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강호 제 3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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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충은 사부 악불군을 속일 수 없음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사부님, 전백광의 행실이 단정치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오
나 그는 이미 저에게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 바 있으며 다
시는 그와 같은 못된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읍니다. 또한 그는
수차례에 걸쳐 저를 죽이지 않았읍니다. 그는 언제나 의리를 지키
면서 저를 친구처럼 대해 왔읍니다.]
악불군은 싸늘히 웃었다.
[흥! 그런 이리(狼)의 심장과 개의 허파를 가진 교활하고 추악
한 녀석과 의리를 논하겠다고? 그와 도의를 따지다가는 평생 골치
를 썩어야 할게다.]
악불군은 영호충을 극진히 아끼고 있었다. 그가 중상을 입고도
다시 살아나자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가 거짓으로 넘어지고 자기 자신을 상해할 때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호충이 사부를 속이려고 한다는 생각에괘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금 전 영호충이 불계화상(不戒和尙)에게 따지던
일을 생각할 때는 마음이 흐뭇하기도 했다.
악불군은 여전히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책은 어디 있느냐?]
영호충은 사부와 사모가 되돌아 오자마자 책에 관해 묻자 어리
둥절해 하다가 곧 알아채고 말했다.
[육후아 사제에게 있읍니다. 소사매는 제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
해 책을 훔쳐 온 것이지 결코 나쁜 생각을 품고 그런 것은 아닙니
다. 사부님께서는 너그러이 그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사부님
의 분부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하공(紫霞功)을 익히지 않았읍
니다. 저는 자하비급을 만져 보지도 않았으며 거기에 적혀 있는
신공(神功)의 요결을 단 한 글자도 읽어보지 않았읍니다.]
악불군은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
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 나는 언젠가 너에게 자하신공을 전수해
줄 생각이었다. 다만 문파의 변고가 생겨 차근차근 가르칠 여가가
없었을 뿐이다. 사실 나의 지도를 받지 않고 혼자서 그 비급을 보
고 자하신공을 익히려고 하다가는 약간만 잘못 해석해도 큰화를
초래하게 되느니라 적게는 중상을 입고 무공을 상실하게 되고 크
게는 생명을 잃게 될 우려가 있다. 나는 그걸 염려했던 것이다.]
악불군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 불계화상은 미친 사람과 같았는데 내공은 퍽이나 놀랍더구
나. 그가 네 몸 속에 있는 여섯 줄기의 사기(邪氣)를 풀어 주었으
니 말이다. 지금은 좀 어떠냐?]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는 몸에 있던 사악한 기운은 모조리 없어졌읍니다. 그렇게
심하던 고통 역시 사라졌읍니다. 하지만 몸의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말았읍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중상에서 치유될 동안 기운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힘이 생길 터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어쨌든 불계화상
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영호충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악불군은 화산으로 돌아오는 동안 도곡육선을 만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랐다. 지금 그들의 종적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약간 놓였지만 화산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육후아를 데리고 빨리 숭산(嵩山)으로 가자. 충아, 그
런 몸으로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
사실 악불군이 급히 화산으로 되돌아 온 것은 자하비급 때문이
었다. 자하비급을 잃어버린다면 문파의 선조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영호충이 자하비급에 수록된 무공을
익히다가 행여 더 큰 화를 입을까봐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
다.
영호충은 악불군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갈 수 있고 말고요! 물론 갈 수 있읍니다. 그건 조금도 염려
하실 필요가 없읍니다.]
악불군과 영호충, 그리고 악영산 세 사람은 정기당 옆의 작은
집에 도착했다.
악영산은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 나아가더니 문을 밀어젖히고 안
으로 들어갔다. 돌연 '악!' 하는 뾰족한 그녀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그 음성에는 놀람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악불군과 영호충은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들이 안에 들
어가 보니 육후아가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땅에 벌렁 드러누워
있지 않은가?
영호충은 웃으면서 말했다.
[사매는 놀라지 마! 내가 이렇게 만든거야!]
악영산은 말했다.
[깜짝 놀랐지 뭐예요! 어째서 육후아 사형의 혈도를 찍었죠.]
영호충은 말했다.
[좋은 뜻으로 그런거야. 내가 자하비급을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육 사제가 비급을 읽어 주지 않겠어? 그래서 하는 수 없어서 혈도
를 찍었지. 혈도가 찍기가 무섭게 육 사제는 벌렁 자빠지더구만!]
갑자기 악불군이 '어'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고개를 숙여 육후
아의 코밑 숨결을 살펴보고 이어 맥을 짚어 보았다.
그는 놀라 부르짖었다.
[죽, 죽었다!]
악영산과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악불군은 다급히 물었다.
[충...... 충아, 너는 그의 무슨 혈도를 찍었느냐?]
영호충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힘이 빠져 몸을 휘청거
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
거렸다.
[저는...... 저는......]
그는 손을 내밀어 육후아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육후아의 얼굴
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듯했다. 영호충은
참을 수 없어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육...... 육 사제, ...... 정말...... 정말...... 죽었느냐?]
악불군이 말했다.
[비급은...... 자하비급은 어디 있지?]
영호충은 눈물을 글썽이며 살펴보았으나 자하비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망연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책......, 책이 어리로 갔을까?]
그는 황망히 육후아의 품 속에 손을 넣어 더듬어 보았으나 자하
비급은 잡히지 않았다.
[제가 그의 혈도를 찍었을 때 비급은 펼쳐진 모습으로 책상위에
떨어지고 말았읍니다. 어째서...... 어째서 보이지 않을까요?]
악영산은 방바닥, 책상 옆, 문, 의자 밑 등 곳곳을 샅샅이 살펴
보았다. 그러나 자하비급의 행방은 묘연할 뿐이었다. 자하비급 이
야말로 화산파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악불군은 당
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악불군은 한참이 지난 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육후아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몸의 어느 한 구석에서도 상처를 발견할 수 없었고
집안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았어도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라곤
없었다.
악불군은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왔다간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도곡육선이나 불계화상
의 짓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악불군은 엄숙한 음성으로 물었다.
[충아, 너는 도대체 그의 어느 혈도를 짚었느냐?]
영호충은 악불군의 앞에 무릎을 끓으며 말했다.
[제자는 중상을 입은 상태라서 손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읍니
다. 저는 그의 전중혈(?中穴)을 가볍게 찔렀을 뿐인데...... 육사
제가 죽을 줄은...... 저는 정말 꿈에도 몰랐읍니다.]
그는 갑자기 육후아의 허리에 매달린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리
고는 냅다 스스로의 목을 향해 찔렀다. 악불군이 번개처럼 한 손
가락을 퉁겼다. '쨍' 하는 음향과 함께 그 검은 멀리 날아가고 말
았다.
악불군은 호통을 내질렀다.
[자하비급을 찾기 전에 죽어선 안 된다! 너는 그것을 어디에 숨
겼느냐?]
영호충은 온몸을 움찔하며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자하비급을 숨긴 줄 알고 있구나?)
그는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 그 비급은 도둑맞은 게 분명합니다. 저는 그 책을 찾
아오겠읍니다. 한 장도 빠집없이 사부님께 다시 갖다 바치겠읍니
다.]
악불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누군가 그 책을 가져다가 머리속에 암기하고 있다면, 또는 다
른 종이에 베껴 놓았다면 설사 도로 찾았다고 해도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자하공은 화산파의 독특한 무공이 아니
게 된다.]
악불군은 잠시 쉬었다가 타이르듯 말했다.
[충아, 네가 가져갔다면 내놓도록 해라. 이 사부는 너의 과실을
용서해 주마.]
영호충은 육후아의 시체를 망연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갑자
기 격양된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님, 저는 맹세하겠읍니다! 자하비급을 훔친 자를 찾아내게
된다면...... 열 명이 훔쳤으면 열 명을 죽일 것이고 백 명이 훔
쳤다면 백 명을 모조리 죽여버리겠읍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의심
하실 바에는 차라리 일장(一掌)을 후려쳐 저를 죽이십시오!]
악불군은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일어나라, 네가 아니라면 아니겠지. 너와 육후아는 무척 친했
으니 네가 그를 고의로 죽일 이유는 없을게다. 그렇다면 그 비급
은 누가 훔쳐갔단 말인가?]
그는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악영산은 눈물을 떨구며 목 멘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지, 모두 저의 잘못에예요. 제가 비급을 후쳐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대사형께서 보시지 않으려고 하는 걸 억지로 가져와
오히려 육 사형을 죽이고 말았어요. 제가...... 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비급을 찾아오고야 말겠읍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우리 한번 더 찾아보자꾸나.]
세 사람은 다시 한참을 찾았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악불군은 악영산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외부에 누설하면 안 된다. 네 엄마에게는 내가 설명
을 하마. 그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우선 육후아를
매장한 다음 우리는 산에서 내려가자.]
영호충은 육후아의 죽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여러 사제들 가운데 육후아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우리의 정(情)은 친형제보다도 깊었다. 아...... 내가 한번의 실
수로 그를 죽이다니!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혹
시...... 혹시 내 몸 안에 있던 도곡육선의 사악한 기운이 손가락
을 통해 방출되어 육 사제를 해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자하비급
은 어디로 갔을까? 스스로 날아서 사라졌단 말인가? 어째서 보잊
않을까? 이 기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단 말인가. 사부님
은 나를 의심하고 계시니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이일을
분명히 밝히지 않는 한 나는...... 나는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살
인자의 누명을 쓰는 것이 아닌가?)
그는 옷소매를 눈물로 닦고 괭이를 가지고 구덩이를 팠다. 그리
고 육후아의 사체를 묻어 주었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
어 있었으며 무섭게 손이 떨려왔지만 악영산이 옆에서 도와주어
간신히 육후아를 매장할 수가 있었다.
세 사람은 백마묘(白馬廟)에 도착했다.
악 부인은 영호충이 무사한 걸 보고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악
불군은 육후아의 죽음과 자하비급의 행방에 대해 악 부인에게 이
야기해 주었다. 악 부인은 처연한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
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악불군이 이미 자하신공을 완전히 익혔기
때문에 자하비급을 잃은 데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육후아는 오래 전에 화산파에 입문하였고 사람됨이 충실하
고 정이 많았다. 악 부인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는 영호충과 육후
아 두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으므로 육후아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그토록 마음 아플 수가 없었다.
많은 제자들은 악 부인이 어찌해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지 알지는 못했지만 덩달아 침울해졌다.
악불군은 노덕약에게 명하여 커다란 수레 두 대를 빌리게 했다.
한 대에는 악 부인과 악영산이 타고 다른 한 대의 수레에는 영
호충을 눕힌 다음 악불군은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숭산을 향해
떠나는 것이었다.
위림진(韋林鎭)이라는 고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
어가고 있었다.
위림진에는 여관이 하나뿐이어서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적
지 않은 손님들이 투숙하고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들 가운데는 아녀자들도 끼어 있었기 때문에 숙소
를 빌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악불군은 말했다.
[조금만 더 가자. 다음의 마을에서 묵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약 오리(五里)정도 갔을까?
악 부인이 타고 있던 수레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 버렸으므로 악
부인과 악영산은 하는 수 없이 수레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시대자(施戴子)가 동북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부님, 저 숲 속에 절이 한 채 있는데 거기서 유숙하는 게 어
떻겠읍니까?]
악 부인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여자들을 받아줄까?]
악불군이 말했다.
[시대자, 네가 가서 물어보려므나. 만약 절의 중들이 좋아하지
않는 눈치가 보이거든 그냥 돌아오도록 하고 억지로 강요하지 말
아라.]
시대자는 대답과 함께 나는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멀리서 뛰어오며 소리쳤다.
[사부님, 낡은 폐찰입니다! 아무도 없어요!]
모두들 크게 기뻐했다.
도균(陶鈞), 영백나(英白羅), 서기(舒奇) 등 나이 어린 제자들
은 다투어 달려갔다.
이때 동쪽 하늘이 검은 구름에 의해 가려지더니 사방이 금새 어
두컴컴하게 되고 말았다.
악 부인이 말했다.
[이곳에 낡은 절이 있어서 천만다행이네요. 그렇지 안았다면 도
중에서 큰 비를 맞아야 했을 거예요.]
법당에 들어서서 사방을 살펴보니 하나의 청면신상(靑面神像)이
한쪽에 서 있었다. 신상의 몸은 나뭇잎으로 덮여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다. 백 가지의 약초를 주관하는 약왕보살(藥
王菩薩)의 모습이었다.
악불군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약왕보살상에게 배례를 올렸다.
번갯불이 사위를 몇번 밝히고 사라지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북소
리처럼 울렸다. 곧이어 장대 같은 빗줄기가 대지를 두드리기 시작
했다.
낡은 절은 여기저기에서 물이 샜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은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피해 앉았다.
고근명(高根明), 양발(梁發)과 세 명의 여제자(女弟子)들이 밥
을 지었다. 악 부인이 말했다.
[올해는 봄비가 일찍 내리는군요.]
영호충은 법당 구석진 자리에 있는 종틀 밑에 앉아 쏟아지는 빗
줄기를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육 사제가 이곳에 있었다면 모든 사람에게 우스갯소리를
하여 모두들 재미있게 웃고 떠들텐데......)
그는 악영산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
(소사매가 사부님께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자하비급을 훔쳐 와
나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깊은
정을 느껴서였을까? 그녀의 행복을 나는 바라고 있다. 나는 자하
비급을 찾은 이후에는 즉시 자결을 하여 육 사제에게 속죄하겠다.
악영산과 임평지는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단지 그녀가 나는 깨끗이 잊어주고 내가 죽었다고 해도 그녀가 눈
물을 흘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그와 같은 생각을 했건만 그녀와 임평지가 오는 도중에 옆
에 붙어 서서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회상했을 때 마음은
여전히 쓰라렸다.
이때 밖에는 퍼붓듯이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악영산은 법
당 안을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며 밥을 짓고 물을 긷는 일을 도와
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과 임평지의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두
사람은 친밀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사정을 눈치
챈 사람은 영호충을 제외하곤 없었다. 그 두 사람이 마주보고 웃
을 때마다 영호충의 마음은 산산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고
개를 돌리고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그녀에게
로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녁밥을 먹고 난 후 모든 사람들은 각각 떨어져 잠을 잤다. 비
는 계속하여 내릴 뿐 그칠 줄을 몰랐다.
영호충은 번뇌에 잠겨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가 단조롭게 들려왔다.
이때 갑자기 동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게 아닌가? 적어
도 십여 필은 되는 것 같았다.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캄캄한 밤에 비를 맞으며 말을 달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한
일이구나? 설마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악불군이 나직이 말했다.
[모두들 소리내지 말고 있어라.]
잠시 후 십여 필의 말은 약왕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때 화산
파의 제자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 각자 손에 무기를 움켜쥐고 만
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말굽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안심한
듯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 누웠다. 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절 밖에서 일제히 멈추었다.
한 사람의 높은 음성이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화산파의 악(岳) 선생님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우리가 물어 볼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소!]
영호충은 화산파의 수제자였으며 평소 손님을 책임지고 접대하
곤 했다. 그는 급히 문 옆으로 다가가 빗장을 뽑고 문을 활짝 열
어젖히면서 말했다.
[한밤중에 방문하신 분들은 누구십니까?]
문 밖에는 열다섯 필의 말이 일자(一字)로 서 있었고 그들 가운
데 예닐곱 사람은 손에 공명등(孔明燈)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등
을 내밀어 영호충의 얼굴 앞에 들이댔다.
영호충은 눈이 부셔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들의
행동은 지극히 무례했다. 영호충은 그들이 좋은 의도로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찾아온 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검은
두건을 쓰고 한 쌍의 눈만 빠끔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영호충은 흠칫 놀라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의 얼굴을 알아볼까봐 두건을 했을
것이다.)
가장 왼쪽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악불군 선생을 만나고 싶소. 청컨대 안내해 주시오.]
영호충은 말했다.
[귀하는 누구시오? 존함을 알려 주시오. 사부님께 우선 말씀을
드려야 되겠소이다.]
그 사람은 말했다.
[그대는 우리가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말게. 그대는 다만 사부에
게 가서 나오라고 하기만 하면 돼네. 소문을 들으니 화산파는 복
위표국(福威??)의 벽사검보(?邪劍譜)를 손에 넣었다고 하더군! 우
리는 그것을 잠시 빌려서 구경을 하려고 한다네.]
영호충은 화가 치밀었다.
[화산파에는 화산파 고유의 무공이 있는데 벽사검보를 가져서
무엇에 쓰겠소? 우리는 그것을 억지도 못했지만 설령 얻었다고 한
다손치더라도 귀하가 이토록 무례하게 나올 수 있단 말이오? 정말
이지 당신들은 화가파를 너무나 업수이 여기고 있구료!]
그 사람은 돌연 껄껄 웃었다. 그러자 나머지 열네 사람 역시 커
다랗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웃는 소리는 멀리멀리 울려퍼져 나갔다. 웃음소리가 매
우 우렁찬 것으로 보아 이들의 내공(內功)이 무척 심후한 것 같았
다.
영호충은 놀라 생각했다.
(오늘 밤 무서운 적을 만난 것 같구나. 이 열다섯 사람은 무두
무예가 뛰어난 고수들임에 틀림없다. 도대체 이 자들의 정체는 무
엇일까?)
갑자기 한 사람이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하하! 복위표국의 꼬마 녀석이 화산파에 투신했다며? 소문을
들으니 군자검(君子劍) 악불군은 검술은 신(神)의 경지에 이르렀
다고 하더군! 그는 무림에서 독보적인 검술의 대가(大家)라고 불
리워지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가 그까짓 벽사검보를 가
지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강호의 무명
소졸에 불과하니만치 하잘 것 없는 벽사검보라도 익혀 보고 싶어
하지!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악 선생에게 비릴고저 하는 것이야!]
영호충은 말했다.
[귀하는 도대체 누구요?]
하지만 열네 사람의 커다랗게 웃는 웃음소리에 묻혀 영호충의
음성은 말한 그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내가 십여 년이나 공들여 쌓아 올린 내공(內功)이 조금도 담아
있지 않다니! 아...... 정말 큰일 났구나!)
그는 화산에서 내려온 이후 몇번에 걸쳐 화산파의 내공심법(內
功心法)을 운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몸 속의 혼잡한 기운이
마구 난동을 부리며 끓어 올라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가 없었
다. 만약 운기행공을 중단하지 않았다면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몇번이고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의 사
부에게 그런 현상이 생긴 까닭을 물었으나 악불군은 단지 냉랭히
코웃음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자하비급을 숨겨두고 혼자서 그 비급에 적
힌 자하신공을 수련하느라고 이런 현상이 생긴 줄로 오해하고 게
시는구나! 나는 애써 변명을 하려고 하지 말자. 어차피 나는 오래
살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이제부터 내공을 연마하지 말
자. 무공을 배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이후 그는 다시는 내공을 연마하지 않았다.
방금 전 그는 내공을 운기하여 말했다고 했지만 평범한 사람의
음성 정도로밖에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악불군의 맑고 낭랑한 음성이 들려 나왔다.
[여러분은 무림에서 이름께나 있는 인물들 같은데 어찌 스스로
를 낮추어 무명소졸이라고 하시오? 이 늙은이는 한평생을 살아오
는 동안 거짓말을 해본 역사가 없소. 임가의 그 벽사검보는 나에
게 있지 않소이다!]
그는 말을 할 때 음성 속에 자하신공의 기운을 섞어 보냈었다.
그러자악불군의 음성은 절 밖의 웃음소리를 누르고 또렷하게 울
려퍼지는 것이었다.
한 명의 흑두건이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소?]
악불군은 말했다.
[당신이 누구이기에 그와 같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감히 지껄이
는 거요.]
그 사람은 말했다.
[천하의 큰일은 천하인 모두가 관계해야 하는 법이오.]
악불군은 냉소를 날린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큰 소리로 말했다.
[악씨 양반, 도대체 내놓을 거요? 아니면 내놓지 않을거요? 말
로 할 때 순순히 듣는 게 좋을 것이오. 우리는 들어가 수색을 할
수도 있소.]
악 부인은 날카롭게 말했다.
[여자들은 한쪽에 물러서고 남자들은 모두 검을 뽑아라!]
'치치칫!' 하는 음향과 함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장검을 뽑아
들었다.
영호충은 문 가에 서 있었는데 손으로 검자루를 잡고 아직 뽑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두 사람이 잽싸게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영호충을 향해 덮
쳐 왔다.
영호충이 몸을 비끼며 검을 뽑으려고 할 때 한 사람이 크게 외
쳤다.
[꺼져!]
공중으로 날며 다리를 들어 영호충을 걷어찼다. 영호충은 멀리
나동그라져 수풀 속에 넘어졌다. 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이렇
게 생각했다.
(저 발짓은 그리 매섭지도 않은데 나는 왜 아랫도리가 이렇게
흐느적흐느적 힘이 없으까?)
허우적거리며 똑바로 앉으려고 했다.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일곱 여덟 줄기의 진기가 왔다갔다 하며 몸 안
에서 서로 부딛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영호충은 손가락 하나 움
직일 수 없었다.
영호충은 깜작 놀라 입을 벌려 크게 외치려고 했으나 한 마디의
목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마치 악몽을 꾸었을 때
손발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상태와 같았다. 귀에는 병기가
서로 주딛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사부와 사모님 둘째
사제 증은 절 밖으로 뛰어나와 일곱 여덟 명의 복면인들과 싸우고
있었고, 다른 몇명의 복면인들은 이미 절 안으로 들어가 크게 싸
우는 듯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절 안
에서는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이때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몇 개의 공명등이 땅바닥에 쓰
러져 노란 빛을 발산하고 그 불빛 아래 검광과 사람의 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췄다.
잠시 후 절 안에서 여자의 비병소리가 들려왔다. 영호충은 더욱
초조해졌다. 적들은 모두 남자이고 이 여자의 비명소리는 틀림없
이 사매 중의 한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었
다. 눈 앞에는 사부님이 장검을 휘두르며 혼자서 네 사람을 대적
하고 있었고 사모님은 두 명의 적들과 서로 엉켜 싸움을 하고 있
었는데 사모님의 검술이 교묘하여 비록 혼자서 여럿과 싸우고는
있으나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째 사제 노덕약은 큰
소리를 외치고 있었는데 역시 혼자서 둘을 대적하고 있었다. 그
두 명은 모두 단도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니 그들의 힘이 막강한 것 같았다. 시간이 길어지면 노덕약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눈 앞에는 세 사람이 여덟 명의 적을 맞아 싸움을 하고 있었는
데 그 형세는 무척이나 험악했다. 절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안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제와 사매들은 숫자는 많으나 고
수는 한 명도 없었다. 귀에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은 이미
몇명이 그들 손에 당하고 있음이다. 그는 마음이 급할수록 힘을
낼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빌었다.
(하나님, 굽어 살피소서! 나에게 반시간만이라도 힘을 회복하게
해주십시오. 이 영호충이 저 안에 들어가 혼자의 힘으로 소 사매
를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적에게 천갈래 만갈래가 되고 이몸은
형용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한다 해도 기꺼이 달게 받겠읍니다.)
그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내공을 운행해 보았다. 갑자기 여섯줄
기의 진기가 일제히 가슴에서 솟아올라 왔다. 뒤따라 또 두 줄기
의 진기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이 두 줄기의 진기는 여섯 줄
기의 진기를 내리눌렀다. 그때 온몸이 텅 빈 듯하고 오장육부도
텅텅 비고 살과 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
속이 냉정해져 암암리에 부르짖었다.
[그렇군, 그래! 그것이 이렇게 되었군!]
그는 이때 비로소 분명히 알았다. 도곡육선이 진기를 가지고 자
기의 상처를 치료할 때 여섯 줄기의 진기는 각각 다른 경맥에 주
입되었고 내상을 치료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 이 여섯 줄기의 진기
는 체내에 머물러 쌓여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내공이 강하고 성질
이 급한 불계화상이 두 줄기의 진기를 가지고 강제로 도곡육선의
진기를 제압시키니 금방 내상은 나은 듯 싶었으나 실제로는 그의
몸에는 두 줄기의 진기가 증가되어 서로 균형적으로 견제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가 옛날에 단련하여 얻은 내공의 힘은 조금도 남
지 않고 결국은 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지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뜻하지 않은 사태를 만나 내 무공은 쓸모가 없어지고 오
늘날 사문이 어려움을 만났으나 나는 결국 조그만 힘도 되지 못하
고 말았구나! 이 영호충의 몸은 이미 화산파의 수제자로서 눈이나
뜨고 땅바닥에 드러누워 사부님과 사모님이 살아남기만을 바라보
고 사제와 사매들이 흑두건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꼴을 보고 있으
니 정말로 허수아비구나! 좋다! 내가 죽더라도 소사매와 함께 죽
겠다!)
그는 조금이라도 기를 운용하면 몸 안에 있는 여덟 줄기의 진기
가 연결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
를 단저에 모으기만할 뿐 기를 돌리지는 않았다. 과연 그렇게 하
니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지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장검을 뽑고
한 걸음씩 발을 절 안을 향하여 옮겨 놓았다.
절에 들어서니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단상에 놓여 있는 두 개의
공명등의 불빛에 양발, 시대자, 고근명 같은 사제들이 적들과 피
범벅이 된 채싸움을 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고 몇명의 사제와 사
매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모를 지경이었다.
악영산과 임평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복면괴인과 싸우고 있었
다. 악영산의 긴 머리카락은 흩어지고 임평지의 왼족 손에 검이
쥐어져 있는데 오른손은 이미 적에게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복
면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단창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의 창법은 힘
이 강하고 날카로웠다.
임평지는 연속적으로 창송영객초식을 삼초씩 써서야 비로소 그
의 공세를 막을 수 있었다. 갑자기 적의 단창이 휘둘러지자 당창
에 붙었던 붉은 술이 갈라지면서 눈이 부실 듯한 빛을 발하는 가
운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임평지의 어깨가 창에 맞았다.
악영산은 급히 두번 칼을 찌르니 적은 그 기세에 한발짝 물러섰
다.
[빨리 가서 상처를 싸매요!]
임평지는 말했다.
[괜찮습니다.]
검을 내미는 동작은 이미 힘이 없었다. 그 복면괴인은 길게 웃
으며 창자루로 악영산의 허리를 찔렀다. 악영산은 오른소에 쥐어
져 있던 장검은 떨어지고 고통에 찬 신음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
졌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즉시 검을 잡고 앞으로 나갔다. 검을 앞으
로 뻗었을 때 진기가 다시 끓어올라 오른쪽 팔목에서 힘이 쑥 빠
져 손은 다시 밑으로 축 처졌고 그 복면괴인은 칼이 오는 것을 보
자 원래는 몸을 피하고 난 다음 반격을 할 생각이었으나 그가 한
검을 앞으로 뻗기도 전에 손이 땅으로 처지는 거서을 보자 그 복
면괴인은 내심 이상했으나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왼쪽 다리
로 영호충을 걷어차 절 안에서 절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콰당하는
소리와 함께 영호충은 절 밖 물구덩이에 떨어졌다.
비는 더욱 억수같이 쏟아져그의 입과 눈, 코, 귀 속에는 흙탕
물이 가득 찼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노덕약은 이미 적에게
허리를 찍혀 넘어졌고 애당초 그와 접전을 하던 복념인은 두 패로
나뉘어 악불군 부부를 에워싸고 있었다. 얼마 후 절 안에서 두 명
의 적이 나와 악불군 혼자 일곱 명을 상대로 싸우는 상황이 되고
악부인은 여전히 세 명의 적과 싸웠다. 악 부인과 한 명의 복면인
의 비명소리가 똑같이 들려왔다. 두 사람의 다리는 동시에 서로의
칼에 맞았던 것이다. 그 적은 급히 물러났다. 악 부인의 앞에 있
던 사람 숫자는 하나 적어졌지만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
에 몇초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적에 의해 칼에 어깨를 맞았다. 칼
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지자 두 명의 복면인이 껄껄 웃으면서 그녀
의 허리에 있는 혈도를 몇군데 짚었다.
이때 절 안에 있던 사제들은 계속 상처를 받고 한 사람 한 사람
씩 제압당했다. 공격해 온 적들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화산파의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혈도를 찍으면서도 절대로
치명상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다섯 명은 둥그렇게 악불군을 에워쌌다. 여덟 명의 고수들은
팔방을 에워싸고 악불군과 접전을 하고 나머지 일곱 사람의 손에
는 각기 공명등이 들려져 있었다. 그들은 등불을 악불군을 향해
비췄다. 화산파의 장문인이 비록 내공이 깊고 검술에 정통하다고
는 하나 이 여덟 명의 고수들이 대전을 하고 일곱 개의 등불이 똑
바로 비추어보니 그는 정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화산
파는 쓰러지고 이대로 가다가는 절에 있는 전부가 전멸될 것이라
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칼을 휘두르며 문을 지키고 있었다.
등불이 일제히 비춰오자 그는 눈을 감고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
가 맹렬하여 여덟 명의 적은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복면을 한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악불군, 빨리 투항하시오!]
악불군은 냉랭하게 말했다.
[악모는 차라리 죽을망정 치욕을 받지는 않겠다.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
그 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투항하지 않는다면 나는 먼저 단신 부인의 오른팔을 자
르겠소.]
그러면서 한 자루의 날이 얇은 귀두도(鬼頭刀)를 집어들었다.
칼은 공명등의 불빛을 받아 파랗고 스산한 빛을 발했다. 칼끝이
악 부인의 어깨에 닿자 악불군은 잠시동안 주저했다.
(팔을 자르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그는 생각을 계속했다.
(만약 검을 버리고 투항한다 해도 똑같이 그들에게 치욕을 당할
것이다. 화산파의 백년이 넘게 내려오는 명성을 어찌 내 손에서
더럽힌단 말이냐?)
순식간에 숨을 길게 들이마시니 얼굴에 비장한 기색이 떠올랐
다. 검을 휘둘러 왼쪽에 있는 사내를 내리찍었다. 그 사내는 칼을
들어 막았으나 악불군의 일검에 자하신공이 가미되었다는 것을 어
찌 알았겠는가? 힘이 너무 강해 그의 칼은 악불군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일도일검이 동시에 그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찍었다. 칼을
맞은 그의 어깨에서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신음을 하면서 땅바
닥에 쓰러졌다. 그와 접전하는 자는 두 명이 적어졌지만 여전히
악불군은 위험 속에 있었다. 갑자기 퍽 하며 악불군의 등허리에
연자추(?子錘)가 와서 꽂혔다. 그는 연속 삼 검을 휘둘러 적을 물
리치고 나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으로 붉은 피를 게워내고
말았다. 모든 적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이 노인네가 상처를 입었으니 지쳐서라도 죽을 것이다!]
그와 접전을 하던 여섯 명은 승산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알고 비
로소 포위망을 풀었다. 그들이 이렇게 나오니 악불군은 더 이상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복면을 한 사람은 모두 열 다섯 명인데
그 중 세명은 악불군 부부에게 상처를 받아 하나는 손이 짤려나가
상처가 심하고 나머지 둘은 다리에 상처를 좀 받았지만은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 둘은 곤륜봉을 들고 쉬지 않고 악불군을 향해
욕을 해댔다. 악불군이 그들의 말하는 말투를 들어보니 남쪽음과
북쪽음이 뒤섞여 있고 무공 또한 잡다하여 하나의 문파가 아니라
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들어오고 물러나가는 서로간의 묵계가 잘
되었으므로 임시로 모인 패거리도 아니었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
가? 실로 추측할 수가 없었다.
제일 이상한 것은 이 열다섯 사람들이 다 고수이며 약자는 없다
는 사실이었다. 자기는 강호의 견문이 넓기 때문에 이 여러 명의
고수들이 하나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으나 실
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 사람
들과는 예전에 전혀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원한이 있어
서 온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벽사검보를 위해서
이렇게 몰려와 우리 화산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그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자하
신공을 펼쳐지니 검 끝은 은은한 빛을 발산했다. 십여 초 후에 또
한 명의 적이 어깨에 칼을 낮고 손에 들고 있던 강철 채찍을 땅에
떨어뜨렸다. 싸움권 밖에 있던 또 한 명이 뛰어들었다. 이 사람의
손에는 거치도(鋸齒刀)가 들려져 있었는데 칼날은 무겁고 칼끝에
는 갈퀴가 하나 달려 있어 계속적으로 악불군의 손에 들려져 있는
장검을 낚으려 했다. 악불군은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정
신은 싸울수록 더욱 맑아졌다. 갑자기 좌측 손의 장력을 이용해서
한 명의 가슴을 밀치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갈비뼈가 부
러졌다. 그 사람의 두 손에 들려져 있던 빈철회장(?鐵懷杖)이 땅
에 떨어져 데구르 굴러갔다.
뜻밖에 이 사람은 그 누구보다 용감하여 갈비뼈가 부러져 고통
이 온몸을 엄습하는데도 오히려 사기 충천하여 땅바닥에 구르면서
손을 벌려 악불군의 오니쪽 다리를 거머쥐었다. 악불군은 깜짝 놀
라 검을 휘둘러 그의 등을 내리쳤다.이때 양쪽에 있던 두 자루의
단검이 동시에 쭉 뻗어나와 그를 막았다. 악불군은 장검을 내리치
지 못하자 오른발로 그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 사람의 동작은 빨
라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발조차 꽉 잡고 함께 땅바닥에 굴렀
다.
악불군의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이런 손놀림에 더 이상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어 함께 땅으로 구르고 말았다. 순간 단도, 단창,
연자추, 장검 등의 병기들이 동시에 그의 얼굴, 머리, 목, 가슴,
중요한 급소를 내리 눌렀다.
악불군은 길게 탄식하고 손을 풀어 검을 놓고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의 허리, 겨드랑, 목 등의 혈도를 찍은 다음 여섯 복
면인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나이를 먹은 듯한 사람이 말했다.
[군자검 악 선생의 무공은 탁월하오. 과연 이름이 헛되지 않소.
우리 열다섯 명이 모두 당신 하나를 상대했는데 그래도 너댓 명이
쓰러지고서야 당신을 잡았소. 하하하! 탄복하오! 탄복합니다! 이
몸이 당신과 단독으로 싸웠다면 당신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열다섯 사람이고 당신들은 스무 명이나 되오. 비교
를 한다면 당신네 화산파 사람들이 많소이다.오늘 저녁 우리는
적은 인원으로 많은 숫자를 상대해 당신네 화산파를 물리쳤소. 이
싸움은 결코 쉽지는 않았소. 그렇지 않소이까?]
그 나이 많은 복면인이 말했다.
[녜, 맞습니다. 참으로 힘겹게 이긴 싸움이었읍니다.]
그 늙은 사람이 말했다.
[악 선생, 우리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이 없소. 오늘 저녁 실례
를 무릅쓴 것도 단지 그 벽사검보를 빌려 보려고 했을 뿐이라오.
이 검보는 애당초 당신네 화산파의 것이 아니잖소? 당신이 모든
계략을 동원해 복위표국에 있던 임가 소년을 문하로 끌어들여 그
검보를 취했단 말이외다. 그런 일은 너무 공명정대하지 못하오.
무림의 동료들이 들었다면 모두들 대노했을 것이오. 이 늙은 몸이
좋은 말로 권하니 그 검보를 이리 내놓으시오.]
악불군은 대노했다.
[악모는 너희들 손에 있으니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그런 쓸데
없는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악불군이라는 사람이
어떠한가는 강호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나를 죽이기는 쉬우나
내 명예를 더럽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복면인이 껄껄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쉬운 일이오. 당신 부인과 딸,
그리고 여제자들이 얼굴이 반반하군요. 우리 모두가 하나식 나누
어 첩으로 삼는다면 하하! 그것이야말로 당신 악 선생 이름이 이
무림에 크게 빛나는 방법이 아니겠소?]
그러나 나머지 복면인들이 일제히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에는
음탕한 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악불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
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몇명의 복면인들이 절 안으로 들어가
남녀 제자들을 끌고 나왔다. 모든 제자들은 중상을 입고 있어서,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어떤 자는 바깥에 끌려 나오자 픽 쓰러지기
도 했다.
그 복면의 늙은이가 말했다.
[악 선생, 우리 정체를 당신이 어느 정도 알아 맞추었는지 모르
겠소. 우리는 결코 무림에서 정도를 걷는 영웅호걸들이 아니오.
그래서 못 하는 일이 없지요. 우리 현제들은 색을 좋아하오. 만약
당신 부인과 당신 딸에게 실례를 범한다면 당신 체면이 크게 손상
되지 않겠소?]
악불군은 외쳤다.
[그만두시오! 그만들 두시오! 당신들이 우리를 못 믿겠다면 우
리 몸을 수색해 보시오! 무슨 검보가 나오는지 찾아 보시오!]
한 복면인이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스스로 내놓으시오. 하나하나씩 수색한다면
당신 마누라와 딸의 몸을 더듬게 된단 말이외다. 그렇게 되어 무
슨 결과가 있겠소?]
임평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화근은 다 이몸 때문에 일어난 일이오! 내가 당신들께 말
하건대 내 몸 어디에도 벽사검보가 없소. 믿고 안 믿고는 당신들
소관에 달렸소.]
그는 말하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빈찰장을 집어 있는 히을 다해
자기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나 그의 두 팔은 혈도가 찍혀 있었기
때문에 손에는 힘이 없었다. 비록 빈철장은 머리를 찍었으나 단지
살갗만 약간 벗겨졌을 뿐이고 아무런 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용기를 본 사람들은 그가 자기 생명을 희생하여 검보가
화산파의 수중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 함을 알았다.
그 복면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임 공자, 너는 퍽 의를 지키는 사람인 것 같군! 우리는 너의
죽은 아버지와 아는 사이다. 악불군은 자네 아버지를 죽이고 당신
집에 전해 내려오는 벽사검보를 손에 넣었지. 우리는 오늘 그것을
바로잡고자 여기 온 것이다. 네 사부가 군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
으나 군자다운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지. 그럴바에야 너는 우리 문
하에 들어오거라. 틀림없이 이 강호를 주름잡는 좋은 무예를 너에
게 가르쳐 줄 것이다.]
임평지는 외쳤다.
[애 어머니와 아버지는 청성파 여창해와 목고봉에게 죽음을 당
한 것이다! 나의 사부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정정당당한
화산파의 제자이다. 어찌 위험이 있다고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양발이 외쳤다.
[너 말 잘 했다! 우리 화산파......]
한 복면인이 대갈했다.
[네 놈의 화산파가 어쨌단 말이냐?]
칼을 휘둘러 양발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머리통이 두쪽으로 쪼
개져 나가며 양발은 죽어 넘어졌다. 화산파의 제자들 중 여덟 아
홉 명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악불군의 머리속에는 여러 생각
이 떠오르고 사라져갔다. 그러나 결국 이 사람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저 늙은이의 말을 들어보면 어쩌면 흑도(黑道)의 인물 같기도
하고, 또 무슨 나븐 짓을 하는 방회(幇會)의 두목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진진천예(秦晉川豫) 일대의 백도흑도(白道黑道)의
이름난 인물들은 설사 내가 알지 못한다 해도 소문이 쫙 퍼졌는데
그러한 문파나 산채에 이렇게 많은 고수들을 지니고 있는 곳은 없
다. 또한 이 사람이 단칼에 양발의 머리통을 쪼개놓는 그 악랄함
이란 실로 보기 힘든 일이다. 이 강토에서 무기를 쓰고 싸움을 하
여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다반사이나 사람을 잡아놓고 단칼에 목
을 베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 사람은 단칼에 양발을 죽인 다음에 미친 듯이 웃어대며 앞으
로 걸어나갔다. 그 칼은 붉은 피로 물들어져 있었고, 그 칼로 허
공을 몇번 휘두르자 악 부인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악영산
은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죽이지...... 내 어머니를 죽이지 말아라!]
그리고 혼절했다. 악 부인은 여중호걸이라 추호도 흔들림이 없
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자가 자기를 죽인다면 더 이상
능욕을 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잘 되었다 싶어 고개를 쳐들고 욕을
했다.
[이 도둑놈의 새끼, 씨가 있는 놈이라면 나를 죽여봐라!]
바로 이때 동북쪽에서 수십기의 말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복면을 한 노인이 말했다.
[누구냐? 빨리 가서 살펴봐라!]
두 명의 복면인이 대답을 했다.
[녜.]
말을 올라타 말굽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말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곧이어 쨍그랑! 쨍그랑! 하고 무기 부딪치는 소
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아이고!]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달려오는 사람이 두 명의 복면인
과 서로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악불군 부부와 화산파 제자들은
구원해 주러 오는 사람이 있는 줄 알고 크게 기뻐했다. 희미한 등
불 아래 삼사십 명이 말을 타고 큰 길을 따라 흙탕물을 튀기며 급
히 달려왔다. 순간 절 밖에 말이 멈추었고 그들은 삥 둘러 섰다.
말에 탄 한 사람이 외쳤다.
[음. 화산파의 친구들이군. 아니! 이건 악형이 아니십니까?]
악불군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참으로 난처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수일 전에 오악령기(五嶽令
旗)를 가지고 화산에 찾아온 숭산파의 세째 고수인 선학수 육백
(仙鶴手陸柏)이었다. 그 사람의 우측에 있는 한 사람은 덩치가 컸
다. 그 사람은 바로 숭산파 둘째 고수인 탁탑수(託塔手) 정면(丁
勉)이었고, 좌측에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화산파 검종(劍宗)의
봉불평(封不平)이었다. 그날 화산에 왔던 태산파(泰山派)와 형산
파(衡山派)의 고수들도 그 안에 있었다. 단지 그때보다는 사람이
더욱 증가된 것뿐이었다. 공명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그림자가 너
울너울 거려 금방 그 많은 사람들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육백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악형, 당신은 그날 좌맹주의 영기를 받지 않으셨소. 좌맹주께
서는 심히 불쾌하셔서 특별히 정 사령과 탁 사령에게 명령을 하여
영기를 받고 다시 화산을 방문하라고 하셨소이다. 뜻밖에 이 밤중
에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정말 공교롭운 일이라고 하겠읍니다.]
악불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복면을 한 노인이 포권을 하며 말
했다.
[알고보니 숭산파의 정 이협, 육 삼협, 양 칠협, 세 분이셨군
요. 정말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육백이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각하께선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어
찌 우리 앞에서 진면목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복면의 노인이 말했다.
[우리 형제들은 흑도의 이름없는 소인배들이올시다. 우리들의
이 지저분한 이름을 들으시면 무림에서 존경받는 여러분들의 귀를
더럽힐까 두렵습니다. 여러분들 앞이니 우리는 악 부인과 딸에게
무례한 짓은 범하지 않겠소. 단지 한 가지 일은 여러분들이 이 무
림에 의리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육백은 말했다.
[무슨 일이오? 한번 들어나 봅시다.]
그 노인은 말했다.
[이 악불군 선생의 호가 군자검이라고 하는데 듣건데 평상시에
는 말끝마다 인(仁)과 덕(德)을 따지고 무림의 규칙을 잘 따진다
고 들었소. 그러나 지금은 잘못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복주 복위
표국은 남에게 멸망당했읍니다. 총표두인 임진남 부부는 누구에게
살해를 당했소. 아마 여러분들도 이제 들어서 알 것이오.]
육백은 말했다.
[그렇소. 듣건대 그것은 사천의 청성파가 저지른 소행이라고 하
더군요.]
그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강호에선 그렇게들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속
한번 터놓고 애기해 봅시다. 사람들이 알다시피 복위표국 임가에
는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벽사검보가 있소. 그 속에는 오묘하고
정묘한 검법이 적혀 있는데 그 검법을 익히면 가히 천하무적(天下
無敵)이라 들었소이다. 임진남 부부가 살해된 원인은 많은 사람들
이 벽사검보를 탐하고 있기 때문이오.]
육백은 말했다.
[그게 또 어쨌다는 거요?]
그 노인은 말했다.
[임진남 부부가 결국 누구에게 살해되었는가는 바깥 사람들은
모릅니다. 우리가 듣건대 이 군자검께서 간계를 꾸며 임진남의 아
들을 속여서 자기의 화산파 문하로 끌어들였으며 그 검보는 자연
히 화산파 문중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추리해 보니 악불
군은 계략에 능통해 강제로 탈취하지 못하자 이러한 간계를 쓴 것
이오. 생각해 보시오. 저 임가가 나이가 얼마이며 또 무엇을 알
겠읍니까? 화산파 문중에 들어선 다음 저 늙은 여우 손바닥에 그
벽사검보를 갖다 바쳤을 것이오.]
육백은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화산파의 검법은 정묘하여 악 선생
의 자하신공은 이 무림에서 독보적인 무예입니다. 그것은 제일 신
비로운 내공이오. 어찌 그것을 놔두고 다른 파의 검버을 탐하겠
소?]
그 노인은 하늘을 향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육노 영웅께선 군자의 마음으로 소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구
료! 악불군이 무슨 정묘한 검법을 가지고 있겠소? 그의 화산파는
기검(氣劍) 두 종파로 나누어져 기종(氣宗)은 화산을 점거하고 기
의 연마만을 따지는데 검법은 평범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소. 이
강호에서 떠들썩한 '화산파' 하는 세 글자의 이름을 그들이 들을
만큼 정묘한 재주가 있단 말이오? 사실은...... 허허허! 허
허......]
그는 코웃음을 몇번 치고 계속 말했다.
[이치를 따진다면 화산파의 장문인의 검술은 자연히 최고의 수
준이어야 할 것이나 여러분들도 지금 보고 있지 않습니까? 눈앞에
보이듯 그들은 우리 몇명의 소인배들에게 잡혔소. 우리들은 첫째
로 독약을 사용하지 않았고, 둘째로는 암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더러, 세째로는 적은 수로 저 많은 숫자를 이겼소. 그것은 우리들
이 가지고 있는 재주와 묘기로 쳐부순 것이오. 그래서 저 화산파
의 스승과 졸개들을 처치해 버렸소. 화산파의 기종의 무예가 어떠
한가는 생각해 보시면 알 것이오. 악불군도 물론 자기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급히 벽사검보를 얻은 다음에 검법을 연마하여 그 빈
껍데기를 채우려 했으나 지금 이런 추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
육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말 또한 일리가 있는 말이오.]
그 노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몇명의 무명소졸들은 여러분들의 눈에는 하잘 것 없을 것
입니다. 그러므로 벽사검보를 감히 꿈꾸지 못할 존재로 보일 것입
니다. 그러나 몇십년 동안 우리는 복위표국의 임 총표두에게 은덕
을 받았읍니다. 그는 해마다 우리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주었고 그
의 표차(?車)가 우리 산 밑을 지날 때면 우리 형제들은 그의 체면
을 보아 그 물건에 절대 손대지 않았소. 이번에 임 총표두께서는
이 검보 때문에 집안이 망하고 돌아가셨소. 우리 모두는 이에 울
분을 느껴 이렇게 악불군에게 빛을 청산하려는 것이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타고온 사람들을
한번 휘둘러 본 후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모두가 무림에서 이름이 쟁
쟁한 영웅호걸들이오. 더우기 화산에서 결맹한 오악검파 고수들께
서도 여기 계시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여러분들의 분
부에 따르겠고 이의를 달지 않겠소.]
육백은 말했다.
[이분이 우리를 친구로 대하니 그걸 받아 줍시다. 정 사형,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소?]
정면은 말했다.
[화산파의 장문인 자리는 좌맹주의 말씀에 따르면 응당히여기
봉 선생이 맡아야 한다고 했고 악불군은 오늘날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으니, 응당 봉 선생께서 집안을 깨끗이 다스리게 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말을 탄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말했다.
[정 이협의 영단이 옳으신 것 같습니다. 화산파느이 일은 응당
히 화산파의 장문인이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강호의 사람들
이 우리보고 쓸데없이 일에 간섭을 많이 한다는 말들을 안할 것이
오.]
봉불평은 말에서 뛰어내려 여러 사람 앞에서 읍을 했다.
[여러분께서 이 몸의 체면을 살려주시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저 아불군이 장문의 자리를 차지한 후 하늘은 노하고, 사람들은
원망을 품었으며 강호에 그 악명이 자자합니다. 오늘날 사람을 죽
이고 검법을 강탈하고 강제로 제자를 거두니 이 같은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그를 어찌 장문인 자리에 놔둘 수 있겠읍니까? 이
몸은 비록 덕이 없고 무능하여 본래는 이 화산파의 장문자리에 어
울리지 않으나 단지 선조들이 어렵게 보호해 오신 화산파를 지키
고 이 화산일파가 저 악불군과 못된 제자들 손에 망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읍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도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손을 모아 사방을 향해 읍을 했다.
이때 말 위의 몇명은 솜자루에 불을 당겼다. 비는 아직 그치지
는 않았지만 가랑비로 변해 있었다. 횃불의 불빛이 봉불평의 얼굴
을 비추었다. 그의 표정은 득의양양해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말
했다.
[악불군의 죄는 너무 크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응당 문규
에 의해 죽어야 한다. 총 사제 자네는 이 화산파를 위해서 집안을
정리해라. 저 반역자 악불군 부부를 죽여버려라.]
오십 세가 약간 안 되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녜.]
장검을 뽑아들고 악불군 앞으로 나가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악가놈아, 네 놈이 본 파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오늘은 마
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악불군은 탄식하며 말했다.
[좋다. 그래 네놈들의 검종이 장문인의 지위를 강탈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계략을 꾸몄구나. 총불기(叢不棄) 네놈이 오늘 나를
죽인다면 앞으로 저 지하에 가서 어떻게 화산파의 선조들을 바라
볼 생각이란 말이냐?]
총불기는 껄껄 웃었다.
[옳지 못한 행동을 했으면 마땅히 목숨을 끊어야 하는 법, 네
스스로 이런 죄행자르 저질러 놓았으니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
면 네놈은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면 더욱 꼴이 안
좋을 걸?]
봉불평은 일갈했다.
[총 사제, 더 말을 해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 형을 집행해
라!]
총불기는 말했다.
[녜.]
그리고 장검을 들어 손을 뻗으니 횃불의 빨간빛이 얼굴을 새빨
갛게 비추었다.
악 부인이 외쳤다.
[잠깐! 그 벽사검보는 도대체 어느 곳에 있느냐? 도둑놈을 잡고
물건을 찾는다면서 이렇게사람에게 누명을 씌운다면 그가 마음속
으로 거기에 수긍하겠는가?]
총불기는 말했다.
[도둑을 잡고 물건을 찾는다고? 좋아.]
악 부인을 향해 두 걸음 다가가서 웃으며 말했다.
[그 벽사검보는 당신 몸 안에 숨겨져 있는 것 같군! 내가 찾아
봐야겠소. 그래야만 당신이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말을 안 할 것
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왼손을 내밀어 악 부인의 허벅지를 더듬으려
고 했다. 악 부인의 다리는 상처를 입고 두 곳에 혈도를 찍혀으니
눈 앞에 총불기의 더러운 손이 자기 몸을 더듬어 왔건만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숭산파 정 사형!]
정면은 그녀가 그를 부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왜 그러시오?]
악 부인은 말했다.
[당신 사형인 좌맹주께선 오악검파의 맹주이시고 이 무림의 황
제입니다. 우리 화산파 또한 좌맹주 휘하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이 무례한 소인배에게 나를 맡기려 하시오? 그것은
어떤 규칙에 있는 일입니까?]
정면은 말했다.
[그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악 부인은 또 말했다.
[저 악당들의 말은 다 거짓이오. 저 두 명의 화산파 역적들이
만약 혼자서 내 남편과 싸울 수 있다면 우리는 장문의 자리를 두
손으로 바칠 것이며 죽어도 원망을 않겠소. 그렇지 않으면 이 무
림에 있는 천하영웅들의 수많은 입을 다 막지 못할 것이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튀 하고 침을 총불기의 얼굴에 뱉었다.
총불기는 그녀와 거리가 가까워서 이런 행동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지라 피하지 못하고 침을 얼굴 가운데 맞았다. 그는 큰 소
리로 욕을 했따.
[제기랄! 개 같은 년!]
악 부인은 노해 말했다.
[이 검종파의 악당아! 네놈의 무공이 졸려하여 내 남편은 고사
하고 나 같은 아녀자도 혈도를 집히지 않았다면 네놈 하나 죽이기
는 누워서 떡먹기다.]
정면은 말했다.
[좋다.]
그리고 두 다리를 벌려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앞으로 나갔다.
악 부인의 몸을 돌아 뒤로 가서 말채찍을 거꾸로 잡고 악 부인의
등에 있는 세 곳의 혈도를 찍었다.
그녀는 온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두 곳의 혈도가 풀리며 사지가
자유롭게 되었다.
정면이 그녀를 풀어준 것은 총불기와 겨루라는 뜻이었다. 눈앞
의 이 일전은 화산파 인물들의 생명과 관계되고 화산파의 흥망성
쇠가 달려 있는 것이다. 자기가 만약 총불기를 이길 수 있다면 비
록 위험에서 구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위기를 타개할 실마
리를 잡게 될 것이다. 만약 자기가 패한다면 더 이상 말할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즉시 따에서 장검을 집어들고 검을 가로로 눕혀
가슴을 막으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바로 이때 왼쪽다리에서 힘이
빠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녀의 다리는 상처가 깊었
다. 약간의 힘을 써도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총불기는 껄껄 웃었다.
[쳇! 여자임을 강조하고 또 다리가 아픈 체 가장하니 무슨 시합
을 하겠소? 내가 이긴다 해도 갈채를 받지도 못할 것이 아니오?]
악 부인은 그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검을 받아라!]
싹싹싹 삼 검이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검에는 내력이 충만되어
있어 휙휙휙 소리가 났다. 이 삼 검은 모두 상대방의 급소를 향했
다. 총불기는 두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좋다!]
악 부인은 선기를 잡고 앞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다리가 말을 듣
지 않았다. 꼼짝 않고 서 있자 총불기가 검을 들고 달려왔다. 쨍
그랑쨍그랑 소리와 함께 맹렬한 공격이 펼쳐졌다. 악 부인은 막고
피한 다음 수비를 공격으로 바꾸고 날카롭게 적의 아랫배를 찔러
갔다. 악불군은 한쪽에 서서 자기의 처가 다리의 상처에도 불구하
고 있는 힘을 다해 간적을 물리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총불기의
검초는 정묘하고 변화가 무쌍했다. 자기의 처보다 한수 위였다.
십여 초 접전하다가 악 부인은 아랫배가 무거움을 느꼈다. 화산기
종은 본래 내력에 의지해 적을 굴복시키는데 그녀의 상처가 깊어
기가 고르지 못해 검은 점점 총불기에게 제압을 받았다.
악불군은 내심 걱정되었다. 자기의 처의 겁법이 빠르면 빠를수
록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검종의 장점은 검법에 있다. 검법으로 그와 부딪치니 자기의
단점을 가지고 적의 장점을 대하는 격이라서 틀림없이 질 것이
다.)
이런 사정을 악 부인이 어찌 모르겠는가? 단지 다리의 상처가
가볍지 않았고 칼을 맞은 다음 혈도를 찍혔으며 더 나아가 그 상
처를 싸매지도 못하여 지금은 피가 계속 흘러 어떻게 지혈시킬 수
가 없었다. 지금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여 지탱하고 있어검초는
비록 흩어지지 않았으나 경력은 급속하게 약해졌다. 십여 초가 지
나자 총불기는 상대방의 약점을 알았다. 내심 기뻐하며 공격보다
는 은밀하게 방어에만 신경을 썼다.
영호충은 눈을 부릅뜨고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총불기
의 검법은 종횡무진하며 사용하는 초식은 힘을 쓰지 않는 검법이
었다. 사부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생각했다.
(과연 본문의 기종과 검종 두 파로 갈라진 후 두 파가 사용하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구나!)
그는 천천히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손을 내밀어 한 자루의
장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오늘 우리 파가 무참히 쓰러지고 사모님과 사매의 순결을 간사
한 무리에게 더럽히도록 두고 볼 수는 없다. 사모님께서 이 사람
의 상대가 못될 성싶으면 내가 먼저 사모님과 사매를 죽이고 목숨
을 끊어 화산파의 명예를 지키리라.)
악 부인의 검법이 점점 흩어졌다. 그런데 순식간에 장거미 기세
를 올려 '얍' 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뻗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무상무대 영씨일검의 초식이었다. 이 일검의 기세는 무서워 비록
그녀가 상처를 입고는 있었지만 공격하는 기세는 정말 위력이 있
었다. 총불기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악 부인의 다리가 온전하고 이 기세를 따라 계속해 공격했다면
적은 틀림없이 패배하고 피를 흘렸을 것이다.
이때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힘없이 검을 땅에 짚고 숨을
계속 헐떡이며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불기는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시오? 악 부인, 힘이 다 빠졌소? 그러면 내가 당신의
몸을 좀 주물러 주겠소.]
그는 말하면서 왼쪽 손을 앞으로 쭉 뻗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
왔다.
악 부인은 검을 들어 지르려고 했으나 오른쪽 팔에 힘이 없어
아무리 해도 검을 들 수가 없었다.
영호충이 외쳤다.
[잠깐!]
그는 악 부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외쳤다.
[사모님.]
그는 검을 뽑아 그녀를 찔러 그녀의 명예를 지키려고 했다. 악
부인의 눈빛에는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생각했다.]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 그녀는 흙구덩이에 주저앉고 말았다.
총불기는 외쳤다.
[꺼져라!]
그는 검을 쭉 뻗어 영호충의 목을 겨누고 찔러왔다.
영호충은 검이 눈 앞에 다가오자 자기에게 약간의 힘조차 없으
니 만약 검을 뽑아 막으려 해보았자 그의 검에 찔리고 말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래서 똑같이 검을 들어 그의 목을 향해 찔렀다.
그것은 상대방과 같이 죽는 검법이었다. 이 일검은 비록 민첩하지
는 못했지만 상당히 절묘했다. 이것이 바로 독고구검 가운데 파검
식(破劍式)이었다.
총불기는 깜짝 놀랐다. 진흙투성이의 소년이 이런 일초를 쓸 줄
은 생각지도 못한처라 급한 나머지 땅으로 몇바퀴를 굴러서야 비
로소 그것을 피했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
람들은 그의 꼴이 말이 아니고 몸을 일으켜 세우자 머리, 얼굴,
손, 그리고 온몸이 진흙투성이로 변하자 어떤 사람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들도 이러한 구르는 방법 외에는 이
초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잇었다. 총불기는 웃음소리를 듣
자 창피하고 화가 났다. 다시 검을 들어 영호충을 향해 달려나갔
다.
영호충은 이에 생각을 굳혔다.
[나는 절대로 내공의 기를 쓸 수 없다. 단지 대사숙께서 전수해
주신 검법으로 그와 맞서보자.]
그는 독고구검을 숙달하게 익히지 못해서 원래는 감히 이것으로
적과 싸울 수 없었으나 지금은 생사가 이 순간에 걸렸기 때문에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갑자기 맑아졌다. 파검식의 여러가
지 복잡하고 신기한 검법이 삽시간에 뚜렷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눈앞에 총불기의 검이 질풍처럼 앞으로 찔러오고 있었다. 영호충
은 벌써 그의 초식에 있는 빈틈을 찾아내고 칼끝을 비스듬히 뉘여
그의 아랫배를 향했다.
총불기는 이렇게 달려들어갈 때 상대방이 피하거나 칼을 들어
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의 아랫배가 무방비 상태였
으나 거기를 막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호충은 피하
지 않았고 단지 검끝을 비스듬히 세워 자기의 아랫배가 검에 닿기
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불기는 몸을 날려 두 다리가 땅에 닿기 전
에 이미 자기가 위험에 처했음을 알았다. 급히 검을 휘둘러 영호
충의 장검을 내리쳤다.
영호충은 벌써 이것을 예상하고 있다는 듯 오른쪽 팔을 가볍게
들어 장검을 앞으로 두 자 정도 뻗었다. 칼끝을 들어올리니 칼끝
이 총불기의 머리에 닿았다. 총불기는 일검을 내리치며 영호충의
장검이 자기의 칼을 막을 때 그 빈틈을 타서 피하면 될 것이라 생
각했으나 뜻밖에 상대방은 이 중요한 때에 검을 살짝 돌렸으니 그
는 허공을 쳤을 뿐이었다. 몸을 허공에서 돌릴 수 없어 '으' 하는
비명을 지를 때 영호충의 칼끝을 향해 그의 몸이 떨어졌다.
봉불평은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어 총불기의 등을 잡았으나
결국 한발짝 늦어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칼끝이 총불기의 어깨를
꿰뚫었다. 봉불평은 순간 검을 뽑아 영호충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
쳤다. 검법의 이치에 따르면 영호충은 반드시 뒤로 급히 물러나
다시 기회를 잡아 공격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몸 속의 내공은 매
우 혼란했다. 조금도 힘을 쓸 수 없었다. 절대로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총불기에 찍혀 있던 검을 뽑아 다시 독고구검의 초
식을 펼쳤다. 반격하여 찌르니 검끝은 봉불평의 배꼽을 향했다.
이 일초는 실로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검법이었다. 그러나 그의
반격 자세는 특이했다. 이 검이 먼저 적의 배꼽을 찌른 다음 적의
병기가 비로소 그의 몸을 찌를 수 있어 서로의 거리는 간발이 차
이이고 먼저 당하는가 나중 당하는가 차이뿐이었다.
봉불평은 자기의 일검을 적이 막지 못함을 알았다. 그런데 영호
충의 장검이 자기의 아랫배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자 위험 천만이
었다. 바로 뒤로 물러나 호흡을 길게 내쉬고 연속 칠검(七劍)을
휘둘렀다. 그 검법은 벼락을 동반한 폭풍우처럼 무섭게 밀어닥쳤
다.
영호충은 이미 삶과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속
으로 생각하는 것은 풍청양이 가르쳐준 수많은 검법뿐이었다. 어
떤 때는 뇌리 속에 뒷동굴에 있던 석벽상의 검초가 떠올랐다. 그
검법을 사용하여 봉불평과 순식간에 칠십여 초를 대결했다. 두 사
람의 장검은 서로 부딪치지 않았다. 공격과 수비는 모두 정묘하고
오묘하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눈이 부셨다. 그 누구도
갈채를 보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든 사람은 영호충의 숨이 점
점 거칠어지고 힘이 지탱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검의 신묘
한 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무쌍하여 끝이 없는 것 같았
다.
봉불평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만 장검을 허공에 대고
찌를 뿐이었다. 상대방이 자기와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검만 서로
부딪치니 쉽게 제압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는 사람 눈에는 봉
불평의 검법이 무미건조할 뿐이어서 어떤 자들은 마음에 불만을
품었다.
태산파의 한 도사가 말했다.
[기종의 제자는 검법이 절묘한데 검종의 사숙은 내공이 강하구
나! 이 어찌된 영문인가? 화산파의 기종 검종은 서로 뒤바뀌었단
말인가?]
봉불평의 얼굴이 빨개졌다. 한 자루의 장검을 더욱 질풍처럼 휘
둘렀다. 그는 오늘날 화산파 검종의 제일고수이고 검술은 대단했
다.
영호충은 발을 옮겨 디딜 힘조차 없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는
터였고 그래서 좋은 기회를 많이 놓쳤다. 처음 사용한 독고구검은
초식이어서 큰 적을 만나자,(오타 아님) 두 사람은 한참을 사웠으
나 금방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시 삼십여 초식을 싸웠다. 영호충은 발견했다. 자기가 초식의
검법이 아닌 마구잡이 검법을 썼을 때 상대방은 때때로 막지 못하
고 손과 발의 움직임이 산만해지는 것을...... 그러나 만약 검초
중에 본문의 검법이나 또 석벽에 조각되어 있는 숭산, 형산, 태산
등의 검법을 사용할 때면 봉불평은 선기를 잡아 반격하여 자기의
검초를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한번은 봉불평이 장검으로 연속 세
개의 호형(弧形)을 그렸는데 자기의 칼이 떨어져 나갈 뻔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풍청양의 한 마디가 또렷이 머리속에 떠올랐
다.
(초식이 없는 검법을 쓴다면 적은 그것을 뚫지 못할 것이다. 초
식의 없음이 초식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검법의 극치이다.)
그때 그는 봉불평과 이미 이백여 초를 싸웠다. 독고구검 중에
절묘한 초식을 갈수록 많이 깨달았다. 봉불평이 어떤 무서운 검법
으로 공격해 와도 그는 결국 한눈에 그의 빈틈을 알아내고 검을
휘둘러 그로 하여금 검을 거두어 자기를 방어하도록 했다. 싸울수
록 자신이 생겼다. 갑자기 풍청양의 말이 생각났다.
(무초로 유초를 파괴하는 비결을 알려 주마. 가볍게 기를 길게
내쉬고 검을 펼쳐라. 이 일검은 어떤 초식에도 속하지 않으며 심
지어 독고구검 중의 파검식의 검법에도 속하지 않는다. 검에는 힘
이 들어가지 않고 검끝은 삐뚤어져 자기도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생각하지 마라!)
봉불평은 영호충의 검법이 변화하자 멈칫거리며 생각했다.
(이것은 또 무슨 초식인가?)
금방 어떻게 해소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춤
을 추듯 검을 휘둘러 자기의 상반신을 방어했다. 영호충의 검은
일정한 초식이 없었다. 상대방이 자기 몸의 상단을 방어하자 검끝
은 가볍게 떨며 그의 허리를 향했다. 봉불평은 그의 초식의 변화
가 이렇게 기묘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깜짝 놀라 뒤로 세 발짝
물러섰다. 영호충은 그를 다라갈 힘이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결투하느라고 비록 내공을 쓰지는 않았지만 검을 들어 찍고 내리
치는 바람에 자기의 힘을 다 소모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
게 오니손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급한 숨을 계속 내쉬었다.
봉불평은 그가 쫓아오지 않음을 보고 기회는 이때다고 생각하며
바로 앞으로 나와 싹싹싹 사검(四劍)으로 영호충의 가슴과 배, 허
리, 어개, 네 곳을 연달아 질렀다.
영호충은 팔뚝을 틀어 검의 방향을 바꾸고 그의 왼쪽 눈을 향해
찔러갔다. 봉불평은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세 발자국을 물러 났
다.
태산파의 그 노인이 말했다.
[이상하다. 이상해! 이 사람의 검법은정말 탄복할 만하구나.]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모두 동감이었다. 모두들 탄복하는
'이 사람의 검법' 은 자연히 봉불평의 검법이 아니라 영호충의 검
법이라는 것을 봉불평은 눈치채고 있었다. 봉불평은 내심 생각했
다.
(나는 검종의 최고 고수로서 화산파를 장악할 의도였는데 만약
내가 검법으로 이 기종의 꼬마에게 진다면 화산파의 장문이 되는
계획은 물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또 산에 드렁가
은거해야 하고 다시는 강호에 나올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
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암암리에 부르짖었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또 무엇을 숨기겠는가?)
고개를 들고 있는 힘을 다해 맑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장검을 비스듬히 찔러갔다. 그 민첩함이란
형용할 수 없었다. 오육 초가 되기도 전에 검세는 이미 윙윙거리
며 바람소리를 냈다. 그의 검은 갈수록 빨랐다. 바람소리도 점점
커졌다. 이 광풍쾌검(狂風快劍)은 봉불평이 중조산(中條山)에서
은거하면서 15년이란 세월이 걸려서 창출해낸 뽐낼 만한 검법이었
다. 검초는 휘두를수록 더욱 빨랐고 불러 일으키는 바람소리도 갈
수록 빨라졌다. 그가 품고 있던 뜻은 아주 컸다.
화산파를 장악하고 또 화산파의 장문인이 된 다음 더 나아가 오
악검파의 맹주가 되려 하는 것이었다. 오직 의지하는 것은 이 백
팔식(百八式)의 광풍쾌검뿐이었다. 그는 이 재주를 가급적 노출하
지 않으려 했다. 일단 노출되면 실제가 다 노출되어 다시는 일류
고수들과 대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은 이미 그 초식을
알아 방비책을 세우기 때문에 그 효과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러
나 지금은 기세가 호랑이등에 올라탄 격이니 영호충을 패퇴 시키
지 못한다면 그는 얼굴을 들 수 없고 강호에 돌아다닐 염치가 없
게 된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그는 어쩔 수가 없어서 그 초식을
펼쳤다.
이 광풍쾌검은 위력이 엄청나 검에서 솟아오르는 한 줄기의 경
기(勁氣)는 점점 확산되어 옆에서 보는 사람에게 한기가 몰려갔고
얼굴이나 손에 검풍(劍風)이 불어와 은은하게 아파오기까지 했다.
모두들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을 에워쌓던 원은 점점 넓혀져 이미
사오 장의 둥근 원으로 펼쳐졌다.
이때 숭산, 태산, 형산파의 고수들과 악불군 부부는 봉불평을
경멸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모두들 그의 검법의 초수가 정기하고
검의 기세가 대단하여 결코 요행히 승리를 얻고자 함이 아님을 깨
달은 것이다. 이 사람은 강호에서 별로 이름이 나 있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검법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말 위의 여러 사람이 비추고 있던 횃불의 불빛이 이 검세의 빛
에 융합되어 너울너울 춤췄다. 검에서 발산하는 바람소리는 점점
커지고 세력이 강화되었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영호충은 바로 만 장의
파도에 묻혀 있는 일엽편주 같았고 광풍노도가 하늘을 덮을 듯한
하얀 풍랑이 작은 배에 부딪치고 작은 배는 파도를 다라 넘실넘실
금방이라도 파도 속에 휘감길 것 같았다.
봉불평의 공격이 빠를수록 영호충은 더욱 풍청양이 가르쳐 주던
검법의 뛰어남을 확신하게 되었다. 매초식마다 그는 더욱 많은 것
을 느꼈다. 그리고 검법의 여러 초식을 철저하게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감이 점점 우러났다. 그는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단지 정신을 집중하여 상대방 검초에 있는 여러 변화를 살폈다.
광풍쾌검은 정말 빠르고 강했다. 백팔 개 초식은 순식간에 끝났
다. 봉불평은 상대방을 제압하지 못하자 마음이 더욱 초조해져 계
속 소리를 질러대며 장검을 비스듬히 하고 앞으로 똑바로 후려쳐
왔다. 맹렬하기 이를데 없어 영호충은 검을 들어 막지 않을 수 없
었다. 영호충은 그의 형세가 목숨을 걸고 들어오는 것 같아 마음
이 두려웠다. 계속 싸움을 할 수 없어 장검을 살짝 흔들어 싹싹싹
네 차례의 가벼운 소리와 함께 오른손과 오른발, 왼손과 왼발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봉불평은 손목을 채여
장검을 떨구고 말았다.
봉불평은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만됐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정면, 육백, 탕영악, 세 사람을 향해 읍을 하
며 말했다.
[숭산파의 세 분의 사형께서 좌맹주에게 전하시오. 이 몸은 그
어르신의 성의에 감격하고 있다고...... 그러나 기량이 부족하여
그분께...... 면목이...... 면목이......]
그리고 또 한번 읍을 한 다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십여보를 도
망친 다음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너의 검법은 대단하다. 이 몸은 굴복한다. 네가 쓰는 검법은
아마 악불군도 지니고 있지 못할 것이다. 너의 이름과 그 검법을
가르쳐 준 분의 이름은 무엇인가? 가르쳐 주게.]
영호충은 말했다.
[저는 영호충이올시다. 은사이신 악 선생 밑에 있는 수제자입니
다. 선배님께서 양보해 주셔서 다행히 일초반식의 승리를 얻었을
뿐입니다. 어찌 입에 올리 수가 있겠읍니까?]
봉불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속에는 처량하고 낙담한
의미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떠나갔다.
정면, 육백과 탕영악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검법으로 말한다면 우리들은 이미 봉불평의 적수가 못 되고 물
론 저 영호충의 적수가 더욱 못 된다. 만약 우리가 일제히 달려들
어 난도질을 한다면 그를 죽일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각파의
고수들이 함께 있는데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세 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했다. 모두 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이 낭랑히 외쳤다.
[영호 현질, 너의 검법은 고명하군! 정말 눈을 뜨게 해 주었어.
나중에 보기로 하세.]
탕영악은 말했다.
[모두들 갑시다!]
그리고 왼손을 흔들어 말머리를 돌려 양쪽 발을 차니 말은 앞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러자 나머지 사라들도 그 뒤를 따랐
다. 순식간에 그 무리는 컴컴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말발굽 소
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약왕묘에는 화산파 사람들과 그 복면의
괴한들만 남아 있었다.
그 복면 노인이 마른 웃음을 두번 웃고 말했다.
[영호 소협, 당신의 검술은 고명하여 모두들 감복하는 바이오.
악불군의 공부는 당신에 비해 아직 멀었소. 이치대로 라면 당신은
벌써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어야 옳았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하여 말했다.
[오늘저녁 각하의 정묘한 검법을 보았으니 응당 우리가 물러가
야 옳으나 우리는 이미 당신들과 원한을 맺었소. 앞으로의 화근이
무궁할 것이오. 오늘 반드시 그 뿌리를 뽑아 그 근원을 없애야 하
겠소. 비록 당신은 상처를 입었지만 사정을 봐줄 수 없구료.]
말을 하면서 한번 소리를 지르자 나머지 복면인들이 둥그렇게
에워쌌다.
정면 일행이 떠나갈 때 횃불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아 깜박깜박 사람들의 하반신을 비추고 있었다. 허리 위
에는 불빛이 비추지 않아 알아 볼 수 없었다. 열다섯 명의 복면인
들의 병기에 불빛이 반사되었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영호충
을 향해 다가왔다.
영호충은 봉불평과 싸움을 할 때 비록 내력을 소모하지는 않았
으나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가 화산파 검종의 고수를 물리
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독고구검을 배웠기 때문이고 초식에 있어
선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열다섯 명의 복면인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병기와 그들이 사용하는 초식이 동시에 공격해 온
다면 어찌 하나하나 헤쳐나간단 말인가? 그는 내공이 조금도 없었
다.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딜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 어찌 열다섯
명이나 되는 고수들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겠는가? 그는 길게 한
숨을 내쉬고 애틋한 눈빛으로 악영산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눈빛이었다. 그는 악영산의 얼굴에서 조그
만 위안이라도 찾고 싶었다. 과연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빛에는 초조함과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영호
충은 내심 기뻤다. 그러마 희미한 불빛 속에 그녀의 섬섬옥수는
한 남자의 손을 꽉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임평지였
다. 영호충은마음속이 시큰해졌으며 더욱 싸울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다. 즉시 검을 던지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 열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그가 조금 전 봉불평과 악투하던 위
세에 질려서 누구도 감히 먼저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반 걸음 반
걸음씩 천천히 다가왔다.
영호충이 천천히 몸을 돌려보니 열다섯 명의 삼십개 눈동자에서
형형한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마치 한 쌍의 맹수눈과 같이 흉악
하고 잔인한 빛이었다.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전광석화 같은 생각
이 스쳤다.
(독고구검의 제칠검 파전식(破箭式)은 전문적으로 암기만을 파
괴하는 것이다. 적의 수천 수만의 화살이 날아오거나 또 수십 명
이 각종 암기를 동시에 쓸 때 이 일초를 사용하면 수백가지의 암
기를 동시에 격퇴할 수 있다.)
그 복면노인이 말했다.
[일제히 공격하라! 저 놈을 난도질해 버려라!]
영호충은 더 이상 생각할 영유가 없었다. 장검을 뽑아들고 독고
구검의 파전식을 펼쳤다. 검끝이 부르르 떨더니 열다섯 사람의 눈
을 찍었다.
아! 아이구! 아이고!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비명소리와 함
께 쨍그랑! 챙강! 하는 소리가 들리며 병기가 일제히 땅에 뚝뚝
떨어졌다. 열다섯 명의 복면인의 삼십 개 눈은 일순간에 영호충의
신속한 수법에 의해 칼에 베어진 것이었다.
독고구검의 파전식은 일초는 먼저 수백 개의 암기를 받아낸 다
음에 수백 개의 급소를 찍는 것이 순서였으나 검이 너무 빨라 마
치 한 번의 칼질로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검법은
단숨에 적중해야 했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게 된다면 적들의 암기
는 자기를 찌를 것이다. 영호충은 이 검술을 숙달되게 익히지 못
했다. 그러나 천천히 다가오는 눈동자를 보자 멀리서 날아오는 암
기를 쳐내는 것처럼 대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느 삼십 검을 뻗
어 내어 삼십 개의 눈동자를 적중시킨 것이었다.
그는 찌른 다음 곧바로 사람이 둘러쌓인 곳을 피해 나갔다. 왼
손으로 문설주를 부여잡고 있는 그의 안색은 창백하였으며 온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영호충의 손에 들
려 있던 장검이 땅에 떨어졌다.
그 열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두 손으로 눈을 싸잡고 비명을 질러
댔는데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줄줄 흘러나왔다. 어떤 자는 땅바닥
에 꿇어 앉고 어떤 자는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어떤 자들은 흙탕
물 속에서 뒹굴었다.
열다섯 명의 복면인은 눈 앞이 갑자기 어두워오고 몹시 아파 참
을 수가 없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만약에 이 사람들이
약간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몰려들어 공격했다면 영호충은
이 열다섯 사람에게 살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
이 아무리 높다 한들 순간에 두 눈이 찔려 눈이 안 보이는데 어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계속하여 공격을 할 수
가 있겠는가? 이 열다섯 사람은 마치 머리를 잘린 파리처럼 부딛
치고 딩굴며 허우적거렸다.
영호충은 위험 천만할 대 자기의 검법이 성공을 거두자 크게 기
뻐했다. 그러나 열다섯 사람의 꼴을 보자 무서움과 또 측은하고
가련한 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악불군은 놀람과 기쁨이 교차되어 큰 소리로 외쳤다.
[충아, 그들의 다리를 잘라라! 그리고 천천히 물어보자!]
영호충은 말했다.
[녜...... 녜.]
고개를 숙여 장검을 주웠다. 그러나 조금 전 그 초식을 쓰면서
내공을 움지였기 때문에 전신은 부들부들 떨려 왔고 아무리 발버
둥쳐도 장검을 쥘 수가 없고 두 다리가 흐물거려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 복면 노인이 외쳤다.
[모두들 병기를 들고 왼손으로 동료들의 허리를 잡고 나를 따라
가자!]
열네 명의 복면객은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그 노인의 외침을 듣
자 일제히 허리를 굽혀 땅바닥을 더듬었다. 어떤 병기를 만지든지
그 병기를 주웠고 어떤 자는 두 개를 잡았으나 어떤 자는 한개도
잡을 수 없었다. 각자 오니손으로 동료들의 허리를 잡고 한줄을
이루어 그 노인을 따라 비를 맞으며 질퍽거리는 흙탕물을 밟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화산파의 많은 사람들은 악 부인과 영호충 외에는 모두들 혈도
가 찍혔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악 부인은 두 다리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영호충은 전신의 힘이 빠
져 일어설 수 없어 눈을 뜨고 열다섯 명의 복면객이 사라지는 것
을 바라보기만 했다.
조용한 가운데 남녀제자들이 내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악불군
은 갑자기 냉랭히 말했다.
[영호충, 영호 대협, 내 혈도를 풀어주지 않을 작정인가? 정말
모두가 너에게 애걸을 해야 풀어줄 생각이냐?]
영호충은 깜짝 놀라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저와 농담을 하시는군요. 제
가...... 제가 바로 사부님의 혈도를 풀어 드리겠읍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 일어났다. 뒤뚱뒤뚱 악불군의 몸 앞
까지 걸어갔다.
[사...... 사부님, 어떤 혈도를 풀까요?]
악불군은 화가 치밀었다. 지난번에 영호충이 화산에서 거짓으로
자기 몸을 찔러 아무리 말을 해도 전백광을 죽이지 않았는데 오늘
도 옛날과 똑같이 거짓 연기를 하여 열다섯 명의 복면객을 풀어주
고 또 고의로 시간을 끌어 자기의 혈도를 풀어주지 않는 것은 자
기가 쫓아가 복면인들을 죽일까봐 그러는 줄 알고 악불군은 몹시
화가 났다.
[넌...... 넌...... 신경쓸 필요 없다!]
그리고 계속해서 속으로 자하신공을 운행하여 여러 혈도를 풀려
고 했다. 그는 적에게 혈도가 찍힌 다음 계속 강력한 내공을 써서
충격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혈도는 너무 강한 충격을 받았
고, 또 찍힌 곳은 옥침(玉枕), 전중, 거추, 견정, 지당(志堂) 등
의 중요한 대혈이었기 때문에 경맥의 운행은 이 몇군데 혈도에서
막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하신공의 위력이 많이 경감되어 금방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영호충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사부님의 혈도를 풀려고 했다.
그러나 티끌만큼의 힘도 낼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들려고 했으나 눈 앞에는 불똥이 튀고 귓속은 윙윙 소리가
나 기절할 것 같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악불군의 몸 옆에 쓰러
져 스스로 악불군이 혈도를 풀 때를 기다렸다.
악 부인은 땅에 엎드려 있었다. 조금 전 힘을 쓰면서 진기를 흐
트려 놓았기 때문에 온몸은 힘이 빠지고 손조차 들 수 없었고 상
처를 누를 수도없었다.
날이 점점 밝아오고 비도 점차 그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얼
굴은 점점 몽롱한 상태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악불군의 머리끝
에는 하얀 안개가 떠올랐고, 얼굴에는 자색의 기운이 자욱하게 번
졌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악불군은 전신의 혈도를 풀 수가 있
었다. 그는 몸을 날려 일어나 두 손으로 치거나 때리며 째거나 문
지르면서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혈도를 풀었다. 그리고 내력을 악
부인의 체내에 집어넣어 그녀의 기가 돌도록 했다.
악영산은 급히 어머니의 상처를 싸맸다. 여러 제자들은 어제 저
녁 죽음에서 소생한 상황을 생각하니 정말로 악몽을 꾼 것 같았
다.
고근명, 시대자 등은 양발의 머리와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참
상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몇 명의 여제자들은 더욱 슬피울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다행히 대사형께서 이 악당들을 격퇴시켰어.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끈찍하게 당하고 말았을 거야.]
고근명은 영호충이 혼자 흙탕물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쪽으로 가서 그를 일으켰다.
악불군은 담담하게 말했다.
[충아, 그 열다섯 명의 복면객의 정체는 무엇이냐?]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 제자는 모르는 일입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너는 그들을 알지 않느냐? 그들과 교분은 어떠하냐?]
영호충은 깜짝 놀라 말했다.
[제자는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 사람 중에 어떤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읍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그들을 잡아 그들의 정체를 밝히라고 명
령했는데 너는 어째서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처리하지도 않았지?]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 제자...... 제자는 정말 힘이 없었읍니다. 손끝 하
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읍니다. 그땐...... 그땐......]
말을 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혼자 서 있기가 상당히 어
려웠던 것이다. 악불군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연기를 멋지게 하는군!]
영호충은 머리에 땀방울이 맺혀 흘렀다. 두 무릎을 꿇어 땅바닥
에 엎드렸다.
[이 제자는 어려서부터 고아가 되어 사부님의 은덕을 받아 사부
님이 키우셨읍니다. 사부님께서는 이 제자를 친아들처럼 여기셨읍
니다. 이 제자가 비록 불충하다고는 하나 어찌 사부님의 뜻을 배
반하여 고의로 사부님과 사모님을 속이겠읍니까?]
악불군은 말했다.
[나와 사모님에게 거짓말을 감히 못 한다고? 그럼 너의 검법은
허허...... 어디서 배웠느냐? 그렇다면 꿈 속의 도사에게 전수받
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이냐?]
영호충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검법을 전수해 준 사람은 이 제자에
게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에게도 검법의 내력을 밝히지 말라고
하셨읍니다. 설령 사부님이나 사모님일지라도 말씀드릴 수 없읍니
다.]
악불군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그렇겠지. 너의 무공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사부
나 사모님이 네 눈에 차겠느냐? 우리 화산파의 이 조그만 공력(功
力)이 어찌 너의 신검(神劍)의 일격을 막을 수 있겠느냐? 아까 그
복면인들도 말하지 않았느냐? 화산파의 장문 자리는 벌써 네가 맡
았어야 옳다고.]
영호충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만 조아렸다. 마음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풍 사숙조에게 검법을 전수받은 경과를 토로하지 않
으면 사부님은 결국 용서해 주지 않으실거다. 그러나 남아대장부
는 한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 전백광 같은 계집질만 일삼는
사람도 도곡육선에게 큰 고통을 당하면서도 절대로 풍 사숙조의
행적을 누설치 아니하였다. 영호충은 큰 은덕을 받았다. 절대로
그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내가 사부님과 사모님을 대하는 마
음은 하늘과 땅이 안다. 잠시 억울함을 받았다손쳐도 그게 뭐가
대수인가?)
생각을 마친 영호충은 말했다.
[사부님, 사모님, 이 제자가 감히 사부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대
항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말할 수 없는 고충이 있읍
니다. 앞으로 제자가 그 선배님에게 요청해서 이 제자가 사부님과
사모님께 알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겠읍니다. 그때는 자연히 속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좋다. 일어나거라.]
영호충은 머리를 두번 조아리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두 무릎에
힘이 없어 다시 무릎을 끓었다. 임평지는 그의 옆에 있었기 때문
에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악불군은 냉소했다.
[너의 검법도 고명했지만 연극은 그보다도 훨씬 고명하더구나!]
영호충은 감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부님의 은혜는 산과 같은데 오늘은 나를 책망했지만 앞으로
는 결국 밝혀질 것이다. 이 일은 사실 너무 이상하다. 의심을 품
는 것도 무리가아니다.)
그는 비록 억울한 오해를 받았지만 추호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
었다.
악 부인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저녁에 충아의 신묘한 검법이 아니었다면 화산파의 인물
은 전멸되고 말았을 것이고, 우리 여자들은 말도 못하는 능욕을
당했을 것이다. 충아에게 검법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이든간에 우
리는 큰 은혜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열다섯 명의 악당들의 정체
는 앞으로 자연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우리 충아가 그들
과 교분이 있겠는가? 그들은 정말로 충아를 죽이려고 했고 충아는
그들의 눈을 찍지 않았는가?]
악불군은 고개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악 부인의 이런 말투
는 조금도 귀에 들어오는 것 같지 않았다. 여러 제자들은 불을 피
우고 밥을 지었다. 어떤 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양발을 묻었다. 아
침 식사 후에 각자 행랑에서 마른 옷을 갈아 입고 젖은 옷을 벗었
다. 모두들 악불군을 주시하며 지시를 기다렸다. 모두들 생각했
다.
(또 숭산에 가서 좌맹주하고 따질 것인가? 봉불평은 이미 대사
형의 검에 패했기 때문에 다시는 화산파의 장문자리를 탐하지 않
을 것이다.)
악불군은 악 부인에게 말했다.
[사매, 어디로 가야될지 말 좀 해보시오?]
악 부인은 말했다.
[숭산에는 갈 필요가 없지요. 기왕 나온 이상 화산에 급히 돌아
갈 필요가 있겠읍니까?]
그녀는 도곡육선이 무서웠다. 그래서 다시 산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악불군은 말했다.
[아무일도 없으니 천하를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겠지. 제자들의
견문이나 경험을 넓혀 두는 것도 좋을거야.]
악영산은 크게 기뻐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버님......]
그러나 양발 사형의죽음이 생각났다. 금방 이렇게 기뻐한다는
것은 실로 걸맞지 않는 것 같아 몇번 손뼉을 치고 바로 입을 다물
었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논다는 소리를 들으니 네가 제일 기쁜 모양이구나. 너의 말대
로 우리 산천구경이나 다니자.]
말을 하면서 임평지를 쳐다보았다.
악영산은 말했다.
[아버지, 논다는 말씀이 나왔으니 한번 통쾌하게 놀아봐요. 멀
리 갈수록 좋구요. 몇백 리 가시다가 다시 집으로 가신다는 말씀
은 마세요. 우리 임 사형의 집에 놀러가요. 나와 둘째 사형이 복
주에 갔을 때 추한 계집종으로 변장을 했기 때문에 밖에 나가 거
닐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복건(福建)의 용안
(龍眼)은 크고 또 달아요. 또 귤나무와 수선화......]
악 부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여기서 복건까지는 수만 리 길인데 우리는 그만한 여비가 없단
다. 화산파가 거지패거리로 변해서 걸식을 하면서 가야 되겠니?]
임평지는 말했다.
[사부님, 사모님, 며칠만 가면 바로 하남성 변경에 도착합니다.
제자의 외갓집니 낙양에 있읍니다.]
악 부인은 말했다.
[맞다. 너의 외조부이신 금도무적 왕원패(金刀無敵 王元覇)는
낙양 사람이지.]
임평지는 말했다.
[제자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읍니다. 정말로 외할머니와 외
할아버지를 만나뵙고 싶고 자세한 내막을 말씀드리고 싶읍니다.
사부님, 사모님, 그리고 여러 사형 사저들께서 기꺼이 가신다면
제자의 외갓집에 가셔서 며칠 묵도록 하시지요. 저의 외할아버지
와 외할머니는 틀림없이 영광으로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천
천히 산구경 물구경을 하면서 복건에 있는 집에 가시지요. 장사분
국(長沙分局)에는 청성파수중에서 제자가 빼앗은 적지 않은 보물
이 있읍니다. 여비의 일체는......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읍
니다.]
악 부인은 도실선(挑實仙)에게 일검을 찌른 후에, 날마다 도곡
사선에게 사지가 잡혀 전신이 네 조각이 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
었다. 더우기 성불우(成不憂)가 네 조각으로 찢어진 후에 오장육
부가 널려진 참상을 생각하니 더욱 걱정이 되고 가슴이 크게 두근
거려 거의 매일밤마다 사지가 찢겨지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번에 하산해 숭산에 가서 따진다는 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명목
이고 사실 속셈은 도곡육선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그녀는 생각하
기를, 피할 바에는 멀리 피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자기와 남편
은 평생 남쪽 지방에 가본 적이 없으니 복건 일대를 유람하는 것
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악불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형, 임평지가 먹을 것과 잠잘 장소를 마련한다고 했으니 우
리 한번 가서 공짜 밥이나 먹어 봅시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평지의 외할아버지 금도무적(金刀無敵)의 위엄은 이 중웡에 떨
쳐 울리고 있다. 나는 옛날부터 만나뵙고 싶었으나 아직 인연이
없었다. 복건 보전(?田)이라는 지방은 남소림(南少林)의 소재지이
다. 옛날부터 무림의 고수들을 많이 배출했지. 우리는 낙양 복권
일대를 구경하자. 만약 몇명의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여러 제자들은 사부가 복건에 가기로 결정했음을 보고 기뻐했
다. 임평지와 악영산은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이 가운데 영호충
만이 남몰래 괴로워했다. 그는 생각했다.
(사부님과 사모님이 다른 데를 안 가시고 하필이면 낙양에 가서
임 사제의 외조부님을 만나보고 다시 수만리 떨어진 복건에 가는
이유는 말을 안 해도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소사매를 임평
지에게 시집보내려고 그러는 것이다. 낙양에 가서 두 사람의 혼사
를 결정하고 복건에 가서 아마 임가와 결혼을 시키겠지? 나는 아
버지, 어머니도 없고 친척도 없는 천애고아다. 어찌 분국(分局)이
온 천하에 뻗쳐 있는 복위표국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임 사제가
낙양에 가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만나는데 내가 따라간다면
내꼴이 무엇이 되겠는가?)
눈 앞의 여러 사제와 사매들은 활짝 얼굴을 펴고 웃고 있었다.
양발이 처참하게 죽은 일은 모두 까마득히 잊은 듯해서 더욱 불쾌
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오늘 저녁 묵은 다음에 밤중에 혼자 사라지자. 내가 임 사제의
밥을 먹고 그의 돈을 써야 되는가? 그리고 다시 억지 웃음을 웃고
그와 소사매가 백년해로 하는 꼴을 축하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모두가 길을 떠난 후 영호충도 뒤를 따랐다. 심기가 불편하고
힘이 바져 걸음걸이가 느렸다. 여러 사람들과 거리가 갈수록 멀어
졌다. 점심때까지 걸었을 무렵, 그는 길 옆의 도로에 걸터앉아 숨
을 헐떡였다. 노덕약이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대사형, 몸이 어떠십니까? 피곤하시죠? 내가 같이 있지요.]
영호충은 말했다.
[좋다. 미안하구나.]
노덕약은 말했다.
[사모님께선 이미 앞마을에서 한 대의 수레를 빌리셨읍니다. 금
방 마중하러 오실 것입니다.]
영호충은 내심 따뜻한 정을 느꼈다.
(사부님은 여전히 나를 의심하시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나에게
잘 대해 주시는구나!)
얼마 있지 않아 한 대의 수레가 나귀에게 끌려 왔다. 영호충은
수레에 오르고 노덕약은 옆에서 걸었다.
그날 저녁은 여관에서 묵었다. 노덕약은 그와 같은 방을 썼다.
이렇게 이틀 동안 노덕약은 그와 촌보도 떨어지지 않았다. 영호충
은 그가 동문의 의리를 생각해 자기의 병든 몸을 보살펴보자 감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덕약 사제는 강호에서 떠돌다가 늙어서야 사부님의 밑에 들
어왔기 때문에 나의 사제이긴 하나 나이는 나보다 많다. 그래서
평소 나와 말을 거의 주고받지 않았는데 뜻밖에 내가 이런 경우를
당하자 그는 이렇게도 진심으로 나를 대해 주니, 길이 멀어야 말
의 진가를 알고 세월이 지나야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는 말
이 맞구나! 다른 사제들은 사부님이 나에게 좋지 않게 대하자 나
하고 말을 하려들지 않았는데.]
세째날 저녁, 그는 마침 방에서 눈을 감고 진기를 운행하고 있
는데 갑자기 소사제인 서기(舒奇)가 문 앞에서 작은 소리로 말하
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째 사형, 사부님이 오늘 물어보셨읍니다. 대사형에게 무슨
꿍궁이가 있느냐고요?]
노덕약은 쉬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리내지 마라. 대사형이 듣는다. 어서 나가라.]
이 두마디 말을 듣자 영호충은 가슴이 서늘해져 왔다. 자기 사
부가 의심을 품고 노덕약을 자기의 옆에 붙여 암암리에 감시하도
록 한 것이 아닌가? 서기가 숨을 죽이며 사라지자 노덕약은 그가
자기의 말을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영호충은 내심 대노하여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켜 시비를 가리고
싶었으나 생각을 바꾸었다.
(이 일이 그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는 사부님의 명을 받들
뿐이다. 어찌 그가 사부님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억지로 노기를 참으며 잠을 자는 척했다. 노덕약은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영호충은 그가 자기의 동정을 사부에게 보고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난 추호도 의심을 받거나 미안한 짓을 한 적이 없다. 너희들
백명 천명이 아침저녁으로 감시해도 영호충은 하나도 두렵지 않
다!)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엎드려 크게
한참동안 숨을 내쉬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몸을 일
으키고 신발과 옷을 찾아 입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부님이 나를 제자로 여기지도 않고 마치 도적을 방비하고 있
는 것처럼 감시하고 있으니 내가 화산파에 남아 있은들 무슨 소용
이 있겠는가? 떠나니만 못하다. 먼 장래에 사부님이 나를 이해하
든 못하든 간에 그분이 알아서 할 일이다.)
바로 이때 창 밖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엎드려! 움지이지 말아라.]
또 한 사람이 소근거렸다.
[대사형이 밖으로 나오는 모양이다.]
이 두 사람의 말소리는 극히 낮았으나 이때는 한반중이고 인적
이 끊겨 영호충은 그들의 말을 분명하게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두
명의 젊은 사제가 문 앞에 몸을 숨기고 자기가 도망가는가를 엿보
고 있었다. 영호충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
다.
(만약 내가 지금 가버린다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저리다고 수근
거릴 것이 아닌가? 좋다. 내 죽어도 가지 않겠다. 다만 두고 보겠
다.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갑자기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라! 술을 가져와라? 술을 가져와?]
한참 부르자 사환이 비로소 술을 가져왔다. 영호충은 술을 한참
들이키고는 인사불성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노덕약의 부축을 받고 수레에 올랐다. 그는 마차
위에서도 여전히 큰 소리로 외쳤다.
[술을 가져와라! 나는 술을 먹어야겠다!]
며칠 후 화산파의 모든 사람들은 낙양에 도착하여 어느 큰 주점
에 투숙했다. 임평지는 혼자 외조부님의 집에 갔고 악불군 등 모
든 사람들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영호충은 약왕묘 밖에서 혈투를 했을 때 입었던 흙탕물이 범벅
이 된 장삼을 아직도 바꿔 입지 않고 있었다. 이날도 역시 술에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악영산이 장포(長袍) 한 벌을 가지고
그에게 걸어 왔다.
[대사형, 이 옷으로 바꿔 입으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사부님의 장포를 왜 나보고 입으라고 하지?]
악영산은 말했다.
[잠시 후에 우리는 임 사형 집에 갈 것이예요. 당신은 아버님의
옷으로 바꿔 입지 않으면 안 돼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의 집에 가는데 왜 예쁜 옷을 입어야 되지?]
말을 하면서 그녀의 위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비취색이 나는 비단 저고리에 아래는 옅은 녹색의 치마
를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약간 분을 칠하고 머리는 깨끗하게 빛
어올린 후 한 송이 꽃을 꽂고 있었다. 영호충이 기억하기론 그녀
는 설날 때나 이렇게 치장을 했었다. 영호충의 마음은 더욱 어지
러워졌다. 몇마디 비양거리는 소리를 하고 싶었으나 생각을 바꾸
었다.
[사내 대장부가 이렇게 마음이 좁아서야 쓰겠는가?)
그는 참고 말하지 않았다. 악영산은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
자 불안했다.
[당신이 싫다면 바꿔 입을 필요가 없어요.]
영호충은 말했다.
[나는 새옷을 입기 싫어해. 나는 바꿔 입고 싶지가 않군!]
악영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장포를 가지고 문을 나섰다.
문 밖에서 늙수구레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악 장문인께서 멀리서 왕림해 주셨는데 나가 영접하지 못했읍
니다. 정말 실례가 많았읍니다.]
악불군은 금도무적 왕원패(王元覇)가 친히 손님을 맞으러 주점
에 왔음을 알고 부인을 쳐다보며 웃었다. 심히 기뻐하면서 두 부
부가 나왔다. 왕원패는 칠십세 정도였다. 얼굴에는 홍조를 띄우고
턱 밑에는 한 다발의 길고 하얀 수염이 탐스럽게 가슴을 덮고 있
었다. 전신은 불덩이처럼 활기에 넘치고 있었으며 좌측 바닥 위에
거위알 크기만한 금담(金膽)을 굴리고 있었다. 무림의 사람들 가
운데 철담(鐵膽)을 가지고 노는 사람은 많았지만 모두들 빈철(?
鐵) 또는 강철로 만든 것이었는데, 왕원패의 손에 있는 두개의 금
담의 노란색을 발하고 있는 것이 철담으로 만든 것보다 몇배는 무
거워 보였다. 분명 황금으로 만든 것 같았다. 그는 악불군을 보자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만나뵈서 반갑소이다. 만나뵈서 반갑소이다. 악 장문인의 명성
은 무림에 자자하오. 이 몸은 이십 년 동안 항상 그리워했다오.
오늘에야 이 낙양에 오시니 정말 중주(中州)지방의 큰 경사입니
다.]
말을 하면서 악불군의 오른손을 꼭 잡고 연신 흔들어댔다. 정말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구를 찾아 유람을 다니는 것은
견문을 넓히려는 것이었읍니다. 특히 이 지방을 찾아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중주대협 금도무적 왕노야를 방문하고 싶었기 때문입
니다. 우리 십여 명의 불청객을 물리치지 말아 주시면 고맙겠읍니
다. 하하하~]
왕원패도 큰 소리로 따라 웃었다.
[금도무적이라는 네 글자를 어찌 악 장문인 앞에서 꺼낼 수가
있겠읍니까?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게 아니겠소? 군자
검 악 선생 앞에서 금도무적을 거론하는 자가 있다면 나를 부추기
는 것이 아니고 이 왕원패의 이름을 손상시키는 것이 됩니다. 악
선생, 당신이 내 외손자를 제자로 거두어주시니 그 은혜는 바다보
다 깊다고 하겠소. 화산파와 금도문(金刀門)은 오늘부터 한 집안
이외다. 형제끼리니 피차를 논하지 맙시다. 자자자, 모두들 우리
집으로 갑시다. 설령 일년, 반년은 살지 못한다 해도 실컷 놀다가
가시구료! 악 장문인! 이 노인네가 친히 당신의 짐을 들어 드리겠
소.]
악불군은급히 말했다.
[그건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왕원패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두 아들을 불렀다.
[백분(伯奮), 중강(仲强), 빨리 악 사숙과 악 사모님께 인사를
올려라.]
왕백분과 왕중강은 똑같이 대답을 하고 무릎을 끓고 절을 했다.
악불군 부부도 급히 무릎을 끓고 반례했다.
[우리들은 똑같은 배분이 아니겠소? '사숙' 이라는 두 글자는
천부당 만부당하오. 고개를 숙일 필요조차 없읍니다. 제 얼굴이
뜨거워지는구료!]
왕백분 왕중강 두 사람은 악예(鄂豫) 지방에서는 명성이 자자했
다. 악불군에 대해서 평소 흠모하고는 있었지만 그에게 고개를 숙
여 절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단지 아버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억지로 무릎을 끓었던 것인데 악불군 부부가 똑같이 무릎을
끓어 반례리 예로 답하니 마음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의
절을 하고 일어났다. 악불군이 두 사람을 바라보니 형제는 키가
컸다. 특히 왕중강은 허리가 무척 굵었다. 두 사람의 태양혈은 높
게 부풀어 올라왔고 손의 근골(?骨)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들의 내공이 심히 깊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증거였다.
악불군은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와서 왕 어르신과 두 분의 사숙께 절을 올려라. 금도문
의 무공은 중원에 자자하다. 우리 화산파의 선조께서는 일지기 금
도문을 숭상하였다. 앞으로 모두들 왕 어르신과 두 분 사숙께 가
르침을 청하도록 해라. 틀림없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제자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녜.]
순식간에 객주집 대청 마루에는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왕원패는 웃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왕백분과 왕중강은 반례했다.
임평지는 한쪽에 서서 화산파의 제자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왕원패는 손이 무척 큰 사람이라 한 사람당 은 사십 냥을 준비해
서 나누어 주었다. 임평지는 악영산을 외조부에게 소개했다.
왕원패는 껄껄 웃으며 악불군에게 말했다.
[악 선생, 당신의 이 따님은 정말 훌룡하시군요. 그래 사위분을
정하셨읍니까?]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딸 아이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더우기 우리같이 무공을 배우
는 사람의 딸들은 하루종일 무술연마나 할 뿐이지 바느질이나 밥
짓는 일은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말괄량이를
데리고 가겠소?]
왕원패는 웃으며 말했다.
[너무 겸손하신 말씀이시오. 장군의 집안에서 여자 호걸이 나는
법이 아니겠소. 그러나 여자이니 주방의 일을 배우는 것도 좋을
듯하오.]
여기까지 말하고 소리가 낮아지면서 매우 침울해 했다. 악불군
은 그가 호남에서 죽임을 당한 임평지의 모친을 생각하는 것임을
알고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왕원패는 무척 호탕한 사람이었다. 딸을 잃은 슬픔을 즉시 지워
버리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따님께서 이렇게 용모와 재주가 있으니 어울리는 소년영웅을
찾아 짝을 맺어주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시겠읍니다.]
노덕약은 방에서 영호충을 부축해 나왔다. 영호충은 휘청거리며
간신히 걸어나왔다. 그는 왕원패와 왕씨 형제를 보고도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고 단지 깊이 읍을 하면서 말했다.
[제자 영호충은 왕 어르신과 두 분 사숙께 인사드립니다.]
악불군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고개 숙여 절을 하지 않느냐?]
왕원패는 벌써 외손자에게 사실을 전해 듣고 영호충이 몸에 중
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영호 현질은 몸이 불편하니 예를 너무 따질 필요가 없소. 악
선생, 당신 화산파의 내공은 오악검파 중에 제일이라고 합니다.
틀림없이 주량도 클 것이니 나는 오늘 당신과 열 그릇의 술을 마
시겠소.]
말을 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객주집을 나갔다.
악 부인,왕백분, 왕중강 및 화산의 여러 제자들도 그 뒤를 따
랐다.
주점을 나서자 밖에는 수레와 말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여
자들은 수레를 타고 남자들은 말을 탔다. 모든 말들의 안장은 화
려하기 이를데 없었다. 임평지가 왕원패에게 손님이 왔음을 알린
것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이미 수레와 말들
이 준비된 것이었다. 이 한 가지를 봐도 금도왕가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었다.
왕가(王家)에 도착 하니 대궐 같은 기와집이 몇십 채나 늘어서
있었고 대문에는 주홍칠이 되어 있었으며 문에는 두 개의 커다란
구리로 만든 고리가 걸려 있었으며 눈부시게 번쩍이고 있었다.
여덟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팔장을 끼고 대문 밖에 서 있었다.
문을 들어섰다. 대들보에는 검은 칠을 한 큰 액자가 걸려 있었
는데 견의용위(見義勇爲)라는 네 글자가 황금으로 박혀져 있었으
며 액자 밑에는 하남성 순무(巡撫)라는 낙관이 찍혀 있었다.
이날 밤 왕원패는 크게 주연을 베풀고 악불군과 제자들을 청했
으며 낙양의 무림인가들을 초청했다. 빈객들 중에는 적지 않은 벼
슬아치들과 거부들이 끼어 있었다.
영호충은 화산파의 수제자이다. 멀리서 온 손님 중에는 악불군
을 제외하고는 그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옷
이 남루하고 의기소침한 태도를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무림 중에는 독특하고 특이한 행동을 하는 인사들이 많았고 특히
개방고수들은 모두 낡고 기운 옷을 입는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많은 빈객들은 이 사람이 바로 화산파의 둘째가는 우두머리이니
틀림없이 평범치 않으리라 생각하고 누구도 그를 업수이 여기지
않았다.
영호충은 두번째 자리에 앉았다. 이때 왕백분은 주인의 자격으
로 그와 자리를 함께 했다. 왕백분은 술이 서너배 돌아도 여전히
영호충의 표정이 냉랭하고 그에게 세 마디 물으면 겨우 한 마디만
대답하는 것을 보고 자기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객주깁에서 자기 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절을 하지 않고 사
십 냥의 은을 나누어 줄 때도 공손하게 받지 않았던 일이 생각났
다. 왕백분은 속으로 화가 났다.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이리 찔러
보고 저리 찔러보고 또는 몇가지의 풀기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여
가르침을 청했건만 영호충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하지 않고 대답
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왕백분에게 어떤 나쁜 감저이 있어서 그
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눈 앞의 왕가가 고귀하게 보이고 사치스
럽게 보이는데 반하여 자기는 보잘것 없는 가난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사람들과 비교할 때 하늘과 땅 차이임을 느꼈기에 기분
이 울억했던 것이다. 임평지는 외갓집에 도착하자 바로 촉땅에서
나는 옷을 입자 더욱 고귀한 티가 나서 마치 옥(玉)처럼 빛나는
것이었다. 영호충은 이것을 보자 자기의 남루한 처지를 더욱 의식
하게 되었다.
(소사매가 산에서 나와 재미있게 놀던 옛날의 일은 이제는 오직
부끄러울 뿐이구나! 부자들은 산에서 놀지 않으니 말이다!)
그의 뇌리엔 온통 악영산 한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왕백분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건 자연히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
다.
왕백분은 중주일대 무림에서 세도가 당당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를 대할 때 벌벌 떨고 쩔쩔 맸는데, 오늘 저녁에 영호충이라는 청
년을 만나 몇번씩이나 푸대접을 받으니 이만저만 화가 나는게 아
니었다. 여느때 같았으면 벌써 발작을 하였겠으나 단지 죽은 누이
를 생각하고 또 아버님이 화산파 사람들을 심히 존경한다는 점을
생각하고 노기를 꾹꾹 눌러 참으며 계속 영호충에게 술을 권했다.
영호충은 잔에 술을 따라놓기가 무섭게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
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십여 잔을 마셨다. 그는 본래 주량이
강했다. 백 잔 이상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으나 그는 지금 내공이
소실되어 힘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취해 왔다. 약 사십 잔
을 들이켰을 때 그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왕백분은 내심 생각
했다.
(네놈은 세상사를 너무 모르는구나. 내 조카가 너의 사제이니
너는 응당히 나를 사숙 또는 세숙(世叔)이라고 불러야 옳은데 너
는 그 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를 이렇게 상대
도 안 해줄 수 있느냐? 좋다. 네놈을 취하게 해놓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보이게 해 주마.)
영호충은 취기가 올라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왕백분은 웃
으며 말했다.
[영호 노제는 화산의 수제자죠. 영웅은 청년 가운데서 나오는
것인가 보오. 무공이 높으니 주량도 높을 것이 아니겠소? 여봐라.
큰 그릇으로 바꾸어라. 영호 도련님에게 술을 따랐다. 드려라.]
왕가의 하인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올라와 술을 따랐다. 영호충
은 일생중 다른 사람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면 절대로 사양하는 법
이 없어 술을 따르면 즉시 비웠다. 순식간에 대여섯 그릇을 마셨
다. 취기가 올라와 들고 있던 술잔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동석
했던 모든 사람들이 말했다.
[영호 소협이 술에 취했군. 뜨거운 차를 마시고 정신을 차리게
해야 돼.]
왕백분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화산파 장문인의 제자요. 그렇게 쉽게 취할 리가 있
겠소? 영호 노제, 자, 듭시다.]
그리고 술을 한잔 가득히 따랐다.
영호충은 말했다.
[내가...... 내가 취한 줄 아십니까? 마십시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마시면서 술을 반은 입밖
으로 흘려보냈다. 갑자기 몸을 구부리며 입을 벌려 뱃속에 담아져
있던 술과 안주를 탁자에 토해내고 말았다. 동석해 있던 손님들이
놀라 일제히 피했다. 왕백분은 그 모습을 보고 냉소했다.
영호충이 토하자 대청에 있던 수백 개의 눈은 그를 쏘아보았다.
악불군 부부가 눈쌀을 찌푸리며 내심 생각했다.
(이 아이는 술좌석에 오니 못할 아이군. 많은 귀빈들 앞에서 추
태를 부리다니!)
노덕약과 임평지가 도잇에 달려와 영호충을 부축했다. 임평지는
말했다.
[대사형, 좀 가서 쉬시지요.]
영호충은 말했다.
[난...... 난 취하지 않았다. 나는 술을 또 먹을 수 있다. 술을
가져오너라.]
임평지는 말했다.
[녜, 녜, 빨리 술을 가져와라!]
영호충은 취한 눈으로 비스듬히 쳐다보며 말했다.
[넌...... 넌...... 임평지...... 어째서 소사매와 함께 있지
않느냐? 나를 끌고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노덕약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사형, 우리 가서 쉽시다.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 함부로 말
씀하지 마십시오.]
영호충은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함부로 지껄였느냐? 사부다바이 너를 파견하여
나를 감시하여 않았느냐? 넌...... 넌 나에게서 무슨 증거를 찾아
내었느냐?]
노덕약은 그가 취한 다음 말을 함부로 할까봐 임평지와 좌우측
에서 부축해 강제로 그를 방 안에 데려다 놓으며 쉬게 했다.
악불군은 '사부님이 너에게 감시하도록 파견했는데 너는 무슨
증거를 찾았느냐' 하는 말을들었다. 그는 비록 수가이 깊은 사람
이었지만 내심 참지 못하고 얼굴색이 변했다.
왕원패는 웃으며 말했따.
[악 노제, 나이가 어린 사람은 술이 취하면 함부로 지껄이는 법
이오. 상대해 무엇하겠소? 자자자, 술을 마십시다.]
악불군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시골 아이들이라 무엇을 모릅니다. 왕 어르신께선 너무 비웃지
나 마십시오.]
연회가 끝난 후 악불군은 노덕약에게 앞으로는 영호충을 감시
하지 말고 단지 주의해 살피라고 분부했다.
영호충은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술에 취했
을 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한 마디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단
지 머리가 부서지도록 아프고 자기 혼자 방에서 잠을 자고 방안이
심히 청결한 것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는 방에서 걸어나와 밖을
살펴보니 여러 제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인에게 물어보
니 그들은 뒷뜰 강무청(講武廳)에서 금도문 왕가의 자녀들과 무예
를 겨루고 있다고 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내가 그들과 섞이며 무엇 하겠는가? 밖으로 나가 거리 구경이
나 하자.)
그는 즉시 문을 나섰다.
악양은 역대 황제들이 사는 곳이었다. 규모는 웅장하나 시가지
는 그리 번화하지 않았다. 영호충은 아는 것이 별로 많지 않았으
며 고대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낙양성 내의 여러 명승
고적을 봐도 그 내력을 알지 못하니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었
다. 작은 골목을 들어서니 일곱 여덟 명의 할일 없는 사람들이 한
작은 주점에서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왕원패가 어제 자기에게 인사할 때 준 은을 꺼내 그들과 도박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도박을 끝내고, 술이 취해 돌
아왔다. 연속 며칠 동안 그는 이 무리들과 도박을 하고 술을 마셨
다. 며칠 동안은 재수가 좋아 몇푼 땄으나 네쨋날부터 털리기 시
작했다. 사십 냥의 은은 며칠이 가기 전에 바닥이 났다. 도박군들
은 돈이 없으면 도박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를 붙여주지 않았
다. 영호충은 화가 치밀어 술을 시켜 연거푸 몇 주전자 들이켰다.
점원은 말했다.
[보시오. 돈을 싹 잃었는데 무엇으로 이 술값을 지불하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내일 와서 갚겠소.]
점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주막은 자금이 적고 이익이 없어 친척이나 친구일지라도 외
상은 사절입니다.]
영호충은 크게 화가 나 말했다.
[이 도련님이 돈이 없다고 깔보는 것이냐?]
점원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도련님이든 영감님이든 마나님이든 그건 상광 않겠읍니
다. 돈이 있으면 팔고 돈이 없으면 외상을 주지 않을 것이오.]
영호충이 자기자신을 돌아보니 옷은 남루하고 돈 있는 차림새가
아니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한 자루의 장거미마 풀어 탁자에 던
지며 말했다.
[이것을 잡혀 주시오.]
한 명의 무뢰한이 그의 돈을 따고 싶어 급히 말했다.
[좋소. 내가 당신 대신 잡혀 드리죠.]
그리고 검을 안고 나갔다.
점원은 또 두 주전자의 술을 가져왔다. 영호충이 한 주전자를
다 마셔버렸을 때 그 무뢰한은 몇 덩이의 은자를 가지고 돌아왔
다.
[모두 세 냥 네 푼의 은이오.]
그는 은자와 전당포 쪽지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영호충이 은을
살펴보니 세 냥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말 하지 않고 다
시 많은 무리들과 도박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때까지 술에 취하여
도박을 하다가 다시 밑천을 몽땅 털리고 말았다.
영호충은 옆에 있던 입이 비뚤어진 자에게 말했다.
[세 냥만 빌려주시오. 이기면 배로 갚아드리겠소.]
입이 비뚤어진 자가 웃으며 말했다.
[만약 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진다면...... 내일 갚아드리리다.]
입이 비뚤어진 자는 말했다.
[네 놈 집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으로 갚겠는가? 마누라를
팔겠는가? 여동생을 팔겠는가?]
영호충은 크게 화가 나 손을 들어 뺨을 철썩 갈겼다. 이때는 취
기가 이미 어리끝까지 올라 있어서 내친 김에 앞에 있던 몇냥의
은까지 빼앗아버렸다. 입이 비뚤어진 자는 외쳤다.
[큰일났다! 큰일났다! 이놈은 강도로구나!]
그 무리들은 모두 한패라 일제히 달려들어 주먹을 쥐고 영호충
에게 덤벼들었다.
영호충은 손에 검도 없고 힘이 없었다. 몇명의 무리에게 떠밀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주먹과 발길질에 그의 얼굴은 시퍼렇게 멍
이 들었다. 갑자기 말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몇명의 말탄 자들이
옆을 지나갔다. 말에 있던 사람이 호통쳤다.
[비켜라! 비켜라!]
말채찍을 휘두르며 무리를 흩어지게 했다. 영호충은 땅바닥에
엎드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었다. 한 명의 여자가 갑자기 외쳤다.
[어머, 이분은 대사형이 아니십니까?]
바로 악영산이었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좀 봅시다.]
이 사람은 임평지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 영호충의 몸을 돌려
놓고 깜짝 놀라 말했다.
[대사형, 어찌 된 일입니까?]
영호충은 고개를 흔들며 쓰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술에 취했고 도박에 졌소.]
임평지는 급히 그를 안아 말 위에 실었다. 임평지와 악영산을
제외하고 다른 네 사람이 말에 타고 잇었다. 말에 타고 있던 사람
은 왕백분의 두 딸과 왕중강의 두 아들이었는데 바로 임평지의 사
촌 남매들이었다. 그들 여섯 사람은 집에서 나와 낙양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는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골목에서 영호충이 사람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
이다. 그들 네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화산파는 오악검파의 하나로 할아버지께서 말씀을 자주 하시고
찬양하셨는데, 그리고 요전날 그들 제자들과 무술시합을 겨룰 때
그들의 공력은 상당했는데 이 영호충은 화산파의 첫째 제자로서
어찌 이 몇명의 깡패들조차 이길 수 없단 말인가?)
영호충이 얻어맞아 시뻘건 코피가 나고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부은 것을 보니 정말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영호충은 왕원패의 집으로 돌아와 이틀 동안 요양하자 비로소
원상태로 돌아왔다. 악불군 부부는 그가 무뢰한들과 도박을 하고
싸움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나서 그를 보러오지도 않았다.
다섯째 날 왕중강의 작은아들인 왕가구(王家駒)가 총총히 방안
으로 돌아왔다.
[영호 대형, 나는 오늘 당신의 빚을 갚았소. 그날 당신을 때린
무뢰한들을 찾아가 채찍으로 그놈들을 몇번 때려주었읍니다.]
영호충은 그 사건에 대해 기실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담담히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읍니다. 그날은 내가 술에 취했고 애당초 내가
잘못했던 것입니다.]
왕가구는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은 우리집 손님이 아닙니까? 금도
왕가의 손님이 어찌 낙양성에서 얻어터지고도 빚을 갚지 못한단
말입니까?]
영호충은 마음속 깊이 금도왕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말끝마다 금도왕가 금도왕가라고들먹이는 꼴을 보자 이 금
도왕가가 뮤에서 권세를 쥐고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아 참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아 버렸다.
[금도왕가가 고작 깡패를 상대하는데 필요하단 말이오?]
그는 말을 한 즉시 후회했다. 막 사과를 하려고 하는데 왕가구
는 침울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영호형, 그 무슨 말씀이시오? 그때 만약 나와 의형님이 그 일
곱명의 건달들을 막지 않았다면 당신이 오늘까지 생명을 부지 할
수 있었겠소?]
영호충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당초 두분께서 생명을 구해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리려고 생
각했소.]
왕가구는 영호충의 말투에 약을 올리는 의미가 들어 있자 큰 소
리로 외쳤다.
[당신은 화사파 장문인의 수제자인데 낙양성의 몇명의 건달조차
상대할 수 없으니 하하하! 그 누가 거짓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말
하지 않겠소?]
[나는 본래 가진게 없고 명성도 없던 사람이오.]
바로 이때 방문 밖에서 어떤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동생, 여기서 영호 형님과 무슨 애기를 주고받고 있어?]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오는데 바로 왕중강의 장자 왕가준
(王家駿)이었다.
왕가구는 화가난 듯 말했다.
[형님, 나는 호의로 이 사람이 당한 분풀이를 하려고 그 일곱
명을 찾아가 한놈 한놈에게 채찍질을 가하는데 뜻밖에 이 영호 대
협께서 나를 책망하는군요.]
왕가준은 말했다.
[동생, 자넨 모르는게 있군. 조금 전 나는 악 사매에게 말을 들
었는데 영호 형님은 쉽게 자기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네.
약왕묘 앞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가지고 단 일 초로 자려다섯 명
의 일류고수의 두 눈을 찍어 봉사로 만들었다 하더군! 그것이 정
말이라면 검술은 신의 경지에 도달하여 있어 천고에 보기 드문게
아닐까? 하하하!]
이 사람은 악영산의 말을 전부 믿지 않는 듯했다. 왕가구도 따
라서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열가섯 명의 일류고수들은 우리 낙양성의 깡패
조무래기보다 훨씬 무예가 뒤떨어지나 보군요. 하하하!]
영호충은 화를 내지 않고 같이 껄껄 따라 웃으며 의자에 앉아
담요로 좌측 무릎을 싸고 몸을 흔들흔들거렸다.
왕가준은 이번에는 백부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영호충에게 말
상대를 하러 온 것이다. 왕백분과 왕중강 형제는 본래 그들에게
호의적으로 말상대를 하고 절대로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분
부했으나 영호충이 교만하고 자기 형제들을 안중에 두지 않자 점
점 화가 치밀었다.
[영호형, 소제는 한가지 여쭈어 볼 말씀이 있읍니다.]
말소리는 매우 컸다. 영호충은 말했다.
[가르침이라니요.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오.]
왕가준은 말했다.
[평지 동생의 말을 듣자니 우리 고모부님과 고모님이 돌아가실
때 영호형께서 그들 두 분의 임종을 지켜보셨다고요?]
영호충은 말했다.
[맞습니다.]
왕가준은 말했다.
[고모부와 고모님의 유언을 영호형께서 우리 평지 사촌동생에게
들려주셨다고요?]
영호충은 말했다.
[틀림없는 사실이오.]
왕가준은 말했다.
[그럼 고모부님의 벽사검보는 어찌하셨소?]
영호충은 이 말을 듣자 몸을 부르르 떨며 몸을 일으키고 큰 소
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왕가준은 그의 행동을 방어하기 위해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말했다.
[우리 고모부께선 벽사검보를 한 권 가지고 계셨는데 당신 보고
평지 동생에게 갖다 주라고 부탁했는데 어찌 당신은 지금까지 그
것을 꺼내놓지 않느냔 말이오?]
영호충은 그의 트집을 듣고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벽...... 사검보가 있다고요? 나보고 임
사제에게 갖다 주라고 부탁을 했다고요?]
왕가준은 웃으며 말했다.
[만약 그런 일이 없다면 당신은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몸을 벌
벌 떨고 말을 더듬지는 않았을 것이오.]
영호충은 화를 참으며 말했다.
[두 분 왕형, 이 영호충은 당신집의 손님이오. 당신이 이런 말
을 하는 것은 할아버지나 아버님의 뜻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
네 두 분의 뜻입니까?]
왕가준은 말했다.
[그냥 물어보는 것뿐이오. 그것이 무슨 큰일이나 되오? 우리 할
아버지와 아버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그러나 복주 임가의 벽
사검보는 천하에 명성을 떨쳤고 이 무림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소.
고모부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몸에 지니고 있던 보물 벽
사검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소. 우리는 그의 가까운 친척이니
찾아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건 임평지가 당신께 물어보라고 시킨 것이오? 왜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 나에게 물어보지 않소?]
왕가구는 킥킥킥 세 번 웃고 말했다.
[평지 사촌동생은 당신의 사제이오. 그가 어찌 당신 앞에서 감
히 물어보겠소?]
영호충은 비웃으며 말했다.
[이 낙양땅은 당신들 금도왕가가 잡고 있소. 하하하! 지금 나에
게 자백을 강요할 생각이라면 임평지에게 와서 물어보라고 하시
오?]
왕가준은 말했다.
[각하는 우리집 손님이오. 자백을 강요한다는 말은 천부당만부
당하오. 우리 형제는 단지 호기심 때문에 한마디 물어보았을 뿐이
고 영호형이 대답을 해 주시면 좋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어쩔 수가 없소.]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겠소. 당신들도 어쩔 수가 없다니 그만 둡시
다.]
왕가구는 마른기침을 한번 하고 화제를 돌렸다.
[영호형, 당신은 일검으로 열다섯 명의 고수의 두 눈을 찔러 멀
게 했다고 하는데 그 같은 신기의 검초는 그 벽사검보에서 배운
것이오?]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그의 마음속에 불현듯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사부와 사모님, 사제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구해준데 대하여 감
격하지도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이 의심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군. 알고보니 그랬어. 알고보니 그들
은 내가 임진남의 벽사검보를 가로챈 줄 아는구나! 그들은 지금껏
독고구검을 구경한 적이 없고 또 내가 풍 사숙조에게 전수 받았다
는 말을 하지도 않았으니 그럴 만하다. 내가 사과애에서 몇개월
묵는 동안 검술이 갑자기 진보하고 검종인 봉불평과 같은 고수조
차 나를 상대하지 못했으니 만약 그 벽사검보에서 기묘한 고초를
배워오지 않았다면 어디서 배워왔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겠지. 또
임진남 부부가 죽을 때 아 혼자만 그들 곁에 있었으니 모든 사람
들은 자연히 나를 의심할거다. 무림고수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
는 벽사검보가 반드시 내 수중에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다른 사
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부
님과 사모님은 나를 키우셨고 소사매와 나와는 오누이처럼 지냈는
데 이 영호충이 어떤 사람인지를 그 사람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그 사람들조차 나를 믿지 못하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구
나!]
왕가구는 득의양양해졌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않소? 그렇지요? 그 벽사검보는 어디 있소? 우리
는 당신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물건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그런다오. 당신이 그 검보를 임가에게 돌려준다면 그
것으로 족하오.]
영호충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난 지금껏 벽사검보라는 것을 본 적이 없소. 임 총표두께선 일
찍 청성파와 새북명타 목고봉에게 잡혔었소. 그의 몸에 무슨 검보
가 있다면 그사람들이 벌써 찾아냈을 것이오.]
왕가준은 말했다.
[그 벽사검보는 상당히 중요한 보물인데 내 고모부와 고모님이
어찌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소. 자연히 아주 은밀한 장소에
숨겨 두었을 것이오. 그들은 죽기 전에 비로소 당신에게 가르쳐
주고 사촌동생에게 전해주도록 유언을 남기셨을 것이외다. 그런
데...... 그런데 그것은......]
왕가구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당신이 그것을 살며시 찾아낸 다음 잡수셨는지 어찌 알겠소?]
영호충은 들을수록 화가 났다. 애당초 상대를 안 하려고 했으나
일이 자기의 명성과 커다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뒤집어
쓴 누명을 벗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 총표두께서 정말 신묘한 검보를 갖고있었다면 적수가 없었
을 것이 아니겠소? 어찌 몇명의 청성파 제자들조차 당해내지 못하
고 그들에게 잡혔단 말이오?]
왕가구는 말했다.
[그건...... 그건......]
그는 입을 벌린 채 일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왕가
준은 말을 잘 하는 달변가였다.
[천하의 일이란 원래 공교로운 법이 아니겠소? 영호충께선 벽사
검보를 배워 검술이 대단한데도 몇명의 깡패조무래기조차 당할 수
없었소. 그들에게 잡힌 까닭은 무슨 연유요? 하하하! 그것이 자기
의 실력을 밖으로 노출시키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나 영호형, 당
신의 행동이 조금은 지나친 것 같지 않소? 정정당당한 화산파 수
제자가 낙양성의 몇명의 깡패조무래기에게 당하면서도 아무런 대
응을 못 했으니 그런 이야기를 누가 믿는단 말이오. 절대로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 안에는 틀림없이 어떤 음모가 숨어 있을
것이오. 영호형, 내가 권고하는데 솔직이 벽사검보의 행방을 말해
주시오.]
영호충은 평상시 성격대로라면 벌써 반격을 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님으로 온 신분을 생각해서 꾹꾹 눌러 참았다.
[영호충은 여지껏 벽사검보인지 뭔지를 본 적이 없소이다. 복주
에 있는 총표두의 유언을 나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임 사제에
게 말했소. 영호충이 만약 속이고 있는 일이 있다면 백번 죽어도
좋소.]
말을 하면서 팔장을 끼었다. 왕가준은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은 무림비급에 관련된 큰일이오. 만약 구렁이 담 넘어가
듯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영호형께선 이 천하를 너무 얕잡
아 본 것이오.]
영호충은 억지로 노기를 참으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라면 나는 어찌해야 하오?]
왕가구는 말했다.
[우리 형제는 감히영호형의 몸을 한번 뒤져 볼까 하오.]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날 영호형께서 그 일곱 명 깡패조무래기들에게 잡혔을 때 우
리는 당신 몸을 샅샅이 뒤질 수도 있었소.]
영호충은 냉랭히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내 몸을 뒤지겠다고? 흥! 이 영호충을 좀도둑으로 보
시오?]
왕가구는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영호형께서 벽사검보를 취하지 않았다. 했는
데 뭐 그렇게 몸수색하는 것을 두려워 하오? 만약 그대 몸에서 검
보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혐의를 풀 수도 있으니 서로 좋
지 않겠소?]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당신들이 가서 임 사제와 악 사매를 불러오시오. 그 두
사람이 증인이 되어야 하오.]
왕가준은 자기가 가고 동생이 혼자 남게 되면 영호충이 어떤 짓
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가면 이 사람은
그 검보를 다른 데에 숨길까 염려되었다.
[몸 좀 살피는 것 가지고 왜 그러시오? 영호형이 만약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면 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있소?]
영호충은 내심 생각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몸수색을 허락하는 것은 단지 사부님, 사모
님, 사매, 세 사람 면전에서 나의 깨끗함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
다. 너희 두 놈이 나를 믿든지 안 믿든지 영호충은 거기에 연연하
지 않는다. 소사매가 만약 이 장소에 없다면 내 어지 네 두 놈들
의 손이 내 몸에 닿는 것을 허락하겠느냐?)
그는 즉시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당신 두 분은 아직은 내 몸을 수색할 능력이 없을 것이외다.]
왕씨 형제는 그가 수색을 거절할수록 더욱 그의 몸에 벽사검보
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벽사검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첫째는 아버님과 고모님 앞에 공을 세우기 위함이고 둘
째는 평소 이 벽사검보가 매우 대단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 검보
를 자기 현제들이 찾아낸다면 한번 읽어볼 생각이었다.
왕가준은 전날 영호충이 몇명의 졸개들에게 땅에 내동댕이쳐 지
고 얻어맞고 있을 때 아무런 힘이 없어 항거하지 못하는 것을 보
았기 때문에 영호충은 단지 검법에만 능할 뿐이고 주먹질과 발길
질은 보잘것 없는 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의 손에 장검이 쥐어
져 있지 않으니 손을 아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느꼈다. 그는
즉시 동생에게 눈짓을 하고 말했다.
[영호충, 좋은 말로 할 때 들으시오. 얼굴을 붉힌다면 좋은 꼴
은 보지 못할 것이오.]
두 형제는 말을 하면서 앞으로 다가왔다.
왕가구는 가슴을 펴고 앞으로 똑바로 달려왔다. 영호충은 손으
로 밀어냈다. 왕가구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쿠! 네놈이 사람을 때리는구나!]
그리고 그의 손목을 꼭 잡고 아래로 짓눌렀다. 그느 영호충이
화산파의 우두머리이니까 섣불리하면 큰코 다친다 싶어 신중을 기
해 잡고 눌렀다. 그 수법은 왕가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금나(擒
拿)수법이었다.
영호충은 손을 잡히자 원래 팔을 돌려 옆으로 찌른 다음 바로
공격으로 전환할 생각이었으나 자기의 내력이 전부 소실된 후라
비록 초식대로 팔을 돌렸지만 조금도 힘을 쓸 수 없었다. 오히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우측 관절이 마비되고 손목은 그에게
눌려 뼈마디가 아팠다.
왕가구의 손은 매서웠다. 영호충의 오른손을 잡고 비트니 그의
우측어깨 관절이 탈골되고 말았다.
[형님, 빨리 수색하십시오.]
왕가준은 좌측 발을 내밀어 영호충의 두 다리 앞에 비스듬히 대
어 그의 공격을 방비하면서 손을 내밀어 그의 품 속을 더듬었다.
많은 잡스런 물건이 꺼내졌다. 그의 손엔 갑자기 한 권의 엷은
책이 잡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외쳤다.
[여기 있구나! 여기 있구나! 임 고모부님의 벽사검보를 찾아냈
다!]
왕씨형제가 급히 책을 살펴보니 첫번째 페이지에 써 있기를 소
오강호지곡(笑傲江湖之曲) 여섯 개의 글씨가 전서(篆書)체로 씌어
져 있었다. 왕씨형제는 글을 잘 몰랐다. 이 여섯 글자가 만약 해
서(楷書)라면 알아보았을 텐데 이 글자들은 전서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글자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 페이지를 넘기니
거기 보이는 것은 괴상한 글자였다. 그 두 사람은 이것이 거문고
의 악보인 줄 모르고 마음속으로 벽사검보라 확신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벽사검보! 벽사검보!]
왕가준은 말했다.
[할아버지께 보내드리자!]
그리고 거문고 악보를 가지고 급히 문을 나섰다. 왕가구는 영호
충의 허리를 힘껏 걷어차며 말했다.
[철면피 같은 놈!]
그리고 그의 얼굴에 침을 퇘 뱉었다.
영호충은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을 돌
렸다.
(이 두 놈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지만 그의 조부나 아버지는 이
렇게까지 무식하지는 않겠지. 잠시 후에 이것이 거문고 악보인줄
알면 틀림없이 나에게 사죄를 할 것이다.)
두 어깨가 탈골이 되자 그 아픔은 참을 수 없었다.
(내 내공이 전부 소실되어 거리에서 깡패조무래기들을 만나도
대항할 힘이 없고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구나. 이 세상을 더 살아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침상에 누웠으나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상심한 나머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왕씨형제가 금방 돌아올 줄 알고 그들
에게 약함을 보여주기가 싫어 즉시 눈물을 닦았다.
한참 후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왕씨형제가 빠른 걸음으로 돌아
왔다. 왕가준은 냉소하며 말했다.
[가서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봐라.]
영호충은 노해 말했다.
[안 간다. 너희 할아버지가 나에게 사죄를 하지 않는데 내가 가
서 무엇을 하겠는가?]
왕씨형제는 껄껄 웃었다. 왕가구가 말했다.
[내 할아버지가 너 같은 도적놈에게 사죄를 해? 꿈도 야무지구
나. 가자!]
두 사람은 영호충의 허리춤을 꽉 잡고그를 침상에서 끌어내 방
문을 나섰다.
영호충은 욕을 했다.
[금도왕가는 자칭 의리를 지킨다고 말해 왔는데 이렇게 비겁하
게 중상을 입은 사람을 능욕하는구나!]
왕가준이 주먹으로 영호충의 입을 후려치자 입에서 피가 흘렀
다.
영호충은 여전히 욕지거리를 해대며 왕씨형제에 이끌려 후원의
대청으로 나갔다.
악불군 부부와 왕원패는 주인과 손님의 신분으로 앉아 있었고
왕백분, 중강 두 사람은 왕원패 아래 앉아 있었다. 영호충은 혼자
욕지거리를 해댔다.
[금도왕가! 치사하고 염치없는 놈들! 무림 중에서 이런 지저분
한 놈들을 본 적이 없다!]
악불군은 얼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충아, 입 닥쳐라!]
영호충은 사부님의 힐책을 듣자 비로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왕원패를 향해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원패의 손에는 거문고 악보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햇다.
[영호 현제, 이 벽사검보를 너는 어디서 얻어왔는가?]
영호충은 껄껄 웃엇다. 웃는 소리가 한참동안 끊이지 않았다.
악불군은 질책하며 말했다.
[충아, 어르신께서 네게 물으시는데 사실대로 말씀드려라. 어찌
무례하게 구느냐? 그것은 어디 규칙이냐?]
영호충은 말했다.
[사부님 제자가 중상을 입고 난 다음 온몸에서 힘이 바졌읍니
다. 보십시오. 저 두 놈이 나를 어떻게 했는지, 이것이 바로 손님
을 접대하는 규칙이란 말입니까?]
왕중강은 말했다.
[만약 친구이고 손님이라면 우리 왕가는 절대로 실례를 범하거
나 죄를 짓지 아니하오. 당신은 남모르게 이 벽사검보를 자기 소
유로 했는데 이 어지 도둑의 행위가 아니겠소? 낙양 금도왕가는
청렴한 가문인데 어찌 도둑을 친구로 삼으리까?]
영호충은 말했다.
[당신과 손자 삼대(三代)는 말끝마다 벽사검보라고 하는데 당신
들은 도대체 벽사검보를 보았소? 어찌 이것이 벽사검보란 말이
오?]
왕중강은 흠칫 놀라며 말했다.
[이 책자는 너의 몸에서 찾아낸 것이고 악 사형께서도 화산파의
무공책자가 아니라고 하셨다. 벽사검보가 아니면 또 무엇이겠느
냐?]
영호충은 화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벽사검보라고 하니 그럼 벽사검보라고 칩시다. 그러면
당신들 금도왕가가 그책을 익히도록 하시구료! 천하무적의 검법을
익힐 수 있을 것이외다. 낙양의 왕가는 이 무림에서 도검쌍절(刀
劍雙絶)이라고 불려질 것이오. 하하하! 하하하!]
왕원패는 말했다.
[영호 현제, 손자들이 일시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화를 풀게. 사
람이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 허물을 알고 고친다면 그것이 바로
큰 그릇의 사람이 아니겠는가? 네가 이미 검보를 꺼내놓았느니 당
신 사부의 체면을 봐서라도 우리가 끝까지 추궁할 수가 없군! 이
일에 우리 모두는 앞으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맙시다. 내가 바로
너의 어깨를 붙여주마.]
말을 하면서 좌석에 내려와 영호충을 향해 손을 내밀어 그의 좌
측 손을 잡았다. 영호충은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영호충은 당신의 동정을 받지 않겠소!]
왕원패는 의아해 말했다.
[왜 그런가?]
영호충은 화가 나서 말했다.
[이 영호충은 허수아비가 아니오. 내 손목이 당신들이 꺾고 싶
으면 꺾고 붙이고 싶으면 붙이는 것인 줄 아시오?]
그리고 좌측으로 두 걸음 가서 악 부인의 곁에 가며 외쳤다.
[사모님!]
악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관절에서 떨어져 나간 그의 두 팔을
붙여 주었다.
영호충은 말했다.
[사모님, 이 책은 분명 칠현금의 악보와 퉁소의 악보인데 이 왕
가의 사람들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면서 자꾸 이것을 벽사검보
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웃기는 일도 다 있읍니까?]
악 부인은 말했다.
[왕 어르신, 그 악보를 나에게 좀 보여주실 수 없읍니까?]
왕원패는 말했다.
[악 부인 보십시오.]
그러면서 악보를 건네주었다. 악 부인은 악보를 몇장 보았으나
알 수가 없는지 이렇게 말했다.
[거문고 악보인지 퉁소의 악보인지 나는 모르겠소. 나는 검보를
몇번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자는 검보 같지는 않읍니다. 왕 어르신
댁에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모셔
다 좀 보여주면 확연히 알 것입니다.]
왕원패는 마음속으로 주저했다. 이것이 정말로 거문고 악보이고
퉁소의 악보라면 그 창피함이란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생각
에 잠긴 채 대답을 못했다. 왕가구는 머리회전이 느린 편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우리 장방(帳房)에 있는 역사야(易師爺)가 퉁소를
불 줄 압니다. 그를 불러 보여주십시오. 이것은 분명히 벽사검보
입니다. 어째서 거문고 악보가 되겠읍니까?]
왕원패는 말했다.
[무학의 비급종류는 많다. 어떤 사람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고
의로 무공의 도식을 악보 모양으로 써 넣는 경우가 있으니 이 또
한 이상할 것이 없다.]
악 부인이 말했다.
[댁에 퉁소를 불 줄 아는 사람이 있다 하니 그럼 이것이 검보인
지 악보인지 그를 불러오면 금방 알 수 있겠군요.]
왕원패는 어쩔 수 없이 왕가구에게 명령을 해서 역사야를 불러
오도록 했다. 역사야는 키가 작았고 비쩍 야위었다. 오십여 세 정
도 되어 보였다. 턱밑에는 수염이 나 있었으며 옷차림새는 심히
정갈했다.
왕원패는 말했다.
[이것 좀 봐주시오? 이것이 악보인지 아닌지 말이오.]
역사야는 거문고 악보를 펼치고 몇장 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
들며 말했다.
[이건 저도 잘 모르겠읍니다.]
그러다가 뒤에 적혀 있던 퉁소의 악보를 보자 두 눈이 빛나고
입에서 낮은 소리로 흥얼대기 시작했다. 오른손과 왼손 손가락은
탁자에 대고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한참 흥얼거리더니 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틀렸어!]
이어서 또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소리가 높아지고 또 갑
자기 낮아지고 하더니 양미간을 찌그리며 말했다.
[이 세상엔 절대로 이러한 일이 없다. 이건...... 이건......
소생으로서도 알지 못하겠읍니다.]
왕원패의 얼굴엔 희색이 감돌았다.
[이 책 속에는 이상한 곳이 있지요? 이것은 일반 악보와 크게
다르지 않소?]
역사야는 악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이곳 궁조(宮調)에서 갑자기 치(?)조로 변하는데가
이것은 악보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오. 그리고 또 퉁소로는 이것
을 연주할 수가 없소. 이것은 갑자기 각(角)조로 변하고 또 다시
우(羽)조로 변하니 이것 또한 지금것 보지 못한 악보입니다. 퉁소
로는 어떤 퉁소라도 이런 곡을 연주하지 못합니다.]
영호충은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불 줄 모른다고 다른 사람도 불지 못하라는 법이 있
소?]
역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정말로 이런 곡조를
불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엎드릴 것이
오. 너무 탄복한 나머지 그 자리에 엎드릴 것이오. 다만...... 다
만 동성(東城)에 있는......]
왕원패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것이 평범하지 못한 악보라고? 그 중에 어떤 곡조들은 퉁소
로는 절대로 불 수 없다고?]
역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너무 평범하지 않습니다. 너무 해괴합니다. 소생
생각으로는 절대 불지 못할 것입니다. 동성에 있는 그를 제외하고
는......]
악 부인이 물었다.
[동성에 있는 사람은 이 악보를 불 줄 안단 말이오?]
역사야는 말했다.
[그건...... 그건 소인도 보증할 수 없읍니다만. 단지...... 오
로지 동성에 있는 녹죽옹(綠竹翁) 그 사람은 거문고도 잘 탈 줄
알 뿐 아니라 퉁소도 잘 붑니다. 어쩌면 그가 볼 수 있을지 모르
겠읍니다. 그의 퉁소실력은 이 소생보다 훨씬 고명하지요. 정말
잘 붑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왕원패는 말했다.
[이 악보가 평범치 못한다면 틀림없이 이 중간에 어떤 우여곡절
이 있을 것이다.]
왕백분은 옆에서 듣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
자기 말에 끼어들었다.
[아버님 정주팔괘도(鄭州八卦刀)의 사문육합도법(四門六合刀法)
은...... 그 도법은 적혀 있지 않습니까?]
왕원패는 짐짓 놀랐다. 그리고 즉시 그 뜻을 이해했다. 아들이
자기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정주팔괘도의 장문인 막성
(莫星)은 낙양 금도왕가와는 수대에 걸친 사돈간인데 그의 팔괘도
문 중에 무슨 사문육합도법이라는 게 없었다. 그러나 화산파는 단
지 검법만 연구하고 다른 파에서 이런 도법을 익혔다고 하면 악불
군을 속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왕원패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다, 맞아! 몇년 전 그 사돈댁에서 이 일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지 악보에다 도법 검법을 적어놓는 일은 늘 있는 일이고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라고.]
영호충은 비웃듯 말했다.
[흔한 일이 아니라구요? 그럼 어르신께 묻겠는데 이 두 개의 악
보에 적혀 있는 검법은 도대체 어떤 검법입니까?]
와우언패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내 사위가 이미 죽었으니 이 악보의 비밀은 그 한
사람을 제하고는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영호충은 이때 '소오강호' 의 악보내력을 설명할 수도 있었으나
첫째로는 형산파 막대선생이 어떻게 대숭양수 비빈을 죽였는가를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사부님이 이 곡조가 마교장로 곡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틀림없이 이것을 없앨 것이며 그렇다면 자
기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영호충은 즉시 노기를 억제하고 말했다.
[이분 역사야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성에는 녹죽옹이라는 분이 음
악에 정통하시다고 하는데 이 악보를 가지고 가 그분에게 맡겨 보
지요.]
왕원패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녹죽옹은 이상하고 기괴한 사람이며 마치 머리가 돈 사람
같은데 그 사람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는가?]
악 부인이 말했다.
[이 일은 반드시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충아도 우리 제자이고
평지 또한 우리들의 제자인데 우리들은 누구 하나를 편애할 수가
없읍니다. 결국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그 녹죽옹을 청해서 이 악
보의 이치나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녀는 이 일이 영호충과 금도왕가의 겨룸이라고 말할 수가 없
어서 금도왕가라는 말 대신에 임평지를 끌어들였다. 악 부인은 다
시 말했다.
[역사야, 사람을 보내 그 분을 모셔오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역사야는 말했다.
[그 노인네의 성질은 기괴하기 짝이 없읍니다. 다른 사람이 일
이 있어 그에게 구하려고 하면 그가 관여하기 싫은 일은 대문 앞
에 가서 절을 해도 그는 절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만약 자기가 어
떤 일에 끼어들면 물리쳐도 물러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분 녹죽옹은 무림의 선배인 것 같읍니다. 사형
우리가 들은 견문은 너무 없지요?]
왕원패는 웃으며 말했다.
[그 녹죽옹은 대나무를 엮는 장인에 불과하오. 대나무 그릇이나
대방석을 짜는 사람일 뿐 무림의 사람은 아니오. 단지 그는 거문
고를 잘 타고 퉁소를 잘 불고 또 그림을 그려 많은 사람들에게 돈
을 받고 팔고 그래서 약간 우아한 노인이어서 우리 지방에선 그를
좀 높이 쳐주는 것이라오.]
악 부인은 말했다.
[이러한 인물이라면 낙양까지 와서 안 보고 갈 수는 없지요. 왕
어르신께서 비록 수고스럽지만 우리 함께 그분을 만나보는게 어떨
까요?]
악 부인의 뜻이 심히 완고하자, 왕원패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
다. 하는 수 없이 아들, 손자, 악불군 부부, 영호충, 임평지, 악
영산 등과 함께 동성을 향했다.
역사야는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작은 골목을 지나고 하나의 막
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골목 끝에는 넓은 대나무 숲이 있는데 바
람을 맞아 대나무가 흔들거리는 풍경이 그림 같았다.
여러 사람이 그 골목으로 들어서자 금을 타는 소리가 딩동딩동
들려올 뿐 골목 안은 조용하고 깨끗하여 밖의 낙양성과는 딴 세상
같았다.
악 부인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녹죽옹은 정말 신선놀음을 하고 계시군요?]
바로 이대 '띵' 하는 한 줄의 가야금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리가 멈췄다.
한 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귀하께서 왕림하신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슨 가르침이 있으십
니까?]
역사야는 말했다.
[죽옹, 이상한 악보 한 권이 있는데 어르신의 높은 안목으로 감
정 좀 해주십시오.]
녹죽옹은 말했다.
[악보를 나보고 감정하라고? 헤헤, 정말 이 몸을 알아주는군!]
역사야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왕가구는 말했다.
[금도왕가의 왕 어르신께서 방문하셨오.]
그는 자기 할아버지의 방문을 알렸다. 그는 생각하기를 자기 할
아버지가 낙양성에서 무시 못할 인물이기 때문에 한 명의 대나무
나 엮는 늙은이가 금방 뛰쳐나와 영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
각했다.
그러나 녹죽옹은 비웃는 듯 말했다.
[흥! 금도인지 은도인지 이 늙은이의 대나무 깎는 솜시보다 나
을려고? 이 늙은이가 왕 어르신을 방문하지 않는데 왕 어르신은
어찌해서 이 늙은이를 방문하는 거지?]
왕가구는 대노해 큰 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이 늙은 노인네는 이치를 모르는 사람 같습니다! 그
를 만나보면 뭘 합니까?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악 부인은 말했다.
[이왕 왔는데 녹중옹에게 청해서 이 악보를 살펴보도록 하는 것
도 괜찮을 성싶군요.]
왕원패는 쳇! 하는 소리를 내며 악보를 역사야에게 꺼내주었다.
역사야는 그 악보를 받아들고 푸른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녹죽옹의 말소리가 들렸다.
[좋소. 그것을 내려 놓으시오.]
역사야는 말했다.
[어르신께 여쭙겠는데 이것은 정말로 악보입니까? 그렇지 않으
면 무공의 비결입니까? 무공의 비결을 이렇게 악보로 고친 것이
아닐까요?]
녹죽옹은 말했다.
[무공의 비결이라고? 이것은 틀림없는 악보이네.]
이어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 왔다. 우아하고 멋진 음률은 사람에
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영호충은 잠간 듣고 이것이 바로 그날 유정풍이 연주했던 곡임
을 기억해 내었다. 곡은 여전히 남아 있건만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잇겠는가?
얼마 있자 거문고 소리가 높이 올라갔다. 거문고 소리가 울릴수
록 음은 높아져 최고의 음이 울릴 때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줄이
하나 끊어져 나갔다. 다시 몇개의 음이 더 높아지자 '쨍' 하면서
거문고 줄은 또 하나가 끊어졌다. 녹죽옹은 '엇' 하는 소리를 내
며 말했다.
[이 악보는 생소하고 기이하기 짝이 없소. 참으로 이해하기 어
렵군요.]
왕원패 일가족 다섯 명은 서로 쳐다보면서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녹죽옹이 말했다.
[그럼 이번엔 이 퉁소의 악보를 좀 보겠소.]
이어서 퉁소 부는 소리가 대나무 숲에서 울려나왔다. 처음에는
유연하여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고 정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
나 나중에 소리가 갈수록 낮아져 거의 들리지가 않았다. 다시 몇
가지의 음률이 들려오더니 퉁소 소리는 마침내 거의 들리지 안마
게 되었다. '픽픽픽' 하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녹죽옹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노제, 당신은 퉁소를 불 줄 아는 사람이오. 이렇게 낮은 음
을 어찌 불어낸단 말이오? 이 금보와 퉁소 악보는 가짜는 아니지
만 그러나 곡을 만든 사람은 장난을 한 모양이군요. 당신은 먼저
돌아가 계시오. 내가 자세히 연구해 보겠소.]
역사야는 말했다.
[녜.]
그리고 대나무 숲에서 물러나왔다.
왕중강은 말했다.
[그 검보는 어디 있소?]
역사야는 말했다.
[검보요? 아 녹죽옹이 놔두고 가라고 했읍니다. 자세히 연구 좀
해보시겠다고요.]
왕중강은 급히 말했다.
[빨리 가서 가져오시오! 그것은 진귀하기 이를데 없는 검보요.
무림 중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지 아
시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놔둔단 말이오?]
역사야는 말했다.
[녜.]
그가 몸을 돌려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녹죽옹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모님, 어떻게 나오셨읍니까?]
왕원패는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녹죽옹은 나이가 어떻게 되오?]
역사야는 말했다.
[칠십 몇살? 거의 팔십 세는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생각했다.
[팔십 먹은 할아버지에게 고모님이 계신다면 이 고모는 백 살이
넘었겠군!]
녹죽옹은 다시 말했다.
[고모님 보십시오. 이 거문고 악보가 좀 이상합니다.]
여인이 '응' 하는 소리가 나고 거문고 소리가 울렸다. 거문고의
음을 맞추어보고 잠시 멈추는 것으로 보아 아마 조금 전에 끊어진
거문고 줄을 잇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음을 조절한 다음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의 연주는 녹죽옹과 비슷했다. 그러나 나중에 올라
갈수록 그 소리는 위험한 상태에서 평온함을 건진 듯 무거운 것을
들다가 가벼운 것을 들은 듯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높은 음으로
올라갔다.
영호충은 놀라고 기뻐했다. 희미한 기억 속에 그날 저녁 곡양이
연주했던 곡조가 생각났다. 이 곡은 때때로 감정이 격렬히 고양되
기도 했고 때때로는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했다. 영호충은 비록 음
악의 이치는 모르고 있었으나 이 노파가 연주하는 것은 곡양이 연
주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풍기는 기상은 크게 차이가 난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이 노파가 연주하는 곡조는 평화롭고 사람이 들을
수록 음악의 아름다움만 생각하게 되는데 비하여 곡양이 연주할
때는 끓는 격분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참 지나자 거문고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마치 음악이 멀리
사라진 다음에 연주하는 사람이 수십장 밖으로 사라진 것 같은 느
낌을 주었다.
가야금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할 때 가끔 한두번씩 작은
퉁소 소리가 거문고 옆에서 울려왔다. 퉁소 소리는 갑자기 높아졌
다가 갑자기 낮아지고 또한 갑자기 가벼워지는가 하면 갑자기 높
아지며, 음의 제일 낮은 쪽으로 갈 즈음 몇번쯤 흐느적거리다가
탁하고 침울한 음으로 변해갔다. 비록 음은 낮았지만 모든 음절은
선명하고 똑똑히 들려왔다. 점점 낮아지는 소리는 어떤 때는 구슬
이 구르는 듯 맑고, 폭풍우가 일어나는 듯 여기서 꿈틀 저기서 꿈
틀했으며 여러 소리가 점차 높아지면서,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
꽃망울이 다투어 피어 꽃밭 속에서 꽃들이 환하게 피고 새들이 말
을 주고받으며 노는 것 같은 음률이 퍼져가더니, 점점 모든 새들
이 사라지면서 봄꽃은 지고 쓸쓸한 비가 내렸다. 처량하고 살 풍
경한 모습으로 돌변한 것이다. 모든 것이 정적 속으로 빨려들었
다.
퉁소 소리가 멈춘 뒤에 모든 사람은 꿈에서 깬 듯 정신이 들었
다. 왕원패, 악불군 등은 비록 음률은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젖어
오는 소리에 흠뻑 취했다. 역사야는 더욱 혼이 나간 듯했다.
악 부인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너무 좋습니다. 탄복합니다. 충아, 이것은 무슨 곡인가?]
영호충은 말했다.
[이 곡은 '소오강호지곡' 이라고 부릅니다. 저 할머니는 거문고
와 퉁소를 신의 경지까지 연마한 것 같군요.]
악 부인은 말했다.
[이 곡의 악보는 비록 기묘하지만 저 할머니의 연주 솜시가있
어야 비로소 연주를 해낼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은 아마
너도 평생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영호충은 말했다.
[아닙니다. 제자는 들어본 적이 있읍니다. 오늘보다 더욱 아름
다웠지요.]
악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럴 수가? 설마 이 세상에 이 노파보다 더욱 솜시가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영호충이 말했다.
[이 할머니보다 기술이 월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자가 즐었
을 때는 두 사람이 합주를 했읍니다. 한 사람은 거문고를 안고 한
사람은 퉁소를 불고 연주한 것은 이 '소오강호지곡'......]
그가 말을 다하지 못했을 때 대나무 숲에서 '떵떵떵' 세 번 거
문고 소리가 울리더니 그 노파의 목소리가 드릴듯 말듯 들려왔다.
[금과 퉁소의 합주라. 세상에 어디를 가서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녹죽옹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역사야, 이것은 틀림없이 악보이오. 내 고모님께서 조금 전 연
주했으니 가져가시오.]
역사야는 대답했다.
[녜.]
대나무 숲에 들어갔던 역사야는 두 손에 악보를 들고 나왔다.
녹죽옹이 말했다.
[ 이 악보에 기재되어 있는 곡들은 정말로 기묘하고 세상에서
보기 힘든 곡이오. 이것은 신물(神物)이오. 절대로 속인들의 손에
들어가지 말게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볼 줄 모른다면 그것을
배우려는 망상을 버리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 몸에는 해만 있을
뿐 좋은 점은 없을 것이오.]
역사야는 말했다.
[녜, 녜. 그렇게 하지요. 절대로 배우지 않겠읍니다.]
그는 악보를 왕원패에게 건네주었다. 왕원패는 친히 거문고 소
리 퉁소 소리를 들은 후 악보 속에 아무런 하자도 없다는 것을 알
고 즉시 영호충에게 건네주며 어색하게 말했다.
[영호 현제, 정말 면목이 없소.]
영호충은 비웃음을 띄었다. 몇 마디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악 부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영호충은 참
고 말하지 않았다. 왕원패의 가족은 서로 면목이 서지 않아 먼저
돌아가고 악불군은 뒤따라 갔다.
영호충은 악보를 손에 쥐고 멍청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악 부인이 말했다.
[충아, 돌아가지 않으련?]
영호충이 말했다.
[저는 좀더 머물다 가겠읍니다.]
악 부인이 말했다.
[일찍 돌아가 쉬거라. 너의 팔이 빠져 나왔으니 절대 힘을 쓰지
말도록 해라.]
영호충은 말했다.
[녜.]
일행이 돌아가자 작은 골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가끔 바람
이 대나무잎을 스쳐 낙엽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영호
충은 손에 들려 있는 악보를 보면서 그날 저녁 유정풍과 곡양이
합주하던 광경을 회상해 보았다.
(그 두 사람은 이런 신묘한 악보를 만들어냈다. 녹죽옹의 고모
란 노파는 비록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어 그 절묘함을 표현했지
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각각 나누어 볼 수 있을 뿐 그 녹
죽옹조차도 그녀와 합주를 못 했다. 이 거문고와 퉁소로 합주하는
'소오강호지곡' 의 곡은 앞으로 그 소리가 끊어지겠구나. 다시는
옛날과 같은 음을 들을 수 없게 되었구나!)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유정풍 사숙과 곡 장로는 한 사람은 정파고수이고 한 사람은
마교장로였으나 음악을 말할 땐 서로 의기투합하여 서로 교분을
맺고 함께 신기롭고 절묘한 '소오강호' 를 만들어냈다. 그 두 사
람이 손을 잡고 함께 죽을 때 마음속에 아무런 유한이 없었다. 나
천애고아인 영호충은이 세상에서 사부님에게 의심을 받고 사매에
게 버림을 받았다. 또 나만을 사랑해주던 육후아마저도 내 손에
죽었으니 나보다도 유정풍 대협이 더 쓸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슬픔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뚝뚝 떨구다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녹죽옹의 소리가 대나무 숲 속에서 들려왔다.
[이보게, 친구. 왜 우나?]
영호충은 말했다.
[내 신세가 가련하고 이 곡을 만든 두 분 선배의 죽음을 생각하
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슬픔이 복받치는군요. 죄송합니다.
어르신!]
말을 하면서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녹죽옹은 말했다.
[이보게 친구, 한 마디 물어볼 것이 있네. 좀 들어와 말 좀 나
누지 않겠나?]
영호충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왕원패에게 말할 때 교만무
례했는데 뜻밖에도 자기같이 이름도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겸손하
게 나오는 것을 보고 퍽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선배님이 궁금함 점이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저는
이실직고하겠읍니다.]
천천히 대나무 숲 안으로 발을 옮겼다. 앞에는 다섯 칸짜리 작
은 집이 있었는데 좌측에 둘 우측에 셋 모두가 굵은 대나무로 엮
어 만든 것이었다. 한 늙은 노옹이 우측 작은 방에서 나오며 빙그
레 웃었다.
[이것 보게 친구, 들어와. 차나 한 잔 하자고.]
영호충은 이 녹죽옹이 몸에 나사처럼 비틀어진 꼽추이고 머리카
락은 드문드문 얼마 남지 않았으며 큰 손과 큰 발을 가졌고 눈빛
이 매우 맑은 것을 보고 즉시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소인은 영호충입니다. 어르신께 인사 여쭙니다.]
녹죽옹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몇살 더 먹었다고 그럴 필요는 없네. 들어오게.
어서 들어오게.]
영호충은 그를 따라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와 의자들은 모
두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벽에는 한 폭의 대나무 그림이 걸렸는
데 형세는 종횡으로 그어져 있어서 심히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탁자에는 한 대의 요금(瑤琴)과 한 자루의 퉁소가 걸려 있었다.
녹죽옹은 주전자에서 한 그릇의 파란 청록차를 따르며 말했다.
[차를 들게나.]
영호충은 두 손으로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 감사했다.
녹죽옹은 말했다.
[이보게 친구, 이 악보는 어디서 얻어왔는가? 좀 가르쳐 줄수
없겠나?]
영호충은 멈칫하고 생각했다.
(이 악보의 내력에는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어서 사부님 사모
님께도 알려드리지 못했다. 그때 유정풍과 곡양이 나에게 건네 줄
때 이 곡을 후세에 전해 절대로 사라지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이
녹죽옹과 그의 고모는 음악에 정통하고 그의 고모는 특히 이 곡조
를 거의 오나벽하게 연주하지 않았던가? 이 두 사람의 나이는 비
록 늙었지만 두 사람 외에는 세상에는 이 악보를 전해 줄만한 사
람이 없을 것이다. 설령 이 세상에 음악에 정통한 사람이 있을지
라도 나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런 인연을 맺기가
어려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잠깐 생각해 본 다음 말했다.
[이 곡을 쓴 두 분의 선배는 한 분은 거문고에 능하고 한 분은
퉁소를 잘 부십니다. 두 사람이 지교를 맺고 이 곡을 만들었지요.
그러나 뜻하지 않은 큰 변을 당해 똑같이 돌아가셨읍니다. 두분
선배님이 죽기 전에 이곡을 제자에게 건네주며 제자에게 전할 사
람을 찾아보고, 이 곡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하라고 했읍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말했다.
[조금 전 이 제자가 선배님과 고모님께서 연주하시는 묘기를 들
었을 때 이 곡의 주인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러하오니 어
르신께서 이 곡을 거두어주시고 고모님께 전해 주십시오. 이 제자
가 졸아가신 선배님의 유언을 따르게 되었으니 소원은 풀은 것 같
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두 손으로 공손하게 악보를 받쳐 올렸다.
녹죽옹은 받으려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먼저 고모님께 여쭈어보고 받겠소. 그분이 받을지 안 받
을지는 모르겠소.]
왼쪽 작은 방에서 고모의 음성이 들려 왔다.
[영호 선생의 높은 뜻을 충분히 알겠소만 우리가 물리치자니 예
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받자니 부끄럽기 짝이 없소. 그러면
그 두 분의 성함이 어지 됩니까? 좀 말씀해 주실 수 없소이까?]
목소리는 그리 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영호충은 말했다.
[물어보시니 응당 말씀을 올리겠읍니다. 곡을 쓰신 두 분의 선
배는 한 분은 유정풍 유 사숙이고 한 분은 곡양 곡 장로올시다.]
그 할머니는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대단히 몰라는 것 같았다.
[알고보니 그 두 분이었군!]
영호충은 말했다.
[그 두 분의 선배님을 아십니까?]
그 노파는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고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
기다가 말했다.
[유정풍은 바로 형산파의 고수이고 곡양은 바로 마교장로이다.
쌍방은 청천지 원수지간인데 어찌 둘이 합십하여 이 곡을 지었단
말이냐? 참으로 해괴한 일이군!]
영호충은 비록 그 노파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타는
거문고 소리와 퉁소 소리를 듣고 나서 그녀가 필시 우아하고 자애
로운 사람이리라 생각했다. 절대로 자기를 속이거나 자기 명예를
더럽힐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그녀가 그들의 내력을 알고 있는
걸로 보아 틀림없이 무림의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유정풍이 어떻게 금분세수를 하고 숭산파 좌맹주가 어떻게 명령을
내려 저지했고 유 선배와 곡양이 어떻게 숭산파의 고수들에게 장
력을 얻어맞고 어떻게 들판에서 합주를 하고 두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자기에게 이 곡을 주면서 부탁했는지 사실 그대로를 일일
이 말해 주었다. 단지 막대선생이 어떻게 비빈을 죽였는지에 대해
서는 상황을 말하지 않았다. 그 노파는 한 마디도 빼지 않고 경청
했다.
영호충의 말이 끝나자 그 노파는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악보인데 그 금도 왕원패는 왜 이것을 무공의
비급이라 했소?]
영호충은 즉시 임진남부부가 어떻게 청성파 및 목고봉에게 살해
되었고 어찌하다가 임평지에게 유언을 전했는가, 그리고 왕씨 형
제가 어떻게 의심을 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알고보니 그랬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말했다.
[이런 사정을 당신 사부와 사모님께 조금이라도 이야기했더라면
많은 의심이 풀렸을텐데...... 나는 자네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인데 어찌 오히려 나에게는 비밀을 숨기지 않고 사실대
로 말하는 것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읍니다. 선배님의 고아한 연주를 듣고 난 다음
선배님의 기풍에 감동되어 이렇게 사실대로 말하는 것 같읍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자네 사부와 사모님께 오히려 불복하는 마음
을 품고 있지 않은가?]
영호충은 감짝 놀라며 말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저의 은사께서는 이 제자
에 대해 의심을 하고 계실 뿐이지요.]
그 노파는 말했다.
[내 자네의 말을 듣건데 자네의 중기(中氣)가 부족한 것 같군.
나이 어린 사람은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 최근에
무슨 큰 병을 앓았는가 아니면 상처를 받고 있나?]
영호충은 말했다.
[녜, 지극히 중한 내상에 시달리고 있읍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조카님, 그 소년을 이쪽으로 데려오시오. 내가 맥을 한번 보리
다.]
녹죽옹은 말했다.
[녜.]
그는 영호충을 이끌고 왼쪽에 있는 작은 방문가로 다가갔다.
녹죽옹은 영호충의 왼손을 대나무발이 쳐져 있는 안으로 뻗게
했다. 그 대나무발 안에는 또 한 겹의 가느다란 명주실이 드리워
져 있었다. 영호충은 희미하게 사람의 그림자만 보았을 뿐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세개
의 차가운 손가락이 자기의 맥을 짚고 있었다. 그 노파는 한참 맥
을 짚더니 '너' 하고 소리를 질렀다.
[거참 이상하군!]
한참이 지난 후 비로소 말했다.
[오른손을 들이밀게.]
그녀는 두 손의 맥을 짚고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영호충은 미소를 지었다.
[노 선배님께서는 이 제자의 죽음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몸
은 생명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며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은지
오래 됩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어떻게 너의 생명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느냐?]
영호충은 말했다.
[이 제자는 사제를 죽이고 사문의 자하비급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있읍니다. 하루 빨리 그 비급을 찾아 사부님께 드린 다음 목
숨을 끊음으로 사제의 넋을 위로해야 합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자하비급은 대단한 물건도 아닌데 자네는 어째서 사제를 죽었
는가?]
영호충은 즉시 도곡육선이 어데게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고 육선
의 진기가 몸 속에서 어떻게 움직였으며, 또 사매가 사문의 비급
을 훔쳐와 자기의 상처를 치료해 주려고 했고, 자기가 거부를 해
서 사제인 육후아가 강제로 읽어주려고 하던 일, 그리고 육후아의
혈도를 찍고 어떻게 해서 스에게 치명상을 입혔는가를 일일이 말
해 주었다.
그 노파는 다 듣고 난 후 말했다.
[자네의 사제는 자네가 죽인 것이 아니네.]
영호충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내가 죽인게 아니라구요?]
그 노파는 말했다.
[자네의 진기는 약하기 그지없었네. 그 두 개의 혈도를 차기었
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자네의 사제는 다른 사람이 죽
인거야.]
영호충은 나직이 말했다.
[그러면 누가 육 사제를 죽였단 말입니까?]
그 노파는 말했다.
[비급을 훔친 사람은 비록 자네 사제를 꼭 죽였다고 할 수는 없
지만 그러나 얼마만큼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네.]
영호충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어
지는 것 같았다. 악영산과 임평지가 서로 가까와지자 그는 마음속
이 심란한 나머지 이미 삶의 희망을 포기한 채 오로지 죽음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노파가 자기를 깨우쳐 주자 분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수! 복수를 해야 한다.]
그 노파는 또 말했다.
[자네 몸 속에는 내가 맥을 짚어 보건데 여덟 줄기의 진기가 흐
르고 있는데 그건 또 어찌된 연고인가?]
영호충은 껄껄 웃으며 불계화상이 자기를 위해서 병을 치료해
준 상황을 말해 주었다. 그 노파도 살며시 웃고 말했다.
[자네의 성격이 호탕하고 명랑해서 맥이 비록 혼란에 빠지기는
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네. 내 또 한 곡을 연주해볼까 하니 한번
듣고 평이나 해주게나.]
영호충은 말했다.
[노 선배님이 들려주신다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겠읍니다.]
그 노파는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거문고를 다시 연주하기 시
작했다. 이번에 타는 곡조는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마치 한 사람
이 가볍게 탄식하는 듯하고, 아침 이슬을 맞아 살며시 피는 꽃 봉
우리가 바람을 맞아 하늘거리는 것 같았다.
영호충은 얼마간 듣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는 생각했다.
(잠잘 수 없다. 내가 노선배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만약 잠이 들었다면 크게 불경스런 일이 된다.)
그러나 비록 있는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시켰지만 잠을 이겨낼
수는 없엇다. 곧 눈꺼풀이 잠겨지고 다시는 뜰 수가 없었다. 몸에
힘이 빠져 땅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 속에서 여전히 은은
하게 그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부드러운 손이 자기의 머
리를 어루만지며, 어린시절로 돌아가 어머님의 품 속에 안겨 그녀
의 사랑을 받는 듯했다.
한참 후 가야금 소리가 멈추자 영호충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
다. 부끄럽기 작이 없었다.
[죽어 마땅합니다. 노 선배님의 연주를 마음속 깊이 듣지 못하
고 결국 잠에 빠졌읍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그렇게 혼자 자책할 필요는 없네. 내가 조금 전 연주한 것은
너에게 최면을 걸어 네가 내공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 그랬다. 몸은 어떠한가?]
영호충은 크게 기뻐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는 즉시 무릎을 끓고 단정히 앉은 다음 기운을 돌리니 그 여
덟 줄기의 진기는 여전히 충돌했으나, 옛날같이 뜨거운 피가 용솟
음치고 구토를 할 것 같은 증상이 많이 사라진 이후였다. 더 기운
을 쓰자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깨어질 것 같아 몸을 비틀거리며 땅
바닥에 쓰러졌다.
녹죽옹은 급히 안으로 나서서 그를 부축해 세웠다. 그리고 그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노파는 말했다.
[도곡육선과 불계대사의 공력이 매우 깊다. 그래서 내 음악 소
리로는 그 진기를 억누를 수 없었네. 오히려 자네에게 고통만 주
었구만! 심히 미안하네.]
영호충은 급히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곡을 듣고 저의 몸이 많이 좋아졌읍니
다.]
녹죽옹은 붓을 들어 벼루에 먹을 찍더니 종이에다 글씨를 썼다.
[이 곡을 전수받도록 하게. 그러면 자네는 평생 좋은 이득을 볼
것이네.]
영호충은 불현듯 깨달았다.
[이 제자가 감히 어르신께서 곡을 전수해주시길 원합니다. 이
제자가 천천히 몸을 조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녹중옹은 기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파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 후 말했다.
[거문고를 탈 줄 아는가? 한 곡조 타 보겠는가?]
영호충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말했다.
[제자는 한번도 배운 적이 없고 틸 줄 모르면서도 어르신의 고
명한 기량을 배우려고 했읍니다. 실로 너무나 무례합니다. 이 제
자의 경망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즉시 녹죽옹에게 읍을 한 다음 말했다.
[이만 물러가겠읍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잠깐만! 자네에게 멋진 곡을 선사 받고 아무 것도 보답해 주지
못해 부끄럽고, 자네의 상처가 매우 깊어 정말 염려스럽군! 조카
님, 내일 거문고 타는 방법을 영호군에게 전수해 주시오. 만약 그
가 인내심이 있고 이 낙양 땅에서 좀 오래 묵느다면 그러면......
그럼 나의 이 청심보선주(淸心普善呪)를 그에게 전수해 주어도 무
방할 것이오.]
마지막 두 구절의 말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부터 영호충은 이 골목 죽사(竹舍)로 와서 거문고를
배웠다. 녹죽옹은 그에게 음률을 전수해 주었다.
[악율(樂律)은 모두 십이율이 있는데 그것은 황종(黃鐘) 대여
(大呂) 태족(太簇) 협종(夾鐘) 고선(姑?) 중여(中呂) 유빈(?賓)
임종(林鐘) 이칙(夷則) 남궁(南宮) 무사(無射) 응종(應鐘) 등이
다. 이것은 엣날부터 전해내려오는 것으로 그 옛날 황제가 영륜(?
倫)에게 명하여 율을 지었는데 봉황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 십이율
을 지었다고 하네. 요금(瑤琴)의 칠현은 궁(宮) 상(商) 각(角) 치
(?) 우(羽) 오음이 있고 첫째현이 황종(黃鐘)이 되고 세째현이 궁
조(宮調)가 된다. 오조(五調)는 만각(慢角), 청상(淸商), 궁조(宮
調) 만궁(慢宮) 유빈조(?賓調) 등이 있다.]
그는 자세하게 해석을 해주었다.
영호충은 비록 음율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만 천성이 총명해서
한번 가르쳐 주면 이해했다.
녹죽옹은 심히 기뻐하며 즉시 연주기법을 가르쳐 주고 극히 짧
은 벽소음(碧?吟)이라는 곡조를 그에게 타보라고 시켰다. 영호충
은 몇번 배우자 연주할 수 잇었다. 비록 많은 음이 정확하지 못하
고 손가락 놀림이 숙달되지 못했으나 하늘이 파랗게 되고 만리에
구름 한 점 없는 기상으로 변했다. 그 곡이 끝나자 그 노파는 여
에서 듣다가 가볍게 탄성을 토했다.
[영호충, 잔는 배우는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군! 얼마 배우지 않
으면 '청심보선주' 를 배울 수가 있겠네.]
녹죽옹은 말했다.
[고모님, 영호 현제가 오늘 처음 배우는데 이 벽소음을 혼자서
탔읍니다. 소리에 나타나는 뜻은 이 조카보다 더 고명한 것 같습
니다. 거문고는 마음의 소리라 그의 가슴이 넓어서 그러한 듯합니
다.]
영호충은 겸손해하며 말했다.
[선배님의 과찬이십니다. 어느 때에 가서 비로소 이 제자가 선
배님처럼 이 '소오강호곡'을 연주할 수 있겠읍니까?]
노파는 실소하며 말했다.
[자네...... 자네도 그 소오강호곡을 연주하고 싶은가?]
영호충은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제자는 어제 저녁 선배님이 타는 거문고 소리가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속으로 내심 흠모하였읍니다.
그 노파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 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자네가 탈 수가 있다면 그건 정말 과히......]
말소리는 점점 작아져 뒤에는 잘 들리지 않고 가벼운 탄식만 들
렸다.
이십여 일 동안 영호충은 아침부터 이 골목에 와서 거문고를 배
우고 저녁 늦게야 돌아갔다. 점심 식사는 녹죽옹의 거처에서 먹었
다. 비록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왕가의 산해진미보다 더 맛이 있었
고 더욱 묘미가 잇었으며 매 끼니마다 좋은 술이 있었다. 녹죽옹
의 주량은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차려나오는 술은 가히 일품 이었
다.
그는 주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천하의 미주에 대해 그 내력
을 자세히 알 뿐 아니라 생산연도를 알아낼 수도 있었다. 영호충
은 이러한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에게 거문고를 배울 뿐 아
니라 술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배웠다. 그의 술에 대한 학문도 검
도나 거문고의 이치보다 모자라는 것 같지가않았다.
며칠 동안 녹죽옹은 대나무 그릇을 팔고 왔으므로, 그 노파와
벽하나의 사이를 두고 가르침을 받았다. 나중에는 영호충이 거문
고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점을 품었으나 녹죽옹은 대답을 할 수 없
어 반드시 그 노파가 친히 지적을 해 주었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
러나 영호충은 끝내 그 노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단지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워 마치 아리따운 처녀 목소리 같았고 노
파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녀는 음악을
알고 어려서부터 음악에 도취되어 깊이 빠졌기때문에 말소리 조
차 듣기 좋아졌고 늙어서까지 변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그 노파는 그에게 '유소아(有所思)' 를 전수해 주었다.
이것은 한나라 때의 곳으로 부드러운 곡조였다. 영호충은 몇번 듣
고 나서 그대로 거문고를 탔다. 그는 이 곡을 타면서 자기도 모르
게 어렸을 때 자기와 악영산 둘이 같이 뛰어놀고 장난치던 그런
추억을 회상했다. 또 폭포에서 함께 검술을 연마하고, 사과애에
밥을 날라다 주고, 소사매는 자기에게 많은 밀어를 속삭이고 장래
를 약속했는데 나중에 무단히 임평지라는 사람이 나타나자 소사매
는 작에게서 멀어져 갔건 일을 회상하게 되었다. 마음이 처량하고
울적해져 갑자기 가락이 변해 자기가 어렸을 적에 있던 복건지방
의 노래가 그 속에 섞여 어울렸다. 그것은 바로 악영산이 산허리
를 내려갈 때 불렀던 노래였다. 그는 흠칫 놀라 손을 멈추고 타지
않았다.
그 노파는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이 '유소사' 곡은 자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군. 마음과 정이
융합하여 이 곡의 이치를 깊이 깨닫게 되고 틀립없이 과거의 일을
회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복건지방의 노래가 그 곡조에서
나오니 실로 의아하게 생각된다. 무슨 연고인가?]
영호충의 성격은 본래 호방했다. 그 노파가 이십여일 동안 자기
에게 극히 잘 해주었음을 느끼고 참지 못하고 자기와 악영산과의
관계를 다 이야기해주었다. 말을 다 하고 나자 심히 부끄러웠다.
[할머니, 제자의 진정한 마음을 말씀드렸읍니다. 쓸데없이 한참
동안 떠들었군요. 정말로...... 정말로......]
그 노파는 가볍게 탄식하고 말했다.
[인연이라는 것은 억지로 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각기 자기의 인연이 있으니 부러워하지 말아라'
영호충, 자네는 오늘날 비록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다른 날 좋은 인
연이 있을 걸세.]
영호충은 큰 소리로 말했다.
[제자는 앞으로 며칠을 더 살지도 모르는데 가정을 이룬다는 것
은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 노파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거문고 소리가 가볍게 들
려왔다. 곡조는 바로 '청심보선주' 였다. 영호충은 잠시 듣다가
잠이 들려고 했다. 그 노파는 거문고를 멈추고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이 곡을 자네에게 전수해 주겠다. 아마십일 정
도면 이 곡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것을 연주하면 때때
로 공력이 다 회복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나아질 것이다.]
영호충은 대답했다.
[녜.]
그 노파는 즉시 악보의 손놀림을 전수해 주었고 영호충은 열심
히 기억했다.
이렇게 나흘 동안 배웠다. 오일째 되는 날 영호충이 거문고를
배우러 가는데 노덕약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말했다.
[대사형, 사부님의 분부이십니다. 우리는 내일 떠난다 합니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말했다.
[내일이면 간다고? 나는...... 나는......]
영호충은 '나는 아직 그 곡을 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하고 말하
고 싶었으나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노덕약은 말했다.
[사모님께서 짐을 정리하라고 하십니다. 내일 아침에 길을 떠난
답니다.]
영호충은 대답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녹죽소사에 도착해서 그
노파에게 말했다.
[제자는 내일 떠나야만 합니다.]
그 노파는 깜짝 놀라 한참동안 말을 않더니 한참 후에 비로소
가볍게 말했다.
[그렇게 급하게 가다니, 자넨...... 자넨 이 곡을 아직 다 배우
지 않았는데.]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지 사부님의 명령을 어기기가 뭣
합니다. 더우기 우리는 타향에 와 있고 다른 사람 집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 할머니는 말했다.
[하긴 그렇군.]
그녀는 어제와 다름없이 그에게 곡을 전수해 주었다.
영호충은 그 노파와 며칠간 배우면서도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거문고를 탈 때와 말할 때 그녀가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염려하고
있고, 친형제와 다름없이 대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그녀의
성격이 담백하여 어쩌다가 한 마디 관심있는말을 하면 바로 다른
말로 돌리고 그에게 자기의 뜻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는 영호충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애당초 악불군 부부
와 악영산과 육후아, 네 사람이었다. 지금 육후아는 이미 죽고 악
영산은 전심전력으로 임평지에게 마음을 두고 있고 사부님과 사모
님은 자기에게 의심을 품고 있으니 진정 친한 사람은 바로 녹죽옹
과 이 노파 두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날 그는 몇번이고 녹죽옹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이 작은 골
목에 머물면서 음악도 배우고 대나무 짜는 까술을 배워 화산파에
돌아가지 않고 지내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악영산의 그림
자가 시종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소사매가 나를 아는 체도 안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해도 날
마다 그녀를 쳐다볼 수 잇다면, 그녀의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
면 그녀의 한 마디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한다.
그녀가 나에게 아는 체를 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 있겠는가?)
그는 녹죽옹과 그 노파에게 많은 정을 느기고 있었다. 그 할머
니가 묵고 있는 뜰 앞에 내려가 무릎을 끓고 절을 했다. 대나무
발 안에서 그 노파도 무릎을 끓고 예를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비록 자네에게 거문고 타는 기법을 가르쳤지만 그것은 자
네가 나에게 이 곡을 선사한데 대한 보답인데 자네는 어찌 그런
큰 예로써 나를 대하는가?]
영호충은 말했다.
[오늘 떠나면 어느날 어느때 다시 두 분을 볼 수 있겠읍니까?
영호충은 가르침을 받았으니, 죽지 않는다면 다시 낙양에 와서 할
머님과 죽옹을 다시 방문하겠읍니다.]
마음속에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이 두분은 나이가 많아 얼마나 더 사실지...... 다음에 내가
낙양땅에 와서도 다시는 뵙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인생이 꿈과 같고 이슬과 같다고 생각하며 참지 못하고 흐
느껴 울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영호충, 나는 지금 자네에게 한 마디 권하고 싶네.]
영호충은 말했다.
[녜, 어떤 가르침이라도 이 영호충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
다.]
그러나 그 노파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살며시 말
했다.
[강호의 풍파는 험악하니 몸조심하게나.]
영호충은 말했다.
[녜.]
그는 마음이 시큰해져 허리를 굽히고 녹죽옹에게 인사를 했다.
왼쪽 방에서는 거문고 타는 소리가 울리는데 바로 유소사라는 곡
이었다.
다음날 악불군 등 일행은 왕원패 부자에게 작별을 고하고 배를
타고 낙수(洛水) 연안을 따라서 북상하기로 했다. 왕원패 일가 다
섯 사람은 배까지 전송나와 많은 술과 요리를 준비해 보내 주었
다.
그날 오아가구 형제에게 팔이 빠진 영호충은 왕가 형제에게 말
을 건네지도 않고 이별할 때도 왕가 집안의 사람들을 냉랭히 쳐다
볼 뿐이었다. 마치 눈 앞에 금도왕가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악
불군은 큰제자 때문에 심히 골치가 아팠다. 악불군은 왕원패에게
거듭 사과를 하고 영호충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선 보고도 못본 척
했다.
영호충이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니 왕가에선 큰상자, 작은 상
자, 큰 보따리, 작은 보따리 등을 준비해서 악영산에게 많은 예물
을 주었고 남녀하인 가릴 것 없이 모두 다 배에 올라 예물을 전하
면서 떠들어대기를, 가는 도중 악소저의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고
하고 또 어떤 하인들은 큰 마님이 아가씨를 위해서 여행 중에 입
을 옷을 준비했다고 했고 둘째 마님은 악영산이 배에서 몸에 치장
할 수 있는 패물들을 준비해 준 것이라 했다. 정말로 그들은 자기
의 친척처럼 대했다. 악영산은 기쁜 나머지 입을 열고 말했다.
[이를 어쩌나 내가 어찌 그 많은 옷을 입을 수 있으며 그 많은
것을 다 먹을 수 있읍니까?]
한참 떠들석하는데 갑자기 한 명의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이 배
에 올라와서 말을 했다.
[영호충.]
영호충이 보니 녹죽옹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 급히 앞
으로 나가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녹죽옹은 말했다.
[내 고노님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선물을 영호군에게 전하라고
하셨네.]
말을 하면서 두 손을 받쳐 들고 하나의 기다란 물건을 싼 보자
기를 건네주었다. 보자기는 하얀 꽃이 수놓아진 파란색의 거친 보
자기였다. 영호충은 고개를 숙여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선배님의 깊고 따뜻한 정, 이 제자가 기꺼이 받겠읍니다.]
말을 하면서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왕가준 왕가구 형제들은 그가 이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에게는
그렇게 있는 예를 다하여 대하고, 이 강호에 이름이 널리 퍼진 금
도무적 왕가준 어르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화가 솟아올랐다. 만약에 악불군 부부와 화산파의 여러 사형 사매
들의 체면을 보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또 영호충을 끌어내어 늘씬
패주고 마음속의 울분을 향해서 밀고 왔다.
두 사람의 좌측어깨와 우측어깨가 가볍게 부딪치기만 해도 그
늙은이는 물에 떨어질 판이었다. 비록 강가에 물은 깊지 않아 물
에 떨어져도 죽지도 않는다손치더라도 그런 행위는 영호충의 체면
을 크게 손상시킨 셈이었다. 영호충은 그것을 보고 급히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막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을 잡으려고 했다. 갑자기 자기의 공력
이 전부 소실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왕씨 형제를 잡지 못할 뿐
더러 설령 잡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가 멈
칫하는 순간에 왕씨 형제가 이미 녹죽옹의 몸에 부딪쳤다. 왕원패
는 크게 부르짖었다.
[안 된다!]
그는 낙양땅에서 가문이 있고 사업이 있는 사람이라 보통의 무
인과는 크게 달랐다. 자기의 두 손자들이 젊은 혈기에 이 늙은이
를 단숨에 부딪쳐 죽인다면 관청의 추궁을 당할 것이고 그 뒤의
일은 무척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창에서 악불
군과 말을 하고 있을 때이므로 손을 써서 저지하기에는 너무 늦었
다. '탁'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형제의 어깨는 녹죽옹을 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개의 그림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텅텅 텅텅
하는 소리를 내며 왕씨 형제는 각기 좌측과 우측에서 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 늙은이는 마치 공기가 부풀은 공처럼 왕씨 형제가
부딪치자 반탄력을 튕겨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는 듯
느릿 느릿 한걸음 한걸음 그 발판을 지나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
다.
왕씨 형제가 물에 떨어지자 배는 삽시간에 큰 혼란에 빠졌다.
곧바로 두명의 선원들이 물에 뛰어들어가 두 사람을 구해 올라왔
다. 이때는 이른 봄이라 이미 얼음이 풀렸다 해도 여전히 물은 차
가웠다. 왕씨 형제는 이미 몇 모금의 강물을 마셨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빨이 부들부들 떨렸고 두 사람의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왕원패는 그 광경을 보고 깜작 놀랐다. 두 형제의 네
개의 팔뚝은 모두가 어깨 관절과 팔뚝 관절이 탈골이 되어 마치
두 사람이 영호충의 팔뚝을 꺾어놓은 광경과 똑같았다.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욕을 해댔다. 두 사람의 양쪽 어깨는 축 늘어져 마치
버들가지와 같았다.
왕중강은 두 아들이 처참한 꼴을 당하자 몸을 달려 올라오더니
녹죽옹의 면전에 뛰어들어 그의 길을 막았다. 녹죽옹은 여전히 활
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꼽추모양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
어왔다. 왕중강은 인사를 했다.
[어디의 누구시요? 이 낙양땅 왕가에게 시비를 일으키다니!]
녹죽옹은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나갔다. 천
천히 왕중강의 몸에 다가섰다. 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눈빛은
두 사람에게 쏠렸다. 녹죽옹은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앞으로 나가
고 왕중강은 살짝 두 팔을 들어 길 가운데를 막았다. 점점 두 사
람이 시간이 흐를수록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일장에서 오
척으로 오 척에서 삼 척으로 줄어들었다. 중강은 일갈했다.
[꺼져라!]
두 손을 내밀어 그의 어개를 향해서 맹렬하게 후려쳤다. 그 두
손이 막 녹죽옹의 몸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왕중강의 크고
거대한 몸체는 허공에 붕 떠 수장 밖으로 날아갔다. 여러 사람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그는 허공에서 반 공중제비를 돌고 땅에
사뿐히 내려섰다. 만약 두 사람이 멀리서 급히 달려오다가 부딪쳐
서 한 사람이 이렇게 공중으로 날라 갔다면 별로 이상한 것은 없
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왕중강은 꼼짝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 아
니했는데 녹죽옹은 천천히 다가가 그를 날려버리니 악불군, 왕원
패 같은 고수들조차도 이 늙은이가 어떤 수법을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왕중강이 땅에 떨어질 때 몸체는 평행을 유지했으며 낭패
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공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가 스
스로 공중으로 날아 자기의 경공을 한번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였
다. 그 주위에 모여 있던 장정들과수레꾼들은 모두 갈채를 보내
고 왕중강의 무공의 대단함을 칭찬했다. 왕원패는 처음에 그 녹죽
옹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두 명의 손자의 관절을 탈골시키자 이미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러한 기법은 자
기도 비록 갖고 있으나 그 수법을 쓰려고 한다면 맹렬한 자세가
필요한데 자기는 이 노인처럼 가볍게 할 수가 없고 그렇게 신속하
게 처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다시 자기의 아들이 공
중에 튕겨서 날게 되니 놀라움뿌 아니라 이미 경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알기로는 자기의 아들은 이미 자기의 무공의 진수
를 받은 듯하여 일수단도(一手單刀)의 사용에 있어서는 이미 안정
이 되고 매서웠으며 발과 팔의 공력도 내공과 일치되어 자기가 젊
었을 때보다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일초를 부딪
치기도 전에 상대방에게 날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광경은 평
생 보지고 못한 것이었고 눈 앞의 자기 아들이 창피를 당하자 그
는 손을 쓰려고 했다.
[중강아 이리오너라.]
왕중강은 몸을 돌려 뱃머리에 와서 침을 툭툭 튀기며 분한 듯이
욕지거리를 했다.
[썩어바진 늙은이! 썩어빠진 늙은이!]
왕원패는 낮은 소리로 물어봤다.
[몸은 좀 어떠하냐? 상처를 받았느냐?]
왕중강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왕원패는 자기의 재주로 이
노인네를 상대할 수 있을런지는 미지수였고 만약에 악불군의 손을
빌려 이긴다 해도 그리 떳떳하지는 못할 것이니 아예 이 일을 거
론하지 않고 모르는 척 넘어갔다.
녹죽옹이 천천히 멀어지자 왕원패는 생각했다.
(저 노인은 영호충의 친구이다. 내 손자가 영호충의 팔을 꺾었
다 햇 그는 손자들의 두 팔을 꺾어 놓음으로 해서 빛을 청산한 것
이다. 이 낙양에서 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인데 내가 늙어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두 대의 수레가 물에 젖은 두 소년을 태우고 돌아갔다. 왕원패
는 악부군을 보면서 말했다.
[악 선생, 그 사람의 내력을 아십니까? 이 늙은이가 눈이 안 좋
아 그 고수를 알아볼 수가 없읍니다.]
악불군은 말을 했다.
[충아, 그는 누구이냐?]
영호충은 말했다.
[그가 바로 녹죽옹입니다.]
왕원패와 악불군은 동시에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날 그들
은 비록 그와 함께 골목에 갔지만그러나 녹죽옹의 얼굴을 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악불군은 그 파란 보자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가 너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영호충은 대답했다.
[제자도 모르겠읍니다.]
보자기를 펼쳐보니 길이가 짧은 단금(短琴)이 나타났다. 낡아
오래 된 물건인 듯했다. 꼬리 부분에는 연어(燕語)라는 글자가 전
서체로 조각되어 있었다.
또 다른 것은 한 권의 책자였는데 뚜껑에는 청심보선주라는 다
섯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영호충은 뜨거운 기운이 울컥 솟아올라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악불군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왜 그러느냐?]
영호충은 말했다.
[이 센배께서는 나에게 비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나에게
악보를 적어 주셨읍니다.]
악보를 펼쳐보니 책자의 한장 한장마다 가득히 아리따운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악보를 설명하는 것 외에도 상세하게 지법현법(指
法絃法)과 금을 다루는 요령 등이 적혀 있었고 종이와 글씨는 모
두 새 것으로 그 노파가 막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
호충은 이 선배가 자기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대해 주니 마음속으
로 감동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마터면 눈물이 떨어질 뻔했다.
왕원패와 악불군은 이 책자에 금을 다루는 비결이 씌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의 어떤 글자들은 그 소오강호곡에 있던 괴상
한 글자와 비슷했다. 비록 마음속에 많은 의문점이 있었지만 아무
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악불군은 말했다.
[그 녹죽옹은 정말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군! 알고보니
무림의 고수였어. 충아, 너느 그가 어느 가문의 어느 파인지 알고
있느냐?]
그는 영호충이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대로 자기 말에 대
답하지 않을 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 사람의 무공이 심후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내력을 묻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
다.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는 단지 그분을 따라 금을 배우기는 했으나 정말로 그의
무공이 이토록 강한 줄은 몰랐읍니다.]
악불군 부부와 왕원패와 왕백분 중강 형제들은 공수를 하고 작
별을 했다. 닻이 올려지고 큰 배는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 배는 십여장의 물길을 가로지르고 떠나갈 때 여러 제자들은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이는 그 녹죽옹의 무공이 깊어 예측
할 수 없다고 했고, 어떤 이는 이 노인네가 아무런 재주가 없다고
했고, 왕씨 형제들은 조심하지 않아서 물에 빠졌을 뿐이고 왕중강
은 단지 그 늙고 추악한 노인을 상대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를 피
했다느니 여러 말들이 오고갔다.
영호충은 배 뒤에 앉아 그들의 말에 끼어들지 않고 스스로 혼자
서 악보를 펼쳐보고 책에서 지시한 대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따라
했다. 단지 사부님과 사모님에게 시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손가
락만 움직이고 있을 뿐 감히 소리를 내어 연주하지는 못했다.
악 부인은 자기가 탄 배가 순풍처럼 내달리자 녹죽옹의 괴이한
모습을 생각하고는 마음속으로 열가지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그
녀가 뱃머리에 가서 앞을 내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당신이 보건대 그 녹죽옹은 어떤 문파의 사람인 것 같소?]
이 말은 마침 그녀가 남편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말이었다. 남편
이 비록 먼저 물어보았지만 악 부인은 여전히 반문했다.
[당신이 볼 때 그는 어떤 문파의 사람인 것 같소?]
악불군은 말햇다.
[그 노인네는 내내 손을 움직이지 않고 발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왕가 부자 세 사람을 그렇게 묵사발을 만들어 놓았으니 아마 정파
무공(正派武功)은 아닐 것이오.]
악 부인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충아와 매우 밀접한 관계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금도왕가와 어떤 시비를 걸려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악불군은 탄식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끝나기를 바랄 뿐이오. 그렇지 않으면 왕 어르신네 평
생의 명예에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길 것이오?]
한참을 쉰뒤 그는 다시 말했다.
[우리는 비록 물길을 타고 가고 있지만 모두 조심해야 돼요.]
악 부인이 말했다.
[당신의 뜻은 이 배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단 말이오?]
악불군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우리는 계속하여 감시를 받고 있는게 아닌가 모르겠구료. 도대
체 그날 저녁 열다섯 명의 복면객이 무슨 일로 우리를 공격했는지
아직도 분명치가 않소. 우리는 밝은 데에 있고 적들은 숨어 있으
니 아마 앞날은 그리 편치 못할 것이오.]
그는 화산파의 강문을 맡은 이후로 이렇게까지 중대한 좌절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앞날이 그리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적은 도대체 누구이며 무슨 조직에 속해 있는지
에 광해서는 손톱만치도 알아낼 수 없으니 더욱 불안했다.
그들 부부는 여러 제잗르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엄중히 방비
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배가 공현(鞏懸) 부근에서 강심으로 나
온 후 동쪽을 향해서 물길을 헤쳐나갔으나 아무런 의외의 일도 발
생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개봉(開封)에 곧 도착할 즈음에 악불군 부부와 여러 제자들은
개봉의 무림인물에 대하여 논평을 했다. 악불군은 말했다.
[개봉은 비록 큰 도시이나 무풍(武風)은 비상하지 못하다. 예를
들면 화노표두(華老?頭) 해노권사(海老拳師) 예중삼영(豫中三
英) 같은 사람들은 무공과 명성이 그리 대단치 못하다. 우리는 이
개봉땅에서 며칠 놀다가 가자. 그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을 삼가하
고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악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개봉부에는 크게 유명한 인물이 있는데 사형은 벌써 잊었어
요?]
악불군은 말했다.
[크게 유능하다고? 당신 말하는 사람이 누구지?]
악 부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한 사람을 치료하면 한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을 죽이면 한 사
람을 살려내고, 살려낸 사람과 죽인 사람이 꼭 같이 말하기를 절
대로 손해보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죠?]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살인명의(殺人名醫) 평일지(平一指)! 그 사람은 너무 유명한
사람이야. 그러나 그의 성질이 괴팍하여 우리가 방문한다 해도 만
나 본다고 말 할 수는 없지.]
악부인은 말했다.
[그렇기는 한데 충은 내상이 있어도 줄곧 치유하지 못했다느데
우리가 이곳까지 와서 그 살인명의를 찾아봐야 옳지 않겠읍니까?]
악영산은이상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어머니, 살인명의가 누구입니까? 사람을 죽이는데 어찌 명의라
하십니까?]
악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 평노선생은 무림 중에 한...... 한분의 기인인데 의술이 고
명하여 어떠한 중한 빌병이나 상처라도 그가 치료해 주겠다는 대
답만 한다면 안 낳은 병이 없지. 그러나 그는 괴팍하고 괴이한 성
격의 소유자란다. 그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사람의 숫자가 일정
해서 조물주나 염라대왕의 마음속에 정해진 사람의 숫자가 있으므
로 만약에 그가 많은 사람을 피료해 준다면 죽는 사람이 적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사는 사람이 너무 많고 죽는 사람이 너무
적어지기 때문에 염라대왕에게 송구스럽단다. 그래서 앞으로 자기
가 죽은 다음 염라대왕이 상대를 안해주고 전생의 죄를 심판하는
귀신이 그를 못살게 굴까봐 걱정을 한단다. 그가 죽으면 염라대왕
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하더구나.]
여러 제자들은 이야기를 듣고 한바탕 웃어댔다. 악 부인은 계속
하여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맹세를 했다. 한 사람을 치료해서 구한다면 한
사람을 죽여서 그 숫자를 충당하겠다고. 또한 그가 사람 하나를
죽이면 사람 하나를 살려 그 숫자를 보충하지. 듣건대 그가 살고
있는 처소에는 한 폭의 큰 글씨가 씌어 있는데 그 글씨에는 '한
사람을 살리면 한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을 죽이면 한 삶을 살려
내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숫자가 같아야 하고 손해 보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느다' 고 씌어 있단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조물
주가, 그가 인명을 많이 살상했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고 염라대왕
또한 그가 저승의 사자를 망치지 않았으므로 원망하지 않을 것이
라고 말한단다.]
여러 제자들은 다시 크게 웃었다. 악영산이 말했다.
[이 평일지라는 의사는 상당히 재미가 있는 분이군요. 그런데
그는 또 어찌 이러한 이름을 지었나요? 그는 정말 손가락이 하나
밖에 없나요?]
악 부인은 말했다.
[아마 손가락이 하나뿐인 것은 아닐거다. 사형, 당신은 그가 왜
이러한 이름을 지었는지 알고 계세요?]
악불군은 말했다.
[평일지는 손 가락 열 개가 모두 성하지. 그는 스스로 일지(一
指)로 자칭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을 죽이든 사람을 살리든 한 손
가락으로 해내기 때문이라는군. 만약에 사라미마 죽이려고 한다면
손가락 하나로 찍어 버리면 죽어버리고 만약에 사람을 살려내려고
생각한다면 역시 손가락 하나로 맥을 짚는 순간에 살아난다고 하
더군!]
악 부인은 말했다.
[아, 알고보니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가 혈도를 찍는 수단은 상
당히 무섭겠군요?]
악불군은 말했다.
[그건 확실히 알지 못하겠어. 이 평일지와 겨뤄본 사람은 몇명
되지 않을테니까. 무림의 고수들은 그의 의술이 매우 고명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한 세상 사는 동안 그 누구도 아무 일 없으리
라고도 단정하지 못하여 어느날 그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모르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사람과 원한을 맺으려고 하지 않
지. 그래서 죽음을 눈 앞에 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감히 그에게 병
을 낫게 해달라는 사정을 못 하지.]
악영산은 말했다.
[그것은 어재서 그래요?]
악불군은 말했다.
[무림의 사람이 그에게 병을 낫게 해달라고 청할 때 그는 반드
시 청한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맹세를 하도록 하지. 병이 난 다음
에 반드시 그의 분부를 따라서 그 사람이 지정한 사람을 꼭 죽여
야 한다고. 이것이 바로 한 목숨과 한 목숨을 상쇄시키는 법칙이
지. 만약 그가 상관없는 사람을 죽이라고 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만약 그가 죽이라고 지정한 사람이 부탁한 사람의 친척
또는 친한 친구라든지 심지어는 부모형제, 처, 자식이라면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겠지.]
여러 제자들은 모두 말했다.
[이 평 의사는 정말로 사악하기 짝이 없군요.]
악영산은 말했다.
[대사형, 그렇다면 당신의 상처도 그에게 치료해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겠군요?]
영호충은 계속 조금 뒤에 떨어진 선창가에서사부와 사모님의
말하는 살인명의 평일지의 괴벽(怪癖)에 대한 말을 듣고 있었다.
소사매의 이런 말을 듣고 담담히 웃으면서 말을 했다.
[그렇군! 그가 내 병을 치료한 다음에 나보고 나의 소사매를 죽
이라고 한다면 어떡하지?]
화산파의 여러 제자들은 모두 웃어버렸다. 악영산도 웃으면서
말했다.
[이분 평 의사는 나와 아무런 원수도 지지 않았는제 왜 당신 보
고 나를 죽이라고 하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에게 물어봤다.
[아버지, 그렇다면 도대체 이 평대부는 좋은 사람입니까그렇지
않으면 나쁜 사람입니까?]
악불군은 말했다.
[듣건대 그의 행적은 희노애락이 무상해서 어떤 때는 올바르지
만 어떤 때는 매우 사악하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고 말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좋게 말한
다면 하나의 기인이고 나쁘게 말한다면 괴인이라고 할까?]
악영산은 말했다.
[강호에 전해오는 말은 과장되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개봉부에
도착하면 그 어르신을 한번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악불군과 악 부인은 차갑게 말했다.
[절대로 함부로 날뛰지 말아라.]
악영산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안색이 매우 심각해지는 것을 보자
깜작 놀라며 물어봤다.
[왜 그러세요?]
악불군은 말했다.
[너는 화를 당하고 싶으냐?]
악영산은 말했다.
[좀 찾아본다고 화를 당할까요? 나 또한 그에게 병을 고쳐달라
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두렵습니까?]
악불군은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우리들은 산천경계를 두루 구경하려고 나온 것이지 절대로 화
를 당하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러 나온 것은 아니다.]
악불군이 화를 내자 악영산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
나 이 살인명의 평일지에 관해서 마음 가득히 호기심이 끓어올랐
다. 악불군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리 악가의 가문을 빛낸 장소가 있
다. 우리는 그곳에 가보자꾸나.]
악영산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렇지요. 잘 알았읍니다. 그곳이 바로 주선진(朱仙鎭)이라는
곳이지요. 그 옛날 악붕거(岳鵬擧) 할아버지께서 김올출(金兀朮)
을 쳐부순 장소이지요?]
무릇 무예를 배우는 사람은 금위국(金衛國)에 대항해서 싸운 악
비(岳飛)에 대하여 모두 숭배의 념을 품고 있었다. 주선진은 바로
악비가 금나라 병사의 군대를 맞이하여 싸웠던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한번은 가 보려고 했다. 악영산은 앞장을 서
서 부둣가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 빨리 그 주선진에 가 봐요! 그리고 나서 개봉성에 가서
점심을 먹어요.]
여러 사람들은 다투어 언덕에 올랐다. 영호충은 뒤에 앉아 꿈쩍
도 하지 않았다.
악영산이 외쳤다.
[대사형! 안 가실 생각이예요?]
영호충은 무공이 소실된 후부터 계속 온몸이 권태롭고 피곤하여
걷기다 싫었다. 마음속으로 모두가 배에서 내려 노는 사이에 자기
는 그 기회를 큼타 청심보선주를 배우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
다. 또한 임평지가 악영산의 몸 가까이에 붙어서 친밀하게 구는
꼴을 보자 더욱 마음이 냉정해져서 말했다.
[나는 힘이 없어. 빨리 걸을 수가 없단 말이다.]
악영산은 말했다.
[그래요? 당신은 배에서 좀 쉬도록 하세요. 우리가 개봉에서 몇
근의 좋은 술을 받아오지요.]
영호충은 그녀가 임평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행하여 빠른
걸음으로 모든 사람을 앞질러 나가자 마음이 울적해져 이렇게 생
각했다.
(이 청심보선주를 배운 다음에 설령 나의 내상이 낫는다 할지라
도 그 내상을 낫게 할 필요가 있을까? 또한 이 금을 타는 수법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
황하의 탁류가 하염없이 흘러가는 것을 쳐다보며 그는 순식간에
인생의 비애가 마치 흐르는 물처럼 끊이지 아니함을 슬퍼했다. 마
음이 울적해지고 심기가 도하자 아랫배가 금새 아파왔다.
악영산과 임평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명서 이곳 저곳의
풍물을 가리키며 낮은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즐겁기 그
지없었다.
악부인은 남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산과 평은 아니가 젊고 어립니다. 이런 천춘 남녀가 같이 걷는
다면 이 들판에서는 아무일 없겠지만 그러나 큰 도시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악불군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과 나는 이미 나이가 적지 않으니 우리가 그들과 동행을
한다면 그들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오.]
악 부인은 깔깔 웃으면서 몇 발짝 앞섰다. 앞서서 딸의 몸 가까
이에 다가갔다. 네 사람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물어가며 주선
진을 향해서 갔다.
주선진에 거의 다 다가갈 무렵 길 옆에 한 채의 절이 있었다.
대문위에 양장군묘(楊將軍廟)라는 황금색의 글씨가 씌어져 있는
액자가 보였다. 악영산은 말했다.
[아버지, 나는 여기가 어떤 절인지 알아요. 이곳이 바로 양재흥
(楊再興) 장군의 사당이지요? 그는 소상하(小商河)에서 금나라 병
사의 화살을 맞아 죽었죠?]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다. 양 장군께서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받쳤으므로 우리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우리 절에 들어가서 그분의 위용이나 보고 그
분의 영령에 참배를 하자꾸나.]
그 나머지 제자들은 그들과 함참 떨어져 잇었기 때문에 네 사람
은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절 안으로 들어갔다. 양 장군의 신
상은 황금색의 빛이 번쩍거렸다. 악영산은 내심 생각했다.
(이 양 장군께서는 참 잘 생기셨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임평지를 쳐다보았다. 마음속으로 비교
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절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 장군 사당이니까 틀림없이 양재흥을 모셨을 것이야.]
악불군 부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핼쓱하게 변했다. 두 사람은 칼자루를 거머쥐었다.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에는 양씨성을 가진 장군이 많은데 어찌 반드시 양재흥 장
군이라고 하지? 어쩌면 후산금도(後山金刀) 양노영공(楊老令公)
인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양육랑(楊六郞), 양칠랑(楊七郞)인지도
모르잖아?]
또 한 사람이 말했다.
[틀림없이 양가장(楊家將)일 것이고 양육랑, 양칠랑 또는 양종
보(楊宗保), 양문광(楊文廣)은 아닐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왜, 양사랑은 안 되는 거야?]
먼저 말한 사람이 말했다.
[양사랑은 번방(番邦)에 투항했으니 절대로 이 절에는 모시지
않았을 것이야.]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나의 항렬이 네째이니까 은연중에 나를 놀리고 내가 번방에 투
항할거라고 비웃고 있군. 그렇지!]
한 사람이 말했다.
[너의 항렬과 양사랑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야?]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당신의 항렬은 다섯째이고, 양오랑은 오대산에 출가를 했는데
당신은 왜 중이 되지 않지?]
한 사람이 말했다.
[내가 만약 중이 된다면 당신은 번방에 투항해야만 돼!]
악불군 부부는 맨처음 말을 할 때 그 사람들이 바로 도곡괴인들
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딸과 임평지와 함
께 신상 뒤로 몸을 피했다. 그 부부는 좌측으로 피하고 악영산과
임평지는 우측으로 피했다.
도곡육선은 절 밖에서 쉬지 않고 언쟁을 했다. 그러나 들어와서
사실을 확인하려 하지는 않았다. 악영산은 속으로 매우 우스웠다.
[뭐 그렇게 다툴 필요가 있을까? 양재흥인지 양사랑인지는들어
와서 쳐다보기만 하면 알 수 있을텐데!]
악 부인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살펴보니 모두 다섯 사람이
라 내심 생각하기를 나머지 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기 칼에 죽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자기와 남편은 화산을 멀리 떠나온 것이 이
다섯 괴물의 몸에서 멀리 피하고 그들이 산에 올라와 복수하는 것
을 방지하려고 했기 때문인데 뜻밖에도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듯
이곳에서 마주쳤으니 비록 그들이 발견하지 못했다 해도 다른 제
자들이 금방 도착할 것이니 어지 이 화를 피할 수 잇단 말인가?
마음속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밖의 도곡오괴들은 갈수록 치열하게 말다툼을 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 들어가보자. 도대체 이 사당에는 어떤 썩어빠진 보살을
모시고 있는가를!]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하! 보시오! 여기는 분명히 '양공재흥지신(楊公再興之神)'
라고 씌어 있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양재흥이니다!]
말하는 사람은 바로 도지선(桃枝仙)이었다.
도간선(桃幹仙)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에 씌어져 있는 것은 양공재(楊公再)이지 양재흥이가 아니
다. 알고보니 양 장군은 성은 양이고 이름은 공재였구나! 오! 양
공재, 양공재, 좋은 이름이군! 암 좋은 이름이고말고!]
도지선은 크게 노해서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이것은 분명히 양재흥이다. 엉터리 말을 하지 말아라! 어째서
양공재이냐?]
도간선은 말을 했다.
[여기 분명히 양공재라고 씌어 있지 않나? 절대로 양재흥이라고
씌어 있지 않단 말이야!]
도근선(桃根仙)은 말했다.
[그렇다면 희지신(興之神) 이 세 글자의 뜻은 무엇일까?]
도엽선(桃葉仙)은 말했다.
[흥(興)은 바로 기쁘다는 뜻이고 흥지신이라 하면 마음이 매우
기쁘다는 뜻이야. 양공재 이 양씨는 죽어서조차도 사람들이 그를
떠받드니 마음이 물론 기쁘겠지.]
도간선은 말했다.
[맞습니다. 참으로 명답입니다.]
도화선(桃花仙)은 말을 했다.
[이곳에는 양칠랑이 모셔져 있을지도 몰라. 틀림없어. 나 도화
선은 선경지명을 가지고 있거든! 암, 내 말이 맞을거야!]
도지선은 화를 내며 말했다.
[양재흥이다. 어찌해서 양칠랑이냐?]
도간선도 또한 화를 내며 말했다.
[양재흥이다! 어째서 양칠랑이냐?]
도화선은 말했다.
[세째 형님. 양재흥의 항렬이 몇째입니까?]
도지선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느 모르겠는걸?]
도화선은 말했다.
[양재흥의 항렬은 일곱째이므로 그래서 양칠랑이야. 둘째형님,
양공재의 항렬은 몇째입니까?]
도간선은 말했다.
[옛날에 난 알았었는데 지금은 다 까먹었다.]
도화선은 말을 했다.
[나는 알지. 그의 항렬은 일곱째였어. 그래서 양칠랑이야.]
도근선은 말했다.
[이 신상이 만약에 양재흥이라면 절대로 양공재는 아니고, 만약
에 양공재라면 절대로 양재흥이가 아닌데 어째서 양재홍이가 되고
또 양공재가 된단 말이야?]
도엽선은 말했다.
[큰형님도 모르시는 것이 있군요. 이 재(再)자는 무슨 뜻입니
까? 이 재 자는 다시 재 자로서 다시 하나 있다는 뜻입니다. 틀림
없이 두 사람이고 하나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양공재도 되고 양재
흥이도 되지요.]
나머지 네 사람은 일제히 말했다.
[그말이 맞는 것 같군!]
갑자기 도지선은 말을 했다.
[양칠랑의 이름 속에 칠자가 있다. 그는 아들을 일곱을 두었지.
아마 모두들 이것을 알 것이야.]
도근선은 말했다.
[그렇다면 이름에 천자가 있으면 아들을 가 명을 나야 되고 만
자가 있다면 아들이 만 명이나 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다섯 사람은 말을 할수록 엉뚱했다. 악영산은 몇버닝고 웃음소
리가 밖으로 튀어 나왔으나 억지로 참고 있었다. 도곡오괴가 한참
을 다투고 난 다음에 도간선이 갑자기 말했다.
[양칠랑이여! 양칠랑이여! 당신이 내 여섯째 동생을 죽지 않게
보살펴 주신다면 이 어르신이 당신에게 몇번 절을 올린들 어떻겠
읍니까? 내가 먼저 절을 하지요!]
말을 하면서 무릎을 끓고 절을 넙죽했다. 악불군 부부는 그 소
리를 듣고 서로 눈짓을 하며 얼굴에 기쁜 빛을 띄었다.
(이 자의 말을 들어 보니 그 괴인은 비록 일검을 맞았지만 아직
죽지 않았군!)
이 도곡육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었다. 그 부부는 그
들과 어떤 원한을 맺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지선은 말을 했다.
[만약 여섯째 동생이 죽는다면?]
도간선을 말을 했다.
[그러다면 나는 이 신상을 뭉개버리겠어. 그 다음에 그 위에다
오줌이나 깔기지.]
도화선이 말했다.
[설령 당신이 이양칠랑의 신상을 까뭉긴다 해서 또 오줌을 내
깔긴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여섯째는 죽을 것이고 당신
은 절을 했으니까 결국은 손해를 볼 것이오.]
도지선은 말했다.
[그말이 맞군. 급히 서둘러 절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우리
먼저 가서 자라아보자. 여섯째의 상처가 낳을 수 있는가? 아니면
고칠 수 없는가? 고칠 수 있으면 다시 와서 절을 하고 고칠 수 없
다면 다시 와서 오줌이나 누자.]
도근선은 말했다.
[만약에 고칠 수 있다면 절을 아니해도 고칠 수 있어. 그러므로
절을 할 필요가 없고 만약에 고칠 수 없다면 오줌을 누지 않아도
고칠 수가 없으니 그 오줌을 눌 필요가 없지요.]
도엽선은 말했다.
[여섯째 동생이 낫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오줌을 눌 수가 없
어. 오줌을 누지 않는다면 배가 부풀어와서 죽지 않을까?]
도간선은 갑자기 방성대곡했다.
[여섯째가 만약에 살아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들 오줌을 눌 수
도 없고 오줌을 누지 않으면 배가 터져 죽을텐데! 배가 터져 죽을
텐데!]
그 나머지 네 사람도 크게 울기 시작했다. 도지선은 갑자기 껄
껄 웃더니 말을 했다.
[여섯째 동생이 만약에 죽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 우는 것도
헛탕이야! 또 손해가 아닌가? 갑시다. 가서 확실히 물어보고 그때
가서 울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
도화선이 말했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군! 만약 죽지 않는다면 다시 물어도 쓸모
가 없지 아니한가?]
다섯 사람은 서로 말다툼을 하면서 바른 걸음으로 사당을 나갔
다.
악불군은 말했다.
[그 사람이 살고 죽음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니 내가 가
서 사정을 알아 보겠소. 사매께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
를 기다려 주시오.]
악 부인이 말했다.
[당신 혼자서 위험한 곳에 들어가면 도울 사람이 없으니 내가
당신과 함께 동행을 하겠읍니다.]
말하면서 먼저 절 밖으로 나갔다.
악불군은 과거에 큰일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부부가 합심하고
연합해서 대응을 했기 때문에 이때 또한 자기의 아내가 이렇게 말
을 하자 떨쳐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당 밖으로 나온 후 도곡오괴가 멀리서 작은 길을
따라 산허리를 돌아서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 가
까이 뒤따를 수는 없었다. 단지 멀리서 뒤쫓아 갈 뿐이었다. 다행
히 다섯 사람의 음성이 몹시 커서 비록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지
만 다섯 사람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산길을 따라서 십여
그루의 큰 버드나무를 지나자 한 줄기의 작은 시내 옆에 몇채의
작은 기와집이 있었는데 오괴들의 다투는 소리는 기와집 속에서
들려왔다.
악불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 뒤로 돌아갑시다.]
두 부부는 경공자르 펼쳐 멀리서 우측으로 달려갔다. 기와집 뒤
에는 일렬로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머드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도곡오괴들의 분노한 목소리가 맹렬히 들려왔다.
[네놈이 여섯째를 죽였구나!]
[어째서...... 어째서 그의 가슴을 파헤쳐 놓았느냐?]
[네놈을 죽여 없애겠다!]
[네놈의 가슴을 해부해 버리겠다.]
[아이고! 여섯째야, 네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구나! 난......
우리들은 영원히 오줌을 누지 않고 너를 따라서 죽겠다!]
악불군은 부부는 크게 놀랬다.
[어째서 이 사람이 여섯째의 가슴을 파헤쳤다고 할까?]
두 사람은 눈짓을 주고받고 허리를 굽혀 창 아래로 다가가서 창
의 문틈으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집안에는 일곱 여덟 개의 등불이
켜져 있고 방 가운데는 하나의 큰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침대에
는 온몸이 벗겨진 한 명의 남자가 위를 향하여 반듯하게 드러누워
있었는데 가슴팍은 이미 해부되어 선혈이 계속 흐르고 두눈은 꼭
감고 있어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듯 했다. 그의 얼굴을 보니 바로
그날 화산에서 몸에 악 부인의 일검을 맞은 도실선이었다. 도곡오
괴들은 침대의 곁에 삥 둘러서서 한 명의 키가 작고 통통한 사람
을 향해서 외치고 욕지거리를 했다. 이 키가 작고 통통한 사람은
머리통이 상당히 컸다. 쥐수염을 기르고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
이 저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그의 두 손에는 새발간 피가 묻
어 있고 우측 손에는 날이 시퍼런 단도가 들려져 있었으며 칼에도
피가 잔뜩 묻혀져 있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도곡오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귀는 다 뀌었습니까?]
도곡오괴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다 뀌었읍니다. 여섯째는 방귀를 뀌었나요?]
그 뚱뚱하고 키가 작은 사람이 말을 했다.
[이 사람이 가슴에 칼을 맞자 당신들은 그에게 금창약을 붙이었
소. 그리고 천리 먼길을 마다않고 나에게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데려왔소. 당신은 도중에 너무 늦게 왔소 상처에는 딱정이가 앉았
고 경맥도 바로잡지 못하였소, 그의 생명을 구할 수는 있소. 그러
나 경맥이 서로 뒤틀려 설령 구한다손치더라도 무공이 전부 소실
되고 하반신을 쓸 수가 없소. 행동을 할 수가 없을 것이오. 이러
한 폐물을 낫게 한다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소?]
도근선은 말했다.
[비록 폐인이지만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소?]
그 키가 작은 뚱뚱한 자가 화를 내며 말했다.
[치료를 안 하면 안 하고 하면 낫게 합니다. 아예 폐인을 만들
어 놓고 이 늙은이가 어디에다 얼굴을 내밀 수 있겠소? 치료하지
않겠소! 치료하지 않겠소! 당신들은 이 시체를 들고 가시오. 이
늙은이는 절대로 치료하지 않겠소! 울화통이 치미는군! 울화가 치
밀어 죽을 지경이군!]
도근선은 말했다.
[당신이 금방 화가나 죽겠다고 했는데 왜 죽지 않았소?]
그 키가 작고 뚱뚱한 자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리고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벌써 당신들 때문에 울화토이 터져 죽었소. 당신들 내가
죽지 않은 줄 아시오?]
도간선이 말했다.
[당신이 내 여섯째를 살릴 수 없다면 그의 가슴을 파헤쳐 놓았
소?]
그 뚱뚱하고 키가 작은 자는 냉랭하게 말했다.
[내 별명이 무엇이라 부르는지 아시오?]
도간선이 말했다.
[당신의 개똥같은 별명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살인명의라고
합니다.]
악불군 부부는 내심 흠칫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똑같
이 이런 생각을 했다.
(알고보니 몸체가 괴상하게 샌긴 킥가 작고 뚱뚱한 자가 바로
그 이름도 쟁쟁한 살인명의로구나! 그래 맞다. 온 천하에서 의술
이 제일 정통한 사람은 강호에서 말들하기를 이 일평지가 첫째라
고 하지 않던가? 여섯 괴인들은 여섯째가 깊은 상처를 받았으니
그에게 고쳐달라고 애원하고 있구나.)
평일지는 냉랭하게 말했다.
[내 별명이 살인명의인 이상 사람하나 죽였다고 무슨 신기한 점
이라고 하겠소?]
도화선이 말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뭐 그리 어렵소? 나는 식은 죽 먹기요.
당신은 단지 사람을 죽일 뿐 고쳐내지도 못하면서 명의라는 두 글
자의 탈을 쓰고 있군!]
평일지는 말했다.
[누가 나보고 사람을 살릴 수 없다고 그러시오? 내가 이 곧 죽
을 사람의 가슴을 해부한 것은 경맥을 다시 접촉하고 치료한 다음
에 내공이 상처를 받지 않을 때와 똑같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
었소. 이것이야말로 살인명의의 위대한 기술이오.]
도곡오괴는 크게 기뻐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알고보니 우리 여섯째를 살리실 수 있군요! 정말로 미안하게
됐소.]
도근선은 말했다.
[당신은 왜...... 어째서 아직도 손을 쓰지 않소? 여섯째의 가
슴을 당신이 다 해부해 놓고 지금도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데 빨
리 손을 쓰지 않는다면 필시 죽고 말 것이오.]
평일지는 말했다.
[살인명의는 당신이요? 아니면 나요?]
도근선이 말했다.
[물론 당신이요, 그걸 뭘 물어볼 필요가 있오?]
평일지는 말했다.
[내가 살인명의인 이상 당신이 늦었는지 늦지 않았는지 어떻게
아시오? 또 내가 그의 가슴을 해부한 다음 나는 벌써 손을 썼을
것이나 당신들 다섯 명의 귀찮은 존재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멈추
지 아니하니 내 어떤 방법으로 치료를 하겠소? 내가 당신들을 보
고 양장군 사당에 가서 한참 놀고 다시 우 장군 사당과, 장 장군
사당에 가서 놀라고 했거늘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이오?]
도간선이 말했다.
빨리 손을 써서 상처를 치료해 주십시오. 당신은 지금 혼자서
떠들고 있지 않소? 왜 우리보고 떠뜬다고 말씀을 하시오?]
평일지는 또 다시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갑자
기 큰 소리로 외쳤다.
[바늘과 실을 가져 오너라!]
그가 갑자기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자 도곡오선과 악불군 부부
는 모두 깜짝 놀랐다. 한 사람의 키가 크고 삐쩍 마른 부인이 방
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한 개의 나무로 된 쟁반을 가지고 와서 일
언반구도 없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이 부인은 사십대 정도로
얼굴이 네모 났으며 귀가 크고 눈이 깊이 패이고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평일지가 말했다.
[당신들이 이 사람을 구해달라고 청했으니 나의 규칙은 벌써 당
신들에게 말했을 것이오. 그렇지요?]
도근선이 말을 했다.
[맞습니다. 우리도 벌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고 맹세도
했소. 누구를 죽이든간에 분부만 하시오. 우리 여섯 형제는 그 명
에 따를 것이오.]
평일지는 말했다.
[그렇다면 됐소. 지금은 아직 누구를 죽여야할 지 생각하지 않
았으니까 생각이 나면 그때 당신들에게 말을 하겠소. 당신들은 모
두 한쪽 옆에 서 계시오. 한 마디도 말을 하면 아니되고 약간의
말소리만 들려도 난 바로 손을 멈출 것이고 이 사람이 죽든살든간
에 난 더 이상 책임을 지지 않겠소.]
도곡의 육형제는 어려서부터 같은 방에서 같이 자고 같은 탁자
에서 밥을 먹고 잠시도 입을 쉬지 않고 꿈 속에서도 서로 다툼을
멈추지 아니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모두들 배에 하고 싶은
말을 가득 채우고 금방이라도 중얼중얼대고 싶었으나. 한 마디라
도 말을 하면 여섯째의 생명이 없어져 가는 판이니 하는 수없이
참고 있었고 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꼼짝달싹하지 않고 쳐다
만 보고 있었다.
평일지는 쟁반에서 큰 바늘을 집더니 투명하고 굵은 선을 뒤에
집어 넣어 도실선의 가슴을 해부해서 벌어진 상처를 봉하기 시작
했다. 그의 열 개의 손가락의 마디는 굵고 또 짧았다. 마치 열 개
의 오이토막 같았다. 그러나 동작의 민첩하고 바름이란 마치 바늘
이 날으는 것 같아 순간 사이에 구촌(九寸)의 길이에 달하는 사처
를 꿰맸다. 상처를 다 꿰멘 다음에 또한 여러 개의 자기병 속에서
약가루와 약물을 꺼낸 다음에 상처에다 발라주고 또 도실선의 입
술을 벌리고, 그 속에다 몇 종류의 약물을 주입시켰다. 그리고 나
서 젖은 걸레로 그의 몸에 있던 피를 닦았다. 키가 크고 삐쩍 마
른 부인은 계속 옆에서 도와주고 바늘을 집어주고 약을 집어주는
데 동작이 매우 숙련돼 보였다.
평일지가 도곡오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다섯 사람의 입술은
꾸물꾸물 움직이고 모두가 급히 말하려고 했다.
[이 사람은 아직 살아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살아난 다음 당신
들은 그대 가서 말하시오.]
다섯 사람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은 매우 난감한 듯했
다. 평일지는 '험' 소리를 내고 한쪽 옆에 앉았다. 그 부인은 바
늘과 실과 약들을 모두 치웠다. 악불군 부부는 창 밖에 숨어서 숨
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다. 이때 실내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창밖에서 만약에 약간의 움직임이라도 있다면 곧 안에 있
던 많은 사람은 금방 눈치를 챌 것이다.
한참 지난 뒤에 평일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도실선의 몸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손바닥을 내밀어 도실선의 머리 정수리
백회혈(百會穴)에 강한 충격을 가했다.여섯 사람은 '아!' 하고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 여섯 명 중에 다섯 명은 도곡오선이요,
다른 한 사람은 침대에 드러누워 지금까지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한 도실선이었다. 도실선은 호흡을 한번 내쉬고 바로 앉았다.
그리고 욕을 해댔다.
[제미랄 놈! 네놈은 왜 내 머리를 때리느냐!]
평일지는 욕을 했다.
[제미랄 놈. 이 어르신께서 진기로 너의 백회혈을 관통시키지
않았다면 네가 어찌 빨리 나을 수 있었단 말이냐?]
도실선이 말했다.
[제미랄 놈! 이 어르신이 빨리 낫고 천천히 낫고 네놈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평일지는 말했다.
[이런 제미랄놈 봤나? 네가 만약에...... 네가 천천히 낫는다면
이 살인명의의 솜씨와 명성이 실추되지 않겠느냐? 네가 만약에 일
어나지 않고 내 방에 드러누워 있다면 꼴불견이 아니냐?]
도실선은 말했다.
[제미랄 놈! 네가 정녕 내가 싫다면 이 어르신네께서 가 주지
뭐 그렇게 어려울 게 있느냐?]
그는 몸을 벌렁 일으켜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 도곡오선은 그가
간다고 말을 하고 가버리자 이렇게 신속하게 몸이 나으니 모두들
놀라고기뻐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 문을 나가 버렸다.
악불군 부부는 마음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평일지의 의술은 과연 듣던대로다. 그의 내력은 정말로 범상치
않다. 조금 전에 도실선 정수리 백회혈에 가한 동작은 정말 대단
했다!)
도곡육선이 멀리 사라지자 평일지는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다
른 방으로 들어갔다.
악불군은 자기 아내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고
살며시 빠져나갔다.
그 집에서 수십 장 떨어진 곳에 와서야 비로소 빠른 걸음으로
당났다.
악 부인이 말했다.
[그 살인명의 무공은 정말 무섭군요. 그의 행동을 보니 옳은 일
을 할 줄 모르는 사악한 인물 같아요.]
악불군은 말했다.
[도곡육괴가 살아 있는 이상 이 세상에는 좋은 일보다 시끄러운
일이 더 많은게 당연하오. 우리는 빨리 이곳을 떠납시다. 그들과
시비를 일으킬 이유가 없지 않소?]
악 부인은 '응' 하는 콧소리를 냈다. 그녀는 이 몇개월 사이에
받은 고통과 서러움이 너무도 많았다. 남편이 오악검파중의 일파
인 화산파의 장문인인데도 이리저리 피해다녀야만 되는 처지가 되
니 천하가 비록 크다고 해도 그들의몸을 둘 곳이 없었다. 그들
부부는 어떤 말이든지 주고받는 사이였으나 화제가 도곡육선에 이
르면 서로 피하고 말하지 않았다.
이때 도실선이 결국 죽지 않았음을 생각하자 기쁘기도 했고 서
운하기도 했다. 기본 이유는 도곡육선과 원수관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양 장군의 사당에 도착해 보니 악영산과
임평지, 노덕약 등 모든 제자들이 모두 뒷켠에 모여 기다리고 있
었다.
악불군은 말했다.
[배로 돌아가자.]
모든 사람들이 이미 도곡오괴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을 알고 있
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총총히 배로 돌아갔다.
닻을 올리고 배가 출항하려고 할 때 갑자기 도곡오선이 일제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호충! 영호충! 너는 어디에 있는가?]
악불군 부부와 화산의 여러 제자들의 얼굴색이 일제히 변했다.
여러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부둣가로 달려왔다. 도곡오선 외에 또
한 사람은 바로 평일지였다. 도곡오선은 악불군 부부를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환호했다. 다섯
사람은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올랐다.
악 부인은 즉시 장검을 뽑아 힘을 다해 도근선의 가슴을 향해
내리쳤다. 악불군 역시 이미 장검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쨍
그랑 소리를 내면서 아내의 칼날을 제지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뱃머리가 움직여 도곡오선은 이미 뱃머리에 서 있었다.
도근선은 큰 소리로 말했다.
[영호충! 어디 숨어 있는가? 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가?]
영호충은 대노해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네놈들을 무서워하는 줄 아느냐? 누가 피했단 말이냐?]
바로 이때 선체가 움직이며 뱃머리에또 한 사람이 늘어났다.
바로 살인명의 평일지였다.
악불군은 내심 깜짝 놀랐다.
(나와 사매가 배에 막 돌아왔는데 이 땅달보가 왜 뒤따라왔지?
나와 우리 두 사람이 창 밖에서 그들의 행적을 몰래 훔쳐보았음을
알고 있는 것일까? 도곡오괴들도 처치하기 곤란한데 더욱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 달라 붙었으니 우리 부부의 생명은 오늘 이 개봉땅
에서 사라지나 보다!)
평일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분이 영호 현제이시오?]
말투가 심히 겸손했다.
영호충은 천천히 뱃머리로 걸어가 말했다.
[제가 영호충입니다. 각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또한
저에게 무슨 하문할 일이 있으신지요?]
평일지는 그를 쳐다보고 위 아래를 가름질하며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당신 상처를 치료해주라고 부탁하셨소.]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식지로 그의 맥을 짚
는 순간 갑자기 양쪽 눈썹을 찌푸리며 '억' 하는 소리를 냈다. 한
참 후에 양쪽 눈썹이 찡그려지며 가운데로 모아졌다. 그는 다시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왼손으로 쉬
지 않고 머리를긁적긁적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한참 후에 한 손으로 영호충의 오른손을 잡고 맥을 짚었다. 그
러다가 갑자기 하품을 크게 하며 말했다.
[그거 참 이상하구나! 이 몸이 평생 이런 경우를 만나지 못했는
데!]
도근선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오? 그가 심경(心經)에 상처를 입
어 나는 벌써 내공으로 그를 치료해준 적이 있소.]
도간선도 말했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그가 심경에 상처를 받다니요 틀림없이
폐경(肺經)이 온전치 못해 그러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나의 진기
로 그의 폐경의 여러 혈도를 통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이놈이
어찌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소?]
나머지 도곡오괴는 남에게 뒤질세라 너도나도 자기가 잘 했다고
고집을 세우며 자기의 공을 치사했다.
평일지는 튼 소리로 꾸짖었다.
[헛소리들 말아라! 헛소리 말아!]
도근선도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오! 어째서 우리 다섯 형제보
고 헛소리를 한다고 하시오?]
평일지는 말했다.
[그건 너희 다섯 형제가 헛소리를하고 있는 것이다. 영호 현제
의 체내에 비교적 강한 두 줄기의 진기가 있는데 아마 불계화상이
주입시킨 것 같고 또 다른 여섯 줄기의 비교적 약한 진기가 있는
데 아마 내 생각에는 당신네 여섯 형제들의 것 같소.]
악불군 부부는 서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 평일지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가 맥을 짚자
마자 체내에 여덟 개의 서로 다른 진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낼 뿐
만 아니라 그 진기가 어디서 연유되었는지를 알아맞추는구나?)
도간선은 화가 나 말했다.
[우리 여섯 사람의 것이약하고 불계대머리의 것이 강하다고?
틀렸어! 우리들 것이 강하고 그의 것이 약한 거야!]
평일지는 냉소하며 말했다.
[창피한 줄도 모르는군! 그 한 사람의 두 줄기 진기가 너희 여
섯 사람의 진기를 누르고 있는데 그래도 너희들 것이 강하다고 우
겨댈거야? 불계화상, 이놈의 늙은이는 무공은 강하지만 너무 멍청
해! 제기랄놈! 늙어빠진 놈!]
도화선은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영호충의 우측손의 맥을 짚고
말했다.
[내가 맥을 짚어본 바로는 아무래도 도곡육선의 진기가 불계화
상의 진기를 눌러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어......]
그러다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손가락이 사람에게 물린 것
처럼 얼얼했다.
[아이쿠! 제기랄!]
평일지는 껄껄 웃으며 매우 의기양양해 했다. 여러 사람은 그가
상승내공으로 영호충의 몸을 빌려 힘을 넣어 매섭게 도화선을 놀
려주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평일지는 한참 웃더니 얼굴색이 갑자기 엄숙해지며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선찬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누구도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
도엽선은 말했다.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오. 우리가 왜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하
오?]
평일지는 말했다.
[너희들은 맹세를 했지? 나를 위해 사람 하나를 죽이겠다고. 그
렇지 아니한가?]
도지선은 말했다.
[맞소. 우리는 단지 당신을 위해 사람 하나를 죽이기로 했지.
당신 말을 듣는다고는 하지 않았소.]
평일지는 말했다.
[만약 내가 너희들에게 도실선을 죽이라고 한다면 너희들은 어
떻게 할 생각이냐?]
도곡오선은 일제히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 이치가 어디 있소? 당신은 그를 살려 주었는데 어찌 우리
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라고 하오?]
평일지는 말했다.
[당신 다섯 사람은 나에게 어떤 맹세를 했는가?]
도근선은 말했다.
[우리들은 승낙을 했지. 만약 당신이 우리들 형제인 도실선을
살려 준다면 당신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죽이라고 분부하면 누
구든지 간에 그대로 따를 것이고 절대로 핑계를 대지 않는다고 했
지.]
[맞소. 그럼 내가 당신들의 형제 하나를 구해 주었는가? 구해주
지 않았는가?]
도화선은 말했다.
[살려 주었지요.]
평일지는 말했다.
[그럼 도실선은 사람인가? 사람이 아닌가?]
도엽선은 말했다.
[물론 사람이지. 아니면 그가 귀신이란 말이오?]
평일지는 말했다.
[좋다. 그럼 내가 너희들에게 사람 하나를 죽이라 하겠다. 그
사람은 바로 도실선이다.]
도곡오선은 서로를 텨다보고 있었다. 이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일이었으나 반박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평일지는 말했다.
[너희들이 정말 도실선을 죽이고 싶지 않다면 어느 정도 융통성
은 있다. 너희들은 선창에 들어가 잔소리 말고 앉아 있어라.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하거나 움직이면 안 된다.]
도곡오선은 연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다섯 사람 모두 두 손을
무릎에 대고 다소곳이 앉아 잠을 자라고 하면 자고 말을 잘 들으
라고 하면 말 잘 듣는 어린애들처럼 평일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
었다.
영호충은 말했다.
[평 선배님, 제가 듣건대 당신은 사람을 고쳐 줄 때 어떤 규칙
이 있다고 했읍니다. 사람을 살려낸 후 그 사람에게 당신을 대신
해서 한 사람을 죽이라고 한다면서요?]
평일지는 말했다.
[그 말이 맞네. 정말 그런 규칙이 있지.]
영호충은 말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
은 나를 치료할 필요가 없읍니다.]
평일지는 이 말을 듣자 하하하 소리를 내며 머리끝에서 발끝까
지 영호충의 모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치 어떤 괴물이나 짐승
을 관찰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그는 말했다.
[나는 치료하지 않겠다. 자네의 병이 중하여 나는 고칠 수가 없
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내가 치료할 수 있다손치더라도 자네는 나
를 위해 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 아닌가? 난
결코 자네를 치료해주지 않겠다.]
영호충은 악영산의 자기에 대한 정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 이
후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세상에서 사람을 회생시킬 수 있다는 명의라고 소문이 자
자한 사람이 자기 병이 이미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단정하자, 자
기도 모르게 처량한 생각이 엄습해 왔다.
악불군 부부는 서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살인명의를 움직여 호나자가 있는 곳에 오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은 영호충과 어떤 관계일까?)
평일지는 말했다.
[영호 현제, 자네의 체내에는 여덟 줄기의 이상한 지기가 있는
데 토해낼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고 감화시킬 수도 없고 네
압할 수도 없다네. 정말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네. 내가 부탁
을 받아 자네를 치료한다고 하여 있는 힘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니네. 실질적으로 자네의 병의 원인은 진기와 관계가 있어 침술
이나 약종류로 어떤 효과를 바랄 수는 없네. 이 몸이 의술을 베푼
이래 지금까지 이런 병세는 본 적이 없네. 나는 무능하여 힘을 쓸
수 없으니 정말로 창피할 뿐이네.]
그러면서 품 속에서 자기병 하나를 꺼내 그 속에서 주홍색의 알
약 열 알을 끄집어 내며 말했다.
[이 열 알의 진심리기환(鎭心理氣丸)은 명귀한 약재가 많이 들
어 있고 만들기도 쉽지 않다네. 자네가 십 일마다 한 알씩 복용한
다면 백 일 동안 생명을 이어갈 수 있네.]
영호충은 두 손으로 받아들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평일지는 몸을 돌려 언덕으로 오르려고 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병 속에 두 알이 남았으니 이것마저 자네에게 주겠네.]
영호충은 받지 않으며 말했다.
[선배님이 이렇게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니 틀림없이 그 약효가
뛰어날 것입니다. 저를 주느니 남기셨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
오. 제가 조금 더 산다 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읍니까?]
평자리지는 고개를 반쯤 위로 빼고 그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생사를 초월하는 자가 진정한 사내대장부라네. 어쩐지 어쩐지
아...... 아깝다! 아가워! 미안하고 창피하다!]
그러면서 큰 머리를 흔들흔들 거리며 언덕을 뛰어올라 바른 걸
음으로 사라졌다.
그는 온다고 하면 오고 간다면 가는 사라이라 화산파의 장문인
은 마치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은 듯했다.
악불군은 무척 화가 났다. 그러나 선창에는 아직도 다섯 명의
목숨을 앗자가는 온신(瘟神)들이 앉아 있어서 어떻게 그들을 쫓아
보낼까를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곡오선들은 앉아 꼼짝도 하
지 않고 눈으로 코를 보고 코는 배꼽을 보고 있었다. 마치 늙은
중이 정좌하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선장에게 명해 배를 떠
나가게 한다면 이 다섯 명의 전염병들을 함께 데려가야 하고 만약
에 배가 떠나지 않는다면 그들이 언제까지 앉아 있을런지 알수 없
었고 또 그들이 발작하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악 부인이 도실
선에게 일검을 가한 복수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노덕약, 악영산 등은 친히 그들이 사람을 찢어 죽이던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때의 무서움이 남아 있어 각자 서로의 얼
굴만 쳐다볼 뿐이고 그 누구도 다섯 명을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
다.
영호충은 몸을 돌려 선창으로 들어가며 도곡오선에세 말했다.
[보시오. 당신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도근선은 말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영호충은 말했다.
[우리는 곧 배를 띄워야 하오. 빨리 언덕으로 오르시오.]
도간선은 말했다.
[평자리지가 우리들에게 선창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앉아 있으
라고 했다. 아무 말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고 했어. 그렇지 않으
면 우리리 형제를 죽이라고 할거야. 그래서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것이고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오.]
영호충은 웃음이 나와 참을 수 없었다.
[평 의원께선 벌써 배를 떠나 언덕에 오르셨소. 당신들은 말을
할 수도 있고 움직일 수도 있소.]
도화선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안 돼!안 돼! 만약 그가 우리가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본다면
정말로 일이 크게 벌어질 거야.]
갑자기 언덕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 같지도 않고 귀신 같지도 않은 다섯 놈은 어디 있느냐?]
도근선은 말했다.
[누가 우리를 부르는 것 같은데!]
도간선은 말했다.
[어째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라고 하느냐? 우리가 어째서 사람
같지도 않고 귀신 같지도 않단 말이냐?]
그 사람은 또 외치듯 말했다.
[여기에 사람 같지도 않고 귀신 같지도 않은 물건이 또 하나 있
다. 평 대국께서 그를 치료해 주셨다. 너흴르이 이 물건이 필요하
냐? 필요하지 않느냐? 만약 내가 손을 놓는다면 이 물건은 즉시
황하강물 속에 빠뜨려져 물고기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도곡오선은 그 소리를 듣자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나란히 선
창을 빠져나가 언덕에 섰다.
평일지가 상처를 꿰맬 때 옆에서 도와주던 중년부인이 똑바로
서서 왼손을 쭉 내밀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아귀엔 도실선이 멱살
을 잡힌 채 대롱대롱 들려져 있었다. 이 부인의 얼굴은 병색이 있
는 듯했으나 힘은 좋아서 한 손으로 도실선을 들고 있으면서도 아
무 것도 들지 않은 듯 조금도 힘겨워하지 않았다.
도근선은 급히 말했다.
[물론 필요하지! 우리가 막내를 받아들이지 않을 까닭이 있겠
어?]
도간선은 말했다.
[너는 어째서 우리보고 사람 같지도 않고 귀신 같지도 않다고
했느냐?]
도실선은 매달린 채 말했다.
[이 여편네의 꼴을 보라구! 우리보다 더욱 사람 같지도 않게 생
겨 먹었잖아!]
원래 도실선은 평일지가 상처를 꿰매주고 영단묘약(靈丹妙藥)을
복용시킨 후 그의 정수리를 한대 쳐 진기를 집어넣어 주자 바로
일어나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피를 너무 쏟은 끝이라 또 혼절했
던 것이다. 그러자 그 중년부인이 그를 다시 집어들고 집으로 돌
아갔던 것이다.
그의 상처는 중했지만 주둥이는 여전히 살아 잇어서 그 누구에
게도 지지 않았다. 그 부인이 냉랭히 말했다.
[당신은 평 의원께서 평생 무엇을 제일 무서워하고 있는지 아시
오?]
도곡육선은 일제히 말했다.
[모르오. 그가 누구를 무서워 하오?]
그 부인은 말했다.
[그는 마누라를 제일 무서워하오.]
도곡육선은 깔깔 웃으며 일제히 말했다.
[그렇게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땅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정말로 마누라를 무서워 한다니. 하하하! 정말 웃기는구나! 정말
웃기는 일이야!]
그 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 내가 바로 그의 마누라야!]
도곡육선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부인이 말했다.
[내가 어떤 분부를 하면 그 사람은 감히 듣지 않고는 못배기지.
내가 누구를 죽이라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너희들에게 죽이라고
할 것이다.]
도곡육선은 일제히 말했다.
[녜, 녜, 그렇겠지요. 평 부인께선 누구를 죽이고 싶소?]
그 부인의 눈빛을 선창을 향했다가 악불군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악 부인을 바라보더니 악영산에게로 눈빛이 흘러갔다. 그리고 화
산파의 여러 제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모든 사람은 그녀의 눈빛과
마주치며 몰골이 송연해졌다. 모든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이
다. 이 추하게 생기고 핏기가 하나도 없는 그 부인이 누구를 지적
하면 도곡육선이 그 사람을 즉시 찢어 죽인다는 사실을......
악불군 같은 고수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
부인은 눈빛을 천천히 거두어들이고 다시 도곡육선을 쳐다보았다.
여섯 형제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 부인이 '흥' 하고 코웃음 치
자 도곡육선이 일제히 말했다.
[녜, 녜.]
그 부인은 '쳇!' 하는 소리를 냈다. 도곡육선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녜녜, 녜녜.]
그 부인이 말했다.
[나는 아직 누구를 죽이겠다고 작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남
편은 말하기를 이 배 안에는 영호충 영호 공자가 계시는데 내 남
편은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하더군. 너희들은 그를 잘 모시도록
해라. 그가 죽을 때까지 모셔야 한다. 그가 뭐라고 하면 그 말에
따르고 절대 반항하면 안 된다.]
도곡육선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보살피라고요?]
평 부인은 말했다.
[맞아,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정중히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백 일 밖에 살지 못하니 너희들은 그 백 일간 그의 모든 분
부를 따라야 한다.]
도곡육선은 영호충이 백 일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에 모두 기뻐
했다. 그리고 일제히 말했다.
[백 일 동안 그를 보살핀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
영호충은 말했다.
[평 선배님의 호의에 몸둘 바를 모르겠읍니다. 도곡육선의 보살
핌을 받을 수 없읍니다. 그들 보고 배에서 내리게 해주십시오. 우
리는 떠나야 합니다.]
평 부인의 얼굴엔 아무런 희노애락의 표정이 없었다.
[평 대부께서 말씀하시길 영호 공자의 병은 이 여섯 사람이 만
들었고, 평 대부가 손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놓았고 그래서 체면이
손상되고 또한 부탁받은 사람에게 할 말이 없게 만들었으니 이 여
섯 멍청이들에게 중한 벌을 내려야 한다고 하셨오. 내 남편은 이
들이 도실선을 죽이도록 명령을 내려야 하지만 아량을 베풀어 영
호 공자를 모시게 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했다.
[이 여섯 멍청이들이 영호 공자의 명을 거역한다면 평 대부게서
는 즉시 여섯 중의 한 명의 목숨을 요구할 것이오.]
도화선은 말했다.
[영호형의 상처는 우리들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니 우리가 그를
보살핀다한들 그것이 뭐 대단한 일이겠소? 대장부는 사리를 분명
히 해야하오.]
도지선이 말했다.
[사내대장부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도 불사하는데 하
물며 그의 상처를 좀 보살피는 것인데요, 뭘.]
도실선도 말했다.
[나의 상처도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하고 그도 보살핌이 필요하
니 서로서로가 좋은 일이지.]
도간선은 말했다.
[하물며 백 일인데 뭐. 날짜도 제한되어 있고.]
도근선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옛사람들은 친구가 병이 나면 천리도 마다 않고 달려간다고 했
소. 우리 형제들은 불의를 보고 칼을 들어 서롤 돕는데......]
평 부인은 눈을 흘기더니 돌아갔다.
도지선과 도간선은 도실선을 받아 들고 배로 뛰어들었다. 도근
선 등도 따라들어오면서 외쳤다.
[충항하시오! 출항하시오!]
영호충은 그들과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섯 도형께서 나와 동행을 하실 때 우리 사부님과 사모님께
반드시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 첫번째의 분부입니다.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들의 보살핌을 받지 않겠소.]
도엽선은 말했다.
[도곡육선이 정인군자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야. 당신
사부와 사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 아들 손자를 보고도 우리는
깍듯이 예를 올려야해.]
영호충은 자칭 정인군자라고 하는 소리를 듣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악불군에게 말했다.
[사부님, 이 여섯분이 우리와 함께 동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사
부님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악불군은 생각했다.
(이 여섯 사람은 지금 화산파 사람을 못살게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같은 배에 있으면 마음속의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그들을 쫓아보낼 수는 없다. 이 여섯 명의 무공이 높고 정
신이 돈 사람 같기 때문에 지혜를 짜내 상대할 수도 있을 것이
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그들이 같이 가는 것은 좋으나 나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
니 그들이 떠들거나 다투지 않도록 해다오.]
도간선이 말했다.
[악 선생의 그런 말은 잘못이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왜
주둥이를 다물고 살아야 하오? 이 주둥아리는 밥먹는 것 외에 말
을 해야 하오. 왜 귀가 두 개 있는지 아시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함이오. 당신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면 그것은 조물주
가 당신의 입을 만든 것에 반발하는 것이고 두 귀를 만들어 준 데
에 반발하는 것이오.]
악불군은 이 사람과 말을 하면 다섯 형제가 끼어들어 언제까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힘으로나 입으로나 그들을 이길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 사공, 배를 띄우게.]
도엽선이 말했다.
[악 선생, 당신이 사공들에게 배를 띄우라고 말씀하실때 어째서
입을 벌려 말을 하는 것이오. 정말 당신이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면 마땅히 손짓으로 그들에게 배를 띄우라고 해야하지 않겠소?]
도간선은 말했다.
[사공들이 뒷편에 있고 악 선생은 중앙에 있으니 손짓을 해도
사공들은 볼 수가 없어. 그러니까 입으로 말한 것이지.]
도엽선이 말했다.
[그렇다면 뒷쪽으로 가서 손짓을 하면 되잖아?]
도화선은 말했다.
[만약 사공들이 그의 손짓을 알아듣지 못하고 배를 띄우라는 뜻
을 배를 뒤집으라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그건 큰일이야.]
도곡육선들의 말싸움이 계속되는 한 듯 영호충과 도곡육선을 둘
러 본 후 서로 똑같은 일을 생각했다.
(평일지가 말하기를 사람에게 부탁을 받고 영호충을 고쳐주러
왔다는데 아마도 부탁을 한 사람은 무림에서 지위가 높을 것이다.
화산파 장문인을 안중에 주지 애으면서도 화산파의 일개 제자에게
예를 다하니 누구 부탁을 받고 충아를 치료해 주려고 했던 것일
까? 그는 불계화상을 제기랄놈! 늙어빠진 놈이라고 욕했으니 그것
으로 보아 불꼐화상의 부탁 같지도 않구나!)
옛날 같았다면 그 부부는 벌써 영호충을 불러다가 자세히 물어
보았을 것이나, 지금은 사제간에 틈이 생겨 두 사람은 영호충에게
물어볼 처지가 못 되었다.
악 부인은 강호에서 첫째 명의라고 평이 난 평일지마저 영호충
의 병을 치료할 수 없고 그가 단지 백 일 동안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는 말을 생각해내곤 마음이 괴로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
렸다.
배는 순풍에 돛단 듯이 빠르게 나아가 그날 저녁에는 난봉(蘭
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했다.
사공들은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었다.
각자 밥을 먹으려고 할 때 갑자기 언덕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말씀 좀 묻겠읍니다. 화산파의 여러 영웅들께서 이 배에 타고
계십니까?]
악불군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도지선이 얼른 대답했다.
[여섯 분의 대영웅 도곡육선과 화산파의 인물들이 이 배 안에
있읍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사람은 기뻐서 말했다.
[아! 참 잘 되었읍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낮 하루밤을 기다
렸읍니다. 자자, 빨리 가져와라.]
열다섯 명의 장정들이 두 줄로 나누어 언덕에 있는 한 초가집에
서 걸어 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손에는 붉은 칠을 한 상자가 하나씩 들려 있었
다.
빈손으로 있던 한 푸른옷을 입은 사내가 배 앞으로 걸어 나왔
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의 상전께서는 영호소협이 몸이 불편하시다는 말을 듣고 심
히 걱정하고 계십니다. 원래 친히 와서 문안을 여쭈어야 하겠지만
이 시간에 맞추어 올 수가 없어 비둘기를 날려 우리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읍니다. 소인들에게 명하기를 정중한 예를 올리라고 하셨으
니 영호소협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십시오.]
사내들은 일제히 뱃머리로 걸어와 십여 개의 상자를 배 위에 올
려놓았다.
영호충은 의아해서 말했다.
[귀하의 상전께서는 누구십니까? 이렇게 대접을 하시니 영호충
은 부끄럽고 몸둘바를 모르겠읍니다.]
그 사내는 말했다.
[영호소협게선 덕망이 높으시니 틀림없이 건강이 회복되실 것입
니다. 그러니 몸을 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예를 행한 후 십여 명의 사내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영호충은 말했다.
[누가 나에게 예물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이상하고 희
한하구나.]
도곡오선은 벌써 참을 수 없어 일제히 말했다.
[먼저 열어보고 구경이나 합시다.]
다섯 사람의 손과 발이 일제히 붉은 칠을 한 상자의 뚜껑을 열
어젖혔다. 그 상자에는 맛있는 간식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고 어떤
것은 닭고기 쇠고기들이었고, 더우기 인삼 녹용이니, 제비둥지,
은이(銀耳)버섯 같은 진귀한 약재가 들어있었다.
마지막 두 상자에는 크고 작은 금덩이와 은덩어리가 담겨져 있
었는데 틀림없이 영호충의 노비에 쓰라고 한 것이었고 그들이 변
변치 않다고 한 이 물건들은 정말 엄청나게 귀하고 값비싼 것이었
다.
도곡오선들은 과자와 꿀을 입힌 과일들을 보자 넝큼 손에 들어
입에 쑤셔넣으며 크게 외쳤다.
[맛있다! 참 맛있군!]
영호충은 십여 개의 상자를 이리뒤적 저리뒤적해 보았으나 편지
나 명함 같은 것이 없었고, 또한 어떤 흔적이나 꽃무늬도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 선물을 보냈을까?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를
찾지 못해서 영호충은 악불군을 향해 말했다.
[사부님 이 제자는 정말 무엇이 무엇인지 통 모르겠읍니다. 이
예물을 보낸 사람은 악의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또 장난인 것 같
지도 않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간식을 들어 먼저 사부님과 사모님께 드린 다
음 차례로 여러 사제와 사매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악불군은 도곡육선이 이런 음식을 먹고 아무런 이상이 없자, 이
음식에는 어떤 독약이 들어 있지 않음을 알고 영호충에게 말했다.
[너의 강호친구들 중에 이 일대에 사는 사람이 있느냐?]
영호충은 한참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없읍니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여덟 팔의 말이 강가를 따라서
달려오면서 한사람이 외쳤다.
[화산파 영호소협께서 이곳에 계십니까?]
도곡육선은 기쁜 나머지 환호성을 지르며 말했다.
[예, 여기 있읍니다.! 여기 있읍니다! 또 무슨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십니까?]
그 사람은 외쳤다.
[저의 방주께서는 영호소협이 이곳 난봉에 오신다는 말씀을 듣
고 또한 영호서협께서 약주를 좋아하신다는 소문을 익히 아시고
우리들에게 명해서 열다섯 단지의 오래 묵은 술을 보내라 하셔서
여기 가지고 왔읍니다. 영호소협게선 배에 놓고 잡수십시오.]
여덟 마리의 말은 가까이 달려왔다 말 한 필마다 두 단지의 술
이 실려져 있었다. 술단지 중의 어떤 것들은 극품공주(極品貢酒)
라고 씌어져 있었고, 어떤 단지 위에는 삼과량분(三鍋良汾)이라고
씌어져 있었으며 또 어떤 것에는 소흥장원홍(紹興狀元紅)이라고
씌어져 있었으며 이 열다섯 단지의 술들은 각기 달랐다.
영호충은 많은 술을 보자 누구보다 기뻐했다. 급히 뱃머리로 나
가 읍을 하며 말했다.
[저의 견문이 좁아 그러하오니 당신들은 어느 방에 속하는지 알
려주십시오. 그리고 형씨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본방의 방주는 수차 분부하셨읍니다. 절대로 영호소협에겐 신
분을 밝히지 말라고요. 그 어르신은 이 약간의 선물을 드리면서
변변치 못한 선물을 주면서 신분을 밝히기가 뭐하라고 말씀하셨읍
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좌측 손으로 손짓을 하자 바로 같이 온 사내들은 술단지를
하나씩 하나씩 옮겨 와 뱃머리에 놓았다.
악불군은 선창에서 이 여덟 명의 사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두가 손놀림이 빠르고 한 손에 술단지 하나씩을 들고도 가볍
게 몸을 흔드니 뱃머리에 올라섰다. 이 여덟 명의 사내들은 특별
히 어떤 무공을 갖춘 것 같지 않았고 틀림없이 여덟 명이 한 문파
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같은 방이지만 서로 소속이다른
것 같았다. 여덟 명은 열여섯 단지의 술을 뱃머리에 올려놓고 고
개를 숙여 영호충에게 절을 한 다음 곧바로 말에 올라타고 가버렸
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 이 일은 정말 이상하군. 누가 이 제자하고 장난을 치
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술을 보내온 것 같아요.]
악불군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전백광이 아닐까? 또 불꼐화상이 아닐런지?]
영호충은 말했다.
[맞습니다. 이 두 사람의 행적이 예측을 불허하니 혹시 그들일
지 모르겠읍니다. 이봐요, 도곡육선. 여기 많은 술이 있소. 당신
들은 마실거요? 안 마실 거요?]
도곡육선은 웃으며 말했다.
[마시지! 마셔! 안 마실 이유가 어디 있는가?]
도근선과 도간선 두 사람은 술단지를 들고 와 흙으로 봉한 뚜껑
을 열고 그릇에 술을 따랐다. 과연 향기가 좋았다.
여섯 사람은 영호충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꿀꺽꿀꺽
마셔댔다.
영호충은 술을 한 그릇 퍼 악불군에게 갖다주며 말했다.
[사부님, 맛 좀 보십시오. 이 술은 정말로 괜찮습니다.]
악불군은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음.]
노덕약은 말했다.
[사부님, 사람을 조심하고 음식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술은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술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겠읍
니까?]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아, 아무래도 조심해야겠다.]
영호충은 향기로운 술내음이 코에 닿자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웃으며 말했다.
[제자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술에 독이 있든 없든 그
것이 대수이겠읍니까?]
두 손에 술잔을 받쳐들고 몇 모금에 한 그릇을 싹 비워버렸다.
그리고 감탄하며 말했다.
[좋은 술이다! 좋은 술이다!]
언덕에서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술이야! 암 좋은 술이야!]
영호충은 눈을 들어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버드나무 아래
에 옷을 남루하게 입은 별볼일 없는 서생(書生)이 오른손에 한 자
루의 낡은 부채를 들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배에서 날아오는 술
내음을 맡고 있었다.
[과연 좋은 술이야!]
영호충은 웃었다.
[형씨께선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어찌 이 술의 좋고 나쁨을 아
시오?]
그 서생은 말했다.
[이 술냄새를 맡아보니 이 술은 육십 이 년 동안 묵었던 삼과두
분주(三鍋頭汾酒)라는 걸 알 수 있소. 그러니 어찌 안 좋을 리 있
겠읍니까?]
영호충은 녹죽옹으로부터 가르침을 맏아 주도의 지식이 이미 상
당한 경지에 올라 있어 이 육십 년 정도 묵은 삼과두보주라는 것
을 벌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않고 많지도 않은 딱 육십이 년 이라는 기간을 알
아 맞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 서생이 조금 과장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웃으며 말했다.
[형씨께선 싫지 않으시다면 좀 건너 오셔서 몇 잔을 드시지요?]
그 서생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당신과 나는 평소 알지 못하고 오다가다 만났을 뿐인데 술내음
을 맡는 것도 미안한 일이거늘 어찌 다시 술을 마시려고 하겠소?
그건 절대 안 되는 일이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 서생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사해지내(四海之內)는 모두 형제라 하지 않았소? 형씨의 말씀
을 들으니 술에 있어서는 선배인 것 같소. 제가 가르침을 청하고
자 하니 배로 건너오셔서 한 잔 드시기를 사양하지 마시오.]
그 서생은 천천히 건너왔다. 아주 깊게 읍을 한 후 말했다.
[저의 성은 조(祖)이고 조상할 때 조씨이며 그 옛날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조적(祖?)이라는 분이 바
로 저의 먼 할아버지외다. 저의 이름은 천추(千秋)라고 합니다.
천추라는 뜻은 백세천추(百歲千秋)라는 뜻이지요. 감히 묻건데 형
씨께선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영호충은 말했다.
[저의 성은 영호라는 복성이고 이름은 외자로 충자입니다.]
그 조천추는 말했다.
[성이 참 좋습니다 성이 참 좋아요! 이름도 좋고요!]
말을 하면서 발판을 건너 뱃머리에 올라섰다.
영호충은 잔잔히 웃으며 생각했다.
(내가 술을 권하니 무조건 좋아 보이는 모양이군!)
그는 즉시 술 한 그릇을 떠서 조천추에게 건네주었다.
[자 한 잔 드시오.]
조천추는 나이가 오십여 세 되어 보였으며 얼굴색은 누렇고, 주
독이 올라 붉게된 코하며, 촛점이 흐려져 있는 두눈에 드문드문
몇 가닥의 수염이 나 있었다.
그의 옷은 때가 절어 반지르르했다. 두 손으로 잔을 받을 때 손
을 보니 열 손가락의 손톱에는 때가 시커멓게 끼어 있었다.
조천추는 영호충이술을 건네는 것을 보자 받으려들지 않고 말
했다.
[영호충, 비록 좋은 술은 있으나 좋은 그릇이 없군요. 아깝습니
다. 아깝습니다.]
영호충은 말했다.
[빈손으로 여행하는 중이니 이렇소. 조 선생께선 개의치 마시고
한 잔 드시구료.]
조천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오. 형시께서
주도(酒道)에 대해 이렇게 무심하시니 틀림없이 주도의 삼매(三
昧)를 모르시는 것 같소이다. 술을 마실 때는 반드시 술그릇을 따
져야 합니다. 어떤 술을 마실 대나 그에 맞는 술잔을 사용해야 되
지요. 분주(汾酒)를 마실 때는 응당히 옥배(玉杯)를 사용해야 합
니다. 당나라 때의 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소. 옥완성래호박광(玉
碗盛來?珀光 ; 옥그릇으로 술을 담으니 행기가 그윽하다!) 이 싯
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옥으로 만든 그릇과 옥으로 만든 술잔
은 술맛을 더 해주는 법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녜, 그렇군요.]
조천추는 한 단지의 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단지에 들어 있는 술은 관외백주(關外白酒)이오. 술맛은 좋
으나 단지 한가지, 향기가 부족하오. 그래서 이 술을 마실 대 제
일 좋은 것은 서각배(犀角杯)에 담아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맛은 무엇하고도 비교할 수 없소. 옥으로 만든 술잔은 술의 색을
아름답게 해주고 서각배 즉 코불소의 코뿔로 만든 술잔은 향기를
첨가시켜 주지요. 옛사람의 말씀이 틀림없읍니다.]
영호충은 낙양에서 녹죽옹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어 천하의 미주
에 대한 내력이나 냄새, 술 담그는 이치, 저장할 때의 비법을 이
미 십중팔구는 알았다.
그러나 술잔에 대한 것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이때 조천추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으니 막힌 구멍이 탁 트이는 듯
후련했다.
그가 또 말했다.
[포도주를 마실 때는 물론 야광배(夜光杯)에 다라 마셔야 되지
요. 옛사람의 시에는 이렇게 되어 있소. '포도미주는 야광배가 제
격이라, 그 술을 먹고 싶어 비파를 타며 말을 재촉하네(葡萄美酒
夜杯欲飮琵琶馬上催) 그리고 알아야 될 것은 포도주는 요염한 색
깔을 내니 우리같은 수염을 기른 남자가 마신다면 호기가 부족하
게 도리 것이오. 포도주를 야광배에 담으면 술의 색깔은 새발간
피와 같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것은 피를 마시는 것 같죠.
악무목(岳武穆)이 지은 사(詞)에서는 '대장부는 뜻을 세워 배가
고플 때는 오랑캐의 살을 뜯어 밥으로 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할 때는 흉노족의 피를 가지고 환담하네(壯志飢餐胡虜肉, 笑談渴
飮?奴血). 이어찌 장엄하지 않소이까?]
영호충은 연신 괘를 끄덕였다. 그는 공부도 많이 못 했고 읽은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조천추가 시사(詩詞)를 가지고 술에 대
해 이야기하자 아무 것도 모르며 웃고 있다가 흉노족의 피를 마신
다는 대목에 이르자 정말로 호기가 하늘을 가르고 가슴에 피가 뭉
쳐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조천추는 한 단지의 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고량미주(高梁美酒)는 정말로 최고 오랜 술 중의 하나이지
요. 하(夏)나라 우(禹) 임금 때 의적(儀狄)이 만든 술을 우 임금
이 마시고 기뻐했다는 술이 바로 이 고량주요. 영호형, 세상 사람
의 안목이 너무 미천합니다. 단지 우 임금이 치수(治水)만을 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었다고만 하는데 그건 그렇다치고 우
임금의 진정한 공로는 무엇인지 당신은 아시오?]
영호충과 도곡육선은 일제히 말했다.
[술을 만드는 것이겠죠?]
조천추는 말했다.
[녜, 바로 맞추었읍니다.]
여덟 사람은 일제히 크게 웃었다.
조천추는 다시 말했다.
[이 고량주를 마실 때는 반드시 청동주작(靑銅酒爵)을 써야만
비로서 옛맛이 나는 법이오. 그리고 쌀로 빚은 미주(米酒)는 그
맛은 비록 좋지만 너무 달지요. 약간 엷게 걸러서 큰 그릇으로 담
아 먹으면 호탕해지지요.]
영호충은 말했다.
[저는 배운 것이 너무 없어 술이나 술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
는데 정말 그 학문은 깊고도 넓군요.]
조천추는 백초미주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는 술단지를 툭툭 치면
서 말했다.
[이 백초미주는 수백 가지의 약초를 채집하여 술을 담갔으므로
술의 향기가 맑아 본나들이를 가는 듯합니다. 그래서 마시지 않아
도 취한 느김을 주지요. 이 백초주를 마실 때는 반드시 고등배(古
藤杯)에 부어 마셔야 합니다. 백년 묵은 등나무로 조각해서 만든
술잔은 이 백초를 담아먹으면 그 향기가 너무나 그윽하오.]
영호충은 말했다.
[백년 묵은 등나무는 무척 구하기가 힘이 들지요?]
조천추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영호형씨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군요. 백년 묵은 등나무보다
는 백년 묵은 술을 구하기가 더 어렵지요. 생가해 보시오. 백년
묵은 등나무는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어도 백년 묵은
미주는 모든 사람이 마시고 싶어하고 마신 후엔 없어져 버리지요.
그러나 하나의 고등배는 천잔만잔 마신다 해도 그래도 그 형태는
망가지지도 않고 여전히 내려오는 법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예, 맞습니다. 제가 너무 모르는군요. 선샌께서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악불군은 계속 조천추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그의 과장된 말투
를 듣고 있었으나 이치에 맞는 것 같았다.
도지선, 도간선 등 잡배들이 백초미주의 술단지를 들고서 원탁
에 줄줄 흘리며 귀중한 술을 물 마시듯 마셔댔다.
악빠루군은 비록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술의 향기가 코끝에 닿
으니 정말 감미로웠다. 그는 그 술이 정말 좋은 술이라는 것을 알
았고 도곡육선들이 이렇게 마셔대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천추는 또 말했다.
[이 소흥장원홍을 마실 때는 반드시 고자배(古瓷杯)에 따라 마
셔야 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북송 때 만들어진 술잔이오. 남송
때 만들어진 자기술잔은 그래도 쓸 만하고 그러나 북송 때 만들어
진 자기술잔보다는 못하오. 원나라 때 만들어진 자기술잔은 저속
하기 이를데 자빠싸다오. 이 단지의 술은 이화주(梨花酒)인데 이
이화주를 마시려면 응당히 비취배(?翠杯)에 따라 마셔야 합니다.
백낙천은 항주춘망(杭州春望)이라는 시에서 붉은 소매자락이 감잎
처럼 나부 낄 때 문박의 푸른 깃발은 이화주의 향기를 더해주네
(紅袖織綾枾葉, 靑旗沽酒?梨) 라고 하였지요. 생각 좀 해보십시오
항주의 술집들은 이 이화주를 팔 때비취색의 기를 문 밖에다 걸
어놓고, 이 이화주를 팔고 있음을 나타냈지요. 이 이화주를 마실
때는 물론 비취잔이 제격이고 이 옥로주(玉露酒)는 응당히 유리배
(琉?杯)에 따라 마셔야 합니다. 옥로주에는 구슬 같은 기포가 생
겨 이 투명한 유리배에 따라마시면 정말 보기좋지요.]
갑자기 한 여자의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치이! 허풍을 떨기는!]
말하는 사람은 악영산이었다.
그녀는 오른쪽 식지를 내밀어 자기의 오른쪽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악불군은 말했다.
[산아, 무례하지 말아라. 이 조 선배님의 말씀은 무척 이치에
맞는 얘기가 아니냐?]
악영산은 말했다.
[이치는 무슨 이치예요? 술 몇 잔 마시고 흥을 돋구면 그것으로
족하지, 아침 저녁 하루종일 술이나 마시면서 그렇게 따진다는 것
이 어찌 영웅대장부의 할 짓이겠어요?]
조천추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아가씨는 몰라서 그러십니다. 한 고조 유방께서는 영웅입니까?
아닙니까? 그 당시 그는 크게 취한 다음 백사(白蛇)를 단검에 찌
르지 않았다면 어찌 한나라를 세우고 수백년 간 업적을 쌓았겠읍
니까? 번쾌(樊?)는 영웅호한이 아닙니까? 그날 홍문연(鴻門宴)에
서 번장군께서 그의 넙적다리를 잘라 한 말의 술을 마셨을 때, 그
를 어찌 장사라고 하지 않겠소?]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선생께선 주법에 도통하시고, 또 말씀하시길 천하의 영웅호걸
들은 술을 좋아한다 하셨는데 왜 드시지 않소이까?]
조천추는 말했다.
[내가 이미 말했지요. 술에 맞는 술잔이 없으면 술에 대한 무례
라고요.]
도간선은 말했다.
[당신도 허풍이 심하시군. 무슨 비취배요 야광배입니까? 세상에
그런 술잔이 어디 있단 말이오? 있다 해도 한 두 개일 뿐인데 그
누가 그 많은 술잔을 다 갖추고 있겠소?]
조천추는 말했다.
[술의 품격을 따지는 신사들은 물론 다 갖추고 있소. 당신들처
럼 소처럼 개처럼 마셔대는 사람들이나 밥그릇이든 물그릇이든 따
지지 않겠지.]
도엽선은 말했다.
[그럼 당신은 풍류를 아는 신사요? 아니요?]
조천추는 말했다.
[과분하다고 한다면 과분하지 않고 부족하다고 한다면 부족하지
않은 어느 정도 풍류를 아는 사람이오.]
도엽선은 깔깔 웃어댔다.
[그렇다면 이 여덟 종류의 미주의 술잔을 당신은 몇 개나 지니
고 있소?]
조천추는 말했다.
[많다면 많지 않고 적다면 적지 않고 한 가지씩은 갖추고 있지
요.]
도곡육선은 일제히 소리쳤다.
[허풍쟁이! 허풍쟁이!]
도근선은 말했다.
[그럼 내가 당신과 내기를 하겠소. 당신 몸에서 여덟 종류의 술
잔이 나온다면 나는 그 술잔 하나하나를 십어 뱃 속에 넣겠소. 당
신이 만약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찌 하겠소?]
조천추는 말했다.
[그러면 내 스스로 여기 있는 술잔과 밥그릇을 하나하나 뱃속에
쳐넣지요.]
도곡육선은 일제히 말했다.
[그것 참 좋다! 잘 되었다! 어떻게 나오는가 보자!]
이 말이 채 끝자지도 않았는데 조천추는 손을 내밀어 품 속을
더듬어 하나의 술잔을 끄집어냈다.
부드럽고 윤이 나는 이 술잔은 바로 양지백옥배(羊脂白玉杯)였
다.
도곡육선은 깜짝 놀라 입을 꼭 다물었다. 조천추는 하나 또 하
나 계속해서 품 속에서 술잔을 끄집어냈는데 틀림없이 비취배, 서
각배, 고등배, 청동작, 야광배, 유리배, 고자배, 등등이었다. 그
는 여덟 개의 술잔을 끄집어 낸 다음 다시 계속해서 끄집어 냈다.
금뱉이 찬란한 금배(金杯) 조각이 정밀한 은배(銀杯), 꽃모양이
조각되어 있는 석배(石杯), 그밖에는 또 아배(牙杯), 호치배(虎齒
杯), 우피배(牛皮杯), 죽동배(竹?杯), 자단배(紫檀杯) 등등이 쏟
아져 나왔다. 이 술잔들은 크고 작은 하나하나가 크기가 전부 달
랐다.
뭇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모두들 멍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이 거렁뱅이의 품 속에서 이렇게 많은 술잔들이 숨겨
져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조천추는 득의양양해 도근선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소?]
도근선의 얼굴은 참담해졌다.
[내가 졌소. 내가 이 여덟 개의 술잔을 먹어치우겠소.]
그는 고등배를 들고 뚝하고 반을 갈라 반쪽을 입 속에 쑤셔넣고
와작와작 씹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가 자기의 말을 실행하기 위해 그 반쪽의 고등
배를 씹어먹는 것을 보자 모두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근선은 손을 내밀어 또 다른 서각배를 집었다. 조천추는 오니
손을 들어 그의 맥문을 내리쳤다. 도근선은 오른손을 약간 내리며
그의 손목을 잡으려고 반격했다.
조천추는 중지로 그의 장심을 쳤다.
도근선은 깜짝 놀라 손을 움추리며 말했다.
[왜 주기가 싫소? 내가 먹겠다는데?]
조천추는 말했다.
[내가 졌소이다. 저는 탄복했소이다. 이 여덟 개의 술잔을 당신
이 다 먹었다고 칩시다. 당신의 호기는 좋지만 나는 아깝다는 생
각을 금할 수가 없을 것이오.]
모든 사람들은 큰 소리로 웃었다.
악영산은 처음에 이 도곡육선의 힘이 무서웠다. 그러나 서로 오
랫동안 같이 지내다보니 그들은 아직까지 어떤 흉악한 짓을 하지
않았고 또한 행동할 때나 말할 때 익살스럽고 친근감이 갔다.
그래서 대담하게 도근선에게 말했다.
[보세요. 그 고등배는 맛이 좋나요?]
도근선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말했다.
[무척 쓴데 무슨 맛이 있겠소?]
조천추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이 나의 고등배를 먹어버렸으니 나의 큰일을 그르친 것이
오. 아이고! 이 고등배가 없어졌으니 이 백초주는 어떤 잔으로 마
셔야한단 말인가! 어쩔 수 없이 나무조각으로 만든 잔으로 마셔야
될 것 같소.]
그는 품 속에서 수건을 끄집어내어 도근선이 먹다 남은 반조각
의 고등배를 닦고 단목배를 집어 계속 닦아대었는데 그 손수건은
시커매서 닦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을 뻔했다. 이렇게 닦으니 닦
을 수록 더 더러워졌다.
한참을 닦고 난 후 비로소 나무잔을 탁자에 올려 놓고 여덟 개
의 술잔을 한줄로 진열하고 나머지 금배, 은배들은 다시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분주, 포도주, 소흥주 등 열 가지의 미주를 각각
여덟 개의 잔에 따랐다.
길게 숨을 한번 내쉬더니 영호충을 향해 말했다.
[영호형, 이 여덟 잔의 술은 당신이 한잔 한잔 드시구료. 그리
고 나서 내가 다시 이 여덟 잔의 술을 마시리다. 그리고 나서 자
세히 품평을 해봅시다. 옛날에 먹던 술과 짐금 먹는 술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시구료.]
영호충은 말했다.
[좋습니다.]
그는 목배를 들어 단숨에 마시니 한 줄기의 쓰고 매운기가 뱃속
에 꽉 찼다. 자기도 모르게 내심 놀라며 깊이 생각했다.
(이 술맛이 어찌 이리 고약하냐?)
조천추는 말했다.
[내 술잔들은 술마시는 사람의 보배요. 단지 담이 작은 소인배
들은 이 술맛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한잔을 마신 다음 두번째 잔
부터는 다시 마시려하지 않는 다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여덟
잔의 술을 다 마신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오.]
영호충은 생각했다.
(설령 술 속에 독이 있다 해도 영호충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
는데 그에게 독살을 당하면 당했지 질 수야 없지.)
그는 또 다른 잔을 들어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한 잔은 쓴맛
이 감돌고 다른 잔은 상당히 떫었다. 절대로 그 미주의 맛이 아니
었다. 다시 네번째 술잔을 들었을 때 도근선이 갑자기 외쳤다.
[아이쿠! 큰일났다! 내 뱃속에서 불이 나네! 불덩어리가 있는
것 같다!]
조천추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내 고등 술잔 반쪽을 먹었으니 어찌 배가 안 아프겠소?
그 오래 묵은 등나무는 딱딱하기가 강철 같은데 뱃속에선 절대로
소화가 되지 않을 것이오. 빨리 설사약을 먹고 다 쏟아버리시오.
만약 쏟아내지 못한다면 별 수 없이 그 살인명의 평일지를 청해
배를 자르고 끄집어내야 될 것이오.]
영호충은 움찔했다.
(이 사람의 여덟 잔의 술잔 속에는 틀림없이 다른 이물질이 들
어 있을 것이다. 도근선이 등나무 술잔을 먹었는데 설령 등나무가
딱딱해 소화가 되지 않는다 해도 단지 뱃속이 아플 뿐인데 열이
날 까닭이 있겠는가? 흥! 사내대장부가 죽음을 무서워 한다면 말
이 안 되지! 독이 독할수록 좋다.)
그는 고개를 들어 또 한 잔의 술을 마셨다.
악영산은 갑자기 말했다.
[대사형, 이 술은 마시지 마세요! 술잔 속에 독이 있을지도 모
르니까요. 당신이 그 복면인들의 눈을 모두 질러 봉사가 되게 했
으니 그 사람들의 복수를 조심해야 합니다.]
영호충은 처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조 선배님은 통쾌한 장부이시오. 절대로 나를 암살하는 것
같지는 않소.]
이렇게 말을 하는 그는 이 술 속에 독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심
정이었다.
악영산이 자기의 죽은 모습을 보고 슬퍼 눈물을 흘렸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또 두 잔을 마셨다.
이 여섯번째의 술은 시고 짰다. 게다가 악취마저 풍겨서 미주는
커녕 술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는 뱃속에
술을 집어넣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간선은 그가 한참 마시고 도 한잔씩 마시는 것을 보자 참지
못하고 그도 먹으려고 했다.
[이 나머지 두 잔의 내가 먹겠소.]
그는 손을 내밀어 일곱번 째 놓인 술잔을 들었다. 조천추는 부
채를 휘둘러 그의 손등을 치고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십시오. 천천히 차례대로 마셔야 합니다. 모든 사람따르
은 반드시 이 여덟 잔의 술을 마셔야 술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것
이외다.]
그가 내리치는 부채의 일격이 극히 강했으므로 만약 손등이 적
중되었다면 도간선의 손마디가 부러졌을 것이다. 그는 손을 피하
면서 오히려 반격에 나서 그는 부채를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이 술을 먹어야겠소! 당신이 어떻게 하시겠
소?]
조천추의 부채는 접어져 있었다. 도간선의 손가락이 부채를 잡
았을 때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나며 부채가 펴지고 부채의 테두
리가 그의 식지를 내리쳤다. 이 행동은 순식간이고 뜻박이어서 도
간선은 부채가 손을 때리자 급히 손을 움추렸다. 식지 손가락은
얼얼하게 아팠다.
그는 고함을 치며 뒤로 물러섰다.
조천추는 말했다.
[영호형, 빨리 이 두 잔의 술을 마시구료.]
영호충은 더 생각하지 않고 나머지 두 잔의 술을 마셨다. 이 두
잔의 술은 악취가 없었으나 한 잔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목구멍
이 칼에 베인 듯 쓰라렸고 한 잔은 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것이
무슨 술인가? 풀에 사용하는 살충제보다 더 독한 것 같았다.
도곡육선은 영호충의 얼굴이 이상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보자 모
두 신기한 듯 쳐다보며 물었다.
[여덟 잔을 다 마셨는데 맛이 좀 어떠시오?]
조천추는 말을 낚아챘다.
[여덟 잔의 술을 다 마셨으니 그 달콤함 맛이야 무궁무진할 것
이오. 옛책에도 그렇게 씌어 있읍니다.]
도간선은 말했다.
[엉터리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무슨 옛날책이 어쩌구 저쩠다
구?]
갑자기 그가 어떤 신호를 했는지 네 명은 동시에 달려나와 각각
조천추의 사지를 붙들었다.
도곡육선이 사람의 사지를 잡는 수법은 너무나 빠르고 괴이했
다. 그 행동은 마치 귀신이나 요괴들 같았다.
조천추는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했었지만 그래도 도곡사선
에게 손과 발이 잡혀 공중으로 추켜올려졌다.
화산파의 여러 사람들은 도곡사선의 손들이 무서운 줄 알고 이
광경을 보고 참지 못하고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조천추는 문득 벗어날 생각이 떠올라 크게 말했다.
[술 중에는 독이 있다! 해독약이 필요하지 않은가?]
조천추의 팔다리를 잡고 있던 도곡사선도 이미 적지 않은 술을
마셨다. 술 속에 독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깜짝 놀랐다.
조천추가 바라고 있는 것은 이 네 사람이 이렇게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크게 외쳤다.
[헛소리 말고 내 똥이나 먹어라!]
도곡사선은 손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느김을 받았다. '펑' 하는
큰 소리가 나면서 배의 천정에 큰 구멍이 뚫어지고 조천추는 구멍
을 통해 도망쳐 사라지고 말았다.
도근선과 도지선은 두 손이 텅비고 도화선과, 도엽선의 손에는
각각 고린내가 나는 양발 한 짝과 흙이 잔뜩 묻어져 있는냄새나
는 신발을 잡고 있었다.
도곡오선의 신법도 극히 빨라 순간에 언덕으로 일제히 쫓아갔
다. 그러나 조천추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섯 사람이 경공을 써서 뒤쫓아가려고 할 때 갑자기 맞은편 쪽
에서 어떤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천추, 이 나쁜 놈의 새끼! 빨리 내 알약을 돌려달라! 한알이
없어지면 나는 너의 뼈를 추리겠다! 네 가죽도 벗기겠다!]
그 사람은 큰 소리로 외치며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도곡오선은 어떤 사람이 조천추를 크게 욕하는 소리가 들리자
마침 자기네들 뜻과 같아 모두들 그 달려오는 사람을 쳐다보며 발
걸음을 멈추고 그 자가 누구인가를 살폈다.
멀리서 숨을 헐떡헐떡 쉬며 굴러오는 것은 고기덩어리였다. 구
를수록 더욱 가까워졌다. 도곡육선은 이 고기덩어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람은 키가 매우 작고 매우 뚱뚱해서 사람이
라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이 사람은 목이 없는 것 같았다. 하나의 멀뚱멀뚱한 대가리가
어깨 위에 얹혀 있는 것 같았고 어미배에서 맨처음 나왔을 때 무
거운 철퇴로 한 방 맞은 것 같고 그 철퇴에 머리가 눌려 얼굴,
뺨, 입, 코, 모든 것이 옆으로 깨지고 퍼진 것 같았다. 이 사람의
생김새를 본 모든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두 생각했다.
(그 평일지라는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한 편이다. 그러나 이 사
람과 비교할 때는 평일지는 크게 준수하다고 하겠구나!)
평일지는 단지 키가 작고 땅딸한데 불과했으나 이 사람은 사방
이 똑같이 퍼지고 뚱뚱했다. 손과 발은 매우 짧았다. 팔은 일반인
의 반밖에 안 되었다. 이 사람은 배만 있고 가슴은 없는 것 같았
다.
이 사람은 배 앞에 다가오자 두 손을 벌리며 노기가 충천한 듯
물었다.
[조천추! 이 도둑놈이 어디에 숨었는가?]
도근선은 웃으며 말했다.
[그 썩어빠진 도둑놈은 도망갔소! 발이 무척 빠르더이다. 당신
처럼 이렇게 느릿느릿 굴러간다면 아마 틀림없이 따라잡을 수 없
을 것이오.]
그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작은 눈으로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소리르 질렀다.
[내 알약! 내 알약!]
그리고 두 발을 튕기더니 한 개의 고기덩이처럼 선창 안으로 날
아 들어왔다. 몇번 냄새를 맡고 탁자 위에 올려 있는 빈 술잔을
바라보고 코에 갖다대고 한번 냄새를 맡아보더니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의 얼굴은 본래 상당히 고약했는데 그러한 표정을 짓자 더욱
술잔을 집어들고 냄새를 맡으면서 한 술잔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내 약! 내 약!]
그는 모두 여덟 번을 내 약 내 약이라고 말했다. 그의 애석하고
실망한 표정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방성대곡을 터뜨렸다.
도곡오선은 더욱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일제히 그의 몸을 둘러
싸고 물었다.
[당신은 왜 우시오?]
[조천추가 당신을 못살게 굴었소?]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시오. 우리가 그 도둑놈을 찾아서 그의
몸뚱이를 네조각으로 찢어버리고 당신의 복수를 해주겠소.]
그 사람은 울면서 말했다.
[나의 알약은 그가 술과 함께 먹어치웠소. 죽여버려야해
요...... 이 도둑놈을 죽여버려야 해요! 그러나...... 그러나 죽
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소?]
영호충은 마음속에 짚히는게 있어 물었다.
[그건 어떤 알약이오?]
그 사람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나느 내 평생 이십 년이라는 세월을 들여서 천년 묵은 인삼,
복령(伏笭), 영지(靈芝), 녹용(鹿茸), 수오(首烏), 영지(靈脂),
웅담(熊膽), 삼칠(三七), 사향(麝香) 등등의 진귀한 약물을 모아
아홉번 찍고 아홉번 말려서 여덟 알의 기사회생할 수 있는 속명팔
환(續命八丸)을 만들었소. 그런데 그 죽여버릴 조천추가 훔쳐가
술에 섞어 먹어버렸소.]
영호충은 크게 놀라며 물어보았다.
[당신의 여덟 알의 환약은 그 맛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말했다.
[물론 다르오. 어떤 것은 매우 냄새가 나고, 어떤 것은 매우 쓰
고, 어떤 것은 입에 넣으면 칼에 베인 듯 쓰리고, 어떤 것은 매워
서 불덩이 같다오. 이 속명팔환을 복용하기만 하면 아무리 큰 외
상이나 내상이라도 기사회생할 수가 있소.]
영호충은 무릎을 '탁'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큰일 났네요, 큰일 났어! 조천추가 당신의 속명팔환을 훔쳐 온
것은 그가 먹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물었다.
[그럼 어쨌단 말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게 아니고 술에 그 약을 섞어서 나에게 속여서 먹였소. 나는
그 술 속에 진귀한 한약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그가 독을 탄 줄
로 알고 있었소.]
그 사람은 노기가 충천해 욕을 하며 말했다.
[독을 넣어? 독을 넣어! 제기랄 독을 넣었어야 했는데...... 당
신이 그 속명팔환을 먹었소?]
영호충은 말했다.
[그 조천추라는 사람이 여덟 개의 잔에 술을 담아서 나에게 먹
도록 했는데 정말로 어떤 것은 매우 쓰고 어떤 것은 악취가 났으
며 어떤 것은 마치 칼로 혀를 자를 듯했고 어떤 것은 불덩이를 먹
는 것 같았소. 무슨 약이 들어 있었는지 나는 보지 못했소.]
그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영호충을 쳐다보았다. 뚱뚱한 얼굴에
근육의 꿈툴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큰 소리치더니 몸을 튕
겨 영호충에게 덮쳐왔다.
도곡오선은 그의 안색을 보고 벌써부터 방비를 하고 있었다. 그
의 몸이 막 튕겨져 올라왔을 때 도곡사선은 번개처럼 각각 네 사
지를 잡았다.
영호충은 급히 외쳤다.
[절대로 그의 생명을 해치지 마시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두손과 다리가 도곡사선에
게 잡히자 사지가 자라의 목처럼 움츠러들어 마치 둥근 공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닌가? 도곡사선은 크게 놀라 일제히 기합을 지르며
그의 사지를 잡아당겼다. 이 사람의 사지는 잡아당길수록 길게 늘
어져 손과 팔 다리는 그의 몸에서쭉쭉 빠져 나왔다. 마치 한 마
리의 자라가 뚜껑 속에서 집혀내는 것과 같았다.
영호충은 또 외쳤다.
[그의 생명을 다치게 하지 마시오!]
도곡사선의 손이 약간 늦쳐지자 그 사람의 사지는 즉시 수축되
어 둥근 공이 되었다.
도실선은 크게 외쳤다.
[그것 참 재미있다! 그것 참 재미있다! 그것은 또 무슨 재주이
지?]
도곡사선은 힘껏 잡아당겼다. 그 사람의 손과 발은 또 한 자 정
도 길게 늘어졌다.
악영산 등 네 제자들은 일제히 그 광경을 보고 킥킥 웃어댔다.
도근선은 말했다.
[보시오, 우리가 당신 팔다리를 길게 잡아당겨 보겠소. 그러면
참 멋있을 것이오.]
그 사람은 크게 외쳤다.
[어이쿠! 사람살려!]
도곡사선은 깜짝 놀라 일제히 말했다.
[뭐라고?]
손에 힘을 약간 늦추었다.
그 사람은 사지를 갑자기 잡아당기더니 도곡사선 수중에서 빠져
나와 펑 하는 소리를 내는 동시에 배 밑바닥을 뚫고 황하의 물속
으로 도망쳐 버렸다.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 외쳤다.
배 위로 물이 계속 흘러들어왔다.
악불군은 외쳤다.
[모둘르 자기 짐을 들고 빨리 언덕으로오르거라!]
배 밑바닥은 둥그렇게 뚫려졌고 강물은 줄줄 들어와 얼마 있지
않아 선찬 안에는 이미 물이 무릎까지 차 올라왔다. 다행히 그 배
는 언덕가에 정박해 있어서 모두들 하선을 할 수 있었다. 배주인
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안절부절했다.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게 근심하지 마시오. 이 배는 얼마의 값이 나가오? 내가
두배로 보상을 하겠소.]
그리고 생각했다.
(나와 조천추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왜 그가 이렇게 귀한
약을 훔쳐 나를 속이면서까지 약을 먹였을까?)
그는 기운을 쓰니 아랫배에 불덩이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몸
안에 있는 여덟 줄기의 진기는 여전히 서로 부딪치며 한 군데로
모이지를 않았다.
즉시 노덕약은 다른 배를 빌리고 모든 물건을 옮겼다.
영호충은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금은으로 그 배주인에게 보상
하였다.
악불군은 그 지역에 이상한 사람이 많고 그 사람들의 뜻이 분명
치 않고 이상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자 하루빨리 이 지역에서 벗
어나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이미 어두웠고 강물은 빨라 저
녁에 배를 띄울 수가 없어 하는 수없이 배에서 쉬었다.
도곡오선은 두 번이나 실수를 했다. 앞뒤로 조천추와 고기덩어
리를 놓친 것은 자기들 평생에 있어 드문 일이었다.
여섯 형제들은 허풍을 떨며 자기가 잘났다. 누가 못났다. 말싸
움을 하더니 끝내는 화를 풀지 못하고 술만 사셔대고는 잠이 들었
다.
악불군은 선창에 누워 파도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생각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지곤 했다. 한참 후 어둠을
뚫고 언덕 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악불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창 큼으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신속히 달려오더니 갑자기한 사람의 손이
위로 올라가자 두 사람의 수장 밖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악불군은 이 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할 것이라고 짐작을 하
고 즉시 자하신공을 끌어올렸다. 귀가 수배로 영민해지더니 멀리
있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바로 이 배다. 낮에 화산파의 녀석들이 탔던 배가 뚫려진 다음
이 배로 옮겨왔죠. 나는 배에다 이미 표시를 해두었다. 틀림없
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좋아요. 우리 돌아가서 제(諸) 사백(師伯)에게 보고합시다. 사
형, 우리 백약문(百藥門)은 언제 이 화산파와 원수를 맺었읍니까?
왜 제 사백께선 모두를 동원하여 화산파를 막고 있읍니까?]
악불군은 '백약문' 이라는 세 글자가 귀에 들어오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정신이 다른 곳에 쏠리자 자하신공
의 위력은 반감되었다. 먼저 말을 했던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 막는 것이 아니다. ...... 제 사백께서는 사람에게 부
탁을 받았지. 다른 사람에게 빛을 져서 사람 하나를 알아보려는
거야...... 결코......]
그 사람의 말은 매우 작았다. 끊어질 듯해서 확실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신공을 불어 넣으려고 할 때 발걸음 소리가 멀어
지더니 두 사람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악불군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화산파가 백약문과 언제 원수를 맺었단 말인가? 제 사백
이라는 사람은 백약문의 장문인이다. 이 사람의 별명은 독불사인
(毒不死人)인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독을 쓰는 수법은
극히 고명하다고 한다. 독은 누구나 쓸 수 있어 그리 신기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독을 쓰면 독에 당한 사람은 금방 죽지 않고
몸이 수천 개의 칼에 난자당하거나 또 벌레나 개미들에게 물어뜯
긴 것 같이 되어 결국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 사람이 구해주지 않는 이상 다른 길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강호에선 백약문과 운남오선교(雲南五仙敎)
를 무림 중의 양대 독문(毒門)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비록 백약문
은 오선교와 비교할 때 그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고는 하지만 두파
가 별로 다른 것은 없지. 이 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모두를 동원
하여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라는데 도대체
누구의 부탁을 받았을까?)
이리저리 생각해보니 결국 두 가지 워인으로 압축되었다. 하나
는 백약문이 검종의 봉불평 등의 부탁을 받고 자기를 괴롭히려는
것이고, 두번재는 영호충이 찌른 열다섯 명이 백약문과 친분관계
가 있는 것이었따.
갑자기 언덕에서 여자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 집에 정말로 벽사검보가 있니?]
바로 딸인 악영산이었다. 대답을 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임평지였다.
언제 두 사람이 배에서 내려 언덕에 올라갔을까? 악불군은 마음
속으로 무엇인가 깨달았다. 딸과 임평지가 요사이 정이 가까워져
낮에는 다른 사람이 눈치챌까봐 자신의 행동들을 나타내지 않다가
밤중에 언덕에 올라 밀회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언덕에 적이 나타나는 바람에 자하신공을 발하여 그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자하신공은 내력을 많이 소모하는 것이어서 평상시에는 운행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적들의 음모도 알아냈고 딸의 비밀도
알아냈던 것이다.
임평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벽사검법은 있읍니다. 내가 일찌기 당신에게 몇번 시범을 보여
주지 않겠소? 그러나 검보(劍譜)는 없읍니다.]
악영산은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대의 외조부님과 두 분의 외삼촌이 우리 대사형
이 검보를 삼켰다고 의심하고 있지?]
임평지는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의심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절대로 의심하지
않소.]
악영산은 말했다.
[흥, 그렇다면 그대야말로 좋은 사람이군? 다른 사람은 의심을
하고 자기는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니!]
임평지는 탄식하며 말했다.
[만약 우리집에 그 같은 신묘한 검법이 있다면 우리 복위표국은
청성파에게 이처럼 능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집안이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악영산은 말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그대의 외조부와 삼촌들이 대
사형에게 의심을 품고 있을 때 그대는 왜 그를 위해 변명을 하지
않았지?]
임평지는 말했다.
[나의 아버님 어머님이 무슨 유언을 하였는지 나는 친히 듣지
못했고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무엇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를 몰
랐소.]
악영산은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그대도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밖에 더 돼?]
임평지는 말했다.
[절대로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대사형께서 아신다면 동문의
의리가 어찌 되겠소?]
악영산은 냉소했다.
[그대는 왜 그리 꿍꿍이 속이 많지? 의심을 하려면 의심을 하고
의심을 안 하려면 의심을 하지 않는거야. 나 같으면 벌써 대사형
에게 가서 물어보았을 거야.]
그녀는 잠시 쉬더니 계속 말했다.
[그대의 성격과 아버님의 성격이 참 비슷해. 두 사람은 마음속
으로 대사형을 의심하고 있어. 그가 남 모르게 검보를 가져갔다고
추측하고 있으니......]
임평지는 그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사부님도 의심하고 계신가요?]
악영산은 비웃었다.
[그래 스스로 범행을 의심치 않는다면 어찌 '사부님도' 라는 말
을 할 수가 있지? 내가 말했잖아, 당신과 아버님의 성격이 똑같다
고. 속으로 호박씨를 까면서도 한 마디도 언급을 안 하니 그러면
못써.]
갑자기 화산파가 타고 있던 배 위에서 징 소리 같은 음성이 들
려왔다.
[돼먹지 않은 년놈들이 함부로 말을 하는구나! 영호충은 영웅호
걸이다~ 무엇이 아쉬워 너희들의 쓸모없는 검보를 가지겠는가? 너
희들이 배후에서 그처럼 나쁜 말을 해대니 이 어르신께서 한놈도
남겨놓지 않겠다!]
이 몇마디의 소리는 너무나 컸다.
배에 탔던 수많은 승객들도 놀라 깨었고 언덕 위에 나뭇가지에
서 자고 있던 새들도 놀라 푸드득 날았다.
배 위에 커다란 대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임평지와 악영산
에게 덮쳐갔다.
임평지와 악영산은 언덕을 오를 때 검을 지니지 않았다. 즉시
권각법을 펼쳐 방어자세를 취했다.
악불군은 그 사람의 호통소리를 듣고 그 사람의 내력이 심후하
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덮쳐가는 기세를 보니 그의 외공(外功)은 더욱 심후한 것
같았다. 그가 자기딸에게 공격을 해가자 급한 나머지 악불군은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멈추시오!]
그리고 몸을 날려 창을 뚫고 바깥으로 뛰쳐나가 언덕으로 달려
갔다. 그의 몸이 허공에 떴을 때 그 사내는 이미 악영산과 임평지
를 한 손에 한 사람씩 잡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악불군은 깜짝 놀라 오른발을 땅에 내디디며 장검을 봅아 백홍
관일(白虹貫日)을 펼쳐 그 사람의 등을 찔렀다.
그 사람은 체격이 컸고 걸음폭도 넓었다. 한 발짝 내딛자 악불
군의 검은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즉시 일초의 중평검(中平劍)을
써 앞으로 덮쳤다.
그 거인이 마침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니 이 일검 또한 허공을
찔렀을 뿐이었다.
악불군은 날카롭게 외쳤다.
[조심하시오!]
그리고 일초의 청풍송화(淸風送花)를 써서 날카롭게 찌르며 앞
으로 나갔다. 검끝이 그 사내의 등에서 한 자 정도에 이를 때 갑
자기 바람이 일며 어떤 사람이 뛰쳐나와 두 손가락을 벌려 악불군
의 두 눈을 향해 찔러왔다.
그들이 싸우는 곳은 막다른 길이라 집 그림자가 달빛을 가리우
고 있었다. 악불군은 몸을 치켜세우고 피했다. 악불군은 비스듬히
장검을 찔렀으나 적은 머리를 숙여 피하고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
어 그의 배에 있는 중완혈(中脘穴)을 내리찍었다.
악불군은 다리를 날려 걷어찼다. 그 사람은 한바퀴 빙글 돌더니
그의 등을 공격해 왔다. 악불군은 피하지 않고 질풍같이 칼을 내
리쳤다. 그 사람은 몸을 돌려 피하더니 그는 가슴을 향해 공격해
왔다.
악불군은 이 사람이 정말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손바다그올 그
의 장검을 대항하고 또 초식마다 공격이니 내심 화가 나서 장검을
빙글 돌려 땅바닥을 걷어차고 뛰어 오르면서 그의 이마를 향해 검
을 내리쳤다. 그 사람은 급히 손가락으로 쨍 하고 검을 튕겼다.
악불군은 장검은 그 때문에 비껴 내려가더니 '싹' 하는 소리와 함
께 그 사람이 쓰고 있던 모자를 떨어뜨렸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중머리가 나타났다.
그 사람은 중이었다. 그의 어리끝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
었다. 이미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그 중은 두 발을 힘껏 놀려 뒤로 향해 질주해 갔다. 악불군은
그가 도망가는 길이 조금 전 악영산을 데리고 간 방향과 정반대가
되므로 쫓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악 부인이 달려오며 급히 물었다.
[산아는 어디 있읍니까?]
악불군은 왼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추격합시다!]
부부는 거인이 도망간 길을 쫓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두 갈래
길이 나왔는데 적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악 부인은 급하게 말했다.
[어떻게 하지요? 어떻게 하지요?]
악불군은 말했다.
[우리 산아를 납치해간 사람은 충아의 친구일 것이오. 아마 그
래서...... 그래서 산아에게는 어떤 행동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
오. 우리 돌아가서 충아에게 물어봅시다.]
악 부인은 말했다.
[그렇겠군요.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잖아요? 산과 평아가 충
아에 대해 나쁜 말을 했다고요.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어요.]
악불군은 말했다.
[아무래도 벽사검보와 관계가 있는 것 같소.]
부부는 배로 돌아왔다. 영호충과 일행들은 언덕에 서 있었으나
표정들이 매우 심각했다.
악불군과 악 부인이 선창에 돌앙와 영호충에게 물어보려고 할
때 언덕의 먼곳에서 어떤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악불군에게 전할 편지가 있다!]
노덕약과 남자제자들은 검을 뽑고 언덕으로 올라갔다가 얼마 후
선창으로 돌아와 말했다.
[사부님, 이 천조각이 돌맹이에 눌려 땅바닥에 있었읍니다. 편
지를 전한 사람은 이미 없어졌읍니다.]
노덕약은 말을 하면서 한 조각의 천을 올렸다.
악불군이 받아보니 그 편지는 옷자락을 찢어내고 손가락에 피를
내어 삐뚤삐뚤하게 쓴 혈서였다.
[오패강(五覇剛)에서 너의 더러운 딸을 돌려주겠다.
악불군은 그 천을 부인에게 건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중놈이 쓴 것이오.]
악 부인은 급히 물었다.
[그...... 그가 누구의 피로 글씨를 썼을까요?]
악불군은 말했다.
[염려마시오. 내가 아까 그의 머리에 상처를 냈소.]
그러면서 뱃주인에게 물었다.
[여기서 오패강까지는 얼마나 되오?]
뱃주인이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배를 출항하여 동와상(銅瓦廂) 구혁집(九赫集)
을 지나면 바로 동명(東明)에 도착합니다. 오패강은 동명의 동쪽
에 있고 하택(荷澤)에서 가깝습니다. 하남과 산동성의 교차지점에
있읍니다. 어르신께서 가신다면 내일 저녁때 쯤이면 도착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악불군은 '음' 하고 내심 생각했다.
(상대방이 오패강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또 나간다 해도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산아 또한 그
들의 수중에 있으니 화가 많을 것이고 칼자루는 저쪽에 있다.)
갈까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언덕 위에서 어떤 사람이 불렀다.
[제기랄! 도곡육괴야! 나 종규(鍾?) 어르신께서 너희들 귀신을
잡으려 왔다.]
도곡육선들이 이 말을 듣고 어지 대노하지 않겠는가?
도실선은 아파 누워있으니 입 속으로만 외쳐댔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일제히 몸을 날려 언덕으로 올라갔다.
말한 사람은 머리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손에는 하얀깃발을 들
고 있었다. 그 사람은 몸을 돌려 달아나며 크게 외쳤다.
[도곡육괴 놈들은 담이 작으니 절대로 나를 따라오지 못할 것이
다!]
도근선 등은 짐승처럼 표호하며 빠른 걸음으로 뒤쫓았다.
그 사람의 경신법은 대단해서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
다.
악불군 등도 이미 언덕에 올라와 있었다.
악불군은 외쳤다.
[이것이 조호이산(調虎離山)의 계략이니 모두들 배에 올라라.]
모든 사람들이 배에 오르려고 할 때 먼 곳에 둥그런 사내의 모
습이 나타났다.
그는 단숨에 영호충의 가슴을 움켜쥐고 말했다.
[나를 따라가자.]
마치 고깃덩어리 캐이 키가 작고 뚱뚱한 사람이었다. 영호충은
그에게 잡혔으나 전신에 힘이 없어 초식을 펼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와 하는 소리가 나며 한 사람이 집모퉁이에서 튀어나오
더니 다짜고짜 발을 날려 공처럼 둥근 사람을 걷어찼다. 바로 도
지선이었다.
그는 수십장을 뒤쫓다가 자기형제인 도실선이 배에 혼자 남았으
니 자칭 종규어르신이라는 사람에게 잡힐까봐 다시 되돌아와 지키
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공같이생긴 사람이 영호충을 잡아가
려고 하자 몸을 날려 그를 구하려고 한 것이었다.
공 같이 사람은 즉시 영호충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날리더
니 선창 안으로 사라졌다. 도실선이 누워 있는 침대로 가서 왼쪽
발을 내밀어 그의 가슴을 차려고 하자 도지선은 깜짝 놀라 외쳤
다.
[절대로 내 형제를 다치게 하지 마시오!]
공 같은 사람이 말했다.
[이 어르신께서는 한번 한다면 하고 말지. 네까짓 녀석이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도지선은 날듯이 선창으로 들어와 침대와 함께 도실선을 껴안았
다.
공 같은 사람은 그를 떨쳐버리려고 그랬던 것이다. 몸을 돌려
언덕으로 올라와 영호충을 다시 둘러매더니 다시 날쌔게 달려갔
다.
도실선은 평일지가 영호충을 보살피라고 했는데 영호충이 납치
당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대할 것인가 하고 걱적했
다.
평 대부는 틀림없이 그들에게 도실선을 죽이라고 할 것이다. 그
러나 도실선을 내려놓고 돌보지 않는다면 이 상처로는 적에게 대
항하지 못할까봐 염려되었다. 그는 두 손으로 도실선을 안고 공
같이 생긴 사람이 뒤를 쫓았다.
악불군은처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여기 남아 제자들을 돌보시오. 내가 살펴보겠소.]
악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자기들을 쫓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을 뒤쫓으려고 두 사
람이 나선다면 배에 가득한 남녀제자들이 적에게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 같은 사람의 경공은 원래 도지선보다 못했으나 그는 영호충
을 어깨에 매고 전력질주했고 도지선은 도실선의 상처가 심해 어
깨에 매면 상처가 더욱 깊어질까 염려되어 두손으로 껴안고 아주
안전하 걸음으로 달렸으므로 그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악불군은 경공을 전개하여 상대방을 뒤쫓을 수가 있었다.
도지선은 큰 소리로 외치며 공 같은 사람에게 영호충을 내려놓
으라고 욕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절대로 가만 놔두
지 않겠다고 연신 외쳐댔다.
도실선은 비록 움직이지는 못햇으나 여전히 주둥이를 놀려대고
쉬지 않고 도지선과 말씨름을 했다.
[큰형님과 둘째형님이 여기 없는데 당신이 공 같은 사람을 따라
가봤자 무슨 수가 있겠어? 이왕 어쩔 수 없는 이상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헛소리고 공갈이 안니가?]
도지선은 말했다.
[헛소리고 공갈이고 겁을 주는데는 효과가 많아. 어쨌든 공갈치
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낫지.]
도실선은 말했다.
[내가 보니 그 공 같은 사람의 걸음걸이는 무척 빨라. 너의 말
을 듣고도 발걸음이 늦춰지지 않으니 공갈쳐서 멈추게 한다는 것
은 멍청이나 하는 말버릇이야.]
도지선은 말했다.
[그는 지금은 걸음걸이를 늦추지 않았지만 잠시 후면 늦춰질거
야.]
그는 손에 사람을 안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말을 하였으며 발걸
음 역시 늦추지 않았다.
세 사람은 일직선을 그으며 동북방을 향해 달렸다.
길은 점점 구불구불해졌고 산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악불군은 갑자기 생각했다.
(그 고깃덩이 같은 사람이 산에다 고수들을 매복해 놓고 우리들
을 함정에 끌어들여 포위공격한다면 정말 위험하겠구나!)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고깃덩어리는 영호충을 안고 산 위에 있는 한 칸의 기와집으
로 걸어가더니 담을 뛰어 넘었다.
악불군은 사방을 경계하며 또 다시 뒤쫓았다.
도지선은 도실선을 안고 담을 넘어 들어섰다. 갑자기 도지선이
비명자르 질렀다. 아마 어떤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악불군은 살금살금 담가로 다가섰다.
도실선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벌써 너에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보라구! 지금은 후
레자식이 쳐 놓은 어망에 꽁꽁 묶여져 있으니 한 마리의 큰 물고
기 같지 않아! 이게 무슨 꼴이야?]
도지선은 말했다.
[틀렸어! 두 마리의 큰 물고기지, 한 마리리 큰 물고기가 아니
다. 그리고 네가 언제 나보고 조심하라고 말했니?]
도실선은 말했다.
[우리가 어려서 함께 다른 집 정원에 있는 석류를 따러 들어갔
을 때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설마 잊은건 아니겠지?]
도지선은 말했다.
[물론 관계가 있지! 그때 네가 조심하지 않아 나무에서 떨어졌
잖아? 그래서 사람에게 잡혀 한바탕 얻어터지지 않았나? 후에 큰
형님과 둘째형님이 도착해 비로소 그들 일가를 깨끗하게 처치해
버렸지 않았어? 이번에도 네가 조심하지 않아서 또 사람에게 잡혔
단 말야!]
도지선은 말했다.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인가? 큰형님과 둘째형님이 오셔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싹 없애버리면 될 것이 아니냐?]
그 고깃덩이 같은 사람이 냉랭이 말했다.
[너희 두 놈은 금방 죽을텐데 아직도 사람 죽일 생각을 하고 있
느냐? 말하지 말아라. 듣기도 싫다!]
도지선과 도실선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소리
가 끊겼다. 틀림없이 고기덩이처럼 생긴 자가 그들의 입 속에 복
숭아씨 같은 것들을 쳐넣어 입을 열지 못하게 한 것 같았다.
악불군이 귀를 집중해 들어도 담 안에서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
다.
담을 한 바퀴 돌아오니 마침 담 바깥쪽에 큰 대추나무가 있는지
라 가볍게 대추나무에 올라가 담 안의 동정을 살폈다. 담 안에는
조그만 기와집 한 채가 있었고 담과 집은 일 장 정도 떨어져 있었
다. 그는 생각했다.
(도지선이 몸을 날려 담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어망에 걸린 것
으로 보아 이 일 장 넓이의 공간에 어떤 장치가 매복되어 있는 모
양이구나!)
그는 즉시 몸을 대추나무 잎이 무성한 곳으로 숨기고 자하신공
을 끌어올려 정신을 집중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 공 같은 사람은 영호충을 의자에 내려놓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도대체 조천추라는 늙은 도둑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영호충은 말했다.
[조천추라는 사람을 나는 오늘 처음 만나보았소. 그와 내가 무
슨 관계라니요?]
고깃덩이는 화가 나서 말했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너는 내
손아귀에 있다. 내가 네놈을 비참하게 죽여주겠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영단묘약을 내가 아무 뜻 없이 먹었으니 당신도 화가
날만 하오. 그런데 당신의약은 아무 영험도 없는 것 같소. 내가
먹고 난 다음에 아무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말이오.]
고깃덩이는 노해 말했다.
[효과가 그렇게 빠를 수 있겠느냐? 속담에 이를길 병이 올 때는
산이 넘어지는 것 같고 병이 나갈 때는 마치 실을 뽑는 것 같다고
하는데, 이 약의 효험은 약을 복용한 후 열흘 후에나 비로소 나타
나는 것이다.]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십일이나 반당이 지난 후 그때가서 상의하기로
합시다.]
고깃덩이는 화가 나서 말했다.
[네가 나를 가지고 노는군! 너는 이어르신의 속명팔환을 먹었
으니 죽어야 한다!]
영호충은 말했다.
[당신이 나를 즉시 죽인다면 그 속명팔환은 목숨을 구하는 효력
은 없는 셈이군!]
고깃덩이는 말했다.
[내가 네놈을 죽이는 것과 속명팔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영호충은 탄식했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면 어서 손을 쓰시오. 어차피 나는 몸에 기
운이 없으니 손을 쓸 수가 없소.]
고깃덩이는 말했다.
[흥! 네놈이 깨끗하게 죽으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쉽지는
않을걸? 나는 먼저 확실히 알아겠다. 제기랄! 조천추는 몇십년이
나 되는 오랜 친구인데 이번에 친구를 판 것은 그만한 사연이 있
을 것이다. 너의 화산파는 나 황하노조(黃河老祖)의 안중에 없다.
그가 너 같은 화산파 제자를 위해 나의 속명팔환을 훔쳐 먹인 것
은 괴이한 일이다. 정말 괴이하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 일이
다!]
한편으로 중얼중얼거리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매우 화가 나 있
는 것 같았다.
영호충은 말했다.
[각하의 외호는 알고보니 황하노조라고 불리우는군요. 실례했읍
니다. 정말 실례합니다.]
고깃덩이는 노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나 혼자 어떻게 황하노조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영호충은 물었다.
[왜 혼자서는 될 수 없다는 말이오?]
고깃덩이는 말했다.
[황하노조의 한 사람은 성이 조씨고 한 사람은 노씨다 물론 두
사람이지. 이런 것조차 모르니 정말 멍청하군! 한 사람은 노야 노
두자(老爺老頭子)이고 하나는 조종(祖宗) 조천추이다. 우리 두사
람은 황하 강가에 살고 있으므로 합하여 황하노조라고 부른다.]
영호충은 물었다.
[어째서 한 사람을 노야(老爺)라고 부르고 한 사람은 조종(祖
宗)이라고 부릅니까?]
고깃덩이 같은 사람은 말했다.
[너는 정말 무식하구나! 이 세상에 조씨성과 노씨성이 있는지
모르다니! 나의 성은 노(老)이고 이름은 외자로 야(爺)라고 한다.
자(字)는 두자(頭子)라고 한다. 사람들은 나를 노야라고 부르기도
하고. 노두자라고 부르기도......]
영호충은 참지 못하고 소리내 웃으며 물었다.
[그럼 그 조천추라는 사람은 성이 조씨고 이름은 종이겠군요?]
고깃덩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다.]
그는 잠깐 말을 쉰 다음 이상한 듯 물었다.
[어? 너는 조천추의 이름도 모른단 말이냐? 그렇게 말하니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을지도 모르겠군! 아니다 아니야! 너는 혹시 조
천추의 아들이 아니냐?]
영호충은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어찌 그의 아들이 되겠소? 그는 조씨고 나의 성은 복성인
영호인데 내가 어찌 그의 아들이 된단 말이오?]
노두자는 중얼거렸다.
[정말 해괴망측하다. 내가 무수한 심혈을 들여 훔치고 빌려 이
속명팔환을 배합했는데 원래 나는 이것을 나의 천금같은 딸의 병
을 치료해주려고 했지. 네가 조천추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가 왜
이 환약을 훔쳐 너에게 먹였을까?]
영호충은 비로소 뭔가 깨달아지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오 선생의 이 환약은 따님의 병을 치료해주려고 만
든 것이었군요. 그런데 제가 잘못해서 복용했으니 천번만번 죄송
합니다. 따님게선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요? 왜 살인명의 평대부
에게 부탁하지 않습니까?]
노두자는 쳇! 쳇! 쳇! 하며 말했다.
[난치의 병이 있으면 평일지를 청하면 되지. 이 누두자는 개봉
땅에 살고 있는데 왜 그것을 모르겠나? 그는 규칙이 하나 있지.
하나를 고치면 하나를 죽여 그 숫자를 맞춘다는 것 말이야. 나는
그가 내 딸을 치료해주지 않을까 염려되어 먼저 그의 마누라 집에
가서 일가 다섯사람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네. 그는 그제서야 미안
한 듯 내 딸의 병을 진맥하였다네. 내 딸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괴질병을 갖고 와삳고 하더군. 그래서 이 속명팔환의 처방을
알려주덕누. 그렇지 않으면 내 어찌 이 약을 만드는 법을 알았겠
는가?]
영호충은 들을수록 이상해 물었다.
[선배님께서 평대부에게 따님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하는데 그의
장모님 식구를 살해했읍니까?]
노두자는 말했다.
[너는 왜 이리 멍청하냐? 가르쳐주지 않으면 쥐어줘도 모르니
말이다. 평리지는 원수가 없지. 요 몇년 동안 그가 병을 낫게 해
준 많은 사람에게 부탁하여 원수를 모두 죽였기 때문이야. 평일지
는 평생 자기 마누라집을 제일 미워했다네. 그러나 마누라를 무서
워하는 공처가였기 때문에 친히 장모를 죽일 수도 없고 사람을 시
켜 죽일 수도 없었네. 이 노두자는 그와 동향이라서 그의 걱정 근
심을 잘 알고 있지. 어찌 그의 내심을 모르겠나? 그래서 내 스스
로 그의 처가집 식구를 죽인거야. 내가 그의 처가집 일가를 살해
하니 그는 매우 기뻐하며 내 딸아이를 진맥해 주었네.]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보니 그렇게 되었군요. 기실 선배님의 단약이 영험하다고
하지만 나의 질병은 낫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님의 병세는 지금
어떤지 모르지만 다시 단약을 만든다면 늦지는 않을까요?]
노두자는 화가 나서 말했다.
[내 딸아이의 생명은 길어야 반년이나 일년이고 그때가 지나면
만사가 끝장이네. 어디 그런 영약들을 찾으러 다닐 시간이나 있겠
나? 지금은 어절 수 없네. 별 수 없이 죽음을 기다리며 살 뿐이
지.]
그는 몇 가닥의 밧줄을 꺼내 영호충의 손과 발을 의자에 묶었
다. 그의 옷을 찢어 가슴의 근육이 나오도록 했다.
영호충은 말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노두자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초조해 할 필요는 없네. 잠시 후면 알게 될 것이네.]
그는 사람과 의자를 함께 들더니 방 두칸을 지나 휘장이 쳐져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영호충이 방 안에 들어가니 숨이 막힐 듯한 더위가 엄습해 왔
다. 그 방의 창과 문틈은 솜종이로 막아 바람이 통하지 못하게 했
다. 방 안에는 두 개의 난로를 피우고 있었고 침대의 휘장은 축처
져 있었으며 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노두자는 의자를 침대 앞에 놓더니 침대의 휘장을 젖히며 부드
럽게 말했다.
[착한 불사(不死)야, 오늘은 좀 어떠냐?]
영호충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뭐라고? 노두자의 딸의 방명(芳名)이 불사라니? 어째서 노불사
(老不死)라고 지어주었을까? 아! 맞다! 그래 알았다! 그는 아까
그녀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괴질병을 앓았기 때문에 그녀가 일찍
죽을까봐 불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늙을 때까지 죽지말라고 기원
한거야 정말 멋진 생각이군! 그녀는 '불' 자의 항렬이니 우리 사
부님과 동년배이군!)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웃음이 나왔다.
벽에는 혈색이 없는 사람이 누워 있었고 약 삼척 정도되는 머리
카락이 이불에 흩어져 있었다.
머리카락도 노랗게 변해 있었고 열여덟 사 정도로 보였는데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낮은 소리로 불렀다.
[아버지.]
그러나 눈을 뜨지는 않았다.
노두자는 말했다.
[불아야, 아버지가 너를 위해서 만든 속명탈환은 성공을 거두었
다. 오늘 복용을 하면 너의 병이 나을 것이야. 그러면 침대에서
일어나 밖에 나가 뛰어 놀아라.]
그 소녀는 녜 하는 소리를 내었으나 간절히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영호충은 그 소녀의 병세가 무거운 것을 보고 미안함 감을 떨
칠 수 없었다.
(이 노두자는 자기 딸에게 대단히 많은 정을 쏟았구나! 그래서
지금 그녀를 어쩔 수 없이 속이고 있는거야.)
노두자는 딸아이의 웠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자 앉아서 좋은 약을 먹으렴. 이 약은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망치지말도록 해라.]
그 소녀는 천처히 앉았다. 노두자는 두 개의 베개로 그녀의 등
뒤를 받쳐주었다.
그 소녀는 눈을 뜨고 영호충을 발견하고 이상한지 눈망울을 연
신 굴리며 영호충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버지, 이...... 이분은 누구예요?]
노두자는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 말이냐? 그는 사람이 아니고 약이야.]
그 소녀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그가 약이라고요?]
노두자는 말했다.
[그래, 약이란다. 그 약은 너무 강해서 네가 먹기에는 조금 적
합하지 못하여 먼저 이 사람에게 복용시킨 후 그의 피를 받아 네
가 복용하는 것이 제일 적합할 것 같았단다.]
그 소녀는 말했다.
[그의 피를 받는다고요? 그럼 아플텐데요. 그럼...... 그럼 좋
지 않은 것이예요.]
노두자는 말했다.
[이 사람은 멍텅구리야. 그래서 아픈 것을 모를꺼야.]
그 소녀는 음 하고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영호충은 놀라고 화가 났다. 막 입을 열어 욕을 하려다 말고 생
각했다.
(내가 이 소녀의 생명을 구하는 영약을 먹었으니 비록 내 의사
는 아니지만 내가 그 일을망친 것이니 그녀의 생명을 앗은 것이
나 다름없다. 하물며 나는 본래 살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내 죄를 사할 수도 있으니 안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는 처량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두자는 그의 몸 옆에 서서 그가 욕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그가 욕을 한다면 바로 아혈을 찍으려고 했는데 그는 무슨 영
문인지 얼굴색도 변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뜻밖이었다. 그가 어찌 영호충의 마음을 알겠는가?
영호충은 악영산에게 버림을 받은 후 살 의욕이 없어졌고, 또
오늘 저녁에 그 괴한이 큰 소리로 악영산과 임평지에게 그 두 사
람이 영호충에게 나쁜 말을 한다고 질책하는 소리도 들었고 또 친
히 악과 임 두 사람이 언덕 위에서 밀회를 즐기는 것을 보았기 때
문에 더욱 살 의욕이 상실되고, 삶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노두자가 알 수가 없었다.
노두자는 물었다.
[나는 너의 가슴을 파헤쳐 뜨거운 피를 받아내 내 딸의 병을 고
치겠다. 무서운가? 무섭지 않은가?]
영호충은 담담이 말했다.
[그까짓거 뭐 무서울게 있겠읍니까?]
노두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영호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약간의 동요도 없이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너의 가슴의 피를 거내면 너의 생명을 보전할 수가 없다. 나는
먼저 알려주었으니 알려주지 않았다고 탓하지는 말게.]
영호충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한번은 죽는 것이오. 일찍 죽으나 몇년 늦게 죽으나 무
슨 큰 차이가 있겠소? 내 피로 아가씨의 생명을 구한다는데 아무
런 이의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렇게나 죽을 바에야 누굴 위해 죽
는다면 더 좋은 것이 아닙니까?]
그는 말을 마치고 생각해 보았다.
(만약 악영산이 나의 죽음을 안다면 혹시 아무런 슬픔빛도 나타
내지 않고 '잘 죽었다' 고 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자기 자신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노두자는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칭찬했다.
[이렇게 죽으미마 두려워하지 않는 호한을 이 누도자는 평생 본
적이 없다. 단지 애석한 것은 내 딸이 너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를 살
려주었을 것이다.]
그는 부뚜막에 가서 한 대접의 물을 가져오고 오른손에 한 자루
의 날카로운 칼을 잡고 왼쪽손으로 뜨거운 물을 적셔서 영호충의
가슴을 문질렀다.
이때 밖에서 조천추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두자! 노두자! 빨리 문을 열게나. 여기 몇가지의 귀중한 물
건을 불사 아가씨에게 주려고 가져왔네!]
노두자는 눈쌀을 찌푸리며 오른손에 들고있던 칼을 휘젖더니 뜨
거운 물에 담갔던 수건을 두 조각으로 내어 한 조각으로 영호충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무슨 좋은 물건인가?]
그는 칼과 뜨거운 물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문을 열었다.
조천추가 방안에 들어오며 말했다.
[노두자,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되겠소? 이 일을 당신께 알릴 수
가 없어 나는 하는 수 없이 속명팔환을 가져다 그에게 먹었소. 만
약 당신이 알았다면 그 영단묘약을 그에게 주었을 것이오.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먹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오.]
노두자는 화가 나서 말했다.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이오?......]
조천추는 자기의 입을 그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몇마디 했
다. 노두자는 갑자기 몸을 껑충 뛰더니 말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소? 당신은 당신은 정말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지?]
조천추는 말했다.
[당신을 왜 속이겠소?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정말이오. 노두
자, 우리는 몇십 년 동안 우정을 맺어 왔소. 서로를 너무나 잘 알
고 있지 않소! 내가 이번 일을 한 것은 당신 맘에도 쏙 들 것이
오.]
노두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틀림없소! 틀림없소! 마땅히 죽어야 하오! 마땅히 죽어야 하
오!]
조천추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어재서 틀림이 없고 누가 죽어야 한단 말이오?]
노두자는 말했다.
[당신은 틀리지 않았소! 내가 죽어야 하오!]
조천추는 더욱 이상해 말했다.
[당신이 왜 죽어야 한단 말이오?]
노두자는 단숨에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영호
충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올리며 외치듯 말했다.
[영호 공자! 영호 어르신! 소인은 돼지기름이 가슴을 꽉 메워서
당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읍니다. 다행히 하늘이 나를 불쌍히 보
우하시오 조천추가 제때에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내가 당신을
단숨에 찔러죽였다면 이 노두자의 전신의 고깃덩이가 보약으로 삶
아진다 해도 내 죄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말을 하면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영호충의 입에는 반조각의 수건이 틀어막혀 욱욱하는 소리만 낼
분 말을 할 수 없었다.
조천추는 급히 그의 입 속의 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영호 공자, 당신는 어째서 이곳에 와 있는 것입니까?]
영호충은 급히 말했다.
[노 선배님, 빨리 일어나시오. 이런 예는 올리 필요가 없읍니
다.]
노두자는 말했다.
[이 늙은이는 영호 공자께서 나의 은인과 이런 관계를 맺고 있
는 줄은 몰랐읍니다. 너무 실례를 했소이다. 정말 죽어야 됩니다.
정말 죽어야 되지요.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다니, 나의 딸 백 명
이 모두 죽는다 해도 절대로 영호 공자의 피를 한방울이라도 흘려
서 그녀들의 개 같은 생명을 구하지는 않겠읍니다.]
조천추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노두자, 당신은 영호 공자를 이곳에 묶어놓고 무엇을 하려고
했소?]
노두자는 말했다.
[아이쿠! 어쨌든 내가 일을 거꾸로 행했고 되지 못한 짓을 했으
니 한 마디라도 변명할 수가 없군!]
조천추는 물었다.
[이 뜨거운 물하며 이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당신은 무슨 짓을
하고 있었소?]
곧이어 퍽퍽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두자가 힘껏 자기의 부
볼을 때리고 있었다. 그의 뺨은 본래 살쪄서 마치 한 개의 호박
같았는데 몇번을 힘껏 때리자 금방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올랐
다.
영호충은 말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저는 지금 뭐가 뭔지 통 보르겠읍니
다. 두 분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노두자와 조천추는 급히 몸에 감겨 있는 끈을 풀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술을 한 잔씩 마시며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영호충은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따님의 병세에 어떤 변화라도 있는지요?]
노두자는 말했다.
[없읍니다.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그건......]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러더니 영
호충과 조천추를 대청에 오르도록 하고 세 그릇의 술을 따르고 또
한 접시의 돼지고기를 가져와 안주로 삼았다. 그리고 아주 공경스
럽게 술잔을 들어 영호충에게 한 잔을 권했다.
영호충은 단숨에 마셨다. 그 술맛은 담담했으며 좋은 술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천추의 술잔에 담아 먹던 그 술맛보다 자려 배
이상은 좋은 것 같았다.
노두자는 말했다.
[영호 공자 이 늙은이가 망령이 들었소. 공자께 실수를 했으니
정말로...... 정말로......]
얼굴에는 미안한 감이 가득 찼으며 무슨 말을 해야 그 송구한
마음을 전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조천추는 말했다.
[영호 공자는 대인이고 마음이 넓으십니다. 절대로 당신을 탓하
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당신이 만든 속명팔환이 효험이 있다면
영호 공자의 몸에 좋은 것이니 당신은 오히려 공을 쌓은 것이오.]
노두자는 말했다.
[그건...... 그 공로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오. 조형의 공이지
요.]
조천추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여덟 알의 환약을 가져갔기 때문에 불사의 몸에
이상이 생길까봐 염려되었소. 이 인삼들을 그녀에게 달여주십시
오.]
말을 하면서 몸을 숙이고 대나무 바구니를 끄집어내어 뚜껑을
열고 한 웅큼의 인삼으 꺼냈다. 굵은 것과 가는 것을 합쳐 최소한
여덟 근은 될 것 같았다.
노두자는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 이 많은 인삼을 가져오시었소?]
조천추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약방에서 빌려온 것이지요.]
노두자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유비(劉備)가 형주(荊州)를 비리듯이 언제나 되돌려줄지 모르
는 격이군요.]
영호충은 노두자가 억지로 웃음을 짓고 껄껄 거렸지만 양미간에
근심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노 선생, 조 선생, 당신들 두 분의 나의 병을 고치시려고 하셨
읍니다. 비록 그것은 좋은 일이나 처음에는 저를 속여 술을 마시
게 했고 다음에는 저를 납치했읍니다. 이런 행동은 저를 너무 얕
보신 것 같습니다.]
노, 조, 두 사람은 그 말을 듣자 다급히 일어나 연시 고개를 조
아리며 말했다.
[영호 공자, 늙은이들의 죄는 천번만번 죽어 마땅하오. 공자께
서 어떤 처벌을 내리셔도 우리 두 늙은이는 달게 받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좋소. 나는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속이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도대체 당신 두 분은 누구의 부탁을 받으시고 나를 이
렇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았다. 노두자가 말했다.
[이건...... 이건...... 이것은......]
조천추가 말했다.
[공자 어르신께서는 아실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우리는 감히
언급할 수가 없군요.]
영호충은 말했다.
[나는 정말, 정말 모르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풍 태사숙인가? 아니면 불계대사인가? 그렇지 않으면
전배광인가? 녹죽옹인가? 그러나 다 아닌 것 같다. 풍 태사숙께선
힘을 가지고 계시나 그 어르신은 은거하시며 나오지 않으시고 또
나에게 자기 행적을 절대로 누설치 말라고 하셨는데 그가 어지 사
능마 내려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조천추는 말했다.
[공자, 이 일을 물어보셔도 나와 노형은 절대 말씀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죽이다 해도 말하지 않을것이오. 공자께
서는 자연히 아시게 될터인데 우리가 꼬 말할 필요가 있겠읍니
까?]
영호충은 그의 말투가 매우 강경해 어떤 협박을 해도 말할 것
같지 않자 말문을 돌렸다.
[좋습니다. 당신들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으니 내 마음속의 노기
가 사라지지 않는군요. 노선생, 당신은 조금 전 나를 의자에 묶어
둘 때 나는 겁이 나서 혼배백산했읍니다. 나도 당신따마 두 분을
묶어놓고 마음이 풀어지지 않으면 나는 뾰족한 칼로 당신들의 심
장을 도려내야겠읍니다.]
노, 조,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일제히 말했다.
[공자께서 묶으신다면 우리는 반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두자는 두 개의 의자와 여덟 개의 끈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먼저 자기들의 두 다리를 의자에 꽁꽁 묶었다. 그리고 나서 두손
을 몸 뒤로 돌리며 말했다.
[공자, 묶으시지요.]
그리고 모두 생각했다.
(이 소년이 우리를 꽁꽁 묶어 화풀이를 할 것이가? 아마 장난이
고 농담이겠지.)
그러나 영호충은 끈을 가져다 두 사람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
노두자의 뾰족한 칼을 집어들며 말했다.
[나의 내력이 이미 소실되어 손으로 혈을 지를 수 없습니다. 또
당신들이 기운을 써 반항할까 염려되어 하는 수없이 칼자루로 당
신 두 사람의 혈도를 봉하겠읍니다.]
그는 즉시 뾰족한 칼자루를 잡고 두 사람의 환도(環跳), 천주
(天柱), 소해(少海) 등의 혈로를 힘껏 내리쳐 두 사람의 혈로를
봉쇄해 버렸다.
노두자와 조천추는 서로 쳐다보며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자
기도 모르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영호충은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까?
영호충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은 여기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대청을 나갔다.
영호추은 뾰족한 칼을 잡고 소녀의 방으로 들어가 기침을 한번
한 후 말했다.
[노...... 소저, 몸은 어떠하시오.]
그가 본래 그녀를 '노소저' 라고 부르려했으나 이 소녀의 나이
가 어리고 성은 비록 노씨이지만 노소저라고 부르기가 마땅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를 '노불쏘저' 라고 부른다면 더 이상할 것 같
았다.
그 소녀는 '응' 하는 신음소리를 냈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영호충은 침대의 휘장을 걷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침대 위
에 앉아 있었다. 베개에 등을 받치고 앉아 있었는데 반은 잠든 것
같고 반은 깨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두 눈은 반쯤 뜨고 있었다.
영호충이 두 걸음 앞으로 나서서 보니 그녀의 얼굴은 투명하리
만치 희었으며 이마에 한 줄기 파가 힘줄이 튀어나와 마치 혈관의
피가 흐르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방안에는 정적만 흘렀고 바람소리조차 없었다. 마치 그녀의 체
내의 신선한 피가 한방울 한방울 굳어져가는 듯했다. 그녀가 내쉬
는 숨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미약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이 아가씨는 본래 살 수가 있었는데 내가 그 환약을 복용하여
죽게 되었다. 나는 어차피 죽어야 될 몸이다. 며칠 더 살고 덜 산
다고 무슨 다른 점이 있겠는가?)
그는 옆에 있던 자기그릇을 탁자에 올려놓고 왼쪽 팔뚝을 들고
오른손으로 칼을 들어 혈맥을 한번 그었다.새빨간 피가 분수 처럼
흘러나와 그릇에 고였다.
그는 노두자가 조금 전 가져온 그 대야의 물에서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고 즉시 뾰족한 칼을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그물을 떠서 상처 부위에 끼얹었다. 그것은 뜨끈한 피가 응고되지
않고 계속 많이 나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순식간에 새빨간 피가
그릇에 가득 찼다.
그 소녀는 혼미한 상태여서 피비린내를 맡고 눈을 떴다. 바라보
니 영호충이 그릇에다 피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
을 질렀다.
영호충은 그릇에 피가 가득 차자, 그녀의 침대 앞으로 가져가
그녀의 입가에 대주며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빨리마시십시오. 이 피에는 영약이 들어있으니 당신 몸이 나
을 것이오.]
그 소녀는 말했다.
[전...... 저는 무서워요. 저는 마시지 않겠어요.]
영호충은 피를 한 그릇이나 흘리게 되자 머리가 텅 빈 것 같았
고 사지에 힘이 쑥 빠져 달아났다.
(소녀가 이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나는 피를 괜히 흘린 것이 아
니겠는가?)
그는 왼손으로 뾰족한 칼을 쥐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는 단칼에 당신을 죽여버리겠소.]
그리고 뾰족한 칼끝을 그녀의 목에 갖다댔다.
그 소녀는 무서워 피를 한모금 한모금씩 마셨다. 몇번이고 역겨
워 토해내고 싶었으나 영호충의 칼끝이 번쩍이자 무서워 감히 토
하지도 못했다.
영호충은 그녀가 한 그릇의 피를 깨끗이 비울 때쯤 자기 팔뚝의
피가 응고되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내가 노두자의 속명팔환을 먹어 핏속에 그 약이 섰이긴 했으나
이 아가씨의 체내에 들어간 양은 영약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에 내가 정신을 잃게 디면 더 많은 피를 흘릴 것
이다. 그럴 바에는 내가 정신이 맑을 때 몇 그릇의 피를 더 마시
게 하자. 내가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그는 오른팔의 혈맥을 끊어 피를 한그릇 가득 담고 그 소녀에게
다시 마시게 했다.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애걸했다.
[그만...... 그만 하세요. 나는 정말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영호충은 말했다.
[먹을 수 없어도 마셔야 되오. 빨리 마시십시오. 빨리 마셔요!
빨리!]
그 소녀는 억지로 몇 모금을 마신 후 숨을 한참 내쉬었다.
[당신은...... 당신은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당신이 이러시면
죽을텐데요.]
영호충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몸을 버린다 해도 그게 무슨 대수요? 나는 단지 당신의 몸
을 낫게 하고 싶소.]
도지선과 도실선은 노두자가 쳐놓은 그물에 걸리자 있는 힘을
다해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럴수록 그물은 더욱 조여져 나중에는
두 사람의 손과 발을 단 몇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나 귀와 눈은 여전히 민감했
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영호충이 노 조 두 사람
을 꽁꽁 묶는 것을 본 도지선은 말하기를 그가 반드시 두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했다. 도실선은 영호충이 먼저 자기형제를 풀어주
기 위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맞지 않
았다. 영호충은 두 사람의 상상을 깨뜨리고 그 소녀의 방으로 들
어갔던 것이다.
그 소저의 규방은 밀폐되어 바람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
의 대화는 들리듯 말듯 밖으로 새어나왔다.
도지선과 도실선, 악불군, 노두자, 조천추 등의 내공은 상당했
지만 영호충이 방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여자의 비명소리가 나자 다섯 사람의 얼굴색은 모두 변
했다.
도지선은 말했다.
[영호충은 남자인데 규수의 방에 들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을
까?]
도실선은 말했다.
[들어보라구. 그 아가씨가 무서워서 '전전...... 무섭습니다.'
그런까 영호충이 '당신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는 단칼에 당신을
죽여버리겠소' 하지 않았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며 어쩌고 저쩌
고 했는데 영호충은 그녀에게 무슨 말을 들으라고 하는걸까?]
도지선은 말했다.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것은 강제로 협박해 그녀를 마누
라로 삼으려는 수작이지.]
도실선은 말했다.
[하하하! 재미있는 일이군!그 호박처럼 둥그렇게 생긴 사람의
딸이라면 틀림없이 호박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겼을텐데 영호충은
왜 그렇게 생긴 여자를 마누라로 삼으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도지선은 말했다.
[호박꽃도 꽃이지. 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 어쩌면
영호충은 아주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뚱뚱
한 여자를 보기만 하면 사죽을 못쓰는지도 모르지.]
도실선은 말했다.
[아이쿠! 저 소리 좀 들어보세요. 그 뚱뚱한 여자가 애원을 하
는군요. '강제로 이러시면 안 돼요! 나는 정말로 못 합니다!']
도지선은 말했다.
[맞다! 그래 맞아! 영호충, 이놈이 정말 강제로 활을 끼워 맞추
려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안 돼도 되게 해야 된다' 고 하지!]
도실선은 말했다.
[영호충은 빨리빨리 하라고 하는데 무엇을 빨리 하라고 그럴
까?]
도지선이 말했다.
[너는 마누라를 얻어본 적이 없는 숫총각이니 물론 이해를 못할
거야.]
도실선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마누라를 얻어본 적이 있소? 피장파장이지
뭐.]
도지선은 말했다.
[네놈도 내가 마누라가 없는걸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말을 무
어보냐?]
도실선은 크게 외쳤다.
[이봐요! 이봐! 노두자! 지금 영호충이 당신 딸을 마누라로 삼
으려고 하는데 당신은 보고도 왜 구하지 않는 것이오?]
도지선은 말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어떻게 뚱뚱한 여자가 마누라가 되
려고 그러는 줄 알지? 마누라가 되는걸 왜 말려야 하지? 정말 소
란을 일으키고 있군! 그녀의 딸 이름이 '노불사' 라고 부르는 데
설마 죽기라도 할까봐?]
노두자와 조천추는 의자에 묶이고 혈도가 봉쇄되었으니 방에서
노소저가애걸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볼 뿐이었다.
두 사람은 내심 의심을 품고 있었으나 도곡이선이 큰 소리로 말
다툼하는 소리를 듣자 더욱 확신을 했다.
조천추는 말했다.
[노형, 이 일은 꼭 막아야 합니다. 영호 공자가 이렇게 색을 좋
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읍니다. 아마 큰 화가 일어날 것 같지
요?]
노두자는 말했다.
[아! 정말 내 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군! 그건 그렇다치
고 정말로...... 정말로 그 사람에게 미안할 뿐이야!]
조천추는 말했다.
[들어보시게! 들어보시게! 당신의 불사 소저가 영호충에게 정이
생긴 모양이오. 그녀가 말하기를 '당신이 이렇게 하면 자기 몸을
다치게 할뿐이예요?' 영호충이 뭐라고 했는지 당신은 들었소?]
노두자는 말했다.
[그가 하는 말은 '내 몸이 무슨 대수겠소. 나는 당신이 좋기만
하면 되오' 제미랄놈! 이 두 년놈들이 벌써......]
조천추는 깔깔 웃어댔다.
[노형, 축하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노두자는 화가 나서 말했다.
[축하는 무슨 얼어죽을 축하요?]
조천추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화낼 필요는 없지 않소? 축하드리오. 좋은 사위를
얻었으니!]
노두자는 크게 소리질렀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이 일이 밖으로 새나가면...... 나
는 당신의 목숨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오!]
그의 말투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조천추는 말했다.
[그렇게 하지. 그렇게 하지.]
그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악불군은 담 밖 나무 위에 있었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 자하신
공을 발하고 있었지만 몇마디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맨처음 영호충이 그녀에게 강제로 일을 벌이려고 했으나 이 사
람들과 영호충까지도 모두 신비하고 괴이하여 어떤 또 다른 계획
이 있는지 몰라 섣불리 들어갈 수가 없어 조용히 일이 돌아가는
추세를 살피고 있었다.
더욱 자하신공을 끌어올려 동태를 살폈다.
도곡이선 노, 조, 네 사람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귓속으로 들려
왔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호충이 그녀가 몸을 움직이 수 없는 기
회를 틈타 그녀에게 큰 실례를 범했고 나중에 노조 두 사람이 주
고받는 말을 들으니 영호충은 체격이 당당하고 멋진 남아인데 그
여자는 저의 아비와 같이 호박처럼 못생긴 추녀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몸을 뺏긴 후 오히려 영호충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갑자기 그 소저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많은 피를, 당신
에게 애원합니다......]
갑자기 담 밖에서 어떤 사람이 외쳤다.
[노두자, 도곡사괴를 멀리 뿌리쳤소!]
탁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나며 어떤 사람이 담 밖에서 몸을 날려
문을 밀치고 집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바로 하얀기를 들고 도곡사
선에게 약을 올렸던 사내였다.
그는 노두자와 조천추가 의자에 묶여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며 말했다.
[왜 그러시오?]
오른손을 돌리니 손에는 비수가 들려 있었다. 손을 춤추듯 놀리
며 두 사람의 밧줄을 끊었다.
옆방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에게...... 당신에게 애원합니다. 절대로 이럴 순 없어
요!]
그 사내는 여자의 외침소리가 들려오자 급히 말했다.
[노불사 소저가 아닙니까?]
그는 그 방을 향해 달려갔다.
노주자는 그 사람의 손목을 잡으며 소리쳤다.
[들어가지 마라!]
그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뜰에 있던 도지선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 생각에 저 키작고 호박덩이는 영호충 같은 사위를 얻었으니
틀림없이 기쁠거야.]
도실선은 말했다.
[영호충은 곧 죽을텐데. 반송장 같은 사위를 얻고 뭐가 그리 기
쁘겠소?]
도지선은 말했다.
[그 사람의 딸도 곧 죽을텐데 뭐. 두 부부는 반은 살고 반은 죽
었어!]
도실선은 물었다.
[누가 죽고 누가 산단 말이오?]
도지선은 말했다.
[그걸 물어볼 필요가 있냐? 물론 영호충이 죽겠지. 노불사 소저
는 이름이 불사인데 어찌 죽겠는가?]
도실선은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이름이 그렇다고 이름대로 된답니
까? 만약에 천하의 모든 사람이 노불사라고 이름 짓는다면 모두
죽지 않는단 말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무공을 배워 어디다 쓰오?]
두 형제가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는 중에 방문이 '펑' 하고 열리
는 소리가 났다. 어떤 물건이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 같았다.
노소저는 다시 부르짖었다. 소리는 비록 약했지만 놀라는 기색
이 역력했다.
[아버지, 빨리 오세요!]
노두자는 딸이부르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영호충은 땅바닥
에 쓰러져 있고 자기 그릇을 가슴에 안고 있었으며 상반신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노소저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는데 입주위가 온통 새빨갛
게 물들여져 있었다.
조천추와 그 사내는 노두자 옆에 서서 영호충을 쳐다보고 노소
저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노소저는 말했다.
[아버지 그가...... 많은 피를 짜서 강제로 나에게 두 그릇
을...... 그는...... 한 그릇을 다시 받으려고 하다가......]
노두자는 깜짝 놀라 급히 영호충을 안아 일으켰다. 그의 두 팔
목의 혈맥은 칼로 그어지고 새빨간 피가 물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두자는 급히 방문을 나가 금창약(金瘡藥)을 꺼내오려고
했다.
마음이 조급해지자 비록 자기 집이지만 허둥지둥하다가 문설주
를 들이받고 머리에 혹이 나고 문은 쓰러져 비스듬해졌다.
도지선은 '우지끈 뚝' 하는 소리가 드릴자 그가 영호충을 구타
하고 있는 줄 알고 외쳤다.
[이봐요! 노두자, 영호충은 도곡육선의 친구요! 절대로 그를 때
려서는 안되오! 만약 그를 때려 죽인다면 도곡육선은 당신의 고깃
덩이를 한 조각 한 조각 찢어버리겠소!]
도실선은 말했다.
[틀렸읍니다! 틀렸읍니다!]
도지선은 말했다.
[뭐가 틀려?]
도실선은 말했다.
[그의 몸이 비쩍 말랐다면 한조각 한조각 찢는게 말이 되지. 하
지만 그의 몸은 모두 비곗덩어리이니 찢는다면 한 덩어리 한 덩어
리로 찢어야 되지 어떻게 조각조각 찢겠소?]
노두자는 금창약을 꺼내 영호충의 상처를 싸맸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있는 혈도를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영호충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노두자는감격스러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호 공자, 당신은...... 당신은 정말로...... 이 은혜 우리는
분골쇄신하여 갚겠읍니다! 또...... 또......]
조천추는 말했다.
[영호 공자, 노두자가 아까 당신을 묶은 것은 모두 오해였소.
당신은 그것을 진심으로 아셨군요? 정말로 내가 면목이 없읍니
다.]
영호충은 미소지며 말했다.
[제 몸의 내상은 영단묘약으로 치료할 수가 없읍니다. 조 선배
님께선 저 때문에 노 선배님의 속명팔환을 훔쳐 나에게 복용케 하
셨읍니다. 정말로...... 정말로 단지 이 소저의 병이 완쾌되길 빌
뿐입니다.]
그는 여기까지 말한 후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노두자는 그를 안고 딸의 방에서 걸어나와 자기방 침대로 옮겼
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리고 볼품사나운 표정을 하며 말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조천추는 말했다.
[영호 공자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소. 어쩌면 생명이 경각에 달
렸는지도 모르오. 우리 세 사람이 필생의 힘을 써서 내공을 영호
공자 체내에 불어넣어 주는 것이 어떻겠소?]
노두자는 말했다.
[그렇게라도 해야겠군!]
그리고 영호충을 가볍게 안고 오른쪽 장심(掌心)을 영호충의 대
추혈(大椎穴)에 가볍게 대고 크게 기운을 썼다. 전신이 떨리며 와
자작하는 소리와 함께 앉았던 나무의자가 부서졌다.
도지선은 깔깔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영호충의 내상은 우리가 그의 상처를 치료하느라고 생겼는데
이 호박덩이가 우리의 전철을 밟는군! 영호충은 그렇게 되면 상처
받은 몸에 또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받고 계속 상처만 받을 것이
아닌가?]
도지선은 말했다.
[들어보시오. 저 뭔가 부서지는 소리는 틀림없이 호박덩이가 영
호충의 체내에 있던 내력(內力)에 튕겨나와 나가 떨어져 무엇엔가
부딪쳐 망가지는 소리요. 영호충의 내력은 곧 우리들의 내력이니
저 호박덩이는 우리 도곡육선에게 당하게 되어군! 정말 멋져요!
정말 멋진 장면이오!]
노두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호 공자께서 상처도 낫지 않고 정신도 들지 않는다면 나 노
두자는 별 수 없이 자살을 할 수밖에 없소.]
그 사내는 갑자기 목소리를 돋우어 큰 소리로 말했다.
[담 밖의 대추나무에 있는 분은호산파의 악 선생이 아니오!]
악불군은 깜짝 놀람 생각했다.
(알고보니 나의 행동을 그들이 벌써부터 알고 있었군!)
다시 그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악 선생, 멀리서 온 손님이니 좀 들어시지 않겠소?]
악불군은 난감했다. 들어가자니 더욱 일이 꼬일 것 같았으나 지
금으로선 계속 나무 위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 사내는 말했다.
[당신 제자인 영호 공자께서 기절을 했읍니다. 빨리오셔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악불군은 기치미마 한번 한 후 몸을 날려 일장 넓이의 들을 지
나 물이 떨어지는 처마 밑에 몸을 댔다.
노두자는 방에서 걸어나오며 읍을 하고 말했다.
[악선생, 들어오시지요.]
악불군은 말했다.
[저는 제자의 안위가 걱정되어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소.]
노두자는 말했다.
[제가 죽일 놈이지요. 아! 만약...... 만약......]
도지선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염려할 필요 없소. 영호충은 죽지 않을 가이오!]
노두자는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가 안 죽는지 아시오?]
도지선은 말했다.
[그의 나이는 당신보다도 적고 또 나보다도 적소. 그렇지 않소
이까?]
노두자는 말했다.
[그렇소, 그것이 어쨌단 말이오?]
도지선은 말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먼저 죽소? 그렇지 않으면 나이가 어린 사
람이 먼저 죽소? 자연히 나이 많은 사람이 먼저 죽지요? 당신과
내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영호충이 어찌 죽는단 말이오?]
노두자는 이런 이치는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이 또 주둥
이를 놀리자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도실선은 말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우리 모두 합심하여 영호충의
이름을 고쳐 부르도록 합시다. 이름을 '영호불사' 라고......]
악불군이 방으로 들어가니 영호충은 정신을 잃고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내가 만약 자하신공을 쓰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몇 사람이 우
리 화산파를 멸시할 것이다.)
그는 즉시 암암리에 자하신공을 발했다. 얼굴을 침대 쪽으로 향
하고 자기(紫氣)가 나타날 때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했다.
손바닥을 영호충의 등에 있는 대추혈에 갖다댔다. 그는 벌써 영
호충의 몸 속에서 진기가 운행하는 상태를 알 수 있었으므로 큰힘
을 쓰지 않고 단지 적절한 내력을 천천히 불어넣었다. 영호충은
몸 속 진기가 반격을 가해오자 그는 손바닥을 영호충의 피부에서
반촌(半寸) 정도 떼었다가 다시 손바닥을 대추혈에 대었다.
과연 얼마 있지 않아 영호충은 천천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오셨군요.]
노두자 등 세 사람은 악불군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영호충의
정신을 돌리자 모두 탄복했다.
악불군이 깊이 생각했다.
(이곳은 더 머물 곳이 안 된다. 배 안에 있는 부인과 제잗르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
악불군은 공수하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우리를 이렇게 대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읍니다.]
노두자는 말했다.
[녜, 녜, 영호 공자는 몸이 안 좋으니 여기서 응당 치료를 해야
겠지만 누추해서......]
악불군은 말했다.
[너무 예가 지나치십니다.]
별로 밝지 않은 불빛 아래 그 사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악
불군은 언뜻 생각이 떠올라 공수를 하며 말했다.
[이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조천추는 웃으며 말했다.
[악 선샌께선 우리들이 밤고양이라고 부르는 무계가시(無計可
施) 계무시(計無施)를 모르시는군요?]
악불군은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반고양이 계무시?듣건대 이 사람은 천부적으로 좋은 눈을 가
지고 태어났으며 행동에 있어선 갑자기 악해졌다 갑자기 선해지고
때로는 바르고 때로는 사악하여 비록 이름은 계무시라고 부르지만
간계가 무궁한 사람으로 상당히 무서운 인물인데 그런 그가 노두
자 등과 함께 있다니!)
급히 공수하며 말했다.
[계사부(計師傅)의 존함을 일찍 들었소. 그 명성은 천둥과 우뢰
같았읍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뵙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계무시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오늘도 만나보고 내일은 오패강에서 만나야되지않습니
까?]
악불군은 깜짝 놀랐다. 비록 초면이라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한
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 줄은 알지만 딸의 행방을 묻지 않을 수 없
었다.
[제가 이곳에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요. 제 생각에는 이곳을 지
나면서 여러분에게 인사를 못 한 것이 그 원인인 것 같습니다. 정
말 미안하지만 제 딸과 임씨성을 가진 제자를 어떤 친지가 데려갔
는지 모르겠으니 계 선생께서 한두 마디만 해주실 수 없을까요?]
계무시는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 일에 대해선 잘 모르겠는데요.]
악불군이 딸의 행방을 물어본 것만으로도 장문인의 신분을 위축
시켰는데 그가 거절하는 하는 소리를 듣자 화가 나고 마음이 초조
해졌다. 더 물어볼 수 없어 담담히 말했다.
[밤도 깊었는데 폐가 많았읍니다. 이만 물러가지요.]
그리고 영호충을 안으려고 했다.
노두자는 영호충을 급히 낚아채며 말했다.
[영호 공자는 제가 모셔왔으니 응당 제가 모셔다 드려야죠.]
그리고 엷은 이불을 꺼내 영호충을 감사더니 큰 걸음으로 문밖
을 나섰다.
도지선이 외쳤다.
[이봐요! 우리 두 마리 물고기를 여기다 두면 어떤 꼴이 되겠
소?]
노두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마음속으로 호랑이를 잡기는 쉬우나 놓아주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 두 형제를 놔주면 도곡육선이 다시 와서 이릉마 저지를 것이고
그러면 이들을 막기란 쉽지 않을 것이고 이 둘을 인질로 삼아도
또 다른 네 사람이 골치인 것 같았다.
영호충은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
[노 선배님, 그 둘을 놓아주십시오. 도곡이선, 당신들은 앞으로
노 조 두 분을 찾아와서 복수를 한다 어쩐다 하지 마시오. 모두들
적개심을 버리고 친구가 되면 어떻겠소?]
도지선은 말했다.
[우리 두 사람으론 복수를 할 수 없지 않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그러면 도곡육선이 함께 오겠단 말이오?]
도실선은 말했다.
[그들에게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있지. 그러나 적개심을
품고 친구로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네 머리가 떨어져
나가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오.]
노두자와 조천추는 '흥' 하고 코웃음쳤다.
(우리는 영호 공자의 체면을 봐서 너희들과 한바탕하지 않는 것
이지 우리가 너희 도곡육선이 무서워 그러는 줄 아느냐?]
영호충은 말했다.
[그건 왜요?]
도실선은 말했다.
[도곡육선과 그들 황하노조와는 본래 원한이나 복수 같은 관계
가 없어. 원래 적이 아니니까 적개심을 품은 적이 없단 말이야.
친구로 사귄다는 것은 괜찮을지언정 적개심을 풀고 친구가 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지.]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조천추는 고개를 숙여 어망의 매듭을 풀었다. 이 어망은 인발
(人髮)과 야잠사와 순금사(純金絲)로 짜여져 있어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칼이나 어떠한 무기로도 자를 수가 없고 그 속에 갇히면 사람이
풀어주지 않는 이상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조여드는 것
이었다.
도지선은 몸을 일으키더니 어망에다 오줌을 갈겼다.
조천추는 놀라 물었다.
[당신......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도지선은 말했다.
[이 더러운 어망에 오줌을 갈기지 않는다면 이 늙은이의 화풀이
는 어디다 한단 말이오?]
일곱 사람은 다시 부둣가로 돌아왔다.
악불군은 노덕약과 고근명 두 제자가 뱃머리에 서서 망을 보는
것을 보자 아무 일도 없었음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노두자는 영호충을 선창에 데려간 후 아주 예의바르게 읍을 하
며 말했다.
[공자의 의리와 정성에 이 늙은이는 감격하였소이다. 오늘은 여
기서 헤어지지만 머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영호충은 돌아오느라고 충격을 받아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 단지
'음' 하는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악 부인과 여러 사람은 호박덩이 같은 사람이 조금 전엔 무례하
게 굴다가 공손해졌으며 지금 영호충에 대해 예의 바르게 나오자
속으로 깜짝 놀랐다.
노두자와 조천추는 도근선 등이 돌아올까 염려되어 더 이상 머
물려고 하지 않고 악불군에게 공수를 한 다음 간다는 인사를 했
다.
도지선은 조천추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조형, 잠깐만.]
조천추는 말했다.
[왜 그러시오?]
도지선은 말했다.
[이 짓을 하려고 그러오.]
무릎을 꿇어 귀를 낮추며 그를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이 행동
은 뜻밖이고 빨라 조천추는 피하지 못하고 급히 내공을 발하여
기를 단전으로 순식간에 불어넣었다. 배는 이미 단단하기 강철 같
으나 '챙그랑' '챙강' 하는 소리가 열 몇번울렸다.
도지선은 이미 수십 장 밖으로 나가면서 깔깔 웃어댔다.
조천추는 크게 외쳤다.
[아이쿠! 아이쿠!]
그는 손을 급히 품 속에 넣어 수십 개의 파편을 끄집어 냈다.
그 파편은 도자기 파편, 옥, 대나무 또는 나무 등 조천추의 품 속
에 있던 이십몇 개의 진귀한 술잔들이 한번의 박치기에 다 박살이
나고 금배나 은배 청동작 같은 물건들은 쭈그러졌다.
그는 아깝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수십 개의 조각들을 주워
도지선을 향해 마구 던졌다.
도지선은 벌써 방어가 되었으므로 몸을 피하며 외쳤다.
[영호충이 우리 보고 적개심을 풀고 친구가 되라고 했는데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잖아? 우리는 이제 적이 되었다고! 다음 차
례는 친구가 되는 것이오.]
조천추는 수십 년 동안 각고의 노력끝에 이 술잔들을 장만했는
데 도지선이 달려들어 술잔들을 다 망가뜨리자 너무너무 화가 났
다. 본래 반격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말을 듣자 즉시 걸음을 멈추
고 껄끄럽게 웃으며 말했다.
[흠 맞는 말이군. 적개심을 풀고 친구가 되고 적이 친구가 된
다.]
그리고 노두자와 계무시와 함께 몸을 돌려가버렸다. 영호충은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그래도 악영산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도지선, 당신이 그들에게 말씀 좀 해주십시오...... 절대 소사
매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요.]
도지선은 말했다.
[알았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요, 이봐! 노두자, 밤고양이, 조천추는 들으시오! 영호충
이 말하기를 당신들은 그의 보배인 사매를 해치지 말라고 합니
다.]
계무시 등은 이미 멀리 갔으나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춘 후 노두
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영호 공자의 명이니 반드시 따르겠소!]
세 사람은 한참 무엇을 상의하더니 비로소 멀어져 갔다.
악불군은 부인에게 조금 전 노두자의 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때 갑자기 언덕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근선 등 네 사람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도곡사선은 허풍을 떨었다. 백기를 들고 있던 사람은 그들에게
잡혀 이미 네 조각이 났다고......
도실선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대단해요! 네분 형님은 충분히 그런 능력이 있
죠!]
도지선은 말했다.
[당신들은 그 사람을 네 조각으로 찢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의 이름을 아시오?]
도간선은 말했다.
[죽었는데 그의 이름을 알아 무엇해? 물어보는 너는 아느냐?]
도지선은 말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지. 그 사람의 성은 계씨고 이름은 무시라고
하지요. 그에겐 별명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를 밤고양이라고 부릅
니다.]
도엽선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 사람은 성도 좋지만 이름 또한 절묘하군! 원래 그는 선견지
명이 있었군! 우리 도곡육선에게 잡힌 다음 아무 계책이 없어 도
망가지 못하고 몸이 네 조각으로 찢어지는 운명을 맞이할 것을 예
상하고 그 이름을 지은거야!]
도실선은 말했다.
[그 밤고양이 계무시의 공력은 출중하여 이 세상에서 보기 힘들
것이오.]
도근선은 말했다.
[맞다. 그의 공력은 대단했다. 우리 도곡육선을 만나지 않았다
면 그의 공력이 이 무림에서 첫째나 둘째는 가겠지.]
도실선은 말했다.
[경신공부(輕身功夫)는 그렇다치고 그는 몸이 네 조각으로 갈기
갈기 찢어진 다음 그는 또 자기 스스로 맞추어 다시 혼이 돌아와
행동이 전과 같이 되어 조금 전만 해도 이곳에서 얘기를 하다 갔
지요.]
도근선 등은 비로소 자기들의 거짓말이 탄로난 줄 알았다. 그들
은 얼굴에 경이스러운 빛을 띄었다.
도화선이 말했다.
[알고보니 계무시는 이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군! 사람이란 겉만
보고 판단할 수 없고 바닷물은 되로 잴수가 없는 법이야! 정말 탄
복했어! 정마로 탄복했어!]
도간선은 말했다.
[몸이 네 조각으로 찢어진 다음 스스로 몸을 맞추어 순식간에
행동이 전과 같아지는 것을 가리켜 '화령위정대법(化零爲整大法)'
이라고 부르지. 이 재주는 실전된 지 오래인데 뜻밖에 그 계무시
가 그 무예를 배웠으니 정말 무림의 괴인이야! 다음에 만나면 그
삶과 친구를 맺어야겠군!]
악불군과 악 부인은 머리를 맞대고 근심에 쌓여 있었다. 사랑하
는 딸이 업혀갔는데도 납치범의 정체조차 모르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화산파의 명예가 한때는 무림을 진동시켰었는
데 뜻밖에도 이 황하에는 이런 일들을 치루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러 제자들이 놀라고 무서워할까봐 악불군 부부는 조금
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부부는 여러가지 의문이 있었으나 마음속
으로만 고민을 할 뿐 서로 상의를 하지도 않았다. 큰 배에서는 도
곡육선들의 말씨름만 들려오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하늘이 점점 밝아오고 언덕 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있지 않아 두 대의 가마가 언덕에 도착했다.
한 명의 가마군이 낭랑히 말했다.
[영호 공자께서 분부하시길 절대로 악 사매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읍니다. 그래서 저희 어르신께서 이렇게 보내셨으니
영호공자께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명의 가마군은 가마를 내려놓고 배를 향해 절을 꾸벅하더니
몸을 돌려 멀리 사라졌다.
가마에서 악영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어머니!]
악불군 부부는 놀라고 기뻐서 언덕으로 올라가 가마의 휘장을
젖혔다. 과연 사랑하는 딸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단지 다리에 혈도가 찍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을 뿐이었다. 다
른 가마에는 바로 임평지가 앉아 있었다.
악불군은 손으로 딸의 환도(環跳) 척중(脊中) 등의 혈도를 몇번
툭툭 치니 막혔던 혈도가 뚫렸다.
악불군은 물었다.
[그 키가 큰 사람은 누구냐?]
악영산은 말했다.
[그 키가 크 꺽다리는 그는...... 그는...... 그는......]
그녀는 작은 입을 삐죽이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울어버렸다.
악 부인은 가볍게 안아 선창에 데려다놓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어떤 일을 당하지 않았느냐?]
악영산은 어머니가 묻자 와와 하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악 부인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정체가 불명하고 달이 그들 손에 떨어져 몇 시간
을 보냈는데 어떤 능욕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급히 물었다.
[왜 그러니? 엄마에게 말을 하려므나. 괜찮단다.]
악영산은 계속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악 부인은 더욱 놀라고 당황하였다.
배에는 사람이 많으므로 더 물어보지 못하고 딸아이를 눕히고
이불을 꺼내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악영산은 큰 소리로 울면서 말했다.
[어머니! 그 꺽다리가 나에게 욕을 했어요! 흑흑흑! 흑흑흑!]
악 부인은 그 말을 듣자 무거운 짐을 벗은 듯했다. 그래서 웃으
며 말했다.
[몇 마디 욕을 얻어 먹었다고 이리 슬피 우느거냐?]
악영산은 울면서 말했다.
[그는 손바닥을 들어 나를 때리려고 했고 겁을 주었어요.]
악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다음번에 만나면 우리도 욕을 해주고 겁을 주자
꾸나.]
악영산은 말했다.
[나는 대사형에게 나쁜 말을 하지도 않았고 임평지도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그 걱다리는 너무나 흉악했어요. 그는 말했어요.
'내가 평생 제일 싫어하는 일은 영호충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년
놈들이다.' 그래서 나도 말했지요. '나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가
말했어요. '나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삶아먹는다!'
어머니, 그는 하얗고 음산한 이빨을 드러내며 나에게 겁을 주었어
요.흑흑!]
악 부인은 말했다.
[그 사람은 정말 나쁘구나! 충아, 그 키가 큰 꺽다리는 누구
냐?]
영호충은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은 상태에서 말했다.
[꺽다리라고? 난...... 난......]
이때 임평지도 사부에게 혈도가 풀리자 선창 안으로 걸어들어
오며 말했다.
[사모님, 그 꺽다리와 그 중놈은 정말로 사람고기를 먹는 사람
입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악 부인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 두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을 너는 어떻게 아느
냐?]
임평지는 말했다.
[그 중은 나에게 벽사검보에 대해 한참 물어보았읍니다. 그러더
니 품 속에서 이상한 물건을 꺼내어 씹고 있는데 참 맛있게 씹는
것 같았읍니다. 또 그것을 내 입에 갖다대며 한입 물어뜯어 맛 좀
보지 않겠냐고 했읍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알고보니 사람의
손목이었읍니다.]
악영산은 놀래서 소리쳤다.
[그럼 왜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임평지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놀랠까봐 말하지 않았던 것이오.]
악불군은 말했다.
[아 생각났다. 이 사람들은 바로 막북쌍웅(漠北雙熊)이다. 그
꺽다리는 피부가 하얗고 그 중은 피부가 검지 않든? 그렇지?]
악영산은 말했다.
[맞아요! 아버지, 그들을 아시나요?]
악불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모른다. 단지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새외막북(塞外漠北)
에는 두 명의 악랄한 도둑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백웅(白熊)이
라고 하고 한느 흑웅(黑熊)이라고 부르지. 만약 어떤 사람이 물건
을 가지고 그곳을 지난다면 막북쌍웅은 그의 재물을 빼앗는다고
한다. 만약 반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쌍웅들은 때때로 그런 사
람들을 잡아서 끓여 먹는단다. 듣기에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은 근
육이 단단해 먹을 때는 일반 사람의 고기보다 더욱 많이 씹어야
한다는 군.]
악영산은 와 하고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악 부인은 말했다.
[사형께선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일반 사람의 살보다 다욱
단단하다는 말을 하시면 비위가 약한 사람은 구역질이 나온답니
다.]
악불군은 웃으며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말했다.
[난 지금껏 막북쌍웅이 만리장성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황하변에 나타났는지 모르겠군. 충아,
너는 어떻게 막북쌍웅을 알고 있느냐?]
영호충은 말했다.
[막북쌍웅이라니요?]
그는 사부의 말을 확실히 알아듣지 못하여서 쌍웅이란 두 글자
를 영웅(英雄)의 웅(雄)이라고 말했고, 곰웅의 웅(熊)자인지는 생
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한참 멍청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는 알지 못합니다.]
악영산이 갑자기 말했다.
[소림, 그 화상이 그대에게 그 손목을 먹으라고 했을 때 그대는
먹었나요?]
임평지는 말했다.
[물론 먹지 않았지요.]
악영산은 말했다.
[안 먹었으니 다행이지. 흥!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을 쳐다보지
도 않았을 거예요.]
도간선은 선창 밖에 있다가 말했다.
[천하에서 첫째로 맛있는 것은 사람고기다. 소림은 반드시 먹었
을거야. 단지 자기가 인정을 하지 않자르 뿐이지.]
도엽선이 말했다.
[그가 먹지 않았다면 거기서 말했을테지. 지금와서 변명을 하고
있다니, 상종 못할 녀석이로군!]
임평지는 큰 변을 당하고부터 일할 때나 말할 때 매우 침착했
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런 말을 듣자 멍청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화선은 말했다.
[됐다, 됐어!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것을 무언
으로써 대답한거야. 악 소저, 사람의 고기를 먹어놓고도 먹지 않
았다고 하니 이 사람은 정말로 성실치 못해. 절대로 그에게 시집
을 가지마!]
도근선은 말했다.
[너와 그가 결혼한 후 그는 틀림없이 두번째 여자를 얻어 어쩌
구 저쩌구 해놓고 집에 와서 네가 물어보면 그는 죽어도 실토하지
않을거야.]
도엽선은 말했다.
[더욱 위험한 일이 있지. 그가 사람고기 맛을 본 이후 앞으로
너와 그가 같은 이불에서 잔다면 한밤중에 갑자기 손가락이 아파
오고 또 쩝쩝 우드득 씹는 소리가 들려올 때 자기 손을 살펴보면
이 소림이 너의 손을 먹고 있을 거야.]
도실선은 말했다.
[악 소저, 한 사람당 발가락까지 합쳐 모두 이십 개인데 이 소
림이 오늘 몇가락 내일 몇가락, 아주 쉽게 너의 열손가락과 열개
의 발가락을 금방 싹 먹어치울거야.]
도곡육선은 화산에서 영호충과 교분으 맺은 다음 그를 이미 좋
은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여섯 형제는 비록 입을 가만히 놀려두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
들도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호충과 악영산의 깊은 관계를 그들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
었기 때문에 이때 임평지의 시비거리를 찾아 임평지와 악영산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있었다.
악영산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외쳤다.
[무슨 엉터리 소리예요! 나는 듣고 싶지 않아요! 나는 듣고 싶
지 않단 말이예요!]
도근선은 말했다.
[악 소저, 네가 만약 이 소림에게 시집을 가면 그것도 괜찮지만
그러나 이것만은 배워두라고. 이 공부는 당신 인생과 관계가 깊으
니 이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론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을 것이오.]
악영산은 그가 침착하게 말하자 물었다.
[무슨 공부요? 그것이 그렇게 나와 관계가 있나요?]
도근선은 말했다.
[그 밤고양이 계무시는 '화영위정대법' 이라는 공부를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 너의 큰 소가락 발가락을 다 이 소림에게 먹힌다고
해도 당신이 이 공부를 익힌다면 무서울 것이 없어. 그때는 그의
배를 뚫고 나오면 되고 원래되로 붙이면 원상복귀가 가능해.]
도곡육선들이 함부로 지껄이고 있는 동안 배는 닻을 올리고 황
하 하류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는 서광이 막 비칠 때여서 아침안개가 흩어지지 않았고 강
수면은 하얀 서리에 덮혀 끝없이 이어져 있어서 봐도 끝이 없었
다. 그 강은 사람의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곳이었다.
약 반시진 정도 지나니 태양은 점점 떠올랐으며 강물은 태양빛
에 물들어 금빛 찬란했다. 갑자기 저 멀리서 한 척의 작은 배가
닻을 올리고 앞으로 달려왔다.
그때는 마침 동풍이 불고 있었는데 작은 배의 범포가 바람을 맞
아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파란 범포에는 하나의 하얀 무뉘가 그
려져 있었다.
배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자 범포에 그려진 무늬가 하나의 아름
다운 다리임을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여자의 다리였다.
화산파의 여러 제자들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
[어째서 닻에 다리 한 쪽이 그려져 있지 정말 이상하다.]
도지선이 말했다.
[이건 아마 막북쌍웅의 배인 것 같은데? 아이쿠! 악 부인, 악
소저, 당신 여자들은 정말 조심해야 됩니다. 아마 저 배의 사람들
은 여자다리만 먹는가 봐요!]
악영산은 무서워졌다.
작은 배는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왔다.
배 안에서는 은은한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래소리는 경쾌하
고 부드러웠으나 가사는 이상해서 한 마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음조가 끈쩍끈쩍한 것이 노래 같지는 않았고 어떻게 들으면 탄식
같았고 또 귀신을 쫓는 소리 같기도 했다.
노래소리가 또 바뀌자 남녀가 성교할 때 내는 희열이 넘치는 극
히 음탕하고 요염하기 이를데 없는 음향이 들려왔다.
화산파의 여러 남녀제자들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악 부인은 욕을 하며 말했다.
[그건 무슨 요망하고 희한한 소린가!]
작은 배에서 갑자기 여자의 가는 음성이 들렸다.
[화산파 영호 공자께서 그 배에 계신지요?]
악 부인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충아, 대꾸하지 말아라.]
그 여자는 말했다.
[우리는 영호 공자의 모습을 좀 보고 싶어요. 그것도 안 되나
요?]
그 소리는 아름답고 부드러웠으며 요염해 듣는 순간 넋을 잃을
정도였다.
작은 배의 선창에는 한 여인이 나오더니 뱃머리에 섰다. 몸에는
파란천에 백화가 수놓인 옷을 입었고 가슴에서 무릎가지 늘어진
꽃을 수놓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옷은 색채가 찬란하고 금빛
이 영롱했다.
귀에는 커다란 황금 귀걸이를 했는데 크기가 술잔만 했다.
그 여인의 나이는 스물예닐곱 살 가량이었고 피부는 약간 놓고
두 눈은 컸으며 눈동자는 검었고 허리띠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
다. 발에는 아무 것도 신고 있지 않았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비
록 아리따웠지만 얼굴은 목소리에 비하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 여자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으며 그녀의 모양과 차림
새를 보니 절대로 한족의 여자인 것 같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화산파 일행이 타고 있던 배는 물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데 금방이라도 그 작은 배와 부딪칠 것 같았다.
그 작은 배는 한번 빙돌아 뱃머리를 돌리더니 닻을 내리고 화산
파가 타고 있던 큰 배와 나란히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악불군은 갑자기 어떤 일을 생각하고 물었다.
[아가씨, 아가씨는 운남오선교남교주(雲南五仙敎藍敎主)의 수하
입니까?]
그 여자는 킥 하고 웃더니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눈이 퍽 좋으시군요. 그러나 반밖에 맞추지 못했어요. 나는 운
남오선교(雲南五仙敎)의 사람이예요. 하지만 남교주의 부하는 아
니예요.]
악불군은 뱃머리에 서서 읍을 하며 말했다.
[저는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청컨대 아가씨의존함을 알려주십
시오. 그리고 친히 배를 타고 오셨는데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신
지요?]
그 여자는 웃었다.
[묘가(苗家)의 여자는 당신들 같은 글쟁이의 말을 몰라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없는지요?]
악불군은 말했다.
[아가씨께 여쭙겠는데 당신의 성씨는 무엇입니까?]
그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벌써 나의 성을 모르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지 않소이
까?]
그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이도 많은 수염도 많이 자랐으니 자연히 나의 성을
알고 계실텐데 어찌 이렇게 능청을 떠시는 거지요?]
이 몇마디는 퍽 무례했다. 그러나 말을 하면서 시종 웃고 있었
으며 얼굴 표정이 몹시 귀여워 아무런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악불군은 말했다.
[아가씨께선 농담을 퍽 잘 하시는군요.]
그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악 장문인, 당신의 성은 무엇인가요?]
악불군은 말했다.
[아가씨께선 저의 성을 알고 계시면서 왜 물으시오?]
악 부인은 그 여자의 말투가 경박하고 놀리고 있음을 알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상대하지 마세요.]
악불군은 왼손을 내밀어 자기 등 뒤로 갖다대며 흔들었다. 그것
은 악 부인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도근선이 말했다.
[악 선생이 등 뒤에다 손짓을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음, 알았다. 악 부인이 상대하지 말라고 하자 악 선생은 그 여자
가 아름답고 또 교태가 넘쳐흐르니까, 마누라 말을 안 듣고 그녀
와 놀고 싶어 하는구나!]
그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감사하군요. 당신들은 나보고 아름답다고 하고 또 교태
가 넘쳐 흐른다고 하시는데 우리 묘족(苗族)의 여자들이 한족(漢
族)의 여자들보다 예쁘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는 교태가 넘친다는 말에 경박하고 쌍스럽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자 갑자기 얼굴빛이 호나하
게 되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악불군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의 성을 알고 있으면서 왜 또 물으시나요?]
도화선은 말했다.
[아마도 불미스런 사태가 발생할거야.]
도간선은 말했다.
[사람들은 악 선생 보고 군자검이라고 칭하는데 알고보니 군자
아니군. 이미 그녀의 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지?
말을 걸고 싶으니까 괜히 물어보고 싶었겠지?]
악불군은 도곡육선들의 말소리를 듣고 무척 남감했다. 이 여섯
사람의입을 막지 못하면 계속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그 입들을 통
해 나올지 모른다. 여러 제자들이 듣는다면 악불군의 체면이 어떻
게 되겠는가?
그렇다고 그들과 맞설 수도 없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 여자에
게 공수를 하며 말했다.
[남교주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가셔서 화산파 악불군이 그 노인
네에게 안부를 여쭙는다고 전해주시오.]
그 여자는 한 쌍의 둥그런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눈동자를 굴
리며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당신은 왜 나를 노인네라고 부르시나요? 내가 벌써 그렇게 늙
었나요?]
악불군은 깜짝 놀랐다.
[아가씨가...... 아가씨가...... 바로 오선교의...... 남교
주......]
그는 오선교가 극히 음험하고 악독하기 이를데 없는 교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선(五仙)이라고 운운하는 것은 단지 아름
답게 미화했을 뿐이고 강호의 사람들은 모두 등 뒤에서 오독교(五
毒敎)라고 칭하고 있었다.
백여 년 전 이 파의 진정한 명칭은 바로 오독교였다. 교파를 창
건한 교조(敎祖)와 그의 중요한 인물들은 전부 운귀천상(雲貴川
湘) 일대의 묘인(苗人)들이었다. 나중에 몇명의 한족 사람들이 그
교파에 들어가 오독이라는 두 글자가 품위가 없는 것 같다고 하여
비로소 오선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 오선교는 장(?),
고(蠱), 독(毒)에 능하여 백약문(白藥門)과 함께 남쪽지방과 부쪽
지방에 그 이름이 자자했다. 오선교의 사람 중에는 여인들이 많기
때문에 독의 사용과 용도는 백약문보다 못했지만 괴상하고 악독한
것은 일반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강호에 전해 내려오
는 말에 의하면 백약문 사람들이 독을 쓰면 비록 방비할 수 없고
손을 쓸 수는 없지만 중독이 된 다음 그 이치를 자세히 따져 보면
결국은 독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다 하지만, 오독교의 독
에 중독되면 설상 오독교 사람들이 그 독을 해독하려고 해도 때때
로 독을 쓴 사람 자신도 해독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고 한다.
그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남봉황(藍鳳凰)이예요. 당신은 벌써 알고 있지 않았
나요? 내가당신에게 말하건대 나는 오선교의 사람이예요. 하지만
남교주 수하에 있는 사람은 아니예요. 오선교 사람 가운데 이 남
봉황을 제외하면 모두 남봉황의 부하들이예요.]
그리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도곡육선은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일제히 말했다.
[악 선생은 정말 멍청하군! 그녀가 그렇게 가르켜줬는데도 아직
무슨 뜻인지 풀이하지 못하나봐!]
악불군은 오선교의 교주가 성이 남씨라는 것만 알았을 뿐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에야 남봉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그녀가 몸을 알록달록하게 치장한 것을 보
니 정말 한 마리의 봉황새 같았다.
당시 한족의 여자들은 이름을 깊이 숨기고 있다가 사주단자가
오고 신랑집에서 문명(問名)의 예를 행하여야 비로소 이름을 알려
주었었다. 무예를 하는 사람들은 비록 이런 예의범절에 구속되지
않았지만 절대로 여자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이 묘족의 여자는 이 강에서 자기이름을 거리낌 없이 말하면서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의 행동과 표정은 대범
했으나 말투는 여전히 곱고 아리따웠다.
악불군은 공수하며 말했다.
[알고보니 남교주께서 몸소 왕림하셨군요. 이 악모가 실례를 범
했읍니다. 남교주께서 친히 왕림하신데는 어떤 가르침이 있는지
요?]
남봉황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데 당신께 무엇을 가르쳐 주겠어
요? 당신이 나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거죠. 당신의 차림새를 보니
정말 글쟁이 같군요. 당신은 나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싶지요? 그
렇지요? 당신네 한족의 남자들은 늘대이고 꿍꿍이 속이 많으니 나
는 절대로 배우지 않을 것이예요.]
악불군은 생각했다.
(정말로 그녀가 멍청한 척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녀가 정말 가르
침이라는 뜻을 모르고 있는지, 그녀의 표정을 보니 거짓으로 꾸미
는 표정 같지는 않구나!)
그는 가르침이라는 말을 풀이하여 이렇게 물었다.
[남교주, 무슨 일로 오셨읍니까?]
남봉황은 웃으며 말했다.
[영호충은 당신의 사제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제자인가요?]
악불군은 말했다.
[제가 길러낸 제자올시다.]
남봉황은 말했다.
[음, 나는 그를 좀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악불군은 말했다.
[우리애는 지금 병이 났소. 아직 정신이 들지 못했소이다. 이
강바닥에서 교주(敎主)를 배알하기가 불편하외다.]
남봉황은 둥드런 눈을 크게 뜨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배알이라니요? 나는 그 사람보고 나를 배알하라고는 하지 않았
어요. 그는 나의 수하도 아닌데 왜 그가 나를 배알하나요? 더우기
그 사람은 히히히......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좋은 친군데 그가
설령 나를 배알한대도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듣건대
그는 자기의 팔을 잘라 피를 뽑아 노두자의 딸에게 먹여 그 아가
씨의 생명을 구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정이 깊고 의리가 돈독한
사람을 우리 묘족의 여자들은 제일 좋아한따빠니다. 그래서 나도
그를 한번 보고 싶어요.]
악불군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 이건......]
남봉황은 말했다.
[그의 상처가 깊은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또 팔을 그어 많은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에게 나오라고 하지 않고
내가 건너가 보겠어요.]
악불군은 급히 말했다.
[교주의 상처가 깊은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또 팔을 그어 많
은 피를 흘렸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요. 그에게 나오라고 하지 않
고 내가 건너가 보겠어요.]
악불군은 급히 말했다.
[교주의 큰 거동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남봉황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무엇이 큰 거동이고, 작은 거동이예요?]
그리고 가볍게 몸을 날려 화산파 사람들이 타고 있는 뱃머리로
올라왔다.
악불군은 그녀의 몸놀림이 가벼운 것을 보고 무공은 대단치 않
다고 느꼈다. 그는 두 걸음 물러나서 허리를 굽혀 예를 했다. 그
러나 마음속으로 걱정이 앞섰다. 그는 일찌기 오선교의 사람들은
다루기가 어렵고 이런 사교(邪敎)의 사람들과 싸운다며 진정한 무
공을 겨룰 기회가 없다느 사실을 상기하고 그녀가 배에 오르자 예
의를 갖추고 맞이했던 것이다. 또 어제 저녁 백약문에 속한 두 사
람의 말이 생각났다. 그들의 말로는 화산파를 뒤쫓는 것이 사람의
부탁을 받아서라고 했었다. 모든 상황으로 짐작할 때 오독교의 부
탁을 받은 것 같았다. 오독교는 어떤 이유로 화산파를 그냥 내버
려두지 않는가? 오독교는 강호에서 커다란 방회(幇會)인데 교주가
침히 왕림했으니 이치로 따질 때 저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온
몸에 천기백괴(千奇百怪)의 독물을 지닌 사람을 선창으로 들여 보
낸다는 것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악불군은 말했다.
[충아, 남교주께서 너를 모고자 하신다. 빨리 나와서 뵙거라.]
그는 영호충을 뱃머리로 불러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호충은 피를 대량으로 흘렸기 때문에 힘을 회
복하지 못했으므로 사부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단지 가볍게 녜 녜
라고 대답했을 뿐 몸을 몇번 움직이다가는 일어날 수 없어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남봉황이 말했다.
[듣기에 그는 상처가 크다고 했어요. 어찌 나올 수가 있단 말이
예요? 강에는 바람도 세어 다시 감기에 걸린다면 안 되니 내가 들
여가 봐야겠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큰 걸음으로 선창 입구로 향했다. 그녀가
몇걸음 나가니 악불군과의 거리가 사 척 정도 되었다. 악불군은
한줄기 짙은 꽃냄새르 맡았고 그 순간 몸이 기우뚱해진다고 느꼈
다. 남봉황은 이미 선창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선창안에는 도곡육선들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도
실선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남봉황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바로 도곡육선인가요? 나는 오선교 교주이고 당신들
은 도곡육선이니 모두들 선(仙)이군요. 모두 다 한 가족이지요.]
도근선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우리는 진짜 선이고 당신들은 가짜 선이요.]
도간선은 말했다.
[당신이 진짜 선이라 해도 당신은 오선이고 우리들은 육선이니
당신들보다 선이 하나 더 맣소.]
남봉황은 웃으며 말했다.
[선을 하나 많게 만드는 일은 아주 쉬운 노릇이예요.]
도엽선은 말했다.
[어떻게 선을 하나 추가시킬 수가 있단 말이오? 당신네 교를 칠
선교라고 고치려고?]
남봉황은 말했다.
[우리들은 오로지 오선이예요. 절대 칠선이 될 수 없어요. 그러
나 당신들의 도곡육선을 사선을 만든다면 우리가 당신들보다 선이
하나 더 많아지지 않겠어요?]
도화선은 화가 나서 말했다.
[도곡육선을 도곡사선으로 만든다고? 그러면 당신은 우리 두 사
람을 죽이려고 그러시오?]
남봉황은 웃으며 말했다.
[죽여도 좋고 죽이지 않아도 돼요. 당신들은 영호충의 친구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죽이지 않는게 좋겠어요. 그러나 당신들은 절
대로 허풍을 떨지 마세요. 절대로 나의 오선교보다 선이 하나 더
많다는 소리는 마세요.]
도간선은 외쳤다.
[하지말래도 꼭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소?]
이 순간 도근 도간 도엽 도화 네 사람은 동시에 그녀의 손과 발
을 잡았다. 막 공중으로 쳐들 때 갑자기 네 사람의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놓았다. 네 사람은 손바닥을 펴고 손바닥에 쥐어져
있는 물건을 보자 얼굴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악불군은 그런 광경을 보자 모골이 송연해졌고 등 뒤에 식은 땀
이 흘렀다. 도근선 도간선의 손바닥에는 각기 한 마리의 녹색 지
네가 쥐어져 있었고 도엽선 도화선의 손바닥에는 울긋불긋한 무늬
가 수놓아진 큰 거미가 쥐어져 있었다. 네 마리의 독충의 몸에는
모두 긴 털이 나 있었고 사람이 그것을 보면 금방이라도 구토를
일으킬 것 같았다.
이 네 마리의 독충은 꿈틀꿈틀 움직일 뿐 아직 도곡사선을 물지
는 않았다. 이미 물었다면 일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고 오히려 사
람들이 공포에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곡사선들은 한치도 움직이지 못했다.
남봉황은 손을 한번 휘젓더니 네 마리의 독충을 수거해갔는데
독충들은순식간에 보이지 않았으며 그녀가 벌레들을 몸 어디에
놓았는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도곡육선을 쳐다
보지도 않고 앞으로 나갔다. 도곡육선들은 겁에 질려 혼비백산하
게 되고 다시는 감히 입을 놀리려 하지 않았다.
악 부인과 여러 제자들은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남봉황은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한번씩 둘러본 다음 영호충
이 누워 있는 침대로 걸어가서 낮은 소리로 불렀다.
[영호 공자, 영호 공자!]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귀에 그 말소
리가 들리자 온몸이 야들야들해지고 마치 그녀가 자기들을 부르는
것 같아 금방이라도 대답을 하고 싶어졌다. 그녀가 이 두 마디를
부르자 모든 남자들은 얼굴에 빨갛게 홍조를 띠면서 온몸을 부들
부들 떨기 시작했다.
영호충은 천천히 눈을 뜨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남봉황은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의 좋은 친구예요. 그러니 당신은 친구이지요.]
영호충은 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남봉황은 말했다.
[영호 공자, 당신은 피를 많이 흘렸지만 염려하지 마세요. 절대
로 죽지 않을 거예요.]
영호충은 정신이 혼미해져 그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남봉황
은 손을 내밀어 영호충의 이부자락 속에 넣어, 영호충의 손을 잡
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끄집어 내더니 그의 맥박을 짚어 보
았다. 그녀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선창 밖을
향해 휙 하고 휘파람을 불더니 큰 소리로 몇마디 외쳤다.
선창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얼마
있지 않아 네 명의 묘녀(苗女)가 걸어 들어왔다.
모두 열여덟이나 열아홉 정도 되었으며 남색바탕에 꽃이 수놓아
진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꽃을 수놓은 긴 허리띠를 늘어뜨리
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모두들 사방 팔촌정도의 대나무로 짠 상자를 들
고 있었다.
악불군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오선교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절대로 좋은 물건이
아닐 것이다. 남봉황의 경우를 봐도 몸에는 이미 지네나 독거미
같은 것을 적지 않게 숨기고 있는데 이 네 명의 묘족의 소녀가 상
자를 가지고 배 안으로 들어왔으니 어쩌면 이 배가 뒤집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방이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손을 써서 막을
수도 없었다.
네 명의 묘녀들은 남봉황 가까이 가더니 낮은 소리로 몇마디 했
다.
남봉황은 고개를 끄덕이자 네 명의 묘녀들은 상자를 열었다.
여러 사람은 호기심이 생겼다. 상자 안에 무슨 이상한 물건이
담겨져 있는지 보고 싶었다.
오로지 악불군만이 조금 전 도곡사선 손바닥에 털이 난 독충들
을 봤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이 상자의 물건들을 앞으로 영원히 보
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네 명의 소녀들이 각자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하얀 팔을 드러냈
다. 또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더니 무릎 위가지 걷어올렸다.
화산파의 여러 남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자 눈이 휘둥그래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악불군은 아뿔싸 하고 속으로 외쳤다.
(아이쿠, 큰일났구나! 이 사악한 여자들이 사술(邪術)을 펼쳐
색으로 우리 문하의 제자들을 꼬이는구나! 이 남봉황의 목소리도
이렇게 음탕한데 다시 요사스런 수법을 펼친다면 여러 제자들은
틀림없이 사절이 부족해 항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검자루에 손을 갖다 댔다. 그는 오선교의
교도들이 만약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내어 사악한 술법을 쓴다면
별 수 없이 검으로 상대하리라 생각했다.
네 명의 묘녀들은 옷소매를 걷어올린 다음에 남봉황도 천천히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렸다.
악불군은 연신 여러 제자들에게 눈총을 주어 선창 밖으로 나갈
것을 명했다. 그렇게 하여 그 사술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오로지 노덕약과 시대자 두 명만이 물러나고 나머지 사
람은 혹은 멍청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고 혹은 몇발자욱 물러서다
가 다시 돌아오곤했다.
악불군은 단전에 기를 모아 자하신공을 발했다. 얼굴에 금새 자
색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생각했다.
(오독교가 이 남쪽에서 이백 년 동안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의
악명은 하루 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닐 것이고 틀림없이 악독한 사
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 지금은 교주가 친히 사악한 사법을
펼치려고 하니 더욱 조심해야겠다. 만약 신공으로 심신을 보호하
지 않으면 약간의 소홀함 때문에 그녀의 술수에 말려들 것이다.)
눈 앞의 묘녀들이 알몸을 드러내는데에 홀려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고그가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지만, 염려되
는 것은 심신이 거기에 홀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추태를 부
린다면 화산파와 군자검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이고 수만
년이 지나도 다시는 명예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 명의 묘녀들은 각자 자기가 가지고 온 상자에서 어떤 물건을
꺼냈다.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독충이었다.
네 명의 묘녀들은 독충을 자기의 팔뚝과 다리에 올려 놓았다.
독충은 팔뚝과 다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악불군은 눈을부라리고 쳐다보니 그것은 독충이 아니라 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였다. 단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거머리보다 두배 가량이 컸다.
네 명의 묘녀들은 한 마리의 거머리를 꺼내고 또 한 마리를 꺼
냈다. 남봉황도 묘녀들의 상자에서 한 마리씩 거머리를 꺼내더니
자기의 팔과 다리에 올려놓았다. 얼마 후 다섯 사람의 팔과 다리
에는 거머리들이 가득찼다. 그 거머리의 숫자는 적게 잡아도 이백
여 마리는 될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은 그 광경을 보자 멍청해지고 말았다.
다섯 사람이 무엇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악 부인은 본래 후창에 있었으나 중창의 여러 사람들이 아! 어!
아이쿠! 하는 괴이한 소리를 지르자 자기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칸막이를 밀치고 다섯 사람의 이런 상황을 보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악 하는 비명소리를 냈다.
남봉황은 악 부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절대로 당신을 물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
이...... 당신이 악 선생의 마누라예요? 듣건대 당신의 검법이 뛰
어나다고 들었지요. 그런가요?]
악 부인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기에게
악 선생의 마누라이냐고 묻는 것은 그 말투가 너무 저속했고 자기
에게 검법이 뛰어나냐고 물어보지 말투는, 만약 다른 사람이 물어
보았다면 설령 상대방이 악의에 차 있다고 해도 응당 몇마디 정도
는 겸손했을 것이다.
이 남봉황은 틀림없이 한인의 습성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만약 자기가 검법이 뛰어나다고 한다면 자기를 너무 추켜세우는
것 같고 만약에 검법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하면 어쩌면 그녀가
자기를 얕보는 것이니 대답을 하지 않는게 제일 상책이라고 여겼
다. 남봉황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악불군은 단단히 방비를 하고 이 다섯 명의 묘녀가 소능마 스기
만을 기다렸다. 만약에 손을 쓴다면 먼저 남봉황을 제압하리라 생
각했다.
선창 안에는 그 누구도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화산
파의 여러 남제자들은 무거운 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한참 후 다섯 명의 묘녀의 팔과 다리에 붙어 있던 거머리의 몸
이 점점 부풀더니 은은하게 붉은 빛을 띄우게 되었다.
악불군은 이 거머리들이 일단 사람이나 짐승의 피부에 달라붙기
만 하면 주둥이가 몸에 딱 다라붙어 피를 빨아 난 후에 배가 부르
지 않으면 절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머리들이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면 그 감각이 크지 않고 느낀다 해도 약간
가려울 뿐이어서 농부들이 밭갈이를 할 때 때때로 거머리들에게
다리를 물려 적지 않은 피를 빼앗겨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는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 요녀들이 거머리로 하여금 피를 빨게 하는것은 그 용의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대개의 오선교들은 어떤 사법을 행할 때
틀림없이 자기의 선혈을 쓰고 있을 것이다. 보아하니 이 거머리들
이 피를 배불리 빨아먹은 다음에야 이 요녀들은 술법을 행하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남봉황은 가볍게 영호충의 몸에 덮혀 있던 이불을 제끼고는 자
기 팔뚝에서 한마리의 피를 빨아 통통해진 거머리를 떼어 영호충
의 혈도에 갖다 놓았다.
악 부인은 그녀가 영호충을 어떻게 할까봐 염려되어 급히 말했
다.
[보세요, 무엇을 하는거요!]
그리고 검을 빼들고 몸을 날렸다.
악불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잠깐만 기다리시오.]
악 부인은 우뚝 제자리에 멈추었다. 눈은남봉황과 영호충을 번
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영호충의 목에 달라붙어 있던 거머리들은 그의 혈관을 물고 또
다시 피를 빨고 있었다.
남봉황은 품 속에서 자기병을 꺼내더니 병뚜껑을 열고 오른쪽
손가락의 뾰족한 손톱으로 병에 있던 백색분말가루를 꺼내어 물
거머리 몸에 뿌렸다. 네 명의 묘녀들은 영호충의 몸을 풀어헤치고
그의 옷소매와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더니 자기 몸에 붙어 있던
거머리들을 한 마리 한 마리 떼어내더니 그의 가슴, 배, 팔, 다리
등의 여러 곳의 혈관에 올려 놓았다.
순식간에 이백여 마리의 거머리들이 영호충의 몸에 달라붙었다.
남봉황은 끊임없이 약가루를 꺼내어 거머리 잔등에 적당량의 흰
가루를 뿌렸다. 이상하게도 이 거머리들은 다섯 명의 묘녀 몸에
붙어 있을 때는 피를 발아 점점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때는 반
대로 점점 몸이 작아졌다.
악불군은 그때서야 뭔가 깨닫고 길게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알고보니 그녀들이 행하는 행동은 전혈지법(轉血之法)이구나!
거머리들을 매개체로 삼아 그녀들 몸에 있던 깨끗한 피를 충아의
혈관에 수혈을 하는구나! 이 하얀 가루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어떻게 해서 거머리들이 자기의 피를 토해내는가? 정말 신기하
다.)
그는 이런 점을 깨닫고 칼자루를 쥐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악 부인도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본래 바짝 긴장되어 있던 얼굴
에 웃음을 띄었다.
선창에는 여전히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조금전의 일촉즉
발의 상황과도 너무도 달랐다. 더욱 이상한 것은 도곡육선조차도
놀라고 경악한 듯 쳐다보며 입을 벌린 채 다물고 못하는 것이었
다. 여섯개의 주둥이를 딱 벌리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말장난을 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툭 하는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의 피를
다 토한 거머리가 뱃바닥에 떨어지더니 꿈특꿈틀 몇번 움직이고는
죽어버렸다.
한 명의 묘녀가 그것을 집어 강물에 던졌다. 거머리들은 한마리
씩 물 속으로 내동댕이쳐져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자 거머리
들은 영호추의 몸에서 다 떨어졌다.
노랗던 영호충의 얼굴에 점점 혈색이 나타났다. 그 이백여 마리
의 거머리가 내뱉어 영호충의 몸 속으로 드러간 혈액은 합치면 한
그릇은 넘을 것 같았다.
비록 그가 소실한 피를 충당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위험에서 벗
어난 듯했다.
악불군과 부인은 서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 묘가의 여자는 한 교파의 지존(至尊)으로서 정말 자기의 몸
을 돌보지 않고 자기의 피로 충아의 피를 보충시켰구나! 그녀와
충아와는 일찌기 아는 사이가 아닐 것이고 또 절대로 그에게 정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그는 자칭 그녀의 좋은 친구라고
했는데 충아는 언제 또 그와 같은 거물급 친구를 두었을까?)
남봉황은 영호충의 얼굴색이 호전되는 것을 보자 다시 그의 맥
박을 재 보았다. 맥박이 강하게 뛰는 것을 보자 심히 기쁜듯 부드
럽게 물었다.
[영호 공자, 좀 어떠신가요?]
영호충은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으나 이
여자가 자기를 치료해 준 것은 알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전...... 저는 많이 나아졌읍니다.]
남봉황은 말했다.
[저 좀 보세요. 제가 늙었는지, 제가 많이 늙었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누가 당신보고 늙었다고 했읍니까? 당신은 늙지 않았읍니다.
만약 당신이 싫어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동생이라 부르고 깊
군요.]
남봉황은 크게 기뻐했다. 얼굴에 꽃봉우리가 금방 피어난듯 아
름답기 그지 없었다.
[참 좋아요! 어쩐지...... 어쩐지...... 천하의 모든 남자를 눈
에 두고 있지 않는 여자조차도 당신을 보면 미치지 않고는 배갤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그렇기 때문에......]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만약 나를 좋게 본다면 왜 빨리 영호 오빠라 부르지 않습니
까?]
남봉황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더니 외쳤다.
[영호 오빠!]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이쁜 동생, 착한 누이지?]
그의 성격은 호탕하고 작은 예절에 구속받지 않았다. 그래서 평
소 군자라고 자칭하는 악불군과는 크게 달랐다.
그는 정신이 약간 들자 남봉황이라는 사람은 그녀보고 젊다는
말을 하면 좋아함을 알고는 그녀가 그에게 단도 직입적으로 자기
가 늙었냐고 묻자 비록 그녀의 나이가 그보다 많았으나 아무 거리
낌 없이 동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를 구해 주었으니 응당 몇마
디 칭찬을 해주어 보답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남봉황
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악불군과악 부인은 그 광경을 보자 참지 못하고 이맛살을 찌푸
리며 생각했다.
(충아 이 놈은 허황하고 싱겁기 짝이 없구나! 정말 구제불능이
다. 평일지의 말에 의하면 그는 백일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으니
직바은 백일도 남지 않았으니 한쪽 발은 이미 관에 들어가 있는거
나 마찬가진데도 정신이 들자마자 이런 사악하고 음탕한 여자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구나!)
남봉황은 웃으며 말했다.
[오빠, 무엇을 잡수시고 싶으세요? 내가 무엇을 갖다드릴까?]
영호충은 말했다.
[먹을 것은 별로 생각이 없고 술을 좀 마시고 싶을 뿐이오.]
남봉황은 말했다.
[아, 그건 쉬운 일이예요. 배에는 우리가 빚은 오보화밀주(五寶
花密酒)가 있는데 한번 마셔보세요.]
그녀는 알 수 없는 묘어(苗語)로 뭐라고 지껄였다.
두 명의 여자가 명을 받들고 나갔다.
그리고 여덟 개의 작은 병의 술을 가져오더니 그 중 한 병의 술
을 그릇에 따라 부었다. 술이 그릇에 따라지자 그 향기가 배 안에
진동했다.
영호충은 말했다.
[동생, 당신의 이 술은 꽃향기가 너무 진하오. 그 향기가 술냄
새를 다 막으니 그것은 여자들만 마시는 술인 것 같습니다.]
남봉황은 웃으며 말했다.
[꽃냄새가 독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독사의 비린내가
나니까요.]
영호충은 이상해서 말했다.
[술 속에서 독사의 비린내가 난다고?]
남봉황은 말했다.
[녜, 나의 이 술은 오보화밀주라 부르는데 그 속에는 오보(五
寶)가 들어 있지요.]
영호충은 물었다.
[무엇을 오보라 부릅니까?]
남봉황은 말했다.
[오보란 우리 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보배예요. 한 번 들어
보세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두 개의 빈 그릇을 가져다가 술병을 거꾸로
들었다.
병에서 술이 나오면서 툭툭 몇번 가벼운 소리가 나더니 몇개의
작은 물체가 술그릇에서 떨어졌다.
여러 화산파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술그릇을 영호충 앞에 놓았다.
영호충이 술을 들여다 보니 술색이 아주 맑아 마치 하얀 샘물과
같은데 술 속에는 다섯 마리의 독충들이 가라 앉아 있었다.
하나의 청사(靑蛇)이고 하나는 지네, 또 하나는 거미, 또 하나
는 전갈, 또 한 마리는 작은 두꺼비였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물었다.
[술 속에 왜...... 왜 이런 독충을 집어넣는 거요?]
남봉황은 '흥' 하더니 말했다.
[이것이 바로 오보예요. 절대로 독충...... 독충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영호 오빠, 마실 수 있겠어요?]
영호충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이...... 오보는 겁이 좀 나는데......]
남봉황은 술그릇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요족의 규칙에는 만약 친구에게 술과 고기를 청해서 친구
가 마시지 않고 먹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친구가 아니예요.]
영호충은 술그릇을 받아들고 한 그릇의 수릉 싹 비웠다.
그 다섯 마리의 독충까지 단숨에 삼킨 것이다. 그의 담이 비록
컸지만 그 맛을 음미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남봉황은 크게 기뻐하며 손을 내밀어 그의 이마를 갑싸안더니
그의 이마에 몇번의 입맞춤 세례를 퍼부었다.
그녀의 입술에 발라져 있던 연지는 영호충의 이마에 두 개의 빨
간 입술자국을 내었다.
[이제야 비로소 제 오바가 된 것이예요!]
영호충은 웃었다.
옆눈으로 사부님의 엄숙한 표정이 들어왔다. 그는 깜짝 놀라 생
각했다.
(큰일났구나! 아차! 큰일났어! 내가 감히 사부님과 사모님 면전
에서 이런 짓을 했구나! 정말로 사부님께 욕을 한번 먹겠구나! 소
사매는 나를 더욱 업신여기지는 않을까?)
남봉황은 또 한 병의 술병에 있던 술을 그릇에 따랐다. 술 속에
다섯 마리의 독충이 담겨져 있는 그릇을 가지고 악불군 면전에 갖
다대고 웃으며 말했다.
[악 선생님, 제가 당신께 술 한 잔을 권하지요.]
악빠루군은 술에 담겨져 있는 독충들을 보자 구토가 일었다.
또 강렬한 꽃향기 중에 말로써 형용하기 지독한 비린내가 섞여
코 속으로 들어오자 참을 수 없어 금방이라도 코할 것 같았다.
그는 왼손을 내밀어 남봉황이 들고 있는 술그릇을 가만히 내밀
었다.
뜻밖에도 남봉황은 손을 거두지 않고 자기의 손에 그녀의 손잔
등을 갖다대고는 손을 다시 악불군을 향해 밀었다.
남봉황은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사부가 제자들보다 담이 적나요? 화산파 여러 형제들이
여, 어떤 사람이 이 술을 마시겠어요? 마시면 몸에 좋은 거예요.]
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봉황이 한 손으로 술잔을 들고 휘둘러 봤으나 아무도 술을 입
에 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남봉황은 한숨을쉬며 말했다.
[화산파는 영호충을 제외하고는 사내대장부가 한 명도 없군요!]
갑자기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마시겠소.]
그는 임평지였다. 그느 몇발작 아피로 나오더니 소능 내밀어 그
술잔을 받으려고 했다.
남봉황은 양쪽 미간을 풀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악영산은 외쳤다.
[소림, 당신이 그 더러운 물건을 먹는다면 독에 중독되어 죽지
않는다 해도 앞으로는 절대로 나를 쳐다볼 생각은 마세요.]
남봉황은 술그릇을 임평지 앞에 갖다대고 웃으며 말했다.
[자, 싹 마셔버리세요.]
임평지는 더듬거렸다.
[난...... 난 마시지 않겠소?]
이 말이 끝나자 남봉황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임평지는 얼굴
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이 술을 안 마시는 것은 그건...... 그건 죽음이 무서워
서가 아니오.]
남봉황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물론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당신을
상대하지 않을까봐 그게 염려가 되는 것이지요? 당신은 졸장부가
아니예요. 당신은 정이 많은 사내일 뿐이예요. 호호호...... 호호
호......]
그리고 영호충 앞에 가서 말했다.
[오빠, 다음에 만나요.]
그리고 술그릇을 탁자에 놓더니 손짓을 하자 네 명의 묘녀들은
나머지 여섯 병의 술을 들고 그녀를 따라 선창을 나가 작은 배로
돌아갔다.
달콤한 노랫소리가 수면에 깔리며 그 배는 동쪽을 향해 나갔다.
그 배는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악불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술병과 술잔들을 모두 강물에 던져 버려라!]
임평지는 녜 하고 대답하고 탁자 가까이 다가갔다.
손가락이 술병에 닿을 때 이상한 비린내가 코끝에 진동하더니
몸이 기우뚱하며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급히 손을 내밀어
탁자를 잡았다.
악불군은 뭔가를 깨닫고 외쳤다.
[술병에는 독이 있다!]
그리고 옷소매를 휘둘러 탁자 위에 있던 술병과 술잔을 강물 속
으로 날려보냈다.
그 순간 가슴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났다. 억지로 몸을 가누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임평지가 토
하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왁' 저쪽에서 '왁'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모든 사람이
배를 움켜잡고 구토를 했다.
도곡육선과 배의 삿대를 쥐고 있던 뱃사공들까지도 토해냈다.
악불군은 억지로 한참을 참았으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 토
해내고 말았다.
모두가 한참을 토했다. 비록 뱃속에 들어 있던 음식들을 깨끗이
토해내 더 토해낼 것이 없어도 구토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계속해
서 쓴물이 토해져 나왔다. 나중에 쓴물조차 없어지자 여전히 가렵
고 속이 메시꺼웠다. 오히려 뱃속에 무엇인가 있어 토해내는 것이
헛구역질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심한 구토였
다.
배 안에는 수십 명이 있었으나 영호충만이 토하지 않았다.
도실선은 말했다.
[영호충, 그 요녀가 당신을 특별히 구해준 것 같군! 당신에겐
해독약을 먹였으니!]
영호충은 말했다.
[나는 해독약을 먹지 않았소. 그럼 그 독주가 바로 해독약인가
요?]
도근선은 말했다.
[누가 아니랬어? 그요녀가 당신이 멋지게 생긴 것을 보더니 당
신을 좋아한 모양이야.]
도지선은 말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멋지게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가 그 요
녀에게 젊고 아름답다고 칭찬을 해줘서 그런 것 같아.]
도화선은 말했다.
[그가 토하지 않은 것은 죽음을 불사하고 독주와 다섯 마리의
독충을 먹었기 때문이오.]
도엽선이 말했다.
[그가 비록 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뱃속에는 다섯 마리의 독충
이 들어갔으니 우리보다 중독이 심할지도 모르지.]
도간선이 말했다.
[아이쿠! 큰일났네! 큰일났어! 영호충이 그 독주를마실 때 우
리가 막지 못했으니 만약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평일지가 우리에
게 따지려고들텐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지?]
도근선이 말했다.
[평일지가 말했잖아? 영호충은 금방 죽는다고! 며칠 일찍 죽을
수도 있는 거야.]
도화선은 말햇다.
[영호충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큰일났단 말야!]
도실선이 말했다.
[우리도 괜찮지요. 우리가 멀리 사라지면 키가 작고 다리가 짧
은 평일지가 우리를 어떻게 쫓아 오겠읍니까?]
도곡육선은 계속 구토를 하면서도 잠시도 주둥이를 쉬게 하지는
않았다.
악불군은 뱃사공들조차 계속 토해내고 큰 배가 강 한복판에서
서쪽을 기울고 동쪽으로 기우뚱하며 위험한 것을 보자 즉시 몸을
배 뒷편으로 날려 배의 방향키를 잡고 남쪽 언덕에 배를 대었다.
그의 내공은 심후해서 키를 몇번 돌리자 뱃속의 구토기가 점점 가
라앉았다.
배가 언덕에 가가워지자 악불군은 몸을 날려 뱃머리로 가서 쇠
로 만든 닻을 들어 언덕에 던졌다.
이 쇠로 만든 닻은 이백 근 정도가 나가 두 명의 뱃군들이 들어
야만 되었다.
뱃군들은 악불군 같이 연약한 서생의 몸에서큰 쇠닻을 한 손에
들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던지자 수십장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
고 자기들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가 배를 움켜잡고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은 다투어 언덕에 올라 물가에 꿇어 앉아 강물을 마셔
대고 또 토해내고 이렇게 몇번 반복하니 비로소 구토증이 멈추었
다.
이 강 언덕은 외딴 곳이었다. 그러나 멀리 동쪽 수리 밖에 집들
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악불군은 말했다.
[배 안의 독기가 아직 깨끗이 씻기지 않았으니 배를 더 이상 탈
수가 없구나. 우리는 먼저 마을에 들어가 논의하기로 하자.]
도간선은 영호충을 메고 도지선은 도실선을 안았다. 여러 사람
은 일제히 그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읍에 도착하자 도간선과 도지선은 먼저 식당에 들어서더니
영호충과 도실선을 내려놓고 외쳤다.
[술과 요리를 가져오고 밥을 가져오너라!]
영호충이 곁눈질을 해보니 식당 가운데 한 명의 키 작은 노인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바로 청성파의 장문인 여창해였다.
그는 깜짝 놀랐다.
이 청성파의 장문인은 포위당해 있었다. 그는 작은 탁자에 앉아
있었는데 탁자에는 술주전자와 젓가락이 놓여져 있도 세 접시의
요리와 한 자루의 장검이 놓여져 있었다.
그 작은 탁자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일곱 개의 큰 의자인데 의
자마다 한 사람식 앉아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는데 얼굴은 심히
흉악해 보였고 각기 의자 위에 병기를 올려놓고 있었다.
일곱 사람은 한 마디도 없이 여창해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
다. 여창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도근선은 말했다.
[이 키 작은 도인은 마음속으론 무서워하고 있군!]
도지선은 말했다.
[물론 무서워하고 있겠지. 일곱 명이 포위하고 있는데 쬐끄만
녀석이 이길 엄두가 나겠어?]
도간선은 말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왼손에만 술잔을 들고 오른손엔 들
지 않았을 까닭이 없지. 그것은 오른손으론 검을 쓰려고 하는 속
셈이지.]
여창해는 '흥' 하더니 술잔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겼다.
도화선은 말했다.
[그가 둘째형님의 말을 알아들었어! 그러나 그는 둘째형님을 쳐
다보려고 하지 않는걸? 그것이 바로 무서워하고 있다는 증거란 말
이야! 그는 절대로 둘째형님을 무서워하고 있는게 아니고 단지 정
신이 분산될까봐 그러는거지. 일곱 사람의 적이 동시에 공격해 들
어온다면 그는 금방 여덟 조각으로 쪼개지겠구나!]
도엽선은 낄낄 웃더니 말했다.
[이 작은 도인은 요렇게 작은데 여덟 조각이 나면 더 작아질게
아닌가?]
영호충은 여창해에게 큰 원한을 갖고 있지만 강적에게 포위당하
고 있는 이 기회를 틈타 그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다.
[여섯분의 도형, 이 도장이 청성파의 장문인이십니다.]
도근선은 말했다.
[청성파의 장문이면 어때? 자네의 친구인가?]
영호충은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절대로 내 친구가 아니오.]
도간선은 말했다.
[자네의 친구가 아니라면 잘 되었군! 우리는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생겼어.]
도화선은 탁자를 툭툭 치며 외쳤다.
[빨리 술을 가져오너라! 술을 마시면서 이 작은 도인이 아홉 조
각이 나는 광경을 보며 술맛을 돋우어야겠다.]
도엽선은 말했다.
[어째서 아홉 조각이오?]
도화선은 말했다.
[봐라. 저 두타(頭陀)는 두 자루의 호두만도(虎頭彎刀)를 사용
하고 있다. 저 사람 혼자 한 조각을 더 낼 것이야!]
도엽선은 말했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 어떤 사람은 낭아추(狼牙錘)를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금괴장(金拐杖)을 휘두르는데 그들이 어떤
초식을 쓸지 아직 모르거든!]
영호충은 말했다.
[모두들 농담하지 마시오. 우리가 도와주지 못할 바에는 청성
장문인 여관주의 심기를 분산시키지 맙시다.]
도곡육선은 더 말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여창해를 보고 있
었다. 영호충은 그를 에워싸고 있는 일곱 사람의 모습을 살펴 보
았다.
한 명의 두타는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머리에 빛나는 구리
띠를 메고 있었고, 몸 옆에는 한 쌍의 낚시바늘처럼 구부러진 호
두계도(虎頭戒刀)가 놓여져 있었다.
그 사람 옆에는 오십 세 정도 돼 보이는 부인이 있었는데 머리
칼이 하얗고 얼굴에 우울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몸 옆에는 두척
길이의 단도(短刀)가 놓여져 있었다.
그 노파 옆에는 중과 한 명의 도인이 앉아 있었다.
중은 몸에 피빛처럼 붉은 승복을 입고 있었으며 몸 옆에는 한
개의 바릿대와 한 개의 징같이 생긴 물건을 놓고 있었다. 이 두개
는 강철로 주조한 것 같았으며 바릿대의 끝은 뾰족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무서운 무기일 것 같았다.
도인의 몸은 거대했고 긴 의자 위에 한 개의 낭아추를 올려 놓
고 있었는데 언뜻 봐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 도인
오른쪽의 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람은 중년의 거지였
다. 목과 어깨에는 두 마리의 파란뱀이 감겨져 있었는데 그 뱀 대
가리는 삼각형으로 생겼고 계속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인데 남자는 왼쪽눈이 멀었
고 여자는 오른눈이 없었다.
두 사람의 옆에는 각기 한 개의 지팡이가 놓여져 있었는데 지팡
이는 황금빛이었고 길고 굵었다.
이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모두 사십여 세 정도로 그 사람들의 상
황을 보니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몰락한 남녀였다. 이런 사람
들이 귀중한 지팡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괴이하게 느껴졌다.
그 두타는 흉악한 눈빛을 하더니 두 손을 천천히 움직여 한 쌍
의 계도의 손자루를 꽉 쥐었다.
그 거지는 목에서 한 마리의 뱀을 집어 팔뚝에 감아 놓았다. 뱀
의 머리는 여창해를 겨누고 있었다.
그 화상은 강철의 바릿대를 집었고 그 도인은 낭아추를 들었으
며 그 중년부인 또한 단조를 손에 쥐었다.
모두 동시에 일격을 가하려는 모양이었다.
여창해는 껄껄 웃더니 말했다.
[많은 수에 의지해 이기는 수법은 원래 사악하고 무도한 자들의
습관이지. 그렇다고 이 여창해가 무서워할까보냐?]
그 한 눈이 없는 남자가 말했다.
[여가놈아! 우리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
한쪽 눈이 없는 여자가 말했다.
[맞아요! 당신은 벽사검보를 점잖게 내놓기만 하면 돼요. 그러
면 우리는 아주 공손히 당신을 놓아주겠어요.]
악불군과 영호충, 임평지, 악영산 등은 그녀가 갑작스럽게 벽사
검보에 대해 말하자 모두 흠칫 놀랐다.
이 일곱 사람이 여창해를 에워싸고 그에게 벽사검보를 요구할
줄은 생가지도 못했던 것이다.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정말 그 벽사검보가 여창해의 수중에 떨어졌는가?)
그 중년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이 땅달보와 더 이야기해 무얼 하겠어요. 먼저 그를 죽인 후
그의 몸을 뒤집시다.]
한쪽 눈이 없는 여자가 말했다.
[어쩌면 그건 은밀한 곳에 숨겼는지도 몰라요.그를 죽인다면
찾을 수 없을 테니 큰일이 아닌가요?]
그 중년부인은 입을 삐죽이더니 말했다.
[찾을 수 없으면 그만이지. 그게 무슨 큰일이요?]
그녀의 말소리는 분명히 전달되지 않았다. 입에서 바람이 새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고보니 이빨이 태반이 빠지고 없었다.
한쪽 눈이 없는 여자가 말했다.
[우리가 점잖게 말할 때 내 놓으시오. 그 검보는 당신 것이 아
니지 않소? 그리고 당신이 수중에서 많은 날이 지났으니 아마 다
외우고 있을 것이오. 끝끝내 가지고 있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
오!]
여창해는 한 마디도 않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바로 이때, 문 밖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한
명의 눈웃음을 치는 사람이 들어왔다.
이 사람은 비단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가 반 정도는 대머리
이고 검은 구레나룻이 나 있었으며 약간 뚱뚱하고 얼굴은 빨간 빛
이었다.
매우 자애스럽고 온화해 보였다. 왼 손에 한 개의 비취비연호
(翡翠鼻烟壺 : 담뱃대)를 들고 있었고 오른 손에는 한 자루의 작
은 부채를 쥐고 있었다.
옷모양이 무척 화려하여 마치 돈 많은 부자 같았다.
그는 주점을 들어선 후 여러 사람을 보자 깜짝 놀라며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러나 즉시 껄껄 웃더니 공수하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
오. 뜻밖에 당세의 영웅호걸들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정말 기쁘
기 그지없소이다.]
이 사람은 여창해를 향해 말했다.
[무슨 바람이 청성파의 여관주를 이곳 하남까지 몰고 왔을까?
오랫동안 청성파의 송풍검법(松風劍法)이 무림에서 일절이라 들었
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안목을 높일 수 있게 됐구료.]
여창해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한쪽 눈이 없는 남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따.
[오랫동안 동백쌍기(桐柏雙奇)가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요
몇년 동안 돈을 많이 벌으셨겠지요?]
한쪽 눈이 없는 남자는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어찌 당신보다 돈을 많이 벌었겠소?]
그 사람은 껄껄 웃더니 말했다.
[저는 빈껍데기지요. 오른손에서 왔다가 왼손으로 가니, 이 몸
의 별명과 같이 빈겁데기에 불과하다오.]
도지선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의 외호는 무엇이라 부르오?]
그 사람은 도지선을 쳐다보았다.
도곡육선들의 모양은 형용할 수 없이 괴상했다. 그는 여섯 사람
의 내력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히히 웃으며 말했다.
[제게는 조금 듣기 거북한 별명이 있는데 그것은 활불유수(滑不
留手)라고 부릅니다. 모두 말하기를 이 몸은 친구 사귀기를 좋아
한다고 합니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몸은 천금도 아깝지 않다하
고 절대로 인색하지 않으며 비록 돈은 많이 벌지만 금과 은이 이
손에 남아 있지 못하다오.]
한쪽 눈이 없는 남자가 말했다.
[또 다른 별명이 있지요.]
유신(游迅)은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부릅니까?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유침니추 활불유수(油浸泥鰍 滑不留手)이지!]
그 말은 이빨이 반이나 빠진 부인의 목소리였다.
도화선은 크게 외쳤다.
[굉장하군! 굉장해! 미꾸라지는 미끄럽기 짝이 없는데, 다시 기
름에 담근다면 그 누가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겠나?]
유신은 웃으며 말했다.
[이 몸은 경공에 대해 좀 아는 것이 있지요. 마치 미꾸라지처럼
민첩하다고 해서 강호 친구들이 그렇게 부릅니다만 창피하기 이를
데 없소. 이 조그만 무예는 실제로 입에 담기가 부끄러울 지경이
오. 장부인(張夫人), 건강도 좋으시군! 그 동안 안녕하셨소!]
그러면서 읍을 했다.
그 늙은 장 부인은 그를 한번 흘낏 쳐다보고 일갈했다.
[주둥이가 번지르르 하구나! 빨리 내 눈 앞에서 꺼져버려라!]
이 유신의 비위는 참 좋았다. 그런 말을 듣고도 조금도 화를 내
지 않고 다시 그 거지를 향해 말했다.
[쌍룡신개(雙龍神?) 엄(嚴)형, 당신의 두 마리 청룡은 갈수록
민첩하고 활발해지는구료.]
그 거지는 이름이 엄삼성(嚴三星)이었고 별명은 쌍사악걸(雙蛇
惡乞)이었다. 유신은 그를 쌍룡신개라고 바꿔부르고 있었다.
엄삼성은 원래 극히 흉악하고 무지했으나 자기를 칭찬해 주자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유신은 장발의 두타인 구송연(仇松年)과 중 서보(西寶) 그리고
도인 옥령(玉靈) 등과도 인사를 한 다음 그들에게도 몇마디 추켜
세우는 말을 했다. 그의 싱글싱글거리며 껄껄 웃는 소리에 순식간
에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갑자기 도엽선이 외쳤다.
[여보시오! 미꾸라지처럼 미끄러운 친구, 당신은 어째서 우리
여섯 형제의무공이 높고 대단한 것을 칭찬하지 않소!]
유신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다면 칭찬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손과 두 다리는 도간 도근 도엽
도지 등의 손아귀에 곽 잡혔다. 도곡육선은 그를 들어올리려고 했
다.
유신은 급히 칭찬했다.
[멋지십니다! 멋진 솜씨이십니다! 이런 무공은 고금에 보기 힘
든 일이오.]
도곡사선은 유신의 이런 소리를 듣자 그를 네 조각으로 찢으려
고 하지 않았다.
도근선, 도지선은 일제히 물었다.
[어찌 우리들의 무공이 고금에 보기 힘든단 말이오?]
유신은 말했다.
[이 몸의 별명을 모두들 활불유수라고 합니다. 사실은 그 누구
도 이 몸을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 분은 손을 내밀
자마자 이 몸을 꽉 잡고서 미끄러뜨리거나 놓치지도 않았읍니다.
네 분의 손놀림은 정말 대단하외다 정말 고금을 통틀어 그런 무예
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읍니다. 이 몸이 앞으로 강호에 나가
여섯 분 어른들의 이름을 널리 선전하여 무림의 모든 사람에게 이
렇게 대단히 인물이 있다고 알리겠읍니다.]
도근선 등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즉시 풀어줬다.
장 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활불유수라고 이름이 헛되지는 않군! 이번에도 잡혔다가 다시
풀려났군!]
유신은 말했다.
[이 여섯 분의 고인들의 무공은 너무나 대단하오. 정말 감탄했
소이다. 단지 이 몸이 아는 것은 없고 들은 것이 없어 여섯 선배
님의 존함을 모르겠구료.]
도근선은 말했다.
[우리 형제의 이름은 도곡육선이라 하오. 내가 도근선이고 그가
도간선이오.]
그리고 여섯 형제의 이름을 하나씩 말했다.
유신은 손을 잡고 말했다.
[멋지오! 멋지오! 이 선(仙)은 여섯 분의 무공과 정말 어울립니
다. 이런 신기한 무공을 가지지 않고는 누구도 이런 선 자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없지요.]
도곡육선은 크게 기뻐하며 일제히 말했다.
[당신은 영리하고 눈빛도 날카롭고 사람을 볼 줄 아는 참 좋은
사람이야!]
장 부인은 눈을 부릅뜨고 여창해에게 일갈했다.
[그 벽사검보를 내놓을 것이오? 내놓지 않을 것이오?]
여창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유신은 말했다.
[아이쿠! 당신들은 지금 벽사검보 때문에 다투고 계시는군요?
내가 알기로는 그 검보는 여관주 수중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
소.]
장 부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손에 있는지 당신은 아시오?]
유신은 말했다.
[이 사람은 유명한 사람이오. 그분의 이름을 말하면 아마 당신
은 놀라서 죽을 것이오.]
두타 구송연은 큰 소리로 일갈했다.
[빨리 말하시오! 말하지 않으려면 이 자리에서 떠나시오. 이곳
에서 밤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지 말고!]
유신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부께세는 먹을 것을 못 먹었나 왜 이리 화를 내시오. 이
몸의 무공은 비록 평범하나 소식은 정말 영통하오. 강호의 비밀이
나 소식은 절대로 이 몸의 천리안 순풍이(順風耳)를 속일 수 없소
이다.]
동백쌍기 장 부인 등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이 유신은 남의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해서 틈만 있으면 끼어들
며 무림 중에 일어난 어떤 일이라도 그가 모르고 있는 일이 없었
다.
그들은 동시에 물었다.
[왜 그리 거드름을 피시오? 벽사검보는 도대체 누구의 수중에
있소?]
유신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알고 계시듯 이 몸의 외호는 활불유수요. 돈과 재물은
왼손으로 갔다가 오른손으로 나가지요. 며칠간 정말 한푼도 없는
거지꼴이 되었죠. 여러분들은 모두 큰 부자입니다. 이 몸이 가까
스로 중요한 소문을 얻어냈는데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요. 속담
에 이르기를 보검은 열사(烈士)에게 드리라 했고 연지곤지의 화장
품은 가인(佳人)에게, 좋은 소식은 응당 부자에게 팔라고 하지 않
았소이까? 이 몸이 파는 것은 거드름이 아니고 소식입죠.]
장 부인은 말했다.
[좋다. 우리가 먼저 이 여창해를 죽이고 난 다음 다시 이 미꾸
라지에게 실토를 받읍시다. 공격들 하시오!]
그녀의 이 공격 소리가 입에서 나오자마자 챙그랑 창창 하는 소
리가 몇번 나고 병기들이 신속하게 부딛쳤다. 장 부인 등 일곱 사
람은 일제히 긴 의자에 올라 각자 병기를 들고 여창해를 공격해
갔다.
일곱 사람은 한번씩 공격한 후 즉시 물러갔다. 그러나 여전히
둥그렇게 여창해를 포위하고 있었다.
서보화상과 구송연의 다리에서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고 여창
해의 장검은 왼손에 옮겨져 있고 오른쪽의 도포가 갈기갈기 찢어
져 있었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분명치 않았다.
장 부인이 외쳤다.
[다시 공격합시다!]
일곱 사람은 또 다시 일제히 공격했다. 챙그랑! 챙그랑! 창창!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일곱 사람은 또 다시 뒤로
물러가 여전히 여창해를 가운데 두고 에워쌌다.
장 부인의 얼굴에는 검이 적중되어 왼쪽 눈썹에서 아래턱까지
한줄기 검흔(劍痕)이 그어졌다.
여창해는 왼쪽 팔뚝에 한 칼이 찍혀 왼손으론 이미 검을 사용
할 수 없어 장검을 오른손으로 옮겼다.
옥령도인은 낭아추를 세우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관주, 우리 두 사람은 삼청(三淸 : 도사들의 집단) 일파요!
권하건대 투항하시오!]
여창해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낮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해
댔다.
장 부인은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단도를
들어 여창해에게 겨누더니 다시 외쳤다.
[다시......]
장 부인이 공격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갑자기 어떤 사
람이 외쳤다.
[잠깐!]
한 사람이 둥그런 원 속으로 기어들어가 여창해의 몸 가까이 가
며 말했다.
[일곱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오. 이
유 선생께서 벽사검보는 이 여창해에게 없다고 하지 않았소?]
이 사람은 바로 임평지였다.
그는 이곳에서 여창해를 보고난 후 눈빛을 한 순간도 그에게서
떼지 않았다. 여창해는 이미 두 팔에 상처를 입고 있으니 또 다시
장 부인 등 일곱 사람의 공격을 받는다면 틀림없이 난도질을 당할
것이다.
자기와 여창해와는 원한이 바다보다 깊어 자기 손으로 요절을
내고 싶었고 다른 사람에 의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몸을 내밀어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장 부인이 엄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너도 그와 함께 저승에 가고 싶은게로구나.]
임평지는 말했다.
[이 사람과 함께 저승에 가고 싶지는 않소. 이 일은 너무 불공
평하니 몇 마디할까 하오. 모두 싸우지 마시오.]
구송연은 말했다.
[이놈도 함게 없애버리자!]
옥령도인은 말했다.
[너는 누구냐? 감히 이 자리가 어디라고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거지?]
임평지는 말했다.
[저는 화산파 임평지......]
동백쌍기, 쌍사악걸, 장 부인 등이 일제히 외쳤다.
[당신이 화산파의 사람이오? 그럼 영호공자는 어디 있소?]
영호충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제가 바로 영호충이올시다. 시골뜨기인데 어찌 공자라고 하겠
읍니까? 여러분도 나의 그 친구를 아십니까?]
그가 지금까지 여행하는 도중 많은 고수와 괴인들이 그를 동경
하고 사귀려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친구 때문이라고 말들 했는데
영호충 또한 그가 어떤 인물이며 누구고 언제 어느때 이런 신통하
고 영향력 있는 친구를 사귀었는지 자기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그러나 이 일곱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암중의 인물이 생
각나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과연 장 부인 등 일곱 사람은 일제히 몸을돌려 영호충을 향해
공송하게 예를 행했다.
옥령도인은 말했다.
[우리 일곱 사람이 소식을 듣고 쫓아온 것은 바로 귀중한 몸과
한번 사귀고 싶어서지요.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니 너무 반갑습니
다.]
여창해는 상처가 가볍지 않았다.
바로 이때 그를 위해 포위망을 풀어준 사람이 다름 아닌 임평지
라는 것을 알고 자기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그러나 즉시 임평
지가 이런 행동을 왜 취했는가를 깨달았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던 일곱 사람이 모두 영호충과 말하고 있는
것을 보자 이때 사라지지 않는다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다리에는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몸을 날려 밖으
로 나가 주막 뒷문 쪽으로 나는 듯 사라져 버렸다.
엄삼성과 구송연은 일제히 외쳤으나 이미 그를 쫓아가기에는 늦
었다.
활불유수 유신은 영호충 앞으로 걸어가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는 동방에서 왔읍니다. 강호친구들이 적지 않게 영호 공자의
존함을 주고받는 소리를 들어서 마음속으로 내심 만나뵙고 싶었읍
니다. 제가 알기로는 몇십 명의 교주, 방주, 동주(洞主), 도주(島
主)들이 오패강에서 공자오 만나뵈려고 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서 저도 이렇게 급히 달려오는 중이지요. 뜻밖에도 재수가 좋아
그들보다 먼저 공자를 만나뵙게 되었군요.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괜찮을 것입니다. 이번에 오패강에 가져오는 영단묘약은 백가지는
되지 않을지라도 아마 아흔 아홉 가지는 될 것입니다. 공자가 지
금 앓고 있는 작은 질병은 치료될 것입니다. 그게 뭐 대수겠읍니
까? 하하하! 참 좋습니다. 참 좋습니다!]
그는 영호충의 손을 꽉 잡고 연신 흔들어대며 굉장히 친하고 다
정하게 굴었다.
영호충은 깜작 놀라 물었다.
[무슨 수십 명의 교주, 방주, 동주, 도주이오? 또 무슨 일백 가
지의 영단묘약이란 말이오? 저는 잘 알지 못하겠군요.]
유신은 웃으며 말했다.
[영호 공자께선 지나치게 염려하실 필요가 없읍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 몸이 비록 하늘과 같은 큰 담력을 지녔다 해도 절대로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한답니다. 공자 어르신께서는 마음을 놓으
십시오. 하하하! 이 몸이 만약 함부로 지껄인다면 설령 공자께서
탓하시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이 유가는 머리
가 몇개 있겠읍니까? 이 유신이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간다고 해
도 이 머리통은 삽시간에 떨어질 것입니다.]
장 부인은 음산하게 말했다.
[너는 함부로 말을 지껄이지 않는다고 네 입으로 지껄여 놓고,
어째서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느냐? 오패강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든간에 얼마 안 있으며 영호 공자께서 친히 보시고 알 수 있을
텐데 네가 주둥이를 놀릴 필요가 있겠느냐? 내가 네게 물어보건대
그 벽사검보는 도대체 누구의 수중에 있느냐?]
유신은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악불군 부부를 보
고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문을 들어서자마자 두 분을 뵙고 게속 마음속으로 생각하
고 있었읍니다. 상공과 부인의 용모는 청아하시고 위엄이 당당하
시므로 틀림없이 두 분은 무림의 고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
지요. 두 분은 영호 공자와 함께 계시니 틀림없이 화산파 장문이
신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 군자검 악 선생 부부이시지요?]
악불군은 미소지었다.
[과찬이시오.]
유신은 말했다.
[속담에 이르기를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읍니
다. 소인이 바로 오늘 그런 꼴이군요. 지금 악 선생께선 열다섯
명의 강적을 맞이해서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했다고 들었읍니다.
선생님의 명성은 이 강호에 자자하지요. 소인은 정말 탄복했읍니
다. 정말 멋진 검법이십니다.]
그는 말하는게 진지했고 마치 눈으로 친히 본 것 같았다. 악불
군은 음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잠시 스
쳤다.
유신은 또 말했다.
[악 부인께서는 여걸......]
장 부인은 호통쳤다.
[너는 계속 쫑알대며 언제 말을 끝내려고 하느냐? 빨리 말해라!
누가 벽사검보를 가져갔는지.]
그녀는 악불군 부부의 이름을 들었는데도 마음속에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유신은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내밀고 말했다.
[백 냥의 은자를 주신다면 내 말씀드리리다.]
장 부인은 '흥' 하고 코웃음치며 말했다.
[네 놈은 평생 돈구경을 못한 놈 같구나! 아무때나 돈, 돈, 돈
을 요구하니!]
동백쌍기와 한쪽 눈이 없는 남자가 품 속에서 한 꾸러미의 은을
꺼내더니 유신에게 던졌다.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은 백 냥이다! 빨리 말을 해라!]
유신은 은자를 받아 헤아려보더니 말했다.
[감사하오. 우리는 밖으로 가십시다. 내가 당신께 말씀드리리
다.]
그 애꾸눈 남자가 말했다.
[왜 밖으로 가려고 하느냐? 여기서 말을 해라. 모두들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여러 사람은 일제히 말했다.
[맞다, 맞아! 왜 그렇게 쥐새끼처럼 쉬쉬하는거냐?]
유신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안 되오. 큰일나지요. 내가 요구한 백 냥은 한 사람당 백 냥이
지요. 이렇게 큰 소식을 백 냥에 팔 내가 아니오. 그렇게 싼 물건
은 이 세상엔 없소이다.]
그 애꾸눈의 남자가 오른손으로 신호를 하자 구송연, 장 부인,
엄삼성, 서보 등이 즉시 유신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그를 가운데 두었다. 조금 전 여창해를 다루는 것과
똑같았다.
장 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이 사람의 별명은 활불유수요. 그를 상대할 때는 손을 쓸 수가
없으니 모두들 병기를 사용하시오.]
옥령도인은 팔각의 낭아추를 들고 공중에서 휙휙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말이 맞소! 이 자의 머리통이 미끄러지나 내 낭하추가 미끄
러지나 봅시다.]
여러 사람들은 그가 들고 있는 낭아추가 글자 그대로 늑대이빨
처럼 날카롭고 번쩍번쩍 빛나는 것을 보고 다시 유신의 머리통을
살펴보았다. 모두 그의 머리통이 앞으로 얼마 얹혀 있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유신은 말했다.
[영호 공자, 조금 전 당신은 한 소년을 내보내 여관주를 포위에
서 구해주었는데 공자께선 이 몸이 이런 재난을 당하고 있는데도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처럼 상관도 안 하시오?]
영호충은 말했다.
[당신이 벽사검보의 소재를 말하지 않는다면 이 몸도 별 수 없
이 같이 끼어들어 노형에게 실례를 할 것이오.]
영호충은 이 말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매우 씁쓸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악영산을 흘끗 쳐다보고 생각했다.
(당신조차도 내가 임평지의 검보를 갖고 있는 줄로 알겠지?)
장 부인 등 일곱 사람은 일제히 환호했다.
[말씀 한번 잘 하셨소! 정말 명답이시오! 영호 공자께서도 한수
거드시지요?]
유신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좋소. 내가 말씀드리겠소. 당신들은 모두 자기 위치로 돌아가
시오. 나를 에워싸고 무엇을 하려고 그려오?]
장 부인은 말했다.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는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니 별 수 없
이 더욱 조심하는 수밖에 더 있겠느냐?]
유신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덫에 자기가 걸린 격이구만! 왜 내가 오패강
에서 기다리지 않소 이곳까지 목숨을 바치러 왔을까?]
장 부인은 말했다.
[도대체 말을 할거요? 하지 않을 것이오?]
유신은 말했다.
[말하지요! 말하지요! 내가 왜 말을 하지 않겠소? 아이쿠! 동방
교주님, 당신이 어찌 여기까지 왕림하셨소이까?]
그의 마지막 두 마디는 소리가 매우 컸다.
동시에 눈빛을 주막 밖의 서쪽을 향하고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
었다.
여러 사람들도 깜짝 놀라 주막 밖의 서쪽을 쳐다보았다.
길 저쪽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손에는 야채를
담는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마을에서 물건을 파는 행상이었다.
어떻게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동방불패(東方不敗) 동방교
주란 말인가?
여러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원위치로 돌렸을 때 유신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을
알았다.
장 부인, 구송연, 옥령도인은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경공이 높고 사람이 그처럼약싹빠를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들은 다시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영호충은 큰 소리로 말했다.
[알고보니 그 벽사검보는 유신의 손에 넘어갔군! 정말로 그의
수중에 있을지는 생각도 못했다!]
여러 사람은 일제히 물었다.
[정말이오? 그것이 유신의 손에 있소?]
영호충은 말했다.
[물론 그의 수중에 있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이실직고하지 않
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겠소?]
그의 소리는 너무 컸다.
너무 힘을 주어 말했기 때문에 숨이 찰 정도였다.
갑자기 문 밖에서 유신의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영호 공자, 당신은 왜 나를 모함하는 것이오?]
말을 하면서 또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장 부인 등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다시 에워쌌다.
옥령도인은 웃으며 말했다.
[너는 영호 공자의 계략에 넘어간거야!]
유신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만약 이 말이 밖으로 퍼져나가 유신이 벽
사검보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소문이 퍼진다면 이 몸은 앞으로 하
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오. 이 강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
를 찾아와 못살게 굴겠소? 내가 설령 머리가 셋이고 발이 여섯 개
가 될지라도 그건 당해낼 수 없을 것이오. 영호 공자, 당신은 정
말 대단하오. 단 한 마디로 이 활불유수를 잡아오다니요.]
영호충은 미소를 띤 채 생각했다.
(내가 뭐가 대단하다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을 뿐
인데......)
그는 악영산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악영산도 마침 그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부딪치는 순간 둘 다 얼굴이 빨개져서
서로 고개를 돌렸다.
장 부인이 말했다.
[유노형, 조금 전 당신은 그 벽사검보를어디다 수믹고 왔소?
우리가 찾아낼까봐 그랬지?]
유신은 외쳤다.
[낭패로군, 낭패야! 장 부인,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유
신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작정한 것이오? 여러분들, 모두 생각
좀 해보시오. 그 벽사검보가 만약 내 수중에 있다면 이 몸은 검법
을 사용할 것이고 또 검법은 상당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
오. 어찌 내 몸에 검을 지니지 않았고 검을 사용치 않겠소이까?
또 어째서 무공이 이렇게 형편없겠소이까?]
모든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근선은 말했다.
[당신은 그 벽사검보를 얻고도 아직 배울 시간이 없었겠지. 설
령 배웠다 해도 다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오. 당신 몸에 검을 지니
고 있지 않은 것을 혹시 다른 사람이 훔쳐갔기 때문인지도 모르
지.]
도간선은 말했다.
[당신 손에 들고 있는 부채는 바로 한 자루의 단검이고 조금 전
당신이 그 부채를 휘두르는 초식이 바로 벽사검보에 있는 검초
요.]
도지선은 말했다.
[맞아, 맞아! 모두 보시오! 그가 부채를 접어 비스듬히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벽사검보에 있는 제오십구초식인 지
타간사(指打奸邪)라고 하는 거야! 그 검끝에 있는 자의 생명은 이
미 없어진거나 다름없는 거야!]
이때 유신의 손에 들려 있던 부채는 마침 구봉연을 가리키고 있
었다.
이 멍청한 두타는 호랑이 같은 소리를 한번 지르더니 두손의 계
도를 가지고 유신을 내리쳤다.
유신은 몸을 돌리며 외쳤다.
[그가 장난한 것이오! 보시오! 보시오! 정말 그 말을 진짜로 여
기지 마시오!]
창창창!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네 번 들리더니 구송연의 왼쪽과
오른손에 들고 있던 쌍도의 두번 공격을 유신이 다 막아냈다.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니 그 부채는 강철로 만든 것이었다. 그의
부자같이 하얀 얼굴모양과 민첩한 몸놀림은 매우 어울리지 않았
다.
그가 접은 부채를 가볍게 튕기니 호두환도는 수척 밖으로 날아
갔다.
이런 것을 보니 그의 무공은 장발두타의 위인 것 같은데 단지
몸이 포위되었으므로 반격을 하지 않은 듯했다.
도화선은 외쳤다.
[이 검법은 벽사검보 중의 제 삼십이초인 오귀방비(烏龜放?)이
다. 즉 거북이가 방귀를 꾸는 모양으로써 이 초식은 제 이십오초
인 갑어번신(甲魚?身) 즉 자라가 몸을 뒤집은 초식으로 이어지
지!]
영호충은 말했다.
[유 선생, 그 벽사검보는 틀림없이 당신 수중에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누구의 수중에 있단 말이오?]
장 부인, 옥령도인들은 일제히 말했다.
[맞소! 빨리 말을 하시오! 누구의 손에 있소?]
유신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지않는 이유는 단지 돈을 좀 더 받으
려고 그랬던 것이오. 당신들의 째째한 모습을 보니 틀림없이 돈을
아끼시려는 것 같은데, 좋소! 내가 말하리다. 그러나 내가 그 검
보의 출처를 댄다 해도 당신들은 듣고 마음속으로 끙끙거릴 뿐이
고 감히 손을 쓸 수는 없을 것이오. 그 벽사검보가 만약 다른 사
람의 손에 있다면 얼마 정도의 희망이 있으나 지금 그 검보는 당
신들이 쳐다볼 수 없는 그런 사람 손에 있소. 그건...... 그 사람
은...... 음음 이건......]
여러 사람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정신을 집중하여 그의 말을 들
으려고 했다.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급히 들려왔다.
말발굽 소리와 수레의 소리가 겹쳐져 길거리를 질주해오고 있었
다.
유신은 그 틈을 타 입을 다물었다. 귀로 유심히 듣더니 말했다.
[어, 누가 왔읍니다.]
옥령도인은 말했다.
[빨리 말하시오. 누가 그 검보를 손에 넣었소?]
유신은 말했다.
[물론 말할 것이오. 왜 그리 성질들이 급하시오?]
수레와 마차 소리가 주점 밖에까지 이르더니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영호 공자, 당신께서는 이곳에 꼐신가요? 우리 방에서 특별히
수레를 보내어 영호 공자를 모실까 합니다.]
영호충은 빨리 벽사검보의 소재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사부
님, 사모님, 여러 사제, 사매들에게 자기에게 대한 의심을 풀어
주고 싶었다.
그는 그 노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해 말했다.
[누가 밖에 와 있으니 빨리 빨리 말하시오!]
유신은 말했다.
[공자께선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오니 말하기가 좋지
않군요.]
갑자기 길에서 말발굽 소리가 급하게 들려왔다. 예닐곱 필의 말
이 질주해 오더니 주점 앞에서 멈추었다.
잠시 후 우렁찬 말소리가 들렸다.
[황(黃)노방주, 당신도 영호 공자를 마중하러 오셨구료!]
그 노인은 말했다.
[그렇소. 사마도주(司馬島主)는 어떻게 왕림하셨소이까?]
그 웅장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흥' 하고 냉소했다. 이어서 무거
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우람한 사람이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어느분이 영호 공자이십니까? 소인 사마대(司馬大)가 이곳의
영호 공자를 모시고 오패강의 여러 군웅들에게 데려갈까 합니다!]
영호충은 공수를 하며 말했다.
[제가 영호충입니다. 사마도주께서 친히 오셨으니 몸둘 바를 모
르겠읍니다.]
사마도주는 말했다.
[소인의 이름은 사마대라 부르지요. 어려서부터 몸이 거대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이런 이름을 지어주셨답니다. 영호 공자께선
저를 사마대라 불러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아대(阿大)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 무슨 도주라고 하십니까? 정말 송구스럽기 짝
이 없읍니다.]
영호충은 말했다.
[아니 될 말씀이오.]
그리고 손을 들어 악불군 부부를 향해 말했다.
[이 두 분이 바로 저의 사부님과 사모님이십니다.]
사마대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두 분의 명성을 익히 듣고 사모하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몸을 돌리고 말했다.
[소인이 좀 늦게 나타난 것 같습니다. 공자께선 질책하지 마십
시오.]
악불군은 화산파 장문으로서 이십여 년을 보내는 동안 지금껏
강호사람에게 존경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사마대와 장 부인, 구송연, 옥령도인 일행은 모두 영
호충에게는 대단히 공손했으나 반대로 화산파 장문인인 그에게는
별볼일 없이 대했다. 약간의 경의를 표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완전
히 영호충을 봐서였다.
그러나 감정은 여러 곳에서 충분히 나타났으므로 이런 행위는
안면에 대고 심한 욕을 하는 것보다 심한 모욕을 악불군에게 주고
있었다.
그러나 악불군은 수양이 깊었으므로 그런 표정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이대 그 황씨성의 방주도 안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은 이미 팔십여 세 가량으로 하얀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
오고 눈빛은 소년처럼 맑았다.
그는 영호충을 향해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말했다.
[영호 공자, 이 소인의 제자들은 모두 이 일대에서 밥을 얻어먹
고 살아가지요. 이번에 공자를 잘 모시지 못했으므로 정말 백번,
천번, 만번 죽어도 할 말이 없읍니다.]
악불군은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바로?)
그는 오래 전부터 홍하하류에 천하방(天河幇)이라는 방파가 있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주인 황백류(黃伯流)는 중원무림에서 나
이 많은 선배인데 방의 규칙이 비교적 느슨하기 때문에 그 방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못된 짓을 도맡아했으며 천하방의 명성은 무
림에서 평판이 좋지가 않았다.
그러나 천하방은 사람들이 많고 방에 고수들이 적지 않게 있었
으므로 이 제노예약(齊魯豫?)의 지방에서 제일 큰 방회였다.
정말로 눈 앞의 이 노인이 바로 만여 명을 호령하는 은염교(銀
髥蛟) 황백류란 말인가?
만약에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면 어째서 영호충과 같은 소
년에게 이렇듯 예를 다하는가?
악불군은 마음속에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쌍사악걸, 엄삼성의 말소리에 그는 생각을 중단했다.
[은염노교(銀髥老蛟), 당신은 이곳의 토박이이니 우리처럼 외지
에서 온 친구들을 잘 접대해 줘야 할 것이오.]
이 하얀 수염의 늙은사람은 틀림없이 은염교 황백류였다. 그는
껄껄 웃더니 말했다.
[만약 영호 공자의 덕택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 많은 영웅호걸들
을 만나뵐 수 있었겠소이까? 여러분들이 저의 지역에 오셨으니 모
두가 이 천하방의 귀한 손님들이오. 물론 접대를 잘 해야겠지요.
저희 아랫것들이 오패강에다 이미 술좌석을 마련했으니 영호 공자
와 여러 손님들께서는 빨리 그곳으로 가시지요?]
영호충은 이 작은 주점에 사람이 꽉 차고 이렇게 웅성거리고 시
끄러운 곳에서 절대로 유신이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조금 전 소란 속에서 사부와 사매들은 자기에게 품던 의
심이 어느 정도 풀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자기의 깨끗함을 풀 수 있을 것이니 급하게
굴 것까지는 없었다.
그는 악불군을 향해 말했다.
[사부님, 우리가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하교해 주십시오.]
악불군은 생각했다.
(오패강에 모인 사람들은 틀림없이 하나도 정파의 인사는 없을
것이다. 어찌 우리가 그들과 함게 섰일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은
겉으로 퍽 공경스럽고 예를 갖추는 척하면서 충아를 자기들 무리
속에 끼워 넣으려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형산파의 유정풍도 그
랬지 않은가? 일단 그들 사악한 무리와 접근하게 되면 평생 거기
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몸과 명성을 마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
황으로 봐서 어찌 안 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유신은 말했다.
[악 선생, 아마 지금쯤 오패강에서는 한참 떠들썩할 것입니다.
꽤 많은 동주(洞主)와 도주들은 모두 십여 년 이십여 년 삼십여
년 동안 강호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읍니다. 모두들 영호 공자
때문에 오신 것이지요. 당신이 정말로 이런 문무를 겸비하고 준걸
한 소협을 가르치시고 길러내셨으니 악 선생님의이름도 덩달아
빛날 것입니다. 오패강엔 당연히 가셔야지요. 악 선생님의 가마가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 사람의 흥을 깨게 될 것입니다. 가시
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악불군이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사마대와 황백류 두 사람은 이미
영호충을 부축하고 데리고 나가 큰 수레에 앉혔다. 구송연, 엄삼
성, 동백쌍기, 도곡육선 등도 모두 밖으로 나왔다.
악불군 부부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눈쌀을 찌푸렸다.
[이 사람들은 단지 충아만을 데리고 갈 것이다. 우리가 가든 않
든 그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을 것이다.)
악영산은 호기심이 일었다.
[아버지, 우리도 가서 구경 좀 해요. 가서 그들 괴물들이 대사
형과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한번 봐요.]
그녀는 사람고기를 먹는 흑백쌍웅을 생각해내더니 자기도 모르
게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들이 대사형의 체면을 봐서 자기를 풀어주었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패강에
가면 아버지 몸에 딱 붙어 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걸어나왔다.
조금 전 한바탕 토해낸 후 아직 음식을 들지 않았으므로 발걸음
을 옮길 때마다 몸이 허공에 뜬 것 같고 정신도 흐릿했다.
그는 생각했다.
(그 오독교의 남봉황의 독약은 정말 대단하구나.)
황백류와 사마대 등 여러 사람은 올 때 말들을 타고 왔기 때문
에 즉시 악불군, 악 부인, 장 부인, 구송연, 도곡육선 등 일행에
게 말을 타도록 했다.
화산파의 몇명의 남제자들은 말이 없어 타지 못하고 천하방의
졸개들과 장경도(長鯨島)의 사마대 도주의 부하들과 함께 걸어서
오패강을 향해 출발했다.
오패강은 노(魯), 예(豫) 두 지역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
으며 동쪽으로는 산동하택정도(山東荷澤定陶)와, 서쪽으로는 하남
동명(河南東明)과 접하고 있었다.
이 일대의 지세는 평탄하고 호수와 연못이 많았으며 멀리 바라
보니 오패강은 그리 높지 않은 듯했고 겨우 작은 산등성이 높이였
다.
일행은 수레와 말을 달려 동쪽으로 질주해 갔다.
얼마가지 않아 수십기의 말이 마중을 나와 수레 앞에 이르더니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려 큰 소리로 영호충에게 자기들의 뜻을 표현
했다. 그들은 예절이 깎듯 했으며 심히 공경스러웠다.
오패강이 가까워졌을 무렵, 마중을 나온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소속과 성명 등을 밝혔는데 영호충은 맣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소개하자 모두 기억할 수가 없었다.
큰 수레는 산등성이 아래 당도했다. 그 오패강의 산을 바라보니
소나무가 뒤덮혀 있고 한 개의 산길이 구불구불 위로 뻗어 있었
다.
황백류는 영호충을 큰 수레에서 부축해 내렸다. 벌써 두 명의
장정이 작은 가마 하나를 가지고와 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호충은 자기가 가마에 탄다면 사부와 사모님, 사매들은 걸어
서 가야 하므로 실례가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사모님, 사모님께서 수레에 타시죠? 제자는 혼자서 걸어갈수가
있읍니다.]
악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영호 공자를 마중나왔지, 나를 마중하러 나온 것은 아
니잖니?]
그리고 경공을 펼쳐 앞질러 산을 올랐다. 악불군과 악영산 부녀
도 빠른 걸음으로 산 위를 올랐다.
영호충은 별 수 없이 가마에 몸을 실었다.
가마는 어느새 소나무 사이의 넓은 공지에 이르렀다. 영호충이
가마에서 내려 살펴보니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
었다.
이 사람들은 형색과 표정을 살펴보니 모두 삼산오악(三山五嶽)
에서 모여든 오합지졸처럼 보였다.
여러 사람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 분이 바로 영호 공자이십니까?]
어떤 사람은 말했다.
[이것은 소인의 집에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영약이올시다! 상당
히 약효가 있읍지요.]
[이것은 제가 이십년 전 장백산(長白山)에서 캐낸 오래 된 산삼
입니다. 그러하오니 영호 공자께서 거두어 주십시오.]
또 한 사람은 말했다.
[이 일곱 사람은 노동육부(魯東六府)에서 제일 명성이 자자한
명의들이지요. 제가 모두들 모셔왔읍니다. 그들에게 공자의 맥을
보게 해주십시오.]
이 일곱 명의 명의라는 사람은 모두 굵은 밧줄에 손이 꽁꽁 묶
여 굴비처럼 줄에 묶여져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표정이
었다.
명의 같은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틀림없이 이 사람에게 잡혀온 것이었다. 청했다는 말은 듣기 좋
게 꾸며낸 말이었다.
또 한 사람은 두 개의 큰 대바구니를 가지고 와 말했다.
[제남부(濟南府)성에서 채집한 약재들입니다. 소인이 모두 한
가지씩 가져왔지요. 공자께서 어떤 약재가 필요하시다면 이 소인
이 모두 준비해 왔으니 두고두고 필요할 때마다 쓰십시오.]
영호충이 그 사람들의 형색을 살피니 모두 차림새가 기괴하고
악독하게 보였다. 그러나 자기들 딴에는 진지했으므로 어떤 의심
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크게 감동하였다.
그는 요즘 실의와 좌절에 빠져 죽을지 살지도 모르다가 이런 환
영을 받게 되니 쉽게 감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뭉틀해지더니 눈물이 글썽해져서 포권을 하며 말
했다.
[여러 친구들이여, 이 영호충은 일개 무명소졸인데 여러분들의
따스한...... 여러분들이 이렇게 고맙게 대해주시니 정말로......
정말로...... 어떻게 보답을 해야할지......]
그는 흐느끼면서 말을 다 할 수가 없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거기 모인 수많은 사람은 너도나도 다투어 말했다.
[아,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빨리 일어나시오.]
[우리를 죽이는게 낫겠읍니다.]
모두 일제히 무릎을 꿇고 환례를 했다.
삽시간에 오패강에 모여 있던 천여 명의 사람들은 일제히 무릎
을 꿇었다. 단지 화산파의 악불군 사제와 도곡육선만이 멀거니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악불군과 제자들은 그들 앞에 서 있기가 쑥스러워 몸을 돌려 피
했다. 도곡육선은 여러 사람 앞이지만 싱글거리며 아무 말이고 해
댔다.
영호충은 여러 사람에게 절을 하고 또 하고 일어났을 때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이 친구들이 무슨 뜻을 품고 왔든지 영호충은 앞으로 이들을
위해 분신쇄골할 것이다. 이들의 부탁이라면 백번 죽어도 불사하
리라!)
천하방의 방주 황백류는 말했다.
[영호 공자, 앞에 있는 초막으로 들어가시어 좀 쉬시지요?]
그는 말하면서 그와 악불군 부부를 데리고 초막으로 들어갔다.
그 초막은 새로 지은 것이었으며 초막 안에는 탁자와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찻잔과 주전자들이 놓여 있었다.
황백류가 손짓하자 그의 부하들이 수릉마 가져오고 어떤 부하는
말린 고기를 가져와 반주로 올렸다.
영호충은 술잔을 들고 초막 밖으로 가더니 낭랑히 말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영호충은 초면이니 응당 같이 술잔을 들어
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나누고 머려움
이 부딪치면 같이 해결해 나갑시다. 이 술은 우리가 서로 마셨다
고 치지요.]
말하면서 술을 하늘로 뿌려 천만개의 물방울을 하늘로 날렸다.
모인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천둥처럼 온 산을 뒤덮었다.
[영호 공자의 말씀이 맞습니다. 모두들 앞으로는 좋은 것이 있
으면 같이 나누고 어려움이 있으면 같이 해결합시다.]
악불군은 눈쌀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충아는 정말 경거망동을 하는구나. 앞뒤로 가리지 않고 눈 앞
의 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잘 해주자, 그들에게 무슨 좋은 것이 있
으면 같이 나누고 어려움이 부딪치면 같이 해결해 나가자고 하는
구나. 이 사람중에 아마 한 사람도 정당한 사람이 없고 모두들 전
백광 같은 류의 놈들인 것이다. 그들이 간음과 약탈, 선량한 사람
들을 죽인다면 너는 그들과 같이 행동할 것이냐? 나 악불군은 이
못된 놈들을 없애야 할 판인데 너는 반대로 그들과 어려움이 있으
면 같이 해결해 나간다고?)
영호충은 또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영호충을 이렇듯 가족처럼 대해주는지 저는 영
문을 알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습니다. 여
러분들이 어려운 일이 있다면 말씀을 해주십시오. 대장부들의 행
동이란 광명정대하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읍니까? 이 영호충이 필
요하면 그 일이 아무리 어렵고 험난해도 전 절대로 물리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 사람들과는 평소 알지 못했는데 자기에게 이렇게 대해
주니 틀림없이 어떤 큰일을 가지고 자기의 도움을 요구하고 있나
보다고 풀이했다. 어차피 결국은 그들에게 대답을 해주었으니 그
일을 달성하지 못할지라도 결국은 한번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했
다.
황백류는 말했다.
[영호 공자께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여러 사람들은 공
자가 이곳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내심 앙모하여 영호
공자의 풍채를 좀 볼까하고 약속이나 한듯 여기에 모였읍니다. 듣
건대 공자는 몸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명의를
데려오거나 약재를 구해 온 것이지 공자에게 절대 무슨 요구가 잇
어서 온 게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패는 아이고 단지 서로 소문을
듣고 모였을 뿐이고, 어떤 일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지도 않
소이다. 단지 공자께서 오늘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나누고 어려
움을 같이 극복하자고 하셨으니 모두들, 설령 사이가 나쁜 친구라
해도 좋은 친구가 돼야 하겠지요.]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황 방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일곱 명의 명의를 묶고 온 그 사람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공자께서는 초막으로 드시지요? 이 일곱 명의 명의에게 진백을
보라고 하는게 어떻겠읍니까?]
영호충은 생각했다.
(평일지 선생처럼 재주가 좋은 사람도 내 상처에는 치료할 약이
없다고 했는데 저까짓 일곱 명의 의사들이 뭘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들의 뜻을 거절할 수 없어 초막으로 들어갔다.
일곱 명의 명의들은 비맞은 장닭처럼 초막 안으로 끌려갔다.
영호충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형씨께선 그들을 풀어주시지요? 그들은 도망가지 않을 것입니
다.]
그 사람이 말했다.
[공자께서 풀어주시라니 풀어줘야죠.]
팍팍팍 하고 소리가 여섯번 들리더니 그 두꺼운 끈이 절단되었
다. 그는 소리쳤다.
[만약 너희들이 영호 공자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너희들의
목을 뎅강뎅강 자르고 말겠다!]
한 명의 의원이 말했다.
[소...... 소인은 있는 힘을 다해 해보겠읍니다.그러나 천하에
는...... 천하에는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있지요.]
또 다른 한 의원이 말했다.
[공자를 살펴보니 마음이 어지러운 듯하지만 기(氣)가 성하니
틀림없이 약으로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명의 의원들이 달려들어 그의 맥을 짚었다.
갑자기 초막 입구에서 그 누구가 일갈했다.
[모두 싹 꺼져버려라! 어설픈 재주로 무엇을 고치겠느냐?]
영호충은 몸을 돌려보니 살인명의 평일지였다.
그는 기뻐서 말했다.
[평 선생님! 당신도 오셨군요? 나도 이 의사들이 아무 쓸모없다
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평일지는 초막으로 들어오더니 왼발을 휘둘러 퍽 하고 소리를
내며 의사 하나를 초막 밖으로 날려버리고 오른쪽 다리를 날려 퍽
하니 다른 한 명의 의사를 초막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그 의사를 잡아온 사람은 평소 평일지를 흠모했던 모양이었다.
[천하의 제일명의 평 대부께서 이곳에 오셨는데 너희놈들이 어
찌 감히 이소에서 뽐낼려고 하느냐?]
팍팍팍 소리가 나며 그 두 명의 의사도 초막 밖으로 아뒹굴었
다. 나머지 세 명의 의사는 넘어지고 곤두박히면서 초막 밖으로
기어 나갔다.
그 사내는 허리를 굽히고 웃으며 말했다.
[영호 공자, 평대부, 제가 너무 경솔했읍니다. 어르신......]
평일지는 왼발을 들어 하늘을 향해 날리니 그 사내가 초막 밖으
로 나뒹굴었다.
평일지의 이런 행동은 영호충으로선 너무 뜻밖이었다. 그는 깜
짝 놀랐다.
평일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털썩 앉더니 손을 내밀어
영호충의 오른쪽 맥박을 재보고 다시 한참 후에는 왼손의 맥박을
재어보았다. 이렇듯 이쪽 손과 저쪽 손을 바꾸어 맥을 짚더니 눈
쌀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무엇인가 열심히 생각을 했다.
영호충은 말했다.
[평 선생님, 평범한 사람의 생사는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오늘
날 영호충의 병은 치료하기 어렵고 또 선생께선 이미 두번이나 저
를 돌봐주셔서 저는 그 은혜에 감격하고 있읍니다. 선생님께선 저
를 위해 더 이상 노심초사하지 마십시오.]
초막 밖에선 흥얼거리는 소리와 노래 부르는 소리가 이곳저곳에
서 들려왔다.
아마 천하방에서 이미 술과 요리를 가져다가 모인 삶에게 대접
하는 것 같았다.
영호충의 마음은 밖에 있었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한바탕떠들
고 싶었다.
그러나 평일지는 연신 손을 바꿔가며 그의 맥박을 짚고 영원히
끝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평 대부의 이름이 바로 평일지인데 자칭 한 손가락으로 맥
을 짚어 병을 치료하며, 사람을 죽일 때도 단지 한 손가락으로 혈
을 찔러 죽인다고 하더니만 지금은 내 맥을 짚을 때는 한 손가락
이 아니라 열 손가락을 거의 다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삐꺽하는 문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머리가 들어왔다.
바로 도간선이었다.
[영호충, 자네는 어째서 술을 마시러 나오지 않는가?]
영호충은 말했다.
[녜, 금방 나갈 것입니다. 날 기다려 주시오. 밖에 있는 술을
다 마시지 말고 말이오.]
도간선은 말했다.
[좋아! 평 어르신, 빨리 치료를 해주시오!]
그는 말하면서 고개를 다시 문 밖으로 빼어냈다.
평일지는 천천히 손을 거두며 눈을 꼭 감고 오른손 식지로 탁자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은 곤혹스럽고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
는 것 같은 태도였다. 한참 지나서 눈을 뜨더니 말했다.
[영호 공자, 당신의 체내에는 일곱 줄기의 진기가 서로 충돌하
고 있는데 없어지지도 않고 제압시킬 수도 없읍니다. 이것은 독에
중독되어 받은 상처도 아니고 더우기 풍이나 열기 때문에 생긴 증
세도 아닙니다. 그래서 침이나 약재를 써서는 치료할 수가 없소이
다.]
영호충은 말했다.
[녜.]
평일지는 말했다.
[그날 주선지에서 공자의 맥을 짚은 다음부터 지금까지 한 가지
해결 방법을 생각해 놓았소. 그 방법은 비록 위험하지만 요행을
바래야겠지요. 일곱 명의 내공이 정순한 인사를 불러다가 동시에
내공을 주입시키면 공자의 체내에 있는 서로 다른 진기를 일거에
없앨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세 명을 불러서 같이 왔고
나머지 사람은 밖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두 분을 선출하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공자의 스승인 악 선생과 저까지 합치면
치료할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조금 전 공자의 맥을 보았더니 공
자의 몸엔 또 다른 변화가 생겼고 더욱 복잡하게 되었더군요.]
영호충은 신음소리를 '음' 하고 냈다.
평일지는 말했다.
[지난 며칠 동안 네 가지의 큰 일이 발생했지요. 첫째로 공자께
선 수십종의 몸에 보신이 되는 희귀한 약을 드셨읍니다. 그 중에
는 인삼, 수오, 직초, 복명 등등의 진귀한 약물도 있지요. 하지만
보약은 여자에게나 소용이 있는 것입니다.]]
영호충은 아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선배님의 신기는 고금을 털어도 없을 것입니
다.]
평일지는 말했다.
[공자께선 왜 그 보약을 복용하셨읍니까? 틀림없이 돌파리 의사
들이 잘못 썼을 것이오. 한심하군요.]
영호충은 생각했다.
(조천추가 노두자의 속명팔환을 훔쳐다 나에게 먹인 것은 좋은
뜻에서 그랬으니 그가 어찌 남자 여자를 구분해야 할 약인 줄 알
았겠는가? 만약에 사실대로 말한다면 평 대부는 틀림없이 그를 책
망할 것이니 아무래도 숨기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 말했다.
[그것은 제가 잘못 복용한 탓이지요. 절대로 다른 사람을 탓하
지 마십시오.]
평일지는 말했다.
[당신의 몸은 본래부터 기(氣)가 고르지 못했으비낟. 갑자기 또
이렇게 많은 보약을 드셨으니 그 어찌 감당하실 수 있겠읍니까?
마치 장강(長江)의 물이 불어서 홍수가 났는데 물을 다스리는 사
람은 물을 빼려고는 생각지 않고 반대로 동정(洞庭), 번양(?陽)
호수의 물을 끌어다대는 꼴이 되었읍니다. 어찌 재앙이 덮치지 않
겠읍니까? 그 약은 오로지 선천적으로 허약하고 무력한 여자들만
이 복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에 이롭지요. 어째서 공자께서 드
셨읍니까? 정말 큰일입니다. 큰일입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나는 노두자의 딸 노불사 아가씨가 내 피를 먹고 병이 치료되
길 바랄 뿐이다.)
평일지는 또 말했다.
[두번째 큰 변괴는 공자게선 갑자기 대량의 피를 흘리셨읍니다.
당신의 지금 병세로는 어떻게 다시 사람들과 무예를 겨루겠읍니
까? 그렇게 싸움을 좋아하시니 어찌 오래 살기를 바랄 수 있겠소?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이렇게 중히 여기는데 당신은 자기 스스로
를 돌보지 않는군요. 군자가 복수를 하는데는 십년이라도 늦지 않
는다고 했소. 어찌 그렇게 급하십니까?]
그는 말을 하면서 연신 고개를 흔들어댔다. 안색은 몹시 못마땅
한 표정이었다.
만약 그가 치료하는 사람이 영호충이 아니라면 그는 단번에 손
찌검을 했던지 그렇지 않으면 호되게 욕을 해댔을 것이다.
영호충이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이 백번천번 옳습니다.]
평일지는 말했다.
[단지 피를 많이 흘렸다면 그것은 치료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
겠으나 어쩌자고 당신은 또 운남오독교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들의 오선대보약주를 마셨읍니까?]
영호충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오선대보약주라니요?]
평일지는 말했다.
[이 오선대보약주는 오독교에서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비방으로
술을 빚었다고 합니다. 술을 빚을 때 사용하는 독충들은 진귀하기
짝이 없고 소문에 의하면 그 독충 한 마리를 기르는데 십여 년을
소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술 속에는 또 다른 수십 종류의 귀중한
약재를 사용해 서로의 독을 독으로 중화시키는 이치를 썼다고 합
니다. 이 약을 복용한 사람은 병에 길리지 아니하고 독에 중독되
지도 않는다고 하며 갑자기 수십 년 동안 쌓은 공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원래는 이 세상에는 제일 신기한 보약이지요. 이 늙은이
가 오랫동안 그 약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읍니다. 듣자니 남
봉황이라는 여자는 보배처럼 그 술을 몸에 지니고 지금까지 어떤
남자에게도 말을 걸지도 않고 술을 대접하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어쩌자고 그녀가 이렇게 진귀한 약주를 당신에게 먹였는지 참 알
다가도 모를 일이군요. 당신은 풍류 남아로서 곳곳에 정(情)을 뿌
리고 다니는데 어찌 자기 몸을 자기가 망치는 줄도 모르고 계시
오?]
영호충은 씁쓸하게 웃었다.
[남교주와 저는 단지 황하의 배에서 한번 만나보았을 뿐이며 그
녀는 오선주를 나에게 주었을 뿐입니다. 그 밖에는 그녀와 아무런
관계가 없소이다.]
평일지는 그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
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남봉황은 남의 부탁을 받고 당신께 오선대
보약주를 마시게 했을 것이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소. 그 술은 비록 몸을 보호해주지만 독이 들
어 있소. 흥! 제기랄! 엉망진창이군! 그 오독교는 단지 몇잔의 조
상대대로 내려오는 괴상한 약방문에 의지했을 뿐이고, 남봉황 이
계집은 의학의 이치와 약의 이치를 조금도 모르면서 제기랄 것!
정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군!]
영호충은 그가 이렇게 욕을 해대는 소리를 듣고 이 사람의 성격
이 급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색이 참담하고 가슴
이 쉬지 않고 벌떡거리며 표정이 엄숙해 자기를 아주 극진하게 생
각하는 것 같아 속으로 미안한 감이 들었다.
[평 어르신, 남교주도 좋은 뜻에서 그랬던 것이지요......]
평일지는 화가 나서 말했다.
[좋은 뜻? 호의? 정말 가관이군! 천하의 돌파리들이 사람을 죽
이는 것이 호의라고 돌파리들이 생명을 죽이는 숫자가 강호에서
칼에 죽는 숫자보다 더 많다는 것을 모르시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것도 그런것 같습니다.]
평일지는 말했다.
[뭐가 그런 것도 같습니까?정말 실제사 그러하오. 나 평일지가
치료한 사람을 남봉황이 무슨 주제에 손을 쓴다는 말이오? 당신
피 속엔 극약이 들어 있소. 만약 그 독이 온몸에 퍼지면 그 일곱
줄기의 진기와 크게 충돌되어 아마 세 시간 안으로 당신 생명은
없어질 것이오.]
영호충은 생각했다.
(내 속에 독이 있는 것은 그 오선주를 마셨기 때문만이 아닐 것
이다. 남교주와 네 명의 요녀들이 나에게 피를 헌혈해 줄 때는 그
녀의 몸에 있는 대로 사용했다. 이 사람들은 날마다 독물들과 함
게 사니 음식중에도 독이 있을 것이고 핏속에도 들어 있을 것이
다. 단지 그녀들은 장시간 습관이 되어서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이다. 이 일은 절대로 평일지에게 말을 하면 안 된다. 그
렇지 않으면 그의 괴퍅한 성격이 더욱 폭발할 것이니까.)
그는 말했다.
[의학의 이치나 약재의 이치는 깊고도 오묘해서 절대로 우리 같
은 일반 사람이 알 수 없지요?]
평일지는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만약에 보약을 잘못 복용하고 대량의 피를 흘리고 약주를 잘못
마셨다 하면 나는 그래도 치료할 방법이 있는데 이 네번째의 큰변
이 정말 나를 속수무책으로 만드는구료.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잘
못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나의 불찰입니다.]
평일지는 말했다.
[이 며칠 동안 당신은 왜 실의에 차 있으며 더 살아가려고 하지
않소? 도대체 어떤 충격을 받았소? 지난번 내가 주선진에서 맥을
짚을 때는 당신의 상처는 비록 중했지만 그러나 당신 심장의 맥박
은 왕성하고 한줄기 생기가 돌고 있었소. 그래서 나는 먼저 당신
생명을 백일 동안 연장시키고 난 후 이 백일 동안 어떤 방법을 강
구하든 당신의 괴병을 치료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 당시에 나
느 그리 자신이 없어 당신에게 명확한 언질을 주지 못했지만 지금
당신에게서는 그 한 줄기의 생기마저 사라져버렸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오?]
그 말을 듣자 영호충은 자기도 모르게 슬픔이 가슴 한쪽에서 쳐
올라왔다.
(맨처음 사부게서 임평지의 벽사검보를 가졌다고 의심할 때도
내 마음은 깨끗해서 결국 분명히 밝혀질 때가 오리라 생각하고 아
무렇지도 않게여겼지만 그러나 소사매마저도 나에게 의심을 품고
그 임평지를 위해 마음속으로 나를 짓밝고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놈으로 여기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세상에 살아있다 한들 아
무런 낙이 없을거라고 생각했었지.)
평일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당신의 맥을 짚어보니 여자 생각으로 꽉 차 있었소. 사실은 천
하의 모든 여자들의 말투는 아무런 재미가 없고 얼굴도 추악하기
그지없소. 제일 좋은 것은 멀리하고 피해야 하는 것이오. 피하거
나 멀리할 수 없다면 별 수 없이 자기 자신을 억제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당신은 어째서 그런 생각을 모르셨소? 오히려 여자일을
온종일 생각하니 이건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된 것이오. 비록
그...... 정말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는 말하면서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당신 부인은 말투가 재미없고 얼굴이 추하기 이를데 없지. 그
러나 천하의 여자들은 모두 당신 부인 같지는 않소이다. 당신이
당신 부인을 보고 천하의 여자를 한데 묶어 논한다는 것은 정말로
웃기는 일이오. 만약 소사매가 당신말대로 말투가 재미없고 추악
하다면......)
도실선이 두 그릇의 술을 받쳐들고 초막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
다.
[어이쿠! 평 대부, 어째서 아직가지 치료를 마치지 않았소?]
평일지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치료할 수가 없게 되었소.]
도실선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나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소?]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영호충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서 술이나 마시게.]
영호충은 말했다.
[좋아요.]
평일지는 화가 나서 일문했다.
[절대로 갈 수 없소이다!]
도실선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려 급히 도망쳤다. 두 그릇의 술은
엎질러져 그의 가슴에 쏟아졌다.
평일지는 말했다.
[영호 공자, 당신은 이 병을 철저하게 다스려야 하오. 설령 대
라금선(大羅金仙)일지라도 아마 치료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나
수개월 수년 동안 생명을 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
은 아니오. 그러나반드시 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첫째로는 수
을 끊어야 하고 둘째로는 반드시 마음을 수습하고 여자는 절대로
가까이 할 수 없으며 가까이 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조차 함녀
안 되오. 세번째는 절대로 무예를 겨루지 마시오. 색을 멀리하고,
싸움을 안 하고, 술을 끊을 수 있다면 일이 년 동안 생명을 연장
시킬 수 있소.]
영호충은 껄껄 웃었다.
평일지는 화가 나서 말했다.
[뭐가 그리 우습소?]
영호충은 말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 때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는데 술
조차 마실 수 없고 여자도 생각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이 못살게
굴어도 손을 쓸 수가 없다면 그게 무슨 사람이오? 그럴 바에는 일
찍 죽는게 낫고 그것이 대장부의 떳떳한 행동입니다.]
평일지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반드시 당신이 그 세 가지를 끊도록 만들고 말겠소. 만약
내가 당신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면 내 명성이 끝장나는 것이 아
니오?]
영호충은 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쪽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평 선생님, 당신의 호의에 이 후배는 감격하고 또 감격하고 있
읍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정해져 있는 법, 선배님의 의술이 비
록 정통하고 정묘하다곤 하나 죽어야 할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설령 내 병을 치료할 수 없다 해도 선생님의 명성은 추
호도 손실을 입지 않을 것이오?]
덜커덕 문 여는 소리가 나며 또 한 사람이 머리를 내밀고 들어
왔다.
그 사람은 도근선이었다.
[영호충, 자네는 병을 치료했나?]
영호충은 말했다.
[평 대부께선 의술이 정묘하셔서 내 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
소.]
도근선은 말했다.
[잘 됐어! 정말 잘 됐어!]
그리고 들어와 그의소매를 잡고 말했다.
[술 마시러 나가세! 나가서 술을 마시세!]
영호충은 평일지에게 깊게 읍을 하며 말했다.
[선배님의 성의에 감사드립니다.]
평리지는 인사도 받지 않고 입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도근선은 말했다.
[내가 애당초 말하지 않았나? 틀림없이 치료할 수 있다고. 그는
살인명의니까 그가 한 사람을 치료해 낫게 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죽이는데 만약 그가 한 사람을 치료해도 낫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
떻게 될까? 그 경우는 정말 알쏭달쏭해.]
영호충은 말했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초막을 걸어나왔다.
사방에서는 호걸들이 모여 술을 통쾌하게 마시고 있었다. 영호
충은 가면서 사람들의 술잔을 받고 건배를 했다.
여러 군웅들은 그의 성격이 호탕하고 주량이 많음을 알고 이야
기를 나누면서 마음속으로 더욱 그를 좋아했다.
모두들 말했다.
[영호 공자는 과연 호기가 하늘을 찌르고 우리들로 하여금 존경
심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영호충은 연속 십여 그릇의 술을 마셨다. 갑자기 평일지가 듣도
록 한 그릇의 술을 들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오늘 술이 있으면 취해 버려라! 있는 족족 마셔버려라!]
그리고 초막으로 걸어들어오며 말했다.
[평 선배님, 저는 당신과 한 잔하고 싶습니다.]
등불 아래 평일지의 모습은 크게 변해 있었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술기운이 싹 가셨다.
자세히 그를 보니 원래 새까맣던 그의 머리가 백발처럼 하얗게
되었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깊게 패어져 있었다. 이 몇 시간 동안
몇십 년이나 늙어 보였다.
그가 중얼중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을 낫게 하면 한 사람을 죽여 왔는데 사람을 치료해주
지 못했으니 나는 어찌해야 할까? 나는 사람 하나를 치료하지 못
했으니 어찌 할건가?]
영호충은 뜨거운 피가 올라와 큰 소리로 외쳤다.
[영호충은 목숨이 무슨 가치가 있읍니까? 선배님은 마음속에 두
지 마십시오!]
평일지는 말했다.
[사람을 낫게 하지 못했으니 내 목숨을 끊어야지. 그렇지 않으
면 살인명의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는 몸을 갑자기 일으키더니 몸을 몇번 비틀거렸다. 새빨간 피
를 토해대더니 땅바닥에 쓰러졌다.
영호충은 크게 놀라 급히 가서 그를 부축하니 그의 호흡은 이미
멈추었고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영호충은 그를 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토막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게 괴었고 마음속에 처량한 생각이 가득 찼
다. 잠시 서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평일지의 시
신을 손에 들고 있으니 갈수록 무거워져 그르 안을 힘이 없어 땅
바닥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초막 안으로 누가 들어오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영호 공자.]
영호충이 보니 조천추였다. 영호충은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 선배님, 평 대부께서 죽었읍니다.]
조천추는 이 일에 대해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영호 공자, 제가 부탁할 일이 한 가지 있읍니다. 누가 물어보
면 영호 공자께선 이 조천추를 본 적이 없다고 해주십시오. 부탁
이오.]
영호충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건 왜요?]
조천추는 말했다.
[뭐 별것이 아닙니다. 단지...... 단지...... 음, 안녕히 계십
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그가 막 초막 밖으로 나가자 또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바로 사
마대였다.
사마대는 말했다.
[영호 공자 전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말할 수 없
는...... 아...... 만약 어떤 사람이 오패강에 모인 사람이 누구
누구였느냐고 물어본다면 공자께서는 제 이름을 절대로 대지 마십
시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죽어도 잊지 않겠읍니다.]
영호충은 말했다.
[그건 또 왜 그러시오?]
사마대는 안색이 나처해지며 어린애가 죄를 저질러 사람에게 목
덜미를 잡힌 것처럼 기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건...... 이건......]
영호충은 말했다.
[이 영호충은 각하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감히 친할
엄두도 내지 않겠읍니다.]
사마대는 얼굴색이 변하더니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말했다.
[공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려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절대로
오패강에서 있었던 일들을 없는걸로 해주십사' 부탁한 것은 그분
이 알면 화를 내실까봐 그랬던 것인데 공자께서 갑자기 그런 말씀
을 하신다면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말은 제가 헛소리를 한 것으로
여겨 주십시오.]
영호충은 급히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사마도주께선 어찌 이런 행동을 하십니까? 도주님, 말씀 좀 해
주십시오. 당신이 오패강에 와서 저를 환대해준 것을 보고 어찌
도주께서 조금 전 말씀하신 그분이 화를 내신다는 말이오? 그 사
람이 그렇게까지 영호충을 미워한다면 이 영호충이......]
사마대는 연신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공자의 말씀은 갈수록 말이 되지 않는군요. 그분은 공자를 너
무나 좋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어째서 미워한다고 하십니까? 정
말 이 소인이 저속한 사람이라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안녕히 계십
시오. 어지되었든 사마대는 당신과 같은 친구를 사귀었으니 앞으
로 당신이 무슨 부탁이라도 하시고 싶으시면 소식이나 전해주십시
오. 그러면 불 속에 들어가라면 들어갈 것이고, 물 속에 들어가라
면 물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만약 사마대가 눈쌀을 찌푸린다면
내 조상들이 모두 후레자식입니다.]
그리고 가슴을 툭치더니 큰걸음으로 나갔다.
영호충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열성으로 나를 대해 주는데 어째서 그가 오패강에
와서 나를 대하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일까? 또
화를 내는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좋아한다니 천하에 이
와 같은 이상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정말로 나를 좋아 한
다면 이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그는 응당히 기뻐해야 할 터인
데......)
그는 갑자기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맞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정파의 선배일 것이다. 나를 심
히 사랑하고 좋아하므로 내가 엉뚱한 짓을 하고 사악한 행동을 하
는 이자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풍 태사숙이 아닐까? 하지만 사마도주와 같은 사람들과 뒤끝이 개
끗한 사람들인데 어떤 점이 안 좋을까?)
그때 초막 밖에서 가벼운 기침소리가 들리더니 낮은 소리가 들
려왔다.
[영호 공자.]
영호충은 황백류의 목소리임을 알고 말했다.
[황 방주, 들어오시지요.]
황백류는 초막 안으로 들어오더니 말했다.
[영호 공자, 밖에 몇 분의 친구들이 영호 공자께 말씀을 전해달
라고 합니다. 그들은 급한 일이 있어 반드시 즉시 돌아가야 한다
고 합니다. 영호 공자께 친히 인사 말씀을 못 드리니 용서해 달라
고 합니다.]
영호충은 말했다.
[용서라니요?]
이때 밖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나더니 금새 조용해졌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떠난 것 같았다.
황백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일은 정말 내가 너무 경솔했읍니다. 모두들 이렇게 모인 것
은 호기심 때문에고 두번째는 정중하게 모시려고 했는데 그분이
그렇게 싫어하는 줄은 몰랐읍니다. 우리들은 모두 경거망동하는
사람이라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남교주, 묘족의 아가씨들은......]
영호충은 그의 말이 앞뒤가 안 맞자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황 방주께선 지금 나보고 그 사람에게 오패강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고 싶으시지요?]
황백류는 멋적게 웃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시치미를 뗄 수 있어도 황백류는 시치미를 뗄 수
없으비낟. 천하방이 오패강에서 공자를 접대했다는 말은 누가 뭐
래도 승인을 하겠읍니다.]
영호충은 '흥' 하고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술 한 잔을 대접했는데 그것이 무슨 용서받지
못할 큰일입니까? 남아대장부가 무슨 시치미를 떼고 시치미를 떼
지 않는단 말이오?]
황백류는 급히 웃음을 띄고 말했다.
[고앝께선 절대 그런 마음을 품고 계시면 안 됩니다. 아! 이 늙
은이는 날 때부터 이런 괴퍅한 성격을 타고 태어났지요. 만약에
저의 마누라나 그렇지 않으면 내 손녀에게 물어보십시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사지 않습니다. 아마 가족들도 모를 것입니
다. 아! 그리고 이 못난 사람이 열일곱 살 때 마누라를 얻었는데
단지 마누라의 명이 짧아 너무 일찍 죽었지요. 그래서 여인네들이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조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들은 정파 인물이 아니고 사악한 무
리라고 했는데 어쩐지 이 사람은 횡설수설하여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구나. 그가 나에게 술대접 한 것을 마누라, 손녀에게 물어
보라는 것인가? 그런데 자기 마누라가 일찍 죽엇다고 하고 있다
니!)
황백류는 또 말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별 수 없지요. 공자, 당신은 벌써
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나하고는 오십 년
동안 사귄 오랜 친구 사이라고 하면 어떨가요? 아, 아닙니다. 저
와는 십년 정도의 교분을 갖고 있다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당신
이 열다섯 살 때 이 늙은이와 도박도 하고 술도 마셨다고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여섯 살 되던 해에 당신과 도박도 하고 술도 먹었다고요?
저는 스무 살이지 스물다섯 살이 아닙니다.]
황백류는 영호충이 말투가 자기를 힐난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자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다
만...... 다만 이 황모라는 사람은 이십년 전부터 못된 짓을 골라
가며 했고 하는 행동은 차마 사람으로선 하지 못할 짓들만 했읍니
다. 공자께서 어찌 이런 저와 친구로 사귀셨겠읍니까? 아, 이
건...... 이건......]
영호충은 말했다.
[황 방주께서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말씀하시니 정말 광명정대
하시군요. 제가 오십년 전에 당신과 같은 친구를 사귀어야 했는
데.]
황백류는 크게 기뻐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녜 녜.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십년 전의 친구이지요!]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공자께선 몸을 중히 여기십시오. 당신의 마음씨가 좋으시니 지
금은 병이 있으나 결국은 나을 것입니다. 하물며 거룩하시
고...... 성(聖)...... 신통광대(神通廣大)...... 아이쿠!]
큰 소리를 한번 지르더니 고개를 돌리고 나갔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무엇이 성...... 성...... 신통광대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르
겠구나.)
이때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가고 떠들썩하던 소리가 뚝 끊겼다.
그는 평일지의 시체를 멍청하게 한참 쳐다보고 초막에서 나왔
다.
사방은 조용하고 한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까지 여기 모인 호인들이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굴다가 삽시간
에 깨끗이 사라질 줄은 몰랐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사부님! 사모님!]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외쳤다.
[둘째 사제! 세째 사제! 소사매!]
여전히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반달은 비스듬히 하늘에 걸려 있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이 큰
산에는 오로지 그 한 사람뿐이었다. 눈 앞에는 온통 술주전자와
그릇과 접시, 그밖에 모자, 외투, 허리띠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많은 호걸들은 급히 사라지느라고 자기 물건조차도 정돈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더욱 이상했다.
(그들은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무슨 홍수나 맹수가
엄습해 와 빨리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인가? 이 사람들은
하늘도 땅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던데 어째서 갑자기 담들이 콩
알만하게 변했을까? 정말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구나! 사부님,
사모님, 소사매, 그들은 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냐? 만약 이곳에
서 무슨 위험이 부딪쳤다면 어째서 나에게 한 마디도 가뜸해 주지
않았을까?)
마음속엔 한줄기 처량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 천지는 크지만 한
사람도 자기의 안위에 관심을 두거나 자기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어째서 쥐새끼조차 보이지 않는 걸까? 또 사부님 사모님
처럼 친한 사람들조차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자 외로움이 사무쳤
다.
가슴이 쓸쓸해지자 체내에 있던 몇가닥의 진기가 복받쳐 올라왔
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벌렁 쓰러졌다. 일어나려고 발버둥쳐봐도
조금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잠깐 쉰 다음 두번때 다시 몸
을 지탱해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힘을 너무 써서 귓속
에서 웅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눈앞이 캄캄해지며 기절해 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가물가물한 속에서 귓가에 비파(琶)를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는 더욱 우아하게
들려왔다.
흩어졌던 마음이 다시 평정이 되었다. 바로 낙양성 할머니댁에
서 연주하던 청심보선주라는 곡(曲)이었다. 영호충은 마치 망망대
해에서 표류하다가 한 개의 작은 섬을 발견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 벌떡 일어설 수가 있었다. 금소리는 초막 안에서 흘러나왔
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소리나는 곳으로 향했다. 초막의 문은
꼭 잠겨져 있었다.
그는 초막에서 예닐곱 보의 거리까지 다가가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이 금소리를 들으면 낙양성 녹죽골목에 계시던 그 할머니가 오
신 것 같은데 낙양에 있을 때 그녀는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했는데 이번에 내가 그분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함부로 문을 밀
치고 들어갈 수는 없지?)
그는 즉시 몸을 숙이고 말했다.
[영호충이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금소리는 몇번 울리더니 소리가 멈췄다. 영호충은 그 금소리에
서 마치 위안의 뜻이 충만된 것 같고 그 곡을 듣자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고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있
다고 느끼고 감격한 나머지 가슴 속에는 뜨거운 격정이 솟아올랐
다.
갑자기 멀리서 어떤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금을 타는 사람이 있구나! 어떤 사악한 무리가 없어지
지 않았는가?]
또 한 명의 매우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악하고 요망하고 간악한 것들이 감히 하남(河南) 땅에 와
서 행패를 부리는구나! 그런 행위는 우리를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음이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더욱 소리를 높여 일갈했다.
[어떤 요망하고 쥐새끼 같은 자들이 이 오패강에서 떠드는지 모
두 이름을 밝혀라!]
그의 기는 충만하고목소리는 사방을 뒤흔들었다.
위세가 당당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그래서 사마대, 황백류, 조천추 등이 무서워 도망을 친 것이구
나! 정말로 정파의 고수들이 이곳으로 도전하러 온 것이야!]
사마대, 황백류 등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남아대장부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모두를 벌벌 떨게 했으니 틀립없이 무공이 높은 선배
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나에게 묻는다면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 먼저 몸을 피하는게 좋겠다.)
그는 즉시 초막 뒤로 몸을 숨겼다.
(초막 안에는 할머니 혼자 계시니 그들은 절대로 그분을 괴롭히
지 않을 거야.)
이때 초막 안의 금소리는 이미 멈추었다.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며 세 사람이 산 위로 올라왔다.
세 사람은 산 위에 올라 모두 어! 어! 하고 탄성을 질러댔다.
틀림없이 산이 적막하고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목소리가 우렁찬 사람이 말했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목소리가 가냘프고 약한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소림파(少林派)의 두분 고수께서 그들을 싹 쓸어버리려
고 한다는 소리를 듣고 꼬리를 감춘 것이겠지요.]
또 다른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시오! 과찬이시오! 그들은 곤류파의 담형(譚兄)의 명성
을 듣고 도망쳤을거요.]
세 사람은 일제히 크게 웃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원래 두 사람은 소림파의 사람이고 한 사람은 곤륜파의 사람이
구나! 소림파는 당나라 초기부터 무림을 이끌어왔고 소림일파만
해도 그 명성은 우리 오악검파 연맹보다 더욱 높고 실력은 가공하
여 비교할 수도 없다. 소림파 장문인인 방증대사(方證大師)는 이
무림에서 모두 어러러보는 인물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시길 곤
륜파의 검법은 독특하여 천하를 위진시킨다고 했는데 이 두 파의
사람들이 연합했으니 정말 위세가 대단할 것이다. 아마 이들 세
사람은 먼저 앞장서서 당도한 것이고 뒤에는 많은 응원부대가 있
을 것이다. 그러나 사부님과 사모님은 어디로 몸을 피하셨을까?)
잠시 골똘이 생각하자 금방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맞다! 내 사부님은 명문정파의 장문인으로서 그 황백류 등과
함께 어울리는 꼴을 소림이나 곤륜파의 고수들에게보이기가 창피
했겠지. 그것은 난처한 일이었을 것이다.)
곤륜파의 담가가 말했다.
[조금 전 이 산에서 금소리를 들었는데 그 사람은 또 어디로 숨
었을까? 신(辛)형, 역(易)형, 여기엔 다른 곡절이 있지 않을까
요?]
목소리가 우렁찬 사람이 말했다.
[맞습니다. 담형은 세심하군요. 우리 한번 찾아보고 목을 잡아
끌어냅시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신 사형, 우리 초막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영호충은 이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성이 역씨라는 것을 알았다.
목소리가 우렁찬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의 사형인
모양이었다.
역씨 성을 가진 사람이 초막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초막 안에서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자 혼자 있는 방이니 야밤에 남녀가 함께 있는 것은 온다치
못해요.]
그 신씨성을 가진 사람이 말했다.
[여자이구먼!]
역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말했다.
[조금 전 당신이 금을 탔소?]
그 할머니는 말했다.
[그렇소.]
역씨 성을 가진 자가 말했다.
[한번 더 타보시지 않겠소?]
그 노파는 말했다.
[평소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인데 어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금을 탈 수 있겠소?]
신씨 성을 가진 자가 말했다.
[흥! 그게 뭐가 대수요? 여러 상황을 살펴보니 틀림없이 토막
안에서 튼 일이 벌어진 것 같으니 우리 들어가 봅시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말했다.
[당신이 금방 홀몸의 여자라고 했는데 늦은 시간에 이곳 오패강
에 올라와 무엇을 하고 있소? 십중팔구는 그 요귀들과 동행인 것
같은데 우리가 들어가 수색을 해야겠소.]
말하면서 큰 걸음으로 초막을 향해 들어갔다.
영호충은 몸을 드러내 천막문을 막고 일갈했다.
[잠깐!]
그 세 사람은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모두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년 하나가 앞을 막아서자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신씨 성을 가진 자는 큰 소리로 일갈했다.
[소년은 누군가? 이 컴컴한 곳에 쥐새끼처럼 숨어서 무엇을 하
고 있었는가?]
영호충은 말했다.
[저는 화산파의 영호충이올시다. 소림파 곤륜의 선배님들께 인
사 드립니다.]
그리고 세 사람을 향해 읍을 했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콧방귀를 흥! 뀌더니 말했다.
[흥! 화산파의 사람이구만! 자네는 이곳에 무엇하러 왔는가?]
영호충은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을 바라보았다. 몸은 비록 크지
않지만 가슴이 앞으로 튀어나와 북 같아 보였다. 그래서 목소리가
그렇게 우렁찼던 것이다.
또 다른 중년 남자와 함께 몸에는 붉은 색의 장포를 입고 있었
다. 그자는 역씨 성을 가진 자와 동문인 모양이라고 생각되었다.
곤륜파의 담씨 성을 가진 자는 어깨에 검을 차고 헐렁한 옷과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대담해 보였고 호탕
하게 생겼다.
역씨 성을 가진 자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또 물었다.
[너는 정파의 제자인데 어찌하여 이 오패강에 와 있는가?]
영호충은 그들이 쥐새끼라는 욕을 마구해대 마음이 캥겼는데 그
의 말을 듣자 약이 올라 말했다.
[세 분 선배님도 정파의 사람인데 역시 이 오패강에 와 있지 않
습니까?]
담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말 한 번 잘 했네! 자네는 초막 안에서 금을 타는 여인을
알고 있는가? 그 여자는 누군가?]
영호충은 말했다.
[그분의 나이가 많고 이 세상 일에 개의하지 않는 노파이십니
다.]
역씨가 질문했다.
[무슨 말을 하는거냐? 이 여자의 음성을 들어보건대 나이가 젊
은데 무엇이 노파고 할머니란 말인가?]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이 노파께선 목소리가 좋을 뿐인데 그것이 뭐 그리 신기하다는
것이오. 그녀의 조카는 당신보다도 이삼십 세는 더 먹었을 것이
오. 그러니 이 할머니의 나이는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역씨 성을 가진 자가 말했다.
[비켜라! 우리가 들어가 살펴보겠다.]
영호충은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지 않던가요? 밤늦은 시간에 남녀가 자리
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그녀는 당신들과 평소 알지 못하
는데 아무 이유없이 들어간다고 하십니까?]
역씨 성을 가진 자는 영호충이 아무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고 뜻밖이라 몸을 움찔하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너는 화산파의 제자라고 하는데 그 말은 허풍인 것 같구나.]
그리고 초막으로 향했다.
영호충은 몸을 일으켰다. 얼굴은 돌에 부딪쳐 한 줄기의 피가
줄줄 흘렸다.
[할머니는 당신들과 만나기를 원하시지 않는데 당신들은 어찌
그리 무례하오? 낙양성에 있을 때 나는 할머니와 며칠 동안 말을
했는데도 얼굴을 한번도 뵙지 못했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말했다.
[이놈아! 너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구나! 한번만 더 입을 놀리
면 다시 또 내동댕이 칠 것이다!]
영호충은 말했다.
[소림파는 무림의 정파인데 틀림없이 두 분은 소림파에서 환속
한 고수들이라고 사료됩니다. 또 이 분은 틀림없이 곤륜파에서 이
름이 혁혁한 사람인 것 같은데 이 야밤중에 일개 노파를 우롱하려
고 하니 이 어찌 강호의 영웅호걸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소?]
역씨 성을 가진 자는 말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이 정말 말이 많구나!]
왼손을 내밀어 영호충의 왼쪽뺨을 세게 후려쳤다.
영호충은 비록 내력은 없어졌지만 그의 왼쪽 어깨가 움직이는
것을 보자 그의 왼손이 공격하리라 생각하고 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허리와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피할 수 없었고 금방 눈앞
이 캄캄해지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말했다.
[역 사제, 이 녀석은 무공을 모르는데 이 사람과 똑같이 될 필
요가 있겠소? 사악한 무리가 이미 가고 없으니 우리도 갑시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말했다.
[노, 예, 지방에 사악하고 요망한 무리들이 갑자기 이 오패강에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모이는 것도 이상하고 흩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소? 이 일을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 없소. 방안에서
어떤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리고 초막의 문을 열려고 했다.
영호충은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장검이 들려져 있었다.
[역 선배님, 이 안에 계신 어르신은 제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읍
니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 이상 당신들이 그녀를 우롱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을 것이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가지고? 그 손에 들린 장검을 가지고 하겠냐?]
영호충은 말했다.
[저의 무예는 미밈하기 짝이 없읍니다. 어찌 소림파의 고수와
대적할 수 있겠읍니까? 그러나 세상만사는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
이요. 당신들이 이 초막 안에 들어가기 전에 나를 먼저 죽이시
오.]
신씨 성을 가진 자가 말했다.
[역 사제, 이 놈은 퍽 뚝심도 있고 배짱이 있는 사내대장부 같
소이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시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웃으며 말했다.
[듣건대 너희 화산파의 검법은 독특하고 오묘하다고 들었다. 검
종과 기종이 있다던데 너는 기종에 속하는 사람이냐. 검종에 속하
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으면 똥종의 사람인가? 하하하! 하하하!]
를 따라 신씨 성을 가진 자와 담씨 성을 가진 자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영호충은 낭랑히 외쳤다.
[강함에 의지해 난폭하게 구는 것을 어찌 명문정파라고 하겠소?
당신들이 소림파 제자입니까? 아마 허풍인 것 같습니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노해 우측 손바닥을세우더니 영호충의 가
슴을 치려고 했다. 이 일 장이 영호충의 가슴에 닿기만 하면 영호
충은 즉시 죽어야 했다.
신씨 성을 가진 자가 말했다.
[잠깐! 영호충! 명문정파의 제자는 다른 사람들과 무예를 겨루
지 못한단 말인가?]
영호충은 말했다.
[정파의 사람들은 손을 쓸 때 어떤 명분이 있어야 하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천천히 손바닥을 거두며 말했다.
[셋을 셀 동안 피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갈비뼈를 세 대 부러
뜨리겠다. 하나!]
영호충은 웃었다.
[갈비뼈 세 개가 부러진데도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읍니까?]
역씨 성을 가진 자가 큰 소리로 수를 셌다.
[둘!]
신씨 성을 가진 자가 말했다.
[나의 사제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네. 빨리 옆으로 비켜서
게나.]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나의 주둥이도 한번 한다면 하는 물건이오. 영호충은 아직 죽
지 않았는데 어찌 비켜서서 당신들이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고 있
겠소?]
이 말이 끝날 때 쯤이면 역가가 공격해오리라 생각하고 기를 오
른 팔목에 모아 놓았다. 그러나 가슴에 혹독하게 아픔을 느꼈고
눈 앞에는 수천 수만 개의 불빛이 너울너울 춤추는 것 같았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일갈했다.
[셋!]
그리고 왼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 영호충이 초막문을 막고서 잔
잔한 미소를 띄우는 것을 보자, 비켜서지 않을 것임을 알고 오른
손 장력을 내뻗었다.
영호충은 상대방의 장력이 엄습해오자 호흡을 멈추었다. 손에는
장검을 빼어들고 그의 장심을 겨누었다. 이 일검의 방향과 시간은
딱 들어맞아 역씨 성을 가진 자는 오른손 장력을 내뻗은 후 금방
거둘 수가 없어 싹 하는 소리와 함께 아 하는 신음소리를 질렀다.
장검의 끝은 그의 장심을 직통한 것이었다. 또 싹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나며 손바닥에서 검날이 빠져나갔다. 순간 역가는 상처를
깊이 받고 수장 밖으로 물러섰다. 그는 왼손으로 장검을 뽑아들며
노해 부르짖었다.
[이놈이 멍청한 척 가장을 했구나! 알고보니 무공이 상당히 높
은 놈이야! 내...... 내가 네놈하고 사생결판을 하겠다.]
신, 역, 담 세 사람은 모두 검을 잘 쓰는 고수였다. 눈 앞의 영
호충이 장검을 쳐올리자 별다른 초식도 쓰지 않고 오로지 방향과
시간을 잡아 상대방의 장력이 그의 검끝에 오도록 유도하는 것을
보자 검법의 조예가 최고의 경지를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씨 성을 가진 자는 비록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경망하게 적
을 대할 수 없어 왼손에 검을 들고 싹싹싹 연속 삼검을 찔러냈다.
그러나 모두 적을 시험삼아 찔러보는 헛초였다. 일초의 검이 중도
에서 다시 들어갔다.
그날 영호충이 약왕묘에서 열다섯 명의 고수들의 두 눈을 찔렀
을 당시에는 내력은 비록 없었지만 오늘처럼 연속 몇차례 탈진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은 거의 팔과 검을 들 수가 없어 마음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연속 세차례 허초를 쓰는 것을 살펴보니
검끝을 부단히 움직였다. 틀림없이 소림파에서도 몇번째 가는 검
법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대적하고 싶지 않아 말했다.
[저는 절대로 세분 선배님께 도전할 생각은 없읍니다. 단지 세
분께선 이곳을 떠나주십시오. 그럼...... 그럼 저는 진심으로 사
죄를 하겠읍니다.]
역씨 성을 가진 자가 코방귀를 '흥' 하고 뀌더니 말했다.
[살려달라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리고 장검을 질풍처럼 뻗어 영호충의 목을향했다. 영호충은
행동이 불편해 이 일검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즉시 검을 들어 내
리쳤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며 상대의 왼손에 있는 혈도를 적중시
켰다.
그 역씨 성을 가지 자는 손가락을 펴며 장검을 땅바닥에 떨어뜨
렸다.
이때 동쪽에선 아침햇살이 서서히 비추고 있었다. 그는 자기 팔
뚝에서 새빨간 피가 한방울 풀잎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 세
상에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믿어지지 않았다. 한참
멍청히 있더니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 신씨 성을 가
진 사람은 원래부터 화산파 사람과 원한을 사고 싶지 않았고 또
영호충의 이 일검이 정묘하고 절륜했기 때문에 자기가 절대로 적
수가 아님을 알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제의 안위가 걱정되어 말했다.
[역 사제.]
그 사람도 자기 사제를 따라가 버렸다.
담씨 성을 가진 사람은 옆눈으로 영호충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
보더니 말했다.
[각하께선 정말로 화산파의 제자입니까?]
영호충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 담씨 성을 가진 자는 그가 몸에 깊은 상처가 있음을 알아차
리고는 비록 검은 절묘하나 잠시만 기다리면 공격할 필요도 없이
그는 자기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며 그러면 손가락 하
나 까딱하지 않고는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자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이 화산파의 제자 때문에 소림파의 고수가 하나는 상
처를 입고 하나는 의기소침해 떠나갔다. 내가 만약 이 자를 사로
잡아 소림사로 데려가 장문인인 방증대사에게 보인다면 소림파에
서 큰 인정을 얻고 곤륜파는 무리에서 크게 이름을 떨칠 것이다.)
그는 한 걸음 내디디며 웃었다.
[소년,당신의 검법은 괜찮은 것 같소이다. 그렇다면 나하고 권
법과 장력으로 대결해 봅시다. 어떻소?]
영호충이 그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미 자기의 처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이 사람은 간교하기 작이 없었지만 조금 전 역씨 성을 가진 자
가 더욱 얄밉게 생각되었다.
영호충은 검을 들어 그의 어깨를 향해 찔러갔다. 검이 중도에
갔으나 팔에는 힘이 없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장검이 땅바닥에 떨
어졌다.
담씨 성을 가진 자는 크게 좋아하며 퍽 하니 일장으로 영호충의
가슴을 쳤다.
영호충은 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새빨간 피를 입에서 토해냈
다.
두 사람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 입 속에서 나온 선혈은 담씨
성을 가진 자의 얼굴에 뿌려졌다.
그 피는 얼굴에 뿌려졌고 몇방울은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담씨 성을 가진 자는 입 속에 비린내를 맡았으나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영호충이 검을 들어 반격할까봐 오른손을 들어 또 일장
을 치려고 할 때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져 오며 땅바닥에 쓰러졌
다.
영호충은 그가 위급할 때 쓰러지는 것을 보자, 이상하게 여기면
서도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얼굴에 한 줄기 검은 빛이 나타나더니 살과 근육이 끊임없
이 움직이며 떨고 있었다.
그 모양은 괴이하고 무서웠다. 영호충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공을 잘못 쓴 모양이군. 당신은 스스로를 책망하시
오.]
사방을 둘러봐도 오패강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나뭇가지
에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으며 땅바닥에는 술그릇들
과 병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은 차마 말로써 표현할 수
가 없이 고적했다.
그는 옷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할머니, 그 동안 존체만안하옵시고 별고 없으신지요?]
그 할머니는 말했다.
[공자,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니 앉아 몸이나 쉬시게.]
영호충은 정말로 온몸에 힘이 숙 빠져 움직일 수 없어 그녀의
말에 따라 앉았다.
초막 안에서 금소리가 가볍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음률은 마치
한 줄기 깨끗한 샘물이 자기 몸을 천천히 씻기고 천천히 사지와
뼈 마디마디를 씻는 것 같았다.
영호충은 온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겼다. 몸이 둥실둥실 떠서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 같고 솜처럼 푹신푹신한 흰 구름에 떠 있
는 것 같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금소리는 갈수록 낮아져 결국은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더니 이윽고 소리가 멈추었다.
영호충은 정신이 맑아지자 몸을 일으키고 깊이 읍을 하며 말했
다.
[할머니의 연주가 많은 도움을 주었읍니다. 오늘 저녁 저의 몸
은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자네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적을 막아주고 나를 못된 놈의 손
아귀에서 능욕을 당하지 않게 했으니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감사
를 해야지.]
영호충은 말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것은 응당 제가 할 일이었읍니
다.]
그 노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가벼운 금소리가 딩동딩
동 들려왔다. 마치 손으로 금을 타면서 내심 깊은 상념에 잠겨 있
는 듯했고 무슨 일인가 말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물었다.
[자넨...... 자네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영호충은 갑자기 가슴 한복판에서 뜨거운 피가 올라왔다. 천지
가 비록 넓다고 하나 결국 자기는 갈 곳이 없지 않은가?
그는 연속 기침을 해대더니 가까스로 기침을 멈춘 다음 비로소
말했다.
[전...... 전 갈곳이 없습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자네는 자네 사부와 사모님을 찾아가지 않겠나? 자네의 사제를
찾아가지 않고 사...... 사매...... 그들을......]
영호충은 말했다.
[그들은......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읍니다. 저의 상처
가 깊으니 그들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찾는다 해도......
움!]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생각했다.
(찾았다 해도 어찌할텐가? 그들은 내가 필요치도 않을텐
데......)
그 노파는 말했다.
[자네는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어디 경치가 좋은 곳에 가서 산
과 물을 벗삼아 마음속의 회포나 풀지 않겠는가? 왜 억지로 고생
을 사서 한단 말인가?]
영호충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의 말씀이 옳습니다. 영호충은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기서 헤어져서 하산하여 세상구경이나
하러 다니겠읍니다.]
그리고 초막을 향해 읍을 하더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가 세 발자국을 옮길 때 그 노파가 말했다.
[자네...... 자네는 지금 가겠는가?]
영호충은 우뚝 서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자네의 상처는 가볍지가 않네. 홀몸으로 갈 수가 없네. 여행도
중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영호충은 그 노파의 말 속에 자기를 생각하는 지극한 정이 담겨
져 있는 것을 알고는 또 다시 마음이 뭉클해졌다.
[정말로 할머니의 성의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상처는 다스릴 수
없읍니다. 일찍 죽든 늦게 죽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읍니까?]
그 노파는 말했다.
[음! 공자의 뜻은 그렇군!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한참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자네가 가 버리면 그 두 명의 소림파 악당들이 또 와서 떠들어
댈텐데 그때는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이 곤륜파의 담씨 성을 가
진 자가 일시적으로 혼절했지만 정시닝 든 다음 또 나를 귀찮게
굴면 어떡하지?]
영호충은 말했다.
[할머니, 어디로 가시겠읍니까? 어디로 가실지 제가 어느 정도
호위를 해드리겠읍니다.]
그 할머니는 말했다.
[그것은 좋으나 이 사건에는 극히 해결하기 어려운 내막이 하나
있는데 자네까지 연루될까봐 걱정이 되는구만.]
영호충은 말했다.
[영호충의 생명은 할머니가 구해주셨는데 그 무엇이 연루되고
안 되고가 있겠읍니까?]
그 노파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나에겐 무서운 맞수가 하나 있었는데 낙양의 녹죽골목으로 찾
아와 나를 못살게 굴었기에 이곳으로 피해 왔다네. 아마 얼마 있
지 않아 또 뒤쫓아 올 걸세. 자네의 상처가 아직 치료되지 않았는
데 그와 손을 쓸 수가 없으니 나는 단지 은밀한 곳을 찾아 잠시
난을 피하고 여러 고수들을 모은 다음 그와 빛을 청상하는 것이
좋겠네. 만약에 자네가 나를 호위한다면 첫째로 자네는 상처가 깊
고 두번째로는 한 마리의 용처럼 펄펄한 소년이 나와 같은 늙은이
와 함께 지내게 되는 격이지. 어쩌면 자네는 더욱 심심할꺼야.]
영호충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할머니께서 말못할 고민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
데 알고보니 이런 작은 일이군요? 할머니가 가시는데까지 저는 할
머니를 호송하겠읍니다. 하늘 끝인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할머니를 모시고 갈 것입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이렇게 폐를 끼쳐도 될까? 정말 하늘끝 어디라도 나를 호송하
고 가겠단 말인가?]
그말 속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늘 끝이고 지옥이라도 영호충은 할머니를 모시
고 갈 것입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또 한 가지 어려운 것이 있는데......]
영호충은 말했다.
[또 무슨 어려움이 있읍니까?]
그 노파는 말했다.
[내 모습은 상당히 추하지. 누가 나를 보든지간에 한번 보기만
하면 모두 달아나 버린다네. 그래서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모습
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렇지 않았다면 그 세 사람이 초막에 들어
오려고 할 때 그들을한번 만나본들 무슨 상관이 있었겠나? 자네
는 나에게 약속을 하나 해야하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나를
쳐다보지 않겠다고. 나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으며 나의 몸 어디
라도 볼 수가 없네. 더욱 나의 옷과 신발조차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네.]
영호충은 말했다.
[저는 할머님을 존경하고 있고 할머님이 제게 보여주신 관심에
감격하고 있읍니다. 할머님의 용모가 어떠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
이 있겠읍니까?]
그 노파는 말했다.
[자네가 이 일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자네 혼자 가보게
나.]
영호충은 급히 말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대답을 하지요. 어떤 상황이든지 절
대로 할머니를 쳐다보지 않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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