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한국, 사라지기 위해 탄생한 나라?

by Casey,Riley 2023. 3. 24.
반응형

한국, 사라지기 위해 탄생한 나라?
장 피엘

 
        SOMMAIRE
      Introduce 기적의 나라를 덮친 폭풍
  누구를 위하여 변화하는가10
  위협받는 공자, 그러나 아직 죽지 않았다14
  민주화와 노동법16
  경제위기의 탈출구18
  은둔의 땅에서 세계로19
      1. 과거의 도전과 미래의 도전23
    새로운 유행어, 세계화25
  백인은 모두 미국인27
  한국식 세계화29
  한국과 세계, 세계 속의 한국34
  극단적 반외세 구호37
  세계화의 또 하나의 적, 경제위기40
  두려움의 표현, 지나친 방어41
  차별 받는 외국인-경계와 애정사이44
  한국의 쿤타킨테, 외국인 노동자들46
  유능한 외국인으로 대접받는 러시아인들과 미국인들52
  한국인이 무조건 옳다54
  목숨도 걸어야 할 국제결혼56
    자신과 다른 것 인정하기61
  감추고 싶은 이름, 에이즈65
  '트기'의 고단한 삶70
  수출용 아기 생산국73
    과거 청산77
  고통스런 상처78
  숭고하지 않은 '세기의 재판'82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일본83
  위안부 문제에 해법은 없다87
  불분명한 역사88
  치열한 평행선91
  아무도 이양기하지 않는다95
      2.경제개발과 사회변화97
    아직 도시는 완성되지 않았다99
  도시로 도시로 대도시로!101
  아파트의 승리104
  자동차의 두 얼굴106
  서울은 여전히 공사중110
    소비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113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115
  아버지 대의 1년 소득보다 많은 아들의 한 달 소득119
  공자, 기업의 CEO(최고경영자)122
  새것은 다 좋은 것?123
  외제-욕망과 양심 사이125
    지금 당신의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129
  아내와 어머니로만 남은 한국의 여성들131
  미시의 승리136
  여성, 사회적 장애139
  아이들의 왕국, 달라지는 아버지142
  21세기에도 유효한 18세기의 결혼방식, 중매147
    일상, 그러나 새로움은 있다151
  유행이 유행하는 젊은이들의 세계153
  TV를 보면 한국이 보인다154
  가족을 움직이는 드라마158
  새로울 것 없는 News160
  청룡열차에서 스키장까지163
  밤의 도시 서울164
  여가시간 지키기167
      3. 급격한 변화와 사회문제들169
    교육의 위기171
  배울수록 바보가 되는 교육173
  입시전쟁의 승자만이 대학의 고지를 점령한다178
  '개인'을 위한 교육이 곧 '나라'를 위한 교육이다184
    달동네 사람들187
  재생산되는 가난189
  가난보다 두려운 소외192
  철거 뒤에 남는 것195
    방황하는 젊은이들198
  법정에 선 피고-돈, 미디어, 가족201
  불법 거주자와 소녀들204
    저질 블루스208
  민주주의가 살 수 있는 집209
  모래 위에 지은 집212
  일회용 소비재, 환경215
  우물 안으로 들어온 세계217
  의혹과 활력의 틈바구니221
      4.한국사회의 불안, 그 해결책225
    영혼과 종교의 나라227
  교황보다 더 기독교적인 한국의 신자들228
  한국, 기독교 새로운 메카231
  종교의 용광로234
  돈 버는 사업, 이단종파238
  비밀 결혼식239
  하나님은 한국인?243
  그래도 종교계는 아름답다244
  돈이 구원과 자비를 낳는다247
    관습의 무게252
  남들 다 하는 대로254
  항상 옳은 사장님258
  필요한 것만 기억하라, 이로운 것이 진실이다261
  야누스의 얼굴, 한국인265
    '우리'의 나라268
  멤버십 트레이닝(Membership Training)269
  구원의 통로, 집단271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제일 똑똑하다274
  순수에 대한 강박 관념278
  피와 땅280
  외부 침략에 맞서기 위한 강한 민족적 동질성284
    새로운 연대의식의 출현289
  받을 때와 줄 때291
  시민은 힘이 세다295
  사회봉사활동은 No.1을 향하여298
    그들만의 공통점301
  몰라서 용감한 성303
  아직도 갈 길이 먼 세계화306
  무늬만 서구화309
  한 문명의 끝과 시작311
      Conclusion 한국은 '진행중'314
      역자 후기 프랑스에서 돌아온 부메랑320
 
    Introduce 기적의 나라를 덮친 폭풍
  화폐가치와 주가 폭락, 기업의 연쇄도산, 실업 급증, 소비 정체, 대량 해고와 그에 
맞선 격렬한 파업... 20세기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 이런  소식이 전해져온 것은, 전통적
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던 유럽에서가 아니라, 역동적인 경제성장과 저돌적
인 무역의 상징이었던 한국이었다. 1985년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
했던 까닭에 '기적의 나라'라고 불리며 모든 개발도상국가가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
겼던 한국도 그 거대한 폭풍은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서는 '아시아의 용이 
아니라 지렁이일 뿐' 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닥쳐온 위기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몇 주 전만 해도 사람들은 흥청망청 돈을 썼으며, 기업은 수십 억 달러에 달하는 돈
을 세계 곳곳에 투자했다고 큰소리를 쳤다. 또한 정부는 북한이 파산 직전의 위기를 
맞아 곧 국제무대에서 외톨이가 될 거라고 빈정대기까지 했다.
  그렇게 모든 상황은 순탄하기만 한 것 같았다. 그러나 19997년 12월 초순이 되자 상
황은 돌변했고, 마침내 공황이 엄습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경제위기는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했던 군사정권의 억
압 속에서 국가의 발전을 꾀한다는 명분 아래 주당60시간을 노동하고도 그 대가로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으며 수십 년 동안을 희생해온 한국 국민을 너무나 맥빠지게 만들었다.
  한국 국민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그 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 
했는데, 그것은 너무도 과도한  소비성향으로 표현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모
든 것이 무너져내렸다.
  일제 식민지 시절과 동족 상잔의 비극 6,25전쟁, 군사독재의  탄압 등 갖가지 역경
을 이겨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인은 확실히  적응력과 저항력이 뛰어난 민족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이렇게 맞은 위기가 불쾌할 것이다.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경제
적인 어려움을 경험하지 못한 채 겨울 스포츠를 즐기고 휴가 때는 외국 여행을 떠나며 
고급 옷을 선호하는 그들의 고품격을 일시적으로나마 접어두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본래 무절제한 소비 끝에는 엄격한 고행이 따르는 법이다.
   누구를 위하여 변화하는가
  신기하게도 국제 언론은 한국의 경제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들은  한국
이 과거에 이루었던 눈부신 경제성장을 찬양하거나, 현재 한국이 처한 어려움만을  염려
할 뿐이다. 그들은 한국을 도산 직전에 처해 있는 하나의 커다란 공장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마치 4,400만 명이나 되는 한국 국민이 투표권을  가진 시민이기 이전에 견습 노
동자에 불과하다는 듯이 말이다. 1950년대에는 방글라데시보다도 더 가난했던 나라를 
50여 년이 흐른 지금, 세계에서 열  한 번째 가는 경제대국으로 만든 눈부신  경제성장
이 사회나 가족관계, 소비성향, 종교적 관습 등과는 아무 관계없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한국에는 정치적인 삶이나 이면적인 토론, 의견의 차이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
는 모양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사실 한국은  경제적인 면을 제외하고는 달리 말할  
게 없는 나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는 거품으로 가득 차 있다. 너무나 짧
은 기간에 부유해짐으로써 지난 1,000년 동안 보다 최근 30년 동안에 더 많은 변화를 겪
었다. 도시화라는 미명 아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사라져갔고, 생활양식도 급변했다. 사
람들 사이의 전통적인 유대관계가 약해졌고, 가족제도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분화되
었다. 서울에서 10km 떨어져 있던 마을도 지금은 수도권으로 편입된 상태이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땅을 잠식하고 있으며, '시골'이라는 향수 어린 이름도 사라지는 추세이다.
  그뿐만 아니라 생활환경과 사회적인 관계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 철저한 유
교문화를 자랑하던 나라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 나이 든 여성들은 그들
의 자율권을 요구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직업과 지위를 젊은  여성
들이 차지해가고 있다. 이제는 회사에 입사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이 승진의 조건이 아니
다. 능력이 있어야만 승진할 수 있다. 40세가 되면 부장이 되어 자기보다 더 나이 많
은 직원을 거느리기도 한다. 10년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던 일이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아이
들은 이미 부모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다. 젊은이들은 더 자유롭고 더 개방적이기
를 원한다. 전통음악은 그들을 지겹게만  할뿐이다. 그들은 록(Rock)을 선호한다. 태
권도 유단자와 같이 절제되고 정돈된 모습보다는, 미국 프로농구 스타들의 자유로움과 
화려하게 튀는 복장을 보고 더  유쾌해한다. 쇼핑중독 증세를 보이는 한국의  젊은이들
은 위조품을 보고도 진짜라고 우겨댄다. 펑크족은 담배연기 자욱한 클럽에서 콘서트를  
열며, 청소년들은 너나없이 귀를 뚫고 머리카락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인다. 휘황찬란한 
유행의 거리는 자정이 되어도 청소년들로  붐비고, 술집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문을  닫
는다.

  유럽인의 눈에는 천박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 모든  변화가 그토록 오랫동안 경직된 
상태로 있던 한국의 진정한 변화 양상이다. 한국 고유의 의상인 한복을 더 이상 한국
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청바지를 입고 야구 헬멧을 쓰고 휴대폰을 손에 든 젊은
이들이 마치 한국적인 것을 대변하는 듯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세대간의 
충돌이 단순함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데  있다. 똑같이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다
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부모와 자식은 더 이상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지 않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다. 국가가 부유해지고 도시화되면서 확산되고 있는 
개이주의가 항상 개인보다는 집단을 더 중요시했던 아시아에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발전하기까지는 많은 고통이 뒤따랐다. 물론 경제적인 발전이 오랫동안  가
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 삶의 질이 향상되자 건강
에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고, 의무교육제가 도입되었으며, 여행과 여가를 즐길 수 있
게 되었다. 또 높은 임금과 중산층의 출현에 힘입어 사회적 평등이 더욱 확산되었다.
  그러나 사회변화에 따른 문제점도 변화만큼이나 많았다. 엘리트 지향주의적인 교육
은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심화시켰고, 그런 경쟁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
적으로 소외되었다.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모두 무시되었고, 그 결과 장애인과 혼
혈아, 독창적인 예술가와 불쌍한 노동자들은 경제발전이 낳은 열차에 동승하지 못하였다.
  한국인은 성공과 화려함에 박수 갈채를 보낸다. 따라서 실패한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1997년 12월에 터진 경제위기는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함으로써 혼란의 와중
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과 피해를  입은 사람들 간의 틈을 더욱 벌려놓았다.  그러
나 낙관론자들은 이번의 위기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하는 한국에서 오히려 국민
들의 결속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 범죄와 이혼율은 점점 증가하는 반면 극빈자의 수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또한 사이비 종교단체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는 증거이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록음악과 새로운 유행, 여행문화와 패스트푸드 등 너무나 빠르
게 받아들인 서구화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비난은 안이하게 
속죄양을 찾으려는 속셈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 변화는 너무나 급속하게 성장만을 추구
하느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경제발전의 결과는 아닐까?
  어떤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급속한 성장을 추구하느라고 모든 것을 희생했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무시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1963년부터 서울에 거주하고 이는 한 프랑스인 카톨릭 신부의 말이다.
"한국은 30년도 안 되어 석기시대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시대로 넘어갔다. 이러한 
일은 정신적인 면의 뒷받침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석한 언론인도 있다.
"한국의 문제점은, 미래의 모습을 먼저 설정하지  않은 채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
는 것이다."

    위협받는 공자, 그러나 아직 죽지는 않았다.
  이토록 불안을 조성하는 변화들이 진정 뿌리 깊은 것일까? 이들이 자주 비난해온 서
구화는 정신보다는 장식적인 면에 훨씬 많이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은 이제 다시 겉치레를 경계해야 한다. 1997년 한국을 뒤흔든 사회적 변화는 매
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가 동요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무너질 것 같지 않다.  권위적인 가장과 현모양처로 살아
가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동자라고  자처하고, 실제로 부모의 눈
에도 선동자로 보인다 할지라도, 한국의 청소년들은 이웃한  미국이나 유럽, 일본의 청
소년들에 비해 현명한 편이다. 많은 TV 채널이 다양하고 혁신적인 연속극과 프로그램들
을 방영하고 있지만, 군인을 위한 방송도 여전히 내보내고 있다. 게다가 방송의 사회
적 책임이 너무나 막중해서, 그것에 위배되는 방송을 한 방송 책임자는 경우에 따라서 가
족은 물론 직업까지 잃을 수도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고대와 현대가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공자가 위협받고  있
지만, 아직은 죽지 않았다.
  자주 여행을 즐기고, 더 나은 교육의 혜택을 받으며 스스로 현대인이 되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조차도 온갖 사회적 문제에 변함없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를테
면, 내연의 관계, 표현의 자유, 동성애, 회사 내 여성의 지위, 예술적 관용, 범죄에  대한 
투쟁방법 등에 이르기까지...
  언론인 이종석 씨는 한국의 현대적인 경제구조와, 새로운 세계적 현실과는 거의 관
계가 없을 정도로 고지식하기까지 한 고전적인 정신구조의 틈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를 
이렇게 요약했다.
  "지금 우리는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성인의 모집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대학 교수의 말이다.
"한국은 역설의 나라이다. 한쪽에는 급속한 경제성장이  진행 중이며, 인터넷상에서 
정보를 찾아다니는 사람들과 서구화된 젊은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과 사회관
습이 있다."
  그러나 이렇듯 변화무쌍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고유함을  지키고 있다는 것
은 한국이 가진 매력이자 강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이미 서울의 주된 풍경이 되
어버린 아파트 옆에 남아 있는 자투리땅에 몇 가지 채소를 고집스럽게 심고 가꾸는 노
인들이나, 9월경이 되면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길가에다 월동용 고추를 말리는 노인들
이 있다는 사실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현대화와 과거의 생활 리듬에 대한 변함없는 집착 사이의 명예를 건 마
지막 한판 승부는 아닌가?

    민주화와 노동법
  오래 전,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학생들의 거대한 시위로 서울이 뒤흔들렸던  시기
가 있었다. 최근 한국인은 일할 권리와  더 나은 노동조건을 보장받기  위해 시위를 했
다. 
또 환경보호라든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수십 년에 걸쳐 지속
되었던 독재정권이 종말을 고하면서  한국에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었다. 1996년 말부터 
1997년 초까지 계속된 커다란 사회적 동요는 기업주가 샐러리맨에게 더 이상 자신들의 
욕심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이 민주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 중 하나로 1997년 
12월18일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73세였던 그는 과거 군
사독재 시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반체제 인사였고  노벨 평화상 후보자 명단에
도 여러 차례 올랐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정치사에 시사하는 바
가 크다.
  그러나 세대간의 충돌이라는 개념과 사회 변동이라는 개념이  미세하게나마 그 의미
가 구분되어야 하는 것처럼, 민주화라는 개념도 상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또 한사람, 훨씬 온건한 반체제 인사였던 김영삼씨가 김대중 씨에 앞서 1992년 대통
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당선은 반체제 인사 체포, 노동조합 금지, 학생
운동 탄압, 일반화된 부패 등 과거부터 지속되어 내려온 나쁜 관습을 차단하지는 못하였
다. 게다가 한국 국민은 민주화라는 모험과 국내 정치의 안정이라는 두 가지 사안 가
운데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김대중 씨 스스로도 한 국가의 초기 경제발전 단계에는  강한 정부가 필요하다는 사
실을 인정한 것이 있다. 더군다나 그는 과반수에도 못 미치는 득표수로 당선되었고, 
그것도 보수 여당의 분열 덕분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정치범들을 사면할 
때, 그는 기업주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 목적으로 노동조합원들을  사면 대상에 포함시
키지 않았다. 요컨대, 이런 식으로 민주화가 진행된다면 한국 국민들, 특히 보수적인 
기성세대도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한국인은 서울 남산 기슭에 위치한 안기부의 어둠침침한 취조실에 끌러갈 위
험 없이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고문, 실종, 신문  도중
의 '심장마비사'는 과거의 일이다. 언론은 통제 받지 않으며,  노조 활동은 오히려 힘을 
얻는다. '생산은 최대한, 자유는 최소한'이라는 구호가 난무하던  때는 이미 지난 지 오
래이다.그러나 항구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시련이 필요할 것이다.

    경제위기의 탈출구
  한국의 민주화가 아주 현실적인 사항이지만 미세하게라도 구분될  필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1997년 한반도를 뒤흔든 경제위기도 상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영구히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의 겉모습은 언제나 다른 진실들
을 숨기고 있다. 따라서 실제적인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경제위기가 사회에 끼치는 경과는 비극적이다. 경제위기는 지난 몇 십년 동안의 급
속한 성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던 한국인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는 여전히 장사가 잘 되고 있으며, 또 수도로서의 기능을 다 
하고 있다. 위기가 심각하고 아마도 피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한국을 붕괴
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파산 1년 전 한국 경제의 무한한 성장을 언급했고, 뒤이어 한국 경제의 파산 가능성
을 경고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말은 모두 과장된 것이었다. 
국내 시장이 협소하기 때문에 수출에 기반을  두고 있고, 노조 활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한국형 경제 모델은 이미 한계에 이르러 있다. 민주화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요구
가 들끓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은 이제부터라도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세계 경제에 적
응해야 할 것이다.
  또 폐쇄된 전체주의 국가에서 개방된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데는 저항도 만만하
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증권거래소가 혼란의 기폭제가 된다면,  실질적인 경제위기
는 더욱 확산되고 심화될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 만연해 있는 부정부패와 족벌주의가 판
을 치며, 사회적, 지적, 도덕적 영역에 걸쳐 중대한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
  그러나 낙관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2,000억 달러에 달하는 국가 채무가 막
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탄탄한 산업조직을 갖추고 있다. 삼성, 현대는 전세
계에 잘 알려진 상표이다. 한국의 인력은 충분한 경쟁력과 강력한 추진력을 갖추고 있
다. 강인한 민족성을 지니고 있는 한국인은 조국을 위해 언제라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
다.과거를 돌이켜 보면, 한국인은 언제나  투쟁적이고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의지
를 보여주었다. 한국은 국가의 명예가 실추된  것을 역으로 더 높이 승화시키려는  욕구
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번 경제위기에서 탈출해나가고 있다.

    은둔의 땅에서 세계로
  중대한 사회 변동에 직면해서 자국 경제의 미래에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한국
은 세계 속의 한국의 지위에 대해서도 노심초사하고 있다. 1991년 유엔 회원국이 된 
이후로 국제적인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국가로  탈바꿈할 만큼 충분히 부유
해진 한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세게 문제에 대해서도 그 역할과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
다. 오랫동안 미국에 의존했던 한국 정부의 외교도 점차 독립적인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21세기의 한국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은 물론, 기독교 
신자와 불교 신자가 인구의 절반씩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들과 
불교 국가들을 연결하는 강력한 중간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국제적인 활동을 펼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
냐하면 한국은 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전쟁의  상흔
이 차갑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남쪽에는 부유하고 현대적이며 개방적이고 항구적인 민
주주의의 길로 들어선 한국이 있고, 북쪽에는 순순하고 엄격하며 외부의 영향에 전혀 흔
들리지 않는 스탈린주의의 최후 보루 북한이 있다.  북한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
고, 경제적으로는 파산상태이며, 정치적으로는 경직되어 있다. 게다가 중무장을 한 채 편
집 증세가지 보이고 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한국  땅에는 아직도 3만 7,000명
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통일을 염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말로는 그렇다. 
왜냐하면 통일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고된 노동을 한 
대가로 이제야 비로소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한국인들이 주머니 돈을 털어 통일 비
용을 부담하려고 할지는 확실하지 않다.  도한 현실로 닥쳐온 경제위기는 이런  감정
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게다가 북한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통일
을 이루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많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
은 하지만 언제나 가설에 기치고 마는  한반도의 통일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을 포함
한 동북아시아의 모든 국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한국의  미래
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여행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많은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떠난다. 마찬가지로  한국
에 여행 오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은 백화점 매장마다 진열되어 있는 수입품과, 지구촌 
곳곳의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을 보게 될 것이다. 사업상의 일이나 외교적인 일로, 
아니면 공부나 관광을 목적으로 여행 가방을 끌고 '미지의'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인의 
숫자는 앞으로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그런데 이때의 충격도 불쾌감을  안겨줄 수 있
다. 
한국의 개방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국가를 지탱해주는 경제의 많은 부분을 외국에 의
존하고 있는 나라가 이런 상태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잦은 외침을 받았고, 
예전에는 식민지였다가 지금은 분단되어 있는 한국은 스스로 강력한 자기 정체성을 구축
해야 하며, 전체주의 사회가 새로운 것과 다른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외국인을 무조건 
두려워하고 무시하도록 국민을 이끌어온 민족주의의 나쁜 면들을 개선해야 한다.
  오래 전에 은둔의 왕국은 이제  스스로 세계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개인들
은 세계화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하는지, 또 세계화에 어떤 변화가 부수적으로 따
라올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주로 젊은이들이  열만하고 있는 일이지만, 외국인
과의 만남은 그 전까지 받아들인 많은 사상을 돌이켜볼 기회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자
신의 조국에 대해, 그리고 학교를 떠난 후에 배우게 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
회를 제공한다. 개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즉각적인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삶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한국관광공사의 안내책자에 '아시아의  가장 은밀한 나라'라고  자랑스럽게 소개되
어 있는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과도한 도시화, 빠른 서구화, 사회 변동, 세계화 등으
로 말미암아 결코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섰다. 한국 국민은 당연
한 결과라고 믿고 있던 경제 발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토록 오
랫동안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자신의 나라가 더 이상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바로 그런 우려 때문에 전통으로의 회귀, 종교에 대
한 강한 의지 등과 같은 퇴행적인 행동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이다. 과거의 행적을 통해 
현실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런 의문을 품
는다.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회가 변화할까?"
  그 이유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변화에 열망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
이다. 한국에는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있고, 도 새로운 가치가 고전적인 가치를  대신하
는 사회, 훨씬 더 성숙한 사회관계가 전통적인 유대관계를  대신하는 사회, 집단과 국가
의 의미가 사라지지 않고 발전하게 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의지의 한국인이 있다. 한국
인에게 발견하도록 권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변화하는 사회이다.
 
      1. 과거의 도전과 미래의 도전
 
    새로운 유행어, 세계화
  세계화. 외국인이라도 해도 이 말 한마디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
면 몇 년 전부터 한국의 모든 것이 세계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도 세계화 
정책의 실현에 맞춰 조직을 개편하고 있다. 또 세계화의 요구에 발맞추기 위해 지방의 
작은 철공소조차도 간판을 바꾸어 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화라는 말이 가진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
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지 않는 나라에서도 영어로 말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또 항상 질시의 대상이었던 외국
인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서비스를 잘해야 한다고 이해한 사람도 있다. 또한 기구 끝까
지라도 가서 한국 제품을 팔아야 하며, 국제경쟁의 시대에 한국 기업의 경쟁을 강화해
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이 말을 훨씬 문화적인  개념
으로, 즉 고유한 가치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외국의 가치들을 더 잘 받아들이고, 세
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정립시키자는 의미로 이해한 사람들도 있다.
  정치사상 교수인 조율태 씨는 세계화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세계화는 우리의 문명을 포기하고 외국에서 들어온 모든 것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
용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종속이 될 뿐입
니다. 진정한 세계화는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기반으로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
미합니다. 세계화의 개념을  경제에만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문화, 교육, 정치 등의 
영역으로 확장시켜야 합니다."
  한국인 각자가 세계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꽤나 다양해 보인다. 하지만 대부
분의 한국인은 이제부터라도 어느 정도는 세계에 문호를 개방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세계화는 집단과 국가에 중요성을 부여해왔던 역사와, 그런 교육의 결
과 외국에서 들어온 것에 항상 경멸의  시선을 보내왔던 한국인은 세계화를  신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한국이 '은둔의 왕국'이라고 불렸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조율태 씨의 말이다.
  "세계는 결코 한국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일어
났던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인은 약간 불안한 시선으로 세계화를 바라보고 있으며, 대대로 내려온 
관습을 전복시킬 위험이 있는, 그러나 결코 피할 수 없는 신성한 도전으로 여기고 있다.

    백인은 모두 미국인
  1989년 이후에야 한국인은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오
직 한국에서 일해야 했고, 특히 소비도 한국 내에서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
로 그들은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한국 땅을 한 번
도 떠나본 적이 없는 이웃집의 60대  노인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프랑스인들은 
항상 그래"라고 으스대며 말하곤 해서, 학식이 풍부한 사람 앞에서는 늘 고개를 조아
리는 노파들의 감탄을 자아내곤 하였다.
  소설가 박완서씨의 중편소설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 나온다.
  전쟁 기간 동안 남자들이 모두 전선에 나갔기 때문에 여자들만 살고 있던 한 마을에 
미군이 들어왔다. 그러자 학식과 덕망을 갖춘 마을의 한 노파가 미군 병사에게 짓밟힐 
위험에 놓인 마을 처녀들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 최대한 야하게 화장을 하고 다녔다. 
미군 병사들이 노파를 밝은 실내로 끌고 들어가기까지 얼마  동안은 노파의 계략이 맞
아떨어졌다. 하지만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군 병사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마
을 사람에게 식량만을 요구했다.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마을에만 시야가 한정되어 있던 80
대 노인은 이야기를 하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일본군이었다면 죽이진  않았을 거야. 
러시아 군인이었다면 먼저 강간한 후에 죽였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미군을 결코 두려
워하지 않았어"라고 말한다.
  비록 외국어를 조금도 할 줄 모르고 한국 땅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지만 외국의 모
든 것을 알고 있는 한국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외국인 역시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외국인은, 비록 한국에서 30년을  살았고 한국어
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완벽하게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 단순하게 말
하면, 한국에서 출생한 '토종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인은 자기 나라
를 외국인의 시선에서 감추려고 하는 특이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외국인이 
한국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개탄한다.
  그래서 한국보다 중국이나 일본을 더 잘 아는 외국인을 만날 때면, 혹은 외국의 국
가원수가 도쿄를 방문하면서 서울은 방문하지 않을 때면,  몹시 불쾌해한다. 게다가 외
국인이 한국을 잘 알기를 원하면서도, 한국인을 비판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또 외
국인이 자신들을 좋아하기를 원하면서도, 외국인이 결코 한국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보통의 한국인들이 서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인식은, 소수의 편협한 프랑
스인의 눈에 모든 아시아인이 중국인으로  보이는 것처럼, 백인은 모두 미국인이며  모
든 외국인이 서로 닮아 보인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일어나는 사
건이나 한국에서 직접적으로 그 효과를 느낄 수 있는 사건, 혹은 한국인의 시각에서만 
분석될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국제적으로 일어나는 커다란 사건은  사
실 한국인에게 자신과 그다지 밀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외국을 잘  이해하
지 못한 채로 바라본 내용이 여과 없이 그대로 언론에 발표될 때면 더욱 안타깝다.
  1993년 프랑스 사회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했을 때 한 중앙 일간지 사설에, 직
접적이며 주요한 패배 원인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내용의 글이 실렸던 적도 있다. 
한국인은 신문에서 외국의 수도나 지도자들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접해도 그리 중요하
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정치인조차 모범을 보여주기 못하고 있다. 세
계화에 관한 온갖 용어들이 난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외교정책프로그램을 
제안하는 정당은 한 군데도 없었다.
  연세대학교 교수인 신명순씨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뿌리 깊은 민족주의의 감정이  모든 조직에 스며들어  있어서 현실의 외교정책보다 
더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는 정치가에 비하면 사업
가들이 훨씬 더 세계화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식 세계화
  현재의 상황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도
시의 풍경이 바뀌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점차 세계에 개방되고 있다. 도심에 들
어가 보면 외국 회사의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대형 옥외광고판에는 다국적기업들의 
광고가 나오고 있으며, 라코스테나 샤넬 혹은 마크 앤 스펜서와 같은 대기업들은 서울에 
점포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전세계의 회사가  몰려든 결과, 서울의 
거리에서는 점점 더 많은 외국인 회사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백
인이 지나가기만 하면 "미국사람이다!"라고 외쳐대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
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또한 겉으로 드러난 모습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것에 대한 호기심도  높아
만 가고 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몇 안 되던 외국 음식점에는 외국인 손님들만 드나들
었다. 그러나 현재 외국 음식점에 식사하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따라
서 영어를 배우는 것은 의무가 되어버렸다. '세계화라는 커다란 운동에 참여하자'는 대통
령의 말에 따라 한국인은 줄지어 어학원으로 달려가고 있다. 매일 새로운 강좌들이 만들
어지고 있으며, 때로는 길을 가다가 회화강의를 맡아줄 수 없느냐는 제안을 받는 외국
인들도 있다고 한다. 10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있는데, 그 
수는 1985년에 비해 네 배 이상이나 는 것이다.
  문화적인 면을 이야기하면, 한국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외국 미술가들의 
작품 전시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파트리샤카스가 서울에 왔을 때, 그녀는 그녀의 
노래를 줄줄 외울 만큼 열렬한 팬들에 둘러싸여 공항 출입구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1995
년에 열린 광주 비엔날레에는 50개국에서 91명의 미술가들이 참석했을 정도이다.
  서울은 도쿄 다음으로 무전여행객의 천국이 되었다. 이들은 자유롭게 여기저기  돌
아다니면서 자질구레한 일을 하며 돈을 모아 '발길 닿는 대로 마음껏 다니는' 여행객들
이다. 이들 중에는 서울의 사설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강의를 많
이 하면, 6개월 동안 1,600만원 정도를 벌 수도 있다. 그들은 도쿄보다 생활비가 적게 드
는 서울의 허름한 여관에 기거하면서 1년 동안 여행 할 돈을 모아 다른 곳을 여행한 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곤 한다. 또한 지하철역에서는 남아메리카에서 온 악살 볼 수 있으
며, 상업지역에서는 화려한 보석들을 파는 무전여행자도 보인다.
  이것은 오래 전 일본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는데, 이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방을 차려 입은 외교관이나 사업가 외에는 외국인을 보지  못했던 한국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 TV도 세계화운동에 부응해서 아시아에 있는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에 있
는 나라들과 관련된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있다. KBS 뉴스는 15분 동안 영
어로 더빙된 뉴스를 보내고 있으며, 여러 TV  채널도 '세계화되는 법'이라든가 '세계
로 향하는 한국인'과 같이 시사적인 제목의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또 외국인 친구를 사
귀는 것뿐만 아니라, 외국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도 세계화 운동의 한 방편으로 작용하고 
있다.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외국여행도 세계화운동에 한몫하고 있다. 1993년 이후  며칠
간이나마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는 한국인의 숫자가 매년 30%씩 증가하고 있다. 3일 동안 
계속되는 설이나 추석 연휴가 되면 한국인은 주저하지 않고 방콕이나 홍콩으로 떠난다. 
물론 이런 여행은 문화 관광의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인들은 '싸구려 즉석' 여행을 
좋아해서, 10일이나 12일 예정으로 유럽 여행을 할 때도 덤으로 모스크바를 들러서 간
다. 또 외국에 나가서 관광할 때도 자기 나라와 비교하는 일을 배놓지 않는다. 모든 것
은 한국에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나 더 나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더 나쁜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행사의 관광 가이드인 김대성씨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파리에 가면 에펠탑과 남산타워를 비교하고, 베를린에 가변 브란덴부르크의 문(역
주 : 도리아식 기둥 12개가 떠받치고 있는 베를린의 상징적인 건조물로서, 동서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장벽의 시작과 끝 지점으로 온 세계의 눈길을  모았던 프러시아 시대의 개
선문)이 남대문보다 못하다고 하며, 차가  빨간 신호등에 멈추면 서울보다  교통체증
이 더 심하다고 불평을 합니다. 또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도 손가락질하며 놀려대는  일
이 다반사입니다. 하지만 어떤 악의도 없습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고, 모든  사람
의 손을 잡고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보는 것마다 호기심을  갖고, 기념물
이 있으면 그 앞에 서서 그 고장 사람과 사진 찍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제일 좋아
하는 것을 두 가지 꼽으라면, 사진과 면세점입니다. 먹는 것도 커다란  문젯거리입니다. 
그래서 1주일 예정으로 여행을 떠나면, 1주일 치의 한국 음식을 싸가지고 갑니다."
  또한 김대성씨는 자기가 안내했던 대부분의 관광객은 한국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
지 품고 잇던 확신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방문하는 나라의 결점을 부풀리고 한국의 
결점은 축소하는 경향까지 보인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말들은 그렇게 하지만, 한국인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한국 관광객은 외국인에게 평판이 좋지 않다. 비행기의 스튜어디스들은 학구인의  
거만하고 위협적인 행동에 불만이 많다. 유럽의 몇몇 호텔은 한국인이 오반불손하고 종
업원을 마구 대한다는 이유로 한국인  관광객을 받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인은  소란스
럽고, 가구를 훼손하거나 때로는 침실에서 취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국제적인 체인을 맺고 있는 서울의 한 호텔 지배인은 흥분해서 이렇게 말했다.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졸부처럼 행동합니다. 훨씬 더 부유
한 나라들이 있고, 그 나라 사람들의 오래 전부터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태국이나 말레이시아나 이집트 같은 나라에  가면, 한국인은 그 나라에서 겪는  인
종 차별에 불평을 터뜨린다. 그러나 한국인 역시 기념물에 낙서를 한다거나, 상아 또는 
금지된 약초를 산다거나 하는 행위로  비난받고 있다. 이것은 외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서 연합통신에 요청하여 실시한 조사에 따라 확인된 내용이다.
  언론인 이종석씨도 마찬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물론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경제적인 명에서는 선진국에 버금간다고 뽐낼 수 있습
니다. 하지만 경제외적인 면에서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낙후되어 있다고 지적 받는 이
유는, 외국 여행을 간 관광객들이 신흥 경제대국의 국민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한 행동
을 한다고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는 당국은 여행사를 통해  '예절' 에 대한 팸플릿을 나누어
주고, 떠나기 전에 관광객들을 잘 지도함으로써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으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만남과 상호교류에 커다란 기대를 품고 외국으로 나간 젊은이들 중
에는 냉대를 받고 실망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프랑
스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을 불만으로 삼고 있는 학생이 있다는 것이다. 여행하는 나라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거나, 지나치게 순진해서 물건값 깎는 것을 잊어버린다거나, 사기
꾼에게 걸려들어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거나, 택시 바가지요금을 뒤집어썼다거나 하는 
등 상투적인 수법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 친구는 다음과 같이 힘주어서 말했다.
  "하지만 곧 변할 거야. 세계가 여전히 우리를 모르고 있고, 우리는 세계로 여행을 
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오랫동안 폐쇄된 민족주의국가에서 자
란 우리는 외국과 관계를 맺을 때  교육에 대한 문제를 피부로 느껴. 게다가  관광객
들 중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관광안내서도 한국어로 된 것이 드물
어. 그래서 서툰 행동이 많이 발생하는 거야. 하지만 이런 문제는  빨리 교정될 거야. 그
리고 한국 사람들은 곧 모범적인 관광객이 될 거야."

    한국과 세계, 세계 속의 한국
  잦은 해외여행, 외국에서 들어온 유행과 음식들, 외국인과의 빈번한 접촉으로 인하
여 한국인은 더 이상 세계에 대해 과거와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세계화
는 여전히 어려운 일로 남아 있다. 
  한국인의 정신 속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것은 '세계 속의 한국' 이 아니라 '한국과 
세계' 이다. 정치인은 자주 세계화의 목적이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자리에, 특히  
일본보다 한 자리 위에 한국을 올려놓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화에 대해 
매우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한국인은 당국의  이중
적인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말을  꼼꼼히 뜯어보면, 개방할 필요는 
있으나 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요컨대, 국민 대다수는 세계화를 정부의  경제정책 가운데 하나로만 받
아들이고 있다.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공직자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세계화가 사고방식의 실질적인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세계화하는 개념을  통해, 세상에 우리만 있
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 원래부터 최고가 아니었다, 다른 나라의 삶의 방식과 사
고방식이 우리보다 완벽하게 뛰어나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과
도한 민족주의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어렵게나마 우리를  돌아보
게 만들 겁니다. 게다가 '외국의 문화를 가르치고 좋아하게 만들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 중에는 그럴 능력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사람조차 머릿속은 완전히 한국인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전문가들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
하고 일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진짜 일본식 사고를 가진 사람인지 의심스
럽습니다. 다른 나라를 좋아한다고 해서 자기 나라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대부
분의 사람은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또한 수평적인 국제관계에 기초를 둔 반대급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
지 않는다. 70만 대의 자동차를 수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6,000대나 되는 차를  
수입하는 것은 침략이라고 여기고 있다.
  1996년에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80.5%가 국내 기업의 외국 투자에 찬성하
고 있지만, 실제 외국에 투자한 자본 중 45%는  국내에 있는 외국계 자본이었다. 마찬
가지로 한국인의 67.7%가  외국인 회사에서  일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56.1%는 국내 기업이 외국인을 채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세
계시장을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도구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외국에 비치는 이미지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한국 정부는 1985년 프랑스
의 한 논문이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공식
적인 경로를 통해 항의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교과서에서 극히 단순한 내용으로 한
국을 언급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한국은 자신이 외국에 바라는 것만큼 외국을 배려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외국에 체
류하게 될 경우, 그 지역 사람과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은 채  방에서만 시간을 보낸
다. 파리에 어학 연수차 온 수십 명의 한국 학생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프랑스 친
구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또 어학 실력도 변변히 향상시키지 못한 채 2년간 머
물다가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왜냐하면 항상 한국인끼리만 어울려 다녔기 때문이다.
  또 인도에 온 한국인 사업가는 엄청난 양의 한국 음식을 가지고 오기도 하였다. 그
의 집 현관에는 여섯 개나 되는 냉장고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렇게 외국에서 한국의 생
활양식을 지키며 사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서울에 사는 외
국인은 서울의 생활양식에 적응해야 한다. '로마에서는 로마인처럼  행동하라!' 는 소리
를 여러 번 들었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이 음미해야 할 말이고도 하다.
  개방에 대한 굳은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정부와 언론은 다른 나라보다 한국이 더 중
요하다는 점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첨단기술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릴 때도 항상 서울
선언이 채택된다. 그러고 대통령이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와 만날 때면 그런 현상이 극
에 달한다. 대통령은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곳을 방문했던 전임 대통령들보다  특
히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신문에 실리는 사진을 보면 항상 한국의 대통령이 중앙에 있
다. 게다가 세계 정상들이 만난 자리에서도 한국 대통령이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으며, 
한국 정부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기사와 사진이 수정되기까지 한
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외국에서 발간되는 잡지를 펴보면, 전혀 대조적인 해설이 나온다.
  1996년 3월,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와 유럽 정상들의 만남을  보도한 TV 방송을 또 
다른 예로 들 수 있다.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와 한국의 TV 방송 보도를 학생들과 비
교해보았던 것이다.
  프랑스 제2방송에서 각국 정상에게 초점을 맞춘 보도가 하나 있었고, 또 다른 보도
는 태국의 경제성장과 '아시아의 용'들이 유럽에 대해서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
었다. 자크 시락 대통령에게 초점을 맞춘 보도는 결단코 없었다.
  반대로 KBS에서는, 정상들에 대해서는 결코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단지  방콕에 있
는 김영삼 대통령만이 보도의 초점이 되어 있었고, 이번 만남으로 한국이 거둔 성과가 
무엇인지만 보도하였다. 대부분의 보도는 시장개방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다고  장
담한 것과는 상반된 내용이었다.
  신문을 접하거나 TV를 끈 후, 독자나  시청자는 자기 나라만이 세계적인 일에서 결
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그것은 한국과  세계이
지, 세계 속의 한국이 아니다.

    극단적 반외세 구호
  세계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이런 장애물들은 분명히  한국에서 교육되고 옹호
되고 고취된 민족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의 나라가 가장 중요하다고  끊임없
이 되뇌면서 왜 개방을 하려는 것일까?
  사람들은 출생지, 생활영역, 출신 대학, 교제 범위 등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세계화
의 결정적인 장애요인은 땅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93년  세계무역기
구가 주관한 쌀시장 개방에 저항해 일어난 시위는  '반외세'라는 열광적인 구호로 방향
을 틀었다. 시장 개방 앞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무리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아이들
이 수입한 쌀을 먹는다면 더 이상 자기  부모를 몰라볼 것이다'와 같은 구호는 너무  심
한 표현 아니었을까?
  수출 지향적인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해야 한다는 사
실을 적절하게 설명한 신문기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농민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학
생이 시위에 참여했는데, 그들은 리바이스 청바지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화 성조기를 
불사르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와 같은 역설적인 상황은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시위와 관련해서 인터뷰에 응해줄 농부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
에 한 농부를 찾아냈는데 인터뷰하기에 알맞은 조용한 장소를 찾아가던 중, 불과 몇 시간 
전에 반미 구호를 박자에 맞춰 외쳐대던 그 농부가 "맥도널드로 갑시다"라고 제안하는 
것을 들었다. 그 제안이 너무나 엉뚱하고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난 그만 웃음
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왜요? 바로 옆에 있는데, 햄버거가 아주 맛있어요."
  이 상황을 보고, 한국인이 무의식중에도 세계화를 실현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할 사
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친구는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많은 사람이 맥도널드가 미국 회사인지 모르고 있어."
  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개방을 하려는 것일까? TV 보도나 신문기
사나 친구들끼리 하는 토론을 살펴보면, 서양 여러 나랄 폭력과 마약과 매춘이 극에 
달한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마치 한국에는 이런 악이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이 말이
다. 특히 혜택을 입은 수많은 기술 전수에 대해서는 왜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어느 날 한 일간지에 '불법 도박장에 출입한 외국인  두 명 체포'라는 제목의 기사
가 실렸던 적이 있다. 기사를 읽는  도중, 그들과 함께 다섯  명의 한국인이 체포되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 그 두 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은 한국에서 출생한 미국인이라
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외국이 무언가를 중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 하려 들
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알고 있는 것보다 한국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간
접적으로 인정하는 결과가 도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모든 대기업은  외국
회사, 특히 일본 회사와 기술이전계약을  체결함으로써 TV나 VTR 등의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1994년까지 한국에서 만든 자동차는 일본이나 미국 혹은 
유럽 모델을 본뜬 것이었다. 모든  기계와 공구도 역시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물
론 이런 것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고, 또 기술이전계약에서 서
명했던 외국 기업이 자선사업을 하느라고 기술 이전을 했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상호 
교환이 불문율로 되어있는 세계에서. 한국 역시 외국에서 기계를 도입한 유일한 국가
는 아니다.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상호교환을 통해서 혜택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1950년 북한이 무력으로 침공해 왔을 때 유엔군에서 구원을 받았고, 가난했던 시기
에는 외국에서 많은 원조를 받았던, 그리고 외국에서 만든 기술에 힘입어 경제개발을 이
룩한 이 나라에서, 한국인과 외국인이  유대관계를 맺는 일이 너무나 힘들다는  사실
을 알고 놀랐던 어느 날, 정당의 간부였던 여자 친구는 마치 내가 저급한 포르노영화라도 
보고 싶어했다는 듯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다시 여기서 
그런 얘기하지 마"라고 아주 거북하게 말했다.
  한국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기술 협력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린다. 언론에서는 한국 회사들이 항상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으며, 결코 
돈주고 사온 것이 아니라고 보도한다.
  1993년 8월, 계약이 체결될 당시만 해도  TGV는 프랑스의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그
리고 그 다음에는 외국  어느 국가로부터 기술을  사들였다고 보도하였다. 초고속열차
(TGV)는 3주만에 한국의 기술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원래의 
국적을 찾을 것이다.

    세계화의 또 하나의 적, 경제위기
  1997년에 터진 경제위기는 겨우 잠들었던 반외세라는 늙은 악마를 잠에서 깨웠다. 
원화 추락의 반대급부로 수입품의 가격이 오르는 동안, 서울의 거리에서는  "미국의 음
모다. 미국의 제품을 팔아먹기 위해 한국을 흔들고 있다."는 말아 여러 사람의 입에 오
르내렸다. 그 결과 서울의 주유소에서는  외국산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는 것조차  거부
했다. 또 "세계화되어서 좋아진 게 하나도 없어요. 국경을 폐쇄하고 우리끼리 사는 게 
더 나아요"라고 탄식조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은둔의 왕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다.
  지도층 인사들은 한국 경제의 개방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반론을 펼 수 없는 실정이다. 전면적인  경제위기에 충격을 받은 보통 사람들의 첫  번
째 반응은 '외국'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권력을 이어받은 정부의 경제정책이, 재
벌들의 방만한 운영이, 허약한 은행 시스템이 차례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IMF가 강요한 엄격한 기준을 새로운 식민지화를 의도하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반
제' '반미'등의 극단적인 외국인 기피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IMF로부터 받은 신
용 융자 570역 달러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이미 파산했을 것이다.  서양의 자본에, 특히 
일본에까지 공개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때 한국인은 겸손을 가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
나 가장된 겸손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 법이다. 정책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단 때
늦은 개혁으로 쓴맛을 본 정부가 현재의 경제위기를 외국 탓으로만 돌릴 수 없음은 자명
한 사실이다.

    두려움의 표현, 지나친 방어
  한국인이 쌀시장을 개방할 때, 또는 외국 기업이 국내에 상륙할 때 지나치게 감정적
으로 대응한 것은 세계화에 직면해서 불안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실직과 사회보장 
문제에 불안을 보이는 유럽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불안의 측면은 더 추상적이고 더 문화
적이다. 한국인은 국가가 예전과 달리지는 것은 아닌지,  정신과 생활양식이 너무나 
변하는 것은 아닌지를 걱정하고 있다.
  한 논설위원은 "한국의 정신은 문화와 전통 속에 깃들여 있다. 전통이 파괴되면 문
화도 잃게 된다"는 시가를 쓴 적이 있다. 그것을 보고 기자인 심재훈씨가 분통을  터뜨
렸다.
  "모든 사람이 세계화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세계화가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를 어
디로 끌고 갈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합
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남아 있을 때만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교
류는 동일성을 위협하는 행위로 여긴다.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끝없는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
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유럽연합의 출범으로 유럽 각국의 민족적인 특수성이 말살되지도 않았으며, 프랑스
와 독일은 서로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고유한 
정신을 간직하고 있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닮으려고 할  필요는 없으며, 또 서로 
다르다는 것은 빈곤이 아니라 풍요로움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같이 토론을 벌이던 친구들은 외국인을 만나고 외국의 생활양식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존경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런 생각에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았다. 그들로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항상  그들
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방 먹일 작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아이들이 피자를 먹는다고 이태리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그들은 웃었지만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회가 
변화할까?'를 늘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과거를 잘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포위된 성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야만적인 식민지 시절 이후 냉전의 희생양이 되어있던 한
국은 외국에서 들어오는 것에 아직도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것을 두고 이종석씨
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한국은 외국에 의해 한국과 관련된 결정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우선 일보의  식민 
지배가 그랬으며, 다음으로는 연합국의 승리로 획득한 자유가  그랬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냉전에 의한 분단이 그랬습니다. 수정할 때가 되긴 했지
만, 우리가 외국인을 경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교육시장 개방도 사실 무척이나 비난을 받았다. 사설 학원 원장들
은 상업적인 측면에서 불안감을 느끼며 있지만, 시위할 때의 구호는 항상 문화적인 것
이었다. '외국 학원의 설립을 허가한다면 국가의 사회적, 문화적 기반이 붕괴될 것이
다.' 또는 '외국은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장려할 것이다' 라는 구호였
다.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당시의 주된 이슈는 '음모'였다. 한국의 한 영자신문 논설위
원인 김마리씨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진정한 개방을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자신의 동일
성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가 힘들어요."
  사회학자인 윤경숙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파란만장한 역사와 문화적인 억압, 그리고 분단을 겪은 한국인은 흡수되지  않고 
외국과 대등한 교류를 할만큼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충분한 자
신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한국은 우월  콤플렉스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
다. 그래서 외국과 관계를 맺을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른 나라를 좋아하는 것이 
곧 자기 나라를 싫어하는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외국에서 이름을 떨친다고 해서  자
기 나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이
유 때문에 외국에서 온 문화나 혁신적인 기술을 자주 침략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
만 국가가 부강해진다면 민족문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또 정신을 빼앗길 염려 없이 
자신 있고 발 빠르게 외국과의 교류에 나설 겁니다."

    차별 받는 외국인-경계와 애정 사이
  모든 관계가 약호화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 들어오면 외국인은 당황하게 된다. 한국
인과 대화할 때 어떤 언어를 상용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반응은 예측이 불
가능하고, 몸짓으로 나타내는 것도 각각  그 의미가 다르다.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거
의 모험이나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더 편안하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 사회에는  일종의 외국인 기피 증세가 만연해있다.  이것
은 인종주의라든가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은 뭔가 다른 
사람들이고 일반적으로 타민족보다 우월하다는 특별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상의 
사소한 행동에서는 이런 현상이 외국인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즉, 
버스에 탔을 때 외국인 옆에 앉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서 있으려 하고, 외국인이 들어오
면 모른 체하는 상점 점원들이 있으며,  외국인을 놀려댈 속셈으로 외국인에게 말을  걸
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등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외국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경우도 많다. 켄도클럽의 멤버들은 무척이나 잘 
대해주었다. 등산 갈 때마다 같이 가지고 청해서 여러 가족과 함께 소풍을 간 적도 많았
다. 이웃들도 항상 나를 반겼다. 그래서 거의 매일 저녁  이웃집을 교대로 돌며 식사
를 하곤 했다.
  1996년12월1일, 대학로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커다란 문화행사가  열
린 적도 있다. 또 관공서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편의를 봐주기 때문에 일을 보는 데 
많은 시간이 단축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인은 아기나 장애인을 다루는 듯한  태도
로 외국인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두려움과 거부감,  혹은 그와는 반대로 과잉보
호와 지나친 염려가 혼합된 표현으로 보인다.
  외국이 더 좋게 보이든 아니든, 아니면 한국과 똑같이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또 외국인에게 너무 친절하든 아니면 쌀쌀맞든 간에, 한국인은 외국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산보하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저녁을 같이 하자고  초대
한 사람들, 모두 한국이 인심 좋은 나라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한
국에 대한 비판이나 프랑스에 대한 찬사, 어느 것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초대
받은 나로서는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겉으로 보인 몸짓
은 대단한 환영이었고, 외국인과 외국 문화에 대한 애정 고백이었다.

    한국의 쿤타칸테, 외국인 노동자들
  한국에서는 짙은 피부보다는 흰 피부를 가진 외국인이 더 유리하다. 현재 한 대기업
에서 고위 간부로 일하고 있는 한 코트디부아르인은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시절, 어느 날 교수 한 사람이 대형 강의실에 들어와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하고만 수업을 시작하겠어요."
  그래서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하였다.
  "교수님, 저는 한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강의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송용이 없었다. 그는 강의실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
붙였다.
  "가장 슬펐던 것은 학생들 중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
부분의 다른 나라 대학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정반대로, 어떤 연대의식의 도움도 받지 못
했던 것입니다."
  또 물고기 양식을 배우기 위해 8개월간의 연수교육차 한국에 온 한 카메룬인은 동료
들이 자기를 '원숭이' 라는 별명으로 불러댔고, 식사를 마치면 자신들이 다시  사용하
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가 사용했던  접시를 깨뜨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도 
있다.
  그런데 그 코트디부아르인은 한국 대기업에 과장으로 채용되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이다.
  주로 필리핀이나 방글라데시, 네팔. 파키스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도 열악하기 이를 데가 없다.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주요 단체 가운데 하나를 이끌고 있
는 김태호씨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이들의 상황은 거의 노예나 다름없습니다. 회사에서는  여권을 압수하고, 하루 12
시간의 노동을 강요합니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한국인 노동자가 받는 임금의 절반 정도
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달에 4만원 밖에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
다. 모욕당하고 멸시받으며, 때론 매질까지 당합니다. 오염지역인  데다 위생시설도 제대
로 갖추어지지 않은 형편없는 곳을 숙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고가 났을 경우에도 보
상금 한 푼 없이 팔 하나가 잘린 채 돌려보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수치입
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한 변호사이 말이다.
  "임금 체불이나 보상금 없는 중상, 여권 압수 등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
니다. 외국인은 한국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부당한 취급을 받고도 감히 법정으로 달려가지 못합니다. 추방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겁
니다. 그 결과 비자 기간이 끝나면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최소한의 임금도 받지  못
한 채 한국 땅을 떠나게 됩니다."
  자유가 억압된 수감자조차도 외국인 노동자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는 실정이
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은 국제노동기
구로부터 정기적으로 비난받고 있다.
  항상 좋은 이미지만을 외국에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한국의  공무원에게는 이 문제가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한편으로는 3D업종의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는 데 외국인 노동
자가 필요하지만, 또 한편으로 공무원의 입장에서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서  정착
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외국인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열
악한 처우가 결코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해당부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월급은 평균  69만 6,000원으로 과거에 비해  370%나 
인상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가 받는 월급의 80%  선에 육박
한다고 발표하였다.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고, 외국인 노동자의 권익
이 더욱 보호받아야 하며, 그들의 이익이  더욱 존중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힌 바  
있다. 중소기업연합도 이런 취지의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한 1994년 1월, 노동부장관은 외국인도 곧 한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똑같이 갖게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생각이  아무리 좋아도 현실은 다른  법이다. 1992년에
도 
정부는 이미 똑같은 약속을 했었다.
  김태호씨는 이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그저 말장난일 뿐입니다. 오히려 정부가 외국인  착취를 조장하고 있는 현실입니
다. 정부는 1993년 연수교육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국내에 들어오게 해서 
중소기업에 착취하도록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정부입니다. 이런 연수교육을  실시함
으로써 한국은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식적으로는 개발도상국가에서  
온 노동자를 연수시킨다는 명목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거의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교육생은 배우는 것 하나 없이 그들이 아니라면 그냥 도산해버릴 처지에 놓인 중
소기업에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교육생의 숫자가 필요보다  
적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항상 있을 테니까요."
  사실 교육생 대부분은 지금 있는  회사를 나와 불법으로라도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1995년 네팔에서 온 샴 파트나크씨는 자청해서 불법체류 노동자가 되었다고 한다.
  "기술교육을 받는 대가로 최저임금을 받기로 하고 한국 정부와 계약했습니다. 그런
데 한국에 도착해서야, 이런 연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
음에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지옥에서 일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젠 배우는 것 없
이 소처럼 일해도 좋으니까, 일하는 만큼 돈이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샴 파트나크씨는 1주일 내내 매일 열 네 시간 씩 일하면서 약70만원을 받고 있
다. 근 자기 운명에 만족한다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
  1995년 1월, 여러 명의 네팔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기 위해 명동성당 
창살에 쇠사슬로 몸을 옭아맨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몇몇 진보적인 신문을 빼고
는 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회사 사장들보다는 오히려 공권력
의 분노를 자아냄으로써, 공권력 측에서 네팔 대사에게 요청하여 네팔인을  진정시키
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1주일 후 중소기업연합과 파업 노동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
는데, 이번에는 크게 매스컴을 탔다.
  그러나 진짜 결론은 몇 달 후에 나타났다. 네팔 노동자들이 비밀리에 추방되었던 것
이다. 그와는 반대로 부당한 대우를  일삼았던 중소기업 사장들은 전혀 기소되지  않
았다. 김태호씨는 이런 말로 유감을 표명했다.
  "그들이 추방당할 때도 언론은 그 문제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핵
심은, 한국에서는 기업의 이익만이 중요할 뿐 그 이익을 실현하는 수단이 무엇인가는 전
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기업을 난처하게 하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는 겁
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후,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이번
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문제는 또한 외국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태국인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 사장들은 공자의 노동자들에게서 최악의 평판을 얻고 있다. 심한 학
대에 못 이긴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그들 중 한 명이 살해당한 일도 있었다.
  여론도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 무관심하다. 외국인 노동자를 돕기 위해 달려오는 단
체들도 있지만, 그 수는 거의  미미한 정도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대중적인 운동
이 없는 것이다. 때때로 방송의 힘에 눌려 기업들이 낸 기금에서 부상 노동자에게 보상금
이 지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제도를 재검토하는 것보다는, 기업 보호를 가장한 
언론의 통제가 더 문제가 되고 있다.
  1996년, 이러한 종류의 기금은 작업 중에 사고를 당한 아홉 명의 필리핀 노동자에게 
350만 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은 한 쪽 팔을 잘라내야  했다. 15년 동
안 근속한 KBS의 한 간부가 손가락 하나 잘리지 않았는데 연초에 상여금으로 700만 원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면, 관용이 매우 상대적으로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는 사법제도에서 훨씬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재판부는 불법 노
동자를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가 임금이나 노동시간, 여권 압수 등에 대해 소송을 제기
한 경우, 언제나 외국인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따라서 과감하게 법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네팔과 파키스탄에서 온 노동자들을 여전히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들을 고용하고 있는 회사의 사장이 그들에 관한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는 동시
에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많은 한국인이 모여 
나지막하게 말한다. 켄도클럽의 한 친구는 자신의 심중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들의 상황이 매우 안됐긴 하지만, 한국 사람이 받는 월급의 절반을 받는다면서 
역시 착취당했던 자기 나라에서보다 열 배는 더 받는 거야. 게다가 그들은 한국 땅을 떠
나려고 하지 않아. 이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
는 거야."
  어디에서나 자주 들을 수 있는 도덕적인 양심가의 말이다.
  실제로 1997년의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의 59%가 한국에 머물기를 원하고 있
다고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한국인이 볼 때, 치열한  국제 경쟁의 시대에 임금이 저
렴한 외국인 노동자들 고용함으로써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다. 따라서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파키스탄이든 베트남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다. 특히 대부분의 언론은 외국인 노동자가 범죄 혐의를 받고 있을 때라든가, 혹은 그와는 
반대로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어떤 입법을 예고할  때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서 언급할 뿐, 외국인 노동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언급하지 않
고 있다.
  몇몇 언론과 종교단체 및 자선단체들의 개입으로 수년 전보다는 노동 조건이 개선되
었다고 하지만, 가족과 멀리 떨어져서 이민족에게 배척받으며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한국에서의 삶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문제
이다.

    유능한 외국인은 대접받는 러시아인과 미국인
  러시아나 동유럽에서 온 노동자는 일반적인 외국인 노동자와는 다른 범주에  속한
다. 대부분이 한국의 대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고학력의 과학자이며, 따라서  
한국에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임금은 한국 엔지니어보다 낮지만,  아이들의 교육비
와 주거비용을 뺀다 하더라도 모스크바나 소피아에서 버는 것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이
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그들을 고용함으로써 저렴한 비용으로 그들이  가진 노하우와 기술
을 획득하는 셈이다. 어쨌든 기술이전계약을 체결하는 것보다는 돈이 덜 드는 일이니
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들도 열렬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한 자동차 회사에서는 22명의 루마
니아 엔지니어를 고용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 중의 한 명에
게, 틀림없이 그들에게 꽤나 많은 돈을 썼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차갑게 웃으면서 "
매일 스물 두 번의 기내식을 먹은 셈이죠"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한국에 경제위기가 닥쳐오자 수많은 외국인과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는 한
국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지체 없이 한국을 떠나야 했다. 비행기 좌석들은 러시아인
이나 파키스탄인, 혹은 방글라데시인 등의 외국인으로 가득 찼다. 강제로 출국 당한 사
람들로서는 한국에 눈곱만큼의 애정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회사에서 한국인을 
선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한국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꽤 많은 
외국인도 강제로 출국 당하고 말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군은 미군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키기 위해 한국  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한국인에게는  매
우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인 관용의 대상이다. 이태원 거리에서는 한국인과 한국 땅을 밟
은 지 3주일만에 비로소 해방된 미군 병사 모두가 잔뜩 술에  취한 채 정기적으로 패싸움
을 벌인다.
  1994년 6월 지하철에서 발생한 사건은 매우 시사적이다. 한 미군 병사가 젊은 한국
의 여자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술에 취하지도 않은 한 
남자가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미군  병사에게 욕설을 해댔다. 또한 그 젊은  한
국 여자를 창녀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그 병사와 동료들은 자제하면서 그가 이성을 되찾
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점점  더 무례하게 굴며 미
군 병사를 밀쳐댔고, 마침내는 싸움이 벌어 졌던 것이다. 게다가 지나가던 다른 행인도 
미군 병사를 공격하였다.
  언론에 의해 크게, 그리고 편파적으로 다뤄진 이 사건은 너무나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기 때문에, 결국은 대통령이 몸소 나서서 '범죄적' 행위를 한 미군 병사를 가장  엄
중한 벌로 다스려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미군 캠프 앞에서는 여러 차례 시
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복잡한 재판 절차를 거친 후에야 미군 병사가 결코 행인을 공격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젊은  한국 여자도 그의 아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에 이르렀다! 동족을 편들기에 여념이 없던 언론은 위선적이게도 의사소통 과정에서 문제
가 있었다면 변명하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언론매체들이 이 사건을 다룬 방법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공식성명이 미군 사령부
에서 발표되자, 즉각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게다가 1995
년 1월, 한 일간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반미시위에 고나한 사진을  실었는
데, 같은 명에 한반도와 극동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군이 한국에 우선적으
로 개입할 계획을 세워놓았다는 사실에 한국이 안도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란히 실렸던 
것이다.

    한국인이 무조건 옳다
  '지하철 사건'은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을 때, 외국인이 옳다고  판
명된 드문 경우이다. 한국인은 자신들 중의 하나가 비난받으면 즉각적으로 반응을 나타
낸다. 한국인 한 명을 비난하는 것은 한국인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래서 정명훈 씨가 1994년 8월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 겸 오케스트라 상임지휘
자의 자리에서 해임되었을 때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전임자와 후임자가 모두 외
국인이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불순한 인종적 편견이 작용한 결과라고  비난했
던 것이다. 기자들은 오페라극장의 책임자와 전화 통화 한번 해보지 않은 채 프랑스를 맹
렬히 비난하는 기사들을 써댔다. 왜냐하면 두 당사자간의 사적인 갈등은 더 이상 중요
하지 않았고, 프랑스와 한국 사이의 갈등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 대형 일간지는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의 변호사 비용을 대기  위해 약 12억 원에 
달하는 돈을 독자들에게서 모금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연봉은 수백만 달러에 달
할 것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정명훈 씨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다. 물론 언론에서는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을 테지만 말이다.
  1996년 가을 대우-톰슨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을 보았다. 경제
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만큼 커다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
을 것이다.
  프랑스 기업을 민영화하는 차원에서는 재벌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프랑
스 정부는 처음에는 상징적인 1프랑과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하는 부채의 절반, 그리고 종
업원 전체 인수를 조건으로 매입을 허락했다. 그러나 민영화위원회는 마지막 순간에 
톰슨그룹의 민영화계획을 백지화했다. 왜냐하면 대우 그룹이 인수에 필요한 재정적, 산
업적, 사회적 보장책을 제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진 기술과 중요한 판매망을 싼 가격에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꿈이 무산
되는 것을 지켜본 한국인은 분노했다. 한국의 여론과 정치 지도자는 이것을 일종의 선
전포고로까지 해석하였다. 민영화위원회가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정부와는 무관
한 단체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정부가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이해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언론은 TGV 계약의 재검토를  요청하는 등 마음껏 즐기면서  프랑스를 공격해댔다. 
무수한 확약이 오갔고, 특별 밀사를 파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우-톰슨 사건'은 오랫
동안 서울 정부와 파리 정부간의 외교적 마찰을 빚게 했다.
  외국인 상사 밑에서 일하는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명령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무척 힘든 모양이다. 외국인 영어 선생님과 한국인 영어 선생님이 있다면, 학생들은 
항상 한국인 영어 선생님을 더 신뢰한다. 일간지에는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무례한 행동
을 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다양한 기사가 지면을 장식하고있다. 잘 모르는 사람과 외국인
이 말싸움을 벌일 경우, 외국인과 절친한  한국 친구들도 외국인이 옳다고는 절대  말하
지 않는다. 외국인을 보호해서 그 자리를 피하긴 하지만,  먼저 싸움을 건 '한국인'을 비
난하지는 않는다. 누구라도 동족을 '배신'하지는 않는 것이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행인  모두가 한국인 버스 운전사가  잘못했다며 나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던 일이 잇다. 그러나 경찰은 사고 현장에 와보지도 않은 채 내
가 잘못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허위로 꾸몄다.

    목숨도 걸어야 할 국제결혼
  개방이 어려운 이유는 국제결혼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국제결혼이 
극히 어렵다. 외국인과 결혼하면 '혼혈아'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캘리
포니아에 살고 있는 젊은 한국인조차도 한국에 돌아와서 결혼  한 후 로스앤젤레스로 돌
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 남자와 외국 여자가 결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유럽이나 미국 남자가 한국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장차 처가가 도리 집안과 전쟁이 벌
어진다. 물론 이례적으로 바로 결혼 승낙이 나는 경우도 아주  가끔은 있다. 그러나 부
모는 외국인과 결혼시키지 않기 위해  딸을 윽박지르고 때리거나 외출을  금지시키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다 자란 딸에게 말이다!
  가족 심리학자인 최홍화씨의 말이다.
  "한국인끼리 결혼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외국인과의 결혼을 문화적인 차
이가 확연하기 때문에 특히 더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 딸을 여러 번 시험합니다. 그래서 만약 진심이라면 딸의 행
복을 위해 결혼을 승낙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옳은  일입니다. 물론 한국인
과 결혼하겠다고 할 때도 딸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시험해볼 겁니다."
  하지만 딸을 품에서 내놓지 않으려는 부모들도 있다. 딸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밤에 전화해서 협박을 하거나, 자동차 타이어를 펑크내거나, 길거리에서 봉변을 준다
거나 하는 물리적인 제재가 상대 남자에게 가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으
면, 말리기에 지친 부모는 체념한 채 마침내 결혼을 승낙하고 만다. 그러나 때로는 "그  
남자를 선택할래, 우리를 선택할래?" 하는  식으로 위험한 선택을 강요하는 부모들도  
있다. 즉 사랑하지만 외국인이라는 결점을  가지고 있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결코  다시
는 부모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것은 젊은 처녀에게 부모는 물론 형제자
매, 조국, 또 그 밖의 모든 사람과의 인연을  영원히 끊으라는 무시무시한 선택을 강
요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다.
  자기 딸이 유럽 남자와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심장미비를 
일으켜서 죽은 경우도 있다. 남자에게는 무시무시한 책임이 아닌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매우 정중하게 가족  식사에 초대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가 그 집 딸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을 받게 될 것이다. 인자하
기 이를 데 없고, 세계 곳곳을 여행했으며, 3개 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고, UN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한 친구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여행하면서 다른 생각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정신을 풍요
롭게 하지. 그렇지만 국제결혼은 반대야. 왜냐하면 인종이  서로 다른 부모에게서 태
어난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영리하지 못하다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거든."
  이렇듯 언제나 한국인은 순수함과 단일한 기원에 대한 강박관념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인을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결론지어야 할까? 그렇게 단정짓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아직도 한국에서의 결혼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이기 전에 두 가족의 계약이다. 한국인이 혈통과 조상과 가족관계에 중요성을 부여하
는 것은 문화적인 차이로 인정하여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부모와 똑같은 문화를 물려받
은 딸이 갈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제결혼을 거부한다면, 이것은 때론 한국인을  호
의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극단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 대전에서 일어난 일을  결론 삼
아 이야기해보자.
  다섯 명의 유럽인이 한 음식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 옆에 앉은 한 무리의 젊
은이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냈고, 마침내는 전형적인 한국 대중음식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침입자들을 내쫓아달라고 주인에게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
인은 버럭 화를 냈고, 그토록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며 
마음에 안 들면 당장 나가라고 오히려 젊은이들을 꾸짖었다.
  한국인이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이토록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앞으로는 후자의 반응이 점점 더 자주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이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개방적이고 대단히 친절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수세기에 걸쳐 많은 침략을 받음으로써 국토가  분단되
었고, 외국인을 대할 때 자신감이 없으며, 과거 지향적인 지나친 민족주의적 교육을 받
음으로써 오히려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그들의 외국인 기피증은 선험적인 거부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을 잘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물론 역사상 수난을 겪었다는 이유로 현재의 지나친 반응을  합리화할 수는 없는 일
이다. 한 러시아 친구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다는 이유로 매일 두들겨 맞고 오
는 자기 아들을 도저히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아이들은 일제 식민 지
배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인은 아이들에게 한국의 것과 다른 것을 경멸하라고 가르
친다. 한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거리를 다니지  못한다
고 한다. 그들은 항상 신기한 동물을 보는 듯한 눈초리를 느낀다.  한 미국인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현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새롭고 다른 것에 근본적으로  기피증과 경멸
을 나타내는 미국 남부의 마을을 연상시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언어라는 장벽이다. 한국인은 영어를 못 한다는 사
실을 드러냄으로써 체면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외국인에게 도움도 주지 않고 가만히 있
는 족을 택한다. 그러나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외국인은 극진하게 대접하며, 
사람들은 그런 외국인을 최대한 도우려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
와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외국에서 온 것에 매력을 느낀다. 점진적으로  개방되고, 외국과 잦은 교류
를 갖게 되며, 빈번하게 여행을 함으로써 교육제도를 재검토할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
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다른 많은 부분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과의 관계에서도 한국
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인은 이중적이다. 집단 속에 있을 때는 우울해하고 따분해하며, 약호화되고 예
측할 수 없는 모든 관계 속에서는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귀찮아한다. 그러나  신뢰
를 느끼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듣지 못한 이야기
들도 많이 하고, 가슴이 따뜻하며 상대방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인은 가장 편협한 국수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이며,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들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인자한 사람들이다.
 
    자신과 다른 것 인정하기
한국 남쪽에 위치한 소록도. 푸른 언덕 여기저기에 작은  샛길이 나 있고, 고요함과 
경관이 뛰어난 백사장과 수정같이 맑은 물이 있는 이 섬은, 여행객의 낙원이라는 말이 
쉽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다.
  이 섬은 낙원이라기보다는 주민들에게 오랫동안 지옥이었다. 소록도에는 실제로 나
환자들만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의 환자는 매우 고령이다.  그들은 1930년대에 한국을 
점령한 일본 군대에 의해 강제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 당시에는 나병이 두려운 병이었
기 때문에 나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 수용해야만 했다.
  손이 없어진 채 팔뚝만 남은 한 노인은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1937년에 여기 왔지. 그때가  열 여섯 살이었어. 일본  사람들이 트럭을 가져와서
는 문둥이들을 죄다 태웠어. 난 대구 출신이야. 우릴 태운 차는  부산에 갔다가 광주에 
갔다가 마지막으로 소록도로 왔어. 어디에 들를 때마다 문둥이들을 태웠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가족을  다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부모나 배우
자, 아이들과의 접촉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게다가 섬에서 멀리 떨어진 육지에 사
는 환자의 아이들도 힘든 삶을 각오해야 한다. 가족관계가 근본인 유교국가에서는, 나환
자의 자식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람이 접촉을 꺼리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소록도 나환자의 삶은 극도로 어려웠다. 물론 식량은 꼬박꼬
박 보급되었고, 섬에는 일본인 의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집을 손수 지
어야만 했다. 그런데 흙손 다루기나 벽돌 나르기, 사다리  오르기 등은 아주 작은 상처
에도 심한 고통이 따르는 나환자에게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한 남자는 말했다.
  "일본인은 우리를 환자가 아니라 일꾼이나 노예로 취급했어."
  그러나 일본의 점령이 끝났어도 소록도 주민에게도 자유가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
려 그 반대였다. 당시 한국은 가난했고,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이 환자들에게 쏟아 부을 
돈도 한 푼 없었다. 식량도 없었고 약도, 의사도 없었다. 그러자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
나기 위해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한 노파의 회상이다.
  "헤엄쳐서 도망가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며칠 지나면 시체가  파도에 떠
밀려왔지. 살기 위해서 채소를 심고  낚시질을 하고 결혼을 했지.  의사가 없었기 때문
에 우리끼리 치료할 수밖에 없었어. 내 다리를 자른 사람도 나와 같은 환자였지."
  소록도에서의 생활조건은 실제로 1970년대 말이 되어서야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가 되어서야 비로소 극빈자를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국가가 부유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날은 모든 환자가 작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 정부는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가구, 전자제품을 무상으로 공급한다. 또 각종 종교단체의 건물도 들어섰다. 지금은  아
늑한 작은 마을로 보이는 이 섬에서는 여덟 병의 의사와  백여 명의 간호사들이 하루 종
일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1,100명의 환자와 카톨릭 신부 몇 명, 그리고 600명의 유
급 직원과 그들의 가족이 여기에 살고 있다. 또한 직원의 아이들을 위한 초등학교도 세워
져서 이곳에 약간의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자
유이다.
  소록도 주민이 섬을 떠나는 일은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1980년
대 초 세계보건기구는 나병에 걸린 사람을 반드시 격리 수용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약
만 있으면 나병 환자는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환자들이 같은 소
록도에 살고 있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 후 1980년 말까지 기
다려서야 규제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신체적인 뒤틀림 현상이 오지 않은 사람은 육지
로 나가도 좋다는 허가도 내렸다. 단, 저녁까지는 섬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조건이었다.  
다시 몇 년이 지나자 모든 환자가 같은 권리를 얻게 되었다. 장이 설 때마다 그들은 해
안 마을로 가곤 한다.
  그리고 1993년 이후로부터 소록도 나환자들이 그토록 원했던, 육지에 정착해서 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명목상의 자유에 불과하다. 실제로 가족도 
없고 고령인 데다 장애까지 겹친 환자들이 50년 동안이나  살아왔고 모든 것이 무상으로 
지급되는 이 섬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생활비도 비싸며,  또 손 대신 팔뚝만 
남은 그들을 이웃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이 뻔한  육지에 나가서 어떻게 정착하
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새장이 아물 금테를 둘렀어도, 새장은 새장일 뿐이다. 게
다가 명목상 소록도에 거주하고있는 주민은 일곱 명뿐인 것으로 되어있다. 그들은 22명
의 간수에게 감시를 받는 죄수와 다르지 않다.
  서울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렸을 때, 많은 시체 장애자와 정신 장애자가 이 섬에 한
시적으로 수용되었던 적이 있다. 올림픽 경기를 보러 온 방문객들이 그들을 볼 필요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소록도병
원장 오대규 박사는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것은 외형적인 모습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유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
다. 최소한 겉모습이 완전해야 한다는 것이죠. 게다가 조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
에, 한 사람이 문둥이면 그의 조상 중에 문둥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날 생활여건이 현저하게 나아졌는데도 불구하고 나환자의 섬 소록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병자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한국인의 정신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울 거리에서 정신 장애자나 휠체어를 타 사람은 만나기는 쉽지 않다. 혹시라도 눈
에 띄는 장애인은 잘린 다리에 더  이상의 상처를 이지 않으려고 고무를 친친  동여
맨, 걷지도 못하고 기어다니면서 구걸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주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
들뿐이다. 다른 장애인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요양원에  숨어 있거나, 때로는 아파
트의 작은 방 한 칸에 갇혀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경우도 있다.
  언론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장애아들이나, 이웃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기가  죽었
다고 믿게 하려는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장애아의 부모는 이
웃과 거의 왕래하지 못하고 지내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2년 동안 살았던 광명에서는 
한 여자가 다운증후군(역주 : 예전에는 '몽고증'이라고 했는데, 염색체의 이상으로 발
생하는 장애. 이 용어는 장애의 특징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밝힌 존 랭던 다운의  이름
의 따서 지은 것이다)을 앓고 있던 여섯 명의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
은 그녀의 용기를 칭찬했지만, 자기 아이는 그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했다. 또 아파트 
주인들은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세를 들어오면 임대료가 떨어진다고 푸념하곤 하였다.

    감추고 싶은 이름, 에이즈
  이런 거부 현상은 에이즈 환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세계적으로 유
행하는 에이즈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위험을 경고하
는 포스터도, 예방 캠페인도, 콘돔 사용을 권하는 TV 고아고도 없다. 섹스에 관계되는 모
든 것은 금기이며, 한국은 에이즈가 없는 나라처럼 보인다. 인구가 1,000만이 넘는 서
울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무료 검진을 받을 수 있는 진료센터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에
이즈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책정된 정부 예산도 3억 원에 불과하다. 공식적으로 밝
혀진 에이즈 감염 환자는 1998년 현재 350명이고,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는 약 1,000
명 정도이다. 그리고 이 경우의 80%는 2, 30대에 나타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 숫자의 50배나  된다고 한다. 매춘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고, 남성들이 콘돔 사용을 항상 꺼리기 때문이다.
  우아한 외모에 보일 듯 화장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주혜란 박사는 사회사
업가라기보다는 피아니스트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녀는 1984년 이후로 에이즈 퇴치운
동을 최우선적인 국가 과제로 인식시키기 위해 홀로 분투해왔다.
  서울 북쪽에 위치한 의정부의 미군  캠프 근처 보건진료소에서 의사로  일하던 시절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그녀는, 그  후 학교와 공장에서 많은  강연을 했고, 보조금을 
얻기 위해 관계 부처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으며, 매일 저녁 서울의 사창가를 돌아
다니면서 콘돔을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과 TV에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 그녀는 오늘날 '매춘부들
의 대모' 또는 '에이즈 박사'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유명해졌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에
이즈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뿐이다.
  "공무원은 아프리카나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면서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있어요. 그저 눈감고  아옹 하는 식이죠. 매춘이 불법이기  때문
에, 창녀도 없는 식이죠. 그래서 매춘을 단속하는 어떤  행위도 없어요. 동성연애자들이 
위험한 집단이라고요? 그래서 모든 게이 바를 문닫게 했죠. 그 결과 예방은 이제 불가능
해졌어요. 정치인은 에이즈 보균자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공식 발표 내용만 가지
고 자신의 안일한 태도를 정당화할 뿐이에요.  너무 늦지 전에 손을 써야 한다는  것
을 그들에게 이해시키는 일도 불가능해요. 정부가 올림픽 경기를 서울에서 유치하려고  
했던 1980년대에는 국가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말은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10
년도 더 지난 지금도,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변한 것이 있다면, 에이즈 보균
자 숫자가 심각하게 늘었다는 것뿐이죠."
  그녀의 개탄이다.
  그러나 그녀는 '에이즈는 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병이다' '한국인들은 근본적으로 
에이즈에 면역성이 있다.' '에이즈는 모기에 의해서 옮겨 질 수 있다.'라든가, 1996년 
서울의 대형 일간지에 '에이즈는 수영장에서 전염될 수 있다'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와 같
은 고정관념과 투쟁하고 있다. 이런 말은 과거의 전통적인  사회라면 모를까, 온갖 정보
를 접할 수 있고 여행도 빈번한 한국의 현대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 엉터리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의 한 교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한국은 역설의 나라입니다. 한편으로는 급속한 경제개발이 이루어지고 있고, 인터
넷상에서 정보를 찾는 사람이 있으며, 너무도 철저히  서양화된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
리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사
회관습과 사고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에이즈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좋은 예이다. 1995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젊은이들의 49%는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의 손을 잡기만 해도 충분히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외국인을 만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1994년까지 신문들은 해외여행을 했거나 외국인과 접촉했던 사람들의 숫자를  
정확히 밝히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사례를 들기도 하였다.
  정치인들은 정보에 어둡다. 또 의사가 에이즈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거나 그들을 병
원 밖으로 쫓아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1993년 한 지역의 주민들은 인근 지역에 에이즈 
보균자센터를 짓는 것에 반대하여 큰 시위를 벌인 적도 있었다. 결국 그 계획은 폐기
되고 말았다.
  에이즈는 사회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병이다. 자신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고
백하는 것은 직장과 주거지를 잃는 결과를 낳는 일이고, 흔히는 가족으로부터 배척 당하
고 만다.
  김현철씨는 결혼하기 며칠 전에 자신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회
사 직원과 술자리를 갖던 날 사장의 강요에 못 이겨 창녀와 관계한 후 감염되었던 것이
다. 그의 증언은 너무나 끔찍했다.
  "직장을 잃고 가족도 잃었습니다. 가족들은 무슨 더러운 벌레라도 보듯 쳐다보았습
니다. 오랫동안 부랑자처럼 살았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고 싸웠기 때문에 
두 달 동안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밤마다 끔찍한 악몽을 꾸었습니다.  술을 몇 병씩 
마시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비관한  나머지 자살하고도 싶었습니다. 거
리를 걸을 때면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생활을 끝내고 싶었던 그는, 어느 날 에이즈 예방협회를 만들기로 결심
하였다. 하지만 그런 단체를 만들 자금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그는,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이 직접 에이즈를 예방하자고 하는 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나의 모든 친구는 그들이 아무리 친절하고 너그럽다고  할지라도 에이즈 보균자에게 
애정을 갖기는 힘들 것이며, 또 그와 함께 운동을 하거나 음식점에 가거나 술을 한잔
하는 일은 불가능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주혜란  박사와 인터뷰할 때 한 기자는  "에이
즈 환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요?"라고 심각하게 물었을 정도이다. 결국 에이즈에  걸
린 사람들은 검진도 받지 않고 침묵해버린다. 침묵은 감염의 최대 공모자이다.
  1995년 5월 주혜란 씨는 에이즈 환자들에게 정신적, 사회적 도움을 주겠다는 목적으
로 '한국 에이즈 퇴치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싸늘한 경멸의 시선만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혼자 맞서기
란 너무나 힘들어요."
  한국 사회는 에이즈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대해서도 역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서
울에는 클럽이나 술집 등 동성애자들이 만나는 장소가 많지만, 모두 다 은밀한 곳에 감
추어져 있다. 대부분의 동성애자는 결혼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남들과 다른 동
성애자라는 사실을 자기 가족에게 고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거니와 거의 불가능
한 일이다. 그렇지만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지금은 잡지에서 TV에 이르기까지 동성애
라는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1994년 이후 동성애협회가 서울의 몇몇 대학교 안에 생기기 시작했다. 또 1997년 6
월 서울에서는 최초로 게이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사회적 비난이 
확산되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감히 공표하고 다닐 정도로 
용기 있는 젊은이들이 있는 것이다.
  국제 정치학과 학생인 정희섭 군은 동성애는 죄악이 아니고, 동성애를 거부하는 것
이야말로 편협하고 소아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한국의 동성애자는  남들
과 다른 특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자와 동일한  권리와 조금 더한 배려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한 일간지의 자유 논단에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주저 없이 게재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선입견이 팽
배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비관적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에서 개봉된 몇  편의 영화는 게이를 조롱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표현하였다. 또 동성애자이면서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 때문에 고용주에게 부당하게  
해고당한 변호사의 투쟁을 다룬  미국 영화 <필라델피아>는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세 게이의  모험을 담은 호주의 코믹영화  <사막의 여왕, 프리실라>는 
납득할 만한 해명도 없이 심의위원회에 의해 상영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금욕에 의해
서가 아니라 성적인 모험을 통해 열반에 도달하고자 한  양성애자 승려의 이야기를 담은 
<유리>의 상영을 거부한 영화관들도 있었다.  종교와 성을 혼합했다는 것만으로  신성 
모독인 것이다.

    '트기'의 고단한 삶
  종환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학교에서 돌아온  일이 여러 번 있다. 또래의  친구들에
게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다반사이고, 그로 인하여 이 여덟 살짜리 아이는 학교에 가는 
것을 끔찍한 고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엄마는 울화가 치밀지만 아이 앞에서는  내색하
지 않는다.
  "그 애들이 숫자가 더 많아도 겁먹지 말고 너 자신을 지켜야 해."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되풀이해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이 당하고 있는 끔찍한 일을 생각하면서  밤마다 몰래 눈물을 흘
린다. 종환이는 혼혈아이기 때문에 반 아이들이 무시무시한 괴물로 취급한다는 것이
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전에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부대의 병사였다. 그는 종환이가  태어
나기 몇 달 전에 미국으로 돌아간 후로는 소식이 없었고, 때문에 아이 엄마는 매우 힘겨
운 삶을 살아야 했다.
  한국에서는 미혼모가 사회적으로 배척받는다. 친구들은 떠나가고,  취업의 문은 닫
히며, 가족조차도 왕래를 끊는다. 그래서 종환이는 엄마는 부모나 형제자매와 더 이상 
접촉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와의 접촉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커피숍에서 어머니를 비밀리에 만나는데, 그때마다 어
머니는 그녀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주곤  한다. 물질적인 면에서도 그녀의 삶은  힘겹
기 그지없는 것이다. 경리 자격증이 있지만 대기업 중 한 곳에 취직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이다. 결국 그녀는 조그마한 상점에서 반나절을 일하며 근근이 살림을 꾸려
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아칸소 출신 금발의 백인 남자를 사랑했던 결과이다. 그러나 근엄한 
한국 사회에서 볼 때, 그녀는 두 가지 죄악을 범한 것이다.  결혼도 하지 전에 아이를 
가졌고, 그것도 외국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 말이다.
  동그란 눈과 밤색 머리카락, 흰 피부를 가진 혼혈아들은 한국에서는 파리아족(역주 
: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들지 못하는 최하층민)인 동시에 원죄를 안고 태어난 아이들이다.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어렵게 생활
한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50년  동안 얼마나 많은 혼혈아가 태어났는지를  정확하
게 알려주는 통제는 없다. 정확하진 않지만 수천 명은 될 거라고  한다. 물론 많은 아이
가 낳자마자 버려졌다.
  지방의 미군 캠프 주위에 있는 사창가에도 역시 많은 혼혈아가 살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그들에게 매달 4만 원의 양육비를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미군 부대
나 미군 대사관은 그들에게 최소한의 혜택을 주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아이 아버지를 
찾으려는 아이 엄마를 전혀 돕지 않는다. 이 아이들은 수많은 장애 때문에 사회에 흡
수되기가 힘들다. 학교에 가면 또래의 아이들이 미국인과 아시아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
혈아를 지칭해서 '트기'라고 부르며 빈정거린다.
  민족적 스포츠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는 태권도장에서도  이 아이들은 말
도 안 되는 구실로 돌려보내지고, 때로는 수영장  입구에서 거절당하기도 한다. 성인
이 되어도, 비록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물리적으로 순수한 한국인의 피를 지니지 않
았다는 이유로 병역의 의무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들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
능하고, 하물며 공무원이 되는 것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그래서 후견인이 있다면 아시아에  거주하는 미국인 혼혈아에게 미국  내에 정착하는 
것은 허용하겠다고 한, 1982년에 개정된 미국 법에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는 혼혈
아도 있다. 독자적으로 대부분은 자격증이  필요 없는 일당 인부나 수선공으로  일하
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결혼한다는 것은 그들에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그
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배척 당하는 비참한 삶일 뿐이다. 한국인은 아직도 혼혈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수출용 아기 생산국
  신생아를 선뜻 입양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혈통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다. 
1996년 1월 이후 국제입양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대부분의 아기들은  외국
인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국민 1인당 GNP가 1만 달러에 육박하는 나라에서,  이런 현상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아이가 유럽으로 입양되
는 것이나 프랑스의 아기가 미국으로 입양되는 것이나 비슷할 텐데 말이다. 물론 오늘날
은 부유해졌고,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고아의  숫
자도 많이 줄기는 했다.  1986년에는 거의 8,000명의  아이들이 입양되었으나, 10년  만
인 1996년에는 겨우 2,500명 내외의 아이들이 입양되었다.
  하지만 정부가 장애아동의 경우를 제외한 모든 국제입양을 금지한다고 공포했을  
때, 입양기관은 이로 인하여 고아원에 아이들이 넘쳐나고 수천 명의 고아들이 평생 고아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정책의 불합리함을 성토하였다. 그러자 정부는  이
런 정책이 국민의 심성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변하였다. 정부 역시  부유해졌
지만 여전히 '아기 수출국'으로 불리는 국가의 이지를 개선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보
건복지부 장관의 말이다.
  "한국은 더 이상 수출용 아기를 만들어내는 공장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입양아를 노골적으로 경멸하기  때문에, 아기를 입양하고자 하는 
여자들은 고아원에서 아기를 데려오기 전에 아홉 달 동안이나 임신을 가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 아기를 입양한 부부는 진짜  자기가 낳은 아기라는 것을 이웃이 믿도록  하
기 위해 자주 이사를 한다. 입양 기관에서 누누이 충고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를 
입양한 부부는 아이에게 생부모가 누구인지 결코 알려주지 않을뿐더러, 다른  가족에게
조차 아이의 출생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한 일간지에 익명으로 실린 어떤 여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꽤 시사적이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아무리 손자를 사랑한다 해도 시부모님은 우리를  보려고 하
지 않을 것예요. 그건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홀트 아동복지회에서 입양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지숙씨는 이렇게 말했다.
  "거의 모든 입양은 비밀이 유지되죠. 아이들은 자기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알지 못해요. 그래서 부모는 까다롭게 아기를 고르지요. 약 3개월 정도 된 아이들을 원
하고, 입양한 아기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신들과  닮은 아기를 원하죠. 유교
의 영향을 받아 혈통을 중시하기 때문에 좋은  집안 출신의 엄마가 '실수'로 낳은  아기
나, 부모가 사고로 죽은 아기를 찾으려고 하죠. 한국 가정에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로부터 
입양된 아기들을 보려면 아직도 멀었죠."
 이미 '친자식들'이 있는 가정은 결코 새로운 아이를 입양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입양
이라는 것은 한 아이에게 삶의 기회를 부여하는 관용과 애정 행위가 아니다. 결혼한 
부부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모순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입양하는 것이다.  그리
고 입양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아이를 입양한 
사실을 숨긴다.
  한국은 가족 구성원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입양한 아이라는 사
실이 밝혀지면 가족의 일원으로 편입되기가 힘들다. 핏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
도 없다. 게다가 한국인은 입양이라는 개념조차 몰랐던 조상들로부터 운명적으로  피
를 이어받았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의 출생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면 그 아이
의 장래에 해를 미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다른 많은 부분처럼, 한국은  얽매어 있던 규범으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지고 있
다. 소록도의 간호사와 의사는 환자를 극진히  간호하고 있다. 벽보 캠페인이 일어난  이
후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으며, 1995년에 정신 지체 아동을 위한 
하계 캠프가 최초로 조직되기도 하였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가 교육자나 생활환경조사
원이라는 직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동성애자는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과감하
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한국인은  집단에서 일탈하는 모든 것들과  외양이 매끈하고 
윤기가 흐르지 않는 모든 것을 불안과 경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에 새
로운 나병 환자는 없으며, 또 나병이 잘 치료되고 있다는 발표는 단적인 예만 들어도 이
런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소록도에서는 매년 50명의 환자가 고령으로 사람하고 있다. 따라서 나병원은 곧 폐
쇄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소록도에는 에이즈 환자가  수용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벌써
부터 수군거리고 있다.
 
    과거 청산
  1996년 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학생들은 20세게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일제 식민 지배의  종말이나 국토 분단이 아니라  '광주'를 꼽고 있다
고 한다. 서울의 대주교인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의 광주를 '우리 역사의 가장 깊은 상
처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또 소설가 조세희씨는 2년 동안이나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하
였다.
  반란과 광주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 이외에도, 두 명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유
죄 판결 조항에는 부패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대통령 재임 중 전두환 씨는 3,276
억 원을 유용했고, 노태우씨는 6,768억 원을 유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모든 문제가  부패
로부터 시작되었다.
  노태우씨가 스위스 은행에 비밀 계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한 야당 국회의원에 의
해 폭로된 뒤 전임 국가원수가 체포되었고, 그 다음에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또 다른 공금 횡령 사건으로 불똥이 튀어 그의 전임자가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여러 명의 
장성이 포함된 두 명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재판은 한국 국민의 승리로 비쳐졌다. 자유
가 짓밟혔고, 억압이 규범이었으며, 인권 유린이 일상이었고, 오직 일하는 것만이  중
요했던 과와 모든 치욕스런 나날에 대한 승리였던 것이다.
  언론 세기의 재판이니,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재판이니, 국가의 위엄을 되찾는 
재판이니 하면서 재판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온갖 수식어를 다 갖다 붙였다. 또 시중에
는 32년간의 군사 정권 이후 최초의  민간인 국가원수가 선출된 1992년의 선거  다음으
로, 이번이 '한국의 두 번째 민주혁명'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유죄 판결은 국가의 민주화와 사법부 독립의 새로운 증
거로 해석되었다. 최고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았던 시절은 끝난 것이다. 
피고인이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고, 얼마만한 액수가 예금된 은행 계좌를 가지
고 있고, 누구의 주소가 수록된 수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법부가 이중적인 잣대
를 가지고 죄를 심판했던 나라에서,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따라서 한국
인은 이 재판을 통해 과거의 악몽을 잊고, 갈구했던 정의를 되찾았으며, 예전에 실추되
었던 국가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새로운 '명예'를 얻음으로써, 영원한 민주주의를 뿌
리내리기 위해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고통스런 상처
  전두환 씨와 노태우씨에 대한 재판은 고통스러운 양심의 시험 무대이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씨는 자신을 이 역사적인 재판의  최고 공로자로 부각시키
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자금이 발견된 이후 노태우씨를 기소하기  위
해 위정자에게 압력을 가했던 국민이 표창을 받아야 마땅하다. 당시 공보처장관이었던  
오인환 씨의 말이다.
  "당시는 여론에 따라 노태우씨를 구속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
토록 국민적 합의를 완벽히 이루어낸 여론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노태우씨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컸던지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는 '대도(대도)가 체
포되는' 날 모든 손님에게 식사와 음료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따라
서 김영삼씨는 예전보다 더욱 충실하게 여론의 흐름을 따랐던 것이다.
  김영삼씨는 1995년 6월 광주에 대해 '이 사건의 판단은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말
하지 않았던가. 그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사용되었던 선거 자금이 부분적으로는 노태우씨가 은닉한 돈에서 나온 것이었고,  또
한 5, 6공의 고위층 책임자가 여전히 활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993년 노태우씨에 
대해 첫 수사를 벌이기로 했던 방침은 비밀리에 폐기되었다. 국민적인 단결과 사회 안정
을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국민들은 침묵했다.
  게다가 여론의 각성은 매우 느리게 나타났다.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
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고, 그것도 주로 학생이 주도하였다. 또 노동자의 파업은 임금 
인상같이 노조원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두환 씨와 노태우씨는 지방에 내
려갈 때마다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곤 했다. 1980년대에는 국가가 부유해졌고, 생활 
수준이 급속히 향상되었으며, 물질적으로 안락했고, 가난에서 벗어나  월급도 꽤 많이 
받던 시기였다. 경제가 성장했고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는 이유로 대다수의 한국인은 광
주에 대한 이야기를 차츰 덮어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독재 정권은 안정되었어도 부정적인 측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자인 
심재훈씨는 이렇게 말했다.
  "광주 학살의 책임자들은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점을 덮어
두려고 했고, 생활 수준이 급속히 향상된 대가로  대통령들을 지지하고자 했습니다. 정
치적으로 비겁했던 끔찍한 시절이었습니다. 경제성자의 대가로 너무 비싼 정치적  희생
을 치른 겁니다."
  작가인 이문열씨는 1987년 그의 소설 <변경>에서 '한국인 각자의 행동 속에  무엇이 
있었기에 군인들의 권력에 그토록 오랫동안 지속되었을까?'라고 의아해했다.
  요컨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두 명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을 보고 한국인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나 단순한 생각이다. 그토록 집요하게 반독재운동을 펼쳤던 김영삼씨도 결국은  1990
년 노태우씨와 손을 잡았고, 안정을 원했던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아 1992년의 선거에
서 김대중씨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또 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씨는 아직도  한
국에서 인기가 높다. 18년간을 철권통치로 일관하면서 수천  명의 반체제 인사들을 투
옥, 고문, 처형하기까지 했으며, 여러 번 계엄령을 선포했고, 선거 폐지, 신문 검열, 정당 
금지, 국회 해산 등과 더불어 '한국인같이 가나한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가 필요  없다'
고 선언하곤 했던 인물이, 한국에서 여전히 추앙 받는 이유는 경제 기적을 일구어 냈기 
때문이다.
  물론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요구 사항이 많다. 반노태우 시위를 벌일 당시
에 만났던 한 연세대학교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일제 식민지시대가 끝난 후 친일파들을 단죄하지 못했고, 그 후로 군사 
정권을 지지했던 부모들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
를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던 당시 역시 학생이었던 김종수씨는 견해가 달랐다.
  "한국 사람은 로봇이나 마찬가집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대중의 행동을  따라 할뿐
입니다. 노태우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다음에는 모두 노태우를  반대하는 걸 보십시오. 
인물의 이중성과 그가 가진 계획의 현실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모두 
김영삼을 지지하다가, 또 이제는  모두 반대하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들을 야유하
는 것도 유행입니다. 그래서 모두를 따라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
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습
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고,  또 젊은 세대가 똑같이 나누
어 갖고 있는 민족적 자부심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될 테니까요."

    숭고하지 않은 '세기의 재판'
  대학 교수, 사회학자, 언론인 등 서로 다른 관측통의 의견을 종합하면, 전직 대통령
들에게 국민이 반발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광주 학살이 미친 정신적 외상은 매우 심각하고, 또 두 명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적개심 역시 매우 강하다.  둘째, 유교사회에서 지도자가 속임수를  쓰는 것은 있
을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도자가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  셋
째, 광주 학살과 관련해서는 양심의 문제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따라서 전직 대
통령들을 증오하는 것은 국가의 명예를 회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한국인은 사실상 정의를 요구하기보다는 침묵함으로써  경제성장의 안락함을 택했다
는 죄책감을 그럴듯하게 가리기 위해 두 명의  가증스런 범죄자를 만들어냈다. 하지
만, 유교 국가에서 두 사람을 심판함으로써 역사를 충분히 백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면, 너무나 안이한 생각이다.
  한국의 세기적인 재판이 약간 얼렁뚱땅 넘어갔다고 유감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두 명의 피고가 수감된 상태에서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형식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
나, 그 다음에는 한국적 소송 절차를  핑계로 변론권을 무시하면서 6개월도  안 되는 시간 
내에 매우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여덟 명의  피고인 측 변호인은 변론을 하게 될  경
우 필연적으로 중형을 선고받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일괄적으로 변론을 포기하였
다. 그들의 변명인즉, 16만 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를 검토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고, 중
요한 증인들은 이미 구조적으로 특권층이 되었기 때문에 증인 채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었다. 
  전직 대통령 측은 이미 패배자가 되었고, 그래서 당시 재판의 부당함을 소리 높여 
외치려고 했던 것을 본 사람은 아마도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명의  전
직 대통령은 관선 변호사의 변호를 받았다.  누구도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었다. 그러나 세기의 재판치고는 숭고함이 없었다.
  또 하나 역설적인 것은, 모든 한국인은 판결문대로 형이 집행되지는 않을 거라고 확
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1997년 12월, 선거가 끝난  직후 역대 군사 정권의 
최고 희생자였던 신임 대통령 김대중 씨는 상소심에서 이미  형량이 경감되었던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사면했다. 대기업의 총수들도 끼여 있었고,  부패 혐의로 법정에 출두
했던 재계 인사들은 국민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 집행이 면제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지도자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국민들이 그 정도에 만족하는 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지적했듯이, 두 명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재판은 그 자체로 사법부가 
새롭게 독립했고 민주주의가 훨씬 확장되었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이다. 그러나 동
시에 한국인이 과거를 청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드러내준 역설적인 사건이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일본
  일본과 관계에서도 역시 과거를 청산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
웃한 일본인을 향해 깊은 증오심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 속에 부리를 내리고 있
는 증오심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 침략을 일삼은 끝에 일본은 마침내 1910년부터 1945년
까지 32년간 한반도를 점령하여 극히  가혹한 식민 통치를 자행했다. 일본인은  자신
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뻔뻔스럽게도 한국의 지하자원들을 약탈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
인에게 일본인의 성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한국어 사용도 금지되었고, 춤이나 음악,  연
극 등의 지역문화를 표현할 권리도 없었다.  체제 반항자들에 대한 억압은 너무도  잔인
했다. 영국 영사는 1923년 이것을 '난장판 전제 정치'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일본의 점령
기간 동안 한국인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빈곤 속에 살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역사가 있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일본인을 향한 한국인의  
증오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일본은 오늘날 일류 선진국 중의 하나가 되었
고, 한국이 외국에 의존해야만 하는 기술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일본은 창조성과 현
대성의 표본이 되었으며, 문화도 매혹적이다. 그에 비해 한국 제품은 여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 또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일본과 같은 눈부신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은 자기 문화가 일본 문화보다 덜  알려져 있고, 한국의 서적이 일
본 서적보다 덜 번역되었으며, 일본어는 많이 연구된 데 비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외국
인이 드물다는 사실을 매우 불쾌해한다. 게다가 외국의 국가원수가 가장 중요한 방문지
인 도쿄로 가는 도중에 서울에 '잠시 들르는' 것도 역시 용인하지 못한다.
  단언하건대,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양국이 경제력에서 많은 격차를 보이
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일본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
기 전까지, 아마도 수년 내에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듯싶다. 한국인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 시기와 매혹이 혼합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
쩔 수 없는 사실이고, 그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커져만 가고 있다. 최고의 적
이 본받아야 할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분통 터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신문에서는 일본을 향한 이러한 증오심이 주로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말로 표현되고 
있다. 주제가 무엇이든 일본인은 틀렸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지도에 '일본
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반박하면서, 모든 지도와 공식 문서에  '동해'
라고 표기하고 있다. 언론은 정기적으로 동해나, 더  좋은 경우는 '한국해'를 언급하고 
있는 15세기의 고서적을 어느 집의 층층이 먼지 쌓인  다락방에서 찾아냈다고 일제히 보
도한다.
  이러한 반일 감정을 계속 견지하고 있는 언론은 때로는 너무도 비합리적이라고 생각
할 만한 논의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1992년 일본이 UN 평화유지군에 최초로 자
위대를 파병했을 때, 한국 언론은 '일본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났다!'고 일제히 외쳐
댔다. 또 일본 관련 기사를 보면, 일반적으로 식민  통치하에서 자행된 범죄 행각을 들
추는 내용을 먼저 스무 줄 정도로 쓰고, 그 다음에 그래도 일본인은 과거와는 달라졌다
는 내용을 고작 한 줄 정도 적고 있다.  1995년 한 일본 특파원이 쓴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다.
  정치인은 일본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본과 더욱 성숙하고 미래 지향
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거창하게 말한다. 양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신기
원을 이룩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또한 일본인을  공식적으로 방문했을 때는, 
기자들 앞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양국 관계가 원만하다는 점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그
리고 대통령도 일본의 총리를 만날  때면 난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오랜 친구인 듯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담소하며 여러 차례 사진을 찍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정치인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사소한 사건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서 일본에 비난의 말
을 서슴지 않는다.
  한국인만큼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인은 때때로 공경의 빌미를 제공한다. 
아마도 지역구의 오랜 지지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인 듯 하지만,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국에 득이 되었다거나, 아시아의 국가들  중 일본 제국주의 때문에 고통받은  국가
는 결코 없었다는 등의 '망언'을 정기적으로 일삼는 관료들이 있다. 그런 망언이 나오면 
한국 언론은 항의 기사로 홍수를 이룬다. 정치인은 일본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신랄하
게 비난하고, 국민들은 일본 대사관  앞에서 거센 시위를 벌인다.  그러나 일본 정부
가 망언을 한 장본인을 처벌하겠다고 밝히면, 언론은 다시  수그러든다. 이런 일들은 수
십 년 동안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2002년 월드컵대회를 공동 개최하기로 되어 있다. 이것을 두고 이웃
한 두 나라가 협력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
나 공동 개최에서 발생하는 난제를 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비난함으로써 양국간
의 긴장이 더 악화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더 많다.

    위안부 문제에 해법은 없다?
  한국과 일본간에 가장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는 부분은 '위안부'에 관련된 것이다.  
주로 아주 젊은 여자들로 구성된 위안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군대를 위해 매춘
을 강요당했다. 위안부 중에는 중국 여자, 필리핀 여자, 인도네시아에서 납치된  네덜
란드 여자 등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한국 여자였다.
  이 문제는 한국 정부에서도 매우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이 불행한 여자들을 위해 일본 정부에서 배상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양국간에 외교관계를 재수립할 당시 체결된 협정서
에 과거의 일은 더 이상 문제삼지  않기로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오랫동안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부해왔다. 또한 일본은 계속 말을 바꿔가며 시간을 버
는 술책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위안부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다
음에는 여자들이 자원해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일본군이 창녀들만을 
끌고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국인의 분노를 가중시킬 뿐
이었다.
  그런 일본이 최근 몇 년 동안 역대 수상들, 혹은 의회를 통해 여러 차례 사과의 뜻
을 표명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사과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속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위안부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민간 기업들의 
자금으로 이루어진 기금 설립을 의도했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의 책임자라는 사실이 명시되도록 공적 자금으로만 배상금이 지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서울대학교 사회심리학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위안부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증오는 
너무나 많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라서 일본 정부의 사과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겁
니다. 이 문제는 사과하는 것이 성의가 없다, 일본이  아니라 수상 개인의 차원에서 
사과하는 것이다, 배상금도 국가가 아니라 민간 기업으로부터 지급되는 것이다, 위안부
들이 만족해하지 않을 것이다 등의 말이 나오면서 논쟁이  더욱 확산될 가능성이 있습니
다. 일본이 진정으로 사과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화를 냈기 때문
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당신에게 사과한다면,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그를 미워할  이유
가 있다는 겁니다."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분노의 대상이다. 하지만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기 나라의 과거 행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육
이 훨씬 더 객관적이기를 요구하고 있다. 한반도의 식민지화나 남경 학살사건이 얼마 전
부터 알려졌기 때문에,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불분명한 역사
  식민지 기간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그것은 한국의 역사가 부분적으로 명확하지 않
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재판과 마찬가지로, 이런  현상 역시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감추고, 역사의 불분명한 부분을 은닉하며, 과거와 관련된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는 일본의 팽창주의의 결과라고만 설명하는 것
이다.
  그러나 당시 황실이 많은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고, 황가의 중심 인물들 중에는 한국
의 식민지화가 아닌 현대화를 위해 일본의 강제 점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일본의 식민지화가 수월했던 것이다. '일진회'라고 불리는  
친일본 성향의 개혁운동에 학식 있는  사람들과 고위 관리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그들
은 이런 운동이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나라를 발전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사람
들이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화에는 아무런 장래가 없었다. 물론 중국을 몰아낸 후 
일본이 이미 한반도 전역을 통제하던 시기인 20세기 초에는  매우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
다. 한국어로 '개화당'이라는 독립적인 정당이 세워졌고,  1905년부터는 거의 10만 명
에 이르는 독립군이 조직되어 사실상의 일본 지배에 맞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합병조약이 체결된 후 대규모 저항운동은 자취를 감추기 시
작했다. 일본의 점령을 반대하는 관리와 나이 든  유생은 은거하거나 자결하였다. 그
러나 뜻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별적으로 행동했고, 그나마도 그런 사람이 소수에 불과
했기 때문에 오늘날 훨씬 더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운동을 기폭
제로 1919년 3월 1일 한국인은 한반도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국가 전체로 확산되었고, 일본은 이 운동을 강제로 진압하였다. 1919년 이후 
점령군은 결코 저항 세력과 충돌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일본인 총독을 보좌하기 위해 
'명예로운 황국 신민'들로 구성된 고문단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것이 일본의 한반도  
합병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역사학 교수인 한 친구는 이렇게 설명해주
었다.
  "한국은 외국 군대에 의해 점령된 적이 많아. 일본이 점령하기 전에는 중국이 오랫
동안 한반도를 점령했지. 말하자면, 외국의 억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의 
전통이 되다시피 했고, 그로 인해 일본이 쉽게 지배할 수 있었던 거야. 물론 모든 국민
이 식민지가 되는 데 동의했다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한국인은 저항하지 않았어."
  1945년 독립될 당시 상황 역시 식민지 기간을 정확히 따지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
다. 왜냐하면 한국의 독립은 항일 투쟁의  결과로 획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
의 독립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라디오를 통해 항복 성명이 발표됨으로써, 
즉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결과이다.
  그 후 1948년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까지 3년 동안, 많은 급진적인 정치 세력
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와중에서 북한을 점령한 공산주의에  가장 철저하게 맞섰던 친
일파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일제 잔존 세력을 정화하려는 재판은 일절 없었고, 일
제 식민지 시절 부역했던 자들은, 희귀한 경우이긴 하지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무엇보다도 안정을 원했던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식 관료제도가 고스란히 보존되었
고, 일본에 협력했던 관리들은 대부분 그대로 자기 자리를 지켰다. 국민의 75%가 문맹이었
던 한국에서는 그들만이 국가를 경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을 빛내고 있는 많은 회사가 일본의 점령 기간 동안에 설립된 회사
들이다. 따라서 식민지 시절부터 행해졌던 많은 일본식 관행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래서 일본에서 살다 한국에 돌아온  사람은 지금도 두 나라가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곤 놀란다.
  한국인은 식민지 시절의 쓰라린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점령된 지 오래되었으니  일본에 대항해서 싸우기보다는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 일본 경찰이나 군대에 지원했던 사람도 많았
다. 하지만 그처럼 한국의 식민지화에는 한국인의 책임이 부분적으로  있다는 것을 한국인
은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자식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가르쳐주기를 꺼
린다.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순히 저항 활동을 했
던 몇 명의 열사들과 식민 통치를 했던 일본인의 잔인성만 이야기한다.
  언론인 이종석씨는 이러한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했다.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지만, 우리는 나라를 지키지도 못했고,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분단된 것도 외국에 의해서였습니다. 참으
로 고단한 운명입니다."

    치열한 평행선
  50번째 맞는 독립기념일인 1995년 8월  15일, 국립박물관의 원형 지붕위로  뾰족하
게 솟은 첨탑이 상징적으로 제거되는 동안, 김영삼 대통령이 주재하는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 행위는 아무 매력 없이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예전에 조선총독
부로 사용되었던 커다랗고 우중중한 건물의 파괴 작업을 시작하라는 신호탄이었다.  김
영삼 대통령은 이 건물을 파괴하는 것은 '국가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선언했다.
  점령군대가 지은 이 건물은, 멀리서 볼 때는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다른 건물로 보이
지만, 공중에서 보면 사실상 일본을  표기하는 한자(漢字)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을 헐어내는 것은 곧 서울 한복판에 각인되어 있던 일본이라는 글자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건물을 철거하기로 한 결정은 이미 활성화되어 있는 일
본 혐오증을 자극하는 데만 기여했을 뿐, 많은 국민의 의문을 자아냈다.
  이 건물을 파괴하기 위해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다렸을까?  이 건물이 일본의 식
민 지배를 강력하게 상징한다면, 왜 그토록 오랫동안이나  정부청사로, 또 한국의 보
물을 소장하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했을까?
  당시 이에 대한 여론은 두 가지로 갈라졌다. 민족적 자부심을 내세우며 건물을 헐어
내야 한다는, 상징적인 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역사적 진실을 내세워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헐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게다가 일제 식민지를 상징하는 것들을 헐어낼 필요가 있다면, 왜 수많은 국도와 경
부선의 단일 철로를 헐어내지 않는가? 아마도 식민지 기간 동안 건설된 구조물들부터 많
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파괴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점령으로 인하여 다른  결과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본
의 점령이 그토록 참을 수 없고 부당한 것이었다고 해도, 일본이 한국을 점령함으로써 한
국의 기간산업 수준은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한반도를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 아
니라, 일본의 이익만을 챙기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말이다.
  한국의 경제 기적을 일구어낸 인물인  박정희씨는 동경대학교를 졸업했고, 일본제국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그가 내린 중요한 외교정책들 중의 하나는 한국에 필요했
던 기술과 자금을 얻기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를 재수립하는 것이었다. 독립적인 모든 관
측통은, 물론 무상 원조는 아니었지만, 일본의 원조가 없었다면 한국이 결코 발전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현재는 독자적인 제품을 생산해내고 있지만, 한국 회사들은 일본 기술을  전수받음
으로써 비로소 제품 생산을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삼성
은 일본의 자동차회사인 닛산과 기술 이전 계약을 맺음으로써  1998년에 상용차를 생산해
낼 수 있었다. 또 대림 오토바이는 사실상 혼다의  기술이고, 롯데 복사기는 캐논의 
기술이며, 많은 TV방송은 일본의 프로그램을 표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소
비상품은 거의 수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대일 무역수지가 엄청난 적자를 보이고 있다
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특허를 사들이고 중장비를 수입하는데 많은 비용이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익을 주는 경제적 교환 앞에서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수그러든
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재계 인사들은 한국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과 더 많은 한국 회사와 협력관계
를 체결할 것을 끊임없이 일본에 요구하고 있다. 1997년  금융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일본 은행은 한국에 13억 달러의 단기자금을 융자해주었다. 국제 교류가 상식인 지금, 
한국이 이웃 나라인 일본에 기술  이전과 재정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결과 일본 기업들도 이익을 챙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그런 사
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일본을 숙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국이 
말이다.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위안부들의 비극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는 양심의 문
제가 제기된다. 일본 군대가 강요한 매춘에 대해 모든 사람이 소리 높여 비난하는 것
은 옳은 행동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그 불쌍한 여자들이 조국에  돌아왔을 때, 원수
인 일본인과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죄로 거부되고 모욕당했으며 배척 당했고, 결국에는  
비참하고 외로운 삶으로 내동댕이쳐졌다는 사실을 더욱 잘 숨기기 위한 것이다. 그 여자
들은 두 번씩이나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다른 나라와는 정반대로,  그들에게 최소한
의 연대의식을 표현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에게 약간의 보상금이라도 지급된 것은  1998
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였다.
  위  안부와 마찬가지고,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한국인들도 한국에 돌아와
KT을 때 같은 한국인들로부터 거부당했다.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한국은 해방되었
지만, 원자폭탄을 직접 맞은 사람은 해방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두려움
을 주는 존재였다. 한국인은 그들에게  전염병이 있다고 생각했다. 부려먹기  위해 그들
을 강제로 끌고 갔던 일본 정부는 1978년 생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던 것이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앞에 언급된 몇 줄의 내용은 한국에서는 금지된 주제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한국
인은 즉각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따라서 이성적인 토론은 불
가능해진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한국인들은 너무 흥분해서, 결국에는  한국인 친구
를 잃게 된다. 게다가 한국인이 '일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결같이 일본을 비난할 뿐, 일본의 사회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긍정
적인 면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배신자로 여
겨진다. 어제의 배신자를 더욱 잘 잊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과거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보려는 개혁 
성향의 지식인도 있다. 보다 객관적인 한반도의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를 다시 쓰려고 하
는 역사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없다>라는 책에 맞서 <일본은 있다>  라는 책
을 쓴 작가도 있다. 물론  거의 팔리지 않았다. "외국의 속박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
는 무엇을 했나?" 라고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설도 있다. 논설위원인 이원술씨는 
수십 년 동안 경제 개발에만 헌신해왔고, 따라서 독재를 거부한 사람들이 극히 적었다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근시안적인 역사관을 개탄했다.
 "우리가 1945년 해방된 이후 스스로를 반성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식민지  기간 동
안 많은 한국인이 일본에 부역했지만, 민족적 차원에서 어떤 참회도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에게서는 이런 개혁  성향을 찾아볼 수 없다. 그와는  반대
로 1995년 한 중앙 일간지에는, 보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다시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면 마찬가지로 한국 민족을 비난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글이  실렸다. 전두환, 노태우 
재판처럼 과거 독재시대에 대한 정치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다시 기술할 수는 있지만, 누
구도 민족을 언급할 수 없고, 따라서 식민지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없다는 한계
가 제기되었다.
  자신의 나라를 점령한 사람들이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여자들을 능욕했으며,  여자
들은 때론 그들이 주는 일자리를 얻었고,  그들이 거대한 민족 기업을 설립할 수  있도
록 해주었으며, 도로를 건설해주고, 그들의 대학에서 국가의 인재를 키웠으며, 그들의 기
술과 노하우에 의지해서 경제 개발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사실 어려울 것이
다. 하지만, 이런 것은 한국인이 가진 장점과 용기, 한국인의 활력과 지혜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상징적인 의미에 그칠지라도 건물을  헐어내는 것보다는, 경제성장
을 이루고 일본 회사에 대해 경쟁력을 갖추며 국제무대에서 점점 큰 영향력을 발휘함으로
써, 한국은 훨씬 더 커다란 민족적 자부심을 되살렸던 것이다.
  역사와 조상의 과실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과거를 
똑바로 쳐다볼 수는 있어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한국에 항구적인 민주주의를 정착
시키고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가능하다. 신세대 정치인과 신세대 사회 지도
자가 출현하면 새로운 논의와 역사의 해명이 가능할 것이다.
  프랑스가 비시 정보를 오랫동안 청사하지 못했던 것처럼,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50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에서의 과거 청산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경제 개발과 사회변화
 
    아직 도시는 완성되지 않았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고속도로는 굴곡도 심하고 넘어야 할 구릉도 많이 보
듬고 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디에나 전원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아담한 논과  멋진 산세, 호박빛 계곡이 눈
길을 잡아끌 뿐, 대부분의 산은 국가의 자랑이자 미국이나 유럽,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
과 경쟁하고 있는 회사들을 선전하는 대형 광고판을 세우기 위해 벌목되어 있는 상태이
다.곳곳에 비닐하우스가 늘어서 있고, 그  위에 씌워진 푸른 플라스틱 방수포가  바람
에 들썩인다.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선 전신주가 경관을 망치고 있다. 많은 전기가 필
요해서 이기도 하겠지만, 현대화의 산물인 물질적 안락함만을 추구했지, 아름다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한국인들은 환경의 중요성은 도외시한 채  경제개발
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만 빠르게 건설했을 뿐이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시원하고 쾌적한 풍경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집도 몇 채 되지 
않는 데다 동네 한복판으로 길이 난 마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흰색으로 칠한 
작은 집이 몇 채 있는데, 그것도 모서리를 살짝 쳐든 전통 기와의 붉고 푸른 지붕의 너
무 많은 곳을 물결무늬 모양의 회색 함석판으로 때운 상태이다.
  정치가들이 땅에 대한 애정과 전원사회의 영구적인 가치에 대해 어떤 수사적 표현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은 더 이상 농업사회가 아니다.  그런 사실은 통계로 증명되
고 있다. 1975년에는 인구의 45.7%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1985년에는  24.9%, 1995년에
는 겨우 11%만이 농업에 종사했을 뿐이다. 20년 동안에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무려 1/4
로 줄어들었다. 1차 산업을 통한 생산량은  GDP(국내 총생산)의 7%에 불과하다. 게다
가 1985년 이후 매년 1만ha에 달하는 농경지가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날 한국은 농경문화를 가지고  있었을까? 서울 근방에 다다를  때까지는 확실히 
그런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서울을 불과 20km  남짓 남겨두었을 때, 오른쪽으로 거대
한 원뿔 모양의 지형에 수십 도의 아파트가 무더기로 솟아나 있는 것이 보였다. 분당
이었다. 1992년에는 흔적조차 없었는데, 불과 2년만에  4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신도시
가 탄생한 것이다. 도시화의 영향으로 서울이 확장을 거듭한 결과였다.
  1960년대에 시작된 경제개발은 급속한 도시화를 이끌었다. 20년 동안  국민의 60%가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결과, 1997년의  도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84.2%를  차지했
다. 모든 행정기관과 대기업들의 본사, 주요 학교들과 수많은 산업체가 집중되어 있는 수
도 서울은 강력한 힘을 가진 자석과도 같다.
  할 말이 있으면 결코 참지 못하는 한국인들은 이렇게들 말한다.
  "이왕 자리잡고 살려면 서울에서 살아야지!"
  그 결과 1965년 이후로 증가한 1,570만 명의  인구 중85.5%가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
하고 있는 셈이다.

    도시로 도시로 대도시로!
  도시로 쇄도해 들어오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정부는 곳곳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신도시 건성 과정에서 종합적이고도 짜임새 있는 도시계획을 마련하지 못했다. 
더구나 생태계에 대한 고려도, 최소한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검토도 없었다. 지을 장
소만 있으면 어디에나 콘크리트 건물을  세웠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부패도 한몫  거들
었다.
  그 결과 도시는 통일성이 결여되었으며, 어디가 중심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마
치 부분부분을 따로 떼어서 붙여놓은 것처럼  보인다. 관광안내원들은 서울을 소개하면서 
석조건물과 초록 공간 사이에서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도시라고 자랑한다. 그러
나 정작 초록 공간을 찾아내려면 꽤 애를 먹어야 한다.
  한국전쟁 직후 서울에 왔다가 눌러앉은 외국인 선교단의 한 프랑스인 신부는 지난날
의 서울을 이렇게 회상한다.
  "50년대 말에는 영등포가 서울에서 10km 떨어진 시골이었어요.  지금은 서울의 일부
가 되었지만 말이죠."
  면적으로 따지면 프랑스의 1/5에  불과한 한국에 4,57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
며, 
1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도 여섯 개나 된다.
  서울의 인구밀도는 1km당 1만 7,000명이다. 지나친 인구집중 현상 때문에 서울은 모
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전차포처럼 길게 뻗은 대로들, 시커먼 먼지가 유리에 가
득 끼어 있는 25층 짜리 빌딩, 계속되는 교통 체증, 시끄러운 호객 행위, 일에 짓눌린 사
람들, 버스나 지하철 혹은 택시를  이용해서 출퇴근하고 이동하는 2,640만 명의  사람
들... 
서울은 폭발직전이다. 그러나 이 끊임없는 움직임도 밤이 되면 고요해진다.
  서울의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사실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도
시계획이 전체적으로 실패했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아파트와 사무실용 빌딩들  뒤
로는 산책할 수 있는 작고 좁은 길들이 나 있고, 그 옆으로는 형형색색의 반짝이는 간판
들이 붙은 수많은 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밤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은 포장마차에 앉아 남자 같은 체격에 벌겋게 달아오른 뺨으
로 쾌활하게 웃는 주인 아주머니가 구워내는 닭똥집이나 빈대떡, 해산물 등을 안주삼
아 맥주나 소주, 막걸리 등을 마시며 끊임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서울
에서 보낸 광적인 하루를 잊는다.
  더 이상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지역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작은 주
택들만이 올망졸망 들어서서 시골의 풍경을 이루기도 한다. 거기서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이가 듬성듬성 빠져버린 할머니들이  길가에 앉아 채소며 생선을 팔기도  하
고, 어린아이들은 거리를 뛰어다니며 공놀이를 하기도 한다. 저녁이 되면 잠옷 바람으로 
동네 식품점에 담배나 찬거리를 사러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이 아무리 거대해졌다 할지라도, 또 지역적으로 아무리 소외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생기가 돈다. 게다가 서울  시민들은 그들이 사는 도시에  대해, 도시가 보여주
는 것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1996년 한 지역신문의 조사에 따라면,  서울 사람들의 65%가 서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서울은 현대적이고, 역동적이며, 특히 국가 경제의 성공을  상징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과잉과 교통체증, 공해 때문에 살기 쾌적한 곳은 
못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즉 서울 사람의 50%는 서울, 하면 회색빛을 연
상하게 되고, 또 30%는 특히 추운 겨울을 연상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서울의 인구과잉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위성도시를 세웠다. 서울의 관문
에 해당하는 분당, 일산, 부천, 광명 등지에 우후죽순 격으로 일련의 베드타운들이  건설
되었다. 그곳에는 5년 동안 200만 채 이상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도시화 현상을 완화시키는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
면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교외와 서울을 여전히 왔다갔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도권은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이미 서울에서 30km 이상 떨어진  용인, 파주, 영종도
에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그곳도 눈에 보이는 경치는  똑같다. 몇 km쯤 떨어진 곳마다 
똑같은 모양을 한 매력 없는 아파트들이  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20층 정도로  균일
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각 층마다 열 다섯  가구씩 들어 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똑같
다. 단지 건설회사 이름만 우성, 한신,  삼익 등으로 다를 뿐,  주소도 우성아파트, C 블
록, 14동, 207호 등으로 거의 같다. 내부구조도 별로 독특하지 않고, 방의 배치 상태도 동
일하다.
  한 친구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다른 집에 초대받아 가도 별로 불편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좋은 점이지.  화
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아파트의 승리
  서울의 고지대에 올라 아래를 굽어볼 때, 대도시의 차가운 느낌을 어느 정도 상쇄시
켜주곤 했던 붉은 벽돌집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꽤 많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간부급 사원이 된 박채연씨는 이렇게 말했다.
  "미적 관점에서 얘기하면, 주택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걸 볼 때마다 아
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조
심해야 합니다. 주택은 예쁘고  아담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겨울
에 난방을 하기도 어렵고,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곳도 있으니까요. 더구나 위생시설
은 말할 것도 없고, 수돗물조차 안 나오는 곳도 있습니다."
  그는 일산의 17층 짜리 아파트 14층에 살고 있었다.
  "정반대로, 여기는 매우 안락합니다. 중앙난방이  되고, 도시가스가 들어오며, 24시
간 온수가 나오기 때문에 언제라도 목욕과 샤워를 할 수 있습니다. 또 테라스에 유리 새
시를 해놓았기 때문에 햇빛도 많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아파트는 지속적으로 관리가 되
기 때문에 전기나 배관시설에 문제가 생기면 경비원에게 전화 한 통만 하면 됩니다. 그러
면 일정 기간 동안에는 무상으로 수리가 됩니다."
  그러나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윤경숙씨는 그와는 생각이 달랐다.
  "이런 아파트에 산다는 건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발전을 나타내는 것
이고, 수년간의 고생과 가난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파트의 편
리하고 좋은 점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무엇이 좋은 점입니까? 
아이들은 이미 풍요한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아파트는 결코 아이들에겐  생
활 수준의 향상을 상징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언젠가 아파트의 불편한 
점들만 보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더러움, 단조로움, 초록 공간의 부족, 질
식할 듯한 분위기 등등 말입니다. 나는 실직했을 경우 이런 환경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
지를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아파트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랬겠죠. 그렇다면, 왜 모든 아파트들을 다 똑같이 지어놓았을까요?"
  아파트에 투자한 것에 만족해하는 박채연씨도, 아파트의 단점들에 대해서는 잘  알
고 있었다.
  "신도시를 건설할 때 건설회사들은 너무나 빠른 시간 안에 아파트들을 지어버렸습니
다. 우선 순위가 질보다는 양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아파트들은 
튼튼하고 편안하게는 지어졌지만, 끝마무리가 허술했습니다. 이 아파트도 분양 받은 지 
6개월이 지나자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겨울이  되자 수도관이 얼었습니다. 건
물 자체는 쓸 만해도 20년이 지나면 아마  전부 다시 지어야 할 겁니다. 공공기관이  하
는 일도 앞뒤가 바뀌었습니다. 위성도시가 생기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게 마련인데, 지
하철을 놓을 계획도 없었고, 옳게 뚫린 길도 하나 없었으며, 더군다나 스포츠클럽이나 
학교, 오물 처리시설 같은 공동생활에 필요한 시설조차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되어가긴 합니다. 다만 오래 걸릴 뿐이죠."
  이런 조건에서의 일상생활은 이따금씩 힘이  든다. 특히 교통 측면에서는 더욱  그
렇다. 박채연씨의 부인은 출근하기 위해  아침마다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까지 운행하는 
만원버스를 탄다. 서울의 지하철은 성능이  좋다. 빠르고, 깨끗하고, 운임도 싸고,  
노선 수와 환승역도 많다. 그러나 너무 만원이다. 파리의 지하철은 러시아워 때 탑승하는 
승객수가 1m 당 12명인 데 비해 서울의 지하철은 1m  당 18명이다. 사람들도 붐비는 역
에는 문을 닫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밀어넣는 '푸시맨'까지 있다. 그래도 못 탄 사람
들이 있어서 플랫폼에 길게 늘어서 있을 정도이다.

    자동차의 두 얼굴
  박채연씨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 대체로 자가용만 타고 다닌다. 그는 최근
에 구입한 자신의 차, 한국 최초의 자동차를 생산해낸 업체인 현대에서 만든 마르샤를 자
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의 차에는 자동차 애호가들이 꿈꿀 수 있는 모든 장치가 장착
되어 있었으며, 그의 눈은 자랑으로 빛나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자동차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타고 다닐 엄두도 못 낼 사치품이
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부터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던 자동차를 장만할 수 있게 되
었다. 한국 최초의 자동차는 미국이나 일본의 자동차회사와 협력계약을 맺고 만들어진 
모델들이었으나, 그 후에는 더욱 품질이 우수하고 색상도 다양한 순수 한국산 자동차들
이 생산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동차의 색깔은 검은색이거나 흰색, 아니면 
회색뿐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자동차는 사치품이었다. 게다가  색상도 화려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인들은 아직도 자동차를 소중하게 다룬다. 마치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때 받은 
선물을 고이 간직하듯이 자동차를 관리한다. 살짝 부딪치기라도 하면 운전자들은 책임 
소재를 따지기도 전에 우선 10여 분 정도 몸싸움부터 벌인다.
  또한 한국은 자동차 액세서리를 파는 사람들에게도 수지가 맞는 나라이다. 자동차 
핸들 커버와 안개 낀 날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서 꼭 갖추고 있어야 할 나
침반은 없어도, 주로 뒷좌석과 뒷유리  사이의 평평한 부분에 머리를 살랑살랑  흔드
는 펠트 강아지 인형과 담배 냄새를 없애기 위한 방향제 정도는 거의 모든 자동차에 액세
서리로 구비되어 있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일요일  아침마다 각양각색의 
속과 스펀지, 헝겊들을 사용해서 차의 구석구석을 청소하느라 거의 세 시간 정도를 소
모한다. 어느 날 그토록 오랜 시간 자동차를 청소하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
는 나에게 자동차를 청소하던 사람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 앞유리와 자동차 문을 같은 스펀지로 닦으면 안 됩니다."
  서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광명시에 살고 있을 때, 이웃 주민 한 사람이 자
동차 밑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자동차 바퀴에 펑크가 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는 이렇게 말했다.
  "펑크 난 게 아니에요. 바퀴 축을 닦으려는 거예요."
  깜짝 놀란 나는 책을 사용해서 차를 들어올린 후에 차례차례 바퀴 축을 닦으면 되는
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약 30초  정도 망설이면서 정말인가 하는 눈빛
을 보내던 그는, 이내 짤막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바퀴를 다 깨끗하게 닦으려고요."
  이것은 확실히 극단적인 예지만, 직접 경험한 일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꿈도 꿀 수 없던 자동차를 이제는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에 대한 통계를 보면 매우 인상적이다.
  1980년 서울의 자동차 수는 77만 8,000대에 불과했다(1950년에는 600대). 그러나 19
97년에는 1,000만 대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의 연평균 증가율은 17.6%이다. 
매일 500대의 새  자동차가 서울에서  등록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국적인  단위로 보
면, 1991년 이후 주차장이 매년 23%식 늘어낫다.  1994년에는 매일 2,858대의 자동차가 팔
렸고, 실제로 운행하는 자동차 수는 1997년 7월에 이미 1,000만 대를 넘어섰다.  그러
므로 1985년에서 1997년까지  12년 동안 1,000만  대의 자동차가 늘어난  셈이고, 앞으
로 2009년이 되면 자동차 수는 그 배가 될 것이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보행자가 자동차에 치이는 사고도 많아졌다. 서울에서는  대로
를 걸어서 건너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로를 건너려면 지하도의 수많은 계단을 내려
갔다 올라가야 한다. 서울의 땅 밑에는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제2의 도시가 건설되어 있
고, 거기에는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또 다른 문제점도 있다. 그것은 자동차
산업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와 같은 리듬을 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즉, 매년 도
로의 0.3%만이 복구되어 확장되고 신설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엄청난 교통체증이 일어
나고 있다. 박채연씨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산에서 서울 한복판에 있는 사무실까지의 거리는 12km에  불과하지만, 그 거리를 
가는 데는 보통 한 시간 30분이 걸립니다."
  자동차가 평균 시속7km로 가는 것은 걸어가는 것보다 겨우 두 배 빠른 정도이다. 그
러니 목적지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그 길을 가는 것이 마치 생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500km의 거리를 가려면 평균 열두 시간은  걸린다고 생
각해야 한다.
  교통발전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배달 지연, 휘발유 소모, 
거리에서의 기력 소모에 따른 노동자들의  생산성 저하 등의 손실이 발생하는데,  이것
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연간 10조 2,0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액수라고 한다. 여기
에 교통사고 발생비용이 추가된다. 이런 현실을 두고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다
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교통체증은 예전에는 개인적인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용을 부담하는 
쪽은 결국 시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
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국민들은 아직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
에는 자동차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이점이 아직도 그런 불편함보다 크다고 생각되는 모
양입니다. 자동차라는 것이 부여하는 사회적 지위를 제외하고도 말입니다."
  서울에서는 주차할 장소 또한 너무나 부족하다. 밤이 되면 직장에서 돌아오는 남편
의 차를 주차시킬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부인들이 일찌감치 빈 공간에서 자리잡고  앉
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일정한 장소에 커다란 쓰레기통을 놓아둠으로써 타인의 
주차공간을 부당하게 가로채는 사람들도 잇다.  이 모든 현상에 대해 최열씨는  이렇
게 말했다.
  "자동차산업은 한국 경제 발달의 상징 그 자체입니다. 빠르고 감동적인  성공 말입
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서운 해악의 근원입니다."

    서울은 여전히 공사중
  공무원들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는 자동차를 더 이상 사회적 성공을 상징하는 전시품이  아니라 단순히 생활을 편리하
게 해주는 도구로 여겨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도로를 확장하고, 자동
차 전용 고가도로를 신설하는 방안과, 여러 개의 터널을 뚫을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현재 서울에는 통행료를 징수는 톨게이트가  생겼기 때문에 차량을 유지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것이다. 게다가 1999년까지 네 개의  지하철 노선이 신설되었고, 지하
철의 배차 간격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지하철은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든 계획이 안고 
있는 가장 분명한 결과는, 한국의 수도 서울은 계속해서 공사가 진행되는 도시가 되 
불이라는 사실이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TGV의 건설, 지금의 네 배나 되는 도로망의 확
충, 부산과 인천의 항만 확장 공사, 영종도의 신공항 건설 등이 예정되어 있다.
  한국은 하부구조의  계획만으로도  흔들린다. 이런   계획을 실행하자면 2001년까지 
1,22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얼마나 엄청난 금액인가! 주거용 콘크리트 
소비는 한국이 세계 1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한국의 지도자들이 배보다 더 큰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에 대해 한 건축가는 이렇게 일축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개발이 너무나 급속하게 이루어진 까닭에 하부구조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도로, 공항, 철도 등 모든 것이 포화상태에 이
르러 있긴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약간 불합리해 보일지도 모르는 대규모  계획들
을 미리 발표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런 계획들을 언제나 훌륭하게 해내
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을 때, 다른 나라들
은 우리가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 나
라는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나라로 보였을 태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
었습니까? 또 현대가 1975년 최초로 자동차를 생산했을 때, 전세계는 일제히 비웃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가는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습
니다. 1988년 올림픽 경기를 유치하기도 결정되자 여러  나라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개발도상국이 그런 커다란 행사를 개최하도록 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고 말입니
다. 그러나 88올림픽도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한국인은  의지가 강하며, 남다른 투
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할 수 있다'는 정신입니다."
  박채연씨도 나름대로 이런 생각에 공감했다.
  "서울은 사람들의 진을 빼고,  사람들로 우글거리며, 교통체증이 극심한  도시입니
다. 너무나 활동적이고, 너무나 인구가 많으며, 또 너무나 도시화된 곳이지요. 서울은  경
치를 구경하려고 온 관광객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겁니다. 그러나 서울을 서구적인 기
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로 북적
거리면서, 이런 리듬과 이런 소음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삶을 사
랑합니다. 만약 한국인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싶다면, 그를 사막으로 보내면 됩니다."

    소비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
  영등포. 서울의 중심에서 교외의 신도시로 나가는 철도와 김포공항으로 가는  순환
도로인 88대로 사이에 낀, 아무 매력  없는 서울의 한 지역. 이  지역은 수많은 오락실
을 확보하고 있으며, 온갖 종류의  암거래가 성행하고, 소규모 제철공장들이  떠난 자리
에 방을 들여 2만 원짜리 싸구려 매춘이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특히 밤의 거리로 악명
이 높다.
  그러나 서울 남부의 전략적 교차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여의도 주택가와 가깝
고, 교외에 사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교통편을 제공하며, 서울의 3대 역 가운데 하나인 영
등포역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인진 날이 밝으면 그 악명 높은 단층집의 붉은 네온등들
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또한 역의 반경 500m 안에 백화점이 세 개나 있다. 모두 8층 건물인데, 그야말로 소
비의 전당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 세 백화점의 매장  운영구조는 모두 동일하
다. 지하에는 식품부가 있고, 1층에는 유명한 유럽 회사들의 상표가 붙어 있는 사치품과 
향수, 지갑, 머플러, 넥타이, 그리고 랑콤, 샤넬, 에스테  로데 등의 화장품 코너들이 
있어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리고 2층에는  리바이스나 셀리오 등 젊은 층을 위한 
후줄근한 의류, 3층과 4층에는 꽤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에나 등장할  듯
한 여성복들, 5층에는 남성복, 6층에는 아동복,  장난감, 스포츠의류, 7층에는 그릇과  
양탄자, 전자레인지 등의 가정용품 8층에는 전통 요리에서 베니스풍의 피자점까지 모든 종
류의 음식점이 있다.
  한국의 백화점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서비스와  상품의 질도 모범적이다. 판매원
들은 고객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백화점들은 아침에 문을 열 때 제일 먼저 들어온 고객
에게 커피를 한 잔씩 제공한다. 그리고 저녁에 문을 닫을 때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단
정한 유니폼을 입은 모든 종업원들이 오랫동안 차려 자세를  하고 있다가 고객들이 나
갈 때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번쩍거린다. 엘리베
이터는 '엘리베이터걸' 이라고 불리는 여직원이 조작하고, 아기 엄마들에게는 유모차도 
대여해 준다.
  이 모든 일은 단 하나의 목적,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한 행위이다. 그러고 그 모
든 일은 잘 진행돼간다. 1줄일 내낸 백화점을 여는데도 한국의 백화점에는 손님이 끊일 
날이 없다. 주말이면 사람의 숲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 것이 꼭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게다가 많은 상품을 진열해놓아서 통로도 좁은 편이다. 지방에서 온 가족이 올라와 백화
점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마치 1972년대에 파리  사람들이 일요일이면 
오를리나 최초의 무역센터였던 벨 에핀느를 보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백화점에 오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모른다! 살 것을  점찍어놓은 '아줌마' 옆에는 
결코 서 있지 말아야 한다. 한국의 아줌마는 일제 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빈곤
의 시대와 군사독재시대를 잘 견디고 살아낸 50대의 주부들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물건
을 사는 혼란의 와중에서 당신을 깔아뭉갤지도 모른다. 
  한국은 현대화되었고, 상품의 공급량도  많아졌으며, 소득도 높아졌다.  롯데백화점
은 1996년에 일상용품의 판매로만 36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한다. 백화점의  상품들
은 가격이 비싸지만 사람들에겐 아무 상관이 없다. 한국인은 마치 탐욕스러운 소비병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서울에서든 지방에서든, 압구정동의 주거지역에서든 구리시 같은 
교외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든, 명동의 의류상가에서든 용산의 전자상가에서든, 미친 듯
이 제품을 사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용산은 이처럼 광적인 구매행위가 이루어지는 또 다른 장소이다. 이곳에는 대형 상
가가 두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지하철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상가에 입
주한 대부분의 상점은 전자제품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각 측에 있는  상점마다 TV, 
VTR, 컴퓨터, 비디오게임, 카메라 등  수천 종류의 전자제품만을 판다. 진열된  제품
들 중에는 유럽에서 제조된 것이 있을 것이다. 이곳도 역시 소비자들로 북적거린다.
  중산층이라면 당연히 두 개의 채널이 동시에 나오는 대형 컬러 TV와 한 달 전에 프
로그램 녹화를 예약해놓을 수 있는 VTR, 전자레인지, 트럭 만한 대형 냉장고,  세탁
기, 기다란 줌렌즈가 달리 카메라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새롭게 필요한 것
은 식기세척기, 진공청소기, 그리고 휴대폰과 같은 온갖 종류의 통신제품이다.
  반면에 까르푸는 한국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물류 부문에서는 프랑스에서도 대기
업에 속하는 까르푸는 1996년에 세 개의 대형 할인점을 열었고, 2000년 이전에 다섯 개
의 점포를 더 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대형 할인점'들은 인근의 상권을 장악하지 못하
였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자신의 거주지역에 위치해 있고, 가족과 날씨에 대한 얘기를 
함께 나눌 수 있으며, 1주일 내내 문을 열고, 아침 7시에서  밤 11시까지 물건을 파는 
가까운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최소한의 활동을 하는 데도 완벽한 차림새를 갖추려고 한다. 서울에서는 
전쟁에 익숙해진 산악 당원처럼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피켈을 들
고, 니커보커(역주 : 무릎 아래서 졸라매는 낙낙한 짧은 바지)를  입은 채로, 부츠에 
목이 긴 양말을 신고 허리띠를 졸라맨 사람들 말이다.  그들의 결연한 태도로 보건대, 
히말라야를 등정하러 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그저 서울 인근에 위치한 900m 
정도 되는 산에 오르려는 것이다. 등산로 입구가 지하철역에서 가깝다보니 청바지에 
농구화 차림으로 산에 올라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한국인은 반드시  완전
한 복장을 갖추어야 한다. 용산에서 카메라점을 하고 있는 이성진씨의 말도 이와 같은 맥
락이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를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 항상 물어보지만, 손님들의 대답은 한결같습니
다. 아이들 사진과 곧 있을 결혼식 사진을 찍기 위해, 그리고 휴가 때 설악산에 가서 사진
을 찍으려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모델의 카메라를 구입하라고 권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크고 비싼 것만 사려고 합니다.  결국은 카메라가 가지고 있는 
기능의 10%도 사용하지 못할 텐데 말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똑같습니다. 그 정
도는 살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한국인들의 소비는 주로 전시하거나 자랑할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런 물건들을 살 능력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이웃이나, 남편 혹은  아내의 가족에게, 또
는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과시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경제
개발이라고 하는 열차에 탑승하는 데 성공했고, 또 '한국의 기적'을 낳은 이 사회에  훌
륭하게 소속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한국에서의 소비는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일이자, 
애국심에 대한 증명서이기도 하다.
  나는 월요일 아침마다 동료 여직원들에게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묻곤 하였
다. 그러면 그녀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쇼핑'이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또 쇼핑을 했다고! 그렇게 많은 물건들을 살 필요가 있어요?"
  "필요가 있냐고요! 아뇨!"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또 허리에 휴대폰을 차고 손목에는 금도금된 모조품 시계를  낀 40대 남자들이 대형 
자동차 안에서 거만하게 으스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쉽게 설명할 수 있
다. 이것은 변화가 진행 중인 나라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며, 구매행위 역시 과거에 
대한 복수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인 홍동화씨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이 너무 현대화되어서 관광객들은 예전에도 서울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 거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많은 서울 사람은 이런 겉모습 속에서 완벽한 편안함을 누
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적응하기 위해 틀림없이 많
은 노력을 했을 겁니다. 35세 이상 된 사람들 대부분은 충분히 먹지도 못한 채 낡고 
초라한 집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휴가를 간다거나 새 옷을 장만한다거
나 외식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현
재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겁
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처지에 맞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게다가 한국인들은 군사독재 시절에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서  많은 노동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로 상황은 많이 변했다. 주당 노동시간은 여전히 44시간이지만,  생
산성은 예전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자유시간과 여가활동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
고 있다.
  또한 임금 수준도, 말 그대로 급상승했다.  1990년과 1996년 사이에 실질임금이 50%
나 올랐다. 1985년 이후로 연평균 임금 상승률은 16.7%에 이른다. 이것 또한 세계 기
록 아닌가! 그리고 도시 가정의 연평균 소득은  현재 1,800만 원 정도이다. 이화여대 경
제학 교수이자 소비자 문제 전문가인 차은양씨의 분석이다.
  "서울은 부동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득의 대부분을 집세로 지출하게 되는 겁니다."

    아버지 때의 1년 소득보다 많은 아들의 한 달 소득
  박천수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활수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는 것이 
실감난다.
 "1952년에 남해에 있는 녹동이라는 어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는 북한과의  전쟁
이 끝나고 폐허가 되어 있던 때였습니다. 현대적인 안락함은  전혀 알지도 못했고, 꿈조
차 꿀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는지는,  살 수 있는 모든 것
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지금에 와서야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짚으로 지붕을 이
은 흙집에서 살았고, 방은 하나뿐이었죠. 매년 여름 태풍이 지나가면 벽을 다시 발라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늘 나무를 때서 밥을 지었습니다. 가진 것  모두가 궤짝 하나에 들
어갈 정도였습니다. 불행하게 살았다고요? 천만에요. 그때는 다른 삶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현대화된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다른 시대를 산 사람의 기억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것은 불과 50년 전의 기억이다. 이어서 그는 유년기의 기억들을 하나씩 털어놓았다.
  "운이 좋았다면, 학교에 갈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거들먹거리는 
신사가 와서 이제부터는 모든 아이가 공짜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공무원이었을 텐데,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신기
한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검은 교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았습니다. 학교는 나무로 지
은 커다란 막사 같은 곳이었고, 아침마다 우유 한  컵씩 배급받았습니다. 1964년에 중학
교에 들어갔습니다. 가족 중에서 공부하러  그렇게 멀리 나간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습
니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대학교는 희망 사항이었습니다. 어부의 아들인 나
로서는 대학에 갈 어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발전하게 되자 자격증 있는 
기능공들이 필요하게 되었죠. 나는 기사 자격증을 딴  뒤에 현대에 입사했습니다. 얼마
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현대는 한국에서 가장 큰 회사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1970년대에 대해서는 왜곡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하루 10시간씩, 주당 6일을 휴가도  없이 일했습니
다. 불평등이니 뭐니 외치고 있었지만, 월급은 빠르게 올랐습니다. 예전에 아버지가 1년 
동안 번 것보다 내가 한 달 동안 번 돈이 더  많았습니다. 기능 교육도 계속 받았습니
다.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 갈 작정이 아니라면 더 나은  노동조건을 주장할 필요도 없었습
니다. 부유해졌다고 처음 느낀 때가 언제냐고요? 그건 화장실 휴지를 살 수 있었을 때
입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예전에는 아무 종이나 사용했고, 어떤 경우에는 나무  이
파리 같은 것을 사용했거든요.  휴지를 사기 위해 돈을  쓴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였습니
다."
 그러는 동안 박천수씨는 결혼을 했고, 1975년에 첫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가족이 
뿌리가 있는 녹동이 아니라 아버지의 직장이 있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상징적
이다. 박천수씨의 삶을 궤적을 따라가보면 1980년대 초에 한국이 새로운 도약을 이루
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은 중동 건설 붐을 타고 많은 이득을 보았다.
  "기술자로 2년간 사우디아라비아에 다녀왔습니다. 2년 동안 꼬박 아들도 집사람도 
친구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돌아오기 전날에야 사우디아라
비아의 수도를 방문해서 기념품들을 살수 있었습니다. 돈은  많이 벌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 아파트 한 채와 자동차도 살 수 있었고, 집사람은 식당을 개업했습니다."
  현재 이 부부는 매달 300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프랑스식으로 하면 거의  2
만 프랑에 달하는 금액이다. 그들의 집은 현대적이며, 모든 전자제품은 당연히 최신형이다.
  자그마한 어촌에서 수도인 대도시 서울로, 지푸라기로 엮은 집에서 현대식 아파트
로, 온 가족의 총수입이 연간 300프랑을 넘지 못하던 상태에서 유럽의 소득 수준으로... 
이 모든 변화가 40년 동안에 이루어졌다.
  박천수씨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회상이긴 하지만 한국의 경제개발을 대변하는 것이기
도 하다. 1953년 한국은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쟁을  끝냈다. 전쟁으로 인하여 
수백만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산업시설의 80%가 파괴되었다. 좋은 지하자원들은 북한
에 있었으나, 인구는 남한이 더  많았다. 게다가 전체 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계속 기아에 시달려야만 했다. 1960년대에 한국은 방글라데시보다는 더  가난
했다. 그래서 국제 원조를 받아 근근이 삶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아시아의 용'이 되어 국민소득이  유럽연합의 몇몇 나라보다 
더 높다. 1960년에는 5,500만 달러도 안 되던 한국의 수출액은 1990년대 말 1,300억 달러
를 넘어섰다. 국민 1인당 GNP는 1962년의 80달러  수준에서 경제위기를 맞기 전에는 1만 
달러 수준이었고, 경제위기를 맞던 그 당시에도 6,000달러 수준이었다.

    공자, 기업의 CEO(최고경영자)
  이렇듯 환상적인 경제성장에는 인간적인 요인이  필수적이다. 새로 들어선 정부마다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것이다. 1945년에는  국민의 75%가 문맹이었다. 그러나 지
금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취학률이 99%로, 유럽보다  훨씬 높다. 게다가 모든 국민이 
국가 발전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한국은 기업국가였던 셈이
다. 
경제학 교수 박태규씨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한국의 성공에는 경제적인 요인이 50%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
지 50%는, 한 단어로 잘라 말한다면 정신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
교입니다."
  유교는 모든 한국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다. 하버드의 중국철학과 두 웨
이 
밍 교수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유교의 원리는 노동에 대한 존중, 교육에의 열의, 가족간의 우애, 훈육, 국가와 기

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빠르게 발전시킨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런 가치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형 모델을 다른 곳으로 이식하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

서 신성한 의지가 작용했다는 듯이 남들이 '경제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한국인은 

의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볼 때, 경제성장은 바로 그들의 노동과 희생의 결실이었던 

이다. 그들은 과거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땀과 눈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언론인 

종석씨의 말이다.
  "한국은 자전거 한 대도 만들지 못하던 농업사회에서  자동차를 수출하는 선진 사업
사회로 발전했습니다."
  값싼 티셔츠나 엉터리 장난감을 만들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오늘날 한국 기업들
은 
반도체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이다. 지금 한국은 발달의 국면을 벗어나 성숙의 국면으
로 
접어들고 있다. 1959년 서양의 어느  기자가 쓴 글의 제목처럼  '사라지기 위해 탄생
한 
나라'였던 그 한국이 이토록 성공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새것은 다 좋은 것?
  특히 30대 중반 이후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이런 소비욕구는 경제적, 사회적 상황
의 
급속한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소비욕구는 젊은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지만, 성장

의 아이들도 그들의 부모가 보여준 행동을 따라하게 되어 있다. 과시적인 소비는 특히 
중고품 시장이 없다는 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모든  것이 새것이고 최신형이다. 문

는 새로운 모델이 이제 막 모습을 드러냈고, 특히 이웃이 그것을 샀다는 구실로 온전
한 
가구나 가정용 전자제품을 마구 버린다는데  있다. 서울의 쓰레기하치장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은 일간신문을 통해 '멀쩡한  냉장고를 하루에 백 개씩  수거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장롱, 서랍장, 냉장고 등을 구하려면 저녁 무렵에 주거지역을 산책하기만 하면 

는 것이다.
  한 친구가 6개월 동안 타면서 8,000km를 운행한,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차를 구입 
가격의 1/3에 사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차에 숨겨진 결함이  있을지도 

른다고 의심한 나머지 자동차 대리점의 판매사원에게 많은 질문을 퍼부어댔다.  판매

원은 지극히 친절하게 자동차 소유주가 새로운 모델을  구입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이 새것이나 다름없는 차와 새로운 모델의 차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나는 걸까? 그 차이는 헤드라이트가 네모가 아니라 둥근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형편이니 수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대규모로  수거한 후 판매망을 조직해서 
개발도상국이나 시골의 못사는 사람들에게 새것인 체하고 다시  팔아먹는 간교한 사기
꾼들이 당연히 활개를 치는 것이다. 그러나 1995년  초, 서울시장이 거리에 교통체증
을 
유발하는 물건들을 버리는 행위를 금지하고 시에서 직접 수거  작업에 나서자 이런 행
위는 점차 줄어들었다. 많은 사람이 무작정 사들이고 아무 생각 없이 버리는 것이 분

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 많은 소비'의 시대는 아직  끝나
지 
않았다. 그러나 '더 나은 소비'의 시대가 곧 시작될 것이다.
  아무리 소비성향이 강하다고 해도, 한국인이 항상 새로운 풍요로움을 창출해내는  

은 아니다. 1992년 미국의 주간지 <뉴스위크>는 '너무 부유하고 너무 빠른 한국'이라
는 
타이틀 아래 대학을 갓 졸업한, 우아하게 화장해서 성숙해 보이는 매혹적인 세 여학생
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대학 측과  세 명의 여학생은 그런 타이틀에 그들의  사진
을 
실어 명예를 훼손했다며 이 주간지를 고소했다. 이 사건은 '기사'가 대학이나 그 여학

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성장에 관련된 것이었던  만큼 더욱 놀라운 일이었
다. 아무튼 이 사건은 원고 측의 승소로 끝이 났다.
  이런 금욕 캠페인은 가난에서 풍요로운 상태로 너무 빠르게  발전한 나라가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망설임과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들어낸 환경과 생활방식에 의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과거의 검소하
고 
소박하며, 공동체적인 생활에서 교훈을 얻을 때이다. 그렇지만 이런 캠페인들의 우선

인 목적은 수입을 제안하자는 데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과잉소비를 할뿐만  아니
라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아무 청바지나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리지널 리바이

를 입고 싶어한다. 또한 테니스 라켓도 아무거나 사지 않는다. 오리지널 나이키 상표
가 
붙은 것을 산다. 이 밖에도 많은 실례를 들 수 있다.  패스트푸드점들은 학생들뿐만 

니라 외식하러 나온 가족들로 초만원이다. 매출액이 그러한 사실들을 증명해주고 있
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연간 매출액은 1984년 14억 원이었는데, 그로부터 10년 후에
는 
1,000억 원으로 증가하였다.
  1996년의 일간지 조사에 따르면, 한국적인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우 유감스러운 결과겠지만, 서울의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은 피자였고, 그 

음이 프라이드 치킨이었다. 애석하게도 한국의 식탁에 빠져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
는 
김치는 선호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다.

    외제-욕망과 양심 사이
  외국상표가 붙은 제품들을 앞다투어 사는 것이 이따금씩  불어오는 일반적인 유행이
지만, 한국의 소비자들은 그보다 더 까다로워졌다. 어떤  제품이 마음에 들어도 그것
이 
2류 제품이라면, 그 제품을 사는 것 자체가 자신이 2류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

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따라서 쓸 만한  제품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가
장 
좋은 것을 원한다. 언제부터인가 품질과 모양, 미적인 것이 구매를 결정하는 기준이 

고 있다.
  1988년에서 1994년까지 한국에서 매상이 두 배나 올랐던  일상적인 소비용품에 비해 
수입품들은 그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추세이다. 모든 것이 이 같은 상황을 따라가고 

다. 국산품의 생산비 상승에 따라 많은 수입품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세계무역기구와 OECD로부터 시장을  개방하라는 거센 압력을  받고, 시장을 
개방한 상태이다. 따라서 한국인은 이제 국내 곳곳에서  많은 외국인을 만나게 되었
고, 
또 케이블 방송의 도입으로 여러 개의 새로운 채널을 시청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
면 더욱더 국제화되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런 요인들은 한국인의 구매욕구를 더욱 부풀릴 것이고, 또 더욱 다양하게, 

리고 더욱 서구적인 유행을 따르도록  수요를 자극할 것이다. 외국의 전문가들에  따

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외제품'을 더 자주 구입한다고 한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한국에 공장을 세운 외국 회사들이 세관
이나 세무서에서 조사를 받던 때도 있었다.
  경제위기를 맞으며 수입품들에 대한 매우 강화된 경계심은, 국산품과 수입품을  비
교 
분석할 때 언제나 국산품에만 편파적인 점수를 주는 소비자단체들이 부추기고 있다.
  1993년 10월 GATT와 포괄적인 협상을 진행하고  있을 때, 한 소비자단체가 지하철
역에서 벽보 캠페인을 벌였다. 벽보에는 멀리서 일본과  미국, 그리고 유럽연합의 깃

들을 펄럭이며 세 척의 배가 들어오고 있었고,  한 남자가 '국산' 금고 위에 서서  칼
을 
높이 빼들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에비앙도 이와 비슷한 쓰라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에비앙 제품이 한국에 상륙했을 
때, 여러 TV 방송은 에비앙  생수를 너무 많이 마시면 건강에  해롭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들은 소비자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일관된 신념이 현실화된 것이었고, 에비앙  대

와 가졌던 인터뷰는 어떤 형태로도 방송되지 않았다.  이 모든 실력행사에도 불구하
고, 
로잔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경영개발협회의 1996년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시장을 

방한 세계 48개국 가운데 마흔 다섯 번째 나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자동차는 외제품에 대한 매력과 반감이 동시에 표현되는 상품이다. 한국에서는  거
의 
국산 차만 보인다. 드물게 보이는 외제차들은 메르세데스와  같이 대형 엔진을 장착
한, 
꿈에 그리는 자동차들이다. 그러나 1993년에서 1994년 사이에 외제차를 한 대 샀던 사
람은 '모험'을 감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웃들로부터 질시를 받았고, 게다가 회복이 불

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을 만한 세무조사를 받곤 했다. 지금은 이런 일들이 거의 일어

지 않지만 말이다.
  한국 정부는 관세가 8%로 유럽연합의 실질관세  10%보다 훨씬 낮다는 점을 자랑스
럽게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무수히 많은 행정서류와 기술 테스트에 관한 공식

인 서류들을 구비해야 하고, 가장된 관세 부과와 은행 차입금이 제한되는 등 비관세 

벽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하는  조사일 뿐이다. 그 결과,  자동차 총보유
량 
1,000만 대 중 외제차는 7,000대를  밑도는 수준으로, 그 점유율  수준이 겨우 0.65%
에 
불과하다. 반면에 외제 차 판매량은 빠르게 늘어나, 1996년에는 판매율이 77.3% 증가

다. 그러나 이토록 증가율 수치가 높은 것은 전년도의 판매실적이 극히 저조했기 때문
이다. 이와 같은 수치상의 증가는 언론이 외제 자동차의 침략이라고 소리 높여 외칠 

실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같은 해에  외제차는 6,921대 수입된 데 비해,  한국
은 
141차례 이상에 걸쳐 97만 6,462대의 국산 차를 수출했다!
  소비 부문에서 보면, 다른 많은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교차점에 서있다. 한국

은 남들과 다르게 소비하기를 원하고, 제품의 질적인  면을 강조하며, 뭔가 새로워보

는 외국 제품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국산품을  사야 하고, 특히 위기에 처
해 
있으니까 더욱더 국산품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인들은 언제나 더 많이 소비하고  싶어한다
는 
사실이다. 게다가 한국 속담에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라는 말이  있지 않

가?
 
    지금 당신의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

김만수씨는 의기소침해짐과 동시에 화가 치밀어 올랐고, 얼이  빠진 듯 귀가 멍멍했
다. 
늘 그랬듯이 친구들과 함께 늦게까지 술을 마신 다음  자정쯤 집에 돌아와서 부인에게 
저녁을 차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부인은  저녁을 먹고 싶으면 자신이 알아서  찾아먹

가, 아니면 저녁 시간에 맞춰서 들어오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다. 이제까지 그의 어머니는 시간과 상관없이 아버지의 밥상 차리는 일을 거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변화하고 있고, 가족관계 역시 변화하고  있다. 가족관계의 변화 속

는 확실히 도시화되는 속도보다는 느리지만, 아직까지 자정에서 스스로 권위 있는 가

이라고 믿고 있던 수많은 아버지를 방황하도록 하기에는 충분한 속도이다.  가족이라
는 
성채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지만, 도시화라든가  여성의 노동, 국제화, 일반적인  지식
의 
발달 등에 타격을 받아 위험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국의 가정은 유럽인의 눈에는 여전히 매
우 전통적으로 보인다는 점 말이다.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아직까지 가족의 

심에는 부인과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군림하고 있다. 아버지의 역할은  노동
을 
통해서 집에 돈을 가지고 오는 것, 권위를 갖고 가정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 

식을 낳아 가계를 잇는 것 등이다. 반면에 어머니의 역할은 남편이 벌어온 생활비를 

리하는 것이다. 또한 어머니는 모든 집안일을 담당하고, 장을 보며 아이를 양육하고 

웃 사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마치 어미 닭이 새끼들을 돌보듯이 온 가족을 

살핀다.
  한편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아주 위험한 역할을 한다. 어린 꼬마
의 어깨에 지워주기엔 너무 무거운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공

나 피아노, 태권도 등에서 모두 1등이 되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 특히  맏아들에

는, 부모가 늙으면 보살펴야 한다는 유교적인 예절 또한 강요된다. 실제로 유교는 남

과 부인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보다는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부모에게  자식으로
의 
수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가정은 밝고 쾌활한 편은  아니
다. 
그러나 한국의 가정은 최소한 현재까지는, 구성원들에게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고  

대의식과 위안을 주는, 안정되고 힘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힘겹고 치열한 경쟁
의 
현장 가운데에 자리잡은 일종의 누에고치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의  조사
에 
따르면, 청소년들의 63%가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 마음속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한 사
람이 없다고 한다. 물론 한국의  부모들이 아이들과 전혀 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
다. 
그들도 나름대로 대화를 나눈다. 현시점에서, 전혀 복지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가족간
의 
연대의식은 경쟁위기라는 가장 분명한 결과를 해결하는 '사회적 완충지대' 역할을 하
고 
있다.

    아내와 어머니로만 남은 한국의 여성들
  유교사상과 그것의 실천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 가족은 확실히 피라미드형  구조
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남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가장이라 할지라도, 가정의  생활

가 소주로 탕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바가지를 긁어대는 주부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 
점에서는 프랑스의 적포도주와 한국의 소주가  같은 역할을 하는 듯하다. 게다가  심
한 
가정 불화로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될 때, 그 책임은 십중팔구  남자 쪽에 있다. 거의 

부분의 경우에 주부의 입장이 옳다. 그렇다고 해도 여자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그녀들은 남편과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새벽같이 
일어난다. 점심과 저녁식사 때도 아침식사와 마찬가지로 여러 종류의 반찬을 준비한
다. 
또한 그녀들은 남편과 아이들이 입을 옷들이 깨끗한지, 또 다림질이 잘 되어 있는지 

상 확인해야 한다. 남편이 출근한 후에도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아이를 돌보는 것까
지 
모두 다 주부들의 몫이다.
  한국 음식은 약한 불에서 서서히 끓이거나 기름에 튀기는 것이 대부분이고, 짧은 시
간에 만들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또한 양념도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외국인이 한
국 
음식에 적응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주부들이 유일하게 쉴 틈이 생기는 때는 밖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이웃 여
자들과 수다를 떠는 시간뿐이다.
  저녁이 되면 남편은 피할 수 없는 직장 일 때문에, 또 빠져나올 수 없는 동료들과의 
술자리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들쭉날쭉하다. 그러나 남편이  집에 들어오
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남편이 식탁에 앉으면,  부인은 정성껏 만들어놓은 음식들
을 
차리기 시작한다. 외국에 나가서 오랫동안  살다 돌아온 한국 여자들은 한국  주부들
이 
사는 모습을 보고 꽤 큰 충격을 받는다. 한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켄도클럽 회원들과 저녁  시간
을 
같이 보낸 후, 그들 중 한 명이 자기 집에 가서 마지막으로 술 한잔만 더 하자며 일행
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이미 저녁을 배불리 먹은 후였고, 근처의 여러 술집을 전전하

서 술도 많이 마신 상태였다. 그나 나나 똑바로 서서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런 일은 서울에서는 전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실제로 밤 9시가 지나자 거리에는 
얼큰하게 술에 취한 사람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신은 또렷했기 때문
에 그가 잡아끄는 것을 뿌리치며 말했다. 
  "자네는 취했어, 지금은 새벽 1시라고. 자네 부인이나 아이들은 자고 있을 거야. 너
무 
많이 마셨어. 가서 자야지."
  그러자 그는 내 어깨를 힘껏 낚아채면서 주정을 부렸다.
  "걱정 마. 너는 내 친구야.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딱 한잔만 더 하자."
  나는 그가 놔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한밤중에 서울의 경관을  이루
고 
있는 무수히 많은 아파트들 중의 한 아파트 앞에서 차를 내렸다. 친구는 현관문을 열

마자 "술 줘!"하고 소리치며 한밤중의 적막을 깨뜨렸다. 아마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
을 
그의 부인은 아무 불평 없이 일어나서  여러 가지 안주와 맥주를 내왔다. 나는  너무
나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피로가 

을 덮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지금의 젊은 부부 집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너무나 특별한 이야

일까 서양인 이 손님으로 왔기 때문에 친구의 부인이 화도  못 내고 애써 친절했던 것
은 아닐까? 나로서는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런데 한국 대기업에서 첨단기술자로 일하는  남자와 결혼한 30살이 될까  말까 한 
동료 여기자가 어느 날 분노와 슬픔과 실망이 뒤섞인 목소리로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
려준 적이 있다.
  "남편이 새벽 2시에 회사 동료들을 여럿 데리고 들어왔어요. 그들은 이미 잔뜩  취
해 
있었지요. 그렇지만 계속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 중  한 명은 거
실 
양탄자에 토하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그걸 치울 사람은 나라는  거죠. 4시쯤 되자 마

내 그들은 모두 돌아가버렸어요. 그렇지만 나는 5시부터 일어나 술에 곯아떨어진 남편
의 아침을 차려야했지요."
  한국 여자들은 당연히 용기의 금메달을, 또한 순종의  금메달을 받을 만하다. 광명
에 
살 때, 이웃에 살던 한 여자가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내가 볼 때, 여자가 자기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에
요. 
한국의 정신 자체가 그렇고, 또 아직 어린 딸들도 그런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
요. 
나는 직장을 계속 다니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남편은  결사적으로 반대했지요. 내가 
집 
밖에서 다른 남자들을 만나는 걸 싫어했거든요. 난 할 수 없이 사표를 냈죠. 선택의 

지가 없었어요.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에요.  여자들은 저녁 시간까지는 말
할 
대상이 자기 아이들밖에 없으니까요.  그 후에는 남편을 기다리는  일분이죠. 아이들
이 
커서 학교에 다니게 되면, 이런 외로움은 훨씬 더 커지죠."
  한국 여자들은 그들의 노력에 대해서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여자들만 열심히 노
력한다고 해서 부부관계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외국인 친구가 

다는 사실을 너무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열살 난 이민우라는 아이는 자기 집 곳곳을 보
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거실이고요, 저기는 나와 엄마 방이에요. 그리고 저기는 아빠방이에요."
  친구 부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실 한국의 어린아이들은 늦게까지, 때로는 12살
이 
될 때까지, 또는 소년이 되어서까지도 엄마와 함께 잠을 자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해주
었다.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많은 부부가 침실을 따로 쓰고  있다. 일단 두 아이를 

찍 낳고 나며, 부부간의 성적인 관계는 뜸해지는 경향이 있다. 여자 친구 몇 명의 비

스런 이야기를 믿자면, 기껏해야 석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그 중 

구가 말했다.
 "둘째 아들을 어떻게 임신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거기에 대해선 아무  

억도 없거든요. 너무 빨리 끝났거나, 아니면 꿈속에서 그랬든지..."
   여자가 언제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되는지는 남편이 부르는 호칭에서 알 수 있다. '

보' '당신' 혹은 이와 비슷한 달콤한 호칭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그 대신 첫째 아이
의 
이름이 붙은 '누구 엄마'라는 호칭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참을성 많고, 본 것도 때로
는 
못 본 체하며, 순종적인 한 여자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남편이 무엇을 하는지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 다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그다지  알
고 
싶지 않아요."
  이것이 한국 여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려  하기보다
는 
오히려 그런 문제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행동한다. 한국의 매춘사업이 이

록 발달한 것이 확실히 우연은 아닌 것 같다.  한국에서는 사창가나 거리에서, 혹은 

스테르담에서처럼 붉은 네온등이 비치는 유리방 뒤에서 매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럽과 사우나, 종업원들이 '특별 봉사 요금'을 받는 이발소나 주택가 인근의  여인숙에

도 역시 마찬가지이 일들이 벌어진다.
  실제로 한국인은 성적인 관계와  부부관계를 다르게 본다. 결혼은  하나의 계약이
며, 
부부는 가정을 이루고 서로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섹스는 다른 것이다. 게다가 한국

에는 사랑을 가리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말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정'이다. '
사랑'
은 맹목적으로 한없이 베푸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유럽식 사랑이라는 개념과 조
금 
일치한다. 여기에 비해 '정'은 부드러움과 존중, 익숙함과 안락함, 그리고 상호간의 
신뢰
가 미묘하게 혼합된 개념이다.
  남자들은 거치고 투박하지만 가정을 보호하고 안전을 책임진다. 반면에 여자는  부

럽고 상냥해야 하며, 남편의 모난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야 하고, 밤잠도 설쳐가며 남

을 기다려야 하는 등 거의 어머니처럼 남편을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부드러움이 부부
간에 갖추어야 할 우선적인 자질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부부간의 폭력이 너무 흔하게 일어난다. 1993년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

면, 60%의 여자들이 남편에게 학대받고 있는데, 남편이 술에 취해 들어왔을 대 부인을 
학대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중 25%는 정신적이 모욕을 주는 욕설을 퍼붓
는 것에서 시작해서 1/3정도는 육체적인 가혹행위로까지 발전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런 
여자들 중 운명론이나 마조히즘(피학대 음란증)에 사로잡힌 13%의 여성들은 자신이 잘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그 잘못을 고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사랑' 한다거나 '정'이 있다고는 해도, 결혼해서 사는 부부들의 절반이 배우자와 
성격
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부간의  폭력이 과연 놀
랄 
만한 일일까?

    미시의 승리
  한국의 가정이 아무리 전통을 사수하는 굳건한 보루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하더라
도,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가정은 '물리적으로' 변화를  시작하여, 현재는 핵가족이 대

족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1975년에는 한 가정의 아이가  평균 3.2명이었는데, 도시화가 진행되고  생활 수준
이 
향상된 지금은 한 가정의 아이가 평균 1.6명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늙은 부모를 모

는 가정도 그리 많지 않다. 도시에서는 거주 공간이 넉넉하지 못하고 집세도 비싸기 

문에 물질적으로 더 편안하게 살려는  것은 모든 이들의 희망이다. 이것은  개인주의
와 
자기본위적인 삶의 승리이다. 아이가 하나뿐인 부부는 그 아이를 너무나  애지중지해

며 키우고,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최대한 해주려고 애쓰며,  아이가 공부를 잘
할 
수 잇도록 가능한 한 많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한다.
  가정은 본질적으로 여성들이 주도권을 쥐고 잇는 내부로부터 변화한다. 이제  미시
의 
시대가 온 것이다. '미스'와 '미시즈'를 결합한 '미시'라는 말은, 결혼해서 아이들은 
있지
만 여전히 젊고 능력이 있으며 우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
다. 개인적으로는 놀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한국에서는 이것이 작은 혁명이
나 
다름없는 일이다. 요즈음에도 결혼한 후에는  더 이상 마음을 사로잡을 남자가  없어
서 
스스로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애쓰지 않는 여자들이 잇다. 그런 여자들은 엄마로서의 

할을 순순히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더 이상 화장도  하
지 
않고, 검정이나 진보라 혹은 벽지 색의 보기 흉한 긴치마를 입은 채 '파마' 머리를 하
고 
다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는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 두 가지 있다. 절고 매력적인 여자를 의미하는 '아

씨'라는 말과, 많은 경험과 성숙함으로 인하여 존경은 받을 만하지만 매력은 없는, 나
이 
든 여자를 가리키는 '아주머니'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미시들은 아주머니에서 나

를 거꾸로 먹은 듯이 보인다. 그녀들은 옷을 잘 차려입고, 미장원에도 자주 가며,  집

에 갇혀 지내기를 거부한 채 자신의 전문적인 일을 찾아 나서거나, 쇼핑을 하기도 하
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광고업자가 만들어 낸 단순한 유행 현상이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속에서 훨씬 더 깊은 사회 변화를  감지하려
는 
사람들도 있다. 소비성향이 강한 미시들이 어느 시간대에 주로 TV를 시청하는지를 일
찌감치 알아차리고 거기에 맞게 광고전략을 짜는 광고업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

서는 확실히 후자가 옳다고 생각한다.
  주신은 여자들에게 자유를 안겨주는 또  다른 근원이다. 갖고의 재정을 관리하는  
데 
이미 익숙해진 어떤 여자들은 때로는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하는 위험한 투자클럽을 만들기도 한다.
  한국의 소액증권 투자 여성들, 혹은  우아함을 추구하는 신세대 여성들은 서양  여
러 
나라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 틀림없다.  남성들
과 
동등한 임금을 받는다거나, 낙태 반대를 위한 투쟁은 하는 것 등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첫걸음이다. 변화의 단계를 성큼성큼 건너뛰고 있는 한국이므
로, 
머지않아 두 번째 단계의 주장이 대두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것들은 무시해야 한
다. 도시에 살고 있으며, 비싼 물건을 구입 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고, 대체로 고등

육을 받은 미시들이 한국 여성 다수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외적인 자유를 

리고 싶어하는 이런 여성들이 어느 순간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열을 올린다거나, 습관처럼 들어오고 싶은 시간에 들어오는 남편의 저녁상을  준비하
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현모양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여성, 사회적 장애
 여성에 대한 불평등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  고용평등법 제6조에 '모든 시

은 모집과 임금에 과하여 평등하다'하고 기술되어 있지만,  여성의 임금은 직급과 경

과 학위가 동등한 남성 임금의  51.9%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 여성의  47.3%가 노동을 
하고 있지만, 단순 고용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부사원 중 여성은 겨우 7%뿐이다.
  또한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이 상급자인  경우 그 밑에서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다. 
결국 여성 간부사원은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 직

들은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시러 갈 수도 없고, 또 전통적으로 그래왔듯이 사창가에 함
께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은 집단의 결속을 확고히 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처
럼 
보인다.
  게다가 고등교육을 받은 많은 여성이 몇 년간의 직장생활에도 불구하고 승진의 기회
가 주어지지 않는 데 실망하여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회사가  어려움
에 
처하면, 회사는 우선 여성들을  해고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여성이  직장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이 거의 사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

게 되고, 그럼으로써 실직자 수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경제위기는 여성의 조건이 막 개선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발생함으
로써 오히려 과거로 복귀하는 역기능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 1998년 5월 서울에서 벌

진 노동자들의 시위는 지나친 요구를 해서 실업을 더욱 악화시킨다며 여성 시위자들을 
비난하던 남성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위기를  맞고 있는 시기에 직장에 다니는  여성
은 
남성의 직업을 강탈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여성이 자신이 설계한 

을 살기 위해, 성질 고용한 남편의 가정적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또 자신의 전문직
에 
헌신하기 위해 독신으로 살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사회적인 압력이 너무도 강하기 때

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여성 스스로가 직장생활에 더욱 적극적
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성도 많다. 그들은 여성이 군대에 가는 것도 찬성한
다. 실제로 1994년 이후 공군사관학교가 여성에게 개방되었다.
  "우리는 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말한 김규진 소령은 여성이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을 '가장 

명적인 변화'라고 평가하였다. 이와 동시에 사관생도들의 음주와 흡연이 금지되었다. 

를 보고 여성을 혐오하는 일부 사람들은 "모든  나쁜 점이 동시에 터져나온다"며 조롱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데도 정치권은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선거운동은 흔히 폭력적이며, 많은 돈과  기업이 동원되는 것이 사

이다. 또 많은 사람이 여성이 당선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는 남성과 

성의 차별이 점차 사라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이 문제에 관련된 새로운 법률들을 
계속 공포하고 있다.
  1992년 정부는 초등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요리 강습을 받는 대신, 여학생들은  기술
을 
배우도록 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사법부는 내부적으로도 황당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성추행으로 기소된  사

에 대해서 재판부는 "정숙하지 못한 여성은 사회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선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1994년 8월, 부인의 단독 과실임을 인정하여 일방적인 이혼을 선

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부인이 '한국의 훌륭한 배우자'로서 살기를  거부했
지 
때문이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며, 그녀는 관례처럼 1주일에 한  번 시댁에 가서 시

머니를 도와 집안일 하는 것을 거부했고, 시어머니의 생신날 시댁에 가기를 거부했다
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1994년 4월 재판부는 한 대학 교수에게, 그의 은근한 수작을 

리쳤다는 핑계로 쫓아낸 조교 앞으로 3,000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리

도 하였다.
  언어학자 강주현씨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어는 어휘 자체가 성차별적인 요소를  지

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특히 가족 구성원을 지칭하는 어휘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

나는데, 남성을 부를 때는 존칭의 어휘를 사용하는 반면, 여성의 호칭은 여성의 가정
적 
기능에 의해서만 규정한다는 것이다. '며느리'는 식사 시중을 드는 사람을 의미하고, 
'사
위'는 장래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또 여성에 대한 차별은 아주 어릴  때부터 느낄 수 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남부
에 
위치한 나라들에서 주워온 것도 아닌데,  한국의 어린 소녀들은 집안일을 하거나  장
을 
보러 다녀야 한다. 반면에 사내아이들에게는 결코 이런  일들을 시키지 않는다. 그리
고 
여동생은 오빠에게 공손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유교의 유산을 느낄 수 있다.  '딸
을 
낳으면 밑지는 장사'라는 속담까지 있지 않는가! 요컨대 초등학교  교육이 완전하게 

등해졌다고는 하지만, 현재 남자아이들은 29.6%가 대학에  진학하는 데 비해 여자아이
는 19.4%만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남아선호사상은 그 뿌리가 너무나 깊다. 한 해에 30만 건에 이르는 낙태 행

가 자행되는 주요 원인도, 남자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사회풍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의사들은 태어날 아기의  성별을 가르쳐줄 권한이 없다.  그러나 은밀히 
몇 
장의 수표만 건네면 금지된 것도 능히 알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한국은 성비 

균형이 가장 심각한 나라 중  하나이다. 1996년의 통계를 보면,  출생 성비는 사내아
이 
114명에 여자아이가 100명이었다. 이러한 경향이 계속 유지된다면, 2010년이 되면 20

에서 30대까지의 성비는 남자가 여자보다 28.6%나 많아질  것이다. 그럴 경우 인구 및 
세대교체 측면에서는 심각한 위협과 퇴행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시어머니들이 손자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소위 말하는 미신에 

나치게 의지함으로써 엄청난 돈을 계속 허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왕국, 달라지는 아버지
  여성 다음으로 가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요인은 아이들이다. 풍요로움 속에서  태어
난 
아이들은 부모들이 자기들의 모든 변덕을  받아주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한국
의 
아이들은 눈을 감고도 닌텐도 게임기의  정품과 가짜를, 진짜 나이키 제품과  모조품
을 
구별해낼 정도이다. 과거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돈을 쓰는 부모들과는  

리, 아이들은 돈 쓰는 것을 일상적인 행위로 여기고 있다. 특히 맞벌이 부모를 둔 경

에는, 돈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한다. 아이들의 주머니에는 보통 제법 큰돈이 들어 있
다. 
그래서 한국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
  또한 같은 나이의 유럽 아이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아이들은 훨씬 많은 자유를 누

는 동시에 훨씬 더 많은 의무를 지니고 있다.
  많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한국에는  유럽에 비해 범죄가 많지 않으므로  아이들
이 
아홉 살이나 열 살 때부터 혼자 지하철을 타고 외출할 수 있으며, 또래의 친구들과 놀
러 다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모 역시 아이들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공손해야 한다고 
교육하거나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반면, 한국에는 학교에 가는 일을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이들은 사실 어린 

이인데도 음악이나 체육 같은 과목은 등한시한 채 부담스러운 교육 프로그램과 반복되
는 숙제 사시에서 그야말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과목에서 남

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중압감까지 느끼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변화는 아이들이 더 이상 아버지의 권위를 원리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점이다. 물론 학교에서는 도덕 시간을 통해 효도가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러나 아주 어린 나이부터 경쟁사회에 뛰어들었고, 직장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
의 
자리가 자주 비어 있는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대체로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놀이 규칙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을 듣
는다. 그러나 대개 집에 없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집에 들어오는데 언제나 술
에 
취해 있으며, 미국 프로농구 스타들이  랩 가수들에게 보이는 아이들의 관심을  하나
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말에 왜 아이들이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가?
  이런 세대간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현상은 사춘기 시절보다 더  깊은 골을 파놓게 된
다. 부모와 아이들은 더 이상 동일한 세계에 살지  않으며, 동일한 가치도 가지고 있
지 
않다. 그들은 서로 너무나 다른 교육을 받았다. 이런 현상은 왕자처럼 자란 사내아이

에게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들을 '마마보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엄마들은 자기 아이의 교육적인 성공을 통해 성취감을 느낀다. 유교사회는 

자가 아들을 낳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격을 부여한다.  사회 인식 또한 엄마와 아

을 완전히 동일시하도록 이끈다. 엄마는 친구를 가려 사귀게 하고, 아이에게 최고의 

외공부를 시키며, 선생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아이들의 모든 투정을  받아주
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만을 해주는 등 자기 자식을 품에  안고 키움으로써 결국은 무
책임한 아이로, 응석받이로, 또 외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로 길러내는 결과
를 
낳고 만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 가장과의  첫 단결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의 충격도 매우 크다.  한국의 동부 산악지대에서 겨울이  혹한 속에 고
된 
훈련을 받으며 26개월의 병역 의무를 마친 박동수씨는 구  입대 전에는 이부자리 한번 
펴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속에 살고 있는 나라에
서 말이다.
  해방되는 여성들, 응석받이 아이들,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들. 수세대에 걸쳐  권위

이고 자아도취적으로 살아온 이들은 세계가 변화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두 가
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는 완전한 거부이다. 남이 말의 듣지 않으며,  소리

르고 위협을 가하면서 스스로의 권위를  재확인하는 형태인데, 아직도 이런 방법이  
잘 
먹힌다.
  하지만 변화에 적응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 거리에서는 아기를 안고  있
는 
것은 물론, 아기에게 우윳병까지 빨리는 아버지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볼 수  

다. 잘 해보겠다는, 즉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 의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행하고 

는 변화의 물결 속으로 밀려들어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영어나 정보처리 기술 등
을 
배우듯이 이것도 잘 배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정보다는 직장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42세의 장병호씨는, 집에서 이방인이 

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날부터 곧바로 변화의 물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정
했다고 한다.
  "고함을 치지 않고는 두 아들과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나를 

고로만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 집의 진짜 가장은 마누라였습니다."
  교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아

들이 선택한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권위를 내세우기 전에 대화로  풀어나가라
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에게 대들어본 적이라고 없던 그가 이런 상황을 꾹 눌
러 참기가 힘든 일일 것이다.
  젊은 부부들은 이보다 훨씬 현대적인  삶을 영위할 줄 안다.  그들은 자주 외출하
고, 
친구들을 초대하며, 여행을 즐기고, 가능한 한 최고의 편리함을 누리려 한다.  남자들
이 
집안일이나 장보는 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현실의 변화와 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남자들이 설거지를  하거나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은  불
과 
10년 전 만해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유교사상에 깊이 젖어 있는 
나라에서 혁명적인 요소가 될 거라고 지적하는 낙관적인 생가가을 가진 사람들도 있
다. 
현재 많은 한국 남성이 여성이 직장생활을 하는 것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입에 발린 소리들을 신뢰하지 않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
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겉모습만 변했을 분 정신은 예전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젊

이들은 그들의 아내가 직장을 갖는 것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생활비가 많이 드는 서

에서는 두 사람이 버는 것이 한 사람이 버는 것보다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훨씬 수월하
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하는 것도 가정에서의 시끄러운 언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자들은 속으로는 언제나 자기들이 여자들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머릿속
은 
전략들로 넘쳐난다. 어느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남자의  58.9%는 가정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겨낼 목적에서 맞벌이 부부를  선호한다고 말할 뿐, 남성과 여성의  평등
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남자는 단 2.9%에 불과하다고 한다.
  결국 결혼 전에 직장생활을 했던 여성들의 절반은 남편의  강요 때문에 혹은 아이들
을 더 잘 키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다. 사회구조가 결코 부부관계가 나아지도록 돕지 
않기 때문이다. 1998년에 집계된 것을 보면 실제로  한국에는 탁아소가 1,079개에 불

하였다. 따라서 조부모의 손에 아이를  맡기지 않으면, 엄마들이 일하기가  어려워진
다. 
낙관론이든 비관론이든, 어느 편이 옳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부엌에 들어가는 남자
는 
인생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광고와 드라마에서는 남자와 

자가 함께 요리하는 장면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21세기에도 유효한 18세기의 결혼 방식, 중매
  가정에 대해 말하자면, 이런 변화들이 분명한데도 전통적인 것들은 언제나 삶을 힘

게 한다. 더구나 중매결혼을 하는 관습이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결

식을 하나의 애정과 관련된 사건으로 여기지 않고 당사자뿐만 아니라 동일한 사회집단
에 속해 있는 두 집안간의 일종의 계약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는 그들의 부모가 그들을 위해서 선택해준 사회적이고 가정적인 계획을 성
공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서로 도와야  한다. 만약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승낙하
지 
않는다면, 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는 셈이다. 가정적이고  순종적인 딸
은 
언제나 부모의 결정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딸이 보모가 반대하는 사람을 너무나 사랑
하고 있다면, 부모가 고집을 꺾을 때까지 투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했을 경우, 부모만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이 보기에 

륭한 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부모는 자기 딸이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를 
알아보기 위해 여러 차례 반대 의사를 표명할 것이다. 하지만 딸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결국에는 부모가 양보하고 만다.  그런 때로는 어린 딸에
게 
부모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남자를 택할 것인지를 물음으로써 위험한 선택
을 
강요하는 부모도 있다.
  중매결혼,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중매로 만나서 결혼하는 관습은  사라지지 않았
다. 
만약 어느 집 딸이 28세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따라서 

머니는 당장 딸을 데리고 '뚜쟁이'의  집을 찾아가 딸의 이력에  어울리는 많은 남자
를 
만나게 해줄 것이다. 이런 커플들은 대체로 커피숍에서 첫 만남을 갖기 때문에 쉽게 

에 띈다. 옷을 잘 차려입고 어색하게 진땀을 흘리고 있는 두 사람은 감히 서로의 눈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커피잔에 시선을 고정시켰다가  때때로 낮은 목소리로 상
투적인 말들을 교환한다.  무엇을 전공하셨나요?  산은 좋아하시나요? 여가활동으로는 
무엇을 즐기세요? 정치적인 이야기거나 사회에  관한 것이거나, 장기적인 결혼계획 등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중매결혼은 이런 유형의 만남을 세 번쯤 가진 후에 결정된다. 당
시에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던 한 여기자는 당연하다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일이 잘 되어 가는지는 아주 빨리 알 수 있어요. 매일매일 자신의 결혼 상대자를 

나는 일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죠."
  그러나 바로 그 친구는 가끔씩  자신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혼할 거라고 털어놓곤 했다. 이런 중매는 이영자씨가 겪은 것처럼 때론 아주 우습기
도 하다.
  "그는 내가 만난 첫 번째 남자였어요. 우리는  그저 그런 얘기부터 시작했죠. 그런
데 
15분이 지나니까 더 이상 서로 할 말이 없더군요. 오랫동안 서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었죠. 그러다 갑자기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어요. 그제서야 난  그가 잠들어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여자의 환심을 사야 하는 첫  만남인데, 그렇게 자다니 안돼 

이긴 하더군요. 두 번째는 꽤 점잖은 남자였어요. 다시 만나기로 했죠. 그런데 보통 

이 들 가는 커피숍으로 가지 않고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그리고 자세한 설명
을 곁들여가며 온갖 종류의 냉장고에 대해 완벽하게 얘기해주는 거예요. 너무도 놀라
서 
'아마 이 사람은 냉장고를 주제로 어떤 보고서를 쓴  적이 있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

고는 그의 설명에 관심이 있는 척하며 얘기를 들어주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 토요일에
도 또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서 또다시 냉장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남자는 

정용 전자제품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고, 자기 일에 깊이 몰두하는 타입이

죠. 그렇지만 냉장고는 정말 재미없어요."
  중매결혼이었든 아니었든, 현재는 일곱 쌍의 부부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 좀더 

명하면, 여성들이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여성들은 예전보다 훨씬 많이 경제

으로 독립되어 있고, 재판관들도 아이를 양육하겠다는 여성들의 주장을 결국은  받아

이고 있다. 실제로 1990년까지는 아버지가 더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는 이유로 아이
의 양육권이 대부분의 아버지에게 넘어갔다.
  여성에게 이혼이라는 것은 강인함과 용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혼한 여자는  아
주 
일상적으로 자신의 가족이나 동료 남자  직원들, 심지어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  사장
의 
적대적인 시선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부모들은 사이에 낀 세대이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채 자랐던 그들
은,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
면서도, 자신의 부모 앞에서는 전통적인 의례와 가정에 대한 의무를 존중하면서 효도

이를 해야만 한다. 그들은 인습에 너무 얽매어 있는  부모들과, 또 너무 현대적인 아

들 틈에 끼여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이다. 그들은 가운데 낀 채로 가능한 한 균형을 유
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듯이,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은 수직적인 관계, 
즉 
무조건적인 효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무조건적인 효도는 수평적인 관
계, 
즉 갖고 내부에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관계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이 민주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이때에,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
는 
가정을 민주화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상, 그러나 새로움은 있다
  명동, 서울 한복판에서 유행하는 옷을 파는 의류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 주말이면 

도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사람들 틈에 어깨가 꽉 낀 채 한참이 지나도록 걷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할 때도 많은 곳이다. 그야말로 옷가게로  즐비한 거리이다. 가끔 유행

는 신발점이나 액세서리점도 옷가게들 사이에 들어서 있다. 품목이 무엇이든 규모가 

마나 되든 상관없다. 라코스테나 애로우의 값싼 티셔츠 판매대들은 서로 붙어 있는 상
태이다.
  또한 대부분의 점포들은 스피커를 설치해놓고 최신 한국 가요나 팝송을 시끄럽게 틀
어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군중들에게 떠밀려 겨우 몇 걸음씩 옮겨가며 이 가게 
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계속 듣게 된다.
  이렇듯 명동은 사람의 진을 빼는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사로잡
는 
유행과 그들의 열정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도 
역시 그들은 옷을 선택하는 일에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는 부모들과는 다르다.  게다
가 
점원들은 때로는 머리를 짧게 한 채 이마에 머리카락을  몇 가닥 늘어뜨리거나 물안경
을 쓰기도 하고, 회색 양복을 입거나 속옷이 보이는  흰색 와이셔츠를 입기도 하며, 
또 
화려한 색상의 넥타이를 매고 로봇 흉내를 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훨씬 자유롭고 훨
씬 
부유한 생활을 하는 한국의 아이들은 부모들과는 반대로  화려함과 즐거움과 다양함을 
추구한다.
  서울에 온 관광객들은 한국 여성의 우아함에 강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여성은 대부분 화장을 하고 다니며, 옷차림 또한 깨끗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러나 <엘르>나<마리 끌레르> 같은 잡지사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력이 있는 외국인 여
성 기자들은 한국 여성의 겉모습에 속지 않는다. 기껏해야 향수와 화장품을 만든 회사
로만 알려져 있다고 자주 불만을 터뜨리곤 하던 프랑스  회사들도 한국에서 자사의 상
품시장이 매우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샤넬이나  디오르, 랑콤 등은 한

에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 회사들이다. 화장품 분야에서는 '프랑스적 감각'이 너무나 

요하다. 그래서 한국의 한 화장품회사는 '메이드 인 프랑스'라는 상표를 이용하기  위
해 
프랑스 본토에서 화장품을 제조하기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행은 의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여성은 가발을 사서 쓰고 다니거나 염색
을 
하기도 하며, 귀를 뚫기도 한다. 또한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자기만의 이미지가 완벽
한 
상태로 표현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성형외과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명동의 어느  병
원 
의사의 말이다.
  "16세에서 25세 정도 되는 여자 손님들이  매일 열 명 이상씩 찾아옵니다.  그녀들
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요? 쌍꺼풀을 만드는 것과 코를 높이는 것, 그리고 광대

를 깎는 겁니다."
  그 의사의 말을 들어보면, 그 여성들은  더 이상 한국적인 얼굴을 원하는 것이  아

라, 오히려 외국 마네킹 같은 비개성적이고 표준적인  얼굴을 닮고 싶어한다는 것이
다.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한 소녀는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취직을 하려면 외모가 매우 중요해요. 얼굴이 예쁘지 않으면 취직이 안 될 수도  

어요."

    유행이 유행하는 젊은이들의 세계
  서울 거리의 젊은이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금지된 것을 위반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이 가장 많이 위반하는 것은 머리카락을 금빛, 오렌지색으로 염색하거나,  

고리를 하는 것이다. 도쿄의 요요기 공원에서 흔히 보는 재즈광들이나 펑크족들과는 

직도 거리가 멀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비록 옷을 그렇게 입으면서 스스로를  혁신적
인 
사람이라고는 자처한다 해도, 아직 얌전한 편이다.
  젊은이들이 유행에 쏟는 열정은 너무나  대단해서,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그것
을 
아예 직업으로 삼으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파리의 의상학원들은 한국 학생들로 넘

난다. 그래서 그 중 하나인 에스모드는 한국 학생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울에 지점
을 
냈을 정도이다.
  옷이 유행하지 않을 때는 화장, 헤어스타일 등 새롭고 창조적인 모든 것이 유행한
다. 
상업적인 유행과는 거리가 멀지만, 한국의 디자이너들도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가

고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화려한 색채를 하고  있거나 파스텔톤의, 품이 넉넉하며 

단으로 지은 전통 의복인 한복에서 영감을 얻어 현대적인 옷을 디자인해내고 있다. 그
런 옷은 너무 아름답다
  이런 디자이너 가운데 몇 명이 파리에 의상실을 열었다. 세계적인 의상실들이 즐비
한 
곳에 한국의 의상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은, 10년 전이었다면 고개를 갸웃
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옷은 그리 잘 팔리
지 않는다.

    TV를 보면 한국이 보인다
  새로운 TV 프로그램들은 매우 화려하고 자유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과거와
는 다른 말투를 사용하는 등, 대중적으로 널리 유행하고 있는 것들의 판박이이다. 자

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일정한 틀은 있지만, 독창적인 것은 거의 없다.
  한국의 공중파 방송은 두  개의 공영 방송  채널(KBS1,2)과 두 개의 민영방송  채널
(MB, SBS), 그리고 하나의 교육방송 채널(EBS) 등  다섯 개의 채널로 이루어져 있다. 
특수한 사명을 띠고 있는 EBS를 제외하면, 다른 네 개의 채널은 그 구성 내용들이 서
로 매우 흡사하다. 드라마, 무수하게 사라지고 생겨나는 호화쇼, 스포츠, 뉴스, 가정
주부
를 위한 프로그램(여기에는 50세 이상 된 유명한 주부들도 출연한다)이 대부분을 차지
한다. 게다가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잊지 않고 광고를 내보낸다. 정말로 신물이 날 정

이다!
  각 채널은 시간당 24개 이상의 광고를 내보내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다. 광고 한 

을 내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40초 정도라고 한다면, 아기 기저귀 광고, 세제 광고, 

탁기 광고 등등을 보내는데 거의 20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셈이다. 프로그램 간의 연결 
과정도 늘 똑같다. 광고, 예고, 광고, 프로그램 자막, 광고, 그러고 나서야 보고 싶은 

로그램이 시작된다.
  몇 년 전부터는 호화쇼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네 시간에 걸친 노래와 춤, 

수 효과와 연막, 다양한 색상의 불빛이 인상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주로 

소년들로 구성된 방청객들은 열광한다. 좋아하는 스타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부터  그

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댄다. 스타는 노래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서서히 팔을 

어올리고 머리를 움직이면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따라
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어도 광적인 팬들을  흥분시키기에는 충분하다.
  방송에서는 변화하고 있고 역동적이며 활기로 가득 찬 한국이 그런 방법으로 드러나
는 것이다. 지금은 예전처럼 단조로운 복장에 엄숙한 표정을 한 사회자가 진행하는 딱
딱한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의 프로그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
니다.
  KBS는 매주 한 번씩 주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전국  노래 자랑>을 방
송한다. 각양각색의 동네 사람들이 차례차례  카메라 앞에 나와 재주껏 노래를  뽑아

다. 이것은 깜짝 놀랄 만한 일인 동시에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로그램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마을에 잔치가 있을 때마다 모인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쾌활한 성격을 지닌 나이 든 사회자 덕분이다. 과거 흑백 TV 시절
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회자가, 이 프로그램을 빛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몇 년 전가지만 해도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MBC는 1개 연대 규모의 군인들을 
방송에 출연시켰다. 깨끗한 군복을 입고 '차려' 자세로 무대에 서 있는 군인들은 무대
로 
나오는 그들의 어머니(이 경우 주로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고 나온다)에게 인사도 하
기 전에 '어머니'라는 말을 먼저 힘차게 외친다. 그런 다음 무대에 나온 어머니는  눈

을 흘리면서(이 장면이 꼭 필요하다) 건강해진 아들의 커다란  품에 안긴다. 그리고 

가에 눈물이 맺힌 어머니가 방송사 측에서 준비한 선물을  받아들 때 사회자의 눈시울
도 감동에 젖는다. 집을 떠나 건강하게  조국을 지키고 있는 이 훌륭한 군인을  낳아
준 
어머니들에게 모두 감사를 보낸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약간 구시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이 든 시청자들의 

수성을 충분히 배려하는 프로그램들이다.
  한국의 새로운 호화쇼 프로그램들은 프로그램 자체가 역동적임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 특히 일본의 비슷한 프로그램들에 비해 새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일본의 

송사들은 정기적으로 한국의 TV 프로그램들을  표절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두 나라의 
방송은 너무나 닮은꼴이다. 사회자는 서로 다른 사람인데, 그들의 스타일, 몸짓, 언어

은 완전히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프로그램들도 전혀 새로워지지 
않는다고 반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조건적인 복제이다. 구성도, 장면도, 무대  디자

조차도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청된 가수들조차 서로 너무  닮은꼴이라
는 
사실에도 이런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모두가 동시에 동일한 스타일을 채택한다. 6개
월 
동안 모든 그룹이 랩 음악을 하고, 다음 6개월 동안은  모든 그룹이 레게 음악을 한
다. 
무대 연기도 완전히 똑같다. 1996년에는 자욱한 연막 속에서 어이없게도 마이클 잭슨
을 
흉내내는 한 무리의 댄서들에게 둘러싸인 2인조 그룹이 유행하였다.
  또한 음악적인 약점을 가리기 위해 모두가 시각적인 효과에만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
다. 쇼 비즈니스 산업이 스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시청자들은 항상 똑같은 인물만
을 
반복해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인기 있는 몇몇 가수들이 요일마다 방송사를 
바꿔가며 출연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물론 진짜로 창조적인 음악을 하는 그룹들이 존재하는데, 그들
은 
대중 호화쇼에는 거의 출연하지 못한다. 프로그램들이  아무리 자유로워지기를 원해
도, 
구세대의 검열관들이 프로그램 내용을 면밀하게  감시하기 때문이다. 출연자들은 너무 
혁신적인 이미지나 사상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1993년 이후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그룹 중 하나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세 
멤버가 라스타파리안(역주 :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새로운 흑인의 메

아로 섬기며, 흑인들의 아프리카 복귀를 제창하고 레게 음악으로 미사를 드리는 자마

카 흑인) 헤어스타일을 휘날리며 KBS의 한 방송에 나온 후 바로 방송 출연을 금지 당
했다. 마찬가지로 1997년 7월, 귀고리를 한 남자 가수들은 출연시키지 않기로 결정하

도 하였다.
  이 두 경우를 놓고 볼 때, 앞의 경우는 한국적인 기준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판
단한 듯하고, 두 번째 경우는 젊은 세대들의 정신에 위험한 영양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런 조건에서 독창적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가족을 움직이는 드라마
  호화쇼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드라마들도 매우 인기가 높다.  드라마에서의 스타
는 
바로 가족이다. 아버지가 주위의 질투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진하며, 열심히 공부한 

들이 일류대학에 합격하는 행복한 가족의  이야기,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고 딸이  
본 
적도 없는 남자와 달아나는 비극적인  이야기 등 사람들은 가족을 분석하고  탐구하
며, 
또한 모든 각도에서 해부한다. 이때 반드시 해피엔딩만이 모범적인 결말로 제시되는 

은 아니다. SBS의 김병욱 프로듀서의 설명이다.
  "시청자들은 희극보다는 비극을 더 선호합니다."
  모든 드라마에서 어머니는 용기 있고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다. 그런 어머니가  집
에 
혼자 남아서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은 남편이 너무나 무심하고, 또 자식들의 장래를 

척이나 걱정하고 있는데도 아이들은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런 
어머니는 결국 아이들과 남편의 행복을 위해 매일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 그리고 

무리 고통스러워도 결코 내색을 하지 않는다. 또 온  가족이 집에 모이면, 어머니는 

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다.
  드라마에서 접근하는 사회적인 주제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사람들은 상부 권력기관
에서 TV라는 매체를 통하여 어떤 메시지들을 전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마저 갖
게 한다. 문제가 되는 모든 것,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는 모든 것, 언젠가는 고쳐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가족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접근

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내용이다. 드라마의 주제는 부부간의 폭력, 알코올 중독, 이
혼,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딸의 결혼, 동성애, 외국인과의 결혼 등등 무수히 많다.
  드라마는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실적인 반응보다  매번 훨씬 
발전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정신적인 이해와 포용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요하다는 듯이, 또 시청자들이  자신들이 갖지 못하는  너그러움을 TV를 통해서 보고 
싶어한다는 듯이 말이다. 시청자들이 자신의 편협함을 얼른  인정하지 못한다면, 또 

런 것은 TV 연속극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핑계를 댄다면, 그렇다면 한국 사회
는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엄격한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김병욱 프로듀서는 이런 드라마들 뒤에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
을 전면 부인했다.
  "어떤 상부 권력기관에서도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연속극은 한두 사

이 쓰는 겁니다. 그들이 진보주의자처럼 보인다면, 그건 작가들이 많은 여행을 했고 

술가들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메

지가 있든 없든, 관용이 있든 없든, 방송국이 중요시하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시청률

니다."

    새로울 것 없는 News
  뉴스는 민감한 주제이다. 한국인은 TV 뉴스, 특히 공영방송에서 내보내는 뉴스는 별
로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군사정권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했던 TV 뉴스에 대한 
의심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컨대, 정권이 자유를 준다고 해도 

쁜 행위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KBS 뉴스의 경우 국가원수에 대해서는 주로 긍정적인 면만 보도할 뿐, 그와 반대되
는 면들은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가령, 난처한  사건이 발생해서 사회가 시끄러워졌
을 
때, 그 사건을 감추기 위해 여러  사실 중 한 면만을 부각시킨다.  1996년 여름 대규
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을 때, TV는 시위에 참가했던 모든 학생을 북한 정권의 과격한 대
리인으로 매도했고, 1996년 말에서 1997년 초에 걸쳐서 사회운동이 벌어졌을 때는 노

가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노조와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보도했던 것들이 그 유명한 실례이다. 진보적인 언론인 지영순씨의 말을 들어보자.
  "처음에 TV들은 운동에 대한 보도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심각해지
자 시위자들이 세계의 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시위자들의 폭력성과 비
타협성을 비난하는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결국 정부가 양보할 기미를 보이고 국민 여

이 운동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보도가 훨씬 객관적이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라면 아마도 외국으로 단파를 송출하는 공영 라디오 방송으로서 '

국의 소리'로 유명한  KBS 라디오 국제방송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RKI(역주 : Radio Korea International의 머리 글자를 딴 것으로, 일반적으로 '국제방
송'
이라고 한다)는 1996년의 학생 시위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10년래 가장 중요했던 

생운동이 외국인 청취자들에게 한국의 이모저모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공영 라디오
방송의 전파를 타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영방송과 공영방송을 포함한 모든 방송사가 매춘,  학원폭력, 기업 내부의 

정부패 등 매우 흥미 있는 주제를 다루는 뉴스 잡지를 가장 최근에야 비로소 창간했다
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몰래카메라를 자주 사용하는 기자들은  취재해보
면 
뭔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걸고 어느 정도 스스로를 정의의 수호자라고 생각한다. 그러
나 이런 것은 때로는 엿보기와 선정주의로 탈선하는 경우가 많다. 지영순씨는 이런 점
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기자들의 직업 윤리에  관한 문제들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습니
다. 
그러나 기자들의 자유는 무척 새로운 문제입니다."
  오랫동안 검열을 받아왔기 때문에, 기자들은 이제는 자유롭게 자기 표현을 하고 싶

한다. 반면에, 과도한 표현의 위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젊은이들의 과

는 빠르게 교정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확실한 것은, 뉴스가 이

과는 달리 말투도 달라졌고, 진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는 
사실이다.
  한국의 시청각적인 상황은 1995년 3월1일 케이블 TV의 개막과  함께 달라지기 시작
하였다.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은 매달 4만 원 정도만  내면 스포츠, 음악, 어린이 방
송, 
영화, 뉴스 등등 전문화된 많은 채널을 볼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과감한 정신을 따
라 
순서가 뒤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즉,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수적으로 너무 부족했고, 

용 가능한 프로그램들이 한정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은  케이블방송 광고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케이블방송사는 영화나 방송  프로그램들을 외국에
서 
사오게 된다. CNN을 중계 방송하는 24시간 뉴스 채널인 연합통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신생시장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루퍼트머독'이나 '타임워너' 같은 외국의 

기업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다니, 너무한 일이 아닌가!  한국은 케이블망
을 
사용하는 아시아의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인도나 일
본, 
싱가포르와는 달리 'BBC 월드서비스'나 '스타플러스' '카툰네트워크'와  같은 방송을 

는 일이 불가능하다. 국제적으로 개방하지 않는다는 비난의 소리에도 공무원들은  꿈

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시장이 개방되기 전에 국내에 미디어산업을 건설해서 우
선 
힘을 기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했다면, 왜 TV에서
는 성공하지 못하겠는가?
  확실히 외국 대기업들의 방송은 공식적으로는 문화의 차이가 심하다는 이유로,  그

고 퇴폐적인 외국 프로그램들로부터  한국의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어 
있다. 결국 얼마간의 초보적인 단계를 거친 후  케이블방송사들은 자리를 잡았다. 그

고 커뮤니케이션에 관련된 일은 한창 유행하는 직업으로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커다
란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애니메이션, 멀티미디어에 관련된  새

운 학원들이 매일 문을 연다. 독립된 프로듀서들은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  만
든 
다큐멘터리들을 방송사에 팔고 있다. 이쯤 되면, 한국은  새로운 현대성을 표방하고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룡열차에서 스키장까지
  여가활동 역시 매우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스포츠클럽 이외의 여가활동이라고는 친

들끼리 등산을 간다거나 가족 단위로  소풍을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런 
기분전환용 여가활동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디스코테크나 놀이공원,  스키 등의 다
른 
여가활동들과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서울에는 디즈니랜드와 비슷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두 개의 대형 놀이공원이  있
다. 
전기자동차나 환상열차, 또는 3차원 영화관을  구비하고 있는 이런 대형  놀이공원에
는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청룡열차도 있다. 음식점에서는 한국이나 중국 혹은 멕시코 음식
이 제공된다. 또 서커스나 마네킹 행렬 등의 볼거리도 정기적으로  있다. 모든 것이 

끗하고 밝고 즐겁게 잘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기계장치들도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다.
  시설이 이렇다 보니 입장료는 비싸다. 모든 놀이시설을 다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는 자유이용권은 거의 4만 원 정도나 한다. 온 가족이 함께 와서 기념품을 몇 개  사
고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한나절을 보내면 20만 원 이상의 경비가 들것이다. 그렇

만 이런 놀이공원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주말이면, 어떤 놀이시설들은 
그 
앞에서 한 시간 동안 줄을 서야 탈 수 있을 정도이다.
  스키도 어느 정도는 이와 비슷하다. 최초의 스키장인 용평스키장이 개장한 것은 197
5
년이었으나 스키를 타는 일은 오랫동안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만 한정되었었다.  그

나 1992년 이후 스키장 수가 매년 23%씩 증가했기 때문에, 이제 한국에서 스키를 타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한국은 경사가 급한 산과 추운 기후 덕택에 겨울 스포츠를 하기에 적합한 나라이다. 
한국의 스키장들 중 일류에 해당하는 곳이 서울에서 자동차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
는데, 그곳에는 경사가 완만한 두세 개의 활강로에 인공  눈이 덮여 있고, 또 리프트
를 
받치고 있는 철탑에 걸린 스피커에서는 음악도 흘러나온다. 서울의  고도가 900m를 넘
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서울이 인상적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필요하다면 사막에도 스키장을 세울 거야."
  같이 스키를 타던 한 친구가 한 말이다.
 생활수준이 높아진 덕택에 망설임 없이 하루 종일 스키를 탈수도 있다. 간혹 스키장

서 모든 도구를 빌린 후, 최소한의  훈련도 받지 않은 채 활강로에 덤벼드는  사람들
도 
있다.
  스키장에 가면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선글라스를 낀 
채 최신 유행하는 눈부신 옷차림을 한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활강로 맨 아래에서 스키
를 신은 채 추위로 아랑곳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밤의 도시 서울
  서울의 밤은 광란의 밤으로 악명이 높다. 서울에는  카바레도 없고 카지노도 없으
며, 
특히 개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흥미롭다고 할 말한 곳이 없다. 밤이 되면 한국인들은 
언제나 똑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어떤 한 곳에서 소주나  맥주로 목을 축인 다음, 음

점의 낮은 테이블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저녁식사를 한다. 많이 먹고 많은 이야기를 나

며, 술도 많이 마신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술이 덜 오른 사람들은 소주나 맥주 등 주

를 제공하는 노래방에 가서야 하루의 술자리를 끝내곤 한다.
  노래방은 일본의 가라오케를 한국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물론 일본의 가라오케와  

교해보면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노래를 부르긴 하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부른 것이 아
니라, 일행끼리만 작은 방에  들어가서 노래를 부른다. 한국인들이  일본인들보다 훨
씬 
개방적이라고 하는데, 노래만큼은 대중 앞에서 부르지 않는다.
  서울에는 술집들이 한데 모여 밤새도록 활기를 띠는 거리가 몇 군데 있다. 그 중 하
나는 미군 캠프 근처에 있는 이태원이고,  또 하나는 서울 서부의 대학가인 홍대  앞

다.
  많은 술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에는 라틴아메리카풍의  술집도 있고, 재즈 음

만을 틀어주는 술집도 있다. 그 술집들의 이름도 마콩도, 파타야, 데스티나시옹 문 등

다.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인 M-TV가 방송되는  대형 스크린에 눈을 고정시킨 채 춤
을 추면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또 술집 바깥으로 나가면 멋진 보석이나 해

판 카세트를 살 수도 있다.
  새로운 것은, 점점 더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에는 외국인에게만 인기가 있던 이
런 장소를 자주 찾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인과 외국인의 융화는 쉽사리 이루어

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섞이지 않은 채 옆에 앉아만 있을 뿐이다.
  1993년 정부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야간 통행금지법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끝
내 
시행되진 않았지만 부모들은 적극적으로 찬성하였고, 특히 딸들에게는 더욱 철저한  

재가 가해진다. 대개 아버지들은 밤 11시까지는 집에  들어오도록 딸에게 강요한다. 

렇게 갑자기 밤이 끝나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처음에는  놀랄 것이고, 그 다음 

간에는 짜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억눌려서 살아온 대부분의 딸들은 군말 없이 복종한
다.
  한국에 초행인 사람은 별것 아니지만,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을 겪을 수도 있다. 

를 들면, 나이트클럽이나 불빛 번쩍이는 술집 앞에서 어떤 사람이 정중하지만 단호하
게 
입장을 거부당하는 일이 있다는 얘기이다. 그가 남루한 옷을 입었고, 수염도 깎지 않

으며, 망나니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그랬을까?
  거기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간단히 말해서 나이가 너
무 
많이 들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는 18세에서 21세까지, 21세에서 25세까지,  
25
세에서 30세까지, 또 그 이상으로 구분하여 전문적으로 입장시키는 술집들이 있다.
  이때 나이만으로는 충분히 권리가 있는데 외모 때문에  입장을 거부당한다면 정신적
인 충격이 클 것이다. 과일 주스나 커피만을 마실 수 있는 커피숍에서조차 중년의 사

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곤 한다.
  35세 가정주부의 말이다.
  "남편하고 같이 그런 카페 한군데에 갔었어요. 너무 많이 변해서 놀랍더군요. 옛날

는 어땠을까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그냥 우울해졌어요. 갑자기  내가 너무 늙었다는 

각이 들더라고요"
  새로 생긴 이런 커피숍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흥미로운  요소는 공간 사용의 개념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술집이나 '다방'은 주로 지하에 있었고 칸막이로 은밀하
게 
공간이 나누어진 어두운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커피숍들은 대로변에 있으며  매
우 
깨끗하고, 대형 유리로 안이 다 비치게 되어 있으며,  때로는 테라스를 갖추고 있는 

우도 있다. 그래서 이런 곳에 앉아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들여다본다고 해
도, 
이제는 더 이상 창피한 일이 아니다.

    여가시간 지키기
  놀이공원, 스키장, 나이트클럽 등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된 것 이외에 가장 

요한 것은, 여가라는 개념 자체가 한국인들에게도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하는 

만이 중요했을 뿐, 기분 전환이라는 말만 꺼내도  눈총을 받았고, 임금 노동자들에게
는 
휴식이 TV를 보거나 잠을 자는 것이었던 시대가 그리 오래 전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런 시대가 이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충분히 노력했으며, 이제
는 
살을 즐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화여대 경제학과 차은양 교수는 '현재는 대부분의 가정이 소득의 10% 이상을 외식
하는 데 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양이 풍부한 사람들은 한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에 거의 매일 들른다. 그 
결과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려운 책들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학

에 위치한 극단들은 예매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공연할 정도이고, 한국 록그룹들의 

반은 바흐의 나단조 미사곡만큼이나 잘 팔린다. 박물관 방문객 수도 1945년 이후 1,00
0
배나 증가했고, 외국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528배나  증가했다. 또 1992년 이
후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한국인의 숫자는 매년 30%씩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여
행 수지는 엄청난 적자이다.
  휴가 기간 동안 국내 여행을 주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유급휴가는 1년에 1

일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공휴일 등을 더하면 14일의 휴가 기간이 추가되는 셈이다. 

여름 주말에는 부산의 해운대 해수욕장에 10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 때도 있다. 
또 한국인은 '징검다리 휴일'을 몹시 좋아한다. 그래서 금요일이 공휴일이면 서울은  

의 4일 동안 텅비다시피 한다. 불과 5, 6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차

양 교수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한국인들이 강한 구매 욕구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 외 수당을 받고  더 

할 것인지 아니면 주말에 쉴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한국인들은 후자를  선택
할 
겁니다."
  1994년 한 중앙 일간지에서 발행한 연감에 실린  것으로, 영국식 주일 근무제(역주 

토요일 반휴 혹은 전휴, 일요일 전휴. 즉, 5일 또는 5일 반 근무)로 근무하고 있는 정

구독자의 말이다.
  "토요일엔 오전이면 일을 마친다. 그러나 통근버스 속에서 보낸 시간과 피로, 그리
고 
주말에 대한 기대 때문에 업무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토요일에 회사에 나오지 않
으면 개인적으로는 더 많은 발전을 기할  수 있고, 또 여가산업의 발달을 가져올  수
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한국인은 더 이상 일만 하는 개미가  아

다.
 
급격한 변화와 사회문제들
 
    교육의 위기
  한국인이 교육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한다. 학생들은 칭찬 받고, 선생님들은 크게 존경받으며, 졸

장은 대단한 영예이다. 한국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당연
히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 한국에 들른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입을 통해서 

반적으로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이런 가장
을 토대로 했을 때, 교육제도의 현실과 교육수준은 어떠한가? 이것은 대단히 복잡하면
서도 논란이 많은 질문이다.

  한국의 모든 교육제도는 한국 학생들이 창조적이고 박식한  두뇌를 갖도록 만들어졌
을 것이다. 한국 학생들이 아는 게 많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과연 창조적인가 

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의견이 분분하다. 교육에 최상의 가치가 부여되고는 있지만, 

실 학교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비판 중에서 으뜸가는 것은, 학급
당 
평균 학생수가 수용 가능한 숫자를 훨씬 초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시골보
다는 대도시에서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서울이나 부산에서는 학급당 60명까지  

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교육개발연구원에 따르면, 학급당 학생수로 따질 때 한국은 세계 168개국 중 140위
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학습이 부진한 아이를 개별적으로 지도하기가  어

다. 다른 만은 아이를 제쳐놓고 선생님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학습이 부진한 아이
는 바보 아니라도 쉽게 열등생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또 의욕이 없는 아이는 자극
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월반제도가 없는 것처럼 낙제제도도 없는 한국에서, 이와 같은 

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평

화 교육으로 인하여 학교는 우등생을 위한 곳으로, 또는 가장 극성스런 부모를 가진 

이들을 위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한번에 60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맨 앞줄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학교성적이 나

다는 이유로 항상 부모에게 꾸중을 듣곤 했던 한 아이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맨 뒷줄에 앉아 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앞줄에 앉을 수 있을까? 한국은 성씨의 수가  몇 안되기 때문에 이름순
으로 자리를 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따라서 제비뽑기를 하거나 작은아이들은 앞에 앉
고 
큰아이들은 뒤에 앉는, 키 순서로 자리를 정하는 방법이  있는데, 두 번째 방법이 공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흔히 통용되는 것은 돈 봉투를 주는  방법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
인 
최혜경씨는 마지못해 이런 사실을 털어놓았다.
  "우리 아이들을 맨 앞줄에 앉히려고 담임선생님한테 정기적으로 봉투를 보내요. 하

만 나만 그러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경쟁적으로 액수가 높

져요. 그걸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만큼
은 
최대한으로 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 걸 어떡합니까."
  봉투는 흔히 아이들의 손에 들려 보내진다. 이것을 두고,  이런 제도가 아주 어린 

이 때부터 부패라든가 돈의 가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이점'도 있다고 말하는 낙관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배울수록 바보가 되는 교육
  인원초과 외에도 학습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모든 학습이 암
기와 아는 것을 나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토론도 없고, 발표도  없으
며, 
그룹스터디도 없다. 그러니 이 시대의 일방적인 교육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염려

럽다. 수업에 참여해보면 이러한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선생님은 이렇게 질문한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왕으로 있었고, 한글의  자모를 만들어 낸 사람은  누구일

요?"
  그러면 60명이나 되는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세종대왕이요!"
  교단에 선 선생님은 수업시간 동안에는  흡사 왕이나 다름없다. 그런 선생님이  수
업 
내용을 불러주면, 학생은 받아적는다. 요점이 명료하지 않을  때도 질문은 나오지 않

다. 정확함을 요구하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질문하는 학생은,  수업에 관심이 있고 호

심이 많으며 머리가 깨인 학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훼방꾼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러다 보니 책을 뒤지거나 부모에게 물어서 의문을 해결하는 학생도 있다.
  선생님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정답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더 생각할 필요 없이 무조
건 그것을 외워야 한다. 의문을 제기하거나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선생님이 

다지 명석하지 못하다는 점을 암시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
능하다.
  학생들이 숙제를 해오지 않기 때문에 필기시험 또한 기계적인 도제식 수업의 일부분
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필기 시험이라는  것도 시험지에 뚫어놓은 빈칸을 채는  것이

나, 질문 아래 나열된 여러 개의 보기 중에서 답을 고르는 형식일 뿐이다. 
  그래서 학기말이 되면 한국의 어린 학생들은 많은 것을 매우 빠른 시간 안에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글짓기도, 발표도, 이야기를 만들어서 말하는 것도 해보지 못한 

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업도 확실히 창조성과 개인적인 성찰, 그리고 토론 능력을 

러주지 못한다.
  국제적인 경제 측면에서 봤을 때, 한국인은 과학 분야에서 우수하지만 인문학 분야

서는 단연코 뒤쳐진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국  언론이 보수적인 데 대해, 유교사상으
로 
우두머리에 대한 충성만을 가르칠 뿐 학교에서 비판정신을 길러주지 않기 때문에, 한

에서는 기자가 되는 일이 힘들다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학적인 연구가 늦게 시작된 것도 교육제도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발

되지 않는데 신제품을 고안해내기가 쉬울 리가 없다. 외국인은 평가절하하지만, 한국

이 많이 가지고 있는 모방적인 취향 자체도 학교 수업시간에 습득한 것이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방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수업의 규칙이다 보니 그럴 수밖
에 없을 것이다. 다른 영역에 대해서 모험하듯이 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지식
이 어느 정도 확고해졌을 때나 가능하다.
  서울의 한 중학교 음악 교사인 이상희씨는 이렇게 토로한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공자의 생산 시스템과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양적인  면은 확

이 되었고, 이제 질적인 우수성에 도달하는 것이 남은 과제입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스스로 생각해내는 능력이 없습니다. 학

는 개인적인 성숙과 개방된 사고를 길러주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암기와 반복학습은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인 외국어  학습 분야에서는 특히 
부적절하다. 한국은 아마도 교사들이,  더 나아가 대학의 교수들조차  자신이 가르치
는 
언어를 말하지 않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은 문법적인 측면에서는 탁월하다. 이 점에서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인데, 학생들은 영

로 읽고 쓸 줄 알며, 객관적인 문법 문제도 잘 풀어낸다. 그러나 초보적인 대화를 나

거나 간단한 대화를 알아듣는 것은 잘 못한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이해와 추리에 의
해서가 아니라 암기에 의해서 지식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부산외국어대학교 음운론 교수 이용성 씨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외국어교육에 관한 한, 이런 식의 교육제도는 전적으로 재고되어야 합니다."
  또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민창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학생들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육제도가 한  게 뭐가 있습니
까? 어느 대학에 몇  명의 학생이 들어갔느냐에  따라 고등학교의 명성이 좌우됩니다. 
따라서 입시에 대한 교육 이외에는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
다. 
당연히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대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들도 똑같이 책임이 

습니다. 나이 든 선생님들은 자기들의 방법을 바꾸는 것 자체를 거부합니다. 생각이 

는지 없는지, 젊은 선생님들도 거기에 끽소리 못 하고  삽니다. 왠지 아십니까? 자신

의 승진이 그 나이든 선생님들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가 열린 이  시

에, 교재도 19세기 것이고 교수방법도 19세기 것입니다."
  약간은 신랄한 비판이다. 이런 학습방법들이 때로는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실이다. 나의 첫 조수는 프랑스 문학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여기자였다. 그녀는 로

그리예의 책을 모두 읽었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 20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썼다. 

러나 그녀는 매일 아침 'Comment a va?(잘 지내셨나요?)'라고만 묻곤 했다. 그리고 가
끔은 'Quelle heure est-il?(지금 몇 시인가요?)'라고 물은 적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녀
가 그런 상황에 길들여졌다는 점이다. 다행히도 정부는 1994년 한국인 영어 교수를 양
성하기 위해 몇 명의 미국인 교수를 채용할 예정이라고 공고했다.
  시험에 대해서도 역시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대학에 들어갈 때 경쟁할 필요
도 없는 학생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여러 날에 걸쳐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른다는 것이
다. 켄도클럽에서는 겨우 12살 된 아이들을 며칠씩 보지 못할  대가 있었다. 그럴 때
면 
그 아이들이 아파서 못 나오겠거니 하고 아이들의 건강을 염려하곤 했다. 그러나 아이
들의 부모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픈 게 아니라 열흘 후에 시험이 있어서 지금 공부하는 중이에요."
  많은 교육학자는 이런 교육제도가 극단적인 경쟁과 능력제일주의의 인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다. 물론 과도한 일반화는 경계해야 한다. 한국의 모
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이빨을 드러낸 늑대'가 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쟁이
란 
개념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을 필요가 없다.

  도제식 교육방법뿐만 아니라 커리큘럼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다. 고등학교는 물론  

학교에서까지도 국사 과목에서 한국이란 나라를 언제나 유리한  관점에서 설명하는 커
리큘럼에 많은 문제가 있다. 고등학생 김락현 군은 실제 식민지 시절에 많은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협력했다고 얘기해주자 깜짝 놀라, 모든 사람이 항거했다고 배웠다며  항

했다.
  확실히 유럽의 학생들이 한국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한국 학생들이 유럽 
역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너
무 
피상적이다. 어느 학교의 사친회 회장인 김민정씨는 이런 말로 유감을 표현했다.
  "학생들 모두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려 했고,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

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왜 혁명이 일어났는지,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활했는지는 잘 몰라요. 물론 선생님들도 대부분의 경우는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모르
고 
있지요."
  또 김락현 군이 지리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많은 나라에 대해서 배웠지만,  조금씩밖에는 배우지 않았어요.  프랑스는 바게트
와 
치즈, 유행과 향수의 나라이고,  콜롬비아는 커피로 유명한  나랑, 인도는 가난한  나

죠."
  그의 말은 피상적인 지식을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한국인이 흔히 가지고 있
는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고등학생들은 더 많은 것을 알
고 싶어한다. 김락현 군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외국과 관련된 비디오를 보고  싶어요. 도시와 산업기술, 제  나이 또래 젊은이들
의 
생활에 대한 비디오도요.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은 다 구식이잖아요."
  아주 당연한 요구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려줄 능력이 누구에게 있겠는가? 수학이
나 생물학 같은 순수과학 분야에서는 커리큘럼이 탁월할지 몰라도, 인문학  분야에서
는 
퇴행적이며, 외국의 현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구시대의' 교사들이  자신보
다 
훨씬 개방적이고 훨씬 세계화되어 있는 젊은 세대의 욕구를 만족시켜주기는 어려울 테
니 말이다.

    입시전쟁의 승자만이 대학의 고지를 점령한다.
  과밀학급, 구태의연한 학습방법, 인문학의 커리큘럼 등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국의 교육제도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아이들에게 너무 과중한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
이다. 아이들의 학습 리듬은  계속 유지되고, 중학교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성공하고
자 
하는 아이들, 혹은 성공해야 한다고 부모에게서 강요받는 아이들은 자기계발에  관심
을 
기울일 틈이 전혀 없다. 논설위원 박무정씨의 말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공부하는 기계나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11살 된 김은성 양의 말을 들어보면, 박무정씨의 말을 얼른 이해

게 될 것이다.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아침 먹고, 7시가 되면 전화영어를  30
분 
동안 들어요. 그 다음에는  엄마가 45분 동안  복습을 시켜요. 그런 다음  조금 놀거
나 
TV를 보거나 8시 45분이 되면 학교로 출발해요. 9시에서 3시 30분까지 학교에서 공부
하고, 집에 돌아오면 점심 먹고 약 1시간 동안 친구들과  밖에서 놀아요. 숙제를 다 

고 나면 5시부터 7시까지 학원에 가요. 끝나면 집에 빨리 들어와야 해요. 왜냐하면 7
시 
30분 후에는 태권도를 배우니까요. 집에는 약 밤 9시쯤  돼서 돌아와요. 그러면 저녁
을 
조금 먹고 TV를 보거나 나가서 자전거를 타거나 해요. 밤 10시가  되면 잠을 자요. 이
것말고도 매주 두 시간씩 피아노 레슨을 받아요. 자유시간이 가장 많은 때는 토요일하
고 일요일 오후예요. 일요일 아침에는 교회에 가서 학습을 받고 예배를 드리니까요. 

지만 오후에는 친구들과 같이 놀 수 있어요. 수영장에 가거나 부모님과 함께 외출을 

기도 해요."
  시간표가 얼마나 꽉 짜여 있는지, 11살의 어린 나이에 얼마나 피곤할지, 충분히 짐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은성 양은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로, 그

도 웃으면서 했다. 혹 외국인들은 한국의 어린이들이 신경쇠약에 걸려 눈가에 거무스

한 멍이 잡히고, 얼굴빛은 납빛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는 반대로, 한국의 어린이들은 예쁘고 힘차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으며, 한눈에 보기

도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TV 영상을 많이 접했어도 감수성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아이들로, 세계 어느 나라의 
아이들과도 다를 바가 없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이런 활동에,  이런 촘촘한 시간표
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김은성 양은 매일 특별한 레슨을 받고 사설 교육시설에서 강의를 듣는다. 한국의 부
모들이 볼 때는 학교 공부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외부에서 더 공부를 
해야만 한다. 이런 사설 교육시설은 한국말로 '학원'이라고  한다. 거의 모든 아이는 

업 시간에 배운 것을 심화시키기 위해, 도는 커리큘럼을 앞서 나가기 위해 매일 두 시
간에서 네 시간 정도씩 학원에 간다. 이런 학원들은 1년  내내 문을 연다. 여름 휴가

에도 아이들은 매일 두세 시간씩 강의를 들으러 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두 달 동

이나 편안히 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유치원생들을 위한 학원에서 대학 
입시 학원까지, 한국에는 5만 개가 넘는 학원이 있다.  그리고 그 중 65%는 강사가 세 
명 정도 되는 소규모 학원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교육비로 월 평균  48만 원을 지출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는 
특수 과외비로 매달 300만 원을 쓰는 부유한 가정들도 있다. 어떤 통계를 보면, 서울

에서만 매달 이런 식의 특수  과외비로 지출되는 액수가 1,250억  원에 달한다고 한
다. 
한국이 과외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나라라는 점에서, 이런 액수는 훨씬 더 놀랍
다. 사설 학원들이 없다면 교육제도가 지금보다 훨씬  평등해졌을 거라며, 이런 학원
들 
때문에 교육제도가 차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민정씨의 
말도 이와 비슷하다.
  "경력이 확실하지 않은 선생님들만 채용하는 질 낮은 학원들도 있어요.  이런 학원

은 중류 수준의 가정만 된다면 낼 수 있을 정도로 수강료가 그리 비싸지 않아요. 하지
만, 고급 주택가에는 실력이 탁월한 선생님들이 있는 수준 높은 학원들이 간혹 있지
요. 
그 선생님들은, 예를 들면 수학 시간에 일본의 대학 입시에 났던 문제들을 모아놓은 

을 가지고 수업을 하는 선생님들이에요 수강료는 각각 달라요. 소득이 꽤 높은 집들만
이 그런 곳에 아이들을 보낼 수 있지요."
  이런 사설 교육시설이 있다는 것은 공교육제도가 실패했다는 증거이다. 과외를  받

도 않고, 학원을 다니지 않고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모든 사람이 입
을 모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겨우 초등학생에 불과한 김은성 양도 앞으로 예정된 교육 일정을 이미 알고 있다. 

학교에 가면 일정이 더 빠듯해질 것이고, 고등학교에 가면 미칠 지경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등학교 3년은 사실상 대학 입시를 위한 교육  과정으로만 짜여 있다. 그리
고 
시험은 매우 어렵다. 시험에 합격한 학생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고등학교요? 거긴 지옥이에요."
  대학 생활은 고등학교 생활에 비하면 바캉스를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
다. 고등학생들은 벼락치기를 해가며 시험공부를 계속 반복해야  한다. 이 말을 확인

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인 김민수군의 일과를 살펴보자.
  "일어나서 아침 5시부터 7시 30분까지 공부를  하고, 그런 다음 재빨리 아침을  먹
고 
학교로 뛰어가요 오후 3시 30분까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3
0
분 정도 농구를 하며 놀죠. 그 다음에는 집에 와서 세  시간 정도 복습을 하고, 저녁
을 
먹은 후 7시부터 10시까지 학원에서 다시 강의를 들어요. 그 다음엔 집에 와서 자냐고
요? 그러면 너무 행복하죠.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독서실에서 복습을 하지요. 그리
고 
5시가 되면 다시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죠. 그래도 행복한  것은 일요일이 있고, 약간
은 
쉴 수 있는 방학이 있다는 것이죠."
  3년 동안 이런 시간표대로 반복하는 생활이 신체적으로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그러
니 
교복과 헤어스타일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이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모
습은 흔히 눈에 띈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리듬을 견디지 못하고, 또 가족과  

부 선생님들이 주는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학생들이 자살하는  숫자가 꽤 많다는 사실
이다. 그러나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조심스럽고 드물게 난다. 또  모든 사람이 신문
에 
난 것보다 그 수치가 더 높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해도, 정확한 통계는 구하기 힘들
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좀더 많이 언급했다면, 아마도 교육제도의 오류를 좀더 일찍 인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김민수군은 때로는 의기소침해질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이런 과정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더 이상 이

할 수가 없어요. 공부해라, 또 공부해라, 더 많은 책을 뒤져봐라...! 때때로 너무 피
곤해
서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도 있어요. 나는 정말로 꼭두각시처럼 공부하고 
있는 셈이에요. 회의가 들어요. 이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는 수동적으
로 
배우고 있어요. 아무 생각도 없이, 뇌를 움직이게 만들지도 않고 말이에요. 많이 배우
면 
배울수록 점점 더 바보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이럴 때는 속으로 이렇게 말

곤 해요. '이건 견디고 넘어가야 할 악몽 같은 순간에 불과해.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
면 
내 삶은 편안해질 거야. 혈들도 이런 리듬을 견디고 성공했으니까.  또 내가 견디지 

하고 중간에 포기한다면 부모님이 얼마나 실망하실까' 라고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실제로 가족 전부의 일이다.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많은 노

을 한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하면 그 영예의 일부가 부모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다면 부모의 노력은 어떤 것인가?
  1994년 언론에 보도된 자료에 따르면, 시험이 1년 정도 남으면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에게 훨씬 넓고 좋은 자신들의 침실을 내준다고 한다. 또한 부모는 아이가 부리는 

든 변덕스러운 행동들을 묵묵히 받아준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이 요구하는 음식을 

두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 경우 부부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 너무나 커서 70%의 부부는 
극심한 편두통에, 64%의 부부는 위장병에 시달리며,  40%의 부부는 더 이상 성관계를 
갖기 힘들 지경에 이른다고 한다.
  드디어 시험을 치르는 날이 오면, 어머니들은 학교 교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도를 드린다. 또 시험이 몇 주일 남지 않았으면, 어머니들은 늘 하던 일인 것처럼 절

나 교회에 간다. 그뿐만이 아니라  점쟁이를 자주 찾아가서 점을  치기도 한다. 따라
서 
대학가의 작은 상점에서 파는 부적들은 그 값이 점점 올라간다.
  시험치는 날이면 나라 전체가 들썩인다. 노동자들은 교통체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
기 
위해, 그리고 한 명의 수험생도 시험장에 늦게 도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출근 시간
을 
한 시간 늦춘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면 매년 신문에 실리는 것과 똑같은 사진이 또다
시 
신문을 장식한다. 즉 시험장에 늦을까봐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시험장으로 향하는 수

생의 사진 말이다. 더 특별한 것은, 방송을 듣고 문제를 푸는 동안에는 어떤 소리도 

생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김포공항의 비행기 이착륙 시간이 연기된다는 사실이다.

    '개인'을 위한 교육이 곧 '나라'를 위한 교육이다.
  대학 입학시험은 연례행사이다. 그러나 마치 감옥생활과도 같은 3년의 고등학교 생

이 끝나면, 비로소 휴식이 찾아온다!  고등학교가 지옥이라면, 반대로 대학교는 천국
일 
터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직접 고백하는 말에 따르면, 그들은 공부는 거의 하지 않
고 
대학 생활의 많은 시간을 사회활동,  그룹 미팅, 다양한 동아리  활동 등으로 보낸다
고 
한다. 그들은 필요한 최소한의 강의, 그것도 따라가기 쉬운 강의만 선택해서 듣는다. 

러나 4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는 이것이 오히려 득보다 실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수학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학생들을 관리할 의무
가 있는 교수와 학생들이 묵시적으로 공모한 결과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
은 
거의가 자기 전공이 아니라 부전공에 속하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졸업하게 될 대학
의 명성이다. 2류 대학에서 발급한 국제무역사 자격증보다는 1류 대학에서 발급하는 

속학 석사학위를 소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실무는 

사에 들어가서 배우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한국에서는 입학시험의 성적에 따라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
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분야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전공으로 선택해서 공부하지 못하는 경
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선택으로 인하여,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을 구할 
때 
유리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실 현행 교육제도와 모순되는 것이
다. 교육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유교국가에 세계 100위권 안에 드는 대학이 
하나도 없다니!
  공무원, 선생님, 학부모, 이들 모두가 교육제도의 불완전함을 잘 인식하고 있다. 삼

그룹의 회장은 한국이 학교의 모든 조직을 재검토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경제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거라고 언급한 바 있다. 개혁의지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
다. 
단지 그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것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제도를 지나치게 비난할 필요는 없다. 한국은 모든 아이들에게 

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데 성공한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 할 만하다. 1945년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시대가 끝났을 때, 한국은 인구의 75%가 문맹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젊
은이의 99%가 중학교를 졸업했고, 84%가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교육개발연구원에 따
르면, 18세에서 21세까지의 젊은이들 중 25%가  대학에 다니고, 29%는 고등기술 직업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134개 대학에서 26만 6,00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고 있다.  
또 
1995년 한 해에만, 4,429명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의 그 어떤 나라도 한국만큼 대

한 결과를 뽐낼 수는 없을 것이다.
  1950년에서 1953년에 걸친 한국전쟁 이후에 들어선 모든 정부는 의무 교육정책을 채
택하였다. 경제개발은 확실히 자격증을 갖춘 노동력에 의지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
다. 
정부는 지금도 국민교육에 예산의 23%를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오랫동안 교육이 너
무 '공리적'이었다는 점이다. 교육은 국가발전에 필요한 간부급 사원과 노동자들을 공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한국뿐 아니라 세계가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는 오늘
날, 
이런 교육제도가 아직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커뮤니케이션과 세계화만을 떠들어대고 있는 이 시대에 맞게 아이들의 개인
적 
소질과 창의성, 비판정신과 세계적으로 개방된 사고를 북돋워줄 교육제도를 개발해내
는 
것이 급선무이다.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그렇지만  개혁을 채택하
고, 
개혁을 실행하며, 새로운 커리큘럼과  새로운 교육방법을 집행하기 위한 전문가를 양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한국 교육제도의 개혁은 아를르의  여

(역주 :비에의 오페라 '아를르의 여인'에 나오는,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여자 주

공)과 흡사하다. 개혁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결국은 이루어지는 것
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발전을 추구한다면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다. 
또 명확하게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문화와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도전도 필요하다.
 
    달동네 사람들
  서울에는 '달동네'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단순하다. 언
덕 
위 높은 곳의 마을이 있기 때문에 달이 뜰 때 제일 먼저 달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달은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며, 특히 만월일 때는 살인이 일어난다고 한다. 

러나 한국에서는 달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이 지역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울의 마지막 남은 빈민촌이다.  소비
의 
전당이자 현대성의 표상이며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서울에, 아직도  이
런 
빈민촌이 10여 군데나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남부에 있는 남골이란 빈민
촌도 그런 곳이다. 유리로 테를 두른 고층빌딩, 백화점, 패스트푸드점으로 가득 찬 서

의 중앙과 비교해보면, 가히 충격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사방으로 뻗은 좁은 골

길들, 무너진 벽돌담을 사이에 두고  촘촘히 붙어 있는 작은  집들, 여기저기에서 주
워 
모은 골이 파인 함석으로 덕지덕지 이어 붙인 지붕, 널빤지 몇 장으로 간신히 지탱하
고 
있는 플라스틱 물탱크, 들어가려면 몸을 깊숙이 구부려야 할 중도로 문이 낮은 집들도 
있다.
  남골은 박정희 장군이 거대한 도시화계획을 추진할 무렵이던  1970년대 중반에 탄생
했다. 대로를 건설하기 위해 정부는 건설 예정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서울의 외곽지대
로 
멀리 쫓아내야만 했다.
  예전에 남골은 공동묘지였다. 그래서 집을 짓기 위해 딸을 팔 때 간혹 뼛조각들을 

견하곤 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버려진 해골바지기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이 지역에 사는 2만  4,000명의 주민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다. 오랫동
안 
이곳에는 수도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석유등으로 불을 밝혔고, 

탄으로 난방을 했으며, 샘에서 물을 길어와야만 했다. 그 후 1986년이 되어서야 비로
소 
수도와 전기가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한국이 경제개발을 꽤 많이 진행한 상
태였다.
  "선거 때만 되면 조금씩 지역개발을 해줍니다."
  쓴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한 주민의 말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대부분의 집들이 화장실도 목욕탕도 갖추지 못하고 있
다. 사람들은 부엌의 개수대 앞에서  잽싸게 세수하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 시 당국
은 
얼마 전에야 공중 화장실과 공중 세면장을 몇 개 설치해주었다. 물론 그것들을 사용하
는 사람들의 말을 의심 없이 그대로 믿자면, 깨끗하고 쓸 만하다고 한다. 그러나 한 

민의 말을 들어보자.
  "하지만 겨울이 오고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면, 특히 밤에 매번  밖으로 

가야 하니까 괴롭죠."

    재생산되는 가난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서울에서의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시골을 떠났던 사
람들이다. 그러나 능력이 없었든지, 아니면 운이 없었든지, 그들은 안정된 직장을  찾
지 
못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된  탓에 주거비용은 상승 일로를  치달았고, 일자리
를 
얻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들은 점차 비참한 생활에 빠져들  수밖
에 
없었다.
  그렇지만 달동네 사람들은 실직자들이 아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아침 5시만 되
면 
건설회사 사람들이 일용잡부들을 구하기 위해 달동네에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  일거

를 구하지 못했다고 해도 내일이면 다시 일거리가 생길지도 모른다. 자기 입으로는 43
세라고 말하지만, 불그죽죽한 얼굴에 주름이 많아서 최소한 열 살은 더 먹어 보이는 

용성씨는 이렇게 말한다.
  "돈은 웬만큼 되죠. 일당 5만 원까지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원체 일이 힘

기 때문에 이틀 연속 일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더 힘
든 
일을 시키거든요. 지상 10m 높이에 기어올라가서 흔들리는 발판을 밟고 곡예사처럼 망
치질을 하는 일 같은 거 말입니다. 게다가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니까, 노예처럼 

는 것이나 다름이 없죠. 밤이 되면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듯  멍해져요. 자고 싶
단 
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30세가 넘은 다음부터 줄곧 남고에서 봉사하고 있는 프랑스인 수녀 콜레트 누아르는 
그 말에 이렇게 덧붙인다.
  "거기다 술도 많이 마셔요. 사실 공사장에서 노동하는 건 너무나 힘들거든요. 그래
서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해서 길에 뒹굴곤 하기 때문에 다음날 일하러 나기지 못하는 사

들도 있지요. 술을 마시고 취하는 건 확실히 힘든 삶을 잊는 한 방법이에요. 하지만 

과적으로는 저축 한 푼 못하고 영원히 이곳에 눌러살 수밖에 없게 되지요."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고, 승진할  희망도 없는 달동네 사람들에게서는 저축에  대
한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날그날 살아가는 데 급급할 뿐이다. 그들이 품었던 

든 꿈은 서글프게도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물론 예외적인 사람들도 있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기로 결심한 

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술 마시러 가자는 여러 사람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다. 

리고 얼마간의 돈이라도 열심히 저축한다. 또한 그들은 정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
들이기 때문에, 기중기 운전사 같은 더 나은 일을 하게 된다.  결국 어느 날 그들은 

동네에 작별을 고하고 떠나간다.
  그러나 공공 토목공사가 점점 더 전문성을 띠게 됨에  따라 단순 노동력보다는 자격
증을 갖춘 전문인력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숫자는 극히 적은 실정이
다. 
따라서 앞으로도 달동네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더구나 일

직 노동자인 그들은 아무런 지위도 없다.
  한국은 사회보장제도가 빈약한 실정이다. 대기업의 노동자들은 유급 휴가, 퇴직금, 

동산 구입자금 대출, 지속적인 연수교육 등등 수많은 사회적 혜택을 받지만, 1994년 

국민에게 확산된 의료보험을 제외하면 50인  이하의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특히 일용직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없다. 더구나 가족은 없지만 자질구레한 

이라도 계속하면서 정부나 시청에서  나오는 소액의 사회보조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처지에 놓인 노인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달동네 사람들은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시골에서 살던  습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인사하고, 문지방에 서서 이야기하며, 알게 모르게 서로의 집을 지

준다. 달동네에 어떤 자율적인 공동체 정신이 감돌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

이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돌보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들은 현재의 삶을 

선해보려고 삯바느질을 하기도 한다. 여자들은 또한 빗물을 받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

거나, 감옥같이 좁은 집을 더 넓히고 편리하게 만들  줄을 안다. 달동네는 결코 쓰레
기 
더미, 범죄, 마약밀매, 깡마른 아이들, 중무장한 경찰관들로  가득 찬 더러운 곳이 아

다. 거리는 깨끗하고, 아이들은 활기차며, 사람들의 옷차림은 말쑥하다.
  남골은 오히려 초현대적인 수도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가난한  시골이라고 할 수 있
을 정도이다. 그러나 콜레트 누아르 수녀는 남골이 치열한 경제 전쟁의 중심에서 밀려
난 소박하고 평화로운 마을의 이미지를 간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녀는 '여기서
의 
비참함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더불어 중병에 

린 많은 사람들, 가족에게 버림받기 전에 스스로 들어온 장애자, 자식에게 버림받은 

인 등이 달동네에 사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 시켜주었다.
  달동네에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 그렇게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까닭에 생활을 규모 있게 하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달동네에는 비양심적인 
장사치들이 들어와, 달동네 사람이 교육받지  못한 것을 악용하여 물건값을 더  비싸
게 
받는 경우도 많다. 이미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사람
들 
간에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것 때문에 더  많은 부부싸움이 일어난다. 콜레트 누

르 수녀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남편이 택시 운전사 같은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부부
들이 있어요. 그 이유는 부인이 살림을  규모 있게 하지 못해서 생활비를 다  써버리
기 
때문이지요. 이런 것 때문에 부부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초등

육이 부실한 데서 오는 문제입니다."
  남자들은 갚을 방법이 없는데도 자동차를 사느라고 때로는 빚을 지기도 한다. 자동

를 사는 것은 이웃에게 과시하려는  부질없는 허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은 
자동차 값과 유지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 몇 달 안 가 가진  재산을 다 날리고 차를 되
파는 사람들도 있다고 콜레트 누아르 수녀는 말했다.

    가난보다 두려운 소외
  이런 과시적인 소비행각은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가진 정신적 가난의 일면을,  
즉 
그들의 소외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성장을 너무 자랑스러워하고 돈이  제
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또 구매욕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한국 땅에서 배척 당했
다고 느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집단의 힘과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필수적인 
이 
나라에서 살아가기가 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달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로
서 이미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학교 친구들에게 사는 곳이 어디인지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다
른 지역에 사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논다. 그러나 부모들
은 모든 희망을 아이들에게 걸고 있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더 

은 삶을 살 수 있는 보증수표인  것이다. 남골에는 거리에 나와서 뛰노는 아이들도  

고, 일하는 아이들도 없다. 모든 아이들이 다 학교에 간다. 그러나 여섯 명이 살기도 

는 7.5평밖에 안 되는 집에서 참고서도  없고 부모의 도움도 없이 공부하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니다.
  봉천동의 달동네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돕는 자원봉사자 김상문씨는 힘주어 말했다.
  "이런 방법은 역효과를 낼뿐입니다. 아홉 살이나 열 살 정도 된 아이들은 때로는  

러 사실에 대해 자기 부모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부모를 경멸하
게 
되거나, 자기들끼리도 솔직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됩니다.  대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
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가 공부를 제일 잘하기를 바랍니
다. 그런데 학원 같은 특수한 시설에서 교육받지  않으면,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합

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실망하게 되고, 아이들은 부모를  실망시키기 때문
에 
불행해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가장 잘돼서  나간 학생들은 전기공이나, 기계공,  기능
공 
등이 되려고 직업학교에 다닌 학생들입니다. 이런 직업학교들은 교육도 잘 시키고 졸

하면 취업도 잘 되지만, 사회적으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업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편견과 사회적인 냉대를 극복하는  힘
을 
갖는다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인정한 상태에서 새로 시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결심을 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많은 단체가 달동네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 남골에는 이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
가 끝난 다음에 따로 보충수업을  해주는 28명의 서울대학교 학생 자원봉사자가  있
다. 
이곳에 사는 여자들도 아이들과 똑같이 이 학생들에게 한글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자들은 대부분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웃에 사는 다른 여자들이 자신이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즉, 항상 체면
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영등포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여대생 유민지 양은  이런 현상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 역시 젊은이들을 깨우치려는 것예요. 공부에 전혀 관심이 

는 청소년들도 있어요. 그 아이들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척만 하죠. 실제로는 하루 중
일 
떼지어 몰려다닐 뿐이고, 때로는 좀도둑질을 하기도 해요. 그래서 경찰서에 잡혀가거
나 
폭력조직에 들어갈 위험이 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학업 자체를 포기하는 아이

도 꽤 많이 있어요.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니까요. 그 아이들은 길거

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다니거나 하찮은 일을 하거나,  혹은 부모를 돕거나 하지
요. 
다행히도 이런 경우에 속하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하지만 그 아이들이 처한 

황은 비극적이죠.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의  부모를 만나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
갈 
수 있도록 유도해달라고 부탁하곤 하죠. 그들은 언제나 그러겠다고 해요."

    철거 뒤에 남는 것
  이런 달동네 사람들도 사회적인 보호를 받는다. 한국에서 최초의 지방 선거가 치러
진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남골지역 대표자로 김혜경씨가 당선되었다. 40대의 정력적인 
활동가인 이 여성은 수도나 전기와 같은 공공시설의 설비를 위해, 그리고 달동네 주민
들의 권리 옹호를 위해 시 당국과 항상 싸워왔다. 그러나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새
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때때로 악용될 소지를 안고 있는 한국의 전

적인 도시개발구조 때문이다.
  판자촌이나 다른 지역의 집들을 철거하기로 결정할 때는 철거된 장소에 재건축될 아
파트를 사는 권리인 '딱지'가 철거민들에게 주어진다. 딱지가 있으면 아파트를 조금  

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이득인 것처럼 보이는 이것이 대개는 함정이다. 실제로 
새 
아파트들은 철거된 건물들보다 훨씬 더 호화롭게 마련이다. 따라서 특혜인 딱지를 받
은 
사람들은 아파트를 분양 받을 능력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그들은 딱지를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 판다. 그러면 딱지를 산 사람들은 약간 싸게 아파트를 취득한 후 그

을 시장가격에 다시 팔아 차익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딱지도 받지 못하는 사람

은 멀리 교외로 나가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한다.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주목하는 작가 조세희씨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란 작품에서 이런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다. 아침에 불도저가 도착하여 난쟁이와 그
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파괴하면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장면  말이
다. 
이 작품에서 '난장이'는 국가로부터 땅 한 뙈기 받은  것 없이 경제개발 단계에서 짓

히고 유린되고 착취당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야기의 배경인 1976년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후에도 상황은 변화하지 않았다. 

인적으로 서울 남부의 인구 밀집지역인 개봉동에서 지은 지 20년이나 되었지만 자율적 
공동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특히 편안했던, 25개의 동이 하나의 단지를 구성한 아
파트에서 1년간 살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멀쩡하게 서 있는 아파트를 헐어내고 그 자
리에 최소 면적 27평의 20층짜리 아파트를 짓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 아파
트 단지에는 도서관과 스포츠센터, 전자감시장치가 설치된 상가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대부분이 택시 운전사이거나 사무실 노동자였던 이웃들은, 딱지를 받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아파트를 살 재력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교외로 나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 단지 건설 결정에 따라 토지나 

산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보상금을 받아내고, 또 딱지를 가능한 한 싸게 구
입하기 위해 과감하게 투쟁을 벌인다. 땅은 부족하고 인구는 넘치는 서울에서는 부동

에서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중개업자들의 탐욕만 증폭되고 있는 실
정이다. 탐욕스런 중개업자들은 "문둥이들이  사는 집 50채 헐면,  그 자리에 20층짜
리 
아파트를 열 개는 지을 수 있을 거야"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노동자 신부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며, 건설회사들은 주민들이 집을 

기하도록 학 위해 '위장 조합원'들을 고용한다고 한다. '위장  조합원'들은 재건축계
획이 
실행되기 1년쯤 전에 점찍어놓은 지역에 가명으로 정착한다. 그리고 건설회사가 그 지
역에 공격신호를 보내면, 그들은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주민들에게 이주에 제공되
는 
조건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한다. 아파트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일부 남골  주민들
을 
두고 콜레트 누아르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안락함을 선택했지요. 하지만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을 것이고, 때론 판

촌의 자율 공동체적인 분위기를 그리워할 거예요."

  머지않아 서울에서는 더 이상 판자촌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극빈

들의 삶의 조건이 더 나아간다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권리가 존중될 거라는 의미는 아
니다. 뉴욕의 빈민가에서 파리의  부랑자에 이르기까지, 부유한 나라의  수도들도 결
코 
가난한 자들을 무리하게 내쫓지는 않았다. 서울시의 고민은 일본의 상황을 잘 알고 있
다는 데 있다. 도쿄에서는 최후의 판자촌이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의 수도 중앙에 신

쿠역에는 실직자들과 일용직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종이도시'가  끊임없이 확장되고 

다.
 
    방황하는 젊은이들
  학원폭력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돈을 빼앗는 행위가 많이 발생
하고 있다. 깡패들은 어린 학생들을 협박해서 돈이나 시계, 라이터 등 값나가는 물건

나 옷을 갖다 바치라고 강요한다.  만약 그런 것을 내놓지  않으면 심하게 구타당한
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면 위험이 더욱 커진다. 따라서 이런 일을 당한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속으로만 삭일 뿐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에 잘 알려져 있는 일일뿐만 아니라, 신문에 주기적으로 보도
되기도 하는 내용이다. 즉 협박과  상습적인 구타, 가해자의 점점  더 커져가는 욕구
를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글을 남기고 자살한 한 청소년에 대한 기사가 그것이다. 이
런 기사가 실리면 한국의 여론은 들끊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처벌을 강화하자느니, 

찰 순찰대를 늘리자느니, 학부모와 선생님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만들자느니 하는  

등의 말을 해댄다. 또 사회학자들은 사회의 일탈에 대해 현학적인 글들을 써대기도 한
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다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잊고 지낸다. 서울에서 고등학

에 다니는 김락현 군이 이런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제가 사는 곳에서는 아이들이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문에서는 그런 기사를 몇 번 본 적이 있지요. 학교에서 돈을 빼앗는 행위가 자주 일어
나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 일을 당하는 애들은 부잣집 애들이거나, 아니면 '있는 체

는 애들'이죠.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두들겨 맞아요. 모두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
만, 
문제가 생기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않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들도 무슨 일
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아요. 하지만 모른 채하는 거죠.  선생님들 역시 두려움을 

지고 있어요. 이런 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공부에 방해가 되거나 친구를 사귀지 못하
니까요. 말할 상대를 골라서 조심스럽게 얘기하면 돼요. 그리고 자기가 얼마 전에 무

을 샀는지를 특별활동 시간에 바보처럼 떠벌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죠. 어쨌든 졸업하
면 
끝나잖아요."
  기묘한 체념이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이런 청소년 폭력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
세라는데 말이다. 1994년에 검거된 비행청소년의 수는 전년도보다 48% 증가했고, 1996
년에는 11.4% 증가했다. 또 구류에 처해진 청소년의 수도 4만 명이 넘었다.
  1995년 덕성여자대학교에서 한  조사에 따르면, 아이들의  36.1%가 학교에서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  중학교 남학생만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는 이  수치
가 
56.8%에 달했다.
  한국의 학교 중 1/4이 학원폭력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가 되는 것은 돈을 빼앗는 행위뿐만이 아니다. 학교 내의 지배권이나 지역의 점유권
을 행사하기 위해 서로 다른 패거리들 간의 패싸움도 심심치 안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
실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싸움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제로 두 패거리가 내가 사는 집 근처의 공터에서 만났다. 15,6세의 건장하고 당차 보

는 청소년 20여 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모여 증오에 
찬 얼굴로 소리를 질러대며 자기편의 남자아이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주먹질과 발길
질, 
박치기 등이 오가는 난폭한  싸움이 벌어졌으나, 다행히도 야구방망이나  쇠파이프, 
칼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마 얼마 지나지 않아 신고를 받고 출동한 15명의 경찰관들
은 서로 싸우는 아이들을 떼어놓기 위해 무기를 꺼내들어야만 했다.
  점점 늘어가는 이런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학교 주변 구역의 순찰 강화, 오락실에 

한 감독 강화, 훨씬 엄격해진 사법적 처벌 등 고압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1996년 3월,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젊은 날의 한때 잘못으로 법원을 드나드는 일이 

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폭력이나  기물파괴 등의 혐의가 있는  학생들에게 고아원이나 
사회복지센터, 병원 등에서 사회봉사활동을 시키자고 제안하였고,  부모들 역시 선생

과 공무원, 그리고 학부모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학원폭력 저지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이 운동은 1995년 김종기씨가 발의한 것으로, 당시 16세에 불과

던 그의 아들이 지속적으로 가해진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18층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고 한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그 아이가  학원폭력의 마지
막 
희생자이기를 바랍니다."
  현재 한국에는 이런 성격의 위원회들이 100여 개나 있다.

    법정에 선 피고-돈, 미디어, 가족
  청소년 폭력의 해결책으로 어떤 것이 제안된다고 하더라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

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은 당연히 그래야 한
다는 듯이 학원폭력을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은 많은 돈과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찬  받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
에 청소년들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지적은 청소년 폭력의 원인을 가장 잘 설
명하는 말이다. 현재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것은 고결한 인격이 아니라, 유행하는 구

나 최신형 워크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살 돈이 없으면 힘
을 
사용해서라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한국범죄연구소 연구원인 정진섭 씨의 말이다.
  "못하는 집 아이들만이 문제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류 수준의  가정에서 자라
난 
아이들이 도둑질을 하다가 잡히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
들은 상대적으로 혜택을 누리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결국은 '언제나 더 많이'라는  소

성향이 승리한 결과죠."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사회가 너무 많은 것들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1주일이 멀다 하고 광고를 통해  신

품을 소개하거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내니까요. 이전 세대에는 이런 유혹들이  있지
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일만 하거나 공부만 했지요. 그 당시에는 사치가 

른 세계에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청소년 폭력의 원인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도 있다. 다시 말하면, 홍콩에서 들어온 

푸 영화가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TV와 영화, 특히 매우 폭력
적이라고 비난받은 서양 영화들이 청소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러
나 
폭력 자체가 대체로 영화의 발명보다  앞서서 존재했다는 점에서 그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따라서 그보다는 한국의 많은 청소년을 둘러싼 현실 세계가 청소년 폭력의 원
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는 '오락실'이라고 불리는 많은 비디오게임방이 있고, 최근 급속히 자

잡은 'PC방'과 함께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낸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각광받는 

퓨터 게임들은 특히 폭력적이다. 그런 게임들에서는 요란한 색채와 시끄러운 소리는 

본이고, 주먹질과 발길질은 물론 최첨단 무기로 적을 죽이는 것이 죽이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물론 컴퓨터 게임과 싸움질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기란 어려운  일이
다. 
그러나 정진섭 씨는 이렇게 강조했다.
  "아이들은 점점 더 충동적이고 계획 없이, 말하자면 이기적일 정도로 쉽게 범죄를 

지릅니다. 일단 흥미가 유발되면 통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듯이 말하죠."
  무슨 일이든 빨리빨리 하는 것이 좋다는 풍조도 역시 청소년 폭력의 원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은 기다릴 줄도, 시간을 아낄 줄도 모르고, 모든 것을 즉시 얻으려고 한
다. 
그래서 때때로 아이들은 다음 프로그램을  인내심 있게 기다릴 수가  없어서 리모컨을 
들고 계속 채널을 바꿈으로써 잡다한 영상만 머릿속에 쑤셔 넣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청소년 폭력의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가족

인 구심점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한국범죄연구소의 연구원인 최인섭씨는 이렇게 분석

다.
  "몇 년 전부터 한국은 도시화, 산업화, 중산층의  출현, 민주화, 시장개방, 자본 경
쟁, 
지도자들의 영향력 상실 등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 

운데서 청소년들의 타락은 부추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관계의 변화인 듯합니다. 부

들은 점점 더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매우 엄격한 권위
와 매우 자유로운 방임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남성적인 이미지가 

여된 아들에게 너무 너그럽습니다. 또 아버지들은 일에 얽매어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
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으뜸가는 보모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
게 
가치 있는 다른 것들을 가르쳐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아이들이 오직 1등이 되기만을 요
구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범죄자는 가정에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 

동이 생활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던 편모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해서는 그 어떤 존경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편, 정치학과 학생인 윤정호씨는 극히 개인적 부분에 초점을 맞춘 논리를 폈다.
  "가치에 관련된 말은 한국에서는 너무나 구태의연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가치의 

기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꼭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사회변화  속에
서 
그 사회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또한 타락에  관해서 말하자면, 정치 지도자

의 책임이 큽니다. 그들은 거창한 도덕적인 말들을 끊임없이 뱉어내고, 또 자신들은 

패해 있으면서도 대중에게는 질서를 지키라고 호소합니다. 유교 덕분에 지도자들이  

청난 권위를 누리고 있는 이 나라에서, 우두머리가 금고를 털고 있다는데 누가 금고를 
털지 않겠습니까? 국가의 지도자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억 달러를 횡령했는데, 청소년
들에게 워크맨을 훔치지 말라는 말이 통하겠습니까? 아이들의 도둑질은 가치의 위기라
는 말로 설명 할 수 있겠지만 대통령의 공금 횡령에는 무슨 이름을 붙여줘야 할까요?"

    불법 거주자와 소녀들
  청소년 폭력은 학교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등학교에서 3년간 열심히 공부한 뒤에 대
학 입시에 실패한 청소년들은 스스로에게 커다란 혐오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사회적 

원에서 볼 때, 대학에 버금가는 가치 있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설 학

의 상업적인 단기 기술 강좌에 등록하게  된다. 또 회사에 들어가서 현장 연수를  받
을 
수도 있고, 아니면 상점에 채용될 수도 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 서울의 한 주유소에서 주유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상빈씨처
럼, 
그들 대부분은 착취일 뿐인 이런 조그마한 일자리를 대체로 감수한다. 이상빈씨는 1주
일 내내 일하며, 그 중 3일은 야간  근무를 한다. 그런 그의 월급은 겨우 50만  원이
다. 
그는 주유소 건물에 딸린 방에서 잠을 자고, 한 달에 단 이틀의 휴가를 얻을 뿐이다.
  경제적 혹은 가정적인 이유로, 아니면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소외되고, 
또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소비사회에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에 커다란  범죄를 한탕 
저지르려고 마음먹는 낙심한 청소년들도 사회 곳곳에서 눈에 띈다. 폐쇄된 아파트에 

법으로 거주하거나 동대문 시장 부근 혹은 교외인 안산 쪽에 있는 값싼 여관에 거주하
는, 적게는 16세 정도의 가출한 아이들만으로 구성된  패거리들이 실제로 있다. 그들
은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중고품을 훔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불법

래를 요령 있게 하기도 한다. 이 청소년들은 가족과의  접촉도 전혀 없는, 소외된 상

이다.
  서울, 인천 등 대도시의 지하철역 부근에서는 성인들의 강요로 구걸하는 아이들을 

렵지 않게 볼 수 있고, 거리에서는 15세 정도의 소녀들을 점점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한국의 수치라고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뉴스라는 것도 검증하기  어려
운 
것이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사창가와 유흥업소를 어슬렁거리는 여고생들이나 원조  

제가 실제 현상임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마약중독은 상대적으로 한국에서는 거의 퍼지지 않았다.  1996년에는 5,418명이 마

을 복용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10년 전에 마약복용 혐의로 체포된  사람
은 
2,016명에 불과하였다. 지금은 한국에 10만 명의 마약  중독자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도 있다. 특히 마약복용 현상은 노동의 일정한 리듬을 맞추기 위해서 우울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스 운전기사나 가정주부들과 같은 새로운 계층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어 입시경쟁이 치열한 고등학교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한국에는 마약을 감시하고 단속하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유일한 해결책이 

다면 억압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여전히 사회의 주된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국에서는 헤로인이나 마리화나를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주로 사용되는 본드, 휘발유, 

사기 용액, 주사기를 놓거나 삼키는 히로뽕 등의 마약도 매우 위험한 효과를 가지고 

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약의 다양한 종류, 마약  사용
법, 
마약 중독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지한 편이다. 한 중앙 일간지의 기자
가 1995년에 자신의 무지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다행히도 한국에서는 마약이라고 하면 마리화나가 아니라 본드를 떠올린다..."

  대부분의 사람은 분명한 것은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서울은 절대로 위험
한 도시가 아니다. 이런 사실은 크기가 비슷한 다른 나라의 수도와 비교해보면 더욱 

확해진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서울에는 위험한 지역이 별로 없다. 밤늦은 시간에도 

소한의 위험도 없이 거리를 산책할 수 있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초등학생들
이 다 자살하지는 않는다. 또 모든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다  한결같은 것은 아니다. 
새 
시계를 차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모두 자기 친구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비디오 화면
에 몇 시간씩 눈을 고정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다 자기 이웃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것은 
아니다. 범죄나 방탕한 놀이, 또는 마약에 빠져들지 않고도 대학에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게다
가 
범죄는 점점 더 흉폭해지고 있다. 돈을 훔치기 위해서는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학

폭력이 증가하는 것 역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공무원과 경찰, 그리고 부모들
을 
포함하여 이런 현상에 직면한 당국자들은 당황스러워만 할뿐이다. 그들은 억압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해결책을 바로 내놓지  못한다. 마치 억압만이 최상의 해결책인  것처
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상황은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 최인섭씨의 말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가족간의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사회복지기구
가 
필요합니다. 이런 지역에는 자원봉사자만 들어가 있는데 그 숫자도 충분하지 않습니
다. 
만약 가정과 사회복지요인이 만족할 만한 해결점을 찾지 못한다면, 청소년의 탈선이 
더 
심화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한국범죄연구소의 동료 연구원인 정진섭 씨는 이보다 훨씬 더 어둡게 전망했다.
  "옛날에는 아동 문제와 다른 문제를 구별하기가 수월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의 
아동 가운데 아동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아주 적습니다."

    저질블루스
  민주화. 현재가 미주화로 가는 과정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방선거가 있던 1995년 6월 이후, 시장과 군수를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게 되었다. 공

원은 야당 후보자를 적대시하며 유권자에게 '훌륭한 선택'을 강요하기가 점점 어려워

고 있다. 기독교협의회, 소비자협회, 스포츠협회, 인권단체  등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이 생겨나고 있다. 비록 여전히 TV뉴스가 비난을 받고  있긴 하지만, 언론은 예전보다 
훨씬 독립적이다.
  지영순씨의 말을 들어보자.
  "언론의 자유가 뚜렷하게 향상되었습니다. 기자들은  이제부터 감옥에 갈 염려  없
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쓸 수 있습니다. 또한 언론은 검열이나 삭제의 위협 없이 보도하
고 
싶은 것을 보도할 수 있습니다. 언론은 이전 보다 훨씬 비판적인 톤을 갖게 될 것입니
다. 민감한 문제들은 여론조사를 실시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완곡하게 표현했던 주제

을 적나라하게 다룰 것이고, 결국에는 왜곡된 진실들을  과감하게 보도할 것입니다. 

러나 자체 검열은 가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군대나 정치사찰과 같이  금기상

로 남아 있는 영역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쪽도 역시 곧 변화할  것입

다."

    민주주의가 살 수 있는 집
  한국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조롱하는 일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행한다.
  그러나 지영순씨는 언론의 자유 앞에 여전히 어떤 장애물들이 놓여 있다고 이야기한
다. 또 민주화의 양상들도 많은 장애를 기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김태호씨는 다음
과 
같이 증언하였다.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단체를 나름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복경찰들이  미행
을 
하더군요. 전화로 협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임대계약을 갱신하지 못하

록 건물 소유주에게 압력을 넣었습니다. 이런 식의 괴롭힘은 끝도 없습니다."
  탄생한지 얼마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주요한 문제점 중의 하나가 바로 
국민의 정치교육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절대군주제 이후의 일제 식민지시대, 그리고 
그 
이후의 군사정권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껏  토론할 기회를 주지 않았
다. 드물게 예외도 있지만, 한국의 신문들 역시 보수적이고, 원칙적으로 정부를  옹호

고 있다.
  1989년까지 금지되었던 해외여행과 학교에서 행하고 있는 기계적인  도제식 수업 탓
에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양성되지 못하였고, 더불어 의견의  상호교
환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 대학생의 순진한 고백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기가 힘듭
니다."
  한 정당의 사무처 요원인 김종윤씨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실제로 한국에는 이념을 가진 정당은 없고, 오직 후보자를 가진 정당만 존재합니
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통일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북한의 위협 때문에 정치적인 

념의 장이 명백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김세우씨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나름대로 논리적이다.
  "정치적 논의라는 것은 한국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
만, 
우리는 국토가 분단되어 있기 때문에 냉전시대의 낡은 사상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
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이분법적입니다. '당신은 내 편이든지 아니면 반대편이다, 그

나 결코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찰자아자 작가인  조세희씨의 이야기를 들어보
자.
  "군사정권 시절에는 모두가 가난한 채 착취당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독재에 대항하
기 
위해 서로 단결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반체제 인사들
이 
휴가라도 간 듯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추진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들이 행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도덕군자인 체하는 파렴치한 지도층이 활개를 치는 
것이고, 다수의 대중이 무관심한 것입니다. 한국은 건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들어 있습니다. 한국은 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론 역시 이념적인 토론 속에서 자기 입자를 찾기가 힘들다. 지영순씨의 말이다.
  "언론사들은 대부분 권력과 결탁한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대기업에 소속되어 있습
니다. 신문의 논설은 대부분 교화적일 뿐이지 분석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념적
인 
토론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가지고 있는 이런 보수적인  성향
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비판정신을  길러주지 않습니
다. 
나이 든 편집장들은 군자독재 시절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는 한

이 집단에 중심을 두고 있는 동일체 국가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 달라지
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수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이념으
로 
청중들에게 충격을 주기보다 순응주의자로 남기를 선호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다양
한 
경험을 한다는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한국에 민족주의가 정착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예는 더 들 수 있다. 한국의  모델
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말하는데, 국가의 경제개발에 그 뿌리를 두고 잇는 정치  지도자들
과 
재계 대그룹들 사이의 모호한 관계는, 이런 가증스러운 관계를 잘라야 한다는 말이 여
기저기에서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군사정권  

절 장관을 지냈던 많은 인사들이 아직도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 이러한  사실
을 
두고 지영순씨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지도층이 출현해야 합니다. 이건 시급한 문제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
  하지만 한국인들은 훨씬 더 구체적인  이유들 때문에 자신감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출근 시간에, 서울의 한강을 남북으로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
되어 32명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기나긴 연쇄 파국의  시작
에 
불과했다. 한 달 후 관광 유람선에 불이 나 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12월 21일에
는 
서울의 인구 밀집지역에서 가스폭발 사고가 일어나 12명의 목숨을 잃었다.
  또한 1995년 4월 28일에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대구 시내에서 또 다른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 105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더 커다란 참사가 다가오고 있었
다. 6월 29일에는 서울에 있는 대형 백화점의 5층의 건물이 모래성인 양 무너져내렸
고, 
그 와중에 500여 명이 사망했다.
  재난 구호조직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참사는 더욱 컸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모두가 부실공사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수대교의 교각들은 바다 모래로 건설되었다. 수익 경쟁이  역효과를 낸 것이다. 

품이 부족할 때도 한국인들은 작업을  늦추기보다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술  규격
에 
맞지 않더라도 다른 부품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부정부패가 만
연해 있어서 평균적인 안전도에 미달하고도 쉽게 건축 허가를 받는 일이 다반사이다.
  삼풍백화점은 지상 5층과 주차장 용도의  지하 3층이 이미 건축되어 있었는데,  다
시 
지하 1층의 주차장 공간을 두 개 층으로 분리해서 지하 4층 짜리 건물로 지어졌고, 건
축을 시작한 지 8개월이 지난 후에야 건축 허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건물은 
최소한의 철골구조물도 없이 건축되었다.
  비극이 벌어진 후 한 엔지니어가 내게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 건물은 무너지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돈벌이에 대한 유혹은 흔히 사고의  원인이 된다. 삼풍 참사가 벌어졌던  월요일에
도 
아침부터 이미 꼭대기 층의 한쪽 천장이 내려앉아 있었다. 게다가 벽에 심한 균열이 
가 
있어서, 안전도 검사를 하러 나온 엔지니어들이 백화점을 폐쇄하라고 충고했다고 한
다. 
그러나 하루 매출액을 손해보고 싶지 않았던 사장은 이를 거부했고, 그 자신은 자리를 
피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세희씨는 어느 날인가 이렇게 한탄한 적이 있다.
  "이 사회에서는 돈만이 중요하죠. 돈이면 모든 게 다 정당화됩니다."
  성수대교 참사가 일어나기 1년 전에 행한 한 조사에 따르면, 교통량은 나날이 늘어

는데 반해 건설 당시에는 교통량의 증가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루에 있는 16개 
다리 대부분이 차량이 통행하기에는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사건은 예산을 절약하려고 한 결과일까, 아니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마

인 교통 혼잡을 피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시 당국에서 아무런 
진단도 하지 않을 정도로 공공 서비스에 태만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또한 이렇게 건설하느냐는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빨리
빨리 건설하려고만 했던 과거 군사정권을 비난하고 있다.
  한국인은 몇몇 건축업자와 기업 소유주, 그리고 고위 공무원의 무책임하고도  사악
한 
행위에 의해 발생한 이런 연쇄 참사 때문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런 사건은 급

한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무적의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특히 정치 지도자들의 극단적
인 
국수주의적 발언으로 인해 한껏 고무되었던 한국인의 자신감을  일시에 뒤흔드는 것이
었다. 서울의 거리에서는 실제로 "한국은 사상누각인가?" "내일은 어떤 건물들이 몇 

나 무너질까?" "그토록 탄성을 자아냈던 한국의  기적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졌을까?" 
라는 말들이 들려오곤 했다.
  사회학자 이성하씨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이 일련의 비극은 성공으로 교만해졌던 한국인에게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습
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들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일해온 국민에게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결과입니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김우상씨는 한국의 '블루스'를 '후기 경제기적 신드롬'이라고 묘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붕괴된 건축물들은 모두 7, 80년대에 지었던 것입니다.  이것들은 '할 수 있다'는 

신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성공과 노력을 나타내던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

버렸습니다. 빠르기와 양적인 측면만을 강조했을 뿐, 질적인  측면과 안전도의 규격 

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희생정신을 갖고 국가의  발전
을 
위해 몸 바쳤던 모든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일회용 소비재, 환경
  한국은 국가적인 성공의 상징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기간산업의 기반이 허약하고,  

주화의 장애물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며, 부정부패가 만성적이다. 따라서 경제위기
를 
겪고 있는 한국 국민은 왜 그들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에 대
해 회의를 갖는다. 환경문제 역시 발전의 성과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서울이나 부산, 대구는 계속되는 교통 혼잡과 늘어만 가는 인구, 특징 없는 건물들
과 
요란한 경적 소리로 사람의 진을 빼는 도시이다. 비록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지만, 서

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의 하나이다. 회색 안개가 자주 서

의 상공을 떠다니고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 숨을 쉬는 것은 매일 담배 한 갑을 피우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공기 중에  있는 황산의 양은 10년 전에 비해 두  배
나 
증가했고, 오염된 환경 속에서만 자라는 나무들이 출현함으로써 산성비가 내리고  있

을 증명하고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모양의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울의 대

오염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물에도 문제가 있다. 서울에 있는 네 개의 정수장은 하루에 340만t의 물을 정수할 

력이 있는 데 반해, 도시가 매일 배출하는 물의 양은 470만t에 달한다. 그 결과 수돗

은 마실 만한 게 못 된다. 서울 국제병원 과장인 존  린튼 박사는 '수돗물 속에 제거
가 
불가능한 중금속 입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매일 나오는 폐기물이 9만 2천t에 이르러, 폐기물의 재활용도 충분하지가 않
다. 
그러다 보니 환경에 위험한 영향을 주는 것들을 땅에 묻거나 태우고 있는 실정이다.
  1990년에 환경부를 신설한 것을 보면, 정부는 몇 년 전부터 환경문제를 인식하고 있
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방음벽 설치, 공장 이전, 새 배관 교체 등에 대해서는  고려하
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때부터 정부는 벌금을 부과한다는 엄포 아래 주민들이 가정의 쓰
레기를 잘 처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대통령 자신도 이렇게 말하는 실정이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는 공장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
나 
지금은 깨끗한 공기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확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1994년 1월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의 젖줄인 낙동강이 심하게 오염되었다. 낙동강 물
에서 공장 폐기물에서 유출된 벤젠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낙동강이 오염된 것은 이때
가 
두 번째였다. 처음으로 낙동강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많은 사람이 다

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들은  여전
히 
느긋한 자세로 한국이 더 이상 오염되지 않을 거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운동
연합 최열씨는 이런 전망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지만, 정책은 공고문과 구호 등 격식 갖추기에  그치고 

습니다. 지금도 계속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환경을 더 나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거의 잘못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듯 여기저기에  아파트를 짓고 있지 않습
니까."
  물론 한국인의 40%가 오염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한 65%는 서울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개인적
이건 대중적이건 행동으로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회사원이나  초등

생들은 정기적으로 초록색 모자를 쓰고 몸에 초록색 띠를 두른 채 거리에 나가 비디오
카메라와 사진기 앞에서 휴지를 줍는다. 모든 사람은 양심에 거리낌없이 환경을 보호

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마치 계속 소비해도 좋다고 허가 받은 듯이 행동한다. 계속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장치를 끊임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성

씨가 주장하는 역설적인 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30대 후반 이상 한국인은 대부분 어릴  때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데 
지금은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보호라는  명분으
로 
그들의 행위를 중단하라고 어떻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물 안으로 들어온 세계
  새로운 생각들을 접하게 되면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

은 1989년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유롭게 외국 여행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
었다. 한국인은 정치적 이유로 오랜 세월 동안 제한  적으로 공급된, 한국에 국한된 

만을 들으며, 이념에 대한 논쟁도 거의 없는  '폐쇄회로'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다가 

자기 여행하는 사람의 숫자와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횟수가 많아졌다. 말이 자

로워짐으로써 지식인은 훨씬 개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 하고, 또 개발의 허

을 비판하려고 한다. 검열을 벗어난 언론은 이전에는 침묵을 지켰던 주제를 다룬다. 
도 
새로운 말은 얼마나 많은가! 거기에서 많은 문제가 제기된다. 리옹에서  1년 동안 공

했던 불문과 학생 김지현 양의 증언은 의미심장하다.
  "프랑스에 오니까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함

로써 한반도를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시킨 것이 바로 미국이었다, 한국은 다른 나라로

터 많은 기술을 빌려왔다. 한국의 경제개발은 부분적으로  외국의 도움이 컸다, 서울

서는 상거래가 정직하지 못하다 등등. 그때 들었던 많은 말을 지금 여기서 다 할 수는 
없어요. 반면에 한국은 외국과의 관계에서 항상 희생자로  묘사되었어요. 이런 말은 

제나 나를 짜증나고 우울하게 만들었지요. 내 프랑스 친구들은 논리적으로  따져가면
서 
실제적인 예를 들기도 했어요.  나는 감정적으로만 대응했죠. 아니면  학교에서 배웠
던 
모든 것들을 죄다 동원해서 대꾸할 수 있었을 뿐이에요. 그때 나는 내가 토론할 줄 모
른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어요. 한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외국
이 
한국 제품에 대해 시장을 폐쇄했다면, 한국의 경제개발이 성공적인 수출  덕분이었다
고 
말할 수 있겠니?' 하고 말이죠. 그때 나는 이 커다란  모순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배웠

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어요. 더  이상 프랑스 친구들
을 
보고 싶지 않았죠. 왜냐하면 나로서는 그런 모순된 것들을 옳다고 우겨댈 수가 없었으
니까요. 결국 한국인 친구들 틈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지만 한국에 돌아와

는 외국인이 쓴 역사서적과 경제서적을 많이 읽었어요. 아직 그 내용을 얘기해줄 수 

을 정도로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진실
과 
거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한국은 자기 모순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사회는 자유로워졌고 젊은이들은  여행
을 
즐기고 있으며, 옷차림은 훨씬 거리낌이 없어졌고, 인기가수들의 노랫말은 매우 반항

이다. 게다가 악명 높았던 한국의 교도 행정도  순화되었다. 이제부터 수감자들은 감

에 TV를 놓을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더 많은 면회객을 만나볼  수도 있게 되었다. 그
러나 집단에 가하는 억압은 여전히 심하고, 사회적 의무는 극히 무거우며, 정치적 토

은 청년기의 열정을 저버린 '구세대'가 독점하고  있다.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는  한
국 
사회는 새로운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심재훈씨는 이렇게 분석한다.
  "한국인의 불안은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정해진 방향이 없다는데서 비롯합
니다. 한국에서는 개혁이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갈지는 모릅니다. 한국이  

떤 사회가 되고자 하는지를 규정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범죄연구소 연구원인 최인섭씨의 분석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강력한 지도자가 통치해왔습니다. 기업,  학교, 가정, 사회 말할 
것 
없이 모두 틀에 박힌 방법으로 다스렸던 겁니다. 사람들은 철저한 도그마 속에서 부모
에 대한 공경, 국가에 대한 충성, 노동에 대한 필요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
다. 
이런 것이 아마도 정당하다거나 발전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커다란 사회적  응집력
을 
갖추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젊
은 
세대는 앞선 세대가 세웠던 기준을 다시 문제삼고 있습니다. 사회는 정치영역을 배제
한 
채 민주화되고 있고, 사람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자유는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성격
의 
것입니다. 새로운 가치로 대체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돈에 많은 가치를 두는 것을 

외한 모든 가치가 동요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는 있지만, 커다란 계

을 수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가 사람들을 어디까지  몰
고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은 매우 불안정한 시기입니다."
  오늘날 한국인은 성장만을 추구한 결과 국가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토대가 상처받
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92년  8월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부유해졌고 사회
적 
평등이 더욱 확산되었으며, 최고의 건강검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62.3%
가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과도한 요구, 혹은 완전함에 

한 요구가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비관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은, 부패가 만성적이며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울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물가가 비싼 도시가 되었으며,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이런 모든 문제는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
고, 과거와의 차이라면 현재는 사람들이 그런 문제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러
한 
지적이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응수하고 있다. 물론 시청의 도시계획과나  세무과
의 
책임자들이 때로는 뇌물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곧 체포된다. 또한 시위 도중에 사

한 사람도 있지만, 이러한 사실은 곧 조사위원회에 통보된다.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모든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진학한다. 삶의 질에 대해서 이

기하면, 사람들은 경제개발이 이루어낸 발전이 공해로 인한 퇴보보다 더 크다고 주장

다. 서울에서 29년간 살고 있는 존 린튼 박사는 이렇게 강조했다.
  "최고의 건강검진, 최고의 모자보건, 식생활  개선, 최상의 노동조건 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개발은 오염으로 위협받는 환경 속에서도 건강에 관한 문제들을 더 많
이 해결했습니다."
    의혹과 활력의 틈바구니
  한국인은 감정에 휩싸여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경향이 있다. 경제가 조금 둔화된 때는 
위기이고, 호경기일 때는 과열이라고  떠들어댄다. 수많은 사이비 종교가  지구 종말
을 
신봉하고 있다. 나의 동료들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를 이야기할 때조차 극단에 치우치
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너는 이해 못  해, 그건 끔직한 일이야
!" 
라고 단정적으로 말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언론도 마찬가지로 과장이 심하다. 1996년 3월 한 중앙  일간지 쌀에는, 서울에 걸

들이 많다는 사실을 한탄하면서 '이 문제로 고통을 겪지 않는 나라는 지구상에 거의 

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확실히 다른 어떤 나라보다 나쁘다'라고 씌어 있었
다. 
그러나 서울의 문제는 파리나 런던, 뉴욕이 안고 있는 문제와 비교해보면 아무 것도 

니다.
  이런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국토가 분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족통일연구

의 상임 연구원인 길정우씨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한국인의 75%가 분단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의 젊은이  모두가 북한에 적대
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존하는 군사적 위협이 이외에도  분단되
어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에게 치유 불가능한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더 부유해
지고 경제적으로도 더 많은 힘을 가질 수 있을 테지만,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는 한 항
상 '미완성'과 '불완전'이라는 단어를 안고 살아갈 겁니다."
  이런 회의적인 생각은 한국을 스쳐지나가는 방문객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다. 
이런 점을 아기 위해서는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생활을 해봐야 한다. 외부인의 시선
으로 볼 때, 한국의 점포에서는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공항은 출발 직전의 관

객으로 붐비며, 거리는 스트레스에 찬 회사원들이 운전하는 자동차의 물결로 넘치고 

다. 침체되었으리라는 예상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원인 유성민씨는, 이런 의혹이 급속한 성장의 모순점과 연관

어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일종의 정신분열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평을 터뜨리고 미래에 대해 

안해하지만, 물건을 사고 계획을 짜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언제 부유했던 적
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이성하씨의 다음 말은 한국인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한국인은 가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합니다. 한국인

에게서 볼 수 있는 표면적인 활력 뒤에는 많은 의혹과 의심, 게다가 어떤 실망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예외적인 적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몇십 년간의 

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의혹을 극복하고, 21세기에는 한국을 일류국

의 대열에 올려놓을 겁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역시 한국인을 요구조건이 아주 많은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래서 

벌과 부정부패가 많은 사람을 실망시키고 있지만 거기에 대해 많은 말이 있었다는 것, 
혹은 사법적인 재판이 있었다는 것이 이미 커다란 발전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모든 
일은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대통령의 아들을 감옥에 

낼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안일하게 낙관주의에 빠지지 말고 이
런 나쁜 점을 한 발 앞서서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심재훈씨는 나름대
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국은 현재 양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수준, 즉 경제개발은 달성했습니다. 이제 한

은 사법부의 독립, 더 나은 교육제도, 개방의 확대, 더 나은 삶의 질 등 질적인 면을 

구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 성숙한 사회가 아닙니다. 따라서 지나친 자신감은 

물입니다. 그것은 발전적인 사고를 저해하여 또 다른 위기를 부를지도 모르기 때문입

다. 또한 '의혹'이라는 것도 아직은 한국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 사치일 뿐입니다."
 
      4. 한국 사회의 불안, 
 
    영혼과 종교의 나라
  "당신들은 모두 개입니다. 주인에게 복종하는 개처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개입

다."
  여의도에 있는 거대한 개신교회인 순복음교회 목사의 설교는 매우 공격적이다.  그

나 신자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설교가 계속되기를 재촉한다. 붉은 색 건물 내부에 희
고 둥근 천장을 가진 순복음교회는 한국의 개신교회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5층으
로 
된 건물 내부에 설치된 비디오를 통해 예배가 중계 방송되고, 영어와 중국어와 일본어
로 동시에 번역되어 나온다. 매주 일요일이면  2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아침 일찍부터 
기도를 드리고, 손뼉을 쳐가며 성가를 부른다. 또 폐부를 찌르는 설교를 행복한 표정

로 듣는다.
  순복음교회의 열성적인 신자들만 보아도 한국에서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이 불가지의 나라라고 한다면, 한국은  영혼과 종교의 나라라고 할 수  있
다. 
한국에는 모든 종교가 들어와 있다. 실제로 불교 신자 외에도 카톨릭 신자와 기독교 

자가 많으며, 이슬람 신자도 꽤 있다. 또 샤머니즘과  같은 전통 종교도 사라지지 않

고, 이단 종파에도 많은 추종자가 몰리고 있다.  외국에서 들어온 비슷비슷한 종교들
은 
전통의례의 저항을 받기도 하였다.
  밤이 되면 서울의 하늘은 개신교회임을 알리는 붉은 십자가로 숲을 이룬다. 개신교

들이 은행이나 보험회사가 입주해 있는 상가 건물에 주로 자리잡고 있다면, 성당은 붉
은 벽돌로 지은 작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현상도 도시에서만 볼 수 있다. 아
주 
낙은 마을에서는 카톨릭 성당이 개신교회와 나란히 있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주로 최신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불교 사찰은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
나, 숲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아니면 언덕 뒤편에  위치해서 눈에 잘 띄지 않

데, 이런 장소는 거의 수백 년 동안 신성시된 곳이다. 산책을 하다 보면 나무에 매달
린 
형형색색의 천조각들을 볼 수 있어 샤머니즘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니미즘의 의식을 보여주는, 솜씨 있게 잘 쌓아올린 돌무더기도 있다. 고요한 아침의 

라에서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 듯하다.
    교황보다 더 기독교적인 한국의 신자들
  한국에서는 미적지근한 신앙생활이 용납되지 않는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든가, 

니면 숫제 신앙생활을 하지 않든가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온몸을 다 바쳐야 한다.
  이런 열성적인 태도는 앞서 말한 순복음교회에서나 혹은  서울을 굽어보는 산봉우리 
아무 데나 올라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짖는 기독교 신
자처럼, 광신론에 가까운 신앙생활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몇 년 

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계속되었다. 겨울이 되면 그들은 영하 20도까
지 
내려가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작은 텐트 안에서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추위를 달래
며, 교대로 하나님을 부르짖음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려 한다.
  이런 극단적인 형태는 아니겠지만 한국에서 신자가 되는 것은, 특히 개신교 신자에

는, 진정한 참여가 전제되어야 한다. 신자들은 지역별 종교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 

들은 일요일마다 예배에 참석하고, '자매'들끼리 한데 모여 점심식사를 하며, 1주일에
도 
여러 차례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다. 그들은 이웃을 전도하기 위해 호별  방문
을 
하기도 하고 자기 아이를 교회에 보내 교리학습을 받게 하기도 하며, 작은 십자가 밑
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 이름이 박힌 스티커를 살고 있는  아파트 현관문에 붙임으로써 자
신의 신앙이 굳건함을 보여준다. 자동차의 백미러에 그리스도가 조각된 작은  십자가
나 
백단목으로 만든 염주가 걸려 있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거의 모든 회
사 
식당에서 식사하기 전에 눈을 감고 몇 분 동안 깊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
이다.
  이런 식의 신앙생활은 경탄스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나치다는  생각도 든다. 한 

국인 선교사는 이렇게 빈정대기도 했다.
  "그들은 교황보다 더 기독교적입니다."
  한 여자 친구가 성경 시험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한 
달 동안 쫓겨났다고 울먹이면서 이야기했던 일이 기억난다. 또다시 실패할 경우에는 

원히 쫓겨날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거의 40대가 다 된 친구였다. 그러나 외국인선

단의 한 프랑스인 신부는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신자들은 공동체 생

을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  공동체
에 
쫓겨났을 때 다른 종교 공동체에서  더 친절하게 접근한다면, 극단적인 경우는  종교
를 
바꾸기까지도 합니다. 그들이 종교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평화로움과 안락함입니다. 

것을 예배 자체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종교가  가정
을 
통합하고, 대도시의 익명화에 맞서며, 옛날 한국 농촌이  가지고 있던 자율 공동체적
인 
분위기를 되찾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아시아에 공동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집

이 개인보다 우세한 한국에서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에서 종교를 중요한 현상의 하나로  여기로 있는 것은, 한국이 예로부터  애니

즘, 샤머니즘, 불교, 도교, 유교가 섞인 종교의  땅이었다는 문화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변화가 진행중이며, 황금 만능주의로 경도돼가고 있고, 전통적인  

대관계가 사라져가고 있는 나라에서 정신적인 피난처를 찾으려는 것으로도 설명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잇고,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적인 축제일은 

두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하나의  종교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42%를 
차지할 정도로 불교는 한국 최대의  종교이다. 개신교는 인구의 35%에 달하는  신자를 
확보해 불교를 바싹 뒤쫓고 있으며,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신자를 가진  카톨릭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자가 가장 커다란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
는 셈이다. 필리핀을 제외하면, 이런 현상을 아시아에서 한국만의 독특한 점이다.

    한국, 기독교의 새로운 메카
  1785년, 최초의 카톨릭 신부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100년 동안

나 박해를 받았다. 그 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에 와서 93명의 한국인
과 
10명의 프랑스인을 포함한 103명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최

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은 아니었다.
  카톨릭은 이미 17세기부터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당시 조정의 사신들이  이탈리아
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중국어복음서를 북경에서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따

서 한반도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사람은 평신도이다. 이들 평신도들은 신부의  숫자
가 
충분하기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83년까지만 해도 불교가 한국에서 으뜸가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
교 
교파의 위세가 커졌고, 그 중에서도 특히 카톨릭이 급성장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독교 교파가 공동체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이 매우 잘 짜여 있는 

독교 교파는 직접 밖으로 나가서 신자를  맞이하며, 또 넉넉한 재정 수단을 가지고  

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장애인들과 고아들, 외로운 노인들과 극빈자들을  따뜻하
게 
보살피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민주주의를 열만하던 시기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정치
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30년 전에 비해 기독교 신자는  여섯 배나 증가하였다. 

컨대, 한국은 기독교 신앙의 세계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순복음교회의 예는 시사적이다. 1958년 다섯 명의 신자로 출발한 순복음교회는  오

날 세계적으로 1,200만 명의 신자를  거느리고 있다. 시작할 당시만  해도 간이 천막
을 
예배 장소로 사용했던 순복음교회는,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 중 한 곳인 여

도에, 4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으며 주일마다  일곱 번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의 설립자인 조용기 목사의 사제들은 신자들에게 정치인과 경찰, 그리고 군

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강요할 정도로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한 해의 예산이 1
억 
달러가 넘는 순복음교회는 몇십만 부의  신문을 발행하는 신문사를 두  개나 소유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는 현직 사업가 클럽이 있을 정도이다.
  또 순복음교회는 동유럽,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28개국에 75만  명의 선교사
를 
파견했으며, 일본과 미국의  한인 사회에 많은  목사를 보냈다. 게다가  미주 지역에
만 
200개의 교회를 가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병원과 고아원, 기술고등학교와  호스

스(역주 : 고아, 노인 등을 수용하는 양육원.  또는 순례자, 여행자를 위한 무료 숙박

설)등도 가지고 있다. 순복음교회의 운영위원 중 한사람인 차인석씨는 다음과  같이 

명한다.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지역적인 것입니다. 최초의 기독교인은 이스라엘에서 나와 

중해 주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우를 보면, 한국에서 일본과 동남아

아로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7세기에서 14세기까지 한반도의 군왕들에 의해 국교로 선포되었던 불교는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쇠퇴의 길을 걷다가, 일제 식민지시대에 와서 국교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반도에 들어온 불교는 원래의 교리에 토착 신앙과 미신이  많이 가미된 대승불교의 마
하야나 경전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는 승려의 2/3가 여자일 정도로 여자

에게 인기가 높다. 개신교만큼 공격적인 포교활동을 펴지 않던 불교는 기독교의 점진

인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도시 지역의 포교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라서 전통적인 불교 시찰 이외에도, 기독교가 오래 전부터 그랬듯이 아파트나 일반 건
물에 포교당이 들어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불교 사찰은 관례적으로 산 속이나 숲 속에 위치해 있었다. 황금을 

힌 종과 초록, 주홍, 파란색  지붕으로 요란하게 치장되어 있는  태국의 사원과 비교
할 
때, 한국의 사찰은 자연색의 목재로 지은 오래된 건축물이어서 그런지 훨씬 엄격한 분
위기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엄격한 만큼 훨씬 더  아름답고, 그만큼 더 진실한 분위

를 자아낸다. 또한 한국의 사찰은 조화로움을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서는 독실한 믿

이 배어 나온다. 승려들도 사찰의 정숙한 분위기에 걸맞게 주홍색 장삼이 아닌 면으로 
된 회색 승복을 입고 있다.
  부산의 북쪽에 위치한 범어사라는 절에서  불교의식이 거행되는 것을 본 적이  있
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을 지나 30분 정도 걸어서야 절에 도착할 수 있었다. 9월 
말 경이었는데, 가을의 분위기를 듬뿍 담은 푸른 채소밭 한가운데에 몇 채의 건물이 

었다. 날이 저물어 저녁 7시가 되자 몇 가닥 줄에 의지해서 높은 처마 밑에 매달려  

던 커다란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멀리서 징소리가 화답했다. 약간 둔중해 보

는 이 악기에서 다양하고 예민한 소리, 기쁜 소리,  혹은 탄식하는 소리를 끌어내기 

해 스님은 능숙하게, 그리고 점점 더 빠른 리듬으로  북을 치기 시작했다. 가끔 날카

운 징소리가 메아리쳐 울려왔다. 그런 다음에는 북소리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더 
빨라졌고, 사람의 혼을 깊이 잡아끄는 소리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고요해

다.
  그러자 밤의 적막 속에서 목소리들이 서서히 일어났다. 울창한 숲 속, 천연의 목재
로 
지은 사찰의 중심에서 울려나오는 깊고 느릿하고 장엄한 노랫소리였다. 의식이  끝나
자 
스님들은 아무 말 없이 만면에 커다란 미소를 머금고 지나는 길에 들른 외국인 길손에
서 그들이 먹는 소박한 야채죽을 나누어주었다.
  한국에 있는 2만 명 정도의 이슬람 신자들은 한국전쟁 때 개종한 사람들이다. 북한
의 
도발로부터 한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16개국 가운데는 터키도 있었다. 터키 병사들
은 
남북 양쪽의 국민들에게 알라의 말씀을 전파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종교의 용광로
  체계가 잘 잡힌 종교들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전통적인 신앙도 여전히  활발
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교는 한국의  모든 사회 관계에 스며들어  있으면서, 약 40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종교로서 인정받고 있다.
  BC 552년에 태어난 중국의 철학자 공자의 가르침이 초자연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유교는 창시자와 그 제자들을 계승자들이 신성함으로써 대중 속에서  교리
를 
전파할 수 있게 된, 일종의 신  없는 종교이다. 오늘날 유교 서원의  숫자를 세는 일
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장 중요한 서원이 서울에 위치한 성균관대학교 안에 있기 때문
이다. 이곳에서는 붉거나 흰 예복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망건을 쓴 유학생들이 제단 

실을 하는 낮은 탁자에 양초를 빙 둘러 꽂아 놓고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바치면서 공
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1년에 두 번씩 거행하고 있다.
  유교의 경직되고 보수적인 면이 한국의 현대화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이야기가 자
주 거론되어왔다. 하지만 사회의 계층화, 세대간의 존경, 유교철학에 의해 강조된  가

에 대한 존중 등이 한국  사회의 물질주의와 인간성 상실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또 전통 종교 중에는 동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동학은 부정부패와 외세에  대항하
기 
위해 절대적 자연주의의 이론을 바탕으로 전개된  사회운동으로, 1860년에 시작되었
다. 
이 운동은 오늘날에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는 샤머니즘이다. 이  신앙에 따르면, 무수히 

은 정령과 악귀가 세계를 채우고 있으며, 살아 있는 존재들, 나무, 바위, 집,  건물 
등에 
깃들어 있다. 샤머니즘의 특성 중 하나는 죽은 자에게 영혼이 있다는 독실한 믿음이
다. 
대부분 여자로 구성된, 샤머니즘의 사제인 '무당'은 죽은 자의 영혼과 산 사람 사이에
서 
매개자 역할을 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한다.
  샤머니즘의 의식은 '굿'이라고 불린다. 이 의식을 진행하면서 무당은, 많은 음식을 

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울부짖으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후에, 말 그대로 최면  상태
에 
빠져서 영혼과 대화를 나누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무당이 불 위를 걷고, 칼을  맞으
며, 
대화를 나누던 죽은 자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이때 똑같은 굿은 

나도 없다. 모든 굿은 목적에 따라 다르고, 무당의 행위에 따라 다르다. 그 주술이 낯

거나 친근한 것에 관계없이, 샤머니즘은 한국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한국인의 문
화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이다. 한국에는 5만 명의  무당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
며, 
사람들은 출생, 결혼, 사망 등 삶의 중대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점을 보기 위해 무당
을 
찾는다.
  한국인은 애정이나 돈, 건강 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또는 불길한 기운
이 
그들 주위에 감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로 역시 무당을 찾는다. 무당의 말에  따
라 
영혼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죽은 누이를 죽은 자에게  시집보내는 '영혼결혼식'
을 
치르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주변이 평소와 다리 소란스러웠던 적이 있
다. 푸른색, 노란색, 흰색, 초록색의 길게 늘어진  천조각들이 몇몇 아파트 창문에서 

에까지 늘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양초와 과일,  

병, 돼지머리 등이 놓여 있었다. 굿이었다. 나는 얼이 빠진 채 눈을 크게 뜨고 그  장

을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자동차 사고로 세 아이가 죽었기 때문에 굿을 하는 것이라고 이웃 남자가 
설명해주었다. 물론 자동차 사고는 운전자의 부주의나 고장난 신호등, 불가항력적인 

도 침범, 항상 쌓이는 스트레스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자동
차 
사고로 사망한 아이들의 부모는 아마도  어떤 혼령이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그래서 무당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그 무당은 많은 구경꾼 앞에서 노래하
고 
춤추며 혼령을 불러냈다. 지역 주민 외에도 호기심이 발동해서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
춘 
채 몇 분간 지켜보다가 서류가방을 손에 들고 다시 지하철로 향하는 행인들도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 15층이나 되는 아파트, 하루 중 그 시간에 몰리는 교통량,  뉴욕이
나 
시드니나 도쿄에서 날아오는, 머리 위 수백 미터 상고에 떠 있는 비행기가 얼마 떨어

지 않은 김포공항으로 다가오는 소리 따위가 모두 배경  음악이 되어 시끄러운 소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당은 흔들림 없이 계속 혼령을 불러내고 있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때로 민속이나 미신을 경멸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

로 들어가면, 이런 말들은 180` 달라진다.
  29세의 김선호씨는 미국에서 공부한 후 서울에 와서 정보처리 분야의 개인 컨설팅회
사를 설립했다. 그는 약 100만 달러를 투자했고, 회사의  모든 설비는 첨단기술로 만
든 
것들이었다. 장소도 현대적인 곳이었고, 벽에 부착된 팸플릿들도 모두 서구적인 것이

는데도 불구하고, 김선호씨는 개업식을 하기 전에 무당을 불러 새로 문을 연 그의 회

를 보호하는 의식을 치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무당의 지시에 따라 그는  사무실
에 
돼지머리를 3일 동안이나 모셔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샤머니즘의 신들이 회사의 성

을 빌어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샤머니즘은 다른 종교와 충돌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자나 불교 신자 혹은 이슬람 신
자라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당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굿을 한다. 한국의 카톨릭 신
부 
대부분은 가장 독실한 신자들 중에도 무당이 길일로 정해준  날 결혼식을 하거나 자신
의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한국이 진정 종교의 용광로임
을 분명하게 증명해주는 예이다.

    돈 버는 사업, 이단종파
  이미 들어와 있는 종교 이외에도, 한국에는 이단종파가 득실거리고 있다. 그 수를 

아리기는 어렵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수천 개의 종파가 있고,  또 각각의 종파에
는 
수만 명의 추종자가 있다고 한다. 서울 거리에서는 십자가를 손에 든 채 새로운 구세

의 사진을 흔들어대며 확성기로 구원이 임박했다고 부르짖는 광신도의 행렬을 거의 날
마다 볼 수 있다. 구원받지 않으면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

서 본다면, 한국에서는 매일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셈이다.
  또 민간신앙의 차원을 넘어, 자주 참극을 빚는 종파들도  있다. 실제로 그 종파의 

종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계시된  날의 바로 전날에 집단적으로 자살했다.  그렇지
만 
이런 비극은 이단종파의 신자에게서만 나타난다.
  우연찮게도 이런 이단종파의 신자들은 가장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한

이 지구의 어디쯤에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르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의 노인네들
이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청소년들이며, 특히 사회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남편에게 

종하는, 그러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자 이단종파에서 위안을 찾음으로써 가족의  

을 갈구하려는 가정주부들이다.
  이런 이단종파의 신자들은 한국 대도시의 주된 풍경을 이루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
에서 매일 포교활동을 한다. 이단종파 중에는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  같이 '오
래된' 
종파도 있고, 지도자의 카리스마적인 성격에 힘입어 추종자를 모은 토착종교집단도  

다.
  광명에 살 때 영적 지도자를 자칭하는 사람을 한 명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우리 

회에 나오세요"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교파인가요?"

고 묻자, 그는 그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 교회예요"라고
만 
말했다. 그런데 그의 친척들 모두가 그를 추종했고, 자식들도 그에게 맡겼다. 그는 아
주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으며, 언제나 최신형의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이단종파는 

엇보다도 돈벌이가 잘되는 산업인 듯했다.

    비밀결혼식
  한국에서 이단종파가 성공할 수 있던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사회적인 요인을 우선 
꼽을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화적인  요인도 마찬가지 이유로 

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종교의 땅'이  되어버린 한국에서는, 우두머리에 대한 충

과 복종을 가르치는 유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학자인 이성하씨는 이렇
게 
강조했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20세기 최고의 독재자 중  한 사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 사람들이 보여준 절망적인  몸부림
을 
보면, 한 나라가 능히 하나의  이단종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

다."
  또한 이단종파들의 세계적 상징이  되어버린 통일교가 한국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선명씨는 1926년 7월  14일 북한에서 태어난T다. 그의 말에 따르
면, 그가 16세 되던 해에 어느 산꼭대기에서 예수가  그의 앞에 나타나, 그리스도가 

다 이룬 사명을 이 땅에서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는 즉시 행동에 옮겼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단종파들을 완곡하게 일컫는 말인 '신흥 사설 종교단체'  중의 하나인 통일교를 설립

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인정받지 

한다'는 성서의 한 구절을 증명이나 하듯 한국에서는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1970년대 초, 문선명 L씨는 그 시절의 군사독재정권과 사이가 나빠져 조국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조국을 떠난 진짜 이유는 자신의 활동을 뒷받침해줄 자금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그 후 1980년대 말이 되자  한국에서는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문선명

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한국에서 환영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서울에
서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 중의  한 곳에 은행보다 더 엄중한  감시체계가 설치된 거대한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극장  하나와 중앙 일간지인 <세계일보>의  소유자이기도 
한 그는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또 한국의 인삼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무기공장의 지분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그의 영향력을 정치권에도 미치고  있다. 그는 서울 정부가 모스크바  정부
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전부터 러시아에서 한국을 위해 비공식적인 몇 가지 임무를 수행
하였고, 북한에 들어가서 김일성을 만나기도 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알려진 그
가 
북한에 가다니! 남북간에 어떤  교환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통일교는  한국의 안정
을 
통해 득을 보고 있다. 여기에 대해  사람들은 통일교가 "세무조사를 받지 않는  특혜
를 
누리고 있다."고 수군거린다.
  통일교 관계자는 한국보다는 일본에 더 많은 신자가 있다고 추산한다. 그러나 문선

씨가 한국 내에서 평판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의 재산과 통일교의 

력한 세력을 둘러싼 의혹 때문에, 또 한국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고 있다는 이유로 

를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분명 전세계에 한

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그를 지지하는 사람의 숫자는 그를 추종하는 신자의 숫자만큼도 
안 된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인기가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추종자가 그
리 
많지 않다. 외국에 살고 있으면서 한국을 상징하는  인삼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단

파의 지도자이지만 주변에 영향력 있는 인사를 거느리고 있다. 반공주의자이자만  평

에도 다녀왔다. 문선명씨를 둘러싼 미스터리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3년마다 8월 25일이 되면 집단결혼식이 거행되는데, 전혀 신비롭지 않을뿐더러  오

려 커다란 놀라움을 안겨주는 편이다. 1995년 8월 25일의 집단 결혼식 때는, 서울 올

픽 스타디움이 3만 5,000개의 네모난 타일로 만든 거대한 흑백의 바둑판 모양으로 변

되었다. 3만 5,000쌍 모두가 남자는 검은 양복을, 그리고 여자는 흰색 전통 혼례복을 

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때의 집단결혼식이 통일교가 이제껏 거행해왔던  집단결혼
식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점이다. 덧붙여 말하면,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
른 
지역에서도 같은 날 결혼식이 있었는데, 바로 그날 결혼식을 올렸거나 결혼서약을 재

인한 통일교 신자가 거의 36만 쌍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첨단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일지라도 어떤 의식
을 거행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는 시대이다. 결혼식은 인공위성으로 중계방송  되

고, 대형 스크린을 통해 배우자를 만난 사람들도  있었다. 통일교 신자들에게 로맨스
는 
제한되어 있는 반면, 깜짝쇼는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듯하다. 그들  중 가장 운
이 
좋은 사람이 미래의 배우자와 전화 통화를 한 번 한 사람들일 뿐, 나머지 대부분의 사
람들은 결혼식이 거행되는 순간에 처음으로 배우자를 만났다. 긴 시간의 기도 끝에 신
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모든 커플을 결정하는 사람은 공식적으로는 문선명 씨 자신이
다. 
그리고 문선명씨도 자기 부인과 그렇게 맺어졌다고 한다.
  1995년 8월 25일, 163개국에서 결혼할 사람들이 입국하였다. 요코하마에서 교사로 

하고 있던 29세의 일본인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한국처녀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
다. 
그런데 그는 고작 한국어를 열 마디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와 결혼할 여자
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의 사랑하는 조국은 서로 인접해 있기는 하지
만 사이는 결코 좋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해 보였으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신이 선택해준  사람이기 

문에 우리의 결합은 틀림없이 힘차고 행복할 겁니다."

    하나님은 한국인?
  1959년 이후 서울에 살고 있는 살레지오회(역주  : 1857년 장 보스코가 창립한  수

회)의 미국인 수도사 잭 트리솔리니의 말이다.
  "한국의 신부님들은 점점 더 명사(명사)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분들은 선교사

서의 임무를 자주 망각하고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면, 교구에서 하는 일에 비
해 
신부님들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다고 해야 합니다."
  외국인 선교단의 풍세 신부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단종파의 추종자는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제도

의 종교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단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고 있는 복잡한 
문제에 대한 확신한 해결책을 원합니다. 그러나 제도권의 관념적인 종교들은 그런 해

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에 내려온 하나님의 대리인임을 자칭

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게서 그런 해결책을 찾으려는 겁니다."
  많은 '신흥 사설 종교단체'는 개신교나 불교, 카톨릭 공동체에서 분열되어 탄생한  

체들이다. 외국인 선교단의 한 프랑스인 신부의 말이다.
  "많은 개신교 공동체가 이단종파와 마찬가지로 극히 강화된  학습과 엄한 규율을 강
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쉽게 분열이 일어납니다. 흔히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유일신 신

은 한 인물에 대한 추종으로  빠르게 변화합니다. 한국에서는 카톨릭과 불교의  관계
가 
카톨릭과 개신교의 관계보다 훨씬 더 가까워 보입니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관계가 지

처럼 서먹서먹해진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한국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 위해  불교와 카톨릭과 개신교를 
혼합하려는 이단종파도 있다. 그렇게 하면 보통은 매우 민족주의적인 종교로  받아들

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단종파는 한국인의 관심사를 주된 교리로 채택하는 경향이 있

며, 서울이 태초에 신성에 의해 선택된 장소라고 주장한다. 또한 스스로 한국적인 가

의 열렬한 옹호자로 보이려고 하며, 모든 외세를 배격한다.
  줄곧 이런 문제를 연구해온 대학교수 예경옥씨의 분석이다.
  "한국 사람은 민족주의의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형 종교  
중 
그 어느 것도 한반도에서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습니
다. 
게다가 어떤 이단종파는 일본의 가에 점령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미국의 한반도 진주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서구화에 대
한 
반작용으로 출현하는 이단종파도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영적인 지도자를 자칭하는 많
은 
사람은 신이 한국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교회에 가보면 태극기를 휘두르는  성
모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지구의 종말이 오면, '구세주'
가 
한국이 중심이 된 세계를 재창조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도 종교계는 아름답다
  한국의 종교계는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 외에도, 사회봉사와 민주주의 옹호와 같은 

은 일에서든, 부정부패 사건들과 권력자들의 결탁과 같은  궂은 일에서든, 언제나 역

의 현장에서 봉사해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은, 한국이 가난
한 
나라였을 때 국가 차원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할 수 없던 수많은 고아원과 병원, 호스

스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설립한 일이다. 이런 시설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유해지기는 했어도 정부측에서는 결코 극빈자에게 최우선

인 도움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종교계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 교회는 이 분야에서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많은 일을 
했다. 복음 전파사업의 틀 안에서 설립된 연세대학교와 같은 몇몇 개신교 대학교도 역
시 훌륭한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볼 때, 기독교 신자는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물
론 
모든 기독교 신자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군사독재시대에는 성직자도 분열되어  있

으며, 특히 고위 성직자에게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많은 사제가 '북한의 위협'이

는 명분 아래 정치적, 사회적 보수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군인의 그늘에서 편안하게 살

다.
  또 몇몇 주교는 더 많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직접 시위에 나서기도 했던 자
기 교구의 신부에게 미사 집전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고위 성

자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했고, 때로는 과격한 행동으로  투옥되
어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교회와 불교 사찰들은 언제나 시위자와 반체제 인사

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포악한 공권력이라고 해도 감히 성스러운 장

는 침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지 중 하나이다. 199
6
년 말에서 1997년 초에 걸쳐서 일어났던 사회운동 당시, 명동성당 광장에서는 많은 집
회가 열렸다. 명동성당은 시위의 출발점이었고,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던 노조 지도자

의 피신처이기도 했다.
  또 광주 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선 것도 종교계였다. 임병태 

부가 주도한 정의평화위원회는 군사정권의  억압의 상징이 되어버린  광주에서 비극을 
주도한 책임자를 밝혀내기 위해 오랫동안 활발하게 활동했고, 지금도 여전히 당시 희

자의 가족을 돕고 있다. 정의평화위원회의 투쟁은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유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승리로 끝났다. 물론 종교계의 활동이 그들의 체포에만 한정되어 

었던 것은 아니다. 종교계의 활동은 정당한 사법처리를 요구하는 의지가 여론에 지속

으로 반영되도록 힘을 기울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로, 사회적 

등이 생길 때마다 흔히 중재자로 요청되곤 하였다.
  1997년 겨울 파업이 일어났을 때, 카톨릭 교회는 명백하게 파업자 측을 지지했다. 

냐하면 주교단의 대변인이 이렇게 선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부가 대화를 거부하지 않기를 희망하며, 정부가 화해의 길을  열고 노동
법 
수정을 제안하기를 희망한다. 노동자는 최후의 수단으로서만 파업을 사용해야 한다. 

러나 사용자 또한 책임의 일부를 짊어져야 할 것이고, 노동자에 대한 경직된 태도를 

려야 할 것이다."
  교회의 영향력이 그토록 막강하다 보니 정치 지도자들도  종교 지도자들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종교계는 한국 내부의 문제에도 참여하고 있다. 요청이 있는 경우에 평양 당국에 비
공식적인 경로로 밀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종교계는 여러 차례에 걸쳐  기아
에 
허덕이는 북한에 돈이나 식량, 의약품을  보내기도 하였다. 물론 이  경우 북한은 정
부 
차원의 공식적인 발표를 배제한다는 조건으로 적이자 형제인 한국의 도움을 받는 것을 
허락하였다.
  195년 한국 정부는 북한 당국의 초대장을 소지한 네 명의 카톨릭 신부와 네 명의 개
신교 목사가, 북한의 나진-선봉  지역에 병원과 교회를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을 허가했다.
  한국 종교계는 항상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한국 주교회의는 오래 전부터 북한 
선교위원회를 발족시켜 운영하고 있으며, 휴전선 이북으로 종교인을 보낼 준비가  완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북한의 교회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실을 주목해야 한다. 서울의 추기경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주교나  마찬가지

다. 따라서 양쪽 정부 모두가 필요로 하는 중재자 역할이 아니더라도, 종교계는 북한
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양국간의 대화가 유지되도록 힘 쓸 수 있다.

    돈이 구원과 자비를 낳는다.
  좋은 일에서든 궂은 일에서든 종교계는 한결같이 역사의 증언자로 남아 있다. 사람

은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성직자가 사회적 명성과 권력, 돈을 탐하는 귀족처럼 행동하
는 
일이 너무나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빈민촌 남골의 한 아낙네의 씁쓸한 이야기다.
  "아기를 낳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신부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어요. 그분은  
잘 
지내느냐, 아기는 잘 크냐, 아기 키우기가 너무 힘들지  않느냐는 등의 말은 묻지도 

더군요. 그분은 교구에 내는 분담금을  여태 내지 않았다는 것만 알려주고는  가버렸

요. 종교라는 게 얼마나 역겨웠는지 몰라요."
  성직자들이 사회적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맨 처음 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커다란 교
회를 짓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신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

의 위력을 보여줄 만한 당당한 건물을 원한다고 한다.
  1967년 이후 나환자 수용소에서 일하고 있는 스위스인 수녀의 말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특히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은 훌륭한 신자가 되려면 돈을 내야

고, 영혼을 구원받으려면 자기 교구에 반드시 많은 헌금을 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교회 유지 헌금으로 소득의 10%를 내야하고, 카톨릭 신자들은 소득
의 3%를 내야 한다. 따라서 극빈자는 낼 돈이 없으므로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교회에서 나가게 된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갈 곳은 이단종파들밖에 없다.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교가 다시 비난의  대상
이 
된다.
  "선교사라기보다는 행정가의 삶을 살고 있는  성직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삶이  전
혀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것은 교회에 악영향을 미칩

다."
  잭 트리솔리니 신부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런 변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 기독교 공동체가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철저히 조
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조사 결과는 결정적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오

날 네 가지 악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악은 교회의 비대화이다. 어떤 교구에는 1만 명 이상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거기에서는 신부 혼자 힘겹게 고해, 상담, 영적 지도를 도맡아 하며, 관리인
의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이런 경우  교회 일에 신자들이 간섭하는  결과를 낳게 되
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속화 운운하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악이다. 교회가 너
무 
안정되어 있고 또 온갖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와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마침내 돈을 
숭배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관용과 구원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런데 돈이 모
든 
것을 판단하는, 신앙의 성실성까지도 판단하는 유일한 가치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헌
금 
액수도 과도해진다. 이것이 세 번째 악이다. 이런  교회는 무엇보다도 극빈자에게 소

감을 느끼게 하는 중산층의 교회라는 점에서 이런 경향이 뚜렷해진다. 결국 이 기독교 
공동체의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네 번째 악은 교구들이 거의 유태인 거

지역처럼 같은 계층의 사람만 환대할 뿐 다른 계층의 사람은 적대시할 정도로 점점 더 
폐쇄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카톨릭대학교에 있는 한 수녀의 말이다.
  "만약 교회와 성직자의 보수성과 과시적인 사치행각이 계속된다면,  한국의 기독교
는 
서구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한 쇠락의 길을 밟을 위험이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점점 성숙되고 있는 마당에, 사람들은 종교를 더 이상 구
원의 항구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점증하는 물질주의가 종교적 무관심을 부추길 가능

이 크다.
  종교계 역시 파벌간의 암투와 권력투쟁에서 예외적인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1994
년 
4월부터 시작하여 불과 얼마 전에 일단락 지어진 불교 조계종 사태에서도 잘 드러난
다.
  당시의 사건은 종교계와 권력의 결탁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었다. 선거에서의 지지를 대가로, 아니면 그와 반대로 사찰을 짓도록 인가를 내주는 

가로 돈이 오갔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게다가 분란의 중심에 있던 서의현 스님은 

국 전역에 있는 1,750여 개 사찰로부터 주지로 임명되는 대가로 이미 상당한 액수의 

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 중  한 명은 주지로 임명된 후  감사의 표시로 3,500
만 
원을 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런 '작은 정성'을 보이는 것은  아시아에서는 이미 관례에 속

는 것이라며, 또 서양에서도 그런  정도의 성의표시는 하고 있지  않느냐며, 그런 것
을 
뇌물수수와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인들  스스로
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사찰을 운영하면 돈벌이가 잘될 수도 있다. 한 스님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찰은 평온과 기도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권력투쟁과 상상을 초월하는 

수의 재정적 음모가 행해지는 중심에 서 있는 사찰도 있습니다."
  불교계에서 일어난 신구 세력간의 가치논쟁 이후, 많은 학교와 몇몇 라디오 방송국
의 
통제에 대한 투쟁과 수천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에 대한 공방이 자취를 감추었다. 조계
종 사태에 의해 밝혀진 것은, 종교와 돈과 정치의 검은 관계가 불자에게도 예외는 아

라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양심적인 많은 사람의 고백이 잇따랐다. 몇몇 고위 성

자의 청렴함에 명백한 의혹을 제기하는 고백들이었다.
  대도시의 고독과 냉엄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게 해줄 평화의 항구를 신앙 속에서 찾
으려는 신자들에게, 종교계에서도 대형 뇌물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 더 

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관습의 무게
  서울. 소음과 군중,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교통체증과 끊임없는 움직임, 무거운 피

가 느껴지는 도시. 그리고 갑자기 3일 동안 텅 비는 도시. 고요, 침묵, 원활한 교통소
통, 
행인 없는 한적한 주택가, 잠깐 동안이나마 새들의 속삭임이 들려오고, 휴식 같은 푸
른 
하늘이 보인다.
  서울이 텅 비는 이 3일은 추수가 끝났음을 확인하고 풍성한 수확에 대해 감사기도를 
드리는, 매년 9월이면 찾아오는 한국 최대의 명절 추석을 전후한 휴가기간이다. 이때
가 
되면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고향을 찾아간다. 그렇게 흩어진 가족이 한데 모여서 세상
을 떠난 조상에게 정성 어린 음식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것은 바로 지극한 효
를 
강조하는 유교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이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관습을 넘어, 특히 장자들에겐 커다란 의무가 된다. 그렇기 때

에 매년 4,500만 중 2,800만의 인구가 길을 떠난다. 기차표나 비행기표는 몇 달 전에 

리 예약을 해두어야 한다. 그러면 며칠 동안 서울은  1,100만의 인구 중 40%가 빠져나
가 흡사 유령도시 같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국가의 주요 간선도로들은 기록적인 교통혼잡으로  몸

을 앓는다. 서울에서 450km 떨어진 한국의 대도시 부산까지 가는데 20시간이  넘게 걸
리기도 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마 가족이 회포를 푸는 데는 여섯 시간도 채 
안 
걸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빌어먹을 유교와 유교가 강요하는 모든 궂은 일에 욕설을 
퍼붓고 다시 운전대를 잡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해에도 이와 똑같은 과정이 되풀이되

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듯 한국인들의 생활은 짜증나게 만드는  규율과 원칙, 사회적인 의무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심각하게 이런 관습들을 뜯어고치려고 마음먹지 않는다. 

론 젊은 세대는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으며,  3일간의 추석 연휴 동안 친구들과  함
께 
휴가를 가거나 때로는 외국으로 여행을  가는 젊은이들도 많다. 이것은 그  부모로서
는 
참을 수 없는 반전통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한
다.
  "그애들은 26개월간 군대생활을 합니다. 그애들은 직장을 구하고, 또  결혼도 합니
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약간 빈정대는 말투이긴 하지만, 근거  없는 말은 아닌 듯하다.  요컨대 어떤 의식
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추석과  같은 국가적 신앙과 전통을  재검토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강요하는 여러 가지 구속들만을 재검토하자는 것이다.
  30대의 광고업자 이홍화씨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로서는 유교와 조상 숭배 전통이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조

의 혼령이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중요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온 국민에게 집단적인 의무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은 자기 조상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죽은 사람에게 음식을 

치기 위해 20시간 동안이나 자동차를 몰아야 하다니, 기절할 노릇 아닙니까?"
  사회학 교수 이송자씨는 한국인이 이런 엄격한 원칙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다.
  "아시아에서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개인의 권리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
다. 
극단적인 경우지만, 집단의 성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황에서는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특히 누구도 집단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는 등의 많은 사회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이러
한 
감정은 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일성을 추구하고 있으니까요. 한

은 실제로 지구상에 남아 있는 최후의 분단국가입니다. 게다가 급속한 경제개발이 삶
의 
양식과 소비형태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세대간의 차이로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이해하
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은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국가입니다. 많은 사람이 

실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의식과 전통에 더욱 매달릴 필요가  생기
는 
것입니다."

남들 다 하는 대로
  이런 사회적인 의무들은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때로는 웃어넘길 

도 있는 것들이지만, 중대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런 예들은 무수히 많다.  여름

면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낸다. 호텔이 투숙하는  사람들도 있고, 콘도를 빌

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이 해변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한다. 여름에는 계절

이 불기 때문에 비를 맞아가며 캠핑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여름에는 당연히 캠

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비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캠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해 전에 직접 겪은 일이다. 9월 말경이던가, 동해안의 해변을 산책하던 중에 아

다운 작은 해수욕장을 하나  발견했다. 아주 화창한 날이었는데,  주중이었기 때문인
지 
해수욕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수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물 속에 막 발
을 
담그려는 순간, 60대 정도의 노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소리쳤다.
  "물에 들어가면 안 돼. 지금은 9월이란 말이오."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왜요? 9월에는 바닷물이 위험한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오."
  나는 집요하게 또다시 물었다.
  "9월에는 해안에 상어가 돌아다니나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9월에는 해수욕을 하지 않아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9월에는 사람들이 해수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

로 그런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습관이기  때문에, 바캉스가 끝났기 때문에 

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날씨는 너무나 화창했고 물도 따뜻했다. 외국

인 데다 남들 눈에 약간은 정신나간 사람으로 비쳤겠지만, 나는 끝내 금지를 깨고 해

욕을 했다.
  하지만 조금은 답답한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사회적인 구속력을 만들어

는 배경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론 지역 토박이 한 사람을 만났을 뿐이
니까 모든 한국인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관습 때

에, 또한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만든 많은 규율이  존재한다. 따라서 한국에
는 
독창적인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
  결혼 역시 광범위하게 의례화되어 있다. 이미 보았듯이,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두 
젊은이의 결합이기 이전에 하나의 계약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단 계약이 성사되면 당

히 소비가 뒤따른다. 한국의 관례와 풍습을 모르는 많은 서양 사람의 눈이 휘둥그래지
는 신혼여행이 바로 그 시작이다. 결혼한 많은 젊은이들은 대체로 한국의 최남단에 위
치한 커다란 섬 제주도에서 밀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따뜻한 기후와 조용한 분위
기, 
수려한 경치를 가지고 있는 제주도는 '열대의 낙원'으로 이름이 나서, 한국인이 가장 

호하는 여행지가 되었다.
  여러 쌍의 신혼부부를 그룹으로 묶어 단체로 가는 신혼여행에는 하루 방과 일출, 폭
포 구경 등 꽉 짜여진 여러 코스의 관광이 포함되어 있다. 남자는 주로 회색 양복을 

고 여자는 전통 의복인 한복을 입고 유명한 관광지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100m 이
상 줄을 서는 경우도 있다.
  제주도에서 제법 돈벌이가 짭짤한, 사진사를 겸한 택시기사는 신혼부부들을 차에  

워 이곳저곳 옮겨다니면서 매번 기념사진을 찍는다며  신혼부부들에게 '낭만적인' 포

를 취하라고 강요한다. 따라서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지에서 찍어온 사진을 보면  모
두 
똑같은 배경에 똑같은 포즈, 똑같은 식당 등이 등장한다.
  호텔업자들 역시 '2박 3일'의 숙식 외에, 첫날밤을 치르고 얼굴이 푸석푸석해진  새

랑에게 교활한 윙크를 보내며 '정력제'가 첨가된 요리를  곁들여 제공함으로써 많은 

입을 올리고 있다. 물론 젊은  세대들은 이런 것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부모
의 
뜻에 맞서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박수정씨의 이야기다.
  "우리는 방콕으로 신혼여행을 갔거든요. 그랬더니 난리가 났죠. 부모님 말을 안 들

다는 거예요.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 친정 부모님들은 우리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어
요. 
다행히도 사내아이를 낳아서 부모님들의 화가 풀어졌지요. 안 그랬으면 몇 년 동안 고
생했을 거예요."
  이 대목에서는 한국의 부모들이 십중팔구 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젊은 부부들은 점점 더 자주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데, 태평양의 미국
령 
섬 괌도 가장 인기가 높은 곳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고 

서 아늑함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신혼부부들은 대개  단체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시 양복과 한복의 차림이거나 아니면 둘 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똑같은 옷을 가장 현
대적으로 차려입는 경우도 있다. 신혼부부들을  태운 보잉 747기에 올라보면  누구라
도 
각각의 커플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아이 낳을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산

는 선택의 여지없이 피를 맑게 해준다는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
  "정말 고역이에요. 하지만 시어머니가 늘 침대 머리맡에서 지키고 앉아  있기 때문
에 
할 수 없이 한 그릇을 다 먹어야 해요."
  한 친구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남편의 부모가 짓는다.
  한국의 '생물학'은 서양과는 다르다. 여자들은 열 달 동안 임신하는 것으로 알려져 

고, 아이는 낳자마자 이미 한 살을 먹는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나이를 물을 때는, 

것이 한국식 나이인지 서양식 나이인지를 항상 구별해야 한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왕절개를 해서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무당이 길일이라고 지정

준 정확한 날짜에 아이를 낳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해서도 사회적 습관이 많다. 사내아이를 선호하는  것, 부인이 남편에게 

종하는 것, 여자들은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시댁에 가서 청소와 설거지를 해야 한다
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 역시 현실적으로 많은 반대의 벽에  부딪치
고 
있다.

    항상 옳은 사장님
  유교사상에 따라 세분된 연공서열제도 때문에 직장에서도 다시  한번 공자가 비난받
고 있다. 직장에는 부장, 차장, 과장 등 무수히 많은  서열이 있다. 이때 회사의 정책
을 
결정하는 고위 간부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부장이 되면 일이  훨
씬 
적어진다. 이런 현상은 특히 은행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창구에 있는 여직원들은 항상 생글생글 웃으며 꾸준한 리듬으로 일한다. 그러나 그

들 뒤에서 커다란 책상에 편안하게 앉아 흰색 와이셔츠에  알록달록한 넥타이를 맨 남
자들은 고객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헤벌리고 낮잠을 자지 않으면 신문을 보건, 느릿느
릿 부채를 해가며 그녀들을 감시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개

해서 해결하는 것이고, 특히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명세서에  사인하
는 
정도이다. 그리고 잘못된 경우에 대한 책임을 진다.
  승진은 능력순이 아니라 연공서열순으로 이루어진다. 윗사람을 존중하도록 되어 있
는 
이런 상황 탓에 한국의 간부사원들은 유럽이나 미국의  간부사원들과는 달리 창의적이
지 못하다. 그들은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이런 확고한 서열제도가 잇기 때문에 

유 있는 미소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부하직원이 회사 사장보다 더 좋은 차를  타
는 
경우는 거의 볼 수가 없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을지라도 윗사람이 퇴근하지 않고 있으
면 사무실을 나오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흔히 비생산적이라고 말하는 너무 경직된 시스템을 만들어낸
다. 
아주 작은 일을 결정할 때도,  또 개인 회사인 경우에도,  수많은 부서를 찾아다니면
서 
수도 없이 사인을 받아야 한다. 훌륭한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알며 

격증도 갖춘, 의욕이 넘치는 젊은이들은 말단 직책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윗사람들

게 자기 생각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얼마나 의욕이 꺾이는 일인가!
  하지만 한국의 몇몇 그룹들은 조직을 대폭 개편하고 있다. 간부사원들이 결과에 더
욱 
많은 책임을 지면서도, 부서 내에서 점점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창의적인 

안을 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며,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재도 능력에 따
라 
승진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없지 않다. 40세 이하의 간부사원이 일반 관리직을 수행하
고 
있는데, 이것을 불과 5년 전만 해도 생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종신고용은 더 이상 

장되지 않는다. 그리고 몇 년 전만 해도 머리가 허옇게 세면 곧 승진할 것이라고 여겼
지만, 지금은 더 이상 능력이 없는 50세의 회사원들은 해고되거나 명예퇴직을 권유받
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변화는 현실적으로 한국을 관통한 경제위기로 인하여  필연적

로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확고한 서열제도는 모든 사회생활 속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직함이 매우 

요하다. 회사에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과장님, 부장님, 상무님 등 언제나 직함을 부

다. 어떤 사람에게든 이 빌어먹을 '님'자를 붙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토록 직

에 집착하는 것이 회사원들에게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형제자매들

차 이름을 부르지 않고 큰형이나 작은형, 큰누나 혹은 작은누나라고 부른다. 따라서 

내아이는 자기보다 손위의 여자 형제를 '누나'라고 부르고, 여자아이는 자기보다 손위
의 
여자 형제를 '언니'라고 부른다. 결국 서열화된 사회나 문명화된 사회나 똑같은  현상
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저기에 유니폼을 입은 경비원을 볼 수 있다. 유니폼을 입는 경우는 아주 

기 때문에 때로는 버스 운전사를 경찰관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들 모두 푸른 셔츠에 
견장을 달고 번듯한 모자를 쓰지 있지  않는가! 이런 경비원은 빌딩이나 건설현장이나 
아파트 입구에서 서 있다. 그들은  계속 순찰을 돌고, 매시간  주차된 자동차의 번호
를 
기록한다.
  경찰관의 담당 구역도 매우 광범위하다. 둘씩 짝을  지어 걸어다니거나, 경찰차를 

천히 몰고 가는 경찰관을 어느 지역에서든 볼 수 있다. 이웃한 일본에서와 마찬가지
로, 
두세 명의 경찰관들이 근무하는 일종의 미니파출소 격인 '경찰 초소'가 수없이 눈에 

다. 이웃들 또한 은밀하게 서로를 감시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비밀을 갖는다는 것은 

마나 힘든 일인가! 몇몇 친구가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가면 다음날 모든 이웃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감시체제는 안보라는 이름으로, 공익이라는 명분으로  실행된다. 그러나 이것
은 
대로는 고통스러운 구속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알려지기 때문에 심리적
인 
구속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새로 지은 아파트는 아파트 내부에 인터폰이 설치되
어 
있어서 역시 물리적인 구속감을 갖게 한다. 경비원도  다음날 단수가 될 예정이라든
가, 
자동차 번호가 '서울 4226'인 흰색 소나타 소유자는 즉시 차를 빼달라는 내용의 전달

항을 인터폰을 통해서 모든 가구에 알릴 수 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의 실질적이고 안정적인 면을 높이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억압
을 요청한 적이 없는데도 이런 식으로 '독재국가'의 면모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은 이런 집단적인 구속을 아주 참을성 있게 용인되고 있다.

    필요한 것만 기억하라, 이로운 것이 진실이다.
  한국에서는 겉모습이 꽤 중요하다. 원래의 모습과 꾸민 모습이 가운데서 한국인은 

자를 선택했다. 모든 것이 울퉁불퉁함 없이 매끄러워야 한다. 한국의 많은 속담 가운
데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이런 사고방식을 잘 

타내주고 있다. 어떤 문제가 제기된다고 해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토론을 하지
는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문제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도 되
는 
양 사람들은 무조건 모른 체한다. 따라서 사무실에서는  토론이 거의 벌어지지 않는
다. 
동료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냥 웃고 만다.
  한국의 라디오와 TV에 대해서  연구하던 시절, 그런  현상이 약간 위선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동료 여선생에게 이야기하자,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부서 내에서 조화
를 
이룰 수 있고, 또 그러한 갈등을 없앰으로써 정신건강에 훨씬 이롭다고 대답했던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적당히 넘어 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섹스와 매춘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 서양 여러 나라가 퇴폐적인 반면, 한국은 고결하
고 도덕적인 나라로 인식한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사창가에서뿐만 아니라 사우나나  

집, 다양한 단골손님이 드나들고 겉모양이  그럴듯해 보이는 이발소에서도 창녀를  '
살' 
수 있다. 간략히 말하면, 매춘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
는 
것이다.
  또한 이단종파에 대한 표현도  놀라움을 안겨준다. 사람들은 이단종파를  '신흥 사
설 
종교단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심각한 환경오염은 위협적인 수준이다. 오염의 

도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에, 오염 경보 기준치를 높이지 않으면 오염경보가 무
척 자주 울려댈 것이다. 알코올 중독도 한국에서는 골칫거리이다. 통계는 신뢰할 수 

는 수준이며, 이것을 입증할 만한 실례도 너무나 많다.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해괴하게 국가간의  비교를 해대는 것도 민
족주의적인 발상이다. 해수욕장과 산과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지만 브르타뉴의  해

욕장만큼은 독특하지 못한 제주를,  한국에서는 '아시아의 하와이'라고  부른다. 서울
의 
유행을 주도하는 상업지역인 명동은 사방으로  길이 난 미로 같은  모습인데도 한국의 
샹젤리제라고 부른다. 또 미남 배우이긴 하지만 미국 스타의 명성에는 절대 미치지 못
하는 안성기를 한국의 드 니로라고 부른다.
  심리학자인 예덕상씨는 이렇게 분석한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위안을 삼기 위해, 혹은 자기 나라, 자기 가족, 자기 친구의 이

지를 옹호하기 위해 분명히 잘못 알고 있는 것도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희한한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실질적인 예들은 아직도 많다. 40대의 한국인에게는 심장질환이 자주 

타난다. 사람들은 그것이 주로 직업적인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동료들과  밤
에 
자주 어울리는 술자리나 환경오염, 교통체증, 일상적인 피로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

다. 간략히 말하면, 한국인은 괜찮은 것은 기억하지만, 자신과 국가의 이미지를  손상

키는 것이 모두 잊어버리려고 한다. 겉모습에 집착하는 이런 취향 탓에 한국인의 사진
을 늘 웃는 모습이다. 억지로라도 웃지 않고는 절대 사진을 찍지 않는다.
  어느 주말 나는 몇 명의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소풍
을 갔다. 화창한 날이면 동료들까지  흔히 소풍을 가듯이, 우리  곁에도 나들이를 가
는 
어느 회사의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술 마시고 노래하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러다가 갑자기 말싸움이 벌어졌다. 그렇게 짤막한 말싸움이 끝나자 쥐죽은듯이  조용

졌다. 단 2분만에 명랑했던 분위기가 끔찍한 영화보다도 더 살벌한 분위기로 바뀐 것

다. 그러나 이번 주말을 추억 속에 남겨야 한다며 단체로 사진을 찍는 순간 모든 사람
이 미소를 지었고, 서로의 어깨를 정겹게 토닥였다. 그러나 사진을 찍고 나서 사람들
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체면을 차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번 

말이 괜찮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상투적인 사진을 실어대는 신문도 이런 나쁜 점을 버리지 않고 있다. 바르셀로나 올
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다음날, 서울의 한 일간지는 TV 앞에
서 환호하고 있는 그의 가족사진을  실었다. 문제는 사진이 연출  된 것이라는 점이
다. 
가족 중 몇 사람은 연기를 잘 했지만, 세 명의 여자들은 진한 화장과 우아한 머리를 
한 
채 한복을 입고 있어서 연기가 서툴렀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채게 했다. 물론 시간은 

벽 1시였고, 생방송이었다. 게다가 황영조 선수의  승리가 예고되지도 않았었는데 말

다. 그들은 속에서 우러나와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손을  높이 들어요!"라고 한 것처
럼 
손을 쳐들었다.
  이런 종류의 사진을 실은 신문의 직업윤리가 염려스럽고, 이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

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도 염려스럽다. 사진에 대한 것 외에도 이런 취향은 한국엣 결
코 
새롭지 않다. 예전에도 농부들은 뱀을 쫓기 위해 '불' 이라고 씌어진 종이를 집의  기

에다 붙여놓았다.
  사회학 교수인 이송자씨는 한국인의 이런 점을 두둔하고 있다.
  "한국인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인 것과  사실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습

다. 그러나 변화를 주는 것이 때론 득이 되기도 합니다. 이미 많은 외침을 받았고 모
든 
사회적인 변화로 불안할 때,  그것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한  방법입니다. 아시아에서
는 
진실과 거짓의 개념이 서양에서 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 진실은 진실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학생  윤종호씨는 이런 분석에 대
해 절대 공감하지 않는다.
  "눈감고 아웅 하는 정책은 길게 보았을 때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문제는 너
무 
많은 것이 거짓이라는 점입니다. 부정부패가 너무 만연해 있는 까닭에 순수한 의도조
차 
의심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사람들은 환경오염과 같은 거북한 현실을 경제적 성공

라는 미사여구로 덮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원하고는 있지만 상황이 뜻대로  되
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잊으려고 하는 겁니다.  기껏해야 2,000m밖에 되지 않는 설악산을 
오른 사람들이, 마치 무슨 대단한 성공이나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은 
히말라야에 가면 그냥 죽은 사람들입니다. 아주 작은 지역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사

이 우승컵을 받아들고는 올림픽 챔피언이라도 된 양 으스댑니다. 이런 모든 것은 아무
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들에게 득이 되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의 말은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야누스의 얼굴, 한국인
  겉치레를 중시하는 것과는 반대로, 한국은  풍부한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
는 
감성적인 나라이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보고도 눈물을 흘린다. 시험에 합

한 것, 떠남, 재회 등도 한국인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들은 아주 작은 감정까지도  

대로 표현한다.
  또한 한국인은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다혈질적인 사람들이다. 사소한 자동차  접촉

고에도 서로 멱살을 움켜쥐는 사람과, 어떤 민감한 주제에 대해 여론이 분분한데도 국
회의사당 안에서 싸움박질이나 해대는 국회의원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실

을 파악하기 힘든 이 나라에서 어떤 기준을 발견하려 애
쓰는 유럽인은 '한국인은 아시아의 라틴족 같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런 현상을 두
고 
사회심리학자인 최상진씨는 나름대로 이렇게 분석한다.
  "한국인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비합리적입니다. 즉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바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많은  모순 가운데 하나가 들어 

다. 그래서 한국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사무실에서는  조화를 유지하
지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한다. 그러나 언쟁은  급작스럽게, 난폭하면서도 짧게 터

나올 수 있다. 사생활과 공적인  생활 사이의 장벽은 견고하다.  따라서 아파트는 모
든 
것을 완전하게 보호받는 장소이다. 술을 한잔 하자거나 식사를 같이 하자는 청이 없으
면 남의 집에 가기가 힘들고,  마찬가지로 불시에 쳐들어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
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문을 잠그지 않는다.
  한국인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냉정하지만, 내가 지금껏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친
절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다. 체면을 지켜야 하지만, 친구끼리  밖에 나가 술을 마시

나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할 때는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짧은 반바지 차림이나 심
지어 속옷 차림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인은 과묵한 동시에 외향적이다. 눈물도 

고 표현도 풍부한 이런 취향은 소리치고, 울고, 괴로워서 몸부림치고, 머리를  쥐어뜯
고 
하는 교회에서, 특히 개신교 교회의 의식에서 다시 나타난다.
  한국인은 다혈질이고 감수성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배짱이  두둑한 사람들이기도 하
다. 이것이 바로 '빨리빨리' 사고방식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정신이다. 몇 년 전
까지 
야심에 찬 사람을 지칭하는 말도 불도저였다. 다른 나라의 자동차회사들은 재규어를 

호했지만, 쌍용자동차의 심벌은 코뿔소이다. 한국인은 저돌적이고, 남보다 항상  앞서

다. 때론 세련미와 정교함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무례한 것이 아니라면 

이다.
  말레이시아로 휴가를 가서 어떤 클럽에서 며칠을 보내고 온  친구 하나가 들려준 이
야기이다.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감히 요트를  타지 않는 일본인에 비
해, 
한국인은 과감하게 도전하고 떨어져도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시도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
이었다는 그 친구는, 한국인의 도전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의 나라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우리'라는 말로 통한다.  이것은 '1인칭 복수'를 가리키는 말
로, 
집단적 소유 개념을 가리킨다. 나의 집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이라고 하며, 나의 

이 아니라 우리형이다. 또한 한국인은 '한국'이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 나라'
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집단이 개인보다  중요하다. 집단은 이미 가

과 같은 느낌을 갖는다.
  한국인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씨족에 귀속된 단일혈통을  가지고 있다'
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한국의 성씨는  그 숫자가 매우 적은데,  그것 때문에 가족단위
의 
감정이 강화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274개의 성씨가 있는데, 그 중 열 개 정도의 성씨
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1/3의 성씨는 그나마 100가구도 안 된다. 즉, 한국

의 절반은 김씨, 박씨, 혹은 이씨이다. 또 윤씨, 오씨,  한씨도 많은 편이다. 한 나라 

구의 절반을 세 성씨가 차지하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전화번호부를 들춰

면 아마도 더욱 놀랄 것이다.  서울에 사는 1만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같은 성
에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멤버십 트레이닝(Membership Training)
  집단의 개념은 가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다. 대학 신입생 환영 팜플렛에 씌어진 첫

디는 '꼭 참석할 것'이다. 스포츠 동호회, 종교집단, 자원봉사단체, 연극반 등 캠퍼스 

에 있는 많은 동아리 가운데 하나에 가입해보라. 외롭게 지내지 말고 원하는 것을 선

하라.
  전통적으로 매년 초가 되면 학생들은 주말을 이용해서 MT를 떠난다. MT 기간에 그
들은 서로 토론하고,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며, 게임을 하기도 하고, 산이나 
숲 
속에서 25km를 행군하는 등의 단체활동을 한다. 이 모든 것은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많이 하는 활동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학생들은 술을 몇 

자씩 가지고 가서는 취해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퍼마신다.
  이러한 MT는 학생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회사의 신입사원들도 학생들과 마찬가지
로 MT를 간다. 회사원들의 MT는 주말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집에도 못 들어가고 몇 
주일간 계속 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훨씬 더 진지하다. 거기에서는 회

의 방침과 목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 직장의  조직과 신입사원이 맡게 될 정

한 업무 등을 소개한다. 또한  신입사원들 서로에 대한 소개,  각자의 개성을 보여주
는 
역할 게임,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극기훈련' 같은 부수적인 모든 활동도 배제

지 않는다.
  한 대기업의 간부사원인 최정훈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의 연수 기간이 나에게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나로서는 회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동료들을 더 많이 알게 되었으며, 집단에 훨씬 쉽게 적응하는 계기가 되었습

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때만큼 많은 술을 마신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에 근무하는 회사원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주중에는 세미나를  

고 주말에는 '집단의 결속력 강화'를 목적으로 보물찾기, 도보행군, 배구경기 등을 하
는 
연수교육을 여러 차례 받게 된다. 물론 모든 참가자에게 회사 마크를 새긴 운동복과 

자 등이 지급된다. 어찌 보면 모든 사림이 어른 보이스카우트처럼 보인다.
  이런 유형의 연수는 유럽이나 미국에도  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억지로  연수
에 
참여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즘에 와서는 여

에 피크닉 외출, 상호 협력을 위한 스포츠 교류, 게다가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누리
게 
되는 주말 스키까지 추가되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똑같은 옷을 입고 마치 여름학

에 온 아이들처럼 재잘대던 각기 다른 어느 두 회사의  사원들은 한국 동부에 있는 용
평스키장에서 2년 동안이나 계속 만났던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집단의 결속은 직장에서도 일상적으로 유지된다. 회사에서의 하루 업무는  

히 5분간의 단체 체조를 한 후에 시작되거나 사가(사가)를 부른 다음 '우리는 승리한
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한다' 등의 구호를 외침으로써 시작된다. 웬만큼 야심도 가진  한

의 간부사원들은 내부경쟁이 치열한  유럽의 간부사원들의 정신상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의 간부사원들은 내부의 치열한  경쟁이 비생산적이며 정신적인 소모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회사의 성공을 위해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진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의 매일 저녁 동료들과  어울려 술 한잔하러 가는  습관은 매우 심각하
다. 
이 '한잔'은 정신이 말짱할 때 하는 말일뿐이다. 두 잔이 세 잔 되고, 세 잔이 곧 열 

이 된다. 그래서 밤 9시가 되면 서울의 거리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셔츠가 바지 바

으로 나온 채 '길지자(지)'로 걸으면서 서류봉투를 겨우  손끝에 대롱대롱 매달고 있
는, 
술에 잔뜩 취해 얼굴이 벌개진 회사원들로 가득 찬다. 술 마시는 것이 정말로 국민적
인 
스포츠이자 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유일한 방법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한국에서는 알코올 중독이 그토록 만연되어 있는데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국에서는 소주가 하루에 1,000만 병이  팔린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한국
은 
인구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세계 최고이다.

    구원의 통로, 집단
  집단에 대한 애착 때문에 창조성과 독창성이 사장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지만, 그

은 한편 많은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강력한 추진력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경제성장
은 
부분적으로는 이런 일체감의 덕으로 입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조국의 발전을 위
해 열심히 일했다. 1988년의 올림픽은  많은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거나 비판하지  않
고 
아무 대가도 없이 열성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 민족이라는 집단이 1997년 12월에  시작된 경제위기로 위태로운 상태에 처했을  
때, 
한국인은 누가 시키거나 한 것처럼 한마음이 되어 약혼반지와 결혼반지를 손에서 빼거
나 패물 등을 챙겨서 은행으로 달려가 몇 시간째 추위에 떠는 일을 자청하였다. 당시

는 집단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간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밀고 지나가도 미안하다는 소리 한마디 없고, 새벽 3시에 자기들 

에는 아무도 없다는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출근길에 다른 운전자와  말싸움
을 
하느라 10분씩이나 길을 막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예전에 누군가가 프랑스인은 개
인주의자인 데 비해 한국인은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나름대로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연대의
식, 
타인에 대한 존중, 조심스러움 등이 단지 집단 내부에만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것을 

는 '집단적 개인주의'라고 이름 붙이려고  한다. 물론 프랑스인은 위험한  개인주의자

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커다란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고, 이런 시민의식이 일반적으
로 
자신보다는 타인을 더 많이 배려하도록,  또 의식하지는 못할지라도 사회 속에서  훨
씬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이끌고 있다.
  한국에서는 집단을 벗어나면 구원도 없다. 그런 점에서 시민의식이 결여된 듯한 행

이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의 폐쇄성을 극복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
다. 
환한 미소와 정다운 눈길, 그리고 몇 마디 따뜻한  말이 오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회심리학자인 최상진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은 자기 주위에 강한 일체감과 충실감, 상호 신뢰감으로 똘똘 뭉친 폐쇄적 

맥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개인이 능력을 발휘하
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집단에 소속되지 많은 사람은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

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인에 대한 집단의  우월함이 한국인과 일본인에게서 똑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인에게는 집단의 목표보다 철저하게 우선시되는 반
면, 
한국인은 직접적인 이익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잇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그
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혈연관계조차도 개인의 이익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본인은 회사를 위해 일합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회사의 성공이 자신에게 개인적인 이

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될 때만 회사를 위해서 일합니다."
  따라서 집단은 개인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웃인 일본과 비교해서  하
는 
말을 들어보면, 한국인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개인주의자들인가!
  국가가 부유해지고 소비사회가 출현함으로써 이런 개인주의가 굳어졌다. 사람들은 

점 더 개인적인 삶을  요구하고, 가족은 분화되며, 대도시에서는  전통적인 유대관계
가 
사라져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집단에 소속된다면 다른 사회  관습
과 
마찬가지로 구속을 자청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삼성의 엔지니어인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동료들과 같이 술 마시러 가는 일은 하나도 즐겁지 않아. 그보다는 아내와 아이들
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아. 하지만 술자리를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러다가는 직장에
서 
쫓겨날지도 모르거든, 집단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승진에 대한 희망을 버리는 거나 마

가지야.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거야.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윗

람에게 감히 대들지 못하지. 질 게 뻔하니까."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제일 똑똑하다
  집단의 최상위 형태는 국가이다. 흔히 프랑스인은  맹목적인 애국주의자이고, 미국

은 자기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상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해 있다. 자기 나라를 '우리 나라'라고 부를 때, 한국인의 

에는 눈물이 맺힌다. 그들의 눈에는 한국이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하고 아름답고 강한 

라인 것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자신의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
고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절대적인 감정의  표현이고, 후자
는 
반박의 여지가 많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예는 너무나 많다.  날씨가 특히 덥고 습한 싱가포르에  머물다
가 
김포공항에 막 도착한 한국인 여행객은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내 앞에서 "여기 날씨가 
훨씬 좋아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은 분명한 목소리로 "당연하지.  여
긴 
한국이니까"라고 말했다.
  한 친구가 한국의 술, 특히 위스키는 세계에서도 알아준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깜
짝 
놀란 나는 위스키의 본고장은 한국보다는  글래스고우가 더 가깝다고 아주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인들이 위스키를 만들어냈어. 스코틀랜드가 우리에게서 훔쳐갔던 거야."
  마찬가지의 예를 하나 더 들면, 1993년 국제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화약은 중국인
이 
발명했지만, 한 한국인이 중국을 여행한 후에 한국에 들어와서 화약을 다시 발명해냈

고 보도한 적이 있다.
  서울의 중심에 있는 광화문 네거리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가  있
다. 
그리고 그곳 입구에는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전시되어 있다. 그
런데 테두리가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로 장식된 빈 액자가 하나 있고, 거기에는 이런 

명이 붙어 있다.
  '미래의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에게 예약된 빈자리임.'
  현재의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다. 그래서  미래
의 
후손들에게 보낼 타임캡슐(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에 묻은 이 타임캡
슐은, 서울이 한국의 수도가 된 지 1,000년째가 되는 2394년이 되어서야 개봉될 예정

다.) 속에 다시 대통령 김영삼씨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나는 한강의 기적과 민주주의의 기적을 이어갈 서울시가 400년 후에 인류의 문명과 
번영의 영광스런 중심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민족주의가 구세대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40대로 보이는 이웃의 한 남자는 나

를 영광스럽게 만들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위해 과학자가 되려고 한 적이 있다고 말하
곤 했다. 국경일이면 주민들은 자기 집에 국기를 다는데, 때로는 차에까지 국기를 달

도 한다. 한국인은 언제나 집단적인 가치를 찬양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한국 민족에 

해서 말하는 것이다.
  모든 대도시에서는 똑같은 목적을 설정하고 앞서 나가기 위해  하늘을 향하여 두 팔
을 벌리고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시킨 근육질의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있는 청동군
상이 광장이나 빌딩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의 노동자를 상징하는, 

전히 '대중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조각상이다.  악의 제국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북한
의 
평양에서도 아마 이와 똑같은 조각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한 일간지에 게재된 '최고 중의 최고'라는  제목의 독자편지 속에서 민족주

의 극치를 엿볼 수 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전세계 사람들은 한국인이 지구상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똑똑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편지를  쓴 사람의 말을 
빌리면, 5,00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한국인은 동일화되었고 문화가 발달했으며, 사

절이 뚜렷한 탓에 환경에 대한 강한  적응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은 분명  이
런 
기준, 즉 사계절이 있다는 등의  기준에는 꼭 맞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이다. 편지
의 
내용을 더 따라가보자.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운이  없던 민족들로부터 많은 질시
를 받고 있다."
  고립된 개인의 민족주의적 망상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문은 그의 편
지를 아무런 논평 없이 실었다.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과는 거리가 먼 언론이 오

려 독자들에게 민족주의적인 감정만을 부추기고 있는 꼴이다.
  "저항하다 망명길에 올라 죽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만  생각해보아도 우리 민족의 
일체감과 그 속에 들어 있는  자신감, 긍지를 빛내고,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우리
의 
결의를 굳건히 할 수 있다."
  이것은 고대 투사의 말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 시절에 저항하다가 미국으로 망명가
서 
죽은 두 구의 시신이 1994년 4월 한국으로 송환되어 왔을 때, 한 중앙 일간지의 사설
에 
실린 내용이다.
  이런 민족주의 때문에 한국을 비판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특히 외국인에게는  금기

항이다. 서울의 심각한 교통체증을 개탄하자 사람들은 과장이 심하다며, 파리에서는 

황이 더 나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물었던 사람은 파리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감히 서울의 오염경보 수준을 지적했을 때 역시, 신랄한 공격이 되

아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통체증과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것은 이
미 
한국의 공무원이 인정한 사실이다. 그러니 한국의 민주화나  인권, 외국과의 관계와 

은 훨씬 민감하고 주관적인 주제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면, 그때의 반응이 어떠할지
는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한국 경찰이 세계 최고이고, 한국의 처녀들이 제일 예쁘며, 한국의 경치가 가장 아

답다는 등의 말은 그렇다 치고, 한국의 민족주의는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포

로 집결되고 있다. 올림픽 경기가 열릴 때면, 한국의 TV에서는 한국 선수가 메달 따는 
장면만 보여준다. 기대했던 것보다 메달을 적게 땄다는 사실을 들추어 낸 비판적인 기
사는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서울과 도쿄에서 공동으로 개최하는 다음 월드컵 축구대회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

로 일본에 너무 많은 혜택이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정상적인 규칙에 따라 
두 나라 중 한 나라에만 개최권을 주었다면, 아마도 일본이 한국을 누르고 개최권을 

냈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 대해 이야기하면, 서울의 대학로에 있는 음식점들은 2002년 월드컵 

최국을 결정할 임무를 띤 FIFA 집행위원회 회원국의 한국 거주자에게 투표가 있기 10
일 전부터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거기에  들어간 비용만도 3,000만 원이
나 
된다고 한다. 아무튼 한국인은 축구와  자신의 나라를 너무 사랑하는 민족임에  틀림

다.

    순수에 대한 강박관념
  한국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민족적인 특수성을 지키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여자들은 열 달 동안 임신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계산방법이 

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여자 친구는 나의 설명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전혀 그렇지 않아. 한국의 여자들은 다른 나라 여자들과 다르거든."
  대학교수인 차하순씨는, 민족주의는 이미 너무 확산되었는데,  1961년 박정희 장군
이 
집권하면서 한국 문화의 특수성과 우수성을 강조하고 학교교육에 대해, 특히 역사에 

해 재검토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한국인은 순결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한국인은 혼합된 것, 

원이 의심스러운 것, 혼혈 등을 혐오한다. 가장 적나라한 예는 군 입대조건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군대에 가기  위해서는 한국 국적이어야 할뿐만  아니라, 혈통 자체
도 
한국인이어야 한다. 따라서 '혼혈아'는, 특히 한국 여자와  미군 흑인 병사 사이에서 

어난 아이들은 군인 선발에서 제외된다. 이런 차별은 모든 차이를 거부한다는 것의 증
거이자, 한국인이 혈통과 국적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군인으로 봉사

는 것은 국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국가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일
단 인정하고 통합된 사회에 편입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외국인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힘든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인이 '편의상' 예를  들
면 
연구를 위해 미국 국적을 취득했을  때는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여권상으로는  국적
이 
바뀌었다고 해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 국

의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또 한국은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우려먹는 기막
힌 재주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LG는 자신의 기술적 노하우를 자랑하기 위해 론과 
알프스 사이를 운행하는 TGV 사진에 LG라는 이름을 붙인 광고를  내보기로 결정하였
다. 하지만 한국은 TGV를 구입했을 뿐이지, 개발한 나라는 아니다. 게다가 LG는 고속
열차를 만들겠다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한국인은 외국에서도 그들의 문화 공동체를 재창조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
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40만의  한국인은 여러 개의 학교와  친목회, 스포츠클
럽, 
많은 점포, 세 개의 일간신문, 각각 하나씩인 라디오방송국과TV 채널, 그리고 600개나 
되는 기독교 교회를 가지고 있다. 이런 관습이 이민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

가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나라에 대규모로 투자할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는 
경우, 그들은 지역 공무원에게 한국만의 독점적인 산업지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해달

고 요청한다.
  1992년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된 한국인 이민자인 김창준씨가  공식적으로는 처음 한
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한국과 미국의 중재자로  일하겠다는 포부를 분명하게 밝혔
다. 
그러나 그의 선거구에 사는 유권자들이 모두 한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아니었다.
  외국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나 맹목적인 애국단체의 대표자, 유엔 평화유지군으
로 
파견된 병사 또한 한국을 홍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푸른 군인모자를 쓴 병사들
이 황폐한 모가디슈(역주 : 소말리아의 수도)에서 40km  떨어진 곳에서 누더기를 걸친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피와 땅
  국제 입양아의 경우, 혈통을 따지느냐 국정을 따지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
다. 정부는 현재 외국에 입양된 한국 혈통의 아이들이 한국을 여행하는 데 많은 경비
를 
지원하고 있다. 20년도 훨씬 더 전에 한국을 떠난 이 아이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제 조상들의 땅을 찾아온 이들에게 한국을  알게 하느라 돈은 쏟아 붓고 잇는  것이
다. 
분명히 칭찬할 만한 행동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환영하며,  그러는 가운데 예전에 한

인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 양부모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
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는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그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울에 와서 1년을 보낸 발레리 양이 털어놓은 씁
쓸한 기억이다.
  "처음에는 모든 게 잘되었어요. 우리는 한국의 여러 관광지를 가보았죠. 한국의 역

와 경제성장과 정치 사회적인 구조에  대한 강연도 들었어요. 교수님들이 와서  한국
의 
문화와 한국인들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어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모두가 친절

게 대해주었고요. 그렇지만 말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주일에 두  번 프로그램
의 
책임자들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항상 너무 친절하게 설명해주더군요. 너희는 원래 한

인이었는데 우연히 이 나라를 떠났다, 그러니 언젠가는 굳은 결심을 하고 한국으로 다
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말아라, 하는 말들이었어요. 또 땅이니, 핏

이니, 뿌리니, 조상이니 하는, 내게는 그리 대단하게 와 닿지 않는 관념적인 말들도  

곤 했어요. 그들은 확실히 진지했어요. 그렇지만 그게 부담스러웠어요. 그들은 또  우

에게 그건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예요. 누가 강요할 문

가 아니고요. 우리는 단순히 관광을 하기 위해  이 나라를 방문했으니까요. 공영방송
인 
KBS 방송 프로그램에 나갔을 때는 최악이었죠. 기자들은 내 입에서  '국제입양은 적응
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게 한다'는 말이 나오게 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썼어요. 정

가 최근에 국제입양을 사실상 금지했다더군요. 누군가에 의해 원격조종되고 있다는  

낌이 들었어요. 사회자가 너무나 집요하게 물어서 마침내  신경질이 났어요. 나는 딸
과 
어머니 사이에 맺어진 운명과, 내가 태어났던 시절에 한국이 비참했던 것 등등에 대해
서는 일부러 잊으려고 했어요. 사회자처럼 단수해지기 위해서요.  그는 내게 한국이 

를 버렸고, 프랑스가 나를 받아주었다고 말했어요.  그 말이 내 속을 뒤집어  놓았지
요. 
그런 사람은 내가 양부모님을 얼마나 존경하는 지, 그들이 나에게는 진짜 가족이고, 

랑스가 나의 조국이라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내 한국인  친구들
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에게 나는 외계인이었어요. 그들에게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있

는 사실은 내가 한국인이고, 프랑스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었

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여기에 돌아와서 살라고 말하곤 했죠. 1년 동안 들어가서 살

던 집의 가족들만이 정말로 친절했고, 또 나를  이해해주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
게 
악의는 없었지만, 뭔가 장벽을 느끼게 했어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한국에서 외국

이라고 느꼈던 적은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한국인은 땅에 대한 애착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시골은 언제나 마음
의 고향이다. 이런 것이 급속한  도시화나 경제개발로 인한 변화에서 비롯된  반작용
은 
아닐까? 마치 숨막히는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한국인은 끊임없이 과거를 
이야기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예전에 살던 시골의 정취를 떠올린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있는 민속촌은 한국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
다. 그곳에는 옛날 집과 옛날의 일터, 전통적인 축제 모습 등 과거의 한국이 화려한 

습으로 재현되어 있다. 프리랜서 기자인 최남현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오늘날 기술산업국가가 되어버렸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땅에 깊은 애착을 

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는, 때로는 물질적으로도 여전히 농사꾼입니다.  

모나게 각진 얼굴과 통통하고 붉은 볼이며 두터운 손을 보십시오. 1993년 12월 세계무
역기구와 협상할 때, 한국경제에서 농업이 더 이상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쌀시장 개방에 대한 격렬한 반대가 일어났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구혼자가 다른 지방 사람일 경우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반대하는 일이 저지 않았는
데, 이것만을 놓고 봐도 아버지의 권한이 절대적이라는 점과, 지역주의와 땅에 대한 

착이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언젠가 있을지도 

를 북한과의 통일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게 하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TV가 훌
륭한 본보기이다. 성공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시골뜨기 처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는 드라마를 예로 들어보자.
  내용을 따라가보면, 서울로 상경한 시골뜨기 처녀는 어느 날 갑자기 시골로 되돌아

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는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얼굴을 찌푸리고서 잠시 동안 움직
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주위를 천천히 쓸어본다. 황량한 곳이다. '버림받았다'는 
주제
를 담고 잇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감히 자신의 뿌리를 저버린  자에게는 모욕을 주
고, 
방탕한 자식은 결코 한국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어머니가  등장하여 눈물을 쏟아내면서 딸의 손을  잡아

다. 시골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가족은 언제나  가족 구성원을 환영함으로써 가

관계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처녀는 진하게 화장하고 우아하게 옷을 차려

었다. 마을의 모든 처녀들이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최소한 그녀는 여행을 해보

던 것이다.
  그녀는 서울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재미있는  곳도 많으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살
고 
있고, 또 세상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이긴 하지만, 시골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야기한다. 그녀가 늘 꿈꿔왔던 진정한 가치는 시골의 소박함과 끈끈한 정인 것이다.

    쇄국과 개방
  한국인은 외부에서 보는 이미지에 매우 민감하며, 자신들의 나라가 좋은 모습으로 

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소설 한 권이 외국어로 번역되기라도 하면, 한국 문화가 국제

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칭찬 일색의 기사가 모든 신문을 장식한다.
  최근 한국은 자국의 문화를 장려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우는 1996년 파리
에서 열린 국제 현대미술전람회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부는 문학작품의  번역
과 
예술가들의 순회공연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둠으로써 세계에 
점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자, 외국의 문화축제 담당자들은 '새로운 아시아'의 문화를 

려고 갑자기 열을 올리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공예품이 외국에서 재발견되자마자 그 나라가  손가락질 받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가 바로 '고문서  탈취 사건' 때문에  그런 일을 겪은  나라이다. 이야기
는 
18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극동함대의 선두에 서서 중국해를 지나가고 있던  로즈 해군소장은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군대를  상륙시켜 보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거센 저항 때문에 프랑스 수병들은 조선인의 검 아래
에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달아나기에 급급했고, 보복하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꿈
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나 로즈 해군소장은 닻을 올리기 직전 조선왕실의 제례와 관습을 
상세하게 기술해놓은 297개의 문서를 탈취해서 달아났던 것이다.
  1993년 파리에 유학 온 한국 대학생이 앞서 말한 문서들을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하기 
전까지 근1세기 이상 동안,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젊은 혈기에 분노가 치

어오른 그 학생은 이런 사실을 본국에 알렸고, 한국인 모든 언론은 일치단결하여 '고

서 탈취 사건'을 보도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
면 북한의 핵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경제적인 도약을 도모해야 했고, 동시에  대통령
이 
부패와의 전면전을 선포한 상태였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신문에 사실 보도
가 
나기 전날까지만 해도 이런 문서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한국인은, 프랑스가 

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고는 다  같이 펄펄 
뛰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일으킨 파장은 너무나  컸기 때문에 1993년 9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했을 때, 프랑스 사절단은 이 예기치 않았던 상황을 모면하
기 위해 파리에서 이 문서들 중의 하나를 가져와  한국의 대통령에게 반환함으로써 한
국 국민들의 여론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이런 문서 반환 행위는 국립도서관의  규정과 그런 문서들의 반환을  금지하고 있는 
프랑스 국내법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로서는 TGV를 파는  것이 더 값진 
일이었던 것이다!
  매우 하찮은 일로 보였던 이 사건에 온 국민이 들고일어나 열화와 같은 분노를 터뜨
렸다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19세기초의 한국 신문에는 16세기에 일어났
던 일본이나 중국과의 전쟁은 모두가 다 외침이었고, 한국이 침략한 적은 없었다는 등
의 사실을 입증하는 고문서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장문의  기사들이 정기적으로 실
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주변의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탓에 자주 침략을 당했고, 또 오랫동안 식민지 지
배를 받았으매, 현재는 분단된 상태로 국토가  두 동강 난 국가인 한국은 이런  침략
에 
저항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매우 강한 민족적 동일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한국이 프랑

에 상대적으로 매우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고문서의 반환을 요구한다면, 거기에는 과

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지워버리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런 식의 민족주의는 항상 국가의 지도자들이 주도해왔다. 그리고 국가의 발전을 

루기 위해 국민들의 아낌없는  희생이 필요했던 한국의 경제적  '기적'은 부분적으로
는 
이런 민족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효과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족주의를 자극함으로써 급속한 경제개발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구나 은행금리가 두  

리 숫자로 불어남에 따라 한국은 자동차와 전자제품에서 일본과 대등한 입장으로 경쟁 
할 수 있게 되었고, 1988년 올림픽 경기를 유치했으며, 1990년에는 유엔에  가입하였
다. 
한국인은 자기 나라가 최고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최남현씨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만 가고 있는 때문에, 한국인이 민족
적 
동질성에 대한 의식을 점점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할 일이다"라고 기술하고 있
다.
  이런 민족주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비슷한 주거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제주

를 제외하면 지역적 편차가 거의 없고, 성씨의 숫자도  많지 않으며, 국민의 99%가 순
수한 한국인으로 이루어져 있을 정도로 인종 혼합이 거의  없는 국가의 통일성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오늘날은 부유해졌고, 또 새로운 국제질서가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
에 
외침의 위협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한국인은 여전히 철저한 민족주의를  자식들에
게 
주입시키고 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국기 앞에서 '맹세'를  해야 한다. 국기는 학교의 

실이나 회사의 사무실, 체육관 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데, 한국인은 모든 활동을 

기 전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마지못해 하는 요식행위일 뿐이지, 아이들은 이제 아무 생각 없
이 국기 앞에서 머리를 숙임으로써 어떤 영향을 받기보다는 외국에서 들어온 유행이나 
음식, TV방송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
장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햄버거나 미국의 드라마가 한국인의 정신을 변화
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나라 밖에는 일어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
고 있으며, 때로는 거슬리기도 하지만 외국인이 한국에 대해서 하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전까지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한국의 민족주의가 모든 것이 세계화에 의해서
만 판단되는 지금 시접에서는 어떤 한계를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세계화' 운동을  현
재 
한국의 공무원들이 공식적으로 주도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심한  모순이 아닐 수 없
다.
 
    새로운 연대의식의 출현
  한국에는 종교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너무 맹목적인 민족주의로  인하여 불안이 커
져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등을 돌린 채  물질적인 쾌락과 무절제한 소비행위에
서 만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구호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극빈자 혹은 외로
운 노인들을 위해 지역별로 자원봉사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는  그
리 
오래지 않은 현상으로, 정부는 경제개발에 매진하고 국민들은 일만 하면서  생활수준
의 
향상만을 도모하던 때와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한 여대생의 말이다.
  "우리 한국인은 원래부터 이타주의자들은 아니에요. 가족끼리나 친구사이에만 커다
란 
연대의식을 갖죠. 그래서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돕는  것
을 
보면 약간 의외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TV를 통해 '국경  없는 이사회'에 관한 방송을 
보면서 경탄하긴 해요. 하지만 자기 자식들이 그런 운동에 참가하는 것은 극구 말릴 

예요. 외국인은 항상 한국인이 친절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말은 너무 피상적인 

각일 뿐이죠. 한국인은 과거에 별로 여행을 한 적도  없고, 지금도 대도시에 살면 옆
집 
사람도 모를 정도거든요."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 심한 말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한국인
이 
자선단체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 오랫동안 국제원조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늘날은 상황이 달라졌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어떻든 간에,  한국은 부유한 나라가 되

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1인당 GNP가 여전히  6,000달러 정도나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선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은 아직 초기단계

긴 하지만, 훌륭한 활동을 펴는 자선단체가 많은 편이다.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자선단체운동을 처음 시작한 쪽은 정부이다. 또한 이런  운동
이 
항상 선의로만 시작된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초에 한국은, 북한 정부와 접촉할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의사를 파견하곤 

다. 적이 되어 대치하고 있는 두 형제국 사이를 연결할 일종의 '박애'의 과정이  필요

던 것이다. 남북으로 대치되어 있는 현실도 박애주의운동의 일환으로 파견된  유능하
고 
성실한 의사들을 가로막지는 못하였다.
  1973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파견된 우영순 박사가 그런 의사들 중의 한 사람이
다. 
그는 스외잘란드와 에티오피아에 주로 머물면서 아프리카에서만 18년의 세월을 보냈
다. 
작은 키에 항상 웃는 얼굴이고 말이 빠른 그는, 푸조 404 밴을 몰고 오지마을로 환자
를 
찾아다녔던 일부터 사자에게 물렸을 때 치료해준 영국인 사냥꾼에 이르기까지,  무궁

진한 경험을 했다. 그는 가벼운 병을 앓고 있는데도 약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
고 
슬퍼했던 일도 기억하고 있다.
  부유해진 한국은 1991년 이후 유엔의 회원국이 되었다. 그 후 한국은 1993년 6월 평
화유지군에 군대를 처음으로 파병함으로써 국제무대에 나서는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
었다. 평화유지군으로 외국에 파견된  병사들 중에는 전투병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이 
의무병이나 보급병, 또는 통신병이었다.
 "부유하다는 것만으로는 선진국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개발도상국가
에 
원조를 해주거나 평화유지 활동에 참가하는 것과 같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해야 합니다.
"
  한국의 외교관임을 자임하는 그들의 말이었다.
  한국이 국제적인 이미지에 굉장히 민감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가다. 마찬

지로 일본이 현재 제 3세계의 최대 지원국이 된 것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받을 때와 줄 때
  1950년대만 해도 국제원조를 받았던 한국은 오늘날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가  되었
다. 
1996년에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제공하기 위해 사용한  공식적인 금액은 15억  달러
로, 
GNP의 1.05%에 달했다. 그러나 한국이 1996년 12월에 가입한 OECD의 요구를 만족시
키기 위해 이 숫자는 급속히 증가할 것임에 틀림없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의 유명한 논설위원 중 한 사람인 김윤을씨는 이렇게 지적
한다.
  "개발도상국가에 대한 원조를 확장하려는 정부의 결정이 인도주의적인 차원이라기보
다는 실익 차원에서 배려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원조를 받는 국가의 불

을 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이 외국으로부터 오랫동안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구호물자
를 관리하는 것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한국은 원조를 제공하는 

가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공할 수도 있다.
  개발도상국의 원조계획을 관리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공공기관인 한국국제협력사무
소(KOICA)는 이 점에서 정부정책의 행정기관이라고 할만하다. 이 기관의 활동 영역은 
병원을 짓는 것에서부터 앰뷸런스나 컴퓨터와 같은 다양한  시설공급에 이르기까지 광
범위하며, 또한 수리학 같은 분야의 교육을 담당하거나 직업연수원을 운영하기도 한
다. 
협력사무소에서 파견된 사람 중에는 태권도 사범도 있고 의사도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 
역시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KOICA에서 제공하는 보수가  제법 센 편이기  때문에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신념으로 삼고 있다기보다는 보수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다음에 지원하지 않았느냐고, 
파견된 사람을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다. 의사는 실제로 생활비가 별로 들지 않는 나라
에 살면서도 모든 경비를 제하고 매달 3,000달러를 받는다. 하지만 당사자는 한국에 

으면 더 많이 돈을 벌 수도 있으며, 그토록 생활조건이 열악한 곳에서 그 정도 받는 

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반문하기도 한다.
  외과의사로서의 봉사를 다하기 위해 1993년 미얀마로 떠난  40대 이종규씨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학교수의 아들이었던 그는, 앨버트 슈바이처의 생애를 쓴 책을 한 권 읽은 후 의

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서울의 한 주택가에서 병원을 개업한 후 14년 동안 일하던 

는,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돈을 쫓는 삶을 살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나를 가장  필요
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의술이 지닌 본래의 목적을 훨씬 값지
게 실천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넉 달 후, 그는 서울의 병원을 

분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랑구운을 향해 떠났다.
  이종규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점점 더 많은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원봉사자의 개념은 실제로 1988년 서울 올림픽 경기가 열렸을 때부터  비롯되었
다. 
통역요원, 안전요원, 안내원, 선수들에게 물을 나르는 사람 등 2만 명의 한국인이 그 

시 자원봉사를 했던 것이다. 그때는 오늘처럼 그렇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부유하지도 

았던 한국의 어마어마한 미래에 참가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후로  자원봉사라
는 
개념이 자리를 잡았고, 또 다른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몇 년간 노인들을 돕는 단체, 제3세계와 연대한 단체, 외국인 노동자  보호단
체, 
환경운동단체 등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런 단체들이 많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은 

국이 민주화됨으로써 가능했다.
  봉사활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동기도 다양하다.  그 중에는 과거에 한국이 진  빚
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닐라의 빈민촌에서 작은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
을 
펴고 있는 이인재씨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한국은 유엔이나 다른 국가들로부터 오랫동안 국제원조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3년
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이 폐허가 되었던 그 시기에 탁아소나 병원에 재
정적인 도움을 주면서 한국의 아이들을 입양해간 특별한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예전

는 달리 부유해진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나라를 돕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
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자원봉사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경우도 역시 많았다. 외국인 노

자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직을 이끌고 있는 김태호씨는 대뜸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개신교도입니다. 피부색이 어떻든  저에게는 모든 사람이  동등합니다. 그것
이 
바로 제가 활동하는 이유입니다."
  유럽의 인종 혼합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한 어떤 남자는, 1992년 봉사활동에 뛰어들
기 
전부터 구로공단 지역의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료 과외지도를 해주곤 했
을 정도로 인도주의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영원히 학생일 듯한  인상
의 
30대의 김태호씨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필리핀이나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에서 온 노동자를 경멸하는 한국인을  보면 얼마
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한국인은 그들을 한국 회사의 경쟁력을 개선시킬  실질적이

도 값싼 노동력으로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자신을 

생양으로 삼고 있는 바로 이런 부당한 대우를 그들이 참아내고만 있다는 점입니다."
 
    시민은 힘이 세다
  인도주의적인 봉사단체에 막연한 생각만으로  참여한 젊은이들은 남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거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영등
포 
지역의 빈민촌 아이들을 대상으로 과외학습  활동을 펴고 있는 사회학과  학생 류민지 
양도 그런 경우이다.
  "친구들이 모두 미친 짓이라고 했어요. 그  지역은 위험한 곳이라서 험한 일을  당
할 
수도 있다고 말이에요. 친구들은 또 그럴 거면 차라리 과외를 하는 게 낫다고 충고하

도 했지요. 그게 훨씬 더 쓸모 있는 일이고, 돈도 많이 벌게 해줄 거라고 말이죠.  그

지만 실리적인 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한 것은  그리 달갑지 않아요. 모든 

람이 남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돈 버는 얘기와 쇼핑하는 얘기만 해요. 그리 반
갑지 않은 얘기들이죠. 저는 남들을 위해서 사심 없이 일하고 싶었어요. 빈민촌에서 

아오면 때로는 기운이 쭉 빠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몇만 원씩 받고  상류
층 
가정의 고등학생을 가르쳐서 성적을 올려주는  것보다, 내가 가르친 이 아이들이  좋
은 
성적을 받아오는 것이 더 기쁨을 주죠."
  한국의 민주화와 함께 이런 봉사단체의 운동이 펼쳐짐으로써  시민들은 새로운 힘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수동적으로 단순한 유권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다. 시민들은 일상적인 삶에 관계되는 모든 결정을 감시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서울에서 환경에 관한 시위를 벌일 때, 한 플래카드에 "환경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안이라서 정치인에게 일임할 수 없다."고 씌어 있는 것을 보았다. 토론에 참여하겠다
는 
이런 의자와 새로운 시민적 각성이 있기 때문에 소비자단체나 학부모협의회 같은 단체
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역시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 제일의 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안성기씨는 자신의 인기를 이용하여 세계의 수많
은 아동들이 겪고 있는 비참함을 여론에 환기시킴으로써 유니세프를 후원하고 있다. 

는 1993년 에티오피아에 다녀온 후 "이 새로운 역할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
라고 말했다.
  소극적이고 신중했던 안성기씨는, 자신을 쉽게 알아보는 대중 곁에서 유니세프  대

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유니세프 프로그램에 이런 스타들이 참여하는 

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겠지만, 마약 10년 전이었다면 한국 배우들이 아프리카
로 
여행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선단체들이 많이 생겨나고는  있지만, 한국에는  규모 있는 비정부기구(NGO)들이 
아직은 그리 많지 않다. 모든 자선단체는 규모도 아주  작고, 또 몇몇 활동적인 회원

이 활력에 의지해서 운영되고 있으며, 재정도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정부가 비정부기구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그리고 문예학술을 
옹호하는 기업들은 가난한 사람보다는 예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이런 단체의 활동은 분명한 효과를 보이기 어렵다. 그래도 의욕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인 김호진 군은 '환경보도에 관해서는 아직도 활동보다는 말
이 
앞서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또한 이런 단체들은 노하우가 없는 경우가 많다.
  "지역 후원자들을 어떻게 찾아낼까요? 어떤 활동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정말로 필요
한 사람에게 구호물자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우리로서는 
이 모든 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배운다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이인재씨는 힘주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농담삼아 덧붙였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인은 항상 모든 것을 빨리 배워왔습니다."
  현질적인 경제위기가 실직자를 도와 식사를 제공하고 지하철  안에서 극빈자를 위한 
모금활동을 하는 등의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런 운동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은  한
국 
사회가 아직 개이주의에 함몰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아직 복지국가로  발

움하지 못한 한국에서는 이런 운동이 그만큼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 이런 단체는 재정이 빈약하기 때문에, 또 때로는 그들의 잠재적인 '후원 대상'
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활동이 제한되어 있다. 중류층 정도의 사람들은 빈민을 돕는 

에 드나드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고, 직업을 바꿔야 할 때 용접공이나 택시기사 연수를 
권유받으면 모욕감마저 느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극히 존경받았던 지도층 인사들이 경제위기 때문에 신임
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동시에 시민의 요구사항 또한 훨씬 많아졌다. 1998년 
8
월 총파업으로 현대라는 대기업이 마비되었을 때, 한 노동자는 분개하면서 이렇게 말

다.
  "재벌들이 경영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번 경제위기에도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
다. 
또 그들은 한국을 '사회적 도살장'으로  만들어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은 
배후에서 계속 경제를 조종하고  있고, 재계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정상적
인 
일입니까! 노조원, 노동자, 학생, 그리고 소박한 시민을 포함한  모든 한국 사람이 경
제 
운영에 훨씬 더 꼼꼼한 감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업에 설명을 요구해야 합니
다. 고용주의 결정을 더 이상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사회봉사활동의 No.1을 향하여
  봉사활동의 성공이 숲을 가리는 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장

인, 외국인 노동자, 가난한 사람을 경멸까지는 아니라 해도 꺼리는 경향은 가지고 있
다. 
또 많은 단체 중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를 칭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적당주의를 또다시 재현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이런 단체에만  봉사활

을 일임한 채 수수방관하려는 것, 둘 중의 하나이다.  그 결과 개인기업과 공기업을 

라해서 장애인 취업 희망자 중 오직 0.48%만이 일자리를 구했다.
  사회복지부는 겨우 인구의 1%에 해당하는 40만 명  정도의 사람들만이 1996년에 사
회봉사활동에 참여했다는 추정치를 발표하였다. 이 비율은 미국의  25%난 일본의 10%
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수치이다. 게다가 이런 활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
의 
58%가 첫 해에 활동을 포기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직도 자원봉사활동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정부는 틀림없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변호시킬 만한  활동을 기획해서 실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95년부터  중학생은 1년에 40시간의 봉사활동을  하도록 되
어 
있다. 이 시스템은 고등학생에게도 확장되어 봉사활동을 입학 기준의 하나로  채택하
는 
대학이 늘어날 전망이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이타주의와 시민의식을 갖추면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정부, 학부모, 인권 단체 사이에 

기적인 협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자원봉사로 할 만한 일거리가 거
의 없는 형편이라 학생들은 헐렁한 감독관의 감시 아래 교정의 낙엽을 모으거나 집 근
처 파출소 앞을 청소하면서 의무적으로 배정된 40시간을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

도 1주일에 한 번 서울 서부에 위치한 성지고등학교 학생 같은 좋은 사례들도 있다.
  16세의 고등학생인 박민례 양도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는데, 처음 1년 동안은 의무로 
배정된 40시간을 채우기 위한 자원봉사활동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 현재는  자원봉

활동이 삶에 소중한 부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1주일에 한 번 고아와 정박아들
이 
수용되어 있는 '천사들의 낙원'에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부엌 청소 등  온
갖 
자질구레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은 장애 아동을 돌보는 교육자가 되기로 결
심했을 정도로, 자원봉사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물론 어려움도 

았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아이들이 제게  다가오는 게 겁났어요. 거의 혐오감을  느
낄 
정도였죠.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는, 오히려  장애아이기 때문
에 
훨씬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앞으로 그녀와 비슷한 일을 겪게 될 사람이 많아지리라 확신할 수 있다. 게다가 199
6
년 3월,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한곳으로 수렴하는 '자원봉사자센터'가  문
을 
열었다. 다른 많은 영역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이 사회봉사활동에서도 '넘버 원(No.1)'
이 
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만의 공통점
  서울의 대학로. '문 플래닛'이나 '뉴 썬샤인'이란 간판이 붙은  술집에서는 젊은이
들이 
맥주를 마시며 토론에 열중하고 있다. 자유로운 분위기, 호탕한 웃음, 열정적인 토론 

을 보면 한국적인 집단의 열기를 느낄  수 잇다. 그들은 한결같이 대부분 미국  상표
가 
붙은 두껍고 헐렁한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었으며 농구화를 신고 있다. 젊은  여자들
은 
오렌지색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입술을 붉게 칠했으며, 눈에  검은 마스카라를 하는 
등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런던의 호소나, 파리의 라틴가나,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에
서, 
즉 전세계의 모든 대학가에서 불 수 있는 모습니다.
  거리에 나가보면, 젊은이들은 야구 헬멧을 머리에 쓰고, 휴대폰을 손에 들고,  워크

을 귀에 꽂은 채로 활보한다. 전통 의상인 한복은 전혀 관심이 없다. 세대차일까? 하

만 그런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20세에서 24세까지의 젊은이들이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 부흥기인 1970년대에 태어나 민주화되고 있던 1990년대에  정치
적 
논의에 참여하기 시작한 그들은, 한국전쟁과 빈곤, 군사 독재를 겪은 부모 세대와 공

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신세대는 생산성을 강조하는 스트레스와 권력의  하수인이라
는 
위협 없이 자기를 표현하고, 여행하며, 왕성한 소비를 즐길 수 있는 첫 세대이다.  효

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함으로써 아버지에서 아들로 완벽하게 이어져  내려온 유교적 가
치를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한국의 보수주의는 이들이 출현하면서 처음으로 깨졌다.
  변화는 완연하다. 그들은 이미 물리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훨씬  잘 먹고 
잘 
키워진 한국의 젊은이들은 부모보다 월등하게 크고 튼튼하다. 1990년 이후 국민의 평
균 
신장은 3cm 커졌고, 평균 체중도 2.3kg 증가했다.  그러나 차이는 이것만이 아니다. 

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두 명의 교수가 수행한 형태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젊은이

은 넓적한 얼굴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째진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이미 언급한 문화적인 변화도 눈에 띈다. 조부모들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옛
날 
이야기를 읊어대는 판소리를 즐기는 반면, 25세 미만의 젊은이들은 록이나 테크노 음

을 듣는다. 국민적인 스포츠인 태권도는 여전히 인기가  좋지만, 농구가 강력한 경쟁

로 부상하고 있으며, 또 젊은이들은 NBA 경기를 TV를 통해 빠뜨리지 않고 본다.
  1994년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한 토론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한 대학 교수는 이렇
게 한탄했다.
  "어휘조차도 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부모와 자식은 서로가 하는 말을 잘 

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같은 땅 위에 살고 있자만,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더 이상 같
은 나라에 살고 있지 않은 듯 합니다."
  겉으로는 무척 달라 보이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이 가진 생각은 꽤나 보수적이기 때문
에, 한층 비관적인 분석이라고 하겠다. 현대적인 것이 정신보다는 겉치레에 더 많은 

향을 끼친 모양이다.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더욱 커다란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 조국에 깊은  애정
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하며, 새로운 생각들을 접하고 싶지만  한편으로
는 
일사불란한 토론과 더 엄격한 사고의 틀을 가진 나라에  머물고 싶어하는 20세에서 25
세 가량의 젊은이들은, 국가와 마차가지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이들은 동

성을 추구하는, 모순으로 가득 찬 오늘날의 세대이다.

    몰라서 용감한 성
  자유롭게 외출하고, 자유롭게 술 마시고, 자유롭게 친구를 만나고, 취향에 맞는  옷
을 
사는 일 등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부모들이 우려하는 것은 이런 자유로운 생활

식으로 인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온 많은 풍습이 '해방'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오

날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으며, 공공장소에서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젊은이들을 보는 

은 더 이상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1996년  보건복지부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소년의 1/3이 20세가 되기 전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결혼도 하기 전에 육체관계
를 
갖다니, 근엄한 한국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행동 아닌가! 그렇다면 왜 결혼

는 걸까? 결혼하지 않고 동거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풍습이  개방된다고 해도 그것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는 
않고 있다. 게다가 과거보다 조숙해진 청소년들이 성관계에서 파생되는 심각한  문제

을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성에 대한 말은 한국에서는 금기이다. 어떤 부모도 자기 아이들과 성에 관련된 이야
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 결과  청소년들은 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들 사이에서만 하
고, 
그로 인하여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며, 불행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성에 대한 상식
이 
부족하고, 피임기구들을 쉽게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번의 임신 중절 수술을  받
은 
소녀들도 상당수에 달한다고 한다.
  주혜란 박사가 털어놓은 이야기이다.
  "때때로 임신 중절 수술과 피임을 혼동하는 여자아이들이 꽤 많다는 인상을 받은 적
이 있어요."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사회로부터 받는 비난이 너무나 따갑기 때문에 혼전 

신을 한 여자들의 80%가 임신 중절을 원한다고 한다.
  성 문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청소년들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1996년 
7월, 서울 교외에 있는 한 중학교 화장실에서 열 네 살짜리 여학생이 혼자 아기를 낳
은 
적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강간당한 후 임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다. 이 이야기는 다행히도 이런 종류의 사건을 거의 겪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격을 주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학교에서 성교육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

다.
  보건복지부는 점점 더 많은 청소년이 점점 더 빨리  성을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하면
서 학교에서 성교육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수많은 부모들
이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학교에서의 성교육이 청소년을 오히려 타락으로 이끌 수
도 있다며 난색을 표명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교육부의 입장이 우세한 실정이다.
  과거보다 훨씬 자유로운 성생활이 허가된 한국의 젊은이들도  결혼과 가족제도의 문
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동거하는  젊은이들
도 
많아지고 있고, 결혼을 늦게까지  미루는 여자들도 많으며, 이혼하는  숫자도 증가하
고 
있다. 게다가 마치 시험삼아 결혼했다는 식으로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헤어지는 '조
기 
이혼'의 경우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그것은 바로 사회의  기강
이 
너무나 해이해졌고 젊은이들이 무책임해졌으며, 가족제도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
는 
것을 드러내주는 명확한 증거'라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있고, '부모들이나 사회가 동거
에 
대해서 더 많이 이해해준다면, 그런 식으로 이혼하는  경우는 줄어들 것'이라고 말하
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가족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 이미 보았듯이, 여전히 중매 결혼을 하
는 사람이 많다. 남자들은 현명하게도 부모의 동의를 얻은 같은 계층 출신의 여자들과 
결혼한다.
  부부관계에서는 평등한  관계가 항상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30세  이하 남자들의 
12.2%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남자들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들 중 43%는 아내를 동안  집안 일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부부관계가 발전적이며, 남편들이 집안 일에 더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말에 동의한
다. 
하지만 이런 말은 이미 1980년대에 나왔던 것들이고, 당시 독립적인 삶을 요구했던 소
녀들이 지금은 남편 말에 깍듯이 복종하는 아이 엄마가 되어 있다.
  주제를 바꾸면, 남성 우위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정반대로 약간 여성스

운 옷을 입으려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항상 동성애자들을 경멸한다. 대학생  게이협회
를 
만들었던 정희섭씨는 "이런 편견들은 아직도 부리가 깊다" 고 증언하고  있다. 훨씬 
더 
커다란 자유와 훨씬 더 개방된 사고방식을 위해 투쟁하는  젊은이들이 이런 생각을 가
지고 있다니, 얼마나 모순인가.

    아직도 갈 길이 먼 세계화
  한국의 젊은이들은 부모들보다 세계화의 실질적인 흐름에 대처할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 많은 대학생은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웬만큼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
다. 
풍요로운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수입품을 접할  기회가 많고, 또 TV를 통해서 전
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행하는 횟수도 점점 잦아지고  있다. 외국 유학을 떠나
는 
젊은이의 수도 1985년 이후 네  배나 증가했다. 부모들은 일본이나 외국에  콤플렉스
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부모들보다 더 많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외국인을 만나기 

한 무장도 더 잘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의 정신을 더욱 크게 개방시킬 것인가? 그건 명확하지 않다. 물
론 새로운 발견과 교류를 갈망하고, 외국인의 생각은  이해하려 하면, 새로운 사고방

을 접하고자 하는 젊은이를 만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외

에서 살고 있거나 외국으로 휴가를 떠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항상 자기들끼리만 어울
리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나 미국에서 2년간 공부하고 
온 
대학생들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젊은이들이었다. 프랑스나 미국에서 한 명의 친구도 

귀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 일화는 매우 시사적이다.

  1998년 초에 인도 남부에서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네 명의 한국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한국에 살았었다고 하자 그들이 한 첫 번째 질문은 "델리에 한국  음식점
이 
있나요?" 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 함께 토론했던 대학생들이  보수적
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항상 놀랬다. 결혼이나 노조 활동, 범죄 행위에 대한 

쟁이나 다른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해 토론할 때, 학생들은 지극히 엄격한 견해를 가지
고 
있었고, 부모들이 가졌던 의견을 그대로 따라했다. 일반적인 견해에서 벗어나는 독특
한 
생각은 전혀 들은 적이 없다. 들었다고 해도 아주 드물었을 것이다.
  가장 특징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부모처럼 그들도 역시 한국을 도쿄나  워싱턴
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중심에 올려놓고 있었고, 현재의 거대한 국제화의 흐름을 결코 의

하지 않고 이었다는 점이다.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질문에,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영국이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다' 고 말했다. 19
96
년 3월 중국과 대만 사이에 미사일 위기가 고조되었는데, 이웃 강대국인 중국의 야심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역시,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미국
이 
개입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 대답했다. 또  한국이 배제된 북한과의 평화협상에 

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미국 정

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불난 데 부채질하고 있는 것 같다' 고  대답

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 사태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토론 
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의 인권 침해와 같이 이웃 나라에 관계된 주제들도 대학생들의 관심사가 아니
다. 
이붕이나 강택민은 아무 걱정 없이 서울을 방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대학생들
은 그들의 방문에 절대로 시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이다. 그들이 민주주의자가 아
니라서 그런 걸까? 그렇지는 않다. 중국  문제는 한국 대학생들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
문이다. 그들은 그런 문제의 본질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문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여대생은 이렇게 말했다.
  "1994년 영자 일간지인 <코리아 헤럴드>가 주최한 영어 작문대회에서는 '국제 결혼, 
잘못된 결합'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김희정씨가  대상을 받았다.20세에 불과했던 
이 
여성은 국제 결혼을 한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오직 거부감만을 주었을 뿐이라며 
국제 결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녀의  글 중에는 '거리에서 흑인  아기를 팔에 안
고 
있는 한국 여자를 보았을 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는  표현도 들어 있었다. 인종 차

주의적인 편견을 가진 모든 행동과, 동시에 외국인보다는 한국인을 훨씬 더 슬프게 만
드는 생각이 글 속에 나열되어 있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 집단과 많은 한국인이 
격노했고, 결국은 많은 정기 구독자를 일제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신문사는 사과 보
도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고 국제적인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20세의 여대생
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 아닌가?  또 신문사의 경영진은 어떻
게 이런 글을 대상으로 뽑을 수 있었을까?

    무늬만 서구화
  한국 경제의 대부분은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는데도 불구하
고, 쌀시장 개방에 대한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모든 시민과 대학생은 시위에서 중심적
인 역할을 했다.
  서울대학교 영어 교수인 데이비드 구드 씨의 말을 들어보았다.
  "당시에는 값싼 아시아 제품 때문에 직장을 잃었던  유럽인들의 수보다 쌀시장 개방
으로 위협받았던 한국 농민의 수가 더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 점을 

르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97년 12월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학생들이 보였던 최초의 반응
은 
'미국의 책임이고, IMF의 과실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었고, '기업과 은행, 그리
고 
정치 지도자의 실책이다. IMF의 원조로 우리 나라는 파산을 면하게 될 것이다.'라는 

은 꺼내지도 않았다. 간단히 말하면, 빈번하게 해외 여행을 했고, 고등교육을 받았기 

문에 위기가 닥쳐온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들은 민족주의적인  표현만
을 
되풀이했던 것이다. 젊은 세대의 눈에는 한국은 파산할 수  없고, 단지 외국 자본의 

생양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한국 문화의 서구화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바로 이 젊은이들이 외국 영화를 보러 가
고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듣고 있다. 이 현상을 유감스러워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렇게 받아들여야 할까?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한 프랑스인 사업가는 "우리를  마음껏 비판하고 있는 그들이 
바로 우리가 만든 제품을 마음껏 사고 있습니다."라고 빈정거렸다.
  김용자씨의 이야기이다.
  "젊은이들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음악과 의상을 배우기  위해 미국
을 
모방하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쏟지만, 동시에 마음속에 영원한 악마의 이미지로 간직
되어 있는 미국을 끊임없이 비난합니다.  그들은 랩 음악을 듣지만,  그 음악이 처음
에 
전파했던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메시지의 최소한의 내용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또 X
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지만, 그것이 '말콤 엑스'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은 

지 못합니다. 지금은 레게 음악만을 들으려고 하는데, 그것도 한국 그룹이 연주하는 

들만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밥 머레이가 누구인지, 자마이카가 어디에 붙어 있는 나

인지도 모를 겁니다. 아마 키 큰 자마이카 흑인이 머리를 땋고 마리화나를 피운다는 

실을 알게 된다면 기절할 겁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을  먹고, 피자를 무척 좋아

는 그들은 겉으로는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부모
와 
똑같이 연장자와 가족을 존중해야 하고, 집단과 국가에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
고 
있습니다. 어떤 조사 결과를 통해서든,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

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가족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왜

하면 가족이야말로 한국에서 문화와 전통적인 가치를 전달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수행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세대가 그토록 혐오하고 있는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 젊은이들의 시각도 문제가 
된다. 상황은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1996년에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25세 미만  

은이들의 48.3%는 일본을 적으로 여기고 있었고, 89.2%는 일본이 팽창주의적인 야욕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유행은 오늘날 도쿄를 통해 들어오고 있다. 청소년들은 일본에서 히

하는 노래들을 듣고 있고,  '일제'만 맹목적으로 좋아하고 있다.  일본 만화와 일본에
서 
들여온 화장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또한 품질이 좋은 것을 찾는 경향을 보이
는 30세 미만의 젊은 층도 일본 상표가 붙은 전자제품을 점점 더 많이 구입하고 있다. 
따라서 젊은 층의 반일 구호는 형식적인 것일 뿐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적
인 거부로는 이어지지 않는 습관적인 구호라는 것이다. 일본 가수의 노래를 듣고, 도

를 자주 왕래하며, 서울에서 점점 더 많은 일본인을 만나는 한국의 젊은 층은 무의식

에 이웃 일본과 화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면 이런 분석이 지나친 낙관인
지 아닌지가 밝혀질 것이다.

    한 문명의 끝과 시작
  한국 사회가 경제 개발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시대는 지났으며, 동시에 독재시

로 끝났다. 그러나 과거는 여전히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

이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젊은
이들의 정신은 그들의 의복 양식만큼 빠르게 발전하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은 동성연애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다양한 의견
과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사고방식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젊은이들은 많은 모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

하지만 전통적인 가치에 깊이 빠져들어 있다. 그들은 자유로운 성생활을 요구하지만 

족 문제에서는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더 평등한 사회를 원하지만, 정

적인 면보다는 소비적인 면에 훨씬 집착하고 있다. 연대의식을 요구하는 운동들이 활

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도 개인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다. 지구상에 새로운 지평
이 
펼쳐지고 있지만, 젊은이들은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항상 과대 평가하고 있는 것
이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 몰아쳐온 변화들은 아마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활동적
인 
젊은이들이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명의 전제 군주에 의해서 통
치된 은둔의 왕국이었던 시대에 비해 지금은 많은 변화가 눈에 띄고 있다. 따라서 오

날 의혹을 품고 망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젊은이들은 고유한 가치를 가
진, 
보다 평등하고 보다 관용적이며 보다 개방적인, 한국적 특질을 지닌 사회를 건설할 것
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확실히 자기 아이들에게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사회
적 
구속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1996년에 발표된 한 조사에 따르면, 25세 미
만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한국이 한 시대의 끝에, 그것도 한 문명의 끝에 와 있다고 생각

고 있었다.
  그러나 김용자씨는 한국이 그렇게 발전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녀에 

르면, 세대간의 격차를 인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겉으로 

이는 것은 다르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부모를 똑같이 빼닮을 거라는 얘기이다.
  "지금은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부모
가 
가르쳤던 대로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보수주의의 승리를 염려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21세기의 한국을 건설할 장본인이  

로 이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Conclusion 한국은 '진행중'
  한국은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 지난 수십 년 도안 가족 및 사회관계, 소비양식, 

반적인 사회와 경제, 국제관계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 가운
데 
그 어느 것도 완성되지 않았다. 결론에까지 이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여

히 '진행 중'이다. 모든 면에서 시작과 끝의 중간 단계에 위치해 있다.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가 제공되고 있지만, 아이들을 더 똑똑하게 키우고 세계
와 
한층 더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교과과정과 교육방법들을 재고해야 한다.  산
업 
기반이 탄탄하고 생산 속도는 빨라졌지만, 제품들은 질적인 면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
지 
못하고 있으므로, 기업은 더 많은 혁신적인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정착

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권유린은 사라지지 않았고, 복수정당제도는 정치적인  견

차이보다는 오히려 야심을 품은 정치인의 정쟁에서 비롯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여행
을 하지만, 여전히 외국의 정신이나 생활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 외에도 
또 
다른 예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많은 한국인은 무뚝뚝하게 말한다.
  "양적인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는 질적인 차원으로 나

가야 합니다."

  경제개발에만 매진해온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거기에 따라서 발생한 사회적인  변

를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토대는 

미 세워졌고, 이제부터는 무엇을 건설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남았는데, 약점은 

로 거기에 있다.
  경제개발은 과거의 가치들 중 많은 부분을 파괴했을 뿐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지 못
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한국이 한 시대와 한 문명의  끝에 이르러 있다면, 이제 새로
운 
시대와 새로운 문명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가의 물리적인 변화보다 명확하지  않
고 
인상적이지도 않은 이 두 번째 단계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 닥쳐올 변화는 

거의 변화만큼이나 정신적인 외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
  모든 분양에서 과대와 현대 간의,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간의 영원한  싸움
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가 있다. 당장 내일부터라고 할 
수 
있는 국가의 미래는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 거기에는 어떤 모호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 현대성과 진보주의가 서구화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자신의 고유한 

격을 당연히 지녀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성격과 가치와 정신은 모든 한국인의 자성과 분명한 선택의 결과여야
지, 세계로의 개방에 장애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타인
을 
향해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경제적, 기술적 차원에서나  의사소통과 창조성의 수준

서나 자기보다 훨씬 부유하고 강한 나라들만이 비교와 참조의 대상이라면, 자신에 대
한 
믿음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한국은 자신을 더 잘 알아가며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재발견함으로써 외국의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서구화하기보다는 아
시아적인 가치에 더 많은 뿌리를  내림으로써 현대성을 과시하고 효과적인  개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민족주의적 착란으로 선회하지 않는다면 희망은 있다. 

재는 전통예술을 연구하는 사람이 외국의 문화적 '침략'을 가장 자주 외쳐대고 있다. 

러나 이것이 외국의 문화를 더 잘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저항

인 문화에서 개방적인 문화로 이행할 필요가 있다.
  점심으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고, 저녁으로는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 캘리포니
아 
출신 그룹의 록음악을 들으면서 전통적인  찬불가를 감상할 수도 있고, 청바지를  입
고 
다니다가도 설이 되면 한복을 입고 조부모  앞에서 절을 할 수 있다. 외국여행을  자
주 
하면서도 자기 나라를 사랑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정확하
게 
이야기하면,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가정과 현대적인 가정 역시 공존할  수 있다. 이 두 모

을 비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쉽게 인정되
지 않고 있는 문제이다.
  한국은 지극히 동일성을 추구하는 나라이고,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정체된 채 단일
한 
모델을 복제해왔다. 오늘날의 도전은 다양함이 존중받으며 공존하는 복수의 사회를  

해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문제는 아예 거론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은폐되어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세계  속의 한국의 위치, 일본과 

반도와의 관계, 이전의 독재정권이 장수한 이유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한국인이 

로 평화롭게 살아가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뿌리 내리기 위한 본질적인 조

이다.
  흔히 '남한은 오늘날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는 
말을 듣는다.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이런 말들이 모든 면에서 적용되는 것은 아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인과 더 잘  만나기 위해 고유한 아시아적 동일성을  재확인하
는 
것, 저항적인 문화에서 개방적인  문화로 이행하는 것, 단조롭고  동일체적인 사회에
서 
복수적이고 다양한 사회로 변화하는 것은 한국이 21세기에 맞닥뜨려야 할 도전일 것이
다.

  한국에서 발생한 경제위기는 오랜 세월 동안 허리띠를 졸라맨 끝에 무제한적인 소비
와 해외여행, 그리고 여가활동을 마음껏 해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비극이었다. 풍

롭게 살다가 갑자기 검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다 도중에 브레이크가 걸린 격이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 알 수 있
다.
  그러나 이 경제위기는 비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에  찾아온 행운이 아니었을까? 
경제운용의 측면에서 볼 때, 3년 간 엄중하게 경제를 치유한 후에는 오히려 성공적으
로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문가들  또한 그렇게 판단하고 있
다. 
따라서 이번에는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국제시장에서의 경쟁력이 의심스러운 재

들을 더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제위기는 이제까지 시간이 없어서였다고 불평한 했던  한국이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우리는 언제나 경제개발만을 생각

느라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지 규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

다. 또한 경제학자는 "이  위기는 한국에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항
상 
감추려고 애썼던 문제들에 대답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덧붙인다.  지금이 바
로 
그 좋은 기회이다.

  "당신이 볼 때 10년 후에는 한국이 어떻게 변할까요?"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
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한반도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무수히 

기 때문이다. 국가가 여전히 변화하는  중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규명되어 있지  

다. 또 실제적인 위기가 전문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경제적으
로도 알려져 있지 않다. 북한의 미래에 대해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
문에 결국은 외교적으로도 알려져 있지 않다.
  북한 정권은 내일 무너질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개혁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수
십 
년 동안 변화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공산 정권
의 
붕괴는 동북아시아의 모든 나라, 특히 남한의 모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

하다. 또 남한의 역시 북한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분명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하는 이중적인 형태를 띨  것이
다. 
사회문제에 극히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볼 때, 젊은이들이 부모들처럼 최소한의 

기 성찰도 없이 '경제위기는 미국의 잘못이다'라고 단정하는 소리를 듣게 될 때, 이  

라는 결코 쉽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심재훈씨는 반복해서 말했다.
  "한국인들은 집단적 건망증이라는 끔찍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거로

터 어떤 교훈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은 의심하고 자문하지만, 민족주의가 몸에 밴 탓에 자신들이 틀렸을 리가 

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우월 콤플렉스와 열등 콤플렉스 사이에서 영원히 동요할 것

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인은 때때로 거리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하고 개방적이며 

대한 품성으로 따뜻하게 외부인을 환대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집단을 선호함으로써 

애를 극복할 수 있는 그들만의 투지를 발휘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은 역동적이고 

집이 세며, 단호하게 말하면 미래 지향적인 사람들이다.
  1959년 서양의 한 신문에는 '한국, 사라지기 위해 탄생한 나라'라는 제목의 글이 실

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섬으로써 한국을 믿지 않던 
외국의 비판적인 예측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십 년 후에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확신은 금물이다. 불안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