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역사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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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바닷속에 묻힌 임금님
신기한 요술피리
꽃을 꺾어 바치리다
지키지 않은 약속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서라벌 달 밝은 밤에
활 쏘기의 명수
신라의 마지막 임금님
노래로 얻은 선화 공주
호랑이의 젖을 먹은 견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가 쓴 감상문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는 바로 이런 책입니다!
하나. 삼국유사의 내용을 충실하게 좇으면서, 현대 감각에 맞도록 문장과 말투를
다듬었습니다.
둘. 문장을 되도록 짧게, 또 한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단어는 쉽게 풀어 놓거나 아니면 괄호 안에 설명을 넣어, 읽다가 막히는
경우가 없도록 했습니다.
셋. 고증을 거친 그림을 많이 실어서 내용의 이해를 돕는 동시에, 글만 있는 책을
읽으면서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없앴습니다.
넷. 각각의 이야기마다 "함께 읽는 이야기"와 "생각 키우기"를 마련하였습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는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고 그 이야기의 배경과
본분에는 나와 있지 않은 뒷 이야기, 인물에 대한 보충 설명을 다루어 본문을
읽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생각 키우기"에서는 본문과 연결 지어 스스로 혹은
친구들과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들을 제시함으로써, 단지 책을 읽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쉽게 고정되기 쉬운 어린이들의 생각을 열어 주려 했습니다.
다섯. 각 권의 마지막에는 올바른 책읽기와 감상을 위해, 이 글을 읽은 어린이가
직접 쓴 독후감 한 편씩을 실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어린이 여러분에게
한 나라의 역사는 바로 그 민족의 숨결이며, 살아온 자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을 이해하는 것이며 또 '나'를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 시대의 아픔을 극복해 내는 슬기를
배울 수 있고, 또 오늘의 우리 모습, 더 나아가 내일의 모습까지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배우고 깨우치는 것은 또한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는 소중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는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생각 키우기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을 세운 단군 이야기를 처음
기록함으로써, 우리 역사를 중국과 동등한 위치를 끌어 올린 위대한 역사의
기록입니다.
이 책은 삼국유사를 어린이들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도록 쉬운 문장으로 다듬고,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보기'를 시도하였습니다. 또한, 단지 책을 읽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마다 '함께 읽는 이야기'와 '생각 키우기'를 실어,
생각을 넓히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올바른 역사 교육이 부족한 상황에서 좋은 역사책은,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역사 의식을 키우게 하고 과거를 통해 내일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주기도
합니다. 또한 남북 분단의 시대에 사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 믿습니다.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바랍니다.
바닷속에 묻힌 임금님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해는 서기 661년이었습니다.
왕은 그로부터 7년 뒤인 668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 흠순 등과 함께 평양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싸움에서 당나라 장군
이적은 고구려의 보장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지만,
완전한 삼국 통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당나라 군사들이 백제와
고구려 땅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서 틈틈이 신라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당나라의 음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남아 있는 당나라
군사를 완전히 쫓아 냈습니다.
그러자 다음 해인 669년 당나라 고종은 그 곳에 머무르던 신라인 김인문 등을
불러들여, 크게 화를 내며 따졌습니다.
"너희들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무찔러 놓고, 이제 와서 우리 군사를
치다니 그게 무슨 도리이냐?"
당나라 고종은 즉시 인문 등을 옥에 가두고는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설방을 장군으로 한 군사 50만 명을 훈련시켜 신라를 치게 하라!"
당나라는 이제 드러내 놓고 신라를 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마침 신라의 의상 스님이 당나라에 유학 가 있다가, 김인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인문은 의상 스님의 귀에 대고 몰래 속삭였습니다.
"지금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치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임금님께
속히 알리십시오."
의상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즉시 신라로 돌아가서 문무왕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습니다.
문무왕은 크게 걱정하며 대신들을 불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했습니다.
"당나라가 꼬투리를 잡아 우리 나라를 치려 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이 말을 들은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신라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싸운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음을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김천존이라는 대신이 입을 열었습니다.
"요즈음 명랑이라는 스님이 용궁에 가서 신비스러운 술법을 배워 왔다고 하니, 그
스님을 불러 물어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문무왕은 곧 명랑 스님을 데려 오게 한 다음, 이 일에 대처할 놓은 방법을 물어
보았습니다.
명랑 스님이 대답하였습니다.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 사천왕을 모실 절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천왕이란 불교를 지켜 주는 제 명의 신을 말합니다.
문무왕과 명랑 스님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정주(지금의 경기도 개풍군)에서
급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지금 배를 탄 당나라 군사들이 바다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문무왕은 명랑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한시가 다급한데 언제 절을 짓는다는 말이오?"
"그러시다면 급해 아름다운 비단을 준비하도록 하십시오."
명랑 스님은 궁중에 있는 모든 비단을 가져다가 임시로 절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풀을 엮어 불교를 수호하는 사천왕을 만든 다음, 열두 명의 스님들로 하여금 염불을
하면서 그 주위를 돌도록 하였습니다. 명랑 스님 역시 열두 명의 스님들 맨 앞에
서서 이상한 주문을 외웠습니다.
명랑 스님이 이상한 주문의 외기 시작한 지 열흘쯤 지나서였습니다. 정주에서
말을 타고 사자(심부름하는 사람)가 달려와 문무왕에게 보고했습니다.
"당나라 군사들이 모두 바닷속으로 침몰해 버렸습니다."
문무왕은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럼 우리 군사가 당군을 물리쳤다는 말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갑자기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당나라 군사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도운 것이 틀림없다. 그래 그 배들은 언제 침몰했느냐?"
"예, 오늘부터 꼭 열흘 전이 됩니다."
"열흘 전이라...."
문무왕은 비로소 명랑 스님의 신기한 주문으로 그 배들이 침몰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뒤 문무왕은 신유림에 정식으로 절을 짓고 이름을 사천왕사라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2년 뒤인 671년의 일이었습니다.
당나라 장수 조헌이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에 쳐들어왔습니다.
신라에서는 힘으로는 도저히 맞싸울 수가 없어, 다시 명랑 스님을 불러
지난번처럼 주문을 외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당나라 군사를 실은 배가
풍랑 속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두 번의 공격에 다 실패한 당나라 고종은 김인문과 함께 옥살이를 하던
박문준이라는 사람을 불러 내어 물었습니다.
"도대체 너희 나라에서 무슨 신기한 술법을 부리기에, 신라에 간 우리 군사들이
매번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느냐?"
"저희들은 당나라에 온 지 십여 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본국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 하오나 들리는 이야기로는 신라가 당나라의 은혜로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기 위해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짓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 하옵니다."
이 말을 들은 당나라 고종은 매우 기본이 좋았습니다.
"그러면 그럴 테지, 내 곧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천왕사를 보고 오도록
하겠다."
당나라 고종은 예부시랑 악붕귀를 신라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편 문무왕은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려 한다는 물을 듣고, 즉시 대신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당나라 고종이 박문준의 말을 듣고, 사천왕사를 살펴보기 위해 사신을 보낸다고
하오. 하지만 사천왕사는 절대로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없으니 그 남쪽에다 따로
절을 세우도록 하시오."
몇 달 뒤 새로운 절이 완성되었습니다.
마침내 당나라 사신이 와서 문무왕에게 말했습니다.
"먼저 저희 나라 황제를 위해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는 사천왕사에 가서 향불을
피우고 싶습니다."
이에 신라 조정에서는 새로 지은 절로 사신을 안내했습니다.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사방을 휘 둘러보고는 말했습니다.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지 않소?"
당나라 사신은 새로 지은 절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었습니다.
당황한 신라 조정에서는 당나라 사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가지로
궁리하다가, 마침내 금 1천냥을 주어서 그의 마음을 샀습니다.
사신은 당나라로 돌아가 고종에게 거짓으로 아뢰었습니다.
"박문준의 말대로 신라에서 사천왕사를 세우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습니다."
문무왕은 당나라 고종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을 알고, 신라의 대문장가 강수에게
김인문 등의 석방을 청하는 글을 짓게 하여 당나라에 보냈습니다.
당나라 고종은 이 글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김인문 일행을 풀어 주었습니다.
문무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무왕은 죽기 전,
지의 스님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려 하오."
"용은 짐승입니다. 대왕께서 어찌 그 추한 짐승이 되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오. 나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니, 만일 짐승으로 태어난다면
오히려 더 바랄 것이 없겠소. 내가 죽거든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지내 주시오."
문무왕이 죽자 신하들은 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동해의 대왕암에
수장(시체를 물 속에 넣어 장사지내는 것)하였습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의 맏아들로서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신
분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 듯이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할 때,
당나라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그런데 당나라 군사는 두 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도
계속해서 머물러 있으면서, 신라마저 쳐부술 속셈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한 당나라의
음모를 눈치챈 문무왕은 그들보다 먼저 공격을 시작해서 당나라 군사들을 북쪽으로
쫓아 보내고, 드디어 삼국 통일을 이루었지요.
앞의 글은 신라를 공격하려 했던 당나라를 슬기롭게 물리친 문무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귀영화에 대한 지나친 탐욕 때문에 나라를 망친 왕들과는 반대로,
자기 자신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문무왕은 또한 유일하게 바닷속에
무덤을 가진 왕이기도 하답니다.
죽은 후에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을 따라, 신하들이
왕의 시신을 화장하여 바닷속에다 장사를 지냈거든요. 왕을 장사지낸 바닷속 큰
바위는 그 후에 '대왕암'이란 이름이 붙여져서, 지금은 감은사 동쪽 바다에 가면 그
바위를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것도 바다용이 되어 있을
문무왕과 같은 훌륭한 선조들이 있어서, 어디에선가 우리를 지켜 주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생각해 키우기
그 당시에는 신라보다 고구려의 힘이 더 막강했는데도,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지요. 그것은 신라에 훌륭한 임금님과 용감한 장군들,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화랑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문무임금님이 바닷속에다 장사지내
달라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시다.
신기한 요술피리
신라 제 31대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문왕은 왕이 된 직후, 돌아가신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가 바라보이는
곳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 이듬해인 682년 5월 초하룻날이었습니다. 박숙청이라는 신하가 와서
신문왕에게 아뢰었습니다.
"동해에 작은 섬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섬이 떠서 오고 있다고?"
"그러하옵니다.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밀리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신문왕은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일관 김춘질을 불렀습니다.
"지금 동해에 섬이 떠서 앞으로 오고 있다 하는데, 이것이 무슨 징조이냐?"
김춘질이 한참 동안 점괘를 뽑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우리 나라를 수호하고 계십니다.
또한 김유신 장군도 하늘이 내려주신 아들로서 인간 세계에서 대신을 지냈습니다.
이 두 성인께서 마음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보물을 주시려 합니다. 만일
지금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신다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신문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바닷가로 나가 그 섬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신하를 보내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명령을 받은 신하는 배를 타고 그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섬의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으며, 그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나무는,
낮에는 두 쪽으로 갈라졌다가 밤이 되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는 신문왕이 묵고 있는 감은사로 가서 이런 사실을 알렸습니다.
다음날 신문왕은 다시 바닷가로 나가 보았습니다.
낮 12시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덮여 밤처럼 어두컴컴했습니다.
이런 날이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그 달 16일에야 비로소 바람이 자고 물결도
잔잔해 졌습니다.
신문왕은 직접 배를 타고 그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닷속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검은 옥대를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옥대란 벼슬아치들이 입는 제복의 허리춤에 두르는, 옥으로 만든 띠를
말합니다.
신문왕은 옥대를 받고 용과 마주 앉았습니다.
신문왕이 물었습니다.
"이 섬의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했다가 합쳐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용이 대답했습니다.
"비유하자면,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바닥이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임금님께서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나라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이제 임금님의 아버님께서는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 장군은 다시 하늘의 신이 되셨습니다. 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저에게
이런 보물을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신문왕은 너무 기뻐서 용에게 오색 비단과 금, 옥 등을 주어 보답했습니다. 그리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게 한 다음, 바다로 나왔습니다. 바다로 나오자마자 그 섬과
용은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신문왕은 감은사에서 밤을 지내고, 17일에는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 때 궁궐을 지키고 있던 태자 이공이,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와서 축하를
올렸습니다.
태자는 용에게 받았다는 옥대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옥대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옥대는 여러 쪽이 고리로 연결되어 하나의 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문왕은 태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습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옥대의 한 조각을 떼어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신문왕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태자의 말대로 옥대의 왼편 두 번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옥대 조각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옥대를 놓은 자리는 연못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왕은 궁궐로 올라온 즉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하늘이
내린 물건을 보관한 창고라는 뜻)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모든 질병이 나았습니다. 또 가뭄 때에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면 날이 환하게 개었으며, 거센 바람도 멎고 물결도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나라의 보물로 삼았습니다.
만파식적이란, 나라의 온갖 근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하고 모든 소원을 이루게
하는 피리라는 뜻입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정말 만파식적은 오늘날의 첨단 과학으로도 감히 어쩔 수 없는 일들, 즉 눈이나
비를 마음대로 오게 하거나 적군을 물리치고 병을 낫게 하는 마술 피리였을까?"
이 이야기를 읽은 여러분 중의 어떤 친구는 혹시 이와 비슷한 궁금증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가만히 앉아서 그 피리를 불기만
하면 질병과 적군과 파도가 없어지고 나라가 평화로워진다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랍니다. 단순히 신기한 피리가 펼치는 기적을 믿으란 얘기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알 수 없을 상징적인 내용의 이야기죠.
사실 조금만 조심해서, 또 자세히 이 이야기를 읽어 나간다면 겉으로 보여지는
이야기의 뒷면에 숨은, 실제의 의미를 읽어 낼 수 있을 거예요.
용은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는 것을,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뼉을 마주쳐야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는 이치와 같다고 말하지요.
'이 대나무는 합쳐진 뒤에야만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으니, 임금님께서는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용의 말은 곧, 임금님이 두 개의 것이 합하여지는
화합의 정치를 하게 될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손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왕이 아무리 권력이 세고 또 능력이
있어도 혼자의 힘으로는 평화의 소리가 울릴 수 없지요. 대나무가 합쳐져 피리
소리를 낼 수 있듯, 왕과 신하가, 또 왕과 백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마음을
모아야만 가뭄과 적군, 풍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어떤 학급의
반장이 아무리 똑똑하고 마음씨가 고와도, 반 아이들이 잘 따라주지 않으면 그 반은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농구나 배구처럼 한 팀을 이뤄서 하는
운동경기도 그렇지요. 몇몇 선수들의 기량이 아주 뛰어나다 해도, 전체 선수들끼리
손발이 맞지 않고 화합이 잘 되지 않는다면 상대팀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겠어요.
서로 힘을 합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죠?
생각 키우기
만약 지금 우리 나라에, 불기만 하면 모든 병이 낫고, 적이 물러가고, 자연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마술 피리, 만파식적이 있다고 가정해 보고, 그렇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 생각해 봅시다.
꽃을 꺾어 바치리다
신라 제32대 성덕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입니다.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태수는 한 고을의 으뜸가는
벼슬입니다.
순정공의 일행에는 그의 아내 수로 부인과 하인들 서넛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넓고 푸른 동해를 옆으로 끼고 굽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순정공의
아내 수로 부인이 하늘의 해를 올려다 보더니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점심때가 되었으니, 식사를 하고 가시지요."
"벌써 점심 때가 되었나? 그렇게 합시다."
수로 부인은 점심을 먹을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우뚝 솟아 있는 바위를
발견하고는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바위 밑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자."
순정공 일행은 그 바위 아래로 갔습니다. 그 바위 옆으로는 커다란 바위들이
연이어져 있어 마치 병풍처럼 바다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절벽 위에는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비어 있었습니다.
수로 부인은 배고픔도 잊어버린 채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에 흠뻑 젖어 있다가,
문득 하인들을 보며 말했습니다.
"저 철쭉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겠느냐?"
이 말을 들은 하인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저렇게 높은 벼랑에 어떻게 올라간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인들은 수로 부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 넘겼습니다.
이 때 암소를 끌고 이들 곁을 지나가던 어떤 노인이, 절벽 위를 쳐다보고 있는
수로 부인을 보고 물었습니다.
"절벽 위는 왜 쳐다보고 계십니까?"
"저 꽃이 하도 아름다워서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렇다면 제가 꺾어다 드리지요."
노인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수로 부인도, 하인들도
모두 가슴을 죄며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마치 나무에 오르듯 쉽게 벼랑에 오르더니, 철쭉꽃을 한 웅큼 꺾어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노인은 꺾어온 꽃을 수로 부인에게 바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줏빛 바위 아래
암소를 놓아두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리다
노인은 노래를 마치자마자,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물어 볼 틈도 주지 않고 떠나
버렸습니다.
노인이 꽃을 바치며 부른 이 노래를 '헌화가'라고 합니다.
순정공과 수로 비인 일행은 다시 강릉으로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로부터 이틀이 지나 순정공 일행이 임해정이라고 하는 정자에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동해가 바로 눈 아래에서부터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순정공 일행이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막 점심을 먹으려는 참이었습니다.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 부인을 안고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벼렸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놀라서 넘어진 순정공이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을 때, 용은 이미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물결만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하인들도 할 말을 잃은 채, 발만 동동 구르며 용이 들어간 바다 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이번에도 한 노인이 나타나서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들 넋이 나간 채 바다만 바라보고 있소?"
순정공은 눈물을 흘리며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말해 주고는,
"도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껄껄 웃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는 옛말이 있지 않소. 그러니 바다의 용도
틀림없이 여러 사람의 입을 무서워할 것이오. 지금 당장 고을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치시오. 그렇게 하면 부인을 다시 만나 보게 될 것이오."
이 말을 마치고 노인은 훌쩍 떠나가 버렸습니다.
순정공은 곧바로 고을에 들어가 이런 사실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고을
사람들은 손에 손에 막대기를 들고 바닷가로 모여들었습니다. 바닷가에는 막대기를
든 사람들로 법석대었습니다.
이윽고 순정공의 명령과 함께, 사람들이 막대기로 언덕을 내리치며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 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빼앗은 죄 얼마나 큰 줄 아느냐
너 만약 무인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겠다
많은 사람들은 이 노래를 계속 부르며 막대기로 언덕을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노인의 말대로 용이 수로 부인을 안고 나타나, 귀찮아 못
견디겠다는 듯이 놓아 두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살아 나온 수로 부인과 순정공에게 축하를 올렸고, 순정공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거듭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간 후 순정공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용궁에 들어가니 어떠합디까?"
"용궁은 일곱 가지 보물로 꾸며져 있었고, 음식은 깨끗하고 맛과 향기가
뛰어났어요. 사람이 만든 음식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러고 보니 수로 부인의 옷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 향기는
인간 세상에서는 맡아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수로 부인은 세상에서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을 타고났습니다.
그래서 깊은 산이나 바닷가를 지날 때마다, 산신이나 바다의 신이 그 아름다움에
반해서 수로 부인을 납치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을 찾고 좋아하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봐요. 남자건
여자건 또 어른이건 아이건 간에 상관없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누구나
감탄을 하게 마련이죠. 그 아름다움이 겉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든, 마음 속에
있는 것이든 말이에요.
이 글은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수로 부인은 옛부터
우리 나라 전설 속에서 아주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곤 했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사람뿐만이 아니라 산이나 바닷속의 동물, 또 귀신들까지도
수로 부인을 사랑하였죠. 그래서 수로 부인을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이 생긴 귀신들이,
산길이나 바닷가를 지나가던 수로 부인을 몰래 데려가 버리는 일들이 많았어요.
여기에서도 바다용이 수로 부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바닷속으로 끌고 가 버린
얘기가 나오지요. 바닷속으로 사라진 수로 부인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면서 안타까워할 뿐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가만히 있기만 했어요. 이 때
지나가던 어떤 할아버지가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일 수 있다'는 말을 하지요.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함께 입을 모아 용을 꾸짖으면서 수로 부인을
내놓으라는 노래를 합니다. 그랬더니 과연 용은 수로 부인을 돌려 주었지요.
그래요.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일 수 있다'는 말처럼, 한두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일도 많은 사람이 힘을 합하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답니다. 여러 사람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기억해 둡시다.
생각 키우기
어떤 것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는지 우리는 가끔 궁금할 때가 있을 거예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기도 하고, 또 '마음씨가 곱다', '행동이 아름답다'라는
말처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도 아름답다는 말을 하지요.
아름답다는 건 정말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지키지 않은 약속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이름은 김우징입니다.
김우징이 아직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김우징이 장보고(궁파)를 불러 은근한 목소리로 부탁을 하였습니다.
"나에게는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을 만큼 원한이 사무친 원수가 있소. 당신이 만일
나를 위해 그를 없애 준다면 왕위에 오른 후에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
장보고는 이를 쾌히 승낙했습니다.
김우징은 늘 자신이 모시고 있는 민애왕을 없앨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42대 흥덕왕이 죽자 신라에는 당장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찬이라는 벼슬에 있는 헌정의 아들 제륭과 헌정의 동생 균정이, 서로
왕이 되려고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김명이라는 신하가 균정을
물리치고 제륭을 도와 왕이 되게 했는데, 이 분이 바로 43대 희강왕입니다.
그런데 김명은 희강왕을 자살하도록 만들고, 대신 자기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분이 제44대 민애왕이며, 김우징은 바로 이 민애왕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균정의
아들입니다.
김우징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민애왕을 물리칠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가,
이 날 장보고에게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김우징의 은밀한 부탁을 받은 장보고는, 몰래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다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궁궐로 쳐들어간 장보고는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제45대 신무왕입니다.
왕위에 오른 신무왕은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하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한사코 반대를 했습니다.
"궁파(장보고)는 원래 보잘것 없는 사람이오니,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궁파는 공이 큰 사람이오."
"그러나 왕비는 백성의 어머니와 같사온데, 그런 사람의 딸을 백성의 어머니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신하가 반대했기 때문에 신무왕은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 장보고는 청해진(지금의 완도)에서 바다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장보고의 마음 속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신무왕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가득 찼습니다.
'어디 두고보자. 나를 이용하여 제 욕심만 채우고는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화가 난 장보고는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보고의 계획은 누군가에 의해 밖으로 새어 나가고
말았습니다.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장군 염장은 즉각 신무왕에게
달려갔습니다.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니, 제가 가서 그를 없애고 오겠습니다."
"그는 지금 멀리 떨어진 청해진에서 바다를 지키고 있는 장군이오. 그건 헛소문일
것이오."
신무왕은 처음에 그 소문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보고가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듣자, 후환이 두려워진
신무왕은 그를 없애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신무왕의 명을 받은 염장은 날쌘 군사 몇 명과 함께 청해진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켜 장보고에게 말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나는 신무왕을 받들 수 없어 이 곳으로 피신해 왔소. 이제부터 장군과 뜻을 같이
하겠으니 나를 받아 주시오."
이 말을 전해 들은 장보고는 크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임금을 충동질해서 내 딸을 왕비가 되지 못하게 해 놓고, 이제 와 서
무슨 얼굴로 나를 찾아왔느냐?"
이 말을 전해 들은 염장은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신하들이 한 일이며 나는 그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소. 나를 믿어
주시오."
장보고는 이 말에 화가 풀리어 염장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맞이했습니다.
자리에 앉자 장보고가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소?"
"전에 임금을 거스른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임금이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그래서 나는 당신의 부하가 되어 이 화를 모면하려 하오."
이 말을 들은 장보고는, 속으로 동지가 한 사람 생겼다고 생각하며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그 다음 날 염장을 위한 큰 술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장보고는 기분이 좋아
염장이 권하는 대로 술을 마셨습니다.
"자, 오늘은 염장 같은 훌륭한 장군을 동지로 맞은 날이니 마음껏 마시고, 즐겁게
놀아 봅시다."
시간이 지나자 장보고는 술이 취해,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때 염장은 긴 칼을 뽑아 장보고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였습니다. 함께 있던 장보고의 부하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이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염장은 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장보고는 임금님을 살해하려고 한 반역자이다. 너희들도 항복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다스릴 것이다."
이 말과 함께 염장과 같이 온 날쌘 군사들이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장보고의
부하들은 저항할 힘을 잃고 모두 염장 앞에 엎드려 항복하였습니다.
염장은 장보고의 부하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가 신무왕을 뵙고 아뢰었습니다.
"장보고의 목을 베어 왔습니다."
"수고가 많았소."
신무왕은 매우 기뻐하며 염장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아간이라는 벼슬까지
주었습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약속을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서로에 대해 믿음을 갖는다는 의미가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고의로든 실수로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에게서 믿음을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앞의 글은 자키지 않은 약속이 결국엔 어떤 결과를 빚어내었는가를 말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신무왕은,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겠다는 약속을 했지요. 하지만 정작 왕이 되고 나서는, 장보고의 딸이
왕족이 아닌 천한 여자라는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장보고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것에 불만을 느낀 신무왕이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신무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두 사이를 연결해 주고 있던 믿음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한때는 뜻을 같이 했던 두 사람이 결국엔 적대 관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죠.
여러분 주위에도 약속을 해 놓고는 잘 지키니 않는, 그러면서도 상대방에게
미안해하지 않는 그런 친구들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상대방으로부터 한 건 신용을
잃게 되면 그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찍혀 버리고, 그 후에도 그
사람의 말을 잘 믿지 않으려 하게 되는 법이랍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말고, 일단 약속을 한 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 이 정도는 기본이라는 거 아시죠?
생각 키우기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면서 장보고의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나요?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나쁜 사람을
바로 약속도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도와준 은인을 죽인 신무왕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겠죠.
반대로 신무왕의 편에 선 친구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 잘못한
일이지만, 신무왕이 만일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면 신하들로부터 원성을 들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 최선의 길이었을지를 함께 생각해 봅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이름은 응렴입니다.
응렴은 열여덟 살에 화랑이 되어, 전국의 산천을 돌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단련했습니다.
응렴이 스무살 때, 헌안왕이 그를 궁중으로 불러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헌안왕이 응렴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화랑이 되어 사방을 두루 다녀 보았을 텐데, 혹시 특별히 인상에 남아
있는 일이 있는가?"
"예, 저는 행실이 매우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그래? 어떤 사람들인지 말해 보아라."
헌안왕은 매우 흥미가 있는 듯 귀를 바짝 기울였습니다.
응렴은 자세를 바로 가다듬고 입을 열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인데도 겸손하여 남의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력이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이 매우 검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남에게 위엄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은, 마음 속으로 응렴의 됨됨이에 깊이 탄복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마음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대의 덕이 바로 그와 같다는 뜻이 아니냐?
참으로 칭찬할 일이로구나."
"황공하옵니다."
헌안왕은 응렴에게 보통 사람과 다른 면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헌안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태자가 없고 두 공주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응렴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헌안왕은,
"나에게는 두 명의 공주가 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을 그대의 아내로 맞이할 뜻이
있는가?"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응렴은 임금님의 뜻밖의 제의에 놀라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응렴을 본 왕이 말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말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의 결정이 되거든, 그 때 가서 말하도록
하여라."
응렴은 절을 한 뒤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응렴은 이런 사실을 부모님께 알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부모님도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응렴이 임금님의 사위가 될 것이라는 말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응렴과 그의 부모에게 축하를 하기 위해 다녀간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응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소문을 들으니 맏공주는 못생기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답다더라. 그러니
둘째 공주를 아내로 맞는 것이 좋겠다."
"어머니, 얼굴이 못생긴 것은 결코 허물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착한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도 얼굴이 예뻐야지...."
응렴과 어머니가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화랑의 우두머리로 있는
범교사라는 사람이 찾아 와서 말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찾아왔네. 임금님께서 자네를 사위로 맞겠다고 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범교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 공주에게 장가들려 하는가?"
"부모님께서는 둘째 공주가 좋겠다고 하십니다."
이 발에 범교사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습니다.
"둘째 공주에게 장가드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네. 그러나 자네가 만일
첫째 공주에게 장가든다면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도록
하게."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첫째 공주를 아내로 맞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헌안왕이 보낸 사자(심부름하는 사람)가 와서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 어느 공주를 택할 것인지 여쭤 보라고 하셨습니다."
응렴은 범교사의 말대로 첫째 공주를 맞겠다고 말했습니다.
응렴의 뜻을 전해 들은 헌안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였습니다. 헌안왕은 갑자기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병은 회복되지 않고 오히려 점점 위독해져 갔습니다.
자신의 병이 회복되지 않을 것을 알고, 헌안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왕위를 물려 주 태자가 없소. 그러니 내가 죽거든, 반드시 맏딸의
남편인 응렴으로 왕위를 잇게 하시오."
이튿날 헌안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하들은 헌안왕의 유언대로 응렴을 받들어
왕위를 잇게 하였습니다. 이 분이 바로 신라 제48대 경문왕입니다.
며칠 뒤 범교사가 경문왕을 찾아와 아뢰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세 가지 좋은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 첫째는
맏공주님을 택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다음은 언니 때문에 결혼을
미루고 있던 둘째 공주가 빨리 시집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맏공주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헌안왕께서 무척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경문왕은 범교사의 말을 고맙게 여겨, 그에게 '대덕'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상으로
금 230냥을 주었습니다.
경문왕이 왕위에 있을 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경문왕은 어느 날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니, 내 귀가 왜 이렇게 됐지? 꼭 당나귀 귀 같잖아?"
그러나 이 사실은 왕후나 궁 안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임금님 자신과
임금님의 머리를 빗겨 주고 관도 씌워 주는 신하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경문왕은 그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내 귀를 감출 수 있는 커다란 왕관을 만들거라. 이 사실이 밖으로 퍼져 나간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여라."
임금님의 엄명을 받은 그 신하는 평생토록 입을 다물고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신하는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하는 그 비밀 때문에 그만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병은 점점 깊어져 마침내 죽음이 가까워 왔습니다.
'죽기 전에 속 시원하게 소리라도 한번 질러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 신하는 이런 생각 끝에, 혼자서 월성군에 있는 대림사 대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대나무만 빽빽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 신하는 마지막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다!"
이렇게 외치고 나니 정말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임금님도 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경문왕은 그 소리가 너무나 듣기 싫었습니다.
"그 대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려라."
신하들은 즉시 그 대나무를 베어 내고, 그 자리에 산수유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 뒤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우리 임금님의 귀는 길다...."
하는 소리만 들려왔다고 합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나요?
이미 알고 있는 친구들도 많겠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신라의 48대 경문
임금님이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을 거예요.
이 이야기는 짧지만,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요. 특히 경문
임금님이 화랑이었을 때 보았다는 훌륭한 세 사람, 곧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가람, 세력이 있는데도 남에게 위세부리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는,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당나귀처럼 기다란 귀를 가진 임금님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왕관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한 그 비밀을,
끝내 참지 못하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대나무 숲에 가서 다 털어놓아 버리지요.
그 후로 대나무 숲에서는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나오고, 그 바람에 경문 임금님이 꼭꼭 숨겨 두었던 비밀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비밀이 지켜진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또 진실은 어떠한 억압이나 권위 때문에 파묻혀질 수 없고 아무리
철저히 숨긴다 해도 결국에는 밝혀지고야 만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생각 키우기
임금님의 비밀을 참지 못하고 숲 속에 가서 털어놓고 말았던 그 사람의 행동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그래요. 비밀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비밀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비밀을 지키는 것이 왜 중요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고, 비밀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생겨났던 일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친구들과 함께 얘기해 봅시다.
서라벌 달 밝은 밤에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의 일입니다.
이 당시 신라는 서울을 비롯하여 먼 지방에 이르기까지 많은 집들로
가득하였습니다. 초가집이라곤 한 재도 없고 모두 기와집뿐이었습니다. 밥도
땔나무로 짓지 않고 숯으로만 지었습니다.
매년마다 풍년이 들어 집집마다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으며, 거리에는 항상
흥겨운 노래가 흘러 넘쳤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리고 있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헌강왕은 신하들은 거느리고 지금의 울산인 개운포로 놀이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놀이를 마치고 궁궐로 돌아오던 임금의 일행이, 잠시 물가에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짙은 안개와 구름이 피어 올라, 대낮인데도 한 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헌강왕이 날씨를 점치는 일관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일관이 잠시 동안 점을 치고 나서 대답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동해의 용왕이 심술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용왕을 위해
좋은 일을 베풀겠다는 약속을 하시면 곧 풀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왕을 위해서 이 근처에다 절을 짓도록 하겠다."
이렇게 약속하자마자 순식간에 안개와 구름이 걷히었습니다. 헌강왕 일행은
깨끗하게 맑아진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신기한 조화에 넋을 잃었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동해의 파도가 갑자기 높이 일며 소용돌이치더니, 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불쑥 나타나 헌강왕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용왕은 일곱 아들과 함께 헌강왕의 어진 마음을 찬양하면서 춤을 추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음악 연주가 끝나자 헌강왕은 용왕에게 말했습니다.
"너의 아들 중 하나를 나에게 줄 수 없느냐?"
"임금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헌강왕은 일곱 아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사람을 골라 서울로 데리고
왔습니다.
헌강왕은 그에게 처용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벼슬까지 주어 나라
일을 돕게 하였습니다. 이제 용왕의 아들 처용은 신라 사람이 된 것입니다.
처용은 매우 총명하고 어질어서 임금님을 잘 받들었습니다.
어느 날 헌강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처용의 아내가 될 아름다운 여자를 찾아보시오."
신하들은 수소문 끝에 매우 아름다운 여자 하나를 찾아 냈습니다.
헌강왕은 처용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이제 신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이 여자와 결혼하여 더욱 나라 일에
힘쓰도록 하여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처용은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귀신들까지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처용을 혼자 보름달을 구경하며 한가롭게 산책을 하였습니다.
이 틈을 타서 역신이 사람의 몸으로 변하여, 처용의 아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역신은 사람에게 질병을 옮기는 나쁜 귀신을 말합니다.
산책 나갔던 처용이 집에 돌아와 보니, 자기 아내 옆에 어떤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용은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방을 나와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서라벌 달 밝은 밤에 혼자 거닐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두 사람이 누워 있네
한 사람은 나의 아내인데 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아내를 빼앗겼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이 노랫소리를 들은 역신은 처용의 너그럽고 어진 마음에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역신은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그만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화를 내지 않으니, 참으로 마음이 넓고 어지십니다. 이제부터 저는
당신의 얼굴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집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 뒤로 역신은 처용의 집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귀신들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신사 사람들은 너도 나도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 위에
붙였습니다. 이 때부터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 위에 붙였습니다. 이 때부터
신라에는 나쁜 귀신과 질병이 모두 사라지고 좋은 일만 생겼다고 합니다..
신라 사람들은 헌강왕 일행이 쉬고 있을 때 구름과 안개가 짙게 깔렸다가 걷힌
곳을 '개운포'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동쪽 영취산 기슭의 경치 좋은 곳에다
용왕을 위한 절을 세우고 '망해사'라 하였습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아내를 빼앗기고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딘가
모자란 바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을 초월한 성자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예요.
처용은 귀신과 자고 있는 아내를 발견했을 때 마구 화를 내면서 내쫓는 대신,
이상하게도 '빼앗겼으니 어쩔 것인가?'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처용의 행동을 과연 용기가 없어서이거나, 정말로
아내를 찾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처용의 춤이 결국 귀신을 감동시켜 스스로 물러가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만일 처용이 칼을 뽑아 귀신을 쳤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틀림없이
귀신은 쫓겨 달아날 망정 남의 아내를 빼앗은 자신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처용에게 복수를 하려 들었을 거예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던 처용의 행동이, 사실은 귀신을 정복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던 것이죠.
여러분! 처용과 같이 분노를 웃음으로, 폭력을 춤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이기고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생각 키우기
요즘같이 '무조건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세상사는 여러분들은, 아내를 빼앗긴
다급한 상황에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 처용을 이해하기 힘들지도 몰라요. 어떻게
그런 상황에까지 너그럽고 신중할 수가 있는지.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큰 소리로 윽박지르거나, 힘을 써서 굴복시키는 것이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해 본 후에 다시 한번 처용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활 쏘기의 명수
신라 제51대 진성 여왕은 여왕으로서는 마지막 임금님입니다.
그런데 진성 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안 되어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성 여왕의 유모 부호 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 그리고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서너 명의 신하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사방에서 도둑들이 벌레처럼 일어났으며, 백성들은 모두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고 말 거야."
"위홍이라는 사람이 정권을 잡고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야."
"진성 여왕의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탓이지, 뭐."
"신라가 생긴 후로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 때는 없었어."
백성들은 입을 모아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궁궐을 향해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나라 안에는, 언제부턴가 진성 여왕과 신하를 저주하는 글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궁궐 안에도 뿌려졌습니다.
자신을 저주하는 글을 본 진성 여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 글을 쓴 자를 당장 잡아 들이도록 하라!"
신하들은 급해 군사를 풀어 그 글을 쓴 사람을 잡으려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자기들끼리 의논을 하였습니다.
"전부 모른다고만 하니 찾아 낼 방법이 없지 않소?"
"글 쓴 솜씨로 보아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오."
"내가 보기엔 왕거인의 짓이 아닌가 싶소. 그가 아니라면 이런 글을 지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오."
"그럼 왕거인을 잡아 들입시다."
"좋소. 그 놈을 잡아 옵시다."
신하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무고한 왕거인을 잡아 들이도록
했습니다.
왕거인은 당시의 유명한 문장가로서, 평소에 정치를 잘못하는 임금과 신하를 늘
비판해 왔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은 왕거인을 잡아다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잡혀 온 왕거인이
억울하다고 몇 번을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왕거인은 감옥 안에서 글을 지어,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늘에다 호소했습니다.
옛날 연나라 태자가 억울하게 죽으니
그 원통함이 해와 달에 사무쳤으며
제나라 추연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니
원통함이 여름에도 서리를 내리게 했습니다
지금 나의 억울한 처지가 그들과 같은데
어찌하여 하늘은 아무 말도 없습니까
왕거인의 글을 지어 하늘에 호소하자,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날이 어두워지더니
왕거인이 갇힌 감옥으로 벼락이 내리쳤습니다. 감옥은 모두 허물어졌지만, 왕거인은
조금도 다치지 않은 채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진성 여왕과 신하들은 겁을 먹고, 다시는 왕거인을 잡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진성 여왕에게 '양패'라는 막내아들이 있었는데, 그를 당나라 사신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에게 불만을 품은 해적들이, 양패를 습격하기 위해 진도에서 진을 차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걱정이 된 진성 여왕은 활 잘 쏘는 군사 50명을 뽑아, 양패가 당나라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호위하게 했습니다.
양패 일행이 탄 배가 골대도라는 섬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풍랑이 거세게 일어 배가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골대도에 배를 대고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
풍랑은 좀처럼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양패는 몹시 초조한 나머지, 날씨를 점치는 일관에게 점을 쳐 보게 했습니다. 점을
치고 난 일관이 말했습니다.
"이 점에 신비스러운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 제사를 지내면 바다를 잠재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패는 그의 말을 따라, 그 연못에다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활을 잘 쏘는 사람 한 명을 이 섬에 남겨 두면,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갈 수
있을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양패는 모두에게 꿈 이야기를 한 뒤, 검에 남을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남아 있겠다고 나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아무도
없는 외딴 섬에 홀로 남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쥐죽은 듯 조용하던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나 이렇게 제의를 했습니다.
"나무토막 50개를 만들어 거기에 각자 자기 이름을 새깁시다. 그리고 그것을 물에
띄워, 가장 먼저 가라앉는 나무토막의 임자가 남도록 합시다."
이 방법이 그래도 제일 공평하다고 생각하여 모두 찬성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제비를 뽑은 결과, 거타지라는 사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거타지를 남겨 두고 배를 타니, 신기하게도 정말 바람과 파도가 가라앉으며
잠잠해졌습니다. 거타지는 홀로 남아, 멀리 사라져 가는 배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배가 막 수평선으로 사라질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한 노인이 연못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나는 서쪽 바다의 신이오. 그런데 해가 뜰 무렵이면 하늘에서 어떤 중이 내려와,
이상한 주문을 외며 이 연못을 세 바퀴 돈다오. 중이 주문을 외기 시작하면 나의
자손들이 물 위로 떠오르는 데, 그러면 그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 먹고는 하늘로
올라간다오. 이렇게 해서 내 자손은 다 죽어 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부부와 딸
하나밖에 없소. 내일 해 뜰 무렵에도 어김없이 그 중이 나타날 것이니, 그대가 활로
쏘아 죽여준다면 그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활 쏘는 일이라면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원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고맙소."
그 노인은 인사를 하고 다시 연못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마침내 이튿날 새벽이 되었습니다.
거타지는 숲 속에 몰래 숨어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해가 떠오르자, 과연 어떤 중 한 명이 나타나 연못 주위를 돌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중이 세 바퀴를 돌기 시작했을 때, 거타지는 중의 가슴을 향해
있는 힘껏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화살을 맞은 그 중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은 중이 아니라 늙은 여우였습니다.
그 때 연못에서 그 노인이 나타나 웃으며 말했습니다.
"정말 고맙소. 그대 덕분에 우리 부부와 딸이 목숨을 건지게 되었소. 그대에게
보답하는 뜻으로 내 딸을 그대에게 드리겠으니, 부디 아내로 맞아 주길 바라오."
"그것은 저 또한 원하던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 것은 염려하지 마오."
노인은 곧 그의 딸을 한 송이의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용 두 마리를 부르더니, 거타지를 등에 태우고 양패 일행을
따라가도록 일렀습니다.
거타지를 태운 용은 곧 양패 일행이 있는 배에 이르렀고, 계속해서 그 배를
호위하며 당나라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당나라 사람들은 용 두 마리가 양쪽에서 신라의 배를 호위하여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당나라 황제가 말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신라의 사신들은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다."
양패 일행을 맞은 황제는 큰 잔치를 베풀고 성심 성의껏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양패 일행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려 하자, 많은 금과 비단을 주면서 환송해
주었습니다.
신라에 무사히 돌아온 거타지는 비로소 품 속에 간직한 꽃송이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그 꽃송이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거타지는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신라의 51대 왕이자 또한 마지막 여왕님이기도 한 진성 여왕 때의
일입니다. 진성 여왕은 신하를 뽑을 때 인물의 됨됨이나 능력은 보지도 않고, 자신과
친하거나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을 골라 높은 자리에 앉히고 나라를 다스리게
했지요. 그렇게 해서 높은 벼슬을 차지한 사람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배고픔은 못 본 체하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했답니다.
하지만 옳지 못한 일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이 있듯이, 자시
마음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진성 여왕과 벼슬아치들을 원망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늘어갔어요.
나쁜 신하들은 평소에 강직하고 성품이 곧아서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왕거인이란
사람에게, 임금님을 욕하는 글을 썼다는 누명의 씌워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하지만 하늘은 벼락을 내려 감옥을 부수고 그를 꺼내 주지요. 이 같은 일 한가지만
보아도 우리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항상 하늘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타지는 역시 진성 여왕 때의 사람입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왕자 양패는 활
잘 쏘는 사람을 남겨 두면 풍랑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서해 신의 말에,
군사들에게 제비 뽑기를 시킵니다. 제비 뽑기를 해서 결국 섬에 혼자 남게 된
거타지는 서쪽 바다 신의 부탁으로, 어린 중으로 변신한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지요.
그리고 그 보답으로 어여쁜 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이렇게 나쁜 일이 어쩔
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가끔 보죠. 옛 속담에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랍니다.)
거타지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의 부탁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지요.
생각 키우기
우리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진성 여왕처럼 어떤 모임이나 단체(작게는 가정이나
학교, 나아가서는 한 나라까지)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이익만 알고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태도를 보이지요. 그냥 모른 척하는 사람도 있고,
그 대표자 편에 서서 나쁜 짓을 부추기는 사람도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직접 앞에
나서서 잘못을 꼬집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한 단체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으려면, 과연 어떠한 태도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봅시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님
신라 제56대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님입니다.(경순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이므로 '김부왕'이라고도 합니다.)
경순왕이 아직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의 일입니다.
신라 제55대 경애왕 때, 후백제의 견훤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에 쳐들어
왔습니다.
견훤은 본래 경상 북도 상주 지방에서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청년이 되어
군대에 들어간 견훤은, 전라도 근방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신라에서는 진성 여왕의 잘못된 정치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 여러 곳에서도 도적떼들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임금을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 졌습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완주까지 쳐들어가서는 신라에게 망한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풀겠다고
선언하고, 서기 892년에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군사를 훈련시키며 신라를 칠 기회를 노리다가, 경애왕이
즉위한 지 4년만인 927년 11월에 신라의 서울을 습격하였습니다.
이 때 경애왕은 아름다운 후궁 수백 명과 함께 포석정에서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임금도 신하들도 모두 술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놀고 있는데, 한 군사가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와 말했습니다.
"지금 견훤이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보고를 받자마자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달아났고, 왕의 친척과 대신들은
각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신라 서울로 쳐들어온 견훤의 군사들은, 죄 없는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약탈하면서 궁궐까지 들이닥쳤습니다.
견훤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경애왕을 놓치지 말고 사로잡아라!"
이미 붙잡힌 많은 대신들은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노예라도 될 테니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마침내 후궁에 숨어있던 경애왕과 왕비도 잡히고 말았습니다. 군사들은 경애왕을
끌고 견훤에게로 데려갔습니다.
견훤은 차마 한 나라의 임금인 경애왕의 목을 칠 수는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습니다.
경애왕을 자살하게 한 견훤은 경애왕의 사촌동생인 김부를 신라의 왕으로 앉힌
뒤, 많은 신하들과 무기를 빼앗아 갔습니다. 이리하여 신라의 찬란한 빛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견훤에 의해 왕이 된 김부가 바로 신라 제56대 경순왕입니다. 하지만 경순왕은
견훤의 손아귀에 쥐여 있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경순왕이 임금이 된 다음 해인 829년 3월에, 고려 태조 왕건이 50명의 군사를
데리고 신라의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676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힘이 점차 쇠약해지자, 잃었던 백제 땅을 되찾기 위해 견훤이
나라를 세우고 후백제라 하였습니다(892년).
한편 궁예는 901년에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함께 있던 때를 후삼국 시대라 합니다.
후고구려가 점차 강해지자, 궁예는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횡포가 심해지고 죄 없는 신하들을 죽이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궁예의 횡포를 보다 못해 신숭겸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임금으로
추대했습니다.
왕건은 임금으로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 후에,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에서 고려로
고쳤습니다. 이 해가 서기 918년이었습니다.
왕건은 정치를 잘하여 고려의 힘은 날로 커져갔습니다.
왕건이 신라의 서울을 방문했던 것은 바로, 그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인 928년
3월의 일이었습니다.
신라의 경순왕은 태조 왕건의 예의를 갖추어 맞아들이고, 태조 왕건을 위해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경순왕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왕건에게 하소연했습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 환란이 끊이지 않고, 견훤은 군사를
끌고 와 신라를 망하게 했으니 이 원통한 일을 어디다 하소연하리오."
이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신하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왕건 역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왕건은 경순왕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후백제의 견훤이 군사의 힘을 믿고 함부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니, 앞으로
신라와 고려는 서로 돕고 화평하게 지내도록 합시다."
태조 왕건이 신라를 돕겠다는 말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크게 기뻐했습니다.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늑대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이번에 태조왕을
뵈니 꼭 부모를 만난 것 같구나."
그해 8월에 왕건은 경순왕에게 비단을 주고, 신하들과 군사들에게도 골고루
선물을 주었습니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른지도 어느덧 아홉 해가 되었습니다. 이 때는 이미 신라의 땅
대부분이 후백제의 소유가 되어 있었고, 나라의 힘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경순왕은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경순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눈물을 머금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 신라의 영광은 다시 되찾을 수가 없게 되었고. 나라의 운명은 거센
바람 앞에 놓인 등불과 같은 형국이 되었소. 그러니 차라리 고려 대조에게 항복하여
백성을 다치지 않게 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좋겠소."
대신들도 나라의 운명이 길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 때 듣고만 있던 태자가 반대 의견을 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흥하는 것은 분명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마땅히 임금님과
신하들이 힘을 합하여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어찌 1천 년을 이어 온 나라를 그렇게 쉽게 남에게 넘겨
준다는 말입니까?"
경순왕은 태자를 달래며 말했습니다.
"우리 신라가 의지할 곳이란 이제 아무 데도 없다. 더 이상 나라를 지켜 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나라의 운명을 회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도, 죄 없는
백성들을 싸움터로 몰아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경순왕은 마침내 고려에 항복한다는 글을 써서 왕건에게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태자는 서럽게 울면서 경순왕을 하직하고 곧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태자는 날마다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만을 씹어 먹으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삼베옷을 입고 일생을 살았던 그를 '마의 태자'라
불렀습니다.
한편, 신라 경순왕이 보낸 항복 편지를 받은 태조 왕건은, 왕철이라는 신하를
보내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했습니다.
경순왕은 왕철의 안내를 받으며, 여러 신하들과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로
들어왔습니다. 보배를 실은 수레와 말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길
양쪽에는 이 행렬을 구경 나온 고려 백성들이 담처럼 늘어서 있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멀리 교외에까지 나가 경순왕 일행을 맞아들이고,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을 궁궐에 있는 정승원에서 살게 하고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또 신라의 국호를 없애고 경주로 했으며, 경순왕을 고려의
정승으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는데, 이 해가 바로 935년이었습니다.
고려는 신라의 경순왕이 자진하여 항복해온 것을 계기로, 다음해인 936년에
후백제를 쳐서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태조 왕건은 완전히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고려 5백 년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에 대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라의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사라져 갔는가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한때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할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신라는, 말기로 접어 들면서 점점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요. 나라 안 곳곳에서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견훤과 궁예처럼 백제와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나라를 세우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나쁜 일을 일삼고 놀기에만 급급하였던 경애왕은,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견훤이 쳐들어오는 것도 알지 못하였죠. 이러한 실정이었으니, 신라가 망하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몰라요.
백제도 마찬가지였잖아요.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평소에 간신의 말만
귀담아 듣고는 진심으로 충고하는 신하들을 죽이고, 신라가 쳐들어온 그 순간에도
궁녀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지요.
한편 견훤에 의해 왕이 된 경순왕은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고려에 도움을
청하다가, 신라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음을 알고 결국은 태조에게 항복해 버립니다.
한때 그 찬란한 빛을 자랑하던 신라는, 이렇게 해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생각 키우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다른 나라에 자기 나라를 넘겨 준다고 하는 것은
결코 훌륭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했던 것도
마찬가지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순왕의 행동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고려에 반항하였다면 적어도 치욕스럽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분명 죄 없는 백성들이 수도 없이 죽었을 테니 말이죠.
경순왕이 내린 결단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에서 경순왕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말해 봅시다.
노래로 얻은 선화 공주
백제의 서울 남쪽에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연못 근처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서동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서동은 매일같이 산을 돌아다니며 마를 캐다가, 시장에 내다 팔아 근근히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비록 마를 캐어 살아가는 서동이었지만, 그는 남달리 재주가 뛰어났으며 생각하는
것이 깊고 넓었습니다.
그러나 서동의 홀어머니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서동이 장가갈 나이가 되었는데도 딸을 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홀어머니는 그런 서동이 안쓰러웠습니다.
"네가 장가가는 것을 봐야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서동은,
"어머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짝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틀림없이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하며 오히려 홀어머니를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동은 그런 얘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선화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우면 백제에까지 그런 소문이 나도는 걸까?'
산에서 마를 캘 때에도 서동의 머리에서는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서동은 선화 공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 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꿈
속에서 선화 공주와 만나 재미있는 놀이를 하다 잠이 깰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날
아침이면 왠지 마음이 부풀어 올라 잘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동은 마음 속으로 굳은 결심을 내렸습니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서 마음만 태우고 있을 수는 없다. 선화 공주를 만나러
가야겠다.'
서동은 선화 공주를 자기 아내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꿈도 꾸어 보지 못할 일이었지만, 서동은 반드시 해내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신라로 떠날 준비를 마친 서동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어머니, 신라에 가서 아내를 맞이해 오겠습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아니, 우리 백제 땅에서도 딸을 주는 사람이 없는데, 난데없이 신라에 간다고
하니 그게 무슨 말이냐?"
"어머니, 우리 백제에서는 제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늘이 저에게 배필을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
때가 왔습니다."
어머니는 도무지 서동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서 네 마음대로 해 봐라."
서동은 마침내 어머니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신라의 서울을 향해 떠났습니다.
서동은 머리를 빡빡 깎고 신라 사람의 옷을 입은 뒤,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들어갔습니다.
서동은 산에서 마를 캐어 자루에 가득 담고 마을로 내려와,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는 마치 감자처럼 생겼는데, 씹으면 달착지근한 단물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마를 얻어먹기 위해, 우루루 서동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서동은 마를 그냥 주지는 않았습니다.
"자, 이 노래를 따라 부른 사람에게 마 하나씩을 주겠다."
서동은 아이들에게 미리 준비해 온 노래를 들려 주었습니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네
밤이면 남몰래 나와 서동의 방으로 들어간다네
아이들은 마를 얻어먹기 위해,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신나게
불렀습니다. 이 노래가 그 마을에 퍼질 때쯤이면, 서동은 다시 다른 마을로 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노래를 퍼뜨렸습니다.
오래지 않아 서라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면서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곧 궁궐의 대신들도 서라벌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신들은 진평왕에게 발했습니다.
"요즘 장안에 이상한 노래가 퍼지고 있습니다."
"이상한 노래라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선화 공주님이 서동이라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내용이 담긴
노래입니다."
진평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서동이라니, 그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서동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진평왕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어허, 선화 공주가 왕실에 먹칠을 하다니.... 빨리 선화 공주를 불러 오도록
하시오."
진평왕은 선화 공주를 앉혀 놓고 호통을 치며, 어떻게 해서 그런 노래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선화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모르는 일이라고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진평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수 있겠느냐? 서동이 누구인지 빨리 말하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선화 공주는 이 노래가 어떻게 하여 퍼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서동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진평왕은 끝까지 선화 공주가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편, 대신들도 임금에게 결단을 내리라고 성화였습니다.
"이런 일로 왕실의 명예에 먹칠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빨리 선화 공주를
귀양보내어, 백성들에게 왕실의 법도가 무섭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라
전체에 퍼지고 있는 노래도 잠잠해질 것입니다."
모든 신하들의 뜻이 그러해서 진평왕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화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도록 하시오."
임금의 명령이 떨어지자 왕비와 선화 공주는 서로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선화 공주가 귀양가기 전날 밤, 왕비는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선화
공주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황금이다.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니 깊이 간직하도록 하여라."
선화 공주는 마침내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서울을 벗어난 지도 며칠이 지나 깊은
산 속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네
밤이면 남몰래 나와 서동의 방으로 들어간다네
가까이서 이런 노래가 들리더니 어디에선가 갑자기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선화 공주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공주님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제가 공주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예, 제가 바로 이 노래를 지은 서동이라고 합니다."
"아니, 뭐라고요?"
"우선 짐이나 이리 주십시오. 제가 들겠습니다. 가면서 천천히 말씀드리지요."
선화 공주는 이 사람이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일단 마음을
놓았습니다.
선화 공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그러나 선화 공주의 말 속에는 서동을 원망하는 빛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서동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선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이런 일을 꾸며내었다는 것도 사실대로 고백했습니다.
선화 공주는 그 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서동 때문에
궁궐에서 쫓겨난 셈이 되었지만,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끌렸습니다.
비록 옷차림은 초라하지만 훤출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리고 결단성이 강하고
용기 있는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선화 공주는 깊은 산 속에서 함께 며칠을 지내는 동안 서동에게 정이 들었습니다.
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동이 자기만 혼자 남겨 두고 따날까 봐 두렵기조차
했습니다.
서동은 이러한 선화 공주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했습니다.
"선화 공주님,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늘의 뜻이니, 나와 함께 백제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화 공주는 얼굴을 붉히며 선선히 승낙하였습니다.
서동에게서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어머니의 마음 속에는, 기쁨과 동시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집이 워낙 가난해서, 공주를 고생시킬 것이 큰 걱정이구나."
이 때 선화 공주는 품 속에 숨겨 두었던 황금을 꺼내며 말했습니다.
"이것을 팔면 큰 짐과 논밭을 사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선화 공주가 꺼낸 것을 자세히 살펴보던 서동이 말했습니다.
"그게 뭐길래 그것으로 집도 사고 논밭도 산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황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평생토록 부자로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황금이란 것은, 내가 마를 캐는 산에 가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주는 깜짝 놀랐습니다.
"황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서 가서 캐어
오도록 하십시오."
서동이 마를 캐러 다녔던 그 산은 바로 황금이 나오는 산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황금을 보지 못했던 서동은 그것이 값진 보배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 황금의 일부를 저의 부모님이 계시는 궁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서동은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적은 편지를, 많은 황금과 함께 신라
진평왕에게로 보냈습니다.
그제서야 진평왕은 서동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 때부터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습니다.
이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서동을 칭찬하고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동은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뭔가 달랐어."
"큰 인물이 될 사람을 우리가 몰라보았군."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니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서동을 부러워하였습니다.
한편 서동은 캐어 놓은 황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서동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의 수도 나날이 늘어났습니다.
서동은 몇 년 뒤 임금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입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이 글은 노래 하나로 어여쁜 한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서동의
이야기입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마를 캐다 팔아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 나갔던 서동은,
매우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거나 용기를 잃는 법이
없었지요. 장가갈 나이가 되어 아무도 그와 결혼하려 하지 않았을 때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신부감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름다운 선화 공주님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죠.
선화 공주와 결혼하여 다시 백제로 돌아간 서동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입니다.
마를 캐다 파는 가난한 소년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겠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기와 자신감만 지닌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원하는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자신의 가난을 부끄러워하면서, 멋진 집과 값비싼 옷을 갖지
못한 것을 속상해 하는 친구는 없나요?
하지만 여러분! 가난은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속상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든 여건을 이겨 낸 사람이 더 높은 평가를 얻을 수 있는
법이죠. 미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자신이 노력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이랍니다.
생각 키우기
우리 주위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이겨내고, 열심히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낮에는 공장에서 땀흘리며 일을 하고, 밤에는 놀린 눈을 비비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스스로 돈을 벌어
집안을 꾸려 나가는 소년 소녀 가장들도 있지요.
우리는 어떤가요? 그들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매일 불평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지금의 생활 속에서 고쳐 나가야 할
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호랑이의 젖을 먹은 견훤
옛날에 한 농부가 살고 있었는데, 몸가짐이 매우 단정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리따운 딸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딸이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제 방에 들어와서 자고 가곤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오늘은 바늘에 긴 실을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꽃아 두어라."
그 날 밤도 역시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자, 딸은 아버지가 시킨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날이 밝은 후 실을 따라가 보았더니, 북쪽 담 밑에 있는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딸은 그 날 이후 임신을 하여 튼튼한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어느 날 딸은 다른 때와 같이 아버지가 밭일하는 곳으로 점심을 가지고 갔습니다.
아이를 잠시 수풀에 뉘어 놓고 아버지에게 점심을 드리고 오니, 호랑이 한 마리가
와서 그 아이에게 젖을 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이 후에도 그 시간이면 매일,
어김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젖을 주곤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자라 열다섯 살이 되자, 견훤은 체격도 크고 몸가짐에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무엇인가 특별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 뒤 견훤은 군인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신라의 서울로 들어갔다가 다시 서남쪽의 해변을 지키는
군인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견훤은 잘 때 항상 창을 베고 누워 잤습니다.
그는 어떤 군인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용감하여, 계속해서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신라의 진성 여왕이 왕위에 오른지 6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왕 곁에는 몇 명의
간신들이 버티고 앉아 나라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습니다.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나라에는 기강이 무너져, 사방에서 도적떼들이 들끓었습니다.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하나 둘 죽어 갔습니다.
이 때 견훤은 남몰래 반역할 마음을 품었습니다. 군사들을 따로 비밀리에 훈련
시켰다가, 어느 날 서울의 서남쪽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환영을 했으며, 한 달 사이에 무려 5천 명의 병사가 모여들었습니다.
견훤은 드디어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습니다.
견훤이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그 곳 백성들 또한 크게
환영하며 맞아 주었습니다.
견훤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더없이 흐뭇했습니다. 완산주에서
그는 부하들에게 선언했습니다.
"백제는 나라를 세운 지 육백여 년 만에 망했다. 당나라 고종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에게 13만 명의 군사를 주어 바다를 건너게 했고, 신라의 김유신은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나는 백제를 잇는 나라를 세워 백제의
원한을 씻으려 한다."
견훤은 스스로 후백제의 왕이라 일컬으며, 관직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어 신하로 삼았습니다. 이 때가 신라 효공왕 4년인 서기 900년의 일이었습니다.
신라 경명왕 2년이 918년에는 후고구려의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고려라 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고려 태조입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고려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어, 많은 선물과 훌륭한 말을
바치며 축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견훤은 겉으로는 축하하는 체하면서 딴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고려 태조가 왕위에 오른 지 6년, 923년 10월에 견훤은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조물성(지금의 안동 부근)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고려 태조는 즉시 날쌘 군사를
거느리고 견훤과 맞서 싸웠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자 견훤에게 화해를
제의했습니다.
그 해 12월에 견훤은 신라의 성 20여 곳을 빼앗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신라의
근품성을 함락시키고 곳곳에 불을 지르며 쳐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병이
출병하기도 전에, 견훤은 이미 고울부를 점령하고 신라 서울을 향해 진격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경애왕은 왕비와 대신, 그리고 궁녀들과 함께 포석정에 나가 놀이를 즐기고
있다가 졸지에 견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견훤은 신라 왕비를 데려다 자신의 부인으로 삼고, 왕의 조카인 김부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 분이 바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입니다.
견훤은 왕의 아우 효렴과 대신들을 인질로 삼고 왕실의 값진 보물과 무리를
훔쳤으며, 뛰어난 기술자들과 많은 백성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이 때 고려 태조는 날쌘 기마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공산(대구 팔공산)을
지나가던 견훤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고려는 용감한 장군인 김락과
신숭겸 등을 잃고, 군사들도 크게 패해 결국 태조만이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견훤은 승세를 몰아 대목성, 경산부, 강주 등지를 공격하고 가는 곳마다 불을
질렀습니다.
의성부의 태수 홍술이 그들과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태조는,
"아, 나의 오른팔을 잃었구나!"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려 태조는 견훤의 만행을 보고도 어찌한 도리가 없었습니다.
서기 930년, 견훤은 고창군(지금의 안동)을 치기 위해 석산에 진을 쳤습니다. 태조
역시 백 보를 사이에 두고 북쪽 병산에 진을 치고 맞섰습니다.
두 나라의 군사가 여러 번 맞붙어 싸운 끝에, 이번에는 견훤이 패했습니다. 다음
날 견훤은 군사를 모아 순주성을 습격했는데, 성주 원봉은 이를 막지 못하고 밤에
도망쳤습니다.
한편 신라는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습니다. 언제 견훤에게 나라를 빼앗길지
몰랐습니다. 신라 혼자 힘으로는 다시 나라를 일으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경순왕은 고려에 화친을 청하고 도와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협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 이미 신라의 간신배들을 물리치고 김부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했소. 그래서
위태롭던 신라를 다시 고쳐 세웠소. 그런데 당신이 신라와 화친한다는 명분으로
신라의 왕위를 넘보고 있다니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오. 일을 잘못 판단하여 후회를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이 편지를 받고 태조도 답장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하늘의 은혜를 저버리고 신라 임금을 죽였소.
대궐에 불을 지르고 대신들을 죽였으며, 많은 궁녀들을 잡아 갔소. 또 많은 보물도
빼앗아 갔소. 하늘에서는 당신의 이런 만행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도
싸움을 계속한다면 그 때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오.
그 뒤 서기 931년에 견훤의 신하 공직이 태조에게 항복해 왔습니다. 그러자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다가 다리의 힘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 해
9월에는 견훤이 일길을 앞세워 고려의 예성강으로 쳐들어가 사흘을 머물면서, 염주,
백주, 진주 등 세 고을의 배 백여 척을 불지르고 돌아갔습니다.
934년, 견훤은 태조가 운주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갑옷 입은 군사 수천
명을 뽑아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운주에 가는 도중 고려의 장군 유검필이
이끄는 기마병에 의해 견훤의 군사 3천여 명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웅진(지금의 공주) 이북에 있는 30여 개 성의 성주들이 자진하여 태조에게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견훤의 부하였던 종훈, 지겸, 상봉, 최필 등도 태조에게
투항했습니다.
이로부터 견훤의 세력은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기 936년 1월이었습니다.
견훤은 그의 아들들을 불러 좋고 말했습니다.
"내가 후백제를 세운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죄었다. 그런데 우리 쪽 군사의 수가
고려보다 갑절이나 많은데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하늘에서 고려를
돕는 것 같구나. 차라리 고려에 항복하여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자 견훤의 아들 신검, 용검, 양검 등은 모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견훤에게는 세 아들 외에도 다른 부인에게서 난 아들 십여 명이 더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견훤은 특히 몸집이 놓고 지혜가 많은 넷째 아들 금강을 사랑했는데,
그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신검, 용검, 양검은 마음이 편지 않았습니다. 이 때 장군 능환이 세
사람을 부추겼습니다.
"왕위는 당연히 맏형이 물려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신검을 왕으로 세울 계획을 짰습니다. 신검, 용검, 양검은 마침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중이어서, 모두 능환의 말을 따르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능환은 영순 등과 힘을 합하여 신검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제일 먼저 금강을 죽였습니다. 반란에 동조한 장수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신검의
뒤를 따랐습니다.
신검은 아버지 견훤의 침실로 달려갔습니다. 견훤은 신검이 온 것을 알고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새벽 일찍 웬일이냐? 아니, 그런데 저 고함소리는 또 무엇이냐?"
신검이 말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지금 연세가 많으셔서 나라 일을 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 장군들이 아버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저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지금
들리는 저 함성은 바로 왕이 된 저를 환영하는 소리입니다."
"무엇이라고? 이놈!"
화가 난 견훤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쳤지만, 이미 모든 일이 끝나 버린
후였습니다.
신검은 미리 계획한 대로 군사를 시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군사 30여 명을
시켜 철저히 감시하게 했습니다.
장자 신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금산사에 갇힌 견훤은, 이를 갈면서 탈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금산사에 온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견훤은 맛있는 술을 빚어 군사들에게 먹이고, 군사들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틈을 타 금산사를 탈출했습니다.
견훤은 그 길로 고려 태조에게 도망쳤습니다. 견훤을 맞이한 고려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열 살 많다고 하여 '상보'라 부르며 궁전 안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리고 노비
40명, 말 9필을 주며 매우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한편, 하루는 후백제의 장군이며 견훤의 사위인 영규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대왕(견훤)께서 애써 나라를 다스린 지 40여 년이 되었소. 그런데 하루 아침에
아들의 반역으로 나라를 잃고 고려의 신하가 되었소. 예로부터 지조가 곧은 여자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우리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신검을 가리킴)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하늘을 우러러보겠소.
지금 고려의 왕은 어질고 덕이 많아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고 있다 하오. 나는
고려로 편지를 올려 우리 임금님을 위로해 드리는 한편, 고려 왕에게도 나의 뜻을
전하려 하오. 훗날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소."
영규의 아내도 찬성했습니다.
"당신의 뜻아 바로 저의 뜻입니다."
이에 영규는 비밀리에 고려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습니다.
"왕께서 후백제를 공략해 오면 저는 고려 군사와 합세하여 신검의 목을
베겠습니다."
고려 태조는 매우 기뻐하며 이렇게 전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그대의 은혜를 입어 성공한다면, 먼저 장군을 뵙고 다음에는 부인에게
절하겠소. 뿐만 아니라 장군을 형으로 섬기고 부인을 누님으로 받들며 그 은혜를
잊지 않겠소. 나의 이 맹세는 하늘과 땅과 귀신도 듣고 있을 것이오."
이런 편지가 오고 간 지 넉 달이 지나서였습니다.
견훤은 아들 신검에게 당한 원한을 갚지 않고는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견훤이
태조 왕건에게 호소했습니다.
"제가 천하에 항복해 온 것은 전하의 힘을 빌어 반역한 아들의 목베고자
함입니다. 대왕께서 반역한 제 아들과 거기에 동조한 신하를 없애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때가 왔습니다."
이에 태조는 태자 무와 장군 술회에게 보병과 기마병 10만을 주어 천안부로
나가게 했습니다. 9월에는 태조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태자의
군대와 합세하여 일선군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신검이 군사를 이끌고 대항해 왔습니다.
두 군대는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고려 쪽에서부터
갑자기 칼과 창 모양의 흰구름이 일어나 적군을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고려 군사들이 북을 치며 진군해 가니, 후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은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해 왔습니다.
고려 태조는 그들을 불러다 놓고 물었습니다.
"신검은 어디에 있느냐?"
"예, 군사들과 함께 있습니다."
태조는 즉시 장군 공훤에게 명령했습니다.
"삼군이 함께 공격하도록 하라."
고려 군사가 북을 치며 일제히 공격해 나가자, 후백제 군사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황산과 탄현까지 달아나던 신검은, 두 아우를 비롯한 장군 부달, 능환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태조가 신검, 용검, 양검을 잡아 문초한 결과, 장군 능환이 뒤에서 조종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태조는 항복한 견훤의 세 아들은 그냥 살려 보내고 능환만을
문책했습니다.
"대왕을 가두고 신검을 왕으로 세운 것은 모두 네가 한 짓이다. 신하된 도리로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능환의 목을 베어라.
태조가 신검을 살려 보낸 것은, 왕위를 빼앗은 것이 모두 능환의 협박
때문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견훤은 반역을 일으킨 아들이
살아서 돌아가는 것을 보자, 울화가 치밀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70살이었습니다.
태조는 견훤의 사위인 영규에게 벼슬을 내리며 말했습니다.
"돌아가신 왕이 나라를 잃은 뒤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당신 내외만이 천 리 먼 곳에서 편지를 보내는 등 성의를 다하였소.
아울러 나에게도 영광을 주었으니 그 의리를 잊지 않겠소."
그리고는 영규의 두 아들에게도 큰 벼슬을 내려 주었습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이 글은 후백제가 생겨나게 된 배경과,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여 한
나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원래 신라의 한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잘못된 정치를
해서 나라가 혼란스럽던 진성 여왕 시절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지요. 비슷한 때,
도적의 부하였던 궁예도 반란을 일으켜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들은 신라에 태어났으면서도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으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쁜 마음을 먹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기회로 삼아 신라의 도읍을 공격했지요.
게다가 임금과 신하들을 마치 짐승처럼 죽이고 죄 없는 백성들까지도 괴롭혔답니다.
결국 궁예가 자신의 부하였던 왕건에게서 버림을 받고 견훤이 그 아들과 신하에게
배신을 당했던 것도, 생각해 보면 모두 스스로 만든 일이 아니겠어요?
반면에 고려에 투항해 온 경순왕이나 견훤 같은 적국의 왕을 따뜻이 맞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움을 지녔던 태조 왕건은, 어진 정치로 인해 많은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한때는 것이었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왕건이었기에 결국은 삼국을 통일하는 커다란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생각 키우기
신하와 후백제의 멸망은 우리에게, 과거에 아무리 강했던 나라일지라도, 국민의
마음이 흩어지고 나라의 힘이 약해지면 결국 그렇게 쓰러지고 만다는 것을 경고해
줍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죠. 지금처럼 국민들이 우리 것보다도 다른 나라의 것을 더
아끼고 좋아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결국에는 우리 나라보다 강한 나라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법이랍니다.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해봅시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낙동강은 흘러서 남쪽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낙동강이 바다로 흘러들기 전, 그 하류 부근에는 아홉 명의 추장이 7만
5천명의 백성을 다스리며 살았습니다.
그 때에는 나라 이름도 없었고, 따라서 임금이니 신하니 하는 명칭도 없었습니다.
단지 아홉 명의 추장과 백성들이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아홉 명의 추장의 이름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이라 했으며, 이를 통틀어 9간이라 하였습니다.
서기 42년 3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9간이 한데 모여 개울에서 목욕을 한 뒤,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조용히 하시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소?"
모두들 개울 북쪽에 있는 구지봉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과연 구지봉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습니다.
9간을 비롯하여 그 곳에 있던 2,3백 명의 사람들이 구지봉으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말소리만 뚜렷하게 들려 왔습니다.
"이 곳에 누가 와 있느냐?"
9간들이 함께 대답했습니다.
"저희들이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러자 다시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가 어디냐?"
"예, 여기는 구지봉입니다."
9간들이 대답하지 또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 곳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셨다.
너희들은 산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겠다'라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렇게 하면 너희들은 곧
임금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9간들은 들은 그대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주색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붉은 보자기에 황금 상자가 싸여
있었습니다. 그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쁜 마음이 솟아나, 황금알을 향해 수없이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안고 9간 중의 한 사람인 아도간의
집으로 갔습니다.
다음 날 사람들은 아도간의 집에 모두 모여 황금 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순간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여섯 개의 황금알이 여섯 명의 사내아이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들 모두는 하나같이 아름답고 총명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들이 하늘에서 내려 준 임금님인 것을 깨닫고, 정성껏 받들어
모셨습니다.
알에서 나온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10여 일이 지나서는
키가 9척(약 3m)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한 아이는 용의 모습을 닮았고,
눈썹은 여러 가시 색으로 빛이 났으며, 동그란 눈동자는 겹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달 보름에 사람들은 그 아이를 왕위에 올리고, 이름을 '수로'라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다고 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6강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한 나라씩 맡아 임금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수로왕이 거처할 임시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수로왕은 매우 검소한 분이라, 궁궐을 짓되 백성들의 집보다 특별히 훌륭하게 짖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서기 43년, 임금이 된 지 2년이 되는 어느 날 수로왕은 9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라가 세워졌으니 도읍을 정해야 되겠소."
수로왕은 9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임시 궁궐의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한참을 내려가던 수로왕은 발길이 멈추고, 한 곳의 산과 들을 둘러본 뒤
말했습니다.
"이곳은 땅이 매우 좁긴 하지만, 산천이 아름답고 하늘의 정기가 서려 있소.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땅을 개척하면 나라가 크게 일어날 것이오."
수로왕은 궁궐과 여러 관청의 건물, 그리고 무기 창고, 곡식 창고 등을 세울 터를
잡은 다음, 곧 공사에 착수하도록 했습니다.
많은 장정들과 기술자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일한 끝에, 궁궐은 매우
빨리 완성되었습니다. 수로왕은 좋은 날을 택해 새로 지은 궁궐로 들어가,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수로왕이 새 궁궐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어느 날 키가 석 자밖에 안되는 작은 사람이 찾아와 수로왕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온 사람이오."
"아니 당신은 누군데, 남의 나라 임금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가?"
"나는 완하국 함달왕의 태자로,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이름은 탈해라 하오."
"그건 그렇고, 나는 하늘의 명령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태평하게 하여 백성을
편하게 살도록 했다. 그런데 감히 하늘의 명을 거기고, 왕위를 남에게 넘겨 줄 수
있겠느냐?"
탈해는 버티고 서서 수로왕을 한참 노려보더니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술법을 써서 승부를 가리기로 합시다."
수로왕도 탈해의 제의에 찬성하였습니다.
이 순간 탈해는 술법을 써서 매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수로왕은 재빨리 독수리로
변했습니다. 탈해가 다시 참새로 변하자 수로왕은 참새를 잡아먹는 새매로
변했습니다. 이런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탈해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수로왕 역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탈해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절하며 수로왕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술법을 써서 매가 되었을 때, 임금님께서는 독수리가 되었습니다. 내가
참새가 되었을 때 임금님께서는 새매가 되었습니다. 두 번 다 나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임금님께서는 나를 살려 수셨습니다. 이는 임금님께서 남을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마음을 지니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임금님과 왕위를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탈해는 수로왕에게 무릎을 꿇고 그 길로 떠나갔습니다. 수로왕은 그가 이 부근에
머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군사를 보내어 멀리 쫓아 버렸습니다.
탈해가 쫓기어 달아난 곳은 계림(신라) 땅 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48년 7월 27일, 9간들이 수로왕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대왕께서도 이제 혼인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신하들의 딸 가운데서 예쁜 처녀를
가려 뽑아 왕비로 정하소서."
이에 수로왕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 곳에 온 것은 하늘의 명이오. 나에게 짝을
지을 왕후 역시 하늘이 정할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마시오."
며칠 후 수로왕은 유천간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그대는 망산도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떤 여인이 나타나면 이리로 모셔
오도록 하시오."
유천간은 말을 타고 달려가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망산도에 들어가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바다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유천간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렸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그 횃불을 바라보고 섬 기슭에 배를 대었습니다.
대궐로 달려가 이런 사실을 알리니 수로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9간 등을 보내며
말했습니다.
"좋은 배를 가지고 가서 그분들을 모시고 오도록 하시오."
9간들이 가서 그들 일행을 대궐로 데려가려 하자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간천이 돌아와 그 말을 전하니 수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내가 직접 나갈 테니, 대궐 서남쪽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임시 거처를 만들도록
하시오."
이런 말을 전해 들은 왕후 일행은, 그 때서야 비로소 배에서 내려 뭍으로
나왔습니다.
왕후를 모시고 온 사람들은 전부 2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옷과 금,
은 등의 패물과 보물들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왕후 일행이 수로왕이 머무는 것에 가까이 오자, 왕이 직접 나가 맞아들였습니다.
수로왕은 곁에 있던 한 신하에게 명했습니다.
"왕후를 모시고 온 분들에게 각기 다른 방을 주어 편안히 쉬도록 하시오. 그리고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들게 하여, 좋은 음식과 술을 대접하시오."
명령을 내리고 난 뒤 수로왕은 왕후와 함께 임금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왕후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는 아유타(중인도에 있는 고대의 왕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금년 5월에 부왕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옥황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수로왕은 하늘이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한 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러나 아직 왕후가 없으니 공주를 보내어 왕후로
삼게 하라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 꿈이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게 울리고
있으니 너는 곧 그 분을 찾아가도록 하라'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수로왕이 말했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의 뜻으로 태어났소. 오늘 공주를 맞이할 것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하라고 청했지만 따르지 않았소.
이제 공주 역시 하늘이 보냈으니 기쁘기 한량 없소."
수로왕은 임시로 만든 거처에서, 왕후와 이틀 밤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왕후가 타고 온 배를 아유타 왕국으로 돌려 보내면서, 15명의 뱃사공에게 각각 쌀
10석과 세 30필 씩을 주었습니다.
8월 1일에 왕후와 함께 대궐로 돌아온 수로왕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후로 삼는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후로 수로왕은 더욱 어질게 백성을 보살피는 한편, 왕후와 의논하여 지금까지의
낡은 제도를 고치고 또 새로운 법도 만들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은 왕과 왕비가 함께 나라를 다시려 나가는 것을 보며, 마치 하늘이 있으니
땅이 있고 해가 있으니 달이 있으며, 밤이 있으니 낮이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 10년
만인 199년 3월 23일에 158세의 나이로 수로왕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에 김해 김씨의 시조가 바로 김수로왕입니다.
함께 읽는 이야기
삼국 중에 가장 먼저 고구려가 생겨나고 백제, 신라가 차례차례 생겨난 후에,
지금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해서 태어난 나라가 바로 '가야'(또는 '가락국'이라고도
불리죠)입니다. 수로 임금님이 내려와 아직 제대로 된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전의
가야는 아홉 명의 대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왕이 되어 줄 현명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김수로가 나타났지요. 백성들은 해처럼 둥글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알에 싸인 채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그를 발견하고, 하늘이 자신들의 바램을
듣고 보내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수로를 포함하여 알에서 나온 여섯
명의 사람들을 각각 여섯 가야의 임금님으로 모십니다. 그 여섯 명 가운데 알에서
가장 먼저 나온 분이 바로 수로 임금님이지요.('수로'란 알에서 처음 나왔다는
뜻이며, 황금빛 알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 성이 붙었지요.)
수로 임금님은 나라를 잘 다스려 어지럽던 나라를 질서있고 평화롭게 만들고,
백성들을 마치 친자식 대하듯 따뜻하고 자상하게 이끌었습니다. 또 매우 검소하였던
수로 임금님은 다른 임금님들처럼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백성들이 사는 것과 같은
허름한 집에서 지냈지요. 백성들은 그런 수로 임금님을, 부모 대하듯 공경하고
사랑했답니다. 왕위에 오른 후 158세의 나이로 수로 임금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모든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고 가슴 아파했던 건 바로 그런 훌륭했던
덕행들 때문이었지요.
기름진 들이 많아 문명이 발달하는 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또 바다를 통해
중국의 앞선 문화를 보다 빨리 수입할 수 있었던 가야는, 신라와 영토를 두고
싸우다 결국 망하기 전까지는 아주 부유했고 또, 아주 발달된 문명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생각 키우기
가야의 수로 임금님이 고구려의 고주몽이나 신라의 탈해와 달랐던 점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고주몽이 자신의 용맹과 힘을 써서 스스로 나라를 세운 것과, 탈해가
지혜를 써서 왕의 자리에 오른 것과는 달리, 수로는 백성들의 뜻에 의해 왕으로
떠받들어졌다는 점일 거예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한 면을 볼 수 있지요. 국민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 국민들이 주인 되는 나라! 바로 여러분들이 만들어 나가야 할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과 비교했을 때, 앞으로 만들어 갈 나라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해봅시다.
내가 쓴 감상문
--노래로 얻은 선화 공주
'노래로 얻은 선화 공주'를 읽고
서울 상원 국민학교 5학년 상상윤
백제 서울 남쪽에 서동이라는 청년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매일같이
마를 캐어서 먹고는 살았지만, 재주가 많고 생각이 깊은 청년이었다.
서동이가 늦도록 장가를 가지 못해서 어머니는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서동이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결심했다. 천하에 가장 예쁘다고 소문난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고 다짐하고는,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서라벌로 떠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걱정이 되었다.
'백제에서도 딸을 주는 사람이 없는데, 신라땅세서 어떻게 색시를 구해온단
말인가?'
그래도 어머니는 서동이를 믿고,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
서라벌에 도착한 서동이는 아이들의 환심도 사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위해
산에서 캐어 온 마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때는 그냥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선화 공주는 남몰래
서동의 방으로 들어간다네' 라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마를 주었다.
왕실에서는 이 노래가 유행이 되면 큰일이 나니까 선화 종주를 귀양 보냈다.
서동은 공주 앞에 나타나서 사나이답게 고백하였다. 선화 공주는 그를 원망하지
않고, 서동과 결혼하는 것을 승낙하였다.
서동은 백제로 돌아가서 어머니께 이 기쁨을 알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공주를
고생시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선화 공주는 자기에게는 황금이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평상시 황금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서동이는 공주가 가져온 황금을 보고, 산에
올라가서 황금을 많이 캐어 왔다.
선화 공주는 편지와 황금을 진평왕게게 보냈다.
그러자 임금님은 이것을 보고 서동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한편 서동이는 어려운 사람에게도 황금을 나눠 주었다. 이 때부터 서동이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이분이 바로 30대 왕인 무왕이다.
서동이는 예쁜 색시를 얻어 어머님에게 효도를 했고, 한번 결심을 한 후에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을 했다. 그런 자세는 우리들에게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
사람이 마음먹으면 안 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기와 자신감만 지닌다면, 어떤 사람도 원하는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다니다. 오히려 힘든 여건을 이겨내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때, 사회에서 다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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