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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나 린지 붉은 아침의 노래

by Casey,Riley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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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아침의 노래
조안나 린지
  -1-
 1892년, 텍사스
  네가 아무리 목장의 공동 소유자라 해도 그곳을 직접 경영할 수는 없어! 
  그런 처사는 부당해요! 타일러 오빠가 여기 있다면 아버지는 얼씨구나 좋
다 하면서 금방 목장을 맡기셨을 거예요. 
  타일러는 다 자란 성인 남자야, 하지만 넌 이제 겨우 열일 곱 살이잖니, 케
이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오빠가 다 
자랐다면, 남편과 자식이 셋까지 딸린 여자들이 수두룩한 내 나이는요? 그게 
아니라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진심이 정말 그렇다면 죽는 날
까지 아버지와 얘기하지 않겠어요.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진심이 아니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코트니 스트래튼은 남편과 외동딸이 서로 노려보는 꼴을 보다 
못해 그들의 관심을 끌 생각으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허
사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언쟁이 열띤 반박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지경으로 접어든 지금, 그런 은근한 중재가 먹혀들리 없었다. 코트니는 두 
사람이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물론 이런 언쟁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과열된 적도 없었다. 
작년에 플레처 스트래튼이 죽은 뒤로 바엠 목장의 운명은 의문에 붙여졌다. 
그 목장의 후계자는 챈도스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들 챈도스를 너무 
잘 아는 플레처가 아들이 상속을 거부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 목장을 3등분
하여 세 명의 손자손녀에게 나눠주라는 조항을 유언장에 덧붙이는 바람에 
오늘과 같은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챈도스는 홀로 자수성가했기 때문에 그 목장을 원치 않았다. 원래 자립심이 
강한데다 아버지에게 뭔가 보여주겠다는 오기까지 가세한 탓에, 혼자 힘으로 
수만 편에 이르는 땅과 수천 마리에 이르는 가축뿐 아니라 아버지 집보다 
두 배나 큰 저택까지 장만했다. 
 바엠과 KC를 합한 목장은 텍사스에서 가장 넓은데다 두 목장의 소유자가 
부자지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두 곳을 하나의 목장으로 생
각했다. 그렇게 여기지 않은 사람은 당사자들인 그 부자뿐이었고, 이제 아버
지가 돌아가신 마당에 챈도스 혼자 독불장군처럼 두 목장을 개별적으로 간
주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한 딸자식에게 목장 경영을 맡기겠다는 뜻은 아니
었다. 그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 점에서는 케이시 또한 뒤지지 않
았다. 케이시는 목장 경영에 관한 문제를 놓고 끈질기게 아버지를 물고 늘어
졌다. 
 그야말로 그 아비에 그 딸이었다. 모친인 코트니를 닮은 두 아들, 열 여덟 
살의 타일러와 열네 살의 딜런과 달리 케이시는 챈도스의 성격과 외모를 쏙 
빼어 닮았다. 머리카락은 아버지처럼 석탄과 같이 검었고, 아버지처럼 키가 
커서 약 177센티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가장 키가 큰 아기씨로 꼽
혔다. 
 케이시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이라고는 그 아름다운 눈이 전부였
다. 케이시의 눈동자는 은은하게 빛나는 호박석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같은 
또래의 아가씨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결혼했을 정도로 모든 게 빠르게 진행
되는 서부의 기준에 비춰볼 때, 케이시는 여러모로 늦었다.
 케이시는 근육만 없다 뿐이지 아버지처럼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데다 강단
이 있었다. 뭐, 생김새가 억세고 우락부락하다는 뜻은 아니다. 찬찬히 뜯어보
면 꽤 예쁜 축에 속했다. 단, 다른 사람들이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만큼 가
만히 있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도무지 한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항상 서성거리지 않으면 손짓을 하며 끊임없이 말을 해대거나 성큼
성큼 걸어다녔다.
 하지만 정지된 순간의 모습을 포착한 이라면, 단박에 눈이 크고 맑으며, 햇
볕에 그을린 피부는 상처 하나 없는데다, 콧날이 거만할 만큼 쭉뻗었다는 사
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사실 눈썹은 지나치리만큼 짙고 턱은 고집스러웠지만 
귀족적인 광대뼈가 그런 단점을 잘 가려줬다. 하지만 감정을 감쪽같이 숨기
는 능력처럼 다른 사람을 낭패스럽게 하는 점이 또 있을까. 아버지, 챈도스
처럼 말이다. 케이시가 그런 능력을 발휘할 때면, 사람들은 아예 그녀의 기
분이나 생각을 어림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그 유별난 능력이 발휘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시는 챈
도스의 또 다른 능력을 물려받았으니, 그건 바로 전략과 전술을 짜내는 기지
였다. 한 가지 술책이 잘 먹혀들지 않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방법을 고
안해냈다. 고함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이시는 재빨리 
차분하고 조리 정연하게 맞섰다.
  하지만 바엠 목장에는 책임자가 필요해요. 
  소투스가 그 일을 잘 해나가고 있어. 
  소투스는 벌써 예순일곱이나 된 노인이에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무렵, 
그분은 이미 은퇴해 작은 오두막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고 아버지가 적임
자를 물색할 때까지만 목장을 책임지기로 했잖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점찍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윤의 반을 주지 않는 한, 목장을 떠맡지 않겠노라고 거
절했어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직접 그곳을 경영하실 생각도 없으시잖아요.  
  이곳에도 신경 쓸 게 한들이 아닌데 그곳까지 책임질 시간이 없...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도 그 점을 잘 알고 계시구요. 바
엠 목장의 3분의 1이 몫인 만큼, 재가 경영해도 권리상 하등의 문제가 없어
요.  
  케이시, 너는 아직 열 여덟 살도 되지 않았어. 
  도대체 열여덟 살이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그리고 몇 달 내로 그 
나이가 될 테니...  
  그 나이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야. 그런데 말을 타고 바엠 
목장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니? 
  결혼! 흥, 나는 타일러 오빠가 대학 졸업하고 돌아올 때까지, 그러니까 앞
으로 2년 동안의 일을 말하는 중이라구요. 나는 목장 경영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요. 그 모든 걸 바로 아버지에게 배운 몸이잖아요? 거기에다 추적하는 
법까지 익혔으니... 
  너에게 그딴 방법을 가르쳤던 건 가장 큰 실수였어  
 챈도스가 투덜거렸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드디어 코트니가 말할 기회를 잡았다.
  당신은 우리가 주위에 없을 때를 대비해 딸아이에게 어떤 상황이라도 충
분히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싶어했어요. 
  그래, 바로 그거야. 나는 우리가 주위에 없을 때 저 아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구. 
  아버지, 나는 배운 대로 하고싶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납득할 만한 반
대 이유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셨어요. 
  그거야 내 말을 흘려들었기 때문이지. 
 챈도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첫째, 너는 너무 어린 아기씨이기 때문에 바
엠 목장의 억센 목동들이 네 명령을 듣지 않을 거야. 들째, 결혼 적령기에 
이른 처녀가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면서 허드렛일이나 하고, 목장 회계 장부에 
코를 파묻고 지내면서 적당한 신랑감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
어.  
 케이시는 얼굴을 붉히고 노발대발하며 쏘아붙였다.
  말이 다시 결혼으로 돌아가는군요! 지난 2년 동안 내가 관심을 둘만한 남
자가 이 주변에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요? 아니면, 아무나 잡아서 결혼하란 
말씀이세요? 정말 아버지 의향이 그러시다면, 한심한 바지저고리들이야 지천
으로 깔려 있어요. 좋아요, 내일 당장 밧줄을 들고 나가 닥치는 대로 잡아오
겠어요. 
  시건방진 소리 말아라.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요. 아버지는 내 남편에게 바엠 목장을 
맡기실 생각이세요? 이제 알았어요, 아버지 눈에 꼭 찰 만한 신랑감을 조만
간 데려올 테니... 
  넌 그러지 못할 게다. 회계 장부에 코를 처박게 될 텐데 결혼을 무슨 놈의 
결혼이야. 
  아버지, 나는 이미 지난 몇 달 동안 회계 장부에 코를 처박아왔어요. 소투
스는 눈뜬 봉사나 다름없기 때문에 장부를 들여다볼 때마다 심한 두통으로 
앓아 누웠단 말이에요.  그 말에 챈도스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다.
  왜 그런 사정을 말하지 않았니?  
  그야 소투스가 이곳에 올 때마다 아버지가 목장에 나가고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아버지가 직접 바엠 목장을 시찰할 턱이 없으니까요. 바엠 목장에 전
혀 관심이 없으시잖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아버지는 그분에게 앙
갚음을 하고 싶으시겠죠? 소원대로 그 목장이 몰락하는 꼴을 조만간 보시게 
될 거예요. 
  케이시! 
 코트니가 질겁해서 소리쳤다.
 케이시도 이미, 말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아
버지의 불벼락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방을 뛰쳐나갔다.
 코트니는 남편을 달랬다. 
  여보, 케이시가 감정이 너무 고조되어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거예요. 
 챈도스는 입을 꾹 다물고 방을 나갔다. 하지만 그는 딸을 쫓아, 저택 앞쪽
이 아니라 뒷문을 통해 마구간으로 갔다.
 챈도스는 말싸움을 이렇게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쯤 케이시도 죄책감을 느끼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바꿔놓
겠다는 결심까지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좀 더 타당한 반대 이유를 댔어야 
했다.
 챈도스는 케이시가 목장 경영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해서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진심을 털어놓았더라면...
 바엠 목장의 목동들은 케이시가 플레처의 손녀딸임을 알고 있으므로 한동
안은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목동의 등장은 필연적이고, 그들
은 그녀와 플레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심각한 불화가 일어나리라. 만
일 케이시가 과부이거나 좀더 나이가 들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대
부분의 남자들이 여자,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처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
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챈도스는 그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하루 이틀 뒤, 케이시의 마음이 진정된 다음에 아내를 시켜 딸을 구슬리도
록 해야지. 일단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케이시는 예측을 불허하는 시한폭탄
이었다.

  -2-
 방을 뛰쳐나온 케이시는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런 아침 시간에 현관 
베란다는 대개 찾는 사람 없이 평화롭게 일쑤였고, 오늘도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저택 전면을 차지한 베란다는 가로세로 3미터에 이를 만큼 넓었고, 흰색의 
소형 탁자와 의자들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설치한 2인용 그네
가 양쪽 가장자리에 달려 있었고, 어머니가 애지중지 돌보는 무성한 화초들
은 군데군데 놓인 목동용 타구(침이나 가래를 뱉는 그릇)를 교묘하게 가려주
었다.
 케이시는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때까지 힘주어 베란다 난간을 쥐었
다. 사방을 둘러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한 스트래튼 목장의 푸른 
목초지는 간간이 솟은 언덕과, 무인도처럼 몇 그루의 나무로 둘러싸인 저수
지, 그리고 텍사스 특유의 선인장과 동물들로 이루어졌다. 북쪽 경계의 숲은 
저택에서 보이지 않았다. 작은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따라 내려가
면 농어의 서식처인 호수가 있었다. 척박하고 아름다운 땅에 찾아든 봄의 향
기가 물씬 풍기는 아침이었건만, 케이시의 눈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
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애당초 아버지의 
비이성적인 태도가 화근이 아니었던가. 죄책감과 분노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
다. 장난기 심한 두 형제와 함께 성장하면서 자주 화를 냈지만 죄책감은 별
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케이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밖에 어떻게 달리 생각한단 말인
가? 아버지는 항상 바엠 목장에 관심이 없다는 인상을 풍겼고, 플레처 스트
래튼의 소유물에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할아버지를 사랑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으르렁거렸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보기
에 할아버지는 부자 관계를 원만히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아버
지는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케이시도 지난 과거사를 다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남편의 부정을 이유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고, 할아버지
는 모자를 다시 데려오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아내
와 자식의 행방을 모른 채 오랜 세월이 흘러, 챈도스가 홀연히 바엠 목장에 
나타났다. 사실, 그가 목장에 발을 디딘 순간 총에 맞아 죽지 않은 것만으로
도 행운이었다. 노르스름한 무스탕을 걸치고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데다 얼
룩말을 탄 모습이 틀림없는 인디언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동자가 
할머니와 똑같이 진한 푸른색이었던 탓에 플레처는 가까스로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플레처는 아들의 입을 통해 기가 막힌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머
니는 홧김에 맨몸으로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가 카이오와족(북미 서부의 인디
언)에게 잡혔고 후에 코만치족에게 팔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젊은 코만
치 용사가 할머니를 아내로 삼고 챈도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들 부부 사이에서 챈도스의 이복 여동생이 태어났다.
 인디언의 포로가 되었을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챈도스는 미처 10년이 지나
기 전인 열여덟 살에, 당당한 성인으로 코만치 부족의 땅에서 자리잡을 준비
를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그를 친아버지의 곁으로 돌려보냈다. 할머니는 아
들이 코만치의 삶을 선택하기 전에 백인 세계에 대한 경험을 쌓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로 그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챈도스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 못
하고 순순히 부족을 떠났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뒤였다. 그는 
코만치족의 손에 코만치족으로 성장한 인디언이었다. 
 하지만 그는 백인들로부터 배울 수 잇는 모든 지식을 받아들였다.  적을 알
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는 신조가 백인이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플레처였다. 그는 아들을 되찾은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챈도스의 적대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플레처의 
호전적이고 고집스러우며 독선적인 태도는 오히려 아들의 적대감을 부추겼
다. 
 플레처는 챈도스를 자신이 원하는 자식의 상에 끼워 맞추려고 갖은 노력을 
했고, 그 때문에 그들 부자는 끊임없이 싸웠다. 챈도스는 고분고분한 어린아
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파국의 시간이 다가왔다. 플레처가 목동들에게 챈도스의 변발을 자
르도록 시킨 사건을 계기로 큰 싸움이 벌어졌다. 챈도스는 세 명의 목동을 
때려눕히고 훌훌 목장을 떠났다가 3년 후에야 다시 나타났다. 그 즈음 플레
처는 이승에서 다시는 아들을 못 보리라고 체념한 상태였다.
 훗날 플레처가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챈도스는 부족으로 돌아가서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백인들에게 학살당한 부족의 시체가 널려 있었던 
것이다. 챈도스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자행된 대학살의 희생자 속에는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끼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강간당한 후에 살해되었다. 그
로부터 4년 동안, 챈도스와 남은 부족 사람들은 살인범을 추적한 끝에 그들
을 찾아내, 똑같이 무참하게 보복을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챈도스는 케
이시의 어머니인 코트니 하트를 만났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챈도스는 코트니의 고향이자 플레처의 목장과 근접
한 지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와 경쟁하면서, 부친의 도움 없이 
성공적으로 목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오래 전에 아버지에게 받았던 재산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은행에 고이 모셔
놓은 채, 오로지 자신의 피와 땀으로 현재의 부를 쌓아올렸다.
 플레처와 챈도스는 화해하지 않았다. 최소한 남들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플레처가 죽은 후에도 챈도스의 태도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훗날 자식을 통
해 두 목장이 합쳐지리라는 미래상이 챈도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로, 바엠 목장은 적임자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몰락할 운명에 처했다. 하지
만 케이시는 절대로 그런 말을 내뱉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이야 자유지만,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짓은 최악의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번도 아
버지를 모욕해본 적이 없었다. 
 소리소문 없이 한 사내가 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처녀, 지금 울고 있는 거유? 
 케이시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틀림없이 그
녀와 아버지의 말싸움을 엿들었으리라. 플레처가 죽은 후, 케이시는 바엠 목
장의 임시 책임자 소투스와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케이시는 팽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를 어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빼고는 별 소용이 없지. 이제 뭘 할 거
유? 
  앞치마 끈을 묶어줄 남편 없이도, 남자들 세계에서 잘 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증명해 보이겠어요. 
  처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앞치마를 걸치지 않을걸. 헌데, 무슨 수로 증명할 
생각인데? 
  여자에게 걸맞지 않은 일을 하겠어요. 
  그런 일이 어디 한둘인가? 
  여자들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거칠고, 위험하고, 불요불굴의 의지
가 필요한 일을 하겠다는 뜻이에요. 애니 오클리(미국 서부 시대의 여자 명
사수)라는 여자는 한동안 소몰이꾼도 하고 척후병 노릇도 했다면서요? 
  그 오클리는 생긴 것도 남자 뺨치게 생겼고, 옷도 그렇게 입었다고 들었수. 
하지만 처녀 심중에 있는 생각이 뭐유? 설마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겠
지? 
  바보 같은 짓이든 말든, 나는 뭔가를 해야 해요. 아버지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갑자가 마음을 바꾸는 기적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아버지의 황소
고집이 누구의 유전인지 아시지요?  
 소투스는 쿡 웃었다. 그는 플레처의 좋은 친구였지만 있는 그대로 사실을 
인정했다.
  애써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정말 대단한 고집이에요. 그러니 허락을 구하지 않겠어요. 또, 내 자신을 
증명할 필요도 없어요. 아버지는 이미 내 능력을 아시니까요. 다시 생각하셔
야 할 거예요. 
  어이구 맙소사, 처녀의 그 충동적인 행동에 내가 명대로 못 살지. 

  -3-
 앞쪽에서 불빛이 어른거렸다. 모닥불이로구나. 데미안 루트리지는 그 불이 
모닥불이기를 바랐다. 지난 이틀 동안 사람 구경을 못 했다. 이 순간, 그는 
아무리 미개한 인간이라도 그에게 가까운 읍으로 통하는 길을 가르쳐준다면 
식사 대접을 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는 완전히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사전 지식에 의하면 서부는 문명화된 
지역이었다. 그에게 문명이란 사람과 이웃과 건물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곳
은 가도가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였다.
 점점 인구가 희박해지는 마을을 지나치면서, 이 지역이 예전에 놀던 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뉴욕으로부터 출발한 기차 여
행은 꽤 쾌적했다.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의 시발점은 캔자스였다. 그리고 첫 시작은 기차였다.
 캔자스와 텍사스 사이를 오가는 기차가 열차 강도 소동으로 철로에서 이탈
하여 엔진이 고장나는 바람에 그 주일에 운행하지 않았다. 그는 역마차를 타
고 인접한 읍까지 가면 다른 기차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길을 우
회해서라도 전진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마차 여행이 시대에 뒤떨어진 탓
에 문제의 그 역마차가 지난 5년 동안 한번도 이용되지 않았다는 정보는 듣
지 못했다.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기차가 수리되기를 기다렸지만, 
데미안은 너무 초조했기 때문에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게 가장 큰 실수였
다. 역마차의 승객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이 그런 
교통편을 피할 만한 이유가 있음을 눈치챘어야 옳았다.
 캔자스에서는 기차가 들어가지 않는 읍 사이를 역마차가 오갔지만, 그 구간
은 강도 떼의 출몰이 잦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비가 줄줄 새는 정
거장에서 수다쟁이 마부를 만나는 순간까지 그럴 줄을 꿈에도 몰랐다. 얼마 
후에야 그 사실을 아주 어렵게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마차를 뒤따르는 총격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다음에 벌어질 사태를 환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도, 마부는 말을 세우기는커녕 그 날고 허름한 마차로 노
상강도들을 따돌리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했다. 게다가 데미안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유로 길에서 벗어나기까지 했다. 강도 떼와 함께 뽀얀 먼지 구름
이 점점 가까워지고 총소리가 빗발치는 가운데 역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데미안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마차 안에서 휘청거리다가 금속 손잡이에 
머리를 찧고 정신을 잃었다.
 그를 다시 깨운 건 마차를 때리는 빗방을 소리였다. 이미 날을 저물어, 전
복된 마차를 간신히 빠져 나와 보니 짙은 어둠으로 세상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말은 도둑을 맞았는지, 아니면 도망을 갔는지 온데간
데없이 사라졌다. 마부 역시 총을 맞고 노변에 쓰러졌는지, 강도 떼에게 끌
려갔는지, 아니면 목숨을 부지하고 도움을 청하러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관자놀이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를 뒤집어쓴 채, 세찬 빗방울과 싸우
며 여기저기 흩어진 소지품을 주섬주섬 가방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비를 피
해 마차 안에서 끔찍한 밤을 보냈지만, 대낮에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 수 없었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역마차의 자취마저 간밤에 내린 비로 깨끗하게 사라진 뒤였다.
 시계는, 주머니와 가방 속에 넣어뒀던 현금과 함께 도둑을 맞았다. 그나마 
재킷 속주머니의 비상금을 빼앗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는 좌석 밑에서 물병 하나와 무릎 덮개를 찾아냈다. 어두워질 때까지 그 
허름한 천 쪼가리를 뒤집어쓴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원래 목적지였던 다음 읍을 향하여 남쪽으로 방향
을 잡았지만, 역마차가 제 길을 벗어났기 때문에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
다. 
 원래보다 훨씬 남쪽이나 동쪽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모르는 사이
에 읍을 지나친 건 아닐까? 그는 막연하게 제 길로 돌아가길 바랐지만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뒤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음식을 먹게 될 날이 
다시 올까? 요깃거리를 잡을 만한 무기도 없을뿐더러 그런 재주도 없었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
한 터였다.
 작은 웅덩이에서 핏자국을 씻어낸 뒤, 비에 젖어 축축하지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물로 배를 채운 후에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를 괴롭히던 두통은 둘째 날부터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련된 도시 
풍의 신발과 가방 덕에 잡힌 손발의 물집 탓에 두통을 의식할 여유조차 없
었다. 비를 맞은 탓에 옷에서 물까지 떨어졌다. 그래서 둘째 날 밤은 전날보
다 훨씬 비참했다.
 이런 지경에서, 우연히 발견한 모닥불은 하늘의 은총이었다. 데미안은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불빛은 아무리 가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헛것을 보았나? 그러나 노력에 대한 보답인지, 점에 불과하던 불빛이 점점 
또렷해졌다. 모닥불이 틀림없었다. 커피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까지..., 음식 
냄새를 맡은 그의 위장이 요동을 쳤다.
 모닥불까지 스무 발짝 정도 남았을까, 목에 차가운 금속이 닿더니 동시에 
 찰칵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인기척을 듣지 못했던 데미안
은 돌연한 상황에 얼어붙고 말았다.
  경고도 없이 남의 캠프에 침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모르나? 
  이틀 동안이나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데미안이 피곤에 절어 대답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경고를 해야 한다는 관습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신경이 바짝바짝 타는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데미안은 지친 머리를 굴려 
덧붙일 말을 찾았다.
  나는 무기가 없습니다. 
 방아쇠를 푸는 소리와 함께 금속과 가죽의 마찰음이 정적을 갈랐다. 
  미안하오. 하지만 이 근방에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코 베이기 십상이오. 
 데미안은 빙그르르 돌아서서 그의 구세주를 보았다. 구세주, 아니, 최소한 
문명으로 안내해줄 인도자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어린 티를 
갓 벗은 소년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 크지 않은 깡마른 소년
의 뺨은 갓난아이처럼 매끄러웠다. 열대여섯 정도 되었을까? 청바지에 무릎
까지 오는 모카신을 신고, 암청색 셔츠 위에 검정과 갈색이 뒤섞인 우중충한 
판초를 걸친 차림이었다. 
 저 판초 아래에 총집이 있으리라. 미주리 지역을 횡단하면서 무수하게 봐왔
던 넓은 테의 모자 아래로, 소년의 검은 머리칼이 흘러내려 있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숨을 멈추게 한 부분은 그 밝은 갈색 눈동자였다. 그 눈은 소년이 
아니라 예쁘장한 소녀에게나 어울림직한 고양이 눈이었다. 
 데미안은 소년의 판초와 모카신을 보며 허둥지둥 질문을 던졌다.
  이곳이 인디언 보호 지역은 아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셨소? 
  혹시 인디언인가 싶어서. 
 소년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데미안은 정말 미소인지 
확신이 안 섰다.
  내가 인디언처럼 보여요? 
  글세, 사실 인디언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구나."
 데미안은 마지못해 사실을 인정했다.
  나 역시 댁이 인디언을 봤으리라 생각지 않소, 신출내기 양반. 
  내 물집이 그렇게 빤히 보였니? 
 소년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소년의 웃
음치고는 관능적인 여운이 강했다. 데미안은 자신이 놀림감이 되었다는 사실
을 알아차렸지만, 현재 모습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얼굴을 가려주는 모자가 없었던 탓에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이번 여행길에 
딱 하나 준비했던 중절모는 강도의 습격으로 손질이 불가능할 만큼 찌부러
진데다, 어제 갈아입은 옷은 이미 먼지와 모래투성이였다. 하지만 예의 범절
만은 온전했다. 그는 악수를 청하며 격식을 갖춰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데미안 루트리지 3세라고 해. 너를 알게 되어서 진심으로 기쁘다. 
 소년은 데미안의 손을 응시하다가 그냥 고개만 까딱 숙여 보였다.
  댁 같은 사람이 세 사람이나 있소? 
 그 다음에 그는 어리석은 질문을 철회라도 하듯 황망하게 손을 저었다.
  지금 그 말을 괘념치 말아요. 오늘 밤 내 캠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따
뜻한 음식도 나눠드리겠소.  소년은 약간 히죽거리며 덧붙였다.
  보아하니, 댁은 음식이 간절한 모양인데.  
 데미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음식 냄새를 맡은 이래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먹거리를 제의 받지 못했다 해도 화를 낼 입장이 아닌데다 
하고 싶은 질문 몇 가지보다 음식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데미안은 서슴지 않
고 불가로 다가갔다.
 모닥불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큰 쪽은 주변을 따뜻하고 밝게 비춰주
는 난방 및 조명용이오, 작은 쪽은 요리용이었다. 움푹 파인 구멍 주변에 놓
인 네 개의 돌이 철제 석쇠를 지탱했고, 그 아래로 잔가지를 태운 깜부기불
이 음식이 타지 않도록 은근한 열을 가했다. 석쇠 한쪽에는 커피 향이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시꺼먼 주석 주전자가, 또 다른 쪽 주석 상자 안에는 갓 구
워낸 비스킷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다 강낭콩 통조림까지 있었으니, 데미안
에게는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이게 무슨 고기니?  
 데미안은 접시용 철판을 받으며 물었다.
  야생 암탉. 
 닭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통째로 데미안의 접시에 
올랐다. 거기에다 강낭콩과 비스킷 세 개까지 덜어주었다. 그는 게눈 감추듯 
밥을 먹어치운 후에야 접시용 철판이 하나밖에 없는 관계로 정작 주인인 소
년은 석쇠에서 직접 음식을 떠먹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미안하다, 내가... 
 그의 사과는 곧 가로막혔다.
  괜한 말하지 마쇼. 철판이라면 이 근방에 수두룩하게 널렸으니. 게다가 저 
아래쪽에 몸을 씻을 수 있는 강까지 있소. 
 목욕이라? 데미안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혹시 비누를 가지고 있니? 
  정히 목욕을 하고 싶거든 남들처럼 강바닥의 침적토로 몸을 닦아요. 웬만
한 먼지는 씻겨나갈 겁니다. 
 정말 원시적이로군, 데미안은 생각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필품만 가지고 
야외에서 캠핑하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전부 원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음식 맛은 나무랄 데 없었다.
  음식을 나눠줘서 정말 고맙다. 나는 굶주림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
야. 
 다시 소년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전부 내 저녁거리라고 생각하쇼? 지금 댁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던 
음식은 내 아침거리였소. 아, 그렇다고 사과할 필요까진 없소. 시간을 버는 
셈치고 아침에는 남은 것을 먹을 테니까. 그리고 아무리 바쁘기로서니 핫케
이크 구울 시간도 없겠소? 
 배를 적당히 채우고 나자, 데미안의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네 이름을 아직 모르는데. 
 그 독특한 갈색 눈동자가 데미안을 주시하다가 커피잔으로 돌아갔다. 
  그거야 내가 당신 식대로 내 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네가 정 이름을 말하기 싫다면... 
  이름 따위는 없소. 최소한 나는 몰라요. 
 데미안은 그런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뭐든 이름이 있을 텐데? 
 소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로  키드(꼬마) 라고 불렸소. 
  아하. 
 데미안은 미소를 지었다. 그 이름은 서부의 수배범 명단에 자주 오르는 것
으로, 그 별칭 뒤에 다른 이름이 따르는 게 관례였다.
    빌리 더 키드 에서 딴 이름이니? 
 소년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하는 일에 내가 너무 어리다는 뜻일 거요. 
  어떤 일을 하는데? 
 소년은 커피잔을 데미안에게 건넸다.
 데미안은 다음에 이어진 소년의 말에 잔을 엎을 뻔했다.
  나는 범죄자들을 잡고 있소. 
  저기...,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까, 네 차림새가... 
  뭐 어떻다는 거요?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 같지 않아. 
  아, 보안관 같지 않다? 그야 물론이오. 누가 나처럼 어린 사람을 보안관으
로 뽑겠소? 
  그렇다면 왜 범죄자를 잡니?  그는 정중하게 물었다.
  그야 현상금을 노리니까. 
  그게 돈벌이가 되니? 
 데미안은 장황한 설명을 기대했기에 소년의 간결한 대답에 또다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매우. 
 꽤 똑똑한 소년이로군, 데미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일을 시작한 이래 몇 번이나 건수를 올렸니? 
  다섯 번. 
  현상 수배범 전단을 여럿 봤는데, 거기에는 수배범의 생사 여부에 따라 현
상금을 준다는 부분이 없더구나. 
  지금 그 말이 내가 죽인 수배범의 숫자를 묻는 거라면, 그 대답은  아무도 
없다 입니다. 지금가지 몇 군데 상처를 입힌 게 전부니까.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니, 올해가 가기 전에 주님을 만나게 될 거요. 
  거친 범죄자들이 너를 무서워하긴 하니? 
 소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자는 거의 없소. 하지만 이것은 무서워하더군요. 
 눈 깜박할 사이에 소년의 손에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래, 권총은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킬 겨야. 
 데미안 역시 그랬다. 소년은 자칭 주장하는 수훈을 달성하기에 너무 어렸
다. 설령 한두 살 더 먹었더라도 데미안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을 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란 워낙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허풍을 치
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데미안은 권총이 다시 권총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무기에서 눈을 떼
지 않았다. 키드는 권총을 넣은 다음에 커피를 다시 따랐다. 
  이 주변에서 사니?  데미안이 또 물었다.
  아닙니다. 
  이 근방에 사는  사람 이 있니? 
 데미안이 특히 강조한 말은 소년의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그 관능적인 웃음
소리는 조금 전의 모습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지 않
았다면, 주변 어딘가에 여자가 숨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그런 웃
음소리였다. 하지만 키드가 워낙 여자아이처럼 예쁘장한 용모였으므로 데미
안은 그런 부조화를 흘려버렸다.
 키드는 데미안의 묵상을 깨뜨렸다.
  루트리지 씨, 댁은 이곳을 죽도록 헤매고 다닌 모양이군요. 
  웃을 일이 아니야. 
 데미안은 건조하게 말하고 약간 뜸을 들였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니? 
  코퍼빌에서 남쪽으로 한 이틀 정도 걸어야 하는 곳이오. 
 코퍼빌이란 이름은 생소했다. 데미안이 아는 거라고는 그곳이 그의 목적지
가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역마차가 뒤집히기 전에 생각보다 훨씬 남쪽으로 
치달은데다, 그 역시 정처 없이 헤매다가 더 남쪽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곳이 가장 가까운 읍이니? 
  여기는 내 손바닥 안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소. 
  그럼, 너는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코퍼빌에 볼일이 있습니다. 
 키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데미안은 소년이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점을 눈치챘다. 하지만 데미안은 대화를 즐기는 타입이라, 네 일에나 
신경 쓰라는 면박을 들을 때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같은 자리를 빙빙 돈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서 가까운 곳에 길이 있
니? 
 키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능한 한 큰길을 피해 다닙니다. 원래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적은 이쪽으로 온 거요. 
 그 퉁명스런 대답에 데미안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방해를 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난 정말 길을 잃었어. 
  어쩌다 그렇게 되었습니까?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거요? 
 키드의 말에는, 데미안을 말 하나 제대로 못 타는 칠칠치 못한 인간으로 여
기는 여운이 감돌았다. 데미안은 약간 팽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냐, 나는 역마차로 여행하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중간에서 마차를 놓쳤
다는 상상을 하기 전에 말해두겠는데... 
  이봐요, 괜히 간단한 질문에 마음 상해서 변명할 필요는 없소. 댁은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내 캠프에 도착했소. 그러니, 당신 말이 절름발이가 되었
다거나, 혹은 낙마해서 말을 잃었다는 추측이 당연하잖소? 역마차 승객이 걸
어다닐 일은 만무하니까.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키드의 말이 하나에서 열까지 이치에 맞았고, 머
리가 다시 깨어질 듯 아파왔다. 하지만 그는 말을 다 끝낼 때까지 사과를 하
지 않을 심산이었다.
  내가 탔던 역마차가 노상강도에게 추적을 받았단다. 마부는 놈들을 피해 
도망가려다가 결국 마차를 부숴 버렸어. 나는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지. 
그날 밤 정신을 차려보니, 마부와 말은 온데간데없고 내 지갑과 주머니는 텅 
비어 있더구나. 
  이 근방에서 노상강도가 출몰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저께. 
 소년은 실망에 찬 한숨을 내뱉었다.
  놈들은 지금쯤 멀리 도망갔겠군. 
 데미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럴 테지. 너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니? 
  역마차 강도의 목에는 후한 현상금이 걸려 있소. 그리고 일단 현상 수배 
범으로 전단이 뿌려진 놈들은 추적자를 피해 감쪽같이 몸을 숨기거든요. 
 데미안은 농을 걸었다.
  그래, 무명의 강도를 잡는 편이 훨씬 수월하겠구나. 
  수월한 게 아니라 더 빠른 거요. 나는 그런 경우를 일종의 예상치 못한 상
여금 생각하니까.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요, 루트리지 씨. 무슨 일로 서부
에 오셨소? 
  내가 동부 출신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니? 
 소년은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로 데미안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봤다.
  육감이라고나 할까. 
 데미안이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키드는 킬킬거리다가 대수롭지 않은 어
조로 질문을 던졌다.
  댁도 서부 유람길에 오른 동부 치 중 한 사람이오? 
 데미안은 약이 올라 툭 쏘아붙였다.
  아니, 나는 사람을 죽이려고 텍사스에 가는 길이야. 

  -4-
 나는 사람을 죽이려고 텍사스에 가는 길이야.
 그 말은 내뱉고 나자, 데미안의 마음속에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던 6개월 
전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바로 그날 밤, 모든 것이 사라졌다. 데미안은 
위니프레드에게 꽃다발과 함께 그날 아침에 완성된 약혼 반지를 줬다. 그들
은 뉴욕의 교통 체증을 뚫고 제사간에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저녁식사는 훌
륭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위니프레드의 집으로 가서 생애 가장 중
요한 청을 할 분위기가 마침맞게 무르익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두 사람의 결합을 쾌히 승낙하신 뒤였다. 그들은 완
벽한 한 쌍이었다. 그는  루트리지 상사 의 후계자요. 그녀는  C.W. & L. 회
사 의 상속녀였으니, 그들의 결합은 단순한 결혼이 아니라 뉴욕에서 가장 큰 
두 회사의 합병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뉴욕 21번 가의 관할 경사 존슨이 나타나 
데미안에게 면회를 청했다. 그들은 로비로 나갔다. 그리고 그 대화가 끝날 
즈음, 데미안은 큰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경사에게 위니프레드의 배웅을 부탁하고 정신없이 
루트리지 상사로 달려갔다. 회사 건물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사무실은 대개 오후 5시경에 문을 닫았지만, 가끔 한두 명의 직원이 늦게까
지 남아 서류 작업을 했고 데미안의 부친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는 아니었다. 심지어 청소부마저 일을 끝내고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데미안이 도착했을 때, 사무실은 뉴욕 시청 소속의 경찰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체는 사무실 깃대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문 양쪽을 각각 장식
한 깃대에는 매년 6월 한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국기가 게양되었다. 6월이  
지나면 덩굴식물의 훌륭한 안식처였다. 허나 그날 밤에는 줄기와 이파리가 
아무렇게나 짓이겨진 채, 시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무실 벽이 벽돌로 만들어지지 않았던들, 그런 체구의 시체가 바닥에서 한 
뼘이나 떨어진 채 깃대에 걸려 있지 못했으리라. 깃대가 모두 강철로 만들어  
진데다가 벽면에 단단히 보강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무거운 물체를 매달아도 
결코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았다.
 깃대 높이는 밑창이 두꺼운 신발을 신고 한쪽 발뒤꿈치를 들고 서야 겨우 
잡힐 정도였다. 하지만 시체는 맨발이었다.  깃대 옆에 있던 의자도 멀리 차
버리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시체를 내려놔요 
 아무도 데미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세 명의 경찰이 사무실 앞에
서 그를 제지했고, 다른 이들은 증거를 찾느라 분주했다.
 데미안은 악을 썼다.
  시체를 내려놓으라니까! 
 그때서야 사람들의 관심을 보였다. 그 중 사복 차림의 한 경사가 호령을 했
다.
  당신 누구야? 
 데미안은 여전히 시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들이오. 
 경찰이 힘을 합해 데미안 루트리지 2세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동정의 말을 
던졌지만, 데미안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이 세상에서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그에게는 친척
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린 데미안을 놔두고 아버지와 이혼한 후에 연인과 재
혼했다. 그 이래 어머니를 만난 적도 없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데미안의 마음속에서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위니프레드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녀와 결혼할 계획이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저 잘 어울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
녀는 결점이 없는 숙녀였다. 아름답고 세련된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가 될 
여자였지만 데미안에게는 타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의심할 여지없는 자살입니다. 여기 유서까지 있어요. 
 그리고  유서 를 데미안의 얼굴에 들이댔다.
 데미안은 가까스로 종이에 초점을 맞추고 내용을 읽었다.
 -데미안, 나는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할 수 없구나. 나를 용서하    
거라.-
 그는 경찰의 손에서 유서를 낚아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또다시 읽었다. 
필체는 아버지의 것처럼 보였고, 종이는 주머니 속에 있었는지 마구 구겨져 
있었다.
  이걸 어디에서 찾아냈습니까? 
  이보라는 듯 책상 한가운데 놓여 있더군요. 
  책상에는 새 편지지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유서가 죽기 전에 쓰여졌다면 
왜 이렇게 구겨졌겠습니까? 
 경찰은 어깨를 으쓱했다.
  부친은 여러 날 동안 유서를 갖고 다니다가 마을을 정하셨겠지요. 
  저 밧줄도 손수 가져오셨단 말입니까? 우리 사무실에는 저런 게 없어요. 
  그렇다면 사오신 모양이군요. 루트리지 씨, 부친께서 이런 식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현실을 어떡하겠습니까? 그건 그렇
고 여기 이 유서에서 부친이 극복할 수 없었다는 일은 도대체 뭡니까? 
  모릅니다. 우리 아버님은 자살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친 생각은 다르셨던 것 같군요. 
 데미안은 경찰의 싸늘한 회색 눈을 쏘아봤다.
  당신은 보이는 그대로 사건을 마무리할 겁니까? 심지어 우리 아버지가 살
해당하셨을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지 않습니까? 
  살해? 
 경찰은 짐짓 겸손하게 말을 받았다.
  목을 매다는 것보다 훨씬 쉽고 빠른 방법이 많습니다. 저런 식으로 죽는데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는지 아십니까? 목이 부러지지 않는 한, 오랫동안 
고통을 당한 뒤에야 죽음을 맞는단 말씀입니다. 부친 목은 멀쩡합디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저보다 쉽고 빠른 살해 방법이 무궁무진해요. 
  당신은 사인을 자살로 보려고 용을 쓰는군요. 
  사람을 살해하려면 머리에 총 한 방 쏘는 것으로 끝났을 겁니다. 이보세요, 
여기에 싸운 흔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 아버님이 반항을 했거나, 양손을 
묶인 것도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목을 매달지 않은 이상, 이런 체구의 사내
를 들어올리려면 몇 사람이나 필요할까요? 한두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세 사람 이상이라면 가능할까? 그리고 살해로 추정할 만한 동기라도 있습니
까? 부친께서 이곳에 돈을 보관하셨어요? 고가품이 없어졌습니까? 아니면, 
그를 죽일 만큼 원한을 품었던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그 대답은 모두 부정이었기에 데미안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경찰은 현
장 증거를 바탕으로 당연한 결론을 도출했고, 그로서는 그런 그들을 욕할 수 
없었다. 사건에 대한 서류 작업을 끝내고 다음 일로 넘어갈 수 있는 마당에 
단지 데미안의 말 한마디로 뻔한 일을 파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이 사건
에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야말로 힘과 시간의 낭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두 시간이나 더 살해 가능성
을 고집했지만, 결국 장의사가 나타났고 경찰은 하나둘 변명을 대며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더 조사를 해보겠노라고 약속했지만, 그는 그 말을 단 
일 초도 믿지 않았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인들 못하랴.
 자정이 넘어서야 데미안은 부친과 함께 생활해왔던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
람에게는 너무 크고 오래된 저택이었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나이가 
차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와 아버지는 서로의 생활방식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며 편안하게 살아왔다.
 그날 밤, 갑자기 찾아든 집안의 적막함이 데미안을 괴롭혔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와 함께 아침을 먹고 출근하지 못하리라. 다시는 늦은 저녁에 서재로 
찾아가 고전 작품에 대한 열띤 토론을 나누지 못하리라. 다시는 저녁을 함께 
하며 사업 이야기를 하지 못하리라. 이제다시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데미안은 격한 감정에 겨워 
침실로 올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워낙 늦은 시간이었기에 평상시의 반듯한 
태도를 벗어 던진 그의 추태를 목격할 만한 하인이 아무도 없었다. 잠 못 이
룰 경우에 대비해 보관해둔 브랜디를 잔에 따랐지만, 너무 구슬프게 오열하
는 통에 미처 술을 삼키지 못했다.
 마음속에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가 그런 식으
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건 현장에 반항이
나 싸움의 흔적이 보이진 않았지만, 데미안은 본능적으로 아버지가 피살당했
음을 알았다. 데미안은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
이였던 것이다.
 루트리지 2세는 고난을 회피하거나 발뺌하는 남자가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
해 노력하는 남자였다. 아무리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해도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 부자는 결혼 계획을 짜왔다. 데미안이 이곳에서 신접살림을 차
릴 경우를 대비하여 저택 서쪽 부분을 다시 짓고 더 철저하게 사생활을 보
장하자는 말까지 거론했다. 데미안의 부친은 귀염둥이 손자를 품에 안아보는 
날만 학수고대한 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루트리지 2세는 진정으로 현재의 삶에 만족했다. 그는 
재혼하지 않고 정부를 두는 생활에 완벽하게 만족했다. 막대한 유산에 기대
지 않고 자기 힘으로 큰 부를 쌓아올렸으며, 선친이 창업한 회사를 성공적으
로 경영해왔다. 한마디로 그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데미안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나를 용서하거라? 아니, 그런 말은 아버지가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아버
지가 용서받을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앙심을 품은 사람이라면...
 데미안은 추억을 옆으로 제쳐놓고 행동에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고용했던 
탐정이 원했던 대답을 찾아냈다. 그렇다,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남자를 죽이
기 위해 서부로 왔다. 하지만 데미안의 살인 선언은 옆에 앉은 소년에게 별
다른 충격을 안겨준 것 같지 않았다.
 키드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댁은 살인광이요, 아니면 사람을 죽일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요? 
  아주 좋은 이유가 있어. 
  댁도 수배범 사냥꾼이오? 
  아니, 이건 개인적인 문제야. 
 데미안은 더한 질문에도 대답할 용의가 있었지만, 키드는 그냥 고개만 끄덕
거리고 말았다. 확실히 별난 꼬마였다. 저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대개 귀찮
을 정도로 호기심을 드러내는 데 반해, 그는 무관심하게 몇 마디 질문만 툭 
던지고 그만이었다.
  목욕을 하고 오마.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키드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강이 있소. 난 잠자리에 들 테니, 나중에 돌아와서 너무 바
스락거리지 말아요. 
 데미안은 가방을 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뒤에서 
키드가 소리쳤다.
  그리고 뱀 조심해요. 
 뒤를 이은 숨죽인 웃음소리에 데미안은 이빨을 갈았다. 망할 놈의 꼬마 같
으니. 내가 저 녀석과 얼마 동안이나 함께 다녀야 할까?

  -5-
 커피 냄새가 잠을 깨웠지만, 데미안은 딱딱한 땅바닥의 불편한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겨우 한두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한 기분이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약간 떠보니, 막 동녘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한 태양이 
보였다. 하지만 날이 밝으려면 아직 더 있어야 했다. 어젯밤 극도의 피곤에
도 불구하고 곧바로 잠을 들지 못했으니, 오늘 아침 기분이 찌뿌드드한 것이
야 너무 당연했다.
 데미안이 아버지의 죽음과 그 뒤에 벌어진 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
이 비단 어제가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6개월 동안 폭발 직전의 격렬한 분노
가 그의 동반자였다. 분노와 좌절감과 불신을 비롯한 씁쓸한 감정을 자주 곱
씹은 후에 정의를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앞 뒤 꽉 막힌 경찰에게 질린 그는 사설 탐정을 고용했는데, 그들의 조사는 
빠르고 완벽했다. 루트리지 상사의 맞은편 카페가 사건 발생 시간에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사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웨이터가 루트리지 사무
실에서 나오는 우락부락한 남자 둘을 목격하고 인상착의를 자세히 봐뒀다. 
우연찮게도 그는 아마추어 화가였기 때문에 푼돈을 받고 그들의 생김새를 
그려냈다. 웨이터의 그림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던지, 몽타주가 뒷골목에 뿌
려진 후에 두 명의 용의자 중 한 사람이 자수해서 모든 범행을 고백했다. 하
지만 그 이전부터 헨리 커루더스는 이미 의심을 받고 있었다.
 헨리 커루더스는 데미안의 부친 밑에서 십 년이 넘도록 일해온, 사십대 중
반의 소심한 경리 사원이었다. 나이 든 고모를 모시고 사는 그는 결근이 단 
하루도 없을 만큼 성실했다. 항상 루트리지 사무실이나 창고, 두 군데 중 한 
곳에서 재고 조사에 몰두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처럼 
장례식에 참석하여 루트리지 2세의 죽음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것처럼 보였
다.
 하지만 사설 탐정이 허락을 얻어 회사 장부를 샅샅이 훑어본 결과 심각한 
오류를 찾아냈다. 그는 헨리에게 질문했지만 개운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의
혹을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수 없는 상황에서 헨리는 뉴욕에서 증발했고, 그 
즈음 두 용의자의 몽타주가 효력을 발휘했다. 
 두 남자는 고용주의 이름을 몰랐지만, 그들이 묘사한 인상착의는 헨리와 똑
같았다. 두꺼운 안경 렌즈와 숱 적은 갈색 머리칼, 왼쪽 뺨의 사마귀와 올빼
미 같은 푸른 눈동자 등 헨리 커루더스가 틀림없었다. 그는 회사 공금을 횡
령한 사실을 들키기 전에 남자 둘을 50달러씩 주고 고용하여 사장을 죽였던 
것이다. 
 단돈 50달러에 사람을 죽이다니. 데미안은 사람의 목숨이 그렇게 값어치 없
다는 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데미안에게 사립 탐정은, 어떤 사람에겐 
푼돈이 다른 이에겐 거금이 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살인을 자살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던 사람도 헨리였다. 심지어 유서까지 위
조했다. 그는 데미안이 비탄에 빠져 회사 일을 등한시하는 동안 완벽하게 장
부를 고쳐놓으리라 작정했던 모양이었다.
 헨리 커루더스는 살인자요, 두 남자는 하수인이었다. 데미안이 내막을 파헤
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활개치며 살 수 있었으리라. 아니, 현재까지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몸을 숨겼다. 3개월이나 걸려, 포
트워스에서 겨우 꼬리를 잡았지만, 다시 온데간데없이 증발했다.
 그 즈음, 데미안은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뒤에서 기다리는 데에 신물이 
났다. 커루더스가 서부 어느 곳에서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으리란 생각을 참
을 수 없었다.
 체리 커루더스는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발견되었다. 즉, 다른 범법자들처럼 
광활한 야생 속에 몸을 숨기려고 서부로 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커루더스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사람을 추적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지했지만, 그래도 반드시 찾아낼 결심이었다. 법적으로 커루더스
의 살해를 정당화시키는 살인 면허 배지까지 손에 넣었다.
 그걸 따기 위해 집안의 힘있는 친구들이 총동원되었다. 데미안은 오로지 커
루더스를 처치할 목적으로 모든 연줄을 다 움직여 미국의 법무부 장관과 면
담까지 했다. 그리고 연방 보안관의 배지와 함께 텍사스를 비롯한 모두 서부
에 퍼져 있는 범죄자 목록을 손에 넣었다.
  거기 계신 두 분, 이제 나와서 이 커피 좀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해가 중
천에 뜰 때까지 계속 땅바닥에 엎드려 있을 겁니까? 
 데미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키드의 말은 그를 향한 게 아니었다. 그의 생
각을 확인이라도 하듯 멀리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미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 스무 발짝쯤 떨어진 그늘 속에서 사내 둘이 몸을 일으
켜 먼지를 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음에는 캠프 주인의 반응을 눈여겨봤다. 키드는 전날과 똑같은 옷을 걸쳤
는데, 다른 점이라면 밤새 옷의 주름이 더 눌었다는 정도였다. 소년의 모자
가 끈으로 고정되어 등에 매달린 탓에 까치집처럼 덥수룩하고 불결한 머리
칼이 훤하게 드러났다. 몇 달 동안 빗질을 하지 않은 머리였다.
 키드는 속 편한 사람처럼 막 지펴놓은 모닥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불가해한 표정으로는 그가 새로운 방문객들을 경계하는지, 환영하
는지, 혹은 불편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데미안은 속으로 곰곰이 궁리했다. 대체 무슨 수로 키드가 저들의 존재를 
알아차렸을까? 데미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모닥불이 비추는 반경 
열 발짝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완전한 어둠에 휩싸인 상태였고, 해가 뜨려
면 족히 30분은 있어야 했다. 데미안이 두 눈을 부릅떠야 겨우 이방인들을 
분간할 수 있는 반면, 키드의 저 황금과도 같은 고양이 눈은 어둠을 꿰뚫었
다.
 캠프에 가까워지기 전에 경고를 해야 한다던 키드의 말을 기준으로 할 때, 
저 두 사람이 숨어 있었던 이유에 대해 데미안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만 관습을 무시하는 게 아니로구나...
 두 사람은 불가로 다가왔다. 키가 큰 쪽은 우호적으로 미소를 지었고, 다른 
쪽은 쭈그러진 모자로 다리의 먼지를 탁탁 털었다. 모자를 어찌 저렇게 험하
게 다룰꼬?
 모자를 쓰지 않은 쪽이 데미안을 보고 자리에 우뚝 섰다. 그는 유령을 본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에게 말했다.
  네가 저놈이 죽었다고 했잖아. 하지만 내 눈에는 죽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데! 
 키가 큰 쪽이 요란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입 싼 바보 멍텅구리 같으니. 너와 한 조를 이뤘다는 게 내 일생 일대의 
불행이야, 빌리밥! 
 그는 말하면서 권총을 꺼내 데미안을 겨냥했다. 빌리밥은 약간 허둥지둥 몸
을 뒤진 다음에야 겨우 무기를 꺼내 키드를 겨냥했다. 키드는 두 손을 위로 
치켜올려 반항할 뜻이 없음을 보여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무표정했다. 공포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데미안은 약이 올랐다. 
역마차를 습격한 놈들과 정면으로 부딪친 이 현실 앞에서, 키드는 완전히 무
심하게 보였다.
 빌리밥이 투덜거렸다.
  빈스, 네가 나를 욕할 이유가 없어. 내가 저놈 때문에 놀란 건 다 네 책임
이잖아. 다음 번에는 희생자의 생사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 똑바로 말하라구. 
  입. 닥쳐, 빌리밥. 넌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어. 
 빌리밥은 정말 딛고 있는 땅바닥을 내려다봤고, 빈스는 눈을 치켜 뜨고 눈
동자를 굴렸다. 빈스는 친구의 옆구리를 쳐서 본연의 임무를 일깨우고 능글
맞게 히죽거리며 데미안을 응시했다.
  자, 빌리밥이 무덤에서 시체를 다시 살려냈으니, 우리의 사업을 마무리해볼
까? 네 놈이 흥미를 끌 만한 건 하나도 지니지 못했다는 거야 다 아는 사실
이고..., 넌 어떠냐, 키드? 
 순간, 데미안은 이 2인조 노상강도가 소년을 이름으로 부를 만큼 친한 사이
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 호칭이 소년의 나이와 관계가 있음을 깨달
았다. 소년 말대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키드(꼬마) 라고 불린 것이다.
  흥미를 끌 만한 것? 
 키드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여기 뜨거운 커피와 핫케이크 반죽이 있는데요. 
 빈스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정말 흥미가 솟는구나, 키드. 하지만 네 주머니에도 뭔가가 들어 있을 텐
데? 
  이것을 말하는 거라면... 
 키드는 전광석화처럼 권총을 뽑아들고 발사했다. 그의 의도가 빈스를 죽이
는 것이었다면, 총알이 목표에서 빗나가도 훨씬 빗나갔다. 하지만 놈을 무장 
해제시킬 목적이었다면 과녁에 명중한 셈이었다. 총알이 빈스의 권총에  핑  
소리를 내며 튀어나가는 통에 그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졌다.
 빈스는 얼얼한 손을 경망스레 흔들며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질렀다. 빌리밥이 
입을 헤벌리고 당황한 시선으로 친구를 바라본 덕분에 키드는 수월하게 곁
으로 다가가 옆구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빌리밥이 우둔한 녀석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임무대로 키드에게 눈을 
떼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그 가운데 앉은 데미안은 꼼짝없이 총알받이 신세가 되었으리라.
 데미안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드가 빌리밥
의 무기를 땅에 떨어뜨리는 광경을 보면서도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저 소
년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쉽게 두 명의 노상강도를 무장 해제시켰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드의 표정을 아까와 다름없이 덤덤했다. 권총을 든 
역마차 강도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 아니라 마치 덤불 속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사람 같았다.
 키드는 땅에 떨어진 권총 한 자루를 발로 차서 데미안에게 던지고, 다른 한 
자루를 허리춤에 쑤셔 넣었다. 그는 여전히 강도들에게 권총을 겨눈 채 말했
다.
  앉아서 양손을 머리 뒤로 올려.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마. 너희들을 산채로 
끌고 가는 것보다 죽이는 편이 훨씬 빠르고 훨씬 쉬우니까. 내 짐이 이미 초
과된 이 마당에 내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키드가 예의바르게 목소리를 낮춘 관계로 데미안은  짐이 초과되었다 는 부
분을 듣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눈앞의 광경에 고민 중이었다. 맨발에 맞닿
은 이 권총을 주워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는 권총에 익숙지 않았다. 사실, 권총을 쥐어본 적도 없었다. 뉴욕에서 권
총은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 사격 대회에 출전하고 아버지와 교
외로 사냥도 다녔던 탓에 라이플(소총)에는 꽤 친숙했다.
 하지만 저 강도 녀석들이 권총을 다시 집으려 할만큼 운신이 자유로운 마
당에 무기를 땅에 내버려둘 수야 없겠지. 그가 막 무기를 집으려는 순간, 키
드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고민을 해결해줬다.
  루트리지 씨, 가방에서 녀석들을 묶을 만한 걸 찾아봐요. 낡은 셔츠가 적당
할 겁니다. 
 데미안은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했다. 셔츠 중에 낡은 거라고는 한 벌도 
없었다. 낡은 셔츠 운운하다니, 사람을 어떻게 봤기에. 그가 생각한 바를 입
에 담으려 할 때, 키드가 다시 덧붙였다.
  댁은 어차피 가방을 가져가지 못할 거요. 말 한 마리에 그것까지 실을 공
간이 없소. 
 데미안은 코웃음치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데미안이 읍까지 갈 방법을 생
각조차 못한 반면, 키드는 강도 두 놈과 그의 짐까지 처리할 대안을 이미 결
정한 모양이었다.
 한참 가방을 뒤진 후에 데미안은 셔츠와 권총을 각각 한 손에 들고 다가갔
다. 키드의 표정에 인내와 짜증이 뒤섞였지만, 데미안은 셔츠를 찢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한참 후에야 그 점을 눈치챘다. 저 아이가 저러는 것도 당연하
지, 그는 생각했다. 키드의 권총 다루는 솜씨는 마치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
러웠지만, 데미안은 빌리밥처럼 권총 다루는 솜씨가 서툴기 그지없었다.
 빈스는 제 친구가 꽁꽁 묶이는 장면을 지켜보며 호전적으로 다그쳤다.
  우리를 어디로 끌과 갈 생각이냐, 키드? 
  코퍼빌의 보안관에게. 
  그런 짓은 너와 우리 모두의 시간 낭비가 될 거야. 우리는 아무 잘못도 저
지르지 않았어. 
  그 의견에 반대표를 던질 목격자가 여기 있어. 
  저놈은 정신을 잃었었어. 
  너희도 자백했잖아. 
  무슨 자백? 
 빈스는 경고 어린 표정으로 친구를 노려봤다.
  네, 무슨 자백했냐? 
 빌리밥은 얼굴을 붉히며 장단을 맞췄다.
  내가 그런 말을 하는 바보인 줄 아냐? 
 키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보안관이 별 어려움 없이 너희들이 한 짓을 가려줄 테니까. 
장담하건대, 보안과 사무실에는 네 놈들 수배 전단이 있을걸. 그렇지 않다
면..., 이번 일을 이 달의 내 업적으로 생각하마. 
 데미안은 수배 전단이라는 말에 빈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음을 눈치챘어
야 옳았다. 또한, 빈스가 다른 녀석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점을 미리 알아차
리고 그를 먼저 묶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의 문제를 예상치 못
했기 때문에 빈스가 키드의 다리 쪽으로 와락 덮치는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
랐다. 두 사람은 땅바닥을 뒹굴었다. 땅바닥에 등을 대고 벌렁 누운 키드의 
다리 위에서 빈스가 총을 잡으려고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들이 몸싸움을 벌
이기 전에 데미안이 빈스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켰다. 그가 강도의 상판때기
에 주먹을 꽂으려는 순간, 뒤에서 찰칵,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울렸다. 두 사
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빈스가 먼저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총을 겨누고 있는 
키드를 응시했다. 
  넌 나를 죽이지 못할걸. 
  과연 그럴까? 
 키드는 딱 한마디만 던졌다. 하지만 소년의 표정에 기가 죽은 빈스는 작게 
투덜거리며 설설 기었다. 그 표정만 봐서는 키드의 생각이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또한 그가 냉혹한 살인자인지, 아니면 두려움을 잘 숨기는 소년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분을 삭일 수 없었다. 그와 그의 어린 구원자가 위협 당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오늘 아침에는 목숨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놀
랄 일이 연거푸 벌어졌다. 그는 빈스의 콧잔등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날
렸다. 빈스는 멍하니 있다가 주먹 한 방에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데미안은 즉시 뉘우쳤다. 육체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는 열다섯 살 이후 처음
이었다. 당시 코를 부러뜨린 사람의 수가 일곱 명에 이르자, 아버지는 주먹
질을 한 아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야단쳤다. 그 내용인
즉, 그가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이 크기 때문에 싸움이 공평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몸집은 다른 이들과 호각을 이루지 
못했다. 186센티의 그는 신장과 체중 면에서 대부분의 성인 남자를 능가했
다.
 하지만 키드가 그의 죄책감을 누그러뜨렸다.
  잘 했소, 루트리지 씨. 이제 댁이 놈들을 마저 묶는 동안, 나는 핫케이크를 
준비하리다. 아침을 먹은 후에 길을 떠납시다. 
 그 목소리는 오늘 아침에 별다른 일이 하나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차분
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대체 저 소년의 심장은 강철로 된 거야, 아니면 아
예 없는 거야?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키드의 말에 따랐다.
 
  -6-
 키드는 다시 불가에 쪼그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프라이팬에 얇게 펴고, 
뒤집고, 하나뿐인 접시에 옮겨 담는 과정을 반복했다. 최소한 데미안의 눈에
는 요리에 열중한 것처럼 보였다.
 권총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유사시에 얼마나 빨리 무기를 꺼낼 수 있는
지는 이미 증명된 바였다. 그리고 갈색보다 금색에 가까운 그 고양이 눈은 
보통 사람들이 놓치는 것까지 다 꿰뚫어보았다. 혀를 내두를 만큼 비범한 소
년이야, 데미안은 다섯 명의 범법자를 잡았다는 키드의 말이 믿어지기 시작
했다.
 데미안은 의식을 잃은 빈스의 손목을 등뒤로 모아 필요 이상으로 꽁꽁 묶
은 다음에 옆으로 눕혀놨다. 흘러내리는 코피로 기도가 막혀 죽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빌리밥은 입을 꾹 다물고 경계 어린 눈초리로 데미안
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봤다.
 임무를 완수한 데미안이 전날 밤 깔끔하게 개켜놓은 코트를 입고 신발을 
막 신으려는 찰나, 키드의 훔쳐보는 시선을 알아차렸다.
  신발을 신기전에 일단 털어 봐야 할겁니다. 밤새 무엇이 그 안에 집을 삼
았을지 누가 알겠소? 
 키드가 소리쳤다.
 데미안은 뱀이라도 만진 듯 깜짝 놀라며 신발을 떨어뜨렸다. 빌리밥은 숨죽
여 킬킬 웃다가 데미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소년은 데미안이 눈치채기 전에 
미소를 감추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데미안은 신발을 다시 들고 힘차게 흔
든 것으로도 모자라 불가로 다가와 신발 속을 들여다봤다.
  그만하면 신어도 될 겁니다. 
 키드가 말했다.
 데미안은 의심 가득 찬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봤다.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을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소. 이 주변에도 전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
는... 
  됐어, 그만 해. 
 데미안은 얼굴을 찡그리고 득달같이 가방 쪽으로 달려가서 새 양말을 찾았
다. 양말만 신고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었는데... 새 양말을 신으려면 우선 더
러운 양말부터 벗어야 했다. 양말을 벗는 과정에서 발바닥의 물집이 터져 피
가 났기 때문에 새 양말을 신는 일이 곤혹스러웠다. 
 그는 어기적거리며 불가로 돌아갔다.
 아, 키드의 예상보다 코퍼빌에 더 빨리 도착하면 좋으련만. 다른 캠프가 없
는 것을 보아하니, 읍이 가깝다는 증거일 거야.
 불가에 도착한 그는 산처럼 쌓인 핫케이크 접시와 꿀단지를 받았다.
  버터가 상했으니까 꿀을 곁들여 드시오. 이른 아침부터 총질을 한 통에 내 
식욕은 싹 달아나버렸으니, 당신이나 많이 드십시오, 루트리지 씨. 나는 나중
에 육포를 씹을 테니까. 
 데미안은 빈스와 빌리밥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른 손님들에겐 식사 대접을 하지 않을 거니? 
  당연하지요. 저 치들이 아침을 원했다면 권총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옳았
소. 
 키드의 얼굴과 목소리에 비친 혐오감은 그날 그가 비친 최초의 감정이었다. 
최소한 저 소년도 뭔가를 느끼는 모양이로구나, 데미안은 처음으로 키드에게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때, 키드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며 빌리밥에게 다
가갔다.
  이 근처에 말을 숨겨뒀나? 
  저쪽 강가에 묶어뒀습니다. 
 키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강가로 향했다.
 데미안은 아침을 먹는 내내 강도들에게 눈을 떼니 않았다. 빈스가 의식을 
잃은 마당에 빌리밥이 소란을 피울 성싶지 않았지만, 설령 소란을 피운다 해
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데미안이 여분의 말과 가방을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 키
드가 뼈만 앙상한 말 두 마리를 끌고 나타났다. 하지만 데미안이 눈을 동그
랗게 뜬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키드가 주저하지 않고 정신을 잃은 빈스에
게 가서 그의 엉덩이를 힘껏 찼던 것이다. 모카신을 신은 발로 찼기 때문에 
그다지 아프지야 않겠지만...
  너희들처럼 동물을 학대하는 놈들은 용서 못해. 
 소년은 빌리밥을 노려보며 말했다. 빌리밥은 맞을까봐 슬금슬금 뒤로 물러
나 앉았다.
  네 말이 어느 쪽이냐? 
  둘 다 아닙니다. 모두 빈스 것이에요. 
 빌리밥이 뻔한 거짓말을 했다.
  한 마리는 아예 탈 수조차 없고, 또 다른 말은 오래 달리지 못할 거야. 말
굽에 박힌 돌을 빼주는 일이 급선무라구. 그리고 저 불쌍한 놈들을 좀 봐! 
두 마리 모두 너희들의 박차 때문에 피가 날 정도로 상처가 났잖아. 
 빌리밥은 더욱더 뒤로 물러나 앉았다. 하지만 키드는 그 정도로 일장연설을 
끝내고 불가로 다가와 데미안에게 말했다.
  출발할 시간이오. 오늘 우리는 걷는 거나 다름없을 겁니다. 말 한 필이 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절뚝거려서 저놈들을 같이 태워야 할 테니까. 젠장, 
바보 같은 놈들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니까. 
 그 점은 겉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데미안을 가방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간 다음에 새 가
방을 살 수 있으리라. 품질이 좋은 새 옷을 찾아내는 일이야 또 다른 문제이
고...
 그는 재빨리 캠프의 뒷정리를 돕고, 손수 강에서 설거지까지 했다. 다시 캠
프로 돌아왔을 때, 모닥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고, 키드의 말에 안장과 여행 
도구가 실려 있었다.
 데미안은 그때서야 밤색 거세마가 캠프 가장자리에 밤새도록 매여 있었음
을 알아차렸다. 아주 잘생기고 털에 윤기가 자르르 도는 데다 기운이 팔팔한 
것이, 가끔 경마장에서 봤던 서러브레드(순혈종의 말)와 쌍벽을 이뤘다. 볼품
없는 소년이 이런 명마를 가졌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소년은 빌리밥을 말 등에 태우는 중이었는데, 들리는 대화로 봐서 그다지 
행운이 따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봐요, 저는 양손을 뒤로 묶인 채로 말을 탈 수 없어요. 그리고 말 등에 
올라타도 잡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금방 떨어지고 말 겁니다. 
 빌리밥이 말했다.
  잘됐군. 그렇다면 하루 종일 다른 꿍꿍이는 품지 말고 낙마하지 않을 생각
이나 하시지. 나로서는 네가 말을 타든 말든 아무 상관없으니까, 선택은 네
가 알아서 해. 
 빌리밥 혼자 말을 타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데미안은 빌리밥 뒤로 가서 
안장 위로 올려주었다. 빌리밥은 요란하게 고함을 치며 반대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장 위에서 용을 썼다.
 키드는 데미안에게 진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완전 무용지물은 아니군요 하
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빈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놈이 아직 살아 있다면, 녀석도 말안장 위로 올려놓을 수 있소? 
 데미안은 센 주먹을 은근히 추켜세우는 소년의 말에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빈스를 빌리밥 뒤쪽에 태우고 물을 들이부어 정
신을 차리게 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말에 타야 할 차례가 되자, 다른 이들
처럼 그도 말 등으로 던져 올려줄 사람이 있었으면 싶었다. 하기야 그만큼 
체구가 큰 사람도 없지만.
 어쨌든, 평생을 대도시에서 살아왔던 데미안은 항상 마부나 일꾼을 부렸기 
때문에 손수 말을 다뤄본 적이 없었다. 오늘이 사실상 말에 타는 첫날인 만
큼 말의 덩치가 새삼 거대해 보였다. 특히 기운이 팔팔한 밤색 거세마는 더 
그랬다. 
 이미 말 등에서 기다리던 소년이 보다못해 입을 열었다.
  루트리지 씨, 말을 등자에 걸고 힘껏 올라와요. 전에 말을 타본 경험이 없
소? 
  난 항상 바퀴 달린 걸 탔어.  
 키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짐작했어야 했는데... 자, 내 손을 잡아요. 그리고 등자에 건 발에 힘을 주
고 뛰어오르듯 안장에 올라타는 겁니다. 
 역시 말은 행동보다 쉬웠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말에 오를 수 있었
다. 그의 승마 자세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불현듯 빈스에게 동정이 갔다. 
빈스는 양손이 뒤로 묶인 채 친구 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자칫 균형을 잃
는 날에는 낙마를 면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해 데미안은 최소한 키드의 믿음직한 위안이라도 듣는 처지였다.
  정히 필요하면 나를 잡아도 좋소. 하지만 그리 빠른 속도로 말을 몰지 않
을 테니, 말 등에 앉아 있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거요. 
 그들은 즉시 길을 떠났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빈스 녀석이 투덜거리기 시작
했다. 녀석은 양손이 묶인 채 말을 타는 것이며, 콧잔등을 부러뜨린 데미안
에 대해 낯부끄러운 욕설만 골라 입심 좋게 떠들어댔다.
 결국 참다 못한 키드가 말을 멈추고 소리를 빽 질렀다.
  저녁밥을 먹고 싶으면 입다물고 가만히 있어. 
 그러자 빈스가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은 빙그레 웃었다. 이 키드란 꼬마, 보기보다 제법인걸. 그는 소년에 
대한 선입관을 수정했다. 키드는 나이에 비해 유능한데다 지도자적인 자질까
지 갖췄다. 그밖에도 흥미를 끄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데미안은 
묘하게 이 소년이 마음에 걸렸지만, 뚜렷하게 이렇다 할 이유를 찾을 수 없
었다.
 저 험악한 강도들을 누워서 떡 먹듯 싑게 잡아 법의 심판대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키드가 제 직업이나 수훈에 대해 한 말은 공연한 허풍이 
아니었다. 수배범 사냥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능수 능란하게 
무기를 다루는 솜씨에 걸맞은 직업이었다. 위험하지만 이상적인 직업.
 하지만 소년의 개인적인 습관에는 개선의 여지가 절실했다. 그는 강가에 캠
프를 치고도 목욕할 기회를 거부했다. 혹시 데미안이 나타나기 전에 목욕을 
끝냈을까? 하지만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말 등에 진드기처럼 달라붙은 탓
에 어쩔 수 없이 데미안은 소년에게서 풍기는 악취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뻗고 말을 쉬게 할 겸 잠시 쉬는 동안, 데미안은 뒤따라오던 말의 
안장에 고정된 가방을 발견하고 하늘을 날둣 좋아했다. 그는 재빨리 가방에
서 손수건을 꺼냈다. 키드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스리슬쩍 손수건을 코에 
대봤지만, 악취를 피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데미안은 평소 개인적인 문제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뉘엿
뉘엿 저무는 늦은 오후가 되자, 하루 종일 맡았던 악취를 더 이상 참지 못하
고 속마음을 터뜨렸다.
  너는 얼마 동안이나 이 옷을 입고 살았니? 
  꽤 오랫동안. 짐승을 쫓는 데 효과가 뛰어나요. 
 데미안은 소년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그  짐승 이 무엇이냐고 질문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이구, 읍에 도착할 때까지 이 악취를 참아야 하는 내 팔자야.
  오늘밤에 그 코퍼빌이란 동네에 도착하지 않을까? 
 데미안이 희망적으로 물었다.
 키드는 그냥 앞만 보고 대답했다.
  우리 발걸음을 잡아당기는 저 두 녀석만 없다면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마당에? 그러기는 힘들 겁니다, 루트리지 씨. 
 데미안은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시적이지만 가까워진 우리 관계를 고려해서 나를 데미안으로 부르려무
나.  루트리지 씨 는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잖니? 그리고 너도  키드 라
는 호칭 이외에 다른 이름을 가졌겠지?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할 때마다  K.C. 라는 이름을 썼소. 
  뭐의 약자니? 
  약자? 그딴 것은 없소. 맨 처음 현상금을 타기 위한 서류에 그냥 아무렇게
나 쓱쓱 휘갈겼는데, 보안관이 그걸  KC 라고 읽었소. 
  KC? 발음상 그럴듯한 이름이구나. 그렇다면 케이시라고 불러도 될까? 
 소년은 눈에 띄게 몸을 굳혔다가, 다시 긴장을 풀었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케이시는 더 이상 그 화제를 놓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빙그레 
웃었다.
 여자 이름 같아서, 이 아이가 반감을 품은 모양이로구나. 이 나이 또래의 
소년들은 사소한 일에도 하늘이 무너진 듯 민감한 반응을 봉기 일쑤라니까.
 그 다음에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여행길은 길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데
미안은 그 점을 다행스럽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지루하다는 것은 속살과 
치부를 숨김없이 드러내야 하는, 생소하고 위험한 사건이 없다는 뜻이었다.
 일몰을 한 시간 가량 앞두고 케이시는 강가에 여장을 풀고 캠프를 쳤다. 그
는 몇 분내로 모닥불을 피우고 솜씨 좋게 빵 반죽을 만들었다. 하지만 빵을 
굽는 대신 다시 말 등에 올랐다. 마침 데미안은 두 명의 불청객을 번쩍 들어 
안장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순간, 데미안은 버려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을 졸였다.
  저녁거리를 잡는 동안 너무 큰 소리 내지 마쇼. 
 데미안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케이시는 아무 눈치도 채
지 못했다. 그는 이미 저만큼 말을 달렸다.

  -7-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내일 아침에 코퍼빌에 도착하리라
는 사실이 반가웠다. 혼자 여행하는 편이 훨씬 좋았다. 예정에 없던 동행 때
문에 한시도 쉴 틈 없이 방어 태세를 갖추느라 마음놓고 쉴 수 없었다. 강을 
옆에 두고 목욕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생리적인 욕구마저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동반자들은 대로에서 무심하게 소변을 갈기는 반면에 그녀는 은
밀한 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게다가 다들 그녀를 남자로 여기는 마당에 그런 
일로 쑥스러워하거나 짜증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인데. 그렇다고 일부러 작
정하고 남자 행세를 한 건 아니었다. 사실,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소년 
행세를 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당시 케이시는 자기 주장을 가능한 한 빨리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에  편리
함 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을 열렬하게 갈망했다. 머리칼을 어깨 길이로 싹
둑싹둑 잘랐던 이유는 전적으로, 범죄자 추적용 의상과 어울리지 않는 긴 머
리가 원치 않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리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자 의상이 승마에 훨씬 더 적합했기에 지금까지 긴 여행길동안 
애용해왔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몸매를 감추면서 사람들의 오해를 피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은 두툼한 모직 판초였다. 애초에 판초를 선택한 이유 또한 
간단했다. 편리하니까. 재킷을 걸치면 앞자락을 옆으로 제치고 권총을 내야 
하지만, 펑퍼짐한 판초는 무기를 집기에 훨씬 용이했다. 그런 단순한 차이가 
생명을 좌우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키가 훌쩍한 케이시를 소년으로 여기기 일쑤였고, 그녀로
선 그런 착각을 바로잡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공연한 분란을 일으킨
단 말인가. 참 우습게도, 세상은 성인 여성보다 나이 어린 소년을 더 관대하
게 받아들였다. 일부 남성들은 여성을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케이시는 정직한 셈이었다. 제 입으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도록 그냥 놔둔 것뿐이니까. 그
녀를 가까이하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선입관이 바로잡힐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거기
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사냥을 해서 끼니를 이어야 할 처지였는데, 동물들은 인간 냄새를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배운 냄새 은폐술 덕분에 먹이감의 바로 옆
가지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읍에 하루 이상 머무르지 않는 한, 굳이 옷을 빨지 않았다. 그
러나 기회가 날 때마다 목욕을 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순전히 판초 때문이었다. 항상 걸치고 다녔을 뿐 아니라 며칠 전에 
쏟아진 폭우로 푹 젖었기 때문에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행이 없었다면, 냄새가 나든 목욕을 하든 그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았으
리라. 하지만 동행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데미안 루트리지 3세가 캠프로 
걸어 들어온 이후, 부끄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 동부인처럼 그녀의 관심을 끄는 남자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는 극히 이
례적인 존재였다. 큰 체구에 세련되고 멋진 정장을 걸친 데다, 넋이 나갈 만
큼 잘생기기까지 했다. 흑발처럼 짙은 암갈색 머리칼하며 사내답게 불거진 
광대뼈는 그렇다고 쳐도, 오만한 턱선과 짙은 눈썹, 반듯한 콧날과 단정한 
입매는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 없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회색 눈은 케이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그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데미안은 그녀를 싱숭생숭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야릇한 감정까지 불러
일으켰다. 멍하니 그를 향하는 시선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두어 차례 예쁘
게 차려 입은 모습을 그에게 과시하고 싶다는 바보 같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에이, 코퍼빌에 도착하자마자 제 갈 길고 갈 거야. 케이시는 그 점이 반가
웠다. 그처럼 정신 산란하게 하는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지
금까지 잘 해왔다.
 한동안 아버지와 싸운 후에 화를 못 이기고 집을 뛰쳐나왔던 행동이 두고
두고 마음에 걸렸다. 작별인사도 없이, 야반도주를... 
 하지만 매주 어머니에게 전보를 쳐서 안부를 전했다. 부모님에게 공연한 걱
정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집에 돌
아가지 않을 결심이었다. 
 아버지 챈도스는 혼자 힘으로 모진 세파를 이겨냈다. 지금 케이시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남자의 도움 없이, 거친 일을 하면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음
을 증명하고야 말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추적을 당하는 범죄자 같은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두 손놓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지금쯤 그녀를 찾아 나섰을 가능성이 높
고 그 추적의 손길을 피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찾
는 딸의 생김새와 지금의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는 데다, 그녀가 사용하는 
약자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순전히 하늘이 도운 탓이었다. 
사실 두어 명의 보안관만 그녀를  KC 로 알고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키드 라고 불렀다.
 조만간 집에 돌아갈 날이 오리라. 최소한 그런 희망을 품고 코퍼빌까지 힘
든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빌 둘린이 이번 주에 코퍼빌에서 두 곳의 은행을 털 계획이라고 큰소리치
는 말을 엿들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둘린은 현상 수배된 돌튼 도적단
과 한패거리였다. 케이시는 술 취한 그를 쉽게 잡는 대신에 기다렸다가 도적
단을 한꺼번에 소탕하기고 결심했다.
 케이시는 항상 그래왔듯이 목표물에 접근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탐문하고 
옛날 신문 기사를 읽는 등 돌튼 도적단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돌튼 3형제
인 로버트와 에메트, 그래튼은 예전에 아칸소 주의 연방 보안관이었다가 쫓
겨난 몸이었다.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 악당으로 변절했다는 사실을 말하기조
차 남부끄럽지만, 돌튼 3형제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2년 전부터 그들은 오클라호마에서 말 도둑질을 하면 강도짓을 시작했고, 
일당의 우두머리인 로버트가 캘리포니아로 무대를 옮기면서 더 대담한 범죄
에 착수했다. 작년 초에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구간의  서던 
퍼시픽  열차를 털려고 시도했지만, 막판에 금고를 열지 못하는 통에 허탕만 
치고 현상 수배범으로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들은 몸을 사리고 다시 오클라
호마로 도망쳤다. 유일하게 체포된 그래튼은 열차 강도질 도중에 한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로 2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간신히 탈옥해서 형제들과 합류했
다.
 그들은 세를 불렸다.  시꺼먼 얼굴  찰리 브라이언트와 찰리 피어스,  난폭한 
크리크족  조지 뉴콤브와 빌 둘린 등 네 명의 악당까지 새로 가세하여 작년 
5월에 체로키 지구의 와톤에서 산타페 은행을 털었다. 그 당시 희생자는 나
오지 않았지만, 그 일당은 만 달러를 훔쳐서 달아났다. 하지만  시꺼먼 얼굴  
찰리는 그 직후에 연방 보안관 마셜에드 쇼트의 총에 맞아 제 몫을 챙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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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달 하반기, 일당은 도망가는 와중에서도 캔자스와 텍사스 구간의 미주
리 열차를 세우고 만 구천 달러를 노략질했다. 하지만 그들은 훔친 돈을 탕
진할 때까지 휴업하기로 했는지, 그 이후부터 잠잠하다가 지난 6월에 레드락
에서 기차를 털었다. 그리고 마지막 범행이었던 7월 열차 강도에서 한 명을 
죽이고 세명을 부상 입혔다.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코퍼빌에서 한 번에 두 곳씩이나 은
행을 해치울 음모를 꾸몄으니 말이다. 그들의 대담무쌍한 전적을 돌이켜볼 
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케이시는 현장에서 범행을 막고 보상금을 
받을 생각이었다.
 패거리의 한 녀석당 매겨진 현상금과 그 동안  제 주장을 증명 하기 위해 
모아뒀던 돈과 합하면, 애초의 목표액을 초과했다. 그러면 원래 2주일로 잡
았던 가출을 툭툭 털어버리고 금의환향하리라. 뭐, 2주일이 아니라 벌써 여
섯 달이나 지났지만 말이다. 그 길고 긴 여섯 달 동안 흘린 눈물과 기막힌 
사연을 누가 알랴.

  -8-
 예상보다 하루가 더 소요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상대적으로 쾌적한 밤을 보
냈다. 하지만 케이시는 캔자스처럼 북쪽으로 멀리 와보기가 처음이었던지라 
일정이 늘어나리라 미처 예상치 못했다. 또, 코퍼빌에 도착하기 전에 음식이 
바닥날 줄도 몰랐다. 하긴 먹여야 할 입이 셋이나 늘어난 터였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느지막하게 여행길에 올랐다. 밀가루와 통조림이 전날 
저녁거리로 동났기 때문에 그녀는 아침감을 사냥해야 했다. 항상 다음 목적
지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에 충분한 식량을 마련했지만, 이번에는 길 잃은 
동부인과 역마차 강도의 합세를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래서 겨우 끼니를 때
우고 길을 재촉한 끝에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코퍼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꽤 번창한 상업 지역이었다. 케이시는 은행이 두 곳이나 있다는 사
전 지식으로, 번창한 지역이리라는 짐작을 미리 했던 터라, 일행을 이끌고 
주도로를 따라 보안관 사무실로 가는 길에  퍼스트 내셔널 은행과 맞은편의 
 컨던 은행은 물론이고 주변의 지형을 눈여겨봤다.
 인부들이 두 은행 앞을 바삐 움직이며, 말을 묶어두는 말뚝을 임시로 치웠
다. 그 광경에 케이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은행 강도들은 탈주를 염두에 두고 목표물의 정면이나 측면에 말을 세워두
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므로 돌튼 일당이 이곳에 왔다가 말뚝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은행털이를 포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편이 읍을 위해서는 좋겠지만, 수배범 사냥꾼에게는 영 아니었다. 그런 
경우, 케이시로서는 돌튼 일당을 잡기 위해 사전에 입수한 인상착의에 의존
하는 수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케이시는 보안관에게 범행에 대한 정보를 귀뜸할지의 여부에 대해 아직 결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보안관이 모든 공로와 돈을 독차지할 욕심으로 정보
만 가로채고 그녀를 쏙 빼놓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혹은 믿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돌튼 일당은 은행 강도가 아니라 열차 강도
로 악명이 높으니까.
 그렇다고 혼자만 알고 있으려니, 그렇게 많은 수의 범죄자를 한 번에 일망
타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좋아, 일단 보안관을 만나본 다음에 마음을 
정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을 즈음 일행은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말 한 마리에 두 명씩 탄 행색하며, 빌리
밥과 빈스가 꽁꽁 묶여서 질질 끌려가는 꼴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
했다. 보안관에게 확인해본 결과, 두 녀석은 현상 수배범이었고 역마차 습격
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데미안이 시시콜콜하게 그들의 범행과 
전복된 마차, 실종된 마부에 대해 진술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혼선이 빚어졌다. 그야말로 케이시의 짜증을 북돋는 이유 
때문에 다들 데미안을 영웅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건 순전히 그의 체격이 듬
직한 반면, 케이시가 너무 어리다는 사람들의 바보 같은 선입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상황을 바로잡자마자 보안관 사무실을 나갔다. 케이시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할 요량으로 그 뒤를 따라나갔다.
  남은 여행길에 행운을 빕니다. 
 케이시는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최소한 텍사스에 도착할 때까지는 별일 없을 거야. 
  참, 댁은 사람을 쫓고 있다고 했죠. 그 일에도 행운이 따르기를 바랍니다. 
 데미안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도와줘서 고맙다, 케이시. 그날 밤, 네 모닥불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난 
아직도 그 주변을 헤매고 있을 거야. 
 그거야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케이시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손을 뒤로 빼내고 얼굴을 붉혔다. 그의 감촉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는 이미 읍을 둘러보며 쾌적한 숙
소를 찾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럼, 안녕히 가시오. 
 케이시는 마지막 인사를 던지고 재빨리 몸을 돌려 보안관 사무실로 들어갔
다. 이제 저 신출내기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성싶었다. 그는 최고의 호텔에 
머무를 공산이 컸고, 케이시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가장 싼 숙소에 들 테
니까. 그녀는 선술집에서 밤을 보내며 정보 수집을 하고, 그는 극장에-이 지
역에 그런 곳이 있다면-갈 것이다.
 케이시가 보기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서부는 외지인에게 견디기 힘
든 곳이었다.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까? 흥, 배우긴 뭘 배워. 동부인들은 전적으로 다른 종자들이
야.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생존 방법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젠장, 
내가 또 생각조차 말아야 하는 남자를 걱정까지 하고 있네.
 현안으로 돌아가서 보안관에게 일체의 정보를 털어놓느냐의 여부를 결정해
야 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입을 열 기회조차 없었다. 보안관과 그 부하들은 
나이를 거론하며 진부하기 그지없는 훈계를 늘어놨고, 게다가 범죄자들이 잠
들어 있거나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잡았으리라고 자기네들끼리 
찧고 까불었다. 케이시는 그들의 착각을 바로잡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래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족히 이십 분이 걸려, 보안관은 내일 와서 현상금 이백 달러를 찾아가라고 
말했다. 역마차 강도 2인조의 몸값치고는 턱없이 낮은 금액이었지만 빈스와 
빌리밥은 거의 초범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 정보를 제공하느냐 마느냐의 선택권을 앗아
갔다. 밖에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 것이다. 보안관과 부
하들은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일제히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케이시는 온 마음을 다해 돌튼 일당이 들이닥치지 않았기를 기도했다. 하지
만 안타깝게도 그 기도는 이미 물 건너갔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봐서는 
돌튼 일당의 은행털이가 수포로 돌아갔음이 확실했으니까. 

  -9-
 데미안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서 있었다. 다시 강도를 만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한 번 강탈당했던 돈을 또다시! 케이시의 
경고가 토씨 하나 어긋나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빈스와 빌리밥이 훔친 당신 돈은 녀석들의 안장 가방이나 옷 속에 있을 
겁니다. 그걸 지금 찾는 편이 좋을 거요, 데미안. 보안관이 그 돈을 되돌려주
기야 하겠지만, 내 보상금도 최소한 이 주일 후에나 나올걸요. 법적인 절차
니 서류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난 돈 걱정 없어. 언제든지 전신환을 받을 수 있거든. 사실, 읍에 도착하자
마자 은행으로 가서...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요.  
  뭐? 
  그냥 내 말대로 은행을 멀리하도록 해요. 
 그리고 소년은 화제를 바꿨고, 데미안은 빈스의 안장 가방에서 돈을 되찾았
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돈을 고스란히 은행 강도의 손에 건네준 것이다.
 컨던 은행에 들이닥친 세 명의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라이플과 
권총으로 중무장을 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들은 은행 고객과 직원
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위협했다.
 강도 두 명은 복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십대 초반의 젊은 티가 완연했
다. 그리고 까무러칠 만큼 진지했다. 서툰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군, 데미안은 확신했다. 그들은 전적인 협조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 스스럼
없이 살인을 불사할 기세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비협조적으로 나갈 만한 무기가 없었다. 소지하고 있던 여
분의 권총마저 보안관에게 자진 반납했던 공정한 시민 의식을 땅을 치며 후
회했다.
 다시 강도를 만나다니! 한마디로 기가 찼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붐비는 읍 한가운데에서.
 그 소년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휜히 알고 데미안에게 경고까지 
했다. 그런데도 데미안은 케이시가 보기보다 신경질적이고 과잉 방어적이라
고 치부해버렸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그것도 사람들이 도처에 깔린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강도들은 금고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단 일초도 낭비하지 않고 은행 
고객의 주머니를 싹싹 털었다. 그 짧은 시간에 컨던 은행에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창 밖의 인기척을 알아차렸다. 누군가 안을 
엿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단박에 눈치챈 모양이었다. 거리에서 경계령을 
내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강도들은 쥐죽은 듯 얼어
붙었다. 그 중 한 명이 욕설을 퍼부었고, 다른 놈들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
렸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다. 돈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일제히 총을 쏘며 문으로 달려나갔다. 온 거리에 총성이 울려 처
지면서 읍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은행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첫 총소리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데미안은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가서 첫 번째 희생자가 발
생하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마침, 맞은편  퍼스트 내셔널  은행에서 돈 
자루를 걸머지고 뛰어나오던 두 명의 강도 앞을 한 남자가 가로막았다. 그는 
놈들의 라이플을 정통으로 맞고 땅에 쓰러졌다. 뒤를 이어 두 명의 무고한 
시민이 강도들의 탈주로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때, 총알이 데미안의 귀를 간발의 차로 스치고 지나갔다. 콩 볶듯 튀기는 
수많은 통탄 중에서 바로 그 한 발이 그의 성질을 건드렸다. 불행하게도, 솟
구친 분노를 해소할 대상이 없어서 씩씩거리는 마당에, 케이시가 강도들의 
뒤를 쫓아 그의 곁을 달려갔다!
 학살극이 따로 없었다. 케이시가 돌튼 패거리의 말이 묶인, 은행에서 반블
록 떨어진 골목에 막 도착했을 즈음, 소강 상태였던 침묵을 깨고 마지막 총
격전이 시작되었다. 어느 쪽이 먼저 발포했는지 알아볼 시간도 없이 에메트 
돌튼이 공중제비를 돌며 말에서 떨어졌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걸친 총격전은 네 명이나 되는 시민의 목숨을 앗아
갔고, 그 명단에는 그래튼 돌튼과 대치했던 보안관까지 포함되었다. 그래튼 
돌튼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 동네는 죽음의 덫으로 변했다. 강도들은 거의 
말까지 도착했지만 주의의 집중 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버트와 그
래튼 돌튼에 이어 딕 브로드웰과 빌 파워스가 죽었다. 그리고 은행을 털 계
획에 대해 허풍을 쳤던 둘린은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사실, 그날 아침 말이 절름거리는 바람에 그는 뒤에 처졌다. 하지만 그는 
죽은 친구들로부터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하고 그 이후에도 패거리를 모아 
불법적인 행각을 계속했다. 그날 유일무이하게 목숨을 구한 에메트 돌튼은 
부상에서 완쾌된 다음에 무기형을 선고받고 캔자스 주립 감옥에 감금되었다.
 피가 난무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케이시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들을 전부 
살릴 수 있었다. 최소한 다리 부상을 입히는 정도로 사건을 끝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악당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총격전에 휘말린 무
고한 시민의 인명 피해는 속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코퍼빌에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었
다. 그리고 그렇게 했어야 마땅했다. 짐이 초과하지만 않았던들, 어제 저녁이
나 오늘 새벽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데미안과 빌어먹을 역마차 강도들. 
 빈스와 빌리밥, 단 두 사람만으로는 그녀의 발걸음을 그토록 오래 묶어놓지 
못했으리라. 목적지를 빤히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귀찮은 존재에 불과한 녀석
들에게 아침밥을 헤먹이려고 사냥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두 녀석이 
좀 굶는다고, 갈등이 벌어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달랐다. 그처럼 식욕이 왕성한 거구의 남자에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굶으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동부인, 그 말은 케이시
에게 무능한 관광객을 뜻했다. 그를 캠프에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에 대한 책
임을 진 셈이므로 당연히 배를 채워줘야 했다.
 그 같은 대도시 출신은 애당초 서부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옳았다. 하
지만 그는 등을 떠밀려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결단으로 이곳에 오지 않았던
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케이시는 이 모든 재난을 데미안의 탓으로 돌렸다. 
지금 그가 앞에 있다면 당장 쏘아버릴 텐데!
 그런데 바로 그때 데미안이 나타났다...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밀려 가까운 벽에 꽝 내던져졌을 뿐 아니라 멱살을 
잡혀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려졌다. 다른 주먹이 뒤로 젖혀졌다가 얼굴을 향
해 뻗어왔다. 조만간 머리가 산산조각 날 판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도움을 요청하는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눈 한번 깜박거리
지 않았다. 데미안이 그녀 또래의 소년에게 손을 대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
고, 그 믿음은 보답을 받았다. 그는 혐오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내려놓더니 
그 꿰뚫는 듯한 눈망울로 노려봤다.
 대관절 왜 이러는 걸까? 그 이유를 몰랐지만 한번 치솟은 분노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리고 케이시는 성질이 났을 때 그와 달리 망설이는 타입이 아니었
다. 단 일 초도 거리낌없이 주먹이 그의 턱에 꽂혔다. 그곳은 원래 노렸던 
부위가 아니었지만, 데미안의 키가 원체 튼지라 팔이 닿지 않았다. 어쨌든, 
한 대 맞은 그가 목이라도 졸라버리겠다는 듯이 다시 손을 뻗었다.
 케이시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상태로 동작을 멈췄
다.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제 그녀가 칼자루를 쥐게 되니 화가 씻은 듯 사라졌다. 
아마 왼손으로 그를 한 대 친 게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황에서도 밥줄이나 다름없는 오른손을 아꼈다. 
  이게 공평한 짓이냐? 
 그가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댁의 체구를 고려하면, 그렇소. 
 케이시의 차분한 어조가 그의 화를 돋웠다.
  너는 저 강도들이 은행을 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렇지? 
 케이시는 말을 돌렸다.
  우선 여기에서 벗어납시다, 신출내기 양반. 
 그들은 동네 어귀에 모여든 주민 사이를 뚫고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그녀가 
데미안의 등을 떠밀어서 들어간 근처 상점의 주인마저 다른 사람들처럼 총
격전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가게 안은 한산했다.
 케이시가 문을 닫자마자, 그는 질문을 되풀이했다.
  너는 다 알고 있었지? 
 지금에 와서 사실을 부인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였
다. 하지만 그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2주일 전에 남쪽의 한 술집에서 돌튼 일당의 패거리를 봤소. 그를 잡으려
다가 우연찮게 계획을 엿들었소. 
  여기 은행을 털 계획을? 
  그래요. 
  그 녀석이 남의 귀에 들어갈 만한 장소에서 그런 계획을 떠벌렸단 말이
니? 
  그는 엿듣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소. 난 작정하면 쉽게 인기척을 감출 수 
있으니까. 게다가 그날 밤 덕이 될 정도로 술에 취했기 때문에 코에 파리가 
붙어도 몰랐을 거요. 
  너는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히 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망할, 나는 저 은행에서 죽을 뻔했단 말이야. 어젯밤에 미리 말해줄 수 없었
냐? 
 그는 기분이 상해서 따져 물었다.
  나는 그런 정보를 보안관에게만 전하오. 그리고, 댁이 내 경고대로 은행에 
가지 말았어야지, 거길 왜 갔던 거요? 
 데미안이 경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나는 은행에 간단한 볼일을 보러 갔어. 그저 여기에서 전신환을 받을 수 
있을지 알고 싶었을 뿐이라구. 그리고 지금은 정말 그래야 할 판이야. 저 강
도놈들이 내 돈을 다시 훔쳐갔단 말이야. 
  그야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까. 
 케이시는 눈곱만큼의 동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다른 말도 하리다. 저 거리에는 죽지 않았어야 할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나뒹굴고 있소. 내가 어제 도착했더라면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
지할 수 있었다, 이 말이오. 그런데 내가 왜 그러지 못했겠소? 순전히 댁 때
문이지. 게다가 저 일당에게 걸린 현상금 천 달러까지 날아갔소. 
  이봐, 저들의 죽음이나 현상금을 놓친 데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지 
마. 네가 총 한번 쏘지 않고 저놈들을 몽땅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니? 흥, 
나로서는 심히 의심스런 일이로구나. 
 케이시가 한숨을 쉬었다.
  내 일이 그것이잖소, 데미안?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요리조리 도망가는 수
배범의 뒤를 추격해서 그들을 잡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패거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수록 더 좋단 말이오. 그리고 이미 총구가 겨눠진 상황에서 무기를 
꺼낼 바보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소? 그야말로 장의사와 단독 회견을 
하려고 환장한 짓이지. 
  사지에 몰리면 그렇게 해. 너야말로 망상에 사로잡혔구나. 사실, 난폭한 범
죄자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잡을 생각을 했단 것 자체가 폭탄을 지고 불 속
으로 뛰어드는 짓이야. 그러니, 오히려 내가 그런 시도를 원천 봉쇄하고 너
를 살린 거나 다름없지. 
 케이시는 기가 막혀 눈동자를 굴렸다.
  해보지도 않은 일의 결과를 누가 알겠소? 확실한 사실은 내가 이 직업에
서 손을 뗄 만큼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거요. 내가 마지
막으로 충고하리다, 데미안. 집으로 돌아가슈. 댁은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
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소. 나에게서 뚝 떨어져요.  

  -10- 
 데미안은 다음 며칠 동안 말 그대로 열을 식혔다. 발바닥 물집을 치료한다
는 명목으로 신발마저 멀리했기 때문에 가만히 누워서 식사까지 배달시켜 
먹었다. 또한 의사의 왕진을 청하여 머리 상처를 진찰한 결과, 그 부상이 실
로 꿰매야 할 정도로 심각했지만 이미 아물고 있었으므로 굳이 손을 댈 필
요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호텔에 죽치고 있는 것은 고된 일이 아니었다. 객실은 그이 높은 수준에 미
치지 못했지만, 서부로 여행을 떠나온 이래 묵었던 다른 곳보다 좋은 편에 
속했다. 그리고 이런 서부의 촌구석에 달리 구경할 곳도 없었다. 하지만 이
곳을 떠나기 전에 중산모를 살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라이플도. 다시는 
무기 없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리라. 그러나 쇼핑이야 다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여행을 계속할 준비가 될 때까지 얼마든지 뒤로 미룰 수 있었다.
 호텔 방을 지키면서, 미주리 이남 지역의 수배자 명단을 다시 훑어봤다. 돌
튼 일당이 한 명도 빠짐없이 그 명단에 올라 있었다. 코퍼빌 읍의 은행 습격
에 가담하지 않았던 그 패거리 중 일부가 언제 제삿날을 맞을지 모르는 일
이었지만, 최소한 돌튼 3형제는 목록에서 영원히 삭제되었다.
 데미안은  추적 후유증에서 회복되는 동안 많은 생각을 거듭했고, 케이시와
의 험악한 이별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참 마음에 드는 소년이었는데. 케이시
는 은행 강도가 출몰했던 그날 그에게 마지막 충고를 남기고 매몰차게 떠나
버렸다. 그 이후로 통 보지 못했다. 과연 데미안이 그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소년을 패해 다녔기 때문에 그를 다시 보지 못했을까? 그게 아니었다. 호텔
에만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케이시의 행방을 몰랐을 뿐이다.
 이런저런 일을 고려한 데미안은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절망적인 지경에
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케이시는 큰 힘이 되어줬다. 하지만 은혜를 갚기는
커녕 그 어린것을 반쯤 죽여놓으려고 주먹질을 할 뻔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할 도리가 아니었다.
 마음속에서 케이시의 말 한마디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요리조리 도망가는 수배범의 뒤를 추격해서 그들을 
잡는단 말입니다. 
 데미안은 이제 헨리 커루더스를 잡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는 것뿐이라고는 커루더스가 마지막으로 거쳤던 읍 이름이 전부였다. 하지
만 케이시 같은 사람은 그런 사소한 단서에서 헨리를 찾아낼 것이다. 그런 
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소년이니까.
 소년을 고용하면 어떨까? 그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케이시가 똑 부러지게 거절할 것 같았다. 데미안 자신은 뭐
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데 익숙한 사람인데다, 여행을 나선 다음부터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마당에 얼굴을 마주 보며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상식이 승리했다. 케이시는 시간 낭비를 막아줄 텐데, 일단 물
어본들 손해볼 일은 없잖은가? 거절당하면 다른 수배범 사냥꾼을 구해보자.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케이시에게 마음이 쏠렸다. 일단 소년과 친해진데다 
소년의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디서 굴러먹
었는지 모를 말 뼈다귀 같은 놈들보다 왠지 케이시에게 믿음이 갔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이미 기회를 잃었을까봐 두려웠다. 케이시가 읍을 떠
났으면 어쩐다? 아무튼 소년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결국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행운의 장소는 읍 변두리에 위치한, 가장 허름하고 값싼 여인숙이었다. 단
정치 못한 주인이 일충에서 데미안을 맞이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중에 계
단이 너무 삐걱거려 도중에 무너져 내리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놀랍게도 방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
에 안으로 들어가서 소년을 기다렸다.
 데미안이 케이시를 찾으리란 기대를 버릴 무렵, 그 문제의 소년은 벽장처럼 
작은 욕실에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나왔다. 척 보아하니 머리를 
감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데미안의 노크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밖에. 어쨌든 
데미안은 판초를 걸치지 않은 소년의 모습을 처음 봤다.
 열대여섯 정도의 케이시는 생각보다 훨씬 말랐고 어깨는 빈약하기 그지없
었다. 펑퍼짐한 셔츠를 청바지에 구겨 넣은 허리는 어찌나 가는지 뭇 여인네
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심지어 발조차 작고 섬세했다. 
 막 씻고 난 케이시는 거의 소녀에 가까웠고, 그에 필적할 만큼 예뻤다. 은
행 강도가 출몰했던 그날, 데미안이 마음먹었던 대로 소년의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먹였다면 그 예쁘장한 얼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흠이 남았으리라.
 소년은 침대에 앉은 데미안을 알아보고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 금색이 도는 갈색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댁이 이곳에 어쩐 일이오? 
  문이 열려 있었어. 
  그게  안으로 곧장 들어오십시오 라는 표지라도 된답디까? 
 케이시는 냉소적으로 대답하며 수건을 목에 걸고 그 양끝을 잡았다.
  아니면 댁은 워낙에 다른 사람의 방에 밀어닥치는 버룻이라도 있소, 데미
안? 
 데미안은 얼굴을 붉혔다.
  아래층 주인 아줌마 말이, 네가 여기에 있다고 했어.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응답이 없기에 괜찮은지 보러 들어온 거야. 
  난 괜찮소. 하지만 댁이 나가주면 더 좋아질 거요. 
  썩 극진한 대접은 아니구나, 케이시. 
  최소한 댁에게 총을 쏘지 않았으니 극진한 대접이고말고. 
 데미안은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었다. 케이시는 토라진 여인네보다 훨씬 
더 신경질을 냈다.
  저번 내 행동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어. 내가 성질을 부렸음을 인정하마. 
  이미 알아차린 바요. 
  그런 일은 다시 없을 거야. 
  댁이 성질을 부리건 말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더 이상 댁 주변에 서성
대며 그런 꼴을 보지 않을 테니까. 이제 댁의 사과가 끝났으니, 한마디만 더 
하겠소. 문은 저쪽에 있수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케이시의 태도는 영 비협조적이었다. 감정을 효과
적으로 숨기는 소년의 표정에 데미안은 슬슬 약이 올랐다. 현재 케이시의 권
총과 권총집은 의자에 걸쳐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소년은 비무장 상태였
다.
  떠나기 전에 너에게 하고 싶은 제안이 있어.  
 데미안이 말했다.
  흥미없수. 
  거절하기 전에 일단 들어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제안이야. 
  그래도 관심이 없다면? 
 데미안은 그 대답을 무시했다.
  나는 너를 고용해서 살인자를 찾고 싶다. 
 케이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데미안, 내가 고용될 사람처럼 보이슈? 난 그런 제목이 아니오. 나는 추적
하고 싶은 놈들을 직접 골라잡아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닦달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고용주에게 얽매이지 않는 깨끗
하고 단순한 일만 한다, 이겁니다. 
  천 달러를 주마. 
 그 말에 소년의 무심한 표정이 흔들렸다. 케이시는 두 귀를 의심하는 눈치
였다. 데미안이 제시한 금액은, 케이시가 공중에 날려버렸다고 주장했던 현
상금과 똑같은 액수였다.
  미쳤수? 
 소년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아니, 그저 부자일 뿐이야. 
  돈을 주체할 수 없어서 펑펑 써버릴 만큼 부자인 게로군. 
  그거야 네 관점에 달렸지. 케이시, 나는 우리 아버지를 죽인 놈이 정의의 
심판을 피해 자유롭게 활개친다고 생각할 때마다 돌아버리겠어. 그리고 이미 
사설 탐정들에게 수천 달러나 쏟아 부었지만, 알아낸 거라고는 살인자가 텍
사스의 포트워스에 있었다는 정도야. 그 뒤로 녀석의 흔적을 놓쳤기 때문에 
내가 직접 찾아내려고 이렇게 나선 거야.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서 그놈을 
빨리 찾아준다면 천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봐. 
 케이시는 침대에 앉아 잠자코 마룻바닥만 바라봤다. 데미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디 소년의 정의감이 발동하여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케이시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댁에게 정직하게 말하겠소. 천 달러나 받지 않고도 그 일을 해줄 사람을 
최소한 열댓 명쯤 알고 있소. 다들 뛰어난 추적자들이오. 그 다음에 댁이 말
만 하면 살인자를 처치해줄 직업 총잡이들도 열댓 명쯤 되오. 
  지금 네가 지적한 그 논리 때문에 내가 너를 고용하려는 거야. 내가 이 지
역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노려 네가 나를 우려먹지 않으리라 믿고 있거든. 너 
이외에 내가 알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러니 지금 그 제의
는 오로지 너에게만 해당되는 거야. 
 아까보다 더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는 침묵이 흘렀다. 케이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더 이상 소년을 밀어붙
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렇
지 않다면, 돌튼 패거리의 현상금이 날아갔을 때 그토록 노발대발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케이시가 입을 열었다.
  좋소, 나에게 그 살인자에 대해 아는 바를 다 털어놔요, 
 데미안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가는 길에 말해줄게. 
  지금 뭐라고 했소? 
  나는 너와 함께 갈 거야. 
  염병할! 
  그게 거래 조건이야, 케이시. 나는 그곳에서 놈의 신분을 확인하고... 
  죽이겠다? 
 케이시는 실눈을 뜨고 데미안의 말을 잘랐다.
  지금에야 댁의 의도를 알겠소, 하지만 내가 멀거니 서서 댁이 비정하게 그
놈을 죽이는 꼴을 보리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하는 편이 좋을 거요. 
  그게 네 직업의 불문율 아니었니? 현상 수배범 전단에  죽이거나 산채로 라
는 문구는 있어도,  죽음 에 대한 네 생0각 여부는 적혀 있지 않던데. 
  내 나름대로 규칙이 있소. 그리고 죽음은 그 목록에서 제외되었소. 
  그래, 네 사업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알아차렸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
어. 놈이 특별한 도발을 하지 않는 한, 죽이지 않을 거야. 하기야 그 특별한 
도발을 열렬히 바라지만 말이야. 어쨌든 나는 녀석을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
들 생각이야. 누군가가 죽음보다 더 지독한 처벌을 원할 거야. 
  지금 그 말을 각서로 쓰겠소? 
  꼭 그래야 한다면. 
  좋소, 내일 아침에 출발합시다. 당신은 말 한 필을 구해서... 
 데미안이 다음 말을 잘랐다. 
  시간을 절약하는 의미에서 기차를 타고 갈 예정이야. 내가 기차표 값을 비
롯한 일체의 여행 경비를 대마. 
  내 경험에 의하면 기차가 항상 빠른 건 아니더군요. 하지만 댁 마음대로 
하시구려. 

  -11-
 케이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유혹에 넘어간 자신을 꾸짖었다. 다시 데미안 
루트리지에게 발목을 잡히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를 위해 살인자를 찾는 것
과 그와 동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그가 주변에 있을 때 어떤 
어려움이 발생하는지 속속들이 아는 몸이 아닌가.
 그는 병아리처럼 모든 걸 대신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은 씻은 듯 사라지고 지진이라도 만난 듯 
뒤흔들렸다. 데미안은 그녀에게 익숙지 않은 감정이 들게 만들었다. 젠장, 그
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생각한 이후에도 그에 대한 상념으로 머리가 빠개질 
뻔했는데.
 하지만 한 번에 천 달러라는 거액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보통 수배
범을 잡을 때엔 위험이 뒤따랐지만, 이번 일은 거저먹기나 다름없다. 뭐니뭐
니해도, 살인자는 동부인이 아닌가? 위험해봤자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일은 보상에 비해 턱없이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데미안이 돈
을 헛되이 내버리든 말든,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케이시로서는 이번 일에 
따르는 부정적인 면만 처리하면 만사 오케이인데..., 아, 그 시련이 내일 당장 
시작된다는 게 문제였다.
 케이시는 데미안이 지시한 시각에 정확하게 기차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는 찾기 쉬웠다. 세련된 정장과 제대로 햇빛을 가려줄 것 같지 않은 우스꽝
스러운 모자를 걸친 채, 아픈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게다가 여행가방과 라이플까지 들고 있었다. 총이 장전되지 않았기를, 저 
남자는 괜히 총을 만지작거리다가 제 발등만 쏘아 맞힐 위인이야.
  넌 늦었어. 
 그것이 데미안의 환영의 말이었다.
  지금은 정각이오. 
 그녀의 반박에, 데미안은 더 이상 헛된 말싸움을 하지 않고 기차 쪽으로 갔
다. 케이시가 뒤따라오리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그 자리
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기차를 살펴보고 소리쳤다. 
  이봐요, 이 기차에 가축 운반 차량이 없잖소! 
 데미안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축 운반 차량이라니? 
 케이시는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내 말을 뒤에 남기고 떠나리라 생각하셨소, 신출내기 양반? 
 데미안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창피했다. 소년의 말
에 대해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만 해도 승마를 해보
지 못한 사람으로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말까지 운반할 수 있는 기차를 
타려면 최소한 일 주일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곧 돌아오마. 
 그리고 몇 분 뒤에 돌아와서 케이시에게 입을 열었다.
  역무원들이 가축 운반 차량을 달 거야. 
 케이시는 박장대소를 하려다가 미소만 지었다.
  한재산 들었겠네요. 
 데미안을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부끄러웠다. 기차는 여분의 차
량을 잇느라고 출발 시간을 넘겼다. 열차 운행 시간 준수를 생명처럼 여기는 
기관사들의 신조를 바꿔놓을 정도라면 케이시의 생각이상으로 데미안이 돈
푼 꽤나 쓴 게 틀림없었다.
 마침내 기차에 오르고 나서, 케이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호화
스런 기차는 생전 처음이었다. 호화스러운 동부식 특별 차량으로 승객이라고
는 데미안과 케이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데미안이 여분의 돈을 내고 북부
에서 이 차량을 임대해 왔으리라.
 얼마 안 있어, 데미안은 하루에 무려 50달러씩이나 내고 이 차량을 임대했
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이미 일반 열차의 딱딱하고 불편한 좌석을 경험했던 
그로서는,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 북부까지 길고 긴 여정동안 누릴 수 있는 
편안함에 비해 그 정도의 경비야 새 발의 피였다. 
 케이시는 그런 논리에 불평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지난 6개월 동안 타봤
던 기차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데미안에게 동의했다.  
목장에서 성장했기에 말을 타고 야외를 달리는 편이 훨씬 좋았지만, 별 대안
이 없는 상황에서는 풀먼식(침대 설비가 있는 호화 차량)특별 차량이 최고의 
교통 수단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뉴욕을 떠날 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데미안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이런 개인 차량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업상 뉴욕
을 떠날 때마다 그걸 이용했단다. 거기에는 대형 침대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집이나 다름없이 쾌적했지. 그 기차로 서부 여행을 할 생각을 미처 못했던 
점이 정말 유감스럽구나. 
  여기에는 침대가 없소? 
 케이시는 슬쩍 말은 꼬았다.
 그는 그 말에 담긴 냉소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 하지만 기차가 밤에 정차하지 않고 달릴 때에도 여기에서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좌석이 편안하단다. 그에 배해 일반 차량의 그 딱딱한 죄석은 
땅바닥이나 다름없다구.
  그거야 댁이 땅바닥에서 자는 걸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에 달린 거 
아니겠소? 
 그 말에 데미안은 케이시를 째려봤다.
  너는 그 편이 좋은가보구나? 
 케이시는 벨벳으로 덮인, 푹신푹신한 좌석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씩 웃었
다. 바짝 약이 오른 데미안이 혐오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데미안, 나는 목장에서 자랐소. 모닥불 옆에서 밤을 보낸 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예요. 
 케이시의 가장 좋은 추억은,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야외에서 보내며 아버
지에게 삶에 보탬이 되는 지식을 얻었던 그때였다. 하지만 데미안에게 고아
라고 말해뒀으므로 그런 추억담을 삼갔다.
  그럼, 수배범 추적만큼이나 목장 일을 잘 알겠구나? 
 데미안이 아무런 복선 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목장 일이라면 속속들이 알고 있수다. 
  그 일을 꽤 즐겼던 모양인데, 왜 훨씬 위험한 현상범 추적으로 전업했니? 
  훨씬 위험하다? 그 의견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군요. 
 케이시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 생각에는... 
  이봐요, 댁이 소 근처에나 가봤수? 총잡이에게야 총으로 맞서면 그만이지
만, 소에게는 대책이 없단 말이오. 수소가 덤벼들거나, 가축들이 우르르 이동
하기 시작할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거든요. 
  하지만 네가 그 편이 더 좋다면 왜...? 
 케이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해야 할 일을 다 끝내는 즉시 목장으로 다시 돌아갈 거요. 
  어떤 일인데? 
  데미안, 댁은 질문이 너무 많은 게 탈이오. 
 데미안은 싱긋 웃었다. 
  이 정도야 약과지. 우리가 여러 날 동안 함께 있을 거라면 서로에 대해 더 
잘 아는 편이 좋지 않겠니? 
  댁이 나에 대해 알아야 할 건 내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입니
다. 자, 이제 댁이 잡고 싶은 녀석에 대한 말이나 해봐요. 
 그다지 길게 설명할 거리가 없었지만, 데미안은 탐정들이 알아낸 모든 정보
를 샅샅이 털어놓았다. 헨리 커루더스를 아는 모든 이들, 그의 늙은 고모와 
동료와 이웃들은 그의 범행 사실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사람을 죽
였다는 사실은 고사하고 회사에서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이란 사람을 극적으로 바꿔놓는 힘을 지녔다. 케이시는 그 사실
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그 좋은 본보기가 아닌가. 그리고 하수인 두 
명의 자백이나 커루더스가 아무 말도 없이 서부로 도망갔다는 점, 게다가 장
부에 드러난 명백한 횡령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그 사람 같은 인상 착의는 찾기 쉬워요. 
 데미안의 설명이 끝나자, 케이시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 전에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소. 
 데미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지금에도 그가 무고하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그 같은 사람이 저지를 범행이 아닌 것 같아서. 더
구나 내가 다뤄왔던 범인의 전형적인 타입도 아니오. 그런 놈들은 대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범행 사실이 너무 자명하단 거요. 그러므로 내가 그
들을 죽인다 쳐도, 워낙 그 죄가 확실하기 때문에 괜한 죄책감이나 찜찜한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소.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했잖니?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항상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오. 그런 경우, 놈들의 범
행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목격자의 진술과 재판 기록들이 내 살인의 근거
가 되어줬을 거요. 하지만 이런 경우가 있었소. 한 증인이, 호러스 존슨이라
는 녀석이 자신의 형제를 쏘아 죽였노라고 주장했소. 그 증인은 읍의 유지였
고, 존슨은 그곳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방방곡곡에 수배 전단이 나붙었소. 하
지만 녀석의 뒤를 쫓는 과정에서 그의 모친과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본 결과 
아무래도 수배범보다 그 증인이 범인이 것 같은 감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 
증인을 불러 사건을 캐물었더니, 결국 자신이 동생을 쏘아 죽였노라고 범행 
일체를 자백하기에 이르렀소. 
  와, 굉장한데. 네가 무고한 사람을 수배범 사냥꾼의 총탄에서 구해낸 셈이
로구나, 네가 그렇게 철저한 줄은 미처 몰랐어. 
 케이시는 얼굴을 붉히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경험담을 말한 이유는 그를 
감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주장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난 그저 커루더스의 항변을 먼저 듣고 싶은 이유를 설명한 거요. 
  하지만 이번 범행에는 목격자가 있어. 두 명의 하수인들이... 
  데미안, 돈을 받고 살인을 저지른 자들은 목격자가 아니라 공범자요. 그리
고 이 세상에 양심적이고 정직한 살인자가 있을 성싶소? 가령 그 하수인들
이 모종의 이유로 커루더스에게 앙심을 품고 살인의 배후 인물로 그를 지목
했을 가능성도 있잖소. 커루더스가 바로 그런 이유에서 도망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지만 횡령금은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야. 
  그건 그래도 그를 발견한 다음에 일단 동기를 물어봐도 큰 해가 없잖소? 
  그래, 일단 그놈을 잡은 다음에 네 마음껏 요리하려무나. 

  -12-
 포트위스까지는 당연히 무사 안일한 여행길이야 했다. 하지만 케이시와 데
미안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단순하고 간단한 행운이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는 의견에 동의했다. 사건은 텍사스 국경을 몇 마일 앞둔 지점에서 터졌다. 
하마터면 기차가 탈선할 뻔했지만 노련한 기관사는 없어진 철로 바로 앞에
서 가까스로 기차를 세웠다. 그 갑작스런 정지로 앞 차량의 승객들이 좌석에
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케이시는 특별 차량의 푹신푹신한 좌석에 파묻혀 있
었기 때문에 그런 불상사를 면했다. 그녀는 데미안의 안전을 확인한 다음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빠진 철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저편의 우거진 나무 
뒤에서 무기를 소지한 일당들이 기차를 향해 달려오는 광경은 놓치려야 놓
칠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데미안에게 말했다. 
 힘 빼요. 열차 강도에 불과하니까. 
 데미안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동그래졌다.
  또 강도 떼가 나타나? 지금 농담하는 거지?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주렴. 이
렇게 빨리 다시 강도를 만나다니 정말 드물고도... 
  이 지역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오. 
  젠장,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이야? 
 그가 노발대발했다.
  이 지역은 항상 무법자들을 꾀는 꿀단지였소, 데미안. 한 2년 전, 체로키족
이 백인 정착민을 위해 땅을 팔았을 때야 이 지역의 절반이 하나의 주로 승
격되었단 말이오. 그러니 나머지 반은 여전히 인디언 땅이오. 
  인디언 지역? 왜 그 말은 이제야 하는 거야? 
  왜요? 그들은 온순한 인디언들이오. 정부에서 인디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
켰지만, 백인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그들을 아무 횡포도 부리지 않았소. 
특히 텍사스와 맞붙은 이곳은  임자 없는 땅 으로 알려졌소.  
  임자 없는 땅? 
  즉, 백인이나 인디언의 관할이 미치지 않는 무법자의 천국이란 뜻이오. 그
래서 여전히 범죄자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은신처를 두는 거요. 최근 2년 사
이, 정부가 이 지역의 안전을 보장하고 새로운 정착을 후원한다고 해서 무법
자들이 두손들고 쫓겨날 턱이 없잖소. 
  그런데 왜 그 말을 전에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야? 
 케이시는 어깨를 들썩인 다음에 씩 웃었다.
  말할 필요가 없기를 바랐으니까. 댁의 생각과 달리 열차 강도들이 매일 출
몰하는 건 아니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산출한 통계는 지금 그 주장과 딴판이야. 
 데미안은 차량 한구석에 세워뒀던 라이플로 향했다.
 케이시가 인상을 썼다.
  지금 뭘 하려는 거요?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케이시를 바라봤다.
  이번엔 내 돈을 지키고야 말 거야. 
  오히려 죽음을 부를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군요. 
  내 의견도 그래. 
 하지만 그 말은 데미안의 말이 아니었다. 복면을 한 남자가 케이시의 말을 
엿듣고 막 문으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목숨은 구할 거요, 신사양반. 
 데미안은 우뚝 멈춰 섰지만 좌석으로 돌아가 앉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분기탱천한 기색이었다. 지금 이 차량으로 들어온 노상강도가 대단히 신경질
적이고 어려 보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데미안의 꼴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
다. 그 청년은 초범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저 몸집 큰 친구가 너를 덮치지 않을 테니까, 바보 같은 짓은 하지마. 
 케이시가 말했다.
 그녀는 강도를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은 데미안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
슨 말로도 강도의 불안을 달래주지 못했다.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권총 든 
손을 바들바들 덜면서 데미안과 케이시를 신경질적으로 번갈아 봤다.
 그는 겨우 용기를 불러모아 명령했다.
  가진 돈을 전부 내놓으면, 순순히 물러가겠다. 
  돈은 그냥 두고 물러가는 편이 좋을 거다. 
 케이시가 차분하게 제안했다.
  왜? 
  그 편이 피를 보지 않을 테니까. 
 케이시는 강도가 데미안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모습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몸집 큰 동부인이 더 위험 인물로 보였으리라. 하지만 무시당했다는 점에 대
해 화를 내 지 않고 그 틈을 이용해 쥐도 새도 모르게 권총을 뽑았다.
 이번이 벌써 며칠 사이에 강도를 맞는 두 번째 불상사였기 때문에, 케이시
가 총을 쏜 이유는 적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위한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
었다. 녀석이 각고의 노력을 거쳐 왼손잡이가 되지 않는 한, 두 번 다시 무
기를 들지 못하도록 놈의 오른손을 정통으로 쏘아 맞혔다.
 놈의 무기가 부드럽게  툭  소리를 내며 카펫이 깔린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사방에 피가 튀었다.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 나오더니 구슬픈 신음으로 이어
졌다. 복면 위로 드러난 눈동자는 공포와 고통으로 물들었다. 놈은 다른 손
으로 절단된 손목을 가슴팍에 꼭 잡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케이시의 
권총은 흔들림 없이 계속 그를 겨눴다.
 케이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바보들이란 몸에 이로운 충고를 무시하기 
마련이라니까.
 그녀는 버럭 고함을 쳤다.
  당장 꺼져! 
 그는 즉각 그 말에 따랐다. 하지만 케이시는 뒤통수에 대고 다시 소리질렀
다.
  그리고 다른 직업을 찾아봐, 카우보이. 너에게 이 직업은 죽음과 직통선이 
될 거다. 
 워낙 놀란 토끼처럼 빨리 달아났으므로, 그는 그 말은 미처 듣지 못했을 것
이다. 케이시는 창문으로 가서 녀석이 패거리와 함께 앙갚음에 나서는 대신 
말을 집어타고 달아나는 광경을 확인했다. 녀석은 이미 말꼬리를 휘날리며 
수풀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다른 강도들도 열차에서 튀어나와 같은 방향
으로 향했다. 
 그들이 겁에 질린 동료의 비명을 듣고 도망가는 건지, 아니면 노략질을 끝
내고 후퇴하는지의 여부는 오로지 다른 승객들만이 알 것이다.
 바로 그때, 귓전을 때리는 총소리에 케이시는 없는 애까지 떨어질 뻔했다.
  도망가게 내버려둬요. 
 데미안은 그녀에게 살기 등등한 시선을 던졌다.
  개똥같은 소리... 
  그들은 일자리를 잃은 젊은 목동들에 불과해요. 
  저놈들은 열차 강도들이야. 
 그는 다시 총을 쏘며 반박했다.
  그리고 한마디해두겠어. 너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스물일곱 살이나 먹은 성인이야. 그런 내가 쥐방울만한 어린아이의 보
호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라구! 그런 일은 다시 없을 거야. 
  지금 뭐라고 했소? 
 케이시가 긴장된 어조로 따졌다.
  내 말을 들었을 텐데. 나는 얼마든지 내 한 몸을 지킬 수 있어. 지금부터는 
이런 불유쾌한 상황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내가 결정을 내리마. 
 케이시는 어깨를 들썩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제 한 몸을 지키는 꼴을 보
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라이플을 쏘아댄들 뭐든 맞힐 성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탄약을 낭비하는 게 아닌 이상 알 바 아니었다. 케이시는 그가 라이
플을 제대로 잡는다는 사실조차 신기했다. 최소한 개머리판을 어깨에 고정시
키지 못해, 자신의 발등이나 그녀를 쏠 염려는 없었다.
 네 발을 연거푸 발사한 후에 그는 한풀이를 마친 듯 케이시에게 고개를 돌
렸다. 하지만 불평불만을 여전했다.
  넌 녀석들 중 한 명을 잡았다가 그냥 놔줬어. 도대체 언제부터 네가 범법
자 해방을 주창하게 된 거냐? 
  딱 한 명의 살인자를 추적하는 일에 고용된 다음부터요. 댁은 저 녀석들을 
쫓아가는 일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들지 않소이까? 
  죽어 마땅한 놈들을 처치하는 데 일 분이면 족해. 
 케이시는 동부인다운 언사에 놀라는 대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댁의 총알이 빗나간 걸 다행으로 여기슈. 지금이야 화가 나서 그런 말
을 하지만, 진짜 살인을 하면 괴로워하며 땅을 치고 후회할 테니. 
 그 말에 데미안은 고개를 다시 창문으로 돌리고 만족에 찬 웃음을 지었다.
 케이시는 벌떡 일어서서 창 밖을 확인했다. 그가 정말 강도를 쏘아 맞혔을
까? 하지만 그 즈음 열차 강도들은 수평선상에 아른거리는 하나의 점에 불
과했고, 땅에 널브러진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케이시는 그의 수에 넘어갔음
을 깨닫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해서 그를 만족시켜줄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다른 말을 했다.
  나는 철로의 손실이 어는 정도인지 보러 가겠소. 
 케이시는 문 쪽으로 향하다, 데미안의 다음 질문에 발길을 멈췄다.
  무슨 근거로 녀석들을 카우보이라고 생각했지? 
  녀석의 손에는 굳은살이 잔뜩 잡혀 있었소. 목장 일을 꽤 오랫동안 한 목
동들은 다 그런 법이오. 그리고 그놈은 잔뜩 얼어 있었소. 아마 경험이 없거
나.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서 술김에 일을 저질렀을 거요. 
  대단한 추측이구나, 케이시. 
 데미안이 비꼬았다.
  내가 항상 옳다고는 할 수 없소. 하지만 틀린 적도 드물지요. 
 케이시는 열차에서 내렸다. 뒤를 따라 내려온 데미안은, 그녀의 넓은 보폭
에 맞추느라 평소보다 발을 재게 놀려야 했다.
  너는 항상 이렇게 서두르니? 
 한참 후에 데미안이 물었다.
 케이시는 그를 힐끔 보고 일단 생각한 다음에 대답했다.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그런 것 같소, 아마 내가 서둘러서 성장했기 때문인 
듯하오. 
  흥, 다 자라면 말해주렴. 
  오늘은 댁의 밸이 꼬일 이유가 없잖소? 참, 나에게 댁을 강도로부터 보호
하지 말라고 했던가? 아마 놈들은 그 말에 좋아라고 박수를 칠 거요. 
 이제 데미안이 쏘아붙일 차례였지만, 케이시는 더 이상 그녀의 성질을 돋울 
기회를 주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기차 앞쪽에 이르자, 승객들이 한자리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마침 기관사가, 이미 지나왔던 읍으로 돌아가서 선
로가 수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 말에 데미안은 폭
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케이시는 그의 화를 진정시킬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이 기차를 타고 움직이겠소, 아니면 다음 읍으로 가서 다른 기차를 타겠
소? 아무래도 후자가 두 배는 더 고생스러울 거요. 
 하지만 데미안이 가슴을 쓱 내밀고 코방귀를 뀌며 하는 대답에 그의 엉덩
이를 찰 뻔했다.
  어서 말을 타고 가자. 

  -13-
 다음 읍은 몇 년 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읍이라고 하기에 어려웠다. 열차 역
을 중심으로 몇 군데의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식당을 
겸한 술집과 잡화상, 빵집과 전신국, 그리고 객실 두 개 짜리 호텔이 전부였
다.
 워낙 늦은 시간에 도착했던 터라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호텔 방을 잡도록 
하고, 자신은 역사로 가서 선로 고장과 열차 강도의 출몰을 신고했다. 케이
시는 호텔 앞에서 만난 데미안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처지였다. 
  다음 열차는 일 주일 후에나 있답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전했다.
  역무원들이 선로를 수리하고 남행 열차를 운행시키는 데 어림잡은 시간이 
그 정도요.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는 다른 기차편은 없겠지? 
  전혀. 설상가상으로, 여기에는 마구간도 없다더군요. 그러므로 댁의 말을 
사려면 족히 하루가 걸리는 근처 목장까지 가야 한다는 거요. 하지만 그곳에
도 여분의 말이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괜히 움직여봤자 시간 낭
비를 하기에 십상입니다. 
 데미안은 구슬픈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럼, 다음주까지 여기에 죽치고 있어야겠구나? 
  댁이 나와 함께  올드샘 을 타지 않는 한 그렇지요. 나야 상관없지만, 올드
샘은 예상치 못했던 짐에 대해 조만간 불평을 늘어놓을걸요. 
 데미안은 미소를 감추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역시 나쁜 소식이 있어. 호텔에 방이 딱 하나밖에 없어서, 너와 내가 같
이 묶어야 할 판이야. 
 케이시는 기가 막혔다. 일 주일 내내 그와 한방을 쓴다? 하룻밤이라면 어찌
해보겠지만, 일 주일은 안 될 말이었다.
  말을 찾아봅시다. 
 케이시는 단호하게 말하고 술집 앞에 묶어둔 여러 필의 말을 훑어봤다. 데
미안의 눈길의 그녀의 시선을 따랐다.
  말 도둑질은 절대로 안 돼. 
 케이시는 코방귀를 뀌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길을 건넜다. 데미안은 
죽지 못해 어쩔 수 없다는 몸짓으로 소년의 뒤를 따랐다. 이 작은 동네에는 
은행도 없기 때문에 말을 구입할 자금을 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수중의 
돈으로 이럭저럭 타산을 맞출 수 있다면이야 다행이지만 이런 동네에서 유
일한 교통 수단인 말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게다가 데미안은 말안장에 올라타 여행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
도 없었다. 케이시의 등뒤에 앉아 있기도 고역인데, 혼자 말을 부리는 일은 
상상만으로 식은땀이 났다. 게다가 이 지옥 같은 여행에서 승마를 익힐 성싶
지도 않았다. 
 여기 선술집은 데미안이 처음 발을 디딘 서부의 주막으로서, 전형적인 모습
을 하고 있었다. 크거나 사람이 붐비지 않았지만, 술과 담배 냄새에 찌든 공
기는 구토가 날 만큼 역겨웠다.
 바닥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였고, 흠집투성이 탁자 세 개가 가구의 전부였
다. 그나마 한 탁자는 이미 사람들로 차 있었고, 알림판에는  최상은 아니지
만 이 부근에서 최고의 음식 제공 이라고 적혀 있었다.
 케이시는 긴 바에 몸을 기대고 제집처럼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이런 곳에 
익숙한 몸짓이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이들에겐 술집 출입을 막는 법률이 시행되어야 마땅해.
 케이시는, 이미 주문한 술잔을 손에 들고 탁자에 둘러앉은 치들을 살폈다. 
세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 카드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팔꿈치에 쌓인 동전
은 그 게임이 도박임을 시사했다. 그들은 소년을 힐끔 보고 재빨리 무시했지
만 데미안에게는 좀더 시선을 오래 줬다.
 케이시가 그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저 밖에 묶인 얼룩배기 말의 임자가 누구입니까? 
 덥수룩한 수염을 한 청년이 대답했다.
  여기에 그런 말은 한 필밖에 없으니, 내 말인 모양이구나. 
  벌이가 괜찮습니까? 
  행운이 따를 때만 그래. 하지만 지금은 운이 바닥을 맴돌고 있구나. 
 그는 손에 든 카드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나야말로 운이 필요한 사람인데, 내 말과 당신 말을 걸고 작은판을 벌여보
는 게 어떻겠습니까? 
 데미안이 옆에서 케이시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니? 
  말을 갖고 싶으면 잠자코 있어요. 
 케이시가 속삭였다.
 청년이 물었다.
  네 말은 어디에 있는데? 
  길 건너편 호텔 앞에. 한번 보시구려. 그보다 더 좋은 말은 보지 못했을걸
요. 
 카드놀이를 하던 패거리들이 우르르 회전문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고 휘
파람을 불었다.
  우우, 괜찮은데. 
 청년은 케이시를 돌아봤다. 구미가 당긴 기색이었다.
  무슨 내기를 걸 테냐? 
  여기 신출내기가 동전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면, 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쏘아 맞히겠소. 물론 이 사람 물건을 훼손하지 않고 말이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진동하는 가운데, 데미안은 익은 새우처럼 혼자 얼
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 이유가 분노인지, 수치심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청년
이 반박했다.
  그런 술수를 전에 봤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라구. 
  총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총을 뽑아서 쏘는데도? 
 청년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총을 뽑아서 쏜다고? 그래도 저 신출내기는 워낙 다리가 기니까 여유만만
일걸. 네가 놓치면, 말을 내놔야 하겠지만. 
  그야 해봐야 아는 일이잖소? 
  차리리 손에 든 동전을 맞히는 편이 어떠냐? 
 데미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케이시가 그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길을 갈 수 있는 대가치고 얼얼한 손가락은 약과예요. 
  손가락이 절단되지 않고 얼얼한 정도에서 끝난다면이야 그렇겠지. 
 소년은 빙그레 웃었다.
  권총을 집지 않는 손으로 잡아요. 그리고 댁이야 총으로 밥 먹고사는 사람
도 아닌데 왼손 오른손이 무슨 차이가 있겠소? 
 데미안은 케이시의 유머가 영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총 솜씨를 익
히 잘 아는지라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기를 건 털북숭이 청년이 
정말 케이시에게 동전을 던지자. 슬슬 걱정이 됐다.
 케이시가 동전을 앞뒤로 빈틈없이 살펴보는 모습에 술집은 더 요란한 웃움
소리로 진동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동전을 데미안에게 던지며 호언장담을 했다.
  마음을 놔요, 신출내기 양반. 난 이 짓을 골백번도 더 해봤소. 
 데미안은 바의 끝 쪽으로 걸어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는 공간도 좁으니 열 발짝이면 되겠지요? 
  열 발짝이라, 좋아, 이제 시작하라구. 
 청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새 말을 타고 싶어서 내  엉덩이가 근질근질하구나.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판초 앞자락을 옆으로 제치며 데미안이 동전을 
들어올리기만 기다렸다. 데미안은 자신이 이런 정신나간 짓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일이 잘못되면 어쩌지? 하지만 케이시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걱정을 덜어줬다. 그가 아는 소년은 과녁을 놓칠 리 없었다.
 케이시의 총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빗나갔다. 동전은 여전히 데미안의 엄
지와 검지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케이시는..., 데미안은 그렇게 망연자실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케이시는 도박을 해서 말을 잃으리란 예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털
북숭이 청년이 동료들에게 축하를 받는 동안 수치심을 못 이기고 술집 밖으
로 뛰어나갔다. 데미안은 확신할 수 없지만, 그 황금빛 눈가에 그렁그렁 맺
힌 눈물을 본 듯했다.
  이봐, 저 녀석이 내게 넘길 말을 타고 달아나지는 않겠지? 
 승리자가 다그쳤다.
  그렇지 않을 거요. 
 데미안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을 보며 대답했다.
  저 아인 명예를 존중해요. 뭐, 제 생각만큼 뛰어난 저격수는 못 되지만. 

  -14-
 데미안은 곧장 어린 친구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추측대로 소년이 울고 
있다면 그 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술집에서 독한 술을 몇 잔 마신 다음에야 호텔로 향했다.
 케이시는 평소처럼 데미안을 동료로 보는 대신 자기 혼자 일을 해결하려다
가 조금 전과 같은 낭패를 당한 셈이었다. 기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케이시는 데미안이 기차에서 창 밖으로 헛방만 쏜 줄 알지만, 사실 데미안
은 도망가던 열차 강도들 중 한 명을 명중시켰다. 놈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을까 봐, 부상 입은 동료를 읍으로 데려가 의사에게 보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안관에게 잡힐 수도 있고.
 케이시는 좁은 호텔 방의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보
나마나 거리에 있는 올드샘을 보면서 침통해하는 중이리라. 데미안은 지나치
게 잘난 척하다 제 발등을 찍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참았다. 그렇지 않
아도 심사가 뒤틀린 소년에게 그런 말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될 테
니까.
 케이시가 인기척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데미안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년
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만 낙심하려무나. 내가 애를 써서... 
 데미안은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다. 소년이 몸을 돌리고 그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그런 짓을 하도록 그냥 놔뒀어요? 왜? 올드샘은 내가 열두살 때
부터 함께 지내왔어요. 나는 녀석이 망아지일 때부터 키웠어요. 녀석은 한가
족이라구요! 
 데미안은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한순간 말문을 잃었다. 평상시 모든 감정
을 철저하게 자제하던 소년이 일순간에 그 격한 감정을 분출시켰다. 데미안
의 방어본능이 재빨리 되살아났다.
  잠깐 기다려. 너는 내 탓을 할 수 없어... 
  내가 못한다구? 
  그래. 케이시, 말을 걸고 도박을 벌이자고 제안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솔직히 말해서 나야말로 네가 그 술집에서 한 말이며 행동으로 무지하게 기
분이 나쁘단 말이야. 
 데미안은 솟구치는 분노를 참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마당에 그런 시도는 너무 벅찼다. 올드샘이 저 소년에게 단순한 교통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눈치챘는데, 육감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그
렇지 않으면 케이시가 저렇게 불같이 화를 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분노를 자제하는 데미안의 태도가 케이시의 성질을 더 자극했는지, 
소년은 데미안의 조리 있는 항변을 무시하고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애초부터 난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오지 않았더라면... 
 데미안이 기억을 상기시켰다.
  네가 이 일을 꼭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어.  
  좋아, 그렇다면 관두겠소! 
 데미안은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다. 소년이 한두 번의 고초에 의기소침
해하기보다 훨씬 명예를 존중하는 줄 알았는데.
 데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넌덜머리가 난다는 식으로 말했다.
  오늘 짜증나는 일이 꽤 여러 가지였지만, 너는 그 중 최악이로구나. 
  감히 그딴 말을! 
  입다물어, 케이시.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네가 내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
지만 않았어도, 나는 애를 써서 네 말을 되찾았다는 말을 했을 거야. 
 케이시가 깜짝 놀라는 표정은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댁이? 
 하지만 소년의 얼굴은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는 뒷걸음질쳐서 열린 창가로 가까이 갔다. 당장이라도 창 밖으로 뛰어내
릴 기세였다.
  맙소사, 미안해요. 
  너무 늦었어... 
  안 돼요, 정말 미안해요, 데미안. 제발 내 설명을 좀 들어보세요. 나는 당신
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화를 낸 겁니다. 나는 좀처럼 바보 같은 짓을 참지 
못하는데, 오늘 내가 선술집에서 한 짓은 너무 바보 같았어요. 
 데미안은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사실이야. 너는 그런 내기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내기 자체는 좋았어요. 
 데미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내가 동전의 가장자리를 노린 짓이 바보 같았다는 말이에요. 너무 작은 과
녁을 조준한 거죠. 나는 만에 하나라도 당신 손가락에 해를 입히고 싶지 않
았거든요. 
 데미안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니까, 고의로 동전을 맞히지 않았다는 말이니? 
  아니요. 
 케이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저 내가 마땅히 동전의 중앙 부분을 표적으로 삼아야 했는데, 그러지 않
았다는 뜻이에요. 내가 과녁으로 삼은 동전의 4분의 1은 지나칠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어요. 
 데미안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지금 이 말을 사과라고 하는 걸
까? 다시 말해, 제대로 쏘았더라면 제 말을 잃지 않았을 테니 사지가 말짱한 
데미안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는 셈이었다.
  그리고 내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던 말도 진심이 아니었어요. 
 케이시는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하며 덧붙였다.
  그 말을 해놓고... 다시 제정신이 들기 시작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
이 뒤집혔어요. 저기, 당신이 아직 나를 원한다면, 나는 무슨 짓을 해서든 그 
일을 완수하겠어요. 
 데미안은 일부러 뜸을 들인 다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이 사소한 언쟁을 잊는 편이 좋겠다. 
 케이시는 안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 나쁜 생각이 아니군요. 그런데, 어떻게 올드샘을 되찾았어요? 
  그야 돈으로 했지. 가끔 돈이란 말할 수 없이 유용한 법이거든. 그리고 이
번에는 네 말에 얼룩배기 말까지 포함할 정도로 유용했어. 
  정말 그 말도 손에 넣었어요? 
 케이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와, 데미안! 댁은 상당히 수완 있는 장사꾼이로군요? 
  그 정도까지는 아냐. 그 말 주인 되는 총각이 조만간 다른 곳에 갈 생각이 
없어 보이더라. 빵집 딸내미를 노리고 있더라구. 하지만 도박을 좋아하는데 
반해 운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판돈이 바닥났대. 사정이 다급했던지, 말 
두 필에 합당한 금액보다 적게 부르더라. 내가 지닌 돈을 전부 긁어냈어도 
될 만한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얼마였는데요? 
 데미안은 씩 웃었다.
  하여튼 내 돈 전부는 아니었어. 내 주머니에 들었던 돈만 3백 달러쯤 되었
는데, 그게 내 총재산인 줄 알았나봐. 
 케이시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정말 더럽게 싸군요. 
  정말 말 값이 여기보다 더 비싸니? 
  그렇지 않아요. 내 올드샘 같은 명마만 더 값이 나가요. 하지만 수요에 비
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이 근방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라구요. 서부에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공급이 달려요. 특히 옛날에 인디언들이 보급 열차
를 습격했을 때나, 새로운 탄광촌이 형성될 때는 그런 현상이 더 심했어요. 
지금도 열차 선로가 들어서지 않은 작은 마을이나 이런 소읍은 여전해요. 
 뼛속까지 장사꾼인 데미안의 귀에 그 말은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다. 수출
과 수입, 그리고 공급과 수요라, 그의 아버지라면 이 근방으로 사업 확장을 
고려하셨을까? 한번 수지타산을 맞춰볼 가치가 있는 생각이었다. 단, 그 일
에 즉각적인 결단이 요구되지 않는 한. 이번 여행을 마친 후에 다시 서부로 
오는 일은 그의 계획에서 가장 밑바닥을 차지했다.
  자, 내일 여행 준비를 끝마쳤으니까 이제 저녁이나 먹을까? 
 데미안이 제안했다.
  나는 저녁을 건너뛰겠어요. 호텔에서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데다, 나는 체
면을 완전히 구기는 일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그 선술집을 멀리하고 싶어요. 
게다가 내일 아침에 떠나려면 상점이 닫기 전에 생필품을 구입해야 해요. 난 
상점에나 다녀올게요.  
 소년이 다시 창피해하는 기색이 완연했기 때문에 데미안은 더 이상 실랑이
를 하지 않았다.
  너 좋을 대로하렴. 하지만 내가 함께 상점에 가서 물건값을 낼게. 
  내 돈으로도 충분해요, 데미안... 
  내가 모든 여행 경비를 대겠노라고 하지 않았니? 그리고 네가 생각한 여
행 필수품의 품목을 내가 우선적으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케이시는 평소와 달리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그 얼룩말에는 안장이 달려 있어요? 
 이번에는 데미안이 얼굴을 붉혔다. 말안장은 고려 대상에서 전적으로 제외
된 품목이었다. 하마터면 내일 아침에 상점이 문을 열 때까지 팔짱끼고 기다
릴 뻔했다.
  실은 그 총각이 안장을 가져갔어. 
  음, 그건 당연한 거예요. 새로 구입한 안장이 몸에 익으려면 새 말을 길들
이는 것보다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하지만 여기는 팔려고 내놓은 말
도 없으니 안장을 가져가도 별 소용이 없을 텐데. 하여튼, 대부분의 잡화점
은 별별 것을 다 갖춘 만물상이니까 안장도 있을 거예요. 
 케이시는 그 점에 대해 별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데미안은 한줄기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만약 없으면 어떻게 하지? 
 케이시가 미소를 지었다.
  데미안, 앞날을 걱정하지 말아요. 일단 발등의 불부터 끈 다음에도 걱정할 
시간은 충분하다구요. 

  -15-
 데미안은 침대를 나눠 쓰는 문제에 대해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부득부득 바닥을 고집했고, 그 방법은 썩 도움이 되지 못했
다.
 한 사람이 누워도 모자랄 침대가 갖춰진 공간에 단둘만 있는 상황은 그녀
의 처리 능력 밖이었다. 케이시는 겨우 참고 누워 있다가 데미안이 잠들자마
자 침실을 빠져 나와 호텔 전용 마구간으로 갔다. 그리고 올드샘의 우리 한
구석에 쪼그리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그 상황을 곰곰이 되새겨보니 약이 올랐다. 남자 옆
에서 잠들었던 경험이야 어제가 처음이 아니잖은가? 하지만 여행 중에 모닥
불을 사이에 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잔뜩 긴장한 채로 자는 것과는 차
원이 달랐다. 호텔 방의 안전 상태는 데미안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백주대낮에 떠올리기조차 남부끄러웠다.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키스를 받는 기분이 어떨까 여러 번 상상했다. 머리칼
이 보기만큼 부드러울지, 넓은 어깨를 어루만지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했다. 
심지어 그의 강인한 품에 꼭 안기는 상상까지 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제정
신을 차렸다. 
 그날 아침 케이시는, 데미안을 보고 부끄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는 동시에 
평소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즉, 그가 그 강렬한 회색 눈으로 속마음을 꿰뚫
어보는 듯했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다면 기겁을 하고 나자빠질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호텔 뒤쪽에서 만났을 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케이
시가 고안해낸 변명, 즉 말들이 적절한 우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마구간에서 밤을 보냈다는 식의 사족은 필요 없었다. 데미안은 그녀
가 어디에서 잤는지조차 모르고, 그저 일찍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거니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무튼 그들은 케이시의 희망만큼 일찍 출발하지 못했다. 그녀는 조금만 가
르치면 데미안이 말에 오르는 법을 터득하리라 예상했지, 그 교습이 진 빠질 
만큼 어려우리라고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데미안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고 안달복달하며 말을 다루려고 했다. 얼
룩말은 그 점을 민감하게 눈치채고 반항했다. 자고로 말이란, 사람을 등에 
태울 만큼 인간과 친밀한 동물인데도, 얼룩말은 그 반대로 데미안을 떨어뜨
리려고 갖은 짓을 다했다.
 게다가 이 상점에 안장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그녀의 것을 빌려줘야 했다. 
데미안이 안장도 없이 말을 탄다는 생각 자체는 논의할 가치가 없었다. 그래
서 새것을 마련할 때까지 케이시 자신은 꼼짝없이 말의 맨 등에 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얼룩말이 뒷걸음치고 반항하는 이유가 전적으로 데미안의 서툰 솜씨 때문
이라면 케이시가 어떻게 해서든 달래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얼룩말은 케이시
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문제는 데미안의 체중이었다. 그 때문에 야생
마처럼 날뛰고 뒷발질까지 했다.
 하지만 데미안의 의지는 높이 살 만했다. 네 번씩이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
고도 끝까지 시도했다. 공들여 겨우 말 등에 올라탔다가, 그 다음 순간 땅바
닥에 패대기쳐지고... 그때마다 케이시의 입에서는, 흙먼지를 뒤집어쓰느니 
차라리 그냥 주워 먹으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꾹 참고 이를 갈았다.
 우선 이 남자의 옷차림부터 여행에 걸맞지 않았다. 털끝만큼의 먼지도 허용
치 않을 차림이었다. 하지만 이런 여행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는 일 정도는 익
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케이시는 이미 어제, 여행에 적당한 옷과 큼지막한 
승마모자를 사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세련된 뉴욕 정장을 고수했다. 거기에
는 저 멋진 모직 신사복이 햇볕에 바래고 흠집이 나고 올이 풀려도 상관하
지 않겠다는 전제가 뒤따라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데미안이 그 점을 상관하
리라는, 그것도 굉장히 상관하리라는 감이 들었다. 저 양복이 땀에 푹 절 경
우는 아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볼 만한 사태가 벌어지리라.
 마침내 얼룩말은 데미안이 죽어도 포기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아차리고 
양순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길을 떠날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아니, 케이
시가 전날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더 늦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데미안의 편의를 위해 천천히 말을 몰아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안장 
없이 승마를 무수히 해봤던지라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그것도 단거리에나 
통했다. 지금 같은 장거리에서는 온몸의 근육이 뻐근하게 당겼다.
 그들은 오로지 데미안을 위해서 일찌감치 캠프를 쳤다. 읍에서 구입한 빵을 
먹어가며 계속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데미안에게는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았
다. 사실, 그는 다시 출발하자는 케이시의 말에 요란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간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캠프를 치자마자, 데미안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할 제의를 했다.
  오늘밤에는 내가 저녁거리를 잡아올게. 뭐, 맞힌다는 보장은 못하지만 말이
야. 
 케이시는 맞힌다는 보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
질거렸다. 그가 사냥에 나가면 아무 것도 잡지 못하리라는 걸 너무 잘 알았
다. 고기가 먹고 싶었지만, 꽤 힘든 날을 보낸 그에게 차마, 사냥은 할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뒤로 빠지라는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다. 
 대신 콩을 익히고 비스킷 만드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진짜 놀랄 일이 벌어
졌다. 30분쯤 후에 데미안이 며칠 동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야생 
칠면조를 잡아온 것이다. 케이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쳇, 억세게 운도 좋은 
남자로군. 총소리는 딱 한 번밖에 듣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녀는 칠면조를 손질하며 말했다.
  행운의 총 한 방이네요. 
  운과는 아무 상관없어. 
 데미안은 케이시의 비꼬는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케이시는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려.
  그럼, 칠면조가  나 잡아 잡수쇼  하고 당신 앞으로 걸어온 모양이군요. 
  아니야. 긴가민가할 정도로 멀리 있었어. 
 케이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목동들의 허풍을 들어온 터라 그 말을 싹 
무시했다.
  어련하겠어요. 
 데미안은 그녀의 냉소를 흘려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직접 보여주마. 자, 아무 목표나 가리켜봐. 
 케이시는 이제 그가 창피를 당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리고 약 12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과녁을 가리켰다.
 데미안은 과녁을 보기 좋게 명중시켰다. 케이시는 눈을 깜박인 다음에 다른 
과녁을 가리켰다. 그는 또 한 방에 명중시켰다. 세 번이나 연거푸 시험한 끝
에 그녀는 포기했다.
  좋아요, 난 감명받았어요. 
 이번에는 데미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냥 감명만 받았어? 
  빌어먹을 만큼 감명을 받았어요. 
 그는 킬킬거리며 모닥불 옆으로 왔다.
  케이시, 네 표정은 천금을 줘도 바꾸기 어렵구나. 하지만 나는 대학시절 라
이플 대회에 나가서 일등을 먹은 몸이라구.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사냥도 다
녔어. 
  어디로? 뒤뜰에서? 당신은 전에 말을 타보지 못했잖아요. 
  우리는 기차를 타고 북쪽 사냥 허가 구역으로 가서 걸어다니면서 사냥을 
했어. 
 케이시는 기분이 팍 상한 터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선입관이 너무 돌연하고 극적으로 바뀌었다.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도 제 한 
몸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판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를 
도와 열차 강도 떼를 물리쳤다.
 이제 케이시는 새로운 의문에 시달렸다. 그 열차 강도 패거리 중에서 몇 명
이나 부상을 입었을까? 그 정도로 정확한 총 솜씨라면 놈들을 얼마든지 죽
일 수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죽어 마땅한 놈
들 이라는 데미안의 말은 진심이 아니라 홧김에 나온 말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그는 이곳에 속하기에는 너무 도시적이었다. 그 점은 변하지 않았
다. 데미안은 여전히 속이 쓰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걱정을 끊어버리리라 작정했다. 말한 필과 라이플 
한 자루만 있으면 혼자 힘으로 거뜬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사내였다.
 케이시는 그를 무시하려고 애쓰며 식사 준비를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녀
의 마음도 모르고 곁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흥, 내 입에서 총 
솜씨에 대한 칭찬을 더 듣기를 기다리는 거라면 한평생 걸릴걸.
 하지만 데미안이 생각하던 바는 그게 아니었다.
  케이시,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네가 여자처럼 생겼다는 사실을 아니? 
혹시 턱수염이나 콧수염을 길러본 적 있어? 
 케이시는 속으로 한바탕 신음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힘들 거예요. 
  왜? 
  나는 여자니까. 
 케이시는 데미안의 경악한 표정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박았다. 굳
이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정말 모를 일이었다.
 충격에 찬 침묵이 흐르자,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케이시는 결국 참다못해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은 판초로 감싼 가슴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있기는 있어요. 
 케이시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한 다음에 꼼꼼하게 덧붙였
다.
  그리고 나에게 증거를 보여달라는 말은 아예 마세요. 그냥 내 말을 믿으라
구요. 
 데미안의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돌아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보듯 이목구비를 구석구석 뜯어봤다. 마침내 충격을 극복한 그의 강렬한 표
정이 일순간에 싹 바뀌었다. 그 변화에 케이시는 움찔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16-
  네가 어떻게 감히 여자일 수 있어? 
 그 이치에 맞지 않는 멍청한 질문이 데미안의 심한 충격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케이시는 그가 놀랄 거라 예상했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떨 만큼 
화를 낼 줄은 미처 몰랐다.
  나야 그 문제에 대해 선택권이 많지 않았어요. 
 케이시는 명백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지적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 너는 의도적으로 나를 속였어. 
 데미안은 살기 등등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아니, 나는 속이지 않았어요. 난 그저 당신이 내린 결론을 수정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한번도 질문하지 않았잖아요. 하지만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구요.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아니라 너와 함께 여행하고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렇게 온당치 못한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겠다. 우리는 같은 침실에서 잠
까지 잤다구! 
  나는 나중에 빠져 나와서 마구간에서 잤는데요. 
 케이시는 그 사실을 아침나절에 밝힐걸 하고 후회했다. 그가 냉소적으로 반
박했기 때문이야.
 흥, 잘도 그랬겠다. 
 케이시는 얼굴을 찡그리고 그가 펄펄 뛰며 화를 내는 이유를 짐작해 보았
다. 가만있어라,  온당치 못한 일 이라고 했지? 그게 문제일까? 그들이 딱 한 
번 같은 침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일가친척이 총을 들고 달려와 그
를 제단까지 끌고 갈까봐 걱정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설마 우리가 결혼처럼 우스꽝스런 짓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기를 바래
요. 머지않아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마당에 그런 결말은... 
  여전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너도 잘 알잖니! 
 귀청이 떨어질 듯한 고함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 동네에서는 안 그래요. 최소한 두 사람만 아는 일에 대해서는요. 당신이 
잠깐 화를 접어두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여성과 여행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여성? 흥, 너를 그렇게 부르기는 대단히 어렵구나, 꼬마야. 
 데미안은 거침없이 비웃었다.
 그야말로 케이시의 신경을 긁는 발언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스스로를 여성
으로 생각해온 터였다. 그리고 지금 이 말싸움은 아버지와 벌이던 토론을 상
기시켰기 때문에 성질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벌컥 화를 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성에 호소하려고 했다.
  데미안, 지금까지 별 탈이 없었으니까 당신이 심하게 화를 낼 필요가 없잖
아요? 그저 내가 여자라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우리의 공적인 관계가 변하
지 않아요. 
  절대 그렇지 않아! 
  저런? 내 능력이나, 당신이 나를 고용한 이유가 어떻게, 언제 바뀐다는 거
지요? 나는 여전히 우리 아버지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수받은 최고 추적꾼이
라구요. 
  아버지? 오호라, 이제 기적적으로 부모님의 존재를 기억해냈구나? 그래, 다
음은 네 진짜 이름이 나올 차례겠지? 
 이 문제를 들고나올 줄 알았어, 케이시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차
분하게 설명했다.
  내 이름에 대해 거짓말을 했던 건 당신을 속인 것과 아무 상관도 없어요. 
  뭐라고 했지? 지금까지 정황을 봐서 내 의견은 딴판이야... 
  데미안, 나는 아무에게도 진짜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나
를 찾아다닐 텐데, 나는 아직 발견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유
일랑 묻지 말아요. 아주 개인적인 일이거든요. 아무튼 내 존재를 알리지 않
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가명을 쓰느니 그냥 모른다고 주장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소년인 척했지. 
  난 그러지 않았어요. 내 짧은 머리와 큰 키와 수척한 몸이 사람들에게 그
런 인상을 줬다고 해서 내 잘못은 아니지요. 
  어이구, 그 옷차림에 대한 부분은 쏙 빼놓는구나. 
  내 옷가지는 전부 추적 여행에 필요한 것들이에요. 하지만 나는 내 입으로 
소년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정말 그랬다면, 굳이 지금 와서 성별
을 밝히지 않았을걸요. 
  그런데 왜 밝혔니? 
  난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케이시, 넌 거짓말을 했어야 했어. 
  왜죠? 앞으로 내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을 텐데? 그리고 당신
의 태도도 변해서는 안 돼요. 그러니까, 당신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유
나 압시다. 
  네가 여자니까 그렇지! 
  그래서요? 
 데미안은 좌절감을 못 이기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네가 그 엄청난 차이를 모른다면, 너는 여성으로서 자각이 부족한거야. 
  지금 그 말이 들리는 그대로의 뜻이 아니기를 바래요. 하지만 나를 욕보이
려던 치들이 큰코다쳤다는 경고는 일단 해두겠어요.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트집을 잡는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 그런 
식으로 관심을 둘 수 없어요. 
  내가 왜 둘 수 없어? 
 케이시는 벌떡 일어서서 총을 빼들고 그의 가슴을 겨냥했다.
  그럼, 관심을 두지 말아요, 데미안. 
  넌 나를 쏘지 못할 거야. 
  정말 그런지 확인하고 싶어요? 
 케이시를 응시하는 데미안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케이시 역시 눈꺼풀
을 깜박거리며, 조준한 권총을 움직이지 않고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마침내 그가 권총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무기를 치워. 난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마..., 지금은. 
 그 말은 케이시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쏘고 싶지 않았기 때문
에 권총을 넣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
로 그와 눈싸움을 했다.
 고통스러울 만큼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았
다.
  칠면조가 타고 있어. 
  그럼, 타지 않도록 해봐요. 내가 꼭 요리를 해야 한다고 쓰인 책이라도 있
답니까? 
  내가 요리법을 모른다고 쓰인 책은 있을 거다. 
 케이시는 눈을 깜박인 후에 긴장을 풀었다. 데미안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
온다면 그들은 싸움으로 끝장을 볼 가능성이 높았다. 뭐, 지금도 싸우는 중
이었지만.
 케이시는 최후의 일침을 놓는 식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 나는 곧바로 잠을 잘 거예요. 당신도 그래야 해요. 내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일찍 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여정도 힘들 테니까. 내일은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해야 할 일을 할거야. 항상 그래왔다구. 
 내용은 긍정적이었지만, 그 어조는 여전히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케이시
는 행운을 믿고 대화를 계속할 마음을 일찌감치 버렸다. 그저 숙면이 데미안
의 생각을 호전시켜주기만을 기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같은 효
과를 보게 될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과연 숙면이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데
미안의 말을 잊게 해줄까?
 케이시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고 또 잠을 설쳤다. 

  -17-
 데미안은 그날 밤잠을 청할 노력마저 포기했다. 그는 나뭇가지를 몇 개 찾
아내 꺼져 가는 모닥불을 살리고 그 옆에 앉아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그리
고 케이시를 지켜봤다. 그 일은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깨어있을 때와 달리 
잠든 모습에서는 연연한 부드러움이 풍겼고, 그 때문에 성별이 더 확실하게 
드러났다.
 전에는 잠든 모습을 보지 못했던 터라 이번은 일종의 행운에 속했다. 소년
인 줄 알았을 때에도, 남자 아이치고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섬
세한 부드러움과 은근한 관능미를 본 지금에 와서는 정신없이 매료되었다.
 이런 젠장, 데미안은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현실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아, 그녀의 입을 통해 
말을 듣기 전에 미리 눈치를 했어야 했어. 항상 야릇한 감정이 들지 않았던
가. 하지만 총 솜씨와 수훈에만 현혹되었던 게 화근이었다. 치마를 두른 여
자치고 케이시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시는 어젯밤에 그 모든 논리와 이유를 철저하게 부숴놓았다.
 여성이라..., 아니, 소녀야. 그 점을 명심하려고 애썼지만, 그런 마음이 오래
갈 것 같지 않았다. 우선 저기 누워 있는 여자는 소녀 같지 않았다. 어디를 
보나 성숙한 처녀,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충분히 나이가 찬 젊은 여성처럼 
보였다.
 피부가 흠집 하나 없는 도자기처럼 매끄럽다는 사실을, 저 아랫입술이 꽉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도톰하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몰랐다. 쥐 파먹은 것처
럼 들쭉날쭉한 모양이 아니라 양어깨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상상
해보았다. 하지만 지금 뒤로 넘긴 머리형은 그녀의 섬세한 얼굴형을 남김없
이 드러냈다.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탐나는 존재였다.
 소년으로서 케이시는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소녀로서 케이시는 매혹적이었
다. 하고 싶은 질문이 수백 가지가 넘었지만. 단 한 가지에도 대답을 듣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케이시는 비밀과 감정을 혼자만 간직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비밀을 공개했다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충격을 안겨준 후에도, 케이시는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불가해한 표정을 써먹었다. 그 특유의 버릇은 속을 타게 만들고 화를 유발하
기에 충분했다. 정말 그를 초조하게 만드는 여성...
 하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신경을 긁는 요물은 아니었으므로, 마음
을 충분히 가라앉히면, 그런 버릇쯤이야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강하게 끌린다는 사실은 극복할 수 없었다.
 함께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녀에게 관심을 끊을 방법이 없다는 점은 명명백
백했다. 사실, 그녀가 남자를 모두 늑대 취급하는 전통적인 여성의 특권에 
집착하지 않는 이 마당에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지조차 의아스러웠다. 지
금 이렇게 단둘이 있다는 현실 자체가 그가 배워왔던 모든 규칙을 깨는 셈
이었다.
 맑은 소리로 지저귀는 새소리와 붉게 타오르는 태양과 함께 케이시가 깨어
날 즈음, 데미안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를 위해 정의를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솟아, 새로 불붙은 욕망을 겨우 진정시켰다. 케이시와 복잡하게 얽히
는 짓이야말로 현명하지 못하므로 가능한 거리를 두는 편이 최선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는 계약한 일을 하면 그뿐이었다.
 여하튼 그것이 데미안의 결심이었다. 제발 그 마음이 끝까지 갔으면 좋으련
만.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거짓말로 케이시의 마음을 풀어주고 다시 데미안 자
신을 무시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그도 그녀를 무시하기가 한결 편
해질 테니까. 데미안은 케이시가 일어나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내가 사과하마. 
 케이시는 힐끔 보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여러 차례 눈을 깜박인 다음에
야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미안, 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어요. 내가 기억하고 싶은 말을 하려거
든, 우선 커피부터 마시게 해줘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눈치를 채지 못한 채 모닥불을 들쑤
시고 마음껏 기지개를 켰다.
 젠장, 저런 고양이 같은 몸짓 좀 하지 말았으면... 그러고 나서 케이시는 덤
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야 데미안은 이전에 케이시의 저런 습관을 눈치채
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데미안의 얼굴을 달궈놓은 홍조는 케이시가 돌아올 무렵에 거의 가라앉았
다. 수치심을 들키지 않을 만큼 주위가 밝지 않다는 점이 천만 다행이었다.
 케이시는 그를 똑바로 보지 않고 아침 일과를 다 끝낸 후에야 김이 모락모
락 오르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모닥불 옆에 앉아 특유의 무심한 표정을 지
었다.
  아까  사과  어쩌고 했던가요? 
 데미안의 시선은 그녀의 다리로 떨어졌다. 케이시는 두 무릎을 활짝 벌리고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그는 좀처럼 그 긴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젯밤 홧김에 한 말은 사실이 아니었어. 
  가령 예를 들면? 
  그러니까..., 저기, 내가 너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다는 식의 암시 말이
야. 
 케이시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럼,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지.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너무 울화통이 터진 나머지 내가 네 깜짝 폭로에 충격을 받은 만큼 너도 
놀라게 해줄 심산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케이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시선을 돌려 무르익은 일출을 응시했
다. 하늘을 물들인 황금빛이 그녀의 얼굴에 매혹적인 후광을 그려놓았고 데
미안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도 성질이 나면 진심이 아닌 말을 내뱉곤 했어요. 
 케이시는 그런 경우를 떠올리려는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나 역시 당신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럴 필요까지야... 
  하지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남은 앙금을 말끔하게 씻어버리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어요. 어젯밤에 나는 내 마음대로 당신이 억지 결혼을 걱정한
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당신이 유부남일 수도 있는데... 내 생각이 짧
고 어리석었어요. 
 유부남이라니? 데미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느닷없는  결혼 에 대한 언급은 
위니프레드의 부친과의 마지막 만남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 미래의 
장인은 다른 곳도 아닌 장례식장에서 데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지만, 설마 결혼식을 미루지는 않겠
지? 
 적절한 때? 데미안은 미래 장인의 이기심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리고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불멸의 진리에 따라 그 이후로 위니프레드나 그녀의 
아버지를 상종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내가 없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물어봤어요? 난 그저 내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점에 대해 사과
하려는 것 뿐이라구요. 나야 당신이 결혼을 했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 있겠
어요? 
 데미안은 케이시가 그 점을 누누이 강조하는 태도에 절로 흥이 났다. 말은 
안 했지만, 데미안의 결혼에 관심 있다는 식으로 비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
다. 심지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케이시를 안심시켰다.
  맞아, 나도 네가 상관하리라고 생각지 않아. 
 케이시는 그 화제가 끝났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숙면은 항상 사물에 대한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더군요.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데미안이야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유증을 느끼지 못했지만, 오후에도 똑같을지 심히 의심스러웠
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오후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피곤에 절어 
있었다. 물릴 정도로 잘 테니까 다음날 보이지 않더라도 찾지 말라고 케이시
에게 무뚝뚝하게 통보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18-
 케이시는 데미안이 하루 종일 자겠다는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그가 나타나지 않자, 짜증이 났다. 그날 여섯 번씩이나 방으
로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방해하지 마시오 라는 알림판이 방문에 걸려 있었
고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오후 늦게야 참다못해, 문짝을 부숴버릴 듯 힘차게 노크했다. 다음날 계속 
여행을 할 생각이라면, 오늘밤 상점이 문을 닫기 전에 안장을 사야 하기 때
문이었다. 이곳의 잡화상은 다양한 물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대시 구입할 수
도 있었지만, 안장이란 개인적일 취향에 달린 문제였다. 사실 데미안은 어떤 
안장이든 좋아할 성싶지 않았지만, 아무튼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데미안이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에야, 케이시는 깜짝 뉴스를 터
뜨렸던 날 밤에 그가 잠을 푹 자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그녀의 성별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더 많이 고민했나? 간단히 넘길 일이 아
닌 것 같은데. 그녀는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데미안이 그녀에게 관심 있다는 식으로 암시했을 때, 신경 쓰이고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줄은 꿈에도 상상 못하다가, 그 말이 거짓이라고 했을 때는 
훨씬 기분이 나빠졌다. 마음이 놓여야 할 말에 오히려 풀이 죽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여기까지 오면서, 케이시의 성별을 무시하려고 대단한 노
력을 기울였다. 그러니 그녀도 똑같은 태도를 취하는 게 도리였다.
 마침내 데미안을 호텔 밖으로 끌어내서 은행에 들렀다가 두 군데의 안장 
가게 중 한 곳으로 간 케이시는, 그가 가장 비싼 안장과 번지르르한 은제 마
구를 사는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 이제 평범한 얼룩말은 햇빛 속에서 번쩍거
리며 1마일 밖에서도 눈에 띌 것이다.
 케이시는 그의 선택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는 짓이
지만, 어쨌든 안장은 안장이었다.
 케이시는 다시 적당한 승마복을 사라고 권했다.
 데미안도 그 말이 옳다는 사실을 아는 만큼 반대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 옷이 좋다며 고집을 부렸다. 게다가 다음 읍에서 기
차를 잡아탈 수 있으므로 승마복이 필요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차와 상
관없이 정장 차림은 가는 곳마다 그가 명백한 신출내기라는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아, 그 여행용 가방을 진작에 내버리고 오는 건데, 후회가 막심했다.
 그렇다고 케이시는 자신의 견해가 그렇게 빠르고 극적인 방법으로 증명되
기를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
 안장을 마구간으로 가져가는 길목에 선술집이 하나 있었다. 왁자지껄한 소
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 꽤 붐비는 모양이었다.
 케이시가 잰걸음으로 앞장서는 동안, 데미안은 낑낑거리며 무거운 안장을 
어깨에 지고 뒤따라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간격이 꽤 벌어졌기 때문
에 그들은 동행처럼 보이지 않았다. 술 취한 현지인 넷이 비틀거리며 술집에
서 나와 그쪽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데미안이었다.
 케이시는 심지어 그의 진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때, 총성이 
연발로 터졌다. 케이시가 재빨리 몸을 돌려보니, 네 남자가 데미안의 발 아
래로 총을 쏘고 있었다. 전에도 다른 읍에서 숱하게 목격한 광경이었다. 양
처럼 순한 시민들이 악질 건달패로 돌변하여 신출내기를 이런 식으로 맞이
하곤 했다.
 일종의 힘 과시랄까, 아니면 이런 식으로 밖에 다른 이와 친해지지 못하는 
남자들이 무장하지 않은 신출내기와 안면을 트는 의식이었다. 거기에 얼큰하
게 술까지 취해, 허세와 만용을 조장함으로써 상상을 악화시켰다. 어떤 동부
인은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이리저리 춤추기를 거부하다 정말 발을 다치는 
경우도 봤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은 총탄을 피해 케이시에게 뛰어오는 대신 안장을 떨어뜨리고 그 자
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약이 오른 현지인들이 데미안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았다. 그가 뛰어난 라이플 사수라는 점은 이미 증명된 바였다. 
하지만 항상 라이플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특히 쇼핑에는.
 무기도 없는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애가 네 놈들에게 놀아날 줄 알아! 
 그러고 나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패거리 한 명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위기 의식을 느낀 그 녀석은 데미안의 발이 아니라 가슴에 총을 겨눴다. 그
때 케이시가 권총을 뽑아 경고 사격을 했다. 데미안이 괜한 호기를 부리다 
죽을까봐 두려웠다.
 총탄이 한 놈의 모자에 구멍을 내자, 패거리들은 일제히 데미안으로부터 관
심을 거뒀다. 하지만 더 이상 총을 쏠 필요는 없었다. 데미안이 두 놈의 멱
살을 잡고 박치기를 시켰기 때문이다.  뻑  소리와 함께 그들은 자리에 주저
앉았다. 세 번째 놈은 데미안의 주먹 한 방에 대자로 뻗었고, 복부를 맞은 
다른 녀석은 숨이 막히는지 캑캑거리며 배를 감싸 안았다.
 데미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양손을 탁탁 털고 옷을 바로잡은 다음에 
안장을 다시 짊어지고 케이시 쪽으로 왔다. 케이시는 그 패거리들이 허튼 짓
을 할 경우를 대비해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의식이 있는 놈에게 시선을 떼
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 짓도 못했다. 그는 계속 가쁜 숨을 내쉬더니, 
비틀거리며 도로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케이시는 총을 넣고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요? 
  아주 좋아. 퍽이나 우호적인 읍이로군. 
 케이시는 그의 냉소에 반박했다.
  내가 입에 쓴 말을 한마디만 하겠어요. 당신이 동부에서 출발한 기차에서 
방금 내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어
요. 당신이 관광객처럼 보이는 한, 현지인들의 짓궂은 장난을 피할 수 없어
요. 관광객이란 유람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족속들이니까
요. 
  그렇다면 가르쳐줘. 
 케이시는 눈을 끔벅거렸다.
  뭘요? 
  여기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달라구. 
 케이시는 그 말뜻을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다음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좋아요, 우선 잡화점으로 다시 가요. 이제 당신은 그냥 지나는 객이 아니라 
여기에 속한 사람처럼 보일 때가 되었어요. 
 데미안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케이시는 또 다른 거절을 예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멋진 양복에 어떤 마법이 있기에, 저토록 다른 옷차
림을 거부하는 걸까? 그저 평범하게 보이기 싫어서일까? 오직 그 이유뿐일
까? 
 하지만 놀랍게도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 
 케이시는 그 말에 따랐다. 그리고 나중에 그런 제안을 했던 자신을 땅을 치
며 원망했다. 세련된 양복 차림의 데미안은 핸섬했지만, 몸에 꽉 달라붙는 
청바지와 청색 캠브리지 셔츠와 조끼, 넓은 챙이 달린 모자 차림의 데미안은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근사했다. 타고난 서부인, 그 모습은 케이시
에게 다른 관점을 불어넣었다. 뜬구름이 아니라..., 손에 닿을 남자.

  -19-
 물웅덩이를 발견한 케이시는 다음날 일찌감치 캠프를 쳤다. 그리고 데미안
이 다시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재빨리 목욕을 하고 머리까지 감았다. 사실, 
머리를 감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목욕이 필요 불가결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지 않으려다가 궁여지책으로 더 이상 꾀죄죄한 외관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만들어냈다.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루엘라 밀러가 나타났다. 다른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케이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근방에서 다른 사람을 봤다는 충격 때
문이 아니었다. 이렇게 뛰어난 미녀는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최신 유행의 보닛(턱밑에서 끈을 매는 모자) 아래로 흰색에 가까운 금발 머
리칼이 찰랑거렸다. 큼지막한 푸른 눈동자는 짙은 눈썹으로 감싸였고, 피부
는 속이 비칠 만큼 투명한 아이보리색이었다. 거기에다 풍만한 가슴과 가는 
허리, 아담한 키, 양산 아래로 나풀거리는 레이스투성이 부츠마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저 풍만한 가슴! 아,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했던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렇게 작을 여성치고는 엄청나게 큰 가슴이었다. 그녀가 
무거운 상체를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친다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였다.
  어휴, 살았다. 
 그 세기의 미녀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하지만 그 벅찬 내용과 달리 어조
는 여유만만이었다.
  당신을 봐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여기에서 혼자 잠을 자야하는 
상황에 처할까봐 안절부절못했답니다. 
 케이시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밤 내 캠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따뜻한 음식도 나눠드리지요. 
  정말 친절하시네요. 
 그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루엘라 밀러라고 해요. 시카고에서 왔답니다. 당신은요? 
 케이시는 그 섬세한 손과 잘 다듬어진 손톱을 말끄러미 응시한 후에 재빨
리 시선을 돌렸다. 혹시 루엘라가 간단한 악수 이상을 예상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케이시는 다른 여자의 손등에 키스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케이시. 
 딱 한마디만 하고 일부러 루엘라의 손을 무시했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루엘라는 미소를 지으며 모닥불 옆에 놓인 올드샘 안장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녀는 케이시가 허락하기도 전에 이미 안장에 새침한 태도로 걸터앉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번 여행은 대단히 끔찍했어요. 나는 텍사스의 포트워스까지 가는 일을 
매우 간단하게 생각했답니다. 
 루엘라가 케이시를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케이시는 정중하
게 되물었다.
  목적지가 그곳입니까? 
  네, 우리 종조부 장례식에 가는 길이에요. 하지만 하녀가 세인트루이스에서 
줄행랑을 쳤답니다. 상상이 가세요? 그 다음에는 기차가 선로를 복구해야 한
다는 이유로 연착했어요. 장례식이 거행되기 전에 포트워스에 도착하고 싶었
어요.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자, 유언장이 낭독되기 전에는 꼭 가야겠다 싶
더라구요. 유언장에 내 이름이 거론될 것 같거든요. 그 일만 아니었다면, 지
금쯤 얌전하게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포트워스까지..., 걸어갈 결심을 했습니까? 
 루엘라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더니  호호  하고 웃었다. 
  정말 농담도 잘 하시네요. 그게 아니예요. 나는 마침 마차로 여행 중이던 
목사 부부를 만났어요. 친절하게도 그 분들이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했어요. 
최소한 버림을 받기 전까지는 아주 친절한 분들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케이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려.
  어떻게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분들이 나를 남겨두고 떠났어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오늘 점심
식사를 하려고 마차가 멈췄을 때, 내가 저기..., 볼일이 있어서 몇 분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보니까 마차가 정신없이 달려가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그
들이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하면서, 아니 희망하면서 여러 시간 동안 기다렸
어요.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계속 남쪽으로 갔어요. 그
런데 이번에는 길이 자취도 없이 끊기잖아요. 아, 이번 여행이 특별히 편하
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마차는 편한 축에 속했어요. 달리는 중에는요. 아무
튼 나는 길을 잃을까봐 두려웠답니다. 
 하루 종일 길을 잃고 헤맨 사람치고 깔끔해 보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먼
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그 이유에서 루엘라 밀러는 바닥에 앉는 대신 
올드샘 안장을 택했으리라.
  그 목사 부부가 당신 소지품도 가져갔겠지요? 
 케이시가 한마디했다. 
  어머, 당신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 내 여행가방 안에 꽤 비싼 보석 
몇 점과 돈이 들어 있었어요. 
 루엘라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그들이 돈을 훔칠 작정으로 나를 마차에 태웠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보이는군요. 
  하지만 나에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케이시는 가까스로 코웃음을 참았다. 이 숙녀는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협조를 제의한다고 생각하는
구나.
  대부분의 도둑들은 대상을 정해놓지 않습니다, 밀러 양. 
  그 목사가 그런 사람이라면 난 눈뜬 소경이 틀림없어요. 
 루엘라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가 당신의 신임을 얻기 위해 목사를 사칭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당국에 신고하기 전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루엘라는 또 예쁘게 한숨을 쉬었다.
  예, 알고 있어요. 그래도 나는 이번 주 안에 포스워드에 가야 한답니다. 당
신이 남쪽으로 여행하시는 중은 아니겠지요? 
 케이시는  아니오 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포스워드
가 목적지라는 말을 생략하는 것 이외에 진실을 왜곡할 다른 방법이 떠오르
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 읍을 경유할 겁니다. 
  우리?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인가요? 
  내가 말한  우리 는 나와 내 친구를 뜻합니다. 그는 지금 이 근처에서 사냥
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연히 우리가 당신을 다음 읍까지 모셔다 드리겠습
니다. 
 대화는 계속되었다. 최소한 루엘라는 쉬지 않고 말했고, 화제는 대부분 그
녀의 화려한 시카고 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케이시가 들은 바로, 루엘라는 
상류 사회의 22세 처녀로 관대한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무려 여덟 번씩
이나 결혼할 뻔했지만, 매번 결혼식을 앞둔 달에 파혼을 당했다. 그녀는 하
늘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내 약혼자들이 나와 결혼하고 싶어한 이유가 내가 아름답기 때문인지, 아
니면 나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어요. 
 케이시가 보기에 여덟 번의 파혼 경력은 좀 많다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데미안이 돌아왔다. 케이시는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그가 멍청하게 
서서 아름다운 손님한테 넋을 잃고 있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귀에는 
루엘라에 대한 케이시의 설명이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에서 
내려올 생각도 못하고 계속 말 등에 앉아 그 숙녀에게 추파를 던졌다.
 루엘라 또한 데미안의 잘생긴 용모에 홀딱 반했다. 케이시는 루엘라처럼 뭇 
남정네에게 눈웃음을 살살 치며 꼬리를 흔드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정말 역
겨운 광경이었지만, 데미안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내가 루엘라에게 다음 읍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어요. 
 케이시는 그 말로 상황 설명을 마쳤다.
  그럼, 그래야 하고말고. 루엘라는 나와 같은 말을 타면 돼. 
 데미안은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정말 태울 기세였다. 
하지만 그 제안에 케이시는 약이 올랐다.
  더 이상 여분의 체중을 실었다가는 얼룩말이 다시 반항할 거예요. 차라리 
루엘라는 내 말을 함께 타는 편이 좋겠어요. 
 데미안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루엘라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데미안은 마침내 말에서 내려 사냥감을 케이시의 무릎에 내동댕이쳤다. 심
지어 케이시 쪽은 보지도 않고, 정중하게 루엘라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황
송하다는 듯 루엘라의 손등에 키스하는 장면에 케이시는 기가 찼다. 
 남은 밤 동안 두 사람은 케이시를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류 사회 출신인 만큼 공통점이 많았고 할말도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딱 한 번 예의바르게도 루엘라가 케이시를 대화에 끌어들이려고 노
력했다. 
  우리의 대화가 지루하지 않기를 바래요, 케이시 군. 
 흥, 저것도 예의라고 차리나!
 하지만 데미안이 생각 없이 끼여들었다.
  케이시는 남자가 아닙니다. 
 그 말에 케이시의 성질이 폭발했다. 데미안이 사실을 폭로했다는 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루엘라가 옆에 앉아 호호거리며 던진 말도 케이시의 성질
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농담 마세요, 나는 한눈에 남자 여자를 알아본답니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자,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케이시를 찬찬히 살피더니 
조금 전의 호언장담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루엘라에게 신경을 끈 상태였다. 살기 등등한 시선으로 데
미안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당신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단둘이서만. 
 케이시는 씩씩하게 어둠 속으로 향했다. 데미안은 잔말 않고 뒤를 따랐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의 하소연이 터져 나왔다.
  잠깐 기다려. 내 눈은 너처럼 어둠 속에서 제구실을 못한다구. 
 케이시는 멈춰섰다. 그만하면 캠프의 가청거리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내 눈이 당신보다 어둠 속에서 특별히 잘 뵈지는 않아요.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주변 지형을 살펴봤을 뿐이라구요. 그리고 댁도 그렇게 했어야 옳아요. 
  그래, 너 잘났다. 
 케이시는 그 비꼬는 말투를 무시하고 데미안의 가슴팍을 꾹꾹 찌르며 삿대
질했다.
  대체 왜 루엘라에게 내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누구인지는 그녀와 아무 
상관도 없다구요. 알리고 싶었으면 진작에 내 입으로 말했어요! 
  지금 나에게 화났니, 케이시? 
 케이시는 그의 어조에 담긴 웃음기를 감지했다. 화를 낼 이유가 전혀 없다
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바닥에 눌러 붙은 이성의 찌꺼기마저 빠져나가는 순
간이었다. 낮게 신음하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도대체 데미안이 어떻게 알고 
날아드는 주먹을 피했을까? 하지만 눈 깜박할 사이에 케이시는 데미안의 품
에 안겨 더 이상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다. 
 그래, 데미안이 원하는 건 주먹을 피하는 거야. 하지만 케이시는 온몸을 짓
누르는 단단한 체구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케이시의 
양순함이 다른 생각을 품게 했는지, 데미안은 그녀의 고개를 뒤로 젖히고 세
찬 키스를 퍼부었다.
 
  -20-
 사고!
 데미안이 키스를 정의한 말에 케이시는 뼛속까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입술
을 맛보고, 속을 휘저어놓고, 맥박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뺨을 부
드럽게 어루만지며 입술을 뗐다. 
  이건... 이건 사고야. 이런 일은 다시 없을 거야. 
 데미안은 그렇게 말하고 가버렸다. 
 뒤에 남은 케이시는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데미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캠프로 돌아가서 모닥불 옆에 앉
더니 루엘라와 다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케이시는 멀찌감치 떨어진 둥근 돌에 앉아 좌절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
었다. 이제 불을 보듯 뻔한 진실을 회피할 도리가 없었다. 데미안에게 끌리
는 마음은 어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키스를 원했다. 사실, 그 이
상을 원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미래는 그려볼 수 없
으니까. 데미안은 원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관광객이었다. 그는 케이
시의 세계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케이시 역시 데미안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
았다. 하지만 그런 자각도 데미안이 불러일으킨  욕망 을 잠재울 수 없다는 
점이 비극이 씨앗이었다.
 케이시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었다.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 새로운 감정을 더 깊이 탐구할 것인가, 아니면 조만간 제 갈 길을 찾아가
기를 바라면서 각고의 노력을 다해 저 남자를 멀리할 것인가? 데미안은 그
녀에게 진짜 관심이 없었지만 이보다 더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든
지 있을 수 있었다. 특히 데미안이 흥미를 둔 루엘라 밀러와 헤어지면...
 이런 맥락에서 루엘라의 출현을 기뻐해야 마땅했다. 왜냐하면 루엘라는 데
미안의 눈과 마음을 꼭 사로잡아 케이시의 존재를 의식할 틈조차 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 데미안이 그 숙녀에게 침을 질질 흘리며 객쩍은 
소리를 해대는 꼴은 케이시의 약을 올렸다.
 어쨌든 케이시는 기대했던 것처럼 빨리 루엘라를 떼어버리지 못했다. 다음
날 남행 열차에 오르게 됐는데, 그 기차는 전에 탔던 것으로, 데미안의 멋진 
특별 차량이 여전히 달려 있었다. 목적지가 모두 같았던 관계로 데미안은 루
엘라를 그의 차량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시가 새침
데기 숙녀에 대한 질투심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반대할 도리가 있을
까?
 그로부터 이틀 후 포스워드에 도착할 즈음, 시카고에서 온 사랑스런 숙녀는 
아홉 번째 희생양을 낚기 일보 직전처럼 보였다.
 함께 여행했던 여러 날 동안, 데미안은 루엘라에게 딱 한 번 짜증을 부린 
적이 있었다. 그녀가 그의 어머니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였다. 그의 모친은 
루엘라처럼 시카고 사교계를 누비며 떵떵거리고 사는 눈치였다. 
 데미안은 어머니에 대한 말은 일체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엘라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입을 놀렸다. 데미안 모친의 첫 남편에 대
해 알게 된 경위하며, 그분이 몇 해 전에 두 번째 남편과 사별하고 미망인이 
되어 지금은 커다란 저택에서 외롭게 홀로 사신다는 등, 데미안이 그런 어머
니를 찾아봬야 한다는 둥 지껄여댔다. 루엘라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데미안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맞은
편 좌석에 앉아 있던 케이시는 혼자 구시렁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입을 닥쳐야 할 때를 모른다니까. 
 하지만 루엘라는 평소처럼 케이시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
며 물었다.
  저이가 왜 저럴까요? 
 케이시는 어깨를 으쓱하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여기가 답답한 모양이에요. 
 루엘라는 입을 삐죽거리며 부채질을 했다. 
  정말 그래요. 하지만 여기보다 밖이 더 덥겠지요? 하지만 나를 화끈 달아
오르게 만든 사람은 바로 그이랍니다. 당신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요? 
 케이시는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루엘라는 케이시의 찌
푸린 얼굴을 무시하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 역시 그에게 같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참 잘된 일이에요. 우
리는 그림 같은 커플이잖아요? 
 저 여자가 정말 대답을 듣고 싶은 건가? 하지만 루엘라가 새롱거리며 데미
안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기 때문에 케이시는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케이시는 입맛이 싹 달아난 상태였다.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가 따로 없어! 
케이시는 루엘라의 외모가 반반하다는, 아니 꽤 아름답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남자들이 어떻게 루엘라처럼 머리가 텅 빈 존재를 참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수수께끼였다. 데미안이 좀더 지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개
인 취향을 누가 말리겠어.
그리고 루엘라는 겉보기와 또 달랐다. 데미안에게는 그런 면을 보일까봐 극
도로 조심하는 반면, 케이시에게는 대놓고 그 비열한 근성을 유감없이 발휘
했다.
 마지막 경유지에서 기차가 점심시간에 맞춰 정차하자, 루엘라는 케이시를 
한쪽으로 데려가서 말했다. 
  나는 당신의 질투를 살까봐 굉장히 걱정했답니다. 하지만 데미안이 단언하
기를, 당신은 그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
잖아요? 당신이 그에게 어울리는 아내감이 아니라는 점이야 당신도 잘 알지
요? 게다가 나는 원하는 걸 절대로 놓치지 않아요. 부디 그 점을 명심해주세
요, 아가씨. 
 케이시는 루엘라가 이런 경고를 해야 할 강박관념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상
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 위치에 불안을 느꼈기 때문일까? 어쨌든 케이시
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즉시 쏘아붙이지 못했고, 그 다음에는 루엘
라가 데미안을 찾으러 가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놓쳤다.
 그것이 어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군항에 기원을 두고 번창한 읍 포스워
드에 도착하자, 케이시는 여우같은 루엘라 밀러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문제의 그 숙녀는 데미안에게 종조부 집까지 배웅해달라고 했지만, 케이시
는 역사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먼저 말을 돌보러 갔다. 그리고 가장 싼 여인
숙에 방을 잡았다. 이만한 크기의 읍에서 헨리 커루더스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되도록 여비를 아낄 필요가 있
었다.
 그날 밤 데미안이 그 여인숙 식당에서 밥을 먹는 케이시를 찾아냈을 즈음, 
그녀는 이미 쓸 만한 정보를 알아낸 후였다. 케이시는 오늘밤 데미안이  어
화둥둥 내 사랑 과 함께 있으리라 추측했기 때문에 다음날에야 그 말을 할 
생각이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데미안은 식탁 옆으로 오자마자 물었다.
  싸니까요. 
 데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모든 경비를 내겠다고 했잖니? 
  여기나 저기나 침대 수준은 다 엇비슷해요. 여기도 괜찮아요. 
  길 맞은편에 있는 가장 좋은 호텔에 네 방을 잡아뒀어. 
  그럼 환불을 받으세요. 
 케이시는 계속 밥을 먹으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그런데, 당신이야말로 여기 웬일이에요? 루엘라가 저녁식사에 초대하지 않
던가요? 
 데미안은 한숨을 쉬며 옆자리에 앉았다.
  제의는 받았지만 거절했어. 솔직히 털어놓으마.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쉴 새 
없는 수다를 들으며 밤을 보낼 수 없어. 
 씹고 있던 스테이크 조각에 목구멍이 막힐 뻔했다. 데미안이 캑캑거리는 케
이시의 등을 두드렸다. 삶은 가재처럼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윽박질렀다.
  지금 내 뼈를 부러뜨릴 심산인가요? 
  미안해. 
 데미안은 도움을 고마워하지 않는 케이시가 원망스러웠다.
  여기 음식이 먹을 만하니? 
  아니오. 하지만 값이 싸요. 
 그는 한참 동안 케이시를 바라보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넌 도대체 어떻게 된 게 싼 건만 쫓아다니니? 보수가 꽤 넉넉할 텐데? 그
렇게 위험한 일이니만큼, 당연히 돈을 많이 받아야지. 
  그렇기는 해요. 하지만 가는 곳마다 돈을 펑펑 뿌리고 다닌다면, 훗날 은퇴
한 다음에 내 꼴이 어떻게 되겠어요? 
 데미안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만간 은퇴할 생각인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래요. 
  그리고 뭘 할 건데? 
  집에 갈 거예요 
  결혼해서 미래의 카우보이를 키우시겠다? 
 케이시는 그의 비비틀린 말을 무시했다.
  아니오, 나는 물려받은 목장을 경영할 생각이에요. 
 데미안은 깜짝 놀랐다.
  그 목장이 어디에 있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데미안. 
  그래도 말해봐. 
  싫어요. 
 데미안의 찡그린 상은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그는 면전에서 거절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그 화제를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의 그 커루더스가 여기에서 남쪽으로 향했어요. 
 케이시는 무심하게 중요 사안을 입에 올렸다.
  그는 샌안토니오를 거론했지만, 그곳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에요. 
 데미안은 의심쩍은 듯 물었다.
  어떻게 그런 정보를 벌써 알아냈지? 
  읍의 마구간이란 마구간은 이 잡든 샅샅이 뒤졌거든요. 
  왜? 
  당신 탐정의 말에 의하면 커루터스는 기차를 타고 이 읍을 떠났다고 하지 
않았어요. 기차가 아니라면 말을 구입했겠지요? 그리고 인상착의가 특징이 
있는 만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조사해본 결과 정말 그랬어요. 
  탐정들의 머리도 그 정도는 돌아갔을 거야. 
  그래서 운이 따라야 한다는 거죠. 커루더스에게 말을 팔았던 친구는 그 다
음날 뉴멕시코로 어머니를 뵈러 갔고, 거의 한 달 가량이나 그곳에 머물렀다
더군요. 그러니 당신 탐정들이 허탕을 칠 수밖에요. 
 데미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최소한 일 주일은 머물러야 할 줄 알았어. 
 케이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감이에요. 그나저나 참 안됐군요. 이제 당신은 체류 기간을 줄이든지, 아
니면 나에게 이 일을 맡기고 뒤로 물러나시겠죠? 
  어림도 없어. 
 데미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꽃 같은 루엘라를 남겨두고 떠나는 일에 
단 일 초도 주저하지 않았다.
  너에게 다시 말해두겠는데, 나는 네가 그놈을 찾는 현장에 있어야만해. 그
놈과 일대일로 맞붙고 싶단 말이야. 자,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없니? 
  그는 자기처럼 눈에 띄는 얼룩말을 샀다더군요. 
  말이 튄다는 뜻이겠지? 
  그래요. 그리고 막 형성되기 시작한 읍에 대해 묻더래요. 말 거래꾼인 멜튼 
씨가 그 이유를 묻자, 웃으면서 자기 소유의 읍을 갖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멜튼 씨는 그런 땅딸보에게 걸맞지 않는 거창한 야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서
던 퍼시픽  기차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작은 읍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노라고 말해줬대요. 
  그래서 너는 이제 뭘 할 거니? 
  일단 샌안토니오에 가서 그를 찾아볼까 해요. 샌안토니오의 동쪽 지역은 
정착민이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그가 정말 신흥 읍을 찾는 중이라면 서쪽으
로 갔을 공산이 커요. 하지만 우선은 샌안토니오에 가서 그런 추측을 확인해
줄 사람을 찾을 생각이에요. 
  샌안토니오까지 기차가 들어가니? 
  예..., 불행하게도. 
 데미안은 케이시의 씁쓸한 어조에 싱긋 웃었다.
  내 특별 차량이 편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그러니, 케이시?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리라.
  기차가 시간표대로 운행한다면이야 시간 낭비를 막을 수 있지요. 아무튼 
샌안토니오행 기차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니까 당신에게는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많지 않은 셈이예요. 
  우와, 배가 고픈걸. 
 데미안은 식당 종업원을 불렀다.
  나에게 스테이크, 아니, 얘가 먹고 있는 걸 가져다주시오. 
 케이시는 여전히 경고하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 루엘라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많지 않다니까요. 
 데미안은 짐짓 생색을 내며 그녀의 팔을 토닥거렸다.
  케이시, 너에게는 중매쟁이 노릇이 어울리지 않아. 네 연애에나 신경 쓰려
무나. 
 중매쟁이? 물고 있던 음식물을 튀겨가며 한바탕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대신 당장이라도 그를 전기의자에 앉히고픈 시선으로 데미안을 노려
봤다. 
 
  -21-
 다음날 아침 역사로 가는 길에 케이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길 한복판을 
따라 내려오는, 저 먼지를 뒤집어쓴 털북숭이는 아버지! 그는 광활한 평원을 
내내 달려온 사람처럼 보였다.
 케이시는 옆에서 말고삐를 쥐고 걷고 있던 데미안에게 한마디 설명도 하지 
않고 재빨리 가까운 골목으로 달려가 벽에 달라붙었다. 제발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지 못했기를..., 그리고 올드샘도. 아버지는 한눈에 케이시의 말을 알아
볼 것이다. 
 데미안이 뒤를 따라왔다. 눈썹만 봐도 잔뜩 긴장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그
는 점잖게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거니? 
  내가 뭘 하는 것처럼 보여요? 
 케이시가 낮게 투덜거렸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숨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아버지가 거리를 따라 말을 모는 중이었다. 아직 케이시가 숨은 골목을 지
나지 않았다. 가능한 한 몸을 숙이는 한편, 올드샘의 대가리도 아래쪽으로 
끌어당겼다.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던 데미안이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기차 놓치겠다. 
  정시에 도착할 테니 걱정일랑 붙들어 매요. 
 데미안은 아래위로 거리를 훑어봤다. 하지만 수상쩍은 낌새나, 현상범 전단
에 나붙은 얼굴은 전혀 없었다.
  빨리 설명해봐. 
  우리 아버지가 지금 막 이 읍에 도착하셨어요. 아, 다시 두리번거리지 말아
요. 그러다 눈치채시겠어요.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다시 두리번거리는 데미안을 막지 못했다. 거리에 
있는 서너 명의 사내가 데미안의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사업가처럼, 또 한 
명은 불량기 가득한 무법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목동처럼 두 마
리의 수소를 몰고 있었다. 케이시의 아버지뻘로 보이는 대상은 두 명으로 압
축되었고, 데미안은 사업가에게 표를 던졌다.
  네 부친은 그리 온화해 보이지 않지만 너를 도망가게 만들 정도는 아닌
데. 
 데미안의 논평에 케이시의 코웃음이 뒤따랐다. 데미안은 재빨리 다른 질문
을 던졌다.
  왜 아버지를 피해서 도망 다니니, 케이시? 
  아버지가 당장 내 머리채를 잡고 집으로 끌고 갈 테니까요. 우리 아버지는 
보통 분이 아니시거든요. 당신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분이
라구요. 
 데미안은 그 사업가를 다시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시선이 불량배 쪽으로 
돌아갔을 때야 사내의 칠흑 같은 흑발과 당당한 광대뼈 등 케이시와 닮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데미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맙소사, 저 사람이 너희 아버지야? 저 무법자처럼 생긴 남자가? 
  아버지가 항상 저런 건 아니에요. 
 케이시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맞아요, 저분이 우리 아버지예요. 제발 그만 좀 봐요! 아버지는 다
른 사람의 시선을 알아챌 수 있다구요. 
  어떻게?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너희 아버지는 네가 여기에 온 걸 알고 계실까? 
  아실 리 없어요. 내가 기차로 여기까지 왔다고 짐작하지 않은 한. 하지만 
당신이 기차표를 샀으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 게다가 호텔방도 당신이 
잡았으니까, 내 흔적은 하나도 없어요. 
  이런 말은 할 땐 아니지만, 어젯밤 네 방은 네 이름으로 잡았어. 
  뭐요? 
 데미안은 움찔했다.
  뭐, 네 진짜 이름은 아니야. 그저 약자를 썼을 뿐이라구. 
  아무 이름이나 지어낼 수 없었어요? 
  왜? 네가 네 입을 그 약자를 쓴다고 했잖아. 
  어휴, 그거야 현상범을 보안관에게 넘겨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에만 그랬지
요. 우리 아버지가 들르는 곳마다 보안관을 찾아가서 일일이 확인할 성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호텔과 여인숙은 샅샅이 뒤졌을 거예요. 
  그럼, 그게 네 본명의 약자였니?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금방 알아볼 약자예요. 
  아하, 아버지의 약자를 도용했구나. 
  아니에요. 
  그렇다면 누구의 약자인데? 
  이미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댁은 정말 질문이 많군요. 아, 이제 우리 아버
지가 지나가셨어요. 빨리 기차역으로 가요. 당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
고 올드샘을 가축 운반 차량으로 데려갈 수 있겠어요? 
  아버지가 네 말도 알아보셔? 
  두말하면 잔소리죠.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말이니까. 
 케이시는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역사로 향했다. 아버지 눈에 띄지 않고 포트
워스를 빠져나가리란 기대를 품지 않았지만, 행운의 여신은 케이시 편이었
다. 챈도스가 특별 차량으로 뛰어드는 불상사 없이 기차는 정각에 출발했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가 따로 없었다. 최
소한 샌안토니오로 가는 길 내내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런 가
슴 조이는 일의 재발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협조 요망.
 추적자를 불러들이기 바람. 조만간 귀향하겠음.
 하지만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샌안토니오에 헨리 커루더스의 
단서가 없었다. 아니, 아예 흔적조차 없었다. 역사 철도원은 여기에서 커루더
스와 같은 인상착의의 승객이 기차를 타지 않았노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케
이시는 그가 신흥 읍을 찾는다는 전제하에서 서던 퍼시픽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으리라 추정했다. 케이시와 데미안으로서는 커루더스와 동일한 여정을 
따라가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데미안은 특별 차량을 새 기차에 연결시켰다. 솔직히 케이시는 그 차량의 
편안함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일반 원칙에 대해서만 불평을 늘어놨다. 그들은 
여러 날에 걸쳐 차량에서 같이 잠을 자야 했다. 케이시는 정말 아무 생각 없
이 잠만 잤다. 어느 날 밤, 자신을 굽어보는 데미안을 보기 전까지는.

  -22-
 케이시는 특별 차량의 한쪽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 좌석은 좁았지만, 최
근에 사용했던 침대보다 훨씬 푹신푹신했다. 게다가 데미안의 꿈까지 꾸고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얼른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참으로 단꿈이었다. KC 목장에서 파티가 열렸고, 그녀와 데미안은 함께 춤
을 추고 있었다. 데미안이 왜 그녀의 집에 있는지조차 의아해하지 않았다. 
꿈속에서는 그가 거기 있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해 보였다. 심지어 부모님까
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때 갑자기 데미안이 키스를 퍼부었다. 정말 이상
하게도 주변에서 함께 춤을 추던 사람들은 그들의 키스를 알아차리지 못했
다. 그 키스는 전과 똑같았다. 단,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고.
 이전에 그가 불러일으킨 감정이 다시 솟았지만, 이번에는 케이시가 긴장을 
푼 상태였기 때문에 전보다 훨씬 강렬했다. 그 키스는 더 이상 깊어질 수 없
는 그런 종류였다. 노련하게 혀를 사용하여 입안을 구석구석 탐험했고, 아랫
입술을 삼켜버리려는 듯 강하게 빨았다. 케이시는 몸을 더듬는 데미안의 손
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이상하다. 춤을 추고 있으니, 그는 내 등만 어루만질 수 있을 텐데...
 그녀로서는 열렬한 키스에서 깨어나 그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이유를 정확하게 가리지 못했다. 데미안의 손이 앞가슴을 부드럽게 주무
르는 충격 때문이었을까? 그 감촉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순간, 데미안이 실제로 좌석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키스하고 있음을 
깨닫고, 케이시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럴싸한 말을 생각하려 했지만,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케이시가 생각해낸 말은 오직 한마디.
  데미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케이시가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한 다음에야 마침내 데미안은 몸
을 일으켰다. 하지만 데미안의 다음 질문에 케이시 또한 그 이상으로 어리둥
절해졌다.
  넌 내 침대에서 뭘 하는 거지? 
  웬 침대? 여기에는 침대가 하나도 없어요.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만한 크
기의 좌석이 전부라구요. 
 케이시는 똑똑 부러지게 강조해서 말했다.
  그리고 내 좌석 쪽에 와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데미안. 
 그때서야 데미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케이시의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젠장할, 대단한 꿈이로군. 
 데미안의 말에 케이시는 눈을 끔벅거렸다.
 사실 데미안의 꿈 상대는 루엘라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시는 여전히 실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다.
  몽유병이라도 있어요? 
  전에 없던 일이야..., 지금까지는. 저기, 내가 사과해야 할까?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줘서 미안하다? 데미안은 자신이 나에게 어떤 감정
을 불러일으켰는지 모르는 걸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혹시 내가 키스나 
애무를 좋아하는 몸짓이나 소리를 내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감정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하
지만 좋아하는 내색을 했다고 해도, 그는 잠들어 있는 상태였으므로 반응을 
깨닫지 못했으리라.
  데미안, 당신이 저쪽 자리에만 붙어 있어준다면 자면서 활개를 치건, 체조
를 하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에요. 
  그럴 테지. 
 데미안은 오랫동안 뜸을 들인 다음에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정말 근사한 기분이었어. 
 케이시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하지만 워낙 어두운
지라 데미안은 그녀의 부끄러움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말은 그가 
여전히  근사 한 기분으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증명했다.
  내 말뜻을 알고 싶지 않니? 
 케이시는 이미 그 말뜻을 정확히 알았다. 지금 그는 키스를 계속하자는 제
안을 하고 그 결정권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빌어먹을, 정말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번에 그가 꿈꾸는 키스 상대
는 루엘라가 아니었다. 데미안은 키스에 녹아든 상대의 입술을 분명하게 기
억했다. 
 묻지 않고 다시 키스했더라면 거부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 질문은 곧 키스
를 원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꼴이었다. 케이시로서는 도저히 인
정할 수 없는 진실을. 그녀는 데미안에게 관심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싶었
다.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망할 놈의 남자, 묻긴 왜 물어?
 하지만 순리에 맞는 행동이었다. 그들이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는 이 마당에 친밀한 관계를 맺는 짓은 예정된 이별을 어렵게 
만들 테니까.
 케이시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냉큼 말했다.
  데미안, 나는 다시 자고 싶어요. 당신도 얌전히 잠이나 자는 게 어때요? 
 지금 들은 소리는 한숨일까? 아냐, 아닐 거야.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내
려다보고 서서 꾸물거렸고 케이시는 묘한 기대감으로 점점 긴장했다. 그러다 
마침내 등을 돌리고 제 좌석으로 돌아가더니 그 좁은 공간에서 하염없이 뒤
척거렸다. 그리고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케이시는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아, 내가 다시 잠을 잘 수 있을까.

  -23-
 케이시는 기차역마다 내려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커루더스의 인상착의를 물
었다. 하지만 번번이 허탕만 치자, 데미안은 더 이상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가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즈음에 그녀가 긍정적인 
정보를 캐냈다.
 기차가 두 시간이나 정차한 덕분에 데미안은 케이스를 따라 조사에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읍의 이발소로 향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인 모
양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이발사는 헨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기적 같은 상황을 계기로 기억을 더듬은 결과, 데미안은 헨리가 항상 깔
끔한 성품이었음을 떠올렸다. 평소 단정한 사람이 도망을 다닌다고 해서 갑
자기 집시가 되진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발은 헨리 커루더스에게 고려
해야 할 행동 양식이었다.
 아무튼 그 이발사는 고객의 머리를 자르면서 계속 대화를 하는 타입이었던 
관계로 헨리에게도 말을 붙였다. 그는 헨리가 이 읍의 읍장 선거는 언제이
고, 읍의 사람들이 현재 읍장에 만족하느냐의 여부를 물었음을 기억해냈다.
 그 질문만 따로 떼어 생각한다면, 헨리가 대화를 잇기 위해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가  소유 할 읍을 찾고 있다는 
기존의 정보와 연결시키자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읍장의 권위를 지닌 사람은 읍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읍
을 소유하는 이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헨리가 권력을 장악하는 쪽으
로 마음을 바꾸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정치에 뜻을 뒀을까?
 하지만 이미 읍장이 있는 읍은 잘 정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제 그들의 조사 지역은 더욱 확대된 것처럼 보였다.
 케이시는 그 결론에 속상해했다.
  그가 이렇게 멀리까지 왔다는 점은 확인되었지만, 이제 여기부터 철로 주
변의 읍을 이 잡듯 샅샅이 뒤져야 할 판이에요. 
 즉, 커루더스를 찾는 데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되리라는 뜻이었다. 그 말은 
곧 케이시와 함께 있는 기간의 연장을 의미했으므로 데미안은 그다지 실망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빨리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을 잡아 고향으로 돌아가
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없이 혼자 루트리지 상사를 경영해야 할 생
각에 마음이 심란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아버지의 신발을 꿰어 신어야 할 줄 미처 몰랐다.
 그리고 케이시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케이시를 멀리하는 일이 더 어려
워지리라 짐작했지만, 매시간 그녀를 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루엘라 밀러가 
한동안 관심을 분산시켰지만 그도 잠시에 불과했다. 그 시카고 사교계 처녀
의 미모는 눈에 부실 정도였다. 그 점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 알맹이 없는 
공허한 수다에 진저리가 나서  입 닥쳐 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에 비해 케이시는 너무 과묵한 나머지 그녀의 비밀과 신분에 대해 입을 
열게 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궁금
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왜 위험한 직업에 투신했을까? 왜 아버지를 피
해 다닐까? 그 험악한 아버지 이외에 다른 식구들이 또 있을까?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케이시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문제였다. 마
침내 그날 밤 기차에서 더 이상 거리를 지키지 못하고 그 욕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날 밤, 데미안은 잠을 이룰 수도, 잠든 그녀에게 눈을 뗄 수도 없었다. 곤
히 잠든 케이시의 부드럽고 관능적인 모습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
었기에 그녀를 탐했다. 그때 케이시가 잠에서 깨어났다. 데미안은 좀처럼 내
숭을 떠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녀가 일어나서 비난을 퍼붓는 데에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몽유병이 생긴 것처럼 행동했다. 가당치도 않은 변명이었지만 욕망
이 한껏 고조되어 있던 터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고, 케이시는 그 변명을 
믿었다. 아, 계속 잠들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케이시의 반응은 뭇 남성
들이 꿈에 그리는 그런 종류였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까지는...
 다음날 저녁, 기차는 랭트리에 정차했고 승객들은 작은 읍의 호텔에서 편안
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데미안은 방을 잡고 일찌감치 물러났다. 하지만 케
이시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나기 전에 조사를 하겠노라고 말했다.
 데미안은 즉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케이시는 제 방에 없었다. 역사에도, 가축 수송 차량에도 없었
다. 데미안은 어디에서도 케이시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사람이 감옥으로 가보라고 귀띔했다. 케이시는 정말 감옥의 튼튼한 쇠
창살 뒤에 있었다. 표정은 평소처럼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황금빛 눈동자에
서 불꽃이 타올랐다.
  심각한 상황이니? 
 데미안이 감방 쪽으로 다가갔다.
  오히려 우스꽝스럽다는 편이 옳아요. 
 케이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총을 쏴서는 안 될 사람에게 총을 쏘지는 않았겠지? 
  내 총은 가죽집에 얌전히 있었어요.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도 그걸 알면 좋겠군요. 
 그녀가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어젯밤  저지 릴리  술집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내 볼 일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싸움판이 벌어지더라구요. 그래도 나는 끼여들지 않고 가만히 서 있
었어요. 결국 싸움이 막을 내리자, 바닥에는 널브러진 사람으로 발 디딜 틈
이 없었고 코피로 강물을 이룰 정도였어요. 
  네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요. 그때 술이 억수로 취한 빈 판사가 자기 법정이 
파손되었다고 노발대발하잖아요. 
  여기 술집은 법정을 겸한다는 말이야? 
  그리 보기 드문 일도 아니에요. 대부분의 작은 소읍들은 주재 판사는커녕 
법정도 없기 때문에 순회 판사가 올 때마다 술집을 이용해요. 그곳이 읍에서 
가장 큰 공간이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이 재판회기와 상관없이 밤낮
으로 법정을 지키는 건 아니에요. 
  왜 네가 그 빈 판사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감이 들까?   
  난 빈 판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어요. 하지만 어젯밤 여러 시간 동안 이 
감방에 함께 감금되었던 동지에게 귀동냥을 했지요. 뭐, 나중에 그 동지는 
부인에게 끌려서 집으로 갔지만요. 그 판사 양반은 건수가 생길 때마다 텍사
스 법을 제 마음대로 해석해서 우려낸 벌금으로 술판을 벌이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말 도둑과 살인자는 교수형으로 엄히 다스린다더군요. 단, 그들이 자
기 술친구가 아닐 경우에만 말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니? 
  즉, 그가 법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적용한다는 뜻이에요, 가령 술친구 
중 한 명이 사람을 쏘았다고 쳐요. 그러면 판사가 발 벗고 나서서 가해자를 
무죄 방면할 방법을 찾아낸다는 거죠. 그가 내린 가장 악명 높은 판결 중 하
나가 뭔 줄 아세요? 글쎄, 죽은 희생자는 자기 친구가 발사한 총알 앞에 서 
있지 말았어야 했다고 판결을 내리더래요.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네 감방 동지가 농담을 했을 거야, 케이시.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영 의심쩍어요. 
  왜? 
  전에 한 목동에게 빈 판사에 대해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거든요. 여러 
해 전 그가 이 읍에 들어섰을 때, 어떤 멀쩡한 사내가 갑자기 술집 앞 길바
닥에 쓰러져서 죽었대요. 당시 판사는 술집 포치에 진을 치고 있었다더군요. 
빈 판사는 즉시 뒤뚱거리며 계단을 내려와서... 
  뒤뚱거리다니?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취해 있었대요. 하여튼, 뒤뚱거리며 계단을 
내려와서 우선 검시관 노릇을 했다더군요. 죽은 남자의 주머니를 샅샅이 뒤
져 돈 몇 푼과 권총을 찾아낸 다음, 사법적인 재량권을 발휘해서 불법 무기
를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죽은 사람에게 사후 벌금을 부가하더라나요. 물론 
그 벌금은 죽은 사람 주머니에서 찾아낸 금액과 맞먹었지요. 
  그 돈을 쓱싹했다? 
  이 근방에서 유일무이한 판사인데, 왜 안 그랬겠어요? 다시 어젯밤 일로 
돌아가서, 판사는 법정이 모두 파손된 만큼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을 체포하
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이 다 수감될 만큼 
감방이 넓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더군요. 그러자 판사는  공식적인  체포를 나
에게만 국한시키지 뭐예요. 
 데미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왜? 
  나도 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건 관련자와 벌금을 징수하러 갈 
그들의 거주지를 모두 알고 있다나요. 젠장, 그들 중 과반수가 술친구들이니 
그들에게 벌금을 징수할 리 없죠. 하지만 나는 이방인이니만큼 도주의 위험
을 고려하여 감방에 처넣은 다음 아침에 재판을 하겠다더군요. 
 데미안이 한숨을 내뱉었다.
  즉, 너는 의자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그 기물 손상의 피해액을 전부 
낸 다음에야 석방될 수 있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너는 네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사람이니, 네가 그 사건과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했겠지? 
 케이시는 데미안을 똑바로 노려봤다.
  내가 감방에서 밤을 보내고 싶어 혈안이 된 사람처럼 보여요? 당연히 그 
말을 했지요.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기물 수리에 
참가하라는  공식적인  판결을 내렸어요. 
  자신을 포함해서? 
 케이시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벌금을 징수해서 수리비로 내놓으라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더
군요. 
  이 일 때문에 기차를 놓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걸요. 사람들이 벌써 판사를 깨우러 갔어요. 내가 듣기로는 재
판이 오래 걸리지 않는데요. 
  네가 아무리 용을 쓴다 해도 돈지갑을 열어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겠구
나. 
  그렇겠죠. 
 케이시는 씁쓰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한 벌금은 내지 않겠어요. 
  걱정하지 마. 내가 낼게. 
  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데미안이 싱긋 웃었다. 
  그래, 돈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돈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줄 거야. 
 돌아가는 판국이 이 모양이었으므로 데미안은 케이시와 함께 그 술집 겸 
법정으로 출두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로이 빈 판사의 기분이 오늘 아침에 
최악이었음을 알 리 없었다.

  -24-
 로이 빈 판사가 재판의 유무를 떠나서 진을 치고 있다던, 그 문제의 술집 
겸 법정  저지 릴리 는 전형적인 선술집이었다. 그러나 딱 한 군데 예외가 있
었다. 그건 바로 한가운데 놓인 간이 판사석이었다.
 빈은 전형적인 판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배불뚝이라 양복 조끼의 맨 
윗단추만 간신히 채우고 나머지는 다 풀어놓았다.
 나이는 일흔 정도로, 핏발선 눈은 술에 대한 정열을 과시했다. 목 주변의 
밧줄 흔적은 과거 어느 시점에 교수대에 섰다는 전력을 암암리에 말해줬다. 
아무래도 왕년에 비열하기 짝이 없는 총잡이였고 다른 패거리들은 모두 송
장이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 같았다. 그것도 다 그가 평화의 사도로 임명되기 
전의 과거지사였다. 
 케이시는 전날 밤 체포되었다는 점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술집의 파손 정
도가 빈의 폭언과 헛소리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임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벌금을 징수할 기회를 잡기 위해 일부러 노발대발하며 연극을 
했다손 치더라도 놀라지 않았으리라.
 넓은 술집에서 파괴의 흔적이라고는 다리 하나가 부러진 탁자 하나와 누군
가의 등에 내리쳐져 부서진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그 외에 술병 파편들이 
즐비했다. 케이시 생애에서 가장 격렬한 축에 해당하는 어젯밤 난동을 청소
하는 일에 대단한 수고와 노력이 요구될 것 같았지만, 그런 뒤처리 흔적을 
아직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 이른 시간에도 판사의 술벗들이 바에 옹기종기 모여 해장술을 
마시며 친구가  일 을 마치고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케이시는 재판 중에도 술
판이 벌어진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터였다.
 빈 판사 자신도 의사봉 옆에 술병을 나란히 놓고 앉아 거침없이 재판을 진
행했다. 특별한 연단도 없었다. 술집을 법정으로 삼으면서 재판석 하나로 만
족하고 그 외의 것을 돈 낭비로 생각하는 위인이었다. 법정은 격식과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마땅히 일어서서 법정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집행관마저 판
사석 한쪽 귀퉁이에 앉아 커피를 훌쩍거리는 정도였다.
 케이시는 법정 대리인의 호위를 받으며 이 희극 무대와 같은 법정으로 들
어갔다. 데미안이 오른쪽에 서서 따라 들어가 판사석 앞에 섰던 탓에 판사의 
즉각적인 관심을 끌었다.
  자리에 앉게, 젊은이. 내가 이 작은 숙녀를 처리한 다음에 자네의 재판을 
하겠네. 
 케이시는 움찔했다. 저 늙은 얼간이가 무슨 수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
의 성별을 정확하게 알아맞혔을까? 빈 판사는 케이시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가래 끓는 웃음소리를 냈다.
  내 눈썰미는 귀신도 못 속여, 아가씨. 
 빈 판사가 허풍을 떨었다.
  포대 자루를 걸친들 예쁜 아가씨를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재주를 발휘할 기회가 극히 드물었지. 
 그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리는 통에 케이시의 얼굴이 붉어졌다.
 판사는 성성한 회색 눈썹을 데미안 쪽으로 치켜올려.
  왜 아직도 거기 서 있는 건가, 젊은이? 귀가 멀었나? 
  저는..., 이 숙녀의 동행인입니다. 벌금을 내고 갈 길을 가려고 왔습니다. 
 데미안이 설명했다.
  그래, 그래야지. 
 판사는 탐욕스런 눈빛을 하고 대답했다.
  평화를 교란하고 개인 재산의 파괴 행위에 동참한 죄목으로 벌금 백 달러
형을 선고하겠다. 집행관에게 벌금을 내도록 하게. 
  백 달러씩이나! 
 케이시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내 판결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소, 아가씨? 
 로이 빈이 경고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데미안이 옆구리를 꾹꾹 찌르는 통에 간신
히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이 돈다발을 꺼내 백 달러에 추가로 60달러를 더 보태지 않았다면 
빈 판사는 즉석에서 더한 죄목을 고안해냈을 것이다. 아무튼 데미안이 건넨 
벌금은 집행관의 손을 거쳐 판사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빈 판사는 부끄러워
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이제 가도 됩니까? 
  좋아, 좋아. 
 빈은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자 정의의 사도 역할을 빨리 벗어버리려고 초조
하게 말했다.
  하지만 왜 자네가 벌금을 내지? 남편이라도 되는가? 
  아닙니다. 
  그럼 변호사?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 
 데미안이 그 개인적인 질문에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으므로 케이시가 대신 
나섰다.
  우리는 동부에서 살인을 저지른 남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특하구먼. 
 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제든 그 살인자를 나에게 데려와도 좋네. 내가 기꺼이 그 녀석을 적절하
고도 빠르게 목매달아 주지.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소위  함께 여행하고 
있지? 
 케이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위 어떻다는 거죠? 지금 무슨 암시를 하시는 겁니까, 재판관님? 
  청춘남녀가 함께 돌아다니면서 육욕적이고 방탕한 죄악에 흠뻑 빠져 있는 
꼴을 좌시할 수 없네. 그럼, 안 될 말이지.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도 없
고, 있어서도 안 돼. 하지만 내 기꺼이 그 잘못을 쉽게 교정해주지. 내가 부
여된 권한에 의거하여 두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 선언하노라. 신의 축복이 두 
사람의 영혼에 있기를. 
 빈 판사는 의사봉을 땅땅 두드린 다음에 덧붙였다.
  결혼 비용으로 5달러를 내게. 집행관에게 지불하도록. 
 케이시가 말을 잃은 순간, 데미안이 소리를 쳤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채 항변이 끝나기도 전에 로이 빈이 핏발선 눈으로 데미안을 노려
봤다.
  합당한 절차와 도덕적인 의무에 대하여 나에게 항변할 생각은 아니겠지, 
젊은이? 
 판사는 준엄하게 다그쳤다.
 케이시는 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5달러를 집행관에게 건네고 데미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데려가지 않으면 두 사람이 나란히 감방으
로 돌아가게 될 참이었다.
 술집 밖으로 나오자, 케이시는 팔을 놨다. 데미안이 길을 재촉하지 않는데
다, 그녀 자신도 너무 황당한 일을 당한 나머지 서두르지 않으면 기차를 놓
칠 판이었다.
  지금 그 선언이 진짜는 아니지? 
 데미안이 물었다.
  안타깝게도, 빈 판사가 우리 두 사람을 한몸으로 엮어준 선언은 진짜가 틀
림없어요. 
  좋아, 하지만 합법적인 건 아니겠지? 
  나도 그렇기를 바래요. 하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는 합법적으로 임명된 
판사예요. 
  케이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데미안이 좌절감에 어린 어조로 말했다.
  보통은 신랑과 신부가 몇 마디 말을 해야 한다구. 결혼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혀야 해! 
 케이시는 그의 냉소적인 태도를 나무랄 수 없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빈이 마음먹고 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때는 
더더욱 아니지요. 저 야비한 늙은 멍청이가 비열해지기로 결심한 마당에 우
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여기에서는. 
  너는 왜 이렇게 침착한 거야? 
  우리가 화를 낼 일이 없으니까요. 
  억지 결혼을 당했는데도 화를 낼 일이 없다? 너, 참 대단하구나.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리는 결혼한 만큼 쉽게 결혼 무효선언을 
받을 수 있어요. 다른 판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구요. 판사를 
찾는 일은 커루더스를 찾는 쪽보다 훨씬 쉬워요. 그러니까 다른 일이 터지기 
전에 이 랭트리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예요, 알았어요? 
 데미안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케이시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말을 집어
타고 출발 경적을 알리는 기차에 가까스로 올랐다. 하지만 빈 판사의 집행관
을 별 어려움 없이 사람의 뒤를 따라와 기차를 세우더니, 케이시의 총을 되
돌려줬다. 그녀는 무기도 없이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다녔으면서도 그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집행관은 또한 결혼 서류를 포함
한 판결문을 가져와서 서명을 요구했다.
 케이시는 고집을 피웠다.
  우리가 서명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런 경우에는 두 사람을 감방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케이시는 권총을 총집에 넣었다. 이제 남은 선택은 딱 두 가지였다. 순순히 
서류에 서명하거나, 아니면 집행관을 기차 밖으로 걷어차거나! 
 케이시의 마음이 후자 쪽으로 기울었을 때,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케이시, 이 사태를 바로잡을 방법이 있으니까 그냥 서명을 하자. 
 데미안 말이 옳았다. 그녀는 서류에  케이시 스미스 라고 서명했고 그 뒤를 
이어 데미안이  데미안 존스 라고 서명했다.
 기차가 지옥을 빠져 나갈 즈음, 두 사람은 최소한 웃을 거리를 찾은 셈이었
다.

  -25-
 일시적이라 해도 데미안과의 결혼을 케이시의 마음을 야금야금 좀먹었다. 
케이시 생각에는 좋은 면도 있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결혼이 싫기만 한지, 
기차가 서는 곳마다 내려서 판사가 있는지의 여부를 제일 먼저 물었다.
 케이시라고 해서, 특별하고 신성해야 할 의식이 교회도 아닌 법원에서 강제
로 몇 초만에 이루어진데다, 식을 마치고 합방도 치르지 않았다는 현실이 좋
을 리 없었다.
 그런데 몇 가지 어리석은 이유에서 생각은 그  합방  부분을 맴돌았다. 직면
한 현실은 엄연히 존재했다. 즉, 두 사람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케이시가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했던가? 아니다. 술에 찌든 판사가 일을 그
렇게 만들어놨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
록 더욱 생생하게 부각되었다. 소위  법적인 허락 을 받았다는 면죄부는 전보
다 더 강렬하게 데미안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샌더슨이라는 읍에서 케이시의 간이 떨어질 뻔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일은 
마음속에서 한동안  결혼  생각을 지워줄 만큼 충격적이었다. 또다시 아버지
를 본 것이다! 사실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라 여인숙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뒷
모습만 목격했다. 그러므로 그는 챈도스가 좋아하는 옷차림을 한 다른 사내
일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말을 타고 포트워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그렇게 빨리 뒤따라왔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혹시 같은 기차를 탔
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가축 수송칸에는 말이 여러 마리 실렸지만, 챈도스의 말은 없었다. 만일 있
었더라면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오후에 그들은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일 년 전, 서든 퍼시픽 선로에서 북
쪽으로 이틀 거리에 있는, 옛날 무역로 근방에 새로운 읍이 들어섰다는 내용
이었다. 그  컬더스 라는 읍은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 관계로 조만간 철로가 
들어설 예정이고, 이미 자체 학교와 세 개의 교회당, 그리고 의회와 읍장까
지 갖춘 곳이었다.
  읍장 이라는 말에 케이시와 데미안은 기차 여행을 포기하고 그곳으로 향하
기로 했다. 또한 읍 이름 자체가 커루더스와 비슷하다는 유사성이 관심을 끌
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케이시는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데미안의 방으로 몰래 들어가서 그를 침대 밖으로 끌어냈다.
 데미안은 불평불만을 늘어놨다.
  케이시, 나는 너와 달리 우리의  결혼 에서 혜택을 하나도 보지 못했어. 
 케이시는 그 말을 무시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고 느린 걸음을 유지했기 때문
에 데미안의 또 다른 불평이 잡음 없이 깨끗하게 귀에 드려왔다.
  우리의 이 일시적인  결혼 은 나에게 아무 혜택도 없어. 
 데미안이 너무 씁쓰름하게 말했으므로 케이시는 당장 반박했다.
  그럼 난 무슨 혜택을 입었다는 거죠? 
  너는 유부녀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구나. 너희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내 
허락 없이 너를 끌고 갈 수 없어. 그걸 모르겠니? 남편의 권리는 부모의 권
리보다 우선한다구. 
 케이시는 싱긋 웃었다.
  참으로 훌륭한 지적이군요. 하지만 우리 결혼이 진짜가 아닌 마당에 그 우
선권 운운하는 말은 우리 아버지에게 씨도 먹히지 않을 거예요. 아, 하지만 
아버지는 가짜 결혼이라는 걸 모르시겠지요? 
  네가 말하지 않는 이상은 당연히 모르시지. 
  맞아요. 하지만 난 그런 허튼 실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그러니까 몇 시간 잠을 덜 잤다고 투덜거리는 짓 좀 그만 할래요? 대신 오
늘 저녁에 일찌감치 캠프를 치면 되잖아요. 
 하지만 데미안은 불평을 멈추지 않았고, 케이시도 그가 입을 다물리라고 생
각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저기압이로구나, 하고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정말 일찌감치 물 맑은 냇가에 캠프를 쳤다.
 케이시는 안전을 생각해 모닥불을 피우지 말자고 할 참이었다. 간단하게 요
기할 음식도 충분한데다 날씨마저 따뜻했다. 하지만 데미안이 너무 비협조적
으로 나왔기 때문에 아예 그런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냇물에 물고기가 있었다. 생성구이라, 생각만 해도 침이 고였다.
 데미안이 말을 돌보러간 동안 케이시는 나뭇가지를 깎아 작살을 만들었다. 
무릎 깊이의 시냇물로 들어가 작살을 던진 결과 한 마리를 잡았다. 그때, 데
미안이 나타났다.
  그보다 훨씬 빠르고 쉬운 방법이 있어. 
 데미안이 강둑에서 소리쳤다.
 케이시는 물고기에 정신을 집중한 터라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 근방에 그물을 만들 만한 재료가 없던걸요. 뭐, 당신이 그 멋진 셔츠 한 
장을 기부한다면 모르지만요. 
  나는 먼지를 씻어내는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야. 넌 보고도 모르겠니? 
 케이시가 눈을 깜빡거렸다.
  봐요? 뭘? 
 시선이 데미안에게 향했다. 겉옷을 벗는 중이었다.
  기다려요. 내가 저녁감으로 물고기를 다 잡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에요. 
  몸이 너무 더러워서 기다릴 수 없어. 
  당신 때문에 물고기들이 놀라서 다 도망간다구요! 
 케이시가 소리를 질렀다.
  물결 일으키지 않을게. 
 그가 셔츠를 벗으면서 대답했다.
  당신은 미쳤어! 
  난 몸이 더러운 거야. 
 그렇게 야비하고 고집스런 말은 듣다듣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도 마
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집을 피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오늘밤에 생선구이를 못 먹는 쪽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될걸요. 
 데미안이 옷을 벗는 마당에 물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도저히 평정을 유
지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케이시는 그냥 등을 돌리고 서서 물고기를 잡는 
데 열중했다.
 몇 초 후에 데미안이 물 속으로 들어왔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그가 맨몸
으로 있다는 사실은 케이시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뒤에서 물을 끼얹는 소리
가 들렸다. 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하지만 물결을 일으키느냐의 여부는 더 
이상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눈은 물고기를 향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아른거리
는 형체는 물고기가 아니었다.
 케이시는 살그머니 더 깊은 쪽으로 향했다. 물은 훨씬 차가웠지만 몸이 점
점 뜨거워졌기 때문에 그 냉기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바로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지금 도망가는 거니, 케이시? 
 데미안이 소리 없이 케이시 뒤까지 접근했다. 그는 물 속에서 천천히 일어
났다. 가슴과 양팔에서 또르르 흘러내린 물방울이 햇살에 반사되어 다이아몬
드처럼 반짝거렸다. 이제 그의 상체가 드러났다. 케이시는 데미안의 남성미
에 넋이 나갔다. 상상보다 훨씬 근육질이었고 팔은 굵었으며, 체모로 뒤덮인 
가슴은 탄탄했고 가는 허리와 대조적으로 우람하기 그지없었다.
 케이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데미안의 질문조차 떠올리지 못했
다. 그가 다시 물었다.
  아니면 너도 목욕을 하기로 결심하고 더 깊은 곳으로 온 거야? 
 여전히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시의 시각은 별 이상 
없이 데미안을 또렷하게 봤고, 감각은 너무 멀쩡하게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가락을 느꼈다. 심지어 데미안 손에서 목덜미로 흘러내린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까지 느끼고 진저리를 쳤다. 그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아직 조리 
있게 말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너는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판초가 몸에서 벗겨졌다. 케이시는 어렴풋이 그 옷이 공중을 붕 날아가 강
둑에 떨어지는 광경을 봤다. 총이 뒤를 따라 판초 위에 툭 떨어졌다. 무기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자, 케이시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지금 무슨 짓을...? 
 그 말이 케이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실 나머지 말도 했지만, 물 속
에 자맥질한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데미안이 그녀를 물 속으로 끌어
들였다. 아니, 물 속으로 잡아 처넣었다.
 케이시는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삼킨 물을 내뱉으며 물 밖으로 얼굴을 내
밀고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데미안을 노려봤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
에 착 달라붙어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통쾌하다는 듯 
껄껄 웃는 게 아닌가! 케이시는 손바닥으로 물 표면을 쳐서 그에게 물벼락을 
입혔다. 데미안은 가슴에 닿는 차가움에 숨을 들이키더니, 다시 케이시 쪽으
로 다가왔다.
 케이시는  으악  소리를 치며 허둥지둥 강둑 쪽으로 도망쳤지만, 데미안이 
텀벙거리고 물 속에서 쓱 나와 온몸으로 덮쳤다. 케이시가 다시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눈을 비빌 즈음, 데미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리
가 물 속으로 쓱 딸려 들어갔다.
 남자 형제들과 물놀이를 했던 적도 오래 전이라  물싸움 을 어떻게 하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배운 재주는 평생 간다고 했던가? 한 20여 
분 후에 데미안이 휴전을 요청했다. 케이시는 웃느라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
다. 동부의 속물과  재미 를 보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케이시가 엉금엉금 기어 강둑으로 올라간 반면, 데미안은 여전히 물 속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케이시는 웃느라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몇 초가 흐른 다음에야 그녀는 데미안이 왜 웃는지 이유를 알
아차렸다.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온몸이 비쳤던 것이다. 데미안처럼 나체나 
다름없었다.
 얼굴을 물들인 홍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데미안의 눈빛 때문이었다. 평소
에는 파리할 만큼 부드러운 회색 눈동자가 지금은 격렬한 감정을 알리듯 훨
씬 짙고 난폭한 색으로 변했다. 그는 휘적휘적 걸어서 그녀 쪽으로 다가왔
다. 설마 물 밖으로 나오지는 않겠지? 설마 그럴 리야, 설마... 하지만 데미안
은 정말 물 밖으로 나왔고 케이시는 너무 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
다.
 데미안의 나체는 케이시가 무덤까지 지니고 가도 될 만큼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오만한 조각가가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고 완벽하게 
빚어낸 작품 같았다. 케이시는 몸 둘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데미안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케이시는 벅찬 기대감으로 숨을 멈췄지
만 차마 눈을 들 수 없었다. 이성은 어서 일어나서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명
령했지만 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데미안의 두 손이 얼굴을 감싸
쥐더니, 그를 향하게 했다.
 통제를 벗어난 불길이 데미안의 눈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석양이 던지는 
황금빛 광채 속에서 케이시는 흘린 듯 그의 강렬한 시선을 응시했다.
  더 이상은 안 돼, 케이시. 
 데미안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안 돼요? 
  나에게 우리 결혼이 가짜라고 말하는 거. 
  하지만 진짜가 아니에요. 
  지금 당장은 진짜야, 진짜라구. 
 데미안은 다른 대답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입술이 더 이상의 말을 막았
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불길? 가당치도 않았다. 차라리 그 키스에는 화산 폭
발이란 표현이 적절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케이시의 정열도 데미안 못지않게 달아올랐다.
 바로 이것이 그 비열한 판사가 두 사람을 묶어줬던 이래로 케이시가 생각
해왔던 바였기에 온 마음을 다해 데미안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당장, 바로 
이 순간, 그들의 결혼을 진짜였다. 케이시는 남편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
정을 무시하고 싸우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무시하고 싶
지도, 무시할 수 도 없었다.
 사나운 태풍에 휘말린 케이시는 무릎걸음으로 데미안에게 다가가 목을 껴
안고 열렬한 키스를 되돌렸다. 데미안은 두 팔로 그녀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
으며, 흥분에 사로잡혀 그녀의 입술을 더욱 세게 빨았다. 정열적인 세계로 
초대, 얼마나 기다리던 세계인가.
 케이시는 키스에 완전히 몰입했던지라 셔츠를 벗기는 손길을 의식하지 못
했다. 데미안은 다음 장애물로 등장한 케이시의 실크 캐미솔에 약간 놀랐다. 
여성스러운 실크와 레이스투성이의 속옷을 예상치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옷
들이 겉옷과 현저한 대조를 이뤘기 때문이다.
 케이시는 그가 판초를 바닥에 깔고 자신을 그 위에 눕히는 데도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옆에 누워 온몸을 탐색하는 감촉마저 모를 리는 없었다.
 데미안의 애무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목을 거쳐 민감한 가슴에 한참 머문 
후에야, 데미안의 거친 손길은 예상치 못한 소유욕과 대담함을 드러내면서 
복부 쪽으로 내려갔다.
 이어진 움직임은 케이시의 제한된 경험이 처리할 수 없는 정열을 불러일으
켰다. 그는 고개를 숙여 꼿꼿이 고개를 쳐든 케이시의 한쪽 젖가슴으로 입을 
가져갔다. 그녀의 입에서 어쩔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를 더 가까이 
껴안으려고 노력했지만 데미안이 응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케이시의 애타는 
몸짓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미칠 정도로 몰아간 감각에 기름을 붓듯 그녀
의 가슴을 마음껏 고문했다. 마침내 데미안의 뜨거운 입술이 다른 쪽 가슴으
로 옮겨갔다. 케이시는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복부에 머무르던 손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아래로 여행을 계속했
다. 양다리 사이의 촉촉한 곳으로..., 케이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기쁨과 환희가 온몸에서 분출하고 눈앞에 불꽃이 튀겼다. 
하복부에서 시작된 감각이 회오리바람이 되어 온 신경 끝까지 휩쓰는 가운
데, 환희가 고동치고 노곤한 나른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를 짓누르는 데미안의 체중이 케이시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
웠다. 케이시는 눈을 뜨고 그의 다정한 미소를 봤다. 그녀도 미소를 되돌리
는 수밖에. 케이시는 육체적인 접촉과 상관없는 친밀감을 느꼈다. 근사하고 
생생한 이 감정! 그래, 지금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을 테야.
 데미안은 다시 키스하며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훨씬 크고 뜨거운 침입자
가 영토를 침범하는 순간, 케이시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무언가가 몸 안에
서 휩쓸려 나감을 느꼈다. 짧은 아픔, 케이시는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떴다. 
그 강렬함이 데미안의 몸으로 다시 전달되었다. 
 케이시는 이 경이로운 감각에 숨을 잊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데미안이 동
참을 부르는 율동이 다시 반복되었을 때, 케이시는 그의 일부를 꽉 죄고 숨
을 헐떡이며 기쁨의 포로가 되어 만족을 추구했다.
 나중에 데미안은 그녀를 가슴에 안고 이마에 입술을 댄 채 한 손으로 케이
시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천상의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이대
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지만 데미안의 배가 꼬르륵 하고 아우성을 쳤다. 케이
시는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 한 마리의 물고기는 두 사람 입으로 들어갔다.

  -26-
 처음에 데미안은 재미있었다. 케이시의 전설적인 무심함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다음날, 데미안을 볼 때마다 그녀의 뺨이 확연하게 붉어졌다. 하지만 
슬슬 걱정이 됐다.
 케이시는 그들이 나눈 사랑에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 데미안 자신도 후회해야 마땅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의 성적인 습관은 대단히 단순했다. 여자와 한두 시간 
보낸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상대를 다시 만나느냐
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케이시는 하룻밤을 통째로 나누고 아
침 커피까지 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에 당면한 데미안으
로서는 케이시의 부끄러워하는 태도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
다.
 두 사람이 느끼는 성적인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오늘 아침에 사랑을 나눴
어야 했는데. 사실, 그것이 그가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케이시가 그 효율적
인 방안,  길을 떠납시다  식의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아무시도도 할 수 없었
다. 게다가 케이시는 처녀였다. 처녀들이란 첫 경험의 후유증으로 약간의 육
체적인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여러 날 후에야 다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다행히 케이시가 어젯밤 그리 아픔을 경험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고통을 줄 
만한 짓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시로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참는 고통이야말로 엄청난 시련이었
다. 그가 가능한 한 빨리 판사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꼭 결혼이 싫어서가 아
니었다. 임시 결혼이 케이시와 사랑을 나눌 권리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혜
택을 외면하고 고상한 행동을 하려 노력해야 하다니, 그 짓이야말로 정말 사
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는 고상함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와 정반대 되는 짓을 저
질렀다. 충동을 참아야 하는 이성적인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낸 끝에 결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건 변명에 불과 했다. 그는 
케이시에게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 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케이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쁨을 증명해 보
였다. 그리고 너무 정열적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신비로울 만큼 감정
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또 다른 면모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들은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은 채, 그날 오후에 목적지인  컬더스 에 도착
했다. 이미 들었던 대로, 그 읍은 작지만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공동체였다. 
겨우 두 개에 불과한 주요한 블록은 잘 정비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사업이 활성화되어 이주민의 정착을 도모했다. 다른 읍에 비교해서 훨씬 평
화롭게 보였다. 거리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과 애완동물들은 평화를 교란하는 
총싸움이 드물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게다가 선술집과 교회도 몇 군데 눈에 
띄었다.
 도착하자마자, 케이시는 여인숙의 위치를 물었다 데미안이 최고 시설의 호
텔에만 묵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여인숙을 찾았다는 건, 그의 따귀를 대
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따로 묶자는 암시를 주고 있구나. 즉, 케이시는 더 이상 친밀한 관계를 맺
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리라.
 그 어떤 웅변도 그보다 더 확실하게 케이시의 의도를 전달하지 못했을 것
이다. 데미안은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령 케이시가 의향을 물
었더라면, 망설이지 않고 그녀와 같은 방에 드는 쪽을 선택했으리라. 하지만 
케이시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아, 그녀는 어젯밤 일을 후회하고 더 이
상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하는구나.
 둘은 말을 마구간에 맡긴 뒤 일단 헤어졌지만, 점찍어뒀던 식당에서 나중에 
함께 식사를 하며 헨리가 이곳에 머물 경우를 대비하여 작전을 짜기로 했다.
 데미안은 호텔에 들어서다가 우연찮게도 카운터에 놓인 신문을 봤다. 그런
데, 그 일면에 헨리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커루더스가 몇 주
일 후로 예정된 읍장 선거에 출마했다는 내용이었다.
 재빨리 기사를 읽은 데미안은 다른 후보가 중상모략을 당했고 그 혐의가 
헨리에게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기사의 논조는 정치적인 측면에 맞춰졌기 
때문에 커루더스가 이 읍에 얼마나 거주했고, 어디 출신인가 등등의 개인사
에 대한 부분이 쏙 빠져 있었다. 심지어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하긴 서
로가 서로를 잘 아는 이렇게 작은 지역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당장 헨리를 찾아내서 요절을 낼까, 아니면 
우선 케이시를 찾아가서 오랫동안 고대해온 대결에 그녀를 동석시킬까? 당
장 이 일을 끝장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케이시의 헌신적인 노력을 생각
해, 그녀에게 관람석 특별석을 배정하고 싶었다.
 케이시가 투숙한 여인숙을 찾기란 대단히 쉬웠다. 학교 여선생이 경영하는, 
깔끔하고 가정적인 분위기의 여인숙이었다. 그 젊은 요조숙녀는 케이시가 여
자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절대로 데미안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
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미처 몰랐던 까닭에 그를 이층 외쪽 방으로 안
내했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데미안은 초조하게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여기 있어, 케이시? 
  웬일이세요? 
 안에서 즉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옷을 걸치고 있어? 
  아니오. 막 목욕을 하려던 참이에요. 
 뜨거운 욕조 안에 몸을 담근 케이시의 영상은 당연히 데미안의 생각을 바
꿔놓았다. 화장실 문이 잠겨 있을까? 그 점을 확인하려는 찰나, 안에서 목소
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직 거기에 있어요? 
  그래.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아, 내가 왜 이럴까?
  여기에 온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잖아요? 
  헨리가 이곳에 있어. 
  알아요. 
 데미안은 그 대답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 대답이 무슨 뜻이지? 
  나도 신문 봤어요. 일면에 헨리의 사진이 실린 그 신문 말이에요. 
 데미안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그런데 나에게 달려오지 않고 한가하게 목욕을 하고 있단 말이야? 
  데미안, 그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내가 목욕을 마칠 때까지 그는 여전
히 이곳에 있을 거예요. 
  그래도 난 기다릴 수 없어. 
 짜증이 섞인 낮은 신음과 함께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실망스럽게도 케
이시는 판초와 권총집 벨트를 제외한 모든 옷을 다 걸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죠? 
  내가 헨리를 찾기 위해 바친 그 오랜 시간을 잘 아는 네가..., 아니 이제 우
린 부부니까 당신이라고 해야겠군. 어쨌든 그런 사정을 잘 아는 당신이 그런 
질문을 꼭 해야겠어? 
 케이시의 호전적인 분위기가 사그라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오, 질문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녀는 권총집 벨트를 허리에 차며 덧붙였다.
  지금 이 시간에 커루더스가 있을 법한 장소를 사람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렇게 질색하지 마세요. 술집은 합법적인 사업에 적당한 장소예요. 꼭 술 
마시고 도박이나 하고..., 아무튼, 그런 곳만은 아니라구요. 
 케이시가 뜸을 들이며 헛기침을 했다.
  당신도 그곳에서 벌어지는 그 외의 것을 다 알잖아요. 
 데미안은 다 알았지만 괜히 지분거렸다.
  그 외의 뭘? 
 케이시는 고집스럽게, 술집의 성적인 측면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외에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데미안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을 살짝 훔쳤다. 그리고 너무 놀라 말
문이 막힌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종류의 좋은 시간? 
 케이시는 코웃음을 치고 판초를 낚아챘지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자, 일을 마무리하러 갑시다. 

  -27-
 바넷 살롱의 첫인상은 청결했다. 기존의 다른 선술집과 천지 차이였다. 붉
은색 가죽으로 마감한 탁자, 천이 씌워진 의자, 거기에다 질 좋을 나무로 조
각해 대리석으로 장식한 바는 예술 작품이었다. 사방 벽에는 꼼꼼하게 벽지
가 발라진데다 바닥에 얇은 카펫까지 깔려 있었다. 눈을 씻고 봐도 타구(침 
뱉는 그릇)는 보이지 않았다. 술집이 아니라 일류급 호텔 로비나 상류층 남
성의 전용 클럽처럼 보였다.
 케이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심지어 밖으로 나가 간판을 다시 확인하고 
장소를 옳게 찾았는지 확인까지 했다. 틀림없었다. 하지만 바넷 살롱은 유럽
인, 아니면 동부 출신의 손길이 닿은 듯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때문
에 자연스럽게 헨리 커루더스 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아니나 다를까, 헨리 커루더스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데미안이 묘사했던 
대로 두꺼운 안경과 뺨에 사마귀가 있어 알아보기 쉬웠다. 그 탁자에는 세 
명의 다른 남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두 명의 남자가 서서 그들의 대화를 경
청하고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정장 차림이었는데 헨리가 가장 운에 뜨였
다. 선거 전략을 토의한다기보다 음침한 은신처에서 다음 도둑질을 모의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케이시는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내가 너무 의심이 많구나. 헨리의 동료
들이 총잡이 특유의 험악한 인상을 풍긴다고 정말 총잡이라는 뜻은 아니잖
아? 그들은 무기도 없었다.
 데미안은 뛰어난 실내장식을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헨리를 본 순간, 초
점은 전적으로 그에게 맞춰졌다. 데미안은 헨리가 시선을 의식하기를 기다렸
다. 케이시도 범인의 신분을 확인할 요량으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 헨리가 
데미안을 알아보고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는다면 그건 빼도 박도 못하는 범
행의 증거일 테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문 쪽으로 고개를 돌
려 두 사람을 본 헨리는 약간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죄의식 
때문이 아니라, 정장이 요구되는 곳에 두 사람이 생뚱한 차림으로 들어서서 
놀란 눈치였다. 그렇다면, 헨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의 출현에 놀
라움을 표시할 텐데..., 정말 그랬다. 다들 호기심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들을 
대했고, 그 중 일부는 노기까지 띠었다.
 한 남자가 성마르게 말했다.
  어이 이봐, 여기는 회원 전용 살롱이야. 술을 마시려면 길 맞은편  이글즈 
네스트 로 가보라구. 
 물론 케이시와 데미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케이시는 속으로 궁리했다. 
권총을 꺼내서 끝장을 봐?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헨리, 나는 너를 체포하겠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순순히 따라오겠느냐, 아니면 내가 네 놈을 끌어낼까? 
 케이시는 데미안이 합법적으로 범인을 체포할 권리도 없는 주제에 큰소리
를 탕탕 치는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의 선언을 공수
표로 받아들이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헨리도 그에 가세했다.
  잭, 어윅 부인의 개를 다시 걷어찬 거요? 
 누군가 숨죽여 웃으며 농을 걸었다.
  아니야, 그게 아닐 거야. 
 다른 사람이 낄낄거리며 장단을 맞췄다.
  신문에 자기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헤닝 영감이 잭을 체포하도
록 한 게 틀림없어. 
 헤닝은 또 다른 읍장 후보이자, 지방 신문의 두 페이지에 걸쳐 헨리에게 중
산 모략을 당한 상대였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잭 이 누구일까? 호칭 문제에 
혼란스러워하기는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커루더스 씨, 댁의 이름을 여럿 들어봤어도  헨리 는 처음인데요? 
 커루더스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에 헨리라고 불리곤 했네. 하지만 나와 쌍둥이 동생이 헷갈리는 실수는 
근 20년만에 처음일세. 
 그는 데미안을 보고 정중하게 물었다.
  선생, 나와 내 동생 헨리를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그런데 당신을 누굽니
까? 
 데미안은 그 질문에 담긴 암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난 데미안 루트리지다. 지금 너와 헨리가 일란성 쌍둥이라는 거냐? 
  불행하게도 그렇습니다. 
  불행하게도? 
 커루더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동생에게 억하심정이 없소이다. 뭐, 녀석이 변변치 못하다고 항상 생
각해왔지만 말이오. 하지만 나와 똑같은 상판을 하고 있다고 내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좋아한 적은 한번도 없소. 그래서 자립할 나이가 되자마자 
난 뉴욕과 가족의 곁을 떠났던 거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 본 적도 없고, 그 
일을 후회하지도 않소. 나는 헨리와 수시로 연락했지만 만나본 적은 한번도 
없소이다. 
  헨리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때가 언제냐? 
  올해 두어 통의 편지를 받았소. 지난봄에 동생이 나를 만나러 올 생각이라
고 편지를 써서 꽤 놀랐소이다. 헨리가 뉴욕과 편한 직장을 떠나고 싶어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거든. 그는 회계사라오. 
  그래, 그 점은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동생처럼 소심한 겁쟁이에게 이 동네는 어울리지 않소이다. 
 그 말에 그의 친구들이 껄껄거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커루더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마음을 바꾼 모양이오. 두어 달 전에 샌안토니오에서 보낸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뚝 끊겼소. 
  그가 이곳에 나타나리라 생각하나?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샌안토니오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3개월
이나 걸리지 않소이다. 평생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텍사스
는 원시적으로 보일 거요. 일정한 유형의 사람들만이 이곳에 정착하는데, 헨
리는 그런 유형이 아니오. 
  하지만 댁은? 
  지난 15년 동안 텍사스에서 살아온 나에게 뭘 더 바랍니까? 
  이 읍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어. 
 데미안이 커루더스 말의 모순을 지적했다.
  나는 이곳이 아니라 텍사스에서 살았다고 했소. 
 잭의 어조는 짐짓 겸손하게 바뀌었다.
  내가 이 컬더스에 살았던 기간은 여덟 달 정도요. 그렇지 않나, 동지들? 
  그래요, 약 8개월 전에 당신이 이곳에 나타났지요. 
 커루더스의 오른쪽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잭은 히죽거리며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헨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체포한다는 거요? 
  살인을 저질렀다. 
  헨리가? 
 커루더스가 배를 껴안고 웃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 후에야 웃음을 가라앉히
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잘못 생각한 겁니다. 헨리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
법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오. 그는 그런 짓을 할 만한 배짱이 없소이다. 
  그렇다면 댁은 어떤가..., 잭? 
 그 작은 남자는 움찔했다. 데미안이 뜸을 들인 다음에야 이름을 들먹이자, 
데미안으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사지 못했다는 점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점은 케이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잭은 성실하게 질문에 답했다.
  나는 내 몸을 방어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를 거요. 하지만 나와 내 동생은 
다르다고 말했잖소. 사실 우리는 밤과 낮처럼 다른 사람들이외다. 내가 약골
을 못 참는 반면, 내 동생은 정확하게 그런 범주에 속한다, 이겁니다. 
 케이시는 잭의 단언에서 일말의 진실을 감지했다. 이 볼품없는 남자는 데미
안이 묘사했던 헨리와 어울리지 않는  오만함 을 풍겼다. 쌍둥이 중 한쪽은 
겁쟁이고 다른 반쪽은 엄청난 허풍쟁이였다. 잭의 말이 전부 쇼일까, 아니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수완을 지녔을까? 케이시는 그 점이 흥미롭기 그지없
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가슴속에만 담아뒀다. 데미안이 혼자서도 잘 하기 때문
이었다. 그는 예상치 않은 상황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으면서도 성질을 잘 참
았다. 케이시는 속으로 감탄했다. 긴긴 추적과 조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이 상황은 그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고, 바로 그 때문에 데미안은 펄펄 
뛰며 화를 내야 마땅했다.
 데미안이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의심쩍은 표정만 짓자, 잭은 
 기분이 상한  태도를 싹 바꾸며 한숨을 쉬었다.
  루트리지 씨, 댁은 내 말을 믿지 못할 거요. 전에 내 존재를 들어보지도 못
했으니 어찌 나를 믿겠소. 그러니까 뉴욕에 계신 우리 고모님께 전보를 치는 
게 어떻겠소이까? 그분은 나와 헨리가 일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
실 거요. 
  전신국이 어디에 있지? 
 그 말에 잭이 다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는 없소. 우리도 모두 올해가 가기 전에 하나 생기기를 바라고 있다
오. 하여튼,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전신국은 샌더슨에 있소. 여기에서 남쪽으
로 한 이틀 정도 떨어진 곳이오. 댁이 그곳에 다녀올 즈음에는 나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사과하게 될 거요. 그리고 선거 유세 중인 내 명성에 흠집을 내
지 못할 거외다. 
 그 작은 남자는 듣는 이의 귀에 거슬릴 만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28-
  두 형제가 모두 읍장이 되고 싶어한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케이시? 
 데미안은 지금까지 일부러 잭 커루더스에 대한 화제를 참았다. 두 사람은 
거의 날고기나 다름없는 스테이크를 반쯤 해치운 상태였다. 처음에 그는 술
집에 있었던 자가 헨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지만, 적포
도주 한 병의 도움을 얻어 마음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 수 있었다.
 케이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튀긴 감자를 우물거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 
  헨리가 형의 족적을 따르기로 결심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피는 물보다 진
하다잖아요. 하지만 그렇다면 헨리는 지났던 곳마다 형의 읍으로 가는 방향
을 물었어야 옳아요. 그런데 한번도 그러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가 
이 읍 이름을 잊어버렸을까요? 그래서 대신 신흥 읍에 대한 질문을 했던 걸
까요? 
  그런 논리는 억지야, 케이시. 
  그렇지만 가능성은 있는 말이에요. 한번 상상해보라구요. 헨리는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고 형의 도움을 받으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중간쯤 왔는데 잭이 
최근에 정착한 읍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
도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흥 읍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전개는 어때요? 아니면 텍사스에 똑같은 이름을 가진 읍이 
두 곳 있는데 그는 잘못된 곳으로 갔다? 혹은 잭이 읍장으로 출마할 계획임
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읍장이 있는 작은 지역을 찾으려고 했지만, 텍사스가 
너무 광활해 그런 식으로 형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다시 동부로 
돌아갔을 수도 있어요. 
  아, 당신 생각이 틀렸기만을 바래. 그런 가정은 수색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맥 풀리는 것이니까... 
  우리가 완전히 헛다리짚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데미안. 
 그녀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졌다.
  즉, 헨리가 여기에 있고 잭은 동생을 숨기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하는 거
야?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면, 잭이 무슨 이유로 헨리가 이곳으
로 찾아올 계획이었다는 말을 했겠어요? 
  우리가 그를 여기까지 뒤쫓아왔기 때문이지. 
 케이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그래도 잭에 대해 한번 생각해봐요. 그는 바늘로 쑤셔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강심장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제아무리 소심한 겁쟁이라도 
덩치들 다섯 명의 호위를 받고 있다면 얼마든지 허세를 부릴 수 있지요. 즉, 
그는 돈의 힘으로 기세 등등한 것이외다. 
 데미안은 케이시의 잭 흉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저 대담한 놈은 내가 아는 헨리와 딴판이야. 
잭의 주장처럼 그들은 성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형제라는 사실조차 의심
스러울 지경이라구. 
  글쎄요, 우리 형제들도 성격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지금 당신 말에 동의할 
수 없어요. 한 명은 목장 일이라면 질색을 하면서 하루 종일 책에다 코를  
박고 지내요. 조만간 변호사가 될 야심에 부풀어 있어요. 그에 반해 다른 한 
명은 집안 내력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소고집에다 집안에서 끌어낼 수... 
  당신에게 형제들이 있어? 
 케이시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포도주 몇 잔에 혀가 가벼워져 비밀 
사항에 해당하는 개인사를 털어놓고 말았다.
  음..., 그래요. 
 케이시가 미지근한 투로 대답했다.
  형제가 몇 명이나 되는데? 
 케이시는 다시 포도주를 들이키고 시험하듯 말했다.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살아 계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편이 어때요? 
 데미안이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기 때문에 일부
러 그 화제를 택했다. 그게 개인사에 대한 질문을 막는 방법이었다.
  자매는 있어? 숙부나 고모들은? 
  당신은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지요, 데미안? 
 케이시는 황금색 눈을 가늘게 뜨고 데미안을 노려보며 정곡을 찔렀다.
 데미안은 케이시가 저렇게 비열하게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어머니의  어 자 
만으로도 데미안의 성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내가 대답한다면, 당신도 말해주겠어? 
 케이시는 그가 질문을 무시하지 않은 점에 내심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무심
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봐서요. 
  좋아. 맨 처음부터 말하자면, 자는 순수한 아이답게 부모님을 사랑했어. 하
지만 어머니는 그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으셨어. 아니, 다른 남자에 대한 사
랑이 훨씬 중요했다는 편이 옳을 거야. 오래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공적
인 문제나 사적인 괴로움을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빙자해서 이혼을 신청
하셨어. 사실상, 나와도 결별했지. 어머니가 뉴욕을 더나 연인과 결혼한 후로 
다시 만난 적이 없으니까. 
  한번도? 그게 그분 선택이었어요, 아니면 당신 선택이었어요? 
  뭐라고? 
  당신 어머니께서 당신을 만나러 뉴욕에 한 번이라도 온 적이 있었어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어머니를 찾아가 그 이유를 물어봤던 적은 있어요? 
  양쪽 모두 해당 사항 없어. 하지만 내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마당에 
왜 괜한 수고를 하겠어? 어머니는 그저 나에게 눈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
은 거야. 집은 박차고 나가 새로운 삶을 꾸리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 
뒤에 남은 사람은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으셨어. 
 냉정하게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에 묻어 있는 씁쓸한 여운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왜 이리 
가슴을 아프게 할까?
 케이시의 얼굴은 데미안의 마음이 심란해질 정도로 동정심으로 가득했다.
  내가 당신이라면, 어머니를 찾아가서 대답을 듣겠어요. 그리고 그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면 나를 매정하게 버렸던 어머니를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요. 
무정한 사람들이란 대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무정한 짓을 저지
르거든요. 하지만 나라면 최선을 다해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겠어
요. 
 지금 농담을 하는 걸까?
  입으로 할거야, 아니면 당신이 애용하는 권총으로 할거야? 
 케이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꽤 심각한 모양이었다.
  데미안, 당신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추측만 해왔어요. 진실 여부가 마음에 
걸리지 않아요? 나라면 어떤 식으로든 확인하고 싶었을 텐데. 
  어머니는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지 않았어. 그러니 나 또
한 그분이 필요하지 않아. 이제 와서 그런 짓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당신 마음이 평화로워질 테니까요. 그분이 당신의 유일한 혈육이니까요. 그
리고 최근에 다시 미망인이 되어 외롭게 살고 있음을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거야 다 내 생각에 불과하겠지요. 항상 부모님과 함께 살아왔던 내가 무엇
을 알겠어요? 
 케이시의 말에는 꾸짖음과 뉘우침이 동시에 깃들여 있었다. 데미안은 그녀
가 그럴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케이시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오래 전에 어머니를 찾아가서 항변을 들었어야 마땅했다. 최악의 추측이 현
실로 드러났다고 한들, 더 나빠질 것도 없었으니까.
  생각해보겠어. 
 데미안은 낮게 투덜거렸다.
 케이시는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꿨다.
  자, 이제 잭 커루더스에 대해... 
  잠깐, 당신이 아까 당신 가족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고 했잖아. 눈에는 눈
이야, 케이시. 이제 당신 말을 들어보자구. 
 케이시는 짜증 섞인 한숨을 길게 내뿜으며 포도주를 잔에 채웠다.
  당신은 이미 우리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는 점을 알고 있어요. 
  양친 모두? 
  그럼요. 두 분의 사랑은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끈끈해요. 두 분
이 끌어안은 채,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할 때마다 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
랍니다. 
 케이시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애당초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이었다.
  나는 남자 형제만 둘이에요. 자매는 없어요. 
 케이시는 말을 이었다.
  타일러 오빠는 나보다 한 살 위예요. 오빠는 우리 가문 최초의 변호사가 
될 거예요. 그리고 딜런은 겨우 열네 살밖에 안 된 게 못 말리는 망나니지
요. 최근에 돌아가신 친할아버지는 폭군이 따로 없었지만, 난 그분을 깊이 
사랑했어요.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세요. 그분은 평생을 의사로 
살아왔고 지금도 진료를 하세요. 정기 환자는 딱 한 명뿐이지만요. 그 외에 
다른 친척은 없어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박에서 이복형제를 만들지 않았
다면요. 
  당신이 집을 떠난 이유는? 
 케이시는 얼굴을 찡그렸다. 망설임에 찬 침묵이 이어진 다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사소한 불화가 좀 있었어요. 
  케이시, 당신이 집을 나올 정도라면 사소한 불화일 수가 없어. 
  하긴...,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고집스럽게 그 생각을 바꾸지 
않으셨다구요. 
  그래서 당신은 아버지의 잘못을 증명하기 위해 대부분의 여성들이 상상조
차 할 수 없는 수배범 사냥꾼이 됐다? 
  그런 거지요. 
 케이시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선택한 직업의 위험성을 고려해보면, 진짜 고집쟁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 행동에 대해 당신더러 인정해달라고 했던가요? 
  아니, 알았으니까 그만 노려봐. 내가 당신을 졸라서 너무 많은 사실을 캐물
은 건 사실이지만, 그 점에 대해 사과하지 않겠어. 케이시, 당신은 매혹적인 
여성이고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참을 수 없단 말이야. 
 케이시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남은 스테이크 조각을 
철저하게 공격했다.
 그런 말을 하지 말걸, 데미안은 금방 후회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아 그녀
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흐뭇해진 그는 또 다른  욕구 에 시달렸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뻔했지만, 그래도 일단 시도했다.
  오늘밤 내 방으로 오겠소, 루트리지 부인? 
 케이시는 즉각 노려보며 호되게 질책했다.
  당신은 이곳에 판사가 있는지 알아보지 않았군요? 
  여기에는 판사가 없소, 부인. 
 존칭까지 써가며 그슬렸지만 케이시의 입술은 뒤틀리기만 할 뿐이었다.
  알아봤는지 아닌지 내가 무슨 수로 알겠어요?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속 꾸짖었다.
  당신 제의는 대단히 고맙지만, 나에게도 방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인 만큼 나는 그곳을 유용하게 쓸 작정이에요. 
  케이시... 
 케이시는 그가 말을 끝낼 틈을 주지 않았다.
  중요한 현안에나 신경 써요.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여자인 것처럼 행동하
지 말고. 당신은 다시 길을 떠나기 전에 지구의 반이 여자라는 혜택을 맛보
게 될 거예요. 
 케이시는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데미안은 하루 종일 그녀의 눈치
를 살폈기 때문에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 충분히 예상한 터였다. 하지
만 그가 매춘부를 찾으리란 짐작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는 다른 여자를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하는 유일한 여자는 바로 아내였다.

  -29-
 다음날 아침까지 케이시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전날 밤, 식당을 박
차고 나가 곧장 술집으로 가서 구입한 포도주 한 병을 비운 다음에야 잠자
리에 들었다. 썩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천국과 지옥을 오르
내리며 심한 고통을 맛본 터라 술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잠을 이루지 못
했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헨리가 컬더스에 있으리라 확신했고 그날이 다 지나기도 
전에 데미안과 영영 이별하게 되리라 굳게 믿었다. 지금도 그녀의 본능은 헨
리가 이곳에 있다고 속삭였다. 놈은 어딘가에 숨어 있거나. 아니면 그들의 
면전에서 쌍둥이 흉내를 냈으리라. 하지만 결론적으로 추적은 끝나지 않은 
셈이고 고통은 계속될 판이었다.
 데미안과 사랑을 나누지 말았어야 했다. 육체를 복잡한 심연의 상태에 밀어 
넣지 말았어야 했다. 아, 호기심이 원수야. 정말 이별한 다음에는 그를 그리
워하고 비참해하느라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케이시는 임시 결혼과 상관없
는 인연으로 데미안에게 묶인 몸이었다. 그런 짓을 벌이다니 정말 바보 같았
지만, 늘 그랬듯이 데미안에게만은 별 수 없는 바보였다.
 벌써 상실감에 시달렸다.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데미안이 아직 떠나지 않
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가 그가 떠나리라는 예측만으로 참을 수 없을 만큼 
심장이 조여들었다.
 하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말아야 했기에 전날 그에게 매몰차게 굴었다. 그들
이 양립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데미안 잘못은 아니었다. 상반된 두 세계에서 
서로 다르게 자란 몸, 케이시는 그의 세계에서 비참해진 것이요, 그 역시 그
녀의 세계에서 비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타협할 길이 없었다.
 케이시는 전날의 실수를 다음날 아침에 만회했다. 학교 선생이자 여인숙 주
인인 라리사 양과 짧은 대화를 나눴고, 마구간으로 가는 길에 두어 명의 주
민에게도 탐문했다. 그들은 커루더스에 대해 입을 모아 똑같은 대답을 했다. 
마구간에서 그녀는 데미안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고했다.
  잭 커루더스의 정착 기간은 그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아요. 그가 덩치 친구
들을 믿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어요. 
  지금 그 말은 순전히 당신 생각이오, 아니면 확인된 사실이오? 
 데미안이 물었다.
  이미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가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매
수할 수 없으리라는 가정하에 진실을 확인했어요. 여교사는 잭과 비슷한 시
기인 5개월 전에 이 읍에 왔노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다른 주민 두 명의 말
도 똑같았어요. 
  헨리가 이곳에 왔답니까? 
  쌍둥이 동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오히려 사람들은 커루
더스에게 그런 동생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던걸요. 하지만 한 주민이 말
하기를, 잭의 선거 운동원으로부터 잭을 찍는 편이 신상에 좋으리라는 충고
를 받았대요. 
 데미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려.
  그들이 주민들을 폭력으로 위협했다는 거요? 
  그런 치들에게 무엇을 바라겠어요? 
  잭이 무력을 써서 읍장 자리를 꿰어찰 생각이란 뜻이군? 
  어디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일인가요. 
  대도시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지. 하지만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시
작하는 이런 곳에서는 사정이 다르리라 생각했소. 
  아, 하지만 커루더스는 대도시 출신이에요. 게다가 부정부패는 세상 어디에
서나 일어날 수 있어요. 단지, 서부의 다른 지역처럼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곳에서는 빈번하지 않을 뿐이지요. 다시 잭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해요. 
헨리가 잭의 시늉을 한 게 아니고, 잭이 정말 헨리의 쌍둥이 형이라면 왜 그
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가 도망갈 시간을 걸기 위해, 우리에게 전보를 쳐보라느니 어쩌라느니 
하면서 쓸데없는 심부름을 보냈단 말이오? 
  아니요 그가 이곳에 쌓아놓은 기반을 버리고 싶어하겠어요? 아마 그는 우
리를 제거하려고 들 거예요 
  그렇다면 앞으로 말썽의 일어날 것이다? 
  딩동댕! 
  그런데 우리가 괜한 전보를 보내려고 샌더슨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그와 다시 대면하기 전에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요. 참, 뉴욕에 있다는 그 
고모 이름을 알고 있어요? 
  그렇소 핸리가 모습을 감춘 후에 그녀는 취조를 당했소. 그녀는 그가 무고
한 시민이고 그렇게 천인공노할 죄악을 저지를 리 없다고 주장 했지만 핸리
가 반평생 동안 그녀를 부양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정도의 방어는 당연
하지 안겠소? 
  쌍둥이 얘기는 한번도 하지 않았나요? 
  그래요. 하지만 당시 그녀는 상당히 비협조적이었소. 묻는 말에나 겨우 대
답할 뿐, 그를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일을 시작하자구요. 당신이 전보를 빨리 칠수록, 우리는 이곳으로 
빨리 돌아와 일을 끝낼 수 없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잭이 헨리라고 생각하오?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그는 헨리의 행방을 알고 있을 공산이 커요 그에게 
그 장소를 불게 만드는 일을 꽤 재미있을걸요. 
 데미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나에게 주먹을 쓰라는 제안은 아니겠지? 
 케이시가 싱긋 웃었다.
  그건 최후의 수단이에요.  
  -30-
 문제를 예상한 케이시는 샌더슨으로 돌아가는 첫날밤에 잠을 많이 자지 못
했다. 데미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하
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샌더슨에 도착한 데미안은 일단 전보를 치고 그 대답을 들을 때까지 호텔 
방에서 밀린 잠을 잤다. 하지만 케이시는 여전히 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편
히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시끌벅적한 선술집으로 들어가 바에서 한 잔 마시
고 포커판이 벌어진 세 군데의 탁자 중에서 한 곳을 골라 게임에 합류했다.
 심각한 도박판보다 사람 좋게 생긴 세 명의 패거리들이 서로 농담을 주거
니 받거니 하면서 카드놀이를 즐기는 쪽을 선택했다. 케이시가 원했던 건 카
드가 아니라 대화였다. 그들은 케이시에게, 그 어린 나이에 카드놀이 하는 
방법을 아느냐고 놀리면서도 그녀를 십년지기 친구처럼 흔쾌히 받아들였다. 
 케이시는 30분 가까이 돈을 잃어준 다음에야 운을 떼었다.
  혹시 잭 커루더스에 대해 들어보셨어요? 그가 컬더스의 읍장으로 출마했
다면서요? 
  많이는 몰라. 그런데 왜? 
 존 웨스코트가 물었다.
 존은 자기가 이 동네에서 유일한 치과 의사라고 소개를 하고, 케이시가 원
한다면 하나도 아프지 않게 이빨을 뽑아주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녀는 절
로 나오는 코웃음을 참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제 주제도 모르고 분수에 어긋나는 짓만 하는 수탉 같은 놈이래. 
 벅키는 지방 목장의 요리사였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야 케이시는 그날이 
토요일 밤임을 알아차렸다. 목동들이 주말 기분에 사로잡혀 일제히 몰려나온 
탓에 술집이 왁자지껄했던 것이다.
  저는 그곳에 들렀어요. 그런데 그의 부하들이 그를 찍으라고 주민들을 협
박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어요. 
 케이시가 손에 든 카드를 응시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나도 놀랍지 않구나. 
 피터 드루먼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2년 전에야 서부로 온 피터는 이 지역 고유 사투리까지 구사하는 등 서부
에 완벽하게 적응한 신출내기였다. 그는 샌더슨에서 무기상을 경영했다.
  그를 아세요? 
 케이시가 피터에게 물었다.
  아니란다. 하지만 그가 컬더스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는 모습을 봤어. 좁
쌀처럼 작은 놈이 이 지역 전체를 소유한 듯 거들먹거리더라. 그렇게 오만불
손한 놈은 보다보다 처음이었어. 
  그가 컬더스를 장악하기 위해 고용한 패거리들이 누군지 아세요? 
  제드 페이슬리와 그 부하들이 분명해. 
 치과 의사가 얼굴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놈들은 이곳과 컬더스의 중간에 위치한 해스팅스 목장에서 한동안 일했
어. 하지만 일이 너무 따분하다고 불평하면서 그곳을 떠났다더라. 
  존, 자네 말이 옳을 걸세. 내 여동생이 2주일 전에 제드와 그 부하 한 명을 
컬더스에서 봤다더구먼. 뭐, 그놈들이 양복을 쫙 빼어 입었다던가. 양복 입은 
불량배의 꼴을 상상해보라구. 
 피터가 말했다.
  제드 페이슬리가 뭐하는 사람인데요? 
 케이시가 물었다.
  너도 알다시피 전부 소문에 불과해. 확인된 사실은 하나도 없단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오르테가 일당과 함께 멕시코 지역을 휘젓고 다
니면서 농부들을 위협하고 단순히 재미로 살인을 저질렀다는구나. 
 피터가 열을 내서 설명했다.
  그러다 2년 전에 합법적인 직업으로 전향해서 이 부근의 목장에서 일했지. 
하지만 작년에 바로 이 술집에서 사람을 죽였단다. 참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더구나. 하지만 그는 그런 놈이야. 
 케이시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 이유가 뭐였어요? 
  그 희생자가 친절하게도 뒷간에 다녀온 제드의 남대문이 열렸다고 귀띔을 
해줬기 때문이래. 제드는 체면을 구해준 걸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모욕으로 
여기고 당장 그를 쏘아 죽였어. 
 케이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꽤 잔인한 사람이네요. 
  많이 잔인하지. 제드는 어디를 훑어보나 착한 구석이 없는 놈이야. 놈이 이
곳 출입을 그만뒀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 
  내가 한 번은 그의 이빨을 뽑아야 했지. 
 존이 끼여들었다.
  그렇게 땀을 많이 흘려본 적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어. 글쎄, 그놈은 이발
을 뽑는 내내 권총을 쥐고 있더라니까. 
  그의 부하들도 개망나니겠지요? 
 케이시가 물었다.
  그럼. 
 피터가 나서서 대답했다.
  다섯 명이 다 똑같아. 그 중 한두 명만 있을 때는 그리 나쁘지 않지만 다
섯 명이 일단 뭉쳐서 술을 억수로 퍼마셨다 하면 꼭 누군가 피를 보기 마련
이야. 그리고 경을 칠 보안관은 그들이 무서워서 설설 기는 판국이란다. 
  총 솜씨가 굉장한 모양이지요? 
 케이시는 확인할 요량으로 넌지시 물었다.
 치과의사 존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히려  정확하다 는 편이 옳지. 
  빠르기로 치자면 메이슨이 으뜸이야. 
 벅키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그가 애니 양에게 홀딱 반해서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속
셈으로 총 뽑는 솜씨를 과시했었어.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르더구먼, 하지만 
존의 말처럼 제드는 백발백중의 명사수야. 어느 정도냐 하면, 언젠가 아이들
이 건드려놓은 벌집 근처를 우연찮게 제드가 지나치게 됐는데, 벌을 한 마리
도 남기지 않고 쏘아 죽였다, 이 말씀이야. 사람들은 총알받이 신세를 면한 
그 꼬마들이 행운이라고 수군덕거렸지. 사실 그 어린것들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 세상에 가 있을 거야. 
  다른 세 사람은 어때요? 
 케이시가 물었다.
  제스로는 일당 중에서 가장 어릴 뿐만 아니라 제드의 동생이기도해. 그는 
2년 전에 이곳으로 와서 형과 합세했어. 흥, 실력도 없는 주제에 형의 후광
을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는 놈이지. 
 치과의사 존이 다시 끼여들었다.
  그리고 엘로이 벤처는 총이 아니라 그 어마어마한 몸집으로 한몫 톡톡히 
한단다. 주먹질에 관해서는 무적이라고 뻐긴다니까. 하지만 그 말이 정말인
지 아닌지는 영원히 모를 거야. 이 주변에는 자청해서 얻어터질 바보가 없거
든. 딱 한 사람이 엘로이에게 대들었다가 척추가 부러져서 평생 앉은뱅이 신
세가 됐어.   
 케이시가 얼굴을 찡그렸다.
  나머지 한 사람은요? 
 이변에는 무기상인 피터가 나섰다.
  캔디맨을 잘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그래서 더 위험하지. 그는 항상 입
을 꾹 다물고 지켜보기만 하거든. 
  웃기는 이름이네요. 
 케이시가 논평했다.
  그가 그렇게 자기를 소개하고 돌아다녀. 그의 친구들은 그냥  캔디 라고 부
르고, 함께 어울리는 자리에서 꼭 사탕을 던져준단다. 하지만 캔디맨이 그걸 
먹는 모습은 한번도 못 봤어. 
  그 녀석을 내 치과 의자에 앉히고 싶구먼. 단, 권총을 밖에 놓고 온다면 말
이야. 
 존의 농담에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이 잦아들자, 피터가 마침내 생각
난 듯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묻니, 키드? 
 케이시는 가장 단순한 변명을 꾸며냈다.
  제가 컬더스에서 커루더스 패거리와 사소한 언쟁을 벌였거든요. 혹시 후환
이 있을까 알고 싶어서요. 
  내가 너라면 그들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않을 거야. 
 벅키기 충고했다.
  키드, 제때에 도망쳐 나온 걸 행운으로 여겨라. 하지만 더 이상 행운을 과
신하지는 말고. 
 무기상인 피터가 말했다.
 케이시는 우호적이고 착한 사람들의 충고에 감사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그 
충고에 따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지만, 잭이 고용한 총잡이들을 걱정하
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잭의 정치적인 이미지를 고려하여 권총조차 소
지하지 않았다. 이빨 빠진 호랑이들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을까?

  -31-
 다음날 아침 샌더슨을 벗어난 지 한 시간 가량 되었을 때, 케이시와 데미안
은 잠복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첫 번째 총알은 깎아지른듯한 왼편 벼
랑 가의 울창한 수풀에서 날아왔다. 두 번째는 말 한 마리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앞쪽의 좁은 길목에서 발사되었다. 컬더스로 통하는 지름길이 완전
히 봉쇄된 셈이었다.
 하지만 잠복한 적은 케이시와 데미안이 우회할 길을 찾아볼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죽어라 총만 쏘아댔고, 케이시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
며 데미안에게 몸을 숨기라고 소리쳤다. 불행히도 두 사람이 선택한 엄폐물
은 길 반대편에 있었다. 케이시가 오른쪽의 큼지막한 바위 뒤에 몸을 숨긴 
반면, 데미안은 왼쪽의 나무 뒤로 갔다.
 때문에 전략 논의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녀의 충고를 듣지 않고
도 기특하게 적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케이시도 라이플을 들고 발사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던 적의 총알은 사실 닥 두 군데에
서 발사되었다. 하지만 시야가 막혀 있는 관계로 단언할 수 없었다.
 케이시는 백주대낮에 습격을 받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밤이라면 몰라도, 
암살자의 정체가 훤하게 드러나는 낮에 이런 기습을 당할 줄이야 누가 예상
하겠는가? 물론 목격자를 남기지 않을 속셈이라면 습격을 언제하든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하지만 어젯밤 제드 페이슬리와 그 일당의 비열한 속성에 대해 충분히 들
었던 그녀로서는 이런 사태를 예상했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샌더
슨에 도착하기 전에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아마 패거리의 두목 격인 제드가 
케이시와 데미안의 동태를 주도면밀하게 살피다가, 그들이 컬더스로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이런 일을 꾸몄으리라. 그 배후에 잭이 도사리고 있음은 의심
할 여지가 없었다.
 케이시는 데미안이 있는 곳에서 20여 미터쯤 떨어진 나무를 향해 총을 쐈
다. 그곳이 데미안과 가장 가까운 적의 잠복지였다. 아, 그녀가 데미안을 걱
정하는 대신 제 걱정을 했더라면 유사시의 경우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췄을 텐데...
  안녕, 키드. 너는 우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멀리 도망가야 했어. 
 케이시는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임자를 즉각 알아차렸다. 바로 샌더슨
의 치과 의사 존 웨스코트였다. 그가 여기에서 총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 한 방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케이시가 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돌려 그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찰나, 존이 
다시 말했다.
  움직이지 마! 그리고 그 라이플을 천천히 땅에 내려놔. 
 케이시는 순순히 명령에 복종했다. 잽싼 동작에는 라이플이 거치적거릴 뿐 
아니라 판초 밑에 6연발 권총이 장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존은 아직 케이
시의 다른 무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케이시처럼 어려 보이는  소년 이 넓적다
리에 총을 차고 있을 줄이야 그 누가 짐작하겠는가.
  제드가 아니라 우리 손에 걸린 걸 다행으로 알아라. 
 그는 무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놈은 우리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악당이야. 그는 희생자를 고문한 후에 
죽이는 걸 좋아하거든. 그러니 내 손에 죽는 걸 행운으로 알아. 나는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이니만큼 빠르고 깨끗하게 일을 처리하거든. 맡은 일을 하
면 그만이지, 희생자에게 여분의 고통을 줄 필요가 없잖아? 자, 너에게 선택
권을 주마. 머리를 쏘아줄까? 아니면 가슴? 내 경험에 의하면 두 부위가 모
두 즉사로 통하니까 그리 아프지 않을 거다. 
 케이시는 두 귀를 의심했다. 죽음을 사소한 타박상 정도로 말하다니! 그리
고 그게 아플지, 안 아플지를 어떻게 알아?
  딱 한 가지 질문에만 대답해주세요. 
 케이시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어젯밤에 댁들과 어울리기 전에 이 일을 맡았습니까, 아니면 
그 후에 맡았습니까? 
  네가 술집을 떠난 직후야. 솔직히 말해 우리는 너와의 대화를 즐겼어. 우리
가 어제처럼 친구들에 대해 떠벌릴 기회도 흔치 않거든. 
 그는 낄낄 웃으며 덧붙였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어. 너에게 위안이 되는 말을 한마디해줄까? 벅키는 이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 너와 안면을 튼 사이가 되었고 너는 너무 어리
니까. 하지만 일은 일이잖아? 개인적인 감정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 이라는 
점을 이해해라. 
 아, 케이시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고용된 살인자를 훗날의 죄책감을 완화시
키기 위해 이런 태도를 취하곤 했다.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살인이 죄악이
라는 의식조차 없으므로 죄책감으로 고통당할 일도 없겠지만.
 그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정말 치과 의사예요? 
  어림없는 소리. 이렇게 쉬운 밥벌이가 있는 마당에 내가 미쳤다고 그런 멍
청한 짓거리를 할 것 같으냐? 자,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 
어디를 쏘아줄까? 
  양미간이 좋겠어요. 당신이 먼저 내 눈을 볼 배짱이 있다면요. 
  쥐방울만한 놈이 대담한 말을 지껄이는구나. 좋아, 돌아서라. 하지만 천천
히 움직여, 키드. 일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뭐가 지저분하단 뜻일까? 당연히 그 대상은 케이시였다.
 케이시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등위에 서 있던 사람은 정말 존 웨스코트였
다. 하지만 모든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이 순간에도, 저 치들이 주말의 오
락을 즐기는 선량한 주민처럼 자신을 속여넘겼다는 사실을 ale을 수 없었다.
  만족해? 
 존이 라이플을 조준하며 물었다.
  이제 시간이 됐다... 
 케이시는 땅으로 몸을 던지며 권총을 뽑았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조준된 
라이플을 피할 만큼 빠르지 못했다. 그저 존의 겨냥을 흩트렸을 뿐이었다. 
케이시가 총을 쏘는 순간, 불이 붙는 듯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케이시는 눈을 부릅뜨고 존 웨스코트를 저승의 길동
무로 삼았는지 확인했다.
  -32- 
 데미안은 케이시가 몸을 숨겼던 바위를 꿰뚫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너
머는 눈에 들어왔다. 두 발의 총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지면서 바위위로 두 
줄리 연기가 솟는 광경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와 바위사이는 약 30미터 정도의 허허벌판이었지만, 그는 무작정 그곳으
로 달려갔다. 총탄이 주위로 빗발쳤다. 하지만 적의 과녁이 되었다는 사실에
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거리 경주의 기록을 경신하고 말았다.
 바위 뒤로 가자, 땅에 널브러진 시체 한 구와 다른 바위에 몸을 기댄 채 이
상한 포즈로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에 기대 있는 자는 이미 죽
었고 그 피가 사방에 튀겨 있었다.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케이시였다. 순간, 데미안은 억장이 무너졌다. 양팔
을 벌리고 바닥에 쓰러진 케이시는 여전히 오른손에 권총을 쥐고 있었다. 다
른 사내처럼 목숨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아니, 숨을 쉬고 있을까? 온몸이 피
로 뒤덮였기 때문에 상처 부위를 찾아내기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 피는 대부분 남자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것
이었다. 그래도 데미안은 실성한 사람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케이시를 부드
럽게 안았다.
 그는 복병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고 오직 케이시에게 초점을 맞춘 채 그
녀를 품에 안고 비탄에 잠겼다. 하지만 남은 총잡이들은 바위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지 못했으므로 계속 총을 쏘았다. 그 총탄의 방패막이가 
된 바위가 깨져 작은 파편들이 주변에 날렸다. 하지만 적은 더 이상 다가오
지 않았다.
 다 내 잘못이야, 데미안은 생각했다. 내가 케이시를 이곳으로 데려왔어. 전
에 없이 많은 보수를 미끼로 케이시를 꾀어낸 거야. 그 제의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케이시가 얼마든지 그의 제의를 거절하고 제 갈 길
로 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으므
로 그 변명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케이시의 체온은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완전히 얼이 
빠진 데미안은 그 점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케이시가 숨을 쉰다는 사실조
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심한 죄책감과 자아 비판의 덫에 빠져 몸부림을 쳤
다. 깊은 비탄과 상실감이 밧줄처럼 목을 조르며 호흡을 방해했다.
 그때, 희미한 신음소리가 케이시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데미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음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데미안의 강한 
포옹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환호성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다시 땅에 
눕혔다. 케이시의 눈꺼풀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아, 살아 있어..., 하지만 
심한 출혈로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데미안은 상처 부위를 찾아서 즉시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
다. 온몸을 뒤지며 상처를 찾았지만 케이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이 머리에 닿자마자, 다시 신음하며 눈을 떴다. 바로 그 순간, 케이시는 데
미안의 뒤로 다가온 복병을 쏘아 맞혔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데미안은 바로 뒤에서 고꾸라지는 하 총잡이의 최후를 
보았다. 데미안이 다시 케이시에게 시선을 돌렸을 즈음, 그녀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케이시 손에서 떨어진 권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재빨리 그 
권총을 허리춤에 쑤셔 넣고 그녀의 머리를 다시 살폈다.
 총알이 스쳐 지나간 오른쪽 관자놀이 바로 위쪽에 3인치 가량의 상처가 났
다. 그 길쭉한 상처를 따라 머리칼이 뿌리까지 뽑힌데다 귀 윗 부분은 시꺼
멓게 그을려 있었다.
 출혈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혼수 상태가 새로운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뇌의 충격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후유증을 가져올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가 전에 당했던 것처럼 가벼운 두통에 시달리는 정도로 끝나
지는 않을 테니까.
 당장 의사에게 데려가야 했다. 또한 가는 길에 다시 총에 맞지 않을 방법까
지 간구해야 했다. 그 말인즉, 우선 남아 있는 일당들을 처치해야 한다는 뜻
이었다. 총알 날아오는 방향이 한 장소로 국한된 점으로 미루어, 적은 딱 한 
명뿐인 것 같았다. 물론 확인된 사실이 아니므로 다른 패거리가 있을 가능성
도 있었다. 그들의 정확한 숫자를 교통수단인 말의 숫자로 파악할 생각으로 
일단 손수건으로 케이시의 머리를 싸맨 다음에 자리를 떴다. 데미안은 배를 
땅에 대고 기어서 큰 바위를 지나 북쪽의 좁은 길 쪽으로 갔다. 그 고개 너
머에 말리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가보니 여타의 교통 수단도 보이지 않
았다. 데미안은 허탕을 치고 다시 케이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총탄은 전과 같은 방향에서 계속 날아왔지만, 그가 북쪽 길목에 도착할 즈
음에 뚝 멈췄다. 그 사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데미안은 서두르지 
않고 케이시에게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케이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두 구의 시체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케이시와 죽은 놈들의 무기, 
그리고 말이 사라졌다. 데미안은 케이시가 혼자 이곳을 떠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한... 하지만 그
럴 경우, 케이시는 우선 데미안의 생사 여부를 확인했을 것이다. 혹시 케이
시가 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건 아닐까? 그렇다며 데미안이 걱정
했던 최악의 사태가 현실이 된 셈이었다.
 머리를 다친 사람들이 가끔 가족과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과거까
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만일 케이시가 의식을 되찾고 이곳을 떠났다
면, 그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즉, 케이시는 그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33-
 케이시는 터벅터벅 걷는 말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관
자놀이가 빠개지듯 아팠다. 뇌리를 스친 첫 번째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데
미안, 나를 이런 수치스런 자세로 태우지 말고 무릎에 앉혔어야지! 하지만 
문득 눈에 보이는 사내의 다리는 데미안의 다리가 아니었다. 최소한 부츠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존 웨스코트를 쏘아죽었다. 또 피터 드루먼드를 쏜 기억도 났다. 그
렇다면 세 사람 중 남은 한 사람인 벅키가 그녀를 데려가고 있단 말일까? 
이상했다. 벅키가 그녀를 발겨했다면 왜 살인 청부업을 끝내지 않았을까?
 너에게 위안이 되는 말을 한마디 해줄까? 벅키는 이 일을 탐탁지 않게 생
각했어. 너와 안면을 튼 사이가 되었고 너는 너무 어리니까.
 케이시는 존의 말을 떠올리고 한시름 놓았다. 벅키가 나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멀리 데려가고 있구나. 이 사람이 정말 잭의 하수인인 제
드 페이슬리나 그의 일당이 아니라 벅키라면 말이다.
 하지만 벅키가 품은 생각은 뭘까? 케이시를 도망치도록 놔주는 것? 글쎄, 
케이시는 그 가정에 의심이 일었다. 벅키는 살인 청부업을 좋아하지 않으면
서도 그 일을 받아들였다. 그런 그가 또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낼까? 고막이 터질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나를 죽이게 만들어? 아
니면 죄책감에 호소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 방법이 가장 타당해 보였
다.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케이시는 여전히 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명심하고 관자놀이의 아픔에 집중되는 생각을 돌려 좋
은 해결 방법을 모색했다. 벅키에게 의식을 되찾았음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가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으리
라.
 바로 그거야! 머리 부상으로 기억을 잃은 척하는 거야. 모든 기억을 상실한 
케이시를 벅키가 더 이상 붙잡아둘 이유가 없잖은가. 기억 상실은 벅키의 모
든 문젯거리를 말끔히 해결해주리라. 아, 제발 벅키의 생각도 일치해야 할 
텐데..., 이제 케이시의 유일한 바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녀가 왜 총에 맞았
는지 모른다면, 벅키가 험하게 나올 리 없었다. 
 이제 느글거리는 속을 참다못해 구토를 하기 전에 말에서 내리기만 하면 
되는데...
 케이시가 말 등에 엎드린 자세로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농장으로 향
하고 있었다. 주변에 농작물이나 일꾼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미 이곳을 떠
난 농부에게 싸게 사들인 부지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 이곳은 벅키같이 법
망에 걸리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집 이라고 부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그는 죽은 두 명의 짝패와 이곳을 나눠 썼으리라. 오두막 자체는 세 사람이 
살기에 충분할 만큼 넓었다.
 벅키는 케이시의 의식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말에서 내리더니, 그녀를 어깨
에 턱 들쳐 메고 집으로 향했다. 그녀로서는 벅키의 앙상한 어깨에 맞닿은 
배에서 욕지기가 안 나도록 참는 게 고작이었다. 다음 순간, 케이시는 말 그
대로 바다에 내동댕이쳐졌다. 젠장, 생사 여부도 상관하지 않는 남자에게 헛
된 희망을 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음을 
내뱉으면서 의식을 되찾은 척했다.
 눈을 번쩍 떴을 때 발견한 사람은 정말 벅키 올콧이었다. 그는 케이시 옆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에 묶인 피 묻은 손수건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날 속일 생각하지 말거라, 키드. 우리는 어젯밤에 안면을 튼 사이잖니. 
  아저씨가 착각하셨어요. 저는 이전에 당신을 한번도 뵌 적이 없어요. 
  이 녀석아, 나는 바보가 아냐. 
  녀석? 
 케이시는 기분이 상한 어조로 그의 말을 막았다.
  녀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세요? 당신, 눈이 멀었어요? 나는 숙녀예요. 
 벅키는 두 눈을 부릅뜨고 케이시를 노려보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목청
을 높여 소리질렀다.
  망할, 숙녀라니! 대체 아가씨는 촌놈 같은 복장으로 무슨 짓을 하는 거
요? 
 케이시는 짐짓 시선을 내리까는 시늉을 하다 옷에 흥건하게 밴 핏자국을 
알아차렸다. 정말 깜짝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내가 죽어가고 있군요?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으니... 
 그가 코방귀를 뀌었다.
  그 피가 아가씨 것이라고 생각지 말아요. 
 케이시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기억을 잃은 연기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피인가요? 
  글쎄요. 
 그가 거짓말을 했다.
  내가 아가씨를 발견했을 대는 이미 그런 차림을 하고 있었소. 
  어머, 내가 왜 이렇게 남자 같은 옷차림을 했는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내가 
승마를 오랫동안 한 모양이군요. 나는 목장에서 청바지를 입었던 것 같아요. 
그래요, 그 점은 확실해요. 
  아가씨 말은 확실한 것처럼 들리지 않는데? 
 케이시는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사실 정확한 건 아니에요. 내 기억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모양이에요. 내가 
어떤 병을 앓았나요? 그래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기억이 혼란스러운 건가
요? 그리고 관자놀이가 왜 이렇게 빠개지듯 아플까요? 
 그가 헛기침을 했다.
  내 생각에..., 아가씨는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소. 
  내가요? 아니,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이봐요, 열 올리지 말고 진정해요. 사실 아가씨는 죽어야 했던 사람이란 말
이오. 내가 죽였어야 했지. 하지만 존과 피터가 모두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가 사실을 곧이곧대로 인정하자, 케이시는 크게 실망했다. 그는 아직 케
이시의 기억 상실에 따른 이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
는 계속 아무 것도 모르는 척했다.
  아저씨가 저를 쐈어요? 
  아니오. 
 그는 낮게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나는 그랬어야 했소. 
  왜요?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나를 죽일 만큼 화가 나셨어요? 
  당신은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그저 보수가 따르는 일에 불과할 
뿐 개인적인 감정은 아무것도 없소. 
 유유상종이라더니, 과연 친구들끼리는 생각마저 똑같구나.
  그렇다면, 아저씨는 지금도 나를 죽일 생각이세요?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내 의도였다면, 아가씨는 이미 죽은목숨이오. 하지만 난 당신을 죽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가씨를 힘들게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컬더스에서 멀
리 떠나라고 충고하는 거요. 
  컬더스가 누구죠? 
  누구? 그곳은..., 아, 괘념치 말아요. 아가씨는 아무 것도 모르는 편이 더 좋
아요. 
 마침내 벅키가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했구나, 케이시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
다.
  아저씨는 내가 누군지 아세요?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아
무 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어요! 
 벅키는 그 말을 듣고 동정은커녕 오히려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당신 말에  KC'라는 낙인이 찍혀 있소. 그곳은 텍사스 동부에 넓게 펼쳐진 
목장이니, 그곳으로 가면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요. 
 케이시는  KC' 목장이 이런 서부의 오지까지 알려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가 말의 낙인까지 생각해냈다는 것 자체가 좋은 추리
력을 지녔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그녀를 놓아주겠다는 뜻이었다.
 케이시는 얼른 동의했다.
  참 좋은 생각이군요. 저 혼자서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해내지 못했을 거예
요. 하지만..., 그 목장이 어디에 있지요? 
  와코 지역 너머에 있을 거요. 난 그곳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지만, 아주 넓
은 곳이라는 말을 들었소. 그러니 동부행 기차를 타는 방법이 가장 쉬워요. 
  이 근처에 기차역이 있어요? 
  그렇소. 내가 기꺼이 아가씨를 기차에 태워주리다. 
 벅키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하지만 우선 의사부터 찾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직접 봐주지. 자,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봐요. 
 스스로 의사를 자청한 벅키는 케이시의 머리에서 손수건을 벗기고 머리카
락을 뒤로 넘겼다. 머리칼은 피에 젖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케이시는 눈
물이 나올 만큼 아팠지만 이를 갈며 그의 손길을 견뎌냈다.
  아무래도 한두 바늘 꿰매야겠군. 내가 바늘을 가져올까? 
  상처가 그렇게 깊어요? 
  그렇지 않소. 하지만 내가 아프지도 않고 훗날 자국도 남지 않게 몇 바늘 
꿰매주리다. 
  정말 고맙지만, 그냥 참겠어요. 대신 상처를 씻을 깨끗한 물을 가져다주시
겠다구요? 그리고 제 안장도 주세요. 그 속에 갈아입을 옷이 들어 있겠지
요? 
 벅키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게다가 케이시를 샌더슨의 기차역으로 데려가서 
손수 기차표까지 끊어줬다. 그녀는 기차를 기다리며 다음 일을 생각할 시간
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기차가 왔던 것이다.
 왜 쫓겨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벅키는 충고 한마디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아가씨,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이곳에 왔던 이유를 잊기 바라오. 다
음 번에도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소. 
 케이시 역시 그를 죽여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어쨌든 
벅키가 그녀의 목숨을 살렸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동감하니까. 
 그렇다 해도 케이시는 돌아올 것이다. 이곳에서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
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벅키를 피할 것이다.
 
  -34-
 케이시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벌써 이틀 전이었다. 이제 데미안은 누가 쳐
다보기만 해도 그 사람 머리를 박살낼 지경에 도달했다. 도대체 케이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해답을 찾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 가지 소득은 있었다. 하루 종일 샌더슨을 뒤진 다음에, 케
이시가 자신의 의지로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일당 중 살아남은 한 명이 그녀를 발견해서 데려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왜? 그 질문은 데미안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생각으로 첫
날 밤을 하얗게 보냈다. 혹시 그녀가 도망가는 적을 목격하고 뒤를 따라간 
건 아닐까? 아니면 그놈이 케이시 뒤를 따라갔을까? 여하튼 두 사람이 모두 
사건 현장을 떠난 건 확실했다. 그곳에는 데미안의 말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
니까.
 그는 케이시가 실종된 다음에 재빨리 샌더슨으로 돌아왔고, 그날 오후 늦게 
보안관을 찾아가서 사건을 신고했다. 하지만 사라진 말의 흔적을 추적하기란 
불가능했다. 발자국들은 이미 다른 것과 뒤섞여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시체 두 구를 본 보안관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고 딱 잡아떼더니, 세 번째 
용의자마저 누군지 모르겠다고 부인했다. 처음에 데미안은 그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 하지만 흐리멍덩한 태도로 말미암아 믿지 말아야겠다
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보안관
을 추궁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유일한 대안이 하나 남아 있었다. 즉, 그 총잡이들을 고용한 사람과 
직접 대면하는 것, 의심의 여지 없이 그 장본인은 커루더스였다.
 잠도 안 자고 계속 말을 달린 끝에 하루 반만에 컬더스로 돌아왔다. 피곤에 
지친 상태였지만 케이시가 너무 걱정스러운지라 도저히 자신의 안락을 추구
할 수 없었다.
 한밤중에 컬더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곧장 케이시가 묵었던 여인숙으로 
갔다. 케이시가 그곳에 있으리라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인 여선생이 잭
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호텔 직원은 
그리 믿음직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여선생은 쉽게 잠에서 깨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시간에 그를 안으로 들여놓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댔다. 지난 며칠 동안의 
사정을 구구하게 설명한 다음에야 겨우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 또한 잭 커루더스를 매우 혐오했다.
 당장 커루더스와 그의 일당을 찾고 싶었지만, 피곤에 찌든 상태였기 때문에 
우선 눈을 붙여야 했다. 데미안은 여교사에게 다음날 새벽에 깨워달라고 부
탁했고, 여교사는 그 주문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게다가 잭의 부하들 이름과, 
그 중 한 사람의 주소까지 말해줬다. 데미안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워낙 이른 시간인지라 엘로이 벤처는 침대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 대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기 때문에 데미안은 쉽게 그 집에 잠입했다. 또한 엘로
이는 혼자였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옆에서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여자가 
있기를 원치 않았다. 이제 엘로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놈을 
반쯤 때려죽일 수 있는 무대가 갖춰진 셈이었다.
 하지만 여주인은 엘로이의 체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데미안 
역시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잭에게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점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데미안이 라이플의 차가운 총구를 엘로이의 
뺨에 대고 흔들어 깨우고, 엘로이가 윗통을 벗은 몸으로 투덜거리며 일어났
을 때야 데미안은 상대의 거대한 몸집을 알아차렸다.
  너무 많이 움직이지 마, 엘로이. 
 데미안이 경고했다.
  아니면 네 머리통이 몸과 분리되어 방 저쪽으로 날아갈 줄 알아. 
 엘로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데미안을 째려봤다. 막 떠오른 태양은 서쪽으로 
면한 침실까지 빛을 뿌리지 못했다. 방 안은 어두웠다.
  넌 누구냐? 
  데미안 루트리지라는 이름이 귀에 익으냐? 나는 네 상관을 체포하려던 사
람이다. 
  아, 네 놈이로구나. 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만큼 바보일 줄은 몰랐다. 
  나 역시 너와 네 친구들이 내 귀환을 막으려고 할 만큼 바보일 줄 몰랐다. 
그래, 네 죄를 인정하나? 
  네 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엘로이가 호전적으로 말했다.
  잡아떼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구나. 잘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내가 
굳이 설명을 해야 한다면 말해주마. 우리를 처치하라고 너희들이 보내 세 명
의 남자들에 대해 말하는 거야. 그 하수인 중에서 두 명이 죽었다. 
 그 말에 엘로이의 투실투실한 뺨이 긴장했다. 그 느낌이 라이플을 통해 전
달되었다. 놈들의 범행 사실이 확인된 순간이었지만, 엘로이는 아직 제정신
을 못 차리고 시침을 뗐다.
  넌 미쳤구나. 무슨 근거로 너희를 공격한 건달들의 소행을 커루더스씨와 
결부시키는 거냐? 너희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어. 왜냐하면 그분을 네
가 찾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라고? 좋아, 그 토론은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너희들
이 고용한 하수인의 이름과 주소가 전부야. 아직 살아남은 놈의 이름과 주소
를 말해. 
 엘로이가 코방귀를 뀌었다.
  난 아무 것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안다 해도, 내가 너에게 협조할 성싶으
냐? 그리고 내 집에 침입하다니, 배짱이 보통이 아니구나. 이 읍에는 엄연한 
법이 있다. 
  그러셨어? 여기 보안관도 잭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나? 
  내가 화를 내기 전에 당장 여기에서 나가. 난 너에게 할말이 없다. 난 아무 
것도 몰라. 
 엘로이가 데미안을 노려보며 역정을 냈다.
  내 생각은 너와 달라. 그리고 너는 내 질문에 기필코 대답하게 될 거야. 
 데미안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어이구, 그래? 무슨 수로? 네가 연방 보안관이라 해도 그 총을 쏜다면 당
장 이곳 보안관에게 체포당할걸. 어서 말해보시지, 내 입을 어떻게 열 생각
인지, 이 간덩이가 부은 녀석아. 
 데미안은 엘로이의 수작을 훤히 들여다봤다. 이놈이 나를 때려눕히려고 일
부러 선동하고 약을 올리고 있구나. 하지만 데미안은 호각지세를 이루는 상
대와 한판 벌인 지도 여러 해가 지났기 때문에 그 수작에 응했다. 젠장, 될 
대로 되라지. 좌절감을 누군가에게 The아버리고 싶어하던 상태였다.
 데미안은 라이플을 침대 옆 탁자에 기대놓고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 시작해볼까? 
 데미안의 주먹은 인가의 신체 중 가장 약한 부분인 코로 날아갔다. 그 한 
방에 엘로이의 콧대가 부러졌다. 엘로이는 코피를 줄줄 흘리며 신음을 내뱉
었다 그는 데미안을 납작하게 만들 생각으로 침대에서 몸을 날렸지만, 두 사
람의 현재 자세를 고려할 때 그 방법은 현명치 못했다, 데미안이 살짝 뒷걸
음치는 바람에 엘로이는 마룻바닥에 대자로 뻗고 말았다.
 데미안은 당연히 상대가 쓰러져 있는 동안 발길질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놈의  페어플레이  정신 때문에 엘로이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고 그것
이 데미안의 실수였다. 엘로이는 그렇지 않아도 쇠망치 같은 주먹에 어마어
마한 힘을 실어 날렸다. 둔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주먹질은 번개처럼 빨랐
다.
 데미안은 정신없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간간이 주먹을 날렸지만 그 위력은 대단치 않았다. 
싸움이 길어질까?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행운이 따른다면...
 드디어 데미안의 주먹이 엘로이의 오른쪽 옆구리에 꽂히는 순간, 우두둑 소
리와 함께 엘로이의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부터 엘로이는 심한 
고통을 참으며 오른손으로 갈비뼈를 감싸 안고 싸워야 했기 때문에 주먹의 
힘이 전과 달랐다.
 몇 분 후 엘로이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데미안은 페어플레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상대를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네 몸의 뼈를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주마! 
 마침내 엘로이는 항복했다.

  -35-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데미안은 샌더슨의 교외에 위치한 벅키 올콧의 목
장에 도착했다. 잠을 아껴가며 이곳으로 달려온 터였다. 그 농장은 거인 엘
로이 벤처의 말처럼 읍에서 1마일 밖에 있었다.
 붓고 멍든 얼굴에도 불구하고 벅키 올콧이 데미안을 즉시 알아볼 가능성이 
높았지만, 데미안은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이 집에 있다는 뜻으로 오두막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기 때문
에 데미안은 현관 앞에서 말을 내려 문을 두들겼다. 벅키가 이미 그를 알아
보고 권총을 장전했다면 총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으로서는  
원하는 대답을 얻어낼 때까지 벅키를 죽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데미안의 눈앞에 서 있는 사내는 총을 들고 있지 않았
다. 중년에 중키 정도, 하지만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랐다. 듬성듬성 빠진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 그리고 세상 풍파를 다 겪은 거친 얼굴의 사
내는 말안장 위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 특유의 안짱다리를 하고 있었다.
 벅키는 데미안을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요리를 하던 중이었는지, 큼직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한족 뺨에도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는 흰 가루가 
묻은 양손을 앞치마에 쓱쓱 문지르며 데미안을 바라봤다.
 벅키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을 겨냥한 라이플로 향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
며 말했다.
  선생, 무기를 들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짓은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른 인상을 심어주기 십상이거든요. 
  이번에는 아냐. 네가 벅키 올콧이냐? 
 데미안이 그의 신분을 확인했다.
 벅키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얼굴을 더 찡그리며 물었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이틀 전 네가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 우리가 만난 적이 있다고 봐야겠지. 
자, 그 소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빨리 말하지 않으면 너를 당장... 
  저런, 저런! 웬 고약한 놈이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군요. 난 아무 것도 몰라
요... 
 데미안이 전광석화처럼 주먹을 날렸고, 벅키는 문 옆에 섰다. 더 이상 거짓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엘로이 벤처에게 네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느라고 한바탕 벌인 탓에 내 손
이 얼마나 아픈 줄 아나? 
 데미안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 관절을 문질렀다.
  너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싶지 않지만 고집을 부린다면 하는 수 없지. 
  기다려봐요, 선생. 
 벅키가 양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난 엘로이 벤처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그가 당신에게 벗어날 생
각으로 나를 끌어들인 것 같군요. 선생도 한번 생각해보시구려. 몇 대 맞았
다고 진실을 말할 것 같습니까?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데미안은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이런 남자가 살인자일까? 요리에 열중하는 남자
가 총잡이로 고용될 수 있을까?
 그는 어디를 보나 농부가 틀림없었다. 데미안은 말을 타고 지나는 길에 헛
간과 닭장, 그리고 돼지우리를 봤다. 인근에 농작물이나 곡식은 없었지만, 이
곳은 엄연한 농장이었다. 그리고 그 야비한 엘로이 벤처라는 놈은 데미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어낼 수 있는 놈이었다.
 데미안은 뒤로 물러섰다. 내가 잘못 찾아왔구나. 아, 무고한 사람을 협박하
고 주먹을 날리다니...
 사과하려는 순간, 데미안의 시선이 우연찮게도 벅키 옆에 뒤집어진 쓰레기 
상자로 떨어졌다. 그곳에는 피에 물든 청바지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케이시의 청바지...
 그는 즉시 라이플을 들고 벅키의 머리를 노렸다. 당장 방아쇠를 당길 기세
로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저 쓰레기 더미에 있는 옷은 바로 그의 옷이야. 다섯을 셀 테니, 네가 그의 
옷을 어떻게 벗겨냈는지 말해. 그리고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다시 
거짓말을 할 생각이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거야. 하나... 
  기다려요! 좋아요, 내가 졌습니다. 하긴 청부받은 일을 끝내지 못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번 일로 두 명의 친구를 잃었으니 그 
피 묻은 돈을 돌려줘야 할 의무도 없어요. 
  둘.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지 않았어요! 도대체 나를 무슨 개망나니로 생각하
는 겁니까? 
  셋. 
  그만 좀 셀 수 없습니까? 내가 아는 걸 모두 털어놓겠습니다. 나는 그 처
녀를 도와줬습니다, 정말이에요. 나는 그 처녀를 소년으로 생각했을 때에도 
그 어린것을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절대로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아
요. 
 하지만 데미안은 라이플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소년이 여자임을 알았지? 그녀가 그 말을 하고 돌아
다닐 리 없어. 
  그녀가 말해줬어요. 내가  녀석 이라고 부르니까, 그 아갔기 분개했어요. 심
지어 펄펄 뛰며 화를 냈단 말입니다. 
  또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일이 어떻게 되었냐 하면, 그 아가씨는 머리에 총을 
맞았어요. 상처는 심하지 않았지만, 기억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어요. 자기가 왜 소년 행세를 했는지 조차 기
억하지 못했어요!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그는 라이플을 내려놓
고 물었다.
  그녀가 정말 기억을 잃었나? 
 벅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가씨는 기억을 잃고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뭐, 이해할 만하지요. 나도 
내 이름을 기억 못할 지경이 된다면 완전히 돌아버렸을 겁니다. 
  그녀를 도와줬다고 했지? 하지만 어떻게? 
  이곳을 떠나 보내려고 우리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총에 맞
은 이유조차 기억 못해서, 나는 그녀에게 깨끗한 옷을 가져다주고 핏자국을 
씻도록 도와준 다음에 동부행 기차에 태웠어요. 
  뭐야? 
 데미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했지? 
  이 근처에서 돌아다니는 짓은 안전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했습니다. 
  데미안은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벅키를 쏘아 죽이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녀가 
그 망할 기차를 타고 제 신분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나? 
  선생,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아십니까?  
 벅키가 분개하며 말했다.
  그녀는 와코 지역 너머에 있는 KC 목장으로 갔어요. 그녀 말에 그곳 낙인
이 찍혀 있었거든요. 그곳에는 그녀나 그 잘생긴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반드
시 있을 겁니다. 
 이 남자가 완전한 멍텅구리는 아니구나. 하지만...
  내가 그녀를 도와줄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 않더냐? 우리는 
함께 여행하는 사이였어. 
  당신 목을 노리는 사내들의 유형을 봐서, 당신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 것 같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숙녀가 당신 문제에 휘말려 목숨
을 잃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어요. 그래서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보낸 겁
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기억을 되찾은 다음에도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만큼 똑똑한 아가씨예요. 
 데미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를 더 이상 닦달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벅키는 케이시를 도우려는 마음에서 그런 짓을 했다. 케이시
의 말을 사준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이 남자가 어찌 알았겠는
가?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그 말을 어디에서 구입했는지. 그 말이 몇 명의 
주인을 거쳤는지는 불가사의였다. 이제 케이시를 찾는 일은 짚더미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 되었다.
 데미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케이시의 뒤를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36-
 당장 케이시 뒤를 쫓아갈까? 아니면 우선 커루더스를 처치할까? 그 문제는 
데미안에게 딜레마였다. 커루더스와 마지막 결판에 들어가는 시간은 딱 하루
면 충분한데 반하여, 케이시를 찾아내는 일은 날짜를 기약할 수 없었다.
 케이시가 와코 이남 지역에 도착해서 자신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 과연 어디로 향할까? 사건의 원점에 해당하는 샌더
슨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기억과 함께 그 놀랄 만한 추리력까지 잃어버렸을
까?
 하지만 오랫동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기차 시간표가 그의 문제를 쉽게 
해결해줬다. 샌더슨에서 출발하는 다음 동부행 기차는 사흘 후에나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이곳 일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데미안은 충
분한 휴식을 취하고 컬더스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수면을 다음으로 미뤘어야 했다.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촉박하게 돌
아간 것이다. 만일 몇 시간만 더 빨리 컬더스로 돌아갔더라면, 그곳에 도착 
즉시 목격한 결투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 다음에 이어진 큰 난리도...
 이런 옷차림으로  바넷 살롱 에 들어가 앉아 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케이시는 잭과 그의 선거 참모들이 점심 시간 무렵, 살롱으로 
향할 때까지 기다렸다.
 몇 분 후, 그녀는 그곳으로 들어가 그들 옆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케이시
가 살롱에 들어섰을 때,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사람은 딱 두 사람에 불과했
다. 그 중 한 사람은 그녀를 그냥 무시했고, 다른 쪽은 남성적인 관심을 보
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행 중 가장 몸집이 큰 거구를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
기 때문에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거구의 사내는 코가 내려앉
은데다 얼굴이 잔뜩 부어 올라 있었다.
 놀림을 받는 남자는 엘로이 벤처가 틀림없었다. 백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사
내가 말굽에 차인 다음 마차에 깔린 행색을 하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놀림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벤처 같은 거인에게 저런 흔적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누
굴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부루퉁한 변명은 케이시의 생각을 바꿔줬다.
  최소한 나는 당한 만큼 갚아줬다구. 그 녀석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
지는 않을걸. 갈비뼈만 부러지지 않았더라도 그 녀석을 요절냈을 텐데. 
 케이시는 궁리했다. 지금 저들의 대화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혹시 데미안이 
아닐까?
 그녀는 데미안이 컬더스로 돌아오리란 희망을 안고 벅키가 태워준 기차를 
중간에서 세웠다. 그 일로 기관사가 얼굴을 붉히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아랑
곳하지 않고 이곳으로 돌아와 여인숙으로 갔다. 여교사인 라리사 말에 따르
면, 데미안이 정말 이곳에 왔었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가 죽지 않았구나! 
가장 큰 공포가 해소되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녀를 찾아 다시 컬더스를 떠
났고, 그들은 단 몇 시간 차이로 서로 길이 어긋난 모양이었다.
 케이시는 데미안이 다시 돌아오리라 확신하고 그 동안 잭 커루더스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수집하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그 읍장 후보와 
개인적인 수준에서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여성미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결
론짓고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세웠다.
 지금 케이시의 의상은 전부 라리사의 것이었다. 케이시는 여선생이 동부에
서 가져온 세련된 옷가지를 샀다. 풍성한 레이스와 보닛은 케이시의 스타일
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녀의 목적에는 적합했다. 즉, 그 옷을 걸친 케이시는 
 키드 와 딴판이었다. 
 살롱에 가만히 앉아 뜸을 들인 케이시는 잭에게 의미 어린 시선을 던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잭은 즉시 관심을 보였다. 그는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
없어 여성들에게 호감을 받는 타입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젊은 처녀의 교태는 그를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잭이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
시에게 다가왔다. 
  아가씨는 우리 읍에서 처음 뵙는 분이시군요. 
 잭은 자기 이름을 말한 다음에 그녀의 초대를 기다리지 않고 냉큼 옆자리
에 앉았다.
  이곳에 방문차 오신 겁니까?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부하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태는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 많이 뵌 분처럼 보이는군요. 
 잭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던진 한마디에 케이시는 속으로 신음을 했다. 보
기보다 눈썰미가 예리한걸.
 잭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전에 만났던 적이 있습니까? 
  저는 텍사스 지역을 두루두루 여행했답니다. 당신은 어떠세요? 
  대단히 많이 했지요. 
  저는 최근에 샌안토니오와 포트워스를 들렀답니다.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케이시는 헨리인 동시에 잭의 정곡을 찔렀음을 확인
하고 재빨리 덧붙였다. 
  그리고 와코 지역도 갔었어요. 그곳은 아주 멋진 곳이었어요. 
  전에 우리가 만났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가 만난 적
이 없음을 확신하니까요. 만일 우리가 만났다면, 내가 당신처럼 예쁜 아가씨
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제인. 
 그녀는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을 말하고 식탁 위의 양념통에서 성을 따왔
다. 
  페퍼스(후추)예요. 
  당신이 이곳에 계시는 동안 당신 말벗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누구
입니까? 
  네?  
  이곳에 누구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아, 라리사 에이머리를 만나러 왔어요. 당신도 아시죠? 그녀가 이 읍에 한 
명밖에 없는 교사라면서요? 우리는 함께 학교를 다닌 동창생인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보러 온 거랍니다. 
  그럼, 아가씨도 그녀처럼 동부 출신이십니까? 이상하군요. 당신 억양은 서
부 토박이, 그것도 텍사스의 것인데요. 
 잭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요, 저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하지만 동부에서 학업을 마쳤답
니다. 어머, 당신이 말을 하셨으니까 꺼내는 말인데, 당신 억양은 동부 출신
처럼 들리네요. 언제 텍사스에 오셨어요? 
  내 말은 하지 맙시다. 페퍼스 양. 내가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바로 아가씨입
니다. 
 케이시는 입에 발린 아첨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상황이 예상대로 척척 돌아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잭은 새로 사귄 사람에게 말실수를 할만
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리고 옆 탁자를 지키고 있는 부하 중 두 명이 그녀를 
매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케이시가 이곳을 떠날 변명을 궁리하던 차에 패거
리의 두목 격인 제드가 잭에게 다가와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잭은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다. 굳
이 생각하지 않아도, 왜 그가 못 먹을 걸 먹은 사람처럼 인상을 쓰며 노려보
는지 빤히 알았다. 케이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권총에 
손을 댔다. 하지만 무기가 제자리에 없었다. 
 사실 총이 있기는 있었다. 손가방 속에. 읍에 도착하자마자 권총을 새로 샀
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꺼내느냐가 문제였다.
 하지만 여섯 명의 남자는 모두 비무장 상태였다. 더구나 이곳은 손님과 종
업원을 비롯한 목격자가 득실거리는 공석이었다. 그러므로 읍장자리를 노리
는 잭이 그녀를 당장 처치하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는 하수인을 보내 더
러운 일을 처리하게 만드는, 극히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나타나리라. 헨리
가 데미안의 아버지를 죽였던 것처럼. 
 그래서 케이시는 즉각적인 대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잭에게 
알아낸 정보도 없을뿐더러, 그는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니었다. 너덧 명의 사
내들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어하는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괜한 걱정을 사
서 할 필요는 없었다. 케이시는 손가방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저는 식욕을 잃었어요. 
 그때, 한 사내의 손이 그녀의 팔을 꽉 쥐고 손가방을 잡지 못하도록 했다. 
  배짱이 두둑한 아가씨로구먼. 
 케이시의 손을 잡은 사람은 제드였다. 제드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요? 
 케이시가 대답했다.
  저는 배가 고파서 식사할  곳을 찾아왔을 뿐인걸요. 이 지역에서는 식사를 
해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요 발랑 까진 말버릇하고... 
  참 재미있는걸. 
 잭은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부하들의 입을 막았다.
  아가씨, 나는 아가씨 속셈을 다 알고 있어. 하지만 나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어. 
 잭은 제드에게 눈짓을 했고, 케이시는 별 문제 없이 그 표정을 해석했다. 
 처치해. 이번에는 네 손으로 라는 아주 단순한 뜻이 담긴 몸짓이었다. 제드
가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가려 하자, 케이시는 이제 걱정을 해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전술을 바꿨다.
  좋아, 너희들 중에서 누가 나와 붙을 테냐? 
  당신과 붙어? 
 제드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정한 결투를 하잔 말이다. 
 거인 엘로이가 히죽거리며 나섰다.
  내가 하지. 
  공정하게 총으로 승부를 가리자. 
 케이시가 결투 방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왜, 모두 겁쟁이라서 감히 나서지 못하는 거냐? 
 한 사내가 낄낄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자가 공정한 결투에 대해 뭘 안다고 까불어. 
  흥, 알고말고. 
 케이시가 얕잡아보듯 대답했다.
  오히려 너희들이야말로 뒤에서 습격하는 것밖에 모르잖아? 
 그 말에 두어 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막대사탕을 빨던 사내가 조용하게 말
했다.
  내가 맡지. 
  아니야, 내가 할래. 
 패거리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녀석이 열렬하게 나섰다.
  제드, 나에게 맡겨줘요. 나는 여자를 죽이는 데에 대해 상관하지 않거든. 
그런데 이 애송이, 정말 여자야? 
 그는 음흉한 시선으로 케이시를 훑어본 다음에 낄낄거리며 덧붙였다.
  일을 끝낸 다음에 저 치마 속을 들춰볼까? 
  밖으로 나가서 해. 
 잭이 까탈스럽게 말했다.
  밥맛 떨어지는 화염 냄새를 맡으며 식사하고 싶지 않아. 



  -37-
 그들은 케이시 뒤로 돌아가 바텐더에게 딱 한마디 말을 던졌다. 그러자 바
텐더가 바 아래 숨겨뒀던 무기를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바로 놈들의 무
기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권총을 차지 않았을 뿐이지, 정말 무장을 
해제한 것은 아니었다.
 결투 상대로 결정된 사람은 메이슨이었다. 무시당한 제스로가 입술을 툭 내
밀고 한바탕 불평을 쏟아놓으려 했지만, 그 형인 제드가 단호한 시선으로 기
선을 제압하며 공개적인 장소에서 소란을 떨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권총에 장전하는 동안 케이시는 속으로 온갖 궁리를 다했다. 과연 
이번 결투가 공정해질 수 있을까? 
 그들은 케이시에게 무기를 집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 탄창이 비었다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그녀는 그 제의를 거절하고 손가방에서 무기를 꺼냈다. 잠
깐 시간을 얻어 옷을 갈아입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말해봤자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케이시 자신도 드레스 위에 권총 벨트를 차는 기분이 묘했으니 
잭 일당이 히죽거리며 비웃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케이시가 총
에 대해 뭘 알랴,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밖으로 나와, 케이시는 길 한복판으로 갔다. 메이슨이 마지막으로 살롱을 
나왔다. 그는 키가 크고 날렵한데다, 어깨에 닿을 만큼 흑발을 기르고 콧수
염을 말끔하게 손질했다. 쌀쌀한 냉기가 감도는 10월 날씨에도 코트를 벗은 
차림이었다. 화려하게 수놓은 조끼를 받쳐입은 정장 위에 쌍권총을 찬 모양
새가 케이시만큼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문명과 야성을 동시에 갖췄다고나 할
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간파한 것처럼 허둥지둥 몸을 피했다. 주변은 
삽시간에 한적해져 간조 때의 바다를 연상시켰다. 잭의 패거리들이 총을 차
고 등장하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케이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잭이 이 읍에 
도착한 이래 바넷 살롱 밖에서 얼마나 많은 혈투가 벌어졌을까?
 그녀의 아버지가 이 일을 안다면, 볼기가 퉁퉁 부을 정도로 매질을 할 것이
다. 무법자를 추적하는 일과 결투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챈도스는 오래 
전, 삶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철저하게 가르쳤고, 케이시는 그 지식을 수배
범 추적에 유용하게 써먹었기 때문에 적이 총을 겨눌 기회조차 주지 않고 
상황을 제압했다. 설령 그들이 총을 뽑는다 해도 그녀의 총구가 먼저 불을 
뿜었으므로 결투까지 이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저만큼 떨어진 적과 눈싸움을 하며 총을 뽑을 기회를 주는 이 상
황은 매우 어렵고 이례적이었다. 그녀는 총을 빨리 뽑는데다 과녁을 정확하
게 맞혔다. 하지만 멍석이 깔린 곳에서 실력을 발휘하려니, 왠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더구나 벅키와 그 짝패들 말에 의하면, 샌더슨에서 메이슨이 
명사수로 소문이 자자하다고 했다.
 손바닥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제안을 하다니, 정말 미친 짓이었어. 
이보다 훨씬 안전하게 바넷 살롱을 빠져 나올 수도 있었는데. 제대로 생각할 
시간만 있었다면 말이다. 차라리 비명을 지르면서 협박당한 여인네 시늉을 
내는 편이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누군가 그녀를 방어하기 위해 나섰을 테
고..., 그녀와 함께 총에 맞아 죽었으리라. 안 돼, 이런 생각은 금물이야. 그녀
는 저승사자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하지만 케이시에 비해 메이슨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일에 익숙한 전
문가, 바로 그런 타입이었다. 케이시도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내심 속마
음을 숨기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는 중이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신경이 날카로웠던 때가 없었다.
 그녀는 메이슨의 차갑고 흔들림 없는 눈을 응시했다. 그는 눈 한번 깜박하
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내였다. 태어날 때부터 비정한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메이슨이 그런 범주에 속했다. 하지만 일이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통에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르침을 받
았던 대로 행동했다.
 그녀의 스승은 탁월했다. 여전히 서 있는 쪽은 케이시오, 쓰러진 쪽은 메이
슨이었다. 그녀는 너무 쉽고 바르고 간단한 결말에 놀란 나머지, 잭의 패거
리 중에서 가장 어린 제스로가 총을 겨누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
만 제스로가 총을 뽑자마자, 케이시 왼쪽에서 라이플이 발사되었다. 제스로
는 오른손에 총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짝패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보복에 나섰다.
 케이시는 얼른 땅바닥을 구르며 총을 발사했다. 게다가 조금 전 그녀의 생
명을 구한 미지의 라이플까지 가세하여 연발 사격을 퍼붓는 통에 살롱 앞을 
장악했던 잭의 패거리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놈들이 퇴각하는 중에 간간이 
되쏘는 총알은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했다. 케이시는 그 라이플의 주인이 누
구인지, 어디에 숨어 있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아마 이 읍 주민 중 한 
사람이 여성을 괴롭히는 제드 일당에게 분개한 나머지 행동에 나선 모양이
었다.
 총탄을 피하는 것도 좋지만, 너풀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대로에 계
속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지의 라이플 사수가 후방을 맡은 틈을 
타, 재빨리 일어나 바넷 살롱 쪽으로 달려갔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숨을 
돌리려는 찰나,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야말로 
여우를 피하려다 사자를 만난 꼴이었다.
  지금은 안 돼요. 
 데미안이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비난을 퍼부으려 하자, 케이시가 먼저 선수
를 쳤다. 
 마침 그들 옆 창문이 적의 포화로 요란하게 흔들렸다. 데미안은 그녀의 말
에 동의하고 창가로 가서 라이플을 쏘아댔다. 케이시는 정신을 가다듬고 밖
의 동정을 살폈다. 갈비뼈가 부러진 엘로이 벤처가 민첩하게 행동하지 못하
고 데미안의 총에 무릎을 맞았다. 그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꺾었다.
 캔디맨은 살롱 계단 위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죽은 게 확실하다. 그녀와 
결투했던 메이슨은 여전히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정말 죽었을까? 설령 그
렇다 해도,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나머지는 살롱 안으로 침입을 시도하는 
중이었고, 최소한 한 명은 문 뒤에서 총을 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당신이 기억을 회복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데미안이 총을 쏘는 사이에 물었다.
  처음부터 기억을 잃지 않았어요.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무슨 마음을 먹고 이런 짓을 벌였소? 
  내가 도전을 피할 사람처럼 보여요? 나는 이곳에서 당신이 나타나기를 기
다리며 시간을 죽이는 동안 잭에게 정보를 빼내려고 했어요. 남자들이란 관
심을 보이는 여자들에게 허풍을 떨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내 드레스 차림
이 그다지 유혹적이지 않았나봐요. 
  정말 녀석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단 말이오? 
 데미안이 험악한 시선으로 그녀를 째려봤다.
 케이시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당신이 잭과 대질했던 첫날, 그들은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당
신은 그들의 자금 공급원을 체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모든 시선은 당신
에게만 맞춰졌다구요. 나는 그저 우연히 당신 옆에 붙어 있던 조무래기에 불
과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했죠. 그리고 정말 그
랬어요, 처음에는. 그 다음 일은 당신 상상에 맡기겠어요. 잭은 내가 비밀을 
캐려던 걸 알아차리고 펄쩍펄쩍 뛰며 화를 냈어요. 
 데미안은 더 이상 언급을 회피했다. 하지만 창 밖으로 총을 두어 방 더 쏜 
다음에 그녀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저기..., 당신 드레스 차림이 굉장히 아름답소. 
 이번에 케이시는 마음껏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말은 서커스 광대에게나 해요. 
  지금 뭐라고 했소? 아니, 남이 기껏 칭찬을 해줬더니 고마워하기는커녕 면
박이나 주기야? 
  그게 아니에요. 당신이 칭찬해줬다고 면박을 주는 게 아니라, 내가 형편없
는 머저리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 거예요. 참, 예비 탄약 있어요? 
 케이시는 마지막 탄약을 장전하며 물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살롱 뒤쪽에서 탄약 한 상자가 공급되었다. 얼굴이 하
얗게 질린 요리사가 그녀에게 바치는 찬사였다. 그리고 데미안이 그녀의 원
래 권총을 던져줬다. 이제 여분의 화력과 탄약까지 확보하자, 케이시의 마음
이 든든해지고 이 위기를 승리로 이끌 자신이 생겼다.
  우리 중 한 사람은 살롱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적의 후방을 공격해야 해요.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요. 
 케이시는 말을 하며 손가방에 여분의 권총과 탄약을 넣고 가방을 어깨에 
둘렀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니? 당신이 나서겠다? 관둬. 나는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눈 밖에 내놓지 않겠소. 그런데 망할 놈의 보안관은 꼭 
필요할 때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때맞춰 낚시를 갔겠죠. 하지만 이런 불공평한 총싸움 한두 번 본 것도 아
닐 테고, 보안관들 여기 있다 해도 저놈들에게 합세할 공산이 높아요. 그러
니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아요. 
  그 얘기는 나중으로 미룹시다. 
  왜요? 
  패거리 중 한 명이 지금 막 살롱 옆 골목으로 돌아갔거든. 아무래도 놈들
이 철수하는 것 같소. 
 케이시는 다시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정황을 살폈다. 그리고 시험 삼아 
총을 함 방 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딱 한 사람만 봤어요? 
 케이시의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뒷모습을 겨우 봤을 정도요. 그러니까 나머지 두 사람은 이미 도망갔을 거
요.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은 나를 혼자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고 했으니, 우리가 함께 뒷문을 
통해 마구간으로 가서 그들을 일망타진하는 게 어때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요. 어서 갑시다. 
 마구간은 한 블록 반 너머에 있었다. 으슥한 뒷골목도 아닌 주택가를 살그
머니 빠져 나가려니 피치 못하게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했다. 데미안은 별 무
리 없이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때문에 
데미안의 도움을 받다 장애물을 넘었다. 데미안의 논리에 의하면 드레스를 
걸친 여성은 숙녀다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나. 케이시는 질린 나머지 두 번 
다시 불평하지 않았다.
 힘들게 마을로 돌아와서 그녀가 결투 중인 것을 발견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자의 행동치고는 참으로 황당했다. 케이시는 일단 참았다가 나중에 호
되게 쏘아주리라 마음먹었다. 옷차림이 한 인간의 능력이나 자질을 규정할 
수 없었다. 케이시야말로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해 가출한 몸이 아니던가?
 아무튼 마구간이 저만큼 보였다. 그 뒷문 주변을 말이 뛰노는 곳이었고 가
장자리에 울타리가 쳐 있었지만,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앞문을 정면 돌파
하는 것보다 훨씬 잠입하기 쉬웠다. 잭과 페이슬리 형제가 이미 도착했다면 
곧 총격전이 전개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이 그들의 최종 목적지니까. 하지
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안에서 마구간 주인은 평화롭게 마사에 건초
를 깔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마구간 주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치고 지나치
게 몸이 굳어 있었다. 케이시와 데미안은 총을 겨냥하고 발사할 준비를 갖췄
다.
 한 발짝 더 떼었을까? 케이시는 데미안의 팔을 잡고 발걸음을 말리려고 했
지만 그가 훨씬 앞에 서 있었다. 위기를 직감한 그녀는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몸을 던져, 두 사람은 땅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총알이 그들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마구간 주인은 비명을 지르며 활짝 열린 앞문으로 달아났다. 데미안이 왼쪽
으로 구르며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헛방질을 한 반면, 케이시는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다. 불행히도 바닥에 누운 그녀 눈에 잭의 신코가 들어왔다. 
 잭은 케이시의 목에 총구를 겨누며 위협했다.
  총을 버려! 
 잭의 명령은 그녀의 본능과 대치되었지만, 목숨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어
쩔 수 없이 그 말에 복종했다. 잭은 작달만한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센 힘을 
과시하며 케이시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물러서라, 루트리지.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이년 숨통을 끊어놓겠다. 
 잭은 큰 소리로 데미안에게 경고했다.
  우리는 이년을 인질로 삼아 데려가겠다. 네가 따라오면, 이년이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해! 
 데미안은 그들을 노려보며 케이시를 피해 잭을 쏘아 맞히는 방법을 간구했
다. 하지만 케이시가 표적보다 키가 큰데다, 문제의 그 표적이 그녀를 방패
막이로 삼아 몸을 숨겼으므로 방법이 없었다.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총을 쏠 
기회를 주기 위해 몸을 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페이슬리 형제가 데미
안에게 총을 겨누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케이시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는 한, 데미안이 꼼짝도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무기를 버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
고 정말 데미안은 손에 권총을 쥐고도 이빨 빠진 사자처럼 맥을 못 췄다.
 케이시는 잭의 말에 태워졌다. 등뒤에 걸터앉은 잭이 여전히 그녀에게 총구
를 겨눴다.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잭이 그녀를 인질로서 소
용없다고 생각하고 방아쇠를 당기게 될 때는 언제일까?

  -38-
 이 작은 오두막이 그들의 상비 은신처였던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잭 일
행은 규칙적인 연습을 했던 사람들처럼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다. 케이시는 
집안으로 끌려 들어가 한구석에 처박혔다. 실내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천장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먼지가 소복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마루 
판자 한쪽을 걷어낸 밑에 큼직한 대피소까지 있고, 그 안에 여러 종류의 통
조림을 비롯한 담요와 탄약, 무기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최후의 저항을 위해 사전에 마련한 장소일까? 제드에게는 직업상 필요한 
곳으로 보였지만, 잭은 의외였다.
 한족 구석에 앉아 입을 다문 케이시는 처음에 인질로 잡혔을 때만큼 낙담
하지 않았다. 네 시간이나 걸려 이 오두막에 도착해, 여전히 어깨에 매고 있
던 손가방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관점은 기적적으로 돌변했다.
 잭의 패거리는 이미 살롱에서 손가방을 뒤져봤기 때문에 가방에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잭의 명령으로 그녀는 권총을 마구간에 버렸
다. 그러니, 살롱과 마구간을 오가는 사이에 다른 무기를 손에 넣어 가방에 
넣어뒀을 줄이야 어찌 알랴.
 케이시는 그들의 관심이 멀어질 때만 기다렸다. 저녁식사 시간이 다가오는 
만큼 그때가 멀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제드가 그녀의 속을 훤히 들여다본 사람처럼 동생에게 임무를 하달
했다.
  저 여자에게 눈을 떼지마. 
 제스로는 여전히 피가 흐르는 손을 피 묻은 옷으로 감싸면서 고통으로 일
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왜 형이 기회가 있었을 때 그놈의 연방 보안관을 처지하지 않았는지 정말 
모르겠어. 그랬더라면, 지금 놈의 추적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저 여자를 인
지로 끌고 다닐 필요도 없었을 것 아냐. 
 제드가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 돌대가리야, 마을 사람들이 말똥말똥 지켜보는데 연방 보안관에게 손을 
대는 짓이 말이나 되냐? 연방 보안관 한 명을 죽이면, 그 동료 30명이 지옥 
끝까지 쫓아올 거야. 그들은 형제애에 가까운 동료 의식을 지녔어. 그런 짓
을 사형 선고를 받는 것과 똑같단 말이다. 
  그가 정말 연방 보안관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 
 잭이 피곤에 찌든 어조로 끼여들었다. 그는 오랜 승마와 강행군에 익숙지 
않았다.
  그는 뉴욕의 상류 사회 출신이고 돈이 썩어 나갈 만큼 부자야. 그런 놈이 
보안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라구. 
  잭, 그거야 이미 도마에 올랐던 말이잖습니까? 그 녀석이 당신을 잡기 위
해 연방 보안관 자격을 땄을 가능성도 있어요. 그리고 그 말이 진실인지, 아
니면 새빨간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딱 한 가지예요. 당신이 
그를 감쪽같이 없애고 싶어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놈은 반드시 이곳에 모
습을 드러낼 테니, 조만간 당신의 원이 풀어지게 될 겁니다. 
 케이시는 자신도  감쪽같이  없애고 싶어하는 범주에 해당된다는 점을 명심
했다. 즉, 잭 일당은 일단 그녀를 방패막이로 써서 데미안의 공격을 막고 그
를 죽인 다음에 그녀도 처치하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케이시는 일이 그들 마
음대로 술술 풀리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연
방 보안관이라고 허풍을 친 덕분에 오늘 마구간에서 목숨을 구했다는 점은 
생각할수록 웃겼다.
 게다가 그녀는 잭의 말에 담긴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데미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동부의 부유한 상류층임을 알고 있다는 사
실 자체가, 잭이 헨리와 동일인이라는 증거였다. 아니면 헨리가 최근에 형에
게 범행 일체와 저간 사정을 모두 고백했던가. 케이시는 전자 쪽에 패를 던
졌다. 하지만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잭은 데미안에게 들었던 헨리와 일치
되지 않았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변할 수도 있을까?
 케이시는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이런 궁지에 몰린 잭이 종전
의 주장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다시 도망 다니는 몸, 그리고 오늘 
거리에서 벌어진 일은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니, 읍장 자리도 물 
건너갔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데미안을 처치한 후에 그녀까지 죽일 생각인 
그가 굳이 비밀을 지킬 필요도 없잖은가.
 그래서 케이시는 거두절미하고 핵심을 찔렀다.
  이봐요, 커루더스 씨, 댁은 잭이에요, 아니면 헨리예요? 
 그는 올빼미 같은 눈을 돌리고 조롱을 퍼부었다.
  어이구, 이 아가씨 좀 봐라. 잔뜩 겁에 질려서 입을 닥치고 있을 줄 알았는
데. 왜 당신같이 야무진 여자가 그런 동부 물렁이와 어울려 다니지? 
  댁이 내 질문에 대답해준다면, 나 역시 말하겠어요. 
 그는 코웃음을 친 다음에 어깨를 으쓱했다.
  아가씨는 병적인 호기심을 채우고 싶어 죽을 맛인가? 좋아, 말해주지. 헨리
는 죽었어. 벌써 일 년도 전에 죽었다구. 
 케이시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숨을 죽였다. 지금 그의 말이 비유일까, 말 
그대로일까?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가늠하는 동안 더욱 그럴 듯한 짐작
이 뇌리를 스쳤다.
  당신이 동생을 죽였군요? 
 잭이 다시 어깨를 들어올렸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제 때가 됐다 싶어서 
고향으로 돌아갔어. 그런데 동생과 싸움이 벌어졌고, 동생은 뒷걸음질을 치
다가 그만 넘어져서 머리를 찧고 죽었지. 그건 사고에 불과했고 그 일로 나
를 귀찮게 한 사람도 없었어. 
  그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지요? 
  당연하지. 그래봐야 욕밖에 더 먹어? 그리고 헨리는 시시한 녀석이었어. 
 잭이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득의만면하고 능글맞은 표정에 케이시는 나머지 조각을 다 꿰어 맞췄
다.
  그리고 당신은 집과 직장에서 헨리인 척했군요. 
 잭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래, 나는 회계에 밝지 못하지만 내 이익을 챙기는 일에 둘째 가라면 서
러울 정도거든. 그래서 머리를 굴려 출장비 명목으로 돈을 빼돌렸어. 회사에
서도 그런 잔돈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더라구. 늙은 루트리지도 이미 한
재산 모은 거부답게 자잘한 장부에 신경을 쓰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이미 
뉴욕을 들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을 때, 그가 이것저것 들춰보고 설명을 
요구했어. 
  그렇다면 왜 고이 떠나지 않았어요? 왜 그를 죽였어요? 
  질문 몇 가지가 매우 개인적이었으니까. 내 동생 같은 약골 흉내는 연기하
기가 훨씬 쉬운데, 내 연기가 충분치 못했던 모양이야. 
 그는 낄낄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에요? 
  루트리지가 나에게 의심을 품었다는 뜻이야. 아마 내가 동생만큼 넙죽넙죽
하지 않았나봐. 
 그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가 우리 고모에게 질문하는 날에는 헨리의 쌍둥이 형에 대한 내막이 폭
로되었을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었잖아요. 
  그래. 하지만 그 늙은 루트리지가 유일하게 내가 예전의 헨리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 우리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밝힐 가능성이 있는 사내를 
가만히 둬야 할 이유가 없잖아? 횡령 혐의를 뒤집어쓰고 추적의 대상이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헨리여야 했고, 바로 그 때문에 루트리지는 죽어줘야 했
지. 그리고 그 루트리지의 아들놈이 그렇게 독이 올라 복수에 나서지 않았던
들, 일은 그런 식으로 마무리되었을 거야. 
  복수? 정의를 실현한다는 편이 정확하지 않을까요? 당신은 그의 아버지를 
죽였어요. 
  하지만 그 데미안이란 녀석을 이 일에 목숨을 걸었어! 정도가 너무 심하잖
아? 그 아비의 죽음을 정말 그럴듯한 자살처럼 위장했는데. 
 잭이 깊은 불만을 쏟아냈다.
  다들 희생자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몰랐다면, 당신의 공들인 계획
이 먹혀들었겠죠. 하지만 당신이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어
요. 그리고 당신이 손수 처리하지 않고 하수인을 산 이유는 어디에 있어요? 
그런 일은 헨리가 할 만한 범주에 속하지 않으니까 그랬어요? 
  뭐, 그런 부분도 없지 않아. 하지만 늙은 루트리지는 제 아들처럼 거구였기 
때문에 나 혼자서 그의 죽음을 자살처럼 위장할 수 없었어. 자, 이제 아가씨
가 대답할 차례야. 아가씨는 루트리지를 쫓아다니면서 그의 침대를 데우는 
임무 이외에 도 무슨 일을 하지? 
 그 질문은, 요리하고 아이를 낳고 남자의 침대를 따뜻하게 하는 것 이외에 
여서의 다른 능력을 거부하는 수많은 남성의 결론인 동시에 어리석은 편견
이었다. 일부 여성들이 남자와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우월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커녕 아예 증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
다.
 케이시는 유감이 철철 흘러 넘치는 어조로 사실을 지적했다.
  내가 이미 당신네 명사수를 눌렀다는 점이 아무 실마리가 되지 못했어요? 
잭, 내가 바로 당신을 추적한 장본인이에요. 그 일에 천 달러를 제의받았죠. 
하지만 내 절반 정도의 실력만 있어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당
신은 꼬리를 잘 숨기지 못했어요. 
 케이시가 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대가는 두 배가 되어 돌아왔다.
  아무래도 아가씨를 죽이지 말아야 할까봐. 아가씨는 꽤 반반하게 생겼으니, 
한동안 데리고 놀아볼까? 
  내 근처에 오기만 해봐라. 코만치족 비장의 인간 쓰레기 처치법을 보여줄 
테다. 넌 머리털이 얼마 없으니 굉장히 아플걸. 
 잭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갈피를 못 잡은 반면, 제드는 잠자코 듣고 있
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리둥절한 잭이 제드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이야? 
  저 여자는 인디언 비법을 전수받은 모양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의 뒤를 추
적하는 일에 인디언을 따라갈 자가 없거든요. 그러니 당신 머리 가죽을 벗기
겠다는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닐 겁니다. 
 제드가 다시 낄낄거리며 뒷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저 여자는 침을 뱉는 것보다 더 쉽게 머리 가죽을 벗길 겁니다. 
 그때 제스로가 징징 짜는 어조로 끼여들었다.
  난 의사에게 가야겠어. 손에서 피가 멈추지 않는데다 현기증까지나. 
  누워서 좀 쉬도록 해. 때가 되면 깨워주마. 
 제드는 동생을 걱정하는 기색 없이 비정하게 말했다.
  불을 피운다면, 내가 피를 멈추게 해줄게요. 
 케이시가 제의했다. 그 말에 제스로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제드는 다시 웃
었다.
  어이구, 여기 인디언 추종자가 나셨구먼. 
 케이시는 무심하게 어깨를 들어올렸다. 치료를 해주겠노라고 나선 이유는, 
다친 상처를 불로 지지는 방법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고 저 소년이 그런 
아픔을 참아낼 것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환자가 치료한 과정에서 기절한다
면 감시하는 눈이 줄어들 테니, 오두막에서 빠져 나가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
이 높아지는 셈이었다.

  -39-
 날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제스로는 형의 충고를 받아들여, 벽에 죽세워둔 
여러 개의 메트리스 중에서 한 개를 맨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누웠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한들, 상처의 아픔을 잃고 잠을 이룰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잭은 하나밖에 없는 식탁에 앉아 케이시의 일거수 일투족을 노려봤고 제드
는 불을 피우고 통조림을 땄다. 하지만 뚜껑을 딴 통조림을 잭에게 그냥 내
민 걸로 보아, 음식을 데우지 않고 그냥 먹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잭
은 음식을 거절했다.
 케이시에게는 아예 먹으라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긴
장한 나머지 식욕이 없었고, 그들의 행동에 담긴 의미 또한 놓치지 않았다. 
결국 죽을 사람에게 아까운 음식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여전히 때를 노렸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케이시는 갖은 생각
을 다했다. 총집이 빈 벨트를 푸는 척하면서 손가방을 열고 권총을 꺼낼까? 
하지만 그 방법은 즉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무기를 꺼냄
과 동시에 발사해야 했다. 그들이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한 소동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행동에 나서기 전에 탄약의 개수는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총알이 몇 발 남았는지조차 모르면서 섣불리 권총을 
꺼내는 짓은 어리석기 짝이 없을 테니까.
 만일 탄창이 텅 비었다면, 무슨 수를 부린다 해도 황천행을 예약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한두 발밖에 없다면 저 패거리들이 무기에 손대지 못할 만
큼 허풍과 협박을 해야 했다. 하지만 세 발 이상이라면 문제는 간단했다. 즉, 
놈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총을 쏜다고 해도 맞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케이시로서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서둘러야 했다. 왜냐하면 적의 예상처럼 조만간 데미안이 나타날 테
니까. 일단 데미안의 사정거리에 들어서면, 잭 일당은 케이시를 미끼로 삼아 
그를 죽여버릴 것이다. 데미안이 이미 밖에 도착했을지 누가 알랴. 이미 이
곳에 도착했다면 현명하게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릴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케이시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데미안의 대응 방식이었다. 선
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적과 협상에 나서는 짓은 최악으로 
꼽혔다. 
 오두막에 난 창문은 유리 대신 판자로 막혔고, 빗장이 걸린 대문도 발길질 
몇 번에 끄덕도 하지 않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쉽게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
거나 내부를 염탐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미 안에 있는 케이시의 두 
어깨에 가장 안전하고 쉬운 탈출법이 놓여 있는 셈이었다.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상대는 딱 한 사람, 바로 제드였다. 잭도 무기를 지
녔지만, 그 솜씨는 의문의 여지가 많았다. 제스로의 오른손을 제구실을 하려
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런 관계로 제스로는 고려 대상에서 벗어났다.
 현재 상황을 다각도로 분석한 케이시는 총알이 딱 한 방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제드만 해치우면, 나머지 두 사람은 길 잃은 양처럼 우왕
좌왕할 테고 그 틈을 노려 제드의 장전된 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잭은 죽이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데미안에게, 아버지 원수를 정의의
심판대로 끌고 가는 만족감을 만끽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니 권총에 최소한 총알 한 방이 남아 있어야 했다. 설마 데미안이 바넷 
살롱에서 빈총을 건네주지는 않았겠지?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슬쩍 눈치를 보니, 잭이 상황에 협조했다. 그는 케이시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를 보는 게 아니었다. 잭도 케이시처럼, 현재의 궁지에서 
벗어날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할 가능
성이 높았다.
 케이시는 행동에 나섰다. 굳이 권총 벨트를 핑계 삼아 일을 번잡하게 만들
지 않았다. 긴 끈이 달린 손가방이 쪼그리고 앉은 그녀의 오른쪽 엉덩이께 
마룻바닥에 늘어졌으므로, 무릎을 세워 치맛자락을 부풀리는 방법으로 잭의 
시선을 차단했다. 그리고 손을 슬그머니 가방 쪽으로 내려 권총을 꺼낸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제드는 과녁이 된 상황에서도 즉시 케이시를 노려보며 
무기에 손을 뻗었다. 지금은 양심이니 죄책감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제드의 심장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힘찬 발사음 대신, 찰칵 하고 빈 탄창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게 아닌
가! 심장이 뚝 떨어졌다.
 이제 죽었구나. 제드의 얼굴에 케이시 자신의 죽음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총에서 파괴음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케이시 얼굴에서 핏기를 가시게 했
던 소리는 제드의 총이 아니라 대문 쪽에서 났다. 철옹성처럼 튼튼한 대문이 
단 한 번의 발길질로  쩍  소리와 반으로 갈라졌다. 할렐루야, 데미안에게 신
의 축복이 있기를! 케이시는 데미안의 큰 몸집과 장사 같은 힘을 깜박 잊었
다. 그가 라이플을 들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제드가 문 쪽으로 몸을 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데미안의 라이플이 불을 뿜
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맡은 제드는 공중으로 붕 날아올라 뒤쪽 벽에 
내동댕이쳤다. 형의 죽음을 목격한 제스로가 겁에 질려, 분개한 표정으로 자
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그는 무장하고 잠자리에 들만큼 영리하지 못
했기 때문에 당장 쓸 만한 무기가 없었다. 반면 케이시의 빈 권총은 나름대
로 유용했다. 그녀가 빈 권총으로 제스로의 머리를 내리쳤던 것이다.
 잭도 서툰 몸짓으로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려고 했다. 사실 그에게는 평생
을 감옥에서 썩느냐, 아니면 지금 데미안의 손에 죽느냐 이외에 별다른 선택
의 여지가 없었다. 데미안이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을 더 마음에 들어할
지는 미지수였다.
 데미안은 잭의 머리에 라이플을 겨누고 녀석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화력 좋은 총에 얼굴에 한 방 맞으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겠지? 
하기야 죽은 사람이 제 얼굴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잭은 감옥 쪽을 선택했는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케이시가 다가가 그의 
주머니에서 데린저식 권총을 회수했다. 
 마침내 그들이, 아니 데미안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두 사람을 곤경에서 
구출했을 뿐 아니라 사건을 깨끗하게 설명했다. 케이시는 본능적으로 우선 
데미안의 품에 안겨 열려한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
었다. 우선 잭과 제스로에게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으니까. 그래서 케이시는 
두 번째 본능에 따랐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퉁명스런 어조로 다그치자, 데미안은 놀라움이 담긴 짧은 시선을 던지며 케
이시만큼 냉소적으로 쏘아붙였다.
  어이 다시 만나서 반갑군, 키드. 여기에 이 두 녀석을 묶을 밧줄이 있나? 
  없어요. 대신 밧줄을 엮을 만한 페티코트는 차고 넘쳐요. 
 케이시의 통렬한 대답은 데미안에게 상반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가 빙그
레 미소를 지은 것이다. 케이시가 부자연스러운 드레스보다 청바지를 더 좋
아한다는 점을 잘 안다는 식의 해맑은 미소였다.
 케이시는 데미안의 유머 감각이 싫지 않으면서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바삐 밧줄을 찾아다녔다.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는, 오두막 뒤편의 작은 
광까지 뒤져봤지만 밧줄은커녕 새끼줄 하나 없었다. 그녀는 대신, 칼로 속치
마를 과감하게 찢었다. 그 질긴 면은 밧줄로 안성맞춤이었다.
 이미 날이 저문 지 두 시간이나 지났지만, 케이시는 이 오두막에서 남은 밤
을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피곤하지도 않았다. 안전한 입지에 
처한 지금까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케이시는 
당장 컬더스로 돌아가자고 제의했고, 데미안이 그에 동의했다.
 데미안은 제드의 시체를 담요로 돌돌 말아 말 등에 고정시켰다. 나머지 두 
사람은 탈출 계획을 꾸미지 못하도록 미리 재갈을 물리고 꽁꽁 묶어서 오두
막 밖으로 끌고 나갔다.
 둘만 밖에 놔둔 채, 데미안은 불을 끄기 위해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케
이시도 아무 이유 없이 데미안 뒤를 따라갔다. 실내에 들어서자, 왜 여전히 
피가 용솟음치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신이 오늘 죽는 줄로만 알았소. 
 데미안이 뒤돌아서 말했다.
  저도 그랬어요. 
 그러자 데미안은 그녀를 왈칵 끌어당겨 품에 안고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조금 전 케이시가 원했던 그런 키스였다 데미안 역시 그녀와 같은 기분이었
을까? 아니면 내일의 태양을 기약할 수 없었던 극한 경험을 마치고 삶을 재
확인하고픈 욕구에서? 그렇다면 정말 강렬한 요구였다. 피가 흥건히 고인 바
닥, 이불도 없는 매트리스, 잭과 제스로 등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케
이시에게는 지금 살을 맞대고 있는 이 남자와 눈 깜짝할 사이에 불이 붙은 
욕망이 전부였다.
 데미안은 그녀의 옷을 벗길 여유도 없었다. 그냥 드레스 자락을 걷어올리고 
속옷을 벗겼다. 얇은 천이 힘찬 손길을 견디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어졌다. 
케이시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키스를 탐하는 데미안의 
탐욕스런 입술과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의 감촉에 전적으로 맞춰졌다. 말
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쁨!
 허전했던 부분이 꽉 채워지며 아귀가 딱 맞는 듯한 충족감과 함께 정열이 
거세게 타올랐다. 하지만 그 불길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단숨에 절정으로 오
른 환희가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매번 그 강도가 전보다 강했고, 그 만족 또
한 매번 다른 식으로 고조되었다.
 그래, 나에게 필요했던 건 바로 이거였어. 하지만 이런 경험을 나눌 수 있
는 남자가 데미안뿐이라면 어떻게 하지? 그를 좋아한다는 증거일까? 젠장, 
그렇다면 나는 그를 너무너무 좋아해.

  -40-
 막 씻어놓은 듯 훤한 보름달이 길을 재촉했다. 한밤중의 마을은 고요했다. 
정적이 감도는 거리마다 간혹 개 짖는 소리가 고작이었다. 케이시는 기진맥
진한 상태였다.
  여인숙으로 가는 게 어때요? 일단 그곳에 잭과 제스로를 감금시켜놨다가 
아침에 처리 방안을 결정해요.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하지만 우리는 제스로 페이슬리만 처리하면 돼. 잭은 나와 함께 뉴욕
으로 돌아가서 재판에 회부될 거요. 
 케이시도 그러리라 이미 예상한 터였다. 그들은 오두막을 출발한 이래 한마
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묵묵히 말을 달렸다. 오두막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
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거기에 말이 필요할까? 그렇다, 그 일은 
벌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 일에는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었다. 아니, 
그런 일은 다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케이시는 우선 잭과 제스로 페이슬리를 여교사 라리사의 하숙집 창고에 가
뒀다. 라리사는 다음날 아침에 계산을 마치겠노라는 약속을 받은 다음에야 
잠자리로 돌아갔다.
 위층 침실로 올라가는 길에 케이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구질구질하지 않게 결론만 말하겠어요. 잭은 헨리가 아니었어요. 
 그 말에 데미안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오? 
  아, 착각하게 해서 미안해요. 당신이 잡은 저 사내는 진범이지만, 처음부터 
범행을 저질렀던 자가 헨리가 아니었다는 뜻이에요. 잭의 말을 빌자면, 헨리
는 형제끼리의 싸움 중에 죽었어요. 하지만 잭은 그 점에 유감스런 기색을 
보이지 않더군요. 잭이 뉴욕으로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헨리의 죽음을 계기
로 동생으로 가장하여 당신 회사에서 돈을 횡령하기로 작정했던 거예요. 
  하지만 그가 단순한 도둑에 불과하다면, 왜 우리 아버지가 목숨을 잃어야 
했지? 
  당신 부친이 다른 누구보다 헨리를 잘 아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헨리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가장 먼저 눈치채셨어요. 아무래도 잭은 연기에 
소질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아무튼 당신 부친은 잭에게 질문하고 의심쩍어하
기 시작한 거예요. 그 나머지는 당신 상상에 맡기겠어요. 
  만일 우리 아버지가 잭의 연기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셨다면 여
전히 살아 계실 거란 말이오? 
  요지는 그래요. 잭은 헨리에게 횡령죄를 뒤집어씌우려 했어요. 문제의 그 
헨리는 이미 죽었으니 법망에 걸려들 리 없지요. 그에 반해 잭의 존재를 아
는 사람은 잭의 고모밖에 없었어요. 참 비열하지만 논리적인 계획이잖아요? 
하지만 잭은 당신 아버님이 의심하다 못해, 고모에게서 헨리의 쌍둥이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까봐 두려워했어요. 
 데미안이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눈썰미가 비상하신 분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미 벌어진 일을 지금 와서 탄식해봤자 무슨 소용 있겠어요? 당신이 범
인을 잡았으니 최소한 정의가 실현된 셈이에요. 
  작은 위안이나마 없는 것보다 낫겠지.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하지만 방에 이르자, 퉁
명스런 어조로 또 다른 화제를 꺼냈다.
  참, 다음 번에 탄창이 빈 총을 던져줄 때는 사전에 미리 말이나 해줘요. 나
는 장전이 되지 않은 총으로 제드를 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구요. 
  미안하게 됐군. 
 데미안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권총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잖소. 그래서 미처 탄창을 확인할 생
각을 못했소. 게다가 바넷 살롱에서 탄약을 한 상자씩이나 얻었느니, 당신이 
다 알아서 할 줄 알았지. 
 이제 케이시가 얼굴을 붉힐 차례였다. 그녀의 잘못이 컸다. 살롱에서 얼마
든지 실탄을 장전할 수 있었는데.
  그 문제는 접어두기로 해요. 하지만 당신의 시간 감각은 훌륭했어요. 데미
안, 당신이 오두막에서 내 생명을 구한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별 말을 다 하는구려. 
 그는 반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데미안이 돌연하게 강렬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케이시는 내심 당황했다. 지금이 내 감정을 고백해야 할 때일까? 하지만 그
래봤자 무슨 소용이람. 데미안은 여전히 두 사람의 결혼이 지속되기를 원하
지 않는데. 그는 여전히 케이시 같은 여성을 아내로 원하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숨이 막힐 듯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래서  잘 자요 란 인사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눈물
이 쏟아졌다.
 이제 할 일이 없었다. 그녀의 몫은 다 끝난 셈이었다. 약속한 돈을 건네 받
으면 더 이상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까?
 복도에 홀로 남은 데미안은 오랫동안 케이시의 방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문을 두드리고 케이시를 불러낼까? 손을 반쯤 올렸다가 다시 슬그머니 내렸
다.
 케이시는 또 그들이 사랑을 나누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강렬한 친밀감을 
공유하지 않은 것처럼 서먹서먹하게 굴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까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걸까? 아니면 그와 친밀한 관계를 나눴다는 사실을 수줍어하
는 걸까?
 돌이켜 생각하니, 케이시가 그를 한 남자로서 존경하는 흔적이 전혀 없었
다.  신출내기 양반 이란 호칭은 명백한 경멸조였다. 케이시는 아직도 과거의 
가치관이 살아 숨쉬는 서부의 토박이였다. 동부의 도시들이 새로운 세기를 
향해 힘차게 도약하는데 반해, 서부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지역이었다. 과연 그가 케이시 단 한 사람 때문에 생활을 훨씬 편안하게 해
주는 진보를 외면해야 할까?
 아니, 내가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할까? 그들은 곧 헤어질 사람들이
었다. 케이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열심이었
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두 사람이 공유한 친밀감이 실수라고 암시했
잖은가. 그를 부추겨 관계를 발전시키려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며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래, 이게 서로에게 좋아. 케이
시가 아내라면..., 사업상의 파티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갈까,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했다. 그녀가 큰살림을 도맡아하는 상상도 불가능했다. 뭐, 남은 평생 
침대에 있는 모습은 상상이 갔다. 하지만 과연 케이시가 침대에만 박혀 있을
까? 적막한 서부에서라면 어떨까? 그녀는 고집 세고 독립적이니만큼 데미안
과 대등하게 나서고 그를 돕고 싶어하리라.
 아니야, 이대로 헤어지는 편이 좋아. 데미안은 비참한 심정이 가시기만을 
바랐다.
  
  -41-
 다음날 아침 제드의 시체를 장의사의 손에 넘길 즈음, 그들은 장안의 관심
을 불러모았다. 하기야 잭과 제스로를 애완견처럼 꽁꽁 묶어 끌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포로들이란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법이다.
 보안관은 사무실로 몰려오는 구름 떼 같은 인파에 폭동이라도 난 줄 알고 
맨발로 뛰어나와 그들을 맞았다. 이제 보안관이 잭의 편이냐 아니냐의 여부
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직업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
법은 법의 수호자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한때 권력을 
휘둘렀던 잭이 실각당한데 반해, 주민들은 목청을 높여 그의 죄상을 조목조
목 열거했기 때문이다. 전에 투표권 행사에 대한 위협을 받고도 끽소리 못했
던 주민들은 이제야 때를 만난 듯 벌 뗴 같이 일어났다.
 하지만 잭을 살인 혐의로 뉴욕의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데미안의 단언은 보
안관의 시름을 덜어줬다. 그러므로 제스로만 그의 손에 넘겨졌다. 거인 엘로
이 역시 처리 대상에 꼽혔지만, 갈비뼈와 무릎 부상으로 몸져누웠을 테니 쉽
게 체포될 것이다.
 데미안이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보안관에게 건넸고, 어깨 너머로 그 내용
을 훔쳐본 케이시는 입을 떡 벌렸다. 그 서류는 미국 연방 보안관 임명장이
었다! 미리 살짝 귀띔이라도 했으면 좀 좋아! 하지만 그래도 믿지 못했을 것
이다.
 하여튼 그 임명장은 산뜻하고 즐거운 놀라움에 속했다. 이제야 데미안이 정
장을 고집했던 이유가 이해가 갔다. 커루더스에게 국한된 임시직일망정, 연
방 보안관으로 그럴듯한 행색을 갖추려 했던 것이다.
 그날 느지막하게 그들은 잭을 데리고 샌더슨으로 향했고, 마침맞게 동부행 
기차에 올랐다. 데미안의 특별 차량 덕분에 편한 여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데미안이 아직 은행에 들르지 못했기 때문에, 케이시 역시 보수를 받을 때
까지 행동을 같이해야 했다. 마음 한편으로 데미안과의 동행을 반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걱정이 앞섰다. 영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유
감스러웠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그를 무시하고, 가끔 눈이 마주쳐도 깊은 
생각에 잠긴 척 딴청을 부렸다.
 기차가 다시 랭트리에 두어 시간 정차하자, 데미안과 케이시는 밖에 나가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합의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빈 판사와 마주치는 불상
사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화 차량을 발견한 빈 판사는 술값을 우려낼 좋은 기회를 잡았다
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기차가 정차한 지 20분도 지나지 않아 빈의 대리인이 
나타났다. 케이시는 또 빈 판사의 법정에 출두하느니, 차라리 말을 타고 이 
마을을 뜰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단정하고 데미안은 
자신의 말을 처분한 상태였다. 데미안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말 한 필에 세 
사람이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별수 없이 그녀는 데미안을 대동하고 로이 빈 판사의 법정에 출두했다. 그
곳에는 빈 판사의 술친구들이 모두 포진해 있었고, 판사 자신은 그들에게 입
이 찢어져라 활짝 웃었다. 케이시는 더욱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호출한 대리인이 판사의 귀에 뭐라고 속닥거리자, 빈의 표정
이 싹 바뀌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새로운 궁리에 골몰했다. 그러더니 대
뜸 입을 열었다.
  내 대리인의 보고에 의하면 자네의 멋진 차량에 포로가 있다던데, 그자가 
찾던 죄인인가? 
 데미안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런, 저런. 
 빈이 미소를 지으며 붙박이 가구처럼 바에 늘어선 술친구들에게 시선을 돌
렸다.
  이보게들, 우리가 교수형을 한판 벌여야 할 것 같구먼. 
 데미안이 고개를 저으며 연방 보안관 임명장을 빈 판사에게 건넸다.
  실례지만, 저는 연방 보안관으로 죄수를 범행 발생 지역인 뉴욕으로 압송
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빈 판사는 역력하게 실망한 기색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하게나.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내가 기꺼이 그자의 목을 
매달아줄 수 있는데. 
 데미안이 임명장을 돌려 받고 말했다.
  뜻은 감사합니다, 판사님. 이제 말씀이 다 끝나셨다면... 
  아냐, 잠깐 기다리게. 일이 끝나지 않았어. 두 사람은 아직 부부인가? 
 케이시는 그 사실을 변경해줄 판사를 열심히 찾았던 데미안의 노고를 떠올
리고 말을 비비 꼬았다.
  그건 순전히 이곳에서 샌더슨까지 판사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판
사님. 
 빈이 씩 웃었다.
  페코스 서부 지역에서 나만한 판사를 보기 힘들지. 결혼도 하지 않은 청춘
남녀가 함께 여행하는 짓은 명백한 죄악이므로 내 조치는 적절했어. 그런데 
평소 결혼을 주재할 때마다 항상 하던 말을 깜박 잊었다는 점이 문제야. 그
게 무엇인고 하지, 부부 쌍방의 합의하에 5달러의 비용으로 결혼 무효 판결
을 내려준다는 거네. 지금 두 사람이 혼인 상태에 불만을 품은 사실이 확실
하므로, 나는 나에게 부여된 권한을 발휘하여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
하노라. 
 빈 판사는 의사봉을 땅땅 쳤다. 
  비용은 5달러네. 대리인에게 지불하도록. 

  -42-
 다음날 기차는 번화가에 섰다. 그곳에는 많은 금액의 전신환을 송금 받을 
수 있는 은행이 있었다. 데미안은 무사히 돈을 찾아 그날 밤 호텔 근처의 작
은 식당에서 케이시에게 건넸다.
 이제 끝이다. 그녀는 돈을 받았고 결혼은 무효가 되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여전히 같은 방향이지만, 두 사람이 구태여 동행할 필요는 없었다. 케이시 
혼자 다음 기차를 기다리든가, 말을 타고 떠나버리면 그뿐이었다. 더 이상 
비참한 기분을 연장할 구실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케이시는 더 비
참했다.  
 케이시가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인데 반해, 식탁 맞은편에 앉은 데미안은 덤
덤하게 식사를 주문했다. 그는  이혼 한 이래 계속 그 모양이었고 케이시는 
그런 데미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했을 때와 똑같이 억지로 이혼
했을지언정, 원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별 감정이 없겠지.
 빈 판사처럼 이기적으로 법을 악용하여 사람의 인생을 가지고 노는 사람에
게 당한 피해자는 평상시처럼 제 삶을 영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
었다.
 케이시는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또 작별의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데
미안 앞에서 눈물을 짜는 짓은 논의할 가치도 없는데다, 그에게 잘 먹고 잘 
살라는 말을 하다가 정말 눈물을 보일까봐 두려웠다. 그는 다음날 아침 기차
역에서 케이시를 다시 만나리라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오늘밤을 마지
막으로 데미안과 인연을 끊을 결심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호텔에 묵었다. 이번에 케이시도 굳이 값싼 여인숙을 찾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도살장으로 향하는 길이나 다름없었다. 데미
안은 평범하고 세속적인 말을 했지만, 그녀는 가슴이 아프고 목이 하염없이 
죄어와 아무 말도 못했다.
 호텔 방에 도착한 케이시가 마지막으로 데미안을 돌아봤다. 순간, 지난 추
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 저이의 머리칼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자랐구나. 하지만 저 투명하면서도 강렬한 회색 눈동자는 변하
지 않았어. 케이시의 뺨이 살짝 붉어지고 입가에 애절한 미소가 머물렀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그를 느끼고 싶었다. 케이시는 작별 키스 대신 
악수를 청했다. 그 이상의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딴판으로 
돌아갔다.  
 데미안은 그 이상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케이시를 꼭 안고 놔주지 않았다. 
그 몸짓이 케이시에게 저항할 수 없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식으로 작
별인사를 하는 것이 이다지도 가슴 아플 수 있을까? 마지막임을 아는 그녀
에게 이보다 더 특별한 게 있을까? 
 데미안 역시 케이시와 같은 심정이었다. 내일 다시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지
만, 이번이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마지막임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데미안의 몸짓은 더욱 조심스럽고 더욱 다정했다.
 데미안은 그녀를 번쩍 안고 침대로 옮겼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옷을 벗기
며 조금씩 드러나는 속살에 키스를 퍼부었다. 어깨, 목, 심지어 손가락까지 
데미안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데미안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소유한 듯 서
두르지 않고 한없이 부드러운 키스와 애무를 했다.
 케이시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의 쥐어짜는 듯한 신음은 데미안을 부추기
고 그의 정열을 고조시켰다. 케이시의 손이 닿는 곳마다 데미안의 근육이 꿈
틀거렸다. 그녀의 손이 아래를 향해 서서히 내려갔다. 곧 단단한 그의 일부
를 느낄 수 있었다. 케이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의 몸 구석구석을 철
저하게 탐색했다.  감칠맛 나는 애무에 데미안의 강한 남성이 맥박치기 시작
했다.
 여성과 달리 남성의 몸은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뚜렷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그의 기쁨은 곧 그녀의 기쁨이기도 했다. 그 점에 있어서 남녀는 차이가 없
었다.
 데미안의 육체는 매혹적이었다. 심지어 그의 체취마저 감각을 자극하는 향
수였다. 혀끝에 와 닿는 그의 맛은..., 형용할 말이 없었다. 나른하고 관능적
인 정열의 포로가 된 데미안은 케이시가 꿈꾸던 환상을 마음껏 즐기도록 했
다. 
 그 기쁨은 끝이 없었다. 두 사람의 몸은 서서히 달아올랐다. 부드러운 애무
에 눈을 뜬 피부가 민감한 촉수를 발동시켰는지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한 
번의 손길에도 강렬한 회오리가 일어났고 신경 끝이 올올이 일어난 듯 세차
게 고동쳤다. 케이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벨벳처럼 부드
럽고 불길처럼 강한 데미안의 남성이 그녀를 공격해 들어왔다.
 데미안은 리듬을 타면서, 천천히 물러섰다 세차게 들어서기를 반복했고 그 
중간중간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사랑의 몸짓은 그녀를 감질나게 했다.
 곧이어 순수한 감각의 물결이 휘몰아쳐 그녀를 절정의 경지로 몰아 붙였다. 
최고조에 오른 감각이 폭발하는 듯한 기쁨 속에서 파괴되었다가 충만감과 
함께 되살아났다. 두 사람은 동시에 절정에 올랐다.
 케이시는 데미안을 꼭 안고 눈물을 꾹 삼켰다. 이 짧은 순간, 데미안은 그
녀의 것이었다. 서로 다른 길이 예정된 두 사람이지만, 절대로 그를 잊지 못
하리라. 데미안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도 않으리라.
 케이시는 결심했다. 이 사랑의 고통을 안으로 삭일 테야. 언젠가 오늘을 되
돌아보며, 내 생애 가장 축복받았던 순간으로 기억하게 될 거야.

  -43-
 목장 서쪽에 있던 코트니는 말을 타고 달려오는 챈도스를 발견했다. 그녀는 
즉시 말고삐를 돌려 챈도스에게 달려갔다. 제발 그가 다시 떠나는 일이 없으
면 좋으련만.
 지난 일곱 달은 그녀에게 힘겨운 시기였다. 사랑하는 딸 케이시가 집을 나
간데다 코트니 혼자 KC 목장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 챈도스와 오
랫동안 떨어져 있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녀가 겨우 한마디 던졌다.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코트니는 구르다시피 말에서 내려 남편 품에 몸을 던졌다.
 챈도스는 껄껄 웃으며,  너무 보고 싶었어  하는 식의 굶주린 키스를 퍼부었
다. 입술을 뗄 즈음,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챈도스는 빙그레 미소
를 짓고 있었다. 코트니의 눈에는 챈도스의 웃자란 수염이나 치렁치렁한 머
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눈까지 이르는 그 웃음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남편은 변했다. 옛날 젊었을 때처럼 보였다. 지난 일곱 달 동안, 챈도스가 
가끔 집에 들를 때마다 그런 흔적을 발견했지만, 지금은 확연하게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응어리진 분노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은 생기를 
되찾았다. 딸과 남편이 모두 집을 떠난 상황이 탐탁지 않으면서도 남편에게 
이럼 변화를 가져온 딸에게 감사한 생각마저 들었다.
 케이시의 가출은 챈도스가 단조로운 목장 생활에서 탈피해 자신이 좋아하
던 일에 몰두하고 자신을 치료할 시간이 되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는 부친인 플레처의 죽음과 함께 점점 목장 일에 흥미를 잃고 지겨워했다. 
최소한 부친이 살아 있을 때는 챈도스가 목장에 열을 올릴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그 동기는 플레처의 죽음으로 사그
라졌다.
  이번에도 잠깐 다니러 온 건 아니겠지요? 
 코트니가 물었다.
 사실 챈도스는 케이시가 가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딸을 찾아냈다. 코트니
는 그것으로 가출 소동이 끝나고 남편이 딸을 곧장 데려오리라 기대했다. 하
지만 챈도스 생각은 아내와 달랐다. 그는 딸에게 집을 떠날 계기를 제공한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케이시가 자기 
주장을 증명하도록 뒤에서 지켜봤다.
  여보, 이제 다 끝났소. 
 그가 짧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케이시가 탄 기차가 정오에 도착할 거요. 그러니 늦어도 저녁때까지는 집
에 도착하겠지. 그 아이는 사형 집행관에게 끌려가는 기분일걸. 
  당연하겠죠. 당신을 대하기가 두려울 테니까요. 
 챈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소. 그 아이는 오히려 금의환향을 기대해야 해. 하지만 내
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케이시의 얼굴을 몇 차례 훔쳐본 바에 의하면 
그 아이는..., 비탄에 잠겨 있었소. 
  최근에 당신이 전보와 편지로 전한 소식 이외에 다른 일이 있었어요? 
  한둘이 아니었소. 하지만 내 보기에 그 아이가 그렇게 풀이 죽을 만한 일
은 없었소. 우리 딸은 마지막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고용주인 동부의 신
출내기와 헤어졌거든. 막판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제
힘에 부치는 일임을 깨달았을 거요.
  죽을 뻔해요? 죽을 뻔하다니! 감히 누가, 언제 우리 딸에게 그런 몹쓸 짓
을 했어요? 당신은 우리 케이시가 위험하지 않다고 누누이 강조했잖아요? 
 그는 아내에게 회의적인 미소를 던졌다.
  그 아이가 총을 뽑을 때마다 내가 현장에 붙어 있을 수야 없지. 케이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나를 교묘하게 따돌렸고, 그때마다 나는 불충분한 흔적으
로 뒤를 쫓느라 애를 먹었소. 
  도대체 언제 케이시가 죽을 뻔했어요? 
 코트니가 다그쳐 물었다
  케이시의 마지막 임무는 내 예상보다 훨씬 위험했소. 한 동부인이 커루더
스란 남자를 찾는 일에 케이시를 고용했는데, 나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커루
더스가 동부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소.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녀석을 우
습게 봤소.  
  커루더스란 작자가 당신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인물이었어요? 
  아니오, 사실 그놈만으로 보면 위험할 것도 없었지. 하지만 그가 고용한 총
잡이들이 문제였소. 내가 샌더슨에서 케이시를 놓친 뒤, 겨우 다시 따라잡았
을 때는 그 아이가 이미 커루더스를 발견한 후였소. 그뿐이 아니었소. 악당 
패거리와 결투를 앞두고 있더라니까. 
  네? 
 챈도스가 싱긋 웃었다.
  여보, 진정해요. 우리 딸이 상대를 간단하게 눌렀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당시 총알이 빗발치던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았소. 그때 내 인내는 한계에 이르렀지. 나는 총싸움이 끝나자마자 케이시
를 집으로 끌고 오리라 결심했소. 
  아니, 우리 딸이 결투를 했다는 게 뭐가 웃겨요? 
 코트니는 진정하기는커녕 길길이 날뛰었다.
  평화로운 거리 한복판에서 그 아이가 평생 입어본 옷 중에서 가장 레이스
가 많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권총 벨트를 찬 모습을 당신이 봤더라
면... 
  그게 웃겨요? 
  자 자. 우리 딸이 안전하게 집에 도착했다는 점을 명심하고 나를 그만 노
려봐요. 
 코트니는 코웃음을 쳤지만 더 이상 도끼눈을 뜨지 않았다.
  흥, 내가 백 살이 넘으면, 그 일을 놓고 웃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왜 그때 
케이시를 집으로 끌고 오지 않았어요? 
 챈도스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기억을 상기했다.
  내 말이 절름거렸소. 
  케이시와 같은 마을에 있었다면서요? 도대체 말과 무슨 상관이에요? 
 코트니 역시 얼굴을 찌푸리며 핵심을 지적했다.
  우리 딸과 맞붙었던 놈들이 결투를 공정하게 끝내지 않았소. 난 마침 현장
에 도착하여 케이시가 총알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벗어나도록 지원 사격을 
했소. 그 동부 신출내기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소. 아마 두 사람은 샌
더슨을 떠난 후 어떤 시점에서 헤어진 모양이오. 어쨌든, 그들은 힘을 합하
여 적들과 접전을 벌였소. 그러다 총소리가 멈췄는데, 당시 나는 양측 모두
가 눈치 빠르게 건물 뒤로 돌아가 마구간으로 전투지를 바꿨다는 사실을 알
아차리지 못했소. 그곳에서 일이 묘하게 돌아갔고 결국 케이시가 적의 인질
이 되어 끌려갔던 거요. 
 코트니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당신의 절뚝거리는 말과 일이 순조롭게 끝나지 못한 관계를 알겠
어요. 
  그보다 훨씬 심각했소. 나는 곧 케이시의 뒤를 따라갔소. 그리고 루트리지 
역시 나보다 한 걸음 바리 앞장섰소. 
  그 동부 사람이? 
 챈도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 발자국은 샌더슨으로 통한 남쪽으로 나 있었지만, 그건 추적자를 따돌
리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소. 나는 놈들이 서쪽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알
아차리고 그 뒤를 따라간 결과 그들을 발견했소. 하지만 루트리지는 그런 줄
도 모르고 곧이곧대로 남쪽으로 가다가 내 뒤에 처졌지. 
  그리고 그때 당신 말이 절름거리기 시작했군요? 
 챈도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루트리지의 장딴지를 걸어 그의 말을 빼앗을 생각을 했소. 그가 일당
을 따라잡는다 해도 케이시에게 뭐 하나 도움될 것 같지 않았거든. 하지만 
그 망할 녀석이 질풍처럼 말을 달리는 통에 그럴 기회조차 잡지 못햇소. 그 
녀석을 컬더스를 잡는 일에만 눈이 시뻘게져서 나를 보지도 못했을 걸. 그리
고 당시 나는 읍에서 족히 5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소. 내가 겨우 다른 
말을 집어타고 케이시를 찾으러 갔을 즈음, 우리 딸과 그 동부 신출내기가 
포로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오더군. 
  어머, 그가 우리 딸을 구했단 말이에요? 
 챈도스가 코방귀를 뀌었다.
  흥, 어림도 없지. 아마 우리 딸이 모든 일을 바로잡은 다음에야 그가 뒤늦
게 도착했을걸. 나는 케이시가 어떻게 악당 중 한 사람을 죽이고, 나머지 두 
사람을 추수감사절 칠면조처럼 곤죽을 만들었는지 매우 궁금하오. 
  케이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직접 물어보세요. 아니면, 그 아이를 발견하지 
못한 척하실 거예요? 
 챈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모르겠소. 일단 그 아이의 말을 먼저 들어본 다음에 결정할 생각이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끝났소. 최소한 내 생각에는 그래. 그러니 당신이 케이
시를 살살 구슬려서 의기양양하기는커녕 풀이 죽은 이유나 알아봐요.  
 
  -44-
 케이시는 바엠 목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멈춰 서서 상념에 잠겼다. 
저 땅이 그토록 많은 가치를 지녔을까? 지난 7개월 동안 그녀가 절실하게 
깨달은 사실은 단 한 가지였다. 그녀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고집 세고, 
융통성 없고,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옳은 줄 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애초에 자신이 무엇을 증명하려 했는지조차 헷갈렸다.
 케이시는 고상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할아버지의 유산을 잘 보존하고 싶었
다. 아니, 가출할 당시의 동기는 그랬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이곳에 돌아오
지 못했던들, 과연 저 목장이 황폐해졌을까? 아버지가 그렇게 놔두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녀야말로 앞 뒤 분간하지 못하고 제 생각에만 사로잡
혀 날뛴 망둥이였다. 케이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난 7개월 동안 자리
를 비웠지만 목장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가출 명
목을 합당하게 대야 할 판국에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이유는 더 이상의 
효력을 상실했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고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했
다.
 케이시는 올드샘의 고삐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저녁식사 시간에 도착하면 
부모님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정말 그랬다. 하지만 먼지투
성이의 청바지와 판초 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식당 입구에 서
자, 하려던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집에 오니 그저 좋았다. 하지만 미
칠 듯 보고 싶었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눈앞에 보면서도 왠지 이곳이 더 이
상 그녀의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쓰라린 현실이었다.
 케이시는 지금 이 기분이 잠시 지나가는 슬픔이기를 바랐다. 이곳은 그녀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항상 환영을 받으리라. 하지만 언젠가 한 남자를 
만났을 때  이곳을 영원히 떠나게 되리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꼭 잘라야 했니, 케이시? 
 코트니가 나무라는 어조로 말했다.
 그 말은 7개월 만의 상봉에서 기대했던 말이 아니었다. 케이시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어머니를 멍하니 봤다. 내가 듣게 될 꾸지람이 겨우 이 정
도야? 그녀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감히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
다. 아버지는 아직 화를 내지 않았지만 곧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머리는 다시 자랄 거예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코트니가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래, 그럴 거야. 자, 어서 이리 오렴. 
 그 말이 바로 케이시가 기다리고, 열렬히 바랐던 말이었다. 그녀는 주저하
지 않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눈물을 터뜨렸다. 어머니의 달래는 말이 요란한 
통곡 소리를 뚫고 귀에 울렸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아
니, 오히려 심해졌다.
 케이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도저히 바로잡을 수 없는 잘못
을 저질렀다. 부모님은 대부분 자식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지만, 케이시는 
이미 문제를 쉽게  바로잡을  나이를 넘겼다.
 케이시는 울며 딱 한마디만 했다.
  죄송해요. 저는 집을 나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젠 그걸 알아요! 
  케이시, 우리 예쁜 딸..., 자, 눈물을 뚝 그쳐. 
 코트니가 계속 딸을 달랬다.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몸 상하지 않고 안전하게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이야. 
이제 됐다. 
 케이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에게 말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녀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몸이었다.
  네가 집을 나가야 했던 이유를 말해주겠니? 
 케이시는 끅끅거리며 눈물을 닦고 어머니에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최
소한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내가 한밤중에 집을 몰래 빠져나갔던 이유는 두말할 필요가 없어요. 두 분
이 내 계획을 아셨다면, 나를 방에 가두고 방 열쇠를 우물에 던져버렸을 테
니까요. 
  있을 법하구나. 
 코트니가 웃음을 되돌렸다.
  그런데 너는 왜 집을 떠났니? 
 케이시는 마침내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헤아릴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차라리 천둥벼락처럼 화
를 내시는 편이 낫겠어.
  절대로 생각조차 말았어야 할 이유였어요. 나는 내 힘으로 바엠 목장을 경
영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아빠는 남자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잖아요. 그래서 나는 남자만의 고유한 직업에 투신해서 대부
분의 남자들이 평생에 걸쳐 모을 만한 돈을 벌겠노라고 작정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위험한 일을 선택한 거냐? 
 챈도스가 차분하게 물었다.
 케이시는 움찔했다.
  아빠가 내 뒤를 좇아오셨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실 만큼 내 뒤를 
바짝 쫓으셨군요? 
  그보다 더 바짝 쫓아갔다. 
 케이시는 단박에 몸이 얼어붙었다가 한참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렇게 오랫동안 네가 나를 따돌릴 수 있을 줄 알았니? 
 케이시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런 생각은 가당치도 않았다. 사실 아버
지가 나타날 줄 알았고, 오히려 그렇지 않아서 불안에 떨었다.
  언제 나를 발견하셨어요? 
  가출한 지 2주일 만에. 
 케이시의 콧잔등이 찌그러졌다.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요. 그런데 왜 그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
셨어요? 
  네가 집을 나간 게 내 잘못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네
가 목표를 달성하거나 한계를 깨닫는다면 내가 더 이상 죄책감을 느낄 이유
가 없잖니? 그래서 그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그 과정이 위험하
지 않기만을 바랐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어요..., 대부분은. 현상 수배범 잡기란 아주 쉬웠어요. 
놈들이 눈치챌 사이도 주지 않고 잡아버렸거든요.  
  안다. 
  아빠가 아세요? 지금 그 말이 날 발견했을 뿐 아니라 나와 행동을 같이하
셨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케이시는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답했다.
  아, 물론 그러셨겠지요. 충분히 그러실 만해요. 아빠는 내가 문제에 처하기
를 기다리셨군요? 그걸 바라셨던 거예요! 
  아니야. 너는 지금 엉뚱한 나무에 대고 짖고 있구나. 나는 네가 선택한 일
을 잘 해낼 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넌 내 딸이야. 내가 거친 흉악범들의 생
리를 뻔히 알면서도 너를 혼자 남겨두리라 생각한다면, 넌 생각을 달리해야 
해. 케이시, 난 네 옆에 있어야만 했다. 내가 옆에 있거나 아니면 네가 집으
로 돌아오거나..., 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놀랄 이유가 없었다. 항상 그녀를 보호
해온 아버지가 달라지리라 생각할 근거가 없잖은가?
 하지만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케이시는 창백하게 질렸다. 아버지
가 계속 뒤를 따라다녔다. 항상 옆에서 주시했다. 그렇다면 데미안과 노변에
서 사랑을 나눈 장면도 지켜보셨을까?
 케이시로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아빠가 항상 내 곁에 계셨어요? 한순간도 안 빼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날 따돌렸던 때가 종종 있었어. 그 중 가장 오래 헤맸던 때는 네가 
코퍼빌로 향했던 시기였다. 그 당시 나는 일 주일이나 지나서 너를 따라잡았
단다. 그런데 내가 코퍼빌에 도착하자마자 넌 또다시 미꾸라지처럼 내 손을 
빠져나갔지. 덕분에 나는 미친 듯 말을 달려서야 다음 기차역에 도착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기차가 먼저 떠나더구나. 네가 밤중에 샌더슨을 떠났을 때도 
다시 찾는 데 여러 날이 걸렸다. 그 후로 계속 헤매다가 결투 중인 너를 컬
더스에서 발견했단다. 
 케이시는 안도의 숨을 내쉬는 동시에 속이 뜨끔했다. 데미안과 사랑을 나누
는 현장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그 결투는...
  그건 순전히 나의 어리석은 불찰이었어요. 
 케이시는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했다.
  그래, 정말 그랬어. 
  사실 난 너무 겁에 질렸기 때문에 무슨 정신으로 총을 뽑아 상대를 맞혔
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아, 그곳에서 나와 데미안을 지원 사격했던 사람이 바
로 아빠였군요? 
  그래. 
  놈들에게 포로로 잡혀 오두막까지 끌려갔을 때, 아빠가 바로 곁에 계셨다
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시 그놈들은 데미안을 죽이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어요. 
  불행히도 난 갈 수 가 없었어. 내 말이 절름거렸거든. 하지만 난 네가 어떻
게든 그 난국을 극복하리라 확신했단다. 나중에 네가 일당을 데리고 돌아오
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는 내 짐작이 옳았구나 하고 생각했단다. 
 케이시는 당시 실수를 떠올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내가 그 난국을 극복했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놈들에게 빈총을 겨누
는 바람에 죽을 뻔했어. 그 상황에서 우리를 구출해낸 주인공은 데미안이에
요. 위기일발의 순간에 문을 부수고 나타나서 내 생명을 구했어요. 
  그 신출내기가? 
  그렇게 의심하지 마세요. 그는 권총에 문외한이지만 라이플의 명사수예요.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기여를 했어요. 
  그런데 처음에 왜 그 신출내기와 얽히게 됐지?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점
을 모르겠더구나. 
 케이시는 주머니에서 은행 수표를 꺼내 아버지에게 건넸다.
  그가 저에게 2주일이면 끝날 단발의 일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금액을 
제의했어요.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전에 벌어놓은 돈이랑 합하면 2만 달러 정도 되는데, 그 정도라면 저에게 남
편이 필요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테니까요. 
 코트니는 손을 들어올려 함박웃음을 가렸다. 챈도스의 얼굴에 다시 수수께
끼 같은 표정이 어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다음 말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
가 마침내 케이시를 놀라게 하는 말을 꺼냈다.
  그래, 네 관점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금액이야. 그리고 바엠 목장의 목동들
이 지난 몇 달 동안의 네 행동을 목격했다면 차후 별다른 문제를 야기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너는 여전히 목동들의 나이와 상관없이 그들을 순순히 복
종시켜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남자들과 함께 더불어 일하는 가장 큰 어
려움은 이렇다. 즉,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들이 뭐든 옳다고 생각하고 상관과 
의견이 다를 때마다 대든다는 거야. 하물며 그 상관이 남자일 때도 그런데 
여자인 경우에는 훨씬 심하겠지. 그들은 제 주장이 옳지 않을 때에도 옳다고 
박박 우기면서 주제넘은 여자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나설 거야. 내 말 알아
듣겠니?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을 경우에 너는 어떻게 대처하겠
니? 
 케이시는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하고 한숨을 쉬었다.
  우선 기분이 나쁘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틀렸다는 점을 똑똑히 증명하겠어
요. 그러고도 그들이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면, 나로서는 당사자를 해고하
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상관에게 반기를 드는 나쁜 
전례가 세워질 테니까요. 
 챈도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걱정을 다 털어놓고 나니까, 왜 예전에 이렇게 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는구나. 네가 여전히 바엠 목장을 맡고 싶다면 나는 더 이상 말리지 않겠
다. 네가 아무리 실패를 거듭할지언정 그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얻는다면, 그
건 단순히 개인의 실패로 끝나지 않을 거야. 
 챈도스는 딸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뒷말을 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런 엄청난 성과를 올린 사람이라면, 내가 예상하는 문
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알아낼 수 있겠지. 그리고 네가 그렇게 하지 못한
다면, 내가 옳았노라고 뻐기는 날이 올 테고. 

  -45-
 어린 시절과 다름없이 핑크와 흰색으로 단장한 침실에, 케이시는 전에 입던 
흰 목면 잠옷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어머니가 케이시의 머
리를 빗겼다. 코트니는 틈틈이 딸의 머리 길이를 한탄했지만, 케이시는 어머
니의 빗질이 즐겁기만 했다. 
 케이시가 위층으로 물러간 직후에 코트니가 찾아왔다. 케이시는 이미 어머
니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 모녀는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챈도스의 앞에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화제도 
있었다. 
  넌 적절한 부위에 살이 붙었구나. 
 코트니가 지적했다.
 케이시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가슴과 엉덩이에 적당한 
굴곡이 생겼다. 그것도 꽤 풍만하게, 그녀로서는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발달
한 신체 성장에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그냥 담담하게 대답했다. 
  드디어 내가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활짝 피는 때 에 이르렀나봐
요. 
  코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빗질을 몇 번 더 한 다음에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그간의 일과 상관없는 일로 네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신단다. 
뭐 그럴 만한 일이라도 있었니? 
  사랑에 빠지는 게 그런 경우에 속한다면요. 
 케이시는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사실을 털어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현실을 
바꿀 수도 없고,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말을 해서 뭐해.
 하지만 코트니는 반색을 하면서 좋아했다.
  네가 정말 사랑에 빠졌어? 난 이 근방에 네 관심을 끌 남자가 없다고 생
각하고 포기했단다. 그럼 상대는 여기 남자가 아니구나? 그 동부 남자니? 
 케이시는 다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난 마음을 정리할 거예요. 
  왜 그래야 하니? 
 케이시는 거울 속에 비친 어머니를 응시했다.
  그 사람이 내 감정에 응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뉴욕의 상류층이고, 나는 그
의 아내감으로 물망에 오르지 못할 시골 여자니까요. 대도시에 가면 나도 불
행해질 거예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말이에요. 도저히 그런 곳에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아요. 또... 
  네가 너무 많은 장애물을 만들어내고 있구나. 그가 정말 네 감정에 응하지 
않을까? 나로서는 너와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남자를 상상도 못하겠다. 두 
사람이 서로 친해진 다음에 말이야. 
 케이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쁘댔어요. 
  난 진심이란다. 너는 예쁘고, 똑똑하고, 다방면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어. 넌 
남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재목이 못 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사실은 달라.  
넌 비범하단다. 네가 마음을 정했다 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이미 증
명되었잖니. 
  모든 남자들이 나의 그런 점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케이시가 회의적으로 말대꾸를 했다.
  그렇기는 해. 하지만 너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네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야. 상대가 데미안이라고 했니? 
  데미안 루트리지 3세예요. 
  3세라? 참 인상적이로구나. 그가 정말 너에게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어? 
 케이시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들이 나눴던 정열을 상기했다.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찾아왔던 그런 경우를 상호간에 느꼈던 매력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데미안의 관점에서는 케이시가 주변의 유일
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느꼈던 충동적인 감정에 불과하지 않을까?
 케이시는 핵심을 찔렀다.
  남자들이란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은 여성에게도 끌릴 수 있잖아요. 아내
감을 고려할 때는 생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서로 잘 어울려서 살 수 
있을까 등등의 문제가 있어요. 그리고 그는 분명히 나 같은 여자를 아내로 
원하지 않아요.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가 뭐니? 
  우리는 결혼했지만 그가 그 관계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다 썼어요. 
 코트니의 손에서 빗이 떨어졌다. 
  뭘 했다고? 
  엄마, 그 결혼은 합의된 결혼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이미 무효화되었구요. 
  합의된 결혼이 아니라니? 그럼 강제로 결혼했단 말이니? 
 케이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마도 랭트리 지역 판사인 로이 빈의 악명을 들어보셨을 겨예요. 그는 데
미안과 내가 부부도 아니면서 함께 여행하는 짓을 죄악으로 단정 내리고 5
달러의 수수료를 벌기 위해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결혼시켰어요. 당시 우리
로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정말... 기막힌 일이로구나! 
 케이시가 동의했다.
  그래요. 데미안은 당연히 노발대발 화를 냈어요.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우
리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줄 판사를 찾아다녔지만 한 명도 못 찾았어요. 하지
만 돌아오는 길에 다시 랭트리를 들렀는데, 그 늙은 판사가 또 5달러를 벌 
속셈으로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결혼 무효 선언을 했어요. 
 코트니는 딸을 꼭 껴안았다. 
  케이시 정말 유감이로구나.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
을까? 
 케이시는 억지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됐어요. 나는 처음부터 그가 나에게 적합한 짝이 아니고, 우리 인생이 
대조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어요. 그가 대도시를 떠나서 못 사는 반면, 나
는 또 그런 대도시를 못 견디잖아요. 그저 내가 딴 생각 품지 않고 이 마음
을 그대로 지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코트니는 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넌 일단 작정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왜 그 남자를 포
기했지? 너는 살인자를 잡았고 앞으로 바엠 목장을 경영할 몸이야. 케이시, 
그런 네가 왜 이번에는 마음 향하는 데로 따르는 걸 주저하니? 
  왜냐하면 그에게 거절당하는 아픔은 내 능력 밖이니까요. 
  그럼, 지금 너는 그를 잃은 아픔을 잘 다스리고 있니? 정말 그래? 혹시 네
가 비참한 이유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네가 마음속으로 
상상한 장애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단다. 네가 일 년 내내 대도시에서 살
아야 하고 그가 지금부터 시골에 살아야 한다고 정해놓은 법이라도 있니? 
두 사람이 도시와 시골을 번갈아가며 살 수 없다고 정한 법이 있어?  
  하지만 데미안은 나를 아내로 원치 않아요! 
  그렇다면 그의 생각을 바꿔놔야지. 
 코트니가 오만하게 선언했다.
  네가 방법을 모르겠다면, 내가 기꺼이 거들어주마. 
 코트니는 이제 얼굴까지 붉혀가며 열을 냈다. 메이시는 어머니에게 미소를  
지었다. 딸자식의 행복을 비는 어머니의 뜻이 고마웠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수를 써서 청혼을 받
는다고 케이시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46-
 데미안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잭 커루더스와의 여행은 지옥이었다. 잭이 재
판을 거친 후에 감옥에 수감되리라는 예상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회사 돈을 
횡령하여 도망간 것도 모자라, 가는 곳마다 물을 흐려놓고 살인까지 시주한 
잭에게는 무기징역이 마땅했다.
 잭은 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었지만 데미안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역겨
운 살인자와 뉴욕까지 먼길을 동행해야 한단 말인가?
 잭은 일말의 후회나 죄책감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능글맞은 웃음으로 데미안의 속을 뒤집어놓고 그의 범행을 자랑했다. 그러므
로 사방이 꽉 막힌 기차의 특별 차량은 데미안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
름없었다. 잭의 입에 재갈을 채우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만, 저 툭 튀어나
온 올빼미 눈에 흐르는 독기를 어찌하랴?
 그런 이유로 데미안은 미주리의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하자마자 잭을 감금할 
다른 차량을 찾아 나섰다. 눈에서 멀어지면 역겨운 마음도 좀 덜하겠지. 다
행히 그가 적당한 침대칸을 찾아 임대하고 돌아왔을 무렵, 잭은 이미 탈출한 
뒤였다.
 데미안은 이제 와서 이런 불상사가 벌어질 줄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리고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예방조치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컬더스의 
보안관이 잭의 손발에 수갑을 채웠고, 그것도 모자라 발에 사슬을 달아 기차 
의자와 연결하기까지 했다. 또 기차 문까지 자물쇠로 단단히 잠갔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데미안과 침대칸 급사가 전부였다.
 하지만 급사는 혐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모든 범행을 듣고 잭에게 
역력한 혐오를 보인데다 기차가 미주리에서 밤을 새우는 틈을 타 일가친척
을 방문하러 갔다. 데미안은 재빨리 목격자를 찾았다. 한 사람이 특별칸의 
의자가 부서지는 듯한 소음을 들었노라고 증언했고, 다른 사람은 잭이 창문
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잭은 다시 사라졌다. 세인트루이스 같
은 대도시에서 몸을 숨길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데미안은 즉시 지방 경찰에 신고하고 그들의 협조를 구했지만 커루더스를 
찾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사흘이나 허탕을 친 끝에 데미안은 뉴욕의 탐정 회
사에 전보를 쳐서 세인트루이스의 지사와 손을 잡았다. 
 일 주일이나 걸려 찾아낸 확증은, 잭이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로 날랐다는 
소식이었다. 잭은 광활한 서부를 포기하고 대도시에 운명을 건 모양이었다. 
시카고는 그 규모 면에서 뉴욕에 필적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선뜻 시카고로 나서지 않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어머니가 
발목을 붙들어맸던 것이다. 언젠가 어머니를 찾을 날이 오리라. 하지만 지금
은 이 여행만으로도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 으뜸이 케이시였다. 케이시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데미안은 여전히 그녀가 한밤중에 그를 침대에 혼자 놔두고 말 한마디 없이 
떠났던 행실에 분개했다. 작별인사도 없었다. 미래에 다시 만날 약속이나..., 
그 밖의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당시 그는 그들의 결혼, 아니 이혼에 대해 말을 꺼낼 심산이었다. 빈 판사
가 다시 그들의 의향과 상관없이 법을 휘두른 점에 대해서는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결혼을  풀어 줘서 은근히 반가웠다. 그 결혼은 익살극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는 남자로서 자존심을 되찾고 케이시에게 정식으로 청
혼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떠나면서 그럴 기회마저 함께 가져가 버
렸다.
 그녀는 약속한 보수를 손에 넣은 지 몇 시간 후에 줄행랑을 쳤다. 그거야말
로 데미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는 반증이었다. 아침까지 기다리지도 못
했고, 더구나 데미안과 같은 기차에 타는 것조차 참지 못했다. 그는 케이시
를 찾으리란 희망을 안고 기차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실망만 하고 감방에
서 밤을 보낸 잭을 데리러 갔다.
 여러 주일이 흐른 지금도 케이시 생각에 속을 끓였다. 그리고 그가 고용한 
탐정들이 아마추어의 개입을 단호하게 거절했으므로 혼자 애태우는 것 이외
에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최소한 케이시가 잭의 뒤를 추적할 때는, 적극적으
로 수사에 개입하면서 일조하는 기분을 맛보았는데..., 가끔이나마.
 생각이 그 부분에 미치자, 데미안은 스테이크를 앞에 둔 난민처럼 억지 결
론에 이르렀다. 케이시는 나와 함께 시카고로 가야 해. 잭을 정의의 심판대
에 세워달라고 케이시에게 천 달러를 지불했지만, 잭이 또다시 법을 피해 도
망갔잖아? 그러니 나는 보수를 지불한 만큼의 서비스를 받지 못한 거야.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집은 고사하고 성조차 모르는데 어디에서 케이시를 
찾는단 말인가? 심지어 그가 아는 이름도 진짜 이름이 아니라, 처음 현상범
을 넘길 때, 그녀가 애마의 낙인에서 딴 약자에 불과했다.
 올드샘의 낙인이라...
 벅키 올콧은 케이시를 와코 지역 부근의 목장으로 보내 아는 사람을 찾게 
했다. 당시 데미안은 그 말이 케이시가 KC 목장에서 직접 산 말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벅키의 생각을 하찮게 여
겼다. 하지만 그녀가 고향에 대해 함구했으므로 그 목장이 데미안의 유일한 
실마리였다.
 게다가 이렇게 답답하고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여행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만, 데미안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으므로 자
신에게조차 그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케이시를 찾으리란 희망 또한 그다지 
없었다. 그저 시간 낭비겠거니, 하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편이 호텔에 죽치고 앉아 탐정의 천편일률적이고 
지루한 보고서를 받는 쪽보다 훨씬 나았다. 영악한 잭은 시카고에 몸을 숨긴 
채, 가명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니 데미안이 무슨 수로 그런 대도시에서 범
인을 찾겠는가? 차라리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지.
 하지만 케이시라면 그 방법을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47-
 KC 목장의 안채는 영락없는 대저택이었다. 데미안은 멀리서 저택과 부속 
건물을 보고 여기가 동부인지 서부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여행길에 나선 
이래 숱하게 거쳤던 여느 목장과 차원이 달랐다.
 그는 그 거대한 규모에 감명을 받는 동시에 크게 실망했다. 이런 성공한 목
장에 올드샘이란, 젊은 처녀의 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설
령 기록이 있다 해도 케이시의 부친 이름조차 모르지 않는가. 포트워스에서 
언뜻 봤던 케이시 아버지의 인상착의에 일말의 기대를 안고 이곳까지 달려
왔지만, 이제 그 희망도 무너졌다. 저 목장에서는 매달 수십 마리의 말이 거
래될 것이다. 마구간 숫자만 봐도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데미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시도해보자. 5, 6년 전에 말을 팔았
던 책임자가 띄어난 기억력을 지녔고 지금까지 근무할 가능성이 있잖은가. 
그리고 케이시의 부친처럼 험악한 인상착의는 다른 평범한 구매자보다 기억
에 오래 남으리라.
 데미안은 와코에서 말을 사서 KC 목장으로 왔다. 이륜마차를 임대하는 대
신 말을 사다니! 몇 해 전이라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승마 
쪽이 훨씬 편했다.
 저택 정면에 길고 넓은 포치가 펼쳐졌고 그만큼 길고 양쪽 난간이 달린 계
단이 포치와 대문으로 이어졌다. 데미안은 한쪽 난간에 말을 묶어놓고 정문
으로 향했다.
 대문을 두드리고 포치에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넓은 평야와 선인장, 간간
이 자리잡은 나무 이외에 볼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포치가 서쪽으
로 향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눈앞에 펼쳐진 일몰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장엄하
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내고 저렇게 숭고한 경치를 감
상한다면 쌓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리라. 포치를 따라 죽 늘어선 의자와 
탁자의 수는 이 농장 사람들이 그 혜택을 즐긴다는 증거였다.
 그때, 대문이 열리고 미모의 중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밝은 갈색 눈동
자가 어디서 많이 본 듯했지만 잔뜩 긴장한 데미안의 머리는 그리 민첩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서 케이시를 찾으리란 희망을 거의 품지 않았
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어쩌면 오늘 케이시와 만나게 될지
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 여성이 궁금한 듯 물었다.
 데미안은 모자를 벗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는 이 목장 말은 탄 아가씨를 찾고 있습니다. 
  그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요? 
  실은 본명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샀던 사람은 그 아가씨가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예요. 한 5년쯤 되었을 겁니다. 그분 성함도 모릅니다만, 이곳
에 그분의 정체나 사는 곳을 아시는 분이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더 자세한 설명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말이 나오
지 않자,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이곳에서 팔린 말은 대단히 많답니다. 혹시 그 말이 식별할 만한 특징이라
도 있나요? 아니면 말을 구입하신 분의 특이한 점이라도? 구입자의 이름을 
모르고서는 찾기 힘들어요. 
  제가 그분의 인상착의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데미안은 혹시나 하는 기대에 부풀어 얼른 나섰다.
  그의 신장은 저 정도 됩니다. 
  어머, 대단히 도움이 되네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평균보다 키가 크니까요. 
 데미안은 약간 가벼운 기분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되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분 머리칼은 검정색이고, 그 길이는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그분을 뵈었을 때는 꽤 길었어요. 지금 그분의 나이가 사십
대 중반이니, 이곳에서 말을 샀을 당시는 사십 전후였을 겁니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 남편을 비롯해서 그런 인상착의를 한 사람은 이 근방에 많답니다. 그 
외에 다른 특징은 없어요? 혹시 흉터나 상처는 없었나요?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분을 가까이에서 뵙지 못했어요. 하지만 아주 예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분이셨습니다. 뭐라고 할까, 사람을 긴장시키는 그런 종류입니다. 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그분은 범죄자처럼 생겼어요. 
  어머나, 정말 그런 분을 꼭 찾고 싶으세요? 
  제가 찾는 사람은 그분의 따님입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말은 어때요? 전혀 특징이 없었나요? 
  대단히 잘생긴 말입니다. 케이시는 그 말을 올드샘이란 흔한 이름으로 불
렀지만, 실은 서러브레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의 몸이 굳었다.
  케이시? 당신은 그들의 이름을 전혀 모른다면서요? 
 데미안은 그녀의 반응에 고무되어 신나게 설명했다.
  예, 모릅니다.  케이시 는 그녀가 사용한 약자  KC 에서 제가 붙여준 이름입
니다. 그녀에게 그 유래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 약자 또한 말의 낙인에서 
따왔을 겁니다. 그녀는 그냥  키드 라고 불렸어요. 혹시 제가 찾는 아가씨를 
알고 계십니까? 
  알 것 같아요. 그런데 왜 그녀를 찾으세요? 
  매우 사적인... 
  그렇다면 나로서는 당신을 도와드릴 수 없어요. 
 그녀는 냉정하게 말하고 면전에서 문을 닫으려고 했다.
  잠깐만요! 제가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수배범 사냥꾼이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고용해 아버지의 원수를 찾았지만, 그놈을 뉴욕으로 데려가 재판에 
회부하기 전에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럼 다시 고용할 생각으로 찾고 있단 말이에요? 
 그녀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데미안은 처음 보는 중년 여인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고 대충 대
답했다.
  비슷합니다.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이곳에 왔어요?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는 태도에 도리어 긴장하는 쪽은 데미안이었다.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그녀는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 남편이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할 것 같군요. 안으로 들어
오세요. 
 그녀는 기다리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자리를 떴고, 데미안으로서는 복종
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행동을 참 이상했다. 뭔가 단단히 화난 사람 같았다. 그녀의 눈이 
한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호박석으로 변했다. 그 변화는 데미안이 케이시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혹시 그녀의 본명이 정말 케이시일
까? 저 중년 여성은 케이시가 누군지 아는 것 같았다.  알 것 같다 는 대답은 
 안다 는 말이 아니겠는가.
 순간 데미안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호박색 눈?
 내 남편을 비롯해서 그런 인상착의를 한 사람은 이 근방에 많답니다. 
 데미안의 몸에서 희망이 용솟음쳤다. 케이시의 집을 제대로 찾아왔나? 화났
을 때 케이시와 똑같은 눈으로 변하는 저 여성이 그녀의 어머니? 그렇다면 
그가 묘사했던 케이시의 아버지가 그녀의 남편...?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몸을 돌리자, 눈앞에 케이시의 아버지가 서 있었
다.
 하지만 다음 순간, 주먹이 날아왔고 데미안의 눈앞에 별똥별이 작렬했다.

  -48-
  케이시가 이 남자한테 빠졌다는 얘기를 괜히 했나봐요. 
 코트니가 남편과 함께, 현관에 뻗은 데미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코
밑에서 코피가 줄줄 흘렀다.
  당연히 말을 했어야지. 
 챈도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주먹을 문질렀다.
 코트니가 의심스럽다는 듯 반박했다.
  정말 그럴까요?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당신은 길길이 날뛰며 뉴욕으로 
가서 이 남자를 죽여놓겠다고 했어요. 결국 이 바보 같은 사내는 얻어터지려
고 제 발로 우리 집에 찾아온 셈이에요. 
 챈도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럼, 왜 나에게 그가 여기에 왔다는 말을 했소? 당신은 얼마든지 나 몰래 
이놈을 돌려보낼 수 있었을 텐데? 
 코트니가 쯧쯧 혀를 찼다.
  그야 짧은 순간이나마 당신이 이 남자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줬으면 했으
니까요. 하지만 그건 아주 순간적인 생각에 불과했어요. 
 챈도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당신 화를 돋우는 말을 한 모양이로군? 
 코트니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가 우리 케이시를 다시 고용하려고 이곳에 왔대요. 도대체 이럴 수 있는 
거예요? 케이시는 이 남자와 일하는 건 고사하고 다시 보는 것만으로 가슴
이 찢어질 듯 아파할 거예요. 그런데 이 남자가 우리 딸 생각을 한 줄 아세
요? 흥,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 이기적이고 둔감하기 짝이 없는 청
년... 
 챈도스가 다정하게 한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대며 말을 막았다.
  여보, 난 당신의 앙칼진 모습을 사랑하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이럴 이유
가 없어. 그가 케이시의 사랑을 받는 줄조차 모른다고 누누이 강조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소. 그리고 케이시도 당신에게 그 점을 인정했다며? 아니면, 
사내들 특유의 무지가 용서 못할 대역죄라도 된다는 거요? 
 코트니가 실눈을 뜨고 남편을 째려봤다.
  좋아요, 그에게 죄가 없다고 쳐요. 그럼 왜 당신은 다짜고짜 이 사람을 때
렸어요? 
  이 녀석이 내 딸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아주 단순하고 보편적인 이유에
서지. 그게 아버지의 특권이 아니겠소? 
  아, 그러세요? 그럼 어머니에게는 그런 특권이 없나요? 
  이제 보니 당신은 내가 이 녀석을 족치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나에게 달
려왔구려. 
 코트니는 죄책감으로 얼굴을 붉혔다.
  이 청년이 싫은 이유를 놓고 실랑이를 하느니, 이 예상치 못한 방문을 어
떻게 처리할까에 대해 토론해야 해요. 나는 케이시에게 이 청년의 방문을 알
리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오늘은 우리 딸이 바엠 목장이 아니라 이곳에서 
자는 날이에요. 게다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조만간 돌아올 시간이에요. 
 챈도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일꾼을 시켜 이놈을 마차에 실어 마을로 돌려보내겠소. 오늘 이곳에
서 받은 환대를 고려한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요. 
 코트니는 인상을 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이유는? 
  이 청년 고집이 보통은 넘는 것 같더라구요. 그리고 케이시를 다시 고용하
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사람이 본인의 거절을 직접 듣지 않고 물
러설 리 없어요. 
  당신 생각에 케이시가 거절할 것 같소? 
  그 아이가 긍정적인 대답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케이시가 이 남자를 위
해 일했던 이유는 오직 당신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서였
어요. 하지만 지금은 증명할 게 없어요. 그 아이는 이미 바엠 목장을 훌륭하
게 운영하고 있잖아요. 
  보통 사람에게라면 조리 있는 이유지만, 과연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도 그
럴까? 
 코트니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당신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그 아이는 오로지 이 남자와 함께 있고 싶다
는 일념으로 이 청년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아니면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동의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케이시가 아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
게끔 우리가 나서야 해요. 
  지금 나에게 이놈을 영원히 처치하라는 거요? 
  제발 실없는 소리 좀 마세요! 
 코트니는 남편의 장난기를 알아차리고 그를 노려봤다.
  음..., 당신이 이 청년에게 점잖게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설득시킨 다음에 
마을까지 직접 데려다주는 게 어때요? 그래도 끝가지 고집을 피우면, 케이시
가 여기 없다고 하는 거예요. 멀리..., 아, 유럽에 갔다고 해요. 유럽은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니까, 아마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겠지요? 
  나는 지금 이놈과 점잖게 대화할 기분이 아니오. 이 상판때기를 보면 내 
손이 근질근질하단 말이오. 
  그렇다면 내가... 
  아냐, 당신은 안 돼. 
 챈도스가  영차  하고 축 늘어진 데미안을 어깨에 걸머졌다.
  젠장, 더럽게 무거운 녀석이로군. 
  챈도스...? 
  왜? 
 그가 문으로 향하며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그 사람에게 절대로 케이시의 감정을 말하지 마세요. 
 챈도스가 아내를 향해 돌아섰다.
  왜 그래선 안 되지? 
  케이시가 그에게 말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잖아요. 그리고 그 청년을 워낙 
둔감하니 죽는 날까지 혼자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 
  이놈이 다 알면서도 상관하지 않았을 수 있소. 당신은 그게 아니라고 말했
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런 것 같아. 
  어머나, 그래서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때렸군요? 
 챈도스는 코웃음을 쳤다. 코트니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핵심을 지
적했다.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 진실이든 간에, 우리 딸은 알리고 싶어하지 않
아요. 아, 나라면 달랐을 텐데. 
 챈도스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계단을 내려가, 데미안을 말 등에 엎어놓았다. 
그리고 말고삐를 잡고 아내를 봤다.
  저녁식사 전에는 돌아오겠소. 녀석의 코피 자국을 말끔하게 치워놔요. 
  그 청년 콧대가 정말 부러졌어요? 
  내가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이렇게 튼실한 코가 그리 쉽게 부러질리 
있겠소? 
  당신이 평소처럼 호되게 주먹을 휘둘렀다면 그쯤이야 부러지고 말았겠죠. 
 챈도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당신은 항상 나를 과대 평가하는군. 
  어림도 없어요. 나는 비범한 남자와 결혼한걸요. 최소한 난 그렇게 알고 있
어요. 
 챈도스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데미안의 말을 끌고 마구간으로 가서 말을 집
어탔다. 하지만 아내의 칭찬은 그녀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그 임무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1마일쯤 지나자, 데미안
이 신음을 하며 의식을 회복했던 것이다. 챈도스가 더 심한 부상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말을 세웠기 때문에 데미안은 말 등에서 굴러 떨어졌다. 한동안 얼
떨떨하게 누워 있던 그는 느릿느릿하게 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챈도스를 발견한 그가 입을 뗐다.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을로 돌아가는 거야. KC 목장은 자네를 환영하지 않네. 
  굳이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콧대를 만지며 투덜거렸다.
  부러졌나?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저 좀 얼얼한 것뿐이겠지? 
 챈도스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약을 올렸다. 
  아무 말도 없이 패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데미안은 윽박지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정도야 약과지. 우리와 같은 일을 당한 여느 처녀의 부모라면 자네를 
죽이겠다고 덤벼들었을걸. 
 데미안은 속으로 찔끔했다. 케이시가 집을 떠나 있을 동안의 경과를 부모님
에게 시시콜콜하게 전부 털어놓았을까? 그는 즉각 자기 방어에 나섰다.
  케이시는 유능한 수배범 사냥꾼이었습니다. 그게 그녀의 직업이었으니... 
  그건 그 아이가 일시적으로 집적거린 일에 불과하니 직업이라고 하기 힘
드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케이시가 적임자였기 때문에 일을 맡긴 겁니다. 
 챈도스가 혐오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그 아이가 자네 일을 다시 맡을 것 같나? 
  케이시가 잡은 범인이 도망갔습니다. 저는 탐정을 고용했지만 이번에도 전
처럼 운이 따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케이시라면 분명 다를 겁니다. 
  사실 케이시의 육감은 대단히 뛰어나지. 
  그녀의 본명이 정말 케이시입니까? 
 챈도스는 엉뚱한 화제에 인상을 썼다.
  그 아이의 이름도 몰랐단 말인가? 
  그리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었기 
때문에 여자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그 질문에는 데미안의 품격을 의심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뒤가 켕겼기 때문에 챈도스의 생각을 강력하게 부인하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말해줬습니다. 제가 수염을 기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니까 입을 열더군
요. 
 챈도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만일 데미안이 상대를 좀더 알았더라
면, 지금 그 표정이 웃음의 흔적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에게 
그 얼굴을 벽력같이 화를 낼 전조로 보였다.
 데미안이 볼 때, 케이시의 아버지는 포트워스에서 봤던 모습과 달랐다. 깔
끔하게 면도를 한데다 머리도 단정하게 정리했다. 뭐, 도시의 기준에 비하면 
아직 길었지만. 하지만 한 가지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사람을 주눅들게 만
드는 분위기.
  루트리지, 다음 기차를 집어타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걸세. 케이
시는 더 이상 수배범 사냥꾼이 아니야. 
  하지만 이번 일은 그녀가 이미 손을 댄, 특별한 경우에 속합니다. 게다가 
저는 그녀의 말을 직접 들어보고 싶... 
  관두라고 하지 않았나! 
 챈도스가 너무 차분하게 말했다.
  난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네. 그러니 내 충고를 귀담아 들어. 감히 내 딸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마. 
 데미안은 반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조
용한데다 상대의 손이 이미 권총집 위에 있었으므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케
이시의 아버지는 데미안의 동기 여하에 관계없이 이성적으로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데미안 자신도 그의 논리에 자신이 없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에 올라탔다.
  아무튼..., 만나 뵙게 돼 기쁩니다. 
 데미안이 건조하게 말했다.
 챈도스는 주먹을 문지르며 그 말에 동의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라네. 

  -49-
 케이시는 묘지 밖에서 말을 탄 아버지를 발견했다. 집에 돌아온 후 처음으
로 할아버지의 묘를 찾은 그녀는 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챈도스가 떡갈
나무 그림자에 파묻힌 이 쓸쓸한 곳을 찾을 이유는 딱 한가지밖에 없었다. 
바엠 묘지는 목장 사람들만이 영원한 안식을 얻는 곳이고, 그가 이곳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의 부친, 플레처 스트래튼뿐이었다.
 케이시는 아버지 옆에 말을 세우고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챈도스
는 딸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고 계속 찡그린 얼굴로 플레처의 비석을 뚫어
져라 바라봤다. 마침내 케이시는 목장에서 꺾은 야생화 다발을 손에 들고 말
에서 내려 묘지의 키 작은 철문을 열었다. 
 그리고 여전히 말을 탄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빠, 이곳은 누구나 환영이에요.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이러나 삿대질
하진 않으신다구요. 
 그녀의 농담 섞인 말에 챈도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진지했다.
  아니, 그분은 그러셔야 한다. 
 죄책감과 괴로움이 뒤섞인 그 대답에 케이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
였다. 할아버지는 부자간의 불화를 모두 당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아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동안 어느 누구도 아버지에게 마음을 닫은 챈도
스의 생각을 바꿔놓지 못했다.
 케이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할아버지 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야
생화를 살며시 놓았다. 잠시 후 챈도스가 옆으로 다가왔다.
  최근에 나는 내 잘못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앞에서 일종의 
고백을 하시려는 걸까? 그렇다면 내가 자리를 피하는 편이 좋겠어.
 케이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챈도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케이시의 
팔을 잡고 후회로 얼룩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할아버지가 나에게 하셨던 그대로 널 통제하려고 했어. 내가 증오했던 
할아버지의 행동을 너에게 똑같이 되풀이한 거야. 그래, 자식을 낳아봐야 어
버이 마음을 안다고들 하지? 이제야 나는 할아버지께서 나를 틀에 맞추려 
하셨던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그분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어. 
 케이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할아버지가 여기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지만 그분은 거기 있었다..., 최소한 케이시는 바엠 목
장에서 항상 할아버지의 존재를 느껴왔고, 이 묘지에 있으면 그 존재의 무게
는 훨씬 더했다.
 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케이시만이 지금 아버지를 위로 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를 용서하세요? 
  그래.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럽
구나. 
  지금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기뻐하실 거예요. 할아버지는 종종 
당신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그걸 거의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인간은 실수로부터 배우고 더 강해진다고 생각하셨거든요. 실수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여기셨던 거예요. 네,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어요. 
 챈도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생각하시고도 남을 분이다. 
 몇 달 전과 달리 아버지 말에 씁쓸한 여운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케
이시는 기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너무 자랑스러워한 나머지 할아버지 당신의 
실수를 눈곱만큼도 후회하지 않으셨어요. 
  뭐라고? 
  아버지가 나쁜 길로 빠져 못쓰게 되었다면, 할아버지는 당신을 책망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잖아요.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할아버지가 
자부심을 느끼는 남자가 되었어요. 그러니 그 모든 공이 할아버지의 은덕인 
셈이죠. 
 챈도스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 
 케이시가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아버지가 좋은 쪽으로 변하자, 할아버지는 당신의 실수가 나름대로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확신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와 KC 목장의 성공이 당
신 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다니셨어요. 그뿐일 줄 아세요? 
아버지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수성가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셨어요. 
아버지는 그분의 아들, 그것도 아비보다 훨씬 나은 아들이었어요. 즉, 아버지
가 할아버지의 면목을 세워준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버지에 대해 긍
지가 대단하셨답니다. 
  난 그런 줄 몰랐어. 
 챈도스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요. 
  고맙다, 우리 사랑스러운 딸. 
  제 말은 모두 진실이니까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할아
버지 살아 생전에 살가운 말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실 필요도 없어요. 그 
말을 방금 하셨잖아요. 할아버지는 이곳에 계시고 모든 것을 아세요. 
 챈도스의 미소는 서글퍼 보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단다. 나는 아버지와 정다운 대화
를 한번도 나눠보지 못했어. 
  아니, 두 분은 충분히 많은 대화를 나누셨어요. 그저 다른 부자보다 좀 요
란했을 따름이지요. 
 챈도스가 껄껄 웃었다.
  글세, 그런 것도 대화의 범주의 들어갈 수 있다면 그렇겠지. 
  최소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왕래를 막지 않으셨어요. 바로 옆에 터를 잡
으셨잖아요. 할아버지께서 그 속에 담긴 배려와 말없는 용서를 모르셨을까
요? 아버지는 우리가 좋을 때마다 언제든지 할아버지를 방문하게 해주셨어
요. 그분이 그 속에 담긴 아버지의 이해를 모르셨다고 생각하세요? 할아버지
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 점 후회 없으셨어요. 그분은 자랑할 만한 유산을 
남기셨고, 그 누구보다 자랑스런 아들을 뒀어요.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생각
하시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셨어요. 
  그럴까? 난 정말 모르겠구나. 
  엄마는 내 말을 입증하실 수 있어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자랑하던 말씀
을 들으셨거든요. 전에 엄마가 그 말을 아버지에게 전하셨죠? 
  그러기는 했지.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이기려고 했지만, 그런 행동이 할아버지를 흐뭇하게 
한다는 사실을 부지불식중에 알고 계셨어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잖아
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부 다 아셨어요. 가령 아버지가 정말 할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일부러 나쁜 길로 빠지고 실패해서 
그분에게 죄책감을 안겨드리고 스스로를 책망하게 했을 거예요. 
 챈도스는 케이시를 꼭 안았다.
  우리 딸, 그 나이에 어디에서 그런 지혜를 얻었니? 
 케이시는 몸을 뒤로 빼고 아버지에게 씩 웃어 보였다.
  아버지에게 배운 게 아닐까요? 
  어림없어. 
  좋아요, 그럼 어머니에게 배운 걸로 해둘게요. 
 깔깔거리며 웃던 케이시는 바로 옆에서 할아버지의 체온과 함께 그분의 기
쁨을 느꼈다. 마치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서로 묵은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속이 시원하구나. 이제 불화는 끝났어. 앞
으로는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될 거야.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뜻을 느낄 수 있었으면.

  -50-
 데미안은 다음 북부행 기차를 타야 옳았다. 케이시의 아버지와 얽히고 싶지 
않은데다, 다시 주먹다짐을 한다 해도 승산이 없을 테니까. 사실 케이시의 
아버지가 주먹 한 방으로 그를 때려눕힌 건 행운이 많이 작용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와 승부를 가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조
금만 더 화가 나면 그녀의 아버지가 주먹 대신 총을 사용하리라는 건 말하
지 않아도 확실했다. 챈도스는 은근한 제스처로 그런 암시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케이시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그냥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총동원한 끝에 케이시의 외할아버지를 
떠올렸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그 의사의 집을 찾아갔다.
당연히 하트 박사는 데미안의 면담을 거절했다. 예전에 케이시가 말했듯이,
최근 들어 박사는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만 진료했다. 하지만 데미안이, 손
녀인 케이시와 아는 사이이며 사위가 휘두른 주먹에 부상을 당했다는 말을 
하자, 박사는 태도를 바꿨다. 그리고 데미안이 기대했던 대로, 집안 사정을 
일러줬다. 
  요즘 케이시는 주로 바엠 목장에서 지낸다네. 그것은 우리 손자손녀들이 
플레처 스트래튼에게 물려받은 곳이야. 
 에드워드 하트가 말했다.
  그 목장이 화근이 되어서 우리 케이시가 몇 달 전에 가출했지. 케이시는 
그곳을 경영하고 싶어했는데 챈도스가 허락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그 아이
가 뭔가 보여주겠다며 집을 뛰쳐나갔어. 물론 사위가 뒤쫓아갔지. 하지만 우
리 기대만큼 빨리 데리고 돌아오지 못했다네. 내 딸 코트니는 남편과 딸의 
오랜 외유를 못마땅하게 여겼어. 
  지금은 사위가 딸에게 그 목장을 경영하도록 허락했단 말입니까? 
  그뿐인 줄 아나? 우리 손녀가 경영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
다네. 두 사람 성격이 그렇게 불같지만 않았던들, 이미 올해 봄부터 그렇게 
되었을 거야. 
 데미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유, 두 사람 성격이 불같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난 케이시를 만
나지 못했을 거야.
 데미안은 케이시가 목장을 잘 운영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그를 즐겁
게 하는 케이시의 능력에 끝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가 아는 챈도스가 그렇게 
오랫동안 딸을 찾지 못했다는 점은 놀라웠다. 뭐니뭐니해도 케이시가 아는 
지식의 태반은 아버지로부터 배웠잖은가.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챈도스가 
딸을 못 찾았던 덕분에 데미안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하트 박사와 대화를 나눈 데미안은 며칠 기다렸다가 다시 케이시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사실 그는 케이시가 마을로 나오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그 
편이 챈도스와 부딪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데미안은 케이시
가 타나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소, 즉 외할아버지의 집과 잡화점 주변을 
내내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케이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데미안은 이
제 더 이상 그녀를 다시 보고픈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케이시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던 그 바엠 목장으로 향했
다. 케이시 혼자 너끈히 경영하는 곳이니만큼 그곳이 KC 목장보다 규모가 
작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그게 아니었다. 한 가문이 소유한 두 
목장은 안채를 중심으로 작은 부속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작은 마을을 연상시켰다. 그제야 데미안은 케이시의 아버지가 딸
에게 바엠 목장의 경영권을 넘기지 않은 이유를 이해했다. 이마한 크기의 목
장이라면 대부분의 남자에게도 벅찬데, 하물며 젊은 처녀라니!
 불행히도 케이시는 그곳에 없었다. 마침 목장의 북쪽 목초지로 나간 뒤였
다. 그는 길을 잃기 십상이니 그녀를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
다. 하지만 그 경고를 무시했고..., 정말 길을 잃었다. 
 해가 서쪽 지평선으로 서서히 기울 즈음에야 다시 건물을 발견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이 농락이라도 하듯, 그곳은 바엠 목장이 아니라 KC 목장에 속
한 건물이었다. 아, 그녀가 두 목장에서 번갈아가며 잔다는 말을 하트 박사
에게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미 KC 목장에 온 이상 데미안으로서
는 그녀가 오늘밤 어디에서 묶는지 확인하지 않고 떠날 수 가 없었다.
 데미안이 바로 그 포치에 도착했을 때, 장엄한 일몰이 연출되고 있었다. 서
쪽 하늘을 강렬하게 물들인 석양의 붉은 여운이 포치에 아늑한 분위기를 더
해줬기 때문에 두 개의 초롱이 빛을 잃었다. 그는 잠깐 흔들의자에 앉아 사
방이 탁 트인 서부에서만 관람할 수 있는, 경이적이고 아름다운 신의 창조물
을 구경했다. 도시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케이시가 마법처럼 옆에 나타나 이 진한 감동의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면, 손을 맞잡고 나란히 흔들의자에 앉아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의 홍수를 
구경할 수 만 있다면...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난 그녀에게 화가 났을지언정, 
그녀와 함께 석양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리고 케이시의 도움을 얻으려면 분
노를 접어둘 필요가 있다. 데미안 자신의 원망이 조목조목 타당하다고 한들, 
죽일 듯 노려보면 케이시가 선 듯 협조할 리 없었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면서,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일어나 문을 두드렸다. 속
으로 케이시의 부모님 이외의 다른 사람이 나오기만을 기도했다. 그는 COS
도스의 경고를 잊었다. 아니, 무시했다. 그러니 그와 다시 마주 치지 않고 이
번 방문을 끝내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넓은 저택에 문을 열어줄 하인이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냐하
면 코트니 스트래튼이 다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데미안을 보자 즉
시 인상을 썼지만, 최소한 면전에서 문을 닫지는 않았다.
  내가 방문하지 말라는 경고를 또 해야 하나요? 
 그녀는 왠지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지역을 떠나기 전에 케이시와 꼭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제발 이번에는 부군을 부르지 마시고 케이시가 있
는지 없는지만 말씀해주십시오. 
 코트니는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그냥 다물었다. 이제 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데미안은 숨을 멈추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드디어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당신이 막무가내로 나오니 어쩔 수 없군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녀는 데미안 등뒤에서 문을 닫고 딸을 불렀다. 
  케이시, 이리 나와보렴. 손님이 오셨어. 
 몇 초 이내로 케이시가 식당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 냅킨이 들려 있었다. 
어머니와 현관에 나란히 서 있는 데미안을 본 그녀는 걸음을 뚝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표정에 충격과 놀라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데미안도 케이시의 우아한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그녀의 판초와 청바지 차
림에 익숙했기 때문에 집에 돌아온 이후의 옷차림이 달라졌으리라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보석이 달린 핀으로 검은 머리칼을 가지런하게 정리하고 에
메랄드 빛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드레스는 허리가 잘록할 뿐 아니
라 깊이 파인 목 주변에 같은 색의 짧은 레이스를 달아 깜찍함을 더했고 봉
긋한 소매까지 달려 있었다.
 케이시는 두 눈을 의심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부드럽게 솟아오른 가슴
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데미안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어버리고 
멍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마침 저녁식사 중이던 스트래튼 일가는 대도시의 상류층처럼 모두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딸을 뒤따라 나온 챈도스 역시 잘 재단한 검정색 정장을 
입고 끈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포트워스에서 봤던 지저분한 흉악범과 완전
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당시의 살기 등등한 표정은 여전했다. 챈
도스는 아내보다 더 데미안의 방문을 불쾌해했다.
 케이시는 충격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데미안,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리고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데미안은 움찔했다. 얼굴에 든 멍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부기는 많
이 가라앉았지만 한쪽 눈과 이마에 걸쳐 시퍼런 멍이 자리를 잡았다. 하트 
박사는 얼굴 중시에서 빗겨 맞은 걸 다행으로 알라고 했다. 코를 정통으로 
맞았다면 콧대가 남아나지 않았을 거라나?
 데미안은 챈도스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그건 당신 아버지에게 물어봐요. 저분은 내가 당신을 위험으로 빠뜨린 대
가로 혼쭐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소. 
 케이시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아빠가 당신을 때렸단 말이에요? 언제 그런 일이? 
  며칠 전에 그랬소. 
  당신이 여기 왔는데, 아무도 나에게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 질문은 데미안을 향한 게 아니었다. 케이시는 챈도스에게 몸을 돌렸다.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니? 
 챈도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는 떠났어.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 
  아빠 우리는, 내가 혼자서도 얼마든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라고 합의
했잖아요? 
  케이시, 너 혼자 엉뚱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저 남자에게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물어보거라. 나에게는 네 나이와 상관없이 너를 보호할 권리가 있어. 
 아버지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케이시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이 그녀에게 해를 끼치려고 여기 왔다는 
식의 암시는 허무맹랑한 모함이었다. 그가 막 반론을 제기하려는 찰나, 케이
시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왜 이곳에 오셨어요, 데미안? 
 데미안은 그녀와 단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허락할 
것 같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잭이 세인트루이스에서 도망갔소. 시카고로 도망간 흔적을 남겼지만, 그곳
에서 다시 감쪽같이 몸을 숨겼소. 그런 대도시는 숨을 곳이 워낙 많잖소? 내
가 고용한 탐정들은 찾기를 포기하고 전국에 수배 전단을 뿌리라더군. 하지
만 워낙 전망이 불투명한 방법이기 때문에 나는 내키지 않았소. 
 케이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설명은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되지 않아요. 
  케이시, 당신은 전에 그를 찾아냈소. 
  여기 서부에서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도시에 있어요. 
 그녀가 핵심을 지적했다.
  내가 도시에 대해 뭘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잭을 잘 알고 있잖소? 
  데미안, 당신은 이미 사람을 고용했잖아요? 
  그들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미 포기했소. 그리고 별다른 흥미도 없소. 하
지만 당신은 달라.  
  내가 흥미를 갖고 있다구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지요? 
 그녀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신은 맡은 일이 깨끗하게 매듭지어지는 걸 원하는 사람이니까. 당신은 
끝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일 자체가 연장되었으므로 아직 끝난 게 아니오. 
  당신이 그를 놓쳤는데, 그게 내 잘못인가요? 
 데미안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지. 하지만 당신은 그 동안 많은 공을 들여 힘들게 찾아
낸 잭이 이제 와서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다시 활개치는 꼴을 보고 싶
소? 
  여기까지 달려온 목적이 뭐예요? 나를 다시 고용하려고? 
  당신이 부르는 대로 보수를 지불할 용의가... 
  난 전에 돈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데미안, 이거 한 가지
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군요.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그게 전부예요? 
단지 잭을 다시 찾아달라고 날 찾아왔어요? 
  단지라니? 놈을 법의 심판대로 끌고 가는 일은 나에게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을 만날 가능성조차 희박한 이
곳까지 내가 뭣하러 찾아왔겠소? 
  뭣하러 찾아왔겠느냐구요? 
 케이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하고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야 아빠의 뜻을 알겠어요. 
 그녀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려 가버렸다. 뒤에 남은 데미안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저렇게 매정하게 거절할 줄이야! 잭의 탈주 소식에 당장 나
서서 함께 시키고행 기차를 탈 줄 알았는데.
  루트리지 씨, 이만하면 대답은 충분하리라 생각해요. 
 데미안은 몸을 돌려 케이시의 어머니와 활짝 열린 대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은 단순히 부탁을 거절당해서가 아니라, 왠지 데
미안 자신이 거부당한 듯해서 생긴 감정이었다.

  -51-
 시카고까지 반쯤 왔을 때, 데미안은 다시 텍사스로 돌아가리라고 결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빨리, 너무 쉽게 포기했다. 그리고 죄책감, 도덕적인 
의무감, 책임, 인정에 호소 등 케이시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의 거절에 낙담하여 꼬리를 사리고 짐을 
쌌던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왕 거절당했을 때, 왜 
가슴에 맺힌 섭섭함을 그녀에게 풀어버리지 못했을까? 그 시점에서 예의바
르고 외교적으로 나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데미안은 남부행 기차 시간표를 알아보려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케이
시가 기차역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저 샛노란 여행용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케이시일 리 없어. 모자와 신발까
지 같은 색으로 맞춰 입은 저 요조숙녀가 설마..., 아마 케이시와 닮은 여자
일 거야. 
 하지만 그런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말 케이시였다. 데미안의 온몸에 
불을 켤 수 있고 살아 숨쉬는 생생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여자는 오직 
케이시뿐이었다.
 그렇다면 와코에서부터 같은 기차를 타고 있었다는 뜻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물론 그런 일은 가능했다. 그건 전적으로 데미안이 특별칸을 거의 
나가지 않고 급사에게 식사 배달을 포함한 모든 시중을 맡겨버렸기 때문이
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불행에 휩싸여, 기차가 역에서도 사람을 피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 가면 연기처럼 사라질까 두려운 심정으로 케이시의 식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데미안을 
쳐다봤다. 그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케이시는 놀라지도, 웃지도,  나를 
여기서 봐서 깜짝 놀랐지요  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그는 사실을 지적했다.
  당신이 왔군. 
  그래요. 
 데미안은 이제 감정이 조금 들어간 어조로 따져 물었다.
  언제 나에게 알릴 생각이었소? 
  그럴 생각 없었어요. 
 데미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왜? 전에 우리는 호흡을 잘 맞췄잖소. 
  우리가 호흡을 맞췄던 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잭을 찾을 일은 그때에 해
당되지 않아요. 
 예상치 않은 대담무쌍한 대답에 데미안은 할말을 잃었다. 그에 비해 케이시
는 잠자리가 좋았다는 말을 해놓고도 얼굴을 붉히거나, 수줍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데미안은 그녀의 뻔뻔스런 태도에 응어리진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참 가소롭군. 한밤중에 작별인사 한마디 없이 줄행랑을 친 당신이  그 일 
에 호흡이 잘 맞았다고 생각할 줄이야 꿈에도 몰랐소. 흥, 정말 웃기는군. 
  그렇게 헤어지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왕 이별하는 마당에 무슨 말
이 필요하죠? 
 케이시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질질 끌지 않고 산뜻하게 헤어지는 편이 당
사자 모두에게 좋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이별 방식은 두 사람 모두가 헤어
지고 싶어 몸살을 앓을 경우에만 해당되었다. 가령 둘 중 한 사람이 다른 마
음을 품은 경우라면...
  우리 중 어느 한쪽한테 할말이 있었을 수도 있잖소? 
 데미안이 넌지시 말했다.
  우리 중 그 어느 한쪽한테는 이미 할말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어
요. 
 케이시가 쏘아붙였다.
 데미안은 이를 갈았다. 그녀의 말이 또 옳았다. 영원히 함께 살자는 제안을 
하지 못하고 용기가 나기만 기다리면서 시간을 질질 끈 쪽은 데미안이었다. 
그리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지금 역시, 자신은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니었
다. 그때, 케이시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작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에 정신이 확 났다.
  케이시, 부모님까지 함께 모시고 왔소? 
 케이시는 데미안의 시선을 따라가다 부모님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우리 식구들이 우연찮게도 같은 곳으로 여행하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시카
고에서 쇼핑할 게 있다고 하셨고, 아버지는 그 동안 너무 떨어져 있었던 어
머니 곁을 다시 떠나고 싶어하지 않으셨어요. 두 분은 그 결정이 나의 시카
고행과 무관하다고 누차 강조하시더군요. 
 케이시는 속이 뻔하게 들여다보이는 부모님의 변명이 황당하다는 듯 눈동
자를 위로 치켜 떴다. 하지만 데미안은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가 도움을 요
청한 사람은 케이시였지, 가족 전체가 아니었다. 참, 그녀는 잭을 잡으러간다
는 것을 알릴 생각이 없었지. 그렇다면 뭐 하나 선명한 부분이 없는 셈이었
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예외로 받아들여야 할 것도 너무 많고, 더 
이상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그냥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
도 가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했다.
  케이시, 지금 잭을 잡으러 가는 거 맞소? 
  내 의도는 그래요. 
  그런데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소? 당신은 아직 탐정들의 보고서도 보지 
못했잖소? 
  당신은 이미 잭이 몸을 숨긴 곳이 엄청나게 큰 대도시라고 지적했어요. 내
가 보기에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와 똑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뿐이
에요. 그러므로 당신 탐정들의 경과 보고서는 볼 필요도 없어요. 
  이런 말하고 싶지 않지만, 잭을 잡던 순간에 내가 약간이나마 일조했음을 
지적하는 바이오. 그리고 유사시에 내가 당신을 도울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
진다면, 당신에게 협조를 구하지도 않았을 거요. 차라리 당신을 끌어들이지 
않았지. 
 이번에 한숨을 쉴 차례는 케이시였다. 케이시의 아버지가 옆에서 듣고 있다
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가 너에게 일을 떠맡기고 나 몰라라, 하리라고 내가 생각했다면 네 어머
니에게 집 근처에서 쇼핑하라고 타일렀을 거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트니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루트리지 씨. 드디어 댁이 우리 딸을 만났군요. 이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특별칸으로 초대하여 남은 여행길을 편안히 하라고 제의하시
겠지요? 
 데미안은 입을 떡 벌리고 할말을 잃었다. 케이시도 아니고 그녀의 부모님이 
함께 여행하기를 바라다니! 그리고 케이시의 아버지는 정말 데미안이 그녀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까?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태도가 
저렇게 180도로 달라졌을까?
 데미안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황망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세 분을 제 차량으로 모시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당연히 챈도스는 데미안의 정중한 말에 어울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정말 그가 데미안을 믿고 있다
는 말을 딸에게 했을지 여부는 미지수지만, 데미안을 응원하는 태도나 몸짓, 
표정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케이시의 부모님은 데미안에 대해 여전히 같은 생각을 가진 건 아닐
까? 그렇다면 데미안이 별 뜻 없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좋아했다
는 말이 되는데... 이런 마당에 케이시의 부모님에게 사방이 딱 막힌 특별칸
에서 몇 날 며칠을 함께 보내자고 제의하다니,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
이었다. 

  -52-
  케이시와 그녀의 어머니는 특별 차량의 부속 침대칸을 차지했다. 챈도스는 
데미안의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 자기 마음대로 그의 소지품을 들어내고 숙
녀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물론 데미안 역시 그 처리에 불만이 없었지만 
몇 마디 질문을 받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다음 며칠은 계속 그 모양이었다. 케이시의 부모님은 마음껏 특별칸의 호사
를 누렸고, 케이시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부모님과 말했을 뿐, 입을 꼭 다물
었다. 데미안은 별 어려움 없이, 케이시와 부모님의 관계가 지극히 원만하다
는 사실을 알았다.
 그 세 사람 중에서 그나마 데미안의 숨통을 트게 해준 사람을 코트니 스트
래튼이었다. 딸이나 남편과 대조를 이루는 그녀의 예의범절은 처녀 시절의 
사교적인 성장 배경을 보여줬다. 그녀는 계속 데미안을 대화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고, 그를 부추겨 신상이나 아버지, 그리고 회사에 대한 말을 하게 했
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까지 했다...
 코트니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케이시는 얼굴을 붉혔다.
  당신 어머님이 시카고에 살고 계신다고 케이시가 말해줬어요. 우리가 그곳
에 있는 동안 그분을 만나 볼 수 있겠지요? 
 데미안은  왜 당신 부모님과 상관없는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  하
는 표정으로 케이시를 쳐다보고 점잖게 대답했다.
  그건 힘들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방문은 사교적인 게 아니라서요. 
 숙녀들이 데미안과 챈도스만 남겨두고 침실로 물러간 다음에는 고문처럼 
어색한 밤이 이어졌다. 첫날 밤의 분위기가 나머지 날을 결정지었다. 즉, 그
들이 서로 무시해버렸던 것이다. 딱 한 번 챈도스가 의자에 자리를 잡고 데
미안에게 말을 건넸다.
  내 아내는 자네에게, 이미 자네가 표명한 결심을 의심하고 다시 생각할 기
회를 줄 거야. 하지만 난 판단을 유보하겠네. 
 데미안은 그 냉소적인 말을 그냥 놓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혼자 알아내게, 신출내기. 
 그 말을 끝으로 챈도스는 몸을 돌려 잠들었다.
 다음 사흘은 챈도스의 말 그대로였다. 스트래튼 식구 중에서 말을 하는 사
람은 유일하게 코트니뿐이었고, 기차가 시카고에 도착할 즈음 데미안은 그녀
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친해졌다. 그에 반해 다른 두 사람은 데
미안의 존재를 겨우 참는다는 식이었다. 게다가 그는 케이시와 단둘이서만 
대화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항상 케이시의 부모님 중 한 분이 곁을 지켰다.
 그래서 데미안은 케이시와 함께 할 기회를 잡을 속셈으로 전에 묶었던 호
텔을 추천했다. 하지만 케이시의 표정으로 봐선 그들이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어쨌든, 코트니는 그 제안을 열렬하게 받아들였고 케이시도 별 이의
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케이시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절대로 혼자 잭을 잡을 생각을 하
지 말라고 챈도스가 엄하게 명령했기 때문에 그녀는 데미안에게 중간 보고
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 말인즉, 그들이 잦은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코트니가 도와준답시고 매일 밤마다 함께 모여 식사하자고 
제의했다. 데미안에게는 하나도 고맙지 않은 제의였지만 지금은 입맛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케이시의 수사 계획도 데미안의 희망을 꺾어놨다.
  잭은 당신의 돈을 흥청망청 쓰고 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졌어요. 은밀하게 
몸을 숨긴 지금도 제 버릇 남 주지 못할 거예요. 그러므로 나는 우선 고급 
호텔과 상류층 전담 부동산 직원부터 탐문할 생각이에요. 
 그 말은 곧 처음 며칠 동안 데미안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보고 딸의 계획을 쾌히 승낙했다. 데
미안은 그저 매일 케이시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도 못했다. 케이시는 빨리 집에 돌아갈 욕심
에, 잭을 찾는 일에만 전념한 나머지 첫날 저녁식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둘
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 다 메시지는 똑같았다. 만날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풀코스 식사를 하는 대신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챈도스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우리 딸은 한 번 손을 대면 끝장을 본다네. 
 데미안은 대놓고 불만을 터뜨릴 수 없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잭을 찾고 
싶었다. 한편으로 케이시가 다시 떠나기 전에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
녀가 협조를 거절했기 때문에 데미안으로서는 이제나저제나 그녀를 기다리
며 함께 식사할 시간을 학수고대했다.
 셋째 날, 그녀가 나타났다. 그것도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아
한 호텔 레스토랑은 투숙객뿐 아니라, 값비싼 보석과 정부를 비롯해 뭐든 자
랑할 거리를 가진 시카고 시민들이 부와 권력을 경합하는 장소였다. 때문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 특히 숙녀들의 옷차림과 장신구는 휘황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간소한 라벤더색 실크드레스와 목을 장식한 검정색 리본 
로켓으로 다른 여인네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녀는 볼 
때마다 점점 아름다워지고 광채가 났다.
 오늘밤 케이시는 부모님보다 한 발 앞서 식당으로 내려왔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 발걸음을 늦추며 다시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녀를 응시하는 데미
안의 표정에 마음을 돌렸다. 그는 필요하다면 당장 일어서서 그녀를 끌어올 
참이었고, 그녀는 소동을 피울 생각이 없었다.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었다. 왜
냐하면 데미안은 주변의 시선에 관계없이 뜻을 이룰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어서서 케이시를 자리에 앉혔다. 웨이터가 당장 나타나 음료수를 권
했다. 데미안은 그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리지 못했다.
  케이시, 오늘밤 당신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구려. 
 칭찬을 기대하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데미안은 말할 틈
을 주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청바지와 판초 차림도 좋소. 
 케이시는 놀란 기색이 완연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웨이터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단둘만 되자, 데미안이 현명치 못한 말을 덧붙
였다.
  사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당신이 가장 좋소.  
 이제 케이시의 얼굴이 타오르듯 붉어졌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힐책했다.
  나를 창피하게 만들 작정이에요? 
  그렇지 않소. 나는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그녀의 황금색 눈이 데미안의 눈과 얽혔다. 데미안은 케이시가 마음속으로 
자신의 나체를 생각하고 있다는 묘한 감이 들었다. 그 역시 케이시의 그런 
모습을 그려보며 그들이 나눈 마지막 밤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케이시를 데리고 당장 방으로 올라가고 싶
었다. 당장...
  데미안..., 당신 데미안 아니에요? 
 달뜬 목소리가 탄성을 올렸다.
  어머, 당신이군요!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여기 시카고에 웬일이세요? 오라, 
당신은 오늘밤 이곳에 도착해서 내일 아침에 나를 만나러 올 생각이셨군요. 
 데미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루엘라 밀러를 맞
았다.

  -53-
 케이시는 빌어먹을 운을 믿을 수 없었다. 데미안이 뭔가 중요한 말을 하리
라 생각하며 숨을 졸인 순간에 혐오스런 목소리가 산통을 깨다니! 그렇다, 
정말 지긋지긋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 주인의 아름다움도 싫었지만, 데미
안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그 태도는 정말이지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혐오스럽다는 표현은 좀 심했지만 케이시는 이 여자가 싫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루엘라 밀러는 데미안을 발견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좋아하고 
있었다. 젠장, 케이시는 루엘라 밀러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기 때문
에 그녀가 이곳에 산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루엘라, 나는 중요한 사업차 이곳에 왔소. 그래서 사교적인 즐거움을 가질 
시간이 없소. 
 데미안이 그녀에게 말했다.
  어머, 정말이세요? 
 루엘라가 도끼눈을 하고 케이시를 째려봤다.
  그럼, 이분은 뭐죠? 
 한 편의 희극이 따로 없는 순간이었다. 루엘라가 케이시를 질투하다니..., 더
구나 케이시를 알아보지조차 못한다. 이보다 저 여자의 피상적이고 천박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또 있을까? 오로지 관심 있는 남자에게만 
마음을 쏟고 그 외의 다른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다니.
  루엘라, 당신이 나를 기억 못하다니 정말 섭섭하네요. 
 케이시가 건조하게 말했다.
  어머, 당신이었군요, 케이시. 
 루엘라가 코웃음을 쳤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이 저쪽에 있는..., 거리의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저 헐뜯는 말에 불과했지만 케이시는 흘려듣지 못했다. 그녀는 부모님이 
오는 즉시 자리를 들 생각이었다. 그녀의 기분은 밑바닥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도착한 다음에도 케이시는 어쩔 수 없이 루엘라와 저녁을 
먹어야 했다. 루엘라가 넌지시 그들의 옆구리를 찔러 합석을 받아냈기 때문
이다. 그녀는 예의 범절 따위는 다 집어던지고 혼자 떠들었다. 전처럼 루엘
라는 오직 그녀의 근황에만 화제의 초점을 맞췄다.
 케이시는 디저트를 생략하고 두통을 핑계 삼아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아는 사람을 발견한 루엘라가 목을 삐고 옆 탁자를 건너다봤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케이시가 방으로 물러가겠노라 양해를 구하려
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루엘라가 더 빨랐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 믿을 수 없는 우연의 일치예요. 데미안, 저쪽에 당신 
어머니가 계세요. 하지만 저분은 아직 당신을 보지 못하셨어요. 
 루엘라는 그녀의 말이 데미안에게 미친 효과를 확인하지 않고 곧장 자리에
서 일어나  저분은 아직 당신을 보지 못하셨어요 라는 부분을 수정하려 했다. 
즉시 데미안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자리에 도로 앉혔다.
 그녀는 불신에 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미안을 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가 
암암리에 던지는 신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데미안이 화가 났
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신, 미쳤어요? 
 그녀가 비난에 나섰다.
  상당히 미쳤소. 
 데미안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 어머니에게 다시 아는 체를 한다면, 난 완전히 돌아버
릴 거요. 루엘라, 당신이 우리 사적인 저녁식사를 방해했을 때 내가 이곳에 
사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일 때문에 왔다는 말을 했을 거요. 그 말을 새겨들
었어야지. 내가 꼭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어머니를 만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혀야겠소? 
  그리고 저를 만날 뜻도 없으셨겠지요. 
 그녀는 즉각적인 부인을 기대하며 일부러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원했던 대답은 영영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
다. 하지만 그렇게 모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
서 불쌍했다. 너무 둔감한 나머지 자신이 모욕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모
양이었다.
 코트니가 좌중의 긴장을 덜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디저트를 먹을 차례예요. 
그러자 챈도스가 웃음을 터트렸고, 케이시가 계속 걱정스런 시선으로 데미안
을 바라봤다. 루엘라에 대한 비난을 마친 데미안은 그의 어머니가 있는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시는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시선을 느낀 순간을 알아차렸다. 온몸이 청
동상처럼 굳어졌다. 숨조차 쉬지 않았다. 데미안의 시선에 드러난 고통에 케
이시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당을 나가버렸다. 케이시는 그 뒤를 따랐다. 
뒤에서 희미하게 루엘라의 불평이 들려왔다.
  어쩜, 저럴 수가. 난 이런 모욕은 처음이에요. 어떻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
을 수 있지요? 
 데미안은 곧장 침실로 올라갔다. 문을 꽝 닫으려고 할 때까지 뒤따라온 케
이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손에 문 대신 케이시가 잡혔다. 그
는 전투 태세를 갖춘 사람처럼 몸을 세차게 돌렸다. 아마 케이시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쫓아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케이시를 본 순간, 몸에서 긴
장이 빠져 나갔다.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소. 
 데미안은 이심전심이라는 식으로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했다.
  알아요. 
  고결한 성인도 그 멍청한 여자를 참지 못할 거요. 
  그것도 알아요. 
  난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서 어머니와 첫 만남을 갖고 싶지 않소. 모든 자
제력을 다 갖추고 앉아 어머니의 변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당신 말이 옳아요. 
 그는 짜증이 가득 배인 몸짓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다시 고
통이 담긴 강렬한 눈으로 호소하듯 케이시를 바라봤다.
  케이시,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셨소. 
 그는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는 나를 어렸을 때 이후로 한번도 보지 못하셨소. 그런데 어떻게 난 
줄 아셨을까? 
  당신이 그분을 알아봤던 방법과 똑같았겠죠. 
 케이시가 주저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어머니는 그리 달라지지 않으셨소. 아니, 전혀 달라지지 않으
셨소. 관자놀이에 흰 머리칼이 생기고 주름이 잡혔을 뿐, 내가 기억하는 그 
아름다운 얼굴 그대로였소. 하지만 어머니가 집을 떠나셨을 당시, 나는 겨우 
열 살이었소. 지금의 나와 예전의 어린아이 사이에는 닮은 점이 없단 말이
오.  
  데미안, 어머니들에게는 육감이랄지 본능이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아주 강
렬한 시선으로 그분을 바라봤어요. 그러니 그분이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도 당연해요. 
  맞아, 그럴 거야. 
 데미안은 말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가 어색하게 자존심을 세웠다.
 케이시는 그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당신, 괜찮겠어요? 
  아마 그럴 거요. 그리고 당신 부모님께 내가 무례하게 자리를 떠서 죄송하
다고 전해줘요. 
 케이시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부모님은 그리 민감하지 않으시니, 사과할 필요 없어요. 
 말을 마치고 케이시는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케이시? 
 그녀는 일순 숨을 멈추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시가 완전히 닫지 않은 문으로 다른 사람이 조심스럽
게 들어왔던 것이다. 그 사람의 시선은 케이시를 지나 아들에게 고정되었다. 
  데미안, 너로구나, 그렇지? 
 그녀가 희망에 차서 말했다.
  나를 만나려고 이곳에 왔니? 
 케이시는 몸을 돌려 데미안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심지어 얼굴에 표정마저 없었다.
  아닙니다.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를 살해한 놈을 잡으려고 이곳에 온 겁니다. 
 그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이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단다. 정말 유감이로구나. 
  부인,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청춘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니
까요. 
 평이한 어조와 달리 말의 내용은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감정을 추스르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너를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그녀는 속삭이고 방을 나갔다.
 하지만 케이시는 그녀의 눈가에 반짝이는 눈물을 보였다. 그녀는 재빨리 데
미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등은 뻣
뻣하게 굳었고 양손은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지금은 그 눈물에 대한 말
을 할 때가 아니었다.

  -54-
 이틀 후, 데미안이 케이시의 부모님과 식사를 반쯤 마쳤을 때 케이시가 나
타나서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이렇게 수사가 빨리 진척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사실 그녀는 잭 커루더스를 잡을 생각으로 시카고에 온 게 아니었다.
 케이시의 머릿속에는, 짐을 싸던 딸을 보고 어머니가 던진 질문이 여전히 
생생했다.
  넌 그를 도와줄 생각이로구나? 
 그녀의 어머니가 물었다. 
  네. 
  왜? 
  난 시작한 일의 끝을 보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
어요. 
  오직 그 이유뿐이니? 
  아니에요. 
 케이시는 하늘이 무너져라 한숨을 쉬며 사실을 인정했다.
 코트니는 초조해졌다.
  어물쩍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다 털어놔. 
 케이시는 침대에 앉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난 엄마 충고에 따를 생각이에요. 최소한 데미안에게 청혼할 기회를 주겠
어요. 하지만  그가 자발적으로 청혼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더 이상은 않겠
어요.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엄마. 난 진심이에요. 
 코트니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그녀가 좋은 아내감이 될 수 있다는 증명을 하기에 시간이 충분
하리라 생각했다. 가슴 떨리게 하는 그의 시선을 여러 번 포착할 때마다, 청
혼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 잭을 발견해버렸다.
 그녀는 식사에 늦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잭의 소재를 알아냈어요. 
 챈도스는 딸의 신속한 성공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코
트니는 발끈 화를 냈다.
  얘, 나는 아직 쇼핑을 시작하지도 않았어! 
 그러자 챈도스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무슨 쇼핑? 
 데미안의 귀에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케이시를 다그쳤다.
  벌써? 확실하오? 
 케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진 않아요. 난 아직 두 눈으로 그를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의 인
상착의며, 그가 이 도시에 도착한 시간 등이 다 맞아떨어져요.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쉽게 그를 찾아냈지? 내가 고용한 탐정들은... 
  그들을 비난하지 마세요. 이건 순전히 행운이에요.  
  가령 예를 들면? 
  내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잭은 강변 근처의 한 호텔에 묵었어요. 하지만 
오래는 아니고 딱 이틀 묵었더라구요. 나는 당연하게 그 다음 절차로 그와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을 법한 호텔 직원들을 모두 조사했어요. 
  탐정들도 이 도시의 호텔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조사했소. 당신이 시간
을 내서 그 보고서를 읽었더라면 이미 그 점을 알았을 거요. 
  내가 그 보고서를 읽었더라면 굳이 호텔 수사에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하
지만 이 일은 전적으로 행운이라고 이미 말했잖아요, 데미안.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잭은 모든 식사를 호텔 방으로 배달시켰고 밀튼이란 직원이 그 방을 
담당했어요. 하지만 그 당시 밀튼이란 직원은 아파서 결근하고 그의 형이 대
신 출근했더라구요. 밀튼은 올해 병가를 많이 냈기 때문에 또 결근할 경우 
해고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그날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
을 상관에게 숨기려고 애를 썼어요. 
  그가 잭에 대해 뭔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란 뜻이군? 
  아니, 그가 아니에요. 나는 그가 무심코 내뱉은 실언을 놓치지 않고 추궁했
어요. 그는 좀처럼 자신과 닮은 형에 대해 입을 열지 않더라구요. 하지만 결
국 그날 그의 형이 그를 대신해서 호텔에 출근했다고 인정했어요. 
  그래서 너는 밀튼 대신 그의 형에게 잭에 대해서 물어봤구나? 
 챈도스가 추리했다.
  정확해요. 마침내 밀튼은 형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줬고, 오늘 오후에 나는 
그 장본인을 찾아갔어요. 호텔에 투숙할 당시, 잭은 잔뜩 긴장한 객실 직원
을 의심한 모양이에요. 잭 본인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쫓기는 몸이잖아
요. 하지만 그 직원은 잭과 무관한 이유에서 긴장했고, 잭이 상사에게 불평
할까봐 동생을 대신 일하는 중이라고 털어놨어요. 잭은 단박에 밀튼의 형이 
유용한 존재임을 알아차렸지요. 왜냐하면 밀튼의 형은 다시 호텔에 나올 사
람이 아니니까, 잭에 대한 질문을 받을 가능성이 없잖아요. 
  하지만 잭이 그 불쌍한 직원의 형을 어떻게 이용해 먹었다는 거니? 
 코트니가 나서서 물었다.
 케이시는 빙그레 웃었다.
  바로 그 점이 잭의 영악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에요. 그는 밀튼의 
형에게 부동산을 통하지 않고 묵을 곳을 찾아준다면, 그들 형제의 역할 바꾸
기에 대해 입을 다물겠노라고 협박했어요. 
  그래서 그 형이란 사람이 그렇게 했어? 
  그럼요. 그는 잔뜩 겁을 먹은 나머지 그날 오후에 당장 집을 알아봐줬어요. 
사실, 그곳은 바로 그의 하숙집이었어요. 그는 제집을 내주고 잭이 다른 곳
으로 옮길 때까지 동생 집에 얹혀살기로 했어요. 그저 갖은 애를 다 써서 잭
을 만족시키고 동생의 일을 호텔 상사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생각뿐이었지요. 
어쨌든, 잭은 누추한 그 하숙집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를 추
적하는 사람들에게 들킬 가능성이 적은 최고의 장소라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숙소를 옮겼어요. 
  잭이 아직 그곳에 있소? 
 데미안이 물었다.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숙집 주인의 말에 따르면 그래요. 그는 만에 하나 추적당할 경우를 대비
해서  마리온 아담스 라는 여자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릴 이유가 없지. 당장 쫓아갑시다. 
 데미안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세요. 
 케이시가 대답했다.
  왜? 
  잭은 지금 그곳에 없어요. 내가 이미 확인해봤어요. 
 그녀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데미안과 챈도스는 못 먹을 것이라도 먹은 사람들처럼 인상을 썼
다.
  네가 벌써 확인해봤단 말이니? 
 챈도스가 먼저 말했다.
  그 말이 네가 그의 방문을 두들겨봤다는 뜻이라면, 내가 너를 호텔 방에 
감금시킬 줄 알아라. 
  아빠... 
  당신 혼자 잭을 체포하지 않겠노라고 이미 동의했잖소? 
 데미안이 다음 타자로 나섰다.
  케이시, 내가 절대로 당신을 내 눈 밖에 내놓지 않겠노라고 맹세했잖소. 
  제발 두 분 모두 그만 좀 할 수 없어요? 
 두 남자의 맹공에 시달린 케이시가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영웅적인 여주인공 노릇을 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잭의 방문을 두
드리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그의 방은 삼층 계단 옆에 있어요. 까다로운 하
숙집 주인이 그가 외출했다고 말해줬지만, 나는 그저 확인할 요량으로 그의 
방문에 돌을 던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그가 밖으로 나오는지 기다렸어요. 
하지만 인기척이 없었어요. 그래서 의심을 사지 않도록 그 돌을 도로 주워서 
밖으로 나왔다구요. 
  당신이 그곳에 있는 동안, 그가 돌라와서 당신을 알아보고 뒤를 밟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소?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빨리 돌아왔어야지. 
 데미안은 여전히 그녀의 안전을 염려하며 오만 가지 걱정을 다 했다.
 케이시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모자에 달린 베일을 내렸다. 두꺼운 베일은 
그녀의 얼굴을 감쪽같이 가려줬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하지만 그는 이런 내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예
요. 
  좋소. 
 데미안이 마침표를 찍듯 그녀의 논리를 인정했다.
  하지만 난 아침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소. 내가 그곳에 잠복하고 있다가 놈
이 돌아오면... 
 하지만 데미안의 목소리는 고개를 가로젓는 케이시의 모습에 점점 잦아들
었다.
  왜 반대하는 거요? 
  하숙집 내부는 굉장히 어두워요. 그의 침실 복도 맨 끝에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데다 그나마 다른 건물과 면하고 있기 때문에 훤한 대낮에도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요. 게다가 삼층 복도의 램프가 부서졌어요. 아마 잭은 촛불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릴 거예요. 그뿐이 아니에요. 모든 방에는 출입구가 두 
개씩 달렸어요. 하나는 보통 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숙집 뒤쪽으로 통하는 비
상 출구예요. 내가 건물 뒤쪽을 확인한 바에 의하면, 잭이 도망갈 경우 몸을 
숨길 곳이 매우 많아요. 그리고 비상 출구 계단으로 이층만 올라가면 지붕과 
통하니까, 그로서는 어둠을 틈타 도망칠 길이 무궁무진한 셈이죠. 하지만 아
침이나 대낮이라면 그렇게 쉽게 도망치지 못할 거예요. 
 데미안은 포기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챈도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다.
  우리 딸은 바늘로 찔러도 들어갈 틈이 없다네. 
  네, 정말 그렇습니다.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55-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호텔은 여전
히 조용했고 거리 또한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잭이 여전
히 잠자리에 있기를 기도했다. 무엇보다 데미안은 문짝을 부수는 데 대가였
고, 그보다 더 효과적인 기습 공격도 없었다.
 챈도스는 비상 출구를 맡겠다고 나섰다. 케이시로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녀와 데미안, 둘이서도 모든 상황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
가 이미 곁에 바싹 붙어 있는 마당에 뿌리칠 만한 방법이 없었다.
 케이시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거치적거리는 드레스 대신 청바지를 입
었다. 그리고 북쪽 지역인 시카고는 서부 날씨에 비해 따뜻한 의상을 요구했
기 때문에 판초 대신 목장에서 입던 두툼한 재킷을 가져왔다. 
 그들은 무슨 문제가 일어나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최소한 케이시는 그랬다. 
잭은 텍사스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 총잡이를 고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잠든 
그를 사로잡는다면 아침식사 때에 맞춰 호텔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
었다. 
 케이시가 시카고에서 임대한 마차가 잭의 하숙집에 도착할 즈음, 태양이 동
녘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챈도스는 건물 앞쪽과 뒤쪽을 모두 감시할 수 있
는 골목에 자리를 잡았고, 데미안과 케이시는 재빨리 3층으로 올라갔다.
 데미안이 라이플을 소지한 반면, 케이시는 대도시에서 권총집을 차는 기분
이 어색했기 때문에 6연발 권총과 여분의 탄약을 재킷 상의에 넣었다. 잭의 
방문에 이르자, 그녀는 총을 꺼냈다.
 방 안에서는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문 아래로 흘러나오는 불빛도 없었다. 
데미안은 자세를 잡고 케이시의 동향을 살핀 다음, 어깨로 방문을 힘차게 밀
었다.
 문이 즉시 열렸다. 데미안은 바닥에 나뒹굴기 전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
지만 방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소지품은 있었지만, 잭 본인은 어디에도 보이
지 않았다.
 케이시가 여기저기 확인하는 동안 데미안이 투덜거렸다.
  놈이 어디에 있단 말이야? 
 케이시는 할말이 없었다. 데미안의 좌절감은 케이시보다 한층 더했다. 그때, 
희미하게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추운 북쪽 도시에는 살지 않
는 새였다.
  우리 아버지예요. 
 케이시가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입을 열었다.
  뭐? 
  아버지가 뭔가 발견하신 게 틀림없어요.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요! 
 케이시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데미안도 잔말하지 않고 냅다 뛰었다. 그는 긴 다리로 붕붕 날 듯이 달려 
그녀보다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잭의 하숙집을 뛰어나온 케이시에게 챈도스
가 서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금은 한가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계
제가 아니었다.
 케이시는 아버지가 모는 마차로 달려갔다. 구보에만 익숙한 마차용 말이 챈
도스의 다그침에 속도를 올렸다. 데미안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마차에 태웠
다. 케이시는 겨우 자리에 앉아 숨넘어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챈도스는 아무 말 없이 앞쪽을 가리켰다. 그들처럼 무모하게 달리는 마차 
한 대가 쉽게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녀
는 마부석에 앉은 아버지와 가까운 반대편 좌석으로 가서 아버지의 어깨를 
두들겼다.
 챈도스가 고개를 돌려 케이시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켰다. 그는 소리
쳤다.
  저 녀석이 우리 중 누구를 알아봤는지 모르겠다만, 난 녀석이 지나가는 마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목격했어. 아마 녀석은 집에 있다가 뭔가 수상쩍은 기
미를 눈치채고 서둘러 나간 모양이야. 내가 골목에서 거리로 나갔을 즈음, 
놈이 마부를 마차에서 떠밀고 저만큼 달려가더라. 그 뒤에서 불쌍한 마부는 
다리가 부러졌다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하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도 저 녀석처럼 미친 듯 말을 달려야 하나요? 이건 너무 위험
해요! 
 케이시가 소리쳤다.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이른 시간에도 거리는 교통 체증을 겪고 있었
다. 배달 마차, 거리를 횡단하는 사람들, 크고 작고 아담하고 널찍한 마차들
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잭은 다른 마차와 충돌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 
혼잡한 거리를 일직선으로 뚫고 미친 듯 달려가고 있었다. 덕분에 뒤따라가
던 케이시의 마차는 이미 뚫린 길을 마음놓고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저기에서 화난 마부와 행인들의 욕설과 저주가 쏟아졌다. 
  네 말이 옳다. 그리고 이 늙은 말은 오래 달리지 못할 거야. 
 챈도스가 말했다.
  난 거리를 좁힐 테니, 너는 그를 쏘아 맞힐 준비를 하거라.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권총으로 잭을 쏘아 맞히라고?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케이시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데미안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아버지 말씀을 들었어요? 
  데미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라이
플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 난 과녁을 명중시킬 방법
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 라이플을 어깨에 단단히 받칠 수 있잖아요. 우
선 그의 머리를 겨냥해요. 그에게 제정신이 남아 있다면 무고한 시민이 다치
기 전에 마차를 세울 거예요. 
 데미안은 아무 대답하지 않고 발사 자체를 취했다. 라이플이 있는 한, 굳이 
마차 거리를 좁힐 필요가 없었다. 권총과 달리 라이플은 두 마차 사이의 간
격을 무시해도 될 만큼 화력이 강했다. 
 데미안이 첫 발을 쏘았다. 하지만 잭은 마차를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발사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마차를 샛길로 몰았다. 
 말은 제 속도를 유지하며 방향을 틀 수 있지만, 마차는 사정이 달랐다. 덩
치가 큰 마차가 돌연한 방향 전환을 견딜 리 만무했다. 결국 마차는 옆으로 
전복되고 말았다.
 잭은 말고삐를 잡은 채 마부석에서 튕겨진 상태로 몇 미터를 질질 끌려갔
다. 말이 결국 멈췄다.
 쓰러진 잭이 남은 운동량에 의해 달려오는 마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마차가 
옆길로 비껴가야 했다. 하지만 요행으로 그렇게 되었던들, 잭에게는 큰 차이
가 없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으니까.

  -56-
 데미안 루트리지가 경찰 조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케이시는 이미 
짐을 꾸리고 있었다. 호텔 측은 고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기차 시간표
를 제공했는데, 텍사스로 가는 다음 기차가 그날 오후에 있었다.
 케이시는 부모님께, 이미 떠날 결심을 했으니 말리지 말라고 했다. 모든 상
황을 고려한 챈도스와 코트니는 딸의 결심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
은 이번 여행에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희망했다, 최소한 그녀의 어머니는 
그랬다.
 챈도스는 여전히  결론이 나올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겠다 는 식이었다. 즉, 
데미안이 케이시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모습을 볼 때까지 데미안을 좋아하
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
성은 거의 없었다.
 케이시는 이번에도 이별을 너무 서두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데
미안에게 잭 이외에 다른 것, 그러니까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데미안 마음에서 잭 커루더스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위험한 도박을 걸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데미안에게는 그
녀와 결혼을 결부시켜 생각하는 기미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녀에게 한두 번 눈치를 준다든지, 최소한 잭을 잡은 다음에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귀띔할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 이틀 더 미적거려봐야 무
슨 소용이 있을까? 케이시가 아는 데미안이라면 좋아라고 오늘 당장 동부행 
기차를 타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어쨌든, 데미안은 그녀에게 와서 경찰과의 일 처리를 낱낱이 보고하고 연방 
보안관직을 공식적으로 사퇴했다는 사족까지 덧붙였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
오지 못한 채 문 밖에 서서 말했다. 하지만 말이 끝날 즈음, 그녀의 어깨 너
머로 침대 위에 헝클어진 옷가지와 여행가방을 발견했다.
  떠날 생각이오? 이렇게 빨리? 
  그러면 안 되나요? 
 데미안은 양손을 주머니에 쿡 찔러 넣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 되긴 왜 안 되겠소? 흥, 당신은 이번에도 작별인사를 생략할 참이었
소? 
  내 기억이 옳다면 당신은 나에게 잭을 잡는 데,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리고 이제 그 목표는 이뤄졌으니, 그만하면 작별인사로 충분하지 않나요? 
 데미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끔 당신이란 여자는 이 세상에서 제일 짜증스럽고... 
  내가 뭘 어쨌다고 이 난리예요? 
 케이시가 얼굴을 찡그리고 그의 말을 잘랐다.
  됐어, 됐다구. 
 데미안은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려서 휘적휘적 가버렸다.
 케이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게 그녀에게 화를 내는 데미안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남은 평생을 데미안과 함께 깨가 쏟아지게 살고 싶었는데..., 그 꿈은 
사라졌지만 이별의 뜻으로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데미안...? 
 그는 재빨리 몸을 들려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녀는 몇 초 동안 뜸을 들이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숨을 죽이고 케이
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이 잭의 일로 정신이 없는 동안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
만 지금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없어 보여서 하는 말인데..., 당신 어머니가 
방까지 당신을 따라왔던 날... 
 어머니에 대한 언급에 데미안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요? 
  데미안, 돌아서서 나가시던 그분 눈가에 눈물이 어렸어요. 
 데미안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케이시가 재
빨리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그건..., 어머니께서 당신에게 강한 감정을 지녔다는 표시예요. 
당신이 시카고를 떠나기 전에 그 감정을 확인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 
그분 주소가 있어요. 내가 뻔뻔스럽게 나서서 미안해요. 
  나와 함께 가주겠소? 
 그런 청을 예상치 못한 케이시는 멍하니 데미안을 바라봤다.
  왜요? 
  나 혼자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케이시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좋아요. 지금 갈까요? 
  지금 갑시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이 변할 거야. 

  -57-
 케이시는 며칠 전 호텔에서 데미안의 어머니를 만난 후에 시간을 내서 그
분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마가렛은 두 번째 
남편 가문의 소유였고 지금은 그녀의 것이 된 갈색 사암 저택에서 혼자 살
고 있었다.
 마가렛은 소위 사교계의 명사로 유명하지만, 가까운 친구는 한 명도 없었
다. 최소한 케이시의 질문을 받은 몇몇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 결혼에서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죽은 이후 삶을 포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혼자 집에 틀어박혀 지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케이시는 데미안의 어머니 집으로 가는 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마가렛의 진면목이 드러나기도 전에 데미안이 어머니에게 공연한 연민을 
품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점심식사를 방해하기 딱 좋은 정오경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예의를 차려 다른 시간으로 방문을 미룰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
리고 마가렛이 집에 있으면서도 아들을 거부할 경우를 대비하여 권총까지 
챙겨왔다. 정말 집에 없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되겠지만. 과연 데미안이 
다시 이곳을 방문할지의 여부는 극히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마가렛은 집에 있었다. 집사가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하고 기
다리라고 전했다. 뼛속까지 완벽한 집사였다. 그는 데미안의 이름을 듣고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데미안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
긴 왜 그렇지 않겠는가? 마가렛이 최근 남편의 집에서 깨진 과거의 결혼 이
야기를 할 이유가 없잖은가.
 몇 분 후, 마가렛은 숨이 턱까지 차서 응접실로 달려왔다. 아들의 방문을 
믿지 못하고 달려온 기색이었다. 벽난로 옆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한 그녀의 
얼굴에 기쁨과 환희가 감돌았다. 케이시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아들만 바라봤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녀는 데미안에게 좋아하는 기색이 없음을 알아차렸
다. 그는 양손을 뒷짐진 채, 판자처럼 뻣뻣하게 서 있었다. 데미안의 표정은 
방어적인데다 눈에 비통함과 분노까지 어려 있었다. 이제 마가렛의 표정이 
슬픔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시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아, 회색 벨벳 치맛자락을 평평하게 펴고 
권총이 담긴 손지갑을 무릎 위에 올려놨다.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아
쉬움이 가슴에서 솟았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할 때가 이니라 모자가 말문을 
열 계기를 만들어줘야 할 때였다.
 케이시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약간 수다를 떨었다.
  부인, 저는 데미안의 친구인 케이시 스트래튼이라고 합니다. 저이는 당신에
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한답니다. 
 데미안에게 칼자루를 쥐라는 뜻으로 보낸 신호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
았다. 그  몇 가지 질문 을 한참 기다리던 마가렛이 아들에게 입을 열었다.
  무슨 질문이니? 
 케이시가 데미안에게 눈짓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케이시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생각만큼 분위기가 술술 풀리지 않았
다.
  부인께서 이혼을 원한 이유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케이시가 보다못해 다시 나서자, 데미안이 반응을 보였다.
  난 이미 어머니가 왜 이혼을 원하셨는지 알고 있소. 
 마가렛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냐, 네가 알 리 없어. 최소한 전부는 아닐 거야. 내가 네 아버지를 사랑
하지 않았던 건 아니란다. 그래, 사실 그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매우 좋아했
어. 우리 결혼은 혼기가 찬 처녀 총각이 별 다른 대안 없이 압력을 견디다 
못해 추진한 것이었단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양측의 편의를 위한 
결혼이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어요. 
 데미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내 감정은 그런 식이 아니었어. 난 그저 모든 
게 다 잘되겠지, 많은 여자들이 이렇게 충족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겠거니,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단다. 하지만 그 즈음, 내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어주는 사람을 만났단다. 나는 그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그 이후로 네 아
버지 곁에 머물 수 없었어. 그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치 못한 처사였
어.   
  그래서 10년에 걸친 결혼 생활과 자식을 내팽개쳤군요. 
  딱 한 사람만 비참하면 되는데, 내가 네 아버지 곁에서 머물러서 우리 세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옳았겠니? 
  딱 한 사람? 이제야 어머니가 그 당시 나를 고려 대상에 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겠군요. 
 마가렛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지 않아! 데미안, 나는 너를 데리고 가려 했어. 그렇게 하고 싶었어. 
하지만 네 아버지가 너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고, 네가 아버지에게 
영향을 많이 받을 나이라는 것도 알았단다. 이혼이란 비수로 네 아버지 가슴
에 상처를 남긴 마당에 너까지 데려갈 수 없었어. 
  좋아요, 그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한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은 이유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했을 뿐 아니
라 나와도 인연을 끊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편지도 쓰지 않고, 만나러 오지
도 않을 만큼 내가 그렇게 하찮은 존재였습니까?
  아, 네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구나? 
 데미안이 인상을 썼다.
  아버지가 나에게 무슨 말을 안 하셨다는 거죠? 
  네 아버지는 나에게 너를 절대로 만나지 말라는 약속을 받아내셨단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데미안, 내 말은 진실이란다. 그게 네 아버지가 내건 이혼 조건이었어. 하
지만 그분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거라. 나름대로 너를 보호하기 위해 궁리해
낸 방법이었으니까. 나는 네 아버지 마음을 이해한단다. 나와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네가 도 다른 상처를 받지 않고 그 시련을 잘 극복하길 원하셨던 
거야. 하지만 네가 나이가 찬 뒤에는, 너만 좋다면 만나도 좋다고 허락하셨
단다. 그러나 넌 한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더구나.  
 그녀의 말은 애처로웠다.
  아, 당시의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지 못한 나 역시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구나. 너를 다시 만나지 말라는 요구는 나에게 너무 심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차례씩 너를 먼발치에서 지켜볼 생각으
로 뉴욕으로 갔단다. 너를 만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약속을 진킨 셈이지. 
심지어 네가 다 커서 루트리지 상사에 들어간 후에도 나는 그 여행을 중단
하지 않았어. 나는 회사 맞은편 작은 카페에 앉아 네가 퇴근하는 모습을 지
켜보곤 했단다. 한번은 늦게까지 일이 있었던지 네가 그 카페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단다. 나는 네가 날 알아보기만을 기다렸지만, 너는 다른 일로 
정신이 없었어. 그리고 또 한 번은 네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면서 몇 시간이
고 마차를 타고 회사 주변을 빙빙 돌았어. 마침내 회사에서 나온 너는 바쁜 
사람처럼 내가 탔던 마차를 세우려고 했어. 나는 마부를 닦달해 그 장소를 
황급히 피했단다... 
 케이시는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지금은 오랜만에 상봉한 모자의 사
적인 순간이었다.
 데미안은 원하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데미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머니 말끝에, 데미안 눈에 맺힌 눈물이 그 말을 믿는다
는 증거였다.
 케이시도 울었다. 많이 울었다. 옷깃이 젖도록.

  -58-
 궂은 일 다음에는 좋은 일이 온다.
 데미안은 호텔로 달려가는 길에 그 속담을 되뇌었다.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
아라.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다 원하는 마음을 누를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와 대화를 마치고 나자, 그 동안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던 짐이 사라
지고 해방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항상 해왔던 생각처럼 어머니에게 버림받
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 온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딱한 번의 포옹으로 
그 동안 맺힌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들은 앞으로 서로 왕래하며 살자
고 약속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케이시의 문제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또 그를 놔
두고 떠나버리다니!
 케이시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어머니 댁을 나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마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간 다음에 데미안을 위해 
다시 마차를 돌려보냈다. 전하는 말도 없었다.
 또다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데미안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호텔로 달려갔다. 하지만 케이시는 
이미 숙박료를 계산하고 기차역으로 떠난 뒤였다. 그의 곁을 떠났다.
 이번에도 데미안은 잭을 쫓을 때처럼 눈이 뒤집혀 역으로 달려갔다. 대도시
의 혼잡한 교통난 때문에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마부에게 어마어마한 팁을 던져줬다.
 간신히 역에 도착했을 즈음, 남행 열차가 출발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
만 다른 기차를 기다리는 인파에 파묻혀, 스트래튼 일가는 쉽게 보이지 않았
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데미안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온 사람은 챈도스였
다.
 챈도스는 덤덤한 표정과 달리 그를 이곳에서 만나 놀랍다는 식으로 말했다.
  케이시가 자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고 하던데. 한 번으로는 부족했나? 
  케이시의 작별인사는 내 방식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업
신여기는 당신 따님에게 뭘 바라겠습니까? 
 챈도스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 아이가 업신여기는 사람을 사랑할 것 같은가? 
 데미안의 심장이 뚝 떨어졌다.
  케이시가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자네가 직접 물어야 할 질문 같은데.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망할 남자 같으니.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챈도스가 철로 끝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기차의 맨 마지막 차량 옆에서 
케이시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었다. 그럴 리 없겠지. 설마?
 저 모녀는 집에 가게 된 기쁨을 나누고 있으리라.
 챈도스가 말했다. 
  이 나라의 심장부까지 멀리 와보기는 처음이었네. 자네가 이곳에 살아야 
할 필요가 없으니, 대도시에 대한 긴 소감은 생략하겠네. 하지만 텍사스에서
는 번잡스러움을 잊고 살 수 있어. 그리고 매연으로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공기도 호흡할 수 있지. 
 시간이 있다면-빌어먹을 기차가 또 경적을 울렸다-데미안은 챈도스의 의견
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케이시가 기차에 
타기 전에 그녀를 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그가 코트니에게 인사했다.
  남편이 나를 부르는 것 같군요. 잠깐 실례하겠어요. 
 코트니는 두 사람만 남겨두고 자리를 피했다.
 데미안은 굳이 그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코트니가 떠나자마
자, 데미안은 케이시를 와락 껴안고 거친 키스를 퍼부었다. 그 키스에는 좌
절감과 케이시,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오래 전에 이렇
게 했어야 했어.
  이게 바로 적절한 작별인사요. 
 그가 몸을 떼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케이시는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난 작별인사를 많이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요. 그리고 난 이별이란 게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아. 
 그가 투덜거렸다.
  그러세요? 
  케이시,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혀가 꼬였다. 그래서 넌지시 돌려 말했다.
  나는 당신 고향이 좋소. 그래서 그곳에 루트리지 상사의 지사를 차리면 어
떨까 생각해왔소. 
 그녀가 눈을 깜박거렸다.
  정말이에요? 
  그렇소. 그리고 내가 와코로 이사를 가면, 당신이 나에게 기회를 줄지도 궁
금하오. 
  당신에게 기회를 줘요? 우리 집에 올 기회? 
 불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케이시가 반문했다.
  난 당신 집에 머물겠다는 뜻이 아니야, 케이시. 언젠가 나는 용기를 내서 
당신에게 청혼할 거요. 그리고 우리는 멋지고 긴 구혼 기간을 거쳐...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케이시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며, 데미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에 그 이상으로 바라는 게 없소. 
 케이시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데미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는 깎아지
른 듯한 벼랑에서 줄타기를 하는 심정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특유의 단정적인 어조가 튀어나왔다.
  구애 따위는 집어치워요. 나에게 청혼하세요, 지금 당장. 
 데미안은 숨을 멈췄다.
  진심이오? 
  빨리 말하라니까요. 
  나와 결혼하겠소? 
  아, 그럼요. 좋아요! 
 케이시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좋아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데미안 또한 마음놓고 웃었다.
  케이시,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일은 생전 처음이요. 당신은 지금 내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소. 나와 결혼해달라는 말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낼 시간이 필요했소. 하지만 컬더스에서 돌아
오는 길에 그 말을 할 계획이었는데, 당신이 그만 먼저 떠나버린 거요. 
  데미안, 아무래도 우물쭈물하는 당신 버릇을 손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나
는 너무 비참해서 당신 곁을 떠난 거예요. 그 당시 당신이 지금과 똑같은 표
정을 지었더라면, 난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을 텐데. 그때도 내 대답은 지금
과 똑같았어요. 나는 이미 당신과 대책 없는 사랑에 빠져 있었단 말이에요. 
 데미안은 뼈가 으스러지도록 케이시를 끌어안았다.
  정말 미안해. 
  사과하지 마세요, 이 어리석은 신출내기. 난 사랑 문제에 있어서만은 당신
과 똑같이 신출내기예요. 나도 내 감정을 밝혔어야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에
게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 비참해해도 늦지 않았을 거란 뜻이
에요. 하지만 난 당신처럼 진실을 확인하기가 두려웠어요. 그건 나에게 너무 
중요했거든요. 그러므로 욕을 먹을 사람은 우리 두 사람 다예요. 
  아니, 그렇지 않아. 우리가 함께 비참했던 그때를 기억하며 그런 일이 벌어
지지 않도록 노력하면 돼. 
  아, 그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약속이에요. 난 꼭 지키겠어요! 
 데미안의 부드러운 입맞춤 속에는 그 이상의 약속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바로 꺼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키스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코트니가 기뻐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가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네요. 
 챈도스는 미소 띤 시선으로, 열렬한 키스를 나누는 케이시와 데미안을 바라
봤다.
  그렇지? 
 코트니는 걱정스러운 듯 남편에게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저 청년을 몰아세우지만 말고 스스로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나 말이오? 
 챈도스는 아내를 향해 빙긋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그 이외에 무슨 생각을 했겠소? 
  행여나 그러셨겠어요. 
 코트니가 숨을 죽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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