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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by Casey,Riley 202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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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 역사의 주인공, 그러나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던 민초들의 생활상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고리타분하고 교훈적인 얘기가 아닌, 역사시간에도 알려주지 않았고 역사책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흥미로운 얘기를 담아낸 만큼, 독자들은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어느 쪽을 펼치든 역사는 수많은 사람의 삶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현대의 삶 또한 과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 Short Summary 
 
이 책의 키워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옛날에는 어땠을까?’이다. 역사 교과서와 수많은 역사책에서 그일단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최첨단 사회에서 사는 현대인으로서는 옛사람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상상 해보는 것이 쉽지 않다. 옛날에도 법적으로 정해진 휴일이 있었을까? 번듯한 집안의 남자와 혼인을 하는 여자는 오늘날처럼 무리해서 혼수를 마련해야 했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경주 사람들이 쓰던 말이 표준어였겠네? 그럼 오늘날의 경상도 사투리가 표준어였겠구나. 옛날에도 데이트를 했을까? 연애 결혼도 가능했을까? 엣날 사람들은 어떤 스포츠를 즐겼을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궁금증을 풀어줄 마땅한 자료를 접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책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을 주목해보자. 
 
▣ 차례 
 
1장 의식주ㆍ풍속 2장 종교ㆍ예술ㆍ교육 3장 과학ㆍ기술ㆍ천문ㆍ의학 4장 제도ㆍ법률 5장 경제생활 6장 정치ㆍ군사ㆍ외교 7장 궁중 생활 
 
- 2 -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1장 의식주ㆍ풍속 
 
쇠 금(金)자를 쓰는 김씨를 금씨라 하지 않는 이유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김씨(金氏)이다. 김씨는 크게 나누어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수로왕계와 신라 왕실의 박ㆍ석ㆍ김 3성 중 하나인 김알지(金閼智)계로 나눌 수 있다. 김수로왕 이나 김알지가 김씨 성을 가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가락에 본디 9간이 있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9간들이 구지봉에 올라 가락을 다스릴 군장을 얻고자 신탁을 묻는 의식을 행했더니, 마침내 하늘에서 6개의 해만한 황금알을 담은 금합이 내려 왔다. 이튿날 이 여섯 개의 알이 아이로 태어나, 그중 가장 먼저 나온 ‘수로’를 가락(본가야)의 임금으로 삼고, 금합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 성을 부여했다고 한다. 
 
신라의 4대 왕인 탈해왕(재위 57~80) 9년(65) 봄날 새벽에 경주의 계림에서 기이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가보니 울창한 소나무숲 높은 나뭇가지에 금빛 찬란한 작은 궤가 걸려 있고, 그 밑에흰 수탉이 울고 있었다. 그 금궤를 열어보니 뜻밖에도 용모가 단정한 비범한 사내아이가 들어있는지라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수로왕이나 알지나 김씨가 아닌 금씨여야 할 것이다. 금합이나 금궤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금씨가 아니라 김씨라고 한다. 이것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조선시대에 금씨가 김씨가 되었다는 속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오행설에서 ‘금목수화토’는 상생일 때 ‘목-화-토-금-수-목’으로 순조로운 원인ㆍ결과가 성립된다고 본다. 나무에서 불이 생기고, 불이 꺼져 흙이 되며, 흙에서 쇠가 나고, 쇠에서 물이 나고, 물이 있어야 나무가 난다는 식이다. ‘목’은 ‘토’를 이기고, ‘토’는 ‘수’를 이기며, ‘수’ 는 ‘화’를, ‘화’는 ‘금’을, ‘금’은 ‘목’을 이기는 것이 상극의 원리이다. 
 
그런데 조선을 건국한 성씨는 이(李)씨인데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목’에 해당이 된다. 한 시대를 이끌 어갈 이씨이니, 이것을 이기는 상극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전제 왕조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이씨를 이기는 성이 있으니 그것이 금(金)씨였다. 이에 ‘금씨’를 ‘김’씨로 읽게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지명에 ‘金’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서는 ‘金’자를 모두 ‘금’으로 읽는다. 즉 금곡, 금촌, 금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강 이남에서는 김해, 김포, 김천처럼 ‘김’으로 읽는다. 다만 금이 나는 곳만은 예외로 ‘금’으로 읽었으니 금구, 금오산 등이 그 예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지인 천 명이 쓴 천자문을 선물 받은 첫돌 김수온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 23년(1441)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이래 공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김수온은 세조 12년(1466) 발영시(단오절에 현직 중신과 문무 관료에게 실시한 임시 과거)에 이어 등준시(현직 관리, 종친, 부마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임시 과거)에 
 
- 3 -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서 장원을 하여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쌀 20석을 하사받았는데, 문무과 장원에게 임금이 쌀을 내리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불교와 제자백가에 능통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시문에 뛰어나 명나 라에까지 그 이름을 알렸다. 
 
김수온에게는 미워할 수 없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책을 찢어서 외우는 버릇이었다. 그는 찢어진 책을 모두 외우면 버렸으므로 한 권을 모두 외우면 곧 책 한 권이 없어지곤 했다. 그러나 김수온도 찢을 수없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천자문』이다. 김수온이 찢을 수 없는 『천자문』은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김수온의 학문적인 발전과 장수를 비는 뜻에서 할아버지가 지인 1000명의 도움을 받아 한 사람이 한 자씩 써서 완성한 『천자문』인 것이다. 
 
이러한 『천자문』은 대개 아이가 첫돌을 맞거나 『천자문』을 배울 나이가 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향시 이상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이 고을 저 고을 찾아다니며 한두자씩 써달라고 청하여 만들었다.
1000명의 사람이 제각각으로 한두자씩 썼으니,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을 일찍이 깨닫게 하면서된 사람들의 성격과 난 사람들의 재능을 이어받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천자문』을 받은 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이 책을 볼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고, 누워있는 어른을 함부로 넘지 않는 것처럼 이 책도 함부로 넘지 못할 정도로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이 『천자문』은 자손 대대로 이어지면서 앞서 이 책을 뗀 사람의 이름과 일시를 기록하여 전통으로 남기는 관습도 있었다. 
 
열두 달 열두 가지 떡떡타령이 있다. “왔더니 가래떡 / 울려놓고 웃기떡 / 정들라 두텁떡 / 수절과부 정절떡 / 색시 속살 백설기 / 오이서리 기자떡 / 주눅 드나 오그랑떡 / 초승달이 달떡이지” 
 
예부터 우리나라는 다달이 명절이 있었고 명절마다 먹는 떡이 있엇다. 정월 보름에는 달떡, 이월 한식 에는 송편, 삼월 삼짇날에는 쑥떡, 사월 초파일에는 느티떡, 오월 단오에는 수리치떡, 유월 유두에는 밀전병, 칠월 칠석에는 수단, 팔월 한가위에는 송편, 구월 중양절에는 국화떡, 시월상달에는 무시루떡, 동짓달 동지에는 새알심, 섣달그믐에는 골무떡을 먹었다. 
 
이 열두 가지 떡을 포함해 적어도 36가지가 넘는 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가에 시집가려면 180가지의 음식을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그중에서 36가지 떡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떡은 한국인에게 한마음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연변에서는 손님 밥상 복판에 김이 모락 모락 나는 흰떡 한 무더기를 올리고 주인과 손님이 각각 손으로 그것을 떼어 먹음으로써 식사가 시작 된다. 인절미(引切米)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떡의 찰기가 서로의 마음을 가깝게 하고, 떡을 함께 먹음으로써 마음을 나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사상에 반드시 떡을 올리는 것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조상신이나 신령과 가까이하기 위함이요, 마을사람들이 떡을 나누어 먹는 것은 한마음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시월상달에 집집마다 만든 고사떡을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것은 한 해 동안 농사일을 하는 데 도움을 주어 고맙다는 뜻과 함께, 같은 마을 사람으로서 한마음을 갖자는 뜻이 있다. 
 
- 4 -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떡은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과도 관련이 있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찹쌀떡을 먹거나 마을 입구 서낭당 나무에 붙이면 합격한다고 믿었다. 수학능력시험이나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합격을 기원하며 찹쌀떡을 주거나 교문에 붙이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풍속이다. 결혼하고 신행을 온 딸이 시댁으로 돌아갈 때도 떡을 만들어 보냈다. 시집가면 ‘입 막고 3년’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말조심하라는 뜻도 있지만, 시댁 식구들과 한마음을 가지라는 뜻도 담겨 있다. 
 
2장 종교ㆍ예술ㆍ교육 
 
당나귀 바람 치맛바람이란 여자의 극성스러운 활동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글자대로 풀이하면 치마를 입고 움직여서 생기는 서슬 또는 옷을 정식으로 갖춰 입지 않고 치마저고리 정도만 걸치고 나서는 여인의 차림새를 뜻한다. 이는 여인이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설친다는 평범한 어원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일종의 유행어가 됨으로써 주목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들의 극성맞은 행위로 지목받은 치맛바람으로는 초ㆍ중등학교에서의 자모회를 중심으로 일으키는 치맛바람, 계모임이나 각종 투기의 치맛바람, 향락 행위와 관련된 치맛바람이 있다.
이러한 양상은 6ㆍ25 전쟁과 휴전 후의 혼란한 사회환경 속에서 서양 문물의 직수입에 자극받아 싹트기 시작했으며, ‘치맛바람’이 유행어가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1970년대에 이르는 고도 경제성장기와 궤를 같이한다. 
 
학교에서의 치맛바람은 자모들의 학교 출입, 교사 초대, 돈봉투 주기 등의 행위로 교육자를 부패시키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고, 자녀에게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며 과대망상이 되거나, 반대로 나약하고 의존적이며 열등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옛날에는 여성들의 외부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므로 치맛바람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대신 남자들이 일으키는 당나귀 바람이 있었다. 당나귀가 행세깨나 하는 사람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즉 학생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형들이 당나귀를 타고 서당으로 찾아가 훈장과 여러 문제를 상담하고 대접도 했던 것이다. 
 
형벌에서 나온 말인 ‘도무지’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도무지’는 조선시대에 사사로이 행해졌던 형벌인 도모지 (塗貌紙)에서 비롯되었다.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여러 겹으로 착착 발라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말라 감에 따라 서서히 숨을 못 쉬어 죽게 되는 형벌이다. 
 
기록을 살펴보자.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된 오치문이란 사람이 울산 장대로 압송된 뒤 도무지형으로 죽었다. 천주교 기록에 따르면 “순교 당시 그는 얼굴을 한지로 덮은 채 물을 뿌림으로써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형(도모지형)을 받았는데, 무의식 중에 혀를 내밀어 물 묻은 한지를 뚫자 군사들이 그구멍을 막아 질식시켰다고 전한다.”고 한다. 이보다 늦은 기록으로는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천주교인들에게 광주유수가 도배형 또는 도모지라고 부르던 백지사형을 집행했다는 기록이 있 다. 
 
- 5 -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또, 황현이 고종 1년(1864)부터 융희 4년(1910)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에 “대원군 시대에 포도청의 형졸들이 살인하기에 염증을 느껴 백지 한 장을 죄수의 얼굴에 붙이고 물을 뿌리면 죄수의 숨이 막혀 죽곤 했는데 이를 ‘도모지’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얼굴에 물을 묻힌 종이를 붙여 숨을 쉴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이라는 뜻이 된 듯하 다. 
 
3장 과학ㆍ기술ㆍ천문ㆍ의학 
 
태아의 성 감별 예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혼인을 한 후에 조상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표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자손을 낳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계를 계승해줄 아들을 낳는 것을 조상들에게 보은하는 것으로 생각 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성리학이 정착되면서 아들에게 가계의 계승이나 제사 등이 우선적으로 이어 지면서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그리하여 며느리나 아내를 고를 때 ‘삼십무자상(三十無子像)’이라는 기준을 적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허리가 가늘어 자궁이 좁은 여자, 머리칼이 검지 않고 노랗거나 붉은 여자, 미간을 찡그렸을 때 도장 무늬가 새겨지는 여자 등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여겨서 꺼렸다. 
 
혼인을 한 후에도 귀숙일을 정하여 남편과 잠자리를 하는 날을 가렸다. 이를테면 정월은 ‘1일, 6일, 9 일, 10일, 11일, 12일, 14일, 21일, 24일, 29일’이 좋은 날이었다. 나이가 홀수인 여자는 아들을 낳고 싶으면 홀수 달에, 짝수인 여자가 딸을 낳고 싶으면 짝수 달에 합방을 해야만 했다. 또 자궁에 좌우로 구멍이 나 있는데, 좌혈로 정자가 들어가면 아들이 되고, 우혈로 들어가면 딸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왼쪽을 아래로 하여 눕는 습관을 들어야 했다. 
 
임신을 하고 난 뒤에도 아들을 낳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활줄을 석 달간 배에다 감고 자거나, 수탉의 깃털을 뽑아 임신한 여자가 깔고 자는 요 속에 넣거나, 금이나 은으로 작은 도끼를 만들어 임신한 여자의 베개 속에 넣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태아의 성을 감별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8월 한가위에 송편을 빚을 때 바늘을 넣고 빚어, 임신부가 그송편을 씹어 바늘귀가 나오면 딸, 바늘 끝이 나오면 아들이라고도 했다. 미역을 사서 왼손으로 들면 아들, 오른손으로 들면 딸이라고 했다. 걸어가는 임신부를 뒤에서 불렀을 때 왼쪽으로 돌아보면 아들, 오른쪽으로 돌아보면 딸이라 했다. 임신한 지 석달 후에 왼쪽 배가 아프면 아들, 오른쪽 배가 아프면 딸이라고 했다. 임신부의 왼손이 부으면 아들, 오른손이 부으면 딸이라고 했다. 왼쪽은 아들이요 오른 쪽은 딸이었던 것이다. 
 
4장 제도ㆍ법률 
 
기상 오보는 바로 처벌 첨단과학이 매우 발달한 오늘날에도 기상청의 기상 예보는 종종 틀려 비난을 받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날씨나 기상을 잘못 예측하면 비난 정도가 아니라 곧바로 처벌을 받았다. 이때는 일식(日食)을 천재 
 
- 6 -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지변으로 생각해, 날씨보다는 일식을 관찰하는 데 신경을 썼다.
일식은 태양을 상징하는 임금이 빛을 잃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임금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곧 백성 들의 통치자로서의 권력을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임금이 정치를 잘못했거나 부정한 일을 저질렀으니, 이를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하늘에 고하는 제천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천문ㆍ지리ㆍ기후 관측 등을 맡아보는 관상감에 일월식 추산관이라는 관리를 두어 미리 일식을 관측하게 했다.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일월식 추산관이 말하면 나라에서는 그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해 나랏일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태양이 빛을 잃었으니 임금이 정상적으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잘못된 믿음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일식을 잘못 예보하면 그 관리는 처벌을 받았다. 『태조실록』 태조 7년(1398) 4월 17일 기사에 간관 박신(朴信) 등이 올린 상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겸서운주부 김서가 월식을 예상하여 예조에 보고했으나 끝내 월식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서는 직책이 추보를 전문으로 하면서, 이제 하늘의 움직임을 보는 것을 혼동하여 나라 사람들을 속였사오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관상감에서는 해임하고 법에 의하여 죄를 묻게 하소서.” 
 
그러나 세종은 일식 예보가 맞지 않는 것은 관상감 관리의 잘못이 아니라 명나라의 천문 관측을 그대로 따른 결과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 14년(1432) 1월 4일 사헌부에서 “관상감에서 원일에 일식이 있을 거라고 했으나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것은 관측이 정밀하지 않은 것입니다. 청컨대 죄를 내리십시오.”하니, 임금이 “중국에서도 또한 정월 원일에 마땅히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니, 이것은 관측을 잘못한 죄는 아니다. 각 도의 보고서와 명나라 정부에 들어간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에 과학기술에 특히 관심을 두어, 천문대인 간의대를 설치하고 혼천의와 양부일구 등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어 우리나라 천문 관측 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그 결과 역서인 『칠정산』 내외편을 펴내어 세계적인 수준의 역법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천문을 잘못 관측한 관리는 처벌을 면치 못했다. 성종 19년(1488) 11월 17일에 우부승지 경준이 아뢰기를, “지난밤은 월식인데 때가 지나도 월식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관상감 추산관을 국문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명령하기를 “그대로 따르라. 그리고 다시 자세히 따져보게 하라.” 했 다. 
 
이처럼 추산관은 천문을 잘못 관측할 경우 처벌을 받았지만 ‘하늘을 읽는 관리’인지라 그 권력은 막강 했다. 천문을 미리 관측해 임금에게 보고해서 대책을 강구해야만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 관측은 보통 하루에 6번 이루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날씨는 『승정원일기』에 기록했으며, 매일매일 관측한 결과는 『조보』에 적어 관청이나 백성들에게 알려 농사를 짓는다거나 행사를 할 때 도움이 되도록 했다. 
 
- 7 -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관상감에서는 일식과 월식뿐 아니라 혜성도 관찰했다. 특히 천문 관측일지인 『성변등록』에는 영조 35 년(1759)에 나타난 핼리혜성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핼리혜성의 이동 경로, 꼬리 길이, 모양, 색깔까지 그림으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천문 관측은 광무 8년(1904)에 시작되었다. 이 해에 제물포 응봉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관측소인 인천관측소가 문을 열었고, 이어 부산ㆍ목포ㆍ원산ㆍ용암포에도 관측소를 설치했다. 인천관측소의 초대 소장으로 파견된 기상학자 와다 유지는 우리나라의 측우기를 세계에 소개 하는 한편, 우리나라 관측 기록을 연구하여 학계에 널리 알렸다. 인천관측소는 1949년 8월 18일에 서울로 옮겨 국립중앙관상대(지금의 기상청)로 바뀌었다. 
 
5장 경제생활 
 
‘땡전 한 푼 없다’에서의 땡전은 당백전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정난을 겪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백전 (當百錢)을 발행했다. 고종 3년(1866) 11월부터 6개월간 약 1600만 냥이 발행되었는데, 법정 가치는 상평통보의 100배였지만 실제 가치는 이에 크게 못 미쳐 화폐 가치의 폭락을 가져왔다. 
 
당백전 발행 초기인 1866년 12월경에는 쌀 1섬의 가격이 7~8냥에 지나지 않았으나, 1~2년 사이에약 6배로 폭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발행한 당백전이 오히려 경제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던 당백전은 당전에서 땅전 으로, 다시 땡전으로 발음이 변했다. ‘땡전 한 푼 없다’고 할 때의 바로 그 땡전이 당백전인 것이다. 
 
그림으로 나타낸 상호 길가에 즐비한 수많은 간판 중에는 고유한 우리말을 살려 쓴 간판이 있다. 옛날에도 상호를 글자로 표시했을지 궁금해진다. 
 
과거 한양에는 대문 앞에 하얗게 칠한 조그만 쪽박을 걸어놓은 집이 있었다. 살며시 문짝을 열고 보면 거기에 풀을 쑤어 바가지로 똑똑 떠서 물에 담가 놓은 그릇이 있었다. 집집마다 바느질을 하자면 으레 붙임풀이 필요했고, 그것을 사러 간 사람은 주인을 찾을 것도 없이 동전 한 닢을 물 속에 넣고 한 모를 똑 떠서 가져오면 되었다. 그러니까 문 앞에 걸어놓은 쪽박이 간판이자 상호인 셈이다. 
 
다른 종류의 상가에서도 이처럼 물건을 걸어놓고 간판이나 상호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용수(간장이나술 등을 거를 때 쓰는 용구. 술독 안에 용수를 박아넣고 그 안에 괴어드는 맑은 술을 떠낸다)를 장대 끝에 꽂아 세우면 술집이다. 냉면집의 국수발, 무당집의 하얀 깃대와 까만 깃대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호랑이가 장죽으로 담배 피우는 그림을 그려 건 곳도 있었는데, 아주 어수룩하여 싸게 판다는 뜻이다.
포목전은 사모관대와 원삼 족두리로 신랑과 신부를 표시했다. 색주가는 홍등(紅燈)을 걸어 색주가임을 알렸다. 그래서 지금도 흔히 색주가를 홍등가라고 한다. 
 
전매 특권과 국역 부담의 의무를 진 한양의 육의전은 노랑 바탕에 빨간 테두리의 깃발에 검정색으로 글씨를 써서 상호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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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정치ㆍ군사ㆍ외교 
 
삼국시대에 시작된 지역 대립의 역사 지역감정은 언제쯤 나타났을까? 1990년 한 여론기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때라고 응답한 사람이 38.2퍼센트, 조선시대 13.2퍼센트, 이승만 정권 9.6퍼센트, 광복부터 건국까지 5.9퍼센트, 삼국시대 3퍼센트, 고려시대 4.7퍼센트였다. 지역감정의 역사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역주의 의식과 편견은 어느 시대건 권력을 독점하거나 과점하려는 정치인에 의해 일어 났으리라 추정된다. 
 
오늘날 영남과 호남의 대립은 삼국시대 나제동맹의 결렬 때문이라 추정된다. 5세기에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펴자, 433년 백제의 비유왕(재위 427~455)과 신라의 눌지왕(재위 417~458)이 나제동맹을 체결했고, 485년에는 백제의 동성왕(재위 479~501)과 신라의 소지왕이 혼인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551년 백제의 성왕(재위 523~554)과 신라의 진흥왕이 대규모 북진을 시작해 한강 하류 지역을 회복했다. 그러나 진흥왕의 배신으로 120여 년간 지속된 나제동맹은 깨지고, 이것이영 호남의 대립으로 이어졌다고 추측된다.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백제의 왕족과 귀족 등을 당나라로 끌고 감으로써 적대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게다가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 정부의 차별정책이 통일 후에도 이어져, 백제 계가 가진 고유 성씨인 부여ㆍ사ㆍ연ㆍ협ㆍ해ㆍ진ㆍ국ㆍ옥ㆍ백 등을 신라인의 성씨로 바꾸도록 강요함 으로써 적대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차별정책은 이어졌다. 태조 왕건이 유언으로 남긴 ‘훈요십조’ 중 8조에는 백제 땅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이 담겨 있다.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이남 지역은 산의 모양과 지세가 함께 거꾸로 달리니 인심도 또한 그러하므로, 그 고을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거나 왕족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원한을 품고 반란을 꾀하거나, 말을 간교하게 하여 권세를 농간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므로,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지어다.” 이는 신라 말기에 유행한 풍수도참설의 영향과 견훤 등 후백제인에 대한 왕건의 개인적인 감정이 차별정책을 더욱 가속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전기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에 대한 관직 등용의 제한이 있었고, 선조 22년 (1589)에 일어난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호남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면서 관직 등용의 제한이 호남 지방 으로 확대되었다. 정약용은 위의 세 지방뿐만이 아닌 황해도, 개성, 강화, 관동 등의 지역을 차별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지역민에 대한 편견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책에서 각 도의 인심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며, 경상도는 풍속이 진실하고, 함경도는 굳세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사납고 모질며, 강원도는 어리석고, 전라도는 오직 간사함을 숭상하여 나쁜 데에 쉽게 움직이고, 경기도는 재물이 보잘것없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이재만 쫓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환의 주관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당시 정치인의 보편적인 생각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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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이다. 
 
7장 궁중 생활 
 
도리도리 짝짜꿍은 왕족의 교육 방식 아이들 교육에 관련해서 단군 이래 전해오는 가르침이 있다. 단동10훈(檀童十訓)이 그것으로, 아기를 얼르는 짝짜꿍, 도리도리, 섬마섬마, 죔죔 등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왕족들은 아이들이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자연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육아법으로 단동10훈을 활용했다. 
 
단동10훈 1훈은 각궁(覺躬), 곧 까꿍이다. 내 마음대로 세상이 만들어지니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뜻이다. 2훈은 도리도리(道理道理)이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하늘의 도리로 생긴 천지만물처럼 자연의 섭리를 잊지 말라는 인생 지침이다. 3훈은 작작궁작작궁(作作弓作作弓), 곧 짝짜꿍짝짜꿍이다. 짝짜꿍은 태극을 뜻하므로 음양의 결합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이치를 깨닫고 박수 치면서 즐겁게 지내 라는 교훈이다. 
 
4훈은 지암지암(持闇持闇), 곧 죔죔이다.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내 것을 찾으면서도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을 가지라는 교훈이다. 5훈은 서마서마(西摩西摩), 곧 섬마섬마이다. 아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따!따!따!’ 하면서 세우는 것으로 홀로서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6훈은 업비업비(業非業非), 곧 어비어비이다. 아이가 위험한 행동이나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할 때 ‘어비’라고 말한다. 곧 커서 나쁜 행동이나 사람의 도리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7훈은 아함아함(亞含亞含)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모든 일은 말이 화근이 되어 일어나므로 말을 조심하라는 뜻에서 ‘아함아함’ 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8훈은 지나아비활활의(支娜阿備活活議), 곧 질라래비훨훨이다.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다고 했다.
아이의 양팔을 잡고 ‘질라래비훨훨’ 말하면서 나비처럼 훨훨 춤을 춘다. 육체가 건강하라는 뜻이다. 9 훈은 불아불아(弗亞弗亞), 즉 부라부라이다. 불(弗)은 기운이 하늘에서 땅으로, 아(亞)는 기운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어린아이에게 두 다리를 번갈아 오르내리도록 하라는 뜻으로 아이의 허리 춤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주면서 ‘부라부라’를 말해준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면서 노력하여 으뜸으로 자라라는 뜻이다. 10훈은 시상시상(詩想詩想)이다. 아이를 앉혀놓고 앞뒤로 흔들면서 ‘시상시상’ 이라고 말해준다. 사람의 몸과 마음과 기운은 각각 땅과 태극과 하늘에서 받았으므로 사람은 작은 우주이다. 그러니 자신을 작은 우주로 생각하여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이다. 

- 10 -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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