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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무라카미 하루키

by Casey,Riley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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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파업에 관하여

이런 발언을 하면 혹시 전철로 출퇴근하시는 분은 불쾌하게 느끼실런 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말해 나는 "교통파업"이라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운수관련 노동자을 지원하고 있다거나 사회혼란을 좋아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사회혼란은 〈조금〉 좋아하지만), 단지 "평소와 다른 것"이 있으면 즐겁다는 것이다.
역이 폐쇄되어 〈쥐 죽은 듯〉하다거나 야마노데선의 육교 위에서
삼십분간 아래의 선로를 내려다보고 있어도 열차 한대 지나가지 않거나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똑같이 "평소와 다른 것"이라도, 평소에는 아무 것도 없던 곳에 
무엇인가가 있기보다는, 평소에는 무언가가 있었던 곳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마이너스상황 또는 누락상황 쪽이 내 취향인 것 같다. 따라서 교통파업 같은 게 기호에
딱 맞는 것이다. 만약에 반(反)교통파업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날은 열차의 편수가 
3배로 늘어난다고 한대도 그와 같은 종류의 비일상성(非日常性)은 그다지 나의 마음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장사를 하고 있던 시절, 교통파업이 있으면 손님이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영업적으로는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에도 파업을 아주 좋아했다.
돈이 들어오지 않는 것만큼은 괴로웠어도 파업이니까 할 수 없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이런 날은 후다닥 가게를 정리하고 인기척이 없어 텅 빈 토교의 거리를 맘껏 산보했던 것이다.
하라주꾸(原宿)에서 시부야(澁谷), 요요기(代 木)에서 신주꾸(新宿) 라는
식으로 걷고 있으면 거리 전체에 〈오늘은 휴일〉이라는

넉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어서, 
조용하기도 하고, 사람이 없기도 하여 아주 즐겁다. 왠지 모르게 〈방과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걷는 스피드도 평소 보다 한층 느긋해져버려 
"어, 느티나무의 새싹이 꽤 많이 돋았네"라고 평소에 그다지 주의를 기우리지 못했던 곳까지
문득 시선이 가기도 한다. 점심이 지나서 교섭이 타결되어 전차가 다니게 되면
크게 낙담하게 된다.
신문에 자주 "이제 파업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무슨 수를 쓰든지 해야지"라는 샐러리맨 A씨(38세)라든지,
"파업이 있는 날은 매상이 오르지 않아 생계가 막막해요"라는 따끈따끈 도시락집 주인(45세)의
발언이 실리곤 하지만, 정말로 세상은 이런 사람들만으로 되어 있을까? 
그야 파업 때문에 상당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파업? 뭐, 가끔은 괜찮지 않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처럼 "파업 대환영"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조차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에는 이런 쪽의 의견은 별로 실리지 않는다. 왜일까?
"파업 좋지요. 길게 계속 됐으면 좋겠는데" 같은 의견이 나오게 되면, 지면을 수습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아마 틀림없이 수습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이런 것들을 다루기 시작하면, 더 나아가 "태풍 아주 좋아" 라든가, "요인암살은 유쾌해"와 같은
의견마저 다루지 않으면 안되게 될런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파업권이란 것은
우선(국철은 차치하고) 법률로 보장된 것이기 때문에 "파업 환영"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결코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태풍지지나 요인암살지지와는 경우가 다르다.
이전에 국철 중앙선의 선로 변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옆〉이 아니라 
뒷마당에 전차가 지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옆〉이다. 물론 엄청나게 
시끄럽고, 따라서 집세도 싸다. 집세만 싸다면 시끄러워도 괜찮아 라는 사람이 살 집이다.
그래서 우리(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와 우리 집사람이기 때문)는 매년 있는 교통파업이 
큰 낙이었다. 파업이 시작되어 열차가 레일 위로 달리지 않게 되면 우리는 선로 옆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느긋하게 햇볕을 쬈다. 선로 옆에는 꽤나 여러 가지의 들풀이 
피어나 선명한 색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종달새가 지저귀고, 주위는
노아의 홍수가 지나간 후처럼 고요했다. 이대로 신석기시대로 돌아가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언젠가 파업이 예정된 전날 밤에 거리를 어슬렁 어슬렁 걷고 있다가 아는 여자와 딱 마주쳤다.
그래서 "어, 이렇게 늦게 뭐하고 있는 거야?" 라고 물었더니, "내일 파업이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호텔을 잡아 준거야" 하길래, "그럼, 지금부터 어디 가서 한잔할까"는 식으로 
일이 되었는데 이것도 아주 즐거웠다. 개중에는 이런 찬스를 이용하여 감쪽같이 
오피스 러브(Office Love)에 열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게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파업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도 물론 신문에 실리지 않는다 

영화에 관하여

장편(長篇)도 마침내 매듭을 지었고, 조판본의 교정도 마쳐, 남은 일은 출판을 기다리는 일 뿐 ― 이 즈음이 내게 있어서는 가장 속편하고 또한 평온한 시기이다. 쓰고 싶은 것도 일단은 다 써버렸고, 우선은 해야 할 일도 없고 ― 라고 하면서도 때로는 생활의 방편으로 이런 원고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 멍하니 봄볕을 받으며 고양이와 함께 매일 쪽마루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자신이 쓴 글이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음 소설에는 착수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 몇 개월간은 놀며 지내게 된다.
이처럼 에어포켓 같이 맘편한 시기에는 대개 몰아서 영화를 본다. 최근에는 비디오테이프도 많아져서 종종 나도 비디오 대여점의 신세를 지기도 하지만, 역시 이와 같이 한가한 시기에는 영화관까지 전철을 타고 나가 암흑 속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맥주집에 들려 한잔하고 귀가하는 것이 최고다. 영화관에서 보고있는 한, 마누라에게 "있잖아, 다이언 키튼이 입고 있는 저 스커트 괜찮치 않아" 와같은 찝쩍거림 없이 끝까지 볼 수 있으며, "저, 잠깐 되돌려 봐요. 저 플로어스탠드 좀 높은 것 같지" 따위도 없다. 플로어스탠드 같은 거야 어찌됐든 상관없지 않은가.
올 봄에도 이런 연유로 정말 엄청나게 영화를 봤다. 『듄·사막의 혹성』을 보고, 『2010년』을 보고, 『터미네이터』와 『리틀 드럼어 걸(Little Drummer Girl)』을 보고, 『네버엔딩 스토리』를 보고(왜 타이틀을 번역하지 않는 거지?), 『아마데우스』를 두번 보고, 『폴링 인 러브(Falling in Love)』과 『슛 더 문(Shoot the Moon)』을 보고, 『베스트 키드』를 보고, 바빠서 놓쳐버린 『보디 더블(Body Double)』과 『레드 돈(Red Dawn)』(이것은『에스콰이어』선정 1984년도 최악의 필름)을 재개봉관에서 기어이 봤으며, 오래간만에 성인영화도 보고···라는 식의 닥치는 대로이다. 이 정도 

무지막지 영화관에 다녀야 정말이지 영화를 봤구나 하는 반응이 같은 게 느껴진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의자에 털썩 앉아서 머리를 휭하니 비우고 있으면 상대편에서 알아서 척척 진행해 주니 참으로 편하다. 이것이 연극이거나 콘서트라면 "오늘은 장단이 잘 맞지 않는 거 아냐"라든지 "어디선가 사고가 난 것 아닐까" 또는 "박수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 등,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만 되어 좀처럼 머리를 비워둘 수가 없다. 때문에 이쪽편의 긴장감이 뚝 떨어져 있을 때에는 순진무구한 허리우드영화을 멍청하게 보는 것이 제일 좋다. 뭔가를 일깨우려 한다거나 하면 오히려 불쾌해지거나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일련의 영화들는 모두가 꽤 재미있었고, 다행히 일깨우려드는 데가 없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투루먼 카포디(주)는 그의 소설에서 영화를 종교적 의식으로 비유하였다. 그렇게 말하면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외톨이가 되어 스크린과 마주하고 있으면 뭔가 자신의 혼을 잠정적인 장소에 보류해두는 듯한 기분이 된다. 그리고 몇 번이고 영화관을 드나드는 사이에 이런 기분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는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시네마딕트(영화중독 : Cinema와 Addict를 합성한 조어) 이다.
나도 한때 이런 시기가 있어서 그때에는 거의 매일처럼 영화관에 갔다. 마침 학원분쟁 때여서 수업 같은 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파트와 아르바이트하는 곳과 영화관이라는 삼각형을 빙빙 돌고있는 듯했다. 물론 매일 매일 볼만큼의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똑같은 영화을 몇 번이 반복해서 보기도 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B급 C급 영화를 뼈다귀 마저 쪽쪽 빨듯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꿈속에서 MGM의 사자가 포효하기도 하고, 도에이의 파도 부서지기도 하며, 20세기 폭스의 서치라이트가 회전할 정도가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 이건 완전히 병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소위 "명작"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볼 영화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보고 또 보고했던 영화나 분명 아무 내용 없던 영화 쪽이 확실히 기억에 남는 것이 불가사의하다. 내용이 없는 B,C급의 영화라는 것이 소위 "명작"이라는 것과는 달라 스스로 무언가 좋은 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달려들지 않으면 완전히 시간낭비 밖에는 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런 긴장감이 그대로 생생하게 뇌리에 새겨져, 나중까지 기억 속에 남는 건 아닐까? 한마디로 영화라고 해도 여러 가지 보는 방법이 있다.
이번에 본 필름 중에서 이런 B, C급 영화감상의 참맛를 맛보게 해준 것은 뭐니뭐니해도 존 미리어스의 『레드 돈』이였다. 모두 이 영화를 호전적이고 황당무계한 영화로 치부하지만, 확실히 그렇기도 하지만, 잘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데가 있다. 내게 가장 흥미 있었던 것은 미국이 소련과 쿠바의 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점령되고, 이에 대항하여 미국의 소년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한다는 상황설정으로, 생각해 보면 이것은 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국의 입장과 위치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상황설정 그 자체에 상당한 무리가 있어 작품 자체로는 자기분열적이 되어버렸지만, 이런 자기분열적인 만큼이 생각하기 따라서는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반전영화로서 성립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타입의 영화가 정말 좋다.




보수에 관하여

나는 이십대 초반부터 8년 정도 재즈 찾집을 경영했는데, 그 사이 제법 많은 아르 바이트생을 썼다. 대개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시작할 무렵에는 나랑 거의 나이 차가 없다가, 찻집을 그만둘 무렵에는 열두어 살 차가 생기게 되었다. 내가 하던 찻집은 아르바이트생의 정착률이 꽤 높은 편이었던 터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비교적 잘 기 억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내 경험으로 봐서 절대로 고용해서는 안되는 타입이 몇 가지 있다. '급료는 안 주 셔도 좋으니까 일하게 해 주십시오'하는 타입도 그 중 하나다. 그런 사람이 있을 리 가 없잖은가 하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실제로 있다구요, 그런 사람이. 예를 들어 '앞으로 가게를 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그냥 일 좀 하게 해 달라'든가, '꼭 여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서'라는 둥 하는 사람이 매해 한 명 정도는 온다. 그렇다고 공짜로 일을 부려먹을 수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급료를 지불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잘 하는가 하면, 대개는 그 반대이다. 일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불평을 늘어놓고, 제멋대로 빠지는가 하면, 지각을 하고, 끝내는 '급료가 싸다'는 둥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한다. 그런 법이 어딨냐고 생각하기는 하지 만, '급료는 안 줘도 좋다'는 둥 비현실적인 말을 당당하게 읊어대는 사람을 고용한 것은 내 쪽의 실수이다.

대동소이한 일이지만, 나는 원고료를 받을 수 없는 원고는 켤코 쓰지 않는다. 몹시 건방진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프로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설령 아무리 값싸다 하더라도 개런티만큼은 철저하게 현금으로 받는다. 자선 파티 따위는 싫다. 내 쪽도 마감날짜는 엄수하니까, 상대방도 빈틈없이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일을 해 나가면 '그 사람 돈에는 까다롭다'라는 얘기를 듣는 때가 있다. 하나 그런 동인지(同人誌)적,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계산하 자는 체질이 일본 문단을 얼마나 황폐하게 했는지, 곰곰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이 다. 문학이든 재즈 찻집이든, 근본은 마찬가지다.


쌍둥이 마을의 쌍둥이 축제

나는 옛날부터 쌍둥이에게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여자 쌍둥이와 데이트를 해 봤으면 하는 게 내 오랜 꿈이다. 양쪽 옆구리에 똑같은 얼굴의 여자가 한 명씩 있어 준다면, 여러 가지 일들이 훨씬 수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정말 그렇지 않을까.

미국 클리블랜드시의 교외에 쌍둥이 마을(Twinsville)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 동네의 기초는 1812년 모제스 윌콕스와 아론 윌콕스 형제에 의해 다져졌다. 그 동네의 역사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신기하리 만큼 똑 닮은 쌍둥이로, 아이를 낳고도 줄곧 같은 땅에서 살았으며, 죽을 때도 같은 병세로 몇 시간 차를 두고 죽었다고 한다. 그 두사람을 기념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이 쌍둥이 마을에서는 매년 쌍둥이 축제가 열린다. 올해에도 미국의 28개 주(州)로부터 몇 백 명이나 되는 쌍둥이가 이 마을로 모여 들었다. 페스티벌의 목적은 원칙적으로 '쌍둥이 상호가 만남의 자리를 같이하므로써, 쌍둥이 특유의 문제나 감정을 서로 나눌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모여 와글와글 게임 같은 것을 하며 즐기는 것이다. 장기 자랑 같은 프로그램도 행해지는데, 그 대부분이 듀엣 합창임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 페스티벌에는 수많은 더블즈도 참가한다. 더블즈란 쌍둥이끼리 결혼한 커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더블즈를 지망하는 쌍둥이들도 찾아온다. 즉 쌍둥이가 쌍둥이를 헌팅하는 셈인데, 그것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역시 '넌 저쪽 해, 난 이쪽으로 할 테니까'하는 식의 사전 합의를 보고 나서 '헤이, 걸즈!' 하고 말을 걸겠지만, 누가 어느쪽을 택할지 도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결정한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것이야말로 진짜 더블 데이트라는 느낌이다.

이틀 동안의 축제 기간 중, 조그만 쌍둥이 마을은 말 그대로 쌍둥이로 만원을 이룬다. 그런 까닭에 축제에 휩쓸려든 '쌍둥이가 아닌' 사람은, 자신이 쌍둥이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워지는 모양이다. '정말, 어찌된 셈인지, 나의 반쪽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듯한 기분'이다. 이것이 '쌍둥이가 아닌 사람'들의 감상이다.

며칠 전 신문을 읽다가 젊은 애들을 위협하여 돈을 강탈해 간 쌍둥이 야쿠자에 대한 기사를 봤는데, 쌍둥이 야쿠자라니 어째 으스스할 것 같다.




커피를 마시는 어떤 방법에 대하여

그날 오후에는 윈톤 켈리의 피아노가 흘렀다. 웨이트리스가 하얀 커피잔을 내 앞에 놓았다. 그 두툼하고 묵직한 잔이 테이블 위에 놓일 때 카탕하고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마치 수영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자그마한 돌멩이처럼, 그 여운은 내 귀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나는 열여섯이었고, 밖은 비였다.

그 곳은 항구를 낀 아담한 소도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늘 바다냄새가 풍겼다. 하루에 몇 번인가 유람선이 항구를 돌았고, 나는 수업이 그 배에 올라타 대형 여객선과 도크의 풍경을 질리지도 않고 바라보곤 했다. 설사 그것이 비 내리는 날이라해도, 우리는 비에 흠뻑 젖어 가며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항구근처에 카운터 외에는 테이블이 딱 하나밖에 없는 조촐한 커피집이 있어, 천장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는 재즈가 흘러 나왔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방에 가두어진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 찾아왔다. 거기엔 언제나 친숙한 커피잔의 온기가 있었고, 소녀들의 보드라운 향내가 있었다.

내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커피맛 그것보다는 커피가 있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내 앞에는 저 사춘기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이 있고, 거기에 커피를 마시는 내 자신의 모습이 또렷하게 비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의 배후로는 네모낳게 도려내진 작은 풍경이 있었다.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선율처럼 따듯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은 나를 축복했다.

그것은 또한 아담한 소도시에서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해 가기 위한 은밀한 기념사진이기도 하다. 자, 커피잔을 가볍게 오른손에 쥐고, 턱을 당기고, 자연스럽게 웃어요……. 좋았어, 찰칵.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다 주는 따스함의 문제, 라고 리차드 브로티간의 작품 어딘가에 씌어 잇다.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제일 흡족스럽다 

이상한 하루

며칠전 갑지기 딕킨스의 〈데이비드 커퍼필드〉가 읽고 싶어져서 모 대형서점에 가서 찾아 보았는데, 이게 도대체 눈에 띄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안내데스크에 있는 젊은 여점원에게 "미안합니다만, 딕킨스의〈데이비드 커퍼필드〉를 찾고 있는데요" 라고 했더니, "그게 어떤 분야의 책인데요?" 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엣?"
라고 했더니, 상대방도 역시
"엣?"
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딕킨스의 〈데이비드 커퍼필드〉인데요"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어떤 종류의 책이냐니까요?"
"에, 그러니까, 소설인데요"
이런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 결국 그것에 관해서는 소설 카운터에다 문의해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소위 서점의 안내라면서 딕킨스를 모른다니"라며 아연했지만,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딕킨스 같은 건 우선 읽지 조차 않으니까,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세상이란 곳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대담한 변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 여점원에게 차라도 한잔하자고 데리고 나와 "에-, 또 샤롯드 브론테 알고 있어요? 푸시킨은? 스타인 백은 알고 있나요?" 라고 꼬치꼬치 따져보고 싶었지만, 상대방도 바쁜 것 같고, 나도 결코 한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그러는 것은 단념하였다.
서점을 나와서 용무를 마치고 나니 배가 고파져서 문득 눈에 띄는 깔끔한 양식당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때 이른 저녁을 하기로 했다. 나는 대개 매일 5시 정도에 저녁을 먹는 것으로 해둔 덕에 언제나 붐비지 않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수 있어 아주 기분이 좋다. 소란스럽지도 않고 천천히 메뉴를 고를 수도 있다.
메뉴에는 〈양식(洋食) 도시락〉 2500엔이란 것이 있어, "저, 이것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습니까?" 라고 웨

이트리스에게 물었다.
"이것저것이요" 라고 단호한 어조를 그녀가 말했다.
"저어, 그거야 도시락이라고 말할 정도니까, 이것저것 들어있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는데, 예를 들어 어떤 것이 들어 있나요?"
"그러니까-, 양식 종류로 이런 저런 것이 들어있다니까요"
라고 말하는 통에, 이거야 〈야끼씨의 우편(山羊さんの郵便〉풍의 미로를 헤매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서양식 도시락을 단념하고 다른 단품요리를 주문하였다. 특별히 그 여자에 대해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도시락에 무엇이 들어가는 지 하나 둘쯤 알려줘도 괜찮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나도 그걸 트집잡아 억지를 부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식사 후 어슬렁 어슬렁 거리를 걷다 우연히 백화점 앞을 지나가게 되어, 들어가서 트위드(올이 굵은 모직물 : 역주) 상의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얼마 전에 담당편집자인 기시따 요오꼬(木下陽子)씨(가명)로부터 "무라까미씨는 항상 청바지에 운동화만 신고 다니는데 도대체 돈은 어디에 써요?" 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맘에 드는 윗도리가 있어 "조금 사이즈가 작지 않나" 하면서도 시험삼아 소매를 끼워보려 했더니 여점원이 바람처럼 달려와 "손님, 그건 사이즈가 너무 작아요. 아무래도 그것은 안되겠어요" 라면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음, 그런 것 같군요. 조금 큰 게 있으면··· "라고 말하려 했더니 그때 이미 거기엔 그 여자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 여자가 되돌아오길 한참동안 그대로 거기 서서 기다렸지만, 돌아올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왠지 모르겠지만 일진이 나쁜 하루였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취급을 받을 것 같기도 하고 거꾸로 내 쪽에서 다른 사람들을 부당하게 취급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정말로 어느 쪽인가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서점의 여자는 어쩜 집에 돌아가 식탁에서 "저- 

있잖아 엄마, 오늘 기분 나쁜 손님이 와서는, 얼토당토않은 책이름을 대기에 내가 그걸 모르겠다고 했더니, 노골적으로 나를 바보 취급하는 거야. 부아가 확 치미는 거 있지" 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는 "아니 〈양식 도시락〉이라고 메뉴에 있으면 그냥 잠자코 시켜 먹으면 되는 거 아냐" 라며 주방장에게 심하게 불평을 늘어놓았을 지도 모르겠다.
백화점의 여점원은 "자기 옷 사이즈도 제대로 모르며 옷를 입어 보려하는 얼간이를 상대하고 있을 틈이 어딨어"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상대가 말하는 만큼 각각 일리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혹은 나의 생활방식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세상이라는 것은 꽤나 어려운 것이다. 




세라복을 입은 연필

얼마 전 일이 있어 어느 잡지사 편집자와 만난 적이 있다. 나중에 둘이서 술한잔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문방구에 대한 것을 화제로 삼게 되었다. 문방구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도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볼펜은 이게 좋고, 지우개는 반드시 저걸 쓴다는 등 술자리에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계속 하던 중, 상대가 "그런데 무라까미씨는 항상 어느 경도의 연필을 사용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항상 F연필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 F인데요"라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은 "그래요. 하지만 F연필이라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요. 저는 항상 그렇던데"라고 말했다.
그때는 술좌석이기도 해서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도 같군요. 세상에는 여러 가지 감수성이 있으니"라는 정도로 웃으면서 끝내고, 화제는 곧 다른 것으로 옮겨갔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 점점 그것에만 신경이 쓰여졌다. 왜 F연필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일까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자, 생각하면 할수록 왠지 모르게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F연필이 완전히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참으로 곤란하다. 최근에는 F연필을 손에 잡기만 하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 떠오르는 형편이다. 물체가 한번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 되면 이번에는 그 이미지가 거꾸로 그 물체를 규정하게 되어버리는 현상일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그냥 진행되면 결국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성욕이 자극받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어버릴 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직업적으로 연필을 많이 잡아야만 하는 나로서는 아주 귀찮게 되어 버릴게 분명하다..
게다가 F연필을 놔두고 HB로 바꾸어 볼까도 생각해는데, 일이 꼬이려니 그 순간에 "만약 F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라면, HB는 교복을 입은 남고생 아닐까"라고 생각해 버렸다. 이렇게 되니 이건 이것대로 왠지 기분이 안좋다. 나는 원래부터 세일러복이라든지 교복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다. 세일러복이라면 멀리서 보기에는 좋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상당히 지저분 하고 볼품이 없다. 교복의 지저분함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것까지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H는 어떤가 하면, 이것은 왠지 '폴리스"(라는 록-그룹이 있다)의 스팅과 느낌이 닮았다. 스팅에 대해 특별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연필이 스팅과 닮았다는 것은 왠지 굉장히 신경이 쓰인다. 귓가에 언제나 "폴리스"의 음악이 울리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2H보다 딱딱한 연필이나 B보다 무른 연필은 사용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결국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과 "교복을 입은 남고생" 그리고 "폴리스의 스팅"이라는 3개의 가능성이랄까, 선택의 여지밖에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 연필의 문제로 이런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일까,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시초는 "F연필이라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과 닮지 않았습니까?"라는 쓸데없는 말을 한 편집자가 나빴다. 거기에서 이미지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확대되어 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 이 원고의 "수정"할 부분을 연필이 아니고 볼펜을 가지고 쓰지 않으면 안될 지경까지 몰리고만 것이다. 볼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극력 노력하고 있다. 볼펜은 그냥 볼펜일 뿐이다..
그런데 연필이라고 하는 것은 참 가엽은 필기구이다. 최근에는 샤프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탓에 문구계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상당히 저하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필에게는 사람-적어도 내게는-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단순하다면 정말로 단순한 제품이지만 연필을 가만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와 예지가 포함되 있는 것을 발견할 수있다. 처음에 연필을 만든 사람은 상당히 이것저것 궁리를 했을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치즈를 채운 찌꾸와(주)를 발명한 사람에 대해 항상 경외감을 가지고 있지만, 치즈를 채운 

찌꾸와보다 연필만들기 쪽이 발상으로서나 기술로서나 휠씬 복잡할 것 같다..
나는 원고의 사소한 "수정"에는 대개 연필을 쓰고 있다. 샤프도 편리하기 때문에 자주 쓰긴 하지만 손에 닿는 감촉과 글쓰는 감촉에서 말하면 지극히 보통의 연필 쪽이 일에는 적합하다. 아침에 한 다스 정도의 연필을 깍아 큰 위스키 잔에 꼿아두고, 그것을 차례로 써나가는 것이다. 따라서-이야기가 다시 원래로 돌아가서- 연필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의 모습으로 보이거나 하면 아주 곤란해져 버리는 것이다..
"다음은, 음-, 너를 사용해 볼까-".
"꺄-, 싫어-, 거짓말!".
괜시리 혼자 일하고 있으면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을 뿐더러 바보가 된 것 같다. 



스웨터

스웨터를 입은 무리들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나는 어느 겨울밤에 우연히 그들을 관찰했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따스한 풍경이었다.
나와 애인은 동쪽 코엔지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 다. 섹스를 한다거나 포테이토 칩을 먹거나 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열 아홉살이었다. 열 아홉살 나이의 남자로서 처음 그 날,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밤늦게 까지 있어주면, 정말로 진짜 애인처럼 생각되었다.
나와 애인은 정말로 애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하철을 탔다. 그 날 확실히 아홉시쯤이었다. 갈색 종이봉지에서 라임쥬스, 얼음, 진토닉을 꺼냈다. 그 리고 유리잔을 두 개 준비했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찌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조용한 아 파트에 울렸다. 우리들은 마치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진라 임을 마셨다. 브라운관을 빼고 전체를 빨갛게 칠한 텔레비젼에 스위치 를 넣었다. 텔레비젼 화면빛을 조명 대신으로 우리들은 창 가로 다가갔다. 옆집 아파트 학생이 수도꼭지를 틀었다. 우리들 방까지 찌이익- 하고 울렸다. 
우리들은 '애인이 되려는 시간'을 일단 연장했다. 그리고 잠시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 텔레비젼 화면은 칙칙거리는 소리만 났다. 아무 프로도 나오지 않았다. 서로의 말들을 브라운관에 비추고 있었다. 그 풍경에 반 사시키고 있었던 나와 애인은 직접 마주보면서 얘기했다. 나는 텔레비젼 볼륨마저 낮추었다. 아무 소리도 안났다. 스위치만 켜져 있는 화면을 그대로 놔뒀다. 조작은 발로 했다.
그리고 나와 애인은 섹스를 했다. 아침이 다가왔다. 우리는 겨울 바람을 쐬기 위해 창문을 열어놨다. 신주쿠쪽에서 형형색색의 스웨터 무리들이 마치 춤이라도 추듯 다가왔다. 이것은 내가 먼저 발견했다. 기류와 기후와의 관계에서 스웨터 무리들은 주로 겨울에, 그것도 심야에 나타났다. "멋있어요. 우리들은 운이 좋아요." 약 삼십분 후 스웨터 무리들은 오기쿠보 방향

으로 사라졌 다.
우리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 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부스가 너무 멀어 우리들만 즐기기 로 했다. 그때의 무수한 스웨터 무리들, 마치 밤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풍경은 지금도 확실히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애인 얼굴은 이제 완전히 잊어버렸다.




두부에 관하여 1

이 컬럼에는 죽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삽화를 그려 주고 있는데, 나로서는 한번만 이라도 좋으니까 안자이 씨에게 아주 그리기 어려운 테마를 주어 고생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해 보려고 꽤나 시도를 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을 보면, 고심한 흔적을 거 의 찾아볼 수가 없다. 아무리 고심한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프로라지만 약간은 '잘 안된다, 어렵다'는 곤경에 처하게 해 놓고 즐겨 보자는 게 인심이다. 그래서 요 전번에는 '식당차에서 비프 커틀릿을 먹는 롬멜 장군'이란 테마로 글을 써 보았는 데, 어김없이 비프 커틀릿을 먹고 있는 롬멜 장군이 담긴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어려운 테마를 제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안자이 미즈 마루 씨를 쩔쩔매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가령 '문어와 커다란 지네의 씨름'이라든가 '수염을 깎고 있는 칼 마르크스를 따스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는 엥겔스' 같은 테마를 내준다 해도, 안자이 화백은 틀림없이 가볍게 정복해 버릴 것 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안자이 미즈마루를 당황하게 할 수 있을 까?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단순성이다. 예를 들면 두부처럼 말이다.

신주쿠에 있는 술집 중에 아주 맛있는 두부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누군가 나를 그곳에 데려갔을 때, 나는 너무 너무 맛있는 나머지 네 모를 연달아 먹어 치웠 다. 간장이나 양념, 그런 것을 전혀 뿌리지 않고, 그냥 새하얗고 매끌한 것을 날름 먹어치우는 것이다. 정말 맛있는 두부라면 불필요한 양념을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 다. 영어로 하면 simple as it must be가 될까. 그 두부는 나카노에 있는 손두부집에서 요리집용으로 만드는 두부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맛있는 두부가 연저하게 줄어들었다. 자동차 수출도 좋지만, 맛있는 두부의 생산을 격감시키는 국 가 구조는 본질적으로 왜곡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부에 관하여 2

안자이 미즈마루 씨로 하여금 그림의 단순함 때문에 골탕을 먹도록 두부 얘기를 계속한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열광적인 두부팬이다. 맥주와 두부와 토마토와 풋콩과 가다랭 이 다짐(관서 지방은 갯장어 같은 것도 좋다)만 있으면, 여름 날의 저녁나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천국이다. 겨울에는 살짝 데친 두부, 두부 튀김, 구운 두부 오뎅 국, 좌우지간 춘하추동을 불문하고 하루 두 모는 먹는다. 우리 집은 현재 쌀밥을 먹 지 않으니까, 실질적으로는 두부가 주식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친구들이 행여 우리 집에 와 저녁 식사라고 내놓으면, 모두 '이게 밥이야!'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맥 주와 샐러드와 두부와 흰 살 생건과 된장국으로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식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습관이니까 이런 걸 계속 먹고 있노라면, 그게 당연한 것처럼 되 어 버려, 남들이 하는 보통 식사를 하면 위에 부담이 간다.

우리 집 근처에 제법 맛있는 손두부를 만드는 두부 가게가 있어, 아주 귀하게 여 기고 있었다. 점심 시간 전에 집에서 나와 책방이나 레코드 대여점이나 오락 센터에 갔다가, 메밀국수집이나 스파게티집에서 적당히 점심을 먹고, 저녁 반찬거리를 산 후, 마지막으로 두부를 사 가지고 돌아오는 게 나의 일과였다.

두부를 맛있게 먹기 위한 비결이 세 가지 있다. 제일 처음 한 가지는 제대로 된 두부 가게에서 두부를 살 것(슈퍼마켓은 안된다), 그 다음 한 가지는 집으로 돌아오 면 곧바로 물을 담은 그릇에 옮겨 냉장고에 보관할 것, 마지막 한 가지는 산 그날 중으로 다 먹어 치우는 것이다. 그런 고로 두부 가게는 반드시 집 근처에 있어야만 한다. 먼데 있으면 일일이 부지런을 떨어가며 사러 다닐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두부 가게에 들 리니 셔터가 내려져 있고, '가게 세줌'이란 종이가 나붙어 있었다. 언제나 웃는 얼 굴로 사람좋게 대해 주던 두부 가게집 일가가 돌연 가게를 그만두고, 어딘가로 사라 지고 만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식생활은 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두부에 관하여 3

파리에 사는 주부들은 빵을 사다 묵히지 않는다. 식사를 할 때마다 그녀들은 빵집 에 가서 빵을 사오고, 남으면 버린다. 식사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 다. 두부만 해도 그렇다. 막 사온 것을 먹어야지, 밤을 넘긴 두부 따위 먹을 수 없 잖은가, 하고 생각하는 게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다. 귀찮으니까 그냥 날 지난 것이 라도 먹자는 주의가 방부제나 응고제 같은 것들의 주입을 초래하는 것이다.

두부 가게집 일손들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침 된장국 끓이기에 지장이 없도 록 그야말로 새벽 네 시부터 일어나 열심히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 것인데, 모두들 아침에는 빵을 먹든지(우리 집도 그렇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방부제가 들어 있어 며칠씩 묵어도 상관없는 두부를 사용하기가 일쑤니까, 두부 가게집도 일할 맛이 없 어져 버리는 것일 게다. 그래서 결국은 본격적인 두부를 만드는 제대로 된 두부집이 동네에서 하나 둘 모습을 감추어 간다.

요즘 세상에 새벽 네 시부터 일어나 일하겠다고 하는 유별난 사람이 어디 있겠는 가. 유감이다.

두부하면 어렸을 적 쿄토(京都)이 난젠지(南禪寺) 부근에서 먹었던 살짝 데친 두 부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맛있었다. 지금은 난젠지의 두부도 '안농'풍으로 완전히 관광화되고 말았지만, 옛날에는 전체적으로 훨씬 더 소박하고 꾸밈없는 맛이 났다.

아버지의 고향집이 난젠지 근처에 있어서 물길을 따라 곧잘 긴카쿠지(銀閣寺) 주 변을 산책하고,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두부집의 뜰에 앉아 후후 불어가며 뜨거운 두부를 먹었다. 이건 뭐랄까, 파리의 길모퉁이에 있는 크레페 판매대와도 비슷한 서 민을 위한 소박한 건강 식품이다. 그러므로 최근 정식 코스로 하여 오천엔 운운하는 것은,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된다.

기껏해야 두부, 그 정도 선에서 두부는 굳건하게 홀로 남아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두부의 존재 방식을 좋아한다.


두부에 관하여 4

'두부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무얼까?' 하고 한가한 때에 생각해 본 일이 있 다.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정사를 나눈 후에 먹는 것이다. 

음, 이 점은 애당초 분명하게 말해 두지만, 모두 상상이다. 정말 당해 본 일이 아 니다. 경험담이라고 오해를 하면 몹시 난처하다. 가상의 얘기다.

우선 오후 해가 짱짱할 무렵 동네를 거닐고 있자니, 삼십대 중반쯤 돼 보이는 요 염한 부인이 '앗'하고 숨을 삼키며 내 얼굴을 본다. '왜 그럴까'하고 이상하게 생각 하고 있는데, 그녀가 데리고 온 다섯 살 정도의 여자 아이가 내게로 달려와 '아빠' 하고 부른다. 사정 얘기를 듣고 보니, 작년에 죽은 그녀의 남편이 나랑 똑 닮았던 것이다.

그녀는 '얘, 그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야'하고 여자 애한테 설득을 하는데, 여자 아이 쪽은 '아빠야-아'하면서 내 손을 놓지 않는다.

하나 나도 이런 걸 싫어하지 않는 터라 '그러면 잠시 동안 아빠가 되어 주지'하 고, 함께 공원에서 놀고 있는 사이에 여자애가 지쳐서 그만 잠들고 만다. 이렇게 되 면 그 다음은 이미 코스나 다름없는 것으로, 나는 둘을 집을 데려다 주고는 당연스 레 그 미망인과 정사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일을 끝내고 나니 저녁나절, 집 밖으로 딸랑딸랑 종소리를 울리며 두부 아줌마가 지나간다. 여자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다 듬으며 '두부 아줌마-'하고 소리를 질러 연두부를 두 모 사들여, 한모에다 잘게 썬 파와 간 생강을 곁들여 맥주와 함께 내 앞에 갖다준다. 그러고는 '우선 두부랑 마시 세요. 지금 바로 저녁 준비를 할테니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우선 두부의 섹시함이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감미롭다. 그러나 나랑 꼭 닮 은 남자랑 결혼을 했던 요염한 미망인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얘기가 안 되는데, 하고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바람 같은 건 도저히 못 피울 것이다.




내가 만난 유명인 1

나는 소위 유명인이라고 하는 사람을 별로 만난 적이 없다. 이건 어째서인가 하면 그냥 내가 눈이 나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그 이상 깊은 의미는 없다. 눈이 나빠 서 좀 떨어진 데 있는 사람의 얼굴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경우라도, 나는 비교적 주변 상황에 대해 부주의한 편이라, 그만 무심결에 여러 가지 일들을 간과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로부터 곧잘 '무라카미는 길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안한다'는 비난을 듣는다. 그런 까닭으 로, 유명인과 우연히 만났다 하더라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리고 만다.

그러나 내 마누라는 그런 일에 있어서는 실로 눈이 밝은 사람으로, 아무리 혼잡한 중에서도 어김없이 유명인의 존재를 캐치한다. 이런 것은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아, 지 금 나카노 료코*와 스쳤어요'라든가 '저기에 구리하마 코마키가 있어요'라고 가르쳐 주곤 하지만, 내가 '그래, 어디 어디?'하고 둘러볼쯤에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 리고 없다.

심할 때에는 '아까 찻집에서 당신 옆에 야마모토 요코*가 앉아 있었잖아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건 그때 슬쩍 가르쳐 주면 좋잖아,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야마모토 요코의 맨얼굴을 본다는 것에 얼마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느낌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역시 놓쳐서 '손해를 봤다'는 아쉬 움이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다음 회부터는 내가 지금까지 해후했던 많지 않은 유 명인사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이바라기현 니하리군에 사는 아라카와 마사히코씨, 지적하신 대로 6월 5일, 신주쿠의 <피자르> 앞에서 당신이 본 사람은 제가 맞습니다. 곁에 있던 여 자는 다행스럽게도 내 마누라였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었을 때는 순간 가슴이 철 렁했지만, 역시 마누라입니다




내가 만난 유명인 2

대학생 시절, 신주쿠에 있는 조그만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70년 의 일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아무튼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가 방일하여 고라쿠엔에 서 콘서트를 연 해이다(아, 그립다). 그 레코드 가게는 무사시노관의 건너편에 있었 는데, 지금은 팬스 스토어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아직 무사시노관이 없었더랬다. 옆 빌딩 지하에는 이라는 재즈 바가 있어, 일하는 틈틈이 곧잘 거기에 서 술을 마셨다.

한번은 내가 일하고 있는 레코드 가게에 후지 케이코* 씨가 온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사람이 후지 케이코라고는, 나는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그다지 눈에 띠 지도 않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화장기도 없이, 아담한 몸집에, 어딘지 소소한 느낌 이었다.

지금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후지 케이코하면 혜성처럼 나타나 연달 아 히트곡을 발표하여 한 시대에 획을 그은 슈퍼스타였다. 지금의 야마구치 모모에* 정도는 못되더라도 혼자서 부담없이 신주쿠 거리를 거닐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 런데 그녀는 매니저도 동반하지 않고 혼자서 훌쩍 내가 일하는 레코드점에 들어와서 는, 아주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저 팔려요?'하고 방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무척 인상이 좋은 웃음이었지만, 나는 무슨 영문인지 잘 몰라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데리 고 나왔다.

'아, 순조롭게 나가고 있습니다'하고 주인이 말하자, 그녀는 또 방긋 웃으며 '잘 부탁드리겠어요'라고 말하고는, 신주쿠의 혼잡한 밤거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주인 장의 얘기에 의하면 그런 일이 이전에도 몇 번인가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바로 후지 케이코였다.

그런 연유로 나는 전혀 엔카는 듣지 않지만, 지금까지 후지 케이코라는 가수를 아 주 인상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이 사람은 자신이 유명인이라는 점에 평생 익숙해질 수 없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 이혼을 하기도,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는 풍문이지만, 열심히 해 주었으면 한다.




내가 만난 유명인 3

요시유키 쥰노스케*라는 사람은 우리들 말단에 있는 젊은 신인 작가에게는 꽤나 외경스러운 인물이다. 그러나 왜 요시유키씨가 외경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웬지 설명 을 잘 못하겠다. 그 외에도 유명한 작가나 훌륭한 작가는 별처럼(……그렇지도 안 나) 많은데, 특별히 요시유키씨에 한해 외경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신기하다. 

요시유키씨는 내가 어느 문예지에서 신인상을 받았을 때의 심사위원으로, 뭐 일 단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기도 하여 어디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 '아, 여전 번에 자네가 쓴 글 상당히 재미있었네'라든가 '요즘엔 눈이 안 좋아서 책을 읽을 수가 없지만, 음, 열심히 하게나'하고 언질을 준다. 그러나 언 제나 그런 식으로 상냥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불필요 한 말을 꺼내거나 하면 '자네, 그건 사소한 일일세'라든가 '아, 촌스런 얘기는 그만두 지'라는 등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는 저쪽으로 가 버린다. 그런 류의 타이 밍을 가늠하는 절묘함이 외경스럽다고 할까, 그것이 바로 이편이 삼가 긴장을 하는 요인이다.

그래서 나는 요시유키 씨의 근처에 있을 때면 스스로 자진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사람 앞에 나서면 대개는 말수가 적어지는 편이므로, 이런 침묵은 전혀 고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게 편하다. 결국 나는 지금껏 네 번 정도 요 시유키 씨와 술자리를 같이 했지만, 무슨 얘기를 나눈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요시유키 씨가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그게 또 정말 어 째도 상관없을 무익한 얘기를 하염없이 늘어놓는 것이다. 무익한 얘기가 무익한 우 여곡절을 거쳐서, 한층 더 무익한 방향으로 흘러, 그리하여 밤이 깊어 진다. 나 역 시 꽤나 무익한 편이지만, 아직 젊으니까 그렇게까지는 무익하게 될 수 없다. 늘 감 탄하고 만다. 그런 얘기를 장황스럽게 늘어놓으면서 호스테스의 젖가슴을 슬며시 만 지는 부분 또한 위대하다. 역시 뭐라고 해도 외경스런 존재이다



내가 만난 유명인 4

야마구치 마사히로 씨는 딱히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유명함의 한 양식을 시사 하고 있음은 분명하므로 이 항에서 특별히 거론해 보기로 한다.

야마구치 마사히로(이하 경칭 생략)는 무사시노 미술대학 상업디자인과 출신으로, 학생 시절에는 내가 옛날 고쿠분지에서 경영하던 재즈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야마구치는(점점 경박하게 부르게 된다) 질이 나쁜 사내는 아니지만, 딱 잘라 말해 무능에 가까운 종업원이었다. 거의 일도 하지 않고, 종업원 할인가격에 그것도 외상 으로 술만 마셔대고, 미술적 재능은 없고, 성적도 나쁘고, 여자한테도 인기가 없었 다. 그 야마구치로부터 며칠 전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어차피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얘기를 듣고 있자니, 웬걸 '학생 원호회'의 광고를 취급하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 원호회'라면 바로 <일간 아르바이 트 뉴스>를 펴내고 있는 버젓한 회사다. 그래서 '거기서 뭘 하는데?'하고 물어 보 니, '광고를 만들고 있죠, 뭐'란다. 대단한 출세다.

'저 하루키 씨 말이죠, 그, 소가 나오는 텔레비젼 광고 있잖습니까. 그걸 말이죠, 이토이 씨 같은 사람들하고 같이, 내가 만들었다구요'라고 야마구치가 말한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젼이 없으니까, 그런 얘기를 해도 무슨 소린지 통 알 수가 없 다. 대체 뭣 때문에 <아르바이트 뉴스> CM에 소가 출현한단 말인가?

'그럼 말이죠, 후지산이 학생복을 입고 짜잔하고 나와서 인간이었더라면 좋았을텐 데 하는 것도 모릅니까?' 텔레비젼이 없으니 그런 걸 알 턱에 없다고 하잖느냐구!

야마구치 마사히로는 낙담한 듯 맥이 풀려 전화를 끊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① 내가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에서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그런거 나는 모른다.
②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성적 평가는 신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야마구치군 진구 구장의 박스석 티켓, 또 주세요. 




이사 그래피티

인간이란 크게 나누어 대충 두 가지 타입으로 갈라진다. 즉 이사를 좋아하는 타입과 싫어하는 타입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행동적이고 진취적인 성품에 좀 덜렁거리는 타입이고, 후자가 그 반대라는 뜻은 아니고, 그저 이사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하는 아주 단 순한 차원의 얘기다.

얘기가 좀 빗나갔지만, 단순한 차원의 얘기를 새삼스레 심각하게 궁리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령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열적이라든가, 개를 좋아하 는 사람은 성격이 밝다든가, 그런 사고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냥 장미를 좋아 하고, 개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참 나 그렇잖아요. 히틀러는 개를 좋아했지만,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히틀러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는 할 수 없죠.

나는 이사를 무척 좋아한다. 짐을 꾸려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노라면 정말이지 행복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동적인 인간 인가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활 습관을 바꾸거나 세상 일에 대한 가치판단을 변경하거나 하는 일은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편이다. 마작의 자리 바꿈, 술집 순례, 다 싫어한다. 양복만 해도 십오 년전과 거의 같은 것을 입고 있 다. 하지만 이사만큼은 좋아한다.

이사의 미덕은 모든 것을 '제로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동네 사람들과의 사귐, 인간 관계,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상 생활에서의 잡다한 일, 그런 모든 것이 한 순간 에 휑하니 소멸해 버린다. 그런 때 맛보는 쾌감은 한번 익히고 나면 평생을 잊어버 릴 수 없다. 내 친구 중에 마작을 하다가 자기가 내 준 패 덕분에 상대방이 점수를 올리게 되면 '에이, 전부 때려부셔!'하면서 탁자를 걷어차 버리는 작자가 있는데, 기분학상으로 그 행위와 비슷하다. 야반도주야말로 이사의 기본적 원형이다.

나는 지금껏 꽤 여러 번 이사를 하여, 수많은 동네에 살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사 귀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제로화'해 버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 잡지는 관동 지방에서밖에 팔지 않으니까(팔지 않겠지, 잘 모르겠다), 관서 지 방에 대한 지리적 설명을 하기가 어렵다. 한가한 사람은 지도를 보세요.

우리 집은 내가 철이 들고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 번밖에 이사를 하지 않았다. 불만스럽다. 훨씬 더 많이 이사를 하고 싶었다.

게다가 두 번 이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직선 거리로 일 킬로미터정도의 지역을 왔 다갔다 했을 뿐이다. 그런 건 이사라고도 할 수 없다. 효고(兵庫)현 니시노미야(西 宮)시의 슈쿠가와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시야시 아시야가와의 동쪽으로 옮겼을 따름이다.

동경으로 말하자면 신주쿠(新宿)의 미츠코시(三越)에서 마이씨티로 옮겼다가, 신 주쿠 교엔(御苑)으로 옮긴 정도의 거리이다. 그런고로 전학이란 걸 해 본 적이 없 다.

나는 옛날부터 전학생을 몹시 동경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전학을 가게 되는 반 친구가 있으면 곧잘 '이별 문집' 같은 것을 만들어서는, '에미코, 멀리 가더라 도 꼭 편지해 줘'라든지, '모래밭에서 넘어뜨려서 미안해'라든가 하는 글을 정리하 여 전해주곤 했다. 그 아이가 없어지고 나면, 한동안 그 자리만 동그마니 비어 있 다. 그런 걸 이상하게도 병적으로 좋아했다.

새로 들어오는 전입생도 무척 좋아했다. 귀여운 여자 아이가 조금은 예민해져 새 침을 부리고 있거나, 새 교과서가 없어서 옆에 앉은 아이랑 함께 보는 걸 바라보면 서, '이거야, 바로 이거'하는 식으로 흥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강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한번도 전학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충족되지 않았던 소년 시절의 욕구 불만이 열여덟 살을 지내고 나자 '이 사병'이란 숙명적인 형태를 띠고 내게 엄습해 온 것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68년으로, 처음에는 메지로(目白)에 있는 학생 기숙사에서 살았다. 이 기숙사는 친잔소(椿山莊) 옆에 지금도 있으니까, 메지로길을 지나갈 때 행여 생각나면 한번 보세요, 힐끗.

나는 그곳에 반년 동안 살다가 그 해 가을에 행실 불량으로 내쫓기고 말았다. 경 영자가 이름난 우익인데다, 기숙사 사감은 육군 나카노(中野)학교 출신의 으스스한 아저씨이고 보면, 나같은 학생을 내쫓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때는 바야흐로 1968년, 학생 운동의 전성기였고, 내 편은 혈기왕성한 나이었기에 화가 치미는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우익 학생이 점검을 하러 온다기에 베갯밑에 칼을 두고 잔 적도 있다.

하지만 태어나서 여지껏 혼자서 지내기는 처음이라 매일 매일의 생활은 꽤 즐거웠 다. 밤이 되면 대개 메지로 언덕길을 내려가 와세다일대에서 마셔댄다. 그리고 마셨 다 하면 반드시 곤드레만드레가 된다. 그 무렵에는 곤죽이 되지 않도록 마시는 기발 한 재주는 아직 피울 줄을 몰랐다.

술에 취해 나가 떨어지면 누군가가 들 것을 만들어 기숙사까지 운반해 주었다. 들 것을 만들기엔 실로 편리한 시대였다. 요컨대 여기저기 아무데고 프래카드가 넘쳐 흘렀기 때문이다. '일제분쇄'라든가 '원잠기항 절대 저지'하는 프래카드를 적당히 골라 짓찢어 와서는, 거기에다 술주정뱅이를 태워 옮기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재 밌었다.

헌데 한번은 메지로 언덕길에서 헝겊이 찢어지면서 돌계단에 정신이 바짝 들 정도 로 머리를 부딪힌 일이 있다. 덕분에, 이, 삼일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한밤중에 일본여자대학의 간판을 훔치러 간 일도 있다. 까짓 거 훔쳐봤댔 자 별 신나는 일도 없지만, 웬지 갖고 싶어서 밖으로 나갔는데, 그만 순경 아저씨한 테 들켜 줄행랑을 쳤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엔 일주일에 한번은 순경 아저씨한테 검색을 당했다. 시절도 어수선했지만, 내 쪽 인상도 나빴으리라. 최근에는 한번도 검색을 당하지 않았다. 순경아저씨한테 검색 한번 당하지 못하게 되다니 내 인생 이제 끝장이 아닌가, 하고 문득 생각하곤 한다. 
메지로의 기숙사에서 쫓겨난 뒤 네리마(練馬)에 있는 하숙집으로 옮겼다. 와세다 대학의 학생과에서 조사한 것 중 가장 싼 방이다. '삼 조에 4,500엔. 보증금·예의 금 없음' 이건 그야말로 진짜 싸다. 보증금·예의금 없음이라니 이곳 빼고는 없을 것이다.

하숙집은 세이부(西武) 신주쿠선 '도립가정(都立家政)'역에서 걸으면 한 십오 분 정도 걸 리는 거리에 있었다. 주변은 그림에서 보는 듯한 무밭이다. 동경에도 이런 곳이 남아 있구나 싶어 정말 경탄스러웠다. 도대체가 '도립가정'이란 역 이름부터가 한심하다. 일단 이름이라도 붙이고 보자는 속셈이 빤히 들여다 보인다. '도립가정' 이라니 한번 들은 것만으로는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무우밭에 드문드문 집이 섞여 있 다는 정도의 인상밖에 주지 않는 동네였다. 땅은 검고, 질척하게 물기가 차 있어 겨 울이 몹시 추웠다. 여자친구와 순조롭지 못했던 점도 있고 해서, 네리마 시절은 내 게는 좀 어두운 시절이었다. 학교에도 거의 가지 않고, 신주쿠에서 올 나이트 아르 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가부키초(歌舞技町)에 있는 재즈 찻집에 드나들며 음악에 푹 젖어 있었다.

재즈 찻집 중에서는 <빌리지 게이트>라든가 <빌리지 방가드>같은 어두컴컴한 데를 좋아했다. 여자애랑 같이 갈 때는 <다그>라든가 <올드 블라인드 캐츠> 같은 데가 좋 았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정말이지 궁상맞은 아저씨 같지만, 재즈가 짜릿짜릿하게 몸 으로 파고드는 시절이었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아마도 '연속 살살마(射殺魔)사건'*의 범인 나가야마 노리오도 비슷한 시기에 역 시 도립가정에 살면서 <방가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럭저럭 벌써 십 년 가까이 세이부 신주쿠선을 타지 않았는데, 저 가부키초→세 이부선→도립가정의 생활은 지금도 내 몸 속에 까끌까글한 느낌으로 아주 리얼하게 남아 있다. 그곳에는 1968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살았다.

도립가정의 어두운 삼조 방에서 반년을 생활하다, 살아 있다는 게 못 견디게 싫어 져서 또 이사를 하기로 했다. 1969년 봄의 일이다. 가구와 짐이라고는 거의 없으니 까 이사하기는 실로 간단하다. 이불과 옷가지와 그릇 나부랭이를 자동차 트렁크에 던져 넣고나면, 그것으로 준비 완료다. 인생이란 모름지기 이랬으면 좋겠다.

이번 터전은 미타카에 있는 다세대 주책이다. 닥지닥지 복잡한 곳은 이제 진절머 리가 나서, 교외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육조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려서 7,500엔(와 싸다), 2층 모퉁이에 있는 방으로 사 방이 전부 빈 들판이어서 참으로 햇빛이 잘 들었다. 역까지 먼 것이 흠이라면 흠이 었지만, 무엇보다도 공기가 깨끗하고, 좀 걸으면 아직도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무 사시노(武藏野)의 잡목림이 있어, 굉장히 행복했다.

날아갈 듯 기분이 산뜻하여 전당포에서 중고 플롯을 사가지고와 연습을 하고 있었 더니, 옆 방에 카마야츠 히로시*와 비슷하게 생긴 기타보이가 '해피맨 같이 해요'라 기에, 매일 <멤피스 언더 그라운드>만 열심히 불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는 미타 카=<멤피스 언더 그라운드>가 되어 버렸다.

그 무렵에 관한 나머지 기억이라고 하면, 브래지어가 하늘을 날았다는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브래지어가 정말 하늘을 날았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바람 에 날려 공중을 떠다녔을 뿐이다. 아주 바람이 강한 밤이었는데, 내가 집 근처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무슨 하얀 물체가 하늘 높이 둥실둥실 날고 있어, '아니, 백 로인가'하고 곰곰 올려다 보니, 그게 브래지어였단 말씀에요.

브래지어가 밤하늘을 날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아실 테 지만, 그게 또 몹시도 희안한 광경입니다. '설마 그런 게 어떻게'하는 의아스러움, 공기 역학적인 움직임의 재미가 일체화되어 그 장면 정말 멋있었다.

나는 절대로 일기를 ㅆ지 않는 인간인데, 미타카 시절에 한해서는 무슨 이유에선 가 짧은 일기를 썼다. 뭐 대단한 일기는 아니고, 뭘 먹었다든지, 무슨 영화를 봤다든지, 누구를 만났다든지, 몇 번 했다든지, 그 정도의 일밖에 씌어 있지 않지 만, 그래도 뒷날 읽어 보니 제법 재밌다.

1971년 당시를 보니, 석간이 15엔이다. 헤이본(平凡) 펀치는 80엔, 쇠고기 200그램 180엔, 하이라이트 80엔, 콜라 40엔, 대충 지금 물가의 반 정도다.

그 해 1월 3일과 5일에는 눈이 내렸다. 1월 3일에는 10센티미터나 쌓였다. 이 날 은 미타카 다이에(大英) 극장에서 야마시타 코사쿠(山下耕作)*의 <승천하는 용>(좋은 영화다)과 아츠미 마리*의 <좋은 거 드리죠>(좋은 제목이다)를 동시 상영 으로 보았다. 5일에는 신주쿠의 게이오(京王) 명화관에서 <석양을 향해 달려라>와 <이지라이더>를 보았다. <이지 라이더>는 그것으로 세 번째 관람이다. 1971년이란 해는 대학의 학생 운동이 일단 전성기를 넘어서고, 투쟁이 음습화되어 폭력적인 내 부 투쟁으로 치닫기 시작한 아주 복잡하고 암울한 시기였지만*, 이렇게 돌이켜보니 실제로는 매일 여자 친구랑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제법 뻔뻔스럽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 남자들이 이러니 저러니'하고 잘난 척 얘기할 수는 도 저히 없을 것 같다. 인간이란 특별히 대의명분이나 불변의 진리나 정신적 향상을 위 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고, 이를테면 깜찍한 여자애랑 데이트나 하면서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이를 먹어서 되새겨 보면 자신이 몹시도 긴장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이 드는 법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들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오래된 옛 일기를 읽고 있으려니, 그런 분위기가 삼삼하게 전해져 온다.


스파게티 공장의 비밀

그들은 나의 서재를 스파게티 공장이라 부른다. '그들'이란 양사나이와 아리따운 쌍둥이 소녀를 일컫는다. 스파게티 공장이란 말에 대단한 의미는 없다. 끓인 물의 온도를 조절하거나, 소금을 뿌리거나, 타이머를 작동시키거나, 그런 정도이다.

내가 원고를 쓰고 있노라니, 양사나이가 두 귀를 쫑긋쫑긋거리며 다가온다.

"있잖아, 우린 아무래도 그 문장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런가?"하고 나는 말한다.

"어쩐지 주제넘은 것 같고, 유익한 게 없잖아."

"흐음."하고 나는 말한다. 정말이지 난 고생하며 쓴 문장이다.

"소금을 좀 많이 뿌린 게지."하고 쌍둥이 중 208쪽이 말한다.

"새로 만들기."하고 209가 말한다.

"우리도 거들께."라고 양사나이가 말한다.

아니 됐어. 양사나이가 도와주면 무엇이든 대충대충 뒤죽박죽이 되고마는 것이다.

"넌 맥주를 가져오고."하고 나는 208에게 말한다.

"넌 연필을 세 자루 깎아 둬."

209가 과일칼로 깔짝깔짝 연필을 깎고 있을 동안 나는 맥주를 마신다. 양사나이는 말린 누에콩을 우물거리고 있다. 

끝이 뽀족한 연필이 세 자루 가지런히 놓이자 나는 짝하고 손뼉을 쳐 그들 세 사람 모두를 서재에서 내쫓는다. 일, 일.

내가 원고를 쓰고 있는 사이 그들은 정원에서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른다. 이런 노래다.

우리의 고향은 아르 덴테*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그 이름도 듀럼 세몰리나*
찬란한 황금빛 밀

봄의 빛살이 그들 머리 위로 내리 쏟아지고 있다. 뭐랄까, 멋진 풍경이다.




아르바이트에 관하여

내가 학생이었던 시절, 벌써 십 년 이상이나 오래 전 일이지만, 아르바이트의 시간당 급료는 보통 찻집의 커피 한 잔 값과 얼추 비슷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60년대가 끝날 무렵에 백오십엔 정도였다. 하이라이트가 팔십 엔, 소년 매거진이 한 백 엔쯤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는 레코드만 열심히 사들였으므로, 하루하고 반나절 일하면 LP를 한 장 살 수 있지, 하는 일념으로 일했다.

지금은 커피가 삼백 엔인데 비해 아르바이트의 시간당 급료가 오백 엔대이니까, 시세가 좀 변한 것 같다. LP만 해도 하루 일하면 두 장 정도 살 수 있다.

숫자로만 살펴보면, 요 십 년 사이에 우리의 생활이 좀 편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생활 감각으로 따져 보면 그렇게 편해진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주부가 파트 타임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일도 그다지 없었고, 샐러리맨이 겪는 고리대금 지옥도 없었다.

숫자라고 하는 것은 실로 복잡하다. 그런고로 총리부 통계국 같은 데는 도저히 신용할 수가 없다. 단언컨대 GNP도 수상쩍은 것이다.

그야 GNP라는 숫자가 신주쿠(新宿)의 서쪽 광장에 보란 듯이 놓여져 있어, 만지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만져도 좋다고 한다면야 믿어도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실체가 없는 그런 숫자 따위 절대로 믿을 수 없지.

그런 면에서는 아케무라 켄이치(竹村健一)*라든가 다나카 가쿠에(田中角榮)* 같은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숫자가 지니는 그런 어정쩡함을 속속들이 통달한 연후에, 그 유리한 부분만을 골라 이용했으니 말이다. 그 정도의 숫자라면 대충 수첩 한 권쯤으로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학생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사 모은 레코드는 지금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 그 한 장 한 장을 소중하게 듣고 있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수라든가 양의 문제가 아니고 요는 질이 문제라는 겁니다.





이혼에 대하여

요즈음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혼한 사람들을 연달아 만난다.

이런 일에는 처신하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즉 상대방이 오래간만에 만나는 사람이라면 얘기거리가 별로 없으니까 '하는 일은 좀 어때?'라든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지?'라는 둥 하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대개는 '부인은 안녕하신가?'하는 데까지 얘기가 진전돼 버린다.

그것은 뭐 딱히 마누라의 동향을 알고 싶어서 묻는게 아니라 - 다른 사람의 마누라인데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람 - 그저 세상사는 이야기랄까, 계절에 따른 인사 정도의 것이다. 그러니까 묻는 쪽도 '아아, 뭐, 여전하지'하는 대답을 기대한다.

그럴 때에 '실은 말이야, 이혼을 해서' 같은 소리를 하면, 말하는 쪽도 난처하지만, 듣는 쪽도 황망한 것이다.

나는 이혼을 증오한다거나 하는 감정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이혼이란 말의 황당한 점은 듣는 쪽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결혼이나 출산이라면 사정이야 어찌됐든 '거 참 잘됐군'으로 때울 수 있고, 장례 식이라면 '고생 많았겠군'으로 대충 얼버무릴 수 있다.

그러나 이혼에 한해서는, 그런 편리한 말이 없다. 헤어져서 잘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시원하겠습니다'하는 것도 어쩐지 무책임하고, '야, 부럽군'하는 것도 경박스럽다. 그렇다고 심각한 얼굴로 '그것 참 안됐군……'하는 것도 분위기가 음울해지니까 안된다.

할 수 없이 '아 그래……?'하는 식으로 돼 버린다.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그게 그렇게 됐어. 음……'하는 식이다. 그런 일이 요즘들어 세 번, 네 번이나 계속된 터라 그만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이만큼이나 저자에 이혼이 횡행하고 있으니 '관혼상제 예절' 같은 책에 이혼이란 항목이 첨가되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보수에 관하여

나는 이십대 초반부터 8년 정도 재즈 찾집을 경영했는데, 그 사이 제법 많은 아르 바이트생을 썼다. 대개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시작할 무렵에는 나랑 거의 나이 차가 없다가, 찻집을 그만둘 무렵에는 열두어 살 차가 생기게 되었다. 내가 하던 찻집은 아르바이트생의 정착률이 꽤 높은 편이었던 터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비교적 잘 기 억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내 경험으로 봐서 절대로 고용해서는 안되는 타입이 몇 가지 있다. '급료는 안 주 셔도 좋으니까 일하게 해 주십시오'하는 타입도 그 중 하나다. 그런 사람이 있을 리 가 없잖은가 하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실제로 있다구요, 그런 사람이. 예를 들어 '앞으로 가게를 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그냥 일 좀 하게 해 달라'든가, '꼭 여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서'라는 둥 하는 사람이 매해 한 명 정도는 온다. 그렇다고 공짜로 일을 부려먹을 수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급료를 지불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잘 하는가 하면, 대개는 그 반대이다. 일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불평을 늘어놓고, 제멋대로 빠지는가 하면, 지각을 하고, 끝내는 '급료가 싸다'는 둥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한다. 그런 법이 어딨냐고 생각하기는 하지 만, '급료는 안 줘도 좋다'는 둥 비현실적인 말을 당당하게 읊어대는 사람을 고용한 것은 내 쪽의 실수이다.

대동소이한 일이지만, 나는 원고료를 받을 수 없는 원고는 켤코 쓰지 않는다. 몹시 건방진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프로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설령 아무리 값싸다 하더라도 개런티만큼은 철저하게 현금으로 받는다. 자선 파티 따위는 싫다. 내 쪽도 마감날짜는 엄수하니까, 상대방도 빈틈없이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일을 해 나가면 '그 사람 돈에는 까다롭다'라는 얘기를 듣는 때가 있다. 하나 그런 동인지(同人誌)적,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계산하 자는 체질이 일본 문단을 얼마나 황폐하게 했는지, 곰곰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이 다. 문학이든 재즈 찻집이든, 근본은 마찬가지다.




여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에 관하여

최근 들어 절실하게, 여자한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올해 서른네 살이고, 뭐 보통 사람들이 하듯 여자를 대해 왔다고 생각하 는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여자한테 친절을 베푼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몸에 사무치도록 알 게 되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냥 단순히 여자한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집까지 바래다 준다든가, 짐을 들어 준다든가, 마음에 들 만한 선물을 사준 다든가, 입은 옷을 칭찬한다든가, 그런 것은 고등 학생이라도 할 수 있다. 내가 어 렵다고 하는 뜻은 그런 일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하루키 씨는 정말 친절하군요'라 고 말하지 않게 하는 테크닉이 어렵다는 것이다. 왜 여자한테 '친절하군요'라고 말 하도록 해서는 안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런 느낌은 나이를 먹어 보 지 않으면 모르지 않을까?

어때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옛날에는 여자한테 친절히 하려다 늘 실패만 했다.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열일곱 살 때 일로, 그 무렵 나는 매일 한규(阪急) 전철로 코베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어느 날 아침 한큐 아시야가 와역에서 종이 봉투가 전차문에 끼어 당황하고 있는 아주 귀여운 여학생을 발견했 다. 이런 찬스를 놓칠 수는 없다. 그래서 곧장 달려가 '잡아당겨 줄게요' '아, 고마 워요'라고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힘껏 잡아당기자 종이 봉투가 둘로 짝 찢어지 면서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선로 위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런 경우는 무척 난감하 다. 그 이상 친절하게 해 줄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 음, 저, 미안합니다' 하고는, 뒷일은 역원에게 맡기고 도망쳐 버렸다.

벌써 십칠 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 코난(甲南) 여자고등학교의 여학생, 정말 미안 합니다. 악의는 없었어요.




신문을 읽지 않음에 대하여

외국으로 나가면 신문을 읽지 않아도 되니까 그게 가장 마음 편하다. 나는 일본에 있어도 대개는 신문을 읽지 않는 편이라서 어디엘 가더라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일본에 있으며 커다란 사건은 싫든 좋은 관계없이 귀에 들어오기도 하고, 가령 대한 항공기가 미그기에 격추되었다는 사건쯤 되면 일단은 신문을 펼치게 된다.

그 점 유럽 같은 데 있으면 현지의 신문은 읽을 줄을 모르고, 그렇다고 비싼 돈 들여가며 영자지 <헤럴드 트리뷴>을 사는 것도 멍청한 짓이고 해서, 정보와는 담을 쌓는 생활을 보내게 된다. 이러 생활은 정말 편하다. 정직한 얘기, 신문 따위 없어 진다 해도 조금도 곤란할 게 없다.

특히 그리스에 있을 때가 그랬는데, 아침에 일어난다 → 밥을 먹는다 → 수영을 한다 → 밥을 먹는다 → 낮잠을 잔다 → 산책을 한다 → 술을 마신다 → 밥을 먹는 다 → 잔다, 이런 패턴을 매일 매일 반복하느라, 신문이 파고 들어올 여유가 도무지 없다. 그리스란 나라는 정말 굉장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지난 번에는 독일에 한달 동안 체재해 있었는데, 그때도 신문이라는 걸 전혀 읽지 않았다. 딱 한번 베를린행 팬암기 내에서 서비스인 트리뷴을 읽었지만, 이렇다할 별 다른 사건도 없어 '음,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했군'이라든가 '론과 야스가 손을 잡 았군'하고 흐음흐음하여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것보다는 독일의 젊은이들이 모두 반핵(反核) 배지를 가슴에 붙이고 있거나, 퍼 싱Ⅱ 반대 캠페인 실을 자동차에 찰딱찰딱 붙여놓은 것을 보는 쪽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흐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진짜 정보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이 도움이 안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세상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쳐갈 뿐 제 것이 되지 않는 정보들이 흘러 넘치 도록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K


K-, 알파벳 순으로 열한번째의 문자.
용례 :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자 K는 현관 매트로 변신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자 K는 현관 매트로 변신해 있었다.
"형편없군."
K는 생각했다.
"고르고 고른 게 겨우 현관 매트야!"
현관매트로 변신한 K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구청에 근무하고 있던 친구였다.
"이봐, 농담은 그만둬-."
그는 말했다.
"망년회 농담 연습인가, 뭔가."
"아니야, 정말로 변신했어."
K는 말했다.
"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데 변신 신고서는 제출했나?"
"변신 신고서?"
"소득세 세율이 들리기 때문이야. 현관 매트로 변신한 경우에는 소득 공제액이 십
퍼센트 정도 낮아지게 되어 있어."
"설마-."
K는 말했다.
"아니야, 정말이야. 다리미 받침으로 변신한 경우도 유감스럽지만 삼 퍼센트 정도
밖에 안 돼."
그 다음으로 K를 발견한 것은 문학 평론을 하는 친구였다.
"이건 얼핏 보아, 현관 매트 같지 않은가-."
그는 말했다.
"현관 매트야, 맞아."
K는 말했다.
"증명해 보일 수 있겠는가?"
"한 번 발을 비벼보게."
친구는 발을 비벼보았다. 그리고는 정말로 K가 현관 매트로 변신한 것을 알게 됐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현관 매트가 됐나?"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런 독백은 카프카적이 아니고 오히려 카뮈적이군."
그 다음에 찾아온 사람은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여자친구였다. 그녀는 현관
매트로 변신한 K에게 발이 걸려, 하마터면 우편함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어머, 죄송합니다. 계속 철야로 원고 정리를 하고, 게다가 급히 목차까지 갈아
끼우는 통에 정신이 없어서 -. 그래서-.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해서 현관 매트
따위로 변신해버렸어요?"
"현실 도피입니다."
K는 말했다.
"불쌍해요."
그녀가 말했다.
"무언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도 있다면? 키스라도 해드리면 혹시 사람으로
다시 돌아옵니까?"
"그같은 발상은 이미 19세기에 끝났소."
K가 말했다.
"아무튼 여자 기숙사 현관에라도 갔다 놔줘요. 그렇게라도 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에요. 그렇게 해드릴게요. 그런데-.저 카세트 테이프
리코더, 이제 필요없겠군요. 그거 내가 쓰면 안 돼요?"
"좋습니다."
"보즈 그리고 폴 데이비스의 레코드도 필요없을 테지요."
"그렇소."
"자동차도 빌려주시면 안 됩니까?"
"수시로 오일 교환을해줘야 해요. 그러고나서 클러치 수리도 받아야 해요.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있어요."
"그래요-."

K는 여자 기숙사 현관에 놓여지게 되었다. 이제는 구청의 친구도, 문학 비평가도,
출판사 여직원도 아무도 채근대지 않는 가운데 언제나 행복하게 살았다. 현관
매트라는 것도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편식에 대하여 1

나는 꽤 편식을 하는 인간이다. 생선과 채소와 술에 관한 한은 거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싫고 좋은 게 없는데, 고기는 쇠고기밖에 못 먹고, 조개류는 굴 이외에 는 입에도 대지 못한다. 그리고 중화 요리도 일체 못 먹는다. 그래서 대개는 생선과 야채를 중심으로, 담백한 음식을 찔끔찔끔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곤약이 라든가 녹미채, 두부 같은 이른 바 노인식이다, 이건 순전히.

이따금 스스로도 신기하게 생각할 때가 있는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한다 는 판단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어째서 굴은 먹을 수 있는데 대 합은 못 먹는 걸까? 대체 굴과 대합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이런 것 들은 암만 생각해도 적절한 대답이 안 나와, 결국 '운명'이란 한마디로 처리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어느 날, 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이유도 없이 굴을 사랑하 게 된 것이다 하는 식으로. 결과가 전부이다.

어떤 이유로 중화 요리를 먹을 수 없게 되었는지 하는 것도 내게는 커다란 수수께 끼 중 하나다. 중국이나 중국인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 려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다. 친구 중에도 몇 사람인가 중국인이 있고, 내 소설 중에도 중국인이 제법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위는 중화 요리란 음식을 완고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 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유아 체험이라든가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센다가야에 살던 시절, 집 근처의 키라 거리에 맛있기로 평판이 난 라면집이 두 집 나란히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가면 싫어하는 라면 냄새가 풍풍 풍기는 터라, 집 으로 돌아오는 길이 늘 고생스러웠다. 어느 친구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라면을 먹 고 싶은 격렬한 욕망을 억누르느라 굉장히 고생을 한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 면 라면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하는 차이만으로도 인생살이의 양상이 꽤 달라지 겠구나 싶은 기분이 든다..


편식에 대하여 2

며칠 전 영국 신문을 읽고 있는데, 광고란에 개가 목을 매달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읽어 보았더니, 그게 애견가 협회에서 보내는 메세 지로 '한국에서는 개를 죽여서 먹는 습관이 있는데, 이건 야만적 행위니까 저지합시 다'란 내용이었다.

그 후 한달쯤 지나 호놀룰루에서 신문을 읽고 있으려니, '중국인은 들개 사냥을 하는데다 그 일부는 먹는다고 하는데, 그건 지나친 야만 행위니 우리는 중국 제품을 보이코트 하자'는 투고가 게재돼 있었다. 투고는 북경에서 행해진 대규모 들개 사냥 으로, 6주 동안에 처분된 개의 숫자가 약 이십만 마리라는 사건(끔찍하다!)에 대한 한 호놀룰루 시민의 반응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조선과 영국 사이에는 개소동이 백년쯤 전에도 한번 있었다. 그 때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고 생각한다)이 우호를 위해 조선 황제에게 선물로 보낸 개를 조선 조정 쪽에서 완전히 잘못 받아들여, 고맙게 요리를 하여 먹어 버린 터라, 당시에는 상당한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재밌다고 말하면 안되겠지만 재밌다.

이렇게 개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습관의 문제를 편식과 동일하게 논하는 것은 좀 무리겠지만, 그래도 무엇은 먹고 무엇은 안 먹는다는 선택이 기본적으로 불합리 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슷한 차원의 것이다. 야만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닌 성향의 문제가 아니고, 개념의 문제이다. 내가 굴은 먹을 수 있지만 대합은 못 먹는다는 점 에 대해 누가 '왜 그런가?'하고 집요하게 묻는다면,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 하다. 성향을 설명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 문이다.

얘기가 한참 비약되는데, '왜 그런 마누라랑 함께 살 게 되었나?'하는 질문도 같 은 선상에 있는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현실을 잠정적으로 '동시 존재 적 정당성(同時 存在的 正當性)'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어째 이번은 얘기가 좀 골치 아파졌다. 그럼.



편식에 대하여 3

딱히 생리적으로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음식이 있다. 카레 우동이라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나는 카레도 우동도 좋아하는데, 그게 '카레 우동'이 되면 도무지 손을 댈 엄두가 안 난다. 정말 속수무책이다. 고로케 우동이라는 것을 며칠 전 신주쿠에서 우연히 봤는데, 그것도 역시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왜 우동 속에다 구태여 카레니 고로케니 하는 분명하게 다른 부류의 이물 질을 집어 넣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그런 일들을 일일일 다 허용하다 보 면 언젠가 '미트 소스 차즈께'* 같은 음식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요 얼마 전에 모 카이세키 요리집에서 아보카도와 리큐(利休) 무침이라는 요리를 먹었 는데, 이것도 좀 먹기 곤란한 음식이었다. 보수적이라고 비난을 한다면 어쩔 수 없 는 일이지만, 요컨대 평화스럽고 느긋하게 정상적인 음식을 먹고 싶다고, 내 희망은 그것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옛날, 혼자서 생활하던 학생시절에는 정말 엉망진 창으로 음식을 만들어서는 적당히 주린 배를 채웠다. 그러니까 별 대단한 소리는 할 수 없다.

당시 가장 빈번하게 만들던 요리는, 당장 집에 있는 걸로 만든 스파게티 한 가지밖에 없다. 스파게티라고 해서 무슨 명확한 맛의 기준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 고, 아무튼 스파게티를 잔뜩 삶아 놓고, 거기에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것을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전부 쓸어 넣고 흐물흐물하게 휘저을 뿐인, 그런 요리이다. 요 리로서의 통일성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없다.

스파게티 속에 찹쌀떡과 토마토와 샐러미햄과 계란과 조미료와 무청이 함께 들어 있는 적도 있어, 지금 생각하면 구역질이 날 정도지만, 당시에는 '아, 맛있어 맛있 어'하고 꿀꺽꿀꺽 먹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는 분은 한번 시험해 보세요. 상당한 스테미너식이니까.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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