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이 책에서 글쓰기에 필요한 태도와 마음가짐, 기자 생활을 통해 쌓아둔 사유와 고민 등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또한 경력단절여성이 되면서 무력함에 빠지고, 좌절하면서도 저항하며 일어서고자 했던 크고 작은 경험이 글쓰기에 미친 영향에 관해 썼다. 2019년 올해의 우수출판 콘텐츠 선정작이다.
여성의 글쓰기
▣ Short Summary
이 책은 지난 십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며 꾸준히 글쓰기 훈련을 해온 저자 이고은의 한때는 면구스러 웠던, 그러나 더는 누추하지 않은 고백을 담았다. 경향신문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일하며 대한민국의 갖가지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마치 자신의 고민인 양 떠안고 살았던 기자 이고은은 육아를 이유로 사표를 낸 후, 이제껏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적지 않은 시간, 사회적 노동을 이어오며 크고 작은 도전과 성취를 이루었건만,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핍진하게 쪼그라들었다. 저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전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인생의 항로가 바뀌는 경험에서 저자는 분투했고, 이를 벼리고 벼려 자신만의 온전한 언어로 빚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글쓰기에 필요한 일종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관한 생각을 시작으로, 기자 생활을 통해 쌓아둔 사유와 고민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또한 경력단절여성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글쓰기의 힘에 대해 절감한 바를 적었다. 잃고, 무력함에 빠지고, 좌절하면서도 저항하며 일어서고자 했던 크고 작은 경험이 글쓰기에 미친 영향에 관해 썼다. 후반부에서는 개인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가 글쓰기를 통해 얻을 수 있고, 또 꿈꿀 수 있는 희망을 강조했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어떻게 쓸 것인가’를 주제로, 글쓰기에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나름의 기술을 정리하며 글쓰기 숙련기술자로서의 내공을 아낌 없이 담았다.
▣ 차례
들어가는 말
1장 자아를 찾아가는 글쓰기 언어를 갖는다는 것자신과 대화하십니까?
나를 확장하는 글쓰기
- 2 - 여성의 글쓰기
이야기로 구성되는 기억과 삶나만의 특별함을 찾아서 #1. 어떻게 쓸 것인가: 구조와 흐름
2장 진실을 찾는 글쓰기 ‘그림 그리듯’ 쓰기 위하여 ‘기레기’의 시대 질문하지 않는 사회 사실은 어디에 있는가?
뉴스를 읽고 시대를 읽다 남성사회의 여성기자 #2. 어떻게 쓸 것인가: 호흡과 리듬
3장 결핍과 충족의 글쓰기 태어난 여성, 길러진 여성 ‘자기만의 방’을 찾아서 소외된 자의 낮은 눈높이 간절함에서 꽃피다글 쓰는 여성의 힘분노하고 울고 일어서다 세상 밖으로 나온 여성들 #3. 어떻게 쓸 것인가: 정확성과 표현
4장 사회, 연대, 글쓰기 자본주의 사회의 글쓰기 노동 개인과 사회 그리고 목소리 정치적 글쓰기가 아름다운 이유 이타적 글쓰기 글쓰기로 짓는 연대의 그물망 남성을 생각하다 우리 모두의 존엄함을 찾아서 #4. 어떻게 쓸 것인가: 시작과 끝맺음
나가는 말참고 도서이 책을 응원해주신 분들
- 3 - 여성의 글쓰기
여성의 글쓰기
자아를 찾아가는 글쓰기
자신과 대화하십니까?
문학, 철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으로 손꼽히는 우치다 다쓰 루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서 이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무엇을 쓸지, 어떻게 쓸 수 있을지 명료한 확신 속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아무리 천재 작가라 할지라도 일필휘지로 한번에 글을 써내는 일은 드물 것이다. 유시민이 구치소 바닥에서 단 한 번의 퇴고 없이 <항소이유서>를 써 내려갔다지만, 물리적으로 글을 수정할 수 없던 상황에서 그는 아마 머릿속으로 수백 번 수천 번 자신의 글을 고쳐 썼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고를 쓴 기간만큼이나 퇴고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글을 단단하고 굳게 만들기 위해 두드리는 집요한 ‘망치질’을 사랑했다.
어제 썼던 글도 하루 지나 보면 새롭다. 어디 그뿐이랴. 한 달 지나 보면 이번에는 다른 이가 쓴 것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아무리 고쳐도 또 새롭게 써야 할 것이 뾰족하니 튀어나와 보인다. 과거에 쓴 글속에서 예전의 나를 직면했을 때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때도 있고, 서먹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의외의 통찰을 얻을 때도 있다. 왜 일까? 우리가 매일같이 스스로를 갱신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는 내면의 자아가 해체되고 분열되며 재구성되는 복잡한 경험을 한다. 때로는 자신조차 몰랐던 내 안의 욕망과 의지가 튀어나오고, 때로는 자기 안의 확고한 논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모순에 빠진다. 대체로 글을 쓸 때는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안에서 만나는 충돌하는 논리 중 우세한 한 가지 방향을 선택하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결론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다르게 방향을 틀기도 한다. 타인을 설득하기 이전에 글의 첫 독자인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글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면서 우리는 스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거듭 확인한 다.
우치다 다쓰루의 말처럼, 우리는 글을 쓰는 도중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지지하는지 계속해서 발견한다. 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완성하는 순간 까지 자신 안에서 수없이 갈팡질팡하며 정체성을 찾아간다. 도입에서 쓴 이야기를 부드럽게 이어가기 위해, 논리의 줄기를 찾고 설득력 있게 전개하기 위해, 마지막에 쓰고자 하는 결론을 벼려내기 위해 수천 번이고 수만 번이고 자신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끄집어내 살펴본다. 성별, 세대, 출신, 지위, 계급, 관계……. 그 사이에 충돌은 없는지, 있다면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지, 어떤 것을 포기하고 어떤 것을 지향할 것인지. 자기 질문과 응답이 끝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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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언뜻 보면 대립하거나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정체성을 한데 품고 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가진 면일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비슷한 성향과 환경을 갖고 있어서 사회적으로 하나의 범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생각과 경험이 세밀하게 다르다. 각각의 다채로운 경험에서 형성된 다양한 층위의 인격들이 어우러져서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다. 각기 존재하는 내면의 모순, 개별적 취향과 선택, 환경의 변화와 영향력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개인의 유일성, 인간의 다양성이 발현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 1981년생, 대구라는 보수적인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 반대로 진보 성향의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한 경력, 기혼, 유자녀, 육아로 인한 퇴사 등. 어떤 것은 태어나며 부여받았고, 어떤 것은 내가 선택한 결과다. 이미 지나온 내 삶의 증거들은 부조화와 모순적인 요소로 엉켜 있다. 누군가에게 나는 출신 지역이나 혼인 여부를 이유로 보수적인 사람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 게는 여성주의적 면모라든가 출신 언론의 정치 성향을 이유로 진보적인 사람일 수 있다.
나이 서른여덟인 현재의 내게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도 퇴적되어 있다. 사춘기를 맞이하던 열세 살의 소녀, 낯선 연애에 빠졌던 스물둘의 여자, 새 생명의 경이로움에 놀라던 서른셋의 엄마가 내 안에 있다. 은퇴와 노년, 죽음이라는 미래 속에 그려진 가상의 나 역시 현재의 나를 구성한다. 다양한 층위의 자아는 삶의 순간마다 시시때때로 소환된다. 이는 마주한 타인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낯섦과 두려움도 끄집어낸다. 그 경험마저 또 쌓이고 쌓이면서 나만의 세계가 갱신된다.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세계가 된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면 글쓰기가 어렵다. 스스로 드러낼 수 없어서다. 자기 세계가 갖는 가치를 표현할 수도 없다. 글쓴이의 인격이 담기지 않은 글은 타인에게도 매력을 주지 못한다. 독자들은 글쓴이의 닫힌 마음을 금세 알아차리고 자신도 마음을 곧바로 닫아버린다.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글은 설득을 할 수도, 울림을 줄 수도 없다. 비록 자신을 끄집어내어 그 안의 모순을 맞닥뜨리는 일이 고통 일지라도, 온전히 자신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고행과도 같은 노동을 이어가야만 한다.
몇 권의 책을 쓴 경험 때문인지, 종종 나에게 “책을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묻는 이들이 있다. 또 누군가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글쓰기를 갓 시작한 사람들에게 내가 권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이야기를 쓰라는 것이다. 언론사 입사 시험에서 치르는 글쓰기 과목중 하나는 ‘작문’으로, 하나의 시제를 주고 자유롭게 쓰게 한다. 일종의 백일장이다. 작문 시험을 판가 름하는 것은 도입부인데, 많은 수험생이 자신의 이야기로 글을 열곤 한다. 나 역시 식상한 사례를 끌어와 글을 시작할 바에야 자신의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훨씬 낫다고 본다. 글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개성을 선보일 수 있어서다.
물론 일상을 단순하게 적는 일기나 살아온 일생을 방대하게 기록하는 전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려면 그만큼 정확하고 날카로운 분석이 필요하다. 개인의 삶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있으므로, 개별적인 일화는 사회적ㆍ정치적 혹은 철학적 주제와 연결고리를 갖는다. 자신의 이야기가 글감으로서 역할을 하게 하려면 그 경험이 관통하는 일반화된 명제가 있어야 한다. 주제를 꿰뚫는 압축적인 예시로서 현상의 정확한 단면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에피소드는 오히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방해할 위험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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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기 이야기를 쓰려면 자신을 잘 알고 객관화하는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먼 곳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글감을 찾되, 개인의 이야기가 보다 큰 거시적 맥락에서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발견하는 연습은 분명히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된다. 그러려면 자기 삶을 낱낱이 뜯어보고 그 구체성을 맥락화해야 한다. 나를 낱낱이 해체하고 관찰하고 비판하고 거부하는 과정을 통해 현실 속 내 좌표를 확인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해 속속들이 탐구한 이가 쓴 글은 그만큼 논리적이고 선명해질 가능성이 높다.
글쓰기는 존재를 증명하고 개인의 고유성을 발견해가는 작업이다. 글 읽기, 책 읽기가 즐거운 이유는 우주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다. 설령 낯설고 괴이한 글이라 하더라도 읽는 이 역시 글쓴이의 세계를 상상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가 확정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글을 쓰며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해야 한다. 자신이 살아온 삶, 그 경험의 힘을 믿고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 값지다고 믿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글은 힘이 있다. 살아 있는 글이 된다.
진실을 찾는 글쓰기
질문하지 않는 사회 2007년 정치부 국회팀에 처음 발령이 났을 때였다. 당시 집권당이던 한나라당을 취재하는 여당팀의 이른바 ‘말진(국회팀 소속 기자 중 가장 막내 기자)’이었던 내가 맡은 임무는 원내 대표실에서 열린 회의를 취재해 선배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당시 여당 원내 대표의 이름과 얼굴도 매치하지 못할 정도로 정치에 문외한이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정치인들의 말을 받아 적는 일은 무척 버거웠는데, 더 큰 문제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일이 “저 사람이 누구죠” 하고 물어보는 것도 기자로서 남세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결국 발언자의 이름도 발언 내용도 충분히 기록하지 못한채 패잔병처럼 기자실로 돌아온 나는 온종일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렇게 시작한 정치부 첫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해 여름, 한나라당은 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당내 경선을 앞두고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 양 진영으로 갈라져 팽팽하게 대립했다. 전쟁터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정치권에 몸담은 이들은 각 진영 내 주요 인물별 히스토리와 관계, 정치적 구도 등을 훤히 꿰고 있었다. 누가 핵심 참모이고 실세인지, 어떤 이들이 경쟁하고 대립하는지, 계파별로 서열은 어떻게 정리되는지……. 여의도는 여의도만의 세계와 질서, 언어가 따로 존재했다. 이런 전장에서 누가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는 초짜 기자가 어떻게 살아남 았을까.
하루는 국회팀장이던 선배가 나를 데리고 의원회관을 한 바퀴 돌았다. 선배는 친이명박계와 친박근혜 계의 핵심 국회의원들에게 새로 온 후배 기자를 소개하며 취재를 했다. 당시 따로 만난다는 것은 상상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던 대선 경선 후보 시절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처음 마주한 것도 선배를 통해서였다. 선배 손에 이끌려 박 전 대통령이 탄 엘리베이터에 비집고 들어가 처음으로 얼굴도장을 찍었는데, 나중에야 이게 얼마나 예외적인 일이었는지 알았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수행비서가 기자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막는 것으로 유명했던 까닭이다.
- 6 - 여성의 글쓰기
선배는 취재원들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반절 이상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내밀한 여의도 정치판의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대화 중에서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선배의 말은 바로 이거였다. “그랬어요? 몰랐어요. 조금만 더 이야기해줘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정치판에 온 지 일주일도 안 된 나는 모를 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생각으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거나, 반면에 조금이라도 아는 게 생기면 어떻게든 아는 티를 내려고 애썼다. 하수도 그런 하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바닥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판을 훤히 꿰뚫다시피 하던 선배는 말끝마다 “잘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질문 끝에 자연 스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도 더 많았다.
선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질문하는 사람’이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기에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질문한다는 것은 ‘내가 여기까지는 알고 있는데, 그 이상으로 더알고 싶다’는 뜻이다. 질문이 있어야 알고 있는 사실들 사이의 구체적인 내용이 채워지고, 더 깊고 넓게 확장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질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에 알고 있던 것, 그동안 고민해온 것이 많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자세는 자신이 모르는 문제라면 누구도 쉽게 답을 얻지 못할 것이기에, 기꺼이 물어야만 한다는 책임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질문은 이렇게 해석되지 않는다. 질문이란 흔히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는 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더 많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질문자의 선한 의지에 주목하기보다, 그 사람이 어디 까지 그리고 얼마나 더 깊이 알고 있는지 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타인과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일이 몸에 익다 보니 ‘모른다’는 선언은 무시와 멸시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모르더라도 차라리 의뭉스럽게 입을 닫는 편이 낫다는 생각 속에 살아간다.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우리에게 질문은 낯선 일이다. 어린 시절부터 튀지 말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면 중간은 간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질문은 정해진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고, 체제에 반기를 드는 일로 터부시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은 질문하는 자, 말하는 자를 소외시키는 이 사회의 경직된 문화를 더욱 공고화한다.
2010년 9월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폐막식에서 미국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폐막 연설 직후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질문 기회는 결국 중국 CCTV의기자에게 돌아갔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을 질문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기자들조차 질문과 취재를 위한 공식 석상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질문 없는 사회, 과연 미래가 있을까.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다. 아무도 묻지 않으면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질문하는 순간부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에, 질문하지 않으면 문제는 늘 정체된 상태에 머물고 만다. 질문이 없다면 이미 존재하는 문제를 인식하기조차 어렵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해결도 없고 변화도 없다. 기존의 체제와 질서가 흔들릴 일도 없다. 사회는 정체되고 고인 물처럼 탁하게 병들어 간다. 우리 사회가 마주한 수많은 문제들은 어쩌면 누구도 질문하지 않기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에 해법을 찾지 못하고 곪아버린 일들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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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일 역시 질문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던 사실에 대해 묻고 답을 구하는 일에서부터 글쓰기의 의지가 발현된다. 스스로 묻고 답하는 일, 타인에게 묻고 객관적 답을 구하는 일. 그 결과를 오롯이 기록하는 것이 결국 글쓰기다. 그렇기에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질문을 할 수있어야 한다. 아니, 그보다 먼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시인할 용기와 궁금한 것을 질문할 의지를 키워야 한다.
10여 년 전 선배가 질문하는 모습을 본 이후, 나는 지금까지 줄곧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거나 “잘 모르는 내용”이라는 고백을 머뭇거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좀 자세히 알려달라”, “어려우니 더 설명 해달라”는 질문도 서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란 잘 모른다는 사실보다, 잘 모르면서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몇 년간 수백 명에 달하는 국회 출입기자들과 얽히고설켜 일하다 보니 질문하지 않는 기자들의 ‘견적’을 대충은 알아차리는 눈이 생겼다. 알아서 안 묻는지, 몰라서 못 묻는지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또 나를 보며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담백하고 솔직한 질문만이 스스로를 당당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빨리 받아들일수록 좋다. 살면서 고수는 못 되더라도 하수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핍과 충족의 글쓰기
태어난 여성, 길러진 여성 생각해보면 없지 않았다. ‘여자라서’, ‘여자니까’, ‘여자인데’ 라는 이유로 나의 삶과 행동에 영향을 받은 일들 말이다. 아홉 살 어린 남동생이 항상 나보다 먼저 제사상에 절을 올렸던 일, 몸 곳곳에 잔털이 없어야 여성스러워 보인다는 이유로 고통스러운 레이저 제모 시술을 받았던 일, “안경 쓴 여자는 아침 첫택시에 안 태운다”는 속설 때문에 안경을 벗어든 채 택시를 잡았던 일… 이 밖에도 ‘여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겪게 된 부당하고 유쾌하지 않은 일들은 시시때때로 있었다. 돌아보면 말이다.
이상하게도 이런 일을 현재진행형으로 겪었던 20대에는 현실을 별로 인지하지 못했다. 대학 교양 과목 이었던 ‘여성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도 그랬다. 페미니즘이란 그저 흥미로운 학문이자 인류 진보의 역사라고 생각했다. 여성 문제가 현실의 이야기라고 해도 정작 내 일상과 연결 지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심각한 폭력과 위압으로 삶을 제약받는, 일부 여성들의 화두라고만 보았다. 내가 일상 속에서 겪어온 성차별이나 여성으로서 느꼈던 크고 작은 한계는 마치 공기 같은 것이어서, 큰 문제의식조차 가지지 못했다.
왜일까. ‘알파걸’ 세대인 나는 스스로 알파걸이라 생각했고, 차별과 억압, 그로 인한 결핍의 경험은 내삶과 무관하다고 믿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실력 있고 뛰어난 여성에게는 좌절과 실패의 경험보다 도전과 성취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라 다짐했다. 물론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남성 중심적인 질서 아래 오랫동안 작동해온 이 사회가 마지못해 변화의 물결에 떠밀려 여성, 그것도 젊고 새로운 세대의 여성 만을 위해 털끝만큼 겨우 내어준 몫임을 알지 못했다.
- 8 - 여성의 글쓰기
나는 이 질서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지만 결국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무너졌다. 여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겪는 소외와 배제, 차별로 인한 고통을 그제야 피부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여성임에도 책으로, 머리로만 알았던 여성의 문제를 드디어 체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 이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완전한 성찰을 얻을 수 없는 한계적 존재라는 사실도 이때 깨달았다.
엄마가 되는 것은 이제껏 내가 개인으로서 도전하고 성취했던 기존의 과제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돌본다는 것은 개인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는 사회적으로는 독립된 인격체이면서도, 생물학적으로는 아직 존재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생명 체에 불과하다. 그런 모순된 존재를 이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 키워내는 데는 양육자의 뭉근하고 끈질긴 노동이 필요하다. 성인의 언어와 이 사회의 속도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돌봄 노동.’ 아이를 돌보는 일과 개인적 성취를 추구하는 사회적 노동으로서의 일을 동시에 해내는 것은 적어도 내 관점에 서는 불가능했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택에 내몰렸다.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생활이 활발해진 꽤 오래 전부터, 수많은 선배 세대 여성들은 반강제적으로 사회적 이름을 잃어왔다. 노동 시장에서 절대적 으로 소수에 불과했던 여성들에게는 그저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마저도 가정과 육아를 돌보는 노동의 의무를 제3의 누군가에게 완전히 위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이들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터에 남은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단련했다.
막상 선택에 내몰리자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 차례는 오지 않을 것이라 믿고 아무런 준비를 못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보아온 선배 여성들의 삶을 그대로 수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배 속에서 잉태된 생명을 내 손으로 길러내는 기쁨과 충족을 외면하기 싫었다. 30여 년간 성취를 향해 달려온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자신 역시 포기할 수 없었다.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포기하라는 것인지, 그때부터 세상이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계산기를 두드려 스스로 사표를 썼다. 나는 양가 부모님에게 육아를 위탁할 수 없었다. 믿고 의지할 만한 제3의 양육자를 찾지 못했고, 적극적으로 찾을 의지도 없었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면 당연히 내 몫이어야 했다. 똑같이 공부하고 대학에 가서 취업해 사회생활을 하지만, 직업과 직무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나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받는 남편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개인과 가정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남성이 100만 원을 벌 때 여성은 평균 약 68만 원을 받는 대한민국의 현실(2018년 OECD ‘성별 임금격차’ 기준) 속에서, 우리 가정과 비슷한 상황이라면 나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여성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런 나의 퇴사는 과연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노력과 성취라는 삶의 기본 작동 기제가 무의미해지면서, 나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했다. 이는 여성 이라는 생물학적ㆍ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로 이어졌다.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자, 그제야 나보다 앞서 차별과 억압에 시달려온 다른 여성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이제껏 내게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간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이유로 일터에서 내몰린 여성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예 취업 시장에서 배제된 여성이 얼마나 많았던가.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거나, 타고난 기질을 억압받거나, 혹은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조차 못했던 여성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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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여성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 주류로부터 비켜서 있는 수많은 ‘타자’들의 삶은 어떠한가. 경험하지 못해 어림짐작조차 쉽지 않은 크고 작게 가난한 다양한 삶들. 주류를 지향하며 앞으로만 내달리는 삶은 스스로 소외와 배제의 경험을 하지 않는 이상 진심으로 주변을 자각하기 어렵다. 정희진은 『페미 니즘의 도전』에서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면서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게 엄마로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 구절에 이리 몰입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나는 승자와 패자를 명확히 가르는 남성적 질서, 세상을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기자로서의 일은 이성적 사고와 논리적 판단을 중시했고, 한국 사회의 교육은 경쟁해서 이기고 남을 짓눌러 살아남는 질서를 가르쳤다.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으려면 얼마 안 되는 몫을 놓고 여성끼리 경쟁해야 하고, 남녀 간에 뚜렷이 구분된 역할의 경계를 넘나들려고 하지 않아야 했다. 그 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치열하고 고된 삶이겠지만, 그렇게 인생을 메우는 것이 삶을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여성이라는 프레임 안과 밖에서 스스로 객관화해볼 기회가 없다면, 우리를 잠식한 굴절된 세계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생의 항로가 바뀌는 경험에 대한 사유는 그저 머릿속에서, 입속에서 맴돌기에는 부족했다. 스스로 해답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다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기사를 수집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된 후로 만난 이들과의 대화, 공격적으로 흡수한 수많은 텍스트는 여성으로서 내 삶을 새롭게 정의하는 토대가 되었다. 인간은 거대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철저하게 규정되며, 사회가 정한 틀과 기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범위 역시 제한적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사회 구조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독립적 존재라는 사실. 나는 어느새이 두 간극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자 애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3.어떻게 쓸 것인가: 정확성과 표현 기호학은 흥미로운 학문이다. 사람들은 기호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고 해석하며, 내용을 공유하고 소통 한다.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기호가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기표는 소리나 문자처럼 물질적으로 전달되고 자각되는 실체인 반면, 기의는 대상의 본질이자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개념이다. 예컨대 실물의 사과가 존재할 때 ‘사과’나 ‘Apple’은 기표가 되지만, 붉고 달콤한 열매라는 사과의 본래적 의미는 기의로서 작용한다. 기표는 나라나 문화마다 달라질 수 있고, 기의는 본래의 성질을 가짐에도 수용자에 의해 새롭게 변용될 수 있다. 소통은 그래서 어렵다.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일물일어설을 주장했다.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의미다. 글 쓰는 입장에서야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보여줄 최적의 기호를 찾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세상에는 많고 많은 기표가 있고, 그 안의 기의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 수많은 변수를 고려하며 최선의 문장을 조합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글쓰기의 통증은 세상에 무수히 떠다니는 단어, 표현, 의미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정확한 ‘단 한가지’를 골라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로부터 온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노력은 글 쓰는 자의 운명이다. 또한 독자에 대한 예의이며, 자존을 지키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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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다. 애써 쓴 글이 엉뚱하게 해석되는 것만큼 작가로서 낭패는 없다. 정확한 단어, 명료한 표현, 분명한 메시지를 글에 담아내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간결성과 정확성: 글이 술술 써질 때가 있다. 머릿속 가득하던 상념들이 어떤 자극에 의해 정돈될 때,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에 대한 자기만의 결론이 확실해질 때,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이 떠올라 상상력이 펼쳐질 때 우리는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럴 때는 좌우간 나오는 대로 충분히 써두는 것이 좋다. 쉽게 찾아오지 않는 귀중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시간이 지나 그때 써둔 글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때가 있다. 충만한 영감이 표현의 절제를 가로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는 문장마다 불필요한 단어들을 찾아 삭제해야 한다.
중복된 표현은 글의 힘을 떨어트린다. 의미가 어긋난 단어를 찾으면 대체어가 없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이 작업에서 포털 사이트의 국어사전 서비스는 좋은 도구가 된다. 하나의 단어를 검색하면 유의어, 반의어가 함께 나온다. 여러 단어를 배회하다 보면 내 문장에 더 알맞은, 내가 놓친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때의 쾌감은 퍼즐 마지막 조각을 맞춘 것만큼 짜릿하다.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이 아름답다. 단번에 그런 문장을 써내지 못한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글쓰기는 나의 생각을 적확하게 표현해줄 단어와 문장을 찾아 헤매는 탐험과 고난의 연속이다. 계속해서 찾고, 쓰고, 고치면 될 일이다.
2)인용과 맥락: 유명 인사의 말과 글을 적절하게 인용하는 것은 글의 효과를 드높인다. 인상 깊게 읽은 책이나 기사의 핵심 내용을 내 글 안에 녹여내고 싶지만, 원문 이상의 효과를 자신할 수 없을 때는 그냥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만 인용은 단순히 ‘베끼기’가 아니어야 한다. 인상적인 문구에 담긴 철학과 사유를 내 것으로 소화해내기 위한 장치로만 활용해야 한다. 그 경계는 무척 아슬아슬하다. 인용할 때는 원문에 대한 경외심을 담고 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원문의 출처를 명확히 밝힌다.
인용의 생명은 정확성이다. 이따금 원문의 취지에 반대되거나, 몇 퍼센트는 깎아낸 채 큰따옴표로 담아내는 경우를 본다. 매우 비윤리적인 행위다. 안타깝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서, 여론을 호도하고 왜곡한다. 알고도 그랬다면 나쁜 것이고, 모르고 그랬다면 무능한 것이다.
아무리 정확성을 기한다고 해도 문장 구조나 흐름, 문체, 비문의 차이 때문에 원문을 ‘마사지’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는 맥락을 살펴야 한다. 내가 인용한 문장이 원문의 맥락을 훼손하지 않는지, 그 문장이 내 글 속에 들어왔을 때 맥락을 설득력 있게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덧붙이자면, 한 편의 글 안에서 큰따옴표와 작은따옴표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
큰따옴표가 많으면 내용을 자기 언어로 소화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작은따옴표가 많으면 논리 적으로 서술할 능력이 부족해 인위적으로 강조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저자의 생각이 궁금한 것이지, 화려한 도구를 늘어놓은 전시를 보려는 것이 아니다.
3)표현과 문체: 작가의 개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상세한 표현과 고유한 문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문체에서도 저자의 특성이 드러난다.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설명하는 과정 끝에 최종 주장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한 메시지를 먼저 던져놓은 후 이를 뒷받침하는 서술을 이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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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있다. 화려한 표현과 수사, 상징을 많이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건조한 설명만으로 묘사하는 담담한 문체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작가의 선택이고 개성이다.
다만 보편적으로 유념하면 좋겠다 싶은 원칙은 있다. 첫째, 상투적인 문구는 쓰지 않는다. 글을 쓰는 이유는 자신만의 생각과 주장을 꺼내 보이기 위함인데 상투적인 표현은 상투적인 글로 이어지기 마련 이므로 시간 낭비요, 종이 낭비에 불과하다. 둘째, 묘사는 최대한 친절하고 구체적으로 한다. 불필요한 이야기까지 늘어지게 쓰라는 것이 아니다. 눈에 그려지듯, 생생히 체험하듯 적정선을 채우되 넘치지는 않아야 한다. 셋째, 접속사나 부사를 과도하게 쓰지 않는다. 글을 다 쓴 뒤 다시 보면 접속사나 부사가 불필요한 경우가 많다. 과감히 생략하자. 접속사 없이 맥락과 흐름만으로도 이해하기 쉬워야 세련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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