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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by Casey,Riley 2020.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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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여러 관계를 하나씩 풀어내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그만의 따뜻한 글로 유려하게 풀어낸다. 자기 자신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애써 맞지 않는 옷을 입지 말고 본인의 색깔에 맞춰 입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위로와 용기를 전한다. 풀리지 않을 고민을 안고 있는 청춘이자 그 시간 위에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인간관계와 행복에 대해 짙은 감성으로 섬세하면서 부드럽게 풀어내고 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Short Summary

함께 가는 길에 꽃이 없다면, 꽃을 심어 따뜻한 마음으로 피울 수 있는 것.

 

 

차례

작가의 말

 

1실수 / 배려와 이기주의 / 가끔 이런 말들이 필요할 거예요 / 착함과 만만함 / 불안 / 그럴 만한 이유 / 느낌 / 비를 맞았다 / 태도에 관하여 /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로 살아가야 한다 / personality / 내가 원하는 삶

 

2놓친 마음 / 봄비/ 주고받음 / 에어컨 / 표현에 관하여 / 다름을 이해하는 것 / 오늘의 즐거움 / 우린 우리만으로 충분하다 / 분홍빛 좌석 / 기억과 죽음

 

3역사 / / 휴식 / 백 퍼센트 / 당신만의 색깔로 살아가는 것 / 사람 / 예술가 / 말 한마디 / 마음과 말 / 모래 한 줌 / 내려놓음 / 일레븐 메디슨 파크

 

4아무렴 행복이길 / 마음가짐 / 책임 / 달빛과 진심 / 잘 살고 싶은 마음 / 밑줄 / 힘을 빼는 연습 / 판단 / 나라는 사람 / 이유 / 아련한 글자 / 어쩔 수 없음 / 메이저와 마이너 / 행복

 

5안으로 향한 기준 /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 처음 떠나는 모험 / 견딤이 주는 가치 / 반증 / 그랬구나 / 다름을 이해하는 것2 / 계획과 운 사이에 / 나를 채우는 것들 / 행복은 결국 내 마음속에 / 마음을 쓴다는 것 / 祝辭(축사)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김상현 지음

필름 / 202001/ 252/ 15,000

 

1

 

가끔 이런 말들이 필요할 거예요

너는 모난 사람들을 볼 때면 저 사람은 왜 저런 걸까 궁금해했었지. 그렇게 둥글기만 했던 네가 몇 번의 인간관계를 앓고 나서 닳고 닳은 탓일까. 이제 네가 모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자책을 하더라. 욱하는 일들도 여럿 있었지만,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서 그런 걸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관계를 위해서 참았기 때문에 그런 걸까. 눈물 꾹 참고, 웃어 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해서 그런 걸까.

 

그런 너에게, 애써 둥근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가끔 화를 내고, 가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아도, 가끔 눈물을 흘리더라도 너를 예뻐하는 사람이 참 많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그래도 된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넌 아주 재주가 있단다. 그렇단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것들 말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말은 꺼내놓지 않아도 된단다. 나를 바라볼 때 그 눈은 어떻고. 어쩔 땐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탓에 쳐다보기도 힘든 걸. 바람이 불어오면 쓸어 넘기는 머리는 어떻고. 오물조물 맛있는 걸 먹을 때 움직이는 입꼬리를 보면 나도 모르게 널 따라하게 되더라. , 그 입꼬리. 웃을 때면 더 예뻐지는 걸 알고는 있니. 자주 웃을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너와 나를 바라봐 주고 있는 이 계절이, 우리의 아름다움을 기억해줬으면 싶어.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또 누군가의 자랑이자 위로라는 걸, 꼭 기억했으면 한다. 언제나 잘될 것이라고 믿고, 함부로 뱉은 말에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아닌 너만의 인생을 살아가며, 비교하거나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만의 색깔을 찾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해 나갔으면 싶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줄 알며 미련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 예쁘단다. 널 바라보면 행복해진단다.

넌 아주 재주가 있단다. 그렇단다. 정말로 그렇단다.

 

2

 

주고받음

주는 게 있어야 받을 수 있다. 오는 게 있어야 갈 것도 생긴다는 말. 모든 관계는 주고받음이 있어야 유지된다는 어느 동료 작가의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연락을 안 해서 서운하다. 연락 좀 해라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흔히 듣는 말이지만, 정작 본인이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적어도 내가 겪어낸 관계에 있어선 말이다.

 

하지만 그 작가는 달랐다. 실제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생각날 때면, “생각나서 전화했어라며 그저 안부만 묻고 전화를 끊곤 했었다. 처음엔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아무 이유 없이 안부를 묻는다는 건 지나온 내 삶에 비춰 볼 때 생소한 경험이었기에. 놀랍게도 그건 그 사람 자체, 본성, 기질이었다. 그저 생각나서 안부를 묻곤 전화를 끊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라는 사람을 목적 없이 궁금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관계를 겪어내는 과정 안에서 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을 많이 보게 됐다. 보통은 그런 사람들과는 인연을 이어가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가득해지기 마련. 그 역시 받기만 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누가 됐든 인연이 오래오래 이어지지 못한다고 했다. 공감되는 말이었다.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부분 표현에 서툴렀다. ‘고마워미안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걸 어색해한다. 그들은 고마운 것들을 고마워하지 못하고, 미안한 것들을 미안해하지 않았다. 관계가 이어지는 건 결국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거라고 생각을 해서 그랬던 탓일까. 그들과 함께 하는 동안엔 마음이 더욱 좁아지고 주는 걸 망설이게 됐다.

 

마음도 역시 주고받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이라는 건 주고받을 때 크기도 커지고 더불어 온도도 올라간다. 마음이 갔으면 상대방에 의해 다시 나에게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전해진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고, 더욱 크고 따뜻한 마음을 나눠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받는 것에 익숙해져 그저 받기만 하는 사람은 마음을 닫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 마음을 전달하는 것만큼 힘든 게 있을까. 나는 배우지 않았는데, 힘들 수밖에.

 

마음을 주고받는 것, 결국 상대방을 생각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일이다. 동질성과 공감, 유대하는 것들이 사람을 심리적으로 안정적이게 만든다.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 주고받음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 무언가를 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 비로소 마음에 안식처가 생긴 것이다. 나는 물론이고, 내 의견을 지지해줄 사람. 그런 사람을 내내 곁에 두고 싶다.

 

표현에 관하여

표현은 인간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자 도구이지 않을까. 표현에 여러 범주들이 존재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표현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중 마음을 인정하는 감정들이 더욱 그렇다. 마음을 인정하는 감정이란 무엇일까.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그런 것들이라 생각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표현에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어떤 선배는 조별 과제를 하는 내내 자신이 할 일을 나에게 떠넘겼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찾아올 무렵, 선배는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고맙다고 했다. 그동안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고맙다는 말을 하면 빚을 진 느낌이라서 잘 꺼내지 못했었다는 이유와 함께.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결국 꺼내지 못했던 건 미안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면 자신이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 채로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끊어졌다.

 

연인 간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직장 동료와의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표현을 아끼지 않으려 한다. 특히나 사랑하고 고마운 일들이 그렇다. 나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그들에게 매순간 고맙다. 내 곁을 지켜주고 신경쓰고 기억해주는 그들이 고맙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일에도 고맙다고 말한다.

 

자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유행을 타지 않으니까. , 언제든 말해도 촌스럽지 않다.

 

미안한 일들은 되도록 만들고 싶지 않지만 의도치 않게 일이 생기곤 한다. 나만 미안해지는 일이 있을 때는 상대방이 서운함을 느끼기도 전에 미안함을 전하려 노력한다. 어떤 부분이 미안하고 당신이 어떤 서운함을 느꼈을지,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리라는 것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문장들과 마음들로 미안함을 표현한다. 그럼 나의 미안함도 그의 서운함도 쉽게 풀리곤 했다.

 

언젠가 미안한 일이 생겼을 때, 미안하다는 말을 미루고 미뤘던 적이 있다. 끝내 표현하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안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때의 그 일이, 나의 행동이 떠오른다. 그 상황에서 나는 꾸밈없이 미안하다는 말, 그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에 숱한 변명과 뻔한 핑계들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상대방과 나의 관계는 풀 수 없을 만큼 더욱 엉켜버렸다. 너무 꼬여버린 실은 가위로든, 입으로든 끊어내야만 한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은 끊어지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다. 그러니 미안한 마음은 되도록 꾸밈없이 모든 걸 내려놓고 구체적이고 빠르게 표현하는 게 좋다. 결국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한 감정은 솔직하게 내 마음 그대로 전달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간혹, 하고 싶은 말을 솔직히 표현한다는 의미로 포장한 채 주변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모두 내뱉는 사람이 있다.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과 무턱대고 내뱉는 건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나는 솔직한 성격이야라는 자신만의 전제 하에 말을 무턱대고 내뱉는 것은 포장된 칼을 무작정 휘둘러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하는 행동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기억과 죽음

전방십자인대와 연골을 다쳐 병원에 한참 입원해 있을 무렵이었다. 병원에만 콕 박혀 있는 게 너무나도 답답해서 어떻게든 밖에 나가 무언가 하고 싶어졌던 나는 절뚝거리며 병원을 나섰다. 두 달 만의 외출이었다. 오전 열 시를 가득 채운 아름다웠던 공기, 눈이 내린 지 얼마 안된 거리, 분주했던 출근 시간이 지나 여유로워진 분위기. 내 오른쪽 무릎만 빼고 모든 게 완벽한 날이었다.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영화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영화를 골랐다. 픽사에서 만든 <코코>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멕시코가 배경인 애니메이션 <코코>는 기억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보여줬다. 영화에서 보여준 죽음은 기억이 바탕이 되었다. 이승세계와 저승세계가 따로 나뉘어 있지만 저승세계에 있다고 해서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니었다. 영화에서 말하는 진정한 죽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때였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일 년에 단 한번, 저승에 있는 사람들이 이승으로 넘어와 각자의 가정에서 축제를 즐긴다. 이를 죽은 자들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일종의 명절인 셈이다. 저승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날에 축제를 즐기려면 이승세계와 저승세계를 연결해주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하지만 아무나 다리를 건널 수는 없다. 이승에서 저승에 있는 그들을 기념해 줘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된다. 이승에서 죽은 자들의 날에 아무도 기념해주지 않는다면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 죽은 자를 기념하는 방식은 우리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와 비슷하다. 해골 조형물과 메리골드로 장식을 한 곳에 죽은 자의 사진을 놓고 축제 동안 즐길 수 있는 음식들을 마련해 놓는 것이다.

 

죽은 자들의 날에 저승에 있는 대상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거나 기념해주지 않는다면 저승에서마저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기억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가 끝나고 많은 생각이 찾아왔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장례는 어떻게 치러야 할까. 내가 죽어도 기억해줄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도 아무도 기억해주지 못할 때가 진짜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의 어떤 걸 기억할까.

 

그러다 김상현이라는 내 이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서로 상()’어질 현()’. 둥글둥글 착하고 현명하게 살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윤숙, 미숙, 현숙, 인숙, 명숙. 다섯 딸을 키우며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였을까. 할아버지는 당신의 첫 손자 이름을 지어줄 때 세상을 둥글둥글 착하고 현명하게 살아가길 바랐던 것 같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이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든 이름, 제목을 따라간다고 하던데 그 말이 진짜인가 싶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잘 안들리셨다. 그래서 대화를 해야할 땐 언제나 가까이서 큰 목소리로 말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인지, 목소리가 크셨다. 가끔 할아버지 댁에 놀러갈 때면 저 먼 곳에서부터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와서 반가울 정도였으니까.

 

나와 내 동생은 할아버지 댁에 놀러갈 때면 텔레비전을 맘껏 볼 수 있어서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항상 자막이 있는 프로그램을 보셨는데, 나와 재현이는 나이도 생각도 어렸던 탓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 보면서 재밌어 했다. 할아버지는 자막도 없는 프로그램을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보곤 하셨는데, 재현이와 내가 낄낄거리며 웃을 땐 할아버지도 덩달아 웃곤 하셨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 귀가 안 들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모두가 함께 웃고 있다는 생각에 더 크게 웃곤 했다. 그 모습을 할아버지는 좋아하셨던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나면 한 톨의 밥풀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은 밥그릇을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곤 했다. 그럼 할아버지는 큰소리로 잘했다고 칭찬해주시며, 볼록 튀어나온 배를 만져주곤 하셨다. 약주를 하실 때면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한 잔씩 따라드리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이제 다 컸다고 생각했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나를 아이처럼 바라봐주셨다. ‘돈을 벌게 되면 언젠가 할아버지에게 꼭 용돈을 드려야겠다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갑자기였다.

 

한 음주 운전자가 할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박아버렸다. 그리고 두려웠던 나머지 도망갔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영정사진도 찍어두지 못해 막내이모의 결혼식 사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영정사진으로 썼던 우리 할아버지.

 

갑작스럽지 않은 죽음이 어딨겠냐마는 내가 겪은 첫 번째 죽음은 그렇게 갑작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죽는다는 건 주변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나에게 많은 걸 알려주었지만, 자신의 마지막은 알려주지 않았다. 내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동안 나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럼 그는 아직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진 않는 거니까. 어디선가 나를 바라봐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은 첫 번째 죽음 이후, 여러 죽음들이 내 주변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파서, 사고로, 스스로, 갑자기 떠나게 된 사람들.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기억할 모습들을 더는 쌓을 수 없게 되니까.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남겨두려는 마음에 슬픔도 같이 오는 모양이다. 기억은 점점 사라지니까.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까.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결국 정말로 죽게 되는 것이니까. 더욱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더욱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슬픔을 불러오는 건 아닐까.

 

죽음에 대하여 기억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나는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당신들 곁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마음인데…….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귀하게 지어준, 값진 의미를 부여한 내 이름 세 글자를 잘 쓰고 싶다. 이름대로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3

 

당신만의 색깔로 살아가는 것

집단의 힘이 개인의 힘보다 월등히 강한 우리나라. 우리는 타인과 비교하고 비교 당하는 게 너무나 익숙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정의 욕구가 그 어느 욕구보다 상위에 속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에서 개개인이 지니고 있어야 할 자존감은 무너지거나 떨어지기 쉽다. 판단의 기준은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바뀐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라는 꽉 막힌 프레임 속에 갇혀, 타인의 의견이 전적으로 반영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교한다. 타인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 비로소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의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집단의 힘이 강해지는 이유는 획일화때문이다. 모든 게 똑같은데 나만 다른 건 아무래도 눈에 띄게 마련이다. 눈에 띄는 건 불편하다. 집단에서 개인의 색을 드러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기게끔 만든다.

 

결국, 집단이 공존하고 유지될 수 있는 건 통일성과 획일화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개개인이 자유로워질수록 통제가 어려워지고 조직이 와해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반복적으로 획일화된 기준과 잣대를 강요한다.

 

자신만의 기준을 적용하면, 나태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거나, 다른 사람의 걱정을 사게 될 거라 지레 짐작해버린다. 태어남으로 이미 충분한 가치를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가치와 비교하고 그 수준에 도달하려 애쓴다. 애초에 다른 평가 기준이 적용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욱여넣어 맞추는 것이다.

 

이는 맞지 않는 옷을 꾸역꾸역 입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왜 떨어질까?’, ‘나는 왜 모자랄까?’, ‘다른 사람들은 왜 나보다 잘난 걸까?’ 자존심을 깎아내는 말들을 스스로에게 외치고 있는 격이다. 그렇게 우리는 혼자서 괴로워한다. 자존감이 무너진다. 자신을 지탱할 큰 기둥 하나가 무너지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게 된다. 회복할 겨를마저 없어진다. 결국 는 사라지고, ‘타인만 남게 된다.

 

색은 여러 종류로 나뉜다. 하나하나의 색을 개인이 가진 다양성이라고 보자. 한 집단 안에서 각기 다른 색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결국 검은색이 된다. 이는 빛 역시 마찬가지. 여러 빛이 모여 결국 하얀색이 되는 것처럼.

 

결국 모두 하나의 색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니 집단 속에서 개인이 살아낼 유일한 방법은 타인의 색에 물들지 않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 역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나 또한 나만의 색깔을 찾아간다. 모두 빛나거나, 각기 다른 색을 띤다 해도 집단의 색이 이상해지거나 별난 색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빛날 수 있는 방법과 색깔은 다양하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당신만의 색깔로, 당신만의 빛깔로 삶에 행복을 들였으면 싶다.

 

4

 

마음가짐

그리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인생을 살다 보니 어찌 됐건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더라도 힘든 순간은 분명히 찾아온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최고의 마음가짐은 모든 걸 좋은 경험이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다. 찾아오는 힘든 순간에서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마음가짐이라면 어떤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어떤 시련을 맞이하더라도 견뎌낼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 모든 것 역시 언젠간 경험으로 남게 될 것이니까.

 

책임

현실을 책임질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현실에 책임감이 생기면 삶의 욕구 또한 강해진다. 살아내려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책임진다는 건 굉장히 값진 일이다 자신의 몫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떤 부분을 세상에 기여하려 노력하고, 행동하게 된다. 책임질 줄 알게 되면, 그에 따른 힘이 생긴다.

 

다시 말해, 내가 가져갈 행복만큼 내 행복의 몫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밑줄

밑줄 하나를 긋고 그 안에 글자를 채워 넣어보자. 밑줄을 먼저 긋고 글자를 쓰려면 밑줄 안에 얽매이게 되어 원하는 글자 크기를, 또 원하는 글자 수를 채우지 못할 확률이 커지게 된다. 반대로 글자를 먼저 쓰고 밑줄을 긋는다면 내가 원하는 크기의 글자를, 또 내가 원하는 글자 수에 맞춰서 밑줄 안에 쓸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자신의 일들을 밑줄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궁무진히 해낼 수 있는 당신이니까.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으면 싶다.

 

이유

우리는 때때로 이해 없는 판단으로 이유를 요구한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선 여러 배경과 상황 그리고 갈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상처를 종합해보면 하나의 퍼즐이 맞춰지고 그 사람이 이해된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모든 사건엔 이유가 존재하고 이해를 바탕으로 판단되어질 가치가 있다.

 

5

 

안으로 향한 기준

TV에 나오는 사람들과 SNS를 통해 비춰지는 사람들. 나는 왜 그들만큼 잘하지 못할까. 나는 왜 그들만큼 잘생기지 않았을까. 나는 왜 그들만큼 부유하지 못할까. 그런 생각들을 계속해서 되뇌며 현실을 살아가곤 했다.

 

그리고 밤늦게 퇴근하는 길, 불이 다 꺼진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형체는 있지만 어두컴컴한 게 마치 내 속마음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아서. 아무런 색깔도 없는 그저 까만색 사람인 걸 들킨 것 같아서.

 

화려하고 싶고, 밝아지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부러워하는 그들처럼 입고 그들처럼 먹고 그들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왜일까. 어째서 그들처럼 되지 못할까. 왜 자꾸만 작아지는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바라보는 기준을 내가 아닌 바깥에 두었을 때, 나는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나는 점점 작아지기만 했고, 계속해서 움츠러들었다. 스스로 작아지게 만들어 놓고선 또다시 작아진 나 자신을 나무라며 미워했다.

 

악순환의 반복, 그 자체였다.

 

나를 좋아할 순 없을까. 나는 그저 나일 순 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막상 생각의 물꼬가 트이자 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좋아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길을 터야 할까, 생각이 유연하게 흐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다 문득 누군갈 좋아할 때 어떻게 좋아할지 생각하고 좋아했었나하는 생각이 들자 쉬워졌다. 그 사람에 대해 알고, 그 사람의 장점을 하나하나 자연스럽게 파악할 때,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와 같은 과정을 나 자신에게도 적용해보기로 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뭘 싫어하는지 알아야 했다. 어떤 것에 슬퍼하고, 어떤 것에 감동할까. 내가 잘하는 건 뭔지, 내가 오래할 수 있는 건 뭔지,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건 또 뭐였더라. 하나하나 나를 알기 위한 노력들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좋아하는 과정을 겪어나갔다.

그러자 바깥에 있던 기준은 안으로 향하고 곧 내가 되었다. 나를 향하고 있던 미움은 좋아함으로 바뀌었다. 사실 나를 한 번 좋아했다고 해서 영원히 좋아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끔 다시 내가 미워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다시 좋아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아 나섰다. 여행을 가기도 하고, 내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하고, 혼자 깊은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 때론 무모한 짓을 해볼까 생각했다가 그만두어 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나를 좋아하는 연습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마음을 쓴다는 것

마음, 종종 곱씹곤 하는 이 단어는 나에게 따뜻한 온기를 준다. 마음을 건네는 일. 마음을 쓰는 일. 마음이 하는 일. 그런 것들이 내가 느끼게 되는 따뜻함의 일종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이토록 따뜻한 단어, 마음이 언제부터 내 마음이었을까.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성선설과 성악설 중 하나를 믿으라면 성악설을 믿는 편이다. 하지만 이기적이고도 악하게 태어난 우리는 언제부터 갖고 있었는지 모를 마음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게 되거나 악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사람이 이기적이며 악하다고 믿는 이유는 누구나 자기 자신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큰 아픔보다는 당장 나의 아픔이나 고통에 훨씬 더 크게 반응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썼던 글에도 이런 생각이 담겨 있었다.

 

인생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고민을, 아픔을 전달하려 해도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삶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감정이다. 우리는 외로움 속에서 벗어나려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난다.

 

북적거리는 삶을 살아가다가 혼자 있게 되는 어느 날, 외로움은 다시 한번 불쑥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 외롭지 않냐고, 너 지금 외로운 거라고. 삶이 퍽퍽해질 때면 결국 사람을 찾는다. 웃음 많은 사람을 찾을 때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카페에 앉아 서로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을 찾을 때도 있고. 말이 많은 사람을 찾아 하루종일 정신없이 함께 수다를 떨 때도 있다. 하지만 너무 퍽퍽해서였는지 금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결국 이기적이고 악한 본성은 사랑과 마음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만을 위했던 마음과 삶은 퍽퍽해질 수밖에 없다. 오래도록 퍽퍽했던 마음과 삶을 녹여줄 수 있는 게 바로 사랑이다.

 

그렇게 퍽퍽한 상태로 놓여 있는 마음에 누군가를 위한 빈자리를 내어준다. 내어준 자리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마음에 불을 지핀다. 지펴놓은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끔. 그래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마음을 쓴다는 것은 놀랍고도 엄청난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이렇다. 상대방이 사랑을 확인하려는 행동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것. 사랑 앞에서 자주 멍청해지는 것. 계산 없이 누군가를 대할 수 있게 되는 것.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알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일상을 나누어 갖는 것. 함께 가는 길에 꽃이 없다면, 꽃을 심어 따뜻한 마음으로 피울 수 있는 것. 조금 늦게 가더라도 돌아오는 길에 꽃을 보며 걸어올 수 있음에 함께 기뻐하는 것 조금 느리더라도 오랫동안 영원할 것처럼 사랑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젊음을 한창 낭비하다가 결국 당신 앞에 섰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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