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현장 취재와 다양한 현지 언론 보도, 각종 통계 자료 등을 토대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일본 사회의 본질과 비밀스런 심층을 드러내 보여준다. 저자는 일본이 깊이 병들게 된 근원으로 ‘자기
속박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현대 일본을 규정하는 9가지 키워드(배제 사회, 집단 사회, 억압
사회, 자기 속박 사회, 함몰 사회, 호족 사회, 종교 사회, 관례 사회, 자멸 사회)로 설명한다.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 Short Summary
요즘 일본이 심상치 않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에 우왕좌왕하며 대응하는 태도나,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이로울 게 없는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한 사례를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사회의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면에 대해서 이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없
고, 나온다 해도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또 누구에게나 빤히 보이는 문제점을 아예 모르거나, 안다
고 해도 서로 쉬쉬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경제대국이자 국민의 의식면에서도 타
인을 배려하고 장인정신이 투철한 선진국으로 불리는 일본 사회의 실상이다.
저자는 일본이 깊이 병들게 된 근원으로 ‘자기 속박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현대 일본을 규정
하는 9가지 키워드(배제 사회, 집단 사회, 억압 사회, 자기 속박 사회, 함몰 사회, 호족 사회, 종교 사
회, 관례 사회, 자멸 사회)로 설명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일본이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나 미래 사회
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직간접적으로 일본의 모
델을 많이 참조한 우리로서는 현재 일본이 겪고 있는 여러 병증 현상을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우리의 미래도 일본의 미래를 닮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일본을 반면교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 차례
머리말 - 자기 속박주의에 대해
1장 배제 사회 - 너는 이제 투명인간 : 죽기 전엔 모른 척, 무라하치부 / 초등학생 20명 중 1명은 이
지메 / 피해 아동의 이중고, 재난 이지메 / 교사의 이지메, 지도사의 실체 / 불타오르는 사이버공간,
사람 잡는 엔조 / 엔조의 주 타깃, 한국 / 피해자를 괴롭히는 나라 / 일본에서 성희롱은 죄가 아니다 /
너를 강간하고 싶어, 일본 여기자들의 수모 / 배제되면 죽는다, 일본의 금기어
2장 집단 사회 - 암묵적 룰입니다 : 정한 사람은 없어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암묵적 룰 / 신입
-2-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사원들의 첫 관문, 꽃놀이 룰 / 어깨에 짊어진 일본식 집단주의, 란도셀 / 폐 끼칠까 가족 죽인 그들,
메이와쿠의 명암 / 차별 당해도 이해가 돼요, 여성 의료계의 침묵 /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우생론에 꽂
힌 사회 / 장애인은 살아갈 이유가 없다, 비뚤어진 인간관 / 구해주면 부담 주잖아요, 극단적 메이와쿠
/ 전체주의,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다 / 결코 환영받지 못한 일본판〈기생충〉
3장 억압 사회 - 일본의 감정선이 위험하다 : 나는 때릴 권리가 있다, 아동학대 / 절대 약자를 향한
주먹질, 간병 폭력 / 길 위의 악마라는 사회 병리 현상, 토오리마 지겐 / 묻지마 범죄의 또 다른 이름,
확대 자살 /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 사건들 / 소녀들을 향한 욕망의 눈초리 / 사회의 무관심이 방조
한, 소녀 사육 사건 / 불안정 사회 일본, 그 폐쇄감
4장 자기 속박 사회 - 변하지 못하는 나라 : 과로사보다 무서운 과로 자살 / 여학생은 도쿄대를 싫어
할까 / 성차별, 도쿄대도 예외는 아니다 / 드라마에만 있는 센 여자 열풍 / 초장기 공연의 나라 / 순수
한 일본인이라는 환상 / 트럼프가 뭘 해도 지지하는가 / 빚을 내더라도 미군 일체화 / 장비 유지 비용
도 없다
5장 함몰 사회 - 반전의 기회가 없다 : 어른이 되기 싫어요, 반경 1미터 세대 / 초식화되는 일본의 젊
은이들 / 취업난이 낳은 은둔자, 히키코모리 / 고령화의 대위기, 2022년이 다가온다 / 빚지고 당겨쓰고,
2021년 경기 절벽 / 정부가 팔고 중앙은행이 산다, 비정상적인 경제구조 / 그래도 국민은 가난하다,
아베노믹스의 실체 / 통계 조작까지, 아베노믹스는 어디로 / 줘도 싫다, 버려지는 집과 땅
6장 호족 사회 - 절대 변하지 않는 카르텔, 정치 : 일본엔 보이지 않는 왕국이 있다 / 누구를 위한 정
치인가, 파벌 정치 / 자질 끝판왕, 어느 대신 / 집단적 아부 정치, 손타쿠 정치 / 정권 교체의 룰, 아오
키 법칙 / 1천 명의 슈퍼 엘리트, 아베 천하를 떠받들다 / 일본 정치에 야당은 없다 / 아베는 절대 변
하지 않는다 / 일본에 과연 촛불은 켜질 것인가
7장 종교 사회 - 왕인가, 제사장인가 : 일본인에게 덴노란 누구인가 / 일본에서는 교황도 교황이 아니
다 / 21세기 일본의 제사장, 덴노 / 일왕가도 인기를 먹고 산다 / 일왕이 휴일을 지배하다 / 불편해도
연호를 쓰는 게 낫다 / 그래도 일왕의 방한은 필요하다
8장 관례 사회 - 늘 그래 왔다는 함정에 빠지다 : 일본은 어쩌다 조작 왕국이 됐나 / 재팬 스트라이크
존의 소멸 / 일본 실패의 패턴, 도시바의 몰락 / 메이드 카페 천국, 아키하바라 / 일렉트로닉 강자에서
보험회사로, 소니의 역변신 / 40퍼센트 쪼그라든 일본, 갈라파고스의 현실
9장 자멸 사회 - 스스로를 가두다 :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인질 사법 / 핵무기는 없어도 핵에 집착하
다 / 자연의 힘에 맞서는 300킬로미터 해안 장벽 / 한국인이라면 범인일지도 몰라 / 일본이여, 소국으
로 회귀하라
10장 일본의 현재 - 그리고 우리의 미래 : 함께 밥상을 차려줍시다, 어린이식당 / 결혼이 아니라 미팅
에서 찾는 인구 해법 / 노인과 외국인도 함께 일하는 회사 / 줄어드는 인구, 민주주의를 위협하다 / 일
본의 미래를 타진하다, 합숙 정치 / 환경과 수익을 모두 잡다, 차 없는 국립공원 / 본토의 식민지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 신생 벤처에 우주여행을 베팅하다
-3-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배제 사회 - 너는 이제 투명인간
죽기 전엔 모른 척, 무라하치부
‘무라하치부’는 마을 전체가 특정 구성원이나 가족을 따돌리는 방식으로 징벌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언
제부터 행해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언젠가부터 촌락에서 징벌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그 면면한 전
통이 현대 일본 사회의 특징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마을의 질서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무라하치부 대
상자가 되면 성인식, 결혼식, 출산, 간병, 집의 증개축, 수해 방지, 제사, 여행 등 8가지 일에서 마을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일손이 절실한 전통적 촌락에서 농삿일에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는, 글자 그대로 마을에서 완전히 없는 존재 취급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결정적인 부분은 마을 공동의 산과 임야 등 생활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땅의 이용 역시 제한된다
는 점이다. 게다가 우물도 사용할 수 없어 사실상 거주하는 마을에서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행위가
제한되는 무서운 처벌이다. 다만 두 가지 경우에는 무라하치부에서 제외된다. ‘사람이 죽었을 때’와 ‘불
이 났을 때’이다. 죽은 사람을 방치하면 시신이 부패하면서 냄새가 날 뿐 아니라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고, 불은 다른 집에도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주와 무사, 농민 등 계급 질서가 뚜렷했던 일본의
봉건적 사회 구조에서 마을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에 대한 처벌은 대개 그 지역을 다스리는 유력자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일종의 통치 수단으로서 무라하치부를 이용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고고학자인 키요유키 히구치는 저서『우메보시와 일본도』(2000)에서 이 같은 주장을 펴기도 했
다.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와 이별하거나 불이 나는 비극이 일어났을 때만큼은 모든 마을 사람이 슬픔
을 공유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어쩐지 본말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기엔 무라하치
부라는 행위가 대상자에게 주는 타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도 법원 판결이 이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1909년 일본 법원은 무라하치부를 통보
하는 행위에 대해 ‘협박’이나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통보’
라는 형식에 대한 것이지, ‘마을의 집단 이지메’ 행위에 대한 판단은 아니었다. 무라하치부 ‘행위’를 처
벌하기엔 그 대상과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던 탓이다. 실제로 인사를 안 한다거나 일을 도와주지 않는
다고 해서 처벌할 수는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법적 판단이 미적지근해서였을까? 무라하치부는 태평
양전쟁 이후에도 쉽게 근절되지 않고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암암리에 이어지게 된다.
현대에 들어서도 무라하치부라는 전근대적 유산은 쉽게 근절되지 않고 있다. 2004년 니가타현에서는
마을 행사에 불참하겠다고 한 촌민을 대상으로 마을의 유력자가 “따르지 않겠다면 무라하치부를 행하
겠다”고 밝힌 뒤 11개 가정에 산나물을 캘 때 사용하는 공용도구 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안은 결국 소송을 제기한 11명에게 220만 엔을 지급하라는 판결로 끝이
난다.
-4-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또 2011년에는 효고현에서 휴대전화 중계기지국 설치를 둘러싼 갈등 끝에 일부 마을 주민에게 ‘개인
적인 교류를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공동절교선언’ 문서가 송부돼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기도 했다.
당시 법원은 공동 여행 적립금을 일방적으로 해약해버린다든지, 연락을 받을 수 없다고 피하는 등 사
회 통념상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이지메’나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법원이 ‘인격권’ 침해라는 점을 명시해 개인의 인격에 대한 공격임을 판단한 것은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일본 국민이 ‘집단의식’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집단에서의 이탈은 곧 사
회적 존립 근거를 잃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선택이라는 잠재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잠재
의식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무라하치부’는 그 단초를 보여준다.
집단 사회 - 암묵적 룰입니다
정한 사람은 없어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암묵적 룰
드라마는 키코가 매회 구청에 찾아가 아이를 언제쯤 공식 인가 보육원에 보낼 수 있을지 구청 직원과
옥신각신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매번 듣는 건 ‘대기 순번이 몇 번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
지 모르겠다’는 말뿐이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유명 사립유치원의 원장은 자신
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는 그녀에게서 뭔가 새로움을 느끼고는 아이의 입학을 권유하는데….
하지만 그곳에서 펼쳐지는 요지경 세상은 아무리 씩씩한 키코라도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엄마들 사이
엔 이미 계급이 나눠진 듯, 모임에서 앉는 자리마저 정해져 있고 지켜야 할 것도 셀 수 없이 많다. 때
가 되면 무엇을 해야 하고,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고… 도저히 적응 안 되는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 속
에서 당찬 이 엄마가 이상하다며 이의를 제기할라치면 날아오는 한마디가 “암묵적 룰입니다”다.
2015년 일본 TBS에서 방영된 〈마더 게임: 그들만의 계급〉이라는 드라마 이야기다. 드라마야 예상대
로 순수한 싱글맘이 좌충우동 불합리한 룰들을 깨나간다는 줄거리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 때문에 우여
곡절을 겪는 주인공과 함께 틀에 갇혀 있던 엄마들이 함께 성장하는 드라마라는 평도 있다. 극단적으
로 보이지만 사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깨지지 않는 불합리한 룰’, 즉 ‘암묵적 룰’의 경우 일본에선
단순히 드라마 속 이상한 유치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포털 사이트에서 ‘입학식’을 치면 연관검
색어로 ‘복장’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입어야 하는 복장에 대한 ‘룰’을 보면 “검은색
이나 짙은 감색 등 어두운 색은 피하고, 되도록 밝은 색의 정장 스타일 옷을 입는다”는 식이다.
‘암묵적 룰’이니 지키지 않는다고 대놓고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만, 다들 그러는데 나만 안 그러기도
참 힘든 사회가 일본이다. 그래서 인터넷상에는 ‘입학식 옷’이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만들어져 있어 정
장 세트를 판매하기도 하고, 그렇다 보니 입학식 옷을 어떻게 마련할까 부담스러워 하는 고민들도 터
져 나온다.
이는 학부모들만 하는 고민이 아니다. 신입 사원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면접 복장이 룰처럼 정해져 있
다. 남성은 어두운 색 양복, 여성도 비슷한 색의 재킷과 치마를 갖춰 입은 정장 스타일이다. 입사한 후
에도 이 같은 복장을 한동안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봄 입사 시즌이 되면 삼삼오오 거리를 오가는 20대
들의 옷차림만 보고도 “아… 신입 사원들이구나” 하고 생각할 지경이다.
-5-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억압 사회 - 일본의 감정선이 위험하다
나는 때릴 권리가 있다, 아동학대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상식보다 자발적 강제성을 더욱 요구하는 여러 가지 룰을 준수해야 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는 결국 개인을 위축시키는 ‘억압 사회’적 특징을 낳는다. 억압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평소에는 일견 질서정연한 틀을 갖춘 집단의 모습을 보이지만 소속된 개인이 그 준거틀을 벗어나 개인
성을 분출할 때 상당한 이상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폭력적 성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
신보다 약한 이를 향해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성(性) 의식 또한 왜곡돼 나타난다.
2019년 1월 지바현의 한 주택 욕실에서 10살짜리 소녀가 숨진 채로 발견됐다. 이름은 미아, 온몸에
멍투성이었다. 범인은 아버지였다. 숨진 당일 오전부터 가정교육을 한다며 아이를 세워놓고 폭행했고,
숨지기 전에는 한겨울임에도 찬물로 샤워까지 시켰다.
일본 사회에 보다 큰 충격을 안긴 것은 미아가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 학교 조사에서 “아버지에게 폭
행을 당하고 있어요. 한밤중에 일어나 발로 차거나 손으로 때립니다. 선생님 어떻게 안 될까요?”라고
적은 설문지를 내는 등 피해를 호소해왔음에도 결국 아버지 손에 숨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
다.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있었음에도 끝내 다시 가정으로 되돌
려 보낸 비극적인 사건이다.
게다가 이를 전후해 일본에서는 심각한 아동학대로 인한 어린이 사망사건이 잇따르면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17년도 아동상담소가 대응한 아동학대 건수는 약 13만 건이다.
10년 사이 3.3배가 급증한 수치다. 또 다른 수치도 있다. 2018년 일본 경찰이 아동학대 신고로 ‘경찰
보호’ 조치한 어린이 수가 4571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2017년보다 16퍼센트, 733명 늘
어난 수치다. 파악되지 않은 아동학대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아이가 사망에 이르는 학대 상황이 연간 수십 건씩 발생하는 원인으로 비뚤어진 훈육관이 꼽히기도 한
다. 미아를 학대한 경우도 아이의 버릇을 고친다는 이유가 따라 붙었는데,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엄
마와 내연남이 훈육을 이유로 8살 여자아이의 손과 발을 끈으로 묶어 방치하고 심지어 이 모습을 스마
트폰으로 촬영하기까지 한 사건도 있었다. 일본 사회의 억압적 성격이 자녀에 대한 강압적 훈육으로
변질됐을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또 집안에서 본인이 받았던 강압적 교육이 자녀에게 전이됐을 가능성이 크고, 몸에 익어 있는 ‘룰’을
따르는 순종적 생활 태도 때문에 표출되지 못하던 억눌린 감정이 자신에게 저항할 수 없는 대상인 아
이에게 ‘학대’라는 방식으로 폭발했을 수도 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일본은 2019년 6월, 부모의 자녀 체벌을 금지하는 내용의 아동학대방지법 등의 개
정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체벌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국제 비정부기
구인 ‘세이브더칠드런 재팬’의 조사에서 일본 성인의 60퍼센트가 체벌을 용인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아사히신문》여론조사에서는 32퍼센트가 체벌을 법으로 금지하지 않는 게 좋다는 답을 내놓았다. 특
히 보수적인 자민당 내에서는 징계권에 손대는 것 자체에 대한 신중한 입장이 강한 편이다.
-6-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자기 속박 사회 - 변하지 못하는 나라
과로사보다 무서운 과로 자살
일본 사회의 특징 중 하나라면 역시 ‘잘 변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변화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크
지 않고, 한번 자리를 잡으면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는 경향이 있는 사회다. 이러한 속성이 오래된 전
통을 만들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예를 보자.
도쿄대를 졸업한 다카하시 마츠리는 2014년 일본 최고의 광고 회사 ‘덴쓰’에 입사한다. 큰 회사에 입
사했지만 다카하시가 트위터에 올린 다음과 같은 글들을 보면, 그녀의 생활이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근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정을 하고, 정말 죽어버리고 싶어.”(2015년 11월 5
일) “하루 20시간인가 회사에 있으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 건지 모르는 지경이 된다.”(2015년 12
월 18일)’
두 달 동안 힘들다는 트윗을 50개 이상 발신한 그녀였다. 그리고 며칠 뒤 크리스마스, 결국 다카하시
는 사원 주택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조사 결과 드러난 다카하시의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10월에는 130시간, 11
월에는 99시간을 초과근무 해, 과로사 기준이라고 하는 ‘월(月) 잔업 80시간’을 매달 훌쩍 넘겼다. 그
리고 근무시간을 축소 신고하도록 한 사실도 드러났다. 지난 한 법정 공방을 거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0개월이 지난 뒤, 그녀의 자살이 ‘업무상재해’, 즉 ‘과로 자살’로 인정받으면서 일본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도쿄대를 나온 엘리트 여사원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일본의 기업문화에 대해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이 문제를 지적하고, 덴쓰의 노동 실태에 대해 전격 조사도 실시됐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2014년 ‘과로사 등 방지 추진법’에 ‘과로 자살’을 따로 규정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다카하시의 어머니는 수기를 통해 “회사를 그만두라고 좀 더 강하게 얘기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했
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그만둠’이라는 높은 벽을 본인은 넘기 힘들었고, 결국
일을 그만두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일을 그만두지 못해 ‘자살한다’는 역설에
이르고 마는 상황, 일에 치이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다. 그 구조에 저항할 힘조차 자기 속박 상태에 빠진 개인에게는 없다.
함몰 사회 - 반전의 기회가 없다
어른이 되기 싫어요, 반경 1미터 세대
일본에서는 1월의 두 번째 월요일을 ‘성인의 날’로 정해, 만 20세를 맞이해 새롭게 어른이 되는 젊은
이들을 성대하게 축하한다. 이때 성년이 된 여성들이 성인식을 기념해 입는 복장이 후리소데다. 후리
소데는 기모노의 일종인데, 사실 이날 한 차례를 빼고는 입을 일이 별로 없어 사기보다는 빌려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빌리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대개는 최저 5만 엔(약 50만 원)에서 10만 엔
(약 100만 원) 정도를 줘야 한다. 여기에 당일 성인의 날을 기념한 촬영 비용 등까지 포함하면 우리
돈으로 200만 원을 훌쩍 넘는 것이 ‘렌탈 후리소데 세트 상품’ 가격이다.
-7-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성인식에 일본 젊은이들이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일본 재단이
2019년 전국 17~19세의 남녀 800명을 조사한 결과 “성인식이 공식 행사로서 필요하느냐”는 질문에
69.8퍼센트, 즉 10명 중 7명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어른이 되는 선언을 빨리 하는 게
싫다는 조사 결과도 함께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일본 민법이 개정돼 성인으로 인정하는 나이를 20세에
서 18세로 낮추면서 성인식을 과연 몇 살에 맞춰 치러야 하는지의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는
데, 이토록 성인식을 중요시하는 일본 젊은이들이기에 당연히 성인식도 빨리하자고 할 것 같지만, 결
과는 정반대였다. 그래도 성인식은 18세가 아닌 20세에 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성인이 되기 위한 여러 준비 과정에 있는 상황,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부담, 고
민이 겹치는 시기에 성인식까지 앞당겨 치르기 싫다는 일본 젊은이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성
인식에 들이는 여러 비용이 부담스럽다면 더더욱 그렇다. 일본 젊은이들이 이렇게 앞으로 남은 시간을
걱정하는 건, 이들이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 안으로만 극히 파고드는 성향을 갖
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늘 가지고 있고,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경제성장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
해 ‘디플레이션 세대’라고도 불리는 일본 젊은이들은 모든 면에서 뭔가를 바꾸기보다는 현상 유지를 원
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러한 세대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이 2013년 유행어 대상 후보에도
오른 ‘사토리 세대’다. ‘사토리’는 원래는 불교용어로 ‘깨달음’, ‘득도’, ‘달관’을 뜻하는 말이지만, 무엇에
도 욕심이 없어 적극적이지 않고, 어떤 것도 하지 않고 세상을 달관한 듯한 일본 젊은 세대의 특징을
표상하는 단어로 곧잘 쓰인다.
일본 청년들의 ‘보수성’ 내지 ‘자기 안착성’은 기본적으로 긴 기간 동안 불황을 겪으면서 나타나기 시작
했다는 분석이 많다. 즉, 앞으로 소득이 늘 것이라는 확신이 약해 긴축적 성향이 강하고, 이러한 성향
이 변화를 지양하면서 내 주변과 테두리 내에서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쪽으로 맞춰졌다는
이야기다. 이들 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자동차를 사지 않는 경향이 꼽히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 세대는 심지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싫어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광고 대행사인
‘JR동일본기획’이 20~79세 사이 성인 2200명을 대상으로 인터넷에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월평균
외출 횟수는 43.6회였지만 20대로 대상을 좁히면 37.3회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40.8회인
70대보다 외출을 하지 않는 20대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20대의 62.3퍼센트는 “자신은 비교적 은
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라고, 35퍼센트는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지낼 수 있는 편”이라고 답했다.
이 정도면 ‘달관 세대(사토리 세대)’가 아닌 ‘달관당한 세대’, ‘강제로 포기당한 세대’라는 말이 맞다. 문
제는 이런 세대적 특징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 일본이라는 국가가 나아가는 방향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국가주의의 유혹〉의 감독 와타나베 겐이치는 일본에 ‘내셔널리즘’이 강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과
거와 비교해 유럽에서 일본인 학생을 보기 어려워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셔널리즘의 특징 중 하나가
관심이 내부로 쏠려 자신과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동질성만 찾는 것이라면, 지금 일본의 젊
은 층은 확실히 ‘국수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8-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호족 사회 - 절대 변하지 않는 카르텔, 정치
일본엔 보이지 않는 왕국이 있다
‘〈다케시타, 아오키 왕국의 붕괴〉’ 이는 2019년 4월 8일, 지방선거 다음날인 《산케이신문》 5면의 머
리기사 제목이다. 시마네 현 지사 선거에서 자민당 시마네 현 국회의원 5명 전원이 지원한다고 선언한
자민당 추천 후보인 오바 세이지가 패배하고, 오히려 시마네 현의회 소속 자민당 광역단체 의원 14명
이 중앙당에 반기를 들고 지원한 무소속 마루야마 다쓰야 후보가 당선된 것과 관련된 기사였다.
다케시타 총리는 1951년 시마네 현에서 정치에 입문해 1989년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6년 동안
지역 출신의 초 거물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지역에서 그를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당연히
지역 정가는 그의 손 안에 있었다. 다케시타파가 지금도 자민당 내 주요 파벌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 양쪽에서 그의 영향력을 알 만하다.
다케시타가 지역에 끼친 영향은 뒤를 물려받은 다른 사람에게도 이어졌다. 앞서 ‘다케시타, 아오키 왕
국’으로 표현되면서 또 다른 축으로 언급된 아오키 미키오는 다케시타 전 총리의 비서 출신으로 현의
회 의원을 거쳐, 다케시타 총리의 요청과 지원으로 참의원에 출마해 유력 정치인이 된 사람이다. 일본
국회는 중의원과 참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인 만큼 양대 축으로서 중의원의 다케시타, 참의원의 아오
키가 시마네 현의 정치 피라미드를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총리 출신의 유력 정치인이 중앙 정계에
‘파벌’을 만들고, 지역에는 ‘왕국’을 건설한 모습이다. 아오키는 이후 아들이 참의원 의원으로 정치에
나섰고, 다케시타 노보루 전 수상의 경우 아들이 없었던 탓에 동생이 그의 뒤를 이었다.
문제는 이렇듯 한 가문과 관련자들이 수십 년간 지역의 맹주로 자리를 지키는 것을 계속 인정하고 선
거 때 표를 던지는 일본 유권자들의 모습이다. 한번 왕국이 자리 잡으면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고 고착
화된다. 일본 국민이 변화에 거부감을 보이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일본의 한
정치평론가는 특히 ‘자민당’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과 지역민들에게 이러한 ‘왕국’의 모습이 강하다고
귀띔했다. 이 같은 사례는 다른 곳에서도 또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정치의 폐쇄성이 얼마나 강한지는 숫자로도 나타난다. 2017년 치러진 중의원 선거 당선자 4명 중
1명은 ‘세습’ 의원이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한편 소속 정당으로 보면 자민당이 96명으로 압도적으
로 많았다. 자민당이 이렇게 세습의원들로 채워지니 이 틀을 바탕으로 한번 ‘파벌’이 성립되면 아버지
와 아들로 대를 이어 파벌을 이어가고, 큰 변화를 가져오기란 쉽지 않은 게 당연하다. 거기에 심지어
파벌 간 나눠 먹기까지 끼어들면 더욱 그렇다.
종교 사회 - 왕인가, 제사장인가
일본인에게 덴노란 누구인가 / 21세기 일본의 제사장, 덴노
2016년 7월 14일 모든 일본 신문의 1면은 한 가지 소식으로 채워졌다. 아키히토 일왕, 지금은 전왕
(前王)이 된 그의 퇴위 의사 표명이 신문 전체를 뒤덮었다. ‘일왕’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은 늘 우리
의 판단과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 사회의 반응에는 일본인의 정신세계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신적 존재’였던 일왕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일본 사회의 성격을 생각할 때 꼭 알아야 하는
-9-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일왕의 존재는, 변하는 듯하지만 기저는 변하지 않는 일본과 너무도 흡사함을 알 수 있다.
2012년 도쿄대에 연구원으로 있을 당시 학교 인터내셔널센터의 주선으로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
누던 자원봉사자가 있었다. 70대의 노신사로 도쿄대에 유학하는 외국인 학생과 연구원들을 상대로 대
화를 나누며 일본에 대해 이야기해주던 분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곧잘 말도 통하고 서로 이해할 만한
부분도 있었지만, 유독 ‘덴노(天皇, 천황)’와 관련된 화두가 나올 때면 분위기가 묘해지던 기억이 난다.
‘천황제’의 문제점이나 과거 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 등을 이야기할라치면, 과민하게 혹은 ‘너는 외국
인이니까 신경 쓸 것 없어’라는 식으로, 어찌 보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게 떠오른다. 일본 내에서
일왕가에 대해 보도할 때 ‘비판적인 논조’가 거의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기자로서 의문이었지만, “당
연한 것 아니냐”는 당당한 태도에 ‘아, 기본적인 인식 자체가 다르구나’ 하고 느꼈었다.
일본의 봉건제와 유럽의 봉건제를 비교해보면, 봉건 영주를 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지배자의 정통
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를 각각 두고 있는데, 유럽에서는 그 존재가 ‘교황’이었고, 일본에서는 ‘천
황’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왕들이 종교적으로 절대적인 존재였던 교황에게 정통성을 인정받고 군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열도의 패자를 원하던 도전자들은 모두 덴노 일가의 인정 속에서 안
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교황과 덴노, 이 둘의 공통점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존재라는 점이다.
현재도 일본에서도 덴노를 일본 신도(神道)의 제1제사장으로 해석하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이는 덴노
가 군림하는 왕보다는 종교적 존재라는 의미가 더 강함을 보여준다.
관례 사회 - 늘 그래 왔다는 함정에 빠지다
일본은 어쩌다 조작 왕국이 됐나
최근 몇 년간 일본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준 무시’, 그리고 임의적인 숫자 대입과 데이터 조작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고베제강을 시작으로 닛산, 스바루, 스즈키, 마쓰다 등의 대형 완성차 업체들
은 무자격자 검사와 연비와 배기가스량 측정 등에서 데이터 조작이 발각됐고, 첨단 섬유업체인 도레이,
대기업 산하 기업인 히타치카세이 등 소재 회사의 부정행위도 잇따라 드러났다. 또 요코하마의 지역
은행은 고객 데이터를 조작해 대규모 부정 대출을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 사회에서 이처럼 한꺼번에
조작 문제가 터져 나오는 현상은 일본 사회의 변화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빠르게 성장을 구가하던 일본 기업들은 1990년대에 들어 버블이 붕괴되면서 혹독한 쇠퇴기를 겪게 된
다. 성장기에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던 ‘생존’해야 한다는 현실은 회사 조직 자체를 폐쇄적으로 몰아
갔고, 어느 정도 부정이 있더라도 조직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논리 속에 눈 감고 넘어가는 문화
를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특히 검사 단계에서 일어나는 부정행위는 제품 제조보다는 완성 후 검사 단
계의 규모를 우선해 비용을 줄이다 보니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도 나온다.
이렇게 한번 부정에 눈 감고 조직문화에 길들여지면 일본 경제가 다시 기지개를 켜더라도 그 습성을
다시 바로잡기가 쉽기 않다. 연비 조작을 저지른 미쓰비시자동차의 경우도 사내에서 공개적으로 문제
가 제기됐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관례라는 이름이었다. 또 발견되고 나서도 부
정 출하를 계속한 사례가 연이어 보고되는 것은 잘못을 알면서도 이를 바로잡을 인력을 투입하는 등의
조치가 곧바로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 10 -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자멸 사회 - 스스로를 가두다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인질 사법
2018년 11월 19일, 도쿄 지검 특수부 수사관들은 당시 무서운 성장세로 세계 1위 자동차 그룹을 노리
고 있던 르노-닛산-미쓰비시의 최고경영자인 카를로스 곤 회장을 공항에서 체포했고, 회장의 신병이
확보되자 곧바로 회사와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회장의 체포, 그리고 회사에 대한 압수수
색이 진행되는 긴박한 상황. 여느 회사라면 상황 파악에 허둥지둥할 테지만, 닛산은 당일 오후 6시 압
수수색을 당하는 와중에 “곤 회장에게 여러 건의 중대한 부정행위가 발견됐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밤 10시, 닛산의 일본인 사장 사이카와 히로토는 기자회견을 갖고 “권좌에 오래 앉아 있어 폐
해가 나타났다”며 곤 회장을 직접 겨냥해 15분간 비판의 날을 세웠다.
곤 회장의 추락은 급여 축소 신고가 직접적인 방아쇠가 됐지만, 결국 그 이면에는 프랑스인 대표와 일
본인 자동차 회사 임원 간의 갈등, 그리고 르노의 틀에서 벗어나 일본의 닛산으로 돌아가려는 큰 힘이
작용했다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거기에 폐쇄적인 사법 시스템이 작용하면서 일본의 배타적인 문화를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다. 도쿄 지방검찰청 특수부는 곧 회장을 하네다공항에서 체포한
뒤 20일간 조사를 벌여, 2011년부터 2015년까지 48억 7,000만 엔의 보수를 기재하지 않은 혐의로 일
단 기소했는데, 논란이 된 지점은 과연 임원의 보수가 ‘중요 사항’이느냐는 것이었다.『니혼게이자이신
문』은 ‘중요 사항’을 규정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정의가 애매하다고 전했다.
검찰은 곤 회장을 처음 기소하면서 2011~2015년의 허위 기재 사항만 적용하고, 2016~2018년에 대
해서는 더 조사해야 한다며 곤 회장을 ‘재체포’했다. ‘재체포’는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로, 이미 구
속된 피의자에 대해 더 조사할 사항이 있다며 별건 혐의로 구속기간을 연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체포
된 곤 회장은 그 후 20여 일 만에 5억 엔의 보석금을 내고 다시 석방됐다. 하지만 정상적인 법정 판결
로 가려질 줄만 알았던 곤 회장에 대한 재판은 2019년 12월 해외 탈출이라는 전대미문의 결론으로 막
을 내렸다. 레바논으로 탈출 후 기자회견에 나선 곤 회장은 “자백만 하면 끝내겠다고 했습니다”라며
일본 검찰의 수사 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물론 변호사 조력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다. 얼기설기
짜맞춰진 퍼즐의 마지막 조각으로 ‘자백’이라는 구시대적 수사 수단을 강요한 일본 검찰이다.
곤 회장의 사건 수사 과정은 이처럼 일본이라는 사회가 폐쇄성을 넘어, 난폭하다고 할 정도로 배타적
인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외국인 회장을 몰아내기 위한 회사 내 일본 임원들의 움직
임, 일본 회사로서의 옛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는 듯 이에 맞춰 움직인 일본 검찰. 도쿄 지검 특수부의
속성상 곤 회장의 체포가 법무성을 통해 총리실에 보고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면서 일본 정부 전체
가 ‘프랑스’의 닛산이 아닌 ‘일본’의 닛산을 위해 움직였다는 의심이 짙어졌다. 이런 총체적인 흐름은
일본 사회의 본질에 대해서 서방의 미디어가 새삼 깨닫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음은 물론이다.
자신들의 형사 사법 시스템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던 일본으로서는 곤 회장 수사를 통
해 해외 언론의 비판을 받고서야 얼마나 불합리한 부분이 많은지 알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호사
조력’ 등 기본적인 인권 보호를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 곤 회장의 축출에 앞장섰던 닛산 자동차의 사이카와 사장은 본
인 또한 수억 원의 보수를 부당하게 챙긴 사실이 드러나 1년도 안 돼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 11 -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물론 그를 향한 검찰의 체포나 수사는 없었다.
일본의 현재 - 그리고 우리의 미래
함께 밥상을 차려줍시다, 어린이식당
변화가 느리고 쇠락의 기미가 뚜렷한 일본이지만, 내부에서는 무너지는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틀기 위
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1억 총활약 사회’, ‘전(全) 세대형 사회보장’ 등을 외
치며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러한 정치 슬로건식 분위기 잡기보다는 각 사회 단위에서 행해
지는 작은 실천들에 더 눈길이 가는 건, 결국 일본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실마리는 현장에서 뛰는
이들의 움직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붕괴에 대처하기 위한 현장의 노력, 현재 일본의 모습이지만, 곧
우리의 고민이 될 수도 있는 사안들에 대해 일본 사회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본다.
일본의 어린이 빈곤율은 얼마나 될까? 2014년 OECD 조사 결과 15.7퍼센트에 달한다. 총 34개의
OECD 회원국 중 25위 수준으로 선진국을 자부하는 일본으로서는 뼈아픈 수치다. 참고로 한국은 9.4
퍼센트다. 아이들이 식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아직도 문제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기도 하다. ‘고도
모식당’이라는 곳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글자 그대로 ‘어린이식당’이다.
“바나나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애가 있다는 거예요. 충격이었죠. 21세기 일본에 결식아동이라니… ” 이
는 2010년 일본 최초의 어린이식당을 연 곤도 히로코에게 식당을 시작한 이유를 물었을 때 나온 첫
마디였다. 채소 가게를 운영하던 곤도는 주변 학교의 선생님에게서 앞에서와 같은 말을 듣고 ‘내가 뭔
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채소 가가에서 남은 부식을 이용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밥을 해 먹여보자.’라고
생각했다.
고도모식당이 문을 여는 날은 1주일 중 목요일 하루다. 음식을 만들어 중고생까지 100엔, 우리 돈으로
1,000원 남짓이면 밥을 사 먹을 수 있게 했다. 공짜보다는 대가를 당당하게 지불하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른에게는 500엔을 받는다. 메뉴는 곤도가 들여온 야채와 식재료 기부 등을 통해 어떤 재
료가 확보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모두 같이 둘러앉아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여기에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생각. ‘보통의 결식아동 대책이라면 1주일에 한 번은 부족하지 않
을까?’ 하지만 조그만 채소 가게 사장이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그 정도였다. 그리고 ‘내
가 할 수 있는 범위’라는 마음가짐은 이후 어린이식당의 중요한 운영 기조가 된다.
목요일, 곤도의 어린이식당은 오후 5시 반에 문을 열지만, 이미 식당은 한참 전부터 어린이들, 또 아
이를 데리고 같이 밥을 먹으러 온 엄마들로 북적거렸다. 가게 뒤쪽 골방은 이미 초등학생들로 가득 찼
다. 카드놀이를 하더니 시간이 되자 식판도 서로 챙겨주며 떠들썩하게 밥을 먹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에서 시행되고 있는 여러 결식아동 대책의 가장 큰 맹점은 혜택을 받는 누군가를 특징짓게 한다는 것
이다. 쿠폰을 발행해도 이를 들고 식당에 가 밥을 사 먹기에 눈치가 보이고, 결식아동인 것을 주변에
알리는 듯한 마음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린이식당에서는 달랐다. 누가 결식아동인지, 누
가 밥을 잘 못 먹고 다니는지 구별은 없었다. 그냥 우르르 몰려와 떠들며 즐겁게 밥을 먹는다.
2018년 기준으로 일본 전국에 있는 어린이식당은 모두 2300여 곳으로, 모두 곤도처럼 순수 민간 차원
- 12 -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에서 운영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우리와 같은 대규모 시민단체 운동이 거의 없고, 특히 기부 등 민간
차원에서 복지 지원을 하는 문화가 그다지 정착돼 있지 않음을 감안할 때 상당한 숫자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시민단체 ‘어린이식당 네트워크’ 측은 어린이식당의 성공 이유를 앞서 밝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에서 찾았다. 일본 전국의 어린이식당은 대개 1주일에 1~2번, 2주일에 1번 정도 문을 연
다. 그리고 운영은 모두 기부와 자원봉사로 이루어진다.
어린이식당 네트워크에서 이 작은 공간을 통해 찾는 의미는 2가지다. 하나는 ‘어린이 빈곤 대책’, 그리
고 또 하나는 ‘지역 교류의 거점’이다. 아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다 보니, 어린이식당은 단순히 배
고픔만을 해결하는 장소를 뛰어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역의 어른과 어린이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
럽게 우리 동네 아이들이 누군지 알고, 서로 관심을 두는 장소가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곳에 따라서
는 식당이 열리지 않는 날엔 공부방 등 또 다른 형태로 운영되면서 어린이들에게 개방되는 곳도 있다
는 설명이다. 그야말로 ‘우리 아이들을 우리가 키우는’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울
림 하나가 일본 전체로 퍼져나가, 주변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착한 메아리’를 만들어가고 있
는 어린이식당은 새로운 차원의 민간 복지 운동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 13 -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군가 당신의 방황에 함께하기를 (0) | 2020.05.12 |
---|---|
1분 안에 말하라 (0) | 2020.05.12 |
신친일파 (0) | 2020.05.12 |
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0) | 2020.05.12 |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 (0) | 2020.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