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동서양의 부가 역전되고 서양 우위의 역사가 지속되게 된 근원을 찾아 유럽의 대항해 시대로,
또 명ㆍ청시대로,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개화기로 우리를 안내하면서, 그 원인을 근대 동서양이 취했
던 ‘해금(海禁)’과 ‘개해(開海)’의 두 키워드로 설명한다. 아울러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청, 일, 조선의
근대화 과정을 비교 분석하여, 어떻게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청과 조선은 실패하였는지 살펴본다.
해금
▣ Short Summary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경제를 자랑했다. 세계 인구의 3분의 2
가 아시아에 거주했으며, 세계 생산의 80퍼센트를 아시아가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산업 총생
산량이 전 세계의 33퍼센트에 이르렀는데, 이는 같은 시기 유럽 전체의 산업 총생산량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였다. 그러나 불과 100년 후 유럽은 아시아의 경제를 뛰어넘고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이 책은 동서양의 부가 역전되고 서양 우위의 역사가 지속되게 된 근원을 찾아 유럽의 대항해 시대로,
또 명ㆍ청 시대로,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개화기로 우리를 안내하면서, 그 원인을 근대 동서양이 취했
던 ‘해금(海禁)’과 ‘개해(開海)’의 두 키워드로 설명한다. 아울러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청, 일, 조선의
근대화 과정을 비교 분석하여, 어떻게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청과 조선은 실패하였는지 살펴본다.
참고로 해금은 ‘하해통번지금(下海通番之禁)’, 즉 ‘바다로 나아가 오랑캐와 소통하는 것을 금한다’는 뜻
으로, 명ㆍ청과 조선, 그리고 일본이 취했던 반해양, 반무역 정책이었다. 이에 반해 서양의 ‘개해’는 바
다로 눈을 돌려 무역로를 개척하고 미지의 땅을 정복하는 해양 진출, 친무역 정책이었다.
구체적으로 제1편에서는 중세의 암흑을 벗어난 유럽인들이 자본주의, 과학 기술로 무장한 채 해양 개
척에 뛰어드는 대항해 시대 이야기가 펼쳐진다. 2편에서는 중국과 조선, 일본으로 시선을 돌려 당시 동
아시아 3국의 상황을 살펴본다. 3편에서는 반해양, 쇄국 정책으로 위태로운 안정을 이어 가던 청, 조선,
일본에 대한 서양 세계의 도전과 그에 대한 3국의 대응, 개혁의 성취와 실패를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4편에서는 동양 3국의 근대화에 실패하고 성공한 원인들을 집중 탐구하고 분석한다.
▣ 차례
서문
제1편 개해의 유럽
제1장 유럽의 대양 진출
근세로 항해한 유럽 / 문명의 혼합 / 범선, 대포, 머스킷 총 / 부를 향한 모험 / 운명의 이베리아반도
/ 항해 왕자 엔히크의 꿈 / ‘세상의 변경’을 넘어선 항해 /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 콜럼버스의 서쪽 항
해 / 운명의 피노스 다리 / 신대륙 발견의 세계사적 의미 / 남반구 해양을 반분한 토르데시야스 조약 /
-2-
해금
태평양을 반분한 사라고사 조약 / 포르투갈의 폭력적인 해상 무역 / 바다의 제국 / 해양 제국의 쇠락
과 네덜란드의 부상
제2장 자본주의 제도의 탄생과 동인도 회사
아시아 진출의 원동력 / 대항해 시대가 발전시킨 자본주의 제도 / 바다로 내몰린 네덜란드 / 항해 안
내서와 동방 무역 진출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얀 / 네덜란드의 폭력적 아시아 진출 / 섬나라 영국의
해적질 / 약탈에서 무역으로 /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동방 진출 / 국가가 주도한 프랑스 동인도 회사 /
후추와 향신료 / 급증하는 차와 면직물 수입 / 높은 수익을 안겨 준 아시아 역내 무역 / ‘아시아 침탈
의 침범’ 동인도 회사의 몰락
제2편 해금의 동아시아
제3장 동아시아의 반해양 정책
명의 해금령 / 청의 천계령 / 떠오르는 개해론 / 찬란한 중국 해양 문명의 쇠퇴 / 정화의 대원정 / 해
금의 세계사적 의미 / 중화주의 세계관에 빠진 중국 / 기독교를 받아들인 다이묘들 / 도요토미 히데요
시의 금교령 / 에도 막부의 해외 무역 / 기독교 금지와 해금 / 서구를 향한 열린 창, 데지마 / 중국보
다 강력한 조선의 해금령
제4장 자유 무역과 해금의 충돌
중국의 폐쇄적 농업 경제 / 대역전의 시작, 산업 혁명 / 영국의 포용적 정치ㆍ경제 체제 / 혁신을 가로
막는 중국의 절대주의 체제 / 매카트니의 눈에 비친 중국의 현실 / 자유 무역과 해금의 ‘충돌’ / 차ㆍ은
ㆍ아편 / 아편 무역 갈등 / 1차 아편 전쟁 / 2차 아편 전쟁과 불타는 원명원 /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의 승부 / 아편에 중독된 중국 대륙
제3편 동양 3국 근대화의 도전
제5장 청, 제국의 몰락과 근대화 노력
강건성세기의 청 / 상공업 경제 체제로의 전환 실패 / 인플레이션 그리고 재정 악화 / 거대한 부패의
고리 / 급격히 무너지는 대청 제국 / 신유정변과 서태후의 등장 /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양무운동 / 근
대식 해군의 창설 / 청불 전쟁의 패배 / 청일 전쟁과 자강 운동의 실패 / 조차의 수난 / 백일유신으로
끝난 무술변법 / 의화단 운동과 불타는 이화원 / 청의 마지막 변혁 시도
제6장 일본, 무사의 나라에서 근대 국가로
무사 집단이 지배하는 나라 / 임진왜란과 중화 체제 이탈 / 에도 막부의 시작 / 막부 체제의 쇼군과 다
이묘 /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 / 쇄국의 시작 / 밀려오는 서양의 거센 물결 / 흑선의 출현과 개항 / 서
양 열강과 통상 조약 체결 / 외세에 대한 일본의 대응 / 부국강병론과 해군 육성 / 막부 타도와 왕정복
고 / 근대화를 위한 대변혁, 메이지 유신 / 전통적 신분 질서 개혁 / 중앙 집권 주의 국가 수립 / 현대
식 군대 창설 / 교육 개혁 / 입헌 정치 체제 수립 / 문명개화 / 메이지 유신의 성공 요인
제7장 소중화 조선, 잃어버린 근대화의 시간
1490년대의 조선과 해금 / 동아시아의 중화주의 질서 / ‘소중화’ 조선의 선택 / 조선의 대일 외교 사절,
-3-
해금
통신사 / 하멜의 조선 표착 / 하멜 일지에 비친 조선 / 네덜란드의 보물섬 원정대 / 강력한 쇄국과 이
양선의 출몰 / 국제 정세에 무지한 조선 조정 / 일본에서 일어난 정한론 / 떠밀린 조선의 개항 / 국제
무대에 등장한 조선 / 취약한 근대화의 기반
제8장 뒤늦은 조선의 개화
쇄국을 깨는 개화사상 / 개화의 반작용 / 개화파의 산실, 북촌 / 급진 개화파의 실패한 꿈, 갑신정변 /
갑신정변의 평가 / 잃어버린 10년 / 동학 농민 운동 / 청과 일본의 충돌 / 친일 정권의 개혁 시도, 갑
오개혁 / 러ㆍ일 간의 갈등과 을미사변 / 외세에 흔들리는 왕실 / 조선의 두 개혁가, 김옥균과 김홍집
/ 열강의 막다른 조선 지배권 전쟁 / 대한 제국의 종말 / [홍유릉 단상]
제4편 근대화의 성패
제9장 성공한 근대화, 실패한 근대화
동양 3국의 갈라진 운명 /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인식과 실용적 학문 / 근대 지식의 습득과 수용 / 미
약한 개혁 주도 세력과 민중의 지지 부재 / 무지를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 / 분권적이고 포용적인 정
치 체제 / 근대화를 위한 국내적 여건 / 근대화의 경제적 기반
맺는말 / 참고문헌
-4-
해금
해금
개해의 유럽
유럽의 대양 진출
근세로 항해한 유럽: 유럽의 중세 시대는 종교, 사상, 문화적으로 ‘암흑시대’로 불린다. 교황 중심의 신
권이 세속 왕권보다 우위에 군림하고 기독교에 반하는 가치나 사상은 한 치도 용납되지 않았다. ‘신의
뜻’이라는 최고의 가치 앞에 우주와 자연의 원리에 대한 과학적 관찰과 합리적 사고는 설 자리가 없었
다. 중세의 긴 암흑시대가 끝나고 근대의 여명이 비쳤다. 중세 유럽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이성’
과 ‘인간 중심’의 사회로 돌리는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되어 다른 유럽 지역으로 확산되었
다. 문명사적 대전환이었다.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기초한 자연과 우주, 사물
에 대한 탐구는 ‘사실’의 발견을 낳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자연의 탐구와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무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유럽인들은 부를 찾아 다른 대
륙으로 눈을 돌렸다. 이들이 개척한 아시아 항로와 신대륙의 발견은 인류사의 신기원이 되었다. 이것
은 새로운 무역 항로를 개척했다는 의미만이 아니었다. 세계사적으로 유럽이 중세의 어둠에서 벗어나
근세로 나아가게 한 ‘대항해 시대’의 시작이었고 서양이 근대 세계사를 주도하는 출발점이었다. 유럽인
들의 해양 진출과 무역은 과학, 기술, 경제의 폭발적 성장과 팽창을 이끌었다. 이들이 전파한 기술 문
명과 법, 제도, 문화, 사상, 언어, 음식은 세계로 퍼져 나가며 근대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세계인들은
오늘날 많은 부분 대항해 시대 이래 유럽인들이 남긴 사회ㆍ경제적, 문화적 유산 속에서 살고 있다.
신대륙 발견의 세계사적 의미: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독립적
으로 존재하던 문명과 문화, 생태 환경들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역사 흐름 속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신대륙은 구대륙의 역사에 강제로 편입되어 혹독한 수탈과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수천 년간 지
속되어 온 원주민의 전통과 문화, 종교, 언어, 공동체는 말살되고, 정복자의 종교와 언어, 문화가 강요
되었다. 정복자가 휘두르는 총칼 앞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구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전염병 앞에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은 속절없이 쓰러졌고, 인구는 한
세기 만에 10분의 1까지 줄었다. 반면 구대륙은 신대륙으로부터 들여온 고구마, 감자, 옥수수와 같은
새로운 작물 덕분에 식량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막대한 금과 은이 유입되면서 유럽의 경제는 확
장되어 갔다. 또한 신대륙, 아프리카를 잇는 삼각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다시 말하면, 유럽
은 원주민의 고통과 눈물 위에 경제적 부를 쌓고 상업과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루며 근대 세계의 패자
로 올라설 수 있었다.
자본주의 제도의 탄생과 동인도 회사
대항해 시대가 발전시킨 자본주의 제도: 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 식민지 건설과 해외 무역은 과학
기술의 발달, 지식의 확대, 상공업의 발달, 부의 축적, 음식과 생활 양식의 변화 등 사회의 모든 면에
서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중에서 금융, 보험, 주식, 회사, 은행 등 오늘날 세계 경제의 근간이 되는
-5-
해금
자본주의 제도의 탄생과 발전은 그 어느 것보다 세계사에 미친 영향이 크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사유 재산을 보장하고 자유로운 상거래와 해외 무역을 허용했던 유럽의 상업 제
도와 자본주의가 대항해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고 이윤
추구를 제일 우선시하는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선박 건조, 선단 구성과 항해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
을 자본가와 일반 투자자들로부터 조달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동방 무역 선단이 아시
아에서 향신료를 싣고 유럽으로 돌아오면 많게는 60배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역 선단의
항해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나 조난을 당하거나 해적에게 약탈을 당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동방 무역은 이익이 높은 만큼 위험성도 큰 투자였다. 따라서 투자의 위험성을 낮추고 더 많은 투자자
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제도의 고안이 절실해졌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주식회사’ 제도였다. 한
명의 투자자가 비용을 모두 부담하는 대신, 주식회사는 항해에 소요되는 비용을 여러 투자자들로부터
모았다. 소수의 투자자가 모든 비용을 부담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의 몫은 적어지지만, 실패해도 투
자자 개인은 자기 자본에서 전체 비용 중 아주 작은 몫만 위험 부담을 지면 되는 방식이었다.
네덜란드 금융에서는 투자의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선물(futures) 제도가 발달했다. ‘청어를 잡기 전에
먼저 구입’하는 전략이었다. 투자자는 1년 후 잡힐 청어 가격을 미리 정했으며, 이러한 금융 상품은 실
제 물건처럼 사고팔 수 있었다. 선물에 투자한 사람은 도중에 상품 가격이 급등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박 사고가 나서 바다에서 화물을 잃더라도 투자 금액을 보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탄생했다. 오늘날 손해 보험의 기원이 된 ‘해상 보험’ 제도이다. 해상 보험 제도는 고대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도 가지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였다. 17세기 말부터 런
던이 해상 보험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유명한 영국의 해상 보험 회사 로이드(Lloyd’s)는 1688년 선
주나 선장, 해상 보험 인수인이 출입하는 커피점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투자자들은 자본을 출자한 후 무역 선단이 돌아와서 싣고 온 물품을 팔아 이익금을 배분받을 때
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자신의 투자를 증명할 수 있는 유가 증서가 필요했
고, 이것이 오늘날 주식의 기원이 되었다. 무역 선단을 운영하는 주식회사는 처음에는 소자본으로 시
작했으나 수익 가능성이 확인되자 사업 전망을 주시하던 대자본과 왕실까지 뛰어들었다.
그리고 투자자들로부터 모은 거액의 자금을 관리하기 위해서 전문 조직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은행
제도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금융 제도는 점차 복잡해져 갔다. 금융 제도 덕분에 개인
이나 정부는 금융업자나 은행가로부터 신용 대출을 받아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용 대출 제도는
왕국이나 제국에 비해 훨씬 효율적으로 탐사 원정이나 정복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했
다.
네덜란드인들은 이런 신용을 바탕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전쟁(1568-1648)을 벌이는 동안에도 용병
을 고용해 싸우게 하고 자신들은 바다로 나갔다. 용병을 고용하고 함포를 장착한 선단을 꾸리는 데 드
는 막대한 비용은 이들이 쌓은 신용 덕분에 유럽 금융 제도로부터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
나면서 조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선박이 커졌고, 대항해 시대 초기의 항해 위험 요소들이 줄어들면서
선단의 규모도 커져 갔다. 아무튼 해상 무역의 위험성은 여전히 컸지만 투자의 위험성을 관리할 금융
-6-
해금
의 제도적 장치가 점차적으로 형성되어 갔다. 금융 제도가 발전하고 대자본과 국가가 결탁하면서 전
세계 대륙에 걸친 유럽 해양 제국의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해금의 동아시아
동아시아의 반해양 정책
명의 해금령: 서양과 동양의 근세 역사와 관계를 결정짓는 키워드는 ‘해금(海禁)’이라 생각한다. 해금은
‘하해통번지금(下海通番之禁)’, 즉 ‘바다로 나가 오랑캐와 교통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말의 약칭이다.
말 그대로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해금은 명ㆍ청 시대에 중국인이 해외에 나가 무역
하는 것을 금지하고 외국 상선의 입출항을 제한하는 반무역 정책이자 해양 진출을 억제하는 해양 통제
정책이었다. 또한 외국에 문호를 닫고 자국민에게는 해외 진출을 금지하는 쇄국 정책이었다.
해금은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 중심의 화이(華夷) 질서 속에 있던 조선과 일본의 근세 역사에도 결정적
인 영향을 미쳤다. 참고로 해금은 몽골이 세운 원 제국을 무너트리고 명나라를 건국한 직후인 1371년
에 처음 시행되었다. 이후 해금이 완화되어 외국으로 나가 무역을 하는 것을 허용하고 부분적으로 사
무역을 허용하는 개해(開海)가 시행되기도 했으나, 해금은 명ㆍ청 시대의 지배적인 외교ㆍ무역ㆍ국방
정책이었다. 이처럼 중국은 유럽 열강들이 앞다투어 활발히 대양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수천 년 동안
누려 왔던 해양 강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스스로 바다에 빗장을 치며 고립을 자초했다.
해금령에 따라 송ㆍ원대에 활발했던 민간의 해외 무역은 금지되고 정부가 관장하는 공무역인 조공 무
역만 허용되었다. 조공 무역은 조공ㆍ책봉 관계에 있던 번속국의 사신단이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방문할
때 함께 온 상인들이 지정된 장소, 즉 입국한 항구와 베이징에서 행했던 무역을 의미한다. 명나라 건
국 초 16개였던 조공국은 이후 40여 개국 이상으로 늘어났다.
주요 조공국은 일본, 고려(조선), 류큐, 안남(북부 베트남) 등이었다. 조공 사절은 정해진 항구를 통해
들어와 공물을 헌상하고 황제가 내리는 선물인 회사품을 받았다. 아무튼 해금은 바다 진출을 금하는
의미이지만, 바닷길이 거의 유일한 해외 진출 통로인 시대에 해금은 곧 자국민의 해외 출입과 이주,
외국인의 도래, 상거래, 무역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의미했다. 이런 이유로 해금은 곧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쇄국이었다.
청의 천계령(遷界令): 명의 해금령을 이어받은 청은 더욱 강력한 해금령을 시행하였다. 청의 법전인『대
청회전』에서 “나뭇조각 하나도 바다에 띄우는 것을 불허한다.”고 규정할 만큼 엄격한 해금령을 시행했
다. 만주족이 세운 청은 대만을 근거지로 하여 반청 복명 운동을 펼치던 정성공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두 차례의 해금령을 내려 조그만 배라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와 함께 1661년에는 해금을 강화한
천계령을 실시하였다. 정성공 세력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푸젠, 광둥, 저장, 장쑤, 산둥 등 5성의 연해
주민들의 해상 교통과 어업, 무역을 금지하고 주민들을 10~30리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1683년 정성공 세력이 평정되면서 천계령이 폐지되고 제한적으로 무역과 어업이 허용되었는데, 이것
은 어디까지나 해금의 완화였지 폐지는 아니었다. 해금이 완화되면서 해외 무역을 위하여 많은 중국인
들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해금령의 완화로 해적이 들끓고 반청 세력이 다시 일어
-7-
해금
날 조짐을 보이자 해외 무역을 다시 통제하였다. 한편 해금령이 엄격하게 시행되는 시기에도 감시의
눈을 피해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동남아시아산 향료나 염료 무역이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상
인들은 목숨을 걸고 밀무역에 종사했다. 밀무역을 단속해야 할 관료들도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떠오르는 개해론(開海論): 명ㆍ청 시대에 해금령이 강력히 시행되면서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정부
의 감시의 눈을 피해 밀무역이 급증하였고 무역을 위해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도항하는 중국인들이 크
게 늘어났는데, 해외로 나간 중국 상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해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유럽
상인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해금령을 완화하고 해외 무역을 허용하자는
개해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명나라 조정도 어쩔 수 없이 1509년 광둥성의 광저우를 조공국 상인들에 개방했
다. 그리고 1576년에는 해금령이 시행된 지 200여 년 만에 다시 사무역을 허용하였는데, 사무역이 허
용되었다고 해서 완전한 자유 무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무역은 대동남아시아 무역항인 장저
우 한 곳으로 한정되었고, 무역선의 연간 출항 횟수도 50회로 제한되었다. 아무튼 해금령의 완화는 그
동안 폐쇄되었던 무역 항로와 교역 루트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해금과 개해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세관에 해당하는 해관(海關)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해관의 역할은 대외 무역을 허가하고 관세를 징수하는 것이었다. 자유롭게 해외 무역을 하던 송ㆍ원대
시기에는 시박사라는 명칭의 기관이 그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관세를 징수하고 선박을 검사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점에서 해관과 동일한 성격의 기관이었다. 아무튼 해금을 완화한 후 청나라의 강희제
는 동남해 연안의 장저우, 광저우, 닝보, 상하이 네 곳에 해관을 설치하였고, 해외로 출항하는 중국 상
선은 배의 규모, 승선자 수, 금지 품목 등 여러 가지 항목에 걸쳐 규제를 받았다.
그러나 해금을 완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륭제는 사소한 무역 분쟁과 유럽 상인들이 중국의 풍속
을 해친다는 이유로 1757년 외국 상선의 입출항을 광저우 한 곳으로 제한했다. 한편 아편 전쟁 후 해
금 체제 해체의 가장 상징적 변화는 광저우 해관의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고 여러 개항장에 근대적 해
관이 설치된 것이었는데, 해관은 자본주의라는 서양의 새로운 시스템이 중국에 도입되는 데 중요한 역
할을 했다. 동시에 대외 무역이나 관세 업무를 넘어 청의 외교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해금의 세계사적 의미: 해금이 중국과 동아시아의 근세 역사에 끼친 영향과 내포하는 의미는 해상 무역
을 넘어 정치, 안보, 사회, 문화, 과학 기술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친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인들은 ‘해양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자유해’ 사상을 바탕으로 일찍이 대
양 개척에 나섰다. 이들이 범선과 대포, 총기를 앞세우고 세계 해양을 누비며 무역 항로를 개척하고 식
민지를 정복하면서 단절되어 있던 대륙들은 해양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반면 아시아는 활발
했던 해상 활동을 뒤로하고 바다에 빗장을 치며 해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이는 다음 세기의 유럽
주도 근대 역사와 ‘식민의 바다’와 ‘굴욕의 아시아’의 근대사가 펼쳐지는 서막이었다.
중국이 다른 대륙과의 해상 무역을 금지한다는 것은 바깥세상을 향한 창을 닫고 다른 문명과 교류를
단절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것은 중국이 고대부터 육ㆍ해상의 실크로드를 통하여 다른 대륙
과 교류하고 앞선 문명을 전파하던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버리고,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선택한
전환점이었다. 문화적 우월감과 자급자족의 경제적 풍요를 믿고 바깥 세계와 담을 쌓은 중국은 점차
-8-
해금
역동성을 잃기 시작했다. 유럽이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사건이 중세에서 근대
로의 전환점이 되고 이후 산업 혁명으로 이어졌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 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한편 아메리카 신대륙을 정복하겠다는 유럽인들의 욕망은 새로운 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찾아 나서게
했다. 새로 발견한 방대한 영토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신대륙의 지리, 기후, 식물, 동물, 언어, 문화, 역
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를 해야 했는데, 성경이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세계관, 중세
적 종교관에 의한 지리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과 과학을
찾아 나서야 했다. 게다가 개인의 창의성과 성과를 인정해 주고 보상이 주어지는 자본주의 제도는 부
를 찾아 대양을 항해하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 강한 유인책이었다.
바다에 빗장을 친 중국과 아시아는 유럽 세력의 대양 진출이라는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에 무지했고 유
교적 신분 질서와 중화주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었다. 결국 중국과 아시아는 세계사의 메가트렌드에
뒤처지고 자기 주도의 근대 세계로의 전환에 실패했다. 그 결과 이름뿐인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과
중화 세계는 유럽 식민주의 세력에게 유린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근대 세계사의 주도권을 대서양에 내
주게 된다.
중국보다 강력한 조선의 해금령: 소중화를 자처하며 중화주의의 충실한 이행자였던 조선도 해금령을
시행했는데, 중국보다 오히려 더 강력한 해금이었다. 참고로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한반도에서
는 중국, 일본 등 주변국 상인들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들과도 교역을 할 만큼 해상 무역
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고 사대주의 노선을 취하였던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조선은 중국의 해금보다 한층 강력한 ‘공도 정책(空島 政策)’을
실행하였다. 공도 정책은 섬에서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 두는 것을 말한다.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던
조선 조정은 섬을 왜구와 결탁할 수 있는 불온 지대로 보고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 1403
년(태종 3년)에 시작된 공도 정책은 1882년(고종 19년)에야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공도 정책은 임진왜란 이후 약화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해금령이 다시 시행되면서 해상 무역은 조선
시대 말까지 허용되지 않았다. 참고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수군을 강화하고 바다를 통한 외적의 침입
에 대비했다. 그러나 바다를 군사 목적으로만 접근했을 뿐 해상 무역을 통한 부의 창출, 바깥세상과의
교류, 해상 교통수단으로서의 이용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수군은 물론 어민이나 상
민이 내양(內洋)을 넘어 외양(外洋)으로 가는 것을 법령으로 금지했다. 참고로 내양은 오늘날 영해와 같
은 개념으로, 해안선으로부터 10리까지였다. 강력한 해금령과 내양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은 해양 이용에 대한 조선 시대의 폐쇄적 인식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성패
성공한 근대화, 실패한 근대화
동양 3국의 갈라진 운명: 청과 일본 모두 서구 열강의 압도적 무력에 굴복하여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
방했고, 이후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목표로 서양의 문물과 사상, 제도를 도입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
다. 일본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의 군사 기술, 산업, 과학, 기술, 제도를 따
라가는 것이 부국강병의 길이라 인식하고, 유럽 열강의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성과를 도입하는 것에
-9-
해금
힘을 쏟았다. 이는 전통 체제와 사상은 그대로 둔 채 우수한 서양의 과학 문명과 기술, 제도만 도입하
겠다는 의도였다. 이것은 서양에 대한 자신들의 정신세계의 우월성에 대한 자부일 수 있고, 노도와 같
이 밀려오는 서구의 물결 속에서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동양 3국이 유럽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했을 때 처한 정치ㆍ사회ㆍ경제ㆍ군사적 여건은 큰 차
이가 있었지만, 고유한 가치와 사상의 바탕 위에서 서구 문명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는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방향에서 일본은 자기 주도적 근대화에 성공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서구
열강과 같이 대외 팽창에 나섰다. 반면 청과 조선은 실패하여 반식민지나 식민지의 쓰라린 시간을 겪
어야 했다. 왜 일본은 성공하고 청과 조선은 실패하였을까. 이번 장에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중심으로 큰 틀에서 동양 3국의 근대화 성공과 실패 요인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인식과 실용적 학문: 일본은 260여 년 동안 쇄국을 했지만 바깥세상의 흐름에 완
전히 귀와 눈을 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호는 닫고 있었지만 유럽의 동향과 청과 주변국의 정세
는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과 나가사키를 오가는 중국 상인들, 왜관을 오가는
조선과 일본의 상인들은 바깥 세계의 소식을 알려 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참고로 에도 막부는 네덜
란드 상인들이 정기적으로 전해 주는 보고서를 통해 유럽의 사정, 서양의 동양 진출, 산업 혁명, 자본주
의, 아편 전쟁, 서양의 군사력 등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에도 막부는 경제적 이익을
앞세운 영국의 청나라 침탈의 성격과 영국의 최신 함선과 함포의 위력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서구
의 힘과 세계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함께 위기의식을 갖고 있던 일본과 달리, 청나라는 중화주의의
자만에 빠져 서양을 무시하고 세계정세에 무지했다. 양국이 크게 대비되는 점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근대화에 대한 각성과 사고를 형성하는 데는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유럽의 실용
적 지식과 학문-네덜란드를 통해서 전해졌다고 해서 난학(蘭學)이라 불림-이 기여했다. 새로운 세력으
로 부상한 상인, 하급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보급된 서양의 기술 서적과
문물을 연구하는 학문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난학자로 불린 이들에 의해 근대화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고, 서양 서적이 대량 유입되고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에도 막부 후기에는 난학에 심취한 다이묘들이 난학 연구를 지원하기도 했고, 1800년대 초에는 에도
막부가 세운 초등 교육 기관인 데라코야에서도 난학을 가르쳤다. 또 18세기 후반에는 신체 해부서인
『해체신서』를 비롯해 의학, 천문학, 물리학, 과학, 박물학 등에 관한 여러 학술서가 번역되어 소개되
었고 네덜란드어 사전도 편찬되었다.
한편 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과 지식을 접한 일본 사회는 중국에 대한 상대적인 인식을 갖기 시작했
다. 중화를 가치의 원천으로 삼는 화이 관념에서 벗어나 상대화하려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화이변태(華夷變態)’라 했다. 이로 인해 유교 경전 중심의 관념론적인 연구와 사고에서 벗어나
서양의 실용적 사고와 학문 연구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과 조선이 사서삼경과 유교 경전
위주의 도덕론과 관념론에만 빠져 있을 때, 일본은 젊은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과학 기술 문
명과 제도를 수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근대 지식의 습득과 수용: 근대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근대화의 성패가
달라졌다. 강한 위기의식 속에서 서양의 부국강병의 원인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했던 일본과 그렇지
- 10 -
해금
못했던 청과 조선은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입헌 군주제와 의회 제도
라는 근대적 정치 체제와 주권을 바탕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조약을 맺는 국제법 질서에 대해 이해와
수용이 빨랐다. 이에 반해 중화 질서의 주체인 중국과 그 속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던 조선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결국 국제법에 무지했던 중국과 조선은 근대적 국제 관계 형성 과정에서
서양에 끌려다녀야 했고, 그것은 고스란히 국익의 손실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서 청, 조선, 일본의 관리 선발 방식의 차이가 젊은 지식인층의 근대화 의식 형성에 지대
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청과 조선은 수백 년 동안 과거 제도를 통하여 관리를 선발
해 오다 변법자강 운동과 갑오개혁으로 폐지하였는데, 과거 시험 과목이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 위주
였기 때문에 과거를 준비하는 젊은 사대부들은 실용적 학문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어려웠다. 또 배타
적이고 원리론적 관념에 바탕을 둔 유학적 소양은 유연하고 실용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화 의
식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 반면, 에도 막부에서도 유학이 기본 학문이었지만 세습이나 가문에 의
하여 관리를 선발하였기 때문에 근대화기의 사무라이들은 시험공부에 얽매이지 않고 서양의 다양한 근
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또 이것은 많은 젊은 사무라이들을 근대화에 대한 열망으로 이끌었다.
미약한 개혁 주도 세력과 민중의 지지 부재: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그렇지 못한 청과 조선의 큰 차이
는 개화를 주도할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일본과 달리, 청과 조선은 소수의 개화 세력에 의해 급진적
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막부 말기 서세동점의 위기가 닥쳐 새로운 사회 질서가 요구되자, 위
기의식을 강하게 느낀 많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사회 변혁에 몸을 던지면서 근대화의 주역이 되었는데,
‘유신지사’라 불린 이들은 대부분 하급 무사 출신으로 두터운 변혁 세력을 형성하며, 외세의 위협 앞에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개항하는 막부 체제에 분노하여 막부 타도 운동에 나섰다. 또 이들과 함께 서양
의 과학 문명과 산업의 발전을 목격한 지식인들은 유신지사들과 근대화의 뜻을 같이했다.
한편 서양 열강에 의해 약탈을 당했던 청나라는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속국으로 여기던 일본에게도
패하자 다시 한번 엄청난 충격과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국토가 서양 열강과 일본에게 침탈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쓰러져 가는 청 제국을 살리기 위해 사회 변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서양의 문물만 받
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제도 변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광서제가 개혁적
유학자 캉유웨이 등의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변법자강 운동으로 불리는 사회 변혁을 추진했다.
103일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군사 등 국정 전 분야의 개혁안을 마련했는데,
기존 질서에 의존해 이익을 누리던 보수 지배 세력은 필사적으로 이에 저항했다. 한편 청에는 일본과
같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무라이 계급과 천황의 정치적 지원,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 또 젊은 유학
자들 역시 이상과 정열은 컸지만 변혁 운동을 추진할 만한 경험이 없었다. 이들은 이상을 추구하는 서
생들이었을 뿐 혁명을 추진할 수 있는 전략가나 정치가들이 아니었다. 결국 변법자강 운동은 개혁의 기
반을 확보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개혁을 추진하다 보수파의 저항에 밀려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한편 대원군이 섭정을 맡았던 10년 동안 강력한 쇄국을 고수했던 조선은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1873
년부터 조금씩 개화를 추진하게 된다. 실학을 계승한 관료와 지식인들이 서세동점의 물결을 인식하고
개화의 필요성에 눈을 떴지만, 그 세력은 아주 미미했다. 일본의 유신지사나 독일 제국을 창건한 융커
(Junker)와 같은 근대화를 추진할 계급이나 계층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 11 -
해금
조선의 개화는 국왕 중심으로 추진된 정부 주도적 개화였다. 그러나 고종은 개방과 개혁을 추진할 근
대화 정치 세력을 키우고 정치적 지원을 이어 나가지 않았다. 메이지 천황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외
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유신지사들을 주체 세력으로 하여 일관되게 개혁을 추진해 나갔지만, 고종은
개혁과 근대화를 외세의 손에 맡겨 놓고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개혁 세력을 교체했다. 이것이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를 가른 뚜렷한 차이점이다. 고종은 상황에 따라 친일, 친청, 친미, 친러 노선을 취하며
개화와 보수 정책 사이를 오갔다. 근대 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사회 변혁이었다기보다는 한반도에 대한
열강의 세력 변화에 따라 왕권 유지에 도움이 되는 세력을 쫓아 이리저리 편승하는 식이었다.
참고로 사회 변혁은 매우 복잡하고 방대한 프로젝트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힌다. 사
회 변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민중들이 직접 참여해 실질적인 사
회ㆍ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어야 개혁이 호응을 얻을 수 있고 변혁의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것
이다. 결국 청과 조선의 사회 변혁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변혁 세력의 기반이 미약했다는 것과 민
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지 없이 개혁 세력들 혼자만의 정치 투쟁으로 끝나 버렸다는 것이었다.
분권적이고 포용적인 정치 체제: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은 전제적 정치 체제를 근대적인 분
권 정치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서양은 오랜 정치적 변혁을 통해 전제적 왕권을 제한하고 시민들
에게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입헌 정치 제도를 발전시켜 왔는데, 입헌 정치 체제는 전제적 왕권에 의한
자의적인 조세와 사법권 행사를 방지하고 근대적 법치주의가 확립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정치,
사상, 사회, 법률 제도, 교육 등 사회 제반 분야의 제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일본에서는 왕정복고 이후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국으로 성
장하기 위해서는 서구식 입헌 정치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개혁 세력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리고
1877년, 사무라이 계급의 마지막 저항이었던 세이난 전쟁이 정부군의 승리로 끝나자 반정부 세력들은
무력 저항 운동 대신 자유 민권 운동에 투신했는데, 이들은 소수의 관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천황도 전제 권력을 휘둘러 위기가 초래되고 있다고 비난하며 민의원 설립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정부 주도 세력은 1881년 10년 후 국회의 개설을 선언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헌법 제정
준비에 착수하여 1889년 2월 헌법을 공포하였고, 1890년 7월 처음으로 중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또
1890년 11월, 제국 의회가 소집되고 일본은 국민 주권 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근대 정당 정치 체제
로 진입했다.
한편 아편 전쟁 패배 이후 전개된 청의 양무운동은 많은 근대적 변화를 가져왔지만 한계가 있었다. 양
무파가 추구한 것은 서양의 군함, 총, 대포와 같은 선진 무기의 도입뿐이었고, 당시 서양 세계를 떠받
치고 있던 분권적 민주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즉 전통적 사회와
전제적인 정치 체제는 손대지 않고 서양의 선진 문물과 무기만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생
각이었다.
양무운동은 후에 제도 개혁을 추구한 변법자강 운동으로 이어졌지만 이 또한 실패했다. 양무운동과 마
찬가지로 서양 세계가 강력해진 근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서양은 입헌 군주제와 같은 분권적 민주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있었지만, 청나라는 황권을 제약시키는 분권적 민주정치
제도ㆍ사상과 사농공상의 지배 질서에 위협이 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도입을 거부했다.
- 12 -
해금
조선도 일련의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서양의 선진 문물만 도입하려 했지, 전체적 정치 체제와 전통 사회를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혁하려는
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갑오개혁과 같이 전통적 사회 질서를 개혁하려는 시도들은 유림 세력과 수구
파의 저항에 막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왕의 개혁 추진 의지가 확고하지 못했고 개혁 세력에 대한 정
치적 후원자가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 정치의 도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편 아관파천을 계기로 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개화기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 의지를 결집하였는데, 처음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
였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의회 설립과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자 군대와 보부상 단체를 동원해 강제적으
로 해산시켜 버렸다. 만약 독립협회의 활동이 이어져 고조된 근대적 개혁 운동과 독립의 열기가 지속되
고, 근대적 분권 정치 체제로 전환이 이루어졌다면 구한말의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근대화의 경제적 기반: 흔히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치 개혁에 성공했고 서양의 사상, 제도, 문
물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일본의 근세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
면 근대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내재적인 요인을 찾을 수 있는데, 일본은 17세기 초 본격적인 쇄국을
시행하기 전부터 외국과의 활발한 해외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침략 이후
200여 년간 조공 관계를 매개로 한 중화주의 질서에서 이탈해 있었다. 덕분에 비교적 자유롭게 일본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임진왜란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
선이 일본을 ‘왜’라고 멸시하며 문화적 우월감에 젖어 있을 때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조선을 능가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건국 후 150여 년이 지난 조선은 사농공상의 성리학적 지배 질서 속에서 공업
과 상업을 천시하여 새로운 부의 창출에 실패했다. 나라의 형편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이이는 상소를 통해 “200년 동안 저축해 온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도 없다. 나
라가 나라가 아니다.”라며 한탄하였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변변한 생산품 없이 조선과의 무역을 애원하던 일본의 경제력이 조선보다 더 강
하고 더 튼튼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먼저 16세기의 활발한 해외 무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고급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자 일본은
몰루카에 일본인 거주지 니혼마치를 만들어 포르투갈 상인들과 무역을 했다. 또 해금령으로 출항할 수
없었던 명나라 상인들과는 밀무역을 했다. 이후 해금령이 완화되어 명의 상인들이 동남아시아 각지로
출항할 수 있게 되자 일본 상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이들과 조우하여 직접 거래했다.
한편 일본의 해외 무역을 더욱 활성화시키고 획기적인 경제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은의 대량 생산이었
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은은 동서양 사이에 가장 중요한 교환 수단이었다. 중국의 물품과 거래할
수 있는 일본의 물품이 변변하지 않아 무역량이 크진 않았지만, 은 생산 덕분에 일본과의 무역은 중요
시되었다. 일본 은은 밀무역 상인의 손을 거쳐 밀물처럼 명나라로 흘러 들어갔다. 일본 경제가 장기간
해외 원정을 감당할 만큼 강력해질 수 있었던 것은 해외 무역과 은의 대량 생산 덕분이었다.
이렇게 축적된 경제력과 대외 전쟁에서 승리 후 받은 배상금은 일본이 근대화를 추진하는 기반이 되었
- 13 -
해금
다. 개화기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철도, 대학, 학교 등 사회 기반 시설을 구축하고 많은 비용을 들여 외
국 군사 교관, 과학자, 기술자, 교육자를 초빙하고 국비로 유학생을 미국과 유럽에 보내 선진 문물을
공부하도록 할 수 있었던 것 모두 재정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는 일본에는 없는 서양의 새로운 산업을 이식하고 상업과 산업의 부흥을 정부가 주도하는 ‘식산흥업
정책’에 의하여 경제력을 키웠고, 또 사회 기간 시설의 구축, 자본 형성, 기업 지원 등을 정부가 주도
했다.
한편 한때 전 세계 총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세계 최고 경제력을 자랑했던 청나라는 폐쇄적 농
업 중심 경제, 부정부패, 민란과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기반 피폐, 권력자의 재정 낭비 등으로 19세기
에 이르러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 있었고, 개혁을 감당할 재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청일 전쟁
의 패배로 당시 일본 재정의 4년 치에 해당하는 3억 엔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1901년 의화단 전쟁의
패배로 참전 8개국에 4억 5,000만 냥을 39년간 분할 지불해야 했다.
한편 대외 무역과 상공업에 의한 부의 창출 없이 전통적 농업 생산에만 의존했던 조선의 경제 사정은
더욱 심각했다. 조세 제도의 문란, 관리들의 부정부패, 경복궁 중건과 같은 과도한 재정 사업, 집권 세
력의 사치와 부패, 외세의 이권 침탈은 어려운 재정 상황을 부채질해 조선 조정은 만성적인 재정 적자
에 시달려야 했다. 서양의 무기와 함선을 도입하고 신식 군대를 창설하였지만, 군대의 봉급마저 지불
할 수 없는 허약한 재정 상태에서 부국과 강병은 한낱 꿈이었다.
- 14 -
해금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약본)흙에서 식탁까지 (0) | 2023.03.22 |
---|---|
(요약본)해양인문학 (0) | 2023.03.22 |
(요약본)하루 한 장 고전 수업 (0) | 2023.03.22 |
(요약본)폴리매스는 타고나는가 (0) | 2023.03.22 |
(요약본)파리의 감각 (0) | 2023.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