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에서부터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봤을 법하지만 막상 대답하기는 막막했던 질문들에 대해 조규만 주교가 성경을 비롯하여 신학, 과학, 역사, 정치 등 다양한 근거를 바탕으로 마련한 답안지이다. 조규만 주교 특유의 통찰력과 유연한 시각을 깊이 있는 해석으로 담아낸 이 책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신앙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기회를,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신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해결할 기회를 줄 것이다. 또한 신과 천국을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선사함으로써 영적 성장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한 길잡이가 되어 줄것이다.
오래된 대답
▣ Short Summary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천주교에 건넸던 스물네 가지 질문이 있다. 앞서 차동엽 신부가 이에 답했고, 그 뒤를 이어 유도그룹의 유영희 회장, 철학자 김용규 옹이 답했다. 그들의 대답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던 조규만 주교가 이제 오랜 시간 준비했던 자신의 대답을 내놓았다.
이 책은 많은 교회 문헌과 성경 구절을 비롯하여 신학, 과학, 역사, 정치 등을 넘나드는 다양한 근거를 바탕으로 조규만 주교가 마련한 답안지이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에서부터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봤을 법하지만 막상 대답하기는 막막했던 질문에 답을 시도했다. 조규만 주교 특유의 시대를 읽는 통찰력과 유연한 시각을 깊이 있는 해석으로 담아냈다.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인간이 죽은 후에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등등 이 책에 담긴 스물네 가지 질문 중 어느 하나 낯선 것이 없다. 누구나 막연하게나마 한 번쯤 떠올 렸을 의문이며, 가톨릭 신자라면 주변 사람에게서 한 번쯤 들어 보았을 질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신자 라고 해도 막상 답을 하려고 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깊은 고뇌가 필요한 질문이며, 신과 인간에 대한 매우 근원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조규만 주교는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차분하면서도 심도 있게 질문의 본질에 다가선다. 자칫 자신의 논리에 빠져 근거가 부족한 주장을 펼칠 가능성이 있는 질문임에도 평정을 유지하면서 다방면의 시각을 살피고 결국 하나의 현답을 이끌어 낸다. 저자는 우리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문제가 아니라, 시력에 의존하려는 우리의 태도 때문이며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는 그리스도인의 악행 때문 임을 깨우쳐 준다. 또한 고통이 없는 세상은 사람의 세상이 아니며, 고통이 있기에 사랑도 존재함을 알려 준다. 악인이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며, 자유로울 때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함을 알려 준다. 모든 대답에서 어려운 설명은 배제하고 친절한 해석으로 독자를 배려했다. 저자의 애정 어린 대답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희망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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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차례
질문 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질문 2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질문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질문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질문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질문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온갖 흉악범들
질문 7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질문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질문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질문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질문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1) 기독교(천주교, 개신교), 2) 유대교, 3) 불교, 4) 회교(마호메트교), 5) 유교, 6) 도교
질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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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 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질문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질문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질문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질문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질문 17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 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 국이 되지 못하는가?
질문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질문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폴란드 등 동구 제국, 니카라과 등
질문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질문 21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질문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질문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질문 24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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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대답
◆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가톨릭 신앙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더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 하느님은 분명 인간보다 훨씬 큰 능력을 지닌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광활함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비록돈, 컴퓨터, 로봇, 건물, 우주선 등을 만들어냈지만 산천초목과 더불어 해와 달과 많은 별 등 우주 만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 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지닌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 우주 안에 인간보다 훨씬 지적이고, 인간의 과학보다 더 과학적이며, 인간의 심미적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답고, 인간의 선함 보다 훨씬 더 선한 어떤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는 137억 년 전 소위 ‘빅뱅’ 사건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미국 항공우주국이 우주의 팽창 속도로 따져보니 우주의 나이는 137억 년(오차 범위 2억년)이라고 결론 내렸다고 합니다. 우주는 빛의 속도로 위로, 아래로, 옆으로, 뒤로, 사방으로 펼쳐져 나가 우주 공간의 지름이 274억광년의 거리로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우주 공간의 지름이 274억 광년의 거리라면 빛이 한 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졌으니 반지름은 137억 광년이 될 터이고, 이것이 우주의 나이가 되는 셈입니다. 더욱이 다중 우주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우주가 여럿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간은 더욱 넓어집니다.
최근 천문학자 이성형의 『빅뱅 우주론 강의』에 따르면, 빅뱅으로 이 우주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폭발 하는 속도가 적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빠르면 열린 우주가 되고, 너무 느리면 팽창하다가 다시 축소되어 우주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정한 속도가 나타나려면 밀도가 정밀 해야 한다고 합니다. 1입방센티미터가 4472해 2591경 7218조 5074억 0128만 4016그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1그램만 더 밀도가 짙어도, 또 1그램만 더 밀도가 옅어도 우주가 형성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정밀함이란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가끔 ‘하느님이 쓰신 큰 글씨’인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어둠 속에 별들이 희미하게 여기저기 있습니다.
지상의 불빛이 약하고, 공기가 맑은 곳에서는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겠지만, 그래도 광활한 우주의 대부분은 어둠입니다. 물론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리우스나 북극성처럼 거리가 멀어서 희미하지만 태양보다 더 밝은 별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 해도 우주 대부분은 캄캄한 어둠으로 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우주는 광활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있는 태양계도 1천억 개의 항성들로 이루어진 성단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성단의 변두리에 있지만 그래도 태양계는 태양이 어둠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태양과 가장 적당한 거리에 있는 지구는 태양계에서 생물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태양에 가까운 수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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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금성은 너무 뜨거워서 사람이 살 수 없고, 화성이나 목성 또는 토성은 태양과 너무 멀기 때문에 추워서 살 수 없답니다. 하지만 혹시 생물이 사는 별이 또 있지 않을까 하여 지금도 열심히 찾는 중입니다. 1백억 개의 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성단이 1천억 개 정도 있다니, 혹시 수백 억 광년 저 멀리 어느 곳에 지구와 같은 환경을 지닌 별이 하나쯤 더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다중 우주에 관한 생각도 있습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이 우주 외에도 다른 여러 개의 우주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 곳에는 인간과 유사한 지적 존재가 생존할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을까요?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광대한 우주에서 지구는 어쩌면 한강 백사장의 모래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지구, 그리고 그 지구에서도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작은 존재인 인간들을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일 자체가 쉽게 믿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가 표현한 대로,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며,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기고,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1-27)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 시편 작가의 이러한 외침은 당연한 듯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우리는 우주의 크기에 놀라지만, 우주의 정교한 운행을 알면 더욱 놀라게 됩니다. 중력 법칙을 따라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돌고 있습니다. 그 사이로 혜성이 궤도를 침범하기도 합니다. 하늘에서는 수많은 별이 죽고 다시 태어납니다. 죽어 가는 별똥별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운석도 수없이 많습니다. 목성은 지구 저 멀리에서 일정한 궤도를 돌면서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운석들을 막아 주는 방패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는 벌써 산산조 각이 났을 것입니다. 또한 지구는 궤도를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을 어김없이 맞이하고 있습 니다. 그에 따라 꽃이 피고 집니다. 해마다 나무의 나이테가 생겨납니다. 그런 것을 그저 우연이라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저절로’ 그리 되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정교합니다. 그건 마치 시계가 저절로 움직여서 시간을 맞추어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솔제니친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인간들이 달이나 화성을 탐사하기 위해 우주선을 만드는 대단한 일을 하지만,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병아리 한 마리를 바라보면서, 그처럼 연약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들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한편으로 새 생명을 창조하시는 조물주를 찬양하는 글이었습니다. 분명 창조주는 세상에 존재하시고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흔적을 분명히 남겨 두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읽어 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그림은 그 화가가 훌륭한 화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 그림에서 화가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창조한 작품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자체가 그 증명입니다. 그 흔적을 읽어 내는 것은 우리 눈에 달려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하느님은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희생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이 최대의 난제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는데 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일까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일까요? 그렇게 단순한 이유라면, 참 대단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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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난제는 고통입니다. 이병철 회장의 다섯 번째 질문처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욥기’가 탄생했다고 여깁니다. 욥의 삶 자체가 의인의 고통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왜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저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삶에 대한 근본 물음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항) 그리고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거듭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합니다. 즉,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7항)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도 사랑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선물인지를 강조합니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하느님의 약속이며 우리의 희망입니다.”(<진리 안의 사랑>, 2항)
저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신 까닭에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도 당신처럼 영원한 생명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사람으로 태어 나게 하셨습니다. 이를 강생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속죄하도록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겪게 하셨습니다. 이를 파스카의 신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음식과 음료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쉽게 알아들을 수없는 성체의 신비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내려오셨습니다. 그것 하나로 우리는 하느님의 큰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사랑받는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것만으로도 존재의 이유가 충분하며 그 사랑 하나로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지닙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큰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인 삶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느님은 늘 제 능력 이상의 것을 주셨습니다. 저는 농사지은 적이 없으면서도 잘 먹고 있습니다. 길쌈한 적도 없는데 헐벗지 않고 있습니다.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고도 자동차로 아주 먼 곳까지 편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더 알 수 있도록, 당신을 더 생각하도록 사제직에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깨닫지 못하지만 하느님이 베푸신 사랑은 더욱더 많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기적 같은 날이 참으로 많습니다. 때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말할 수있다는 것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눈물겹게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이 기적 같은 고마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주신 ‘사랑’이라는 선물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들에게 ‘사랑’이라는 선물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삶은 지옥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을 이기려고 사는 세상은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 사회에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삶이 남아 있습니다. 욕심에 의해 벌어지는 전쟁, 테러, 살인 등이 그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이세상이 ‘사랑’ 때문에 훈훈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걷는 오솔길이 아름다워집니다. 사랑하는 가족 들의 사진이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에너지와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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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합니다. 그런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재화들이 경쟁을 위한 투쟁으로 사용된다면 우리 세상은 정말 험악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지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사랑’은 정말큰 선물입니다. 사랑은 우리들이 힘든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고달픔 속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어린이가 독사와 사자, 호랑이 등 모든 동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에덴동산이 그리웠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왜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어서 그곳으로부터 쫓겨나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하는, 이 고통스러운 세상으로 오게 했을까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의 잘못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잘못이라는 걸 깨달은 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하느님은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에게만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선택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여전히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인지 죽음의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십니다. 오늘 나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좋은 일, 나쁜 일을 선택하는 건 나 자신입니다. 기쁜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은 내가 선택한 일의 결과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남김없이 해명할 수 없는 고통의 신비도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실수로, 또는 고의로 내가 고통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의 잘못은 나의 고통이 됩니다. 부모나 자녀나 형제가 잘못한 것이 나에게도 아픔이 됩니다. 이것이 연대 책임이며, 원죄성의 고통 분담입니다. 이와 같이 고통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값입니다. 윤리적이든, 물리적이든 내가 실수를 했든, 또는 우리 가족의 누군가가 잘못했든 그 죄를 속죄하기 위한 아픔 입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속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고통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큰 잘못도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고통은 우리가 성장하는 힘이 됩니다.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입 니다. 또한 그 고통을 이겨 낸 사람들입니다. 겪어 낸 고통이 클수록 더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고통은 우리를 키워 주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여행을 시키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집을 떠나 보아야 고생하게 되고, 고생을 해야 사람으로서 철이 든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고통은 신비입니다. 물론 고통은 죄의 대가일 수도 있고, 고통이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에너 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의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그 부분이 더 클 것입 니다. 사랑만 신비가 아닙니다. 고통도 신비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 고통 없이도 그는 충분히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고통은 왜 올까요? 다 알 수 없습니다. 욥기는 말합니다.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찾아내고 전능하신 분의 한계까지도 찾아냈단 말인가? 그것이 하늘보다 높은데 자네가 어찌하겠는가? 저승보다 깊은 데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그 길이는 땅보다 길고 넓이는 바다보다 넓다네.”(욥 11,7-9)
저는 고통이 사랑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서도 고통을 주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아버지는 자녀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못합 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는 아버지는 자녀에게 힘든 일을 요구합니다. 고생을 시킵니다. 그 고생을 보상해 줄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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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을까? 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셨을까? 아버지, 아버지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는데 왜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마지막 고통인 죽음까지 겪도록 방치하셨을까? 예전에 멜 깁슨이 제작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예수님에게 잔인한 고통을 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잔인한 아픔을 방치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도 느껴졌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을 묵묵히 겪어 내시는 예수님의 사랑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고통도 느껴졌습니다. 장작을 지고 가는 아들 이사악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던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 아버지 께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죽음 넘어서까지도 그 아들에게 뭔가 해 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고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고통이 없다고 가정합시다. 내가 누군가를 때렸는데 아무런 고통이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했는데도 아무런 아픔이 없습 니다. 누구를 죽였는데도 죽는 사람도 나도 아무런 고통이 없습니다. 그건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돌의 세상일 것입니다. 고통 없이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까? 배고픈 아들이 지쳐서 돌아왔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어떻게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가 병이 들어 고통을 겪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면 어떻게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 고통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표징입니다. 사랑하는 깊이만큼 우리는 고통과 기쁨을 함께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기쁨보다도 고통에서 더 깊이 새겨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사람들이 저질러 일어난 고통을 두고, 하느님께 따집니다. 왜 하느님은 인간 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느냐고? 왜 고통을 방치하시냐고?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면 아마도 인간 세상에서 고통의 90% 이상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에 의한 고통, 그리고 인간에게 최대의 고통으로 남겨진 죽음만이 하느님과 관련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그분께서 그 이상으로 보상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맴돕니다. 그 외침 속에 아직도 그분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랑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기대가 느껴집니다. 아니, 여전히 예수님의 가슴에 아버지의 사랑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 니다. 고통은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처럼.
◆ 영혼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세상에 많은 존재들을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세상의 사물을 크게 광물, 식물, 동물세 가지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광물의 특징은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식물과 동물은 생명이 있는데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자신의 거주지를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사물을 그런 정도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중세의 스콜라 신학은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 사물을 구별하였습니다. 광물은 혼이 없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식물은 생혼(生魂)은 있지만 아픔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각혼(覺魂)이 없는 것으로 봅니다. 동물은 각혼은 있지만 인간과 구별되어 영혼이 없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든 생물이 지닌 생혼, 그리고 동물들이 지닌 각혼의 능력을 다 포함하고 그것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학문적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는 인간이란 물질적인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라고 이해해 왔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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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세상에는 인간과 달리 육체는 지니지 않고 순수 영혼만으로 이루어진 영적 존재, 천사들이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지니지 않은 까닭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은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창조하신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일찍이 성경 저자들은 사람을 뜻하는 ‘아담’이라는 존재는 진흙으로 빚어진 존재에 하느님의 ‘입김’이 들어가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입김’ 또는 ‘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하’는 ‘바람’, ‘생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최근 심심치 않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회자됩니다. 물론 의학적인 규정으로 뇌사, 심장사, 또는 여러 가지로 죽음을 판명할 수 있겠지만, 신학은 그것을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언저 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임사체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임사체험자들의 공통점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몸을 빠져 나가는 자신을 느끼고 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가 수술대에 있고, 친지들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어 슬퍼하고 있는 모습들을 본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육체를 떠난 그 존재, 여전히 자신을 자신으로 느끼는 그 무엇을 우리는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영혼이 다른 육신을 취해도 그가 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처럼 다른 육체를 취해도 여전히 그가 그일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육체는 마치 로봇이나 기계의 한 부품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고유한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은 그 육신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 니다. 그가 가진 성격이나 취미, 결국 그가 살아오면서 이루어 낸 모든 결과들은 자신의 육체적 조건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운동선수로 성공한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유리한 육체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고유한 자신이 된다는 것은 육체와 분리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혼과 육신의 분리는 플라톤 이전으로 소급되는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 철학은 영혼이란 이데아 세계에서 온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데아 세계에서 온 영혼이 이 세상의 물질과 결합하여 한 인간이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죽음이란 이데아 세계에서 온 영혼이 육신을 떨쳐 내고 이데아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상을 소크라테스에게서 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해외 망명을 요구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죽음이란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 즉 사람이 죽으면 모든 감각이 없어지는 것, 또는 영혼이 이 세상 에서 저승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만일 무로 돌아가서 모든 감각이 사라진다면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것이나 다름없을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죽음이란 큰 소득이라 하겠습니다. … 그리고 만일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저승으로 가는 여정과 같은 것이라면, 그리하여 전설에서처럼 죽는 사람은 누구나 그곳으로 가는 것이라면,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소크라테 스의 변명』, 35~56쪽)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인간학은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갈라놓는 그리스적 이원론을 벗어납니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자신의 저서 『예수 그리스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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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영혼은 병존하거나 서로 뒤섞여 있는 별개의 두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인간은 육체로서도 하나의 전체요 영혼으로서도 하나의 전체이다. 둘 다 각각 하나의 전체로서 인간을 이룬다. 우리의 정신생활, 우리의 사유도 가령 일정한 뇌 기능과 같은, 어떤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에 단순히 외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이른바 ‘정신적’이라고 일컬 어지는 활동들은 내적으로도 철저하게 육체에 의해 특징지어져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이 육체이다. 이 육체 안에 전 인간은 자신을 개방하고 천명한다. 육체는 이처럼 인간의 표현이요 상징이며 육적 자기외화이고 본질 매체이다. 육체 안에 전 인간이 ‘거기’ 있다(현존재). 그래서 육체를 바로 인간의 ‘현존재’와 현존으로 개념하게 된 것이다.”(『예수 그리스도』, 357~358쪽)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가톨릭 교리 문답은 첫 조항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문: 사람은 왜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답: 사람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여, 자기 영혼을 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무한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 영혼을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362.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어진 ‘인간’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는 성경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상징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전체적인 인간을 원하신 것이다.”
“363. 영혼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종종 인간의 생명이나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특히 인간은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을 가리킨다.”
6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우리 몸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상처가 아무는 것도 하나의 변화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얼굴도, 체중도, 몸매도 어린 시절의 모습과 달라집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는 인간을 동식물과 구별해 주는 영혼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리고 영혼은, 더 나아가 우리가 나이를 먹어 육체적인 변화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나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이지 않을까요? 이것은 사후 세계에서도 이 세상을 살아갔던 자신으 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해 주는 나의 본질일 것입니다.
◆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 나?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습니다.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 적인 욕망은 어린이들의 동화에 잘 담겨 있습니다. 동화는 늘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본능적으로 죽음 너머 또 다른 삶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공평하기 위해서 죽음 너머에 삶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불공평합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살기 좋은 나라에, 금수저 집안에, 그리고 높은 지능을 지니고 태어나고, 외모도 수려하고, 많은 재주를 지닌 채로 태어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려운 나라에, 가난한 집안에 태어납니다. 재주도, 높은 지능도, 멋진 용모도 물려받지 못하고 태어납니다. 또한 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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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을 많이 했는데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착하게 살았는데도 고생만 하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라면 이 세상은 분명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앞서서 말한 영원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 때문에, 또는 불공평한 세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 니다. 물론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을 다시 살아 계신 분으로 만났던 제자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그 증언이 복음서에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분의 부활을 처음부터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의심하고 불신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으 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의심과 불신을 넘어서 예수님의 부활이 첫 번째 부활이요, 그분의 부활에 이어서 우리들도 부활할 것으로 희망하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희망과 믿음은 일찍이 바오로 사도에 의해 강조된 바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그런데 이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부활이 마지막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 부활은 아버지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톨릭 교리는 승천 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표현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 도교인이 믿는 ‘육신의 부활’은 영혼의 불사불멸성이라는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플라톤 철학은 인간을 이데아 세계에서 온 영혼과 물질세 계에서 유래하는 육신의 결합으로 이해했으며, 죽음이란 물질적인 세계에 속하는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나 이데아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천상병의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는 그러한 믿음의 반영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에게로 귀천하는 것은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과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 돌아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이요, 특히 ‘육신의 부활’이라는 신경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다. 죽음이 한 인간의 마지막이 아니며, 인간의 죽음 후에도 무로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바, 육신의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불교의 윤회에 의한 죽음 후 생명과 다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구별하기는 하지만, 육신을 마치 부속품처럼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몸 없는 영혼도 없고, 영혼 없는 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은 육신 없이는 한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 니다. 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속품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몸은 어떤 것이 아니다. 몸은 어떤 사람이다. 나의 몸, 그것은 나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332쪽 참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희망하는 부활은 결코 영적 부활이 아닙니다. ‘육신의 부활’이란 영혼 없는 육신만의 부활도 아닙니다. ‘육신의 부활’에서 ‘육신’이란 단순히 신체적 실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포로서의 살덩이는 끊임없이 다른 세포로 교체됩니다. 다른 세포로 대체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동일성을 보여 주는 ‘육신’은 그 세포의 의미보다 더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하는 육신은 그의 모든 역사와 더불어 모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지니고 미래를 향하는 그의 인격적 실재를 의미합니다. ‘육신의 부활’은 구체적으로 역사 안의 삶을 살았던 그 자신의 죽음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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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하느님 앞에 서게 된다는 표현입니다. 물론 지금의 우리 육신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불사의 옷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강조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희망합니다. 단 한 번의 삶을 살고 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 자신의 모습으로 서게 되리라는 것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 님의 정의를 믿습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상선벌악은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저세상에서도, 곧 죽음을 넘어서라도 이루어진다는 신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상선벌악을 최후 심판이라는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 다.”(마태 24, 34-46)
그렇습니다. 죄인들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간다는 사실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서 알려 주어도 믿지 않을 사람은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죄인을 위한 지옥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오랫동안 죽은 이들의 염을 비롯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던 어느 성당의 연령회장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었음에도 죽은 것인지 잠을 자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집에 들어 서기조차 힘들 만큼 역겨운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 자체에서 바로 천당과 죽음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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