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사물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시인 으로 알려진 나희덕 시인은 등단 이후 지금까지 3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삶의 통증과 그늘을 문학이라는 품 안에 끌어안으며 살아왔다. 이 산문집을 통해 “누추한 삶의 기록을 되살리는 일이 조금이나마 우리가 잃어버린 불빛을 기억하는 일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전하고 있 다.
저 불빛들을 기억해
▣ Short Summary
이 책은 점, 선, 면이라는 3가지 주제로 나뉘어 있다. 하나의 작은 세계이자 존재의 내밀한 모습인 ‘점’, 이 점이 다른 점과 맞닿으며 탄생하는 ‘선’, 그리고 제각기 다양한 형태의 선들이 만나 비로소 완성되는 ‘면’. 나희덕 시인은 점, 선, 면이라는 세 가지 구도 속에서 존재와 관계, 그리고 세상의 축도를 섬세하고 온기 어린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 책을 통해 시인은 “이 누추한 삶의 기록을 되살리는 일이 작으나마 우리가 잃어버린 불빛을 기억하는 일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전하고 있다.
▣ 차례
개정판을 내며 / 작가의 말
1부 점에덴에서 무등까지 / 518호라는 방 / 구름과 수풀 / 말벌과 함께 살기 / 저 연둣빛처럼 / 식사를 소풍 으로 바꾼 저녁 / 무릉은 사라졌어도 / 건천乾川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 피아노가 있는 풍경 / 돌멩이가 묻고 있는 것 / 나는 너를 듣고 싶다 / 쓰러진 회화나무의 말 / 서른 살의 아침
2부 선저 불빛들을 기억해 / 가장자리 쪽으로 / 무위당无爲堂 생각 / 아름다운 농부에 대한 기억 / 산양의 젖을 남겨두는 마음 /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 타인의 냄새 / 당신을 알기 전에는 / 스스로 멈출 수있는 힘 / 뒤주와 굴뚝 / 이사, 집의 기억을 나누는 의식 / 수녀님, 어디 계세요? / 영혼의 감기 / 네밤 자면 집에 갈 수 있어요 / 피어나지 못한 목숨을 위하여 / 영랑의 나무와 다산의 나무 / 일기는 쓰고 있니?
3부 면풀 비린내에 대하여 / 구름 앞에서 부끄러웠다 / 슬픔의 이유를 알 권리 / 죽음과 죽어감 / 통증과 치유의 주체는 누구인가 / 삶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 그늘 속의 의자들 / 무엇을 줄일 수 있을까 / 플러그를 뽑는 즐거움 / 반달 모양의 칼과 길 / 어리석은 자가 산을 옮긴다 / 가지취 냄새나는 책을 찾아서 / 팔 권리와 사지 않을 권리 / 나무 열매와 다이아몬드 / 영양과 뱀잡이수리 / 폭설이 우리 곁을 지 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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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불빛들을 기억해
1부 점
건천(乾川)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만물에 대한 글썽임: 어릴 때 유난히 울음이 많았다. 슬프거나 아프지 않을 때에도 공연히 눈물을 글썽거리기 일쑤였다. 노을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눈가에 물기가 맺혔고, 심중의 말을 간곡하게 몇마디 꺼내려 해도 울먹임이 앞을 가로막았다. 너무 아름답거나 간절한 것을 보며 어린 나이에 왜 환희 보다 아련한 슬픔을 느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툭하면 터지던 울음이 내가 문학이라는 불꽃을 지피는 데 주된 연료였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감상적 낭만주의자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내 문학이 만물에 대한 글썽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부터 오히려 그 눈물을 말리고 식히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인가. 언제 부턴가 웬만한 일에는 울지 않게 되었다.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나 슬픔 앞에서도 울음은 속에서만 아우성칠 뿐 좀처럼 목을 밀고 올라오는 일이 없어졌다.
홍사용의 <나는 王이로소이다>는 다소 장황하고 과장된 시이기는 하지만, 삶이 얼마나 슬픔으로 점철된 것인가를 보여주며 그것을 잘 다스리라 이른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주면서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말한다. 그날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의든 타의든 마음의 물줄기를 감추 어야 하는 시기는 찾아오게 마련이다.
따라서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세상사에 무심해져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밖으로 흐르지 못함으로써 내면으로 더 깊이 숨어버린 물줄기 같은 게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저마다 마음 속에 건천(乾川)을 하나씩 품고 사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을 섣불리 표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의 슬픔에 덜 열중하게 될 때, 시인으로서는 다른 존재의 울음소리에 좀더 귀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소리들을 잘 듣기 위해서: 꽤 오래전 일이다. 1박 2일 일정으로 열리는 문학 행사에서 아름답고 화사한 한 여성 시인을 보았다. 먼발치에서 바라보았을 뿐 그녀와 인사를 제대로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밤에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술에 취한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몸부림쳤다. 나는 그녀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짙은 화장기 아래 숨어 있던 아픈 영혼을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를 간신히 숙소로 부축해 들어와 재우고 나서 나는 우두커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목을 밀고 올라왔다. 내 안의 마른 물줄기가 갑자기 격랑을 만났을 때처럼 수압이 높아지면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잠든 그녀의 등 뒤에서 나는 영문도 알 수 없는 울음을 쉽게 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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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낯선 사람의 아픈 삶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그녀의 슬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흔히 시인을 곡비(哭婢)에 비유하듯이, 그날의 경험이 내게는 우는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내 시의 팔할은 슬픔이나 연민의 공명(共鳴)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내 안의 슬픔이 다른 슬픔과 만나 서로 스미고 어루만질 때 흘러나오는 언어. 또는 존재와 존재가 서로 삐걱거리고 뒤척이며 내는 소리들. 시는 그런 다양한 울음소리를 받아 적은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시인이 가장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만물이 내는 울음소리의 섬세한 리듬과 결이 아닐까.
한 기자가 마더 테레사에게 “수녀님은 무어라고 기도하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고개 숙이고 “저는 듣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아해하며 기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을 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도 역시 그녀는 “그분도 들으십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기도는 고백과 발언의 양식임이 분명하지만 말하는 것 못지 않게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하나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면, 먼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잘 듣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특히 살아있는 존재들이 내는 울음소리를 나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 듣고 싶다. 사물과 자연을 통해 누군가 얘기하고 있는 것을, 아니 사물 자체가 말하거나 울고 있는 것을 잘 듣고 있으면 그 속에는 이미 시가 흐르고 있다.
그 소리들을 받아 적어서 한 편의 시로 완성하고 문예지에 발표하고 시집을 묶는 행위는 어찌 보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시인이 가장 충실하게 살아 있는 순간은 만물의 울음소리를 자신의 몸으로 온전하게 실어낼 수 있는 때다. 마음 속의 건천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죽은 것처럼 보이던 존재가 되살아나고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기 시작한다.
시는 마른 폭포 같은 것: 언젠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폭포를 찾아 강원도 산길을 올라간 적이 있다. 어느새 인가도 사라져버리고 가파른 산길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이 길로 올라가다 보면 폭포가 나온다고 했는데,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한 노인이 바위에 앉아 있기에 그 폭포에 대해 여쭈어보았다. 노인은 더 올라가도 폭포를볼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몇 해 전 물줄기가 시름시름 새기 시작해서 이제는 마른 절벽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이 숨어버렸다니! 나는 그 소리도 형체도 없는 폭포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지친 걸음을 재촉해 올라 갔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물이 거의 마르다시피 한 계곡에 홀연 서 있는 절벽을 보았다. 절벽에는 아직 풀포기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풀포기들은 마치 절벽 속으로 사라진 물줄기를 따라들어간 푸른 발자국들처럼 보였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난 오래도록 그 절벽 앞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더 어두운 곳에 닿아 측량할 수 없는 높이로 곤두서 있는 물소리를. 더 깊이 울게 된 물소리를.
시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란 그 마른 폭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정지용의 시론을 되새기게 된다.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란 일종의 생리를 압복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다. 그러나 시의 위의(威儀)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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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처럼, 눈물을 다스리는 힘이 없이 슬픔을 제대로 노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울음을 터뜨리려는 힘과 울음을 다스리려는 힘의 팽팽한 긴장, 겉으로는 서늘한 듯하면서 안으로는 뜨거운 슬픔의 샘에서 길어올린 진폭과 파동을 지닌 언어. 시의 위엄은 바로 그런 내면의 싸움을 통과한 언어에 의해 얻어질수 있는 것이리라.
여기 비추어볼 때 그동안 내가 써온 시는 얼마나 진정성을 지닐 수 있을까. 뒤돌아보면 수많은 슬픔의 물줄기가 실핏줄처럼 뻗은 채 도란거리고 있다. 저 젖은 길들을 과연 내 발로 걸어오기는 한 것일까.
바라건대, 저 실핏줄들이 모여 언젠가는 슬픔의 강물 하나 만들어낼 수 있기를. 넓게 흐를수록 더 깊이 숨어서 우는 건천이 되기를.
나는 너를 듣고 싶다 아지랑이와 먼지: 옛날에 들었던 얼음나라 이야기에서는 모든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허공에 얼어버 린다. 한번은 말얼음을 보자기에 싸서 이웃나라에 가던 사신이 그만 보자기를 땅에 떨어뜨려 얼음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얼음조각들을 간신히 주워들고 이웃나라에 도착한 일행은 그것을 뜨거운 물에 녹였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소식인즉 얼음나라의 잔치가 연기되었다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찾아갔다가 며칠 굶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이윽고 얼음나라에 봄이 찾아와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그 사이로 어떤 소리들이 들려왔다. 꼬르륵, 꼬르륵……. 그들의 배고픔조차 너무 늦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작가도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말에 관한 상징을 품고 있는 이 이야기 덕분에 봄이 오면 아지랑이가 피워올리는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햇빛을 받은 말들,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의 수런거림을.
『장자』 <소요유> 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지랑이와 먼지. 이는 천지간의 생물이 서로 입김으로 내뿜어 생기는 현상이다.” 굳이 이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먼지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은 단순히 과학적인 현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적 해명 이상의 독해를 필요로 한다. 아지랑이와 먼지는 일종의 언어이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입김을 내뿜어 표현하는, 허공에 투명하게 떠도는 그 말들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마음의 귀가 필요하다. 그리고 눈과 코와 혀와 입술, 손으로도 들어야 한다.
침묵을 뚫고 도란거리기 시작하는 그 소리들은 아지랑이처럼 따뜻하고 아련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듯 이따금 말의 해빙이 찾아오는 날. 굳게 닫혀 있던 입들이 열리고 말의 얼음조각들이 온기에 녹기 시작하면서 모락모락 무어라 말하기 시작한다.
부름켜와 나이테: 식물의 줄기나 뿌리의 단면을 보면, 수피와 목질부 사이에 부름켜가 있다. 그리고 굵은 나무에는 수십 개의 나이테가 있다. 그것은 세포분열의 흔적이지만, 좀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나무가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낸 역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말에도 부름켜나 나이테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말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성을 느낄 때, 그 말은 한층 깊게 들린다.
이른 봄날 오래된 묵정밭을 일구기 위해 흙 속에 삽을 깊이 밀어 넣었다. 땅을 일구는 행위는 우선 푸성귀나 열매를 얻기 위해서지만, 그 푸른 목숨들이 자라는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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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아난 새싹, 어제보다 넓어진 잎사귀, 하루하루 키가 자라고 굵어가는 줄기, 피어나는 꽃망울, 둥글게 맺히기 시작한 열매……. 시간이 지나간 자리마다 늘 새로운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그것은 아마도 흙이 풍부한 말의 지층을 품고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밭에 가서 나는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 있던 돌멩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 들로 이루어진 말의 지층”(<한 삽의 흙> 중에서)을 눈이 부신 듯 우두커니 바라보곤 한다. 한 삽의 흙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오글거리고 있는지……. 빛에 마악 깨어난 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경작은 충분하리라. 그렇게 발굴된 말은 늘 현재형이다.
열매가 떨어질 때: 사람들이 말할 때 그 억양이나 발음에 유심히 귀를 기울여보면, 저마다 모양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둥근 말, 각진 말, 길고 뾰족한 말, 짧고 뭉툭한 말, 우둘투둘한 말……. 귀로 듣는 말소리들이 마치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것처럼 다양한 모양과 질감으로 변형되곤 한다.
나무 열매가 떨어질 때도 비슷하다. 발화의 순간을 오래 기다려온 나무는 가을이 되면 유난히 수다스 러워진다. 가을밤 숲에서 열매가 떨어지거나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면 그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을 듯하다. “열매는 번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나무가 말을 하고 싶을 때를 위해 지어 졌다는 것을”(<저 숲에 누가 있다> 중에서) 알게 되면서부터 가을밤 내 발길은 자꾸 숲으로 간다.
신성한 숲을 지나며 어둠 저편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상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이 나무 위에 앉아서 던지고 있는 둥근 말을 받아 적으려고 했다. 그들에 비하면 현대의 시인들에게 남아 있는 숲은 그리 풍요롭지 못하다. 그러나 가상의 숲을 손가락으로 내달리면서도, 조화가 꽂혀 있는 돌계단을 걸어내려오면서도 여전히 머나먼 숲을 향해 두리번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울음소리를 따라: 말은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낯선 곳에 살게 될 경우 공기가 희박해지는 것처럼 고립감과 절박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고립감은 다른 소통으로 이끌기도 한다.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인간의 가청 범위를 넘어서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도 그런 때가 아닐까 싶다. 물리적 실재를 전혀 갖지 못한 환영이나 환청에 가까운 존재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늦가을 마른 덤불 속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다른 말’에 대한 갈망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왔으니, 그 울음소리를 따라 더 멀리 가리라. 들리지 않는, 그러나 사방에서 말을 걸어오는 존재 들이여. 나는 너를 듣고 싶다.
2부 선
타인의 냄새 여름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가장 힘든 것은 타인의 냄새다. 비라도 내린 뒤에는 땀과 비와 체취가 뒤섞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나기도 한다. 지하철이면 다른 칸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밀폐된 버스나 택시에서는 참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타인의 냄새가 그 존재 자체를 견딜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후각은 오감 중에서 가장 수동적인 감각이다. 눈은 감을 수 있고, 입은 다물 수 있고, 귀는 막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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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손은 뗄 수 있지만, 코는 차단하기가 어렵다. 코는 호흡과 후각을 함께 담당하기에 숨을 멈추지 않는 한 냄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이앤 애커먼이 쓴 『감각의 박물학』에 따르면, “인간은 매일 약 2만 3040회 호흡하고, 12입방미터의 공기를 마셨다가 내뱉는다. 한 번의 호흡에는 약 5초가 걸리고, 그때 냄새 분자들이 몸속으로 들어온 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후각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예민한 사람은 만 가지 이상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코는 그야말로 매순간 갖가지 냄새의 습격에 무방비로 노출 되어 있는 것이다.
냄새에 대한 반응 역시 가장 즉각적이다. 불쾌한 냄새가 나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거나 코를 틀어막고 ‘이게 무슨 냄새지?’ 하며 두리번거린다. 냄새는 어떤 소리도 없이 퍼져가는 침묵의 자극이자, 어떤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투명의 자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냄새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이 누군가에게는, 특히 그 냄새의 출처가 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모욕감을 줄 수 있다.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는 계층 간의 위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호로 등장한다. 박 사장 가족은 자신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외부인들에 대해 독특한 냄새를 감지한다. 결국 기택은 자신의 냄새에 대한 박 사장의 태도에 순간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장면을 본 후로 냄새와 계층의 관계를 자주 떠올 리게 된다. 타인의 냄새에 반응하는 태도도 신중해졌다.
며칠 전 비가 쏟아지는 날 택시를 탔는데 택시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무심코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라는 말이 흘러나왔지만, 얼른 입을 다물었다. 승객마다 이런 말을 던졌다면그 택시 기사는 어떤 기분이 들까 싶어서였다. 입도 창문도 열지 못하고 한 시간 가까이 냄새의 감옥에 앉아 있었던 것은 운전대를 잡은 사람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타인의 냄새를 견디는 일에도 어떤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사, 집의 기억을 나누는 의식 우리가 평생 깃들어 살게 될 집의 수는 얼마나 될까. 아주 드문 경우지만 태어난 집에서 일생을 마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 년이 멀다 하고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사람에게 집은 존재의 유일한 근거지이자 가두리일 것이고, 후자의 사람에게 집은 생활을 꾸리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처소에 가까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집은 거기 깃들어 사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말해준다. 실제로 어린아이에게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그 아이의 심리 상태가 잘 드러난다. 행복한 아이는 온기와 활기가 느껴지는 안정된 집을 그리지만, 불행한 아이는 비좁고 싸늘한 집을 그린다. 그만큼 집은 우리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삶의 중요한 터전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로 올수록 집의 고유한 가치나 의미는 상당히 희박해진 듯하다. 이사철만 되면 전세 대란을 겪어야 하고 치솟는 전세금에 맞추어 해마다 집을 찾아다녀야 하는 서민들에게는 집의 의미를 운운하는 것조차 배부른 노릇일지 모른다. 또한 바쁜 일상에 쫓겨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 한 끼 먹기도 힘든 세상이니 집은 단순히 잠자리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려워졌다. 부평초처럼 직장 따라, 전세금 싼동네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다닐 뿐이다.
나 역시 이사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했다. 결혼 후 열 번 넘게 이사를 했지만 낯선 천장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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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드는 일에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올여름의 이사는 좀 달랐다. 객지에서 일 년 만에 다시 집을 구해야 할 형편이라 막막했는데, 어떤 부부와의 만남이 집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보게 했다.
이사하기 며칠 전 나는 그 집에 살던 부부로부터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다.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끼리 관리비나 세금 고지서 등을 주고받는 일은 흔하지만, 이렇게 친필로 쓴 편지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지금부터 제가 쓸 말은 이 집에서 사시는 동안 편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잘 읽어보시고 이전에 살았던 가족을 따뜻하게 기억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이 땅의 집이 영원한 집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편지에는 각 방의 특징과 주의사항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베란다의 창문 틈새 중모기가 잘 들어오는 곳이 어디라든지, 다용도실의 배수구에서 나는 물소리가 처음엔 거슬리겠지만 나중엔 산중의 물소리처럼 느껴질 것이라든지, 어느 방은 문을 여닫을 때 특히 조심하라든지, 욕실에 문제가 생길 경우 어디로 연락하면 된다든지 하는 소소한 얘기들이었다.
그 부부도 급하게 이사를 하느라 경황이 없었을 텐데 이사올 사람을 위해 이렇게 친절한 편지를 쓸 수있다니……. 그 편지만으로도 나는 이미 낯선 집의 온기를 나누어가진 것 같았다. 집을 매개로 서로의 경험과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 참으로 오랜만에 누려보는 행복이었다. 그런 행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아마도 지상의 집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그 부부를 보면서 집을 사랑한다는 것과 집에 대한 집착을 갖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값 상승을 막겠다고 정부가 온갖 대책을 내놓지만, 집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그 어떤 대책도 투기꾼들에게는 헐거운 그물일 수밖에 없다. 집을 선택하고 소유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정치ㆍ경제ㆍ교육 전반과 관련되어 있다. 집이 소유와 투자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 세태를 대체 어디서부터 돌이킬 수 있을까. 한 마리의 번데기가 고치 속에 들어 있듯이, 한 마리의 풀벌레가 장미꽃 속에 잠들어 있듯이, 왜 인간은 한 채의 집에 충만하게 깃들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 부부의 편지는 집을 상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랑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덕분에 짜증 나는 이사도 이번에는 집의 기억을 나누는 소중한 의식처럼 여겨졌다.
3부 면
풀 비린내에 대하여 광주비엔날레에서 태국의 작가 수라시 쿠솔웡의 <감성적 기계>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은 65년형 폭스바겐의 엔진과 핸들, 타이어, 섀시 등을 완전히 제거하고 차체를 뒤집어 그네 침대로 설치한 것이다. 그네 옆에는 타이어를 비롯한 부속을 재활용해 만든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차체로 만들어진 그네 침대 속에서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타이어를 쌓아 만든 의자에 걸터앉아그 ‘감성적 기계’를 바라보았다. 흔히 ‘달리는 무기’라고 불리는 자동차가 완전히 해체됨으로써 새로운 용도로 거듭난 모습은 예술 고유의 전복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자동차에 대한 생각을 곱씹어보게 했 다.
그 무렵 나는 운전 초보 딱지도 떼지 않은 상태여서 자동차가 주는 편리와 불안을 아주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면허를 따놓고도 오 년이 넘도록 차를 살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데리고 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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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이사한 후로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으로 해결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엔 출퇴근 때나 장을 볼 게 많을 때만 차를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마음이 답답할 때 무작정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는 습관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차를 모는 일이 점차 잦아졌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를 어디로든 데려다줄 수 있는 밀폐된 공간에 그렇게 조금씩 길들여져갔다.
스웨덴의 생태주의자인 에민 텡스룀은 자동차라는 물건이 “자기 자신의 영토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의지와 이 영토 밖으로 움직일 필요성”을 동시에 충족시켜준다고 말한 바 있다. 현대인들이 자동차라는 ‘아 늑한 자궁’으로부터 잠시도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모순된 욕망을 자동차라는 공간이 해결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감성적 기계>처럼 굳이 자동차를 해체하지 않아도 자동차는 이미 충분히 ‘감성적 기계’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자동차에 대한 낯설고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서울에 갈 일이 생겼는데 주말이라 차표를 구할 수 없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나는 초보 주제에 식구들을 태우고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무사히 서울에 도착해서 일을 보고 다음날 밤에 광주로 돌아올 수는 있었다. 그런데 밤에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차창에 무언가 타닥타닥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처음 에는 그저 속도 때문에 모래 알갱이 같은 게 튀는 소리려니 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려는데 유리창은 물론이고 앞 범퍼에 푸르죽죽한 것들이 잔뜩 엉겨 있었다. 그것은 흙먼지가 아니라 수많은 풀벌레들이 달리는 차체에 부딪쳐 죽은 잔해였다. 마치 거대한 모터 주위에 두텁게 쌓여 있는 먼지뭉치처럼 말이다. 그것을 닦아내려다 나는 지난밤 엄청난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손발이 후들후들 떨려 도망치듯 세차장으로 갔다. 그러나 세차 기계의 물살에도 엉겨붙은 풀벌레들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 후로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풀 비린내는 몸서리치는 기억으로 남았고, 나는 손을 씻고 또 씻었다.
시속 100킬로미터 정도의 속력에 그렇게 많은 풀벌레가 짓이겨졌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지만, 이런 살상의 경험을 모든 운전자들이 초경처럼 겪었으리라는 사실이야말로 나에게는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인간에게는 편리하고 안락한 공간이 다른 생명을 해칠 수 있다는 자각이 그제야 찾아왔다.
옛날 티베트의 승려들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공기 중의 미생물을 죽이게 될까봐 얼굴에 일곱 겹의 천을 두르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생명을 아끼는 태도에 비하면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살생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차를 없앨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나는 자동 차에 대한 태도를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결국 차를 유지하되 사용을 최소화하고 의존도를 낮추는 선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감성적 기계’의 편안함에 길들여지려는 순간마다 그것이 풀 비린내뿐 아니라 피 비린내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자각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운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난 걷기 예찬자였고, 인공적인 공간보다는 자연 속에 머물기를 누구보다 좋아 했다. 그러나 차를 소유하고부터는 생태적인 어떤 발언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차를 소유하되 그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날 아침의 풀 비린내가 원죄 의식처럼 운전대를 잡은 내 손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나무 열매와 다이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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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아이는 창밖을 보며 손가락을 열심히 꼽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나무들을 차례로 세고 있는 것이었다. 나무를 셀 때는 ‘그루’라는 단위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전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 아이의 눈에는 사람과 나무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보일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이 무심코 쓰는 말을 잘 관찰해보면, 대상에 대해 분화되지 않은 의식에서 나온 표현들이 적지 않다. 내가 어쩌다 안전벨트 매는 것을 잊으면 아이는 “엄마, 그러다 경찰한테 들켜”라며 귀띔 해준다. ‘걸리다’라는 동사 대신 ‘들키다’라는 동사를 쓰는 걸 보면 아이는 법적인 규칙이나 공중도덕도 숨바꼭질 같은 놀이의 규칙처럼 여기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말은 문법적으로는 다소 문제(問 題)가 있지만, 자유로운 상상력과 실물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문재(文才)를 보여준다.
그럼 언제부터 그렇게 자유로운 상상력과 감각이 관념화되고 계량화되는 것일까. 아마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각종 ‘단위’와 ‘문법’을 익히면서부터일 것이다. 나아가 그 단위와 수량, 가격에 따라 대상의 가치를 가늠하는 데 익숙해지면서부터일 것이다. 결국 나무를 “한 그루, 두 그루…….”라고 똑바로 셀 수있을 때부터 아이의 마음 속에는 사람과 나무를 구분하는 척도가 생겨나게 되는 게 아닌지. 그것은 지식의 획득과 분화 과정이면서 동시에 전체성을 상실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이에게 ‘그루’라는 새로운 단위를 가르쳐주려다가 머뭇거린 것도 그래서였다.
단위나 도량형의 역사를 보면, 최초의 단위나 척도는 대체로 인간의 몸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한 되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성인 남자의 양손을 모아 담은 곡물량을 표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 이집트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큐빗(Cubit)’이라는 단위는 팔꿈치부터 가운뎃손가락 끝까 지의 팔길이에 해당한다. 그리스에서 길이를 잴 때 쓰던 ‘핑거(Finger)’ 역시 손가락을 단위로 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몸 자체가 가장 훌륭한 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도량형이 발달하고 미터법으로 통일되면서 만들어진 정교한 자가 차츰 인간의 몸을 대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게 되었다. 초밀도의 정확성을 향해 기계적 척도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몸이 지닌 실물적 감각은 퇴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시대를 위한’ 미터법이 많은 편리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표준화시키고 획일화시킨 면이 없지 않았 다.
그렇다고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미터법을 폐기하고 다시 원시적인 상태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도량형의 발달과 척도의 세분화가 우리의 의식과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되돌아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나무’를 ‘사람’으로 세던 아이의 엉뚱한 행동이 환기시키는 것도 바로 ‘단위’나 ‘문법’의 원초성이다. 완강하게 굳어가는 어른들의 기준을 즐겁게 흔들어보는 것, 그 반전이 일으킨 생각의 자장은 꽤 근원적일 수 있다.
다이아몬드의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가 ‘캐럿’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캐럿’이라는 단위가 원래 캐럽나무 열매 하나를 기준으로 다이아몬드의 무게를 잰 것에서 유래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무 열매와 보석. 돈으로 환산할 때 이 둘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캐럿’이란 단위를 처음 사용했던 사람들에게 상품성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한 캐럿의 다이아몬 드와 캐럽나무 열매 한 개가 비슷한 존재의 무게로 느껴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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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그 단위가 생겨난 아름다운 연원은 잊히고 재화로서의 다이아몬드만이 중요해진 세상이 되어버렸다. 나무와 사람을 구분해서 셀 수 있다는 것이, 또한 나무 열매와 보석이 지닌 상품적 차이를 알게 되는 것이 과연 진화라고만 볼 수 있을까. 창밖의 나무를 열심히 세고 있는 아이를 보며 문득 떠올린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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