.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
  지상최초의 대문명
  고승원에 있는 수수께끼의 점토판
  나아칼 비문의 해독
  멕시코 석판의 표상
    2. 빛나는 태양의 제국
  아름다운 무우의도시
  무우왕실의 문장
  세계로 뻗어가는 식민선
    3. 무우대륙의 대함몰
  대륙밑에 있는 가스 체임버
  무우대륙 최후의 날
  각지에 남아있는 비극의 전설
    4. 태평양에 잠든 무우의 유적
  원시 식인으로의 환운
  흰 폴리네시아인의 수수께끼
  거인상이 잠자는 이이스터 섬
  태평양에 산재하는 무우의 유적
  전설과 신화의 섬들
    5. 아틀란티스 대륙과 지중해
  나폴레옹의이집트 원정
  피라밋의 동서남북
  파피러스의 (죽은 자의 책)
  아틀란티스 제국군
  애처로운 그리이스문자
  무우대륙으로부터 파생한 언어
    6. 북아메리카의 고대유적
  살아있던 공룡
  하바스파이 협곡의 암벽그림
  즈니족의 홍수 전설
  사라져간 수수께끼의 고대도시
    7. 중앙아메리카의 매몰된 도시
  고대 도시의 발굴
  작은 중국인의 수수께끼
  무우, 어머니의 나라여
  밀림속의 고대마야 문명
  흰 마야인의 전설
    8. 동양의 신비한 나라들
  하늘차와 불을 토하는 화염기
  나가제국의 향방
  알려지지 않는 위굴 대제국
  시베리아의 수골군
  나아칼 도서관의 점토판
    9. 무우대륙 최후의 날
  파괴되어 버린 대륙
  영광의 잔영을 찾아서
    10. 동방으로 뻗어나간 식민선
  마야로 불리우는 이주자들
  불가사의한 선주민족
    11. 유사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
  케투일족의 신대륙 발견
  태양이 물속으로 빠졌다
  지구에 산이 없었던 무렵
    12. 멕시코 석판의 신비
  남자와 여자는 왜 나뉘었는가?
  인간의시조(흰 남녀)
  (AUM)이란 무엇인가?
  고대의 공산 공영사회
  거룩한 멕시코 버드(새)
    13. 아마존해의 카라 제국
  2 만 5 천년 전의 옛 지도
  쿠스코 골짜기 새벽
  환상의 챙카제국
  마노아의 황금도시
  아름다운 내해 아마존
  식민근거지 이이스터섬
  큰 바다를 건너간 검은 식민단
    14. 아틀란티스대륙의 붕괴
  빛나는 오리하르콘의 나라
  새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
  대서양의 해저산맥
  축복받은섬들
    15. 서유럽의 원초를 더듬어 본다
  들소는 어디에서 왔는가?
  스칸디나비아로의 도정
  문명 사회에 끼인 원시
    16. 에게해의 선사민족
  함몰해버린 고대 아테네
  수도의 언덕이 말해주는 것
  바알벡 신전의 경이
    17. 나일강변의 여명
  동서식민단의 합류
  환상의 식민지 마이오우
  델타 모래밭의 개척자
  오실리스와 이시스
  최고의 신관 호루스
  고대이집트의 오케스트라
    18. 살아있는 무우의 후예
  황금의 얼굴이 말하는 비극
  수수께끼 민족인 일본의 조상
  아름다운 모국어 신하리이즈
  땅의 맨 끝에 있는 유적
  문명에로 귀환한 마오리족
    19. 사막에 묻힌 위글 대제국
  유사 이전의 대홍수
  물이 풍부한 고비평야
  나아칼 라이브러리
  동서로 넓어진 판도
  역자후기

    머리말

  이 책에 쓰여 있는 사건들은 모두 두 종류의 고대 비문판(타블레트)에
근거하고 있다. 그 하나는 나 자신이 몇십 년전에 인도에서 발견한 나아칼의
점토판이며, 또 하나는 월리엄 니이벤씨가 멕시코에서 발견한 2 천 5 백여 점의
석판이다.
  이 두 종류의 비문판은 모두가 무우 대륙의 성전 "거룩한 영감의 책"을
바탕으로 하여 기록된 것이다.
  나아칼의 점토판은 고대 나가인의 표상과 문자에 의해서 엮어져 있으며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어머니의 나라" 무우에서 쓰여져 버마를 거쳐 인도로
가져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년 전의 일이다.
  멕시코의 석판이 어디에서 기록되었었는 지는 의문이지만 북방의 고대
위글계의 표상과 문자가 쓰여지고 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이 무우대륙에서
쓰여지고 있었던 알파벳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멕시코 석판의 연대도 아주 오랜 옛날인 약 1만 2천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는데 (어머니의 나라)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들 석판에 의해서 내가 발견한 나아칼의 비문 가운데
특히 천지창조에 관한 기술에서 빠져 있는 부분의 (우주의 사대 원동력)의
발생과 그 활동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내가 동양에서 볼 수가 없었던 나아칼의 점토판은 "잃어버린 고리"
(밋싱정)처럼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자기 자신의
체험에 의해서 이들 비문판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을 보증하고 증명해 보고자
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약 50여 년의 귀한 세월을 소비하며 세계 각지를
싸돌아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중대한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시기에 이 지구상에 아주 크나큰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며, 그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 문명을 훨씬 능가하는
고도의 문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위대한 고대 문명이라 하여 경탄해 마지 않는 인도, 바빌로니아,
페르샤, 이집트, 유카탄 "마야문명의 중심지"등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문명의
흔적은 사실 그 대문명의 타다 남은 잔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수반하여 이해되었던 것은 인류 탄생의 땅,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일어났던 발상지는 나일의 강변도, 유우프라테스의 강 유역도, 미국도,
오리엔트의 어떤 고장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씀에 있어서 대영박물관, 호놀룰루의 민속박물관, 아메리칸
위클리지, 로스앤젤리스의 E. A. 솔즈베리 대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새뮤얼 하버트 씨, 텍사스주 오스틴의 윌리암 니이벤씨 등의 협조에 뜨거운
감사를 보내는 바이다.
  또 인도 및 티베트의 몇 군데 승원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그 쪽의
희망에 따라 사원의 이름, 지명 등은 일체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제임스 처치워드 기록-

      1.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

    지상 최초의 대문명

  아득한 옛날, 태평양상에 "무우"라는 대륙이 있었다. 광대한 대륙으로
동쪽 끝은 현재의 하와이 제도, 서쪽 끝은 마리아나 군도, 남쪽 끝은
포나페, 피이지, 통가, 쿠크의 여러 섬을 연결하는 선, 최동남단은
이이스터 섬에 이르는 지역을 점하고 있었다. 동서의 연장 8 천 킬로미터,
남북 5 천 킬로미터에 걸쳐 태평양 면적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이 대륙에 인류가 최초로 탄생한 것은 적어도 5 만 년 이상도 전 일이다.
우수한 민족으로 무우 대륙에는 아주 높은 문화가 이룩되어 있었다
  인구는 약 6 천 4 백만 명, 주민은 열 종류의 민족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피부 색깔, 머리 색깔, 눈의 빛깔은 여러 가지였지만 인류에 따른 차별이란
전혀 없고 한 사람의 제왕, 하나의 정부를 중심으로 뭉쳐져 있었다. 그리고
국민은 한결같이 천지를 만들어 주신 창조주를 공경하고 있었다.
  무우 제국의 국민은 우수한 학문과 문화를 가졌고 특히 건축과 항해술에
뛰어나 있었다. 진취적인 기질이 풍부하여 세계의 바다를 항해하고 육지를
답파하여 서로는 아시아 대륙, 유럽, 이집트, 동으로는 북 아메리카 중앙,
남 아메리카의 북부에까지 식민지를 확장해 갔다.
  대륙은 좁은 해협에 의해서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완만한 동산외에는
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일곱개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단단하게 부석을 깔아 놓은 널따란 도로가 도시에서 도시로,
고을에서 고을로, 마을에서 마을로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큰 강의 어구에는 항구가 있었다.
  세계 각지로 향하여 떠나가는 배, 또 들어오는 배들을 통해 세계의
 각지로부터 진귀한 물건이나 산물들이 모여들고 또 흩어져 갔다. 항만이나
수를 따라 상가들이 늘어서고 상인들의 외침 소리, 신호로 울려대는
징소리나 북소리 등으로 밤이나 낮이나 떠들썩했다.
  유복한 사람들은 보석으로 장식된 의상을 몸에 감고 수많은 종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화사한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바다 위를 불어 스쳐가는 밤이면 반짝반짝 화사하게 차려
입은 젊은 남녀들이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하여 아름다운 노래
소리며 웃음 소리가 화려하게 수면을 흘러갔다.
  전원도 역시 한가로왔다.
  눈부신 태양의 햇살은 쨍쨍 내리쏟아져 해변의 야자나무는 강의
하구로부터 내륙에 이르기까지 강변을 아름다운 푸르름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밋밋한 동산과 동산 사이의 골짜기에서 솟아나오는 맑은 시냇물은
이윽고 강이 되어 울창한 열대식물의 숲 사이를 누비면서 천천히 널따란
평야를 가로질러 흘러갔다.
  나무의 뿌리, 풀잎, 수액, 꽃, 과실-향료, 조미료의 원료나 신선한
음식물은 모두가 그런 것들로부터 취할 수가 있었다. 풍부한 물, 온화한
기후, 비옥한 토지는 대부분 재배다운 일을 하지 않고도 자연의 혜택을
풍요로히 누릴 수가 있었다.
  물가에는 연꽃이 깨끗하게 흰꽃을 피우고, 시원한 나무 그늘에는 갖가지
색깔로 물든 날개를 흐느적거리며 큰 나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나무가지
사이를 뚫고 스며오는 햇살을 가로막으면서 벌새들이 노닐고 있었다.
풀숲에서 우는 벌레들,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들에게 지지
않을세라 매미들이 자기 인생의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원시의 모습을 간직한 어슴프레한 숲 속에는 마스토돈(신세대 제 3 기에
성했던 대형 코끼리의 일종) 의 무리가 서성이며 큰 귀를 부채처럼 움직여
귀찮은 파리들을 쫓고 있었다.
  태양의 상징을 기치로 내세우고 세계를 그 세력하에 두었던 대제국 무우,
그 번영은 흔들림이 없어 어떤 자라도 그 왕좌를 넘겨다 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국민은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이, 가장 무서워해야
할 적이 그 발 앞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땅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땅울림은 점차적으로
심해졌고 사람들이 불안한 눈초리를 서로 교환할 사이도 없이 발밑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하여 땅이 찢어지며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쳐 올라와 하늘을
새빨갛게 뒤덮었다.
  지진과 분화는 특히 대륙의 남부 쪽에 격심했다. 지진에 수반하여 큰 해일이
일어나 남쪽에 있던 도시들 대부분이 바닷속으로 삼켜 들어가 버렸다.
분화구에서는 누굴누굴하게 녹은 용암이 흘러나왔다.
  경사가 없는 지대였으므로 용암은 이윽고 한 군데로 엉켜들어 원추형으로
겹쳐 쌓여져 이상한 모양의 바위산이 되었다.
  지진도 분화도 멎었다. 무우 대륙의 위에 정적이 찾아왔다. 주민들이
올려다 보는 분화의 자국으로부터는 엷은 하얀 연기가 솟아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무사함을 기뻐하며 신의 은혜를 찬양했다. 그 폐허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심으로 무언가를 비는 여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천재에 의한 피해는 컸었지만 태양 제국의 국민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해일로 인한 자갈과 진흙 속에서 다시 석조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에 도시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며 산업과 문화도 부활했다.
  평화로운 나날들이 계속되고 두려웠던 재해의 기억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늙은이들만이 지금도 우뚝 솟아 있는 화성암의 바위산을 가리키고는
그 소름이 끼쳤던 날의 추억을 이야기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늙은이들도 죽어가고
재해의 체험자는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무우 제국의 국민들 거의 전부가 완전히 재해의 사실을 잊어버릴 무렵, 그
기분나쁜 땅울림이 다시 발밑에서 솟아 올라왔다.
  격심한 연속 지진이 대지를 파도 위의 나뭇잎처럼 흔들어댔다. 웅장한 건물들이
모래탑처럼 허물어지고 기념비나 동상들이 뒤집혀졌다. 도시는 잡동사니들의 퇴적이
되고 사상자들의 신음소리로 가득찼다.
  숲 속에서는 들짐승들이 떼로 뛰쳐나와 뒤흔들리는 대지를 비명을 지르면서 미친 듯이
싸돌아 다녔다.
  대지는 크게 들려 올라갔다가 또 다시 쿵하고 떨어져 들어갔다. 이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자 무우 대륙 전체는 빈사의 거상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대지는 여기저기에서
금이 가고 어림잡아 5킬로미터는 됨직한 큰 불기둥이 하늘 중천에 높이 솟아올랐다
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두텁게 깔리기 시작했고 빨갛게 작열한 용암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면서 불화살처럼 날아가고 날아오고 하였다.
  그 때 땅울림과는 다른 음향이 사람들의 귀를 때렸다. 큰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였다.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에 허물어져 버린 폐허에 남아 있는 신전의 큰 돌기둥이나 궁전의
탑을 한꺼번에 삼켜 버릴 듯한 하얀 파도의 꼭대기가 보였다. 바닷물은 우르릉 하고
내륙까지 밀어닥쳐 왔다. 호수나 늪이나 강물도 범람하여 이것들과 합류했다. 초원과
숲, 허물어져 버린 가로를 격류가 쓸면서 밀려 닥쳐와 소용돌이치며 부딪쳤다.
아비규환은 분화의 폭발음에 완전히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까지 이 대륙의 인구는 이미 태반이 없어졌다. 살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최후의
피난처를 찾아 무너지다 남은 신전이나 왕궁의 탑으로 모여들었다. 도망쳐 다니는
남녀의 의상에 붙은 보석들이 덧없이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무우 제국의 제왕이자 최고의 제사장이기도
한 현자(라 무우)의 존재였다. 하늘에 계신 신에게 부탁하여 이 파국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자, 무우 밖에는 없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무우여, 우리들을 구해 주소서!"
  수평선 저 너머로 잠기는 태양은 검은 연기 속을 뚫고 분노를 머금은 빨간 불덩이와도
같이 보였다. 해가 넘어가자 어둠이 깔렸다. 이따금씩 생각난 듯이 불기둥이 땅 밑에서
솟아올라와 무너지다 남은 대리석의 벽이나 돌기둥에 붉게 비췄다.
  그 밤 사이에 무우 대륙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대지는
가루처럼 쪼개져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잠겨 들어갔다. 밑으로, 밑으로... 지옥의
입구멍 속으로, 거대한 밑 없는 불도가니 속으로 대륙이 불길에 휩싸여 잠겨 들어가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무서운 힘이 파괴에 힘을 더해 주었다. 실로 8천만 제곱 킬로미터라는
거대한 함몰의 구멍을 향하여 사방 팔방으로부터 바닷물이 큰 물결을
일으키면서 쇄도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잠긴 대륙의 중심부에서 맞부딪쳐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리하여 인간이 이 지구상에 쌓아 올린 최초이자 최대의 문명은 하룻밤 사이에
붕괴하고 말았다. 지금부터 약 1만 2천년 전의 일이다. 다음은 끝없는 망망대해 뿐.흐려진
바닷물에는 대문명의 꿈의 잔영과도 같이 하얀 물거품만이 여기저기 떠다니고 있었다. 그
물거품 속에서 새로운 오늘의 문명이 태어났던 것이다.

    고승원에 있는 수수께기의 점토판

  에덴동산-그것은 도대체 지구상의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현재로서는 에덴동산이 아시아의 서부, 티그리스강과 유우프라테스강의 두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 소위 인류 문명의 발상지에 있었다고 하는 설이 아주
많다. 그런데 과연 옳은 것일까?
  에덴동산-그것이 인류가 처음 이 지상에 탄생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단언한다. 그것은 태평양상의 한 대륙에 있었다고-그리고
구약성경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7일 밤낮의 창조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처럼 나일강이나 유우프라테스강 연안의 주민들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금은 없어진 그 대륙의 주민들 사이에서 생겨나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는 수십 년 전의 추억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무렵(1868)영국 육군의 군인이었던 나는 인도 주둔군에 배속되어 인도에
있었는데 당시 인도의 중부는 대기근을 만나고 있었다. 구호반이 편성되고 나는
그 대장이 되어 피해지로 향했다.
  그 고장에 힌두교의 낡은 사원이 있었다. 사원의 주인인 리시는 우리의 구호
활동에 적극 협조해 주었다. 나는 이 승려와 점점 친해져 갔다. 어느 날 틈을
보아 내가 고대의 부조문자의 해독에 매달려 있자니 그 승려는 매우 친철하게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의 고대 문화에 대한 학식의 깊이에 경탄했다.
  나는 이 고승에게 초보적인 것을 배우면서 더욱 난해한 고대 문자와 싸우기
시작했다. 나와 그는 친구이자 또 사제지간과도 같은 감정이 생겨났다.
  어느날 고승은 멈칫멈칫하면서도 나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 사원에는 굴로 된 비밀 창고가 있소. 거기에 낡은 점토판이 많이 저장되어
있는데 나도 아직 그걸 본 적은 없다오.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계율이 있어서요. 그 점토판에 새겨져 있는 비문은 이 지구에 최초로
나타난 인간들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인가 본데"
  이 지구에 최초로 나타난 인간-이 말이 나의 뒤통수를 쳤다. 나는 그것을 꼭
보여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승은 원주인 자신이 그 계율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아주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귀중한 것을 굴 속에다 처박아 내버려 두어 훼손이라도 되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보존 상태를 개선하는건 우리의 의무입니다."
고승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념하지 않고 기회있을 때마다 부탁을
했다. 마침내는 끈기가 이기고 말았다. 반 년쯤 지난 어느 날 밤, 내가 고승의
부름을 받고 나가보니 탁자 위에 보자기가 깔리고 그 위에 아주 오랜 년대가
지난 것으로 생각되는 점토판이 두 개 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점토를 햇빛 아래서 말려 굳힌 것인 듯 두터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 먼지를 닦아 내자 그 아래는 이상스런 도형과, 기호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고승은 그것을 "나아칼" 즉 "거룩한 형제"로 불리우며 '본국'으로부터 각
식민지로 포교를 위해 파견된 선교사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특수한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비문은 아마 그들의 모국에서 쓰여진 것에 틀림없다고도 말했다.
본국? 모국?... 그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 것일까? 고승은 그 때야
비로소 전인류의 어머니 나라-지금은 사라져 없어진 대륙 "무우"의 이름을
말했던 것이다.
  점토판에 새겨져 있던 비문은 그 무우 대륙의 역사를 엮은 것인 듯 했지만 이
두장의 점토판만으로는 아무래도 미흡했다. 결국 고승은 나를 굴 속으로
안내하여 점토판의 실체를 보여 주었다.
  습기가 많은 지하 굴창고에서 그것들은 몹시 손상되어 금이 가고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나는 그것들을 시멘트로 정중히 보수하여 박지로 싸고 또 면포로
외장을 하여 다시 보존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본 고승은 나에게 아주 감사를 하며,
  "당신이 말이 옳았소. 분명 거룩한 점토판의 보존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하늘의
음성이었음에 틀림없소."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나는 최초의 인류 문자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의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고승에게 물어보았더니,
  "나도 모르죠. 그러나 알 수 있는 방법은 있소."라고 말했다.
  "그 방법이란?"
  "두 사람의 지혜를 모아 끈기있게 풀어 가야죠. 그 이외의 방법은 없소."
  점토판의 전부를 통해 기술의 사용법의 공통점으로써 어림을 잡는다는, 암호
해독의 빈도수 검출과 비슷한 것인데 예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고승의 고대 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뼈를
깎는 듯한 2년간의 노력끝에 이윽고 점토판의 해독에 성공했다.
  수확은 컸다. 낡은 비문은 무우 대륙의 성정인 "거룩한 영감의 글"의 복각으로
이 지구가 생겼을 때의 모양과 인류의 출현, 그리고 인류가 최초에 나타난 고장인
무우 대륙에 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들 점토판은 인도의 7개
성도가 몰락할 때에 모아져 사원에 보존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다른 사원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나는 인도 전역의
사원들을 돌아보았지만 어딜 가나 냉담한 반응 뿐이었다. 계율이 엄격했기
때문인지, 혹은 지하에 보존된 채로 잊혀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버어마의
오래된 사원을 방문했던 때 등은 도둑놈 취급을 받아 곤욕을 치룰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 일련의 점토판으로부터 귀중한 테이터를 얻은 바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그리이스, 바빌로니아, 페류샤, 이집트 인도 등의 문명은 무우
제국의 그것과 비교하면 훨씬 새로운 자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연구를 계속함에 따라 이 잃어버린 대륙은 현재 하와이의 북부 지방부터
남쪽으로는 피지이제도, 이이스터 섬의 근방까지 널려 있었고, 의심할 것도 없이
인류의 발생지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아름다운 국토에 살고 있던 주민은
약 6천 4백만명. 지구상의 각지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1만
2천년 전 대지진과 함몰로 인해서 물과 물의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져 버렸던
것이라고 추측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비문에 엮어진 무우 대륙 개벽의 설화는 구약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설화와 아주 흡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즉 무우 대륙의 역사는
식민지인 인도에 전해졌고, 또 이집트로, 그리고 시나이 반도로 전해졌다.
시나이의 사원에서 모세는 그것을 베껴 썼다. 그리고 나서 8백년 후, 에스라가
다시 고쳐 썼다. 그것이 성경이다. 따라서 원전은 하나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칼 비문의 해독

  나아칼의 점토판은 항목별로 시리즈로 되어 있어 한 항목에 관해 짧은 것이면
두 개, 긴 것이면 열 일곱 개에 걸쳐 있다. 그리고 그중 다른 것보다 2배나 큰
점토판이 두 개 있고 이것은 비문의 기호나 상형문자의 의미를 풀기 위한 길잡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점토판을 시리즈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가 있었다.
  1. 천지창조와 인류 탄생.
  2. 지하의 불(가스)에 의한 뭍(육지)의 융기와 그 후의 상황.
  3. 전우주에 존재하는 위대한 힘의 근원과 그 작용.
  4. 지구가 가진 위대한 원동력의 근원과 그 작용.
  5. 지구가 가진 원자력의 근원과 그 작용.
  6. 생명을 창조하고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의 근원과 그 작용.
  7. 생명의 근원, 생명의 본질, 지구의 역사에 수반하는 그 변화.
  8. 인류의 창조, 인류의 본질, 다른 모든 생물과의 차이.
  9. 지구상에서의 인류의 출현, 그 최초의 고장인 "인류의 어머니나라"에 관해서.
이것은 아마 무우 대륙 역사의 최초의 일부분으로 여기에 이어지는 긴 시리즈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분류를 끝마치고 우리들은 마침내 해독에 들어갔는데 이 나아칼의 비문에
새겨져 있는 기호는 상형문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회화적이고 복잡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것을 심볼(표상)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책머리에 있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련의
장식문자를 소개해 두고자 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점은 무우 대륙 초기 역사의
다이제스트라고 말해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각 번호에 해당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음.)
  1a. 가로의 직선은 우주를 나타낸다.
  1b. 공간을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 헤매고 다닌다. 주위의 원은 우주이다.
  2. 가로의 곡선은 지구상의 물을 나타낸다.
  3. 원은 태양. 태양은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다.
  4. 세로의 직선은 지구상의 광력에 미치는 태양의 힘. 그것은 지구에 활동력과
밝음을 준다.
  5. 세로의 곡선은 지구의 열력에 미치는 태양의 힘. 이 두가지가 합해져서
지구의 열력이 활동을 시작한다.
  6a. 세로의 점선은 지구의 생명력에 미치는 태양의 힘.
  6b. 물속에 있는 우주란 속의 지구 생명력에 태양의 힘이 작용하여 생명을
가져오려고 한다.
  6c. 흙 속에 있는 우주란 속 지구의 생명력에 태양의 힘이 작용하여 그것을
부화시키려 하고 있다.
  7. 이 기하학적 기호는 고대인들에 의해서 Mu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었다. 종교
문자로서는 M으로 쓰여지고 Moo, Ma, "모", "육", "평원", "국토", "입"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8. Tau는 부활을 의미한다. 남십자의 성좌를 본 뜬 것으로서 "낳는다"
"나타난다"는 등의 의미도 있다.
  9. 연꽃은 무우를 상징하는 꽃이다. 지상에 핀 최초의 꽃이었다는 전설에서
어머니인 나라의 상징으로 되었던 것이다.
  10. 작은 원이 3개. 3은 무우를 상징하는 수. 이 대륙은 해협에 따라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1. 도약하려고 하는 사슴--Keh는 나아칼의 비문에 종 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지구 최초의 인간의 상징이다. 인류는 지구의 창조가 완성되자 처음부터 본래의
모습으로 이 지상에 튀어 나왔다. 즉 자연법칙에 의한 진화를 걸어온 것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특수한 창조물이다. 그것을 사슴의 도약력에 비교한 것.
  12. 불을 나타낸다.
  13. 산의 융기와 가스대(화산대)의 모양을 나타낸다. 이집트인들의 불의
상징이 여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14. 아주 흥미있는 것인데, 무우 대륙의 형성과 인류의 발생을 이야기한다.
a는 연꽃, b는 3개의 잎, c는 M,즉 무우를 상징하는 꽃, 수, 문자이다. d의 Tau는
"부활" "탄생"을 의미하고 그 머리는 M이기도 하다. 가로의 곡선은 물로, 즉 무우
대륙이 물 속으로부터 출현하여 그 위에 인간이 뛰어 오르려 하고 있다.
  나아칼 점토판의 비문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되고 있다.
  "우주는 태초에 영 그 자체였다. 생명도 없고 소리도 없고 다만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공허와 흑암 뿐이었다. 흑암은 깊었고, 지극히 높으신
영, 위대한 힘 그 자체, 창조신이신 일곱 머리의 뱀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은
세계를 만들고자 하여 세계를 만들었다. 지구를 만들고 그 위에 생물을 지으셨다."
  "일곱 머리의 뱀의 일곱 개의 뛰어난 두뇌는 일곱 가지 명령을 내렸다. 첫째
명령, 형체도 없이 공간에 있는 가스여, 한군데로 모이라--가스는 한데 모아지고
소용돌이치듯 뭉쳐졌다. 둘째 명령, 가스는 응고하여 지구가 되라--가스는
엉켜져 체적이 있는 물질로 되었다. 세째 명령, 외부의 가스는 발산하여 물과
대기가 되라--가스는 발산하여 물이 되었다. 물이 안된 가스는 대기가 되었다.
태양의 방사선과 대기중의 방사선이 합해져 빛이 생겨났다. 네째 명령, 땅 속의
가스는 물위로 육지를 들어 올리라--땅 속의 불은 수면 위로 육지를 들어 올렸다.
다섯째 명령, 물 속에 생명이 생겨나라--태양의 방사선은 물 속의 진흙탕 속에서
지구의 방사선과 만나 진흙의 분자로 우주란(생명의 배아)을 만들었다.
우주란으로부터 명령대로의 생명이 생겨 나왔다. 여섯째 명령, 육지에 생명이
생겨나라--태양의 방사선은 육지의 흙 속에서 지구의 방사선과 만나 우주란을
만들었다. 우주란으로부터 명령대로 생명이 생겨났다. 모든 것이 만들어진 다음에
제7의 명령이 내려졌다. "신들의 모습을 본따서 인간을 만들라. 인간에게 지구를
지배하는 힘을 주어라"--그리하여 나라야나(일곱 머리의 뱀)는 인간을 만들고
그 체내에 불멸의 영혼을 넣음으로써 인간은 나라야나와 같은 지혜의 힘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것으로 창조는 완성했다.
  이 일곱 가지 명령이라는 것은 일곱 시기를 보여주는 것에 틀림없다. 그 단위가
하루인지 1년인지, 혹은 또 1백만 년, 1천만 년 인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7일 밤낮으로 표현하고 있다.

    멕시코 석판의 표상

  나아칼의 비문의 발견으로 무우 대륙의 존재에 매우 흥미를 갖게 된 나는
그로부터 세계 각지를 돌며 각각의 고대문화나 건설과 나아칼 비문의 조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나아칼의 비문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아주 흥미깊은
고대의 석판을 볼 수가 있었다.
  멕시코의 광물학자 윌리엄 니 이벤씨가 모은 멕시코 고대 민족의 석판은 총수
2천 6백여 개에 달하는데 흥미를 끈 것은 No.1231이라고 번호가 붙여진 석판이었다.
"신성한 4"--그것은 나아칼의 비문에 따르면 창조신 자신의 명령을 의미하여
그것에 의해서 혼란한 세계에 처음으로 우주의 법칙과 질서가 생겨났다고 한다.
천지창조의 근본 개념이 "신성한 4"로 대표되고 있다. 석판 No.1231에 새겨진
심볼은 분명히 이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각 번호에 해당하는 그림있음)
  1. 이 원은 태양 Ra를 그린 것. 창조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2. 어머니의 나라 무우의 알파벳으로 H를 나타내는 종교문자. 종교 문자에는
반드시 상징적인 의미를 수반하고 있어 H는 "신성한 4"를 나타낸다.
"신성한 4"는 창조주 속에 있어 그의 입으로부터 "힘"으로 되어 토해져 나온다.
즉 "네 가지의 위대한 원동력"은 창조주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나타낸다.
고대인은 이 사실을 "신의 욕구" "신의 명령"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3. 힘을 상징하는 것. 선단으로 감에 따라 구부러져 있는 것은 힘의 작용 방향을
가리킨다. 즉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힘이 작용하고 있다.
  4. "네 가지 힘"은 각각 화살촉, 또는 창의 끝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활동력의
상징인데 힘은 끊임없이 언제나 일정한 방향,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계속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5. 이 모양은 기하학자를 나타낸다. "네 가지 힘"의 하나하나 속에 기하학자가
있다. 그들은 창조주 자신과 연관되어 있는 것도 나타내고 있다.
  6. 네 가지 힘이 교차하여 서에서 동으로 향하여 움직이고 있어 그 선단이 그리는
원은 우주이다. 우주 만물의 움직임을 네 가지 힘이 지배하고, 만물은 서에서
동으로 향하여 회전궤도를 그리고 있다. 그 중심에 전능하신 신이 존재한다.
만물은 그 의지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니이벤씨의 2천 6백여 점의 석판의 콜렉션 가운데 무려 천여 점이 이 네 가지의
원동력의 작용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미 깨달았으리라 생각되지만 이 모양에서
"ㄱ"자 모양으로 왼쪽으로 구부리면 불교의 만자, 오른쪽으로 구부리면 나찌스의
스와스티카, 똑바로 펴면 기독교의 십자가가 된다.
  석판 No.988은 "위대한 자기 원동력"이 전 우주에 존재하는 것을 나타낸다.
우주는 두 개의 선에 의한 원주로써 나타냈으며 가운데 있는 원이 창조신이다.
우주 안에 있는 곡선은 서에서 동으로 향하는 만물에 의한 규칙적 회전 현상. 그
방향은 열쇠 모양으로 나와 있는 두 개의 심볼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ㄱ"자 모양은 조물주--건축자. 얼마 후에는 목수를 나타내는 부첩이
되기도 했다.
  석판 No.339는 얼마나 호감이 가는 모양인가. 고대인의 참으로 근사한 예술적
표현력이 여기에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나비가 신의 뜻을 받아 우주에 질서와
법칙을 만들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타원형은 한없는 공간--곧 우주를 나타낸다. 나비의 머리는 원과 네 개의
흑점으로 되어 있다. 원은 창조주, 검은 네 개의 점은 즉 "신성한 4"를 나타낸다.
한 개의 원과 네 개의 점, 4 플러스 1은 5이다.  5는 완전한 신성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머리로 부터 돌출해 있는 두 개의 촉각이 질서와 법칙이다. 날개에서 볼 수
있는 다섯 개의 줄은 "완전한 신성", 네 개의 공간은 "신성한 4"이다.
우주를 가로질러 드리워져 있는 것은 혀이다. 혀는 말, 명령을 의미한다.
전우주에 질서와 법칙을 만들라고 한 신의 명령을 나비가 포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만 될 점은 어머니의 나라에서 "거룩한 영감의 글"
원전으로부터 직접 베낀 나아칼의 비문은 점토판에 한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멕시코와 무우 대륙의 관계에 관해서는 후에 기술하겠지만 멕시코의 석판은
나아칼의 점토판보다 적어도 1 만년쯤 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하면 이것이 어디까지 원전에 충실한가, 그 점에 관해서는
의문이다. 후대의 성직자가 그 시대의 포교에 적합하도록 손질을 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류 탄생의 이야기는 나아칼의 비문에서도 나오는데 니이벤씨의 석판
No.1584에는 그것이 더욱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no.1584 그림있음)
  인간의 머리, 그 눈은 잠자고 있다.-- 눈동자가 없는, 즉 볼 수 없는 눈이다.
고대인은 영혼의 불멸을 믿어 죽음은 일시적으로 수면 상태라고 생각했다. 머리의
양쪽으로부터 튀어나와 있는 것은 '힘'으로써 인간에게 지구를 지배할 힘이
주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서 나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지혜의
힘이라는 뜻이다. 그 밑에 있는 원은 창조주로 인간이 창조주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며, 그 지혜의 힘도 창조주께서 나누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동체는 두 개의 달갈형이 겹쳐져 있는 데 위의 알로부터 양쪽으로 힘이
방출되고 있다. 아래 있는 알로부터는 또한 좌우로 4개의 알이 생겨 나오려
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힘에서 다시 나누어진 힘이 아래에 새로 생겨난 알에
활력을 주고 있다. 위의 알은 남성, 아래의 알은 여성으로 인간이 양친으로부터
아이에게로 점차적으로 자손을 불려 나가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래쪽에 가위와 같은 모양을 한 것이 있는 데 이것은 힘이 두 다리로 나누어진
것으로 그 사이에 끼어진 것은 두 갈래로 찢겨져 버린다.
  이상을 해독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최초의 인간은 남성 양성을 갖추고 태어났다. 그는 잠자고 있는 사이에
두 개로 나누어 떨어져 둘이 되었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이다. 그 아래로 남자와
여자에 의해 생식이 이루어지게 되어 전세계의 인간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뭏든 무우 대륙이야말로 인류 탄생의 땅이며 세계의 각지에 산재하는 우주
개벽의 전설, 인류 탄생의 설화는 모두 이 대륙의 성전 "거룩한 영감의 글"을
모태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인류 탄생의 땅
"에덴동산"의 무우 대륙은 문자대로 대양의 물거품으로 사라져 가 버렸던 것이다.
  옛 기록에 사용되고 있는 그림문자는 모두 무우 대륙의 심볼에서 나온 것이다.
  (각 문항에 관계된 그림있음)
  A. 마야의 장식문자로 '서방의 나라들'무우 대륙의 함몰을 말해주고 있다.
  1. 세 개의 돌기가 있는 이 글자는 무우 대륙을 상징하는 숫자 3을 나타낸다.
  2. 세 개의 돌기가 있는 왕관은 태양의 제국, 무우의 황제의 관이다.
  3. 광선이 없는 태양, 무우 제국에 다시금 빛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다.
  4. 무우 제국이 침몰하고 그 끝부분만이 약간 나타나 있다.
  5. 나락, 깊은 함정, 연못 등을 나타낸다.
  6. 무우 본토와 함께 잠겨버린 두 개의 육지를 의미한다.
  (해독) "태양의 제국 무우는 나락으로 잠겨버렸다. 지금은 암흑의 세계에
갇혀 두 번 다시 빛이 비칠 수는 없다. 다른 두 개의 육지도 본토와 함께 사라져
갔다. 무우 제국의 왕관은 이제 전세계를 지배할 수가 없다."
  이 그림문자의 모양 자체가 깊은 나락을 본 뜬 것이다.
  B. "무우, 서방의 나라들"이라고 읽어지는 종교 문자.
  C. "어머니라는 나라"를 상징하는 수인 3을 나타낸다.
  D. "어머니라는 나라"의 알파벳 M으로 무우의 국토를 나타내는 도형이기도 하다.
  E. 세 개의 돌기가 있는 이 모양은 세 개의 육지로 된 무우 대륙을 나타낸다.
  F. 무우 제국이 함몰된 후 이 모양으로 상징되어지게 되었다.
  G. 위와 같음. 때에 따라서는 이 두 가지가 사용되었다.
  H. 무우를 상징하는 꽃, 연꽃을 도안화 한 것.
  I. 서방의 나라들의 함몰을 의미하는 마야의 장식문자.
  K. 이것도 무우를 상징하는 연꽃.
  L. 말라 시든 연꽃, 사라진 무우 제국의 상징.
  M. 장식 등에 사용된 연꽃의 봉오리.
  N. 쿠이의 나라(인류 탄생의 땅)의 함몰을 의미하는 마야의 장식 문자.
  O. 쿠이의 나라라고 읽어지는 종교 문자.
  P. 무우 대륙의 함몰을 나타내는 이집트의 장식문자.
  소티카로의 피라밋은 상부의 코르니스(차양)와 하부로 나뉘어 무우 대륙의
최후를 말해 주고 있다.
  (상부에 그림있음)
  1. 이 장방형은 무우를 나타낸다. 그것이 횡전하고 있다. 옆으로 나와 있는 돌기는
무우 본토에 속하는 두 개의 육지를 나타내고 그 때문에 무우 대륙은 서방의
나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불리웠다.
  2. 대륙의 밑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산맥.
  3. 신의 뜻으로 움직이는 우주의 4대 원동력.
  4. 화살촉 또는 창의 날. 활동 중인 원동력을 나타낸다. 선이 몇 개나 있는 것은
힘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5. 세 부분으로 나뉜다. a.무우를 나타내는 표상 M. b.그것을 받쳐 주는 네 개의
기둥. c. 기둥을 넘어뜨려 무우 대륙을 가라앉힌 힘.
  6. 인간의 모습. 인류가 대륙과 운명을 함께 한 것을 나타낸다.
  (번호에 해당하는 그림있음)
  1a. 뱀은 물의 심볼이다. U자형으로 몸을 비틀고 있다. U는 심연을 상징한다.
따라서 물의 심연이다.
  1b. 뱀의 눈은 감기어져 있다. 수면과 휴식을 나타낸다. 물은 스스로 수위에 있을
때는 평정하다.
  2. 3은 무우를 상징하는 숫자.
  3. 이것도 서방의 나라들을 나타내는 상징의 하나. 3개의 테두리 중에 2개는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다. 서방의 나라들은 잠겼다는 뜻.
  4. 뱀의 꼬리가 안쪽으로 감아, 인간의 모습을 그 안에 감아 넣는 형태로 되어
있다. 주민들이 땅과 함께 잠긴 것을 말해 준다.
  이 피라밋(멕시코 소티카로)은 많은 주민들과 함께 바다 밑에 잠긴 어머니라는 나라를
추도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멕시코 시티의 남서 96킬로미터인 곳에
있어 이집트의 가장 오랜 피라밋보다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 빛나는 태양의 제국

    아름다운 무우의 도시

  인류의 어머니라는 나라, 무우 대륙의 멸망만큼 기괴한 것은 없다. 태평양상의
대륙에 꽃핀 백인종에 의한 대문명은 고작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가 버렸던
것이다. 2--30년 전까지는 그런 대륙의 존재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일소에
붙이는 과학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세계 각지로부터 무우 대륙에 관한
기록물들이 차례차례 발견되어 비교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그 실제성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무우 대륙의 존재를 믿는 주요한 이유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싶다.
  첫째, 인도의 고찰에서 나아칼의 점토판을 발견한 것. 그것에 의해서 나아칼은
태평양의 한 가운데에 있는 어머니인 나라 무우로부터 전해져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 점토판이 무우 대륙의 존재에 대한 나의 눈을 뜨게 하여 내가 세계
각지를 돌며 자료수집에 몰두하게 되었던 것은 앞에 말한 대로이다.
  둘째, 힌두교의 성전 "라마야나"에 나아칼의 이야기를 "동방의 미지의 땅에서
버어마로 온 것"이라고 되어 있다. 동방이란 태평양을 가리키고 있다. 현재
대영박물관 소장의 "토로아노 고사본"은 유카탄 반도의 고대 마야족에 의해
기록된 옛 기록인데, 이 가운데도 무우 대륙에 관한 기술이 있어 인도, 버어마,
이집트에 있는 옛 기록과 똑같은 모양의 심볼을 무우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마찬가지 마야의 "코르테시아누스 고사본", 티베트의 "라사기록"
이집트, 그리이스, 중앙 아메리카, 멕시코 등지의 수 많은 옛 기록, 합중국 서부
지방의 여러 주의 암굴 등에 새겨져 있는 기록 등에도 무우 대륙과 관계된 것이 보인다.
  세째, 현존하는 유적이나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심볼 등으로부터 무우 대륙의
위치를 추정할 수가 있다. 이이스터, 망가이어, 통가타브, 포타페, 라드로오누,
마리아나 등 남태평양의 섬들에는 무우 대륙의 옛날을 숨기고 있는 온갖 유적이
지금도 남겨져 있다.
  또 유카탄 반도 우슈말의 사원 폐허에는 "서방의 나라,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새겨진 비문을 읽어볼 수가 있고, 멕시코 시티의 남서에 있는
피라밋은 그 비문에 의해서 어머니의 나라의 붕괴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네째, 이집트, 버어마, 인도, 일본, 중국, 남태평양 제도,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인디안들 사이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의 습관, 심볼
등에 공통성이 있으며 그것들이 동일한 고대 문명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상의 일들로 미루어 우리는 무우 대륙의 번영과 붕괴의 이야기를 더듬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무우 대륙은 광대했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쪽 끝은 현재의 하와이
제도이며 서쪽 끝은 마리아나 군도 부근까지, 남쪽은 포나페, 피지이, 통가, 쿠크
제도에 이르는 동서 8 천 킬로미터, 남북 5 천 킬로미터에 걸친 방대한 영역을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협이라기보다는 좁은 수로에 의해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첫머리에서 기록한 무우 대륙의 낙원의 묘사, 그리고 또 최후의 날의
양상 등은 결코 상상만으로 쓴 것은 아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옛 기록이나 전승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는 것이다.
그 몇 가지를 여기에 소개해 보자.
  "연속되는 대평원(그리이스의 옛 기록)"
  "골짜기와 초원으로 가득찬 낮은 언덕의 땅" (트로아노의 옛 사본)
  "연꽃은 피고 지다...(각종 옛 기록)"
  "아름다운 나비나 벌새가 난무하고 햇빛이 쨍쨍 내리 비치니...(남아메리카의 전승)"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 소리(이이스터 섬의 비문)"
  "힘센 마스토돈의 무리나 여러 가지 종류의 코끼리 떼가 큰 귀를 흔들어대며
이 평원을 횡행하고 있었다(북아메리카 인디언 및 고대마야의 옛 기록)"
  "인구는 6천 4백만명(트로아노 고사본)"
  "매끄러운 도로는 거미줄처럼 뻗쳐져 있고 부석 사이에는 풀이 돋아날 틈도
없었다(이이스터 섬의 비문)"
  "이 나라에는 열 종족이 있었는 데 단 한 개의 정부가 통괄하고 있었다.
(트로아노의 옛 사본)"
  "백성들은 국왕을 선출하여 "라"라고 칭했다. 또 국왕은 "라.무우"라 일컬음을
받고 최고의 신관, 법왕도 겸임했다.(라사 기록-기타)"
  "태양의 제왕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있었다. 종교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존경하며, 영혼은 불멸이고, 얼마 후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되돌아간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라사 기록)"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특별한 것으로서 그 이름을 부르는 일마저도 황송하게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기원할 때는 상징물의 이름에 의해 신에게 호소했다.
태양 "라"가 신의 은혜의 전부를 집약한 상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다(고대 마야와
그 밖의 옛 기록)"
  "라 무우는 종교상의 최고 신관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였다. 라 무우는 신의
대리자이므로 신으로 공경하는 것은 금지되고 이것은 일반 민중들에게도 잘
가르쳐지고 있었다.(트로아노 옛 사본)".
  "그 민중들은 높은 문명을 가지고 그것은 전토에 걸쳐 있어 야만적인 풍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중심이 되고 있던 인종은 백인종이고 아름다운
밝은 색깔의 머리털과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피부에는 순백색과 
올리브색이 있었다. 그 밖에 황색, 갈색, 흑색의 인종이 있었다. 모두가 다 
주권자 아래 아이들처럼 안심하고 살고 있었다. (코르테시아누스 옛 사본 기타)".
  "그들은 대 향해자여서 동서남북, 세계의 바다를 마음대로 항해하고 있었다.
또 그들은 건축의 기교가 뛰어나 거대한 신전이나 왕궁을 돌로 지었다.(바르미이키)".
  "조각을 잘하여 기념비로서 큰 돌비를 많이 세웠다. 이 나라에는 일곱 개의
큰 도시가 있어서 그 곳은 종교, 학문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라사 기록)".
  "인간이 지상에 최초로 나타난 곳은 무우 대륙이며 그 때문에 특히
'쿠이의 나라'(여신 마야의 탄생지란 뜻)라고도 불리었다. (트로아노 옛 사본)".
  "도시들에는 "투명한 신전"이라고 불리는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에는 지붕이
없고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태양빛은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남태평양제도의 전승)".
  "부유한 계급의 사람들은 금은보석으로 몸을 꾸미고 여러 종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화려한 저택 속에서 살고 있었다.(라사 기록)".
  "배는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비싼 보석으로 장식한 남녀들을 태우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각 식민지로부터는 빈번히 화물이 수송되어 왔다(바르미이키)".
  "노래와 음악으로 사람들은 즐겁게 지냈다. 큰 돌의 초상이나 돌비가 입립해
있었다(남태평양 제도의 전승)".
  학문 문화의 중심지였던 일곱 도시. 그 중의 하나가 왕궁이 있던 수도가
아니었을까. 티베트의 옛 기록에 따르면 이것을 히라니플라라고 부르고 있다.
수도를 에워싸고 수로가 들러 싸여 있고 다리에는 탑과 문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왕궁은 적색, 백색, 흑색 등의 단색, 또는 얼룩 무늬를 한 돌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왕궁의 내부는 상아의 천정, 벽에는
금, 주석, 기타 불과 같은 빛을 발하는 이상한 금속이 둘러쳐져 있었다.
  큰 강의 하구나 해만, 수로를 따라 상업과 무역 도시가 개발되고 있었고, 수로를
따라 내륙으로부터 목재나 수화물이 운반되어 온다. 그러한 산물들을 세계 각지에
산재하는 식민지로 향해 싣고 떠나가는 배, 또는 식민지로부터 진기한 특산물을
산처럼 싣고 입항해 들어오는 선박들--. 무우 대륙은 문자 그대로 세계 문화의
모태이며 또 상업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6천 4백만 명의 인구는 열 종족, 혹은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이 어떤
분포를 이루고 있었는지 또 생활상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피부색, 머리, 눈빛, 등은 현재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는 인종의 전부를
포함하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흰 피부와 올리브색의 피부를 한 민족이
주로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인종적 차별은 일체 없고 무우 제국의
국민으로서 주권에 있어서는 평등했었다.
  하나의 정부 아래 모든 국민이 그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다.
  왕의 계승자는 몇 세대 전부터 국민에 의해서 선출되고 선출된 자는 이름에
"라"--즉 태양의 칭호가 덧붙여진다. 이 왕위의 계승자는 종교상도 최고의 사제며
법왕이 되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윽고 "라 무우"가 되어 정치적,
종교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서게 된다.
  종교의 하나는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었다. 하나님에게는
이름은 없었고 또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조차 황송한 일이므로 "라" 즉 태양이
하나님의 속성의 전부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고 영혼은 반드시 그 "큰 근원"--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호소할 때나 기원을 드릴 때 언제나 상징물을 통해서
해야만 했었다. 제왕이자 최고의 신관인 라 무우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대변자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신은 아니다.
  거룩한 존재이기는 했지만, 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신의로서 숭배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었다. 이것을 혼동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또 이 사실은 국민들
사이에서 아주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무우 제국에는 높은 문명이 있었으며 혜택이 대륙의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시골엘 가더라도 야만적인 풍습 같은 것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럼 이 무우 대륙에 문명이 탄생한 것은 도대체 언제쯤이었을까?

    무우 왕실의 문장

  중앙아메리카 유카탄 반도의 고대 마야 문화의 연구가인 르푸론 존 박사는 치첸
이짜의 유적에서 고대 마야 최고의 신관인 카이의 무덤으로부터 12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조각을 발견하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이 12개의 머리를 가진 뱀은 칸
왕조에 앞서 마야 12왕조를 나타낸 것으로 이 12왕조가 통치한 기간은 약 1만
8천 년에 달한다. 그리고 "트리아노의 옛 사본"에 따르면 칸 왕조 최후의 왕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8천 년쯤 전에 재위하고 있던 셈이 된다.
  고대 마야 족을 최초의 왕이 통치한 연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이 숫자를
더하지 않으면 안 된다. 1만 6천 년에 1만 8천 년을 더하면 3만 4천 년, 최후의
칸 왕조는 어느 정도 계속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십수 대, 적어도 수 대는
계속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을 약 1천 년으로 보면 고대 마야의 최초의 왕이
백성을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약 3만 5천 년 전부터 3만 8천 년 사이쯤이라고
생각 되어진다.
  이 고대의 마야 제국이라는 것은 인도나 위글이나 이집트와 나란히 무우제국의
식민지들 가운데서도 최대급에 속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낱 식민지였던 것이
훗날에 대제국을 만들기에 이르렀으므로 그 사실로 미루어 생각하면 무우 제국의
문명은 적어도 3만 5천 년 이상이나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이집트의 신관이자 역사가인 아네토우가 쓴 책에 따르면 "아틀란티스국의
"사게 왕"에 의한 통치는 1만 3천 9백 년간 계속 되었다"고 한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대서양상에 있던 대륙으로 지금으로부터 1만 1천 5백 년 전에 무우 대륙과
마찬가지 사정으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때까지 1만 3천 9백 년 동안 왕에
의해 지배 되었다고 하니까 초대 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2만 5천 4백 년 전 이라고
보게 된다. 고대 마야 제국이 약 1만 년쯤 더 오랜 것이다. 그로부터 역산하여
무우 대륙에 최초의 문명이 싹터 나온 것이 언제쯤인가 하면 이 제국의 규모의
장대함, 그 식민 제국의 역사가 오랜 점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지금으로부터 5만
년 이상 전에 그 곳에 문명이 있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4만 5천 년
전에는 무우 대륙 최초의 왕 또는 제왕이 나타나 있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스스로 "태양의 아들"이라 일컬으며 그 나라에서 부르는 태양의
이름을 붙인 제왕과 왕의 수는 많다. 그들은 태양에 의해 스스로의 권력을
상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어머니의 나라에 만들어진 지구상 최초의 제국, 지구상 최초의
제왕이야말로 태양의 이름을 붙이기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유래는 무우 제국 왕실의 문장인 방패에서 볼 수가 있다.
  (무우 제국 왕실의 문장방패 그림있음)
  a. 방패는 무우의 종교문자의 하나인 M을 본 뜬 것이다. Mu 또는 Moo로 발음된다.
  b. 문장의 중앙에 있는 이 상형문자는 U-Iuumil (Oo-Ioo-oo-mil)로 읽혀지므로
"--의 제국"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c. 이 원은 태양을 나타낸다. b와 맞추어 "태양의 제국" a와 맞추면
"무우, 태양의 제국"이 된다.
  d. 태양이 갖는 8광과 여덟 방위점을 나타낸다. 지구가 태양에 지배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e. 광선을 에워싼 원은 우주이다. 우주가 인간의 손에 맡겨지고 이 인간의 우주
즉 지구가 된다. 태양의 광선과 그 혜택이 모든 인류에게 미쳐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문장 방패는, 지구의 전인류를 지배하는 것이 태양이며 지구상의
전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무우 제국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태양을 의미하는
"라"는 법왕의 칭호이며 동시에 국왕의 이름위에 붙여지는 것이라는 말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기에서 무우 제국 제왕에게 라, 무우의 칭호가 주어지게
되었고 또한 그 나라가 태양의 제국으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인 나라" 무우의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무우 대륙의 야심있는 기업가나
대항해자들은 동으로 서로 신천지를 찾아서 진출해 갔다. 이 식민들은 마야라고
불리었다. 마야 족, 또는 마야인이라고 불린 것은 원래는 이 무우 제국의
이주자들이었던 것이다.
  이 식민 정책은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다. 즉 무우 대륙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 진출해 간 사람들과 서쪽으로 나간 사람들이다. 이 두 주류로부터
다시 몇 개의 기지가 나누어지고 전세계로 마야인은 분포되어 나갔다. 동방으로
향한 이주자들이 최초로 정착한 것은 현재의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의
태평양에 면한 서해안이었다.
  그리고 서쪽으로 향한 이민이 최초로 식민지를 쌓았던 것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해안으로 태평양에 면한 지점이다.
  식민지가 점차로 발전하여 한 왕국 또는 한 제국을 형성하게 되고서도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나라"무우의 통솔아래 있어 전세계는 마치 한 가족인
것처럼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식민지는 무우 제국의 흐름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수평선상에 떠오르는 태양
또는 광선이 없는 태양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왕국 또는
제국으로 발전하면 태양에 광선을 붙이는 것이 허용되었다.
  식민 제국의 초대 제왕 또는 왕은 무우 제국의 왕실에서 선발했던지 혹은
적임자가 임명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새제왕이나 새왕은 "태양의 아들"의 칭호를
사용했지만 이것은 태양의 제국 왕조로부터 분리된 자, 혹은 태양 제국의
아들이라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그 문장도 태양이지만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나라에 종속한다는 의미에서 떠올라온 탱양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무우 제국의 식민 정책이 언제쯤부터 시행되었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나
나아칼의 비문 등을 보면 적어도 4만 년 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우 제국의 식민지로서 오랜 인도의 데칸 지방, 이 지방에 식민한 이주자들은
"나가 마야"라 불리었다. 그리고 이 땅이 왕국으로 된 때, 초대 왕국은 "라마"라
일컬었다.
  현재의 래디푸울의 마할라디아 (대군)는 이 라마의 직계자손이라는 이야기인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3만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계로 뻗어가는 식민선

  무우 대륙으로부터 동방으로 향했던 식민선은 다시 두 개의 주선으로 나뉜다.
하나는 아메리카 대륙에 달하여 이것을 횡단하였으며 중앙아메리카 유카탄
반도로부터 대서양으로 나가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건너갔으며 다시 동쪽으로 향해
지중해 깊숙히까지 파고 들어가 더다 넬스 해협을 통해 흑해의 동남안에 이르는 선이다. 
  이 선으로 지선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아메리카의
칠레로 향한 것과 동해안 연안으로 남하하여 아르헨티나에 이른 것이 있다.
  또 하나의 주선은 역시 대서양을 넘어 유럽의 남서부로부터 아프리카의 북서부에
이르는 선으로서, 지중해의 북안과 남안에 펼쳐졌으며 그 중 가장 남하한 집단이
아프리카 나일강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정착하여 이집트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 동방 식민선 가운데 아주 특수한 코스를 밟아 온 집단이 있다. 이 코스에
관해서는 자료도 부족하여 필자는 티베트에서 발견한 고대 점토판의 지도
(다음에 나옴)에 의해서 이윽고 그 발자취를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따르면 남아메리카 대륙의 지도에 다섯개의 이상한 도시가 그려 넣어져 있었다.
  그 하나는 현재 페루의 잉카문명 유적지인 티아와나코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어
운하에 면하여 "아마존 해"의 남서 해안에 보석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여진 도시가
한 개, 또 남부의 해안에 황금의 도시라고 이름 붙여진 것과, 대서양 연안에 한
개, 북부의 현재 베네수엘라 근처에 한 개, 이렇게 하여 합계 다섯 개였다.
  아마존 해--아마존 강의 잘못된 표기는 아니다.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2만 5천
년 전 경까지는 현재 "푸르름의 비경"이라고 하는 아마존 강의 유역지대에 커다란
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쪽은 대서양과 이어져 있고 서쪽은 운하에 의해 태평양으로 통해 있었다.
북안은 현재 베네수엘라의 고원지방으로 지금도 그 곳은 근사한 하양 석영의 층을
볼 수가 있는데 이전에는 이 석영의 단층에 파란 물결이 부딪쳐서 물보라를 뿌리고
있었을 것이다. 남안은 판 알토 산맥의 산록, 동안은 판 알토의 동부의 계곡, 서는
안데스 동부 산록과 해안선이 펼쳐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우 대륙으로부터 남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민단은 아마존 해의 서쪽
끝으로부터 운하를 팠다. 이로 말미암아 남아메리카 대륙은 이 수로에 의해
횡단되어 대서양으로 나와 무우 대륙에 이어 세계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틀란티스
대륙에 도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아마존 해의 주변에 몇 개의 고대
도시가 번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에 이런 오랜 전설이 있다.
  "---일단의 카라 족은 배를 타고 바다의 남쪽으로 내려가 이윽고 큰 강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아름다운 고장을 발견하여 정착하였고 위대한 국가를
이룩해냈다. 아름다운 해변에 큰 도시를 만들고 황금의 사원을 몇 개나 세웠다.
이 도시의 이름은 마노아라고 불리었다."
  이 카라 족이라는 것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중앙아메리카에 식민해 있던 일단인데
즉 카라 마야족이다. 그들이 남하한 바다라 함은 현재의 카리브해 이외에는 없다.
이 바다의 명칭도 카라족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북단 부근으로부터 내륙으로 들어가 아마존해의 주변에 도시를 만들었다.
  중앙 브라질의 인디오들 사이에는 예로부터 백인이 사는 미지의 고대 도시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이 전설을 근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잃어버린 도시"의
탐구에 나선 것이 영국의 포병장교 P.H. 포세트였다. 그는 2천 4백 킬로미터나
되는 브라질의 내륙 깊숙히까지 헤치고 들어가, 아마존의 지류인 푸이그 강과
타파오 강의 중간 지대에서 마침내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러나 1925년에
포세트는 푸른 비경이라 불리는 중앙 브라질의 매트 그로소 고원으로 황금 도시를
목표로 하여 출발했는데 그 후 소식이 끊겼다.
  그럼 이 아마존 해는 어째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일까? 그 이유는 안데스 산중의
표고 5천 미터 고지에 있는 티아와나코의 유적이 역력히 말해주고 있다. 이 고대
도시는 앞에서 말한 대로 아마존 해로 통하는 운하의 연변에 있었다. 즉 해면과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겠다. 이 유적지에서는 심볼을 조각한 돌기둥이
발굴되고 그 때에 많은 패각 즉, 조개들이 쏟아져 나왔던 일로도 그것은 분명하다.
  이윽고 지진, 높은 파도, 분화가 잇달아서 일어났다. 바다같던 평야는 일변하여
산지가 되고, 안데스 산계가 형성되었다. 이 대변동으로 생명이 있는 것은 대부분
죽음에 이르렀고 아마존 해도 소택지나 강의 상태로 변했다. 치치카카 호도 아마
그 때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존 해가 운하에 의해서 태평양으로 통해진 때쯤 현재의 페루는 잉카 제국이
번영했던 곳이다. 그러나 잉카의 초대 황제인 망코카패크가 즉위한 것. 기원
565년으로 지금부터 천 4 백 년쯤 전의 일로서, 카라 마야 족이
중앙아메리카로부터 찾아왔던 때보다도 훨씬 새로운 일이다. 그들은 카라 마야족이
세운 카리양 제국이 조산활동으로 인해 없어진 다음에 새로이 제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잉카의 전승에는 아마존 해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잉카의
시조는 중앙아메리카로부터 페루로 들어왔던 키티에족으로 잉카 제국의 공용어인
케추어 어는 지금도 이 부근의 인디오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
  잉카의 초대 황제는 어머니의 나라 무우의 정통적인 혈통을 이어 받은 자라하여
스스로 태양의 아들이라 칭하고 태양의 제국은 남아메리카에서 군림했다. 그러나
1533년 13대 황제 아타와르파의 때에 스페인 인들에 의해서 정복된 것은 다 아는
바와 같다.
  지각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아마존 해 주변의 카라
마야족만은 아니었다. 멕시코의 고대 석판의 바라굴자인 윌리엄니이벤씨는
멕시코 시티의 북방에서 화산 활동과 홍수에 의해 괴멸한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견하고 있다.
  또 유럽으로부터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한 마야인들도 마찬가지의 괴로운
체험을 겪고 있다. 예를 들면 터어키의 스미르나에 있는 캐피탈 힐의 유적은 해발
2백미터의 높은 곳에 있지만 여기에는 유사 이전의 고대 문명의 흔적이 3층으로
겹쳐져 있다. 게다가 그 겹쳐진 상태는 약 45도의 각도로 엇갈려 있다. 이것은
당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이 융기하는데 따라 옮겨져 올라
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무우 대륙의 동방 식민선이 최초에 다다른 북아메리카 대륙 서부--이 부근에도
지각변동으로 말미암은 대홍수는 미친 듯이 휩쓸어 그 문명의 흔적을 씻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무우 대륙으로부터 서쪽으로 향했던 이주자들도 이 지각 변동에 의해서
괴멸되었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무우 대륙에서 버어마까지는 배편으로 약 1개월쯤 걸린다고 보고 있었다.
  서방 식민선의 제 1선은 우선 이 버어마로부터 인도에 정주한 일단으로서 나가
마야 족이라 불리었다.
  제 2선은 말레이 반도에서 인도 남부에 걸쳐 드라비다국을 세운 일단으로
타미르인의 조상이다.
  제 3선은 아시아대륙의 북방을 따라 서진하여 중앙 아시아로부터 중부 유럽에
걸치는 대제국을 이룩한 위글 마야로서 아리아 민족의 시조이다.
  이 밖에도 코오티시나 지방에 정착한 몽고 인종의 선조도 있다.
  히말라야 옛사원의 기록에 따르면 무우 제국의 종교와 학문의 보급을 위해
나아칼이 무우의 수도 힐라니프라를 나와 버어마 북방에 온 것은 7만 년 전의
일이라고 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무우 대륙의 문명은 5만 년 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고대 버어마는 현재의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지금의
캄보디아에서 태국, 라오스 국경 부근을 흐르는 메콩강 유역 주변이 식민지였다.
이 부근도 지각 변동으로 말미암은 홍수가 밀어닥쳐 그 문명을 씻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인도에서 온 아리아계의 민족에 의해서 크메르 제국이
세워졌다. 그 문명의 흔적은 지금 앙코르의 유적으로 남겨져 있다.
  그들도 역시 카라 마야문명의 자취 위에 대제국을 이룩한 잉카처럼 그 선주
민족의 일을 모른다. 다만 선주 민족이었던 나가 마야인이 창조신의 상징으로
삼고 있던 일곱 개의 머리가 달린 뱀을 "나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그 기억이 남아 있던 증거이기라도 하단 말일까?
  지각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은 위글 마야족이다. 기름진
땅 중앙아시아의 들판은 대홍수에(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대홍수인지도 모른다)
씻겨져 내려 불모의 사막으로 화했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가 생기던 때의
부산물이다. 높은 산과 산 사이의 약간씩 남겨진 위글 대제국의 살아 남은 자들은
훨씬 후에야 남하를 시작하여 역사에 등장하게 될 때까지 비참한 산민의 생활을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보면 무우 대륙의 식민자들에 의해 세계 각지에 쌓여진 문명은 지각
변동이라는 지구의 형성상 피할 수 없는 일대 재변에 의해 큰 타격을 입고
지상으로부터 사라져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니,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의 나라"무우 대륙 자체가 이 지각 변동으로 말미암은 최대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3. 무우 대륙의 대함몰

    대륙 밑에 있는 가스 체임버

  그 왕실의 문장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태양의 빛이 지상을 두루두루 비추듯이
전세계에 그 국력을 떨치고 영화를 자랑하고 있던 무우 제국이 단 하룻밤 사이에
태평양의 바다 밑 깊이 사라져 간 사실은 대자연 앞에 인간의 덧없음을 새삼스럽게
연상케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 최후의 날의 모양을 더듬기 전에 먼저 무우
대륙 그 자체가 지질학상 어떤 조건에 놓여 있었으며 어떤 숙명을 간직하고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자.
  무우 제국의 번영을 지탱하고 있던 광대한 무우 대륙--그 지각 밑에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함정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화산대에 의해서
조성된 가스가 채워진 구멍인 가스실(체임버)였다.
  지저화산의 활동에 의해 땅속에서 발생한 가스는 매우 폭발하기 쉬운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지각을 형성하고 있는 화강암에 벌집과 같은 구멍을 뚫어 버린다.
그리고 무언가의 계기로 이 가스가 지상으로 빠져나와 버리면 다음은 아주 어린
공동이 되어 지각을 지탱하는 역할마저도 간신히 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지탱해 주는 힘이 없는 천정이 허물어져 내리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땅 속의 공동은
다음에서 다음으로 무너져 내리고 방대한 면적에 걸친 대함몰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그림 A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가스 체임버는 지표로부터 몇 층이나 되는
깊이로 겹쳐 쌓여 만들어진다. 가장 옅은 곳이 지표로부터 24킬로미터, 중간층이
24킬로미터에서 48킬로미터, 가장 깊은 것은 48킬로미터부터 지구 중심부의
뜨거운 열로 누글누글한 부분에까지 달한다.
  가장 옅은 층은 또 다시 3개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8킬로미터까지의 깊이를
0층이라 한다. 이 층에 있는 가스 체임버는 그 하나하나가 고립된 상태로 되어
있다. "고립"이라는 의미는 아래층의 가스 체임버와 연결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여기에는 가스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있다.
  8킬로미터에서 16킬로미터쯤까지의 깊이의 것을 X층이라고 한다. 이 층의 가스
체임버에는 아래의 W층으로부터 금이 간 부분을 통해 항상 가스가 보급되어 온다.
  W층의 가스 체임버는 지구의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어 여기로 올라온 가스는
X층의 가스 체임버로 들어가고 그 압력에 의해서 체임버의 천정은 들어 올려진다.
암반에는 금이 가고 X층으로부터 0층으로 가스가 통해지게 된다.
  이윽고 O1의 천정이 들리워지고 O2에 금이 생기고 마침내는 가스가 끊임없이
밑층으로부터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O2의 천정이 올려지면 화산의 형태로
가스가 빠져나오고 내부의 가스 압력은 줄어들어 천정을 받쳐줄 수 없게 된다.
천정은 허물어져 버리고 남아 있던 가스가 거대한 불꽃으로 화하여 지표면을
핥아간다. 지각의 함몰로 말미암아 생긴 거대한 구멍에는 바닷물이 무서운 기세로
흘러 들어가며 육지는 당장 삼킴을 당해 버린다.
  이렇게 위험한 가스대(벨트)가 대륙의 지하에 가로질러 있는 것인데, 그 깊이가
반드시 일정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대가스대는 대체적으로 0층의
하부로부터 X층의 상부에 있다. 그러나 때로는 W층에 있기도 하고 X층으 벗어나
또 W층으로 되돌아오는 등의 변화가 있다. 또 지표로부터 겨우 1.6킬로미터 내지
3킬로미터 정도의 깊이로 올라와 있는 수도 있다.
  이른바 가스대의 안전판인 화산이 가까이에 있는 경우는 층이 옅은 수가 많고
하와, 에콰도르, 중앙아메리카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는
지표로부터 24키로미터 내지 29킬로미터 쯤의 곳에 있다.
  (그림 A: 지각 중에 형성되어 있는 가스 체임버의 횡단면)
  (그림 B: 함몰되기 전 무우대륙 밑에 형성되어 있던 가스 체임버의 상태)
  (그림 C: 태평양의 해저에 형성되어 있던 가스 체임버의 분포도)
  그림 B를 보자. 이것은 함몰 전 무우 대륙 지하의 상태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고립한 가스 체임버가 무우 대륙 부근에 모여 있으며 문자 그대로 대륙의 지하는
공동으로 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은 상태이다.
  그림 C는 그림 B를 위에서 내려다본 평면도로 고립한 가스 체임버가 거의 무우
대륙의 전면적을 뒤덮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체임버와 체임버 사이는
가느다란 갈라진 틈이나 벌어진 금에 의해 서로 이어져 있다.
  무우 대륙의 아래에 있던 고립한 가스 체임버의 층은 매우 앝아서 지표면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가스 체임버가 깊은 층에 있는
경우 지표는 가스의 팽창력에 의해서 들리어지면서도 아직 터져 찢어지지 않은
채로 견뎌낼 수가 있다. 그 융기가 산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트로아노 고사본", "코르테시아누스 고사본", "라사 기록"등의
옛 기록에 의해 볼 지라도 무우 대륙 최후의 날에 대규모적인 융기를 발생시켰다고
생각되는 기술은 찾아볼 수 없다. "두 차례 흔들어 올려졌다." "대지는 두 차례
튀어 올랐었다."고 한 표현은 볼 수 있는 데 이것은 아마 땅 밑의 화산 활동에
의해서 생겨난 갈라진 금을 통해서 가스가 O1의 가스 체임버로, 다시 O2의
체임버로 빠져 올라갔던 때의 충격이 아닐는지.
  이러한 예는 태고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를 통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서 반복되어 온 것으로 그 때마다 많은 육지가 소실되기도 하고 또
나타내기도 했던 것이다. 지하의 가스 체임버의 붕괴와 육지의 함몰은 원성암의
암반의 두께가 지하로부터의 융기를 견뎌내고, 땅 속에서는 가스 체임버가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터널 모양의 가스대가 완성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스대의
완성과 동시에 대규모적인 육지의 함몰과 현상은 일단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그림 D 있음: 태평양을 횡단하는 가스대)
  그림 D를 보자. 이것은 태평양을 밑을 달리고 있는 가스대의 코스를 나타낸
것인데 마치 전에 무우 대륙이 있던 부분인 태평양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
두 개의 대가스대 1은 지구의 중앙부를 지나가 이른바 대중앙 가스대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무우 대륙을 받치고 있던 가스 체임버는 이 대중앙 가스대와, 그 밖의
몇 개인가로 나뉜 가스대가 생겨나는 과정에서 뭉개져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가스 체임버가 아니고 수많은 가스실의 연결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두 개의 큰 가스대는 모다가 아메니카 대륙 밑을 지나서
대서양으로 지구를 휙 한 바퀴 돌고 있다.
  무우 대륙의 지하에 이와 같은 우수한 가스 체임버가 있었다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가 있겠다.
  1. 현재 태평양상의 여기저기에 뿔뿔히 흩어져 있는 섬들 사이의 바다의 심도는
아주 가지가지이다. 이것은 수많은 가스 체임버의 함몰이나 그의 겹침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거대한 하나의 가스 체임버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바다 밑은
그렇게까지 심하게 울퉁불퉁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그러한 섬들은 함몰된 대륙의 찌꺼기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대가스 체임버의
함몰로 인한 것이라면 그와 같은 섬이 가라앉지 않은 채로 남는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3. 그러한 섬들은 가스 체임버와 가스 체임버 사이의 대목 위에 있었기 때문에
완전 함몰을 면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4.가스 체임버가 서로 통해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러한 섬들의 화산 활동을
보면 명백해진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로 그러한 섬들에는 산이나 단애와 절벽이 많다.
  현재도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섬들 가운데는 대규모의 화산 활동 현상을 몇
개쯤은 볼 수가 있다. 현재 이만큼 뚜렷하고 대규모적인 화산 폭발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은 세계를 통털어 폴리네시아를 빼놓고 달리 찾아볼 수 없다. 그들
거대한 화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대분화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폭발력의 엄청남은 넉넉히 한 대륙의 숨통을 순식간에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나가면 폴리네시아의 화산의 크기는 놀랄 만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뭏든 이와 같이 섬이 남았다고 하는 사실조차도 기적적이며 대폭발과
더불어 안개나 구름처럼 모든 것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큰 중앙가스대가 완성에 가까와지자 그 안전판인 화구가 또 하나 새로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분화는 킬라웨어의 바로 아래에서 일어났으므로 이것이
킬라웨어의 새 화구 할레마우마우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화구는 직경이
겨우 2백 70킬로미터로 대화구의 18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최대급 화구의 하나로 손꼽아지고 있기 때문에 옛 화구의 거대함을 가히
미루어 짐작해 봄직하다.
  이 하와이제도의 밑을 달리고 있는 가스대는 대중앙 가스대의 북쪽에 있는 것의
하나로서 지구의 중앙부를 빙 둘러 감아 돌고 있는 이 가스대의 코스 가운데서는
가장 땅표면에 접근해 있는 부분이다.
  또 한 가지 흥미있는 화구도로는 니와호우 섬이 있다. 피지이제도의 북동쪽
사모아와의 거의 중간 지점에 있는 작은 섬인데 무우 대륙의 함몰 때, 이 곳의
화구에는 물이 흘러 들어가서 지금은 호수가 되어 있다.
  이상은 폴리네시아의 화산 활동 중에서도 매우 두드러진 예를 들어본 것 뿐인데
아뭏든 화산 활동이라는 자연 현상이 인류 위에 이만큼 큰 재해를 가져다준 예는
무우 대륙의 괴멸 이외에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지질학에 따르면 북아메리카 대륙 서해안의 육지는 융기한 흔적이 있는 모양이다.
해안선이 넓어져 감으로써 그것은 역력하다고 한다. 확실히 해안선은 넓어졌는데
그것은 육지의 융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태평양의 해면이 내려갔기 때문에
육지가 넓어졌던 것이다. 어쨌든 태평양의 태반을 점하고 있던 무우 대륙이다.
동서 폭이 8천 킬로미터, 남북이 5천 킬로미터에 미치는 큰 구멍이 바다 밑에
뚫렸던 것이다. 그 깊이는 곳에 따라서는 수천 미터도 되었을 것이다.
바닷물은 단번에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통상 수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2배 이상의 수량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태평양의 수위는 일시적으로
내려가서 여태까지 수면 아래있던 부분이 드러나서 육지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때 내려앉은 것은 비단 무우 대륙만은 아니었다. 북방에도, 서방에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북태평양 베링 해협의 부분은 육지로 이어졌고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이어져 있었다. 이 베링 지협은 상당한 폭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남안은
현재의 앨류우션 열도를 따라 알라스카로부터 캄차카 반도를 잇는 선, 북안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북극해에 면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부분도 크게 함몰하여 현재와 같이 바다에 의해 끊겨져 버렸다.
  그다지 대규모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캘리포니아로부터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 서북단에 이르는 가늘고 길다란 함몰이 있었다. 또 말레이 군도 주변에도
함몰이 있었던 듯한데 그 규모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그리고 무우 대륙의 함몰과 전후하여 대서양에도 일대 비극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함몰이다. 무우 대륙에 이어 인류 문명의 중심이었던
아틀란티스, 이 광대한 대륙도 지각 변동이라는 대재액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대서양상의 고대 대륙 아틀란티스, 이것은 켤코 공상의 산물이 아니다.
  대서양의 중앙부에 실제로 존재했던 대륙으로서 무우 대류과 마찬가지로 주위가
바다로 에워싸인 광대한 대륙이었는데 그 화려한 문명과 더불어 바다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또 그 무렵 북대서양에는 유럽으로 연결되는 육로가 있었다. 그것은
아메리카로부터 그린랜드, 그린랜드로부터 노르웨이, 이슬랜드로부터 프랑스의
서북단을 연결하는 선에 널려 있던 육지였는데 이것도 함몰에 의해서 토막토막
끊겨져 버렸다.
  이러한 함몰은 모두 가스대가 만들어지는 도중에 화산 활동에 의해서 야기된
현상이다. 대중앙 가스대가 무우 대륙과 아틀란티스 대륙을 침몰시키고 태평양
환상 가스대는 베링 지협을 침몰시키고, 아팔라치아--아이슬랜드--스칸디나비아의
가스대는 유럽으로 가는 육로를 침몰시켜 버렸다.
  대양의 수위 저하에 의해서 거꾸로 수면으로부터 드러난 육지도 있다. 또 주변의
해안선이 넓어진 곳도 있다. 그러나 잠겨버린 육지의 면적은 그것들에 비하면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컸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인구가 밀집해 있었다. 잃어버린
인명은 아마 모두 1억 쯤은 될 것으로 상상된다. 무우 대륙에서만도 6천 4백만
명이 바다 속으로 삼켜져 버리고 말지 않았는가.
  그리고 땅 속의 가스 체임버의 붕괴와 암반의 수축에 의해서 계산한 것만으로도
지구의 직경은 27킬로미터 내지 35킬로미터쯤은 짧아졌을 것이다.

    무우 대륙 최후의 날

  "칸의 6년, 11무르크, 사크의 달에 무서운 지진이 시작되어 13츄엔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땅의 언덕의 나라--무우 대륙은 희생의 운명에 처해졌다.
대지는 두 차례 들리어 올라갔다가 밤 사이에 사라져 갔다. 지하의 불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대지는 끊일 새 없이 진동하고 도처에서 솟구쳐 올라왔다가 또 잠겼다.
마침내 땅은 찢어지고 열 개의 나라들(민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리하여 6천
4백만 명의 주민들은 그 나라와 더불어 함몰했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8천 60년
전의 사건이다."
  "트로아노 고사본"가운데는 무우 대륙 최후의 모습이 참으로 간결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이 고대 민족의 신화집은
프랑스이 고대 마야 연구가인 르 프론존 박사에 의해 정리된 것이다. 그것이
기록된 연대는 1천 5백년부터 4천 년쯤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부터 약 1만 2천 년 전, 무우 대륙이 이 대재액을 만난 때, 그 문명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풍요한 자원에 힘입어 온 세계가 식민지를 넓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던 제국의 국민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파멸을 예상할 수가
있었겠는가?
  무우 대륙 최후의 날을 그린 옛 기록들을 소개해 보자.
  "갑자기 남방에 지진이 일어난 분화 때문에 지면이 다 찢어졌다(이이스터 섬의
비문)"
  "당장 큰 파도가 몰려와서 아름다운 도시는 파괴되고 분연에 쌓였는 데 엄청난
용암은 흘러 내려가려 하지않고 겹쳐 쌓여 암산이 되었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섬이
되었다(남태평양 제도의 전승)".
  "이윽고 분화는 그치고 조용해졌으므로 사람들은 안심했다. 그리고 도시를
재건하고 상업을 부활했다. 몇 대가 지난 후에 또 지진이 일어나 큰 파도처럼
대지는 흔들리고 모든 것은 파멸해 버렸다(토로아노 고사본)".
  "평야에는 물이 충만했고 도시는 모두 가라앉았다. 괴로움의 절규가 하늘에 가득
찼었다. 신전이나 궁전을 향해 사람들은 피난처를 찾았으나 곧 불길과 검은 연기에
휩싸이고 말았다(라사의 기록)".
  "저녁 해는 연기 속에서 불덩이가 되어 새빨갛게 성난 얼굴을 드러냈다. 불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밤이 오고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한 밤중에 무우의 나라는
산산히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대지는 지옥 밑으로 빠져 들어갔다. 화염이 솟아
올라와 무우의 나라를 삼켜버렸다(이집트의 옛 기록)".
  위의 기록, 전승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우 대륙의 함몰에 앞서서
그 전조라고도 할 분화, 지진, 해일 등이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이 때는 지역이
남방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괴멸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때에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져서 거대한 원추형의 암산이 되었으며 두 번째의 재액 때에도
남아서 섬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있다. 사실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에는
화성암으로 된 원추형 암산의 섬이 많다. 화산 활동은 일시 정지되었다. 사람들은
가슴을 쓰다듬어 내렸지만 이 무렵 지하에서는 제 2의 대재난의 준비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재해를 입었던 대륙의 남부로 부흥하여 무우 대륙은 이전보다도 더
번영했었다. 무시무시한 재해의 기억은 노인들의 엣 이야기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몇 세대가 지났다. 두 번째의 그리고 결정적인 재액이 다가왔을 때 지난번의 재해를
경험한 체험자는 아마 한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었을 것이다.
  기분나쁜 땅울림으로 시작되어 지진, 분화, 해일은 지난번과 마찬가지 경과를
더듬었는데 그러나 이번은 지난번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규모여서 피해는 무우
대륙 전역에 미쳤다.
  (트리아노 고사본에 그려진 무우 제국의 붕괴 그림 있음)
  "트리아노 고사본"과 마찬가지로 고대 마야족의 신화, 전승들을 모은
"코르테시아누스 고사본"-- 현재 스페인의 마드리드 국립박물관에 있는 이
옛사본으로부터 무우 대륙 초후의 양상을 인용해 보자.
  "해가 떨어지면서 호멘은 억센팔로 대지를 뒤흔들어 밤중에 땅의 언덕의 나라--
무우는 가라앉았다."
  "수발(바다)의 지붕인 생명  무우는 밤중에 호멘에 의해 함몰당했다." "죽음이 지배
하는 토지에는 생명이란 없고 대지는  두번 튕겨오른 뒤 움직이지 않았다. 땅 밑의 왕
이 밀고 나와서 대지를 상하로 뒤흔들더니 그 숨통이 끊기고 땅 밑으로 끌려
들어갔다."
  "무우는 두 차례 그 근처로부터 튀어 올라왔다. 그것은 땅밑의 불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지진에 의해 무섭게 흔들리고 깨어지고 부서졌다. 마신이 대지를
뒤흔들 때마다 만물은 마치 벌레들처럼 휘둘려 돌림을 당하고 그 밤중에 희생이
되었다."
  트로이의 유적의 발굴로 세상에 알려진 하인리히 슐리먼의 손자 파울로 슐리먼은
티베트의 라사에 있는 고사원에서 기원 전 약 2천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고문서를 발견했다. 그것이 "와사기록"이다. 여기에도 무우 대륙의 최후가
엮어져 있다.
  바루의 별이 떨어진 때, 다만 하늘과 바다만이 남았다. 일곱 개의 도시는
황금의 문, 투명한 신전과 함께 폭풍 속의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왕궁으로부터는
불과 연기가 넘쳐 나왔다. 비명과 아비규환이 주위에 가득 찼다. 군중은 도피처를
찾아 사원이나 탑에 모였다. 현자 무우 최고의 신관 라.무우는 일어서서 군중을
향해 말했다.
  "나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예언하지 않았던가?"
  화려한 의상을 입은 남녀들은 울부짖었다.
  "무우여, 우리를 도와 주소서!"
  무우는 대답했다.
  "너희들은 그 종들이나 제물과 더불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잿 속에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많이 얻는 것보다 많이 주는 것이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잊을 때, 이같은 재앙은 그들 위에 내려질 것이다.!"
  불꽃과 연기는 무우의 말을 흐트렸다. 국토와 주민들은 조각조각 갈라져서
나락의 밑으로 삼키어졌다.
  바루란 마야의 말로 "땅의 지배자"라는 의미이다. 이 기술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최고의 신관이자 현자인 라 무우가 무우 대륙의 함락을 예언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영화에 도취해 있던 사람들 위에 내려진 천벌인 것처럼
쓰여져 있는데 당시에 이미 고도로 과학이 발달해 있어 현대인보다도 예지 능력에
뛰어났으며 또 전례도 있었던 일이니까 일부 사람들은 민중들에게 대재난이 가까운
것을 경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드 프론존 박사도 유카탄 반도에서 발견한 옛
기록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무우 국의 법왕은 대륙의 붕괴를 예언했다. 이 예언을 믿었던 자들은
본토를 나와 식민지로 떠났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이리하여 인류의 어머니의 나라는 사라져 갔다. 번영을 자랑하던 대도시도,
장려한 신전이나 궁전, 예술, 과학 그 밖의 학문도 지금은 흘러간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들으면 지금은 한가로운 태평양의 파도 소리도 이미
사라져간 대륙에 대한 만가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세계 각지에 널려 있던 무우 제국의 식민지도 모국의 소멸에 의해서 뿌리가 끊긴
풀이나 꽃처럼 기운 잃고 그 문명도 퇴화해 갔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잇단 지각의
변동으로 인한 대재난이 이런 문명의 숨결을 끊어갔다.
  그러나 이런 식민제국, 또는 식민지는 모국과 같이 하룻밤 사이에 바다 밑에
장사지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모국에 대한 애석해 하는 마음을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하여 기념으로 남겨 놓았다. 그 대부분은 오랜 세월과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없어졌지만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그 몇 가지를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각지에 남아 있는 비극의 전설

  세계 각지에 전설을 찾아보면 하늘을 나는 새를 천지창조 때 하나님의 창조력의
상징으로서 하고 있는 예가 적지 않다. 현재 하와이 남쪽의 섬들, 동양의
나라들,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북아메리카 각지, 멕시코 등지에 그런 종류의
전설은 산재해 있다. 그런 것들로 미루어 보아 어머니의 나라에서 새가 신성시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대륙의 북동 지방에서는 그 경향이
강했던 것 같다.
  (그림 있음-멕시칸 새 1066, 1086, 1259 새는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설에 샌더 버어드라고 불리우는 새가 있다. 니이벤씨
멕시코 석판 속에도 새를 그린 것이 30개 이상이나 있다. 여기에 든 것은 그
가운데서 선택한 3점의 그림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중앙의 것에는 창조력을
의미하는 종교문자 H자를 나타낸 기호가 삽입되어 있다. 모두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다. 고대 위글제국의 국민도 새의 모양을 잘 사용하고 있는데
그 눈이 독특한 형태로 태양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 특징이 있으며 역시 하나님의
상징이다.
  이집트의 판테온에서 볼 수 있는 새 "세브"는 일종의 거위로서 동양의 전설에는
잘 나타나며 "신들의 아버지" 또는 "신들의 사자"라 하여 신성시되고 있다.
이집트인은 그것을 심볼로 삼아 관(일종의 모자)위등에 붙였다. 또 세브는 우주의
알을 낳은 "위대한 조류"가 되어 그 알로부터 지구가 생기고 인류가 생겨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집트의 고전 "죽은 자의 책"에도 "우리는 위대한 새의 알을
수호한다. 우리가 번영할 때 번영하고, 우리가 살 때 살고, 우리가 호흡할 때
호흡하는 자---"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도 새는 천지를 창조하는 힘,
"4대 원동력"의 상징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새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이 무우 대륙 붕괴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해온 바와 같이
  "트로아노 고사본" "코르테시아누스 고사본" 등의 옛 기록, 고대 마야의 상징
문자나 기호의 조합 등, 무우 대륙의 붕괴를 말해주는 것은 많이 있지만 그것을
독립된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세계에 둘밖에 없다.
  하나는 이집트에 있고 또 하나는 캐나다의 브리티쉬 콜럼비아, 뱅쿠버 섬의
누트카 인디언의 타브로오에서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이 두 그림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는데, 이집트의 것은 대륙이 불도가니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데 비해서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것은 대륙이 물에 잠겨 들어가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이 두가지가 겹쳐져 대륙이 소멸했던 것으로, 그러니까 어느 쪽이
잘못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인디언의 타브로오에 사용되고 있는 심볼은 무우 국의 것과 대체로 같지만
완전히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큰 차이는 물의 표상이다. 내가, 위글,
마야같은 고대 문명에서는 물의 심볼로서 마치 대양의 파도의 노호를 연상케
하는 듯한 파도 모양의 "깃벼슬이 없는" 뱀을 사용하고 있는데 고대 인디언은
다르다. 그들은 물의 심볼을 두 가지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
  대양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가장 큰 고기를, 그 밖의 경우는 뱀을 사용했다.
가장 큰 고기(고래나 돌고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로써 그들은 사나운 킬라
호에일(범고래)을 낚아 올렸다. 이 심볼은 모든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아주 많은 부족들 사이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식인
고래(범고래)를 사용한 곳에 바다의 두려움--무우 대륙에 엄습해 와 수천만 명의
인간을 단숨에 삼켜버린 바다의 두려움을 나타내고자 했던 기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림 있음-북아메리카 인디언이 그린 킬라호에일)
  그런데 이 그림은 보는 바와 같이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맨 위쪽이 뱀,
한가운데가 새, 아래가 고래(범고래)이다. 이 뱀이 다른 민족의 뱀의 심볼과 다른
점은 머리에 벼슬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머니의 나라의 북부지방 사람들이
신임하고 있던 거룩한 뱀 "케짤코아토르"와 공통점이 있어서 고대인이
창조신으로서의  하나님과 그 일곱 가지 명령을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운데의 새가 아메 북서부에 있는 인디언의 전설에 나오는 샌더 버드이다.
무우 대륙의 북부지방에서는 새는 "거룩한 4"--사대 원동력이나 창조력, 창조주의
일곱가지 대명령의 집행자로 믿어 왔던 것 같다. 새의 심볼은 현재 하와이 등의
남태평양 제도, 멕시코, 이집트, 동양 제국 등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무우 대륙에서는 꽤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거룩한 4"--
네 가지 창조력의 심볼로서는 새 외에 십자가가 있으며, 이것은 가장 오래된
심볼의 하나로서 전세계적으로 쓰여지고 있었던 것 같다.
  맨 아래가 인디언이 말하는 큰 물고기--범고래이다. 대양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참으로 어울리는데 어째서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 이외에는 이것이 사용되지
않았던가가 이상스러울 정도이다.
  그럼 이 그림풀이를 해보면 4대 원동력을 나타내는 샌더 버드가 대양의 심볼인
범고래 위에 앉아 그 등에 발톱을 세우고 있다. 대양의 물은 지구의 원동력의
제어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등에 물 뿜는 구멍은 동시에 해저 화산의 폭발을 교묘하게 상징하고 있다. 샌더
버드의 날개에서 나오는 자력에 의해서 범고래의 목은 꺾이고--대양에 죽음의
심연이 만들어졌다.
  이 범고래를 다시 분해해 보면--(범고래의 분해도 그림 있음)
  1. 눈은 세 개의 장방형이 겹쳐졌고 한 가운데의 한 개는 검게 칠해 뭉개져 있다.
바깥 쪽의 두 개는 어머니와 국토를 나타낸다. 즉 "어머니의 나라"이다. 한가운데는
눈동자이고, 검게 칠해 뭉개져 있는 것은 암흑--마침내 태양의 빛은 빛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나라는 어둠의 심연으로 잠겼다." 니이벤씨의
석판 가운데서도 이 눈과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심볼은 어머니의 나라나
그 식민지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던 것인 듯하다.
  2. 범고래--대양은 그 입으로 무언가를 들이삼키고 있다.
  3. 목구멍. 그 깊숙히 4가 대기하고 있다.
  4. 종교문자의 U. 깊은 구멍, 심연을 나타낸다.
  5. U의 깊숙히 있는 이 모양은 무우 제국에서 수를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된
것인데, 네 개가 있는 것은 "4"를 의미한다. 4는 "거룩한 4"--4대 원동력으로
통한다.
  6. 범고래의 뼈 속에서 볼 수 있는 이 원도 4를 나타낸 것, 즉 "4"이다.
  7. 4와 같은 모양으로 다섯 개가 있다  5는 다섯 개의 신성을-창조신과 4대
원동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타브로오는 무우 제국의 붕괴는 간접적으로 지구의 4대
원동력의 작용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무우 대륙의
붕괴에 대해 모든 옛 기록이 말하고 있는 사실과 합치되는 것이다.
  전설에 이런 말이 있다  '창조신은 인류의 어머니 나라의 붕괴를 원했다. 창조신의
명령집행자인 4대 원동력은 대륙을 잠기게 하고 대홍수를 일으켜 이윽고는 심연의
바닥으로 끌어들였다'
  알곤킹 인디언들에게도 대홍수와 무우 대륙의 함몰에 관한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존
발루우는 말하고 있다
  "알곤킹 인디언은 대홍수가 닥쳐올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피난용 배를 만들어
놓았다. 홍수가 들이닥쳐 오자 1백 38척의 배에 타고 팬 대륙(무우 대륙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이날 하늘과 땅의 문이 열렸다. 대지는 바다
위의 배처럼 흔들렸으며 비는 폭포수처럼 내리 쏟아졌다. 뇌성 소리는 땅 밑에서
들려왔다. 대지는 소용돌이치다가 마침내 갈라져 부서졌다. 강한 대륙은 그 받침을
잃고 땅 속의 불은 큰 굉음과 함께 불꽃과 연기를 뿜어냈다. 대지의 소용돌이는
모든 곳에서 일어났으며  그 힘에 의해서 육지는 물  속으로 가라앉아 다시 떠올라 올
수가 없었다"

      4. 태평양에 잠든 무우의 유적

    원시 식인으로의 환원

  무우 대륙이 바닷 속에 삼키어 졌을 때, 주민들 대부분은 운명을 함께 했지만
그러나 약간이나마 살아 남은 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면에 약간 머리를 내민 화성암의 암산 돌출부나 대륙의 등과 같은 곳에서는
구사일생으로 겨우 몸뚱이만 죽음을 면한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래도
계속되는 지진에 몸을 떨면서 그들은 자기네들의 신전이나 왕궁, 배나 도로가
분쇄되어 많은 동포들과 함께 바닷속에 삼키워 가는 것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주위의 바다는 열의 수렁으로 화하여 열기를 내뿜어 올리면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뒤덮어 햇빛을 가로막고 재가 비처럼 내리
쏟아졌다. 바닷 속에 삼켜 들어간 사람들의 비명이나 부르짖음은 귀에 엉켜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연기와 유황 냄새가 엷어진 것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였다.
구름의 베일을 뚫고서 이윽고 그 그립던 태양의 모습이 보이게 되었다. 바다 위에
점점이 남겨진 대륙의 부스러기들-그 위에는 겁에 질린 남녀의 무리들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꼭 팔짱을 낀 채로 꼼짝도 않는 자, 손에
손을 잡은 자들, 그들의 초점을 잃은 시선은 끝없이 펼쳐진 망망한 바다 위에
던져지고 있었다.
  그 아름답던 국토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전에 우리 인간들이 번영을 자랑하던 국토는 지금은 바다 밑의 어족이나
정체도 모르는 생물들의 소굴로 화하고 있었다. 울긋불긋 꽃들이 햇볕 속에
피어 있던 곳에는 해초가 무성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웅장한 왕궁 대신
산호초가 겹겹이 쌓였다. 큰 가로가 좁다고 웅성대고 있던 군중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바윗덩이 위에 몇 사람씩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다른 대륙으로
가고 싶어도 거리가 수천 km나 떨어져 있고 게다가 배도 없는 터였다.
  불에 그을린 화산암이나 갈라진 암산, 그 위에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살
집도 없이 남겨진 사람들-대부분은 여기저기 쓰러져 죽었고, 살아 있는 자들도
너무나도 비참한 상황때문에 미쳐버린 자가 많았다. 어렵게 살아 남아 있던
짐승들의 가죽을 벗겨 나뭇잎 등과 함께 옷가지 대신으로 삼았다. 연장들이
없으므로 조개껍질이나 돌로 만들어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 문제였다.
  살아나갈 수단은 한 가지 길밖에 없었다. 죽은 자의 시체는 생존자의 식량이
되었다. 그것도 동이 나면 생존자끼리 서로가 기회를 엿보느라 눈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창이나 활.화살을 만들어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승자는 패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이 당연한
질서처럼 되었다. 이것이 식인 풍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대제국의 국민이었던 문명인이 제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야만적인 행위를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사실은 그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기 전에 죽음을 선택한 자가 많았을 것이다. 또 서로간에 범해서는 안 될
종교나 계율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것들은
잊혀지고 살기 위한 법칙이 대신 생겨났을 것이다. 그들의 찬란하던 영광은
무우 대륙을 덮친 대양의 물과 함께 씻어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야만인으로서의 생활로 접어 들어갔다.
  해상에 남겨진 이들 대륙의 단편들-그것이 현재의 남태평양제도라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야만인은 그대로 놔두면 영원히 문명인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은 미개한 것이
아니라 전에는 문명인이었는데 낙오자가 된 것이니까 그대로 놔두면 낙후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문명 사회와 접할 때, 두가지 반응을 보인다. 그들이 그
문명을 흡수하여 개화해갔든지, 아니면 문명 사회의 나쁜 면만을 받아 들여
자기들의 스타일에 추가해 더욱 그 악습을 조장시켜갔든지 둘 중에 하나다.
  인간이 야만 상태로 떨어져 가는 데에는 지리적 조건이 크게 좌우하게 된다.
  예를 들면 최후의 조산 활동이 일어나기 전 평야는 아주 비옥했고 인구의
밀도가 짙었다. 이윽고 지면이 뭉클뭉클 솟아 올라오고 땅이 갈라지거나
무너지거나 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갑자기 생겨난
산악지대에 남겨졌다. 평야부에 남아있던 무리들은 더욱 운이 나빴다. 높은
파도가 몰려와서 닥치는대로 모조리 씻어 내려갔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비옥한 평야를 황량한 불모의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리하여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의 고기를 먹는 비참한 상태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산이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비옥한 토지를 이 지구상에서
깎아내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살아 남은 자들은 대문명의 혜택을 입어
생활력이 모자랐다. 살아가는 일에 쫓기다 보니 예술도 과학도 잊혀져 갔다.
식인의 풍습과 조산 활동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자는 문명의 특징과 진보를 판단할 때, 돌의 화살촉과 창의
끝날에 아주 중점을 둔다.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것은 구석기시대의 것과 비교하면
정교하기 때문에 구석기시대보다도 신석기시대의 문명이 발달해 있었다고
말한다. 이 사실 자체는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문명의
단계와 연결되는지 어떤지는 의문이다. 그 반대의 예도 얼마든지 발견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모든 기술에 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태고 시절이나 현재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숙련공은 완전한 제품을 만들어낼 수가
있으나 견습공은 만족할 만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 구석기시대의 인간은 말하자면
견습공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미개했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이 견습공들은 공동의 문명을 가지고 있던
국민들이 살아 남은 자들로서, 그 시대 지구의 대변동에 의해서 별안간 악조건
속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가령, 지금 자신이 그 상태에 놓인다면 어찌될까. 연속되는 재난으로
말미암아 가진 것을 다 잃고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로 황량한 대자연
속에 내동댕이쳐졌다고 하자. 도구 한 가지도 손에 가지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두뇌와 수족 뿐이다. 불안한 솜씨로 우선, 발 앞에 있는
재료로 도구를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해야만 된다. 도대체 얼마 만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거친 돌의 화살촉이나 창의 끝날은 그것을 만든 자들의
미개성, 문명도의 낮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고도의 문명이 야만화하여
가는 모습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흰 폴리네시아인의 수수께끼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이 가라앉은 대륙의 남은 자투리들이라고 한다면 그
속에는 당연히 예전의 대륙의 영화를 말해주는 잔재가 남겨져 있어야만 할
것이다. 사실 이들 섬들에는 비문, 문자, 풍속, 습관, 언어, 전설 등으로부터
돌의 신전, 돌비, 돌기둥 등의 유적까지, 그 옛날을 증명해 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들이란 사실만으로도 그것들은 더욱 무우대륙의
모습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 되고 있다.
  또 이러한 섬들의 위치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지난 날의 무우 대륙의 크기나
모양 등이 희미하게나마 떠올라오는 것이다. 이 대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사실은 여러 가지 기록으로 부터도 명백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나누어져 있었던가는 분명하지가 않다. 이집트의 기록에는 동서로 긴
육지였었다고 쓰여져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특히 그 식민지의 넓음으로 보아 나는 이 대륙이
상상외로 북쪽으로 뻗어 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고 생각된다. 남동쪽의 끝은
현재의 이이스터 섬 부근, 북서쪽 끝은 래드로오느 제도, 북단이 하와이 근방,
북동은 어느 부분까지 뻗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산이 없고 낮은 지대가
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해안선에는 만이나 강의 하구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남태평양의 섬들이 무우 대륙의 단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류
탄생의 땅-이 지구상에 조금씩 남겨진 에덴 동산의 자투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섬들에 남겨진 옛 기록이나 유적 등으로 보아 인간은 이 지구에
나타난 당초부터 이미 상당한 문명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인간은 자신의 혼의 모습에 대해 자각을 갖고 하나님을 믿고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그 무렵에 이미 일종의 종교적 상징물을 전달의
수단으로써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실로
지금으로부터 5만 년 이상 옛날의 일인 것이다.
  남태평양 제도의 원주민들에 관해서 조사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그들은 미개의
토인, 혹은 반미개라고 할 상태에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며 어떤
문명을 가진 민족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현재와 같은 상태는
그 조상들이 먼 옛날에 아주 커다란 천재지변을 만났던 때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라고 하는 사실도 추찰이 되는 것이다.
  과학자는 언제나 백인종의 기원을 소아시아로부터라고 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만한 옛 기록은 한 가지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남태평양
폴리네시아계의 원주민이 백인종에 속한다고 하는 사실은 완전히 놀라운
발견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아주 이목구비가 또렷한 인종이다. 그러나 이런
섬들이 가라앉은 대륙의 단편이라는 사실을 연상하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전설에 따르면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가 무우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그
곳으로 이주해온 최초의 이민들은 금발계의 백인(브론드 화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보다 색깔이 검은 블루우네트계의 백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멀리 동방의 나라의 해뜨는 쪽으로 항해해 가는 가운데 육지에 도착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유럽의 북부이며 현재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다고 한다.
  현재의 북구계 백인은 확실히 금발이 많다. 블루우네트계 백인이 고대 마야,
중앙아메리카, 아틀란티스를 경유하여 이주해간 남유럽,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반복되었다. 따라서 함몰을 면한 섬들에서도
브론드계의 백인보다도 블루우네트계의 약간 거무튀튀한 피부의 종족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쉽사리 상상할 수가 있다. 현재의 폴리네시아인이
검은 머리에 흑갈색 피부를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터이다.
  폴리네시아 이외에 이 갈색의 피부를 한 백인종이 있는 곳에 미크로네시아가
있다. 미크로네시아계의 원주민은 인류의 전형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훌륭한 몸매와 용모를 하고 있어 마치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을 보는 듯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피지이 제도의 주민들은 매우 손재주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와이의 남서쪽 6천 4백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길버터 군도, 여기에
알로라이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의 주민들도 갈색계 백인종에 속한다. 이곳
여자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날씬한 몸매, 반듯한 이목구비에 애교도 있고 또
단아하기도 한 표정, 검은 머리털과 검은 눈동자가 퍽 인상적이다. 그 중에서도
이 섬의 공주--공주인 알라왈리는 특히 아름답다. 평판에 따르면 '정숙하고
사랑스러운데 약간 성미가 급하고 질투심이 있다는 점도 있지만 야만인의
딸치고는 아주 기품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든 부채를 보는 것이 좋다. 무언가 생각케 해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 모양이야말로 바로 태양의 제국 무우의 문장 방패에서 볼 수
있는 그 도형인 것이다.
  옛 기록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무우 대륙의 붕괴 이전에 이와 같은 야만인이
지구상에 존재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그 야만인이 무우 제국의
문장을 그것인 줄도 모르고 사용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연관지어 생각하면 좋을 것인가? 무우 대륙의
붕괴와 가라앉다 남은 그 파편, 거기에 남겨진 사람들의 야만화, 과거에 대한
망각, 이러한 사실들을 젖혀 놓고 이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발견할 수 없다.
  (그림 있음)
  짜모투섬에서 사용되고 있는 장식. 4개의 검은 점은 "신성한 4"를 나타낸다.
  마르게사스 제도에서 볼 수 있는 도형. 4대 원동력으로 무우대륙에서 가장
오랜 심볼. 십자가의 변형이다.

    거인상이 잠자는 이이스터 섬

  남아메리카의 칠레에서 태평양으로 3천 4백 킬로미터 지점, 유달리 파란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쐐기형의 고도--그것이 이이스터 섬이다.
  이 섬이 처음으로 백인들의 눈길에 닿은 것은 1722년 부활절 날이었다.
네덜란드의 선원인 로케베엔에 의해서였다. 이리하여 이 섬은 이이스터 섬으로서
세계지도에 실리게 되었다.
  이 섬의 존재가 알려지고 얼마 안 될 즈음에 호기심도 한 몫 곁들여 일단의
유럽인들이 상륙했다. 그들은 해안에서 이상한 인물을 보았다.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 높은 코에 얇은 입술, 붉은 머리털,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었지만 피부는
분명히 백인의 것이었다.
  영낙없는 백인 표류자라고 생각한 선원들은 네델란드 말, 스페인 말, 프랑스 말,
영어 등 여러 나라 말로 의사를 소통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그 노인의 얼굴은 무표정하여 아무 감정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선원들은 이 노인의 얼굴을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이 미친 것은 이 섬의 여기저기에 서 있는 이상한 석상들,
사람의 얼굴을 본딴 거대한 석상의 얼굴 모습이 이 노인의 얼굴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었다.
  한 선원이 원주민에게 저 백인은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그 섬의 주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것은 이 섬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의 자손이다. 지금은 모두 다 죽어 없어지고
한 사람밖에는 없다. 우리네들의 조상은 갈색 피부 빛깔이었는데 흰 피부를 가진
사람도 있었다. 우리들 갈색 피부의 사람들은 22대 전의 추장 때에 다른 섬에서
찾아왔던 것 같다"
  이이스터 섬으로 알려진 이 섬은 폴리네시아어로 적어도 3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테 피트 테 헤누아"(섬들의 배꼽), "마타 키테 라니"(하늘을 보는 눈),
"라파 누이" (큰  나팔)-그리고 이 섬의 서쪽에는 이  섬과 거의 같은 크기의 섬이
있는데 이것은 "라파 이테이" 즉 "작은 나팔"이라고 불리고 있다.
  폴리네시아의 남동쪽 끝, 면적 1백 10제곱미터쯤의 불모의 고도가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550개 이상이나 있다고 하는 거대한
사람의 얼굴을 조각한 석상 때문이다. 고고학자인 W.J.톰슨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면석상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미완성품이긴 하지만 높이 약 20m로
채석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고,  가장 작은 것은 길이 약
93cm로 동굴 속에서 발견되었다. 5m내지 6m가량 높이의 것이 많고 그 얼굴은
고귀한 인물상을 본뜬 것으로 생각되며 아마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처음 유럽인이 이 섬을 찾았을 때 그들 석상은 무역풍(북위 30 - 40도쯤에서
적도로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씻기면서 늘어서 있어 그들의 눈을 놀라게 했다.
원주민이 말하는 22대 전의 추장이 이 섬에 찾아왔을 때도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이고 되풀이된 원주민끼리의 투쟁도, 노예로서 백인들에게
끌려가는 섬사람들의 모습도 이 석상은 아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더 먼 옛날, 지금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먼 옛날의 일을 석상의 무리는
그 눈으로 보아 왔음에 틀림없다.
  이 섬은 고대 사화산의 정상이라고 말해도 좋다. 몇 개 있는 화구 중 라노
알로이는 5백 40m 높이로 솟아 있다. 화구 가운데는 조각장의 흔적이 있다. 이
일터에는 거대한 석상이 미완성인 채로 드러누워 있으며 조각에 사용했던 도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다른 섬의 주민들이 공격해 왔기 때문에
석공들은 일을 하다가 말고 그대로 놔둔 채 도망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그림있음- 이이스터 섬에 남은 괴이한 사람얼굴의 석상)
  이들 거석상은 모두가 한개의 돌로 깎아 세운 것들이다. 이 몇 톤이나 나가는
무거운 돌덩이를 채석장(조각장)으로부터 몇 km나 되는 장소까지 운반해다가
이것을 세우는 데는 어떤 방법이 사용되어졌던 것일까.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방도가 없다. 분화구 밑으로 내려져 그 사면에 세워져 있는 것도 있는데 거대한
빌딩에 못지 않는 이 큰 석상을 분화구의 벽을 넘어들어 올려져서 몇 km나
운반되어 대석 위에 세워지고, 다른 빨간 용암의 거석이 머리 위에 얹혀져 있는
것이다.
  이 석상 위에 얹혀져 있는 빨간 색의 둥근 돌은 테라이의 언덕에서 캐낸 빨간
색의 화성암을 세공한 것으로, 그것만 해도 그 크기가 무려 4m나 되는 것이 있다.
이 돌은 멀리에서 보면 마치 머리 위에 원광이 비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고귀한 인물의 석상에 위엄을 더하기 위해서 얹혀진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폴리네시아의 전설에 따르면 폴리네시아의 모든 섬들에는 붉은 머리털과 흰
피부를 가진 인종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섬주민들도 이 섬에 최초의 주민의
자손이 이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있는 섬에서는 종교적인 제사 의식을
행할 때, 거기에 참가하는 자는 먼 조상과 비슷하게 하기 위해서 피부를 희게 하고
머리는 빨갛게 칠하는 풍습이 있다. 이이스터 섬의 제사에서도 제주는 머리를
대머리로 깎고 붉게 칠한다.
  길다란 귀, 뾰족한 턱수염, 똑바로 선 높은 코, 얇고 뾰족한 입술, 이 백색
인종의 전형적인 용모와 붉은 머리-이이스터 섬의 석상에 공통되는 이 특징은
도대체 무엇을 얘기해 주는 것일까? 유럽인이 최초로 이 섬을 방문할 때, 해안에서
이상한 '백인'을 보았다는 그 백인이란...
  큰 머리와 작은 다리-이이스터 섬의 석상이 갖는 장식은 배의 둘레에 새겨져
있는 띠 뿐이다. 그리고 이 띠 모양은 남아메리카 페루의 치치카카 호반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다. 전설에 이런 말이 있다.
  '창조신은 태양에 명하여 무지개의 띠를 풀어서 하얀 피부를 가진 자손들을 살게
하기 위해 그것을 전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듯이 무우 대륙에는 몇 종류의 피부 색깔, 머리 색깔, 눈 빛깔을 한
주민이 살고 있었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섬이 된 무우 대륙의 단편에 매달렸던
사람들은 한 인종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흰 피부에 붉은 머리를 한(혹은 붉게
머리를 물들이는 풍습이 있었든가, 붉은 모자 같은 것을 뒤집어 쓰고 있던가)
인종도 대륙의 남동부에 많이 있었고, 그들은 무우 대륙에서도 지도자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나쁜 조건속에 살아남을 정도의 생활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혹은 그들의 도덕적 감각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생존경쟁에 낙오되거나 부족끼리의 싸움에 패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이이스터 섬에서는 석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지만 그 밖에도 주목할 만한
유적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해안에서 뚝 끊겨 있는 포장된 도로, 해안선이나
라나 로라카 및 라나 라오 화산의 가까이에 있는 거대한 석조 신전의 흔적, 높이
약 10m, 길이 70m나 되는 돌더미--이 돌더미는 전에 이곳이 대륙밖의 부분과 붙어
있던 때, 다른 고장의 신전이나 왕궁을 짓는 재료로서 잘라내어 쌓아 놓고 실어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섬에서 롱고롱고의 문자라고 말하는 괴이한
상형문자일 것이다. 이것은 신관이 사용했다고 하는 목판(코우하우)에도, 또
신전의 돌벽에도, 거인상의 가슴에도, 암벽에도, 또 돌비에도 새겨져 있다.
  이 기호는 최근에야 많은 관심을 모아 하나의 체계를 가진 문자라는 사실이
학자들에 의해 인식되고 인도의 인더스강 상류에서 발굴된 고대의 인장과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그 인장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위글 마야의 종교무자이든가 나가마야의 심볼로서 적어도 무우 대륙의
상징으로 변화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W.J. 톰슨은 섬 주민들 중에서 오직 한 사람, 이 고대문자의 의미를 아는
노인의 도움을 얻어 해독해본 비문의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 섬이 최초에 우리의 조상에게 알려진 때, 평범한 돌을 아름답게 깔아
놓은 길이 종횡으로 달리고 있었다. 돌은 매끄럽고 그럴싸하게 깔아져 있었다.
코오피나무가 도로 양쪽 가에 무성하여 그 가지들은 머리 위에 손발처럼
헝클러져 있었다.'
  '길을 만든 것은 헤케이고, 그는 명예의 장소에 앉아 있었고 길은 그 곳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나누어져 나갔다'
  '그 복있는 땅, 아름다운 땅, 그 옛날 로마하가 사랑하는 항가루바와 함께
살던 곳'
  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작은 섬은 옛날 넓은 대륙의 일부였다. 편편한 돌을 아름답게 깐 도로가
몇 가닥이고 가로 세로 교차하여 달리고 있었다. 잿빛과 검은 반점이 있는
거미집의 모양을 본떠 도로는 교묘하게 얽혀져 있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
기점과 종점을 알 수 없었다.
  그 거대한 석상을 어떻게 운반하고 또 세울 수가 있었던지 그것은 전혀 알 수가
없지만 그곳에도 현대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고대인의 지혜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역주:노르웨이의 고고학자 하이엘다아르는 그것이 경사면의
이용과 지렛대의 응용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실증해 보였다) 앞에서 큰 석상의
허리띠와 남아메리카 페루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장식과의 공통성을 말했는데,
여기에는 더욱 중대한 공통성이 또 하나 있다.
  이이스터 섬의 석상 제작법에서 가장 특징이 있는 것은 돌을 새길때, 옆으로
놓은 채로 새겨 나가는 것이다. 즉, 재료인 큰 돌이 있는 곳이 조각장이며 일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돌을 새겨 나가는 가운데 당연히 그 주위에는 큰 동굴이
만들어진다. 이와 똑같은 예는 이곳으로부터 너무 멀어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다. 그 장소란 소아시아의 레바논에
있는 바알베크의 유적이다.
  바알베크의 언덕에는 장려한 신전의 유적이 있다. 지중해 주변의 고대 문명중
최대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 입구에는 높이 26.6m 주위 6.6m나 되는 큰
원주가 서 있다. 전에는 54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지금은 그 중
6개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대 원주의 절단 방법, 조각 방법, 그리고 아마
세우는 방법도 이이스터 섬의 큰 석상과 똑같은 공정을 거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알베크의 언덕 아래에는  거대한 동굴이 있는데 이 속에  약 1천 톤은 됨직한 큰
원주가 가로 위치로 새겨져서
미완성인 채 놓여져 있다. 이 매우 특수한 공정-그것이 까마득히 떨어진 지구상의
두 지점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사실을 우연의 일치로 보아 넘겨 버려야 할 것인가
  이이스터 섬의 큰 석상 조각자와 바알베크 언덕의 대원주의 제작자는 같은
(어머니의 나라)에서 이 고대 국민이 항해술과 함께 가장 전문이던 건축술을
체득하고 있었다고, 혹은 적어도 그것을 이어받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가 있을
것이다.

    태평양에 산재하는 무우의 유적

  태평양의 제도라고 말할지라도 그런 섬들은 광대한 대양상에 작은 그룹으로
웅거하고 있다. 그 섬을 하나하나씩 방문하여 대문명의 흔적을 찾아낸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한편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적이라고 해도 무성한 열대림 속에 감춰져 있거나 얼른 보아 그저 옛무덤이나
작은 언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또 원주민이 미신으로 인해 그런
유적으로 안내해 주려 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직도 많은 유적들이 태고의
모습 그대로 태평양의 바닷물 속에 아무도 모른 채 잠들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섬들을 소개하여 간단히 설명을 덧붙여 두고자
한다.
  쿠크제도:하와이의 정남방, 위도로 40도 떨어진 위치에 있으며 타히티 섬과
피지이 제도를 연결하는 선상에 있다.
  라도통가 섬:쿠크 제도에 속하는 이 섬에는 이이스터 섬의 비문이나 전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은 도로의 일부가 남아 있다.
  망가이아 섬:쿠크 제도의 최남단에 있고 이이스터 섬의 절반쯤 되는 섬이다.
이곳에는 이이스터 섬과 똑같은 유적이 있는데 이 섬에는 채석장의 흔적을 볼 수가
없다. 여기에서 돌을 쪼고 새기는 작업을 한 것 같지 않으니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것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통가 타브 섬:통가 제도에 속하는 환상의 산호 섬이다. 따라서 이 섬에는
자연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치형을 한 돌로 만든
거대한 유적이 있다. 70톤은 됨직한 큰 돌이 두개 세워져 있고 그 위에 25톤
정도의 돌이 얹혀져 있는 것이다. 이 섬에는 돌이라는 것은 없는 까닭에 다른
곳에서 온반해 온다 하더라도 적잖이 3백 km이상 떨어진 곳이 아니면 구할 수가
없다. 어떤 배를 이용하여 이런 큰 돌을 운반해 왔는지, 어떻게 해서 양륙을
했었는지, 어떤 방법으로 짜 맞추어 세웠는지, 불가사의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마아샬 제도 길버트 제도:이 두개의 제도에 속하는 여러 섬들에서는 키가 큰
피라밋이 발견되었다. 섬주민들은 (어머니의 나라)의 표상을 장식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들 자신도 그 유래나 의미를 모른다. 알로라이 섬의 공주 알라왈리가
부채에 무우 제국 왕실의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그대로다
  카로린 제도:이곳은 대륙이었던 무렵 버어마 방면으로 출발하는 기지였던지
유적도 많다. 나아칼의 비문이나 바르미이키의 붓으로도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해가 떠오르는 쪽으로 향하여 (버어마로 부터)한 달의 여정(배로)'의 곳에 있는
인류의 어머니 나라가 있던 때, 이 근방에서 최초의 이주자들이 인도나 버어마로
향하여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포나페:이곳에 있는 유적은 남태평양의 제도 중앙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다.
대 신전의 유적은 길이 약 100m, 폭은 약 20m나 되는 것이므로 그 벽은 지금도 약
10m 높이로 솟아 있다. 벽의 두께는 밑부분이 약 1.6m, 어머니의 나라의 표상이
많이 새겨져 있다. 이 신전은 운하와 토담으로 에워싸여 있고 아치형 천정의 방과
통로, 발코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을 깔아 놓은 넓은 뜰 아래에 앞뒤로 두
개의 현관이 있고, 3제곱미터쯤의 넓이가 있다. 이곳으로부터 외벽을 뚫고
운하까지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이 커다란 중뜰은 분명히 신전의 중심부로서 아마
가장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었을 것이다. 원주민의 얘기로는 옛날에 난파한
스페인 해적들이 이 신전의 유적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던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저장고 대신 사용하고 있었던 듯한 방에는 확실히 그들이 살고 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주민들은 이 신전 유적에 (마우리)라고 부르는 악령이 있다고 하여 가까이
가려고 조차도 하지 않는다.
  유적은 이 밖에도 해안 근처나 언덕 위 등의 공지에서 볼 수 있는데, 어디나
그럴싸한 좋은 장소로 바다가 빤히 내다 보여 전망이 좋다. 그 공지들 중에는
자그마치 20km이상이나 될 듯한 것도 있으며 돌의 유적들이 겹겹이 이어져 있다.
그것은 마치 대지와도 같은 것위에 위치해 있고 수로가 빙둘러 파여 있던 것 같은
형적이 있다.
  분명히 고대 도시의 흔적이다. 그 규모로 보아 아마 인구가 10만명 이하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우 대륙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하는 (거룩한 일곱
도시)의 하나로 어쩌면 티베트의 점토판에서 볼 수 있는 수도, 히라니푸라의
유적지인지도 모른다.
  스왈로우 섬:포나페 섬으로부터 경도로 따져 12도쯤 떨어진 위치에 있는 작은
섬이다. 괌도나 테니안도와 같은 구조의 피라밋이 있다. 서쪽에는 돌담이 있고 몇
개의 고총들이 보이는데 조분석이나 흙에 묻혀 있다. 그 아래 큰 건축물이 잠자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쿠사이 섬:캐롤린 제도의 남동쪽 끝에 있고 포니페도에 있는 것들과 마찬가지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선착장의 남쪽에는 돌로 호안공사를 해놓은 운하가 몇 개인가
있으며 각각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다. 이 교차된 위치에 인공 섬이 만들어져
있어서 전에는 그곳에 건물이 서 있었던 것으로 상상되며 지금도 10m이상이나 되는
탑이 하나 남아 있다. 이곳 원주민의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이 섬의 주민들은
아주 강하여 큰 배를 조종하여 동쪽으로 서쪽으로, 몇 달이고 항해를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르미이키가 '마야족은 강한 항해자로서 동서남북의 바다를
항해했다'고 쓰고 있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레레 섬:쿠사이 섬과는 작은 수로로 경계지어져 있다. 이 섬에는 원추형의
언덕이 있고 주위가 6m 내지 7m 정도 높이의 아주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온 섬에 걸쳐 큰 돌담과 거대한 성벽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런
것들 가운데는 연장 35.6m 에 70m 정도의 평행사변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있다.
길이 100m내지 130m, 혹은 50m에 미치는 큰 것도 있다. 벽의 두께는 대체로 4m
정도이고, 아치형 천정을 한 방과 인공적인 굴창고, 통로 등이 만들어져 있다.
  킹스 밀 제도:이 제도에 속하는 타피테이우 섬에는 길버트 제도와 마아샬
제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높은 피라밋이 있다.
  나비게이터 제도:이 제도의 섬들에도 돌로 된 건물의 유적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5백m나 되는 높은 산 위에 있는 것이 장관으로 160 - 70m 나 되는 절벽의
끝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거대한 화성암의 기단으로 무려 지름이 50m 높이 7m
가까이나 된다.
한쪽은 절벽인데 반대쪽에는 큰 수로를 팠으며 과거에는 6m 내지 7m 길이는 되었던
것 같다.
  마리아나 제도:괌도도 이 제도에 속한다. 이 제도에 있는 유적은 매우 특색이
있다. 피라밋형의 머리 부분을 자른 듯한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위에 실려 있는
반구형의 관석까지 하면 높이가 7m에 달한다. 기초가 3m쯤 두껍다. 그 중에는
관석이 무언가에 흔들려 떨어진 듯,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도 있다.
  땅바닥에 넘어져 있어도 흠이 없는 것이 있지만 완전히 부서져 버린 것도 있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관석은 격심한 지진이라도 만나 흔들려 떨어진 것 같다.
피라밋의 머리 부분을 잘라내 버린 듯한 모양 위에 반구형의 돌이 얹혀 있으며
기초는 주위 6 - 7m쯤이고 높이는 3.5m, 위로 올라감에 따라 약간 가늘어져 있다.
관석은 높이 1.7m, 폭 2m, 정도이다. 까칠까칠하고 단단한 침전암을 잘라낸 것으로
전체의 무게는 30톤쯤 될 것이다. 약 2 - 3m 간격으로 두 줄로 병행하여 늘어서
있고 그 길이는 18m쯤 된다.
  하와이:힐로에서 약 16km떨어진 쿠키이의 언덕에 대 유적이 있다. 이것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운반해 온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외에 이 언덕 위에는 돌이
없다. 정상은 평평하고 네모가 났으며 건물은 방위점에 따라 세워졌으며 바닥에는
돌이 깔려져 있다. 두 개의 각석이 5m쯤 떨어져 정확히 서와 동의 위치에 세워져
있다. 언덕의 정상 평평한 곳에는 돌이 쫙 깔려 있는데 그 돌은 정방형을 하고
있고 작은 것은 직경이 1m 정도가 된다. 어떤 돌의 바닥이나 잘 다듬어져 있고 꼭
들어맞게 되어 있다. 그러나 10m쯤은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다. 서쪽에는
아래부터 정상까지 약 100m의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마르케사스 제도:이 제도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되는 점이 몇 개인가 있어
이이스터 섬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는 유적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 대부분이 미발견 된 상태이다.
  이상이 남태평양의 섬들에 산재하는 유적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예를 든 것은
전체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다만 이런 유적의 존재에 의해 '이 지구의
역사 위에서 어느 시기에는 태평양상의 광대한 대륙이 존재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현재 각 제도가 흩어져 있는 근방인데, 그러니까 이러한 유사 이전의
유적--찢기어진 문명의 자취가 발견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해되면 되는
것이다. 또 그밖에 몇가지 덧붙일 것 같으면--
  뉴질랜드:원주민인 마오리족에게는 태고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는
전설이나 구비가 많이 있다. 또 고대의 종교적 심볼도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타트)즉 (토우템 풀)로서 마을 입구 같은 데에 세워져 있다.
(타트)라고 하는 것은 이집트에서의 호칭인데 이런 종류의 기둥은 마야, 잉카,
아틀란티스, 이집트, 카르데아 등의 고대 민족들이 다 이용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여기에는 전설 전승의 종류는 거의 없는데 나의 지리적 추론이
옳은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도 괴이한 것이 아니다. 북방의 종족이 가진 부메랑에
아주 소박한 기하학적 도형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 북부
오스트레일리아의 숲 속에 사는 종족은 매우 미개한데 동굴들에서 벽화가 발견되는
것은 분명히 선주민족의 문명을 말히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벽화에는
(라)(태양), 3의 숫자(무우제국을 상징하는 숫자), 그리고 도끼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영국인이 처음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식민한 때, 원주민들은 도끼같은 것은
전혀 몰랐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남태평양의 제도에 남은 신전이나 석상이나 돌기둥 등의 유적에
새겨져 있는 비문, 그리고 채석장에 일하던 그대로의 흔적을 남겨 놓은 작업의
흔적-특히 폴리네시아라고 일컫는 해역의 섬들에 과거와 현재를 연결짓는 데에
아주 귀중한 증거를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거대한 돌의 유적이 작은 섬들에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은 고고학자들에 있어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 말로 말미암아 해결된다. '시간이 흐르는 그늘 뒤에
감추어진 암흑의 부분이 있다. 지금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그것은
그 어둠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전설과 신화의 섬들

  상하의 나라 하와이에 이런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큰 새는 높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바닷 속에 알을 낳아 떨어뜨렸다. 그 알이
깨져 하와이 섬이 되었다'
  이 얼마나 남해의 섬다운 여유있고 흐뭇한 전설인가  하와이의 주민들은
예로부터 큰 새를 창조주의 상징으로 숭배해 왔다. 그리고 이 섬에 관한 전설은
아메리카 인디언, 멕시코 위글 제국, 이집트 등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 예로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남태평양, 특히 폴리네시아는 세계 전설의
발생지인 것 같은 냄새가 난다. 특히 천지창조의 전설에 관해서는 세계 속의
전설은 모두 폴리네시아의 그것으로부터 재료를 얻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폴리네시아의 섬들이 가라앉은 무우 대륙의 조각들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이상하다고 할 것은 없겠지만...
  앞에서 예로 든 하와이의 전설은 엘리스의 '폴리네시아 탐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샌드위치 제도(하와이)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세상에는 처음 물밖에 없었다.
하늘로부터 큰 새가 춤추며 내려와 바닷 속에 빠뜨린 알이 깨져서 하와이가
태어났다'
  이것은 우주개벽 전설의, 말하자면 원형이라고 해도 좋은 것일 것이다. 지구의
표면이 물에 덮이고 그 물 속에다 낳은 우주란으로부터 생명이 태어났다고 하는
생각은 형태는 다르더라도 거의 모든 천지창조 설화의 토대가 되고 있다.
  오브라이언의 '남해의 신비한 섬들'속에도 이런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폴리네시아의 대부분 섬들에는 예전 세계적인 대홍수가 나서 간신히 피해 나올
수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폴리네시아의 원주민들은 천지창조와 인류 탄생에 관해 매우 움직일 수 없는 한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 그 전설의 몇 가지를 여기서 들어 보겠다.
  '태초에 지구는 모두 물로 덮혀 있었다(사모아)'
  '타알로아는 붉은 흙의 알라에아로 남자를 만들고 콧구멍에 숨을 불어 넣었다. 
다음에 남자의 뼈로 여자를 만들고 이비라고 이름붙였다(하와이)'
  이 전설을 듣고 구약성경 속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연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인간의 아들은 그 형제를 죽였다(통가)'
  뉴질랜드의 마리오 족 전설에도 이와 같은 것이 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하는 성경속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나온 것은 아닐는지
  '조상들은 높은 탑을 세워 달 속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어떤지를 보고자 했다.
(피지이 제도)'
  그 탑의 유적이라고 하는 것도 현존해 있다. 이것도 성경 속의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다.
  '타알로아는 타히티 섬의 아버지이다. 그의 아내 하나는 지구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오로는 세계의 지배자였다. 오로의 형제 타네는 할리네의
신이다'
  타알로아는 섬들에 따라 달리 불리우고 있다. 이것도 고대인의 천지개벽설과
공통인데 그것은 삼위일체(삼위는 모든 신의 나타남이고 원래 일체의 것이라는
설)라는 사실을 아주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은 여담인 듯하지만 폴리네시아의 섬들에서 볼 수 있는 고대 대륙의
잔영은 유적이나 전설만이 아니다. 고대인이 오늘날의 인간들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초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더러 볼
수가 있다. 고대인은 맨발로 불 위를 걸을 수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고대의
기록, 등에서 볼 수가 있는데 하와이에는 새빨갛게 달군 바위 위를 맨발로 걸어도
아무렇지 않은 인간이 있다고 한다. 사실 필자 자신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피지이
제도에서 목격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일보다도 문명인들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외계로부터 차단되어
살아온 폴리네시아의 주민들이 예로부터 자기네들 사이에서만 전해 내려온 전설의
내용이 문명 사회에서 사용되어 온 기독교의 성경내용과 꼭 일치한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 아틀란티스 대륙과 지중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1798년 7월 2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이끄는 3백 28척의 함대가 이집트
해안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 함대가 싣고 있던 것은 2천 문의 대포만은 아니었다.
천문학, 기하학, 광물학, 화학, 고고학, 교량학, 토목건축, 오리엔트학, 정치, 경제,
화가, 시인 등 각 분야의 권위자들이 타고 있었으며 기함 '오리엔트'호에는 근사한
도서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물 위에 뜬 종합대학이었다.
  나폴레옹의 원정 함대에 타고 온 많은 지식인들은 보물더미 속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처럼 탐욕적으로 이집트 문화의 보물을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 고대
문화 속에서 발걸음을 옮겨 놓으면 놓을수록 신발을 신고 발등을 긁는 듯한 답답함과
안타까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거의 모든 유적, 고문서 속에서 볼 수
있는 히에로그리프(고대 이집트의 그림 문자)의 의미를 거의 하나도 정확히 판독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수께끼를 간직한 이 표상물은 인간, 동물, 공상 동물,
식물, 과실, 무기, 파도, 화염 등의 형태를 빌어 거대한 피라밋의 무덤, 신전의 벽,
관, 묘표(비), 조상, 신상, 지팡이, 나무, 돌 등이나 무수한 파피러스 문서의 위를
가득 덮고 있었다. 이러한 그림문자가 파라오(왕)의 나라 이집트의 전역사의 성립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의미는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다만 그것을 소개하는데 그치던가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엉뚱한 해석을 발표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손꼽는 이 학자들이 히에로그리프 앞에서 어안이 벙벙해서
우두커니 서 있던 때, 프랑스군 공병대의 한 이름없는 병사가 요새의 유적지에서 3가지
글자가 새겨진 검은 현무암을 발견해 냈다. 오랜 세월동안 사막의 모래알들의 마찰로
말미암아 그 표면은 일부가 다 지워져 가고 있는 터였으나 그 3종류의 문자란
히에로그리프(그림문자), 이집트, 데모틱(민용문자),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자는
놀랍게도 그리이스어였다.
  그리고 후에 프랑스의 자그만 지방 읍내의 책방집 아들로서 어학의 첫째라고 불리던
장 프랑소와 샹포리온에 의해서 이 비문의 의미가 해독되어 모든 히에로그리프 비문
해독의 열쇠가 되었다. 이 돌이야말로 이집트의 비밀의 첫 장을 여는 역할을 한
역사상으로 유명한 '로제타의 세 언어의 돌(로제타 스토온)'이다.
  이집트의 역사는 나일강 하구 부근 델타의 '북왕국', 상류의 카이로(멤피스)와
나일강 제일 폭포의 사이에 있는 '남왕국'이 메네스왕에 의해서 통일되어 제일 왕조가
세워지던 기원 전 2천 9백년 경부터 이야기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집트의
성립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금 수천 년, 아니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집트 문화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나일강 상류의 계곡지대에 있는 상이집트와
하구에 가까운 델타 지대의 하이집트로 나눈다는 사실은 아시는 바와 같다. 그 위에
상이집트에 식민한 것은 동방으로부터 찾아온 이민단이며 하이집트에 이민한 것은
서방으로부터 찾아온 이민단인데 모두가 무우 대륙이 그 근원이 되어 있다.
  무우 본국으로부터 아시아 대륙으로 건너온 식민단은 버어마, 인도, 바빌로니아 등을
거쳐 아덴만연안이나 홍해 서안의 각지에 도달하여 나일강 상류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북동부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는데 지금으로부터 1만 3천 년 전쯤의 일로 생각된다.
한편 무우 본국으로부터 미국 대륙에 건너온 일단은 고대 마야 제국, 아틀란티스 제국을
거쳐 아프리카에 도달하여 나일강 하구에서 가까운 삼각주 지대에 정착했는데,
지금으로부터 1만 6천 년 전의 일이다.
  (그림 있음-카르나크에 있는 아몬 신전에 있는 두 개의 기둥. 오른쪽은 상이집트의
문장인 연꽃이, 왼쪽은 하이집트의 파피루스가 새겨져 있다. 상,하이집트의 통합을 상징)
  나일 상류에 정착한 이주자들은 그 식민지를 마이오오, 델타 지대에 정착한 자들은
사이스라고 일컫고 있었다. 당시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지방, 코카사스 지방은 산지도
없고 나무는 무성했으며 물이 풍부하여 기후가 좋았지만 이 나일 지대는 그렇게 천혜의
혜택을 받은 식민지는 아니었다. 특히 하류의 삼각주 지대는 작열하는 태양에 모래밭은
불타는 것 같아 살기가 어려운 고장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이집트 신화의 신'토토'가 등장한다. 토토는 티그리스, 유우프라테스의 델타에
나타난 오안네스처럼 나일강의 델타에 나타나 사이스의 백성들에게 '오실리스'의
가르침을 전한다.
  예를 들면 그것은 인더스강의 델타에 나타났던 파라샬리아, 그리이스 북부 테와살리아에
나타난 '바다의 아들'펠라고스,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족의 쿠쿠루칸, 토르테카 족이나
아스테카 족의 교화자 케차르코아틀, 페루 인디오의 콘 티키 등과 마찬가지로 신의
가르침과 함께 역, 건축, 농경, 용수로, 법전, 천문학, 의학 등의 학식을 전한 문화의
사도이다.
  모든 이들 사도가 신화 속의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의 인물인 것처럼 토토도
실제의 인물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토토는 이집트인의 선조의 나라, 서방 행복의
나라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토토는 중앙아메리카에 있던 고대 마야 제국 신관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틀란티스
대륙에 건너와서 포교에 힘쓰고 있었는데 크로노스왕의 공주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어 신관의 몸으로 근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나라에서
쫓겨났다. 그는 아프리카로 도망쳐 나일강 하구의 불타는 듯한 모래 위에서 안주할
땅을 찾아냈다. 이 변경의 지대에서는 그의 행위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자가
없었다. 오히려 이 문화인의 도래를 기꺼이 맞아 주었다.
  그는 여기에 신전을 세우고 모국의 학문을 그곳 백성들에게 전해주었다. 고대 마야
제국의 '트로아노 고사본'에 따르면 마야의 여왕 무우도 오빠 왕의 분노를 사
아틀란티스를 거쳐 사이스로 향하고 있다. 이 변경은 당시 죄 있는 자의
유형지였었는지도 모른다. 무우여왕은 여기에서 토토와 만나 그에게서 종교를 배우고
있다. '트로아노 고사본'에 따르면 이 여왕의 재세 연대는 1만 6천 년 전부터 백 년
동안으로 되어 있다. 사이스 식민지의 초기의 연대와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하인리히 슐리이면은 그리이스의 미케이네의 유적에서 (사자의 문)에 새겨진 비문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이집트인의 시조 미조르는 계몽자 토토의 아들이었다. 토토는 아틀란티스왕 크로노스의
딸을 사랑하여 그녀와 함께 아틀란티스를 떠나 오랜 방랑 끝에 이집트로 옮겨가
살았다. 사이스에 최초의 신전을 세운 것이 그였으며 그곳에서 신관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토토가 사이스의 백성들에게 가르친 종교는 오실리스의 가르침이었다. 오실리스는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명계의 신으로 추앙되고 있는데 그는 아틀란티스 출신의
신관이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틀란티스의 이야기를 쓴 이집트의 파피리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오실리스는 아틀란티스 제국에 태어나서 무우 본국의 나아칼 대학에 유학하여 교사의
자격을 얻어가지고 귀국한 후에 신관장으로서 자제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아주 덕망이
있어 국왕에 추대되었지만 아우 세토가 이를 질투하여 죽이고 말았다. 토토는 그의
가르침을 이집트로 가져왔다'
  이 고문서에 의하면 오실리스가 태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만 년 전에서 1만
8천 년 전의 일이 된다.

    피라밋의 동서남북

  나일강 유역에 생겨난 두 개의 식민지는 점차 발전하여 제각기 왕국을 세우고
북왕국(하이집트), 남왕국(상이집트)이 되었다. 이 남북의 오앙국은 어쩌면 전쟁을
되풀이했었던 모양인데 메네스와 때 남북이 통일되어 이집트 제국이 되었다. 기원 전
2천 9백년 경의 일이다. 정치적으로는 통일국가가 되었지만 여기에 한 가지 혼란이
벌어졌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대 이집트인은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있었다. 사람이 최후의
깊은 잠(죽음)에 들어가도 영혼은 죽지 않고 그 (어머니의 나라(본향))으로 돌아가서
부활의 때를 기다린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어머니의 나라의 소재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상이집트의 주민은 하늘의 낙원은 동방에 있다고
생각했고, 하이집트 주민들은 부활의 동산에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대의 어떤 시기까지 이집트인은 동쪽을 거룩한 방향으로 생각하는 자와 서쪽을
거룩한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자의 두 파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명백한 해석을 한 이집트 학자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 도널드 A.매켄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지고 있던 동방 숭배와 서방 숭배와, 이 상반되는 두 가지
사상은 낙원이 서방에 있다고 하는 오실리스의 가르침과, 동방, 즉 해가 뜨는 쪽을
거룩한 방향이라고 하는 태양 숭배, 이 두 종류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두가지 사고방식의 차이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경문 속에까지 나타나 있다. 오실리스란
신성시되고 있던 고대의 왕으로 서방 숭배의 신들에 속해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인간들에게는 왜 동방 숭배와 서방 숭배 두 가지 사상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참으로 싱거울 정도로 간단한 이유에 기인한다.
  (그림있음- 피라밋은 지금도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던지며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신비를 간직하고 숨쉬고 있다.)
  이집트에 온 식민단에는 두 개의 코오스가 있었다. 하나는 동방으로부터 버어마, 인도를
경유해 왔다. 그들은 영혼이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나라는 동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마야, 아틀란티스를 경유해서 온 자들은 돌아갈 땅은 서쪽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다. 동과 서로, 그들은 제각기 자기네들이 거쳐온 코오스로부터 (어머니의
나라)의 소재를 생각했는데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고 있던 그 어머니의 나라란 오직 하나,
태평양상의 무우 대륙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그들이 동쪽을, 혹은 서쪽을 거룩한 방향이라
하여 고집한 것은 단순히 자기네들이 더듬어 온 식민 코오스라는 지리적 조건에
기인해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예를 들면 피라밋의 건조와도 관련성을 갖게 된다. 한 사람의 왕을 위해
이 거대한 돌의 무덤은 각 사면이 똑바로 동서남북의 방위에 근거해서 쌓아졌다. 그 오차는
손바닥 하나 이상이 아니라고 한다. 왜 그렇게까지 정확성이 요구되는 것일까?  그것은
르.프론존 박사가 발견한 유카탄 반도 우쉬마르의 (비의의 신전)의 내진의 문이 바로
서방으로 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에 근거한 것이다. 어머니의 나라가 있다고 믿는
동쪽, 또는 서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방향에 관실의 입구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어머니의 나라로 돌아가서 다시 부활해 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또 죽은 자가 저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부활해 오기 위한 안내서가 '죽은자의
책'이었다.

    파피러스의 '죽은 자의 책'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가성소오다액 속에 70일간 담갔다가 다음에 항문, 콧구명
등에서 내장이나 뇌수를 갈고리로 빼내고 그 다음에 수지를 채워둔다. 그런 다음 시체를
씻어 기름을 바르고 향유에 담근 아마포로 정중히 감는다 미이라의 제조법이다.
  이집트인들은 사후의 생활이 생전의 그림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미이라를
장사지낼 때, 그 묘소에는 음식물, 의복, 가구, 식사도구 등이 갖추어지고 죽은자의
심부름꾼으로 우샤부티라는 인형이 시중을 들고, 피라밋의 내부에 변소 시설까지
있다는 용의주도함이다.
  이 죽은 자의 부장품 가운데 아무래도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죽은자의 책'이었다
이것은 죽은 자의 명계 안내서라고도 할 것이어서, 이것이 없으면 물정이 어두운 저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1백 25장에 의하면 혼은
명예의 왕 오실리스의 심판의 광장으로 안내되어 여기에서 생전의 행위에 따라 42명의
신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혼은 정의의 날개와 저울에 걸리게 되는데
혼쪽이 가벼우면 유죄로 인정되어 괴수에게 잡아 먹혀 버린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아아루우의 들(극락)에서 부활의 날까지 편안하게 지낼 수가 있게 되어 있다. '죽은
자의 책'은 이집트의 제21왕조 무렵(기원 전 1090년 경)파피러스에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 고전은 고대 이집트인의 종교관, 사생관을 아는 데에도 귀중한 문헌으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이집트 학자가 이 책을 만든 고대 이집트인의 참 목적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있음- 무우제국의 소멸을 말해주는 (죽은자의 책)표제)
  이 고전이 죽은 자의 길 안내서라는 말은 앞에서도 썼지만 또 한 가지 이 책이
무우 대륙의 붕괴와 그 때에 생명을 잃은 무수한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엮어진
기념의 글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림있음-창과 방패를 든 목각병사  이집트 왕자의 무덤을 지키는 이 보병은
왕자가 생전에 군사에 관심을 가졌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사후세계에서의 호위
구실도 한다. 이집트 병사는 각자가 직접 디자인한 방패를 지녔다. 싸움터에서
한눈으로 자기의 방패를 분간하기 위해서이다. 제11왕조 시대)
  (그림있음- (죽은 자의 책) 속에 그려져 있는 무우대륙의 지도)
  '죽은 자의 책'이 도대체 언제쯤 쓰여진 것인지 정확한 것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최초에 쓰여진 때에는 고작 몇 장으로 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힌두교의
성전인 '마하.바라아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런 종류의 고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관이나 승려가 자기들에게 유리한 자구나 장절을 덧붙여 왔기 때문에 방대한
규모로 되어버린 예가 많다. 그런 점으로 보아 최초에 쓰여졌던 때의 정신을 추측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히에로그리프라고 불리는 그림문자, 그 해독은 현재 많은 이집트 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고대의 상징문자는 언제나 이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글자만을 읽어 연결해 나간다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를 해독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인도나 티베트에서 나아칼의 비문 해독을 위해 고심한 필자는 '죽은 자의
책'의 원전 해독에 이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아시아 방면으로 부터의 이민단이 상이집트에 식민지 마이오오를 만들 때, 인도로부터
일단의 나아칼이 식민지로 향해가서 '거룩한 영감의 책'의 보급에 힘써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쉽사리 상상되는 일이다.
  잘 주의해서 보아 가면 '죽은 자의 책'속의 각 장이 많건 적건 간에 무우 제국과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하나하나를 인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선 그 타이틀만을 적어보고자 한다.
  앞의 그림은 Per-m-h-ru라고 읽는다. 이집트 학자의 말에 따르면 Per=Coming forth,
hru=day, m=from으로 풀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죽은 자와 함께 땅 속에 장사된 글(책),
해의 눈을 보지 못하는 명계의 글이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필자도 여기에는 대체적으로 찬성이나 단 한 가지만은 해석이 다른 점이 있다. m을
전치사 from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반대이다. m은 하나의 상징문자로 무우를 의미하는
명사인 것이다. 따라서 이 타이틀의 그림문자는 '무우 국은 해의 눈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읽는 것이 진짜인 것이다.
  (그림있음-무우대륙의 붕괴를 설명하는 그림문자-죽은 자의 책으로부터)
  앞의 그림에서 든 이 그림문자는 무우 대륙의 붕괴를 말해주는 것이다.
  1은 화염을 상징한다.
  2는 무우 대륙의 종교문자 M. 무우대륙을 나타낼 때, 가장 보통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문자이며, 또 도형이기도 하다.
  3은 나락, 물통, 구멍 등을 나타낸다.
  4. 불로 가득 채워져 있는 나락. (해독)'무우 국은 불도가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것이 가라앉은 때, 불꽃이 솟아 올라 부근 일대를 다 에워쌌다'
  '죽은 사람의 책'속에서 매우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표상이 있다. 그것은 제단을
도안화한 것 위에 가라앉은 태양이 있으며 또한 그 위에 말라 시들은 연꽃을 조화시킨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연꽃은 언제나 말라 시든 형태로 다루어지고 있는 사실에는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림있음- 무우제국과의 관련을 보여주는 (죽은 자의 책)의 그림문자)
  1은 제단을 나타내는 이집트의 그림 문자.
  2는 신성한 연꽃, 무우 국을 상징하는 꽃이다.
  3은 광망이 없는 태양, 이미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은 것을 보여준다.
  해독-'태양은 영원히 죽은 무우 국 위에 빛나지 않는다. 무우 국은 어둠의 세계에
갇혀 버렸다'
  무우 국이 함몰하기 전에 이집트에서는 3개의 돌기부를 가진 모양(4)을 사용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세 개의 육지로 된 "서방의 나라들" 무우 대륙을 나타냈다. 무우
대륙이 함몰하고 나서는 한가운데의 돌기부 위에 빛이 없는 태양을 놓게(6) 되었다
또 때로는 한가운데의 돌기부를 떨어뜨리고 그 곳에다 빛이 없는 태양을 놓는(5)일도
있었다.
  '죽은 사람의 책' 제81장에 이런 그림문자를 볼 수가 있다. 이집트의 학자들은 이것을
'(태양의 들)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연꽃의 요정'이라고 해독하고 있다.
  이 머리는 머리카락의 모양을 보아도 분명히 이집트인이다. 그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그 연꽃은 말라 시들어 있다. 이 연꽃은 죽은 무우 대륙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한 줄은 전체 장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연꽃의
요정'이라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순수한 무우 국민의 피를 받은 자'가 되며,
'태양의 들'은 '태양의 제국'이라고 말 할 수가 있겠다. 어머니의 나라의 말로는
무우는 어머니, 들, 국토, 제국, 입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해독-'우리는 순수한 피를 받은 이집트인이며 부조는 어머니의 나라 무우로부터 온
자, 그 나라 '태양의 제국'은 이미 사라지고 이 세상에 없다'

    아틀란티스 제국군

  '당신들은 단 1회의 대홍수 밖에는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도 몇
차례나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들은 모르지만 당신의 나라에는 인류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고 완전한 한 종족이 생존해 있었다. 그리고 극히 일부가 살아 남아서
당신도, 당신들도, 당신의 도시도 그곳으로부터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이스의 철인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속에서 일곱 현인의 한 사람인 솔론이
이집트의 도시 사이스에서 아주 나이가 많은 신관에게 들은 이야기라 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이스, 그 고대 문명은 기원 전 1천 5백년 경, 미케네 문화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제 1회 올림픽이 이루어진 기원전 776년 경부터
눈부신 활약으로 역사 위에 등장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속에서 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미케네 문화가 나타난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전에 이미 그곳에는
아주 높은 문명을 가진 인류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이스, 그것이 역사에 나타나기 전, 적어도 수천 년 전 어쩌면
수만 년 전의 옛날에 그곳에는 아주 우수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던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 본원은 무우 대륙인데 그
주류는 동방 식민선, 즉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마야인이었다.
  여기에서 회상해 보시기 바란다. 남아메리카의, 지금은 사라져버린 바다, 아마존해의
주변에 카라 마야족이라는 고대 민족이 있어 잉카 제국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마노아의 황금도시'의 대문명을 쌓아 올려가고 있었다는 사실을--그들은 그 왕성한
국력과 뛰어난 항해술에 힘입어 아마존해를 따라 남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해서 대서양으로
나와 지브랄탈 해협으로부터 지중해로 들어와서 그 양쪽 해안에 조금씩 정착하면서
이윽고는 그리이스, 소아시아 등지로 진출하여 흑해, 카스피해의 연안 부근에서 같은
무우 대륙의 서방계이민의 흐름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카라 마야계의 이민들은 대서양에서 직접 유럽 대륙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대서양에는 거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대륙이 있었다. 그것은 무우 대륙에
이어 당시의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틀란티스 대륙이다. 그리이스에 있어서는 먼 태평양에
있는 '어머니의 나라'무우 대륙보다는 지중해의 출구에 있는 아틀란티스 대륙쪽이 훨씬
관계가 깊은 것이었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에 관한 이야기를 할아버지인 쿨리티아스에게서
들었다.
  '당신들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랄탈 해협)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바다 입구의
전면에 한 개의 섬이 있었다. 이 섬은 리비아 (아프리카 북부)와 아시아(소아시아)를
합한 것보다도 컸다. 항해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섬에서 다른 제도에 이르는 항로가
개설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들 섬으로부터 진짜 바다(대서양)를 에워싼 반대쪽의
대륙(아메리카 대륙)전체로 건너갈 수가 있었다'
  이 아틀란티스 대륙도 원래는 무우 대륙의 식민지였는데 점차로 강대한 제국이
만들어져 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풀루타크는 '솔론'가운데서 '이집트인과 서방의
나라들과 사이가 중단된 것은 아틀란티스와 먼 저편에 있는 대륙이 대홍수를 만나
괴멸한 후에 밀려 내려온 진흙탕 때문에 배가 항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9천 년 전의 일이다'고 적혀 있다. 솔론이 이집트를 방문하여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기원 전 6백 년이라고 하니까 기원 후를 2천 년이라고 하면 9000+600+2000 = 11,600이
된다. 즉 1만 1천 6백년 전에 아틀란티스 대륙은 함몰한 것이 된다. 그러면 무우
대륙(1만 2천년 전 함몰)보다도 전에 가라앉았다고 볼 수 있는데 어는 것이나 그것은
개념상의 계산이므로 확실한 것은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이 양대륙이 같은 시기의 지각 변동에 의해서 해저에 가라앉은 것만은 사실이다
무우 대륙의 밑을 달리고 있던 대중앙 가스대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아틀란티스 대륙의
땅밑으로도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틀란티스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까지 1만 3천 9백년 동안 왕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 1대의 왕은 지금으로부터 2만 5천 6백년 전에 왕위에 오른
것이 된다. 오실리스의 가르침을 이집트의 사이스 백성들에게 전한 토토가 아틀란티스의
크로노스왕의 공주와 사랑에 빠졌고 마야의 무우 여왕이 형의 분노를 사 아틀란티스를
경유하여 이집트로 가서 토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얘기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다
  트로이의 발굴로 유명한 하인리히 슐리이먼의 손자 파울로 슐리이먼이 할아버지의
유언형태로 발표한 수기 속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하인리히 슈리이먼이 1873년에 히살리크의 언덕에서 트로이의 유적 발굴을 한
때, 둘째층에서 훌륭한 푸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견했는데 그 발견된 재화 중에 놀랄
만큼 큰 청동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 속에는 작은 점토의 그릇, 상, 정교한 금속 세공,
화석이 된 뼈로 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그 항아리나 물건들의 어떤 것에는 페니키아의
상형문자로 '아틀란티스왕 크로노스로부터'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하인리히 슐리이먼의 유언에는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883년, 나는 파리의 루블 박물관에서 남아메리카의 티어와나코에서 발굴된 물건들의
콜렉션을 발견했다. 그것들 가운데 나는 점토의 그릇이나 석회로 된 뼈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발견했다. 그런 것들은 내가 '푸리아모스의 보배'의 청동 항아리 속에서
발견한 물건들과 꼭 닮았었다. 이와 같은 일치가 우연일 수는 없었다'
  파울로 슐리이먼은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해 조사해 가는
중에 할아버지의 콜렉션 가운데서 올빼미의 머리가 붙은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 낡은
항아리 속에서는 고대의 특수한 금속으로 된 판이 발견되었다. 파울로 슐리이먼은 이와
같은 금속판을 찾아서 온 세계를 싸돌아 다녔다. 그리고 이집트의 석판, 중부아메리카의
낡은 항아리, 아프리카의 서해안, 멕시코의 티오치와칸의 피라밋에서 같은 모양의
금속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카라 마야족이 동으로 동으로 나아가다가 지중해가 끝나고 레바논의 산지에 바알벡의
고도가 있었다. 이곳 대신전의 기둥이 태평양상의 고도 이이스터 섬의 큰 석상과 같은
방법으로 잘라서 건립되었음은 앞에서도 말했다. 유럽, 소아시아, 아프리카 북부의
고대 문화는 무우 대륙으로부터 중남아메리카, 아틀란티스로 두 개의 대문명을
경유하여 온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아주 번영했다. 금에 이어 귀중한 것으로
여겨지던 고대의 오리할콘을 이용하여 왕궁이나 수많은 신전이 세워졌다. 가장 큰
신전은 아틀란티스의 시조 포세이돈을 모신 신전으로 주위는 황금으로 둘러져 있었다
항구에는 배가 많았고 훌륭한 경마장까지 있었다. 그리고 전차 1만대, 쌍두마차 3만대,
천 2백 척의 병선, 그리고 기병, 중무장병, 경무장병, 사궁병, 투석병, 투창병, 수병
등으로 이루어진 잘 훈련된 대군단이 왕궁이 있는 수도를 지키고 있었다. 그 밖에
이집트로부터 이탈리아에 이르는 열 군데의 점령 지역에 군단이 파견되어 있었다
  아틀란티스 제국은 한 발 한 발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침략하여 그리이스로 다가왔다
그리이스의 각 도시는 아틀란티스의 강대한 병력에 겁을 먹고 싸워보지도 않고 패색이
농후했었다. 이 때 그리이스의 각 도시의 군대들의 선두에 서서 분전한 것은 아테네의
군단이다.
  이집트의 늙은 신관이 솔론에게 한 말이다.
  '솔론이여, 당시는 당신네 도시의 군세가 전세계에 그 용맹을 떨치고 있었소
용감하고도 교묘한 작전으로써 그리이스인들의 선두에 서서 싸워 다른 도시의 군대가
퇴각해도 버티고 저항했소. 그리고 마침내 진격해 오는 적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오'
  이리하여 그리이스인은 아틀란티스의 침략의도를 분쇄하고 노예화되어 가고 있던
'헤라클레스의 기둥'안쪽의 나라들을 해방했다. 그리고 다시 그 여세를 몰아 아틀란티스의
본토로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리이스의 웅도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의해 좌절된다. 그것은 무우 대륙과 마찬가지로 아틀란티스를 습격한 대함몰이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닷 속으로 가라앉았을 때, 3천 명의 아테네 병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아테네의 군대들은 아마 아틀란티스 대륙의 점령군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점령한 영토와 운명을 함께 하고 바다 밑으로 사라져 들어가 버렸다.

    애처로운 그리이스 문자

  유사 이전의 그리이스 문명도 무우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이주자들에 의해 쌓아진
문명이었다. 그들은 같은 흐름인 아틀란티스와는 가끔 전쟁을 했는데 그러나 태평양의
건너편에 있는 어머니의 나라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이스 크로스'라고 불리우는 특수한 십자형이 있다. 이 십자형은 그리이스의
고대 문명, 고전 속에서 종종 나타나는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수수께끼가 되어
왔다. 이것은 그리이스 뿐만 아니라 유카탄 반도, 중앙 아메리카 각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윈터는 그의 저서 '과테말라'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이스 크로스라고 일컫는 이상한 심볼은 킬리구아, 코판 등 등 유적의 돌에서
발견되었으며 연구가들 사이에 많은 추측들을 낳게 하고 있다'
  (그림있음-그리이스 크로스(왼쪽)와 무우제국의 왕실문장)
  무우 제국 왕실의 문장을 연상할 때, 그 의문은 풀릴 것이다. 문장의 중앙 부분에 이
모양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우의 언어로 "우우루우밀"이라고 읽을 수
있는 표이고 그 의미는 (--의 나라) (--의 땅)더 나아가서는 (--제국)(--왕국)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표상이 발견되는 땅에는 그 위에 무언가의 나라 이름을 붙인 무우
제국의 식민지 또는 식민 제국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이스와 무우 대륙의 관계를 가장 잘 얘기해 주는 것은 그 알파벳이다. 현재의
그리이스는 기원 전 403년에 문법학자들이 아테네의 알파벳을 다시 배열하여 만든
것으로서, 그것은 마야어를 기원으로 할 뿐 아니라 배열 그 자체가 무우 대륙의 붕괴를
얘기하는 한편의 서사시인 것이다.
  예를 들면 Alpha는 카라 마야어의 Al(무겁다), paa(깨지다), ha(물)이 합해져 된
것이다.
  Beta=Be(걷다) ta(장소, 평원), Gamma=Kam(받다) ma(어머니, 대지), Delta=Tel(깊다,
밑바닥), ta(곳), Epsilon=EP(막히다), zil(모가 나다), onom(선풍), Zeta=Ze(치다),
ta(곳, 장소 외), Eta=Et(함께), ha(물), Theta=Thate(넓힌다), ha(물), Iota=Io(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 ta(장소, 곳 외), Kappa=Ka(침전물), Pa'a(깨지다, 방해하다),
Lambda=Lam(가라앉다), be(가다), ta(곳, 장소)
  이와 같이 한 자 한 자의 성립이 하나의 글귀로 되어 있어 그것을 이으면 무우 대륙의
최후의 양상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이스어  카라, 마야어  우리말 번역
  Alpha  AL-paa-ha  무겁게 물을 깨뜨리다.
  Beta  be-ta  평원에 펼쳐지다.
  Gamma  kam-ma  지면을 덮다.
  Delta  tel-ta  낮은 장소로
  Epsilon  ep-sil-on-om  장애물,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Zeta  ze-ta  땅을 치다.
  Eta  et-ha  물과 함께
  Theta  thetheha-ha  물이 펼쳐진다.
  Iota  io-ta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 위에
  Kappa  ka-paa  방해되는 것을 치우다.
  Lambda  Lam-be-ta  가라앉은 것은 --의 나라
  Mu  Mu  무우(제국)
  Ni  ni  꼭대기만
  Xi  xi  물 위에 나타남
  Omikron  om-ik-le-on  선풍은 몰아치다.
  Pi  pi  조금씩
  Rho  la-ho  그곳에 오기까지
  Sigma  zi-ik-ma  차가운 바람이
  Tau  ta-u  골짜기가 있던 곳
  Upsilon  u-pa-zi-le-on  지금은 심연, 차가운 장소
  Phi  pe-hi  흙탕이 만들어지다.
  Chi  chi  입이 떨어지다.
  Psi  pe-zi  수증기가 발생하여
  Omega  o-mec-ka  화산의 침전물
  이것이야말로 문자에 의해 불리어진 장송의 노래이며, 문자에 의해서 쌓아진
기념비이다. 그리이스인다운 복잡한 발상이라고 할까.
  (해독) '물은 넘쳐 평원에 펼쳐지고 온갖 장애물이 겹쳐 쌓였다. 대지는 물과 함께
찢어졌다. 물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뒤덮었고 지반은 무너져 무우 대륙은 가라앉았다
약간의 꼭대기만이 물 위에 남았고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바람은 점차 차가와져 가고
있었다. 골짜기였던 곳은 심연이 되어 차가운 물이 맴돌았다. 진흙탕은 모여 둑처럼
쌓여 올라갔다. 입이 벌어지고 그곳으로부터 수증기와 화산의 침전물이 솟아 올라왔다.

    무우 대륙으로부터 파생한 언어

  그러나 카라 마야어와 그리이스 문자와의 공통성은 놀랄 것까지는 없다. 사실은 전세계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말 가운데 마야어, 즉 무우 대륙의 이주자들이 사용한 말이
서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어는 그 절반까지가 카라 마야계의 언어이며 인도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것이 나가
마야의 말이다. 싱가리이스(세일론어)에는 마야어의 원형을 많이 볼 수가 있으며
그리이스를 포함하여 유럽의 말은 카라 마야계가 농후하다. 멕시코 인디오의 말과
일본인들의 말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같은 의미, 같은 발음의 것이 많으며, 어쩌면
통역이 없이도 대화가 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케 할 정도이다. 잉카의 말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고대의 아카드인, 카르디아인, 그리고 이집트에는 나가 마야계의
말도 많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언어는 여러 가지로 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좀체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이스에서는
마야어의 K를 종종 g로 바꾸고 있다. t는 d로, I는 r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변화는 다른
나라의 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어의 변화는 대부분 쓰는 방법을 잘
모르거나 문법을 확실히 모르거나 하는데서 야기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국어들 가운데는 반드시 다른 나라와 공통의 발음, 또는 의미를 지닌 말이
몇 가지 있다. 그리고 그런 말은 거의 세계 각지에서 공통되고 있다. 말하자면 언어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하나의 기원을 가진다'
  F.맥스 뮐러(독일 태생, 영국의 언어학 종교학자 1823 - 1900)의 이 말은 충분히
증명되는 것이다. 뮐러는 '6천년사'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 페르샤의 고대어인 젠드와의 공통성이나 그리이스,
라틴, 영국 그 밖의 국어를 각각 비교해 보면 확실히 어딘가 먼 하나의 기원(뿌리)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아주 흔한 물건이나 인물, 단순한 기물이나 행위를
표현하는 말, 아버지, 형, 딸, 아들 같은 가족 관계를 나타내는 말, 숫자, 대명사, 명사나
동사의 어미 등에 특히 공통점이 많다. 이것은 우연의 결과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러 나라나 민족이 서로 먼 옛날의 일을 알지 못한 채로 넓은 지구상에 여기저기로
흩어져 갔다. 그러나 모방이나 차용을 제외하면 그들의 말은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나뉘어져
온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6. 북아메리카의 고대 유적

    살아 있던 공룡

  '그들 괴물은 무서운 육식동물이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를 가지고 있었다. 마운틴
라이언(퓨우마)도 그것들에 비하면 두더지와 같은 존재였다. 어느날 하늘 위에서
소리가 났었다.
  "너희 괴물들아, 돌이 되라!  인간과 원수가 안 되도록 돌이 되어라!"
  그리하여 괴물들은 영원히 돌이 되었다. 그때 지면도 굳어졌다. 지금도 그 때 돌이
된 괴물들을 원래 그대로의 큰 모습으로, 또 찌그러지거나 부스러진 모습으로 볼 수가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 즈니족 신화의 한 귀절이다. 아메리카 맹수 퓨우마도 두더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이 대괴수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즈니족의 조상들이
살고 있던 무렵에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실제로 그런 괴수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일까?
  자연과학 박물관으로 가보자
  전세기 시대의 진열실에 제대로 된 맘모스의 화석이나 트라코든, 스테고사우루스라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공룡류의 실물 그대로의 모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흉폭했던 것 같은 대괴수--설명판에는 티라노사우루스라고 쓰여져
있다. 공룡류는 겉모양과는 달리 초식성이고 순진한 것이 많은데 티라노사우루스는
다르다. 체장은 15미터에 달하고 육식성에 큰 입에는 날카로운 이가 있고 사지에는 갈고리
모양으로 꼬부라진 보기 흉한 발톱이 있어 다른 동물들의 위협의 대상이었다. 즈니족의
신화에 나오는 괴물의 정체는 아무래도 이 티라노사우루스다운 것이다.
  (그림있음-아리조나주 하바스파이 협곡 암벽에 그려진 대공룡 티라노사우루스)
  그런데 박물관의 설명판에 따르면 이 대공룡은 백아기의 말기, 지금으로부터 6천만
년 이상이나 전에 지상을 어슬렁거리고 다녔다는 셈이 된다. 6천만 년--설마 즈니족
조상이 그런 태고시절부터 북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면
신화는 공룡의 화석이라도 본 고대 인디언이 공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란 말인가?  이런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아리조나주의 하바스파이, 협곡의 암벽에 그려진 그림을 한
번 보면 알 수가 있다. 거기에는 일찌기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흉폭한 공룡,
티라노사우루스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는 것이다. 꼬리가 굵고 앞다리가
빈약했었다고 하는 그 특징도 참으로 잘 파악되고 있다. 바위 위의 이 벽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2천 년 전에 북아메리카 대륙의 선주 민족에 의해서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종류의 공룡의 존재를 과학자들이 안 것은 겨우 백 년 남짓 밖에 안되며
정확히 그 형태가 파악된 것은 50년 전쯤의 일이다. 그것을 1만 2천년 전의 고대인이
정확히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6천만년 전에 죽은 괴수의 화석으로부터 이것을 그림으로
그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에 이 괴수가 살아 돌아다니고 있어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인간은 자기네들의 조상이 맨 먼저 언제쯤, 어디에 나타났던가하는 의문마저도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6천만 년이나 전에 사멸했다고 제멋대로 단정했던 괴수가 사실은
마침 1, 2만년 전까지 살아 남아 있어 자기들의 조상들과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지금 또 생물의 화석이라는
것이 세계 도처에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이다.
  네안델탈인, 필트다운인, 하이델베르크인 등등, 인류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인종의
화석의 발견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예를 들면 북아메리카 대륙의 고대인의
유물, 유적같은 것은 비교적 소홀히 넘겨 버리고 있는 것 같다. 독일의 네안델탈인이
굴 당초부터 병리학의 권위 필효우 등에 의해서 정상적인 인류의 고형으로 의문시되며,
'여명의 사람'이라고 명명된 영국의 필트다운인이 발견자 도오슨의 조작이라고 안
사실을 달리하더라도 이른바 원인(원숭이인간), 원인(원시인)으로 불리우는 것이
사실은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퇴화한 것인지,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동물류라는 
사실은 그 두개골의 형태로 보아도 명백히 알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된 선사 시대 주민의 유골이나 유물은 결코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아주 귀중한 것이다. 원인, 원인으로 불리우는 것이 존재했던 시대와 그다지
격차는 없지만 그곳에는 훌륭한 문화의 흔적이 인정되는 것이다. 오늘의 과학자가 말하는
진화설에서는 가령 무우 제국의 성전 '거룩한 영감의 책'의 수수께끼마저도 풀 수가
없다. 이 5만년 전에 쓰여진 성전은 현재의 과학자들도 풀 수가 없는 생명의 본질,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어 무엇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재의 과학자가 엘렉트론이라 부르고 있는 것의 성질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문자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역사를 아는 일이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적어도 암혈 거주 민족이나 현재의 인디언 이전에 살고 있던 선주
민족은 기록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서부 지방의 여러 주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곳에는 적어도 네 시기에 걸친 선사시대의 문명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돌이나 암벽이나 건축물에 독특한 방법으로써 그들이 기록해 놓은 것들을 볼
수가 있으며 단편적이기는 하나 그들의 신앙, 그 생활 등을 알 수도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나라에서 사용된 독특한 종교문자, 심볼이나 그림문자의 의미나 조합 방법만
이해하면 그것들을 해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바스파이 협곡의 암벽 그림

  북아메리카 대륙의 지붕 록키산맥을 태평양 연안으로 향해 넘어서면 블루우 산지와
월라월라 산지를 따라 불모의 건조지대가 있다. 이른바 오리건 사막이다. 이 사막의
한가운데에 (화석의 호수) (폰루 레이크)라고 불리우는 장소가 있다. 옛날에 호수였던
것이 산의 융기에 의해서 물은 없어졌지만 그 자리가 비옥한 평야였던 것 같다.
  지금은 바싹 말라 붙은 사막이지만 그곳으로부터 전세기 동물 뼈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아래의 지층으로부터는 공룡 따위 중생대 동물 뼈의 화석이 나타났다. 지표에 가까운
층으로부터는 홍적세의 말기 2만 년 정도까지 북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다고 하는
코끼리의 일종인 마스토돈의 뼈가 나타났는데 그 뼈와 함께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화살촉이나 창이 발견되고 있다.
  오리건주의 남쪽 인접 네바다주에는 북아메리카 선주 민족의 연구에 있어 아주 귀중한
자료들이 아직도 손이 미치지 못한 채로 잠자고 있다. 동굴의 벽이나 단애에 수백, 수천에
이르는 심볼, 종교문자 장식 들을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이 고대
민족이 '어머니의 나라'로부터 이 대륙으로 건너온 것이 사실이라는 것과 중앙아메리카의
고대 민족 마야인과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그 언어도 고대 마야어로부터 분류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레이프바인 협곡에는 신전의 설계도가 돌에 그려져 있는 것이 있다. 이 신전은 함몰된
무우 대륙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돌에는
제단에 바쳤던 희생의 동물을 불에 태워 죽이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희생의 제물을
불에 태우는 풍습은 아마 이때부터, 무우 대륙이 불도가니 속에 삼켜졌던 때부터 그
희생자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 생각된다.
  같은 네바다주의 골드 가르슈라는 곳에는 아주 괴상스런 모양의 바위가 있다.
마치 인간이 두 다리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아서 탄식하고 있는 모양인 것이다.
  일부러 조작한 것이 아니고 그런 모양을 한 천연의 암석인 것이다. 이 인간의
모양을 한 바위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에 두 개의 심볼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입이
벌어지고 불꽃이 솟아나와 나라가 침몰했다'는 의미의 그림이다. 즉 왼손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에 물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바위와 사막 뿐인 황무지를 가는 여행자에게 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도표인 것이다. 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심볼은 위글 마야가
사용했던 것이므로 몽고계의 이주자에 의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눈에 띄는 바위를
이용하여 나그네의 편의를 도모함과 동시에 그 바위 모양으로부터 잃어버린 '어머니의
날' 무우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기념비로 삼는다는 것은 밉살스러울 정도로 어질고
착한 고대인의 지혜와 심정이 아니었겠는가
  무우 대륙으로부터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한 최초의 이주자들은 현재의 남서부
여러 주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들 식민지는 같은 무렵 멕시코로 이주한 사람들과
함께 지각 변동에 의한 큰 파도에 의해 파괴되어 씻겨 내려갔다. 그 뒤 제 2, 제 3의
식민이 이루어졌는데 그 무렵부터 조산 운동이 활발해지고 지진과 높은 물결에 의해
현재의 콜로라도, 아리조나, 네바다의 여러 주들에 있는 옥토는 돌변하여 황무지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제 4번 타자로서 이윽고 무우 대륙으로부터의 최후의 이주자들인
암혈 거주 민족이 타석에 등장한다. 현재 그들이 정착해 살았던 발자취가 산지의 절벽
등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보면 이때 이미 산악은 생겨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콜로라도강이 캘리포니아 만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일대를
목표로 무우 대륙으로부터 찾아왔다. 그리고 기라강, 리틀콜로라도, 그랜드 리버라는
콜로라도강의 지류를 따라 내륙 지방으로 들어왔었다. 이리하여 아리조나로부터 뉴멕시코,
다시 콜로라도강 상류의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으로 그들의 거주 범위는 넓혀져 갔다
다시 샌 쥬앙, 화이트, 얀파 등의 각 지류를 따라 콜로라도의 원류로 다가갔다. 이코스는
켤코 추측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현재도 그들이 도표로 이용했다고
생각되는 바위 등에 그 진로를 보여주는 벽화, 기호 같은 종류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유카탄 마야어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것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식민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것은 도대체 언제쯤의 일이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분명히 이렇다 할 뚜렷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첫 번째 이주자들이
온 것이 조산 운동이 시작 되기 전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1만 2천 년 이상이나 옛날의
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아리조나의 '화석의 숲'의 조사를 한 스미소니안 연구소의 월터하우 박사는 4종류의
민족의 유물을 발굴하고 있는데 그 네 가지 문명 가운데 세 가지까지가 조산 운동 이전의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하바스파이 협곡의 암벽에 그려진 그림도
코끼리의 일종인 마스토돈이나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등의 야수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던 1만 2천 년 전 고대인의 생활을 여실히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즈니족의 홍수 전설

  '먼 옛날에 즈니족은 한결같이 마음이 비뚤어진 자들 뿐이어서 신이 아무리 충고해도
나쁜 일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은 하늘과 땅 두 수원의 둑을 떠뜨렸다
즈니족은 신의 진노가 내렸을음 알았다. 그들은 당황하여 "타이요아라네(샌터 마운틴)"의
정상으로 향하여 달아났다. 그러나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일단은 다른
사람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조소했다.
  그러나 물이 점점 불어가는 것을 보자 이 자들도 잠잠해졌고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신관들은 춤이나 노래로써 신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하여 산불을 피우며
주문을 외워대고 제물을 바쳤지만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신관의 장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
백성들을 위해 신의 진노를 진정시키고자 신께 기도했다. 이윽고 그는 백성들에게 말했다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길은 한가지 밖에 없다. 가장 잘난 총각과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제물로 신에게 드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누구를 제물로 바쳐야 할까를 의논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아주 훌륭한
젊은이가 선발되었다. 그러나 제물로 바칠 아가씨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을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장 예쁜 아가씨라면 그 일족의 장인 카시쿠의 딸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시쿠의 볼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는 딸을 불러 세우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젊은이와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란히 서자 누구의
눈에나 이 이상의 신에 대한 제물을 없다고 생각되었다. 물은 점점 불어나서 사람들은
겨우 머리만 내놓고 있는 산 꼭대기에 서 있었다.
  훌륭한 젊은이와 아름다운 아가씨는 몸치장을 다시하고 물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러자 얼마 후 물은 빠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윽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 신을 업신여기고 있던 한 남자가 타이요아라네를 올려다보니
정상에 아름다운 남녀가 서 있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젊은이는 깜짝 놀라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카시쿠는 자기네가 바친 제물을 신이 받아 주셨다는 정표로 여기에
두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으므로 사람들은 눈이 부신 듯이 그 모습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도 산꼭대기의 바깥쪽에 크게 보이는 것이 젊은이의 모습이요 안쪽에 작게 보이는
것이 아가씨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도 즈니족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이다. 즈니족은 호피족과 함께 푸에블로
인디언에 속한다.
  푸에블로 인디언--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이만큼 흥미깊은 종족은 없다. 그리고 또
무우 대륙과의 연관성을 이만큼 똑똑히 보여주고 있는 민족도 없다.
  호피족과 즈니족은 모두 두 가지 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두가지 신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는 있지만 숭배하지는 않고 있다. 즉 우리의 성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신의 이름은 '바아인타'와 '마짜이레마'이다. 그들은 이 두 신을 인간의 시조며 신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지상에 나타난 최초의 남과 여는 자연의 산물은 아니며
신이 특별히 만들어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무우 제국의 '거룩한
영감의 책'의 교의와 공통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은 이 신의 이름으로써도 증명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하인타'는 무우의 말로 '아.하이.인.타',
'마짜이레마'는 '마 짜이 레 마'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두 말을 이어합치면
무우의 말로 이런 의미가 된다.
  '신은 지구에 살도록 하고자 하여 최초의 사나이와 최초의 여자를 만들어 주었다.
이 신의 자식들은 전인류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이다'
  뉴 멕시코주의 선사는 그대로 푸에블로 인디언의 역사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그들이
아메리카로 온 때, 이미 아주 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우수한 채색 토기나
돌이나 기와로 집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종족의
말 가운데는 '어머니의 나라'의 말, 또는 그곳으로부터 변화한 말이 굉장히 많은
것이다. '시보라의 거룩한 일곱 도시'--어쩐지 신비한 메아리를 지닌 말이다. 지금도
아메리카 대륙의 어딘가에 고대에 번영했던 일곱 도시가 아무도 모른 채로 잠들어
있다고 한다.
  이 시보라의 일곱도시의 전설도 푸에블로 인디언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 옛날 이 종족은 일곱 개의 번영한 도시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무우
제국에는 종교와 학문의 중심이 되는 도시가 일곱 개 있었다. 이것을 '일곱 개의 거룩한
도시'라고 불렀는데 식민지에서는 즐겨 이를 본받았었다. 아틀란티스도 마찬가지의
도시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대 인도에도 일곱 개의 리시(거룩한 도시)가 있었다. 푸에블로
인디언의 전설은 분명히 '조상은 해가 넘어가는 방향을 향해 배로 바다를 건너왔다'고
그들이 '어머니의 나라'로 부터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뭏든 이 푸에블로 인디언의 전설에 대홍수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조상이
최후의 지각 변동에 의해 바뀌어졌다는 증거이다. 그들이 키체 마야족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새의 날개가 돋친 뱀 케차르코아틀을 상징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써도 명백하다.
  라스베가스 대학교수인 E.L.휴우이트는 어느 고대인이 살던 유적지에서 유물과 함께
동물의 뼈를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 뼈를 조사한 결과 홍적세(2만 년-백만년 전)의 동물로서 겁치호라고도 불리우는
스미로토돈과 고대의 코끼리 마스토돈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
마스토돈의 상아로 만들어진 생활 도구까지 발굴되었다. 하바스파이 협곡의
티라노사우루스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있음-돌에 그려진 그림(네바다주 글레이프파인 협곡)
  신전의 설계도
  1. 신전의 설계도. 2. 함몰한 국토와 '무수(2a)한 인명이 잃어진 것을 보여준다.
3. '태양'(a)은 '함몰한 나라'(b)의 위에 두 번 다시 빛나지 않는다. 4. 이 신전의
내전, M자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은 무우가 이미 죽은 것을 보여준다. 5. 3개의
입구가 있는 것은 종교적 위계에 따라 예배지가 3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해독) '많은 생명과 더불어 무우 제국은 가라앉았다. 그 위에 이젠 해가 비치지
않고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었다. 죽어간 나라 무우를 기념하기 위해 이 신전을
세운다'
  (그림있음-무우제국을 위로하는 제전)
  1. 제단 위에 희생 제물로 바쳐 진 동물. 2. 제물을 굽는 불. 3. 가라앉는 태양
지하의 불에 의해서 함몰한 무우 대륙을 나타낸다.
  무우 국을 위로하는 제전의 모양을 그린 것으로서 제물을 불에 굽는 관습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구약성경에 번제라고 일컬어 아브라함이 아들인 이삭을 제단 위에서 구워 여호와
신에게 바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대의 종교의식에서는 희생을 굽는 것이
보통이 되고 있었는데 무우 대륙의 함몰 이전에 그 풍습은 볼 수 없다. 불에
에워싸여 가라앉은 무우 대륙과 그 주민들을 애도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것이 그 기원이
라고 생각된다.
  (그림있음-암굴 거주민의 표상들-아메리카,네바다주)
  암굴 거주민의 표상(아메리카.네바다 주)
  a. 높이 떠오른 빛살이 있는 태양. 무우 제국의 상징이다.
  b. 떠오른 아침해.
  c. 낮의 태양.
  d. 함몰한 태양. 검게 뭉개져 버린 경우. 영구히 해의 눈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e. 돌출부가 3개, 무우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어둠 속에 갇혀버린 무우 대륙
  f. 뱀은 Khan, 즉 대양 Khanab의 상징, 반원의 선은 서쪽의 수평선. 세 개의 깃은
무우 제국  "무우는 해가 잠긴 저편, 바다쪽에 있다"
  g1. 상형문자 U-Iummil, "--의 제국" 무우 왕실의 문장방패에서 볼 수 있다.
  h. 연꽃봉오리  (어머니의 나라)의 상징화
  g. 머리가 하나에 깃벼슬이 없는 뱀  물의 상징
  h2. 이것도 물의 상징  때로는 뱀을 대신해 사용되었다.
  i. 방위점을 보여주는 경우, 사변형이 이 +자를 이용했다.
  k. 무우 제국의 알파벳 첫째 문자로 ah라고 발음한다. hun이라고 읽으면
숫자의 (1)이 된다. 또한 Ahau(왕중의 왕)의 의미도 된다.
  l. 알파벳의 n.
  m. 심연--골짜기, 구멍.
  n. 알파벳의 x
  o. 마찬가지로 u를 거꾸로 한 것.
  p. 이 뱀과 나무의 상징에 관해서는 몇 페이지를 써야 할 만큼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무우 대륙의 함몰 후에 볼 수 있는 것이다.
  q. 이것도 이중의 의미를 갖는 상징  (창조)와 숫자의 (9).
  r. 위글마야의 종교적 상징.
  s. 위글의 문자로 h.
  t. 날개를 나타낸 것인지 관목을 나타낸 것인지 분명치 않음.
  u. 백.
  v. 선을 나타내는 상징인데 그다지 오랜 것은 아니다.
  w. 이것은 북.중.남아메리카 서해안의 지형을 나타내는 진귀한 것이다.
  x. 특별히 상징적인 의미는 없다. 세계 각지 동굴의 벽 등에서 곧잘 볼 수 있다.
  y. 자연 속에 있는 능동적인 요소와 수동적인 요소를 나타내는 기호인데 이것에도
이중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z. 장식적인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aa. 짐승의 껍질을 그린 것.
  bb. 짐승의 머리. 이집트 등지에서도 곧잘 볼 수 있다. 제전이나 의식에
사용되어진 동물인 듯 뿔로 장식되어 있다. 그다지 오랜 것은 아니다.
  cc. 다수를 나타낸다. 보통은 하향으로 그린다.
  dd. 나그네들에게 방향이나 도정을 가르치는 도표.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문자를 갖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 역사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들의 선주 민족은 암벽이나 거주의 벽 등에 이와 같이 훌륭한 기록을 남겼다. 그것은
단편적이기는 하나 이 대륙의 선사를 얘기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우 대륙의 종교
문자 및 표상의 지식이 있으면 그것들을 해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림있음-암굴 거주민의 도표)
  1. 육로의 이정표(아리조나주). 2. 육로의 이정표(뉴 멕시코주). 3. 식민지에 대한
육로 및 수로를 보여주는 도표(유타주)
  요소의 암각 등에 새겨서 뒤에 오는 같은 종족들의 표지로 삼았다. 종족에 따라서
제각지 특징이 있다.

    사라져 간 수수께끼의 고대 도시

  끝없이 이어진 모래언덕의 물결,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선 암각의 실루엣을
시커멓게 떠 올라오게 하는 괴기한 암산의 모습--콜로라도나 오리건의 사막으로
대표되는 서부의 황야이다. 록키 산맥이 만들어지기 전, 일찌기 이곳이 넓은 옥토의
평야였고 높은 문명을 가진 인류가 살고 있었다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 풍경이다.
그러한 황야의 여기저기에서 나그네는 때때로 이상한 구멍을 발견하는 수가 있다.
서부에서는 이것을 바팔로우 월로우라고 불러 아메리카의 들소들이 뒹굴던 자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팔로우 월로우는 들소가 만든 것은 아니다. 수천년 전의 혈거민족이 살던 흔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민족이고 어떻게 이 지상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어 버렸는지
분명하지 않다'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R.W.길더 교수는 이와 같은 중대한 발표를 하고 이 설을
입증이라도 하듯 네브라스카주의 바팔로우 월로우 속에서 고대 민족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1. 곱게 다듬은 점토의 파이프, 2. 짐승의 뼈로 만든 낚시바늘, 3. 사팔눈을
한 점토로 만든 사람의 얼굴, 4. 핑크색의 소우프스톤(동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사람의
머리, 5. 조개로 만든 장식품, 6. 큰 사슴의 뿔로 만든 머리빗 등이다.
  '그 중에서도 동석으로 된 사람의 머리는 참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것으로서 잘
닦여져 있다. 그 쓰개나 귀덮개로 보아도 이집트 인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
얼굴은 현재 오리엔탈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왕 람세스 2세의 흉상과 꼭 닮고 있다'
  길더 교수는 그 보고에서 이렇게 말하고 다시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지하의 주거흔적의 바닥에는 그으른 나무토막, 식물의 줄기, 풀잎이나 또 옥수수
알갱이 축 등이 흩어져 있었다. 굴 안에는 반드시 저장고가 갖추어져 있고 생활 도구와
그 밖의 필수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 입구는 점토로 발랐고 그 위에 재로 둘러
씌워져 있다. 병처럼 속이 넓게 되어 있고 큰 항아리 만한 크기가 있었다. 하나의
굴 속에 이런 저장고가 몇 개씩이나 만들어져 있는 것도 있었다. 굴 속에는
대홍수 때 밀려온 진흙이나 퇴적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입구만이 오목하게
보이는데 그 형태로 보아 들소가 뒹굴고 있던 자국이라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길더 교수가 발견한 고대인의 주거 흔적은 분명히 지각 변동 때의 대홍수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합중국에서도 동쪽의 켄터키주의 블루우 릭스프링스에서 몇 년전에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지하 4미터 되는 곳에서 인부의 스코프(도구이름)끝이 마스토돈의 뼈에
부딪쳤다. 다시 더 파들어가자 사력층이 있고, 다시 그 밑으로부터 부석이 나타났다
  이들은 네모로 잘라져 있고 그 표면은 곱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마스토돈은 홍적세에
생존해 있던 코끼리의 일종이다. 사력층의 지각 변동 때의 대홍수에 의해서 생겼던
것이라고 한다면 이 부석을 만든 고대인은 적어도 대홍수 이전에 아주 높은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는 결과가 된다.
  켄터키의 역사가인 조지 U.랭크 씨는 그 저서 '렉싱텅시사'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재 켄터키주의 렉싱팅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도시는 사실은 태고에 모습이 사라져버린
민족의 수도의 폐허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 민족이란 어떤 인간들이었던가. 그 이름도,
말도, 역사도, 어떤 흔적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만일 이 지방에 찾아온 초기의
개척자나 모험자들이 그 오래된 폐허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런 고대 도시나 민족의
존재 그 자체마저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먼 옛날의 언젠가 여기에
도시가 번영했고 강대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
그 민족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왔던 것일까? 어떤 종교를 갖고 어떤 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인디언에 앞서 몇백 년 전의
주민이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돌의 대신전을 건립하여 장려한 도시를
건설했다. 얼마 뒤 그들이 멸망한 후에 벌거숭이 인디언들이 찾아와 잡초로 뒤덮힌
폐허에서 사슴이나 들소를 몰고 다니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생활하고 일하다가 죽어갔다. 그것은 컬럼부스가 신세계 아메리카 대륙에 스페인
제국의 국기를 세우기 휠씬 이전에 고올이나 부리헨이나 게르만이 방랑의 이민족에게
정복되기 전, 아니 저 로마 제국이 그 영화의 절정에 달했던 때보다도 더 훨씬 옛날의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공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가 멸망함과 동시에 영원히 잊혀져 버렸던 것이다. 사멸한
국가의 잃어버린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들이 공예에 뛰어나 있었다는 것은 그 건축물이 '니네베 (고대 앗시리아)나
칠레(고대 페니키아)등의 옛 도시와 견줄만 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 될 수 없다. 그들은 바위나 돌 위에다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북아메리카 대륙--특히 합중국 남서부의 여러 주들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오랜
바위그림, 기호, 문자의 부류들은 모두 암굴 거주 민족의 것으로 단정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암굴 거주 민족은 이 대륙의 선거주자로서
확실히 무우 대륙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이 민족에 속하지 않는 축도 그런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위글계, 유카탄계, 키치에계 등 세 가지 특징을
볼 수가 있는데 모두가 마야어--즉 무우 대륙 이주자들의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현재 암굴 거주 민족의 문화라고 일컫고 있는 것 중에 사실은 더욱더 오랜
선주 민족의 것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각각 다른 종족--이라고 하기보다도 다른 국가를
조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가 적어도 빙하기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예를 들면 바위굴의 표면에 그려진 그림이나 문자가 조산 활동의 토지 융기에 의해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지각의 파열로서 바위들도 찢어지고 있다는 현상을 보아 알게
되는 것이다.

      7. 중앙 아메리카의 매몰된 도시

    고대 도시의 발굴

  멕시코시티로부터 약 7km 떨어진 데스코코에서 아레판토라에 이르는 약 1백
80제곱킬로미터라는 광대한 멕시코 분지가 펼쳐져 있다. 인적조차도 없는 이
끝없는 황무지에 직경 50m내지 100m는 됨직한 큰 구멍이 마치 거인의 눈처럼
멍청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 수는 수백--아니 천에 달할지도 모른다.
  이들 큰 구멍은 아즈테카의 수도 건설을 위해 사용된 점토 채굴의 흔적이다.
참으로 3백 년 동안에 걸쳐 이 분지의 점토 채굴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세계에 자랑하는 근대 도시인 멕시코시가 되어 잡초들의 무섬함 속에 잊혀져
버린 큰 구멍의 수들--그것들이 멕시코의, 아니 아메리카 대륙의 선사 시대
연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멕시코 석판의 콜렉션으로 알려져 있는 윌리엄 니이벤씨, 이 광물학자는 이
오래된 점토 채굴의 구멍으로부터 이따금씩 인공의 돌바닥이라고 생각되는
것이거나 콘크리트의 파편 같은 것을 발견해내고 있다. 그것이 위대한 발견의
실마리가 되었던 것인데 니이벤씨 자신이 광범위하게 걸친 발굴 작업에서
이러한 구멍이 얼마만큼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니이벤씨에 의한 '매몰된 고대 도시'의 발굴은 고고학상은 말할 것도
없고 지질학상으로도 아주 중대한 발견이었다. 그것은 단절된 채로 버려져 있던
과거와 현재--이 두 가지를 맺는 고리테를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 그 자신의 보고에 따른 이 획기적인 발굴의 모양을 소개하자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은 광대한 분지의 북서부, 길이 40km, 폭 20km
정도의 범위였다. 여기에서 나는 3층으로 겹쳐 쌓인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곳은 발이 묻힐 듯한 부드러운 흙이 지표를 30cm쯤 덮여 있고 그 아래에
사력, 조약돌의 층이 있었다. 그것을 3m 가량 파올려가자 최초의 유적과
맞닥쳤다. 콘크리트의 바닥, 돌이 깔린 바닥 등의 파편이 있었다. 항아리의
파편, 작은 점토의 인형, 섬록암으로 만든 장식 구슬, 화살촉, 창날, 실패 등이
나오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매우 파손되어 있었다.
  제 2층은 다시 2m 남짓 아래, 지표로부터는 약 5m 남짓되는 곳에 있었다. 
역시 돌바닥이나 콘크리트의 파편이 있고, 파손은 제 1층보다도 심했고 한 개의
항아리도 발견되지 않아 이곳에 전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이 또 아래에 귀중한 유적이 잠자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좀더 확인해 보기 위해 제 2층의 아래를 파냈는데 4m나 파들어 가도 사력과
조약돌 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중단하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인부들이 가진 스코프가 가벼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화산재의 층으로서 1m
정도 두께로 주욱 겹쳐져 있었다. 그 재를 신중히 젖혀 나가자 석조 건물 같은
것이 나타났던 것이다.
  건물은 몇 채나 계속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이들 건물에는 재나 기와 조각과
자갈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발굴을 계속해 나가자 목제의 문짝 같은
것에 부딪쳤다. 사실 이 문짝이야말로 나를 "알지 못하는 고대 도시"로
이끌어준 문이었던 것이다. 지표로부터 11m 남짓이나 파 내려간 곳에 있었던
것이다.
  목재의 문짝은 이미 화석화되어 있었는데 반원형의 가로대가 붙어 있고
이것은 지름이 15cm 정도의 통나무를 꾸부린 것이었다. 나는 멕시코의 유적으로
아아치형의 가로대를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 짐의 벽이 돌을 시멘트로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가로대는 오히려 그 취향을 즐겨 썼던 것인
듯하다. 이것은 고도로 발달된 문화가 있었다고 말하는 증거가 된다.
  나는 뛰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이 문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그 곳은 10m
사방이 됨직한 큰 방으로서 안에는 거의 화산재 뿐이었다. 이 사본은 이 방이
위로부터 짓눌려 내려오는 흙이나 돌의 무게를 견뎌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돌을 콘크리트로 연결시킨 판판한 지붕은 안쪽으로 휘어진 채 무너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방 한쪽 구석에 약간 움푹한 부분이 있고 거기에도 화산재가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이 속에서 거의 원상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공품들이 발견되었다. 또 몇
사람 분인지 모르는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만져보자 소석회처럼 부스러졌다.
지진과 화산의 폭발로 말미암아 생매장되어 버린 사람들일 것이다. 나의 눈에
발견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을 그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일까
  약 2m의 통로 안쪽에 다음 방이 나타났다. 입구로부터 4미터쯤 들어간 곳에
지름이 40cm정도의 붉은 진흙으로 굳힌 작은 아궁이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끝이
가늘어진 굴뚝이 위로 뻗어 있었다. 아궁이 주위의 바닥에는 작은 순금으로
생각되는 파편들이 엉겨붙어 있었다. 그리고 점토를 구워서 만든 2백여 개나
되는 주형(거푸집)이 있었다. 이 집은 아마 이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귀금속
세공장이의 집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 거푸집의 두께는 1mm의 반에도 미치지 않는 참으로 정교한 것까지 있었다.
지난 날에 머리나 가슴이나 팔이나 발 등에 붙은 금, 은, 동의 장식품들은
여기에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거푸집의 안쪽에는 노랗게 빛나는 산화철이
두껍게 발라져 있었는데 이것은 녹은 금속물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
듯했다.
  후에 나는 이 집 안에서 얇은 금의 장식품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내가
파렌케나 미트라의 유적 등에서 발견했던 금세공품과는 그 취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정교함과 그 아름다움은 저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첫 발걸음을 들여놓은 때 뜻밖에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아즈테카
제국의 문명--그것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은 문명이 거기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방 안쪽으로 또 하나의 방이 있었는데 이곳은 꽤나 파손이 심한 상태였다. 
아마 앞의 방이 일하는 곳이고 이곳이 거실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다.
이 방의 벽에는 청색, 황색, 녹색, 흑색 등의 색채를 이용하여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전에 내가 이집트, 에톨리아, 그리이스 등지에서 본 것 가운데 최고의
부류에 들어가는 것과 겨눌 만한 근사한 것이었다. 벽의 바탕색은 담청색이고
천정으로부터 4m정도의 폭에 심홍색과 흑색으로 풀리이즈(그림의 띠)가
채색되어 있었다.
  그런 다음에 무언가 천연의 왁스같은 것으로 색을 내어 마무리를 한 듯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퇴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첫째 그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짓눌려 내린 지붕의 파편에 세 군데가 파손되고 있었는데 무엇을
그렸었던가를 식별해 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물--아마 신분이
높은 인물의 생애를 그린 것이었다.
  이 방의 지하에는 무덤이 있었다. 깊이 약 1m로 시멘트로 발라져 있었다. 
75개의 뼈 조각들이 인체의 형태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것은 아마 벽에 그려진
인물의 뼈일 것이다. 두골에는 동제의 손도끼가 찍힌 채로 꽂혀 있었다. 아마
이것이 그 주인공의 목숨을 빼앗아간 것인 듯했다. 친족들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것을 빼내지 않은 채 장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 뼈도 상당히 오랜
세월이 지난 것으로 보였는데 손이 닿으면 그냥 부서져 버렸다.
  무덤의 바닥에는 1백 20개에 달하는 붉은 흙(적토)으로 구워 만든 인형과
질그릇 등이 놓여져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주위를 끌었던 것은
동양식으로 책상다리를 하고 무릎에 손을 얹고 앉아 있는 남자의 상이었다.
책상다리를 하는 것은 동양인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이다. 이
흙인형의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목은 자유로이 뗐다 붙였다 하게 되어 있었다.
인형의 얼굴생김새는 소아시아 지방의 페니키아(블레셋인)인, 또는 샘족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 장소에서 6km 남짓 되는 곳에
오래된 강의 흔적이 있고 말라 붙은 하상의 모래자갈들 밑에서 무수한 적토
또는 점토로 만든 흙인형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다 남아시아 지방의
민족을 연상케 하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여기에는 미토라, 팔렌케, 치첸이짜라는 중앙아메리카의 유명한
유적에 못지 않는 문명의 유적지가 매몰되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대대적인 발굴이 단행되어진 때는 폼페이와 같이 화산 폭발로 묻혀버린 고대의
대도시가 모습을 드러내어 화제를 불러 일으키게 될는지도 모른다'

    작은 중국인의 수수께끼

  멕시코의 알지 못하는 도시에 관한 니이벤씨의 제 1보는 여기에서 끝나고
있다. 그러나 그 제 2보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사실은 멕시코 분지에 우리들이 모르는 아득한 옛날, 적어도 몽고인에
가까운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그 작은
중국인을 발견한 곳은 멕시코 시티로부터 약 7km 떨어진 알레판토라 근방의
샌미겔 아만톨라에서 점토 채굴의 흔적이 있는 구멍을 약 11m 남짓 파내려간
곳이었다.
  그것은 제 3층에 속하는 유적이었는데 약 10제곱미터쯤 되는 방이 있고
콘크리트 벽의 하부는 허물어져 있었다. 이 방 밑이 무덤으로 되어 있었다.
중앙에 장방형의 콘크리트로 된 하대가 있고 그 위에 인골이 눕혀져 있었다.
신장은 1.7m보다 크지는 않았다. 팔도 아주 길어서 거의 무릎께까지 닿을
정도였는데 무엇보다도 그 두개골이 넓은 얼굴, 넓적한 코, 짧은 머리의 몽고계
특징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었다. 목에는 비취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이 녹색의
보석은 동양에서 아주 중히 여기는 것으로 멕시코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인골의 곁에는 조개로 된 세공품 구슬이 있었는데 전부 해서 5백 97개나
되었다. 물론 그 패각 구슬을 꿰어 놓았던 가죽끈은 흐늘흐늘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 가죽끈으로 꿰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화폐가 흩어져
있었다. 이 화폐와 함께 가장 중대한 발굴물--(자그만 중국인)이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멕시코 인디오들 가운데는 몽고계라고 생각되는 자들이 꽤
있어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아시아에서 왔다고 하는 설의 증명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흙인형이 멕시코의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하는
얘기는 아직 들은 적이 없다.
  (그림있음-니이벤씨가 멕시코에서 발견한 매몰된 도시의 조각품들)
  그 흙인형의 눈은 가늘게 치켜 올라가 있고 면직물의 상의에 헐렁한 바지, 그
옷도 현재 중국인의 풍속과 별로 다름이 없었다. 높이 약 18cm에 붉은 색을 한
무른 점토로 만들어져 있고 두 팔이 없었지만 이미 화석이 된 현재로서는
망치로 두들겨도 깨지지 않을 것처럼 바깥쪽이 단단하게 굳어져 있다. 가슴폭이
8.7cm 배 부분의 두께가 3.7cm, 큰 귀걸이를 달고 작은 장식용 단추가 붙은
모자를 쓴 것은 중국의 옛날 관리들을 방불케 한다. 상의의 가슴 장식에는
확실히 금박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이용한 흔적이 있었는데 완전히 퇴색되어
있어서 그 연대가 오래임을 연상케 했다.
  이 오랜 흙인형이 아즈테카 문화의 산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이것은
아즈테카가 멕시코 고원에 터전을 잡기 위해 수천 년 전부터 땅 속 깊이 묻혀
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원래 멕시코의 역사에서 아즈테카인은 신래자이다.
그들은 건설자는 아니다. 토르테카인이나 오르메카인이 쌓아 놓은 문화를
완력으로써 가로챈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멕시코에 최초의 문화의 뿌리를 내리게 했던 것은 어떤 자들이었을까?
(자그만 중국인)이 그것을 무언중에 말해주는 것이다...'
  멕시코의 지하 10m에 묻혀져 있던 중국 인형은 아무래도 수수께끼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아무래도 중국 문명이 오래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우 대륙에서 온 몽고(황색)계의 인종 가운데 이와 같은
풍속을 가진 민족이 있으며, 그것이 아시아 대륙에 이식되고 나서 무언가의
형태로 중국인들에게 물려준 것일 것이다. 이 사실은 다른 발굴품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이 밖에도 니이벤씨의 보고 가운데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제 3층, 즉 가장 오래된 문명이 가장 고도인 듯하다는 사실, 결국 문명의
발달은 반드시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또 청동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금속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청동에 앞서 산화철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문명은 멕시코로부터 유카탄 반도에 걸쳐
분포한 가장 오랜 문명이라고 생각되는 고대 마야 문명과 분명히 이질적인
것이라는 점 등이다.
  주거지의 벽에 그려진 그림은 아마도 프레스코회(회반죽에 물감을 넣어
그리는 천정, 벽화 등의 한 기법)일 것이다. 1만 6천년 전 고대 마야 칸 왕조의
코오 왕자가 죽어 장사된 때, 그 분묘의 벽에 왕자의 생애를 그리기 위해서
화법이 사용되고 있다. 게다가 이 벽에 그려진 인물인 듯이 보이는 유체의 두
골에 동제 손도끼가 찍혀진 채로 남아 있다고 하는 사실은 당시 이미 이만한
연장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니이벤씨는 멕시코에서는 생산되지도 않는 비취를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있는데 르 브론존 박사도 (무우 여왕의 부적(마귀를 쫓는 물건))이라고 부르는
비취 장식품을 그 분묘 속에서 발견하고 있다. 나는 그 비취를 조사해본 일이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뉴질랜드산과는 다른 것이었다. 멕시코의 고대유물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비취는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면 무우 대륙산으로
생각해도 좋지 않을는지
  이만한 발견을 하면서 니이벤씨도 결국 미국 원주민은 아시아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진부한 결론밖에 얻어낼 수 없었다. '멕시코의 고대 민족은
몽고계다'라고 하는 이 설은 그러나 조건을 달지 않으면 찬성할 수가 없다.
카리브해 연안에 최초로 정착한 자들 가운데는 몽고계의 종족이 우월해 있었다.
한편 유카탄 반도에서 내륙부에 걸쳐서는 백인종이 우월해 있었다. 그들이 흰
마야인이다. 그런데 유카탄 반도에서 북쪽 부분에는 모든 기록, 자료가
몽고계가 많았던 사실을--거의 전부가 몽고계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
북부의 종족이 멕시코 전토 내지 중앙 아메리카를 정복하여 사나이는 잘라
죽이고 여자는 약탈하여 자기네 것으로 삼았다. 그 결과 멕시코 인디오의
전부에게 몽고계의 피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멕시코의 (매몰된 도시)의
발견은 예를 들면 하인리히 슐리이먼의 (트로이의 유적)발굴에 못지 않는
대발견이었다. 니이벤씨는 이것을 화산 폭발로 묻혀 버린 이탈리아의 고대 도시
폼페이와 비교하고 있는데 폼페이의 경우는 이미 역사상에 나타난 도시이지만
이곳은 유사 이전의 알려지지 않은 도시라는 사실로 보아 그 귀중함은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유사 이전의, 아마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도 말해도 좋을
옛 도시의 유적은 유카탄 반도나 소아시아 지방이나 남태평양의 제도에서 그
편린은 볼 수 있지만 아직도 이 넓은 지구상의 이 곳 저 곳에 아무도 모른 채로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그런데 니이벤씨가 발굴한 (매몰된 도시)의 특징을
여기에 들어 보자
  1. 현재 멕시코시티의 위치와 거의 같은 해발 2천 2백 m의 고지에 있다.
  2. 약 10m의 땅 속에 있다.
  3. 산으로 둘려싸인 평평한 분지에 있는데 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4. 화산재로 덮여 있다.
  5. 유적이 3층을 이루었고 그 맨 아래층에 위치해 있다.
  6. 각 유적 사이에는 조약돌, 자갈로 층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될 것은, 이 유적은 화산 폭발에 의해서 묻혔다는 사실이
명백하면서도 어디에서도 용암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이 장소가 평평한
분지였기 때문에 용암은 흘러내리지 않고 화구 부근에 굳어져 원추형을
이루었다(현재 남아프리카나 남태평양 제도의 화산에서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용암의 분출량이 적었다(고대의 화산에는 이 케이스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화산 폭발로 인한 재만으로써 이 만큼 큰 도시가 파괴되고
매몰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화산 폭발에 따르는 맹렬한 지진이 석조
건물들을 마구 허물어뜨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 각 층의 유적 위에 씌워져 있는 자갈이나 조약돌의 퇴적은 무얼
말해주는 것일까 화산 폭발은 이와 같은 현상을 가져올 수는 없는 일이다. 해일
또는 큰 물결이 밀고 온 것이 침전하여 퇴적되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해발 2천m의 고지를 집어 삼킬 만한 큰 파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화산 활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파도라도 60m 내지 70m의 높이가 최대라고
생각된다. 2천m나 되는 높은 파도가 일어났다면 지구의 표면은 거의 잠겨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질학적으로 보아도 이 유적이 있는 장소를 높은
파도가 엄습해 온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세 번--아니, 적어도 두 번--
그렇더라도 그것은 수천 년의 간격을 두고는 있지만 그때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지나갔던 것이다.
  이런 높은 파도의 공포는 바다의 침입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것은 지진 혹은 대지의 함몰 때에 대양 밑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와 광대한
육지를 물 속에 잠기게 하고 만다. 예를 들면 19세기 후반에 남태평양의 쿠크
제도의 투이나키 섬이 물 속에 잠긴 일이 있다. 이때 섬에 사는 어부들은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바다로 나갔었다. 점심 때쯤 되어 그들이 탄 통나무배는
크게 흔들렸다. 길고 큰 파도가 해면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해가 저물어
그들이 섬으로 돌아왔을 때 섬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잔잔한
수면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그 섬과 1만 3천 명의 주민을 집어 삼켰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었다.
  제 3층의 가장 오래된 도시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지진과 높은 파도가 휘몰아쳐 온 때, 수만--아마 수십만명이라는 인명이
죽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비극은 지각 변동이라는 이 시기에 때맞춰
태어났던 사람들의 운명이기도 했다.
  다른 날, 다른 도시에서도 당연히 재앙은 만났을 것이 틀림없다. 다만 그
기억은 역사의 저편에 영원히 매몰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몇천 년, 혹은 몇만 년 동안 이런 높은 파도는 몇 번이나 이
일대를 엄습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최초로 도시의 잔해가 지표상에
나타나 있는 동안은 그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폐허가 재를
뒤집어 쓴 채로의 모습으로 형체를 남기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윽고 이 땅 위에 다시금 도시가 건설되었다. 강이 가까와 아마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새로운 도시는 높은 파도의 무서운
재앙을 만났다. 그리고 돌바닥과 콘크리트바닥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로 씻겨 내려갔다. 이때도 큰 지진이 수반했는지 모른다. 이 비극은
그리고 나서 수천만 년이 지난 후에 그와 똑같은 형태로 반복되었다. 그러나
나중의 높은 파도는 지난 번 만큼은 크지 않았었으므로 약간이나마 유물이 씻겨
내려 가지 않고 남았던 것이다.
  높은 파도--홍수는 아니고 높은 파도였다. 왜냐하면 여기에 작은 돌이나
자갈모래를 날라올 수 있는 물은 해수에 틀림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제
1층과 제 2층을 뒤덮고 있던 조약돌을 조사한 결과, 그것이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으로부터 날라져온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물이 어떻게 천
2백 m라는 높이를 역류해 갈 수 있었을까?
  이 수수께끼는 이 책을 여기까지 읽어 나온 독자들로서는 간단히 풀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수만 년 전의 옛날 이 근방에는 산이 없었던 것이다. 바다와
이곳과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물론 현재 멕시코시티가 세워져 있는
해발 2천 2백 60m의 고지대도 없었다. 아마 멕시코 전역에 해발 50m를 넘는
언덕은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산이 없었다고 하면 도시의 멸망의 원인이 된 화산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가스벨트의 형상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 무렵 조산 활동의 전체가 되는 가스 벨트는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가스체임버는 지구상의 여기저기에서 폭발, 붕괴, 함몰 현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특히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서인도 근방은 대가스 벨트가 완성하기
전의 아주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가스체임버는 겹쳐지기도 하고 서로
이어져 있기도 하여 위험한 상태였다. 그리고 때로 지표를 가르고 분화하거나
지진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일 도시를 붕괴시킨 것은 이와 같은 현상으로서 그
폭발력은 상상외로 격심했었음에 틀림없다.
  이윽고 가스벨트가 완성에 가까와짐에 따라 대부분의 육지가 함몰했고 반대로
또 많은 육지가 융기했다. 이 지각 변동에 수반하는 높은 파도는 지구상의
각처에서 발생하여 육지를 엄습했다. 그 파괴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해면과 큰
차이가 없는 이 지방도 높은 파도에 씻겨 내려갔다.
  만일 이 때에 제일의 도시를 파괴시키는 원인으로 된 분화구, 또는 균열과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높은 파도가 날라온 토사와 돌 밑에 매몰되어
버렸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거기에 이에 조산 활동에 의해서 대지는 유적마다
쌓여 올라와서 이 일대의 지형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렸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또 반복한다. 지구상에 최후의 조산활동이 활발히 시행된 것은
그다지 먼 옛날의 일은 아니다. 이 멕시코의 옛도시는 그 이전에 지상에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만일 지질학자의 설에 따른다면 제 1층의 고도시는 지금으로부터 20만 년이나
전에 세워진 셈이 된다. 그렇다면 제 3층의 가장 오래된 도시는 도대체 언제쯤
세워졌던 것일까?
  그런 터무니없는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이 가장 오랜 도시는 약
5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무우, 어머니의 나라여!

  니이벤씨는 이 유적 외에 또 한 가지 아주 귀중한 발굴을 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앞에 소개한 2천 6백 개에 달하는 석판인데, 멕시코시티의 북서방
8km 부근의 지점에서 파냈던 것이다. 이들 석판은 분명히 1만 2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무우 대륙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잃어버린
대륙의 모습을 아주 농도짙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소개해 보자
    석판 No.4
  높이 2m 반, 폭 1.7m, 두께 45cm, 무게 1톤의 큰 돌 위에 그려진 것이고
제단용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성한 4)에 대한 외경심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한 점 한 선이 모든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상징 도형의 걸작이다.
  (그림있음-무우제국의 최고의 신관 라 무우를 상징하는 것)
  A--왕관, B--날개 장식, C--동체 및 의복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A--왕관.
  맨위의 선을 그은 부분으로 네 개의 돌출부가 있으며 양쪽 끝은 종교문자 H를
의미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붉은 색 4^5^ H는 모두 (신성한 4)를 나타내는
숫자문자
  B--날개 장식.
  왕관 밑 부채꼴의 부분  일곱 개의 황색 선으로 되어 있다. 황색은 왕의
색깔이다.
  C--동체 및 의복.
  장방형의 동체는 종교문자 M. 무우 대륙을 나타내는 것 태양을 모방한
귀걸이를 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인물이 무우 제국 최고의 신관인 라
무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목걸이도 3개의 태양. 3은 무우를 나타내는 숫자. 
이상은 황색. 열쇠 모양의 손은 "건설자"를 나타내는 상형문자. 적색이다.
허리에서 다섯개씩 세로로 내리그어진 선은 손가락이고, 5는 (충족되어진
신격)을 나타낸다. 허리띠 중앙으로부터 옷소매를 좌우로 나누고 있는 모양은
(대건설자)를 나타내는 상형문자. 두 손의 아래로 보이는 것은 종교문자 H.
이상은 황색이다. 그 아래에 있는 3개의 원은 무우를 나타내는 숫자로 이것은
적색이다. 발가락도 다섯 개. 겉옷은 역시 좌우에 4개의 돌출부를 갖고 있는데
적색이다.
  (해독) '이 신전은 (위대한 창조주)를 제사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4대
원동력)은 위대한 창조주로부터 발하는 힘이며 그것은 우주를 지배하며 만물을
만들어낸다. 이 신전은 어머니의 나라 무우의 최고신관으로 위대한 창조주의
대변자라 무우에 의해서 관리된다'
  무우 제국의 최고의 신관인 라 무우에 의해 이 신전이 관리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아직 무우 대륙이 붕괴하기 전 그 문명은 꽤나 화려했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석판은 아주 귀중하다. 무우 대륙이 잠긴 것이 약
1만 2천 년 전의 일이라고 하면 이들 돌비가 적어도 1만 2천 년 이전의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도 입증된다.
    No. 684
  (그림있음- 무우를 상징하는 인면석. 멕시코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센다레온에서 발굴된 이 석판은 약간 색다른 것으로 자연석의 모양을
이용하여 사람의 얼굴 모양을 그리고 있다. 장방형은 종교문자의 M을 나타낸다.
입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는 무우요 하나는 마더, 즉 어머니를
의미한다. 턱이 약간 넓은 장방형은 대지의 상징이고 거기에서 국토의 의미도
생겨났다. 즉 이 인면석은 얼굴 전체로써 '무우, 어머니의 나라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No. 1055
  (그림있음-하나님인 "라"를 상징하는 것)
  한가운데에 있는 이중의 원은 무우 대륙의 북부나 위글 제국에서 사용되던
심볼로서 (라)즉 태양이고 창조주 혹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꽃잎처럼 3개가
나와 있는 부분은 무우를 의미한다. 이중 원의 아래쪽에 드리워져 있는 것은
혀--말하다, 말의 뜻이다 오른편 옆에 태양과 무우 양쪽에 접해 있는 혀가 있다
  (해독) '창조주--하나님은 무우의 입을 빌어 말해 주신다'
    No. 1780
  (그림있음-멕시코 석판의 창조주)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의 얼굴  모자에는 세 개의 깃털 장식이 붙어 있다.
깃털은 진리의 상징이며 3개의 깃털 장식은 최고의 신관, 법왕 라 무우에게만
허용되고 있다 마주 보아 오른쪽의 눈이 큰 것은 태양--전능의 창조주를
나타내고 그것이 입으로 연결되어 있다. 왼쪽의 눈이 작은 것은 달--밤을
나타낸다
  (해독) '낮과 밤을 구별하지 않고 창조주의 눈은 만물 위에 쏟아지며 라
무우의 입을 빌어 진리를 말해 준다'
    No. 51
  1. (타우)--부화 또는 출현의 상징.
  2. (타우)의 머리는 종교문자의 M이다.
  3. 숫자의 (3)을 나타낸다.
  4. 감겨진 눈  인간의 눈은 무우 국을 보지 못했다. 즉 인간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는 의미.
  5. 턱 아래에 있는 것은 (지하의 불)땅 밑의 화산맥을 나타낸다.
  6. 나가인이 사용하는 심볼로 창조주를 나타낸 것.
  7. (4대 원동력)과 그 작용을 나타낸다.
  (해독) "위대한 창조주"의 명령에 따라 4대 원동력은 "지하의 불의 힘"을
이용하여 대양의 밑을 물 위에까지 들어 올리고 그 위에서 인간이 살도록 하기
위해 육지를 만들어 주셨다. 그 육지의 이름은 무우라고 한다'
    No. 1
  선 미겔 아만토라 부근에서 발굴된 것으로 신전의 설계도가 새겨져 있다. 이
석판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멕시코의 석판에서는 보기 드문
문자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각각
독립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부분1
  1. 중앙 최상부에 있는 사람의 얼굴--무우 제국 최고의 신관 라 무우
  2. 라 무우의 두 손이 축복을 위해 펼쳐져 있다.
  (그림있음-멕시코의 선 미겔 야만토라에서 발견된 신전의 설계도)
  (그림있음-우주의 '4대 원동력'이 바다밑으로부터 무우대륙을 융기시켰다.
(세상의 창조를 말해주는 멕시코 석판))
  3. "라"--태양. 창조주의 전부를 보여주는 상징  축복이 무한한 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4. '쿠이'--이것도 태양의 상징인데 천체로서의 태양을 나타내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라)에는 "왕의 왕이신 신"이란 의미가 있지만 "쿠이"가 보태지면
"지상에 계신 왕의 왕이신 신"이 된다.
  (해독) "왕의 왕이신 신"--창조주, 전능하신 신의 대변자나 태양의 제국의
법왕 라 무우로부터 모든 신전 및 백성들에게 축복을...
  (그림있음-부분1^5^ 부분2)
  부분2
  1. 4개의 방에 둘러싸이듯이 "내진"이 있다.
  2. 사원에 들어서면 왼쪽에 각주가 있다. 사각은 힘--강함의 상징이다.
  3. 들어서서 오른쪽으로는 원기둥이 있다. 원은 완성을 나타낸다. 기둥
가운데 다섯 개의 선이 있는 것은 창조주와 그 4대 원동력--(완전한 신성)을
나타내는 5이다. 따라서 두 개의 기둥은 '이 신전은 창조주--전능하신 신의
존경하는 힘에 의해 완성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4. 이 상형문자는 무우 대륙 북부 및 위글 제국에서 사용된 것.
  (해독) 어머니의 나라의 관리하에 태양(하나님)에게 바쳐진 신전의 뜻
  (그림있음-부분3)
  부분 3
  1. 사원의 입구  각주와 원주의 사이에 장방형의 장식 윤곽이 있다.
  2. T와 M을 나타내는 심볼의 조합  M은 말할 것도 없이 무우, T는 which,
what에 해당한다.
  3. 수평선에 떠올라 온 태양. 식민지의 심볼이다. 빚살이 없는 것은 제국이
아님을 나타낸다.
  4. 태양의 상단에 붙여 이 식민지의 명칭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이름을
해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독) '이 땅은 무우 제국의 식민지 ??의 나라이다'

    밀림 속의 고대 마야 문명

  중앙아메리카의 지도를 펼쳐보자
  멕시코의 남동부에서 멕시코만으로 향해 쭉 나와있는 커다란 반도가 있다.
해안선의 일부를 제외하고 지금은 사는 사람도 적은 쓸쓸한 고장이지만 그것이
전에 마야 문명을 꽃피웠던 유카탄 반도이다.
  이 고대 마야의 문명은 오랜 동안 역사의 한 구석에 잊혀져 버려 있었는데 존
로이드 스테펜스, 협력자인 프레드릭 캐더우드, 알프레드 P 모들레이 같은
사람들이 이 유적을 탐험하여 19세기 중엽이 되어 이윽고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마야의 역사는 기원 68년 경, 우와하크톤(현재의
온두라스)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으로부터 24km쯤 떨어진 더카르로 도읍을
옮겨 적어도 5세기까지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부터는 차례차례로 도시를
만들었다가는 버리고, 만들었다가는 버리고 한 끝에 마침내 중부 멕시코로부터
북쪽의 유카탄 반도로 이주했다. 그것이 기원 530년부터 629년 사이라고 한다.
훌륭한 도시를 이룩하면서 어째서 그것을 버리곤 했던 것일까?  이 이동에
관해서는 오늘까지도 수수께끼로 되어 있다.
  유카탄 반도는 하천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을 알면서도 어찌 농경민족인
마야인이 그곳으로 이주해 갔던 것일까? 하천은 없지만 이 반도의 북반부에는
도처에 큰 세노테스(지하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야족은 이 물을
이용하여 농경이나 음료수로 사용하며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그들의
불가사의한 이동도 아마 이 농경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1519년
멕시코에 상륙한 스페인의 가난한 귀족 헤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군대는
멕시코 전토를 정복했다. 스페인의 군인들이 진군한 다음에는 기독교의
선교사들이 찾아와서 인디오의 피로 물든 땅에 교회당을 세우고 원주민들의
개종을 위해 일했다.
  그들은 마야족의 문명을 이교도의 문명으로 간주하고 이를 파괴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이로 말미암아 마야 문화의 연구를 위해 필요한 중요한 사료의
거의 전부가 재로 변했다. 이 행위는 후세 역사가의 원망과 탄식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원한을 사고 있는 것은 비숍(감독)랜다로 알려져 있는
스페인의 대사교 디에고 드랜다이다.
  랜다 승정은 스페인 점령 후 2대째의 선교사로서 유카탄에 왔다. 그는
열성적인 선교사였는데 그 열성이 지나친 나머지 마야인이 가진 옛기록, 고대의
유물들을 강제적으로 긁어 모아 공공 광장에다 산처럼 쌓아 놓고 불태워 버렸다
  1562년 7월의 어느 날 위대한 문명을 아는 실마리가 될 만한 귀중한 문화재는
일진의 연기와 함께 사라져가고 말았다. 이 때 간신히 랜다 승정의 눈을 피해
후세에 전해졌던 문헌은 오직 세 부였다. 그것이 곧 '트로아노 고사본'
'코르테시아누스 고사본' '페르시안누스 고사본'이었다.
  (그림있음- 우슈말의 유적들. 해발 약 100m의 낮은 구릉지대에 널리 퍼져있다
X자형의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맞춘 모자이크형은 이미 마야문명의 걸작이었다.)
  고대 마야족의 유적 가운데 우쉬마르의 옛도시가 있다. 여기에는 (비밀의
신전)이라 부르는 고대의 신전이 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마야 문명의
연구에 커다란 공헌을 남긴 프랑스인, 르 브론존 박사이다. 이 신전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마야족의 역사라는것이 몹시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신전은 이른바 그것--자체가
(어머니의 나라)의 상징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인 것이다.
  벽에는 많은 비문이나 심볼이 그려져 있고 또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무우 대륙의 우주도이다. 벽에는 '이 신전은 우리의
교의를 가져다 준 서방의 나라 무우의 붕괴를 애도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라고 읽히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아마 무우 대륙의 붕괴 직후에 (어머니의 나라)의 장송과 기념의 마음을 담아
세워진 것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신전은 참으로 1만 1천 5백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지닌 신전이라고 하겠다. 르 브론존 박사에 의하면 우쉬마르의
유적 가운데는 '우쉬마르는 세 번 파괴되었고 세 번 다시 세워졌다'는 의미의
비문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니이벤씨가 발굴한 3층의
유적과 연관지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마야 문명이 겨우 1천 4^5^ 5백년의 역사 밖에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 하겠다.

    (가장 오래된 우주도)
  약 3만 5천년 전 무우 대륙에서 쓰여진 것이다. 중앙의 원은 하나님의 상징인
(라) 태양이고, 두 겹의 삼각형이 합해진 6각 별 모양으로 이루어진 열 두
부분(안팎)은 하늘에 이르는 열 두 개의 문을 뜻한다.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열 두 가지 미덕을 내것으로 만들어야만 된다. 바깥쪽의 원은
이집트라고 하는 (아멘티)--내세를 의미하며 그 둘레의 열 두 개의 장식은 열
두 가지 유혹이다. 영혼이 내세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열 두 가지
현세의 유혹을 극복했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래로 늘어져 있는 리본은 영혼이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만 되는 길로
이 길이 여덟개로 나누어져 있음을 나타낸다. 이 도형 하나로 교의를 나타내는
가장 오랜 성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무우 대륙에서는 오늘날의 아이들이 성경을 배우듯이 이 우주도의 의미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 널려 있는 식민지의 포교에도 사용되었다.
남북아메리카 대륙, 인도,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후대의 신관, 승려들에 의해서 그 교의는 현저하게 왜곡되어졌다. 예를
들면 악마, 지옥과 같은 관념은 당초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림있음- 치첸이짜 중심에 있는 성벽. 높이 24m. 돌계단의 수는 1년의 
일수에 맞춰 365개. 그 바로 앞에 천개의 기둥이 있다.)
  치첸 이짜--그것은 유카탄 반도에 널려 있는 마야 문명의 유적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것이다. 여기에는 높이 30m, 토대의 면적 60m??라는 석조의
피라밋형 대신전이 있다. 또 마야인이 기상관측에 사용했다는 도옴 모양의 건물
에르 칼라코르도 있다. 이 곳은 전에 마야족의 영광이 어린 수도였던 것이다
  치첸 이짜의 대신전은 크크르칸의 신전으로 불리운다. 쿠크르칸이란 '날개가 
있는 뱀' 즉 멕시코인들이 말하는 케투얼코아토르이다. 마야족의 전승에 따르면
쿠크르칸은 그 옛날 포로로서 치첸 이짜를 따라와서 비의 신 나홈윰채크에게
바치는 희생물로서 거룩한 샘에 내던져졌다. 그런데 쿠크르칸은 죽지 않았다.
그래서 예로부터의 관습대로 마야인들은 그를 건져내어 신의 자리를 주었다.
이후 쿠크르칸은 유카탄 반도에서 가장 세력 있는 수장이 되었으므로 그를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하고 신전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 신전으로부터 폭 4m, 길이
4백m의 돌로 깐 길이 있으며, 양쪽으로는 날개가 있는 뱀, 쿠크르칸의 석상이
몇백 개나 나란히 줄지어 세워져 있다. 이 길이 거룩한 샘 (세노테)로 통하는
길이다.

    흰 마야인의 전설

  랜다 승정이 처음으로 유카탄 반도를 방문한 때, 우뚝 솟은 대신 전의 유적에
놀라 길 가에서 한 인디오를 붙잡고 물었다.
  "저것은 누가 세운 것이죠?"
  인디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토르테크"
  이것은 마야어로 건축자라는 의미이다. 인디오는 누가 세웠느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이 궁하자, 지극히 당연한 대답을 선택했던 것이다. 토르테크족--그
이름은 아즈테크족에 앞서 중앙아메리카의 문화를 이룩한 민족으로서 훗날에
주목을 받게 되는데 원래는 건축자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랜다
승정은 마야족의 수천 권의 고전, 27개의 고사본, 양피지 문서 등을 재로
화하게 했고 5천 개의 조상, 197개의 항아리 등을 부숴뜨려 버렸는데, 반면
마야의 왕자 한 사람에게 전설을 말하게 하고 그것을 기록하여 스케치를
추가했다. 그것은 '유카탄 사물기'라 하여 남겨 놓았으며 치첸 이짜의 비의
신의 신부의 이야기도 거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그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마야의 고대 건축물은 이미 폐허로 되어
있었는데 원주민들은 두려워서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건물들을 누가 무엇때문에 세웠는지 몰랐다'
  페드로 벨트람은 그의 저서 '마야족의 민술' 속에서 '마야의 가장 오랜
건축물의 장식에는 마스토돈의 코가 잘 쓰여지고 있고 거기에는 (필요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르 브론존 박사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야의 표상물 가운데는 마스토돈의 코 모양에 조각을 한 것을 가끔 볼 수가
있는데 이들 조각은 아주 오랜 시대의 것이라고 생각되며 카아크(우뢰)라는
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림있음- 태고에 서식했던 마스토돈을 모방한 고대 마야의 조각)
  마스토돈은 홍적세(2만년-백만 년전)에 살았던 코끼리이다. 고대 마야인의
역사는 적어도 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 마야의 고대 문명이 매우 수준이 높았었다는 것은 기상대를 만들 정도로
천문학이 발달했고, 또 마야력으로 알려져 있는 훌륭한 캘린더가 있었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마야의 건축물에 새겨져 있는 사람의 얼굴이나
조수(새나 짐승)의 모양이 몇 개나 이어져 있기도 하고 또 갑자기 끊겨 있기도
하다. 이것은 날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달력은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캘린더와는 전혀 다른 계산으로 되어 있는데 그 정확함에
있어서는 결코 다른 것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우수한 고대 문명이 언제 어떻게 해서 인류 역사로부터 지워져
버렸던 것일까  그것은 많은 세월에 의한 것도 아니고 랜다 승정과 같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도 아니다.
  1870년, 유카탄 반도의 튜마이엘에서 '틸람 발람의 서'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마야어를 라틴 문자로 쓴 것으로 아마 마야의 신관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되는 데 대부분은 스페인 정복 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선주 민족인 고대 마야족으로부터 무언가의 형태로
전승되었다고 생각되는 전설이나 신화가 흩어져 있다. 그 속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마야족의 선조는 아주 먼 옛날에 지진과 분화 때문에 멸망하여 마침내는
바다에 삼킴을 당해 버렸다. 더러 살아 남은 자들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갔다'
  그 말대로 고대의 마야 문명은 화산 활동과 대홍수라는 자연 현상에 의해
멸망했던 것이다.
  아즈테카의 고전 '타마르뽀뽀크의 법전'은 이때의 일을 이렇게 말한다.
  '(비의 태양)이라고 불리우던 시대에 불의 비가 내렸다. 그리고 단 하루에
모든 것이 불의 비에 의해 절멸되었다' 페루나 브라질 인디오의 전설에는 이런
것이 있다.
  '사람들은 땅울림이나 둔탁한 뇌성소리를 들었다. 태양과 달은 혹은 붉게,
혹은 파랗게, 혹은 노랗게 되었다. 낮의 태양빛과 대지는 마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물은 몹시도 높이 솟아 올라와 대지는 모조리 물
속으로 잠겨 버렸다. 어둠 속에 호우는 멎을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집에서
도망쳐 나와 높은 나무나 산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생명을 구출받은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사나이와 그 아내 뿐이었다. 홍수가 걷히고 그들이 지상에 내려
섰을 때, 한 인간의 시체도 한 인간의 뼈도 만나지 못했다'
  이때의 공포를 과테말라의 키티에족의 고전 '포포르 부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곧 나무인형(인간)은 재기 불능케 되고 부숴지고, 죽음을 당해버렸다.
그리고 하늘의 마음에 의해 홍수가 났다. 대홍수가 일언 큰물이 나무인형의
머리 위에 내리 퍼부어졌다. 그 때문에 지면은 컴컴해지고 검은 비가 밤낮없이
내리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진과 홍수에 의해 황폐해져 버린 고장에서는 그 누구도 살 수가 없다.
저기에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선주자들의 괴멸이 있고 난 후 아주
오랜 세울이 지난 뒤의 일이다. 최초에 나타난 것은 어떤 인종인지 모른다.
아마 그 무렵에 이미 중앙아메리카 전역에 퍼지기 시작하고 있던 몽고계의
종족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고대 마야의 국민과는 전혀 다른 민족이었다. 그후 나와토르인이
남쪽으로부터 와서 이 땅을 정복하고 다시 아즈테카인이 역시 남쪽으로부터
와서 이 땅을 지배하에 두었다. 현재 중앙아메리카의 인디오라고 불리우는
종족은 이러한 정복자의 피가 몇 가지나 섞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스페인
인이 찾아왔을 때 마야족이라 일컬어 유카탄 반도에 살고 있던 민족은 눈부신
문명을 쌓은 고대 마야족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현재 치첸 이짜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대건축물의 대부분은 고대 마야제국의
칸 왕조가 아니면 피푸우 왕조의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르브론존 박사나 페드로
벨트람에 의해서 주목의 대상이된 마스토돈의 조각은 이 피푸우 왕조의
심볼이었던 것이다. 칸 왕조는 "날개가 있는 뱀"을 상징으로서 사용하고
있었다. 치첸이짜에서 이 상징을 참으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까닭이다. 전쟁이나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 상징을 그린 녹색 기가
게양되었다. 치첸이짜의 코오 왕자의 무덤 벽에는 이 왕자가 태어나서부터
죽기까지의 생애가 그려져 있는 데 여기에도 이 상징을 볼 수 있다. 분전하는
젊은 왕자 코오, 그를 수호하듯이 날개가 있는 뱀이 하늘로 향하고 기운을
토하고 있는 용맹스런 그림이다.
  (그림있음-날개가 있는 뱀의 수호를 받으며 분전하는 코오왕자(유카탄 코오
왕자의 무덤))
  칸 왕조라 함은 고대 마야 제국 최후의 왕조로 그 최후의 왕좌에 앉았던 것이
무우 여왕이다.
  남아메리카 페루의 치치카카 호반에 잉카 제국의 유적으로 일컬어지는
티어와나코가 있다. 해발 4천 5백m의 이 땅에 한 개의 거대한 모노리스(돌비)가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전의 유적의 일부분인데 이런 고지에 이만큼의 거대한
돌을 어떻게 운반해 올라왔었는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도 수수께끼가 되어있다.
  이 대신전이 축조되던 무렵, 안데스 산맥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이 산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주민도 건축물도 괴멸적인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두 개로 쪼개진 이 큰 돌비가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고대 문명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잉카의 것은 아니다.
잉카(케투어족)가 페루에 나타난 것은 이 신전이 세워지고나서 약 1만 5천 년
후며, 안데스 산맥이 생기고 나서도 수천 년이나 후의 일인 것이다.
  (그림있음-기원 전 9,500년경 고대 마야족은 지각 변동에 수반하는 대홍수로
씻겨 내려갔다.)
  (그림있음-페루의 티어와나코 유적에서 볼 수 있는 큰 벽조각)
  이 돌비에는 아주 우수한 기계적인 기술과, 그 위에 예술적인 솜씨가 일체를
이룬 그럴싸한 그림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그림 모양 자체가 하나의
비문으로 엮어져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문자다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무우
대륙의 심볼에 관한 지식만 있으면 비교적 쉽사리 해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돌비의 그림 중에서 가장 눈을 끄는 것은 인물 부분이다. 사람의 얼굴
부분은 방패 모양으로 에워싸였고 그 주위는 세 짝으로 이루어진 것이 몇 개나
엮어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3은 무우 대륙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머리에
3개의 깃털 장식, 볼에 3개의 점, 3단으로 된 왕좌, 가슴받침은 무우의 심볼인
장방형의 판이 3개로 되어 있다. 입도 장방형이고 세어 보면 여기에는 무우를
상징하는 도형이 전부 합해서 아홉 개가 있다. 그리고 태양의 광망(빗살)은
얼굴의 주위 모두를 에워싸 (태양의 제국 무우)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광망의
끝에는 ??--(아하우)즉 (왕의 왕)의 표시가 있다. 즉 '태양 제국의 황제는
지상의 모든 왕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이 인물상에 손에 든 홀은 그 끝이 잉꼬의 머리 모양으로 되어 있다. 잉꼬는
마야 제국의 무우 여왕의 토우템인 것이다. 그리고 홀 아래쪽에 그것이 붙어
있는 것은 마야 제국이 무우에 종속하는 식민제국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방패 모양의 상부에는 표범의 머리가 좌우에 붙어 있는데 이것은 무우 여와의
젊은 남편 코오 왕자의 토오템인 것이다. 그리고 하부에 붙어 있는 뱀의 머리는
말할 것도 없이 칸 왕조의 심볼이다.
  이상의 사실들로 보아 알 수 있듯이 돌비의 중앙부에 있는 이 인물상은 칸
왕실의 무우 여왕과 그녀의 남편 코오가 마야 제국에 군림했고, 그리고 마야
제국은 무우의 식민국임을 알려주고 있다. 돌비의 밑부분에는 열 일곱 개의
사람얼굴이 새겨졌으며, 그 하나하나는 국토를 나타내는 표상으로서 열쇠
모양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이것은 무우 제국에 17개의 식민국이 있었던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이 부분의
위에는 날개를 단 인간의 모습인 듯한 것이 3단으로 늘어져 있는데 중간 단의
것은 머리가 잉꼬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밖의 단에 있는 것은 인간의
머리인데 그 관에는 역시 잉꼬를 본뜬 것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 인물상은
열 두 마리의 뱀에 의해서 구획지어져 있다. 이 뱀은 마야의 12왕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돌비가 세워지던 무렵, 이 부근은 무우 여왕과 그 남편 코오에 의해
통치되는 마야 제국의 영토, 또는 식민지였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돌비는
마야 제국과 무우 여왕에 대한 충성을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트로아노 고사본'에는 무우 여왕이 이집트의 나일 델타에 있었던 사이스의
식민지를 찾아 신관 토토를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이스의 식민지는 1만
6천 년 전에 개척되었고 토토가 여기에 부임했던 것은 극히 초기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 돌비는 거의 1만 6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결과가 되는데
  어쨌든 스페인 인들이 찾아왔을 때 후대의 마야족이 위대한 문명의 건설자를
몰랐었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는 않다.
  예를 들면 치첸 이짜의 쿠크르칸 신전에 관련된 이야기인데 그것은 후대의
마야족이 그곳에 남겨져 있던 고대 문명의 흔적이나, 미미하게나마 전해져 온
구비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낸 신화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흰 마야인)과
(갈색의 이주자)들이 싸운 사실을 알면 쿠크르칸이란 그 때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흰 마야인의 한 사람이고 그는 그 학식이나 재능에 의해 갈색의
이주자들에게 숭배를 받았고 드디어는 신격화되었다고 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멕시코 최초의 주민은 흰 종족이었다'
  아즈테크족의 전설은 이렇게 말한다. '이 흰 종족은 거무튀튀한 피부의
종족에게 정복되어 그 나라로부터 추방 당했다. 흰 종족은 배를 타고 동쪽의
해뜨는 곳을 향해 항해하여 이윽고 개척지에 도착하여 그곳에 살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전설에 다음과 같은 예언까지 덧붙이고 있다
  '이 흰 종족은 어느 날엔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나라를 되찾을
것이다'
  라이더 해거드는 그의 저서 '몽테스마의 땅'속에서 이런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케트알코아토르는 아나와크의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즉 정부를
만들어 정책을 수립하는 것까지 가르쳐 준 성자였다. 그는 흰 피부를 하고 밝은
빛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뱀가죽을 붙인 배를 타고 아나와크의
해변으로부터 하파란 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유카탄 반도의 내륙부 쪽에 있는 과테말라, 이곳 원주민 키치에족의 성전인
'뽀뽀르 부우'에도 이런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케트알코아토르왕이 영도하는 흰 종족은 거무스레한 피부를 가진 종족에게
침략을 받았다. 왕은 체포되고 살아갈 수가 없었으므로 배에 탈 만큼 사람들을
태워 해가 뜨는 방향에 있는 먼 육지를 향했다. 이윽고 육지에 도착하여 그곳에
살며 크게 번영했다. 그 대전쟁 동안에 숲 속으로 도망쳐 간 백인들도 많았는데
그들의 소식은 끊기고 말았다. 남은 자들은 정복자들에 의해 체포되고 노예가
되었다'
  현재 케트알은 과테말라의 국조(나라새)가 되어 있는데 이 새는 그
케트알코아토르왕처럼 붙잡히면 살아 있지 못하는 새인 듯하다. 그 큰 전쟁 때,
밀림으로 도망쳐 간 백인종은 어찌된 것일까  어딘가에서 제2^5^ 제3의
마야제국을 건설하여 아무도 몰래 현재에 이른다--밀림속의 백인 제국, 이
상상은 얼마나 많은 탐험가, 모험가의 꿈을 충동질할 것인가
  역사의 베일 저쪽에 감추어 있는 고대 마야제국, 백인국가의 왕이었던
케트알코아토르, 그의 집권 연대는 도대체 언제쯤이었을까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다. 지금부터 1만 6천 년 전내지 3만 6천 년 사이라는
대략적인 추정 밖에는 할 수 없다 혹은 또 케트알코아토르란 한 사람의 왕이
아니라 고대 마야 제국에 있었던 왕조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 케트알 왕, 혹은 케트알 왕조를
멸망시킨(갈색의 이주자)(거무튀튀한 피부)의 종족이란 절대로 후대의 마야족은
아니다. 거무튀튀한 피부라함은 케트알 왕이 영도하는 마야 제국의 국민과
비교한 이야기로, 역시 백인종이었던 것이다. 무우 대륙에는 순백의 피부와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두 종류의 백인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연상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하얀 피부의 백인종을 대신하여 마야 제국의 주권을 장악한
거무튀튀한 피부의 백인종이 지각 변동에 의해서 대재앙을 만났던 것이다.
  아즈테크인이 멕시코 고원으로 흘러 들어온 것은 1090년 경부터라고
생각되는데 1216년 경까지는 그 만큼 단단한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아즈테크인은 제국을 건설하자 전설속의 위대한 백인의 왕 케트알을 신으로서
공경하기로 했다. 그리고 케트알의 아들 카스카토를 생각해 냈다. 그 전설에
따르면 테스카토는 부왕 케트알과 함께 나라에서 도망친 것으로 되어 있다.
'테스카토의 영혼은 백인의 몸에 깃들고 많은 군대들을 이끌고 얼마 후에
돌아올 것이다. 그는 전쟁에 이기고 나라를 되찾아 사나이는 칼로 죽이고
여자는 노예로 삼을 것이다'
  이 테스카토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아즈테크인은 거대한 석조신전
테오카리에 희생의 제물을 계속해서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신관들은 이 공포의
의식때문에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는 신관이나
귀족들이 민중에게 공포의 종교를 심어 주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생각지 않은 역효과를 부르는 결과가 되는 때가 왔다.
스페인의 출현이다.
  케트알코아토르왕이 영도하는 고대 마야제국의 국민은 현재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근방에 정주하여 금발의 스칸디나비아인의 시조가 되었다. 그들은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지는 않았었는데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의 군대가
갑주로 무장을 하고 말을 타고 멕시코 고원에 나타났을 때, 아즈테크인은
전설에 있는 테스카토가 다시 온 것이라고 믿고 두려워하며 떨었다.
  대제국은 한 무리의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짓밟혀 싱겁게 정복당해 버렸다.
이 이상한 현상, 이 수수께끼는 케트알과 그의 아들 테스카토에 대해
아즈테크인이 품고 있던 공포의 신앙을 젖혀 놓고는 풀릴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랜시스코의 피살로 이하의 스페인 사람들이 잉카의
흰 신 비라코티야가 다시 온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흡사한 것이다.
  케트알코아토르, 그것은 무우 대륙에서 창조주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던
날개가 있는 뱀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중앙아메리카의 고대 민족과는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예를 들면 북아메리카의
푸에블로 인디언과 같이 지금도 종교상의 의식에 이것을 사용하고 있는 종족도
있다. 때로는 이름을 바꾸고, 때로는 모습을 바꾸어 모든 종족의 전설, 전승,
신앙속에 나타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유래는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종족들
사이에서도 지금은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 이름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온 것이며
케트알코아토르로 대표되는 백인종이야말로 고대 마야 제국의 문명을 최초로
쌓아올린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8. 동양의 신비한 나라들

    하늘차와 불을 토하는 화염기

  기원 전 325년, 그리이스의 알렉산더 대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동정하여 이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삼각형으로 튀어나온 광대한 반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따금 큰 강이
가로막았으므로 그 고장 사람들에게 그 강의 이름을 물으면 (신두강)이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와전되어 힌두우, 인두우, 인도로 변화했다고 한다. 따라서 인도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2천 2--3백년 전 일에 불과하다.
  인도의 시성 바르미이키가 힌두교의 일곱 성승의 한 사람인 나라나의 구술을 써서
엮었다고 하는 대서사시 '라아마야나'에 대해서는 이때까지 몇 차례나 인용해 왔는데
이 고전 속에 인도의 태고에 관해 쓰여져 있다. 거기에 따르면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의 이주자 마야인은 처음 버어마에 정주하여 나가라고 불리었다.
  용맹스런 전사였던 그들은 인도 남부로 침입해 왔다. 인도에서는 다너바인으로도
불리운 모양이다. 그와 전후하여 인도에는 타미르인에 의한 드라비다국이 있었다. 이
타미르인이라 함은 무우 대륙의 남서부지방에 있던 흑인종인 듯하고 그들은 말레이
반도를 경유하여 인도로 온 것 같다. 나가인은 타미르인과 싸워 이기고 (라마) 즉
제왕을 세워 인도 최초의 제국 (나가)를 건설했다. 현재의 데칸 지방, 나가푸울시가
있는 부근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3만 5천 년 이전의 일이다.
  힌두교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바라문교, 그 성전에 '리그 베에다'가 있다. 우주의
만물 중에 신을 인정하고 이를 찬미하는 종교시로서 기원 전 1천 5백년 경의 일인데
그 가운데는 분명히 무우 제국의 '거룩한 영감의 서'하고 같은 자구를 볼 수 있다
바라문교는 현재 인도인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리아인 민족의 냄새가 강한 종교인데
그 근본의 성전 속에 무우 제국 성전의 문장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어쩐 일일까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해 들어온 때 자기들보다도 훨씬 문화도가 높은 선주 민족
나가인들로부터 종교, 과학, 예술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는 팔이 네 개나 있는 이른바 사비의 불상을 흔히 보게 된다.
사원의 벽화, 경정의 삽화, 조각 등으로부터 토착민의 보석 세공품 등에서까지 볼 수
있다. 이것을 (힌두교의 그로데스크한 신들)이라고 부르는데 사실은 이들 가운데도
무우 제국의 국민이 사용한 심볼이나 천지창조, 인간 탄생의 개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여기에 든 것은 폼페이 시 근교의 아단타 사원의 동굴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다리가
2개, 손이 4개, 그리고 머리와 전신에 일곱 개의 포인트가 있다. 즉 이 인물상은
창조주의 상징인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과 자리를 바꾸어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머리에는 진주의 왕관을 쓰고 위의 왼손은 과실을, 위의 오른손은 어머니의 나라의
상징인 연꽃을 들고 있다. 발에서 하반신에 걸쳐 무수한 횡선이 새겨져 있는 것은
그가 물 속에 서있는 것을 말한다. 아래의 오른손에 붙잡고 있는 한 마리의 뱀도 물의
상징인데 그 뱀의 머리는 란낭(알주머니)인지, 콩껍질과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서 종자가 떨어져 나오고 있다. 이것은 대자연의 종자, 또는 우주의 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물 속에 뿌려져 이윽고 배아가 되어 지구상에 생명을, 또 풍요를
가져오려 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곁에 튀어나와 있는 사슴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인류의 시조이다.
  창조의 왕은 생명의 배아를 물(바다) 속에 뿌려 풍요한 대지를 만들어냈다. 지구
최초의 인간은 지금 막 뛰어나가려 하고 있다. 바다 위에 만들어진 이 풍요로운 자원의
혜택을 받고 있는 육지, 그것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양을 바꾸어 표현되고 있어도 일곱 머리를 가진 뱀에게 고유명사를 붙이지
않고 있는데 대해서, 인도에서는 (카이샤)또는 (나라야나)라고 부르고 있다. 고대의
버어마에 속하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톰의 유적, 여기에도 일곱 머리를 가진 뱀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은 (나가)라고 부르고 있다. (나가)는 말할
것도 없이 버어마로부터 인도로 들어온 마야인의 다른 이름이다. 아마 이 상징적인
물건을 가지고 들어온 자들의 이름을 후세에 이르러 맞춘 것일 것이다.
  나가 제국의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프린스 마야--마야 왕자의 이름이다. 그의
집권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지금으로부터 1만 5천 년 전부터 2만 년 전 사이라고
생각된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학서인 '수우일라싯다안타'의 저자가 이 마야
왕자이다. 이 무렵 식민 제국의 왕 및 일족은 무우의 태양 황제의 분신으로 생각되며
모국에 유학하여 본격적인 학문을 배우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다.
  또 모국 무우에는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필적하는--아니, 보다 충실한 교육기관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수우일라 싯다안타'는 모국에 유학하여 과학을, 특히 천문학을
전공한 마야 왕자의 연구 논문의 성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삼각법을 응용한
매우 진보된 천문학이며 당시의 무우 보존의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있음- 어머니의나라의 개벽과 인간의 탄생을 보여주는 아단타 사원의 조각)
  2만 년 전이라는 아득히 먼 옛날에 그런 학문이--라는 등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여기에 당시 이미 비행기가 존재했고 또한 그것을 격추하기 위한 고사포가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해 두고 싶다.
  바르미이키가 쓴 '라아마야나' 그 가운데서도 라아마와 시이타는 코오사라 국의
라아마 왕자와 비데에하국의 시이타 공주의 연애 이야기를 그린 서정시인데
산스크리트로 쓰여진 이 성전 중에서도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는 나가인이 정주하여 수천 년이 지난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되며 이 무렵 인도는
소왕국들이 분립하여 전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전란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왕자와
공주의 비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행기와 그것에 대항하는 무기라고
생각되는 것이 등장한 것이다.
  '라바아나는 시이타를 무서운 스피드로 달리는 (하늘의 차)에 태운다. 그것은 금색이
찬연하여 인도라의 천마와 같이 달린다'
  '얼마 후 하늘의 차는 공중으로 날아 올라가 언덕을 넘고, 숲을 넘고, 골짜기를
건넜다'
  '라아마는 분노 끝에 부라아민의 무서운 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하늘의
불을 토하는 화염기였다. 인도라의 불처럼 빠르게 날고 하늘의 불처럼 치명적이었다.
(원형의 활)로부터 연기에 싸인 불꽃의 화살이 몇 개고 계속해서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날아왔다. 라바아나는 (철의 심장)을 불꽃 화살로 쏘아 꿰뚫어 쓰러뜨렸고 마침내 숨이
끊겼다.'
  하늘의 차, 철의 심장, 하늘의 불을 토하는 화염기 원형의 활--이런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순한 비유나 상징으로 이런 까다로운 표현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나는 다시금 힌두교의 옛기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기술을 발견했다.
  '새벽녘에 라아마는 푸쉬파아카가 보내 온 하늘의 차를 탔다. 그것은 크고 예쁘게
채색이 되어 있었다. 내부는 2층 구조로 많은 방이 있고 어떤 방에나 창이 붙어 있었다.
바깥쪽에는 깃발이나 기드림(길다른 깃발 같은 것)이 붙어 있어서 공중을 날아갈 때,
음악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이것을 현재의 여객기와 비교하는 것은 너무 비약한 것일까?
  '세일론의 왕인 라왕은 적군의 위를 날아 폭탄을 투하하여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라왕은 마침내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나는 기계는 힌두의 장군 람
찬드라의 손에 들어갔으며 그는 그것을 타고 북부 인도에 있는 수도 아요오디아까지
날아갔다가 돌아왔다'
  이러한 옛기록은 기원 전 5백 년부터 1천 년의 것인데 쓰여 있는 내용은 2만 년 쯤
전의 일로 상상된다. 나는 또 기원 전 1천 년 경의 기록인 '마하 바라아타' 속에도
'왕은 우호의 표시로 (나는 기계)를 이웃 국왕에게 보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아뭏든
고대 인도에 나는 기계를 가지고 있던 왕후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나는 기계)에 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점토판이나 옛 문서를 조사해 보았지만
그 도면, 구조에 대해서는 끝내 명확한 것을 얻을 수가 없었다. 다만 단편적으로 다음과
같은 개요를 포착할 수 있었던 것 뿐이다.
  '엔진은 오늘날의 터빈처럼 몇 개의 기실을 갖고 발동과 배기가 이루어지며 에너지가
완전히 이용되도록 되어 있다. 동력은 증기 중에서 얻었다. 항속 거리는 5천 킬로
정도였다. 비행 중에 연료 보급을 위해 착륙할 필요는 없었는데 기관이나 그 밖의
기계의 마멸로 비행 거리에는 한도가 있었다'
  이러한 단편들로부터 독자가 어떻게 상상의 비행기를 짜맞추든 그것은 자유이다. 단
한 가지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은 프로펠러와 비슷한 기술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라아마 왕자가 사용한 "하늘의 불"을 토하는 "원형의 활", 라왕 왕이 탄
비행기를 격추시켰던 무기는 회전포화 같은 것, 오늘날의 기관총, 기관포와 비슷한
것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여기서 다시 고대 현자의 말을 되풀이하고 싶다.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나가 제국의 향방

  캄보디아의 톤레사프호의 북방에 있는 앙코르 톰, 그 남방에 있는 앙코르 와트, 이
두 큰 유적에 관해서는 이제 새삼스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고장이
태고 시절에는 무우 대륙으로부터의 이주자들이 인도로 향하는 통로, 고대 버어마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이 유적을 방문한 것은 아직 프랑스 정부의 소유가 되기 전의 일로서, 길도
현재와 같이는 정비되지 않았고 무성한 잡초 속에 황폐한 유적이 우뚝 솟아 있다.
무엇보다도 나의 눈을 끈 것은 유명한 바이요의 인면탑에 이르는 회랑의 양쪽에
도사린 형태로 있는 칠두사의 조각인데 머리를 쳐 든 높이가 약 3m, 뱀의 꼬리는 회랑의
벽과 이어져 있다.
  이 조각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고고학 연구가들이 불가해인 채로 연구를 게을리하여
아마도 이 사원의 건립자가 뱀을 숭배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정도의 추측으로 만족하고
있다. 오직 한 사람 헬렌 처어칠 캔디 여사만은 그 기행서 '훌륭한 앙코르'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것은 틀림없이 (나가)였다. 몇천 만이라는 과거의 신화와 신앙, 종교와 전설이
집약된 하나의 형태이다. 예술가나 건축가가 공상에 의거하여 다만 일시적인 기분에서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이것이야 말로 고대인이 신앙한 데미고트 (반신반인)의 상징에
틀림없는 것이다'
  캔디 부인의 추측은 목표를 빗나가고 있다. 다만 아쉬워지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반신반인의 상징이 아니라 이 지구의 창조주를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먼 옛날, 이 지방에도 지각 변동으로 말미암은 높은 파도와 대홍수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살고 있던 나가인들은 물에 씻겨내려갔고, 토지는 황폐했다. 그로부터 몇천
년인가 지나서 이 고장에 찾아온 민족은 이 이상한 일곱 머리의 뱀이 먼 옛날 이 부근에
살고 있던 나가인이란 자들이 가져온 것이라고 전해 듣고 그 이름을 이 상징물에다
맞추었다. 그래서 아마 캄보디아에서는 (일곱 머리의 뱀)을 나가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이 앙코르 톰에는 또 유명한 사자의 군상이 있다. 이 동물의 조각이 모두 잃어버린
모국 무우의 방향을 향해 장방형으로 입을 벌려 '무우여, 우리 모국이여!' 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그곳에는 모국을 잃은 나가인들의 비통한 슬픔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림있음-캄보디아 앙코르 톰에 있는 칠두사를 본딴 조각)
  인도의 남단으로부터 뚝 떨어져 있는 세일론 섬이 있다. 이 섬의 아누라다풀라 시에
있는 사원의 돌계단 아래 반원형의 돌이 놓여 있다. (아누라다풀라의 무운스톤)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돌이다. 고고학자들도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나 이 돌은
세일론 섬의 주민들이 어딘가에서, 어떻게 해서 온 것인가를 참으로 시원스럽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돌의 중심부에는 활짝 핀 연꽃을 도안화하여 꽤 복잡하고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우국의 상징이다. 연꽃의 바깥쪽은 물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그 바깥쪽은 오리이다. 이것은 오리처럼 물 위를
달려왔다고 하는 의미로 배에 실려 왔음을 나타내고 있다. 오리의 바깥쪽은 분명히
장식이고 그 바깥쪽과의 사이를 구분짓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다음이 동물의 예인데 동물은 세 종류가 있는 것 같다. 3은 무우국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반원은 무우국 식민지의 상징이고 동물의 줄 바깥쪽에는 식민지인가
식민제국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새겨져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마멸이 심해서 유감스럽게도
판독이 불가능하다. 어쨌든 이 돌은 세일론 섬 주민의 역사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섬의 주민들은 무우 제국의 식민지(또는 식민 제국)로부터 항로를 따라서 배로
대양을 넘어 왔다. 그들의 조상은 어머니의 나라로부터 식민지 또는 식민제국으로 온
것이다'
  아누라다풀라 시는 지금부터 2천 2백 년 쯤 전에 생긴 것인 듯하고 그러나
'라아마야나'의 필자 바르미이키에 따르면 이 도시가 만들어지기 전 세일론 섬에는
아주 무용이 뛰어난 일족이 있어 그들은 적어도 1만 년 동안에 걸쳐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림있음-세일론 섬 아누라다플라의 역사를 말해주는 무우스톤)
  인도에 탄생한 고대 나가 제국은 어느 정도 계속되었을까
  오래된 점토판 가운데는 나가 제국은 기원 전 5천 년, 혹은 3천 년경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한 것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제국의 형태로서는 약 1만년쯤은
계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가 제국이 건설되고 나서 수천 년이 지나자 인도에는 많은 소왕국이 나타났다.. 그
왕국끼리의 싸움에 편승하여 이전에 나가인에게 정복당한 타미르인도 독립하여 몇 개의
왕국을 만들었다.
  이윽고 작은 집단의 아리아인들이 힌두쿠시의 골짜기 근방으로부터 내려 와서
간디스강의 흐름을 따라 동진하여 물이 대지로 스며들어오듯 북부 인도로 퍼져 나갔다.
  오랜 산중 생활에서 무지한 토착민이었던 그들은 나가인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그
속에 융화되어 가서 양민족의 피는 서로 섞이게 되었다. 그리고 순수한 나가인이 멸망해
감과 동시에 아리아계의 민족이 전인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라문(승려)을 최고로 여기는 네 계급의 캐스트 제도를 수립했던 것이 기원 전 천
수백년 경에 그것이 현재의 인도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다.
  아리아인은 나가인들로부터 문화를 흡수하여 특히 무우 제국에서 교육 포교를 위해
정주하여 와서 특유한 학식을 전달해준 나아칼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니까
바라문교의 성전 '리그 베에다'에 '거룩한 영감의 서'와 일치하는 자구가 있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라문 승려들은 자기네들의 스승인 나아칼들을 인도에서
내쫓았다. 나아칼들은 북쪽으로의 길을 더듬어 히말라야의 남쪽 등성이로부터 다시금
티베트로 들어와서 이윽고 그 발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바라문 승려들은 '거룩한 영감의 서'를 자기들의 것으로 삼고 왕족의 위에 선 계급이
됐는데 자기들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너무 알기 쉬운 교의로써는 권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반 민중에게 신비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영감의 서'의 원전은 극히 일부의 한정된 고위층 승려들만이 볼 수
있게 하여 원전의 문장을 적당히 가감하여 고의로 복잡하게 만들어 알기 어려운 것을
일반에게 유포시켰다.
  산스크리트로 쓰여진 힌두교 관계의 고전이 매우 난해한 것은 이런 점에도 그 원인이
있다.
  '거룩한 영감의 서'의 교의 그 자체는 결코 난해한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종교를
가르치기 위한 것, 그리고 이 책을 배우는 것이야 말로 종교라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근저에 있는 것은 사랑이었다. 인간은 자신들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과
그 위업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은 그 거룩한 사랑을 자신의 분신인 인간에게
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숭배는 있어도 외포는 없었다. 손을 펼치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아들이 달려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절이 있다. 선을 앙모하기에 족한 절이 있다. 마음 고요히
명상하고 사랑하는데 완전한 절이 있다. 모든 때와 장소에 절이 있다. 낮이나, 밤이나,
도시의 혼잡 속에서도, 사막 가운데서도 절이 있다. 하늘을 찬양하기 위한 절이 있다
사람이 하늘의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절이 있다.'
  얼마나 쉽고, 게다가 자애가 넘치는 교의 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의 대행자로서
일곱 머리의 뱀이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것을 하나로 집약한 상징으로서 태양이 있었던
것이다.
  무우 대륙이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춘 후에도 식민 제국인 인도에는 오랜 동안 그
여광이 유지되어 높은 수준의 철학, 과학, 예술이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무우 제국의
아들인 나가인은 어느사이엔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현재 남인도의 마들라스 지방에 고대 나가 제국의 인장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또 유다스족이라는 소수 민족이 생존해 있다고 한다.
  북방 캐시미르 지방에도 나야족이라는 유목 민족이 있어 힌두교의 교의에 복종하지
않고 지금도 칠두사인 나가를 하나님의 상징으로 공경하고 있다든가, 또 동부
단다카라니아 지방에도 이상한 소수 민족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아리아계에도
드라비다계(타미르인)에도 속하지 않고 현재 남태평양 섬들의 원주민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표정이 풍부한 용모, 균형이 잡힌 체격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혹은 그들이야말로 태고에 어머니의 나라 무우로부터 이 고장에 이주해 와서 제국을
건설한 나가인의 순수한 피를 미미하게나마 계속 유지해 온 자들인지도 모른다.

  중앙에 있는 것은 연꽃, 그 주위의 원은 태양. 태양에서 나오고 있는 광선은 3개로
나뉘어져 무우 대륙의 상징 숫자인 3을 나타내고 있다.
  (왼쪽)앙코르 와트
  바깥쪽의 원이 태양이고 안쪽 3개의 원은 무우의 숫자를 나타냄과 동시에 그 식민지
또는 식민제국을 나타낸다. 중앙에는 무우제국의 꽃인 연꽃이 있다.
  앙코르 유적이 있는 칠두사의 조각에는 목이나 등부분에 이와 같은 정교한 장식들이
그려져 있다. 이것으로써 이 유적을 최초에 만들었던 민족이 무우 대륙으로부터 온
이주자임을 알게 되는데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와트는 표상에 이와 같은 차이가 있다.
  (그림있음-전원과 수확을 관장하는 신-기네엣시아)
  하나님의 은혜의 한가지를 태표하는 것. 전원의 신답게 꽃을 가지고 장식하고 있다.
무우 대륙에서는 (라마아나)라고 불리우고 역시 대지의 왕의 상징이었다.
  코끼리는 유카탄 마야의 조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왕위를 상징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단검
  고대 나가족의 왕이 차고 있었다고 한다. 나가 제국은 기원 전 5천 년 경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칼날은 철인데 이것은 후에 붙인 것  원래는 동이었다고 생각된다.
  자루와 칼집은 은이고 표상이나 장식이 새겨져 있다.
  (그림있음-나가족 단검의 자루에 있는 장식)
  1. 세 가지씩 장식이 많은 것은 무우 제국의 상징 숫자를 나타낸다. 상하의 중앙에
있는 길고 가느다란 것은 물 담는 곳. 그 좌우에 봉오리진 것과 활짝 핀 연꽃이 있다.
한가운데 부분은 사람의 얼굴로 입과 코에 해당하는 장방형은 종교문자의 M이다. 그쪽에
세 개씩 있는 반원은 떠오르고 있는 태양, 무우의 식민국을 나타낸다.
  2 물로 에워싸인 국토 무우. 물고기는 동서로 웅비하는 이주자의 모습, 바빌로니아의
시조, 반인 반어의 전설을 연상케 한다.
  3 이집트인인 창조신의 상징으로 삼았던 스카라베--갑충이 여기에 있는데는 놀라게
된다. 대지를 나타내는 장방형의 밑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갑충이 잠들어 있다.
양쪽 사슴은 최초의 인간을 나타내는 (케이)  최초의 인간이 창조신의 상징인 갑충을
추앙하고 있는 장면
  '스카라베는 진흙공을 굴리며 그 곳에 알을 낳아놓는다. 지구를 회전시켜 생명을
탄생케한 창조신과 흡사하다'(이집트 파피러스)
  고대 이집트 왕실의 필사생인 아나나는 그 파피러스 문서에 스카라베가 창조신의
상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유를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파피러스는 3천 5백년
이상이나 옛날에 쓰여진 것으로서 이미 그 무렵 지구의 회전운동을 고대 이집트인은
알고 있었다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이 상징이 고대 인도의 비문, 조각들로부터
발견되는 것은 매우 진기한 것들이다. 이 단검이 만들어진 고대 인도 최초의 제국
(나가)는 지금으로부터 7천 년 전에 이미 멸망하고 있다. 갑충의 상징이 이집트인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 우주에 관한 인간의 지식은 매우 오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알려지지 않은 위글 대제국

  나는 기묘한 브론즈상(청동상)을 알고 있다. 작지만 아주 정교한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 여인상의 왼쪽 어깨에 인간의 머리를 한 새가 앉아 있다. 이것은 여인상 즉 무우
대륙이 인면의 새 즉 창조주로부터 생명을 받으려 하고 있는 그림이다. 혹은 인간이
영혼을 부음 받으려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다.
  이 브론즈상의 제작 연대는 아주 오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게 하면 이만한 재료,
기술을 합하여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고대 문화는 자연히 한정된다. 무우 제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거의 전부 바다 밑으로 잠겨 버려 현재까지 남아 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그렇다면 고대의 위글 식민제국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19세기, 중국에서는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사건 등으로 소란이 잇달았다.
그때마다. 오랜 궁전이나 사원이 폭도들에 의해서 황폐화되고 귀중한 문화재가
약탈되어져 갔다. 의화단 사건 때 상하이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함대의 한 장교가
쿠울리이에게서 한 개의 브론즈상을 강매 당했다.
  그는 토산품이란 생각으로 그것을 가볍게 사들였다. 귀국 때 미국으로 가지고
돌아왔는데 천정 속의 다락에 내 팽개쳐 오랜 동안 둬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가치가 재인식되어 소중하게 금고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것이 예의 브론즈상이다.
  (그림있음-위글 대제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브론즈상. 창조주가 인간에게 영혼을 넣어주
고 있다.)
  "8세기 경부터 몽고 고원에 터어키계 유목민족이 국가를 세웠다. 이 나라는 백 년쯤
계속되었지만 키르기스인의 공격을 받아 괴멸하여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간슈
까오창 등지에 왕국을 세우고 이란계의 선주민족과 혼혈하여 톨키스탄이 되었다--이것이
보통 전해지는 위글의 역사이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위글, 예의 브론즈상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그 나라는
그것과는 다른 위글인 것이다. 먼 옛날 이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린 대위글
제국인 것이다.
  무우 제국의 열 일곱 개 식민지 가운데 위글 제국은 최대의 것이었다. 동은 태평양을
내다보고 서로는 모스코바 근방까지 뻗쳤으며 다시금 식민지는 점점 유렵 중앙부에
위치하여 대서양까지 달하고 있다. 북쪽은 시베리아로부터 북빙양에 미치고 남으로는
코오치시나, 버어마, 인도, 페르샤의 일부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확실히 무우
본국과도 맞먹을 정도의 광대한 영토이다.
  (그림있음-오른쪽 홀을 들고 있는 것이 위글제국의 여왕. 왼쪽은 그 배우자. 왕관 중앙
의 태양광망이 위쪽에만 있는 것이 무우의 식민제국을 나타낸다.)
  이 대제국에 관해서 안 것은 1896년 내가 티베트에 체재 중의 일이다. 어느 탐험가가
외몽고의 카라코오타(몽고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유적을 발굴했다는 것이다. 그
전부터 나는 티베트의 고사원에 있는 옛 기록이나 고승들의 이야기로부터 위글 제국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 카라코오타는 몽고를 둘로 나누는 텐샨산맥의 북쪽,
바이칼로 남족의 오르혼강 상류 유역의 분지에 있다. 그것은 일찌기 대위글 제국의
수도가 놓여 있던 위치와 부합하고 있다.
  탐험대는 지하 15m까지 파 내려가서 귀중한 유물을 발굴할 수가 있었는데 자금이
모자라서 중단해야만 했었다. 그 말을 들은 러시아의 고고학자 P.K.코즈로프 교수가
발굴작업을 물려받아 상당한 성과를 올렸는데 몽고 정부가 발굴물의 국외 반출을
금지시켰으므로 사진을 발표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여기에 몽고 제국의 수도가 자리잡기
훨씬 이전에 위글제국의 수도가 있었다는 것은 그 발굴물로 보아도 명백하게 되었다.
  (그림있음-위글제국의 왕위를  나타내는 홀. 세  갈래의 창은  무우의 상징숫자를 본딴 
것.)
  동양 제국에 전해지고 있는 전설로써 당시 중앙아시아의 지형을 상상해 보자
  '중앙아시아 전역에 걸쳐 기름진 평야가 있고 호수 하천이 많아 큰 도시나 작은
도시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으리으리한 궁전이나 신전, 의사당이나 관청, 주택 등이
늘어서 있었다. 도시나 마을들은 훌륭한 도로로 이어져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도 티베트 고원도 없었다. 즉 위글 제국이 번영하고 있던 것은 지구상에
조산 활동이 일어나기 전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고비사막의 지하로부터 고대의
번영을 상상할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되는데 그렇더라도 이 상전벽해의 변모는 어쩐
일일까! 지각 변동으로 인한 그 대홍수가 모든 것을 씻어가고 불모의 모래 바다로
바꾸어버린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 이 대제국이 존재했던 것은 도대체 언제쯤의 일이었던가. 나는 티베트의
사원에서 추정의 실마리가 되는 나아칼의 점토판을 발견했다. 그것에 따르면 '약 7만
년 전, 나아칼이 어머니의 나라의 '신성한 책' '거룩한 영감의 서'의 사본을 위글의
수도로 가져왔다'고 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무우 제국의 이주자들은 황해 연안을 우선 발판으로 삼고 점차로
내륙으로 진출하여 물이 풍부한 기름진 땅(고비의 아름다운 토지)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금 서로 진출하여 카스피해로부터 유럽 중앙부를 거쳐 멀리 대서양으로까지 그
세력을 뻗쳤던 것 같다. 현재 발칸 반도, 프랑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아일랜드에서까지도 이 고대 제국의 것들이라고 생각되는 유물이 발견되는 것은 아마
그러한 지점에 작은 나라들이나 식민지를 수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무우 제국 최대의 식민제국의 통치자는 임명되어 본국으로부터 교체되어 와
있었던 것 같다.
  '위글인은 밝은 머리 색깔을 하고 있고 눈은 파란 색이었다'
  이것은 기원 전 5백 년 경 중국의 기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또 '위글인은
흰 피부를 하고 있고 북방에 살고 있는 자들은 밝은 머리 색깔에 눈은 파랗고 남방에
살고 있는 자들은 짙은 머리 색깔에 눈은 검다'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어쨌든
중앙아시아에 광대한 판도를 자랑하던 고대 위글의 민족은 그 웅장한 건축물, 예술품
등과 더불어 문자 그대로 이 지상으로부터 씻겨 흘러가 버렸던 것이다.

    시베리아의 수골군

  '위글의 수도는 그 주민과 함께 홍수에 의해 멸망했다. 제국의 동부는 이 때 남김없이
괴멸했다'
  티베트의 고사원에서 본 이 옛기록은 지리학적으로도 증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1880년대에 어느 탐험대에 가담하여 바이칼호의 남쪽으로부터 레나강의 하구, 아시아의
북빙양 연안을 탐사한 일이 있었다. 그 때의 경험은 내가 종래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충분히 보충해 주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전, 혹은 1만 년 이상이나 전에, 지각 변동으로 말미암은
대홍수(성경 속의 노아 홍수??)가 아시아 대륙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표를 씻어 갔다.
  그 범위는 동경 백도 선으로부터 동쪽, 즉 바이칼호가 있는 부근부터 동쪽을 레나강
유역을 따라 북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이것은 빙하와는 다른 것으로 동시베리아의 이
홍수가 휩쓸어 갔다고 생각되는 지역에는 빙하의 흔적을 볼 수 없었다. 레나강의 하구
부근에 라코프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은 대부분 맘모스나 그 밖에 태고적 야수의 뼈,
어금니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것들은 멀리 몽고 평야나 시베리아로부터 홍수에 의해 밀려 내려와서 여기에 모아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빙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북아메리카 동부의
마찬가지 짐승의 뼈들이 얼음덩이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조각조각 부숴져 있는데
비해 이 섬의 것은 비교적 완전한 모양으로 남겨져 있는 점으로도 명백하다.
  이리하여 그토록 영화를 뽐내던 위글제국도 대홍수로 말미암아 그 동반부는 거의
괴멸되었다. 그 후에는 돌과 모래 뿐인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는 황폐한 토지로 변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홍수를 면한 서방으로 도망쳐 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뒤를 추격하듯이 제2의 재앙이 닥쳐 와서 제국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조산 활동이 홍수가 있은지 얼마나 뒤에 일어났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대지는
무섭게 흔들리며 쌓여 올라왔고 거대한 금이 지각을 이리저리 갈라 놓았다. 천지개벽의
형태였다. 밑창으로부터 고열에 흙탕물처럼 녹은 마그마(암장)가 분출하여 그것이 용암이
되어 흐르는 곳에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이윽고 용암은 괴물과 같이 괴이한
형태로 굳어져 겹겹이 쌓이고 쌓여 불모의 암산이 되었다.
  이 조산 활동에 의해 생명 있는 것은 사람이고 짐승이고 식물이고 모조리 괴멸했다.
우리가 그 위에서 살고 있는 대지가 이와 같은 대 변동을 만날 때, 그것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히말라야 산맥, 해발 8천m에서
9천m에 이르는 높은 산들이 꼬리를 물고 잇달아서 생겨난 것이 이때였던 것이다.
  고비 평야의 주변에도 산들이나 고지가 생겼다. 이전에 풍요한 고비 평야를 적셔주고
있던 수맥도 크게 변했다. 현재 고비사막을 여행하는 캐러반이 3m나 4m쯤 모래밭을
파 내려가면 물을 얻을 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전에 위글 제국을 가로세로 누비며
흐르고 있던 하천이 지표로부터 그 자취를 감추고 모래로 뒤덮인 채로 지금도 수맥이
끊기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시련을 거치고서도 그래도 살아 남은 끈질긴  한 무리의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높은 산과 산 사이에 끼인 골짜기나 고지 위 등에 남겨진 채, 서로간에
연락도 두절된 채로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처했다. 그 후 몇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들은 불모의 산지에서 계속 살아갔다. 그곳에는 일찌기 영화도,
높은 문화의 흔적도 없이 들짐승들을 사냥하며 풀뿌리를 캐먹는 산민의 모습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도 중앙아시아의 산지로부터 이동을 시작했다.
  '처음 코오카시아인은 중앙아시아의 산 속으로부터 소그룹으로 찾아 왔었다.(맥스
뮐러)'
  '위글인은 산이 생겨났기 때문에 전에 살던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카스피해의
북쪽, 동쪽 및 서쪽으로 이주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의 이주였다.
(인도 마누 법전)' 인도로 들어간 그룹은 간디스강 유역을 무대로 하여 이윽고는 전
인도로 퍼져 갔으며 나가인으로 되돌아간다. 유럽 방면으로 향했던 자는 위글 제국이
번창했던 무렵에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유럽 각지에 정주했다.
  전자는 인도, 현재의 국민이 기반을 이룬 힌두 아리아이며, 후자는 슬라브, 튜우톤,
캘트, 아일리쉬, 플래톤, 바스크 등, 유럽 제민족의 모태가 되었다. 페르샤 제국을
건설한 이란인도 아리아계이다.
  이제는 알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위글 대제국의 역사는 그대로 아리아인의 역사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나아칼 도서관의 점토판

  트로이의 발굴을 한 유명한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먼의 손자 파출로
슈리먼은 할아버지의 유언을 바탕으로 세계의 고대 문화 조사 연구에 몰두한 결과를
'어떻게 하여 나는 아틀란티스를 발견했는가'라는 제목으로 1912년 10월 20일자의 뉴욕
아메리칸 지에 이렇게 발표하고 있다. 거기에 따르면 파울로 슐리먼은 티베트라사의
고사원에 있는 기원 전 2천 년 경의 옛 기록 가운데 중앙아메리카 마야족의 신화의
사본--'트로아노 고사본'과 부합되는 기술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미지의
나라 무우의 붕괴에 관한 기술이었다.
  티베트는 아시는 바와 같이 남쪽은 인도, 서쪽은 캐시미르, 토르키스탄에 접하고
북쪽은 고비사막을 안고 몽고를 바라보는 중앙아시아의 산악국이다. 아리아계의
바라문승들에게 쫓긴 나아칼들은 인도와 티베트를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는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 기슭에 이르러 그곳에 몇 개의 사원을 세운 후, 마침내는 이 병풍을 넘어
티베트로 모습을 감추었다.
  1896년에 나는 나아칼의 발자취를 따라 티베트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어느
고승으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나아칼의 타블레트(점토판)에 의한
큰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였다.
  옛날 위글의 수도에는 무우 대륙으로부터 나아칼이 가지고 들어온 점토판이 많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것은 예의 대홍수 때에 진흙속에 깊이 묻혀버렸다. 제국의 서부에서
살아 남은 나아칼은 수도의 폐허로 가서 굉장한 고생 끝에 가까스로 상당수의 점토판을
파내어 자기네 사원에 보관했다.
  '그런데...'하고 노승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서 또 무서운 재앙이 찾아왔던 거지. 대지는 이곳저곳에서 솟아 올라왔으며
산이 몇 개고 자꾸만 생겨났지. 지진과 분화와 지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서방으로 가져온 점토판은 또 용암과 화산재와 흙더미 아래 묻혀 버렸다네'
  어렵게 살아 남은 나아칼의 자손이 훨씬 훗날에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장소를 찾아내어
다시 파내었다. 많은 수가 없어졌었지만 그 때도 상당한 수의 점토판을 파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점토판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승의 말투로 보면 그것들이
보존되어 있는 장소는 티베트의 어딘가인 듯하다. 티베트는 그 위치로 보아 일찌기
위글 제국의 일부였었음에 과연 틀림없다. 파내어진 점토판이 티베트 어딘가의 고사원에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은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그 점토판을 본 일이 있느냐고 묻자
노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전 내가 아직 어렸던 시절, 투안포 강(브라마프톨라 강)의 지류에 연한 산
아래에 있는 사원에서 수백 장의 점토판을 본 일이 있지  그 절에서 지금의 이야기를
들었던 걸세'
  '그 절이란 어디 있는 겁니까?'
  노승은 눈을 내리감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옛날 일이라서 기억하고 있지 않다오. 하지만 그 절에 있던 점토판은 나아칼 도서관의
일부여서 그 밖에 아직도 몇천 장은 있는 모양이야'
  '몇 천 장이나요! 그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 민족의 비밀이지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가 없는 노릇이라네'
  그래도 내가 끈기있게 졸라대자 노승은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우리의 수도 아요디아가 침략군의 약탈을 받고 모두 불에 탄 일이 있었다. 나아칼
도서관의 점토판은 그곳에 있던 사원의 굴창고 속에 숨겨져 있었기에 다행히도 적의
눈길을 피할 수가 있었다--이것은 우리 티베트의 승려들 사이에 말로 구전되어 온
이야기인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아칼의 몇 천 개의 점토판은 지금도 그
사원의 폐허 지하 깊숙이에 잠자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의 수도 아요디아란 어디인가, 노승은 입을 꼭 다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고사원의 폐허에 두 명의 영국인과 두 명의 러시아인이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 영국인, 러시아인들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최후의 티베트 여행을 했을 때, 나는 서부지방의 사원에서 꽤 많은 점토판을 발견했다.
그곳은 티베트의 남부를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투안포 강의
원류지대로서, 수도를 하는 라마승 이외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는
변경이라고만 써 두겠다.
  그런 변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꽤 커다란 승원이었는데, 그곳에서 발견한 점토판
속에서 나는 매우 진기한 것을 목격했다. 60cm사방이라는 꽤 큰 점토판으로 그곳에
새겨져 있는 것을 이해하기가지에 나는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그것은 확실히 (세계지도)였다. 어느 시대의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뭏든 세계의 지형을
그린 것이 틀림없었다. 너무나도 그 묘사 방법이 소박하고 간결했었으므로 나는 곧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현재의 세계지도와는 상당히 달라 있었고 특히
남아메리카 대륙에 그 차이가 심했던 것이다
  그 지도에는 지형만이 아니라 성좌 같은 것이 그려 넣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베껴 귀국하고 나서 어느 천문학자에게 보였다. 성좌의 위치, 운행 상태로써 연대를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천문학자는 꽤 여러 날이 걸려서
대답을 해 주었다. 가장 오래 된 천체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굴된 돌기둥이나
점토판에 새겨진 것으로 기원 전 3천 년--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쯤 전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티베트의 천체도는 그것보다도 훨씬 오래되 넋이라고 한다. 나는 지형의 다름으로
보아도 1만 2, 3천 년쯤 전의 것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지만 1만 5천 년 이전의 것인
듯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1만 5천 년 전에 성좌를 이만큼 정확하게 위치를 설정할 수 있는
인간이 있었을 리가 없는데...'라고 그 천문학자는 자신도 납득할 수 없다는 말투로
이렇게 덧붙였다.
  실제 티베트에는 우리의 상식으로써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 수많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만 5천 년 이전의 인간이 어떻게 해서 세계지도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수수께끼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있음- 폐허가  되어가는 이런 옛사원 어딘엔가  고대문명의 신비를 아는 점토판은 
반드시 있다.)

      9. 무우 대륙 최후의 날

    파괴되어 버린 대륙

  그 날도 무우 대륙은 여늬 때처럼 화창한 아침을 맞았다.
  구름 한 점도 없는 파아란 하늘과 감청색의 바다... 열대수의 푸르름에 물든
내만이나 큰 강을 따라 석조 건물이 들어선 도시들이 향기높은 꽃들로 둘러싸여 그
그림자를 수면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끝없이 기름진 들판에는 눈부신 태양빛이 쨍쨍 내리쏟아져 무르익은 열대 과일의
향기는 코를 찔러 숨을 막히게 할 정도였다. 완만한 언덕과 언덕 사이를 누비듯이
흐르는 운하에는 곡물, 과일, 수액, 향료 등의 산물들을 가득 실은 배들이 천천히
지나간다. 물가의 연꽃은 오늘도 청초한 새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 제국의 한없는
번영을 약속이라도 하는 듯이...
  오늘은 어제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다만 다른 날 같으면 해가 높아져 감에 따라
끊일새 없이 들려오던 새들의 합창이 오늘은 왠지 곧잘 끊기곤 했다. 그리고 보니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눈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벌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한 열흘 전부터 먼데서 들리는 뇌성소리와도 비슷한 이상스런 굉음 같은 것을 들은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귀울림으로 착각할 정도로 미미한 울림이었기에
아주 오랜 옛날, 100년도 더 이전에 대륙의 남부에 일어났다고 하는 천재를 새삼스럽게
상기시킬만한 것은 못되었다. 하물며 일부의 신관이나 학자들이 계속 주장해온 불길한
예언을 믿게 할 정도의 것은 아니다.
  오늘 아침, 동쪽 바다에서 떠오른 태양이 두번 다시 대륙의 위에 빛나지 못하리라고야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었으랴
  무우 제국의 황제이며 최고위의 신관이기도 한 라 무우는 그날 아침에도 수도의
신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투명한 신전이라 불리우는 신전에는 지붕이 없어 하나님의
상징인 태양의 빛은 아낌없이 집 안으로 비춰 들어와서 황제의 새하얀 법복에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제국의 장래와 국민의 평안을 지켜 주시옵소서...'
  긴 기도 후에 황제는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이변을
연상케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너무나도 맑게 개인 하늘의
푸르름에 도리어 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황제이자 현자인 라 무우는 전에도 그런 불안감에 싸여 본 일이 있었다. 그것은
번영의 절정에 있는 자가 때때로 느끼게 되는 이유없는 불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제는 기회있을 때마다 영화의 극을 누리며 화려한 사치에 빠져 신의 존재를 잊기
쉬운 국민들에게 경고를 발해 왔던 터였다.
  '신의 은혜에 만성이 되어 그의 두려움을 잊지 말라!'
  그러나 그런 황제 자신도, 설마 제국의 운명이 겨우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오고
있으리라고는 알 리가 없었다.
  이변은 최초에 숲에서부터 일어났다. 원시의 그림자를 드리운 큰 숲 속으로부터 온
것은 마스토돈으로부터 작은 것은 들쥐에 이르기까지의 들짐승들이 떼를 지어 달려나와서
미친 듯이 정처도 없이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무서운 충격이었다. 기분나쁜 땅울림과 함게 대지는 찢어질 듯이 도처에서 솟구쳐
올라왔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큰 굉음과 더불어 육지에서도 큰 불기둥이 솟아 올랐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불 연기와 열기에 의해 심한 뇌성이 들려왔다. 검은 비가
쏟아져 내려와 태양빛을 가리웠다. 열니의 분류가 들을 뒤 덮고 시내로 흘러 들어왔다
새빨갛게 달구어진 크고 작은 암석은 번쩍번쩍 불빛을 내면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열니에 삼키워지기도 하고, 용암에 얻어맞기도 하고, 짙은 유황 가스에 질식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쓰러져 갔다.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쳐 나간 자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해수는 무서운 악취를
내뿜고 탕기가 솟아나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내리쏟아지는 용암을 뒤집어쓴 배는
나무 끝의 먼지가 되어 뜨거운 바다속으로 삼켜 들어갔다.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자들은 신전으로 신전으로 모여 들었다. 그 가운데는 아직
반짝이는 장식품, 의상, 보석류를 버리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각지 울부짖고
있었다.
  '라 무우여, 우리를 구해 주소서!'
  라 무우는 무너지다 남은 신전의 그루터기에 서서 군중을 향해 부르짖었다.
  '최후의 때가 온 것이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내가 일찌기 예언하지
않았던가!'
  빨강, 흰색, 검정, 얼룩덜룩한 돌들을 예쁘게 조화시켜 지은 왕궁도 지금은 금이
가고 다 무너졌다. 오늘 아침 화창한 아침해를 받은 철탑이나 문이나 다리나 대리석
벽은 지금은 흑암 속에 서서 솟아오르는 지옥의 겁화에 빨갛게 비친다.
  땅울림과도 다른 이상한 음향이 귀를 울렸다.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눈에 믿겨지지
않는 광경이 비쳤다.
  처음에 그것은 마치 이동하는 산맥처럼 보였다. 이윽고 하늘을 날아가는 섬광이나
분화의 여광으로 몇 겹으로 겹쳐진 하얀 파도가, 큰 돌기둥이나 철탑보다도 높은
파도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을 때,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운명을 알았다. 큰
해일이었다.
  그날 안에 무우 대륙은 산산히 부서졌다. 대지는 쪼각쪼각 남김없이 부서지고 바다밑
깊숙이 함몰해 들어갔다.
  며칠인가 지나고 태양빛은 이윽고 어둔 구름을 뚫고 멍청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빛을 받아들여야 할 대지는 이제 그곳에는 없었다. 흙탕물이 되어 버린
대양의 물에는 부패한 무수한 어류들이 허연 배를 내놓고 떠내려 갔고 그 위를
분화의 여진이 바람과 물결을 따라 떠돌아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만 2천 년 전의 일이다.
  이리하여 무우 대륙은 6천 4백만 명의 주민과 더불어 바다밑 깊속이 함몰해 갔다.
그러나 지상 최초의 문명과 제국의 영광은 완전히 사라져 간 것은 아니다. 영화의
절정에 있던 무우 제국은 거의 모든 지구상의 구석구석에 그 문화의 발자취를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사의 베일 아득한 저편에, 그곳은 암흑의 원시 세계는 아니고, 현대의
문명보다 나은 문명이 존재했고 (어머니의 나라)의 잔영으로 생존을 계속한 알지
못하는 나라들의 흥망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영광의 잔영을 찾아서

  그 대륙은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사이, 태평양상에 존재한 광대한 육지였다.
동서의 연장 8천km, 남북 5천km에 걸쳤으며 그 중심선은 적도보다 약간 남쪽에 위치한다.
  대륙은 해협에 의해 갈라 놓은 3개의 부분으로 되었고 열 종류의 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나라는 번영의 극에 달해 그 말기에는 추정 6천 4백만 명의 인구를
포용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만 2천 년 전, 이 대륙은 지각 변동으로 말미암은 대지진과 홍수,
해저, 화산의 폭발에 의해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중부 태평양에서 남태평양에
산재하는 이이스터, 타이티, 사모아, 쿠크, 통가, 마아샬, 길버트, 카로린, 마리아나,
하와이, 마르케사스 등등의 고도나 제도는 모두가 잃어버린 대륙의 파편이라 할 수가
있고, 그것은 대문명이 대양 위에 남긴 묘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대륙의 존재를 필자가 안 것은 인도의 고승원에 비장된 점토판의 비문으로부터였다.
그 후 50년 동안을 소비하여 필자는 세계각지를 답파하여 연구한 결과, 무우 대륙의
실재를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자료들의 일부를 여기에 들어 보면...
  인도, 중국, 버어마, 티베트, 캄보디아 등에서 발견한 이른바 나아칼의 비문판과
고문서, 전설류이다.
  유카탄 반도, 중앙아메리카에서 본 고대 마야의 고문서, 사본, 심볼, 전설류
  태평양상의 섬들의 유적, 비문, 심볼, 전설류.
  멕시코시티 근교에서 발굴된 석판  아메리카 합중국 서북부에서 발견된 암굴 거주
민족에 의한 암석 비문류.
  고대 그리이스 현인의 저작, 기록류.
  고대 이집트의 고문헌.
  세계 각지에 전해지고 있는 전설, 구비류.
  이러한 자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들이 떠올라 왔다.
  그 대륙은 일찌기 태평양상에 존재하여 무우의 나라라고 불리웠다.
  이 대륙은 인류 탄생의 땅이며, 그 역사는 약 2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 속에 있는 (에덴의 동산)이란 무우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나아칼의 점토판과 멕시코의 석판이 말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그 발생으로부터
다른 생물과 다른 신의 창조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은 성경의
기술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무우 대륙이 붕괴한 때, 거기에는 매우 고도의 문명이 번영하고 있었다. 학문도
현대인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인도, 이집트, 바빌로니아 기타 고대 오리엔트 국가들의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사실은 죽어 간 대제국 무우가 불타다 남은 것이라고 말해도 좋고, 그들 무우 제국의
자손들은 (어머니의 나라)의 소멸에 의해서 뿌리를 절단 당해 쇠퇴해 간 것이다.
  모두가 확실한 근거에 기인한 것이며, 결코 단순한 상상에 의한 것은 아니다.
고대인의 표현 방법은 얼핏 보아 복잡하고 난해한 듯 하지만 근본은 단순하며 전설은
하나 밖에 없다.
  필자가 소개하고 있는 비문, 심볼의 종류는 결코 필자에 의해서 새로이 발견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것도 적지 않다. 다만 그것들이 1만 2천 년부터
7만 년이나 되는 오랜 연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고는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
뿐이다.
  그러한 옛날의 비문이나 표상이 간직하고 있는 의미를 해명해 냈을 때, 아예 오랜
전설이나 구비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도 고고학적 의문, 지리학상의 수수께끼는 저절로
풀려가는 것이다. 유사 이전에 대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에 관해서는 기원 전 6백 년 경
중국의 철인, 노자도 언급하고 있는 바이다.
  고대인은 어질고 사려가 깊었으므로 점토판이나 석판에 기록을 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사이스의 늙은 신관이 그리이스의 현인 솔론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천재지변이나 전쟁에 의해 세대가 바뀌고 민족이 교체되는 가운데 후세의
사람들은 자기 고장의 과거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과거의
귀중한 기록은 파괴되고 혹은 숨겨진 장소에 비장된 채로 잊혀져 버렸다.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진기한 것이 아니었던 그런 기록은 현재로서는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그 단편이나 잔해를 캐어내도록 하여 찾아내야만 한다. 그러나 지구의
북쪽 끝에서 발견된 기록의 단편이 남쪽 끝에서 파낸 기록과 부합되고, 그 의미를
보완하는 데에 도움이 된 경우는 필자의 경험으로도 한두 번에 그치지만은 않았다.
이것은 그 문명의 근원이 하나라고 한다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노력을
끈기있게 계속해 나가는 가운데 지상 최초의 대문명의 모습이 점차로 윤곽이 밝혀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천지창조와 인류 탄생의 수수께끼 전부를 해명하는데는 필자 한 사람이 50년을
소비한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우리 인류의 시조가
어떻게 하여 지상에 나타났으며 어떻게 최초의 문명을 쌓아 올렸던가  그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필자의 취재를 계승할 자가 앞으로 몇 사람이고 나타나서 오랜 세월을
그 탐구에 소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점토판이나 석판 등의 비문도 그렇지만 무우 대륙 그 자체의 유적 혹은 유물을
발견하는 것도 아주 곤란했었다. 필자는 오로지 이 유물을 찾아 수년 동안을 소비한
끝에 이윽고 2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데 지나지 않았다. 그 2점 모두가 작은 브론즈
상인데 무우 대륙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무우 대륙 최대의 식민국의
하나인 위글 대제국에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위글 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 연대는 1만 8천 년 전부터 2만 년, 만일 무우 대륙에서 제작되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 연대가 오래임은 추정하는 것마저도 곤란하다.
  이 2점의 브론즈상은, 무우 제국에서는 통치자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으므로 그
세공의 정교함은 놀라울 뿐 아니라 현재 인류의 미술품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의 일품이다. 이들 브론즈상은 어떤 사정에선지 1백 50년 동안이나 미국에 있었는데
그것이 동양의 성적에서 파낸 것임은 명백하다.
  필자가 입수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다른 3점의 무우 대륙 유물을 알고 있다. 그것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서 3개의 왕의 홀이다. 그것들이 함몰 전의 무우
대륙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우 대륙에 열 종류의 민족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들은
그 머리빛깔, 피부색, 체격 등으로도 분명히 구별이 되는데 그 언어에도 약간의 상위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비문이나 상형문자에서 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무우 대륙에서도 여러 지역에 나뉘어져 살고 있었는데 다른 토지에 식민할
때에도 같은 민족끼리 뭉쳐서 행동했다. 그리고 자기네들이 토지를 결정하면 조상이
모국에서 했던 것처럼 자기들의 도시를 만들었다.
  식민지가 도시가 되고 이윽고 국가로 되어 감에 따라 언어에도 분명한 상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통의 모국을 가진 이들 여러 국가들이 제각기 독자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던 것이다.

      10. 동방으로 뻗어나간 식민선

    마야로 불리우는 이주자들

  무우 대륙은 그 전역이 열대에 속하는 풍요하고 비옥한 일대 낙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인구의 증대도 격심하여 그렇게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드디어 인구
과잉 상태가 되어 갔다  그렇지 않아도 용감한 해양 민족이었던 그들은 모국을 멀리
떠나 동으로 서로 항해했다  그들 속에는 신천지를 찾는 야심이 싹터나가게 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리하여 식민지 계획이 실행되기에 이르렀다  식민을 위해 무우제국을 떠난
이주자들은 모두 (마야)라고 불리었다
  식민은 도대체 어느 무렵부터 시작되었던가?  그 정확한 연대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나아칼의 비문판에 다음과 같은 기술을 볼 수 있다
  '거룩한 형제들--나아칼의 어머니의 나라로부터 그 종교과 학문을 식민지로 가져온
것은 약 7만 년 전의 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식민지란 아시아 방면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들 식민지 가운데는
인구 3천 5백만에 달하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대인의 유적, 그들이 남긴 상형문자, 그림, 비문, 고문서
등으로 종합해 보면 무우 대륙의 식민지들이 걸어온 코오스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무우 대륙을 중심으로 하여 동과 서로 향하는 두 개의 식민선이데 이 코오스로부터 다시
많은 지선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 동과 서는 어느 코오스가 맨 먼저 선택되었었는지, 또 맨 처음에 발을 내디딘
식민지가 어디이며 그것은 언제쯤의 일인지 그것들을 말해주는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집트의 나일델타 지방에 마야족이 뿌리를 내린 것은 약 1만 6천
년 전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아마 동서의 식민서은 거의 동시에 개척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양 식민선에서 최초에
만들어진 식민지를 상상해 내는 것은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비교적 용이하다  동방
식민선에서는 현재 미국의 북부, 중부의 서해안, 서방 식민선에서는 아시아 대륙의
동해안이었다
  무우 제국 식민지의 상징으로는 수평선에서 반쯤 떠 오른 태양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식민지가 발전하여 식민 제국이 건설되자 그 태양에 광망(빛살)이 붙여졌다
  식민 제국의 제왕은 (태양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는데 이것은 아무리 국가가
커지더라도 태양의 제국 무우에 종속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동방 식민선에는 두 개의 주요 코오스가 있었다
  그 하나는 무우 대륙으로부터 유카탄 반도, 중앙아메리카 방면으로 향한 코오스이다
그것은 다시 아틀란티스 대륙으로부터 지중해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가 다아다넬스
해협을 지나 흑해의 동남안까지 뻗어 있다  이 코오스에는 기록들도 더 남겨져 있어
그 자취를 더듬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
  이 주요 코오스에서는 미국의 서해안으로부터 남아메리카의 동해안인 칠레에 이르는
지선, 중앙아메리카의 동해안으로부터 남아메리카의 동해안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지선이
있다  그 밖에 중앙아메리카로부터 북동쪽으로 나아가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는 선,
아틀란티스에서 나누어져 유럽 남서부로 향한 지선도 있다
  주요 코오스가 지중해에 이르면 몇 개의 지선이 아메리카 대륙의 북부로 나누어지는데
이 지중해선 최후의 식민지가 하이집트, 나일델타 지방에 만들어진 사이스의 식민지였을
것이다
  이상을 필자는 동방식민선의 북 코오스라 부르기로 하고 있는데 이 식민선에는 또
한 군데 다른 코오스가 있다  그것은 무우 대륙의 남서부를 기점으로 하여 남아메리카에
달하는 코오스로 이렇다 할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데 필자는 한 장의 아주 오래된
지도에서 암시를 얻어낼 수가 있었다  수수께끼가 많아 가장 흥미 깊은 코오스이다
  이 코오스는 남아메리카의 서해안에서 운하를 지나 아마존해로 나간다  현재 아마존의
습기찬 지대가 있는 부근이다  아마존해를 빠져 나가면 아마 보급을 위해 아틀란티스
남해안으로 다가가서 거기서 아프리카 동부로 향하고 있다  이 코오스의
마야(식민자)들은 니그로 또는 네그로이드, 즉 흑인계이다
  그들은 무우 대륙의 남서부에 살고 있던 민족으로 생각되며 현재의 남서태평양의
섬들, 멜라네시아에서 그 후예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더군다나 이 코오스에는
이밖에도 (카라) 또는 (카리안)이라고 불리던 백인종도 끼어 있었던 모양인데 그들은
그리이스인의 조상이다
  동방 식민선에는 이 밖에도 또 매우 중요한 코오스가 있다  하나는 북아메리카의
네바다 근방, 두 번째는 멕시코 분지 근방, 그리고 세 번째는 페루 근방에 정착한
자들이다  페루에 식민단이 도달한 때, 아마존해로 빠지는 운하는 괴멸 상태에 있었다
현재 안데스 산맥이나 치치카카호수 주변에서 그 잔영을 찾아볼 수가 있다

    불가사의한 선주 민족

  지도를 보자
  이 지도는 북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인데 유사 이전의 문명을 나타내는 유적, 또는
유물이 발견된 위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단순한 원은 한 종류의 문명 유적이, 이중의
원은 두 종류의 문명의 유적이, 그리고 삼중의 원은 세 종류 또는 그 이상의 문명
유적이 발견된 장소이다  합중국의 서부 여러주, 어기는 3내지 4의 유적을 볼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분명히 현재 서부에 우뚝 솟아 있는 산들이 융기한 때 그 조산 활동에
수반하는 재해에 의해서 괴멸한 것이며 그 밖은 대 홍수에 휩쓸려 파괴되어 씻어 내려간
것으로 생각된다
  유타, 네바다, 뉴멕시코, 아리조나, 콜로라도의 여러 주, 멕시코,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의 각지는 고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보물창고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이
만큼 연구 재로를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는 지역은 온 세계를 다 찾아 헤메도 찾아 보기
힘들다  그리고 유적이나 유물 뿐만 아니라 귀중한 고대의 기록도 발견된 일이 있다
  확실히 그러한 기록들은 너무나도 오래된 것이어서 그저 보아 넘겨서는 인간의 손에
의해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마져 못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들 속에 있는 선입관이나
틀에 박힌 지식을 떨쳐버리고 허심탄회하게 바라볼 때, 고대인은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알파벳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것들은 때로는 조금도 다름없는 바위의 구멍이나
균열이며 낙서와도 같은 그림이나 문자이며, 또한 부싯돌, 화살촉, 근사한 토기, 보석류,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자랑하는 근대 도시 못지 않는 콘크리트의 대도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북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에 맨 처음에 살았던 인간은 케투알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들의 발자취를 나타내는 것은 구전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인간의 유물이라고 생각되는 것 중에 우리가 그것인 줄
알지 못한 채로 케투알의 유물을 보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필자가 중앙아메리카로 조사 여행을 떠난 것이 1890년대의 일이었는데, 그때
원주민은 인디오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온두라스나 과테말라의 대밀림 속
깊숙한 곳에 브론드 화이트의 인디오 부락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금발에 하얀 피부의 인디오--그것은 결코 공사의 산물을 아니다  필자에게 그 말을
해 준 그 원주민은 진지한 얼굴로 그 흰 인디오 한 명이 그들의 부락에 몇 주간이나
체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 흰 인디오는 자기들의 조상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마야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들은 먼 옛날 케투얼왕이 전쟁에 패하여 왕위를
물러난 때, 숲 속으로 도망쳐 들어간 자들의 후예라고 말했다
  유카탄 반도에 관해 쓴 것 중에서 피그미(소인족)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좋겠다  그러나 그들은 또 전사의 수수께끼를 탐색하는데 있어 중요한
존재이다
  반도 동부의 해안선이나 그 근방에 산재하는 섬들에는 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집이나 신전의 유적이 있다. 현재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소인족에 관한 전설이 매우 많이 남겨져 있으며 그들이 그 지방에 살고 있었던 것은 그 만큼 
오랜 옛날의 일은 아니라고 한다.
  반도의 동쪽에 있는 코스메르 섬에는 그들이 세운 것으로 생각되는 신전이 남아 있는데, 
그 문의 높이는 가까스로 1m, 폭은 20여cm밖에 안 된다. 그들의 집이라고 하는 것도 대개 
그런 크기이다. 그렇더라도 이 소인족은 도대체 어디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전멸하고 만 것일까?
  필자가 영령 온두라스에 체재하고 있을때, 사냥꾼이나 탐험가로부터 때때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산 속 깊숙한 곳 어두운 골짜기에서 이상한 인디오를 만났다. 그들은 키가 겨우 1m, 
피부는 거무스름하고 긴 머리털로 산발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마야어였다고 한다

      11. 유사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

    케투얼족의 신대륙 발견

  파도... 또 파도, 한없는 대양을 한 척의 큰 배가 동으로 나아갔다  그 배의 고물에는 
날개를 편 무서운 형상으로 된 큰 뱀의 조각이 새겨지고 그것이 파도를 뒤집어 쓸 때마다 큰 
뱀이 하얀 거품을 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키가 크고 골격이 늠름하게 생긴 젊은이들로 밀크색의 
아름다운 피부는 내리쐬는 햇볕에 그을려 더 한층 씩씩해 보였다  무서움을 모르는 파란 눈, 
그리고 아마 색의 머리를 해풍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무우 대륙의 주민들 가운데 케투얼이라고 불리우는 일족으로 "날개 있는 뱀" 
케투얼코아토르는 그들 일족의 수호신으로서 추앙받고 있었다
  어머니의 나라 해안을 떠날 때, 하늘에는 둥근 달이 떠 있었다  그 달이 점차로 
일그러지기 시작하여 실처럼 가늘어지더니 이윽고 밤하늘에서 그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금 모습을 나타내더니 조금씩 동그라미로 변해갔다.
  오랜 항해였다.
  "동쪽으로 가면 넓고 넓은 육지가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배를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퍼져 있는 
말이었다.그리고 지금 케투얼족은 황제의 허가를 받아 그 신천지를 탐험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발견할 때에는 그 토지의 이주권을 우선적으로 얻는다는 조건 아래...
  아침해가 수평선으로부터 절반쯤 얼굴을 나타낼 때, 망을 보는 사나이가 외쳤다.
  "야아! 보인다 보여! 육지가 보인다!"
  그들은 모두 사나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침의 햇살 아래 실오라기처럼 
가늘고 흰 한 줄이 수평선 위로 보였다. 그리고 나직막이 육지에 부딪치는 파도의 
물보라치는 모습도... 희게 보이는 것은 해안에 부딪치는 파도의 물보라임이 틀림없었다.
  미지의 대륙은 점차로 그 모습을 크게 나타내었다. 거친 파도는 광막한 대륙의 단애나 
인기척도 없는 하얀 모랫가를 씻어갔다. 배는 그들이 상륙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 해안을 
따라 천천히 남으로 남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그들은 커다란 하구를 발견했다. 배를 해안에 세우고 작은 거룻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윽고 해안에 도착하자 움막집을 지었다. 그 곳을 근거지로 하여 그들은 
주변을 탐험하고 돌아다녔다. 어디를 보아도사람의 그림자다운 것은 전혀 없었는데 기후는 
따뜻하고 수목도 무성하여 살기에는 퍽 좋았던 것 같다.
  케투얼의 배가 가지고 돌아온 뉴우스를 듣자 무우 대륙은 떠들썩했다. 이번에는 본격적인 
조사단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점점 신천지에로의 식민이 개시되었다.
  최초에 케투얼의 배가 발견한 것은 아마 북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가서 최초에 상륙했던 지점은 아마 멕시코 근방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지금부터 적어도 5만 
년 이전의 일이었다. 이주자들은 속속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알래스카의 북단으로부터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호온 곳에 이르기까지 그 자취를 더듬을 수가 있다.
  무우 대륙으로부터 복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최초의 이주자들은 콜로라도 강 
유역으로부터 현재 남서부의 주들에 정착, 그리고 나서 아리조나-네바다, 유타, 와이오밍으로 
퍼져나갔다. 아리조나의 하바스파이 협곡의 암벽화, 오리건 사막의 "화석의 호수", 
네브라스카의 "바팔로우 월로우"라고 불리우는 고대인들의 주거 유적, 동부 캔터키의 
블루우릭스프링스의 지하 유적과 고대 식민자들의 유적을 몇 가지인가를 볼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들은 이만큼 광대한 지역으로 보면 결코 많다고 할 수는 없겠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문자를 갖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를 아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선사 민족이 기록의 수단을 갖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선사연구의 자료나 유물, 화석골의 종류들이 적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대자연의 맹위에 의한 것이다.
  록키 산맥이라는 대 산맥의 융기가 복아메리카 대륙의 선주 민족에게 끼친 타격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지진, 대홍수, 산의 융기, 거기에 잇단 빙하의 출현 등으로 
말미암아 사람도 짐승도 건축물도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분쇄되고 씻겨 내려갔다. 두꺼운 
빙설이나 빙하의 맹위에 의해서 궤멸했다는 점에서는 알프스라는 대 산맥의 융기를 만났던 
유럽과도 공통한다.
  그러한 재앙을 거친 후에도 네바다주와 같이 꽤 풍부한 자료가 남겨져 있는 곳도 있다. 
그레이프바인 협곡, 고올드 갸르쉬 등, 현재 암굴 거주 민족의 주거 유적으로 불리고 있는 
곳에는 동굴의 벽이나 절벽에 새겨 놓은 수백, 수천이나 되는 심볼, 종교문자, 도표, 신전의 
조감도 등을 볼 수 있으며 북아메리카 대륙의 선사를 이야기해 존다. 이들 선사 민족이 
록키라는 대산맥의 융기에 의해서 크게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록키 산맥을 남으로 남으로 더듬어 가면 이윽고 멕시코에 이른다. 무우 대륙으로부터의 
식민지가 아마 최초에 정착했을 멕시코, 여기도 물론 이 대산맥의 융기로 말미암아 큰 
재앙을 입었다. 그리고 멕시코의 선주민들이 걸어온 운명은 북아메리카 대륙 전토 선주민의 
운명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고장에는 먼 과거를 더듬는 자료가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태양이 물 속으로 빠졌다!

  멕시코 분지-이 고장 만큼 고고학 애호가들을 매료시키는 곳은 없다. 여기에는 인간의 
흥망의 역사가 그림으로 그리듯이 되풀이 되고 있다. 게다가 그 비극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인간의 발자국이 찍혀졌을 때부터 이미 준비되었던 갓이다.
  멕시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지로서 크게 번영하여 더욱더 발전해 갔다. 
남쪽의 유카탄 반도나 과테말라 쪽에도 식민지가 만들어지고 도시가 건설되어 갔는데 멕시코 
분지의 문명은 유달리 뛰어나 있었다. 대도시가 건설되고 웅장한 대신전이 만들어졌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경우 멕시코의 분지라든가, 멕시코의 골짜기라든가 하는 말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야라든가 완만한 기복이 있는 언덕에 둘러싸인 
토지였기 때문이다.
  그 번영이 절정에 달했는가 하고 생각되었을 때 쯤 해서 갑자기 대양으로보터 큰 파도가 
몰아 닥쳐왔다. 물은 들을 삼키고 무서운 기세로 도시로 흘러 들어와 신전 등의 
대건축물등을 쓰러뜨렸으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씻어갔다.
  물이 빠졌을때, 물에 씻겨 간 자국에는 황량한 광경만이 남았다. 겹겹이 쌓인 조약돌, 자갈, 
모래로 끝이 없는 죽음의 세계 그것이었다. 그 밑에 일찌기 그 화려함을 자랑하던 대도시나 
산전이 묻혀 버렸을 것이다. 제일의 문명은 이렇게 멸망해 갓다. 그 유적은 지금도 
멕시코시티의 북방 40km 지점에 잠들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도 그 후에 4개의 문명이 이 땅에 뿌리를 내렸고, 그리고 모두가 큰 
파도, 혹은 대홍수로 말미암아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이 네 번째의 문명을 쌓은 
고대인들은 파괴되기 어려운 기록을--돌에 새겨진 기록을 남기고 갔다. 2천 6백 점에 미치는 
이들 석판이 멕시코의 광물
학자 윌리엄 니이벤씨에 의해 발굴된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이 문명 최후의 날은 규모는 다르지만 무우 대륙의 붕괴를 방불케 하는 것이 있다. 땅밑의 
화산맥의 활동에 의해서 멕시코 분지의 지하에 가로질러 있던 가스체임버가 폭발하여 지반이 
함몰했다. 대양의 물은 그 구멍으로 향해 쏟아져 흘러들었다. 멕시코 분지는 순식간에 거대한 
홍수로 변했다. 잇달아 무시무시한 화산 폭발이 꼬리를 이었다. 대지는 숨쉴 틈도 없이 
흔들려 댔다. 땅은 갈라지고 거대한 불기둥은 분연과 더불어  하늘높이 치솟아 올랐다. 
시뻘건 용암의 흐름이 사람이건 동물이건 초목이건 할 것 없이 모두 불태우고 녹여 버렸다.
  이 때의 분화구나 흘러내린 용암이 식어 굳어진 덩어리는 지금도 볼 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현저한 것은 "히틀리"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이 용암의 흐름은 약 30km에 걸쳐 
뻗어 있어 멕시코시티의 끝까지 달하고 있다. 그 두께는 8m 남짓이고, 그것만으로도 
대분화의 엄청남을 말해 주고 남음이 있다.
  이 대함몰이 일어났던 것은 도대체 언제쯤의 일일까. 그 정확한 연대를 알 길은 없으나 
이집트에 있는 신전의 기록에 따르면 현재의 중앙아메리카에 해당하는 지역의 함몰은 적어도 
약 1만 6천 년전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 기록은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아즈테크족의 전설에는 이런 것이 있다.
  "코르테스에 의해 멕시코가 정복된 때(1521년), 그는 한 사람의 아즈테크의 신관에게서 
이런이야기를 들었다. (먼 옛날, 대홍수가 멕시코의 골짜기를 뒤덮어 모든 인간이 익사했다. 
그 홍수는 태양마저도 물 속에 잠기게 할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세계는 흑암의 
세계로 변했다. 신은 새로운 태양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이 새로운 태양이 이 세계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아마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전설로부터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그 하나는 
멕시코 분지의 함몰, 또 다른 하나는 무우 대륙의 붕괴이다.
  물은 다 빠져 나갔으나 황폐한 토지에 사람이 살게 되기까지에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었다.
  어느 사이엔가 이 토지에 또 사람이 붙어 살게 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전보다 더 번영하게 
되었다. 그 무렵에 무우 제국은 여지껏 "태양의 제국"이라 칭하여 전세계에 군림하고 있었다. 
아즈테크의 전설에서 말하는 태양이란 이 태양의 제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는지. 그 후 
태양--즉 무우 대륙은 물 속으로 함몰했다. 그것을 전설은 "태양이 빠졌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 분지의 함몰과 무우 대륙의 붕괴, 이 두 가지의 시기를 달리 했던 대 이변이 
아즈테크의 전설에서 하나로 묶여져 버렸던 것은 아닌지.
  전세계의 지배자인 태양의 제국이 소멸한 때, 모든 질서와 통솔을 잃어버렸다. 모든 
식민지, 식민 제국은 일시적인 혼란에 빠졌다. 전설은 말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세계는 흑암으로 변했다"라고---.
  그러나 얼마 후 제각기 나라들은 자치제도를 확립하고 "어머니의 나라"로 미덥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것은 확실히 세계 역사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번영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이에 지하에서는 다음의 대 규모적인 이변이 
준비되고 있었다.
  거대한 가스 벨트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부를 따라 지하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멕시코의 서방을 지났고, 또 하나는 동방으로 달려 조산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하의 
가스 벨트는 팽창하여 무서운 에너지로 지각을 들어 올렸다. 현재의 동-서셜라마들레 산맥의 
융기이다. 이 산지의 융기 사이에 끼어 있던 멕시코의 골짜기도 덩달아 수천m의 높이로 들어 
올려졌다.
  이 대규모적인 디각 변동에 즈음하여 그곳에 만일 인간이 살고 있었다고 하면 우선 
괴멸적인 타격을 받아 아마 전멸했다고 보아도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조산 활동이 일어난 
때, 그것은 어느 고장에서나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날 멕시코 분지의 성립에 관해 여러 가지로 조사해 나가면 북아메리  카 대륙 서부의 
산지가 형성된 것은 오래 잡아 1만 1천 5백 년이고, 그 이상 옛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명백해진다.
  멕시코 분지가 함몰하여 물 밑으로 함몰한 때, 홍수가 날라온 조약돌이나 모래 자갈들이 
쌓이고 겹쳐졌고 또한 바다로부터 운반되어 온 조개껍질들이 그 사이에 채워졌다. 이윽고 
물이 빠지자 그것이 부서지기 쉬운 바위로 남게 되었다. 멕시코의 (테페타테)라고 불리우는 
깨어지기 쉬운 약한 바위가 그것이다. 이 바위는 분지 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산 위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산의 융기가 함몰 후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또 이 테페타테가 조성암이라는 것은 분지를 덮고 있던 물의 깊이와 그 세월에 대해 힌 
가지 람시를 제공해 준다. 아주 오랜 동안 계속해서 수압을 받고 있으면 더욱 밀도가 높은 
단단한 암석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멕시코 분지를 사이에 끼고 있는 것처럼 양쪽으로 뻗혀진 동.서셜라마들레 산맥이 
북아메리카의 대산맥 록키 산맥의 끝 대목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멕시코 산지의 융기 
연대는 북아메리카대륙으이 적어도 서부의 산들의 연령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멕시코 분지는 왜 이와 같이 때때로 큰 파도나 대홍수를 만낫던 것일까?
  지도에 나타나 있듯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가스 벨트가 마치 멕시코를 사이에 끼어 놓은 
것처럼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또 서해안의 해저에도 세 가닥의 가스 벨트가 펼행으로 
달리고 있다. 모두가 지구의 지각 속에 있는 가스 벨트 가은데서도 가장 큰 태펼양 환상 
가스 벨트의 가지선이다.
  이들 가스대와 교차하여 두 가닥의 가스 벨트가 동서로 달리고 있다. 지구를 한 바퀴 빙 
돌아가는 대중앙 가스 벨트의 지선으로서 중앙아메리카에서 유카탄 반도 부근에서 몇 
가닥인가로 나누어지거나 또 묶여지거나 하여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
  (그림생략)
  이들 가스 벨트가 완성되기까지에는 지하에 겹쳐지고 흩어져 있는 가스가 가득차 있는 
공동인 가스체임버가 가스의 팽창력으로 말미암아 깨어져서 합해지지않으면 안 된다. 그 
충격은 지표에 대지진이나 큰 해일을 일으키기레 충분하다. 또 빠져나갈 곳이 없는 가스는 
지표를 향하여 분출, 대지를 들어 올리는 수도 있다. 이것도 또 대지진이나 해일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지표의 융기, 즉 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구에 산이 없었던 무렵

  산-- 그것은 으리의 지구상에 얼마나 변화와 풍취를 더해 주고 있는가. 백설을 이고 솟아 
있는 고봉이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쳐 있는 산맥이나, 불과 연기를 토해내는 
활화산이나 현재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위로해 주는 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먼 인간의 비극의 역사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인 것이다.
  대부분의 옛 기록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만 2천 년 내지 1만 5천 년 전쯤의 지구상에는 
산이 보통 지표 아래 10km 내지 20km 부분에 있는 가스벨트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고대인의 사고방식에 따그면 창조주가 대지를 완전히 만들어내는 도중에 
생긴 부산물이다.
  옛 기록으로 남겨진 지난 날 무우 대륙의 묘사에도 산다운 것은 나오지 않는다.
  "쭉 계속된 대평원 (그리이스의 고기록)"
  "골짜기와 초원에 가득 찬 낮은 언덕의 땅-트로아노 고사본-"
  "강한 마스토돈의 무리나 여러 가지 종류의 코끼리떼들이 큰 귀를 흔들어 대며 이 펼원을 
설치고 다녔다(북아메리카 인디언 및 고대마야의 옛기록)"
  "땅과 언덕의 나라 무우 -트로아노 고사본-"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과 완만한 대지의 기복의 연속, 그것은 한가로우면서도 무언가 
부족한 풍경이었는지도 모른다.
  땅 밑 화산맥의 활동에 의해서 발생된 가스가 땅속에 공동을 만들어 가스체임버(방)가 
되었고 이윽고 벽을 깨고 천정을 뚫고 올라와 가스 벨트를 형성해 나간다. 그런 과정에서 
무우 대륙은 함몰했다. 그것은 규모의 크고작음에 불구하고 지각 변동에 수반하여 지구의 
각처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희생은 컸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물이 고일 만한 곳에 물은 
고이고 높아질 만한 곳은 솟아 올라왔다. 그것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대자연의 법칙이며 
고대식으로 말하면 창조주의 의지였다.
  사실 지구의 변혁은 태초 무렵부터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지구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되었을 때 인간이 나타났던 것이다. 지구의 변혁은 다시 계속되고 
인간도, 그밖의 생물도 새로운 상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 갔으며 
지금도 그것은 계속되어지고 있다.
  화석에 따라서 머나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3억 2천만년 전, 고생대의 
실루리아기에서 조차도 육서 동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무렵 식물은 아주 
적었든가, 아니면 전혀 없었겠지만 그러나 곤충은 이미 출현해 있었다. 그들은 불타는  듯한 
뜨거운 태양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갑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영겁처럼 길고 긴 세월이 지난 후 이윽고 데본기가 된다. 그 말기에는 열대의 늪에 수십 
Cm나 되는 양치 식물들이 무성하기 시작했다. 석탄기에 들어서자 식물은 굵고 튼튼해지고 
그에 이어 타충류들이 나타났다. 쥬라기에 들어서자 단단한 지면을 걷기에 적합한 파충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아직 대지는 그렇게 굳어 지지 않고 있었다.
  백악기의 중엽이 되자 늪지대의 식물들은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고 그 말기에는 늪지대에도 
밟고 걸어다닐 수 있을 만큼 연ㅂ이 굳어져 있었다. 제삼기에 들어오자 늪지대의 변화로 
파충류는 소멸하고 새로이 포유류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지구는 아직 인간이 살기에는 너무 
습하고 질척질척하며 독기로 가득차 있었다. 물론 아직 산은 없었다. 최후의 지각 변동 
때까지 산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제 삼기 중신세에 이으어 지구는 인간이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되고 기온도 겨울철에는 꽤 
추울 정도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산은 없고 메마른 평아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야의 고문서는 무우 대륙을 "땅과 언덕의 나라"라고 형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완만하게 기복하고 있는 대평원을 의미한 것일 것이다. 이 문서--"트로아노서"란 유카탄의 
어느 지하 동굴 속에 비장되어 있는건(현재도 있는것) 고신전의 기록 사본으로 5천 년 
이상이나 되었다고 하는 고사본이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산이 지상에 나타나기 전과 후는 녁사의 한 분수령이었음에 틀림없다. 
성경의 시편 속에도 "산이 솟아오르기 전..."이란 싯귀가 보인다. 중앙아시아의 고대 민족은 
히말라야의 중앙아시아에 있는 산의 융기를 자기네 역사를 더듬어보는 하나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전설은 그 때에 몇 억이라는 인간이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멕시코 분지에 인간의 문명이 쌓여져다가 홍수에 모조리 씻겨 내러졌다고 하는 역사가 
몇번인가 반복되었을 무렵, 물은 태평양으로부터 거의 아무 장애도 받지 않고 대지를 
침습했다. 현재 2천 3백m나 되고 표고에 있어 사면이 산으로 에워싸인 이 고원 지대도 
당시에는 겨우 해발 몇 m라는 낮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조산 활동을 불러일으킨 최후의 지각 변동이 그때까지 쌓아진 인간의 문명을 괴멸시킨 
것은 각종 고대 기록으로 보아 약 1만 2천년 전쯤의 일로 ㅅ각되는데 멕시코에는 그보다 
훨씬 앞선 5만 년 이상의 옛날부터 고도로 발달한 문
명이 몇 번인가 쌓여졌다가는 무너지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유구함으로 비교해 볼 때, 바빌로니아나 이집트나 유칸탄 등 현재 이른바 고대 문명의 
유적이라 하여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아메리카인과 외국인을 불문하고 많은 학자들 (모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에게 이것을 보이고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읍니다만 대답은 오직 하나, 이런 상형문자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는 대답 뿐이었읍니다..."
  이런 편지와 함께 윌리엄 니이벤씨로부터 필자에게로 이상한 석판을 복사한 것을 많이 
보내 왔다  니이벤씨는 그 석판들을 멕시코 시티의 북서쪽 약 8??? 지점의 호젓한 시골마을 
부근에서 발굴했다는 것이다  지표면으로부터 5??6?? 깊이에 고대의 보물류와 함께 묻혀 
있었다고 한다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석판들을 앞에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 것은 오히려 
당연할는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일류 고고학자일지라도 6천 년, 7천 년 이상의 오랜 것이 
되고 보면 심볼이건 비문이 되었건 우선 해독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보다 오랜 세계로 분류해 들어가려면 모든 고대문명의 근원이 되어 있던 무우 대륙의 
언어나 그 표상을, 알파벳을, 그리고 종교관, 우주관을 알아야만 한다  어머니의 나라 무우, 
그것을 아는 것이 이와 같은 아주 오래된 표상이나 비문을 푸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나라"의 알파벳은 겨우 열 여섯 글자로 되어 있는데 한 글자 한 글자가 많은 
발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문자가 세 종류쯤의 다른 글자체를 가지고 있다
  그 첫째는 종교문자로서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특수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둘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민간용 문자이고, 세째는 특별한 형용, 또는 강조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문자이다
  종교문자는 신관만이 사용했던 것으로 그 의미가 깊어서 신관들 가운데도 그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였던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그 숨겨진 의미라는 
것은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은 무우를 상징하는 문자, "??"는 무우의 
우주관의 기본에 있는 "거룩한 4", "??"는 창조하는 자 즉 하나님을 나타내는 문자였다
  니이벤씨에게서 보내 온 석판의 사본을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 필자는 마치 옛친구라도 
만난 것과도 같은 감개에 젖었다  왜냐하면 전에 인도의 옛 승원에서 노승과 함께 점토판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하나하나 풀어갔던 때의 그 지혜가 여기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열쇠는 오직 하나였다  석판의 한 장 한 장은 유사 이전의 알려지지 않은 아메리카를 
얘기해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판의 발굴 때, 사람 머리의 조각품도 몇 개나 함께 파내었다  그 사람 머리의 특징을 
보면 현재 지구상의 민족 중에 거기에 부합되는 것은 좀체 찾아볼 수가 없다  니이벤씨는 
몽고계가 아닐까 하는 의견인데 필자는 오히려 샘족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상한 
것은 석판에 새겨져 있는 종교적인 기록 가운데 최근 바빌로니아에 발견된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니이벤씨에 따르면 석판의 대부분은 고대의 제단이라고 생각되는 것의 주위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표면을 점토로 덮고 있는 것은 선각에 칠해진 채색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제단의 주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점으로부터 석판에 새겨져 
있는 그림들은 신화의 종류가 아닐까 하는 것이 쉽게 상상된다
  인두의 조각은 당연히 전에 이 곳에 살고 있던 고대 민족의 풍모를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연대와 석판의 연대는 간격이 있으며 석판 쪽이 훨씬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거룩한 영감의 ??"-그것은 무우제국 종교의 교의며 근본이다  멕시코 석판의 해독을 
계속해 나가는 가운데 그 대부분이 "거룩한 영감의 ??"로부터의 인용이나 발췌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따라서 종교문자가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는 중에 필자는 뭐라고 말하기 곤란한, 아니 불가능한 현상에 부딪혔다
  1. 석판의 대부분은 제작방법이 조잡하다  그 필치, 조각, 모든 점으로 보아 전문가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아주 근사한 솜씨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2. 석판은 천연색을 이용하고 있고, 그 모양에 어울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모양도 크기도 가지가지이고 표면은 물에 마멸된 것처럼 매끄럽다
  3. 그림은 아주 소박하지만 거기에 표현되고 있는 내용은 매우 고도의 지식을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우주 원동력의 근원과 그 작용, 인간의 생명과 그 기원 등등  오늘의 
과학자가 에너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완전히 이해되고 있다  그 지식의 심원함은 
오늘날의 학술 수준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이것이 미개 원시인의 손에 의한 것일 수는 없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몇 가지의 수수께끼가 떠올라온다  이만큼 심원한 지식을 가진 자가 
어떻게 이런 조잡한 표현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일까?  동시에 출토한 토기류는 그러싸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도 석판의 돌 자체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것은 웬일일까?
  무딘 필치이지만 그 문자는 고위의 신관들만 사용하던 종교문자가 많은 것은 웬일일까? 
1만 2천 년 이상 옛날의 아메리카에서 어째서 이런 것이 만들어졌던가? 이러한 일에 관해 
아직 만족스런 해명은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석판을 읽고 있는 가운데 느낀 것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종교관이나 우주관은 
동시에 그들 고대 민족의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듯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쓰여 있는 
것은 지식이며 교양임과 동시에, 법률이며 지상 명령이기도 했던 것이다
  "거룩한 영감의 책"의 특징은 종교관과 우주관, 영적인 것과 과학이 혼연 일치하고 있는 
점에 있다
  "태초에 모든 것은 혼돈하여 우주는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하기 그지없었고 다만 있는 
것은 흑암 뿐이었다"
  천지창조로부터 인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고도한 과학성에 근거하고 있다  원초의 혼돈과 
암흑에 질서를 주고 빛을 가져다준 창조주가 갖는 속성, 만능의 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상징화되었다  태양은 그 집약적인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많은 상징을 통하여 고대인의 
마음은 결국 한 가지 것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지상의 것"이었다  창조주에 대한 숭배이고 
따라서 일신교였다고 하겠다
  실제 사회생활에서 그들은 일종의 공산적인 제도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수확물이 법률에 의해서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아마 
당시 지배자의 주의와 주장에 의한 것은 아니고 "거룩한 영감의 책"을 근본 교의로 삼는 
종교적인 이념에 기인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상하다면 금전에 대해 말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금전이라는 것을 일체 쓰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으면 고의로 다루려 하지 않았던가, 그 점에 관해서도 분명치가 않다
  아뭏든 고대인이 창조주에 대해서 품고 있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신"이라는 것에 대해 
품는 개념과는 달랐던 것 같다  적어도 후세의 이집트나 그리이스나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는 전혀 다르다  창조주를 생각할 때, 그들은 이 전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에너지, 
우주가 가진 본래의 힘 그 자체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현재의 물리학, 역학과도 
맞먹는 이론, 때로는 훨씬 그것을 능가하는 탁월한 이론이 전개되고 있다
  현재의 사고방식으로는 인간의 영혼이 그 물질적인 육체를 떠날 때, 비로소 신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부터 우주가 
갖는 본래의 힘을 나누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지배하는 것이 영혼이다  따라서 인간 
자체가 "신성"한 존재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만들어 주신 그때부터 특수한 존재였다  말하자면 창조주의 분신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경모하는 마음은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로 달려가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어느 쪽이 종교적으로 더 심원하며, 게다가 
현실적, 과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라진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5만 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현재의 우리와 같은 정도이든가, 그 이상의 
지식??교양을 가진 민족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2. 멕시코 석판의 신비

    남자와 여자는 왜 나뉘었는가?

  "1910년, 나는 겔레로주의 낯선 고장에서 고대 도시의 조사를 끝마치고 멕시코시티로 
돌아왔읍니다  그러자 인디오들이 줄곧 나에게 찾아와서 덜 구운 흙 인형을 팔려고 한는 
것이었읍니다  그들은 테오치와칸에 있는 태양의 피라밋에서 파낸 것이라고 말했읍니다만 
물론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40??? 남짓이나 떨어진 곳에 갈 리가 없읍니다  그들은 
왕복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곳에서 찾아온 것을 나는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들 흙 인형 
가운데서 특히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있었읍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출토된 장소를 가르쳐 
준다면 5페소(2달러 50센트)를 주겠노라고 말했읍니다  그랬더니 그 인디오는 기꺼이 
승낙했읍니다"
  윌리엄 니이벤씨는 멕시코 석판의 발구까지의 경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만톨라에서 가까운 그 부락, 샌티애고 아우이소쿠트라에서 실제로 발굴에 
착수했던 것은 이듬해인 1921년의 일이었읍니다  우선 맨 먼저 지하 4??의 곳에서 조각 
석판을 몇 개인가 발굴했읍니다  나는 이 석판에 아주 매혹을 느껴 더 땅 속 깊이 묻혀 있는 
것을 파낼 만큼 파내고 싶다고 생각했읍니다
  약 32???의 면적 안에 있는 점토 채굴갱, 모래를 파낸 흔적, 테페타
테의 채석장 등을 나는 조직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읍니다  이것은 굉장한 
대작업이었읍니다만 나의 고생은 충분히 보상받았읍니다  발굴작업을 시작한지 3년이 채 
되지 않아서 975개의 참으로 신비적인 석판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것은 대부분 어떤 제단이라고 생각되는 돌의 주의에서 
발견되었읍니다  이 제단은 인상의 윤곽이 선으로 새겨져 있고 빨강이나 노랑색으로 채색이 
되어 있읍니다  그림 물감은 대부분 철의 산화물이 사용되고 있었읍니다  1924년 카네기 
연구소의 S.G.모올제이 박사는 석판이나 제단을 복고, 멕시코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어느 
고장에서나 아직껏 본 일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읍니다.
  이리하여 니이벤씨는 그 후에도 석판을 계속 발굴하여 현재로서는 2천6백 점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석판은 얼마나 오랜 것일까? 적어도 1만2천년, 그러나 그 이상 오래되지 
않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세월이 자나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간의 역사의 출발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려면 적어도 5만년 
이상, 혹은 10만년 이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실제 지질학상의 기록이 보여주는 
바로는 5만년 이상 이전에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매우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콘크리트나 돌로 현대 도시 못지 않는 도시가 세워졌고 근사한 도자기나 
호화로운 귀금속 세공, 훌륭한 플레스코화 등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멕시코 석탄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 한 장은 No.1231이었다  이 석판은 유일하게 
이집트 고대 문명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된 로제타석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단순한 도형 가운데는 고대인의 우주관과 종교관의 모든 것을 푸는 열쇠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 상징 도형은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예로부터 알려져 온 것이다. 그의 호칭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서는 "거룩한 4"라고 불러 두기로 하자  그 뜻은 "창조주로부터 
방사된 4개의 위대한 원동력"이다.
  처음에 이 4개의 힘은 혼돈한 우주에 최초로 법칙을 새우고 질서를 만들었다  다음으로 
창조주는 의지의 대행자로서 만물을 만들어 냈다  만물이 만들어지자 이 4가지 힘은 모든 
속에 주입되며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서 모든 힘과 운동의 근원은 창조주에게 있다  원자는 
힘을 방사한다  원자의 운동은 이 대 원동력에 의한 것이다.
  "거룩한 4" 이 호칭으로써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숫자도 하나하나가 
종교적으로 심원한 의미를 지니며, 천지창조와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제각기 특수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나가, 마야, 모두가 무우 대륙으로부터 
나누어진 대식민 제국의 이름으로 언어에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이다.
  나가  마야  풀이
  1. Hun.  Hun.  만유의 중심이라
  2. Cas.  Ca.  이원적인 신
  3. Ox.  Ox.  그 힘에 의해서 생긴 자
  4. San.  Can.  네 개의 힘센 것
  5. Ho.  Ho.  오다
  6. Uac.  Uac.  혼돈에 질서를 세우다
  7. Uuc.  Uuc.  창조하고, 그리고...
  8. Uaxax.  Uaxax.  인간을 만든다  직립시켜
  9. Bolan.  Bolan.  그 몸 속에 순환 기관을 만든다.
  10. Lahun.  Lahun.  하나이면서도 둘일 것
  특히 10의 수는 매우 신성시하여 그 말을 하는 것마져도 꺼려 했다  왜냐하면 
하나이면서도 둘인 것, 그것은 창조주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볼 "래픈"을 
가지고 그것을 대신하기도 했다. 계산할 때도 5의2배, 5의3배,5의4배 하는 식으로 10자를 
피하도록 수를 헤아려 갔다.
  최초에 여성과 남성은 어떻게 해서 나누어졌는가? 이것은 인류의 탄생 이후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예로부터 여러 가지 전설, 신화속에 그것이 받아들여졌으나 모두가 다 너무나 
상징적인데 지나지 않는다.
  "그가 잠들어 곯아 떨어졌을때, 신은 그 갈비뼈 하나를 떼어내 그 장소를 살로 채웠다  
신은 사람에게서 취한 늑골을 한 사람의 여자로 만들어 그녀를 그 사람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때 사람은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 이것에 여자라는 
이름을 붙이리라" (구약성경의 '창세기').
  "타알로아는 남자의 뼈로 여자를 만들어 이비라고 이름붙였다(폴리네시아의 전설)"
  "타오는 1을 낳았다  1은 2가 되었다  2는 3을 낳고 3은 모든 인간을 만들어 냈다"
  "인류는 처음에 남녀가 한 몸으로 만들어졌었다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을 가지고 
있었다  몸은 둥글고 손과 발을 이용하여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신들에게 
점점 불손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대로 놔 두면 위험하다  인간은 전부 죽이기로 
하자."고, 어떤 신이 말했다  "아니, 그건 좋지 않아"라고 다른 신이 또 말했다  인간의 몸을 
절반으로 떼어놓기로 하자  그렇게 하면 손 두개, 발 두 개가 되어 만족스럽게 굴러다닐 수 
없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으로 나누어진다면 서로가 그리워하며 서로를 찾게 되어 
아무래도 우리를 번거롭게 할 틈도 없어질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둘로 "남자"와 "여자"로 떼어졌다(플라톤)
  멕시코 석판 No.1584를 보자  거기에는 1만 2천년 이전의 인간 양성의 비밀에 관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멕시코 석판 No.1584그림 생략)
  이 석판은 "거룩한 영감의 책"속의 창조주의 제 7의 명령 "인간의 탄생"제 1절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아담과 이브"도, 노자의 "1이 2가 된다"는 설도 아마 이것을 근원으로 하고 
있는지 모른다.
  1. 이 인간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  잠들어 있는 "죽어 있는"인간이다  머리양쪽에 나와 
있는 것은 두 개의 힘, 그 아래의 원은 창조주의 상징이고 두 개가 있는 것은 "이원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2, 3. 두 개의 난형으로 되어 있는 동체, 이것은 "이원적인 것"이 체내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위에 있는 알로부터는 힘 4가 방출되고 있는 만큼 이것은 남성이고, 아래의 
알로부터는 또 다시 네 개의 길다란 알 5가 삐져 나오려 하고 있다.
  6. 남성의 힘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알"5의 네 개 알중 위의 것"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생식을 위해서는 양성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7. 이 가위 모양을 한 것은 하나를 둘로 떼어 낸다는 의미로서 두 개의 난형으로 된 
동체가 한 개씩으로 떨어져서 한쪽은 남성, 한쪽은 여성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해독) 인간의 시조는 이원적인 것, 양성을 지니고 태어났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잠 
"죽음"을 주어 그 사이에 둘로 떼어 냈다  잠을 깼을 때 인간은 둘로,즉 남성과 여성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창조주가 인간으로 하여금 생식을 시켜 종이 끊기지 않도록 하려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 전해지고 있는 천지 창조설 "기원전 2천년쯤의 것"에는 "거룩한 영감의 
책"의 영향이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그리이스의 철인 플라톤은 이집트의 종교를 알기 
위해서 지중해를 건너고 있다  그때 인간의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것을 속인들이 알기 
쉽도록 다시 만든 것이 앞에서 말한 신화가 아닐는지.

    인간의 시조 "흰 남녀"

  인간은 이리하여 남자와 여자로 되었다  그리고 나서 어찌되었을까? 멕시코 석판이 말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석판 No.150은 인간이 어떻게 증식해 나왔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 석판 No.150 그림 생략)  창조주는 하나를 만들었다  1은 2(1)가 되었다  2는 
3(2)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3에서 모든 인간이 태어났다.(3)
  앞에서 말했듯이 이와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 아주 많이 있다  다만 이 
멕시코 석판의 연대를 생각하면 어느쪽이 그 근원인가는 저절로 밝혀진다. 최초의 남녀는 흰 
피부를 하고 있었다  고대의 전설, 비문 등에는 이러한 설이 압도적으로 많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 후예인 현재 지구상의 인간이 어째서 백인만이 아니고 황색, 갈색, 
흑색등 여러 가지로 다른가 하는 당연한 의문이 제기된다  예를 들면 멕시코 석판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무우의 나라는 열 종류의 서로 다른 민족, 다른 인종으로 이루어 졌다"(4) 다만 한 쌍의 
백인 남녀에게서 어찌하여 이와 같이 피부색, 머리색, 눈의 빛깔, 체격이 다른 인종이 생겨난 
것일까? 현재 지구상의 각 민족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각지에 식민한 자들의 후예이다  
그러나 이들 민족 중에서 무우 대륙의 열 종류인 민족의 전형을 찾으려고 해도 무리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에 서로 교류하여 복잡하게 피가 섞여져 버렸기 때문이다.
  만일 무우 대륙 직계의 자손을 찾으려고 하면 태평양의 섬들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대륙의 함몰 때, 대양상에 점점이 고립하여 남겨진 그들 가운데는 무우의 비교적 순수함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태양의 아들"들은 지금 멸망의 이리로를 걸어가고 
있다.
  인류의 기원에는 지리적 조건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구의 조산 활동, 산의 융기로 
인한 대이변 때문애 고대인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남은 한 패의 
무리들은 대지나 골짜기에 단단히 고립되어 겨우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그들이 증식하기 위해서는 소수끼리의 결혼, 근친 결혼도 피할 수가 없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는 이 상태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들은 말했다  (목숨을 걸고 달아나라!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  낮은 땅의 어디에도 
멈춰서서는 안 된다  산으로 도망쳐 멸망을 면하라)"
  "신은 소돔과 고모라 위에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퍼부어 이들 도시의 전주민과 땅 위의 
식물을 멸해 주셨다."
  (그는 그 두 아들과 함께 동굴에 살았다  그 큰딸이 작은 딸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님은 
늙으셨다  하지만 이 땅에는 세상의 관습처럼 우리 집으로 들어올 남자가 없지 않니, 그러니 
어서 아버님께 술을 먹여 함께 잠자리에 들어 아버님으로 말미암아 자손을 얻도록 
하자꾸나")
  이러한 결과는 매우 그 가계의 특징이 강한 타입을 낳았다  그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윽고 
한 민족이 되고 한 인종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현재 지구상에 있는 각 민족의 
성립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할지라도 무우 대륙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 열 종류의 민족의 
설명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무렵 지구상에는 산다운산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우 
대륙으로부터 직접 인도로 운반되어 왔다고 생각되는 나아칼의 이런 의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지상에 나타나고서부터 열 종루의 구별은 시작되었다  인구는 증가하여 여러 
방면으로 펼쳐져 갔다  멸리 떨어진 고장에 살게 된 가족도 있었다  때로는 오누이, 누나와 
남동생이 결혼하는 수도 있었다  일족은 모두가 생김새나 체형이 비슷했다  세월이 지나고, 
기후와 풍토, 음식물 등에 의해 하나의 전형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이윽고 민족이 되었다"
  이리하여 생겨난 민족 "혹은 종족"이 무우 대륙이 함몰될 무렵에는 크게 나누어져 열 
종류가 있었다는 말이 될는지?
  그렇다 하더라도 하얀 피부가 갈색으로 된다거나 검게 된다거나 하는 것은 도대체 어쩐 
일일까? 거기에 대해서도 나아칼의 비문은 언급하고 있다  다만 이 점토판은 지금으로부터 
2만 5천년 내지 3만 년전의 것으로서 게다가 성직자들에게만 통용되는 종교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 내용을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이미 먼 옛날에 사멸해버린 
고어이기 때문에 현대에 알맞는 언어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큰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으면 다행이다.
  "인간의 피부 색깔이 변하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요 원인은 "생명의 힘"과 
피부를 형성하는 성분의 불균형이다  이 불균형은 피부를 포함한 신체 각 부분으로 혈액을 
통해서 "생명의 힘"을 분비하는 샘 자극의 다소에 의한 것이다  각 샘은 신체의 각 부분을 
조절하여 적당량의 생명의 힘을 보내는 역할을 한다  샘에 의한 분비액의 분비는 음식물의 
성질에 지배되며 음식물에 따라서는 어떤 샘에 생명의 힘의 분비는 과다, 혹은 과소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생명의 힘은 세포에 자극을 주는데 그것이 너무 많은 때에는 세포의 작용이 
극도로 너무 적을 때에는 어떤 변혁을 가져온다. 그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예를 들면 
몸의 크기, 머리털의 성질, 피부색, 때로는 체형까지도 바꾸어 버린다  식물의 성질과 기온의 
조합에 의해서 이 경향은 더욱더 심해진다."
  이것은 나아칼 비문 가운데서도 가장 귀중한 것의 하나인 "생명의 기원과 그 
성립"으로부터 발췌한 내용이다  10만년의 역사를 가진 무우 대륙에서 음식물이나 그 사는 
곳의 기후 풍토에 의해서 각각의 특징이 한층 더 뚜렷해 졌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무우 대륙의 함몰에 의해서 제각기의 섬들이 고립해 버린 남태평양에서는 다른 
섬에 사는 사람과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현재도 그들이 어느 섬 어느 부족에 
속하는지 얼핏 보아도 알 정도이다.

    "AUM"이란 무엇인가?

  석판 No.2379도 인류의 탄생과 그 번식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다  원속에 평행선이 
그어졌고 3칸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도형은 곧잘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네바다의 
암굴 거주민이 그린 것, 멕시코의 테오치와칸의 피라밋에서 볼 수 있는 비문, 브라질 북동부, 
영령 기아나와의 국경 부근의 암석 비문, 그 외에 아메리카 대륙 각지의 고대 비문이나 조각 
문양들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위글, 인도,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의 고대 기록들 속에서 
발견되는 수도있다.
  (석판 No.2379 그림생략)  나아칼의 비문 가운데서는 이 도형이 3개로 떨어져서 그 
하나하나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창조주는 하나이다."Hun"
  2. 창조주는 1이면서 2이다."Lahun"
  3. 이 2로부터 아들 인간이 생겨났다."Mehen"
이런 사고방식이 중국철인인 노자의 "1은 2이면서 3을 낳는다"라고 하는 철학의 근원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그밖에 거기서부터 변화한 표현이 무수히 많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AUM 오랜 힌두교의 고문서 속에서 볼 수 있는 이 세 글자는 예로부터 수수께끼로 되어 
왔다
  인도의 고어인 산스크리트 속에 왜 이 글자가 섞어 들어 갔을까? 대부분의 학자,연구가가 
이 불가사의한 세 글자에 매달려 싸워 왔지만 끝내 해명되지 않은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아시아 지방으로 떠난 전도단 나아칼(거룩한 형제)들에 의해서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다지 명쾌하진 않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하는 바를 해명하고 있는 고문서도 있다  
오래된 힌두의 책자인 "다너바 달마 사스트라" 74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아디티라고 불리우는 무한한 것만이 존재했다  이 무한한 곳에서AUM 그 이름은 
모든 기도하는 자와 그 기도 위에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누서" 77장에는 "AUM, 이 말은 대지, 하늘, 그리고 공중을 의미한다"
  J.T 호일러는 그의 저서 "인도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A, U, M의 세 글자에 
관해서는 AUM이라고 하나의 말로 엮어지는 경우 이외에는 거의 쓰여지지 않고 있다  
AUM은 마누서에 의하면 만물의 영장 블러미마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H.T 코올부르크의 "아시아의 탐구"에는
  "고대 인도의 성전 (베에다 용어해)(노루우카)에 의하면 AUM의 뜻은 모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라몬승들은 자기들의 종교상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  이상의 
의미에 관해서 일반에게는 알리지 않았다는 말도 그럴싸하다
  "노루우카"는 성전인 "베에다"를 바라몬의 종지에 따라 해설한 것인데 베에다 자체가 뭉우 
대륙의 성전,거룩한 영감의 책에서 취한 것이며,그것을 바라몬교적으로 왜곡하여 자기네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여 일반에게 강요하려 했던 것이다  베에다의 원전이 나아칼 비문에 
의한 것이라면 "창조주,하나이면서 모든 것이 되는자"라고 하는 말이 "모든 하나님"으로 
의미가 바ㄲ어져 있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왜곡되어 있는 증거이다
  그럼 과연 AUM이란 무엇일까?
  AUM이란 "거룩한 영감의 책"의 1절, 또는 멕시코 석판 No.2379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거룩한 영감의 책" 및 멕시코 석판이 옛 신전의 종교적 비문으로서 쓰여진데 비하여 
AUM은 알파벳에 의한 종교적 심볼로서 기록된 것이라 그 글자체가 다를 따름이라는 것이다
  A  Ahau  남성  아버지
  U  여성대명사 she  어머니
  M  Mehen  태어나는 것  아들
  참으로 간단 명료한 것이다  그러나 바라몬승은 이것을 특별히 복잡 나해하게 만들어 
대중의 눈을 어둡게 만들려고 시도했다  몇천년이 지나는 가운데 더욱 복잡한 군더더기가 
붙여졌다  그리고 나가어가 아니라 일반에게 산스크리트로 그것이 전해졌다  후세에 이르자 
승려들 상이에서도 그 말의 기원,본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동양의 오랜 전승에 따르면 이 도형은 일종의 종교적인 비밀문에 쓰여 있고 언제나 
삼각형의 한 점을 처음으로 한다는 수리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또 1, 2, 3으로 세는 것처럼 늘어 놓은 3개의 작은 원이나 동그라미는 금자탑 즉 피라밋 
형으로 된다  무우 대륙 식민단 나가계의 숫자에 쓰여졌으며,때로는 가운데가 메워진 
동그라미가 쓰였다
  같은 위글계에서는 원이나 동그라미 대신 작대기가 쓰여졌는데 종교적 비문 등에는 역시 
나가계의 형을 취한 수가 있었다  옆으로 늘어놓거나(1, 2, 3)세로로 늘어 놓거나 한 것은 
쓴는 장소의 공간에 따른 것일 것이다
  (No.1256 그림생략)  석판 No.1256에는 나가계와 위글계와 양쪽의 심볼이 사용되고 있다  
전체의 모양은 피라밋 금자탑의 모양을 이루고 있고 이것은 나가계인데 그러나 이 모양의 
선은 또 위글계에서는 태양 즉 하나님의 심볼이기도 하다
  브라질의 북동부,영령 기아나와의 국경에 가까운 대초원에 하나의 거대한 암석이 솟아 
있다  그 암석의 표면에는 여기저기 매끄러운 부분이 있고,그곳에는 매우 오래된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부분의 주민들은 이것을 "비문 암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심볼은 분명히 
역시 무우 대륙 식민단의 카라계, 즉 카라인에게 쓰이던 것이다  그중에서 몇 가지이가를 
열거해 보면
  1. 앞에서 말한 것처럼 Mehen"인간"의 일반적인 심볼
  2. 위글계에서 1을 나타냄
  3. 마찬가지로 2를 나타낸다
  4. 마찬가지로 3인데 그 한쪽 끝이 일그러진 것과 같이 되어 있는데 특징이 있다
  (해독) 1은 2가 되며 2는 3을 낳아 이들 3의 생명은 계속되었다
  4를 나타내는 숫자가 미완성인 것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숫자 1을 
나타내는 작대기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쪽이 닫혀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5를 나타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대인들은 창조주를 나타내는 10의 숫자를 신성시하고 있으므로 10부터 
위는 5의 배수로써 나타냈다  따라서 미완성의 1자를 두개 쓰면 10이 된다  여기에 나타낸 
것은 멕시코에서도 유명한 테오치와칸 피라밋의 고대 비문으로부터 발췌한 것인데 분명히 
무우 대륙으로부터 나온 문자이다
  1, 2, 3을 나타내는 막대기는 브라질의 비문 암석과 공통인데 카라계와 다른 것은 주의에 
테가 에워싸여 있지 않은 것인데 이것은 위글계임을 나타낸다  그 밖에는 Lahun 및 
Mehen과 그 변화이다

    고대의 공산 공영사회

  멕시코 석판과 함께 발굴된 이 둘 제단에 이 둘 제단에 관해서는 앞에서 자세히 
기술했으므로 간단히 설명해 둔다.
  (해설) 이 선전은 스스로 네 가지의 대원동력을 방출하고 그것에 명령하여 우주의 혼돌에 
질서를 수립하고 만물을 만들어낸 위대한 창조주를 제사하는 것이다. 이선전은 어머니의 
나라 무우의 최고 신관 라 무우의 권한 아래 사제된다.
  이 제단이 말하는 의미는 중대하다. 이것은 무우 대륙이 아직 함물하지 않아 제국은 번영 
얼로를 걷고 있던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제단의 주의에서 파낸 석판이나 
기타 유물의 연대를 거의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무우 대륙의 함몰은 약 1만 2천 
년전이기 때문에 적어도 1만 2천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아 다섯 개의 석판은 모두 다 창조주의 이원성을 나타내고 있다.
  1. 가장 기본적인 심볼로 무우 대륙의 "거룩한 영감의 책"에 사용되고 있다(분해도 1). 
"1이면서 모든 것이 되신 자" 혹은 "1이면서 2인 것"- 즉 LaHun이라 불리우는 심볼이다. 
원은 창조주를 상징하고 둘로 나누어진 반원이 그 이원성을 나타낸다. 나가계는 중앙의 선을 
세로, 위글계는 중앙의 선을 세로, 위글계는 가로로 쓰지만 의미는 마찬가지다. 창조주가 
이원성이라는 사고방식은 이 멕시코 석판이 쓰여진 몇만년 전부터 교의로서 배워 온 것이다.
  2. 석판 No. 1430은 창조주와 대지와의 관계, 지상의 만물 창조를 가리킨다. 여성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고 생각되는 얼굴의 눈이 사방형(대지를 나타내는 심볼)이다. 두 얼굴의 
양쪽에 있는 것은 창조주의 심볼인데 주로 나가계에서 쓰여졌다. 다음 두개의 고대문자가 
그것을 증명한다.
  3. 석판 No. 150의 상반부는 남성으로서의 태양을 상징하고, 하반부는 여성으로서의 달을 
상징한다. 얼굴의 양쪽에 있는 심볼은 석판 No. 1430과 마찬가지로 창조주를 나타낸다. 
태양이나 달에 대해 피라밋 신전이 세워진 것은 이 두 천체를 제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창조주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하기 위함이었다.
  4. 석판 No. 1006은 창조주를 나타내는 원을 2개 그리고 다시 뱀에 의한 심볼을 사용하고 
있다. 태양을 이중 원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우 대륙의 북방계 사람들이나 위글 식민단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림있음)
  5. 이것은 멕시코 석판들 가운데서도 아주 진기하고 의정의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 것. 
인면은 창조주를 나타냈고 그 머리위의 왕관에 7개의 빛살이 있는 것은 창조를 나타낸다.
  그 광선의 왼쪽 끝에 있는 것은 화살촉 또는 창날인데 활동, 실행을 나타내는 심볼 동체는 
번데기인데 이것은 힘의 거처를 의미하는 오랜 멕시코의 심볼이다. 한 개의 선으로 갈라 
놓은 상하에 4개씩의 선이 있는 것은 4대 원동력을 나타낸다. 그 양쪽에 창조주의 상징이 
있으며 창조주가 네개의 거룩한 것에 의해서 천지 창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그 
도형의 재미있는 점과 사랑스런 점으로부터는 수만년 전 고대인의 심정이 넘쳐나고 있을 
따름이다.
  고대인은 일종의 공산 공용 사회를 영위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말을 앞에서 했다. 여기에 
든 4개의 석판은 그들이 그 귀중한 수확물을 어떻게 나눠 가졌던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거기에 따르면 모든 토지는 정부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고 농민은 그것을 경작하고 수확은 
필요에 따라 분배되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고대 동양제국에서도 볼 수가 있어 
그다지 드문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로써 곧 고대 사회에 공산주의적 정치형태가 취해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또 멕시코 석판 2천 6백개 중 하나도 금전에 관해 말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주 불가사의한 일이다.
  석판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수확물은 일단 모아졌고 그리고 나서 분배되었던 것 같다. 
그가운데 몇 할인가가 정부에게, 다시 몇 할인가가 신전의 유지비로 돌려졌고 그 나머지가 
각자에게 분배되었다. 일정량씩 분배한 후, 잉여분에 있는 경우에는 공공 창고에 보관어 
흉작이나 기근에 대비했다. 그리고 그 축적분이 또 일정ㄷ랭을 초과하면 또 각자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따라서 천재나 기근 둥으로 나라 전체가 크게 고통을 당하는 일은 있었을 
망정개인적인 빈곤과 곤궁이라는 현상은 우선 있을 수 없었다. 잉카 제국이 서구인에게 
발견되었을 때, 역시 이와 같은 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다고 한다.
  석판이나 동앵의 옛 기록들에 따르면 정부, 신전, 일반 민중의 분배율은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예를 들면 나가계의 나라들에서는 정부의 몫과 신전의 유지비로서 6분의 1이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어째서 이와 같은 차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수확의 6분의 
1내지 12분의 1까지가 정부 및 신전으로 돌려지고 있었던 것 같다. 신전에 바쳐지는 몫을 
"신곡"이라든가 "신령"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은 동양의 옛기록에도 남아 있는데 얻던 
비문판에는 이와 같으나 도형형으로 나타내고 있다.
  토지를 상징하는 사방형이 9등 분할되어 그중심의 한 부분에 창조주에 심볼이 그려져 
있다. 9분의 1이 신전의 배분이라는 사실이 일목요연하다.
  석판 NO. 1647은 정부, 신전의 분배율 9분의 1과 곡물창고의 축적분을 나타낸 것.
  석판 NO. 237은 정부, 신전의 분배율 6분의 1과 일반 민중에 대한 배분을 나타낸다. 
나가계의 것이다.
  석판 NO. 927은 정부, 신전의 분배율 9분의 1로 위글계의 것이다.
  석판 NO.535는 역시 9분의 1의 분배율을 나타내고 있다.

    거룩한 멕시칸 버드 (새)

  최후로 멕시코 석판들 가운데서도 가장 늑징이 있는 몇 그룹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에 든 4개의 석판과 같은 종류의 도형은 116개에 달하는데 완전히 똑같은 것은 
두 개도 발견할 수 없다. 얼핏 보기에는 무언가 동물을 도안화한 듯이 보이는데 그런 
것은 아니며 우주 원동력의 기원과 그 활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생략) 멕시코 석판

  동체는 누에고치, 또는 번데기 모양을 하고 있고, 이것은 힘의 거처를 나타내는 고대의 
심볼인데 반드시 4대 원동력의 경우에만 사용 되어졌다
  동체에 그려져 있는 선은 이 도형이 상징하는 의미를 이야기해 준다  이선들은 앞에서 
말했듯이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면서 또 한 가지 숨겨진 의미를 각각 갖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형의 종교문자이다  사서에 따르면 그리이스의 철인 피타고라스는 이집트에서 
어느 종교의 비밀 의식에 참가하여 숫자에 의한 비밀 문서 쓰는 방법을 배웠다
  귀국 후에 그는 민중에게 "숫자를 가지고 신의 이름을 찬양하는" 일이나 "4의 수는 
신성한 창조력의 이름을 의미한다"는 것 등을 가르쳤다
  모든 십자가는 4대 원동력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이 점차로 더욱 구체화되어 
소위 "마르타 크로스"라고 부르는 것이 되았다  그 4개의 팔은 4개의 힘-거룩한 
창조력을 의미하고 있다
  석판 도형의 동체에 그려져 있는 선은 대원동력이 모든 다른 힘을 지배한다는 사실, 
즉 이 네 가지 힘이 전부 창조주 그 자신으로 부터 방출된 것으로서, 말하자면 창조주의 
명령이 구현화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림 생략 해저지층이 융기하여 이루어진 안데스 산맥의 어딘가에도 고도로 발달했던 
문명의 잔재는 남아 있을 것이다 

  동체의 모양, 얼굴의 방향, 모두가 그 힘이 우주에 대해서 작용을 미치고 있는 그 
방향, 그 활동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얼굴은 예외없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 동체는 동향으로 회전해 있다  손발의 수도 4개로부터 전혀 없는 것까지 
있는데 이것들도 제각각 우주에 작용하는 힘의 종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일련의 석판은 천지 창조 때에 위대한 구심력이 떠도는 가스를 아떻게 해서 한데 
뭉쳐 굳혀서 지구를 만들어 냈는가, 그리고그 지구에 어떻게 해서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바른 운동은 하게 했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다음에서 보는 석판의 그룹은 이른바 멕시칸 버드로서 이것 역시 우리의 현대 문명이 
아득히 먼 옛날에 끊겨 버린 대문명의 여진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모든 고대 민족 사이에서 어떤 종류의 새는 신성시 되고 그에 관한 전설, 신화의 
종류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왜 그러한 새가 신성한가 하는 의문에 관해서는 매우 애매 
모호하다  고대 오리엔트 지방을 답사한 결과, 오직 한가지, 이 의문 해명에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집트의 "세브"이다  이 세브는 일종의 
거위인데 "죽은자의 서" 속에서 "신들의 아버지"로 되어 있다  즉 거위가 알을 낳아 
거기에서 지구나 인간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림 생략) 멕시칸 새  

  세브는 라아에 의한 인간의 멸망이라 일컫는 전설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이집트의 세브가 하나의 상징으로 창조주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알래스카의 인디언들 사이에도 새를 창조주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부족이 있다
  엘리스의 "폴리네시아의 탐구"제1권에도 이런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샌드위치 제도(하와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태초에는 물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곳에 큰 새가 날아와서 하늘로부터 춤추며 내려앉아 바다에다 알을 
낳아 떨구었다  알은 깨지며 하와이 섬이 생겨 났다)"
  이런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에서는 일반적으로 장식이 
있는 뱀이 하나님의 상징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대륙의 일부 지방에서는 새가 그 대신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새를 신성시하는 전설들은 세계 도처에 많이 있지만 실제로 표상화되고 이와 같이 
수많이 정리된 것을 본 것은 멕시코 석판이 처음이었다
  뱀은 고대인들 사이에서 언제나 물의 상징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초의 때부터 
그것은 장식없는 뱀"칸"의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거룩한 영감의 서"에 기록된 
천지 창조설에서는 물에 대해서 신의 제5의 명령이 지시된다
  멕시코 석판 가운데는 이 제5의 명령이 시행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적어도 50개는 
있다  그 가운데서 전형적인 것을 여기에 16개 선택해 보았는데 전부를 설명할 지면이 
없으므로 No.328을 추출하여 설명해 보겠다
  이 석판은 생물이 물 속에 처음 나타났던 때의 상황을 말해준다
  (그림 생략) 물의 심볼로 된 뱀들

  1. 칸,장식없는 뱀
  2. 우주란(알),오늘의 생명의 씨앗
  3. 4와 5의 상징문자의 합성
  4. 나락,깊은 구멍,심연,기타
  5. 위글계의 숫자 4
  "천지창조에서의 제 5명령..."물 속에 생명이 있으라!" 이윽고 태양의 화살은 물 속의 
진흙 속에서 대지의 화살과 만나 진흙의 분자로부터 우주란이 만들어 졌다  이 안에서 
명령대로 생명이 생겨났다"
  석판에는 한개의 알이 도사리고 있는 뱀 곁에 있고, 뱀이 알을 토해 내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알이 그저 하나라는 것은 그것이 맨 처음의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최초의 생명이 물 속에서 생겨나고 최초의 생명이 지구상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거룩한 영감의 서' 속에서 뱀은 그 알을 품듯이 서리고 앉아 알집을 덮어 여러가지 
모양의 생물이 한번에 생겨나온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알을 토해 내려고 하는 뱀 아래에 두 개의 상형문자를 조합시킨 심볼이 있다. 나락의 
밑이란, 여기서는 대양의 밑을 나타낸다. 대양의 밑의 진흙 속에서 우주란이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4의 숫자는 말할 나위도 없이 4대 원동력, 즉 신의 명령의 실행자이다.
  (해설) 창조주는 (거룩한 4)에 명령을 내렸다. '물 속에 생명을 갖게 하라' (거룩한 
4)는 실행했다. 그리고 물 밑의 진흙으로부터 우주란이 만들어져 나왔다. 그 알로부터 제 
5의 명령대로 지구상에 생명이 태어났다.
  즉 이 한 장의 석판은 멕시코의 오랜 아주 오랜 옛날의 주민들이 무우 대륙의 '거룩한 
영감의 서'로부터 우주 개벽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3종의 석판 그룹은 모두 다 이 장의 맨 앞에서 소개한 (거룩한 4) 즉, 
4대 원동력의 작용을 나타내는 석판 No. 1231의 변화, 혹은 그것을 더욱 상세하게 말한 
것이다.
  1. plus자를 에워싼 원은 우주를 나타낸다.
  2. 태양 (라)를 나타내는 집약적인 상징으로 나가계의 것.
  3. 마찬가지로 위글계의 것.
  4. 건설자를 의미하는 상형문자.
  5. 기둥.
  6. 기하학자.
  7. 건축가.
  8. 왕(왕좌로 오르는 계단)
  9. 하늘(삼각형)
  10. 완성되었다...
  이 16개의 석판이 지닌 의미를 다음 세 가지의 열쇠로 풀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1. 거룩한 4
  2. 강함
  3. 이룩되었다...
  이 16개의 석판은 모두 4대 원동력 중 한 가지의 힘, 혹은 몇 가지 힘의 활동상을 
나타낸 것이다.

      13. 아마존해의 카라제국

    이만 오천년 전의 옛지도

  남아메리카 대륙 이 대륙 만큼 불가해한 곳은 없다. 이 대륙의 역사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필자는 깊은 수수께끼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광대한 대륙은 북아메리카 대륙이나 중앙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나라 무우와 이웃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아메리카나
중앙아메리카가 지상 최초의 대문명에 관해서 웅변해 주는데 비해서
남아메리카 대륙에 있었서는 그 유사 이전의 이야기를 전해주지는 않는다.
  동양의 옛 기록이나 남태평양의 섬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해서
무우 대륙의 국민이 매우 항해술에 뛰어나 있어 세계의 대해로 진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남아메리카에서 그들의 발차취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더욱 더 불가해하게 된다. 무우 대륙과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이 땅에는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지상 최초의 문명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야 옳을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서 남아메리카 대륙은 마치 그림 맞추기의 그림조각과 같은
것이었다. 그거은 지상 최초의 대문명이라는 그림의 한군데에 딱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다. 필자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최대의 문명이라고 일컫는 잉카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 그것에
의해서 이 땅의 선사를 찾아내는 실마리가 풀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학술보고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오류로 가득차
있고 불확실한가를 알고는 몹시 실망했다. 그리고 이 한장의 그림의 단편을
손에 쥔 채로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광명은 생각지 못한 곳으로부터 비춰 들어왔다. 무우대륙의 전도단
"거룩한 형제(나아칼)"의 발자취를 따라 필자가 최후의 티베트 여행을 한 때,
서부의 어느 승원에 체재한 일이 있다. 티베트의 남부를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서 동서로 흐르는 봔포강(브라마프톨라 강)의 원류지대인데 이 변경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큰 승원이었다.
  이 승원의 지하실로부터 비장된 점토판이 속속 발견되었다. 그 속에서 필자는
기묘한 점토판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사방 약 육십센티미터의 것으로서 거기
새겨져 있는 선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까지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머나먼 옛날의 즉 유사이전의 세계지도라고 알았을 때, 필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지도의 묘사 방법이 너무나도 소박했었다는
것과 현재의 세계지도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그것이
세계지도라고 알수 없었던 것이다.
  그 지도에는 성좌의 운행도가 기입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고대인이 천체에
의해 날짜를 알고 여행일정의 가늠으로 삼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점토판은 문밖에 나갈 수 없는 것, 가지고 나간다는 건 생각조차도 못할
일이므로 필자는 그 선각 위를 연필로 덧그려서 사본을 만들었다. 이것을
미국으로 가지고 돌아와서 어느 천문학자에게 보였던 바, 그는 자세히 조사한
끝에 그 천체 운행도의 묘사 방법으로 보아 아마도 이만년 내지 이만 오천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오래된 지도를 도데체 어디에서 입수했습니까?"하고,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런 지도가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삼십여년에 걸친 조사여행 끝에 이윽고 눈으로 보게된 것이다.
  이 옛날 지도에는 무우 대륙으로부터 세계의 각지로 가는 코스가 기록되어
있으며 선사시대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묘출해냈다. 그리고 가장 놀랐던 것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지형이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점차로 눈앞의
안개가 벗겨져 가는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그와 동시에 필자의 눈동자에 한가지
어슴푸레한 광경이 떠올라왔다. 그것은 이만 오천년전 먼 예날의 광경이다.
  돛에 바람을 가득 담은 큰 배가 남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질러 간다. 바람이 없는
때는 큰 노가 일제히 바닷물을 가르며 배는 미끄러지듯 달려간다. 튼튼하여
안정된 배는 대양의 한 가운데에 있는 모국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다시 대서양으로 나가, 또 하나의 대륙인 아틀란티스를 거쳐, 지중해를
빠져나와 소아시아의 연안에 이른다는 대항해까지를 해내고 있었다.
  대륙을 배로 횡단한다고? 그렇다! 게다가 그것은 지금부터 이만 오천년 이상도
전이며 무우 대륙이 함몰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유구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 우선 남아메리카 최대의
고대문명으로 생각되는 잉카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쿠스코 골짜기의 새벽

  남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거대한 병풍처럼 뻗어 있는 대산맥 안데스,
그 동쪽에 있는 백콜디엘라산계와 서쪽의 흑콜디얼라산계 사이에 끼어 있어
해발 사천미터에 미치는 대상의 고원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그 고원이
페루로부터 볼리비아로 들어가려는 국경 부분에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담수호인
티티카카"(신의 금대야)란 뜻" 호수가 있다. 길이 백칠십육 킬로미터, 면적
팔천이백팔십 제곱킬로미터, 최심부가 약 이백십 미터, 표고 삼천팔백십 미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호수이다.
  호수의 수면은 천고의 옛날부터 변함없는 하늘의 빛깔을 비치고 있고 옛날
그대로의 갈배가 천천히 지나가며 검푸른 신비를 안은 수면을 흔든다.
  이 호수에는 한가지 오래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양의 신은 티티카카호 태양의 섬에서 남자와 여자 그 아이들을 만들었다.
당시 인디오들은 야만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신은 그들에게 인간의
생활방법을 가르치도록 명했다. 신은 그들에게 황금 지팡이를 주며 (이 지팡이가
가라앉은 곳에서 살라)고 명했다. 그들은 북쪽을 향해 고통스런 여행을계속했다.
깊은 숲으로 뒤덮인 쿠스코의 골짜기에 들어서자 황금의 지팡이는 땅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그 무렵 이 골짜기에서 살고 있던 인간들은 무지하여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자인 만코 카파크와 여자인 마마 오크요는
두 패로 나누어 사람들을 모아 쿠스코의 도시를 만들었다. 만코는 사람들에게
농업을, 오크요는 사람들에게 베를 짜는 법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이 고장에
인간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잉카 제국의 창설자 만코 카파르의 전설이다.
  이 전설속에서 당시의 인디오는 무지하여 "인간답지 않은 제 멋대로의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잉카제국 연대기"를
쓴 페드로 데 세사 데 레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쿠스코 인디오의 이야기들를 간추려 보면 우리가 페루라고 부르고 있는 이
나라의 여러 지방은 옛날은 완전히 무질서하여 토착민들은 믿기 어려울 만큼
지식, 깨우침이 모자랐다. 마치 짐승과도 같았으며 인육을 먹는 자들도 많이
있었고 딸이나 어미를 아내로 삼는 자도 있었으며, 그 밖에도 더욱 심한 큰
죄를 범했고, 악마를 중시하여 누구나가 다 이 악마를 섬기고 공경하고 있었다."
  또한 페드로 데 세사 데 레옹은 만코 가파크의 업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만코 카파크가 쿠스코시를 건설하고 나름대로의 법률을 제정했다. 그와
그의 자손은 잉카라고 불리우는데 이것는 임금 내지 대추장이란 뜻이다.
파스트에서 칠레까지 정복하여 지배하고 그 군대는 남쪽은 마울레 강의 변경,
북쪽은 앙가스마요 강에까지 이르렀는데 이것들이 제국의 경계의 강이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는 삼백 레구와나 되었다. 그리고 큰 성채나 단단한 막사를
짓고 여러 지방에 대장이나 사령관을 두었다. 세계에서 이에 필적할 만한
위대한 업적과 훌륭한 정치를 한 나라는 적다."
  "백성들에게 좋은 풍습을 가르치고, 영혼의 불멸, 기타 자연의 신비한 의리를
중요시했다. 만물의 창조자가 있다는 것을 믿고, 태양을 지극히 높은 신으로
보아 그를 위해 대신전을 세웠다." 잉카제국의 탄생은 그다지 오랜 것은 아니다
잉카제국이 건설된 것은 기원 9백년 내지 1천년 경의 일이라고 하며,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약 5백년 동안 영화를 자랑했는데 1532년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잉카제국에는 13대에 걸친 황제가 있었다. 그 최대의 황제가 만코 카파크였다.
그러나 이 인물의 존재는 신화와 전설속에서 희미하게 비치고 있다. 스페인인이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침입한 때 2대부터 11대까지 황제의 미이라는 보존되어
있으나 시조 만코 카파크의 것만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왕조의 피를 끊지 않기 위해 그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나 고대 마야에서도 이미 이런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티티카카호 전설이 말해주듯이 그는 "태양의 아들"이라 하여 존경을 받았다.
이 신화는 페루에서도 태양이 창조신으로서 숭배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코 카파크의 탄생에 얽힌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신분이
높은 집안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티티카카호에 떠있는 한 섬에 몸을 숨겼다. 거기에서 아이를 낳아
길렀다. 아이가 자라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호수 밖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아들이야말로 신에 의해 잉태했던 거룩한 신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를 "잉카" 즉 왕으로 삼았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는 아직 출판된 적이 없는 페루의 오래된 사본이 있다.
이것은 아네로 알리이브라는 예수회파의 신부에 의해서 1631년 초에 쓰여진
것인데 이 사본에 따르면 잉카왕조의 시조인 만코 카파크의 선조는 키체라고
불리우는 중앙아메리카로부터의 이주자였다고 되어 있다.
  키체족은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로부터 남아메리카로 이주해온 자들로서
페루에 정착했다. 이때 이미 이 고장에는 아이마라족이 있었다. 아이마라족과
키체족은 혼교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잉카제국의 백성이 되었다. 따라서
잉카제국은 그 건국때부터 순수한 단일민족은 아니었다.
  중앙아메리카로부터 이주해 온 키체족이란 어떤 자들이었을까? 그것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중앙아메리카로 이주하여 일대 식민대륙을 이룩했던 고대
마야의 한 부족인 키체 마야라 불리우는 일단이었다.
  키체의 이름은 "날개있는 뱀"을 수호신(토우템)으로서 무우대륙으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온 케투얼족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잉카제국의 공용어였던 케투어어는 지금도 안데스 지방의 인디오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원래 키체족이 쓰고 있던 말이다. 그리고 대 잉카제국의
초대 황제 만코 카파크의 이름은 케투어어로 "최고이면서 권력있는 족장"을
의미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이 그가 어머니의 나라 무우왕조의 피를 이어받은
명문의 후예였다고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우제국은 태양의 제국이라 칭하여 그 식민국의 왕은
태양의 아들의 칭호를 받았다. 중앙아메리카에서 큰 소리를 치던 마야는 그
식민국 중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큰 것이었는데 그 지배자는 당연히 무우제국
왕조를 따르는 자였었다.
  만코 카파크가 고대 마야 왕조의 일족, 나아가서는 무우제국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하면 그가 스스로 태양의 아들이라 칭하고 태양을 지극히 높은 신으로
공경했으리라는 것은 더욱 납득이 간다.
  키체족의 이민들이 중앙아메리카로 부터 이 땅에 찾아왔을 때, 이미
아이말라족에게는 상당히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 키체족은 그 문화에 동화해
갔는데 자기네들의 언어만은 바꾸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잉카문명은 키체,
아이말라 두 부족에 의해서 쌓아졌던 것이다.
  역사가들 가운데는 잉카족이란 부족이 있어 페루에 침입하여 다른 민족을
정복하여 대 문명을 수립했다고 쓰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큰 잘못이다.
키체족과 아이말라족의 결합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지배자인 만코 카파크를 찬양할 때, 비로소 최고의 수장 "잉카"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을 제국의 이름으로 부른 것은 훨씬 후세에 이 땅을
정복한 스페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잉카 건국의 역사에 언제까지고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다시 1만 6천년, 아니 더욱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환상의 챙카제국

  1533년 11월 15일 스페인의 탐험가 프랜시스코 피사로가 거느린 4백명의
스페인 병사들은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진입했다. 그곳은 유럽인이라면 이야기나
전설로 보고 들었고 한 번은 꿈을 꾸어본 황금 나라의 황금 도시이기도 했다.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문, 황금으로 벽을 바른 대궐, 순금으로 만든
야아마나 새 등의 장식물, 정원에는 이것 또한 순금제의 꽃이나 화초 등이 심어져
있었다.
  "어떻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결국 잉카가 자랑하던 이러한 대궐의 호화로움을
완전히 전할 수는 없다."고 스페인의 연대기 작가도 경탄한 나머지,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러한 잉카제국의 보물만은 아니었다.
쿠스코로부터 동남쪽으로 향해 라파스로 가는 도중에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
끝없는 사막, 눈을 이고 있는 산, 초원등을 지나서 갑자기 4천미터 가까운 고지에
널따랗게 펼쳐저 있는 호수를 목격했을 때 그들의 놀람은 상당히 컸었다.
  "이 호수는 주위 80레구와나가 될 정도로 크고 또 굉장히 깊어서 2개의 돛을
단 배를 타고 들어갔던 일이 있는 후왕 래드리이예이로 대장의 이야기로는 곳에
따라 칠 팔십 길이나 되며, 더욱 깊은 곳도 있고 얕은 곳도 있다고 한다. 아뭏든
깊어서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면 바다의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호수에 저다지도 많은 물이 갇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다지도 높은 곳에
말이다. 어디서 흘러온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많은 강이나
개천들이 이 호수로 흘러 들어 오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써는 이만한 물이 고일
턱이 없다.
  세사 데 레옹은 티티카카호를 목격했을 때의 놀라움을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호수의 남쪽 연안으로부터 약 2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티어와나코라는
작은 부락이 있다. 스페인 인들이 이 부락을 지나갈 때, 남쪽의 대지에 겹겹이
이어져 있는 낡은 석조 건축군을 보았다. 주민들이 지은 애드베의 집은 아니고
전부가 돌로 만들어진 그러한 건물이나 거대한 기념비 등은 인적도 드문 폐허로
변해 고원의 쓸쓸한 바람을 맏이하고 서 있었다.
  "저건 도데체, 누가 세웠을까?"
  스페인 인이 그 고장의 인디오에게 물어보니 그는 대답했다.
  "저건, 태양이 하늘에 빛나기 전에 세워진 것이라, 누가 세웠는지 모른답니다."
  이에 관해 티티카카호 연안에 사는 아이말라족들 사이에 이런 전설이 있다는
것을 연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태초에 인간이 창조신 비나코치를 화나게 했으므로 그는 홍수로써 인간들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지구는 물 속에 잠겼다. 그 때문에 며칠이고 빛이 없는
날이 계속되고 모든 것은 온통 어둥에 싸여 버렸는데 이 티티카카의 섬으로부터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나왔다."
 이 전설에 대해 아는 세사 데 레옹은, 어쩌면 오랜 일식현상 같은 것이
일어났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 아즈테카의 신관이
멕시코의 정복자 에르난도 코스테르에게 말했다는 대홍수에 의해서 "태양이
물 속에 빠졌다"라는 이야기를 알고있다.
  "태양이 나오기 전" "빛이 없는 날"이란 즉 어머니의 나라 무우대륙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식민국이 어쩔 줄 몰라하던 상황을 가르키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식민국이 모국의 비호없이 독립한 발걸음을 내딛은 때, 그것을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나왔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 전설에는 또 다른 한가지 해석이 나온다. 그것은 "태양이 빛나기 전"
이라는 표현에 중점을 둔 것이다. 무우제국은 식민국에 절반쯤 떠오른 태양마크를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식민제국으로 발전하면 거기에다 광선(빛살)을 붙이도록
허용했다. 즉 "태양이 빛을 내기 전"이란 식민제국이 되기 전이란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경우 무우대륙은 아직도 건재했었다는 말이 된다.
  이와 똑같은 표현은 힌두교의 현인이자 역사가인 발미이키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나아가 식민제국의 역사를 기록할 때에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기 전"
이라는 형용을 쓰고 있다.
  위에 말한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이 최후의 조산활동이 일어나기
전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남아메리카의 유명한 지질학자 E.B.에녹도 페루의
주변에 관해 쓴 그의 저서 속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쓰고 있다.
  만일 이미 조산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면 안데스 산맥의 융기에 수반하는
대 이변으로 말미암아 이 주변의 주민들은 거의 절멸상태에 이르렀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 남은 극소수의 사람들도 아마 아마존의 대 밀림지대로
도망쳐 갔을 것이다.
  현재 아마존의 원류지대에 사는 미개종족들 가운데 티어와나코의 대 유적을
세운 위대한 민족의 후예가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말이다.
  즉 티어와나코의 대석조 건축군이 세워진 때, 이 고장은 해발 몇미터의 높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안데스 산맥은 융기하여 고대도시는 단번에
 4천미터의 높이로 밀어 올려졌던 것이다.
  티어와나코의 유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태양의 문"이다. 문의 상부에는
폭 3미터, 길이 3.75미터에 달하는 한개의 돌이 사용되었다. 무게 10톤이나 되는
이 큰 돌을 4천미터의 높은 곳까지 어떻게 운반해 올 수 있었을까?
  이 문에는 세로로 큰 금이 가 있는데, 이거야 말로 산의 융기와 지진과 같은
대 변동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다. 이 한장의 돌 가운데
왕의 홀을 가진 모습으로 세겨져 있는 것은 이전에 중앙아메리카에 군림한
식민제국 마야의 왕자 코오를 모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왕의 홀 아래쪽 끝에
보이는 잉꼬새의 머리는 마야의 옛 제국 여왕인 무우의 수호신인 것이다. 그리고
또 이 대리석 비에 새겨져 있는 마크의 대부분이 고대 마야족 가운데 카야
마야라고 불리던 일족에 의해서 사용되던 것이다.
  이 "태양의 문"이라고 부르는 큰 돌비석은 도데체 무엇때문에 세워졌던가.
이것은 신전의 일부라고 생각되지만 고대인은 행운, 불행에 불구하고 무언가
커다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신전을 건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신전은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던 것일까. 이것이 세워질 무렵, 이 부근은 고대
마야제국의 식민지였는지도 무른다. 그렇다고 하면 이 비석은 마야제국의
주권을 선언하기 위해 세워진 비문이었을 것이다. 비문이 카라 마야의 상징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고장이 카라족의 식민지였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카라족에 관해서는 이후에 상세히 설명한다). 1835년, 페루에 체재하고 있던
찰스 다윈은 수도인 리마시에서 길씨라는 토목기사와 만났다. 그 기사는 이런
말을 했었다.
  "티티카카호의 연안에 있는 유적의 주변에 토지가 비옥하지 않는 것은 잉카족이
인공적인 방수로에 의해서 수량을 조절하여 물이 넘치지 않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말은 반은 옳고 반은 그르다. 잉카는 방수로를 여기에다 만들지는 않았다.
그것은 잉카제국이 나타나기 전, 1만 6천년 내지 1만 8천년 전의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말라족이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그곳은 이미 유적으로 되어 있었다.
  현재 호안을 면밀히 조사하면 그들 운하는 산이 융기하기 전, 즉 페루가
평야였던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은 배수를 잘하기 위한
방수로가 아니라 배를 지나가게 하기 위한 운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티베트의 승원에서 입수한 2만 5천년 전의 옛 지도를 베껴, 그곳에서
필자는 처음으로 태평양과 남아메리카 대륙의 내해를 연결하는 수로를 발견했던
것이다. 내해, 그것은 이 옛 지도에 따르면 현재의 아마존강 유역의 광대한
습지대 부근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해의 동쪽 끝에는 좁은 해협이 있어
대서양으로 통하고 있다. 티어와나코는 태평양과 내해를 연결하는 수도의 연변
가까이 아주 강력한 장소에 자리한다.
  현재 페루 원주민의 풍습에는 동양과 매우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언어에도 공통성이 많다. 이 일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나 연구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이나 그 이유에 관해서는 분명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동양의 민족이나 페루의 원주민도 그 조상은 무우대륙이라는 같은
모국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인 자체 속에도 그러한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잉카의 정복자 프랜시스코 피사로는 남스페인의 마을 토르히이요의 출신이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에도 남스페인 출신자가 적지 않았었다. 남스페인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북서아프리카의 원주민 무어인과의 교류가 빈번하였고 8세기에는
이 무어인에 의해서 스페인이 제패 당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스페인 속에서도
가장 무어색이 농후한 남스페인 출신자에 의해서 잉카는 정복되어 그 풍속
습관을 강요 당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무어인은 Moor라고 쓰고 무우대륙에서 Moo의 말은 Mu와 마찬가지로
대지, 평원, 국토, 어머니 등을 의미했다.
  페루의 원주민에게는 아득한 옛날의 생활면모를 전하는 풍습이 몇 가지
발견된다. 예를 들면 그들은 물이나 술을 마시는 때에는 그 몇 방울을 땅바닥에
떨구고, 식물이라면 그 몇 가지를 지면에 뿌리고, 몇 번이고 주문과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파챠 마마. 파챠 마마-". 마마라는 말은 그대로 무우대륙의 말이었다.
Ma 혹은 Mama는 이것도 Mu와 마찬가지로 사용되고, 똑같은 대지의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마시고 또는 먹을 때마다 자기들의 생명을 지탱해 주는 대지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침과 동시에 잃어버린 모국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했던 것이다.
  페루의 전설에 따르면 잉카와 인접해 있고 오히려 잉카문명을 능가할 정도의
제국이 존재해 있었다. 그 이름은 챙카라 불리었다. 그 유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안데스 계곡으로부터 이미 몇가진가가 발견되고 있는데 제국의 수도라고 생각되는
것은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 챙카국은 초기의 잉카와 무서운 공방전을 되풀이 하였는데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맹공하여 실패한 후 마침내 잉카에 의해서 정복되고 그 국가는 소멸해
버린다. 그것은 기원 1천 4백년대의 일로 생각된다.
  이 챙카에 관해서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챙카를 정복한
잉카제국은 다시금 북방으로, 또 서방으로 원정했다. 이때, 이미 잉카에 병합되어
있던 챙카의 병사들은 잉카의 병사들 이상으로 용감히 분전했다. 그 용감함을
두려워한 잉카의 황제 파챠쿠티는 챙카의 장군 안 아이요를 죽이고자 했다. 그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린 안 아이요는 부하를 이끌고 안데스 동방의 대밀림으로
도망쳐 달아나고 말았다.
  파챠쿠티는 대군을 동원하여 안 아이요와 그의 부대를 추적했지만 그 행방은
끝내 몰랐다고 한다. 밀림으로 사라져간 챙카의 병사들, 그들은 도데체 어디에서
안주할 땅을 발견했던 것일까.
  이 수수께끼의 제국 챙카에 관해서는 또 한가지 전설이 있다.
  "챙카족은 지금부터 약 2천년 전, 남아메리카의 중앙부로부터 아마존강과 그
지류를 따라서 페루로 찾아왔다. 그들은 밀림의 저편 아득히 먼 나라로부터
찾아온 것이다."
  그 나라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였고, 마노아 즉 황금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장려한 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마노아의 황금도시

  영국의 육군 포병 대령인 P.H.포세트는 볼리비아, 브라질, 페루의 국경
측정작업에 종사하고 있을 때, 인디오들의 사이에 이상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밀림속에는 거대한 도시가 아무도 모른채 잠자고 있어 그 폐허를 악의 힘이
지키고 있으므로 누구도 접근할 수 없다."
  "이 도시는 먼 옛날의 홍수로 한번 물 밑으로 잠겨 들었는데 그 후에 다시
신들의 의지에 의해 나타났다."
  "그 도시의 폐허에는 어느 흰 색깔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정글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다 붙잡아, 피에 굶주린 잔혹한 수호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디오들은 공포감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다시금 그는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포르투칼어로 기록되어 있는
고문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어떤 포르투칼인의 일행이 전설로 내려오는
무리베카의 은산을 찾아서 고대의 폐허도시에 이르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바라보면 한없이 폐허가 펼쳐져 있었는데 건물속에는 거대한 돌의 지붕이 아직
남아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커다란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 올려다 보이는
돌기둥이 서 있고, 이 기둥위에 한쪽 손을 허리에 대고 다른쪽 손으로 북방을
가르키고 있는 한 사나이의 조각이 아직 조금도 파손되지 않은 채 안치되어
있었다. 같은 검은 돌에 조각되어 있는 첨탑이 허물어진 채 광장의 네 기퉁이에
서서 광장의 한쪽 전부를 하나의 건물이 점하고 있다. 설계도, 장식도 참으로
근사한 것이어서 이곳이 왕궁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벽이고 지붕이고 무너져 있었지만 거대한 네모기둥은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허물어진 넓은 돌계단을 다 올라간 곳은 널따란 홀이 있었는데 그곳의 벽화나
조각에는 채색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몇 천, 몇 만 마리나 되는 박쥐떼들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날아다니며 그 똥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광장의 정면 맞은편은 일대가 완전히 폐허로 되어 있고 흙의 산 아래에 묻혀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산에는 한 포기의 풀도 돋아 있지 않았었다.
지면이 반듯반듯하게 나누어져 있고, 그 속에 바위를 떨어뜨려 보아도 밑에 닿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 도시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알수 있었다.
이 곳에 대지진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장려한 도시를 파괴하고 아마 한개가
50톤쯤 되는 돌기둥이나 각재를 쓰러뜨려 1천년에 걸친 정성들인 노동의 보람을
불과 몇 분 동안에 폐허로 만들어버린 대 재변이 어떠했던가는 쉽사리
상상할 수가 있었다."
  포세트는 "잃어버린 고대 도시"의 실재를 믿고 그의 탐구에 정렬을 다 쏟았다.
그는 마침내 "잃어버린 도시"의 소재를 아마존의 지류 타라조스강과 씽카의 상류
지대, 쿠야바의 북방 근방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 부근은 아마존 본류의 남쪽으로
매토그로소라고 불리우는 대밀림의 한복판이다. 1952년, 그는 이 푸른 마경을
향해 출발한 채로 영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던 것이다.
  필자는 이 포세트 대령이 밀림속에서 발견했다고 하는 작은 상을 본 일이 있다.
그 가슴 부분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카라 마야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수 있었다. 이것을 보고 필자는 한가지 확신을 가졌다. 포세트 대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이미 마노아의 황금도시에서 아주 가까운 곳까지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최근 이 지방을 탐험한 필자가 아는 두 탐험가의 말에 의하면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티아 챙카"라고 불리우는 고대의 다리도 있었다고
한다. 그 다리는 약 170미터 내지 200미터 정도의 길이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곳을 지나는 길은 지상 약 100미터의 높이에 있었다고 한다.
  포세트 대령이 발견한 고문서 가운데도 다음과 같은 기술을 볼수 있다.
  "일행은 늪지대나 관목지대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엔가 군데군데
살림지대가 있는 푸른 평원 저쪽으로 갑자기 깍은 듯이 쏟은 산줄기가 나타났다.
그것은 단순한 산은 아니었다. 다가가서 보니 그 사면이 불타는 듯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가 그친 뒤이라서 수정이나 석영이 섞인 바위가 비에 젖은
표면에 저녁 해가 반사하여 찬란한 빛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는 것이었다."
  "산은 아주 높게 보였다. 그 곳까지 오자 산의 사면은 절벽이 되어 깍은 듯이
솟아 있었다. 어디 올라갈 만한 곳이 없는가 하고 온 종일 찾아 헤매다 큰 바위가
벌어진 틈을 발견하고 그곳을 넘어 걸음을 계속했다."
  "오르는 것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는데 군데군데 오래된 깐돌과 같은 것이 남아
있고, 벌어진 바위가 있는 쪽의 벽에는 공구의 흔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직도
약간 확인되었다. 다발이 된 수정이나 거품 비슷한 석영 덩어리는 마법의 나라를
방문한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오르기가 무척 힘들어서 주위의 평원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 위로
나오기까지는 3시간이나 걸렸다. 그러나 그곳에서부터 산의 지붕까지 길은
편편하여 일동은 이윽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붕에 서서 그곳에서 산을 바라다
보며 휴식을 취했다. 산등성이로부터 4마일쯤 떨어진 곳에 거대한 도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붕은 동남쪽으로부터 서북에 이르는 눈길이 닿는 끝까지 이어져 있고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북쪽은 일대가 삼림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앞에는 넓은 평야가
있어 녹색과 갈색의 얼룩무늬를 이루고 있고, 군데 군데에서 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일동이 올라온 바윗길은 지붕을 넘어 계속해서 얼마 후
보이지 않게 되고나서부터 평야 가운데를 꾸불꾸불 누비는 길이 되어 다시금
나타났으며 도시의 성벽을 애워싸고 있는 나무들의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페루의 오랜 전설을 돌이켜 보자.
  "챙카족은 밀림의 저편으로부터 이 땅에 왔다. 그들의 본국은 산으로 둘러싸인
강대한 제국이며 그 수도는 마노아(황금의 도시)라고 불리웠다."
  다시 전설은 이렇게 계속된다.
  "이 제국의 왕에게는 두 왕자가 있었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두 왕자는
왕위를 둘러싸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내란은 몇년이나 계속되었다.
백성들은 지쳤고 국력은 쇠퇴했다. 마침내 아우 왕자는 간계로써 형을
이겼냈다. 형은 일족과 함께 나라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숲 속으로 도망쳐
배를 만들어 타고 라오강을 따라 내려갔다. 배는 얼마 후에 더욱 큰 강으로
나왔다. 그들은 그 강을 배가 들어갈 수 있는 한 끝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뭍으로 상륙하여 온갖 괴로움을 겪으면서 헤매던 중에 커다란 호숫가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고 왕자를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점차로 힘을
키우고 나라를 만들어 스스로 (챙카)라고 불렀다."
  이 큰 호수란 티티카카호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챙카족이 이 호수의
주변에 정착하고 나서 잉카에 의해 멸망당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났던 것일까. 전설은 "연대로 30"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왕의
연대라고 생각하면 한 사람 평균 50년이라고 생각하여 약 천오백년이 된다
챙카가 멸망한 1,400년대부터 역산하면 기원전후, 즉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 페루로 나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다지 먼 옛날의 일은 아니다.
이윽고 잉카에게 패망한 그들은 다시금 밀림 속의 선조 땅으로 돌아갔던
것일까.
  티어와나코의 "태양의 문"의 비문이 (카라 마야"의 것이라는 얘기는 앞에서도
말했다. 카라족을 빼 놓고서 중남미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필자는 중앙아메리카에 체류하고 있을 때, 카라족에 관해 여러가지를
구전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중앙아메리카를 뒤로하고 남쪽으로 향해 얼마 후
어느 큰 강가에 정착했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만 6천년 이전의 옛날 일이 된다. 남아메리카의
여행자이자 탐험가이기도 한 레오나로드 달톤의 저서 "베네수엘라"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국경 부근의 산중 밀림속에는 아주 오래된 카라의
유적이란 것이 발견된다."
  "오리노코강 연안과 기아나의 각지에는 아주 오래된 상형문자로 생각되는
많은 암석 비문을 볼 수 있다."
  "카라족은 지금도 베네수엘라에 잔존해 있다. 그 후예의 하나로 고디로족이
있다. 그들의 부락에는 카시크, 즉 추장이 있다."
  "카시크" 이 언어는 뜻밖에도 카라족과 북아메리카 인디언과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카시크는 푸에블로 인디언과 그 밖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 족장을
부르는 존칭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푸에블로 인디언과
카라족 사이에는 공통되는 언어가 많다. 이것은 그들이 아메리카대륙에서,
혹은 그보다 이전의 어머니의 나라에서 인접해 살고 있은 적이 있었다는
한 가지 증명이 된다.
  베네수엘라 남부의 가장 미개한 오지에 과할리보족이란 인종이 살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미개 종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포악스러워서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이상스런 모양의 두골을 가진 종족들에게서도 중앙아메리카의 잃어버린
민족인 카라족의 특징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또 아르헨티나의 라프라타강 연안에도 카라족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아주
오래된 유적을 볼 수가 있다. 이 유적들에서 한 개의 오랜 비문판이 발굴된
일이 있다. 이 비문판에 쓰인 문자는 아시아 대륙의 몽고 지방에서 발굴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말해온 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매우 기이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대륙의 유사이전에 생각이 미칠 때, 그리고 그 무렵의
대륙이 하고 있던 역할을 알았을 때, 그 의혹은 깨끗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내해 아마존

  현재 브라질이라고 불리고 있는 지역에 최초로 인간이 살게 된 무렵, 현재의 
아마존강의 유역 일대---아마존의 대밀림으로 불리우는 부문은 광대한 범위에 
걸쳐서 바다 밑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중해와 같은 내해였다. 그 무렵에 
과나해서는 포세트 대령도 그탐험기 속에서 "이 지방이 전에는 바다 밑이었다는
것은 각종 징후로 보아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머니의 나라 무우를 떠나 
동방으로 향했던 식민단의 배는 태평양을 넘어 운하를 지나서 내해를 가로질러
해협을 빠져 대성야으로 나간다. 즉 남아메리카 대륙은 일찌기 세계 교통의 요로
---대동맥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우 대륙을 나온 카라(캐리어족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자 우선 
중앙아메리카 지방에 뿌리를 뻗쳤다. 그들이야말로 카라족의 식민단,
즉 "카라 마야"이다. 그들은 이윽고 중앙아메리카의 동해안으로부터 
남아메리카에 걸쳐서 식민지를 쌓아 올린다.
  "트로아노 고사본"에 따르면 중앙아메리카의 대식민 제국이었던 마야 제국의
무우 여왕의 치세 (약 1만 6천 년 전)에 카라족은 중앙아메리카의 동해안 지방에
정착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유카탄 반도를 중심으로 카라족이란 것은 존재하지만 그들은 흑인계의
피와 섞여서 옛날의 그 면모는 남아 있지 않다. 최초의 카라족은 백인종이었던
것이다.
  카라 마야---즉 카라족의 식민단은 중앙아메리카에서 다시금 동쪽 바다로 
진출하여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나아가서는 지중해 깊숙이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 카라족이 자꾸자꾸 항해한 바다가 "카라해"---후에 카리브해라고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 카라해를 가로질러 카라족의 일단은 중앙아메리카로부터 남아메리카 대륙에 
이프러 아마존해의 기슭을 따라 더 남하하여 이 바다로 흘러 내려오는 강변에
정착했다.
  "카라족의 일단은 중앙아메리카를 떠나 카리브해의 연안으로부터 배를 타고 
남으로 향해서 이윽고는 큰 강에 이르렀다. 그들은 아름다운 고장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리를 잡고 큰 나라를 이룩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호반에 큰 도시를 
만들고 황금의 신전을 세웠다. 이 도시의 이름은 마노아였다." 일 전설에서 
아름다운 호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마 아마존해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 내해를 처음으로 목격한 자가 큰 호수라고 생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페루의 전설에 따르면 챙카족의 수도도 마노아라0고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면
밀림 속에 왕국을 이루고 있던 챙카족이라는 것은 카라족의 후예였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쯤 전까지 계속 살았으며 다시금 거기에서 나뉘어진
일족이 안데스 고원으로 나와서 세력을 펴 잉카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닐까? 그 점에 관해서는 필자도 분명하게 단언할 수는 없다.
  오늘의 남아메리카 대륙 지형을 보면 아마존해의 윤곽을 대개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북안은 현재의 베네수엘라의 고지의 기슭에 해당하는데 이 지방에는
지금도 아름다운 석영의 층을 발견하게 된다. 남안은 판 알토 산맥의 등성이 
부근이고, 동안은 판 알토 산맥에서 뻗어나온 지맥의 산지요, 그리고 서안은
안데스 산맥의 동쪽 등성이였다. 태평양을 건너 온 배가 널따란 폭넓은 수로에
들어오면 이윽고 왼편, 즉 북쪽으로 훌륭한 도시가 나타난다. 그것이 무어라고 
불리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으나 티베트의 옛지도에 따르면 그 위치는 현재 
티어와나코 유적의 위치와 딱 들어맞는다.
  이 지도에는 그 밖에도 4개의 도시가 기입되어 있다. 그 하나는 아마존해의 
남서안에 있어 "보석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남안의 절반쯤 되는 
지점부터 조금 내륙으로 들어간 곳, 아마존해로 흘러 들어오는 강을 따라가면
또 하나의 도시가 있어 "황금의 도시"라고 이름붙여져 있다. 이것이 의심할 
나위도 없이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마노아이다.
  또한 이 남안에서 죽 남으로 내려와 대서양 연안으로 나가려 하는 부분,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강변에 하나의 도시가 있다. 현재의 아르헨티나, 라프라타 
강의 부근이다. 또 하나는 훨씬 북쪽에 있어 카리브해의 동쪽 끝, 현재의 
베네수엘라, 오리노코강의 하구로부터의 약간 들어간 지점이다. 이들 다섯 개의
도시가 아마존해 주변에서 번영했던 카라족에 의해 건설되었던 것임은 명백하다.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에는 일곱 개의 대도시가 있었다고 한다. 푸에블로 
인디언들 사이에도 "시보라의 일곱 도시"에 관한 전설이 있다. 당시 무우 대륙의 
식민단은 모국에 따르는 풍습이 있었다. 카라족도 이 남아메리카 대륙에 일곱 개의
도시를 만들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라 젝구이 건설되기 전에 태평양과 아마존해를 연결하는 운하가 생겨져 
있었던가, 아니면 이 제국에 의해서 수로가 개설되었었던가, 그 점에 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우 대류과 아틀란티스 대륙과 두 개의 고도로
발달한 문명 사이에 있어서 아마존해 연안의 도시는 배의 중계 기지로서, 또 
산물의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영했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윽고 파멸이 찾아왔다.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원래 앝았던 아마존해의
밑은 높아져 가서 늪처럼 되었다. 오랜 동안의 침전물로 말미암아 비옥해질 대로
비옥해진 진흙 속에서는 풀이나 나무들이 걷잡을 수 없으리 만큼 무성하기 시작했다.
  갖아 깊은 곳은 폭 넓게 긴 늪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남아서 주위의
강물은 그 곳으로 향해 쏟아졌다. 이것이 곧 아마존의 대 밀림과 아마존강의 형성이다.
  지진과 해일이 잇달아 일어났다. 아마존해 주변에서 영화를 누리던 카라의 
도시도, 혹은 무너지고 혹은 흙탕물에 씻겨 내려서 겨우 남겨진 초석도 밀림 
속에 묻혀 갔다.
  이 "아마존 형성"이라는 대이변의 마지막 마무리를 지은 것이 조산 활동이다.
아마존의 저습지대를 에워싸듯이 산들은 사방 팔방에서 융기해 일어났다. 특히
대안데스의 융기는 굉장했었다.
  아마존해와 태평양을 연결하고 있던 수로에 가까운 도시는 평지에서 곧 4천m의
높이로 부상해 올려졌다. 대수로의 물은 넘쳐나와 주변으로 펼쳐졌다. 그 도시의
흔적이 현재의 티어와나코이며 수로의 남겨진 부분이 티티카카호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조산활동에 수반하는 지진에 의해서 크게 뒤흔들려 그 최상의 
대공사인 유적도 흔적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그래도 주의깊은 
관찰자에게는 그 흔적이 눈에 띠며 도대체 어떤 사람이 무엇때문에 만들었던 
것일까 하고 의혹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티어와나코의 유적 가운데서도 "세계 수수께끼의 하나"라고 고고학자들을
감탄시킨 "태양의 문"그 거대한 돌비(모노리스)에 새겨져 있는 비문은 분명히 
카라 마야의 것인 것이다.(이 비문의 의미에 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말했다.)
  그리고 또 이 도시와 수로의 유적 서쪽에서는 많은 해산물의 패각들을 보게
된다. 이 사실은 또 안데스 산들이 융기할 때, 도시 서쪽의 땅이 바다밑으로부터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지난 날의 도시와 수로가 거의 해면과
차가 없는 평지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마노아의 황금도시---이 전설의 도시에 얽힌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이 고대 도시의 존재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그것이 발굴되었다는 얘기를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고도가 존재했었다는 매트그로소 지방이 일찌기 번영을 자랑하던 카라
제국의 영토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예를 들면 이 지방으로부터 발하여 
아마존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싱구강, 이 강 이름의 철자는 Xingu인데 Shingu라고
발음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을 연상시키는 데 충분하다고
하겠다.
  무우 대륙의 알파벳 가운데는 우리(영어)의 X자와 아주 비슷한 글자가 있었다.
이것은 종교문자 N(I)을 십자형으로 교차시킨 것으로서 Sh로 발음된다. 오늘날에도
힌두어의 Si로 시작되는 말은 모두 She로 발음된다. 예를 들면 Siva는 Sheva로
발음된다.
  현재 이 매트그로소 지방에 사는 미개한 인디오들은 백인들을 모두
 "카라이바"라고 부른다. 이것은 분명히 카라 또는 카리브에서 나온 말로서, 그들
미개 종족이 그곳에 정착하기 전에 이 일대에서 살고 있던 인간들의 피부색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산 활동의 영향이 비교적 적었던 이 일대에서는 도시가 괴멸할 정도의 타격을 
면했으리라는 것쯤은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밀림속에 고립된 주민들은 그 
나름대로 그 옛날 영와의 여광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전 종족을 통솔하는 
지배자를 잃고 고립한 도시제국의 말로는 세계의 어디에서나 비슷했던 것 같다.
내란은 일어나고, 백성은 굶주리고 국력은 쇠미하여 이윽고는 호전적인 외적의 
좋은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남자는 모두 다 살해되고 여서아들 중에서도 젊고 
예쁜 자들만이 살아 남아 정복자의 노예가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앞에서 말한
챙카족에 관한 페루의 전설에도 전해지고 있는 바이다. 중앙아메리카에도 마노아의
황금도시, 그리고 카라족의 멸망에 얽힌 전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나도 신비한 베일 저쪽에 가리워져 있어 희미하기만 하다.

    식민 근거지 이이스터 섬

  이이스터섬은, 칠레에서 서쪽으로 3천 4백km의 태평양상에 떠있는 고도이다.
인면 거석상으로 알려진 이 섬도 카라족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아이가 수박을 먹고 있었다. 또 한 아이가 그것을 먹고
싶어서 이렇게 말했다.
  "껍데기 한 조각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남겨 다오"
  그러자 상대는 수박을 먹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껍질 같은 거 없어."
  이이스터 섬에 관해서,
  "그 섬이 그렇게 오래된 섬입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필자는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먼 옛날에는 이이스터 섬 같은 건 없었어요."
  그렇다! 아득히 먼 옛날에는 이이스터섬 같은 섬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이스터섬의 현재 주민은 인면 거석상을 만든 사람들의 자손이 아니며
그보다 더 못한 인종이다."
  이이스터 섬의 원주민과 인면 거석상에 관해 연구한 자들의 의견은 대개 이런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론이 아니며 하나의 큰 의문이 여전히 남게 된다.
  "그럼 인면의 큰 석상을 만든 것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의문에 감히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럼 필자가 대답하겠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필자가 동야에서 모은 기록, 그리고 이이스터 섬이나 
소아시아에서 목격한 유적의 특징 등을 순서를 세워 배열해 나가야만 된다.
  티베트에서 발견한 고지도에 따르면 지난 날, 현재의 아마존강 유역 주변은
내해에서 수로에 의해 태평양과 이어져 있었다. 이이스터섬에서 동쪽으로, 페루
해류를 거슬르지 않고 약간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정확히 이 수로---현재의 
티티카카호에 다다른다. 이이스터섬---섬이라기보다는 무우 대륙의 
이이스터항으로부터 카라족은 배를 타고 나가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그들은 
현재 이이스터섬이 있는 부문, 무우 대륙의 남동부에 사는 일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부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빠져나와 대서양을 넘어 지중해의 안쪽
깊숙이에 있는 소아시아 방면에 도달했다.
  현재 이이스터 섬을 방문한 자는 채석장에서 돌조각 작업 현장의 자리에서 
미완성된 거대한 석상을 볼 수가 있다. 그 길이는 약 22.4M에 미치며 절벽의 한쪽
면에 만들어진 채굴갱 속에 드러누워 있다.
  소아시아의 바알베크의 유적---여기에는 신전의 건조를 위해 사용할 예정이었던 
것 같은 천 2백 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기둥이 있다.
  이이스터 섬의 미완성된 석상과 바아베크의 돌기둥, 이 두 가지는 어느 특이한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보통 돌은 거친 돌 그대로 잘라가지고 넓은 장소로
옮겨져서 세공 작업이 이루어졌던데 비해서 이 경우는 채굴된 굴 속에서 세공되어
길게 눕혀진 채로 다듬어진 후에 밖으로 나가는 공정이 채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이스터 섬과 바알베크, 이 특이한 돌의 공정은 그것을 손질한 자가 같은 
민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다. 확실히 이이스터 섬의 경우는 
세공이 거칠은 솜씨이고 바알베크의 경우는 눈을 부릅뜨게 할 만큼 정교하다. 
이이스터 섬의 석상은 지상에 아직 산들이 없었을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며 
바알베크의 돌기둥은 분명히 산의 융기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동안에 아주 
오랜 세월의 격차는 있으나 그 공정의 특이성에는 틀림없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이이스터 섬의 채석장을 본 사람은 반드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일이 갑자기 중단되어 다시 계속되지 못한 것은 어떤 까닭에서였을까? 만들고
있던 석상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당황하여 허둥대며 도망쳐 갔던가를 알 수가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이스터 섬의 비문판은 이렇게 말한다.
  "이 작은 섬은 옛날에 큰 육지의 일부였다. 판판한 돌을 좁게 깐 도로가 몇 
가닥이고 서로 교차하여 달리고 있었다."
  이 섬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다른 섬에서 온 것이고 아득히 먼 옛날 여기에 
살고 있었던 것은 하얀 피부의 인간들이었다는 설이 있다. 인면의 거석상을 보자. 
긴 귀, 똑바르고 높은 코, 얇고 예리한 입술, 그것은 전형적인 백인종의 얼굴이다.
또한 이 석상의 배에 새겨진 띠의 모양은 티티카카호반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것이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돌과 씨름하고 있던 석공들은 갑자기 기분나쁜 땅울림과 
함께 발밑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일하던 도구를 내팽개치고 
도망쳐 갔다. 본능적으로 내륙 쪽으로 달아났지만 그것은 도리어 불리했었다.
무우 대륙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불과 물도가니 속으로 잠겨 갔다.
  가까스로 침몰을 면했다고는 하나 이 부분에도 몇 번이고 큰 파도가 밀려닥쳐
와 사람들을 씻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물이 빠졌을 때 이 곳은 대해 가운데에
고도로 남겨져 있었다. 만일 그곳에 한 패거리의 사람들이 살아 남았다고 하더라도 
아주 나쁜 조건 밑에서 점차로 퇴화해 갔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거대한 인면
거석상만이 옛날의 영광의 거점이었는데 그 일을 떠맡아 계속할 기력도 기술도 
남아 있지 못했다.
  길고 긴 세월이 지난 후, 어딘가 먼 섬으로부터 활기에 넘친 갈색 피부의 
인종들이 카누를 타고 찾아왔다. 그 무렵, 아직 극소수의 백인종이 여명을 
유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새로 온 이 불법 침입자에게 살해를 
당했든가, 혹은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자연히 절멸해 버렸다. 그들 
백색 인종이 어떤 자들이었든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이스터 섬---그 이름은 유럽인이 처음으로 이 섬을 발견한 날이 공교롭게도
부활절(이이스터)이었으므로 그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찌기 이 섬은 대륙의 동남단에 있어서 동방 식민선의 근거지였다. 동으로
동으로 여행을 떠난 카라 마야족들의 선단, 그들을 거대한 인면의 거석상군은 
무역풍(각주:위도 3.40도 부근에서 적도를 향해 부는 바람을 말함)을 맞으면서
전송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 석상은 식민단이 출발할 때마다 이향의 
기념으로 자기들의 전도를 지켜 보아 달라는 염원을 담아 세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이스터 섬, 동쪽으로 향하는 섬---그 이름은 이 섬에 가장 어울린다고 
하겠다.

    큰 바다를 건너간 검은 식민단

  무우 대륙으로부터 동으로 향한 식민단 가운데 아마존해를 빠져나와 대서양
바아면으로 진출한 것은 카라 마야족만이 아니다. 그곳에는 색이 검은 이주자들도
있었다. 니그로계의 식민단이다. 그들은 무우 대륙의 남서부에 사는 민족이었다. 
이 사실은 현재 멜라네시아라고 불리우는 남서태평양 섬들의 주민이 흑인종이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섬들은 모두가 가라앉은 무우 대륙의 
다나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부가 검은 인종이라고 하더라도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이디오피아인---그들은 피부색은 검지만 그리이스인과 같은 잘 생긴
얼굴에 머리털도 곱슬머리가 아니다. 그들은 니그로가 아니라 타미르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최초에 그들이 식민한 것은 인도의 남부로서 그곳을 
드라비다라고 불렀다. 그들은 무우 대륙에서 말레이 반도를 거쳐 인도로 찾아 
왔으므로 인도에서 아프리카 동부에 이르렀다. 그것이 이디오피아인이 되었던
것이다.
  힌두의 옛 기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인도의 타미르 사람들은 서방의 큰 육지로 이주했다.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여 큰 나라를 만들었다."
  즉 그들은 동방 식민선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다.
  피부가 검고 머리털리 심하게 곱슬머리고, 코가 낮고 입술이 두거운, 이른자
니그로가 무우 대륙의 남서부에 살고 있던 인종이다. 현재 그 후예를 비스마르크
제도, 솔로몬 제도, 뉴우헤브리데스 제도 등에서 볼 수가 있다. 그들은 무우 
대륙의 주민들 가운데서도 이색의 존재여서 옛 비문에 따르면 그들은 이주하거나
긴 여행을 할 때, "항상 물 위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들은 아프리카 방면으로 식민하는데에 그들다운 특이한 코오스를 선택하고
있다. 귿르의 고장인 무우 대륙의 남서부로부터 직접 배를 타고 대륙의 남안을 
따라 해로를 항행하여 이이스터 섬의 코앞을 스쳐 남아메리카로 향하고 있다. 
거기서부터는 카라 마야족과 똑같은 코오스로 아마존해를 지나서 대서양으로 
나오자 아틀란티스 대륙의 남안을 지나 아프리카 대륙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나이지리아 북부 지방이다. 그 발자취는 아틀란티스 대륙의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현재의 카나리아 군도변에까지 미치고 있다.   
  가로린 제도의 원주민에게는 이런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 섬들이 아직 섬이 아니고 큰 육지였던 무렵,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큰 배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타고 온세계를 돌아다녔으며 때로는 1년
이상도 돌아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인도의 시성 바르미이키는 어느 고사원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나라 국민들은 위대한 항해자로 그들의 배를 조종하여 동쪽 대양에서
서쪽의 대양으로, 남쪽 바다에서 북쪽의 바다로 항해했다. 그것은 인도가 아직 
제국이 되기 전, 그저 식민지였던 먼 옛날의 일이다."
  인도가 식민지로부터 식민 제국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만 년 이상 옛날의
일이다. 현재도 그러한 조상들의 피를 이어받고 있는 건지, 남태평양의 원주민들
가운데는 그들의 카누로 1천km이상에 달하는 대항해를 해 낸 자가 있다.
  각종 자료들로 미루어 볼 때 아틀란티스 대륙의 남부에는 피부가 검은 인종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에는 훨씬 후세에 와서야 
유럽인이 노예로 데려온 자 외에 니그로가 있었다는 흔적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아마존해를 ---수상의 길을 곧장 항행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프리카에는 흑인종이 정착했고 인구는 증가하고 널리 분포하여 
번창해 갔다. 그러나 그들도 이윽고 큰 천재를 만나게 된다. 산의 융기---.
주우루우족의 전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처으부터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것은 아니다. 산이 솟아 올라온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북쪽의 고향으로부터 남쪽으로 찾아왔다. 약간의 
살아 남은 자들이 도망쳐 남아프리카로 왔다. 그것이 주우루우국의 조상이다."
  이것으로써 미지의 바다 아마존해에 관해서 개략적인 것은 다 말한 셈이다. 
단 한 가지 필자는 큰 의문을 하나 놓쳐 버린 것 같다.
  "아마존해가 왜 말라 붙어 버렸을까?"
  이 의문을 그대로 두고 이 장을 끝마칠 수는 없다. 아마존해가 말라 붙은 것은
대서양의 수위가 내려갔으므로 그냥 옅은 물이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대서양의 수위는 내려가버렸는가?"
  대서양의 밑창에 큰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다. 직경 수천km, 깊이 수천m나 되는
큰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 대륙 자체의 해안선도 
수중에서 나타났으며 그만큼 육지가 넓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와 같은 큰 구멍이 왜 뚫렸던 것일까? 그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함몰은 아마존해를 말라 붙게 하여 남아메리카 대륙의 면적을
넓힌 것만은 아니다. 거의 내해와 같은 상태였던 북아메리카의 미시시피 강이나 
센트로우렌스강의 물줄기를 좁게 만들어 플로리다 반도를 물 속에서 떠올라오게 
만들었다. 그 밖에도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에 수많은
이변을 일으켰다.

      14. 아틀란티스 대륙의 붕괴

    빛나는 오리하르콘의 나라

  그 곳에는 또 하나의 대륙이 있었다. 무우 대륙이나 남북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대륙 정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바다에 둘러싸인 광대한 
대륙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이 대륙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문명과, 그리고 
세계 최강의 군대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도시에는 태양신의 신전 외에 이 나라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포세이돈의
신전이 있었다. 신전의 담장은 황금으로 둘렀고 천정은 상아로 붙이고 있었다.
그 광택은 멀리 해상의 배에서도 볼 수가 있었다.
  왕궁은 운하로 둘러싸였고, 배도 그대로 바다로 나갈 수 있었고 또 바다에 
왕궁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궁전의 탑이나 문이나 돌벽은 흰 색이나 검은 색, 
빨간 색, 혹은 얼룩진 돌로 조화있게 쌓아ㅇ 있었다. 운하에는 현수교가 걸려
있어 막상 위급한 때에는 왕궁이 세워져 있는 섬 자체가 강력한 성채로 될 수 
있었다.
  왕궁이나 신전의 뜰에는 색채가 곱고 향기가 그윽한 꽃들이 가득차 있고 그 
사이에 위병들의 황금의 갑주가 반짝여 보였다.
  왕궁에서 운하 하나를 사이한 주위에는 신관이나 귀족, 장군들의 집들, 수도원
군대막사, 도서관, 학교 등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운하를 건너면
시민들의 집들이 세워져 있고 상수도나 하수 시설도 완전히 갖추어져 있었다.
훌룡한 경마장이나 경기장도 있었다.
  운하가 끝나고 바다로 나가는 곳에는 반드시 항구가 있어 드나드는 선박이
끊이지 않았다. 상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 뱃고동 소리 등으로 선착장은 언제나
활기에 넘쳐 있었다. 교역의 광장(무역시장)은 백색, 갈색, 흑색 등의 세계 
각지로부터 몰려온 사람들오 ㄷㄱ었으며 조수나 어류, 야채류, 감귤류, 바나나,
야자, 향신료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매수자를 기다리고 있었고, 금, 은, 동 호박 
그 밖의 장식품, 상아, 패각, 직물, 모피 향유 등이 빈틈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불타는 듯 빛을 발하는 오리하르콘의 원광석은 이 대륙의 특산물로
세계 각지의 황휴, 귀족의 궁전, 저택의 장식에는 이 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한다.
  먼 무우 제국, 마야 젝구 등으로부터도 교환 물자를 산더미처럼 실은 배사 
쉴새없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푸르른 숲, 밋밋한 언덕, 호수, 강, 그리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대평원에는
방목의 가축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야수의 종류도 많아 때로는 
코끼리떼가 천천히 평원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기름진 토지는 보리, 밀, 사탕수수, 면화, 옥수수 등, 연 2회의 수확을 약속했다.
대평원의 여기저기에는 휘뿌연 김이 무럭무럭 솟고 있었다. 농부들은 하루 노동의
피로를 천연의 온천에 몸을 담가 풀곤 했다.
  밤이 되면 신관들은 신전의 탑 위에 횃불을 붙였다. 그 불빛은 황금의 신상이며
오리하르콘의 벽에 비쳐 붉게 반사했다.
  선착장에는 구리로 된 원기둥 위에서 타아트를 불태워 야간 항해의 표지로 
삼았다. 읍내나 시골 마을의 광장에서도 공공의 규율을 새긴 원기둥 위에 불을
피워 사람들은 신께 기도를 드린 후, 춤이나 극이나 음악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 나라가 자랑하는 군대는 전차 1만대, 이두마차 3만 대, 기병 중무장병, 
경무장병, 사궁병 투창병 등의 대군단으로서 특히 시조 포세이돈은 해신이라고
하는 만큼 해군력은 매우 강대하여 천 2백 척의 군선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를 자랑했던 이 나라의 군대는 주변의 나라들을 위압하여 이윽고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해협으로부터 안으로 침공해 들어왔다. 이 
대군단 앞에는 맞설 자가 거의 없어 내해 깊숙히 깊숙히 침입했는데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그 적군의 수는 많지는 않았으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놀라 정도로
용감했고 게다가 단결력도 굉장했었다. 전술 또한 특히 뛰어나서 경쾌한 작은
배를 조종하여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그 내해에 출몰하여 크게 침입군들을 괴롭혔다.
  대해에 둘러싸인 나라의 대선단은 좁은 내해에서의 싸움에 익숙치 못했었다.
그들은 마침내 적군의 기습을 만나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말았다. 무적 해군의
첫 패전이었다. 대국 앞에 위압되어 있던 다른 나라들도 불온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패배의 선단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부터 밖으로 빠져 나가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때 추격을 당해 마침내 지리멸렬 산산이 흩어져 패주하고 
말았다. 그다지도 영화를 자랑했던 나라의 국운도 기울고 왕도에는 다른 나라, 즉
승전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될 상태가 되었다. 그 국운의 쇠퇴에
결말을 내리기라도 하듯 대이변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이따금씩 떨리고 있던 대지가 더욱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강한 충격이 지하에서부터 일어났다. 대지는 가라져 불꽃과 불연기를 분출하고 
회색의 모래먼지가 한없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산에서 올려다 보일 정도로 큰 파도가 엄습해 왔다. 대지는 크게 몸부림을 
치면서 잠기기 시작했고 그 위를 태산 같은 큰 파도가 몇 차례고 할 것 없이 씻어 
갔다.
  바닷물은 대륙ㅇ 위에서 큰 소용돌이를 치며 석조의 궁전을, 또 오리하르콘의
광채를, 거룩한 원기둥을, 도망쳐 가는 사람들을, 이 나라 영화의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시뻘건 불기둥과 분연만이 물속에서 몇 차례고 치솟아 오르곤 했다.
  대륙이 모두 바닷속에 삼켜 버리고 나서도 궁전의 탑 위나 물 위에 남아 있는, 
원주의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개미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바다는
모두 짙은 진흙의 늪으로 변하여 이 문명과 영화의 최후를 알리고 있었다.

    새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

  아틀란티스 대륙---필자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렇게 썼다. 사실 티베트에서 
발견한 고지도에는 지금 대서양의 파도가 출렁이는 대해원 부분에 확실히 거대한
대륙의 모습이 그려 넣어져 있다. 다만 그곳에는 아무런 이름도 기재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대서양의 또 하나 잃어버린 대륙---이른바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얼마 전까지는 전설이나 신화 속의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각종 고고학적인 발견이나 탐구의 결과, 현재 이 대륙의 실제는 진실임이
입증되어 역사 속에 써 넣으려 하고 있다.
  아틀란티스 대륙도 또 광대한 육지였다. 북방은 북대서양, 서쪽은 북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 동쪽은 유럽 대륙이나 북서 아프리카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륙이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쯤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것이다.
  기원 전 400년 경 그리이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현인 솔론이 한 얘기라고 하며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아틀란티스 문명의 중심지로 이 나라는 세계를 제패했다. 아테네가 자랑하는 
문명의 가장 훌륭한 것으로도 아틀란티스의 그것과 비교하면 상대가 안될 정도이다.
이 대륙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랄탈 해협)"의 맞은편에 가로질러 있어 
리비아와 소아시아를 합한 것보다도 넓었다. 그리고 다른 섬들이나 그 맞은편에
가로놓인 대륙으로 가는 길이며, 지중해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출입구로 하는 
항만에 불과했었다. 아틀란티스 제국의 세력은 이집트나 티레니아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 강국은 이집트와 그리이스나 지우해 연안의 제국을 제압하려 했다.
이때, 아테네는 일어서서 스스로 위기에 몸을 내놓고 분전했다. 다른 
그리이스인들은 도망쳐 달아났는데, 아테네는 끝내 적군을 격퇴하여 헤라클레스
기둥의 안쪽 나라들을 해방 시켰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큰 지진이 일어났으며 
대륙은 바다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포세이돈은 아틀란티스의 시조였다. 포세이돈을 제사하는 신전이 건립되었다.
사람들은 5년마다, 6년마다 모여 제물을 바치고 "신전의 기둥"에 새겨진 거룩한
비문을 경배하는 것이었다."
  그리이스 말기의 전기 작가인 풀르타아크는 "솔로몬의 생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솔론이 이집트를 방문한 때, (기원 전 600년) 사이스의 신관 소우티스와, 
헬리오폴리스의 사제인 푸세노히스가 이렇게 말했다. "서방의 나라들"과 이집트의
연관은 아틀란티스의 붕괴와 그 맞은편 나라가 대해일과 대홍수를 만난 때의
진흙탕 때문에 바다가 다닐 수 없게 되어 길이 끊겼다."
  솔론이 이집트를 방문한 것은 기원 전 6백년이며 그보다 9천 년 전에 
아틀란티스 대륙은 가라앉았다고 한다. 기원 후를 2천 년으로 치면 
2,000+9,000+600=11,600이 된다. 즉 이 기록에 의한 한,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
밑으로 침몰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1천 5백년 전이란 계산이 나온다.
  그리이스의 고기록에 따르면 아틀란티스 대륙이 사라졌을 때, 그곳에는 약
3천 명의 아테네 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아틀란티스 제국에 이긴
아테네의 주둔군이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파피러스 고문서에 따르면 포세이돈은 아틀란티스 최초의 왕이었다.
그후 그의 혈맥은 오래 이어져서, 즉 포세이돈 왕조가 되었다. 포세이돈의 왕관은
3개의 첨단을 갖는다. 무우 대륙은 3개의 육지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3개의 수는 
무우를 상징하는 수이다. 고대 위글 제국의 삼지창을 본 딴 왕의 홀, 이 모두가
같은 유래를 가진 것이다.
  마야족 연구의 권위자인 루 브론존 박사는 유카탄 반도의 다음과 같은 비문을
발견했다.
  "아틀란티스는 최초의 식민자는 마야쿠스(고대 마야 제국)로부터의 마야의
식민단이었다."
  "아틀란티스는 처음 지진에 의해서 폐쇄되고 이윽고 함몰했다."
  이 점에서 아틀란티스는 무우 대륙과 마찬가지 운명을 걸었다는 얘기인데
그러나 거기에는 커다란 어그러짐이 한 가지 있었다.
  트로이 유적의 발굴로 유명한 하인리히 슐리먼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러시아의 센트 페트르스불그 박물관에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한 권의
파피러스 문서가 있다. 이것은 이집트의 제2왕조, 센트왕의 치세에 쓰여진 
것으로서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 (센트왕은 아틀란티스국의 유적을 찾기
위해 서방으로 탐험대로 파견했다. 3천 3백 50년 전 이집트인의 조상은 그들 
모국의 모든 지혜를 가지고 아틀란티스로부터 이집트로 왔던 것이다.
  탐험대는 5년 뒤에 돌아왔다. 지쳐버린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사라져 간 나라의
유적을 발견해 내는 계기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동박물관에는 이집트의 신관이자 역사간인 마네토우에 의해서 쓰여진 또 다른 
하나의 파피러스가 있다. 그것에 의한 아틀란티스의 "사게"---왕의 치세는 1만
3천 9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6천 년 전
이집트의 역사의 극히 초기에서 아틀란티스의 문명이 아주 고도한 것이었음을
인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해서 아틀란티스의 왕은 "사게"---즉 현인이라고 일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티베트에 있는 라사의 고사원의 옛 기록에 무무의 황제를 
"현자이자 최고의 신관 라 무우"라고 칭하고 있는 것과 부합한다.
  이 사게의 치세가 1만 3천 9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소멸한 것은 1만 1천 5백 년이다. 따라서 아틀란티스는 지금으로부터 2만 5천 
4백년 전에 이미 왕에 의해서 통치되는 왕국이었던 것이다.
  슐리먼 박사의 손자, 파울 슐리먼에 의해 발표된 박사의 유서라고 하는 것에
따르면 슐리먼 박사는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해서 어떤 놀랄 만한 발견을 하고 
있다.
  "1873년 나는 히살리크의 언덕에서 트로이의 육적을 발굴했을 때, 제2층고도의
유적으로부터 유명한 푸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견했다. 그 보물 속에는 커다란 청동
항아리가 있었다. 그 항아리 속에는 몇 가지의 작은 도자기 제품들, 특수한 
금속의 상, 석화한 뼈로 만든것 등이 들어 있다. 이런 것들이나 항아리의 청동으로
된 표면에는 고대 페니키아의 상형문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아틀란티스의 왕 크로노스로부터"라고 읽을 수 있다. 푸리아모스의 보물 
가운데는 기묘한 올빼미의 머리를 새긴 항아리도 있었다." "빠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남아메리카의 티어와나코에서 출토된 물품들의 콜렉션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속에서 푸리아모스의 보물에 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발견했다. 
남아메리카와 트로이, 이 두 가지가, 서로 멀리 떨어진 고장에서 나온 것이면서도
이 두 항아리는 같은 모양, 같은 크기,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묘한 올빼미의 머리가
새겨져 있었다."
  푸리아모스의 보물들 가운데는 또 하나의 주목을 끄는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새의 머리를 가진 스핑크스의 상으로, 이것에도 "아틀란티스의 왕 
크로노스로부터"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이 스핑크스의
정체는 틀림없다. 그것은 아틀란티스와 마야크로(고대 마야 제국)와의 연관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아마 그것은 고대 마야 제국의 최후의 왕조에 속했다고
하는 무우 여왕의 기념으로 건립한 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장신구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무우 여왕의 수호신은 콩고우 잉꼬였다. 그리고 이 스핑크스는 머리가 
콩고우잉고이고 동체가 표범을 본뜨고 있다. 표범은 무우 여왕의 남편인 코오
왕자의 수호신이다. 따라서 이 모양의 스핑크스는 무우 여왕과 그 남편 코오 
왕자의 치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틀림없다. 이 코오 왕자를 기념하는 
것으로서 현재 멕시코시티의 국립막물관에서 "죽은 표범"의 조각을 볼 수가 있다.
또 독자는 티어와나코의 "태양의 문"에 왕자의 상과 무우 여왕의 수호신 잉꼬가 
새겨져 있는 것을 상기해 주었으면 한다.
  하인리히 슐리먼 박사는 크레타 섬의 미케네의 "사자의 문"에서 한 개의 비문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런 의미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집트인은 미조를 시조로 하고 있다. 미조르는 이집트에서는 신으로 여기고
있는 토토의 아들이다. 토토는 신관의 아들로 아틀란티스의 크로노스왕의 딸, 
공주와 사랑에 빠져 아틀란티스르르 쫓겨났다. 그는 각지를 편력한 후 이집트에 
정착했다. 그리고 사이스에 신전을 세워 모국의 학문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이 얘기는 사이스---즉 나일강의 하류 지대인, 이른바 하이집트에 최초로 정착한
것이 어떤 자들이었든가를 암시해 줌과 동시에 토토가 신화 속의 신이 아니고 
실제로 살고 있었던 인간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마야의 고사본 "트로아노서"에도 나일의 델타 지대에 최초로 정착해서 살았던 
것은 마야족이었다고 쓰여져 있다. 이집트의 파피러스는 그 조상이 
아틀란티스로부터 왔다고 하고, 마야의 고사본은 사이스의 개척자가 마야족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적어도 아틀란티스 대륙의 일부가 마야족에 의해 식민되었던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이스의 철인 오르헤우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카르데아에서 이집트의 쌍둥이 자매, 바다 저편의 나라들과 리비아와 왕, 
포세이돈의 왕녀."
  이 "바다 저편의 나라들"을 "서방의 나라들"과 혼동하여 아틀란티스란 곧 무우 
대륙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는데, 이것도 물론 잘못이다.
  이집트의 신관은 솔론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방의 나라들과 이집트와의 연관성은 아틀란티스의 붕괴와 그 건너의 나라가
대해일과 대홍수를 만났을 때 진흙탕 때문에 바다가 지나다닐 수 없게 길이 끊기고
말았다."
  이 서방의 나라들과 아틀란티스 대륙이 동일할 리는 없다. 서방의 나라들과는 
물론 이집트에서 보아서 무우 대륙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 이집트인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 아틀란티스를 거쳐 서쪽으로부터 식민해 왔기 때문에
어머니의 나라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나라들"이라고 복수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우 대륙이 3개의 육지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틀란티스의 "그 건너편 나라"란 아메리카 대륙을 말하게 된다. 
  다만 이집트 신관의 말을 믿는다면 아틀란티스 대륙은 무우 대륙보다도 앞서 
함몰했다는 말이 된다. 과연 그런 것일까?
  무우 대륙 함몰의 양상을 기록한 마야의 고사본 "트로아노서"에는 그 대이변이 
일어난 것은,
"이 책을 엮음에 앞서기 8천 60년 전의 사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트로아노"
고사본의 기술은 천 5백년 내지 4천 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므로 만일
이 기록을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8060+4000=12060 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무우 대륙의 함몰이 1만 2천년 전, 아틀란티스 대륙의 함몰이 1만 1천 5백년 전
이라고 한다면 5백 년의 차이로 무우 대륙이 앞서 함몰한 셈이 되는데...정밀한
계산의 방법이 없으므로 어느 쪽이 먼저라고는 잘라 말할 수가 없다. 어쨌든 이 
양대륙이 서로 전후하여 대재앙을 만났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대서양의 해저 산맥

  티베트의 옛 승원에서 발견한 점토판의 고지도에 관해서는 종종 언급했는데
이 지도는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해서도 어떤 미지의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지도를 보면 대서양을 둘러싼 육지의 모양이 현재와는 매우 다르다. 
전체적으로 보아 육지가 모두 넓은 것이다. 이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한 가지
사실이 머리에 떠오른다. "아틀란티스는 반드시 사방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는
섬이 아니었다. 먼 옛날 아직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전, 지구에도, 물속에도
큰 괴수들이 득실거리고 있던 무렵, 아틀란티스는 남북 두 아메리카주,유럽,
아프리카와는 땅이 이어져 있었다. 큰 화산 활동이 일어났다. 육지는 함몰하여
바다로 변했다.아틀란티스는 사방이 바다로 에워싸인 거대한 섬이 되었다."
  북대서양의 해저는 아주 특색이 있다. 대양의 밑에 몇 가지 단속된 해저 산맥을
수반하는 고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돌핀 릿지"---"고래의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지의 위치는 북위 25도부터 50도 서경 20도부터 50도에 걸쳐 있다.
아조레스 제도는 이 해저 산맥 정상의 하나이다. 이 해저의 고지 끝에 해당하는 
부분은 수백m 때로는 수천m에 미치는 깎은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다. 마치 
지붕에서 급히 수직으로 벽이 있는 것 같은 상태이다. 또 곳에 따라서는 판판한
지붕의 3면이 허물어져 급경사가 되고 한쪽만이 겨우 지탱되고 있는 듯한 상태도
볼 수 있다.
  아일랜드에서 약간 남쪽, 서쪽으로 약 1천km쯤 떨어진 해저에는 그림과 같은
낭떠러지가 있다. 해저는 선반 같은 형태로 갑자기 1천m의 깊이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아일랜드의 벽"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있다.
  대서양 해저의 이러한 특징은 이미 각국의 조사대에 의해서 측정된 것이다.
1898년 유럽, 아메리카 양대륙 사이에 해저전선을 개설하려 할 때, 이 사실은
보다 확실히 확인 되었다. 아조레스 제도의 북방, 심도 3천m지점에서 케이블이 
무언가에 걸려서 뚝뚝 끊어졌다. 이 끊어진 케이블을 수색하는 작업에서 해저에는
높은 봉우리나 깊은 골짜기, 절벽, 고지 등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러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강철 준설기의 갈퀴발에는 현무암의 용암 파편이 몇 개나 걸려 
나왔다.
  아메리카 대륙측에서도 이 현상을 볼 수 있는 곳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뉴파운드란드의 옅은 곳에서 심한 급경사가 마치 집의 처마처럼 남쪽으로 향해
떨어지고 있다.
  카리브해의 해도도 역시 매우 특색이 있다. 마치 육지를 수면으로 지탱하기 
위해 일찌기 그곳에는 길다란 쐐기가 끝을 대서양으로 향해 처박혀진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쐐기가 빠져나오고 육지는 뚝과 넓고 옅은 수면이 생긴 듯한 
형상이다.
  해저 관측자들의 말에 의하면 돌핀 리지---해저의 고지 자체는 거의 평탄하지만
고에 따라서는 깨지고 부서져서 암석을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섞어 쌓아 올린 듯한
층을 이루고 있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상태는 상당한 대이변이 없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구 역사의 어떤 시기에 대서양의 해저에는 매우 대규모적인 화산 활동이 
있었다.그리고 해저의 지형을 크게 변동시켰다.
  대중앙 가스벨트---그것은 지도로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 아래서 두 개의 평행선이 되어 동쪽으로 향하여 태평양의 밑을 홱 빠져나가
유카탄 반도나 중앙아메리카에 이른다. 서인도 제도 아래를 지나가서 북쪽 한 
가닥은 아틀란티스에서 아조레스 제도에 이르고 이 부근에서 몇 갈래로 나뉜다. 
한편 남쪽의 한 가닥은 역시 아틀란티스를 빠져나가 카나리아 제도에 달하고 
거기에서 두 갈리로 나뉘어 아프리카의 모로코 부근과, 아틀라스 산맥의 아래를
지난다.
  대중앙 가스벨트의 2개의 간선은 동시에 형성된 것은 아니다. 남쪽의 한 개는 
북쪽보다 뒤에 생겼다. 그 깊이도 일정하지는 않다. 가스벨트의 깊이는 대개 
지표로부터 24km--29km지점에 있는 데 때로는 지표로부터 겨우 2--3km의 깊이까지
올라와 있는 수도 있다.
  이 사실은 예를 들면 아틀란티스 대륙이 처음에 함몰한 때, 간조시에는 가라앉은
대륙이 해면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진흙의 퇴적이 해초의 덩어리와 뭉쳐져 북대서양은 전혀 배가 다닐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집트의 신관이 했던 "진흙탕 때문에 배가 다닐 수 없게
되었다."란 말은 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대중앙 가스벨트는 아틀란티스 대륙 밑에서는 두 개가 깊고 옅고, 하여 
극단적으로 다르다. 대서양 밑이 깊어져서 배가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남쪽의
깊은 가스벨트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아틀란티스 대륙이 또 한번 깊이 떨어져 
내려간 뒤이다.
  무우 대륙과 아틀란티스 대륙이 같은 원인으로 함몰하면서 한 가지 점에서 
달랐다고 앞에서 말한 것은 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륙이 중앙 
가스벨트라는 일련의 가스벨트에 의해서 숨통이 끊어졌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땅속 화산의 활동에 의해서 발생한 가스는 땅 속에 무수한 공동 가스체임버를
만들어 나간다. 이 가스체임버가 가스의 팽창력으로 말미암아 허물어지고 서로 
연결되어 가스벨트가 생긴다.
  그러나 주위에 연결할 친구를 찾지 못한 고독한 가스체임버는 가스의 팽창에
견뎌내지 못하고 폭발하여 지표를 파괴하고 일시에 가스가 빠져나간 공동은 
지탱하지 못하여 대함몰을 일으키게 된다.
  만일 무우 대륙이나 아틀란티스 대륙의 지하에 이와 같은 성질의 공동이 
없었다면, 또 지표의 암반이 충분한 두께를 갖고 있었다면 가스벨트가 지하에
형성되어가도 지표에는 지면의 융기만이 일어나고 대륙은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조산 활동에 의해서 대재해는 면할 수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곳에는 
산이나 강이나 호수가 있는 대륙이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2대 대륙을 희생으로 하여 대중앙 가스벨트가 완성되어 가고 있을 때, 그와 거의
시기를 같이 하여 또 하나의 가스벨트가 만들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팔라치아, 
아이슬랜드, 스칸디나비아 벨트가 그것이다.
  이 가스벨트는 현재의 합중국 동남부에서 시작하여 카나다의 라브라도르로부터
대서양의 북단을 지나 그린랜드로, 그린랜드로부터 아이슬란드로, 다시 
북유럽으로부터 우랄 산맥에까지 달한다. 매우 지맥이 많은 가스벨트인데
지도에는 그 간선만이 나타나 있다.
  이 가스벨트가 형성되기 전, 아메리카와 유럽 사이는 끊겨져 있지 않았다. 옛
지도의 표시된 곳에는 육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 육지는 지질학상으로 
"유럽으로의 가교"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스벨트가 만들어졌을 때,
이 "가교"는 파괴되어 함몰한 것이다. 아틀란티스와 이 거대한 대륙의 가교가 
함몰하였을 때, 주위에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로
아메리카의 동부, 유럽의 서부, 아프리카 북서부에 나타났다.
  광대한 육지의 체적이 점하고 있던 부분이 소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대서양의
수위는 낮아지고 그들 해안선은 반대로 넓어졌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수심이 
앝아진 곳이나 육지가 물속에서 수면위로 드러난 곳도 있다. 그 가운데서 눈부신
것을 들면 아마존해의 소실, 미시시피강 및 센트로오렌스강 유역이 육지화, 
플로리다 반도의 출현 등이다.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은 전체적으로 해안선이 
넓어진 것이고 미시시피강이나 센트로오렌스강은 원래는 꽤 폭이 넓어 얕은 내해
같은 상태였던 것이 수위의 저화와 육지의 확장에 의해서 강이 되었던 것이다.
  지질학에서는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북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의 전반적인 융기는 지구의 역사상, 비교적 새로운 
시기에 생겨난 현상으로 북아메리카 서해안에도 마찬가지의 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아메리카 동북부의 내륙에서 더러 고대 해안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이와 똑같은 현상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을 지질학상으로 "챔플레인 해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챔플레인기"는 
제4기 홍적세(약 백만 년--1만년 전)의 한 시기이다.
  땅 밑에 가스벨트가 형성되면서 그 과정에서 육지가 대양에 함몰하고 그 
영향으로 주변의 바다가 얕아지면서 잠겨 있던 육지가 드러나고 해안선이 
넓어지고 산이 융기하는---이런 현상은 확실히 모두가 이 시기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챔플렌인 해안이 생긴 원인을 모두 육지의 융기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함은 잘못이다. 최초에 먼저 대양의 수위저하가 있고, 육지가 넓어지고, 그 후에
화산 활동으로 말미암은 대지의 융기가 있었던 것이다.

    축복받은 섬들

  카나리아 제도---아프리카 대륙의 북서쪽 약 백km로부터 3백km의 대서양상에 
있는 일곱 개의 섬들이다. 그 예쁜 새 카나리아의 원산지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배가 이 섬에 다가가면 여행자는 우선 해안에 높다란 절벽의 기괴한 모양에 
놀란다. 거대한 현무암의 바윗덩어리가 밀어닥치는 파도에 침식되어 천연의 
주랑처럼 되어 있는 곳도 있다. 거무튀튀한 모래밭에 서서 바라다보면 짙푸른 
언덕 저편에 화산의 분화구가 우뚝 솟아 있다.
  카나리아 제도는 화산열도이다. 그 섬들 하나하나가 바다 밑에서 솟아나온 
화산인 것이다. 이 제도의 땅 밑에는 대중앙 가스벨트의 남쪽이 뻗어 있다.
이것은 대서양의 아래를 홱 빠져나와 카나리아제도의 밑을 통과하여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도달한다. 이것이야말로 아틀란티스 대륙을 깊이 깊이 함몰시킨 
가스벨트이다. 
  그러나 이 제도에서 볼 수 있는 모둔 화산이 이 가스벨트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화구 가운데는 지금도 땅 속에 있는 가스벨트와 관계가 없는 것,
이 가스벨트가 형성되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
  카나리아 제도의 황산 중에서 가장 알려져 있는 것은 최고봉인 테이데산
(3천7백10m)이다. 테네리페 섬의 현무암질의 거무스름한 모래밭 침묵의 해변이라고
이름붙여진 해안에서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에 우뚝 솟아 눈을 이고 있는 그 정상이 
보인다.
  테이데산은 분명히 가스벨트에 의해 융기한 화산이다.
  "테네리페의 꼭대기(테이데산)는 화산이 기세를 부리던 무시무시한 시절에 
"그랜드 카르데라"가 화가 잔뜩 난 것처럼 밀어 올린 것이다."
  원주민들 사이에는 이런 전설이 남아있다.
  그 "그랜드 카르데라"라는 것은 테네리페 섬의 북서방 약 90km 해상에 있는
파르마 섬의 분화구이다. 필자는 이전에 이보다 거대한 섬을 본 적이 없다. 
하와이제도의 대분화산 킬라웨어, 그 옛 화구의 직경은 약 50km에 달하는데
그랜드 카르데라의 화구는 직겨이 6.7km는 될 것이다. 그리고 킬라웨어 화구의
깊이는 약 백m인데 비해 그랜드 카르데라는 실로 천2, 3백m에 달하는 것이다.
  그 화구를 자세히 조사하면 그것은 아주 먼 옛날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지하에
있는 가스벨트와 또 형성되는 가스벨트와는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안다. 처음부터
그렇게 깊었던 것은 아니며 점차로 떨어져 내려갔던 것이다. 땅 속에 고립된 
가스체임버가 있다고 한다. 그 가스가 팽창하여 땅표면이 약한 부분을 찔러 깨뜨려
분화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 구멍을 통해 가스가 빠져 나가면 그 공동을 지탱하는 
물체가 없어져 화구의 벽면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다시 지진에 의하여 공동의 
간격이 메꿔진다. 이것이 반복됨으로서 화구의 밑창은 깊어져 갔다.
  따라서 이 화구는 가스벨트가 형성되기 전에 팽창한 가스를 가스체임버로부터
방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가스체임버라는 풍선 속의 가스를 적당히
방출하여 폭발을 방지하는 안전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땅 속의 가스체임버가 가스의 팽창력으로 측벽을 파괴하고 서로 연결되어
가스벨트가 만들어져 간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지하를 횡단하면서 형성되어 갔던
가스벨트는 테네리페 섬의 아래까지 와서 무언가의 방해를 받았다. 대지는 가스의 
팽창력으로 부풀어 올라서 지표가 부드러운 부분으로부터 가스가 방출되었다. 
그것은 확실히 전설에서 말하듯이 그랜드 카르테라가 화가 잔뜩 난 듯 엉뚱한 
곳으로 불을 뿜어 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테이데산이 가스벨트와 이어져 
있는데 반해 그랜드 카르테라는 원래 가스벨트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이
전설은 테이데산이 그랜드 카르테라 보다도 더 나중에 생겼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하 가스체임버의 붕괴, 육지의 함몰은 원성암의 암반 두께가 지하로부터의 
융기에 견뎌내고, 땅속에서는 가스체임버가 연결되어 거대한 터널상의 가스벨트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했다.
  이미 완성된 가스벨트에 있어 화산은 그 가스의 팽창을 조절하는 안전판이다. 
그 중에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활화산)과, 일시 그 활동을
정지하고 있는 것(휴화산)이 있다. 그러나 가스벨트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는
그랜드 카르테라와 같은 화구도 있다. 그것들은 가스체임버의 가스가 다하여 그
공급도 끊기면 화구가 함몰하여 영구히 되살아날 수가 없는 사화산이 된다. 그러나
또 테네리페 섬의 채홀라라고 불리우는 화구와 같이 오랜 분화구이면서 새로운
분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테네리페 섬의 남동 약 60km 지점에 그랜드 카나리아 섬이 있다. 여기에도
가스벨트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화구를 볼 수 있다. 화구의 직경은 
약 천 5백m 로 그랜도 카르테르와 비교하면 훨씬 작아서"그랜드카르테라 데 밴덤"
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두 개의 분화구를 제외하고 카나리아 제도의 화산은 모두 "새로운"---즉
가스벨트와 연결되어 있는 화산이다.
  카나리아 제도는 일찌기 아틀란티스 대륙의 동남부에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서아프리카의 모로코를 바라다보는 지점에 있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침몰한
때 그랜드 카르테라는 이미 솟아 올라와 있었기 때문에 해상에 남게 된 것이리라.
그 밖의 화산은---즉 현재의 섬들은 아마 일단 가라앉았다가 그 후 가스벨트의
형성 과정에서 융기하여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것으로 생각된다. 카나리아 제도는
이제 스페인령이 되어 원주민 카나리로가 있다. 그들은 서주민 관체족과 
스페인인의 혼혈로서 그 주민 특유의 피리에 의한 대화"시르보"는 이 선주민에게서 
물려받은 것일 것이다.
  그 선주민 관체족은 수수께끼가 많은 민족이다. 장신에다 산양의 털옷을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야생의 카나리아가 날아다니는 
고메라 섬의 깊은 숲 속, 깊은 암산 속에서 극히 드물게 순순한 관체족의 모습이
눈에 띄는 일이 있다. 그들은 "자기네들을 이 섬에 놔 두고 잃어버린 것은 신이다.
신은 태양과 함께 다시금 이곳으로 돌아와 줄 것이다."라고 믿고 있다.
  14세기, 스페인인이 처음 이 제도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관체족은 자기들
이외의 나라나 민족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또 한 척의 작은 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섬들에는 누가 세운 것인지도 모르는 아주 오랜 석조의 성채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벽에는 뜻을 알 수 없는 상형문자가 몇 개나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해협을 경계로 하고 아프리카 대륙에 면하고 있던 이 요소에 아틀란티스 제국 
군대의 성채가 있었다 하더라고 족므도 이상할 것은 없다.
  고대 그리이스인은 카나리아 제도를 "축복의 섬"이라 부르고, 고대 로마인은 
"행운의 섬"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아틀란티스 대륙에 속하지만 신의 축복에
의해 다행히도 살아 남은 섬들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었던가?
  아조레스 제도---북아프리카의 북서 약 천 5백km 해상에 마치 망가진 쇠고리처럼
흩어져 있는 아홉 개의 섬들이 그것이다. 스페인, 폴르투갈의 바로 서쪽에 
해당한다.
  이 제도도 화산열도로서 2천m를 넘는 산들이 군청색 바닷속에 솟아 있다. 파이알
섬은 대서양의 해저 조사에도 커다른 의의를 남긴 해저전선의 중계 기지였다.
  대중앙 가스벨트의 북쪽 것이 이 제도의 바로 아래를 지나서 스페인 포르투갈
방면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이 가스벨트에 의해 제도는 수면상에 머리를 내밀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섬들은 해저 산맥의 정상이기 때문에---.
  아틀란티스 대륙이 가스체임버의 최초의 폭발로 침몰할 때, 대륙의 일부였던
이 고장도 바닷속으로 함몰했다. 얼마 후 가스벨트가 형성되자 일련의 산맥으로서
이 고장은 융기했다. 그리고 그 정상은 수면 위로 돌출해 나왔다.
  산미겔 섬의 후르나의 대동굴은 이른바 아틀란티스 대륙이 남긴 기념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동굴은 원래 아틀란티스 대륙을 지탱하고 있던 가스
체임버로부터 가스르르 분출한 화구의 하나였다. 따라서 구멍은 수직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가스가 빠져나간 공동은 함몰하고 화구도 일단은 수중에 잠겼다. 그런데
가스벨트가 만들어지는 도중에 해저가 된 육지는 다시 융기하여 수면 위로 나왔다.
그러나 융기의 정상은 원래의 화구와는 다르므로 화구는 옆으로 쓰러져서 현재와
같은 언덕의 사면에 깊은 동굴이 되었다.
  이 제도의 주민들은 "피가리오님"이라는 이교의 신을 믿고 있다.
  "피가리오님은 바다의 하나님이지---"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이 신의 유래에 관해서는 주민들 자신도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 제도의 주민은 15세기에 걸쳐 온 폴투갈 식민자의 자손이라고 한다. 하얀
피부, 파란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전에 이 제도에는 어느
고대 민족의 후예가 살고 있었던 일이 있고 중세기 경까지는 모습을 감추어
버렸는데 그들이 신앙하고 있던 신이 이름을 폴투갈식으로 고쳐 남겼던 것이라고
한다.
  샌 피가리오와 아틀란티스 대륙의 시조 포세이돈과의 공통성은 매우 농후하다.

      15. 서유럽의 원초를 더듬어 본다.

    들소(바이슨)는 어디에서 왔는가?

  바이슨---전에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황야에 큰 무리를 이루어 서성거리고 있던
들소이다. 바팔로우라고도 불리우고, 인디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냥거리의
대상이었다. 거대한 체구 전체가 적갈색의 억센 털로 덮여 있으며, 성이 나면
무섭게 난폭성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 맹우도 인간의 지혜에는 당해 내지 못해 인디언들은 들소들이 지나는
길을 막아 절벽 아래로 몰라 떨어뜨려 한꺼번에 몇백마리씩 대량 학살을 전개했다.
백인이 총기를 신대륙으로 가지고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그들의 비운도 박차를 
가했다. 현재로서는 세계 각지 동물원의 바이슨을 다 모은다 하더라도 몇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멸종 위기에 있는 초원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아메리카 들소가 프랑스 태고의 벽화나 조각물 등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프랑스 고대의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이 들소는 그림의
좋은 소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아메리카 대륙에서 고대인에 의한 암벽의 벽화 등을 
보아도 이 야수의 모습은 일체 눈에 띠지 않는다. 곰, 사슴, 염소, 마스토돈,
공룡의 종류까지 그려져 있는데도 바이슨만은 볼 수가 없다.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바이슨은 유럽에도 있었다고 한다. 확실히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프랑스 고대의 예술가들이 이만큼 생생하게 그 생태를 그려 놓았을 턱이
없다. 사실 그것은 들소들의 뼈가 유럽에서 발굴되는 사실로 보아도 분명하다.
  바이슨, 또는 버팔로우는 확실히 유럽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순수한 
바이슨이었던가, 그 변종이었던가는 분명치 않다. 프랑스의 고대 벽화에서 보면
진짜 바이슨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것도 과연 원산의 것인지, 이주해 온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바이슨은 유럽에 이주된 것인지도 모르며, 어쩌면 또 아메리카로 이주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유럽에 이입된 것은 아메리카보다도 더 이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그들을 유럽으로 가져온 것일까?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그린 프랑스의 고대인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었던가를 더듬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각종 옛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스페인, 폴투갈 등의 남서부에는 아틀란티스 
대륙으로부터 식민이 단행되어졌다. 바이슨을 그린 그림이 아메리카의 암굴 
화랑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무렵 아메리카의 서부 및 남서부에는 이 야수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는 증명이 된다. 바이슨은 아틀란티스로부터 아메리카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전에 아틀란티스에서 프랑스로 식민이 단행될 때, 
그와 함께 바이슨을 유럽 대륙으로 가져왔었다는 얘기가 된다.
  바이슨이 아틀란티스 대륙 원산의 동물이었던가, 아틀란티스에서 프랑스로
가져온 것일까, 또 아틀란티스에서 아메리카로 왔었던가, 물론 이런 일들을
"이런 것"이라고 단언할 만한 자료를 필자가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이슨은 아메리카 원산의 동물은 아니며 아메리카의 고대 예술가들이          
서부나 남서부의 협곡 암벽에 그 작품을 잠긴 시대보다 훗날에 어딘가로부터 
건너와 이 고장에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디에서 왔건, 그것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지각 변동 후의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도
또 대홍수나 대빙하에 의해서 네브라스카의 암굴 거주 민족과 마찬가지로 괴멸의
운명을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바이슨은 "베링 지협"을 타고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아메리카로 왔다는 설이 
신빙성이 있다. 베링 지협이란 편리한 존재로 어디엔가 이용되었던 모양인데, 
이 설을 보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시아에서 얼마 전에 고대 바이슨의 뿔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뉴우스가 보도 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뿔은 사향소의 뿔이라는
사실이 그 후에 판명되었다.
  또 백아기(6천만 년--1억 3천만년 전)의 지층으로부터 바이슨의 뿔이 
발견되었다고 떠들썩했던 일도 있다. 이때는 그 후의 면일한 조사에 의해서 
부근에서 톨리케라톱스(세 뿔을 가진 백아기의 각룡)의 머리와 방패 모양의 목이
발굴되었다. 다만 그 3개의 뿔 중 한 개가 없었으므로 문제의 바이슨 뿔을 맞추어
보자 딱 들어 맞았다.
  바이슨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것은 아니다. 그 뿔이 아지껏 아시아 
대륙에서 발굴된 일이 없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수골의 섬이라고 불리는 
시베리아의 라코프 섬에서도 바이슨의 뼈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최후의
지각 변동으로 인한 대홍수가 몽고나 시베리아의 대평원을 습격하여 모든 동물을 
레나 강의 하구로부터 북극해로 밀어버렸다. 그 동물들의 뼈로 퇴적되어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라코프 섬에도 바이슨의 뼈만은 없었던 것이다.
  바이슨의 역사를 찾는 것은 이쯤 해 두기로 하고 인간의 역사로 들어가야 하겠다.

    스칸디나비아로의 도정

  인류가 최초에 유럽의 흙을 밟은 것은 그 북서부에서였다. 그 무렵, "육지의
가교"---이른바 베링 지협은 아직은 붕괴되지 않고 있었다. 일글리쉬 제도는 아직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아직 식민되고 
있지 않았다.
  유럽의 북서부, 그곳에는 지금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나라들이 있다. 적어도 
5만 년 전의 옛날, 이 지역에 중아아메리카로부터의 식민이 단행되었다. 그들의
후예가 그 후의 지각 변동으로 말미암은 대재액에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필자로서도 의문이다.
  유럽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은 인간들은 반드시 좋아서 이 고장으로 진출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케추얼왕이 거느린 케추얼족인데 조상의 땅인 
중앙아메리카에서 적에게 쫓겨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라틴계 민족의 선조가
되엉ㅆ다.
  "어떤 사람은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쳐 갔고, 어떤 사람은 숲속으로 달아나기도
하여 행방이 묘연해졌다. 배에 탄 자들은 해가 뜬 ㄴ방향으로 향하여 나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땅을 발견ㅇ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번영했다. 그들은 큰 나라가
되었다."
  중앙아메리카의 전설은 이와 같이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아마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여 스칸디나비아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최초의 상륙 지점은 바다밑이 
되어 있을 것이다.
  수 년 전 아주 오랜 선사 민족의 뼈라고 하는 것이 스칸디나비아에서 발견된
일이 있다. 발견자는 이것이야말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통파의 학자들은 유럽에 최초에 인간이 나타난 것은 중앙아시아의 
어딘가에서 소아시아의 코카시스 평야을 거쳐 온 것이라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결국 하나의 결론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증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북방설은 유력하다. 소아시아 지방에서도 뼈나 유물이 발굴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분명히 산이 융기한 이후인 홍적세의 것인 것이다. 
그에 비해 노르웨이에서 발견된 것은 산이 융기하기 몇만 년 전의 일인 것이다. 
발견자는 확실히 이 선사 민족을 "기베츠"또는 "기베치"라 일컫고 있었는데 
상세하게는 알 수 없다.
  중앙아메리카의 전설에 따르면 케추얼족은 밀크 화이트의 피부, 파란 눈, 밝은
아마색의 머리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그 
후예를 볼 수가 있다.
  중앙아메리카 온두라스나 과테말라의 대밀림 속에도 이러한 특징을 지닌 
인디언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필자의 친구는 그들의 마을에서 몇 주일을 보내면서
몇 가지 전설을 입수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산의 융기 때의 이야기를
똑똑히 전해 주고 있는 것도 있어따. 그들은 밀림으로 달아나서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하는 케추얼족의 후예인 것일까---.
  노르웨이에는 "콴란"이라고 하는 고대어가 있다. 이 언어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무우의 말, 혹은 무우의 말, 혹은 무우의 언어에 그 어원을 둔 것이 상당히 
많은데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그중 남인도의 말과 똑같은
발음,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 몇 가지나 발견 된다는 것이다. 콴란과 
중앙아메리카의 케추얼계의 언어를 연결지어 생각한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케추얼족이 유럽 북서부에 정착한 것은 도대체 언제쯤의 일이었을까? 그 연대를
딱 잡아 내기란 곤란한 일이지만 적어도 아틀란티스, 남서 및 남부 유럽이 아직
식민되기 이전이었던 것임은 확실하다. 이런 고장들은 아메리카로 건너와서
케추얼족을 몰아낸 민족에 의해 최초에 식민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소아시아 방면에서 발견된 뼈는 도대체 어떤 민족의 것일까?
그들은 고대 위글 제국의 식민지였다. 아시아에 군림한 이 무우의 식민 제국에
관해서는 여기서 자세히 다 말할 수 없겠으나 이 나라의 식민단은 유럽의 중앙부로 
진출해 갔다.
  이 위글의 식민단은 그 연대의 보아 전후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최초의 
이주자들은 지각 변동으로 인한 대홍수와 그에 따른 조산 활동에 의해 괴멸되었다.
겨우 세 동네, 혹은 세 가족이 가까스로 살아 남았다. 그 후예가 스페인의 
바스크족이었으며, 프랑스의 부리타니이인이며 순수한 아일랜드인이다. 이 세 
민족의 언어는 모두 관련을 가지고 있다.
  수년 전의 일이다. 뉴욕의 어떤 청부업자가 쿠바에서의 어떤 공사를 떠맡았다. 
감독은 따로 선택하기로 하고 인부는 현지인을 고용하기로 행ㅆ다. 청부업자는 
아일랜드인의 감독을 데리고 쿠바로 들어가?ㅆ다. 그런데 현지인의 인부들 가운데
바스크족들이 한 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만 기다려 줘요. 통역을 찾아 올 테니까..." 
  청부업자는 황급히 떠나갔다. 한 시간쯤 지나서 이윽고 통역을 찾아낸 그가
돌아와 보니 그곳에는 뜻밖의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의 아일랜드인 
감독이 바스크인들 가운데 앉아서 무언가 열심히 얘기를 하면서 웃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청부업자의 얼굴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통역 따위는 필요 없어요. 이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계열어를 하는 걸요!"
거의 같은 말이 인도에도 있다. 영국인들이 훈련 조교인 상사의 인솔로 
티베트와의 국경지대인 네팔을 행군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의 한 마을을 통과한던 
때, 상사는 문득 귀를 곤두 세웠다. 그리고 대열을 떠나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얘기를 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야, 이건 놀랄 일이군! 이 사람들이 우리 고향 말을 하고 있는걸!"
  1929년 8월 18일, 일요일자의 뉴욕타임지에 레닌그라드 발,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회원 N.마알 교수의 말이라 하여 이런 기사가 게재되고 있었다. 
  "아일랜드인과 알메니아인(이란 북서의 소련 공화국민)은 사촌과 같다.그리고
고대에서 가장 용감한 민족이었던 스키타이인(흑해 북안에서 맹위를 떨친 고대민족)
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동 교수는 이어서 이들 아시아 민족이 현재 아일랜드의 주민들 전부와 관계가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일랜드 선주 민족의 혈통을 포함한 도착민과 매우 짙은 
혈통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각의 대변동이 일어나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의 대홍수"와 산의 융기가
있어, 현재 아리아라고 불리우고 있는 위글제국의 식민단은 중앙아시아 혹은 
서아시아에서 동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 사실은 맥스 뮐러도 그의 저서에서 
쓰고 있다. 그들은 홍수와 산의 융기으ㅔ 수반하는 대재해를 가까스로 피해 나온 
한 패의 인간들이었다. 
  동양의 옛 기록을 근거로 위글로부터 유럽으로 향한 전후 두 차례의 식민에 관해
조사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처음 식민은 제 3기 최신세---즉 아직 산이 융기하기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다.
제 2식민은 그후 몇천 년인가가 더 지난 산의 융기 후, 즉 홍적세에 들어서 
이루어졌다. 이 최초의 식민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앞서 발견된 오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의 중부)의 유적이 있다. 여기에는 홍수와 조산활동에 의해서 
메워졌다고 생각되는 고대의 집단 부락이 있다. 이 마을은 마치 산에 삼킴을 
당한 듯이 산기슭의 땅 밑에 고스란히 묻혀 있다.

    문명 사이에 끼인 원시

  남유럽 및 남서유럽은 아메리카의 동북부와 비슷하여 선사를 더듬어 볼 만한
자료가 없다. 최초의 식민에 관해 알아야 할 기록, 비문의 종류도 보기 어렵다.
지각 변동으로 인한 대홍수, 그 아래로부터 융기한 알프스를 중심으로 한 빙설을 
이고 있는 산들. 사람도 동물도 물건도 거의 분쇄되어 지상에서 사라져 갔다.
  우선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크로마뇽인이다. 이 장신 장두의 원시인의
화석 인골은 남서프랑스의 도르도오인 지방의 고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유럽의 이 지방에 최초로 정착한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발굴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들은 분명히 산지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산이 융기한 후의 인간인 것이다.
  그보다 전인 최후의 지각 변동에 따른 대홍수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사력층 속에서 현재의 인간과 거의 다름없는 인골과 유물들이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산의 융기가 있기 몇만 년 전부터 이 지방에서 상당한 문명을 가진 
인간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소아시아, 수미르나의 "수도의 언덕(캐피탈의 힐)"의 유적에서 보아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지중해의 동단에는 산이 융기하기 훨씬 전부터 훌륭한 도시가 
건설되어 갔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지중해의 다른 연안 지방에도 당연히
발달한 문명을 가진 여러 민족의 식민이 거듭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ㅇ그러면 크로마ㅌ인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크로마뇽인 뿐 아니라 
네안델탈인, 필트다운인, 하이델베르크인 등등, 이른바 원인이라든가 원인이라든가
인류의 시조라고 일컫는 자는 사실은 결코 그와 같은 존재는 아니다. 무우 대륙의
"거대한 영감의 서"가 말하고 있듯이 인류는 그 원초부터 지성을 갖춘 영적인 
존재였다.
  독일의 네안델탈인은 발굴 당초부터 정상적인 인류의 고형으로서는 의문시되며
"여명의 사람"이라고 명명된 필트다운인은 발견자의 날조로 판명되었다. 최근에는
소아시아의 카페르남에서 한 개의 두개골이 화석으로 발견되어, 이거야말로 3만
년 전의 인류라고 하며 떠들썩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소아시아에서 스미르나처럼,
그것보다도 훨씬 옛날 인류 문명의 유적이 발굴되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단 한 개의 두개골과 고도한 문명의 유적, 그 중요성을 잘못 평가해 버리는 것은
문명이란 언제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진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의 진보는
시간의 결과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빼놓을 수 없는 고정관념에 의한 것이다.
  확실히 원인이라든가 원인이라든가 일컫는 자는 이 지상에 존재했다. 아니, 아마
현재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특수한 환경과 조건에서 오랜 연월 사이에 
퇴화한 자이든가, 인간을 닯은 짐승이든가, 돌연변이적인 기형이었음에 틀림었다.
  키체 마야의 성전"뽀뽀루 부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상에는 몇 세대를 지나면서도 산에 살고 있고, 전혀 얼굴을 보이지 않고,
집도 갖지 않고, 다만 큰 산들, 작은 산들을 미친 사람처럼 쏘다니는 자가 있다.
사람들은 이들 산에 사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다." 
  반수인들 가운데는 매우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꼬리,
주름살, 날개 등의 자국같은 것이 남아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은 후대 문명의 
이른바 반수신이란 것의 조각이나 회화를 보면 상상이 가능하다. 제아무리 인간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그들은 인간 사회에 끼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이나 종교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에게 사역시켜 
단순한 노동을 하는 일은 있었느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뼈가 한 개, 또는 극소수가 발견된다는 사실로 생각해 보더라도 그들이
집단 사회를 영위할 만한 문명을 가지고 있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현재 히말라야의 오지 등에 생존하고 있는 설인,아메리카의 변경에
출몰하는 "숲속의 사람"등의 뼈가 화석이 되어 후세의 과학자에게 발견되어, 
그것이 인류의 시조라고 단정된 때, 우리의 존재는 도대체 어찌될 것인가.
  유럽에서도 세계의 다른 고장과 마찬가지로 학자들은 발굴된 석기의 특징,
화살촉이나 창의 끝날의 솜씨에 의해서 선사 민족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하게 말했는데, 그런 엉성한 유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문명의 멸망을 중명하는 것이긴 할 망정 지구의 시간 경과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이 중요시하는 석기 둥이라는 것은 이미 먼 옛날에 지나간
문명과 우리가 현재 들어가려 하고 있는 문명 사이의 가교 비슷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뽀뽀루 부우"에서 한 가지 더 인용해 보자. 
  "그들은 파괴되고 전멸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손은 지금도 숲 속에 있는 원숭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즈보온의 명저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페트의 대동굴 안에 묻혀 있던 두개골군은 모두가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석기의 특징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서쪽을 
향하여 묻혀 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서쪽에 무엇이 있었던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 조상, 문, 사원의 정면, 도로 등의 
바아향을 보면 더 한층 분명해진다.
  필자는 지구상의 인류의 역사가"멸망의 연속"이라는 것을 거듭거듭 말하고 있다.
인종의 다음에 인종이, 민족의 뒤에 민족이 나타났다가는 또 사라져 갔다. 
대부분의 고대 민족과 선사 시대의 문명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그 유적이 
발굴되기까지 아무도 모른 채로 잠자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유적도, 인류의 유구한 역사로 보면 바로 어제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카탄의 
가장 오랜된 유적은 아마도 이집트보다는 하루쯤 오래된 것일 것이다. 윌리엄 
니이벤씨가 발굴한 고대 도시는 그것보다 또 하루쯤 오래된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가장 오래 전의 인간이 이 지상에 남긴 것과 우리가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히말라야의 어느 고승원에는 7마나년 전의 것으로 생각되는 비문판이 있다.
또한 그 비문들 중에는 20만년, 혹은 27만년 전의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도 있다. 그 연대 측정에 관해서는 천문학자의 지식을 빌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고대인의 날짜나 연대는 전체의 위치에 따라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정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면 이 비문판이 우리에게 인간의
원초에 관해 어느 정도 자세히 말해 줄는지도 모른다.

      16. 에게해의 선사 민족

    함몰해 버린 고대 아테네

  그리이스--- 이 장에서 비로소 우리는 선사의 베일 저편으로부터 현재까지 
살아 오고 있는 나라의 역사에 관해 언급하기로 하자.
  그리이스가 역사상에 분명하게 모습을 나타낸 것은 기원 전1104년 제 1회 
올림픽부터이다. 그러나 이 올림픽까지에 그리이스는 몇 만년 이라는 시련과 
인고의 역사를 겪어 오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역사나 전설에 관해 
기록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그들 집필자들 대부분이 
자신이 쓴 것을 스스로 단순한 신화의 부류로 미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소아시아나 발칸 반도에 있는 유적을 조사해 나가면 그것들을 다만 신화로 간과할
수는 없게 된다. 예를 들면 바알벡의 대유구를 건설한 자는 고대 그리이스인의
일족이며 현재의 그리이스인의 조상이다.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기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상태를 가끔 만나는 수가
있다. 즉 선사 시대 고도의 자취가 몇 층이고 겹쳐져 있는 상태이다. 그것들은 거의
예외없이 대 홍수로 말미암아 괴멸한 것이다.
  그리이스에 관해 쓰고 있는 책자들 가운데는 기원 전 2천 년 전후의 이른바
도올리아인의 내왕이 있기 이전은 "어렴풋한 전설의 세계"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
많다. 과연 그런 것일까? 우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로부터 이집트의 노신관과
그리이스의 현인 솔론의 문답을 인용해 보자.
  "현재 이 도시(이집트의 사이스)의 시민들은 아테네인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말하자면 피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오, 솔론, 솔론, 당신들은 아이들이오. 그리이스인에게는 고로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소."
  솔론은 물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
  "당신들의  정신이 아직 미숙하다는 말이다. 고래의 전승에 길러진 아무런 
의견도 연대를 거쳐 원숙한 아무런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 까닭을
말하지. 인간은 여지껏 많은 파멸에 부딪치면서 살아 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지해는 불과 물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당신들의
나라나 우리의 나라나 또 다른 나라들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었던가, 
고결하고 위대한 행위와 그 밖의 현저한 사건들은 모두 기록되어져 우리의 오랜
신전에 보존되어 있어 언제까지고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나 다른 
나라들에는 참으로 문자가 있다. 하지만 일정한 시기마다 하늘로부터 나쁜 
전염병처럼 흐름이 쏟아져 내려와 모든 것을 씻어 갔으며 남은 자들은 문자에 
어둡고 교양이 부족하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당신들은 다시 아이들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가 버려 우리나 당신들의 나라에서 옛날에 있었던 일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
  "하늘로부터의 흐름"이라는 말은 의미가 분명치 않지만, 이것은 오랜 옛날의
카라 마야어의 용법이다. "하늘의 뜻에 따른 물"이라고 하는 편이 분명할는지도
모른다. 거칠데가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해일이나 홍수를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이집트의 옛 기록에는 이따금씩 해일이나 홍수가 나오는데 결코 일정한
시기마다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대양의 밑을 달리는 가스벨트의 형성, 혹은 그
형성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잉ㅆ을 때, 가스체임버가 폭발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갑자기 몰아닥쳐 오는 것이다.
  이집트만이 아니라 고대의 나라들에서는 ㄴ여러 가지 사건의 기록이 소멸되는
일이 없도록 돌이나 벽돌처럼 구운 점토판에 써 넣어 사원이나 신전에 보관해 
두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필자가 티베트나 인도에서 3만 5천 년 내지 7만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점토판을 발견했다는 얘기는 이미 여러 번 쓰고 있다. 
  이집트의 노신관은 다시 솔론에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한 당신들의 혈통 이야기는 단순한 아이들의 얘기에 불과한
것이다. 첫째로 당신들은 오직 한 번의 홍수 밖에 모르지만 그곳에는 몇 번이나
홍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당신들이 모르는 당신들의 나라에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매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 당신들은 그 자손이며 피를 이어 받은 자인 
것이다. 이 사실을 당신들이 모르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재해로부터 살아 남은
자들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바알벡에 웅장한 신전을 세우려고 한 사람들, 그것은 여기에 이야긱되고 있는
민족의 자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전은 마침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 
공사 기간 동안 끊임없는 화산활동과 진진에 의해서 계속 시달림을 받았던 것이다.
  "솔론이여, 저 가장 큰 홍수가 일어나기 전, 현재 아테넨로 불리우는 도시가 
전쟁에 가장 강하고, 그 법률에 가장 우수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 솔론은
크게 놀라 아테네인의 조상에 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신관에게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이해가 빠르군, 솔론. 당신 자신을 위해 그 위대한 도시를 위해, 특히 우리 두
도시의 수호자이자 인도자이신 여신을 위해서...여신은 "대지"와 
헤파이스토스신으로부터 당신들 민족의 씨를 받아, 우리의 도시(사이스)보다도
천 년이나 전에 당신들의 도시를 만들었던 것이다. "
  이 노신관은 말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자신과 솔론에게 공통의 모국어"대지"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심볼은 무우 대륙에서 "어머니" "대지"또 "어머니인 대지" "모국"또는 
"어머니의 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대지로부터 당신들의 씨를 받아..."는
"어머니의 나라로부터..."라고 하는 것이 진짜이다. 바꾸어 말하면 
"당신들의 조상은 어머니의 나라에서 왔다"가 된다.
  노신관은 전장에서 말한 아테네와 아틀란티스와의 전쟁에 말이 미친다. 
그리고...
  "그러나 그후 (아테네에 의해서 아틀란티스가 패배한 뒤), 격심한 지진과
홍수(대해일)가 일어나 하루 밤낮 동안에 용감한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대지의 밑으로 삼키워졌다.마찬가지 상태로 아틀란티스도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가 얕은 늪으로 되어 다닐수가 없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고대 아테네가 어떠한 운명에 처해졌던가가 분명해졌다. 그리고 다음에 아테네가
역사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로부터 9천 년 후인 제 1회 올림픽 때인 것이다.
  세계의 역사는 이렇게 부침을 거듭했던 것이다.

    "수도의 언덕"이 말해 주는 것

  하인리히 슐리먼은 언제나처럼 아내와 함께 발굴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4--5명의 인부가 단조로운 동작으로 흙을 파내고 있어다. 그곳은 일찌기 슐리먼
자신이 풀리아모스의 궁전이라고 판단한 건물의 벽 위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 2의 장소에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일---그러니까 
1873년 6월 15일을 그는 발굴작업의 마지막 날로 정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곁에 서 있는 아내의 팔을 붙잡았다.
  "금이다!"
  낮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는 외쳤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인부들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도둑놈 같은 인부들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슐리먼은 대형 나이프를 손에 잡고 지하 8.5m의 갱 밑으로 내려갔다. 구리의 
방패, 구리의 가마솥, 은 항아리, 호박의 컵, 은잔, 은꽃병, 은나이프, 구리로 
된 창날, 무수한 금 귀걸이나 장식, 반지, 단추---잇따라 보물은 나타났다. 
슐리먼은 그것을 아내의 쇼올 속에 넣고는 사람들 몰래 가까운 움막집으로 
달려갔다. 
  보몰 속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금관으로, 그것은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금고리로 이마를 온통 덮듯이 되어 있다. 슐리먼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아내의 이마에 놓았다.
  "헬레네!"
  아내를 바라보면서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그것은 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전쟁에 등장하는 절세의 미녀 이름이었다. 
  그곳은 소아시아 북서부, 다아다넬스 해협으로부터 5km쯤 들어 간 샐리크라
부르는 쓸쓸한 언덕이었다. 발견된 것은 기원 전 1194년 경 집권했었다고 하는
트로이의 풀리아모스 왕의 보물이었다. 하인리히 슐리먼을 트로이의 발굴에
나서도록 충동했던 것은,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 그것을 실증하려는 
정열이었다.
  "모든 언덕, 모든 돌, 모든 흐름, 모든 감람나무 숲이 나에게 호메로스를
연상케 하므로 몇 백 세대의 시대를 단 한번에 거슬러 올라가서 그리이스 기사의
빛나는 시대에 어울렸다."
  그는 스스로 이와 같이 쓰고 잉ㅆ다. 슐리먼은 트로이의 유적에서 적어도
여섯 개의 고도시를 발견하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겹쳐져 땅 속에 묻혀 있는데
그 가장 오래된 도시의 역사는 아마도 산들의 융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고 생각된다.
  아테네, 트로이...그 밖에 ㅇ거의 몇 몇, 어느 것이든 지중해의 막다른 곳인
이 자방, 소아시아 주변에 일찌기 고대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시작되기 전, 몇천 년, 아니 몇만 년 
전의 옛날 일이었다. 그들은 어떤 자들이었던가?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던 것일까?
거기에 대답하기 전에 두 개의 유적을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는 수미르나의 
"수도의 언덕"이요, 또 하나는 바알벡이다.
  수미르나의 유적은 트로이의 유적으로부터 남하하여 소아시아의 서단, 에게해에
면한 곳에 있다. 마크 트웨인의 "촌놈의 외유기"에 의해 이 유적을 방문해 보자.
  "도시의 주변에서 우리는 여섯 개의 유적을 볼 수가 있었다. 일찌기 이곳에
존재했던 그들 도시는 불태워지고 또 지진에 의해서 붕괴 되었던 것이다. 언덕이나 
바위산이 군데군데 벌어져 있었다. 그 단면에 오랜 세월 동안 묻혀온 많은 
건축물의 잔해들이 노출되어 있었다."
  "언덕의 경사는 꽤 가파랐다. 해발 5백 피트의 지점, 도로의 위쪽으로 
10피트로부터 15피트의 높이로 수직으로 흙이 퇴적되어 있는 곳이 있었다. 그 
단면에 3층으로 겹쳐진 패각의 층이 보였다. 그 층은 두께가 약 18인치로 각각
2피트 내지 3피트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하향으로 경사하여 30피트쯤
계속되다 이윽고 없어졌다. 그 단면이 도로면과 접한 부분, 패각 속에서 오래된
토기의 파편이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 기술은 소아시아의 선사 연구에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와 같은
먼 옛날,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과 지구의 거의 모든 곳에 매우 높은 문명을 가진
민족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 차례에 걸쳐 대홍수가 일어나 세 가지 고대
문명을 씻어가 버렸다. 그것은 아직 산이 융기되기 전의 일이다.
  홍수에 의해서 황폐한 고장에 다시금 인간들이 정착하고 도시를 이룩하게 
되기까지에는 긴 세월이 필요했음에 틀림이 없다. 세 개의 층과 층과의 간격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유적이 산 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은 산 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유적의 층이 평행하여 경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평지에 이룩된 도시의 유적이 
산의 융기에 의해서 밀려 올라갔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산이 융기한 것은 홍적세에 들어선 이후부터이다. 이들 문명은 그 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필자가 지금까지 보아 온 옛 기록 가운데서 유럽과 소아시아의 대 홍수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두 점 밖에는 없다. 이집트의 옛기록과 성서이다. 플라톤의
"티에이오스"에 나오는 홍수는 이집트로부터 솔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므로 순수한 그리이스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세계의
각지에 걸쳐 거의 모든 민족에게 대해일이나 대홍수의 기록이나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장소에서 이러한 기록이나 전설은 지질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바알벡 신전의 경이

  바알벡의 유적은 지중해의 동단, 시리아 사막의 북단, 베이루트의 북동에 있다.
그 유구는 고대의 유들 가운데서 가장 장엄하면서도 고아한 것이다. 세계의 
고고학자, 연구가들의 매우 강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유적이 도대체 언제쯤, 어떤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하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마크 트웨인의 묘사를 빌려 보자.
  "11시, 우리의 눈은 바알벡의 벽이나 큰 원주(둥근 기둥)로 향해졌다. 유명한
이 유적, 그러나 그 역사는 닫힌 채로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몇천 년 동안 
나극네의 경이와 감탄의 눈을 맞으면서 그곳에 계속 서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세운 것인지, 그것은 수수께끼이니만큼 절대로 대답이 나올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과거 20세기 동안에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만큼 장려한 의장, 이처럼 우아한 솜씨를 보여주는 것이 이것 외에 또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 발 밑에도 따라올 수 있을 만한 것이 있었단 말인가..."
  "태양의 대신전, 쥬피터의 신전, 그것보다는 작은 몇 개의 신전이 조촐한
시리아의 촌락 속에 한 덩어리가 되어 솟아 있다. 그 대상은 아주 기묘한 것이다. 
이 신전들은 완전히 온 세계를 받칠 수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튼튼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토대에는 각석이 쓰여져 있는데 이 초석의 크기는 합승 마차 만큼
큰 것도 있고, 작은 것일지라도 목수들의 연장상자 만큼은 했다. 이들 토대는
열차도 지나갈 듯한 석조의 터널로 뚫려져 있다. 이와 같은 구조로 오랜 세월 
동안 줄곧 서 있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경이이다."
  "태양의 신전은 길이가 약 3백피트, 폭은 약 1백 60피트이다. 주위에는 54개의
원주가 둘러 세워져 있는데 지금까지 서 있는 것은 6개이고 그 밖은 허물어져서
쓰러져 있거나 겹쳐져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고린트식의 기둥머리나 중인방도
여섯 개의 기둥의 위 이외는 없어졌지만 그 높이는 90피트나 되며 그것을 올려다
보고 있노라면 아름답고 근사한 균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원주는 늘씬하여 우아하게 보이고 중인방에는 호화로운 석고 세공품과도 같은
조각이 되어 있는데 너무 오랜동안 올려다보아 눈이 피로해지면 바닥으로 눈을 
떨구어 서 있는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그곳에 쓰러져 있는 원주의 파편
직경은 8피트는 남짓되고, 아름다운 기둥머리는 오두막집만한 크기이며, 그리고
조각된 석판으로 보이는 것은 두께 약 4--5피트, 보통 거실이라면 완전히 막아 
버릴 정도의 넓이가 되는 것이다."
  "쥬피터의 신전은 태양의 신전 만큼은 안 되지만 이 또한 웅대한 것이다. 
보존상태는 꽤 양호하여 9개의 원주 중 한 개는 거의 손상이 없는 상태로 서 있다.
원주의 높이는 약 65피트로 보랑과 같은 지붕을 받치고 있다. 그 지붕은 거대한
평석으로 그 하면에는 그럴싸한 조각이 되어 있어 밑에서 보면 프레스코화처럼
보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 평석을 보면 이 또한 조각을 한 거대한 돌덩이라고
해도 좋은 것으로 아무래도 머리 위의 것과는 같은 크기로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신전의 안쪽에도 정교하고 장대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이 건조물이
아직 새것이었을 때는 얼마나 장려했을까. 그리고 별을 수놓는 밤하늘아래 달빛을
받으며 우뚝 솟았을 때, 그것은 얼마나 기품있게 보였던 것일까."
  "더군다나 이들 조각이 된 각석은 이 대신전을 에워싼 넓은 노대(베란다) 혹은
보랑을 만든 반조석(덜다듬어진 돌)에 비하면 말도 못할 만큼 큰 것이었다. 
길이 약 3백 피트의 보랑에는 13피트각, 길이 64피트로부터 69피트나 되는 큰 돌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바알벡 신전의 돌을 깍아낸 채석장으로 가 보았다. 그것은 언덕의 
등성이였고 그곳에서 4분의 1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에 여기 
살고 있던 고대 민족의 증인으로서 몇천 년 동안 내팽개쳐져 있는 거인이라도 된
것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두께 약 14피트 폭 17피트, 길이 70피트나 되는 거대한 
석재가 여기서 깎여져 신전의 건축에 쓰여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돌은 무게 2백 톤에 달하는 것으로서 같은 것이 이미 신전의 바깥쪽 보랑에
이용되고 있다. 또 태양의 신전에 원주 중 세 개는 1759년의 대지진 때에 쓰러진
것이다.
  R. 카알은 그의 저서 "과거의 경이"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건축양식은 주로 로마황제인 안토니우스 피우스(86년--161년)가 집권했던
때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돌은 약 반 마일 떨어진 장소에서 다듬어졌다. 그 작업장에는 아직도
폭 14피트, 길이 68피트의 평평한 돌이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 필요한 장소로 
운반하기에는 너무도 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만큼 오류로 가득찬 기술은 없다. 로마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이스, 이집트의
역사에도 바알벡의 건조물에 관해 기록한 것은 없는 것이다. 이런 나라들의 
역사에는 카알이 지적하는 시대의 이야기는 모든 사건, 모든 계획, 모든 업적에 
관해 모조리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그리이스는 지리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다. 그리고 그시대보다 천 2,3백 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옛나라부터 역사적 
사실, 업적, 건조물 등에 관해서 명백하게 기록해 오고 있다. 그런데 이 대신전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채석장의 돌을 운반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와 똑같은 큰 돌리 어째서 신전에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건축이나 기타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원주 가운데는
이집트 중앙부에서 산출되는 대리석제의 것이 있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 정도의 대수송 사건에 관해서 이집트에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로마나 그리이스의 역사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채석장에 남겨진 수수께끼의 큰 돌, 그러나 이 돌은 두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 준다. 한 가지는 바알 벡의 대건물이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갑자기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경위를 미루어 
생각해 보면 무언가 돌연한 사건이 일어나 작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명백하다. 그 돌발적인 사건이란 무엇인가?
  바알벡 채석장의 미완성인 큰 돌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생생하게 머리에 
떠오라오는 광경이 있다. 그것은 이곳으로부터 꽤나 멀리 떨어진 태평양상의 
이이스터 섬의 채석장에서 본 광경이다. 그곳에도 무언가 이상한 돌발 사건이 
발생을 암시해 주는 듯한 미원성의 석상(앞에서 이야기한)작업 도중에 방치되었다.
  어느 날엔가는 이 불가해한 유적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될 만한 옛 기록의 
비문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직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수미르나의 "수도의 언덕"은 산이 융기하기 전에 존재했던 옛 도시의 유적이지만
바알벡의 유적은 그 상황으로 보아 분명히 산이 융기하고 나서 그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유적이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바알벡 신전의 건설자가 "수도의 언덕"을 만든 민족의 
후예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바알벡의 건설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건조물의 특징은 비교적
용이하게 판별이 간다. 이 신전의 원주 양식은 그리이스 건축의 가장 오랜
양식의 하나라고 하는 코린트식이다. 그러나 그리이스에 코린트식의 건축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바알벡이 세워진 후 거의 7--8천 년 후의 일이다.
  그리이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 양식이 그보다 훨씬 옛날의, 이름도 모르는 고대
민족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 이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17. 나일강의 여명

    동서 식민단의 합류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3백 28척의 함대를 이끌고 지중해를 건넜다. 7월, 
이집트의 흙을 밟은 원정군은 길고 고통스런 사막의 행군 끝에 노란 사마긔 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기하학적인 건조물을 만나 군인들은 그저 어리벙벙하여 이것을
올려다 볼 따름이었다. 또 이 원정군에 종군하고 있던 175명의 프랑스 학자들도
오랜 왕릉이나 신전의 벽이나 문기둥을 덮고 있는, 그림인지 글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상스런 조각의 무리들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집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함께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고 한다. 실상
파라오 무덤의 고색 창연한 벽화, 황금 관 속에 담겨 있는 미이라를 본 후, 저녁
노을에 붉게 물들어 천천히 흐르는 나일강 연안에 섰을 때, 사람들은 그대로 유구한
태고로 따라가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인류 문명이 탄생했다는 이 고장에 최초에 살았고, 개척한 인간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러한 의문 앞에서는 고고학자라 할지라도 분명한 대답을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현재에도 피라밋에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군의 군인들과 별다를 바가 없다. 
  이른바 이집트 학자란 자들은 많지만 이집트인들의 종교에는 왜 서방 숭배와
동방 숭배와의 2종이 있는가 하게 되면 말문이 막혀 버린다. 필자는 지금까지 
여기에 시원스런 해답을 준 책을 본 일이 없다.
  이 사실은 이집트의 이른바 히에로그리프(상형문자)라는 것의 해독이 만족스럽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원인으로 되고 있다. 예로부터 이집트의 폐허에서 볼 수 
있는 비문에 관해서는 그릇된 해석이 얼마나 전해 왔던가. 이른바 반어석---로제타
스톤의 발견에 의해서도 이 신비의 문을 열어 주는 완전한 열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 이상스런 그림문자를 자의대로 읽을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그 배후에 숨겨진 또 다른 하나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상형문자가 간직하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동양의 이른바 고승, 현인이라고 불리우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다.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신전이나 승원에 처박혀 거의
그 생애를 소비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것은 수업임과 동시에 현대의 편의적인
사고방식에 방해 받는 일이 없이 고대인들의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에 접근해 가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러나 고승, 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독한
비문의 의미를 공개하는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인에게, 혹은 
또 학자들에 의해서 완전히 넌센스라고 일소에 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원래부터 두 가지 다른 민족에 의해서 다른 두 가지 장소에 식민되었다. 
그 한쪽은 서방으로부터 찾아와서 이른바 하이집트에 정착했다. 다른 식민단의 
무리는 동방으로부터 건너와서 상이집트에 자리를 잡았다.
  서쪽에서 온 식민자들은 나일 하류의 델타 지대, 사이스에 최초의 식민지를 
만들었다. 동쪽에서 온 식민자들은 홍해의 출입구, 아덴만의 구아르다피곶으로부터
아프리카 동쪽 연안을 따라 식민해 가면서 이집트에 이르렀던 것이다.
  필자는 인도에서 이 동방으로부터의 식민지가 "마이오우"라고 불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 이름이 그들의 식민지 모두에 해당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 도시를 가리켜 한 말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그 인도의 옛 기록이 
쓰여지던 무렵, 마이오우는 그들 식민자의 수도이며 동시에 그 식민지의 
이름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해안으로부터 그들은 점차적으로 내륙으로 들어가서 이윽고 나일강 연안에 
도달했다. 그리고 상류와 하류로 퍼져 나갔다. 당연히 상이집트의 식민자와 
하이집트의 식민자는 나일강변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은 인류 역사상 매우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즉, 지구 반대쪽의 한 지점에서 서로 역방향으로 출발한
두 식민단의 물결이 여기에서 비로소 회동을 했던 것이다. 그 출발점이란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이었다.
  최초로 식민이 사이스에 단행되고 나서 약 1만 년 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와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하이집트의 패배로 끝났는데 이 두 개의 나라는
하나로 병합되어 제국이 되었다.

    환상의 식민지 마이오우

  무우 대륙에서 아시아 방면으로 건너 온 이주자의 일단에 나가 마야가 있었다.
그들은 버어마로부터 인도 남부로 뿌리를 뻗쳐 인도 최초의 제국을 세웠다.
약 3만 5천 년 전의 일이다. 그들은 다시금 아라비아해로부터 페르샤만 깊숙히
들어갔으며 유우프라테스강의 하구 부근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바빌로니아 문명의
사조가 되었던 아카드인이다. 그것은 약 1만 8천 년 전의 일이다.
  바빌로니아의 식민지가 건설되고 나서 얼마쯤 후의 일인지 모른다. 인도에서 
서쪽으로 향해 또 다른 식민이 개시되었다.
  그들은 역시 아라비아해를 건너 아프리카의 북동부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덴만이나
홍해의 서안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인도의 옛기록이나, 이집트의 옛기록 등은
상이집트에 만들어진 최초의 식민지 마이오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식민지가 이룩된 것은 약 1만 5천 년 쯤 전의 일인 듯하다. 그 무렵 물론
아프리카 대륙에는 산은 없었고 또 끝없는 사막이 있었던지, 어떠했는지도 몹시
의문스럽다.
  그들은 점점 내륙으로 들어나 나일강의 상류가 두 가래로 나누어 지는 부분, 
이른바 백나일 청나일의 유역에 정착했다. 이 식민지는 번영하여 매우 강대해졌다.
그리고 나일강 하류의 식민자와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상이집트는 전쟁에 이겨 두 개의 이집트는 한 개의 제국으로 통합 되었다. 
이 제국의 초대 임금이 메나 또는 메네스왕이다. 이집트의 역사에서는 
"북과 남의 왕"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 상이집트의 국민은 태양을 하나님의 상징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이 인도,
이집트의 옛 기록들에 기록되어 있다. 두 마리의 뱀을 곁들인 날개 있는 해의 
심볼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상이집트인들에 의해서 하이집트로 가져 왔었다.
  날개가 있는 원은 고대의 나라들이 곧잘 사용한 심볼로서 그다지 드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뱀이 곁들여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것은 단순한 착상도 
아니요, 단순한 장식도 아니다. 무우 대륙에 있어서 나가족은 뱀을 조물주로서 
하나님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뱀은 "나가"라고 불리었다. 여기에서 그들
민족의 이름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태양은 하나님의 지고한 심볼이었다. 뱀은 조물주로서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그 다음 가는 심볼이었다. 그 밖의 몇 가지 심볼은
모두 이 두 가지 심볼에 비해 하위의 것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왕관도 뱀의 심볼로서 장식되는 일은 있었지만 태양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태양은 무한하며 전능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인간인 왕의 관에 
사용하는 것은 신을 모둑하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는 땅은 바뀌어도 그들은 나가 제국에서의 풍속 습관을 오랫동안 지녀 온
것일 것이다. 이집트의 옛 문명 속에 인도적인 요소가 발견된다고 하면 그들의
손에 의해 가져온 것임에 틀림없다.
  히로스트라토스는 "타이애너의 생애"에 이렇게 쓰고 있다.
  "최초의 이집트인은 인도로부터 온 식민이었다."
  힌두의 현인이자 역사가인 바르미이키는 아요디아이 "리시"사원 옛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인도로부터 출발한 식민자(마야)들은 이집트에 식민지를 만들고 마이오우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은 고승 나라아나가 그 사원에 전해 오는 옛 기록을 말하고 그것을 
바르미이키가 쓴 고전 "라아마야나"제 1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아칼은 처음에 인도의 데칸 지방에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교의와 지식을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에까지 가지고 왔었다."
  브룬센의 "세계사에서 이집트의 위치"제 4권에는---
  "이집트에서의 생활이 시작될 때, 유우프라테스 지방으로부터의 이주는 늦어도 
기원 전 9850년에는 시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유우프라테스 유역으로부터 이집트에 식민이 단행되었다는 이 기술은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모르지만 의문이 남는다. 아라비아의 오오먼 지방을 유우프라테스
지방에 포함시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실제로 아카드인이 오오먼, 
또는 아카드로부터 이집트에로의 식민에 가담했었다는 것일까?
  필자 자신은 아지껏 아카드인이 인도로부터 이집트로의 식민에 가담했다고 하는
문헌, 옛 기록 같은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식민자가 인도로부터 이집트로 이주를 개시한 
때, 아카드는 도중의 보급지였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브룬센은 이집트로의 
식민자가 아카드를 떠났다고 하는 기술을 무언가의 옛 기록에서 찾아내어 식민자가 
아카드인이라고 단언했는지도 모른다.
  이집트이 새식민지는 마이오우라고 불리었다고 바르미이키는 쓰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집트의 지도를 펼쳐 보아도 마이오우의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마이오우라는 곳은 과연 실제로 있었던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느 지점에 있었던
것일까?
  고대 이집트 연구의 권위자인 브루쉬베이는 그의 저서 "파라오의 나라
이집트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이오우의 이름은 토토메스 3세에 의해 정복 당한 영토의 목록 속에 포함되어
있다."
  "마이오우의 이름은 누비아에 있는 묘실내의 영토 목록 중에서 발견되었다."
  토토메스 3세는 고대 이집트 제 18왕조(신왕국)의 왕으로서, 재위는 기원 전
1534년부터 1448년으로 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이 나폴레옹이라고 불리었고 시리아,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누비아를 정복하여 그 영토는 고대 이집트 최대의 넓이에 
미쳤다. 이 토토메스 3세의 영토 목록 속에 마이오우의 이름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가공의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누비아는 홍해의 서쪽 연안, 상이집트에 속하는 사막지대이다. 이 사막은 홍해의
남단, 바브 에르 만데브해협의 약간 북쪽 지점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사막의 동단,
홍해 서안의 꼭 중앙부에 위치하는 곳에 현재 수아킨이라 불리는 항구가 있다.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아 마이오우는 이 부분을 중심으로 하여 퍼져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위 이집트의 역사에서 이집트인의 시조는 유우프라테스 유역으로부터 시리아 
사막을 가로질러 하이집트로 들어가 강을 거슬러 백나일 청나일 유역에 정착했고, 
얼마 후 분열하여 두 개의 왕국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왜 물이 없는
사막이라는, 가장 곤란한 코오스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더욱 
안전하고 용이한 수로가 눈 앞에서 열리고 있는데도...
  바빌로니아의 신관이자 역사가요 천문학자인 베로소스는 유우프라테스가의 
연안에서 셈인이 최초로 만났던 사람들(아카등니)이 "반어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바르미이키도 "마야(무우 대륙의 식민자)는 뛰어난 항해자로 그 배는 
동으로부터 서쪽으로,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자유로이 항해했다"고 말하고 있다.
  "반어인"이라고 생각될 만큼 수영에 능ㅅㄱ하였고 동시에 뛰어난 항해자였던 
나가 마야가 만일 그곳에 사막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부러 해로보다도 훨씬 
도정이 먼 육로를 택할 필요가 있었을까. 해로를 선택하면 거리로도 몇 백 km나
지름길이 될 뿐만 아니라 시종 해안선을 따라 안전한 항해가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나일델타라고 하는 비교적 비옥한 토지를 발견했으면서도 왜 하필 메마른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던 것일까. 아주 불합리한 설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델타 모래밭의 개척자

  상이집트가 인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비해 하이집트는 아틀란티스 대륙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이집트의 역사를 말하려 
할 때, 아틀란티스의 장에서 다룬 자료와 중복을 피할 수 없겠다. 나일 식민지
---그것이 하이집트 식민지의 최초의 이름이었다. 이 식민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6천 년 전, 아트란티스 대륙으로부터 온 식민자(마야)에 으이해서 나일
델타의 한 지점인 사이스에서 시작했다. 그 지도자가 토토였다.
  나일 델타는 당시의 지중해 연안 식민자들에 의해 경원시 된 땅이었던 모양이다.
소아시아, 발칸 반도와 그 주변의 섬들, 코카사스평야, 이러한 지방은 비옥한 토양,
좋은 물, 적당한 기후 풍토로 이상적인 식민지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일 델타는 그저 더울 따름인 불모의 모래밭이라는 인상이 강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 식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어지간히 땅이 비좁게 되어 갔던가,
아니면 불가항력적인 사정으로 식민자가 여기에 정착하게 되었던가의 어느 쪽일
것이다. "이집트인은 미조루부터 시작된다. 미조루는 역사의 신 토토의 
아들이었다. 토토는 아틀란티스 신관의 아들이었다. 그는 사이스에 신전을 세우고
모국의 지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하인리히 슐리먼이 크레타 섬의 미케네의 유적에서 발견한 비문이다.
  "형 아아크이 분노를 사서 무우 여왕(고대 마야 제국의 여왕)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향해 달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나일가의 모래밭 위에 쌓아 올린 마야의
식민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무우 여왕은 이 땅의 건설자 토토를 만나 토토는 
여왕의 친구가 되고 또 종교상의 스승이 되었다(트로아노의 고사본)"
  "제 2왕조 센트왕의 치세에 왕은 아틀란티스의 유적을 찾기 위해서 탐험대를
보냈다. 3천 3백 50년 전 이집트인은 그 곳으로부터 모국의 지식 전부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파피러스 고문서)"
  "이집트인은 자기네들의 조상은 아득한 먼 옛날에 나일강의 모래밭 위에 정착한
이국인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있다(조지 로우린슨의 국가의 기원)"
  "이집트인은 서방의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레로도토스)"
  "이집트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아득히 먼 옛날에 나일강의 모래밭 위에 정착한
이국인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 모국의 문명을, 문자를 쓰는 방법이나
고운 말을 하는 방법을 이 땅으로 가져 왔었다. 그들은 해가 지는 쪽에서 왔으므로
가장 오래 된 인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디오도로스의 역사)"
  "이집트인은 서방에 있는 신들의 나라 쿠이란드로부터 찾아왔다(티스스의 
돌의 기적)"
  "솔론이 이집트 사이스의 신관 소우티스, 헬리오포리스의 신관 푸세노히스를
방문했을 때, 9천년 전 지진에 의해 아틀란티스가 괴멸 하고 그 맞은편 나라가
홍수에 휩쓸렸기 때문에 바다는 진흙으로 말미암아 지나 다닐 수 없게 되었으며,
그때 이후로 서방의 나라들과의 인연은 끊어졌다는 말을 들었다(풀루타아크의 
솔론의 생애)"
  "이집트 포세이돈(아틀란티스의 시조)의 딸을...(오르헤우스)"
  "레프세우스는 이집트의 종교 의식에, 아메리카의 마야 의식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종교적 상징을 발견했다. (카알 리히알트 레프세우스)"
  이상의 사실들을 정리해 보자.
  최초의 이집트인은 마야였다.
  하이집트 최초의 식민자는 아틀란티스로부터 왔다. 상이집트 최초의 식민자는 
인도에서 왔다.
  두 식민지는 무우 대륙으로부터 인도나 마야쿠스(고대 마야 제국)를 거쳐 찾아
온 식민자들에 의해 커져 있었다. 그 무우 대륙의 국민이란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이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함몰했을 때, 아메리카도 대해일에 의해서 괴멸하여 교통은 
두절되고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일찌기 무우 제국의 식민지였다. 그리고 무우 대륙이 함몰한 후에
한 개의 제국이 되었다.

    오실리스와 이시스

  "이집트에서 특이한 것은 초기의 미개 시대라고 하는 것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역사가 까마득한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문명이 
거기에서 발달되어 왔어야 할 야만적인 시기라는 것이 없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이집트 최초의 주민들은 이미 매우 높은 문명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상 아주 이상스런 현상이지만 그들은 자기들
언어의 대부분과, 일찌기는 자신들 문명의 매체이자 전달 수단이었던 문장이라는
것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오즈본의 이 의견은 유감이지만 너무 상상에 치우쳐 면밀한 증거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인 디오도로스의 책을 보았다면 이런 오류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인은 그 전 역사를 통해서 언어를 문자로 표현하여 그것을 계속 지켜왔다. 
"죽은 자의 서"의 제64장은 이집트의 역사의 초기경 사이스의 식민지의 개조
토토에 의해 쓰여졌던 것이다.
  이집트인의 이른바 신관 문자---종교문자는 기원 전 수백 년 경에 이르러 
상징적인 알파벳으로 대체되었는데, "죽은 자의 책"속에는 그것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다.
  명계의 왕 오실리스---그것은 이집트의 신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오실리스가 도대체 어떤자였었느냐 하게 되면 이른바
이집트 학자라고 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백인 백출이다. 신화 속의 존재로
실재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또 단순한 상징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한편 실제 살았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어떤 이집트 
학자는 오실리스란 어딘가의 왕이었다고 말한다. 이집트인 자신은 오실리스가 전에
실재했다고 믿고 그 탄생의 장소라는 것도 이집트의 각지에 있다. 그러나 그들도
오실리스가 하이집트의 삼위 일좌의 신들의 최상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오실리스는 확실히 실재의 인물이었다. 그 내력에 관해서는 무우 대륙의 
전도단인 나아칼에 의해 남겨진 점토판에서 알 수가 있다. 비문은 이렇게 말한다.
  "오실리스는 2만 2천년 전(약), 아틀란티스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되자
아틀란티스를 떠나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어머니의 나라로 향했다. 그는 
나아칼의 대학에 들어가 수사가 되고 이윽고 전도사 "거룩한 형제"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아틀란티스로 돌아가 방송과 안일에 빠진 종교계를 숙정했다.
그리고 아틀란티스국 교단의 장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부드러운 말씨나
태도와 알아듣기 쉽게 설교하는 그의 가르침에 깊이 감복하여 연모한 나머지
마침내는 왕을 퇴위시키고 오실리스를 왕위에 앉히자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오실리스는 이를 거절했을 뿐아니라 그런 풍문을 퍼뜨리는 것을 단호하게 
금지시켰다."
  오실리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신으로 추앙되었고 그의 가르침은 마치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일컬어지듯이 그의 이름을 따서
"오실리스의 가르침"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나아칼의 비문에는 오실리스가 죽은 원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인은 거기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오실리스의 죽음은 비극적이었다. 오실리스는 그의 아우 세토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세토는 형 오실리스의 인망이 너무나도 높은데에 질투심을 불태워
음모를 꾸며 오실리스를 죽여 버렸다."
  이것은 후세 이집트의 신관이 만들어낸 이야기와 같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지위를 높게 보여 마음먹은 대로 민중을 조종하기 위해 민중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 주는 데에 전념했다. 호루스는 이상스런 동물의 머리를 가진 신으로 표현되어
악마라는 것이 창조되었다. 그 이전에는 악마니 어쩌니 하는 따위를 사람들이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 이전의 종교에서는 인간 속의 영혼, 즉 거룩한 힘과
육체적인 것과의 싸움이란 것이 문제로 되었다. 영혼의 힘은 물질적인 인간을 더욱
높은 존재로까지 높일 수가 있다. 육체적인 것은 그것과 싸워, 인간을 낮은 존재로
끌어 내리려고 한다. 거기에는 후세의 신관이나 승려가 그러 보여 준 추악한 
악귀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실리스, 고다마, 그리스도, 이 삼자의 가르침에는 매우 비슷한 말이 많이 
나타난다. 아주 똑같은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마저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이 위대한 3사람 가운데, 도대체 누가 최초에 그런한 말을 사용했는지, 그 연대로
보아도 오실리스임은 분명해질 것이다.
  다만 그러한 말들은 이 세 가지 종교 속에서 가끔 말하는 가운데 인류가 가진 
최초의 성서, 어머니의 나라 무우의 "거룩한 영감의 서"로부터 인용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집트인은 오실리스가 이집트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하이집트의
건설자 토토가 오실리스의 가르침을 아틀란티스로부터 가져 왔으며, 사이스에 
최초의 신전을 세웠다고 하는 사실은 "죽은 자의 책"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후세의 이집트인은 어째서 오실리스를 아멘과 바꿔 놓게 되었던 것일까.
  이시는 오실리스의 누이이자 또 아내로서 하이집트의 삼위일좌 신의 하나로 
세어진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실재의 한 여성이었던가, 아니면
단순한 상징적인 존재였던가.
  "세토에 의해 살해된 오실리스의 시체를 발견한 아내 이시스는 남편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가는데, 세토는 다시금 그 시체를 빼앗아 시체를 깎아 내어 나일강에
흘려 보냈다. 이시스는 이 살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어 모아 그 주운 장소마다
신전을 세우고 살조각은 아마포로 싸서 숨을 불어 넣어 부활시켰다. 이것이 이집트 
각지에 오실리스의 신전이 있는 것과 미이라를 만드는 유래이다."
  그러나 이시는 분명히 실재의 여성은 아니고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종교의
원초부터 있었던 한 가지 사고방식을 대표하고 있다. 이시는 이집트의 종교에서는
자연의 신이다. 자연은 창조우의 하나의 속성인 산출해 내는 힘을 상징한다. 이
속성은 여성의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이시스에세 많은 속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본래 만물을 생산하는
풍요의 신으로서 천지창조 때의 창조주의 명령 중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대표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또 한 가지, 이시스의 실재성이 의심스러운 것은 미이라의 모습으로 표현된
이시스라고 하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재해 있던 인물의 경우, 
그 신상은 종종 미이라와 같은 형태로 표현되었고, 더군다나 그 머리(두골)는
생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시스의 경우는 이와 같은 신상을
볼 수가 없다. 이시스가 오실리스의 아내라고 말함은 그 속성인 여성으로부터 
생각해낸 것이지,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랜 이집트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시스는 연대를 지나 그 옷은 바뀔지라도 결코 죽는 일은 없다."
  바꿔 말하면 이시스는 시대가 바뀌거나 민족이 달라지더라도 다른 이름으로
신앙된다고 하는 말일까.
  이집트인은 페르샤인에 의해서 패망되고 신관들은 학살당했다. 이집트의 신들은
스핑크스 앞에 모여 있다.
  "안녕, 어머니인 이집트여! 몇천 년 동안 우리가 살던 이집트여! 너의 흙으로
우리는 만들어졌다. 이제 또 그 흙으로 돌아가련다."
  스핑크스가 말한다.
  "너희들에게 이 괴이한 모습을 부여하여 신이라고 이름붙인 자는 누구지?"
  신들은 말한다.
  "신들은 말한다. 신관들은 우리들은 신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그들은
죽임을 당했다. 오오, 이집트여! 우리는 너의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관들과
더불어 멸망해야만 된다."
  이시스가 나타난다.
  "나를 보라! 나에게는 혼이 있다. 오오, 이집트여! 나는 너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나를 만든 것은 "거룩한 신의"이다. 나일에서는 나를 이시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넓은 세상 사람들은 나를 전능하신 신의 옷, 눈에 보이지 않는 옷
"자연"이라고 부른다. 나는 남을 것이다. 오오! 이집트여! 지나간 무한한 나날들,
그렇게 불리었던 것처럼 얼마 후 닥쳐올 무한한 나날들도, 사람들은 나를 여러
모양으로 부르리라. 나는 영원히 이 땅에 머무르리라."
  라이더 해거드("솔로몬의 동굴"의 저자)의 작품에 나타난 이 장면은 이 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라이더 해거드는 이시스의 이 대사를 무언가 옛 기록들로부터 인용했던 것일까.
아뭏든 그가 이집트에 대해 풍부한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이시스의 "거룩한 신의"라고 한 말이다.
달은 창조주의 여성으로서 속성을 나타내는 고대의 심볼이었다. 천지창조 때 신은
"거룩한 영감의 책"의 천지창조의 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과 부합된다.
  이시스는 달의 심볼이었다. 모든 종교의식에 이 여신은 달을 모방한 관을 머리
위에 이고 나타난다. 달은 창조주의 여성으로서 속성을 나타내는 고대의 
심볼이었다. 천지창조 때 신은 "지상에 생물이여 나타나라"고 명했다. 그때에
발동된 신의 생산력을 나타내는 속성인 것이다.
  멕시코 석판 No.150을 연상해 보자.
  이 석판의 상부에서 볼 수 있는 인면은 태양인데 창조주의 남성으로서 속성을 
나타낸 것이다. 검은 점을 가진 원이 양쪽에 있는 것은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부의 인면은 달인데 여성으로서 속성을 나타냈고, 이것도 점이 있는 원으로
강조되고 있다. 
  장방형의 테두리 속에 선이 몇 개나 있는 것은 숫자에 의미를 포함시킨 
종교문자이다.
  "창조주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을 두 가지의 속성---남성과
여성으로 분류하여 놓았다. 이 두 사람으로부터 세 번째 인간이 생겨났다. 세 번째
인간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생겨 나왔다."
  이와 마찬가지 사고방식은 고대 인도에서도 볼 수 있다. 페루의 잉카나 고대 
마야에서도 볼 수 있다.
  "달은 태양의 누이이며 아내이기도 하다."
  이라하여 달과 태양은 창조주의 두 가지 속성의 상징으로 된다. 이 사고방식은
이집트인은 물론이요, 멕시코 석판이 쓰여진 연대보다도 훨씬 옛날인 7만 년 
이전에 쓰여진 무우 대륙의 "거룩한 영감의 책"에서 근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원성이라는 것은 먼 옛날부터 배워 온 것이다.

    최고의 신관인 "호루스"

  하이집트 삼위일좌의 신 가운데 나머지는 호루스이다. 호루스는 오실리스와 그 
아내 이시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집트의 고문서는 호루스를 실재의 인물로 다루고 있는 것도 있다. 또 다른 
고문서에는 태양의 신 라아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나아칼의 비문에는
이시스나 호루스에 관해서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이 두 신은 이집트인이
만든 상징적인 존재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하이집트의 교단 장로는 "호루스"라고 일컬었었다. 마치 오늘날 카톨릭교단의
장로가 교황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호루스가 태양의 상징이 되고 
태양이 하나님의 상징이었다고 하면 호루스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상징이라고 하게
된다. 초기의 이집트에서는 제국이 되기 전에 교단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던 
시대가 있는 것이다. 제국이 되고 나서 호루스는 왕권의 보호신으로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이집트 학자들에 따르면 호루스는 굉장히 장수했다는 것이다. 
오실리스의 시대가 지금부터 2만 2천 년 전이라고 하면 그때 살았던 호루스는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 메네스왕의 시대에 아직도 정정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 연령이 자그마치 1만 7천살이라는 겨론이 나온다.
  힌두교에서는 번역의 잘못으로 라아마가 엉뚱하게도 장수자로 되어 있다. 무려
1만 살이나 된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에 나오는 무투셀라는 9백 69세였다고 하므로
앞의 두 사람에 비하면 젊은 나이라 하겠다.
  호루스는 상징적 존재이지 실재 인물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것을 단언할 
만한 근거도 없다. 어쩌면 제1대인 "호루스"가 오실리스의 아들이고, 오실리스가
죽은 후 아틀란티스 교단의 장로가 되었다고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메네스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호루스는 이집트의 교황이었다(헤로도토스의
"역사")".
  "이집트에서 왕(사게)의 치세는 1만 년 간이었다. 왕은 최고의 신관이었다.
(마네토우)".
  이집트의 신관이자 역사가인 마네토우가 쓴 것 가운데는 최고의 신곤, 교황으로서
적어도 여섯 명의 호루스가 보인다. 종교상의 의식 때, 이집트인들은 호루스를 
태양신 라아의 대리자로 삼았다. 이리하여 호루스는 태양의 상징으로 되었던
것이다.
  무우 제국에서는 교황은 "라 무우"의 칭호로 불리워졌으며 종교상의 행사 때에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이것에 "호루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즉 호루스는 몇 사람이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연령의
수수께끼는 풀리게 되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아마도 그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몇천 년이라는 세월동안 
호루스를 최고위에 추대하는 교단에 의해 치죄되어 왔음에 틀림없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하이집트의 마직막 교황의 뒤를 이어 메네스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말이
된다.
  메네스왕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합하여 제1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이 
나라의 종교에 두 개의 파벌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 상이집트에서는 태양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상징이 되는데 하이집트에서는 오실리스를 최고위로 삼는 삼위일좌의
신들을 지고한 것으로 숭배한다. 현재의 학자들이 수수께끼로 삼는 이집트인의
동방 숭배, 서방 숭배도 여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상이집트의 식민자들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인도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돌아
이집트에 왔다. 하이집트의 식민자들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동쪽으로 돌아서 
아메리카, 아틀란티스를 거쳐 이집트에 도착했다. 상이집트의 주민은 동방에는
우리의 영혼이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땅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이집트의 주민은 
"서방의 나라들"이야말로 성지라고 믿었다.
  이 두 종파의 싸움은 그후 약 2천 년 동안에나 걸쳐 심각하게 계속되었다. 
서로가 상대방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한다는 기세에서, 왕까지도 여기에 
휘말려들어 상이집트 편에 붙는 왕이 있는가 하면 하이집트 편을 응원하는 왕도
있었다. 이것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은 이집트의 역사 속에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신관들은 자기들의 교단에 속한 자 이외에는 그 종교상의 
교의나 비의를 절대로 털어놓지 않았다고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테네나
아틀란티스에 관한 비화를 들을 수가 있었던 것처럼, 타알레스, 피타고라스, 
헤로도토스, 유우모르호스, 플라톤, 오르헤우스, 기타 많은 그리이스의 철인들이
이집트를 방문하여 그 종교의 비밀에 관해 쓰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의 오케스트라

  이집트 최초의 신전은 토토에 의해 사이스에 건립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만 6천 년 전의 일이다. 그것은 이집트 역사의 여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인리히 슐리먼이 크레타 섬의 미케네의 유적에서 발견한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최초의 이집트인은 역사의 신 토토에 의해 들어온 아틀란티스인이었다.
그들은 나일강의 모래밭 위, 사이스에 정착하여 최초의 신전을 세웠다."
  이 비문의 발견은 당시엔 발표되지 않았었던 것인데 후에 슐리면의 손자인 
파울이 유언에 따라 이를 알고 사이스의 신전 발굴에 착수했었다. 그의 수기를
보자.
  "우리는 5개월에 걸쳐 이집트 사이스의 고신전의 유적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흥미있는 많은 고고학적 발견을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당시 유명한 
음악가의 묘실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제3왕조 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카타콤
(지하묘소)에서 커다른 석관과 함께 아주 드문 악기류가 담겨 있었다. 또 한 권의
파피러스 문서도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집트의 특수한 악보 종류가 아닌가하고 생각되었다."
  석관에는 신관 문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 악기류는 사이스
신전 소속 오케스트라의 것이며, 아메네헤트 1세의 대관식에 사용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악기류들 가운데는 바람이나 파도소리, 새소리 등, 온갖 자연의
음색을 발하는 것이 있었다. 현대 우리의 음악도 그 정도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핀란드의 대작곡가 J.시베리우스가 가까스로 자연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시도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의 작곡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일거리였던
모양이다. 화가 난 사자의 울음소리를 내는 거대한 목제의 트럼펫도 있고, 또
일찌기 들어본 적이 없는 정도로 아름다운 음색을 내는 플루우트도 있었다. 
그 음색의 매혹적인 점은 비교할 수가 없고 다만 한 번 부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만일 명수에 의해 불어진다고 하면 듣는 사람은
아마 전신이 짜릿해질 정도의 감흥을 느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오케스트라의 
악기는 거의 전부가 목제 혹은 자기로 만든 것이었다. 금속같은 것으로는 놋쇠와
같은 호온이 하나 있을 뿐이다. 하아프의 현도 현재로서는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의
섬유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가늘고 강해서 마치 은선을 연상케 했다. 또 화학 
전문가에 의해 머리털링라고 판단된 현도 있다. 바이올린의 최고음부의 현은
어쩌면 당시 미녀의 길다란 머리털을 뻗쳐 놓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장엄한 태양의 찬가를 연주하는데는 65개의 악기로 된 오케스트라와 80명의
합창단이 필요하였다. 이 악기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하얗게 바랜 촉류(해골바가지)였다. 이것은 그 공도에 특수한 세공이 되어
있어서 어떻게 보면 정체모를 괴물의 인후와도 같고, 단조롭고 기분나쁜, 길게
꼬리를 끄는 메아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악기의 음역은 매우 미묘해서
연주자 나름대로 음색도 달라지고, 그런 만큼 악기의 비밀을 잘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며 모든 악기들 가운데서도 독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촉루에 새겨져 있는 비문에 따르면 이 악기는 다른 악기와 같은 소리를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가 있다고 하므로 "죽은자의 인후"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발견은 이와 같은 먼 옛날에 이만한 음악이 있었다는 사실로 고고학적인 
의의도 중요하지만 현대의 작곡가, 연주가, 가수들에게 연주 스타일이나 표현
형식의 면에서 매우 큰 시사를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집트인은 나일강변 그들의 식민지에 아틀란티스 문화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의 갖가지 발굴을 통해 느꼈던 것은, 이집트는 그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문명도가 높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고장이 인류 문명의 발상지임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문명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아메리카, 
아틀란티스, 인도 등을 통해서 유입되어진 것이다.
  파울 슐리먼은 아틀란티스가 소멸한 후 이집트도 쇠진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확실히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집트에 있어 가장 커다란 타격은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의 소멸이었음에 틀림없다. 무우 대륙의 소멸 후 쇠진했던 것은
이집트만이 아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의 문화가 이 대륙의 함몰에 의해서 뿌리가
끊어져버린 나무들처럼 정체하기도 하고 쇠진해갔던 것이다.

      18. 살아 있는 무우의 후예

    황금의 얼굴이 말하는 비극

  어머니의 나라 무우 대륙에 쌓아 올린 인류 최초의 대문명은 대륙 자체가
태평양 밑으로 함몰해 버린 후에도 수많은 식민국으로 몰려 이루어져 그 여광을
지속했다. 그러나 꽃병에 꽂혀 있는 꽃이 언젠가 마르는 것처럼 뿌리가 끊긴 
문명이 영구히 그 생명을 유지할 수는 없다. 또 인간이 각 민족의 잡혼에 의해서
점차 그 원형을 잃어간 것처럼, 무우 대륙에서 발생된 문명도 후속 문명과 섞여서
그 순수성을 잃어 갔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 그 잔영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찾아내려고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것은 뜻밖의 곳에서 우리에게 호소해 온다. 
의외로 신변 가까이에서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어느 한 구석에서 그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멕시코의 오아하카 근처에서 알폰소 가소 박사가 몬테 아르반의 고대 묘지의
유적을 발견했던 것은 극히 최근(1931년)의 일이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밋보다도 오랜 것이라고 하는 소태카로의 피라밋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다.
  이 묘지에서는 호화로운 귀금속이나 보석류로 만들어진 목걸이, 귀걸이, 관,
그 밖의 장신구류가 나타났다. 이런 현란한 보물들 속에 두 개의 황금 마스크가
있었다. "죽음의 신의 마스크"라고 불리우는 것인데 이것이 무무 대류그이 소멸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도대체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옆 사진의 마스크에 새겨져 있는 심볼을 분해하여 해독해 보자.
  1. 세 개의 막대기는 무우를 상징하는 수인 3을 나타낸다.
  2. 눈은 아래로 힘없이 감겨져 있다.
  3. 잠자고 있는 (죽어 있는)눈.
  4. 코는 힘이 빠져 죄여져서 질식시켜져 있다.
  5. 무우의 알파벳 M을 나타내는 심볼. 그것이 입을 가리고 있다.
  6. 우주의 원동력은 아래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
  7. 말려드는 큰 물결.
  눈은 잠겨 이제 볼 수가 없다. 코는 막혀 있어 호흡을 할 수가 없다. 무우는 
이미 말할 수 없다.
  즉 이 마스크는 그것 자체가 무우 대륙의 붕괴와 함몰을 말해주는 것이다. 
윗쪽 사진의 마스크는 똑같은 의미를 더 수식이 많은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소티카로의 피라밋에 새겨진 심볼이 무우 대륙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그것이 사라져 간 무우 대륙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부근에서는 또 고대 신전의 흔적이 몇 개인가 
발견되었다.
  몬테 아르반의 황금 마스크는 그런 신전, 또는 피라밋에서 시행된 무우 대륙을 
위로하는 의식을 할 때에 신관들이 썼던 것이 아닐는지.

    수수께끼 민족인 일본인의 조상

  일본---이 나라 민족의 기원 만큼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나라도 없다.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몽고계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백인과 흑인이 상위할 만큼
일본인과 몽고인은 다르다. 그들은 섬나라라는 조건도 있어 무우 대륙의 민족의 
피를 꽤나 순수하게 존속해 나가고 있는 민족인 것이다.
  무우 대륙의 서방 식민선 중에 말레이 제도로 향했던 키체 마야의 일단이 있다.
그들은 말레이에 뿌리를 내렸는데 그중에서 무언가의 이유로 북방의 섬들로 향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좁지만 살기에 알맞은 육지를 발견하고 그곳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것이 곧 일본인의 조상이다.
  일본인의 신화를 보면 남방계 민족, 특히 말레이 제도에서 인도네시아에 걸쳐 
있는 부족들의 전설과 매우 유사한 것이 많다. 이 사실은 일본인 자신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일본인은 예로부터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데, 
벼농사의 기원은 남방에 있다. 그들의 조상이 말레이 제도에서 북방의 섬들로
건너갔던 것도 이 벼농사에 그 원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벼농사의 적지를 찾아서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저 섬에서 이 섬으로 옮겨 가는 가운데 일본을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일본인은 그 섬에 도착하였을 때부터 높은 문명---인류 최초의
대문명의 소유자였다. 이 문명의 잔영은 현재 살아 있는 일본인들 속에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인은 모든 면에서 현대적이며,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개방된 민족의 하나로 손꼽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문명이 이와 같이 발달한
것은 겨우 50년에서 60년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보다 앞서, 예를 들면
백 년 전을 돌이켜 보자. 거기에는 1만 5천 년 전부터의 무우 대륙 문명의 잔영을 
볼 수가 있다.
  일본의 고대 왕들은 스스로"해바퀴"를 깃발로 삼아 태양의 아들---무우 제국
식민지의 지배자인 것을 자인했다. "강한 항해자"인 마야족의 자손들은 이 깃발을
세우고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대양을 왕래했다. 현재 인본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광망이 있는 태양의 기"가 지난 날 태양의 제국 무우 왕조의 문장 방패로
사용했던 심볼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은 얼핏 보아도 분명하다.
  일본일들의 전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암굴 속에 "숨겨진 태양"의 
이야기인데 이것은 남방제도의 주민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전설과 공통되어
있음과 동시에 키체 마야의 동방 식민선에 속하는 중남아메리카의 전설과도 
이야기의 줄거리가 일치하고 있다. 그밖에 일본인의 종교관, 풍속 습관들 가운데
무우 대륙 문명과의 관련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런 것들도 그들 자신에 의해
점차로 잊혀져 가려 하고 있다.
  키체 마야족과 아이말라족에 의해 건설되고 키체 마야계의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던 잉카 제국의 언어가 일본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어의 48%가 기체 마야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름다운 모국어 신하리이즈

  세일론---그것은 인도 반도의 남단, 코모린 곶의 동쪽 해상에 있는 계란 모양의
아름다운 섬이다. "인도의 눈썹위의 진주"라는 등의 아름다운 이름이 있다. 고무,
코코넛 등이 생산되는데 특히 홍차는 특산물로 잘 알려져 있다. 섬 주위의 
해안지대와 북반부는 평야이지만 중앙부 남쪽으로는 2천m의 높은 산들로 이어지는
산악지대가 있으며, 그중에도 아담봉(2.243m)은 거룩한 산이라 하여 불교도의 
신앙적인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섬의 주민들은 "신하리이즈"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들은 언제쯤, 어디서 왔던
것일까? 수드 아누라다플라의 고사원에 있는"무운스토온"이라 불리우는 반원형의 
돌에는 이런 의미의 말이 상징으로 새겨져 있다.
  "이 섬의 주민들은 무우의 식민지(또는 식민 제국)로부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 그들의 조상은 어머니의 나라로부터 식민지로 왔던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동양의 이탈리아어라고 해도 좋겠다. 듣기 좋고 음악적이며 
그 언어의 대부분이 모음으로 시작되어 모음으로 끝난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필자는 수만 년 전, 아니 더 먼 옛날에 인류의 발상지 무우 대륙에서
쓰여지고 있던 가장 노오블한 언어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신하리이즈는 의심할 것도 없이 백인계이다. 그들은 타미르인이 아니다. 
타미르인은 인도 남부에 살고 있던 흑인종이다. 필자는 동양의 어떤 나라에서도,
또 말레이 제도나 남태평양의 섬들에서도 이와 같은 언어나 비슷한 언어를 듣지
못했다.
  그들이 최초의 수도를 아누라다플라에 세운 것은 기원 전 250년 내지 2백 년
경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겨우 수천 년 전에 세일론 섬에 온 것 치고 그들의
언어는 매우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연상케 해 준다. 그리고 또 신하리이즈가 
왔을 때, 이 섬이 무인도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타미르인은 좁은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 풍요한 섬을 왜 못본 체하고 있었던 것일까?
  고대 인도의 역사가인 바르미이키에 따르면 아누라다플라가 세워지기 전, 
세일론에는 매우 무용에 뛰어난 일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신하리이즈의
조상이 그들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멸망한 후에 신하리이즈가 찾아왔던 
것인지는 모두 궁금한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어쨌든 신하리이즈의 선조는 나가 마야, 혹은 나가 마야로부터 나누어진 
일족임에 틀림없다고 필자는 단언한다. 도시의 이름, 강의 이름 그 밖의 모든 
것에서 순수한 나가 마야어가 발견되는 것이다.
  섬의 북부에 그들은 수도 아누라다플라를 건설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재난이
닥쳐왔다. 인도 남부의 타미르인이 풍요한 목초로 눈을 돌려 방목을 위해 이 섬을
선택했던 것이다. 타미르인은 신하리이즈의 도시를 습격하여 미녀만 보면 다 
붙잡아 갔다. 이 습격이 거듭되었으므로 신하리이즈는 더욱 내륙으로 들어가 또
하나의 도시를 세웠다. 그런데 여기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타미르인은 이 도시를 
발견하자 또 습격해 와서 젊은 여자만 보면 사로잡아 갔다.
  그리하여 신하리이즈는 다시 남부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타미르인도 
여기까지는 따라 오지 않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다. 
깐데에라고 불리우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도시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세일론
남부의 산지를 장악했고, 그것은 1815년, 영국이 이 섬을 식민지로 삼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신하리이즈는 경건한 불교됴들이어서 본래의 교의를 중시하여 종파가 갈라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들의 신앙심을 보여주는 유적은 많은데 특히 깐데에에는
지금도 불교의 중심지가 되어 있으며 간소하지만 유니크한 사원도 있다.

    땅의 맨 끝에 있는 유적

  "샌디발의 남쪽 약 6백 50km, 동아프리카 해안의 키르와라는 도시 가까이에 
파도에 침식된 절벽이 있는데요. 이 단애 위에 페르샤인의 묘지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묘비를 세운 날짜를 보면 7백 년 전의 옛날 것이예요."
  어떤 여행자에게서 필자는 이런 얘기를 들었다.
  "그 묘지 아래 기와조각들이 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쩐지 옛
도시의 유적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또 하나의 그런 층이 있어서 이것은
더 오래 전 도시의 유적 같았습니다만, 또 그 아래에, 이것은 이제 얼마나 오래 
됐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먼 옛날의 폐허가 있었습니다. 이 맨 아래의 
유적층으로부터 최근에 토기 몇 개가 발굴되었답니다. 광택이 나는 토기로 지금도 
그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기였습니다."
  이 키르와의 도시라고 함은 어쩌면 키르와키빈제를 말하는 듯한데, 거기라면 
지도를 보면 샌디발에서 꼭 4백km지점이지 6백 50km는 아니다. 그건 어쨌든 필자는
이 이야기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
  동아프리카의 역사는 비밀의 베일 속에 쌓여 있다. 그러나 수렵가나 탐험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실은 풍부한 고고학적 자료가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채 잠자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필자는 인도에 체재 중, 나가 마야의 식민단이 동아프리카 방면으로 향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부는 홍해 연안에 정착했는데 더 남하해간 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 발자취는 완전한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러나 
전세계에 걸친 무우 대륙식민단의 활동상을 보고 있노라면 인도에서 아프리카 
해안에 도달한 식민자들이 오직 북쪽으로만 퍼져 나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남하해 갔던 자도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한 여행가의
이야기란 사실은 전에도 두세 차례 들은 일이 있다. 다만 이 이야기로써는 유적의
층과 층 사이의 상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흙의 종류라든가, 돌의 크기, 
성질 등은 이러한 폐도의 연대, 파괴의 원인 등을 찾는데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고대 페니키아인이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발을 뻗쳐서 교역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기록을 본 일이 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동아프리카에는 꽤 오래
전부터 상당한 인구가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는 하나 넓은 
지구상에서도 한적한 이 부분에 3층에 걸친 고대 도시의 유적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기이한 일임에 틀림없다.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이런 3층에 걸친 문명의 연대는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다른 고장 유적과
일치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와 같이 동떨어진 지역에서 연대를 같이 하는 폐도가 똑같이
겹쳐져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찌기 때를 같이 하여 지구상 전역에 걸쳐서 인류의 대부분을 괴멸시키는 
대재난이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는 사실일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한 여행자의 이야기에 기인하고 있으므로 분명하게
단언할 수는 없다.

    문명에로 귀환한 마오리족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라고 불리우는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필자의 사견에 따르면 뉴질랜드는 무우의
식민선으로부터 떨어진 한 개의 소식민지였던 것 같다.
  뉴질랜드는 무우 대륙의 남서단 쪽으로 몇천 km의 남방 해상에 있다. 그러나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대양을 항해했던 무우 대륙의 식민자인 마야에게
있어서 이 거리는 결코 건너갈 수 없을 정도로 먼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건너 갔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의 가장 용감하고 야심에 찬
일단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숫자가 적었다는 것은 분업으로 일을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도구를 만든다거나, 기술을 연마한다거나, 학문을 하거나 하기 
전에 우선 자기 자신이 먹고 살 것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 전언이 땅을 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당연히 필요한 도구나 물자를 어머니의 나라로부터 보급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여타의 식민자들과 비슷했었지만, 그러나 
그 모국은 이윽고 태평양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살아 남은 그들에게는 다른 
식민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뉴질랜드가
커다란 섬으로 천연자원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었다는 것은, 화산암의 파편 위에
남겨진 무우 대륙의 생존자---태평양 제도의 원주민들보다 얼마쯤 나았었는지도 
모른다.
  마오리족은 보아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인계이며 그 점에서는 
폴리네시아인과 가까운 혈연이다. 오브라이언은 폴리네시아의 고어가 오늘날의 
마오리 언어라고 말하고 다시 논리를 정립하여 그들이 폴리네시아로부터 
뉴질랜드로, 다시금 아시아로부터 폴리네시아로 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양쪽 다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오리족이 뉴질랜드로 온 것이 무우가 함몰되기 
전이라는 것에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마오리족의 전설은 먼 과거에는 태평양에 현재와 같은 섬들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마오리족은 분명히 무우 대륙으로부터 유래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언어, 종교, ㅈㄴ설, 종교적 심볼이나 토템풀(역주:인디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수호신을 새긴 기둥--사람이나 짐승의 머리를 새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폴리네시아의 섬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마오리족은 무우 대륙으로부터 직접 뉴질랜드로 온 자들인 것이다.
  캡틴 쿠크의 항해일지에 의하면 그는 1770년 1월, 세계 일주의 항해 도중, 
뉴질랜드에 상륙하고 있다. "그들(마오리)은 처음부터 여기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먼 옛날에 헤아우이스로부터 뉴질랜드로 왔다는 구비를 가지고 있다."
  이 "헤아우이스"라는 곳이 어디인지는 필자도 모른다. 다만 남태평양 제도나
말레이 제도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 무우 대륙상의 한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쿠크의 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지극히 높은 신과 그 아래에 자리한 신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속성을 나타내는 몇 가지 상징이 쿠크의 눈에 그와 같이
비쳤는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최근에 요리되어 먹히운 인골이 몇 개 흩어져 있다. 그들은 인육을
맛있는 식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적 이외의 자는 절대로 먹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모국을 잃고 고도에 남겨진 자의 비참함은 모두가 비슷한 것이었다. 영광스럽던
무우 제국의 백인종도 이 나쁜 조건 아래서는 옛날의 그 면모를 유지해 갈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것의 보급 이외에는 물건을 만드는데 익숙치 못했던
그들이었다. 믿었던 모국은 갑자기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들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엉성한 오두막집과 대지 뿐이었다. 몇천 년, 또 몇천 년이 지나는 
가운데 그들의 조상이 가지고 있던 문명은 모두 사라져 갔으며 미개의 원시 민족이
거기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던 대제국 백성의 피는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영국인이 식민하게 되어 그들에게 새로운 교육을 실시하자
놀라울 정도의 진보를 보였다. 바아흐로 그들은 다시금 문명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마오리족은 얼마 전까지도 야만인 같은 인상이 짙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현재 높은 교육을 받아 뉴질랜드의 지식인, 정부 기관의 요인 등이 되어 있다. 
영국인은 현재 자신들의 교육이 마오리족에게 미친 성과에 만족해 하며 또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마오리족은 영국인이 말하듯이 "개화"되어 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구한 옛날, 어머니의 나라를 잃어버린 이래 어둠 속에 갇혀 살아
온 그들의 두뇌가 다시금 활동을 재개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긴 긴 
수면에서 잠을 깬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문명이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서구인이 이 섬에 나타나기
몇천 년 전부터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미개 상태로부터 몇만 년, 몇십
만 년이 지나는 가운데 발달해 온 것이라는 설은 현대과학의 착오이다.
  미개인은 그대로 방치해 두면 언제까지 가도 개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원시 상태로 떨어져 갈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조건 때문에 문명인으로부터
미개의 상태로 떨어진 것이므로 그 조건이 계속되는 한 진보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미개 상태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새로운
문명과 접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업삳.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저 오로지 
몰락해 갈 따름인 것이다.

      19. 사막에 묻힌 위글 대제국

    유사 이전의 대홍수

  1896년의 일이다. 고비사막의 중앙부로부터 바이칼호로 흘러 들어 가는 오르혼강
유역, 항가이 산맥의 기슭 부분에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강이라 해도 항상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회색의 점토성 먼지를
뒤집어쓴 건조한 초원이 끝없이 뻗쳐 있을 뿐, 외로이 서 있는 천막도, 
그곳으로부터 드나드는 개미처럼 작은 사람들의 그림자도 흙먼지가 묻어서 사막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보였다.
  몇 개월인가 지나고 이윽고 천막도, 사람 그림자도 사막으로부터 사라지고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고고학자 P.K. 코즈로프 교수가 칼라코오타 유적 발굴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이다. 어떤 고고학자가 티베트에서 얻은 정보를
근거로 탐험대를 조직하여 고비사막 중앙부의 유적 발굴에 임했다. 지하 15.6m쯤
파 내려가자 자갈, 조약돌, 모래의 층이 나왔고, 그 밑에 아주 오랜 문명의 
유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금이 
동이나 일단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말을 들은 코즈로프 교수는 재빨리 발굴단을 조직하여 고비사막으로 향했다.
교수는 상당히 귀중한 학술적인 발견을 할 수가 있었는데 몽고 정부에 의해서
발굴물의 국외 반출은 금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발굴물은 사진으로 찍혀서 그
몇 가지는 이미 앞에서 소개되고 있다.
  바이칼호 남방으로부터 레나강 하구에 이르는 지질학적 조사를 목적으로 한
탐험대에 필자가 가담했던 것은 1880년대의 일이다. 탐사를 계속해 나가자 의외의
사실이 밝혀져 갔다. 아시아 대륙의 이 부분에서는 빙하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수천 년 전 매우 규모가 큰 홍수가 이 지역을 휩쓸었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동경 백도 선으로부터 동쪽, 즉 바이칼호가
있는 부분을 경계로 하여 시베리아의 동부 전역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레나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남에서 북으로, 무서운 대홍수가 씻겨 갔다는 사실이 
분명했었다. 레나강의 어구에는 라코프 섬이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오랜 짐승들
뼈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섬이다. 그 짐승의 뼈들은 먼 옛날에 몽고나 
시베리아의 평원, 숲으로부터 흘러내려 온 것이다. 그것이 빙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짐승뼈들이 심하게 부셔져 있지 않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북아메리카 동부의 빙식 작용이 있었던 지역에서는 모든 것이 가루처럼
분쇄되어 그와 같은 섬이 생겨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필자는 티베트의 승원에 비장되어 있던 나아칼의 비문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아칼은 7만 년 전, 어머니 나라의 
"거룩한 영감의 책"의 사본을 위글의 수도로 가져왔었다."
  이리하여 이전에 아시아 대륙에서 패권을 잡고 있던 "알려지지 않은 대제국"의
모습이 어슴푸레하게 밝은 저편으로부터 떠올라 왔던 것이다. 위글---그것은
물론 8세기 경 몽고르 고원에서 만들어진 저 유목민족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몇만 년 전인 옛날에 중앙아시아 전역으로부터 유럽에 걸쳐 광대한 
판도를 자랑하던 하나의 위글인 것이다.

    물이 풍부한 고비 평야

  고대 위글제국은 태양의 제국 무우의 식미나국 중, 최대의 식민제국이었다.
무우 제국을 제외하고 이만큼 큰 제국은 지구의 역사상 일찌기 볼 수 없다.
  위글 제국은 동을 태평양으로 한정하고 서는 현재의 모스크바 부근까지 뻗쳤으며
그 밖의 대서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유럽 중앙부의 각지에 띄엄띄엄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북쪽은 아마 북극해, 그리고 남쪽은 코오티, 차이나, 버어마, 인도, 
페르샤의 일부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위글의 역사는 아아리아 민족의 역사라고 해도 좋다. 아아리아 인중이라 
불리우는 자는 모두 위글족의 자손인 것이다. 처음 위글 제국은 중앙 유럽의
중앙부에 차츰차츰 식민지를 만들었다. 대홍수와 산의 융기가 있고, 지상의 생물은
거의가 전부 소멸했다. 그때, 가까스로 살아 남은 위글족의 후예는 다시금 유럽에
뿌리를 내렸다.
  이 최초의 식민이 언제쯤 실시되었던가, 그것은 위글 제국의, 나아가서는 무우
대륙의 기원이 분명하지 않는 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곳에는 무한하다고도 
생각되는 시간의 흐름이 있다. 제 2기의 유럽 식민은 당연히 홍적세 이후라는 셈이
된다. 슬라브, 튜우튼,케르트, 아이리쉬, 부리톤, 바스크 등의 제민족은 이 
홍적세에 유럽 대륙에 식민한 위글인의 자손들인 것이다.
  전설적인 역사에 따르면 위글족은 현재 황해 연안의 언딘가로부터 최초에
아시아에 발을 들여 놓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내륙으로 나아갔다. 물이 풍부한 평야(고비)를 목표로 최초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그후 그들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카스피해 연안으로, 다시 중앙 유럽으로부터 
대서양 연안까지 진출해 갔다.
  우리가 모르는 아득한 옛날, 광대한 아시아 대륙에 큰 도로를 건설하고 장려한
대도시를 몇 개나 세운 위글족이란 어떤 민족이었을까? 기원 전 5백 년 경 중국의
옛 기록들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위글의 백성은 밝은 머리 색깔에 파란 눈을 하고 있었다."
  "위글의 백성은 우유빛 피부를 하고 있고 눈과 밝은 머리털을 가진 자가 눈에
띠었고, 남부에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던 대문명도 무서운 대홍수에 휘말렸으며, 혹은 고비 
사막의 모래 아래 묻혀 버렸던 것이다. 어느 승원의 옛기록은 말한다.
  "위글의 수도는 그 주민들 모두와 함께 홍수에 의해 멸망했다. 제국의 동부는
이때 남김없이 모조리 괴멸했다."
  카라코오타 유적의 상층에는 자갈이나 조약돌, 모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것은
온세계의 지질학자들에 의해 인정된 바와 같이 홍수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홍수는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즉 최후의 지각 변동에 따라 
일어난 대홍수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이 대홍수가 일어났던 시기는 북반구의 빙하기와 때를 
같이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시베리아의 라코프 섬으 수골군에는
얼음덩어리에 의해 파괴된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또 옛 기록도 위글 제국의 
동반부가 홍수에 의해서 괴멸한 때, 서부 및 남서부는 무사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기온의 저하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빙하 현상에서 이와 같은
일은 도저히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중앙아시아를 종횡으로 가로지른 산맥은 특히 위글 제국의 중심부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지역에 많이 모여 있다. 대홍수가 있은 후, 얼마쯤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
산이 융기했던가, 그것을 말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산이 솟아 올라왔을 때, 대지는
문자 그대로 명동하여 지진에 의해서 부서지고 암석은 땅 밑으로부터 튀어나와 
분하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의 흐름은 지표의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렸을 것이다.
  대홍수 후에 다시 몰아 닥친 이 대재난을 피해 나올 수 있었던 자가 도대체
몇 사람이나 있었던 것일까. 그 극소수의 생존자들은 융기한 산들이 가로막혀
제각기 고립된 생활을 보내게 된다. 이윽고 그 인구가 증가하여 산중의 생활에
견딜 수가 없어 평야지대로 이동을 개시한다. 그것이 인도 아아리아인이며, 
코카사스인이며, 페르샤나 유럽 제민족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악사는 영원히 그 그림자를 되찾을 수가 없었다. 그 옛날의 
옥토에는 종횡으로 산맥이 솟아 올라와 수맥을 끊고 또 방향을 바꾸기고 했다.
암반은 깨지고 지표로부터 물을 빨아 들여 땅밑의 강이 되었다. 물은 거의
말라붙어 지표면은 건조해지고 현재와 같은 황량한 사막으로 변했다. 그러나
현재에도 그곳의 지리에 밝은 카라반들은 지표를 수m 파 내려가서 물을 얻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일찌기 펄펄 넘쳐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위글의 옥토를 적셔 
주고 있던 강이나 운하의 남은 흔적인 것이다.
  인도의 고전 "마누서"에는 이런 기록을 볼 수가 있다.
  "위글은 카스피해의 북쪽연안 및 동쪽 연안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것은 아마 홍적세의 시대에 실시된 위글 제 2의 유럽 식민으로서, 이 식민에
관해서는 맥스 뮐러도 언급하고 있다. 이른바 동유럽의 초기 식민이다.
  "최초의 코카사스인은 소집단으로 중앙아시아의 산지로부터 나타났다."
  맥스 뮐러는 다시금 그들이 코카사스 평야에 나타난 것은 홍적세에 접어든
다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산이 융기하고 난 후의 일인 것이다. 세계의 다른
고장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산의 융기는 과거 방대한 시간의 퇴적에 한계를
지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현재도 중앙아시아의 제민족들 
중에는 산이 융기한 전과 후를 자신들의 민족 역사의 분수령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많다.

    나아칼 라이브러리(도서관)

  티베트---그것은 현재에도 선사 시대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숨겨져 있는 
보고이다. 동쪽은 중국, 서쪽으로는 캐시미르와 톨키스탄에 접하고, 북쪽은 몽고,
남에는 인도를 바라보는 이 산악국은 일찌기 위글 대제국의 일부였었다. 물론
그 무렵은 산 하나없는 비옥한 평야였는데 이제는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대산악지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동서로 길게 뻗은 티베트의 큰 산덩어리, 그 남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이 있고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이 만년설을 이루고 높이 솟아 있다.
  이 산악국 티베트의 가장 인적이 두문 산간 지대, 눈이 아찔해지는 단애의
위나 절벽 아래 매달려 있는 것처럼 승원이 붙어 있다. 바위를 뚫고 돌로 쌓아 
올린 그 승원들은 이른바 라마승들의 수업도장으로서 라마사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외계와 단절된 이러한 승원의 계율은 엄격한 것으로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며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부근에 살고 있는 극소수의 주민들 뿐이다. 
불교의 한 종파인 라마교를 신봉하는 이들 고승원에서 맑은 수도를 하고 있는
고승이나 노승들 중에는 스스로 나아칼의 후예라고 칭하는 자가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약 3천 년 전에 바라몬 교도들에 의해서 인도를 쫓겨난
나가계 학자들의 후예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그 절에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인류
최초의 종교, 인류 최초의 과학이 전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티베트에 수백 개의 사원이 있는 중에서도 그러한 사원은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된다. 그중에서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은
겨우 3개이다.
  파울 슐리먼의 말에 따르면 티베트의 라사에 있는 고사원에는 무우 대륙의 
붕괴에 관해 말한 고문서가 있다. 그 옛 기록은 오랜 비문판으로부터의 번역인데
파리어와 티베트의 혼합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그 원전인 비쿤판이 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가 않다. 그것은 아마 많은 다른 점토판과 함께 승원의 지하실에서
먼지와 곰팡이가 끼인채로 굴러 다니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동서로 흘러내려, 이윽고 간디스강과 합하여 벵갈만으로 
쏟아지는 부라마프토라강, 그 상류지대의 깊은 산속에는 몇 개의 사원이나 승원이
있다. 그 승원의 하나로 완전한 나아칼 라이브러리(도서관)ㅇ라는 것이, 즉 몇천
개의 나아칼 점토판의 콜렉션이 비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 나아칼 라이브러리는 원래가 위글의 수도에 있었던 것인데 이들 점토판에
얽힌 전설인지, 역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필자는 은사인 리시(고승)에게 이 점토판에 관해 들려주고 싶은게 없는가 하고 
질문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그가 아직 어렸을 시절, 그 승원을 찾았을 때, 나아칼의 점토판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대홍수가 아시아의 동부와 북동부를 엄습하였을 때, 위글의 수도는 파괴되고 
주민 모두가 익사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나라로부터 나아칼에 의해서 들여왔던
많은 점토판도 물 속으로 잠겨 버렸다. 그리고 나서 꽤 오랜 후의 일이다. 제국의
서쪽에서 홍수의 재난을 면한 나아칼이 수도의 폐허로 가서 ㅈㄹㄱ탕 속에서 
점토판을 파내 서방의 사원으로 ㅇ겼다. 그런데 얼마 후 산이 융기하고 그 
대이변으로 서방의 사원들도 괴멸했다. 점토판은 다시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그 대재액 속에서도 살아 남은 나아칼의
자손들이 사원의 유적을 찾아 다시 점토판을 파내어 지금의 승원에 안치했던
것이다."
  이 승원과 점토판의 이야기가 전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동양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꽤 잘 알려져 있어 지금까지 세 명의 영국인과 두 명의
러시아인이 이 승원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필자는 고승에게 물었다.
  "그럼, 그 점토판 라이브러리라고 하는 것은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것입니까?"
  노승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지. 우리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네. 우리의 성도 아요티아가 적의 침략을 만났었지. 온 시내가 다 불탔을 때,
나아칼의 점토판은 비밀 토굴 창고속에 숨겨져 있어 무사했었다는 얘길세. 만이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많은 점토판은 지금도 고스란히 그 사원의 폐허 아래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잠자고 있을 텐데..."
  그 아요티아라는 성도의 유적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필자가 그에 관해
알고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은 특히
지금까지 북부 인도, 티베트, 캐시미르에 관해 구체적인 지명이나 고유명사를 
피해온 것과 관계가 있다고만 말해 둔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동서로 넓어진 판도

  중국이라고 하면 동양의 노대국 등으로 형용되는데, 그 문명은 그다지 오랜 
것은 아니다. 알고 있는 역사로는 겨우 5천 년 밖에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문명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 부조에게서 물려받은
것인 것이다.
  중국인은 일반적으로 몽고계라고 생각하기가 일쑤인데 몽고인의 피는 섞여 
있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백색계의 아아리아인이야말로 그들의 조상이었다.
위글제국 시대, 그 남방에 인접한 황색인종 몽고와는 피가 섞이게 되어 그들
혼혈아인 자손이 최초의 차이나 제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옛 기록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위글인은 황색의 미개인중 최량의 자를 선택해 결혼했다."
  이것은 분명히 원전으로부터의 오역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 이 지상에는
미개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노랗고 못난 종족"
이었음에 틀림없다. 사실 전설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황색의 몽고족은 위글족과 비교하면 꽤 뒤떨어져 있었다 그 문명도 위글족보다
낮은 것이었다."
  당연히 혼혈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수준이 높은 교육을 시키고자 했다.
위글 제국의 교육 시설은 그런 혼혈아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높았다. 위글의
대문명에 혜택을 받은 그들의 자손이 얼마나 차이후 제국을 건설한다. 따라서 중국
문명에는 위글 대제국 문명의 잔영이 농도짙게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도교의 
묘등에서 그런 사실을 얘기해 주는 옛 문서류가 많이 눈에 띠는데 다음과 같은
얘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차이나인은 원래부터 이 땅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먼 나라로부터 해가
떠오르는 쪽을 향해 찾아왔던 것이다."
  몽고 지방에서 보아 중국은 해뜨는 쪽, 동방에 해당한다. 필자는 중국의 선사를
말해주는 전설, 전승들을 가능한 한 다 모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것은
많지 않았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이라고 하는 "시경"만 하더라도 기원
전 7백 년 전후의 것이다.
  E.H.파아커는 그의 저서"차이나"속에서 기원 전 2850년부터 255년에 이르는
왕조와 군주의 수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 5왕조와 90명의 군주들 중에 분명히
실재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기원 전 827년부터 255년에 이르는 25명 뿐이고 그
나머지는 불확실한 신화, 전설에서 유추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원 전 2백 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에 관해 파아커는 아주 면밀하게
그 발자취를 더듬어, 많은 몽고계의 부족이나 국가의 흥망을 그리고 있다.
파아커는 그 확실한 역사의 근거를 모두 문자에 의해 기록된 기록에만 두고 있는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일본에 관해서는 매우 그릇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다른 기술에 있어서도 커다란 의문을 남기는 것이 되며 또 고비사막이나 
그 밖에 아시아의 선사를 말해주는 유적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위글 대제국의 소멸 후, 아마도 7천 년이나 8천 년이 지나고 나서 많은 소국가가
동아시아에 나타났다. 이들 제국가들 전부가 몽고계였다.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징기스칸의 출현에 의해서 몽고의 제국가, 제부족은 통일되어 대몽고제국이
건설되었다. 이 제국 5대째의 황제 쿠빌라이는 젊어서 중국으로 가 그 사정을 
알아냈고 후에는 남종을 멸하여 중국 전토를 그 지배하에 두어 원왕조라 일컬어 
몽고족의 대정복 국가를 완성한다. 그러나 일본 원정은 마침내 실패했다. 
이 쿠빌라이의 재위 연대는 1260년대부터 1290년대에 걸쳐 있다.
  중국 최대의 철학자인 공자는 중국의 역사가 분명하게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고부터 약 3백 년, 기원 전 551년부터 기원 전 480년에 재세하고 있었다. 
이 현인이 자국의 선사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까닭은 없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설한 진나라 시황제는 기원 전 214년, 정치를 
비판하는 학자들을 생매장하고 정책에 따르지 않는 책들을 다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때 불타버린 유교 경전들 가운데는 공ㅈ, 맹자가 쓴
것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방대한 양에 달하는 이 금단의 서적들 속에는 
중국의 선사와 관계가 있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남몰래 사원 깊숙이 비장되어 분서의 화를 면한 것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런 책들은 지금도 도교의 묘 등에 보존되어 있었을 터인데오 아마 문외
불출의 계율은 엄격하여 특히 외국인들의 눈에 띨 기회란 절대로 없는 것 같다.
  위글 제국의 동쪽에는 이와 같이 우이글인과 몽고인의 혼혈 민족에 의해서 
중국이 이룩되었다. 그럼 서쪽은 어찌되어 있었던 것일까?
  제국의 서쪽은 동쪽처럼 바다가 없었기 때문에 그 세력도 넉넉히 펼쳐져 나갔다. 
위글의 식민단은 아시아의 중앙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진출했다. 발칸 반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가 있다. 또한 대서양 연안으로
나온 그들은 아틀란티스를 거쳐 아일래ㄴ에 도달하여 이윽고 여기에서 발을 
멈추었다. 북방은 북극해 연안, 남쪽은 인도의 나가 제국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불확실한 말을 하는 것은 산이 융기되기 전과 현재로서는 
지형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상상되어 정확한 판도는 파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도에도, 위문의 부분에는 줄을 쳐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동토지대의 밑으로부터 고대 위글의 유적 같은 것이 발견된 일이 있다.
유럽의 식민만 하더라도 선을 이루어 뻗어나갔든지, 차츰차츰 뿔뿔이 흩어져
버린 식민지였었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어쨌든 고대 위글 제국과 아틀란티스 제국은 원래부터 그 영토의 넓음에 
있어서는 모국 무우를 능가할 만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대제국도 태양의
제국 무우의 종주권 아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위글 제국은 많은 소왕국, 또는 주와 같은 것으로 성립되어
있어 제각각 자치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 자치제의 지배자를 통솔하는 대통령과 
같은 것이 잉ㅆ었고, 그 위에 무우 제국의 황제가 있었다. 무우의 종주권을 
제외하면 어쩌면 오늘날 아메리카 합중국 체제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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