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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by Casey,Riley 2020.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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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 도시유키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이 책은 발트해, 북해, 대서양을 헤엄쳐 다니다 인간의 경제적 욕망과 뒤얽히며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물고기, 특히 청어와 대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청어는 밝혀지지 않는 어떤 이유로 이
동 경로를 바꿀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주변 국가의 운명이 달라졌으며, 대구는 미지의 땅 아메리
카대륙을 구세계 시스템으로 편입시키는 첨병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 저자 오치 도시유키
1962년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교대학원 문학 연구과 영문학 전공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지바공업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전공은 셰익스피어와 미국 사회다.
저서에 『미국 최신 히트 상품&트렌드』, 『영어로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등이 있고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공동 번역하기도 했다.



▣ Short Summary
중세 유럽의 기독교는 육류를 ‘뜨거운 고기’라 하여 엄격히 금지했다. 인간의 마음속에 성욕이 불같이
일어나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연장선에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육류를 섭취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 년 중 거의 절반이나 되는 기간을 ‘단식일’로 정해 엄격히 시행했다. 그러나
사람이 일 년의 절반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단식일에도 적은 양이나마 뭔가를
반드시 먹어야 했는데, 그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생선’이었다.
생선은 ‘차가운 고기’라 하여 성욕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단식일에도
생선만은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식일에 단지 생선 먹는 일을 허용하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생선 먹는 날’로 변화해갔다. 그러더니 급기야 단식일이 ‘피시 데이’로 바뀌고
엄격히 시행되었다. 거의 모든 기독교 신자가 삼시세끼를 생선으로 해결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것
도 일 년의 절반이나 되는 기간에 말이다. 이쯤 되면 종교적 관습에서 비롯된 생선 위주 음식문화가
당대 유럽사회를 전반적으로 어떻게 바꾸어놓았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중세 기독교가 만든 ‘피시 데이’ 관습은 거대한 생선 수요를 창출했고, 거대한 시장 형성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업이 발달했으며 어업 장려 운동도 일어났다. 복합적 경제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그 시스템을 장악한 상인연합세력 한자동맹과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 네덜란드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 ‘청어’와 ‘대구’가 있었다. 13~17세기에 이 물고기들은 유럽 국
가들의 부의 원천이자 중요한 전략 자원이었으며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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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이 책은 발트해, 북해, 지중해, 대서양을 힘차게 헤엄쳐 다니다 인간의 경제적 욕망과 뒤얽히며 세계사
의 물줄기를 바꾼 물고기, 특히 청어와 대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회유어인 청어는 밝혀지지 않
는 어떤 이유로 이동 경로를 바꿀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주변 국가의 운명이 달라졌으며, 대구는 미
지의 땅 아메리카대륙을 구세계 시스템으로 편입시키는 첨병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 차례
서문 - 청어의 회유 경로 변화가 국가의 운명을 바꾸고 유럽사와 세계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고?
01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꾼 작지만 위대한 물고기, 청어 이야기
1. 청어의 회유 경로 변화가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꾸고 여러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었다고? / 2.
청어를 매개로 한자동맹 중심지로 떠오른 독일 도시 뤼베크 / 3. 빌럼 벤켈소어의 ‘소금에 절인 청어’
가 세계사를 바꾸다 / 4. 청어전투에서 ‘소금에 절인 청어’로 열 배 많은 프랑스군을 격파한 잉글랜드
군 / 5. 작은 어촌마을 암스테르담을 세계적 도시로 거듭나게 한 ‘소금에 절인 청어’ / 6. 청어와 대구는
왜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부정적인 물고기 역할’을 전담했나
02 청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꾸다
7. 엘리자베스 1세는 왜 그토록 ‘해양주권론’에 집착했을까 / 8. 청어로 부를 쌓은 네덜란드, 동인도회
사를 설립해 동아시아로 진출하다 / 9. 네덜란드와 청어 어장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잉
글랜드 / 10. 찰스 1세의 야심 찬 어업 육성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 / 11. 세 차례의 잉글랜드ㆍ네
덜란드 전쟁으로 번진 ‘청어잡이’ 불화 / 12. 셰익스피어 시대의 잉글랜드인은 왜 청어를 천대했을까
03 신항로 개척시대를 열어준 주인공, ‘스톡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
13. 말린 대구 ‘스톡피시’가 없었다면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바이킹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도 없었
다 / 14. 신항로 개척시대를 가능케 한 ‘스톡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 / 15. 네덜란드와의 ‘청어 경쟁’
에서 밀린 잉글랜드가 아이슬란드 해역의 대구에 눈독 들인 이유 / 16. 북아메리카에서 온 캐벗이 발
견한 ‘대구 떼’가 신항로 개척시대의 역사를 바꾸다 / 17. 존 캐벗이 북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영지로 선
언한 이후에도 잉글랜드가 아이슬란드에 집착한 이유 / 18. 필그림 파더스는 왜 대구가 풍부한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도 한동안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을까 / 19. ‘뉴잉글랜드’를 탄생시킨 주인공 존 스미
스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 / 20. 셰익스피어에게 문학적 영감을 불어넣은 1609년 신대륙에서의 ‘시
벤처호 해난사고’ / 21. 셰익스피어는 왜 잉글랜드 평민과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을 ‘말린 대구’에 비유
했을까 / 22. 노예무역을 발전시킨 싸구려 대구, ‘웨스트 인디즈’
04 식민지 미국이 잉글랜드에서 독립하고 강대국이 된 원동력, 대구
23. 미국 독립혁명 당시 매사추세츠주에서 대구가 ‘자유’의 상징이 된 까닭 / 24. 뉴잉글랜드에서 분탕
질치는 잉글랜드 어민 / 25. 잉글랜드의 서인도제도 사탕수수 재배가 ‘소금에 절인 대구’ 수요를 폭발
적으로 늘린 이유 / 26. 대구 어장을 지키기 위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주ㆍ잉글랜드 정부라는 거
대 권력에 맞선 뉴잉글랜드 어민의 끈질긴 투쟁 / 27. 뉴잉글랜드 대구 어부의 정치의식이 민주주의를
앞당겼다고?
05 청어와 대구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를 어떻게 지배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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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28. 중세 기독교는 왜 극단적으로 식욕을 금기시하고 억압했을까 / 29, 초기 기독교가 ‘뜨거운 고기’
육류를 금하고 ‘차가운 고기’ 생선 섭취를 권장한 까닭 / 30. 단식일의 변화: 육식을 금하는 날에서 적
극적으로 생선을 먹는 날로 / 31. ‘청어’와 ‘대구’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 경제 시스템을 좌우할 수
있었던 이유 / 32. 신분과 생활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던 단식일의 다양한 생선 / 33. 피시 데이 쇠
퇴가 잉글랜드 어업 쇠퇴로, 어업 쇠퇴가 국방력(해군력) 쇠퇴로
06 물고기는 어떻게 기독교에 스며들고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까
34. 기독교에서 물고기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할까 / 35. 고대 페니키아의 신관들이 금기로 여겨
졌던 물고기를 먹은 진짜 이유 / 36. 베드로를 독실한 신자로 변화시킨 기적의 물고기 / 37. 기독교는
어떻게 ‘아가페’와 ‘에로스’가 존재한 물고기라는 상징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을까
맺음말 - ‘피시 앤드 칩스’가 이 책에 등장하지 못한 이유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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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오치 도시유키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0년 5월 / 312쪽 / 17,000원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꾼 작지만 위대한 물고기, 청어 이야기
청어의 회유 경로 변화가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꾸고 여러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었다고?
청어는 잡은 뒤 볕에 말리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워낙 기름기가 많은 생선이라 금세 상하기 십상인 까
닭이다. ‘소금에 절인 청어’라는 식품은 이런 이유로 등장했다. 한편 회유어인 청어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갑작스럽게 이동 경로를 바꾸곤 하는데,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종종 일어난다. 아무
튼 ‘소금에 절인 청어’가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자 청어의 회유 경로 변화가 당대 유럽의 세력 판도
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또, 그로 인해 여러 국가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주요 집단의 흥망성쇠
를 좌우하게 되었다. 청어라는 평범하고 흔한 생선이 유럽사를 바꾸고 한발 더 나아가 세계사를 뒤바
꾸어 놓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바이킹의 기원에 관한 추측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주장이 있다. 바로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습격한
배경에 ‘청어 회유 경로 변화’가 은밀히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1952년 S. M. 토인은 〈청어와 역
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이색적인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청어 떼가 노르웨이 근해를 회유 경
로로 삼아 이동할 때는 바이킹의 잉글랜드 습격이 소강상태에 있었다. 10세기 무렵의 상황이었다. 그
런데 이후 바이킹이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은 도시나 지역은 거의 예외 없이 청어잡이가 활발한 곳이었
다. 토인은 다양한 자료를 꼼꼼히 조사한 끝에 바이킹이 유럽 여러 나라를 침략할 때 택한 항로가 훗
날 북해에서 청어잡이 하던 네덜란드의 어장 및 해로와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청어의
회유 경로 변화는 이후 실제로 몇 번이나 여러 국가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쳤다.
청어를 매개로 한자동맹 중심지로 떠오른 독일 도시 뤼베크
13세기 무렵 기독교의 급속한 확산과 더불어 피시 데이(fish day, 禁肉齋日)가 자리 잡았고, 이 시기에
유럽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청어의 수요가 증가했으며 국제무역에서 주요 상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흐름에 발맞추어 가공ㆍ보존 기술과 운송 수단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두 가지 수단을 가장
먼저 확보하고 시스템을 구축한 주체가 바로 ‘한자동맹’이었다. 말하자면 한자동맹이 탄탄하게 기반을
닦고 정점에 올랐다가 다시 추락하게 된 배경에도 청어가 깊이 관여한 셈이다.
독일의 뤼베크는 한자동맹 중심도시로 발전한 대표적인 도시다. 뤼베크는 윌란반도가 발트해를 향해
뻗어나가는 지점에 건설되었는데, 1143년 즈음의 일이었다. 이후 이 도시는 13세기 초부터 북해와 발
트해 지방 무역 중계도시로서 중요한 지위를 확보해나갔다. 일반적으로 한자동맹 성립은 독일 도시 뤼
베크와 함부르크가 1241년에 맺은 상업동맹을 발단으로 본다. 뤼베크는 어떻게 교역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었을까?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지리적 조건’을 꼽을 수 있다. 즉, 이 도시가 발트해와 북해를 나
누는 윌란반도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다는 탁월한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뤼베크에는 두 해협의 중간지점이라는 천연의 지리적 이점 이외에도 또 다른 이점이 있었다. 바로 청
어 떼가 주기적으로 몰려온다는 점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뤼베크 바다 건너 맞은편의 스칸디나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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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반도 남단에 있는 스코네 지방과 뤼베크 동쪽의 뤼겐섬 연안, 그리고 남서쪽의 암염 산지인 뤼네부르
크에 엄청난 규모의 청어 떼가 몰려왔다. 이는 11세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 두
가지 입지 조건이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뤼베크는 독일과 유럽의 주요 도시로 성장했고 청어 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려 무역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절정에 도달한 다음에는 내리막길이 기다리는 것이 자연과 우주의 원리
다. 오랫동안 한자동맹의 부와 권력을 뒷받침해주었던 청어 떼가 회유 경로를 바꾸는 바람에 발트해에
서 산란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15세기 중반 유럽국가들이 일상적으로 교류하고 무역하던 바
다에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청어 떼는 완전히 북해로 이동했다.
빌럼 벤켈소어의 ‘소금에 절인 청어’가 세계사를 바꾸다
소금에 절인 청어 만드는 법을 개발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대다수 학자가 빌럼 벤켈소어를 꼽는 데 이
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움직일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네덜란드
는 빌럼 벤켈소어가 활약한 시기에 발전의 기틀을 다졌는데, 학자들은 이를 14세기 무렵으로 추정한다.
그즈음 이 나라는 빌럼 벤켈소어 같은 위대한 장인과 기술자, 숙련공들의 노력에 힘입어 소금에 절인
청어를 가공하는 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그로써 이전에는 며칠만 지나도 썩어 문드러지고 악취
를 풍긴 청어를 무려 1년 넘게 신선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무역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부를 일구었다. 아무튼 네덜란드 성공 신화는 한자동맹을 대
신해 ‘소금에 절인 청어’를 본격적으로 공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빌럼 벤켈소어의 ‘소금
에 절인 청어’는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발명 중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꾸다
세 차례의 잉글랜드ㆍ네덜란드 전쟁으로 번진 ‘청어잡이’ 불화
찰스 L. 커팅의 책 『물고기: 가공과 보존』에 따르면 1679년 시점에 네덜란드에는 4,000여 척의 어선
과 20만여 명의 어부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이어진 어업 진흥책에도 잉글랜
드와 스코틀랜드 어민과 어업 상인은 17세기 안에 압도적 우위를 점한 네덜란드를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번영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18세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찰스 L. 커팅에 따르면 1736년에 이 나라의 청어잡이 어선 수
는 300척까지 떨어졌고 1779년에는 162척으로 곤두박질쳤다. 17세기에 청어잡이로 엄청난 호황을 누
리며 잉글랜드인의 질투를 유발하고 네덜란드 타도를 외치던 국왕의 목을 떨어뜨리게 하는 원인이 되
기도 했던 네덜란드 어업은 잉글랜드인의 도전이나 위협과는 무관하게 저절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네덜란드 어업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을 꼽아보라면 ‘끊임없는 전쟁’을 들 수 있다. 네덜란드는 1652년
제1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 시작된 후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종
료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의 대부분을 잉글랜드나 프랑스, 혹은 두 나라 모두와 전쟁을 치르며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됭케르크 해적은 잠시도 잠잠할 새 없이 약탈과 살육을 반복했다. 바다에서 아무
리 잘나가는 해양 강국 네덜란드라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어업에 관한 권리를 한 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던 네덜란드의 외교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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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침이 과연 옳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같은 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이 훨씬 현명하지 않았을까. 네덜란드 부의 원천은 동인도에도 있었으니 청어 어장 정도는 양보해
도 좋지 않았을까.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보장금’이라 부르는 어업진흥을 위한
기금 제도가 잉글랜드에 조성되었다. 1718년에는 수출되는 소금에 절인 청어 한 통당 2실링 8펜스, 알
배기 레드헤링은 한 통당 1실링 9펜스, 품질이 떨어지는 쇼튼 헤링은 한 동안 1실링의 보장금을 지급
했다. 『국부론』을 집필하고 자유주의를 주창한 애덤 스미스는 이 보장금 제도를 당연히 낮게 평가했
다. 그러나 찰스 L. 커팅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이 보장금 제도가 18세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청어잡이 성장에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고 주
장한다. 1755년 7만 통의 청어가 야머스에서 보존ㆍ가공되었는데, 그중 5만 2,000통이 수출 길에 올
랐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는 보장금 제도 덕분에 청어잡이에 나선 바위스선 수가 1751년부터 1756년
사이의 3척에서 1787년에서 1798년 사이에 293척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스튜어트 왕조의 청어에 걸
었던 꿈은 하노버 왕조 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진 셈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잉글랜드인은 왜 청어를 천대했을까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서 청어는 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왜 그 시대의 잉글랜드인은 청어라면 치를
떨었을까? 우선 음식에 관한 당대인의 통념이 여기에 한몫했다. 당시 사람들은 음식을 ‘고기 vs. 생선’
이라는 이분법 구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인식은 ‘피시 데이’의 생성 기반이 되었다.
사람들은 소고기 등 육류를 ‘뜨거운 고기’라 하여 남자다움, 성욕, 양기 등 양성을 상징하는 음식 재료
로 보았다. 아울러 그들은 대구나 청어 같은 물고기류를 ‘차가운 고기’라 하여 여성스러움, 음습한 성
격 등 음성을 상징하는 음식 재료로 인식했다. 따라서 ‘차가운 고기’ 생선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순절은 평범한 시민에게는 날마다 맛없는 청어를 질리도록 먹어야 하는 끔찍
한 기간을 의미했다. 이런 이분법적 관점과 우울한 현실이 셰익스피어 작품에 잘 드러나듯 당대인이
청어를 기피하고 천대하는 사고방식과 태도의 기반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피시 데이는 애초부터 종교적 목적으로 생겨난 이벤트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피시 데이의 종교
적 색채는 옅어졌다. 그러다가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색채가 상당 부분 사
라졌다. 게다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치적 억압으로 해석할 여지마저 생겨났다. 그 결과 셰익스피
어 시대의 잉글랜드 국민은 신의 뜻보다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생선을 먹어야 했던 셈이다.
잉글랜드가 청어의 국제정치적ㆍ경제적 중요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 잉글랜드는 그야말로 ‘청어에 홀렸다!’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청어를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자원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잉글랜드인이 청어의 가치
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국가 자원으로 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 거대한 산 중 하나가 바로 청어가 헤엄치는 바다 건너편에 버티고 선 신흥강대국이자 ‘청어의 나라’
네덜란드의 존재였다. 당대에 잉글랜드 어민들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배와 구식 도구만으로 대규모 선
단에 최신 장비를 갖추고 조업하는 네덜란드 어선 가까이에서 주눅 든 채 청어잡이를 해야 했다. 게다
가 네덜란드산 소금에 절인 청어가 1 라스트 당 25파운드에 팔릴 때 야머스에서 가공한 잉글랜드산
소금에 절인 청어는 1 라스트당 고작 10파운드 남짓한 헐값에 팔렸다. 이렇듯 당시 잉글랜드와 네덜란
드 사이에는 청어의 어획량뿐 아니라 품질 면에서도 완전히 다른 상품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격차가 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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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네덜란드산 소금에 절인 청어에 맞서 그나마 어느 정도 경쟁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상품이 바로 야머스 특산물 ‘레드헤링’이었다. 레드헤링은 ‘훈제청어’다. 왜 야머스산 훈
제 청어에 ‘레드헤링’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훈제 과정을 마칠 무렵이 되면 청어가 검붉은 빛깔을 띠
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보존 기간을 좀 더 늘리기 위해 장기간 훈제 과정을 거친 훈제 청어 ‘블랙 헤
링(Black herring)’도 있었다.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었던 토머스 내시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소금에 절인 청어를 먹고 사망한 것
으로 알려진 로버트 그린의 친구였다. 그의 『내시의 사순절 음식』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까? 흥미롭게도 야머스와 야머스의 특산물인 레드헤링에 관한 찬가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그는 “잉글랜드에 많고 많은 특산물이 있지만 전 기독교 국가에서 돈을 그러모으는 상품
으로 레드헤링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그는 “청어가 이 정도로 많이 잡히는
해안은 전 유럽을 통틀어 잉글랜드의 야머스밖에 없다. 청어를 제대로 가공할 줄 아는 지역도 야머스
외에는 없다”라는 주장도 한다. 내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오로지 야머스만 말리고 훈제하고 구
운 다음 네덜란드인도 부러워할 정도로 세심하게 소금을 뿌릴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신항로 개척시대를 열어준 주인공, ‘스톡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
말린 대구 ‘스톡피시’가 없었다면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바이킹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도 없었다
노르웨이 북서부 로포텐 제도와 베스테롤렌 제도, 노르웨이 본토에 의해 둘러싸인 해역은 오래전부터
북유럽 최대 대구 어장으로 유명했다. 이 해역은 북극권에 있음에도 난류인 멕시코 만류가 부근을 통
과해 비교적 온난하다. 이 바다에 서식하는 대구는 1~5월에 산란기를 맞이한다. 이 해역의 대구잡이
역사는 유구하다. 놀랍게도 석기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말린 대구 스톡피시는 노르웨이 북서부 지방에서 맨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는 절대 오류가 없는 정설은 아니므로 정확한 진위는 알 수 없다. 스톡피시는 아이슬란드나 스칸디
나비아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섣불리 따라 하기 힘든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으로 스톡피시를 만
들려면 한랭한 기후와 온화한 기후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금을 사용하지 않고
장시간 볕에 말려, 망치로 수십 수백 번 두드린 다음 하루 넘게 물에 불려야 겨우 요리할 수 있을 정
도로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사가의 하나인 『대머리 그림의 아들 에길의 사가』에는 9세
기 노르웨이에서 제조해 잉글랜드로 수출했다는 스톡피시 무역이 묘사돼 있다.
스톡피시는 뛰어난 보존성이 장점이다. 심지어 소금에 절인 청어와 비교해도 보존 기간이 훨씬 길다.
통상 소금에 절인 청어의 유통기한이 1년 정도인 데 반해, 스톡피시의 경우 보존 상태가 좋으면 5년도
넘게 보관할 수 있다. 게다가 수분을 빼고 바짝 말린 덕분에 무게가 가볍고 부피도 적다. 이런 장점 덕
분에 스톡피시는 먼 바다로 항해할 때 비상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참고로 아이슬란드인의 사가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와 『그뢴렌딩가 사가』에 따르면, 바이킹은 콜
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선 1000년 전후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
한 바이킹 리더는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인데, 오늘날 미국에는 ‘레이프 에이릭손의
날(Leif Erikson Day)’이라는 기념일이 있다. 10월 9일로 레이프 에이릭손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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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을 기리기 위해서다. 다만 ‘레이프 에이릭손의 날’은 국경일이 아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
견한 날을 기념해 10월 둘째 주 월요일을 국경일로 정한 것과 대조적이다.
바이킹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준 기특한 먹을거리는 바로 ‘스톡피시’였다. 이렇게나 뛰어난 상품을 이재
에 밝은 상인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상인들 눈에 스톡피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
위’로 보였다. 노르웨이의 로포텐 제도의 스톡피시는 노르웨이 남서부 베르겐에서 곡물과 거래되었다.
그리고 10~13세기 무렵에는 독일 상인들이 베르겐을 찾아와 거래했다. 1350년 무렵 한자동맹은 베르
겐에 사무소를 설치했다. 비슷한 시기인 14세기 중반에 한자동맹은 스톡피시 무역을 독점했다. 이 독
점이 노르웨이 왕국과 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을 가져다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스
톡피시 덕분에 국제무역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고 시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참고로 베르겐에 있던 한
자동맹 사무소 문장에는 독수리와 왕관을 쓴 스톡피시가 그려져 있다.
신항로 개척시대를 가능케 한 ‘스톡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
생선 처리 방법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스톡피시’로 소금을 쓰지 않고 볕에 말리는 방
법이다. 둘째, ‘그린 피시’로 소금에 절이기만 하고 말리지 않는 방법이다. 셋째, ‘잉글랜드식 대구’로 소
금에 절인 다음 말리는 방법이다. 그런데 잉글랜드식 말린 대구는 크기와 말리는 정도에 따라 몇 가지
종류의 상품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솔트 피시(Salt fish)’라고 하면 대구를 뜻하는 ‘코드(Cod)’를 붙이지
않아도 대구를 의미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제2막 제2장에서 트린큘로의 대사에 나오는 ‘푸어
존(Poor-john)’이 바로 잉글랜드식으로 만든 소금에 절여 말린 대구였다. 이후 잉글랜드식으로 제조한
대구는 소금에 절인 대구로, 그린피시는 글자 그대로 ‘Green fish’로 표기한다.
이 세 종류 중 보존성이 가장 좋은 상품은 ‘소금에 절인 대구’였다. 즉, 스톡피시보다 항해를 위한 식
량으로 더욱더 적합해 냉동기술이 개발되고 상용화할 때까지 적도를 넘어도 변질되지 않는 몇 안 되는
보존식품이었다. 신항로 개척시대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도 대다수 사람이 ‘황금’이나 ‘보물’, ‘향신료’
등의 화려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그러나 스톡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가 없었더라면 신항
로 개척시대가 그 정도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으리라 추정하는 연구자가 많다. 마치 그보
다 훨씬 오래전에 스톡피시가 바이킹의 뛰어난 항해 능력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었듯 말이다.

식민지 미국이 잉글랜드에서 독립하고 강대국이 된 원동력, 대구
미국 독립혁명 당시 매사추세츠주에서 대구가 ‘자유’의 상징이 된 까닭
1895년 1월 매사추세츠주 의회 하원이 소집되었다. 주 의회당 확장 공사에 따른 회의장 이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주요 안건은 의원들의 머리 위에서 100년 넘게 회의 장면을
지켜보던 ‘대구 상’ 처리 문제였다. 의회는 대구 상의 역사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후
2개월여 동안의 철저한 조사와 연구 끝에 위원회는 의원들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당시)의 대구 상은 3대째 내려오는 것(1대와 2대 대구 상은 소실)으로 세일럼
마녀재판(매사추세츠주 세일럼 빌리지에서 일어난 마녀 재판 사건) 사건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새뮤얼
수얼 판사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보고서에는 풍문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라 진위는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취지의 말도 덧붙여져 있다. 참고로 1895년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매사추세츠주 의회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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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걸려 있는 대구 상은 1784년 존 로가 발의해 설치한 조형물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매사추세츠주가
번영하는 일에 있어서 대구잡이가 가지는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기념하기 위해” 존 로가 당시 의
회당에 대구 상을 설치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다고 한다. 존 로는 매사추세츠주 첫 주지사를 지낸
존 핸콕, 새뮤얼 애덤스 등과 함께 보스턴 차 사건(1773)의 발단이 된 집회에서 연설했다.
1895년 의회는 그의 발의를 공식 승인했으며 의회당 이전 시 ‘3대째 대구 상’도 당시 의회당으로 옮겨
전시했다. 대구 상의 이력을 담은 내용을 보고받은 의회는 의회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 대구 상을
새 의회장으로 이전하도록 조치했다. 의원들은 예전 의회당에 걸려 있던 대구 상을 국기로 감싼 다음
함대에 실어 새로 지은 의회당으로 옮겼다. 새로운 회의장에 이 행렬이 들어서자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대구 상을 맞이했다. 마침 그 무렵 발간된 《보스턴글로브》라는 일간지 기사에서 이 상을
‘성스러운 대구(Sacred Cod)’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이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대구는 뉴잉글랜드 역사의 다양한 장면에서 대활약을 펼쳤다. 노예무역에서 맡은 녀석의 비중은 단역
배우의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의 잣대를 들이대자면 그것은 어쩌면 불명예스러운 역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을 두려워하던 청교도들이 대구잡이로 생계를 해결하며 신대륙으로 무
사히 건너올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보고서는 대구 상의 유래를 간략히 설명한 뒤 대구잡이가 뉴잉글랜드에서 맡아온 중요한 역할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 다음 플리머스 식민지 이전의 잉글랜드 어민의 경제생활을 간략히 살펴본다. 이어서
매사추세츠주 최초의 수출품이 대구였다는 사실, 굶주림으로 고통 받던 이민자를 대구잡이 어부들이
구해낸 미담,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총독 존 윈스럽이 펼쳤던 대구잡이 우대 정책 등을 소개한다. 보고
서는 1775~1783년의 미국 독립혁명과 1812년 전쟁(1812~1814) 기간에 있었던 강화회의는 물론이
고, 뉴잉글랜드에서 대구 어업 권리를 끝까지 지켜낸 존 애덤스ㆍ존 퀸시 애덤스 부자의 투쟁도 다루
는데, 두 사람은 강화회의에서 활약한 후 각각 미국 제2대 대통령과 제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 보고서가 제출된 1895년에는 이미 미국 공업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대구 어업의 경제적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전국적인 철도망 건설로 내륙부에서 생선 수요가 눈
에 띄게 확대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민의 수는 갑작스럽게 불어난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당시 잉글랜드 자치령이던 캐나다에서 들여오는 값싼 어류 관세를 올려달라고 정부에 집요하게 요구하
는 사태가 벌어졌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대구는 ‘자유’를 상징하는 생선이었다. 바이킹 시대와 신항로 개척시대에는 뛰어난 보존
식품으로 뱃사람들에게 ‘항해의 자유’를 선사했다. 또, 뉴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대구의 상징성으로 근대 중상주의 보
호 정책과 정면으로 맞부딪쳐 싸웠다. 미국이 잉글랜드에 독립을 요구하는 배경에 자유롭게 물고기를
잡으며 경제활동을 하고 싶다는 대구잡이 어부들의 욕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미국
이 실현한 민주주의의 근간인 ‘자유’의 원류 중 하나를 형성했다.

청어와 대구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를 어떻게 지배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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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초기 기독교가 ‘뜨거운 고기’ 육류를 금하고 ‘차가운 고기’ 생선 섭취를 권장한 까닭
기독교가 단식 기간에 특히 금기로 여겼던 음식이 있다. 바로 ‘고기’다. 라틴어 번역 성서를 처음으로
완성한 성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고기를 먹고, 와인을 마시고, 배가 두둑이 찰 때까지 먹는
행위는 육욕의 온상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육욕이야말로 신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은 탓에 발현된 죄로
여겼다. 다시 말해 육욕은 기독교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가장 불경스럽게 여겨지는 욕구인 셈이다. 그
러므로 그는 기독교 신자라면 마땅히 최선을 다해 이 욕구를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기와 와인을 육욕과 결부 짓는 태도의 배경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의학지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발달한 지식이었다. 또한 그리스ㆍ로마 시대의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
가 주창한 체액 이론이 그 지식의 요체였다. 당시 사람들은 우주 만물이 네 개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
다고 굳게 믿었는데, 공기, 불, 흙, 물이라는 네 가지 원소에는 각각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질이 있다.
공기는 따뜻하고 습하며 불은 따뜻하고 건조하다. 흙은 건조하고 차가우며 물은 차갑고 축축하다.
한편 인체에도 네 가지 체액, 즉 혈액, 황담즙, 흑담즙, 점액이 존재한다. 각각의 체액은 네 가지 원소
와 대응 관계에 있다. 혈액은 따뜻하고 습한 공기와 대응한다. 황담즙은 따뜻하고 건조한 불과 대응한
다. 흑담즙은 건조하고 차가운 흙과 대응한다. 점액은 차가운 물과 대응한다. 그리고 인체에서 비율이
가장 높은 체액이 있어 그 인물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리고 또 만물이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기
에 만물의 일부인 음식도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성욕을 억누르고자 한다면 혈액을 발생
시키는 식품을 삼가거나 생성을 억제하는 식품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고기나 와인은 성질이 뜨겁고
습한 음식이므로 혈액을 생성해 일종의 정력 효과를 만든다. 따라서 성욕을 억제하고자 한다면 ‘차가
운’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물속에 사는 생선을 ‘차가운’ 음식의 대표 격으로 인식한다.
단식일의 변화 - 육식을 금하는 날에서 적극적으로 생선을 먹는 날로
기독교의 단식은 애초 식욕이라는 간접적 쾌락을 이김으로써 육체를 극복하고, 성욕의 원천인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성욕을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단식일에 생
선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고,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생선을 먹는 날로 변화해갔다. 그러더니 급기
야 ‘피시 데이’, 즉 ‘생선을 먹는 날’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피시 데이’는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고
기를 먹지 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기간이라 하여 ‘금육제(禁肉齋)’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몇 가지 가설이 거론되는데 이런 것이다.
고대 비너스 여신을 믿는 신자는 매주 금요일에 여신에게 물고기를 바쳤으며 생선을 요리해 먹는 문화
가 있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 로마 가톨릭이 그 문화를 수용하면서 생선을 먹는 문화
가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비너스를 찬미하던 금요일은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
가에 못 박힌 날에 해당하며 사순절 기간 이외에도 확고부동한 단식일로 정해져 있었다.
‘청어’와 ‘대구’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 경제 시스템을 좌우할 수 있었던 이유
4세기 초 동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 황제는 특정한 날에 생선을 먹도록 명을 내렸다. 그는 왜 그런 명
령을 내렸을까? 아마도 양에 제약이 있는 육류 소비를 억제하려는 경제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석기 시대에서 최근까지 잉글랜드에서의 음식과 음료』에서 C. 앤 윌슨이 추정한 내용이다. 그러나
단식일이 지닌 경제적 의미와 가치는 단지 육류 소비의 절약에만 머물지 않았다. 단식일은 사순절 기
간의 40일로 끝나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금요일과 수요일,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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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지어 토요일이 단식일로 지정된 시기가 있었다. 또, 주요 성인을 기리는 축일에도 사람들은 자주 단식
했다. 그러고 보면 당시만 해도 1년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단식일이었던 셈이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단식일은 ‘고기를 먹을 수 없는 날’이라는 약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날로 받
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보다는 기독교 세계에서 모든 신자가 ‘생선을 먹는 날’이다. 그로 인해
1년의 절반 정도 기간 엄청난 양의 생선 수요가 발생한다. 이렇듯 단식일이 ‘고기를 먹지 않는 날’에서
‘생선을 적극적으로 먹는 날’로 탈바꿈함에 따라 생선은 기독교 세계 경제 시스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
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기독교 세계의 역사를 좌우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람들이 단식일을 ‘생선 먹는 날’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는 몇 가지 필수조건이 있었다. 그게 무엇이
었을까? 우선 아무리 생선을 먹고 싶어도 생선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양의 생선을 한꺼
번에 잡기 위해서는 고도의 어업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또 여기에 더해 그렇게 잡은 대량의 생선
을 장기간 보존하는 기술도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대량의 상품을 운송하는 능력이 확립되어야 했다.
이 3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자칫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청어와 대구 모두 대량의 어획이 이루어졌다. 14세기에 무려 1년간이나 보존할 수
있는 ‘소금에 절인 청어’라는 상품이 등장했다. 그리고 ‘스톡피시’라는 이름의 상품도 탄생했는데, 이는
대구로 만든 것이었다. 스톡피시는 소금에 절인 청어보다도 훨씬 오래 보존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상품이 개발된 시기는 10세기 이전이었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것이 ‘한자동맹’이다. 처음
에 이 동맹은 ‘소금에 절인 청어’의 판로를 독점하여 엄청난 이익을 얻고 영향력을 확대했는데, 나중에
‘스톡피시’로 전략 상품을 바꾸었다. 그 과정에 한자동맹은 코그선이라는 이름의 중세시대 최초 대형
운송선을 동원하기도 했다. 청어는 한자동맹뿐 아니라 이후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운명에 엄청난 영
향을 미쳤다. 이에 질세라 대구도 북미 대륙 개발과 미국 독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피시 데이 쇠퇴가 잉글랜드 어업 쇠퇴로, 어업 쇠퇴가 국방력(해군력) 쇠퇴로
종교개혁을 이끈 사람들은 피시 데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가톨릭의 허례허식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
라는 주장이었다. 당시의 종교개혁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며 사회 전체에 변혁을 몰고 왔다. 그것은
단지 신앙적 측면만이 아니라 의식과 생활 전반(사람들의 생활 리듬, 그 리듬에서 파생되는 경제적 수
요, 그 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활동 등 전반적 영역)에 이르는 거대한 운동이었다.
잉글랜드 교회 개혁 세력은 피시 데이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를테면 잉글랜드 교회는 공식적
으로 피시 데이 폐지를 선언하지 않았다. 물론 가톨릭교회처럼 피시 데이 준수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저 개인의 자율에 맡겼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피시 데이를 준수하
는 마음가짐도 오래 사용한 허리띠처럼 느슨해졌다. 하지만 생선 소비가 크게 줄어들면서 국가 경제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원래 종교적 요청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종교 개혁 시대에 이미 피시 데이는 경제적 필요를 넘어
군사적 필요까지 충족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피시 데이를 지키지 않자 어촌 항구가 한산해지
고 쇠락해갔다. 이런 변화는 매우 급속히 이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촌 마을이 눈에 띄게 황폐
해졌다. 이는 주요 생선 소비자였던 수도원을 헨리 8세가 폐쇄한 지 1~2년도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
변화였다. 그 연장선에서 1541년 해외와 해상에서 사들인 생선을 판매 목적으로 잉글랜드에 반입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어업이 쇠퇴하자 잉글랜드 정부는 다른 나라에서 더는 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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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을 수입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헨리 8세를 이은 에드워드 6세 시대에 윌리엄 세실 경은 런던에서 수
산물 상인을 대상으로 어업 상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당시 상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헨리 8세 재위 20
년째였던 1529년 무렵 440척의 어선이 조업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552년과 1553년에는
133척까지 곤두박질쳤다. 당시 어업 쇠퇴는 곧바로 해군력 쇠퇴로 이어졌다. 잉글랜드에게 해군력 쇠
퇴는 곧 국방력 쇠퇴를 의미한다. 당시 어업 현장은 ‘해군 훈련소’나 다름없었다. 전쟁이 나면 어민은
기초 군사 훈련을 받고 즉시 해군으로 편성되어 복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전함이 충분히 갖
추어지지 않은 당시만 해도 수시로 어선을 징발해 군함으로 사용했다. 이 시기 잉글랜드 어업 쇠퇴 현
상을 두고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주장에 대체로 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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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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