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딸.
임 춘남
----- 차례 -----
⊙ 작가 소개
1. 제1장 벚꽃동산 殺人事件
2. 제2장 强盜 만난 사람들
3. 제3장 쫓는 者와 쫓기는 者
4. 제4장 幻想殺人劇
5. 제5장 어떤 迷路
6. 제6장 尹刑事의 執念
7. 제7장 박쥐 人間
8. 제8장 검은손
9. 제9장 陷穽
10. 제10장 死者의 告白
1. 제1장 벚꽃동산 殺人事件
1950년 4월 9일 일요일, 진해(鎭海) 벚꽃장.
천지가 꽃이었다. 눈부시게 흐드러진 환상의 꽃동산이었다.
뭉실뭉실 솜사탕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터널 속을
일가족 네 사람이 걷고 있었다.
그 황홀한 꽃무리의 환상적인 분위기에 걸맞게 일가족 네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갓마흔 가량의 박갑철(朴甲哲)이 우아하게 가꾼 아내
임지숙(林知淑)과 대화 중이었는데, 황홀한 벚꽃 못잖게
아리따운 딸 해림(海林)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지요?"
"그래. 4월이 황홀한 건 아무래도 벚꽃 때문인 것 같구나."
"언제 어디서 보아도 벚꽃은 정말 환상의 꽃 같아요. 메마른
가지 끝에 매혹적인 꽃망울이 솟아오를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니까요."
오랜 세월 동안 해마다 벚꽃을 음미해 온 아내 지숙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금방 피어난 꽃 같은 딸 해림은 그게 아니었다.
"사꾸라는 일본 꽃이잖아요? 아직도 일본을 잊지 못하셨군요."
"사꾸라는 일본 꽃이라 할 수 있지만, 벚꽃은 우리나라
꽃이야."
아버지의 말에 딸 해림은 호수처럼 맑고 큰 눈동자를
의아스럽게 굴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꾸라는 엄연히 일본인의
꽃이잖아요?"
"넌 아직 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구나. 세월이 가고 깨달음이
오면 꽃을 알 날이 올 거야."
"주말에 내 고향 진해에 내려가 아름다운 벚꽃을 실컷
구경하고 온다니까 우리 과 애들이 비아냥거리더군요. 사꾸라는
왜놈들의 꽃이라구요."
"여대생쯤 되면 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터인데, 정말 답답들
하군 그래. 하긴 해림이 과 애들이라면 대학생이 된 지 1년
남짓밖에 안됐으니 꽃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기는 어려울
테지."
"그럼 벚꽃은 일본인의 꽃이 아니란 말씀이신 가요?"
"그래. 꽃에는 국적이 없어. 사꾸라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꽃이야. 그러나 벚꽃은 엄연히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꽃이지.
워싱턴 광장에도 벚꽃을 사랑하는 미국인들이 해마다 몰려들고
있어."
"정말 그런 가요?"
"정말이고 말고. 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만 진정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있어. 꽃에다 국적을 부여하는 건 어리석은
인간들의 이기적인 소치일 따름이야. 꽃에 원산지는 있을 수
있어도 원래 꽃에는 국적이 없어."
"사랑엔 국적이 없듯이 꽃에도 국적이 없다는 말씀은 이해할
것 같아요. 그런데 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진짜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의 뜻은 얼른 이해하기 어려워요."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 사랑은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영원한 빛이니까. 진정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이니까."
"인간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여자가 진짜
아름다운 여자란 그 말씀이신 가요?"
"과연 내 딸이군 그래.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진정 꽃을 사랑할 수가 없어. 설령 꽃을 사랑한다고 해도
편협하게 이기적으로 기분이 내킬 때만 사랑할 수밖에 없어.
조선꽃, 일본꽃 하면서 말이야. 만약 꽃이 그런 말을 알아들어
봐. 꽃이 인간들을 불쌍히 여길 거야. 꽃들이 모여 사는
꽃동네에 가서 꽃들에게 국적이 어디냐고 묻는 얼빠진 인간이
있다면 꽃들이 뭐라고 대답을 하겠니?"
"글쎄요."
"내 생각에는 정신병원에나 먼저 다녀오라고 꽃들이 말할 것
같다."
"그럼 전국 각처에서 내노라 하고 모여든 우리 과 애들도 아직
정신적으로는 멀었군요?"
"꽃을 바라보는 정신적인 눈은 아직도 열리지 않은 것이지."
"고마와요, 아빠. 아빠가 벚꽃을 사랑하는 뜻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군요."
"내가 벚꽃을 사랑하는 건 내 고향 진해의 기후와 토양에 잘
맞는 꽃이 벚꽃이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벚꽃뿐만 아니라
고향산천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진달래꽃 등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귀국선에 올랐던 거야."
"조국강산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희생을
감수하시고 귀국선에 오르셨던 거죠?"
"해림이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지?"
"왜 몰라요. 저도 똑똑히 보았어요. 그 땅에 이루어 놓았던
아빠의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은 정말 근사했어요. 그리고 그
집을 버리다시피 하고 떠날 때부터 몰아닥친 고통과 굴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귀국선을 기다리면서
시모노세키항(港)에서 며칠 동안 겪었던 그 혹한과 고통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게 바로 내 개인에게 주어졌던 해방의 대가였지. 그 밖에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정말 지난 5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치르신 걸 알아요.
재일귀향민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환동포 취급을
당했었잖아요."
"오늘같이 좋은 날 그런 이야기는 그만 하자. 이젠 우리집도
안전권에 들게 되었으니까."
"정말이예요, 아빠?"
"그럼 정말이지."
"우리는 언제 일본에서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집에서 살게 되나요?"
"염려 말아. 난 꿈을 가지고 귀국했어. 나는 일본인을 알고
일본인을 능가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잠입했다가 꿈을 가지고
귀국한 사람이니까."
"어떤 꿈을 가지고 귀국하셨어요?"
"내 고향 진해를 온통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꿀 꿈을 가지고
귀국했어. 일본에 있던 우리집 정원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 계획이다."
"어떻게요?"
"먼저 저기 저 탑이 서 있는 제황산(帝皇山)만 남겨놓고
제황산에 잇달린 펑퍼짐한 황토산을 속천(束川) 앞 바다로 밀어
버리는 거야."
"그럼 답답한 진해의 앞가슴이 확 트이겠군요."
"바로 그거야. 바다를 향해 가슴을 열게 하고 평지를 만들어
진해땅을 넓히고 곳곳마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맑은 호수와
개천을 만들고 고기가 뛰놀게 하고 진달래. 벚꽃. 동백꽃을
지천으로 심어 환상의 꽃이 피는 고향, 사시사철 무지개빛 꽃이
피는 꽃의 고향을 만들 작정이야."
"그럼 울타리 없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생기겠군요."
"그렇게 되면 내 고향 진해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원도시가 되는 거야."
"그런데 그 엄청난 공사를 어떻게 하실 수 있겠어요?"
"허가는 어떻게 얻어내고 공사비용은 어떻게 감당해 내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겠지?"
"예. 그 점이 의문이예요."
"아빠는 곧 실시될 도의원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다."
"선거비용이 많이 들잖아요?"
"아빠는 부자야. 큰 돈이 될 만한 보물도 있고 예금증서도
있어."
"도의원이 되시면 진해를 아름다운 전원도시로 만드실 자신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자신이라기보다 신념이 있지."
"우리 아빠를 다시 우러러 보아야겠군요."
"그럼 지금까지는 형편없는 아빠로 여겨 온 모양이구나."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큰 돈이 될 만한 보물이란
뭐예요?"
"그건 비밀이다."
"아빠의 사랑하는 딸에게도 비밀로 해야 할 만큼 귀한
보물인가요?"
"응. 지금은 말할 수 없어.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누나는 그것도 몰라?"
지금까지 말 한 마디 없이 솜사탕을 먹으면서 뒤따라오던
국민학교 6학년짜리 지훈(智薰)이 불쑥 던진 말에 해림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럼 지훈이 너는 그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단 말이냐?"
"그럼. 우리집 보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장남이 될 수
있어."
"어렵소. 조그만 녀석이 누나 앞에서 장남 운운하면서 거들먹
거리네. 빨리 말 안해 주겠니?"
그때 박갑철이 남매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지훈아, 넌 작아도 남자야. 남자는 자고로 입이 무거워야 해.
아빠는 너희들한테 그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는데, 무얼
안다고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입 다무는 게
좋겠다."
"예. 알겠어요, 아빠. 그 대신 아까 약속하신 대로 땅콩
사주세요."
"오늘 따라 지훈이가 먹는 걸 꽤 밝히는구나."
"누가 아니래요, 조그마한 게 아까부터 계속 먹어대기만
해요."
"흥. 누나는 모르면 가만히 있어. 난 먹기만 한 게 아니라
아빠의 이야기도 다 들었다."
"자칫 잘못 하다간 다투겠다. 이젠 그만 해, 약속은
약속이니까 땅콩을 사주어야겠군 그래."
일가족 네 사람이 벚나무 밑에다 좌판을 벌여놓고 있는
땅콩장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였다.
30미터 가량 간격을 두고 뒤따라오던 중절모를 눌러쓴
선글라스의 사내도 걸음을 멈추고 딴전을 피웠다.
그뿐 아니었다. 선글라스의 사내 뒤에 바짝 뒤따라오던
더벅머리 청년도 발길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그
청년은 어딘지 모르게 바보스러워 보였다. 사람들의 눈 밖에 날
만큼.
그날 밤 자정이 가까울 무렵.
박갑철은 오랜만에 아내의 부드러운 젖빛 언덕에서 버찌처럼
탐스러운 열매를 따먹었다.
뭉실뭉실한 젖빛 언덕에 솟아있는 두 개의 버찌는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았고 질리지도 않았다.
"여보. 당신은 그윽한 멋만 있는 게 아니라 깊숙한 맛이 있는
여자야."
"대낮부터 한 잔 하시더니만, 기운이 나시는가 봐요."
"당신의 그 동굴은 싱싱한 멍게 속 같아."
"또 그 소리!"
"더 듣고 싶은 모양이지?"
"몰라요!"
"싱싱한 멍게 속처럼 뭉클하고 뽀들뽀들하면서 상큼하고
화하고 싸하고 쫄깃쫄깃하면서 감칠맛이 감도는 그게 뭔데?"
"몰라요!"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워!"
"벌써 마흔이예요. 이젠 늙었어요."
"늙다니? 조금도 늙지 않았어. 우리의 인생은 이제부터야. 그
동안 귀국해서 자리를 잡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았어. 화폐교환만
제대로 해주었더라면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은행에 맡긴 돈은 언제 교환해 준대요? 벌써 4년이
지났어요."
"글쎄, 곧 해주겠지. 그런 얘긴 그만둡시다. 괜히 내가 엉뚱한
소릴 해서 분위기를 깨뜨렸군. 당신은 정말 감칠맛이 철철
넘치는 맛있는 여자야."
부부는 늘 해 오던 식으로 한 차례 황홀한 게임을 벌였다.
"여보, 이번엔 당신 차례야."
"전 별로 생각이 없어요."
"왜 그래? 당신 내가 너무 서둘러 싱겁게 끝내서 기분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군."
"아니예요. 오늘밤은 이상하게 잘 안될 것 같아요. 그만
자야겠어요."
"낮에 벚꽃 구경하느라고 피곤했던 모양이군."
"글쎄요. 암튼 당신도 피곤하실 텐데 그만 주무세요."
등잔불이 꺼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남자의 코고는
소리가 났다. 방금 치른 정사가 부부의 최후의 황홀한 게임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박갑철이 살포시 잠이 들었을 때, 아내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여, 여보!"
"왜 그래? 당신 생각이 있어서 그래?"
"아니예요."
"그럼 아직 등잔불도 끄지 않고 왜 그래?"
"다시 켠 거예요. 무, 무슨 소리가 났어요."
"지훈이 녀석이 변소가는 소리겠지 뭐. 오늘 낮에 이것저것
많이 먹더니만 배탈이 난 모양이지."
"벼, 변소 쪽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어요. 해림이 방 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어요."
"해림이가 잠을 깬 모양인가?"
"글쎄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동시에 송곳처럼 신경이 곤두섰다.
아무래도 집안 식구들의 움직임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창살이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예리한 칼날이 창호지문을 뚫고 들어와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미처 손을 쓸 틈조차 없었다.
빨래방망이에 의해 창살이 부숴졌다. 안으로 잠긴 문고리가
풀렸다.
괴한은 세 명이었다. 한결같이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
행동은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꼼짝 말아!"
"움직이면 죽인다!"
앞선 괴한은 한 손에 칼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플래시를 켜
들고 있었다.
대항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칼을 뽑아든 세 명의 괴한에게
맨손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금불상(金佛像)을 찾으러 온 사람들이다."
"뭐, 뭐라구요?"
"말이 많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
"그 밖에 있는 것도 다 내놓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도망가는 일본놈한테 금불상을 헐값에 넘겨받은 사실을 다
알고 있어."
"난 모르는 일이오."
"안되겠군. 손발을 묶어!"
몸집이 호리호리하고 셋 중에 키가 가장 작은 복면의 괴한이
명령했다. 그가 두목인 것 같았다.
명령을 받은 두 괴한은 먼저 박갑철의 손목과 발목을 준비해
온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벌벌 떨고 있는
임여인을 방 가운데로 끌어내었다.
"그년 삼삼하게 생겼는데!"
"보통 여자가 아닌데!"
"입 닥쳐! 지금 여자한테 눈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야.
여자한테 빨리 재갈을 물려."
두목인 듯한 복면 괴한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다.
"여자는 손만 묶어놓고 빨리 애들을 끌고 와."
대답은 없었지만, 다른 두 괴한은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애들을 끌고 와서 족치기 전에 빨리 금불상을 내놓지."
"우리집엔 그런 물건이 없소!"
"좋아. 그렇다면 그 예쁜 네 딸년을 손좀 봐야겠군.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욕을 좀 보여주지. 그래도 상관없겠지?"
"제, 제발 그런 짓은...."
"딸년을 고이 시집 보내고 싶거든 빨리 말해."
"좋소. 그 대신 물건만 가지고 조용히 돌아가는 거죠?"
"있는 것 다 내놓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약속한 겁니다."
"그렇다니까. 왜 빨갱이처럼 말이 많아. 어서 금불상부터
내놓아."
"손발이 묶였는데, 어떻게 내놓을 수 있겠소?"
"정말 이유가 많군 그래. 금불상을 어디에 숨겨놓았는지 말만
해. 말 안하면 네 딸년하고 여편네는 성치 못할 거야."
"장농 밑 방바닥 속에 있소. 빨리 가지고 가시오."
"알았어. 돈은 어딨어?"
"다락방 고리짝 속에 있소. 하지만 예금통장엔 손대지 마시오.
언제 나올는지 모르는 돈이라 가져가더라도 찾아 쓸 수 없는
통장이니까요."
"가져가고 안 가져가고는 우리 자유야. 알겠어?"
"......"
플래시 불빛 때문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예리한 칼날
뿐이었지만, 박갑철은 얼굴 없는 괴한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두 괴한이 잠옷 차림에 머리채가 흐트러진 해림을 앞
세우고 돌아왔는데, 해림의 입에는 이미 재갈이 물려 있었다.
"꼬마 녀석도 있잖아? 왜 그 놈은 끌고 오지 않았어?"
"어디 갔는지 안 보입니다."
"한 사람이 나가서 다시 찾아봐!"
"그 앤 친구집에 놀러가서 돌아오지 않았소."
"거짓말 마. 주둥이를 뭉개어 놓기 전에."
"정말이오."
"이 새끼가!"
거의 동시에 두목의 발길이 박갑철의 얼굴을 강타했다.
남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임여사가
울부짖고 덩달아 해림이 소리쳤다. 그러나 재갈이 물린 입
밖으로 소리가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이것들 봐라."
갑자기 반항하듯 몸부림치는 모녀의 행동에 두목은 제동을
걸었다.
"한번만 더 반항했다가는 두 년 모두 벌거벗겨서 떡을 칠
테니까, 알아서 해."
"우리 몸엔 손을 대지 말고 빨리 물건을 가지고 나가란
말이오."
"너도 마찬가지야. 한번만 더 주둥이를 놀렸다가는 네 딸년은
성치 못할 거야. 알아서 해."
박갑철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어. 꼬마 녀석을 찾으러 나간 친구 들어오라고 해."
그러잖아도 때마침 밖에 나갔던 어깨가 벌어진 복면의 괴한이
헛탕을 치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집 안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알았어. 빨리 작업을 서둘러."
이미 금불상과 귀중품이 있는 곳을 알아낸 괴한들이 물건을
챙기는 데는 불과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괴한들은 물건을 챙긴 후에도 금방 돌아서지 않았다.
먹음직한 먹이를 발견한 야수들처럼 모녀를 번갈아 내려다보며
군침을 삼켰다.
괴한들의 눈동자 속에는 욕정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까부터 탐을 냈던 두 괴한의 탐욕이 그대로 두목에게까지
전염되어 버린 것 같았다.
두목의 눈동자에 욕정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동시에 눈짓이
있었다. 끝내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사내 놈의 입에 재갈을 먹여놓고 두 여자는 다른 방으로 끌고
가."
"이놈들! 그렇게는 안돼!"
박갑철은 소리쳤다.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 소리쳤다.
승산이 없는 맨손이었지만, 처음부터 지혜롭게 대항할 것을,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다음 순간, 괴한의 검은 손아귀에 있던 예리한 칼날이
박갑철의 심장에 깊숙이 꽂혔다. 동시에 검붉은 피가 치솟았다.
모녀는 비명을 지를래야 지를 수가 없었다. 재갈이 물린
입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놈들은 계획적이었던 것 같았다.
거의 빈틈이 없었다.
문득, 임여사는 깊이를 잴 수 없는 시꺼먼 벼랑 밑으로 떨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묶인 두 손으로 간신히 입에 물린 재갈을
뽑아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괴한의 손목을 들개처럼 물고
늘어졌다.
느닷없는 기습에 괴한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일단 임여인의
이빨에 물린 괴한의 왼손목은 톱니바퀴에 물린 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괴한은 약간 벌어진 임여사의 뽀얀 가슴팍에도
단검을 깊숙이 꽂았다.
빛과 어둠이 엇갈리는 가운데 괴한들의 단검이 몇 차례
번쩍거렸다. 그때마다 암적색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피의 잔치를 벌인 후, 괴한들은 해림을 끌고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괴한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이성이 없는 짐승이었다.
피와 성욕에 굶주린 짐승이었다.
해림은 울부짖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을 수도
없었다. 입에는 여전히 재갈이 물려 있었다.
두 발을 허위적거리며 몸부림쳐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두
손은 머리 뒤로 꽁꽁 묶여 있었다. 건장한 괴한 세 놈을 혼자서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해림은 금방 탈진상태에 빠져 기진맥진했다. 두 다리는 두
괴한의 억센 손아귀에 눌려 있었다.
반항 한번 제대로 못한채 짐승 같은 놈에게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묘책이 없었다. 두 번째 사내놈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을 자유도 없었다.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아픔과
절망의 시꺼먼 심연뿐이었다.
세 번째 놈의 역겨운 숨소리가 귓전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난데없이 날아온 돌멩이에 연거푸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강도야! 강도 잡아라!" 하는
고함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해림은 정신을 가다듬고 머리 뒤로 묶여 있는 두 손을
더듬거렸다. 아까부터 몸부림칠 때마다 손끝에 닿는 물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물그릇이었다.
해림의 두 다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붙잡고 있던 두 괴한은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강도 잡으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혼비백산하여 강도질한 귀중품들을 챙겨 들고 먼저 도망치기에
바빴다.
고통 속에 짓눌려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 몸이 자유로와진
것을 해림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놈이라고는 그녀의 배를 깔아뭉개고 있는 한
놈뿐이었다.
마침내 해림은 묶인 두 손을 모아 머리맡에 있는 물그릇의
한쪽 끝부분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하여 상체를 일으키면서 자기 가슴에
얼굴을 거의 파묻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괴한의
머리통을 물그릇으로 강타했다. 어디서 그런 엄청난 힘이 솟구쳐
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괴한이 비명을 지르고
나가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 그때까지 어떻게
버텨왔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가 떨어졌던 괴한이 바지를
입든 둥 마는 둥 꿰차고 줄행랑을 치는 꼴도 보지 못했다.
해림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까마득한 나락 밑으로 굴러
떨어지듯이 의식이 가물거렸다.
이튿날 아침.
박갑철 씨 집 주변에는 수백 명의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경찰에서 파견된 형사들 외에는 아무도 현장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경비임무를 맡은 순경들은 지방주재 신문기자들의
접근마저 막았다. 아무리 기자라도 현장검증을 하는 동안에는
출입을 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수사관계자들 외에 사건현장에 들어간 사람은 피살자 가족인
지훈이 한 사람뿐이었다.
박씨 부부가 피살당한 안방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피바다였다.
물씬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방바닥은 물론 벽에까지 피가
튀어 있었다. 현장검증에 나선 수사관들조차 머리를 가로저을
정도였다.
안방 현장에서는 범인들의 지문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박씨
부부를 살해할 때 사용한 흉기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운동화
발자국만 찾아내었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형사들은 임여인의 잇몸에 묻은 피가 범인들 중 한
사람의 피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증거물이 하나도 없잖아?"
"계획적인 범행인 것 같은데."
그때 지훈이 불쑥 형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누나 방에 깨어진 사기 그릇이 있어요. 그 그릇에도 피가
묻어 있어요."
국민학교 6학년짜리 소년답지 않게 조리 있게 말하자 형사들이
지훈이에게 몰렸다.
"그 밖에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봐. 범인들을 보았니?"
"범인들은 우리집 보물인 금불상하고 귀중품들, 그리고 일본
은행권을 맡겨놓은 보관증까지 다 가져갔어요."
"너 정말 똑똑하구나. 일본은행권을 다 알고."
"그럼 너도 범인들을 보았다 그 말이니?"
"예. 변소에서 나오다가 보았어요. 아마 세 명인 것
같았어요."
"넌 그때 어디서 범인들을 보았니?"
"정원 사철나무 뒤에 숨어 있었어요. 한 명이 날 찾으러 나온
것 같았어요."
"그럼 이 집 사정을 잘 아는 놈들이었을 가능성이 짙군 그래.
범인들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본 그대로 말해 봐."
"시꺼먼 복면을 하고 있어서 마치 얼굴 없는 사람들
같았어요."
"그때 소릴 치지 그랬어?"
"너,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어요. 사철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붙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치기에 바빴어요."
지훈의 눈에서 마침내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내가 왜 소리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하면 어른이라도 얼어붙게 돼 있어. 한데
누나의 방이 어디냐?"
"왼쪽으로 둘째 방이예요. 바깥 쪽 유리창이 깨어진 방요."
어느새 형사들은 해림의 방으로 몰려갔다.
해림의 방에는 이불과 요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두
동강으로 깨어진 사기 그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기 그릇 한
동강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그릇에 묻은 피는 범인의 것 같은데...."
"요 위에도 피가 많이 묻어 있는데 누구의 필까?"
"누나가 범인의 머리통을 그릇으로 갈겼대요."
"음. 그래."
형사들은 해림의 방에서 찾아낸 증거물을 소중하게 거둔 후,
그녀가 입원해 있는 <평안의원>으로 달려갔다.
형사들은 해림이 격심한 충격으로 몇 시간 전에 입원한
중환자라는 점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범인들은 몇 명이었읍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해림은 대답 대신 형사들에게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역시 세 명이었군요."
"범인들은 장갑을 끼고 있었읍니까?"
어떤 형사의 질문에 해림은 넋나간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놈들이 아가씨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읍니까?"
"서슴치 않고 난처한 질문을 던지는 형사도 있었다.
인간성을 상실한 괴한들에게 동물적 능욕을 당한 가련한 어린
여자의 심경 같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해림은 자신이 당한 인간이하의 폭행에 대해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가씨가 범인 중 한 놈의 머리를 사기 그릇으로 쳤읍니까?"
해림은 멍청히 앉아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그릇에 묻어 있는 피는 범인 중 한 놈의 것이
분명하겠군 그래."
"죄송하지만, 수사에 협조 좀 해주셔야겠읍니다. 놈들이
부모님들을 어떻게 살해했읍니까? 그때 현장에 계시지
않았읍니까?"
"부모님의 피가 아가씨 방에까지 많이 묻어 있는 걸 봐서
아가씨도 현장에 계셨던 게 틀림없으시지요?"
"세, 세 놈 모두 내 손으로 잡아 죽일 거야. 환상의 꽃이 피는
그날에 내 손으로 잡아 죽일 거야. 안개꽃이 피는 그날에 엄마
아빠 원수는 내 손으로 꼭 갚을 거야."
해림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흡사 미친 여자 같았다.
"범인들이 어떻게 들어와서 어떻게 부모님을 살해했읍니까?
괴로우시겠지만, 한번만 설명해 주세요."
"누나, 이분들은 모두 형사 아저씨들이야. 누나가 본 대로
말해 드려."
지훈이 안타까운 듯 눈물을 글썽거리며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해림은 형사들의 시선을 피한 채
입원실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들이 어떻게 침입해 들어왔는지 말 좀 해보세요."
역시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환상의 꽃이 피는 그날에 내
손으로 그 놈들을 잡아 죽이겠다는 대답 아닌 대답뿐이었다.
"아가씨는 범인들의 말소리를 들었겠지요? 어디 말씨였읍니까?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가요?"
"안개처럼 뭉실뭉실 또다시 벚꽃이 피어오르면 다 알게 될
거예요."
형사들은 마침내 약속이나 한 듯이 머리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정말 아까운 미모의 여대생 하나가 너무 심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멀쩡하던 정신이 나가 버렸다고.
하지만 윤태호(尹太浩) 형사만은 달랐다. 예사로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연민의 정이 어린 눈으로 해림의 흐트러진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선 몸조리를 잘 하세요. 그리고 다음 기회에 협조 좀
해주세요."
"오늘은 실례 많았읍니다. 건강 빨리 회복하세요."
형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남겨놓고 입원실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까지 뒤따라 나온 지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이름이 지훈이라고 했지?"
"예."
"진해에 연고자가 있니?"
"연고자가 뭐예요?"
"가까운 일가나 친척 말이야."
"서울에 이모님이 계세요."
"그 밖엔."
"글쎄요. 제일 가까운 친척이 서울 이모님이예요."
"그래서 너도 서울서 살다 왔구나?"
"예."
"그럼 서울 이모님에게 연락을 하도록 해."
"벌써 했어요."
"정말 똑똑한 애로구나."
"누나가 시켜서 연락했어요."
"누나가?"
"예."
"그럼 정신이 멀쩡한 거 아닌가?"
"글쎄."
"누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지훈이 다시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쳐오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큰 불행을 당했어도 사내 대장부가 그렇게 자주
눈물을 보여서 쓰겠니?"
형사들 중에서 가장 키가 작고 후줄근하게 생긴 윤형사가
지훈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용기를 가져야 해. 내가 보니까 지훈이 넌 희망이 있는
애야."
"고, 고마와요."
"나하고 정식으로 인사나 해 둘까?"
윤형사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훈은 엉거주춤
작은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통성명을 나눈 후 악수를
풀었다.
윤태호는 체구도 작고 인상도 형사 같지 않게 허술하게 생긴
남자였다. 코가 비뚤어져서 더욱 허술하게 생긴 그 모습이
묘하게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형사였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경찰서로 날 찾아오든지 전화를 걸어."
"고맙습니다."
"일찌감치 어린 꼬마한테 포석을 잘해 두는군 윤형사는."
누군가 옆에서 빈정거리는 투로 한 마디 던졌지만, 윤형사는
아무런 대꾸 없이 지훈의 어깨를 토닥거리기만 했다.
그 다음 날.
서울에서 비보를 접한 지훈의 이모와 이모부가 허겁지겁
내려왔다.
"언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요? 그렇게도 착하게 사신 언니한테
이런 끔찍한 일이 생기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늘도
무심하셔! 그리고 형부는 큰 꿈을 지니고 하향하시더니만,
도대체 어떻게 되신 거예요? 대답들 좀 해보세요. 어린 것들은
불쌍해서 어떡하라고, 이렇게 비참하게 가시는 거예요. 너무너무
억울하고, 너무너무 원통해서 남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 가라고
이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떠나시는 거예요."
언니와 형부를 위해 울고불고 또 울고불어도 참변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형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읍니까?
일본에서 그 고생을 하시면서 번 돈으로 고향을
발전시키시겠다던 포부는 어떻게 하시고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시다니, 저승에선들 눈이나 제대로 감으시겠읍니까?"
그 누구의 눈물도 애끓는 심정도 고인이 된 사람들은 알 턱이
없었다.
박씨 부부의 장례식은 사흘 만에 조촐하게 치러졌다.
도불산(道佛山) 너머 경화동 화장장에서 두 시간 가량 화장한 후
분골실에서 회색의 한 줌 재가 되어 물빛 고운 속천 앞바다에
뿌려졌다.
대지 1백여 평에 방 다섯 칸 짜리 목조건물도 헐값으로 타인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이젠 진해를 떠나야겠다."
이모 임씨의 말에 해림은 단호하게 맞섰다.
"이모, 나는 절대로 진해를 떠날 수가 없어요."
해림의 말에 지훈이도 뒤질세라 맞장구를 쳤다.
"저두요."
"지훈아, 누나는 지금 환자야."
"제가 왜 환자예요?"
"누나는 서울에 가서 빨리 치료를 받고 학교에도 다시 나가야
하잖니? 그리고 너도 내년에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면 더
좋잖아."
"엄마 아빠를 진해에 두고 떠날 수는 없어요, 이모!"
"두 분은 돌아가셨다.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돌아가신 분들은
돌아가신 분들이고, 살아 있는 너희들이나 제대로 살아갈 궁리를
해야잖니?"
"엄마 아빠 원수는 누가 갚고요?"
"경찰이 범인들을 잡아낼 거야. 그리고 이 나라의 법이
범인들을 처단할 거야."
"경찰은 믿을 수가 없어요. 벌써 닷새가 지났는데 한 놈도
잡지 못했잖아요."
"좀더 시간을 주어야지. 범인이란 금방 잡힐 수도 있지만,
금방 잡히지 않을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야."
"제가 찾아낼 거예요."
"넌 너무 어려. 범인을 잡으려다 오히려 나쁜 놈들 손에
붙잡혀 어려운 일을 당할 염려도 있어."
"상준 형이 도와 준댔어요."
"지훈이 너 요즘 학교에도 안가고 그 병신 같은 사람하고
범인을 찾아다녔구나."
"상준 형은 병신이 아니예요."
"내가 보니까, 말도 잘 못하던데?"
"말만 잘하면 똑똑한 사람인가요? 말을 좀 더듬거린다고
사람을 그렇게 깔보실 수 있어요?"
"글쎄. 내가 보기엔 병신 같았어."
"상준 형더러 병신 같은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은 취소해
주세요."
"그래, 내가 잘못했다. 취소하마. 말만 번드르하게 잘한다고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넌 중학교 시험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하는 학생인데, 학교에는 안가고 그런 사람하고 어울려
다니다니,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안드니?"
"학교에 다니면 무엇해요? 그리고 상준 형은 내가 부탁해서
함께 다니는 거예요."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었어."
"상준 형은 그날 낮에 벚꽃장에서 우리를 미행하던 사람의
얼굴을 보아두었대요."
"그날 낮이라니?"
"강도들이 들이닥친 날 낮에 우리 가족이 벚꽃 구경을
갔었는데, 그때 우리를 미행하는 수상한 남자가 있었다는
거예요."
"정말 그랬다면 왜 그런 말을 진작 해주지 않고, 사고를 당한
후에야 해주는지 모르겠군. 그것만 봐도 그 사람 좀 모자라는
사람 아니냐?"
"아빠 엄마가 상준 형을 좀 못마땅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선뜻
말을 못했던 거예요. 그리고 그런 엄청난 일이 생길 줄은 미처
몰랐던 거예요. 미리 알았으면 왜 말을 안했겠어요."
"그런데 두 분이 왜 그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누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고 야단도 치시고 못마땅하게
여기셨어요."
"그 사람이 우리 해림이를 짝사랑했던 모양이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다닌 게 무슨 나쁜 짓인가요?"
"나쁜 짓일 수도 있지."
"왜요?"
"한쪽에서만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니면 결과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기 때문에 그런 거야."
"어려운 일이 생기다니요?"
"지훈이도 조금만 더 크면 모든 걸 알게 돼. 그런데 그 사람이
정말 미행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대?"
"예."
"혹시 그 사람이 누나의 환심을 사려고 꾸며낸 얘기는
아닐까?"
"꾸며낸 이야기라니요? 상준 형이 거짓말을 했다 그 말씀이신
가요?"
"가령,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
"상준 형은 절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지훈이 넌 그 사람을 너무 믿는 것 같구나. 만약 그 사람이
미행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면 경찰에는 왜 알리지 않았지?"
"제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
"그 미행자가 꼭 범인들 중의 한 놈인지 아직 알지도
못하잖아요. 그리고 공연히 그런 수상한 사람을 보았다고 하면
경찰은 상준 형을 오라가라 하고 괴롭힐게 뻔하니까요."
"네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고 있니?"
"지훈이는 귀신이니까요."
"귀, 귀신이라니?"
"제 별명이 귀신이예요. 우리 반 애들이 지어준 별명이예요."
"그 별명 별로 좋지 않은 별명이구나."
"저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저는
정말 귀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범인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말예요."
"지훈이 너는 아직 어린애야. 그런 무서운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 범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교활한 놈들인데, 너같은
어린애에게 잡히겠니? 아서라, 빨리 서울로 떠나야겠다."
"누나만 데리고 가세요. 누나는 몸이 성치 않으니까요."
"내일 새벽 첫차로 떠난다. 고집 부려도 아무 소용이 없어. 이
불쌍한 것들 같으니라구."
이모는 참고 있던 눈물을 왈칵 쏟으면서 뒤돌아섰다.
그날 밤.
꽃잔치가 막을 내리는 밤이어서 밤꽃장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오색 축등만이 꽃의 서러운 임종을 지켜보듯
밤거리를 수놓고 있었다.
환상의 나래를 펴고 솜사탕처럼 뭉실뭉실 피어올랐다가
바람따라 눈꽃송이되어 훨훨 날던 꽃상여는 간 곳이 없었다.
꽃의 임종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꽃잎 몇 개가 볼품없이
띄엄띄엄 새초롬하게 움이 돋는 가지 끝에 매달려 있었다.
풍성한 잔치가 끝난 집처럼 구경꾼도 거의 없었다. 바람 따라
떠나간 꽃상여 속에 파묻혀 모두들 어디론가 가버린 것 같았다.
"상준 형, 우리는 이제 진해를 떠나야 한대."
"지, 진해를 떠, 떠난다고?"
"이모를 따라 서울로 가야 해. 가서 편지할께, 형."
"그, 그 놈들을 안 찾아보고?"
"누나 말을 들으니까, 놈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고
했어. 놈들은 외지 사람들이었어. 놈들은 이미 진해를
빠져나갔을 거야, 형."
"그,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 그렇지만 그, 금불상은 쉽게
가지고 나가지는 못했을 낀데...."
"그러니까 놈들은 다시 진해로 돌아와서 어딘가에 숨겨놓은
금불상을 가지고 갈 거다 그 말이지?"
"응."
"그럴 가능성이 있겠는데. 놈들 중에 한 놈은 심한 상처를
입은 데다, 급히 도망치는 놈들에게 금불상은 틀림없이 짐이
되었을 테니까."
"겨, 경찰은 뭐라꼬 하더노?"
"오늘도 윤형사님을 만났는데, 수사에 진전이 없나 봐. 범인이
머리 부분에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많이 흘렸는데도 범인을
못찾아내다니, 경찰은 뭐하는지 모르겠어."
"그, 그놈의 얼굴은 내가 보면 알아볼 수 있을 낀데."
"검정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면서 어떻게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어?"
"새, 색안경을 벗었을 때 가까이에서 봤는데, 왼쪽 눈썹 밑에
검은 점이 있었다카이."
"검은 점이 얼마만큼 컸는데?"
"파, 팥알보다 더 큰 것 같았어."
"정말?"
"응."
"인상은 어땠어?"
"허, 험상궂게 생겼어. 누, 눈은 조그맣고 실눈 같았고."
"왼쪽 눈 위에 점이 있는 점박이에다 인상이 험상궂고 눈이
실눈 같은 남자라 했지?"
"응. 그래."
"그럼 다시 만나면 틀림없이 알아볼 수 있겠네?"
최상준(崔相俊)은 대답 대신 고개를 자신 있게 끄덕였다.
"형, 꼭 부탁해. 우리가 진해에서 떠나고 없더라도 그놈을
찾으면 빨리 서울로 연락해 줘. 알았지, 형!"
"아, 알았어."
"그리고 윤형사님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겠어, 형."
"내, 내가 그랬다는 말은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말해 줘."
"무슨 말인지 알겠어, 형."
"내, 내일 몇 시 차로 떠나노?"
"새벽 다섯 시 차야."
"누, 누나를 잘 보살펴 주거라."
"말 안해도 형의 마음을 알아."
두 사람은 쓸쓸하게 막을 내리는 밤의 벚꽃장을 둘러본후,
중원(中園) 로터리 앞에서 헤어졌다.
바로 중원 로터리 앞이 진해경찰서였고, 경찰서 위에 있는
태화여관에 지훈이 이모가 임시 숙소를 정해 놓고 있었다.
지훈이 머리를 떨구고 무거운 걸음으로 여관 2층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너, 어디 갔다 이제 오니? 해, 해림이가 없어졌어!"
울상이 된 이모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다가왔다.
"누나가 없어졌다구요?"
"한 시간도 더 지났어. 처음엔 화장실에 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어떡하면 좋니?"
"경찰에는 알렸어요?"
"응. 여관에 파견나와 있는 순경에게 알렸어."
"그 순경은 뭐래요?"
"못 보았다는구나. 어떡하지?"
"우리를 지켜준다지만, 말뿐이예요."
"어떡하면 좋아?"
"제가 나가서 상준 형이랑 함께 찾아보겠어요. 이모님은 여기
계세요."
"무서워 죽겠다."
지훈이 이모부는 회사의 급한 용무 때문에 서울 본사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떠나고 없었다.
"이모는, 어른이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여기는 순경이
있으니까 염려할 거 없어요."
"집 판 돈만 다 받았다면 이모부하고 함께 떠나는 건데...."
"무서워하실 이유가 없어요."
말은 용감하게 했지만, 어린 지훈의 가슴은 이미 떨리고
있었다.
"혹시 그 못된 놈들한테 납치를 당한 건 아닐까?"
"납치를 당한 건 아닐 거예요. 제가 나가서 찾아보겠어요."
" 너 혼자서 어떻게?"
"상준 형하고 함께 찾아보겠어요."
지훈은 어느새 2층 계단을 밟고 내려와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아빠 엄마가 당했던 그때처럼 그렇게 벌벌 떨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제 나한테는 해림이 누나 한 사람밖에 없어.
지훈은 자신을 채찍질했다. 모질게 몰아붙였다. 며칠 전 그날
밤처럼 그렇게 무참히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지훈은 화장실에서 나와 사철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손발이
얼어붙은 듯 꼼짝달싹을 못했었다.
안방을 향하여 돌멩이를 던지면서 고함을 쳤더라도 놈들은
아빠 엄마를 죽이지는 못했을 텐데.... 그날 밤은 왜 그렇게
병신처럼 손과 발과 입까지 모두 얼어 버렸을까.
좀더 빨리 돌멩이를 던지고 고함을 쳤더라면, 놈들에게 해림이
누나가 그렇게 무참히 짓밟히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왜 그렇게
벌벌 떨고만 있었을까.
지훈이는 겁장이가 되긴 싫어. 앞으로는 죽어도 겁장이가 되지
않을 거야.
반 애들이 붙혀준 별명처럼 진짜 귀신이 될 거야. 놈들을 물
속으로 끌고가는 물귀신이 되든지, 놈들을 불속으로 집어넣는
불귀신이 되든지, 놈들을 뒷간에 쑤셔박는 몽당빗자루귀신이
되든지, 진짜 귀신이 될 거야.
지훈은 어둠을 뚫고 귀신처럼 달려갔다. 벽돌간(황토로 벽돌을
만들던 동네 이름) 절간 옆에 있는 상준의 집으로 바람처럼
달려갔다.
상준은 집에 있었다. 막 잠자리에 들려다가 놀란 기색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지, 지훈이가 어쩐 일로 또 왔노?"
"누나가 없어졌어! 납치를 당했는지도 모르겠어."
"해, 해림씨가 없어졌다꼬? 크, 큰일 났네. 쪼, 쪼매만
기다리거래이."
"이 병신아,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카이.
쯧쯧쯧...."
그러나 상준이 노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어눌한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발을 챙겨주며 도와주고 있었다.
"어, 언제 없어졌노?"
"한 시간 이상 지났다고 했어. 납치인지도 몰라."
"어, 어데로 갔을꼬?"
두 사람은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어둠 속을 걷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우뚝 멈추어 섰다.
"형,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나, 나도 잘 모르겠는데."
"놈들이 누나를 납치해 간 것은 아닐까?"
"가, 간땡이가 고렇게 크게 부은 놈들이라꼬 생각하나?"
"놈들은 보통 강도가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어."
"아, 아무리 그래도 수, 순경이 지키고 있었는데, 나 납치까지
할 엄두는 못냈을 끼다."
"그럼 누나는 어디로 갔을까?"
"내, 내 생각에는 작별인사를 하러 갔거나 세상이 싫어서...."
"작별인사라니? 친구들한테? 아니면 엄마 아빠한테?"
"치, 친구들한테 작별인사하러 갈 맘에 여분은 없었을 끼고,
부, 부모님들한테 작별인사하러 갔을 끼다."
"그리고 또 세상이 싫어서라는 말도 했잖아? 무슨 말이지, 그
말은?"
"바, 방정맞은 소리 될까 싶어서 그, 그 말은 안 할란다."
"엄마 아빠한테 작별인사를 하러 간 게 아니면 자살하러
갔을거라 그 말이지?"
상준은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 보니, 형의 말이 맞을 것 같다."
"소, 속천으로 가 보자."
"속천으로 갔을 가능성이 짙어, 빨리 뛰자."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바꾸어 제황산 언덕길로
올라가는 골목으로 뛰기 시작했다.
발을 맞추다시피 하여 얼마나 뛰었을까. 오래지 않아 제황산
언덕길에 접어들 수 있었다.
문득, 작년 여름 상준 형과 벚나무가 즐비한 제황산 고갯길을
넘어 바다로 나가다 말고 벚나무 가지에 올라가 검붉게 익은
버찌를 따먹던 생각이 떠올랐다.
드높게 솟아오른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가리워 뒤늦게
피어나기 일쑤인 제황산 언덕길의 벚꽃은 아직도 조금 남아
있었다.
"바로 이 길 너머 동쪽으로 뻗쳐 있는 황토산을 바다로 밀어
붙인후에 진해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동산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호흡을 가다듬고 걸으면서 지훈이 혼잣소리처럼 뇌이는 말
뜻을 상준은 알 턱이 없었다.
"지, 지훈이 니 뭐라캤노?"
"우리 아빠의 한많은 꿈이 서린 제황산 벚꽃길을 넘어가고
있다고 했어."
"두, 두 분은 참말로 아까운 분이셨지만, 이자와서 어짤 끼고?
빨리 뛰기나 하자."
어둠에 묻힌 고갯길을 넘어 내리막길로 달음질쳤다.
속천 앞바다는 달빛에 은은히 부서지고 있었다.
선창에 서서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만 처량하게 귓전에 와 닿았다.
"도, 돌섬 쪽으로 가보자."
"누나는 돌섬 앞 은모래밭을 좋아했어."
돌섬은 속천 선창에서 동쪽으로 3백여 미터 지점에 있었다.
선창을 등지고 달빛이 파도에 부서지는 해변으로 내달았다.
오래지 않아 달빛이 고인 은모래 밭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멈추어섰다. 그리고 각기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신비로운 달빛 아래 소복의 여인이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트, 틀림없이 해림씨다!"
"정말 누날까?"
달빛 아래서 은모래를 밟으며 신비한 춤에 열중해 있던 소복의
여인은 어느새 동작을 멈추고 남쪽 바다를 향하여 큰절을 두 번
올렸다.
제사를 올리는 게 분명했다.
신비롭고 경건한 제사였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함께 흐느껴
주는 제사였다. 은빛으로 부서지는 달빛이 제물이 되어 은은하게
드려지는 제사였다. 깊은 바다에서 올라온 신선한 바람이 영혼의
향기를 하늘로 담아가는 제사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신비로운 광경을 지켜보던 두 사람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 큰일났어. 누나가 자살하려고 해!"
"저, 정말로 와 그라지?"
느닷없이 무엇엔가 홀린 듯이 여인은 바다를 향하여 뛰고
있었다.
순식간에 여인의 몸은 바닷물에 잠겨들고 있었다.
상준은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서 바닷물에 첨벙 뛰어들었다.
다행히 그는 수영의 명수였다.
2. 제2장 强盜 만난 사람들
1954년 3월.
해림은 4년 만에 진해에 돌아왔다. 그녀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의 모습은 한눈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해림은 눈부실 만큼 요염했다. 그녀는 풍만하면서도 늘씬했다.
뜨거운 피가 꿈틀거리는 사내라면 한번쯤 탐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여인으로 무르익어 있었다.
그녀는 미군기지 케이 텐(K 10)의 타이피스트 겸 통역관으로
발령을 받아 돌아온 것이다.
놀라운 변신이었다. 양친을 잃고 사고를 당했던 4년 전에 이미
영문학을 전공하는 대학 2년생이었지만, 무참히 짓밟힌 한송이
못다 핀 꽃 같던 그녀였기에 놀라운 변신이 아닐 수 없었다.
박해림을 기억의 수첩 속에 선명하게 기록해 놓고 있는 윤태호
형사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참담한 6.25 동란을 치렀는데, 상한 갈대 같던 그녀가
어떻게 한 그루 소나무처럼 의젓하고 푸르게 일어설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이 난세에 어떻게 어린
여자의 몸으로, 더우기 상한 갈대처럼 참혹하게 꺾였던 몸으로
미군부대의 통역관까지 될 수 있었을까?
더우기 놀라운 사실은 해군 통제부에 근무하는 미 고문관
제임스 브라운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여인이라는 점이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계급을 알 수 없는 미 고문관실의 실력자로
알려져 있었다.
혹시 해림이 브라운의 정부(情婦)란 말인가?
만약 해림이 그의 정부라면 진해에 오기 전부터 그를 알고
지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어떻게 된 관계일까?
아무리 그의 정부라도 군사기밀을 다루는 미군기지의
타이피스트에다 통역관으로 일하게 되기는 어려울 텐데, 어떻게
된 일일까?
윤형사는 덕산동 기지촌에서 양공주 피살사건을 다루다가
우연히 케이 텐 정문에서 해림을 마주친 후부터 갈수록 의문에
휩싸여 갔다.
해림이 4년 전 그 사건을 결코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경찰의 무능을 탓하면서 오랫동안 복수의 칼을 갈아 왔을
텐데.... 해림의 남동생 지훈이도 보통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쨌든 윤형사는 박해림의 눈부신 변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해림만이 몰라보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 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소읍 진해 역시 놀라울 만큼
변모해 있었다.
우선 손바닥만한 땅에 육.해.공군 사관학교가 모두 들어와
있었다.
피비린내나는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느라고 군항(軍港) 진해는 유엔군은 물론 아군의
기라성 같은 고급장교들이 득실거리는 도시로 변해 있었다.
6.25 동란 덕분에 곳곳에 다방이 생겨나고, 양공주촌이
성시(盛市)를 이루고, 수도 서울에서나 볼 수 있는 댄스홀도 세
군데나 생겨났다.
진해 인구도 급격히 불어나 있었다. 유동인구까지 두세 배
이상 불어났다고들 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각 도 사람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피난민들도 적잖았다.
진해로 돌아온지 일주일 만에 해림은 최상준을 만났다. 그는
어느새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싸여 있는 벽돌간의 절간 앞에서였다.
"상준씨,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살아 있으니까 이렇게
만나뵙게 되는군요."
"해, 해, 해림씨 앙입니꺼? 해, 해림씨 맞지예? 정말로
꿈같심니더."
상준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숙해 있는 해림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는 두 눈에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매혹적인 고운 미소를 뿌리고 있었다.
"군대에는 나가지 않았더랬어요?"
상준은 이 말에 대답 대신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데 쓰는
오른손 검지를 내보였다. 그의 오른손 둘째 손가락은 뭉뚱하게
짤려 나가고 없었다.
해림은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군대에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손가락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려면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참,
인사가 늦었군요. 어머님은 건강하신가요?"
"어, 어머니는 재작년에 도, 돌아가셨십니더."
"정말 안됐군요.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모르겠군요."
상준은 역시 대답 없이 송아지처럼 두 눈만 껌벅거렸다.
"혹시 우리 지훈이 소식 알고 있으세요?"
마침내 해림은 제일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 알고 있십니더."
"정말이세요?"
상준은 대답 대신 처음으로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지훈이가 어디 있어요?"
"부, 부산에 있십니더. 여, 영도 보, 봉래동에 있다캅니더."
"만나보았어요?"
"예. 하, 한 달 전에 진해에 왔더랬십니더."
"봉래동 어디에 있다고 하던가요?"
"보, 봉래동 꽃동네에 가서 보, 봉래동 귀신을 찾으모 마,
만날 수 있다 캤십니더."
상준은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애쓰는 통에 더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귀신이라는 그 별명 아직도 못 버린 모양이군요. 소식을 알려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고, 고맙긴요."
"그리고 혹시 왼쪽 눈썹 밑에 검은 점이 있는 그 남자 그 후에
본 적이 있으세요?"
상준은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두어번 끄덕거렸다.
"정말 보았어요?"
"예."
"언제 보았어요?"
"2년 전에요."
"어디서 보았어요?"
"버, 벚꽃장 근처에 있는 치, 칠락관에서 어떤 사람하고
나오는 걸 보았십니더."
"칠락관이라면 나도 알아요. 유명한 요정이지요. 근데 거기서
어떤 사람하고 같이 나오는 걸 분명히 보았단 말이죠?"
"예."
"미행을 해 보시지 그랬어요?"
"거,검은색 지프 차를 타고 가는 바람에 못 따라갔십니더."
"그 사람하고 같이 나오던 사람 얼굴도 똑똑히 봐 두시지
그랬어요."
"봐 둘라꼬 캤지만서도 밤이 돼놔서 잘 못 봤십니더."
"정말 수고하셨어요. 이건 작은 성의예요. 받아 주세요."
해림은 핸드백에서 포장지에 싼 작은 선물 꾸러미 하나를
꺼내어 상준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내 연락처도 그 안에 적혀 있어요. 급한 일이 있을 땐 전화로
연락해 주세요."
"이, 이런 걸 받아서 되겠심니꺼?"
"상준씨에게 입은 은혜는 천 배 만 배로 갚아도 다 못 갚을
거예요. 몸조심하세요."
상준은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서 멀어져 가는 해림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절간 마당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석탑 뒤에서 윤형사가 두
사람의 만남을 훔쳐본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해림은 그 무엇보다 어린 동생 지훈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싶었다.
그 어린 것이 전쟁의 와중에서 얼마나 큰 고생을 했을까.
형이라도 살아 있었으면 큰 의지가 되었을 텐데....
원래 지훈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해림이 바로
밑에 남동생이 하나 더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훈의 형은 지훈이 태어나던 해 네 살의 어린 나이로
부모의 품을 영영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해림과 지훈 사이에는 터울이 많았고, 그 터울 많음이
양친을 졸지에 잃은 이후 더 한층 안쓰럽게 만들고 있었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오전근무를 마치자마자 지훈이를 만나러
가야지.
봉래동 꽃동네라면 창녀촌일 텐데, 그 동네에서 무슨 놈의
귀신 노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도 부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참담했던
1.4후퇴 이후 3년 동안 피난지 부산의 판자집 대학에 다녔던
것이다.
피난살이 한도 많고 설움도 많은 영도(影島)의 지붕 밑에 함께
살았으면서 그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달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훈이를 만나지 못했던 걸까?
봉래동 꽃동네는 달동네가 아니었다. 영도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부두를 끼고 도는 지점에 적산가옥이 밀집해 있는 곳이
바로 봉래동 꽃동네였다.
지훈이는 얼마나 컸을까? 아까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왜
그런것은 물어보지 못했을까? 건강할까? 학교엔 다니고 있을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내일 오전근무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이튿날.
토요일 오전근무를 마친 해림은 부산행 급행 버스를 타고
지훈이를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미 고문관 브라운의 데이트 신청도 내일로 미룬 채 케이 텐
정문을 나서고 있을 때였다.
"미스 박! 해리임, 박!"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해림은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힘에 끌려 되돌아섰다.
시꺼먼 얼굴에 하얀 치아를 드러낸 흑인 병사가 황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아하 하고 탄식처럼 부르짖었다. 자기 눈을
의심하였다.
"미스 박! 나 존슨 중사야. 아니, 미스 박이 아는 존슨
하사야!"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돌이 된 느낌이었다.
"나, 해리임 박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3년 동안이나 찾아
헤매었단 말이오. 그 동안 잘 지냈어요?"
"예. 덕분예요."
"나는 미스 박 덕분에 진급도 하고 무공훈장도 받았어요."
"잘 됐군요."
"모리슨 소령님이 귀국하신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예."
"그 동안 나는 전선에만 투입돼 있어서 소식을 전할 길도,
미스 박을 찾을 길도 없었어요."
"지금도 전선에 계신가요?"
"지금은 대구에 있어요. 미스 박을 찾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요?"
"고마와요."
해림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떨쳐 버리고 싶었던 또 하나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난데없이 나타난 존슨 중사를 만나 어디로 어떻게
끌려가고 있는지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반면에, 그녀의 혼(魂)은 어느결에 어두웠던 지난날의 암담한
기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51년 2월.
그 참담했던 죽음의 날들이 떠올랐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해림은 토굴 속에서 끌려나와 산 아래 빈집으로 끌려갔다.
빈방 안에는 굶주린 늑대 같은 북괴군 군관 두 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겁먹은 눈으로 호소했다. 애원이
통할리 없었다. 반항이 먹혀들 리 없었다.
늑대들에게 당했다. 차례로 요리당하며 거듭 짓밟혔다.
그뿐 아니었다. 그녀를 군관들에게 진상한 북괴군에게도
당했다. 토굴로 돌아가는 숲 속의 길가에서였다. 기진맥진해
있는 그녀를 또다시 덮쳤던 것이다.
해림은 죽고 싶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짐승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어 갈갈이 찢긴 걸레처럼 누추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편이 나을 것 같았다.
토굴 속 돌멩이 밑에 감추어 두었던 면도날을 간신히
찾아내었다. 끌려가기 직전에 왜 행동에 옮기지 못했는지
후회막심이었다.
동맥을 끊었다. 뭉실뭉실 환상의 꽃이 솟아나는 벚꽃장을
한가로이 거닐던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두 뺨을 적셨다. 생명이 다하는 날에는 앞서 가신
부모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련한 피로가 밀려왔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한 느낌이 왔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토굴 속
어슴푸레한 어둠도 눈에 익어왔다.
"촛불 이리로 가져 오세요."
"담요 있는 사람 없어요? 담요 좀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디선가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부드러운 아빠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조금 따뜻해 왔다. 불현듯 아빠가 계신 곳에 왔는가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전히 싸늘하고 습기 찬 토굴 속이었다.
"해림 자매님, 이제 정신이 좀 듭니까?"
아랫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 허(許) 목사의 목소리였다.
"모, 목사님이시군요?"
"예. 나예요, 나."
허목사는 함께 끌려와 갇혀 있는 사람들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해림 자매님, 내 말 들려요?"
"예."
"피를 많이 쏟은 것 같은데, 불행중 다행이군요. 어쩔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거요?"
"그,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왜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어요. 산다는게 역겨워요. 산다는게 구역질나고
원망스러워요."
"해림 자매님은 생각을 바꾸어야 하오. 산다는 것은
숭고한거요. 더우기 고난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답기까지 한 거요."
"짐승 같은 놈들에게 여러 차례 폭행을 당했는데두요?"
"해림 자매님은 지금 고통스런 연단을 받고 있는 겁니다."
"연단을 받고 있는 게 아니예요. 죽어 마땅한 수모를 당한
거예요."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스런 연단인 줄 알고 있소. 그러나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했소."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전 그런
바보같은 말에 찬성할 수가 없어요.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고난을 당해 본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욥이라는 사람이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했소.
욥이라는 사람은 해림 자매님보다 더 엄청난 고통과 병마와
배신을 당했던 사람이오. 혹시 욥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소?"
"들어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의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예요."
"육체는 중요한 거요. 순결이라는 것도 소중한 거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을 자매님은 모르시는 것
같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뭔가요?"
"그건 자매님의 영혼이요."
"영혼이란 게 정말 있어요?"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소."
"사람에게 영혼이 정말 있나요?"
"해림 자매님의 몸을 망가뜨리고 죽일 수 있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소. 그러나 해림 자매님의 몸과 마음을 함께 죽일 수
있는 자들은 쉽게 찾을 수 없을 거요."
"......"
"몸이 약간 망가졌다고 마음까지 망가져서야 되겠소?"
"......?
"왜 대답이 없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요?"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죽일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해야 하오."
"그분이 누구신데요?"
"해림 자매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라오. 해맑은 영혼도 함께
말이오. 생명을 주신 분께 감사하고 생명을 주신 분을 두려워
해야 하오."
"생명을 주신 분이 어디 있어요? 죽음보다 더 비참하게
짓밟히도록 침묵하고 계신 분이 생명을 주신 분이란 말예요?"
"그분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참고 기다리실 따름이라오."
"침묵하고 계신 그분에게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육신으로
감사하라구요?"
"해림 자매님, 비록 몸은 상처를 입었지만 마음까지 상처를
입어선 안되오. 천주교를 박해할 때 이런 일이 있었소.
강효임(姜孝任).강효주(姜孝珠) 자매님은 부젓가락으로 부끄러운
부분까지 열여섯 군데나 지져지고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복하지 않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굶주린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굴속에 던져지기까지 했었다오. 하지만
끝내 두 자매님의 뜻은 꺾질 못했었다오. 강도 만난 사람은
자매님 혼자 뿐이 아니오. 그래도 해림 자매님은 살아 있지
않소? 살아 있는 걸 감사해야 하오."
"하지만 저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혐오스러워요."
"해림 자매님, 스스로 자기를 더러운 폭력의 희생물로
전락시켜서는 안되오. 그분은 새롭고자 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신다고 약속했소.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기름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소. 용기는 보이지
않지만, 용기라는 기름을 마음의 등잔 속에 담고 있는 자는 그
생애가 아름답게 활활 타오를 수 있어요. 반면에 좌절과
실망이라는 찌꺼기를 마음의 등잔에 담고 있는 자의 인생은
실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허망하게 꺼져 버린단 말이오.
그러므로 해림 자매님은 생각을 바꾸어 감사해야 하오."
"목사님은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만약 제 기구한
운명을 모두 아신다면 그런 말씀을 하시지 못할 거예요."
"눈에 보이는 기구한 팔자나 운명 같은 것만으로 인생을
가름해서는 안되오. 세상엔 확실히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살아
있는 것들이 많아요. 그 가운데 하나가 해림 자매님의 눈에
보이는 몸보다 더 소중한 영혼이란 말이오."
"저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영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해림 자매님, 비록 몸은 상처투성이라 할지언정 마음의
심지를 올리고 마음의 등불로 온몸 구석구석을 비추면 영혼의
존재를 실감하게 될 거요. 그러므로 비참한 때일수록, 어두운
때일수록, 마음의 등불을 밝혀야 한다오. 아무도 빛을 주지
못한다 해도, 아무도 자매님을 소생시키지 못한다 해도 마음의
등불을 밝혀주는 그분만은 해림 자매님을 소생시킬 수 있단
말이오."
"제가 소생할 수 있다구요? 마음의 등불을 밝히면?"
"해림 자매님은 새롭게 소생할 수 있소.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게 되면 독수리같이 새 힘을 얻을 수 있단
말이오. 영혼이 소중하다는 것만 깨닫게 되면 문제는 해결된단
말이오."
"영혼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세요."
"자매님의 마음을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보여줄 수가 없는 것들이라오.
자매님은 빨리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영혼을 수렁에서 건져야
하오. 그리고 소생해야 하오."
"마음의 등불이 있는 곳이 어딘데요?"
"사람에겐 영혼이 있고, 영혼마다 지성소(至聖所)가 있고, 그
영혼의 지성소에는 제단이 있고, 제단에는 기름 등잔이 있는데,
그 등잔에 불을 지피면 마음의 등불이 밝아지는 거라오."
"어렵군요."
"세상에 좋은 것 치고 쉽게 이해되는 게 많지 않아요. 하지만
이해하려 한다면 결코 어려운 게 아니오."
"마음의 등불이 그렇게 소중한 건가요?"
"주님은 항상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강조하셨소."
"그것이 곧 마음의 등불인가요?"
"그렇소. 어떤 모진 비바람에도 마음의 등불은 꺼진 적이
없었다오. 마음속에 있는 빛이기 때문이오."
"......"
그 순간, 해림은 부모님들의 혼령이 아직도 벚꽃동산을 떠돌
것이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어떤 모진 비바람에도 마음의 등불은 꺼진 적이 없었다는 그
말씀이 정말인가요?"
"정말이오."
"정말 마음의 등불을 켜면 다시 소생할 수 있나요?"
"소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매님은 부활할 수 있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부활이란 추상적인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요?"
"믿는 자에게는 부활이 있소. 그분의 부활은 추상적인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오."
"제게도 해당되는 말씀인가요?"
"해림 자매님은 부활할 수 있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매님을
짓밟고 버릴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매님을 사랑하시고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자매님은 부활의 반열에
설 수 있소."
"꿈 같은 이야기로만 들리는군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믿는 대로 되었소. 소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오."
"정말 소생할 수 있을까요?"
"반드시 소생할 수 있소."
"사실 제게는 이 세상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런데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소?"
"너무 비참해서요."
"살고 싶지않다는 그 마음의 빈 자리에, 죽고 싶다는 텅빈 그
마음의 빈 자리에 마음의 등불을 밝힌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거요."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자매님은 빼어난 미모에다 남들보다 공부도 많이 했잖소?
정말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선한 일을 한 후에
죽어도 늦진 않을 거요.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 준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이오. 우리 주변에 강도 만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란 말이오."
"가, 강도 만난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예요."
"해림 자매님은 강도 만난 사람들을 구해 내어야 하오.
자매님이라면 얼마든지 강도 만난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을
거요."
"강도 만난 사람은 바로 해림이란 말예요."
"알고 있소. 해림 자매님이 강도 만난 사람이란 것을."
"저, 정말이세요?"
"정말이오. 우리 가운데 강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소. 거의 모두가 강도 만난 사람들 아니겠소."
"저는 원수를 갚기 위해 살아 남고 싶어요."
"마음의 등불을 켜고 원수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 원수도 한낱
가엾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요."
"저는 놈들을 증오하고 있어요."
"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야 하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다가 돌아가는 불쌍한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말이오."
"강도들을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어요?"
"우리는 강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야 하오. 마음의 등불을 켜고 강도 만난 사람들을
도와주다 보면 증오심이 차츰 사라지겠지요."
"믿어지지 않아요. 강도 만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보면 누구에게나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단 말이오. 어떤
십자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림 자매님에게도 자매님이 져야
할 십자가가 반드시 있단 말이오."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따로 있다구요?"
"강도 만난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가 오히려 강도 만난 두
사람을 나는 알고 있소. 그런데 나는 그 사람들을 구해 주고
싶어도 구해 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소. 그 두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소?"
"누군데요?"
"알고 싶다면, 귀 좀 빌려 주시오."
허목사는 음성을 낮추며 해림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부상당한 미군 장교와 병사, 두 사람이 숨어 있소."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데요?"
해림 역시 허목사에게 바싹 접근하여 음성을 낮추며 물었다.
"놈들은 곧 우리를 끌어내어 총살을 하든지 북쪽으로
끌고갈거요. 그때 자매님은 놈들에게 애원하시오. 살려 달라고
말이오. 살려만 주면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말이오. 그리고
끝까지 살아 남도록 하시오."
"목사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목사님도 그렇게 하실 거예요?
그럼 저도 그렇게 하겠어요?"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소. 나는 여기서 죽는 게 떳떳이 사는
길이 될 거요. 혹시 생명을 주신 분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면
또 모르거니와 비굴하게 살려고 버둥거리면 살아나더라도 죽는
것만 못한 삶이 될 거요. 참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목숨을
버려야 하오."
"저더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아 남으라고
하시면서, 목사님은 생명을 내놓으시겠다니, 이율배반이잖아요?"
"나는 이미 늙었소.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시골 목사요.
구차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구차해질 거요."
"한번 더 좋은 기회를 얻으시기 위해서라도 꼭 살아 남으셔야
해요."
"이곳엔 교인들이 많이 잡혀 왔소. 그들을 비겁한 자로 죽게
만들기는 싫단 말이오."
"그러시면서 왜 제겐 비겁하게 살아 남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살아 남는다는 것은 위대하고 강한 것이오.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사랑밖에 없을 거요."
"그런데 목사님은 왜 죽음을 택하시려 하세요?"
"나는 지금 죽어야 살아 남게 되기 때문에 그쪽을 택하려 하는
것뿐이오. 허지만 해림 자매님은 다르단 말이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자매님은 우리 교회에 왔다가 붙잡힌 사람이기 때문에 내게
책임이 있단 말이오."
"그때 저는 먹을 것을 얻으러 갔을 따름이예요."
"해림 자매님은 여호와께서 내게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딸이란
말이오."
"저는 사람의 딸이예요."
"하여튼 자매님은 영혼을 건져야 하기 때문에 뱀보다 지혜롭게
살아 남아야 하오. 그분이 부탁하신 말씀이라오. 뱀보다
지혜롭고 비둘기보다 순결하라고."
"저는 이미 순결을 잃어버렸어요."
"그런 껍데기 순결만을 말씀하신 게 아니오. 비둘기보다
순결해지기 위하여 뱀보다 지혜롭게 살아 남아야 하오.
엄동설한은 땅속에 기어들어가 살아 남는 뱀처럼 말이오."
"정말 살아 남아야 하나요?"
"해림 자매님이라면 강도 만난 사람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 남아야 하오. 그리고 또 꼭 해야 할 일도 있다고 했잖소?"
"예. 있어요."
"강도 만난 두 사람을 구해 준 후에 하여도 늦진 않을 거요.
우린 받기만 해 왔는데, 그들에게 뭔가 주어야겠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한번 해 보겠어요."
"고맙소. 함께 기도합시다."
"......"
허목사는 해림의 두 손을 감싸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당신의 딸을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어린 딸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딸이 가야 할 험한 길을 열어 주시고 지켜
주시옵소서. 당신의 딸을 치료하여 주시고 소생시켜 주시옵소서.
강도 만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어린 딸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그 다음날.
과연 허목사의 말대로 북괴군은 토굴 속에 처박아 놓았던
양민들을 밖으로 끌어내었다.
여러 개의 토굴 속에 갇혀 있다 밖으로 나온 양민의 수효는
어림잡아 7,80명이 넘었다.
아무래도 심상찮은 일을 저지를 기세였다. 북괴군 병사들의
눈초리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예수쟁이들에게 특별히 살 기회를 주겠다! 예수 욕하고 예수
안 믿겠다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라!"
사방이 웅성거렸다. 배교자(背敎者)에게는 살길을 열어
주겠다는 유혹에 동요가 일었다.
무리들 중에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주둥아리들 못 닥치겠어!"
해림은 기회를 엿보다가 북괴군 군관의 발 아래 쓰러져
매달렸다. 전날 빈집에서 굶주린 늑대처럼 그녀를 유린했던 군관
중의 하나였다.
오직 살아 남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정조 같은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양민들의 혐오에 찬 눈초리 같은 걸 의식할
겨를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나는 예수 같은 거 안 믿겠어요."
"간나아가 죽기는 싫은 모양이지?"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흥, 제법인데! 좋아. 그러잖아도 내레 삼삼한 간나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저 소나무 밑에 가 있어."
"고마와요."
삶과 죽음의 사이가 백지 한 장 사이와도 같았다.
배교자들을 골라내려다가 실패한 북괴군은 양민들을 다시 토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따발총으로 무차별 사살을 감행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학살을 마무리
짓듯이 토굴 깊숙이 수류탄 세례를 퍼부었다.
학살을 끝낸 후, 북괴군들은 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전세가 불리해진 모양이었다.
북괴군은 일개 중대 병력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북진은 거북이 걸음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미 공군 비행편대의
출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어느 빈집에서 해림은 북괴군 소좌의 애첩이 되다시피
했다. 이미 약속한 터라 반항할 수도 없었다.
술을 퍼마시고 격렬한 게임을 치른 후에 소좌는 곯아떨어졌다.
해림은 기회를 엿보다가 소좌의 권총을 그의 허리춤에서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쏘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권총을 다룰 줄을 몰랐다. 아니, 다룰 줄
안다해도 쏘지는 못했을 것이다. 총성을 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대문 앞의 보초도 졸고 있었다. 그녀는 포탄에
허물어진 듯한 돌담을 넘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얼마나 뛰고 달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살아 남아서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사용방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권총이었으나,
권총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담력을 안겨
주었다.
필사적인 남하 하루 만에 해림은 평택 근교에 있는 용화리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마을에 허목사가 시무하던 시골 교회당이 있었다. 50여
명이 들어가 앉을까 말까한 자그마하고 낡은 교회당이었다.
그 교회당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초가집 헛간에 두 명의
미군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공포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었다. 백인 장교의
대퇴부 상처는 깊었고, 흑인 하사의 흉부 상처는 대수롭지
않았다.
두 미군은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여인이 허목사의
주선으로 그들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그녀의 영어회화 실력은 서툴고 짧은 것이었지만.
일주일 후, 진격해 온 국군을 만날 때까지 해림은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낯선 마을에서 두 명의 미군 부상자를
몰래 돌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동안 몇 차례 위험한 고비도 있었다. 도주하는 북괴군
패잔병들이 들이닥친 적도 있었다.
다행히 패잔병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적적으로 부딪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거동이 어려운 늙은이 몇 명만 남겨놓고 모두 피난해 버린 텅
빈 마을에서 양식과 치료약품을 구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더우기 해림은 꽃처럼 탐스럽게 피어오른 여자였다.
두 미군 부상자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하루하루 달라져
갔다.
해림은 대퇴부의 상처가 깊은 윌리엄 모리슨 소령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두 사람 모두 생전 처음 만난 이방인이었으나
모리슨은 나이가 든 장교였고 백인이었기 때문에 흑인 병사 존슨
쪽보다 대하기가 수월했다.
시꺼먼 얼굴에 검붉은 입술과 허연 치아를 곧잘 드러내는 존슨
하사는 고릴라 같은 느낌이 들어 무서웠다.
사흘째 되던 날 깊고 어두운 밤.
흑인 병사 존슨이 해림을 덮쳤다. 뒷간에서 소피를 보고
밖으로 나서려는 참이었다.
억센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웬지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부엌으로 끌려간 해림은 짚더미에 처박힌 채 온몸으로 흑인
병사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후, 국군이 용화리에 들이닥치기까지 며칠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존슨 하사는 해림을 안방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아예
방바닥에다 두툼하게 요와 이불을 깔아 침대를 만들어 놓고
정사를 강요했다.
해림은 거동을 할 수 없어 헛간에 갇혀 있는 모리슨 소령이
사실을 알까 싶어 조심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모리슨 소령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챈 것 같았다. 한번도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해림은 괴로왔다. 모리슨 소령과 헛간에 함께 있을
때에는 존슨 하사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헛간에서 잠을 잘 때
역시 모리슨 소령 쪽에 붙어서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그러면서도 해림은 흑인 병사를 완강히 거절하지 못했다.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른 적이 없었다.
국군이 용화리에 들이닥치기 전날이었다. 해림은 존슨 하사의
검은 몸뚱아리에 짓눌려 있으면서 그의 우람스런 어깨를 두 팔을
벌려 껴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해 잔인한 겨울--- 죽음의 계절에 일어났던 일들은 기억의
수첩에서 영원히 지워 버리고 싶은 악몽이었다.
다시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악몽이었기에 해림은 망각의 깊은
강물에다 그 악몽을 흘러보낸 지 오래였다.
그런데 흑인 병사 존슨이 그 잔인한 죽음의 계절에 체험했던
악몽을 바람처럼 다시 몰고 나타난 것이다.
커피 잔을 내려놓으면서 존슨 중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고 있읍니까?"
"잠시 지난 일을 생각했을 따름이예요."
"난 약속을 지키려고 찾아왔는데, 미스 박은 내가 찾아온 게
큰 부담이 되는 모양이군요."
"우리가 무슨 약속을 했었던가요?"
"피스톨."
"예에?"
"벌써 잊어버렸어요?"
"잊진 않았어요. 하지만 그때 권총 이야기를 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소련제 권총을 압수당했기 때문에 아쉬운 맘으로
그랬던 거예요."
"그럼 당신이 했던 말이 모두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단
말입니까?"
"글쎄요. 모두 지나간 이야기예요."
"권총 쏘는 법까지 가르쳐 달라고 해 놓고서...."
"권총이란 말은 빼세요. 누가 듣겠어요."
"미스 박 말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이 다방에
있겠읍니까?"
"권총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역시 미스 박에게는 그것이 필요한 모양이군요."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필요한 건 아니예요. 다만 호신용으로
없는 것보다 있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호신용으로?"
"예."
"그럼 미스 박을 노리는 괴한들이 정말 있는 겁니까?"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잘 가지고 왔군요."
"뒷탈이 없는 것인가요?"
"전사자의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권총입니다. 안심하고
쓰세요."
"사용하진 않을 거예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전에는요."
"가방 속에 있어요."
"언제 돌아가실 거예요?"
"오늘 밤은 미스 박과 함께 지내고 싶어요."
"그건 안돼요."
"왜요? 내가 검둥이라서?"
"우리들의 이상한 게임은 끝난 지 오래 되었어요."
"난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두요?"
"그때 그 해림이가 아니예요."
"이젠 미군 장교나 상대하는 값비싼 여자가 되었다 그
말이군요?"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그때 그 불쌍한 해림이가 아니란
말예요. 똑똑히 알고 말하세요!"
"부산 피난시절에는 모리슨의 애인이었고, 지금은 미 고문관
브라운의 애인이란 사실까지 다 알고 찾아왔단 말이오. 권총을
구해 주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누구의 애인도 아니었고, 누구의 애인도 될 수가 없는
몸이예요."
"난 미스 박과 싸우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니오. 우선
한잔 하고 싶은데 클럽으로 갑시다. 진해에도 근사한 클럽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근사한 클럽도 있고, 근사한 여자들도 많아요. 내가 소개해
드리지요."
"여자는 해리임 박 하나면 족해요."
"뭐라구요?"
"해리임 박이 존슨의 남성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거침없이 노골적으로 나오는 존슨 중사의 검은 얼굴에
침이라도 뱉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렁거렸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아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마흔이 넘은
모리슨 소령이나 미 고문관 브라운 쪽보다 게임을 치르는 데는
젊은 검둥이 존슨이 더 좋았을는지도 모르니까.
"난 오늘 부산엘 가야 해요."
"부산엘 왜?"
"1.4후퇴 때 헤어졌던 동생을 만나러 가야 해요."
"남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었지요?"
"내가 어제 그런 이야기까지 다 했던가요?"
"그보다 더한 이야기도 많이 했었는데, 다 잊어버린
모양이군요. 어쨌든 동생을 찾는 일이라면 나도 돕고 싶어요.
함께 갑시다."
더 이상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뿌리친다고 따라오지
않을 사람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케이 텐에서 지프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지프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를 신나게 달렸다. 존슨
중사의 부탁을 받은 흑인 운전병은 엑셀레이터를 제 마음껏
밟아댔다.
영도다리를 건너 봉래동 꽃동네에 닿았을 때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어둠을 몰아내듯 꽃동네 언저리에는 요란한 꽃등이 피어났다.
흑인 병사를 발견한 꽃동네 아가씨들은 초저녁부터 웬 떡이
굴러들어오는가 싶어 잽싸게 접근했다.
"헬로우 CBCB 오케이!"
"헬로우 서비스 만땅꼬!"
꽃동네에서 꽃파는 아가씨들 헛물켜는 꼴을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어 해림이 존슨 하사 옆에 바짝 다가서서 걸었다.
"아이구, 깜둥이 주제에 양갈보를 달고 다니네."
"그 양갈보 늘씬한데!"
"갈보치고 얼굴도 반반하고!"
"깜딩이 그것은 힘이 쎄고 크다 안카더나. 그 맛에 졸졸 따라
나선 것 앙이겠나?"
"깜둥이 것도 깜둥이 나름이겠지."
"어떤 아이는 가랭이가 찢어질라 캐서 깜딩이하고는 도저히 못
하겠다 카더라."
"그 양갈보 깜둥이한테 주기는 인물이 아깝다!"
"차라리 나하고 한번 놀다 가지."
"x팔년! x맛만 아는 벙어린가."
꼴들이 측은해서 괜히 헛물켜지 말라고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더니만, 꽃동네 계집들의 텃세가 대단했다. 졸졸
따라오면서까지 음담패설을 퍼부어댔다. 전쟁 덕분에 함께 고통
당하는 여자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양갈보 취급을 당하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해림은
참았다. 하도 험한 세상을 살았기에 나이는 몇 살 먹지 않았으나
인생은 참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존슨 중사 역시 잘 참아냈다. 봉래동 꽃동네는 적어도 그녀들
구역이라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림은 꽃파는 여자들이 득실거리는 꽃동네에 흑인 병사와
함께 들어선 것부터 잘못인 줄을 깨달았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존슨 중사와 간격을 벌렸다.
그리고 물었다. 식당에서도 묻고, 좌판에 양담배를 놓고 파는
아주머니에게도 물었다.
이름은 박지훈, 나이는 열 일곱, 별명은 봉래동 귀신이라는
사내아이를 모르냐고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헛걸음이었다. 덕분에 꽃동네 여자들에게 당한 모욕을
생각하니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는데, 저희 주제에 양갈보의
아픔이나 설움 같은 건 눈꼽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고 입이
벌어져 있다고 제멋대로 지껄이다니....
아까 모욕을 당할 때는 잘 참아내었는데, 부산까지 달려와서
꿈에도 그리던 지훈이를 찾지 못하고 보니까, 그녀들에게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스 박은 치밀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주소도 모르고 동생을
찾으러 오다니 이해를 할 수 없군요. 혹시 이곳 여자들에게 나를
도매금으로 팔아넘길 속셈으로 일부러 여기까지 끌고 온 것
아닙니까?"
"기왕 팔아넘길 바에야 완월동으로 모시고 가지 왜 이리로
왔겠어요?"
"완월동이 유명한 곳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어요."
"항상 솔직해서 좋군요."
"난 한국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해리임 박 같은 여자
하구요."
"꿈 깨세요. 주제파악하시구요."
해림은 자기도 모르는 새 존슨 중사에게 화풀이를 해대고
있었다.
"헤어진 동생을 찾지 못해서 화가 나셨군요? 미스 박은 화난
모습이 더 섹시하단 말입니다."
"정말 본색은 어쩔 수가 없군요."
"잘난 체하지 말아요. 제아무리 감추려고 비꼬아도 비꼬는 그
말 속에 남자를 자극하는 암내가 풍긴단 말입니다."
"뭐라구요? 암내가 풍긴다구요?"
"그런 것 같군요."
"내가 양갈보인 줄 알아요?"
"대학을 나온 숙녀지요. 어찌 양갈보일 수 있겠어요?"
"사람을 창녀 취급하면서, 놀리는 거예요, 뭐예요?"
"창녀만이 창녀 취급당하는 것을 안다고 우리 할머니가 말씀
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해림이 너도 창녀나 마찬가지다 바로 그 말이군요?"
"그러고 보니, 창녀 근성이 없잖아 있는 것 같군요. 전에는
몰랐었는데."
"정말 말 다 했어요?"
"아직 못다 했어요. 우리 할머니 말씀이 여자는 창녀 근성이
있어야 편하게 살 수 있다고 했어요."
"완월동으로 가든지, 봉래동으로 가든지 편하게 사는 여자들이
깔려 있는 곳으로 가세요. 할머니의 말씀을 존중하시는 뜻에서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 할머니 말씀에 부끄러움이 한 점 없는 여자보다
부끄러움이 한두 점 있는 여자가 더 여자답다고 더 처녀답다고
했어요. 사람은 원래 부끄럽게 태어난 존재 아닙니까?"
"빨리 어디론지 꺼져 버려요."
"나를 기분 나쁜 방향으로 몰아붙이는 해리임의 목적이 뭔가
나는 벌써 알고 있어요."
"뭐라구요?"
"그래서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단 말입니다."
"빨리 꺼져 버리라니까요. 이 시간 이후부터는 영영
이별이예요. 아시겠어요?"
"왜? 내가 창녀 근성이 있는 여자라고 솔직이 말했기 때문에?"
"그래요."
"해리임 박 답지 않군 그래."
"난 창녀 근성이 있는 여자가 아니라 강도 만난 여자란
말예요. 이제 알겠어요?"
"미스 박 혼자만 강도 만난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군요. 정말
사람 웃기지 말아요."
"웃기다니요? 내가 농담하고 있는 줄 알아요?"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강도들을 만난 사람이었어요,
알겠어요? 한두 번 강도를 만난 게 아니었단 말이요."
"뭐라구요?"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적부터 강도들은 열두어 살밖에 안된
그녀들을 뻔뻔스럽게 강도질했단 말이오. 이젠 알겠어요? "
"하,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우리 조상들은 정조도 없는 동물 취급을
당해도 되는 종족이란 말입니까?"
"......"
"한두 차례 강도질당한 그 슬픈 사연 때문에 자학에 빠져
자신의 운명을 망치려 들다니.... 만약 우리 할머니들과
어머니들 모두가 그랬었다면 우리 흑인들은 세상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 살아 남기 위해선 치욕을 무릅쓰고 창녀가 되어도
괜찮다 그 말인가요?"
"창녀가 되란 말은 아니오."
"그럼 뭐예요? 모두 용서하란 말인가요?"
"난 아는게 없어서 적절한 대답을 못하겠어요. 그러나 내가 한
가지 알고 있는 사실은 우리 할머니들의 가슴속에는 부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 할머니들을 살아 남게
만들었읍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영감에 가득찬 찬송을 부르던 우리 할머니들과 어머니들의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있읍니다."
"당신의 어머니도 크리스찬이었나?"
"믿음이 많은 분이셨지요. 늘 잡초의 지혜를 말씀해 주시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했읍니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었읍니다."
"그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 흥미가 없어요. 난 혼자
있고 싶어요."
"다른 사람을 전혀 생각해 주지 않는 걸 보니, 마음의 문이
닫혀 있군요."
"그래요. 마음의 문이 꽉 닫혔어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몰랐다. 날이 갈수록 비정한 여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해풍이 차가운 영도다리 위에서 밑도 끝도 없이
옥신각신하다가 이윽고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난 이제 진해로 돌아가겠어요."
"정말 고집불통이군요."
"붙잡아도 소용없을 거예요. 나는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그날 밤 해림은 진해로 돌아가지 않았다.
샨데리야가 유혹하는 남포동의 어느 살롱에서 위스키 한 잔을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갈증 때문에 마셨다. 다음에는 울화 때문에
들이켰다. 그리고 고독 때문에도 마셨다. 술이 나오는 대로
마셔야 할 이유는 자꾸만 불어났다.
급기야는 만취하여 "내 손으로 원수를 갚기 위하여!" 건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존슨 중사는 "그것만은 안돼!" 하면서도
술잔만은 함께 비웠다.
그날 밤은 그랬다. 마셔야 할 이유들이 파도처럼 넘실넘실
가슴에 밀려와서는 활화산처럼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어떻게 얻었는지 모르지만, 광복동에 자리한 최고급 호텔 방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해림은 자기 속엔 창녀 근성이 없다고 우겨댔었다. 불과
서너시간 전까지만 하여도.
그녀는 색깔없는 여자처럼 굴었다. 찬바람 부는 영도다리
위에서는. 그러나 그녀는 색깔이 진한 여자였다. 광복동
언덕배기의 고급 호텔 아늑한 침실에서는.
"목욕을 해야겠어요."
그건 옷을 벗겠다는 표현이었다. 흑인 병사 앞에서 창녀와
다름없이.
초여름날 꽃뱀이 화려한 허물을 벗어 버리듯 해림은 겉옷을
벗어던지고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젖빛 투명한 인어처럼 눈부신 여인의 나신에 잠시 혼을
빼앗겼던 존슨 중사 역시 재빨리 군복을 벗어던졌다.
더운 물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 휘감겨 있는 여인의 알몸은
더없이 신비로왔다.
"안돼요, 존슨!"
그러나 해림의 그 말은 존슨 중사를 흥분시키는 촉진제 구실을
했다. 존슨은 탄력이 넘치는 알몸으로 성큼 욕조(浴槽) 앞으로
다가섰다.
아스라한 현기증이 일어났다. 도저히 감당해 낼 것 같잖았다.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오를 듯한 시꺼먼 그 불새를.
그해 4월
무참하게 짓밟혔던 바로 그날 아침에 해림이 목격했던
군마(軍馬)의 그것같이 보였다. 동네 쌀배급소 앞마당에서
교미를 하던 두 마리의 말(馬) 중에 숫놈의 그것 같아 보였다.
"안돼요. 안돼. 나가란 말예요!"
그녀는 흑인 병사를 밀어내기라도 할 듯이 안개를 헤집고
욕조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온몸에 가느다란 전율이
스쳐갔다.
"해리임, 난 오늘을 기다려 왔어. 3년 동안 전선을 맴돌면서."
"짐승처럼 굴지 말아요."
"우린 다 같이 강도 만난 사람이란 말이야."
존슨은 성큼 욕조 안으로 뛰어들어 그녀를 벽면에다
밀어붙였다.
어느새 뜨거운 열기가 목덜미와 가슴과 하복부에 격렬하게
쏟아져내렸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포들이 민감하게 꿈틀거렸다. 핏속의
작은 불씨가 차츰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로 변해 갔다.
해림은 꽃망울이 뭉클하게 터지듯 오열에 북받쳐 깨어지고
있었다. 활화산이 바위를 꿰뚫고 용암으로 흘러내리듯이 그녀의
육체는 파르르 떨며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짐승 같은 놈! 짐승같이, 내가 무슨 짐승인 줄 알어?"
입술로는 반항하면서도 검고 우람한 그의 어깨에 그녀는
매달려 있었다. 불꽃으로 튕기는 용암처럼 걷잡을 수 없이
봇물을 토하면서.
때때로 뭔가에 흠뻑 빠져들고픈 게 여자의 본능이라 그런가.
때로는 욕망의 전차를 타고 죽음의 계곡으로라도 돌진하고픈
여자의 본성이 있어 그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짐승같이 난폭한 검둥이를 그녀는 슬프게도 잘 감당해
내고 있었다.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해림의 젊고 싱싱한 세포는 연거푸 폭발하는 폭죽처럼 걸신이
들려 파르르 떨며 불타올랐다. 예민한 세포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불티처럼 활활 튀어올랐다.
3. 제3장 쫓는 者와 쫓기는 者
"미스 박, 전화 받아 보세요."
주인집 아주머니의 말에 해림은 미닫이문을 열었다.
"어디서 온 전화예요?"
"고문단의 브라운 씨인가 봐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죄송하긴요, 한가족 같은데. 난 해림씨를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약간 비만형이긴 하지만 30대 초반의 아직 젊고 고운 목포댁은
여간 친절한게 아니었다.
해림은 건너편 본채 대청마루로 달려가 마룻바닥에 내려져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전화 바꾸었읍니다."
"미스 박, 난 브라운이오."
"안녕하셨어요?"
"오늘 저녁에는 시간을 좀 낼 수 있읍니까?"
"예."
"그럼 장교 클럽에서 저녁 일곱 시에 만날까요?"
"예."
"어디 아파요?"
"아녜요."
"그런데 왜 그렇게 대답에 힘이 없지요?"
"점심을 굶었더니 그런가 봐요."
"힘 좀 내세요."
"예."
실제 해림은 힘이 없었다. 점심을 굶어서가 아니었다.
어젯밤의 격렬한 동물적인 게임 때문에 심신이 지쳐 있었다.
존슨 중사는 욕실 밖에서도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의 밤새도록 욕망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날 밤 해군 장교구락부.
저녁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2층 댄스홀로 자리를 옮겼다.
샨데리야 불빛이 은구슬이 되어 아롱지는 플로어에는 여러
쌍의 남녀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플로어에서 멀리 떨어진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제 동생을 만났나요?"
"못 만났어요."
"어제 진해에 왔던 흑인 병사는 누구지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아세요?"
"모리슨 소령과 함께 있었던 존슨 하사인가요?"
"예. 지금은 중사예요."
"대구로 떠났나요?"
"예."
"동생은 내일 진해로 올 겁니다."
"예에? 어, 어떻게?"
"오늘 낮에 영도에 가서 지훈이를 만나고 온 사람이 있어요."
"부하를 보내셨나요?"
"어제 저녁에 누나와 흑인 병사가 다녀간 줄 벌써 알고
있더랍니다."
"지훈이가요?"
"역시 봉래동 귀신은 다르더랍니다."
"지훈이 별명은 어떻게 아셨지요? 누구한테 들었어요?"
"소문은 손발이 없어도 빠른 겁니다."
"그런데 왜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온다고 했는지 모르겠군요."
"정리할 일이 있어서 당장은 갈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럼 우리 주인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나요?"
"물론이지요."
"정말 감사해요."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할까요?"
"예."
두 사람은 위스키 몇 잔을 마신 후에 플로어로 나갔다.
애수어린 블루스가 가슴에 촉촉히 젖어들었다.
홀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한군데로 쏠렸다.
군계일학이랄까. 하얀 드레스가 눈부신 해림은 미모의
여인들이 출입하는 장교구락부 안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했던 것일까. 브라운은 자기 품에 안겨
있는 해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힘껏 끌어안았다.
밤은 깊어갔다. 애잔하게 흐르는 블루스의 물결을 따라서 점점
깊어갔다.
해림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불을 당기기 전의 그녀는 하나의
실루에트, 투명한 실루에트 같은 여자였다. 적당히 가랑이를
벌린 채 물빛 투명한 속옷만을 살짝 걸치고 벽에 걸려 있는
캘린더 걸 같은 실루에트. 한쪽 유방은 풍성하게 드러내 놓고
한쪽 유방은 버찌 같은 유두를 통째 가린 슬픈 실루에트.
하나의 실루에트로 흔들리고 있다가 불만 당기면 갑자기
생기를 얻어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 같은 여자. 영혼에다 불을
당기면 영(靈)의 여자가 되고, 육체에다 불을 당기면 스스로
먹음직한 바베큐가 되어 버리는 그런 여자로 해림은 변해
있었다.
그날 밤도 해림은 벗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옷을 벗을
때마다 자신의 신비스런 알몸 그 어디엔가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곤 했다. 자기 육체는 아무리 아름다와도 껍질인 것을,
보이지 않는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껍질인 것을 실감했다.
그날 밤 그녀는 브라운을 위해 벗었다. 마음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의 인간적인 호의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랄까.
해림은 남의 호의를 묵살해 버리고 제 맘대로 행동할 만큼
강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 같았다.
제임스 브라운은 신사야. 하지만 브라운은 무서운 사람이야.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간에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브라운은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면서도 헤프게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차라리 어젯밤 존슨과의 만남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캐묻고
질투라도 했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알면서도
침묵하는 그에게 내심 그녀는 쫓기는 기분이었다.
혹시 내가 존슨에게 권총을 받은 사실까지 다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제임스 브라운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그의 직책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를 해림에게 소개해
주고 귀국한 모리슨 소령마저 그의 직책이나 계급은 모른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의 친구인 모리슨은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른다고
했는지 몰라.
3년 전에 있었던 존슨과의 관계까지 브라운은 알고 있는 거
아닐까?
착잡했다. 타자기 앞에 앉아 정신없이 타이프라이터를
치다가도 문득 브라운의 모습이 떠오르면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브라운이 내 곁에 있으면 내 손으로 범인들을 해치우기가
어려워지지 않을까?
혹시 그는 CIA(미국중앙정보국) 요원이 아닐까.
CIC(한국방첩대)까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나 있는 CIA 요원이라면 내가 계획하고 비밀리에
실천해야 할 일이 성공할 수 있을까?
삼장법사의 손바닥 안에서 까불어 대는 손오공 꼴이 되지
않을까?
해림은 불안했다. 오직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잡초처럼
모질게 살아온 지난 4년의 세월이 수포로 돌아갈까 싶어
불안했다.
잡초처럼 모질게 짓밟히고 거머리처럼 피멍이 든 채
산산조각이 났어도 모질고 모질게 살아 남았는데....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요인은 또 있었다. 그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못생긴 윤형사가 4년 전의 그녀를 기억하고 접근해
오는 데도 무슨 까닭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해림은 일찍 퇴근하여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렸다.
지훈은 그날 저녁 약속대로 진해에 나타났다. 그러나 전화로
만날 장소만 약속해 놓고 해림이 세들어 사는 집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
중원 로터리 근처의 중국집 2층 허름한 방에서 남매는 만났다.
실로 3년 2개월만의 눈물겨운 상봉이었다. 난리통에 생사를 모른
채 헤어져 있다가 처음으로 만난 것이었다.
"지훈아!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해림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고생은 우리만 했나. 모두들 다 했는데 뭐."
지훈은 누나와 헤어질 무렵의 철없던 개구장이 소년이
아니었다. 주먹으로 눈언저리를 적신 눈물을 몇 번 닦아낸
후로는 눈물도 비치지 않았다.
"정말 많이 컸구나. 그런데 못 먹어서 그러니? 왜 그렇게
야위었어?"
"권투선수는 살이 찌면 실격이야."
"권투선수라니?"
"난 챔피온이 될 거야. 권투도장에 다녔어."
"공부를 해야지. 권투를 하면 안돼."
"난 이미 결정했어. 놈들을 때려잡기 위해선 주먹이 있어야
하니까."
"놈들이라니?"
"누나는 벌써 모두 잊었어?"
"천만에, 잊기는.... 그러나 권투선수는 안돼. 학교에 가야
해. 돌아가신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시겠니?"
"그럼 복수는 안할 거야?"
"해야지. 하지만 주먹으론 안돼. 쥐도 새도 모르게 기막힌
방법을 써야만 성공할 수 있어."
"귀신 같은 방법으로 아무도 모르게 복수를 하겠다 그
말이지?"
"응, 그래. 정말 감쪽같이 해내야 해.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손을 쓸 수가 없어."
"왜?"
"우선 그 강도들을 찾아내야만 복수를 하든 고발을 하든 무슨
수를 쓸 수 있잖아?"
"난 고발하는 건 반대야."
"왜?"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고발을 해도 소용이 없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응. 상준 형도 그런 말을 했고, 부산에 있는 형들도 그런
말을 했어."
"물론 그럴 테지."
"그러니까 우리 손으로 해치우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어."
"우선 범인들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야."
"범인은 벌써 나타났어."
"범인이 나타나다니?"
"그 점박이가 진해에 나타난 적이 있다고 했어."
"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그리고 그 점박이와 함께 있던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냈대."
"뭐, 뭐라고? 좀더 자세히 얘기해 봐. 어떤 사람인지?"
"간장공장 사장이래."
"사장이라고?"
"응. 그리고 자민당 경남도당 부위원장이래."
"뭐, 뭐라고? 공중에 날아가는 새도 말 한 마디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자민당 도당 부위원장이라고?"
"그런가 봐."
"누가 그래? 상준씨가?"
"응."
"그 사람 언제 만났는데?"
"어제 봉래동에 왔었어."
"설마 브라운이 그를...."
"브라운이 누구야?"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상준씨가 언제 그 사람을 보았대?"
"지난 토요일 오후에 봤는데, 분명히 그 점박이 사내와 함께
칠락관에서 나와 지프 차를 타고간 그 사람이었다고 했어."
"그 점박이가 진짜 범인 중 한 놈일까?"
"상준 형은 바보가 아니야. 영리한 사람이야. 누나는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만....."
"세상에 점박이 남자가 한 사람뿐이겠니?"
"그날 벚꽃장에서 얼굴도 똑똑히 보아뒀다고 했어."
"그 점박이가 정말 범행에 가담한 놈들 중의 한 사람일까?
"뒤를 캐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어떻게?"
"혹시 이마나 머리에 흉터가 있는지도 알아보고, 피도
AB형인가 알아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해림은 아무런 대꾸 없이 두 눈을 감았다. 다시는 입 밖에도
꺼내어 놓고 싶지 않은 악몽의 그날 범인에게 입힌 상처와 그
범인이 흘린 피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괴롭겠지만, 어쩔 수 없어. 점박이 그놈이 제일 졸개였는지도
몰라. 심부름꾼으로서 미행을 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그래. 지훈이 네 말이 맞을는지도 몰라."
해림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두 눈을 떴다. 연약한
피해자로서 뒷전에 물러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나를 범한 그 놈은 제일 졸개였을 가능성이
높다. 찬물을 마시는 데도 순서가 있다고 하니까.
"그 점박이 사내를 납치해서 족친다면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확실한 증거도 없이 폭력을 사용해선 안돼."
"폭력은 우리가 먼저 당했어. 조그마한 증거라도 찾으면 놈을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오히려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그 사장인가 부원장인가 하는 사람도 내가 미행해 보겠어.
칠락관에서 대접할 정도였으면 아무래도 보통 사이는 아니었을
거야."
"어린애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생각할 수 있니?"
"난 어린애가 아니야. 학교에 다녔으면 벌써 고등학생이야."
"그래, 맞아. 그런데 학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일부터
당장 야간중학교에라도 다녀야겠다. 내가 다 알아두었어."
"야간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란 말이야?"
"그럼. 차곡차곡 계단을 밟아야지."
"창피해서 어떻게 다녀? 키라도 작으면 또 모르지만."
"창피하긴. 누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도 다니고, 남학생들
가운데는 장가간 사람까지 다 있다더라."
"정말?"
"젊은 총각 교장선생님이 거짓말을 하시겠니?"
"이상한 중학교도 다 있군 그래. 그 학교 교장선생님은 아직
총각이신데, 학생 중에는 장가간 어른도 있다니...."
"모두가 전쟁 때문이야. 뒤죽박죽인 데가 야간중학교뿐만이
아니야."
"하긴 그래."
"벌써 수속을 다 마치고 입학금까지 치렀으니까 넌
중학생이야."
"내가 중학생이 되었다고?"
"그래. 공부란 기초가 중요한 거야.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날 거야."
"난 담배장사를 할 생각인데."
"다방 같은 데 돌아다니면서 양담배 장사를 한단 말이지?"
"응. 놈들을 추적하기 위해선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아.
칠락관 같은 데도 미친 척하고 담배를 팔러 들어가면 되거든."
"정말 놀랍구나."
"누나 말대로 야간중학에도 다녀야 하겠어. 고학생 담배장수!
그럴 듯한 이름이니까. 본래 별명은 귀신이지만."
"귀신이란 말은 하지 말아. 섬뜩하니까."
"하지만 지훈이는 귀신이 되어야 해. 그래야만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누나는 어떤
방법으로 복수할 것인가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글쎄. 경찰에 고발해서 안되면...."
"안되면?"
"권총으로 쏴 죽이겠어. 칼로는 죽이기 어려울 테니까."
"그건 바보 같은 방법이야. 일류대학 나온 머리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돌아가?"
"피난살이 가교사(假校舍) 판자대학을 나왔으니 오죽하겠니."
"내 말 들어 봐, 누나. 우리가 범인들을 찾아내어 놈들을
응징하는 방법은 환상살인(幻想殺人)이어야 해."
"환상살인? 넌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말까지 다 아니?"
"4년 동안 그것만 생각해 왔으니까 그 정도는 보통이지."
"환상살인만 생각해 왔다고?"
"응. 왜냐하면 우리 남매는 멋지게 복수를 한 후에도 살아
남아야만 하니까. 잡혀서 사형을 당하거나 평생 감옥에 갇혀
콩밥을 먹어야 하는 그런 복수는 무의미하니까."
"말은 쉽지만, 어떻게 환상적인 살인을 할 수 있겠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어. 우리에게는 방법이 있단 말이야.
놈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차례차례 환상적인 수법으로 제거해
버리는 거야."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환상살인을 감행할 수 있을까?"
"고급 양주병에다 메틸 알콜을 넣어서 범인의 집에다 갖다
놓는 방법이 있어."
"그럼 가족이나 다른 사람이 마시고 화를 당할 염려도
있잖아?"
"놈들은 우리 가족을 몰살시키려 했어. 일본은행권 보관증까지
싹 쓸어간 것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야."
"그건 그렇지만 그 방법밖에 없을까?"
"석유 난로나 곤로에다 휘발유를 몰래 채워놓고, 난로나 곤로
바닥에다 화약을 살짝 뿌려놓는 방법도 있어."
"화약이라니?"
"엠원(M1) 총알이나 다른 총알에서 빼낸 화약을 살짝
뿌려놓으면 먼지 같아서 식별하기 어렵거든.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말이야."
"무서운 방법인데."
"더 무서운 방법이 있어. 박격포탄이나 수류탄, 그리고
기관총알 같은 것을 여러 개 아궁이 속에다 깊숙이 밀어넣고
살짝 재를 덮어두는 방법이 있어. 그 방법을 쓸 때에도 화약을
뿌려놓으면 즉시 효력이 발생하게 돼 있어."
"아무것도 모르고 불을 당기면 금방 박살이 나겠군 그래."
"아마 그 방법을 쓰면 범인의 집을 날려 버릴 수도 있을
거야."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아. 아궁이 깊숙이 밀어넣어 놓으면
안방에 있는 사람이 박살이 날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몰라."
"너무 끔찍한 방법인 것 같다."
"현대식 능지처참 방법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재료를 구할 수 없으니까 그 방법은 어렵겠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재료는 구할 수 있어."
"정말?"
"응. 놀라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사실대로 말해 줄 수도 있어."
"그만한 일에 내가 왜 놀라니?"
"놀라지 마. 박격포탄과 수류탄은 이미 구해 놓았어."
"저, 정말?"
"놀라지 않는다고 했잖아?"
"어떻게 구했니?"
"얼마 전 진해중학교에서 미군부대가 이동할 때 마루 밑에
남겨놓고 간 것들을 주워 놓았어."
"그렇게 위험한 물건들을 어디다 갖다 놓았니?"
"그건 비밀이야. 개머리판 없는 칼빈총도 주워 왔는데 쓸모가
있을는지 모르겠어."
"누나에게도 꼭 비밀로 해야겠니?"
"응, 어쩔 수 없어."
"너 정말 무서운 애가 되었구나."
"청산가리를 구해서 교묘하게 사용하는 방법도 있고 독사를 몇
마리 잡아서 절묘하게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혼쭐을
내는 데 그치기 쉬운 방법이지."
"독사까지 동원할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독사를 어떻게
잡니?"
"무주구천동으로 피난갔을 때, 땅꾼에게 독사 잡는 방법을
직접 배웠어."
"정말?"
"응. 환상살인을 위해서 배워두었던 거야. 진해에도 독사는
많으니까. 봄이 되면 슬슬 기어나오지."
"하나님 맙소사! 정말 무서운 아이로 변했구나."
"아이가 아니라 귀신이라니까."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얘."
"그럼 누나는 놈들을 찾아내도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아뭏든 넌 범인들을 찾는 일만 도와주고 그 밖의 일은 내게
맡겨."
"간이 콩알만 해서 말만 듣고도 새파랗게 질리는 여자의
몸으로 야수 같은 놈들을 어떻게 처치하겠어?"
"내게도 방법은 있어."
"권총으로?"
"권총도 구할 수 있을 거야."
"권총으로는 안된다니까. 금방 잡히고 말아."
"아뭏든 너는 환상살인에 뛰어들지 마. 이젠 누나도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았으니까, 잘 기억해 두었다가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어. 누나도 보통 여자가 아니란 걸 알아 둬. 해림이란 여자는
한다면 하는 여자야."
"한다면 하는 여자? 그럴 듯한 이름의 여자 같은데. 그러나
누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어쨌든 지훈이 너는 범인들을 찾아내는 일만 도와주면 돼."
"알았어. 누가 뭐래도 범인들을 찾아내는 일이 급하니까."
"이젠 집으로 갈까?"
"나는 당분간 상준 형하고 지낼 생각이야.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건 왜?"
"얼굴이 팔리면 안되니까."
"그래서 오늘도 밤에 여기서 만나자고 했구나."
"그래. 그리고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들에겐 날 친동생이라고
하지 말아."
"그건 또 왜?"
"복수를 하려면 그래야 해. 그리고 앞으론 이름도 그저
훈이라고만 부르는 게 좋겠어. 아니면 귀신이라고 부르든지."
"정말 그래야 하니?"
"응. 그리고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장소에서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타인들 앞에서는 남남처럼 지내야 한다 그 말이니?"
"응, 그래."
"3년 이상 생사도 모르고 헤어져 있었는데, 만나자마자 그렇게
살아가야 하니? 어린것이 인정사정도 없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어차피 누나는 누나의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그게 좋을
거야. 헤어져 있어야 보고 싶기도 하고."
"함께 살면 꼴보기 싫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 미리 처방을
해 두는 것 같구나."
"피차 100% 마음에 들기는 어려울 테니까."
"알겠어. 우리에겐 타인이 알아서는 안될 숨은 목적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 이젠 나갈까?"
"돈 필요치 않니?"
"내게도 있어."
"담배장사 하려면 밑천도 있어야 하고, 학교에 나가려면 책도
사야잖아."
"그 정도는 부산서 벌어 두었어."
"그럼 이 돈은 비상금으로 넣어 둬. 상준씨한테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돈이 좀 있어야 할 거야."
해림은 핸드백에서 고액권 지폐 한 다발을 꺼내 지훈에게
건네주고 일어섰다.
"고마와, 누나."
"몸조심해야 한다."
"누나도."
"응. 그래. 그리고 자주 연락해야 해, 알겠지?"
"자주는 못할 거야.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으면 쪽지를 누나네
대문 앞에 있는 벚나무 밑둥치의 작은 구멍에다 끼워 놓든지
상준 형을 보내도록 하겠어."
"전화가 있는데,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려고 하지?"
"그 집 전화는 직통전화가 아니잖아. 어떤 여자가 연락을 해
주는 전화던데?"
"그럼 어때? 목포댁은 친절한 사람이야. 날 친동생처럼
여긴다구."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야?"
"그럼. 그 사람은 교회 집사님이야."
"누나도 교회에 다녀?"
"글쎄."
"대답이 뭐 그래."
"나가고 싶지만, 거의 못 나가고 있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지? 심약한 사람처럼."
"모두 전쟁덕분이야. 어떤 노인 목사님이 나에게 새 삶의
용기를 심어주셨어."
"새 삶의 용기라니?"
"마음속에 불꽃이 타오르게 만들어 주셨어."
"마음이 약해진 것은 아니겠지?"
"그럼."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
"알고 있어."
"혹시 목포댁인가 하는 사람에게 우리 집안의 일을 얘기한 건
아니겠지?"
"물론이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염려하지 말아."
"아무리 친절한 사람한테도 집안 얘기를 하면 안돼."
"알았어. 하지만 목포댁은 믿을 만한 좋은 사람이야. 선한
사업을 하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선한 사업이라니?"
"큰 교회당을 짓는 게 평생 소원이래."
"누굴 위해서?"
"글쎄.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겠지. 아뭏든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는가 봐."
"그럴 테지."
"지훈이도 한번 만나 봐. 좋은 여집사님이니까."
"남편은 무엇하시는 분인데?"
"혼자 사시는 분이야. 남편과는 사별했나 봐."
"자녀도 없어?"
"응. 없어."
"그래서 교회에 충성하는 모양이군."
"앞으로 전화할 때 인사를 드려."
"벌써 내 얘기를 했구나."
"남동생이 있다는 말만 했어."
"전화는 필요할 때 하겠지만, 인사는 드리지 않을 생각이야."
"마음대로 해. 그러잖아도 내 방에서 직접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전화기 하나 달아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자주 전화해."
"알았어."
"오늘은 일부러 일찍 퇴근하여 기다렸었는데, 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만나자고 했니?"
"얼굴이 팔리면 곤란하거든."
"그렇게 경계해야 해?"
"조심은 해야 할 거야."
"긴급할 때는 상준 형이 전화하는 경우도 있을 거야.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말이야."
"이젠 농담도 잘하네."
"농담이 아니야."
"정말 보안이 철저하군 그래. 몸조심해야 해."
"누나도 건강해야 해요."
남매는 두 눈에 이슬을 머금은 채 보일락말락한 미소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지훈은 누나보다 한 걸음 늦추어서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어둠 속 어디에선가 바람이
일고 있었다.
문득, 두 분의 혼령이 어둠 속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따라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잿빛 허무의 빛깔을 밟고 가듯 어둠 속을 정처없이 걸었다.
아득한 어둠의 저 끄트머리에 닿으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혼을
만날 것만 같았다.
지훈은 소리없이 울며 걸었다. 바람이 차가왔다. 그제야 속천
앞바다가 가까운 것을 깨달았다.
물빛 고운 바다였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달콤하고
짭짤하고 상큼한 몰(바다말) 맛에 홀딱 반하여 물오리처럼
자맥질하던 추억의 그 바다는 한없이 고운 물빛 바다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바다는
무슨 거대한 괴물 같았다. 어둠에 싸인 채 출렁이는 밤바다는
금방 사람을 삼킬 것만 같았다.
저 참담한 원수놈의 어둠. 검은 가면을 쓴 놈들을 얼른
찾아내서 처단해야 할 터인데....
옷깃을 여몄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세찼다.
이 밤도 두 분의 영혼은 어두운 밤바다에 떠돌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이 맺혀 안식을 얻지 못한 채.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거므스름하게 출렁이는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은 귀신같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님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그 길이 한 많은
부모님들의 혼령을 위로해 드리는 일이 될 것 같아서였다.
아까 중국집을 나설 때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미행을
하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른 채 지훈은 밤바다와 맞서 있었다.
다음날부터 지훈은 담배장사에 열을 올렸다. 야간중학에
입학하였으나 뒤늦게 들어간 중학교인데다 따로 마음에 정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공부에는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일주일에
2,3일 정도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보통이었다.
토요일 밤에는 아예 학교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열 종류
정도의 양담배와 껌을 넣은 납작한 사각형의 나무상자 담배통을
옆구리에 끼고 다방을 순례했다.
중원 로터리 근방에 있는
랑랑다방.진달래다방.칼멘다방.야자수다방을 비롯해서 해양극장
쪽으로 비스듬히 대로를 따라 올라가다 등대다방에 들렀다가
해양극장 오른쪽 옆구리에 붙은 해양다방을 거쳐 길 건너
궁전다방에 들르곤 했다.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는 남원
로터리 못미처 갈매기다방에도 이따금 들렀다.
다방 외에 가는 곳은 해군 장교구락부와 미군 댄스홀과 요정
칠락관 세 군데 정도였다. 세 군데 모두 보통 담배장수들은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훈이만은 예외였다. 언제 어디서나 예외는 있었다.
몇 차례 그 곳 종업원들과 몸으로 부딪친 후, 귀신처럼 들어갈
구멍을 뚫어놓은 것이다.
"훈이 니는 정말 귀신이구나."
"정말로 놀랐다 놀랐어."
떠돌이 담배장수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의 자녀이거나
고아였다. 사투리를 투박하게 쓰는 토박이도 있고, 지훈이처럼
타지방 청소년도 있었다.
4월로 접어들면서 진해 다방가는 더욱 활기를 띠고 붐볐다.
웃음 파는 꽃다운 레지들의 수효가 늘어났고 손님들도 불어났다.
전쟁 때문에 벚꽃장이 열리지 못하다가 휴전협정과 함께 4년
만에 벚꽃장이 열리자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왔다.
구경꾼들은 물론이요, 그보다 한 발 앞서 잡상인들이 몰려들고
주모들과 색시들이 몰려들고 서커스단이 몰려들고 소싸움꾼들과
닭싸움꾼들이 몰려들고 덩달아 노름꾼들과 사기꾼들이 몰려들고
심지어 소매치기들까지 몰려든다고들 했다.
참담한 6.25의 후유증 같은 건 아랑곳없이 진해의 4월은
살판이 난 것같이 보였다.
서커드단의 신나는 트럼펫 소리, 징 소리, 소고 소리,
축음기의 유행가 소리에다 상모를 휘돌려 대는 농악꾼들의
날라리 소리, 자바라 소리, 꽹과리 소리, 장구 소리 등등에다
꽃파는 색시들의 매미 소리까지 별의별 흥겨운 소리가 큰
잔치집을 방불케 하고도 남았다.
4월로 접어들면서 담배도 훨씬 더 잘 팔렸다. 니나노 가락이
울려퍼지는 벚꽃장 술판까지 돌아야 할 만큼 시장도 넓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지훈은 벚꽃장 쪽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다방들이
밀집되어 있는 중원 로터리 근방이 그들 담배장수들의 본거지나
다름이 없었는데, 거기서 서쪽으로 3백 미터 정도만 나가면
벚꽃장이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였으나 지훈은 ㅂ꽃장엔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동춘(同春) 서커스단의 재미있는 묘기를
보고 싶었지만, 용케 참아냈다.
그 대신 벚꽃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칠락관에는 자주
들렀다. 상준으로부터 칠락관에 점박이가 나타났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그때 그 사람을 만났어?"
"그, 그건 잘 모르겠어."
"왜? 못 봤어?"
"응. 호, 혼자 나오는 걸 봤는데, 내가 미행을 했더니만
해양극장 안으로 토켰어."
"그 놈이 일부러 형을 따돌리려고 그랬었던 거야."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았어."
"해양극장으로 들어가서 해양다방으로 빠져 나오면 극장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모르게 돼 있거든."
"다, 다방에서 극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냐?"
"다방에선 극장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지만, 극장에 들어왔던
손님은 다방에 들어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돼 있거든."
"그라모 문이 두 개인 셈이네."
"해양다방은 출입문이 두 개인 셈이지."
"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극장 앞에서 영화가 끝나는 시간까지
쎄 빠지게 기다렸는데 그 점박이가 끝까지 안 나타나는 기라. 꼭
무슨 귀신한테 홀린 기분이었다카이."
"정말 아깝게 되었군 그래. 형이 머리를 조금만 더 썼더라면
끝까지 미행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그 놈의 뒤를 끝까지 캐봤어야 하는 긴데...."
"그런데 그 점박이가 미행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교묘하게
꼬리를 감추었다면 틀림없이 나쁜 짓을 저지른 놈이 아닐까?"
"처, 처음 볼 때부터 좋은 일 할 만한 사람맨쿠로 보이지는
않았어."
"인상부터 범죄형이었다 그 말이지?"
"응."
상준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받은 후 지훈은 칠락관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점박이가 칠락관에 출입하는 것을 상준이 두 번이나
목격했다면 그 미지의 사내는 틀림없이 칠락관에 자주 들렀을 것
같아서였다.
그 점박이 사내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내지? 터놓고 칠락관
색시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계집애 얼굴이었다.
그 계집애는 칠락관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애였다. 그래도
명색이 관(館)의 물을 먹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한눈에
되바라진 데가 있는 계집애였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이
난다더니만 때때로 입술에 루즈도 칠하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명숙(明淑)이라고 했던가. 그 계집애를 통해 정보를
캐내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한담?
어쩐지 부담스러워서 선뜻 접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도 비슷할 것 같고 쉽게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그 계집애를 택하기로 작정했다.
담배장사를 처음 시작했을 무렵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명숙이었다. 얼굴은 밉지 않게 생겼지만, 한눈에 마땅찮은
계집애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 어려운 일에도 발벗고
나서야 할 텐데, 내가 왜 망설이고 있을까?
그러나 난생 처음 호의를 베풀어야 할 여성이 칠락관의 물을
먹고 있는 계집애라는 점에 어쩐지 서글픔이 앞섰다.
지훈은 서둘러 접근해 갔다. 처음에는 미제 껌과 초코렛으로
호감을 사고 그 다음에는 십자가가 달린 목걸이로 그녀의 마음을
잡아당겼다.
생각했던 대로 명숙은 어려운 계집애가 아니었다. 엉뚱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함락할 수도 있을 계집애 같았다.
쌀쌀맞던 지훈이 봄눈 녹듯 부드러워진 데다 선물까지
안겨주자 명숙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순진한
구석도 있는 계집애였다.
지훈은 다과점으로 명숙이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가끔 바깥
심부름을 나오는 틈을 타서 가까운 제과점에서 만난 것이다.
"명숙이 너 몇 살이니?"
"어머머, 얘 봐라. 어른처럼 반말로 남의 나이를 다 묻고."
명숙은 속으로는 좋으면서도 짐짓 싫은 척했다.
"그럼 존대말로 연세를 물어야 대답하실 건가?"
"갑자기 남의 나이는 왜 물어?"
"그냥."
"이유도 없이?"
"응.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둬."
"누가 대답하기 싫다고 했어."
"그럼 대답해 봐."
"열 일곱이야, 왜?"
"알았어."
"지훈이 너보다 누나지?"
"천만에. 난 열 여덟이야. 고생을 많이 해서 나이가 좀 들어
보이지만."
지훈은 눈도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제 나이보다 한 살 올려
말했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정말 열 여덟 살이니?"
"그렇다니까.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어?"
"못 믿긴...."
명숙은, 좀 마르기는 했지만 준수하게 생긴 데다 자기보다
키가 훨씬 큰 지훈을 올려다 보았다.
"특별히 몸조심을 해야 해, 명숙이."
오빠처럼 의젓하게 한 마디 하자, 금방 명숙이 눈을 흘기면서
도전해 왔다.
"어머머, 목걸이 선물 하나 하더니만 무슨 관계가 있는
사람처럼 말하네."
"우린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니까, 돕는 의미에서 말한
것뿐이야. 말뜻을 잘 새겨들어야지."
"날 도와주는 말이라고?"
"그래. 이 맹추야."
"뭐, 뭐라고?"
"명숙이 넌 예쁘니까, 탐내는 능구렁이들이 많을 거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칠락관에는 고급 손님들만 드나드니까, 염려하지 마."
"고급 손님 좋아하네. 오히려 그런 손님들 가운데 어린
숫처녀만 골라서 잡아먹는 능구렁이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지. 이 맹추야!"
"너 그런 말 어디서 들었니?"
"다방에 죽치고 않아서 하는 이야기들이 대개 그런
얘기들인데, 귀가 있으면 다 들을 수밖에. 명숙이 너도 옛날
같으면 시집을 갈 나이니까, 조심해야 한단 말이야."
"하긴 우리집 주인 마담과 언니들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그 봐. 그러니까 몸조심하라구. 특히 며칠 전에 칠락관에
들렀던 그 인상이 고약한 점박이 남자는 그 방면에 유명한
남자인가 보더라. 벌써 명숙이를 점찍어 놓았는지도 몰라."
"그런 무서운 소리를 다하다니? 사람이 물건인가? 점찍어
놓게."
"왼쪽 눈썹 밑에 팥알만한 점이 있는 인상이 험한 그 점박이
남자 본 적이 없니?"
"우리집에 오신 손님인데 왜 못 보았겠니? 근데 그 손님이
진짜 그런 사람이래?"
"이건 비밀인데, 색골인가 봐. 어린 처녀들의 킬러라는 거야."
"어머, 정말?"
"칼멘다방에도 명숙이 네 또래의 심부름하는 애가 하나
있었는데, 그치가 손을 댔다는 거야."
"정말?"
"이건 절대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
"알았어. 근데 칼멘다방 그 애, 지금도 그 다방에 있니?"
"그렇게 됐는데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겠어. 벌써 칼멘처럼
다른 곳으로 떠났지."
"칼멘처럼?"
"응."
"혹시 지훈이 너 그 애를 좋아했던 거 아냐?"
"천만에. 난 그렇게 아무나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정말?"
"정말이라니까. 그런데 그날 그 점박이 남자와 같이 왔던
사람이 누군지 알어?"
"글쎄."
"전에는 간장공장 곽사장하고 잘 다녔는데.... 자민당
부위원장이란 사람 몰라?"
"응, 알아. 그날도 그 곽사장님 하고 왔다가 먼저 나갔을
거야. 아마 그날은 다투었는지도 몰라."
"다투다니?"
"고함소리가 났으니까. 그리고 먼저 나가는 것 같았어."
"그 사람들 둘 다 조심하라구."
"둘 다?"
"응."
"둘 다 처녀 킬러야?"
"처녀가 못하는 말이 없네."
"자기가 알려줘 놓고선."
"하지만 절대 비밀이라고 했잖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그런 말을 하면 안돼. 그런 말을 하면 자기 속을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자기 속을 보이는 거라고?"
"미안해 할 거 없어, 나한테 만은. 그런데 그 사람들 거기
자주 오니?"
"곽사장님은 가끔 오시는 편이야. 앞으로 선거 바람이 크게
일어날 것에 대비하는 모양이야."
"곽사장이란 사람, 대개 어떤 사람들 하고 같이 오니?"
"글쎄. 유심히 봐 두지 않아서 잘 몰라. 근데 왜 그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이 많지?"
"명숙이 때문이야."
"나 때문에?"
"그런 줄 알고, 그 사람과 점박이 남자의 주변인물들을 잘
살펴봐."
"무엇 때문에?"
"궁금증이 대단하구나, 명숙이 넌."
"궁금하게 만드는 쪽이 누군데?"
"난 장래 소설가가 될 거야."
"어머, 정말?"
"응. 그래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사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해 두고 싶은거야. 명숙이도 보호할 겸 말이야."
"어머, 마치 누구의 보호자라도 된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하네."
"혹시 누가 알어. 보호자가 될는지."
"징그럽다, 얘."
"늙은 능구렁이들이 눈여겨 보는 것은 징그럽지 않고?"
"아까부터 누가 누굴 눈여겨 본다는 거야?"
"입술에 물감을 칠하고 손톱에 색깔을 먹이면 능구렁이들이
요것 봐라 하고 눈여겨 보는 줄 몰라?"
"그래, 알았어. 다음부턴 물감은 쓰지 않을께."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3일에 한 번 정도는 나올 수 있을 거야."
"사실은 말이야."
"말해 봐."
"그 점박이 남자가 그 밖에도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확실한
증거를 못 잡고 있어."
"그럼 경찰에 부탁하면 되잖아."
"증거가 없으면 백 번 고발해도 소용이 없어."
"그래서 나더러 도와 달라는 거야?"
"응. 그 점박이가 나타나면 랑랑다방 미스 정한테 전화로 살짝
알려 줘. 칠락관에서 손님이 훈이를 찾는다고만 알려 주면
달려갈 테니까."
"미스 정이 누군데?"
"레지야."
"몇 살인데?"
"내가 그 여자 나이를 어떻게 알아. 하지만 아마 스물 다섯은
되었을거야.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이야."
"그럼 엑스(X) 누나야?"
"그저 누나라고 부르기만 한다니까."
"나 말고 아무나 사귀면 안돼."
"알았어. 명숙이나 조심해."
제과점 앞에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다음에 만날 장소는 다른
장소를 정한 후에.
혼자가 되었을 때, 지훈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점박이 남자와 곽일남(郭日男) 사장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왜 은밀히 만났을까? 왜 얼마 전에 만났을 때는 다투고
헤어졌을까? 무슨 말 못할 비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묘연했다. 안개 속의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곽사장도 일당 중의 한 놈이 아닐까?
검은 조직의 우두머리들 가운데는 뜻밖에도 사회적 거물이
있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정계(政界)의 거물 가운데도 검은 조직에 깊이 관련된 자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수사기관의 고위층 가운데서도 빨갱이들이
있었으니까 사회적 지위가 확고하다고 해서 반드시 사상이
건전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확고부동한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검은 조직의
뿌리를 더욱 깊숙이 내리게 만들 수 있지 않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일반의 상식으로서는 검은 조직을
붕괴시킬 엄두조차 낼 수 없지 않을까?
과연 자민당 도당 부위원장 곽일남은 어떤 인물일까?
곽사장의 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법 알려진 사람의 집이라
어렵잖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집은 중원로터리 근처의 익선동에 있었다. 칠락관과는
지척에 있는 읍내의 고급 주택가였다.
높은 담장에 수목으로 들어찬 정원 때문에 단층 양옥은 파묻혀
있다시피 했다.
이틀 후.
나름대로 심어놓은 정보원 명숙으로부터 랑랑다방에 연락이 와
있었다.
담배통을 펼쳐들고 다방을 반쯤 돌았을 때, 미스 정이 반색을
하고 다가왔다.
"칠락관에서 오라는 전화가 왔어."
"언제쯤 왔어요?"
"아마 한 시간 정도 되었을 거야."
"고마와요, 누나."
지훈은 담배통을 옆구리에 끼고 어둠 속을 바람처럼 달려갔다.
랑랑다방에서 칠락관까지는 2백여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뭉실뭉실 환상의 꽃이 피는 꽃철이라 그런가.
칠락관 아늑한 밀실에서는 술판이 여러 군데 벌어지고 있었다.
간드러진 웃음 소리, 흥겨운 노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훈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던 명숙이 다가왔다.
"맨 끝방 7호실에 있어."
"점박이가?"
"응. 곽사장하고 같이 있어."
"두 사람뿐이야?"
"아니. 언니들하고 모두 넷이야."
"고마와."
"내일 약속 잊지 않았겠지?"
"그럼."
명숙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지훈은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7호실은 현관에서 기역자로 꺾어진 곳에 있는 맨 구석방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는 것 같았다. 방망이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쿵쿵거렸다.
7호실 미닫이문 앞에 섰다. 방안에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가 무슨 수작을 벌이는 소리 같았다.
노크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험상궂은 점박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할 만한 배짱이 없었다.
미친 척하고 밀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설 수도 없었다. 밝은 불빛 아래서 점박이의
얼굴을 꼭 봐두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가 등을 탁 쳤다. 흡사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담배통을 놓칠 뻔했다.
지훈은 세차게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뒤돌아봤다.
낯이 익은 웨이터가 노려보고 서 있었다.
"임마, 너 여기서 뭣해?"
"다, 다, 담배 좀 팔려구요."
"놀라는 꼴을 보니, 수상한데?"
"아닙니다, 형. 담배 좀 팔게 해주세요. 담배 한 갑 서비스
할께요."
"넌 정말 수완이 대단하구나. 다른 애들은 들어올 엄두도 못
내는 곳에 들어와서 담밸 다 팔겠다니, 너 혹시 삼팔 따라지
아니냐?"
"예. 이북서 피난 나왔어요. 이거 한 갑 태우세요."
지훈은 얼른 담배통을 열어 낙타가 그려져 있는 캐멀 한 갑을
웨이터에게 내밀었다.
"이러면 손해 나잖아?"
"손해는요. 앞으로 잘 봐 주세요."
"알았어. 내 뒤에 바싹 따라 들어와서 수단껏 팔아 봐."
"고마와요, 형."
마침내 7호실 미닫이문이 열렸다. 지훈은 웨이터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진수성찬의 요리상을 가운데 놓고 네 사람의 남녀가
사이사이에 붙어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수사과장님한테서 전화 왔읍니다."
"이 밤중에 무슨 전화야?"
"한번 받아보십시오."
"그 친구 술 생각이 나는 모양이지? 하지만 중간에 끼어들면
술맛 떨어지니까, 가고 없더라고 해."
"예. 알겠읍니다."
때를 놓칠세라 지훈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사장님, 담배 좀 팔아 주세요."
"어렵소. 꼬마 녀석은 언제 어느새 들어왔지?"
"재수없게시리 담배장사하는 놈이 요정에 다 들어와?"
왼쪽 눈썹 밑에 팥알만한 점이 선명한 사내가 곽사장의 말을
거들었지만, 지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고급 양담배예요. 좀 팔아 주세요. 고학생이예요."
"얼른 꺼지지 못해."
"한 갑이라도 팔아 주세요."
"이놈 봐라. 보통 끈덕진 놈이 아닌데!"
"불쌍한 고학생인데 한 갑 사 주세요. 담배도 떨어져 가네요."
곽사장 곁에 앉아 있는 색시가 안쓰럽다는 듯이 한 마디 하는
통에 분위기가 금세 달라졌다.
"그래. 내 사랑 춘매가 원하는데, 담배 한 갑 정도 못
사주겠나?"
"감사합니다, 사장님."
결국 양담배 네 갑에다 껌 두 통까지 파는 데 성공했다.
지훈은 큰절을 하다시피 하고 뒤로 물러섰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점박이의 인상을 기억의 수첩에다 선명하게 그려 넣는
일은 잊지 않았다.
역시 범죄형이었다. 고약한 인상에다 약간 매부리코에 이마에
흉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곽사장처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고 있을까? 보통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의혹의 먹구름이 온통 머리를 어지럽혔다. 점박이와 곽사장
사이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순간, 웨이터의 전갈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수사과장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했었는데, 무슨 전화일까?
<그 친구 술 생각이 나는 모양이지> 하고 뇌까렸었는데,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평소에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수사과장이라면 수사관들 가운데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아닌가?
웨이터가 전한 말이었으니, 수사과장이란 호칭이 암호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 수사과장이란 사람은 과연 누굴까? 진짜 수사과장을 말하는
것일까?
안개 같은 의혹이 피어올랐다. 뭐가 뭔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까닭 모를 의혹에 휩싸인 채 허겁지겁 칠락관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다.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가는 거야?"
언제 따라나왔는지 명숙이 눈을 흘기며 출구에 서 있었다.
"미, 미안해. 난 명숙이가 바빠서 못 나오는 줄 알았어."
"핑계가 좋군 그래. 담배는 좀 팔았어?"
"응. 몇 갑 팔았어. 근데 말이야."
"뭐가 잘못 됐어?"
"아니야. 혹시 곽사장하고 친한 수사과장이 누군지 알아?"
"글쎄."
"곽사장하고 여기 술 마시러 온 적도 있었을 텐데?"
"응. 그러니까 알겠다. 진해경찰서 수사과장님이실 거야."
"진해경찰서 수사과장이라고?"
"응. 근데, 왜?"
"아무것도 아니야. 잘 있어."
"정말 갈수록 이상한 애군 그래. 비밀이 왜 그렇게 많지?"
"내일 오후에 만나."
지훈은 한 마디 남기고 어둠 속에다 몸을 묻어 버리듯 칠락관
출입문을 등졌다.
그러나 지훈은 칠락관을 아주 등진 것이 아니었다. 50미터
정도 떨어진 플라타너스 가로수 뒤에 몸을 숨기고 두 사람이
칠락관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준 형한테 연락을 취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연락하지?
불안과 초조가 뒤범벅이 된 채 시간이 흘렀다.
담배통도 짐스러웠다. 밖에서 오래 기다려야 할 줄 알았으면
담배통을 어딘가에 맡기고 돌아와서 기다렸을 텐데, 그렇게 못한
점이 아쉬웠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었다.
곽사장의 모습이 칠락관 외등 아래 나타났다. 아늑한
고급요정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도 함께 나오지 않는 게
수상쩍었다.
이삼 분쯤 지났을까.
점박이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방금 곽사장이 걸어간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떳떳한 관계라면 남의 눈을 피해 따로 행동할 필요가 없을 것
아닌가. 전에 상준이 미행했을 때에도 그랬었다는 점이 마음의
그물에 걸렸다.
점박이 사내는 주변을 살핀 후,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소방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상준 형만 있었으면 저 사내를 납치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어둠 속이었지만, 지훈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점박이의
뒤를 밟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납치를 하고 싶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뒤를 밟기만 했다.
점박이 사내는 소방서 앞을 지나 중원 로터리 쪽으로
내려갔다. 그 길은 바로 칼멘다방 앞을 지나치게 되어 있었다.
지훈으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점박이가 지나간 후, 지훈은 얼른 달려가서 칼멘다방 앞에서
좌판을 놓고 담배장사를 하는 하는 아주머니에게 담배통을
맡겼다. 그리고 계속 점박이 사내를 미행했다.
점박이는 천천히 랑랑다방 앞을 지나 신흥동 쪽으로 뻗은 길로
내려가다가 개천 다리를 지나자마자 벚꽃장으로 통하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칠락관에서 곧장 남쪽 지름길로 내려왔으면 불과 2백 미터
정도밖에 안될 거리인데 그는 7,8백 미터 이상 더 돌아온
셈이었다.
곽사장과 같이 내려왔으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많이
돌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점박이가 걸음을 멈춘 곳은 곽사장의 저택 대문 앞이었다.
사내가 초인종을 누르자, 누군가 안에서 금방 쪽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문 안으로 사라졌다. 이미 무슨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지훈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어둠 속에 버티고 서 있는
육중한 대문을 바라볼 도리밖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점박이와 곽일남은 분명히 무슨 암거래가 있었어.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곽일남도 4년 전 그 범행에 가담했던 놈 중의 한 놈일
가능성이 있어.
어둠 속에서 머뭇거리고 섰는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후, 훈아. 나, 나야. 놀라지 말아."
목소리의 주인공이 상준 형임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지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노, 놀랐구나."
"아니야. 괜찮아. 형을 조금만 일찍 만났더라면 그 점박이를
납치할 수 있었을 텐데...."
"바, 방금 곽사장 집에 들어간 것이 점박이었제?"
"응. 형도 보았어?"
"거, 걸음걸이하고 뒷모습만 봐도 인자는 안다카이."
"그럼 조금 전에 왔어?"
"응."
"그럼 곽사장이 집에 들어가는 겉 못 보았어?"
"응."
"형, 어떻게 할까? 놈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안에 들어가서
한번 들었으면 좋겠는데...."
"개, 개가 있을 낀데?"
"망이라도 한번 보게 목말을 태워 줘 봐."
"다, 담 위에 올라가 볼라꼬?"
"응."
"위, 위험하지 않겠나?"
"위험하긴."
두 사람은 보안등 불빛이 미치지 않는 담장 밑으로 가서
상준은 쪼그려 앉고, 지훈은 그의 목덜미에 가랭이를 벌리고
올라앉았다.
"무겁지, 형."
"괘, 괜찮다."
상준은 있는 힘을 다했다. 목말을 태워 지훈을 담장 위에
올려놓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바로 그때였다.
폭발물이 터지듯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나왔다. 한
마리의 개가 아닌 것 같았다.
"지, 지훈아, 안되겠다. 어, 어서 내려와야겠다."
상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훈은 담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단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무모한 도전에 실패한 것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바로 그 무렵에 곽사장 저택을 향해 다가오던 두 사내가
소리치며 달려왔기 때문이다.
"이놈들! 꼼짝 말앗! 도망치면 쏜다!"
"형, 튀어!"
불과 30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냥 엉거주춤 선
채로 붙잡힐 순 없었다.
우선 남쪽 방향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건장한 두 사내가 북쪽
방향에서 돌진해 왔기 때문이다.
얼마나 뛰었을까. 끈질기게 두 사내가 쫓아오고 있었다.
옆에서 함께 도망치던 상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뛰어내려오다 다른 골목으로 빠진 게 분명했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전에 없이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는 지훈이었다. 반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도 끝까지 잡히지 않고 살아 남는 그였다. 그래서 귀신이라는
별명을 붙혀 주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날 밤만은 달랐다. 아무래도 높은 담장에서 급히
뛰어내리면서 발목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갈수록 왼쪽 발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실은 아까부터 지훈은 발을 약간 절룩거리고 있었다. 워낙
다급한 통에 미처 발에 이상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갑작스레 왼발에 쥐가 내렸다. 발목을
삔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등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었다. 도저히 생각대로
도망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골목을 꺾어들면서
몸을 숨겼다.
처음에는 성공이었다. 조랑말이 끄는 달구지 뒤에 몸을
숨겼는데, 두 사내는 그냥 앞을 지나쳐 달려갔다.
그러나 한참 가다가 두 사내는 속은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뒤돌아서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더욱 안전한 곳을 찾으려 했다. 달구지
옆에 마침 개울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살금살금 기어서 돌계단을 타고 개천으로 내려갔다.
지훈의 움직임은 빠르지 못했다. 아무래도 한쪽 발에 이상이
생긴 게 결정적인 장애가 된 것 같았다.
개천으로 내려가서 몸을 숨기기 직전에 두 사내가 이미 달구지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지훈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크게
번져나가지 못했다.
"한번만 더 소리쳤다간 당장 죽여 버릴 테다."
민첩하게 개천으로 내려온 사내가 발목을 움켜쥐고 앉아 있는
지훈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난 나쁜짓을 하지 않았어요."
"생각보다 어린 놈인데."
뒤따라 개천으로 내려온 사내가 플래시 불빛에 드러난 지훈의
얼굴을 눈여겨 보고 뇌까렸다.
"무엇 때문에 그 집 담을 넘으려고 했지?"
"넘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솔직이 불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야. 왜 담을 넘으려 했지?"
"넘으려 하지 않았어요."
"이 새끼가!"
사내의 발길이 지훈의 입 언저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
바람에 입안이 찢어진 듯 금방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어둠 속이었지만, 두 사내의 얼굴을 확인해 두고 싶었다.
그러나 둘 모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다른 한 놈은 어떤 놈이냐?"
"모, 모르겠어요."
"맨입으로는 안되겠어. 맛 좀 보여줘야겠어."
"똥물을 먹이는 게 좋겠어."
"더러운 물을 먹고 싶지 않거든 빨리 바른대로 말해. 담장을
넘으려던 목적이 무엇이었지?"
"배, 배가 고파서 그랬어요."
"안되겠군."
한 사내가 지훈의 허리띠를 풀어 두 손을 뒤로 묶은 후,
개천물이 흐르는 가운데로 끌고갔다.
사람에게 똥물을 먹이려 하다니?
순간적으로 지훈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장복산 봉우리 아래 가마니 골짜기에서 흘러내릴 때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지만, 그 물이 읍내 중심부를 관통하면서
더럽기 짝이 없는 개천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우기 근처에는 달구지꾼들이 많아 조랑말의 오물이 그냥
그대로 개천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잠시였다. 미처 반항할
겨를도 없이 더러운 개천물에 머리가 처박혔다. 두 손이 뒤로
묶여 있어 두 사내의 완강한 힘에 굴복당할 수밖에 없었다.
바닷물, 냇물 가릴 것 없이 잠수에는 자신이 있는 지훈이었다.
그러나 똥물이나 다름없는 물에다 완력으로 머리를
처박아놓는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참변을 당한 부모님의 얼굴과
가엾은 누이의 얼굴이 스쳐갔다. 끝까지 참아내고 싶었으나
견뎌낼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입속으로 콧속으로 똥물이 밀려들어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홍수처럼 더러운 물이 몰려들어왔다.
속이 메스꺼웠다. 울컥 토하고 싶었다. 하지만 토할 수가
없었다.
문득, 개죽음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무모한 도전이
어처구니없는 참혹한 죽음으로 몰고가는구나 싶었다.
그 순간, 억누르고 있던 완력이 풀렸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쳐들었다.
한꺼번에 숨을 몰아내쉬었다. 손가락을 입에 넣을 수가 없어
똥물을 제대로 토해 낼 수가 없었다.
속이 메슥거렸다. 머리통이 얼얼하다 못해 빠개지는 것
같았다.
"물맛이 좋지? 네 이름이 뭐냐?"
"......"
"너 같은 놈은 물을 먹여서 바다에 던져 버리면 그만이야.
알겠어?"
"사, 살려 주세요. 사, 사실대로 다 말 하겠어요."
"이름이 뭐냐?"
"기, 김종일입니다."
"그럼 너희 누나 이름은 뭐냐?"
"김종순입니다."
"안되겠어. 물귀신을 만들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제, 제발 사, 살려 주세요."
다시 거부할 수 없는 완강한 힘이 머리와 목을 짓누르는 통에
지훈은 개천물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다.
이젠 정말 개죽음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입을 꽉 다물고 숨을
쉬지 않으려는 노력도 잠시뿐이었다.
똥물이 입과 코와 눈과 귓속으로 몰려왔다. 똥물이 숨구멍
하나하나 속으로 몰려왔다. 똥물이 숨구멍을 파헤치고 살갗을
뚫고 침략자가 되어 전신으로 쳐들어왔다.
시꺼먼 죽음의 사자에게 이끌려 지옥 문턱에 거의 도달했을
때였다.
사내의 비명 소리가 연거푸 일어나는가 싶더니만,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완력이 풀렸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지훈은 거의 필사적으로 머리를 쳐들고
개울물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안간힘을 다하여 눈을 떴다. 검은 그림자들이 얼씬거렸다.
누군가 막대기 같은 걸 휘두르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벌떡 일어나 사력을 다하여 싸우고 싶었다. 당장 죽더라도
싸우고 싶었다. 그러나 온몸이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워서 말을
듣지 않았다.
4. 제4장 幻想殺人劇
박지훈의 회복은 빨랐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발목의 상처도 심한 것이 아니었다. 약간 삐었을 뿐이어서
사고 당일 밤에 즉시 치료한 효과가 컸다. 침술치료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해림이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지훈이 죽을 고비에서 상준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 하더라도 해림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마침내 손을 쓰지 않으면 안될 단계에까지 사건이 심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밤 지훈이 당했던 일을 미루어 보아 범인 일당이
곽사장과 무슨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해림도 곽사장을 조금은 알았다. 그는 진해의 유지였다. 가끔
장교구락부에도 나타나는 사람이었고, 미 고문관 제임스
브라운과도 아는 사이였다.
브라운은 곽사장을 가리켜 지방 정계의 실력자라고 했다.
정계의 실력자가 악당들의 우두머리일 수가 있을까?
적어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려고 발벗고 나선 사람이
암암리에 악당들을 조종하는 자라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정치가는 국민을 두러워할 줄 아는 선량한
면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우리 아버지처럼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고향을 가꿀 꿈이
있는 사람이 정치가가 되어야 하는데....
문득, 뇌리에 아로새겨지는 일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와
곽사장이 정치지망생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데가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아버지도 정치가가 되고 싶어했었는데, 곽사장도 마찬가지
아닌가?
정치를 하려 했던 사람끼리라면 서로 통하는 면이 있지
않았을까?
가족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일 가운데 정치하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무슨 거래나 비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곽사장에게 접근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접근한다면 무슨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내가 무엇이 두려워서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엉거주춤하고
있었을까?
나는 죽음보다 더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여자이다. 아픈
과거를 지닌 여자이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여자나 다름이 없다.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동생 지훈을 지키는 일이라면 나의
생명을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다. 여자가 스스로 지켜야 할 선
같은 건 이미 넘어선 지 오래이다. 무분별하게 자기를 팔면서
살아온 것도 아니건만, 그런 운명을 타고난 여자이다.
내가 왜 살아 있는가?
이따금 자신에게 던져보는 질문에, 부모의 원수를 갚고
남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지훈아, 넌 그 일에서 손을 떼고 공부나 열심히 해. 넌
장래가 구만리 장천 같은 우리집 대들보란 말이야, 알겠어?"
"알았어."
"앞으론 절대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마. 누나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누나 혼자서 어떻게?"
"누나 곁에도 사람이 있어. 염려하지 말고 공부에나 관심을
쏟아 봐. 남자는 평생 공부를 해야 하니까."
"누나는 그런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이야."
"이미 준비를 다 해 놓았어."
"정말?"
"정말이라니까."
"누가 도와줬어?"
"그건 비밀이야."
"알 만해. 누가 도와줬는지."
그날 밤.
브라운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해림은 이틀 전에 지훈이 당한
물고문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정말 동생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어요?"
"예. 그들은 훈이를 죽이려 했어요. 죽여서 바다에 버리려
했어요."
"못된 놈들이군 그래."
"그 집에 아무래도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 같아요."
"정당에 관계된 사람들이겠지요."
"제 예감은 그렇지 않아요. 여자에겐 특별한 느낌이 있어요."
"그렇다면 경찰에 부탁해서 조사해 보도록 하지요?"
"아직은 경찰에 부탁할 단계가 아니예요. 그리고 곽사장은
경찰간부들과도 가까운 사이인가 봐요."
"그렇다면 좀더 두고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곽사장에게 접근해 보겠어요."
"미스 박이?"
"예."
"그건 찬성할 수 없어요."
"위험하단 말씀이신가요?"
"위험할 수도 있고, 접근해 보아야 얻는 게 없을 거요."
"그렇다고 그냥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단 말예요.
오늘 밤 그 사람이 장교구락부에 나타나면 접근해 볼 거예요."
"정말?"
"예. 도와주세요."
"어떻게?"
"오늘은 토요일이라 꼭 나타날 거예요. 그 사람이 나타나면
합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세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만,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요."
"질투하시는 거예요?"
"질투? 하기야 그런 감정도 전혀 없다고 할 순 없지요."
브라운은 솔직했다. 은발의 브라운은 중년신사답게 여유 있는
미소도 잊지 않았다.
샨데리야의 오색 영롱한 빛무리가 두 사람의 얼굴을 계속
스쳐갔다. 둘이 어울려 탱고 한 곡을 추고 났을 때, 곽사장이
장교구락부에 나타났다. 그들 일행은 셋이었다.
브라운은 해림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장미빛 어둠을 헤치고
곽사장 일행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이었지만, 곽사장은 금방 브라운을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림은 얼른 곽사장에게 목례하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녀는 겉도는 기름방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말없이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브라운은 은근히 합석할
것을 제안했다.
"우리 오랜만에 좋은 곳에서 만났으니 함께 한 잔 하실까요?"
"정말 그렇게 하시겠읍니까?"
"예."
그러나 끝내 합석할 수는 없었다. 곽사장 쪽의 낯선 일행 두
사람 때문이었다.
브라운과 곽사장이 대화를 하는 동안, 해림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낯선 두 사내를 눈여겨 봤다.
30대의 건장한 두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행여나
싶었는데, 점박이 사내는 없었다.
선입견 때문일까. 두 사내 모두 인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음흉한 그늘이 깔려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래도 해림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정면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위한 일종의 수법이었다. 두 사내도 덩달아 미소를 띄우며
그녀의 아주 깊은 속에까지 들어가보고 싶어하는 그런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좀 불러 주십시오, 사장님."
"저두요."
"미스 박까지.... 어쨌든 그 말씀 잊지 않고 기억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브라운 씨는 정말 행운아십니다."
"제가요?"
"예. 미스 박과 같은 미인과 동행이시니까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밤이 되시기 바랍니다."
"브라운 씨두요."
곽사장과 헤어져 그들의 테이블로 돌아오자마자, 해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남자를 보셨지요?"
"응."
"전에 보신 적이 있는 사람인가요?"
"글쎄. 처음 본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 왜요?"
"왜 우리한테 인사도 시키지 않고 동석도 마다했을까요?"
"낯선 두 남자가 동석을 꺼리는 기색이더군요."
"선생님도 그렇게 보셨어요?"
"응."
"인상은 어땠어요?"
"글쎄."
"제가 보기엔 인상이 별로 좋지 않더군요."
"그래서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어요."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닐까요?"
"아뭏든 그런 생각이 두 사람을 보는 순간에 일어났어요.
그들이 누군가 알 수 없을까요?"
"암암리에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요."
"어쩌면 훈이한테 물을 먹인 놈들인지도 몰라요."
"증거가 없잖아요."
"하긴 그래요."
"점박이 남자는 아니었지요?"
"예. 이틀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두더쥐처럼 숨어서 몸을
사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아무래도 재미가 없는데...."
"재미가 없다뇨?"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든단 말이오."
"좀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방정맞은 생각만 들 뿐, 뭐가뭔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 무슨
말을 하겠어요."
"오늘 밤따라 이곳 공기가 탁한 것 같군요. 벚꽃 구경
가시겠어요?"
"아까 낮에 통제부에서 나올 때 꽃이 아름답게 피었더군요."
"아마 앞으로 이삼일 동안이 절정일 거예요. 밖으로 나가요,
우리."
"그럽시다."
장교구락부에서 벚꽃장까지는 걸어서 십여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환상의 꽃무리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뭉실뭉실 솜사탕처럼 우아한 감동으로 밤벚꽃이 가슴에
다가왔다. 시야를 온통 어지럽히는 환상적인 밤벚꽃이 해림의
가슴에 한 줄기 비감을 몰고 왔다.
청사초롱에 오색 등불이 꽃무늬 되어 흐르는 환상의 벚꽃 터널
속을 거닐고 있건만, 해림의 가슴에는 지울 수 없는 비감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어두운 기억의 슬픈 언덕으로 줄달음질쳤다. 4년 전
벚꽃놀이를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가슴에 사무쳤다.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오늘 밤벚꽃놀이에 나왔더라면 그
얼마나 좋을까.
해림의 가슴속에 물결이 되어 일고 있는 비감을 부채질하듯 등
뒤에서 누군가 잡가를 불러 댔다.
양갈보 똥갈보 어데로 가느냐
삐닥구두 신고서 어데로 가느냐
아랫동네 칠구서 코쟁이 만나서
벚꽃장을 돌아서 x하러 가느냐.
무정한 노래였다. 인정사정 없는 노래였다. 산토끼 곡조에
짝짝 맞추어서 제딴에는 신나게 불러 대는 잡가였으나, 해림
같은 여자에게는 가슴을 멍들게 하는 노래였다.
그녀는 뒤를 돌아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은발의 브라운도
잡가 나부랑이를 못 들은 척하고 천천히 앞만 보고 걸었다.
한 줄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우수수 눈송이처럼 꽃잎이
흩날렸다. 그게 바로 꽃의 운명 같아 보였다.
"죄송해요. 오늘 밤은 혼자 지내고 싶어요."
"그 노래 때문에 기분이 상했군요."
"아니예요. 그 따위 노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요.
실은 좀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
"아뭏든 죄송해요. 안녕히 가세요."
해림은 대문 앞에서 브라운을 돌려보냈다. 작별의 키스도 없이
악수만으로 쓸쓸히 돌려보냈다.
어쩔 수 없어요. 내게는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이예요.
바람따라 피었다가 바람 따라 지는 운명의 작은 꽃, 환상의 꽃이
훨훨 다 지기 전에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예요.
두 눈을 감았을 때, 두 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밤.
천길 물속같이 깊은 밤에 해림은 마침내 일을 벌였다.
요행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경찰을 믿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실행해야만 했다.
누가 우리 남매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단 말인가?
신들린 여자처럼 달려갔다. 환상의 검은 날개를 퍼득이듯 검은
드레스를 펄럭이며 달려갔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그래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그녀는 계획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힘에 이끌려 그림자처럼 읍내를
돌았다.
죽음의 사자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어둠과 어둠의 비늘
사이를 교묘하게 헤집고 돌아다니며 각본대로 용케 작업을
마무리했다.
위험한 순간이 적잖았지만,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그녀를
도왔다. 위험한 고비가 몇 번 있었지만,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존슨은 미군 전용 댄스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술잔만 비우고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함께 술을 마셨다. 춤을 출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벚꽃장을 한 바퀴 돌아 국립양어장 쪽으로 올라갔다. 무성한
삼나무 숲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집으로 돌아왔는지 몰랐다. 대문을 통해 들어왔는지
담장을 넘어 들어왔는지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물안개 속 같았다. 얼마나 허위적거렸는지 몰랐다.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순간들은 그랬었다.
몰래 숨어 들어와 얼마나 잤는지도 몰랐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목이 답답했다. 온몸이 끈적거렸다.
흥건하게 배인 땀 때문에 나이트 가운을 그대로 걸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꽃뱀이 허물을 벗듯 가운을 벗어 던졌다.
알몸으로 욕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알몸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왔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살갗은 어떤 열기로
복숭아꽃처럼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샤워 바드 꼭지를 틀었다. 신비롭게 솟아오른 탄력 있는
유방에 차가운 물줄기가 촘촘히 떨어져 내렸다.
가슴이 시려오는 신선함을 느꼈다. 아까보다 훨씬 의식이
선명해 왔다.
마침내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후련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후회가 묘하게 엇갈렸다.
정말 어떻게 된 걸까?
해림은 샤워를 마친 후, 나락처럼 깊은 잠속으로 떨어졌다.
역시 그날 밤.
점박이 사내는 거나하게 취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때늦은
귀가였다.
"진해로 이사온 지 며칠 되었어요?"
"삼일 됐지.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아나."
"날 유혹해서 이런 시골 바닥에다 데려다 놓고 이렇게
대접하기예요?"
"시골 바닥이라니? 시내 한번 나가 봐. 다방엔 손님들이
득실거리고 벚꽃장은 흥청망청이야."
"호강시켜 주겠다고 해 놓고 벚꽃장 구경 한번 안 시켜
주었잖아요?"
"미안해. 오늘은 특별한 사람을 만나느라고 시간이 없었어.
내일이나 모레쯤이 제일 꽃이 볼 만할 거라니까 그때 구경시켜
주지."
"일은 잘돼 가나요?"
"그럼.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오늘밤 신나게 한 잔 하자구.
미옥이는 강짜를 부릴 때가 더 매력적이란 말이야. 한 잔 어때?"
"그러잖아도 일이 잘돼 가면 한 잔 올리려고 안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단 말예요."
"정말?"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했어요?"
"그런데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어?"
"기다리다 지쳐서 깜박 졸았던 거예요. 술상 봐 올까요?"
"음, 그래. 우리 오늘밤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고 그 좋은 게임
한번 하자구. 난 많이 취했을 때 그게 더 잘 되더라."
"아이, 몰라요. 벌써 그것 생각부터 먼저 하시다니."
접대부 출신의 미옥은 눈을 흘기며 요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은 양주로 시작해서 양주로 끝을 내야겠어."
"양주는 귀한 손님이 오실 때 마신다고 하셨잖아요?"
"미옥이 당신한테 이 천영만이보다 더 귀한 손님이 어딨어? 안
그래?"
"하긴 그래요."
"우린 이상한 버릇이 있지? 많이 마시면 많이 마실수록 그
좋은 게임이 훨씬 길어지고 맛이 더 나는 버릇 말이야."
"아이, 몰라요."
어쩌고 저쩌고 농익은 수작을 떨면서도 본색이 있는지라
미옥은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주안상을 얼른 차려내었다.
"이건 보통 사람들이 구경하기도 어려운 고급 위스키인데,
이거 한 병만 마시고 나면 벌거벗고 멋진 게임을 실컷 할 수
있을 거야."
"독한가요?"
"그럼 명색이 고급 위스키인데!"
우아한 네모꼴 모양의 위스키 병 마개를 따고 두 잔에 가득
위스키를 따랐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당신의 성공을 위해서."
두 사람은 유리잔을 맞들어 살짝 부딪친 후, 단숨에 잔을
비웠다.
음탕한 수작을 떨면서 몇 잔이나 주고받았을까.
"술 맛이 원래 이런가요? 이상한 것 같아요."
미옥이 곱상하게 피어나는 꽃 같은 얼굴로 미심쩍어했다.
그러나 천영만은 막무가내였다.
"뭐가 이상해? 아직 양주 맛을 모르는군. 위스키란 원래 독한
술이라고 했잖아."
"정말 그런가 봐요."
"가슴이 타오르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아요."
"그럼 가슴을 풀어헤치고 마시면 될 거 아니야."
"가슴을요?"
"나밖에 없는데 어때? 당신 가슴은 일품이잖아."
"수, 술이 너무 독한가 봐요."
"그럼 풀어헤쳐."
"정말 그래야겠어요."
미옥은 빙하처럼 차갑고 화산처럼 타오르는 가슴을
풀어헤쳤다. 그 빙하와 그 화산 어디쯤에선가 면도칼처럼 예리한
보이지 않는 독사가 가슴 한 부분을 도려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정말 미옥이 당신은 멋진 여자야. 천영만이한테는 아까울
정도로 화려한 여자야."
"다, 당신, 언젠가 나보다 더 화려한 여자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 여자가 누구예요?"
"노, 농담으로 그랬지."
"저, 정말 농담이었어요?"
"응."
"차, 찬물을 뒤집어 쓰고 싶어요."
"그럼 다 벗어."
"저, 정말?"
"아아, 정말 술 맛 나네 그려. 류미옥의 나체를 감상해 가며
최고급 위스키를 마시는 맛은 이 세상 아무도 못 본 맛일 거야."
그러나 천영만의 혀는 많이 꼬부라져 있었다. 말이 겨우겨우
지탱될 정도였다.
그래도 마셨다. 전작이 많은 데다가 술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미옥은 찬물을 뒤집어쓰려는 듯 벗어제쳤고, 영만은 사내답게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이, 인생이란 이런 것인 줄을 그 누가 또 알랴!"
"그, 그래, 그래. 아, 아무도 안 보니까 벌거벗고 나갔다 와.
버, 벌거벗었을 때가 제일 아름다울 때니까."
잠시 후, 미옥은 진달래처럼 붉게 피어오른 알몸으로 슬슬
기다시피 하여 부엌으로 나갔다.
"무, 무, 물...."
짐승처럼 그녀는 네 발로 기어나간 채 돌아올 줄을 몰랐다.
"미, 미옥이.... 왜, 왜 이렇게 머, 머리가 아프고 멍하지?
오, 오늘 밤은 멋진 게임을 벌여야 할 텐데.... 그, 그날
밤처럼.... 으으으...."
천영만은 흉터자국이 있는 이마 위에다 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검은 머리칼을 기다랗게 풀어헤친 하얀 상복의
여인이 싸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검고 긴 머리카락에 가리워
얼굴을 분간할 수 없는 여인이 핏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다가왔다.
두 눈알에서도 피! 두 귀에서도 검붉은 피! 콧구멍에서도 피!
입에서도 피! 불룩한 앞가슴에서도 피! 열 개의 손톱 끝에서도
피! 피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다가왔다.
정체모를 흡혈귀였다. 원한에 사무친 여귀신이었다.
몰아내고 싶었다. 박살을 내고 싶었다. 꺼꾸러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얼어붙어
있었다. 한 발자국도 떼놓을 수가 없었다.
소리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금방 질식할 것 같았다. 목구멍이
컥컥 막혔다.
마침내 검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다가온 날카로운 열 개의
손톱이 천영만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두 손을 뻗어 반항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뭔가를 붙잡고
늘어졌으나 두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그, 그날 밤 그, 그 여잔가?"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썩은 나무토막처럼
볼품없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천영만은 이튿날 오전 8시 경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류미옥은 알몸인 채 물이 흥건한 부엌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나
목숨만은 붙어 있었다.
처음 시체를 발견한 주인집 할머니도 아는 게 없었다.
천영만이 술상 옆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는 것밖에.
진해경찰서에서 달려온 형사들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감도 잡지
못한 채 돌아서야만 했다. 그들은 의식불명인 채 병원으로
옮겨진 류미옥에게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나 한 사람 윤태호 형사만은 예외였다. 작은 키에다
머리는 짱구에 코뼈까지 약간 찌그러진 볼품없는 모양의 그
형사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형사들이 밀어닥쳐 한바탕
북새통을 떨고 난 뒤인지라 집안에는 이상한 고요마저 감돌고
있었다.
점박이 그 사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4년 전 그
강도살인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에게 미행을 당하고 있던 자였어.
윤형사는 지훈이와 해림 남매가 진해에 나타난 이후, 심상찮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한 발 늦고 말았구나. 진작 손을 썼어야만 하는
건데.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일은 벌어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두 남매는 참혹하게 살해당한 부모들의 일을 잠시도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야.
6.25라는 참담한 민족적 비극 때문에 그 사건이 전쟁의 잿더미
속에 소리 없이 묻혀 버린 것 같지만, 두 남매에게만은 결단코
쉽사리 묻어 버릴 사건이 될 수 없을 것 아닌가.
그런 까닭에 윤형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두 남매를 몰래
지켜보아 왔던 터였다.
만약 내 예감이 적중했다면 이번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니겠는데....
마당 한가운데를 왔다갔다하던 윤형사는 마루로 올라가는 섬돌
위에 흰 종이 부스러기 같은 게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그 종이 부스러기 같은 것을 주워들었다. 그것은 벚꽃
이파리였다. 누군가의 발에 여러 차례 짓밟힌 것이었으나 그것은
분명히 벚꽃 이파리였다.
윤형사는 짓밟혀서 종이 부스러기처럼 되어 버린 벚꽃
이파리가 무슨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손수건에 싸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 여러 개의 꽃 이파리가 하나의 환영(幻影)이 되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솜사탕 같은 꽃무리를 떠오르게 했다.
점박이 사내는 자살한 게 아니야. 꽃잎을 수없이 섬돌 위에
뿌려놓을 만큼 감상적인 사내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윤형사는 우연히 점박이 그 사내를 미행한 적이 있었다.
점박이는 잔인한 편이었다. 구두를 닦다 말고 구두닦이 소년의
엉덩이를 걷어찬 적이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한 가지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
병원으로 실려간 그 여자가 나체로 부엌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는 것 역시 동반자살을 시도한 것 같지 않았다.
윤형사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장롱과 책상 서랍과 경대
서랍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점박이 사내가 여자와 찍은 사진이 있었다. 단둘이 찍은 게
아니었다. 점박이 사내가 세 사람의 여자와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아무래도 세 여자 모두 여염집 여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풍기는 게 달라 보였다.
책상 서랍에는 이상한 번호가 적힌 낡은 수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번호 끝에는 알파벳 대문자가 적혀 있었다.
131217---H
424146---G
343235---k
21232524---M
무슨 암호문 같기도 하고, 수감중인 죄수의 번호 같기도 했다.
알파벳 부호는 어떤 사람 이름의 약자이거나 성(姓)같아
보였다.
소중한 수사자료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숫자의
비밀을 풀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렁거렸다. 숫자의 비밀만 푼다면
뭔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아뭏든 보통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해 온 사람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윤형사는 사진과 수첩을 챙겨들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날 오후.
천영만의 사망원인이 밝혀졌다. 사망자의 위액을 검출한 결과
사인(死因)은 메틸 알콜 중독사로 드러났다. 검시의는
사망시간을 당일 새벽 3시 전후로 잡고 있었다.
반면에, 병원에 입원한 류미옥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의식불명인 채였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읍니까?"
"호흡이 차츰 또렷해지는 것을 봐서는 생명은 건질 것
같습니다만,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는지 아직 모르겠읍니다."
"왜 그렇습니까? 후유증이 나타나기 때문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메틸 알콜 중독자에게는 여러 가지 후유증이
일어나는 게 통례입니다."
"그럼 의식은 회복하기 어렵겠단 말씀이십니까?"
"이따금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의식은 회복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의식은 언제쯤 회복될 수 있겠읍니까?"
"글쎄요. 사람에 따라서 다르니까요. 이 여인은 메틸 알콜을
남자 쪽보다 적게 마신 데다 부엌에 가서 물을 많이 마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목숨은 건졌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다른 일 때문에 먼저
실례하겠읍니다."
검시를 담당했던 노의사는 귀찮다는 듯이 형사들을 따돌리고
원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날 오후까지만 하여도 진해경찰서 안에 별도의 수사본부는
설치되지 않았다. 타살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었거니와
천영만과 함께 술을 마셨던 미옥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의식을 회복하기까지 기다리게 된 셈이었다.
그러잖아도 꽃철을 만난 진해에는 치안유지를 위해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벌떼 같은 구경꾼들 속에 섞여 있는
소매치기들을 잡아들이는 일만 하여도 여느 때보다 몇 갑절은 더
뛰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11시 30분 경.
놀라운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안방에 잠들어 있던 두 남녀가
난데없이 터진 폭발물 사고로 폭사(瀑死)당했던 것이다.
폭음이 얼마나 요란스러웠던지 제법 동떨어져 있는 이웃이
거의 모두 잠을 깨었을 정도였다.
경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방 벌집을 쑤셔놓은 듯
비상근무에 돌입했다.
폭발물 사고가 일어난 집은 인사동의 외딴집이었는데, 천정과
지붕의 일부분까지 무너진 통에 그날 밤에는 제대로 현장에
접근조차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동틀 무렵부터 수사는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폭발물 폭파사건인지라 군 수사기관에서도 수사요원들이
파견되어 흩어진 파편을 수집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해가 떠오르고 날이 밝아질수록 피비린내는 코를 찔렀다.
경찰과 군 수사당국에 의해 세밀한 현장검증이 실시되었다.
작업요원들이 마스크를 하고 무너진 지붕의 기왓장과 온돌
조각을 삽으로 옮겨놓을 때마다 검붉은 피가 묻어 나오는 것을
보고 구경꾼들은 전쟁이 끝난 줄 알았는데 무슨 날벼락이냐고
혀를 끌끌 찼다.
다행히 벽은 무너지지 않아 작업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야말로 천갈래 만갈래 찢어진 두 구의 시체를
발굴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어디쯤에서 어떻게 폭발물이 폭파했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두 남녀가 폭사당했다는 사실을 진작 알게 된 것은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할아버지의 증언을 통해서였다.
시체발굴 결과 역시 두 사람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제대로 형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찢어진 시체이긴
했지만.
윤형사도 그 시체발굴 현장에 있었다. 비록 작업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그리고 동틀 무렵.
윤형사는 방 두칸 짜리 작은 주택의 현관 앞에서 사람의 발에
짓밟힌 벚꽃 이파리를 발견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천영만의 집에서와 같이 눈에 띄는
곳에 벚꽃 이파리를 뿌려놓았던 것이다.
가슴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뭔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윤형사는 슬그머니 꽃
이파리 몇 개를 주워들고 돌아섰다.
4월 12일 월요일.
진해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전담반이 편성되었다.
수사본부장은 경찰서장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 총책은
수사과장 하만태(河萬泰)로 내정되었다.
윤형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 수사과장에게 찾아가서
전담반에 넣어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명하던 하과장도 사건현장에서 입수한 벚꽃
이파리를 내놓고 자청해 오는 윤형사를 제외시킬 수는 없었다.
"음, 그래. 그렇다면 넣어주지. 한번 멋지게 잘 풀어 봐."
"감사합니다, 과장님."
하과장은 묘한 미소를 띄고 물러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평소 윤형사는 하과장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지내온 터였다.
그래서 중대한 사건수사에는 제외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담반 형사들은 먼저 두 사건의 피해자의 신상파악부터 해
나갔다.
1. 천영만(千英萬)
생년월일: 1918년 5월 7일생
본적: 서울시 영등포구 흑석동 386
주소: 부산시 중구 광복동 725
직업: 상업
피해사항: 사망(메틸 알콜 중독사)
2. 류미옥(柳美玉)
생년월일: 1923년 9월 18일생
본적: 충북 영동군 영동면 대사리 145번지
주소: 부산시 중구 남포동 136번지
직업: 없음(전직은 접대부)
피해사항: 메틸 알콜 중독(의식불명)
3. 조복주(曺福柱)
생년월일: 1916년 2월 5일생
본적: 강원도 원성군 화성면 화곡리 275번지
주소: 경남 진해읍 인사동 646번지
직업: 상업
피해사항: 사망(폭발물에 의한 폭사)
4. 신원 미상의 여인
피해사항: 사망(폭사)
목격자 진술: 약 30세 가량의 미모의 여성으로서 서울 말씨
사용했음.
천영만과 류미옥은 도민증에 의해서 신원이 밝혀졌고,
조복주는 얼마 전에 매입한 부동산(주택)의 등기서류와
동사무소에 기재된 인적사항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복주와 동거중이었던 여인의 신원은 쉽사리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검붉은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잿더미 속에서
행여나 도민증 조각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싶어 몇 차례
뒤졌으나 허사였다.
전담반 형사들은 우선 밝혀진 세 사람의 피해자 신상을 놓고
분류부터 서둘렀다.
첫째, 피해자들 모두 외지 사람으로서 진해로 이사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째, 두 남자 피해자는 다같이 결혼을 하지 않고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세째, 목격자의 진술과 입원해 있는 류미옥의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이 두 여자 모두 평범한 가정주부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네째, 두 남자의 직업이 다같이 상업이었으나 확실하게 어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섯째, 두 사건이 신문지상에까지 게재되었으나 피해자
모두에게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섯째, 각기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방법에
의해 일어난 두 사건현장에 다같이 벚꽃 이파리가 여러 개
떨어져 있었다는 이상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을 찾아 분류해 본 결과 두 사건에는
일맥상통하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윤형사의 주장대로 애당초 두 사건은 따로 떼어놓고 수사를
전개해야 할 별개의 사건이 아닌 것 같았다. 비록 피해사항은
전혀 달랐지만.
어쨌든 수사본부의 전담반원들은 수사방향을 설정하고 사건에
접근해 나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전담반
형사들은 두 사건의 범행동기를 다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1. 원한관계의 목적 살인
2. 치정관계의 목적 살인
3. 배임관계의 목적 살인
4. 이권관계의 목적 살인
5. 침묵을 위한 목적 살인
6. 용공분자들의 목적 살인
첫째번은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만약 두 남자가 참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추악한 범법행위를 저질렀다면 그
피해자의 가족이나 연고자에게 보복을 당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둘째번 역시 원한관계 못잖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사내들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미모의 여자들과
동거하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치정관계의 살인극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세째번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전쟁의 북새통 속에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배임행위를 했던 배신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째번 역시 가능성이 있었다. 직업이 모두 상업이었다고
밝혀진 이상 어떤 사업상의 이권이 개입된 청부살인일 수도
있었다.
다섯째번도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었다. 두 사내의 입을
영원히 봉해 버림으로써 횡재를 할 수 있는 인간이 세상
어디엔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섯째번은 가능성이 없을 것 같으면서도 가능성이 농후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용공분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제거하는 집단으로 변모해 있었기
때문에 만약 두 사내가 그들 조직에 참여했다가 이탈한 자라면
얼마든지 참혹한 보복을 당할 가능성은 있었다.
전담반 형사들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이상과 같이 여러 갈래로
수사방향을 설정했다. 여컨대 큼직한 수사망을 재빨리 짠
셈이었다.
그리고 민첩하게 사건에 접근하려 했다. 그러나 막상 수사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겨우 메틸 알콜과 폭발물(박격포탄과 수류탄)의 입수가능
경로를 알아내는 데만 그쳤을 따름이었다.
1. 메틸 알콜은 소독용 내지는 연료용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군부대의 병원과 의무실에서 쉽게 입수할 수 있다.
2.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케이 텐이나 그 밖에 특수부대에서도
메틸 알콜이 유출될 수 있다.
3. 폭발물은 진해중학교 교정에 주둔했던 미군부대가
이동하면서 교실 밑에다 버리고 간 물량이 많아 어렵지 않게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그 밖에 도불산 박격포 사격장이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군부대의 사격장에서도 폭발물이 유출될 수 있다.
하지만, 사건에 실체 사용되었던 메틸 알콜이나 폭발물의
출처를 정확히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막연하게나마 입수 내지
유출 가능지역을 점찍어 본 것에 불과했다.
네 사람의 사상자를 낸 두 사건 때문에 전담반이 편성되었으나
전담반은 용의자 한 사람 지목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사는
자연히 답보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류미옥인가 하는 그 여자가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어."
"그 여자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고 시치밀 딱 떼면 어떡하지?
보복이 두려워서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단 말이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아. 그 여자마저 벙어리가 되면 우린
모두 발이 꽉 묶여 버린단 말이야."
"그땐 과장님한테 구박깨나 당하게 될걸."
"누가 아니래. 윤형사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더 있었으면
나는 쑥 빠지는 건데 말이야."
전담반 형사들은 병원 복도의 긴 나무의자에 앉아 구세주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류미옥이 의식을 회복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윤형사 이 친구는 어디 갔을까?"
"글쎄 말이야. 쪼그만한 친구가 세월 만난 듯이 혼자 잘
돌아다니는군 그래."
"그 친구, 뭔가 감을 잡은 게 아닐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같더란 말이야."
"감은 무슨 놈의 감? 곶감이라면 몰라도 윤형사라고 무슨 놈의
용뺄 수가 있겠어."
"군 수사요원들을 찾아갔을는지도 몰라."
"그 친구들은 왜 만나러 갔을까?"
"폭발물을 어떻게 설치했는지 알고 싶어서 갔겠지, 뭐."
"그거야 다 밝혀졌잖아. 폭발물을 아궁이 깊숙이 밀어넣고,
구멍이 뚫린 파이프 같은 것으로 화약을 줄줄이 뿌려서 도화선을
만들었다는 소리 못들었어?"
"들었어."
"실제 부엌 입구에서부터 탄약이 타들어간 흔적도
발견되었잖아. 근데 그 이상 무얼 더 알고 싶어서 찾아갔을까?"
"윤형사는 다른 데 갔을 거야. 우리가 모르는 곳에 말이야."
"그럼 윤형사 뒤라도 밟아봐야겠군 그래."
"자존심은 어떡하고?"
"글쎄 말이야."
이렇게 형사들이 한담을 주고받고 있을 때, 하얀 제복의
간호원이 다가왔다.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나 봐요. 원장님이 한 분만 오시래요."
세 명의 형사 중에 반장인 고참 형사 권달준(權達準)이
간호원을 따라나섰다.
원장과 젊은 의사 한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돌보고
있다가 권형사가 병실에 들어서자 고개를 들었다.
"수고하십니다."
"기다리신 보람이 있는 것 같군요. 의식만 회복되었을 뿐이지,
아직 중환자이니까 꼭 필요한 질문만 간단히 해주세요."
"예. 알겠읍니다, 원장님."
원장과 젊은 의사가 병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권형사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다가가서 앉았다.
"류미옥 씨,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두 눈을 감은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여인은 대답 대신
머리를 조금 끄덕거렸다.
"그날 밤 무슨 술을 마셨읍니까?"
"위, 위스키요."
류미옥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는 귀뚜라미 소리 같았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분이 사들고 온 술이었읍니까?"
"찬장에 있던 술이예요."
"그 술은 언제 어디서 샀읍니까? 아니면 누구에게 선물로 받은
술입니까?"
류여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시쯤부터 마셨읍니까?"
"열한 시쯤 되었을 거예요."
"그분의 직업은 무엇이었읍니까?"
"군납업자와 동업을 한다고 했어요."
"실례지만, 그분과 동거하시기 전에 아주머니는 무슨 일을
하셨읍니까?"
"......"
"사건해결을 위해서 솔직이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범인을 빨리 잡을 수 있읍니다."
"수, 술집에 나갔어요."
"부산에 있는 술집이었읍니까?"
"예."
"어느 술집이었읍니까?"
"남포동의 <고향집>이었어요."
"남편되신 분의 일가친척이나 연고자 중에 아는 분이
없으십니까?"
"그분은 고향이 이북 원산이라 혈혈단신이예요."
"본적이 서울이던데요?"
"원적은 이북이예요."
"조복주 씨하고 남편은 친구지간이신가요?"
"예. 그런가 봐요."
"조씨 부인은 아주머니의 친구 분이시지요?"
"예."
"이름이 뭔가요?"
"그, 그애도 다, 당했나요?"
"그렇습니다. 이름이 뭡니까?"
"오, 옥련이예요."
"성은요?"
"송씨예요."
"송옥련 씨는 부산 어디에서 일했읍니까? 혹시 같이
일했읍니까?"
"남항동의 <항구집>에 있었어요."
"옥련씨 남편도 군납업자였읍니까?"
"모, 모르겠어요."
"진해에는 어떻게 이사오시게 되었읍니까? 직장이나 직업이
있어야 할 거 아니겠읍니까?"
"군납업에 손을 댈 생각이었던가 봐요."
"좀더 자세히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그 밖엔 몰라요."
"혹시 그분이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은 없었읍니까?
금전관계라든가, 남녀 이성관계라든가 말입니다."
"어, 없었어요."
"그럼 류미옥 씨 본인에게는요?"
"제게도 없어요."
"아주머니쪽 일가친척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6.25 난리통에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어요."
"진해에 달리 아는 분은 한 사람도 없으십니까?"
"예. 없어요."
"남편되신 분이 돌아가신 줄은 알고 계십니까?"
"모, 몰랐어요."
"뭔가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세요."
"어, 없어요. 무, 물 좀 주세요."
바로 그때, 젊은 의사와 간호원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 끝나셨읍니까?"
"몇 가지 더 묻고 싶은데요."
"환자에게 무리인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물어 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의사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권형사는 소형 녹음기의 스톱 버튼을 누르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병원 내에서는 의사의 지시를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권형사는 뒤따라 복도로 나온 젊은 의사에게 한 가지 물었다.
"눈을 전혀 뜨지 못하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아마, 회복이 되어도 실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메틸알콜 복용자의 후유증 중에 가장 무서운 후유증이 바로
실명입니다."
"소경이 된다 그 말씀이십니까?"
"예. 그리고 뇌의 기능도 온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정말 안됐군요."
전담반 형사들은 젊은 의사와 간호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점심부터 먼저 해야잖아?"
"그래야죠."
"기왕이면 벚꽃장 별미집에 가서 먹고 들어가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전담반 형사들은 벚꽃장 입구의
별미집으로 몰려갔다.
별미인 돼지 족발을 주문했다. 족은 앞발이고, 발은 또
뒷발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군침을 삼켜가며 족발을 물어뜯고
있는데, 방정맞게 호출기 신호음이 "삐삐" 울렸다.
"권형삽니다."
"뭣들 하는 거야. 빨리 병원으로 달려가 봐!"
하 수사과장의 불호령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방금 병원에서 나왔잖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잔소리 말고 빨리 뛰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병원에서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군침을 삼키며 물어뜯던 족발도 팽개쳐야만
했다. 모처럼 별미를 즐기는가 했더니만, 차려놓은 상도 박차고
일어나야만 했다.
평안병원까지 7,8백 미터나 되는 거리를 허둥지둥 달려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여느 때 같지 않았다.
간호원들의 얼굴에도 한결같이 긴장감과 불안이 감돌고 있었다.
류미옥이 입원해 있는 201호 병실로 권형사가 앞장서서
들어갔다. 뒤따라 두 형사도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원장과 젊은 의사와 간호원이 의견을 교환하다 말고 전담반
형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원장님,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환자가 죽었읍니다."
"죽다니요? 조금 전에 의식을 회복한 후, 저하고 대화까지
하지 않았읍니까?"
"약 30분 전에 경부압박 질식사한 것 같습니다."
"질식사라니요? 그럼 누가 환자의 목을 졸랐단 말입니까?"
"여자용 스타킹으로 목을 조른 것 같습니다. 환자의 머리맡에
스타킹이 떨어져 있었읍니다. 저기 있지 않습니까. 아무도
손대지 않았읍니다."
원장은 류미옥의 후두부 근처에 떨어져 있는 갈색 스타킹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병원에서 나간 후 이삼십 분 사이에 누군가
병실에 잠입하여 범행을 저지른 셈이군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혹시 그 시간에 낯선 사람이 출입하는 것을 목격한 병원
직원은 없었읍니까?"
"글쎄요. 아직은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좋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보도록 하겠읍니다."
"때가 점심시간이라 외부 사람들의 출입이 있어도 그냥
무관심하게 넘기기 쉬웠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병원 내부를 조금 살펴보겠읍니다."
"좋도록 하세요."
전담반 형사들은 이미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그러나 그냥 돌아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원 내부를 수색해 보고, 사건발생 전후시간에 병원
출입자들을 체크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이렇다할 수확이 없었다.
범인이 남긴 흔적이라고는 여자용 갈색 스타킹 하나뿐이었다.
그 밖에는 지문 하난 남기지 않고 범인은 투명인간처럼
접근했다가 투명인간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전담반 형사들은 참담한 꼴로 수사과장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리라고 믿었던 유일한 생존자를 졸지에 범인의 손에 넘겨준
그들로서는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게 돼 버렸다.
사건은 이미 가시덤불처럼 뒤엉켜들고 있었다. 류미옥이
병실에서 질식사함으로써 이 사건의 용의선상에 올려놓아야 할
대상이 갑자기 더 불어나 있었다. 범인은 처음부터 그 점을
노렸는지도 몰랐다.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형사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수사과장의 뱀같이 날카로운
시선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형사들의 이마에 차례차례 다가와
꽂혔다.
"돌대가리들 같으니라고!"
역시 하 수사과장은 형사들의 머리통을 주시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한 사람은 어디 갔어?"
"유, 윤형사 말입니까?"
"그래, 반장이 모르면 누가 알아?"
역시 돌대가리여서일까? 마땅한 구실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수사과장은 화풀이를 엉뚱한 데서 찾으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명색이 전담반인데, 한번 일을 맡겼으면 소신껏
일하도록 격려는 못해 줄망정 지나치다 싶었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평소 족집게로 자칭하는
하과장도 돌파구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책상을 쾅 쳤다. 어떻게 하든 돌파구를 열어보겠다는
일종의 의지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책상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형사들은 그 공격적인 소리에 움찔했다.
"멍청한 것들! 놀라긴 왜 놀라? 벚꽃장 구경이나 하고 돼지
족발이나 뜯으라고 전담반을 편성한 줄 알아?"
"죄송합니다."
"그러잖아도 수사요원이 부족한 판국에 전담반까지 편성해
주었는데, 서장님 얼굴을 어떻게 대할 거야."
"정신 차리겠읍니다."
"신문기자들이 뭐라고 비웃겠어?"
"면목이 없읍니다."
"거기들 앉아."
비로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수사회의가 열렸다.
용의자 한 사람도 찾지 못한 판국에 보고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까닭에, 권형사가 녹음해 온 류미옥의 진술을 듣는 게
고작이었다.
녹음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류미옥의 대답을 한참 듣고 있을
때, 윤형사가 수사과장실에 나타났다.
권형사는 녹음기의 스톱 버튼을 눌렀다. 수사과장이 눈짓으로
지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윤형사는 엉거주춤 앉으려다가 그
자리에 섰다. 그러잖아도 볼품없는 체구가 더 왜소해 보였다.
"도대체 어딜 쏘다니는 거야?"
독이 오른 시선이었다. 수사과장의 그 시선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확증은 없지만, 용의자로 심증을 굳힐 만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윤형사는 보고를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오기 같은 게
뭉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다.
"호, 혹시나 하고 현장에 다녀왔읍니다."
"현장이라니?"
"메틸 알콜 파티가 벌어졌던 곳과 폭발사건이 일어났던 곳
말입니다."
"파티 좋아하네. 오늘의 현장은 평안병원 201호실이었단
말이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류미옥 씨가 당했다는 말을 방금 들었읍니다."
"전담 형사가 넷이나 있으면서 환자 한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다니, 그 책임을 누가 지겠어? 윤형사가 질 수 있겠어?"
할 말이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좀 마음에 들게 굴어."
"명심하겠읍니다."
"혹시 용의자라도 발견했나?"
"못했읍니다."
"앉아."
"예."
다시 녹음기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수사회의가 계속되었으나
전담반원들의 두뇌는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출구가 없었다. 사방이 시꺼먼 벽으로 막혀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류미옥을 그림자조차 없는 범인에게 졸지에 넘겨준 게 결정적인
실수인 것 같았다.
그녀는 의식불명인 채 이틀 동안 입원해 있었다. 그 동안은
아무 사고가 없었다. 특별히 전담반원들이 그녀를 지킨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안전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철저하게 교대근무를 해 가며 그녀를 지키지는 않았다.
검은손이 대담하게 병실에까지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병실에서 이틀을 무사히 넘겼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그런데 검은손이 다가왔다. 의식을 회복하고 입을 열게 되었을
때, 난데없이 검은손이 불쑥 나타났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때를 정확하게 맞추어 그녀의 입을
봉해 버리기 위하여 소리 없이 검은손이 나타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범행은 있었는데 용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범행은 있었는데
흔적이라고는 갈색 스타킹 한 짝뿐이었다.
흡사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처치해 버릴 수
있었을까?
불가사의했다. 의심스런 인물이 그 시각에 병원에 출입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수사결과 나타났다.
그렇다면 병원 내부에 범인이 있단 말인가?
평안병원은 큰 규모의 병원이 아니었다. 병실 서른 개에
의사가 셋, 간호원이 아홉, 그 밖에 직원이 둘뿐인 작은
병원이었다. 그러나 진해읍내에서는 가장 큰 개인병원이었다.
병원내부에 범인이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환자 한 사람
정도는 해치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담반의 두 형사는 병원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수사를
전개해 나갔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정확한 알리바이를
체크해 나갔다.
그러나 수확이 없었다. 범인은 꼬리가 없는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듯 수사망에 걸려들지 않았다.
5. 제5장 어떤 迷路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지훈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며칠치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일찌기 자기가
설계했던 환상살인극이 실제 그대로 활자화되어 신문지상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그놈이 범인이라는 확증만
잡으면 내가 설계해 놓았던 환상적인 살인을 스스로 실행하려
했었는데, 이럴 수가 있을까?
점박이 사내 천영만이 범인이라는 확증은커녕 혈액형도 확인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내 방법대로 그를 처단하다니....
누나 해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나가 했던 말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아뭏든 넌 환상살인에 뛰어들지 말아. 이젠 누나도 방법을
알았으니까. 잘 기억해 두었다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어. 누나도
보통 여자가 아니란 걸 알아 둬. 해림이란 여자는 한다면 하는
여자야."
설마 누나가? 그 착한 여자가? 아무리 원한을 품고 있다지만
그럴 리가 없어.
강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누나는 그럴 수 없는 여자였다.
말로는 살인을 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살인을 할 수 없는 그런
여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인 것 같았다.
실제 양갈보는 아니지만, 해림 누나가 양갈보 소리를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 고문관 브라운과 밀접한 사이이면서도 검둥이 존슨과도
만나는 해림 누나를 지훈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구많은 남자들 중에 하필이면 흰둥이와 검둥이를 번갈아
만나는 누나를 생각하면 가슴 한 부분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겉으로는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문득,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흑인 병사 존슨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존슨에게 하수인 노릇을 시킨 게 아닐까?
존슨이라면 누나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인물인 것 같았다. 그리고 검은 얼굴의 존슨이라면
환상살인극의 하수인으로 그 누구보다 안성마춤일 것 같았다.
스스로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던 누나의 말이
새삼스럽게 뇌리를 때렸다.
그렇다. 박해림은 누가 보아도 보통 여자가 아니다.
피난살이의 그 어려움 속에서도 대학을 나온 여자다. 누나의 말
그대로 해림이란 여자는 한다면 하는 여자다.
한다면 하는 여자? 무서운 여자? 바로 누나가 환상살인의
연출자?
흑인 병사 존슨과의 교제도 미리 계산에 넣고 해온 교제
같았다. 가장 믿을 만한 좋은 하수인을 만들기 위해서 그랬을 것
같았다.
신문지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슴까지 떨리고 있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여인까지 스타킹으로 목을 졸라 죽이다니,
설마 그럴 수가 있을까?
누나가 즐겨 신는 갈색 스타킹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날씬한 다리를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갈색 스타킹이 사람의 목을
죈 흉기로 변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처참하게 폭사당했다는 조복주란 사람은 누굴까? 그 사내 역시
부모님을 살해하고 누나를 범한 범인 중의 한 놈이었을까?
무슨 증거가 나타났길래 가차없이 처단한 것일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누나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지금은 누나를 만나러 갈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지훈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어쩌면 내가 환상살인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선수를 친 것은 아닐까?
섣불리 처리하다가는 엉뚱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제대로 복수도 못할 경우가 생기기 쉬운데....
안타까왔다. 사실을 알고 싶었다. 만약 누나가 일을 저지른
것이 사실이라면 위험한 궁지에 빠질 확률이 높았다.
빈틈이 있었다면 큰일인데.... 완벽했을까? 알리바이는
철저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방구석에 처박혀 신문이나 읽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무래도
손을 좀 써야 할 것 같았다.
묘수가 없을까. 기상천외의 묘수가 있으면 형사 몇 명쯤은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박해림은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누나였다. 절대 감옥으로
보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귀신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묘수를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궁리에
궁리만을 거듭하였다.
그 무렵.
윤형사는 칼멘다방 구석자리에서 해림과 마주앉아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다방 안에 손님이라고는 둘뿐이었다. 당번
레지도 커피를 갖다준 후에 화장을 하러 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출근하시는 데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용건이 뭐예요?"
"모르고 계셨읍니까?"
"알면 왜 묻겠어요."
해림은 자그마하고 가무잡잡한 데다 코까지 비뚤어진 형사의
얼굴을 못마땅한 눈으로 주시했다.
도대체 이 못생긴 형사가 무슨 질문을 하려고 아침 일찍 나를
불러내었을까.
십중팔구 최근 진해에서 일어난 의문의 세 사건 때문에 나를
만나자고 한 거겠지. 내게서 무슨 혐의라도 찾아내려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윤형사는 불가사의한 세 사건의 개요부터 먼저 간단히 설명한
다음, 해림을 대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미스 박도 신문을 보셔서 대강 알고 계셨겠지요?"
"예. 관심을 가지고 봤어요. 환상살인이란 타이틀이
붙었더군요. 환상살인이 뭐예요?"
"죄송하지만, 그런 질문은 다음에 해주시고 묻는 말에 대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점박이 남자, 천영만 씨에 대해서
아시는 게 없읍니까?"
"제가 그런 남자를 어떻게 알겠어요? 이상한 질문을 다
하시는군요."
"점박이 그 남자가 언젠가 미스 박 동생에게 미행을 당하고
있었읍니다."
"예에? 그게 정말이세요?"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지훈이가 그 남자를 미행하다니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미행할 이유가 없잖아요?"
"4년 전 박갑철 씨 내외분, 즉 미스 박 부모님이 당한 참변을
나는 기억하고 있읍니다."
"질긴 인연이군요. 감사하다는 말은 생략하겠어요."
"6.25 동란 때문에 진해경찰서도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수사요원들도 거의 다 바뀐 통에 범인들을 추적할 기회를
놓쳤지만, 내 수사수첩에서 세 사람의 범인을 지워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미스 박, 아니 해림씨는 왜 나만 보면 피하시거나
빈정거리시는지 모르겠군요? 못생긴 남자라고 빈정거리는
겁니까?"
"빈정거리다니요?"
문득, 못생긴 형사를 한번 유혹해 볼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남자 하나 정도 유혹하는 일은 누워서 떡먹기일
것 같았다.
여자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미소에 압도당한 듯
윤형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화를 풀어나갔다.
"좋습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만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사건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읍니다. 4년 전 그날 밤 마지막으로
해림씨 방에서 도망친 범인은 머리나 이마에 심한 상처를
입었읍니다."
"그래서요?"
"쓰라린 과거를 들먹거려서 죄송합니다만, 그때 상처를 입은
범인의 혈액형은 AB형이었읍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사망한 그
점박이 남자도 AB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읍니다."
"이 세상에 AB형 혈액을 가진 사람이 한두 사람인가요?"
"그리고 그 점박이 남자의 바로 이마 위에 앞머리에는
반달형의 큰 흉터가 있었읍니다."
"그래서요?"
"그 이마 위 앞머리의 흉터에 대해서 전문가에게 문의해 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읍니다."
"놀라운 사실이라니요?"
"그 흉터는 원형의 사기 그릇이나 원형의 물체에 의해서
입었던 상처자국이라는 것입니다."
"뭐, 뭐라구요?"
해림은 흥분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혈액형도 그렇고, 거기다
왼쪽 눈썹 밑의 팥알만한 점까지 합친다면 그 점박이 사내는
자기를 마지막으로 폭행했던 복면의 사내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혈액형도 같은 데다 앞머리의 흉터까지 그날 밤에 상처를
입었던 범인의 그것과 같다는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림은 흥분을 억눌렀다. 절대로 자기의 속을 보여 주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잔인할이만큼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미 윤형사님이 알고 계신 것보다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고 있어요. 범인 중 한 사내가 점박이었을 가능성이 짙다는
사실을 말예요. 아시겠어요?" 하고 이죽거려 주고 싶었지만
해림은 꾹 참았다.
반면에 전혀 엉뚱한 말로 빈정거려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세상엔 우연의 일치가 많아요. 그 정도 우연의 일치를 가지고
큰 단서라도 잡은 것처럼 흥분하시는 걸 보니까, 웃음이
나오는군요?"
"뭐라구요? 웃음이 나온다구요?"
윤형사는 벌컥 화를 냈다. 뜻밖의 모멸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림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수 더 떴다.
"얼렁뚱땅 넘겨짚지 마시고, 제발 과학수사를 하시는 수사관이
되세요."
"뭐, 뭐라구요?"
"흥분하지 마시고 차분히 과학수사를 해주신다면 그 우정은
잊지 않고 간직하겠어요."
해림은 도도했다. 윤형사 앞에서는 항상 도도할 수 있다고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그에게만은 그래도
된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윤형사는 까무잡잡한 얼굴을 붉혔다.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상야릇하게 그녀 앞에 나서기만
하면 눈부신 그녀의 아름다움에 자신의 초라한 몰골이
압도당하는 것 같아 몸둘 바를 모를 때가 종종 있었다.
내가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양공주나 거의 다름없는 여자에게 쩔쩔 매다니, 도대체 무슨
망령이 들어서였을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시해 버리고 싶지만, 무시할 수
없는 여자 앞이라 어색할 때가 많은 것 같았다.
"이젠 출근해도 괜찮겠지요?"
서슴지 않고 침묵을 깨뜨린 것도 그녀쪽이었다. 윤형사는 유독
그녀 앞에서는 용기 없는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해림은 일어섰다. 형사 앞에 나온 여자가 형사의 허락도 없이
일어선다는 사실에 윤형사는 신경이 곤두섰다.
"누구 맘대로 가겠다는 겁니까? 앉아요!"
"사람을 무슨 용의자 취급하시는 건가요?"
"미안합니다. 잠깐만 앉아요."
"저는 출근해야 할 사람이예요."
하지만 엉거주춤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4월 10일 밤에 벚꽃장에 갔었지요!"
"예."
"누구하고 가셨읍니까?"
"브라운 씨하고 갔었어요."
"몇 시쯤에 집에 들어가셨읍니까?"
"아마 열 시쯤 되었을 거예요."
"그 후에는 무얼하셨읍니까?"
"잤어요."
"혼자서 주무셨읍니까?"
"무례한 질문을 다 하시는군요?"
"어쩔 수 없읍니다."
"심문인가요?"
"협조해 주세요."
"혼자 잤어요."
"그 사실을 누가 증명할 수 있읍니까?"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주인집 아주머니도 증명해 주실
수 있을 거예요."
"목포댁은 그날 따라 일찍 잠들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하던데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쪽문 열쇠를 가지고 계시지요?"
"예."
"그렇다면 만약의 경우, 마음만 먹는다면 혼자 자유롭게
밖으로 나올 수도 있겠군요?"
"도대체 내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유도심문까지 하는 거예요?
해림이가 용의자라도 된다는 건가요?"
"경찰이란 원래 사건이 발생하면 일단 주변인물들을 모두
용의선상에 올려놓는 법입니다."
"그럼 제가 그 남자의 주변인물인가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읍니다."
"그런 기분 나쁜 얘기를 하시려고 출근하는 사람을 다방으로
끌고 들어오셨어요?"
"언젠가는 거쳐야 할 일종의 과정입니다."
"저는 그날 밤에 집에 들어온 이후 문 밖에는 한 발자국도
내밀지 않았어요? 이젠 됐어요?"
"브라운 씨한테는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서 혼자 지내고
싶다는 얘기를 하셨다지요?"
"남의 사생활에 웬 관심이 그렇게 많으세요?"
"실례지만, 생각할 일이란 무슨 일이었읍니까?"
"장래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싶었어요."
"그날 밤에 꼭 그런 생각을 했어야 했던 이유라도 있읍니까?"
"없어요. 이젠 속 시원하세요?"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군요."
"거짓말을 하다니요?"
"그날 밤 열 시 이후에 벚꽃장 근처에서 해림씨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읍니다."
"사람을 잘못 보았겠지요."
"흑인 병사와 함께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 흑인은 누굽니까?"
"진해 바닥에 흑인 병사가 어디 한둘인가요? 괜히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마세요. 나처럼 생긴 여자도 한둘이
아니예요."
"전에도 한번 흑인 병사를 만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사람이 흑백을 차별할 수 있겠어요?
흑인 병사하고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흉인가요?"
"좋습니다. 그 문제는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읍니다. 그럼 그
다음날 밤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내셨읍니까?"
"집에서 자고 있었어요."
"역시 그랬었군요. 그러나 진해 바닥은 좁습니다. 지금은
시치미를 떼고 계시지만...."
일부러 감질나게 여운을 뿌렸다. 그녀 스스로 끌려 들어오게할
속셈이었다.
"조사해 보면 의문점이 밝혀질 거란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언제 어느 때나 자기 맘대로
쪽문을 출입할 수 있는 것 아니겠읍니까?"
"제발 꿈 깨세요."
"천만에요. 검은 얼굴의 그 병사가 당신의 심부름을 하지
않았읍니까?"
윤형사는 시퍼런 비수를 들이댔다. 인정사정 볼 것도 없었다.
그러자 금방 신경질적인 반응이 해림의 얼굴에 나타났다.
"심부름이라니요? 도,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함부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그럼 제가 알고도 시치미를 떼고 있단 말인가요?"
"미스 박은 나이에 비해 사연도 많고 고통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를 동정하시는 건가요?"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축적된 경험이 많은 운명의
여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요?"
"비상한 두뇌에 축적된 경험이 많은 사람은 기상천외의
환상살인도 시도할 수 있단 말입니다. 죽인 자의 영혼에 꽃
이파리를 띄워보내는 여유를 가지고 말입니다."
"뭐, 뭐라구요! 경찰이라고 해서 사람을 그렇게 터무니없이
의심해도 괜찮은 건가요?"
"꽃의 고향 진해에서 여러 해를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벚꽃
이파리가 내게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몰고오는 것이었읍니다.
섬돌 위의 벚꽃 이파리와 현관 앞의 벚꽃 이파리를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벚꽃 이파리니, 섬돌이니,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만
하세요."
"그날 밤 벚꽂장에 다녀오셨다고 하시지 않았읍니까?"
"저는 꽃을 사랑하는 여자예요. 함부로 꽃잎을 뿌리고 다니는
꽃파는 여자가 아니예요. 왜 남의 집 섬돌이나 현관에다
꽃이파리를 뿌리고 다니겠어요."
"참혹한 복수극에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미하기 위해서
꽃잎을 뿌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엉뚱한 상상에 도통하신 분이군요."
"그 정도야 얼마든지 추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줍잖은 추리력으로 사람을 잡으려 들지 마세요."
"4년 전 4월 어느 날 미스 박이 했던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읍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했던 말이라 미스 박도
잊어버리진 않았을 겝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시겠읍니까?"
"4년 전 이야기는 왜 자꾸만 들먹거리는 거예요?"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병실에서 미스 박은 이런 말을
거듭했읍니다. <환상의 꽃이 피는 그날에 내 손으로 잡아 죽일
거야. 안개꽃이 피는 그날에 엄마 아빠 원수는 내 손으로 갚을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 환상의 꽃, 그 안개꽃이 올 4월에도
어김없이 피었고, 그들은 피살당했읍니다."
"그들이라니요?"
"이미 말했잖읍니까? 범인일 가능성이 짙다구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 보세요. 4년 전에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전혀
없읍니까?"
"글쎄요.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
"잘 생각해 보세요."
"설령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잘못인가요? 충격을 받고 헛소리를 한 것 같은데, 왜 헛소리까지
물고 늘어지려 하세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가 보죠?"
"헛소리란 흔히 의식의 심층을 지배하던 어떤 억눌렸던 관념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헛소리
속에서도 범행동기를 찾아낼 수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찾아보세요."
"그리고 알리바이가 문젭니다. 절대로 알리바이가 완벽하게
성립되었다고 생각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상종 못할 사람이군요. 그 시간에 잠들어 있었던 사람을
끌어내어 사건에 결부시키다니. 제가 몽유병 환자인 줄 아세요?"
"만에 하나 몽유병 환자라면 어떡하시겠읍니까?"
"남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데도 도통하셨군요?"
"사람이 어떤 일에 외곬으로 집착하면 그 일이 헛소리에도
반영되고 꿈에도 반영된다는 사실 정도는 아시겠지요?"
"글쎄요."
"실제로 외국의 경우 비몽사몽간에 환상살인을 한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 방면에 연구가 미흡해서
살인사건에 대한 분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젠 남의 나라 사건까지 들먹거리시는군요."
"복수의 칼을 시퍼렇게 갈고 있는 사람은 평소에는 그런
증상이 전혀 없다가도 갑작스레 몽유병자처럼 뭔가에 이끌려
일을 저지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하시는군요."
"다른 형사들은 4년 전 일을 모르지만, 나는 4년 전부터
지켜봐 왔읍니다."
"집념이 대단하시군요."
"진해에는 복수를 하러 돌아오신 것이겠지요?"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어림짐작으로 사람을 용의자 취급하지
마세요. 기분 나빠요."
"만약 내가 미스 박처럼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냥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경찰도 찾아내지 못한 그때 그 사건의 범인들을 우리가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어요?"
"어떤 경우에는 경찰보다 피해자 가족들이 범인을 더 빨리
찾을 수도 있읍니다."
"만에 하나 범인을 찾아내었다면 경찰에다 신고하여
체포하도록 하면 되잖아요. 구태여 사람을 해칠 필요가
없잖아요."
"심증은 가는데, 증거를 찾지 못했다면 경찰에 신고해도 별
소용이 없을 줄 알고, 복수극을 벌일 수 있는 겁니다. 특히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아야만 응어리진 감정을 시원하게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생각하시는 것은 자유지만, 단서 하나 없이 사람을 괴롭히지
마세요."
"그리고 조금 전에 우리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누굽니까? 설마
그 흑인 병사는 아니시겠지요?"
"사람 놀리시는 거예요?"
"그럼, 동생하고 공모하셨읍니까?"
"정말 무례한 말을 함부로 하시는군요?"
"그럼 왜 우리라는 말을 썼읍니까?"
"우리 가족 모두 피해자니까, 우리라는 말을 얼마든지 쓸 수
있잖아요."
"솔직해서 좋군요. 그래서 동생과 합작하신 겁니까?"
"터무니없는 추리로 사람 그만 괴롭히세요."
"동생 지훈이도 이젠 어린 소년이 아니더군요. 그의
눈동자에는 복수의 집념 같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더군요."
"우리 훈이에게 친구가 되자고 하셨다지요?"
"예. 그랬읍니다."
"동생 친구분에게 한 마디 충고를 드리겠는데요. 훈이를
모르고 훈이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내가 훈이를 모른다 그 말인가요?"
"예. 우리 훈이는 권위를 의심하는 자유로운 아이예요.
만들어진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요. 대개 인위적인 권위는
엄포이고 허세일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잖아도 권위를 비웃는 대담성이 있는 걸 발견했읍니다.
미스 박이 가르치신 건가요?"
"천만에요. 전쟁이 지훈이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지혜롭게
말예요."
"아무리 지혜로와도 완전범죄만은 어려울 겁니다."
윤형사는 슬쩍 넘겨짚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넘겨짚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예민한 반응이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반짝이는가 싶더니만, 두 눈에 영롱한
이슬방울이 맺혔다.
"제발 이중삼중의 상처를 입히지 마세요. 죽은 사람을 또
죽이는 그런 비열한 행위는 삼가해주세요."
"이중삼중의 상처라니요?"
윤형사는 무슨 말인지 말뜻을 알고도 꼬투리를 잡으려고 물고
늘어졌다.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입은 상처만 해도 깊단 말예요. 그런데
그 사건 때문에 공연히 사람을 의심하고 용의자 취급을 하다니,
이중삼중의 상처를 입히는게 아니고 뭐예요?"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지만, 공연히 사람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의심할 만하니까 의심하는 겁니다."
"그럼 제가 무슨 의심받을 만한 짓을 했단 말예요?"
"그 여자가 죽은 201호 병실에서 발견된 스타킹 색상이 평소
미스 박이 많이 신고 다니는 갈색이라는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타킹 색상까지 문제가 되나요? 만약 내가 범인이라면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오히려 평소엔 신지 않는 색상의 스타킹을
사용했을 거예요. 그리고 스타킹을 병실에 떨어뜨리고 나가지도
않았을 거구요."
"일리가 있읍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당황하면 실수를 범할
수도 있고, 급하면 평소에 쓰던 것을 사용하게 되는 법입니다."
"뭐라구요?"
"내가 어디 틀린 말을 했읍니까?"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을 작정을 하신 모양이군요. 그러나
마음대로 안될 거예요."
"그리고 그날 미스 박은 근무시간에 외출을 하셨더군요."
"근무시간에 외출한 게 아니라 점심시간에 외출했어요.
그러니까 외출한 것 때문에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붙일
속셈이시군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네요."
"그날 점심시간에 야자수다방에 있는 미스 박을 목격한 사람이
있읍니다. 누굴 만날 약속이라도 하셨던가요?"
"갑자기 훈이를 만나고 싶어서 밖으로 나왔던 거예요."
"정말 이상하군요. 하필이면 그날 동생을 만나고 싶어
외출했다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하필이면 또 야자수다방에
나가다니 그것도 이상하군요."
"야자수다방에 나간 것까지 잘못된 일인가요?"
"야자수다방에서 평안병원까지는 불과 150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시간에 얼마든지 병원에 다녀올
수 있지 않겠읍니까?"
"이젠 터놓고 범인취급을 하실 작정이군요."
"뿐만 아니라 동생이 입원했을 때 출입하였으니까 평안병원의
내부구조까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잘은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런데 그게 또 무슨
잘못인가요?"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조건이
되죠."
"아전인수격으로만 해석하시는군요."
"야자수다방에 나갔던 목적이 다른 데 있었지요?"
"저는 투명인간이 아니예요? 그래서 야자수다방에 갔던 사실이
드러났어요. 제가 만약 병원에 갔었다면 누군가 저를 보았을
거예요."
"자신만만하군요. 요컨대 증거를 내놓아 봐라 이거군요."
"경찰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의심해도 되는 건가요?"
"사람은 그 능력여하에 따라서 투명인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투명인간이란 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투명인간의
환상살인..., 전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야자수다방에서 어떻게 투명인간이 되어 병원으로 잠입했는지
아직은 모르고 있지만 말입니다. 변장의 명수라면 투명인간이 될
수도 있겠지요."
"터무니없이 사람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미스 박 남매는 뭔가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진해에 다시 나타났고, 점박이 남자에게 접근하려 했단
말입니다."
"직장을 따라 고향에 돌아온 것도 잘못인가요?"
"그건 표면상 이유에 불과합니다. 그처럼 아픈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고향이 그리워도 대부분이 고향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게 상례입니다."
"이 세상엔 예외라는 게 얼마든지 있어요. 우리 남매는 생업을
위해서 고향에 돌아왔어요. 얼마나 살기 어려운 때인지 저보다
윤형사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물론 직장을 얻기도 어려운 때이고 살기도 어려운 때인 줄은
압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그럼 미스 박 남매가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정곡(正鵠)을 찔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를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해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돌같이 싸늘한 여자였다.
실제, 해림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살아왔다. 아니, 살아
남았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 목적은 변경할 수 없는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은 그런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짐짓 딴청을 피웠다. 이렇다 할 목적이 없는
것처럼 적당히 둘러댔다.
"목적이 없는 것도 목적일 수 있어요. 부평초 같은 인생이 더
많은 세상이니까요."
"아마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를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나는 4년 전부터 박해림 씨에게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니까요."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아요. 남자는 다 도둑놈들이예요."
"미스 박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솔직이 털어놔 보세요."
문득, 꺼져가는 심지에 말씀의 기름을 부어주고 마음의 등불을
밝혀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주름투성이의 깡마른 늙은
목사였다.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저는 크리스찬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게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그런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미스 박이 교회에 나가십니까?"
"제 뒤를 밟아보셨으니까 잘 아시겠군요. 교회에 잘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예요."
"그런데 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었읍니까? 믿어지지 않는군요."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론 크리스찬이 되었지만,
아직 교회엔 잘 나가지 않고 있어요."
"어떤 말씀을 들으셨기에 교회에 잘 나가지 않고도 크리스찬이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사람 속에 있는 빛, 즉 마음의 등불이 밝아지면 원수 갚는
일은 사람에게 속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마음의 등불이 밝으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 말씀에 감동되어 크리스찬이 되기로 작정하셨단
말입니까?"
"예."
"정말 편리하군요."
"편리하다니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셨다니, 정말 편리한
하나님이시군요."
"그런 모욕적인 언사는 삼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셨다면 미스 박은 복수하는
일을 포기했다는 거 아닙니까? 얼마나 편리한 대답입니까?"
"우리에겐 누굴 처단할 수 있는 사법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 대신 경찰이 범인들을 잡아줄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6.25라는 엄청난 동족상잔의 비극 때문에 박갑철 씨 부부
피살사건은 흐지부지 백지화되다시피 했읍니다. 경찰관의 한
사람으로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현실이
그렇게 돼 버린 사실을 피살자 가족들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대책이 없이 가만히
있겠읍니까?"
"우리 남매에겐 아무런 대책이 없어요. 그저 경찰만 믿을
뿐이예요."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무슨 거짓말을 했어요?"
"경찰이 그 사건에서 손을 뗀 줄 알면서도 경찰이 범인들을
잡아줄 것을 믿고 있다니,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하나님을 믿든지, 경찰을 믿든지 뭔가 하나쯤은 믿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예요. 아시겠어요, 멍청한 형사님?"
"뭐, 뭐라구요? 경찰관을 우습게 여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합니까?"
"저는 친구로서 얘기하는 거예요, 멍청한 형사님!"
"뭐라구요? 친구라구요?"
"예. 동생의 친구지만, 나이가 많으니까 제 친구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4년 전부터 우리 가족들과 제게 관심을
가져 주신 분인데 친구가 아니고 뭣이겠어요? 분명히 애인은
아니잖아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해림의 그 대담성에 주눅이 든 것일까.
그 순간, 스스로 멍청한 형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만들어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더니만, 수사관의 권위를
비웃는 대담성까지 가지셨군요."
"4년 전부터 연민의 정이 담긴 눈빛으로 절 바라보곤
하셨지요?"
"정말 비상한 판단력까지 겸비하셨군요. 4년 전 그때는 실성한
사람 같았었는데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고 계시다니, 다시 한번
놀랐읍니다."
"4년 전 그때 경찰이 짚고 넘어가지 못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 점이 뭔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군요."
"그때 범인 중 한 사람이 어머니한테 세게 물렸어요. 물려도
보통 물린 게 아니라 비명을 크게 질렀을 만큼 물렸어요."
"어느 부위를 물렸읍니까?"
"아마 손목이나 팔뚝을 물었을 거예요. 살점이 떨어져 나갈
만큼 강하게 말예요."
"그런데 왜 그땐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읍니까?"
"실성한 사람같이 돼 버려 미처 생각을 못했던 거예요."
"그럼 어머니의 입에 범인의 피가 묻어 있었겠군요."
"그 점을 지금 제가 묻고 있는 거예요. 경찰이 그날
현장검증을 통해 안방에서 범인 중 한 사람의 혈액을 발견했는지
여부를 말예요."
"그날 그 안방은 너무 비참한 피바다여서 두 분의 피 이외
다른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읍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고도 범인을 잡을 수 있을는지 의문이군요."
"그때 어머니께서 범인의 어느쪽 손목이나 팔뚝을 물었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해 내려고 애써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그 밖에 사건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사실을 알고 계시면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밖의 것은 이미 경찰에 다 말했어요."
"오늘 시간을 내줘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 같은 못난이
형사를 친구로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진짜 친구는
진실을 밝혀내길 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집요하시군요. 언제부터 그렇게 집요해지셨나요?"
"글쎄요."
"제가 한번 알아맞혀 볼까요?"
"재미있는 제안이군요. 어디 한번 맞혀 봐요."
"혹시 코뼈를 다치신 후부터 그렇게 집요해진 게 아닌가요?"
"글쎄요. 미처 그런 것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미스
박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 수 있읍니까?"
해림은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자들은 상처가
많아도 그 상처를 안으로 삭히기만 하면 더 아름다와진다더니,
해림을 바라보면 그게 사실인 것 같았다. 여자들은 속으로
상처를 꿰매고 아물게 하면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잠깐만요."
윤형사는 미소를 남기고 일어서는 해림을 다시 앉도록
부탁했다.
"또 다른 질문이 있으세요?"
"어떻게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는지,
그 점이 궁금하군요."
"마음을 텅 비운 자리에 마음의 등불을 밝히면 그렇게
되는가봐요."
"마음의 등불을?"
"예. 마음의 등불을 밝히면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 이제 그만 실례합니다."
궁금한 게 시원스레 풀린 것은 아니었다. 뭔가 알 듯 말
듯하기만 했다. 그러나 윤형사는 해림을 다시 불러 앉히지는
못했다.
해림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차값을 치른 후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
윤형사는 선이 아름다운 그녀의 뒷모습만 지켜보며 돌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내가 그 여자의 고등수법에 말려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와의 심리전에서 몰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자기
친구라고? 애인은 분명히 아니라고?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읽을 수 있었을까? 내가 은근히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점을 어떻게 간파했을까?
코뼈를 다친 후부터 내가 집요해진 것은 어떻게 알아내었을까?
실제, 그랬으면서도 나 자신이 미처 모르고 있었던 일을 어떻게
족집게처럼 꺼내어 보일 수 있었을까?
윤태호는 어릴 때 공놀이를 하다가 코뼈를 부러뜨리고
못난이란 소리를 듣기 시작한 이후부터 실제로 한번 관심을
기울인 일에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버릇이 생겼던 것이다.
족집게무당처럼 어떻게 그렇게 알 수 있었을까?
역시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해 본 경험을 통하여 산
지식을 터득했을 테지.
그건 그렇고 마음의 등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마음의 등불이
밝으면 정말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환히 비추어 볼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여우에게 홀린 것
같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접해 보지 못했던 신선한 그
무엇과 만난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아름다운 여자는 요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어 놓고 홀리기 때문에.
문득, 이러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형사가 되어 멍하니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다방 앞에 세워둔 자전거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페달을 밟았다.
나더러 멍청한 형사라고? 어디 두고 보자.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 테니까. 정말 미처 몰라봐서 죄송하다는 말이
가슴에서 우러나오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신선한 봄바람이 볼을 스치고 귓전을 간지럽혔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꽃잎이 나뒹굴고 있었다.
칼멘다방에서 자전거로 인사동 절간 옆의 상준네 집까지는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윤형사가 도착했을 때, 상준이 막 밥상을 물리고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꺼? 어, 어떻게 오셨습니꺼?"
상준이 부엌문 앞에서 윤형사를 알아보고 떫은 낯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랜만이오. 안에 지훈이 있지요?"
다 알고 묻는 시늉을 하는 통에 상준이 역시 떫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형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잽싸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방구석에 누워 있던 지훈이 당황해 하며 일어나 앉았다.
"누, 누구세요?"
"나야, 나. 윤형사 몰라? 정말 오랜만이군 그래."
"난 또 누구시라구요."
"그 동안 잘 지냈나?"
"예."
"지훈이 너 만나기 정말 힘드는구나. 왜 날 피해 다니지?"
"피해 다니다니요?"
"좀 앉아도 되겠지?"
"예."
그때, 상준이 겁먹은 얼굴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꺼?"
"사건 때문에 왔어요."
"사, 사건 때문에요?"
"예. 그래서 주인장한테 양해를 좀 구하고 싶은데요. 잠시만
지훈이하고 이야기 좀 하게 해주면 고맙겠읍니다."
"나, 나는 좀 나가 있으라 그 말씀이십니꺼?"
"예. 그리고 지훈이하고 얘기를 끝낸 후에 형씨도 좀 봤으면
좋겠읍니다."
"내, 내도요?"
"예. 그런데 왜 말을 그렇게 더듬거립니까?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상준 형은 원래 말을 좀 더듬어요. 괜히 꼬투리를 잡지
마세요. 옛날부터 알고 계시면서 왜 그러세요?"
그 누나에 그 동생이랄까. 지훈이 사뭇 도전적으로 나오는
통에 윤형사는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훈은 못생긴 형사 주제에 누구더러 말을 더듬거린다고
놀리느냐는 투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실수 했군 그래."
금방 변명을 하고, 윤형사는 상준이 밖으로 나가 주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둘이 되었을 때 윤형사가 먼저 침묵의 고리를
풀었다.
"나를 피해 다니는 이유가 뭐지?"
"저는 피해 다니지 않았어요."
"난 여러 차례 널 만나러 왔었어."
"무엇 때문예요?"
"몰라서 묻냐?"
"예."
"지훈이 너, 점박이 사내를 미행하고 다녔었지?"
"점박이 사내라니요?"
"며칠 전에 메틸 알콜을 마시고 죽은 남자 말이야. 그래도
몰라?"
"아, 그 얘긴 신문에서 읽었어요."
"그 남자를 미행한 적이 있었지?"
"없었어요."
"거짓말하지 마.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도 속일
작정이야?"
"저는 담배를 팔러 다녔을 뿐, 누굴 미행한 적이 없어요."
"누굴 닮아서 오리발을 이렇게 잘 내밀지?"
"오리발이 뭔데요?"
"그래. 모르는 척해라. 하지만 언젠가 모든 게 사실대로
밝혀지게 돼 있단 말이야. 그땐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 알겠어?"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 점박이 남자가 4년 전 그 사건에 관련돼 있던 사람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지?"
"금시초문이에요."
"뭐라고? 금시초문이라고?"
"예."
"오리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녀석이 금시초문이란 문자는
어떻게 알지?"
"오리발은 오리발이고, 금시초문은 시방 들은 말 처음 들은
말이란 뜻 아닌가요?"
"야아, 지훈이 이 녀석 봐라. 4년 전보다는 몰라보게
발전했는데. 역시 전쟁을 치른 덕분이군 그래."
"녀석, 녀석 하지 마세요. 인격적으로 대해 주세요."
"정말 많이 발전했군 그래."
"비꼬시지 마세요."
"그래. 말장난하려고 널 찾아다닌 게 아니니까 그러는 게
좋겠다. 하지만 계속 오리발을 내밀고 거짓말을 하면
연행하겠어, 알겠지?"
"연행하다니요? 그럼 영장 가지고 오셨어요?"
"뭐라고? 영장?"
"예. 영장 가지고 오셨냐구요?"
"정말 사람 웃기는데?"
"웃을 일이 아니예요."
"이 꼬마 녀석이 친하게 지내려 했더니만 안되겠는데...."
"영장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너 정말?"
기가 막혔다. 어이가 없었다. 어린 지훈이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 두 손을 들 수도 없고, 어리둥절했다.
"제 말이 틀렸어요?"
"어디서 쥐꼬리만큼 법률상식을 배워가지고 함부로 까불어
대니. 공무를 집행하는 경찰관에게 협조하지 않고 공무를
방해하면 무슨 죄가 성립되는지 알아?"
"제가 언제 공무를 방해했어요?"
"더 이상 까불면 끌고 가겠어."
"사람 너무 겁주지 마세요. 난 잘못한 게 없어요."
"좋아. 그럼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야 돼.
알겠지?"
"예."
"4월 8일 밤에 칠락관에 갔었지?"
그 순간, 그때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웨이터의 얼굴이
스쳐갔다. 아무래도 그 웨이터가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갔었어요."
"거기서 누구한테 담배를 팔았어."
"손님한테요."
"어떤 손님한테 담배를 팔았느냐고 묻고 있는 거야."
"약간 뚱뚱하고 나이 드신 남자 손님에게요."
"그 손님이 누군지 알고 있겠지?"
"몰라요."
"또 거짓말을 하는군. 그 손님 옆에 누가 앉아 있었어?"
"예쁜 색시요."
"색시들 말고 남자가 한 사람 있었잖아!"
"글쎄요. 어떤 남자가 앉아 있긴 있었지만, 자세히 보지는
못했어요."
"그 남자가 점박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지?"
"천만에요."
"거짓말하지 말아. 칠락관의 명숙이가 다 불었어."
"명숙이가요?"
"그래. 근데 왜 그렇게 놀라지?"
순간, 뇌리를 파고 드는 지시 하나가 있었다. 그 지시는
봉래동 꽃동네에 있을 때 왕초 형에게 배운 것이었다.
곰(형사)들은 넘겨짚는 데 도사들이야. 넘겨짚는 데 넘어가면
아무 일도 못해. 직접 대질시키기 전까지는 계속 오리발을
내밀어야 살아 남을 수 있어.
지훈은 싱긋이 웃었다. 여드름이 몇 알 불거진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감돌았다.
"명숙이가 뭐라고 그러던가요?"
"그 점박이 남자가 칠락관에 나타날 때마다 뒤를 밟았다고
하더군."
"누가요?"
"누군 누구야. 지훈이 바로 너지."
"내가요?"
"그래."
"명숙이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난 그 애하고 빵집에서 빵
몇 번 먹은 적밖에 없어요."
"명숙이를 통해서 그 점박이 남자가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기까지 하지 않았어?"
뭔가 알고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쉽게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님이 있는 곳에 담배장사가 담배를 팔러가는 게 무슨
잘못인가요?"
"그럼 4월 10일 토요일 밤에 어디서 뭘 했어?"
"다방에서 담배를 팔고 집에 와서 잤어요."
"몇 시에 집에 돌아왔지?"
"열한 시쯤 되어서 돌아왔어요."
"그럼 그 다음날 밤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는 어디서 뭘
했지?"
"역시 다방에 다니면서 담배를 팔다가 열한 시가 좀 지나서
돌아왔어요."
"그날 밤 열한 시 쯤에 폭발물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지?"
"못 들었어요."
"여기서 직선거리로 5백 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폭발물이 터졌는데도 그 소리를 못 들었어?"
"아마 그날 밤엔 좀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못 들은 것
같아요."
"그날 밤따라 왜 늦게 들어오게 되었지?"
"그날은 일요일이라 다른 날보다 손님이 많았어요."
"집에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른 다방이 어디였어?"
"궁전다방이었어요."
"그 다방이라면 폭발물 사고가 일어난 지점과는 불과 9백 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군 그래."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슬슬 몰아붙이시는군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담배통의 담배만 비운다면
얼마든지 폭발물을 담배통 속에 넣어서 운반할 수도 있었겠군
그래. 아무한테도 의심받지 않고 말이야."
"물론이지요. 담배장수가 그런 일을 꾸몄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다른 담배장수한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훈이 너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란 말이군."
"예."
"그 어두운 밤에 담배통을 가진 사람이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이상 1킬로 정도 달려가는 건 문제가 안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할
마음만 먹었다면 말이야."
"그러나 저는 그런 끔찍한 일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거짓말 말아. 넌 그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내고 계획적으로
준비해 왔을 가능성이 짙어."
"도대체 그 사람들이 누군데요?"
"4년 전 그 사건과 관련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어. 그래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겠어?"
"그럼 폭사당한 그 사람이 우리 부모님을 해친 범인이었다 그
말씀인가요?"
"능청떨지 말아. 넌 점박이 남자와 폭사당한 남자가 4년 전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런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음, 그래. 그럼 이불 옆에 있는 신문 좀 이리 줘 봐. 무슨
신문인지 궁금하군 그래."
"두 사건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이예요. 얼마든지 보세요."
지훈은 앉은 채로 몸을 구부려 여러 장의 신문을 모아다가
윤형사 앞에 내밀었다.
"일부러 샀군 그래."
"예."
"평소엔 신문을 보지 않다가 왜 갑자기 두 사건에 관련된
기사가 실린 신문을 사보게 되었지?"
"호기심에서요."
"호기심이라?"
"예, 온통 화제의 대상이 된 사건이라 자세히 읽어보고 싶어서
샀어요. 그게 무슨 잘못인가요?"
"정말?"
"예."
지훈은 바위 같았다.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는 바위처럼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쉽사리 허물어뜨릴 도리가 없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랄까.
윤형사는 바깥을 향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도둑고양이처럼 엿듣고 있는 거요? 얼굴 좀 봅시다!"
아까부터 부엌쪽 창문 뒤에서 상준이 방안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 나는 안 들었심더. 부, 부엌에서 누룽밥을 먹고
있었심더."
상준이 겸연쩍은 얼굴로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처음부터 내가 좀 나가 있으라고 부탁했잖습니까?"
"미, 미안하게 됐심더. 후, 훈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는가 싶어서 걱정이 돼 가지고 부엌에 앉아 있었심더."
"최상준 씨라 했지요?"
"예."
"최씨도 그 점박이 남자를 미행한 적이 있었지요?"
"어, 없심니더."
"다 알고 묻는데, 왜 거짓말을 합니까? 위증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 거짓말을 합니까?"
"나,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더."
"최씨도 그날 밤에 벚꽃장에 갔었지요?"
"그, 그날 밤 언제 말입니꺼?"
"천영만 씨가 메틸 알콜을 마시고 죽은 날 말입니다."
"벚, 벚꽃장에 가기는 갔지만, 일찌감치 돌아와서 잤십니더."
"그 사실을 누가 증명할 수 있읍니까?"
"혼, 혼자 잤십니더."
"그 다음날 밤 열한 시 경에는 어디 있었읍니까?"
"지, 집에 있었십니더."
"그럼 폭발물이 터지는 폭음을 들었겠군요?"
"모, 못 들었심더."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날 밤 폭음 소리를
들었는데, 최씨는 왜 못 들었읍니까?"
"나, 나는 잠들었던 모양입니더."
"핑계 한번 잘 대는군요. 하지만 그걸 누가 믿겠읍니까?"
"그, 그라모 내 말을 도통 못 믿으시겠다 그 말씀입니꺼?"
"점박이 남자를 미행해 놓고 미행한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읍니까?"
"그, 그런 사람을 모르니께 모른다 카는 거 앙입니꺼."
"두 사람이 미리 짰군 그래."
"미리 짜다니요?"
지훈이 못 참겠다는 듯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빠져나갈 구멍까지 미리 연구했을 정도니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증거를 대세요."
"그래, 알았다. 멀잖아 증거를 가지고 오겠어.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점박이 남자를 미행하는 것을 나 말고도 분명히
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둬."
윤형사는 일어섰다. 이렇다 할 단서를 잡은 것은 없었지만,
심증은 굳힐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뭔가 동시에 숨기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칠락관 명숙이를 달래든지 족치면 금방 무슨 정보나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자전거를 타고 칠락관으로 단숨에 달려가서
정보를 얻어낼 속셈이었다.
등 뒤에서 비웃고 있을 두 녀석을 오래지 않아 용의자로
잡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일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마당에 세워둔 자전거 타이어가 터져 있었다. 멀쩡하던
타이어였는데, 바람 한점 없이 푹 꺼져 있었다.
누구의 짓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십중팔구 최상준의 짓이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목격자가 없었다. 그리고 증거도 없었다. 증거 없이
족칠 수도 없었다. 아무리 형사지만, 4년 전부터 아는 사이라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우거지상이 되어 자전거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참 걷다가 윤형사는 꽃잎이 거의 다 떨어진 벚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웠다. 그리고 벚나무에 몸을 기대고 수사수첩 속에
세 사람의 용의자 이름을 적어넣었다.
1. 박해림. 만23세. 케이 텐 타이피스트 겸 통역관. 미혼.
2. 박지훈. 만17세. 담배장수. 야간중학교 1학년생. 박해림의
친동생.
3. 최상준. 만26세. 구두닦이. 지훈과 동숙자.
지금까지의 수사경험에 비추어 세 사람은 얼마든지 용의선상에
올려놓을 만한 인물들이었다.
첫째, 세 사람 모두 정확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못했다는 점.
둘째, 두 사건의 피해자들과 두 남매는 원한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짙다는 점.
세째, 박해림이 애용하는 스타킹과 같은 색상의 스타킹이
흉기로 사용되었다는 점.
네째, 제3의 사건현장과 가까운 지점에 사건당시 박해림이
나타났었다는 점.
다섯째, 박지훈과 최상준이 교묘하게 피살당한 천영만을
미행했다는 점 등등....
윤형사가 세 사람을 용의자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을 무렵,
지훈은 이웃집 자전거를 빌어 타고 칠락관으로 내달렸다.
때마침 명숙은 정원 앞마당을 쓸고 있는 중이었다.
명숙은 눈치가 빨랐다. 미리 짜놓은 대로 지훈이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한 소절을 다 부르기 전에 대문 밖으로
살그머니 나왔다.
지훈은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 어떤 형사가 날 찾아왔는데, 점박이 사내 때문에 나를
의심하고 있어."
"왜?"
"그 남자가 죽었거든. 너도 알고 있겠지?"
"응. 그런데 왜?"
"그 남자가 우리 부모님을 살해한 범인들 중의 한 사람일
가능성이 짙은가 봐."
"그래서 경찰이 훈이를 의심하는 모양이지?"
"응. 명숙이는 날 믿지?"
"그럼."
"그러니까 혹시 누가 물어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알겠지?"
"응."
"죽어도 모른다고 해야 해. 자칫 잘못하면 누명을 쓰게
되니까."
"알았다니까. 명숙이가 그렇게 바본 줄 알아. 아침부터
쫓아오게."
"곽사장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그저 모른다고만 해."
"알았으니까, 안심해."
"고마와, 명숙이."
"몸조심해."
그제야 지훈은 미소를 남기고 얼른 자전거에 올라탔다.
6. 제6장 尹刑事의 執念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중원 로터리
8거리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꽃철을 시샘하는 비바람 같았다. 아직 꽃철이 남았건만,
비바람에 꽃잎이 우수수 흩날렸다.
윤형사의 머리에 문득 눈부신 여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언제 보아도 산벚꽃처럼 눈부신 여자였다.
그 여자를 용의선상에 올려놓긴 했으나 수사회의에 내놓을
만한 뚜렷한 단서 같은 게 없었다.
윤형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까부터 비바람치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수감중인 죄수의 번호와 같은 이상한 숫자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형무소에까지 손을 뻗쳐 보았지만, 그 숫자의 비밀은
밝혀낼 수가 없었다.
그 숫자 때문에 형무소 여러 군데를 찾아다니느라고 윤형사는
지쳐 있었다.
숫자의 비밀만 알아낸다면 사건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텐데.... 그 숫자가 무슨 암호문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 숫자의 비밀만 풀리면 숫자 뒤에 표시되어 있는 알파벳
부호의 정체는 덩달아 드러날 것 같았다.
혹시 군번이 아닌가 싶어 국방부에 문의해 보았으나 군번도
아니었다.
도대체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포로들의 번호는 아닐까?
천영만의 수첩에 적혀 있던 이상한 숫자의 내용을 윤형사는
수사회의에서 밝히려다가 덮어두고 말았다. 그 숫자에 대해서는
조사해 볼 만큼 조사했기 때문에 무슨 단서가 잡힐 때 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전담반 수사회의는 처음부터 암담한 벽에 부딪치게 되어
하나마나였다.
윤형사 이외에 다른 수사요원들은 4년 전 박갑철 씨 부부
피살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6.25 동란 당시 빨갱이들
등쌀에 진해경찰서는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그 바람에 고참
형사들은 모두 떠나 버리고 없었다.
실제, 수사본부장 역을 맡고 있는 하 수사과장 역시 3년 전에
부임해 온 사람이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일해 먹겠나? 누가 무슨 말이든지
해봐!"
"그럼 아까 권형사가 말한 대로 그 치밀성이나 잔인성으로
보아 빨갱이들의 소행 같다 그말인가?"
"예."
"빨갱이들 소행이건 누구의 소행이건 무슨 실마리를 잡아야 할
거 아니겠어?"
"......"
"어이, 윤형사."
"예."
창밖에서 얼른 고개를 돌려 수사과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넨 아까부터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뭐가 나오나?"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면서 윤형사를 은연중 멀리해
오던 수사과장이었다.
"자넨 이번에 전담반에 자원해서 들어오지 않았나? 환상적인
그 벚꽃 이파리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어?"
"지금 추리중에 있읍니다."
"음, 그래. 그럼 어디 한번 기대해 보기로 하지. 이틀 후, 이
시간에 다시 회의를 하겠어."
하과장이 일어섰다. 뒤이어 전담반 형사들도 일제히 자리를
떴다.
"윤형사!"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윤형사는 뒤돌아보았다. 전담반
반장인 권형사였다. 그는 윤형사보다 한 계급이 높은 경사였다.
나이도 세 살 위였다.
"수고가 많네. 비도 오는데, 우리 따뜻한 커피나 한 잔 할까?"
"좋지요."
두 사람은 경찰서 맞은편 랑랑다방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을씨년스런 바깥과는 달리 다방 안은 제법 흥청거렸다. 꽃다운
레지들과 노닥거리는 손님들이 적잖았고, 축음기판에서는
"부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이 구슬프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꽃무늬 잔 속의 암갈색 커피를 스푼으로 저으면서 권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틀 후에 수사요원 둘을 축소시킬 작정인가 봐."
"상부의 명령인가요?"
"그런가 봐. 계속 여러 사건이 터지는 데다 이번 사건은
군사요원들이 별도로 뛰고 있는 사건이라 두 사람에게만
전담시킬 생각인가 봐."
"설마 나더러 이번 수사에서 빠지라고 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물론이지. 우리 두 사람이 잘해 보자고 부탁할 작정이었어."
"감사합니다, 반장님."
"난 이제 반장이 아니야."
"반장이 아니라니요?"
"수사요원을 축소시키면서 반장자리를 없앨 모양이야."
"서운하시겠군요."
"서운하긴, 차라리 잘 됐지."
"병원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읍니까?"
"아무래도 그쪽에선 수확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병원직원,
입원환자, 면회 온 사람, 진찰받으러 온 사람까지 다 조사해
보았으나 허사였어. 범인은 류미옥의 입을 막으려고 십중팔구
변장을 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졌나 봐."
"그렇다면 피해자 네 사람의 신상파악을 철두철미하게 해 보는
게 상책이겠군요."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지."
"천영만 씨가 죽기 이틀 전에 곽일남 사장을 칠락관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금시초문인데. 그런데 왜 아까 수사회의 때는 그런 말을 안
했지?"
"글쎄요. 어쩐지 시기상조인 것 같아 보고하고 싶지
않았읍니다."
"곽사장은 발이 넓은 사람이지. 자민당 도당 부위원장이니까
실력도 있는 사람이고. 아마 우리 서장님은 물론 수사과장님
하고도 친분이 있는 사이이지."
"수사과장님하구요?"
"응. 아마 동향인일거야."
"그렇다면 내가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 잘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글쎄. 어쨌든 이렇게 초동수사 과정에서부터 암담한 벽에
부딪혔던 사건은 생전 처음인 것 같군."
"류미옥을 목 졸라 죽인 것은 일종의 트릭이 아닐까요?"
"수사에 혼선을 빚게 만들고, 수사력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려는 트릭 말인가?"
"예. 입만 막은 게 아니라 트릭까지 쓴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군 그래. 그 동안 수사력을 그쪽에다
엄청나게 낭비한 셈이니까. 헛다리를 짚어도 보통 헛다리를 짚은
게 아니었어."
"이번 사건에 용공분자들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읍니까? 천영만의 원적이 이북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겠지요?"
"물론이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읍니까?"
"궁여지책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앞뒤가 꽉 막힌
사건을 파헤쳐 보려면 별의별 생각을 다하는 것 아니겠어."
"정말 앞뒤가 꽉 막힌 사건인 것 같습니다."
"박해림을 만난 결과는 어떻게 되었어?"
"예에?"
권형사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가슴이 철렁했다.
"칼멘 같은 그 여자를 칼멘다방에서 만났었잖아?"
"알고 계셨군요."
"그 여자에게 무슨 혐의가 있었나?"
"아직은 찾지 못했읍니다."
"그럼 이번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 여잔가?"
"글쎄요."
"글쎄요라니? 혼자만의 비밀로 접어두고 싶은 모양이지?"
"그런 게 아니라 아직은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보고를 드리지 못했읍니다."
"그래도 무슨 냄새를 맡긴 맡은 모양이군 그래."
형사 특유의 직감으로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혀 냄새를
맡지 못했다고 발뺌해 보아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전담반에
남도록 배려해 주고 있는 선배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윤형사는 4년 전 박갑철 부부 피살사건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고,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이 그때 그 사건에
관련된 자들이 아닌가 싶어 추적중이라고 설명했다.
"역시 윤형사는 진해경찰서 터줏 대감이야. 우리
하과장님한테는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야."
"무능해서 진해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그렇게 됐읍니다."
"원 별말을. 아뭏든 뭔가 실마리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그렇다고 미스 박에게 혐의점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답더군 그래. 하지만 여자의 아름다움
뒤에는 어두운 면이 오히려 많을 수도 있어."
"선입감은 위험한 것 아닐까요?"
"글쎄. 그런 면도 없잖아 있지. 그런데 혹시 윤형사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했거나 매혹된 건 아니겠지? 노총각이니까
말이야."
"농담할 기분이 아닙니다."
"어쨌든 잘해 보자구."
"아뭏든 전담반에 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형사는 후회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권형사와
헤어진 윤형사는 후회하면서 걸었다.
입을 꽉 다물고 있었어야 했는데, 어줍잖게 속을
털어놓다니....
권형사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해림을 괴롭힐 것
같았다. 예감이 그랬다. 전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던
판국이라 어김없이 그럴 것 같았다.
괴로와하는 해림의 모습과 의기충천한 권형사의 얼굴이
엇갈리며 뇌리를 스쳐갔다.
그는 질척질척 비를 맞고 걸었다.
지훈은 칼멘다방에 없었다. 윤형사는 다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방을 나섰다.
비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진달래다방에도 지훈은 없었다. 이번에는 차도 마시지 않고
그냥 다방을 등졌다.
지훈은 분명히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보이지 않는
열쇠를 쥐고 있을 것 같았다. 직감이 그랬다.
칠락관의 명숙이를 다시 만나본 이후 지훈이 이번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느낌을 받았다.
명숙이에게서 사건에 관계되는 무슨 말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기대했던 말을 한 마디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명숙이 완벽하게 함구하고 있는 점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한통속이었어. 지훈이 그 녀석이 함구령을 내린 게 분명해.
자전거포에서나 이웃집에서 자전거를 빌어 타고 나보다 훨씬
앞서 칠락관에 들렀던 게 분명해.
그런데 왜 나는 항상 한 발이 늦을까? 멍청해서 그런가?
목줄기에 빗물이 타내렸다. 가슴 아래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랑랑다방에도 야자수다방에도 지훈은 없었다.
비에 젖은 새앙쥐 같은 초라한 몰골로는 한 다방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행여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찾아가는 다방마다 홀 안은 흥청거렸다. "홍도야 울지 마라"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꿈에 본 내 고향" 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그러나 윤형사는 다방순례를
계속했다. 흠씬 젖은 몸을 이끌고 이 다방에서 다시 저 다방으로
옮겨갔다.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락을 따라 흘러가듯이
그는 빗속을 계속 흘러갔다.
갈매기다방에서 곽일남 사장의 모습을 발견했지만 모른 척하고
돌아서 버렸다.
등대다방.해양다방.궁전다방을 차례를 훑어갔다.
읍내 여덟 개 다방을 다 돌았지만, 지훈은 어느 다방에도
없었다.
분명히 오후에 담배를 팔러 나갔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딜
갔을까.
실패였다. 어린 지훈이와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어 빗속을
찾아 헤매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시장기에 곁들여 물먹은 솜뭉치 같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통에 하숙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무렵.
해림과 지훈 남매는 중국집 2층 작은 방에 마주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따금 두 눈동자가 마주쳤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주문한 탕수육과 볶음밥은 먹는 둥 마는 둥 물려놓았다.
입맛이 있을 리 없었다. 지훈은 입안이 부르터 있었다.
"윤형사가 널 찾아갔었지?"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나를 찾아왔으니까 당연히 너한테도 갔을 거 아냐."
"누나한테는 어떤 질문을 했어?"
"알리바이를 캐물었어."
"역시 우릴 의심하고 있군."
"지훈이 너한테도 그런 질문을 했었구나?"
"응."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그랬어."
"시원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신통치 않은 알리바이라고 의문을
품더군."
"왜?"
"그 시간에 장사를 하느라고 바깥에 있었으니까, 발 달린
사람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거야."
"윤형사가 왜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아니?"
"내가 점박이 남자를 미행하는 걸 봤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
같았어."
"정말?"
"응."
"그럼 야단났구나."
"그까짓 게 뭐가 야단이라고 그래."
"아니야. 그 점박이 사내가 우리가 찾고 있던 범인이기 때문에
그래."
"어디서 확증을 찾아내었지?"
"그 점박이 사내의 앞머리엔 반달형 흉터가 있었고, 그 사내의
혈액형은 AB형이란 사실이 드러난 이상, 그때 그 사건의 범인들
중 한 놈일 가능성이 짙어."
"신문엔 그런 사실이 적혀 있지 않던데, 누구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어?"
"윤형사가 그랬어."
"그래서 우리를 더 의심하는구나."
"너 혹시 의심받을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물론이지. 근데 누나는?"
"나 역시 마찬가지야."
"참 이상해."
"뭐가 이상해?"
"환상살인극이 이상하단 말이야."
"나 역시 그 점에 대해서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우리가 생각했던 환상살인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글쎄 말이야. 나도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어. 훈이 넌
절대로 가담하지 않았겠지?"
"누나까지 날 의심하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그래."
"너 역시 누나를 의심하고 있지?"
"글쎄. 누가 해치웠든간에 범인들이 모두 처단받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야."
"훈이 너, 무슨 끔찍한 소리를 그렇게 하니?"
"엄마 아빠께서 아직 두 눈을 제대로 못 감으시고 계시다는
말을 한 것뿐이야."
"그 말, 정말이지?"
"응. 아무 염려하지 마."
"윤형사 그 사람 보기와는 다른 사람이야."
"집념이 강한 사람이지."
"응. 그리고 여간 대담한 질문을 해 오는 게 아니었어."
"누나한테 어떤 질문을 했는지 사실대로 이야기해 봐."
"진해에 돌아온 것은 복수하러 돌아온 게 아니냐고 묻더라."
"그리고 또?"
"삶의 목적은 원수 갚는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어."
"제법 웃기시는군 그래."
"복수극을 벌이기 위해 동생과 공모했을 가능성도 있을 거라는
거야."
"또 다른 말은?"
"비상한 두뇌에 축적된 경험이 많은 사람은 기상천외의
환상살인도 시도할 수 있다는 거야."
"정말 그런 말까지 다 했어?"
"응. 나더러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여자라는 말까지
했어."
"멍청한 못난이 형사인 줄로만 알았다가는 큰코 다치겠군."
"지금 한 그 말은 무슨 뜻이 담긴 말 같은데?"
"아무 뜻이 없는 말이니까 안심해. 그런데 폭사당한 그
조복주라는 사람은 누구지?"
"글쎄. 난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그런데 그 사람도 무슨
냄새가 나는 사람인가 봐."
"윤형사가 그랬어?"
"응."
"정말 아리송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 그래."
"윤형사가 훈이 너한테는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을
하지 않았니?"
"하긴 했어. 그렇지만 그렇게 심각한 질문은 아니었어.
상투적인 질문에 지나지 않았어."
"그래도 궁금하다. 어서 말해 봐."
"누나한테처럼 그렇게 심각한 질문은 해 오지 않았어.
그러니까 안심해."
"정말 안심해도 되겠니?"
"응.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진해를 떠나야겠어."
"안심해도 된다면서, 왜 진해를 떠나겠다는 거니?"
"글쎄.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내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단 말이야."
"할 일이라니? 무슨 일인데?"
"어쨌든 진해를 뜬다는 것만 알고 있어."
"학교는 어떡하고?"
"어차피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는 학교인데, 뭐."
"너,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이상할 거 하나도 없어."
"그런데 왜 갑자기 진해를 떠나겠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
봐."
"윤형사가 그날은 영장을 가지고 오지 않아 그냥 돌아갔지만,
아무래도 멀잖아 영장을 가지고 올 것 같아서 그래."
"영장이라니? 무슨 꼬투리라도 잡힌 모양이로구나."
"점박이 사내를 미행한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더니만,
증인을 찾아내겠다고 했어."
"증인을 찾아내어서 널 잡아가겠다는 거니?"
"영장을 발급받지 못하면 임의동행 형식으로라도 잡아다가
족칠 것 같아. 내 예감은 항상 거의 정확하니까."
"그런 예감이 든다면 정말 큰일이로구나."
"하지만 염려 마. 지훈에게도 비법이 있으니까."
"비법이라니? 넌 어디서 그런 어려운 문자까지 터득했니?"
"염려 마, 누나. 그건 그렇고 누나한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어. 물어봐도 되겠지?"
"무슨 일인데?"
"지난 토요일 밤에 존슨 중사가 왜 다녀갔지?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 말이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그날 밤 취해 있었어. 환상에
말이야."
"뭐, 뭐라고 했어?"
"글쎄. 이상한 환상에 취했는지, 술에 취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어. 훈이는 날 이해해 줘야 해. 더 이상 묻지 말아 줘."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알았어. 그렇게 믿고 있겠어.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가 먼저
일어나야 하겠어."
"어디로 가려고?"
"서울로 갈지, 부산으로 갈지,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 그건
비밀이야."
"......"
지훈이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좀처럼
무거운 분위기는 풀릴 줄을 몰랐다.
그들은 서로 두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은밀한 장소에서 남매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 만났다. 서로
품고 있는 의문의 매듭을 쉽게 풀어 버리려고 어렵게 만났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눌수록 피차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의문의 매듭이
불어났다.
설마 해림이 누나가?
설마 지훈이가?
그러면 어떻게?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를
만난 꼴이 되고 말았다. 의문의 꼬리 하나를 잘라 버리면 또
하나의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해림이 누나가 나 대신 십자가를 진 건 아닐까. 전쟁을
치르면서 어느 노인 목사를 만났다더니만, 무슨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지훈이가 나 몰래 함정을 파놓고 환상살인극을 연출한 게
아닐까. 어리기는 하지만, 지훈이라면 얼마든지 각본대로 일을
꾸밀 수 있지 않을까?
둘이 헤어져 각각 혼자가 되었을 때, 의혹의 먹구름은 더욱
진하게 뇌리를 덮쳤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해림은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튿날 아침 동틀 무렵.
윤형사는 지훈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사라지고 없었다.
어젯밤 늦게 들어오긴 했으나 언제 나갔는지 알 수 없다고
상준은 대답했다. 담배통은 두고 책가방만 들고 나갔다고 했다.
"짜고 대답하는 거 아니오?"
"아, 앙입니더."
"아니긴 뭐가 아니오. 당신은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단 말이오."
"내, 내가요?"
"오리발 그만 내미는 게 좋을 거요. 당신 말고 여기 또 누가
있소?"
"지, 지발 불쌍한 그 자석 좀 괴롭히지 마이소. 부,
부탁입니더. 와,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족칠라 캅니꺼?"
상준이 울상이 되어 매달렸다. 더 이상 시비를 해 보았자
수확이 없을 성싶었다.
"최씨도 앞으로 한번만 더 수사를 방해했다간 그대로 두지
않겠소."
"수, 수사를 방해했다고예?"
"내 자전거 바퀴에 펑크를 낸 것이 최씨였다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이오."
"그, 그런 짓 나는 안했심더."
"그 일 때문에 새삼스레 시비할 생각은 없소. 그 대신 지훈이
나타나면 내게 알려 주시오. 경찰서로 말이오. 알겠소?"
"예. 알겠심더."
윤형사는 돌아섰다.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역시 어린 그놈이 대담하게 사건에 뛰어들었던 것 같았다. 4년
동안이나 갈아왔을 복수의 예리한 칼을 휘둘렀던 것 같았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지 몰라. 졸지에 그처럼 비참한 일을
당했었더라면 십중팔구 복수의 칼을 시퍼렇게 갈았을 거야.
어디로 튀었을까? 마산? 부산? 아니면 서울?
새벽 기차를 탔을까? 아니면 첫 버스에 올랐을까?
수사의 포인트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당장 수사방향을 어디로
돌려놓아야 좋을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암담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다란 원통형 안에서만
허위적거리다가는 아무 일도 안될 것 같았다.
문득, 행동반경을 최대한으로 넓게 잡아야만 수사의 방향
내지는 수사의 초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내려다볼 때, 움직이는 먹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매처럼 최대한 행동반경을 넓혀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 형사란 먹이를 찾아다니는 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혼자 씁쓸히 웃었다. 윤형사가 탄 시외 버스는 뿌연 먼지를
날리며 달렸다.
낙동강 긴 다리 위에 이르자 겨우 버스 꽁무니의 뿌연 먼지가
사라졌다.
구포(龜浦)를 지나고 있었다. 낙동강은 펑퍼짐하게 누워
있었다. 강물은 흙빛이었다. 흙으로 돌아가는 전사들의 젊은
피와 푸른 강물이 어우러져 흙빛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야말로"흐르듯 담겨 있는 기나긴 강물"이 자랑스러워
보였다. 한민족의 가장 푸짐한 젖줄일 뿐만 아니라 6.25 동란의
최후의 교두보 역할을 해내었던 낙동강을 전쟁 이후 처음 접하는
감회가 뭉클했다.
구포다리를 건너자마자 버스가 멎었다. 몇 명의 손님이
내리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의 젊은 아낙들이 차창가로
몰려왔다.
"내 배 사이소! 물이 찌꺽찌꺽 나는 내 배 사이소!"
"시원하고 달콤한 내 배 사이소! 물이 찌꺽찌꺽 나는 내 배
하나 팔아 주시이소."
버스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배장수 아낙네들이 하나둘
물러섰다.
버스는 떠났다. 다시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문득, 해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쟁을 치른 후, 여자들이
한층 더 대담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렇지만 해림이 그렇게 끔찍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의 여자까지....
윤형사는 지금 천영만과 함께 찍은 사진 속의 세 여자 중 남은
한 여자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남포동의 주점 고향집을 거쳐
남항동의 주점 항구집에 들렀다.
사진 속의 세 여자 가운데 아직도 살아 있을 한 여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옥련이하고 미옥이가 참말로 죽었십니꺼?"
항구집 주모는 살기에 바빠서 신문도 제대로 못본 모양이었다.
윤형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난 후, 질문을 계속했다.
"세 사람이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면서요?"
"예. 그래서 삼총사라 안ㅋ십니꺼."
"그런데 왜 한집에서 일하지 않고 각기 다른 집에서 일을
했었는지 모르겠군요. 혹시 무슨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었읍니까?"
"그야 한집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보모 속상할 일이 자주
생기니께 그랬겠지예."
"장수미(張秀美) 씨의 성격은 어땠읍니까?"
"차분한 거 같았심더. 인사도 잘하고 붙임성도 있는
색시였십니더."
"여긴 자주 놀러 왔읍니까?"
"예. 낮에는 시간이 있으니께 자주 왔다갔다 했심더."
"혹시 장수미 씨에게는 남자가 없었읍니까?"
"글쎄예. 확실히는 모르지만, 있긴 있겠지예. 이런 데 있는
여자들은 다 남자들 덕에 사는 거 앙입니꺼."
"고향집 주인께서는 그 색시가 동래온천장 동일관에 있다고
하던데, 아주머니도 그렇게 알고 계십니까?"
"나는 수미가 동래온천장에 있다는 거밖에 몰라예."
"감사합니다."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남은 한 여자의 이름 정도 알아내는
일과 직장을 알아내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윤형사는 곧장 동래온천장 동일관으로 달려갔다.
장수미는 방금 목욕을 다녀온 듯 약간 젖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신선한 얼굴을 내밀었다.
"진해경찰서에서 왔읍니다."
"미옥이하고 옥련이 때문에 오셨군요?"
수미는 윤형사를 미소로 맞을 만큼 차분하고 여유가 있었다.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어주시겠읍니까?"
"예. 올라오세요."
"감사합니다."
"친구하고 같이 쓰는 방이예요."
수미는 묻지도 않은 말에 설명을 붙였다. 윤형사가 방안을
두루 살피는 데 대한 대답이었다.
"네 사람이 사고를 당한 걸 언제 알았읍니까?"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그런데 왜 진해에는 오시지 않읍니까? 친하게 지내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매인 몸인 데다 어디로 어떻게 찾아가야 할는지 엄두도 안
나고, 차일피일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삼총사처럼 지냈다고들 하던데...."
"죄송해요. 어쩌다 그렇게 사람구실을 못하고 말았어요."
슬픔 때문일까. 서글픈 미소를 오래도록 얼굴에 담고 있었다.
"연고자도 없는 쓸쓸한 장례식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읍니까?"
"미안하게 생각할 따름이예요."
"두 분하고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읍니까?"
"피난 나와서 알게 되었어요."
"정확히 몇 년쯤 되었읍니까?"
"3년 정도 되었을 거예요. 광복동에 있는 술집에서 옥련이를
먼저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옥련이를 통해 미옥이를
알게 되었어요."
"피난 나오셨다고 했는데, 고향은 어디십니까?"
"평양이예요. 그러나 제가 열 여섯 살 대 서울로 이사왔어요."
"그럼 서울에서 피난 나왔읍니까?"
"예."
"수복이 되었는데, 왜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이런 꼴로 어떻게 돌아가겠어요."
"혹시 남자분이 계시기 때문에 못 돌아가시는 거 아닙니까?"
"천만에요."
"그럼 미옥씨와 동거중이었던 천영만 씨는 언제부터
알았읍니까?"
"글쎄요. 약 3년 되었을 거예요. 미옥이하고 친해서 자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예요."
"그 당시 천씨의 직업은 무엇이었읍니까?"
"군속이라고 하더군요."
"군속이라니요?"
"어느 보급창 군속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잊어버렸어요."
"천씨하고 사진은 언제 찍은 것입니까?"
"바닷가에서 넷이서 찍은 사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재작년에 송도에서 찍은 거예요."
"그런데 왜 남자는 혼자였읍니까?"
"글쎄요."
"조복주 씨도 계시고, 수미씨의 파트너도 계실 텐데
말입니다."
"제게는 파트너가 없었어요."
"돌아가신 두 분보다 더 예쁜 데도 파트너가 없다니 이해가
안가는군요."
"저는 그 애들보다 쌀쌀맞아서 그런가 봐요."
"남자들의 시력이 많이 딸리는 모양입니다. 아뭏든 왜 천씨만
함께 사진을 찍었는지 모르겠군요. 혹시 조복주 씨가 찍어주신
것 아닙니까?"
"사진사가 찍은 거예요."
"그 사진에 천씨가 끼이게 된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셋이 송도에 나가 있는데, 천씨가 미옥이를 찾아왔어요."
"천씨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시면 얘기해 주세요."
"별로 아는 게 없어요."
"그럼 조복주 씨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애기해 주세요."
"역시 마찬가지예요."
"3년 전에 조씨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분도 군속이었을 거예요."
"문관 말입니까?"
"예. 어느 군부대 문관이라고 하더군요."
"천씨와 조씨가 무얼 하려고 진해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옥련이 말로는 아마 군납을 할 생각이었던가 봐요."
"네 분 중에 혹시 누구한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했던 사람은
없읍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수미씨의 파트너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혹시 그분도 진해에
계십니까?"
"제겐 그런 사람이 없다니까요."
"남자가 있다는 소문이던데요?"
"제게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숨겨둔 남자가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당황하십니까? 미모의 여자에게 남자가 있는 게
무슨 잘못입니까?"
"이런 곳에 있다고 깔보고 말씀하시는군요. 아무리 요정에
있어도 정을 줄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정을 안주는 거
아니겠어요?"
"믿어지지 않는군요. 이런 고급요정에는 돈 많은 한량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습니까?"
"웃음을 파는 것하고 정을 주는 것하곤 근본적으로 달라요.
바람처럼 스쳐가는 남자나 달빛처럼 머물다 가는 남자는 많아도
닻을 내리는 남자는 아직 없더군요."
"의미 있는 말 같군요. 혹시 천씨나 조씨의 연고자나 친구들
중에 누구 아는 사람이 없으십니까?"
"없어요."
"실례지만, 그 사건들이 일어난 날 밤에 수미씨는 어디
계셨읍니까?"
"이곳에 있었어요. 의심스러우면 확인해 보세요."
"알겠읍니다."
결국 이렇다 할 정보도 얻어내지 못하고 일어서야 했다.
아쉬웠다. 그리고 미심쩍었다. 뭔가 뒤끝이 석연치 않았다.
"수미씨는 대단한 미인이십니다. 한번 놀러와도 되겠읍니까?"
"얼마든지 오세요. 수미씨, 수미씨 하시니까, 파트너를 만난
기분이군요."
"원래 말버릇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광입니다. 정말
찾아와도 괜찮겠읍니까? 수미씨를."
"예."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와 보라는 투였다.
"나같이 못생긴 녀석도 손님으로 받아주시겠읍니까?"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통에 장수미는 머쓱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 방면에는 이골이 난 여자였다.
"일부러 찾아오시는 손님을 박대할 이유가 없잖아요."
역시 요정의 여자답게 능수능란한 데가 있었다. 방안에서와는
달리 몸을 살짝 비틀며 교태까지 부렸다.
"내일이나 모레 저녁에 한번 꼭 찾아오겠읍니다. 노총각이라
그런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어머 아직 총각이세요?"
"예. 생김새가 이 모양이라 아직 장가를 들지 못했습니다."
"저는 실력이 있고 마음씨 좋은 남자를 좋아해요. 실력있는
남자가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실력있는 남자라니요? 무슨 실력을 말하는 겁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생활력을 말하는 거예요."
"난 또 남자 구실을 잘하는 실력인 줄 알았지요."
"솔직이 그실력도 있어야죠, 뭐. 괜히 불만 지펴놓고 물러
앉는 남정네를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얼굴한점 붉히지 않고 매혹적으로 웃었다. 남자 한둘은 금방
녹여 먹을 수 있는 여자 같았다.
"희망을 줘서 감사합니다. 내일이나 모레 오겠읍니다"
"기다리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대문 앞에서 헤어졌다. 한참 걷다가 혹시나 하고
뒤돌아보았다. 뒤통수에 눈길이 와 닿는 어떤 느낌 때문이었다.
역시 수미는 대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윤형사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수미는 웃음으로 답한 후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윤형사는 진해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는
척했을 따름이었다. 우선 온천장에 들러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제일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이를 악물고 견디어
나갔다. 일종의 연단이라 생각했다. 차츰 시원해졌다. 뼛속
깊숙하게 상쾌함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 어둠은 밀려와 있었다.
그날 밤.
장수미는 생각을 바꾸었다. 오후 늦게 찾아왔던 못생긴 그
형사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내일 온다고 했는데, 혹시 그 형사하고 마주치면
어떡하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과의 약속을 변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 알고 싶었다.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우동섭(禹東燮), 그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능력이 있는
신사였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자였다.
그런데 최근 그 사람 주변에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가장 가까운 친구 두 사람이 연달아 사고를 당해 생명을
잃었다.
그 사람의 친구 둘 뿐만 아니라 자기 친구 두 사람도 함께
살해를
당했다.
그 사건은 심상치 않은 사건임에 틀림이 없었다. 형사가
찾아온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뭔가 내막을 조금이라도 알아야만 미리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미는 모든 게 갑자기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까닭모를
의혹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얼른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동섭은 가게에 있었다.
"오늘 만나고 싶어요."
"내일 간다고 했잖아."
"우리집엔 오지 마세요."
"왜?"
"오늘 밤 해동여관으로 오세요. 그때 말씀 드리겠어요."
"몇 시까지?"
"좀 일찍 가겠어요."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지. 늦어도 열한 시까지는 와야 해."
"그 전에 도착하겠어요."
누가 엿들을까 봐 간단한 통화로 약속을 앞당겼다.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할 어떤 비밀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았다.
그 형사가 왜 나의 파트너를 찾고 있을까? 아무래도 무슨
냄새를 맡은 게 아닐까? 못생긴 작은 들개처럼 냄새를 잘 맡게
생겼던데....
초조하고 불안했다. 혹시나 싶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할수록 마음은 더욱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손님들 방에 들어가도 술이 술 같잖았다. 노래도 노래
같잖았다. 일이 영 손에 잡히지 않았다.
거북이 걸음으로 밤은 깊어갔다. 일이 끝나기도 전에 적당히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밤길은 어두웠다. 수미는 일부러 어두운 골목으로 돌아갔다.
누가 그렇게 시키지도 않았지만,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따금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미행자는 없었다.
여관은 한적한 곳에 있었다. 입구에서 다시 한번 뒤를
살펴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동섭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시계바늘처럼 정확한
남자였다. 그녀가 객실 앞에 다다르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목욕부터 해."
"고마와요."
목욕물까지 준비해 놓고 기다려 준 그가 고마왔다.
수미는 허물을 벗듯 겉옷을 벗어던졌다.
욕실은 안개의 늪 같았다. 무수한 안개꽃을 피우며 욕조
밖으로 철철 물이 넘치고 있었다.
온천물에 알몸을 담갔다. 한꺼번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수선하게 흩어졌던 의식이 포근하게 정돈되어 갔다.
살그머니 욕실 문이 열렸다. 안개가 무리 지어 문쪽으로
몰려갔다. 흡사 욕실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맞이하러 나가는
것 같았다.
안개 속으로 다가서는 남자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숲의
남자였다. 두 가슴 사이의 골짜기로부터 배꼽 아래까지 무성한
숲이 길다랗게 뻗쳐 있었다. 배꼽 아래 언덕배기와 두 다리 역시
무성한 검은 숲으로 싸여 있었다.
그 무성한 검은 숲이 그녀를 온통 사로잡았다. 그녀는 무성한
검은 숲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혼을 빼앗긴 듯이 황홀하게
안개 속에서 꿈틀거리는 남자의 무성한 숲을 음미하고 있었다.
풋풋한 고향 내음이 물씬 풍기는 숲의 싱그러움과 숲의
풍성함을 어릴 적부터 그녀는 몹시 사랑했다. 기림리(基林里)
고향 마을의 우거진 숲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동섭씨는 내 고향 기림리의 우거진 숲을 생각나게 하는 숲의
남자야.
안개를 헤집고 여자의 미끈한 알몸이 더운 물에서 솟아났다.
연꽃 방울 같은 맵시로 풍성하게 솟아오른 유방이 꿈틀거렸다.
안개의 늪 속에서 두 남녀는 선 채로 만났다. 입술이
포개어지며 하나가 되었고, 두 팔이 어깨를 감싸고 자연스레
뒤엉켰다.
뭉클하고 화하고 싸하고 감미롭고 쫄깃쫄깃하고 뽀들뽀들한
멍게 속 같은 동굴 내부로 한없이 빨려들어 갔다.
안개가 거의 가라앉았을 때, 격렬한 게임은 끝났다.
남자쪽이 먼저 무너졌다. 덩달아 여자도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녀는 촛농처럼 녹아내리지 못했지만 더 이상 남자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제대로 안될 것 같았다. 모처럼 활활
불꽃처럼 타오르고 싶었는데....
그 못생긴 형사의 얼굴이 스쳐갔다. 기분 나쁜 얼굴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그 형사의 얼굴이 스쳐가다니.
"당신, 오늘 좀 이상하군 그래. 아직 못했지?"
"아니예요. 됐어요."
간단히 몸을 씻고 욕실문을 나왔다. 객실 입구에는 나이트
가운이 준비되어 있었다.
알몸에다 나이트 가운 하나만 덜렁 걸치고 마주 앉았다.
캔 맥주와 안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빈틈없는 동섭의
배려였다.
안개꽃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더운 욕탕에서 뜨거운 게임을
치르고 난 후에 들이키는 맥주 맛은 일품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만큼 상큼한 맥주 맛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날 밤만은 달랐다. 이상하게 맥주 맛이 신통치
않았다. 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로서는 남자의 전부를
받아주는 데 그쳤을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수미 기분이 이상한 것 같아. 혹시 무슨 일이
있었어?"
"어떻게 아시죠?"
"그 정도도 몰라서 되겠어. 그러잖아도 갑자기 약속을 앞당겨
오늘 밤에 만나자고 한 이유가 궁금했어."
"아까 오후에 형사가 다녀갔어요."
"형사가?"
"예. 진해경찰서에서 왔대요."
"음, 그래."
"당신 얼마 전에 진해에 갔었지요?"
"갔었지. 하지만 나는 벚꽃 구경을 갔던 거야."
"정말이세요?"
"그럼 정말이지. 내가 언제 수미한테 거짓말하는 것 봤어?"
"하긴 그래요. 그렇지만...."
"왜? 뭐가 의심스러워서 그래?"
"어떻게 한꺼번에 모두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가 있어요?"
"글쎄 말이야."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사건 같아요."
"남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동섭씨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사건이겠지요?"
"그렇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미옥이한테는 못가게 했어요?"
"병문안 말인가?"
"예."
"공연히 의심받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야."
"아무 잘못이 없는데두요?"
"세상은 내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아. 특히 형사들은 사람을
먼저 의심부터 하는 못된 습성이 배인 족속들이니까."
"아까 왔던 윤형사라는 사람, 내일 놀러 오겠다고 했어요."
"왜?"
"뭔가 미심쩍은 구석을 느꼈나 봐요."
"미심쩍은 구석이라니?"
"자꾸만 내 파트너가 누구냐고 캐묻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는 파트너가 없다고 했어요."
"잘했어."
"잘하다니요?"
"공연히 의심받기 싫어서 그래."
"두 분의 친구인데다 사건당일 진해에 있었기 때문에 의심받을
여지가 많다 그 말씀인가요?"
"음. 이상하게 일이 그렇게 되었어."
"내일 그 형사가 찾아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아요?"
"글쎄.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런데 어떻게 생긴
형사였어?"
"키가 작고 코가 이상하게 찌그러진 못생긴 형사였어요."
"윤형사라고 했나?"
"예. 혹시 진해경찰서 형사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
"그 형사, 생김새보다 무척 까다롭더군요. 유들유들하면서도
물을 건 다 물어오는 통에 대답하기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 자식이 왜 당신한테 가서 유들유들하게 굴지?"
"글쎄요. 뭔가 감을 잡은 것처럼 말을 하더군요."
"형사들이란 원래 그런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건수를
올리려고 혈안이 되어 사람을 마구 다그치는 버릇들이 있어."
"당신, 정말 그 사건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거죠?"
"날 믿어 줘. 지금까지 믿어 왔듯이 말이야."
"그 형사의 태도가 아무래도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아서
그래요."
"혹시 수미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닐까?"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차라리 그랬으면 적당히 구슬려
보낼텐데, 어쩐지 두려워요."
"두렵다니?"
"우리의 행복을 깨뜨릴까 봐서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해."
"알았어요. 그리고 내일 저녁엔 오시지 마세요."
"당분간은 수미가 내게 연락해 줘. 공연히 귀찮은 일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으니까."
"잘 알겠어요."
두 사람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옆방에서 대화를
엿들으려고 윤형사가 귀를 벽에다 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대화인 것 같은데....
그러나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벽이 두꺼운
모양이었다.
분명히 사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윤형사는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당장 옆방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수미가 날 속인 것만은 분명해졌는데, 그것 한 가지만으로
그녀를 심문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쉬웠다. 벽 하나 정도는 충분히 뚫고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도청기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갑자기 도란도란하던 소리가 그치고 침묵이 깔렸다. 벽 너머
옆방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정사를 벌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문득, 하 수사과장의 성난 얼굴이 떠올랐다. 무턱대고 기다릴
순 없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우선 쳐들어가 놓고 볼
일 같았다.
범행현장은 아닐지라도, 현장을 덮치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나중에 오리발 내밀기 전에, 기회가 왔을 때 덮치는 게 기회를
잡는 일 아닌가.
벽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의를 걸치고 복도로 나갔다.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요란스레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놀란 듯 금방 안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도, 도대체 누구야?"
남자의 굵은 목소리였다.
"임검 나왔읍니다. 문 좀 열어 보시오!"
"뭐라구요?"
출입문을 열지 않은 채 안에서 되묻기만 했다.
"경찰에서 임검 나왔단 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요."
이윽고 출입문이 열렸다. 그리고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내는 나이트 가운 차림이었다.
사내는 불만의 눈초리로 키가 작은 윤형사를 훑어보고
시큰둥하게 한 마디 내뱉았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임검 나왔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소?"
"흥, 임검 좋아하시네. 사복인데, 당신이 누군 줄 알고 검문을
받겠소."
"진해경찰서 윤형삽니다. 신분증 보여 드릴까요?"
"그 먼 데서 여기까지 임검을 나왔단 말이오?"
"글쎄 그렇다니까요."
"안면방해하시지 마시고 나가 주었으면 좋겠소. 사복경찰이
임검을 한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소리요."
"끝까지 그렇게 나오면 연행할 테니까 알아서 하시오."
"흥, 무슨 죄목으로 사람을 맘대로 연행하겠다는 거요?"
"사건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거짓말을 시킨 죄로 연행할 수도
있단 말이오."
"도대체 누가 당신한테 거짓말을 했다고 으름장을 놓는 거요?"
"방안에 있는 장수미 씨가 몇 시간 전에 내게 거짓말을 했소.
이젠 알아듣겠소?"
"용건이 뭔지 말해 보시오."
"그 여자를 만나야겠소. 그리고 당신두요."
"나까지?"
"그렇소."
그제야 방문이 열렸다. 흡사 미리 무슨 약속이나 해 놓은
것처럼.
그 동안 수미는 옷을 주워 입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윤형사가 방안에 들어가 앉기가 무섭게 수미는 얼굴 한점
붉히지 않고 따발총처럼 쏘아 댔다.
"도대체 이런 실례가 어딨어요? 내일 밤에 놀러 오신다더니만,
밤중에 여관에까지 따라와서 난리굿을 피우니 이게 무슨
행패예요. 이렇게 한다고 누가 넘어갈 줄 알아요. 어림도
없어요. 어줍잖은 공갈협박에 넘어갈 여자로 봤으면 잘못
봤어요."
기가 막혔다. 아리송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라곤 해도 그 나이에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불쌍한 여자 같으니라구.
수미의 균형잡힌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용건이 있으면 내일 우리집으로 오세요. 피곤해서
쉬어야겠어요."
"장수미 씨, 당신은 머리가 정말 좋은 여자로군요. 동일관에서
썩기는 아까운 여잡니다."
"빈정거리지 마세요."
"임기응변에 그처럼 능한 여자는 처음 봅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시고 돌아가 주세요. 우린 범법자가
아니예요."
"실례지만, 남자 손님 신분증부터 좀 봅시다."
윤형사는 뒤따라 들어와 앉은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복경찰이 임검을 할 수 있소? 대답 좀 들어 봅시다."
"이 양반이!"
윤형사는 권총이 꽂혀 있는 왼쪽 옆가슴에 손을 집어넣으면서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위협이었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 사내에게는 그 방법밖에
다른 약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 양반이라니?"
여전히 반항적으로 나왔지만, 처음보다 수그러진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무슨 냄새가 나는 사람인 것 같군. 반항하는 꼴을
보니까."
"이젠 반말로 나오네 그려."
"신사적으로 대할 때, 협조하라고 했잖아. 반항하면 쏴 버릴
수도 있어."
"이젠 못하는 소리가 없군 그래."
"도민증 내놔 봐. 화류계 여자하고 몰래 여관에나 드나드는 놈
쳐놓고 범법자 아닌 놈이 없단 말이야. 빨리 도민증 내놔!"
윤형사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뱀같이 차갑게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참다 못해 독이 오른 뱀의 눈 같았다.
"끝까지 반말투로 나오기요?"
"누가 먼저 약을 올렸어?"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시오. 모처럼 미녀하고
기분 풀이를 하려는데, 불쑥 뛰어든 사람이 있다면 형씨는
기분이 좋겠소?"
"미녀 좋아하시네. 얼굴만 반들거리면 뭣해. 속은 다
썩어빠졌는데."
"저, 정말, 말이면 다 말인 줄 알아요!"
수미가 신경질적으로 한 마디 던졌지만, 윤형사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미안하게 되었소. 알고 보면 나도 나쁜 사람이
아닐거요. 도민증은 여기 있소. 높은 자리에 계실 때 잘 좀 봐
주시오."
사내가 두툼한 지갑에서 증명서만 따로 꺼내어 보였다.
"우동섭...."
윤형사는 혼잣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우동섭의 도민증 내용을
수첩에 그대로 적어넣었다.
"무얼 그렇게 많이 적습니까?"
뻣뻣하게 나오던 사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윤형사 역시 차분하게 감정을 가라앉혔다.
"미안합니다. 실례지만, 직업은 무엇입니까?"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읍니다."
"구체적으로?"
"주류도매상을 하고 있읍니다."
"그래요? 그럼 메틸 알콜도 취급할 수 있겠군요?"
"천만에요."
"에틸 알콜로는 소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지 않습니까?"
"많이 흘러나오면 그렇게 하는 수도 있긴 있는 모양입디다."
"메틸 알콜과 에틸 알콜을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읍니까?"
"아마 어려울 겁니다. 화학적인 실험을 거쳐야만 제대로
판별이 되는 줄로 알고 있읍니다."
"그래서 의무실 같은 데서 쓰는 메틸 알콜에는 분홍색 색소를
첨가하는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데 알콜에 대해선 왜 그렇게 관심이
많습니까?"
"몰라서 묻는 겁니까?"
"무슨 말씀인가요?"
"그건 그렇고 수미씨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읍니까?"
"오래 되진 않았읍니다. 일 년 정도 되었을 겁니다."
"다 알고 묻는데, 왜 속입니까?"
"속이다니요.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사입니까?"
윤형사는 수미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만나는 단골손님일 따름예요."
수미는 딱 잘라 대답하였다.
"조사해 보면 다 나타나게 돼 있읍니다."
"얼마든지 조사해 보세요. 오랜만에 만난 손님이예요."
수미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으나 역시 묵살해
버렸다.
"두 사람 앞에서 그런 걸 묻는 내가 어리석은 놈입니다."
"주류업을 하다 보니까, 요정에 있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더군요."
"그럼 천영만 씨와 조복주 씨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읍니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누구라고 했지요?"
"옛친구들의 이름 아닙니까? 벌써 잊어버렸읍니까?"
"옛친구들이라니요? 어릴 때 친구들 말입니까?"
"4년 전 친구들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수수께끼도 아니고."
"4년 전 그 사건과 4년 전 친구들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4년 전 그 사건의 피해자 측에서 지금 교묘한 복수극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십니까?"
"몇 번 더 대답해야 알아듣겠읍니까?"
"4년 전 그 사건에 가담했던 자들은 지금 차례차례 죽어가고
있읍니다. 만약 당신도 그 사건에 관계된 사람이라면 위험하기
짝이 없읍니다. 경찰도 미처 손을 쓰지 못하는 무서운 복수극이
한창 진행중이니까요."
"무서운 복수극이라니요?"
"최근에 진해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인데, 신문도
읽어보지 않았읍니까?"
"그러고 보니, 한번 보기는 본 것 같은데, 남의 일이라 그런지
이름은 잊어버렸읍니다."
"그 사건 때문에 수미씨의 친구 두 사람이 죽었는데도, 남의
일이라고 발뺌을 할 수 있읍니까?"
"내게는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읍니다."
"제가 그런 사실은 말하지 않았어요. 말할 시간도 없었구요."
수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거짓말장이는 좀 빠져 주시오."
"뭐, 뭐라구요?"
"4월 10일 밤 열 시부터 열한 시 사이에 우선생은 어디서
뭘하고 계셨읍니까?"
"그날이 아마 토요일이었던가요?"
"예."
"집에 있었읍니다."
"증인이 있읍니까?"
"글쎄요. 대개 그 시간에 나 혼자 가게에 있기
마련이라서...."
"그럼 증인이 없는 셈이군요?"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부인이나 가족은 없읍니까?"
"삼팔따라지가 돼놔서 아직 혼자 삽니다."
"그럼 다음날 밤에도 부산에 계셨읍니까?"
"예."
"최근에 진해에 갔던 적은 없으십니까? 낮이든 밤이든."
"예."
"중앙동 가게에는 우선생 말고 누가 있읍니까?"
"술 배달하는 청년 둘이 있읍니다."
"그럼 증인이 있겠군요."
"물론이지요."
"지금까지 한 말 모두 녹음이 되었읍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말했다면 곧 탄로가 날 겁니다. 알겠지요?"
"예. 이젠 끝났읍니까?"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시작이라니요?"
"진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렇다 그 말입니다. 장수미 씨도
마찬가집니다. 알겠지요?"
윤형사는 약간 떨어져 앉아 있는 수미에게 시선을 돌리고
다그쳤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분명히 파트너가 없다고 하지 않았읍니까?"
"호호호. 나는 또 무슨 말씀이시라구요. 요정에 있는 여자가
단골손님도 없으면 무얼 먹고 살겠어요. 우리가 봉급으로 사는
줄 아세요?"
"그럼 우선생이 파트너는 아니란 얘기군요."
"좋도록 생각하시고, 빨리 나가 주세요. 잠이 와 죽겠어요."
"장수미 씨는 앞으로 조사를 좀더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왜요? 내가 죄를 지었나요?"
"두 사람의 친구가 비참하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조사도 받고, 참고인 노릇도
해주셔야겠읍니다."
"정말 기가 막혀서...."
"두 사람 모두 다음 기회에 또 뵙겠읍니다."
그냥 고삐를 늦추어 주어서는 안될 것 같아 여운을 남기고
일어섰다.
그러나 방문을 나서기 직전에 윤형사는 다시 돌아섰다. 예리한
형사의 시선에 두 남녀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우선생 손목에 흉터가 있지요?"
"예에?"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놀라긴요. 갑작스런 질문에 어이가 없어서 그랬읍니다."
"오른쪽 팔뚝을 좀 봅시다."
우동섭의 오른쪽 손목이나 팔뚝에는 아무런 흉터가 없었다.
"왼쪽 팔뚝도 좀 봅시다."
"문신 자국뿐입니다."
"무신 자국이라니요? 어디 한번 봅시다."
놀라운 일이었다. 가운 소맷자락을 걷어올리자 손목 바로
위부분의 팔뚝에 흉터가 있었다. 둥그스름한 제법 큰 흉터였다.
그러나 이빨 자국은 아니었다.
"무슨 흉텁니까?"
"문신을 새겼다가 흉해서 파낸 자립니다."
"일부러 파내었군요?"
"예. 보기가 흉해서...."
"원래는 이빨에 물린 자국이었지요?"
"처, 천만에요. 지금도 문신이 조금 남아 있지 않습니까?"
"문신이야 수술 후에 적당히 조잡하게 새겨 넣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원래는 무슨 흉터였읍니까?"
"문신을 파낸 자리라니까요."
"나무의 나이테를 알듯이 과학적으로 조사해 보면 흉터를
제거한 시기와 문신을 새겨 넣은 시기가 따로따로 노출되게 돼
있읍니다."
"사람 겁주지 말아요. 나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라구요? 어디 두고 봅시다."
싸늘한 미소를 남기고, 윤형사는 돌아섰다.
윤형사가 사라진 후,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엄습해 왔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으나 둘 중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동섭은 담배만 연거푸 빨아 댔다.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가물거리며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다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사건이었다. 삶의 수첩에서 영원히 지워 버려야 할 오점이기도
했다.
무서운 복수극이 한창 진행중에 있다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못생긴 형사의 농간에 휘말려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조복주와 벚꽃장에서 함께 한 잔 했었는데, 그게
마지막 밤이 되다니.... 천영만의 죽음을 말없이 애도하며 무척
취하도록 마셨는데 그게 영원한 이별주가 되다니....
허망했다. 그 허망함 속에 회한과 후회가 엇갈렸다. 치욕에
찌들은 인생은 결국 허무뿐인 것 같았다.
내 팔목에 흉터가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 오욕의 증표가 나를 항상 괴롭혀 왔었는데, 그 증표를 지워
버린 다음에도 지워 버린 흔적 때문에 덜미를 잡힐 염려가
생기다니....
문득, 술 생각이 났다. 술은 과거사를 파묻어 주는 약이었다.
그날 밤, 환상적인 벚꽃나무 아래서 마시던 술이 그리웠다.
간장이 녹아내리도록 퍼마시고 싶었다.
수미와 둘이서 벌거벗고 마주앉아 주거니받거니, 밤새도록
마시고 싶다. 그녀는 특히 나의 털복숭이 나체를 좋아하니까.
"수미, 우리 한 잔 할까? 벌거벗고 말이야."
"갑자기 왜 그러세요?"
여느 때와는 달랐다. 다른 때 같으면 얼마든지 동섭의 제안을
달갑게 받아들였을 그녀였다. 수미는 끼가 짙어 색깔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여자였다.
"술 좀 부탁할까?"
"잠깐만요."
수미는 일어서려는 동섭을 만류하여 그 자리에 앉혔다.
"오늘 밤은 이상하군요. 방금 왔던 그 형사때문인가요?"
"그런 녀석의 말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4년 전 그 사건이란 무슨 사건을 말하는 거예요?"
"글쎄. 모르는 일이라니까."
"며칠 전에 죽은 두 분이 옛친구인 것만은 사실이잖아요?"
"그저 오다가다 만난 친구일 따름이지. 옛친구는 무슨놈의
옛친구겠어."
"아무래도 당신 이상하군요. 그럼 무서운 복수극이
진행중이라는 말은 또 무슨 말이예요?"
"글쎄."
"검은 손길이 뻗쳐오고 있다는 말은 단순한 협박인가요?"
"사람 겁주려고 형사들이 꾸며낸 소리에 불과해."
"만약 당신이 그 사람들과 친구라는 것과 사건당일 진해에
갔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그땐 적당히 둘러붙이면 돼. 내가 범행에 가담한 건
아니니까."
"그럼 당신 팔목에 흉터가 있는 사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요?"
"글쎄.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저한테까지 속일 작정이신가요?"
"속이긴 내가 뭘 속이겠어. 잠이 달아났으니, 신나게 술이나
마시자고."
"저는 더 이상 술 못해요."
"왜? 수미야말로 갑자기 이상해졌군 그래."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내가 혹시 엉터리없는 짓을 했을까 봐서?"
"그런 점도 없잖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어요."
"진짜 이유가 뭔데?"
"방 하나만 마련해 주세요. 더 이상 손님들에게 시달리고 싶진
않아요."
"방 얻어 주겠다고 할 때는 마다하더니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지?"
"술을 많이 마시면 해롭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버, 벌써...."
"벌써라니? 속 시원하게 말해 봐."
"벌써 삼 개월째 접어들었대요."
"뭐, 뭐라구? 그럼 수미가 임신을 했단 말인가?"
그녀는 대답 대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부인과에 다녀왔어?"
"예."
"우리 수미 정말 이뻐! 정말 수고했어!"
"정말이세요?"
"그럼 정말이고말고. 이젠 멀잖아 나도 아버지가 되겠군
그래."
"정말 아빠가 되시는 게 좋으세요?"
"그럼 좋고말고."
"그렇다면 몸조심하셔야 해요. 엉터리없는 일엔 절대 가담하지
마시고 말예요. 아시겠어요?"
"꼭 약속하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겠다고 말이야."
우동섭은 두 팔을 벌리고 수미를 맞아들일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기림리 고향의 숲 속 같은
남자의 가슴에 안겼다.
7. 제7장 박쥐 人間
어떻게 눈을 조금 붙였는지 몰랐다. 뭔가에 쫓기는 꿈을
꾸다가 뒤늦게 잠이 들었는데, 목포댁이 잠을 깨웠다.
"손님이 찾아왔어요?"
"손님이라니요?"
"형사이신가 봐요."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주세요."
잠시 후 해림은 안집 마루에 앉아 있는 권형사 앞에 나타났다.
"낮잠을 즐기시는데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못 주무신
모양이지요?"
"용건이 뭔가요?"
해림은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면서 싸늘하게 물었다.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무슨 말씀인지...."
"그래요? 그렇다면 그날 밤 당신의 알리바이가 보기 좋게
깨졌다는 사실부터 알려드려야겠군요."
"그날 밤 제 알리바이가요?"
"브라운 씨하고 만났던 건 사실이지만, 일단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집을 빠져나간 사실이 드러났어요. 왜 다시 집을
빠져나갔지요?"
"글쎄요. 왜 밖으로 나갔는지 저 자신도 잘 모르겠어요."
"끝까지 그런 애매모호한 대답만 할 거요?"
"왜 밖으로 나갔는지 생각이 안나는 걸 어떡해요."
"그럼 몽유병자처럼 어둠에 끌려다녔단 말이오?"
"아마 그랬던 거 같아요."
"그렇다면 계획적이었군요."
"계획적이라니요?"
"환상살인 말이오. 동생과 환상살인을 계획했었지요?"
"계, 계획하지 않았어요."
"벌써 감이 잡혔어요. 숙녀 대접을 받고 싶으면 인간적으로
대할 때 순순히 대답하시오."
"......"
"두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당신은 집에 없었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단 말이오. 그리고 동생 역시 사건현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단 말이오."
"우리 남매는 그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어요!"
"개입하지 않았다면 왜 동생은 도망을 치고, 누나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제시하지 못하는 거요. 시원하게 대답 좀
해 보시오."
"벚꽃장에 갔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가슴을 마구 뒤흔들어
대는 유랑극단의 트럼펫 소리를 들었어요."
"증인이 되어 줄 사람이 있소?"
"글쎄요."
"브라운 씨하고 벚꽃장엘 다녀왔었는데, 또 다시 밤중에
벚꽃장엘 갔었단 말이오? 그게 말이나 되오?"
"왜 말이 안돼요. 술도 2차, 3차 마시러 다니잖아요."
"그럼 무엇하러 다시 벚꽃장에 갔는지 말해 보시오."
"누굴 만나러 갔었어요."
"그 사람 이름이 뭐요?"
"박갑철 씨와 임지숙 씨예요."
"그 분들은 뭣하는 사람입니까?"
"돌아가신 분들이예요."
"뭐라구요? 당신 사람을 놀리는 거요? 죽은 사람을 한밤중에
벚꽃장으로 만나러 가다니?"
"마음의 등불을 켜면 죽은 사람의 영혼과도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도 있단 말이예요."
"이거, 정말 사람 미치겠네!"
권형사는 자신의 왼손바닥에 오른쪽 주먹을 세차게 내리쳤다.
자기 뜻대로 심문이 진행되지 않을 때마다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배후에 미 고문관 브라운만 없어도 소신껏 심문을 할 수 있을
텐데....
하 수사과장 역시 제임스 브라운을 의식하여 신중하게
용의자를 다루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도대체 마음의 등불인지 호롱불인지 하는 게 뭐요?"
"그런 것도 모르고 수사를 하시다니 안타깝군요. 마음의
등불은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등불이예요.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욕심으로도 구할 수 없는
신성한 거예요."
"하필이면 사건이 일어난 날 밤만 골라서 마음의 등불을 켜고
벚꽃장에 나갔단 말이오. 그러잖아도 벚꽃장에 오색등불이
가득한데 말이오."
"맹물 같은 형사 나으리님의 눈에는 그런 등불밖에 보이지
않을 거예요. 당연지사예요."
"정말 이 여자가 한물 갔나?"
권형사는 미모의 젊은 여인이 안됐다는 듯이 혼잣 소리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해림은 금방 형사의 말을 알아듣고 히죽 웃었다.
"온세상이 한물 갔는데 저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맹물
같은 형사 나으리님!"
"좋소. 우리 피차 시간을 아껴서 본론만 얘기합시다.
박갑철씨와 임지숙 씨가 미스 박 부모님입니까?"
"예."
"그럼 그날 밤 벚꽃장에서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만났소?"
"못 만났어요. 마음의 등불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나 봐요."
"그날 밤 다른 사람을 만났지요?"
"흑인 병사를 만났던 것 같은데, 기억이 선명치 않아요."
"그 흑인 병사는 누구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잘 알지도 못하는 흑인 병사를 만나서 데이트를 했단
말이오?"
"전혀 모르는 흑인 병사는 아닐 거예요. 아마 케이 텐에
근무하는 병사였을 거예요. 너무 외로와 보여서 한 잔 했나
봐요."
"정말 케이 텐에 근무하는 흑인 병사였다면 이름을 말해
보시오."
"그러잖아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던 데다가 그 애들은 얼굴이
검고 비슷비슷해서 누굴 만났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적당히 얼버무릴 일이 아니란 말이오."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조사해 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조사해 볼 거요. 그럼 그 다음날 일요일
밤에는 누굴 만났소?"
"두 분을 만났어요. 마음의 등불이 밝았던가 봐요."
"부모님을 만났단 말이오?"
"그럼요."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소?"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요."
"예를 들면 어떤 대화였는지 말해 보시오."
"두 분이 내 망막에서 사라지신 후엔, 나누었던 대화도 거의
다 함께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요? 그럼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대화는 어떤 대화인지
말해 보시오."
"살인자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계셨어요. 이제 곧 꽃처럼
시들어 허무하게 떨어질 인생인데, 불쌍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하셨어요."
"흥. 대단히 편리한 만남이었군요.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벚꽃장에서 만나 그런 분부를 받았으니 말이오."
"비웃으시는 건 형사님의 자유에 속하지만, 언젠가 깨닫게 될
날이 오기를 바라요."
"나도 4년 전 그 사건에 관하여 충분히 들을 만큼 들었소.
그래서 벚꽃이 한창일 때, 비극적인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소. 아마 내가 피해자라도 당연히 복수의 칼을
갈았을 것이오. 사람은 다 같으니까 말이오."
"사람은 다 같다니요? 그건 뭔가 모르시는 말씀이예요. 이
세상엔 사람다운 사람이 있고, 짐승과 같은 사람이 있어요. 비록
짐승과 같은 사람한테 사람다운 사람이 잡혀 먹히고 있지만
말예요."
"제법 그럴싸한 설법으로 교묘하게 심문을 피하려 하지만,
나한테는 잘 안될 거요. 혹시 당신의 미모에 반한 윤형사라면 또
모르지만 말이오."
"형제를 모함하지 마세요. 그것보다 더 비열한 짓은 없어요."
"듣고 보니, 수녀 같은 말을 자주 하는군요. 비록 몸은
미군부대에 담고 있지만, 마음만은 수녀원에 가 있는 사람처럼
말이오."
"사람을 차별하고 모함하지 마세요."
"역시 윤형사하고는 통하는 데가 있군요. 하지만 권형사는
사람이 다르다는 걸 명심해 둬야 할 거요."
"권형사님은 사람다운 사람쪽에 속하는 사람이라 자부하시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착각일 수도 있어요."
"당신하고 말장난하려고 여기 앉아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귀신을 만나러 벚꽃장에 갔다는 둥 엉뚱한 소리만 하지 말고
정확한 알리바이를 대란 말이오."
"귀신이라뇨? 귀신이란 내 동생의 별명이예요.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의 영혼을 모독하지 마세요."
"정말 기가 찬 남매를 두시고 두 분이 일찍 돌아가셨군요. 그
점은 참 안됐읍니다. 그런데 그 귀신 같은 남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소?"
"귀신 같은 애라 어디서 뭘하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박지훈이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도망칠 이유가 없지
않소?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도망갈 이유는 얼마든지 있어요.
저처럼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쓸 염려도 있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잠시 몸을 피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동생이 해야 할 일이란 어떤 일을 말하는 거요?"
"훈이밖에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 애는 정말 귀신 같은
구석이 있는 애니까요."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자취를
감추었는데도 동생에게 혐의가 없단 말이오?"
"글쎄요. 지훈이를 붙잡고 직접 물어보세요."
"자신이 만만하군요. 하지만 우리 수사망을 벗어날 순
없을거요."
"제발 범인을 빨리 잡아 주세요. 괜히 엉뚱한 사람 범인
취급하지 마시고 말예요."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 한 용의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단 말이오."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았다고 인격을 모독하고 범인 취급을
하셨잖아요. 그래도 괜찮은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확한 알리바이를 내세워 보란
말이오."
"마음의 등불을 켜고 벚꽂장에 나갔던 기억밖에 없어요. 아마
아픈 상처가 도져서 그랬던가 봐요."
"그런 추상적인 설명만으로는 알리바이가 성립될 수
없읍니다."
"왜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빛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해
보려 하지 않으세요."
"실은 브라운 씨 덕분에 숙녀 대접을 받은 줄로만 아시오."
"그럼 그분 덕분에 이젠 다 끝났나요?"
"천만에요. 정확한 알리바이가 나올 때까지 계속 심문에
응해야 할 거요. 그러니까 우리 서로 시간을 단축하자는 거
아니오. 말장난은 그만하고 말이오."
"말장난이라니요? 정말 실망했어요. 원래 경찰은 껍데기만
가지고 수사를 하시는 건가요?"
"심층수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당신의 말을
다 들은 거 아니겠소. 천영만과 조복주가 4년 전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내었소?"
"그럼 그 두 사람이 우리 부모님들을 살해한 범인이었단
말인가요?"
"글쎄요. 방금 내가 물었잖소? 어떻게 알아내었느냐고."
"경찰이 알아내지 못한 범인들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겠어요."
"6.25 동란 때에 각 경찰서마다 말할 수 없는 곤욕을 치른
사실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않소."
"6.25는 경찰만 겪은 게 아니예요. 모두 겪었어요."
"그 사건이 6.25 동란 직전에 일어났다는 건 운명의 장난이라
할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런 말 역시 추상적인 거예요. 이쨌든 죄없는 사람을 붙잡아
놓고 알리바이, 알리바이 하지 마시고, 제가 범인이라는 무슨
증거를 보여 주세요. 아무 증거도 없이 사람을 범인 취급하는 건
딱 질색이예요. 범행에 가담했다면 무슨 증거가 있을 거
아니예요?"
"......"
말문이 막혔다. 얼굴값을 한다더니만 해림은 녹녹한 여자가
아니었다. 어지간히 구슬리고 다그쳐서는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을 단단한 여자 같았다. 역시 사람은 뭔가 배우고 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저도 제 알리바이에 대해서 다신 한번 차분이 생각해
보겠어요. 그날 밤엔 몸살 기운이 있어서 열이 높았는데다
술까지 마셨었고, 믿지 않으시겠지만, 이제 벚꽃장으로
나오너라, 벚꽃장으로 나오면 만날 수 있을 게다 하는
환청(幻聽)을 들었어요."
"환상살인에 환청이라. 제법 그럴싸하군."
"비꼬지 마시고, 앞으로는 증거를 가지고 불러 주세요. 이만
실례합니다."
해림은 벌떡 일어났다. 돌아서서 당당하게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권형사는 다시 그녀를 붙잡아 앉히지 못한 채,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제기랄! 똑똑한 년일수록 꼼짝달싹 코를 납작하게 눌러놓아야
하는데...."
다시 왼손바닥에 주먹을 세차게 내리친 후,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그리고 힘없이 해림의 집을 나왔다.
해림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겉옷을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꽃무늬 팬티가 흠씬 젖어 있었다. 땀에 젖은 속옷을 홀랑
벗었다. 맨살에 닿는 바람기가 상큼한 레몬처럼 신선한 감촉으로
다가왔다.
찬물이라도 몇 바가지 뒤집어써야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알몸에다 물을 끼얹고 비누칠을 하고 전신을 문질렀다.
그때 방안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었다. 이상하게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울어 댔다.
얼른 몇 번 물을 끼얹고 알몸에 타올 한 장만 덜렁 두르고 방
안으로 나왔다.
수화기를 들었다. 목포댁의 다정한 목소리가 수화기에 울려
왔다.
"미스 박, 오늘은 찾는 사람이 많군요."
"누가 또 왔어요?"
"전화 한번 받아 봐요. 아까도 왔었어요."
"예. 고마와요."
목포댁의 중계역할이 끝나자마자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박해림 씹니까?"
"예. 그런데요. 누구세요?"
"흐흐흐. 나를 모르시겠읍니까? 나는 해림씨를 보통 아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돌연 목소리가 변했다. 흡사 능구렁이의 목소리 같았다.
느릿느릿 휘감겨 오는 징그러움이 해림의 알몸을 오싹하게
수축시켰다.
하필이면 벗고 있을 때, 낯선 남자한테서 전화가 오다니.
당장 끊어 버리고 싶었다. 돌변한 목소리 자체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더 이상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해림은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훈이의 이름이 수화기 속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박지훈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역시 느릿느릿하게 느려 터진 능구렁이처럼 휘감겨 오는
목소리였다.
"우리 지훈이가 어디 있는 줄 아세요?"
"부산에 있읍니다. 그런데 경찰에 쫓기고 있읍니다."
"무, 무엇 때문에요?"
수화기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지난 3월, 누나와 함께 중국집에서 환상살인을 모의하고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구요?"
"아, 그렇게 놀라실 것까지는 없읍니다. 그날 중국집 2층에서
두 남매가 복수극의 각본을 짰다는 사실은 나 한 사람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읍니다."
"복수극의 각본을 짜다니요?"
"환상살인극 말입니다. 어쨌든 당신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한
나는 그날 밤도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당신이 나가는 것을
보고 당신이 어떤 남자를 만나는가 알고 싶어서 당신이 들어간
중국집 2층 바로 옆 다락방에 숨어들어 갔읍니다."
"거짓말 마세요."
"아, 2층에는 때에 따라 미닫이로 가로막을 수 있는 큰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 말씀이시군요? 그렇지만 당신이 들어간 방
위쪽에 다락방이 있는지 없는지는 오늘이라도 당장 확인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내가 왜 그런 걸 확인해 봅니까?"
"어쨌든 종업원들이 잠을 자기도 하는 조그마한 다락방이 하나
있는데, 나는 재수좋게 그 방에 들어가 종이로 밀봉해 놓은
환기통을 면도칼로 적당히 물통형으로 긋고 당신과 당신 동생을
내려다볼 수 있었읍니다. 그러니까 당신 편에서 볼 때는
천정이나 다름없는 벽 꼭대기가 되기 때문에 알 도리가
없었겠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입이 있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몰랐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능구렁이 같은 사내가 금방 천정에서 기어내려와
자기 알몸을 휘감을 것 같았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흥미롭군요."
"나는 박쥐 같은 인간입니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이면
녹음기를 품에 안고 해림씨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박쥐
말입니다."
"......"
"왜 그런 못된 짓을 하느냐구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해림씨가 너무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 있지 않습니까?
나는 박쥐이기 때문에 해림씨 남매의 밤 말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
"남매의 대화가 성능 좋은 미제 녹음기에 녹음이 잘되어
있읍니다. 미제가 얼마나 좋은지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요.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도대체 무얼 요구하는 거예요?"
"물론 경찰에 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감옥에 들어가 늙어 죽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니까요."
"우리 남매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그것만은 명심해
두세요."
"그럼 나 같은 박쥐 인간하고는 거래를 하기 싫으시다 그
말씀이십니까?"
"무얼 바라세요?"
"몰론 당신 자신을 주신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뭐, 뭐라구요?"
"죄송합니다. 고정하십시오. 어찌 나 같은 박쥐 인간이
당신같이 아름다우신 분을 영원히 달라고 요청할 수 있겠읍니까?
우선 오늘은 잠시 얼굴만이라도 뵙기를 원합니다."
"거래는 단 한번으로 끝냈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얼굴만 뵙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단
한번의 거래에 대해서 간단히 의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낮
말은 또 새가 들을지 모르니까요."
"......"
"대답이 없으신 것을 보면 수긍하시는 쪽이라 생각하고 말씀
드리겠읍니다. 진달래다방 아시지요?"
"예."
"삼십분 후인 오후 2시 20분까지 진달래다방으로 나오십시오.
신문지를 왼손에 말아쥐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바로 납니다.
그 사람이 말아쥔 신문지를 오른손에 옮겨쥐고 밖으로 나가면
3분 후에 따라나오십시오. 환상의 꽃이 지고 있는 꽃여울을
거슬러 북상하면서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흥정이 이루어 것
같습니다. 삼십 분 후에 나오시겠읍니까?"
"생각해 보겠어요."
수화기를 찰깍 내려놓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풍성한
젖무덤 사이에 식은땀이 송알송알 맺혀 있었다.
몸둘 곳을 몰랐다. 우리 안에 갇힌 작은 짐승처럼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자신이 알몸인 것을 깨달았다.
목덜미와 젖가슴 사이의 땀을 닦아내고 속옷을 챙겨 입었다.
얼굴 화장을 고칠 겨를도 없었다. 얼른 옷을 챙겨 입기가
무섭게 전화기에 매달렸다. 안집 전화를 연결하여 필요에 따라
쓸 수 있도록 만들어 놓기를 잘 했구나 싶었다.
몇 군데 연락해 보았으나 제임스 브라운과는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는 꼭 알려야 하는데....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알리라고 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목포댁에게 부탁해 놓고 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얼굴이 새하얗군요. 왜 그래요, 미스 박?"
"아무것도 아니예요. 미안하지만, 브라운 씨한테 연락을 해서
제가 진달래다방에 나갔으니 제 뒤를 좀 보살펴 달라고 부탁해
주세요."
"그렇게만 말하면 되나요?"
"예. 지금이 오후 2시니까 늦어도 2시 20분까지 나와야만 날
만날 수 있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어요. 염려 말고 잘 다녀와요."
"매번 정말 고마와요."
대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정신을
일깨웠다.
아무래도 무슨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휘적휘적 걸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흡사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 남매의 이야기를 엿듣다니, 단순히 나를 따라다니다가
들은 게 아니라 계획적으로 엿들은 게 아닐까.
머리속이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 함정을 파놓고 우리 남매를 거기다 몰아넣으려는 수작은
아닐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긴장감을 풀어 놓을 수가 없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굳은 표정으로 다방 문을 밀고 들어섰다.
마담이 아는 체했지만, 미소도 띄지 못하고 목례만 했다.
시켜 놓은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초조와 불안 속에 시간이
흘렀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으나 왼손에 신문지를 말아쥐고
커피를 마시는 남자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었는데, 왜 나오지 않고 가슴만 태울까.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다방에는 손님이 많았다. 꽃철이라 외지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거듭 다방 안을 살펴보았으나 그런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다방 안 어디에선가 미지의
사내가 뱀 같은 눈으로 자기를 훔쳐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방에 오긴 왔는데, 약속대로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냥
죽치고 앉아서 나를 훔쳐보고 있는 건 아닐까.
뱀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기를 쏘아보고 있을 것만 같아
가슴이 물방아처럼 쿵덕거렸다.
바로 그때, 다방 입구에 브라운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미 2시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해림은 아까 목포댁에게
부탁한 것과는 달리 은발의 신사 브라운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어떻게 된 거요.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차나 한 잔 하세요. 밖에 나가서 말씀 드리겠어요."
"해림은 차 마셨소?"
"예."
얼굴 없는 미지의 사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다방에
나타났는데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놓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다방을 나섰다. 진달래다방 앞이 바로 큰
개천이었다.
장복산 가마니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읍내 한복판을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해마다 4월 중순에는 낙화하는 벚꽃으로 꽃여울이 되는 낭만의
개천이기도 했다.
진달래다방 앞에서 개천을 따라 남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면 옥포만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언젠가 지훈이 마구간의 오물과 생활 하수로 똥물이 되다시피
한 개천물에 물고문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지점은
옥포만에 이르기 직전의 지점이었다.
반면에, 진달래다방 앞에서 개천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개천물은 맑아졌다.
두 사람은 꽃여울을 따라 천천히 북쪽으로 올라갔다.
"미스터리예요."
"미스터 리라니, 누구 말이오?"
걸음을 멈추며 브라운이 파란 눈으로 물었다.
"알 수 없는 일, 미스터리(mystery)란 말예요."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꽃바람이 해림의 긴
머리카락을 흩뜨리고 지나갔다.
해림은 그때까지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흡사 미행을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숨김없이 자초지종을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브라운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해림의 눈빛에는 어떤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브라운은 그녀의 내면에서 커다란 격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한 것 같았다. 그녀의 어깨를 꼬옥 감쌌다가 풀어놓아
주었다. 두려워 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말보다 몇 갑절이나
진지한 행동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해림은 미묘한 위로를 받았다. 가슴의 고동이 차츰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역시 브라운은 단수가 높은 남자였다. 이상하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아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도 듣지
않고도 위로부터 해오는 브라운이 고맙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역시 비밀은 비밀로 접어두어야 할 것 같았다. 많은
수수께끼를 내포하고는 있지만....
바람 따라 꽃잎이 지고 있었다. 깊숙한 개천바닥으로 떨어지며
꽃잎은 몸부림치고 있었다.
바람이 일렁거려도 봄볕은 따뜻하고 풍요로왔다.
꽃의 임종을 지켜보며 꽃여울을 따라 한없이 올라갔다.
진해여중을 지나 숲으로 둘러싸인 국립양어장을 옆으로 끼고
올라갔다. 개울물은 수정같이 맑고 곱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현듯 지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국립양어장 무성한 숲 속을
훈이와 함께 거닐던 일이 되살아났다.
국립양어장에서 남매는 숲과 호수와 안개와 비와 햇살과
무지개와 찔레꽃을 만난 적이 있었다. 숲은 환상의 은빛 날개를
퍼득이고 날아와 머물다 가는 곳이기도 했었다. 숲은 한없이
신선하고 신비롭고 푸르고 무성했었다. 두 남매의 아름다운 녹색
꿈처럼.
그 애는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아름다운 꿈을 가졌던 그
애가 왜 진해를 떠났을까?
권형사의 말대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도망친 것일까?
늪 속으로 빠져들 듯 다시 사건 속으로 빨려들고 있는 자신을
해림은 발견했다.
역시 우리 두 남매는 그 비극적인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다소곳이 마음의 등불을 밝히면 온갖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는데, 한갓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말이었을까?
브라운은 해림이 당기는 보이지 않는 줄에 쉽게 걸려들어 오지
않았다. 입이 무겁고 무서운 남자였다. 감정을 숨기는 데에는
철저히 훈련된 해림이었으나 그에게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역시 브라운은 CIA 같은 데 소속된 첩보요원일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입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다른 일에는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었다. 때로는
다정다감하기까지 했던 그였다.
그런데 어떤 사건에 연유된 대화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해림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편이 되고,
브라운은 미소를 머금은 채 끝까지 듣기만 하는 편이 되기
일쑤였다.
혹시 브라운도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되면 누구든지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는 선입감
때문에....
답답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우뚝 걸음을 멈추고
브라운을 올려다보았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꼭 연락을 취하라고 하셨잖아요.
언제나 듣기만 하시고 왜 한 마디도 하지 않으세요? 해림일
의심하시는 거예요?"
"의심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소?"
"그럼 뭐예요? 항상 듣기만 하시고 일언반구 가타부타 한 마디
없으셨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일에 무슨 말을 함부로 늘어놓겠소."
"그만큼 제가 당하고 있는 일에 관심이 없으신 거죠?"
"아무 일에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솔직이 말해 보세요. 해림이를 의심하시는 거죠?"
"글쎄요. 그 과정에 많은 수수께끼가 깔려 있는 것 같군요."
"결과적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때문에 해림이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씀이시군요."
"솔직이 말해서 뭔가 숨기고 있는 일이 있는 것 같군요.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말이오."
"그럼 왜 묻지도 않으세요?"
"마음속의 비밀을 내가 묻는다고 다 말해 주겠소. 그리고
남동생이 도망친 점이 납득이 가지 않아요."
"당신은 아직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모르시는군요. 해방된 지
십 년도 지나지 않은 이땅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가 짙게
깔려 있고 빨갱이들이 날뛰고 폭력이 난무하고 있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 폭력이 두려워서 동생이 도망쳤단 그 말이군요."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폭력이 동생을 도망치게
만들었을 거예요. 당신은 동생까지 의심하고 계셨군요."
"수수께끼의 연속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소. 왜 그 남자가
전화만 해 놓고 나타나지 않는지 이상스럽지 않소?"
"그거야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바로 그 이유가 수수께끼 중의 하나란 말이오.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그 남자를 해림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점도 이상스럽지
않소.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소."
"이론적으로는 그래요. 그러나 막상 일을 당해 보세요. 그리고
연약한 여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세요. 이론처럼 그렇게
당당하게 현실을 받아들일 순 없을 거예요."
"또 한 가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처음 사건이 일어났던 날
밤, 존슨을 만나고도 형사들에게는 누구를 만났는지 잘
모르겠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점이오. 왜 존슨을 만났던
사실을 숨기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존슨을 만난 사실을 알고 계셨군요.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사생활에 관한 문제예요. 공연히 저 때문에
존슨이 어려움을 당할까 봐 말하지 않았을 따름이예요.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혹시 존슨 중사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 건 아니겠지요?"
"존슨까지 의심하고 계시군요."
"해림, 당신의 부탁이라면 존슨은 무슨 부탁이든지 들어줄
사람이니까 하는 말이오."
"우리 지훈이하고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존슨은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존슨은 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보호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예요."
"존슨은 그 다음날 밤에도 귀대하지 않고 진해에 머물러
있었지요? 해림을 보호하기 위해서 머물러 있었던 겁니까?"
"그렇게 따지고 묻는 건 질색이예요. 존슨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해림은 갑자기 돌아서서 빠른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 무렵.
진해경찰서 수사과장실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어수선했다.
경찰서장과 수사본부장 앞으로 배달되어 온 두 통의 투서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특히 경찰서장 앞으로 배달된 투서가 하 수사과장을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하과장은 얼굴이 상기된 채 선불 맞은 짐승처럼 연신
씩씩거리다가 소리쳤다.
"도대체 어떤 놈의 장난이지? 지금까지 수사를 해 보았다면
금방 알 수 있잖아? 어디 한번 속 시원하게 대답해 봐."
수사과장실에 불려들어온 두 형사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윤형사!"
"예."
"누구의 짓인지 모르겠어?"
"예. 현재로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읍니다."
"전담반에 특별히 자원해서 들어와서 지금까지 뭘 했어?
수사를 했어, 여행만 하고 다녔어?"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뭔가 실적을 올려야 인정을 해줄 거
아니야?"
"면목이 없읍니다."
"권형사는 어떻게 생각해? 도대체 누구의 짓 같나?"
"아무래도 박지훈이 그 녀석의 짓 같습니다."
"그 이유는?"
"어린 놈이지만, 그놈의 별명은 귀신이라고 합니다.
경찰수사에 혼란을 유발시키려고 귀신 같은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
"그 어린 놈이 어떻게 내 이름까지 알고 나를 모함하는 투서를
할 수 있느냐 말이야."
"그래서 별명이 귀신인 것 같습니다. 누가 붙여 준 별명이지
모르겠읍니다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 수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범인의 교활한 함정일 가능성이 짙어."
"그 꼬마녀석이 범행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읍니다."
"그럼 속히 잡아들여야 할 거 아니야. 베테랑 형사 둘이서 그
어린놈 하나를 못 잡아들인단 말야. 빨리 잡아들여서 필체를
감정해 봐."
"정보원들에게 부탁을 해 놓았지만, 워낙 귀신 같은 놈이라
보고도 못 잡았답니다."
"보고도 못 잡았다고?"
"예."
"그놈의 투서 때문에 내가 서장님한테 얼마나 호되게 당한 줄
알아. 놈을 당장 잡아들여!"
"예."
"두번째 투서에 대해서 윤형사는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또 흐릿하게 나오는군 그래."
"죄송합니다."
"자네하곤 손발이 전혀 안맞는 것 같군 그래. 권형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두 남매가 범인일 가능성이 짙다는 건가?"
"예. 두 사람 모두 범행동기가 충분한 데다 알리바이까지
성립되지 않았읍니다. 그리고 지훈이 그놈은 미군부대가
이동하면서 남겨놓고 간 수류탄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났읍니다."
"증거물을 입수했어?"
"증거물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수류탄을 여러 개 빼돌리는
걸 목격한 사람을 찾아내었읍니다."
"음, 그래."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흑인 병사가 두 남매의 일을 돕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 그래. 그렇다면 얼마든지 범행을 저지를 수도 있었겠군
그래."
"예, 그렇습니다."
"그럼 그 흑인 병사에 대해서도 계속 추적해 봐."
"예."
"그런데 두 남매가 범인일 가능성이 짙다는 투서는 누가
했을까?"
"그 점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윤형사는 어떤 사람의 투서라고 생각해?"
"글쎄요."
"중대한 정보이긴 하지만, 정보제공자가 제보의 출처는 절대로
비밀로 해 달라는 전제조건을 붙였단 말이야. 그리고 비밀만
지켜준다면 앞으로도 세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비밀, 비밀하는 게 뭔가 떨떠름하지 않아?"
"떨떠름합니다."
윤형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사과장의 말에 맞장구를 쳐
버렸다.
"뭐가 떨떠름한가? 구체적으로 말해 봐, 윤형사!"
"첫째, 비밀에 붙여달라며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숨긴 점이
떨떠름하며, 둘째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으려는 어떤 음모가 투서
속에 깃들어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세째, 결정적인 증거가 될
만한 단서를 제공해 주지 못한 점이 이상하고, 네째 정보를
제공한 대가를 바라는 점이 떨떠름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래. 권형사 생각은 어때?"
"저는 아무래도 첫 투서이기 때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서투른 내용을 담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현재로선 두 남매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란 그
말인가?"
"예."
"그런데 박해림한테서는 아직 이렇다 할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했잖아."
"곧 찾아내도록 하겠읍니다."
"제발 날 실망시키거나 궁지에 몰아넣지 말고 빨리 범인을
가려내 봐. 오늘 수사회의는 이 정도로 끝낼 테니까."
하과장의 말이 끝났으나 윤형사는 의자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지훈이란 놈이 진해에 잠입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함께 안
나가보겠어, 윤형사?"
권형사가 함께 나가기를 바랐지만, 윤형사는 응하지 않았다.
"저는 다른 쪽으로 파고들어 보겠읍니다."
"다른 쪽이라니?"
"우선 투서내용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고 나서
결정하겠읍니다."
"뭐라고? 투서내용을 또 읽어보겠다고?"
하과장이 금방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윤형사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두 종류의 투서 모두 보통 투서가 아닌 것
같아서 암기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윤형사는 내가 골탕먹는 게 재미있어서 그러는 게지?"
"그럴 리가 있겠읍니까? 과장님의 존함에 먹칠을 한 놈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이 부하된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래. 어쨌든 수사자료가 될 테니까, 다시 한번 검토해
봐."
달갑잖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별로 어렵잖게 허락이 떨어졌다.
윤형사는 두 종류의 투서를 하과장한테서 넘겨받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필체가 틀렸다. 원래의 필체를 감춘 듯 일부러 조잡하게 쓴
점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필체였다.
경찰서장 앞으로 온 첫번째 투서를 속으로 읽어 내려갔다.
진해경찰서장님께
안녕하십니까. 최근 진해에서 일어난 기묘한 두 사건의
배후에는 곽일남 사장과 하만태 수사과장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읍니다.
지난날 빨갱이 앞ㅈ이들이 경찰서 내부에 침투했을 때에도
용감한 읍민들의 제보로 일망타진한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상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혹시나 하고
뒷조사를 부탁드리겠읍니다. 수고하십시오.
용감한 읍민의 한 사람 올림
뒤이어 수사본부장 앞으로 날아들어온 투서의 내용을 들여다
보았다.
수사본부장님 귀하
수고가 많으십니다. 진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벚꽃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몸서리치는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펜을 들었읍니다.
수사당국이 범인색출에 박차를 가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제법 쓸 만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박해림과 박지훈 남매를 체포하여 심문해 보시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남매는 피살당한 두 사람과 원한관계에 있었읍니다.
심층수사를 해 보시면 어렵잖게 사실이 사실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정보의 출처를 절대 비밀로 해주시고,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 주신다면 남매를 체포하고도 남을 수 있는 결정적인
정보를 멀지않아 제공해 드릴 용의가 있읍니다. 박해림에게는
치명적인 증거가 될 결정적인 자료를 본인이 확보하고 있읍니다.
만약 이 사실을 그 여자에게 알리고 상당한 대가를 요구한다면
액면은 훨씬 더 올라가겠지만, 그러한 방법은 합법적인 건전한
방법이 아니므로 사용하지 않기로 했읍니다.
다음 기회에 조용히 연락드리겠읍니다. 이만 줄입니다. 수고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제보자로부터
가슴에 와 닿는 게 없었다. 허공을 울리는 소리에 불과한 것
같았다. 투서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가짜 같았다.
해림 남매를 범인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투서는 단순한
제보자의 투서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함정이나 음모가 깔려
있는 투서 같았다.
내가 두 남매에게 연민의 정을 품고 있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판단을 다시 한번 되씹어 보았으나 일방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읍내 유지인 곽사장과 하수사과장에 대한 투서는
한번쯤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하과장이 꼬나물었던 담뱃불을 비벼끄고 다가왔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나?"
"발견하지 못했읍니다. 그러나 궁금한 점이 있읍니다."
"궁금한 점이라니? 내게 대해서 말인가?"
"예.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거든 얼마든지 물어보게. 그러잖아도 엉뚱한
투서가 날아들어온 후에 윤형사 자네하고 허심탄회하게 툭
털어놓고 이야길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저하구요?"
"뭐가 궁금한가? 날 위해서 솔직하게 털어놔 봐."
"지금 읍내 다방가에 헛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헛소문이라니?"
"일종의 유언비어지요. 과장님과 곽사장님이 이번 사건에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단 말입니다."
"난 전혀 몰랐는데. 그렇다면 투서내용 그대로군 그래."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상한 소문이 떠돌게 되었는지
모르겠읍니다. 뭔가 짚이는 일이 없으십니까?"
"글쎄, 그 담배장수 꼬마녀석이 귀신 같은 놈이라더니, 다방에
돌아다니면서 헛소문을 퍼뜨린 게 아닐까?"
"그 녀석이 마음만 먹었으면 그런 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겠지요."
"정말 귀신 같은 놈인데!"
"그 녀석에게 귀신이란 별명을 붙이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글쎄 말이야. 내가 그런 말을 해 놓고도 귀신 같은 놈이라고
탄복을 하고 있으니, 뭐가 잘못 됐어도 많이 잘못 됐군 그래."
"그런데 만약에 그 녀석이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다고 해도
말입니다, 전혀 근거 없는 헛소문을 퍼뜨릴 순 없지
않겠읍니까?"
"그건 그래."
"그게 바로 문젭니다."
"문제라니?"
"지훈이와 상준이라는 청년이 오래 전부터 곽사장을 미행하고
다녔읍니다."
"정말?"
"예. 그리고 그 미행 결과 녀석들은 뭔가 나름대로의 수확을
얻었던 것입니다."
"음, 그랬었구나. 그런데 그 수확이란 게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적어도 곽사장이 4년 전 그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을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인데!"
"이건 물론 추립니다. 허지만 십중팔구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추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미행과정에서 나를 몇 번 보았겠군 그래."
"그렇습니다. 과장님은 곽사장님과 친분이 두텁지 않습니까?"
"그 양반하고는 가끔 술자리를 같이하는 셈이지."
"그 양반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고향 선배님이지."
"동문(同門)이십니까?"
"그런 셈이지."
"그렇다면 지연(地緣)에다 학연(學緣)까지 있으신 셈이군요?"
"그래서 가깝게 지내오고 있지. 솔직이 말해서 사회적 지위도
상당한 사람이니까."
"과장님께서 저를 융통성 없는 형사, 실적을 못 올리는 형사,
과장의 지시를 어기는 형사로 낙인 찍으신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겠읍니다."
"맞아. 내가 처음 부임해 왔을 때 그런 일이 있었지. 곽사장의
간장공장과 소주공장의 비리를 들추어내려 했을 때, 적당히
알아서 하라고 슬쩍 말한 적이 있었어."
"솔직이 털어놔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상 감사는 내가 자네에게 해야겠네. 지연과 학연이
사람잡는 끄나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준 사람이
바로 자네니까."
"한 통의 투서가 전화위복의 역사를 일으켰군요. 어쨌든
오늘은 기쁩니다. 과장님과 저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게
되었으니까요."
"나 역시 크게 깨달았어. 자칫 잘못하여 소경 노릇을 더
했다가는 모가지 달아날 뻔했으니까."
"아무래도 그 투서는 우리 서(署)의 내막을 잘 아는 자의 소행
같습니다."
"그럼 박지훈이가 아닐 수도 있다 그 말인가?"
"예."
"그건 그렇고, 곽사장이 정말 4년 전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까?"
"과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6.25 전에 월남을 하긴 했지만,
해주(海州)에서 내려온 지 불과 수년 만에 부자가 된 점에
대해서 말입니다."
"글쎄. 부모님들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없이 큰 부를 이룬데
대해서 그저 감탄하고 존경해 왔을 뿐인데, 지금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뭔가 꺼림칙한 생각이 드는군 그래."
"지금은 공장을 팔아넘겼지만, 제가 알기로는 3년 전
소주공장을 할 때, 곽사장은 에틸 알콜로 대량의 소주를
제조하여 부산.마산에까지 내다 판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그때 떼돈을 벌었을 겁니다. 그런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전에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엄청난 짓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추리나 상상력만으로 사람을 범법자로 몰아붙일 수는
없지 않는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에 피살당한 천영만 씨와
조복주 씨가 외지 사람인데도 이따금 곽사장과 비밀리에 요정
같은 곳에서 만난 사실이 드러났읍니다."
"뭐, 뭐라구? 그게 정말이야?"
"예, 외지 사람이 그 사람들이 왜 비밀리에 곽사장과 접촉을
시도해 왔을까요? 무슨 심상찮은 거래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갈수록 태산이군. 어쩔 수 없이 유력한 용의자 리스트에
곽사장을 올려놓아야겠군 그래."
"곽사장은 과장님께서 직접 다루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야, 난 안돼. 오해를 살 여지도 아직 남아 있고 해서
말이야."
"오해를 살 여지가 남아 있다니요?"
"3일 전에 우연히 미 고문관실 브라운을 만났는데, 지나가는
말이지만 심상찮은 질문을 해 왔어. 자민당 곽부위원장님과 어떤
사이냐고 말이야."
"브라운이 그런 질문을 했다구요?"
"응. 그랬어."
"그렇다면 그쪽에서도 암암리에 수사를 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오늘 투서를 받고 보니 그런 느낌이 강하게 일어나더군 그래.
비중이 큰 사건인 데다 자기 애인이 용의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
사건이라 관심이 많은 것 같았어."
"군 수사기관에서도 뛰고 있는 것 같고, 미 고문관실에서도
무관심하고 있진 않은 것 같으니 어떡하면 좋겠읍니까?"
"우리쪽에서 더 열심히 뛰는 수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잘 알겠읍니다."
"곽사장에 대해서 그 밖에 혐의가 될 만한 점은 없나?"
"아직 그 정도밖에 밝혀내지 못했읍니다."
"음, 그래. 나도 좀 나서보아야겠군 그래."
"제 생각으로는 당분간 곽사장 댁으로 통하는 전화를 모두
체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청을 하자는 건가?"
"예. 수사본부장님 명의로 전화국장님에게 부탁을 드리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꼭 그랬으면 좋겠나?"
"예."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시도해 보겠네. 그리고 그 밖에 내가
모르고 있는 일은 없나?"
"부산쪽에 용의자가 두 사람 있읍니다."
"누군데?"
"우동섭이라는 사람과 장수미라는 여잔데 냄새가 나는
자들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예."
윤형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두 용의자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하과장은 부하 형사의 말을 모두 들은 후, 오랜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까지 내가 윤형사를 잘못 대접해 왔어."
"황송한 말씁입니다."
"새로운 용의자가 여러 명 나타났으니, 사건은 멀잖아 해결될
것 같군 그래. 사건이 빨리 해결되어야 나도 누명을 빨리 좀
벗지."
"너무 염려 마십시오."
"어디로 갈 생각인가? 부산으로 가보겠나?"
"예. 그 두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나야겠읍니다."
"출장비 좀 타 가지고 가게."
"괜찮습니다."
"시키는 대로 해."
"예. 감사합니다."
그 동안 수사과장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어 오금을 제대로
펴지 못했던 윤형사도 이날만은 달랐다.
그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으로 수사과장실을 나왔다.
8. 제8장 검은손
마지막 몇 잎 남은 벚꽃이 지고 있었다. 꽃이 지는 자리에
연초록 움이 돋아났다.
저녁놀이 서럽게 물들고 있었다. 꽃가지를 어루만지다가
서럽게 사위어 가고 있었다. 환상적인 꽃무리도 신랑의 얼굴
같은 태양도 마지막 가는 길은 서러운 모양으로 가는 것 같았다.
권형사는 칠락관 정문이 비스듬히 보이는 지점의 벚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땅거미가 서서히 기어들고 있었다. 사방은 금세 땅거미에
침식당하여 어둠으로 물들었다.
칠락관의 현관에 매달린 외등이 외로왔다. 초저녁이라 요정에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뿌연 외등 밑에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금방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더욱 민첩하게 움직였다.
명숙이었다. 손에는 큼직한 물건을 하나 들고 있었다. 명숙의
모습이 거리의 불빛에 완연히 드러났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 권형사는 미행하기 시작했다.
명숙은 중원 로타리를 가로질러 제황산쪽으로 황급히 걸었다.
슬쩍 뒤를 돌아다보고는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자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제황산 아래 대로를 끼고 천주교회 쪽으로 올라갔다.
거창한 교회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쪽문은 빠끔히
열려 있었다.
명숙은 교회당과 유치원 사이의 마당을 지나 마리아상이 있는
산 밑으로 들어갔다.
산 밑에는 굴이 있었다. 굴 앞에는 하얀 마리아상이 서
있었다. 마리아상 밑에는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리아상
정면 기도대 위에도 촛불이 두 개 간들거리고 있었다.
명숙이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았다. 뭔가를 빌고 있었다.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동시에 기도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명숙이 몸을 일으켰다.
"고맙다, 명숙아."
어둠 속의 목소리는 지훈의 목소리였다.
"별일 없었니?"
"응. 명숙이 너도?"
"응. 먹을 걸 준비해 왔어."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지?"
"응."
"손 한번 잡아보자."
"싫어."
"이리 와."
말로는 싫다고 했지만, 명숙은 지훈이 이끄는 대로 마리아상
뒤 굴쪽으로 따라갔다.
"날 믿어 주어서 정말 고마와."
"또 그 소리."
"오늘은 뭔가 보답해 주고 싶어."
"뭘로?"
"눈을 감아 봐. 기도하는 맘으로."
"응. 알았어."
어둠 속에 선 채로 명숙이 눈을 감았을 때였다. 지훈의 입술이
다가왔다. 거친 숨소리를 몰고.
본능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두 개의 입술이 하나가 되었다.
입 안이 가득차 올랐다. 감미롭고도 상큼했다. 가슴까지
뭉클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바로 그때, 포근한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가 굴 속을
뒤흔들었다. 마리아상 바로 뒤쪽에서 어린것들이 최초의 키스를
나누다니. 성모의 노여움을 산 것인지도 몰랐다.
"박지훈, 이놈!"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난 진해경찰서 권형사다!"
검은 그림자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도망갈 생각은 아예 말아."
"제가 뭘 잘못 했길래요?"
"두 손을 내밀엇!"
어둠 속에서 은빛 차가운 물체가 번쩍거렸다. 수갑을 채울
모양이었다.
"영장 가지고 왔어요?"
"영장 좋아하네. 넌 이제 독안에 든 쥐새끼야. 도망칠 구멍이
없어."
"알겠어요. 수갑을 채우세요. 하지만 후회하실 거예요."
지훈이 두 손을 내밀었다. 도망갈 구멍이 없어 포기한
모양이었다. 굴이라야 깊이가 5미터도 안되는 곳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귀신도 별 수 없군 그래."
권형사가 검은 그림자를 몰고 정면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명숙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이 소리쳤다.
"괜히 까불면 너도 혼날 줄 알아."
은빛 수갑을 쳐들고 권형사가 성큼 다가섰다. 반면에 명숙은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섰다.
아아, 그러나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좁은 굴 속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참으로 순식간에 벌어진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지훈이 내밀고 있던 두 손이 움찔하는 순간, 권형사는 수갑을
채우려는 동작을 멈추고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고
비틀거렸다. 흡사 소리 없는 총탄을 맞은 멧돼지처럼 괴성을
지르면서.
불과 5,6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어슴푸레한
어둠속이라 그런지 명숙은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종잡을
수조차 없었다. 흡사 무슨 엉터리없는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기만 했다. 아연실색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사이, 지훈은 챙길 것을 잽싸게 챙긴 후 어둠 속으로
내달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야말로 귀신 같았다.
명숙은, 속으로는 통쾌했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말씀 좀 해 보세요."
"귀, 귀신 같은 놈에게 당했어."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아 버린 권형사 옆에 가기가 무서웠다.
명숙은 조금 전보다 더 멀리 떨어져서 물었다.
"당하다니요?"
"고, 고춧가루 세례를 받았어."
그제야 명숙의 코에도 매콤한 고춧가루 냄새가 번져왔다. 너무
놀랍고 긴장했던 탓인지 냄새조차 미처 가리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럼, 지훈이가 고춧가루를 뿌렸단 말인가요?"
"그, 그 놈이 그랬어. 제, 제발 날 좀 도와줘."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나요?"
"누, 눈을 씻을 수 있는 물이 있는 데로 날 좀 데리고 가 줘."
"알겠어요."
비로소 명숙은 방금 벌어진 일의 내막을 알고 조심스럽게
권형사에게로 다가섰다.
권형사가 마리아상 뒤쪽 어두컴컴한 굴 속에서 창피한 꼴을
당하고 있을 무렵.
윤형사는 동래 온천장 동일관에 와 있었다.
"장수미 씨가 어제 그만두었다구요? 그게 사실입니까?"
"예."
"갑자기 그만둔 이유가 무엇이지 아십니까?"
"글쎄요."
"직장을 옮긴 건 아닙니까?"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보따리를 싸들고 나가는 바람에 그저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이예요."
"그래도 어디로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정도는 물었을 거
아닙니까?"
"묻긴 물었어요. 하지만 대답이 시원치 않았어요. 서울로
갈는지 어디로 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다음에 또 들르겠읍니다. 혹시 장수미 씨의 거처를 알게 되면
기억해 두셨다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수미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읍니까?"
"글쎄요. 큰 잘못은 없는데 경찰을 피해다니는 건 본인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다고 전해 주세요."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그렇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일관을 등졌다. 어둠 속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썰렁했다.
문득,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수미가 행선지도 밝히지 않고 훌쩍 어디론가 잠적해 버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이나 모레 놀러오라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어
버리다니.
새나라 택시를 잡아 타고 중앙동 우동섭의 가게로 달려갔다.
가게문은 닫혀 있었다. 불도 꺼져 있었다. 육중한 자물쇠가
가게문을 밖에서 가로막고 있었다.
까마귀가 되어 벌써 날랐나? 하루 사이에 점포까지 정리하고
날랐다면 여간 민첩한 게 아닌데....
이웃 가게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우동섭의 행방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한 발 늦었군 그래. 이 바쁜 때에 허탕을 치다니.
냄새가 나는 년놈들이었는데, 잡아들이지 못하고 놓쳐
버리다니, 난 항상 이래서 실적을 올리지 못한단 말이야.
그는 냄새가 난다고 무조건 잡아들이는 형사가 아니었다. 그는
실적위주의 수사를 펼치는 형사가 아니었다. 무슨 증거를
확보해야만 구속수사를 시도하는 형사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항상 실적이 뒤떨어지는 형사요, 못생긴 형사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난 아무래도 형사 자격이 없는가 봐. 냄새를 맡고 감을 잡기는
하는데, 과감하게 사람을 잡아들이지 못하니 실적을 올릴 수
있나.
하지만 이번만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걸. 전국에
사진수배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두 년놈은 잡아들일 테니까.
어둠에 밀려가듯 휘적휘적 걸었다. 그 다음 표적은
곽사장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날 밤 10시 경.
해림은 미지의 사내로부터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아까 낮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했읍니다."
역시 능구렁이처럼 능글맞게 휘감겨 오는 목소리였다.
"......"
해림은 재빨리 녹음기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적당한 거리에 닿게 만들었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기분이 많이 상하셨군요. 하지만
약속을 먼저 깨뜨린 쪽은 미스 박 쪽이었읍니다."
"......"
"듣고 계십니까?"
"예."
"혼자 오시라고 부탁했었는데, 다른 분이 따라나오셨더군요.
케이 텐에 근무하시니까 잘 아는 외국인들이 많으시겠지요."
"미안해요. 겁이 나서 그랬어요."
"겁내실 필요까진 없을 겁니다. 다 같은 한국인이니까요.
그리고 나는 미스 박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우려는
사람입니다. 아니 솔직이 말해서 중대한 정보를 헐값에
넘겨주려는 사람입니다."
미리 대본을 마련해 놓고 느릿느릿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동생이 범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읍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남동생은 지금 쫓기고 있읍니다. 붙잡히면 자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특히 내가 가진 정보가 경찰의 손에 넘어가는
날이면 말입니다."
"도대체 무얼 요구하시는 거예요?"
"나는 해림씨한테 반한 사람입니다 오늘 밤 11시까지
태화여관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거래는 그때 하도록
하시구요."
"여관엔 못 가겠어요."
"그럼 하는 수 없지요. 내가 아는 사실을 경찰에 알리는 수
밖에요."
"경찰에 알리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알리세요."
"남동생이 위험한데두요?"
"훈이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단 말예요."
"범행을 모의한 사실을 담아놓은 테이프가 있읍니다. 그리고
폭발물을 훔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위험하지 않단 말입니까?
시간적 여유를 조금 더 드리겠읍니다.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이 시점에서 그런 정보가 경찰의 손에
넘어갔을 때 동생은 안전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삼십 분
후에 다시 전화하겠읍니다."
"잠깐만요."
딱부러지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지훈이와 자기 자신이 관련된 일이기에.
"말씀하세요."
"거래는 단 한번으로 끝낼 수 있다고 하셨지요?"
"예. 그 대신 혼자 오셔야 합니다."
"돈은 얼마나 요구하실 작정이세요?"
"흐흐흐. 나는 돈이 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만, 나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기상
천외의 게임을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불행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지요."
"경찰서와 소방서 사이에 있는 태화여관을 아시겠지요. 207호,
이층 맨 끝방입니다."
"거기에 가서 누굴 찾으면 되나요."
"나는 K라고 합니다. 하지만 구태여 K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겠읍니다. 한 시간 후에
뵙겠읍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전화가 끊어졌는데도 해림은 한동안 수화기를 들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참만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녹음기의 스톱 버튼을 눌렀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미지의 사내를 만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우리 남매가 은밀하게 모의했던 복수극의 각본을
기막히게 알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 하나 때문에
고삐에 꿰인 송아지처럼 질질 끌려갈 필요가 있을까?
갈 바를 정할 수가 없었다. 진퇴유곡이라고 할까.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었다.
브라운에게 다시 연락을 할까? 연락하여 그놈을 붙잡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망설여졌다. 브라운에게 연락을 하면 미지의 사내가
나타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브라운이 복수극의 각본에
대해서 알게 되면 복잡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예감이 그랬다.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부딪쳐 보아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니까.
부딪쳐 보아야만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딪쳐 보지도 않고 지나치게 두려워했다가는 아무 일도 못해
낼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더우기 그 여관은 경찰서에서
가까운 곳이 아닌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했다.
뭔가 결행해야 할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여자로서 당할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수모를 몇 차례나
당한 여자 아닌가. 여러 놈들에게 그 잔인한 수모를 당하고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 남은 해림이 아닌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 지훈이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가 이미 되어 있었다. 지훈이를 위해서라면 산 제물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맞서야 할 것 같았다. 운명은 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내겐 권총이 있지 않은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호신용 권총이 있지 않은가.
문득, 존슨의 선물인 4,5구경 권총이 침대 시트 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권총이 자신의 불안과 초조를 지금까지
여러 차례 몰아내 주었던 사실도 새삼스레 깨달았다.
권총은 머리맡 시트 밑에 있었다. 묵직한 권총의 무게가
오히려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권총을 손질했다. 노리쇠를 후퇴시켜 보기도 했다. 탄환도
확인했다. 6발의 탄환이 은은한 구리빛 윤기를 토하고 있었다.
존슨이 오늘 이 밤을 위하여 내게 권총을 선물한 것이지도
모르겠군. 이 권총만 있으면 그놈이 내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할 수 있어.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못해 낼 일이 없다고 확신했다.
도박일 수도 있었다. 게임일 수도 있었다. 도박이든 게임이든
그냥 그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흥정도 쉽게 할 수 있어. 돈을 주고 녹음 테이프를 받아낼 수
있어.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빼앗아 올 수도 있어.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는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정성들여 화장을 했다. 때로는 아름다움이 무기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았다. 남자 한둘쯤은 뇌살시킬 수
있는 쓸 만한 여자라고 거울이 대답해 주는 것 같았다.
권총을 핸드백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대문 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아무래도 한 줄기 비가 퍼부을 것 같은
날씨였다.
태화여관은 걸어서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여관 종업원은 카운터에서 졸고 있었다. 해림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태화여관 207호실은 소방서 쪽의 도로와 접해 있는 방이었다.
손이 약간 떨렸다. 노크를 하자마자 안에서 "예"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약속대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튿날 오전 9시 경.
때마침 수사회의를 위해 모였던 전담반 수사요원들은 태화여관
종업원의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갔다.
태화여관은 진해경찰서에서 직선거리 7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 수사과장 다음에 권형사 그 다음에 윤형사 순으로 태화여관
207호실에 들어섰다.
방안은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지폐가
낙엽처럼 흩어져 있었다.
방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사내의 가슴에는 권총 탄흔 같은
것이 두 군데 나 있었다. 너무나 많은 출혈 때문에 두 겨드랑이
밑은 피가 응어리져 있을 정도였다.
"권총에 맞은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서에서는
총소리도 못 들었지?"
"글쎄 말입니다."
"감식반에는 연락이 되었나?"
"예."
윤형사는 대답을 마친 후, 다시 한번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
있는 사내를 살펴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이 죽다니?"
분명히 한번 만나본 적이 있는 우동섭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윤형사가 아는 사람인가?"
"예. 우동섭이라는 사람인데, 제가 어젯밤 부산으로 만나러
갔던 사람입니다."
"음, 그래. 그러면 어젯밤에 이 사람을 만났었나?"
"못 만났읍니다. 술 도매상을 하는 사람인데, 가게문을 닫아
놓고 자취를 감추고 없었읍니다."
"그럼 이 사람도 용의자 리스트에 올랐던 사람인가?"
"예. 이미 죽은 천영만 씨와 조복주 씨의 친구였읍니다.
그런데도 제가 처음 만났을 때는 두 사람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딱 뗀 자입니다."
"오리발을 내밀었다면 우선 잡아들이지 그랬어?"
"그러잖아도 어젯밤에 만나면 연행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읍니다."
"처음부터 잡아들였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찮아."
"죄송합니다. 딱 한번 만났는데, 어떻게 뒤를 캐보지도 않고
연행할 수 있읍니까?"
"하긴 그렇군."
"한 발만 더 빨랐더라면 사건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는데 정말 아까운 기회를 놓쳤읍니다."
"그럼 이 사람도 4년 전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인가?"
"예. 그럴 가능성이 짙습니다. 제가 이 사람의 왼쪽 팔뚝에
흉터가 있는 사실까지 알아냈읍니다만, 한 발 늦었읍니다."
"정말 갈수록 오리무중이군 그래. 그 흉터란 건 뭐야?"
"4년 전에 해림의 모친한데 물어뜯긴 흉터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빨자국이던가?"
"성형수술을 받았는데, 제 생각엔 돌팔이 의사한테 받은 것
같았읍니다. 위장을 하긴 했지만, 완벽하지 못했읍니다."
"음, 그래. 그건 그렇고 권총을 두 발이나 맞았는데, 지척에
있는 우리 서에서는 왜 총소리도 못 들었을까?"
"담요 같은 것으로 권총을 싼 후에 쏘았던가 아니면 통금 예비
사이렌이나 통금 사이렌이 울릴 때 권총을 발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음. 정말 그랬겠는데. 사이렌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겠어."
"여기서 소방서까지는 직선 거리로 5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까 사이렌이 울릴 때는 굉장히 크게 들립니다. 그 굉장한
사이렌 소리에 권총 소리가 빨려들어가면 서에서는 총소리를
제대로 못들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무추어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먼저 피살자의 신원부터 확인해 보겠읍니다."
"응, 감식반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어."
바로 그때 권형사가 우동섭의 도민증과 소형 녹음 테이프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이런 게 안주머니에서 나왔읍니다."
"이름이 우동섭 맞는가?"
"예. 윤형사가 냄새를 맡긴 제대로 맡았던 것 같습니다."
"술 도매상을 하는 사람이 소형 녹음 테이프는 왜 가지고
있었는지 의문이군 그래. 구하기 힘든 테이프인데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더욱 궁금합니다."
"그 밖에 특이한 것은 없나?"
"예. 지갑.손수건.담배.라이터 정도뿐입니다."
"모두 잘 보관해 둬."
"방바닥에 긴 머리카락도 떨어져 있읍니다."
"감식반원에게 넘겨주도록 해."
그로부터 두 시간 후, 감식반원들의 감식결과와 검시의의
부검결과를 놓고 수사회의가 열렸다.
그 무엇보다 수사에 박차를 가하게 해준 것은 소형 녹음
테이프에 담긴 해림과 지훈 남매의 대화내용이었다.
"프로의 짓인 줄 알았는데, 남매의 짓이라니 정말 놀라운
일인데."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를 누가 녹음했을까요?"
"그야 우동섭이나 그의 한패거리가 했겠지."
"지문을 대조하나마나 박해림의 짓이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여관 종업원의 증언만 들어도 그 여자가 어젯밤 태화여관에
나타났던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권형사의 주장은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윤형사는 달랐다.
"그 여자는 그렇게 어리석은 여자가 아닙니다. 지폐와
문고리에 지문을 남기고 머리카락까지 떨어뜨리고 다닐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만약 그 여자가 진짜 범인이었다면 말입니다.
그 여자는 완벽하게 해내었을 것입니다. 더우기 녹음 테이프까지
남겨두고 도망칠 여자가 아닙니다."
"정말 그럴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박해림은 프로가 아니기 때문에 실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아무리 완벽하게 계획을 세웠더라도 실제 행동에서는 허점을
남기게 되는 게 아마추어입니다."
"우동섭이 녹음 테이프를 가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와의 흥정이 깨어지자 그의 입을 막으려고 그를 죽이고 도주한
게 아닐까? 돈으로는 흥정이 안되니까 말이야."
하 수사과장의 말에 권형사가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돈이 흩어져 있었다는 게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읍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남매의 대화가 녹음돼 있었다는 점이 계획적인 것 같아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계획적인 것 같다니?"
"아무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어떻게 그런 은밀한 대화를 녹음
테이프에다 담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 계획적인 것 같다는
겁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 그래."
"그리고 둘째로, 완전범행을 시도했다면 지문을 남기지
말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허술하게 지문과 머리카락을
남겼읍니다."
"그러고 보니, 지폐에는 여러 군데 지문이 있었어."
"그리고 세째로는, 여관 종업원에게 얼굴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완전범죄를 시도했다면 아예 여관같이 눈에 잘 뜨이는
장소가 아닌 은밀한 장소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도 허술했어."
"그리고 네째로는, 범인이 녹음 테이프를 남겨두고 도망쳤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그건 처음부터 몰랐으니까 못 가져간 게 아닐까."
"만약 과장님 말씀대로 뭔가 흥정을 하려 했다면 우동섭이
분명히 녹음 테이프에 대하여 들먹거렸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흥정을 시도하려면 그럴싸한 미끼가 있는 게 훨씬
용이하니까요."
"하긴 내가 테이프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겠는데."
"그리고 다섯째로는, 4.5 구경 권총은 서양인의 체질에 맞게
만들어진 군용 권총으로서 박해림 같은 여자가 다루기에는
부담이 가는 권총인데 피살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관통시켰다는
점이 의문스럽습니다."
"그거야 가까운 곳에서 쏘았을 테니까 명중시킬 수도 있잖아."
"그리고 여섯째로는, 앞서 일어난 메틸 알콜 살인사건이나
폭발물 살인사건에 비해 이번 사건은 허점이 금방 드러날 만큼
허술했다는 점입니다. 동일범의 소행인 것처럼 벚꽃을 몇 잎
떨어뜨려 놓았지만 말입니다."
"그럼 일종의 함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말인가?"
"예. 어딘지 모르게 각본이 짜여진 것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수가 없읍니다."
"하지만 저는 윤형사의 말대로 꼭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윤형사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사람이 중요한
일을 놓고 흥정을 하다 보면 흥정이 결렬되어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고, 돈을 던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업원에게
얼굴을 보인 것만 하여도 그렇습니다. 카운터에 엎드려 자고
있는 줄 알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들킨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네 의견도 일리가 있어. 박해림이 집에도 없고 직장에도
나가지 않은 것을 보면 범행 후에 어디론가 날랐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일단 남매를 체포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물론 그래야지."
"그 점에 대해선 저도 동감입니다마는 두 사람을 체포하는
일은 권선배님이 맡아 주십시오. 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아야
하겠읍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니?"
"수사요원이 부족한데, 남매를 체포하는 일에 수사력을
집중시킬 필요까진 없지 않겠읍니까?"
"그건 그래. 그러니까 권형사는 남매를 체포하는 일에 신경을
쓰도록 하고, 윤형사는 나름대로 빨리 다른 사람들을 조사해
봐."
"감사합니다."
"그 밖에 특별한 의견은 없나?"
"예."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명심해서 듣고 열심히들
뛰어봐."
두 사람은 수사과장으로부터 사건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지시
몇 가지를 받은 후 밖으로 나왔다.
"윤형사!"
권형사가 걸음을 늦추며 큰 목소리로 윤형사를 불러세웠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자넬 대하는 과장님의 태도가 백팔십도 바뀐 이유가 뭐지?"
"글쎄요."
"시치미 떼지 마. 뭔가 알아냈지?"
"아직은 아리송할 따름입니다."
"그럼 새로운 용의자가 여러 명 떠올랐단 말인가?"
"글쎄요. 저 역시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부딪쳐 볼
생각입니다."
"누구하고 말인가?"
"우선 곽일남 사장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수사과장님의 고향 선배되는 그분을 만나러 간다고?"
"예."
"투서 때문에 한번 만나보겠다는 건가?"
"예. 과장님까지 싸잡아서 뭔가 캐낼 작정입니다."
"그런데도 수사과장님이 윤형사를 갑자기 신임하는 눈치를
보이시다니, 정말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군 그래."
"저 역시 그렇습니다."
"아니야. 분명히 뭔가 있긴 있어. 괜히 날 살짝 따돌리지
말아. 우리 과장님이 어떤 분이신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을 거야."
"공연히 시샘하지 마시고, 빨리 선배님이 하실 일이나 하세요.
좋은 일은 선배님에게 양보한 것이니까요."
"쉬운 일을 내게 맡겼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미모의 아가씨를 체포하는 일은 궂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귀신 같은 지훈이 녀석한테는 골탕을 잡술 우려가 있으니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윤형사는 선배 형사를 등지고 터벅터벅 걸었다.
곽사장의 집은 진해경찰서에서 서남쪽으로 3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8거리 중의 하나인 서남쪽 거리로
내려가다가 오른쪽에 있는 아담한 단층 양옥이 그의 집이었다.
육중한 대문 앞에 다가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미리 전화연락을
취해 두었기 때문에 곽사장은 집에 있었다.
윤형사는 응접실로 안내되어 곽사장과 마주 앉았다.
곽사장의 인상은 밝은 편이 아니었다. 멀쩡한 사람을 왜
공연히 괴롭히느냐 하는 빛이 역력했다.
"용건이 뭐요?"
도도했다. 부유층 특유의 거만한 질문에 윤형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할 게 있어서 찾아왔읍니다."
"조사할 게 있다니?"
성공한 사람은 남을 깔보게 되어 있는 것처럼 반말 투였다.
배알이 틀렸다. 하지만 사회 지도층에 있는 명사에게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곽일남 사장은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사실대로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뭘 잘못했다구 사실이니 오실이니 하고 사람을
괴롭히는거요. 그러고 보니, 3년 전에도 당신이 나를 괴롭힌
적이 있었지?"
"소주공장 일 때문에 몇 번 찾아뵌 적이 있읍니다. 그러나 그
때는 하과장님 덕분에 수사가 흐지부지되고 말았었지요."
"언중유골(言中有骨)이 심하군 그래. 하과장이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까?"
"3년 전 일을 이제와서 새삼스레 들추고 싶진 않습니다. 그땐
사장님 뿐만 아니라 모두들 에틸 알콜로 소주를 만들어 팔던
때였으니까요."
"하과장을 보아서라도 그러지 못할 텐데, 나하고 무슨 유감이
있어서 또 이러는가?"
"유감은 없읍니다. 사장님의 말씨가 거칠은 것이 다소
못마땅합니다만, 그 밖에 사사로운 유감은 없읍니다."
"나도 공당에 몸을 담고 있는 공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
수사과장도 믿고 윤형사 자네도 믿으니까 간격을 두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을 뿐, 자넬 무시하는 게 아니야. 그 정도
이해도 못해."
"잘 알겠읍니다. 아뭏든 사실대로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만치 않은 사람에게는 고삐를 늦추어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섣불리 다루었다가는 오히려 큰코 다칠 염려가 있을
것 같았다.
"뜸 들이지 말고 의문스런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요."
일부러 여운을 남긴 효과가 금방 드러났다. 질문을 재촉하는
걸 보니, 뭔가 초조함이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며칠 전 다방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제가 천영만 씨와
조복주 씨를 아시느냐고 물었었지요. 그때 사장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지요?"
"모른다고 했지."
"정말 모르십니까?"
"오다가다 만난 사람이라 얼굴 정도는 알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안다고 할 수는 없어 쉬운 말로 모른다고 대답했지."
"얼굴 정도 아는 사람들과 칠락관에도 가시고 장교구락부에도
가실 수 있읍니까?"
"그, 그건 앞으로 있을 선거를 위해서 그저 한번 만났을
뿐이지."
"증인이 있읍니다. 적당히 꾸며대도 소용이 없읍니다."
"선거도 있고 사업관계도 있어서 한두 번 만났던 건
사실이지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어."
역시 권세 있는 공당의 도부위원답게 당당한 태도를
수그러뜨릴 줄 몰랐다.
"무슨 사업관계로 극진한 대접을 하셨읍니까?"
"내가 대접을 한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이 나를 위한답시고
대접한 거였어."
"그러니까 무슨 청탁을 받으셨다 그 말씀이시군요?"
"좋은 사업이 있으면 밀어달라고 부탁을 하더군."
"이 좁은 진해 바닥에 좋은 사업이 있다면 뭐가 있겠읍니까?
보나마나 군납 아니겠읍니까?"
"......"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혹시 군납업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미끼를 그 사람들에게 던졌던 게 아닙니까?"
"난 그런 미끼를 던진 적이 없어."
"증거가 있는데두요."
"증거가 있다니? 군납에 대한 얘기가 오간 적은 있지만, 한
마디로 거절해 버린 기억밖에 없소."
"평안병원에 입원했다가 살해당한 류미옥이라는 여자가 증언한
것이 남아 있읍니다."
"글쎄. 난 모르는 일이야. 어떤 작자가 그 여자를 녹이려고
무슨 감언이설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 여자는 죽었지만, 그 여자의 말은 남아 있읍니다."
"글쎄. 무슨 말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백한
사람이야."
"제가 볼 때는 결백한 것 같지 않은데 어떡합니까?"
윤형사가 사정없이 정곡을 찔렀으나 곽사장은 표정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사람 웃기지 말게. 윤형사는 생김새처럼 퍽 희극적이군 그래.
비극보다야 희극이 좋지."
사람 약 올리는 것 같아 은근히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냥
넘겨서는 안될 성싶었다. 이런 건방진 작자는 어지간히
다루어서는 씨도 안먹힐 것 같았다.
"이 양반이 사장인 주제에 싸레기밥만 잡수셨나?
반말지거리밖에 못하시는 걸 보니...."
윤형사의 이 가시돋힌 말에 곽사장은 입을 꽉 다물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 속에서도 두 사람은
차가운 눈빛으로 맞서고 있었다.
"누군 반말을 할 줄 몰라서 안하는 줄 아십니까?"
"미안하오. 허물없이 대하느라고 그랬을 뿐이오."
어느새 곽사장의 태도에는 변화가 일고 있었다. 거만하게 나올
때와는 달리 말투도 달라져 있었다.
"우동섭이라는 사람은 설마 모른다고 대답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 사람 역시 이름 정도밖에 몰라요."
"우동섭 씨도 사장님에게 군납업자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었지요?"
"부탁은 한 적이 있소."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장님에게 군납업자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세 사람이 쥐도 새도 모르게 차례차례로
죽어갔으니 말입니다."
"그럼 우동섭인가 하는 그 사람도 죽었단 말이오?"
"예. 어젯밤 열두 시 전후에 심장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읍니다."
"관통상이라니? 그럼 총에 맞아서 죽었단 말이오?"
"예. 사장님도 권총을 가지고 계시지요?"
"내, 내가?"
넘겨짚은 게 적중한 것 같았다. 여유만만한 사람답잖게
더듬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내겐 권총이 없소. 휴전 전에는 호신용으로 한 자루 가지고
있었지만, 휴전 후에 경찰에다 내놓았어요."
"정말이십니까?"
"의심스러우면 하 수사과장한테 물어봐요."
"어젯밤 늦게 우동섭 씨를 만났었지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어젯밤 제가 사장님을 미행했는데도 거짓말하시겠읍니까?"
부산에서 밤늦게 돌아온 윤형사가 어젯밤 곽사장을 미행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런데도 곽사장이 우동섭을 만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늘 아침 박지훈이 전화로 정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곽사장은 유구무언인 채 윤형사를 원망스럽게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젯밤 열 시 삼십 분 경에 태화여관 맞은편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만난 사람은 누굽니까?"
"......"
"설마 묵비권을 사용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
"갑자기 벙어리가 되셨읍니까?"
"......"
"바로 그때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우동섭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귀신이 나타나는 통에 산통 다 깨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귀신이 나타나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이 있읍니다. 박해림 씨
동생이라면 아시겠읍니까?"
"담배장사를 하는 애 말이오?"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그 애가 귀신처럼 사장님의 뒤를
따라다녔다는 사실은 모르셨던 모양이지요?"
"그놈이 왜 날 따라다녔는지 아는 게 있으면 말해 주시오."
"사장님한테서 냄새가 났기 때문에 그 애가 그림자처럼 몰래
변장까지 하고 따라다녔읍니다."
"냄새라니? 무슨 냄새 말이오?"
"범죄의 냄새 말입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불행하게 죽은 세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범죄에
관련돼 있는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과 은밀하게
만났으니 범죄의 냄새가 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건 오해라니까."
"어젯밤 우동섭 씨를 만나서 무슨 모의를 했읍니까? 어둠
속에서 잠시 만났다가 헤어질 때는 무슨 특별한 동기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우연히 만났을 뿐이라니까요."
"적당히 꾸며대는 데 명수시군요. 그렇게 늦은 시각에 으슥한
장소에서 이름 정도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밀담을 나누고
재빨리 헤어지다니, 뭔가 꼬여도 보통 꼬인 일이 아니군요."
"사람이 살다 보면 그보다 훨씬 더 외진 곳에서도 얼마든지
우연히 부딪칠 수 있는 거 아니겠소?"
"진해 천지에서는 무서울 것이 없으실 사장님께서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사람을 만났다가 헤어져야 했었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공연히 엉뚱한 상상력으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지 마시오."
"경직된 상태이거나 부자연스러운 데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기 마련이라는 걸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요?"
"상상은 자유요. 하지만, 사람을 함부로 거기다 끌어들이지는
마시오."
"어젯밤 열한 시부터 열두 시 사이엔 어디서 물어하고
계셨읍니까?"
"집에 돌아와 자고 있었소."
"증인이 있읍니까?"
"우리집에서 일하는 통영댁한테 물어봐요."
"사모님은 출타중이신가요?"
"이틀 전에 친정에 갔소."
"집안이 조용한데요. 통영댁은 어디 계십니까?"
"시장에 갔나 보오."
"사나운 개가 두 마리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보이지
않더군요."
"너무 시끄러워서 팔았소."
"혹시 낯선 사람들이 드나드는 데 지장이 생겨서 갑자기
팔아버린 거 아니십니까?"
"무례한 질문이군 그래."
"사장님 댁에서 태화여관까지는 직선거리로 4백 미터 가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은 어젯밤 우동섭이 태화여관에
투숙한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러니까 일을 꾸미려 했으면
얼마든지 일을 꾸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셈입니다."
"그냥 듣자 하니, 해도 너무 하는군 그래."
"정말 권총이 없으십니까?"
"없다니까 자꾸만 더하네 그려."
"만약 집안을 뒤져서 권총이 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수색영장이 있으면 얼마든지 뒤져보시오."
"그러니까 함부로 집안을 수색할 순 없다 그 말씀이시군요?"
"그게 상식인 줄 알고 있는데, 내게 상식 밖의 일을 할 수
있겠소?"
"좋습니다. 그 이야기는 영장을 가지고 와서 다시 하기로
하겠읍니다."
"이젠 끝났소?"
"천만에요. 평소 사장님은 박해림 씨에게 관심이 많았읍니다.
미스 박에게 접근하려 했던 저의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까운 처녀가 길을 잘못 택한 것 같아 도와주려 했을
뿐이오."
"어떻게 도와주려고 하셨읍니까?"
"원한다면 우리 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려고 했소. 그게
무슨 잘못이오."
"저의는 다른 데 있었던 것 아닙니까? 다 알고 있읍니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후회하게 될
거요."
"지체가 높은 분이시지만, 어쩔 수 없읍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니까요."
"그럼 내가 무슨 범법행위라도 저질렀단 말이오?"
"스스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부러 여운을 남겼다. 상대방이 스스로 끌려 들어오게 하는
수법 중의 하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곽사장은 조바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미심쩍어서 그러는 거요? 아무 근거도 없이
사람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가지고 놀 작정이오?"
"지체 높으신 사장님을 감히 가지고 놀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읍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게 뭐요?"
"수색영장을 가지고 오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수색영장만
가지고 왔더라면 무슨 근거가 될 만한 증거물을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정말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러는 거요?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면 무고죄로 고발할 테니까 알아서 하시오?"
"3년 전에는 우리 수사과장님 덕택에 무사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하면 겁낼 사람인 줄 아시오."
"아마 이번엔 변명의 여지가 없으실 겁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릴 다
하는군."
"다행히도 제가 3년 전 소주공장 주류 불법제조 과정에 대한
수사를 맡았었기 대문에 사장님과 사장님의 주변 인물을 조금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 우동섭 씨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 알게 되었단 말입니다."
"윤형사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 사람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란 말이오."
"거짓말하지 마세요. 오늘 아침 죽어 있는 우동섭 씨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중, 3년 전에 본 얼굴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읍니다. 3년 전 어느 때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줄
아십니까?"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소?"
"바로 사장님의 소주공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본 얼굴이었단
말입니다. 그래도 우동섭 씨를 2년 전부터 알게 되었다고
고집하시겠읍니까?"
"난 그 사람을 몇 년 전부터 알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소."
"죄송하지만, 서에까지 함께 가 주셔야겠읍니다."
"이 양반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연행하겠다는 거요?"
"우동섭 피살사건의 용의자로 연행하겠다는 겁니다."
"흐흐흐.... 살다 보니 별의별 수모를 다 당하는군 그래."
"사장님은 지금까지 횡설수설 수사관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았읍니다. 그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연행할 수
있읍니다."
"날 연행했다가는 곧 후회하게 될 거요. 그러니까 헛수고 그만
하고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정 그러시면 혐의가 더욱 더 짙어집니다."
"나를 연행하고 싶으면 영장을 들고 오시오. 나는 바쁜
사람이오."
"알겠읍니다. 수색영장까지 발부받도록 하겠읍니다."
강제로 연행할 수는 없었다. 더우기 그는 거물이었기 때문에
한층 더 어려웠다. 애당초 별 볼일 없는 형사한테 호락호락
연행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쉬운 점이 많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색영장까지 발부받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윤형사는 그런
절차를 밟을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수색영장까지 발부
받으려면 적어도 이틀은 소요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권력깨나 쓰는 집안을 수색하겠다는 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가능성이 짙었다.
윤형사는 경찰서로 돌아가지 않고 곽사장의 단층 양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진일여관 2층 객실을 하나 빌었다.
진일여관과 곽사장의 저택은 대각선상에 놓인 셈이었는데, 1백
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다.
저택을 한눈에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세밀한 행동은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거리였다.
윤형사는 수사본부에다 전화로 망원경을 부탁했다. 뿐만
아니라 곽사장집으로 통하는 모든 전화가 도청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곽일남이 범행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짙어졌는데, 과연 곽이
주모자일까?
천영만, 조복주, 우동섭이 4년 전 그 사건의 행동대원이었을
가능성이 짙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차례차례 살해당했을까?
누가 그들을 차례차례 해치웠단 말인가?
곽일남? 박해림? 박지훈? 존슨 중사? 아니면 제삼자?
물안개 속 같았다.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복잡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뿐이었다.
망원경은 곧 손에 들어왔다. 경찰서가 지척에 있어 편리했다.
윤형사는 객실 창가에서 망원경으로 감시를 계속했다.
곽사장이 만약 범행에 가담한 사람이라면 쫓기는 심정으로
지금쯤 행동을 개시할 때가 되었는데....
수색영장이 발부되기 전에 꼬투리를 잡힐 만한 것들을 미리
제거해 놓으려 할 터인데....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집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따금 창문에 비치던 곽사장의
모습조차 커튼에 가리워져서 볼 수가 없었다.
대낮에 커튼을 치고 무슨 수작을 꾸미는 건 아닐까?
답답했다.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싶었다. 얼굴조차 없는 인물을 멀리서 감시하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참고 기다려야 했다. 수사관은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윤형사는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담배를 피워 물고 창가에서 서성거리다가 망원경을 들었다.
언제 나왔는지 곽사장이 정원에 나와 있었다.
윤형사는 얼른 담뱃불을 비벼끄고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었다.
행동이 어색해 보였다. 주위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담 너머에서나 가까운 곳에서 누가 훔쳐보고 있는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먼 데서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는 창고에서 삽을 하나 들고 나와 상록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송이버섯 모양으로 곱게 다듬어진 상록수 뒤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검은손이 뭔가 중요한 물건을 숨기고 잇는 게
아닐까? 저 송이버섯 모양의 상록수는 천리향(千里香)이었는데,
그 나무 밑에다 뭔가를 파묻은 게 아닐까?
망원경을 아무리 뚫어지게 들여다보아도 상록수에 몸이 가린
곽일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봄볕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는
평화스런 정원만 렌즈 속에 가득차 있을 뿐이었다.
곽일남의 손은 흰손이 아니야. 3년 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짜 소주를 만들어 팔았던 그 손은 분명히 검은손이었어.
곽일남은 숫자에 밝고 간이 큰 남자였다. 후처와도 별거중인
그는 여자를 밝히는 데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는
남자였다.
한참만에야 삽을 든 곽일남의 모습이 망원경에 드러났다.
그는 다시 한번 사방을 살핀 후,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창고에
삽을 갖다놓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9. 제9장 陷 穽
속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고절산 언덕 위의 외딴집.
해림은 악몽에 쫓기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알송알 맺혀 있었다.
괴한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검은 복면을 쓰고 손에 칼을 든 세
명의 괴한이었다.
칼에 맞은 아버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가슴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튀고 있었다.
괴한들은 어머니를 벗기고 있었다. 짐승들처럼 껍질을 벗기고
한꺼번에 범하려 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겁에 질려 허위적거리다가 단달마의 비명으로
무너져내렸다. 검은 짐승들은 어머니의 뽀얀 젖무덤과 살점을
신나게 뜯어먹고 있었다.
어느새 해림은 얼굴 없는 검은 짐승들을 향하여 돌아서고
있었다.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었다. 시퍼런 날이 번뜩이는 푸줏간의
칼이 신들린 듯이 떨고 있었다.
칼을 휘둘렀다. 괴한들의 검붉은 피가 치솟고 살점이 튀었다.
난도질했다. 온몸이 피범벅이 되도록 칼을 놓지 않았다.
그래도 시원치 않았다. 얼굴 없는 검은 괴한들의 눈알을
도려내고 싶었다. 그러나 검은 복면을 끝내 벗겨지지 않았다.
"으으흐.... 으으흐...."
신음 소리를 듣고 상준이 방안으로 달려들어왔다.
"이, 이자 깨어났십니꺼? 저, 정신이 좀 드십니꺼?"
"여, 여기가 어디예요?"
"소, 속천 해수욕장 근첩니더."
상준은 물수건으로 해림의 얼굴의 땀을 닦아내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여기 와 있어요?"
"미, 미음이라도 좀 잡수시이소. 그라고나서 이야기해
드리지예."
상준은 부엌으로 나가서 미음 한 그릇과 새우젓을 쟁반에
받쳐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조, 조금 들어보시이소. 이, 이만하기 천만다행입니더."
해림은 일어나 앉아 미음을 들었다.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녀는 새삼스레 상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병신같이 말을 더듬거리는 보잘것없는 남자이긴 하지만,
가장 외로울 때 자기 곁에 있어 주고, 가장 위험할 때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를 도와주는 남자가 바로 상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나와 무슨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사이란 말인가?
해림은 미음 그릇을 반쯤 비우고 내놓았다. 뱃속은 텅 빈 것
같은데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그, 그냥 다 잡수시지예."
"많이 먹었어요. 그보다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 알고
싶어요."
"그, 그라모 이야기해 드리지예."
어젯밤, 상준은 칼멘다방 건너 상업은행 옆 가로수 밑에서
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가발을 쓰고 여자로 변장하여 나타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지나도록 지훈은 나타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필경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평정을 잃은 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황급히 역전쪽으로 올라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변장한 지훈인가 싶어 따라나섰다. 하지만 지훈은 아닌 것
같았다. 영락없는 해림이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가 박해림에 틀림이 없었다.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
그랬다.
상준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여자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쏜살같이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과
마주치는 바람에 앞서 가는 여자를 놓치고 말았다.
태화여관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여관을 지나 진해역 쪽으로 가다가 어느
골목으로 사라졌는지도 몰랐다.
차마 여관 문을 밀고 들어가 비슷한 여자가 투숙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웬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관 근처를 왔다갔다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진해역까지 올라가보기도 하고, 상업은행 근처까지 내려와보기도
했다.
혹시나 그 여자가 변장을 한 지훈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손목시계가 열 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통금 예비 사이렌이
불려면 아직 이 십분 이상 남아 있었다.
한번 용기를 내어 여관 문을 밀고 들어갈 생각도 없잖아
있었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한번만 여관 근처를 살펴보고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나마 여관 앞은 밝았다. 외등이 외롭게 졸고 있었다. 여관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여관 담벼락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문 열리는 소리 같았다. 얼른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여관 담벼락 쪽의 작은 문이 열리더니만, 안에서 사내 하나가
나왔다. 사내의 등에는 축 늘어진 사람이 업혀 있었다. 긴
머리채와 옷 모양이 아까 그 여자 같았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상준은 자기도 모르게 힘에 끌려 주먹만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담벼락 옆에는 리어카가 준비되어 있었다. 사내는 축 늘어진
여자를 리어카에 싣고 가마니로 덮었다.
그 순간, 상준은 번개처럼 돌진하여 사내의 뒤통수를 주먹만한
돌멩이로 후려쳤다. 사내는 불의의 습격에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어두운 골목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목격자가
없었다.
상준은 리어카를 밀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집으로 가면
위험할 것 같아 속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으셨군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
"이번이 벌써 두번째군요. 그러잖았으면 벌써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는지도 모르는데...."
"......"
"정말 고마와요."
상준은 대꾸 없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해림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급할 때마다 기적처럼 나타나서 나를 구해 주다니, 나와
무슨 인연이 닿는 남자일까?
두 번이나 엄청난 은혜를 입었는데, 이 남자에게 내가 주어야
할 게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돈? 사랑? 아니면 육체?
"날 갖고 싶으시죠?"
입안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채.
적극적인 자세로 덤벼들었다면 못 이긴 척하고 몸을
내주었을는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이 남자에게는 저돌적인
데가 없었다.
문득, 저돌적인 남자 존슨의 모습이 떠올랐다. 흑인이라
그런지 몰라도 존슨은 성(性)에 있어서만은 굶주린 야수처럼
저돌적이었다.
자기가 갖고 싶은 여자에게 성의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그
다음날 아침에 노예선을 타더라도 여한이 없다던 작자였다.
권총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도 그래서였다. 해림이 가지고 있던
소련제 권총 대신에 미제 4.5구경 권총을 들고 나타나서는
저돌적으로 해림을 다시 거쳐간 것이었다. 처음 그녀를 덮쳤을
때처럼 그렇게 저돌적으로.
뭉실뭉실 환상의 꽃이 피어오르던 그날 밤도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그녀의 육체를 탐닉했던
것이다. 밤이슬이 내리는 숲 속에서 저돌적으로.
타고난 창녀도 있다더니만, 내가 바로 그런 여자인가?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갑자기 창녀라도 된 듯이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
"어, 어떻게 해서 그 여관에 가게 되었십니꺼?"
"전화를 받고 이상하게 끌려들어갔어요. 그건 그렇고, 혹시 내
핸드백하고 권총 못 보았어요?"
"그, 그런 것 못 보았심더. 권, 권총은 무슨 권총입니꺼?"
"찾아야겠는데, 큰일났군요."
"내, 내가 시장 가는 길에 한번 찾아보지예."
"벌써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찾지 못할 것 같아요. 그냥
두세요."
"그라모 시장 다녀오겠심더. 어짜모 지훈이도 올 낍니더. 누워
계시이소."
"지훈이도 아는 집인가요?"
"예."
"이 집은 누구의 집이예요?"
"우리 외할매집인데, 빈집이나 마찬가집니더, 안심 푹
놓으시고 몸조리 하시이소."
"알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상준이 밖으로 나간 후, 얼마나 지났을까.
해림은 산비탈 오두막집을 나섰다. 고절산의 산그림자에 먹혀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서남쪽으로 산과 해변을 끼고 몇 구비 돌면 한적한 곳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왕릉만큼이나 큰 바위들이 즐비해 있는 해변에 이르렀다.
동편의 고절산 밑과는 달리 그 우람한 바위들 위에는 따뜻한
햇빛이 소복이 깔려 있었다.
큼직하고 펑퍼짐한 바위 하나를 골라잡았다. 진해만을
무덤으로 삼은 부모님에게 제사를 올리기에는 안성마춤의 자리
같았다.
오래지 않아 석양이 큰 바위를 물들였다. 해림의 가슴 아픈
추억제가 열리고 있는 그 바위에 핏빛 처연한 황혼이 서럽게
깔렸다.
그해 그 잔인한 4월을 핏빛으로 재현해 주듯이 저녁놀이 일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두 분의 원수들이 두 놈이나 쓰러졌어요!
누군가가 그들을 죽여 주었어요! 환상처럼 말이예요! 우리
남매가 의논한 대로 말이예요! 나머지 한 놈도 멀잖아 죽을
거예요! 환상적인 수법으로 누군가에게 당할 거예요! 그게 우리
남매가 될는지도 몰라요!"
놀에 물든 넓고 넓은 바다를 향하여 소리쳤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으나 바다는 대답이 없었다.
"아아,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돌아가신 두
분에게는 더욱 더 부질없는 짓일 거예요. 저도 알아요. 다는
몰라도 조금은 알아요. 그런데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부질없는 짓들 그만 하라고 왜 말씀해 주시지 않으세요?
지훈이를 위해서도 말씀해 주셔야 해요. 지훈이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고 있는 것 같아요. 저로서는 도저히 말릴 수가
없어요. 제가 지훈이 대신에 복수를 감행하는 길밖에는요.
어쩌면 좋아요?"
그러나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만 철썩거릴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등 뒤에 있는 고절산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의아하여 뒤로 몸을 돌렸다. 산 옆 오솔길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다음 순간, 차가운 눈초리를 만났다. 피할 수 없는 그
눈초리는 먹이를 발견한 매의 눈초리 같았다.
"박해림 씨, 거기서 뭘하고 계시는 겁니까?"
권달준 형사였다. 성큼성큼 바위와 바위 사이를 지나 높고 큰
바위 위로 올라왔다.
"역시 환상적이군요. 놀이 지는 해변에서 무얼 합니까?"
하지만 해림은 대꾸가 없었다. 권형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석양에 물들어 있는 처연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야 가 주셔야겠읍니다."
"서에 가다니요?"
돌아서지도 않은 채 되물었다.
"어젯밤 태화여관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지 않았읍니까?"
"사람을 죽였다구요?"
"확실한 증거가 있읍니다. 서에 가서 얘기합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림의 오른쪽 손목에 수갑이 감겼다.
"도망치지 않아요. 이걸 푸세요."
"나 역시 두 번 연거푸 당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억울하면
서에 가서 해명해 봐요."
권형사는 조금도 양보가 없었다. 지훈이한테 느닷없이
고춧가루 세례를 받고 망신살이 뻗쳤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해림은 범인 취급을 당하면서 연행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수사과 취조실.
사방이 음산한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밀실이었다. 천정에는
덩그렇게 촉수 얕은 백열등이 매달려 있었다.
커다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해림은 유들유들한 권형사와
마주 앉아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슬며시 오기가 일어났다. 사람을 깔보고
희롱하는 듯한 형사의 눈초리가 마음에 걸렸다.
진지한 구석이 없는 형사에게는 더 이상 대답하기조차 싫었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람의 말이 말 같잖소?"
아까 해변에서와는 말투부터 달라져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잠자코 듣기만 했다.
"왜 대답이 없소?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소?"
"말했잖아요. 이상한 전화를 받고 여관에 갔다가 기습을
당했다구요. 그 밖에 달리 아는 게 없어요. 옆구리와 머리를
강타당하고 의식을 잃었어요. 나중에 검정 주머니 같은 걸
얼굴에 뒤집어 쓰게 되었는데, 의식이 가물거렸기 때문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당신의 지문이 묻은 권총이 여관 근처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단 말이오. 뿐만 아니라 당신 남매가 꾸민 범행계획
일체가 담긴 녹음 테이프가 피살자의 안주머니에서 나왔단
말이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소?"
"무서운 함정이군요."
"사람 웃기지 말고, 신사적으로 대할 때 사실대로 다 털어놓는
게 좋을 거요."
"사람의 말을 도무지 믿지 못하시는 형사 나으리하고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거요?"
"윤형사님을 만나고 싶어요."
"기피신청을 하는 거요?"
"좋도록 생각하세요."
"이게 정말?"
"이거라니요?"
"사람을 무얼로 보고 이러는 거야. 내, 원 참!"
권형사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치고 일어섰다. 생각 같아서는
주먹으로 한방 먹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녀의 배후에는 미 고문관 제임스 브라운이 있었다.
도도한 년 같으니라구. 어디 한번 밤새도록 기다려 봐. 맛이
어떤가.
자존심이 구겨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권형사는
취조실에다 피의자만 남겨놓고 밖으로 나왔다.
윤태호 형사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후였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해림은 탁자 위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인기척이 나자 금방
얼굴을 들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선배님한테 대강 들었읍니다."
"설마 윤형사님도 그 형사 나으리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천천히, 어제 일어났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실대로 다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로서는 해림씨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증거가 너무 많습니다.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만큼 확실한 증거가 여러 가지 나타나 있읍니다."
"그럼 제가 그 사람을 죽인 범인이란 말예요?"
"증거물이 증명해 주고 있읍니다."
"우동섭이란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예요. 이름도 그
형사 나으리한테 들어서 알았어요."
"얼굴을 보았읍니까?"
"병원 영안실에 그 형사 나으리와 함께 가서 시신은 봤어요."
"그럼 어젯밤에도 그 사람의 얼굴을 못보았단 말입니까?"
"예. 저는 어젯밤 그 여관에서 종업원의 얼굴밖에 다른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동섭 그 사람도 세 명의 범인 중의 한
사람인가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읍니다. 그 사람의
왼쪽 팔목에 있는 흉터가 이빨자국이었을 가능성이 있읍니다."
"우리 어머니가 남긴 그 이빨자국 말인가요?"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읍니다."
"그런 정보까지 다 제공해 드렸는데 도대체 경찰은 뭣들
하시는 거예요. 왜 우리의 원한은 풀어주실 생각조차 않으시는
거예요?"
"화풀이하시기 전에 먼저 어제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도
숨김없이 이야기해 주셔야겠읍니다. 그래야만 뭐가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있겠읍니다."
"좋아요. 잘 들으세요. 이제 두번 다시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녹음까지 해 두세요."
"그러잖아도 녹음하고 있읍니다."
"어제 오후에 어떤 남자로부터 괴상한 전화를 받았어요."
해림의 진술은 길었다. 그러나 흥미로왔다. 만약 그녀의
진술이 사실 그대로라면 문제는 간단치 않을 것 같았다. 그 진술
속에는 복잡한 문제가 분명히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하신 얘기를 정말 다 믿어도 되겠읍니까?"
"그럼 제가 지금까지 꾸며낸 이야기를 한 줄 아세요?"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해림씨는 지금 깊은 함정에
빠졌읍니다. 잘못했다가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과 같은
함정에 빠진 거나 같단 말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지만 길은 있읍니다."
"길이 있다니요? 이 수렁에서 저를 건져낼 방법이 있단
말인가요?"
해림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묻고 있었으나 윤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뇌리 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해림이 과연 함정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지금 카멜레온처럼
절묘한 빛깔로 사람을 홀리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열 길 물 속은 헤아릴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속은 헤아리기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돈은 왜 가지고 갔었지요?"
"흥정을 하려구요."
"무슨 흥정?"
"녹음 테이프를 돌려받으려구요."
"죄가 없는데, 흥정까지 벌여 녹음 테이프를 왜 받아내려고
했읍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남매에게 불리한 물건이었으니까요."
"그럼 권총은 왜 가지고 갔었지요?"
"나 자신을 지키려구요."
"그 권총은 어디서 났읍니까?"
"훔친 건 아니예요. 얻은 거예요."
"권총을 가지고 있으면 불법무기 소지죄로 걸린다는 사실을
몰랐읍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어요."
"원수를 갚기 위해서 권총이 필요했던 거 아닙니까?"
"권총을 머리맡에 놓고 자면 잠이 잘 왔어요."
"지훈이한테도 그러지 않았읍니까? 범인들만 찾아내면 내게도
방법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때는 그랬어요. 그렇지만 권총으로 사람을 해칠 생각은
없었어요."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권총을 사용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유도심문까지 하시는 걸 보니까, 아직도 절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면 최상준 씨를 만나서
물어보세요.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
"그 친구는 지금 어디 있읍니까?"
"아마 고절산 밑 외딴집에 있을 거예요."
"지훈이는 지금 어디 있읍니까?"
"그 앤 어디 있는지 몰라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귀신이라 누나도
모르는군요."
"그 앤 어릴 때부터 그런 이상한 구석이 많았어요."
"그날 지훈이를 중국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는데, 왜 해림씨
집에서 만나지 않고 중국집에서 만났읍니까?"
"그러잖아도 집으로 오라고 했더니, 얼굴이 팔린다고
거절했어요."
"그렇다면 진해에 다시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복수극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습니까?"
"계획은 했어요. 하지만 사람이 계획한 모든 것이 사람의
뜻대로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계획은 했지만, 실제로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
말이군요."
"예. 더더구나 환상살인은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살인이 아닌가
봐요. 예술처럼, 작품처럼 만들어지는 살인인가 봐요. 솔직이
말해서 우리 남매에게는 이상하게 복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이 항상 나를
가로막았어요."
"믿어지지 않는 말이군요."
"세상엔 믿어지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있어요."
"지훈의 행동도 그 중에 하나지요. 그날 지훈이를 중국집에서
만날 때도 전화약속을 먼저 했읍니까?"
"예. 그러니까 생각나는 말이 하나 있군요."
"무슨 말인데요?"
"앞으로는 전화도 잘 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어요. 누나가 받는
그 전화는 직통전화가 아니기 때문에 쪽지 같은 것을
사용하겠다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녹음 테이프 속에 그런 대화가 담겨 있었던 것
같군요. 잘 알았읍니다. 뭔가 감이 잡히는 것 같군요."
"그럼 이제 심문이 끝났나요?"
"한 가지만 더 묻겠읍니다. 어떻게 김남희(金南姬) 씨 댁에
세들어 살게 되었읍니까?"
"김남희 씨라니요? 김집사님 말씀이신가요?"
"예. 목포댁 말입니다."
"그분 성함이 김남희인 줄은 몰랐어요."
"집세를 낼 때 계약서 같은 것도 쓰지 않았읍니까?"
"예. 달세를 내기 때문에 계약서 같은 건 쓰지 않았어요."
"같은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까?"
"예. 나는 판자교회에 가뭄에 콩나듯 나가고 있어요."
"어떻게 그 집에 세들어 살게 되었읍니까? 교회를
통해서였읍니까?"
"아니예요. 이상하게 처음부터 친절한 아주머니와 줄이 닿아서
그 집에 세를 들었어요."
"목포댁이 먼저 접근해 왔읍니까?"
"예. 피난민이냐고 물으시더군요."
"그 다음에는요?"
"자기 집에 좋은 방이 하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다른 말은 없었읍니까?"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조용하게 방을 쓸 사람에게
세를 주고 싶다고 하더군요."
"잘 알았읍니다."
"저는 언제 내보내 주시는 거예요. 당장 내보내 주세요."
"아마 당장은 나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요?"
"그 이유는 본인이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정말
놈들이 해림씨를 없애려 했다면 오히려 이곳이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정말 사람을 이렇게 대접하기예요?"
"미안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윤형사는 사방이 음산한 벽으로 둘러싸인 취조실에 해림을
남겨두고 돌아섰다.
밤 10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윤형사는 경찰서를 빠져나와 중원
로터리를 가로질러 해림의 집 쪽으로 황급히 걸었다.
처음부터 정보가 새고 있었어. 해림에게 가는 중요한 전화는
낱낱이 체크되었던 게 분명해. 처음부터 귀신 같은 꼬마녀석이
염려했던 그대로였어.
그런데 그들은 누굴까? 용공주의자들일까?
아니면 그 밖의 검은 조직체일까? 아니면 일개 강도들의
집단일까? 곽사장과 목포댁은 아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된 셈일까?
어둠을 헤집고 흡사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민첩하게
목적지를 향해 윤형사가 접근하고 있을 무렵.
곽사장은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변장용으로 달았던 콧수염과
가발을 벗기 전에 수화기부터 들었다. 웬지 느낌이 중요한 전화
같아서였다.
"곽일남입니다."
"천리향!"
"옛."
"당신은 살이 너무 많이 쪘어. 군살을 좀 빼야겠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예."
곽일남은 부동자세를 취한 채 경직되어 있었다.
"당신의 서툰 움직임이 경찰 정보망에 포착되었어."
"정말이십니까?"
"바로 그 나무 밑에 묻어둔 물건들이 경찰의 손에 넘어갔어."
"그럴 리가 없읍니다."
"그 못생긴 형사가 다녀갔어.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어. 약속된
장소에 나와서 기다려."
"예. 알겠읍니다."
"약속된 시간은 부엉이 3이야."
"예. 그대로 시행하겠읍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동시에 맥이 확 풀렸다.
이대로 두고 갑자기 떠나야 하다니.... 물론 그들의 뒷받침이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 일구어 놓은 터전인데, 이 터전을 버려야
하다니.... 인생을 꽃피울 수 있는 터전인데....
문득, 코가 비뚤어진 못생긴 윤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그 볼품없는 놈에게 당했구나 싶었다.
천리향이 피는 남쪽나라 따뜻한 내 보금자리를 무참하게
짓밟아 놓다니, 이놈 두고 보자. 곽일남이가 얼마나 집념이 강한
인간인지 보여줄 날이 오래지 않아 닥쳐올 테니까.
곽일남은 조직의 우두머리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검은
조직이라는 것밖에 조직의 내부구조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아온 만큼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날이 곧 죽음을 불러들이는 날이 되기 때문이었다.
곽사장은 서둘러 귀중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공장과 저택은 은행에다 담보물로 잡히고 최대한의
융자를 받은 터라 별로 아까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결코 남겨두고 갈 수 없을 만큼 아까운 것은 금붙이와
보석들이었다. 그는 한 사람이 들고 가기에는 무거울 만큼 많은
금붙이와 보석과 현금을 소유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각.
윤형사는 해림이 세들어 사는 목포댁 대문 근처에 잠복하고
있었다.
목포댁 김남희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 같았다.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여겼기 때문에 몰랐지만, 분명 한 개의
얼굴을 가진 평범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교회 집사이면서 사채업자요, 계주였다. 교회 집사라는
직분과 사채업자라는 직업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포댁은 사채업자요, 계주로서 진해
바닥에서는 상당한 부자로 알려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집사로서도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안방 벽에는 교회당의 대형 조감도가 걸려
있을만큼 신앙에 대한 열의도 있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차를 대접받을 때였다. 거창한 교회당 조감도를 보고
윤형사가 물은 적이 있었다.
"진해에다 저렇게 큰 교회당을 지을 생각이십니까?"
"아니예요. 서울이나 부산에다 건축할 계획이예요."
"거 참, 섭섭하군요. 기왕이면 진해에다 건축하시지요."
"진해는 인구가 적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능력 있는 목사님이 소도시에 오시겠어요?"
"그런 점도 없잖아 있겠군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큰물에서 크게 활동하길 원하겠지요."
"그러믄요. 역시 윤형사님은 넓은 분이시라 통하는 데가
있군요."
"그럼 능력 있는 목사님을 찾으셔야겠군요?"
"예. 제 소망이 이루어질 단계에 가서는 찾아야겠지요. 기도
중에 있으니까 능력 있는 분이 나타나실 거예요."
"믿음이 좋으시군요."
"믿음대로 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대형 교회당 건축 문제를 놓고 대화할 때의 목포댁은 과연
교회 집사요 성녀(聖女)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전혀 다른 점도 있었다. 장난이 심한 여자였고, 볼수록
끼가 농익은 여자였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정사 정도는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여자 같았고, 요염하게 나긋나긋한 게
사내 한둘쯤은 어렵잖게 회쳐 먹을 여자 같았다.
윤형사가 노총각이라는 사실을 알고 김남희는 여러 차례
은근히 접근해 왔었다.
도대체 그 여자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장난거리로
색깔 있는 호의를 베풀려 했을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랬을까?
해림 남매의 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윤형사는 목포댁을
몇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목포댁은 무척 친절했다. 양주를 내놓은 적도
있었다. 차 한잔 정도는 보통이었다.
때로는 뭔가 갈망하는 눈빛으로 사람을 빨아들인 적도 있었다.
정말 몸둘 곳을 모를 만큼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총각 시절에 바람을 좀 피워야만 장가가서 아내를 만족하게
해줄 수 있단 말예요. 목석 같은 총각 형사 나으리님,
아시겠어요?"
바람기 있는 어지간한 남자 같았으면 농익은 그 과수댁에게 푹
빠졌을는지도 몰랐다.
단순히 고독한 과수댁의 바람기 섞인 호의가 아니었어. 미리
계산된 유혹이었을 가능성이 짙었어.
만약 정교(情交)가 일종의 뇌물이 아니라면 목포댁의 농익은
육체를 탐닉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매혹적인 여인이 은근히
가랑이를 벌리고 접근해 오는데 마다할 독신 사내는 없을
테니까.
"노총각이 젊은 과부 사정을 모르면 누가 알아요? 심심하면
놀러 오세요. 놀러 오시는 거죠?"
쉽사리 뿌리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때 정욕에 눈이 어두워 무턱대고 그 여자를 정복했더라면
오히려 내가 정복당했을 것 아닌가?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수사를 포기하거나 중단해야 할 뻔했잖은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역시 농익은 여자는 요물인 것 같았다.
목포댁 김남희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건장한 사내의 모습이 얼씬거렸다. 캡을 눌러쓴
사내는 그녀의 집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돌아서서 가로수
뒤에 몸을 숨겼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전신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윤형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옆구리의 권총에 손을
갖다대고 있었다.
목포댁의 끄나불일까? 그런데 그 여자는 어디서 무얼하고
있길래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일까?
가로수 뒤의 사내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분명히 목포댁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윤형사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자리를 떴다. 캡을 눌러쓴
건장한 사내가 몸을 숨기고 있는 가로수와는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사내의 등 뒤로 접근해 갔다.
7,8미터 정도까지 간격을 좁혔을 때였다. 가로수 뒤에 붙어
있던 어둠 속의 사내가 갑자기 돌아섰다. 거의 동시에 윤형사는
권총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꼼짝 말고 손들엇!"
캡을 눌러쓴 건장한 사내는 어둠 속에서 손을 들었다.
윤형사는 대어(大魚)를 낚은 낚시꾼의 기분으로 불심검문을
하기 위해 다가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헬로, 미스터 윤!"
건장한 사내는 미 고문관 제임스 브라운이었다.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목포댁을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브라운 씨도 무슨 냄새를 맡으신 모양이군요."
"남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본 결과 목포댁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았읍니다."
"남매라니요? 그럼 지훈이도 브라운 씨에게 정보를 제고해
왔단 말입니까?"
"예."
"그 꼬마녀석이 정말 귀신같이 설치는군요."
"그들 자신의 문제니까요."
"그 꼬마녀석이 경찰을 갖고 노는 듯한 야릇한 기분이 든단
말입니다. 투서를 하고 다방가에 소문을 퍼뜨려서 우리 과장님을
난처하게 만드는가 하면 내게 지시까지 하고 있단 말입니다."
"지시는 받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새로운 정보가 담긴 내용이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읍니다."
"정말 재미있는 친구군요."
"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수사과장님과 곽사장이 친하다는 투서는 지훈이가 한 게
아닙니다."
"그럼 브라운 씨가 하셨군요."
"어떻게 아셨지요?"
"그 녀석이 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밝힌 사람이 바로
당신이니까요."
"맞습니다. 내가 했읍니다. 수사에 촉진제가 필요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역시 그 녀석의 지시였군요?"
"물론 알려준 사람은 지훈이였지만, 판단은 내가 했읍니다."
"그럼 다방가에 소문을 뿌린 것도 브라운 씨였읍니까?"
"소문이야 내가 어떻게 내겠읍니까?"
"역시 지훈이 그 녀석이었군요."
"아직 곽사장한테서 무슨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읍니까?"
"냄새가 나긴 나는 것 같았읍니다."
"어떤 냄새가 나던가요?"
"글쎄요. 아직은 정확하게 냄새의 성질을 말할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읍니다. 하지만 내일쯤엔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될는지 모릅니다."
"3년 전에도 빨갱이들 때문에 진해경찰서가 홍역을
치렀었지요?"
"예. 난리가 났었읍니다. 그럼 이번 사건에도 용공주의자들이
개입됐다고 보시는 겁니까?"
"글쎄요."
"브라운 씨께서 이번 사건에 이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실
줄은 정말 미처 몰랐읍니다."
"해림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니까요."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다른 이유는 없읍니다."
"목포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사를 해 볼 만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목포댁의 고향이 함흥이란 사실을 알아냈읍니다."
"그럼 위장을 하고 있었군요."
"예. 그 여자는 서울에서 교육을 받았읍니다. 그리고 이북에서
결혼을 하고 남편과 헤어진 모양입니다."
"그럼 집이 은행에 저당되어 있는 사실도 알겠군요?"
"예. 말하자면 허울 좋은 개살구처럼 타인의 눈을 그럴싸하게
속이고 활동해 온 흔적이 나타났읍니다."
"죽은 다섯 사람의 신원은 제대로 파악되었읍니까?"
"사건이 이상하게 얼키고설켜서 현재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사건은 해결될 가능성이 있읍니다."
"미스터 윤이 어느 정도 감을 잡았으니까 다행이군요. 나는
이만 돌아가겠읍니다. 수고 많이 하시오."
브라운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후에도 윤형사는 잠복근무를
계속했다. 그렇지만 허사였다. 통금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퍼진
후에도 목포댁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윤형사는 수색영장을 가지고 곽사장 집으로 달려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곽사장은 집에 있지 않았다.
대문을 열어준 늙수그레한 식모 아주머니는 곽사장이 언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럼 어제 저녁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읍니까?"
"밤 늦게 들어오시기는 오신 것 같은데, 잠이 들어서 잘
모르겠심더."
"주인 아저씨가 들어오시기도 전에 주무셨단 말입니까?"
"어젯밤에 이상하게 잠이 빨리 들었십니더."
더 이상 붙잡고 대화를 해 보아도 소득이 없을 것 같았다.
윤형사는 창고에서 삽을 꺼내어 들고 천리향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를 비밀리에 파묻어 놓은 것
치고는 너무 엉성해 보였다. 한눈에 흙을 파헤쳤던 흔적이
뚜렷했다.
분명히 천리향나무 뒤에 뭔가 숨기는 것 같았었는데, 다시
꺼내어서 챙겨들고 도주한 게 아닐까?
한 발 늦은 것 같았다. 땅을 파헤친 흔적이 뚜렷한 지점을
다시 파헤쳐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다른 곳에 파묻은 건 아닐까 하고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허사였다.
어제 오후에 당장 쳐들어와서 파헤치는 건데, 나는 왜 늘
한발이 늦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어제 오후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수색영장이
없었는데다가 수사본부에 들렀더니, 박해림 남매를 빨리
체포하라는 불호령이 때마침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곽사장은
도망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내일 가택수색을 하더라도 늦지
않다고 하면서....
하과장님만 아니었으면, 곽사장부터 먼저 덮치는 건데....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묘수도 묘안도 묘책도 없는 수사가
늘 그랬다. 한 발작 늦거나 뒤통수를 치기 십상이었다. 못생긴
멍텅구리 형사라는 소리를 듣게 되어 있었다.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팔자에 없는 형사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다치고 하과장님은 뭔가? 늘 묘책도 묘수도 없이
부하 형사를 다그치는 통에 헛다리를 짚게 하는 장본인이
아닌가?
하기야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라지 않는가?
내팽개치듯 마당에다 삽을 내던지고 돌아설 참이었다. 그때,
식모 아주머니가 창문을 열고 윤형사를 불렀다.
"서에서 전화왔십니다. 빨리 받으시랍니더."
응접실로 뛰어들어갔다. 부리나케 수화기를 들자마자 하과장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도대체 뭣하고 있는 거야?"
"증거물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늦었어."
"늦다니요?"
"어젯밤 늦게 도청된 전화에 의하면 곽사장은 이미 어젯밤에
날랐어."
"그런데 왜 그런 중요한 전화내용을 진작 접수하지 못했는지
모르겠군요."
"실은 어젯밤 접수를 하고, 권형사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그런데 저만 몰랐었군요."
"수색영장을 받아내느라고 수고했지만 한 발 늦었어."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읍니다."
"연락이 잘 되지 않아서 그래. 뇌세포처럼 연락이 제대로
되어야 하는데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을 망쳤어."
"망치다니요? 무슨 일이 일어났읍니까?"
"속천으로 빨리 달려가 봐. 곽사장이 죽었어."
"죽다니요? 정말입니까?"
"두 사람이 익사했어. 조선공장이 있는 선창으로 빨리 가 봐."
"두 사람이 익사를 하다니요?"
"다른 한 사람은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어."
"알겠읍니다."
곽사장의 저택을 등진 윤형사는 근처 자전거포에서 자전거
한대를 빌려 타고 쏜살같이 속천으로 달려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곽일남이 우두머리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누가 그를 죽였을까?
어제 오후에 곽일남을 과감하게 덮쳤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다른 익사자는 누굴까? 혹시 목포댁은 아닐까? 어젯밤
늦게까지 그녀도 돌아오지 않았었는데....
선창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윤형사는 구경꾼들의 접근을 막고 있는 제복의 순경이 서 있는
지점까지 다가갔다.
안면이 있는 순경이 경례를 하였으나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가마니에 덮여 있는 두 구의 시체 앞으로 다가섰다.
가마니를 들쳤다. 곽일남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어제 오후에 만났을 때만 해도 당당하던 그 모습은 간 곳이 없고
푸르죽죽하게 부푼 사자(死者)의 얼굴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 곁에 나란히 덮여 있는 다른 가마니를 들쳐보았다.
순간, 움찔했다. 이마에 심한 타박상을 입고 푸르죽죽하게
부어 있는 그 얼굴은 최상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그가 당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확인해 보았으나 최상준의
얼굴이 틀림없었다.
그림자처럼 해림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녀를 도와주던 상준이
익사체로 발견되다니? 수영을 잘하는 남자가 선창 앞에 빠져
죽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다른 한 사람은 목포댁인 줄 알았는데, 상준이 죽다니?
그럼 목포댁 김남희가 범인이란 말인가? 과연 여자 혼자
힘으로 두 남자를 익사시킬 수 있었을까?
그때 두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듯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서
기어이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10. 제10장 死者의 告白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때때로 바람이 비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한참만에 하 수사과장이 침통한 얼굴을 들고 넋두리처럼
내뱉았다.
"곽사장이 그런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윤형사는 뭔가 알고 있었으면서 왜 체포하지 않았지?"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려는 듯이 권형사가 화제의 방향을
약간 돌렸다.
"체포할 만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여 한 발 늦었읍니다.
면목이 없읍니다."
"면목이 없는 사람은 바로 나야. 고향 선배, 학교 선배라고
너무 믿었던 게 큰 실수였어."
"곽사장과 최상준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윤형사의 견해는 어때?"
하 수사과장은 권형사의 질문을 윤형사에게로 돌렸다.
"제 생각으로는 두 사람이 싸우다가 익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두 사람이 한패거리였단 말인가?"
"아니었읍니다."
"검시의의 검시결과를 보면 두 사람은 어젯밤 열두 시 전후
거의 같은 시각에 익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최상준은 놈들에게 끌려가서 폭행을 당한 후 거의 의식불명이
되다시피 하여 익사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익사직전의 여자를 살려낼 만큼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곽사장은 어떻게 거의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익사했을까?"
"먼저 최상준을 바다에 던진 후에 그 다음 차례로 곽사장을
바다에 밀어넣었다면 거의 같은 시각에 익사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범인은 곽사장 패거리로서 곽사장과 함께 최상준을 죽게
만든 후 곽사장을 익사시켰단 말인가?"
"예. 곽일남이가 경찰에 잡힐 단계에 이르자 기밀유지를 위해
제거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곽사장은 어젯밤 집을 나갈 때 많은
귀중품을 가지고 나갔는데, 그 물건들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곽사장이 천리향나무 밑에 뭔가를 숨기는 걸 목격하고도
덮치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쉽군 그래."
"수색영장도 발부받지 못한데다 때마침 과장님께서 긴급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읍니다. 그리고 기회가 금방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그라질 줄은 미처 몰랐읍니다."
"정말 아까운 기회를 놓쳤어."
"다 잡은 고기를 놓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다 내 탓이었어."
"수사경험이 부족한 제 탓이었읍니다."
"과장님의 탓도 윤형사의 탓도 아니었읍니다. 놈들은 우리보다
한수 위였읍니다. 만약 윤형사가 곽사장 집을 덮쳤다면 놈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형사 생각에는 우리 수사요원들이 놈들에게
노출돼 있었다 그 말인가?"
"예. 우리는 놈들에게 노출되어 있었읍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건에 접근해 갔다 하면 놈들은 입을 막는 작전을 미리
썼읍니다."
"그럼 익사자 두 사람 모두 놈들의 기밀유지를 위한 제물로
희생되었단 말인가?"
"예. 최상준을 살려두면 박해림이 우동섭을 살해한 범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제거한 것 같습니다."
"윤형사 생각대로라면 놈들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무서운
놈들이군 그래."
"그렇습니다. 놈들은 살인전문가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읍니다. 자기네들에게 조금만 불리한 점이 노출되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여지없이 짓밟아서 증거를 남기지 않는 잔인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읍니다."
"그런 잔인한 놈들을 어떻게 잡지?"
"어젯밤 통금 이후 살인전문가가 속천에 묵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잡듯이 속천을 뒤져볼까요?"
"쥐도 새도 모르게 두 사람을 해치운 킬러가 날 잡아가시오
하고 지금까지 속천에서 기다리고 있겠어?"
"물론 자취를 감추었겠지만, 그래도 무슨 증거를 찾아낼
가능성이 있지 않겠읍니까?"
"괜히 수사에 혼선을 빚을 짓은 하지 말고, 권형사는 귀신을
붙잡도록 해."
"그 어린 놈 말입니까?"
"어린 놈이지만, 역시 귀신은 귀신인 것 같아. 권형사보다 한
수 높은 귀신임에 틀림이 없으니까 그놈을 잡으면 뭔가 소득이
있을 것 같네. 자네한테 고춧가루를 먹인 놈인데, 그냥 둘순
없잖아?"
"과장님도 농담이 심하십니다."
"왜? 서운하다 그 말인가? 하지만 그놈은 틀림없이 뭔가 알고
있을 것 같단 말이야."
"과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지훈이는 보통 놈이 아닙니다.
곽사장과 우동섭이 태화여관 건너편에서 만난 사실을 내게
전화로 귀띔해 준 사람이 바로 그 녀석이니까요."
"그놈이 정말 그런 정보를 윤형사한테 제공했어?"
"예. 랑랑다방을 통해서 중요한 정보를 보내어 주겠다고 이미
약속했읍니다."
"그런데 왜 진작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날 골탕 먹인
놈인데 말이야."
"만약 그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라면 두 분에게 제가
무슨 꾸중을 듣고도 남았을 겁니다."
"정말 그놈 맹랑한 놈인데! 아뭏든 권형사는 그놈을
잡아들이도록 하고, 윤형사는 목포댁을 한번 미행해 봐."
"예. 알겠읍니다."
"그럼 박해림은 어떻게 할까요?"
"그렇다고 그 여자의 혐의가 풀린 건 아니야. 오히려 혐의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 죽었기 때문에 현재로선 더
불리한 입장에 빠졌어."
"잘 알겠읍니다."
"제임스 브라운이 이번 사건을 해결해 보려고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친구한테 범인을 넘겨주어서는
안돼. 무슨 말인가 알겠지?"
"예."
수사회의를 마치고 두 형사는 수사과장실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희생자가 일곱 명으로 불어났어. 그런데 우리는 아직
범인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밟아보지 못했으니, 사표를 쓰라는
말이 나오게 생겼어."
"이젠 박지훈이가 범인이란 생각은 버리셨읍니까?"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 같군. 그 녀석을 잡아보아야
알겠지만, 최상준이 당한 걸 보면 그 녀석이 범인인 것 같지가
않아."
"정말 최상준 씨는 안됐읍니다. 비록 말은 더듬거렸지만,
순박한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윤형사 자네하곤 어떤 의미에서 라이벌이 아니었던가?"
"선배님도....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닙니다."
"그 친구도 박해림을 무척 따랐었잖아. 자네처럼 말이야."
"정말 인생이 허무합니다. 어디 가서 소주라도 한 잔
해야겠읍니다."
"그래. 그러자구. 까짓거 사표를 쓸 땐 쓰더라도 이런 참담한
기분으로는 도저히 수사가 안될 것 같군."
"오랜만에 선배님한테 인간적인 말을 들어보는 것 같군요."
"자네 정말 박해림을 사랑하는 모양이지? 그 아리따운 운명의
여자를 말이야."
"해림은 폭풍의 속의 여잡니다."
윤형사는 동무서답을 하고 있었다.
"그걸 누가 모르나. 옛날부터 비바람은 불어왔는데, 그리고
지금도 비바람이 치고 있는데."
두 사람은 비바람이 부는 거리를 거슬러 시장통으로 올라갔다.
허름한 대포집에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놈을 어디 가서 잡지?"
"진해에서 뜬 것 같더군요."
"그런데 어떻게 진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렇게 귀신처럼
알아낼 수 있었을까?"
"지훈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요. 이곳 진해에는요."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 녀석이 좋다는 것 아닌가?"
"그런 점이 없잖아 있어요."
"그 녀석이 진해 바닥에 없는 걸 보면 목포댁도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짙어."
"지훈이가 목포댁을 미행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 그래."
"그럼 마산으로 가봐야겠군요."
"마산으로?"
"예. 어젯밤 곽사장에게 걸려온 전화는 마산에서 온
전화였다고 하더군요."
"그럼 마산으로 가 봐야겠군 그래."
"목포댁이 집에 돌아왔는지 보고 움직이는 게 좋겠읍니다."
"한번 확인해 봐."
대포집에서 나오자마자 윤형사는 해양다방에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예상했던 대로 목포댁은 집에 없었다.
그 무렵.
박지훈은 마산에 있었다. 어젯밤부터 목포댁을 미행하고
있었다.
목포댁 김남희는 세련된 미모의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육감적인 몸매에 매혹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 사내는 누굴까?
김남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은밀한 동행자가 있었다. 건장한
삼십대 남자와 동행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동행임에 틀림이 없었다.
두 남녀는 어젯밤 향림여관에서 한방을 사용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여관을 옮겼다.
마산항에서 가까운 항도여관으로 은밀하게 자리를 옮긴
것이다.
목포댁이 먼저 여관에 투숙한 후 두 시간 이상의 간격을 두고
미지의 사내가 뒤따라 여관에 투숙했다.
어젯밤과는 달리 한방을 쓰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그랬다.
저 낯선 사내는 누굴까? 단순히 목포댁의 정부일까? 어디선가
한번 본 얼굴 같기도 한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뭔가 짚이는
게 있을 것 같으면서도 짚이는 없었다.
내 머리가 왜 이 모양일까? 한번 만난 사람은 몇 년이
지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는데....
어디서 본 사람일까? 그저 다방에서 지나치다 본 손님일까?"
담배 한 갑 팔아준 손님의 얼굴도 쉽게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데....
갑자기 돌대가리가 된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머리에 배반당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만난 사람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만났던 사람일까?
다음 순간,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먹구름과 함께
강렬한 느낌이 지훈의 전신을 부르르 떨게 했다.
바로 그 사람, 어둠 속에서 만났던 사람이었어. 어둠 속에서
만났기 때문에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내게 더러운 물을 먹인 자 중의 한 놈이 바로 저놈이야.
아무래도 안되겠어. 두 사람이 오늘밤에도 쉽게 헤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한번 접근해 보아야겠어.
지훈은 항도여관 맞은편에 있는 덕성여관의 방 하나를 빌었다.
비록 미성년자였지만, 머리 한번 귀신같이 굴린 덕분에 필요한
여관방을 어렵잖게 얻을 수 있었다.
진해경찰서 윤태호 형사의 이름을 대고 경찰 정보원이라고
꾸며댄 것이었다. 중대사건을 수사중인 수사반의 뒷바라지를
하는 정보원이라는 통에 여관 종업원은 방을 내놓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방값은 내는 거지예?"
"물론입니다. 오늘밤 윤형사님이 이곳에 오시기로 돼
있읍니다. 기본요금이면 되겠지요."
방값에다 덤으로 얼마를 얹어주자 여관 종업원은 굽신거리고
돌아섰다.
지훈은 종업원을 따라 아랫층 카운터로 내려가서 시외전화를
걸었다.
랑랑다방 미스 정에게 연락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윤형사님한테 연락이 오면 내가 있는 곳 전화번호를 알려주신
후에 내가 꼭 전할 말이 있다고 하세요."
"알았어. 몸조심해."
"예.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마치고 2층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맞은편 항도여관의
2층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지훈은 건너편 2층 방을 감시하느라고 창가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거울 앞에 앉았다.
얼굴을 고칠 수 있는 데까지 적당히 고쳤다. 그럴싸하게
검정을 칠하고 수염을 붙이고 중절모를 눌러 써 보았다.
다른 사람 같았다. 거지 같기도 했지만 언뜻 보기에는 삼십대
청년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대로 만족할 만했다. 혼자 멋적게 씨익 웃어보고 다시
건너편 항도여관 2층 방을 감시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럴 때 상준 형이라도 있어 주었으면 힘이 될 터인데.
아쉬웠다. 힘을 합하여 함께 일한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지훈은 최상준과 곽사장이 익사한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상준 형을 적당히 변장시켜서 형사라고 내세운다면
항도여관으로 쳐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게 아쉬웠다. 여느 때와는 달리 혼자 행동하기가 싫었다.
밤이 깊어갔다. 외로움을 느꼈다. 두려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 건장한 사내는 누굴까? 왜 방을 슬그머니 옮겼을까? 한
군데 오래 있으면 꼬리가 잡힐 염려가 있기 때문에 옮긴 것이
아닐까?
문득, 개천에서 구정물로 물고문 당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 사내들 중 한 놈도 키 큰 사내였어. 그리고 그 사내는
내가 누구인지 짐작했던 것 같았어. 어둠 속이었지만, 나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내였어. 그런데 그 사내는 내 이름을
확인해 보려 했었어. 누나의 이름까지 물었었어.
당시 그 사내들은 나를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렇다면 누구를 통해서 나를 간접적으로 알았을까?
목포댁 같았다. 목포댁이 아니고서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처음부터 목포댁이 정보를 빼낸 장본인이라면
그녀를 통해서 두 사내는 지훈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 같았다.
설마 그 엄청난 사건 뒤에 목포댁이 도사리고 있었을까?
목포댁은 교회 집사라고 했는데, 교회 집사가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큰 범죄 뒤에는 반드시 여자가 숨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 목포댁이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얼굴 없는 범인이라는
증거는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나 명백해진 것이 두 가지 있었다. 목포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빼낼 수 없는 정보가 쥐도 새도 모르게 밖으로
흘러나갔다는 점이었다.
목포댁이라면 자기가 직접 뛰지 않고도 얼마든지 우리 남매의
뒤를 밟을 수 있었을 거야.
다른 한 가지 사실은 아직 뚜렷한 윤곽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목포댁 주변에는 낯선 외지의
두 사내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벚꽃철 외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시기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일을 벌였던 게 틀림없어.
그런데 중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한 사내는 왜 나타나지
않을까?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편 저녁 나절 마산에 온 두 형사는 전화통에 매달려
숙박업소를 점검해 보았지만, 김남희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화가 있는 숙박업소는 다 확인했는데도 그런 여자가 투숙한
집은 나타나지 않으니 어떡하지요?"
"그 여자는 틀림없이 가명을 썼을 거야."
"혹시 진해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아직 꼬투리를 잡힌 건
아니니까요."
"안심하고 돌아갔는지도 모르지. 한번 확인해 봐."
윤형사가 곧 진해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목포댁은 집에
없었다.
"여관마다 이 잡듯이 뒤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 그래."
"잠깐만요."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언뜻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왕 내친 김에 윤형사는 랑랑다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낯선 전화번호가 윤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산의
전화번호라는 다방 레지의 말에 윤형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훈이 있는 곳 전화번호를 알아냈읍니다. 꼭 전할 말이
있다고 하는군요."
"내가 왔다고 하지 마."
"알겠읍니다."
윤형사는 오래지 않아 지훈과 통화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목포댁을 찾으러 오셨나요?"
"응. 어떻게 알았지?"
"그 여자가 있는 곳을 알려 드릴까요?"
"응. 빨리 알려 줘."
"권형사님도 오셨지요?"
"아니. 혼자 왔어."
"목포댁은 혼자가 아니예요. 키가 180센티나 되는 건장한
남자와 함께 있어요.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올는지도 몰라요.
윤형사님 혼자서는 당해내기 어려울 거예요."
"빨리 그 여자가 있는 곳을 알려 줘. 뜸은 그만 들이고."
"권형사님하고 같이 오셨군요?"
"그래. 좋도록 생각해."
"목포댁은 마산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어요."
"거기가 어딘데?"
"우리 누나는 지금 어디 있어요?"
"집에 계시겠지."
"집에는 없더군요."
"안전한 곳에 있어. 염려하지 말아. 날 믿어. 목포댁은
어디있지?"
"누나는 체포당했군요."
"그곳이 더 안전해. 그리고 죄가 없으면 곧 풀려날 거야."
"위험한 일이 일어났었군요. 태화여관에서 우동섭이란 사람이
피살당했다더니만 말예요."
"글쎄. 알 만한 건 다 아는군 그래. 이제 그만 말해 봐."
"상준 형은 어디 있어요?"
"아직 그 사람들 사건은 발표되지 않았던가?"
"상준 형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죽었어."
"주, 죽다니요?"
"곽사장과 함께 속천에서 익사체로 발견됐어."
"저, 정말이예요?"
"이젠 목포댁이 어디 있는지 말할 차례야."
"항도여관 2층에 있어요. 덕성여관 203호실이 윤형사님
방이예요."
"고마와."
"권형사님한테 전해 주세요. 지훈일 잡을 생각은
포기하시라구요."
"알았어."
"어젯밤에는 그들이 향림여관 2층에 있었어요. 수고하세요."
먼저 지훈이 쪽에서 수화기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상준 형이 죽다니? 더우기 자신의 앞마당처럼 생각하고 있는
속천에서 익사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연신 터지는가 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어린 지훈은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분명히 타살이야. 상준 형은 우리 남매 때문에 죽은 거야.
못난 우리 남매 때문에 고귀한 생명을 바친 거야. 우리 남매를
위해 살아 남으려고 집게손가락을 짜르고 군대에도 가지
않았었는데, 결국 얼굴 없는 놈들에게 당하고 말았어.
나는 놈들의 정체를 밝혀내어야 해. 상준 형은 죽고 누나는
체포당했어. 얼굴 없는 흉악한 놈들의 음모에 걸려들었던 게
분명해.
지훈은 울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적시고 있었다.
문득, 울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민첩하게
움직여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동섭의 가족을 만나야 해. 부산 중앙동에서 술도매상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가족이 있을 거야.
덕성여관을 나섰다. 건너편 항도여관 2층 목포댁이 묵고 있는
방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여관 가까이에 있는 전신주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두
형사가 나타나자 지훈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두 형사는 외등이 졸고 있는 항도여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할까요, 선배님?"
"자넨 여기서 목포댁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어. 우선 지훈이
녀석부터 체포할 테니까."
"벌써 달아났을 겁니다. 귀신 같은 놈이 여관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읍니다."
"그래도 혹시 알아? 자넬 믿고 죽치고 앉아 있을는지, 조금만
기다려 봐. 203호실이라고 했지?"
"예."
권형사는 고집스러웠다. 기어이 덕성여관 203호실에 들렀다가
돌아왔다.
"지훈이가 기다리고 있던가요?"
"자네도 날 놀릴 셈인가?"
"목포댁이 2층 어느 방에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더 급합니다."
"바다가 보이는 방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다면 불이 켜져 있는 오른쪽 끝방이군 그래."
"그래도 확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선배님이 먼저 올라가서
방을 마련해 놓으세요. 난 얼굴이 팔려서 곤란합니다."
"그럼 자넨 바깥에서 감시하고 있어. 내가 방을 하나 빌어놓고
내려올 테니까."
"종업원에게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하지만 남자만 둘이서 투숙을 한다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 동안 저는 여자로 변장하겠읍니다. 선배님의 애인 노릇 좀
하게요."
"윤형사 자네가?"
"예. 보나마나 못생긴 여자가 되겠지만, 오늘밤만은 꼭 필요한
여자가 될 겁니다."
"그러잖아도 잡부라도 하나 있었으면 일하기가 쉽겠다
생각했었는데, 마침 잘됐군 그래."
"졸지에 잡부로 전락할 신세가 되었군요. 조심하세요."
"알았어."
권형사가 항도여관 2층에다 방을 하나 구해 놓고 밖으로
나왔을 때, 윤형사는 여자로 변신해 있었다.
비록 치마는 두르지 않았지만, 빨간 잠바 차림에 긴 머리채를
가진 영락없는 여자로 변해 있었다. 신발까지 빨간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여관 종업원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고 2층 방으로 윤형사를
데리고 들어온 권형사가 의심스런 눈으로 물었다.
"정말 여우한테 홀린 기분인데! 어떻게 된 셈이지?"
"잠바를 뒤집어 입고, 미리 준비해 온 가발을 쓰고 운동화를
바꾸어 신었을 뿐입니다."
"그런 잠바를 입고 다녔나?"
"예. 특별히 주문한 겁니다."
"입술엔 루즈까지 칠했잖아?"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애들처럼 청바지를 입고 가방까지 들고 다닌다고 했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군 그래."
"잡담을 나눌 때가 아닙니다."
"알았어. 슬슬 움직여보자구."
"180센티짜리 사내의 방은 어느 방입니까?"
"아직은 몰라. 하지만 복도 맨 끝에 화장실과 세면장이
있으니까, 몇 번만 다녀오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럼 화장실 바로 옆방이 그 여자의 방입니까?"
"아마 그런 것 같군. 덕성여관 203호실에서 마주볼 수 있는
방이 그 방이니까."
항도여관 2층에는 객실이 모두 열 두 개였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여섯 개의 방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었는데, 출입구만은
서로 마주치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다행히 2층 입구의 방이 남아 있었군요."
"우리 한테는 좋은 방이지만, 밀애를 나누기에는 이 방이 가장
신통찮은 방이니까 남아 있었던 거야."
"아뭏든 길목을 지키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두 형사는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가며 화장실과
세면장을 오가는 동안 목포댁과 미지의 사내가 투숙해 있는 방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목포댁은 맨 끝방이니 212호실에 투숙해 있었고 미지의 사내는
바로 옆방인 211호실에 있었다.
"무턱대고 이렇게 기다릴 셈인가?"
"적어도 한 놈이 더 나타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래도 두 사람이 행동을 개시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현재 상태로는 체포한다 해도 구속할 만한 건덕지가 없지
않습니까?"
"곽사장 때처럼 한 발 늦기 전에 체포부터 해 놓고 증거물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이번엔 놓칠 염려가 없읍니다. 설령 놓친다고 해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무턱대고 사람을 잡아들일 순 없지 않습니까?"
"내 생각엔 체포하는 게 좋겠어."
"섣불리 체포했다간 사건을 미궁 속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읍니다."
"왜? 무엇 때문에?"
"완전범죄를 목표로 했던 환상살인극이었기 때문입니다."
"놈들은 단수가 높은 놈들이야. 아무래도 독안에 든 쥐꼴이
되었을 때 체포하는 게 안전할 것 같아."
"안전제일주의로는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어려울 겁니다.
무조건 체포하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은 예상도주로를 미리 차단해
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상도주로가 어딘데?"
"바다입니다."
"바다라고?"
"바다로 도주할 가능성이 큽니다. 죄송하지만, 덕성여관에 좀
다녀오세요."
"거긴 왜?"
"해양경찰대에다 부탁을 좀 해 놓고 오세요."
"전화를 하고 오란 말인가?"
"예. 저는 꼴이 이래서 가기가 곤란하지 않습니까?"
"알았어."
"기왕이면 마산경찰서에도 지원을 요청해 놓으세요. 일당을
놓치고 싶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알았어. 여자로 둔갑을 하더니만, 남자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는군 그래."
"죄송합니다. 여자란 원래 그런 겁니다."
"진짜 여우한테 홀린 게 아닌지 모르겠군."
투덜거리면서 권형사가 밖으로 나간지 이삼분이 지났을까.
옆 방에서 조심스럽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윤형사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낯선 사내가 김남희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두 남녀는 보통 정부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단순한 정부
사이라면 오늘밤 목포댁은 진해로 돌아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젯밤 두 남녀는 육체의 향연을 벌일 만큼 벌였을 테니까.
아무래도 다른 목적이 있어 대기중인 자들 같았다.
다행히 권형사가 돌아올 때까지 목포댁 일행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과장님한테까지 연락을 취했어. 마산항으로 나오시겠다고
했어."
"수고했읍니다."
"놈들이 언제 행동을 할는지 모르니까 교대로 잠 좀 자 두는게
어떻겠어?"
"그러다가 두 사람 다 잠들면 어떡합니까?"
"불침번을 제대로 못 선 사람은 사표를 써야지."
"먼저 좀 쉬세요. 두 시간 후에 깨우겠읍니다."
두 형사가 교대로 잠을 청한 후에도 목포댁 일행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사만 나누고 아침에 여관을 나설 작정인가?
답답했다. 윤형사는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나마 자기가 쉴 시간에는 코를 골며 단잠에 빠질 수 있는
권형사가 부러웠다.
통금해제 사이렌이 밤의 적막을 잔인하게 찢어 놓았다. 새벽
4시였다.
분명히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윤형사는 신경을 칼날처럼
곤두세웠다.
빠끔히 열어놓았던 문을 닫았다. 아랫층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문앞을 지나가야 하는데, 빠끔히 열린 문을 보면
십중팔구 의심을 사게 될 것 같아서였다.
문을 닫는 대신 윤형사는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귀를
기울였다. 오래지 않아 조심스럽게 문앞을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귀에 스며들어 왔다.
말없이 권형사를 흔들어 깨웠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어, 어떻게 됐어?"
"조용히 하세요. 방금 사내가 아랫층으로 내려갔읍니다."
윤형사는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권형사는 뭔가에 쫓기고 있는
것처럼 여유가 없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따라나서야 할 거 아니야."
"너무 급히 서둘면 오히려 놓치기 쉽습니다. 선배님은
목포댁을 맡아 주세요."
"체포하란 말인가?"
"도주하기 전에는 체포하지 않으시는 게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인물과 접선을 할는지 모르니까 끝까지 미행하는게
좋을 것 같단 말인가?"
"예."
"그런데 자넨 혼자서 그 사내를 감당할 수 있겠어?"
"여자 차림이라 사내를 미행하는 데는 안성마춤일 것
같습니다."
"놓치지 말아야 해. 해경 경비정이 부두에 대기중일 거야."
"알겠읍니다."
윤형사는 진짜 여자처럼 미소를 지어 보이고 객실을 나섰다.
잠시 후, 인기척이 나더니만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종업원이 안으로 잠겨 있던 자물쇠를 열어준 모양이었다.
거의 동시에 윤형사는 행동을 개시했다. 여관 종업원은 아직
이른 새벽이라 남자 손님을 밖으로 내보내고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잠깐만!"
낮은 목소리였지만, 무게가 있는 목소리로 여관 종업원에게
자물쇠를 채우지 못하게 했다.
윤형사가 밖으로 나왔을 때, 키 큰 사내는 총총걸음으로
부두를 향하여 멀어져 가고 있었다.
사내는 이따금 뒤를 힐끗힐끗 돌아다보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에 묻혀 있는 전신주 뒤에 교묘하게
몸을 숨겨가며 따라가는 윤형사의 미행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둠과 적막이 깔린 항구에는 안개까지 내리고 있었다. 처량한
파도 소리가 사내의 심장에 와서 강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학인해 보았지만, 미행자는 없었다. 사내는 일단은
성공이라고 믿었다.
사내는 소형 어선들이 밀집해 있는 방파제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려갔다. 석유 램프를 밝혀놓고 사내를 기다리는 어선이
있었다.
윤형사는 사내가 방파제 쪽으로 접어든 것을 확인한 후에 선창
쪽으로 뛰어갔다.
사내는 소형 어선에 접근했다. 어선에 오르기 직전 다시 한번
방파제 끝을 살펴보았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안개뿐이었다.
사내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어선에 올라탔다.
사내가 승선하자마자 발동이 걸렸다. 소형 어선의 요란스런
엔진 소리가 새벽 바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어선은 방파제를 떠났다. 잔잔한 물살을 가르고 미끄러지듯
전진해 나갔다. 신선한 갯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항구의 불빛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방파제가 가물거리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어선에 타고 있는 두
사내의 귓전을 때렸다.
해경 경비정의 사이렌 소리였다. 그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어선 오른쪽에서 파고드는
소리였다.
소형 어선에 타고 있는 두 사내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이렌이 울리는 쪽에 가 있었다.
"빨리 패물 주머니를 바다에 버려! 버린 지점을 잘 기억해
놓고서."
키 큰 사내의 명령이었다. 사내는 어느 결에 냉혹한 상관으로
변해 있었다.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잔말 말고 빨리 버렷!"
"예. 알겠읍니다."
묵직한 두 개의 검은 주머니가 어둠에 덮인 바다에 내던져진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경비정은 탐조등을 환하게 비추며 무서운 속력으로 소형
어선의 옆구리께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성난 고래처럼 흰
거품을 마구 내뿜으면서.
"정체불명의 어선, 그 자리에 멈추어라! 어선, 빨리 멈추어라!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어느새 접근해 온 경비정의 확성기 소리가 두 사내의 고막을
뒤흔들어 놓았다.
"항도여관에서 나온 사내는 듣고 있겠지? 반항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키 큰 사내는 기가 막혔다. 분명히 미행자가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꼬리를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날 아침, 진해경찰서로 압송되어 온 두 사내의 신원은
다음과 같았다.
1. 민창호(閔昌浩) : 만 36세. 독신. 사기폭력전과 3범
원적 : 신의주
본적 : 서울
주소 : 부산 남포동
직업 : 요식업
2. 김병섭(金炳燮) : 만 34세. 기혼. 밀수전과 2범. 김남희의
6촌 남동생.
원적 : 함흥
본적 : 부산
주소 : 마산 오동동
직업 : 어부
전직 : 군속(문관)
두 용의자는 각각 다른 방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한결같이 범행을 부인했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겁니까? 대한민국에는 법도
없읍니까?"
"왜 법이 없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람을 함부로 범인 취급해도 되는
겁니까?"
증거가 있으면 내놓고 조사를 하든지 심문을 하든지 하라는
것이었다.
"왜 새벽에 어선을 타고 도망치려 했지?"
"도망을 치다니요? 낚시질이나 할까 하고 배를 탄 것도
잘못입니까?"
"거짓말 마. 바다에다 금은보석을 버린 작자들이 낚시질을
간다고?"
"무슨 보석 말입니까?"
"정말 버리지 않았어?"
"금은보석을 왜 버립니까?"
"알았어. 버리지 않았다니 할 말이 없군 그래. 당신이
경영하는 불고기집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
"좀 공손하게 물으면 안됩니까?"
"살인마한테 공손이 어딨어."
"살인마라니요?"
"전화번호가 몇 번이냐고 물었잖아."
"1354번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마산 향림여관에서 216번으로 전화한 게
당신이었지?"
"216번이라니요?"
"곽사장집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하겠어?"
"모릅니다."
"김병섭의 전화번호도 모르는가?"
"압니다."
"몇 번이지?"
"마산 425번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럼 김남희의 전화번호는 몇 번이지?"
"진해 327번입니다."
"전화번호만 보아도 너희들이 살인마의 일당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어."
"사람 웃기지 말아요."
"천영만의 수첩에 네 사람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어."
"사람 놀리지 말아요."
"천영만은 머리가 나쁜 사람이거나 기억력이 부족했던
사람이라 나름대로 중요한 전화번호를 암호식으로 수첩에 기록해
놓았던 거야. 자, 두 눈이 있거든 똑똑히 봐."
윤형사는 수첩에 적혀 있는 아라비아 숫자와 알파벳 부호를
민창호 앞에 내놓았다.
131217--H
424146--G
343235--K
21232524--M
"무슨 전화번호가 그렇게 길어요. 제발 사람 헛갈리게 하지
말아요."
"나 역시 처음에는 전화번호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하지만
연구해 본 결과 전화번호란 사실을 알아냈어."
"그런 엉뚱한 숫자 놀이에 넘어갈 내가 아닙니다."
"숫자뿐만이 아니야. 숫자 뒤에는 알파벳 대문자가 있어. M은
민창호, K는 김병섭, G는 곽일남, H는 김남희의 끝 글자를 따낸
약칭이었어."
"편리하게 갖다 붙이시는군요."
"김남희가 서열 1, 민창호가 서열 2, 김병섭이 서열 3, 곽일남
사장이 서열 4로 전화번호에 나타나 있었어. 사실 그대로겠지?"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군요."
"전화번호 앞머리부터 서열을 사이사이마다 넣어 놨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화번호인 줄 몰랐어. 혹시 죄수번호인가 했는데,
수인의 번호도 아니고, 군번도 아니고 포로들의 번호도
아니었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결국 숫자의 비밀은 풀렸어, 숫자의 비밀까지 드러난 이상 더
버텨 봐도 소용이 없어. 순순히 털어놓는 게 피차에 좋을거야."
"난 털어놓을 게 없읍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불러주는 대로 글을 써 봐. 왼손으로 열
번, 오른손으로 스무 번만 써 봐."
"필기공부까지 시킬 생각입니까?"
"필체감정을 해야겠어. 그래도 고집을 피우면 목소리까지
감정을 하겠어. 녹음된 목소리가 있으니까."
"무슨 근거로 사람을 이렇게 마구 잡는 겁니까?"
"신사적으로 대할 때 펜을 들어!"
윤형사가 민창호를 심문하고 있을 동안 권형사는 다른 방에서
김병섭을 심문하고 있었다.
"바른대로 말해. 뒤통수의 상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은
상처인가?"
"몇 번이나 말해야 합니까? 사흘 전에 오동동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다가 불량배한테 짱돌로 얻어 맞은 겁니다."
"목격자가 있어?"
"찾아보면 나올 겁니다."
"거짓말하지마. 그 상처는 이틀 전에 태화여관 뒤에서 최상준
씨한테 얻어맞은 상처지?"
"나는 누구한데 얻어맞았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럴 테지. 그럼 그 상처, 어느 병원에서 꿰매었어?"
"오동동에 있는 병원인 것 같은데,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읍니다."
"오리발만 내밀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그럼 어제
그제밤에는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어?"
"집에 있었읍니다."
"집에서 무얼 하고 지냈어?"
"잠잤읍니다."
"증인이 있어?"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군 그래."
진해경찰서에서 두 용의자를 심문하고 있을 무렵.
지훈은 부산 중앙동에 가 있었다. 마산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달려온 것이었다.
우동섭의 가게는 닫혀 있었다. 이웃 점포에 들어가 물었더니,
연고자가 한 사람 있다고 했다. 장사는 하지 않았지만, 점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위하여 매일 한두 번씩 가게에 들른다고
알려 주었다.
가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두 시간 가량 기다렸을까.
젊은 여인이 자물쇠를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훈은 주위를 살펴본 후, 우동섭의 가게로 달려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낯선 청소년을 보고 장수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누구예요?"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반가와서 뛰어들어
왔읍니다."
"왜 오래 기다렸어요?"
"진해경찰서 윤형사님이 보내서 왔읍니다."
"정말이예요?"
"예. 우동섭 씨 피살사건에 대해서 뭔가 아시는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범인을 잡는 데 참고하려고 합니다."
"왜 윤형사님이 직접 오시지 않고 어린 사람을 보냈지요?"
"그분은 용의자들을 체포하느라고 너무 바쁘셔서 대신 절
보냈읍니다."
"그러잖아도 윤형사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실 줄 알고 윤형사님이 절 보내신 겁니다."
"믿어도 될까요?"
"진해 충무중학교 학생이니까 믿어도 되실 겁니다.
박지훈이라고 합니다."
"중학생이 이렇게 커요?"
"정상적으로 다녔으면 고등학생이 되었을 텐데,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입니다. 피난 나와서 뒤늦게 야간중학교에 다니고
있읍니다. 학생증 보여 드릴까요?"
"괜찮아요. 학생의 얼굴을 보니까,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실은, 어제 이상한 등기우편물이 왔기 때문에 그러잖아도
윤형사님한테 전하고 싶었어요."
"아마 윤형사님은 며칠 동안 움직이지 못하실 겁니다. 제가
전해 드리지요."
"절대로 뜯어보면 안되는 편지예요. 약속 지킬 수 있어요?"
"예."
"나한테도 필요한 편지지만, 어쩐지 가지고 있기가 무서워서
윤형사님이 오시지 않으면 오늘 오후에라도 진해경찰서로 부칠
생각이었어요."
"그럼 마침 잘 되었군요. 제가 인수증을 써 드리고
가져가겠읍니다."
"그렇게 해줄래요?"
"예."
지훈은 종이 한 장을 얻어 인수증을 써 주고 여인에게서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꼭 윤형사님한테 빨리 전해 주세요."
"염려 마십시오."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가게를 등지자마자 지훈은 재빨리
걸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긴 편지이기에 절대로 뜯어보아서는
안되는 편지라고 하는가?
궁금했다. 얼른 뜯어보고 싶었다. 그 여인의 진지한 표정만
읽어보아도 중요한 편지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지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적한 골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여인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여겨졌을 때, 걸음을
멈추고 적당한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약속을 지키려면 편지 겉봉을 마구 뜯어 버릴 수는 없었다.
겉봉 아랫쪽 부분의 미세한 틈 사이에다 성냥개비 만한 작은
꼬챙이를 끼우고서 아주 천천히 빙글빙글 돌렸다. 겉봉 밑
부분이 흠 하나 없이 감쪽같이 열렸다.
지훈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소리없이
차분하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우동섭에게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따라 웬지
모르게 X의 인생을 몇 줄 적어두고 싶다.
오늘밤 X는 G를 만나러 간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하기
때문에 만나러 간다.
G쪽에서 빚을 갚겠다고 자청해 온 것은 뜻밖의 일이다. 무슨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빚은 보통 빚이 아니다. 그 빚을 받아내려고 독촉해 오던
두 사람이 다시는 그 빚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곳으로 가
버렸다.
X는 그 빚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G에게 맡겼던
금불상과 금붙이 등은 불로소득물이었다.
X는 마(魔)가 끼인 금불상이 어떤 검은 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간 사실을 정작 알았다.
G가 엄살을 떨면서 그 검은 조직에 대하여 술김에 들먹거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G는 '무당벌레'라는 그 조직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X는 G의 말을 믿기로 작정했다. 금불상 대금 일부가 치러지는
과정에서 G가 대금을 잘라먹은 구린내가 풍겼지만 모른 척 했다.
G는 그 조직의 연락책인 K의 얼굴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K는 X가 전부터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밀수꾼이었다.
X는 어느날 부산에 들른 K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미행한
결과 M과 접선하는 것을 발견했다.
M은 남포동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정도만 알고 말았으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X의
호기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갈색 선글라스를 즐겨 쓰는 그 여인은 진해행 직행 버스를
타고 돌아가곤 했다.
그 여인은 진해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진해의
유지라고 할 수 있는 G는 그 여인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조직의 이름을 알면서도 정체를
전혀 모르다니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그런데 최근에 떠오른 한 토막의 기억 가운데는 얼마 전에
당한 C가 전부터 M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포함돼 있었다.
4년 전인가. M이 사기범으로 구속되었을 때, C가 면회를
가려다가 포기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C가 언제부터 어떻게 M을 알고 있었을까?
C 역시 그 조직의 일원이었는데, 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얼키고설킨 인간관계에 대하여 한 마디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 X는 그들 모두에게서 떠나고 싶다.
4년 전 여자를 해칠 마음이 없었다. 손댈 마음도 거의 없었다.
그저 한 밑천 잡아보자는 꾀임에 빠져 가담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느닷없이 X의 손목을 물고 늘어졌다. 팔이
잘려나가는 듯한 통증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여자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겠지만,
X는 X대로 이성을 잃었다.
X는 전혀 경험이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단검을 뽑아들었다.
앞뒤 가릴 겨를이 없었다.
그 여자의 가슴에 단검이 꽂혔을 때 X 자신의 운명도 천길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큰 실수였다. 그 실수가 또 다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금방
불러들였다. X는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여자를 폭행하는
짓에까지 휘말려들어갔다.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처럼 그다지 어렵잖게 참회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하고, X는 여러 차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날 밤 그 범행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독이 서린 이빨자국
같은 것이어서 X의 뇌리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X! 너는 무당벌레들이 너를 찾아 날아들기 전에 먼저 찾아가서
어둠에 휘말렸던 과거를 청산해 버리고 돌아와야 한다.
마음의 소리를 듣고, X는 기쁜 마음으로 G를 만나러 간다.
빚을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그런 빚은 애당초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놓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X는 자립의 기반을 스스로 땀 흘려 이루어 놓았다. 구태여
악마가 끼어 있는 금불상에 관계할 필요가 없게 되어 있었다.
X에게는 이제 밝은 내일이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 X에게
불행이 닥친다면 X의 재산은 J에게 모두 돌아가야 한다. J는
임신 4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는 X의 여인이다.
X도 J도 외로운 사람이다. 외로운 사람 사이에 소중한 씨가
잉태된 것이다. 어떤 금붙이나 금불상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생명이요, 아름답게 자라나야 할 소중한 씨이다.
착한 J는 외로운 두 사람 사이의 소중한 씨를 착하게 건강하게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X는 이상야릇한 감회에 젖어 이 글을 마무리 짓는다. 왜
썼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4월 어느 날
X가 우동섭에게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접어서 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X는 우동섭 자신이었다. X는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X의 용기가 무척이나 돋보이는 편지였다. 지훈은
그렇게 느꼈다. 이미 죽은 X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뜨거운
눈물이 핑 돌 따름이었다.
왜 이런 편지를 썼을까? 죽음이 임박한 줄 알고 쓴 것일까?
차라리 도망을 치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우동섭은 만에 하나 자신에게 위험이 닥칠 경우를 생각하여
곽일남을 만나러 진해로 떠나면서 자기 자신 앞으로 편지를 띄운
것 같았다. 아무런 사고 없이 돌아오면 자기 앞으로 배달되어 올
편지를 받아서 없애 버리면 되기 때문에.
그러나 만에 하나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참회하고 청산하는 유서인 동시에 '무당벌레'의
정체를 폭로시킬 증거물이 되게 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임신중인 J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자기의 씨를 잘
부탁하는 일석삼조의 목적을 지닌 편지 같았다.
그렇다면 그 '무당벌레'들이 우리 부모님을 죽인 자들을 모두
처단해 준 셈이 되지 않는가? 놈들이 강도질한 물건들을
가로채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 남매에게 누명을 모두 뒤집어
씌우기 위하여....
지훈은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거지 행색으로 진해에 잠입했다.
그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갈색 선글라스를 즐겨 쓰는 여인은 누굴까?
십중팔구 목포댁 김남희일 것 같았다. 그 여자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목포댁은 이미 마산에서 체포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모를 일이었다. 워낙 두뇌회전이 빠른 뱀 같은
여자여서 형사들의 미행을 따돌렸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포댁이 체포되었으면 누나는 풀려났을 테지.
327번으로 전화를 걸었다. 목포댁이 아니면 누나, 둘 중의 한
사람이 전화를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호가 가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포댁의 목소리였다.
이게 어떻게 된 셈일까? 아직 체포당하지 않고 있다니.
일단 전화를 끊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목포댁은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성공했을 경우 M이
제3자를 통하여 두 사람만이 아는 안부를 전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누굴 찾으세요?"
"무당벌레를 찾고 있소."
굵직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압도당한 듯 목포댁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목포댁, 왜 대답이 없지?"
"도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그런 건 알 필요가 없어."
"알 필요가 없다니요?"
"목포댁 당신이 무당벌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어."
"생사람 잡지 말아요."
"명색이 교회 집사가 무당벌레가 되다니, 불쌍하군 그래."
"뭐라구요?"
"차라리 진딧물을 잡아먹는 진짜 무당벌레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어."
"정체를 밝혀요."
"우리는 처음부터 정보가 새고 있는 사실을 알았어. 교회
집사라는 허울 좋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갈색 선글라스를
즐겨 쓰는 목포댁이 정보를 뽑아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미스 박에게 방을 내주고 그 여자에게 걸려오는 전화 내용을
도청하여 정보를 빼어낸 게 목포댁 당신이 아니면 누구겠어?"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방은 어른의 굵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어설픈 데가 있었다. 목포댁은 금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알 만한 사람이군 그래.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날 속일 수는 없을거야."
"최상준 씨는 왜 죽였지?"
"난 모르는 일이야. 형사들한테 물어 봐."
"교회 집사가 사람을 죽이다니! 돈독에 오른 살인마
같으니라구!"
"이젠 못하는 소리가 없네."
"최상준 씨를 살려 내놔!"
"뭐, 뭐라구? 난 지훈이 너 얼굴을 알고 있어. 까불면 그냥
두지 않겠어."
"잔소리 말고, 최상준 씨를 살려 내놔!"
"그렇게 하라고 윤형사가 시켰지?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고
덜미를 잡으려고 말이야."
"난 그런 멍청이 형사의 끄나불이 아니야. 난 바로 당신의
모가지를 원하는 귀신이야. 귀, 귀신도 몰라?"
"뭐, 뭐라구?"
"K와 M은 체포되었어. 의심스러우면 경찰서에 한번 확인해
봐."
"난 그런 사람이 누군지 몰라."
"능청 떨지 마. 향림여관과 향도여관에 함께 투숙했던 놈도
몰라?"
"지훈이 너, 지금 제 정신이 아니구나."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모든 것을 고백해. 금불상과
일본은행권 보관증은 어떻게 했어?"
"어린것이 어른한테 그러면 못써.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더라도 그러면 안돼. 알겠어?"
"무당벌레의 정체는 다 드러났어. 내 손에 들어와 있는 X의
편지만 경찰에 넘어가면 형사들이 곧 당신을 체포하러 갈 거야.
늦기 전에 다 털어놔."
"지훈이 너 정말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래. 난 너희 남매를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았어. 오히려 두 사람 모두 좋게 봤어.
그러니까 그 말버릇부터 고쳐."
"난 귀신이야. 당신이 날 언제 보았다고 아첨을 다 하지?"
"지훈아. 제발 그러지 말아.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다고 내게
누명을 씌우려드니?"
"최후의 발악을 하는군 그래. 누명을 쓴 사람은 따로 있어."
"제발, 너무 흥분하지 마. 나중에 몹시 후회하게 될 거야."
"목포댁, 김남희 집사! 당신은 이제 끝장이야! 이제 당신은
당신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됐어."
찰칵, 전화가 끊겼다. 목포댁은 파랗게 질려 간신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침내 다가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왔었는데, '무당벌레'의 정체가 드러나다니.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다시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렸으나 전화 벨은 울리지 않았다.
이젠 타협의 여지조차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도대체 X의 편지란 무엇일까?
알 도리가 없었다. 뭔가 알아야만 적절한 처방을 할 터인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산항을 떠나 무인도에 귀중품을 숨기러 간 두 사람이 체포된
것도 사실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채택될 만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해내었는데....
그러나 김남희는 경찰이 시시각각으로 자기 목을 죄여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산 항도여관에서부터 형사한테 미행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대문 밖에 감시원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의젓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범행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물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신념
때문이었다.
누가 뭐래도 증거물이 없이는 나를 구속하지 못할걸.
그런데 '무당벌레'를 들먹거리는 지훈의 전화를 받은 이후로는
몸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목포댁, 김남희 집사! 당신은 이제 끝장이야!"
환청(幻聽)이 되어 다시 그녀의 고막을 울리고 가슴을
뒤흔들었다. 흡사 거역할 수 없는 신(神)의 음성처럼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목포댁, 김남희 집사! 당신은 이제 끝장이야! 이제 당신은
당신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됐어!"
두 귀를 막았다. 두 눈마저 감았다. 애당초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져서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자처럼 느껴졌다.
김남희--버림받은 여자.
처음부터 왜 버림을 받아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편은 허위대만 멀쩡한 능력이 없는 남자였다. 사내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양반의 후예였다.
일제하(日帝下)였다. 양반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 아니었다.
빈둥거리는 양반 남편 대신 살기 위해서는 뛰어야만 했다.
친일파에 부탁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남편을 징용에 내보내지 않기 위해서도 친일파와 가까워져야 할
판국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일자리 하나를 얻었다. 병원의 간호보조원
자리였다.
김남희는 몸 하나만은 타고난 여자였다. 20대 초반에는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몸을
탐내는 친일파가 한두 놈이 아니었다. 몸을 빼앗기지 않고
간호보조원 자리를 얻은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러나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남편의 질투가 시퍼런 불꽃
같았다. 원래 의처증 환자나 다름 없는 불쌍한 남자였다.
누명을 썼다. 통째로 뒤집어썼다. 일본인 의사와 찰떡같이
붙어먹었다는 데는 당할 도리가 없었다. 살아 남기 위하여
의사를 가까이했을 뿐이었는데,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직장을 포기하지 않으면 남편에게
버림받을 처지였다.
앞길이 캄캄했다. 일본인 고등계 형사와도 쑥떡같이
붙어먹었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상하게 아이조차 생기지 않았다. 집 안에 들어앉아도 편한
꼴 보기는 이미 틀려먹은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단신 월남했다. 서울은 그런대로 살맛이 나는 곳 같았다. 뭔가
뜻대로 되는 것 같았다. 충무로 다방가의 마돈나로 통했다.
거추장스러운 게 없었다. 젊은 육체를 마음껏 불태웠다.
마음에 드는 화가를 만났다.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 다음에는
몸과 마음을 주었다. 보금자리를 꾸미고 싶었다. 전부를
쏟아부었다.
결과는 배신뿐이었다. 그림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떠난 후
소식이 없었다.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 화가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할 꿈을 안고 목포로 내려왔다.
목포에서도 배신을 당했다. 밀항을 도와주겠다던 사내한테
돈과 몸을 빼앗겼다. 그러고도 그 사내는 진드기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마침내 그 사내가 폭풍을 몰고 왔다.
그 의식의 폭풍 속에 날아들어온 게 한 마리 무당벌레였다.
여러 가지 바탕에 화려한 무늬를 지닌 무당벌레가 되어 진드기
같은 사내놈들을 집어 삼키리라.
그 진드기 같은 사내를 6촌 동생의 손에 붙였다. 오래지 않아
그 사내는 무당벌레의 밥이 되고 말았다.
그 후부터 검은 세월을 살았다. 무당벌레의 세월을 살았다.
칠성무당벌레의 세월을 살았고, 이십팔점박이무당벌레의 세월도
살았다.
다양한 빛깔의 무당벌레로 살아오는 동안 교회 집사까지
되었다. 그럴싸한 위장을 위해서였다.
김남희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 무당벌레로 변신해 있었다.
그러나 역시 교회는 교회였다. 어느 날 부흥강사를 만났다.
독신이라는 데 마음이 끌렸다. 점심 대접을 하면서 좀더
가까이에서 만났다. 어딘지 모르게 금방 전류가 통할 것 같았다.
도전해 보고픈 욕망이 꿈틀거렸다.
"목사님도 꿈이 있으시겠지요?"
"그럼요."
"목사님의 꿈은 어떤 것인가요?"
"6.25 동란으로 폐허가 된 땅 위에 십자가를 높이 올리는 게
나의 꿈입니다."
"그럼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하시는 게 목사님의
꿈이시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집사님이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아십니까?"
"한눈에 큰 비전이 있는 분으로 보였어요."
"보잘것없는 종을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꿈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뒤에서 기도해 드리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부족한 종도 집사님을 위하여
기도하겠읍니다."
"6.25 때 사모님이 돌아가셨다지요?"
"예."
"그럼 계속 혼자 사실 작정이신가요?"
"성전 건축 후에는 결혼할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도 빨리 결혼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개신교 목회는 독신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에 가면 꼭 한번 찾아뵙겠읍니다. 주소를 좀 알려
주세요."
"예. 그러지요."
젊은 부흥강사의 대답에서 김남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첨탑이 드높은 성(城)이 하나 떠올랐다. 새로운 성을 쌓아올릴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겼다. 그 거룩한 성은 빛나는 성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 빛나는 성에 입성하는 날 성주(城主)와 결혼하여
다시는 배신이 없는 세월을 살고 싶었다. 그 성의 성주는
성직자이기에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는 부군이 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끝장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끝장이란 말인가? 도저히
끝장일 수가 없었다.
버림받은 여자란 옛말이야. 이제 김남희는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야. 빛나는 성을 쌓아올리고 있는 약속받은 여자야.
끝장이란 버림받은 여자에게만 통하는 말이야. 성주의 약속을
받은 여자에게 끝장이란 말을 함부로 하다니, 고얀놈
같으니라구.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고 영접하시겠다고 했다.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으셨는데, 도대체 누가 나를 버림받은 여자라고 하겠어.
그러기에 끝장이란 소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빛나는
성에 입성할 약속을 받은 여자로서는 그 따위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어.
김남희는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야. 내일을 약속받은 여자야.
김남희는 횡설수설하다가 벌떡 일어나 실성한 사람처럼
히죽거리며 웅장한 교회당 조감도 앞으로 다가섰다.
언뜻 보기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성도의 모습 같았다.
그날 오후 5시 경.
두 용의자, 민창호와 김병섭은 마침내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끝까지 교묘한 말재주로 수사관들의 심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두 용의자의 처음 진술이 새빨간 거짓임이
조사결과 하나둘 드러나고 말았다.
마산항 앞바다에서 잠수부들이 건져 올린 귀중품 주머니
두개와, 우동섭에게 배달된 X의 편지가 지훈으로부터 경찰의
손에 넘어왔기 때문에 두 용의자는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었다.
이미 투서의 필체가 민창호의 필체임이 밝혀진 데다 뒤통수의
상처로 김병섭은 덜미가 잡힌 꼴이었었는데, 확실한 증거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오자 '무당벌레'들은 정체를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역시 범인을 색출해 내는 데는 범행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물이 제일이었다.
<민창호의 범행>
1. 천영만을 메틸 알콜로 독살하였음.
2. 류미옥을 메틸 알콜로 독살하려다 미수에 그쳤음.
3. 조복주와 송옥련을 군용 폭발물로 폭사시켰음.
4. 곽일남에게 전화를 걸어 귀중품을 가지고 속천 선창으로
나오게 만들었음.
5. 박해림을 두 차례 전화로 진달래다방과 태화여관으로
유인해 내었음.
6. 조복주.천영만.우동섭이 강도질한 장물을 인수받아
곽일남에게 넘겨 주었음.
7. 김남희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아 그 밖의 범행일체를
김병섭에게 지시하였음.
<김병섭의 범행>
1. 류미옥을 평안병원 입원실에서 스타킹으로 경부압박 질식사
시켰음.
2. 우동섭을 태화여관에서 권총으로 살해하였음.
3. 최상준을 곽일남과 합세하여 폭행한 후 속천에서
익사시켰음.
5. 박해림을 태화여관에서 구타하여 기절시키고 유기하려다가
실패하였음.
6. 박해림과 박지훈의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하여 음모용으로
사용하였음.
7. 김남희와 민창호의 지시를 받아 그 밖의 범행에 하수인
노릇을 하였음.
<곽일남의 범행>
1. 금불상과 귀중품 등 장물을 일본인에게 매도하였음.
2. 우동섭에게 시외전화를 걸어 태화여관으로 유인하였음.
3. 박갑철 명의의 액면 18만 엔짜리 일본은행권 보관증을
일본인 상인에게 맡긴 후 되돌려받지 않았음.
4. 장물 매도급 일부를 착복하였음.
5. '무당벌레'로부터 사업자금을 조달받았음.
6. 최상준을 김병섭과 합세하여 폭행한 후 속천에서 익사하게
하였음.
두 용의자의 진술을 토대로 조서를 거의 마무리짓고 있을 때,
하만태 수사과장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형사실에 나타났다.
"김남희를 구속하지 않고 도대체 무엇들 하는 거야."
수사과장의 언행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무슨 낭패스런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계속 감시하라는 지시에 따라 감시원들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안심하고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조서를 작성하고
있었읍니다."
권형사의 말에 수사과장은 벌컥 화를 냈다.
"별도 지시는 무슨 별도의 지시야. 주범이나 다름이 없는
여자를 그렇게 방치해 두어서 되겠어. 감이 잡히면 알아서 처리
해야지."
"무슨 일이 생겼읍니까?"
"빨리 그 여자를 잡아들여. 병신 같은 놈들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 목포댁을 놓쳤어."
"놓치다니요?"
"김남희가 도망쳤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하수사과장은 감시원으로부터 전화보고를 받고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도대체 어떻게 감시를 했기에 그 모양들이지?"
권형사가 혼잣소리로 투덜거리며 일어섰다.
"조서 작성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권형사하고 윤형사, 두
사람이 책임지고 빨리 잡아들여."
하 수사과장은 지시를 내리고 형사실을 빠져나갔다.
두 형사는 일단 김남희의 집으로 직행했다.
두 감시원의 감시를 따돌리고 대낮의 탈출에 성공하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권형사의 신경질적인 질문에 감시를 맡았던 젊은 형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죄송합니다. 축음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에 집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판이 끝나도 갈아 끼우지 않아 이상해서 대문을
뛰어넘어 들어가 봤더니, 도망치고 없었읍니다."
"대문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도대체 어디로 도망쳤어?"
"담 밑으로 뚫린 하수구를 통해 옆집으로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하수구 뚜껑이 열려 있고, 하수구 앞에 지갑이 하나
떨어져 있었읍니다."
"지갑에 뭐가 들어 있는지 조사해 보았나?"
"예. 돈하고 도장하고 쪽지 두 개가 들어 있었읍니다."
"무슨 쪽지인가 꺼내 봐."
"마산 전화번호와 목포 전화번호가 몇 개 적혀 있는
쪽지였읍니다.
"도장은?"
"김남희 것이었읍니다."
"음, 그래. 윤형사, 어떻게 할까?"
"선배님 생각대로 방향을 정하세요."
"난 마산을 거쳐 목포 쪽으로 가 보겠어."
"좋도록 하세요."
"윤형사는 어떻게 하겠나?"
"나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움직이겠읍니다."
윤형사는 지갑 속의 돈과 도장과 쪽지가 일종의 트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락처는 칼멘다방으로 하자구."
"예. 알겠읍니다."
두 사람은 곧 헤어졌다. 권형사는 시외 버스 정류장 쪽으로
황급히 달려가고, 윤형사는 방향도 정하지 않고 터벅터벅
걸었다.
하수구를 통하여 필사의 도주를 하다니, 목적지는 어딜까?
막연하기만 했다. '무당벌레'가 날아가야 할 곳은 진딧물이
있는 곳일 터인데,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굴 만나러 갔을까?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여러 사람의 얼굴이 스쳐갔으나
결정적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얼마 전에 은행에서 인출된 막대한 돈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어떻게 빼돌렸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민창호와
김병섭도 자금인출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다고
했었다.
이제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게 된 김남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는 어디일까?
문득,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 있었다. 그 그림은 목포댁
안방벽에 걸린 맘모스 교회당 조감도였다.
김남희의 마지막 피난처는 아무래도 교회일 것 같았다. 그녀는
무당벌레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과 정성을 쏟아붓고 있는
데가 분명히 따로 있었다. 그게 교회였다. 아니, 웅장한 성과
같은 첨탑이 치솟은 성전이었다.
성전 건축에 대하여 말할 때만은 과연 교회 집사요, 성녀와
같던 김남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등대다방에 들어가 김남희 집사가 축석하는 방주교회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담임목사는 교회 사무실에 있었다.
"혹시 김남희 집사님, 거기 가시지 않았읍니까?"
"오늘은 오시지 않았읍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진해경찰서 윤태호 형삽니다. 전화로 죄송합니다만, 김남희
집사님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시라면 아는 대로 대답해 드리지요."
"김남희 집사님이 대형 교회당 건축의 꿈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목사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예. 알고 있읍니다."
"그 대형 교회당을 서울이나 부산에다 건축하기 위하여 능력
있는 목사님을 만났으면 했었는데, 혹시 김집사님이 그런 능력
있는 목사님을 찾았는지 모르겠읍니다."
"아마 찾았을 겁니다."
"어떤 목사님이신가요?"
"서울에 계신 젊은 부흥강사 목사님이신데, 우리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신 적이 있는 분입니다."
"그분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정관용(丁寬鎔)입니다."
"그분이 시무하시는 교회가 서울 무슨 교회입니까?"
"왜 그러십니까? 만나 뵈려고 그러십니까?"
"예."
"그렇다면 부산으로 가시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마침 부산
영도 청학동에 있는 천막교회에서 부홍회를 인도하고 계시는
중이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 목사님, 여자 교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분이신가요?"
"예. 인기가 좋은 편이지요. 독신이니까요."
"아직 미혼이신가요?"
"아닙니다. 상처를 하신 분입니다."
"잘 알았읍니다. 감사합니다."
윤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급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날 밤.
천막교회 안은 뜨거웠다. 의자도 없이 가마니를 깔아놓은 50평
남짓한 교회는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을 만큼 신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젊은 부흥강사의 설교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믿습니까?"
"아멘!"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까?"
"할렐루야! 아멘!"
"받은 줄로 믿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부흥강사의 입에서 "믿습니까?"가 나오기가 무섭게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아멘!"이 터져나오고 "할렐루야!"가 빗발쳤다.
대단한 열기였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대부분이 여신도
들이었는데 한결같이 "믿습니까?"에 굶주린 신의 딸들 같았다.
"아멘!" "할렐루야!" 할 때마다 금방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손을
번쩍번쩍 쳐들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부흥강사는 반주를 넣듯이 말씀 사이사이마다 그 위력적인
"믿습니까?"를 곁들이며 회중을 사로잡았다.
"부족한 종이 금식하며 철야하며 울며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종의 간구를 들이시고 2천 평의 교회 대지를 허락해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일찌기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처럼
부족한 종이 사생결단 의지하고 믿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종의 믿음대로 연건평 1천 평이 넘는
성전의 기초를 세우도록 허락해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 주님은 늘 말씀하셨읍니다. 딸아,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여러분의 믿음대로 될 줄
믿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믿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을 깨끗이
하고 성전에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바쳤을 때, 더욱 크게
흥왕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도착한 후,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맨 먼저 교회당을 세우고, 그 다음에 학교를
세우고, 그 다음에야 자기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되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복된 나라와 민족이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 민족의 지도자 김 구 선생님께서도 경찰서 열 개를 짓는
것보다 교회당 하나를 세우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 청학교회도 이제 천막을 걷고 하나님의 거룩한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른 줄 믿습니다. 믿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의 집을 황무하게 버려두면 도적이 틈타고, 병마가
틈타고, 마귀 유혹이 넘나들어 될 것도 안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습니까?"
"아멘!"
"왜 아멘 소리가 작아요. 믿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믿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영광을 얻으리라! 영광 영광을 얻으리라!"
"아멘! 할렐루야!"
"이 황무한 땅에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기적의 역사를
이룩하여 소낙비처럼 부어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솔로몬 대왕은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해 드림으로써 세상 모든
왕 중에 제일 가는 부귀영화와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누리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할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큰 믿음을
가지시고, 성전 건축의 복된 사업에 생명까지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했읍니다. 많은 것을 심어 많이 거두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요, 세상 보화가 모두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하늘의 신령한 축복과 땅의 기름진 축복을 내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습니까?"
"아멘!"
"성전 건축을 위하여 아낌없이 희생의 예물을 드림으로써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과 "할렐루야!"로 말미암아 천막교회가 하늘로 붕
치솟을 것만 같았다.
활화산 같은 열기였다. 용암이 마구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다같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통성기도하십시다.
기도하시는 가운데 불의 혀 같은 성령의 뜨거운 역사와 강한
바람같은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신도들은 이 시간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이 울고불고
떨고 흔들고 뒹굴고 뛰고 솟구치고 까무러치고 난리였다.
야단이었다. 장관이었다.
윤형사는 천막 입구에 서서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한번 그렇게 철저하게 몰입하여 어떤 일에 미쳐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수백 명의 회중을 마음대로 사로잡고 마음대로 요리하는
부흥강사 정관용 목사는 역시 인물이 좋고 능력 있는 목사로
보였다.
이윽고 천막교회 안의 열기는 가라앉고 신도들은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윤형사는 한편으로 비켜서서 돌아가는 여신도들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그러나 김남희는 없었다. 예감과는 정반대였다. 틀림없이
집회에 참석했거나 정목사를 만나러 왔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김남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천막교회 안에 남은 신도들이라고는 가마니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몇 사람뿐이었다. 아마 그들은 철야라도 할
모양이었다.
윤형사는 입구에 서서 정목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세 사람이 천천히 출입구 쪽으로 다가왔다. 정목사와 천막교회
담임목사와 27,8세 가량 돼 보이는 여인 한 사람이었다.
"실례합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읍니다."
"집회에 참석하신 분입니까?"
"예. 진해경찰서 윤형사입니다. 목사님을 특별히 뵙고 싶어서
찾아왔읍니다."
"나를요?"
정관용 목사는 뜻밖의 방문객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피곤하시겠지만, 시간을 잠시만 내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김남희 집사님을 아시지요?"
"예."
"그분 때문에 찾아왔읍니다."
"알겠읍니다."
바로 그때였다. 교회당 가마니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던 여신도
중에 한 사람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사, 사람이 죽었어요! 내 옆에서 기도하던 사람이 죽었어요!"
모두 달려갔다. 그때까지 남아서 기도하던 신도들도 놀라
일어났다.
"기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기척이 없어서 흔들어 보았더니,
옆으로 피익 쓰러졌어요."
가마니 바닥에 쓰러져 죽은 여자는 김남희였다. 얼굴에
검정칠을 많이 한 데다 머리카락까지 풀어놓았기 때문에 얼른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김남희의 몸뚱아리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정확한
사인은 부검을 해 보아야 알겠지만, 시체의 반응을 보아서
청산가리를 사용한 것 같았다.
"아까 그 미친 여자예요."
정목사 옆에 바싹 붙어 서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말이었다.
"미친 여자라니요?"
시체를 살펴보던 윤형사가 상체를 일으키며 재빨리 물었다.
죽은 여자를 모르는 사람처럼.
"아까 집회가 시작되기 직전...."
"그만 해요!"
정목사의 나즈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여인의 말을
중간에서 토막내고 말았다.
"이야기를 계속하시지요."
"......"
꿀 먹은 벙어리처럼 미모의 젊은 여인은 큰 눈동자만 굴렸다.
윤형사는 정목사가 독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척 짓궂게
물었다.
"목사님 사모님이신가요?"
"아직은 아니예요."
"아직은 아니라니요? 그럼 약혼녀이십니까?"
"예."
"아까 그 미친 여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목사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그 말밖에 하지 않았읍니까?"
"예."
"다른 말을 했을 것 같은데요?"
"하지 않았어요."
"그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셨읍니까?"
"얼굴에다 이상한 걸 마구 칠한 사람이라 그냥 그렇게
느꼈어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분이 누구시든간에
빨리 손을 써야겠읍니다."
천막교회 담임목사가 화급하다는 듯이 나서는 통에 윤형사는
더 이상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경찰에 계신 분이
말씀해 주세요."
"우선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으면 좋겠읍니다."
"그럼 이 아래 영선동에 있는 침례병원으로 옮기겠읍니다."
"잘 부탁합니다. 저는 목사님을 따로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조금 후에 병원에 들르겠읍니다."
"알겠읍니다. 자아, 빨리빨리 좀 도와주세요."
천막교회 목사의 지시에 따라 신도들이 시신을 옮길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윤형사는 밖으로 나왔다. 정목사도 그의 뒤를
따라나왔다.
"실례지만, 김남희 집사를 언제부터 아셨읍니까?"
"일년 남짓 되었을 겁니다."
"김집사와는 어떤 관계였읍니까?"
"목사와 교인의 관계였읍니다."
"단순히 그런 관계만은 아니었을 텐데요? 목사님은 서울에
시무하시고 김집사는 진해 방주교회에 나갔던 점 하나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보통 목사라면 그런 말이 타당하겠지만, 명색이
부흥사인지라 곳곳에 나를 따르는 교인들이 있읍니다."
"그러니까 김집사는 목사님의 열렬한 팬이라 할 수 있겠군요?"
"쉽게 말해서 그런 셈이지요."
"그런데 김집사가 왜 하필이면 목사님이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집회도중에 자살을 했을까요?"
"글쎄요. 그러잖아도 그 점이 아까부터 궁금했읍니다."
"목사님을 사모했는데, 목사님 곁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아서 자살한 게 아닐까요?"
"글쎄요. 뭐가 뭔지 앞뒤를 가늠할 수가 없군요. 얼굴엔
검정을 잔뜩 칠하고 머리는 산발을 한 데다 극약까지 준비하고
집회에 참석하다니, 그 깔끔한 여자가 말입니다."
"목사님께서도 김집사가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미쳤다곤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해 못할 점이 너무 많아요."
"혹시 약혼녀한테 충격적인 말을 들은 건 아닐까요?"
"그 사람이 왜 충격적인 말을 했겠읍니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말입니다."
"그런데 왜 아까 교회에서는 약혼녀의 말을
가로막으셨읍니까?"
"교인들 앞에서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그럼 목사님께서는 약혼녀의 입에서 대강 무슨 말이 나올
것인지 짐작하고 계셨던 셈이군요?"
"결코 좋은 말은 할 것 같지 않아 죽은 사람을 위하여서라도
입을 다물라고 그랬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입을 다물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글쎄요. 그렇게 따지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읍니다."
"김남희 집사의 통장에서 두 달 전에 거액의 돈이
인출되었는데, 혹시 그 돈의 행방을 모르십니까?"
"두 달 전에 집사님께서 거액의 건축헌금을 하신 적이
있읍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실례지만, 액면이 얼마나
되었읍니까?"
"9백만 환이었읍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잘못된 자금입니까?"
"예. 김남희는 무당벌레라는 검은 조직의 우두머리였읍니다."
"검은 조직이라니요?"
"범죄집단 말입니다."
"그럴 수가? 그게 정말입니까?"
"놀라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입니다."
"그래서 김남희 집사님을 체포하러 오셨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분을 올바른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 책임은 모두
나한테 있읍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건축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말았읍니다."
"실례지만, 약혼은 언제 하셨읍니까?"
"3주일 전에 했읍니다."
"김남희 집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셨읍니까?"
"너무 바빠서 미처 알릴 겨를이 없었읍니다."
"혹시 김남희 집사와는 결혼을 약속한 내연의 관계는
아니었읍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렁거렸으나
성직자 앞이라 그런지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물어보나마나 그런 사이는 아니라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았다.
"병원에 내려가 보아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읍니다. 다음 기회에 또 뵙겠읍니다."
"나도 내일 아침 일찍 병원에 들르겠읍니다."
"그럼 그때 다시 뵙겠읍니다."
정목사와 헤어진 윤형사는 깊은 생각을 하며 걸었다.
비탈길을 얼마나 내려왔을까. 침례병원 정문의 외등이 외로이
졸고 있었다.
문득, 김남희가 극약을 복용하고 죽어간 그 시간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사람이 신음하며 죽어가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거룩한 신의 말씀이 선포되는 뜨거운 집회가
계속되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역시 사람은 자기
자신만 아는 무서운 동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야 옆에서 죽어가든 말든 자기만 하늘의 축복을
받으면 된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내일도 모레도 천막교회
안으로 몰려들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교회라는 곳도 무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런 무서운 성역(聖域)을 더 넓게 더 크게 더 높게 더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이 자비로운 신의 뜻일는지 의심스러웠다.
하기야 몰랐을 테지. 전혀 못 들었을 테지. 하늘의 소리,
축복의 소리에 온통 사로잡혀 땅의 신음 소리에 미처 귀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을 테지. 역시 인생이란 모르는
일투성이니까.
이번 사건만 하더라고 그렇다. 일단 사건이 해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세 가지 불가사의한 숙제가
남아 있었다.
첫째 불가사의는 귀신 뺨칠 만큼이나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어린 지훈이의 행적이었다. 박지훈은 보나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담배장수.구두닦이.신문팔이.거지.접대부.웨이터, 심지어 다방
레지까지도 그를 도왔을 것이다. 그리고 진해의 지리.지형에
익숙한 점도 그의 기상천외의 행동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귀신 같은 행적의 내막과 비결을 속 시원하게 알아
볼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의 행적이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 불가사의는 박해림의 변신과 행적이었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마음의 등불이 되어 그녀를 변신시켰다는 점과 그
신비로운 힘이 기가 막히게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시시때때로 그녀를 막아주고 도와주었다는 점은 어떤 추리로도
풀리지 않은 불가사의한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세째 불가사의는 김남희의 행적과 죽음이었다.
'무당벌레'의 우두머리가 무슨 마음으로 거액의 건축헌금을
선뜻 내놓았느냐 하는 점과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던 그녀가
하필이면 성스러운 은혜의 자리에서 그렇게 추한 모습으로
음독자살을 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거액의 건축헌금을 갖다 바쳤을 만큼 믿고 따랐던 정관용
목사를 코앞에 두고서도 끝끝내 만나지 않고 왜 추한 모습으로
죽어갔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남희는 뭔가 고백하고 죽은 것 같은 데 무엇을 고백하고
죽었는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추리로도
풀리지 않을 불가사의한 숙제로 남고 말았다.
윤형사는 병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추적했던, 이번 사건에 관련된
얼굴들이 번갈아 스쳐지나갔다.
윤형사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 저었다. 그러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환상적인 벚꽃이파리가 무수히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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