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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by Casey,Riley 2020.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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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회사가 아닌 또 다른 무대, 회사원이 아닌 또 다른 내 모습, 지겨운 내일이 아닌 기
대되는 내일을 꿈꾼다. 하지만 ‘할 줄 아는 게 지금 하는 일밖에 없어서’ 이것 말고 달리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망설인다. 이 책은 또 다른 나를 깨우고 싶어 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일
상 새로 고침’ 안내서로, 20년 차 카피라이터 김강미가 앞으로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지금까지의
일상을 바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 Short Summary
매일 내가 근무하는 시간에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해야 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까? 한두 시간 딴청을 피우거나 하루 이틀 떠나는 휴가가 아닌 이상, ‘일’이 빠진 일상을 생각해본 적
은 대부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는 일터를 떠나며, 무엇보다 일만 하고 살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길다. 그러므로 일밖에 할 줄 모르고, 일 이야기를 빼면 할 말이 없고, 직업이 아닌 다른
말로는 나를 소개할 수 없다면, 내 삶에서 무엇이 빠져 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아마도 그 답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는 20년 차 카피라이터인 중년의 저자가 인생에 급제동을 걸고 자발적
백수가 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위해 묵은 일상을 하나하나 새로 고쳐나가는 이야기다. 저자가 말하는
‘일하지 않는’ 삶은 최소한의 생계비도 벌지 않겠다는 포기가 아니다. 일이 전부인 인생을 더 이상 살
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용기를 기르는 도전이자, 내가 좋아하는 것들
로 인생을 채워나가려는 모험이다.
회사가 아닌 또 다른 무대, 회사원이 아닌 또 다른 내 모습, 막막한 내일이 아닌 기대되는 내일을 꿈꾼
다면 일상을 새로 고쳐야 할 때다. 일 말고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그래서 달리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들에게 이 책이 조금이라도 도움 되길 바란다. 일 말고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일 말고 다른 것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용기를 내어 나에게 일이 아닌
다른 기회를 주면 좋겠다. 우리 모두 내가 하고 싶은 것이면 그게 무엇이든 마음껏 하려고 욕심부리는
철없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그날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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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 차례
프롤로그 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1단계 일상 새로 고치기
번아웃에 빠진 날 / 스무 살의 내가 그렸던 나는 사라졌다 / 습관이라는 공포 / 나는 없었다 / 혼자 먹
는 점심 / 독서의 즐거움은 개뿔 / 혼자 보내는 수술 전날 밤 / 다 잊어버려 / 열심히 사는 것이 지겨
워서 / 나만의 레퍼런스
2단계 일상 새로 느끼기
바쁘면 사람 노릇 하기 힘들다 / 고작 3개월 / 일보다 더 중요한 일 / 인생에 좋은 날은 얼마나 될까 /
화장을 지우다 / 자꾸 무언가가 되기 / 취미에 관하여 / 나를 먹이는 일 / 다정한 말 한마디 / 눈물이
흐르는 대로 고개를 들어요
3단계 일상 새로 다듬기
네가 그렇게 살지 몰랐어 /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기에 / 어쩔 수 없는 마음 / 내 몸과 마주해야
할 때 / 너 아직 안 죽었구나 / 그때도 외로웠다 / 월요일이 사라졌다 / 용돈 받는 날 / 프리랜서의 휴
가 / 억지로 안 되는 일
4단계 일상 새로 채우기
또 다른 나를 깨우는 일 / 오므라이스 냄새 / 언어의 정원 / 보잘것없지만 소중한 / 좋아하는 너무 좋
아하는 / 작가가 되던 날 / 마흔 살의 도쿄 취업 도전기 / 무용한 것들 / 운을 높이는 가장 멋진 방법
/ 보이지 않았던 것들
5단계 일상 새로 즐기기
인연의 끝이란 / 결혼은 다음 생에 / 얼마면 되니? / 뉴욕에서 한 달 살기 / 무릎 담요 같은 하루 / 딸
은 그렇게 엄마의 친구가 된다 / 야구는 인생과 같다 / 만약에 말이야 / 나의 그녀들에게 / 가벼운 희

에필로그 많은 것들이 잘 지나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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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1단계 일상 새로 고치기
번아웃에 빠진 날
“이건 다 네 책임이야. 이렇게까지 일을 몰아온 건 너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었어.” 보기만 해도 정나미
가 뚝 떨어지는 그분의 도톰한 입술에서 튀어나온 첫마디였다. 새빨간 크레용으로 얼굴 위에 역삼각형
을 그리면 정확히 아래 꼭짓점에 위치할 그의 주둥이에서 일주일 만에 나를 향해 날아온 비수였다. (그
간 온갖 핑계로 그를 피해온 내 탓도 있다.)
무조건 ‘네 책임’이라고 했다. 지금 일어난 모든 사태를 이 잡듯이 요목조목 짚으며 마지막에는 반드시
“네 책임이야”라고 덧붙였다. 계속해서 듣다 보니 정말 ‘내 책임’인 것도 같았다. 진행하고 있는 일도
많고 팀원들도 만사가 귀찮다는 듯 맥 빠진 눈빛을 보이는데, 또 일을 덥석덥석 물고 온 것도 모자라
서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내 뜻대로 일을 밀어붙인 것은 물론, 마지막까
지 객기에 가까운 자존심을 놓지 못한 것도… 다 내 잘못이고 내 책임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분과 10분 정도 간격을 두고 힘없이 회의실
을 나와 내 자리로 돌아왔다. 따뜻한 봄 햇살이 눈치 없이 내리쬈다. ‘아, 지친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마음 편히 밥 한 끼가 먹고 싶어졌다.
팀원이자 직속 후배인 A와 회사 근처 횟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소맥으로 바짝 마른 입안을 축이
고 싱싱한 회 한 점을 초장에 찍어 억지로 몇 점 쑤셔 넣었다. “힘들다 힘들어. 일도 회사도…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지. 전부 내 마음 같지는 않아도 할 만큼 했는데… 이제는 숨이 막힌다.” 나 못지 않
게 깊은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내가 내민 잔을 말없이 받던 후배 A는 나를 물끄러미 본다. 그 눈빛엔
분명 억울함과 원망이 서려 있었다. “팀장님만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저희는요…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았을까요?” 순간 술이 번쩍 깼다. 그런 거였다. 내 잘못이라는 게, 내 책임이라는 게.
새로 맡은 그 프로젝트는 누가 봐도 거절했어야 했다. 다른 팀장들이 고개를 돌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악하지 않음이 미덕은 아니었다. 사회에서 최소한 이만큼 뒹굴었으면 영악함은 실력보다 생
존을 위한 필수 덕목이 되어야 한다는 걸 나는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니, 이건 눈치의 문제가 아니
라 나의 절대적인 부족함이 분명했다. 소위 출세라는 과업 달성을 위한 사회성의 결여이며, 나를 믿고
따르는 팀원을 향한 민폐였다.
그다음 날, 나는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이미 바닥
을 드러내고 있는 나를 위해서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욱더 노력해야 하는, 다음 과제가 언제나 준비
되어 있는 그런 삶을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천직이라고 굳게 믿었던 이 일을
향한 어떤 구차한 변명과 미련도, 매번 발목을 잡았던 징글징글한 애정도, 이제는 더 이상 가슴속에서
요동치지 않을 거라는 또렷한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 충분히 활활 불타올랐고, 이제 남은 것은 바람
불면 날아가고 말 새하얀 잿더미뿐이라며 나는 스스로 절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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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그 후 회사라는 곳에서 내 몸과 마음의 짐을 모두 옮겨 오기까지 딱 한 달이 걸렸다. 그간의 세월과
역사가 담긴 손때 묻은 산물들을 커다란 슈트 케이스 하나에 모두 구겨 담았다. 나는 회사라는 동네와
그동안 얽힌 모든 금전 관계를 정리하고, 다양한 버전의 희로애락을 주고받던 돈에 주민들과 몇 차례
의 눈물겨운 이별 의식을 치른 후, 새 동네로 왔다.
그리고 소위 출근하지 않는 사람, 때 묻지 않은 하얀 손의 주인공이 되었다. 내일부터 뭘 할지 딱히 계
획이 없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되지도 않는 계획 따위는 당분간 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그냥 일
이 없는 새 동네에 적응해보기로 한다.
스무 살의 내가 그렸던 나는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광고 회사에 입사한 것은 순전히 나의 겉멋과 뻔뻔한 오버 액션 덕분인지도 모
른다. 전문직이니까, 제법 그럴싸해서, 대기업 공채를 뒤로하고 광고 회사에 덜컥 지원했다. 그리고 최
후의 당락을 결정짓는 임원 면접 날, 내가 얼마나 이 일을 간절하게 하고 싶은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꽤 드라마틱하게 어르신들에게 어필했다. 그 순간 아마도 그분들의 치기 어렸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내게 반짝 투영되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날의 홍일점이었던 내게 심적으로 플러스 점수를 더해줬고,
결국 치열한 경쟁률 속에서 합격이라는 행운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문학을 전공한 덕에 4년 동안 어찌
어찌 갈고닦은 글재주로 실기 시험도 무사히 통과하고, 나름 주목받는 신입 사원으로 회사에서 가장
뜨거운 팀에 배치되는 기적까지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시련의 시작이었다. 여유롭게 일을 즐기는 듯하지만 찬바람이 부는 프로들 사이
에서 나는 한없이 주눅 들었고, 그것을 티 낼 틈도 없이 쏟아지는 일들 앞에 바싹바싹 말라가고 있었
다. 그 시절 나는 하루하루가 절망이고, 나의 무능함을 매 순간 확인받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회의 시간마다 숙제 검사받듯 뒤죽박죽 엉망인 아이디어와 습작에 가까운 카피들을 쏟아내야
했고, 속을 알 수 없는 선배들의 차가운 미소와 어색한 침묵의 순간은 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당시 나의 정신적인 멘토였던 동종 업계 선배의 조언은 힘든 순간마다 내게 버틸 힘을 줬다. “지금이
아닌 2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라. ‘그때의 내’가 되기 위해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역으
로 생각해보라. 하루하루 그것을 하다 보면 어느덧 당신은 20년 후의 내가 되기 위해 반드시 경험해야
했던 20대의 행보를 걷고 있으리라.” 매일 아침 쏟아지는 잠을 가까스로 밀어내면서, 회의 시간이 다
가올수록 꽉 막혀오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불 꺼진 사무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눈물을 훌쩍이면서,
나는 수없이 되뇌었다. 그리고 그 주문은 내게 분명 효력이 있었다.
나는 다른 동기들보다 제법 굵직한 기회가 많았고, 그 덕분에 몇 달 앞서 승진을 하고, 더 좋은 회사로
터를 옮긴 소위 날고 기는 선배들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진흙탕 속에
서 온갖 발버둥을 치고, 때론 영혼도 아낌없이 팔아가며 나의 30대를 고스란히 상납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좀 슬프지만 누군가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
연코 “노!”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마흔을 앞둔 어느 날, 나는 이 사회 속에서 갈 길을 잃은 미아가 되었다. 스무 살의 내가 마음
속에 그렸던 ‘나’는 내 곁에서 영영 사라졌기 때문이다. 회사라는 문을 나오는 순간, 어제까지 내 손을
잡고 이끌어주던 마음속의 ‘나’는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분명 작별을 고해야 했다. 아울러,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며 감사의 말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해주고 견디게 해줬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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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나를 미치게 하고 아프게 했던 ‘나’에게. 참으로 힘들었던 순간에도 나를 떠나지 않았던 ‘나’에게. 그동
안 정말 고마웠다고. 그리고 아낌없이 사랑했었다고.

2단계 일상 새로 느끼기
인생에 좋은 날은 얼마나 될까
비가 온 다음 날의 하늘은 화장을 말끔히 지운 소녀의 뽀얀 얼굴처럼 맑았다. 저 눈부시고 영롱한 얼
굴에 다시 분을 덧칠하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출근 시간대임
에도 불구하고 나는 청바지와 후드티를 꺼내 입고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아홉 시를 갓 넘긴 아침은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한 달 전에 오픈한 길가의 카페는 부지런히 커피를
내리는 청춘들의 풋풋한 웃음소리와 시큼한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물오른 봄날의 꽃
처럼 생기가 피어올라 있었다. 미소가 정겨운 알바생이 요리조리 주전자를 돌려가며 정성껏 내린 커피
한 잔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좋은 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 중에 좋
은 날은 얼마나 되었을까? 뒤돌아보면, 내게 좋은 날이란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실수를 몇 번 줄인
날, 계획대로 그럭저럭 풀린 날, 내가 어제보다 덜 한심해 보이는 날, 꾸지람보다 칭찬을 몇 모금 더
먹은 날, 골칫덩어리 같은 일들이 실마리를 찾은 날, 퇴근길의 발걸음이 무겁지 않은 날, 늘 복잡하고
멍한 내 머릿속에 약간의 평온이 찾아온 날….
나보다 타인을 의식하고, 내가 아닌 타인의 잣대에 휘둘리고 평가되었던 내 지난날들은 결코 완벽하게
좋을 수 없었다. 내가 좋아야 하는 게 아니라 남이 좋아해야 좋은 날이 되니까. 나의 좋은 날의 중심에
는 내가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나를 위한 좋은 날들을 만들면 그만이지만 나를 위해 좋은 게 무엇인지
도,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도, 솔직히 까마득했다.
우선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자. 이유나 결과 따위는 무시하고,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스스로에게 떼를 쓰자. 저걸 하게 해달라고. 무조건 하고 싶다고. 그걸 하면서 하루가 가고 또 새로운
하루가 기다려졌다면 그날이 바로, 좋은 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자꾸 무언가가 되기
나는 더 이상 한 우물만 파는 인생을 살지 않기로 했다. 자꾸 무언가가 되기로 했다. 그렇게 계속 무언
가가 되고 또 되면서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그 출발은 무언가를 하나씩 하는 거였
다. 지금까지 내 일이 아니라고 등 돌리며 살아왔던 것들,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거리를 두
었던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씩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결과와 상관없이 끝까지 완
수하고 이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도전’이라는 거창하고 부담스러운 말도 필요 없었다. 단순히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만의 두둑
한 배짱과 언젠가 쓸모를 발휘할 숨은 재능이 될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드
는 그 평범한 시간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즐겁게 하면서 사는 것만으
로 인생은 꽤 근사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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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목표에 나를 가두지 않겠다는 결심은, 무엇이든 가벼운 마음으로 해볼 수 있는 자유를 갖게 한
다. 내가 하나의 정체성(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듯, 오
로지 성공만 바라보며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무엇보다 성공은 얻을 수 있는 것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때가 되면 그냥 오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아이디어를 낸다. 그리고 모든 일의 시간
과 끝에 ‘무심코’와 ‘어쩌다’라는 느낌표를 찍는다. 매번 ‘무심코’ 시작한 일이 ‘어쩌다’ 잘되었다는 총평
을 하며 나의 일상을 기특해했다. 때때로 대단한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을 때, 생각보다 대단한 결과
를 얻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참고 이겨내야 하는 미션이 아니므로 어려움에 봉착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루 끝에서 ‘오늘도 괜찮았네’라고 생각하며
만족하는 밤을 이어가고 이어가면 그만이다.
나를 먹이는 일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생활하다 보면 요리는 나만의 재미난 오락이 된다. 처음엔 라면을 끓이고
즉석 밥을 데우는 게 전부였는데 점점 간단한 반찬거리를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나를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몇 시간 동안 부산을 떨어 완성한 음식을
먹어줄 사람이 고작 나뿐이라는 게 시시했다. 내게 요리를 하는 행위는 누군가를 먹이기 위한 것이었
다. 그래서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혼자 밥을 먹기 위해 네모반듯한 식탁 위에 테이블보를 깔고 구색을
갖춘 그릇에 차려내는 근사한 한 끼를 순전히 오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넓적한 용기의 즉석 밥과 도시락 크기의 반찬 통이 그대로 식탁에 오르고, 국물
로 얼룩진 냄비가 국그릇이 되는 나의 밥상에 짜증이 났다. 한마디로 초라함을 넘어 궁색해 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구도 아닌 나를 먹이는 일에 이렇게 홀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좋은 것을 제대로 먹여주자고 결심했다. 요리를 해본 적도, 잘할 자신도 없었지만 일단 수년
간 식품 회사 광고를 담당해온 이론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만한 요리책 하나를 샀다.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 인사들의 요리책이 차고 넘쳤지만, 나는 일본에서 사내 식당으로 유명한 『타니타 직원
식당』을 골랐다. 재료가 간단하고 특별한 조미료도 필요 없고 무엇보다 건강식 위주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먼저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확인하고 책을 뒤적여 바로 요리할 수 있는 오늘의 메뉴를 정했다. 그리고
천천히 재료를 손질하고 아끼던 냄비를 꺼내 레시피를 따라 차근차근 요리했다. (그릇과 냄비 욕심이
많은 절친을 따라 하나둘씩 사 모은 냄비와 그릇 들이 어느새 싱크대 위의 커다란 선반을 꽉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처음 도전한 아스파라거스와 새송이버섯을 볶은 요리는 참기름 덕분인지 윤기를 내며 맛깔스러워 보였
고, 은은한 하늘색 사기 그릇에 담긴 시금치 된장국의 자태는 단아했다. 쓰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두
기만 했던 테이블보를 꺼내 식탁 위에 깔고, 손잡이에 나뭇잎 모양이 새겨진 은빛 수저를 가지런히 놓
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로지 나를 먹이기 위한 근사한 밥상을 차렸다. 내게 비싼 옷을 사준 것보다
더 흐뭇하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혼자 먹는 밥에는 추억이 없다고 생각했다. 밥이라는 것은 달그락달그락 서로의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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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치는 소리를 들으며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내게 혼자 먹는 밥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요리 과정은 즐거웠고, 먹는 내내 흐뭇했다. 그렇게 나만의
추억이 생겼다. 나를 먹이는 일, 생각보다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3단계 일상 새로 다듬기
그때도 외로웠다
“둘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만큼 외로운 건 똑같아요.” 청춘들의 꿈과 사랑을 그린 일본 영화 <황색 눈
물>에 나오는 대사이다. 간절히 짝사랑하던 남자 쇼이치와 첫날밤을 보낸 후 돌아서는 토키에의 뒷모
습은 참으로 외로워 보였다. 그 순간, 회사 안에서 그토록 원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녀처럼 외롭고 허
전했던 내가 떠올랐다.
특별히 직장 생활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새로 만든 사내 동호회에서 회장을 맡기도 했고, 지긋
지긋한 야근을 끝내고 아직도 회사에 남아 있는 후배들을 모아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고, 친한 선배들
의 생일도 꼬박꼬박 챙겼다. 그러나 나는 크고 작은 위기의 순간에 늘 혼자였다. 그때마다 그들은 처
음 만나는 사이처럼 낯설었고 서늘한 거리감마저 느껴졌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었고,
내가 믿었던 그 사람은 나를 믿지 않는 듯했다. 나는 참으로 외로웠고, 그런 그들을 마음속으로 원망
했다.
전체 회식 날 갑자기 월차를 내거나, 퇴근 시간쯤에 일부러 외근을 나가거나, 일을 핑계로 온종일 회
의실에서 나오지 않는 등 숱한 고립의 순간을 자처하면서 모든 게 다 내 탓이라는 자학 속으로 빠져들
었다. 고독은 억눌린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했지만, 그때의 내 고독은 어디에도 속마음
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차가운 감옥 속 처절한 외로움이었다.
일이 사라진 나의 일상은 혼자 시작하고 혼자 끝내는 날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
겠다고 다짐했으니 혼자 보내는 시간은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가끔 누군가와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저 동네 카페에 들어서면 여기저기 팝콘처럼 터져 나오는 그 흔하디흔한 수
다가 간절했다.
회사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면 그들은 “이따가 전화할게”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고, 잠시 후에 ‘별일
있는 건 아니지?’라는 간결한 문자로 자신들의 도리를 다해야 했다. 그럴 때면 ‘혼자’라는 새삼스러울
일 없는 사실에 쓸쓸해졌다. 그러나 이 순간의 쓸쓸함이 단지 마른 침을 삼키며 근질근질해진 내 입술
의 운동 부족일 것이고, 퇴근 시간까지 참았다가 누구든 붙들고 폭풍 수다로 떨쳐내면 그만이었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고 했지만, 어느 순간에는 같은 감정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고독은 외로움이 되고 외로움은 고독이 된다. 나는 여전히 고독과 외로움의 혼돈 속에서
살고 있다. 어쩌다 이른 저녁부터 마신 술에 뜬금없는 후회들로 가슴이 미어지다가 또 외로워지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주문을 외우듯 중얼댄다. “그때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잖아.”
억지로 안 되는 일
일상을 새로 고치기 시작한 이후 내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망설임 없이 거절을 할 수 있게 되
었다는 것이다. 프리랜서 주제에 일을 거절한다는 것은 다음을 약속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위험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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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거절을 한다. 거절의 이유는 두 가지다. 해도 안 될 것 같은 일과 하
기 싫은 일, 즉 억지로 안 되는 일이라면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 정도 버티고 나면 직감적으로 ‘웬만하면 안 하는 편이 좋겠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감’이라는
녀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그럴 때면, 이제 웬만해서는 잘 뜨거워지지도 않는 열정과 의욕이 더
차갑게 얼어붙는다. 노력에도 밀고 당김이 필요하고 노력만으로 빛나던 시대가 지났다는 걸 알게 된
탓이기도 하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오래전에 끊긴 인연을 어쩌다 다시 만났다고 해서 반가움에 호들갑 떨지 않으
며, 뜻밖의 일로 멀어진 인연이 아쉬워 애써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스쳐 지나가고 떠나갈
인연이라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다.
늘 고대하던 ‘기회’라는 녀석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기회가 주어졌다고 앞뒤 가리지 않고 덥석 잡지 않
는다. 이것이 기회인지 위기인지, 나를 중심에 놓고 앞뒤 상황을 찬찬히 따지게 된다. 이런 나를 보며
누군가가 나이 먹더니 변했다고 했다. 예전보다 표정도 소심해지고 두둑했던 배짱도 사라졌다나. 또
누군가는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데, 그렇게 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겠냐며 걱정의 쓴소리도
했다.
물론이다. 나는 예전보다 소심하고 조심스러워졌고, 내 젊은 날의 해시태그였던 배짱과 확신은 분명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깨달은 게 있다. 삶은 억지로 확신을 불어넣고 완벽해지려고 애쓸수록 힘들어
진다는 사실이다. 한낱 인간인 우리는 모두 약점과 실수투성이고, ‘나는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는 불편
한 진실을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는 자연의 섭리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진작 그랬다면, 사는 게 조금은 만만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내 탓도 아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애쓰기보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꼭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내가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숙한 자신감과 느슨한 여유
를 키우려 한다. 이제야 내 삶에 초대된 이 일상들을 더 이상 억지로 해도 안 될 일 때문에 놓치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다.

4단계 일상 새로 채우기
또 다른 나를 깨우는 일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래 좋아. 이제부터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그럼 뭘 하고 싶은 거야?’ 주변에선 잘하는 걸 하라고 충고하는데, 내가 잘하는 게 뭐였는
지 되묻고 되물을수록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 가슴이 꽉 막혔다.
내가 분신처럼 끼고 다니던 노트를 펼쳤다. 이 노트는 마음에 와 닿았던 각종 글귀, 짧은 메모에 가까
운 일기, 낙서들로 가득했다. 몇 장을 뒤적이다가 나는 보라색 펜으로 또렷하게 써 놓은 몇 줄에 시선
이 멈췄다. ‘그림을 그리자. 글과 그림이 가능하다면 하고 싶은 걸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에
턱을 괴고 고민에 빠진 여인의 일러스트가 어설프게 그려져 있었다.
그랬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전국 사생 대회에 나가서 특상을 받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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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음대를 나온 엄마 손에 이끌려 미술 학원 대신 피아노 학원에 보내졌지만, 그림에 대한 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철마다 화단에 피는 꽃들을 그리던 미술반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가장 존경
했던 미술 선생님을 따라 전시회를 다니기도 했다. 여고생이었던 나는 용돈을 모아 질이 좋은 수입 스
케치북을 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이불 속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그림을 그렸다.
그날 바로 서점으로 가 몇 권의 일러스트 책과 스케치북을 샀다. 아주 오랜만에 스케치북을 펼치고,
유럽 출장 때 케이스가 예뻐서 덜컥 샀던 색연필을 꺼냈다. 가지런히 누워 있는 24색의 색연필들이 무
지개처럼 아름답게 빛났고, 그 빛은 고스란히 내 가슴속으로 투영되었다. 그렇게 나는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내 우주 속에서 까맣게 지워졌던 또 다른 나를 깨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녀 시절의 꿈이
내 남은 생을 책임질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는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소위
남들이 알아주는 그런 일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거나 성공의 지표가 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하기에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보다 더 번듯해 보이고, 회사를 떠난 지금의 나를
더욱더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해줘야 했다.
결국 무대를 바꿀 뿐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많은 것을 기꺼이 내려놓지 않으면 또 다른 나를 깨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약간
의 분노와 약간의 허영심, 그리고 이기적인 고집과 집착에 가까운 그런 마음의 감정들. 그것들을 ‘용
기’라는 이름으로 떳떳하게 꺼내야 했다. 나의 빨간 머리 앤은, 잊혔던 나를 깨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살아가도 그만이라고. 그래서 당신이 조금 더 즐겁고 조금 더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나를 흔들며 토닥였다.

5단계 일상 새로 즐기기
야구는 인생과 같다
‘아버지와 친해지고 싶어서요.’ 이 나이에 이런 말을 내뱉기가 오글거렸지만… 어느 야구 열성 팬이 자
신의 페이스북에 ‘야구를 보게 된 이유’를 댓글로 달면 여분으로 생긴 3루석 표를 주겠다는 깜짝 제안
에, 내가 쓴 댓글이다. 그는 내게 ‘좋아요’와 함께 기꺼이 표를 줬다. 물론 내가 야구를 보게 된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도쿄에서 돌아온 후,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 달간 집에 머문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아
버지와 단둘이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는 어색한 부녀지간이라 여지없이 침묵이 흘렀고, 해
가 지면 거실에서 묵묵히 야구를 보았다. 일방적으로 채널 선택권은 아버지에게 있었기에 나는 그 옆
을 멀뚱멀뚱 지키는 꼴이었다. 지루하기만 한 저 공놀이에 재미를 붙이게 된 건 잠시라도 이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 이것저것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지면서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룰에 관해 물었고, 그다음엔 선수 기용에 관한 나름의 심각한 의견이 오갔고, 나중에
는 손뼉을 치며 감독의 지략에 환호를 지르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시즌이 끝나자 ‘야구는 인생과 같
다’는 철학적인 결론을 끌어내며, 아버지와 처음으로 이견 없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야구를 보면서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사실과 ‘잘나가다’라는 말이 지닌 참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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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없는 가벼움과 허무에 관해서 또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어떤 선수가 있었다. 가끔 주전 선수가 갑자
기 부상을 당하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역할이었다. 그 선수가 등장할 때마다 해설자는 말했다. “참, 안
타까워요. 저 선수가 저럴 선수가 아닌데… 고등학교 시절, 정말로 실력이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데 참 안 풀립니다. 언젠가 실력 발휘를 하겠죠?”
선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그의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그의 말대
로 그 선수는 정말 안 풀렸다. 기회가 왔지만 진루타를 쳐내지 못했고, 어쩌다 베이스를 밟아도 어설
픈 도루나 어이없는 주루 플레이로 아웃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힘없이 돌아서는 그의 초라한 뒷
모습을 향해 해설자는 말했다. “참… 아쉬운 순간입니다. 언젠가 잘하는 때가 오겠죠.”
그리고 이듬해, 바로 그때가 왔다. 이번에도 개막전에서 주전으로 선발되지 못한 그 선수는, 거액 연봉
을 주고 스카우트한 ‘잘나가는’ 선수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대신 뛰게 되었다. 그는 놀랍게도 연신 방
망이를 휘둘러대며 줄줄이 득점을 올렸고, 펄펄 나는 수비를 펼치는 것도 모자라 모두를 기립하게 만
든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화면에 클로즈업되는 순간, 해설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실력이 빛을 발하는군요. 그럼요. 그런 선수니까요.”
그리고 부상을 당해 더그아웃을 지키고 있던 그 비운의 ‘잘나가는’ 선수가 잠시 화면에 스쳐 지나갔다.
‘잘나가는’ 그는 한순간에 자의와 상관없이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벤치 신세가 되었고, 늘 벤치를 지키
던 ‘잘 안 풀리던’ 그는 틈을 파고들며 실력을 빛냈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졌고, 그
선수는 보란 듯이 자신의 기회를 살렸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는 위기와 같다.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이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꾸준히 실력을 쌓는 것은 기본이지만, 자꾸만 타이밍이 엇나가면 행운의 여신이 자신을 외면하고 있다
는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불끈 쥐었던 두 주먹에 힘이 빠진다. 그러나 그 순간 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바로 ‘나’ 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파티에 가려면 파티 드레스부터 준비해야 하듯, 어느 날 일확천금의 기회가 들
이닥쳐도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성공으로 나아가기는 영영 힘들 것이다.
오늘 내가 얻은 기회는 누군가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 기회 덕분에 내가 잘나가게 되었다고 해도 언
제든지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내줄 준비를 하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기회는 돌고 돌아서 결국 또 다
른 내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억울해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기회가 내 차례
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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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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