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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집을 위한 인문학

by Casey,Riley 2020.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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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낮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고 사람들과 부대끼고 피곤했어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집이란 거친 세상에서 가족을 보호해주는 안온한 덮개다. 집은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처럼 헐렁하고 편안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추억이 들어 있는집, 기억이 묻어 있는 집,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 가족의 생활이 담기는 집, 일상복처럼 편안한 집이 정말 좋은 집이 아닐까? 집은 사는 사람이 자신의 몸에 맞게 손보고 고치며 다듬어가는 공간 이다. 『집을 위한 인문학』은 노은주, 임형남 부부가 그동안 만났던, 좋아하는, 함께 지었던 집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이야기다. 
 
집을 위한 인문학 
 

▣ Short Summary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넓게 보면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고 흔적이고, 그것이 인문학일 것입니다. 그흔적은 명확하게 궤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늘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고 길을 잃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만들어집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함께 터키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가족 여행으로는 가장 먼 곳으로 가장 오랫 동안 다닌 여행이었고, 인류의 오래된 유산이 가득한 고대도시를 여러 곳 둘러보는 대단한 여정이었습 니다. 부모가 모두 건축가이다 보니 아무래도 여행을 다닐 때 남들보다는 건축물이나 도시의 풍경을 좀더 꼼꼼히 들여다보는 편이라, 휴식 시간까지 줄이며 바쁘게 아이들을 끌고 다녔습니다. 
 
옛 실크로드 상인들의 휴게소였던 카라반사라이, 2만 명이 넘게 살았다는 지하도시 데린쿠유, 그리스 식민지 시절부터 문화가 융성했던 에페수스의 고대 도서관 등 참 볼 게 많았던 여행이었지요. 그러나 아이들에게 건축의 내력이나 양식 같은 뭔가 교육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둥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길거리에 편하게 드러누워 있는 귀여운 고양이나 개들에게 눈길을 더주었습니다. 우리는 보라는 달은 안 보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며 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지나 우연히 아이가 남긴 그때의 여행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장래 희망에 대한 생각을 적어내는 과제였나 본데, 그 여행에서 보았던 거리 풍경, 사람들에 대한 감상을 사진과 글을 통해 표현하며 시간을 기록하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했더군요. 단순히 아이의 겉모습만을 보고 관심 없어한다고 속단했던 것이 조금 미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방식이 평소 우리가 말하는 어투와 비슷해져 어쩔 수 없는 가족이구나, 부모의 생각과 함께한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삼삼한 소금간 뿌리듯 아이들에게도 배어들었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는 간혹 지식 중에는 주워들은 지식이 최고라 
 
- 2 ? 집을 위한 인문학 
 
고 말합니다. 그 지식이 실천되는 지점을 스스로 깨달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은 무엇으로 지을까요? 물론 집은 콘크리트로 짓고 나무로 짓고 혹은 철과 유리로도 짓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 대해 어떤 재료로 내부와 외부를 덮을까, 가구를 어떻게 놓을까. 방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만들까 하는 부분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집은 그런 물리적인 요소 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집 구석구석에 배어든 사는 사람의 생각과 온기입니다. 
 
건축가로서 누군가의 집을 짓기 위해 많은 분을 만나고 오래 이야기를 나눕니다. 늘 정답이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막막하기만 하던 빈 땅에 선이 그어지고 벽이 올라오고 지붕이 덮이기까지의 과정은 낯선 골목에서 여기저기 들어가 보고 되돌아 나오며 마침내 출구를 찾을 때까지 헤매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누가 정의해주고 알려주지 않아도 단편적인 이야기들과 지식들을 모아 큰 줄기를 이루는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해나갑니다. 
 
말하자면 집은 생각으로 짓고 시간이 완성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은 것입니다. 집에는 가족이 나누던 온기와 생활의 흔적과 집에서 펼쳐질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담깁니다. 혹 사람들이 집을 떠나거나 그 집이 여러 가지 이유로 사라지게 되더라도, 그 집에 쌓인 시간과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생각은 그대로 남게 됩니다. 그렇게 집은 생명력을 얻고 영원히 기억됩니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만났던, 좋아하는, 함께 지었던 집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이야기입니다. 
 
▣ 차례 
 
책머리에 
 
제1장 가족을 품은 집행복의 향기가 있다 / 손때와 추억이 묻어 있다 / 가족의 삶을 담아내다 삶의 여백을 즐기다 / 평온한 아름다움을 간직하다 
 
제2장 사람을 품은 집부대끼며 살아온 흔적이 있다 /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집시인의 집은 시다 / 주인의 성품을 닮는다 / 고정관념을 깨다 
 
제3장 자연을 품은 집이상적인 지혜에 이르다 / 수직과 수평이 조화를 이루다 경계와 경계를 넘나들다 / 자연을 즐기다 / 자연의 질서, 인간의 질서 
 
제4장 이야기를 품은 집집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 집은 사람이 살면서 채워진다 / 집은 희망으로 짓는다 우리의 정서와 정신을 담아내다 / 비움과 채움의 삶의 풍경 
 
- 3 ? 집을 위한 인문학 
 
 
제1장 가족을 품은 집 
 
행복의 향기가 있다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다: 건축가인 나에게 건축은 즐거운가? 그렇다. 머릿속에 있는 희미한 구상이 물리적 실체로 서서히 나타날 때, 초음파 사진에서 외계 생명체와 같던 존재가 점점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듯한 탄생의 과정이 숨어 있다. 그런 존재의 발현은 인간에게 놀랍도록 아름다운 순간이다. 
 
나는 집이라는 것이 그런 의미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 집이라는 구체적인 실체에 담겨질 때의 감동, 땅이라는 보편적인 환경에 점을 찍듯 자신의 어떤 자취로 만들어지는 경이, 그런 느낌이 집을 짓는 즐거움이며 의미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런 의미와 생각이 시간의 파괴 작용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남을 때의 감동이 더해지면, 집짓기란 인생에 걸쳐 가장 의미 있고 즐거운 행위가 되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부동산으로서 경제적 가치보다는 가족의 안식처로서 집, 그 본연의 가치를 생각하며 설계를 맡기는 사람이 늘고 있음을 실감한다. 물론 교외에 나가 자연과 가까이 살고자 하는 사람도 많지만, 일터가 있는 도심 한복판에서 절묘한 해법을 찾는 사람도 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은 큰길을 사이에 두고 협곡처럼 두 개의 언덕이 골짜기를 이루며 마주 보고 있다.
서쪽은 북한산을 기대고 있으며 비교적 크고 호화로운 집들이 자리 잡고 있고, 북악산과 의왕산을 기대고 있는 동쪽 언덕은 상대적으로 경사지의 규모가 작고 오래된 집들이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어느날 이 동네에 집을 짓겠다며 어떤 부부가 찾아왔다. 신혼살림을 평창동에 있는 주택에서 시작했는데, 살다보니 동네가 마음에 들어 적당한 땅을 찾기 위해 꽤 오랫동안 발품을 팔았다고 한다. 
 
집을 지을 땅은 평창동 동쪽 언덕에 있었다. 지어진 시기와 공사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집들이 가파른 경사지 위에 앉아 있는 동네의 제일 안쪽에 있었고, 경치가 무척 좋았다. 사방으로 장엄하게 펼쳐진 북한산의 모습은 중간중간 집의 앞과 옆으로 지어진 연립주택들로 인해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언제 부서졌는지 원래 이 땅에 있었던 집의 잔해가 땅을 다 덮고 있었고, 잡초가 무성했다. 경사가 심해 접근이 어렵고 얼핏 험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그동안 아무도 여기에 선뜻 새로 집을 짓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가 아닌가 싶었다. 
 
나는 땅을 보고 나서, 그들이 살고 싶은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설계를 시작했다. 프로그램은 단순했다. 아내는 돌보고 있는 고양이 세 마리와 개 한 마리가 함께 지내기에 편리한 공간이기를 원했고 (모두 유기되었던 동물들을 데려왔다고 한다), 남편은 그리 넓지 않더라도 수영을 할 수 있는 풀장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나중에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을 2층으로 올리고, 부부의 침실과 식당과 거실 등의 공용 공간과 적당히 분리하고 싶다고 했다. 
 
밖을 향해 열린 곳과 닫힌 곳이 너무 명확하고 접근 방향도 너무나 뚜렷해서 집을 계획하는 것은 정해 
 
- 4 ? 집을 위한 인문학 
 
진 길을 걷는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있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집의 덩어리를 ‘ㄱ’자로 꺾고, 풀장과 중정(中庭)을 끼워 넣고 그 안에 작은 뜰을 만들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의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두고, 삼면이 열려 있는 거실로 가는 동선의 중간에 독립적인 주방을 끼워 넣었다. 안방은 후정(後庭)을 끼고 다양한 풍경을 보며 걸어가는 긴 복도 끝에 자리 잡았다. 그 침실은 문을 열자마자 어긋하게 연결된 풀장과 곧바로 연결되고, 멀리 북한산의 풍경이 물에 비친다. 그 빛은 다시 안방의 천장으로 반사되어 어른거린다. 
 
설계는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다만 공사 과정에서 언덕 끝자락에 매달린 집의 주변을 정리하는 일과 마음 약한 시공자의 느슨한 마무리와 행정 절차의 이유 없는 지연이 우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늦어지는 건축 일정에도 당차게 해법을 같이 고민하며 흔들리는 기색 없이 버텨낸 건축주의 태도는 놀랍 고도 고마웠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과정의 괴로움은 뒤꿈치로 북북 지워버린 땅 위의 낙서처럼 희미하게 사라져버리고, 그들 앞에 이제는 즐길 일만 남았다. 
 
일이 마무리될 무렵 건축주로부터 전화가 와서 집의 이름은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는 집, ‘요산요수(樂 山樂水)’로 정하고 싶다고 했다. 왜 안 되겠는가. 어렵고 괴롭고 슬플 수도 있는 여건을 불평 없이 참아내며 심지어 즐겨가며 집을 짓고, 이제는 수확을 앞둔 농부처럼 집에서 살아갈 여러 가지 즐거운 미래를 생각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놀다: 가족이 변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부모와 큰집, 작은집 등이 모여 살던 대가족이 현대로 들어서며 부모와 아이가 사는 핵가족으로 바뀌더니, 요즘은 아예 부부만 살거나 한부모와 아이, 혹은 혼자 사는집 등 1~2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이겠지만, 막대한 사교육비와 불안한 육아 환경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늘어난 것도 큰 요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관통했던 20세기 후반도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족이 변했고 집이 변했다. 물론 살았던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나처럼 서울 시내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은 훨씬 다이내믹한 주거의 변천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ㄷ’자 형식으로 생긴 도심형 한옥에서 자랐고, 서울 외곽의 신흥 주택 지역의 ‘집장사 집’에서 살아보았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비 온 다음에 죽순 자라듯 서울 전역을 무섭게 뒤덮었던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 우리나라 주거 문화의 절정인 아파트까지 모든 형태의 주거 형식을 다 겪어보았다. 그 무렵 주택을 정주의 개념이 아닌 유목민의 텐트처럼 여기고 언제나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도시 유목민의 라이프스타일이 생겨났다. 그리고 4~5인 가족을 기준으로 삼은 집의 규모가 지난 40여 년간 실시된 주택정책의 근간이 되어왔는데, 최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가족 구성원의 변화로 인해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국민주택의 규모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전남 나주혁신도시는 참여정부의 공기업 지방 이전 정책에 의해 여러 공공기관이 새 사옥을 짓고 그에 따른 주거시설과 상업시설이 들어서며 새로 만들어진 도시다. 많은 사람이 서울을 떠나 이사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원래 도시라기보다는 농업이 주된 산업인 이곳이 몇 년 사이에 인천 송도나 행정수 도인 세종시 못지않은 큰 스케일의 도시로 거듭났다. 
 
그러나 나주역에서 내려 현장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는 그런 번화함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 
 
- 5 ? 집을 위한 인문학 
 
다. 서울에서 살다가 회사를 따라 나주로 이사 온 한 가족의 집을 설계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군데 새로 지어진 아파트 대신, 이왕이면 마당이 있는 집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싶었고, 나무도 심고 정원도 가꾸고 싶어 했다. 
 
계획도시 한복판에 조성된 택지는 역사나 전통과는 거리가 먼, 논과 밭을 갈아엎어 만든 곳이었다. 멀찍이 언덕에 과장된 형태의 전망대가 있고, 주변에 잘 드는 칼로 잘라놓은 두부처럼 택지들이 매끈한 단지 도로를 끼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놀이터가 있고 평평하고 편안한 땅이었지만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땅의 흔적과 땅의 에고를 뭉개놓은 택지 앞에서는 항상 좌절을 느낀다.
땅이 가진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아야 하는데 흘러나오는 박자가 없다. 그런 곳에서 건축을 하는 것은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고 귀를 막고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아주 난처하다. 그러나 우리는 집을 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력이라는 것을 꺼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인간에게 상상 력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 
 
즐거운 작당을 꾸미다: 이 집 역시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이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주택을 마련 하기로 한 전형적인 4인 가족을 위한 집이다. 조용하지만 무척 결단력이 있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아빠와 늘 웃는 얼굴을 한 명랑한 성격의 착한 엄마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에너지가 넘치는 두 아이가 살집이었다. 핵가족이라 부르는 두 세대가 사는 집이며, 엄마ㆍ아빠ㆍ딸ㆍ아들 네 식구가 사는 집. 무언가 가장 표준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화수분처럼 집의 재산을 늘려줄 것이라고 기대해왔던 아파트에서 가족이 구상하고 가족이 정주하는 집을 짓는다는 것은 좀 달라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집의 이름을 ‘적당과 작당의 집’이라고 미리 정해서 왔다. ‘적당’하다는 것은 넘치지 않도록 중용을 지킨다는 의미일 것이고, ‘작당’은 가족들끼리 화목하게 즐거운 모의를 하겠노라는 선언으로 들렸다. 평이한 듯하지만 비범한 두 개의 단어를 갖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의 가족 구성 에는 다소 넘치는 공간을 두 개 층에 만들었다. 어린 두 남매와 함께 즐겁게 지내기 위한 공간을 다양 하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와 같은 방에서 살다가 성장하면 독립할수 있는, 가족 간에 적당한 거리를 부여하는 집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은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가족이 모여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희미 해져가는 부모와 자녀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마지막 단위의 집을 만들며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다소 축소된 의미일지라도 집이란 가족에게는 거친 세상에서 보호해주는 안온한 덮개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전처럼 대를 이어가며 살게 될 집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가 집을 짓는 과정을 부모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기억하는 집이 될 것이다. 
 
평온한 아름다움을 간직하다 집은 일상복처럼 편안해야 한다: 건축 강연을 하거나 혹은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은 “좋은 집은 어떤 집인가?”가 아니다. 애석하게도 “집을 짓기 위해 돈이 얼마나 드나요?”(사실은 “평당 얼마예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듣는다. 물론 이 질문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전개되다 보니 집의 의미가 돈과 결부되는 여러 가지 조건과 환금성, 투자 가치 등으로만 환산되는 것 같아 씁쓸해지는 것도 어쩔수 없다. 그래서 집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고 우리의 삶을 담은 아주 소중한 곳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래서 대체 얼마나 드는데?’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참으로 우울해지다 
 
- 6 ? 집을 위한 인문학 
 
가 결국은 슬퍼지는 우리 현실이다. 
 
나는 사람들이 지루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회가 되면 늘 이야기한다. “건축은 산업이기도 하고 공학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화입니다. 그중에서도 집이란 문화로서의 건축에서도 가장 활짝 피어나는 꽃이며 정화(精華)이기도 하고요.” 문화라는 것, 혹은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문학이라는 것또한 알고 보면 그저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문화란 편안한 것이고 매우 유쾌한 것이다. 어쩌다 간혹 성의 있는 사람이 “어떤 집이 좋은 집인가요?” 하고 물어보면 나는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좋은 집은 가족의 생활이 담기는 집, 일상복처럼 편안한 집”이라고 말한다. 
 
집이란 우리 생활이 담기는 곳이고 그러므로 편안해야 한다. 집은 우리가 앉거나 누워서 쉬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는 곳이다(실은 대개 텔레비전을 본다). 그런 공간에서 빳빳하게 다려낸 듯한, 이를테면 유명 디자이너가 패션쇼 무대 위에서 걸을 때 입는 용도로 디자인한 옷을 입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집이란 우리에게는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처럼 헐렁하고 편안해야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집이 있다.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집도 있고, 모든 사람이 꿈꾸는 집도 있고, 돈으로 쌓아놓은 듯한 집도 있다. 20세기 현대건축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지었 다는 ‘빌라 사보아’는 현대건축의 새로운 어휘를 정립한 걸작이다. 지금도 관광객과 건축가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가는 집이지만, 시공상의 여러 문제로 정작 집주인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의 대표적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크트 설계한 ‘낙수장’ 역시 미국의 보물로 여겨지고 많은 사람이 찾아가는 명소다. 새로운 건축의 지평을 열어준 집이지만, 집의 설계를 의뢰한 건축주인 에드거 카우 프만이라는 사람은 시끄러운 폭포 소리와 실험적 건축의 대가로 생긴 크고 작은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 다고 한다. 
 
역사에 길이 남고 건축의 영원한 고전으로 추앙받는 이 집들은 과연 ‘좋은 집’일까, 아니면 나쁜 집일까? 우리는 어떤 곳에 가치의 기준을 맞춰야 할까? 역사적 의미나 건축적 성과를 떠나서 나만의 기준 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길옆으로 피어난 들꽃같은 집들을 좋아한다. 말하자면 어느 동네에나 흔히 있는 민가들, 어떤 특정 시대의 양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 하며 동네의 노동력으로 지은 집이다. 이러한 집에는 생활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생각이 스며있다. 이 집은 거칠고 순박하지만 마음을 흔들어대는 감동을 준다. 나는 그런 건축, 일상이 만들어내는 그런 집들을 위대한 건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대로 문화이며 그대로 인문학이기도 하다. 
 
제2장 사람을 품은 집 
 
주인의 성품을 닮는다 집은 얼마나 커야 충분한가?: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필생의 집이 있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뛰어넘는다. 현대건축의 기틀을 만들었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만년에 바닷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쉬면서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던중 세상을 떠났다. 
 
사실 르 코르뷔지에의 건물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의 만년에 대해서도 사실은 얼마 전 TV에서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잠깐 봐서 알게 된 것이다. 
 
- 7 ? 집을 위한 인문학 
 
바다에 인접한 경치가 아름다운 언덕에 오두막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야외에서 이웃들과 웃으며 이야 기를 나누는 70대 후반의 르 코르뷔지에의 사진이 흘러갔다. 어떤 꼬마와 그 가족과 둘러앉아 햇살이 가득찬 정원에서 환담하는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과는 무척 달라 어색하기까지 했다. “어느날 그는 여느 때처럼 바다로 수영을 나갔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그의 나이 일흔일곱이었 다”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작은 집을 짓고 바다를 보며 종이에 휘갈긴 스케치를 벽에 덕지덕지 붙여놓고 수영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르 코르뷔지에. 무언가 탈속한 신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그렇게 많은 건물을 설계하고, 그가 설계한 건물 하나하나가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00 년이 넘게 추앙받고 있는 위대한 건축가가 마지막으로 지은 집이 자신을 위한 허름한 오두막이라니… ….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몸짓이었을까? 
 
르 코르뷔지에의 작은 집은 1951~1952년 사이에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나무가 우거진 절벽에 지어 졌다. 최소 크기의 공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조립식 오두막은 4평(13.4제곱미터) 남짓 된다.
공교롭게도 이 크기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지었던 월든 호숫가의 집 크기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한 사람이 거주하는 데 필요한 최소 면적이라고 규정하는 규모이기도 하다. 이 집은 르 코르뷔지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지은 유일한 집으로, 마침 친구가 근처에서 레스토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부엌을 아예 설계하지 않았고, 먹고 자고 기도하기 위해 지어진 수도사의 거주 공간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의 다른 몇몇 작품과 함께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집의 이름인 ‘카바농’은 오두막 이라는 뜻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의 기원, 즉 아주 기본적인 것만을 갖춘 원초적인 오두막이자 그가 건축에 대해 꿈꾸고 생각했던 장소로서 작은 집을 만들었다. 
 
제3장 자연을 품은 집 
 
자연을 즐기다 오뚝한 산과 유장한 물을 품다: 영양군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으며, 울릉군에 이어 우리나 라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적고 육지에서는 첫 번째로 인구가 적은 행정구역이라고 한다. 볕이 좋아 맵싸하고 달콤한 이 고장 특산물 영양고추가 잘 자라는 곳이며, 인물도 많이 나온 곳이다. 
 
나 또한 나름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 헤집고 다녔다고 자신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영양과는 인연이 닿지 않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꼭 가보리라 여러 해 다짐하다가 몇 년 전 어느 토요일 새벽에 무턱대고 눈을 비비며 차를 몰고 떠났다. 일단 영양으로 가는 명분은 서식지와 사월종택을 보기 위해서였다. 서식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이고, 사월종택은 반가의 품위를 보여주는 집으로 그 명성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영양이라는 땅의 생김새가 궁금하기도 했다. 
 
직업이 건축가이다 보니 많은 땅을 만난다. 여기서 땅이란 의미는 산과 물과 하늘과 흙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말한다. 그리고 땅은 사람처럼 고유의 성질이 있고 품이 다르고 성질도 제각각이다. 잘생긴 땅도 있고 험상궂은 땅도 있고 순박한 땅도 있고 영리하고 냉정한 땅도 있다. 혹은 사람을 반기기도 하고 문전박대를 하기도 한다. 눈치가 있다면 그것을 알아야 하고 적당히 비위도 맞춰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대책 없이 쳐들어가고 아무 생각 없이 말뚝을 받고 자기 땅이라고 우기다가 큰코다치기도 한다. 사람의 역사라는 것이 사실은 땅과 어우러져서 살아온 역사가 전부다. 사람과 땅사이에는 오랜 역사와 친분이 있지만, 땅과 친해지고 땅과 화합하는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다. 
 
- 8 ? 집을 위한 인문학 
 
땅은 사람을 고른다. 맞는 사람을 고르고 자리 잡게 한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그 땅으로 들어가서 진심으로 섬기면 그곳에서 별 문제 없이 잘 살게 되고, 사람들이 그곳을 명당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은 땅이나 나쁜 땅을 찾지 말고 나에게 맞는 땅을 찾으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준다. 그곳이 바로 당신에게는 명당이라고……. 
 
나도 땅을 찾는다. 내게 맞는 땅 혹은 내가 들어가서 살고 싶은 땅. 흘끔흘끔 길을 다니다가 차에서 내려 흙을 만져보고 바람을 맞아보며 측정하는데, 사실 여기저기 좋은 땅은 참 많이 있다. 부동산적인 가치는 잘 모르겠고, 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처음 갔을 때의 인상이다. 그렇게 본땅 중에서 내가 가장 살고 싶었던 곳은 진평왕릉에서 선덕여왕릉으로 가로질러가는 경주 낭산 어귀의 어느 동네였는데, 땅이 호방하면서도 포근한 것이 나를 기다리는 땅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곳에 필적하는 좋은 땅을 영양에서 보았다. 산이 오뚝하지만 사람을 짓누르지 않고 물이 유장하면서도 사람을 겁박하지 않으며 땅이 맑고 공기가 투명한 곳이었다. 
 
경계를 알 수 없는 정원: 영양을 찾아간 날은 다행히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차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산들의 풍경이 아주 장엄했다. 서안동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가자, 갑자기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 다른 차원의 정적이 차 안까지 스며들었다. 영양으로 접어들며 제일 먼저 산허리를 크게 휘어감는 강 옆에 우뚝 서 있는 신라시대에 누르스름한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아놓은 오층석탑 (봉감모전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조금 더 가서 영양 읍내에 들어가기도 전에 문득 서석지가 나왔다. 
 
서석지는 17세기 초반에 정영방이라는 사람이 공부하고 손님을 맞는 별서(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 공간으로 조성한 곳이다. 마을 초입의 조금 높은 대지에 물길을 내어 연못을 조성하고, 그 연못 동쪽과 북쪽에 크고 작은 건물 두 채를 앉혔다. 그리고 그 뒤에 옆으로 부속채가 있다. 그것이 서식지의 전부다. 서식지(瑞石池)는 ‘상서로운 돌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공간의 주인공은 한가운데 있는 네모진 연못이다. 그래서 이곳은 건축보다는 정원으로 유명하다. 
 
책을 읽고 세상을 보다: 정영방은 경북 예천 사람이다. 그는 예학의 종장이며 병산서원과 대산루 등명건축을 만들었던 우복 정경세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낙향 해서 살며 유유자적했다. 그런 그가 고향과는 조금 떨어진 영양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처가인 무실을 오가며 눈여겨보았던 장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낮은 담과 건물 두 채가 직교하고 있는 서석지는 겨울이라는 계절에 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꽃이 피고 잎에 물이 도는 봄이나 은행나무 단풍이 그토록 화려하다는 가을에 와야 하는 곳에 겨울에 간 것은 한적함을 기대해서였는데, 도착하고 보니 그런 정취는 없을 듯했다. 담의 옆구리에 슬그머니 붙어 있는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서식지의 네모난 연못이 보이고 건너편 사우단이 보이고 그 뒤로 정영방이 책을 읽던 서재 주일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주일재 앞에서는 두 사람이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다가 나를 반기며 불을 좀 쬐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래도 햇볕이 나서 좀 낫다며 뒤로 돌아가서 바라지문을 열고 연못 쪽을 살펴보라고 정보를 주었다. 
 
나는 불을 쬐며 사우단을 바라보았다. 서쪽으로 열린 전망을 원경으로 삼고 서석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연못을 근경으로 삼으며 연못과 주일재 사이에 작은 단을 만들어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심어 ‘사우단’이라 이름 붙인 것인데, 한겨울이라 그 위세를 알 수 없었다. 
 
- 9 ? 집을 위한 인문학 
 
주일재 앞에 몰려 있는 60여 개의 서석에 각기 이름을 붙여 꽃밭에 꽃을 심어놓듯 의미를 심어놓은 풍경이 절경인데, 물이 마르고 바위만 그 성질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 옆으로 400년 된 은행나무처럼 팔을 활짝 펴고 활달하게 웃고 있는 경정을 보았다. 경정은 주일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다. 그리 넓지 않은 부지를 은행나무 거목, 연못과 더불어 가득 메우고 있는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반규모에 날개를 활짝 편 새처럼 팔작지붕으로 지어놓았다. 그리고 1칸씩 두 개가 있는 온돌을 제외하면 전체가 마루로 되어 있어 사실은 누마루 같은 공간이다. 
 
그런데 건물의 크기에 비해 출입이 매우 제한적이다.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측면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전부다. 그리고 연못 쪽으로는 계자난간이 둘러쳐져 접근이 불가능하다. 즉, 경정은 연못을 바라보기만 할 뿐 다른 행위는 불가능한 공간이다. 보통 누마루를 둘렀다고 해도 건물 전면으로 폭이 좁아도 약간의 여유가 있는 법인데, 이곳은 단호하게 그런 관계를 단절했다. 주인의 의도가 명확히 보이는 구성이다. 아주 간결하고 단순한 동선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동까지 제한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연못은 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끌어들이는데, 들어오는 수문을 읍청거(맑은 물이 흐르는 도랑)라고 하여 주일재 옆에 두고, 물이 나가는 곳은 토예거(더러움을 토하는 도랑)라 이름 붙여 서식지로 들어오는 문 앞에 두었다. 지형과 방향을 고려해 집을 배치했지만, 주일재에서 나와 경정으로 물이 빠지는 구성은 공간의 균형을 잡고 주인의 위치를 나타내는 숨겨진 의도로 보인다. 손님들은 물이 나가는 토예거를 지나서 경정에 오르고 그 위에서 구경하고 자연에 대한 공경을 표하면 되는 것이다. 
 
주인의 공간인 주일재는 마루 1칸, 방 2칸의 아주 단출한 건물이다. 직교하며 이웃한 경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몸짓을 하고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은 그곳을 부속 공간 정도로 볼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바로 주인의 공간이고 화려함의 안쪽 깊숙이 숨겨놓은 공간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디테일이 숨어 있는 서석지는 주일재에서 책을 읽고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자연을 완상하는 겸손한 주인의 오롯한 정원이다. 
 
제4장 이야기를 품은 집 
 
우리의 정서와 정신을 담아내다 ‘고희동 가옥’에서 가졌던 의문: 건축사무소에서 하는 일이란, 절반은 실제로 지어지는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고, 절반은 지어질지 모르는, 지어질 수도 있는 건물에 대한 꿈을 그려주는 것이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주로 가능성을 검토하는 일이라 어찌 보면 현실을 살짝 아름답게 포장하고 조금 과장하면서 상상력을 총동원해 보는 사람이 즐거워지고 지어야겠다는 ‘구매 욕구’가 생기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궁리를 한다. 
 
1990년대 중반, 아직 독립하기 전 한 건축사무소의 직원으로 일하다 보았던 ‘그 집’도 그런 과정 속에서 만나게 된 집이었다. 어떤 사람이 창덕궁 옆 원서동에 있는 조금 넓은 땅에 커다란 ‘빌라’를 한 채짓고자 했고 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상사에게서 전해 듣기만 했을 뿐 그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어떤 집을 원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현장에 가서 보고 조사하는 것이 설계의 가장 기본적인 순서다. 
 
이튿날 낮에 원서동으로 향했다. 지금이야 동네가 깨끗해지고 멋들어진 찻집도 많이 생기고 길도 꽤넓어졌지만, 그때는 사실 ‘뜨기’ 조금 전이었던지라 동네가 아주 수더분했다. 창덕궁 담을 끼고 한참 
 
- 10 ? 집을 위한 인문학 
 
걸어서 들어갔는데, 길이 거의 끝나가는 부근에 집 지을 땅이 보였다. 빈터는 아니고 벽돌로 길게 담을 쌓아놓은 집이 한 채 있었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언제 사람이 살았는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 오랜 시간 사람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산 듯한 집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그저 ‘북촌에 있는 평범한 한옥이겠지’라고 생각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들어서니 바로 현관이 나왔다. 한옥에 현관이 없는 것도 조금 특이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더 특이한 공간이 펼쳐졌다. 한옥과 양옥, 일본식 집의 형식이 교묘히 섞여 있었다. 외관은 한옥이었고 전체적인 골격도 한옥이었지만, 지었던 사람 혹은 살았던 사람의 독특한 기호와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특이한 집이었다. 내부 공간의 구성도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한옥의 구성과 달랐고, 타일 등의 현대적인 재료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집은 그런 재료들을 위해 설계된 것처럼 자연스러 웠다. 
 
나는 새로운 설계를 하는 것 이상으로, 그 ‘한옥’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스케치를 했다. 그리고 그 땅에 여러 세대가 들어가 수익을 많이 올릴 수 있는 3층짜리 평범한 빌라를 설계했지만, 결국 그 일은 더는 추진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그 일을 잊고 살았는데, 몇 년 후 내가 독립해 내 사무소를 열었을 때어디선가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고희동 가옥’이 헐릴 위기라는 소식이 화제가 되어, 관련 기사를 자세히 읽다 보니 몇 년 전 내가 들어가 보았던 바로 그 이상한 한옥이었다. 
 
고희동이라면 서양 회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의 화가 아닌가. 그리고 그 집은 고희동이 직접 설계한 집이라고 했다. 그때서야 나는 그 집에 가서 느꼈던 여러 가지 묘한 느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집은 한옥을 기반으로 근대와 현대를 동시에 겪었던 당시의 생활 방식이 반영된 그야말로 ‘이 시대의 한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겹의 시간과 문화의 진보가 덧씌워지면서 아주 묘한 시간의 단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 한옥의 가치: 한옥에는 좌식 생활을 하던 우리 조상들, 멀리 갈 것도 없이 30여 년 전 우리의 삶이 담겼다. 방에 앉아서 밥을 먹고, 밥상을 물리면 그 자리에서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공부하고,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 깔고 자고, 비가 오면 문을 열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었다. 지붕에 가려진 태양의 빛은 흙 마당을 통해 반사되어 천장에 어른거리며 방을 환하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하고,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아야 하고,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야 한다. 그런 가구들은 주거 공간에서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우리가 지금의 입식 생활을 가지고 한옥으로 들어가면, 앉아 있는 공간은 쪼뼛해지고 답답해지고 마루는 조명 없이는 컴컴해진다. 결국 내용이 형식을 지배하고 라이프스타일이 집을 만드는 것이다. 
 
‘민가다헌’이라는 서울 경운동 수운회관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근대 초기의 한옥을 양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 있다. ‘민가다헌’은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두 아들 민병옥과 민병완을 위해 같은 모양으로 나란히 지은 집 두 채 가운데 하나다. 현재의 주차장 자리에 있던 또 하나의 집인 각심 재는 월계동으로 옮겨졌다. 
 
한옥에 현관을 만들고, 화장실에 욕실을 내부로 넣고 이를 연결하는 긴 복도를 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태의 이 집은 근대적 건축 개념이 도입된 한국 최초의 개량 한옥으로 일컬어진다. 동향으로 난대문을 들어서면 ‘H’자형(예전 식으로 말하자면 ‘工’자 형)의 본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모든 방에 채광 
 
- 11 ? 집을 위한 인문학 
 
이 잘 되도록 했고, 대청을 1칸 규모로 축소하고 별도의 응접실을 두었다. 
 
현재 북촌 등에 남아 있는 ‘ㄱ’, ‘ㅁ’자 형의 한옥들과 달리, 이 집은 전통적인 서울ㆍ경기 지방의 ‘ㄱ’자형 평면에 현대적 개념의 응접실ㆍ욕실 등을 배치한 것이 독특하다. 지금의 인테리어도 당시 집주인이 사용했던 빅토리아풍 가구를 재현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서구의 주거 형태를 도입해 우리 주택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이 집의 설계자는 건축가 박길룡이다. 사실 이 집에 굳이 ‘개량 한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현대식 건축교육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인 박길룡의 이름이 걸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박길룡은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 1980년대 말까지 있었던, 명동의 일본인 상권에 대응하는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었던 옛 화신백화점을 설계했다.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그는 경성공업전문 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20년 조선총독부에 건축 기수로 들어가 청사 신축공사에 실무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시인이자 건축가였던 이상의 선배이기도 한데, 특히 종로 일대를 중심으로 여러 근대식 빌딩을 세워 한국인 건축가로서 자긍심을 높여갔다. 또한 주거에 대한 문화ㆍ개량ㆍ위생 운동을 벌이고 신문ㆍ잡지 매체를 통해 건축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민가다헌은 그러한 그의 건축적 이념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미 80여 년 전의 건축가가 실현했듯이, 전통은 계승해야 하는 것이지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한옥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한옥이라는 이름의 상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지금의 재료와 구법에 맞는,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정신을 담는 집을 새로운 한옥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 지어지는 한옥이 가져야 할 가치다. 
 

 
- 12 ? 집을 위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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