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병 엄마를 8년간 돌보고, 그 엄마를 떠나보낸 아들의 애틋한 마음을 쓴 에세이다. 20살부터 28살까지 매일 엄마를 간호한 아들의 20대의 추억은 온전히 엄마뿐이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때로는 감사하며, 갈등하고 주저앉을 때도 있지만, 결국은 가족의 힘으로 화해하고 사랑을 확인한다. 읽는 이를 뭉클하게 하는 진솔한 문장은 그 어떤 화려한 문장보다 힘이 세다.
나대지마라 슬픔아
▣ Short Summary
루게릭병 엄마를 8년간 돌보고, 그 엄마를 떠나보낸 아들의 애틋한 마음을 쓴 에세이다. 루게릭병은 서서히 근육이 약해지는 병으로,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시작해서 발, 혀, 목 결국은 호흡까지 다다라 결국엔 질식사로 생을 마감하는 병이다. 2년밖에 못 산다던 엄마는 8년을 버티고 57세의 삶을 마감했다.
20살부터 28살까지 매일 엄마를 간호한 아들의 20대의 추억은 온전히 엄마뿐이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때로는 감사하며, 갈등하고 주저앉을 때도 있지만, 결국은 가족의 힘으로 화해하고 사랑을 확인 한다. 읽는 이를 뭉클하게 하는 진솔한 문장은 그 어떤 화려한 문장보다 힘이 세다.
▣ 차례
제1장 믿고 싶다 듣고 싶지 않을 이야기 / 삼킬 수 없는 응어리 / 살아갈 수 있을까 / 보이지 않는 소리
제2장 짧아지는 날들 640일 / 우리 버텨 봐요 / 모든 순간을 함께 해 / 뒤집어진 우산 / 별도 없는 밤 / 미안해요, 세상이 그렇네요 / 물고기 병원 / 봄날은 간다
제3장 가족 꿈처럼 괜찮아질까 / 요란한 밤이 찾아왔어요 / 잘한 것 같아 / 남겨진 기억들
제4장 엄마의 이름으로 나를 알아봐 줘 / 받아들일 수 없는 것 / 나만 몰랐던 세상 / 피보다 진한 어느 연못 / 고생 끝에 보는 미소란
제5장 떠나지 못한 여행 누구보다 가슴 아플 그대에게 / 4월 16일 / 8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다 / 그리고 너는 내 안에 살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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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지마라 슬픔아
믿고 싶다
삼킬 수 없는 응어리 다음 날,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고생해서 들어간 학생회를 그만뒀다. 곧 있으면 매니저로 승진시켜 준다던 유명 빵집 일도 그만두기로 했다. 양손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엄마는 집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집안 살림을 시작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을 내가 언제 했던가. 생각해보니 매년 딱 2번씩 했었다. 5월 8일 어버 이날과 8월 1일 엄마의 생일날. 이제 이걸 매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간 귀찮을 수가 없다. 학생회 실이나 빵집에서 일할 때는 이런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대가가 돌아왔다. 돈과 명예라는 보이는 결정체로. 그에 반해 집안일은 그러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일 중 가장 하기 싫었던 건 ‘화장실 휴지통 비우기’였다. 평생을 아무 생각 없이 휴지를 버렸었다.
‘이렇게 더러운 걸 어떻게 매번 치우지?’ 엄마는 했다. 항상. 단 한 번의 불평 없이. 내가 집안일을 하면서 엄마가 가장 기뻐했던 순간도 화장실 휴지통이 비워졌을 때다. 그때 집안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대가를 얻었다. 그건 학생회나 빵집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을 보이지 않는 비결정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외출은 더욱 잦아졌고 집에는 흰 종이들이 산처럼 쌓여갔다. 아무도 없을 때몰래 봤다. 수많은 병원에서 받은 진단 결과였다. 병명 난에는 모르거나 알 수 없다는 내용들뿐이었다.
병을 알아야 어떻게 치료를 하든 할 텐데. 엄마는 누구에게도 같이 가자고 말하지 못한 채 홀로 병을 찾아다녔다. 불안한 마음을 곱씹으며. 아무도 엄마의 곁에 없을 때 두려움과 외로움만이 엄마의 곁을 지켜줬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엄마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안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병이 있다고. 병명은 ‘진동 증후군’인 거 같다고. 미싱 일을 할 때 진동으로 생긴 직업병일 수 있다고. 하지만, 잘하면, 아니 어쩌면 희귀병인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는 난생 처음 듣는 병일 수도 있다고 했다.
만약 후자의 병이라면 2년 안에 죽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마치 형장에서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높이 들어 달라는 잔 다르크처럼. 엄마는 아빠에게 연약한 여자이지만 나에게는 강인한 엄마로 보이고 싶어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병명을 한양대 병원에서 알려줬다. ‘진동 증후군’이 아니었다. 살면서 두 번째로 듣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었다. 이 병의 또 다른 이름은 ‘루게릭병’이다. 엄마가 루게릭병에 걸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슬프거나 괴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가 나에게 보여준 담담했던 모습처럼 나 또한 덤덤했다.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마음으로는 거부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신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변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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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지는 날들
별도 없는 밤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점장님이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더니 매니저 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아침에만 일할 거라서 안 된다고 했다. 오후부터 내가 엄마를 병간호하기로 했다.
10만 명 당 1명꼴로 걸리는 루게릭병은 불치병이다. 치료제도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몸에 좋다는 건 하나씩 다 먹여보기로 했다. 양파즙부터 시작해서 처음 들어보는 철갑상어 엑기스가 일주일마다 택배로 왔다. 우리집 창고가 각종 약들로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산삼 같은 약초들이 실내 조경처럼 즐비해 있었다.
어느 날 아빠는 해맑은 미소로 집에 왔다. 오른손에는 검정 비닐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그 비닐봉투에는 작은 하얀색 약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창고에 쌓인 약들이 넘쳐나고 방에마저 축적되는 상황에 저애기 손바닥 만한 약통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난감했다. 그 약은 또 어디서 사온 거예요? 아빠는 아는 친구한테 산 거라고 했다. 얼만데요? 20만원. 뭐라고? 말도 안 된다. 저딴 게 20만 원일 리가 없었다.
일단은 알았다고 넘겼다. 그날 밤 그 약에 대해 조사했다. 예상은 했지만 2만원도 안 되는 싸구려 영양제였다. 아빠의 친구는 다단계 판매원이었다.
화가 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빠에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절박해서 그런 거니까. 절망의 늪에 빠져서 사기를 당하는 줄 알면서도 혹시나 사기 당한 약일지라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 가시 달린 밧줄을 잡은 거니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성이 나서 머리에 뿔이 자랄 것만 같았다. 아빠라면 화 때문에 자란 내 머리의 뿔마저 녹용일 수 있다고 말할 거다.
더는 안 된다. 아빠에게 말해야 했다. 내 안에 알 수 없는 언어로 메아리치는 굉음을 해석해서 전하기로 했다. 엄마가 그 약을 먹을 때마다 그 말이 토악질처럼 나올 거 같았다. 억지로 참으며 그 말을 곱씹었다. 한 달이 지나서야 약통이 비워졌다. 마침내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친구에게 산 약은 아쉽지만 효과가 없어요. 다른 약을 알아봐야겠어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당연한 거였지만 약으로는 효과가 없었다. 이번에 아빠는 물리적인 치료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호텔에 딸려 있는 조그만한 병원에 갔다.
겉은 말짱해 보이는 의사가 전기 치료를 해보겠다고 했다. 병실로 가자 침대 하나와 이상하게 생긴 기계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그 이상한 기계로 전기 치료를 할 거라고 했다. 생긴 건 오래된 인두 다리미같이 생겼다. 제조회사를 찾아보니 의료 관련 회사도 아니었다. 의사에게 이게 무슨 기계냐고 물었다. 그 의사는 한국에서 대단하신 분이 이번에 한 번 만들어본 거라고, 환자분이 최초로 임상 실험 대상자가 된 거라며 휘황찬란하게 말했다.
이딴 임상 실험 같지도 않은 걸 돈을 바쳐 가며 받게 될 줄이야. 화가 잔뜩 났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의 희망에 찬 얼굴을 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그 치료 같지도 않은 치료를 받았다. 나 역시 가끔은 속으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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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으로 물리적으로도 되지 않았다. 사실 방법이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사실이다. 루게릭 병은 불치병이라는 걸. 하지만 아빠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종교였다. 주님만이 엄마를 치료해줄 거라고 믿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전주 끝자락에서 치료의 은사를 찾았다. 아빠는 부탁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내 아내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지만 그 은사는 거절했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그 후로 아빠는 쉬는 날만 되면 전주까지 내려가 은사에게 사정사정하며 부탁했다. 그래도 그 은사는 거절했다. 아빠는 가족 몰래 비상금을 털어 전주로 내려갔다. 마침내 만나기로 했다. 비상금이 사라진걸 누나가 알게 되고 집안에 난리가 났다. 아빠는 한 번만 믿어보라고 거듭 강조했다. 화난 누나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빠한테 어떻게 치료가 되냐고 물었다. 아빠는 기도로 치료가 된다고 했다. 나는 믿지 않았다. 그래도 기도만 하는 거니 엄마에게 잘됐다고 했다.
치료의 은사에게 기도를 받으러 가는 날, 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때문에 가지 못했다. 일할 사람이 없어 그날만 저녁 파트까지 일했다. 몸에 피로가 가득 쌓였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터덜터덜 걷는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집에 와보니 모두가 자고 있었다. 조용히 안방으로 갔다. 오랜만에 밖에 나갔다 온 엄마에게 고생했다고 손을 잡으며 말하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엄마의 손을 찾았다.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마루에 켜둔 불빛이 은은하게 안방을 밝히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놀라서 불을 켰다. 왜 엄마의 손을 못 찾았는지 그 이유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엄마의 손이 검은색이 되어 있었다. 마치 반타 블랙으로 염색한 것처럼. 양손이 숨을 못 쉴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아빠를 깨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소란스 러웠는지 누나가 자기 방에서 뛰쳐나와 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줬다.
그 치료의 은사를 받았다는 인간이 이렇게 만들었다. 기도를 하면서 엄마의 양손을 사정없이 때렸다.
엄마는 움직이지 못하는 손으로 가만히 맞기만 했다. 아빠와 누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화를 전부 토해냈다. 그러다 눈물이 났다. 속상해서 미칠 거 같았다. 어쩌다가 당하기만 하는 인생이 되어버렸는지. 당해도 몸부 림조차 칠 수 없게 됐는지.
이렇게 당해도 우린 또 다시 당하기 위해 없는 치료제를 찾아다닌다는 걸 안다. 멈출 수가 없다. 엄마가 낫거나 죽을 때까지. 계속 당하기만 해야 한다.
오늘도 병원에 다녀왔다. 돈이 셀 수 없이 빠져나간다. 내가 병원을 안 가고 치료를 안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밤새 생각해보니 남편이 가여워서 그만 할 수가 없었다. 내 자식들이 불쌍하지만 앞으로 살 날이 많으니 행복한 날들이 많겠지? 남편은 홀로 생활하면 나를 그리워하며 얼마나 외로워할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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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요란한 밤이 찾아왔어요 우리 가족에게 있어 가장 혹독한 시기가 있었다. 평상시라면 다혈질 누나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면 부모님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그 무렵에는 누나에게 맞받아쳤다. 각진 단어를 골라 서로에게 상처 주기 바빴다. 누나도 아빠도 그리고 엄마도 다들 지쳐 있었다. 거의 매일 싸웠던 거 같다. 아빠와 누나는 목이 쉬고 엄마는 그 약해진 치악력으로 자신의 어금니를 부러뜨렸다. 나도 성이 났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집안의 막내고 화가 나도 잠을 자거나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면 금방 화가 풀렸다. 더군다나 나까지 그러면 누가 엄마를 돌볼까.
아침이 되면 누나가 옆동네까지 들릴 만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생활 패턴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누나가 잠수를 타면 밤을 새우고 이제 막 잠이 들려는 나에게 자동적으로 인수인계가 된다. 이불을 치우며 혼잣말을 한다. 그럼 그렇지. 오늘은 왜 안 싸우나 했다. 마루로 나와 덩그러니 소파에 누워 있는 엄마를 보면서 잘 잔 척 모션을 취하고 엄마를 간호했다. 엄마가 병에 걸리기 전에는 누나보다 더한 다혈질 성격이었다. 그 화를 가만히 누워서 해결해야 하니 미치지 않고선 감당하기 어려울 거 같았다. 그래서 내가 옆에서 재롱을 떨면서 엄마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사실 나도 많이 지쳐 있었다. 다들 화가 나면 자신이 화가 났다는 걸 표시라도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항상 참아야 했다. 하루에 3시간을 자거나 아예 잠을 포기하고 그 다음 날에 3시간을 잤다. 그만들 좀 싸웠으면 싶었지만 이 시기에 가족들의 표정을 봤을 때 난 군말 없이 그들의 싸움에 내 등이 터지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한 번은 새벽에 엄마를 소파에 앉히는데 빈혈 증세가 일어났다. 잠을 너무 못 자서 그랬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잠도 깰 겸 침대에 거칠게 몸을 박았다.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그런데 그 한 번의 눈 깜빡임에 피로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됐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일어나 시계를 봤다. 2시간이 지나 있었다.
팔자에도 없는 잠을 자버렸다. 아, 엄마는 한 시간밖에 못 앉아 있는데. 엄마를 봤다. 앉은 상태로 숨쉬기 어렵게 고개가 푹 숙여져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의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코가 막혀 입으로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엄마에게 정말 미안하 다며 사과했다. 잘 생각이 정말 없었는데. 하지만 내게 기회가 있다면 푹 자고 싶었다.
이 시기는 무기한이었다. 일주일 연속으로 잠수를 탄 누나를 대신해 밤낮으로 엄마를 간호하고 있었다.
물보다 커피를 더 마시고 내 책상엔 자양강장제 빈병들이 쌓이다 못해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엄마는 줄기세포를 맞으러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병원에 가는 인원은 총 세사람이었고 그날은 아빠와 누나가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출발하기 직전 아빠와 누나의 언성이 높아졌다. 정말 사소하게 아빠의 말투가 거칠었다며 누나가 계속 따졌다. 당사자의 심정은 모르지만내 입장에선 그냥 싸울 꼬투리를 잡는 거 같았다.
나는 이제 병원 가야 되니까 그만 싸우라고 했다. 그러자 누나는 소리를 질렀다. 가기 싫다고. 내가 왜가야 하냐고. 내 친구들은 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난 가기 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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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니까 네가 가라고. 그 말에 여태까지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해버렸다.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목이 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병원 약속은 취소됐다. 누나와 아빠는 각자가 정한 휴식처로 집을 나가버렸다. 목이 아파 물 한잔을 마셨다. 물 넘김에 따라 목의 열이 식었다. 엄마에게 화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웃으며 잘했다고 했다. 잘했다고? 왜? 대체 내가 화를 낸 게 뭐가 잘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내가 화를 낸 날이 그 시기의 최후의 날이 되었다. 진시황제가 영생을 꿈꾼 것처럼 영원할 줄 알았는데. 누나와 아빠는 한동안 싸우지 않았다. 평생 이렇게 다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시기도 잠시겠지. 기대하지 말자. 희망은 절망의 지름길이니까.
내 딸은 너무 게으르다. 거의 하루 종일 잔다. 나 밥 먹는 건 하나라도 더 많이 먹이려고 하는데 다른건 제때 하는 게 없다. 그래도 잘해 나가고 있다.
잘한 것 같아 엄마가 처음 내게 말했을 때가 생각난다. 루게릭병은 2년 안에 죽는 병이라고. 하지만 그건 평균적인 계산법이다. 엄마는 5년째 살아 있다. 매년 엄마의 생일이 될 때마다 감사함을 느꼈다. 올해도 엄마의 생일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엄마가 믿는 신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생각해보니 엄마의 생일날 특별한 선물을 해준 게 없었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해주거나 옷을 사주거나 편지를 써줬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뭐 원하는 거 있어? 말해봐. 내가 엄마의 소원을 이뤄 줄게. 엄마는 내 말을 기다렸는지 바로 대답했다. 비행기. 까지만 말하고 울었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했다. 일단 엄마를 진정시키고 다시 물었다. 엄마는 울먹이며 다시 대답했다. 비행기에서 먹는 밥이 먹고 싶다고. 엄마, 기내식 말하는 거야? 뜬금없이 왜 기내식이 먹고 싶었을까. 평생 비행기 한번 타본 적 없었는데. 아니다. 있었다. 엄마가 우리 가족들 중 최초로 해외에 나갔던 적이.
내가 군대에 있던 시절, 부모님은 병을 초기에 잡으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때 엄마는 양손에 힘이 없었다. 그러다 한국에서 손가락 다섯 개 안에 들어가는 교회의 목사를 만났다. 그 목사는 고령에다 몸에 질환이 있었는데 중국에서 줄기세포를 맞고 나았다고 했다.
사실 그건 불법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계획을 진행했다. 그런데 꼴랑 주사 세 번 맞는데 천만 원이 넘었다. 부담스러운 금액이었지만 엄마를 위해서 상관없이 돈을 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가 혼자서 거길 갈 수 없어서 가이드도 붙였다. 그렇게 엄마는 중국을 세 번이나 갔다 왔다. 그때 비행기에서 무료로 기내식을 줬는데 엄마는 움직이지 못하는 손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서 옆의 가이드가 먹는 걸 구경만 했다. 남들은 다 먹고 있는데 엄마 혼자 침을 모아 삼키고 있었다.
기내식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비행기를 타본 사람이 없어 기내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다. 은박지로 이뤄진 그릇에 담긴 덮밥이 보였다. 바로 은박지로 그릇을 만들 었다. 쓰레기통에서 갓 꺼낸 것 같이 생기게 만들어 버렸다. 냉동고에 있던 돼지고기로 급하게 요리를 했다. 음식은 정말 맛없게 보였다.
은박지 그릇에 밥을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 요리를 올렸다. 꼬라지가 정말 형편없었다. 엄마한테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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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며 이렇게밖에 못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는 정말 고맙다면서 바로 우리집 기내식을 먹었다.
물론 감동적이었지만 맛은 보장이 안 돼서 기내식은 남겨졌다.
엄마는 하루종일 드라마를 봤다. 아침 드라마부터 저녁 드라마까지 방영하는 모든 걸 챙겨봤다. 하지만 24시간 집에만 있는 엄마에게는 짧은 영상에 불과했다. 더 이상 볼 게 없으면 봤던 드라마를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뭐 보고 싶은 드라마 있어? 엄마가 대답했다. 뿌리, 라고. 뿌리 깊은 나무? 엄마는 아니라고 했다. 내가 아는 드라마는 그것뿐인데. 혹시나 다른 ‘뿌리’라는 드라마가 있나 찾아봤다. 없었다. 다만 1977년 작 미국 드라마뿐이었다. 엄마, 제목이 틀린 거 같은데 미국 드라마 말곤 없어. 그런데 엄마가 이 드라마가 맞다고 했다. 1961년생인 엄마는 어릴 적에 봤던 드라 마를 찾고 있었다.
드라마는 소설 원작으로 1767년 감비아에서 납치되어 미국에 노예로 끌려온 쿤타 킨테와 그의 후손들의 삶과 고난을 그린 이야기였다. 텔레비전 안에서 흑인들은 자유를 갈망했다. 엄마가 집에서 자유의 몸을 찾는 것처럼.
파랑색이 보고 싶어 바다에 갔다. 휠체어를 타고 바닷길을 걸었다. 집의 먼지 냄새를 맡다가 바다 냄새를 맡고 숨이 탁 트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목이 막혀 죽을 뻔 했다. 이젠 숨쉬기도 벅차다.
떠나지 못한 여행
그리고 너는 내 안에 살아간다 호주에서 좋은 경치만 보면 눈물이 났다. 맛있는 걸 먹어도, 좋은 사람을 만나도, 눈물이 멈출 생각을안 했다. 이런 세상을 보지 못한 채 떠난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내가 항상 울자 외국인 친구가 내게 말했다. 걱정 말라고. 엄마의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네 마음 안에서 살아간다고.
삶의 막바지에 이르자 엄마는 수시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앰뷸런스에 실려갔을 때의사가 우리에게 질문을 했었다. 환자가 지금 어려운 상태인데 약물 주입을 할지 말지 선택하라고. 약물을 주입하면 살 수도 있지만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으로 있게 될 확률이 크다고.
순간 엄마의 유언이 떠올랐다. 엄마가 위급한 상황에 놓이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라는 말. 평생 이날이 오지 않길 빌었는데 운명을 거스를 순 없었다. 엄마를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삶은 지옥 이었다. 내가 원한다고 엄마를 다시 지옥으로 부를 순 없었다. 그럼 엄마를 죽게 내버려둬야 할까? 차마 못하겠다.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아빠가 말했다. 살려 달라고. 아직까지도 아빠에게 엄마의 유언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엄마의 유언을 알게 되면 아빠는 아내의 유언조차 들어주지 못한 남편이 된다. 응급실에서 아내를 살려 달라고 했던 말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선택조차 못했던 나처럼.
우리는 엄마에게 최선을 다했다. 불타는 20대 청춘을 다 바쳤다. 엄마가 30~40대 젊음을 우리에게 바친 것처럼. 하지만 여전히 후회가 남는다. 조금 더 잘할걸.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걸. 엄마에게 잘해준 기억을 지운 채 아쉬운 마음만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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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인생은 엄마를 추억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엄마의 어릴 적 꿈이었던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엄마가 좋아하는 자연 경관을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그리고 마음속에 남기기로 했다. 가끔 고민거리가 생길 때가 있다. 그때마다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쉽게 답이 나왔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항상 지켜 봐주길. 개떡은 조금씩만 먹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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