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재가제자 정찬주 작가가 2020년 입적 10주기를 즈음하여 스님을 추모하며 스님의 말씀과 생전 일화를 담백하게 담아낸 인생 에세이이자 명상록.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의 중압감과 물욕으로 말미암은 상실감에 허덕이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안과 더불어 진정한 행복의 길을 밝혀준다. 저자 자신에게 명상의 주제와 가르침이 되었을 뿐 애석하게도 스님을 흠모하는 사람들과 공유할 기회를 잃어버린 스님의 말씀과 일화를 저자 자신의 방식대로 구성하여 독자들과 함께할 명상록을 집필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법정스님을 다시 만나고 신산한 삶을 사는 데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 Short Summary
마당가 소나무 밑에 우윳빛 차나무 꽃이 피어 있다. 노란 산국 못지않게 향기가 은은하다. 차꽃이 질때도 능소화처럼 미련 없이 통째로 떨어진다. 풀잎 끝에 맺힌 영롱한 이슬이 떨어지는 것과 흡사하다.
온몸으로 살았으니 온몸으로 지는 것인가. 차꽃의 낙화가 비장하게 아름답다. 차꽃은 삶도 죽음도 여여하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생사일여라고 하는 모양이다.
20여 년 전 차꽃이 피는 계절이었다. 당시 나는 샘터사 직원이자 스님 원고 담당자로서 나의 스승이시 기도 한 법정스님을 뵙고 길상사 행지실에서 이런 차담을 나누었다.
“스님, 스님의 산문집을 십여 권 만들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독자들이 스님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스님만의 시적인 감성이나 현실을 바라보는 예각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허허. 그래요?” 스님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귀를 기울이셨다.
“스님 글에는 일관된 사상이 있습니다. 그 사상에 공감하여 독자들이 스님 책을 꾸준히 사랑하는 것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스님 사상이라면 인간은 물론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등 유무정물의 생명의 가치가 같다는 생명 중심 사상인 것 같습니다.”
“무염거사, 새로울 것은 없어요. 서양이 인간 중심이라면 동양의 불교는 생명 중심의 진리지요.”
“그동안 발간하신 스님의 산문집 중에서 스님의 사상이 드러난 구절들만 뽑아 책을 한 권 만들어보겠 습니다. 정채봉 형에게는 이미 상의 드리고 왔습니다.”
고인이 된 정채봉 동화작가는 나의 상사이자 대학 선배였다.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스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스님의 성정으로 보아 탐탁지 않으면 언제는 바로 분명 하게 거절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회오리바람처럼 거칠게 지나갔다. 나는 스님 책을 만들어드리지 못한 채 마흔아홉에 샘터사를 그만두고 남도 산중으로 은거하듯 낙향했고, 스님은 몇 해 뒤 천식이 깊어져 먼 길을 떠나시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10여 년의 세월이 전생의 시간처럼 아득하게 멀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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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표시하거나 메모해두었던 스님의 글이나 말씀의 구절들은 내 명상의 가르침이 되었을 뿐 애석 하게도 스님을 흠모하는 사람들과 공유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마침내 나는 글의 형식을 내 방식대로라도 해서 명상록을 내기로 하고 불일암을 찾아갔다. 내 뜻을 불일암에 계시는 스님의 맏상좌 덕조스님께 먼저 말씀드렸다. 그런 뒤 차분하게 『법정스님 인생응원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내 방식이란 별다른 것은 아니었다. ‘마중물 생각’, ‘스님의 말씀과 침묵’, ‘갈무리 생각’으로 서론ㆍ본론 ㆍ결론의 형식을 취했다. ‘마중물 생각’은 스님의 가르침을 청하는 청법의 글이라는 의미에서, ‘스님의 말씀과 침묵’은 스님의 가르침은 물론 그 너머 스님의 침묵까지 헤아리라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갈무리 생각’은 스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연상해낸 내 상념이나 단상, 내 삶의 흔적을 명상한 글이자 나의 고백일 터였다. 앞뒤로 붙인 내 글이 스님께 허물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자유롭게 무엇에 구애받지 않았다. 스님도 고지식하게 어떤 형식을 고수하는 태도보다는 다소 주제가 빗나가더라도 걸림 없는 분방함과 파격을 좋아하시리라 믿기 때문이었다.
▣ 차례
추천의 말작가의 말
1부 명상, 스님의 공감언어 산이란 영혼을 맑히는 시(詩)다 / 모든 생명의 무게는 같다 / 산다는 것은?
행복은 자기 자신이 만든다 / 자기다운 꽃을 피워라 / 삶이란 다듬고 가꾸는 것생명은 존중받아야 한다 / 믿음은 가슴에서 온다 / 선(禪)이란 한 생각 돌이키는 것고독하되 고립되지 말라 / 자연은 끊임없이 베풀고 있다 / 현대문명, 무엇이 문제인가?
차 한 잔의 행복 / 법정스님 주례사 / 따뜻한 가슴에 덕이 자란다 / 행복은 실천이고 의무이다 침묵이 필요하다 / 소유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 자비와 사랑은 그 무게가 같다 무소유를 무소유하라 / 명상이란 무엇인가? / 열린 마음으로 살아라 나는 누구인가? / 삶이 빛나는 것은 죽음이 있어서다
2부 명상, 스님의 공감법어 수행은 절이 생기기 전에 있었다 / 시간 속에 살고 죽는다 / 궁핍을 모르면 고마움을 모른다그 순간은 그 순간일 뿐 / 꽃은 봄날의 은혜다 /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라 모든 만남은 생에 단 한 번이다 / 나를 기준으로 삼지 말라 / 수평적인 자비, 수직적인 사랑 이웃은 내 복을 일구는 밭이다 / 자살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 어머니 힘으로 세상이 바뀐다 인생을 영원히 사는 법 / 자비심이 부처이다 /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지장보살 게으름은 쇠를 먹는 녹이다 / 나로부터 너에게 이르는 길 / 행복한 가정, 불행한 가정 부처님이듯 천주님이듯 대하라 / 마음을 주면 메아리가 있다 / 책은 자신을 다스리고 높인다 용서가 가장 큰 수행이다
3부 명상, 스님의 명동성당 특별강론 가난을 익히라 / 청빈의 덕은 가슴에서 / 행복은 만족할 줄 아는 데 있다 마음에 영혼의 메아리가 울리려면 / 순례자처럼 나그네처럼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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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명상, 스님의 공감언어
산다는 것은?
[마중물 생각]: 아들 쌍둥이 외손자 백일잔치 초대를 받아 서울에 다녀왔다. 큰 소리로 우는 주영이,
방긋 웃는 태영이를 보니 ‘장강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며 흐른다’는 중국 금언이 실감난다. 그렇다. 갓난아이로 인해서 묵은 나무 같은 나에게도 청솔가지 하나가 솟구치는 느낌이다. 손님들이 묻는다. 왜 산중으로 내려와 사느냐고,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온전하게 살고 싶어서 수십 년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남도 산중으로 내려왔다고.
방에서 창호 밖을 바라보는 산중 풍경과 툇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방은 바깥과 단절된 공간이지만 툇마루는 산중과 연결되어 있다. 툇마루는 방과 산중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이다. 산중의 풍경이 보다 가깝게 다가와 보인다. 물소리 바람소리도 한층 또렷하게 들린다. 자연의 소리는 시비에 찌든 눈을 맑히고 귀를 씻어준다. 강론이나 설법이 따로 없다. 내가 입을 닫고 있으니 자연이 입을 연다. 그러한 삶의 순간순간이 더욱 투명하고 절절하게 다가온다. 산중생활의 맑은 행운, 정복(淨 福)이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 아닌 새날이다. 겉으로 보면 같은 달력에 박힌 비슷한날 같지만 어제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사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 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나태와 노쇠와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숨 쉬고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짐승이나 다를 게 없다. 보다 높은 가치를 찾아 삶의 의미를 순간순간 다지고 그려냄으로써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피어남이다. 이런 탄생의 과정이 멈출 때 잿빛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삶을 소유물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이니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수 있어야 한다. 새롭게 발견되는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나는 오두막에 살면서 내 자신을 만나고 되찾게 된 것을 무엇보다 고맙게 여긴다.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짐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속에 사는 홀가분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이 순간에 있는 그대로 사는 사람한테는 사슬이 없다. 기억의 사슬도 없고 욕망의 사슬도 없다, 시냇물이 흐르듯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비슷비슷한 되풀이 같지만 적어도 현존재인 이 육신을 가지고서는 단 일회적인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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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에 존엄하다. 존귀한 삶이 밝고 당당한 경우는 빛이 나서 이웃에까지도 두루 환하게 비춘다. 그러나 어둡고 병들어 있다면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도 암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따뜻한 말을 나눈다든가 눈매를 나눈다든가, 일을 나눈다든가 시간을 함께 나눈다든가.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사는 기쁨도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외떨어져 독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다.
(갈무리 생각): 비로소 마당가 홍매화 꽃이 보인다. 백매화 꽃도 피어 있고, 청매화 꽃은 꽃봉오리가 파랗게 부풀어 있다. 내 산방의 세 가지 매화, 삼매 향기가 귀로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문향(聞香)이라고 했을 것이다. 연못에서는 개구리들 합창소리가 절절하다. 겨우내 참았던 소리이니 그럴 것이다. 그렇다. 사람도 절절해지려면 참고 지그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순리 대로 살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정신으로 살고,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농부가 쟁기질을 하면서 눈앞의 밭을 봐야지 뒤를 돌아보면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면 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이 왜 영롱하고 아름다운지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온몸을 던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백척간두 진일보와 다르지 않다. 희비의 길 위에서 운 좋게 생존해온 나도 이제는 풀잎 끝의 이슬처럼 순간순간 온몸을 던지며 살고 싶다.
현대문명, 무엇이 문제인가?
[마중물 생각]: 급한 볼일이 생겨 서울에 다녀온 일이 있다. 한나절 시간이 나서 서울생활을 할 때 자주 찾아가 위안받곤 했던 관악산을 S대학교 정문쪽으로 올랐다. 그런데 관악산 산자락은 여기저기 망가진 채 숲이 사라지고 있었다. 불과 10여 년만인데 산자락에 S대학교 신축건물들이 자연을 무시하고 깔보듯 들어서 있었다. 이른바 학문의 전당이 자연을 훼손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니 도대체 학문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문명의 폐해는 자연의 훼손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데까지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거듭거듭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오늘날 우리들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현대인으로서 그 대열에 처지지 않으려면 지식과 정보에 어둡지 않아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지식과 정보의 양이 광대하면 오히려 거기에 매몰되어 인간이 부재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문으로 들어온 곳은 보배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바깥소리에 팔리다 보면 내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다 보면 개인의 창의력을 묵히게 되어 인간 그 자체가 시들어진다.
감정이 없는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아 있다. 둘레에는 삶의 율동과 지혜, 인간미와 흙냄새 등 현실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지식과 정보와 가상공간이 있을 뿐이다. 차디찬 정보는 있어도 따뜻한 삶의 실존이 없다. 이것은 과학문명시대라는 우리 시대의 단적인 현상이다.
우리 시대에 이르러 물리적인 풍요만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심성과 생활환경이 말할 수 없이 황폐화된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 저지른 재앙이다. 자연에서 이탈한 인간은 그만큼 부자연스럽다. 커다란 생명체인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잃으면 자연 속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인간을 깔보게 된다. 우리가 어머니인 대지에 소속되려면 먼저 그 대지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돌아가 그 품에 안길 대지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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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불편함과 모자람으로 살아가는 나는 오히려 다행한 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문명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연과 더 가까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에는 독성이 들어 있어 점진적 으로 사람을 시들게 만든다. 자연은 원초적이며 건강한 것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의지처이다.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낸 문명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그 문명으로부터 배반을 당할 때가 반드시 온다.
문명은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먹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죽이는 일을 즐기기 위해서 죽이기도 한다. 사냥이나 낚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요즘 사람들은 ‘레저’라고 한다. 여가를 이용한 놀이와 오락이라는 것이다. 당하는 쪽에서 보면 절박한 생사의 문제인데 그것을 놀이와 오락으로 즐기고 있다니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산토끼는 어린아이처럼 운다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문명에 어떻게 삶의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 암담하다. 항상 크고 많고 빠른 것과 새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인. 만족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르면서 소모적이고 향락적인 우리들. 생명과 자연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면서 단 하나뿐인 삶의 터전인 고마운 지구를 거대한 쓰레 기장으로 만들어가는 오늘의 문명에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갈무리 생각): 자신의 둘레를 배려하지 않는 염치없는 인간부재의 문명세상이 되어가고 있어 두렵고 씁쓸하고 걱정이 앞선다. 스님의 말씀을 빌지 않더라도 자연이 병들면 인간도 병들게 된다.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서로 얽혀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까. 산중에 산다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동시대를 살아 가는 사람이기에 더불어 답답하다. 산중마을의 논밭도 농약 때문에 땅이 부실해지고 있다. 농약도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산물이 분명하다. 벌레들에게는 자기를 죽이는 독약일 것이다. 논밭의 벌레가 줄어 드니 제비마저도 성미가 급해진 듯싶다. 올해는 제비가 너무 일찍 날아가 버리고 없다. 철새 중에서도 제비는 삼월 삼짇날 왔다가 구월 중양절에 간다고 하는데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내 산방 현관문 위에 살던 제비가 자꾸만 생각나 산책길에 절골 마을의 황씨 집에 가보니 거기도 제비 집이 비어 있다. 찬 서리가 내리려면 아직 멀었는데 제비들이 왜 빨리 날아가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
내가 산방 현관문을 너무 매몰차게 닫아 그랬는가 싶기도 하고, 온난화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 황씨에게 물어보았지만 선문답처럼 대답하며 웃는다. “스님허고 제비는 올 때는 알갑시라도 갈 때는 몰라불지 라우.” 미소를 짓게 하는 대답이다. 아래 절에 스님들도 어느 날 와서 공부하다가 때가 되면 구름처럼 물처럼 가버리고 없다. 그래서 운수납자(雲水衲子; 누더기를 입고 구름 가듯 물 흐르듯 떠돌아다니면서 수행하는 승려)라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갈 때를 모르는 것은 스님과 제비뿐이 아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금생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다.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갈 때를 아는 천상병 시인 같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소유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마중물 생각]: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대학 시절에 문고판으로 읽은 기억이 난다. 그가 역설한 핵심을 나는 이와 같이 이해하고 있다.
소유 지향적인 삶은 관형격이다. / 무엇의 나다. / 존재 지향적인 삶은 주격이다. / 무엇이 나다.
부처님도 어디에 종속되지 말고 자유를 향유하면서 자주적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부처님에게도 의존하지 말라고 했다. 오직 자신과 진리에만 의지하라고 했다. 게으르지 말라고도 유언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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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여야하고 순일하게 정진하면서 주인공으로 살라고 당부했다. 선사들도 그 어떤 욕망, 부(富), 심지어 대의명분이라도 노예가 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좋은 말들의 성찬, 이데올로기에 속지 말고 순간순간 깨어 있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데올로기가 약이 아닌 독으로 쓰일때 맹독인 까닭은 이성과 양심까지도 마비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우리는 ‘내 것’이라고 집착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한다. 빼앗길까 봐 어디로 새어 나갈까 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다만 한때 맡아서 지니고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아닌데 자신이 지닌 것들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얼마만한 재물이 필요할까? 개인이 쓰는 데는 한도가 있다. 그 밖의 것은 개인의 소유가 아닌 인류가 함께 나누고 누려야 할 세상의 공유물이다. 사람은 무엇이 필요하고 불필요한 것인지를 가려볼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어디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뒷받침해준다.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자기 자신 다운 삶을 조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살 줄 아는 사람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하고 만다. 돈이나 물건에 집착하면 그 돈과 물건이 인간 존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으면, 그 반대로 반드시 무엇인가 잃는 것도 있다. 모두 두루 갖추고 편리하게만 지내려고 한다면, 사람은 그 틈새에 끼여 자주적인 활력을 잃게 된다. 인간의 자존과 창의력을 지키기 위해 얼마쯤의 불편은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의 황혼기는 묵은 가지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어야 한다. 몸은 조금씩 이지러져가지만 마음은 샘물처럼 차올라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결코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간에 항상 배우고 익히면서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누구나 삶에 녹이 슨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종착점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거듭거듭 일깨워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이다음 생의 문전에 섰을 때도 당당할 것이다. 이제 나이도 들 만큼 들었으니 그만 쉬라는 이웃의 권고를 듣고 디오게네스는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결승점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그만 멈추어야 하겠는가?”
사람은 저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독창적인 존재다. 사람마다 조건이 다르고, 삶의 양식이 다르며, 그릇이 다르다. 자신의 빛깔을 지니고 진정으로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결코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과 이웃의 처지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비교는 마침내 자기 몫의 삶마저 스스로 물리쳐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의 불행을 가져온다. 비교는 좌절 감을 가져오고 시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부질없는 비교는 배움을 저해하고 두려움만 키운다.
때가 되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일몰 앞에 서게 된다. 그 전에 맺힌 것을 풀어서 안팎으로 걸림 없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 짐을 다음 생으로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날이다. 무릇 묵은 시간에 갇힌 채 새로운 시간을 등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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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침묵과 하나가 될 때 내가 사라진다. 무아의 경지에 든다. 어딘가에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내가 없는 그 무한한 공간 속에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는 에너지가 있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혼돈 상태가 아니다. 정신은 또렷하고 아무 번뇌와 망상이 없는 그침묵 속에 강물처럼 흐르는 에너지가 있다.
(갈무리 생각): 기쁠 때는 기쁨에 매달리지 말라. 슬플 때는 슬픔을 회피하지 말라. 무심코 기쁨이 되고 슬픔이 되라. 기쁨도 슬픔도 삶의 한 부분이니.
가을장마가 져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중이다. 더불어 뜬금없지만 삶의 방식을 생각해보고 있다. 미련 하게 한곳에 붙박이로 사는 농사꾼 스타일이 있고, 먹이(풀)을 찾아서 끝없이 옮겨 다니는 유목민 스타 일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두 스타일이 혼재된 경우도 있겠고, 경쟁을 좋아하지 않고 민첩하지 못한 나같은 사람은 비록 천수답일지언정 농사꾼 스타일로 사는 게 성정에 맞는 것 같다. 심신을 쉬게 한 채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점심을 먹은 뒤 방금도 아랫목에 누워 토막잠을 잤다.
머리와 눈과 가슴을 쉬게 했다. 이를 컴퓨터 용어로는 리셋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삶이 빛나는 것은 죽음이 있어서다 [마중물 생각]: 어른이 ‘죽다’라는 말을 우리는 ‘돌아가시다’라고 표현한다. 어느 지점이 아니라 또 다른 지점으로 가셨다는 뜻이다. 그 말 속에서 이 세상과의 인연이 끊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또 다른 인연으로 살아간다는 뜻이 숨어 있다. 불교 용어로는 ‘윤회하다’이다. 우리 말 속에 불교용어가 습합되어 있는 경우이다. ‘명복을 빈다’라는 문장도 ‘명부(지장보살이 있는 곳)의 복을 빈다’라는 문장의 줄임말이다. 한 종교가 문화와 역사가 되려면 5백 년 이상이 지나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 같다.
우리에게 불교문화, 유교문화, 샤머니즘 문화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 피톨 속에 정체성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다. 그의 가족이며 친척과 친구, 그와 관계된 모든 세계가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지녔던 물건까지도 빛을 잃는다.
그러니 한 사람의 목숨을 앗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죽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죽음이 없다면 사람은 또 얼마나 오만하고 방자하고 무도할 것인가. 죽음이 우리들의 생을 조명해주기 때문에 보다 빛나고 값진 생을 가지려고 우리는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그 생을 마감한다.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며 삶의 신비이다. 만약 삶에 죽음이 없다면 삶은 그 의미를 잃게 될 터이다. 죽음이 삶을 받쳐주기 때문에 그 삶이 빛나는 것이다.
사람에게 저마다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듯이 죽음도 그 사람다운 죽음을 택할 수 있도록 이웃들은 거들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찍부터 삶을 배우듯이 죽음도 미리 배워둬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들 자신이 맞이해야 할 엄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음 쪽에서 보면 순간순간 죽어오고 있는 것. 그러므로 순간순간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그것이 삶일 수도 있고 죽음의 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지 죽기 위해서가 아니다. 강물은 흘러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는 영원한 생명의 고향.
살 때는 철저히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 삶에 철저할
- 8 ?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일단 죽으면 조금도 삶에 미련을 두어서는안 된다. 사는 것도 내 자신의 일이고 죽음도 또한 내 자신의 일이니,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도 철저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꽃이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겠지만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모란처럼 뚝뚝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게 얼마나 산뜻한 낙화인가.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자신을 삶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에 두면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크게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지혜와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한다.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 다.
(갈무리 생각): 며칠 전에 메모해둔 글을 보니 내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글의 주제와 엇비슷해서 그대로 옮겨본다.
서울의 새벽 6시. 산중의 적막한 시간과 다르다. 건물의 불빛과 달리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서울에 와있음을 실감 나게 한다. 어제, 인사동마루 3층 갤러리에서 안사람 도예전의 작품들을 디스플레이하고 큰딸 집으로 온 뒤, 뚝 떨어져서 잤다. 쌍둥이를 임신한 큰딸은 지금 배가 산만 하다. 계산해보니 곧태어날 아기가 30세가 되면 나는 97세가 된다. 아내는 94세이니 혹시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도 이 세상에 없을 터. 지난달에 받은 문학상 상금은 아내가 가지고 있다가 태어날 아기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특별하지도 않고 대단한 자랑거리도 아니다. 내가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줄 뿐이다. 아니,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어찌 비할 것인가.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안경알이 흐려지는 것 같다. 인생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른다. 인생이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이어야 한다는 자각이 사무친다. 내게 남은 인생의 잔고만이라도 잘 책임지고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숙연한 생각이 든다.
생사일여가 딱 맞는 말이다. 나는 죽음을 생각했고, 딸은 쌍둥이 출산을 앞두고 있다.
2부 명상, 스님의 공감법어
인생을 영원히 사는 법 [마중물 생각]: 나는 누구인가? 가장 분명한 것은 권력도 없고 경제적인 부를 누리고 사는 사람도 아니라는 점이다. 고백하건대 그저 평생 글을 쓰고 살아갈 작가라는 것이 나의 정체성일 터이다. 아내는 가끔 남을 도와주고 싶은데, 말하자면 내가 사는 산중의 중학교에 장학금도 내놓고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이웃을 돕는 삶이 영원히 사는 비결일 것이다. 선인선과 라는 인과의 법칙을 떠나서도, 시골 산중에서는 덕을 베푼 한 사람의 칭송은 대를 잇는다. 누구네 어른의 자식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엊그제는 산중마을 농부이장이 찾아와서 신간을 서명해 선물했다. 그랬더니 중학교 시절에는 황순원과 이광수 등의 소설이 꽂힌 학급문고를 전부 다 읽었다며 좋아했다.
산중농부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도 내가 베풀 수 있는 나만의 덕이 아닐까도 싶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물질과 거창한 법문으로만 나누어 갖는 것이 아닙니다.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만 기울이면 얼마든지 이웃과 나누어 가질 수 있습니다. 저 자신이 목격한 일입니다. 지리산 자락에한 이상한 노인이 살았습니다. 환갑이 넘은 노인이 욕심 사납게 누가 뭘 버리려고 하면 다 자기를 달라고 했습니다. 노인은 깨진 그릇이든, 옷가지든, 농기구든, 주는 대로 다 긁어모았습니다. 사람들은
- 9 ?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저런 걸 가져다 무엇에 쓰려고 욕심을 부리는가 하고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노인은 혼자 살았습니다. 그런데 집 뒤에 조그마한 선반을 만들어놓고 얻어 온 물건들 중 망가진 것은 고치고, 해진 옷은 깨끗이 빨아서 기운 뒤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선반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아무거나 다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남을 돕는 것은 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마음만 내면 얼마든지 노력해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보살이라는 이름 없이 보살행을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연말이 되면 자선냄비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자선냄비 옆으로한 스님이 와서 곁에다 시주함을 놓고 종일 목탁을 치더랍니다. 자선냄비 사람들은 말은 못 하고 영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해가 질 무렵, 스님이 주섬주섬 정리하는가 싶더니 자기 시주함에서 돈을 모두 꺼내어 자선냄비에 넣어놓고 가더랍니다.
한 생각 일으키면 누구든지 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것이 많아서만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한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날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목숨의 신비가 그만큼 닳아진다는 것입니다. 그 소모되는 생명의 신비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인생은 자기 자신에게 끝이 납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인생은 이웃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갈무리 생각): 서울이나 부산 등에서 가끔 손님들이 찾아온다. 나는 주로 내가 쓴 책을 선물하거나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차 한 잔을 우려준다. 엊그제도 야당 대표를 지낸 정치인이 찾아와 차를 마시고 갔다. 전화 통화할 일이 있어서 팔순이 되어가는 은사님에게 말했더니 나에게 뭔가 지혜를 구할 일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셨다. 그러나 나에게 무슨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내가 해준 것은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차를 우려준 것밖에 없는 듯하다. 그 정치인뿐만이 아니다. 평범한 직장 인부터 수녀님, 영화감독, 교수, 사업가, 검사, 변호사, 수행자 등등 직업도 천차만별이다. 내가 어찌 경험해보지 않은 그 손님들의 세계를 다 알 수 있을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차를 우려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소중한 일이 아닐까 싶다. 향기로운 차 한 잔 권하고 손님이 화자일 때 내가 청자가 되는 것이 설령 영원히 사는 길은 아니라도 남은 생을 그런대로 괜찮게 사는 일이 아닌지 모르 겠다.
행복한 가정, 불행한 가정 [마중물 생각]: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생각하라. 이와 같이 부모의 부모님, 조상의 조상님을 잊지 말라.
<스님의 말씀과 침묵>: 제가 얼마 전에 당사자의 친구 분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올해 일흔 살 된 할아버지인데, 3년 전쯤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아파트에서 사는데 아들 내외가 아파트를 팔고 자기 집으로 들어오시면 잘 모시겠다고 몇 달 동안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들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들어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않고 지참금 같은 것을 가져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동안 지내다가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어서 아들 며느리 방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얼 찾다가 가계부가 펼쳐져 있어서 무심히 훑어보게 되었는데 ‘촌놈 용돈 2만 원’이란 기록이 보이더랍니다. 자기 시아버지한테 용돈 주는 것을 ‘촌놈 용돈 2만 원’이라고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고 그날로 그 집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 10 ?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이것은 실화입니다. 저도 이 말을 전해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가정이 해체되어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텅 빈 썰렁한 가옥만 남아 있는 집안이 많습니다. 가정이란 가족이 한 데 모여 오순 도순 살아가는 곳입니다. 밖에 나가서 지치면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고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전통적인 가정에는 가장이 있고 주부가 있고 부모님이 계시고 자식들이 있습니다.
훈김이 돌지 않으면 온전한 가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혼이 빠져 나간 몸뚱이나 다름없습니다. 가족끼리 대화가 단절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극의 싹입니다. 대화란 부르고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고 그걸 주제로 속의 말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로 살아가기 때문에 가족 간에 단절현상이 발생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가족끼리 서로 닮아 갑니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따로 삽니다.
왕이든 평민이든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이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 집에 들어와서 평온한 분위기를 누릴 수 있는 이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회의 구성요소인 가정이 해체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회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붕괴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갈무리 생각): 몇 달 전 아내가 처형으로부터 흑백사진 한 뭉텅이를 받았는데 그것을 본 적이 있다.
장인 가족으로 부모님과 사촌형제, 자식들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아내의 형제 삼남매가 각자 가지고 있던 흑백사진들만 모은 것이었다. 사진에는 일제강점기부터 70년대까지 장인가족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각자의 사진첩에 있던 흑백사진들을 한데 모으고 편집하여 아예 사진첩으로 인쇄하겠다는 것이 아내 형제의 바람이었다. 사진들을 카메라로 접사하여 업체에 보내면 사진집을 만들어주는 회사가 있는데, 값도 저렴하고 신뢰할 만했다.
나는 아내에게 흑백사진들의 사연을 들어보고는 사진에 설명을 붙여주었다. 이를테면 ‘문래동 집 앞에 서’, ‘덕수궁 미술대회에 가서’, ‘누구누구 대학 졸업식에서’ 등등이었다. 덕분에 나는 처가의 따뜻한 가족사를 비로소 알게 된 느낌이 들었다. ‘아, 한 가정의 가족이란 이런 존재구나!’ 하고 흥미를 느꼈다.
아내의 어린 시절 꿈이 화가였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덕수궁 사진을 보았던 것이다. 또 1950년 후반에 네댓 살의 아내가 선 채 찍은 자가용 지프차 사진을 보고서는 장인이 원래는 큰 부자였다는 사실도 알았다. 처할머니 환갑잔치 사진에는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과 미풍양속이 오롯이 드러나 있었다. 흑백사진들은 처가의 가족사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내와 상의한 끝에 일러스트를 전공한 둘째딸에게 보내 시간이 걸리더라도 흐릿한 사진들을 보정한뒤 디자인적으로 담백하게 편집하기로 했다.
어제 아침에 사진보정과 편집이 다 되었는지 딸에게는 전화가 왔다. 편집을 하다 보니 빈 공간이 있는데 가족에 대해서 한 마디 금언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전화였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써서 메일로 보냈다.
허공의 물방울들이 / 개울에서 만나 강을 이루고 / 산과 들, 그리고 대지를 적신다. / 가장 넓은 자비의 바다를 이룬다. / 가족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 가족의 역사란 그런 것이다.
3부 스님의 명동성당 특별강론
- 11 ?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마음에 영혼의 메아리가 울리려면 우리는 필요한 욕망의 차이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욕망은 자기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입니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하나마저 잃게 됩니다.
내가 선물 받은 예쁜 다기가 있어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만 여행 중 똑같은 다기가 있어 구입해 왔더니 처음의 예쁘고 살뜰한 맛이 없어졌습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물건만이 아닙니다. 애인이 둘이 되면 하나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은 소극적 삶의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길입니다. 물건에 집착하면 그 물건이 인간 존재 보다 소중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비싼 물건 사다 놓고 친구들 불러 뽐내고 자랑 치다가 가정부가 깨뜨 려버렸습니다. 그러면 야단이 납니다.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 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청빈의 덕입니다.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끔 언론에서 인터뷰를 할 때 스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개인적인 소원은 보다 간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어린 시절부터 책상 앞에 ‘대통령’이라고 써서 주문을 외웠다고 합니다. 저는 부엌 벽에 ‘보다 단순하고 보다 간소하게’ 이렇게 낙서를 해놓았습니다.
단순함과 간소함이란 본질적인 세계입니다. 단순과 간소함이란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필요 불가결한 것, 꼭 있어야 할 것만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단순과 간소입니다. 복잡한 것들을다 소화하고 나서 어떤 궁극에 다다른 경지, 그림으로 치면 수묵화 같은 것입니다. 그 먹은 단순히 검은 빛이 아닙니다. 그 속에 모든 빛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자면 침묵의 세계이며 텅빈 충만의 경지입니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과 간소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 하지 텅 비울 줄을 모릅니다. 텅 비어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립니다. 텅 비어야 거기에 새로운 것이 들어갑니다. 한 생각 버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때 거기에 어떤 영혼의 메아리가 울립니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를 얼핏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어도 기죽지 않고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신의 사람이고 청빈의 화신입니다. 그것은 모자람이 아니라 충만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욕심은 부리는 것이 아니고 버리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린 수행자는 후세에까지 영원히 빛을 발합니다.
제가 가난을 강조하는 것은 궁상스럽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넘치는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삶을 옛 스승들의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보자는 뜻입니다.
청빈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생활 방편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고두고 배우며 익혀가야할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생활 규범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촌에는 우리가 나누고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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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어려운 이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자원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간디의 말처럼, 청빈의 상대개념은 부자가 아니라 탐욕 입니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나누어 갖는다는 뜻입니다. 탐(貪) 자는 조개 패(貝) 위에 금(今) 자를 씁니다. 빈(貧) 자는 조개 패(貝) 위에 나눌 분(分) 자를 씁니다. 과거 중국에서는 조개껍데기가 화폐의 기능을 했습니다. 화폐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 탐욕입니다. 손에 쥔 화폐를 나누는 것이 청빈입니다. 가난이라는 말은 나누어 갖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가난이 없었다면 나누어 가지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가 가난을 겪어봄으로써 이웃의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논리를 빌리자면 가난은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과 나누어 가질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 올리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경제위기는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지 않고 높이 들어 올리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이웃들과 나누어 갖는 뜻을 거듭거듭 생활화시켜야 합니다.
- 13 ?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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