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 지음 / 이 책은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철학서이다. 저자는 철학의 발전단계부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유물론과 유심론의 논쟁부터 헤겔의 변증법적 유심론 등을 다루면서, 인간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세계관과 인생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철학을 발전적 존재로서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하버드 철학 수업
윌리엄 제임스 지음
▣ 저자 윌리엄 제임스
미국 심리학회 의장, 미국 국립과학 아카데미 원사, 하버드 대학 교수, 실용주의자, 미국 기능주의 심리학 학파의 창시자이자 미국 초창기 실험주의 학자 중 한 명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남다른 업적을 세운 그는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오랫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학, 철학, 생리학을 가르쳤으며, 미국 최초로 심리학 수업인 〈생리학과 심리학의 관계〉를 개설했으며, 비공식적인 심리학 실험실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 심령학연구회의 주요 창립자이기도 한 그는 평생 초개인의 심리 현상과 초심리학을 연구하며, 인간의 정신생활에는 생물학적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며 특정 현상을 통해 ‘초월적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는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총 7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주요 저서로는 『심리학 원리』, 『진리의 의의』, 『다원적 우주』, 『교사가 심리학과 학생에게 들려주는 심리학』, 『경험론 논문집』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인식론은 인식의 전제, 기초, 발전 과정 및 법칙을 다루는 이론인데. 유물론적 인식론과 유심론적 인식으로 구분되며, 그들의 논쟁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한편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이론과 학파가 탄생했는데, 명목론과 실재론, 경험주의와 이성주의, 유물론과 유심론 등이다. 그런데 실용주의는 두 진영 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철학을 이해한다. 즉, 두 진영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든지, 상대의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기 전까지 모든 이론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고, 또한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질적인 효과를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철학서이다. 저자는 철학의 발전단계부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유물론과 유심론의 논쟁부터 헤겔의 변증법적 유심론,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등을 다루면서, 인간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세계관과 인생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실용주의자인 저자는 실용주의는 명목론과 실재론, 경험주의와 이성주의, 유물론과 유심론 등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으며, 철학을 발전적 존재로서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 차례
Chapter 1 사고의 형태 : 흐르는 강물처럼 멈추지 않는 의식 - 개인의식의 훈련 비결 / 변화무쌍한 사고 / 연속되는 의식, 이어지는 사고 / 언어의 방향을 통해 깨달음의 문을 열어라
Chapter 2 실용주의 : 실천의 힘,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 빵도 굽지 못하는 철학을 왜 연구해야 하는가 / 잔혹한 현실과 아름다운 마음 / 서두를수록 멀어지는 진리 탐구 / 실용주의 : 다양한 철학을 이어주는 ‘회랑’ / 실용주의 철학에 정통한 ‘여우’ / ‘절대’의 강력한 힘
Chapter 3 이성주의 : 숫자로 세상을 이해하다 - 온건파 vs 강경파 : 성향에 따른 철학관 / 헌 부대에 담은 새 술 : 옛 진리와 새 진리의 이중주 / 진리론의 틀에서 바라본 ‘불꽃’과 ‘에너지’ / 고상하고 순결한 이성주의자 / 실용주의 : 이성과 경험 사이에 세워진 다리 / 상식을 초월하는 양날의 검 : 과학 /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 사이의 갈등에서 벗어나다
Chapter 4 유물론과 유심론 : 물질 속에서 방황할 것인가, 본심을 지킬 것인가 - 속성 vs 실체 : 현상을 통해 어떻게 본질을 볼 것인가 / 존재와 허무 : 정신적 실체의 환상곡을 연주하다 / 세계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 열 죽음 상태 : 무서운 유물론 / 자유의지의 죄와 벌 / 유물론 역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 유심론이 만든 완벽한 세상을 찾아라 / 객관 vs 주관 : 주인(主)과 손님(客) 중 누가 주인이 될 수 있는가
Chapter 5 다양한 세계 : 세계는 다채로운가, 단조로운가 - ‘오행 상극’에서 비롯되는 유물론적 일원론 / 다원화 진영의 실용주의 우주관의 손을 들어주다 / 우주 통일의 심미성과 목적성 / 만물의 실존 여부를 결정하는 ‘보편논쟁’ 문제 / 실용주의에 무시당한 극단적 일원론 / 다원론과 일원론의 ‘화해’ / 이원론 : 정신세계의 견고한 벽을 쌓다
Chapter 6 형이상학 : 모든 것을 아우르는 ‘궁극의 진리’를 찾아라 - 세 살배기 아이도 아는 형이상학 / 모든 유아론을 의심해라 / 신은 자신의 일부인 나를 왜 해치려 하는가 / 수학자를 무시하는 과학자 / 경험 vs 이성 :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 기계 운동만 할 줄 아는 인간 / 결정론을 궁지에 몰아넣은 경험주의자 / 흥미로운 ‘선험적 인식 형식’
Chapter 7 변증법 : 궁극적 진리를 끌어내리다 - 형이상학을 쓰러뜨린 무기 : 변증법 / 절대적 운동과 상대적 정지 / 닭과 달걀의 이분법적 악순환에서 벗어나다 / 세상이 존재하는 한 투쟁은 피할 수 없다 / ‘절대정신’의 고지를 서다 / 8대 범주에서 변증법을 ‘독점’하다
Chapter 8 인본주의 : 실용주의의 중요 분과 - 인본주의의 가소성 세계 / 진리의 본질은 실재에 관한 신념과 관련 있다 / 실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 이중주의의 철학 고수 / 내게 유용해야 합리적이다 / 진리는 종종 오해 속에서 전진한다
Chapter 9 개선론 :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실용파 -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의 중재자 / 세상의 가능성에 대한 실용주의적 해석 / 세상은 꾸준한 개선을 통해 구원된다 / 명확한 철학은 한 가지 주장만 선택할 수 있다 / 이중 성향의 믿음-실용주의
하버드 철학 수업
윌리엄 제임스 지음
나무와열매 / 2020년 2월 / 328쪽 / 16,000원
사고의 형태 - 흐르는 강물처럼 멈추지 않는 의식
나는 사고 활동이 다음의 5가지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첫째, 개인의식은 사고의 총체로서, 모든 사고는 개인의식의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둘째, 개인의식의 사고는 쉼 없는 변화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셋째, 사고는 멈추지 않고 이어지거나 혹은 확연히 지속된다. 넷째, 사고는 언제나 자신과 독립적인 존재로서 인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섯째, 사고는 선택, 취향이라는 특성 때문에 자신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고, 관심이 없는 것을 버릴 수 있다.
인류가 의식을 지니게 된 뒤로 우리의 사고는 필연적으로 대상, 관계로 이루어진 ‘다중체’의 모습을 띠게 됐다. 그리고 관심의 정도에 따라 단순한 감각과 복잡한 감각을 형성한다. 이를테면 조각가가 커다란 바위를 망치와 정으로 쪼개는 것처럼 우리의 대뇌 역시 우리가 감지한 정보를 가공한다. 우리의 관점에 아무리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혼란스러운 감각 상태에 처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러한 사실들은 모든 인간에게 사고라는 물질을 제공한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인간의 사고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설사 무의식 상태에서 시간의 틈이 존재할지라도, 사고의 성질과 내용 면에서 우리의 사고와 의식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대뇌에서 정보를 재구성하는 작업 역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구성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 인류의 사고와 의식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어의 방향을 통해 깨달음의 문을 열어라
책을 자주 접하는 사람이라면 글을 읽다가 ‘비록 ……하지만’, ‘……뿐만 아니라’, ‘비단…… 뿐만 아니라 또……’, ‘왜냐면…… 그래서……’ 등처럼 논리적 관계를 지닌 문장구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곤 하는데, 이러한 문장구조와 내용을 우리는 의식과 감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인류의 사고에서 언어는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에 지나지 않지만, 사고에 존재하는 이러한 방향을 우리는 예리하게 식별해낼 수 있다. 우리의 사고에서 존재감을 보여주는 눈에 띄는 감각적 표상은 없지만 예리한 식별 감각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감각적 표상’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또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이른바 ‘감각적 표상’이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안정적인 심리 사실을 가리킨다. ‘감각적 표상’은 포착하기도 쉬울뿐더러, 사람들에게 시간 제약 없이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인류의 사고 논리 운동은 한순간도 가만있지 못하는 탓에 포착하기가 쉽지 않아 ‘심리적 과도(心理過渡)’라는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고 논리 운동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분명한 사실은 사고 논리 운동은 다양한 표상을 이끄는 ‘안내자’라는 점이다. 여기에 힘입어 사람들은 하나의 표상에서 또 다른 표상으로 옮겨가거나 표상의 점진적 변화를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인지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우리는 사고 외에 사고의 대체품이 늘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뇌에는 수많은 사고가 존재하지만, 하나의 사고는 하나의 대상과 대응한다. 개체의 사고가 다른 개체의 사고와 동일하다면 심리학자는 해당 개체가 외부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고 간주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고 대상에 의거해 현재의 사고 대상을 판단할 수 있고, 과거 사고의 대상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뒤에 이를 독립적 위치로 전환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독립적 위치는 과거와 현재의 사고에 ‘여지’를 제공하게 된다.
실용주의 - 실천의 힘,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실용주의는 신학적 관점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학적 관점 중에도 남다른 가치를 지닌 내용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는 추상적인 철학 이론을 ‘인격화’하고, 지식은 현실에 응용되어야 하며, 현실에서 경험을 흡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행동으로 교체를 대체하고, 경험으로 융통성 없는 원칙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용주의는 삶, 효과와 행위를 강조하고, 경험과 존재를 행동의 효과라고 여긴다. 자연계의 규칙과 본질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실용주의가 형이상학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비결로 작용했다. 실용주의는 행동의 효과를 이해하고, 행동에서 신념을 얻는다. 그들의 관점에서 개념과 이론은 세상의 정답이 아니다. 그래서 실용주의적 의미와 가치를 판단할 때는 이론 또는 논리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실제 활용도를 살펴야 한다. 나는 실용주의를 공리주의에서 비롯된, 효과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원칙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유물론과 유심론 모두 의미 없는 형이상학에 불과할 뿐이다.
실용주의 - 다양한 철학을 이어주는 ‘회랑’
실용주의는 이성에 반(反)하는 경향을 보인다. 실용주의는 독선적인 이성주의를 반대하고, 세상의 궁극적인 본질을 밝히기 위해 터무니없는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용주의는 특정 이론을 대표하지 않는다. 방법론 이외에 실용주의는 독창적인 이념이나 주장을 내놓지 못한다. 실용주의 학자 파피니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남겼다.
“실용주의는 우리가 배운 다양한 철학 이론을 이어주는 회랑과도 같다. 수많은 방이 모두 회랑을 통해 이어져 있다. 첫 번째 방에는 무신론자가 들어 있고, 두 번째 방에는 신성한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방에는 기계 원리를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살고 있고, 네 번째 방에는 유심론적 세계관을 연구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다섯 번째 방에는 형이상학의 단편성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이 아무리 심오하다고 해도 다른 이론과 소통하려면 반드시 실용주의라는 회랑을 통해야 한다. 그러므로 실용주의적 방법론은 특별한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이 정확한 철학적 방향을 찾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철학적 방향은 우리에게 원칙, 궁극(최후) 또는 가설의 필연성 모두 가장 핵심적인 연구 방향이 아니다. 최종 결과와 사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실용주의는 모든 사물을 수용한다. 그러므로 실용주의자가 진리를 판단하는 유일한 근거는, 진리가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는지, 어떠한 이론이 우리의 삶을 더 효과적으로 이끄는지, 경험과 실천의 유기적 결합에 작은 허점도 없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실제 생활에서 하나의 이론이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다면 진실할 뿐만 아니라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성주의 - 숫자로 세상을 이해하다
사람의 이성을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이성주의를 적극적으로 보급한 인물은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다. 17~18세기 당시 이성주의는 이성이 감각보다 먼저라는 주장을 앞세우며 사회적으로 크게 유행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인류의 행위를 식별, 판단, 평가할 수 있는 지혜로서, 이성은 논점과 논거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논리와 추리를 통해 최종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각종 이론 또는 행위의 이유를 밝혀낸다.
한편 이성주의의 주요 경쟁자로 지목되는 경험주의는 영국에서 기원한 이론으로, 인간의 사상은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그 때문에 수학을 제외한 지식은 모두 객관적 세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경험주의는 감각기관 역시 지식을 획득하는 중요한 경로라고 여긴다. 이처럼 인식의 출처를 두고 경험주의는 이성주의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고상하고 순결한 이성주의자
한 학생으로부터 예전에 자신이 들었던 철학 수업이 내 강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편지를 받은 적 있었다. 학생은 자신도 뭐가 다른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내 수업 내용이 무척 현실에 가까운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내 수업을 들은 많은 학생들이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교수들이 강단에서 들려주는 세상은 모두 완전무결한 이상적인 세계로, 현실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등이나 충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처럼 순결하면서도 장엄하고, 온통 이성의 빛으로 반짝인다.
하지만 시장이나 거리에 나가보면 온갖 소란과 갈등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는 공장에서는 걸핏하면 파업 사태가 터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 간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심지어 유혈 충돌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되며, 심지어 더럽기까지 한지 새삼 놀랄 것이다. 즉, 철학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세상이 현실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이성주의자가 상상력으로 현실 생활의 고통을 내면에서 한 번 ‘미화’시킨 조작된 이미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세상은 객관적으로 설명한 것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물로서, 현실에서 벗어난 썩 괜찮은 도피처일 뿐이다.
성향이라는 관점에서 철학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 철학의 성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철학이 한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원시적인 갈망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주의자들에게 책을 내려놓고 길거리로 나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둘러보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혼란 그리고 잔혹하고 기괴한 온갖 현실을 살펴보라고 간절히 호소한다.
그렇게 현실을 보고 나면 그들의 입에서 ‘고상함’, ‘순결함’ 같은 단어를 다시는 듣지 못할 것이다. 참고로 고상함, 순결함이 사물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높다는 걸 나 역시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철학 이론이 하나같이 고상하고 순결한 것이라면 이는 지나치게 단편적인 것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철학에 심취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실용주의 - 이성과 경험 사이에 세워진 다리
철학계에서 권위, 경험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세상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병들고, 아픈 몸 때문에 신음할 병 따위는 없다. 하나같이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 이른바 전문가나 교수라 불리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탓에 세상에 대한 평가와 분석 모두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고통, 배고픔, 갈등, 싸움 등의 사물은 하나같이 중요한 사실을 담아내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어떤 이론으로도 숨길 수 없다. 이는 경험주의가 이성주의를 공격하는 강력한 증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한 경험주의자는 스콜라 철학과 이성주의가 몽유병 환자 같다며, 그들에게 현실은 텅 빈 것과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이 문제를 깨달은 것 같다. 그래서 경험주의자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유물론을 널리 알리고 있다. 하지만 유물론은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틈을 타서 이성주의는 한동안 반격의 기회를 잡게 됐다. 사람들은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지만 심리적인 위안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학자의 사상은 모두 어느 정도의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이런 부조화의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실용주의로 양대 철학을 절충하자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이성주의처럼 신학을 존중하면서도 경험주의처럼 사실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나처럼 모두가 실용주의 이론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실용주의를 인정해 주기를 기대한다.
유물론과 유심론 - 물질 속에서 방황할 것인가, 본심을 지킬 것인가
유물론과 유심론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이 무엇을 결정하는가에서 비롯된다. 즉 유물론은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만, 유심론은 의식이 물질을 결정한다고 한다. 유물론이 물질을 세계를 이루는 본질이라고 여기며 물질이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의식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달리, 유심론은 선(先) 의식 - 후(後) 물질이라고 강조하며 의식이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그 밖에도 세상을 통합하는 대상을 두고도 유물론과 유심론은 큰 차이를 보인다.
유심론자는 세상이 정신을 기준으로 통합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주관적 유심론자가 세상이 인간의 정신에 의해 통합될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달리, 객관적 유심론자는 세상이 특정한 객관적 정신에 의해 통합될 것이라고 여긴다.
한편 이들과 달리 유물론은 세상이 물질에 의해 통합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소박 유물론(Naive materialism)과 기계적 유물론 모두 똑같은 주장을 내놓는다. 하지만 유심론과 유물론은 여전히 고립되고 경직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이 유아론(Solipsism)과 결정론을 의식하고 있다. 한편 훗날 헤겔 등이 변증법을 유심론에 접목한 변증법적 유심론을 창시하고,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유물론에 접목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탄생시켰다.
유물론 역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전통적인 사고에 의하면 유물론과 유신론은 상호 모순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유심론과 유신론은 같은 진영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단편적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유물론 또는 유신론의 구체적인 관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 없으며, 그들의 작용만 살피면 된다고 나는 일찍이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부디 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말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은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지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잠시 복잡한 문제를 내려놓고 우리의 인지 수준이 이해할 수 있는, 인류와 사회에 눈에 띄는 효과를 가져다줄 만한 문제에 집중하자는 뜻이다. 이후 사회가 일정 수준까지 발전하면 예전에 포기했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분석하면 된다.
가장 앞선 관점에서 바라본 유물론과 유신론은 필연적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유물론자일 수도 있고, 유신론자일수도 있다. 이들은 상호 모순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유물론적 유신론으로 융합될 수도 있다. 유물론적 유신론에서는 신과 영혼 등의 사물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단순한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대자연을 뛰어넘은 정신적 존재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여겨서도 안 된다. 그저 생명의 특수한 형태로 간주해야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혼이나 신 등은 대자연의 산물이며, 자연계에서 우리가 아직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사물일 뿐이다.
신을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생명체로 인식하면, 유물론적 유신론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존재로서 신학과 과학 사이의 대립 관계 역시 사라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신학에서 비현실적인 규정이나 도덕적 규범을 더 이상 준수하지 않고도 과학을 통해 신학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유물론적 유신론은 여전히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탓에 사람들은 신 또는 영혼이라는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연과학 분야에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원소와 에너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철학을 연구하는 데 유물론적 유신론은 든든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 준다. 이를 기반으로 물질이 실제 존재한다면 다음의 몇 가지 특징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신 또는 영혼 등의 사물은 밀도와 에너지가 상당히 작을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었을 때 체중은 거의 아무런 차이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신 또는 영혼 등의 사물은 육안이나 현미경으로 그 존재를 관찰하기 어려울 만큼 공기처럼 투명하거나 심지어 아무런 색도 띠지 않을 것이다. 셋째, 신 또는 영혼 등의 사물은 아무런 향기나 맛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인간의 미각, 후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 신 또는 영혼 등의 사물의 구조는 느슨하고 세밀해서 다른 물질을 관통할 수 있다. 또한 세상의 모든 물질과 반응하기 어려우므로, 현존하는 측정기로는 그 존재를 측량할 수 없다. 다섯째, 신 또는 영혼 등의 사물은 한데 취합된 뒤에 쉽게 형태를 바꾸고 고정되지 않을 만큼 높은 탄력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빛은 물론 자외선, 적외선 같은 빛도 복사하지 않을 것이고, 어떠한 반사광도 흡수할 수 없다.
다양한 세계 - 세계는 다채로운가, 단조로운가
일원론과 다원론은 인식론을 구성하는 양대 산맥으로서, 세상이 몇 종류의 원소로 구성됐는지를 다룬다. 일원론은 세상의 본질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확신하는데, 세계의 본질은 정신에 있다는 유심론적 일원론과 세계의 본질은 물질이라는 유물론적 일원론으로 구분된다. 한편 다원론은 세상이 다양한 본질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말하는데, 세상을 다양한 물질의 본질로 귀결하는 학설은 유물론적 다원론이라고, 세상을 다양한 정신의 본질로 귀결하는 학설은 유심론적 다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많은 철학자가 세상은 다원화되었으며 물, 불, 흙, 공기 등의 원소로 구성되었다고 간주했다. 17세기에 이르러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유명한 단자론을 제시하며, 세계는 수많은 정신적 ‘단자(Monad)’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유심론적 다원론의 일종에 해당한다. 한편 헤겔은 세상이 궁극적으로는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했었는데, 이 역시 유심론적 일원론에 속한다. 그러므로 특정 철학의 체계가 일원론과 다원론 중 어디에 속하는지 판단할 때는 반드시 해당 이론이 속한 학파와 세계관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형이상학 - 모든 것을 아우르는 ‘궁극의 진리’를 찾아라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고립적, 단편적, 정지(靜止)된 관념으로 세상을 분석하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변증법과 대립되는 이론처럼 보인다. 또한 형이상학은 사물을 정지되고 영원한 것으로 여기며 사물과 사물 간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사물의 탄생, 운동, 소멸의 과정을 무시하고 변화를 단순한 위치의 이동으로 이해하는 개념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형이상학은 분명 폄하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자칭 형이상학적 철학자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이들은 자신을 깎아내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형이상학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형이상학은 ‘형(形)’을 형체, 형상으로 이해하는 형체에 우선하는 철학이라 해도 무방하다. 여기에는 세상의 본원은 무엇인가, 우주는 생겨나고 변화하는가, 시간과 공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같은 문제가 포함되는데, 이를 통해 해당 문제가 객관적 세계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대부분의 심오한 문제는 형이상학에 속한다.
세 살배기 아이도 아는 형이상학
형이상학을 창시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대에는 과학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던 터라, 그의 이론은 물리학, 수학, 철학 등을 아우르고 있고, 여러 이론이 한데 얽혀있으면서 그 안에서 수많은 내용으로 세분화되었다. 훗날 안드로(安德洛)라는 사람이 이론을 형체를 지닌 사물에 대한 연구와 형체가 없는 사물을 연구하는 영역으로 분류했는데, 이는 형이상학의 유래가 된다. ‘형이상학’이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 형체를 초월한 것으로, 우리의 이성적 사고로 자연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진리, 이를테면 세계의 본질이나 생명의 의미 등을 연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많은 사람이 형이상학적 문제는 너무 복잡해서 일상생활에서 응용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어린아이도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 하지만 답을 얻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아이가 아빠에게 왜 공장에 가서 일해야 하는지 묻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돈을 벌어야 맛있는 걸 사 먹을 수 있거든.” “사람들은 왜 맛있는 걸 먹으려고 해요?” “맛있는 음식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럼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 건데요?” 이러한 아이의 질문에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줄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아이가 물어본 마지막 문제는 형이상학적 문제로서, 어린아이도 제시할 수 있지만 가장 지혜로운 철학자조차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궁금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해가 매일 떴다졌다 하는 이유를 물어보기도 한다. 물리학을 배운 적 있는 부모라면 뉴턴의 역학 이론을 곁들여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려주기 무섭게 아이가 재빨리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해는 왜 뉴턴의 역학대로 움직여야 하는 건데요?” 이쯤 되면 아이의 부모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이다.
이 역시 형이상학적 문제에 속한다. 형이상학적 문제는 다양한 궁극적 문제로 파생되는데 이를테면 “물리학 규칙은 왜 모든 행성에 적용될 수 있는가?”, “지구에서 결과가 입증된 이론이 태양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문제를 계속해서 캐묻다 보면 세계의 본질을 묻는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즉 “세계는 물질과 정신 중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물리학 규칙은 객관적 실재인가 아니면 우리의 신념이 객관적 실재인가?”
변증법 - 궁극적 진리를 끌어내리다
변증법은 실증과 사변을 모두 아우르는 방법으로, 변증법의 발전 초기에 변증을 통해 진리, 즉 사변을 구했다. 그리고 훗날 실천을 통해 우주의 발전에 관한 인과율을 찾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었는데, 이를 실증이라고 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진리와 실증이 한데 합쳐진다. 즉 변증법은 발전 초기에 인식론에 기반을 둔 형태를 보이다가, 본체론으로 발전한 뒤, 최종 단계에서 인식론과 본체론을 모두 아우르는 형태로 정착했다. 변증법은 사회, 자연과 사고의 인과율에 관한 철학으로서 일종의 방법론이자 세계관이며, 변론에서 상대의 이론이 지닌 모순을 폭로하고 자신의 이론이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노력을 가리킨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투쟁은 피할 수 없다
최신의 변증법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과 ‘양질 전화 역전의 법칙’으로 정리할 수 있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은 관련을 맺은 물질과 상호 모순적 관계를 보여주는데, 사물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동력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통해 대립과 통일의 원리를 설명해 보겠다. 삶과 죽음은 서로 대립되는 통일체의 관계를 가진 당사자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삶과 죽음은 상호 의존적이다. 요컨대 태어나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 삶은 죽음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없고, 죽음 역시 삶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은 통일성이 구체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둘째, 삶과 죽음은 모두 투쟁성을 지닌다. 삶은 죽음이 아니고 죽음 역시 삶이 아니므로 둘 사이의 모순은 해소될 수 없다. 통일성은 당사자의 상호 전화라는 형태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예로 삶이 죽음으로 변하면 인간의 목숨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죽음이 삶이 되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반대자의 협력, 대립의 통일’을 제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립ㆍ통일 관계에 관한 주장을 다뤘다. 근대에 이르러 유심론을 집대성한 헤겔이 최초로 변증법을 사용해 대립ㆍ통일 규칙을 설명했다. 또 헤겔은 모든 사물은 원래 상호 모순적이라며, 모순은 운동과 생명의 원천이 된다고 여겼다. 신유물론이 훗날 헤겔의 변증법을 흡수하며 대립ㆍ통일에 관한 과학적 규칙을 세웠다.
양질 전화 역전의 법칙 역시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루는 기본 규칙 중 하나로, 내부 모순 때문에 모든 사물의 내부, 현상이 일으킨 발전은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 구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적 변화는 사물의 특징, 수량의 변화로 구현되는 데 현저한 변화를 알아보긴 어렵다. 반면 질적 변화는 사물 본질의 변화로, 형태의 변화로 점진적 과정을 마무리한다. 사물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의 투쟁과 통일이라는 과정에서 사물은 양적 변화를 거쳐 서서히 변화한다. 양적 변화가 최대일 때 질적 변화로 신속히 ‘태세 전환’하면서 사물의 성질을 변화시키는데, 이것을 ‘양질 전화 역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질적 변화를 거쳐 생겨난 새로운 사물은 궁극적 형태가 아니다. 점진적으로 양적 변화를 거쳐 결국 질적 변화로 전화되고, 훗날의 질적 변화는 또 다른 새로운 양적 변화를 끌어낸다. 반복적 순환을 통해 사물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는 이처럼 연관된 동시에 차별되며 또한 서로 침투하면서도 의존한다. 그리고 양적 변화 과정에서 제한된 질적 변화가 일어나고 질적 변화 속에서도 양적 변화가 등장한다.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의 기초라면 질적 변화는 양적 변화 과정의 필연적 결과로서, 서로 관련을 맺은 채 사물의 점진성과 비약성을 구현한다.
양질 전화 역전의 법칙은 인류의 실제 생활에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닌다. 눈앞의 성과에 급급하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작은 변화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질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부정적인 사물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를테면 몸을 단련할 때 체력이 늘어나거나 힘에 세지는 듯한 눈에 띄는 효과가 초반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양적 변화가 서서히 이뤄지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바뀌면 몸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인본주의 - 실용주의의 중요 분과
인본주의는 실용주의의 중요 분과로, ‘사람을 물화(物化)하는 형이상학 유물주의 학설’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자는 사람의 가치와 인격 발전을 심리학 연구의 중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본주의는 세상은 가소성을 지닌다는 세계관을 제시한다. 그들은 가소성으로 가득한 세상은 인적 기초 위에 세워지고, 세상의 가소성은 다원화의 토대 위에 존재하므로 세상은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다고 여긴다.
실용주의자와 인본주의자는 인류는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재료를 만들어낼 수 있으나, 이들 재료의 본원이 무엇인지, 또 인류가 멸망할 때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의 재료가 뭔지 파악하는 것은 오로지 인적 요소에 달렸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이루는 재료는 인류에 의해 결정되며, 인간의 바람대로 형성된다. 그리고 세상을 구성하는 재료가 인간에 의해 정해진다면, 세상도 당연히 인간의 바람대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세상이 가소성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소성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실험이다. 세상을 인간의 바람대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소성을 인정하고, 상술한 명제를 토대로 더 이상의 예증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연구해야 한다. 한편 실재적 존재는 다양한 인위적 첨가를 수반하는데 3가지 부분의 내용을 포함한다. 그것은 감각, 신념, 그리고 지각으로, 모두 고려해야 하는 요소다. 실용주의자가 실재가 합리적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척 간단하다. 무릇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모두 합리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인본주의의 가소성 세계
역사의 발전에 따라 옳고 그름에 대한 인간의 판단, 처벌, 관용어, 형식적 개념 등은 늘어나고, 새로운 ‘창조’ 역시 계속 일어난다. 그런데 법률, 언어, 진리는 변화된 결과를 보여주는 추상적 이름일 뿐 변화의 본질이 아니다. 따라서 법률과 언어는 인류가 창조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실러는 인류의 신념에 이 같은 유추를 적용한 ‘인본주의’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것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제시한 각종 진리는 그 저 인위적 산물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일부 문제들이 고차원적 수준까지 발전한 것은, 이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동기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건, 그 해답에 우리가 만족했기 때문이다. 모든 공식이 반드시 ‘정석’은 아니다. 이 또한 인류가 자신의 필요에 맞춰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다. 모든 산물은 인적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실러는 ‘세상에서 인적 요소가 뒤섞인 존재 말고 다른 것이 또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우리는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재료를 만들어 내지만 해당 재료의 본원이 무엇인지, 또 우리의 곁을 떠난 후에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위의 두 상황에 따라 기본 재료에 대해 함부로 정의내릴 수 없다. 심오한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도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은 물 보듯 뻔하다. 해당 재료들이 어떠할지는 항상 인적 요소를 통해 결정된다. 인간이 기대하는 모습대로 이들 재료 역시 변화한다. 그래서 세상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수준까지 만들어질 수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험뿐이다. 실험을 진행하기에 앞서 실험은 우리의 의도대로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를 토대로 구체적인 실험에 나서야 한다. 이 문제의 방법론은 사실 간단하다. 가설에 따라 더 이상 연구를 진행할 수 없을 때까지 쉬지 말고 연구하면 된다.”
위의 내용은 실러가 자신의 인본주의적 입장을 밝힌 것으로, 이러한 관점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말았다. 그래서 인본주의적 입장을 변호하고자 한다. 인간은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 진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항상 방해 요소의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이는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이자, 새로운 진리가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진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실재’에 관한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념 속의 실재는 모두 독립적일 수도, 또는 이미 밝혀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실재는 만들어진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려면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선론 -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실용파
실용주의자는 철학을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주의자는 온건한 성향과 이성을 통한 일처리 방식을 지녔으며, 자신만의 믿음을 갖고 자유의지를 신봉한다. 또한 삶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유심론자에 속한다. 경험주의자는 이와는 정반대다. 그들은 강직한 성향과 감각을 통한 일처리 방식을 지녔으며, 자신만의 믿음 없이 인과적 관계를 신봉한다. 삶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유물론자라 하겠다. 한편 실용주의자는 이성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에서 자신에게 속한 위치를 찾고자 한다. 즉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의 중재자’라는 포지션을 확보한 실용주의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시도한다.
실용주의자는 현실은 바뀔 수 있으며, 지식이 현실을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실제 경험이 원칙이나 추리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신앙과 관념이 실제 효과로 이어진다면 그것 모두 진실하다고 여긴다. 진리는 성공을 위한 사상적 활동이지만 이론은 자신의 행위, 결과를 정리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사람의 행위를 성공으로 이끌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난다.
사실을 존중하는 실용주의자는 일원론과 이원론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다원론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에 대해 효과와 가치를 지닌 사람들에게 이용될 수 있는 그리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받아들인다. 또 그들은 세상이 다원적 특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가능성을 지녔다고 여기고 세상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데, 이러한 구원은 끊임없는 개선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실용주의자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선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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