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강호 제 1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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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멸문(滅門)
싱그러운 꽃내음이 봄의 훈풍(薰風)에 실려오는 남국(南國)의 봄날이었다.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서문대가(西門大街)의 청석판로(靑石板路)를 쭉
따라가면 서문에 다다른다. 웅장한 저택앞에, 이장(二丈)높이의 깃대가 좌우 양쪽
의 돌계단위에 서있고, 깃대에는 푸른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오른쪽 깃발에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바짝 세운 용맹스런 숫사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바람에 깃
발이 펄럭이니 마치 사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위세가 있었다. 사자의 머리위
에는 날개를 퍼득이며 막 날아오를 듯한 한 마리 박쥐가 검은색 실로 수놓아져 있
었고, 왼쪽 깃발에는 [복위표국(福威標局)] 이라는 네글자가 검은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저택 대문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문위의 크고 작은 차종이 반짝거리며 금빛
을 발하고 있었다. 대문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에는 [福威標局] 네 글자가 금색으
로 새겨져 있고, 그아래 작은 글씨로 [총호(總號)]라 적혀 있었다. 대문앞에 긴 의
자가 양편으로 놓여져 있고, 8명의 건장한 무사(武士)들이 나뉘어 앉아 있었는데
꼿꼿이 앉아 있는 그들의 자세는 한결같이 용맹스러워 보였다.
그때 갑자기, 후원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리자 8명의 무사들은 일제히 일어나 대문
으로 뛰어들어갔다. 표국 서쪽 문에서 5기의 말이 뛰어나와 대문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선두에 선 말은 전신이 눈처럼 하얗고 말장식이 모두 은(銀)으로 되
어 있는데 안장에는 18세 가량의 비단옷을 화려하게 입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어
깨에는 잘 길들여진 사냥매가 앉아 있고 허리에는 보검을 차고 등에는 장궁을 메고
말을 몰아 나왔다. 그뒤에 4기의 말이 따랐는데, 모두 청색 짧은 옷을 입은 대한들
이 타고 있었다.
다섯 사람이 표국 입구에 이르자, 8명의 무사중 세명이 아뢰었다.
"소표두(小標頭), 또 사냥을 나가십니까?"
소년이 하하 웃으면서 말채찍으로 허공을 후려치자, 백마가 고개를 쳐들고 청석판
로(靑石板路)로 뛰어나갔다. 무사 한 명이 소리쳤다.
"사표두(史標頭), 오늘 멧돼지 한 마리 잡아와서 배에 기름칠 좀 합시다."
소년을 뒤따르는 40세쯤 되어 보이는 무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한 마리 잡아서는 꼬리 한 쪽도 자네에게 돌아갈게 없다네! 국물이나 실컷 마시
도록 하게"
사람들이 웃고 있는 사이에 5기의 말은 이미 멀리로 내달렸다.
성문을 벗어나자 소표두 임평지(小標頭 林平之)는 말을 더욱 빨리 몰아 순식간에
일행들과 거리를 벌리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산언덕에 이르자, 말을
세우고 사냥매를 날려 보내 숲속에서 한 쌍의 토끼를 발견했다. 그는 등에서 장궁
(長弓)을 하나 빼들고 안장옆의 전대(箭袋)에서 화살을 집어 활에 걸고 시위를 당
겼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토끼 한마리가 튀어올랐다 떨어졌다. 다시 한발을 쏘려
하니 나머지 한 마리의 토끼는 수풀속으로 도망쳐 보이지 않았다. 정표두가 말을
멈추고 웃으며 말했다.
"小標頭, 명중(命中)입니다."
그때 쟁자수(쟁子手), 백이(白二)가 왼쪽 숲속에서 소리쳤다.
"소표두, 빨리 오십시오. 여기 꿩이 있어요."
임평지는 말을 뒤로 돌려 숲속에서 꿩 한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한 발을 쏘
았으나 명중하지 않고 꿩은 그의 머리위로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는 급히 꿩을 쫓
아 말채찍으로 허공을 치니 퍽하는 소리와 함께, 오색 깃털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
렸다. 다섯 사람은 함께 호쾌하게 웃었다. 사표두(史標頭)가 말했다.
"소표두, 이번의 채찍질은 꿩이 아니라 수리라도 잡겠습니다."
다섯 사람은 숲속에서 새와 짐승을 쫓았는데 사표두, 정표두와 쟁자수, 백이, 진
칠(陳七)은 소표두를 흥겹게 하기 위해 그들 앞에 사냥감이 나타나 좋은 기회가 와
도 잡지않고 양보했다. 두어 시진 동안 사냥을 해서 임평지는 토끼 두 마리, 꿩 두
마리만을 잡았을 뿐, 멧돼지같은 큰 짐승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성에 차지 않아
"우리 앞쪽 산으로 가서 다시 짐승을 찾아봐요."
라고 했다.
사표두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다시 다른 산으로 들어가면, 소표두의 성미로 보아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가지 않
을 텐데. 우리들이 돌아가면 아마 부인의 원망을 듣게 되기 쉽지.)
생각을 굴리면서 그는 말했다.
"날이 곧 어두워질 것입니다. 산속에는 길이 험해서 말의 발목을 다칠지도 모르
니, 내일일찍 다시 일어나서 다시 와 멧돼지를 잡지요?"
그는 무슨말을 해도 소표두의 성미를 누그러뜨릴 수 없으나 소년이 백마를 매우
아끼므로 절대로 그말을 다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명마는 임
평지의 외할머니가 낙양(洛陽)에서 천금을 주고 사서, 이년전 그가 17세 되던 생일
날 선물로 준 것이었다. 과연 그는 말발굽이 상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말머
리를 쓰다듬으면서 애석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소설룡(小雪龍)은 매우 총명해서 날카로운 돌을 밟지 않지만 그대들의 말이
문제가될 것 같아. 좋아! 우리 돌아가자. 진칠의 엉덩이에 불이 나지 않도록 말이
야."
다섯 사람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임평지는 원래 왔던 길이 아니
라, 북쪽으로 말을 몰아 한바탕 신나게 달린후 흥이 다하자, 말고삐를 당겨 천천히
말을 몰았다. 앞쪽 길옆에 주점이 보였다. 정표두가 제안했다.
"소표두 우리 술 한잔 하는 게 어떻습니까? 신선한 토끼고기와 꿩고기를 구워 놓
으면 안주로 기가 막힐 텐데요."
임평지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나와 사냥하러 온 것이 아니라, 술 마시러 왔구먼, 오늘술을 사지 않는
다면 자네가 내일은 따라오지도 않을테니 하는 수 없지. 한잔 하세."
그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는 안장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려 천천히 주점으로 걸
어갔다.
예전같으면 주인 채노인(蔡老人)이 이미 나와 말고삐를 받으며 "소표두, 오늘은
몇 마리나 잡으셨나요. 활을 소표두만큼이나 잘쏘는 사람은 아마 당금 천하에 없을
겁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주점앞에 왔는데
도 술집안이 고요하고, 주로(酒爐)옆에 청의 소녀가 머리를 곱게 빗어 노리개를 꽂
고 있는옆모습만이 보이는데, 술을 거르느라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정표두가 소
리쳤다.
"채노인, 나와서 말고삐를 매지 않고 뭘하는 게요?"
백이, 진칠은 의자를 당겨 옷소매로 먼지를 털고 임평지에게 앉도록 권했다. 사표
두, 정표두가 임평지의 오른쪽에 앉았고,두명의 쟁자수가 따로 한자리를 차지했다.
안쪽에서 기침소리가 나더니 백발노인이 나와서 말했다.
"손님들 자리에 앉으시지요. 무슨 술을 드시겠습니까?"
말소리에 북방 사투리가 섞여 나왔다. 정표두가 말했다.
"술말고 차를 마시면 어떨까? 먼저 죽엽청(竹葉靑)을 세 근 가지고 와봐요. 채노
인은 어디 갔소? 뭐라구, 술집주인이 바뀌었다구요?"
그 노인이 대답했다.
"예, 예, 완아(宛兒), 죽엽청 세 근 가지고 오너라. 실은 저의 성씨는 설(薛)씨로
이 지방이 고향인데 어려서부터 객지에 나가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자식과 며느
리가 모두 일찍 죽고, 찢어지는 가슴을 달랠 길없어 이렇게 손녀를 데리고 고향으
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 떠난 지 40년동안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없어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침 이 술집을 하던 채노인이 장사를 그만두고 저에게 은
자 30냥에 술집을 팔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고향말씨를 들으니 말할 수 없이 반
가우나 저는 이미 고향말씨를 잊어버려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 청의 소녀는 머리를 숙이고 나무 소반을 받쳐들고 와서 임평지 등의 사람들 앞
에 술잔, 젓가락과 세개의 호로병을 놓고 머리를 숙이고 돌아갔다. 시종 손님들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임평지는 이 소녀가 몸매는 날씬하지만 살결이 검어 깨끗하지 못하고 얼굴에는 점
이 많아 용모가 볼품이 없어보이자 술집에서 장사하는 것이 서툴러도 신경쓰지 않
았다.
사표두는 꿩과 토끼 한마리씩을 설노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먼저 깨끗이 껍질을 벗긴 다음, 두개의 그릇에 나누어 볶아주시오."
"예, 예! 우선 우육(牛肉)과, 잠두(蠶豆), 화생(花生)을 드시고 계십시요."
완아는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벌써 우육,잠두 등을 탁자위에 내어 놓았다.
정표두가 말했다.
"이 임공자는 福威標局의 소표두일세. 의협을 떨쳐 소년 영웅으로서 명성을 날리
고 계시지. 만약 요리가 소표두의 입맛에 맞는다면 노인이 투자한 30냥은 한달안에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네"
설노인이 대답했다.
"예, 예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연신 인사를 하며 꿩과 토끼를 가지고 나갔다.
정표두는 임평지, 사표두와 자기의 잔에 술을 채우고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
키고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주인은 바뀌었어도 술맛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
그리고 또 잔을 부어 마시려 할 때, 갑자기 말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두 마
리의 말이 북쪽에서 관도(官道)위로 달려왔다.
두 필의 말은 매우 빨리 달려 순식간에 주점앞에 다다라서
"여기 술집이 있구나. 들어가서 한 잔 하지."
라는 소리가밖에서 들려왔다. 사표두가 말소리를 듣고 천서인(川西人)임을 알아차
리고 머리를 돌려보니 청색 장포(長袍)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주점앞의 큰 용나무
(榕木)밑에 말을 매고 술집안으로 들어와 임평지 일행에게 눈길을 흘끔 던지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일신에 청포를 걸쳐 사문을 표시하는 듯 했으나,
두 다리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신발을 신고 있었다. 사표두는 천인(川人)은 대
개가 이러한 복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리에 두른 흰띠는 제갈량이 죽은
해에 천인(川人)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머리에 둘렀던 것이 천년이 지난 뒤에도 여
전히 머리에 띠를 두르는 관습으로 전해졌다. 임평지는 그들의 복장이 매우 기이하
다고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저 두 사람이 文人인지 武人인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기
이한 차림새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두 사람 중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술을 다오. 술을 주오. 복건성에는 산이 많아 말도 지쳐버렸구나."
완아는 머리를 숙이고 두 사람의 탁자로 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술을 드시겠습니까."
작았지만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 젊은 무사는 움찔하더니, 갑자기 오른손
을 내밀어 완아의 턱끝을 받쳐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깝구만, 아까워 !"
완아는 깜짝 놀라서 급히 뒤로 도망쳤다. 또 한 명의 武士가 웃으면서 소리쳤다.
"여(余)형제,이 아가씨 몸매는 쓸만한데 얼굴은 점이 많아 마치 석류껍질같구료."
여(余)씨 성을 가진 사람도 따라서 크게 웃었다.
임평지는 비위가 상해 오른손으로 탁자를 쾅 두드리며 크게 소리쳤다.
"뭐라고, 눈도 없는 두마리 미친개가 복주땅을 더럽히고 있구나."
여씨 성을 가진 젊은 무사가 비웃으며 말을 받았다.
"여보게, 저사람이 욕을 심하게 하고 있구먼. 자네는 저 토끼같은 어린 사람이 누
구를 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
임평지의 용모는 그의 어머니를 닮아 미목(眉目)이 수려(秀麗)하고 품격을 갖추고
있어서 평소 그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는
데, 지금 토끼같은 어린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어찌 참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탁자위의 술병을 들어 그들의 머리를 향해 냅다 던졌다. 여씨 무사가 가볍게
피하니 술병은 주점 밖의 풀밭위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술은 땅위로 쏟아졌다.
사표두, 정표두가 몸을 일으켜 그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여씨 무사가 비웃으며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저 어린 놈이 함부로 설치니, 한 번 매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정표두가 소리쳤다.
"이분은 복위표국의 임소공자이시다. 너는 간이 얼마만하기에 누구에게 감히 덤비
려 하느냐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오른손의 무시무시한 일격이 그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여씨 무사는 왼손을 위로 가볍게 뒤집어 쳐오는 손목의 맥문을 잡아당기니 정표두
는 서있지 못하고 몸이 탁자를 향해 쾅하고 넘어졌다. 그 무사가 다시 왼손을 털듯
이 정표두의 목덜미를 내리치니 "읔"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정표두는 탁자위로 콰당
넘어졌고 사람과 함께 탁자도 뒤집어졌다.
정표두는 복위표국에서도 고수라 할 수는 없었지만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
었다. 사표두는 정표두가 그 사내의 가벼운 일초(一招)에 쓰러지자 상대의 무예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 차리고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 그대도 무림인일진데 어찌 福威標局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인가?"
여씨 무사는 냉소했다.
"福威標局 ? 나는 이때까지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게 뭐하는 것이냐?
먹는 것이냐? 마시는 것이냐?"
임평지가 몸을 날렵하게 위로 솟구치면서 소리쳤다.
"이 죽일 놈의 자식 !"
왼손이 눈부시게 뻗어나갔고,오른손이 연이어 왼손 밑으로 뻗어쳤다. 곧바로 가문
고유의 [번천장(번天掌)]중의 [운리건곤(雲裏乾坤)] 일초를 시전한 것이었다. 여씨
무사는 여전히 비양거렸다.
"어린 놈이 제법 몇 수를 알고 있구나."
그는 왼손을 휘둘러 공격해오는 주먹을 막으며 오른손으로 비스듬이 임평지의 어
깨를 잡아갔다.
임평지는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빼면서 갑작스러운 각도로 왼손을 격출시켰다. 여
씨 무사가 옆으로 피하자, 갑자기 임평지의 좌권(左卷)이 펴지면서 순간적으로 권
이 장(掌)으로 변하며 [무리간화(霧裏看花)] 일초를 펼치자, 퍽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몸통에 격중했다. 여씨 무사는 한 번 몸을 휘청하고 크게 노하여 발로 임평
지를 공격했다. 임평지도 우측으로 피하면서, 역시 발로 수비와 공격을 겸했다.
이때 사표두도 이미 가(賈)씨 무사와 한창 싸우고 있었고, 白二는 정표두를 부축
하고 있었다. 정표두는 큰소리로 욕을 하며, 여씨 무사를 공격해 갔다. 임평지가
그를 막으면서 말했다.
"사표두를 도와주시오. 이자는 내가 맡겠소."
정표두는 소표두의 호승심(好勝心)이 매우 강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원치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손을 거두고 방향을 바꾸어 가씨 무사의 머리를 향해 공격해 갔다.
두 사람의 쟁자수는 문밖으로 도망쳐 한 명은 말안장에서 임평지의 보검을 빼어들
고, 한 명은 사냥용 창을 들고, 여씨무사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욕을 했다.
표국의 쟁자수는 무예는 평범하지만 표호(標號)를 항상 소리쳐 왔기 때문에 목소
리가 매우 크다. 두 사람은 모두 복주사투리로 욕했기 때문에 두 명의 서천인은 한
마디도 알아 듣지 못했지만 좋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임평지는 부친이 직접 가르쳐준 [번천장]의 일초(一招), 일식(一式)을 차례대로
펼쳐 갔다. 그는 평소에 표국의 표사(標師)들과 무예를 겨루어 늘 이기곤 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전수받은 무예가 뛰어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 표사들 중 누구도
이 소년 주인에게 전력을 다하지 않고 양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처를
입은 경험은 다소 있지만 이번처럼 목숨을 걸고 싸운 경험은 매우 적었다. 비록 복
주성 안팎에서 몇몇 악한들과 싸운 적이 있지만 그 시정잡배들의 무예로 어찌 임씨
집안의 절예에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 삼초양식(三招兩式)을 쓰기도 전에 눈이 퍼
렇게 멍이 들고 코가 깨져서 그들은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가곤 했었다. 그러나 이
번에는 솜씨를 뽐내어 10여초(招)를 격돌했는데 이미 임평지의 오만함은 점차 꺾여
가고 상대방의 솜씨는 더욱 교묘해져서 이 소년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
은 자세를 풀고, 비웃으며 말했다.
"소형제 자넨 보면 볼수록 예쁜 여자같기만 하이. 아가씨가 남장을 한 것 같단 말
씀이야! 얼굴이 볼그스럼한 게 제법 향기로운 숨결까지 내뿜으니 다치도록 때릴 수
가 있나. 우리 심하게 다투지는 말도록 하세."
임평지는 더욱 화가 치솟았다. 사 정표두를 바라보니 그들은 가(賈)씨 무사와 싸
우고 있는데, 여전히 수세에 빠져있었다. 정표두의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옷에는
선혈이 묻어 있었다.
임평지가 갑자기 장(掌)을 뻗어 싱글거리고 있는 상대를 치니 퍽소리와 함께 여씨
무사에게 주먹이 격중했다. 이번의 한 수는 매우 힘을 쓴 공격이어서 그는 대노하
여 소리쳤다.
"은혜를 모르는 놈. 생기길 여자같이 생겨서 사정을 봐주었더니 천지를 모르고 함
부로 날뛰는 구나."
권법이 일변하며, 갑자기 강풍이 몰아치듯 임평지의 아래 위에서 공격이 몰아닥쳤
다. 두 사람은 주점 밖으로 나와서 싸우고 있었다.
임평지는 상대방의 주먹이 뻗어오는 것을 보자 부친이 가르쳐준 어(御)자결을 기
억해 내어 왼손을 뻗어 적의 권풍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은 거세고 교
묘했으니 공격을막지 못하고 가슴에 일권을 맞았다. 임평지의 몸이 휘청거렸고 목
은 이미 그의 왼손에 잡혔다. 그는 팔에 힘을 가해 임평지를 아래로 꾸부리게 하고
는 연이어 오른팔로 [철문감(鐵門鑑)]을 펼쳐 목덜미위를 누르며 광포하게 웃었다.
"이놈아! 나에게 세 번 절하며 세 번 '좋은 아저씨 좋은 아저씨, 잘못 했어요!'라
고 하면 놓아주겠다."
사 정표두가 깜짝 놀라서, 상대방을 젖히고 나아가 구하려 했으나, 가씨 무사가
막아서는 바람에 나아갈 수도 없었다. 쟁자수 白二는 사냥용 창을 들고 여씨 무사
의 등을 향해 찌르며 큰소리를 쳤다.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네 놈은 도대체 목이 몇 개나 된단 말이냐..."
여씨 무사가 왼쪽 발을 떨쳐 돌려차니 찔러오던 창이 수장 밖으로 멀리 날아갔고,
이어서 오른쪽 발을 날리니 백이는 땅위를 몇 바퀴 굴러 나가떨어져 한참동안 일어
나지도 못했다. 진칠이 큰소리로 욕을 했다.
"이 죽일 잡종 놈아 !"
욕을 한마디하고는 한 걸음 물러서고 몇 마디하고는 몇 걸음 물러서곤 했다. 여씨
무사가 계속 놀렸다.
"아가씨, 절을 할 거요. 안할 거요?"
팔에 힘을 가하니 임평지의 머리는 점점 숙여져, 이마가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임평지는 주먹으로 그의 배를 치려 했으나 계속 간발의 차로 칠 수 없었다. 목은
아파서 부러질 지경이었고, 눈에는 별이 번쩍이고, 귀에는 윙윙하는 소리만 들렸왔
다. 그는 두손을 마구 휘두르다가, 자신의 종아리 근처에서 딱딱한 물건을 집어들
고, 엉겁결에 혼신의 힘을 다해 앞으로 뻗어 여씨 무사의 배를 찔렀다.
여씨 무사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풀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참담
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배에는 한 자루의 비수가 칼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
게 꽂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석양이 배에 꽂힌 칼자루에
반사되어 번쩍이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고
손을 뻗어 비수를 뽑으려 했으나 기운이 달렸다.
임평지도 놀라서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그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가씨 무사와 정 사표두도 싸움을 멈추고, 경악에 찬
눈으로 여씨 무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고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뽑으려 애를 쓰니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만 보여,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여씨 무사가
힘겹게 말했다.
"가형(賈兄), 가형, 아버지에게 전해서 복수를, 복수를......"
그는 오른손을 젖혀 비수를 뽑아 던졌다. 가씨 무사가 부르짖었다.
"여형제(余兄弟), 여형제."
그가 급히 곁으로 뛰어갔지만 여씨 무사는 땅위에 넘어지더니 몸을 몇 차례 부르
르 떨다가는 곧 멈추어버렸다.
사표두가 낮은 소리로 으르릉거렸다.
"저놈도 죽여야 한다."
그는 급히 말옆으로 가서 칼을 빼들었다. 그는 강호의 경험이 풍부하여 이미 피를
본 이상 가씨 무사도 살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씨 무사는 임평지를 잠시 노려보고는 비수를 주워들고 뛰어가 말위로 훌쩍 올라
타고 말재갈이 풀리지 않자 비수로 끊어버리고 말을 몰아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진칠은 시체 곁으로 가서 발로 툭툭차서 뒤집으니 입에서 선혈이 콸콸 흐르는 것
을 보고는 표독스럽게 씹어뱉었다.
"우리 소표두께 죄를 짓고 살아남을 것 같으냐 ! 죽어 마땅한 놈, 잘 죽었다."
임평지는 지금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사표두, 어떻게 해야하지 ? 나, 나는 죽일 생각은 없었어."
(복위표국이 3대째 장사를 해오면서 강호에서 사람을 죽인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죽인 사람이 모두 흑도의 인물들이었고, 또 깊은 산중에서 죽여버리고 그대로 매장
하였기 때문에 관가에 그일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죽인 사람은 도적
이 아니고 게다가 표국의 소표두가 사람을 죽였으니 일이 골치 아프게 될지도 모르
겠구나.)
사표두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체를 빨리 술집으로 옮기자. 여기서 큰길이 가까우니 사람들 눈에 띌지 몰라."
마침 해가 넘어가고 있는 때여서 도로에 다른 행인은 없었다. 백이와 진칠이 시신
을 술집안으로 옮겼다. 사표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표두 은자가 좀 있습니까 ?"
임평지가 급히 대답했다.
"있어, 있어, 얼마나 있어야 할까 ?"
그는 품안에서 은자 20여냥을 꺼내어 놓았다.
사표두는 돈을 받아들고, 술집으로 들어가 탁자위에 돈을 놓고는 설노인을 향해
말했다.
"설노인, 저 사람이 당신 손녀를 희롱하는 것을 우리 공자께서 보시고 당신 손녀
를 도와 주려다 우연히 사람을 죽여버렸소.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직접 눈으로 본 사
실이오. 이일은 당신과도 관계가 있으니, 말이 새어나가면 당신도 이로울 게 없소.
여기 돈을 드릴 테니 우리 함께 시신을 묻읍시다. 그리고 뒷일은 다시 천천히 생각
하도록 합시다."
설노인이 황망히 대답했다.
"예, 예, 알았습니다."
정표두가 겁을 주면서 덧붙였다.
"우리 복위표국이 장사를 하면서 녹림의 도적 몇 명 죽이는 것 쯤은 흔히 있는 일
인데, 내가 보기에 저 두 놈은 강양(江洋)의 도적의 괴수인데 복주에 일을 벌리러
온 것 같다. 우리 소표두께서 훌륭한 무공으로 저 놈을 가볍게 처리하여 복주를 편
안하게 했으니 이는 표창을 받을 일이지만 우리 공자께서는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허명(虛名)을 원치 않으셔서 이렇게 처리하는 것일세. 노인장, 만일 비밀을 발설할
시에는 당신도 저자들과 같은 패라고 여길 것이오. 그러니 알아서 하시오."
설노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알았습니다.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사표두는 백이, 진칠을 데리고 시신을 술집뒤의 채소밭에 묻고 또 술집 문앞의 혈
혼을 깨끗이 없앴다. 정표두가 설노인에게 다시 으름짱을 놓았다.
"열흘동안 비밀이 새나가지 않으면관값으로 은자 50냥을 보내 주겠소. 만약 당신
이 입을 놀리고 다닌다면, 그때는 목숨을 보전키 어려울 것이오. 우리 손에 죽은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는데 당신과 손녀를 죽인들 채소밭에 시체가 두 구 늘어나는
것 밖에 별일이 아니오."
설노인이 계속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절대로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모든일을 처리 했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임평지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표국으로 돌아왔다.
대청(大廳)으로 들아서자. 부친이 태사의(太師椅)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보였다. 임평지는 좋지않은 낯빛으로 "아버지"하고 불렀다.
임진남(林震南)은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물었다.
"사냥을 갔었다고 ? 멧돼지라도 한 마리 잡았느냐 ?"
임평지가 말했다.
"아니요, 잡지 못했습니다."
임진남은 담뱃대를 들더니, 갑자기 아들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
"환초(還招)!"
임평지는 부친이 불시에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같
았으면 그는 [벽사검법(僻邪劍法)]의 제 20초 [유성비타(流星飛墮)]에 대응하여 제
46초 [화개견불(花開見佛)]을 펼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가 이미 술집에서의 살인을 알고 있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여
담뱃대로 자신을 꾸짖는 것으로 알고 감히 피하지 못하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불렀
다.
"아버지."
임진남은 담뱃대로 아들의 어깨를 내리치다가 어깨 3촌(寸)앞에서 멈추고는 물었
다.
"왜 그러느냐. 강호에서 만약 적을 만난다면, 임기응변이 이처럼 늦어서야 너의
어깨가 제대로 성하겠느냐 ?"
말가운데 꾸짖음의 뜻이 들어 있었으나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임평지는 왼쪽 어깨를 낮추면서 몸을 돌려 아버지의 몸뒤로 돌아가 차탁자 옆의
계모추(鷄毛추)를 잡아 아버지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바로 [화개견불]을 펼친 것
이다.
임진남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막아내며 손을 뒤집어 담뱃대를 휘두르며, [강상롱적(江上弄笛)] 일초를 뽑아 공격
함에 임평지는 정신을 차려 [자기동래(紫氣東來)]의 수법으로 막았다. 부자는 서로
50여초를 겨루었다. 그때 임진남이 담뱃대를 재빨리 뻗으면서 아들의 왼쪽 가슴을
가볍게 찔렀다. 임평지의 방어 초식이 미치지 못하고 가슴을 찔려 계모추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임진남이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한 달 동안 많이 늘었구나. 오늘은 이 애비의 공격을 네번씩이나 막아냈
으니."
의자에 앉으면서 담뱃대에 담배를 채우며 말을 이어갔다.
"평아, 잘 듣거라. 오늘 우리 표국에 기쁜 소식이 당도했다."
임평지는 부싯돌을 집어서 아버지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물었다.
"아버님, 장사가 잘되어 이익을 많이 남겼습니까 ?"
임진남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이익만 생각하다간 일을 망치는 법이야."
그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고는 말을 이었다.
"방금 호남(湖南)에서 장표두가 서찰을 보내왔는데, 천서(川西) 청성파(靑城派)의
송풍관(松風觀) 여(余)관주가 이미 우리가 보낸 예물을 받았다고 전해 왔다."
임평지는 천서와 여관주라는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이미 우리가 보낸 예물을 받았다구요 ?"
임진남이 설명했다.
"표국의 일을 이제까지 너에게 말하지 않았음을 너도 알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
도 나이가 들었으니, 아버지가 맡고 있는 짐을 조금씩 맡기려 한다. 이후에는 표국
의 일을 한가지라도 무심하게 넘겨보지 않도록 해라. 얘야 ! 우리 집안은 3대째 표
국을 해오고 있다. 너의 증조부님의 명성과 우리 집안의 재주를 바탕으로 지금은
강남(江南)굴지의 대표국이 되었다. 강호에서 [복위표국]이라는 이름이 명성과 신
용을 얻게끔 되었다. 강호의 일이라는 것은 이름과 실력이 2할이고, 나머지가 8할
을 점하기 때문에 흑백도의 인물들과 모두 친하게 지내야 한다. 생각해 보아라. 복
위표국의 표차는 10개성을 다니는데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싸움이 난다면 얼마나 많
은 생명이 다치겠느냐 ? 매번 승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을 10명 죽이면 우리도
8명은 다치는 법, 표사가 다친다면 그 가족은 우리 표국에서 돌봐주어야 하니 표국
으로서도 재산의 손실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표국을 이끌어가려면 첫째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서 얼굴을 넓혀야 한다. 이 [교정(交情)] 두 글자를 너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임평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잘 알았습니다."
그전 같았으면 표국의 일을 자신에게 맡기겠다는 소리를 들으면 흥분해서 이것 저
것 물으며 아버지와 쉬지않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천서]와 [여
관주]라는 몇 마디만 머리속에 맴돌았다.
임진남은 다시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면서 말을 이었다.
"이 아버지의 무예는 너의 증조부에 미치지 못한다. 또 너의 할아버지에게도 미치
지 못한다. 그러나 표국을 경영하는 일은 내가 그분들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복건에서 광동(廣東), 북으로 절강(浙江), 강소(江蘇) 네 성의 기업은 너의 증조부
께서 이룩한 것이었다. 산동(山東),하북(河北), 양호(兩湖), 강서(江西)와 광서(廣
西)의 여섯 성은 내가 이룩한 것이다. 그 비결을 말하자면 [다교붕우 소결원가(多
交朋友少結寃家)]의 여덟 글자이다. 복위라는 이름에서 복(福)이 위에 위(威)가 아
래에 있는 것은 복기(福氣)가 위풍(威風)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복기(福氣)라는
것은 [다교붕우 소결원가(多交朋友少結寃家)]의 여덟 글자에서 오는 것이다. 만약
[위복(威福)]으로 고치면 위엄조차 복이 될지도 모르지 하하하 !"
임평지도 아버지를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도 근심이 깃들어 있었다.
임진남은 아들이 불안함을 감추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흥이 나서 다시 말을
었다.
"옛날 사람의 말에 의하면 롱(瓏)을 얻으면 촉(蜀)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애비
는 이미 악(鄂)을 얻었으니 촉(蜀)을 차지 하려고 한다. 우리 표국은 복건에서 서
쪽으로 뻗어갔고, 강서, 호남에서 호북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었다. 왜 서천으로 진출하지 못한다 말인가 ? 서천은 예로부터 땅이 기
름진 곳이어서 부자들이 매우 많다. 우리가 서천에 진출할 수 있다면, 북으로 섬서
(陝西)에 남으로 운귀(雲貴)에 이를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3배의 이익
을 남길 수가 있다. 사천성은 지세가 와호장룡(臥虎藏龍)의 형세여서 기인이사들이
많다. 복위표국의 표차가 사천으로 가려면 청성파(靑城派)의 송풍관(松風觀)과 아
미파(峨嵋派)의 금정사(金頂士)에서 통행을 허가해 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3년전부
터 매년 봄, 가을로 예물을 준비하여 양파에 보내왔었다. 그러나 양파의 장문인들
은 예물을 받지 않았다. 아미파의 금광상인(金光上人)은 우리 표국의 표두를 만나
사양의 뜻을 표하고 간단한 식사를 대접한 후, 예물을 뜯어보지도 않고 표두와 함
께 돌려보냈다. 송풍관의 여관주는 더 심하게 대했었다. 예물을 가지고 간 표두에
게 관주가 폐관중이니 만날 수 없다고 하면서 예물을 받지 않았다. 우리 표국의 표
두는 여관주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송풍관 대문조차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 보낸 표두에게 어떠한 수모나 굴욕을 당하더라도 참을 것을 분부하
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냥 조용히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매우 자랑스러운 듯 몸을 일으켜서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여관주가 예물을 받고 네 명의 제자를 답례차 보냈다고 한다."
임평지가 물었다.
"네 명이요 ? 두 명이 아니고요 ?"
임진남이 대답했다.
"그래. 네 명의 제자, 여관주가 네명의 제자를 보낸 것은 복위표국의 영광이 아니
겠는가 ? 이미 강서, 호남, 호북의 분국에 청성파 네 명의 제자를 잘 대접하도록
전했다."
임평지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버지, 사천인들은 자신을 노자(老子)라 칭하고, 다른 사람은 귀아자(龜兒子)라
부르지 않나요 ?"
임진남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사천의 천민들이 그런 말을 사용한다. 어디든지 입이 험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
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는 항상 욕설이 끊이지 않는 법이지. 우리 표국의 쟁자수들
이 하는 말을 너도 들어보지 않았느냐 ? 왜 그것을 물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한 번 여쭈어 보았습니다."
"청성파 제자가 오면 그들과 가깝게 지내거라. 명가 제자의 풍모를 배우고, 또 그
들을 사귀어두면 차후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니라."
임평지는 아버지의 말에 귀울이지 않고 줄곧 사람 죽인 일을 이야기할까 말까 망
설이다가 결국은 어머니에게 먼저 말하리라 마음먹고 다시 아버지와 이야기를 계속
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임진남 일가는 후원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처남의 생일
이 유월초였다. 그래서 임진남은 생일예물에 관해 부인과 의논하고 있었는데, 낙양
의 금도왕가(金刀王家)의 눈에 찰 만한 물건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몇사람이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임진남이 미간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너희들은 규칙도 모르느냐 ? 우리 가족이 담소하는 자리에 이렇게 분주하게 뛰어
들다니."
세명의 쟁자수가 뛰어들어왔는데, 그중의 한 명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외쳤다.
"총, 총표두..."
임진남이 답답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을 피우느냐 ?"
쟁자수 진칠이 더듬거리며 보고했다.
"백...백이가 죽었습니다."
임진남이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누가 죽었다고 ? 너희 놈들 또 서로 싸운 것이 아니냐? 바른 대로 말하렸다."
진칠이 하얗게 질려서 계속 더듬거렸다.
"아닙니다. 싸우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소인이 측간(厠間)에 갔었는데 측간옆
채소밭에서 백이를 보았습니다. 상처는 없는데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
다. 무슨일로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급환(急患)이 아닌가 합니다."
임진남이 숨을 한 번 몰아 쉬고 마음이 좀 가라앉자,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가보겠다."
임평지가 뒤따라갔다.
채소밭에 가보니 7,8명의 표사와 쟁자수가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총
표두가 오는 것을 보고 길을 비켰다. 임진남이 백이의 시체를 보니 이미 옷이 벗겨
져 있었는데 아무런 핏자국도 없었다. 옆에 서있는 축표두에게 물었다.
"아무런 흔적이 없느냐 ?"
축표두가 대답했다.
"제가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독살(毒殺)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임진남이 고개를 끄떡이며 명했다.
"장방동(贓房董)선생에게 알려서 백이의 장례를 치루도록 해라. 그리고 백이의 가
족에게 위로금으로 은자 100냥을 보내도록 해라. "
쟁자수 한 명이 병으로 죽은 것에 불과한데도 임진남의 마음에 불안감이 스쳐갔다
대청으로 몸을 돌리면서 아들에게 물었다.
"백이가 오늘 너와 사냥갔었지 ?"
임평지가 대답했다.
"갔었습니다. 돌아올 때까지는 멀쩡했었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흉복은 왕왕 갑자기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사천의 상권을 얻기 위해 10
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건만, 실마리가 풀리지 않던 일이 오늘에야 풀려 여관주가
갑자기 맘을 바꿔 예물을 받아들이고 또 천리 먼곳까지 제자를 보냈으니 말이다."
임평지가 억지 호기를 부리며 말했다.
"아버지, 청성파가 비록 무림의 명문대파이지만 복위표국과 아버님의 명성도 강호
에서 그에 못지않습니다. 우리가 예물을 바치고 그들이 우리에게 사람을 바치는 것
은 주종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까 ?"
임진남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무엇을알겠느냐. 사천성의 아미 청성 양파는 이미 200년의 전통을 쌓았고
그 문하의 영웅들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비록 소림(少林), 무당(武當)에는 미
치지 못하나, 숭산(嵩山),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의 오
악검(五嶽劍)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너의 증조부이신 원도공(遠圖孔)께서 72로
(路)의 벽사검법을 창안하시어 강호에 이름을 떨치셔서 무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었
다. 그러나 너의 조부에 이르러서는 원도공만 못했고, 나에 이르러서는 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 임씨 가문은 1인에게만 무예를 전수했기에 한 명의 사형제도 없
다. 너와 나 둘이서 어떻게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
임평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주장했다.
"우리의 열개 성에 깔려 있는 표국으로부터 영웅 호한을 모두 모은다면 소림,무
당,아미,청성과 오악검파와도 겨룰 만할 텐데요."
임진남이 웃으며 아들을 바라보곤 다시 얘기했다.
"얘야, 그런 어린아이같은 말은 이 애비하고나 이야기할 것이지, 밖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거라. 만약 그말을 누가 듣고 강호에 전해진다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면 무엇을 하겠느냐 ? 표국을 경영하기 위해 한발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영웅입네, 호걸입네 추켜주면 우리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느
냐 ?"
갑자기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정표두가 또 죽었다."
임진남 부자는 동시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임평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것은
그들의 복......'이라 말하다가 '수'라는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때 임진남은 이
미 문쪽으로 나가 아들의 말에는 신경쓰지 않고 쟁자수 진칠이 급히 뛰어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총...총표두.큰일 났습니다. 정표두...정표두가 또 사천악귀에게 목숨을...목숨
을 잃었습니다."
임진남의 안색이 변하며 급히 물었다.
"뭐! 사천악귀라고 ? 그게 무슨 정신나간 소리냐."
진칠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천악귀가, 사천악귀가 이처럼 악날하게 사람을 죽이
고 있습니다."
그는 총표두의 노한 얼굴을 대하자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임평지의 얼굴만 바라
보았다. 진칠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차 있었다. 임진남이 무겁게 말했다.
"정표두가 죽었단 말이지. 시체는 어디에있느냐 ? 왜 죽었느냐 ?"
이때 몇 명의 표사와 쟁자수가 분주히 대청안으로 들어왔다.
그중의 한 표사가 대답했다.
"정형은 마굿간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백이와 마찬가지로 몸에 아무런 혈혼도 없
고 칠공(七孔)에서 피도 흐르지 않고 얼굴에 청자(靑紫)색의 부종(浮腫)도 없습니
다. 아마...아마, 낮에 소표두를 따라 사냥을 갔다가 악귀가 붙어온 모양입니다."
임진남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나는 이때까지 귀신을 본 적이 없다. 내가 가보겠다."
그는 대청을 나와 마굿간으로 걸어갔다. 정표두는 땅에 누워 있었고,두 손에는 말
안장이 잡혀있었는데, 아마 말안장을 내리다가 갑자기 쓰러진 것 같았고 다른 사람
과 싸운 흔적도 없었다.
이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임진남은 사람들에게 등불을 비추게하고는 손수 정표두
의 옷을 헤쳐 앞뒤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전신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고 반점
조차도 없었다. 임진남은 평소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백이만 급사했
다면 몰라도 정표두도 똑같이 죽어버렸으니, 분명히 무슨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
만약 흑사병같은 전염병이라면 몸에 반점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 그는 이 일이
낮에 그의 아들과 사냥갔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몸을 돌려 임평지에
게 물었다.
"오늘 너를 따라 사냥갔던 사람 중 정표두와 백이외에 사표두와 진칠이 남았지 ?"
임평지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진남이 명했다.
"너희 둘은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고 쟁자수에게 사표두를 동상(東廂)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명했다.
세사람이 동상에 이르자, 임진남이 아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
임평지는 아버지에게 사냥에서 돌아오다 들린 술집에서 두명의사천인과 다투다가
엉겁결에 그를 비수로 찔러 죽이고 술집뒤의 채소밭에 묻게 되었고, 술집 주인에게
돈을 주어 비밀을 지키도록 당부한 것 등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
는 아들의 말을 다듣고 한참동안 침묵에 잠겨있다가 물었다.
"그 두 명이 자신들이 어떤 문파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
임평지가 대답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임진남이 다시 물었다.
"그들의 행동과 말씨에 어떤 특이한 점은 없었느냐 ?"
"뭐 별로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성이 여(余)씨 라는 것 밖에는......"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임진남이 다잡아 물었다.
"네가 죽인 사람의 성이 여씨라고 ?"
"예! 제가 듣기에는 다른 한 사람이 여형제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余)인지.
유(兪)인지 다른 지방 사투리여서 정확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임진남이 고개를 흔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여관주가 보낸 사람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리야. 몸에 날개가 달
린 것도 아닐 텐데."
임평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그 두 사람이 청성파의 사람인가요 ?"
"네가 [번천장]을 펼쳤을 때 상대가 어떻게 막더냐 ?"
"그는 막아내지 못하고 가슴에 타격을 입었습니다."
임진남이 웃으면서 말했다.
"잘했다. 아주 잘했다."
방안의 분위기는 숙연하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임진남이 이렇게 웃으며 칭찬하자
임평지도 활짝 얼굴을 펴고 따라 웃으니 마음이 한순간에 가벼워졌다.
임진남이 또 물었다.
"네가 이 초식을 펼쳤을 때, 그가 어떻게 반격하더냐 ?"
그는 한편으로 말하면서, 한편으로 손짓을 해보였다.
"그때 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허초와
실초를 실어서 그의 가슴을 때린 것 같습니다."
임진남은 안색이 더욱 부드러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 초식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 무예조차 막아내지 못했다면
그 유명한 청성파 여관주의 자제일 리가 없다. 잘했다."
이것은 자식의 무예를 칭찬한 것이 아니었다. 사천에는 여(余)씨 성을 가진 사람
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아들에게 당할 정도의 무공을 가진 사람이라면 청성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불안했던 마음에 위안을 얻게
되어 칭찬의 소리를 연발했던 것이다. 그는 오른손의 중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면
서 또 물었다.
"그가 어떻게 너의 목덜미를 잡아채더냐 ?"
임평지는 어떻게 잡혔는가를 손짓으로 설명했다. 진칠이 겁없이 끼어들어 설명했
다.
"백이가 소표두를 구하려고 창으로 찌르자 발로 창을 차버리고 연이어 사람을 찼
습니다."
임진남이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발로 백이를 차서 쓰러뜨리고 또 창을 차서 날려버렸다구 ? 어떻게 차더냐 ?"
"아마 이렇게 찬 것 같습니다."
진칠은 말을 하면서 두 손을 등뒤로 하고 오른발로 돌려차고 한 번 뛰어오른 다음
왼발로 돌려차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두 번 차는 모습이 마치 말이 뒷발로 사람을
차는 모습과 흡사해서 임평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보세요..."
임진남의 얼굴에는 놀라운 빛이 가득했고 아무말도 하지 않고 망연하게 서있었다.
잠시후 임진남이 무겁게 말했다.
"이렇게 발을 들어 두 번 차는 것은 청성파의 절기 [무영환퇴(無影幻腿)] 와 비슷
하구나. 얘야 ! 도대체 발을 어떻게 움직이더냐 ?"
"그때 저는 목이 잡혀 있어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사표두에게 물어보아야겠구나."
임진남은방문을 나서서 큰소리로 불렀다.
"아무도 없느냐. 왜 사표두가 아직 오지 않느냐?"
두명의 쟁자수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사표두가 아무곳에도 없다고 대답
했다.
임진남은 대청안을 왔다갔다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발재간은 아무래도 청성의 [무영환퇴] 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여관
주의 자식이 아니면, 청성파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 도대체 그사람은
누구일까 ?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그는 최표두와 계표두를 불렀다. 최표사와 계표사는 표국 일도 잘 처리할 뿐더러
오랜 세월동안 같이 일하면서 임진남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들 두사람은
정표두가 횡사하고 사표두가 보이지 않자 이미 대청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임진남이
부르는 소리를 듣자 바로 대청안으로 들어왔다. 임진남이 명했다.
"내가 직접 가보아야겠다. 최 계표두, 진칠 그리고 너도 따라오너라."
즉시 다섯사람은 말을 몰아 성밖 북쪽으로 달려갔다. 임평지가 선두에서 말을 몰
아 안내했다. 얼마가지 않아 다섯 필의 말은 주점에 도착했다. 주점은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임평지가 문을 두드리며불렀다.
"설노인, 설노인, 문 좀 열어요."
한참동안 문을 두드렸는데도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최표두가 임진남을 바
라보며 쌍수로 문을 칠 자세를 취했다.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기합 소리
와 함께 문고리를 힘껏 내리쳤다. 쇳소리를 내면서 문고리가 끊어지자 문이 삐거덕
거리며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최표두가 임평지의 옆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니 술청
안에는 촛불만이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 탁자 위와 벽에 붙어
있는 등에 불을 붙였다. 몇 사람이 바깥으로 나가 주위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었
다. 방안의 이불과 가구들은 제자리에 있었다.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노인이 도망친 것 같구나. 자신이 살인 사건과 연루될까 두려워 도망쳤구나."
채소밭으로 걸어와서 담에 세워져 있는 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칠, 시체를 파라."
진칠은 악귀를 믿기 때문에 두세 번 삽질을 하다 손발을 떨면서 주저앉아 버렸다.
계표두가 노해 소리쳤다.
"똥을 싸느냐? 너같은 놈이 어찌 우리 표국에 붙어 있었느냐?"
진칠에게 등불을 넘기고 자신이 삽을 받아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파지 않
아, 시체의 옷이 드러났고, 조금 더 파니, 삽끝에 시체가 걸려나왔다. 진칠은 고개
를 돌리고 시체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등
불을 떨어뜨렸다. 채소밭 주위가 갑자기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임평지가 떨리는 소리로 중얼중얼했다.
"분명히 여기에 사천인을 묻었었는데. 그런데...그런데..."
임진남이 소리쳤다.
"빨리 등불을 켜라."
그는 계속 침착했으나 이때에는 목소리에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최표두가 급히
등불을 켜자, 임진남이 허리를 굽혀 시체를 한참동안 살펴보고 말했다.
"시체에 아무런 상처도 없다. 똑같은 수법으로 죽였다."
진칠이 용기를 내어 시체를 보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사표두, 사표두다 !"
땅속에서 파낸 것은 사표두의 시체였고, 원래 묻었던 사천인의 시체는 온데간데없
이 사라져 버렸다.
"그 설노인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임진남이 등불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부뚜막의 솥에서부터 탁자 밑까지 샅샅이 조
사했으나 아무런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최 계표두와 임평지가 흩어져서
여기저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임평지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 빨리 와 보세요."
임진남이 급히 소리나는 곳으로 가니, 아들이 소녀의 방에서 녹색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임평지가 수건을 흔들며 말했다.
"아버지, 가난한 집의 소녀가 어떻게 이런 것을 갖고 있을 수 있을까요 ?"
임진남이 수건을 받아드니 담담한 향기가 코에 전해졌다. 그수건은 부드러우며 묵
직한 게 고급명주가 분명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수건의 가장자리를 녹색으로 둘렀
고 한쪽 귀퉁이에 황색으로 산호(珊瑚)가지를 수놓았는데 수(繡)가 매우 정교했다.
임진남이 물었다.
"이 수건을 어디서 찾았느냐 ?"
"침대밑 구석에서 찾았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물건을 챙길 때
빠뜨린 모양입니다."
임진남이 등불을 들고 몸을 구부려 침대밑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깊
이 생각하다 말했다.
"네가 그 소녀의 얼굴이 추하고 의복의 천이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옷매무새는
무척 정결하지 않았느냐 ?"
"그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옷이 더러웠다면 술을 따를 때 느꼈을
겁니다."
임진남이 최표두에게 물었다.
"최표두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제 생각에는 사표두, 정표두와 백이의 죽음은 이 노인과 소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독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계표두가 말을 이었다.
"두명의 사천인과 그들이 한패인 것 같습니다. 아니라면 그들이 시체를 옮겼을 턱
이 없지 않습니까 ?"
임평지가 부정했다.
"그 여(余)씨라는 놈이 그 소녀를 희롱했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나와 다투지
도 않았을 겁니다. 한패일 리가 없습니다."
최표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표두께서는 강호의 인심이 얼마나 험한지 모르십니다. 강호에서는 함정을 파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계표두가 물었다.
"총표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 술집 주인과 소녀는 분명히 우리를 노리고 여기에 왔다. 그러나 그들과 사천
인이 한패인지는 알 수가 없구나."
임평지가 초조하게 물었다.
"아버지 송풍관 여관주가 네 명을 보냈다고 했는데,그들이 그 네 명이 아닐까요?"
이 질문에 임진남은 무엇이 생각난 듯이 한참동안 말을 않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복위표국은 청성파에 대해 예의를 다했고 어디에서도 그들과 다툰 일이 없는데
그들이 우리를 괴롭힐 리 없지 않느냐 ?"
네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묵묵히 서있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임진남
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사표두의 시신을 먼저 방으로 옮긴 후 이야기하자. 표국에 돌아간 후 이 일을 절
대로 발설하지 말아라. 이 일이 관부에 알려지면 일이 커질 것이다. 비록 임씨 가
문이 겸손하고, 주위에 죄를 짓지 않았지만,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를 그냥 묵과할
수는 없다."
계표두가 큰소리로 말했다.
"총표두, 우리도 병사를 모아서 전력으로 싸운다면 복위표국의 위명에 부끄럽지
않게 대항할수 있을 겁니다."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사람은 성안 표국으로 말을 몰았다. 멀리서 보니 대문밖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임진남은 마음이 급해서 말을 재촉했다. 모여 있던 몇 사람
이 소리쳤다.
"총표두께서 돌아오셨다 !"
임진남이 말에서 내리니, 그의 처 왕부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보세요 ! 누군가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어요."
두 개의 깃대와 비단 깃발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표국 문앞에 있던
큰 깃발이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부러뜨려 땅위에 버려놓았던 것이다. 깃대가 부
러진 면이 매우 매끈한 것으로 보아, 보도로 단칼에 베어버린 것 같았다.
왕부인은 다른 사람의 허리에서 칼을 빼어들고 "얏 !"하고 앙칼진 기합소리와 함
께 비단 깃발을 깃대를 따라 끊어들고 대문으로 들어갔다. 임진남이 명령했다.
"최표두, 저 두 토막난 깃대를 토막 토막 잘라버려라. 흥, 福威標局을 짓밟는 일
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최표두가 대답했다.
"예 ! 알았습니다."
계표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느 놈인지 씨를 말려 버리겠다. 총표두께서 안계신 틈을 타서이런 무례한 짓
을 하다니."
임진남이 손짓으로 아들을 불러 함께 표국안으로 들어갔다.
부자(父子)가 동상(東廂)의 방으로 들어오니, 왕부인이 두 개의 깃발을 탁자위에
반듯하게 펴놓고 있었다. 하나의 깃발은 황색사자의 눈이 파져 구멍이 나있었고,
또 하나는 [福威標局] 네 글자중 [威]자가 없어져 있었다. 임진남은 수양을 오래
쌓은 사람이었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며 손으로 탁자를 내리
치니, 이화팔선탁(梨花八仙卓)의 다리가 와장창 부러졌다.
임평지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따.
"아버지, 모두......이 모든 것이 제가 못난 탓입니다. 소자가 못났기 때문에 이
런일이 벌어졌습니다."
임진남이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임씨 집안 사람이 그런 놈을 죽였기로서니 그것이 어떻단 말이냐 ? 그런 놈
이 내손에 걸렸다면 요절을 냈을 것이다."
왕부인이 물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말씀인가요 ?"
임진남이 대답했다.
"평지야 ! 어머니께 말씀드려라."
임평지가 오늘 어쩌다 사천인을 죽이게 되었으며, 사표두가 술집에 죽어 있었다는
것 등을 낱낱이 설명했다. 백이와 정표두가 급사한 것은이미 왕부인도 알고 있었
다. 사표두가 또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왕부인은 탁자를 치면서 일어나 말했다.
"여보, 우리 북위표국이 어찌 이처럼 수모를 당할 수가 있습니까 ? 사람들을 모아
사천성 청성파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겠습니다. 친정 아버지와 형제들도 모두 불
러야겠습니다."
왕부인은 어려서부터 성미가 불과 같아서 처녀때도 종종 칼을 휘둘러 사람을 상하
게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 금도무적(金刀無敵) 왕원패(王元覇)가 애지중지하는 딸
이어서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아들이 이처럼 장성했어도
불같은 성미는 여전했다. 임진남이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원흉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청성파인지도 확실하지 않소. 내 생각에
는 그들이 깃대만을 부러뜨렸을 리 없고, 두 표사를 죽인 것도 같은 흉수일 것이
오. 그러니 이일은......"
왕부인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을까요."
임진남이 아들을 바라보자, 왕부인은 남편의 속마음을 읽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얼
굴도 폈다.
"이 일은 저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대장부로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소자...두렵
지 않습니다."
임평지는 입으로는 두렵지 않다고 했으나 목소리는 떨렸고 속마음은 겁에 질려 있
었다.
왕부인이 아들을 달랬다.
"흥, 누가 너에게 손끝이라도 댈려면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걸. 북위표국이 세워진
지 3대째인데 너는 그 명성이 그저 얻어진 것인줄 아느냐 ?"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임진남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요."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사람을 풀어서 성 내외와 표국안을 조사할 터이니, 당신은 평지와 함께 여
기서 기다리시오.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예, 잘 알았습니다."
그들 부부는 적들이 아들곁에 한 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적들
은 기회를 노리다 임평지가 표국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죽이려 할 것이다.
임진남은 대청으로 나와 표사들을 불러모아 각각 조를 나누어 호위와 순찰을 엄중
히 하도록 명했다. 여러 표사들도 복위표국의 기(旗)가 부러지고, 표사들이 죽는
상황에 접하자 이것을 그들 자신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여겨, 이미 무장을 완벽히
하고 있다가 총표두의 명이 떨어지자 즉시 각자 맡은 위치로 갔다.
임진남은 표국의 식솔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뭉치는 것을 보고 다소 마음이 편
해졌다. 그는 내당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말했다.
"평지야 ! 어머니가 요며칠 몸이 불편했는데 오늘 이런 일이 생겼으니, 네가 며칠
동안 우리 방밖의 침상에서 자면서 어머니를 보호하도록 해라."
왕부인이 웃으면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남편의 뜻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임
진남의 속뜻은 부부가 함께 아들을 보호하고자 함이었다. 이 귀하게 키운 아들은
자존심이 강하여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라고 말하면 도리어 밖으로 나가 위험을 자
초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요사이 손발이 쑤신다고 하는구나. 나는 전표국을 관장해야 하니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가 없구나. 만약 적이 내당으로 들어온다면 누가 어머니를 지키
겠느냐."
"제가 어머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요."
그날 저녁 임평지는 부모님 곁에서 잠을 잤다. 임진남 부부는 방문을 열어놓고 무
기를 베개옆에 두고 누워 있었다. 옷과 신발도 벗지않은 채 얇은 이불만을 덮고 누
워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날 저녁은 아무일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하인이 창밖에서 작은 소리
로 임평지를 불렀다.
"소표두, 소표두 !"
임평지는 밤새 잠을 못 이루다 새벽녘에 잠이 들어 아직 잠이 깨지 않았다. 임진
남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
밖에서 하인이 대답했다.
"소표두......소표두의 말이 죽었습니다."
그 백마는 임평지가 매우 아끼던 말이었다. 임평지는 몽롱한 잠결에 그 소리를 듣
고 벌떡 일어나 황급히 뛰어나갔다. 임진남도 아침부터 기이한 일이 벌여지자 아들
과 함께 급히 마굿간으로 달려갔다. 마굿간 바닥에 백마가 드러누워 있었는데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역시 아무런 상처없이 죽은 것이다.
임진남이 물었다.
"밤에 말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느냐 ? 아니면 다른 소리라도 ?"
그 마부가 대답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임진남이 아들의 손을 잡으면서 달랬다.
"얘야 ! 상심하지 말아라 이 애비가 더 좋은 말을 사주마."
임평지는 죽은 말을 쓰다듬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쟁자수 진칠이 뛰어와 숨넘어가는 소리로 외쳤다.
"총...총표두님, 큰일났습니다. 큰일났습니다 ! 표두들이 모두 악귀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임진남과 임평지가 동시에 놀라서 물었다.
"무엇이라구 ?"
진칠은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몇 마디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죽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임평지가 노해서 물었다.
"누가, 무엇이 모두 죽었단 말이냐 ?"
손으로 진칠의 가슴을 잡고 흔들면서 다그쳤다.
"소...소표두......죽었습니다."
임진남에게 '소표두가 죽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처럼 재수없는 소리
를 들으니 말할 수 없이 기분이 나빴으나 그것을 꾸짖으면 기분이 더 착찹해질 것
같았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표두는 ? 장인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면서."
"이놈의 악귀가 이처럼 신출귀몰하니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임진남이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두 명의 표사와 세 명의 쟁자수가 목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우두머리인 듯한 표사
가 말했다.
"총표두, 순찰나갔던 사람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임진남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또 사람이 죽은 것일까 하고 생각했
었다.
그러나 어제 저녁에 순찰나간 표사와 쟁자수가 모두 23명이나 되는데 모두 죽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급히 되물었다.
"죽은 사람이 누구누구냐 ? 연락을 못받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 아
니냐?"
그 표사는 고개를 흔들면서 얼이 빠진 듯이 말했다.
"이미 17구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임진남과 임평지가 깜짝 놀라 똑같이 소리쳤다.
"17구의 시체라구."
그 표사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워섬겼다.
"그렇습니다. 부(富)표두, 전(錢)표두, 오(吳)표두의 시체와 함께 모두 17구의 시
체가 대청에 있습니다."
임진남은 더이상 말을 하지않고 빠른 걸음으로 대청으로 갔다.
대청에는 탁자와 의자가 치워져 있고 17구의 시체가 엇갈리게 놓여 있었다.
임진남은 일생동안 무수한 풍파를 겪었지만 이번같은 경우는 일찌기 없었다.
두 손이 쉴새없이 떨리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
며 외쳤다.
"이럴 수가......,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목이 쉬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대청밖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표두는 사람됨이 매우 충실했었는데 악귀에게 목숨을 잃을 줄이야."
이웃 사람 다섯 명이 시체 한구를 떠메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 한명이 임진남에
게 말했다.
"소인이 오늘 아침 가게문을 열다가 길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가보았더
니 고표두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체를 가지고 왔습니다."
임진남이 예의를 갖추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수고를 끼쳤습니다."
그리고 쟁자수에게 명했다.
"저분들에게 수고비를 좀 드리도록 하여라."
이웃 사람들은 대청에 시체가 가득한 것을 보고 질겁해서 곧 가버렸다. 잠시 후
또 어떤 사람이 3명의 표사의 시체를 보내왔다. 임진남이 시체를 헤아려 보니 어제
저녁 순찰 나간 사람이 23명인데 이미 22명이 시체가 되었다. 아직 한 명이 남았지
만 이제는 모두 죽었다는 귀신이 곡을 할 일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동상(東廂)으로 돌아와 뜨거운 차를 마셨으나 마음은 더욱 산란해지고 혼란
스러웠다. 대문을 나서니 이미 두 개의 깃대가 부러져 기분이 더욱 언짢았다. 지금
까지 종적을 알 수 없는 흉수가 28명을 감쪽 같이죽였는데 아직도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그는 고개를 돌려 {福威標局}이라 적힌 현판을 한참 바라보다가 마음속
으로 생각했다.
(복위표국이 강호에 명성을 얻은 지 수십 년인데 오늘 나의 대에서 무너질 줄 누
가 알았으랴 ?)
갑자기 거리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 필의 말이 천천히 걸어왔는데 등에는
사람이 가로로 얹혀 늘어져 있었다.
임진남이 나아가 보니 저표사(楮標師)의 시신이었다.
임진남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저표사의 시체를 안고 대청으
로 들어가며 말했다.
"저현제, 너의 복수를 하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조금
만 빨리 살아와서 원수의 정체를 나에게 알려주지 못한 것이다."
저표두는 표국내에 가족도 피붙이도 없는 홀몸이었다. 임진남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그와의 정이 각별했기에 슬픔을 참지못하고 오열하며 걸어들어왔다.
왕부인은 대청 입구에서 가문의 금도(金刀)를 오른손에 잡고 고개를 젖히며 대들
보쪽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이 사람 백정놈아 ! 숨어서 사람을 해치지 말고 네가 남자라면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 정정당당하게 겨루어 보자."
임진남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 보았다.
"부인 무슨 낌새라도 있었소 ? 누구에게 그렇게 소리치는 것이오 ?"
그는 저표두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왕부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지만 누군가가 이 근처에 있어요. 흉수놈은 아마 우리 가문의
벽사검법을 매우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꼬리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아요."
그녀는 금도를 잡고 허공에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나의 금도가 두려우냐 ?"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방 모서리 위에서 음침한 냉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고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작은 물체가 날아와 쨍하고 그녀의 금도를 때렸다. 왕
부인은 손아귀가 찢어질 듯이 저려와 더이상 도를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을 떠난 금도가 그대로 천정쪽을 향해 날아갔다.
이때 임진남이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검을 뽑으며 그쪽 방위로 뛰어오르며 {소탕
군마(掃蕩群摩)} 초식을 빠르게 펼쳐갔다. 암기가 날아온 곳으로 한줄기 검화(劍花
) 가 눈부시게 뿌려졌다. 그는 지금까지 흉수의 흔적조차 보지못해 매우 답답하고
심기가 사나웠으므로 이 일초에 필생의 공력을 다해 찔렀기에 검화가 뻗어나가는
사방 몇 자의 범위에서 검을 피할 여지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사나운 공
격은 허공만을 갈랐고 어디에도 적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동상의 지붕까지 뛰어올
라 세세히 살펴보았으나 흉수의 종적조차 볼 수 없었다.
왕부인과 임평지도 무기를 집어들고 위로 치솟아 올라왔다. 왕부인이 앙칼지게 외
쳤다.
"어떤 놈인지 꼬리를 감추지 말고 나오너라. 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
그리고 남편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망을 갔나요 ?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
임진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연히 떠들석하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마시오."
세 사람은 지붕위에서 뛰어내렸다. 임진남이 낮은 소리로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의 금도를 때린 암기가 무엇이었소 ?"
왕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무슨 암기가 그렇게 강하고 세찬지 손아귀가 찢어질 뻔했어요."
세 사람은 주변을 세심하게 조사하여 계화수(桂花樹)옆에 떨어져 있는 매우 작은
벽돌조각을 찾아냈다. 상대가 이렇게 작은 벽돌 조각을 던져 그 정도의 위력을 냈
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왕부인은 겉으로는 승복하지 않았지만 그 벽돌 조각을 보는 순간 가슴속이 서늘해
졌다. 한참동안 망연자실해서 서있다가 아무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과 아들
도 방으로 따라 들어오자 문을 닫아 걸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상대가 이토록 신출귀몰하고 그 무공이 이렇게 깊이를 알 수 없으니 우리의 적수
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 장차 이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임진남이 마음을 다지듯이 무겁게 말을 했다.
"친구에게 도움을 청해야지. 무림인이라면 이러한 어려움을 맞았을 때 서로 도우
는 것이 의기이고 예의이니까. 그들은 곧장 달려와 우리와 힘을 합쳐줄 거요."
"우리와 우의가 두터운 사람들은 적지 않지만 그이들의 무예가 우리 부부보다 나
은 사람이 별로 없지 않아요 ? 그이들이 달려온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오. 친구들을 불러 의논하다 보면 묘책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오."
"누구누구를 청하시려구요 ?"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들부터 불러야지, 우선 항주(抗州), 남창(南昌), 광주(廣
州) 세 곳의 표국 무사들을 부르고, 민, 절(浙), 오(奧), 감 네 성의 무림동도들을
청해야겠소."
왕부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처럼 급하게 도움을 청하다가 소문이 나면, 복위표국의 위신이 땅에 처박힐 텐
데요."
임진남이 갑자기 물었다.
"부인 올해 몇 살이오 ?"
왕부인이 의아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아니 갑자기 나이는 왜 물으세요 ? 호랑이띠잖아요. 제 나이도 모르세요 ?"
임진남이 설명했다.
"초청장을 보낼 때 당신의 40세 생일초대라고 하면 어떻겠소 ? 생일 초대라 한다
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친구들이 도착한 후 비밀리에 이야기한다면, 표
국의 명예도 손상되지 않을 것이 아니겠소."
왕부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아요, 당신 뜻대로 하세요. 그건 그렇다치고 제 생일선물은 뭘 주실 거에요 ?"
"우리 내년에는 아기를 하나 낳읍시다."
왕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이 양반이 무슨 망녕이 드셨나봐. 지금 이 혼란중에 무슨 심정으로 그런 농담을
하셔요."
임진남은 호방하게 웃으며 서재로 들어가서 친구들에게 보낼 초청장을 쓰기 시작
했다. 두려워하는 부인을 위로하려고 농담을 했지만 혼자 있게 되자 그의 마음도
울적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먼곳의 물로 근처의 불을 끄려는 격이로구나. 오늘 저녁 표국에 큰일이 벌
어질 것 같은데 친구들이 당도했을 때 세상에 복위표국이라는 현판조각이 남아 있
을런 지 모르겠구나.)
그가 서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하인 두명이 공포에 질린 소리로 부
르짖었다.
"초....총표두, 큰일 났습니다."
임진남이 방문을 열고 물었다.
"또 무슨일이냐 ?"
"관을 주문하러 갔던 임복(林福)이 길 모퉁이에서 시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임진남은 시체를 거두어 오라고 명하고는 혼자 생각했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그것도 길거리에서 사람을 마구 죽이다니 보통 담이 큰 녀
석이 아니구나.)
하인들이 대답만 하고 길거리로 가려 하지 않고 머뭇거리기에 임진남이 물었다.
"왜 그러고 있느냐 ?"
"총표두님께서 좀 가보셔야겠습니다......"
임진남이 기이하게 여겨 하인들을 꾸짖으며 대문으로 나갔다.
대문앞에 세 명의 표사와 다섯 명의 쟁자수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문밖을 바
라보고 있었다. 임진남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까닭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대문밖 청석판
(靑石板)위에 검붉은 피로 여섯 자의 글자가 또렷하게 마치 저주받은 악령의 붉은
혓줄기같은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出門十步者死...}
---열 발자국 이상 문밖으로 나오면 죽는다...---
문에서 약 10보 떨어진 곳에 무시무시한 혈선(血線)이 주욱 그어져 있었다.
임진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되었느냐 ? 누가 제일 먼저 보았느냐 ?"
한 표사가 대답했다.
"조금 전 임복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모두 거기로 달려가고 문앞에 아무도 없
었습니다. 누가 그랬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임진남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구차스럽게 사느니 죽기를 원하니 과연 죽는지 안죽는지 보아라."
그는 큰걸음으로 대문밖으로 나갔다. 표사 두명이 동시에 외쳤다.
"총표두 !"
임진남은 손을 저으면서 걸어나가 그 혈선 있는 곳을 지났다가 되돌아와 발로 혈
선을 문질러 지워버리고 대문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세 분 형제들 관을 좀 사오시오. 그리고 서성(西城)의 천녕사(天寧寺)에 가서 반
(班)화상에게 며칠간 와서 영혼을 달래줄 것을 부탁하고 오시오."
세 명의 표사는 총표두가 혈선 너머까지 갔다 왔는데도 무사한 것을 보고는 안심
하면서 무기를 고쳐 잡고 어깨를 맞대어 대문을 나섰다. 임진남은 그들이 혈선을
지나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것까지 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 집사에게 명했다.
"황선생, 초청장을 보내시오. 집사람의 생일을 맞아 잔치를 벌인다고 알리시오."
황선생이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생일이 언제입니까 ?"
돌연 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한 명이 뛰어들어왔다. 임진남이 고개를 돌려보
니 꽝!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뛰어들어 방바닥에 쓰러졌다. 임진남이 숨을
죽이며 다가서 보니, 관을 사러갔던 세 명의 표사중 한 사람인 적(狄)표두가 쓰러
져 있었다. 임진남이 그를 일으켜 안고 급히 물었다.
"적형제, 무슨 일이오 ? 어떻게 된 거요 ?"
적표두가 힘겹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저만 간신히 도망쳐 왔습니다."
임진남이 다그쳤다.
"도대체 어떤 놈에게 당했소 ? 흉수가 누구요 ?"
"누군지 알 수가......알 수가 없었습니다."
적표두는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표국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졌다. 왕부인과 임평지가 내당
에서 나오니 온통 {出門十步者死} 라는 겁에 질린 소리가 들려왔다. 임진남이 나서
며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두 명 표사의 시신을 가지고 오겠다."
황선생이 임진남을 만류했다.
"총...총표두 가시면 안됩니다. 누가 가서 시체를 가져올 사람 없느냐. 은자 30냥
을 내리겠다."
그가 세 번을 소리쳤으나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왕부인이 갑자기 외쳤다.
"아니, 평지야 ! 평지야 !"
아들을 부르는 여인의 애절한 목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울려 흔들었다. 다른 사람
들도 따라서 소리쳤다.
"소표두, 소표두 !"
그때 문밖에서 임평지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여기 있어요. 황선생. 은자 30냥을 주시오."
사람들이 기뻐하며 대문으로 몰려가 보니, 임평지가 양 어깨에 시체를 메고 길 모
퉁이를 돌아서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두 명 표사의 시체였다. 임진남과 왕부인이
손에 검과 도를 움켜잡고 혈선 너머까지 나아가 아들을 호위해서 돌아왔다.
여러 표사와 쟁자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소표두, 우리 표국의 소년영웅, 과연 용감하십니다."
임진남과 왕부인의 기분도 뿌듯했다.
그러나 왕부인이 애타는 목소리로 아들을 원망했다.
"얘야. 왜 이리 속을 썩이느냐 ? 두 명 표사가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
을 위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 필요는 없었지 않느냐 !"
임평지는 웃으면서, 그러나 심정은 괴로운 듯 말했다.
"소자가 잠시 혈기를 참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몸을
아낀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갑자기 후당(後堂)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사부(華師傅)가 쥐도새도 모르게 죽었습니다."
임진남이 급하게 몸을 돌려 되물었다.
"무엇이 ?"
표국의 관사(管事) 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보고했다.
"총표두, 화사부가 후문으로 채소를 사러 가다가 10보밖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후문에도...후문에도 그 혈자(血字)가 쓰여 있습니다."
화사부는 표국의 요리사였는데 요리 솜씨가 복주에서 제일이어서 복위표국의 보배
와 같은 존재였다. 임진남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화사부는 일개 요리사에 불과한데, 강호에서 표국을 칠 때 거부(車夫), 교부(轎
夫)등은 죽이지 않는 것이 상례이거늘, 이렇게 적이 악랄하니 우리 표국을 완전히
멸문 시킬 작정이구나.)
그는 여러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들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해라. 적은 우리의 헛점을 노리고 있다. 방금 우리
가 10보밖까지 갔다와도 아무일이 없지 않았느냐 ?"
사람들은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문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임진남과 왕
부인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임진남은 표사들에게 표국 주위를 경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가 순찰을 돌면서 보니 10여 명의 표사가 대청에 모여 있었고, 아무도
밖에 나가 경비하지 않고 있었다. 표사들은 총표두를 보고 쑥스러운 듯이 몸을 일
으켰지만, 아무도 대문밖으로는 나가려 하지 않았다. 임진남 자신도 적이 너무 신
비하다고 여기고 있었고 이미 여러명이 죽었는데도 적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을 달래주
기 위해 여러 표사들과 함께 대청에서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마음이 산
란하여 아무말도 않고 술만 마셔댔다. 오래지 않아 이미 몇 사람이 술에 골아떨어
졌다.
다음날 오후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리며 몇 명의 표사가 표국을 나가 도망가 버
렸다. 임진남이 조사해보니 다섯 명의 표사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도망쳤던 것
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큰 환란(患亂)이 닥쳤는데, 내가 무능하여 대책을 세우지 못하니 모두들 도망가
는 구나."
남아있는 표사들 중에는 도망간 표사들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말도 않고 탄
식만 연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녁 무렵에 다섯 필의 말이 다섯 구의 시체를 싣고 돌아왔다.
이 다섯 사람은 위험한 곳을 피해 도망가려다 도리어 먼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임평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장검을 빼어들고 혈선 삼보(三步)앞까지 나아가 낭
랑한 소리로 외쳤다.
"대장부는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책임을 지는 법이다. 여씨 성의 사천인은 내가
죽인 것이니 나에게 복수해라. 그대들은 무고한 사람을 계속 죽이고 있는데, 그것
은 영웅호걸이 할 일이 아니다. 어서 나오너라."
그는 더욱 큰소리를 지르며 앞가슴을 풀어헤쳐 가슴을 탕탕치며 미친 듯이 외쳤
다.
"장부는 한번 목숨을 걸었으면 두 말을 하지않는다.나를 죽여라.이 못된 놈아!"
그가 두 눈을 붉히고 가슴을 치며 소리치는 모습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멀리서 보
고 아무도 표국 근처로 오지 않았다.
임진남 부부는 자식의 외침소리를 듣고 급히 문밖으로 달려나가 임평지의 손을 잡
아끌며 대문안으로 돌아왔다. 임평지는 울먹거리다가 침실로 들어와서는 참지 못
하고 침대에 엎드려서 울음을 터뜨렸다. 임진남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야, 너는 과연 우리 林氏 가문의 아들답구나. 그러나 적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
쩌겠느냐.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숨 푹 자거라."
임평지는 한참동안 울다가 잠이 들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임진남과 왕부인의
이야기소리가 들렸다. 몇 명의 표사들이 후원에 땅을 파서 혈선을 넘어간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쑤근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표국에 남아 가슴을 조이며 죽을
때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일찍 생명을 걸고 탈출하겠다는 것이었다. 왕부인이 처연
하게 탄식했다.
"땅굴을 파는 거야 그들 자유지만. 두려운 것은....."
임진남 부자는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말을 타고 도망가다 죽은 다섯 사람처럼 그
들도 미리 생명을 잃을까봐 두렵다는 뜻이었다. 임진남이 착잡한 심정으로 말했다.
"땅굴을 파서 살 수만 있다면, 모두 다 가더라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을 텐데...."
그날 저녁 세 사람은 일찍 잠을 청했다. 표국내의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건질 방
도만을 궁리할 뿐, 표국을 지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포자기의 심경으로
어렴풋이 잠이 들었던 임평지는 누가 조심스레 어깨를 치는 것을 느끼고 벌떡 일어
나 베개 밑의 장검을 잡으려 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지야, 아버지께서 나가신 지 오래되셨는데 아직 돌아오시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내가 찾아 나섰다."
임평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버지가 어디 가셨는데요 ?"
"나도 모르겠구나."
두 사람이 방을 나오니 대청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표사들이 모여앉아 노름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가슴을 조리며 몇날 밤을 지새우자 이제는 지치고 지친 상태
가 되어서 생사문제도 개의치 않고 노름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자(母子)는 여러 곳
을 살폈으나 임진남을 찾지 못하자 점점 불안해졌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표국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큰 혼란이 일
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던 임평지가 왼쪽에서 칼날이 부
딪치는 작은 소리를 듣고 가보니 병기고(兵機庫) 창에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창을 뚫고 안을 들여다보고 기뻐서 소리쳤다.
"아버님, 거기 계셨군요."
임진남은 허리를 꾸부린 채, 벽을 향해 서있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
다. 임평지는 하얗게 질린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떨려 얼굴은 창백해지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왕부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이 온통 피바다였고, 가
로놓인 긴의자에 사람의 시체가 발가벗은 채 누워 있었다. 그 시체는 가슴과 배가
갈라져 있었는데 얼굴을 보니 곽(郭)표두였다. 그는 네 명의 표사와 함께 도망치다
죽음을 당했었다. 임평지도 병기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임진남은 시체의 가
슴속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꺼내 들며 말했다.
"아무런 외상도 없이 심장을 여덟 조각으로 갈라버리다니, 과연...과연..."
왕부인이 말을 이었다.
"과연 청성파의 {최심장(催心掌)}이로군요 !"
임진남은 고개만 끄덕일 뿐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임평지는 그제서야 부친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렸다.임진남은 사인(死因)
을 규명하기 위해 시신을 부검했던 것이다.
임진남은 시체를 기름종이에 싸서 벽모서리에 치워두고 손을 깨끗이 씻고 부인과
아들과 함께 침실로 돌아와 말했다.
"상대는 분명히 청성파의 고수다. 부인, 장차 이일을 어쩌면 좋겠소?"
임평지가 성질을 부리며 벌컥 소리질렀다.
"이일은 저로 인해 생긴으니 제가 그놈과 싸우겠습니다. 제가 상대가 되지못해 죽
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임진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의 일장에 심장이 여덟조각 났는데도 겉으로 봐서 몸에는 하나의 상처도없었
다. 이와 같은 솜씨라면 청성파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가 틀림이없다. 그
가 너를 죽이려고 마음 먹었다면 그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
그들은 우리 세 사람을 쉽게 죽이려 하지도 않을 것 같다."
임평지가 물었다.
"도대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가요 ?"
"그놈들은 우리를 지금 놀리고 있다. 놈들은 우리가 공포에 질려 스스로 자결을
할 때까지 서서히 조여올 것 같다."
임평지가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쳤따.
"그놈들이 아버지의 벽사검법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모습
을 보이지 않고 암중(暗中)에서 사람을 해치겠습니까 ?"
임진남이 한숨을 쉬며 아들을 타일렀다.
"평지야, 나의 벽사검법은 조무라기 흑도의 인물들을 능히 상대할 수는 있다.그러
나 최심장을 때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심장을 조각낼 정도의 고수라면 아예 상대
가 되지를 못한다. 나...나는 이제까지 패배를 자인해본 적이 없으나 곽표두의 심
장을 보니 이 일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어서 인정하지않을 수가 없다."
임평지는 처음으로 대하는 부친의 허약한 모습을 보고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왕부인이 제안했다.
"적이 이처럼 강하니 우리 잠시 피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후일을 기약하도록 해
요."
임진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그러하오."
"오늘밤을 기하여 우리 낙양으로 피합시다. 적의 내력을 알고 있으니 당신은 정진
하여 10년 안에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소. 장인 어른은 강호에 친구가 많으시니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어서 행장을
차려 몸을 피하도록 합시다."
임평지가 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가버리면 표국에 남아있는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가 ?"
임진남이 대답했다.
"적들은 그들과 애초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우리가가버리면 그들은 무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임평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는 듯 하다. 적이 표국의 여러 사람을 죽였지만, 실은 나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으니, 내가 여기서 도망가 버리면 표사들과 쟁자수들은아무런 화
도 입지 않을 거야.)
그는 곧 자기방으로 가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적이 지금까
지 살아온 기반을 온통 흔들어 놓았고, 많은 귀한 것들을 두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
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그는 아끼던 물건들을 두 개의 큰 상자속에 넣어
들고 부모님이 기다리는 방으로 갔다.
왕부인은 큰 상자를 들고오는 아들을 보더니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우리는 도망가는 거지 이사가는 게 아니란다. 그 많은 물건을 어떻게 가져 가려
고 하느냐 ?"
임진남이 탄식하면서 생각했다.
(우리 집안은 무학세가(武學世家)임에도 자식을 너무 곱게만 키웠어.저런 철부지
도련님이 오늘처럼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혼자 헤쳐나갈 수 있을 까 ?"
갑자기 애처로운 생각이 솟아나 아들을 타일렀다.
"외가집에는 없는 게 없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져갈 필요가 없어. 약간의 금과
보석만 가지고 가자. 강서, 호남, 호북에는 모두 우리 표국의 분국이 있으니 먹고
자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짐이 간편할 수록 움직이기가 수월한 법이다."
왕부인이 말했다.
"말을 타고 대문을 뚫고 나갈까요. 아니면 뒷문으로 몰래 빠져 나갈까요 ?"
임진남은 태사의에 앉아 눈을 감고 한참 생각하다 비로서 눈을 떴다.
"평아, 가서 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라. 짐을 꾸려 날이 밝거든 모두 떠나라
고. 그리고 집사에게 여비를 나누어 주도록 시켜라.모두 뒷날을 기약하자고 해라."
임평지는 "예!"하고 대답하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 알수가 없
었다. 왕부인이 물었다.
"모두 떠나버리면 이 표국은 누가 관리하지요 ?"
"표국을 지킬 필요는 없소. 역신이 나와 떼죽음을 하는 흉가에 누가 들어와 죽으
려하겠소. 우리 세 사람이 떠나버리면 어차피 남아있을 사람이 있겠소 ?"
임평지가 나가서 부친의 말을 전하니 일시에 표국이 소란했다.
임진남은 아들이 나가자 말을 시작했다.
"부인, 평지와 나는 쟁자수의 옷으로 갈아입고 부인은 하녀처럼 차린 다음, 날이
밝는 대로, 백여 명의 사람 속에 끼여서 빠져나간다면 적이 아무리 무공이 높더라
도 알아보지 못할 거요."
"정말 그렇겠군요."
왕부인은 곧 남루한 쟁자수의 옷 두벌을 가지고 와서 아들이 돌아오자 부자(父子)
의 옷을 갈아입게 하고 자신도 푸른색 치마로 갈아입고 머리에는 남색 수건을 두르
니 피부가 하얀 것 외에는 영락없는 하녀가 되었다. 임평지는 냄새나는 옷이 입기
싫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새벽녘이 되자 임진남은 대문을 열게하고 모두에게 말했다.
"나의 운수가 좋지 않아 표국내에 역귀(疫鬼)가 설치니 모두 피난가도록 하여라.
만약 우리 표국에 계속 있기를 원허는 사람은 항주부, 남창부에 가서 절강분국, 강
서분국의 유표두, 역표두를 찾도록 해라. 그럼 모두 떠나거라."
일백여 사람이 말에 올라 대문을 향해 일제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함성을
지르며 10여 필의 말이 혈선을 넘어 달려갔다. 사람들은 이제 혈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표국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려는 생각뿐이었다.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모두들 북문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옆사
람이 북쪽으로 가니 그저 몰려갈 뿐이었다.
임진남은 길모퉁이에서 손을 들어 자식과 부인을 멈추게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
다.
"그들이 북쪽으로 갔으니 우리는 남쪽으로 가자."
"낙양으로 가야하는데, 어찌 남쪽으로 갑니까 ?"
"적들은 우리가 반드시 북쪽으로 가리라 예상하고 북문밖에서 지키고 있을 것이
오. 그러니 우리는 남쪽으로 가서 빙돌아서 다시 북쪽으로 향하면 그들을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임평지가 결연하게 말했다.
"저는 북쪽으로 가겠습니다. 그 흉수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또 그들
을 죽이고 제가살기 위해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왕부인이 아들을 달랬다.
"이 원수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의 무예로 어찌 그들의 상대가 되
겠느냐 ?"
임평지가 울컥 화를 내면서 말했다.
"기껏해야 곽표두꼴밖에 더 되겠습니까. 심장이 갈라지면 갈라지는 거지요."
임진남이 안색이 파랗게 되어 탄식하며 아들을 눌렀다.
"우리 임씨 3대가 너와같이 용감했다면 복위표국이 오늘 이런 비참한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
임평지는 감히 아무말도 못하고 부모를 따라 남쪽으로 갔다.
성을 지나, 서남쪽으로 구부러져 민강(閔江)을 지나서 남서(南嶼)에 당도했다.
쉬지않고 반나절을 달려 정오가 지나서야 비로소 길옆의 작은 음식점에서 잠시 쉬
게 되었다. 임진남은 주인에게 식사를 주문하면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서둘렀
다. 그러나 주인이 간 지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임진남이 재촉했다.
"주인장, 음식을 빨리 주시오."
두 번을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왕부인도 "주인장, 주인장..."하고 불렀지
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왕부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금도를 빼들고 후당(後堂)으로 뛰어갔다. 음식점
주인은 땅에 쓰러져 있었고, 문턱위에 한 여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는데, 술집 주
인의 아내였다. 그들은 이미 숨이 끊어졌으나 입술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때, 임진남 부자도 장검을 빼어들고, 음식점 주위를 조사하고 있었다. 이 음식
점은 외진 곳에 있어서, 근처에 소나무숲이 있을 뿐 민가는 없었다. 세 사람이 집
앞에서 사방을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임진남이 검신(劍身)을 눕히고, 소나무숲을 향해 낭랑한 소리로 외쳤다.
"청성파의 친구, 나 임모(林某)가 여기 있으니, 어서 모습을 나타내시오."
몇 번을 외쳤으나 메아리만 울려 되돌아올 뿐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가까이에
적이 숨어있는 것은 분명한데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임평지도 큰소리로 외쳤다.
"임평지가 여기 있으니 나와 죽여보아라. 이꼬리를 감추는 비겁자야. 겁이 나서
못 나오는 거냐 ! 무엇때문에 애꿔은 사람들만 죽이는 거냐 ? 나를 죽여라."
갑자기 송림으로부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임평지는 적의 흔적이 보이자 자
세히 보지도 않고 장검으로 직도황룡(直島黃龍)을 펼쳐 몸통을 베어 갔다. 적은 몸
을 옆으로 비끼면서 가볍게 피했다. 임평지는 힘을 왼손으로 일장을 날리고 이어서
검을 돌려 찔렀다.
임진남과 왕부인도 도검을 빼어 겨누고 있었으나, 아들이 여러 초를 강하게 펼쳐
가며 강적을 만났음에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날카롭게 공격하자, 뒤로 물러나
적을 살폈다. 이제야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청삼(靑衫)을 입었고, 허리에 장검을
찬 긴 얼굴이었는데, 나이는 23,4세쯤 되어 보였다. 침착한 얼굴에서는 불굴의 투
혼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울분을 참아왔던 임평지는 벽사검법을 펼치며 검을 휘둘렀다. 자신을 돌
보지 않는 동귀어진의 검법이었다. 적은 행운유수처럼 피하기만 할 뿐 공격하지 않
았다. 임평지의 20여 초 결사적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비로소 그 사람은 냉소
하며 말했다.
"벽사검법이 고작 그런 정도냐."
그가 가볍게 일지를 튕기자 쨍소리와 함께 임평지의 칼이 날아갔다. 임평지는 팔
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일격을 맞대고 나서 아들을 보호했다. 임진남이 말했다.
"귀하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 어떻게 되시오. 귀하는 청성파의 제자요 ?"
그는 싸늘하게 웃었다.
"이름뿐인 복위표국을 믿고 감히 나의 이름을 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
그렇소, 나는 청성파의 제자요."
임진남은 검을 거두며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송풍관 여관주에게 예의를 다해 왔소. 올해는 여관주가 친선의
뜻으로 제자 네 명을 보낸다고 들었소. 우리가 무슨 결례를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소."
그 청년이 울분을 폭발시키듯이 앙천대소했다.
"그렇소, 사부께서 네 명의 제자를 복주에 보냈소이다. 내가 그중의 한 사람이
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오 ?"
그 청년은 한동안 말없이 세 사람을 바라보다 무겁게 입을 뗐다.
"나의 성은 간(干)이요. 간인호(干人豪)라 하오."
임진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성사수, 여관주의 4대제자중의 한 명이니 최심장이 그토록 고명했구료. 두 눈
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솜씨였소이다. 젊은 나이에 놀라운 일이오. 간영웅
(干英雄)이 멀리서 오셨는데 마중을 나가지 못했구료. 결례가 많았소."
간인호가 코웃음을 쳤다.
"뭐, 영접을 못했다구 ? 이처럼 무예가 높은 공자로부터 우리는 대단한 영접을 받
았소이다. 사부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 말이오."
임진남은 그 소리를 듣자 머리가 아찔했다. 죽은 사람이 청성파의 일반제자였다면
그래도 화해해 볼 가능성이 있었으나, 여관주의 아들이라면 목숨을 걸고 사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이미 없었다. 그느 장검을 치켜들고 대소하며 물었다.
"간소협, 농담을 하는 거요 ?"
간인호는 임진남의 뜻밖의 말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농담이라고요."
"여관주는 일대의 종사이고, 가정교육이 엄하다고 들어왔소. 노부의 자식이 실수
하여 해친 사람은 술집에서 소녀를 희롱하다 죽었고, 그 무예 또한 철없는 자식에
게 당할 정도로 평범했으니, 어찌 여관주의 자식일 수 있겠소. 이치가 그렇지 않
소."
간인호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순간적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소
나무숲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은 잘도 둘러댄다마는 주먹으로는 사수(四秀)를 못당할 것이오. 그 술집에서
임소표두는 표두 10여 명을 데리고 와서 우리를 에워싸더니 갑자기 공격했소."
그는 말하면서 숲에서 걸어나왔는데 머리는 작았고 손에는 부체를 들고 있었다.
그 사람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검이나 도로 싸웠으면 복위표국의 사람들이 아무리 많았어도 우리가 쉽게 당하지
는 않았을 거요. 비겁하게 여형제의 술에 독을 풀고 독묻힌 암기로 해쳤소. 우리가
호의를 베풀어 이렇게 방문했는데 암살당할 줄이야 생각도 못했소."
임진남이 물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
그 사람이 대답했다.
"방인지(方人智)라 하오."
임평지가 장검을 들고 노기를 참으며 부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 너와 원수진 일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데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
방인지가 교묘하게 말을 되받았다.
"비겁한 어린 놈, 여형제는 너에게 원수진 일도 없는데 왜 표사와 쟁자수들을 술
집에 매복시켜 그를 암살했느냐 ? 술집에서 소녀를 희롱하는 너를 보다못해 형제가
타이르려고 했는데 너는 은혜를 모르고 도리어 표사, 쟁자수들과 함께 여형제를 협
살하지 않았느냐 ?"
임평지는 울분을 삭일 길이 없어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청성파는 명문정파를 자처하면서 모두 이런 무뢰배들만 모였는가 ?"
돌연 휙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임평지 앞으로 빠르게 닥쳐왔
다. 임평지는 좌장(左掌)을 급히 뻗었으나 한 발 늦어 얼굴에 정통으로 일격을 맞
았다. 눈앞에는 별똥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방인지가 민첩하게 일격을 때리고 제자리로 돌아가 자기의 뺨을 만지며 소리쳤다.
"비린내 나는 어린 놈이 말을 함부로 하니 혼이 나야 한다. 알겠느냐. 하하핫 !"
왕부인이 아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도를 뻗으며 { 야화소천(野火燒天)} 을 펼쳐
공
격했다. 초식이 부드러웠으나 힘이 실려 있어다. 방인지가 몸을 틀어 피하자 도가
오른쪽 어깨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갔다.
그는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
"훌륭한 도법이었소."
다시는 상대를 경시하지 않고 허리에서 검을 빼어 왕부인의 다음 공격이 들어오기
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진남이 장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청성파가 복위표국을 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오. 그러나 무림의 시비에는 공론
(公論)이 있는 법이오. 간소협께 한 수 청하는 바이오."
간인호가 장검을 빼어들고 낭랑하게 말했다.
"임총표두께 가르침을 청하오."
임진남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청성파의 송풍검법(松風劍法)은소나무의 강함과 바람의 빠름을 겸하고 있다고
들어왔다. 오직 내가 선기(先機)를 잡아 몰아붙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주저하지 않고 그는 장검을 횡으로 뉘어 비스듬히 베어가니 바로 벽사검법 중의 {
군사피역(群邪避易)}의 일초였다. 간인호는 쌩하는 바람소리를 듣고 그의 검법이
실로 위맹하자 몸을 돌려 피했다. 임진남은 계속해서 {종규결목(鍾規抉目)}을 펼쳐
상대의 두 눈을 찔러 갔다. 간인호가 뒤로 뛰어오르며 피했다. 임진남이 계속해서
제 3초를 펼치자 간인호는 검을 들어 정면으로 막았다. 쨍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
모두 손이 저려왔다.
임진남이 생각했다.
(청성파의 4대제자가 이 정도 실력에 불과하다니, 저자의 무예로 보아 그처럼 높
은 수법의 최심장을 펼칠 수는 없다. 그럼 또 다른 흉수가 따로 있단 말인가 ?)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가슴이 내려 앉는 듯했다. 간인호가 장검을 돌려 찔려오니
검끝이 7개 방위에서 엄밀하게 밀려왔다. 임진남도 재빠르게 대응하여 검막의 중심
을 찔러갔다. 두 사람이 일진일퇴하며 20여 초를 겨루었다.
그 옆에서는 왕부인과 방인지가 맞서 싸우고 있었는데 왕부인이 상대의 신속한 검
초에 밀리고 있었다.
임평지는 어머니가 수세에 밀리자 급히 뛰어가 방인지의 목을 무기교하게 베어갔
다. 방인지가 몸을 젖히며 슬쩍 피해버리자 임평지의 검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돌연, 임평지의 발이 겹질려 땅에 나둥그러졌다. 육중한 발이 그를 밟고 있었고
날카로운 비수가 등에 겨누어져 있었다. 임평지의 눈에는 땅바닥만 보였고 어머니
의 외침이 들렸다.
"죽이지 마라 ! 아들을 살려다오."
임평지 모자가 방인지를 협공할 때, 한 사람이 뒤에서 나타나 임평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비수를 빼서 등을 겨누었던 것이다. 왕부인도 아들의 목숨이 적의 손에
잡혀 있으니 마음이 산란해져 도법이 흐트러지고 방인지의 공격을 받아 쓰러졌다.
방인지는 왕부인의 28혈도(二十八穴道)를 빠르게 짚어버렸다. 임평지를 넘어뜨린
자는 복주성밖 주점에 있었던 가(賈)씨 무사였다.
임진남은 부인과 자식이 적에게 제압당한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져 검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간인호가 장소(長笑)를 터뜨리며 절초를 펼쳐 도리어 기선을 잡아버렸
다. 임진남은 상대의 검법을 보고 당황하여 손발이 떨렸다.
(저 자가 어찌 벽사검법을 익숙하게 알고 있을까 ?)
간인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의 벽사검법이 어떻소 ?"
임진남이 떠듬떠듬 물었다.
"너...너는 어떻게 벽사검법을 알고 있느냐 ?"
방인지가 웃으면서 놀렸다.
"임가의 벽사검법이 이런 정도요 ?"
그는 장검을 휘둘러 군사피역, 종규결목, 비연천류를 연거푸 펼쳐 보였다. 1인 전
수의 가전절학이 임진남의 눈앞에서 일초반식의 어긋남이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임진남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정신이 없고 망연자실, 전신에 힘이 빠졌다.
간인호가 외쳤다.
"받아랏 !"
임진남은 오른쪽 무릎에 검을 맞고 휘청하며 쓰러졌다. 그는 즉시 일어나려 했으
나 간인호의 검이 이미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가인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사제, 훌륭한 유성간월(流星桿月)이었소."
임진남을 쓰러뜨린 유성간월은 벽사검법 중의 일초였다.
임진남이 검을 버리고 탄식했다.
"너희들이, 어떻게 벽사검법을 알고 있느냐 ? 그것도 그다지도 완벽하게......"
그는 방인지의 칼등에 혈도를 짚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만 그들의 말소리
만을 들을 뿐이었다.
"흥, 천하에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소. 저 임씨부부와 어린 자식을 사부
님께 데려갑시다.
가인달이 임평지의 배를 움켜 잡아 일으켜서 몇 대를 후려쳤다.
"이놈아, 오늘부터 사천의 청성산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에 18대씩을 때려야겠다.
그러면 그 예쁘장한 얼굴이 볼 만하게 될 거야."
방인지가 웃으며 말했다.
"됐어 그만해. 죽어버리면 사부님을 어찌 뵐려고, 이놈은 색시같이 약해서 너무
심하게 다루면 안돼."
가인달은 무예가 평범하고 인품이 간사해서 사부가 평소에 그를 싫어했고 동문 사
형제들도 그를 멸시했다. 가인달은 방인지의 말을 듣고 더 이상 때리지 못하고 손
을 거두었다.
방 간 두 사람은 임진남 일가를 음식점으로 끌고 들어가 땅바닥에 팽개쳤다. 방
인지가 말했다.
"여기서 식사나 하고 가지. 가사제, 밥 좀 해오시구료."
"알았습니다."
가인달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간인호가 말했다.
"방사형, 저 세 사람이 도망치지 않을까요. 저 애비의 무공은 무시할 수 없는데,
좋은 수가 없을까요?"
방인지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없어. 밥먹고 난 후, 세 사람의 수근(手筋)을 끊어버리고 포승으로 비파골
(琵琶骨)을 묶어버리면 꼼짝할 수 없지."
임평지가 욕설을 내뱉었다.
"할아버님께서 너희 들을 죽이러 오실 것이다. 사람을 간살하는 더러운 잡졸들."
방인지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 어린놈, 입에 똥을 처넣기 전에 입닥치거라."
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임평지는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인지가 웃으며 말했다.
"간사제, 사부님이 우리에게 72로(七十二路) 벽사검법을 가르쳐 주시어 우리가 이
처럼 완벽하게 전개하는 것을 보고 임표두가 혼이 빠진 모양이오. 임표두, 우리 청
성파가 어떻게 벽사검법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소."
임진남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청성파가 어떻게 우리 임씨 가문의 벽사검법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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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밝혀지는 비밀(秘密)
임평지는 방인지와 간인호를 죽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등의 혈도
가 막혀서 하반신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수근(手筋)이 절단되고 비파골(琵琶
骨)이 묶여 폐인이나 다름없었으니 깨끗이 죽은 것만 못했다.
갑자기 부엌에서 "으악"하는 비명이 들렸다. 가인달의 비명소리였다.
방인지와 간인호는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뛰어갔다. 문에 인영
(人影)이 비치는 듯하더니 한 사람이 소리없이 다가와 임평지의 목덜미를 잡아 일
으켰다. 임평지가 얼굴을 쳐다보니 그 술집에서 심부름하던 못생긴 얼굴의 소녀였
다.
그 소녀는 임평지를 가볍게 들고 문밖 말이 매어져 있는 나무밑으로 데려가서 왼
손으로 허리를 잡아 그를 말잔등 위에 올려 앉혔다.
임평지가 놀라 얼이 빠져있는 사이에 그 못생긴 소녀는 장검을 빼어들어 섬전처럼
휘둘러 고삐를 끊고 말 엉덩이를 가볍게 쳤다. 말이 놀라 울음소리를 내며 숲속으
로 달려들어갔다.
임평지가 외쳤다.
[아버지, 어머니 !]
부모님을 그냥둔 채, 혼자만 도망갈 수는 없었다. 두 손으로 말잔등을 온힘을 다
해 치니 그는 말에서 떨어져 몇바퀴 구르다가 수풀속에 쳐박혔다. 말은 멈추지 않
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임평지는 관목의 가지를 잡고 일어서려 했으나, 양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서려다가 넘어지곤 했다. 어깨와 허리에도 통증이 전해졌는데 말에서
떨어질 때 나무뿌리와 바위에 부딪친 것 같았다.
고함소리, 발걸음소리가 들리며 청성파 무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임평지는 수
풀속에 엎드려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칼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나며 싸우는 소리
가 들려왔다. 임평지가 수풀속에서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청성파의 간인호, 방인
지와 그 추녀와 또다른 한 남자가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얼굴을 흑포로
가리고 있었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것으로 보아 노인이었다. 임평지는 그순간 그가
설노인임을 알아차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저 두 사람도 청성파인 줄 알았는데 저 소녀가 나를 구하다니. 아 ! 그녀의 무공
이 이토록 뛰어난 줄 진작 알았더라면 그때 내가 나서지 않았을 테고. 그랬으면 이
런 멸문지화도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는 또 생각을 바꾸어
(서로 격렬히 싸우고 있으니, 나는 이 틈에 부모님을 구해야겠구나.)
그러나 등의 혈도가 아직 풀리지 않아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인지가 다급하게 물었다.
[너...너는 도대체 누구냐 ? 어떻게 청성파의 검법을 알고 있느냐 ?]
노인은 대답을 않고 돌연 섬광같이 움직여 방인지의 장검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검을 빼앗긴 방인지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고 간인호가 막아섰다. 복면노인이 수초
(數招)를 공격하자 간인호가 외쳤다.
[너는...너는 대체...]
놀란 목소리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갑자기 [쨍]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손
에서도 장검이 떨어졌다. 추녀는 한발 앞으로 나아가 간인호를 찌르려고 했다. 복
면노인이 검으로 추녀를 제지했다.
[죽이지는 마라 !]
그 추녀가 말했다.
[죽일 놈들이에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잖아요.]
[우리는 그만 가자 !]
그 추녀가 머뭇거리자 노인이 말했다.
[사부의 분부를 잊었느냐 ?]
그 추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승복한다.
[살려주도록 하지요.]
추녀는 숲을 뚫고 달려가고 복면노인도 그 소녀를 따라 순식간에 멀리 가버렸다.
방-간 두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자기들의 검을 찾아들었다. 간인호가 말했다.
[정말 신비한 사람들이오, 그들이 누구기에 이렇게 우리의 검법을 알고 있을까 ?]
방인지가 받았다.
[그는 단지 몇 초를 펼쳤을 뿐인데 그 홍비명명(鴻飛冥冥) 일 초의 절묘함이란 정
말...정말...아 !]
간인호가 갑자기 깨닫고 외쳤다.
[그들이 어린 녀석을 구해갔다.]
방인지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조호이산(調虎離山)의 계책이 아닐까. 임진남 부부는 ?]
두 사람은 몸을 돌려 날 듯이 되돌아갔다.
한참 뒤 말발굽소리가 천천히 들리더니 숲속에서 두 필의 말이 걸어나왔는데, 방
인지와 간인호가 한 필씩을 끌고 나왔다. 말잔등에는 임진남과 왕부인이 묶여 있었
다. 임평지는 [아버지, 어머니] 하고 외치려다, 지금 소리치면 자신의 목숨조차 위
태로울 뿐 부모님을 구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고 입을 다물었다.
두 필의 말이 몇 장(丈)걸어간 후 절뚝거리며 한 사람이 뒤따랐는데 가인달이었
다. 머리에 두른 백포(백포)에는 붉은 선혈이 비치었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 놈들이 임가의 아들을 구해가 버렸군. 이 연놈을 매일 칼로 한 번씩 베어 청
성산에 갈 때까지 살아있나 보겠다.]
방인지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가사제, 이 임씨부부는 사부님의 처분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사부님께
문책을 당하려 하는가.]
가인달은 감히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임평지는 청성파의 세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도리어 안심이 되었다.
(그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청성산으로 데려간다면 당장은 부모님께 별 위험이 없
겠구나. 여기서 사천 청성산까지는 수만리나 되니 그 사이에 아버지 어머니를 구할
묘책을 세워야겠구나. 표국의 분국을 찾아가서 이사실을 낙양에 전해야지.)
그는 수풀속에 힘없이 누워, 모기가 물어도 그냥둘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날이 어두워지자 마침내 등의 혈도가 풀렸다. 그제서야 겨우 일어나 천천히 음식점
으로 걸어갔다.
(변장을 하면 그들이 나를 알아볼 수가 없을 거야. 그때 단번에 그 두놈을 죽여
버려야지. 도대체 부모님을 어디서 구하지...?)
그는 음식점 주인방으로 절뚝거리며 들어가 등불을 켜고 갈아입을 옷을 찾았으나
얼마나 궁핍하게 살았는지 옷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음식점 주인
부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죽은 사람의 옷을 벗겨 입어야만 하겠구나.)
죽은 사람의 옷을 벗기니 손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팽개치
고 싶었지만 (내가 잠시의 청결을 위해 시간을 지체하여 기회를 잃고 부모님을 구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천추의 한이 되리라.) 생각하여 그는 입을 악물고 옷을 벗
고 죽은 사람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횃불을 밝혀 사방을 둘러보니 부친과 자신의 장검, 어머니의 금도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부친의 장검을 천으로 싸서 옷속에 숨겨놓고 방향을 잡아 걷기
시작했다. 계곡에서 개구리소리가 들리니 갑자기 마음이 처량해지고 눈물이 나오려
했다. 들고 있던 횃불을 허공을 향해 던지니 횃불이 연못에 떨어졌다. 갑자기 사방
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임평지야, 임평지야, 소심하고 인내심이 그처럼 없으면 다시 청성 사람들에게
잡히고 만다. 그건 마치 횃불이 연못에 빠져 있는 격이지.)
그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 이를 악물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몇 발자국을 걸어가자
허리에 심한통증이 느껴졌으나 그는 더욱 빨리 걸어갔다. 고갯마루에 이르니 길이
사방으로 나있어 부모님이 어디로 잡혀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걷다보니 날이 밝아
햇빛이 얼굴에 비쳐 눈이부셨다. 임평지는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그들이 부모님을 잡아 청성산으로 갔고 사천은 복건의 서쪽인데도 나는 도리어
동쪽으로 왔구나.)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로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은자 한닢도 없었다. 금은 보석
은 말안장 옆의 주머니에 있었고, 은자는 부모님에게 있었기에 그에게는 돈이 한푼
도 없었다.
그는 더욱 조급해 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어떡하지 ? 어떡해야 하지 ?]
그는잠시 서성이며 생각했다.
(부모님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야. 설마 굶어죽기야 할라구.)
그는 고개 아래로 뛰어갔다. 정오쯤 되자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
옆의 용안수(龍眼樹)에 청색의 용안(龍眼)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을 보고 군침이
돌았다. 그는 나무밑으로 가서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이 용안수는 주인이 있을 텐데 주인 몰래 열매를 따는 것은 도둑질이 아닌가.
임씨 가문은 3대 동안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녹림의 도적과 싸워왔는데, 내가 어찌
도둑질을 한단 말인가 ?)
그는 길옆의 용안수는 쳐다보지도 않고 큰걸음으로 걸어갔다.
몇 리를 걸어서 조그만 마을에 당도했다. 그는 인가(人家)를 찾아가 음식을 구걸
했다. 그는 이때까지 누구에게 무엇을 구걸해본 적이 없었기에 몇 마디 하지않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농가의 아낙네에게 삶은 옥수수를
얻어먹고 배를 채웠다.
임평지는 길에서 구걸을 하거나 산야에서 열매를 따먹으면서 요기를 했다. 마침
그 해는 복건성에 풍년이 들어 집집마다 양식이 풍족했기 때문에, 얼굴은 더럽고
옷은 남루했지만 말씨가 부드러웠고 호감가는 인상을 가진 임평지로서는 밥을 얻어
먹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8, 9일을 걸어서 강서(江西) 경내에 도착했고 묻고 물어 남창(南昌)으로의 길을
재촉했다. 남창에는 표국의 분국이 있으니 반드시 어떤 소식이 있을 것 같았고, 소
식은 못 듣더라도 말을 빌어 타고 갈 생각이었다.
남창성에 당도하여 복위표국을 물으니 행인이 이상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복위표국 ? 무엇하시려구요 ? 표국은 이미 화재로 없어졌어요. 근처의 인가도 수
십 채나 타버린 걸요.]
임평지가 허탈하게 표국을 찾아가보니 타다만 기둥과 부숴진 기와조각만 남아있었
다. 그는 가만히 서서 폐허가 된 남창분국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청성파의 흉적들이 한 짓이야. 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
다.
그는 남창에 머무르지 않고 그 날로 서쪽으로 향해서 호남성의 장사(長沙)에 당도
했다. 그는 장사분국 역시 이미 폐허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복위표국에 무슨 일
이 있었느냐고 물으니 모두들 금시초문이라는 듯 어리둥절했다. 그는 매우 기뻐 소
재를 물어 표국을 향해 달려갔다.
표국 입구에 당도해서 보니, 복주 총국만은 못해도 호남분국은 매우 웅장했다.
붉은색 대문 옆에는 두 마리의 석사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며 임평
지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런 꼴로 분국에 나타나면 표두들이 멸시하지는 않을까 ?)
고개를 들어 현판을 보니 {복위표국상국(福威標局湘局)}이라는 금색 글씨의 현판
이 거꾸로 걸려 있었다. 그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표국의 표두들이 어찌 이처럼 해이해져 있는가 ? 현판이 거꾸로 걸려 있다니.)
고개를 돌려 표국의 깃발을 바라보다 그는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왼쪽 깃발
에는 짚신이 걸려 있었고, 오른쪽 깃발에는 너덜너덜한 여자옷이 걸려 바람에 펄럭
이고 있었다.
그때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표국안에서 누가 걸어나와 소리쳤다.
[어느 놈이 여기서 서성거리느냐. 무엇을 훔쳐 갈려고.]
말씨를 듣고 임평지는 방인지나 가인달과 같은 사천인임을 알아차리고 감히 쳐다
보지 못하고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엉덩이를 걷어차였다.
(이곳의 표국도 청성파가 점거하고 있구나. 여기서 아버지, 어머니의 소식을 캐
기 위해서는 내가 참아야지.)
그는 무공을 모르는 체 가장하여 넘어져서 한참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웃으며 몇 마디 욕설을 내뱉고 돌아갔다.
임평지는 천천히 기어 일어나 골목에서 찬밥을 얻어먹고 재를 주워서 얼굴을 시커
멓게 칠한 다음, 담모퉁이에서 머리를 파묻은채 잠을 잤다.
2경(二更)쯤 되자, 그는 장검을 허리에 차고, 후문쪽으로 가서 아무 소리도 들리
지 않자 담을 넘어 과일밭에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는 담에 붙어서 살금살금 걸어
갔다. 임평지는 발소리가 날까 가슴을 조리며 걸어가니 동쪽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
오고 있었다.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이야기소리가 들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
가가 창가에 숨을 죽이고 앉았다. 계속하여 이야기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일찍 이 표국도 불타버릴 테지 ?]
다른 사람이 대꾸했다.
[아니야, 불지르지 않을 거야. 피(皮)사형이 남창표국에 불을 질러 근처의 인가까
지 태우는 바람에 사부에게 꾸중을 들었어. 청성파의 협의도에 먹칠을 했다고 말이
야.]
임평지는 속으로 욕했다.
(청성파 놈들 과연 좋은 일 하는구나. 그러고도 협의도라 자칭하다니 뻔뻔스러운
놈들.)
먼저 말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불을 지르진 않겠군. 그럼 왜 하는 일 없이 여기에 머물러 있지 ?]
[길(吉)사제, 생각해보게. 현판을 거꾸로 걸어놓고, 깃대에 여자옷을 걸어놓았으
면 복위표국의 위명은 땅에 떨어진 것 아닌가. 그걸로 됐지, 뭐 태워버릴 것 까지
야 있겠는가.]
[신(申)사형의 말이 옳습니다. 하하. 저 누더기옷이 복위표국이 망한 것을 나타낸
다면 백년이 지나도 그대로 걸려 있게 해야지요.]
두 사람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길(吉)씨가 말했다.
[내일 형산(衡山) 유정풍(劉正風)을 뵈러가는데 무엇을 가지고 가지요 ? 듣자하니
지난번의 예물이 너무 초라해서 청성파의 이름이 부끄러웠다고 하던데요.]
신(申)씨가 웃으며 말했다.
[예물은 이미 마련했으니 염려하지 말게. 아마 이번에는 유정풍의 눈이 휘둥그래
질 것이네.]
[예물이 무엇인가요 ? 저는 전혀 알지 못하는데요.]
신씨가 크게 웃으며 득의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게, 얼마나 광채가 아름다운지.]
방에서 자루를 여는 소리가 들려오고 길씨가 탄성을 질렀다.
[굉장합니다. 신사형은 이 귀한 물건을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정말 용하십니다.]
임평지는 도대체 어떤 물건인지 보고싶었으나 발각될까 두려워 들여다보지 못했
다.
이어서 신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리가 복위표국을 그저 빼앗은 줄 아나 ? 이 옥마(玉馬) 한 쌍은 원래 사부님께
바치려고 했었는데, 유정풍에게 예물로 보내기로 했지.]
임평지는 가슴속에 울화가 치밀었다.
(우리 표국의 보물을 빼앗아 선심을 쓰는 것이 도둑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장사분국에 무슨 보물이 있을 리 없지. 분명히 전표를 주고 산 것일 텐데. 저걸
회수하지 못한다면 아버지가 돈을 물어야 하겠구나.)
신씨가 말했다.
[이 네 자루의 보물을 하나는 사매들에게, 하나는 사형제들에게 주고, 하나는 너,
하나는 내가 가지도록 하자. 자, 어서 뜯어봐라.]
[이게 다 무엇입니까 ?]
잠시후 길씨의 입에서 놀란 소리가 터져나왔다.
[모두 금은보화로구나. 우리는 제법 큰 부자가 되었네요. 복위표국도 도둑질 꽤나
한 모양이지요. 사형 도대체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 나는 안팎을 샅샅이 뒤졌어도
은자 백여냥밖에 못찾았는데. 사형은 어디서 이런 귀한 물건을 찾았습니까 ?]
신씨가 득의에 차서 웃으며 말했다.
[표국이 금은보화를 아무곳에나두겠느냐 ? 며칠 동안 네가 서랍, 상자, 벽속을
뒤지는 걸 지켜보았네 헛수고라고 말해도 믿을 것 같지도 않고 도리어 나를 의심할
까봐 이야기하지 않았지. 표국안에 있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무엇이 있나 ?]
길씨가 한참 생각한 후 대답했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 내가 보기에 이 표국에는 이상한 점이 매우 많아요. 무예
는 형편 없으면서 깃발에는 위풍당당한 사자를 수놓고 있기나 하고 말입니다. 에
또, 장표두라는 사람이 분국의 주인인데 자기 침실 벽장에 관을 넣어두지를 않나
말입니다.]
신씨가 웃으며 말했다.
[네 머리도 쓸만하구나. 그가 왜 벽장에 관을 두었을까 ? 관속의 사람이 어머니여
서 차마 묻을 수 없어서일까 ?]
길씨가 [아]하고 소리치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래, 그랬구나. 금은보석이 그 관속에 있었구나. 교묘하구나. 교묘해.]
자르륵, 자르륵하고 금은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고 한참후 길씨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신사형, 씻을 물을 가져올 테니. 세수나 하고 그만 잡시다.]
하품을 하면서 방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임평지는 창밑에 쭈그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길씨라는 사람을 곁눈질로
보니 작고 땅땅한 게 낮에 자기를 걷었찼던 사람같았다.
잠시후, 길씨가 더운 물을 갖고 방에 와서 말했다.
[신사형, 사부께서 보낸 사형제들 중 우리 두 사람이 제일 큰 공을 세운 것 같습
니다. 이것은 사형의 복이고 또한 저의 영광입니다. 장(蔣)사형은 광주(廣州)분국
을, 마(馬)사형은 항주(杭州)분국을 빼앗았지만, 이리저리 설치느라 우리 만큼의
수확은 없을 겁니다.]
신씨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방사형, 간사형과 가인달은 복주총국을 빼앗았으니 노획물은 우리 둘보다 많을
거야. 그러나 사부의 아들을 잃었으니 그것은 공을 세우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
지.]
길씨가 말을 이었다.
[복위총국을 공격할 때는 사부님이 친히 지휘하셨으니 방사형 간사제가 한 일은
별로 없지요. 여사제가 죽었으니, 사부님께서 그들을 탓하지 않을 리 없지요. 이번
에 우리들이 대거 출동하여 총국과 각 성의 분국을 치면서 임씨 가문의 무예가 이
토록 형편없는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방사형을 비롯한 세 명의 선봉에 의해
임진남 부부가 잡히지 않았습니까. 사부님조차 매우 놀라셨지요. 하하하 !]
임평지는 세수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청성파에서 이미 총국과 분국을 한꺼번에 칠려고 계획을 짰었구나. 내가 그 여
(余)씨 놈을 죽여서 화를 만든 게 아니었구나. 여창해(余滄海)가 직접 복주에 왔으
니, 최심장이 그토록 신출귀몰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런데 우리 표국이 청성파
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우리를 이렇게 악랄하게 공격하는 걸까 ?]
또 신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께서 잘못 보신게 아니야. 복위표국의 명성이 드높은 것은 분명히 무엇인
가 이유가 있어. 벽사검법은 무림계에 명성이 높아 아무도 경시할 수가 없네. 다만
자손이 불민하여 선조의 무예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이지.]
임평지가 그 소리를 듣고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신씨가 말을 이었다.
[우리들이 하산하기 전에, 사부님과 우리들이 벽사검법의 파해법을 연구했었는데,
몇 달이 지나도 벽사검법의 원리를 알아낼 수 없었지. 내가 보기에 벽사검법의 위
력은 굉장할 것 같아. 다만 완벽하게 펼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모양이지만. 길사
제 자네는 어느 정도 깨우쳤는가?]
[사부님 말씀이 임진남도 벽사검법을 완벽하게 펼치지 못한다고 하는데 제가 어찌
그 검법을 깨우쳤겠습니까. 신사형, 사부님이 보낸 전령에 본문 제자들은 형산으로
되돌아오도록 하셨는데, 방사형도 임진남 부부를 데리고 형산으로 가지 않았습니
까. 벽사검법의 전인에게 왜 그처럼 후하게 대하는지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임평지는 부모님이 형산에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
로는 말할 수 없이 심정이 착찹했다.
신씨가 웃으며 말했다.
[며칠 후 임진남을 만날 수 있으니, 벽사검법을 배울 수 있을 걸세.]
곧 방에 불이 꺼지고 사방이 컴컴해졌다.
임평지는 즉시 그곳을 떠나고 싶었으나 사방이 너무나도 고요해 발각될까봐 그들
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창밖에 기대어 꼼짝않고 한참을 있으니 그때야 비로소 코고
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창을 보니 창문을 닫지 않고 열어 두었다.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로구나.)
임평지는 오른손으로 허리에서 장검을 빼들고 왼손으로 창문턱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달빛이 창으로 비치어 두 개의 침상에 한 명씩 자고 있는 것이 훤하게
보였다. 엎어져 자고 있는 놈은 머리카락이 몇 올 남지 않은 대머리였고 바로 누워
자는 놈은 머리카락이 쑥대밭처럼 길게 자라 있었다. 침상앞의 탁자위에는 5개의
작은 자루와 두 자루의 검이 놓여있었다.
임평지는 검을 치켜들며 생각했다.
(한 칼에 한 명씩 해치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지.)
막 검을 들어 내리치려다 다시 생각했다.
(내가 지금 두 놈을 몰래 죽이는 것은 장부가 할 짓이 아니지 않는가? 후일 가전
무공을 제대로 익힌 후 청송파의 원수놈들을 찾아 해치우는 것이 대장부다운 행동
이겠지.)
그래서 천천히 5개의 자루를 창문가에 놓여 있는 탁자위에 오려놓고 창을 열어 창
문턱으로 올라섰다. 장검을 허리에 차고 자루 세 개는 등에 지고 한손에 하나씩 들
고 뛰어내려 후원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갔다.
그는 후문을 열고 표국을 나와 남문으로 걸어갔다. 남문에 이르니 성문이 아직 열
리지 않아 성벽옆의 구릉뒤에 몸을 기대고 숨어 있었다. 청성파의 제자들이 추격할
까봐 가슴이 계속 쿵쿵 뛰었다. 날이 밝아 성문이 열리자, 그는 곧 성문을 벋어나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수십리를 내달렸다.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놓여졌다. 복주를
떠난 이래 지금까지 가슴 한번 펼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눈앞에 음식점이 보이
자, 그는 국수를 시켜 배불리 먹고는 자루에서 은자를 꺼내어 주인에게 지불했다.
주인이 가게에 있는 모든 동전을 찾았으나 거스름돈이 부족했다. 임평지는 이제까
지 얻어 먹는 신세가 되어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던가 ? 이제 손을 저으며 큰소
리로 말할 수 있었다.
[거스름돈은 필요없소. 주인장이 가지시오.]
비로소 소표두의 호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삼십여 리를 더 걸어가서 제법 큰마을이 나타났다. 임평지가객점에 방을 얻어 창
문을 닫아걸고 5개의 자루를 풀어 보았다. 열어보니 자루 네 개에는 황금과 은이
가득했고, 하나에는 높이가 오촌(五寸)쯤 되는 옥마(玉馬) 한 쌍과 진기한 물건들
이 가득차 있었다.
(일개 장사분국에 이렇게 많은 재보(財寶)가 있으니 청성파가 탐을 낼 만도 하구
나.)
그는 당장 약간의 은을 가지고 5개의 자루를 하나로 합쳐 등에 지고 시장으로 가
서 좋은 말 두 필을 샀다. 두 필의 말을 번갈아 타면서 하루에 두세 시진(時辰)만
자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했다.
꼬박 하루를 달려 형산에 당도했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임평지는 방인지 일당들에게 들킬
까봐 고개를 숙이고 객점을 찾아갔다. 몇 집을 들렸으나 모두 방이 없었다. 점소이
(店小二)가 말했다.
[3일 후가 유대야(劉大爺)께서 무림을 떠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객점마다 하객으
로 가득찼으니 다른 곳을 찾아가 보세요.]
임평지는 후미지고 조용한 거리로 가서 세곳의 객점을 거쳐서야 겨우 조그마한 방
한 칸을 얻었다. 임평지는 얼굴이 비록 더러워졌으나 방인지 일당이 알아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방에 가서고약을 사 얼굴에 붙이고 두 눈썹을 깎아버리
고, 왼쪽 입술을 뒤집어 이빨이 반쯤 보이도록 했다.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니 자신
이 봐도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그리고 또 금은보화가 들어 있는 자루를 등에 넣
고 그위에 옷을 걸친 다음 허리를 약간 구부리니 영낙없이 꼽추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 기괴하게 모습이 바뀌었으니 부모님도 못알아 보실 거야. 이제는 걱
정이 없구나.)
그는 비골대면(菲骨大麵) 한 그릇을 시켜먹고는 복잡한 거리로 나갔다. 부모님의
행방을 알 수 있으면 좋겠고, 아니면 청성파의 소식을듣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반나절동안 돌아다니니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는 길거리에서 삿
갓을 사 머리에 쓰고 하늘을 쳐다보니 캄캄한 게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았
다.
길모퉁이를 돌아가니 찻집에 사람이 가득했다. 그도 찻집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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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남악(南嶽) 형산(衡山)의 장엄한 모습이 멀리 바라뵈는 형산성(衡山城)의 거리
는 한적하기만 했다. 찻집에는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사
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다박사(茶博士:차를 나르는 사람)는 남과자(南瓜子)와 차
를 내왔고 한쪽 구석에서는 <삼국지>와 <수호지> 같은 이야기책을 읽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날 따라 태평다루(太平茶樓)에는 무사 차림을 하고 있는 손님
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렴이 걷히고 한 사람이 다루 안으로 들어섰다. 비를 피하려고 머리에 썼던
기름종이로 만든 삿갓을 벗자 그 삶의 용모가 드러났다. 나이가 약관에 이른 꼽
추였는데, 얼굴은 곰보자국으로 가득했으며 짙고 뭉퉁한 눈썹과 위로 뒤틀려 올
라간 입술이 보는 이로 하여금 역겨움을 느끼게 했다.
[어서 오십시오.]
다박사가 꼽추에게 옆의 자리를 하나 정해 주고 뜨끈뜨끈한 차와 한 접시의
남과자를 갖다 주었다. 꼽추는 주위를 한 번 둘러 보더니 천천히 남과자를까먹
기 시작했다.
꼽추의 옆에는 흑의를 걸치고 칼을 찬 세 명의 무사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
다. 그들 중에서 젊고 바짝 마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유 대협(柳大俠)께서 금분세수(금분세수:금대야에 손을 씻는다는 말로
은퇴식을 뜻함)의 예식을 치르게 된다면 대단히 많은 하객들로 붐빌 것이라 생
각되는 군요. 아직 삼 일이나 남았는데 버써 이 형산성은 각지의 영웅호걸들로
가득 차지 않았읍니까?]
옆에 있던 뚱뚱한 장한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거야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 오악검파(五嶽劍派)의 위세는 천하를 떨게
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중원오악의 하나인 남악 형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오악검파 중의 하나인 형산파의 둘째 가는 고수이니만큼 유 대협의 위세는 하늘
에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고도 남지. 그러니까 그가 금분세수를 하는 예식장에
는 강호의 이름 높은 영웅호걸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게 될거야.]
마른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정풍(柳正風) 대협은 무공 역시 뛰어나 형산파에는 장문인(掌門人:문파의
우두머리)으로 있는 막대선생(莫大先生)과 버금간다고 하더군요. 형산파의 독특
하고 오묘한 회풍낙안검(廻風落雁劍)을 유 대협은 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터
득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뭐가?]
[유 대협의 나이도 오십 세에 불과하고 무공도 이제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한창 활동할 나이가 아니겠어요? 그런데 왜 은퇴를 하는 걸까요?]
뚱뚱한 장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군. 유 대협의 명성은 중천에 떠 있는 태
양처럼 드높은데 어째서 은퇴를 서두르는 것일까?]
이때 건너편 탁자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비단장삼을 몸에 두른 장한이 큰 소
리로 말했다.
[나는 며칠 전 무한(武漢)에 갔다가 한 가지 소문을 들었소. 유 대협께서 금분
세수를 하게 된 데는 실로 부득이한 고충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찻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비단옷을 입은 장한을 바라보았다.
구석에 잇던 한 무사가 소리쳐 물었다.
[귀하는 무슨 소문을 들었읍니까? 몹시 궁금하군요. 이야기 좀 해 주십시오.]
비단옷을 입은 장한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소문은 내용을 다른 지방에서 발설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이 형산성에서는
말하기가 곤란하군요.]
그러자, 키가 작고 땅딸한 사내가 거친 음성으로 비양거렸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마치 혼자만 알고 있는 듯이 뻐기는
꼴이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땅딸한 사내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몇 사람이 이
구동성으로 물었다.
[당신도 알고 있읍니까? 들려 주시오.]
땅딸한 사내는 큰 기침을 한번 하고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유 대협이 금분세수를 하게 된 이유는 형산파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
열을 미연에 방지하려느 데 잇지요.]
[내분이라뇨?]
땅딸한 사내는 느긋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은 유 대협의 무공이 형산파의 장문인 막대선생보다 약하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오. 두 사람이 몇 년 전 무예를 겨루게 되었을 때 막대
선생은 일검(一劍)으로 세 마리의 날아가는 기러기를 베어 떨어뜨렸지만 유 대
협은 다섯 마리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형산파의 제자들은 유 대협이
장문인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막대선생파와 유 대협파로 분열되었던
것입니다. 쌍방은 몇 번이나 충돌하였고 그 과정에서 십여 명의 고수들이 죽었
다고 하더군요. 유 대협은 형산파의 장래를 생각한 끝에 스스로 은퇴하여 막대
선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려고 한답니다.]
모두들 분분히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그와 같은 사연이 있었군! 유 대협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
켰으니 정말 훌룡한 분이시다!]
[막대선생이 소심한 거야! 유 대협에게 은퇴를 강요한 것과 다름이 없지 않
아? 스스로의 무공이 약하다면 장문인 자리를 유 대협께 물려 주었어야 되는 건
데!]
[막대선생을 욕할 수만은 없어. 누구나 권세를 한번잡게 되면 포기하기 힘드
니까.]
이때였다. 갑자기 문 밖에서 스르릉 스르릉 하며 호금(胡琴)을 타는 음향이 들
려왔다. 그리고 구슬픈 노랫소리도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다.
[양가(揚家)의 충성심을 애도하노라. 송(宋)나라의 위기를 타개하려고......]
목청을 길게 빼는 그 노래는 매우 처량했다. 모든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문 밖을 내다보았다. 마루 안으로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백발 노인이 품 안에 낡
은 호금을 안은 채 천천히 들어서고 있었다. 피부는 밀납처럼 창백했고 쭈글쭈
글 주름이 져 있었으며, 몸에는 빛 바랜 청삼을 걸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는 사람인 것 같았다.
땅딸한 사내는 노인이 나타나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끄러워요!]
노인은 즉시 호금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여전히 노래가락을 흥얼
거렸다.
[금사탄(金沙灘)의 싸움에서 패하게 되니......]
이때 땅딸한 사람은 노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좌중을 향해 말했다.
[유 대협의 은퇴식은 형산파에서 주요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막대선생 일파는
유 대협의 집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강호의 손님을 맞이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지요. 이것만 보아도 막대선생이 얼마나 소심한 사람인지 잘 알 수가 있읍니
다.]
갑자기 노인은 높은 목청으로 노래를 불렀다.
[소슬비는 난간에 부슬부슬 내리고...... 떠나는 님을 전송하는 이 마음......]
한 젊은이가 노인을 향해 호통을 질렀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돈이나 받아서 가시오!]
말과 함께 한 꾸러미의 동전을 노인 앞으로 던졌다. 동전꾸러미는 쨍그랑 소
리를 내며 정확히 노인의 호금 위에 떨어졌다. 노인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동전
꾸러미를 거두어들였다. 땅딸한 사내는 말을 계속했다.
[유 대협은 대인(大人)이고 막대선생은 소인(小人)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갑자기 노인은 걸음을 옮겨 땅딸한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꺄우뚱한 채 땅딸한 사내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 보았다. 땅딸한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왜 이래?]
노인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어서......]
노인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땅딸한 사내는 벌컥 화를 내며
손을 뻗쳐 노인의 등을 움켜쥐려고 했다. 별안간 푸른 빛이 번쩍이며 쨍그렁
쨍!하는 음향이 일었다. 땅딸한 사내는 깜짝 놀라 뒤로 몸을 젖혔다. 노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가늘고 파란 빛이 감도는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노인은
장검을 위로 쳐들더니 호금의 밑바닥에 서서히 찔러넣었다. 이윽고 검신은
호금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원래 이 장검은 호금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인은 천천히 문 밖을 나섰다. 모두들 노인이 빗속으로 사라지
는 것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뒷모습은 몹시 고독해 보였다. 처량한 호금 소리
는 점점 멀어져서는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아' 하
고 놀라며 부르짖었다.
[여러분, 저것 보시오!]
모두들 소리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땅딸한 사내가 앉아 있는 탁자 위
에 있던 일곱 개의 찻잔들이 일정한 높이로 수평이 되게 잘라져 있었다. 둥
글게 잘라진 윗부분은 옆에 떨어져 있었으나 찻잔은 하나도 쓰러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수십 명은 일제히 일어서서 탁자를 에워싸고 웅성거렸다.
[그 노인은 누구지? 누구이기에 그토록 검 쓰는 수법이 무서울까?]
[일검으로 일곱 개의 유리잔을 잘랐을 뿐 아니라 찻잔이 하나도 쓰러지
지 않았다니...... 신의 솜씨다!]
[다행히 노인이 사정을 봐 주어서 다행이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노형의
머리통은 이 찻잔처럼 베어지고 말았을거요.]
땅딸한 사내는 일곱 개의 잘라진 찻잔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한 점의 혈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옆에서 사
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자고로 시비는 입에서 비롯되고 재앙은 혀에서 생긴다고 햇소. 지금 이
곳 형산성에서 천하의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으니 우리
모두는 조심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 노인은 아마도 막대선생의 친구일
것이오. 우리들이 막대선생이 없는 자리에서 이러쿵저러쿵 험담을 하는 것을
보고 한번 검을 휘둘러 교훈을 내렸던 것이외다.]
구석에 있던 비단옷을 걸친 중년 무사가 차갑게 말했다.
[누가 막대선생의 친구라는 거요? 그 노인이 바로 형산파의 장문인인 소
상야우(瀟湘夜雨) 막대선생이란 말이오.]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뭐라고? 그분이 막대선생 본인이라고? 당신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소?]
비단옷을 입고 무사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자연히 알게 되었소. 막대선생은 호금 타기를 좋아한다오. 소상야우라
는 곡(曲)을 그 분이 연주하면 듣는 사람은 누구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하
지 않습니까? <금중장검(琴中藏劍) 검발금음(劍發琴音)>의 이 여덟 자는 바로
그 분이 지니고 있는 무예를 표현한 귀절입니다. 그 노인의 호금 속에 검이
숨겨져 있는 것을 여러분은 보지 못했읍니까?]
비단옷을 입은 무사는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땅딸한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
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저분이 막대선생의 실력이 유 대협보다 뒤떨어진다고 하면서 기러기를
세 마리밖에 떨구지 못했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막대선생은 일검에 일곱 개
의 찻잔을 잘라 스스로의 실력이 유 대협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오. 찻잔마저 자르는 그분께서 기러기를 베어 떨어뜨리지 못할 리가 없
지요. 그렇기 때문에 막대선생은 저분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비단옷을 입은 무사는 차값을 지불하고 총총히 찻집을 나선다. 모든 사람
들은 소상야우 막대선생이 세상을 놀라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는 솜씨를 보
여준 이후 하나같이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그들 모두는 조금 전 땅딸한 사
내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가 아니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던 점을 상기하
고 그곳에 더 이상 머무르다가는 다시 어떤 불미스런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고 생각하고 찻집에서 나갔다.
사람들로 붐비던 찻집은 금새 썰렁해지고 말았다. 남아있는 사람은 못생긴
꼽추와 구석진 자리에서 얼굴을 탁자 위에 대고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는 두
사람뿐이었다. 꼽추는 놀란 눈초리로 일곱 개의 반토막이 난 찻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노인의 모습은 초라해 보이고 힘이 전혀 없어 보였다.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였는데, 그의 장검이 한번 번뜩이는 순간 일곱 개의 찻잔을 베어
버리지 않았는가? 내가 복주(福州)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세상에 이처럼 놀라운
무술이 있다는 사실을 어찌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나야말로 복위표국(福
威標局)에서 하인들을 호령하면서 스스로 뽐내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물
안의 개구리와 다름이 없었구나! 그동안 나는 아버님께서 천하제일의 무예를
지니신 줄 알았는데 이 노인은 아버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예가
탁월하구나! 내가 그분을 사부로 모셔서 무예를 배우게 된다면 복위표국을 멸
망시킨 청성파(靑城派)의 원수들을 무찌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막대선생
을 찾아가서 우리 부모님을 구출해 주고 나를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애걸을 해
보았겠다.]
꼽추는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고 몇 걸음 옮기다가 갑자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부질없는 일이다! 막대선생은 형산파의 장문인이다. 오악검파와
청성파는 깊은 교분을 맺고 있는데 막대선생이 알지도 못하는 나를 제자로 거
두어들이고 나를 위해 청성파와 싸울 까닭이 없다.]
홀연 문 밖에서 말고 고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둘째 사형, 비가 멎지 않았네요. 저의 옷이 다 젖을 것 같으니 여기에서
차를 마시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게 어때요?]
꼽추는 그 음성을 듣자 깜짝 놀라며 고개를 아래로 숙여 얼굴이 남에게 보
이지않도록 했다. 문 밖에는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좋아! 따끈따끈한 차를 마시며 한기가 좀 가실 것이다.]
두 사람은 찻집 안으로 들어서더니 한쪽의 탁자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앗
다. 몸에 청의를 걸친 소녀와 오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소녀의 얼
굴은 곰보자국으로 가득해서 보기에 몹시 추했다. 꼽추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당신네 두 사람은 사형제간이었군! 그런데 할아버지와 손녀딸로 가장
을 하고서 술집을 차렸던 것이구나. 그들은 어찌해서 복위표국의 근처에서 술
집을 차리고 술을 파는 행세를 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찌해서 청성파 고수들
에게 납치되어가던 나를 구출해 주었을까?어쩌면 그들은 부모님의 행방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꼽추로 변장을 하고 얼굴 모습을 바꾸기를 정말 잘 했
구나! 하마터면 저들에게 발각될 뻔하지 않았는가?)
이때 다박사가 끓인 차를 두 삼에게 날라왔다. 노인은 차를 받아 들고 훌훌
불며 마시다가 갑자기 '어' 하고 놀란다.
[소사매, 저것 좀 봐!]
소년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람을 감추
지 못했다. 바로 막대선생이 자른 일곱 개의 찻잔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저 한 수의 무예는 정말 놀랍군요! 누가 저 일곱 개의 찻잔을 베어 버렸을
까요?]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소사매, 내가 소사매를 한번 시험해 봐야겠군! 일검을 휘둘러 단번에 일곱
개의 찻잔을 자를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춰 보게나.]
소녀는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내가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누가 그랬는지 알 수가 있겠어요? 아...... 아
니예요! 나는 알 수 있어요!]
소녀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호호호! 삼십육로(三十六路) 회풍낙안검(廻風落雁劍)의 제 십칠초인 일검
낙구안(一劍落九雁)이라는 수법이 분명해요! 이것이야 말로 유정풍 대협의 걸
작이예요!]
노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유 대협의 검법은 아직 이런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소사매
는 겨우 절반만 알아맞추었어.]
소녀는 둘째 손가락을 내밀어 노인의 입술을 꾹 누르며 웃었다.
[그만 말씀하세요! 나는 알아애었다구요! 이건 바로...... 소상야우 막대선
생이 만들어 낸 걸작이예요.]
이때였다. 갑자기 대여섯 명의 남자가 한꺼번에 웃어젖히는 소리가 들려왔
다.
[하하하! 사매는 정말 날카로운 안목을 가지고 있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꼽추는 깜짝 놀라 곁눈질을 하며 사방을 살펴보았
다. 탁자 위에 엎드려 코를 골고 있던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찻집의
문 밖에서도 몇 명의 인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짐꾼의 차림이었
고, 어떤 사람은손에 주판을 든 상인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깨 위
에 작은 원숭이를 얹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마도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며
약을 파는 사람인 듯했다.
소녀는 나타난 사람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호호호! 한 떼의 저속한 사람들이 이제보니 모두 여기에 숨어 있었군요!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구요! 그런데 대사형(大師兄)은 왜 보이지 않죠?]
그러자 어깨에 원숭이를 태우고 있는 사람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보자마자 저속한 사람들이라고 욕을 하기야?]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몰래 숨어 있다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저속한 사람들이 언제나 즐겨
사용하는 못된 습관이라구요. 대사형은 어찌해서 함께 오시지 않았어요?]
원숭이를 어깨에 태우고 있는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다짜고짜 대사형부터 찾는군! 어째서 여섯째 사형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거지?]
소녀는 발을 한번 구르고 쏘아부쳤다.
[쳇! 원숭이처럼 생긴 여섯째 사형은 이곳에 버젓이 있고, 죽지도 않았고
썩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그대에 관해서 물어요?]
그러자 그 사내는 웃으면서 말했다.
[대사형 역시 죽지도 않았고 썩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에 관해서 묻는거
지?]
소녀는 뾰로통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대와 말하지 않겠어요. 오직 네째 사형만이 좋은 사람이예요. 네째
사형, 대사형은 어떻게되었나요?]
짐꾼차림의 사내는 뭐라고 대답하려고 할 때 몇 사람이 일제히 입을 열었
다.
[네째 사형만이 좋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모두 나쁜 사람이란 말이지? 네째,
그녀에게 말해 주지 말게나.]
소녀는 샐쭉해져서 말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뻐기는 거예요. 말하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사형들
이 이야기해 주지 않으니 나도 둘째 사형과 함께 겪은 괴이한 일들을 들려 주
지 않을 거예요.]
짐꾼 차림의 사내는 그녀에게 놈담을 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순박하고 과묵한 사람인 듯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제 형양(衡陽)에서 헤어졌어. 대사형은 우리 보고 먼저 이곳에
와서 기다리라고 했어. 지금쯤은 술이 깨었을테니 머지 않아 이리로 달려올거
야.]
소녀는 살짝 미간 찌푸렸다.
[또 술에 취하셨나요?]
짐꾼 차림의 사내는 말했다.
[맞아.]
손에 주판을 들고 있는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번에 대사형은 정말 통괘하게 마셨지. 아침에서 정오까지
그리고 정오에서 해질 무렵까지 마셨으니 적어도 이삼십 근의 술
은 마셨을 꺼야.]
소녀는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그렇게 많이 마시면 몸을 버린단 말이예요! 어째서 만류하지
않았죠?]
주판을 들고 있는 사람은 혀를 쑥 내밀더니 말했다.
[대사형이 언제 남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나. 그렇다면 해가
서쪽에서 뜨게? 소사매가 그에게 권한다면 또 모르지. 한 모금
정도 줄여 마실지도......]
그러자 여러 사람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는 급히 말했
다.
[어째서 그토록 퍼 마시게 되었죠?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요?]
주판을 든 사람이 말했다.
[그야 사형 자신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혹시 모르지.
형산성에 오게 된다면 소사매를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
아져서 술을 퍼 마셨는지도!]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터무니없는 소리 말아요! 여자를 우롱했다고 아버지에게 일러
바칠거예요!]
그러나 그녀의 어투에는 기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꼽추는 그들 사형사매가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어보건데 이 소녀는 대사형이라는 인물에 대해 정
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둘째 사형이라는 자가 저토
록 늙었으니 대사형은 더욱 늙지 않았겠는가? 이 소녀의 나이는
불과 십육 세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와 같은 늙은이
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아! 그렇군! 이 소녀의 얼굴은 정말 보기
힘들 정도로 추하지 않은가. 따라서 세상의 어느 남자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자 정에 굶주린 이 소녀는 한사
람의 늙은 홀아비의 주정뱅이를 사랑하게 된 모양이구나.)
이때 소녀는 다시 물었다.
[대사형은 아침 일찍부터 술을 마셨나요?]
원숭이를 어깨 위에 태우고 있는 사내가 말했다.
[소사매가 이토록 간절하게 애원하니 모두 이야기해 주도록 하
지. 어제 아침 일찍 우리들 여덟 명이 막 출발하려고 할 즈음에
대사형은 갑자기 술냄새를 맡게 되었지. 한 거렁뱅이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손에 호로(葫蘆)를 들고는 입에 호로병의 주둥
이를 대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고 있는 중이었어. 대사형은 회
가 동하여 거렁뱅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더군. '술향기가 몹시 특
이한데 무슨 술이요.' 하고 물었던 거야. 그러자 거렁뱅이가 이
렇게 대답했지. '이것은 원숭이술이라는 것이외다.' 대사형은 호
기심을 끔치 못하고 물었지. '원숭이술? 처음 듣는 소린데요?'
거렁뱅이는 원숭이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었지. '호남성 북쪽
의 산 속에는 원숭이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데 과일을 따서
술을 만들기도 한다오. 원숭이들은 가장 신선하고 달콤한 열매를
골라서 술을 빚기 때문에 그 맛이 천하제일이라오. 나는 우연히
산 속에서 그 술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마침 원숭이들이 집을 비
웠던 터라 세 호로나 되는 원숭이술을 훔칠 수 있었고 한 마리의
새끼 원숭이를 잡게 되었소.']
말을 하던 사내는 어깨에 태운 원숭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이 바로 그 거렁뱅이가 데리고 있던 원숭이 새끼야.]
그 원숭이의 뒷다리는 노끈에 묶어져 있었고 그 사내가 노끈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 원숭이는 끊임없이 머리를 긁적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매우 우스꽝스럽고 귀여웠다.
소녀는 원숭이를 바라보고는 깔깔 웃었다.
[여섯째 사형, 사형이 육후아(六喉兒)라는 별명을 가진 것도
무리는 아니예요! 여섯째 사형과 이 작은 원숭이는 정말 생김새
가 비슷하네요!]
육후아라고 불리는 사람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원숭이는 나의 친형제가 아니고 나의 사형(師兄)이야. 우리
는 이 원숭이 나으리를 마땅히 첫째 사형이라고 불러야 돼.]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 배꼽을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소녀
는 눈을 흘기며 빈정거렸다.
[잘 하는 짓이군요! 말을 빙 돌려 대사형을 원숭이 같은 인간
이라고 빗대어 욕을 하다니요! 내가 고자질을 안 할 줄 아세요?
대사형은 아마도 여섯째 사형이 몇 번이나 곤두박질치도록 아프
게 발길질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런데 저원숭이는 어쩌다가 여섯
째 사형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었죠?]
육후아는 말했다.
[나의 사형인 이조그만 짐승 말인가? 아...... 말을 하자면 정
말 골치가 아프지.]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요. 틀림없이 대사형께서 그 원숭이
를 달라고 해쏀죠 뭐. 그리고 여섯째 사형에게 돌보라고 했겠지
요. 대사형은 아마도 이 쬐그만 녀석이 한 호로의 원숭이술을 담
가 자기에게 먹여 주기를 바라고 있을 거예요.]
육후아가 말했다.
[정말 대사형에게 대해 많이도 연구했군! 맞아! 소사매는 정말
보지도 않고 훤히 내다보는구만!]
소녀는 다소곳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형께서는 정말 이상야릇한 것만 좋아해요. 원숭이는 숲
속에 있을 때나 술을 빚는 법이예요. 사람이 붙잡고 있다면 어떻
게 열매를 따서 술을 만들 수가 있겠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째서 육후아 사형이 원숭이술을 담그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없었겠어요?]
육후아는 화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매, 사형을 존경하지는 못할망정 원숭이라고 하면 어떡해?
정말 아래 위도 없이 함부로 말하기야?]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어머나! 새삼스럽게 사형의 위신을 세워보겠다는 거예요? 여
섯째 사형, 그건 그렇다 치고 대사형은 어쩌다가 아침부터 저녁
까지 술을 마시게 되었죠?]
육후아는 지나간 일을 회상하듯 눔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아...... 눈에 선하군! 그대 대사형은 더럽지도 않은지 거러
뱅이가 먹고 있는 술맛을 좀 보자고 하더군. 그 거렁뱅이의 살갗
에는 시커먼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다 떨어진 의복에는 쌀
알만한 이가 들락날락 했었지. 어디 그뿐인가? 눈물과 콧물이 흘
러내려 얼굴은 온통 더럽게 반죽이 되어 있었어. 틀림없이 그 호
로병에는 많은 양의 눈물과 콧물이 떨어져을 거야.]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해요. 구역질이 나려고 그래요.]
육후아는 짓궂게 말했다.
[사매는 구역질이 날지 모르지만 대사형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
었어. 그 거렁뱅이는 세 호로의 원숭이술을 모두 마시고 겨우 반
호로의 술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남에게 줄 수가 없다고
말했어. 나 같으면 공짜로 주어도 마시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대사형은 한 냥의 은자를 꺼내면서 그 더러운 술을 사려고 하더
군.]
소녀는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정말 대사형은 바보예요! 그는 너무 술을 좋아해서 탈이라고
요!]
육후아는 싱긋 웃고 말을 계속했다.
[그 거렁뱅이는 은자를 보자 손을 내밀어 은자를 나꿔채면서
말 했지. '당신이 하도 먹고 싶어하니까 딱 한 모금만 마시도록
허락하겠소. 딱 한 모금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대사형은 이
렇게 말했지. '한 모금만 마시라면 그렇게하겠소이다.' 그리고는
호로를 입으로 가져가 마시기 시작했지. 대사형이 한 모금을 마
시는 시간은 매우 길었지. 꿀꺽꿀꺽 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단숨에 반 호로나 되는 술을 다 마셔 버리는 것였어. 이때 대사
형은 사부님이 전수해 준 기공(氣功)을 펼쳐서는 숨 한번 쉬지
않고 용(龍)이 강물을 마시듯 호로의 술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
고 모두 마셔 버렸던 거야.]
사람들은 거기까지 듣게 되자 일제히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육후아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소사매(小師妹), 어제 그대가 형양에서 친히 대사형이 그 술
을 마시는 재간을 보았더라면 정말 탄복하고 말았을 거야. 그야
말로 '신응단전(神凝丹田) 식유자부(息遊紫府) 신고능허이초화악
(身苦凌虛而超華嶽) 기여충소이감북진(氣如沖宵而憾北辰)이라는
구절이 실감이나는 순간이었다니까! 이 한 수의 숨을 쉬는 재간
이야말로 신(神)의 경지에 도달하여 있어 오묘하기 이를 데 없었
단 말이야.]
소녀는 깔깔 웃으면서도 쌀짝 눈을 흘겼다.
[터무니 없는 소리는 그만 하세요. 대사형의 술을 마시는 행동
이 우스꽝스러웠다고 해서 무공의 비결을 들먹일 것까지는 없다
구요! 우리 문파의 무공 비결을 조롱했다고 아버지께 일러바치고
말테니 두고 봐요.]
육후아는 황망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내가 문파의 구결(口訣)을 욕하는데 사용한 것은 아
냐! 모두 보았다니까! 이것들 봐, 대사형이 구결에 있는 재간으
로 술을 마시는데 쓴 것을 모두 보았지요?]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소사매, 육후아의 말은 사실이야.]
소녀는 기가 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기공을 오직 대사형에게만 전수해 주셧는데
고작 거렁뱅이의 콧물이 섞인 술을 빼앗아 마시는데 사용하다
니...... ]
육후아는 말했다.
[대사형이 호로의 술을 모조리 마셔 버리자 그 거렁뱅이는 화
가 나가 대사형에게 대들었지. '딱 한 모금만 마시겠다고 하고서
어째서 반 호로의 술을 다 마셔 버리는 거요!' 대사형은 웃으면
서 이렇게 말했지. '나는 확실히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소. 내
가 언제 숨을 바꾸는 것을 보았소? 숨을 바꾸어 쉬지 않으면 그
게 한 모금이 아니고 뭐겠소? 우리는 큰 한 모금과 작은 한 모금
을 정하지 않았단 말이외다. 사실 나로서는 반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소. 한 모금도 채 마시지 못했단 말이오. 적어도 다섯 호로
정도의 분량은 되어야 나의 한 모금이 될 수 있단 말이오. 한 모
금에 한 냥의 은자를 주기로 했으니 반 모금에는 오전(五錢)의
가격이 붙은 셈이외다. 오전의 은자를 거슬러 주어야 하오.' 그
러자 거렁뱅이는 다급해진 나머지 울려고 하더군, 그러자 대사형
은 얼른 그를 위로해 주었어. '노형, 술 한 모금을 가지고 그토
록 마음 아파하는 걸 보니 그대는 정말 술을 좋아하는 군자(君
子)로군요! 갑시다! 내가 한 턱 낼테니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대사형은 거렁뱅이의 팔을 끌고 길 옆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가서는 권커니 자커니 마셔대기 시작했지. 우리들은 정오까
지 기다리며 술자리가 파하기를 기다렸으나 두 사람은 조금도 멈
추지를 않았지. 대사형은 그 거렁뱅이에게 원숭이를 달라고 해서
는 나에게 주며 돌보라고 했어. 오후가 되었을 때 그 거렁뱅이는
땅 바닥에 쓰러져서는 일어날 생각도 못했지. 대사형은 혼자서
자음 자작하게 되었는데 평소 술을 많이 먹기로 유명하여 '밑 삐
진 독'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대사형도 결국은 혀 꼬부라진 소리
를 하게되더구만! 대사형은 우리 보고 형산성에 먼저 가 있으라
고 하면서 자기도 곧 뒤따라 오겠다고 했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렇게 된 일이군요. 그 거지는 개방의 인물이었나
요?]
육후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포대자루를 등에 메고 있지는 않았어.]
소녀는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
리고 있었다.
육후아는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사매, 둘째 사형과 함께 있는 동안 많은 괴상한 일을 만났
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려 주는게 어때?]
소녀는 육후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나중에 대사형이 도착하면 그때 말할
래요. 그렇지 않으면 같은 이야기를 두 번이나 하게 되니까 번거
러운 일이예요. 그런데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셨나요?]
육후아는 말했다.
[약속은 하지 않았어. 그저 형산성에서 만나기로 했지. 술에
취하면 세상이 작게 보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대사형은 술에
만취하게 되자 형산성이 안방처럼 좁은 줄 알고 형산성에서만 있
으면 금방 찾을 수 있다는 듯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먼저 형산
성에 가시오. 나는 곧 뒤따라 가겠소.'라고 말하고는 곧이어 그
자리에 큰 대(大)자로 쓰러져 잠이 들었단 말이야. 글쎄 곧 따라
올런지 아니면 몇 달이 걸린 후에 따라올런지는 우리도 알 수 없
는 노릇이지. 소사매, 나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소사매도 겪은 일
을 이야기해 주어야 되지 않겠어?]
소녀는 시쿵등한 어조로 말했다.
[둘째 사형, 사형이 말해 주세요. 저는 이야기할 기분이 나지
않아요.]
소녀는 꼽추를 흘깃 바라본 후 다시 말했다.
[이곳은 이목이 많아서 그 괴상한 일을 이야기할 장소가 되지
못해요. 다른 곳에 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
육후아는 말했다.
[저 꼽추는 분명히 실성한 녀석일거야.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
고 쳐들 생각을 하지 않잖아? 우리는 미친 녀석을 아랑곳하지 맙
시다. 둘째 사형, 사매와 같이 북위표국을 정탐하러 갔었는데 어
찌 되었소? 소문을 듣자니 북위표국은 청성파의 고수들에 의해
멸망당했다고 하던데 북위표국에는 쓸만한 고수가 없었나보구
려?]
노인은 천천히 말했다.
[대사형이 아직 오지 않고 비도 그치지 않은데다가 할 일도 없
고 하니 처음부터 이야기 해주지. 모두들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이후 청성파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조심을 하게 될 거이야. 그러
니까 작년 겨울에 대사형이 한중(漢中)에서 청성파의 제자인 후
인영(候人英)과 홍인웅(洪人雄)을 때린 적이 있지 않은가?]
육후아는 갑자기 킥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소녀는 그를 흘겨
보며 말했다.
[뭐가 우스워요?]
[나는 그들 두 녀석이 자존망대(自尊妄大)하여 거들먹거리는
꼴이 생각나서 웃은 거야. 무슨 인영(人英)이니 인웅(人雄)인 하
는 이름을 지은 것도 그렇지만 강호에서 청성파의 가장 뛰어난
네 제자를 가리켜 청성사수(靑城四秀)이라고 부르지 않은가? 하
지만 그 이름 때문에 망신을 당하게 되었던 거지. 차라리 나처럼
육후아(六喉兒)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그와 같은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이때 짐꾼 차림의 사내가 말했다.
[육후아, 둘때 사형이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어 쓸데없는 말을
늘여놓지 말게나.]
육후아는 말했다.
[끼어들지 말라면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 킥! 하고 웃었다. 소녀는 눈쌀을
찌푸리며 쏘아부쳤다.
[또 뭐가 우스워요? 정말 훼방만 놓고 있네.]
육후아는 말했다.
[히히히...... 나는 홍인웅과 후인영 두 녀석이 대사형의 발길
에 채여서는 예닐곱 번이나 곤두박질치면서 나가떨어진 광경을
상기하고 웃은 거야. 원래 대사형은 그들의 건방진 이름을 듣고
화를 낸 것이야. 그래서 술잔을 높이 쳐들고 건배하면서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지. 즉'영웅호걸 청성사수'라는 말 대신에 구웅야
저(狗熊野猪), 청성사수(靑城四獸)'라고 외쳤던 거지. 그 말뜻을
풀이한다면 '개와 곰과 멧돼지 같은 청성파의 네 짐승'이 되는
것이지. 이 말을듣게 된 두 녀석은 크게 노하여 대사형에게 덤
벼들었는데 대사형의 발길에 채여서는 그만 이 층의 주루에서 땅
바닥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지. 하하하!]
꼽추는 그 대사형이란 인물이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고 생각했
다. 술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점도 재미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이
름이 건방지다고 시비를 걸고 발길질을 했다니 들을수록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대사형이라는 인물은 정말 별 일을 다 참견하는군. 술을 마시
는 거렁뱅이에게 수작을 부리지 않나...... 어쨌든 우리 북위표
국을 멸망시킨 청성파 놈들을 혼내 주었다니 고맙다고 인사를 해
야할 판이군.)
둘째 사형이라는 노인은 말을 계속했다.
[대사형이 청성파 제자를 걷어찬 사실을 전해 들은 청성파의
장문인인 송풍관주(松風關主)여창해(余滄海)는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사부님께 보냈지. 그 편지에는 '불초가 제자를 엄히 다스리
지 못하여 귀하의 제자에게 얻어 맞았읍니다. 내 제자들은 맞아
도 쌉니다. 고명하신 귀제자에게 시비를 걸어오니까 맞은 것이지
요.'라는 말이 씌어 있었네.]
육후아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 여창해 녀석은 아주 못됐군! 편지를 써서 사과를 한 것은
사실상 사부님께서 대사형의 행동을 알려 주어 혼을 내주려는 것
이었지! 그 바람에 대사형은 문 밖에서 하루 밤낮을 두고 꿇어
앉는 벌을 받게 되었고 여러 사형제들이 간곡히 사정을 해서야
사부님께서는 대사형을 용서해 주셨단 말이야!]
소녀는 뾰로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용서는 무슨 용서예요! 그대신 삼십 대의 곤장을 맞앗단 말이
예요.]
육후아가 말했다.
[나도 덩달아 열 대의 곤장을 맞게 되었지. 히히히...... 그렇
지만 청성파의 두 녀석이 엉덩이를 걷어채여 아래층으로 굴러 떨
어지는 꼴을 구경했으니만큼 열 대의 곤장은 그만한 가치가 있
어!]
주판을 든 사내가 임을 열었다.
[자네는 여전히 뉘우치는 기색이 없군! 열 대의 곤장을 헛맞았
어.]
육후아는 말했다.
[뉘우치긴 뭘 뉘우친단 말이오? 대사형이 하는 일을 내가 어떻
게 막을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주판을 든 사내는 말했다.
[하지만 옆에서 몇 마디 말로 만류를 했어야 했어. 사부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어. '육후아란 녀석은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오
히려 충동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열 대의 곤장을 내린다.'
하하하......]
옆에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웃었다. 육후아는 말했다.
[나는 정말 억울하오! 생각해 보오. 대사형의 발길질이 얼마나
빠른지를. 두 녀석이 대사형에게 덤벼들었을 때 대사형은 잔을 높
이 들고 꿀꺽꿀꺽 술을 마시고 있었소. 그래서 나는 부르짖었소.
'대사형! 조심하시오!' 그 순간 퍽퍽하는 둔탁한 음향이 울려퍼지
면서 곧이어 두 분의 영웅이 아래층으로 내리뻗는 계단으로 데굴
데굴 굴러 내려가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그저 대사형의 동작을
자세히 관찰하여 대사형의 그 유명한 표미각(豹尾脚)이라는 발길
질을 배우려고 했을 뿐이었으나 미처 볼 사이도 없었소. 그런데
나보고 충동질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그건 너무나 억울한
일이오.]
주판을 든 사내가 물었다.
[육후아, 솔직히 말해보아라. 대사형이 '구웅야저 청성사수'라
고 부르짖었을 때 너도 옆에서 그 말을 따라 함께 부르짖지 않았
느냐?]
육후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헤헤...... 대사형께서 그와 같이 선창을 하는데 사제가 된 나
로서 어찌 따라 불러 기세를 돋우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요? 설마
하니 나보고 청성파 두 녀석의 편을 들어 대사형에게 욕을 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주판을 든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사제들은 사부님께서 대사형에게 훈계를 내리시던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하네. 사부님께서는, '강호의 인물들은 누구나 별호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같이 지나친 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들
면 위진천남(威震天南)이나 추풍협(秋風俠), 또는 초상비(草上飛)
와 같은 별호가 사용되고 있다. 그 많은 별호를 어찌 일일이 상관
하여 시비를 걸 필요가 있겠느냐? 남이 영웅호걸이라고 불러도 그
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 친구를 사귀려고 해도 한 평생 시간이 부
족한데 어찌 원한을 맺으려고 일일이 따라다니며 치근거린단 말이
냐?]
모든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육후아는 나직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여섯째 원숭이(六喉兒)'라는 별명은 참 좋
은 것 같군. 듣고 화를 내거나 시비를 걸 사람이 없으니 말야.]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사형은 청성파의 두 녀석을 발로 차서 떨어뜨린 것은 청
성파 사람들에게 큰 치욕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사부님께
서는 그 소문을 퍼뜨리면 안 된다고 우리들에게 분부하셨던 거
야. 그러니 우리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다른 사람이 듣고 소
문이 퍼지면 안 되거든!]
육후아가 말했다.
[사실 청성파는 헛된 명성만 지니고 있었어요. 그들의 미움
을 사도 상관 없읍니다. 그들은 우리를 어쩌지 못하니까 말입니
다.]
그러자, 노인이 눈을 흘기며 쏘아부쳤다.
[여섯째 사제, 자네가 계속 쓸데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나
는 사부님께 일러 바치고 말겠어. 그렇게 되면 자네는 다시 열
대의 곤장을 맞게 될거야. 자네는 알고 있는가? 대사형께서 그
두 녀석을 차서 아래층으로 떨어뜨린 것은 두 녀석의 빈틈을 노
려 기습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한 대사형은 화산파의 두 번
째 가는 고수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자네는 백년 동안
무예를 익혀봤자 대사형의 발끝에도 못 미친단 말이야. 자네에
게 청성사수를 차서 떨어뜨릴 재간이 있다고 여기나?]
육후아는 혀를 쑥 내밀고 손을 내저었다.
[헤헤...... 내가 대사형과 비교될 자격이 있나요?]
노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성파의 장문인인 여관주는 당금 천하의 기재(奇才)이고
괴걸(怪傑)일쎄. 그를 얕보다간 큰 코 다치지. 소사매, 그대는
여관주를 직접 보았는데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해?]
소녀는 말했다.
[맞아요. 맞고 말고요! 여관주의 수법은 약랄하기 그지없어
요. 나는...... 그를 다시는 맞나고 싶지 않아요. 그가 두려워
요. 그는 정말 너무나도 무서운 사람이예요.]
소녀의 음성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육후아는 물었다.
[그 여관주의 수법이 악랄하다고? 사매는 그가 사람을 죽이
는 광경을 본 거야?]
소녀는 몸을 움츠리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
인은 말했다.
[그날 사부님께서는 여관주가 보낸 편지를 받으시고 크게 화
를 내시며 대사형과 육 사제를 혼내 주셨지. 그리고, 이튿날 한
통의 편지를 써서 나에게 건네 주시며 청성산으로 가서 여관주
에게 전해 주라고 하셨네.]
여러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알고 보니 그날 둘째 사형께서 총총히 산을 내려간 것은 바
로 청성파로 가느라고 그런 것이었군요?]
노인은 말했다.
[맞아. 사부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
네. 쓸데없는 일을 일으키게 될까 염려하셨던 거지.]
육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쓸데없는 일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우리는 쓸데없는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키가 큰 사내가 말했다.
[자네가 무얼 안다고 그래? 둘째 사형이 만약 자네에게 이야
기를 했다고 해봐. 자네는 분명 대사형께 일러바쳤을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대사형은 틀림없이 은밀히 일을 꾸며서 청성파를
골탕먹였을 거야.]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째 사제의 말이 옳아. 대사형은 강호(江湖)에 친구가 많
으시니까 무슨 일을 꾸미려고 한다면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지.
사부님께서는 편지에 사과하는 말을 쓰셨다고 했어. 즉, 제자가
커다란 골치덩어리라서 쓸데없는 일을 자주 저지르기 때문에
매우 속이 상하다고 하시며 사문(師門)에서 축출해야 마땅하겠
지만 그렇게 되면 강호에서는 청성파와 화산파에 알력이 생겼다
고 수근거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욱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하셨지, 그리고 이미 두 명의 못된 제자들
을.......]
거기까지 말하고 노인은 육후아를 슬쩍 바라보았다. 육후아
는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못된 제자란 말이지?]
소녀는 '체' 하며 말했다.
[여섯째 사형이 대사형과 나란히 평가된다는 것이 설마하니
불쾌하다는 말은 아니겠죠?]
육후아는 대뜸 기쁜 표정을 지으며 크게 부르짖었다.
[맞아! 맞다구! 제가랄...... 술을 가져 와! 술을!]
찻집은 원래 차를 팔지 술을 파는 법이 없었다. 다박사(茶
博士)가 얼른 다가오며 굽신굽신 거렸다.
[손님 죄송합니다.저희 가게에는 동정춘(洞庭春), 수선(水
仙), 용정(龍井), 기문(祁門), 보문(普聞), 철관음(鐵觀音)같은
차밖에 없읍니다. 술은 팔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형양(衡陽)이나 형산(衡山) 지방의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종
종 '죄송합니다' 하는 뒷말을 붙이곤 했다. 이 다박사는 특히
심한 편이었다.
육후아는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죄송합니다. 당신네 가게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면 나도 술
을 마시지는 않겠읍니다. 죄송합니다.]
다박사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예, 예.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몇 주전자의 끓인 물을 탁자 위에 갖다 놓았다.
노인은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서는 편지에, '못된 두 제자를 청성산에 보내 사과
를 하도록 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두 명의 못된 제자가
너무나 심하게 매를 맞아 걸음을 옮길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특별히 둘째 제자 노덕약을 보내 대신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
다.'라고 쓰셨다네. 그리고 '이 일은 오로지 두 녀석 때문에 일
어난 불상사이니만큼 여관주께서 청성과 화산 두 파의 평소 교분
을 보아서 마음속에 접어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 기회에 제
가 친히 여관주를 찾아 뵙고 사과를 드리도록 하겠읍니다.'라는
글도 쓰셨다고 하더구만.]
꼽추는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당신의 이름은 노덕약이고 당신들은 화산파의 제
자들이었군! 화산파라면 태산파(泰山派), 형산파(衡山派),항산파
(恒山派), 숭산파(崇山派)와 함께 오악검파(五嶽劍派)의 하나가
아닌가?)
이때 노덕약은 말을 계속했다.
[내가 청성산에 이르니 그들은 사사건건 나에게 시비를 걸더
군. 특히 후인영과 홍인웅 두 녀석은......]
육후아는 눈쌀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청성파 녀석들이 그토록 건방지다니! 둘째 사
형,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셨어요?]
노덕약은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청성파에 보낸 것은 화해를 하라는 것이었
지 시비를 일으키라는 게 아니었어. 그래서 나는 꾹 눌러 참고 이
레가 지난 후 여관주를 만날 수 있었네.]
육후아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들은 꽤나 거드름을 피웠군! 둘째 사형, 이레 동안 꽤
나 심심하고 따분하고 울화가 치밀었겠군요?]
노덕약은 말했다.
[물론 시시콜콜 녀석들이 시비를 걸었지. 그러나 나는 사부님
의 뜻을 받들어 꾹 참았단 말이야. 나는 정말 참을성을 극도로 발
휘했었지. 내가 청성파의 송풍관(松風觀)에서 이레를 머무는 동안
에 나는 한 가지 이득을 보았다네. 나는 삼 일째 되는 날 이른 아
침산보를 나갔다가 송풍관 뒤쪽의 연무장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
었는데, 거기서 청성파의 수십 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무술을 연마
하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지. 강호에서는 남이 무예를 익히는
광경을 엿보는 것은 크게 꺼리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급히 발길
을 돌려 내 방으로 돌아갔지. 그러나 흘깃 본 그들이 연마하는 무
공초식에 크나큰 위혹을 느꼈다네. 그들이 익히고 있는 초식은 결
코 청성파의 검법(劍法)이 아니었거든! 생각해 볼수록 이상하지
않겠나? 더구나 청성사수라고 일컬어지는 후인영, 홍인웅, 우인
호, 나인걸 등도 그 속에 끼어서 그 검법을 익히고 있었는데 처음
으로 익히는지 매우 서툴렀다네. 여러 사제들은 어떻게 생각하
나?]
손에 주판을 들고 있는 사람이 말했다.
[청성파에서는 혹시 한 권의 검법비급(劍法秘及)을 얻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여관주가 새로운 검법을 창안해 냈는지도 모르지
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전수했겠지요.]
노덕약은 말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더군! 여관주의
검 쓰는 재간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러 있으니만큼그가 새
로운 검법을 창안했다면 그 위력은 정말 놀라웁지 않겠는가. 그리
고 만약 새로운 무공비급을 얻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고명한 제자
들에게 연마하도록 했을 것이야. 그리고 고명한 수법이라면 평범
한 제자들은 터득하기 어려우므로 무공이 뛰어난 몇몇 제자들에게
만 전수했을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엉터리 무사가 도시에 검술
도장(道場)을 건설하고 어중이 떠중이를 긁어모아 돈을 우려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냐 말이야. 그런 짓을 명문대파(名門大派)의
대종사(大宗師)가 할 까닭이 없지. 그날 밤 내가 이런저런 생각으
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갑자기 멀리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
려오지 않았겠나? 나는 깜짝 놀라 생각했지. 혹시 청성파에 강적
이 쳐들어 온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 대
사형이 벌을 받고 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송풍관에 쳐들어 온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네. 그분 혼자서는 중과부적이니까 내가 나가
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지. 당시 나는 청성산에 오르느라고 입구
에 무기를 벗어놓았기 때문에 검(劍)을 갖고 있지 못핸네. 부득이
적수공권으로 뛰어나가는 수밖에 없었지.]
육후아가 갑자기 칭찬의 말을 던졌다.
[훌룡하오! 둘째 사형은 정말 용기가 대단하군요! 나로서는 감
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노덕약은 눈을 흘겼다.
[자네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가? 나는 결코 적수공권으로
싸우려는 것이 아니었어. 맨손으로 나서지 않으면 베개를 들고 나
가란 말인가? 아니면 이불 속에 자라처럼 머리를 파묻고 숨을 죽
이고 있어야 했단 말인가?]
육후아는 혀를 쑥 내밀고 말했다.
[나는 둘째 사형을 칭찬하는 건데 왜 도리어화를 내시지요?]
노덕약은 말했다.
[칭찬의 말이라면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웬지 듣기 거
북스러운 칭찬이로군!]
소녀가 얼른 말했다.
[둘째 사형, 육후아 사형이 자꾸만 방해를 놓는데 그분을 아랑
곳하지 마세요.]
노덕약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는 살그머니 일어나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갓지. 무기 부딪
치는 소리는 바로 후전(後殿)에서 들려왔어. 후전의 창문에서는
등불이 환히 비치고 있었어.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다가
가 창문 구멍을통해 안을 엿보았지. 그제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
을 크게 내쉴 수가 있었다네. 후전에는 두 쌍의 사람이 마주서서
비검(比劍:검을 겨룸)을 하고 있었는데 한 쌍의 후인영과 홍인웅
이었고 다른 한 쌍은 방인지(方人智)와 우인호(于人豪)였다네.]
육후아는 익살스런 표정으로 짐짓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허! 청성파의 제자들은 정말 열심히 무공을 연마하는군! 밤에
잠도 자지 않고 무공을 연마하다니 말이오. 이야말로 소 잃고 외
양간 고치는 격이 아니겠소?]
노덕약은 그를 한 번 흘기고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
다.
[대사형에게 걷어채이고 정신을 차렸는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
지. 어쨌든 후전 한복판에는 푸른 도포(道袍)를 걸친 왜소한 도사
가 앉아 있더구만. 나이는 약 오십 세 가량이고 얼굴은 깡말랐는
데 몸무게가 기껏해야 서른 근(斤)정도밖에 나가지 않을 것 같더
군. 왜소하다고 소문 난 청성파의 장문인 여창해(余滄海)였어. 나
는 두 쌍의 제자들이 펼치는 검법이 바로 그날 아침 그들이 새로
이 배우고 있던 초식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었지. 나는 그들에게
발각될까봐 전전긍긍했지. 남이 무공을 연마하는 걸 엿보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일이며 그 소문이 퍼진다면 화산파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대사형이 청성사수를 걷어찬 것은 우리
화산파를 빛낸 일이지만 내가 그들의 무공 연습을 숨어서 지켜본
다는 것은 우리 문파를 망치게 하는 일이었지. 사실 이제야 말이
지만 사부님께서는 속으로 대사형을 기특하게 여기셨을 거라고 샐
각해. 그때 나는 청성파의 제자들이 화산파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운 검법을 익히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그들의 무공을몇
초 훔쳐 보고 사부님께 알려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
지. 그들의 검법은 기이하긴 했지만 위력은 없어 보였다네. 이레
가 되는 날 나는 여관주를 접견하게 되었는데 그는 사부님께서 제
자들에게 너무 엄한 벌을 내리신 것 같다고 하시더군. 제자들끼리
한 번 장난을 한 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하더라니까. 물론 마음에
는 없는 소리였겠지. 나는 송풍관에서 떠나 사부님께로 돌아왔고
즉시 그들이 연마했던 검초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시범을 보여 드
렸지. 사부님은 말씀하시더군. '그 검법은바로 복위표국(福威標
國) 임(林)씨 집안의 벽사검법(僻邪劍法)이다!']
[벽사검법이라.......]
육후아는 중얼거렸다. 노덕약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당시 나는 사부님께서 이렇게 여쭈어 보았지. '벽사검법은 대
단한 위력이 있나요? 그들은 어째서 그 검법을 애써 연마하는 거
지요?'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네. '강호에 떠도는 소문에
서 복위표국의 총표두(總標頭) 임진남(林震南)의 무공은 어떻게
평가되는지 아는 데로 말해 보게.' 나는 말했지. '무림의 친구들
은 임진남에게 의리의 사나이라고 합니다만 무공은 별로 이름이
나있지 못하더군요.' 사부님께서는 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
셨어. '맞아. 자네는 여관주의 사부 장청자(長靑子)가 옛날 임원
도(林遠圖)의 벽사검(僻邪劍) 아래 패한 사실을 들어본 적이 있는
가?' 나는 어리둥절하여 물어보았지. '임원도라면...... 임진남의
부친인가요?' '아니야. 임원도는 임진남의 조부이고 복위표국을
건립한 인물이야. 과거 임원도는 칠십이로(七十二路) 벽사검법으
로 천하무적(天下無敵)이었어.' '그렇다면 벽사검법은 대단히 무
섭겠군요?' '장청자는 벽사검법 아래 패한 이후 청성파의 제자들
에게 기필코 벽사검법을 꺾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한을 품고 죽었
지. 벽사검 아래 중상을 입었는데 결국 치료를 하지 못했던 거야.
벽사검법은 비록 겉으로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는 오묘한 변화가 숨겨져 있어. 그야말로 천하무적
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아깝게도 그의 자손들은 벽사검법의
오묘한 점을 깨우치지 못하고 한낱 평범한 검법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지. 덕약, 너는 여창해가 새삼스레 벽사검법을 익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말했네. '혹시 여관주는 복위표국
을 무찔러 장청자 사부의 원한을 갚으려는 것이 아닐까요?' 사부
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네. '네 말이 옳다. 이번에 청성파와 복위
표국은 피의 혈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여창해는 청출어람(靑出於
藍: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의 기재로서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
렀지만 임진남은 그의 조부의 발바닥에도 못 미치지. 그러니 복위
표국은 참패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임진남이 그의 장인 되는
낙양금도(洛陽金刀) 왕원패(王元覇)의 도움을 받는다면 한바탕 겨
뤄 볼만 하겠지만...... 자네는 그 싸움을 살펴보고 오게.' 이리
하여 나와 소사매 두 사람은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변장을 하고
복위표국 옆에서 술집을 차리고 복위표국의 동정을 살피게 되었
지. 어느 날 공교롭게도 임진남의 아들 임평지(林平之)가 우리가
차려 놓은 술집에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바로 이때 청성파의 못
된 제자 두 명이 그 술집에 들어왔단 말씀이야!]
육후아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 술집은 정말 장사가 잘 되었군요! 그야말로 한 밑천 톡톡히
잡았겠군요?]
노덕약은 웃으며 말했다.
[임평지란 녀석의 무공은 하잘 것이 없었지. 우리 소사매의 제
자가 될 자격도 없었는데 뜻밖에도 의협심은 대단하더군! 청성파
의 못된 녀석들이 소사매를 희롱하는 걸 보고 그들에게 대들었단
말이야! 임평지는 청성파의 두 제자을 찔러 죽였지만, 무공이 뛰
어났던 게 아니고 순전히 기습을 했던 거야. 그날 밤 여관주는 수
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복위표국에 쳐들어가 수백 명이나 되는 식
솔들을 이 잡듯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 버리더구만! 정말 악랄
했어. 차라리 끔찍할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어. 여관주는 임진남
부부와 임평지를 사로잡아 제자들을 시켜 청성산으로 호송하라고
시키고 자신은 복위표국에 남아 여인의 속옷을 찢어서 표국의 깃
발을 만들어 대문 앞에 높이 걸어놓았지. 복위표국의 위신이 깡그
리 뭉개지는 순간이었다고! 소사매는 임진남 부부가 납치되는 걸
따라가서 기습을 하여 임평지를 구출해 주었어. 하지만 임진남 부
부까지 구할 수는 없었지.]
육후아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묘하군! 정말 묘하다! 내 생각엔 소사매가 임가 녀석을 구한
속셈은 따로 있었을 거야!]
소녀는 발을 구르며 부르짖었다.
[나에게 무슨 속셈이 있었다고 그래요? 터무니없는 소리 그만두
지 못해요!]
육후아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내가 곤장을 맞은 게 바로 청성파의 녀석들 때문이 아니었겠
어? 소사매는 그래서 청성파 녀석들만 보면 훼방을 놓고 싶었을
거라구! 청성파 녀석들을 골탕먹인 것은 바로 나의 원수를 갚아
준 것이 아니고 뭐겠어? 정말 고마워!]
그러면서 육후아는 소녀에게 허리를 굽혔다. 소녀는 '훗' 하고
웃으며 마주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여섯째 사형, 너무 고마와할 건 없어요.]
주판을 든 사람이 말했다.
[소사매가 청성파 녀석들을 골탕먹인 것은 물론 화풀이를 한 것
이지. 하지만 자네를 위해서 그랬다고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고 생각해. 사부님께 곤장을 맞은 사람이 육후아 한 삶은 아니지
않은가?]
노덕약은 웃으며 말했다.
[소사매가 육후아의 화풀이를 해준 것이 맞아. 이후에 사부님께
서 물어보실 때 소사매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테니 두고 보라
구!]
육후아는 손을 마구 내저으며 황급히 말했다.
[아이쿠! 그런 소리 그만 하세요. 만약 그 말이 사부님 귀에 들
어간다면 나는 다시 열 대의 곤장을 맞을 거예요.]
여러 사람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노덕약은 말했다.
[어쨌든 대사형이 그 일을 알게 된다면 소사매를 크게 칭찬할거
야!]
빗발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이때 혼돈(混沌)을 파는 사람이 등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솔을
지고 찻집 처마 아래에 이르러 비를 피하고 있었다. 혼돈을 파는
노인은 대나무로 만든 딱딱이를 쳐서 '딱딱딱' 하는 소리를 내며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들은 일제히 문 밖을 내다
보았으며 육후아는 큰 소리로 부르짖기까지 했다.
[이봐요! 여기 아홉 그릇의 혼돈을 주시오. 계란 하나씩 얹어
주시면 더욱 좋을 것이오.]
노인은 대답했다.
[예, 예, 곧 됩니다.]
그리고는 혼돈을 끓는 물 속에 집어 넣었다. 얼마 후 그는 다
섯 그릇의 혼돈을 삶아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릇을 날라왔
다. 육후아는 첫번째 그릇을 노덕약에게 주고, 둘째 그릇은 세째
사형인 양발에게 주고, 차례대로 네째인 시대자, 다섯쟤인 고근
명의 앞에 놓았고 다섯째의 그릇은 원래 그가 차지해야 했으나
소녀의 앞에 가져오며 말했다.
[소사매, 먼저 먹어.]
소년는 줄곧 그와 농담을 했으며 원숭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가 혼돈 그릇을 가져오자 급히 몸을 일으키며 정중하게 마랴싶
다.
[사형, 고마와요.]
화산파의 규칙은 매우 엄하여 농담을 할 때도 있지만, 결코 장
유유서의 규칙을 깨뜨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육후아가 먼저 혼
돈을 먹자 모든 사제들도 기다렸다는 듯 급히 혼돈을 먹기 시작
했다.
양발이 물었다.
[여관주는 복위표국에 머문 다음 즉시 떠났나요?]
노덕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쎄. 여관주는 표국에 산처럼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제자
들을 시켜 나르게 하고 다시 표국을 이리저리 뒤지는데 뭔가를
찾고 있는모양이었네.]
양발은 무릎을 '탁' 하고 치며 부르짖었다.
[알겠소! 그는 바로 벽사검법의 검보를 찾고 있었군요?]
[맞아! 자네는 참 추리력이 뛰어나군! 어쨌든 여관주는 벽사검
보를 찾아내지 못했네. 변소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벽사검보는 커
녕 쥐새끼 한 마리 없었단 말일세. 내 생각에는 그가 복위표국을
멸한 것은 사부의 원한을 갚기 위한 것보다는 오히려 벽사검보를
얻으려는 데에 있는 듯하더군.]
네째인 시대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 벽사검보란 게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요?]
노덕약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원래 무공의 비결은 사부가 말로써 제자에게 알려 주는 게 일
반적이지. 그래서 구결이란 말도 생긴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네. 예외란 항상 있는 법이니까 말이네. 여관주는 욕
심이 대단한 사람이지. 그는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예로운 지위에
오르려고 광분하고 있지. 사제, 자네는 청성파의 무공이 오악검
파에 비교할 때 어떻다고 보는가?]
시대자는 얼른 대답했다.
[오악검파의 천하제일의 다섯 검파입니다. 청성파는 그 밑에
있는 게 당연합니다.]
노덕약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것 보게. 세상 사람은 누구나 그처럼 생각하고 있네. 여관
주같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어찌 오악검파의 위에 오르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 않겠는가? 벽사검법의 오묘한 점만 깨우친다면 오
악검파와 능히 겨룰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라네.]
시대자는 탁자를 '꽝'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더니 큰 소리로 말
했다.
[둘째 사형의 추리가 그럴 듯하군요! 정말 일리가 있어요!]
이때였다.
밖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님가?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소낙비를 맞으며 십여 명의 여승
들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몸에는 기름종이로 만든 우의를 걸치고
있었다. 앞장을 선 늙은 여승은 키가 매우 컸는데 그는 찻집 앞
에 이르자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영호충은, 썩 나오너라!]
화산파의 제자들은 그 늙은 여승이 정일사태라고 불리우며 오
악검파 중의 하나인 북악 항산파의 이름난 고수로서, 항산파의
장문인인 정한사태의 사매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는 성질이
불 같아서 강호의 인물들은 그녀를 보면 아예 멀리 피해 버리고
마는 괴퍅한 여승이었다.
노덕약을 비롯한 화산파의 제자들은 급히 몸을 일으켜 정일사
태에게 공손히허리를 굽혔다.
[삼가 사숙님을 뵈옵니다.]
정일사태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거친 어조로 호통
을 쳤다.
[영호충은 어디에 숨었느냐? 빨리 기어나오라고 해라!]
그녀의 음성은 사내들보다도 훨씬 우렁찼다. 노덕약은 공손히
대답했다.
[사숙께 아룁니다. 영호충 대사형은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습
니다. 우리도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화산파의 대사형은 바로 영호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꼽추는 속으로 생각했다.
(영호충이라는 분은 참 말썽꾸러기인 모양이구나! 어쩌다가 늙
은 여승의 비위를 긁어놓게 되었다지?)
정일사태는 나카롭게 찻집 안을 둘러보더니 소녀의 얼굴에 시
선을 못박고 물었다.
[너는 영산이겠지? 어째서 흉칙스럽게 곰보의 얼굴로 변장을
했느냐?]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나쁜 사람이 저의 얼굴을 보면 자꾸만 추근거릴 게 아니예요?
그래서 곰보로 분장을 한 거예요.]
정일사태는 사늘히 코웃음쳤다.
[너희 화산파는 점점 규율이 문란해지는구나. 너의 아버지는
어째서 제자들을 풀어놓아 이곳저곳에서 말썽을 피우도록 하는지
알수가 없어! 이곳의 일이 끝나는 대로 내 친히 화산으로 달려가
따져야 되겠다.]
영산은 급히 말했다.
[사숙, 그러지 마세요. 대사형은 얼마 전 아버님께 서른 대의
곤장을 맞았어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지경이라구요. 사숙
께서 다시 아버님께 대사형의 일을 말씀 드린다면 그분은 다시
예순 대의 곤장을 얻어맞게 될 것이고 다리 병신이 되고 말 것이
예요.]
[그 짐승 같은 녀석은 때려서 일찍 죽여 버리는게 좋을 게다.
영산, 너도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구나. 영호충이 걸음을 걷지
못한다고? 걸음을 걷지 못하는 녀석이 어떻게 나의 막내 제자를
납치해 갈 수 있었느냐?]
정일사태의 그 말이 떨어지자 화산파의 모든 제자들은 대경실
색하고 말았다. 영산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숙, 그럴 리가 없을 거예요! 대사형이 아무리 당돌하다고
해도 사숙의 막내 제자를 납치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마도 누
군가 헛소문을 퍼뜨렸겠지요!]
정일사태는 버럭 노호를 터뜨렸다.
[너는 그래도 그를 위해 변명을 하겟단 말이냐? 의광, 태산파
의 사람들이 말한 대로 설명해 주도록 해라.]
그러자 정일사태의 뒤에 서 있던 한 명의 중년 여승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태산파의 천송도장은 형양성의 어느 주루에서, 구체적으로 말
하면 회안루라는 술집에서 영호충이 의림 막내와 술을 마시는 모
습을 목격했답니다. 의림 막내는 영호충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고
영호충의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술을 마셧다고 했읍니다. 의림
사매는 금새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답니다. 그리고
두 삶의 옆에는 또 한 사람이 동석하여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는
데 그 사람은...... 여인을 괴롭히기로 유명한...... 전백광이라
고 했읍니다.]
정일사태는 들을수록 화가 나는지 주먹을 들어 옆의 탁자를 힘
껏 내리쳤다. 그 바람에 그 탁자는 대뜸 도끼로 내려친 듯 두쪽
으로 갈라졌다. 화산파의 제자들은 그녀의 귀신 같은 솜씨를 보
자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영산은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거짓말이예요! 천송도장은 사람을 잘못 본 게 틀림없어요!]
정일사태는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입 닥쳐라! 영호충 이 짐승이 감히 전백광과 같은 악당과 사
귀었으니 그야말로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고 할 수 있다. 만리독
행 전백광이 어떤 인물인지 너도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을 것이
다. 그놈은 전문적으로 여인을 납치하여 강간한 후 살인하는 색
마가 아니더냐? 나는 반드시 천하의 여인들을 위해 전백광과 영
호충 두 벌레를 제거해 버릴테다! 아...... 의림이 제발 무사해
야 할 텐데.......]
정일사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다시 말했
다.
[의림...... 이 예쁘고 철 없는 것이...... 잘못되면 어떡하
나.......]
화산파의 제자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사형이 항산파의 막내 여제자를 데리고 술을 마셨다고 화산
파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고 문규를 어긴 것이다. 더구나 색마 전
백광과 어울려 다녔으니 큰일났구나!)
노덕약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숙, 아마 영호충 사형과 전백광은 우연히 같은 좌석에 앉아
술을 마시게 되었을 겁니다. 결코 어울려 다니는 사이는 아닐 것
입니다. 영호충 사형은 요 며칠 동안 술에 대취하여 정신을 차리
지 못할 정도였읍니다. 아마 술기운 때문에 .]
정일사태는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
[술에 취하면 무슨짓을 하여도 괜찮단 말이냐!]
[아 아닙니다. 영호충사형을 찾아낸 후 사부님께 데리고
가서 무거운 벌을 받도록 하겠읍니다.]
정일사태는 낼랭히 말했다.
[흥! 그 녀석이 무서운 벌을 받든 받지 않든 나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의림이란 말야!]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갑자기 손을 뻗쳐 악영산의 손목을 움켜
쥐었다. 악영산은 손목이 쇠집게에 물린 듯 아파서 '악' 하는 비
명소리를 냇다.
[사숙 왜 이러세요!]
정일사태는 호통을 내질렀다.
[너희 화산파의 제자가 나의 의림을 잡아갔으니 나 역시 너희
화산파의 막내 제자를 잡아가야겠다. 너희들이 의림을 내놓는다
면 나도 영산을 내놓겠다!]
그녀는 영산을 확 끌어당기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영산은
억지로 끌려 문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노덕약과 양발이 휙 몸을 날려 정일사태의 앞을 가로막았다.
노덕약은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사숙께서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러나 이 일은 저의 사매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입니다. 아무쪼
록 사숙께서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정일사태는 소리 높여 외쳤다.
[좋아! 아량을 베풀어 주겠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오른발을 비스듬히 휘둘러 노덕
약을 향해 후려쳐 갔다. 노덕약과 양발은 음유한 기운이 덮쳐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노덕약은 태풍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뒤로 날라가 길 건너에 있는 어느 가게의 벽에 '꽝' 하는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말았다. 양발은 혼돈을 파는 노인의 등 뒤로 날아
갔다. 펄펄 끓는 물이 담긴 솥을 머리로 들이받는 기세로 그의
몸은 곧장 날아가는 것이었다. 끓는 물을 얼굴에 뒤집어 쓰게 될
위험한 처지였으나 누구도 막을 여유가 없었다. 모두들 놀라
'아' 하는 비명소리를 냈다.
그런데 혼돈을 파는 노인이 갑자기 몸을 뒤로 돌리며 한 손바
닥을 불쑥 내밀지 않는가! 양발의 머리는 노인의 손바닥에 철썩
하며 부딪쳤다. 노인은 손바닥을 가볍게 앞으로 밀어냈고 양발은
뒤로 몇 보 정도 날아갔다가 사뿐히 자리에 내려설 수 있게 되었
다.
정일사태는 혼돈을 파는 노인을 놀란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싸
늘히 말했다.
[알고 보니 당신이었군!]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알아 내셨군! 사태의 불 같은 성질은 여전하시구료.]
바로 이때 길 저쪽에서 두 삶이 기름 종이로 된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등롱을 든 채 가까이 다가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혹시 항산파의 정일사태가 아니십니까?]
정일사태는 대답했다.
[내가 바로 정일이오. 그런데 귀하는 누구시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등롱에는 유부라는 붉은 글자가 씌어 있었
다. 앞장을 선 사람이 공손히 말했다.
[저는 사부님의 명을 받고 여러 무림 협사들을 모시러 왔읍니
다. 성 밖까지 마중하지 못한 점 용서해 주십시오.]
말과 함께 그는 깊이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절을 했다. 정일사
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지나친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소. 두 분께서는 유정풍 대협의
제자들이신가요?]
앞에 선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의 이름은 상대년이고 이 사람은 저의 사제로
미위의라고 합니다.]
[좋소.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은 유정풍 대협의 은퇴식에 참석
하려는 중이었소.]
상대년은 화산파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분들은 어디서 오신 영웅호걸이신지요?]
양발이 얼른 말했다.
[저는 화산파의 양발이라고 합니다.]
상대년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보니 화산파의 세째 사형이시군요. 영명은 오래 전 부터
익히 들어왔읍니다. 자아, 함께 저희 집으로 가십시다.]
노덕약이 다가와 말했다.
[우리는 원래 대사형을 기다렸다가 함께 유 대협께 가서 문안
을 드리려고 했었네.]
상대년은 기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혹시 화산파의 둘째 사형이 아니신지요? 우리 사부님
께서는 화산파의 영호 대사형과 노 둘째 사형 두 분이 걸출한 영
재라고 말씀하시곤 했었읍니다. 영호 사형께서 아직 안 오셨다면
우선 다른 분들이라도 함께 저희 정원으로 가십시다.]
노덕약은 생각했다.
(소사매가 정일사태에게 잡혀 있으니 함께 행동할 수밖에는 없
구나.)
생각을 마친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럼 폐를 끼치겠읍니다. 안내해 주십시오.]
[예, 따라오십시오.]
상대년은 앞장 서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정일은 혼돈을 파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도 초대하지 그러오?]
상대년은 그 노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그는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알고보니 안탕산의 하 대협께서도 여기에 계셨군요. 미처 몰
라 뵌 점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가시기를 청해도 될런지
요?]
혼돈을 파는 노인은 바로 절강성의 안탕산에 거주하고 있는 고
수 하삼칠 이었다. 하삼칠은 어려서부터 혼돈을 팔아 생계를 꾸
려가고 있었는데 무공을 익힌 후에도 변함없이 혼돈을 메고 다니
며 강호를 유랑하고 있었고, 따라서 혼돈을 삶는 솥은 그의 표기
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일신에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나 무공
을 이용해 돈을 벌지 않고 혼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으
므로 그를 아는 강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를 존경하고 있었
다.
하삼칠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뒤를 따라가려던 참이었네!]
그러면서 하삼칠은 탁자 위에 놓여진 혼돈 그릇을 거두기 시닥
했다.
노덕약은 말했다.
[이 후배가 눈이 있으면서도 선배님을 알아보지 못한 점 너그
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하삼칠은 웃으며 말했다.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있나? 자네들은 나의 혼돈을 팔아 주
었으니 나의 은인이 아닌가? 혼돈은 한 그릇에 십 문전이니까 모
두 합하면 칠십 문이 되네.]
그러면서 그는 왼손을 내밀었다. 돈을 내라는 뜻이었다. 혼돈
이란 밀가루 반죽에 고기를 넣어 삶거나 찐 음식으로 만두의 일
종이었다.
정일사태가 그 광경을 보고 말했다.
[하 대협의 별 말이 없는 이상 혼돈을 먹었으면 값을 치루어야
지.]
하삼칠은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맞아. 조그만 밑천으로 현금 거래를 하는 장사이니만
큼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외상은 사절이오.]
노덕약은 급히 칠십 문의 동전을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
다. 하삼칠은 돈을 품 속에 넣은 후 정일사태를 바라보며 말했
다.
[그대가 탁자를 후려칠 때 혼돈 그릇 하나가 깨졌소. 모두 십
사 문이니 배상을 해 주시오.]
정일사태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째째하군요. 출가인에게도 돈을 받으려고 하다니! 의광,
배상해 주도록 해라.]
의광은 십사 문의 돈을 꺼내 공손히 건네주었다. 하삼칠은 돈
을 품 속에 넣으며 '갑시다' 하고 말했다.
상대년은 다박사에게 말했다.
[이분 손님들이 마신 차값은 나중에 계산해 줄 것이오. 사부님
앞으로 적어 두시구료.]
다박사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공손히 말했다.
[유 대협의 손님이라면 차값은 받지 않겠읍니다. 죄송합니다.]
상대년은 가지고 온 우산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눠 주고 앞장
을 섰다. 정일사태는 여전히 영산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하삼칠
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옮겼다. 항산파와 화산파의 여러
제자들은 그 뒤를 따랐다.
자리에 홀로 남아 있던 꼽추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화산파
제자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큰 거리를 세 구비나 돌게 되자 한 채의 커다란 저택이 웅장하
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문의 좌우에는 커다
란 등롱이 걸려 있었고 십여 명의 무사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 집
주위에 늘어서 있어서 육중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정일사태의
일행이 대문 안으로 들어간 직후 또 한 떼의 무사들이 대문 안으
로 들어서고 있었다. 꼽추는 그 삶들 틈에 끼어 대문 안으로 들
어섰다.
대청 안에 들어서니 이백여 명이나 되는 하객들이 가득들어 앉
아 차를 마시기도 하고 국수를 먹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화산파의 제자들과 항산파의 제자들은 각기 하나의 탁자를 차
지하고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정일사태는 많은 사람의 이목
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영산의 손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악영산은 풀려나게 되자 노덕약 곁으로 달려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의젖하게 앉았다.
정일사태와 하삼칠에게 상대년이와서 말했다.
[두 분께서는 후원에 있는 귀빈관으로 가시죠. 강호의 종사들
은 거기에 모여 있답니다.]
[음, 그렇게 하지.]
정일사태는 하삼칠과 함께 대청에 나 있는 또 하나의 문을 열
고 안으로 사라졌다.
이때였다. 대문이 있는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며 몇
명의 청의를 걸친 사람들이 두 사람을 태운 문짝을 들고 걸어 들
어왔다.
문짝 위에 눕혀진 사람은 온몸을 하얀 베로 칭칭 감고 있었는
데 백포의 곳곳에는 점점이 붉은 선혈이 물들어 있었다. 대청에
있던 군웅들은 다투어 다가갔다.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태산파의 제자다!]
[태산파의 천송도인이 큰 중상을 입었군! 또 한 사람은 누구
지?]
[태산파의 장문인 천문진인의 제자다!]
[그는 이미 죽었다! 저것 보라구! 칼이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빠져나왔쟎아? 그러니 죽지 않고 베기겠어?]
시끌벅적한 가운데 중상을 입은 사람과 한 구의 시체는 대청의
한 쪽에 나 있는 문을 열고 떠매어져 갔다. 바로 귀빈실로 간 것
이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군
거렸다.
[오악검파의 제자를 누가 감히 죽였을까?]
[천송도인에게 중상을 입힌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무공이 대단
한 고수인가봐.]
[무공이 높으면 용기도 자연히 커지는 법이 아니겠어? 그러니
이상할 건 없어.]
이때 상대년이 총총히 달려와 노덕약에게 말했다.
[둘째 사형, 저희 사부님께서 귀빈실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 알겠소. 갑시다.]
노덕약은 몸을 일으켜 상대년의 뒤를 따라 기다란 낭하를 지나
하나의 호려한 대청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 귀빈실이었다.
노덕약이 바라보니 귀빈실의 북쪽으로는 다섯 개의 태사의가
가지런히 놈여져 있었는데 체구가 우람하고 얼굴에 붉으레 한 화
색이 감도는 한 도인이 앉아 있고 나머지 네 개의 태사의는 비어
있었다.
노덕약은 그 다섯 개의 태사의가 바로 오악검파의 다섯 장문인
이 앉을 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태사의에 앉아 있는 우
람한 도인은 바로 태산파의 장문인인 천문진인이었다. 아직 나머
지 오악검파인 숭산, 항산, 화산, 형산의 네 명 장문인은 도착하
지 않고 있었다.
태사의 앞으로는 십구 인의 무림 선배들이 각기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항산파의 정일사태, 청성파의 장문인 여창해(청성파는
오악검파에 속하지 않으므로 태사의에 앉지 못했음), 하삼칠도
그 사람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동쪽의 주인석에는 지금 몸에 짙은 자색의 명주로 짠 장포(두
루마기처럼 무릎 밑까지 내리 덮느 웃옷)를 걸친 땅딸한 중년인
이 앉아 있었다. 바로 유정풍이었다.
제가 이 글을 HWP 2.0으로 작성하고 있는데 없는 한 자가 자주
나와서 아예 한자를 적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육후아' 같은
한자는 후자가 없어 다른 후자로 썼습니다.이접 사과 드리며 양
해 바랍니다. 한문 확장 팩을 구입하면 아마 없는 한자가 거의
없을 거예요.
제가 시가이 쫑기다 보니 일주일에 한번 정도 밖에 못 올립니
다. 시간 나는 데로 그날 작성해서 그 날 올리니 이해해 주세요.
그럼, 다음 편을......
방 안에 들어선 노덕약은 먼저 유정풍에게 인사를 올리고 다시
천문진인에게 절을 했다.
[화산파의 제자 노덕약이 삼가 천문사백님께 인사 드립니다.]
천문진인은 분노에 몸을 떨며 이빨을 악물고 있는 도중이었다.
그는 노덕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힘주어 발을 구른 후 노
갈을 터뜨렸다.
[영호충은 어디 있느냐?]
그 음성은 천둥소리처럼 우렁차서 멀리 멀리 울려퍼졌다.
대청 안에 있던 화산파 제자들까지도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음성이었다. 악영산은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났어요! 대사형께서 또 무슨 일을 저지르셨나 봐요!]
세째인 양발이 악영산의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의 말을 던졌다.
[사매, 진정해. 대사형은 결코 못된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
야.]
꼽추는 구석진 자리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가 혼자 나직이 중얼
거렸다.
[그들은 똔 영호충을 거론하고 있군! 그 영호충이라는 늙은이
는 정말 말썽꾸러기인 모양이다!]
노덕약은 얼른 천문진인에게 깊이 허리를 구부리며 말했다.
[영호 대사형은 우리와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읍
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이곳에 도착하여 사백(오악검파끼리는 결
맹을 맺었으므로 사백이니 사숙이니 사형, 사제 등으로 서로를
불렀음)께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천문진인은 다시 발을 힘차게 구르며 노갈을 터뜨렸다.
[그놈이 감히 이곳에 얼굴을 내밀어? 그놈은 화산파의 대사형
으로서 감히 강간과 강도질을 자행하면서 색마 전백광과 어울렸
단 말이다! 오악검파의 망신은 그 녀석이 혼자 다 시키고 다닌단
말이다!]
노덕약은 말했다.
[대사형은 평소 전백광과 교류가 없었읍니다. 아마 상대방이
전백광인지 모르고 술자리를 함께 한 모양입니다. 정말 우연히
술을 마셨던 거죠.]
천문진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노덕약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지 마라! 천송 사제, 자네가 어떻게 중
상을 입게 되었는지 노덕약에게 말해 주게.]
두 개의 문짝은 한 켠에 놓여져 있엇다. 한 개의 문짝 위에는
한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고 다른 한 개의 문짝 위에는 기다란
수염을 기른 노인이 앉아 있엇다. 그의 얼굴과 온몸은 피로 덮여
있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오늘 아침......나와 저 사질은......]
그는 손을 들어 문짝 위에 쓰러져 있는 한 구의 시체를 가리킨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계속했다.
[형안의 회안......회안루에서 영호충을 만나......았읍니다.
그는 전백광과 젊은 여승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는 몹시 말하기가 힘이 드는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잇지 못
했다. 유정풍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천송도우, 좀 쉬시구료. 내가 조금 전 도우가 한 말을 그에게
들려 주겠소.]
유정풍은 노덕약에게 고개를 돌리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나를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데 대해서 나는 무척 고맙
게 여기고 있네. 그러나 영호 사질이 어떻게 전백광과 같은 색마
와 사귀게 되었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네. 진정 영호
사질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우리 오악검파는 한 집안사람과 다름
없으니만큼 그를 잘 타일러야 되지.]
천문진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타이르긴 뭘 타일러? 문호를 정리하고 마땅히 그의 목을 잘라
야 돼!]
유정풍은 말했다.
[화산파의 장문인 악 사형은 제자를 엄히 다스리기로 소문난
사람이니 영호충을 알아서 처단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도 이번
일은 영호충이 지나쳤다고 사료됩니다.]
천문진인은 차갑게 말했다.
[지나칠 뿐 아니라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게 옳다.]
노덕약은 말했다.
[유 사숙, 진상을 듣고 싶으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정풍은 말했다.
[조금 전 천송도우는 이렇게 말햇네. 그가 두 명의 사질을 이
끌고 회안루에 올라갔을 때 영호충, 전백광, 의림 세 사람이 함
께 술을 마시는 걸 보앗다네. 천송도우는 이 광경을 목격하자 속
으로 화가 났다네. 원래 천송도우는 그들을 몰라보았으나 옷차림
을 보고 한 사람은 화산파의 제자이고, 또 한 사람은 항산파의
여승인지 알 수가 있었다네. 그렇지만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삼십
세 가량의 남자가 전백광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네. 영호 사질
이 그를 부르는 말을 듣고 비로소 알아차렸다는 거야. 영호 사질
은 이렇게 말했네. '전형, 그대의 경신법이 천하에서 으뜸간다고
는 하나 재수 옴 붙으면 경신법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도망
칠 수가 없을 것이오.' 전씨 성을 가지고 경신법이 천하에서 으
뜸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리독행 전백광임을 알 수가 있지 않
겠는가? 천송도우는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협사로서 그들의 술
마시는 꼴을 보자 치미는 울화를 억제하지 못했다네.]
노덕약은 허리를 굽신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가 봐도 울화가 치밀었을 겁니다. 색마와 여승, 그리고 도
사 세 사람이 어울려 술을 마시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꼴불견일
것입니다.]
유정풍은 말을 계속했다.
[이때 전백광이 말했네. '이 전백광은 언제나 홀로 강호를 횡
행했네. 이 젊은 여승을 만난 이상 억지로라도 술을 먹입시다.'
이 말을 들은 청송도우와 두 명의 사질은 크게 호통을 쳤다네.
'네가 바로 그 죽어 마땅한 색마 전백광이구나! 누구나 너를 보
면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데 이곳에서 감히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
여! 살기가 싫다면 죽여 주지.' 그리고 무기를 뽑아 들고 전백광
을 향해 공격했네. 그러다가 전백광에게 죽임을 당하고 중상을
입게 되었던 거라네. 영호충은 그 옆에 있으면서도 천송도우를
돕기는 고사하고 술만 마시고 있더라는 게야. 이야말로 우리 오
악검파의 결맹에 커다란 금을 그어놓은 일이지. 천문진인께서 화
를 내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라네.]
천문진인은 싸늘히 코웃음을쳤다.
[흥! 결맹은 무슨 결맹이야! 색마와 어울리는 화산파는 결맹을
우습게 여긴 게 아니고 뭐냔 말이다!]
이때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제자가 드릴 말씀이 있읍니다.]
천무진인은 그 음성이 귀에 익은 것을 알고 잘라 말했다.
[들어 와.]
서른 가량의 영기발랄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더니 유정
풍에게 먼저 인사를 올린 후 천문진인에게 말했다.
[사부님, 천백 사숙께서는 본문의 제자를 이끌고 색마 영호충
과 전백광을 잡으러 떠났읍니다. 아직까지는 색마의 종적을 발견
하지 못했지만 머지 않아 사로잡아 오겠다고 전갈이 왔읍니다.]
천문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색마들이 반항한다면 사로잡을 필요도 없이 죽여서
수급을 가져와도 상관 없다고 전해라.]
[예.]
사내는 읍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형양성 밖에서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그 시체의
배에는 한 자루의 검이 박혀 있다고 합니다. 그 칼은 바로......
영호충 그 색마의 칼이었다고 합니다.]
천문진인은 깜짝 놀라 물었다.
[뭐라고? 죽은 사람은 누구더냐? 또 우리 태산파의 제자이냐?]
[다행히 우리 파의 제자는 아닙니다. 그 시체는 바로 청성파의
나인걸......]
이때 여창해가 소스라쳐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나인걸 그 애가......시체는 ......시체는 어디에 있
지?]
그러자 문 밖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 있읍니다.]
[가지고 들어오너라.]
[예.]
다시 한 개의 문짝이 들려 왔는데 거기에는 배에 검이 찔린 채
죽은 한 삶의 시신이 뉘여 있었다. 그 수법은 악독하고 잔인했
다. 배에서부터 찔러 목으로 치밀어 올렸는데 자루만 남기고 검
날은 시체의 뱃속에 파고들어 보이지 않았다.
여창해는 사랑하는 제자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자 몸을 부들
부들 떨었다.
[영호충......영호충......너는 정말 악랄하구나!]
바로 이때였다.
문 밖에서 교태어린 여인의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사부님, 제가 돌아왔어요.]
정일사태의 표정에 기쁜 빛과 분노의 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녀는 다급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의림아, 빨리 들어오너라.]
모든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문을 향해 돌려졌다. 밝은 대낮에
두 남자와 술을 같이 마신 대담한 여승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
지 궁금했던 것이다.
문의 휘장이 걷혀지는 순간 사람들은 갑자기 방 안이 환히 밝
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명의 젊은 여승이 사뿐사뿐 걸어서 들어오고 있었다. 청초
하고 고운 용모였다. 아리따운 얼굴은 인간 세상에서 보기 드물
정도였고 빛이 나서 사람들을 비추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
다. 그녀는 십오 세 정도의 나이로 보였지만 몸매는 가냘프면서
도 굴곡이 뚜렷해서 풍성하지도 여위지도 않아 매우 보기에 좋았
다. 넓은 승포로 몸이 감추어져 있었으나 뛰어난 몸맵시는 감추
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정일사태의 앞으로 다가서서 다소곳하게 인사를 한 후
고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부님......]
한 마디를 채 뱉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는 왁 하니 울음을 터뜨
렸다.]
정일사태는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너는 무슨 짖을 하고 다녔지? 어찌하여 돌아왔느
냐?]
의림의 울음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님......저는 이번에......이번에 하마터면 사부님을 뵙
지 못할 뻔 했읍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고왔다. 한쌍의 해맑은 섬섬옥수를 내밀
어 정일사태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그 손은 투명할 정도로 희
고 고왔다. 모든 사람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어쩌다가 여승이 되었을까?)
여창해는 멍하니 나인걸의 배에 박힌 장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자루에 달린 수실이 미풍에 흔들거리고 있었고, 검자루에 가까
운 칼날에는 '화산 영호충'이라는 다섯 글자가 깨알처럼 작게 새
겨져 있었다. 여창해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노덕약의 허리에
매달린 장검을 바라보았다. 허리에 찬 패검은 나인걸의 배에 꽃
힌 검과 모양이 같았다. 여창해는 불쑥 손을 내밀어 노덕약의 허
리를 향해 뻗어갔다. 노덕약은 깜짝 놀라면서 재빨리 거화소천의
일초를 써서 두 손을 내밀어 여창해의 손을 내밀려고 했다. 여창
해는 차갑게 코웃음치며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쉭' 하는 음향
이 들리며 푸른 빛이 장내에 어른 거렸다.
여창해의 손에는 노덕약의 장검이 들려져 있었다. 어느 틈에
뽑았는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번개 같은 솜씨였다.
장검의 예리한 끝은 노덕약의 목젖에 살짝 닿아 있어 조금만
힘을 주면 목을 꿰뚫을 수 있는 상태였다.
노덕약은 얼굴색이 창백하게 변하여 더듬거렸다.
[왜...... 왜 이러시오!]
여창해는 대꾸를 하지 않고 검날을 바라보았다. 검날에는 '화
산 노덕약'이라는 다섯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여창해는
검을 내려뜨려 여창해의 아랫배를 찌를 듯 몇 번 내밀며 물었다.
[이렇게 검을 비스듬히 올려 찔러 상대를 죽이는 수법은 화산
파의 검법이겠지?]
노덕약은 이마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우리 화산파의 검법에는 그와 같은 수법은 없읍니다.]
여창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인걸을 죽인 이 일초는 장검을 아랫배에서 찔러 넣어 목구
멍까지 찌르는 잔인한 수법이다. 혹시 영호충은 몸을 낮춘 자세
에서 위를 향해 치찌른 것이 아닐까? 그는 살인 후에 어째서 장
검을 뽑지 않고 그냥 두었을까? 청성파에 공공연히 도전하겠다는
수작일까?]
의림의 음성이 장내에 낭랑히 울려퍼졌다.
[여 장문인, 영호 오라버니의 그 수법은 화산파의 검법이 아니
었어요.]
여창해의 얼굴은 한 겹의 서리가 내린 듯 차가웠다. 그는 정일
사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태, 당신도 들었지요? 방금 당신의 나이 어린 제자는 영호
충 그 색마를 향해 무어라고 호칭하던가요?]
정일사태는 발끈한 음성으로 쏘아부쳤다.
[나는 귀가 없는 줄 아시오?]
정일사태 역시 의림이 영호충을 '영호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르던 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여창해가 먼저 무례한 어조로 따지고 들자 오히려 제자를 변호하
고 나섰던 것이다.
[그녀가 그를 가리켜 오라버니라고 부르는게 당신과 무슨 상관
이 있겠소? 오악검파는 의리로 결맹을 맺었으니까 모두 사형 또
는 사매라고 불러도 괜찮은 것이오.]
여창해는 급히 말했다.
[좋소! 좋아!]
말과 함께 여창해는 장검을 거두어들이면서 왼손으로 노덕약의
가슴을 힘껏 떠밀었다. 노덕약은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맥없이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정일사태는 의림을 돌아보며 말했다.
[의림아, 네가 어떻게 하다가 그 짐승들에게 잡혔으며 무슨 일
이 있었는지 사부에게 상세히 이야기해 주렴.]
그러면서 의림의 손을 끌고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사람
들은 하나같이 끌려가는 의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와 같이 아리따운 소녀가 색마에게 사로잡혔으니 분명히 몸
을 더럽혔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래서 우리들이 들을까봐 나가는 것이겠지.)
갑자기 푸른 그림자가 번뜩이면서 여창해가 정일사태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일은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중대한 일이니 의림으로 하여
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상을 밝히도록 해야 하오.]
정일사태의 성격은 열화와 같았다. 평소 사자인 정정이나 항상
파의 장문인 정한도 그에게는 양보하는 처지였다. 그녀가 어찌
여창해로 하여금 앞길을 막아서서 비웃음을 던지도록 허용하겠는
가? 즉시 그녀의 눈썹이 쫑긋 솟아올랐다. 이때 유정풍이 두 사
람 사이로 들어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두 분은 모두 본인의 손님이 아니겠소? 아무쪼록 저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서로 양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모두가 불초의 불
찰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절을 했다. 정일사태는 호호 하고
웃은 다음 말했다.
[이 소코도사의 기를 꺾어 놓고 싶지만 유 대협의 얼굴을 봐서
참도록 하죠.]
여창해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소코고 말코고 좋소. 의림 보고 어서 진상을 말하게
하시오. 그러면 나는길을 막으래도 막지 않을 것이외다.]
여창해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정일사태는 의림을 돌아보며
말했다.
[할 수 없다. 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라. 그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간 후 너는 어떤 일을 겪었느냐?]
정일사태는 의림이 나이가 어리고 순진하여 쓸데없이 자질구레
한 일까지 이야기할 것 같아서 주의를 주었다.
[다만 요긴한 말만 골라서 해라. 상관이 없는 일을 들먹일 필
요는 없다.]
의림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네. 제자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았어요. 다만 전백
광......그 나쁜 사람이......그는......그는......]
정일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반드시
전백광과 영호충 두 악적을 죽여 너의 화풀이를 해주겠다.]
의림은 혼백을 빨아당길 듯 맑고 깊은 눈동자를 들어 정일사태
를 바라보았다. 점차 그녀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영호 오라버니는......그분은......그분은...... 이미 죽었어
요.]
사람들은 영호충이 죽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천문진인은 크
게 기뻐 소리를 질렀다.
[잘 죽었군. 잘 죽었어! 그를 누가 죽였느냐?]
의림은 손을 들어 나인걸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리고 울음 섞
인 음성으로 말했다.
[바로......바로 저기 있는 청성파의 나쁜 사람이예요.]
여창해는 의기양양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인걸과 영호충은 서로를 죽인 것이구나. 좋아! 인걸 녀석이
용감하다는 것을 나는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 과연 우리 청성
파의 위명을 손상시키지 않았구나!)
생각을 마친 그는 의림을 흘겨 보며 싸늘히 말했다.
[나인걸이 나쁜 사람이라고? 흥! 오악검파의 인물만 좋은 사람
이란 말이지?]
의림의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뺨 위로 수정같은 눈물방울이 흘
러내렸다.
[저는...... 청성파를 욕한 게 아니고 다만 저 사람을 나쁘다
고 한 거예요.]
그녀는 다시 한번 나인걸의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일사태는 여창해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당신 어찌해서 나의 제자에게 큰 소리를 치는 거지? 내 제자
가 얼마나 놀라겠어? 의림아, 겁내지 말아라. 그 사람이 어째서
나쁜 사람인지 말해 보아라. 사부가 여기에 있는 이상 누가 감히
너를 괴롭힐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한번 여창해를 흘겨보았다. 여창해는
말했다.
[출가인은 거짖말을 하면 안 된다. 의림, 그대는 관음보살의
이름을 걸고 너의 말이 진실이라고 맹세할 수 있겠느냐?]
그는 의림이 나인걸을 헐뜯지 못하게 만들 속셈이었다.
의림은 말했다.
[저는 사부님 앞에서 거짖말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는 문 밖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합장하고 눈
을 감았다. 그녀는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의림은 관세음보살께 맹세합니다. 오늘저는 한 마디도 거짖
말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굽어 살피소서.]
사람들은 그녀의 음성이 매우 진지하고 가냘픈 몸매가 안스러
워 저절로 동정심을 느꼈다. 그리고 의림이 거짖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 명의 구렛나룻이 무성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분은 결코 거짖말을 하지 않을 것 같소. 우리는 그를 믿어
도 될 것이외다.]
정일사태가 여창해를 향해 말했다.
[소코도사, 당신도 들었지요. 문 선생께서도 의림을 믿는다고
했소. 그녀는 거짖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모든 삶들의 시선은 의림 한 사람의 얼굴로 집중되었다. 이때
의림의 아리따운 자태는 명주처럼 밝고 순결해 보였다. 심지어
여창해마저도 이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저 어린 비구니는 결코 거짖말을 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사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들 의림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림은 고운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어제 오후 저는 사부님과 언니들을 따라 형양으로 갔지요. 그
런데 도중에 비를 만나고 말았답니다. 언덕을 내려가다가 그만
미끄러졌지요. 저는 엉겁결에 손으로 땅을 짚었고 그 바람에 손
에는 진흙이 잔뜩 묻었어요. 그래서 저는 언덕 아래에 있는 개울
가로 가서 손을 씻고 있었어요. 갑자기 개울의 수면 위에 저의
그림자 말고 한 남자의 모습이 비춰지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깜
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는데 그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서 비틀
거리게 되었읍니다. 그 남자에게 혈도를 짚힌 것이지요. 그 사람
은 비틀거리는 나를 품에 안고 산 속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어요.
결국은 은밀한 어느 동굴 속으로 들어갔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저를 땅 위에 내려놓았어요. 저는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움직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읍니다. 이때였어요.
언니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의림아, 어디에 있느
냐!' 언니들은 그렇게 불렀어요. 그 남자는 웃으며 말했어요.
'저 계집애들이 너를 찾고 있구나. 이곳으로 그녀들이 들어온다
면 나는 그들마저 잡아먹어야지.' 한참이 지나자 언니들은 저를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고 말았어요. 그 사람은 그제서야 나의
혈도를 풀어 주었어요. 저는 즉시 동굴 밖으로 도망을 치려고 했
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신법은 저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그는
먼저 동굴의 입구를 막아서는 것이었어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서 저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어요. 그는 웃으며 말
했어요. '네가 내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저는
급히 뒤로 물러나 장검을 뽑아들었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이봐
요. 왜 나의 앞을 가로막는 거예요? 비키지 않으면 나의 검으로
당신을 찌를 거예요!'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어요. '어린 여승,
그대는 마음씨가 꽤 자비롭군. 나를 차마 찌르지는 못할 것이
다.' 저는 말했어요. '나는 당신에게 원한이 없는데 왜 당신을
찔러야 하나요? 빨리 비켜 주세요.' 그 사람은 말했어요. '그렇
다면 우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저는 말했어요. '그
럴 시간이 없어요. 사부님께 돌아가야 해요. 저의 사부님께서는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이미 이야기를
나누었지 않아. 몇 마디 더 한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니
라구.' 저는 소리쳤어요. '빨리 비키세요. 당신은 우리 사부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군요. 그분께서 당신의 무례한 행동을 보
았다면 당신의 다리를 분질러 버렸을 거예요.' 그러자, 그는 말
했어요. '그대가 나의 다리를 분질러 버린다면 나는 반항하지 않
겠소. 하지만 그대의 사부는 늙은이가 아닌가? 쭈그렁 바가지를
위해 다리를 맡길 수는 없지.']
정일사태가 호통을 쳤다.
[바보 같으니라구! 그런 말까지 하면 어떡해?]
의림은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했어요. 사부님을 쭈그렁 바가......]
[됐다. 그와 같은 말은 요긴한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들먹이지
말아라. 너는 어쩌다가 화산의 영호충을 만나게 되었는지 미야기
해라.]
의림은 말했다.
[예, 알겠어요. 그는 여러 가지 말을 했어요. 저를 밖으로 나
가지 못하게 하면서 내가 매우 예쁘게 생겼다고 했고......같이
잠을 자자고......]
[닥쳐라! 점점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의림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말을 했을 뿐이고 저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어요. 나
는 그와 같이 잠을 자지 않았어요.]
[닥치지 못해!]
이때 나인걸의 시체를 떠매고 들어왔던 한 사람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나직이 웃었다. 정일사태는 대뜸 옆의 찻잔을 집어들고
뜨거운 찻물을 그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아이쿠!]
그 사람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여창해
가 노해 부르짖었다.
[그대의 제자는 말을 할 수 있고 나의 제자는 웃지도 못한단
말이오?]
정일사태는 여창해를 흘겨준 후 다시 의림을 바라보고 입을 열
었다.
[말을 계속해라. 하지만 필요가 없는 말은 생략하도록 해라.]
[예, 사부님.]
의림은 다소곳이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참지 못한 제자는 결국은 그 사람을 향해 검을 찔러 갔어요.
그때 제자는 금침도겁(金針渡劫)이라는 일초를 펼쳤어요. 그는
검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 있었어요. 저는 차마 그를 찌르지 못
하고 검의 끝을 그의 가슴팍에 대고 내밀지 못했어요. 갑자기 그
가 크게 웃었는데 웃음소리가 끝났을 때 저의 검은 어느샌가 그
사람의 손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는 왼손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
으로 검의 끝을 잡더니 '뚝'하고 저의 장검의 끝을 한 치 정도의
길이로 잘라 버렸어요.]
정일사태는 놀란 어조로 물었다.
[잘라낸 검의 끝이 정말 한 치밖에 되지 않았느냐?]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일사태는 말했다.
[그 전백광이 장검의 가운데를 부러뜨렸다면 별로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식지와 엄지의 힘으로 칼끝 한 치 부근을 부러뜨렸
다면......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구나!]
이때 천문진인이 제자의 패검을 뽑아들고 왼손의 식지와 엄지
로 검 끝을 잡고 힘을 주었다. '뚝' 소리와 함께 검끝의 한 치
부근이 대뜸 부러져 나갔다. 천문진인은 의림을 향해 물었다.
[이렇게 하더냐?]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사백부님께서도 그 수법을 알고 계셨군요.]
천문진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부러진 검끝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책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팍' 소리가 나면서 검끝
은 단단한 책상을 뚫고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의림은 기쁜 어조로 소리쳤다.
[멋지네요! 아마 그와 같은 재간은 전백광도 가지고 있지 못했
을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수심에 잠긴 채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애석하게도 그때 사백부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았어요. 그렇
지 않았다면 영호 오라버니는 상처를 입지 않으셨을 텐데......]
천문진인은 물었다.
[상처를 입었다고? 너는 영호충이 이미 죽었다고 하지 않았느
냐?]
[그래요. 영호 오라버니는 몸에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에 청성
파의 나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거예요.]
의림의 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금새라도 주루
루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은 너무나 애처로와 보는 사람
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그녀가 출가한 비구니가 아니라면 선
배고수들은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던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던졌을 것이다.
의림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친 다음 울먹이며 말했다.
[전백광은 나쁜 사람이었어요. 자꾸만 저를 끌어안으려고했어
요. 제가 손으로 그를 때리자 그는 저의 두 손마저 움켜쥐고 저
의 몸을 와락 끌어당기는 것이었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갑자기
동굴 밖에서 누군가 '하!하!하!' 하고 세 번 웃음을 터뜨리는 것
이었어요. 잠시 멈추었다가 그 사람은 다시 '하!하!하!' 하고 세
번 웃었어요. 전백광은 호통을 쳤어요. '어떤 놈이냐?' 그러자
동굴 밖에 있는 사람은 다시 '하!하!하!' 하는 웃음을 다섯 차례
에 걸쳐 웃었어요. 전백광은 소리를 질렀어요. '분수를 알고 일
찌감치 꺼져 버려라! 이 전 나으리가 만약 밖으로 나간다면 네
녀석은 뼈도 추리지 못한다!' 그러나 밖의 사람은 다시 '하!하!
하!' 하는 기이한 웃음소리를 냈어요. 그 웃음소리는 호탕했고
우렁찼으며 맑기가 그지없었어요. 전백광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제 앞가슴 옷섶을 해치려고 했어요. 그때 다시 '하!하!
하!' 하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어요. 저는 그 사람이 달려들
어와 전백광을 물리치고 저를 구해 주기를 바랬죠. 하지만 그 역
시 전백광이 무서운지 감히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어요.
다만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만 계속되었을 뿐이었죠.
전백광은 화가 나는지 다시 저의 혈도를 짚은 후 휙 하니 동굴
밖으로 다려 나갔어요. 하지만 밖에 있던 사람의 종적은 발견할
수 없었죠. 전백광은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 나를 거칠게 일으켜
세우고 입맞춤을 하려고 했어요. 바로 이때 동굴 밖에서 다시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어요. 저는 그만 크게 우스
워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정일사태는 의림을 흘겨보며 말했다.
[네 자신의 몸이 더럽혀지는 긴급한 순간인데도 웃음이 나오더
냐?]
의림의 두 뺨이 진달래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고
개를 숙이며 나직이 대답했다.
[우스운 걸 어떡해요. 이때 전백광은 살며시 나를 내려놓고 살
금살금 소리를 죽여 동굴 있는 쪽으로 다가갔어요. 기습을 하여
사로잡으려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동굴 밖으로 사람은 대단히
눈치가 빨라서 다시는 웃지를 않더군요. 전백광이 막 동굴 입구
로 뛰어나갈 때 저는 소리를 쳤어요. '조심하세요! 그가 나가
요!' 이때 멀리서 그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어요. '하!하!하!
알려 주어서 고맙소. 하지만 나는 잡히지 않는다오. 그의 경신법
은 나의 발바닥에는 미치지 못한다오!']
모든 사람들은 전백광의 별명이 만리독행(萬里獨行)으로서 경
신법(輕身法:몸을 빨리 이동하는 기술)이 독보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경신법은 나의 발바닥에도 미치
지 못한다'라는 말은 전백광을 충동질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낸
말일 거라고 짐작했다.
[전백광은 나에게로 번개같이 달려와 나의 얼굴을 힘껏 비틀었
어요. 내가 아파서 비명을 지를 때 그는 밖으로 뛰쳐나가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어요. '이 도둑아! 나와 경신법을 겨루어 보자!'
전백광은 속은 거예요. 원래 그 사람은 동굴 바로 옆에 몸을 숨
기고 있었거든요. 전백광이 멀리 뛰어가자 그는 살그머니 동굴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는 말했죠. '두려워 마오. 나는 그대를 구
하러 왔소. 그는 그대의 어느 혈도를 짚었소.' 나는 얼른 대답했
어요. '견정(肩井)과 대추(大?)를 짚혔어요. 당신은 누구신가
요?' 그는 말했어요. '혈도를 푼 이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
리고 손을 뻗어 저의 견정과 대추 두 혈도를 추궁과혈(推宮過血)
의 수법을 써서 풀어 주려 했어요. 이때 전백광이 되돌아오는 기
척이 들렸어요. 저는 말했죠. '그대는 빨리 도망치세요. 그가 돌
아오면 당신을 죽이고 말 거예요.' 그는 말했답니다. '오악검파
는 의리로 맺어진 만큼 한 집안이 아니겠소?사매의 어려움을 보
고도 구하지 않는다면 그건 말이 안 되지.']
정일사태는 물었다.
[그가 오악검파의 사람이었느냐?]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가 바로 영호충(令狐沖) 영호 오라버니였어요.]
모든 사람은 의림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 '아' 하는 신음 소리
를 냈다.
한문 확장 팩을 사면 한자를 쓰려고 했는데 있는 글자 만이라
도 쓰고 없는 글자는 '?'로 쓰기로 했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의림은 말을 계속했다.
[전백광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죠.
'실례하오.' 그리고 저를 품 안에 안고 동굴 밖으로 뛰어가서 주
변의 풀더미 속에 몸을 숨겻어요. 우리가 숨자마자 전백광은 동
굴로 돌아왔어요. 그는 동굴 속에서 나를 찾지 못하자 별의 별
욕설을 퍼부었어요. 그는 장검을 휘둘러 동굴 주변의 풀더미를
마구 찌르고 베었어요. 다행히 그날 밤은 비가 오고 난 뒤라서
달도 별도 없이 캄캄했기 때문에 전백광은 우리를 찾아내지 못??
어요. 그는 우리가 멀리 달아나지 못했을 거라고 내다보고 풀더
미를 난도질하기 시작했죠. 한번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검이 저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어요. 전백광은 칼을 휘둘러 풀을 베며 우
리를 지나쳐 갔어요.
저는 갑자기 뜨끈뜨끈한 액체가 저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동시에 짙은 피비린내를 맡았어요. 바로......
영호 오라버니가 전백광의 칼에 상처를 입었던 거예요. 저는 깜
짝 놀라서 물었죠. '그대는 상처를 입었나요?' 영호 오라버니는
손을 뻗쳐 저의 입을 막았어?? '큰 상처는 아니오.' 그러나 저
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피는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어
요. '그대는 큰 상처를 입었으므로 얼른 지혈을 해야 돼요. 저에
게 천향단속교(天香斷續膠)라는 약이 있어요.' 그때 영호 오라버
니는 말씀하셨어요. '소리내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마시오. 전백
광은 귀가 밝은 녀석이외다.' 한참 후 전백광이 다시 달려오며
부르짖었어요. '하하하! 너희들은 알고 보니 그 곳에 숨어 있었
구나! 나는 보았다. 냉큼 나오지 못해!' 저는 전백광이 우리를
발견한 줄 알고 정말4 몸을 일으키려고 했죠. 그때 영호 오라버니
가 저를 꽉 눌렀죠. 이때 저는 풀더미 속에 드러누운 상태였고
영호 오라버니는 제 몸 위에 엎드린 상태였어요. 그분이 몸을 일
으키지 않으니까 저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더군요.]
정일사태는 말했다.
[전백광은 너희들을 발견하지 못했어. 그냥 상대방의 허를 찔
러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도록 흉계를 꾸민 것이지.]
의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사부님은 거기에 계시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있죠?]
[그 정도는 강호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窄?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야. 그가 정말 너희들을 발견했다면 일검으로 영호충을 찔러
죽일 일이지 무엇 때문에 소리를 지르겠느냐?]
[영호 오라버니는 이때 일어나려는 저를 내리누르고 손으로 나
의 입을 막았어요. 그분 역시 전백광의 교활한 생각을 꿰뚫어 보
신 거지요. 영호 오라버니는 그가 다시 멀리 간 후 나직이 말했
어요. '전백광은 다시 와서 칼을 휘두를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아예 동굴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기로 합시다. 그 녀석은 우리가
동굴 속에 들어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
하삼칠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좋아! 정말 영호충은 용기가 있고 견식이 풍부하구나!]
의림은 하삼칠을 바라보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영호 오라버니가 용감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군요. 우
리 두 사람은 동굴 속으로 들어왔어요. 그분은 저를 땅바닥에 내
려 놓았어요. 저는 그분의 머리와 어깨에서 여전히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말했죠. '저의 품 안에 천향단속교라는 약이 있어요.
그걸 바르면 피가 곧 멎을 거예요. 저는 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니까 오라버니께서 제 ??속에 있는 약을 꺼내도록 하세
요.' 그는 말했어요. '지금 꺼내기가 불편하니 그대가 손을 움직
일 수 있을 때 그대가 꺼내 주시오.' 그분은 허리의 검을 뽑아
옷자락을 잘라 왼쪽 어깨를 싸맸어요. 상처는 몹시 깊었어요. 그
분은 저를 위해 그처럼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신음소리 한 번 내
뱉지 않았어요. 저는 몹시 미안했어요. 그리고 약을 왜 꺼내지
않고 나 보고 꺼내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정일사태는 '흥' 하고 코웃음친 후 말했다.
[체! 그렇다면 영호충은 정인군자(正人君子)4로군!]
정일사태는 영호충이 의림의 품 속에 손을 넣을 수 없어서 의
림의 혈도가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의림의 맑고 커다란 눈동자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
[맞아요! 영호 오라버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예요. 그
분은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놀랍게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저를 구하려고 했어요.]
여창해는 냉랭히 말했다.
[그 녀석은 였날부터 너의 용모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미쳤다고 위험을 무릅쓰겠어?]
의림은 말?杉?
[아니예요. 그분은 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분은 결코 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분은 거짓말을 몰
라요.]
사람들은 그녀의 진정에 가득 찬 말을 듣고 숙연해졌다. 여창
해는 속으로 생각했다.
(영호충이라는 녀석은 대담하면서도 건방진 구석이 있었군! 의
림에게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면 전백광과 겨루어 천하에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의림은 계속해서 말했다.
[동굴 밖에서 전백광이 풀을 베어 넘기며 가까이 다가왔어요.
그는 동굴4 안에 들어와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묵묵히 침묵을 지켰
어요. 저는 숨을 죽였으며 영호 오라버니 역시 구석에 웅크리고
숨소리 한 번 내지 않았죠. 갑자기 막혔던 혈도가 시간이 흐르자
풀렸고 혈도가 풀리느라고 몸이 쿡쿡 쑤셨지요. 저는 잔뜩 긴장
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고통이 엄습해오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
렀어요. 전백광이 껄껄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죠. 영호 오라버니
는 옆에 움츠린 채 아무 기척도 내지 않았지요. 전백광은 웃으면
서 말했어요. '어린 양(羊)이 동굴 속에 숨어 있었구나!' 그는 4
손을 뻗어 저를 붙잡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칙' 하는 소리가 났
죠. 영호충 오라버니께서 전백광에게 일검(一劍)을 격중시켰던
거죠. 전백광은 뒤로 물러서더니 허리에 찬 칼을 뽑아서 영호 오
라버니를 향해 찔러 갔어요. '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불똥이 튀
고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싸우게 되었죠. 그들은 한참 동안 싸
우다가 갑자기 똑같이 뒤로 물러섰어요. 거친 숨소리만 동굴 속
을 메웠을 뿐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크게 무
서워졌어요.]
천문진인이 불쑥 물었다.
[영호충4은 그와 몇 초를 싸웠느냐?]
의림은 말했다.
[저는 얼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잘 몰라요. 갑자기 전백광이 놀
란 음성으로 소리쳤어요. '이제 보니 너는 화산파의 인물이었구
나! 화산파의 검법은 나의 적수가 못 된다. 너의 이름이 뭐냐?'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죠. '그건 몰라도 되오. 오악검파는 그대 같
은 색마의 적이오.' 막 영호 오라버니의 말이 끝났을 때 전백광은
몰래 기습을 했어요. 원래 그는 영호 오라버니가 말을 할 때 위치
를 알아내려고 했던 거죠. 두 사람은 다시 몇 초를 싸웠어요. ??
자기 영호 오라버니가 '아' 하는 신음소리를 냈어요. 다시 상처를
입었던 거예요.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어요. '나는 이미 화산검법
이 나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너의 사부 악(岳) 노인이
친히 달려온다 해도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저는 이 무렵
혈도가 풀려진 상태였죠. 저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영
호 오라버니는 기척을 듣고 크게 말했어요. '혈도가 풀렸군! 빨리
떠나시오. 빨리!' 나는 말했어요. '화산파의 사형, 저는 그대를
도와 저 악인을 무찌를 거예요.' 영호 오라4버니는 말했어요. '빨
리 떠나요! 둘이 힘을 합한다고 해도 그를 이길 수는 없소.' 전백
광이 웃었어요. '알고 있으니 잘 되었다. 구태여 목숨을 버리지
말고 자네가 떠나게. 그리고 나와 저 여승은 이곳에 남겠네. 한데
그대의 이름은 뭔가? 나는 그대의 의협심에 깊이 감복했네.'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죠. '나의 존성대명을 이야기해 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오. 이 늙은이는 그대 보다 나이가 많은데 그대가 반말
을 하므로 기분이 나빠서 내 이름을 알려 주지 않겠소.' 사부님
우습죠? 그분은 스스로4 늙은이라고 했어요.]
정일사태는 냉소했다.
[시정잡배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냈군! 천박스럽다! 천박스러
워!]
의림은 말했다.
[아...... 늙은이란 말은 원래 천한 말이었군요. 영호 오라버
니는 말했어요. '사매, 빨리 형산성으로 가시오. 거기엔 많은 무
예의 달인들이 모여 있으므로 이 색마가 감히 추격하지 못할 것
이오.' 나는 물었어요. '내가 떠난 후 그가 사형을 죽이면 어쩌
지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나도 곧 뒤를 따를 테니 어
서 가시오.' 순간 다시 무기가 무섭게 충돌4했어요. 영호 오라버
니의 비명소리가 다시 들리는 걸로 보아 또 다시 상처를 입은 모
양이었어요. 이때 영호 오라버니는 크게 소리쳤어요. '사매, 어
서 떠나시오. 빨리 떠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욕하겠소!' 저
는 부르짖었어요.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공격해요.' 전백광은 웃
으며 말했어요. '그거 참 영광스럽군! 나 전백광이 혼자 화산파
와 항산파의 연수공격을 맞아 싸우게 되다니!' 이때 영호 오라버
니가 저를 욕했죠. '이 철없는 비구니야! 천치 밥통 머저리야!
아직도 떠나지 않았느냐!' 전백광??웃으며 말했어요. '이 여승
은 나에게 미련이 남아 있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지.' 영호 오
라버니는 크게 욕을 했어요. '병신 같은 계집애야! 갈꺼냐 안갈
꺼냐?' 저는 말했어요. '저는 가지 않겠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죠. '그렇다면 그대의 사부를 욕하겠다. 정한(定閒) 그 늙은
중대가리는 멍청이라서 너 같은 어린 멍청이를 배출했구나!' 저
는 말했어요. '정한 사백부님은 저의 사부님이 아니예요.' 그분
은 다시 말했어요. '좋아. 그렇다면 정정(定靜)사태를 욕하겠
다.' 저는 말했어요. '그?筠?저의 사부님이 아니예요.' 그는 말
했어요. '쳇! 그래도 가지 않고 말대꾸야. 그렇다면 나는 정일
(定逸) 사태를 욕해야 되겠군. 정일 그 병신 멍청이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일사태의 안색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의림은 얼른 말했다.
[사부님, 노여워하지 마세요. 영호 오라버니는 저를 위해서 그
런 것이지 결코 사부님을 정말로 욕하려고 한 게 아이예요. 저는
말했죠. '저 자신이 멍청한 것이지 사부님을 닮아서 멍청한 것은
아니예요.' 갑자기 전백광이 제 곁으로 날아오며 손가락??뻗어
저를 찌르려고 했어요. 저는 어둠 속에서 마구 검을 휘둘러 간신
히 그를 퇴치했어요. 영호 오라버니가 큰 소리로 외쳤어요. '나
에게는 무수한 욕설이 있다. 그대의 사부에게 써먹어도 좋단 말
인가? 왜 안 가지?' 저는 말했어요. '욕을 하시면 안 돼요. 우리
함께 도망쳐요.' 영호 오라버니가 소리쳤어요. '네가 네 곁에 있
으면 내가 화산검법을 펼칠 수가 없게 돼. 그러면 나는 전백광을
죽일 수 없어! 빨리 나가라고! 나는 화산검법을 펼쳐 전백광을
죽일 테니까!' 전백광은 소리내어 웃었어요. '4하하! 그대는 젊은
여승에 대해서 정말 다정하구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대
의 성명조차 모르고 있네.' 저는 그 말을 듣고 말했어요. '화산
파의 사형,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제가 형산으로 가서 사부
님께 그대가 저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겠어
요.' 영호 오라버니는 외쳤어요. '빨리 꺼져라! 귀찮아 죽을 지
경이다. 나의 성은 노이고 이름은 덕약이라고 한다.']
노덕약은 의림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했다.
(대사형은 어째서 나의 이름을 들먹였을까?)
문선생이 고4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호충은 착한 일을 하면서도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니 정말
우리 협의지사들의 모범이라고 할 것이외다.]
정일사태는 노덕약의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칼을 바라보며 중
얼거렸다.
[흥! 나를 욕했으니 겁이 났겠지. 나중에 내가 따질까봐 남에
게 죄를 전가시킨 것이겠지.]
그녀는 노덕약을 노려보며 앙칼지게 물었다.
[이봐 노덕약, 자네가 동굴 속에서 나를 욕했다는데 사실인
가?]
노덕약은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저는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4]
유정풍은 미소를 지었다.
[정일사태, 영호충이 그의 사제의 이름을 사칭한 데는 이유가
있다오. 노덕약으로 말하면 나이가 들어 화산파에 입문한 자로서
배분은 비록 낮으나 나이는 가장 많지요. 수염도 저렇게 무성하
니 족히 의림의 할아버지 뻘이 될 수 있을 것이외다.]
정일사태는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녀는 영호충이 의림을
생각하여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동굴 안은 칠
흑처럼 어두웠다. 남녀가 한 동굴 속에서 있었다면 자연히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누구??생갈할 것이외다. 하지만 의림이
노덕약 같은 늙은이와 있었다고 한다면 누구도 할아버지와 손녀
딸 같은 두 사람이 동굴 속에서 엉뚱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
정일사태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은 정말 용의주도하구나. 의림아, 그 다음을 이야기해
보아라.]
의림은 말을 이었다.
[저는 말했어요. '노덕약 오라버니, 그대가 저 때문에 위험에
처했는데 제가 어떻게 혼자 도망칠 수가 있겠어요. 사부님께서도
그와 같은 일은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사부님께서는 평소4 우리
항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여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행협(行俠)에
있어 결코 남자들 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정일사태는 흐뭇해져서 손뼉을 쳤다.
[좋아! 나는 언제나 여자가 남자보다 못한 게 없다고 말했었
지. 여자라고 해서 의로운 일에 발벗고 나서지 말라는 법은 없
다.]
사람들은 정일사태의 표정이 호탕한 것을 보고 하나같이 생각
했다.
(저 늙은 여승의 기백은 수염을 기른 남자에 못지않구나!)
의림은 계속해서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는 큰 소리로 욕을 퍼붓기 시작했어요. '이 빌
어먹을 어린 중대가리야! 네가 내 곁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화산
파의 천하무적검법(天下無敵劍法)을 펼칠 수 있겠느냐? 이 늙은
이는 전백광에게 죽고 말겠구나! 이제 보니 너와 전백광은 한 통
속이 되어 내가 화산파의 검법을 펼치지 못하게 하고 있구나! 이
노덕약은 오늘 정말 재수가 없느라고 여자 중대가리를 만난 거
야! 전백광, 자네는 한 칼로 나를 쳐 죽이게. 이 늙은이는 삶에
미련을 느끼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은 의림의 고운 목소리가 영호충의 그처럼 거칠고
무례한 말을 되풀이하는 소리를 듣자 빙그레 웃고 말았다.
의림은 말을 계속했다.
[저는 영호 오라버니의 말을 듣고 내가 동굴 속에 있어 봤자
그분이 천하무적의 화산검법을 펼치는데 지장이 될 뿐이라고 생
각했어요.]
[흥! 그 녀석은 허풍이 너무 세서 탈이라니까! 화산파의 검법
은 그저 그렇지. 천하무적이라니 무슨 빌어먹을 소리야!]
정일사태가 싸늘히 말했다. 의림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사부님, 그분을 욕하지 마세요. 그분은 거만해서 그런 말을
한게 아니예요. 다만 전백광에게 겁을 주어 스스로 물러가게 만
들려고 했던 거지요. 저는 말했어요. '노덕약 오라버니, 저는 이
만 가겠어요. 다음에 만나요.' 영호 오라버니는 소리를 버럭 질
렀어요. '빨리 꺼지기나 해! 그리고 다음에 만나지 않는 게 좋
아! 나는 여자 중대가리만 보면 몇 년 동안 재수가 없더라! 싸움
을 하건 놀음을 하건 재수가 없어서 언제나 지고 말지.']
정일사태는 크게 화가 났다. 발을 힘껏 구르며 날카롭게 소리
쳤다.
[그 녀석은 정말 못됐구나!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너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더냐?]
의림은 말했다.
[저는 그분이 재수가 없게 되어 싸움에서 질까봐 얼른 동굴을
나왔어요. 저는 있는 힘을 다해 사부님 계신 곳을 향해 뛰어갔어
요. 사부님, 영호 오라버니는 저를 만나서 재수가 없어졌고 그래
서 상처를 입은 거예요.]
정일은 노해 부르짖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작작해라!]
의림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말했다.
[알았읍니다. 저는 날이 밝을 때까지 달렸어요. 형양성이멀리
보였어요. 이때 전백광이 저를 쫓아오는 것이었어요.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끝내는 붙잡히고 말았지요. 저는 영호 오
라버니가 전백광에게 죽었으리라 짐작하고 마음이 아팠어요. 전
백광은 거리에 많은 행인이 있어서 감히 저에게 무례한 짓을 하
지는 못했어요. 그는 말했어요. '네가 순순히 나를 따라온다면
너를 때려 주지 않겠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너의 옷
을 홀랑 벗겨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만들겠다.' 저는 놀랍기
짝이 없어서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갔
어요. 전백광은 저를 데리고 회안루(廻雁樓)라는 술집 앞으로 데
려 갔어요. 그는 나에게 말했어요. '이봐, 너는 침어낙안(沈魚落
雁:여인이 너무 아름다와서 그 모습을 본 물고기가 놀라 물 속에
가라앉고 날아가던 기러기가 놀라서 땅에 떨어짐)이라는 말이 실
감 날 정도로 아름답구나. 나는 그대 같은 미녀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싶다. 우리 함께 즐겨 보도록 하자꾸나.' 저는 말했어요.
'출가인은 비린 고기와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법이예요. 이는 우
리 백운암(白雲岩)의 규칙이예요.' 그는 말했어요. '그런 엉터리
규칙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나는 너를 파계승으로 만들고 말테다.
너의 사부는...... 사부는......']
의림은 당혹한 표정으로 정일사태를 바라보고 말을 잊지 못한
다.
정일사태는 말했다.
[그 악인이 나를 헐뜯은 모양이구나. 그 말은 하지 않아도 된
다. 그 다음을 애기해라.]
[예, 저는 그에게 말했어요. '당신은 거짓말하지 말아요. 저의
사부님은 숨어서 몰래 개고기와 술을 먹은 적이 없었어요.']
여러 사람들은 그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의림은 전백광이
한 말을 직접 옮기지는 낳았으나 전백광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전백광은 정일사태가 순링어서 술과 개고기를 먹었다
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멍청이......]
정일사태는 의림을 쏘아보았다. 의림은 사부가 왜 화를 내는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일사태는 순진하기만 한 그녀에게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
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부드럽게 고치고 말했다.
[의림아, 그 다음을 이야기해라.]
의림은 사부의 얼굴이 풀어지자 마음이 놓이는지 한번 빙그레
웃고 말을 계속했다.
[저는 그와 함께 회안루에 올라갔어요. 그 악한 사람은 술과
고기를 시켰어요. 쇠고기와 돼지고기, 오리고기, 닭고기, 새우
같은 음식을 시킨 거예요. 그는 말했어요. '네가 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옷을 벗겨 버리겠다.' 사부님 저는 한사코
먹기를 거절했어요. 불문(佛門)의 제자는 비린 음식을 먹으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나쁜 사람이 저의 옷을 벗긴다고 하더라도 그
건 그가 벗긴 것이지 내가 스스로 벗은 게 아니니까 나에게는 책
임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이때였어요. 한 사람이 이층으로
올라왔죠. 허리엔 장검을 차고 있었고 안색은 창백했으며 온몸은
피투성이였어요. 그는 나와 전백광이 있는 탁자 옆으로 다가오더
니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전백광이 나
에게 마시라고 따라 놓은 그 술잔을 집어들고 단숨에 비웠어요.
그리고 스스로 한 잔을 따라 들고 전백광에게 말했어요. '드시
오.' 그리고 저에게 말했어요. '듭시다.' 말을 마치자 다시 그
술잔의 술을 들이켰어요. 저는 그 음성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원래 그는 동굴에서 저를 구해 주었던 바로 노덕약 오라버니였던
거예요. 나는 그분이 죽지 않은 것을 알고 너무 너무 기뻤어요.
하지만 그의 온몸은 상처 투성이었어요. 모두 저를 구하려고 입
은 상처였어요. 전백광은 말했어요. '그대였군!' 영호 오라버니
는 대답했어요. '그렇소, 바로 나외다.' 전백광은 영호 오라버니
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칭찬의 말을 던졌죠. '훌룡하
오.' 영호 오라버니도 전백광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칭찬했
죠. '훌룡한 도법(刀法)이었소이다.' 두 사람은 껄껄 호탕하게
웃어졔혔지요. 그리고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마시더군요. 저는 이
상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들은 어젯밤 무섭게 생명을 걸고 싸웠
는데 어째서 갑자기 친구로 변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던 거죠.
이때 전백광이 말했어요. '그대는 노덕약이 아니군. 노덕약은 늙
은이야. 그대처럼 젊지가 않단 말이야.' 저는 놀라서 나타난 그
사람을 바라보았죠. 과연 그는 20세 남짓해 보였으며 얼굴이 아
주 잘 생겼더군요.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어요. '맞소이다. 나는
노덕약이 아니오.' 전백광은 탁자를 손으로 탁치며 부르짖었어
요. '알았소. 그대는 바로 화산(華山)의 영호충(令狐沖)! 강호에
서 으뜸가는 인물이군!' 영호 오라버니는 빙긋 웃었죠. '감당할
수 없는 칭찬이외다. 영호충은 그대에게 패배한 인물이 아니겠
소?' 전백광은 말했어요. '싸우지 않고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소. 우리 친구로 사귀는 게 어떻소. 영호 형이 이 아름다
운 비구니를 좋아한다면 나는 기꺼이 양보해 드리리다. 나는 여
색을 밝히는 사람이지만 친구간의 신의를 더욱 높이 평가한다
오.']
정일사태는 서슬이 퍼래 가지고 중얼거렸다.
[그 악적은 죽어 마땅하다. 감히 내 사랑하는 제자를 주고받으
려고 하다니!]
의림이 갑자기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사부님...... 영호 오라버니는 갑자기 저를 욕하기 시작했어
요. '이 젊은 비구니는 얼굴에 핏기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이 창백하오. 마치 시체의 얼굴을 보는 듯 징그럽단 말이외다.
전형, 나는 여승을 보기만 해도 재수가 없소. 생각 같아서는 천하
의 여승을 모조리 때려 죽이고 싶은 심정이라오.' 전백광은 웃으
며 물었어요. '여승이 어째서 재수가 없을까? 난 처음 듣는 애기
군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솔직히말하리다. 나는 좋아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도박이지요. 골패와 주사위를 보면 사죽을
쓰지 못한다오. 그런데 일단 여승을 보면 그날은 재수가 더럽게
없어서 놀음을 하는 족족 털리기만 한다오. 비단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화산파의 모든 사제들도 여승만 보았다 하면 재수 옴
붙게 된다오. 우리 화산파의 제자들은 그래서 항산파의 냄새나는
계집애들을 보기만 하면 멀리 피해 버린다오.']
정일사태는 크게 화를 내며 '철썩' 하니 노덕약의 따귀를 후려
쳤다. 노덕약은 호되게 한 대 얻어맞자잠시 비틀거렸다. 머리가
띵 하며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유정풍은 웃으며 말했다.
[사태께서는 화를 푸시구료. 영호 사질은 의림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오. 그 말을 정말로 믿으시면 아니되오.]
의림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는 좋은 사람이예요. 다만 말을 함부로 하는 게
탈이죠. 사부님께서 화를 내시니 저는 이야기를 계속할 수가 없네
요.]
정일사태는 호통을 내질렀다.
[말해라! 한 자도 빠짐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보라구! 나는 그가
도대체 얼마나 대담하게 지껄였는지 알아내야겠다.]
의림은 노기등등한 사부의 모습을 보자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정일사태는 소리쳤다.
[어서 말하라니까! 이 애가 갑자기 벙어리가 됐나! 네가 영호충
이 나중에 혼날까봐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이 사부를 무
시한 것이 되고 사부보다 그 녀석을 더 중요시한다는 증거가 된
다. 그러니 숨김없이 말을 하라구!]
의림은 풀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말씀 드릴께요. 영호 오라버니는 다시 말했어요. '전형, 우리
무예계의 인사들은 한 자루 검을 의지하여 강호를 횡행하고 있소.
운수가 불길하면 남의 칼에 맞아 죽기가 일쑤가 아니겠소? 이 젊
은 여승은 마른 동태처럼 비쩍 여위어서 매우 꼴불견이구료. 척
보아하니 아주 재수 없게 생겨 먹었단 말이외다. 그러니 당신도
이 젊은 비구니를 건드리지 않은 게 좋을 듯하군요.' 전백광은 웃
으며 말했어요. '영호 형, 나는 그대를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 영
웅호걸인 줄 알았는데 한낱 여승 때문에 의기소침하여 몸을 사리
는 걸 보니 저절로 실망을 느끼게 되는구료.' 영호 오라버니가 말
했어요. '나는 여승을 만나고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소. 생각해
보시오. 어젯밤만 해도 나는 멀쩡했는데 이 젊은 여승을 만난 후
당신에게 중상을 입지 않았소? 이것이 재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뭐가 재수 없는 일이겠소?' 전백광은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어요.
'하하하! 그 말에도 일리가 있소.'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전형, 우리 사내대장부는 모름지기 술을 마실 때 통괘히 마셔야
하오. 옆에 여승이 있으니 어디 술맛이 나겠소? 어서 꺼지라고 하
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내가 충고하는데 만약 당신이 이 비쩍 마
르고 볼품없는 비구니를 품게 된다면 이후 평생 동안 그대는 재수
가 없게 될 것이외다. 천하삼독(天下三毒)을 그대는 어찌하여 가
까이 하는 것이오?' 전백광은 물었어요. '천하삼독이라니? 그게
뭐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죠. '어이쿠! 전형은 강호를 주유한
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천하삼독이 뭔지도 모르오? 천하삼독이란
비구니, 비상(砒霜), 그리고 금전사(金錢蛇) 세 가지를 일컫는 말
이외다. 용기가 있건 없건 천하삼독을 가까이 할 필요는 없는 일
이라오. 이 비구니는 천하삼독 중에서 으뜸가는 독(毒)이외다. 우
리 오악검파의 남자제자들은 종종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오.']
듣고 있던 정일사태는 탁자를 힘주어 내리치며 성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저런 망할 녀석이 있나! 개......]
그녀는 '개방구 같은 소리'라는 말을 하려고 하다가 여러 사람
들 앞에서 차마 '방구'라는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말
았다.
노덕약은 그녀가 또다시 발작을 하자 다시 따귀를 맞을까봐 얼
른 뒤로 피해 버렸다.
유정풍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영호 사질은 좋은 일을 위해 말을 했겠지만 좀 지나쳤다고 생
각하오. 하지만 전백광과 같은 악당을 때 그럴 듯하게 말하지 않
는다면 그를 속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오. 영호 사질의 고충이 많
았을 거외다.]
의림은 그 말을 듣고 마음속의 고민이 말끔히 사라지는지 기쁜
어조로 물었다.
[유 사숙님, 영호 오라버니는 일부러 그와 같은 말을 꾸며내어
그 전백광을 속이려고 한 것이었군요?]
유정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오악검파의 협사들은 결코 그와 같이 항산파를 비난
하지 않는다. 내일 나는 은퇴식을 갖게 되는데 항산파를업수이
여겼다면 항산파에 초청장을 보내지도 않았을 게다.]
정일사태는 유정풍의 말을 듣고 안색이 약간 풀어졌다.
[흥! 영호충이란 녀석은 입버릇이 없어. 그 녀석이 어디서 그따
위 주둥이 놀리는 법을 배웠는지 모르겠군.]
그녀의 말은 은근히 영호충의 사부를 빗대어 욕한 것이기도 했
다. 유정풍이 말했다.
[사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소이다. 전백광은 무공
은 매우 무섭소이다. 영호 사질이 그를 이길 수가 없고 의림이 커
다란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그와 같은 말을 꾸며대어
그 악적으로 하여금 그녀를 포기하게끔 유도했던 것이외다. 더구
나 전백광 같은 노련한 여우를 속이려면 평범한 방법은 통하지 않
을 것이고, 그래서 영호 사질은 그러한 말을 꾸며댄 것이라고 할
수가 있소. 우리는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 때때가로 속
임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움에 처할 때가 많지 않겠소? 영
호 사질이 만약 항산파를 업수이 여겼다면 그가 생명의 위험을 무
릅쓰고 항산파의 제자를 구하려고 했겠소?]
정일사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 대협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의림에게 말했다.
[영호충의 말을 듣고 전백광이 너를 놓아 주더냐?]
의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전형 그대의 경신법이
천하에서 제일간다고는 하지만 재수가 없으면 경신법이 아무리 고
강해도 도망칠 수 없는 경우도 생기는 법이외다. 이 비쩍 마른 비
구니를 가까이 한다면 재수가 없어서 전형은 오래 살지 못하게 될
것이외다.' 전백광은 그 말을 듣고 몇 번이나 저를 바라보다가 결
심한 듯 말했어요. '나 전백광은 언제나 홀로 천하를 종횡한 몸,
그런 미신에 구애를 받지 않소이다. 이 비구니는 이미 얼굴을 보
았으니 같이 놀도록 합시다.' 바로 이때였어요. 옆의 탁자에 앉아
있던 젊은 무사가 갑자기 장검을 뽑아들고 갑자기 전백광에게 덮
치며 호통을 질렀어요. '당신이 바로 전백광인가?' 전백광은 말했
어요. '그렇소. 왜 묻는 거요?' 그 젊은 무사는 말했어요. '너 같
은 색마는 죽어야 한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은 모두 너를
죽이고 싶어하는데 너는 겁도 없이 여기서 정체를 밝혔다. 살고
싶지 않다면 죽여 주겠다.' 말을 마치자, 그는 검을 휘두르며 전
백광을 공격했어요. 태산파의 검법이었어요. 그 젊은 무사는 바로
저기 죽어 있는 사형이었어요.]
그녀는 문짝 위에 눕혀져 있는 태산파의 제자를 손가락질했다.
천문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백성(遲百城)! 너는 진정 용감했다! 정말 훌룡한 영웅이었
다!]
의림은 계속해서 말했다.
[전백광은 몸이 흔들한 순간 어느새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단
도가 들려져 있는 것이었어요. 전백광은 말했어요. '자, 앉아서
술이나 마셔라.' 그 말이 끝나고 전백광은 단도를 칼집에 꽂아 넣
었어요. 그런데 태산파 사형의 가슴팍에서는 선혈이 왈칵 뿜어져
나왔으며 힘없이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어요. 전백광은
눈 깜짝할 사이에 태산파 사형을 베어 버렸던 거예요. 태산파 사
형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어요.]
의림은 태산파의 천송도인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자 천송 사백이 검을 휘두르며 전백광을 향해 덤벼들었어
요. 천송 사백의 검술은 눈부실 정도로 훌룡하셨지만 전백광은 여
전히 몸을 일으키지않고 의자에 앉은 채 단도를 뽑아 천송 사백
을 상대했어요. 어느덧 삼십여 초가 흘렀어요. 전백광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서 상대했어요.]
천문진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는 천송도인을 바라보
며 물었다.
[사제, 그 전백광이 앉아서 너를 상대했단 말이 사실인가? 그의
무공이 그토록 고강하던가?]
천송도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의림은 계속해서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께서는 그제서야 검을 뽑아 들고 전백광을 향해
번개 같이 일격을 가했어요. 전백광은 단도를 휘둘러 막으며 몸을
일으켰어요.]
정일사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거 믿어지지 않는군. 천송도인이 삼십 초를 공격해도 끄덕
없던 전백광이 영호충의 단 일 초를 못견디고 몸을 일으켰단 말이
냐? 그렇다면 영호충의 무공이 천송도인보다 훨씬 뛰어나단 말인
가?]
의림은 말했다.
[전백광은 일어서면서 말했어요. '영호 형, 나는 그대를 친구로
여기고 있다오. 그대가 무기를 뽑아 나를 공격하는데 내가 여전히
앉아서 상대한다면 그대를 업수이 여기는 것이 되지 않겠소. 나는
그대의 영웅적인 기질을 존경하고 있다오. 그래서 몸을 일으켜 예
의를 차린 것이외다. 그러나 이 소코......소코도사는 나의 존경
을 받지 못한다오.' 영호 오라버니는 싸늘히 코웃음쳤어요. '흥!
나를 높이 봐 주니 이 영호충은 영광스럽기 그지 없소이다.' 라는
말과 함께 휙휙휙 삼검(三劍)을 공격했어요. 사부님, 그 삼검의
기세는 전광석화처럼 빨랐고 우뢰처럼 강맹했으며 폭풍처럼 숨이
막혔답니다. 검광(劍光)은 대뜸 전백광의 상반신을 에워쌌답니
다.]
정일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법은 바로 악(岳) 늙은이가 자랑하는 '태악삼청봉(太岳三
靑峯)'이라고 부르는 수법이란다. 제이 검이 제일 검보다 무섭고
제삼 검은 제이 검보다 빨리 상대방의 몸에 닿는다고 하더구나.
전백광은 어떻게 막아내더냐?]
의림은 말했어요.
[전백광은 일초가 펼쳐질 때마다 한 걸음씩 물러섰어요. 그는
잇달아 세 걸음을 물러서더니 갈채를 보냈어요. '훌룡한 검법이
오!' 전백광은 고개를 돌려 천송 사백부님을 보며 말했어요. '소
코도사, 그대는 어째서 공격을 멈추었지?' 영호 오라버니가 검을
쓰자마자 천송 사백님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관망하고 계셨어요.
천송 사백은 냉랭히 말했어요. '우리 태산파 제자는 정인군자이
다. 어찌 사악하고 음란한 저 녀석과 힘을 합치겠느냐?' 저는 참
지 못하고 말했어요. '영호 오라버니를 헐뜯지 마세요. 그분은 좋
은 사람이란 말이예요!' 천송 사백은 냉소를 날렸어요. '그가 좋
은 사람이라고? 흐흐흐! 그는 전백광과 함께 어울려서 술을 마시
고 형님 아우하는 사이가 아니냐? 그런데도 좋은 사람이라면 세상
에 나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말을 하던 천송 사백
은 갑자기 '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가슴팍을 얼싸안았
어요.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으며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
왔어요. 전백광은 천천히 단도를 칼집에 꽂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자, 앉아서 술이나 마셔.' 전백광의 칼 쓰는 솜씨는 정말 신속해
서 저는 언제 어떻게 천송 사백을 베었는지 보지 못했어요. 저는
놀라 부르짖었어요. '죽이지......죽이지 마세요.' 전백광은 웃으
며 말했어요. '미인(美人)이 죽이지 말라고 하니 죽이지 않겠다.'
천송 사백은 상처를 감싸쥔 채 아래층으로 비틀거리며 내려갔어
요.
영호 오라버니는 뒤따라가서 부축하려고 했어요. 그때 전백광이
영호 오라버니를 말렸어요. '영호 형, 저 소코도사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자로서 죽으면 죽었지 그대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
을 것이오.' 영호 오라버니는 쓸쓸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더니
잇달아 세 잔의 술을 마셨어요. 사부님, 그때 영호 오라버니의 모
습은 한없이 외로워 보였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 매우 아팠어
요.]
정일사태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다음엔 어떻게 됐느냐?]
의림은 말했다.
[전백광은 말했어요. '그 소코도사의 무공은 쓸만하더군! 나의
일도(一刀)는 몹시 빨랐는데 그는 놀랍게도 세치 정도 뒤로 물러
섰기 때문에 죽지 않았어. 태산파의 무공은 정말 얕볼 수가 없구
만! 영호 형, 저 소코도사가 죽지 않는다면 이후 그대에 대해 억
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울 게 뻔하오. 영호 형이 원한다면 내가
지금 뒤따라 가서 그를 죽여 버리겠??' 영호 오라버니는 고개를
저었어요. '나는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매일같이 귀찮은 사건에
휘말려 들었소. 그를 상관하지 마시오. 술이나 마십시다. 술이나
마셔. 전형, 그대의 그 일도를 나에게 펼쳤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
고 말았을 것이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어요. '하하하! 영호 형
은 어젯밤 나를 죽일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소. 내가 어떻게 영
호 형을 죽이겠소?' 그 말을 듣고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동굴
속에서 두 사람이 싸울 때 영호 오라버니는 전백광을 죽일 수 있
었는데 살려 준 1모양이구나, 하고요. 전백광은 다시 말했어요.
'어제 내가 동굴 속에 들어갔을 때 동굴 안은 칠흑같이 캄캄했소.
나는 이 비구니가 소리를 지를 때만 해도 그대가 동굴 속에 함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소. 그때 만약 영호 형이 계속 기척을
내지 않고 나를 죽일 기회를 노렸다면 하하......내가 이 비구니
를 끌어안고 쾌락의 늪에 빠져서 넋을 잃고 황홀해 할 때 그대가
검을 내리쳤다면 나는 영락없이 죽었을 거외다. 나는 그대가 당당
한 사내대장부로서 비겁하게 암습을 가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잘 알고 있다오.'
영호 오라버니는 코웃음을 치고 말했어요.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요. 중요한 것은 그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
비구니가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란 말이외다. 전형의 생명보다
는 이 비구니의 순결이 더 중요하단 말이외다. 내가 비록 비구니
를 보면 때려 죽이고 싶긴 하지만 항산파는 오악검파 중의 하나이
니만큼 돕지 않을 수 없단 말이외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어요.
'나에게는 내 목숨이 이 비구니의 순결보다 중요하지 않겠소. 그
래서 영호 형께 고마움을1 느끼고 있다오.'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
어요. '좋아요! 좋아! 술을 마십시다!' 전백광은 소리내어 웃었어
요. '좋소! 영호 형, 그대는 내 맘에 쏙 드는 사람이오! 자, 술을
마십시다!' 영호 오라버니는 빙긋 웃으며 말했어요. '무공에 있어
서는 내가 전형보다 못하겠지만 주량에 있어서는 내가 훨씬 뛰어
날 것이외다.' 전백광은 말했어요. '그렇다면 한번 겨루어 봅시
다. 자, 먼저 열 대접의 술을 마신 후 이야기합시다!' 그러자 영
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나는 전형이 떳떳한 사내대장부라고 생
각했기에1 같이 술을 마시자고 했던 것이오. 그런데 이제 보니 비
겁한 사람이군!' 전백광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 했어요. '비겁하
다니, 무엇이 비겁하다는 것이오?'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나는 비구니만 보면 재수가 없어서 내기에서 진단 말이외다. 지
금 술 내기를 하는 좌석에 비쩍 마른 비구니가 앉아 있으니 입맛
이 싹 달아나서 내기를 해봐야 질게 뻔하단 말이오. 전형은 나의
이와 같은 약점을 알고 비구니를 옆에 앉히고 내기를 하자고 하는
게 아니오?' 전백광은 소리내어 웃었어요. '하하하, 그대1가 계책
을 써서 이 비구니를 구하려고 하지만 이 전백광은 색(色)을 목숨
처럼 좋아한다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내 생전 처음 보는 바
이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비구니를 취하고 말겠소. 내가
이 비구니를 포기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가 있소,' 영호 오라버니
는 물었어요. '그게 무엇이오?' 전백광은 석잔의 술잔에 술을 가
득 따른 후 말했어요. '그대가 석 잔의 술을 마신다면 이야기해
주리다.' 영호 오라버니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비웠어요. 그리고
석 잔의 술잔에 술을 따라서 전백광에게1 내밀며 말했어요. '석 잔
을 들고 말씀하시오.' 전백광은 석 잔의 술을 마신 후 입을 열었
어요. '<강호에는 친구의 아내를 넘보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소.
그대가 만약 이 예쁜 비구니를......비구니를......']
여기까지 말한 의림은 두 볼을 빨갛게 붉히며 수줍어했다. 그녀
의 음성은 점점 작아져서는 끝내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정일사태는 탁자를 내리치며 노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 다음을 이야기해라! 전백광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의림은 말했1다.
[전백광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인 다음 이렇게 말했어요.
'대장부의 말이 한번 입에서 나오면 사마난추(駟馬難追:네 필의
말이 끄는 몹시 속도가 빠른 마차로도 따라 잡기 어려움)라고 했
소. 그대가 이 비구니를 처로 맞아들인다면 나는 즉시 이 비구니
를 놓아 줄 뿐 아니라 이 비구니에게 절을 하여 내가 저지른 무례
를 사과하겠소. 이 방법 외에는 그녀를 나에게서 떼어갈 수 없
소.' 영호 오라버니는 코웃음을 쳤어요. '그대는 나로 하여금 한
평생을 재수 옴 붙게 만들 참이오? 들어볼1 가치도 없는 소리!' 전
백광은 다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여댔어요. 머리를 기르게 되
면 여승이 아니라는 말도 했고......저는 귀를 막고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큰 소리로 외쳤어요. '닥치시
오! 더 이상 무례한 소리를 한다면 이 영호충은 울화통이 터져서
죽고 말 것이오. 죽은 사람이 어떻게 그대와 술내기를 할 수 있겠
소? 그대가 이 비구니를 놓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사의 결전
을 치루는 수밖에 없소.'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어요. '싸워봤자
그대는 내 적수가 못 ??'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서서 싸운
다면 내가 질 것이오. 그러나 앉아서 싸운다면 내가 이기지.']
모든 사람들은 조금 전에 의림이 했던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백광은 의자에 앉은 채 태산파의 고수인 천송도인을 여
유있게 상대하지 않았던가? 전백광이 앉아서 싸우는데 이력이 났
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영호충이 앉아서 싸우면 전백광을 이길 수
있다고 하자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의림은 계속해서 말했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어요. '나 전백광이 탄복한 것은 그대의
호?藪?용기이지 그대의 무공은 아니오.'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
죠. '이 영호충이 탄복한 것은 그대가 서서 싸우는 쾌도(快刀)이
지 그대가 앉아서 싸우는 수법은 아니외다.' 전백광은 그 말을 듣
고 웃었어요. '그건 그대가 모르고 하는 소리요. 나는 소년 시절
에 다리에 한질(寒疾)을 앓은 적이 있었소. 따라서 나는 이 년 동
안이나 앉은 자세에서 칼 쓰는 방법을 연마했소. 앉아서 싸우는
재간은 나의 자랑스런 특기란 말이오. 조금 전 내가 앉은 자세로
태산파의 소코도사의 공격을 막아내지 않았소? 이것??결코 그를
얕본 것이 아니고 내가 편하기 때문에 일어나기 귀찮았던 때문이
었소. 영호 형, 앉아서 겨루는 재간에 있어서는 천하에 나를 능가
할 자가 없을 것이외다.'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전형, 그것
은 전형이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외다. 전형은 소년 시절에 다리에
한질을 앓느라고 이 년 동안 앉아서 도법(刀法)을 연마했다고 하
지만 나는 십여 년 동안 앉아서 검법(劍法)을 연마하고 있는 중이
외다. 그러므로 그대는 나를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외다.']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일제히 노1덕약을 바라보았다. 그들
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화산파에서는 앉아서 검을 연마하는 수법이 있나 보군!)
노덕약은 그 눈치를 알아채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대사형은 전백광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외다. 저희 화산파에는
앉아서 연마하는 검법이 없읍니다.]
의림이 말했다.
[전백광은 물었어요. '정말 그런 무공이 있소? 나는 견문이 좁
아 처음 듣는군요. 정말 화산파의 좌(坐)......검법을 구경하고
싶구료.'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햇답니다. '그 검법은 저의
사부께??전수하신 게 아니외다. 다만 나 자신이 창안해낸 것이라
오.' 전백광은 그 말을 듣자 놀라는 눈치였어요. '알고 보니 그대
가 창안한 검법이었군! 영호 형은 정말 총명하시오! 검법을 창안
까지 하다니!']
사람들은 전백광이 어째서 놀랐는지 알고 있었다. 무예(武藝)에
있어 새로운 검법을 창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예가
탁월하고 타고난 총명이 없이는 결코 새로운 무공을 창안할 수 없
는 것이다. 화산파같이 문파가 창립된 지 수백 년이나 되는 명문
대파(名門大派)의 검법은 일초일식(一1抄一式)마다 수많은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것들로써 이 가운데 단 한 초라도 변화시키기
힘든 노릇인데 새로운 검법을 창안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
는 일이었다.
노덕약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사형은 원래 한 가지 검법을 창안한 모양이구나! 그런데 어
째서 사부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을까?)
이때 의림이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했어요. '이 검법은 구린내가 충천
하는 검법인데, 무얼 그리 탄복하시오?' 전백광은 크게 의아하여
물었어요. '냄새가 나는 검법도 있소? 해괴한 일이 다 있군.' 저
역시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검법이란 기껏해야 뛰어나거나 형편없
을 뿐이지 어떻게 냄새를 풍긴단 말이예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
어요. '사실대로 말해 주리다. 나는 매일 아침 변소에 앉아서 대
변을 본다오. 이때 파리들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매우 번거롭소.
그리하여 나는 검을 들고 파리를 찔러 떨어뜨리기 시작했다오. 처
음에는 잘 되지 않았으나 몇 년을 연습하니까 익숙해질대로 익숙
해졌소. 그리하여 일검(一劍)에 십여 마리의 파리를 떨어뜨릴 수
있게 되었고 뜻(意)과 정신(神)이 하나로 융합되어 파리를 잡는
검초를 연결시켜 하나의 검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외다. 따라서 대
변을 볼 때 이 검법을 펼쳤으니 구린내가 난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닐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저는 웃음을 터뜨렸어요. 영호 오라
버니는 정말 우스운 분이예요. 저는 대변을 보면서 검법을 연마한
다는 말은 처음 들었어요. 전백광은 안색이 새파래지더니 노해 부
르짖었죠. '영호 형, 나는 그대를 친구로 여기고 있는데 그와 같
은 말을 하다니......나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니오? 그대는 이 전
백광을 변소에서 오락가락하는 파리로 여긴단 말이오? 좋소. 나는
즉시 그대의 냄새나는 검법과 겨루어 보겠소!']
모든 사람은 거기까지 듣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고수(高手)
들끼리의 겨룸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들뜨게 된다면 불리하게 마
련이다. 영호충이 그와 같은 말로 상대방을 격노하게 만들었으니
일단은 계책이 성공한 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일사태는 말했어요.
[좋아! 그후엔 어찌 되었느냐?]
의림은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는 빙긋 웃고 말했어요. '불초는 결코 전형을 변
소에 있는 파리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소. 언짢아 마시구료.'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웃었어요. 전백광은 더욱 화를 내며 단도를 뽑아
탁자에 콱 꽂고 말했어요. '좋소! 앉아서 겨루어봅시다.' 이때 전
백광의 두 눈에는 흉악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어요. 분명히 영호
오라버니를 죽이려고결심했던 거예요.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했어요. '앉아서 겨룬다면 그대는 나를 이길 수 없소. 영호충은
오늘 새로 사귄 전형을 해치고 싶지 않구료. 나 영호충은 당당한
사내대장부로서 나의 특기를 가지고 친구를 굴복시키고 싶지는 않
구료!' 전백광은 싸늘히 말했어요. '잔말 말고 겨루자고!'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전형은 꼭 겨루어야 되겠소?' '물론이지!'
'반드시 앉아서 겨루고 싶소?' '맞아! 우리 앉아서 겨루자고!'
'좋소! 그렇다면 우리는 조건을 미리 정합시다. 승부가 결정되기
전에 먼저 일어나는 쪽이 지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겠소?' '맞아!
먼저 일어나는 자가 지는 것으로 하자고!'
영호 오라버니는 물었어요. '지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요?' 전백
광은 말했어요. '내가 진다면 그대가 하라는 대로 따르겠소.' '좋
소. 이렇게 합시다. 진 사람은 금후 이 젊은 비구니를 보게 되었
을 때 어떤 무례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안 될 뿐 아니라 그녀를
보는 즉시 그녀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사부님, 제자 전백광이 인
사 드립니다.>하고 인사를 올리기로 합시다.' 전백광은 화를 냈어
요. '쳇! 내가 반드시 진다는 보장이 없는데 왜 전백광을 찍어다
붙이는 거지? 만약 그대가 진다면......'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
요. '나도 마찬가지요. 그 누가 지던간에 항산파 문하의 제자로
들어가야 하며 정일사태의 사손(師孫)이 되어야 하고 젊은 여승의
제자가 되어야 하오.' 사부님, 영호 오라버니의 말은 정말 우습지
요? 그들 두 사람이 무공을 겨루다가 진다고 해서 어찌 항산파의
문하로 귀의할 수 있겠으며 제가 어떻게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그녀는 줄곧 근심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방긋 웃으니
그 모습은 더욱 아름다와 보였다.
정일사태는 말했다.
[강호에서 굴러먹은 거친 사내들은 무슨 말이든지 거침없이 하
기 마련인데 너는 그 말을 정말로 알아듣느냐? 영호충은 전백광을
격노시키자는데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턱을 쳐들고 지그시 눈을 감고서 영호충
이 무슨 방법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 있을까, 만약 그가 진다면 자
기가 한 말을 어떻게 취소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
해 보았다. 잠시 생각해본 그녀는 자기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영호
충의 속셈을 알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전백광은 어떻게 대답하던?]
의림은 말했다.
[전백광은 영호 오라버니가 믿는 데가 있는 듣이 말을 하자 주
저하는 빛을 띄웠어요. 제가 보기에 그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어
요. 아마도 영호 오라버니가 앉아서 검을 쓰는데 있어 정말 남보
다 뛰어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이때 영호 오라
버니는 다시 그를 화나게 만들었죠. '만약 그대가 항산파의 문하
로 귀의하기 두렵다면 우리는 무공을 겨룰 필요가 없소이다.' 전
백광은 노해 말했어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야!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지는 사람이 이 젊은 여승을 사부로 모시도록 합시
다.' 저는 말했어요. '저는 그대들을 제자로 거둬들일 수 없고 사
부로서의 자격도 없어요. 더군다나 저의 사부님도 허락하지 않으
실 거예요. 우리 항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여자예요. 그런데 어
찌... 그런데 어찌......' 영호 오라버니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어
요. '나와 전형이 상의해서 정했으니 그대는 거두기 싫어도 제자
로 거두어 들여야 하오.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오.' 그리
고 그는 전백광을 향해 말했어요. '두 번째 조건은 지는 사람이
칼을 들어 스스로 태감(太監:내시의 중국식 표현)이 되는 것으로
합시다.' 사부님, 칼을 들어 스스로 태감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
인가요?]
그녀가 이와 같이 묻게 되자 뭇사람들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스스로 생식기를 자른다는 뜻인데 순진한 의림은 그것도
모르고 불쑥 물었던 것이다.
정일사태는 근엄하던 얼굴에 한가닥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망나니들의 거친 말이다. 얘야, 너는 모르면 더 묻지
말아라. 좋은 뜻은 아니란다.]
의림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알고보니 거친 말이었군요. 전백광은 그 말을 듣더니 영호 오
라버니에게 말했어요. '영호 형, 그대는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
소?'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그거야 물론이오. 서서 싸운다
면 이 영호충은 천하무림에서 서열이 여든 아홉 번째에 해당하겠
지만, 앉아서 싸운다면 서열이 둘째 간다오.' 전백광은 호기심이
이는 듯 물었어요. '그대가 두 번째 간다고? 그럼 첫번째는 누구
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그것은 마교 교주(魔敎敎主) 동
방불패(東方不敗)이외다.']
뭇사람들은 마교교주 동방불패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의림은 뭇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편으로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한편 당황하기도 했다. 혹시 자기
가 말을 잘못한 것이나 아닐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
럽게 물었다.
[사부님 저의 말이 잘못되었나요?]
정일사태는 말했다.
[너는 마교 교주의 이름을 다시는 들먹이지 말아라. 전백광은
어떻게 말하드냐?]
[전백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그대가 마교 교주가 제
일이라고 하는데는 나 또한 이의가 없소. 그러나 귀하가 스스로
둘째라 자처한다면 그건 자화자찬이 좀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오. 설마 그대는 영사이신 악(岳)선생까지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오?'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나는 앉아서 싸
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서서 싸울 때 저의 사부님은 여덟 번
째이고 나는 여든 아홉 번째이외다. 그러니 그 어르신과 비교한다
면 아주 뒤떨어지게 된다오.' 전백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
요. '알고보니 그렇군. 그렇다면 서서 싸울 때 나의 서열은 몇 번
째 가오? 그리고 그것은 누가 정한 서열이오?'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이것은 큰 비밀이외다. 나는 그대와 의기투합했으므로
말해 주지만 절대로 남에게 누설하면 안 되오. 그렇지 않으면 반
드시 무림에 커다란 풍파를 일으키게 될 것이외다. 삼 개월 전 우
리 오악검파의 다섯 장문인께서 화산에 모이게 되었소. 그때 그
분들은 당금 무림고수들의 실력을논하게 되었소. 다섯 분의 장문
인께서는 오랜 토론끝에 천하에 있는 고수들의 서열을 정하게 되
었소. 전형 솔직이 말하지만 다섯 분 사존(師尊)께서는 그대의 인
품에 대해서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 욕을 했지만 그대의 무공에 대
해서는 모두들 대단하다고 인정했지요. 그리고 서서 싸운다면 열
네 버째라고 했소.']
천문진인과 정일사태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영호충은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군. 언제 그런 일이 있
었다고 그래!]
의림은 계속해서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가 속인 것이었군요. 전백광 역시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어요. 그러나 그는 말했어요. '오악검파의 장문인들은 모두
무림에서 대단한 고수이신데 놀랍게도 이 전백광에게 열네 번째라
는 서열을 내주셨군! 고맙소이다. 영호 형, 그대는 다섯 장문인
앞에서 그 구린내 나는 파리잡는 검법을 펼쳐 보였소? 그렇지 않
다면 그분들이 그대가 천하에서 둘째 간다고 하지는 않았을거요.'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했어요. '이 변소의 검법을 뭇사람 앞
에서 펼친다는 것은 너무나 보기 흉칙한 것인데 어떻게 감히 다섯
분의 사존 앞에서 볼썽 사나운 추태를 보인단 말이오. 이 검법의
자세는 보기에 흉칙하나 매우 무섭소. 나 영호충은 몇 명의 방문
좌도의 고수와 무공을 토론한 바가 있는데 모두들 마교 교주를 제
외하고는 천하에 필적할 고수가 없다고 인정했다오. 하지만 전형,
다시 말하지만 이 검법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파리를 잡는 것 외엔
별 쓸모가 없다오. 생각해 보시오. 남과 손을 써서 무공을 겨룰
때 그 누가 앉아서 싸우려고 하겠소? 설사 나와 그대가 반드시 앉
아서 겨루기로 약속을 했지만 내가 이기게 되었을 때 그대는 수치
가 분노로 변해 몸을 일으키게 될 것이 아니겠소? 그대가 싸우는
데는 천하에서 열네 번째이니만큼 일어서서 나를 상대한다면 앉아
서 싸우는데 두 번째 가는 나를 한칼에 죽일 수가 있을 거외다.
그대가 서서 싸웠을 때 열네 번째 가는 것은 실용적이지만 반면에
앉아 싸우는 서열 두 번째인 나의 구릿내나는 검법은 헛되이 서열
만 높았지 별 쓸모가 없는 것라로.' 전백광은 살며시 코웃음치며
말했어요. '영호 형 그대의 혀는 정말 기름을 칠한 듯 매끄럽게
구르는 구료. 그대는 내가 앉아서 싸울 때 반드시 그대에게 진다
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으며 또 내가 수치가 분노로 변해서 몸을
일으켜 그대를 죽인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소?' 영호 오라버니
는 말했어요. '그대가 진 이후에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태감이 될
게 아니겠소? 나를 죽여야만 그대는 태감이 되어 자손이 끊어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좋소. 이제 쓸데없는 소리
는 그만두고 손을 쓰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탁자
와 술주전자 등을 한쪽으로 치웠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마
주본 채 앉았어요. 한 사람은 손에 칼을 들고 한 사람은 검을 들
었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공격하시오. 먼저 일어나거
나 먼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사람이 지게 되는 것이외다.' 전
백광은 말했어요. '좋소, 누가 먼저 몸을 일으키는지 두고 봅시
다.' 두 사람이 막 손을 쓰려는 찰나 전백광은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어요. '영호 형, 나는 그대에게 탄복했소!
알고보니 그대는 사람을 매복하였다가 이 전백광을 난처한 처지에
빠뜨릴려고 했구료. 내가 그대와 싸우게 되고 그 누구도 먼저 일
어나선 안 된다고 했을 때 그대의 협조자들이 와락 달려든다면 말
할 것도 없이 나는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게 아니오? 흥!'
영호 오라버니 역시 소리내어 웃었어요. '다른 사람이 끼어든다면
이 영호충이 진 것으로 합시다. 젊은 여승, 그대는 내가 이기기를
바라오? 아니면 내가 지는 것을 바라오.' 저는 말했어요. '물론
그대가 이기는 것을 바라죠. 앉아서 싸울 때 그대가 천하에서 둘
째라니 결코 저 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거예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좋소, 그렇다면 그대는 가시오. 가능한한 멀리, 빨리
갈수록 좋소. 그대와 같은 못생긴 여승이 내 앞에서 있으면 재수
옴붙게 되어 이 영호충은 싸울 것도 없이 지게 마련이외다.' 그는
전백광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일검을 찔러갔어요. 전백광은 칼
을 들어 막으며 말했어요. '탄복했소이다! 탄복했어! 젊은 여승을
구해 주려는 멋진 계책이었군! 영호 형, 정녕 다정종자(多情種子)
이외다. 그러나 이 같은 일에 지나친 모험을 하는 것 같구료.' 그
제서야 저는 영호 오라버니가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진다고 한 것
은 바로 저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음을 깨달았죠. 전백
광은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으니 자연 저를 잡을 수 없을 것이 아
니예요.]
뭇사람들은 거기까지 듣게 되었을 때 영호충의 계책에 대해 찬
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영호충의 무공이 전백광에게 뒤지는 것이
사실이니 그 방법 외에는 확실히 의림을 그곳에서 벗어나게 할 뾰
족할 방법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일사태는 말했다.
[다정종자라는 말은 거친 말이다. 이후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며 마음속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의림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네, 알고보니 그말 역시 거친 말이었군요. 제자는 알았읍니
다.]
정일사태는 말했어요.
[그렇다면 너는 뒤로 돌아 길을 떠나야 하지 않았느냐? 만약 전
백광이 영호충을 죽인다면 너는 그의 독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요, 영호 오라버니가 두번 세번 말하기에 저는 인사를 하
고 말했어요. '영호 사형이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
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왔어요. 계단 쪽으로 등을
돌렸을 때 전백광의 호통소리가 들려왔어요. '받아랏!' 제가 고개
를 돌려 바라보는데 두 방울의 피가 저의 얼굴에 튀었어요. 영호
오라버니가 어깨를 맞은 거예요.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어요. '하
하! 앉아서 싸우는데 천하에서 둘째 가는 검법도 내가 보기엔 시
시하기만 하군!'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저 젊은 여승이 아
직 가지 않았는데 어찌 내가 이길 수 있겠소? 이것은 재수가 없어
서 벌어진 일이란 말이오.' 저는 영호 오라버니가 여승을 미워하
는데 계속 남아 있다가는 그의 목숨을 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어요.그래서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왔어요. 계단을 내려오게 되었
을 때 이층에선 칼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곧
이어 전백광의 호통소리가 들려왔어요. '받아랏!' 저는 깜짝 놀라
고 말았어요. 영호 오라버니가 그의 칼에 맞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감히 이층으로 올라갈 수 없었어요. 저는 주루의 담장을
끼고 지붕 위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저는 지붕 위에 납짝 엎드려
방안을 엿보게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영호 오라버니는 여전히 검
을 들고 무섭게 싸우고 있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었어요. 반면에
전백광은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어요. 다시 한동안 싸우다가 전
백광이 호통을 내질렀어요. '받아랏!' 영호 오라버니의 왼팔을 찌
른 전백광은 칼을 거두며 웃었어요. '영호 형, 나의 이 일초는 사
정을 둔 것이오.'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했어요. '나도 알고
있소. 그대가 손에 조금만 더 힘을 줬다면 나의 이 팔은 잘라지게
되었을 것이오.' 사부님,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그이는 웃고 있었
어요. 전백광은 말했어요. '그래도 싸우겠소?'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물론 싸워야지. 내가 언제 몸을 일으켰소?' 전백광은
말했어요. '충고하건대 일어나도록 하시오. 우리가 정했던 조건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그 젊은 여승을 사부로 모시는 것도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소.'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대장부 일언은 사
마난추라고 했소이다. 그 말을 어떻게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겠
소?' 전백광은 말했어요. '천하에 적지 않은 호걸을 만나보았지만
영호 형과 같은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나보는 바이오. 좋소, 모든
것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손을 멈춥시다.' 영호 오라버니는 빙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몸에 입은 상처에서는 끊임없
이 피가 흘러 마루를 적셨어요. 그때 전백광은 칼을 칼집에 꽂으
며 몸을 일으키려 했어요. 갑자기 그는 몸을 일으키면 진다는 점
을 상기하고 즉시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어쨌든 의자에서 엉덩이
를 떨구지는 않았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했죠. '전형 매
우 재빠르군요!']
뭇사람들은 의림의 말을 듣고 전백광이 일어섰어야 하는 건데하
고 애석하게 여겼다.
의림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전백광은 칼을 뽑아들며 말했어요. '나는 쾌도를 펼칠 작정이
오. 조금만 더 지체하면 그 젊은 여승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 쫓아
잡을 수 없으니 말이오.' 저는 그가 나를 쫓아잡는다는 말을 듣자
전신이 떨려왔어요. 그리고 영호 오라버니가 그의 독수에 당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어요. 별안간 영호 오라버니가 힘을 들여 그와
싸운 것은 단지 저를 구하기 위한 거라는 생각이 퍼뜩 머리에 떠
올랐어요. 제가 두 사람 앞에서 자결을 하게 된다면 영호 오라버
니가 죽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허리에 찬 단검을
들고 집 안으로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별안간 영호 오라버니가 몸
을 흔들하더니 의자와 함께 땅바닥에 쓰러졌어요. 그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의자는 그의 엉덩이에 붙은
채 쓰러져 있었어요. 그는 상처가 매우 심해 일시 버둥거렸을 뿐
일어나지를 못했어요. 전백광은 의기양양한 빛을 띄운 채 웃으며
말했어요. '앉아서 싸운다면 천하에서 둘째 가고 누워서 싸운다면
몇 번째 서열에 해당되오?' 그러면서 그는 몸을 일으켰어요. 영호
오라버니 역시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어요. '그대가 졌소.' 전백광
은 웃으며 말했어요. '그대가 낭패를 했는데도 내가 졌다는 것이
오?' 영호 오라버니는 땅바닥에 쓰러진 자세로 물었어요. '우리는
처음 어떻게 정했소.' 전백광은 말했어요. '우리는 앉아서 싸우기
로 했지.누가 먼저 일어나 의자에서 엉덩이가 떨어지느냐......
떨어지느냐......' 전백광은 말을 더듬거렸어요. 그리고 왼손으로
영호 오라버니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그제서야 속임수에 넘어갔다
는 것을 깨달은 것이예요. 그는 이미 일어섰고 영호 오라버니는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죠. 전백광은 매우 난처했으나 약속대로라면 영호 오라버니
가 이긴 거죠.]
뭇사람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손뼉을 치며 잇달아 '잘 했다'고
탄성을 질렀다.
그런데 여창해만이 코웃음치며 입을 열었다.
[무례한 녀석이 전백광과 같은 악적을 상대로 속임수를 썼으니
명문정파의 체면을 깎는 것이 아니겠소?]
정일사태는 노해서 말했다.
[무엇이 속임수란 말이오? 사내대장부는 지혜로 싸우는 것이지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오. 당신의 말을 듣건대 그대의 청성파에
는 의리를 위해 용감히 나서는 소년 영협(英俠)이 없음을 알수 있
소.]
그녀는 의림으로부터 영호충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항상파의
체면을 보존해 주었다는 긴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커다란 감
동을 받고 있었다. 처음 영호충을 미워하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
져 버리고 말았다.
여창해는 다시 코웃음치며 말했다.
[땅바닥에 쓰러진 소년 영협이라! 정말 대단하구료!]
정일사태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다그쳤다.
[그대 청성파에서......]
유정풍은 그들 두 사람이 다시 충돌을 일으킬까봐 재빨리 큰 소
리로 의림에게 물었다.
[전백광이 졌음을 시인했는가?]
의림은 말했다.
[전백광은 우두커니 서서 일시 어떻게 할지 몰랐어요. 영호 오
라버니는 큰 소리로 말했어요. '항상파의 비구니 내려오시구료.
그대가 새로 뛰어난 제자를 거둬들이게 된 점을 축하하오.' 그는
제가 지붕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예요. 전백광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억지를 쓰지 않았어요. 그는 앞으로 나서 한칼로 영
호 오라버니를 죽일 수 있었고 저를 상대할 수도 있었으나 이런
말만 했어요. '젊은 여승, 그대에게 말하겠는데 다음에 나를 만나
게 되면 한칼에 죽이고 말겠으니 알아서 하시오.' 저는 원래 그와
같은 악인을 제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제가 바라던 바였지요.전백광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칼을 칼집
속에 넣고 성큼성큼 주루 아래로 내려갔어요. 저는 뛰어 들어가
영호 오라버니를 부축해 일으켰어요. 그리고 천향단속교(天香斷續
膠)를 상처에 발라 주었어요. 크고 작은 상처가 열세 곳이나 되었
어요.]
여창해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일사태, 축하드립니다.]
정일사태는 눈을 부릅떴다.
[무슨 축하를 한다는 것이오?]
여창해는 말했다.
[무공이 탁월하며 천하에 명성을 떨친 사손(師孫:제자의 제자)
을 거두어들인 것을 축하 드립니다.]
정일사태는 대노해서 탁자를 치고 몸을 일으키며 욕설을 퍼부으
려고 했다.
이때 천문진인이 입을 열었다.
[여관주, 지나친 말은 삼가하시오. 우리 현문(玄門)에서 수도를
하는 사람이 어찌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소?]
여창해는 첫째로 자기가 잘못했고, 둘째는 천문진인의 고강한
무공을 무서워했으므로 즉시 고개를 돌리고 못 들은 체했다.
의림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영호 오라버니의 상처를 돌본 후 그를 부축해 의자에 앉
혔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연신 가쁜숨을 내쉬며 말했어요. '수고
스럽지만 술을 한 잔 따라 주시오.' 저는 술을 따라 드렸지요. 그
런데 주루에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이 올라왔어요. 한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나인걸의 시체를 메고온 청성파의 제자를 가리켰다. 그
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은 악인 나인걸이었어요. 두 사람은 저와 영호 오라
버니를 번갈아 바라보는데 그 표정은 오만무례했어요.]
뭇사람들은 나인걸이 온몸에 피칠을 한 영호충과 아름다운 여승
이 주루에 앉아 있을 뿐 아니라 젊은 여승이 영호충에게 술을 따
라 먹이는 것을 보고 자연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무례한
얼굴빛을 띄우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림은 계속해서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는 나인걸 등을 한번 쓸어보더니 제게 물었어요.
'사매, 그대는 청성파에서 가장 자랑하는 재주가 무엇인지 아시
오.' 저는 말했어요. '모르겠어요. 청성파에는 고명한 재간이 많
다고 하더군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했어요. '맞았소! 청성파에는
고명한 재간이 많이 있소. 그 가운데 으뜸은......하!하!하! 서로
의 감정을 위해서 말하지 않는게 낫겠군!' 그러고 나서 나인걸을
한번 쏘아보았어요. 나인걸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어요. '가장 고
명한 것이 무엇이오? 이야기해 보시오.'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했어요. '나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그대는 나 보고 꼭 밝히
란 것이오? 말해 주겠소. 그것은 엉덩이를 뒤로 내밀고 나가 떨어
지는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는 신법이외다.' 나인걸은 탁자를 내
리치며 큰 소리를 쳤어요. '터무니없는 소리! 무엇이 엉덩이를 뒤
로 내밀고 날아가는 평사낙안식이란 말이오? 나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소.'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했어요. '이것은 귀파의
자랑하는 초식인데 그대는 어찌 들어보지 못했소? 그대는 몸을 돌
리시오. 내가 펼쳐 보이리다.' 나인걸은 몇마디 욕을 하고 영호
오라버니를 향해 주먹을 날렸어요. 오라버니는 몸을 피하려고 했
으나 피를 많이 흘려서 기운이 전혀 없었어요. 오라버니는 몸을
흔들었을 뿐 즉시 주저앉게 되고 나인걸의 주먹에 코를 맞고 코피
를 마구 쏟게 되었어요. 나인걸이 또다시 때리려고 했을 때 나는
재빨리 손을 내밀며 말했어요. '때려선 안 돼요!이분은 몸에 중
상을 입고 있단 말이예요! 그대가 상처입은 사람을 못살게 굴다
니! 어찌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겠어요?' 나인걸이 욕을 했어요.
'젊은 여승이 이 녀석의 반반한 얼굴을 보고 속세에 뛰어들고 싶
은 게로군! 비키시오! 비키지 않는다면 그대마저 때려 주겠소!'
저는 말했어요. '그대가 나를 때린다면 나는 그대의 사부 여관주
에게 일러 바칠거예요.' 그는 말했죠. '하하하! 그대가 계율을 지
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음란한 죄마저 범했으니만큼 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그대를 때릴 수 있소.' 사부님, 이것은 억울하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는 왼손으로 저를 잡으려고 했어요.
제가 막으려 했을 때 뜻밖에 그의 한 수는 헛초였어요. 별안간 그
의 오른손이 뻗어 나오면서 저의 왼쪽뺨을 꼬집고 껄껄 웃지 않겠
어요. 저는 화도 나고 다급해져 잇달아 삼 장을 후려쳤지만 그는
모두 피해냈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말햇어요. '사매, 그대는 손을
쓰지 마시오. 내가 운기행공을 하고 나서 곧 저 녀석을 혼내 주겠
소.' 저는 고개를 돌리고 그이를 바라보았어요. 그이의 얼굴은 핏
기라곤 전혀 없고 창백했어요. 이때 나인걸이 다가서더니 다시 주
먹을 들고 때리려고 했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왼손으로 슬쩍 원을
그리며 그를 잡아당겼어요. 곧이어 다리를 들어 그의......그의
엉덩이를 걷어찼어요. 그 발길질은 참 빠르고 교묘하기 이를데 없
었어요. 나인걸은 그대로 서 있지 못하고 곧장 아래층으로 날아가
떨어졌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껄껄 웃으며 말했어요. '사매, 이것
이 청성파에서 가장 유명한 초식으로서 <엉덩이를 뒤로 한 채로
날아가는 평사낙안식>이라는 신법이외다. 엉덩이를 뒤로하는 것
은 전문적으로 남의 발길질을 당하려고 것이고 그것은 모레벌판을
기러기가 날아내리듯 매우 우아한 자태를 보여 주게 되는 것이오.
하!하!하! 그대가 볼 때 과연 근사하지 않소?' 저는 웃고 싶었으
나 그의 얼굴 빛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어 웃지
도 못하고 말했어요. '좀 쉬도록 하세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저는 상처에서 또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어요. 아마도 지금
그가 발길질을 하느라고 힘을 주었기 때문에 상처가 재차 터진 모
양이었어요. 나인걸은 주루 아래로 떨어졌으나 곧 달려왔어요. 그
의 손엔 이미 한 자루의 검이 쥐어져 있었어요. 그는 말했죠. '너
는 화산의 영호충이지? 그렇지?'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했어
요. '귀파의 고수들 가운데 나에게 엉덩이를 뒤로 한 평사낙안식
을 펼쳐 보인 사람은 귀하가 세 번째요. 그러니......그러
니......' 말을 하다가 끊임없이 기침을 했어요. 저는 나인걸이
그분을 해할까봐 검을 뽑아 옆을 지켰어요. 나인걸은 사제에게 말
했어요. '여 사제, 그대가 이 젊은 여승을 상대하게.' 그 여가라
는 악인은 대답을 하더니 장검을 뽑고 제게 공격을 해왔어요. 저
는 검을 써서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나인걸은 일검
을 휘두르며 영호 오라버니에게 다가갔어요. 영호 오라버니는 간
신히 검을 들어 막았으나 그 형세는 무척 다급해 보였어요. 다시
몇 초를 싸우게 되었을 때 영호 오라버니의 장검이 떨어지고 말았
어요. 나인걸은 장검을 뻗어내서는 그의 가슴을 겨누고 웃으며 말
했어요. '그대가 나를 거룩하신 할아버지라고 세 번 부른다면 그
대의 목숨을 살려 주도록 하지.' 영호 오라버니는 웃으며 말했죠.
'좋아. 내가 부르지 부르고 말고 내가 부른다면 그대는 귀파의 엉
덩이를 뒤로 한 평사낙안식을 나에게 전수해 주겠소?' 그의 말을
듣자 나인걸은 장검을 앞으로 내질렀어요. 검은 영호 오라버니의
가슴을 깊숙히 찌르고 말았어요. 나인걸은 너무 악랄했어요.]
그녀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의 뺨을 타고 두 줄기 맑은 눈
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계속했다.
[저는......저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달려가 막으려고
했으나 나인걸의 일검은 이미......영호 오라버니의 가슴을 찌른
이후였어요.]
일시에 화청 안은 조용해졌다.
여창해는 갑자기 자기의 얼굴에 많은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느
꼈다. 그 눈동자는 하나같이 멸시와 분노, 그리고 미움의 빛이 서
려 있었다.
여창해는 그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은 진실성이 없군. 그대는 나인걸이 영호충을 죽였다
고 했는데 어떻게 나인걸이 그의 검에 죽게 되었지?]
의림은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는 검에 찔린 이후 빙그레 웃으며 저에게 말했어
요. '소사매, 나에게......나에게 커다란 비밀이 있소. 그대에게
드려 드리지. 그 ......복위표국의 벽사......벽사검보는 저기
......저기 ......' 그의 음성은 갈수록 낮아져서 전 무엇이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다만 그의 입술이 달짝거리는것
만 보였을 뿐이예요.]
여창해는 그녀가 복위표국의 벽사검보를 들먹이자 마음속에 큰
충격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져 물었다.
[어디에......]
그는 어디에 있었냐고 물으려고 했으나 그와 같은 말을 많은 사
람 앞에서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하고 말을 멈추고 말았
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쿵쿵거렸으며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이때 의림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인걸은 그 검보에 대해 관심이 매우 많은 것 같았어요. 다가
와서 몸을 숙이고 영호 오라버니의 음성을 들으려고 했어요. 그때
별안간 영호 오라버니는 마루바닥에 떨어진 검을 움켜잡고 손을
쳐들어 나인걸의 아랫배를 찔렀어요. 나인걸은 뒤로 벌렁 쓰러지
게 되었으며 손과 발을 몇 번 떨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어요.
원래......원래......사부님, 영호 오라버니는 일부러 그가 가까
이 다가오게 해서 그를 죽여 원한을 갚은 것이었어요.]
그녀는 이야기를 끝내자 정신적으로 다시 견딜 수 없는 듯 몸을
두어번휘청거리더니 까무러치고 말았다.
정일사태는 손을 뻗어 그를 안고 여창해를 노기 띤 눈으로 바라
보았다.
뭇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담을 서늘하케하
는 그 광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천문진인, 유정풍, 문선생, 하삼
칠 등 고수의 눈에는 영호충과 나인걸의 무공은 대단하게 여겨지
지 않았다. 그러나 그토록 변화가 많고 잔혹한 싸움은 강호에서
보기드문 처절한 장면이라고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의림과 같은 아름답고 순진한 여승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이야기
는 조금도 과장되거나 허황된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유정풍은 여가라 하는 청성파의 제자를 보며 말했다.
[여형, 당신도 그곳에 있었다는데 친히 목격했소?]
여가라는 청성파의 제자는 대답은 하지 않고 여창해를 바라보았
다. 사람들은 그의 표정을 보고 당시의 사실이 확실하다고 느꼈
다. 그렇지 않고 의림이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면 그가
틀림없이 나서서 반박했을 것이었다.
여창해는 눈길을 들고 노덕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푸르뎅뎅
한 얼굴로 물었다.
[노덕약, 우리 청성파가 도대체 어떤 일로 귀파에 죄를 짖게 되
었길래 그대의 사형이 두번 세번 무단히 시비를 일으킬 뿐 아니라
청성파의 제자들에게 도전을 했는가?]
노덕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자는 모릅니다. 그것은 영호 사형과 귀파 나인걸과의 사사로
운 싸움이겠죠. 청성파나 화산 두 파의 교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읍니다.]
5편 끝
정말 힘드네요. 제가 이렇게 맣이 올리긴 이번이 처음 일거예
요. 아무쪼록 많이 읽어주시구요. ID가 'mainz10'이신분 정말 감
사 합니다. 그럼 그 이후에도 많은 조회를 부탁 드리면서 안녕히
계세요.
여창해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 상관 없다고? 허허허......그대는 깨끗이 그 일을 부정하
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와장창' 하고 대청의 창문이
부서지면서 무엇인가 날아들었다. 대청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수
인지라 임기웅변이 신속했다. 한쪽으로 비키면서 각기 손을 내밀
어 자기 자신을 지켯다. 날아든 것은 사람이?駭? 그 사람이 바닥
에 떨어지기도 전에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사람이 날아 들
었다. 이들 두 사람은 땅바닥에 쓰러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
두 몸에 청색장포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성파의 제자였다.
그들의 엉덩이 위에는 발자욱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때 창
밖에서 창노하고 거친 음성이 낭랑히 들려왔다.
[엉덩이를 뒤로 한 평사낙안식이라! 하하하, 하하하!]
여창해는 몸을 흔들면서 두 손을 뻗어냈다. 곧이어 장세를 따라
훌쩍 몸을 날려 창 밖으로 뛰어나갔다. 왼손을 창틀0에 붙이고 껑
충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지붕 위에서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어
두운 빛만이 주위를 감싸고 있고 소나기가 댓줄기처럼 대지를 난
타하고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
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순식간에 종적을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 이 부근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사람이 강적이라고 생각했다. 손을 뻗어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몸을 날려 빗속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천문진인은 자기의 ?탄隙?중시하여 여전히 태사의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고 정일사태, 하삼칠, 문선생, 유정풍. 노덕약 등은
지붕 위로 날아 올라갔다.
이들은 체구가 왜소한 도인이 검을 들고 쏘아나가자, 눈부신 검
광(劍光)이 어둠을 찬란히 밝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섬광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그 도사는 드넓은 장원의 주위를
순식간에 몇 바퀴 맴돌았다.
그들은 여창해의 경신법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여창해는 빠르게 움직이며 횃불 같은 눈길로 집 모퉁이와 나무,
풀더미가 있는 곳을 빠짐없이 훑?咀맘弩립?아무도 발견할 수 없
었다. 그는 화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의 제자는 여전히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엉덩이에 똑똑
히 찍힌 발자욱은 이제부터 수많은 무술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터엿다. 청성파의 명예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듯한 환상을 여창
해는 보았다.
여창해는 한 명의 제자를 뒤집어 보았다. 그 제자는 신인준이었
다. 그는 다른 사람은 뒤집어 보지도 않고 그의 뒤통수를 내려 보
는 즉시 신인준과 항상 행동을 같이 하는 길인통(吉人通)이라는
사실을 알아 보았다. 0 그는 손을 뻗어 신인준의 옆구리를 두번 치
면서 물었다.
[누구의 수작에 넘어갔느냐?]
신인준은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했으나 소리를 내지 못했다.
여창해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 그가 두번 후려친 것은 사실 청
성파의 상승내력을 실어 후려친 것이었다. 그런데 신인준의 막힌
혈도를 풀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내공을 돋우고 자신의 내
력을 신인준의 등에 있는 영대혈(靈?穴)로 천천히 주입시켰다.
한참 후 신인준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 사부님!]
여창해는 아무 말??하지 않고 한 동안 내력을 주입하기만 했
다.
신인준은 말했다.
[제...... 제자는 그가 누구인지도 보지 못했읍니다.]
여창해는 말했다.
[그는 어디서 손을 썼느냐?]
신인준은 말했다.
[제자와 길 사제는 함께 밖으로 가서 소변을 보려고 했읍니다.
갑자기 제자는 전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읍니다. 그 녀석은...]
여창해는 말했다.
[상대방은 무림의 고수이다. 함부로 욕하지 말아라.]
신인준은 대답했다.
[네.]
여창해는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엇다. 천문진인0을 바라보
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덤덤하기만 했다. 이 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오악검파는 청성파와는 별로 교분이 없다. 나인걸이 영호충을
죽인데 대한 천문이라는 이 작자도 청성파를 탓하고 있는 모양이
다.)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하수인은 어쩌면 대청에 있는 사람들 틈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
다.)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대청으로 나갔다.
대청의 사람들은 한 명의 태산파 제자와 청성파 제자를 죽인 사
람이 누구일까 하는 문제를 놓고 아직까지0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
다.
그들은 여창해가 들어오자, 그가 청성파의 장문이라는 사실을
즉시 알아보았다. 모든 사람들은 여창해가 체구는 비록 왜소하지
만 눈빛이 형형하고 무악종사의 풍모가 엿보일 뿐 아니라 행동에
서도 절로 위엄이 스며나오는 것을 보고 감히 떠들 수가 없었다.
여창해는 눈을 들어 한 사람 한 사람을 훑어보았다. 대청의 사
람들은 모두 무림의 인물이었다. 그는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옷차림을 보고 어느 문파에 속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떤 문파의 ?╂眉?하더라도 그들 가운데는 내력이 심후한
고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대청에 있다면 반
드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의 눈길
이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그 사람은 얼굴이 흉칙하게 일그러졌고 근육은 비틀어졌으며 등
이 낙타처럼 불룩했다. 바로 찻집에서 군웅들의 뒤를 따라온 젊은
꼽추였다.
여창해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혹시 그가 아닐까? 소문에 듣건대 새북명타(塞北明駝) 목고봉
(木高峯)은 평소 새외(塞外)에서 활?오?하고 있으며, 중원땅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다고 했다. 도대체 오악검파와 어떤 교분이
있길래 유정풍의 은퇴식에 그가 참석하게 된 것일까? 만약 그가
아니라면 무림에서 모습이 저토록 추악한 꼽추를 어디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대청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여창해의 눈길을 따라 그 꼽추에게
쏠렸다. 무림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놀
라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유정풍은 앞으로 나가 깊이 읍을 하고
말했다.
[귀하가 방문한 것을 모르고 대접이 소홀했으니 정??실례가 많
았소이다.]
꼽추는 무림의 이인이 아니었다. 바로 납치된 부모의 행방을 알
아내려고 은퇴식에 잠입한 복위표국 임진남의 아들 임평지(林平
之)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남에게 알려질까봐 줄곧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린 채 대청 한 모퉁이에 우크리고 있었다. 만약 여창해가
한 사람 한 사람 훑어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
지 않았을 것이다. 뭇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임평지는
겸연쩍은지 유정풍의 인사를 받고 재빨리 일어서서 읍을 하고 말
을 했다.
[그와0 같은 말씀은 감당할 수 없읍니다.]
유정풍은 목고봉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눈
앞의 이 사람이 쓰는 말씨는 남쪽지방의 말씨가 아닌가? 나이도
차이가 많았다. 그는 의심이 일었다. 그러나 평소 목고봉의 행동
이 신출귀몰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여전히 공손하게 말했다.
[불초는 유정풍이라고 합니다. 실례이지만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임평지는 집안을 멸망시킨 여창해 앞에서 정체를 드러낼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가 꼽추로 변장하고 얼굴 모습을 바??이유도
청성파 사람들에게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
정풍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유정풍은 말했다.
[귀하는 목 대협과......]
임평지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의 성은 임(林)씨이나 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만 사용해도 될
것이니 목(木)씨로 해두자.)
그는 생각이 끝나자 불쑥 말했다.
[저의 성은 목씨입니다.]
유정풍은 말했다.
[목 선생이 형산까지 왕림해 주신 점, 불초는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새북명타 목 대협과는 어?뺐?되시는가요?]
그는 임평지의 나이가 젊고 얼굴에 붙어 있는 고약은 자기 본래
모습을 감추려고 붙였다고 추측하였다. 분명히 명성을 떨친 지 수
십 년이나 되는 새북명타 목고봉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임평지는 새북명타 목고봉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정풍의 어조에는 목가 성을 가진 사람을 매우 존경하는
듯했고 여창해가 옆에서 노기등등한 눈초리로 자기를 쏘아보고 있
는 모습을 대하자 자기가 만약 조금이라도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면 당장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0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세가
급박하니만큼 아무렇게나 얼버무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새북명타 목 대협 말씀입니까? 그는...... 불초의 윗어른이 됩
니다.]
여창해는 대청에 또 다른 이상한 사람이 없으므로 제자 신인준
과 길인통 두 사람을 걷어찬 사람이 임평지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만약 새북명타 목고봉이 친히 나섰다면 상당히 꺼렸을 것이다. 그
런데 이 사람은 목고봉의 후손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만만해졌다.
그가 먼저 청성파에 도전을 한 셈이니 어찌 참고 견딜 수가 있0
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청성파는 새북의 목 선생과는 아물나 관계가 없소. 그런데 어
떤 점이 귀하의 눈에 거슬렸는지요?]
임평지는 이 왜소한 도사를 마주 바라보게 되자 두렵기도 했고
증오심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도 했다. 며칠 전 여창해에 의해
집안이 멸망되었을 뿐 아니라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지 않
았던가? 그의 부모는 사로잡혀 아직까지 생사를 모르는데 이 모든
것은 왜소한 도사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비록 여창해의 무공이
자기보??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
체하기 힘들었다. 그는 무기를 뽑아 찔러 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
로 잡혔다. 하지만 이 며칠 동안 많은 고초를 겪은 그는 이미 닭
싸움이나 시키고 말을 달리던 부잣집 도련님은 아니었다. 그는 즉
시 노기를 억누르고 말했다.
[청성파에서 비위에 거슬리는 일을 일으키게 되었다면 목 대협
이 자연 손을 쓰게 되지 않겠소? 목 대협께서는 의협심이 탁월하
신 분으로서 포악한 자를 치고 약한 자를 도우시는 성미이니 귀하
가 그분에게 죄를 지었다??그분이 응분의 대가를 치룰게 아니겠
소?]
유정풍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새북명타
목고봉은 무공은 고강하나 인품은 퍽 포악한 편이었다. 그가 목
대협이라 부른 것도 예의상 그렇게 부른 것을 뿐이었다. 목고봉을
두고 논할 때 그는 대협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인물이 되지 못
했다. 이 자는 권세에 아부하고 이익에 민감한 자로서 신의를 돌
보지 않았다. 그러나 목고봉은 무공이 고강하여 그와 원한을 맺게
된다면 상당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림에 몸 담0
고 있는 사람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 그
를 존경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유정풍은 임평지의 말을 듣고
그가 목고봉의 아들이거나 조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
고서야 목고봉을 좋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유정풍은 말했다.
[여관주, 그리고 목 형, 두 분이 저희 집에 오신 이상 모두 불
초의 귀빈이올시다. 이 유모의 늙은 얼굴을 봐서라도 술 한 잔을
나누며 감정을 풀도록 하시구료. 게 누구 없느냐, 술을 가져오거
라.]
집안의 장정들이 우렁차게 대답하고 술을0 가져왔다.
여창해는 맞은편에 서 있는 젊은 꼽추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었
다. 그러나 강호의 소문을 통하여 목고봉이 여러가지 음흉하고 독
랄하며 억지를 쓰는 일들을 들은 적이 있는 터라서 감히 경솔하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임평지는 한편으론 미움에 치를 떨었고 한편으로 두려웠다. 그
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은 이미 이 악독한 도사의 독수를
맞고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일장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그와 함께 술을 마실 수는 없다.)
그는 두 눈에 노기0의 빛을 가득 띄우고 여창해를 노려보았을 뿐
술잔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창해는 임평지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자, 노기가 끓어올라 손
을 뻗어 금나수법으로 임평지의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좋아, 좋아, 유 대협의 체면을 보아서 너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는 않겠다. 우리 잘 사귀어 보자구.]
임평지는 힘을 주었으나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손목에 격렬한
아픔이 밀려왔다. 손목뼈가 우두둑하며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말
것 같았다. 여창해는 내력을 모아 내쏟지 않고 임평지로 하여금 0
용서를 빌도록 할 속셈이었다. 그런데 임평지는 그에게 깊은 원한
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손목뼈 마디마디가 부서지는 듯 아파왔으
나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유정풍은 임평지가 이마에서 콩알 같은 땀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데도 얼굴에는 여전히 의연한 빛을 띄우고 조금도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 젊은이의 굿굿함에 탄복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 보시오, 여관주.]
그러면서 그는 쌍방을 화해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날카
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여관주, 어찌 염치가 이토록 좋0소? 목고봉의 손자를 못살게 굴
다니!]
뭇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대청 입구에 뚱뚱한 꼽추가
서 있었다. 이 사람의 얼굴은 하얀 버짐이 잔뜩 나 있었고 또 양
쪽 뺨에는 커다란 검은 사마귀가 하나씩 나 있었다.
그 모습은 기괴하고도 흉칙해 보였다. 대청의 뭇사람들은 대부
분 목고봉의 참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때 그가 스스로 자기의
성명을 들먹이고 기이한 모습을 나타내자 하나같이 얼굴표정이 굳
어졌다.
이 꼽추의 몸은 비대했으나 행동은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번쩍 몸을0 날려 어느새 임평지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치
면서 말했다.
[착한 손자 녀석, 정말 착하지. 너는 너의 할아버지가 의협의
길을 가며 강한 자를 무찌르고 약한 자를 도왔다고 말했지? 이 할
아비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정말 기분이 좋구나!]
그는 다시 임평지의 어깨를 툭툭쳤다.
그가 처음 어깨를 툭 치게 되었을 때 임평지는 전신이 짜릿해지
는 것을 느꼈다. 여창해 또한 손에 화끈한 기운이 전해져 하마터
면 손을 놓을 뻔했다. 그러나 급히 공력을 돋우고 손을 더욱 힘주
어 움켜쥐었다. 0목고봉은 여창해를 뿌리칠 수 없자 임평지에게 말
을 걸면서 한편으론 내력을 돋우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로 임평지
의 어깨를 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온몸의 공력을 돋우게 되었다.
임평지는 두 번째로 어깨를 맞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목 안이 달콤
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한 모금의 선혈이 입 안까지 올라옴을 느꼈
다. 그러나 그는 힘들여 참고 꿀꺽하며 선혈을 되삼켰다.
여창해는 이때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해서 더 잡고 있지 못하고
손을 놓고 말았다. 그는 한걸음 물러서며 생각했다.
(이 꼽추는 악랄??인물이라고 하더니 정말 명불허전이로구나.
그는 나의 손을 떨치기 위해 자기의 손자가 내상을 입는 것도 아
랑곳하지 않는군!)
임평지는 억지로 껄껄웃으며 여창해에게 말했다.
[하하, 여관주, 청성파의 무공은 너무나 힘이 없구료. 새북명타
목 대협과 비교한다면 차이가 많이 나는구료. 내가 보기에 당신은
차라리 목 대협의 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몇 수 받는다
면...... 약간의...... 진보가 있을 것 같구료......]
그는 내상을 입고 있는지라 그와 같은 말을 할 때 가스밍 크게
울0렁거렸다.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억지로 말을 끝냈으
나 몸은 쓰러질듯 휘청거렸다.
여창해는 말했다.
[좋아, 그대가 나에게 목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서 약간의 재간
을 읽히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 여창해가 바라던 바이다. 그대는
목 선생의 문하이니 재간이 반드시 뛰어나렸다? 불초는 그대의 가
르침을 받고 싶군!]
그는 임평지를 지명하여 도전했다.
이렇게 되면 목고봉으로선 사만히 구경만 해야지 간섭할 수 없
었다.
목고봉은 뒤로 물러서며 웃고 말했다.
[손자 녀석아, 아직0 너의 조예는 낮아서 청성파 장문인의 적수
가 되지 못할 것이며 덤벼들었다간 일장에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
다. 꼽추 녀석이 죽음을 당하는 것은 안타깝다고 아니할 수 없는
일...... 너는 차라리 무릎을 끓고 이 할아비에게 큰절을 올리고
이 할아버지가 대신 손을 써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임평지는 여창해를 한번 바라보더니 생각했다.
(내가 경솔하게 나서서 여가와 손을 쓰게 된다면 분노에 휩싸인
그는 정말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 목숨을 부지 못한다면 어떻게
부모의 원수를 갚0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임평지는 사내대장부이
다. 어찌 처음 보는 꼽추를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링단 말이냐?
내 자신이 모욕을 당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아버지까지도 큰 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하고서야 강호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내가 그에게 무릎을 끓는다면 이것은 새
북명타의 보호를 받겠다는 의미가 되고 다시는 자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창해는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사내다운 데가 없군! 절을 몇 번하고 남에게
대신 싸워달라고 하는 것이 뭐??그리 대수로운 일인가?]
그는 이미 임평지와 목고봉 사이의 관계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목고봉이 그의 할아버지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짐작했
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임평지는 그를 대협이라 불렀을 뿐 시종 할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겠는가? 그리고 목고봉 역시 그 순간에 자기
손자에게 절을 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창해는 충동질을 하여 임평지로 하여금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손을 쓰도록 유도하려고 했다.
임평지는 머리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대장부가 일시0의 기분에 좌우되어 함부로 날뛴다면 큰일을 그
르치기 쉽다. 내가 이후에 정말 위세를 떨치게 된다면 오늘 약간
의 치욕을 당한다 해도 설욕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는 즉시 몸을 돌려 무릎을 끓고 목고봉을 향해 절을 했다.
[할아버지, 저 여창해는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며 재물을
빼앗았읍니다. 무림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할아
버지께서 무림의 정의를 위해 강호의 저 큰 해충을 제거해 주십시
오.]
목고봉과 여창해로서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이 젊은 꼽추는
조금0 전 여창해에게 잡혀서 내력으로 핍박을 해도 시종 굴복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을 하지 않는가? 많은 사람
들 앞에서 이처럼 굴욕적인 절을 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뭇사람들은 이 젊은 꼽추가 목고봉의 손자쯤되는 줄 알았
다. 목고봉만이 이 젊은 꼽추가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
실을 알 뿐이었다. 그런데 여창해는 그 가운데 빈틈을 어느 정도
간파하긴 했으나 두 사람 사이의 참된 관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목고봉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정말 0착한 손자다. 착한 손자야! 자아, 우리 한번 놀
아볼까?]
그는 입으로 임평지를 칭찬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여창해를 향하
고 있었다. 착한 손자니 하는 말은 마치 여창해 보고 하는 소리
같았다.
여창해는 더욱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는 오늘 이 일전은 비단
자기의 생사존망과 관계 있을 뿐 아니라 청성파의 명예와도 큰 관
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경계하면서
도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목 선생이 여러 친구들 앞에서 절세의 무예를 선 보여 주셔서0
우리의 시야를 넓혀 줄 의도가 있다고 하시니 빈도는 목숨을 걸고
상대해 드릴 수밖에 없겠구료.]
조금 전 목고봉이 임평지의 어깨를 쳐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
던 여창해는 그의 내력이 심후할 뿐 아니라 매우 패도(覇道)적이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단 정면으로 공격을 해온다면 그 기
세는 마치 천둥이 치고 산이 무너지며 바다가 뒤엎어지는 듯한 위
협적인 공세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목고봉은 왜소한 도인의 몸이 어린애 같아 손에 든다해도 몇 근
나가지 않을 것 같았으나 우뚝 버티고 서 ?獵?모습에 태산과 같
은 위엄이 서려 있어서 절로 일파의 종사(宗師)다운 풍모가 엿보
이는지라 여창해의 내공조예가 퍽 심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은 도사에게는 정말 약간의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청성
파에서는 대대로 고수를 배출하였는데 이 소코도사는 장문인이니
만큼 결코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겨루는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별안간 '휙' 하는 소
리가 나면서 두 사람이 뒤로 날아와 '쿵' 하고 땅바닥에 떨어졌
다. 그들은 사지를 쭉 뻗고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0 이 두
사람은 몸에 청포를 걸치고 있었고 엉덩이에는 각기 발자욱이 찍
혀 있었다. 곧이어 한 소녀는 크게 부르짖었다.
[이것은 바로 청성파가 자랑하는 재간으로 엉덩이를 뒤로 한 평
사낙안식이로군!]
여창해는 크게 노해 고개를 돌렸다. 녹색장삼을 걸친 소녀가 탁
자 곁에 서 있었다. 여창해는 휙 하고 몸을 날려 그녀의 팔을 힘
주어 움켜쥐었다. 그 소녀는 크게 부르짖었다.
[어머나!]
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여창해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본래 그는 청성파 제자 두
명이 또 한번 당하게 된 것은 그녀와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했
다. 그리하여 그녀의 팔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는데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이 어린 소녀에게 포악하게 구는 것
이 자기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급히 손을 놓았다. 그 소녀는 더욱 더 소리높이 울부짖었다.
[당신은 나의 팔뼈를 끊어놨어요! 엄마, 저의 팔이 끊어졌어요!
흑흑...... 아파요! 아파 죽을 지경이예요!]
이 청성파 장문인은 수없이 많은 싸움을 해왔다. 그리고 무수한
풍랑을 헤쳐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곤란한 경우에 처
했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 모든 사람의 눈길이 자기에게 쏠리고
또 하나같이 힐난하고 멸시하는 빛을 띄우고 있는지라 얼굴이 화
끈 달아올랐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울지 말아라. 울지 마, 팔은 끊어지지 않았어.]
그 소녀는 울부짖었다.
[이미 끊어진걸요, 당신은 사람을 못살게 구는군요. 어른이 어
린애를 때리다니, 너무나 염치가 없어요. 아이쿠! 아파라! 흑흑
흑......]
그 소녀는 나이는 약 열 서너 살 되어 보이며 몸에 초록색 의상
을 걸치고 있었다. 소녀는 피부가 하얗고 얼굴도 매우 청초하고
귀엽게 생겼다. 사람들은 한같이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몇
명의 거친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저 소코도사는 염치가 없군!]
[키 작은 도사가 자기 힘을 믿고 날뛰는 꼴이란!]
여창해는 낭패했다. 당혹한 그는 소녀를 타일렀다.
[애야 울지 마라. 미안하다. 어디 상처를 입었는지 너의 팔을
보자.]
그리고 나서 그는 소녀의 옷자락을 걷어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그 소녀는 말했다.
[아니예요, 나를 건드리지 말아요. 어머니, 어머니, 이 키 작은
도사가 저의 팔을 부러뜨렸어요!]
여창해가 난처해서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한쪽에서 청
포를 걸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바로 청성파에서 가장 머리회전이
빠르다는 방인지(方人智)였다.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이봐 조그만 아가씨, 일부러 그러지 말아, 우리 사부님의 손은
너의 옷자락에도 닿지 않았는데 어찌 너의 팔을 부러뜨렸다는 것
이냐?]
그 소녀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어머니, 저 사람이 나를 때리려고 해요!]
정일사태는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앞으로 나가 방인지의 따귀를 때리려고 하면서 호
통쳤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괴롭히다니! 정말 염치가 없군!]
방인지는 팔을 뻗어 막으려고 했다. 이때 정일사태는 오른손을
질풍과 같이 내밀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왼손을 내밀
어 방인지의 팔목에 끼우고 방인지의 팔을 위로 꺾었다. 이렇게
좀더 힘을 주게 된다면 방인지의 팔이 부러질 판이었다. 여창해는
손을 드는 즉시 일지(一指)를 들어 정일사태의 뒷등을 찌르려고
했다. 정일사태는 방인지를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놓는 즉시
손을 뒤로 하고 후려쳤다. 여창해는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실례했소.]
그리고 두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정일사태는 그 소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애야, 어디가 아프냐? 나에게 보여 주렴. 내가 치료를 해주겠
다.]
그리고 그 소녀의 팔을 만져보았다. 부러지지는 않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녀의 옷자락을 올리고 보니 희디흰 팔에는 선명하게 네
개의 시퍼런 손가락 자국이 나 있지 않은가? 정일사태는 크게 노
하여 방인지에게 호통을 쳤다.
[네 녀석은 거짓말을했다. 너의 사부가 그녀의 팔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이 네 개의 손가락 자국은 누가 만든 것이지?]
그 소녀는 말했다.
[자라가 한 짓이예요. 자라가 한 짓이예요.]
자라는 바로 애비없는 자식 즉 후레자식이라는 뜻이었다. 그 소
녀는 그와 같이 말을 하면서 여창해의 뒷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
다.
갑자기 군웅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어떤 사람은 웃느라고 입 안
에 넣었던 찻물을 뿜어 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허리를 잡고 눈물
을 흘리기도 했다. 대청 안은 떠나갈듯한 웃음소리로 가득찼다.
여창해는 사람들이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녀가 자기를
자라라고 욕했지만 어린애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내지른 욕을 가지
고 그토록 웃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사
람들이 자기를 향해 웃음을 터뜨리자 낭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인지가 몸을 날려 앞으로 다가 오더니 여창해의 뒤로 돌아가서
그의 등에서 한 장의 종이를 떼어내어 손으로 둘둘 말았다. 여창
해가 둘둘말은 그 종이를 낚아채서 펼쳐 보니 그 종이 위에는 커
다란 자라가 그려 있었다. 그 소녀가 자기의 등에 붙인것이 분명
했다. 여창해는 수치와 분노를 느끼고 속으로 흠칫거리며 생각했
다.
(틀림없이 저 소녀가 크게 울부짖어서 내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를 때 붙인 것일게다. 그렇다면...... 몰래 지시한 사람이 있었
을 것이다.)
그는 유정풍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소녀는 유씨 집안의 사람이니 유정풍이 나에게 수작을 부렸
군.)
유정풍은 여창해의 시선을 받자 즉시 눈치를 챘다. 그는 한 걸
음 나가 그 소녀에게 말했다.
[애야, 너는 뉘집 아이냐?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두 마디의 질문은 여창해에게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암시를 한
것이었다. 유정풍 역시 이 소녀가 어떤 사람이 데리고 왔는지 궁
금했다.
소녀는 말했다.
[저의 부무님은 볼일이 계셔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저 보고 가
만히 앉아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요. 잠시 후면 구경거리가 생긴다
고 했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날아와 땅바닥에 쓰러져 꼼짝하지 않
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것은 청성파가 자랑하는 재간으로서 '엉덩
이를 뒤로 한 평사낙안식'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정말 보기 좋군
요.]
그녀는 말하면서 손뼉을 쳤다. 그녀는 얼굴에 수정과 같은 눈물
방울을 닦아내기도 전에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매우 귀여
웠다.
두 명의 청성파 제자들은 아직도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엉덩이의 발자욱은 청성파의 못난 꼴을 여지없이 드러내
고 있었다.
여창해는 방인지에게 말했다.
[먼저 떠메어 가도록 해라.]
방인지는 몇 명의 동문들에게 손짖을 했다. 몇 명이 다가와 두
명의 쓰러진 제자를 떠메고 대청에서 나갔다.
그 소녀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청성파 사람들은 정말 많군요. 한사람이 평사낙안식을 펼치면
두 사람이 떠메고 나가고 두 사람이 평사낙안식을 펼치면 네 사람
이 달라붙는군요!]
여창해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되어 소녀에게 말했다.
[너희 아버님의 성씨가 뭐냐? 방금 몇 마디 말은 너의 아버님이
가르친 것이냐?]
그는 이 소녀의 두 마디는 실로 청성파를 꺼집는 말이며 어른이
가르치지 않으면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
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했다.
(엉덩이를 뒤로 한 평사낙안식이니 뭐니 하는 것은 영호충이라
는 녀석이 만들어낸 것이다. 십중팔구 화산파의 사람들이 가호충
이 나인걸에게 죽은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청성파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이겠지. 그런데 혈도를 짚은 사람의 무공은 지극히 높
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화산파의 장문인 악불군이 수작을
부린 것일까?)
악불군이 자기를 적대시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웠다. 악불
군은 뛰어난 고수였다. 더군다나 오악검파는 연맹을 맺고 있는 것
이 아닌가? 오늘 그들이 일제히 손을 쓰게 된다면 청성파는 일패
도지할 가능성이 컸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그는 안색이 핼쓱
하게 변했다.
이때 소녀는 그의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
다.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사는 팔, 네 사람이 나가
떨어지면 여덟 명이 떠메고 나가겠구나!]
그녀는 끊임없이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여창해가 소리쳤다.
[입 닥치지 못해!]
그 음성은 매우 엄했다.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왁 하고 울
음을 터뜨리면서 얼굴을 정일사태의 품에 묻었다.
정일사태는 가볍게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위로했다.
[겁낼 것 없다. 애야 겁내지 말아라.]
그리고 머리를 돌려 여창해에게 말했다.
[왜 소리를 질러 어린애를 놀라게 만드는거요?]
여창해는 속으로 코웃음치며 생각했다.
(오악검파는 아늘 힘을 합쳐 우리 청성파에게 도전할 작정이군!
조심해야지.)
그 소녀는 정일사태의 품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웃으며 말했다.
[이이는 사라고 청성파의 두 사람이 엉덩이를 뒤로 한 평사낙안
식을 펼치자 네 사람이 떠메게 되고 이삼은 육이라고 세 사람이
평사낙안식을 펼치자 여섯 사람이 떠메게 되고 이사는 팔......]
그녀는 더 말하지 않고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었다.
뭇사람들은 이 소녀가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렸다간 즉시 웃음을
띄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와 같이 갑자기 울었다
웃는 것은 칠팔 세 어린애나 하는 짓이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열
서너 살은 돼 보였고 키도 꽤 큰 편이었다. 더군다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여창해를 꼬집는 말이라 천지난만한 어린애의 말 이라곤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바로 누구의 지시를 받고 그렇게 행동하는
모양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창해는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내대장부는 공명정대하게 행동해야 하오. 어느 친구가 빈도
를 못살게 구는지 모습을 드러내시오! 이와 같이 꼬리를 감추고
한 어린애를 시켜 무례한 말을 하도록 한다면 어디 영웅호걸이라
고 할 수 있겠소?]
그의 몸은 왜소했으나 이 몇 마디 말은 단전에서 울려퍼진 것이
라 매우 우렁찼다. 듣는 사람은 머리가 웅 하고 울리 정도였다.
군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조
금 전까지 경시하던 태도를 고치게 되었다. 그의 말이 끝난 이후
대청 안은 조용했으며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노사태, 그는 어떤 영웅호걸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의 청성파
는 영웅호걸들이 아니예요?]
정일은 항상파의 선배인물이었다. 청성파에 대해 비록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공공연히 청성파의 전체를 비판할 수는 없었
다. 그래서 그녀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청성파?...... . 청성파의 윗대에는 많은 영웅호걸들이 있었
지.]
그 소녀는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영웅호걸들이 남아 있나요?]
정일은 입으로 여창해를 가리키고 말했다.
[너는 이 청성파의 장문도장님께 물어봐라.]
그 소녀는 여창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성파의 장문도장, 만약 그 누가 중상을 입어 꼼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누가 그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면 어떻게 되는 거예
요? 남의 위험한 처지를 노리고 덤벼드는 녀석을 영웅호걸이라고
할 수 있나요?]
여창해는 가슴이 쿵 하며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했
다.
[정말 화산파의 짓이군!]
조금 전 화청에서 나인걸이 영호충을 죽인 경과를 의림에게 들
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흠칫했다.
(혹시 이 소녀는 화산파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노덕약은 그들 생각과는 달랐다.
(이 소녀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분명히 대사형을 위해 변호
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일까?)
그는 소사매가 슬퍼할까봐 대사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동문들에
게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의림은 전신을 떨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 소녀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한 마디로 말하면 그녀가 일
찌기 여창해에게 따지고 싶었던 말이었다. 다만 그녀는 성격이 온
화한 편이었고 평소 윗사람을 존경하는 터였다. 여창해는 어찌되
었든 선배이기 때문에 그 말을 묻지 못했는데 그 소녀가 대신해
서 자기 마음속의 접어 두었던 말을 표현하자 고마움을 느끼는 한
편 마음이 쓰라려왔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여창해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한 마디는 누가 너에게 가르친 것이지?]
소녀는 말했다.
[청성파의 나인걸이란 사람은 본파의 제자이지요? 그는 남이 중
상을 입은 것을 보고 상처를 입은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인데도
그를 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검으로 찔렀어요. 그러니 나인걸이
란 사람이 영웅호걸이예요? 아니예요? 그와 같은 짓은 도장께서
그에게 가르친 '청성파의 의협심'이 아니겠어요?]
이 같은 몇 마디 말이 한 소녀의 입에서 나오긴 했으나 그녀의
물음은 매우 직선적이어서 사람을 다그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창해는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누구의 지시를 받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 너
의 아버지는 화산파의 사람이냐?]
그 소녀는 무섭다는 듯 몸을 떨더니 정일사태에게 말했다.
[노사태, 저 사람이 저에게 겁을 주는데 공명정대한 사내대장부
가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저 자라는 영웅호걸이나요?]
정일사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로선 말을 할 수 없구나.]
뭇사람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소녀의 먼
저번 말들은 십중팔구 어른이 가르쳐 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방금 한 말은 바로 여창해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 것이 아닌가?
의림은 눈물 때문에 시야가 모호했으나 그 소녀의 잘룩한 뒷모
습을 대하게 되자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저 소녀는 어디서 본 것 같다. 어디서 보았을까?)
고개를 갸웃하고 한참 생각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어제 회안루의 구석에 그녀가 앉아 있었지.)
그녀의 뇌리엔 어제의 광경이 점차 뚜렷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제 아침 전백광이 그녀를 협박하여 주루 위에 올라가게 되었
을 때 주루에는 여덟 개의 탁자 곁에 손님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그후 태산파의 두 사람이 나와 도전을 하게 되고 전백광이 한 사
람을 죽이게 되자 손님들이 놀라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주보
(酒保:술심부름을 하는사람)마저도 감히 다가와 음식을 나르지
못했다. 그러나 거리 쪽으로 난 탁자 옆에는 체구가 매우 우람한
화상이 앉아 있었고 다른 조그만 탁자 곁엔 또 두 사람이 앉아 있
었다. 영호충이 피살되고 그녀 자신이 영호충의 시체를 안고 주루
를 내려가게 되었을 때 화상과 두 사람은 시종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놀람과 당황함이 극도로 달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던터라 체구가 우람한 화상과 다른 두 사람을
유의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소녀의 뒷모습을 보
자 뇌리에 남아 있던 모습과 대조되어 똑똑히 기억할 수 있게 되
었는데 어제 조그만 탁자에 앉아 있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 소녀였다. 그녀는 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뒷모습 만
기억할 수 있었다. 어제 그녀는 엷은 황색의상을 입고 있었으나
지금은 초록색옷을 입고 있었기에 만약 그녀가 등을 자기쪽으로
도리지 않았다면 기억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일까? 의림은 그 사람이 남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늙은인지 젊은인지 옷차림은 어떠했는지 하나도 기
억이 나지 않았다. 또 기억이 나는 것은 그 화상은 잔을 들고 술
을 마시고 있었는데 전백광이 영호충의 속임수에 넘어가 졌음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그 화상이 소리내어 웃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 당시 이 소녀 역시 웃었는데 그녀의 맑고 고운 웃음소리는 지
금도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대화상은 누구일까? 어찌하여 화상이 술을 마시고 있었
을까?
의림의 마음은 어제의 광경을 떠올리느라고 골몰해 있었다. 그
녀의 눈 앞에는 영호충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죽을 당시
어떻게 하여 나인걸을 다가오도록 유인했으며 어떻게 검으로 나인
걸의 배를 찔렀는가를 되새겨 보았다. 그녀가 영호충의 시체를 안
고 휘청거리며 주루를 내려오던 일, 멍해져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고 무작정 성문을 나서서는 길을 가던 일...... .
그녀는 품에 안고 있는 시체가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
었다. 무거운 줄도 몰랐고 슬픈 줄도 몰랐으며, 영호충의 시신을
어디로 안고 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별안간 그녀는 연꽃이 아름
답게 자라고 있는 연못가에 이르게 되었다. 연못 가득히 연꽃이
활짝 피어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었다. 연꽃을 본 순간 그녀는 가
슴을 커다란 망치에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고 더 지탱할 수
없어서 영호충의 시체와 함께 쓰러져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
다.
그녀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 찬란한 햇빛이 온누리
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시체를 안으려고 했다.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것은 빈 허공뿐이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몸
을 일으켰다. 그녀 자신은 여전히 연못가에 있었고 연껑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으나, 영호충의 시체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놀라고 당황하여 연못가를 몇 바퀴나 돌았으나 영
호충의 시신은 어디로 갔는지 눈을 씻고보아도 발견할 수 없었
다. 자기의 옷차림을 보니 이곳저곳이 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영호충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자국이었다. 태양의 광채 아래 핏방
울은 눈에 선연히 비추어 들었다. 핏자국은 남아 있건만 시신은
날개가 달린 듯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연못의 물은
얕았다. 그녀는 연꽃잎을 헤치고 연못 속을 살펴보았으나 영호충
은 거기에도 없었다.
그녀는 형산성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유씨 저택을 물어 본 이후
사부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시시각각
영호충의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영호 오라버니의 시체는 어디로 갔을까? 지나가던 사람이 옮겨
간 것일까? 아니면 야수가 끌고간 것일까.)
영호충은 자기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그녀 자신은
그 시체마저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야수가 끌고가서
먹어 버렸다면 그녀 스스로는 세상을 더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생
각했다. 아니 영호충의 시체가 완전무결하게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해도 그녀는 역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별안간 그녀 마음속 깊은 곳에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예전엔 감히 생각해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 생각은 하
룻동안 수없이 떠올랐으나 억지로 지워 버리곤 했었다. 그녀는 마
음속으로 스스로를 꾸짖었다.
(내가 어째서 이토록 마음을 가라앝히지 못할까? 어찌하여 이토
록 쓸데없는 생각을 할까? 진정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
다. 아니다,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생각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똑똑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가 영호 오라버니의 시체를 안고 있을 때 나의 마음은 매우
차분했으며 기쁘기까지 했다. 마치 입정하여 염불을 하는 듯 마음
속에 아무런 생각도 없었으며, 오로지 한 평생 그의 몸을 끌어
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길을 따라서
영원히 걸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었다. 나는 어찌되었든 그
의 시체를 찾아야 된다. 그건 또 무엇 때문일까? 그의 시체가 야
수들에게 뜯어먹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다. 결
코 아니다. 나는 그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그저 영원히 있고 싶
다. 그리고 연꽃이 핀 연못가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내가 어떻게 정신을 잃게 되었을까? 정말 죽어 마땅하다. 빨리 이
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부님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보살님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악마의 유혹이다. 나는 악마의 속
삭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영호 오라버니의 시체는?)
그녀의 마음은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져 있었다. 영호충의 빙
긋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모든 근심 걱정을 초월한 듯한 미소! 그
녀의 눈앞에 다시 영호충이 재수없는 젊은 여승이라고 욕을 할때
의 멸시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가슴이 아파움을 느꼈다. 마치 칼로 에이는 듯......
여창해의 음성이 다시 울려 퍼졌다.
[노덕약 이 소녀는 화산파의 사람이지? 그렇지?]
노덕약은 말했다.
[아닙니다. 그 소녀는 제가 오늘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화산파의 사람이 아닙니다.]
여창해는 말했다.
[좋다. 네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만두지.]
별안간 그는 손을 쳐들어 홱 뿌리쳤다. 광채가 번쩍이는 가운데
비추(飛錐)가 의림을 향해 쏟아져갔다. 동시에그는 호통을 쳤다.
[여승, 이게 무엇인지 보아라!]
그녀는 멍하니 서서 영호충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창해가 자기
에게 암기를 던지며 소리치자 고개를 돌렸다. 쉭! 하니 암기가 날
아드는 것을 본 순간 갑자기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그가 나를 죽인다면 가장 좋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 빨리 죽
는게 좋겠다.)
그녀는 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 비추가 빠르게 날
아들자 옆 사람이 소리쳤다.
[암기를 조심하시오!]
의림은 어찌 된 노릇인지 오히려 평안함과 평온함을 느꼈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고달프기 이를데 없는 일처럼 느껴졌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외롭게 느껴졌다. 비추가 자기를 죽인다면
그것은 자기가 바라던 바라고 생각했다.
이때 정일은 녹의소녀를 가볍게 밀어 젖히더니 나는 듯 다가와
의림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이미 늙은 몸이었으나 이번에 몸을
날린 행동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그 비추가 날아가는 속도는 무
척 빨랐다. 그러나 정일사태의 행동은 더욱 빨랐다. 정일은 나중
에 몸을 날렸는데도 먼저 다가가서 때 늦지 않게 손을 뻗어 그 암
기를 잡으려고 했다.
정일사태가 손을 뻗기만 하면 그 비추를 잡을 것 같았다. 그런
데 그 무쇠비추는 그녀의 몸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아래
로 뚝 떨어졌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박힌 것이다.
정일사태는 허공을 움켜잡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상대방에게
우롱당한 셈이라서 얼굴을 살짝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이때 여창해는 다시 손을 흔
들어 둘둘만 종이를 그 소녀를 향해 날렸다. 그 종이는 바로 자라
를 그린 종이였다. 정일사태는 그 광경을 보고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 소코도사가 비추를 날린 것은 원래 나를 소녀의 곁에서 끌
어내려는 것이었을 뿐, 결코 의림을 해치려는 것은 아니었구나!)
그 종이뭉치는 날아가는 기세가 무척 빨랐다. 조금 전의 비추에
비하면 기세가 날카롭기 이를데 없었으며 그 가운데 실린 내력 또
한 엄청나 보였다. 종이뭉치가 소녀의 얼굴에 맞으면 소녀는 반드
시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이때 정일사태는 의림의 곁에 서 있었
기 때문에 창졸간에 일어난 변화에 대처할 수 없었고 미처 그녀를
구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당황하여 부르짖게 되었을때 그 소녀가
돌연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어머니! 저 악인이 나를 때려 죽이려고 해요!]
그녀가 주저앉는 행동은 매우 신속했다. 일시에 종이뭉치를 피
한 것이다. 그녀가 몸에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 순진한 체 어머
니를 찾으며 우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뭇사람들은 우스꽝스럽
다고 생각했다.
여창해는 더이상 녹의소녀를 핍박할 염치가 없었다. 다만 가슴
까지 끓어오르는 의문을 풀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정일사태는 여창해의 안색에 겸연쩍어 하는 표정이 떠오르자 우
습기 짝이 없었다. 청성파에서는 정말 적지 않게 못난 꼴을 보인
셈이었다. 정일사태는 속으로 고소하다고 생각하며 의림에게 말했
다.
[의림아, 저 소녀의 부모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그
를 데리고 찾아보도록 해라. 그러면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남에게
놀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
의림은 다가가서 그 소녀의 손을 잡았다. 그 소년는 방긋 웃어
보이고 함께 대청을 나갔다.
여창해는 냉소를 한번 흘렸을 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
더니 목고봉을 바라보았다.
의림은 그 소녀를 끌고 대청 밖에 이르자 물었다.
[소저, 성씨가 무엇이며 이름이 무엇인지?]
그 소녀는 히히 하고 웃더니 말했다.
[저는 복성으로 영호(令狐)라고 하며, 이름은 외자로 충(沖)이
라 해요.]
의림은 가슴이 쿵 내려 앉는 것을 느끼고 안색을 굳혔다.
[내가 호의로 묻는데 어째서 농담을 하지?]
그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왜 농담을 하겠어요? 설마하니 그대의 친구만 영호충이라는 이
름을 가질 수 있고 나는 그 이름을 가지지 못한단 말인가요?]
의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호충을 생각하자 서글품이 물밀듯
밀려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 영호 오라버니는 나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나 끝내 나 때문
에 죽고 말았어...... 나는...... 나는 그의 친구가 될 자격이 없
는 몸이야!]
여기까지 말했을 때 두 사람의 꼽추가 총총히 대청 밖의 난간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새북명타 목고봉과 임평지였다. 그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천하에 정말 이토록 공교로운 일이 있을까? 흉칙한 늙은 꼽추
가 있는가 하면 또 그와 같은 젊은 꼽추가 한 장소에 있다니!]
의림은 그녀가 다른 사람을 조소하자 마음속으로 그녀가 귀찮아
졌다.
[소저, 그대 혼자 그대의 부모를 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어?
나는 머리가 아프고 몸이 편찮아.]
그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편찮은 것은 모두 가짜예요. 나는 알고 있
어요. 그대는 내가 영호충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한 거예요. 언니, 그대의 사부가 나를 데리고 있
으라고 했는데 어째서 나를 돌보지 않고 곁을 떠나려고 하는 거예
요? 내가 나쁜 사람에게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면 그대 사부는 그
대를 크게 꾸짖을 거예요.]
의림은 말했다.
[그대의 재간은 나보다 훨씬 낫고 눈치가 빨라 여관주와 같이
천하에 이름을 떨친 인물도 그대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았어? 그대
가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천지신
명께 감사하다고 여길 것인데 누가 감히 그대를 괴롭히겠어요.?]
소녀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의림의 손을 잡았다.
[그 말은 나를 비웃는 것이군요? 조금 전 그대의 사부가 나를
살려 주지 않았다면 그 소코도사는 나를 때렸을 거예요. 저의 성
은 곡(曲)이고 이름은 비연(非烟)이라고 해요. 저의 할아버지는
비비(非非)라고 불러요. 그대도 나를 비비라고 부르는게 좋겠어
요.]
의림은 그녀가 자기의 진짜 성명을 말해 주자, 마음이 누그러졌
다. 그녀는 어떻게 자기가 영호충을 생각하고 있다는 속마음을 알
고 영호충의 이름으로 자기를 놀리는 것일까? 그녀는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화청에서 사부에게 애기를 할 때 이 영리한 소저가 창
밖에 숨어서 엿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곡 소저, 그대는 그대의 부모님을 찾아가도록 해요. 그대는 그
분들이 어디로 가셨다고 짐작하죠?]
곡비연은 말했다.
[나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그대가 찾고자 한다면 혼
자서 가도록 해요. 나는 가지 않겠어요.]
의림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니 그대는 왜 가지 않겠다는 거죠?]
곡비연이 말을 가로챘다.
[우리 부모님은 이미 남에게 살해당하셨어요. 그대가 그들을 찾
고 싶다면 저승으로 가서 찾도록 하세요.]
의림은 불쾌한 표정을 짖고 말했다.
[그대의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신 것을 어찌 농담삼아 이야
기하지? 나는 그대와 같이 있지 않을래.]
곡비연은 의림의 손을 잡고 부탁을 했다.
[착한 언니, 전 외로운 몸이예요. 그리고 저를 상대해 줄 사람
도 없어요. 잠시 저와 함께 있어 줘요.]
의림은 그녀가 가련한 어조로 말을 하자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단지 조금만 함께 있을께. 그러나 그대는 무례한 농담을
하면 안 돼. 나는 출가인이야, 그러니 그대가 언니라 부르는 것도
역시 마땅치 않아.]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어떤 말들도 그대는 무례하다고 느끼는 모양인데 나는 재미있
다고 생각해요. 그건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예요. 그대는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것인데 뭐가 잘못되
었나요? 내가 그대를 누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의림 언니, 그대는
여승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요.]
의림은 아연해져 걸음을 멈췄다. 곡비연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웃고 말했다.
[여승이 무엇이 좋아요? 고기나 새우, 닭, 오리고기도 먹을 수
없고 소고기나 양고기도 먹을 수 없지 않아요? 언니는 참 아름다
워요. 머리를 깎고 봐도 아름다운데 새까맣고 기다란 머리를 기른
다면 얼마나 더 예쁘겠어요?]
의림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말을 들으며 웃었다.
[나는 공문(空門)에 든 몸이라 모든 것을 헛되다고 보고 있는데
어찌 겉모습의 아름답고 못난 것을 생각하겠어?]
곡비연은 자세히 의림을 뜯어 보았다. 이때 빗줄기는 가늘어지
고 있었고 검은 구름을 헤치고 엷은 달빛이 비스듬히 내리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몽롱한 한겹의 은빛 장막으로 가려진 듯
고결하고 신비스럽게 보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의 선녀가 하강했
다고나 할까? 곡비연은 한숨을 쉬며 나직이 말했다.
[언니, 정말 아름답네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토록 그대를 생
각하겠죠.]
의림은 얼굴이 붉어져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대가 또 장난을 친다면 나는
가겠어요.]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을께요. 언니, 언니는 나에게 천향단속교를 좀 줘요.
가서 사람을 구해야겠어요.]
의림은 아연해 물었다.
[그대는 누구를 구하려고 하지?]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예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의림은 말했다.
[그대가 사람의 목숨을 구하겠다니 응당 주어야겠지만 사부님께
선 이 천향단속교를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 만약 상처를 입은 사람
이 나쁜 사람이라면 결코 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상대
를 확인하기 전에는 주기가 난처해요.]
곡비연은 말했다.
[언니, 만약 누가 듣기 거북한 말로 그대의 사부와 항산파를 욕
한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예요? 아니면 나쁜 사람이예요?]
의림은 말했다.
[그 사람이 우리 사부님과 항산파를 욕한다면 물론 나쁜 사람이
지 어떻게 좋은 사람이겠어?]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어떤 사람이 입을 벙긋하기만 하면 여승
을 재수 없는 물건이라고 욕을 하고 놀음을 하게 되면 반드시 잃
는다고 했어요. 그대의 사부님을 욕하고 전체 항산파를 욕했어요.
만약 이 같은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면?]
의림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안색이 변해 몸을 돌렸다. 곡
비연은 웃으며 그녀가 지나가지 못하게 손을 활짝 벌려 막아섰다.
의림은 갑자기 마음속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어제 회안루에서 이 소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영
호 오라버니가 죽고 내가 그의 시체를 안고 내려올 때도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모든 광경을 그녀는 보았으니 내가 하는 말을 훔
쳐 들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녀는 나의 뒤를 줄
곧 따라온 것이 아닐까?)
의림은 소녀에게 한 마디 묻고 싶었으나 얼굴만 붉혔을 뿐 입을
열지 못했다.
곡비연은 말했다.
[언니가 묻고 싶은 말은 영호 오라버니 시체는 어디로 갔느냐하
는 것이죠? 그렇죠?]
[그래요. 소저가 말해 줄 수 있다면...... 나는...... 정말 고
맙게 생각할 거예요.]
곡비연은 말했다.
[저는 몰라요, 하지만 아는 사람이 한 사람 있어요. 이 사람은
몸에 중상을 입고 있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렸어요. 언니가 천향단
속교로 그의 생명을 구한다면 그는 영호 오라버니의 시체가 있는
곳을 말해 줄 거예요.]
의림은 말했다.
[그대 자신은 정말 모르는 거예요?]
[이 곡비연이 영호충의 시체가 있는 곳을 안다면 내일 나는 여
창해의 손에 죽게 될 것이고 그의 장검에 의해 십여 군데나 구멍
이 뚫리게 될 거예요.]
의림은 재빨리 말했다.
[난 믿을 수 있어요. 망설일 것 없어요. 그 사람은 누구죠?]
곡비연은 말했다.
[그 사람을 구하고 안 구하고는 그대에게 달렸지요. 우리가 가
고자 하는 곳도 좋은 곳은 아니예요.]
영호충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라면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 해도
뛰어들 형편인데 좋은 곳과 나쁜 곳을 가리랴?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가 보도록 해요.]
두 사람은 대문 입구에 이르렀다. 빗줄기는 가늘게 내리고 있었
고 문 옆에는 수십 자루의 기름 먹인 우산이 놓여 있었다. 의림과
곡비연은 각기 한 자루씩을 들고 대문을 나서서 동북 쪽으로 걸음
을 옮겼다.
이때는 이미 깊은 밤이어서 거리엔 행인도 드물었다. 두 사람이
지나가자 깊숙한 골목 안쪽에는 한두 마디의 개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의림은 곡비연이 외지고 좁은 길을 따라 갔으나 그저 영호
충의 시체가 있는 곳이 궁금하여 곡비연이 자기를 어디로 데려가
든 상관치 않고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한참 동안 걷게 되었을 때
곡비연은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섰다. 홍등(紅燈)이 문 앞에 걸린
한 채의 장원이 나왔다. 곡비연은 다가서더니 문을 두드렸다. 안
에서 걸어나오는 발자욱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누군가 고
개를 내밀었다. 곡비연이 그 사람의 귀에다 뭐라고 나직이 몇마디
속삭이고 다시 한 가지 물건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사람은
말했다.
[녜, 녜, 소저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곡비연은 고개를 돌리면 손짖을 했다. 의림은 그녀를 따라 문안
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띄우고는 앞서 길
을 안내했다. 그는 뜨락을 지나 동쪽에 있는 객실의 문 휘장을 걸
치더니 말했다.
[소저와 스님은 이곳에 앉아 계십시오.]
휘장이 걷혀지자 지분 냄새가 코에 와 닿았다.
의림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
고 꽃을 수 놓은 이불과 베개가 놓여 있었다. 붉은 바탕의 이부자
락 위에 수 놓아진 것은 한 쌍의 원앙(鴛鴦)이었다. 빛깔이 밝았
고 생동감이 넘쳐 흘렀다. 의림은 어려서부터 출가하였기 때문에
백운암에서 시퍼런 무명베로 만든 거친 이불만을 덮고 잠을 잤지
한 평생 이처럼 화려한 이불과 요를 본 적이 없었던 터였다. 탁자
위에는 붉은 초가 타고 있었다. 초 옆에는 거울이 달려 있었고 화
장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침대 앞에는 한 쌍의 꽃을 수놓은 남녀
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의림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쳐들었다.
눈 앞에 얼굴을 살짝 붉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약간 부끄러워하는 겸연쩍은 빛을 얼굴에 살포시 짖고 있었다. 자
기의 얼굴이 거울에 비친 것이었다.
등 뒤에서 발자욱 소리가 들리며 일하는 하녀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차를 올렸다. 이 하녀의 의복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어 신체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나 있었다. 옷이 몸
에 붙었으며 요염한 미소를 짖는 모습이 매우 음탕해 보였다.
의림은 나직이 곡비연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떤 곳이지?]
곡비연은 웃으며 몸을 숙이고 그 여인에게 속삭였다. 그 여인은
대답했다.
[녜.]
그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웃으며 엉덩이를 흔들고 걸어 나
갔다.
의림은 생각했다.
(저 여인의 모양을 내는 태도로 보아 반드시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곡비연에게 다시 물었다.
[이곳에는 왜 데려왔지? 이곳은 무엇하는 곳이지?]
[이곳은 형산성에서 크게 유명한 곳이예요. 이곳은 군옥원(?玉
阮)이라고 해요.]
의림은 다시 물었다.
[군원옥이 무엇하는 곳이지?]
[군원옥은 형산성에서 으뜸가는 기녀원이예요.]
의림은 기녀원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방안의 치장을 보고 은연중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으나
이곳이 기녀원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기녀원이 무
엇을 하는 곳인지 확실히는 몰랐으나 속가의 동문 사제들로부터
기녀원은 천하에서 가장 음탕하고 비천한 여자들이 사는 곳이고
어떤 남자라도 돈만 있으면 기녀와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곡비연이 자기를 기녀원에 데리고 온 것은 바로 자
기에게 기녀를 시키려고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 그녀는 당황해
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바로 이때, 옆방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매
우 귀에 익었다. 바로 전백광의 웃음소리가 아닌가! 의림은 두다
리에 힘이 풀어져서 풀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얼굴에는 핏기 한점
없이 창백했다.
곡비연은 깜짝 놀라 달려와서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죠?]
[저...... 저 사람은 전...... 전백광......]
곡비연은 '헤'하고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나도 그의 웃음소리를 알고 있어요. 그는 그대의 제자
전백광이 아니예요?]
전백광이 옆방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그 누가 나의 이름을 들먹이는가?]
곡비연은 말했다.
[이봐, 전백광! 당신의 사부가 지금 여기 계시니 이리 와서 큰
절을 올려요.]
전백광은 노해 말했다.
[무슨 사부야. 계집애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군. 내 너의
입을 찢어 놓겠다.]
곡비연은 말했다.
[그대는 형산성 회안루에서 항산파의 의림을 사부로 모셨지 않
았어요? 그녀가 바로 이곳에 계시니 빨리 이리 와요.]
전백광은 말했다.
[그녀가 왜 이런 곳에 있지? 그대는...... 그대는 어떻게 알고
있지? 그대는 누구이지? 내 그대를 죽이고 말겠다.]
그 음성에는 놀람과 두려운 빛이 담겨 있었다.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사부에게 절을 한 이후 다시 말하도록 해요.]
의림은 재빨리 말했다.
[안 돼요. 안 돼! 그가 이리로 건너오지 말도록 해요.]
전백광은 놀람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곧이어 쿵 하며 침대 위
에서 마루바닥 위로 내려서는 것 같았다.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나으리, 가지 마세요. 한번만 더 사랑해 주세요.]
곡비연은 말했다.
[전백광, 도망치지 말아요. 그대의 사부가 그대에게 빚을 갚으
러 왔어요.]
전백광은 욕을 했다.
[사부는 무슨 놈의 사부야! 난 영호충의 속임수에 넘어 갔단 말
이야! 그 젊은 여승이 한 걸음이라도 건너온다면 난 즉시 죽여 버
리겠다.]
의림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네, 나는 그리로 가지 않겠으니 그대도 들어오지 말아요.]
곡비연은 말했다.
[전백광, 그대는 강호에서 일류의 인물로 손꼽히고 있는데 자기
가 한 말을 책임지지 못하는 거예요. 사부로 모셔놓고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어요? 빨리 와서 그대의 사부에게 절을 해요.]
전백광은 코웃음쳤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의림은 말했다.
[나는 그대가 절하는 것도 싫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그대는
그대는 나의 제자가 아니예요.]
전백광은 재빨리 말했다.
[그렇지, 비구니께서는 아예 나를 마나는 것조차 싫어하는구
만!]
곡비연은 말했다.
[좋아요. 그대의 말이 옳다고 해도 좋아요. 그대도 알겠지만 우
리가 방금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 때 두 도적이 살그머니 우리의
뒤를 따라 왔어요. 그대는 빨리 가서 그들을 내쩨고 와요. 나와
그대의 사부는 이곳에서 쉬고 있을 것이니 그대는 밖에서 지키고
있으면서 누구도 우리에게 방해를 놓지 못하게 해요. 그대가 이
일을 하게 되면 그대가 항산파의 사부로 모셨던 일을 이후들먹이
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천하의 사람에게 모조리 불고 다니겠
어요.]
전백광은 소리를 돋우며 말했다.
[이 좀도적 같으니, 대담하구나!]
곧이어 창문이 펑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고 지붕 위에서 '챙그
랑' 하는 소리가 뒤이어 울려 퍼졌다. 두 가지 무기가 지붕 위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곧이어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고 다시 도망
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창문에서 다시 한번 '펑'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전백광이 그
방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하나는 죽였는데 청성파의 좀도둑이었소. 하나는 도망을 쳤
소.]
곡비연은 말했다.
[정말 쓸모없네요. 어찌하여 도망치게 내버려두었어요?]
전백광은 말했다.
[그 사람은 내가 죽일 수 없었소. 그는...... 항산파의 여승이
었소.]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그대의 사백부였군. 그렇다면 물론 죽여선 안 되지.]
의림은 깜짝 놀라 나직이 말했다.
[나의 사저였다고? 어찌하면 좋지?]
전백광은 물었다.
[소저, 그대는 누구지?]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물을 것 없어요. 그대는 조용히 있기만 하면 돼요. 그
대의 사부는 영원히 그대를 찾으러 다니지 않을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전백광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의림은 말했다.
[곡 소저, 빨리 돌아갑시다.]
[상처 입은 사람을 아직 보지도 않았는걸요. 그대는 그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대가 사부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두려우면 즉시 돌아가도록 해요.]
의림은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어찌 되었든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는...... 그 사람을 보러 가
요.]
곡비연은 빙긋 웃으며 침대가로 가서 손을 뻗어 동쪽의 벽을 밀
었다. 그러자 한 쪽의 문이 가볍게 열렸다. 벽에는 비밀문이 장치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곡비연은 손짓을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의림은 이 기녀원이 더욱 더 이상하고 신비스럽게 생각됐다. 다
행히 전백광은 서쪽방에 있으니 그와는 멀어지면 질수록 좋다는
생각에 대담하게 곡비연을 따라 들어갔다. 한쪽 역시 방이었으나
등불이 없었다. 방 안이 좁으나 침대가 놓여 있고 모기장이 나직
이 드리워져 있으며 어렴풋이 한 사람이 침대 위에 누워 자고 있
는 모습을 볼 수있었다. 의림은 문 안으로 드어서자 다시는 앞으
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곡비연은 말했다.
[언니, 언니는 천향단속교로 이 사람을 치료해 주도록 하세요.]
의림이 부르짖었다.
[그는...... 그는 정말 영호 오라버니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아
나요?]
곡비연은 말했다.
[어쩌면 알고 어쩌면 모를 거예요. 확정해서 말할 수는 없어
요.]
의림은 다급히 말했다.
[방금 그대는 그가 알고 있다고 했잖아요?]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없었던 말로 하면 되잖아요. 그대가 시험해 보고 싶다면 이 사
람의 상처를 치료해 주세요. 그러고 싶지 않으면 그대는 이곳을
떠나면 돼요. 그 누구도 그대를 막지 않을 거예요.]
의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찌 되었던 영호 오라버니의 시체를 찾아야 한다. 기회가 이
번뿐이라면 절대로 놓칠 수가 없지.)
그녀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말했다.
[좋아, 내가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지.]
그녀는 바깥방으로 가 촛대를 가져와 침대 앞에 놓고 모기장을
들추었다. 한 사람이 위를 향해 누워 있었는데 얼굴엔 녹색의 비
단 손수건이 덮여 있었다. 숨을 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비단수건이
미미하게 떨렸다.
의림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자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 사람은 어디에 상처를 입었지?]
곡비연은 말했다.
[가슴에 상처를 입었어요. 상처가 매우 깊어 하마터면 심장을
건드릴 뻔했어요.]
의림은 그 사람이 덮고 있는 엷은 이부자락을 들추었다. 그 사
람의 가슴이 드러나게 되었다.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상처가 나있
었는데 피는 멎었으나 상처가 매우 깊었다. 생명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의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찌 되었던 이 사람의 목숨을 구해 놓고 보자.)
그녀는 촛대를 곡비연에게 들고 있으라고 주고는 품 속에서 천
향단속교가 들어 있는 나무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고 한 개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 사람의 상처 주위를 가볍게 눌
러 보았다.
곡비연이 나직이 말했다.
[필요로 하는 혈도는 이미 짚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죽
었을 거예요.]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사방의 혈도가 봉해져 있었
다. 그 혈도 짚는 수법은 매우 교묘해서 의림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솜씨였다.
그녀가 천천히 상처에 막았던 솜을 꺼내자 선혈이 뿜어져 나왔
다. 의림은 사문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재간을 배웠는지라 왼손으
로 상처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천향단속교를 상처 위에 발랐다. 그
리고 다시 솜으로 상처 구멍을 틀어막았다. 이 천향단속교는 항산
파에서 자랑하는 금창약으로 성약(聖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
다. 상처에 약을 바르자마자 피가 멎었다. 의림은 그 사람의 호흡
이 불규칙한 것을 보고 회생할 수 있을런지 의문스러웠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것 보세요. 빈니가 한 가지 여쭈어 볼 말이 있으니 영웅께서
는 가르침을 베풀어주기 바래요.]
별안간 곡비연이 몸을 기울였다. 그 바람에 촛대가 비스듬히 기
울여져 촛불이 꺼지고 말았다. 방 안은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이고
말았다.
곡비연이 말했다.
[어마!]
그리고 말했다.
[촛불이 꺼졌군요.]
의림은 다섯 손가락을 눈 앞에 펴보았으나 보이지 않자 크게 당
황해 했다.
(이처럼 깨끗하지 못한 곳에 출가인이 어찌 올 수 있을까. 나는
영호 오라버니의 시체가 있는 곳을 물어본 후 즉시 떠나야겠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여보세요. 아픈 것은 좀 어떠세요?]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곡비연은 말했다.
[그는 열이 나고 있어요. 머리를 만져 보세요. 매우 뜨거울 거
예요.]
의림이 대답하기 전에 곡비연은 의림의 오른손을 잡고 그 사람
의 이마 위로 가져갔다. 그의 얼굴에 덮혀 있던 비단수건은 곡비
연이 치운 모양이었다. 의림은 손닿는 곳이 숯불처럼 뜨거운 것을
느끼고 그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는 먹는 약이 있으니 반드시 그에게 먹이는게 좋겠군요.
곡소저, 그대는 촛불을 켜도록 해요.]
곡비연은 말했다.
[좋아요, 그럼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불씨를 찾아 올께요.]
의림은 그녀가 떠나겠다는 말에 다급해져 재빨리 곡비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니예요, 그대는 가지 말아요. 나 혼자 남겨두면 난...... 무
서워요.]
곡비연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먼저 약을 꺼내 봐요.]
의림은 품 속에서 하나의 자기로 된 병을 꺼내 병마개를 뽑았
다. 그리고 세 알의 약을 꺼내들고 말했다.
[약을 꺼냈으니 그대가 그에게 먹이도록 해요.]
곡비연은 말했다.
[어둠 속에서 약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요. 사람의 목숨은 하늘
이 주신 것이니 함부로 할 수가 없어요. 언니가 이곳에 남아 있지
못하겠다면 내가 남을테니 언니가 촛불을 찾아 불을 켜도록 해
요.]
의림은 그녀가 기녀원 이곳저곳을 마구 돌아다니며 촛불을 켤
불씨를 구하라고 하자, 더욱 조바심이 나서 말했다.
[아니야, 난 가지 않겠어요.]
곡비연은 말했다.
[부처님을 보내려면 서쪽까지 보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 사
람을 구하려면 끝까지 구해야 되죠. 그대는 약을 이 사람의 입에
넣어 주고 몇 모금의 차를 마시게 하면 될 것이예요. 어둠 속이라
그는 그대가 누구인지 보지도 못하는데 무엇이 두렵다고 그래요?
자, 여기 찻잔이 있으니 조심해서 받아요. 쏟지 말고요.]
의림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찻잔을 받고 망설이며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출가인은 자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사람의
한 목숨을 구하는 것은 칠층의 불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
하셨다. 이 사람이 영호 오라버니의 시체가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해도 명이 경각에 달렸으니 나는 그를 구해야 한다.)
그는 왼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사람의 이마를 더듬어 보고
손바닥을 뒤집어 세 알의 백운웅담환(白雲熊膽丸)을 그 사람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그 사람은 입을 벌리고 알약을 입 안에 머금었
다. 의림이 찻잔을 그의 입가로 가져가서 몇 모금 먹이자 그 사람
은 힘들게 약을 삼켰다. 그리고 뭐라고 웅얼거렸다. 고맙다는 말
을 하는 것 같았다.
의림은 말했다.
[여보세요, 댁은 중상을 입었어요. 안정하여 휴식을 취하는게
좋겠어요. 저에게 한 가지 여쭐 일이 있어요. 영호충 협사는 그
누구에게 해침을 당했는데 그 시체는......]
그 사람은 말했다.
[그대는..... 그대는 영호충에 대해서 묻는 것이오?]
[바로 그래요. 귀하는 영호충 영웅의 시체가 어디로 갔는지 아
세요?]
그 사람은 나직이 말했다.
[뭐라고...... 시체라니?]
의림은 말했다.
[맞아요. 귀하께선 영호충 협사의 시체가 어디갔는지 아세요?]
그 사람은 몇 마디 말을 하는 것 같았으나 소리가 너무 작아 전
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의림은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귀를 그 사람의 얼굴 쪽으로 가져
갔다. 그 사람의 숨소리는 매우 미약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시종 말하지 못했다.
의림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본문의 천향단속교와 백운웅담환은 효험이 대단하지만 약기운
이 상당히 세다. 더우기 백운웅담환을 복용하게 되면 종종 반나절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다. 이것이 상처를 치료하는 요긴한 배려가
아닌가? 어찌 그에게 다그쳐 질문을 할 수 있으랴?)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모기장 한쪽에서 머리를 내밀었
다. 그리고 침착하게 의자를 잡고 그 의자 위에 앉으며 나직이 말
했다.
[그가 좀 나아지면 다시 묻기로 하지.]
곡비연은 말했다.
[언니, 그 사람의 생명엔 지장이 없겠어요?]
의림이 말했다.
[아믓든 상처가 치료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가슴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곡 소저 이 어른은...... 누구시지요?]
곡비연은 대답하지 않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저희 할아버지는 그대가 모든 속세의 인연을 떨쳐 버리지 못하
면 여승이 될 수 없다고 했어요.]
의림은 의아해 말했다.
[그대 할아버지는 나를 아시는가? 그...... 그 노인께선 내가
속세의 인연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계시지?]
곡비연은 말했다.
[어제 회안루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그대들과 전백
광이 싸우는 것을 보았어요.]
[그럼 함께 있던 그 분이 할아버지였나요?]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대의 영호 오라버니는 말도 잘 하더군요. 그가 앉아
서 싸우는 데는 천하에서 둘째 간다고 말할 때 저희 할아버지도
어느 정도 믿는 것 같았으며, 그리고 대변을 볼 때 연마한 검법이
있는 줄 아셨으며 전백광이 그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어요. 호호호......]
어둠 속에서 그녀의 웃는 얼굴을볼 수 없었지만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짓고 있음이 분명했다. 곡비연은 웃을수록 기분이 좋아졌
으나 의림은 마음이 갈수록 아파 오기만 했다.
곡비연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후 전백광은 도망을 쳤어요. 할아버지는 그 녀석에게 못난
놈이라고 욕을 하셨어요. 지게 되면 그대를 사부로 모시겠다고 한
이상 응당 절을 하고 사부로 모셔야 하는데 어찌 억지를 쓰느냐고
했어요.]
의림은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는 나를 구하기 위해서 꾀를 낸 것에 불과해요.
그리고 전백광을 이겼다고는 할 수 없어요.]
곡비연은 말했다.
[언니는 정말 마음이 좋은 사람이예요. 전백광이란 녀석은 그대
를 못살게 굴었는데도 그대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군요. 영호 오라
버니가 찔려 죽음을 당하게 된 이후 그대가 그 시체를 안고 주루
에서 내려올 때 저희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저 젊은 여승은
정이 많은 사람이니 이번엔 아마도 미치게 될 것 같구나. 우리 뒤
를 따라가 보자.'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그대의 뒤를 따랐어요.
그대는 죽은 사람을 안고 있는데도 놓기가 아쉬운 듯했어요. 저희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죠. '비비야 저 젊은 여승이 얼마나 상심하고
있느냐? 영호충이란 녀석이 죽지 않는다면 저 젊은 여승은 반드시
환속해서 그에게 시집을 가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의림은 얼굴이 붉혀졌다. 귀뿌리와 목이 화끈화끈 달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곡비연은 말했다.
[언니, 저희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의림은 말했다.
[내가 그 분을 죽게 한 것이야. 난 내가 죽고 그가 살았으면해.
만약 보살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내가 죽어서 영호 오라버니께서
살아나실 수만 있다면 나는...... 나는 십팔 층 지옥으로 떨어져
만겁(萬劫)에 휩싸여 환생하지 못한다 해도 좋아.]
그녀의 이 몇 마디 말은 진정에 가득 차 있었다.
이때 침대 위에 사람이 나직이 신음소리를 냈다. 의림은 기뻐서
말했다.
[그는...... 그는 깨어난 모양이야. 곡 소저, 그에게 물어봐요.
좀 나아졌는가?]
곡비연은 말했다.
[어째서 내가 물어봐야 하나요? 그대는 입이 없나요?]
의림은 잠시 머뭇거리다 침대 앞으로 나가 모기장을 걷으며 말
했다.
[이것 보세요, 그대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 사람은 신음소리를 몇 번 토해냈
다. 의림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는 지금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내가 어찌 그를
번거롭게 할 수 있으랴?)
그녀는 잠시 말 없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의 숨소리가 차츰 고르
게 되었다. 약기운에 다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곡비연은 나직이 말했다.
[언니, 영호충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하셨죠? 정말 그가
그토록 좋으세요?]
의림은 말했다.
[아냐, 아냐. 곡 소저 나는 출가인이야. 그대는 부처님을 모독
하는 말을 하지 말아요. 영호 오라버니는 나와 전혀 모르는 사이
인데도 나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당했어요. 나는...... 나는 다만
그에게 미안할 뿐이야.]
곡비연은 말했다.
[만약 그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대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
든지 할 수 있겠어요? 그분에게 시집을 가래도 갈 수 있어요?]
의림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잠시 후 모기소리만 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위해 천번 죽는다고 해도 좋아.]
곡비연은 음성을 높여 웃으며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 들었죠? 의림 언니는 친히 말했어요.]
의림은 노해 말했다.
[그대는 무슨 장난을 하려는 거예요?]
곡비연은 계속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영호 오라버니가 죽지만 않는다면 무슨 일이라도 그를
위해 하겠다고 햇잖아요?]
의림은 그녀의 말투가 장난 같지 않자 그만 머리가 어지럽고 가
슴이 뛰었다. 그저 말을 더듬거릴 뿐이었다.
[그대는...... 그대는......]
이때 달각거리던 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눈 앞이 환해졌다. 곡
비연이 어느덧 촛불에 불을 켠 것이다. 그리고 모기장을 들추고
웃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의림은 천천히 다가갔다. 별
안간 눈 앞이 캄캄해지는 충격을 받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려고 했
다. 곡비연은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부축해 쓰러지지 않도록 하
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놀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어요. 이제 그가 누
군지 보았나요?]
의림은 말했다.
[그는...... 그는......]
그 음성은 미약하기 그지 없었으며 숨이 막힌 듯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말았다.
침대 위의 그 사람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으나, 희고 창백한
얼굴에 칼날처럼 힘차게 뻗어나간 눈썹, 붉고 꽉 다문 입술, 우뚝
솟은 코를 지닌 미청년(美靑年)이었다. 천하제일의 풍류남아 영호
충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의림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이는...... 그이는 죽지 않았나요?]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대의 상처약이 효과가 없
다면 죽게 될 거예요.]
의림은 다급히 부르짖었다.
[죽지 않을 거예요! 그이는 죽을 수 없어요! 그이는 죽어서는
안 돼요!]
놀람과 기쁨에 넘쳐 갑자기 그녀는 왁 하니 울음을 터뜨렸다.
곡비연은 의아해 물었다.
[어마, 그가 죽지 않았는데 왜 우는 거예요?]
의림은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 침대를 붙
잡고 앉아 흐느껴 울었다.
[너무 기뻐서 우는 거예요. 곡 소저 정말 그대에게 감사 드려
요. 그대가 영호 오라버니를 구했어요.]
곡비연은 말했다.
[그대가 구한 거예요. 난 그런 재간이 없어요. 나에겐 천향단속
교가 없는걸요.]
의림은 깨달은 듯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음 곡비연의 손목을 잡
고 말했다.
[그대의 할아버지가 구하신거야. 그대의 할아버지께서 구하신거
야. 정말 고마워요.]
[의림아! 의림아! 어디 있느냐?]
별안간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정일사태의 음성
이었다.
의림이 깜짝 놀라 막 대답을 하려고 할 때 곡비연이 입김을 훅
불어 촛불을 껐다. 이어 손을 들어 의림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곳이 무슨 곳이예요? 대답하지 말아요.]
의림은 어지할 바를 몰랐다.지금 그녀는 기녀원에 있는 것이
다. 난처한 입장이 아닐 수 없었다. 사부님의 음성을 듣고 대답을
않은 적은 일찌기 없었던 일이었다.
이때 정일은 다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전백광, 빨리 이리로 기어나와! 의림을 내놓아라!]
그러자 서쪽 방에서 전백광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동안
웃던 그는 입을 열었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항산파 백운암의 정일사태시죠? 이후배
는 응당 나가서 인사를 드려야 하겠으나 지금 곁에는 몇 명의 아
리따운 여인들이 옷을 벗고 있어 감히 뿌리칠 수가 없군요. 피파
인사는 그만두기로 합시다. 하하하!]
곧이어 너댓 명의 여인들이 간드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매우 음탕하고 천한 것으로 보아 기녀들의 웃음소리였
다. 한 기녀가 코먹은 소리로 말했다.
[상공, 그녀를 상관치 말고 다시 뽀뽀를 해줘요. 호호호!]
기녀들은 자지러지는 신음소리를 내질렀으며 점점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전백광의 분부를 받고 일부러 더하는 것 같았다. 정
일사태의 혐오감을 자극시켜 떠나가게 만들려고 그러는 모양이었
다.
정일사태는 호통쳤다.
[전백광, 기어나오지 않는다면 너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겠
다!]
전백광이 말했다.
[내가 기어나가지 않더라도 그대가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
이고 내가 기어나간다 해도 날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니 기어나
가지 않는 것이 좋겠소이다. 정일사태, 이곳은 그대 같은 출가인
이 올 곳이 못 되니 되돌아가는 것이 좋을게요. 귀하의 제자는 이
곳에 없소이다. 그녀는 계율을 무척 철저히 지키는 여승인데 어떻
게 이곳으로 왔겠소이까? 어르신께서 이런 곳에 와서 제자를 찾는
그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창녀들만 있는 곳에 당신의 짜
가 있다면 그것은......]
정일사태는 노해 부르짖었다.
[불을 질러라. 불을 질러서 이 개집을 태워 버려라. 그래도 그
가 안 나오는지 두고보자!]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정일사태, 이곳은 항산성에서 유명한 군옥원이라 한답니다. 그
런데 불을 질러 태우면 나는 상관이 없겠지만 강호의 뭇사람들은
한참 떠들 것입니다. 항산성의 큰 군옥원은 항산파 백운암의 정일
사태가 불태웠다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게 될 겁니
다. '정일사태는 덕망이 높은 사태인데 어찌 그와 같은 곳에 갔었
지?' 그러면 다른 사람은 대답을 하겠죠. '그녀는 제자를 찾아갔
었대.' 그러면 상대방이 묻겠죠. '항산파 제자가 어찌하여 기녀원
에 가 있었지?' 이와 같이 너 한마디 나 한 마디 하게되면 귀파의
명성에 금이 가고 말 것입니다. 귀하에게 말씀 드리오만 만리독행
전백광은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꺼운지 모르는 사람
이지만 이 세상에서 귀하의 제자 한 사람만은 두려워한답니다. 그
녀를 만나기만 하면 저는 멀리 피하기가 바쁜 신세가 되는데 어찌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있겠읍니까?]
정일은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명의 제자
가 의림이 바로 이 집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으며 전백광에게 상처
입은 것도 사실인데 그 제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
다. 그녀는 다섯 구멍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리
하여 지붕 위의 기와를 마구 밟아 깨뜨렸지만 일시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별안간 맞은편 지붕 위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전백광, 나의 제자 팽인기(彭人騏)는 그대가 죽인 것인가?]
그는 바로 청성파의 장문인 여창해의 음성이었다.
전백광은 말했다.
[이거 실례했소이다. 청성파의 장문인까지도 왕림을 하셨군. 이
렇게 되면 군옥원은 명성을 떨치고 장사가 잘 되어 손님을 다 받
지도 못하게 생겼군요. 한 녀석을 내가 죽인 건 사실이오. 검법이
평범하고 청성파의 초식인 것 같았으나 그 이름이 팽인기인지 아
닌지는 물어보지 못했소이다.]
'휙' 하며 여창해가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곧이어 '창창' 하
는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여창해와 전백광이 싸움을 시작한 것
이었다.
정일사태는 지붕 위에 서서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탄복했다.
(전백광이란 녀석! 재간이 제법 있군! 이 몇 수의 쾌도로 청성
파의 장문인과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이다니 몰랍군!)
별안간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무기 부딪치는 소리도 멎
었다.
의림은 이때 곡비연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손바닥엔 홍건히
식은 땀이 고여 있었다. 전백광과 여창해 두 사람의 싸움은 누가
지고 이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리를 따지자면 전백광이 수차레
에 걸쳐 욕보이려 했으니 전백광이 여창해에게 지기를 바래야 되
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여창해가 전백광에게 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여창해가 빨리 돌아가고 자기의 사부도 떠나가 주기를 그
래서 영호충이 이곳에서 편안하게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으면 가
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영호충은 생사의 관문에 돌입해 있었
다. 만약 여창해가 방 안으로 뛰어들어온다면 놀란 나머지 상처가
파열될 것이고 그러면 그는 죽게 되는 것이다.
이때 전백광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여관주, 방안은 장소가 너무 협소하니 발을 움직이기 불편하
오! 우리는 넓은 곳으로 가서 삼사백 초만 크게 싸워 누가 센지
가려내도록 합시다! 그대가 이긴다면 기녀 옥보아(玉寶兒)를 주겠
소이다. 그러나 그대가 지게 된다면 이 옥보아는 내 것이 되오.]
여창해는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다. 전백광의 말은 자기와 전백
광이 군옥원의 일개 기녀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다는 뜻이 아닌
가? 조금 전 방안에서 두 사람은 삽시간에 오십여 초를 겨루게 되
었는데 전백광의 도법은 정묘했고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 법도가
있었다. 여창해는 상대방의 무공이 자기에 못지 않다고 생각했다.
삼사백 초를 싸운다 해도 꼭 이긴다는 자신이 서지 않았다. 삽시
간에 사방은 조용해졌다. 의림은 자기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곡비연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물었다.
[그......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곡비연은 그녀보다 몇 살 아래였다. 그러나 다급한 경우를 당해
의림은 어떻게 할지 몰랐다. 곡비연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입을 막았다.
갑자기 유정풍의 음성이 들렸다.
[여관주, 전백광이란 녀석은 많은 악한 짓을 한 자이니 이후 곱
게 죽지는 못할 것이오. 우리가 그를 처치한다 해도 지금 서두를
필요는 없소. 이 기녀원은 더럽기 짝이 없는 곳, 이 형제는 벌써
부터 없앨려고 했으니 이 집은 형제가 처리하겠소. 대년(大年) 위
의(爲義) 모두 들어가 조사를 해봐라. 한 사람도 놓치지 말아라.]
유씨의 제자인 상대년과 미위의는 일제히 대답을 했다. 곧이어
정일사태가 급히 명을 내려 뭇사제들로 하여금 사방을 아래 위로
겹겹이 에워싸도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림은 갈수록 당황하고 다급해졌다. 곧이어 유씨 문중의 제자
들의 호통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각방을 일일이 뒤지기 시작했
다.
유정풍과 여창해는 옆으로 감독을 하고 있는 듯했다. 상대년과
미위의는 기녀원의 하인과 주모를 마구 패는 듯 그들의 울부짖음
이 들려왔다. 청성파의 제자들은 기녀원의 가구와 집기 그리고 찻
잔과 술잔을 내던져 박살을 내고 있었다.
유정풍 등이 곧 들이닥치려고 하자, 의림은 다급해져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사부님이 나를 구하러 왔지만 나는 소리내어 대답을 하지 못했
다. 게다가 기녀원에서 영호 오라버니와 밤중에 한방에 같이 있
다. 물론 영호 오라버니는 중상을 입고 있지만 항산파와 청성파의
많은 남자들이 떼를 지어 들어오면 내게 입이 백 개 달렸대도 변
명을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항산파의 명성에 누를 끼친다면 내
어찌...... 어찌 사부님과 사제들을 대할까?)
그녀는 손을 뻗어 장검을 뽑아 자기 복을 찌르려고 했다.
곡비연은 장검이 뽑아지는 소리를 이미 듣고 짐작했는지 왼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소리쳤다.
[안 돼요. 불안하면 달려나가도록 해요.]
침대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호충이 몸을 일으
키더니 나직이 말했다.
[촛불을 켜라.]
곡비연은 말했다.
[뭐하게요?]
[나는 촛불을 켜라고 했다.]
그 음성은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곡비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화도(火刀)와 화석(火石)을 꺼내 불을 당겨 촛불을 밝혔다.
촛불 아래 먼저 드러난 것은 별처럼 빛나는 영호충의 눈동자였
다. 의림은 영호충의 안색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것을 보고 나
직이 놀람에 찬 소리를 냈다.
영호충은 침대머리에 놓여 있는 장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
다.
[나에게...... 나의 몸 위에 걸쳐 주시오.]
의림은 전신을 떨면서 몸을 굽혀 장포를 들어 그의 몸 위에 덮
었다. 영호충은 장포의 앞자락을 당겨 자기 가슴의 상처와 핏자욱
을 가리며 말했다.
[그대들 두 분은 침대 위에 누워 계시도록 하시오.]
곡비연은 '헤' 웃고 말했다.
[재미있군! 재미있게 되었어!]
그리고 의림을 끌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때 밖의 사람들은 이 방 안에 촛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다
투어 불렀다.
[저쪽으로 가서 찾아보세.]
그리고 벌떼처럼 몰려왔다.
영호충은 한 모금의 진기를 돋우고 달려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빗장을 지르고 침대 앞으로 되돌아와 모기장을 들고 말했다.
[모두 이부자리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의림은 말했다.
[그...... 그대는 움직이지 말고 상처를 조심하도록 하세요.]
영호충은 왼손을 뻗어 의림의 머리가 이불 안으로 들어가게 밀
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론 곡비연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끌어내 베
게 위에 흐뜨려 놓았다. 그가 힘을 쓰자 상처의 피가 다시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 무릎에 힘이 풀려 침대가에 걸터앉았다.
이때 누군가 방문을 쿵쿵 치더니 부르짖었다.
[개새끼야! 문 열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삼사 명이 동시에 방안
으로 들어왔다.
앞장을 선 사람은 청성파의 제자 홍인웅(洪人雄)이었다. 그는
영호충을 보자 놀라 더듬거렸다.
[너는...... 영...... 영호충!]
급히 두 걸음 물러섰다. 상대년과 미위의는 영호충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영호충이 나인걸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
런데 홍인웅이 이름을 부르자 똑같이 흠칫해서 약속이나 한듯 뒤
로 물러났다.
이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영호충을 바라보았다.
영호충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당신들...... 이 많은 사람들은......]
홍인웅은 말했다.
[영호...... 영호충! 알고보니...... 알고보니 죽지 않았었군!]
영호충은 냉랭히 말했다.
[어떻게 쉽게 죽을 수 있겠나?]
여창해는 뭇사람 앞에 나오더니 말했다.
[네가 바로 영호충인가? 좋아, 좋아!]
영호충은 그를 한번 쳐다보고 대답하지 않았다.
여창해는 말했다.
[너는 이 기녀원에 무엇하러왔지?]
영호충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알고 계시면서 일부러 묻는 것이오? 기녀원에 온 목적
이 무엇인지 당신은 모른단 말이오? 여자가 필요해서 온게 아니겠
소?]
여창해는 냉랭히 말했다.
[평소 화산파의 문규가 심히 엄하다고 들었다. 너는 화산파의
대제자이고 군자검(君子劍) 악 선생의 직계제자가 아닌가? 그런데
몰래 들어와 기생을 끼고 자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허허
허......]
영호충은 말했다.
[화산파의 문규가 어떻든 우리 화산파의 일이오. 남이 걱정할
필요는 없소.]
여창해는 견식이 넓은 사람이었다. 영호충의 얼굴이 창백하고
몸을 쉬지 않고 뛰고 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상이 분명한데 태
연한 것을 보아 더럭 의심이 치밀었다. 이 방안엔 어떤 속임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염두를 굴렸다.
(이 녀석이 인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는데 죽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젊은 여승이 거짓말을 한 것이 틀림없다. 그녀가 말을 할
때 영호 오라버니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말투에 정을 가득 실려 있
었는데 그렇다면 두 사람은 이미 사통을 하고 있는 관계인지도 모
르겠군. 그 젊은 여승이 기녀원에 온 것을 본 사람이 있는데 지금
은 종적도 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이 녀석이 숨긴 것이 분명하
다. 흥, 그들 오악검파는 무림의 명문정파라고 자부하고 있으며
우리 청성파를 업수이 여기고 있는데 애가 젊은 여승을 잡아서 끌
어낸다면 화산파와 항산파에 커다란 수모를 안겨 주게 되는 것이
고 오악검파 전체에 치욕스런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강
호에서 큰소리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 젊은 여승은 침대 위에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해.)
그는 홍인웅에게 말했다.
[인웅아, 모기장을 들추고 침대 위에 여승이 있는지 찾아 보아
라.]
홍인웅은 대답하고 앞으로 두 걸음 나갔으나 영호충에게 쓴맛을
본 적이 있는지라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며 감히 앞으로 나가
지 못했다.
영호충은 말했다.
[너는 살기가 귀찮아진 모양이구나!]
홍인웅은 흠칫했으나 사부가 곁에 있으니 두려울 것 없다고 생
각하고 장검을 뽑아들었다.
영호충은 여창해에게 말했다.
[어쩌자는 것이오?]
여창해는 말했다.
[항산파에서 한 명의 여제자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가 이곳
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그녀를 찾으려고 그러는 것
이다.]
영호충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오악검파의 일을 당신네 청성파에서 감히 상관하려는 것이오.
여창해는 말했다.
[오늘 일은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인웅아, 손을 써라.]
홍인웅은 대답을 하고 장검을 내밀어 모기장을 들췄다.
의림과 곡비연은 꼭 껴안고 이불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녀들은 영호충과 여창해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똑똑
히 들을 수가 있었다.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하고 전신이 떨려왔
다. 거기다 홍인웅이 모기장을 들추자, 더욱 혼비백산했다.
모기장이 들춰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침대 위로 쏠렸다. 한 쌍의
원앙이 수놓인 붉은 이불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리고 베개 위에는 기다란 머리카락이 흩어졌고 이불이 연신 흔들
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불 안의 사람이 매우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창해는 베갯머리에 기다란 머리카락을 보자 매우 실망했다.
이불 안에 몸을 숨긴 사람은 결코 젊은 여승이 아니라고 확신했
다. 영호충은 정말로 기생을 품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영호충은 냉랭히 말했다.
[여관주, 그대는 출가인이지만 청성파의 도사들은 혼인을 금하
지 않는다고 합디다. 그대에겐 작은 마누라 큰 마누라가 적지 않
다고 하더군요. 그대가 목숨처럼 색을 좋아하여 기녀원의 벌거벗
은 여자의 몸을 보고 싶다면 어서 시원스럽게 이불을 들치고 몇번
더 들여다보도록 하시오. 항산파의 여제자를 찾는다는 구실을 내
세울 필요는 없을 것이오.]
여창해는 호통했다.
[개소리 마라!]
그리고 오른손을 후려쳤다. 영호충은 옆으로 몸을 날려 장풍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몸이라 몸놀림이 여의치 못했
다. 여창해의 일장은 그의 어깨죽지를 후려쳤다. 영호충은 의자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힘주어 버티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
간 입에서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여창해가 다시 손을 쓰려
고 할 때 창 밖에서 누군가 부르짖었다.
[어른이 나이 어린 사람을 못살게 굴다니! 염치가 없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창해는 오른손을 돌려 창문을 후려쳤
다. '우지직' 하며 창문이 부서져 나갔다. 여창해의 몸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한 명의 꼽추가 담장 모퉁이를 돌아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여창해는 호통을 쳤다.
[게 섰거라!]
그 꼽추는 바로 임평지였다. 그는 유정풍의 집에서 곡비연이 출
현하여 여창해가 소녀에게 정신을 팔게 되자 슬그머니 빠져나오고
말았다. 바로 그의 뒤를 목고봉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담장에 숨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 해야 부모님을 구할 수 있을런지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
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꼽추로 가장한 것을 대청의 사람은 모두 보았다. 다시 청
성파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본
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되지 않을까?)
조금 전 여창해에게 붙잡혔던 광경을 떠올리자 전신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여창해의 고강한 무공을 생각하니 그의
마음은 착찹하기 그지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가 그의 등을 가볍게 후려쳤다. 임
평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렸다. 눈 앞엔 뒷등이 불룩한 진짜
꼽추 새북명타 목고봉이 서 있지 않은가?
새북명타 목고봉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짜 꼽추야, 꼽추가 뭐가 좋지? 어째서 나의 제자나 사손으로
사칭하려고 했지?]
임평지는 이 사람의 성격이 흉폭하며 무공이 고강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대답을 잘못하게 된다면 살신지화를 초
래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조금 전 대청에서 그는 목고봉에게 큰
절을 한 바 있으며 그가 이런 일을 한다고 추켜세웠을 뿐 그에게
죄를 지은 적은 없었다. 그는 계속 친절하게 말하면 그의 화를 부
르지 않을 줄 알고 말했다.
[후배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북명타 목 대협의 자자한 명성을 들
었읍니다. 그리고 목 대협께선 남의 어려움을 가장 잘 돌봐주며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 준다고 들었읍니다. 저는 줄곧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그만 부지불식간에 목 대협의 모양으로 변
장을 하게 되었읍니다. 이점 용서해 주십시오.]
목고봉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구하고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돌
봐 준다고?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로군!]
그는 임평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말이 듣기 싫지는 않았다.
[너의 이름은 뭐냐? 누구의 문하이지?]
임평지는 말했다.
[후배의 성은 임씨이며 우연히 선배님의 성씨로 가장하게 되었
읍니다.]
목고봉은 냉소했다.
[뭐가 우연이야? 너의 할아버지 이름으로 남들을 속이려 한 것
이지. 여창해는 천하에서 몇째 안 가는 고수이다. 손가락 하나로
도 능히 너를 죽일 수 있는데 네 녀석은 감히 그와 맞서다니 정말
담이 적지 않구나!]
임평지는 여창해라는 이름을 듣게 되자,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
는 것을 느끼고 큰 소리로 말했다.
[후배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사악한 자를 친히 죽이고 말겠
읍니다!]
목고봉은 의아해 물었다.
[자네는 여창해와 원한이 닝는가?]
임평지는 잠시 생각했다.
(내 힘으론 부모님을 구출할 수 없다. 그에게 큰절을 올리고 도
움을 빌리자.)
그는 즉시 두 무릎을 끓고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후배의 부모님이 그 간악한 적의 손에 들어갔읍니다. 선배님께
선 의리로서 저의 부모님을 구해 주십시오.]
목고봉은 눈쌀을 찌푸리며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좋은 일이 없는 한 이 꼽추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너의 아
버님은 누구냐? 그를 구출해 주면 무슨 이득이 돌아오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대문에서 누가 다급한 음성으로 말하는 소
리가 들렸다.
[빨리 사부님께 알려라! 군옥원이란 기녀원에서 청성파의 사람
이 또 한 명 살해되었고 항산파의 한 사람이 상처를 입고 도망쳐
왔다고 해라!]
목고봉은 나직이 말했다.
[너의 얘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자. 당장 좋은 구경거리가 생기
게 되었으니 너도 구경을 하려면 날 따라오너라.]
임평지는 생각했다.
(그의 곁에 있으면 부탁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는 급히 대답했다.
[녜, 녜, 노선배님께서 가시는 데라면 후배는 마땅히 뒤를 따라
야죠.]
목고봉은 말했다.
[우리는 먼저 말을 확실히 해두자. 이 꼽추는 어떤 일이든 이득
이 되는 일만 한다. 네가 나를 몇 번 추켜세운다고 해서 이 할아
버님께서 귀찮은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
다.]
임평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갑자기 목고봉이 말했다.
[그들이 갔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 순간 임평지는 자기의 오른쪽 손목이 바짝 조여지는 것을 느
꼈다. 이미 그에게 잡혀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땅을 밟지 않는 듯 쾌속하게 거리를 질주해 나가고 있었다.
군옥원 밖에 이르게 되었을 때 목고봉과 그는 한 그루 나무 뒤
에 숨어서 기녀원의 동정을 엿보았다. 여창해와 전백광이 손을 쓰
고 유정풍이 사람을 데리고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영호충이 나서서
말을 하던 상황을 두 사람은 일일이 귀로 들어 알게 되었다. 여창
해가 재차 영호충을 때리려고 했을 때 임평지는 더 참을 수 없어.
'어른이라는 작자가 어린애를 못살게 구니 염치없다' 는 비웃음의
말을 던졌던 것이다.
임평지는 말을 마친 즉시 자기가 경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
을 돌려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창해의 동작은 신속하기 그지
없었다. 여창해는 뒷모습을 알아보고 냉소했다.
[알고 보니 너였군!]
임평지는 목고봉의 옆에 가서 섰다. 여창해는 목고봉을 쏘아보
며 말했다.
[목 꼽추, 당신은 세 번씩이나 어린애를 시켜 나를 난처하게 했
다. 도대체 왜 그러는가?]
목고봉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저 사람은 스스로 나의 아랫사람이라 했지만 이 꼽추
는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의 성은 임씨이고 나의 성은 목씨
이니 나와 저녀석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여관주, 목 꼽추
는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아. 다만 이 가짜 꼽추 때문에 그대와 싸
우고 싶지 않을 뿐이야. 즉 방패막이는 될 수 없다는 애기지. 물
론 방패막이가 되어 돌아올 이득이 있다면 이 목고봉은 간섭을 할
수도 있지.]
여창해는 그 말을 듣자 기뻐서 말했다.
[이 사람은 목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빈도는 더 이상 귀
하의 체면을 돌보지 않겠소.]
그는 장풍(掌風)을 쏘아내어 임평지의 가슴을 뻐개려고 했다.
갑자기 창문 안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어른이 어린이를 괴롭히다니 정말 염치가 없군!]
여창해가 고개를 돌려보니 한 사람이 창문가에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영호충이었다.
여창해는 노기가 끓어올랐다. '어른이 어린이를 괴롭히니 염치
없다'는 말은 바로 여창해의 치부를 건드린 셈이었다. 눈앞의 두
사람은 무공에 있어서 자기에 뒤떨어진다. 죽이려면 손을 한번 휘
두르면 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어린이를 괴롭혔다는 비난을 면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힘을 믿고 약자를 괴롭힌다는 것은 강호에
서 가장 경멸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두 사람을 용
서한다면 터질 것 같은 울화를 진정시키기 힘든 노릇이 아닌가?
그는 냉소를 하며 영호충에게 말했다.
[너의 일은 이후 내가 너의 사부를 찾아가 따지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임평지를 보며 물었다.
[이 녀석, 넌 도대체 어떤 문파의 사람이냐?]
임평지는 노해 부르짖었다.
[이 도적놈아, 네놈은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해놓고 가족을 뿔뿔
이 흩어지게 만들지 않았느냐? 이제 와서 나에게 묻다니 철면피
같은 놈!]
여창해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네가 언제 이 추악한 녀석을 알고 있었단 말이냐? 내가 집안을
망하게 하고 식구를 뿔뿔이 헤어지게 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
인가?)
사방에서 이곳을 주시하는 시선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여창
해는 홍인웅에게 말했다.
[잉웅, 먼저 이 녀석을 죽여 버려라. 그리고 영호충을 없애도록
해라.]
제자가 나서게 된다면 어른이 되어 어린사람을 못살게 굴었다는
비난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홍인웅은 대답하고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갔다.
임평지는 손을 뻗어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검을 뽑는 순간 홍
인웅의 장검은 싸늘한 광채를 뿜어내며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
임평지는 부르짖었다.
[여창해, 이 도적놈아! 나 임평지는 네놈을......]
여창해는 깜짝 놀라 왼손을 급히 후려쳤다. 장풍을 발출하여 홍
인웅의 장검을 비껴가게 만든 후 여창해는 말했다.
[너는 방금 무엇이라고 했지?]
임평지는 말했다.
[이 임평지는 악귀가 된다 해도 네놈을 찾아 목숨값을 받아낼
것이다!]
여창해는 말했다.
[네가...... 네가 복위표국의 임평지란 말이냐?]
임평지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죽는 것은 이미 겁나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얼굴에 붙인 고약을 떼며 말했다.
[그렇다. 나는 복위표국의 임평지다. 그런데 네놈은 우리 집안
의 모든 사람들을 죽였을 뿐 아니라 우리 부모님마저도...... 네
놈은 도대체 우리 부모님을 어디다 가둬 두었느냐?]
청성파에서 이번에 복위표국을 뒤엎어 놓은 사실은 강호에 파다
하게 퍼진 소문이었다. 장청자가 일찌기 임원도의 검 아래 패했다
는 사실을 무림에선 알고 있는 사람이 희귀했다. 강호에는 청성파
에서 임씨 집안의 벽사검보를 훔치려고 그랬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영호충은 그와 같은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회안루에서 벽
사검보를 들먹여 나인걸을 자기 곁으로 유인하여 죽일수가 있었던
것이다. 목고봉 역시 그와 같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눈 앞
의 가짜꼽추가 복위표국의 임평지라는 말을 듣게 되고 여창해가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황망히 홍인웅의 장검을 밀어제치며 긴장된
표정을 띄우고 것을 보고 이 젊은이의 몸에 있는 벽사검보를 얻으
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이때 여창해는 왼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임평지의 오른쪽 손목을
움켜잡고 팔을 잡아당겨서 자기 쪽으로 끌어가려고 했다. 목고봉
이 호통쳤다.
[잠깐!]
그는 달려나와 손을 뻗어 임평지의 손목을 잡고 뒤로 끌었다.
임평지는 두 팔이 엄청난 힘에 의해 전후로 끌어당기게 되자 어
깨와 팔굽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고 너무 아파 기절을 할 지경이
었다.
여창해는 즉시 오른손의 장검을 내밀어 목고봉을 겨누고 소리쳤
다.
[목형, 손을 놓으시오!]
목고봉은 왼손을 흔들더니 '창' 하고 장검을 밀어냈다. 그의 손
엔 한 자루의 푸른 빛이 번쩍이는 만도(彎刀)가 들려 있었다. 여
창해는 검법을 펼쳐 '칙칙' 하는 음향을 흘리며 순식간에 여덟 번
을 목고봉을 향해 찔러갔다.
[목형, 그대와 나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이 녀석 때문에 두
집안이 감정을 상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목고봉은 만도를 휘둘러 찔러 오는 검을 일일이 밀어내며 말했
다.
[조금 전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이 녀석은 나에게 절을
했고 나를 할아버지라 불렀소. 이것은 모든 사람이 보고 들은 일
이외다. 불초와 여관주는 비록 과거에 원한이 없고 최근에 감정을
상한 일도 없으나 그대가 나를 할아버지라 부른 사람을 잡아가 죽
이게 된다면 이는 나의 체면을 깎는 게 아니겠소? 할아버지가 되
어 손자를 비호하지 못한다면 이후 그 누가 나를 할아버지라 부르
겠소?]
두 사람은 이와 같이 이야기하면서 무기를 휘둘러대었다. 무기
를 휘두르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여창해는 노해 부르짖었다.
[목형, 이사람은 나의 친아들을 죽인 사람이오. 아들의 원한을
갚지 말란 말이오?]
목고봉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좋소, 여관주의 체면을 보아 그대를 대신해 원한을 갚
아드리지. 자, 그대가 앞쪽으로 당기고 내가 뒤쪽으로 당깁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 녀석을 두 조각으로 찢어 죽입시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하나 둘 셋 하고 헤아렸다. 셋 소리가 끝
나자마자 손에 힘을 주었다. 임평지의 전신 뼈마디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여창해는 깜짝 놀랐다. 원한을 갚는데 서둘 필요는 없었다. 검
보를 손에 넣기도 전에 임평지의 목숨을 해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서 즉시 손을 놓자 임평지의 몸이 목고봉 쪽으로 끌려가게 내버려
두었다.
목고봉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정말 고맙소. 정말 고마워! 여관주는 정말 의리가 깊
소. 이꼽추의 체면을 봐서 아들의 원한마저 덮어두니 말이오. 이
처럼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오!]
여창해는 냉랭히 말했다.
[목형이 알고 있다면 잘 되었소. 이번엔 불초가 한 걸음 양보하
지만 이후엔 양보가 절대로없을 것이오.]
목고봉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꼽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어쩌면 여관주께선 하늘을
찌를 듯한 의리를 지켜 두 번째로 양보할지도 모르지.]
여창해는 코웃음치고 왼손을 들어 신호하며 말했다.
[우리는 가자.]
그는 청성파의 제자를 이끌고 즉시 물러갔다.
이때 정일사태는 의림을 찾느라고 항산파의 여승들을 이끌고 서
쪽을 향해 수색해가고 있었다. 유정풍은 제자들을 이끌고 동남쪽
으로 나갔다.
청성파가 떠나자 군옥원 밖은 목고봉과 임평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목고봉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너는 꼽추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알고 보니 퍽 준수하게 생긴 녀
석이구나! 이 녀석아, 너는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를 것도 없다.
이 꼽추는 네가 마음에 드니 너를 제자로 거두워들이는게 어떨
까?]
임평지는 조금 전 두 사람의 상승내력에 의해 전신이 아파 감당
할 수 없었고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목고봉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이 꼽추의 무공은 우리 아버지보다 열 배나 강하다. 여창해도
이 사람을 퍽 꺼리고 있다. 내가 원한을 갚으려면 그를 사부로 삼
아야만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청성파의 제자가 나를
죽이려 할 때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다가 나의 정체를 알게 되자
즉시 손을 써서 여창해와 쟁탈전을 일으켰다. 그가 나를 제자로
거두워들이겠다니 틀림없이 딴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목고봉은 그가 망설이는 것을 보자 다시 말했다.
[새북명타의 무공이나 명성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아직 한 명의 제자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네가 나를 사부
로 모신다면 이 사부는 일신의 무공을 모조리 전수해 주겠다. 그
때 청성파의 젊은 녀석들은 결코 너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고
시일이 흐르게 되면 여창해를 대패시키는 것도 어려움이 없을 것
이다. 이 녀석아, 너는 어째서 절을 하고 나를 사부로 모시려 하
지 않느냐?]
그는 갈수록 강렬한 어조로 말을 했다. 임평지는 더욱 의심이
생겼다.
(그가 정말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어찌 조금 전 내 손을 잡고
조금도 거침없이 힘을 주어 잡아당길 수 있었단 말이냐? 여창해라
는 악적은 내가 그의 아들을 죽인 원수라는 것을 알고도 나를 죽
이려 하지 않았다. 물론 벽사검보 때문이다. 오악검파에는 무공이
고강하고 정직한 인사들이 많다. 내가 명사를 섬기려면 그와 같은
명사를 찾아갈 것이다. 이 꼽추는 심보가 악독하니 무공이 높다
해도 결코 사부로 모실 수 없다.)
목고봉은 그가 여전히 주저하자 속에서 노기가 끓어올랐다. 그
러나 여전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느냐? 너는 이 꼽추의 무공이 너무 약해서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임평지는 목고봉의 얼굴에 찰나적으로 흉칙한 빛이 떠오르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노기는 일순간이고 더욱더 부드러운
얼굴을 짓는 것이 아닌가? 임평지는 지금의 자기 처지가 매우 위
험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사부로 모시지 않는다면 그가 자기를 죽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목 대협, 이 후배를 제자로 삼아 준다는 것은 이 후배로서는
감지덕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후배가 배운 것은 가전무공(家傳
武功)입니다. 달리 명사를 찾으려고 한다면 가친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법이기도 하고 무림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목고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말은 맞다. 그러나 자네의 재간은 무공이라고 할 수가 없어.
너의 아버지 역시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오늘 이 어르신께서는 갑
자기 흥이 나서 너를 제자로 거두어들이려고 하는 것인데 이후 그
와 같은 흥취가 있을런지 알 수 없다. 인연이란 것은 우연히 만나
게 돼야지 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다. 내가 보기엔 네 녀석은
매우 영리한 것 같은데 어찌 그리도 멍청하게 구느냐? 서로 이렇
게 하자. 너는 먼저 나를 사부로 모시고 그후에 내가 너의 아버님
께 이야기하도록 하자. 그러면 그도 감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임평지는 마음이 움직이는 듯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목 대협, 이 후배의 부모님은 청성파에 잡혀 있으며 생사를 알
수 없읍니다. 목 대협께서 구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이 후배
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목 대협의 어떤 분부라해도 받들겠읍
니다.]
목 대협은 노해 말했다.
[뭐라고? 너는 나에게 흥정을 하자는 것이냐! 네 녀석이 뭐가
대단하다고 반드시 너를 제자로 삼아야 한단 말이냐? 네가 감히
나에게 조건을 내걸어? 허! 별일 다 보겠군!]
여창해가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두 쪽으로 찢어죽이지 않은 것
은 달리 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여
창해 같은 사람이 속임수에 넘어갈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강호의 소문이 십중팔구 맞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임씨
집안의 벽사검보는 대단할 것이다. 이 녀석을 제자로 삼기만 한다
면 무학의 비급은 조만간 자기의 손에 들어올 것이 아니겠는가?
[빨리 절을 해라, 세 번 절을 하면 너는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다. 제자의 부모를 어찌 사부가 모른 체하랴? 여창해가 나의 제자
의 부모를 잡아갔다면 내가 그에게 가서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더
라도 명분이 서는 일이니 그가 어찌 사마을 내놓지 않겠느냐?]
임평지는 부모님을 복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부모님께서는 간악한 자의 수중에 떨어져 하루를 일 년처럼 보
내고 계실 것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두 분을 구해내야 한다.
내가 일시 굴욕적인 입장이 되더라도 그를 사부로 모셔서 그가 우
리 아버님과 어머님을 구해내기만 한다면 그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그는 즉시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 절을 하려고 했다. 목고봉은
그가 후회를 할까봐 손을 벋어 그의 머리에 얹고는 앞으로 눌렀
다.
임평지는 본래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힘을 주어 내
리 누르자 속으로 반감이 일었다. 다리와 목에 힘을 주어 버텼고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 했다. 목고봉은 노해 부르짖었다.
[감히 절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리고 손에 힘을 더했다. 임평지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복위표국의 소국주로서 한 평생 남에게 떠받들리기만 했을 뿐 굴
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이미 큰
절을 하기로 결심을 했지만 목고봉이 손을 뻗어 내리누르니 오히
려 그의 고집스런 본성을 불러일으킨 셈이 되었다. 그는 큰 소리
로 외쳤다.
[당신이 저의 부모님을 구한다고 응낙한다면 저는 당신을 사부
로 모시겠읍니다. 지금 나 보고 절을 하라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목고봉은 말했다.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어디 두고 보자. 정말 절대로 있을 수
없는지.]
그리고 더욱 힘을 가했다. 임평지는 허리에 힘을 주어 버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머리 위에 천 근이나 되는 바위가 내
리누르는 것 같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애써 버티었다. 목고봉은 다시 손에 부쩍 힘을 가했다. 임평
지는 자기의 목뼈가 '우두둑' '우두둑' 하며 어긋나는 소리를 들
었다. 목고봉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네가 큰절을 하지 않겠다고? 내가 손에 다시 힘을 가
하게 된다면 너의 목뼈는 부러지게 될 것이다.]
임평지의 머리는 한 치 한 치 아래로 숙여지게 되었다. 이제는
땅바닥과 한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임평지는 애써
부르짖었다.
[나는 절을 하지 않겠다! 죽어도 절을 하지 않겠다!]
목고봉은 말했다.
[어디 두도보자!]
그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임평지의 이마가 다시 두 치 정도 아
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바로 이때였다. 임평지는 갑자기 등에 은은한 온기를 느꼈다.
부드러운 힘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고 머리 위의 압력이 별안간 가
벼웠졌다. 두 손으로 땅바닥을 밀면서 몸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임평지는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목고봉 역
시 깜짝 놀라게 되었다. 조금 전 목고봉은 어떤 힘이 자기 손의
내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느꼈다. 그와 같은 힘은 무림에서 명성
이 자자한 화산파의 자하공(紫霞功) 같았다. 소문에 듣건데 이 내
공(內功)은 노을(霞)과 같이 처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기척을 느
낄 수 없으나 거기에 실린 힘은 지극히 강하고 질긴 것이라고 나
중에는 하늘을 덮고 땅을 뒤덮어 버리고 그 기세는 감당할 수 없
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하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목고봉은 놀람과 의아함 속에서 다시 손을 뻗어 임평지의 머리
를 잡고 내리누르려고 했다. 그런데 땅과 임평지의 머리가 막 부
딪치려 할 때 임평지의 머리 위에서 다시 한 줄기의 부드러우면서
도 강한 내력이 솟아올랐다. 따라서 두 기운이 충돌하게 되었다.
목고봉은 손과 팔이 마비될 것 같았고 가슴도 아파옴을 느꼈다.
그는 두 걸음 물러서며 점점 웃었다.
[하하하, 화산파의 악형이시오? 어째서 담장가에 숨어 이 꼽추
를 놀린단 말이오?]
그러자 담장 모퉁이 뒤쪽에서 한 사람이 소리도 없이 그림자처
럼 걸어왔다. 청삼(靑衫)을 걸친 서생(書生)이었다. 무릎을 가리
는 장포에 보라색 띠를 허리에 질끈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섭선을
들고 한가롭게 흔들고 있었다. 표정은 매우 소탈해보였으며 여유
있어 보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목형, 몇 년 보지 못했지만 풍채는 여전하구료. 정말 축하할
일이외다.]
목고봉은 그 사람이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 군자검 악불군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예전부터 악불군을 여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가 친히 손을 써서 무공이 평범한
녀석을 몰아 세우고 있는 광경을 군자검 악불군에게 발각당하고
악불군이 손을 써서 이 젊은이를 구해내게 되자 그로서는 매우 겸
연쩍은 입장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헤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악형, 갈수록 더 젊어지시는구료. 이 곱추는 정말 그대를 사부
님으로 모시고 음양채보(陰陽採補)라는 술법을 배우고 싶구료.]
악불군은 형형한 눈빛이 되어 엄숙히 말했다.
[꼽추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구나. 엣사람끼리 얼굴을 마주치게
되었다면 그간 있었던 일을 인사로 나눌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이지? 내가 언제 그와 같은 사악한 무공을 배웠
다고 그러는가?]
목고봉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음양채보의 재간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믿지 않
을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대는 육십이 다 되었는데도
반로환동(返老還童)한 듯이 얼핏 보기에 이 꼽추의 손자처럼 보이
냔 말이외다.]
임평지는 목고봉의 손이 풀어지는 순간 즉시 몇 걸음 뒤로 물러
나 있었다. 그리고 서생을 바라보았다. 그 서생은 검고 윤이 나는
턱수염을 탐스럽게 기르고 있었다. 얼굴은 관옥처럼 빛나고 있었
다. 의젓하고 당당한 기상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
로 우러러 보는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사람이
자기를 구했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목고봉이 그를 화산파의 악형
이라고 부르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 신선 같은 인물이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 악불군이란 말인
가?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불과 사십여 세밖에 되지 않은 것 같
다. 노덕약은 그의 제자인데도 훨씬 늙어 보이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목고봉이 악불군에게 주안술(주안술)을 익혔다고 칭찬을
하게 되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머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 무림고수들은 내공이 상당히
심후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불로장수할 뿐 아니라 진짜로 반로환
동하신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 악선생은 내공이 상상도 못할 정도
로 심후하겠구나!)
그는 흠모하는 마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악불군은 횃불같이 형형한 눈동자로 복고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만나자마자 좋은 말은 하지 않는군. 이 젊은이는 효자
일 뿐 아니라 의협심이 강한 인재로서 그대가 좋아하는 것도 무리
가 아니외다. 그가 오늘 여러 가지 화를 입게 된 것은 모두가 당
시 복주에서 의협심을 내세워 불초의 딸인 영산(靈珊)을 구햇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오. 따라서 나로서는 구경만 할 수 없으니 당
신은 나의 얼굴을 보아서 손을 떼시기 바라오.]
목고봉은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뭐라고요? 이 녀석의 재간으로 영산을 구했단 말이오? 아마도
그 반대이겠지. 영산이 이 녀석의 반반한 얼굴을 보고 마음이 움
직여......]
악불군은 이 꼽추가 거칠고 속되기 이를데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음 말은 좋은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즉시 말을 가로
챘다.
[강호에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구원해야 하며 자기 자신
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구해야하는 것이오. 결코 무예가 높
아야 협사가 되는 것은 아니오. 목형 그대가 이 젊은이를 제자로
삼기로 결심을 했다면 이 젊은이의 부모에게 말씀을 드린 후 다시
그를 귀파의 문하로 끌어들여야 할 것이 아니오?]
목고봉은 악불군이 가운데 끼어드는 것을 보고 이 일은 자기의
뜻대로 되기 어렵다고 짐작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꼽추가 일시 흥이 나서 제자로 거둘려고 했으나 지금은 흥
미가 없소. 이 녀석이 나에게 만 번 절을 해도 나는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왼발을 살짝 쳐들어 '퍽' 하고 임평지를 걷어차 수
장 밖에 나가 떨어지게 했다. 이 한 수는 악불군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터였고 그가 발을 쳐들어 걷어차리라고는 사전에 조금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손을 써서 막을 여유가 없었다.
임평지는 나가 떨어진 후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목고봉을 노려보았다.
악불군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감히 내 앞에서 경거망동을 하다니! 앞으로 조심하시오.]
목고봉은 웃으며 말했다.
[악형, 안심하시오. 이 꼽추에게 하늘과 같이 큰 용기가 있다해
도...... 하하하! 나는 당신마저 이 일에 개입할 줄은 몰랐소이
다. 우리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그러나 저러나 화산파가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도 벽사검보에 혈안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
지 못했소.]
그렇게 말하면서 목고봉은 공손히 예를 하고 뒤로 물러섰다.
악불군은 한 걸음 다가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봐, 방금 뭐라고 했는가?]
별안간 그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노을빛은 삽
시간에 사라졌고 하얀 얼굴이 되살아났다.
목고봉은 그의 얼굴에 자색기운이 돌았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화산파의 자하공이군! 악불군은 무공이 신비할 뿐 아니라
무시무시한 내공을 연성한 사람이다. 이꼽추는 그의 비위를 거슬
릴 수 없지.)
그는 악불군을 향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역시 벽사검보가 무엇인지 모르오. 다만 청성파의 여창해가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고 했기에 함부로 주워 섬긴 것이오. 헤헤
헤...... 내가 지나친 말을 했다면 헤헤...... 취소하겠읍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갔다.
악불군은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한숨
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무림에서 그와 같은 무공을 지닌 사람도 드물다. 그런데 스스
로 좋아서......]
그는 '스스로 좋아서 비천하게 군다' 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둔
것이었다. 별안간 임평지가 악불군 앞에 무릎을 끓더니 연신 큰절
을 올리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이 제자를 거두어 주십시오. 제자는 가르침을 지키
겠읍니다. 문규를 엄히 지키고 결코 사명을 잃는 일은 하지 않겠
읍니다.]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제자로 거둬들인다면 목 꼽추가 등 뒤에서 내가 그
의 제자를 가로챘다고 헛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임평지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자는 사부님을 뵙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흠모의 정이 생겼
읍니다. 이것은 이 제자가 성심성의로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신 큰절을 올렸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좋다. 내 너를 거두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넌 아직도 부모님에
게 알리지도 않았잖느냐. 그리고 그분들이 응낙할지도 모르는 일
이다.]
임평지는 말했다.
[제자로 거두어 주신다면 저희 부모님은 기뻐했으며 기뻐했지
허락하지 않을 리가 없읍니다. 저희 아버님과 어머님은 청성파의
악적들에게 잡혀 있으니 사부님께서 아무쪼록 그분들을 구해 주십
시오.]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거라, 우리는 너희 부모를 찾으러 가자.]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덕약, 산(珊)아 너희들도 나오너라.]
그러자 담장 뒷모퉁이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걸어나왔다. 바로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도달해 있었으나 악불군은 그들에게 목고봉이 떠날
때까지 숨어 있으라고 했던 것이다. 왜냐 하면 사람이 많을수록
목고봉의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노덕약은 기뻐하며 축하
를 했다.
[사부님께서 새로이 제자를 거두어들이셨군요. 기쁘기 그지없읍
니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평지, 너는 이 몇 분 사형들을 그 조그만 찻집에서 이미 만나
보았을 것이다. 이제 사형들께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늙은이는 바로 둘째 사형 노덕약이었다. 체구가 우람한 사람은
세째 사형인 양발(梁發)이었다. 그리고 네재 사형은 시대자(施戴
子)였다. 손에 언제나 주판을 들고 있는 사람은 다섯째 사형인 고
근명(高根明), 여섯째 사형은 육후아라는 별명을 가진 육대유(六
大有)였다. 그들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밖에 일곱째
사형 도균, 여덟째 사형 영백나(英白羅)는 젊은 제자였다. 임평지
는 일일이 인사를 올렸다.
갑자기 악불군의 등 뒤에서 간들어진 웃음소리와 더불어 곱고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님, 아버님. 저는 사저가 되나요. 사매가 되나요?]
임평지는 어리둥절해졌다. 말하는 음성으로 미루어 보아 화산파
의 제자들이 모두 그녀를 소사매라고 부르는 소녀 같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사부의 딸이 아닌가? 이때 악불군의 청포자락 뒷쪽에
서 희고 고운 얼굴이 반쯤 나타났다. 까맣고 예쁜 눈동자를 또르
르 굴리며 임평지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는 부끄러운지 악불군의
등 뒤로 사라져 버렸다. 임평지는 생각했다.
(그 소사매라는 소녀는 곰보투성이의 얼굴이었는데 갑자기 미인
으로 변했구나! 거 참 이상하다!)
그녀가 고개를 살그머니 내밀었다가 움추린 행동은 빨랐고 달빛
이 몽롱하여 똑똑히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소녀의 용모가 아
름답다는 것만은 절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곰보처럼 변장을 하고 복주성 밖에서 술을 팔았다고 했으
며, 정일사태는 그녀를 왜 그처럼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느냐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추악한 모양은 일부러 면장을 한 것일게
다. 틀림없다!)
이때 악불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너보다 입문한 것이 늦다고 해도 모
두들 너를 소사매라고 부르지 않느냐? 너는 사매가 되어야 할 운
명이니 자연 이번에도 사매가 되는 것이다.]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안 돼요. 이제부터 저는 사저가 될 거예요. 아버지 임(林) 사
제가 나를 사매로 부르게 된다면 이후 아버님이 다시 백 명이나
이백 명의 제자를 거두어들인다 해도 모두들 나를 사매라고 부를
거예요.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웃으면서 악불군의 등 뒤에서 걸어나왔다.
달빛 아래 임평지는 어렴풋이 갸름하고 어여쁜 얼굴을 볼 수 있었
다. 그리고 흑백이 분명한 한 쌍의 눈동자는 그의 얼굴을 쏘아보
고 있는 게 아닌가? 임평지는 뛰는 가슴을 진정한 후 말했다.
[악사저, 소제는 오늘에야 은사님을 사부로 섬기게 되는 행운을
얻었읍니다. 입문(入門)을 먼저 한 사람이 윗어른이니 소제는 자
연히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악영산은 크게 기뻐서 부친에게 말했다.
[아버님, 그 스스로 저를 사저라고 불렀어요. 결코 제가 강요한
건 아니예요.]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나의 문하로 들어왔는데 너는 벌써 '강요' 라는 한 마디
의 말을 쓰는구나. 따라서 그가 내 문하의 제자들이 모두 너처럼
아랫사람을 억압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먼저 겁부터 집어먹게 되
지 않겠느냐?]
그 말에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
악영산은 말했다.
[아버님, 대사형은 이곳에 숨어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여
창해라는 못난 도사에게 일장을 더 맞았으니 지금 매우 위험한 상
태에 놓여 있을 거예요. 우리 그분을 찾아보도록 해요.]
악불군은 눈쌀을 한번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고근명, 시대자, 너희 두 사람은 가서 대사형을 떠메고 나오너
라.]
고근명과 시대자는 일제히 대답을 하고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곧이어 두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사형은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방 안엔 아무도 없읍
니다!]
곧이어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이 촛불에 불을
붙인 것이다.
악불군은 더욱 눈쌀을 찌푸렸다. 그는 기녀원이란 더러운 곳으
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노덕약에게 말했다.
[네가 들어가 살펴 보아라.]
노덕약은 대답하고 창문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악영산은 말했다.
[저도 가 보겠어요.]
악불군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무슨 짓이냐? 저곳이 뭐하는 곳인지 알고나 있느냐?]
악영산은 다급해져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러나 대사형은 몸에 중상을 입고 있어요.
......아마도 그는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
악불군은 나직이 말했다.
[걱정마라. 그는 항산파의 천향단속교를 발랐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악영산은 놀람과 기쁨에 넘쳐 말했다.
[아버님, 아버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악불군은 말했다.
[나직이 말해라. 그리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영호충은 중상을 입고 다시 여창해의 장풍에 얻어맞게 되자 상
처가 격렬하게 아파왔다. 거기다 몇 모금의 피까지 토한 몸이었
다. 그러나 정신은 맑았다. 그는 목고봉과 여창해가 다투는 소리
를 듣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물러간 이후 다시 사부가 도달하는
기척을 들었다. 그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지만 사부님만은 두
려워했다. 사부님과 목고봉이 말하는 소리를 듣자 그는 자기가 너
무 터무니없는 행동을 했으니 사부께서 어떤 책벌을 내릴지 모른
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처의 아픔을 잊고 몸을 침대 쪽으로 돌리
며 말했다.
[큰일났소. 나의 사부님이 오셨으니 빨리 도망칩시다.]
그리고 그는 벽을 짚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곡비연은 의림을 끌고 이불 속에서 나와 그의 뒤를 따랐다. 영
호충은 신음소리를 내며 때때로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재빨
리 부축을 했다. 영호충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부축을 받고 한
곳의 복도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속으로 사부의 이목이 영
리하기 이를데 없으니 밖으로 나갔다간 즉시 그에게 발각당할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니 오른쪽에 커다란 방이 있었다. 즉
시 방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문을......문과 창문을 닫으시오.]
곡비연은 그 말에 따라 문을 닫고 창문도 닫았다. 영호충은 더
지탱할 수 없는 듯 침대 위에 드러누우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를 부르는 음성
이 들려왔다.
[대사형은 이 곳에 없나 보다. 우리는 가자.]
영호충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놓았다.
잠시 후 발걸음을 죽이며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소리가 들려왔
다. 그 사람은 나직이 불렀다.
[대사형. 대사형.]
바로 육후아였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역시 육후아는 나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구나!)
그가 대답을 하려고 하자 침대 모기장이 흔들거렸다. 바로 의림
이 누가 찾아온 기척을 듣고 떨고 있는 것이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내가 대답을 하게 된다면 저 여승에게 안 좋은 소문이 나겠
지?)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육후아가 창 밖을 지나가면서
대사형, 대사형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갔고 잠시 후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곡비연은 침묵을 깨뜨리고 말했다.
[이봐요, 영호충! 그대는 정말 죽게 되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내가 죽을 것 같소? 내가 죽으면 항산파의 명성을 크게 더럽힐
것이니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노릇이 아니겠소?]
곡비연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것은 어째서죠?]
영호충은 말했다.
[항산파의 영양을 밖으로 바르고 안으론 먹었소. 그런데도 여전
히 치료할 수 없다면 이 영호충은 크게...... 항산파의 사매에게
죄를 짓는 꼴이 되지 않겠소?]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맞았어요. 그대가 죽는다면 너무 미안한 노릇이예요.]
의림은 그가 무서운 상처를 입고도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을 보
고 그의 용기에 탄복하는 한편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영호 오라버니, 또다시 여관주의 일장을 맞았잖아요. 어디 상
처 좀 봐요.]
영호충은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곡비연은 말했다.
[호호호..... 새삼스럽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누워 계
세요.]
영호충은 전신의 기운이 쑥 빠져 그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곡비연은 촛불에 불을 당겼다. 의림은 영호충의 옷자락이 모두
선혈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남녀간이 지켜야 할 예의도
버리고 가만히 그의 장포를 들췄다. 그리고 세수대야를 놓는 시렁
위에 걸린 한 조각의 수건을 가져와 상처 주위를 닦아냈다. 그리
고 품에 갈무리했던 천향단속교를 모조리 그의 몸 위에 발라 주었
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이 같은 진귀한 영약을 나의 몸에 모두 낭비하다니 너무 아깝
군!]
의림은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는 저 때문에 이와 같은 중상을 입었으니 그까짓
약은 고사하고 설사...... 설사...... .]
거기까지 말했으나 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고 한참 머뭇거
리다가 말했다.
[저희 사부님께서도 그대는 의협심이 강하고 용감한 젊은 영협
이라 했어요. 그와 같은 말 때문에 사부님과 여관주가 언쟁을 벌
이기도 했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칭찬은 필요 없소. 사태 어르신께서 나를 욕하지 않는다면 그
것만으로도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려야 할거요.]
의림은 말했다.
[저희 사부님께서...... 어찌 그대를 욕한단 말이예요? 영호 오
라버니, 이곳에서 열두 시진만 정양을 하여 상처가 다시 파열되지
만 않는다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녀는 세 알의 백운웅담환을 그에게 먹였다.
곡비연은 갑자기 말했다.
[언니는 이곳에 남아서 나쁜 사람이 다시 나타나 오라버니에게
해를 입히지 않도록 보호하세요. 할아버지께서 저를 기다리고 앴
어서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의림은 다급히 말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대는 가면 안 돼요. 나 혼자...... 어
떻게 이곳에 있는단 말이예요?]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영호충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어재서
혼자 남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등을 돌려 떠나려 했다. 의림은 초조한 나머지 앞
으로 나갔다. 그녀는 다급한 김에 항산파의 금나수법을 펼쳐서 그
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고 말했다.
[가지 말아요!]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무공을 쓸 참이예요?]
의림의 얼굴을 붉히며 손을 놓고 부탁했다.
[소저, 제발 나와 함께 있어 줄께요. 영호충이 나쁜 사람도 아
닌데 어째서 그대는 그토록 그를 두려워 해요?]
의림은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곡 소저, 내가 아프게 잡진 않았나요?]
곡비연은 말했다.
[아프진 않아요. 그러나 영호충은 매우 아픈 것 같아요.]
의림은 놀라 모기장을 들추고 바라보았다. 영호충은 두 눈을 꼭
감고 조용히 잠이 들어 있지 않은가?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코
앞에 대 보았다. 숨 쉬는 간격이 고르고 평온해 보여 그녀는 마음
을 놓았다.
그때 갑자기 곡비연이 킥 웃는 소리가 들리고 창문 닫히는 소리
가 났다. 의림은 급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이미 창문으로 나간
후였다.
의림은 대경실색하여 일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침대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 영호 오라버니, 그녀...... 그녀가 갔어요.]
이때는 약기운이 한참 퍼질 때라 영호충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
는 상태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림은 전신을 떨며 두려움
이 엄습해옴을 느꼈다.
한참 후 그녀는 창문을 닫아 걸고 생각했다.
(내가 빨리 이곳을 떠나야지. 영호 오라버니가 깨어나게 되고
나에게 말을 걸면 난 어떻게 하지?)
그리고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그가 이토록 심한 상처를 입었으니 지금 어린애라고 해도 목숨
을 앗아갈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돌보지 않고 여길 떠난단 말인
가?)
어둠 속 멀리 골목길 안에서 간혹 개짖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
다. 주위는 조용했다. 기녀원의 사람들이 이미 멀리 도망가고 없
었다. 모기장 안의 영호충과 그녀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침대 모서리에 앉아 물끄러미 영호충의 얼굴을 내려다보
았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칼날같은 눈썹과 붉은 입술 때
문에 준수하기 이를데 없었다. 의림은 가만히 손가락을 내밀어 그
의 입술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불에 데인 듯 손을 움추리며 얼굴
을 붉혔다. 그녀는 넋을 잃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사방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개벽이 가까와
진 것이다. 의림은 정신을 차렸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모여들게 될 것이다. 그때 난 어떻게 하
지?)
그녀는 어려서 출가하여 한 평생 정일사태의 돌봄을 받고 자랐
기 때문에 이 세상을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
다. 그저 초조하게 애를 태울 뿐 어떤 방법도 떠올리지 못했다.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서너 명이 골목길에서 걸어오는 것
같았다. 사방은 적막하고 발걸음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
사람들은 기녀원 문 앞에 이르더니 발을 멈추었다. 이때 한 사람
이 말했다.
[너희 두 사람은 동쪽을 수색해. 우리는 서쪽을 수색할테니, 만
약 영호충을 만나게 된다면 사로잡아야 해. 그는 부상을 입었으니
항거하지 못할 것이다.]
의림은 그 말을 듣게 되자 놀라고 당황했다. 더우기 그 사람이
영호충을 잡으러 왔다는 말에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떻게 하더라도 영호 오라버니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 결
코 그가 나쁜 자의 손에 들어가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생각이 들자 놀람과 두려웠던 마음이 일시에 사라지고
머리도 맑아지게 되었다. 그녀가 침대가로 다가가 요의 천을 틀어
영호충의 몸을 감쌌다. 촛불을 끈 다음 가만히 방문을 나섰다.
이때는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람소리가 들려
온 곳과 반대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삽시간에 한
군데 채소밭을 가로질러 뒷문 쪽으로 오게 되었다. 문은 반쯤 닫
혀 있었다. 원래 기녀원의 사람이 도망을 치면서 뒷문을 닫지 않
았던 것이다. 그녀는 영호충을 비스듬히 안아 들고 뒷문을 나섰
다. 그리고 골목길을 따라 달렸다. 얼마 후 성벽가에 이르게 되자
속으로 생각?杉?
(성을 빠져나가야 한다. 형산성 안에는 영호 오라버니의 원수가
너무나 많다.)
그녀는 성벽을 따라 질풍처럼 달렸다. 성문에 도달하게 되자 급
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단숨에 칠 마장을 달렸다. 그녀는 황량한 산 속을 향해 자꾸만
깊이 들어갔다. 나중에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깊은 계곡에 들어
서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심신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 영호충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자기를 쳐
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영호충의 웃음을 보자 당황하??두 손이 떨려 하마터면
그의 몸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어머' 하는 소리와 함께 급
히 경봉보경(敬棒寶經)의 일 초를 써서 몸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
그를 똑바로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바람에 돌부리를 걷어차게
되고 휘청하며 앞으로 몇 걸음 내달은 후에야 가까스로 몸을 가누
고 설 수 있었다.
[미안해요. 상처를 건드리진 않았나요?]
영호충은 빙긋 웃었다.
[이제 괜찮소. 좀 쉬도록 하시구료.]
의림은 조금 전 청성파 제자들의 추격을 피하는 데만 온정신을
쏟고 있었다. 오직2 한마음 한뜻으로 어떻게 해야 영호충이 상대방
의 독수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 자기의 몸 생각
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안정이 되자 온몸이 쑤시고 결
려 왔으며 뼈마디 마디가 모두 흩어지는 것 같았다. 간신히 영호
충을 풀밭 위에 내려놓고는 서 있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달리기에 바빠서 기식을 조절하는 것을 잊었구료. 그것
은 무공을 익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꺼리는 것이오. 그
러면...... 쉽게 ?纂낯?입게 되오.]
의림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의 가르침에 감사 드려요.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
셨는데 마음이 다급해져 잊고 말았어요.]
잠시 후 그녀는 다시 물었다.
[상처는 어떠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이제 아프지 않소. 약간 근질거릴 뿐이오.]
의림은 크게 기뻐했다.
[좋아요! 좋아요! 상처가 근질거리는 것은 치유될 조짐이예요!
이토록 빨리 낫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영호충은 그녀가 무한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
았다. ?榴?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모두가 항산파의 영약 덕분이오.]
그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증오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애석하게도 내가 중상을 입고 있기에 건달 녀석들에게서 도망
을 쳐야 했고 그대가 고생을 하게 되었소. 조금 전 청성파 녀석들
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면 죽는 것은 물론이고 별의별 욕을 다
당하게 되었을 것이오.]
의림은 말했다.
[알고 보니 모두 듣고 계셨군요?]
그녀는 자기가 그를 안고 오랫동안 달렸던 사실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바라보았다는 2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영호충은 그녀가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줄도 모르고 너무 빨리
달렸기 때문에 지쳐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사매, 타좌(打坐)하여 잠시 쉬도록 하시오. 그리고 귀파의 심
법으로 내식을 조절하여 내상을 입지 않도록 하시오.]
의림은 말했다.
[녜.]
대답을 마치고 그녀는 단정히 앉았다. 그리고 사문(師門)의 심
법으로 호흡을 조절했다. 그러나 마음이 번거롭고 답답해서 시종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눈을 ?煞?영호충을 바
라보았다. 그의 상처에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가 자기를
보고 있지는 없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눈을 들어 바라볼때 마
침 영호충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눈을 감았다.
영호충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의림은 두 뺨을 붉히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어째서...... 어째서 웃으시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대는 나이가 어리고 좌식법(坐息法)이 얕
아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을 것이니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마시오2.
정일사태께서 그대에게 무공을 연마할 때 너무 서두르면 커다란
장해를 일으킨다고 가르쳤을 것이외다. 내식을 조절할 때는 마음
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해야 되오.]
그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대는 안심하시오. 나는 원기를 점차 회복하고 있소. 청성파
의 그 녀석들이 다시 쫓아온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
가 없소. 나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엉덩이를 뒤로
한...... .]
의림은 미소했다.
[평사낙안식을 펼치게 하겠다는 것이죠?]
영호충은 웃으며2 말했다.
[맞았소. 정말 잘 대답했소. 그러나 엉덩이를 뒤로 하고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품위가 없는 말이라오. 우리는 이후 '우아한 평
사낙안식' 이라고 합시다.]
말을 마친 그는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의림은 말했다.
[더 말하지 마세요. 한숨 자도록 하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저희 사부님도 유 대협의 장원에 도달하셨을 것이오. 나는 즉
시 유 대협의 집으로 가서 구경을 했으면 하오.]
의림은 그의 입술리 말라터지고 다만 눈동자만이 별처럼 빛나는
것을 보고 너무 피를 많2이 흘려서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제가 물을 찾아와 마시도록 해 드릴께요. 목이 타시죠?]
영호충은 말했다.
[길을 오다 봤는데 왼쪽 언덕 아래에 수박밭이 있읍디다. 그대
는 그 수박을 몇 통 따오도록 하시오.]
의림은 말했다.
[좋아요.]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서 안쪽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나 한푼
의 돈도 없었다.
[영호 오라버니, 돈 지닌 것 있으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뭘 하려고?]
[수박을 사려고요.]
영호충??웃으며 말했다.
[사기는 뭘 사오? 그저 몇 통 따오면 될 것을! 부근엔 인가도
없고 수박을 심은 사람은 반드시 먼 곳에 살고 있을 텐데 그 누구
에게 산다는 말이오?]
의림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돈을 주지 않고 가로챈다는 것은...... 훔치는 것이예요. 이것
은 오계(五戒)가운데 두 번째 계율을 어기는 것이니 안 되어요.
돈이 없다면 그들에게 동냥을 해야겠지요. 수박 한 통 달라면 그
들도 마다 하지는 않을 거예요.]
영호충은 귀찮아졌다.
[그대는 나이 어린...... .]
그는 ?뻔?나이 어린 멍청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처럼
힘을 써서 자기를 구한 사실을 상기하고 말을 중도에서 멈추었다.
의림은 그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떠오르는 것은 보고 더 말하지
못했다. 그의 말을 따라 왼쪽으로 나아갔다. 이 마장쯤 나갔을 때
아니나 다를까 쾌 넓은 수박밭이 있었는데 수박이 이렁마다 가득
익어 있었다.
나무 위에선 매미가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울어대고 햇빛은 온
누리에 떨어져 내릴 뿐 사방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영호 오라버니는 수박을 먹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2 이 수박은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어찌 함부로 훔칠 수 있으랴!)
그녀는 재빨리 높은 언덕 위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원두막이나 농가 한 채 보이지 않
았다. 그녀는 부득이 되돌아와 수박밭에 서서 한참 동안 망설였
다. 손을 뻗어 수박을 다려다 다시 손을 움추리기를 몇 차례에 걸
쳐 반복했다. 사부가 타이르던 말씀이 떠올랐다.
(결코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그 생각을 하자 수박에 손을 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뇌
리에 영호충의 바짝 2마른 입술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를 올렸다.
(보살님, 굽어 살펴 주옵소서. 제자는 일부러 훔치려는 것이 아
니라 영호 오라버니...... 께서 수박을 먹자고 하기에...... .)
그녀가 생각해 볼 때 영호 오라버니가 수박을 먹고자 하는 것은
적당한 이유가 못 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초조해진 나머지 눈물
이 글썽거리게 되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두 손으로 수박을
한 통 따서 위로 들어 올렸다. 수박이 그녀의 품에 안기자 생각했
다.
(상대방은 너의 목숨을 2 구하려고 했다. 너는 그를 위해 지옥으
로 들어가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니
냐?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의림이 지은 짓
이니 영호 오라버니에겐 잘못이 없어.)
그녀는 수박을 들고 영호충의 곁으로 돌아왔다.
영호충은 세속적인 예의와 규칙 같은 것을 한번도 안중에 둔적
이 없었다. 의림이 수박을 얻기 위해 동냥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
고 의림이 철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녀가 한 통의 수박을
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음의 고통을 당해야 했?쩝測?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수박을 따서 돌아오자 크게 기뻐 칭찬
을 했다.
[정말 착한 사매로군!]
의림은 갑자기 그가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자 기쁘고 놀란 나
머지 수박을 떨어뜨릴 뻔했다. 급히 옷자락으로 수박을 감싸듯 안
았다. 영호충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예 그처럼 당황해 하시오? 수박을 훔쳤으니 그 누가 그대를 잡
을까봐 두렵소?]
의림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예요. 날 잡으려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리고 천천히 영호충의 곁에 앉았다.
이때 햇2살은 눈부시게 이 산과 저 산의 푸른 나무들을 찬란히
비춰 주고 있었다. 영호충과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산 그늘 쪽이
라 햇살이 비춰들지 않았다. 온 산의 나무들은 어제 내린 빗물에
씻긴 후라 더욱 푸르러 보였고 산바람이 싱그럽게 불어 왔다.
의림은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부러진 검끝을 보자 떠오
르는 생각이 있었다.
(전백광 그 악인은 무공이 그토록 뛰어나니 그날 만약 영호 오
라버니가 목숨을 던져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무사하게 이
곳에 앉아 잇을 수 없었을 거야!)
?嫄?바라보니 영호충은 두 눈이 움푹 꺼져 있었고 얼굴은 창백
했다.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내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꺼야. 이까짓 수박 하나 훔치는 게 뭐가 대수롭겠어?)
이 같은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옷자락으로 단
검을 깨끗이 닦은 후 수박을 갈랐다. 신선한 과일 냄새가 풍겼다.
영호충은 냄새를 몇 번 맡아보더니 말했다.
[잘 익었는데!]
조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매, 수박을 보니 한 가지 우스갯소리가 떠오르는군2! 금년 대
보름날 우리 사형제와 사매가 모여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이때 사
매가 수수께끼를 냈소. 그것은 '왼쪽에 한 마리 작은 개가 있고
오른쪽에 한 개의 오이가 있다' 라는 문제인데 풀이하면 한 글자
(一字)가 되는 것이었소. 그날 마침 왼쪽에 앉아 있는 것은 우리
여섯째 사제인 육후아였소. 바로 어젯밤 집안으로 들어와 나를 찾
던 그 사제요. 그리고 나는 그녀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소.]
의림은 미소했다.
[그녀가 그와 같은 수수께끼를 낸 것은 그대와 육 사형을 조롱
하는 것이었군요?]
2
영호충은 말했다.
[맞았소. 그 수수께끼응 어렵지 않았소. 바로 이 영호충의 호
(狐)였소. 그녀는 그 우스갯소리를 책에서 보았다고 했소. 그런데
마침 여섯째 사제가 그녀의 왼쪽에 앉아 있었고 내가 오른쪽에 앉
아 있었소. 공교롭게도 지금 나의 곁에는 이쪽에 조금만 개 한 마
리가 있고 이쪽엔 한 통의 커다란 수박이 놓여 있군요!]
그러면서 그는 수박을 가리키고 다시 그녀를 가리키며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의림은 방금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대는 말을 돌려 저를 못난 개라고 욕2하는군요.]
그러면서 그녀는 수박을 조각조각 내서 씨를 뽑고 한쪽을 영호
충에게 주었다. 영호충은 한 입 깨물었다. 달콤한 맛과 향긋한 냄
새가 입 안에 가득 찼다.
의림은 그가 매우 맛있게 먹는 것을 보자 마음이 무척 흐뭇해
졌다.
그의 앞자락에 수박물이 떨어져 얼룩이져 있었다. 그녀는 두째
번의 조각은 조그맣게 잘라서 그에게 건네 주었다. 한 입에 한 조
각씩 먹게 된다면 수박물을 옷자락에 흘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었다. 그가 손을 뻗어 수박을 받을 때마다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
?年? 의림은 마음속으로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 조그맣게 잘라진
수박을 한 조각씩 그의 입에 대 주었다.
영호충은 수박 반 통을 먹고 나서야 의림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깨닫고 말했다.
[그대도 들도록 하구료.]
의림은 말했다.
[그대가 다 먹고 난 후 먹을께요.]
영호충은 말했다.
[나는 배가 부르오. 이제 그대가 먹도록 하시오.]
의림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영호충에게 몇 조각 더 먹인 이
후에야 겨우 한 조각의 수박을 입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영호충은 눈길 한 번2 돌리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녀는 부끄러워 몸을 돌렸다.
영호충은 갑자기 칭찬의 말을 했다.
[와! 정말 아름답군!]
그 말 속에는 즐거워하는 빛이 가득했다. 의림은 크게 부끄러웠
다. 속으로 자기를 보기 좋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동시에
몸을 일으켜 도망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야말로 몸둘바를 모
를 정도가 되었다. 온몸이 후끈 달아 오르고 부끄러워 목덜미까지
빨갛게 붉어졌다.
영호충은 다시 말했다.
[저것 보시오. 얼마나 아름답소? 어떻소?]
의림은 몸을 2 돌렸다. 그의 손끝을 바라보니 멀리 무지개가 한
그루 나무 뒤에서 뻗어나와 일곱 색깔의 빛을 영롱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그제서야 그녀는 보기 좋다는 것이 바로 무지개를
가리킨 것임을 알았다. 방금 자기가 그 뜻을 오해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다시 부끄러워졌다. 그러면서 웬지 허전하고 그가 얄미
웠다. 조금 전 속으로 겸연쩍어 하면서도 기뻐하던 심정과는 퍽
다른 것이었다.
영호충은 말했다.
[자세히 들어보시오. 들리오?]
의림은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무지개가 피어오른 2 곳에서 은연
중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폭포가 있는 것 같군요.]
영호충은 말했다.
[바로 그렇소. 비 때문에 산 속 도처에 폭포를 이루게 되었을
것이오. 우리 따라가 봅시다.]
의림은 말했다.
[그대는...... 그대는 역시 좀더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거예
요.]
[이곳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얽혀 있을 뿐 볼만한 것이 없소.
그러니 폭포나 구경하도록 합시다.]
의림은 그 뜻을 거절하기가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망설여
지는 바가 있었다.
(나는 두 2번이나 그를 안은 적이 있다. 한 번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안았고 두 번째는 다급해서 도망을 치느라고 그랬다. 이제
그는 중상을 입고 있는 몸이지만 정신이 멀쩡한데 어찌 그를 다시
안고 폭포구경을 갈 수 있으랴? 그가 폭포 쪽으로 가자는 것은 혹
시 나에게...... 나에게...... .)
이와 같이 망설이고 있을 때 영호충은 땅바닥에서 부러진 나뭇
가지를 집어들더니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해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 한번 오해를 한 셈이었다.
의림은 재빨리 다가가 손을 뻗어 영호충의 어깨를 부축하여 스
스로를 꾸짖었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일까? 영호 오라버니는 분명히 정인군자(正
人君子)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
고 나쁜 생각으로만 기울고 있구나! 내가 홀로 한 남자와 함께 있
으니 경계를 하기 때문이다. 그와 전백광은 같은 남자지만 하늘과
땅 차이가 있으니 결코 같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영호충의 발걸음은 온전하지는 못했으나 그런대로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한동안 걸어가니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의림
은 그를 부축해 바위 곁에 앉히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여기가 괜찮군요. 그대는 꼭 폭포로 가야 되나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이곳이 좋다면 우리 함께 이곳에서 구경을 하도록 합시
다.]
의림은 말했다.
[그렇다면 저쪽으로 가도록 해요. 저쪽은 경치가 좋으니 마음이
기쁠 거예요. 마음이 기쁘면 상처도 빨리 날 거구요.]
영호충은 빙그레 웃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천천히 산모퉁
이를 돌았다. 그때 '우르릉' 소리가 들리고 다시 한 모퉁이를 돌
자 물소리가 더욱 우렁차게 들려 왔다. 소나무밭을 가로지르자 한
마리의 백룡과 같은 폭포가 산벽을 타고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광
경이 눈에 들어왔다.
영호충은 기뻐서 말했다.
[우리 화산의 옥녀봉(玉女峯) 옆에도 폭포가 있는데 이곳보다
더 크다오. 그렇지만 형산은 비슷하구료. 나와 영산 사매는 종종
폭포 곁에서 검술을 연마했다오. 그녀는 때때로 짓궂게 폭포 안으
로 기어들어가기도 한다오.]
의림은 그가 두 번째로 영산 사매를 들먹이자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가 중상을 입은 몸인데도 반드시 폭포 옆으로 오자고 한 것
은 풍경을 감상하기 보다는 영산 사매를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닐
까?)
어찌된 노릇인지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마치 주먹으로 맞은 것
처럼 저려왔다. 이때 영오충이 말했다.
[한번은 폭포가에서 검술을 연마하다가 그녀가 발을 헛디뎌 미
끄러지게 되었고 하마터면 아래의 깊은 소(沼)속으로 떨어질 뻔
했는데 다행이 내가 그녀를 잡아 주어서 괜찮았소. 그땐 정말 위
험했었지.]
의림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에겐 많은 사매가 있나요?]
영호충이 말했다.
[우리 화산파에는 일곱 명의 여제자가 있소. 영산 사매는 사부
의 딸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그녀를 소사매로 부른다오. 그리
고 나머지 여섯 명은 모두 사모님께서 거둬들인 제자이지요.]
의림은 말했다.
[그녀는 악(岳) 사백님의 따님이시군요? 그녀는...... 그녀
는...... 그녀는 그대와 상당히 친한가 보죠?]
영호충은 천천히 앉으며 말했다.
[나는 부모 없는 고아인데 십오 년 전 은사와 사모님이 문하제
자로 거두어 주었소. 그대 소사매는 나이가 세 살밖에 되지 않았
소. 나는 그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종종 그녀를 안고 야산의 열매
를 따거나 토끼를 잡으러 다녔소. 나와 그녀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것이오. 사부님과 사모님께선 아들이 없기 때문에 나를 아들
처럼 대해 주시고 소사매는 나를 친오빠같이 따른다오.]
의림은 그냥 음 하고 대답했다. 잠시 후 그녀는 말했다.
[저 역시 부모님이 없는 고아예요. 어려서부터 은사께서 거두어
주셨고 어려서 출가하게 되었어요.]
영호충은 말했다.
[애석하오. 애석해!]
의림은 눈에 의문의 빛을 띄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영호충은 말
했다.
[그대가 이미 정일 사백의 문하제자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사모님에게 그대를 제자로 받아 주십사 하고 청을 드릴 수 있는
건데...... 애석하게 되었소. 우리 사형제자매들은 사람 수가 많
소. 이십여 명이나 되는데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면 매우 떠드는
편이라오. 그리고 공부가 끝나게 되면 각기 짝을 지어 논다오. 사
부님과 사모님께서도 별로 관계하지 않는다오. 그대가 나의 소사
매를 보게 된다면 그녀를 반드시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는 좋은 친
구가 될 것이오.]
의림은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에겐 그런 복이 없어요. 하지만 백운암의
사부님이나 사저들도 저에게 퍽 잘 대해 주고 있어요. ...... 저
역시 매우 즐거워요.]
영호충은 말했다.
[맞았소. 내가 말을 잘못했소. 또 정일 사백께선 검법(劍法)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소. 우리 사부님과 사모님께서는 각 문
파의 검법을 논하게 되었을 때 그대 사부님에게 대해 퍽 탄복하는
빛을 보였소. 항산파가 어찌 우리 화산파만 못 하겠소?]
의림은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 그날 전백광에게 서서 싸우면 전백광이 천하에
서 열네 번째 가고 악 사백은 여덟 번째 간다고 했죠? 그러면 우
리 사부님은 천하에서 몇째 가나요?]
영호충은 웃기 시작했다.
[나는 전백광을 속인 것이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소? 무공의
강약은 시시각각 변화가 있는 것이오. 어떤 사람은 진보를 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많아 힘이 줄어들어 퇴보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천하의 뭇고수들의 서열을 정할 수 있겠소? 전백광 녀석의
무공은 고강하지만 천하에서 천하에서 열네 번째 간다고는 볼 수
없소. 나는 일부러 그를 좀더 높여 말해 그가 흐뭇해지도록 만들
려고 했던 것이오.]
의림은 말했다.
[원래 그대는 그를 속인거군요?]
그리고 한참 동안 넋을 잃고 폭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종종 사람을 속이나요?]
영호충은 빙그레 웃고 말했다.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니 종종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어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은 속일 수 없소. 사부님이
나 사모님이 어떤 일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조금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소.]
의림은 '음' 하고 말했다.
[그럼 동문의 사형제자매에겐 어때요?]
그녀는 본래 그대의 영산 사매를 속이진 않느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처럼 직선적으로 물을 수가
없었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상대방이 누구인가, 또 어떤 일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오. 우리 사형제끼리는 종종 장난을 친다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가 나겠소?]
의림은 끝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영산 언니에게도 거짓말을 하나요?]
영호충은 한번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눈쌀을 찌
푸리고 한참 생각해 보고 한번도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
지라 말했다.
[중요한 일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소. 같이 놀 때 그녀를 달
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적은 물론 있소.]
의림은 백운암에서 자란 몸이었다. 백운암에선 사부님이 농담을
하지 않았다. 계율도 엄했다. 뭇사저들도 한나같이 차가운 얼굴과
담담한 말투로서 서로를 대했을 뿐이었다. 물론 서로 사랑하고 돌
보았지만 우스갯소리를 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더구나 장
난을 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정, 정한 두
사백의 문하에는 적지 않은 나이가 젊고 활달한 여제자들이 있었
다. 그러나 그녀들은 출가한 동문들과는 좀처럼 우스갯소리를 하
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냉정하고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보낸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외에는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
을 해야 했다. 이때 영호충으로부터 화산파의 동문들이 매우 재미
있게 논다는 말을 듣자 불현듯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내가 만약에 그를 따라 화산으로 놀러갈 수 있다면 정말 재미
있겠구나!)
그러나 그녀는 즉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번 백운암에서 떠나온 이후 이처럼 커다란 풍파를 겪게 되었
으니 백운암으로 돌아가면 사부님은 다시는 나에게 외출을 못 하
도록 할 것이다. 화산으로 가서 논다는 것은 헛된 망상이 아닌
가?)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설사 화산에 간다 해도 그는 온종일 그의 소사매만 상대하느라
고 나를 언제 보았느냐 할 것이니 무슨 재미가 있을려구?
아...... !)
갑자기 그녀는 처량한 심사에 사로잡혔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
다.
영호충은 온정신을 폭포에 쏟고 있어서 그녀의 심정을 알아차리
지 못하고 말했다.
[나는 소사매와 한 가지 검법을 연구하고 있소. 그것은 폭포의
물이 쏟아지는 힘을 빌려서 검초를 펼치는 것이오. 사매, 그대는
그 같은 검법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아시오?]
의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는 몰라요.]
그녀의 음성은 잠겨 있었다. 영호충은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하
고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들이 남과 손을 쓰게 되었을 때 만약 상대방의 내공이 심
후하다면 상대방의 무기와 권장(卷掌)은 종종 무거운 내력이 실리
게 되고 무형중에 형체가 있듯이 우리의 장검을 밀어내는 것이라
오. 나와 소사매가 폭포에서 검법을 연마한 것은 물이 힘차게 쏟
아지는 것을 적의 내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라오. 그렇게 되면 적의
내력을 밀어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힘을 빌려 상대방을 때릴 수
도 있게 된다오.]
의림은 그가 신이 나서 얘기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대들은 연성하게 되었나요?]
영호충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오. 아니오, 아직 못했소. 한 가지 검법을 창조한다는 것
이 어디 쉬운 노릇이오? 더군다나 우리들은 새로운 검초를 창출할
능력이 없다오. 다만 사부님이 전수해 준 본문의 검법을 폭포 가
운데서 치고 찌르고 할 뿐이오. 설사 새로운 초식을 펼친다 해도
그것은 장난삼아하는 것이지 정말 적과 싸우게 되었을 때는 아무
런 소용이 없는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전백광에게 얻어맞고도 전
혀 반격할 힘이 없었겠소?]
그리고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손을 뻗어 내어 검을 휘두르는 시
늉을 해 보고는 기뻐서 말했다.
[나는 또 일 초를 생각하게 되었소. 상처가 나은 후 돌아가서
소사매와 시험해 봐야겠소!]
의림은 나직이 물었다.
[그대들의 검법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주제 넘게 무슨 이름을 붙이느냐고 했으나 사매는 반드시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한다고 했소. 그리고 그녀는 충영검법(沖靈劍
法)이라고 했소. 왜냐 하면 그것은 나와 그녀 두 사람이 함께 창
안해 냈기 때문이라오.]
의림은 나직이 말했다.
[충영검법, 충영검법, 이 검법에는 그대 이름도 있고 그녀 이름
도 있군요. 장래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여지면 모든 사람들이 그대
들...... 두 분이 합심하여 만들었음을 알겠군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나의 소사매는 어린애와 같은 성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
지만 우리들의 재간과 조예로써 무슨 자격이 있어 검법을 창안하
겠소? 그대는 절대로 남에게 말하지 마시오, 남이 알게 된다면 아
마 배꼽이 빠지도록 웃을 것이오.]
의림은 말했다.
[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그대가 스스로 검법을 창안했다는 사실을 남들은 이미 알고 있
어요.]
영호충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렇소? 영산 사매가 남에게 이야기한 것이오?]
의림은 빙그레 웃었다.
[그대 스스로 전백광에게 얘기하지 않았나요? 그대는 스스로 않
아서 하늘을 찌르는 검법을 창출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영호충은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것은 내가 그에게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인 것인데 그
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료?]
영호충은 웃는 바람에 상처에 자극을 주었는지 눈쌀을 찌푸렸
다.
의림은 말했다.
[어마! 모두가 제 잘못이예요. 저때문에 그대가 상처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군요. 빨리 말을 멈추고 안정을 취한 후 한숨 자도록
해요.]
영호충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서 말했다.
[나는 이곳의 풍경이 좋다는 것만 생각했소. 그러나 폭포 가까
이에 이르고 보니 오히려 무지개를 볼 수 없게 되었구료.]
의림은 말했다.
[폭포는 폭포대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고 무지개는 무지개대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맞소. 세상에는 완벽한 것이란 있을 수 없소. 한
사람이 천신만고하여 한 가지 물건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나중에
구했을 땐 별것 아니라고 여기게 될 것이고, 손에 쥐게 된 물건을
오히려 내던질 수도 있을 것이오.]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 오라버니, 그 몇 마디 말엔 은연중 선기(禪機)가 담겨져
있군요. 하지만 저의 조예가 너무 낮아 그 가운데의 도리를 깨우
칠 수가 없네요. 사부님께서 들으셨다면 반드시 설명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영호충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선기인지 내가 어찌 알겠소? 아...... 피곤하기만 하
군!]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점차 호흡이 낮아지면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의림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하나
뜯어 그에게 달려드는 벌레들을 쫓아냈다. 한 시진을 그렇게 앉아
있게 되자 그녀 자신도 피곤해졌다. 그리고 몽롱하게 눈을 감고
잠이 들려고 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깨어나게 됐을 때 배가 고플텐데 먹을 것이 없으니 다시
가서 몇 통의 수박을 따와야겠다. 해갈을 할 수도 있고 배를 채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윽고 그녀는 재빠른 걸음으로 수박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두 통의 수박을 땄다. 그녀는 혹시 자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에 야수가 영호충을 해칠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편
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마음을 놓고 가볍게
그의 곁에 앉았다.
영호충은 눈을 뜨고 미소지었다.
[나는 그대가 떠난 줄 알았소.]
의림은 의아해 말했다.
[떠나다니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의 사부와 사저들이 그대를 찾지 않겠소? 그녀들은 매우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오.]
의림은 줄곧 그와 같은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 같은 말을
듣자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내일 사부님을 뵈오면 그 어르신께서는 나를 꾸짖지나 않을지
모르겠구나.)
영호충은 말했다.
[사매, 정말 반나절 동안 나와 함께 있어 준데 대해 고맙게 생
각하오. 그리고 나의 목숨도 그대가 살려 준 셈이니 그대는 일찍
돌아가도록 하시오.]
의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산 속에 그대 혼자 돌볼 사람없이 남겨 둔다는 것은
안 될 말이예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가 형산성 유 사숙의 집에 가서 나의 사제들에게 은밀히
이야기만 하면 그들이 와서 나를 돌봐 줄 것이오.]
의림은 속이 쓰라렸다.
(원래 그는 그의 소사매와 함께 있고자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비켜 주었으면 하는 거야.)
그녀는 참을 수 없어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영호충은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크게 의아했다.
[그대는...... 그대는...... 어째서 울지? 돌아가서 사부님께
꾸지람을 들을까봐 두려운 것이오?]
의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호충은 다시 말했다.
[그렇군! 그대는 길에서 다시 전백광을 만날까봐 두려운 모양이
군! 두려워 마시오. 이후부터 그는 그대를 보는 즉시 도망칠 것이
며 다시는 감히 그대와 대면하지 못할 것이오.]
의림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 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영호충은 그녀가 더욱 눈물이 많아짐을 보고 속으로 의아한 감
정을 금할 수 없었다.
[좋소, 좋아! 내가 말을 잘못했다고 합시다. 내가 사과를 하지.
소사매 화를 내지 아오.]
의림은 그의 말이 부드러워지자 마음속의 서러움이 조금 누그러
졌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이 몇 마디의 다정한 말은 너무 듣기가 좋구나! 아마도 평소
소사매에게 말하던 버릇이 튀어나왔을 거야. 맞아, 옛날 버릇이
튀어나온 것이겠지.)
별안간 그녀는 '왁' 하니 울음을 터뜨리고 발을 굴렀5다.
[나는 그대의 소사매가 아니예요. 그대는...... 그대는......
그대의 마음속에는 그 소사매 생각뿐이군요!]
이 말을 내뱉은 순간 그녀는 출가인이 어떻게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분수를 모르는 말 아닌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벌겋게 묽히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
다.
영호충은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모
습을 보자 물방울을 머금은 조그만 붉은 꽃처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녀는 이토5록 잘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군! 정말 영사
사매보다 뒤지지 않는구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이가 적소. 우리 오악검파는 한 집안 사람과 다름없
으며 모두들 사제이오. 절대 남남이 아니오. 그러니 그대는 자연
히 나의 소사매가 되기도 하는 것이오. 내가 어떤 점에서 그대에
게 죄를 지었는지 그대가 나에게 이야기해 줄 수 없겠소?]
의림은 승포자락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울먹이는 음성으로 대답
했다.
[그대는 저에게 아무 죄도 지지 않았?楮? 나는 알고 있어요.
그대는 내가 한시 바삐 이곳을 떠났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요. 보
기만 해도 화가 나고 또 재수없게 만드니 말이예요. 그대가 말하
지 않았나요? 영승을 보기만 하면 놀음판에서 반드시...... .]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다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영호충은 우스꽝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가 회안루에서 한 말을 따지는구나. 그것이야말로 정
말 사과를 해야할 일이지.)
그래서 그는 말했다.
[이 영호충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소. 말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내5뱉었구료. 그날 회안루에서 실 없는 말을 한 것은 항산파의 모
든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것이오. 응당 벌을 받아야지, 벌을 받아
야 해!]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철썩거리며 자기의 뺨을 후려쳤다.
의림은 급히 몸을 돌리며 당황한 음성으로 말했다.
[때리지...... 마세요. ......저는...... 그것을 탓하는 게 아
니예요! 저는...... 저는...... 다만 그대에게 누를 끼칠까봐 두
려운 거예요!]
영호충은 말했다.
[마땅히 맞아야 해!]
그리고 다시 철썩 하고 자기의 뺨을 때렸다.
의림은 급??말했다.
[저는 화를 내지 않았어요. 오라버니 그대는...... 더 때리지
마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말했소?]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가 웃지 않는 걸 보면 여전히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겠
소?]
의림은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러다 별안간 설움이 복바치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슬픔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더니 나
직이 말했다.
영호충은 그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고 흐느끼자 땅이 꺼져라 탄
식을 불어냈다. ?퓔꼭?천천히 눈물을 훔치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왜 한숨을 내쉬나요?]
영호충은 속으로 웃었다.
(역시 그녀는 나이가 어려서 나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마는구
나!)
그는 어려서부터 악영산을 벗하여 놀곤 했다. 악영산은 때때로
성질을 부리곤 했는데 화가 나면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 영호충이 온갖 수단을 다해 달래려고 하지만 좀처럼 악영
산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떠한 말을 그녀에게 해도 그
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면 영호충은 일부러 시5치미를 떼고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행동을 하여 오히려 그 쪽에서 질문
을 해 오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단 한번에 효과가 나타나 영호충
의 수작에 말려들고 마는 것이었다. 영호충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린 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림은 물었다.
[영호 오라버니 화 나셨어요? 조금 전 제가 잘못했어요. 그대
는...... 그대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아니오. 그대는 나에게 잘못한 적이 없소.]
의림은 그가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맘年? 그
러나 영호충은 속으로 크게 웃고 있었다. 그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꾸며낸 것이었다. 다급해진 의림이 말했다.
[제가 나빴어요. 제가 나빠서 그대 스스로 자신을 때리게 만들
었군요. 저는...... 저는 제 자신을 때려 사과를 드리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손을 들어 철썩하며 오른쪽 뺨을 후려쳤다. 두번
째 다시 치려고 할 때 영호충이 급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나 힘을 쓰자 다시 상처가 아파왔다. 자기도 모르
게 나직이 신음소리를 냈다. 의림은 놀라 부르짖었??
[어마! 빨리...... 빨리 눕도록 하세요! 상처를 아프게 하지 마
세요!]
그녀는 그를 부축해 천천히 눕혔다.
그리고 스스로를 원망했다.
[제가 바보예요.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군요. 오라
버니 그대는...... 그대는 많이 아픈가요?]
영호충의 상처는 사실 무섭도록 아픈 것이었다. 그렇지만 평시
였다면 절대 아프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좋은 꾀가 떠올
랐다.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녀의 눈물진 얼굴에 웃음을 띄우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ソ弩?찌푸리며 크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의림은
다급해져 말했다.
[아무쪼록...... 피를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다행히 열은 없었
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나직이 물었다.
[아픔이 좀 가라앉았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여전히 매우 아프오.]
의림은 울상을 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더 크게 신음을
질렀다.
[아...... 정말 아프군! 육 사제...... 육 사제가 이곳에 있었
으면 좋았을 텐데...... .]
의림은 말했5다.
[아니 그에게 아픔을 멎게 하는 약이라도 있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소. 그의 입이 바로 상처를 잊게 하는 약이오. 예전에 상
처를 입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상처가 매우 아팠소. 여섯째 사제
는 우스갯소리를 잘 하기 때문에 난 그의 우스갯소리를 듣고 그만
상처의 아픔도 잊고 말았다오. 그가 여기에 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오. 아이구...... 어찌 이리 아플까...... 이렇게 아프다니
아이구...... 아이구!]
의림은 난처하기 이를데 없었다. 정일사태의 문하생들은 하나같
이 5얼굴을 굳히고 연구를 하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내공을 연
마하거나 검술을 연마하는데만 신경을 썼다. 백운암에서는 한 달
동안 한두 마디의 우스갯소리도 듣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녀보고
우스갯소리를 하라는 것은 목숨을 달라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
다.
(그 육후아 사형이 이곳에 없는데 영호 오라버니는 우스갯소리
를 듣고자 하니 내가 그에게 우스갯소리를 할 수밖에 없구나. 하
지만...... 하지만...... 나는 한 마디의 우스갯말도 할 줄 모르
지 않나?)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5
한 가지 생각이 나서 신이 난 듯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 우스갯말을 저는 할 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장경각(藏經閣)에서 한 권의 경서를 본 적이 있는데 퍽 재미있었
어요. 이름은 백유경(百喩經)이라고 하는데 오라버니도 본 적이
있나요?]
영호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소. 나는 책을 읽지 않소. 더욱 불경을 손에 만져 본 적도
없다오.]
의림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저는 정말 바보 같아요. 그와 같은 우둔한 말을 묻다니......
그대는 불문의 제자가 아니니 자5연 그와 같은 경서를 읽을 턱이
없죠.]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계속해 말했다.
[그 백유경은 천축(天竺)의 한 분 고승인 가사나(伽斯那)가 지
은 것인데 그 안에는 많은 재미있는 옛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영호충은 재빨리 말했다.
[좋았어!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오. 그대가 몇가
지 들려 주구료.]
의림은 미소지었다. 그 백유경에는 많은 이야기를 하겠어요. 옛
날에 한 대머리가 있었는데 머리엔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없었어
요. 그는 타고난 대머리였죠. 그 대머리가 어?윰?농사꾼과 어떤
일로 언쟁을 벌이게 되었대요. 그 농사꾼은 소로 밭을 가는 쟁기
를 갖고 있었는데 그만 그 쟁기로 대머리를 쳤어요. 그러자 그 대
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게 되었죠. 그런데 그 대머리는 잠자코 참
을 뿐 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웃고 있었어요.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지요. 왜 피하지 않으며 오히
려 웃기만 할까 하고 말이예요. 그러자 그 대머리는 웃으며 말했
어요. '저 농사꾼은 바보외다. 나의 머리에 털이 없는 것을 보고
돌인 줄로 알고 쟁기를 들??나를 밀어친게 아니겠소. 그런데 내
가 피하면 그로 하여금 총명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소?]
그녀가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영호충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
다.
[정말 훌룡한 이야기군! 그 대머리는 정말 총명하기 이를데 없
구만! 설사 그 누구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마 피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오.]
의림은 그가 흐뭇하게 웃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무척 기뻐하
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왕녀(王女)를 치료하는 약을 만들어 왕녀를 크게 한 이야
기를 ??드릴께요. 옛날 어느 나라에 국왕이 있었는데 공주를 낳
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국왕은 성질이 매우 급했어요. 갓난아이
가 매우 어린 것을 보고 공주가 한시 바삐 자라기를 바랬으며 어
의를 불러와 약을 처방하여 공주에게 먹이도록 했어요. 한시 바삐
장성한 공주가 되도록 하라고 명했지요. 그 어의는 말했죠. '영양
은 있읍니다만 찾아서 배합하여 약을 만드는 데는 많은 시일이 걸
립니다. 이제 소신이 공주를 집에 데리고 가 재빨리 약초를 구해
약을 만들 것이니 페하께선 너무 재촉하시지 마십시오.5' 국왕은
말했어요. '좋아 재촉은 하지 않기로 하지.' 그리하여 어의는 공
주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 매일 국왕에게 영양을 채집하여 약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했어요. 그리고 십이 년이란 세월이 흘
렀죠. 이때 어의는 말했어요. '영양은 만들어졌으며 오늘 공주에
게 복용시켰읍니다.' 그리고 공주를 데리고 국왕 앞에 데리고 갔
읍니다. 국왕은 과거의 갓난아이가 이미 처녀티가 나는 소녀로 자
란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어요. 그리고 어의의 의술이 탁월하다
고 칭찬했으며 한 재의 영양으로 정말 5 크게 자라도록 했다면서 좌
우의 신하들에게 명을 하여 금은보화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
이 하사하셨대요.]
영호충은 다시 한번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대가 말하는 국왕의 성질이 급하다고 했는데 사실은
조금도 급하지 않소. 그는 십이 년이란 세월을 기다린 게 아니오?
만약 내가 어의라면 하룻만에 갓난아이인 공주를 십칠 팔 세의 자
태고운 소녀공주로 만들고 말았을 거요.]
의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대는 무슨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죠?]
영호충은 미소했??
[밖으로 천향단속교를 바르고 안으로는 백운웅담환을 먹이는 것
이오.]
의림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약물인데 어찌 사람이 빨리 자라도록
할 수 있겠어요?]
영호충은 말했다.
[다만 그대가 나를 도와 주기만 하면 되오.]
의림은 의아하여 물었다.
[내게 무슨 도움을 달라는 것이예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소. 내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가게 되었을 때 네 명의 재봉
사로 하여금...... .]
의림은 더욱 더 의아하여 물었다.
[네 명의 재봉사를5 데려다 무엇에 쓰려고요?]
영호충은 말했다.
[빨리 새 옷을 만드는 것이오. 나는 그들에게 그대의 몸매를 재
도록 한 후 공주의 의복 한 벌을 만들 거예요. 그리고 이튿날 그
대가 입는 것이외다. 머리엔 영롱한 관을 쓰고 몸에는 수많은 꽃
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발에는 금실로 수놓고 구슬로 장식된 신
발을 싣는 것이오. 그와 같이 아름다운 옷차림을 하고서 사뿐사뿐
금란전(金?殿) 위로 올라가 세 번 만세를 부르고 허리를 굽힌 다
음 이렇게 말하란 말이외다. '아바마마! 저는 어의 영호충이 만??
영양을 먹은 후 하룻밤 동안에 이토록 크게 되었읍니다.' 국왕은
이처럼 아름답고 귀여운 공주를 대하게 되면 흐뭇해져 그대에게
진짜 공주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오. 그러면 이 어의 영호충은 커
다란 상을 받는 것은 틀림없지 않겠소?]
의림은 끊임없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났을때도
허리를 구부리며 웃었는데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였다. 한참 후에
야 그녀는 말햇다.
[그대는 백유경의 어의보다 총명하군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
전...... 이토록 못 나서 전혀 공주를 닮지 ?刻弩릿?어떻게 하
죠?]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가 못났다면 천하에 아름다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오.
옛날부터 공주는 수천 수만이 있었겠지만 어찌 그대처럼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겠소?]
의림은 그가 자기를 칭찬해 주자 마음이 아주 흐뭇해졌다.
[수천 수만의 공주를 그대는 모두 보았소.]
영호충은 말했다.
[그야 물론이오. 난 꿈 속에서 모두 보았소.]
의림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어떻게 된 사람이길래 꿈마다 공주를 보게 되나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5[낮에 생각을 하면...... .]
그러나 그는 곧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의림은 천진무사한 여승
이 아닌가? 자기와 더블어 우스갯말을 한다는 것도 사문의 규율을
어기는 것과 같은데 자기가 어찌 그녀를 상대로 헛소리를 마구 지
껄여댈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생각이 들게 되자 금방 얼굴빛이 엄
숙해져 일부러 잠이 온다는 듯 하품을 했다.
의림은 말했다.
[아 영호 오라버니, 피곤하셨군요. 눈을 감고 잠시 주무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좋소. 그대의 우스갯말은 정말 효험이 있구료! 내 상처의 아??
이 말끔히 사라졌소.]
영호충은 의림이 활짝 웃게 되자 뜻을 이룬 셈이었다. 그는 천
천히 눈을 감았다.
의림은 그의 옆에 앉아 가볍게 나뭇가지를 흔들어 날파리를 쫓
았다. 멀리 계곡 안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림은 피
곤해졌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의림은 천천히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공주의 화려한 복장을 하고 화려한 궁전안으
로 들어갔다. 그 옆에는 준수하기 이를데 없는 젊은이가 자기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데 영호충 같았다. 곧이어 발밑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두 사람은 두둥실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말할 수없이
달콤하고 흐뭇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누군가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노해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자기의 사부였다.
의림이 깜짝 놀랄 때 사부가 호통을 쳤다.
[이 못난 것아! 계율을 지키지 않고 감히 대담하게 공주가 되다
니! 거기다 저 떠돌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즉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삽시간에 눈앞이 칠흙같
이 어두워지면서 영호충도 보이지 않았고 사부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는 새까만 구름 속에서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의
림은 놀라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영호 오라버니! 오라버니!]
그러나 전신에 힘이 없어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 부르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영
호충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림은 두 뺨을 붉히며 부끄러운듯 말했다.
[저는...... 저는......]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는 꿈을 꾸었소?]
의림은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꿈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말을 끝내고 보니 영호충은 얼굴이 매우 이상해 보였다.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물었다.
[그대는...... 그대의 상처가 매우 아픈가 보죠?]
영호충은 말했다.
[아직은 괜찮군요.]
그러나 그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이마에선 비지 같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의림은 매우 당황해서 말했다.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죠?]
그녀는 품 속에서 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에 맺혀진 땀방울을 닦
아 주었다. 손가락이 그의 이마에 닿게 되었을 때 숯불처럼 뜨거
웠다. 그녀는 사부에게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칼이나 검에
상처를 입은 후 열을 내게 된다면 그 증세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
지 않았던가? 다급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경을 읽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수억의 중생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관세음보살이란 이름을 불러야 하느니라. 오로지 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관세음보살은 즉시 그 음성을 알아듣고 모
두를 해탈로 이끌어 주실 것이니라. 만약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
르는 자가 있어 커다란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면 불은 그를 태울
수 없으리라. 이는 보살의 신력이 높기 때문이라. 만약에 큰 물에
휩쓸리게 되었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즉시 얕은 곳으로
이르게 될 것이니라......]
그녀가 읊는 것은 묘법연화경관세음보문품(妙法蓮華經觀世音普
門品)이었다. 처음 소리는 들렸으나 잠시 경을 읽게 되자 심신이
안정되어 갔다.
영호충은 의림의 음이 맑고 고울 뿐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마
음이 차분히 안정되는 것을 느끼고 불경에 씌여진 신통력이란 게
있긴 있나보다고 생각했다. 의림은 계속해서 경을 읊었다.
[만약에 누가 해를 입게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
게 된다면 상대방의 손에 들린 칼과 지팡이가 모조리 토막이 나서
해탈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삼천이나 되는 대천국(大天國)의 땅
에 많은 야차와 나찰들이 달려들어 사람을 곤하게 한다면관세음
보살의 이름을 듣게 된 악귀들은 감히 나쁜 눈으로 바라보지도 못
할 것이니 어찌 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만약에 죄가 있으면 모르
되 죄가 없이......]
영호충은 들을수록 우스워져 '홧'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의림
은 물었다.
[무엇이...... 무엇이 우스워요?]
영호충은 말했다.
[진작 그런줄 알았으면 무공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오. 악인과
원수가 있어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내가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들
먹이기만 해도 악인의 칼이 한 토막씩 잘라지게 될 것이니 정
말...... 무사할 것이 아니겠소?]
의림은 정색하며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 보살님을 모독하지 마세요. 마음에 성실이 없으
면 경을 읽어도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그녀는 계속해서 읊었다.
[만약에 흉악한 짐승이 에워싸고 예리한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
서 으르렁거린다면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기억하게 되는 순간에
그들은 모조리 멀리 사라지게 될 것이니라. 구렁이나 뱀, 전갈이
독기를 내뿜으며 달려들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생각하면
그들은 저절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라.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
이 쳐도 우박과 큰 비가 쏟아져도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생각하
면 때맞춰 구름이 걷히게 될 것이니라. 중생의 고달픔에 시달려
고생은 한없으나 관세음보살의 신통한 지력으로 세상사의 고달픔
에서 구원을 받게될 것이니라......]
영호충은 그녀가 읽을수록 경건해져감을 느꼈다. 소리는 나직했
으나 오직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구원을 받고 있는 것이 분
명했다. 온마음이 관세음보살에게 쏠려서 애달프게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나타내 자기의 고달픔을 해탈
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관세음보살, 제발 영호 오라버니의 고통을 면해 주시고 그의
고통을 나의 몸으로 옮겨오도록 해주소서. 나는 짐승이 되어도 좋
고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습니다. 다만 보살님께서는 영호 오라버
니의 고난을 해탈시켜 주시옵소서......]
나중엔 영호충은 경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간구하고 비는 소리였으며 진지하고 열렬하다는 것을
알수 있을 뿐이었다. 곧이어 영호충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없었다. 사부님이나 사모님은 그에 대
해 많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장난이 심해 꾸지람
을 받고 벌을 받을 때가 사랑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
했었다. 사형제자매간에는 그를 대사형이라 생각하고 존경하며 그
의 비위를 거슬리려고 하지 않았다. 영산 사매는 그와 비교적 절
친한 편이었으나 그에 대해 이처럼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런
데 의림은 세상의 온갖 고통을 자기의 몸으로 옮겨주어 영호충의
평안과 즐거움을 주십사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호충은 가슴에서 끓는 피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의림을 슬쩍
쳐다보자 의림의 온몸에선 은연중 거룩하고 고결한 광채가 빛나는
것 같았다.
의림의 염불소리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눈앞엔 마치 손
에 버들가지를 들고 감로(甘露)로 이 세상의 고난에서 사람을 구
해내려는 관세음보살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한 마디 한 마디가 영호충을 위해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성의로 가득 차 있었다.
영호충은 고맙기도 하고 위로도 되었다. 부드럽고 경건한 염불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꿈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악불군은 임평지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인 이후 제자들을 이끌고
곧장 유씨 저택의 모임으로 갔다. 유정풍은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 놀랍고 반가왔다.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군자검이 놀랍게
도 친히 왕림을 한 것이 아닌가. 재빨리 영접을 하러 나갔다. 그
리고 끊임없이 고맙다는 치하를 했다. 악불군은 매우 겸손하고 온
화한 얼굴로 웃음을 가득 띄우고 축하를 했다. 그리고 유정풍과
손을 맞잡고 대문을 들어섰다.천문진인, 정일사태, 여창해, 문선
생, 하삼칠 등도 처마 아래까지 내려와 그를 맞아들였다.
여창해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화산 장문인이 친히 이곳으로 오다니...... 반드시 나 때문에
온것일게다. 그의 오악검파는 사람도 많고 세력도 강하지만 우리
청성파를 얕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악불군이 불손한 말을 내뱉는다
면 나는 먼저 영호충이 술집에 유숙한 행위를 들고 따지겠다. 만
약 얼굴을 붉히고 대어든다면 손을 쓸 수밖에 없지.)
악불군은 여창해를 보자 깊이 읍을 하며 말했다.
[여관주, 몇 년 보지 못한 새에 더욱더 건강해진 모습이구료.]
여창해 역시 읍을 하며 말했다.
[악선생, 그동안 안녕하셨소?]
각자 인사말을 나누었다. 유씨 저택에는 많은 손님들이 들어왔
다. 이날을 유정풍이 금대야에 손을 씻는 즉 은퇴를 하는 바로 그
날이었다.
유정풍은 곧 내실로 들어가게 되고 문하제자들이 손님을 접대하
게 되었다.
오시가 가까워지게 되었을 때 오육백 명이나 되는 원거리 손님
들이 들이닥쳤다.
개방의 부방주 장금별(張金?), 사졸을 세 명이나 거느린 정주
(鄭州) 육합문(六合門)의 하노권사(夏老拳師), 사천과 호북간에
있는 무산의 신녀봉(神女峯) 철노로(鐵老老), 동해해사방 방주 반
후(潘吼), 곡강(曲江), 이우신도(二友神刀), 백극(白克), 신필(神
筆) 노서사(盧西思)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이 사람들은 서로 알
고 있기도 했고 이름만 듣고 앙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청 안은 서로 인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느라고 시끌벅적했다.
천문진인과 정일사태는 각기 상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서
도 뭇사람과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
다.
(오늘 온 사람중엔 강호에서 명성과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잡다한 불량배들에 불과하다. 유정풍은 형산파
의 고수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자중할 줄 모르고 이토록 막무
가내로 교분을 되었을까. 그러면 오악검파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악불군의 이름은 불군이라 했지만 매우 친구를 좋아하는 편이었
다. 그래서 내빈들 가운데이름도 없거나 명성이 별로 깨끗하지 못
한 자가 있더라도 악불군은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조금도 화산파 장문인의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유씨댁의 제자들은 요리사들과 하인들을 시켜 이백여 석이나 자
리를 마련하게 했다. 유정풍의 친척, 문객, 집사, 그리고 유씨문
의 제자인 상대년, 미위의 등은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무림
의 지위나 명성으로 볼 때 태산파의 천문진인이 상석에 앉아야 하
나 오악검파는 결맹을 한 까닭으로 천문진인이나 악불군, 정일사
태 등은 반쯤은 주인이 된 셈이어서 웃자리에 앉기가 거북했다.
그리고 선배들과 명숙들도 서로 양보하여 그 누구도 상석에 앉으
려고 하지 않았다.
문 밖에서 펑펑하고 폭죽소리가 났다. 곧이어 북소리와 주악을
울리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그런가 하면 징을 치고 길을 비키라
는 소리도 들렸다. 아마도 관가의 사람이 문 밖에 이른 모양이었
다. 군웅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유정풍이 새 비단장포를 걸치고 총
총히 내당에서 달려나왔다. 군웅들은 환호소리로 그에게 축하를
했다. 유정풍은 잠시 두 손으로 답례를 한 후 문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는 공손히 관복을 입은 관원을 데리고 들어왔다. 군웅
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설마하니 저 관원도 무림의 고수인가?)
관원의 옷차림은 당당했으나 두 눈은 침침해 보였다. 그리고 얼
굴은 주색에 탐닉한 기색이 역력했다. 틀림없이 무공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악불군 등은 생각했다.
(유정풍은 형산성의 큰 유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평소에
관가의 사람들과 내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뜻깊은 날이
기도 하니 관리들이 인사차 온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관원은 가슴을 펴고 곧장 들어오더니 한복판에 우뚝 섰다. 그러
자 뒤를 따르던 자가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노란 비단을 덮어놓은 쟁반을 쳐들었다. 그 쟁반엔 하나의 두루마
리가 놓여 있었다. 이 관원은 허리를 굽히고 두루마리를 받아들며
낭랑히 외쳤다.
[성지가 내렸으니 유정풍은 성지를 받드시오.]
군웅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 깜짝 놀라게 되었다.
(유정풍은 은퇴하는 날로부터 무림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고 이는 강호의 일이다. 조정과는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
가? 어찌하여 황제가 성지를 내렸을까? 설마 유정풍이 대역무도한
짓을 했다가 조정에 발각되었을까. 아니면 구족을 멸하게 되는 큰
죄를 지은 것일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일제히 모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질이 급한 사람은 지니고 있던 무기를쳐
들었다. 그들 생각에는 관원이 성지를 받들라고 한 것을 보면 유
씨집 주위가 관병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것이고 한바탕 커다란 싸
움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따라서 자기들도 유정
풍과 잘 아는 처지이니 결코 구경만 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군다나 새 둥지가 침입을 당하면 새알이 무사할 수 없듯이 자기
들이 유씨 저택의 모임에 참석했으니 역모에 가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관계가 없다 해도 변명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은 유정풍의 안색이 변해서 호통을 내지르면 뭇사람
들은 무기를 들고 삽시간에 그 관원을 베어서 피떡을 만들 참이었
다.
그런데 유정풍은 침착했다. 두 무릎을 끓고 끓어앉았다. 그리고
그 관원에게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낭랑히 말했다.
[미신(微臣) 유정풍이 성지를 받들겠읍니다. 황제폐하 만세! 만
세! 만만세!]
군웅들은 이를 보자 아연해지고 말았다.
관원은 두루마리를 펼치더니 읽어 내려갓다.
[하늘의 뜻을 받아 승운(承運) 황제는 조서를 내리노라. 호남성
의 순무가 알려온 바에 의하면 형산성의 서민인 유정풍은 공사에
매우 협조적이고 의협심도 있으며 고향에서 많은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활쏘기나 말타기에 능숙하므로 크게 쓰모가 있는 인재라
하겠다. 따라서 참잔(參將)직을 내리노니 금후로는 조정에 충성을
다하여 짐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유정풍은 다시 큰절을 했다.
[미신 유정풍이 성은에 감사 드립니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그리고 몸을 일으켜 관원에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장(張) 대인께서 거두워 주시고 추천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
니다.]
그 관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했다.
[축하하오. 축하하오. 유 장군 이후 우리는 같은 조정의 신하이
니 겸손해 할 것 없소.]
유정풍은 말했다.
[소인은 일개 초야에 묻힌 백성에 지나지 않읍니다. 오늘 조정
에서 내린 조서를 받은 것은 황상의 은혜가 넓으신 탓입니다. 소
인이 선조들을 빛나게 한 것은 모두 순무와 장대인의 파격적인 안
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읍니다.]
그 관원은 웃으며 말했다.
[원 별 말씀을 다하시는구료!]
유정풍은 고개를 돌리고 방천구(方千駒)에게 말했다.
[방아우님, 장대인께 드릴 예물은 어떻게 되었소?]
방천구가 말했다.
[벌써 이곳에 준비해 왔읍니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둥근 쟁반을 꺼내들었다. 그 쟁반 위에
는 비단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유정풍은 두 손으로 받아들면서
말했다.
[별것아니라서 경의를 표할 수 없읍니다만 장대인께선 웃으면
서 받아 주십시오.]
장대인은 웃으며 말했다.
[다 같은 형제인데 유대인은 이토록 예의를 차리시는구료.]
그리고 옆으로 눈짓을 했다. 옆에 있던 관졸이 그 쟁반을 받았
다. 그런데 그 쟁반을 받게 되었을 때 팔이 아래로 쑥 떨어졌다.
아마도 쟁반에 놓인 물건의 무게가 상당한 것 같았다. 백은이 아
니고 황금인 것 같았다.
장대인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소제는 공무가 바빠 오래 머물지 못하게 도니 술 석 잔을 들어
유 장군이 오늘 관직을 받게 된 것을 축하하고 얼마 후 벼슬길에
올라 황제폐하의 은혜가 넘치기를 빌겠소이다.]
그러자, 좌우에 술을 따라 받쳤다. 장대인은 잇달아 석 잔의 술
을 마시더니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한 후 문을 나섰다.
유정풍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우고 그를 대문 밖까지 전송했
다. 그러자 징소리가 나고 길을 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유씨 댁
에선 곧 폭죽을 터뜨려 전송을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광경은 군웅들에게는 뜻밖이었다. 서로를 얼굴만 쳐
다보면 아무 소리도 못했다. 어떤 사람들의 얼굴은 겸연쩍어했고
어떤 자는 의아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유씨 저택에 온 손님들은 결코 흑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들도 아니었다. 그
러나 무림에선 각기 명망이 있고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평
소 관부에 대해서는 눈여겨보지도 않았는데 유정풍이 아부해서 황
제로부터 참장이라는 쥐꼬리만한 무관벼슬에 봉해지자 감격해 할
뿐 아니라 굽신굽신하는 태도를 취하는 한편 공공연히 뇌물까지
바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업수이 여겼다. 어떤 자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멸시의 빛을 띄우기도 했다.
나이가 비교적 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이 사정을 보건대 아마도 그의 벼슬은 금은으로 사들인 모양이
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썼기에 순무의 주례까지 받게 되었
을까? 유정풍은 평소 위인됨이 정직하다. 그런데 어찌 늙으막에
벼슬길에 눈이 어두워 수단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사려는 것일
까?)
유정풍은 군웅들 앞으로 나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읍을 하
며 자리에 앉기를권했다. 그런데 아무도 수석(首席)에 앉는 사람
이 없었다. 그 가운데 의자는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왼쪽
에는 연세가 가장 많은 육합문의 하노권사가 앉았고, 오른쪽엔 개
방의 부방주 장금별이 앉았다. 장금별의 무공은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강호의 제일 큰 방파인 개방의 방주 해풍(解風)은 무공과
명성이 대단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삼 푼쯤 존경했다.
군웅들이 자리에 앉게 되자 하인들이 음식을 나르고 술을 따랐
다. 곧이어 상대년이 한 개의 차탁자를 내놓았다. 그 위는 비단으
로 덮어져 있었다. 상대년은 두 손으로 한 쌍의 금빛이 찬란하고
지름이 한 자나 되는 황금대야를 들고 와 차탁자 위에 놓았다. 대
야 안은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때 문 밖에서 펑펑펑 세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꽝꽝꽝 하며 여덟 번의 폭죽을 터
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청과 화청에 앉았던 뭇후배들과 제자들
이 모조리 대청으로 달려와 구경을 하게 되었다.
유정풍은 싱글벙글 웃으며 앞으로 나가 포권을 하고 뭇사람에게
읍을 해보엿다. 군웅들은 모두 일어나 반례했다.
유정풍은 낭랑한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수한 영웅들과 친구분, 그리고 젊은 양반들, 여러분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유정풍으로선 실로 영광된
일이라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외다. 이 형제가 오늘 손을 씻고 이
후 강호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원인을 아셨
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형제는 조정의 은전을 받아 조그만 벼슬을
하게 된 것입니다. 흔히들 임금의 녹을 먹게 된다면 임금께 충성
을 다하라는 말이 있읍니다. 강호에서는 의리를 중시합니다만 나
라의 공사에는 반드시 공무를 중시해야 하며 법을 잘 지킴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읍니다. 이 양자에 충돌이 있게 된다
면 이 유정풍으로선 난처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따라서 유정풍은
무림에서 물러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의 문하제자들이 만약 원
한다면 다른 문파의 제자가 될 수 있으며 그들 마음대로 하도록
하겠읍니다. 이 유모가 여러분들을 이곳에 모신 것은 여러 친구분
들이 공증인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후 여러분들이 형산성에
오게 된다면 물론 유모와는 절친한 친구임에 틀림이 없는 일입니
다.하지만 무림의 여러 가지 은원과 지위는 미안하지만 이 유모
가 다시 묻지 않겠읍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재차 읍을 했다.
군웅들은 그가 그같이 말하리라고 짐작하고 있던터라 하나같이
생각했다.
(그는 오로지 벼슬만 하려고 하는구나. 사람의 길은 각기 뜻하
는 바가 다르니 강요할 수 없다. 어찌되었든 그는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이후부터 무림에 그 같은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
하면 되겠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같은 행동은 형산파의 영광에 누를 끼치는 행동이다. 아마
도 형산파의 장문인 막대선생은 매우 늙었기 때문에 이곳에 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생각했다.
(오악검파는 근년에 이르러 강호에 의협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
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유정풍이 이 같
은 일을 저지르다니 모든 사람들은 앞에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겠
지만 등 뒤에선 비웃지 않겠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꼬집고 있었다.
(오악검파는 협의문파라고? 그러나 벼슬길에 올라 재물을 만지
게 되자 관원에게 아부하는구나. 이래 가지고 무슨 협의(俠義)라
고 할 수 있겠는가?)
군웅들은 제각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시에 대청 안은
조용해졌다. 이와 같은 상황 안에선 각자 다투어 유정풍에게 축하
의 말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를 추켜올려 수복을 누리라느니 과
단성 있게 물러서라느니 정말 지혜롭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등
의 찬사를 늘어놓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은 대청에 모였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유정풍은 몸을 문 밖으로 돌리더니 낭랑히 외쳤다.
[제자 유정풍은 은사의 거두심을 받고 무예를 전수받았으나 형
산파를 빛내지 못한 점 매우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다행히 본문은
막사형이 이끌어 가고 있고 이 유정풍은 우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
이라 한 사람 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후부터 이 유모는 금대야에 손을 씻고 오직 벼슬길에 오르는 것에
만 충실하겠으며 결코 사문에서 전수해 준 무예로써 벼슬길에 오
르도록 하지는 않겠읍니다. 그리고 강호의 은원시비나 문파의 쟁
탈전에 있어서는 이 유정풍은 더욱 더 간섭하지 않겠읍니다. 만약
이 말을 어기게 되었을 때는 이 검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뒤집더니 장포자락 안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양쪽을 잡고 내려눌렀다. 그러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검날은 두 토막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장검
을 부러뜨리고 두 토막의 장검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싹싹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동강이 난 두 토막의 장검이 모두 푸른 벽돌
에 박히는 것이 아닌가?
군웅들은 이를 보자 모두 아연해졌다. 두 토막의 단검이 푸른
벽돌을 파고드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그 검은 옥을 자르고 무쇠
를 동강낼 수 있는 예리한 보검이 틀림없었다. 손으로 강철검을
부러뜨린다는 것은 유정풍과 같은 인물로선 별로 대수롭지 않았
다. 그러나 그는 보통 장검을 부러뜨린 것이 아니라 전혀 힘을 들
이지 않고 한 자루의 보검을 부러뜨린 것이다. 손과 손가락의 재
간이 순수하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실로 무림에서 일
류 가는 조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선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석하다. 애석해!]
그가 그 보검을 애석하게 여기는지 아니면 유정풍과 같은 고수
가 관부에 투신하는 점을 애석하게 여긴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
다.
유정풍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소매자락을 걷어올렸다. 그리고
두 손을 금대야에 집어넣으려 했다. 별안간 대문 밖에서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유정풍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대문 쪽에서 네
명의 황삼을 걸친 사내들이 들어왔다. 이 네 사람은 문 앞으로 들
어서자마자 양쪽으로 나누어섰다. 그러자 한 명의 체구가 우람한
황삼의 사내가 네 사람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이 사람
의 손에는 한 폭의 오색빛이 영롱한 기가 높이 쳐들려 있었는데
깃폭에는 진주보석이 잔뜩 박혀 있어 한번 흔들 때마다 찬란한 보
광이 뻗쳐나오곤 했다. 뭇사람들은 그 기를 알아보고 속으로 흠칫
해서 생각했다.
(오악검파 맹주(盟主)의 영기(令旗)가 도달했군!)
그 사람은 유정풍의 앞에 이르더니 깃발을 쳐들고 말했다.
[유 사숙, 오악검파 좌맹주(左盟主)의 명을 받들도록 하십시오.
유 사숙께서 금분세수를 하는 일은 잠시 미루어 주시랍니다.]
유정풍은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맹주께서 명을 내린 것은 무슨 뜻인지?]
대한은 말했다.
[제자는 명을 받들고 행할 뿐 맹주의 뜻을 모릅니다. 유 사숙께
선 용서하십시오.]
유정풍은 미소했다.
[겸손해 할 것 없네. 현질은 천장송(天丈松) 사(史)현질이겠
지.]
그의 얼굴엔 웃음빛이 감돌았으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이 사
건이 느닷없이 일어나 그처럼 많은 풍상을 겪은 사람도 크게 충격
을 받은 듯했다.
그 사내는 바로 숭산파 문하의 제자 천장송 사등달(史登達)이었
다. 그는 유정풍이 자기 이름과 호를 알자 속으로 의기양양해져서
허리를 약간 굽혀보였다.
[제자 사등달이 유 사숙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 몇 걸음 나서서 재차 천문진인과 악불군, 정일사태 등에
게 절을 하고 말했다.
[숭산파 제자가 여러 사백님과 사숙님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나머지 네 명의 사내들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정일사태는 무척 기뻐했다. 반례를 하고 말했다.
[그대의 사부가 나서서 이 일을 정지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
이 잘 되었네. 사실 무공을 배우는 사람은 강호에서 얼마나 자유
로운가? 그런데 하필이면 그까짓 벼슬아치를 해야하느냔 말일세.
다만 나는 유 아우님이 모든 것을 안배해 놓은 것을 보고 결코 이
늙은이의 말을 듣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입을 놀리지 않았을 뿐이
라네.]
유정풍의 안색은 매우 진지했다.
[과거 우리 오악검파가 결맹을 맺고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 서로
돕는다는 약속과 함께 무림의 정의를 지키기로 했소. 따라서 오악
검파와 관계되는 일에 부딪치게 된다면 모두들 맹주의 호령을 들
어야 할 것이오. 그로 인해 이 영기를 대할 때 맹주를 대하듯 하
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외다. 하지만 오늘 불초가 금분세수를 하
게 되는 것은 이 유모의 사사로운 일이고, 또 무림의 법칙다에 어
긋나지 않으며 오악검파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오. 따라서 오
늘은 맹주영기의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사 현질은
존사에게 유모가 기령을 받들 수 없으니 좌 사형께서 용서해주십
사 하는 말을 전하도록 하게나.]
그리고 나서 그는 금대야 쪽으로 다가갔다.
사등달은 몸을 흔들더니 금대야 앞을 막고 오른손의 비단기를
높이 쳐들고 말했다.
[유 사숙, 저의 사부님께서는 천번만번 사숙께선 금분세수의 예
를 늦추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오악검파가 한
뿌리를 가진 나뭇가지처럼 모두들 함께 고락을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읍니다. 저의 사부님께서 영기를 전하신 것은 오악검파의 정
을 돌보는 동시에 무림의 정의를 지키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
에 유 사숙을 위해서입니다.]
유정풍은 말했다.
[난 알 수가 없군. 이 유모가 금분세수를 하겠다는 초청장을 이
미 공손히 숭산에 보냈으며 또 장문의 편지를 써서 좌 사형께 말
씀을 드렸다네. 좌 사형께서 정말 호의를 가지고 계셨다면 어째서
사전에 권하여 막지 않고 이제서야 영기를 내려보내 저지를 하느
냔 말일세. 이것이야말로 이 유모로 하여금 천하영웅들 앞에서 이
랬다 저랬다 하는 소인으로 만들어 강호의 호걸들로부터 웃음을
사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등달은 말했다.
[저희 사부님께서는 유 사숙께서 형산파의 영웅으로서 의기가
구름을 찌르듯 높다고 했읍니다. 그리고 무림의 동도들도 언제나
유 사숙을 심히 존경했으며 저희 사부님 역시 마음속으로 매우 흠
모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제자에게 추호도 실례된 행동을 하지 말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엄벌을 내리겠다고 했읍니다. 유
사숙의 대명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 이 점에 관해서 걱정
할 것이 업다고 생각합니다.]
유정풍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좌 맹주의 과찬이시지. 이 유모에게 그와 같은 명망이
있겠는가?]
정일사태는 두 사람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
다는 듯 입을 열었다.
[유 아우님, 이 일은 좀 지체시켜도 상관이 없지 않겠나. 오늘
이곳의 분들은 절친한 친구이니 누가 자네를 비웃겠는가? 설사 한
두 사람 분수를 모르는 자들이 있어 함부로 비웃고 욕을 한다면
유 아우님을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해도 빈니가 그를 먼저 용서하
지 않을 걸일세.]
그리고 그녀는 눈을 들어 여러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매우 도
전적인 눈초리였다. 누구든지 담이 있으면 오악검파를 상대로 덤
벼봐라 하는 눈빛이었다.
유정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일사태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불초는 금분세수의 일을
내일 오시로 연기하지요. 여러 친구들은 가지 마시고 이 형산에서
하루 더 묵어주시기 바라겠읍니다. 그리고 불초는 숭산파 현질에
게 자세한 사정을 듣도록 하겠읍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안채에서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이봐요. 이게 무슨 짓이예요. 내가 그 누구와 함께 놀던 당신
이 상곤할 게 뭐냔 말이예요.]
군웅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음성으로 미루어보아 바로 하루전날
여창해와 크게 언쟁을 벌였던 곡비연이었다.
그러자 다시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고분고분 앉아 있는게 좋아. 함부로 말하지 말고움직이
지도 마라. 이후에 너를 놓아줄 것이다.]
곡비연은 말했다.
[그거! 정말 이상하네요. 이곳이 당신의 집인가요? 나는 유씨
언니와 후원으로 가서 나비를 잡으려고 하는 데 어째서 당신이 막
느냔 말이예요!]
그 사람은 말했다.
[좋아, 너는 혼자서 가도록 해. 유 소저는 이곳에서 좀 더 기다
려야 한다.]
곡비연은 말했다.
[유 언니는 당신을 보기만 하면 싫증이 난다고 했어요. 그러니
당신은 빨리 멀리 비켜요. 유 언니가 당신을 아는 것도 아닌데 당
신은 누굴 믿고 이곳에서귀찮게 구는거냔 말이예요.]
그러자 다른 여인의 말이 들렸다.
[누이 상관할 것 없어. 가자.]
그 남자는 말했다.
[유 소저, 아무쪼록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시기 바라오.]
유정풍은 들을수록 화가 났다.
(어느 대담한 미친 녀석이 우리집에 와서 소란을 피운담. 감히
나의 청(菁)아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유씨 문하의 두 제자인 미위의가 그 소리를 듣고 안채로 달려갔
다. 곡비연과 그의 사매가 손을 잡은 채 뜨락에 서 있고 한 황삼
의 젊은이가 두 손을 벌린 채 그녀들 두 사람을 막고 있었다. 미
위의는 그 사람의 복장을 보고 숭산파의 제자인 것을 보고 화가
났다. 기침을 두 번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분은 숭산파의 사형이 아니오? 어찌하여 대청으로 가서 앉지
않으시오?]
그 사람은 오만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소. 맹주의 명을 받아 유씨 집안의 가족들 가운데
한 사람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도록 지키고 있는 중이오.]
이 몇마디 말은 우렁찬 것은 아니었으나 대청의 군웅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모두 안색이 변했다. 유정풍은 대노해 사등달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사등달은 말했다.
[만 사제, 이리 나오게. 말을 조심해서 하도록 하게. 유 사숙께
선 이미 손을 씻지 않기로 응낙하셨네.]
그러자 안채의 그 사내가 말했다.
[네, 그렇다면 잘 된 일이죠.]
그리고 그는 안채에서 걸어나와 유정풍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말했다.
[숭산 문하제자인 만대평(萬大平)이 유 사숙께 인사를 드립니
다.]
유정풍은 울화가 치미는 듯 몸마저 미미하게 떨며 낭랑히 외쳤
다.
[숭산파에선 얼마나 많은 제자가 왔는지 모두 일제히 모습을 드
러내 보시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붕 위에서, 대문 밖에서, 대청 모퉁이
에서, 후원에서, 전후좌우에서 수십 명이 일제히 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녜, 숭산파의 제자들이 유 사숙께 인사 드립니다.]
수십 명이 외치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지자 소리가 매우 우렁
찼다. 거기다 너무 뜻밖이라 군우들은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지붕 위에는 십여 명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황삼을 걸치고 있었다.
대청의뭇사람들 가운데 있던 숭산파 제자들은 갖가지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점으로 볼 때 일찌기 잠입하여 암암리에 유정풍
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정일사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게 무슨 짓인가? 너무 사람을 업신여기는군?]
사등달은 말했다.
[정일 사백님께선 용서하십시오. 저희 사부님께선 명령을 내리
시어 어떻게 하더라도 유 사숙에게 권고하여 금분세수를 하지 않
도록 막르라고 했읍니다. 혹시나 유 사숙께서 영을 듣지 않을까봐
부득이 이 같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때 안채에서 십여 명의 사람이 나왔다. 바로 유정풍의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유씨문중의 칠 명 제자였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한 사람의 숭산파 제자가 손에 비수를 들고 유 부인의 등
을 겨누고 있었다.
유정풍은 낭랑히 말했다.
[여러 친구분들, 이 유모가 자기의 뜻만을 고집하자는 것이 아
니오. 그런데 오늘 좌 사형이 이토록 위협을 하는데 그 위협에 굴
복을 한다면 무슨 면목으로이 세상을 살아가겠소. 좌 사형은 이
유모에게 금분세수를 못 하도록 하고 있으나 허허허, 이 유모는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뜻은 굽힐 수 없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그는 한걸음 나가 금대야에 두 손을 담그려고 했다.
사등달은 부르짖었다.
[잠깐!]
그리고 영기를 활짝 펼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유정풍
은 왼손을 질풍처럼 뻗어 두 개의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찌르려고
했다. 사등달은 두 팔을 위로 들었다. 유정풍은 왼손을 움추리며
오른손의 두 손가락으로 다시 그의 두 눈을찌르려고 했다. 사등
달은 막을 수가 없자 뒤로 물러섰다. 유정풍은 그가 물러서자 손
을 다시 금대야에 담그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바람소리가 나며
두 사람이 함께 달려들었다. 유정풍은 머리를 돌리지 않은 채 왼
다리를 들어 뒤로 걷어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게 한 명의 숭산
파 제자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런가 하면 오른손은 다른 한 명
숭산파 제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제자를 들어 사등달에
게 던졌다. 유정풍이 발로 차고 손을 뒤로 돌려 움켜쥐는 행위는
마치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 겨냥한 부위가 정확했고 동작 또
한 빨랐다. 확실히 내가고수인지라 뛰어난 것이었다.
숭산파의 제자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일시 다시 덤벼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유정풍의 등 뒤에서 숭산파 제자가 부르짖었다.
[유 사숙, 손을 머추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의 아들을 죽이고 말
겠소이다!]
유정풍은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더니 냉랭히 말했다.
[천하영웅들이 오셔 계시니 네가 만약 나의 아들을 건드린다면
너희 수십 명 숭산파 제자들은 모조리 피떡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말은 결코 위협만은 아니었다. 숭산파의 제자들이 그의 어린
아들을 해치게 된다면 반드시 공분을 사게 될 것이고 군호들은 일
제히 일어나 공격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면 숭산파 제자들은 죽
음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유정풍은 그 말을 마친 이후 등
을 돌려 두 손을 금대야에 담그려고 했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저지하는 사람이 없는 듯이 보였다. 별안간
은빛 광채가 번쩍하면서 파공성을 내며 날아들었다. 유정풍은 뒤
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 암기는 금대야의 가장자리에 적중되었고
그 충격에 금대야는 옆으로 기울어졌으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쨍
그랑' 소리와 함께 대야는 엎어지고 담겼던 물이 땅바다에 질펀하
게 쏟아지게 되었다.
동시에 누런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지붕 위에서 한 사람
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들어 금대야를 밟았다. 금대야는
밟히자마자 납짝하게 찌그러졌다. 그 사람은 사십여 세 가량에 비
쩍 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가에 희끗희끗한 쥐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두 손을 흔들며 맞잡고 말했다.
[유 사형 맹주의 영을 받들어 그대가 금분세수하는 것을 막은
것이외다.]
유정풍은 이 사람이 숭산파의 장문 좌냉선(左冷禪)의 네째 사제
인 비빈(費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비빈은 대숭양수(大
崇陽手)라는 무예로 무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오늘 유정풍을 상대하기 위해서 삼류의
제자들만이 온 것이 아닌 듯했다. 금대야는 이미 형태가 변했으니
그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유정풍은 지금 당장의 일은
온 힘을 다해 일전을 하느냐 아니면 잠시 굴욕을 참느냐는 것이었
다. 삽시간에 그의 뇌리에는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숭산파에서는 오악맹기를 쥐고 있기는 하나 이토록 사람을 다
그치는 데도 이곳의 천여 명이나 되는 영웅호걸들 가운데 한 사람
도 나서서 공평한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
그는 즉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공수의 예를 하며 말했다.
[비 사형이 오셨구료. 이곳에 와서 술이라도 드시지 않고 어재
서 지붕 위에 숨어서 햇살이 내리쬐이는 따가움을 당하고 계셨소?
숭산파에서는 십중팔구 달리 고수를 보내오신 것 같은데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시기 바라오. 단지 유모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비 사
형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러나 만약 이곳의 영웅호걸을 상
대하려면 숭산파에서는 아마도 좀 부족함을 느끼게 될거요.]
비빈은 빙그레 웃었다.
[유 사형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설사 유 사형 한 사람을 상
대한다고 하더라도 불초는 조금 전 유 사형이 보여 준 소낙안식
(小落雁式) 한 수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외다. 숭산파는 결코 형
산파의 비위를 거슬리려는 것이 아니고 이곳의 영웅에게 죄를 짓
자는 것도 아니외다. 심지어는 유 사형에 대해서도 죄를 지을 생
각은 없소이다. 다만 무림의 수천수백만이나 되는 동도들의 목숨
을 위해 유 사형께서 금분세수를 하시면 안 된다고 당부하러 왔소
이다.]
그말이 떨어지자 대청의 군웅들은 모두 아연해져 생각했다.
(유정풍이 금분세수를 하고 안 하고가 어째서 무림 수천수백만
이나 되는 동도들의 생명과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유정풍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비 사형은 너무나 소제를 추켜올리는 것이외다. 이 유모는 무
공도 보잘 것 없으며 아들딸도 모두 어릴 뿐만 아니라 문하에 팔
구 명도 안 되는 제자를 거둬들이고 있을 뿐이니 실로 보잘 것 없
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런데 이 유모의 일거일동이 어찌하여 무
림의 수천수백만 동도들이 목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정일사태는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소. 유 아우님이 금분세수를 하고 쥐꼬리만한 벼슬을 한다
는데는 솔직히 말해 본인 역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이오. 그러나
사람마다 뜻이 다른 법, 그가 벼슬길에 올라 재물을 모은다 해도
백성을 해치지 않고 무림의 동도들이 저버리지 않는다면 다른 사
람이 억지로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내가 볼 때 유 아
우님은 많은 무림동도를 해칠 만큼 악랄한 사람은 아니예요.]
비빈은 말했다.
[정일사태, 사태는 불문의 인물이니만큼 다른 사람의 교활한 기
량을 알지 못할 것이외다. 이 커다란 음모가 만약 성공한다면 비
단 무림의 수많은 동도들을 해치게 될 뿐 아니라 선량한 백성들도
모두 크게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형
산파 유 세째 나으리는 강호에서 명성이 쟁쟁한 영웅호걸인데 어
찌 스스로 타락의 길로 들어서서 그 더러운 상관의 지시를 받으려
고 하겠읍니까? 세째 나으리로 말하면 집안 재산이 만관이나 됩니
다. 어찌 벼슬길에 올라 재물을 모을 욕심을 부릴 수 있겠읍니까?
이 가운데는 물론 말할 수 없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군웅들은 생각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었어. 유정풍 같
은 사람이 그 조그만 벼슬을 한다면 실로 우스운 일니지.)
유정풍은 노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 사형 억울하게 누명을 씌우지 마시오. 더 이상 숨어 있지
말고 숭산파의 다른 사형제들께서도 모두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시
오.]
그러자 지붕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소.]
노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두 사람이 어느덧 대청 문 앞
에 우뚝 서 있었다. 이 경신법은 조금 전 비빈이 뛰어내릴 때의
그 수법이었다. 동쪽에 선 사람은 뚱뚱하고 체구가 우람한 편이었
다. 정일사태 등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는 바로 숭산파 장
문인의 둘째 사제인 탁탑수(托塔手) 정면(丁勉)이었다. 서쪽의 그
사람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사람이었다. 바로 숭산파의 세 번째
선학수(仙鶴手) 육백(陸柏)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맞잡고 흔들며 말했다.
[유 세째 나으리, 안녕하시오? 여러 영웅들께서도 안녕하십니
까?]
정면과 육백 두 사람은 무림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는 고수들
이었다. 군웅들이 일제히 일어나 반례를 했다. 숭산파의 고수들이
잇달아 도달한 것을 보고 뭇사람들은 속으로 오늘 일이 좋게 해결
되기는 어렵고 유정풍이 크게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일사태는 분연히 말했다.
[유 아우님, 걱정할 것 없소.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이치를 따
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상대방이 많다고 겁을 낼 필요는 없소.
설마 우리 화산파와 항산파의 친구들이 모두 눈을 멀거니 뜨고 이
일을 방관하겠소?]
유정풍은 웃었다.
[정일사태, 이번 일은 말하자면 부끄럽기 짝이 없소. 본래는 형
산파 안의 사사로운 일입니다만 여러 친구들에게 그만 근심을 끼
쳐 드리게 되었군요. 유모는 지금에 와서야 똑똑히 알게 되었읍니
다. 틀림없이 우리 막사형께서 숭산파 좌 맹주에게 내가 여러모로
잘못했다고 고자질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숭산파의 사
형들께서 크게 따지러 온 모양입니다. 좋아요. 유모는 막사형에
대해 예의를 다하지 못했으니 이 몸이 나서서 막사형께 잘못을 인
정하고 사과를 드리도록 하죠.]
비빈은 눈을 들어 대청을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한번 훑어보았
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는데 형형한 안광이 가늘게 뜨여
진 눈을 통해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내공이 몹시 심후하다는
증거였다. 이때 비빈이 유정풍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이 일이 어재서 막대선생과 관계가 있단 말이오. 막대선샌께선
이리 나오십시오. 모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대청 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잠시 시간
이 흘렀으나 막대선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정풍은 쓰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사형제의 불화를 무림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제가 솔직이 말씀드리죠. 소제는 윗어른들의 덕택으로 비교적 부
유한 생활을 누리는 편이죠. 우리 막사형은 집안이 가난하답니다.
친구들 사이에도 재물을 주고받을 수가 있는데 사형제지간에 더
말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그러나 막사형은 웬 까닭인지 감정을 품
으시고 소제의 문으로 한 발자국도 들여놓은 적이 없소이다. 우리
사형제는 수년간 내왕을 하지 않았고 얼굴을 대하지도 않았으니
막사형이 오늘 이곳에 왕림하지 않은 것도 당연합니다. 불초가 마
음속으로 승복할 수 없는 것은, 좌 맹주가 우리 막사형의 말만 듣
고 이토록 많은 사형들을 보내 소제를 상대할 뿐만 아니라 이 유
모의 처와 자녀들까지도 인질로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이오. 이것
이야 말로 조그만 일을 크게 벌리는게 아니겠소?]
비빈은 사등달에게 말했다.
[영기를 들어 올려라.]
사등달은 말했다.
[녜.]
그리고 영기를 높이 쳐들고 비빈의 곁으로 가서 섰다. 비빈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유 사형, 오늘의 이 일은 형산파의 장문인 막대선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니 그대는 그를 끌어대지 마시오. 좌 맹주께서는
우리에게 진상을 분명히 알아보라는 분부를 내렸소. 유 사형이 마
교 교주(魔敎敎主) 동방불패(東方不敗)와 몰래 결탁하고 있지 않
은지 분명히 알아내라고 하셨소. 그리고 어떤 음모를 꾸며 우리
오악 검파와 무림의 정파 동도들을 상대하려고 하는지도 밝혀내라
고 하셨소이다.]
이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의 얼굴빛은 즉시 핼쓱하게 변했다. 어
떤 사람들은 놀라 '어' 하는 소리를 질렀다. 마교와 백도의 협사
들은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쌍방이 원한을 맺은 지 이미 백년이
흘렀으며 서로 끊임없는 싸움을 벌여왔고 상호간에 무수한 사상자
를 냈다. 이 대청의 천여 명이나 되는 군웅들 중에서 적어도 반
이상은 마교에게 해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부형(父兄)이 피살되거나 사부(師父)를 잃은 사람이 태반이었
다. 따라서 마교라는 말만 들어도 이를 갈고 통한히 여겼다. 오악
검파가 결맹을 맺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마교를 상대하기 위함이었
다. 마교는 사람도 많고 세력도 강할 뿐 아니라 무공이 고강했다.
명문정파에선 각기 절예를 지니고 있었으나 종종 마교를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마교 교주 동방불패로 말하면 고금(古今)을 통
틀어 제일가는 고수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그의 이름이 불패(不
敗)라고 하듯 무예를 익힌 이래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군
웅들은 비빈으로부터 유정풍과 마교가 결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자 본래 유정풍에 대해 갖고 있던 동정심이 깨끗이 사라지
고 말았다.
유정풍은 말했다.
[불초는 아직 한번도 마교의 동방불패는 본 적이 없소이다. 어
찌하여 결탁하니 음모니 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오?]
비빈은 고개를 돌리고 세째 사형 육백을 쳐다보았다. 육백은 조
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유 사형, 그대의 그와 같은 말은 솔직하지 못한 것 같구료. 마
교 가운데는 한 명의 장로가 있는데 이름은 곡양(曲洋)이라고 하
지요. 유 사형은 그 사람을 모르시오?]
유정풍은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곡양이란 이름
이 거론되자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면은 대청으로 들어선 이후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갑자
기 날카로운 어조로 다그쳤다.
[당신은 곡양을 모르오?]
그 음성은 우렁차기 이를데 없었다. 그 한마디에 모든 사람들은
귀가 윙윙거리는 것을 느꼈다.
유정풍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주시
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 유정풍은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맞았소. 곡양 형님으로 말하면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나의
유일한 지기이고 가장 절친한 친구요.]
대청 안은 웅웅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군웅들은 술렁거리며
다투어 의견을 주고 받았다. 유정풍의 말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
을 주었다.
비빈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대 스스로 인정하니 참 잘 되었소. 사내대장부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소. 유정풍, 좌 맹주는 두 가지의 길
을 제시하고 그대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했소.]
유정풍은 비빈의 말을 못 들은 척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의자
에 앉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술주전자를 들더니 잔에 따라 한자
의 술을 천천히 마셨다. 군웅들은 그의 옷소매가 직선으로 아래로
드리워져 있을 뿐 조금도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수양이 대단히 깊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요긴한 때에도 조금도 표
정과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은 무공이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
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담이 크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 같은 행동을 보고 군웅들은 탄복했다.
비빈은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좌 맹주께선 유정풍이 형산파에서 다시 얻을 수 없는 인재라고
하시며 일시 도적을 잘못 사귀어 나쁜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나 만
약 깊이 뉘우친다면 우리는 절친한 친구 사이이니 새로운 길을 열
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소이다. 그대가 이 길을 선택하겠다면
한달 안으로 마교장로 곡양을 죽여서 그 머리를 들고 숭산으로 오
라고 하셨읍니다. 그러면 과거의 일은 따지지 않겠으며 다시금 옛
날같이 사이좋은 형제가 될 것이라고 하셨소.]
군웅들은 생각했다.
(정사(正邪)는 양립할 수 없는 법이다. 마교의 방문좌도(旁門左
道)의 무리들은 협의도의 인물들을 만나기만 하면 사생결단을 내
려고 한다. 따라서 좌 맹주가 유정풍에게 곡양을 죽여 뜻을 분명
히 하라고 한 것은 지나친 요구가 아니다.)
유정풍의 얼굴에 한 가닥 처량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곡형과 나는 한번 보자마자 의기가 투합하여 친구가 되었소.
그와 나는 십여 차례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밤중에 이야기를 한적
이 있고, 간혹 우연히 문호나 종파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면 그
는 언제나 깊이 탄식하면서 우리들이 싸우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고 했소. 나와 곡형이 사귄 것은 다만 음률을 연구하자는 것에 불
과하오. 그는 칠현금(七絃琴)의 명수이고 나는 퉁소를 불기 좋아
하오. 우리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칠현금과
퉁소를 함께 부는데 소일할 뿐 무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얘기
하지 않소이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믿지 않을런지 모르지만 당금 세상에서 칠현금을
튕기는데 있어서 그 누구도 곡형을 따라갈 수 없소. 그리고 퉁소
를 부는데 있어 불초 역시 두 번째 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소. 곡형이 비록 마교에 몸을 담고 있긴 하지만 나는 그가 칠현
금을 튕기는 가락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성품이 고결하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소. 그야말로 가을 하늘처럼 넓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분이오. 유정풍은 그에 대해서 탄복할 뿐 아니라 앙모하고
있소. 이 유모는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으나 그 같은 군자를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소이다.]
군웅들은 들을수록 어리둥절해졌다. 그와 곡양이 음악으로 사귀
게 되었다는 사실은 천만 뜻밖이었다. 그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
으나 유정풍의 말이 너무나 간곡하여 조금도 거짓말을 하는 기색
이 보이지 않았다.
강호에는 기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로부터 성
(聲)과 색(色)은 사람을 홀리게 하지 않았던가? 유정풍이 음악에
탐닉하게 된 것도 크게 신기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형산
파의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형산파의 역대 고수들이 몬 음악
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특히 당금 장문인 막대선생의 호가 소상야
우(瀟湘夜雨)이며 언제나 호금(胡琴)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금중장검, 검발금음(琴中藏劍, 劍發琴
音)' 이라는 여덟 자의 외호(外號)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유정풍이 퉁소를 불다가 곡양과 서로 사귀게 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비빈은 말했다.
[그대와 곡 마두(曲魔頭)가 음률로 사귀었다는 사정을 좌 맹주
(左盟主)는 이미 알고 있소. 좌 맹주께서는 마교가 커다란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씀하시었소. 마교에게는 오악검파가 근래 들어
무척 세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다해서 오악검파끼
리의 불화를 심고 이간질을 시키는 등 온갖 음모를 꾸미고 있소.
혹은 재물로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미색으로 정신
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오. 유 사형은 평소 근엄하기때문에 마교
에게는 그대가 좋아하는 바를 간파한 후 곡양을 보내 음률로써 친
구를 맺도록 계책을 꾸몄던 것이오. 유 사형, 그대는 반드시 머리
를 맑게 하고 생각해보시오. 과거 마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
쳤소? 그런데도 그대는 그와 같은 사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까?]
정일사태는 말했다.
[그렇지. 비 사제의는 말이 맞아. 마교가 무서운 점은 무공의
음독(陰毒)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시 여러가지 간계를 쓴다는
데에 있지. 유 사제 그대는 정인군자가 아니오? 한시 바삐 곡양이
라는 마두를 일검에 죽이도록 하시오. 그렇다면 모든 일은 깨끗이
처리될 것이오. 오악검파는 한 집안과 다름이 없는 사이 마교의
이간질을 받아 분열되는 불상사를 막아내야 할 것이외다.]
천문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 사제. 잘못이 있으면 서슴없이 고치는 것이 군자의 할 도리
라고 했소. 그대가 곡 마두를 죽인다면 협의도를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형산파의 유정풍은 과연 선악을 분명히
가릴 줄 아는 호걸' 이라고 칭찬을 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대
의 많은 친구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소?]
유정풍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악불군을 한동안 주
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악 사형은 시비를 구분할 줄 아는 군자라고 생각합니다. 이곳
의 많은 분들이 저 보고 친구를 팔아먹으라고 핍박하고 있는데 악
사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불군은 말했다.
[아우님, 진정한 친구라면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의리를
지켜야 할 것이오. 그러나 마교의 그 곡가는 웃음 속에 칼을 감추
고 있고 입술은 달콤하나 속에는 검을 품고 있는 자로서 온갖 방
법을다해 그대의 환심을 사려고 했소. 그자야말로 가장 음독하고
악랄한 우리의 적이라고 할 수 있소. 그는 유 아우님을 패가망신
기키고 오악검파를 분열시키려는 악독하기 그지없는 작자란 말이
오. 그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친구라는 두 글자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겠소? 옛사람들은 대의를 위해서 혈육을 버린다고 했소. 혈육
을 죽일 수도 있거늘 어찌 그와 같은 마두를 죽이지 못한단 말이
오?]
군웅들은 그가 조금도 거침없이 내뱉는 말을 듣고 다투어 말했
다.
[악선생의 그와 같은 말씀은 몹시 명백하게 도리를 밝힌 것이군
요! 친구를 위해서는 의리를 지켜야 되겠지만 적이라면 반드시 제
거해야 되는 법이오.]
유정풍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불초와 곡형은 처음 사귈 때부터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
이라고 짐작했었소. 최근의 형세를 살펴본 결과 우리 오악검파와
마교 사이에는 커다란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짐작이 되는군요.
한쪽은 동맹을 맺은 사형제들이고 한편은 절친한 친구이니 불초로
서는 어느 한쪽을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오. 따라서 어쩔 수없이
오늘 금분세수의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천하에 이 유모가 무림에서
물러서며 다시는 강호의 은원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외다. 그리하여 나는 돈을 주고 쥐꼬리만한 벼슬을 얻어
내었고 이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 이목을 가지려고 했던 것이오.
그런데 뜻밖에도 신통력이 대단하신 좌 맹주께서 불초의 사정을
환히 알고 계셨구료.]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정풍이 은퇴식을 하는 이유를 알았
다는 시늉을 했다. 비빈과 정일, 육백(陸柏) 세 사람은 서로의 얼
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좌 맹주께서 유정풍의 간계를 미리 알아차려 방비하지 않
았다면 큰일날 뻔했다!)
유정풍은 계속해서 말했다.
[마교와 우리 협의도는 백년이 넘도록 싸워왔으며 서로 죽고 죽
이는 원수지간으로 변하고 말았소이다. 따라서 시비를 가리기란
여간 복잡미묘한 게 아니외다. 나는 그저 피비릿내나는 강호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퉁소나 불고 자식들에게 글공부나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외다. 이것이 오악검파의 맹약(盟約)을
어긴 행위일까요?]
비빈은 멸시의 웃음을 입가에 담고 말했다.
[세상이 어려울 때 조용히 은거한다는 것은 마교가 세상을 유린
하도록 방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그 곡씨성을 가진 마두는
당신과 친구인데 당신은 강호의 일에서 손을 떼고 곡가는 여전히
마교를 위해 활동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마교를 돕는 결과가
되는 것이오.]
유정풍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곡형은 이미 내 앞에서 맹세를 했소. 마교와 백도가 어떻게 싸
우든지 절대로 상관하지 않겠다는 맹세였소. 남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한 절대로 사람을......]
비빈은 냉랭히 말했다.
[흥!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공
격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란 말인가?]
유정풍은 대답했다.
[그는 힘을 다하여 싸움을 막겠다고 했소. 그는 오늘 아침 사람
을 보내어 나에게 말했소. 화산의 영호충이 누구에겐가 상처를 입
어 새영이 경각에 달렸는데 그가 나서서 구해냈다고 했소.]
그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악영산이 참
지 못하겠다는듯 물었다.
[대사형은 어디에 있나요? 정말 곡씨 선배가 그의 생명을 구해
주었나요?]
[곡형의 말이니 거짓은 아니겠지. 이후 영호 현질을 만난다면
네가 친히 물어보려므나.]
비빈은 냉소를 날렸다.
[흥! 마교의 녀석들은 사람을 이간질시키고 또 자기편으로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별별 수단을 다 쓰지. 그러니 온갖 방법을 다해
영호충을 포섭하려는 모양이지. 영호충은 어쩌면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마교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우리 오악검파는 또 한 명의 반도(叛徒)가 생기게 마련이
야.]
유정풍의 눈썹이 꿈틀 뻗쳐 올라갔다.
그는 노한 어조로 말했다.
[비 사형, 그대는 또 한 명의 반도라고 했는데 또 라는 그 한
글자는 무슨 뜻이오?]
비빈은 냉소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 짐작하고 있을 터인데 밝혀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유정풍은 말했다.
[흥. 그대는 이 유모가 본문의 반도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 유
모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니 다른 사람이 관계할 것
없소. 유정풍은 감히 조사나 윗어른들을 기만한 적이 없으며 형산
파 본문을 배반한 적도 없소. 그 반도라는 두 글자는 그대로 돌려
드리겠소.]
그는 예의가 깎듯한 편이었다. 군웅들은 그의 처지가 매우 불리
한데도 여전히 비빈과 칼날 같은 언사로 맞서서 논쟁할 뿐만 아니
라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담량이 뛰어난데 감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비빈은 말했다.
[그렇다면 유 사형은 첫번째의 길을 가지 않을 것이며 결코 그
대마두 곡양을 죽이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유정풍은 말했다.
[좌 맹주께서 명령을 내리셨다면 비 사형은 이대로 손을 써서
우리 유씨 집안의 전가족을 죽이도록 하시구료.]
비빈은 말했다.
[그대는 믿는데가 있는 체 행동하지 마시오. 천하의 영웅호걸들
이 그대의 집에 손님으로 있다고 해서 우리 오악검파가 두려워서
문호를 정리하지 못할 줄 아시오?]
그는 손을 뻗어 사등달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너라.]
사등달은 대답했다.
[녜.]
그리고 그는 세 걸음 다가섰다. 비빈은 그에게서 오색영기를 받
아 높이 쳐들며 말했다.
[유정풍을 들으시오? 좌 맹주께선 영을 내리셨소. 그대가 만약
한달 안으로 곡양을 죽일 것을 응낙하지 않는다면 오악검파는 부
득이 후한을 없애기 위해 뿌리째 풀을 잘라 버릴 것이며 결코 용
서하지 않겠소. 그대는 다시 생각해 보시오.]
유정풍은 참담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이 유모는 친구를 사귐에 있어 온 정열과 정성을 다했소이다.
그런데 어떻게 친구를 죽여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한단 말이오? 그
대 숭산파에선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한 모양이구료. 손을 쓰려면
즉시 손을 쓰시오. 언제까지 기다릴 참이오?]
비빈은 영기를 활짝 펼치며 낭랑히 외쳤다.
[태산파의 천문 사형, 화산파의 악 사형, 항산파의 정일사태,
형산파의 사형과 사제들은 좌 맹주의 분부를 들으시오. 자고로 정
사는 양립할 수 없으며 마교와 우리 오악검파의 원한은 바다같이
깊소. 유정풍은 도적과 사귀고 원수를 돕고자 하니 우리 오악의
형제들은 함께 손을 써서 주살해야 할 것이오. 자아, 명령을 따를
사람들은 왼쪽에 서시오!]
천문진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성큼성큼 걸어 왼쪽에 가서 섰다.
그는 유정풍에게 일변조차 던지지 않았다. 천문진인의 사부가 과
거 마교의 장로에 의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그는 마교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가 왼쪽으로 가자 문하 제
자들도 뒤를 따랐다.
악불군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유 아우 그대가 고개만 끄덕인다면 악불군이 책임지고 그대를
위해 곡양의 일을 처리하겠소. 어떠시오? 그대는 사내대장부로서
친구에게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고 했는데 천하에 곡양 한 사람만
그대의 친구이고 오악검파와 이곳에 많이 모인 호걸들은 그대의
친구가 아니란 말이오? 이곳의 천여 명이나 되는 무림의 동도들이
그대가 금분세수를 한다는 말을 듣고 먼길을 멀다 하지 않고 달려
왔으며가슴 가득히 성의를 다해 그대에게 축하를 했으니 진정한
우정을 보인 것이 아니겠소. 그대는 집안의 나이 많은 노인과 어
린애와, 오악검파의 사형제들의 의리, 이곳의 수천 명이나 되는
동도들의 우정을 함께 합친다 해도 곡양 한 사람에 미치지 못한다
고 생각하시오?]
유정풍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악 사형 그대는 선배이니 대장부가 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 무
엇인지 알고 계실 것이오. 그대의 충고에 이 유모는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곡양을 살해하라고 강요한다면 절대 들을
수 없소. 그것은 나보고 악 사형을 해치거나 이곳에 계신 한 분을
해치라고 강요했을 때 내가 거절하는 것과 같은 것이오. 이 유모
는 전가족이 죽음을 당한다 해도 결코 허락할 수 없는 노릇이외
다. 곡형은 나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와 같은 말은 지극히 성의에 차 있어서 군웅들은 얼굴빛이 변
했다. 무림에선 의리를 가장 중시했다. 유정풍이 곡양과의 교분을
중요시하는데 대해 강호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한편 찬탄을
금치 못했다.
악불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 아우님, 그 말은 틀렸소. 유 아우님이 친구와의 의리를 지
키는 것은 탄복할 일이지만 정사를 가리지 않고 시비를 가리지 않
는 면이 있구료. 마교는 많은 악한 일을 저질렀으며 강호의 정인
군자들을,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해쳤소. 유 아우님은 일시적
으로 칠현금과 퉁소로써 의기투합한다고 하여 전가족의 목숨을 그
자에게 맡긴다는 것은 의리라는 두 글자를 오해한 것이오.]
유정풍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악 사형, 그대는 음율을 좋아하지 않으니 소제의 뜻을 모를 것
이오. 말이나 글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칠현금이나 퉁소의 소
리는 마음의 소리라서 결코 가장할 수가 없는 것이외다. 소제와
곡형이 서로 사귀게 된 후 칠현금과 퉁소 소리로 서로 화답하는
가운데 마음과 뜻이 통하게 되었소. 소제는 기꺼이 전가족의 목숨
을 걸고 거부하겠소. 곡형은 마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지만
손톱만큼도 사악한 구석이 없는 사람이외다.]
악불군은 길게 한숨을 쉬고 천문진인 옆으로 갔다. 노더약, 악
영산, 육후아 등도 악불군과 같이 행동했다.
정일사태는 유정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후 내가 그대를 유 아우님이라 불러야겠소? 아니면 유정풍이
라 불러야겠소?]
유정풍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정풍은 이미 죽고 없을 텐데 부를 일이 있겠소?]
정일사태는 합장하고 말했다.
[아미타불!]
그리고 악불군 곁으로 가더니 말했다.
[마에 깊이 빠졌으니 정말, 죄(罪)가 크도다! 죄가 크도다!]
그녀의 제자들도 그녀를 따라갔다. 비빈은 말했다.
[이것은 유정풍 한 사람의 일로 다른 사람과는 상관이 없는 일
이오. 형산파의 제자들 가운데 반역도를 따르기 싫은 사람은 모두
왼쪽으로 가 서시오.]
대청 안은 잠시 조용했다. 한 명의 젊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유 사백부님 제자들은 실례하겠읍니다.]
곧이어 삼십 명이나 되는 형산파의 제자들이 항산파 여승들의
옆으로 가 섰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유정풍의 사질들이었다.
비빈은 다시 말했다.
[유씨문중의 직계제자들도 왼쪽으로 가 서시오.]
상대년이 낭랑히 말했다.
[우리는 사문의 깊은 은혜를 입은 몸으로서 의리로 보더라도 그
은혜를 저버릴 수 없읍니다. 유씨문중의 제자들은 은사님과 생사
를 같이 하겠소이다.]
유정풍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좋다, 좋아. 대년, 너는 그 한마디 말로써 이미 사부에게 할바
를 다했다. 너희들도 저쪽으로 가거라. 이 사부가 친구를 사귄것
이니 너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미위의는 장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어느 누구든 우리 은사를 해치고자 한다면 나를 먼저 죽이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는 유정풍의 앞을 막아섰다. 정면이 왼손을 쳐들었다.
쉭 하는 가벼운 음향이 일면서 가느다란 은빛 광채가 번개같이 쏟
아졌다. 유정풍이 깜짝 놀라 미위의의 오른쪽 어깨를 밀었다. 내
력이 이르는 곳에 미위의는 왼쪽으로 밀려났다. 그러자 그 은빛
광채는 유정풍의 가슴을 향해 날았다. 상대년은 사부님을 보호하
겠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즉시 몸을 날렸 유정풍의 앞을 막아
섰다. 순간 그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은침은 그의 심장에 적중되었고 그는 즉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유정풍은 왼손으로 그의 시체를 얼싸안고 손을 그의 코 앞으로
가져갔으나 이미 숨은 멈추어져 있었다. 유정풍은 고개를 돌려 정
면에게 말했다.
[정노이(丁老二) 그대 숭산파에서 먼저 나의 제자를 죽였다.]
정면은 싸늘히 말했다.
[그렇소. 우리가 먼저 손을 썼소. 어떻게 할 참이오?]
유정풍은 상대년의 시체를 안더니 힘주어 정면에게 던질 자세를
취했다. 정면은 그의 힘을 주려는 자세를 바라보고 형산파의 내공
이 매우 독특한 점을 상기했다. 거기다 유정풍은 형산파의 일류고
수가 아닌가? 한번 던진다면 그의 기세는 대단할 것이라고 여겼
다. 그는 즉시 암암리에 내력을 끌어올리고 시체를 받아들었다가
재차 그에게 던질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유정풍이 시체를 앞으로
내던질 자세를 취하더니 별안간 몸을 비스듬히 날렸다. 그리고 두
손을 조금 구부려서 상대년의 시체를 비빈의 가슴 쪽으로 밀었다.
그 같은 행동은 너무 빨라 비빈은 뜻밖의 일을 당한 셈이었다. 비
빈은 두 손을 세우고 힘을 주어 시체를 막으려고 했다. 바로 이때
그는 양쪽의 허리가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유정풍에게 혈도를 집
힌 것이다.
유정풍은 일초가 성공하게 되자 왼손으로 비빈의 손에 들려 있
는 영기를 낚아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들고 비스듬히
그의 목에 갖다대었다. 그리고 왼쪽 팔굽을 연달아 움직여 그의
등에 있는 세 곳의 혈도를 봉해 버렸다. 손을 쓰느라고 상대년의
시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이 몇
가지의 행동은 변화가 지극히 빨라 비빈이 제압을 당했다고 생각
했을 때는 오악영기가 이미 유정풍의 손으로 넘어간 후였다. 유정
풍이 펼친 것은 바로 형산파의 절기로서 백변천환형산운무십삼식
(百變千幻衡山雲霧十三式)라고 불려지는 무예였다. 뭇사람들은 오
래 전부터 그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으나 구경을 하기에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악불군은 과거에 사부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이 백변천환형산
운무십삼식은 형산파 윗대 제일의 고수가 창출한 것이라고 했다.
이 고수는 강호에 돌아다니면서 요술를 부려 생계를 유지했다. 강
호에 떠돌아다니면 요술을 부리는 것은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
쪽에서 치는 일이며 허허실실 사람의 이목을 속이는 일이었다. 그
런데 만년에 이르러 그의 무공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고 요술의 기
량도 날로 늘게 되자 내가(內家)의 재간을 요술에 섞어서 사용하
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요술의 재간을 무공에 섞게 되었다.
그리하여 갖가지의 신기한 무공을 잇달아 창안하게 되었다. 이것
이 후세에 이르게 되자 형산파의 삼대 절기 중에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 재간은 변화가 무쌍하기는 했으나 적을 상대로 싸울때 별
쓸모가 없었다. 고수들끼리 싸우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은밀
히 경계를 하고 전신의 문호를 조심스럽게 엄히 지키기 때문에 이
처럼 사람의 이목을 속이는 요란스런 초식을 사용할 기회는 적었
다. 그래서 형산파에서는 이 무공에 대해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유정풍은 말이 적고 심기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부에게 이
재간을 배우게 되었으나 깊이 감추고 한평생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급해지자 그것을 펼쳐 숭산파의 명성이 쟁쟁한 대숭양수
(大崇陽手) 비빈을 제압한 것이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오악검파의
맹기를 쳐들고 왼손의 장검을 비빈의 목에 겨눈 채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 사형, 육 사형 이 유모는 당돌하게 오악영기를 빼앗았지만
나는 결코 두 분께 위협을 하자는게 아니오. 다만 두 분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게 있읍니다.]
정면은 육백을 쳐다보고 생각했다.
(비 사제가 그의 암수에 걸렸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우선
들어보기로 하자.)
그래서 정면은 말했다.
[무슨 부탁을 하자는 것이오?]
유정풍은 말했다.
[두 분은 좌 맹주에게 이 유모의 전가족이 은거할 수 있도록 허
락을 해주시고 차후로는 무림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 주시오. 이 유모는 곡양과는 두번 다시 만나
지 않겠소. 따라서 여러 사형들과 친구분들과도 ......영원히 다
시 만나지 않기로 하겠소. 이 유모는 가족과 제자를 데리고 멀리
해외로 떠나 은거하겠으며 살아 생전 다시는 중원 땅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소.]
정면은 잠시 망설인 후 말했다.
[이 일은 나와 육 사제로서는 결정할 수 없소. 반드시 돌아가
좌 사형께 말씀을 올리고 그의 분부를 따라야 하오.]
유정풍은 말했다.
[이곳에 태산파 화산 두 장문인이 계시고 항산파의 정일사태도
계시니 정일사태는 그녀의 장문사제를 대신해서 결정할 수 있을
것이오. 그밖에도 영웅호걸들이 증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뭇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유모는 친구분들에게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 몸으로 하여금
친구의 의리를 돌보게 하고 가족과 제자들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
도록 해 주십시오.]
정일사태는 외유내강한 성격이었다. 성질이 조급한 편이었지만
심성은 말할 수 없이 인자한 편이었다. 그녀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는게 좋겠소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들 감정을 상하지 않을
것이오. 정 사형, 육 사형 우리 유 현제의 청을 들어 주도록 합시
다. 그는 다시 마교 사람과 사귀지 않고 또 중원서멀리 떠나게
되니 이는 세상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가 아
니겠소? 그러니 반드시 살생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천문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오. 악 현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
오?]
악불군은 말했다.
[유 아우님은 한번 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
와 같이 말을 한 이상 그를 믿을 수가 잇는 것이죠. 자아, 우리는
싸움을 평화롭게 해결하도록 합시다. 유 아우님은 비 아우님을 놔
주시오. 그리고 모두 함께 화해의 술을한 잔 들도록 합시다. 그
리고 내일 일찌기 그대는 가족과 제자를 데리고 형산성에서 떠나
가도록 하시구료.]
이때 육백이 입을 열었다.
[태산과 화산 두 파의 장문인께서 모두 그렇게 말씀 하시고 정
일사태께서도 유정풍을 위해 좋은 말씀을 하시니 우리가 어찌 뭇
사람들의 뜻을 저버릴 수 있겠소이까? 하지만 사제가 지금 그의
암수에 걸려 있는 몸인데 우리가 만약 그 요구에 응낙을 하게 된
다면 강호의 사람들은 반드시 숭산파에서 유정풍의 협박을 받고
부득이 머리를 숙이고 굴복했다고할 것이오. 그와 같은 소문이
퍼지게 된다면 숭산파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소?]
정일사태는 말했다.
[유 아우님은 숭산파에 대해서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이지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외다.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굴복했다고 한다
면 유정풍이 굴복한 것이지요. 더군다나 그대들은 이미 유씨문의
제자를 한 명 죽이지 않았소?]
이때 육백이 번쩍 몸을 날렸다. 유정풍의 큰 아들의 등에 칼날
을 들이대고 말했다.
육백은 말했다.
[유정풍, 우리를 따라 숭산으로 가 좌 맹주를 보고 친히 사정을
하도록 하시오. 우리는 명을 바꾸어 결정을 할 수가 없소. 그대는
즉시 영기를 바치고 우리 비 사제를 놔 주시오.]
유정풍은 참담한 미소를 짓고 아들을 보며 말했다.
[얘야, 너는 죽음이 두려우냐?]
유 공자는 말했다.
[저는 아버님의 말씀을 따르겠읍니다. 전 두렵지 않읍니다.]
유정풍은 말했다.
[오, 착하다.]
육백이 호통을 쳤다.
[죽어라!]
단검은 유 공자의 등을 뚫고 들어가 그의 심장까지 파고 들었
다. 유 공자는 앞으로 쓰러졌으며 그의 등에 난 상처에서 샘처럼
피가 솟아 올랐다.
유 부인은 큰 소리를 내지르며 아들의 시체를 덮었다. 육백은
다시 소리쳤다.
[죽어라!]
그는 다시 검을 찔렀다.
다시 일 검으로 유 부인의 등을 찌른 것이었다.
정일사태는 대노해서 일장을 휙 하고 육백을 후려치며 소리쳤
다.
[이 짐승 같은 녀석!]
정면이 다가들며 일 장을 후려쳤다. 쌍 방의 손이 부딪치게 되
자 정일사태는 세 걸음 물러서게 되었다. 가슴에서 비릿내가 나면
서 한 모금의 선혈이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호승심이
강했다. 피를 다시 꿀꺽 삼켰다. 정면은 빙그레 웃고 말했다.
[양보해 주셔서 고맙소.]
정일사태는 원래 장력에 장점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방금 이 일 장은 육백을 때리려고 한 것이었지만 그 일 장으로 무
리를 쳐죽일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면이 손을 썼는데
정면의 일 장에는 혼신의 공력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하여 두손이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을 때 정면의 장력이 산과 바다처럼 밀어 닥
치게 되었고 그만 상처를 입고 피까지 토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정일사태는 크게 분노하고 말았다.
다시 두 번째로 손을 들고 제이 장을 격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공
력을 돋우는 그 순간 단전이 칼로 에이는 듯 아파왔다. 그녀는 자
기 상처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당장 대항할 수 없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손을 흔들며 노해 부르짖었다.
[우리는 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 밖으로 걸어 나갔고 문하의 제자들도 뒤를
따라 나갔다.
육백이 소리쳤다.
[모두 죽여라!]
두 명의 숭산파 제자가 검을 휘둘러 두 명의 유씨문중 제자를
살해했다. 육백은 말했다.
[유씨 문중의 제자는 들어라! 만약 살고 싶다면 땅바닥에 꿇어
앉아 용서를 빌면서 유정풍의 잘못을 꾸짖는다면 살려 주겠다.]
유정풍의 딸 유청은 노해 부르짖었다.
[이흉악한 도적놈! 너희 숭산파는 마교보다도 만 배나 더 잔악
하다!]
육백이 소리를 내질렀다.
[죽여라!]
만대평은 장검으 들고 일검을 내리쳤다. 그의 검은 유청의 오른
쪽 어깨를 곧장 허리까지 이르도록 베었다. 나머지 숭산파의 제자
들도 일검에 한 명씩 이미 혈도를 제압당해 있는 유씨 문중의 직
계제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대청에 모여 있는 군웅들은 한평생 창과 칼끝에서 살아온 사람
들 이었지만 이와 같은 학살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선배 영웅들은 말로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숭산파는 너무나 빨
리 손을 썼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대청에는 이미 시체가 이곳
저곳에 널려지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은 다시 생각했다.
(자고로 정사는 세불양립이라고 했다. 숭산파에서 이와 같은 거
동을 한 것은 결코 유정풍에 대하여 어떤 사사로운 사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손을
쓰는데 있어서 잔인하다고 해서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
나 숭산파에서는 이미 상황을 장악하고 있고 항산파의 정일사태까
지도 돌아갔으며 천문진인이나 악불군과 같은 고수들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있지 않느냐? 이 일은 형산파의 일인데 다른 사람이 만
약 쓸데없이 간섭을 하겠다고 억지로 나섰다가는 살신지화를 면하
기 어려운 것이니 자기 몸이나 잘 지키는 것이 낳겠다.)
이때 유씨 가문의 제자들과 자녀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게 되
고 다만 유정풍이 가장 사랑하는 열다섯 살 난 아들 유근(劉芹)만
이 남게 되었다. 육백은 사등달에게 말했다.
[저녀석에게 용서를 빌겠느냐 물어봐라.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그의 코를 자르고 다시 귀를 자른 후 눈깔을 뽑아 고통을 당하도
록 해 주어라.]
사등달은 말했다.
[좋읍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리고 유근을 향해 물었다.
[너는 용서를 빌겠느냐?]
유근의 안색은 창백했다.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유
정풍은 말했다.
[애야, 너의 형과 누나는 얼마나 꿋꿋하더냐? 죽으면 죽는 것이
지 두려워 할 것이 뭐 있겠느냐?]
유근은 약간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아, 아버님 그들은......저의 코를 자르고......
저의 눈알을 뽑아낼려고......]
유정풍은 소리내어 웃었다.
[이제 이 지경에 이른 이상 그들이 우리를 놔 주리라고 생각하
느냐?]
유근은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곡 백부님을 죽이겠다고 응낙을 하
세요.]
유정풍은 대노하여 호통을 내질렀다.
[닥쳐라! 이 짐승 같은 녀석! 무슨 말을 하느냐?]
사등달은 장검을 들고 끝을 유근의 코앞에 갖다 대고서 흔들흔
들해 보이며 말했다.
[오냐, 네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이 일검으로 코
를 잘라 내겠다. 하나......둘......]
그가 미처 셋 하기도 전에 유근은 밑바닥에 꿇어 엎드려서는 애
걸을 했다.
[나를......나를 죽이지 말아요. 나는......]
육백은 웃으며 말했다.
[좋다. 너를 용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너는 반드시
천하영웅들 앞에서 유정풍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유근은 눈으로 자기 부친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유정풍은 줄곧 침착하기 이를데 없는 태도를 보였다. 처자와 아
들딸이 그의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얼굴 근육은 움직이
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는 분노를 걷잡을 수 없는 듯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이 짐승 같은 녀석! 너는 너의 어미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지도
않느냐?]
유근은 어머니와 형 그리고 누나의 시체가 피바다 속에 잇는 것
을 보고 또 사등달이 장검을 들고 끊임없이 얼굴 앞에 대고 흔들
고 있는지라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살려 줘요! 그리고 저희 아버님을 용서해 주세요!]
육백은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마교의 악인과 결탁을 했다. 너는 그가 잘 했다
고 생각하느냐?]
유근은 나직이 말했다.
[잘......잘못했어요.]
육백은 말했다.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되겠지?]
유근은 고개를 숙이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육백은 말했다.
[꼬마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일검으로 죽여 버려라.]
사등달은 대답했다.
[네.]
그러나 그 말이 정말 죽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칼을
들고 내리치는 시늉만 했다.
유근은 재빨리 말했다.
[죽여야......마땅합니다.]
육백은 말했다.
[잘 대답했다. 이후부터 너는 형산파의 사람도 아니고 유정풍의
아들도 아니다. 내 너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
유근은 땅바닥에 꿇어 앉아서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두 다리에
맥이 빠진듯 일어서지도 못했다.
군웅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참을 수 없는 수치를 느꼈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바라보지도 않았다.
유정풍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육가야! 네가 이겼다.]
그리고 오른손을 휙휙둘러 오악영기를 육백에게 던졌다. 그리고
왼발을 들어 비빈을 걷어차 쓰러지게 하고는 낭랑히 말했다.
[이 유모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스스로 자결을
하겠다.]
장검을 비켜들고 자기의 목으로 가져 갔다. 바로 그때였다. 처
마 쪽에서 별안간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질풍과 같은
속도였다. 대뜸 손을 뻗쳐 유정풍의 왼쪽 손목을 잡고 말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은게 아니다! 같이 가세!]
그리고 오른손을 뒤로 향해 하나의 원을 그리더니 유정풍을 끌
고 바깥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유정풍은 놀라 말했다.
[곡형, 그대 ......]
군웅들은 그가 곡형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 흑의인이 바
로 마교장로 곡양인 것을 알고는 하나같이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곡양은 부르짖었다.
[말은 하지 말게!]
그리고 발에다 힘을 주었다. 그런데 단 세 걸음을 옮겼을 때 정
명과 육백 두 사람이 일제히 양손을 쳐들고 나누어 두 사람의 등
을 후려쳤다. 곡양은 유정풍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빨리가세!]
그리고 손을 뻗쳐 유정풍의 등을 옆으로 미는 동시에 등에 과격
을 돋우고 억지로 정면과 육백 두 고수가 공격한 일격을 받았다.
'펑'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곡양의 몸뚱아리가 바깥쪽으
로 날아갔다. 한 모금의 선혈이 그의 입에서 뿜어졌다. 그러나 그
는 뒤로 손을 돌려 잇달아 휘둘렀다. 한 줄기의 검은 바늘이 빗살
처럼 뒤로 날아갔다.
정면은 부르짖었다.
[흑혈심침(黑血神針)이다! 빨리 피해라!]
그리고 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들은 한 무더기의 흑침이 오래전
부터 전해 내려오는 마교의 흑혈신침이라는 고함소리를 듣자, 모
두 놀라서는 황망히 피하느라고 대뜸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십여
명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대청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
고 신침이 많고 빨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독침에 적중되고
말았던 것이다.
혼란 속에서 곡양과 유정풍은 어느덧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영호충이 입은 상처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항산파의 영약과 깊은 내공(內功) 조예 때문에 폭포 옆
에서 이틀을 지내고 나자 상처는 점차 아물어 갔다.
그 동안 그가 먹은 것은 의림이 따온 수박이었다. 그는 의림에
게 물고기와 토끼를 잡으라고 했으나 의림은 아무리 말해도 그렇
게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호충이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은 관세음보살이 보호했기 때문이므로 약 이 년 동안 소채만을
억어 관세음보살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그녀로 하
여금 살상까지 하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영호충은 그녀가 매우 진부하다고 보고 비웃었으나 억지
로 강요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날도 해는 저물고 두 사람은 나무등걸에 몸을 기대고 풀밭 사
이로 오락가락하는 개똥벌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이 쏟아지는
별똥같이 개똥벌레는 참으로 보기에 아름다왔다.
영호충은 말했다.
[작년 여름 나는 수천 마리나 되는 개똥벌레를 잡아서는 십여
개의 은사로 만든 주머니 속에 넣어서 방 안에 걸어 놓았지. 정말
재미있더군!]
의림은 그의 노력으로는 결코 십여 개나 되는 주머니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물었다.
[그대의 소사매가 그대에게 만들어 준 것이지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총명하구료. 대뜸 알아 맞추는군! 소사매가 나
에게 개똥벌레를 넣으라고 만들어 준 걸 어떻게 알았지?]
의림은 미소를 띄웠다.
[그대의 성격이 그토록 급하고 인내심이 없는데 어찌 참을성 있
게 수천 마리나 되는 개똥벌레를 잡으려고 했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후 어떻게 됐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사매는 주머니를 그녀의 모기장 안에 걸어놓았어. 침대 위에
개똥벌레들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게 되니 그녀는 마치 하늘의 구
름 위에서 잠을 자듯이 눈을 뜨기만 하면 전후 좌우에서 개똥별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무척 기뻐했어.]
의림은 말했다.
[그대의 소사매는 정말 놀기를 좋아하는군요. 그 여자의 사형
역시 비위를 잘 맞춰 주었어요. 만약 그녀가 그대엑 하늘에서 별
으 따오라고 하였다면 그대는 별을 따려고 했을 거예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개똥벌레를 잡는 것도 원래는 별을 따는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
라오. 그날 밤 나는 그녀와 함께 별을 세면서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잇었소. 그런데 소사매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말했
소. '잠시 후면 잠을 자러 가야 해요. 저는 정말 밖에서 잠을 자
고 싶어요. 방 안에 들어가게 되면 온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
들이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보지 못할게 아니예요?' 그래서 나는
말했소. '개똥벌레를 잡아서 그대의 모기장 안에 놔둡시다. 그러
면 되지 않겠소?']
의림은 나직이 말했다.
[알고보니 역시 그대의 발상이었군요?]
영호충은 빙그레 웃고 말했다.
[소사매는 말했소. '개똥벌레는 날아다니며 얼굴이나 몸 위에
앉을테니 그거야말로 귀찮은 노릇잉 아니겠어요? 그런데 됐어요.
명주실로 주머니를 만들어 개똥벌레를 그 안에 두면 되겠군요.'
그리하여 그녀는 주머니를 만들게 되었고 나는 개똥벌레를 잡게
되었소. 꼬박 하루 낮 하루밤을 바쁘게 설쳐댔는데 하룻밤을 보내
고 이튿날 아침 개똥벌레를 모두 죽여 버렸지.]
의림은 몸을 흠칫해서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수천 마리나 되는 개똥벌레를 모두 죽게 만들었어요? 그대는
그대는...... 어쩌면 그럴 수 있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우리가 잔인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이오? 그대는 불문의
제자라서 그런지 마음이 유난히 곱구료. 개똥벌레는 날씨가 차거
와지게 되었을 때 모조리 얼어죽고 만다오. 다만 며칠 더 일찍 죽
는 것에 불과한데그 무슨 상관이 있겠소.]
의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기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들은
일찍 죽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늦게 죽게 되는 것이죠. 일찍 죽거
나 늦게 죽거나 죽기는 마찬가지예요. '무상(無常)과 고(苦)' 라
고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은 생노병사하는 고통을 면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큰 깨달음을 얻고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이 어디 쉬운가요?]
영호충은 말했다.
[어려우니까 그대 또한 그와 같은 규율이나 규칙을 언제나 머리
에 넣어둘 필요가 없오. 죽이면 훔치는 것들에 너무 신경쓸 필요
는 없다는 것이오. 보살께서 정말 모든 일을 관계하자면 그야말로
바빠서 몸을 그르치게 되었을 거요.]
의림은 고개를 돌리고 무슨 말로 응수해야 될지 몰랐다. 바로
이때 왼쪽 산 위로 하나의 유성이 날아가며 하늘에 한 줄기 기다
란 꽃을 수놓았다. 의림은 말했다.
[의형 사질은 말했어요. 어느 누가 유성을 보게 되었을 때 옷고
름으로 매듭을 지으면서 마음속으로 소원을 말하되 그 유성이 사
라지기 전에 매듭을 맺게 되고 소원을말하게 된다면 그 소원은
이룰 수 있댔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난 정말 모르겠군요. 우리 시험을 해 보지요. 그러나 손이 그
토록 빠르기는 힘들거요.]
그리고 그는 허리띠를 잡아들고 허리를 손에 쥐고 말했다.
[허리를 잡을 준비를 해요. 때를 놓치지 말도록 준비해야 되
오.]
의림은 허리띠를 잡고서는 멍하니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여름밤
에는 유성이 무척 맣았다. 하나의 유성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 유성은 눈깜짝 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의
림의 손가락이 움직이려고 할 때 유성은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의
림은 나직이 '아' 하고 안타까와했다. 다시 하나의 유성이 서쪽에
서 동쪽으로 길게 꼬리를 끌며 날았다. 의림은 동작도 민첩하게
매듭을 짓게 되었다.
영호충은 기뻐서 말했다.
[좋소, 좋아. 그대는 매듭을 짓게 되었구료. 관세음보살께서 보
호하시어 반드시 그대의 소원을 이루도록 해 주실 것이오.]
의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매듭을 짓느라고 마음속으론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어
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생각을 해놓고 몇 번 외워 보도록 해요. 그렇게
되면 매듭을 짓느라고 소원을 말하는 것을 잊지 않게 될 거요.]
의림은 허리띠를 잡고서 웃었다.
[무슨 소원을 아뢰는게 좋을까?]
그리고 영호충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
며 급히 얼굴을 돌렸다. 이때 하늘에는 몇 개의 유성이 잇달아 허
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영호충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야단을
피웠다.
[저것 좀 봐! 이번 유성은 매우 길게 꼬리를 끄는군! 매듭을 지
었소? 아니면 이번에도 늦었소?]
의림은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하나의 간
절히 바라는 소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원은 혼자만 생각할 뿐
이지 감히 관세음보살에게 빌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이 두근거리
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뭐라
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 영호충은 다시 물었
다.
[이제 소원을 생각해냈소?]
이때 하나의 유성이 하늘가를 가로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
녀는 고개를 든 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짐작을 해보지요.]
의림은 다급히 말했다.
[아니예요! 그대는 말하지 마세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상관이 있겠소? 내가 세번 짐작을 해볼테니 어디 맞는가
안 맞는가 보시오!]
의림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더 말한다면 저는 가겠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좋소. 그렇다면 말하진 않겠소. 설사 그대가 마음속으로
항산파의 장문인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워 할 것은 없는
것이오.]
의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항산파의 장문인이 되려고 한다고 짐작을 하고 있었군요.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어떻
게 장문인이 되가 수 있겠어요.)
이때 갑자기 멀리서 '쨍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누가 금
(琴)을 퉁기고 있는 것 같았다. 영호충과 의림은 서로 한번 쳐다
보고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누가 이 황량한 산 속에서 금을 퉁길까?)
금의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매우 우아했다. 그리
고 잠시 후에는 퉁소소리가 금의 소리에 섞여서 들려왔다. 금의
소리는 온화했다. 맑고 투명한 퉁소소리가 섞이자 더욱 더 두 사
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금의 소리와 퉁소소리는 마치 묻고
대답하는 것 같았으며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영호충은 의림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저 음악 소리는 매우 이상하오. 아마도 우리에게 불길한 일이
생기려나 보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시오.]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금의 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
러나 퉁소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퉁소소리는 낮아졌지만은 마치
유사(遊絲)가 바람에 흔들리듯 은은히 이어지고 있어서 더욱 사람
의 애간장을 끊게 했다. 바로 이때 산바위 뒤에서 세 사람의 그림
자가 나타났다. 이때 달은 한 조각 구름에 가려져서 사방은 몽롱
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렴풋이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큰 편이
고 한 사람은 키가 작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키가
큰 사람은 두 남자였고 작은 사람은 여자였다. 두 남자는 천천히
걸어 와 커다란 바위 앞에 이르더니 앉았다. 그리고 한 사람은 금
을 만졌고 한 사람은 퉁소를 들었다. 그 여자는 금을 퉁기는 사람
의 곁에 섰다. 영호충은 석벽 뒤에 몸을 움추린 후 그 세 사람에
게 발견이 될까봐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이때 금과 퉁소소
리가 그윽하게 울려 퍼지는데 무척 부드러웠으며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폭포가 바로 곁에 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우렁찬데도 부드러운
금과 퉁소의 소리를 막지 못하는 구나! 아마도 금을 퉁기고 퉁소
를 부는 사람의 내공이 약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군! 그들이 이
곳에 와서 퉁소를 불고 금을 퉁기는 것은 바로 이곳에 폭포의 소
리가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구나.)
그리하여 그는 마음을 놓았다.
별안간 칠현금이 '쩡쩡'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퉁소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흐느적 흐느적했다. 잠시 후 금의 소리도 점차
부드러워졌다. 두 소리는 갑자기 높아졌다가 갑자기 낮아지곤 했
다. 그런데 별안간 칠현금과 퉁소소리가 삽시간에 변했다. 마치
여덟 개의 칠현금과 여덟 자루의 퉁소소리가 동시에 음율을 퉁겨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금과 퉁소소리는 복잡하고 변화가 많았으나
그 소리 하나하나에 높고 낮은 음조가 분명해서 사람의 귀를 즐겁
게 하고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영호충은 그만 피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귀를 기
울였다. 그러자 금과 퉁소소리가 다시 변했다. 이번에는 퉁소소리
가 주가 되고 칠현금은 그저 '띵똥땡' 하면서 반주를 했다. 그러
나 퉁소소리는 점차 갈수록 높아졌다. 영호충은 자기도 모르게 구
슬픈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의림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녀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별안간 '쨍' 하는 소리가
급히 울려 퍼지면서 칠현금의 소리가 멈추어졌고 퉁소소리도 멈추
어졌다. 삽시간에 사방은 조용해졌다. 오로지 하늘에 떠 잇는 달
과 땅 위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뿐이었다. 이때 한 사람이 천천
히 입을 열었다.
[유 형제, 내가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게 된 것도 따지고 보
면 운명일쎄. 다만 이 못난 형이 일찌기 손을 쓰지 못하여 그대의
가족과 형제들이 모조리 액난을 당하도록 만들었으니 이 우형은
마음이 실로 불안하기 짝이 없다네.]
[우리 두 사람은 우정으로 맺어진 사이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
시오.]
의림은 그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아직이
말했다.
[유정풍 사숙이예요.]
그들 두 사람은 유정풍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조금도 알지 못하
고 있었다. 이때 유정풍은 슬픈 어조로 말했다.
[사람은 모두 다 죽는 것이 아니겠소? 한 사람의 친구를 위해서
는 죽어도 한이 없소이다.]
[아우, 그대의 퉁소소리에는 그래도 아직 한이 남아 있는 것 같
더군. 혹시 아드님이 위급한 경우를 당해서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그대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유정풍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곡형의 생각이 옳소이다. 그러나 그 애는 평소 내가 너무나 사
랑한 나머지 가르침이 모자랐던 것이오. 뜻밖에도 그토록 줏대가
없는 놈인 줄은 몰랐지요.]
곡양은 말했다.
[줏대가 있고 없고간에 죽은 후에는 모두 다 황토로 돌아가는
것인데 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 우형은 일찍부터 지붕 위
에 엎드려 있었네, 원래는 일찌기 손을 써야 했겠지만은 형제가
나 때문에 검파의 친구분들과의 감정을 상하고 싶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고 또 우형은 형제를 위해서 협의의 사람은 절대 해치지 않
겠다고 맹세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며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이라네. 그런데 숭산파의 좌 맹주가 그토록 악랄하게 손을 쓰리
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유정풍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와 같은 속인들이 어찌 그대와 나 사이의 고아한 우정을 이
해할 수 있겠소. 그들은 그저 상리로써 짐작하고 그대와 나 사이
에 사귐이 오악검파의 협의에 크게 불리한 결과를 낳게 되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오. 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그
들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오. 곡형! 그대는 대추혈(大椎穴)에
상처를 입고 심맥에 충격을 입게 되었소?]
곡양은 말했다.
[바로 그렇다네. 숭산파의 내공은 정말 무섭네. 내가 뒷등으로
그와 같은 일격을 맞받아 내었는데도 내력이 미치는 곳에 그대의
심장까지 충격을 주어 죽게 되었으니 정말 뜻밖일세. 아우까지도
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한 무더기의 흑혈신침을 던
지지 말았을걸 그랬네. 사람을 더 해친다는 것은 일에 아무런 보
탬이 될 수 없지 않겠는가? 다행히 침에는 독을 묻히지 않았지만
은]
영호충은 흑혈신침이라는 말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저 사람은 나의 목숨을 구했는데 마교의 현재 고수란 말인가?
유 사숙께서는 언제 그와 사귀게 되었지?)
유정풍은 나직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곡형 그대와 나는 그래서 다시 한 곡을 합주(合奏)하게 되지
않았소. 이후에는 세상은 다시는 이와 같은 금과 퉁소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 것이외다.]
곡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옛날 계강이 죽음에 임하여 한 곡을 퉁긴 후 광릉산(廣陵散)이
라는 곳이 이제부터 단절되게 되었다고 탄식하였지. 허허허, 광릉
산이 정묘하기는 하나 어찌 우리의 소오강호(笑傲江湖)라는 곡
(曲)에 미칠 수 있겠는가? 다만 과거 계강의 심정은 지금의 그대
와 나의 심정과 똑같았을 것이네.]
유정풍은 웃으며 말했다.
[곡형은 조금 전까지도 무척 달관해 보이시더니 어째서 지금은
그토록 집착을 하시오. 그대와 내가 오늘밤 합주를 하여 소오강호
라는 곡을 남김없이 퉁기고 불어내지 않았소? 세상에 이 한곡이
이쎄 되었고 우리가 또 이곡을 합주하게 된 이상 이 세상에 또 무
슨 한을 남길 수 있겠소.]
곡양은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형제의 말씀이 옳으이!]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쉈다. 유정풍은 그에게 물
었다.
[형은 또 어째서 한숨을 쉬시오. 아마도 비비가 걱정되는 모양
이구료.]
의림은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비비라니 바로 그 비비인가?]
그러자 곡비연의 음성이 들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유공공께서 천천히 상처를치료하신 하
우리는 숭산으로 들어가 그 악당들을 한 사람 남김없이 몰살시켜
요. 할머니 등의 원수를 갚도록 해요.]
별안간 산벽 뒷쪽에서 기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
리가 끊기기 전에 산벽 뒤에서 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푸
른 광채가 번뜩이는 가운데 그 사람이 곡양과 유정풍의 앞에 섰
다. 손에 장검을 들고 있는데 바로 숭산파의 비빈이었다. 그는 냉
소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허허허. 계집애의 말투가 엄청나구나. 숭산파를 모조리 몰살
시키겠다고? 세상에 그와 같이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을
까?]
유정풍은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비빈 그대는 이미 우리 전가족을 죽였고 유모는 그분 사형의
장력에 적중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소. 그런데 또 어쩌자는
것이오?]
비빈은 소리내어 웃더니 요란하게 말했다.
[하하하, 저 계집애는 몰살시키겠다고 했으니 불초도 당신들을
몰살시키려고 하는 것이오. 이 계집애야, 네가 먼저 이리 나와서
죽음을 받도록 해라.]
의림은 영호충에게 말했다.
[그대는 비비와 그녀의 할아버지가 구하신 거예요. 그러니 우리
도 어떻게 방법을 강구해서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
어요?]
영호충은 이미 어떻게 하면 그들을 구해 그 조손이 자기를 구해
준 은덕을 갚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째 상대방은 숭산파의
고수였다. 자기가 설사 중상을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코 적수
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둘째 곡양이 지금 마교의 사람이라는 것
을 알게 되었다. 화산파는 언제나 마교와는 원수지간이었다. 그런
데 어떻게 원수를 구해 주겠는가 하는 문제가 그를 당혹케 했다.
따라서 그는 마음속으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정풍이 입을 열었다.
[비빈아, 너 역시 명문정파에서 이름이 있고 알려진 사람이다.
곡양과 유정풍이 오늘 너의 손에 걸린 이상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
로 해라. 우리가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겠다. 그러
나 네가 한 나이어린 여아를 못살게 군다면 그것은 영웅호걸이라
할 수 없다. 비비야 너는 빨리 떠나도록 해라.]
비비는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와 유 할아버님을 모시고 함께 죽겠으며 결코 혼
자 살아 남지는 않겠어요.]
유정풍은 말했다.
[떠나라. 빨리 떠나라. 우리 어른들의 일은 너희 아이들과는 아
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곡비연은 말했다.
[저는 떠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휙휙 하니 허리께서 수 자루의 단검을 뽑아들고는 유정
풍의 앞을 가로막고서는 부르짖었다.
[비빈, 조금 전 유 할아버지께서 그대를 용서해 죽이지 않았는
데 그대는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다니 염치가 있어요 없
어요.]
비빈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너 이 계집애야, 너는 우리 숭산파를 몰살시키겠다고 하지 않
았느냐? 나또한 몰살시키고 말테다! 설마하니 너희가 감히 나를
죽이도록 당하고만 있겠느냐? 아니면 고개를 돌리고 도망을 쳐야
한단 말이냐?]
유정풍은 곡비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빨리 가거라. 빨리 가!]
그러나 그는 숭산파 내력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심맥이 거의 끊
어진 상태였다. 거기다가 조금 전 소오강호라는 곡을 불어냈기 때
문에 지칠대로 지쳐 있어 손에 아무런 힘도 없었다. 곡비연이 가
볍게 뿌리치자 유정풍의 붙잡은 손이 떨어지게 되었다. 바로 그때
에 곡비연의 눈앞에 푸른 광채가 번뜩이는 가운데 비빈의 장검이
어느덧 얼굴 앞으로 찔러왔다. 곡비연은 왼손의 장검을 들어 막았
다. 그리고 오른손의 검을 잇달아 디밀었다. 비빈은 싸늘히 냉소
를 흘리며 장검으로 원을 그렸다. 그 순간 '팍' 하는 소리가 나면
서 그의 장검이 그녀의 오른손의 단검을 후려치게 되었다. 곡비연
은 오른팔이 시큰거리고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 아픔을 느꼈다. 따
라서 그녀의 단검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비빈의 장검은 비스듬히
흔들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옮겨갔다. '캉!' 소리가 나면서 곡비연
의 왼쪽 장검 역시 충격을 받고서는 수장 밖으로 날아갔다. 비빈
의 장검은 어느덧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비빈은 날카롭게 웃으며
말했다.
[곡 장로, 나는 먼저 당신 손녀의 왼쪽 눈을 찔러 멀게 한 후
그녀의 코를 잘라내고 재차 그녀의 두 귀마저 짤라내겠소.]
곡비연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몸을 날려 장검에 스스로 부딪
치려고 했다. 비빈은 장검을 재빨리 움추리면서 왼손의 식지를 찔
러 내었다. 곡비연은 그만 나딩굴어지고 말았다. 비빈은 소리 내
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하하! 사마외도의 사람들은 너무나 악한 짓을 많이 저질
렀기 때문에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역
시 먼저 네 왼쪽 눈알을 찔러 멀게 한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장검을 들고서는 곡비연의 왼쪽 눈을 찌르려고 했다.
별안간 등 뒤에서 그 누가 소리쳤다.
[잠깐!]
비빈은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검을 들어 자기 자
신부터 지켰다. 그는 영호충과 의림이 벌써 산벽 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재간
으로는 그 누가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 차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
니 달빛아래 한 젊은이가 두 손을 허리께에 짚고 서 잇는 것이 보
였다.
비빈은 호통쳐 물었다.
[너는 누구냐?]
영호충은 말했다.
[소인은 화산파의 영호충입니다. 비 사숙에게 인사 드립니다.]
그리고 구부리고 절을 했다. 몸을 휘청휘청하는 것이 아직도 제
대로 몸을 가누기 힘드는 모양이었다.
비빈(費彬)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현제는 그만두게. 알고보니 악 사형의 대제자였군. 너는 이곳
에서 무엇하고 있었지?]
영호충은 말했다.
[소제는 청성파 제자에게 상처를 입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는
데 다행히도 비 사숙을 뵈옵게 되었읍니다.]
비빈은 커다랗게 코웃음을쳤다.
[마침 잘 왔다. 이 계집애는 마교의 사마외도라 마땅히 주살되
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손을 쓰게 된다면 어른이 어린 사람
을 해쳤다는 비난을 듣기가 쉽상이니 네가 이 계집애를 죽이도록
해라.]
그리고 손으로 곡비연을 가르켰다.
영호충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 소녀의 조부와 형산파의 유 사숙께서 친구로 사귀고 계시니
따지자면 그녀는 저보다 한 항렬 아래입니다. 소질이 만약 그녀를
죽이게 된다면 강호에서는 화산파에서 어른의 신분으로 어린 사람
을 해쳤다는 소문이 나게 될 것이고 화산파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
게 될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저 곡 선배님과 유 사숙께서는 이
미 몸에 중상을 입고 계십니다. 그런데 두 분들 앞에서 두분의 아
랫사람을 못살게 군다는 것은 결코 영웅호걸의 행동이라 할 수 없
읍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화산파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입
니다. 그러니 비 사숙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오.
그 말 뜻은 명백했다. 화산파가 할 수 없는 일을 숭산파에서 하
게 된다면 숭산파가 크게 화산파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비빈은 두 누썹을 곤두세우며 두 눈에 흉칙한 안광을 빛냈다.
그리고 날카롭게 외쳤다.
[알고보니 너도 마교의 요사한 인물들과 원래 결탁을 하고 있었
구나! 그러니 조금 전 유정풍은 곡가라는 요사한 인물이 너를 위
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너의 목숨을 구했다는 말을 했다. 뜻밖에
도 너는 당당한 화산파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서 이토록 빨리 마교
에 투신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손에 장검을 흔들었다. 검날의 차가운 광채가 번쩍번쩍
빛났다. 금방이라도 영호충을 찔러올 것 같았다.
유정풍은 말했다.
[영호 현질, 자네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이 쓸데없는 일에 뛰어
들지 말고 빨리 되돌아 가게 그래야만 장래에 자네의 사부도 난처
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네.]
영호충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비 사숙, 우리는 협의도의 사람으로 자처하며 사마외도
와는 세불양립이라고 떠들고 있으나 이 협의라는 두 글자가 무엇
입이까? 몸의 중상을 입은 사람을 욕보는 것이 협의입니까? 조그
만 어린 소녀를 참혹하게 죽이는 것이 협의라고 할 수 있읍니까?
만약 이와 같은 일들을 모조리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마외도와
는 무슨 다른 것이 있겠읍니까?]
곡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마교의 사람들도 하지 않는다네. 영호 형
제 그대는 스스로 자기 볼일이나 보도록 하게. 숭산파에서 이와
같은 짓을 하기 좋아한다면 실컷 하도록 내버려 두게나.]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불초는 가지 않겠읍니다. 대숭양수는 강호에서 명성이 유명한
사람이며 숭산파에서 첫째나 둘째가는 영웅호걸입니다. 그는 그저
소녀를 놀리려고 몇 마디했을 뿐 어디 정말 그와 같이 염치없는
짓을 하겠읍니까? 비 사숙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그는 두 손으로 팔장을 끼고 한 그루의 소나무에 등을
기댔다.
비빈은 살기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고 흉칙한 미소를 띠
었다.
[너는 그와 같은 말로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서는 이 세 요사
한 인물을 용서하도록 하겠다는 것이겠지? 흐흐흐! 그야말로 잠꼬
대도 분수가 있다. 네가 이미 마교에 투신한 이상 이 비모가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네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한 걸음 내딛었다.
영호충은 그의 흉칙한 얼굴을 대하자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벗어나나 하
고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도 하지 않고 말했다.
[비 사숙 저마저 죽여 입을 봉하려는 것입니까?]
비빈은 말했다.
[너는 매우 총명하군. 그 한마디 말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걸음 다가섯다. 별안간 산바위 뒤에서 한
묘령의 여승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비 사숙 고해(苦海)는 끝이 없으나, 돌아서게 된다면 언덛가이
라 했읍니다. 비 사숙께서는 나쁜 일을 저지르려고만 하는 나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은 아직 나쁜 일을 행하지는 않았읍니다.
급히 마음을 돌리신다면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의림이었다. 영호충은 그때 바위 뒤에 숨어서
남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당부했지만 그녀는 영호충이 위태한 처지
에 빠지게 되자 더 생각해 볼 여지없이 급히 좋은 말로써 비빈에
게 충고하여 손을 쓰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선 것이었
다.
비빈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는 항산파의 제자로구나! 그렇지? 어찌하여 슬그머니 그와
같은 곳에 숨어 있었지?]
의림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저는......]
곡비연은 혈도가 집혀 땅바닥에 쓰러져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
러나 입은 움직일 수가 있어 부르짖었다.
[의림 언니! 저는 이미 그대가 영호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거라
고 짐작했어요. 정말 그대는 그의 상처를 치료했군요.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애석하게도...... 우리는 모두 죽게 되었어요.]
의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럿어. 비 사숙께서는 무림에서도 크게 이름이 알려지
신 영웅호걸인데 어떻게 몸에 중상을 입은 사람과 그대와 같은 소
녀를 해칠 수 있겠어?]
곡비연은 싸늘히 냉소를 흘렸다.
[호호, 그가 정말 대영웅 대호걸일까요?]
의림은 말했다.
[숭산파는 오악검파의 맹주이며 강호 협도의 영도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을 할 때 자연히 협의를 내세우며 그 정도
에서 벗어난 행동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이 몇 마디는 실로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비빈인 들을 때 비빈 자신을 비웃는 말로밖에 들을 수 없었다. 따
라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내친 걸음이라 오늘 한 사람이라도 살려 보내게
된다면 이 몸은 명성으 더럽히게 될 것이다. 죽이는 자들이 마교
의 요사한 인물이라고 하나 상처를 입은 포로를 주살한다는 것은
영웅호걸의 행위라고 할 수 없으니 반드시 남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장검을 뻗치며 의림을 가리켰다.
[너는 몸에 중상을 입지 않았고 또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도
아니니 내가 너만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겠지?]
의림은 깜짝 놀라 몇 걸음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를...... 저를요? 어째서 저를 죽이시려고 하지요?]
비빈은 말했다.
[너는 마교의 요상한 인물과 결탁하고 있으며 서로 언니니 누이
니 하는 처지다. 그러니 이미 요사한 인물과 한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너를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성큼 다가서며 검을 뻗쳐서는 의림을 찌르려고 했다. 영
호충은 급히 달려와 의림의 앞을 가로막으며 부르짖었다.
[사매 빨리 가시오! 가서 사부님에게 우리를 구해 달라고 청을
하시오!]
그는 물론 먼데 물러서서 가가운 곳에 난 불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의림으로 하여금 구원병을 불러오도록 시킨 것은 단
지 그녀를 이 자리에서 떠나보내 목숨을 건지도록 하려는 계책에
불과했다.
비빈은 장검을 흔들더니 검을 영호충의 오른쪽으로 공격해왔다.
영호충은 급히 몸을 기울여 피했다. 비빈은 히히히 하며 돌연 삼
검을 찔댔다. 이와 같은 공세에 영호충은 연신 아슬아슬한 위기를
당하게 되었다. 의림은 크게 초조한 나머지 재빨리 허리에 찬 장
검을 뽑아서는 비빈의 어깨쭉지를 찔러 가며 부르짖었다.
[영호 오라버니! 몸의 상처가 잇으니 빨리 물러서세요!]
비빈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젊은 여승이 속세의 정에 눈 뜨게 되었군. 준수한
젊은이를 대하게 되자 자기 목숨마저도 바치려 하는구나!]
그리고 검을 휘둘러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쌍검이 서로 부딛쳤
다. 의림의 손에 들린 장검은 대뜸 그녀의 손을 빠져서 날아갔다.
비빈은 장검을 쳐들어 의린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비빈이 당장 죽
여야 할 사람이 다섯이나 되었다.하나같이 별로 저항할 힘이 없
는 사람이었으나 만일 실수해서 한 사람이라도 놓치게 된다면 무
궁한 후한을 남기게 됨으로 손을 쓰자마자 살수를 펼쳤다.
이때 영호충이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왼손의 두 손가락으로 비
빈의 왼팔을 찍으려고 했다. 비빈은 두 발로 급히 땅을 차며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장검을 걷어 들이는 그 기세를 빌려서는 영호충
의 왼팔에 기다란 상처를 내도록 만들었다.
영호충은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 의림을 구출한 그 순간 이미 숨
도 제대로 돌리지 못할 지경으로 헐떡이게 되었다. 그래서 몸을
쓰러질듯 휘청거렸다. 의림은 재빨리 달려들어가 그를 부축하며
목메인 어조로 말했다.
[우리를 함께 주깅세요!]
영호충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대는 빨리 떠나시오......]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바보 아직도 상대방의 뜻을 모르겠어요? 그녀는 그대와 함께
죽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한 마디가 미처 끝나기 전에 비빈은 장검을 밀어냈
다. 어느덧 곡비연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곡양과 유정풍 그리고 영호충은 물론 의림까지도 일제히 놀라
부르짖었다.
비빈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영호충과 의림 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검 끝에
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영호충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그는 정말 소녀를 죽이고 말았구나! 정말 악독하
다! 이제 나도 죽게 되었다! 의림 사매는 어찌해서 나와 함께 죽
으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그녀를 구했지만 그녀도 나를 구했으니
이미 내게 진 빚은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전에 그녀와는 전
혀 모르는 사이였다. 다만 같은 오악검파의 사남매에 불과했었다.
강호의 도의를 지킨다 하더라도 목숨까지 버리면서 죽음을 함께할
필요는 없다. 정말 항산파의 문하 제자들이 하나같이 이토록 무림
의 의림을 돌보고자 할 줄은 몰랐다. 정일사태는 정말 대단한 인
물이다. 이 의림 사매가 나와 함께 죽게 되었구나. 나와 함께 죽
는 사람이 영산 사매가 아니라서 유감이로군. 사매는 지금쯤 무엇
을 하고 있을까?)
비빈이 흉칙한 얼굴을 하고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고 영호충은
빙그레 웃으며 한숨을 내쉰 후 눈을 감았다.
별아난 그의 귀에 나직한 호금소리가 들려왔다. 호금소리는 매
우 처량했다. 탄식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는 것 같았
다. 호금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잇달아 '수수수' 하는 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그것은 아마 한 방울 한 방울의 비가 풀잎에 떨
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영호충은 크게 의아하여 눈을 떴다.
비빈은 흠칫했다.
[소상야우 막대선생이 나타났군!]
그러나 호금소리는 갈수록 처량항 빛을 띄우게 되었으나 막대선
생은 시종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빈은 물론 부
르짖었다.
[막대선생, 어지하여 몸을 드러내지 않읍니까?]
호금소리가 갑자기 멎으면서 소나무 뒤에서 한 비쩍 마른 사람
이 걸어 나왓다. 영호충은 어려서부터 소상야우 막대선생의 이름
을 들어온 터였으나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달
빛 아래 바라보니 그는 앙상하여 뼈마디만 남아 있는것 같았다.
어깨는 우뚝 솟아 잇어서 정말 금방이라도 쓰러져 숨을 거둘 것
같은 폐병쟁이 같았다. 강호에 명성이 쟁쟁한 문파의 장문인이 이
토록 초라한 사람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터였다. 그런데막대선
생은 눈길을 허공에 두고 두 손을 잡고서 비빈에게 흔들어 보인
후 말했다.
[비 사형, 좌 맹주께서는 안녕하시오.]
비빈은 그의 악의가 없는 것을 보고 또 그와 유정풍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염려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사형은 잘 있읍니다. 귀파의 유정
풍과 마교의 요사한 인물이 연합하여 우리 오악검파에 불리한 행
동을 하려고 했읍니다. 막대선생께서는 마땅히 어떠한 조치를 내
려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막대선생은 유정풍에게 두어 걸음 다가가며 살벌한 어조로 말했
다.
[마땅히 죽어야지.]
그 한마디가 들리는 순간 싸늘한 광채가 갑자기 빛났다. 그의
손에는 이미 한 자루의 엷고 폭이 좁은 장검이 쥐어 있었다. 그는
벼락같이 그 검을 뒤로 뻗치며 비빈의 가슴팍을 찌르는 것이 아닌
가? 이 한 수는 너무나 빠랐고 또한 아련한 것이 도깨비와 같았
다. 그것은 바로 '백병천환형산운무십삼식' 가운데 전초였다. 비
빈은 일시에 유정풍의 그와 같은 무공에 당한 적이 있는데 지금
재차 그와 같은 술수에 말려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깜짝 놀란
나머지 이번엔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짝' 하는 소리와 함
께 가슴팍은 어느덧 예리한 검에 의해 기다란 상처가 나고 말았고
옷자락도 찢어졌다. 가슴팍의 근육이 베어진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상처는 깊지 않으나 이와 같은 상처를 입게 되자 비빈은
놀람과 분노에 얽히게 되었고 그만 예기(銳氣)가 크게 움추려들게
되었다.
비빈은 즉시 검을 휘둘러 반격하려 했다. 그러나 막대선생의 일
검이 선기를 먼저 제압하자 뒷수가 끝임없이 잇달아 펼쳐졌다. 한
자루의 엷은 검은 마치 교묘한 뱀처럼 끊임없이 흔들거리고 있었
다. 비빈은 검의 장막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날렸으나 그것은 부
족해서 부득이 연신 뒤로 물러서야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해
욕을 할 기회마저 없는 형편이었다.
곡양과 유정풍, 영호충 세 사람은 막대선생의 검초의 변화가 마
치 유령처럼 아련하면서도 허깨비를 보는 듯한지라 하나같이 놀람
과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유정풍은 그와
한 동문으로서 무공을 익혔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사형제라는 관
계에 놓여 있는 처지였으나 그 사형의 검술이 이토록 정묘한 지경
에 이르렀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상태였다. 한 방울 두 방울의
피가 두 자루의 장검 사이에서 뿌려졌다. 비빈은 이리 몸을 날리
고 저리 몸을 날리면서 힘을 다해 맞받아 내려고 했으나 시종 막
대선생이 펼쳐내는 검의 장막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선
혈은 점차 두 사람의 주위에 한 붉은 원을 그리게 되었다. 별안간
비빈이 길게 한 소리 비명을 질러내었다. 그리고 높이 뛰어올랐
다. 막대선생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장검을 호금(胡琴)속에다
감추고는 몸을 돌려서 그 자리를 떴다. '소상야우' 라는 곡이 소
나무 뒷쪽에서 울려 퍼졌는데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비빈은 몸을 허공으로 날렸으나 곧이어 땅바닥에 쓰러졌다. 가
슴팍에서 피가 샘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조금 전 그는 숭산파의
내력을 돋우었던 것인데 가슴팍에 검을 맞은 후에도 그 내력이 해
소되지 않아 선혈이 그 상처에서 급히 뿜어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처참하면서도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의림은 영호충의 팔을 붙잡았다.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는 나직이 물었다.
[상처를 입지 않았어요?]
곡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 현질, 그대는 그대의 사형과 화목하지 못한 사이라고 말했
는데 뜻밖에도 그는 그대가 위험하게 되었을 때 손을 써서 구원을
해주는군!]
유정풍은 말했다.
[나의 사형의 행동은 괴퍅하여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짐작하기
어려울 때가 있죠. 나와 그는 화목하지 못하기는 하나 결코 빈부
의 격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그저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입
니다.]
곡양은 말했다.
[그의 검법(劍法)은 그토록 강맹한데 그가 연주하는 호금(胡琴)
소리는 언제나 처량하기 그지없구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
을 흘리게 만드니 속된 시정(市井)의 음률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없네.]
유정풍은 말했다.
[그렇지요. 사형은 언제나 그와 같은 곡만 퉁긴답니다. 그리고
그 곡은 항상 서글프기만 하죠. 좋은 시나 사(詞)는 좋으면서도
음란하지 말하야 하고 슬프면서도 처량한 맛이 없어야 한다고 했
읍니다. 따라서 좋은 곡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읍니까? 나는
그의 호금소리를 듣기만 하면 멀리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죠.]
영호충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다가 완전히 빠져들었군! 이 생사
의 고비길에도 슬프거나 처량하지 말아야 하며 우아해야 하고 서
글프지 말아야 한므니 하는 말들을 하고 있을가? 다행히 막대 사
백께서 늦지 않게 달려오시어 우리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애석
하게도 곡씨의 소녀는 그만 비빈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구나.)
이때 유정풍은 다시 말했다.
[그러나 검법과 무공에 있어서는 결코 미칠 수가 없읍니다. 나
는 전에 그에게 퍽이나 공손하지 못한 점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
니 실로 부끄럽기만 하구료.]
곡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형산의 장문인은 정말 명불허전이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영호충에게 말했다.
[소형제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겠는가?]
영호충은 말했다.
[선배께서 분부만 하십시오. 마땅히 받들겠읍니다.]
곡양은 유정풍을 한번 바라 보더니 말했다.
[나와 유 형제는 음률에 깊이 빠지고 말았네. 그리하여 수년이
라는 세월에 걸쳐 공을 들여서는 '소오강호' 라는 한 곡을 지어
내었는데, 이 곡의 기이함은 천고에 없었던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
다네. 금후 이 세상에 곡양과 같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유정풍
이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유정풍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곡양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네. 설사 곡양과 유정풍
과 같은 인물이 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동시에 태어나서 서로
만나게 되어 사귀게 되리라고는 볼 수 없네. 즉 음률에 정통하고
내공에 정통한 두 사람의 뜻이 맛고 성격이 비슷하여 함께 이런
곡을 지어낸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일세. 이 곡이 단
절되게 된다면 나와 유형제는 구천지하에서도 길게 탄식을 불어내
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이와 같이 말하고는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는 소오강호곡(笑傲江湖曲)의 금과 퉁소의 악보이네. 소형제
는 우리 두 사람이 기울인 심혈을 생각해서 이 금과 퉁소의 악보
를 세상으로 가져가 전할만한 사람을 찾아주게.]
유정풍은 말했다.
[이 소호강호곡이 이 세상에 퍼지게 된다면 이분 곡형은 죽어
눈을 감을 수 잇을 것이네.]
영호충은 허리를 구부려서 곡양의 손에서 그 악보를 받아 품 속
에 갈무리 하고는 말했다.
[두 분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이 후배는 온 힘을 다 기울이겠읍
니다.]
그는 처음 곡양이 부탁할 것이 있다는 말을 하자 마음속으로 매
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 더군다나 이 일을 행
하다가 문규를 위반하거나종파의 동도들에게 죄를 짓게 되면 어
쩌나 하는 걱정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응낙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부탁이라는 것이 이 금과
퉁소를 배울 수 있는 두 사람을 찾아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는 크
게 마음을 놓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유정풍이 입을 열었다.
[영호 현질, 이 곡은 우리 두 사람이 필생의 심혈을 기울인 곡
일 뿐만 아니라 한 분의 고인(古人)과도 관련이 있다네. 소오강호
곡 한 군데의 상당한 부분은 칠현금의 곡을 곡형이 진나라 사람인
계강(稽康) 광릉산(廣陵散)에 의거하여 고쳐 쓴 것이라네.]
곡양은 그것에 대해서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미소를 띠었
다.
[옛부터 전해지기를, 계강이 죽은 이후 광릉산이 단절되었다고
했네. 그런데 내가 어디서 이 곡을 얻게 되었는지 자네는 짐작할
수 있겠는가?]
영호충은 생각했다.
(음율에 대해서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당신네 두 사람의
행동은 뭇 사람들과 매우 다른데 내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선배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곡양은 웃으며 말했다.
[계강이라는 사람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역사서에는 그의
글이 장려하고, 또한 노자 장자를 즐겨 말한며 그 자신은 협사들
을 숭배하고 있다고 했네. 그의 성격은 정말 내 마음에 맞는다고
할 수 있네. 종회(鍾會)는 당시 큰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이
름을 듣고 그를 방문했다네. 그런데 계강은 그저 무쇠를 달구고
있을 뿐 상대를 하지 않았네. 종회는 냉대를 받고 부득이 그 자리
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계강이 그에게 물었다네. '무엇을 하러
왔으며 무엇을 보고 가는가?' 종회는 말했네.
[듣던 바를 듣고 본 바를 보고 가외다.]
종회라는 녀석은 영님하고 재치가 있는 인사라고 할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그 흉금이 너무 좁다고 할 수 있지. 그는 이 일로 화
를 내게 되었고, 사마소(司馬昭)에게 계강을 헐뜯는 말을 하게 되
었네. 그리하여 사마소는 계강을 죽이게 되었는데 계강은 형장에
이르러 한 곡을 퉁기는 여유마저 보였지. 정말 의연한 기풍을 보
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네. 그런데 그는 광릉산이 이로써 끊어지
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와 같은 이야기는 후세의 사람은 너무나
잘못 본 것이라 할 수 있네. 그 곡이 그가 지은 것도 아니었지.
그리고 그는 서진(西晋)때의 사람인데 이 곡이 설사 서진때에 실
종되었다 하더라도 설마하니 서진 이전에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영호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서진 이전이라고요?]
곡양은 말했다.
[그렇다네. 나는 전해오는 말에 승복할 수 없어서 서한(西漢)과
동한(東漢)대의 황제와 대신들의 무덤을 파게 되었는데 잇달아 스
물 아홉 채의 오래 된 무덤을 판 뒤에야 끝내 채소(??)의 무덤에
서 광릉산의 곡을 발견하게 되었다네.]
말이 끝나고서는 껄껄 웃었다. 매우 자랑스러운 듯했다.
영호충은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배님이 한 수의 음률을 타는 악보를 위해 잇달아 스물 아
홉 채의 무덤을 파헤치다니.)
이때 곡양은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침울한 얼굴빛으로 말했
다.
[소형제, 그대는 명문의 대제자이다. 나는 본래 자네에게 부탁
을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은 일이 다급하게 되어서 자네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으니 너무 탓하지 말게.]
그리고 그는고개를 돌리고 유정풍에게 말했다.
[유 현제 이제 우리들은 떠나야 되겠네.]
유정풍은 말했다.
[그렇지요.]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두 손을 꼭 마주잡았다. 그리
고 일제히 기다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내력을 돋운 가운데 힘을
주어 심장의 주맥(主脈)을 끊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는 이 세상을
하직했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선배님! 유 사숙!]
그리고 손을 뻗쳐 그들의 코 앞으로 가져갔다. 이미 숨쉬는 것
이 멎어 있었다. 의림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들은 모두 죽었나요?]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사매, 우리는 빨리 이 네 사람의 시체를 묻어 줍시다. 다른 사
람이 찾아와서 또 다른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비빈인 막대선생에게
죽임을 당한 일을 절대 밖으로 누설해서는 안 되오.]
거기까지 말한 뒤에는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만약 이 일이 누설된다면 막대선생은 과연 우리 두 사람이 말
한 것인 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두 사람은 화를 불러들
이게 될거야.]
의림은 말했다.
[예, 그러지요 뭐. 그런데 사부님이 물어보시더라도 말을 하지
않아야 되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소. 그대가 말을 하기만 한다면 막
대선생은 그대의 사부와 검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니 야단날 일이
아니겠소.]
의림은 조금 전 막대선생의 검법을 상기했다. 자기도 모르게 부
르르 떨면서 말했다.
[저는 말하지 않겠어요.]
영호충은 천천히 몸을 구부려서는 비빈의 장검을 잡았다. 그리
고 다시 일검으로 비빈의 시체 위에다가 십칠 개의 구멍을 뚫었
다. 의림은 마음속으로 안 되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영호 오라버니 그는 죽었는데 그토록 미워서 시체마저 망가뜨
릴 필요가 어디 있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막대선생의 검날은 좁고 얇아서 전문가라면 비 사숙의 상처를
한번 보고 누가 손을 쓴 것인지 알게 될 것이오. 그의 시체를 망
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일곱 여덟개의 상처를 내어서 그
누구도 단서를 찾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오.]
의림은 한숨을 내쉬고 속으로 생각했다.
(강호에는 이토록 많은 꾀를 부리고 있구나. 정말 정말 헤쳐나
가기가 어렵군.)
그러다가 그녀는 영호충이 장검을 내던지고 돌을 들어서는 비빈
의 시체 위에 던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했다.
[그대는 움직이지 말고 앉아서 쉬도록 하세요. 네가 할께요.]
그리고 돌을 들어서는 가볍게 비빈의 시체 위에 올려 놓았다.
마치 죽은 시체에 지각이 있어 아파하면 어쩔까 염려하는 듯한 태
도였다. 그는 돌들을 주어서는 유정풍 등 네 구의 시체를 모조리
묻어 주었다. 그리고 곡비연의 돌무덤을 향해 말했다.
[누이 그대가 만약 나 때문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난을 당하지
도 않았을 거야. 아무쪼록 그대는 하늘로 올라가 복을 받도록 하
고 내세에는 남자가 되어 많은 공덕을 쌓아서 복을 받도록 하고
끝내는 서방극락세계로 갈 수 있기를 빌겠어요. 나무아미타불 나
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영호충은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곡비연이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베풀었던 사실을 상기했다. 어린나이에 아
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그만 목숨을 잃다니 하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물론 부처님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참을 수 없어 의림을 따라 몇마디 나무아미타불을
따라 외었다.
잠시 쉰 후 영호충은 상처의 아픔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리하여
그는 품속에서 소오강호를 꺼내 펼쳐 보았다. 그런데 장마다 괴상
하게 생긴 부호들이 쓰여 있었는데 하나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본래 그가 알고 있는 악보는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칠현금의
악보가 본래는 모두 이상하게 생긴 부호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악보에 실린 문자가 너무나 오래 된 것이고, 어려워
서 공부를 하지 못한 그로서는 자연히 읽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책자를 품 속에 다시 집어 넣고는 고개를 쳐들
고 길게 한숨을 내뿜고 속으로 생각했다.
[유 사숙은 친구를 사귄 것이 화근이 되어 전가족의 목숨을 잃
게 되었구나. 물론 사귀는 사람은 마교의 장로라고 하나 두 사람
은 서로 마음이 통했으며, 그야말로 굳굳한 사내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정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게
만드는구나. 유 사숙께서는 오늘 금분세수의 의식을 행한 후 무림
에서 물러서기로 했는데 어떻게 되어 숭산파와 원한을 맺게 되었
을까?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숲 속에서 큰 광채가 번
쩍번쩍 몇 번 빛났다. 그리고 검광이 종횡으로 허공을 누비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첫눈에 그 검법이 눈에 매우 익었다. 바로 화산
파의 고수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아서 속으로 흠칫했다.
[소사매 그대는 이곳에서 잠시 나를 기다리도록 하시오. 내 곧
갔다오겠소.]
의림은 여전히 돌무덤을 만들고 있느라고 그 푸른빛 광채를 보
지 못했다. 그저 그는 소변을 보러 가는가 보다고 고개를 끄덕였
다.
영호충은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하고 십여 걸음을 걸어갔다. 그
는 비빈의 장검을 집어서 허리에 차고 푸른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참 가게 되었을 때 은연중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잇달아 들려오는 것은 들을 수 있었다. 싸움은 매우 긴박하게 돌
아가는 듯 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본문의 어느 어른이 남과 싸우는 것일까? 상대방 역시 고수임
에 틀림이 없겠군!)
그는 몸을 낮추고 천천히 다가갔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
리는 얼마되지 않는 곳에서 들려 왔다. 그는 즉시 한 그루의 커다
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살폈다. 달빛 아래 한 유생이 장검을
들고 우뚝 버티고 서 있는데 바로 그의 사부인 악불군이었다. 그
리고 왜소한 노인이 그를 따라 번개와 같이 돌아가면서 손에 든
장검을 질풍과 같이 내지르고 있었다. 원을 돌 때마다 십여 검을
찔러댔다.청성파의 장문인 여창해였다. 영호충은 갑자기 사부님
이 싸우는 것을 보고 상대방이 청성파의 장문인인 것을 보고 크게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사부는 매우 의젓했다. 여창해가
일검을 찔러 올 때마다 그는 언제나 아무렇게 손을 들어 막는 것
같았다. 여창해가 그의 등뒤로 돌아갔을 때도 그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검을 들어 뒷등을 지킬 뿐이었다. 여창해가 검을 쓰
는 것은 갈수록 빨라졌다. 그런데도 악불군은 시종일관 공격을 하
지 않았다. 영호충은 속으로 탄복했다.
(사부님은 무림에서 군자검으로 일컬어지고 잇다. 정말 온유하
고 의젓하구나. 남과 싸우는데 있어서도 조금도 패도적인 기질을
보이지 않는구나.)
그리고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조금도 성을 내지 않는 것은 풍도가 무척 높을 뿐
아니라 무공이 무척 높기 때문일 것이다.)
악불군은 남과 싸우는 때가 드물었다. 영호충은 그가 손쓰는 것
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사문과 대련할 때나 문인 제자들
에게 시범을 보일 때였다. 물론 그것은 거짓으로 싸우는 것이었
다. 그러나 지금 진짜로 싸우는 것이 그때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
다 할 수 있었다. 그는 여창해가 일검을 찔러낼 때마다 검명이 찍
울려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 그의 검에 실린 힘
이 강맹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영호충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청성파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저 왜소한 도사는 저토록
뛰어나구나! 설사 내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역시 멀
찌감치 피하는 것이 낫겠다.)
다시한동안 싸움을 주시했다. 여창해의 돌아가는 속도는 갈수
록 빨라졌다. 마치 둥근원을 그리듯 푸른 그림자가 되어 악불군
주위를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쌍검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는 너무나 빨라 앞의 소리와 뒷소리
가 하나로 이어져서는 쨍그랑 쨍쨍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
는 소리로 화하고 말았다. 영호충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저 수십 검이 나의 몸에 펼쳐졌더라면 나는 일검도 감당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전신은 그에게 찔러 수십 군데나 되는 구멍
이 생기고 말았을 것이다. 저 여관주는 전백광과 비교할 때 반수
정도는 더 높은 것 같다.)
이때 그의 사부는 여전히 몸을 돌려서 공세를 취하고 있지를 않
았다. 이렇게 되자 영호충은 속으로 걱정이 되어 않을 수 없었다.
(저 여도사의 검법이 정말 훌룡하구나. 사부나 찰나적으로 정신
을 흐트려뜨렸다간 그의 검아래 지게 된다.)
별안간 쨍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여창해는 한 대의 화
살처럼 뒷쪽을 향해 수평으로 수장정도 날아가더니 곧이어 땅위에
바로 내려섰다. 그런데 어느결에 그의 장검은 이미 그의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영호충은 깜짝놀라 사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
부의 검도 이미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 일은 너무
나 느닷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영호충으로서는 도대체 누가 이겼는
지 누가 진것인지 그리고 어느 쪽에서 내상을 입은 것인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여창해가 싸늘하니 코
웃음쳤다.
[좋소,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몸을 날리더니 곧장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악불군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관주, 잠깐만 그 임진남이란 분은 어떻게 되었소?]
그리고 몸을 흔들하더니 뒤쫓아갔다. 그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
에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영호충은 두 사
람의 말투에서 사부가 여창해를 이긴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속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후에 이와 같이 움직이고
정신을 쏟는다는데 대해서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
여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은 여창해를 뒤쫓아 가셨다. 그 두 분이 경신법을 일단
전개했다면 삽시간에 이미 수마장 밖에 가 있을 것이다.]
그는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하고는 다시 돌아가 의림과 행동을
함께 하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왼쪽 숲속에서 또 기다란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음성은 매우 처절했다. 영호충은 깜짝 놀
라 숲속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보니
멀리 하나의 누런 담장이 보였다. 그것은 한 채의 절간 같았다.
그는 동문사형사매가 청성파의 제자들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은 것
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어 재빠른 걸음으로 그 누런 담장이 있
는 곳으로 다가갔다.
절간과는 아직도 수장을 나겨두게 되었을 때 그 절간 안에서 한
늙수구레하고(오타 아님) 또 뾰족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벽사검보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대가 솔직이 나에게 말한
다면 나는 그대를 대신해서 청성파를 모조리 주살하여 그대 부부
의 원한을 갚아 드리겠소.]
영호충은 침대 위에서 창문을 통하여 그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사람이 바로 새북명타 목고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지금 임진남의 행방을 찾고 계신데.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다시 목고봉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구나.)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시오! 나는 벽사검법이 무엇인지 모르오. 우리 임씨 집안
의 벽사검법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모두 다 입으로 전
수하는 것이지 검보로 전하는 것이 아니외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 임평지의 부친인 복위표국 임진남이
겠지.)
이때 다시 임진남의 음성이 들려왔다.
[선배가 불초를 위해 원한을 갚아 준다니 정말 고맙기 이를데
없읍니다. 청성파의 여창해로 말하면 여러모로 의롭지 못한 행동
을 저질렀으니 이후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선
배님에게 불행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한 분의 영웅호걸
의 칼이나 검 아래 죽게 될 것이 뻔합니다.]
목고봉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말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새북명타의 소문을
너는 들어보았느냐?]
임진남은 말했다.
[목 선배님! 강호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모
르겠읍니까?]
목고봉은 말했다.
[좋아, 좋아. 강호에 위세를 떨친다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은
이 목가의 수단이 악랄하고 한번도 선심을 쓴적이 없다는 사실도
그대는 들어봤겠지.]
임진남은 말했다.
[목 선배님이 이 임모에게 강제적인 수단을 쓰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 임씨 집안에는 벽사검보라
는 것이 없읍니다. 설사 정말 있다 하더라도 또 어떤 사람이 어떤
위협을 가하고 위력을 보인다 하더라도 결코 말하지 않을 것입니
다. 이 임모는 청성파에게 사로잡혀 매일 같이 혹독한 고문을 당
했소이다. 임모는 무공이얕으나 굳건한 면은 그런대로 지니고 있
읍니다.]
목고봉은 말했다.
[그렇지, 바로 그래.]
영호충은 그 말을 듣고서 속으로 생각했다.
(뭐가 그렇지 그렇지야! 아...... 이제보니 원래 그랬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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