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자신이 만난 조현병, 망상성 우울증, 조울증, 자기애성 성격장애, 치매, 아스퍼거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를 소개한다. 경미한 우울증처럼 건강한 사람도 간혹 겪는 증상이 아니라 환각이나 피해망상에 빠져 정신과 치료가 꼭 필요한 이들의 이야기를 주로 담았다. 자신이 병적인 상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통찰력을 ‘병식(病識)’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병식이 없는 셈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병식을 이해함으로써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괜찮은데 그들은 내가 아프다고 한다
▣ 저자 니시다 마사키
정신과 의사이자 의학박사. 와세다 대학 스포츠과학학술원 부교수. 도쿄 의과치과대학 의학부를 졸업 했다. 국립 신경정신의료 연구센터 병원, 하버드 대학 의학부 연구원, 스탠퍼드 대학 의학부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다. 일본 정신신경학회 전문의, 수면의료 인정의 등 다수의 자격을 보유하고 있다. 임상 정신의학 전반과 수면의학, 신체운동과 정신건강을 전문으로 한다. 국내에는 『하루 15분 피로를 푸는 습관』, 『노력의 배신』, 『불쾌한 사람들과 인간답게 일하는 법』, 『갑자기 폭발하지 않는 기술』 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 Short Summary
우리 주변에 ‘그 사람 정신병자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이상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갑자기 욱하는 마음에 흉기를 휘두르는가 하면, 온라인에서 논쟁을 벌이다가 실제로 사람을 살해하기도 한다. 정치판만 봐도 자신이 신봉하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끊임없이 자기 정당화를 하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
누군가를 함부로 ‘이상’하다고 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들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나는 정상이라고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는 괜찮은데 그들은 내가 아프다고 한다』는 그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이다.
명문대 출신으로 겉보기에는 평범한 20대 회사원 유스케는 자신이 ‘발달장애’인지 알고 싶어서 병원을 찾았다. 사회성이 떨어져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다는 그는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심리검사를 해봤 지만 결과는 애매하다. 독특한 사고와 행동 경향을 보이는 것은 분명했지만 직장이나 집에서 큰 문제는 없는 상황이다. 그에게는 과연 치료가 필요할까.
이 책은 정신과 의사도 정상과 이상을 판별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0이냐 100 이냐’로 명확하게 나눌 수가 없다. 유스케처럼 어떤 병이라고 진단을 내릴 정도는 아니지만, 병적인 부분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정상도 아닌 상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병 식’이 필요하다. 병식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책은 사회생활에 큰 문제를 겪는다면 자신이 이상한 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치료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병적인 사람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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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정상이라고 확신하는 이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자신이 이상한 줄 모르는 사람은 어쩌면 당신일지도 모른다.
▣ 차례
들어가며 정상과 이상의 경계선
제1장 지나친 피해망상 고향에서 들려온 불안한 소식 / 카레 냄새로 괴롭힌다고? / 변해버린 엄마와 친정집 / 드디어 정신과를 찾다 / 불면증 치료를 가장하다 / 또 하나의 병마
제2장 자신의 이상을 인식하는 병식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이상을 인식하는 병식 / 병식의 계보학 / 현대 정신의학은 병식을 경시한다 / 조현병에 대한 질병 의식 / 망상과 현실의 이중 세계
제3장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의 병적인 심리 잘나가는 국가공무원이 저지른 실수 / 사소한 실수가 동기가 된 자살 미수 / 구급 병동에서의 문답 / 원치 않는 정신과 입원 결정 / 우울증 3대 망상과 잃어버린 병식 / 건강한 척 위장하는 질환 은폐의 심리 / 항우울증 약 투약기
제4장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끼는 비정상적인 하이텐션 케이스 콘퍼런스에 등장한 새로운 환자 / 불편한 병동 생활 / 파란만장한 인생 / 갑작스러운 자살 의사 표명 / 자살은 이성적인 판단인가 / 약을 과감하게 끊다 / 간과하기 쉬운 양극성장애
제5장 왜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아픔을 느끼지 못할까 입원을 의뢰하다 / 갑작스러운 입원 연기 / 뒤늦은 첫 대면 / 의사에게 하는 설교 / 붕괴된 가족 / 타인을 향한 끝없는 비난 / 화장실의 담배꽁초 / 강제 퇴원 / 교묘한 자기 정당화로 피해자 되기
제6장 사람들을 위협하고 공격하는 치매도 있다?
외래 진료실에서의 대소동 1 / 외래 진료실에서의 대소동 2 / 일시적인 수습 / 뇌졸중? 탈수? / 지나치게 규칙적인 생활 / 둘만의 케이스 콘퍼런스 / 병원에서 일어난 두 번째 갈등 / 다른 병원으로의 이동 / 궁지에 몰린 노인들
제7장 악의 없이 이상한 사람 나는 발달장애일까? / 독특한 사고와 행동 경향 / 심리검사를 해봤지만 / 본인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 어디까지가 개성인가 / 현대사회와 아스퍼거적 특성
제8장 ‘죽고 싶다’는 말은 농담인가, 진담인가 당직 의사를 울리는 단골 전화 / 주치의의 고뇌 / 응급실에서의 안하무인격 태도 / 박복한 가정환경 / 부성의 결여와 모성의 과잉 / 예상치 못한 결말 / 극진한 의료 시스템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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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은데 그들은 내가 아프다고 한다
지나친 피해망상
고향에서 들려온 불안한 소식 쇼코는 고향에 있는 외삼촌에게서 몇 년 만에 전화를 받았다. 결혼해서 상경한 뒤 얼마간의 아이 얼굴도 비출 겸 명절마다 고향에 내려가곤 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고 남편이 박봉에 야근이 잦은 자회사로 인사이동을 하면서 친정을 찾는 일이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실은 말이야……. 누나, 아니 너희 엄마 일로 전화했어.”
쇼코 엄마는 올해 56세다. 2년 전 아빠가 뇌경색으로 돌아가시고 지금은 혼자가 되었다. 결혼 후에는 집에서 살림만 했는데 사교적인 성격이라 지역주민 활동으로 바지런히 참가하곤 했다. 아빠가 돌아가 시고 기운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동네 친구와 신사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전화로 들은 터라 ‘기운을 조금 되찾았나 보다’ 하고 한시름 놓은 후였다. 외삼촌은 난감해하며 엄마의 현재 상태를 전했다. “이웃 에서 항의가 들어왔어. 요전에 경찰까지 출동할 정도로 소란을 피웠거든.”
그 이야기를 들으니 두 달 전쯤 엄마가 전화로 이상한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웃에서 카레라이 스를 만드는 게 유행한다’는 것이다. “엄마 상태를 살피러 한번 내려오지 않을래?” “알았어요. 일단 전화라도 한번 해볼게요. 그리고 한동안 못 갔으니까 최대한 빨리 얼굴 보러 내려갈게요.”
변해버린 엄마와 친정집 친정집으로 향하는 고속열차 안에서 쇼코는 엄마의 젊은 시절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쾌활했던 엄마는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중을 나온 엄마는 반년 만이었는데, 쇼코 눈에는 꽤나 야윈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방과 부엌에 물건이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집 안을 둘러본 쇼코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번에 카레 얘기했었지? 점점 더 심해져서 진짜 미치겠어. 지금도 냄새 나지? 카레로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항상 몇 명이 모여서 소란을 피운다고. 게다가 나한테 ‘괴팍한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빨리 죽어버리라는 거 있지?” 하지만 카레 냄새 같은 전혀 나지 않았다. 쇼코는 더 이상 침착하게 대응할 수가 없어서 “무슨 카레 냄새가 난다고 그래?” 하고 쏘아대듯 말을 뱉는 바람에 말다툼이 시작되었 다. “이렇게 냄새가 심한데 무슨 소리야? 너도 다카시 외삼촌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거니?”
“진짜로 카레 냄새가 안 나니까 그렇지. 게다가 집 안 꼴은 또 이게 뭐야? 엄마답지 않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거야 매일같이 괴롭힘을 당하니까 그렇지. 밤에 잠도 못 자고, 장 보러 가기도 힘들 다고.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경찰서에도 갔다며?” “외삼촌이 그 얘기도 했어? 여기 경찰도 옆집 사람들하고 한 패야. 경찰도 믿을 게 못 되더라고.” 쇼코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자 상당한 무기력을 느꼈다. 엄마는 본인이 믿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쇼코를 포함해 타인이 하는 말은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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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었을 때 쇼코는 깜짝 놀랄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엄마가 라디오 스피커를 옆집으로 향하게 하고 음악을 트는 것이 아닌가. 스피커에서는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뭐 하는 거야?” “옆집에서 이렇게 야단법석을 떠는데,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밤에 밖을 향해 음악을 트는 건 정상이 아니다. 다행히 옆집은 불이 꺼져 있어서 시끄럽다고 쫓아올 걱정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소란을 피우는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고, 정원에서 우는 소리만 날 뿐이었 다.
드디어 정신과를 찾다 쇼코와 어머니가 나를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1년이나 지나서였다. 쇼코 어머니는 그 후로도 자신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부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면증이 점점 심해지는 바람에 견디다 못해 나에게 진료를 받으러 온 것이다.
쇼코 어머니는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인사를 했다. 웃음기 없는 무뚝뚝한 표정에서 의사에 대한 강한 불신이 엿보였다. 문진표를 들여다보니 수많은 항목 가운데 ‘불면’에만 체크 표시가 있을 뿐, ‘망상’이나 ‘환청’ 항목은 비어 있었다. 진찰을 하기 전에 나는 접수처에 쇼코가 미리 건넨, 담당 의사에게 보내는 쪽지를 받았다. 지금까지 어머니가 보인 이상 행동과 이에 대해 어머니에게 물을 때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주었으면 한다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불면증 치료를 가장하다 쇼코 어머니는 2주에 한 번 간격으로 반년 정도 통원을 하며 나를 만났다. 나이로 봤을 때 치매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심리검사 결과로 봐서는 건망증이나 실행기능(사고나 행동을 제어하는 뇌의 기능) 장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뇌 MRI에서도 알츠하이머형 치매에서 보이는 뇌 축소나 뇌혈관 장애를 의심할 수 있는 변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혈액검사와 뇌파검사 결과에는 이상 소견이 없었기 때문에 다소 발병 연령이 늦은 ‘조현병’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조현명 중에서도 쇼코 어머니는 망상이 강한 ‘망상형’에 속한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환청이나 망상을 억제하는 약, 항정신병 약이 소량이라도 필요한 상태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환자에게 이를 어떻게 전달해서 치료를 받게 할 것인가’다. 쇼코 어머니는 자신의 병적인 부분 이나 이상을 모를 뿐 아니라 ‘병식’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주변사람들이 이상한 것이고 본인은 정상이라고 믿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조현병입니다’라고 말하면 도리어 화를 내면서 통원을 거부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게 되면 치료를 받지 않은 채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가능 성이 높다.
“만일을 위해서 검사를 해봤는데, 운 좋게도 무라타(쇼코의 어머니) 씨는 치매는 아닙니다. 스트레스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네요. 역시 수면제가 필요할까요?” “그 부분이 판단하기 어려워요. 무라타 씨의 경우는 스트레스를 완화해주는 약이 나을 것 같습니다. 카레 소동으로 지금은 힘드시겠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져서 괴롭힘이 줄어들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약을 끊을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그래서 나는 소량의 항정신병 약을 처방했다. 내가 처방한 항정신병 약은 환청과 망상에 효과가 있고, 졸립거나 나른하지 않은 대신 불면에는 효과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낮 동안 활동량이 늘면 수면 습관도 틀림없이 개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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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으려면 두 번째, 세 번째 진료 때 약을 단계적으로 늘려서 적정량을 복용 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쇼코 어머니의 경우, 소량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무리하게 양을 늘렸다가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이대로 치료를 계속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항정신병 약은 초기 투여량 그대로 한 알을 유지하기로 했다.
마지막 진료 때 오랜만에 아주 조심스럽게 카레 소동을 돌아보게 했다. ‘병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카레 냄새가 나나요?” “가끔씩 나요. 하지만 전처럼 신경 쓰이진 않아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카레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네요.” “그 당시에는 너무 고통스럽고 화도 났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해요. 내 코가 잘못되었던 건가 싶을 때도 있는데, 카레가 지긋지긋했던 건 사실이에요.” 그녀는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이상을 인식하는 병식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이상을 인식하는 병식 정신과에는 ‘나는 정신병 따위에 걸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족이나 직장 상사, 경찰 등 제3자에게 반강제적으로 끌려오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겉으로는 본인의 의지로 병원에 왔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나는 이상하지 않다’,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의사의 질문에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이를 판단하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정신과와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 라도 남들 눈에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이 ‘나는 정신병이 아니다’, ‘나는 정상이다’라고 생각하면 웬만큼 주위에 피해를 주거나 스스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이상, 정신과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무시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식의 환청이나 ‘주위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조현병 환자는 이런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옆에서 아무리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말해봤자 그들이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고 괘씸하게 느껴질 뿐이다. 쇼코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이웃과 가족이야말로 자신들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골치 아픈 사람들인 것이다.
‘자신의 이상’을 인식하는 일. 100퍼센트 맞지 않지만 이에 가까운 뜻의 용어가 정신의학 분야에 존재 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병에 대한 인식, 즉 ‘자신의 병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를 의미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병식’은 정신질환이라는 ‘병’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정상’과 ‘이상’, ‘건강’과 ‘불건강’ 사이에 선을 긋기가 어려워졌다. 본인이 정상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 가운데 어떤 병이라고 진단을 내릴 정도는 아니지만, 병적인 부분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상’을 인식하는 ‘병식’에 대해 옛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세히 살펴보면 ‘병식’ 안에도 그 사람이 가지는 병적인 부분이 무엇인지, 그에 대해 심리적으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에 다양한 차이가 존재한다.
병식의 계보학 병식에 대해서 처음으로 논한 사람은 체코의 정신과 의사 아놀드 픽이다. 그는 ‘질병 의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는 말 그대로 질병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인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병을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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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이해하는 병식부터 ‘어쩌면 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불안 수준의 병식까지 그가 질병 의식을 여러 가지로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병식이라는 용어를 확립한 사람은 독일의 정신과 의사 카를 야스퍼스다. 야스퍼스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유명한데, 그는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 즉, 파시즘이라는 집단적 광기의 피해자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관심이 병식이라는 실존적인 문제로 향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야스퍼스는 픽과는 달리 병(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을 아래처럼 두 가지로 나눴다. ① 질병 의식(병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② 병식(병에 대한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판단을 내린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인플루 엔자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의사인 나도 자신감을 가지고 완벽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 또한 ‘병식’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인지기능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의료 수준은 야스퍼스가 활동하던 시대에 비해 훨씬 발달했다. 게다가 지금은 고도의 치료를 행하기 전에 반드시 ‘사전동의(의사가 환자에게 지료의 목적으로 내용을 충분히 설명한 다음 치료하는 일)’를 얻어야 한다. 따라서 환자에게 병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시키지 않으면 검사와 치료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현대 정신의학은 병식을 경시한다 21세기에는 정신병을 진단할 때 ‘조작적 진단 기준’을 이용한다. ‘조작적 진단 기준’이란 나쁘게 말하면 매뉴얼에 따라서 판에 박힌 듯이 진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역 앞에 있는 동네 정신과의원부터 미국의 고차원적 연구시설에 이르기까지 정신병을 진단하는 데 DSM(미국 정신의학과가 제시하는 진단 기준으로 현재는 그 최신판인 DSM-5를 쓴다)을 널리 사용한다.
이에 따르면 다음 다섯 항목 중 두 가지 이상에 해당되고, 각각의 항목이 한 달 이상 지속되면 조현명 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① 환청이 들리거나 환미를 느끼는 등 환각에 빠진다. ② 망상에 사로잡힌다.
③ 사고가 해체되고 대화를 해도 소통이 안 된다(엉뚱한 소리를 한다). ④ 두서없는 언동을 보이고 긴장한다(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갑자기 굳어버린다). ⑤ 음성 증상을 보인다(무표정하다, 둔감하고 모든 일에 나태해진다).
그렇다면 DSM에 야스퍼스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병식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을까? 애석하게도 병식의 유무는 어떤 병의 진단 기준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병식에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는 조현병조차 진단을 내릴 때는 병식의 유무를 따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진단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병식이 있느냐 없느냐를 흑과 백을 나누듯 정확하게 가리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자신의 이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렴풋이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어서 환자마다 개인차가 매우 크다. 진단 항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피해망상의 중증도와는 관련이 없다고는 하지만 ‘병식’을 어느 정도로 가지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병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려면 환자를 자극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다. 장기간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병식’이 없으면 ‘나는 정상이다’라고 생각해서 의사를 찾아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치료를 받지 못해 병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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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의 병적인 심리
잘나가는 국가공무원이 저지른 실수 “오늘 밤에도 답변 서류를 준비해야 되는군…….” 모 관청의 국가공무원인 게이이치로는 올해로 공무 원이 된 지 12년째다. 처음 공무원이 되었을 때는 ‘이 나라를 변화시킬 만한 일을 하겠다’, ‘몇 년 뒤에는 국회의원이 되겠다’라는 뜨거운 희망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의욕이 넘치던 그도 인원 삭감과 국정 혼란 등으로 어수선한 요즘에는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피로가 잦아졌다. 국회가 열리는 시즌에는 질문에 대한 답변서 작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예전만큼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 작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게이이치로가 담당하던 사업의 중간 보고서를 정리해야 해서 표 계산 프로그램을 이용해 경비 정산 작업을 하는 일이 잦은 시기였다. 보고서는 표 계산 프로그램에서 나온 숫자를 워드 프로그램에 복사해서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소한 실수 한 번 한 적이 없는 게이이치로가 이 복사 작업에서 엉뚱한 걸 붙여넣는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상사가 “숫자가 안 맞는 것 같은데?”라고 해서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자릿수가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숫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다시 정리하면 되지, 뭐.” 상사는 단순한 실수라며 수정을 지시했다. 사실 공적인 자리에서 자료를 배포하기 전, 확인 작업 중에 발견했기 때문에 업무상 치명적인 실수라고 할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실수는 고등학교와 입시 학원에 다니던 시절에도 한 적이 거의 없는 실수였다. 게다가 공무원이 되고 난 뒤로는 학생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긴장하며 일하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실수를 했다는 사실보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과 자신감이 크게 흔들린 것이 그에게는 더충격이었다.
사소한 실수가 동기가 된 자살 미수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뒤에도 그가 담당하는 일의 양은 계속해서 늘었고 피로도 쌓여만 갔다. 게이이 치로가 속한 부서의 업무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속사정도 있었지만, 국정이나 경제 상황, 여론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관청 탓만 할 수도 없었다. 최근 두 달 정도 그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생각을 비워야 한다는 건 알지만, 어렵사리 잠에 들어도 꿈에서 조차 업무 중에 숫자를 크게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정치가와 국민에게 매도당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온다. 그러다가 상사가 “너 같은 건 죽어버려야 해!”라고 화를 내는 장면에서 깜짝 놀라 잠이 깨곤 한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서는 “또 꿈이네…….” 하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현실과 구분 가지 않을 만큼 생생한 악몽이라서 휴식을 취해야 할 밤에 오히려 더 피곤했다.
어느 날, 먼 곳을 바라보니 구름을 뒤집어 쓴 산봉우리들이 게이이치로의 고민 따위 관심도 없다는 듯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는 다리의 끝자락, 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강변에 차를 세우고,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 차 안에 넣어둔 다음 미리 준비해두었던 유서를 신발 위에 올려놓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게이 이치로는 차가운 강물에 빠져 물을 먹으며 괴로워하다가 우연히 강변 바위 밭에서 낚시를 하던 낚시꾼 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울증 3대 망상과 잃어버린 병식 게이이치로의 진단명은 우울증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정신병(망상)을 동반한 우울증’인데, 망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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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라고 부르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망상성 우울증 환자는 망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나 가족의 설득에도 좀처럼 응하지 않고, 의료진의 집중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입원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병원에 근무하다 보면 게이이치로 같은 망상성 우울증 환자를 종종 만나게 된다.
‘3대 망상’이라고 불리는 ‘죄업 망상’, ‘빈곤 망상’, ‘건강 염려 망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울증 환자에게 빈번하게 나타나는 망상으로 알려져 왔다. ‘죄업 망상’은 게이이치로가 사로잡혀 있는 망상이라고 할수 있다. 그들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고 말하며 자신이 도덕적 또는 윤리적으로 무거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우울증이 유발하는 죄업 망상에서는 그 죄가 과거에 저지른,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사소한 잘못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과실이나 무능력 때문에 자신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곤궁해질 거라고 확신하는 ‘빈곤 망상’도 의료 현장에서 종종 접하게 된다. ‘파산했기 때문에 의료비를 지불할 수 없다’는 식으로 우기면서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그 전형적인 행태다. ‘건강 염려 망상’이란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다고 확신하는 망상이다. 어떤 이는 ‘나는 틀림없이 폐암이다’라고 주장하며 몇 번이나 검사를 하고, 폐암이 아니라는 결과를 보고도 납득하지 못해서 의사를 곤란하게 한다. 자신의 건강과 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망상 수준의 강한 확신에까지 이른 상태이다.
‘3대 망상’은 자신을 도덕적, 신체적, 경제적 면에서 부당하게 낮게 평가하는 망상이기 때문에 ‘미소 망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망상에 사로잡히면 자신이 느끼는 불안이나 공포뿐 아니라 주위에 대한 불신과 경계, 이해받지 못하는 데 대한 초조감과 분노가 늘어난다. 감정 상태가 이러니 자살 미수나 타해 사건을 일으킬 위험성이 높은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게이이치로는 ‘나는 무가치하다’ 라는 미소 망상에 빠져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인식할 수 있다면 물에 빠져서 죽으려는 행동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다.
건강한 척 위장하는 질환 은폐의 심리 동료나 친구뿐 아니라 아내조차 게이이치로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그수수께끼로 풀 열쇠는 망상성 우울증 환자가 쉽게 빠지는 부정적인 자기평가에 있다. 게이이치로가 고민한 치욕감이나 죄책감, 자책감, 후회 등 부정적인 자기평가는 이상하다고 인식하기가 어렵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평가나 어느 순간부터 부정적으로 변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감정에 잠식당해서 병적인 변화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소 망상’에서 ‘微小’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작게 뭉쳐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사실 미소 망상은 ‘과장’ 하는 측면도 있다. 게이이치로가 ‘뉴스에 나올 만큼 눈에 띄는 방법’을 노려서 자살을 기도한 것이 그 일례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부정적인 과장성’을 들 수 있다. 죄업 망상 환자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소리 높여 표현한다. 빈곤 망상 환자는 빚이나 파산을 보란 듯이 고뇌한다. 건강 염려 망상 환자는 의사가 난감해할 정도로 병에 대해 걱정한다. 이러한 과장성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생존에 대한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3대 망상이 생존에 필요한 ‘경제력’, ‘건강’,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생존 가치’를 주제로 한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의 망상에는 눈에 띄는 불안이 존재한다는 점이 확인된다.
‘질환 은폐’란 병을 감추고 건강한 척 가장하는 일을 말한다. 게이이치로의 이변을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한 것도 그가 ‘질환 은폐’를 잘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소 망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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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코 숨긴 이유는 그것이 상담하기 어려운 주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람들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다만 이는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무능이 알려지면 좌천되고 말거야’, ‘정신병이라는 사실을 알면 아내가 날 떠날지도 몰라’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항우울증 약 투약기 게이이치로는 입원 당시에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탈수 같은 신체적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입원하기 석 달 전부터 이미 체중이 빠지고 있는 상태라 영양 면에 대한 처치가 급선무 였다. 그는 수분과 영양분을 보충하는 링거는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말없이 맞았지만 질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인지 항우울증 약 복용은 예상했던 대로 ‘약은 필요 없다’, ‘쓸데없는 짓이다’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망상성 우울증은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개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살을 할 위험성도 크기 때문에 느긋하게 대처하면 사고가 날 수 있다. 따라서 초기 단계에서는 항우울증 약을 이용한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울증이 경증일 때는 정신요법이나 인지행동요법 등 약을 사용하지 않는 치료가 효과 적이지만, 강한 망상을 보이는 중증일 경우에는 이런 방법으로는 완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모든 우울 증은 약 없이도 치료된다’고 큰소리 치는 의사는 경증 환자만 대하고, 중증 환자는 만난 적이 없는 의사일 것이다.
우울증이라도 이처럼 망상에 사로잡히고 병식이 없으면 ‘질환 은폐’ 경향까지 있는 환자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자살할 위험이 높다. 게이이치로의 경우에는 다행히 항우울증 약을 링거로 투여하는 치료가 잘 들었고 부작용도 없었지만 약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부작용이 생기는 등 약물 투여가 어려워진 경우에는 다른 치료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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