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키스
앤 햄프슨 지음
1
3에이커에 걸쳐 울창하게 자란 삼림(森林)지대의 한가운데에 타임커티지는 서 있었다. 사방팔방으로 퍼진 독특한 양식인 그 오래된 집의 정원은 처마밑과 나무에 매단 장식 램프로 부드럽고 밝게 조명이 되어 있었다. 사면에 심어진 잔디밭 한쪽에는 스코틀랜드 소나무가 대상(帶狀)으로 어두운 밤하늘 높이 솟아 있다.
이 나무들 밑에서는 목탄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일하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새끼염소의 커틀렛, 소시지, 영계의 고기 요리를 하고 있었다.
주의회(州議會)의 의례적인 만찬을 대신하여 야외 대연회가 개최되고 있는 것이다. 의회의원들 외에도 백 명이 넘는 손님이 초대되었으며, 그 중에는 게일 데이비스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 교수였다.
게일의 친구인 트리석 심즈는 머찮아 트레비스 카드와 결혼하기로 결정되어 마치 행복을 얼굴에 그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약혼자는 지금 버밍검의 숙부 밑에서 슈퍼마켓 체인 경영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게일은 친구의 약혼자와는 아직 인사가 없었는데, 지금 같아서는 결혼식 때까지 아무래도 만나볼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이 모임에는 쥴리어스 스필든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친구인 잉검 교수가 초청한 것이다. 여행 관계의 일로 영국에 자주 오는데, 서른다섯 살인 그는 아직 독신이며, 그것은 그리스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미혼의 아가씨들이 그에게 찬사와 기대의 눈길을 보내는 것을 보고 게일은 남몰래 미소지었다. 그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키가 크고 늘씬했으며, 숱이 많은 철회색 머리는 깊은 주름이 팬 이마를 약간 덮은 채 웨이브가 져 있었다.
그가 참석한 모임에서는 쥴리어스가 언제나 가장 풍채가 그럴싸한 남성이었다.
'확실히 매력적이야.'
하고 게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무스름하고 탄탄해 보이는 그의 용모는 현무암(玄武岩)처럼 검고 날카로운 눈동자 때문에 딱딱하고 정서적인 면이 전혀 없는 위압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끝 모를 냉혹함이 있다고 게일은 생각했다.
이삼 개월 전의 파티에서 처음으로 이 남자에게 소개되었을 때 게일은 즉각, 이 남자와 결혼하는 여성을 구원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는 파트머스라고 하는 아름다운 섬에 웅대한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하얗고 푸른 현대식 저택을 갖고 있었다. 그 정도밖에 게일은 이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쥴리어스는 그녀의 친구인 데보라 커티스와 춤추고 있었다. 불쌍한 데보라. 만약 이 남자가 여자에게 흥미를 가졌다 해도 일시적인 것일 뿐, 일이 있느니 뭐니 하고 깨끗이 데보라의 일 따윈 잊어버릴 게 틀림없다고 모두들 주의를 주었는데, 냉혹한 그리스 남자에게 열중하다니, 하고 게일은 두 사람을 보면서 생각했다.
"로버트 콜즈가 네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오빠인 에드워드의 목소리로 게일은 남자친구를 떠올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속눈썹 밑에서 오빠를 흘겨 쳐다보았다.
"실망하는 게 고작일 텐데!"
그녀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너는 바보야, 게일! 말컴에게 버림받았다 해서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다른 남자에게 화풀이를 해야 한단 말이니?"
"말컴 때문만은 아니야. 남자 전부에게 내가 멋대로 도전하고 있는 싸움이지. 누구를 봐도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걸."
"그건 온당한 말씨가 아닌걸. 어리석고 경솔한 짓이야. 그렇다면 오빠인 나도 그렇다는 말이냐?"
"아니, 아직은. 언젠가 앤시아에 대한 성의가 오빠에게서 없어졌다 해도 나는 조금도 놀라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야, 그건 정말― 너 좀 삐뚤어졌구나. 그다지 매력적은 못 되는데!"
에드워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게일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지만 완고한 눈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열여덟 살쯤이었을 때는 나도 조금은 얌전했었는데. 그런데다…
"아주 사랑스러웠지. 그렇던 것이 스물세 살이 된 지금에 와서는 지나치게 고집스럽고 고약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는 얘기지."
"고마와요, 오빠. 하지만 다른 남성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은 것 같던데."
게일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호된 짓을 당하지 않은 놈은 그렇겠지."
"호된 짓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남자의 마음을 끌어놓고 나서 딱지를 놓는 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너는?"
"그야 통쾌하지. 그런 눈초리를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누구든지 불쌍하니까. 그리고 틀림없이 남자쪽에서 여자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쯤은 오빠도 알겠지? 아빠를 봐요. 함께 살아온 엄마의 생활도. 아, 저기 계시네요. 언제나처럼 추근추근하고. 엄마는 집에 계시는 게 좋을 텐데.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정신을 빼앗기는 것을 앉아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언제나 그러니까, 아빠는. 생각 좀 해봐, 엄마는 혼자 집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는 게 고작이지."
"집에 함께 있겠다고 말했지만 어머니가 듣지 않으시더군."
"즐거움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야. 혼자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훨씬 전부터 엄마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셨어야 하는건데."
"말이 안 돼요! 아빠는 한 사람의 여자론 만족 못해요. 남자란… 모두 그런지도…"
"또 말컴 생각을 하고 있구나."
에드워드는 짜증을 냈다.
"그래, 확실히 그 친구는 성실하지 못했지. 그렇다고 해서 어느 남자나 다 그 작자와 같다고는 말할 수 없어."
깊은 한숨을 쉬고, 그는 화제를 바꿨다. 틀림없이 언쟁을 하는 게 싫었던 것이었다.
"우리의 그리스 친구가 네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네게서 줄곧 눈을 떼지 않고 있는걸."
"정말? 몰랐는데."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귀찮았던 것이다.
5년 전의 말컴과의 파탄 이래 누구에게도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면역이 생겨 버린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그리스인은 그녀가 압도될 정도로 남성적이었다. 여자를 전율시키는 독특한 품격을 갖추고 상대를 완전히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주인, 여자는 노예, 이것이 그리스의 전통이었다.
파트너의 빛나는 눈동자를 곁눈으로 내려다보는 그 남자의 표정에는 약간 경멸의 빛이 보였다. 여성에 대해서 극히 낮은 평가밖에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남자를 유혹한 후 냉혹하게 버린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쥴리어스 스필든은 네가 상대해 온 패들하고는 달라. 게일, 명심해라, 충고한다."
게일의 매력적인 눈썹이 약간 치켜올라가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야."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남성과는 확실히 틀리군. 하지만 시험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아주 잘 걸려들지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야. 그래요!"
"네가 진심으로 우리 그리스 친구와 교제할 작정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충고를 듣고 그만두는 게 좋을걸. 만만찮아, 저 남자는. 어떤 흥정이라도, 특히 여자가 관련되면 결코 지지 않을걸."
"여러 가지로 고마와요. 하지만 충고는 필요없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대단한 자신인데. 알겠지? 잊지 말아,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한 것은 상처의 원인이 되니까."
게일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거침없는 웃음은 에드워드의 눈썹을 또다시 찌푸리게 했다. 열여덟 살 때에는 그토록 양순하고 다정하더니, 어찌하여 이토록 뻣뻣하고 삐뚤어진 것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게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따금 그녀 자신도 복수만을 생각하게 된 자기의 변모(變貌)에 섬뜩해지는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남자들의 마음을 괴롭혀 주고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게 열을 올렸다가 딱지를 맞은 스테판도 미첼도 다 결혼했다. 이런 것은, 남자란 결코 깊이 사랑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증명한 데 지나지 않았다.
게일의 시선은 또다시 키가 크고 남의 시선을 끄는 그리스인에게 멎었다. 그래, 확실히 재미있을 것 같아…
"충고했지."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그는 동생의 시선을 보고 동생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한 것 같았다.
"저 남자는 그냥 매력적일 뿐만 아니야. 유혹을 한다구.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만약 저 사람에게 접근한다 해도 조심하겠다고 약속하겠어. 위험한 입장에 처하지 않도록 마음쓸 작정이야."
게일은 웃으면서 말했다.
"위험한 입장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에드워드는 무뚝뚝하게 동생의 팔을 잡고 요리를 준비하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장소에는 가지 않을 거야. 혼잡한 속에서라면 유혹하거나 하지 못할 테니까."
"동감이야. 하지만 혼잡한 속에서라면 너의 경우도 별다른 일은 못하지. 골탕을 먹이겠다 치면, 두 사람만이 되는 기회가 없고서야 가능하겠니?"
게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기간밖에 영국에 머물지 않는 남성과는 친해진다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이 생각은 곧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잠시 후, 게일은 그런 생각이 간절히 끓어오르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 저 거만한 그리스인에게 통쾌할이만큼 낙담의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인기척이 없는 샛길 끝쪽의 정자 속에 있는 의자를 발견하고 그것에 걸터앉았다. 장미 덩굴의 울타리 저쪽에 쥴리어스가 그의 친구와 앉아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윽고 그들의 음성이 뚜렷이 들려오자, 그녀는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입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들은 여자 얘기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성격적인 강인성이 전혀 없어서."
잉검 교수가 얘기하고 있었다.
"극히 경박하고― 그래서 실로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지."
"동감이야― 실망이 될 정도로 간단하게 말이지. 나는 싸워서 쟁취하는 게 성미에 맞는데, 이건 그저 여자의 가슴팍에 손만 가져가면 즉시 함락되지."
두 남자는 한번 더 크게 웃었다.
게일의 머리는 피가 올라가 가슴이 격렬하게 일렁거렸다. 이만큼 격렬한 노여움을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여자의 가슴팍에 손만 가져가면 즉시 함락된다…'
어쩌면 이렇게도 거만하고 대담하고 밉살스러운 남자들일까! 이 남자야말로 괴롭혀 줘야 마땅하다― 서서히!
노여움으로 숨이 답답해진 게일은 일어나서 소리를 죽이고 음악과 등불 쪽을 향해 되돌아갔다. 삼십 분쯤 지나서 쥴리어스가 그녀에게 춤을 신청해 왔다. 그녀는 그의 팔 안에 몸을 미끄러뜨렸지만 순식간에 왈츠는 끝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마주선 채 조금 떨어져 춤추고 있었다.
게일은 그의 얼굴을 잠깐 올려다보고 눈을 찡끗해 보였다. 쥴리어스가 자기에게 정신이 팔려 계속 쳐다보고 있다고 한 오빠의 말이 생각났다. 아주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면 앞길이 훤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매력있게 웃음지어 보였다.
자신은 그 정도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실제 그녀는 매우 사랑스러웠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서는 팩팩한 기가 가셔져 아름다운 얼굴은 상큼하고 고상하게 정돈되고, 시원스럽게 큰 눈은 티가 없고, 입술은 키스를 기다리는 듯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쥴리어스의 눈은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게일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그 시선은 그녀의 목덜미의 아름다운 곡선에서 엷은색 금발이 늘어져 있는 어깨로 움직여 갔다.
그의 시선이 자기 몸의 곡선을 그리는 지점까지 옮겨지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것을 깨달은 그는 약간 미소지었다. 아직 다음 음악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를 팔에 안은 채 춤추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 가지를 펼친 큰 참나무 밑으로 이끌어 갔다. 나뭇가지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달빛 이외에는 모두 암흑이었다.
음악은 희미하게 들려오다가 갑자기 멎어 버렸다. 그러나 쥴리어스는 그녀에게 돌린 팔을 풀지 않았다. 게일은 그의 균형 잡힌 몸이 자기에게 밀착되어 있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다정하게 애무하는 그의 손이 그녀의 등에서 허리로 움직여 와서 멈췄다. 일순간, 긴장된 분위기가 충만했다. 아무 말도 없었다. 나뭇잎의 스치는 소리만이 밤의 정적 속에 들려왔다.
쥴리어스의 손이 또다시 움직였다. 틀림없이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표정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여자의 가슴팍에 손만 가져가면 즉시…'
하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게일은 몸을 틀어서 그에게서 떨어지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주 멋진 밤이군요. 날씨가 좋아 바비큐하기에 안성맞춤이네요. 당신의 나라에서는 날씨 걱정일랑 안해도 되겠죠?"
그는 반쯤 그녀에게서 몸의 방향을 바꾸고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 미소지었다.
"이런 모임은, 그래요, 확실히 언제나 계획할 수 있죠."
그녀는 얼굴을 들어 달빛이 드문드문 비쳐 들어오는 어둠 속에서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얼굴의 윤곽이 돌에 새겨진 듯이 뚜렷이 떠올라 있었다. 탄탄한 턱과 매부리코, 넓고 주름이 있는 이마에는 기품이 있고, 철회색의 머리가 그의 용모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매력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스 얘기를 해주시겠어요?"
이 남성에게 자기의 매력을 시험해 볼 것인지 어쩐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 그녀는 말을 걸었다.
그는 게일을 바라보고는 나무 줄기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스에 온 적은 없습니까?"
그는 물었다. 게일이 고개를 흔들자, 그는 말했다.
"가보려고 노력해 봐야 해요. 물론 아테네는 빼놓을 수 없지만, 섬 쪽은… 좀 특별하죠. 섬을 순회하기 위한 휴가를 가져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요."
"들은 적은 있지만, 섬 순회에선 실제로 어떤 일을 하나요?"
"섬에서 섬으로 건너간다 해도…"
그는 싱긋 미소지었다. 요번에는 눈에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그건 말 그대로라곤 할 수 없죠. 연락선이 항상 섬과 섬 사이를 왕래하고 있지요. 배삯이 무척 싸고 호텔도 싸죠. 그러니까 있고 싶으면 이삼 일은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다른 섬에는 보트로 가면 되죠."
"어떤 섬이라도 모두 비슷한가요?"
"아뇨, 전부가 같다고는 할 수 없죠. 섬 자체는 모두 비슷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에게 해(海)의 섬들 사이에도 제각기 서로 비슷한 점도 있고, 뭐 대개 그런 정도죠."
"당신이 살고 있는 섬의 얘기를 들려주시겠어요? 파트머스죠?"
"맞아요. 도데커니즈 제도(諸島)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고 제일 작죠. 물론 화산도(火山島)이고, 대부분 불모지죠. 그래도 매우 아름다운 섬으로, 곳에 따라서는 식물이 무성한 곳도 있어요."
게일은 얘기하고 있는 그의 표정변화를 주의깊게 지켜보며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지금까지 자기가 만난 남성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성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다른 남자들은 헤어진 후 십 분만 지나면 잊을 수 있었지만, 쥴리어스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이삼 개월 전의 파티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그녀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었다. 헤어지고 난 후에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종의 매력이 그에겐 있었다. 게일은 나중에 이런 자신에게 화가 나서 단호히 마음속에서 그의 이미지를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겨우겨우 성공했었다. 그러나 또다시 쥴리어스가 나타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저택의 무성한 올리브나무와 시트론(cltron)의 열매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바다 저 멀리 보이는 경치 얘기를 하고, 파트머스에서 쉽사리 손에라도 닿을 것 같은 곳에 있는 다른 섬의 얘기도 했다.
"와 보지 않으면 안 돼요. 파트머스는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섬이죠."
"아주 멋진 곳 같군요."
게일은 지금까지 냉담한 투로 얘기했었는데, 이젠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그녀 자신이 느끼지 못한 다정한 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쥴리어스는 또 한번 황홀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마음속으로 평가를 하는 듯했다. 게일은 '여자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가기만 하면…' 하는 말을 생각해 냈다. 만약 그에게 간단히 놔 줄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잘 넘길 것인가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아주 멋지죠, 게일."
한데 왠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하여 그녀는 매력적인 그리스인 남성과 함께 있고 싶은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여기 있어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난 그 일은 그녀에게는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머리 위에 늘어진 나뭇가지 그늘에서 나왔을 때, 그는 다가오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고 대신에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악마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강압적이고 사정없는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밀착되었다. 게일은 꽉 죄어진 팔 속에서 몸을 비틀었지만 허사였다. 이미 도망칠 수는 없었다. 몸은 멍이 들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힘차게 안겨지고, 입술은 눌리어 터질 지경이었다.
"처음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줄곧 이렇게 하고 싶었지."
그는 만족하여 몸을 빼고는 게일의 상기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 알고나 있소?"
그녀의 눈동자는 불타듯 빛났다. 그녀는 그에게 덤벼들듯이 주먹을 움켜쥐고 올려붙이려 했지만 그의 손에 붙잡혀 제지되고 말았다. 게일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버둥대자 쥴리어스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당신은 비열한 남자예요!"
그녀는 꽉 잡힌 손을 빼며 큰소리로 말했다.
"어쩜 그런 짓을… 마치 내가 당신을 자극하여 유혹이라도 했다는 것 같군요."
"틀리단 말이오?"
그는 약간 비양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추파를 던진 거야, 게일. 그만둬요, 부정하는 것은. 그러면 정직한 게 못 되지. 당신이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 난 실망하게 된단 말이오. 확실히 당신에게 어느 정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인정하겠소.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우유부단함 탓이지."
그는 입을 다물고 차디차게 그녀의 눈을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에게 갖은 수단을 쓸까 말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소. 다른 남자들에게 써서 성공했듯이. 나는 그렇게 듣고 있소."
성량이 풍부한 그의 목소리는 약간의 사투리 때문에 한층 매력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힐난하는 듯한 날카로움이 있었지만 기분이 언짢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게일의 행동을 비난하면서도 그녀의 제물이 되었던 남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동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그의 남다른 통찰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이만큼 정확하게 그녀의 심중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심한 놀라움에 뒤섞여 같은 정도의 격렬한 노여움이 치밀어올라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노여움에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나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했군요. 누구하고 얘기했는지 가르쳐 줬으면 하는데요!"
쥴리어스는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그녀가 전부터 몇 번인가 본 일이 있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웃음이었다.
"나에게 정보를 준 사람의 이름을 밝힐 생각은 없소."
그는 차갑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것에 관해서인데, 아름다운 여성은 항상 화제에 오른다는 것쯤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이 느슨해졌다. 그 틈에 게일은 손을 빼었지만 아직 그의 압력이 느껴져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떨구었다. 새빨개진 손자국은 그의 힘센 손을 나타내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변해 가는 자국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게일의 격심한 노여움은 무엇이든 삼켜 버리고 말 것 같은 불길이 되어 금방 타오를 것 같았다. 쥴리어스가 선 채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당신의 매력을 나에게 시험해 봐도 전혀 상관없었던 셈이오, 게일. 하지만 내게 시험하려면 거기에 나서기 전에 열이 식는 것을 기다리는 편이 좋았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말투는 다정했지만 얘기의 내용은 아주 끔직한 것이었다. 게일은 얼굴을 붉혔다.
이번에는 노여움이라기보다는 낭패감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피했어야 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조금 전 오빠가 쥴리어스 스필든은 어떤 협상에서도 결코 지는 일이 없다. 여성이 관계한 경우는 특히 그렇다고 단언하였던 것을 생각해 냈다.
그 키스도, 그리고 노여움도 애써 잊으려고 했다. 가공할 난공불락의 적으로부터 게일은 명예로운 퇴각을 결정했다.
"우리들, 서로 확실히 이해되었으리라고 생각해요. 쥴리어스, 당신에게는 여자의 온갖 수단이 통하지 않는군요. 아마도 경험을 쌓은 탓이겠죠?"
게일은 갑자기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놀려대듯 웃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눈을 번쩍 빛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 있는 데로 돌아갈까요? 우리들이 어디 갔을까 하고 궁금해 하기 시작할 테니까요."
그는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볼 뿐, 그 제안에 응하여 움직이려 하지도 않고 거기 서 있었다.
"당신은 색다른 여성이오."
그는 겨우 입을 열어 말하고는 그녀를 발가벗기기라도 하려는 듯한 눈초리로 천천히 훑어보는 것이었다.
"과연 색다른 여성이군. 사귀면 재미있겠는걸. 운수 사납게도 이삼 일 내에 그리스로 돌아가야 하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꼭 다시 만나고 싶소."
게일은 턱을 쑥 내밀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까 쥴리어스, 두번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군요."
"거짓말이오."
그녀가 천천히 걸어 그곳을 떠나려고 하자, 그는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나를 홀리면 나도 마찬가지로 당신을 홀릴 거요. 당신은 내가 당신의 매력에 무릎 꿇기를 바라는 거죠? 다른 몇 사람인가의 남자가 그런 꼴을 당했듯이 나도 내던지고 그 상처를 어디선가 치유하게끔 해놓고 만족하는, 당신에게는 단지 그 일뿐이오. 그런데 어렵쇼. 나는 당신이 나의― 그, 뭐라고 하면 좋을까― 진격이라고 해두죠. 그것에 굴복해 오는 것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소. 나는 당신만큼 자기의 매력에 충분한 자신을 갖고 있진 않지만."
"어쩜 그다지도 겸손하신가요!"
게일은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보면서 빈정대듯 노골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감히 말하겠어요. 당신은 남자로서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죠."
놀랍게도 이 말에 그는 몹시 눈썹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마치 그렇게 대놓고 칭찬받는 게 화가 난다는 투였다. 그는 침묵을 계속했다. 그것은 나무라는 듯한 침묵이었다.
게일은 너무 불유쾌해지기 전에 침묵을 매듭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모하게끔 해가지고 즐기자는 건가요? 그저 단순히 나를 버리고 기뻐하기 위해서?"
그의 검은 눈동자가 또다시 그녀를 더듬었다. 눈동자 깊숙이 노골적인 욕망이 있었다.
"당신을 사랑에 빠뜨리게 하려면…"
그는 천천히 말했다. 늘어진 말투였다.
"막판에 당신을 버리게 되기 전에 보다 다른 즐거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게일은 얼굴을 붉히고 살기가 등등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려 했지만 결국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정직하게 보이고 마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위엄을 갖추고 이 어려운 고비를 모면하기 위해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쥴리어스, 우리들은 아무래도 상대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등의 일은 두번 다시 없을 테니 감정을 해소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어느 쪽도 우정과 미움의 경계를 넘기 전에, 지금 그렇게 할까요?"
그의 입가가 약간 일그러졌다. 그녀가 열심히 말을 구사해서 아무에게도 지장 없게 설명하려는 것을 그가 더없이 경멸하듯 듣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다.
그는 그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경멸을 나타내려고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이별은 오늘 밤 파티가 끝나면 자연히 오게 마련이오. 하지만 우리들은 또다시 만나게 될 거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마치 전에 만났던 것처럼 또 다른 모임에서 말이오."
게일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능란한 말주변은 도저히 그녀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까무잡잡하고 만만치 않은 그리스인과 또 한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에겐 확신이 없었다.
남자에게 대해 그녀는 우위(優位)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한방 먹이는 거라면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은 쪽이었다. 하지만 쥴리어스와의 사이에서는 그와 같은 입장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 실은 아주 그 반대였으므로 게일의 마음은 조금도 이끌리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가 잔디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자 곁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잔디밭에서는 몇 쌍인가의 남녀가 춤추고 있었다. 그날 밤은 상쾌하고 따뜻했으며, 공기는 소나무의 향기로 가득차 있었다.
머리 위의 보름달이 백아(白亞)의 구릉(丘陵)지대와 저편의 한층더 높은 구릉 지대 위에 내리비치고 있었다. 전에 없이 온화한 밤이었다. 친숙한 에게 해(海)의 섬공기와 비슷한 것을 그는 깨닫고 있는 것일까, 하고 게일은 생각했다.
묘하게도 쥴리어스와의 사이에 긴 침묵은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일체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만약 그처럼 언쟁을 하지 않았다면 이 조용한 산책은 한층 더 즐거웠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휘황한 빛에 가까이 가자 그녀는 정원에서 댄스 신청을 받았으므로 쥴리어스와는 그뿐으로, 헤어질 때까지 말 한마디도 교환하지 않았다.
"안녕, 게일― 이 다음 만날 때까지."
똑바로 그어진 눈썹을 치뜨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미묘해서 약간이긴 했지만 놀리고 있는 듯한 음색이었다.
"다음 달에는 영국으로 돌아올 거요."
"우리들이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이제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게일은 자기의 음성이 변명하려는 투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덧붙였다.
"그 무렵에는, 내가 아는 한 파티는 없으니까요."
"두려워하는 거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는 물었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단호히 말했다.
"뭐가 두려워요? 아무도 나를 두렵게 한 일은 없어요, 쥴리어스. 그리고 아무도 그런 일은 안할 거라는 자신이 있어요."
"어떤 남자도 누구 한 사람 당신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다고…"
그는 그녀의 눈을 차근히 바라보며 되풀이했다.
"불행한 경우는 당했지만 두려운 경우는 없었단 말이군. 어떤 남자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당신이 교제하는 남자는 어느 남자도 다 복수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말을 다 마치지 않은 채 얘기를 중단하고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다시 말했다.
"아냐, 그럴 수만은 없을걸. 당신의 악랄한 음모에 희생될 정도로 얼빠진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는 자신이 멋대로 생각하고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또 쥴리어스에게 자기에 관한 얘기를 한 것은 누구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자기의 행동이 오빠와 자기의 친구 이외에도 몇 사람인가에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을 산란하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무도 쥴리어스와 자기의 이야기를 화제 삼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절대적인 자신을 갖고 있었다.
"차차 알게 될 거요, 게일. 하지만 교훈이 몸에 배기 전에 따끔한 맛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
"다치지는 않아요."
지금껏 순조로왔던 것에서 얻은 자신으로 그녀는 말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이지요."
그의 눈동자가 활기를 띠고 번쩍 빛났다. 하지만 타이르듯 고개를 옆으로 흔들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내 자신을 잘 알아요. 그것에 관해서 잘못은 저지르지 않아요."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그 문제에 관해서는 다소 식상한 이번에는 함부로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요, 게일. 모험가로서 훌륭하게 성공하는 여성도 있지… 그리고 실패하는 자도 있고. 그녀들은 그다지 영리하지 않고 거기다 그런 특별한 인생에는 맞지 않지. 너무 늦기 전에 나의 충고를 듣는 게 좋을 거요."
2
그로부터 한 달 후, 게일은 주말을 무아크로프트 저택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느냐는 트리셔의 모친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
딸 트리셔의 몸이 불편하므로 게일이 와서 말상대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게일은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편지를 본 후, 심즈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게일이 들은 얘기는 가슴이 철렁한 내용이었다. 트리셔는 파혼당한 것이었다.
상대인 트레비스는 캔버랜드에 있는 귀족 딸과의 관계가 소문이 나 있었다. 그 여성 부친의 소유인 토지 가까이에 그는 낚시하기 위한 오두막집을 갖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까와진 것이었다. 트리셔를 혼자 내버려 두고 그가 혼자서 오두막집에 가곤 하는 것을 게일은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주말마다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었다.
분개하는 게일에 대해서 트리셔는, 그에게는 힘든 일을 떠나서 휴양이 필요하다며 관대한 이해를 보이고 있었다. 게일은 부인에게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양이라니, 기가 차서! 남자란 돼먹지 못했어. 누구나 할것없이! 무슨 기적이나 일어나서 그에게 적합한 벌이 내려졌으면 하고 게일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게일이 18세기에 지어진 심즈 집안의 저택에 도착하자 심즈 부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맞이하며, 트리셔는 이층의 자기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게일에게 말했다.
친구의 괴로움을 게일은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부인이 게일을 부른 이유는 그 점이었다. 일찍이 게일에게도 같은 경험이 있었던 것을 부인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그 애가 괴로와하는 것을 보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파리하고 핼쑥해진 얼굴을 한 부인은 흐느껴 울었다.
게일의 마음속에 격렬한 노여움이 끓어올랐다. 트레비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죽여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의 작은 요정 같은 트리셔. 저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데, 어째서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의심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트리셔였는데. 그가 낚시하러 간다는 것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전화에서는 트레비스와 그 여자와의 소문이 이미 퍼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째서 그렇게 빨리 알려졌나요?"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트레비스는 자기가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오두막집을 친구에게 빌려주고 있었거든. 친구 한 사람이 부인과 함께 그곳에 갔다가 그 부인이 마을 우체국에서 소문을 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 부부가 돌아오자마자 그 소문이 퍼지고, 트리셔의 귀에도 들어간 거야. 그 애가 트레비스를 만나 얘기해 봤던 거야."
눈물이 흘러서 말이 끊어졌다.
"트레비스는 인정했단다. 그리고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으니까 파혼을 하자고 트리셔에게 말했다는구나."
게일의 아름다운 입술은 보기 싫을 정도로 당겨져 한 줄의 선처럼 다물어졌다. 그녀는 말컴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상대방 여성이 게일에게 사실을 알려줄 때까지 그는 오랫동안 게일을 배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사람과 언제나 만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왜 그렇게 자주 거기에 갔었는지 간단히 설명이 되는 일이지. 불쌍한 것은 트리셔야. 과로했으니까 휴양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두둔했으니."
잠시 동안 가만히 있다가 게일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트리셔를 만나고 오겠어요. 제가 온 것은 모른다고 하셨죠?"
"그래, 얘기 안했지. 가서 만나봐, 게일. 그래서 어떻게든 위로할 수 있는지 어떤지 살펴봐 줘."
부인은 괴로운 듯 고개를 저었다.
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구의 어머니와 이런 일로 만나게 된 것이 가슴 아팠다. 더구나 트리셔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조그만 몸을 떨며 소리를 죽여 울고 있는 것을 보자 가슴은 더욱 아팠다.
게일은 친구 위에 엎드려 다정하게 팔을 돌려 달래듯 얘기를 걸었다. 그러자 트리셔는 놀라서 몸을 홱 돌려 눈물 속에서 게일을 보며 젖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 얼굴은 부었고, 눈밑은 그늘이 지고, 눈동자는 초점없이 흐려 있었다.
"어머니가 주말에 놀러오라고 하셨어. 왜 나한테 연락 안해 줬니, 트리셔.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을 말해 주지 않았냐니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
마음속으로부터 오열이 솟구쳐 올라 목소리가 잠겼다.
"너는 알 거야. 난 그 사람이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었어."
"그의 일은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어."
게일의 목소리는 달래는 것 같은 어조였지만 날카로왔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셔. 하지만 만약 돌아온다면 난 용서할 거야."
게일은 말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말컴이 별것 아닌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잊기까지는 많은 괴로움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 일어나서 시내로 가자. 어머니의 생일 선물을 사야 해. 고르는 것을 도와줄 수 있겠지?"
게일이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트리셔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마음씨가 착하구나, 게일은. 하지만 나 혼자 있고 싶어. 여기 혼자 있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끊기고 또다시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솟아났다.
"어떤 심정인지 훤히 알 수 있어. 잊을 수가 없는걸. 나를 도와주려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더라면 훨씬 마음이 편하리라는 것도 나는 알아. 하지만 나도 너와 똑같았어. 결국 모든 걸 단념하고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였지. 나 좀 봐, 트리셔. 얘기를 해보는 게 어떨까. 그리고 밑에 내려가면 조금 기분이 좋아질 거야. 오늘 뭐 먹었니? 그 멋진 스위스 요리점에 전화해서 식사하러 가자. 전에 갔었잖아. 생각나?"
트리셔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켜 눈물로 꼬깃꼬깃해진 손수건으로 눈을 닦았다. 마침내 트리셔는 게일을 따라 시내에 가는 것에 동의했다.
심즈 부인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게일과 눈이 마주치자 부인은 말없이 감사의 표정을 나타냈다.
식당에서 탁자 너머로 트리셔는 게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먹을 수가 없어!"
그녀의 눈은 눈물로 흥건해졌다.
"너무하지, 난. 하지만 나는 살고 싶지 않구나."
트리셔는 이성을 잃고 어찌해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게일의 몸속에서 격렬한 노여움이 끓어올랐다. 트레비스를 괴롭히는 방법만 있다면! 게일은 자기가 그 방법을 생각해 낸다면 끝까지 해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내놓은 것은 본인인 트리셔였다. 일요일 저녁, 게일이 다음 주말에 또 오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애정이 전부 미움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아. 나는 그 사람을 괴롭힐 일밖에 생각할 수 없어. 나는 그와 그 여자와의 결혼을 방해할 거야."
"네가 어떤 기분으로 있는지는 잘 알아. 나도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트리셔."
오랜 침묵 끝에 트리셔는 주저하듯 말했다.
"할 수 있어, 게일.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그녀는 또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음씨 착한 트리셔가 그런 것을 생각해 내고, 또한 그것을 입밖에 내기까지 한 데 대해 게일은 아연해져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강한 어투로 얘기했다고 생각했지만 게일의 목소리는 약하디약했다. 그 터무니없는 생각을 애써 쫓아 버리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릿속은 엄청난 기세로 흥분하고 격렬하게 동요되었다. 왜 안 된다는 말인가? 게일은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순간 몹시 겁이 나고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트레비스는 격노하여 날뛸지도 모른다― 보다 더 심한 경우는 해치려 들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갖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다고 원할 것이다.
"트레비스란 어떤 사람이니?"
게일은 자신이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주 말이 없는 조용한 성격이라고 듣고 놀라는 것이었다.
"틀림없니?"
게일은 다짐했다. 그가 트리셔에게 한 짓과 똑같은 짓을 당했다 해도 곧 결혼하기를 원했던 여성에게서 버림받았다 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원했다 해도 도저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음, 틀림없어, 게일. 그 사람이 노한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 사람은 언제나 다정했었어…"
오열로 인해 목이 멘 트리셔의 말은 끊어졌다. 그녀는 동요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세히 계획을 설명했다.
"내주 일요일에 트레비스는 오두막집으로 갈 거야. 하지만 루이즈는 안 간대."
"어떻게 해서 그 여자 이름을 알지? 전에는 그 여자 이름을 말하지 않았잖아. 난 네가 모르는 줄 알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게일은 날카롭게 말을 가로막았다.
"트레비스가 말해 줬어. 내주 주말에는 그 사람의 할머니한테 간다는 것도."
트리셔는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게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정말로 그 여자 얘기를 너에게 했니?"
"정말이라니까, 마지막으로 만나 약혼을 해소하기로 했을 때야. 내가 물으니까 그가 그 여자의 이름을 알려줬어. 한 달에 한 번씩 할머니 집에 간대. 매달 첫 주말에는 할머니와 함께 보낸다고 그렇게 말했어."
트리셔는 게일이 무슨 말인가 하기를 잠자코 기다렸지만, 게일은 혐오감 때문에 말이 안 나왔다. 천연덕스럽게 다른 여자 얘기를 하다니, 너무도 파렴치한 남자구나!
"그는 오두막집에 가지만 루이즈하고는 만나지 않을 거야. 만약 네가 그곳에 가서 내가 말한 대로 해준다면 내가 아침 일찍 루이즈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겠어. 그리고 따님과 결혼하고 싶다는 남자가 오두막집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있으니 가면 증거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할 거야."
게일은 또다시 말을 잃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트리셔는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매우 침착했다. 그리고 애원하듯 눈을 크게 뜨고 게일을 보고 있었다. 마치 게일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트리셔는 복수의 일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마음씨 착한 트리셔가 할 만한 방법은 아니었다. 게일은 또다시 자기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저히 잘 되어질 것 같지 않아."
게일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지만 한층 더 그 계획에 빠져들려는 자신을 깨달았다.
"한번 오두막집에 간 일이 있어."
트리셔에게는 게일의 말 같은 것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곳에는 침실이 둘 있어. 조그만 쪽은 안까지 통하는 낭하의 맨구석 쪽에 있는데, 거기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그 사람이 말했었어. 친구들도 모두 언제나 큰 쪽의 침실을 사용한대. 그쪽은 거실에서도 가깝고 욕실도 붙어 있어. 전혀 사용하지 않으니까, 작은 침실은 없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했었어."
트리셔는 게일을 살짝 쳐다보았지만 게일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열쇠는 언제나 바깥채에 놔 두고 있어. 선반 위에지. 안으로 들어가면 창을 열고… 이층은 없으니까 그 침실은 일층이야. 그리고는 밖에서부터 문을 잠그고 열쇠를 본래의 장소에 갖다 놓고 작은 침실에 숨든가… 침대에 들어가 있어도 상관없어. 트레비스는 너를 찾아낼 리가 없지.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는 토요일의 이른 아침이 아니면 안 와. 침대에서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쉬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라고."
겨우 말을 마친 트리셔는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게일의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끓어올라 차라리 트리셔의 계획에 협력하여 트레비스에게 응당의 보복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이성이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위험성이 크구나."
게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트레비스가 그 방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다면?"
"그럴 리가 없지. 내내 차를 운전해 와서 오두막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지쳐 있거든. 그렇기도 하지만 들여다볼 필요가 없지. 그 방에는 캠핑용의 침대가 하나 있을 뿐인걸."
게일은 약간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만약 내가 승낙했을 경우, 몇 시간이고 나는 끔찍할 정도로 불편한 마음으로 보내야 한단 말이지?"
"빨라도 한밤중 전에 침실에 들어가 있을 필요는 없지. 거기다 토요일 아침 7시경에 루이즈의 아버지에게 전화하면 삼십 분 정도면 도착할 거거든."
트리셔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후엔 마음대로 돌아가도 되지."
"마음대로 돌아간다고?"
게일은 눈썹을 치켰다. 어쩌면 그토록 천진난만해질 수 있단 말인가.
"트레비스가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나는 그때쯤 잠옷바람으로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그걸 잊지 마. 루이즈와 결혼할 기회를 망쳐 놨다고 나에게 복수하려 들지도 몰라. 그가 나를 순순히 돌려보내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
"그 사람이 강제로 너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니?"
트리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게일은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경고를 하고 있었지만 이 제안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것이었다.
예비(豫備) 침실에 숨어 있다가 루이즈의 아버지가 찾아오면 즉시 나가서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특별한 상황에서 어리둥절해진 트레비스가 찾아온 손님이 분개하여 돌아갈 때까지 아무리 지혜를 짜서 생각한다 해도 일의 경위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게일은 일이 순조롭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침착하게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될 것이라고 트리셔도 말했다. 트리셔는 게일의 승낙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레비스는 그런 보복을 당해도 싸!"
게일은 눈앞의 벽을 얼마간 공허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기듯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단순한 계획이야. 트레비스는 네가 뒤에서 조정했을 거라고 일단 의심해 보겠지만 별다른 일은 하지 못할 거야. 그는 나를 모를 테니까.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니까 보복을 할 수가 없지."
"해줄 셈이구나! 고맙다, 게일."
트리셔는 감격의 소리를 질렀다.
게일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확실히 트리셔는 자기를 배반한 애인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맹목적이 되어 자기 계획 성공 여부에 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계획에 마음이 크게 끌리긴 했지만 게일은 조심하느라고 좀더 생각해 보겠다고 트리셔에게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도 잠시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딜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게일은 고속도로를 북쪽으로 향해 차를 달렸다. 호소(湖沼) 지방의 아름다움은 몇 번이나 들어서 수년 전부터 한번 찾아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휴가가 아니고선 스스로 가려고 생각하진 못했다. 이번의 장거리 여행은 과감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무모한 행동일수록 한층 더 매력있게 생각되었다. 무사히 일이 진행되면 트레비스가 자업자득한 것으로 치고 더없는 만족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길은 지루했다. 겨우 에너딜에 도착한 게일은 그곳의 호텔에 묵었다. 이튿날 아침, 산악 지대의 높은 언덕을 몇 개나 넘었다. 마음은 얼마 안 있어 일어날 일로 꽉 차다시피 되었지만 웅대한 경치에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렸다.
스워저모어팩에 도착하자 오른쪽의 약간 높은 지대에 루이즈네 저택이 꽃과 수목이 무성한 언덕에 둘러싸인 모습을 드러냈다. 게일은 차를 작동시켰다. 트리셔에게 들려서 약도를 그려 왔기 때문에 그 큰 집에서 l킬로미터 반쯤의 어느 곳에 오두막집이 있는 것까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도로는 조그만 강을 끼고 뻗어 있었고, 거기서부터는 수목이나 야생의 식물로 거의 덮인 두툭한 건물 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건물을 바라본 순간 그 계획은 전에 없던 현실감으로 육박해 왔다.
굳은 결의를 가지고 태연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게일은 신경이 긴장하여 명치께가 경련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행동속에 현실적으로 위험이 도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불안으로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트레비스는 냉혹하게 트리셔를 버렸지만 새로운 상대도 잃게 된 것을 알게 되면 트리셔도 마음이 풀릴 것이다. 트레비스는 그만한 일을 저질렀으니까,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아직 시간이 충분하여 그녀는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바깥채의 선반에 트리셔가 말한 대로 열쇠가 놓여 있었다.
게일은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약간 추위가 느껴졌다. 숨어 있기로 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러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거야말로 차가운 환영이군. 나중에 쉴 캠핑용 침대 쪽을 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가로로 통해 있는 낭하를 걸어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특별히 정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쾌적했다. 주위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낚시 도구가 놓여져 있었다. 그녀는 침실로 들어갔다. 여기도 쾌적하게 침대는 잘 정돈되고, 낮고 옆으로 길게 난 창에는 커튼이 약간 젖혀져 있었다.
게일의 눈은 경대 위로 이끌려 갔다. 거기에는 열아홉 살 정도의 예쁜 소녀의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장식되어 있었다. 게일은 혐오감을 느껴 방을 나왔다.
오두막집에는 주방과 큰 침실로 통하는 조그만 화장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멋대로 자란 야생의 초목이 만산한 영토라도 되는 양 오두막집을 둘러싸고 무성했다.
다음으로 그녀는 차에서 여행가방을 꺼내고 차를 울창한 나무 사이로 집어넣어 전혀 보이지 않게 숨겼다. 또다시 모든 것은 깊은 정적에 싸여 평온한 야생의 아름다움이 돌아왔다. 게일은 여행가방을 작은 쪽 침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감추고는 주방으로 가서 전기 포트로 차를 끓여 호텔에서 주문해 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녀는 매우 침착해져 있어서 아무것에도 동요되지 않고 정신의 평형(平衡)상태라고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있는 것 같았다.
식기를 치우고 모든 게 원상태로 된 것을 확인한 후, 그녀는 응접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한밤중까지는 트레비스가 오지 않을 것이므로 초저녁부터 곰팡내 나는 그 방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에 황홀해졌다. 확실히 이곳은 휴양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밖의 오솔길에서 차가 서는 소리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그럴 리가 없는데! 8시 30분경이었다.
트레비스는 여느 때보다 훨씬 빨리 나온 것이 틀림없으리라. 게일은 번개처럼 날쌔게 응접실을 빠져나와 소리도 내지 않고 복도를 지나 예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닫힌 창 옆에 서서 커튼의 좁은 틈새로 밖을 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밖의 별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트레비스가 손을 뻗쳐 열쇠를 집는 동작을 그렸다. 그리고 나서 정면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좁은 복도를 가득 채우며 트레비스가 걸어들어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는 빨리 도착했으므로 그대로 침대에 들어가 잠자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리셔가 자신있게 말했듯이 이쪽 침실에는 들어오지 않는다고 게일은 강하게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 집안에 정적이 깃들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창가에 선 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무사히 차를 운전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여행길에 오르게 될 때까지 몇 시간이나 이곳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고 그녀는 셈해 보는 것이었다.
정적은 계속되고 있었다. 게일은 캠핑용 침대에 걸터앉았다. 트레비스가 도착한 지 두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지만 그는 응접실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몇 분 후에 그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기척이 났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응접실로 되돌아갔다. 아마 쟁반을 가지고 갔겠지 하고 그녀는 상상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자기 자신도 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마침내 그가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 소리를 들은 것은 l2시가 훨씬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그녀는 한숨 놓았다. 최대의 위험은 지나갔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몸을 옆으로 누이고 어떻게든 한두 시간만이라도 자고 싶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는 잠이 들었다. 중단되곤 하는 수면으로 이따금 눈을 떴지만 6시 반에 일어나 머리를 매만질 때까지 잠잘 수가 있었다. 세수를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가지고 있던 화장수로 얼굴과 손을 닦았다. 트리셔는 7시에 루이즈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기로 되어 있었다.
전화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러 오는데 꾸물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그 전화를 받은 뒤 즉시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게일은 그 미지의 사나이가 전화를 받고 있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아마 지금쯤 그 사람은 잠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른 아침에 침대 속에 있다가 단잠이 깨지는 바람에 분개할 것이다.
순간순간 게일은 긴장해 갔다. 필사적으로 침착하려고 애쓰는데도 신경은 팽팽해져 가기만 했다. 준비는 되어 있었다. 속이 비치는 잠옷을 입고 그 위에 잠옷보다 약간 기장이 긴 프릴 달린 가운을 걸쳤다.
고약하기조차 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바라보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 몇 초간에 끝나 버릴걸…
차가 멎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서 쾅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오두막집의 현관문을 날카롭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부르고 있는 사람의 오만한 목소리가 게일에게도 들렸다. 트레비스의 목소리는 낮을 대로 낮아 명료하지 못한 중얼거림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 뒤의 몇 마디는 게일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방금 전화를 받았는걸. 이제 알겠다…"
뒤에 이어지는 말을 게일은 듣지 못했다. 어쨌거나 지금이 드디어 드라마틱한 출연의 시기였는데, 그녀는 주저했다. 그녀의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깊이 숨을 들여마시고 마침내 그녀는 방을 나와 복도를 지나서 조용히 응접실로 향했다. 거기서는 트레비스가 손님과 이미 마주하고 있었다.
"트레비스, 무슨 일이죠? 목소리가 난 것 같던데…"
방안에 있는 한 남자를 보고 그녀는 아연해져서 엉거주춤한 채 믿기지 않아 허덕였다. 그녀의 뺨에서 핏기가 싹 가셔졌다.
"쥴리어스!"
겨우 힘을 내서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다, 당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기계적으로 그녀는 잠옷의 양끝을 끌어당겼다.
키가 큰 그 그리스인은 처음에는 무심한 듯이 보다가 수상쩍다는 눈초리가 되더니,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다는 눈초리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가죽으로 된 예쁜 슬리퍼에서부터 그녀의 몸의 선이나 곡선에 이르기까지 또 한번 찬찬히 뜯어보듯 바라보는 것이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물어야 하는 것은 내 쪽이 아닐는지요?"
쥴리어스는 재미있는 듯 되물었다.
게일은 힘들여서 겨우 할 말을 찾았다.
"트레비스라고 생각했어요."
"어찌된 셈인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얘기해 줄 수 없겠소?"
루이즈의 아버지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호통치듯 가로막았다.
"당신이 트레비스라고 생각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
쥴리어스는 참견하려는 것을 무시하고 설명했다.
"당신이 그 남자와 자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그러니까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데."
그의 말에 게일이 얼굴을 붉혔으므로 쥴리어스는 입가를 비틀면서 침묵했다.
"누군진 알 수 없지만, 어느 여성이 전화해 온 사건으로 여기 계신 이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려던 참이었는데, 그 여성이 말하길…"
도중에서 쥴리어스는 얘기를 중단했다.
"댁에서 다시 한번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내 친구가 이곳에 나타나서 얘기를 중단할 때까지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는데…"
"당신의 친구라고?"
남자는 갑자기 말을 가로막고 쥴리어스를 노려보았다.
"트레비스의 친구라고 전화로 듣고 왔소. 거기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함께 있다고도. 정말 트레비스가 이곳에 있소?"
돌연히 명령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더니 남자의 눈에 갑자기 불신하는 빛이 떠올랐다.
"나는 혼자 왔다니까요."
쥴리어스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트레비스는 여자친구가 어디론가 가고 없어서 오고 싶어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주말에 내가 이곳에 오도록 주선해 준 내 친구로부터는 그렇게 들었는데요. 나는 트레비스와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는 않지만, 추측컨대 그는 이 오두막집에서 주말을 대개 그 여성과 보내고 있는 것 같던데요."
"오두막집이라고!"
남자의 얼굴은 뚜렷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보랏빛이 되어 있었다.
"젊은 양반, 그건 내 딸 얘기야! 틀림없이 트레비스는 딸과 만나고 있지. 하지만 우리집의 응접실에서지. 그 남자가 여기 없다는 것은 확실하겠지?"
"방금 말한 대로지요."
쥴리어스는 하품을 삼키며 지겨운 듯이 말했다.
"게일, 당신도 해명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는 지시하듯이 의자 쪽으로 손을 움직이며,
"앉아요."
온건하긴 했지만 강한 어투로 말했다.
게일은 턱을 발딱 치켜 보였다. 하지만 곧 그 지시의 의미를 알았다. 잠옷의 아랫단이 벌어져 속살이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나이 지긋한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의 뺨은 한층 붉어졌다.
그 남자가 그녀를 염치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지시를 따랐다. 매우 당황한 게일은 아래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쥴리어스는 되풀이해서 설명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루이즈의 아버지 앞에서는 그럴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그가 알아주기를 원하는 그녀의 절실한 전언(傳言)이 담겨져 있었다.
쥴리어스는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잘 생각해 보면, 게일, 두 사람만이 얘기해야 될 것 같소."
그는 곁에서 해명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 쪽을 향해 말했다.
"누를 끼친 것을 사과드리고 돌아가 주시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데요."
"돌아가 달라고!"
남자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어떻게 해서 여기에 불리어 오게 되었는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 하겠소. 내 사위가 될 남자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대신에 외국인이 자기의…"
쥴리어스의 표정이 변하자, 그는 무뚝뚝하게 얘기를 중단했다.
"그래서, 하시려던 말씀이 뭐죠?"
그러자, 남자는 조심하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잠시 떠들어댄 후 트레비스에게 곧 연락하여 그에게 사정 얘기를 들어보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가 여기 오는 걸로 알고 당신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소. 당신은 아까 그렇게 말했으니까!"
쥴리어스는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옆을 지나칠 때 눈을 번득였다. 잠시 후 그 남자의 차가 사방에 잡초가 나 있는 길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문을 향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당신이 나에게 설명해 줄 차례가 되었소."
3
게일이 얘기를 마치자, 방안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쥴리어스에게 있어서는 불신(不信)의 침묵이었으며, 게일에게 있어서는 곤혹의 침묵이었다. 그녀는 사정을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실패한 것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쥴리어스에게 얘기한 것은 불유쾌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트레비스는 난을 모면한 것이 된다. 계획이 순조로울 것으로 자신을 갖고 있었던만큼 실패는 게일을 실망시켰다.
이번 주말에 트레비스가 여기 온다는 트리셔의 예상이 처음부터 빗나갔기 때문에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날 운명이었다. 쥴리어스의 얘기로는 그의 친구이며 트레비스의 친구도 되는 사람이 이번 일을 주선해 줬다는 것이다.
낚시를 하기 위해서인지, 단지 휴식하기 위해서인지 혹은 경치를 보기 위한 것이든간에 이유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쥴리어스가 여기 와 있는 바람에 게일이 굴욕을 느껴야 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그는 탐색하는 것 같은 시선으로 게일을 주시했다. 일의 경위를 다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는 다소 미심쩍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당신의 행위는 기가 차다는 표현으로는 약한 것 같군, 정말로."
드디어 그는 말했다.
"당신은 색다른 여성이라고 내가 말한 적이 있는데, 고약한 버릇까지 갖고 있는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소."
"나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들은 적은 없어요."
그녀는 냉정하게 대답하고 일어섰다.
"피차간에 이 이상 할 얘기가 없으니까 이제 가도 상관없죠? 나는 집에 가야 하니까요."
그의 까만 눈동자가 거침없이 게일 위를 흘깃거리자 그녀는 오싹했다. 그녀는 당황하여 잠옷의 아랫단을 여몄다. 상대방은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당신은 차로 왔소? 내가 태워 주면 어떻겠소?"
그녀는 끄덕였다.
"밖에 세워 놨어요."
"보이지 않는 곳에 잘도 감췄군."
그는 방 한가운데까지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뒷걸음질쳤다. 그의 야유하는 듯한 웃음이 만면에 퍼졌다.
"또 한번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하오?"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마치 고양이가 한껏 기분좋을 때 내는 소리와 흡사했다. 게일은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게끔 애썼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어요."
그러자 쥴리어스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으로 입술을 떨며 말했다.
"절호의 기회군!"
게일의 신경은 떨렸다. 물론 그는 농담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녀는 어깨너머로 살짝 곁눈질했다. 문은 닫혀 있었다. 목으로 침을 꼴깍 삼키며 애써 침착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을 재미있어 하시는군요."
"정말로 재미있어."
그는 유쾌한 듯 말을 받았다.
"하지만 곧 끝날걸요. 옷을 입고 이삼 분 안에 나가겠어요."
"가려고?"
그는 이상야릇한 억양으로 말했다.
"물론이죠. 나는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요. 당신은… 당신 자신도 나 때문에 방해되기를 원치 않으실 게 아녜요."
게일은 자기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는 쥴리어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일이 되어가는 것을 재미있어 하는 듯도 했지만, 그 이외의 뭔가 다른 것도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 고동은 빨라졌다. 게일은 즉시 그와 자기와의 사이를 눈어림하고 몸을 사렸다. 자기가 지금 얼마나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여자의 가슴에 손만 가져가면 즉시로…'라는, 여성을 경멸하는 그 말이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에 또다시 게일에게 떠오른 것이다.
그녀는 눈앞에 처해 있는 상황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한편 이끌려 드는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했다.
"방해가 되다니, 오히려 나를 즐겁게 해주고 있소."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나를 도대체 어떤 여자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빛을 내며 깜박였다.
"마음씨 착한 처녀라고 말해 달라는 거요?"
게일은 화가 발칵 나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심산이에요!"
그는 눈썹을 곤두세웠다.
"이봐요, 게일. 백 퍼센트 잘 도망친 기록을 갖고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소. 남자들과 친해져서 상대방이 열을 올리면 버리는 그런 식으로는 아무래도… 그렇지 않소!"
그는 도전하듯 계속했다.
"나에게는 그 작자들, 남자라고 할 수가 없는걸. 내게 그런 짓을 했다면 혼줄이 났을걸."
게일이 뭔가 말하기를 기다리며 그는 말을 끊었지만,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전에는 이번처럼 위험한 게임을 하지는 않았겠지? 당신은 이런 무모한 장난을 치고 아무 탈없이 빠져나가리라고 생각했던 거요?"
그는 말하면서 다가왔다. 그 동작이 민첩하고 불시였기 때문에 허를 찔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어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그의 눈에는 또다시 야유하는 듯한 빛이 되돌아왔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트레비스에게서 도망칠 심산은 아니었죠."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트리셔가 트레비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하고 그녀에게 강조하기는 했지만, 게일은 어떤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데. 순진하다는 것은 성격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오. 당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맡은 일이 아니오? 하긴 트레비스란 남자의 수단에 달린 것이지만.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방식이 나에게도 통용되리라고 생각하오?"
미묘한 화술이었다. 그의 눈에는 그 표정이 또다시 떠올랐다.
게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남자하고 있는 것은 위험해. 굉장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오빠가 바비큐 파티의 밤에 말한 것처럼 그 독특한 방식으로 유혹하는구나.
"당신의 질문은 이 일과 관계가 없어요."
게일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정말 우스꽝스럽군요."
쥴리어스가 큰 걸음으로 세 발짝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간격이 없어졌다. 게일의 맥박이 빨라졌다. 그녀는 한 손을 등뒤로 돌려 문의 손잡이를 만져 보았다.
"나는 가서, 오…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의 심장 고동은 방망이질치고 마음은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지만 간신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조그맣게 오므린 그의 관능적인 입술도, 까만 눈동자도 그녀는 신용할 수가 없었다. 마치 무엇인가 그을음을 피우다가 당장에라도 불길이 되어 타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위험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몇 번이나 뭔가 이상하게 감정이 예민해지곤 하는 것을 게일은 뚜렷이 느꼈다. 그것은 이 그리스 남자가 그녀의 내부에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그에게 강렬한 개성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근본적으로 정숙한 여자라 할지라도 만약 이 강렬한 개성과 맞부딪치면 그것은 혹독한 시련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늦어지기 때문에…"
게일은 문의 손잡이를 손가락 사이로 만지작거리면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긴 여행은 아침 일찍이… 아직 상쾌한 기분일 때에 출발하는 것이 좋거든요."
"그건 틀림없는 얘기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출발하기는 너무 빨라요."
그는 또다시 기분이 한껏 좋을 때의 고양이 소리 같은 느낌으로 말했다.
"일어나기에도 너무 빨라."
몸을 비킬 틈도 안 주고 그는 게일을 양팔 안에 끌어안아 입술을 강하게 눌러댔다. 그의 행동에 언젠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 남자같이 강한 힘 앞에는 무력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그녀를 붙잡고 강제로 키스했다. 그러고는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한쪽 손을 교묘하게 움직였다. 그 손은 비정상으로 빠르게 고동치고 있는 그녀의 가슴 언저리로 향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게일."
그는 길라진 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둘이서 즐깁시다."
"놔 줘요! 몸에 손 대면 고소할래요!"
"내가 당신을 놔 줄 것 같소, 게일? 남자가 이런 기회를 잘 이용하지 않는다면 목석이지. 나는 목석이 아니라고 단언해 두지. 거기다 나는 그리스인인걸. 우리들의 평판은 들은 적이 있을 텐데?"
매끄럽지만 약간 야유 섞인 느낌의 화술은 이미 그의 어조 그것이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라는 것이 두려워져서 게일은 또다시 버둥댔다.
"이 손을 놔요."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곧 처음부터 허사라고 알고 있었듯이 체념하고 버둥대는 것을 중지했다.
"말했잖아요! 난 가야 해요!"
그러나 말이 끝나기 전에 쥴리어스는 문을 열고 마치 인형이라도 다루듯이 게일의 다리께로부터 안아올려 어젯밤 자기가 잔 방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이런 일을 하면,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큰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가운의 끈을 푸는 것을 보자 게일의 입술은 마르고 숨이 막혔다.
"당신은 손톱만치라도 이게 어떤 일이 되는지 생각 안해요?"
"착한 여자지. 우선 이런 때는 일의 진행을 이리저리 생각하고 중요한 때를 망치거나 하는 게 아니오. 앞으로의 즐거운 일만 생각하도록 합시다. 우리들이 말려든 상황 속에서의 로맨스를 말이오."
그는 문께로 걸어가 그 앞에서 가운을 벗고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전혀 희망이 없었다.
그래도 화를 내고 저항하거나 적의를 갖고 달려드는 것보다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게일은 애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쥴리어스는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섭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알았을 테니까 다음 번에 누군가 불쌍한 남자를 괴롭힐 때에는 그 전에 잘 생각하게 될 거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얘기하는 것이었다.
군살 없이 뚜렷한 그의 얼굴, 튀어나온 턱, 그리고 높은 광대뼈, 그런 것들은 헤일 수 없이 많은 그리스의 저 돌에 새겨진 이교도(異敎徒) 신들의 조상(彫像)과 같았다. 게일은 그것을 깨닫고 그의 모습 어느 구석에도 한 가닥의 동정심마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는 이교도로서 게일의 눈에 비쳤다. 이교도인 것이다.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이런 짓 하면 후회하게 될걸요. 나는… 다… 다…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게일이 내려놓여진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고 침대를 등뒤로 하고 앉아 있는 것을 그는 멈춰 서서 거리를 둔 채 보고 있었다.
"나는 후회할 게 없어, 게일."
그는 또다시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그의 팔은 부드러웠고 계속되는 말소리 역시 다정했다.
"그리고 당신 쪽에서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우리 두 사람은 줄곧 이런 관계를 계속해 갈 것이 아닌가 하고 낙관적으로 믿고 있소."
"그런 일은 있을 리 없어요!"
그녀의 뺨은 차갑고 창백했다.
"내가 당신에게 대해서 느끼고 있는 것은 증오뿐이에요!"
그는 한번 더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좀 이른 것 같은데?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기다려 봐요.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스스로 놀랄지도 모를 테니까."
그녀는 그의 양팔 속에서 힘차긴 해도 다정하게 안긴 채 말없이 눈을 치떴다.
"정숙이란 것은 틀림없이 당신의 미덕은 아니지."
"몸을 조심하는 것이 당신의 미덕이 아닌 것도 확실하죠."
그녀는 경멸하듯이 냉소를 띠고 말했다.
"불성실이라는 것도 나의 악덕(惡德)은 아니지만."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여성의 반응을 본 경험은 충분히 있지. 따라서 포옹을 즐기고 있는지 어떤지 나는 알 수 있단 말이오."
게일은 잠시 동안 잠자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녀는 그가 철저한 바람둥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그가 잠깐 비친 말은 정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유혹되는 것은 여자들에게는 더없는 쾌감일지도 모른다.
"많은 여성에게 그렇게 했나요?"
정말로 물을 셈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해 버렸다. 이대로 이렇게 있고 싶다는 자연의 본능이 명하는 대로 시간을 끌어 보려는가 하고 자문해 본다.
"도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되는데."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의 대답은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즉, 그들 여자들은 누구 한 사람 희미한 인상조차도 그에게 남겨 놓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녀들의 마음을 빼앗고는 즐긴 뒤 그녀들이 어떤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지 생각조차 않고 버려온 것이다.
도대체 몇 사람의 불행한 여자들이 남다른 용모와 매력적인 그리스인에게 사랑을 품었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를 사모하게 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른 어떤 남성에게서도 경험한 일이 없을 만큼 자기 마음이 움직인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쉴새없이 움직였고, 그녀는 숨막힐 정도로 힘있게 끌어당겨지자 맥이 빠져 버릴 정도였다. 그녀의 입술은 길고 뜨거운 키스를 강요당했고, 몸은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의 몸에 밀착되어졌다.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그는 흥분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게일, 좀더 자연스러워 봐. 나처럼 좋은 기분이 될 테니까."
그의 팔은 더욱 힘이 주어져 그녀를 짓눌렀고, 손은 가슴 주위를 더듬고 있었다.
"그만해요."
게일은 그의 격정의 물결에 자신을 잊고 빠져들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며 간청했다.
"놔 줘요… 제발!"
"정말로 놔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정직하게 인정해요."
속에서 나오는 쉰 저음은 억누르고 있는 격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은 교묘하게 욕망을 불러일으키려고 설득시키듯 그녀의 뺨을 애무했다. 그녀의 몸 전체가 뜨거워졌다.
"몸부림치지 말고 순순히 내 말을 들어줘."
"들을 필요없어요! 절대로… 순순히 말을 들으라니!"
필사적이 되어 끝까지 저항하며 그녀는 조그만 주먹으로 그의 더없이 넓은 가슴을 두드려서 겨우 몸을 떼어냈다. 아무리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어도 자기가 이렇게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일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자기를 구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를 내기도 하고 다음에는 애원하기도 하면서 게일은 할수없이 이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눈물로 눈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두 사람 다 서로의 일은 거의 모르죠. 당신이 내게 관한 것을 알 리가 없을 뿐더러 말도 안 돼요. 그런 내가… 우리들이…"
하지만 게일의 말은 그의 입술로 중단되었다. 날씬하고 작은 그녀의 몸에 그의 양팔이 굵은 밧줄처럼 둘려지고 그녀는 도리없이 그에게 끌어당겨졌다. 그의 힘과 맞서다 지쳐 버린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는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비웃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정복자가 단지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뽐내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놔 줘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애원했다.
"부탁해요, 쥴리어스…"
입술이 잠깐 사이 떨어졌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은 관능적이고 집요하며 용서가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욕망에 타는 불이 번득였다. 게일의 몸 전체에 충만했던 빛은 바람을 타고 불길이 되었다.
이렇게도 쉽사리 그의 격정에 몸을 맡겨 버린단 말인가? 아냐, 절대로 그가 요구해도 응하지는 않을 거야. 그의 팔 속에서 그냥 찰흙처럼 되어 그에게 정복의 만족감 따위를 맛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녀는 맹세했다. 하지만 온통 몸을 내던지고 있으면서 뭣 때문에 이 마당에 괴로와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다.
"놔 줘요."
"이제 너무 늦었어, 게일. 너무도 무리한 요구야. 바보같이 저항하는 것을 체념해 주었으면 좋겠는걸. 당신은 매우 고집통이야. 내가 즐겁게 해주려고 하고 있는데 당신은 즐거워하지 않아. 하지만 말이지, 이건 당신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거요. 그…"
또다시 그녀가 애원하자, 그는 도중에 침묵해 버렸다. 들으려고는 하지 않고 그녀를 안아올려 침대 곁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겨우 입을 열자 그는 시간의 낭비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군. 먼젓번에도 한번 말했지만, 당신은 실로 매혹적이라구. 그때는 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었소. 그러나 이번에는… 아름다운 게일, 나는 더한 것을 갖고 싶어…"
갑자기 그는 몸을 곧추세우더니 귀를 기울였다. 그의 눈길은 게일의 파리한 얼굴에서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의 문으로 옮겨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그녀를 마루에 내려놓고 그는 한달음에 방안을 가로질러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게일도 뒤를 따랐다. 그녀는 목욕탕의 한쪽 벽을 따라 뻗혀 있는 파이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파열됐군요."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갈라지고 약간 히스테릭한 웃음이었다. 그 소리에 뒤돌아본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때를 잘 맞췄는걸, 당신에게는."
그는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도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날씬한 몸을 헤매고 있었고, 최후까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혹적인 곡선을 바라보고 있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목숨을 건졌는걸. 파이프의 파열이라니, 너무도 멋없군!"
얄궂은 웃음이 그의 입술에 떠올랐다. 분함이 섞인 쓴웃음이었다.
"때맞춰 구원이 나타나다니, 당신은 운이 좋아."
그는 아주 잠깐 침묵한 후, 침착한 태도가 되어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당신은… 갈 거요?"
그녀 또한 맥이 빠져 버렸다. 그가 게일에게 넌지시 출발을 재촉하니까 그녀의 뺨은 삽시간에 빨개졌다. 파이프에서 쏟아지는 물이 갑자기 많아진 탓에 그녀는 무언가 신랄하게 대꾸할 말을 찾지 않아도 좋았다. 물이 발목까지 흘러들어오자 쥴리어스는 날쌔게 비켰지만 게일의 가벼운 슬리퍼는 곧 물에 잠겼다. 물은 계속해서 파이프에서 흘러나와 방안까지 흘러들었다. 쥴리어스는 민첩하게 가운을 잡고 팔을 꿰었다.
"꼭지가 어디 있는지 당신은 모르겠지? 가서 찾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곧 무릎까지 물에 잠길 것 같소."
그가 가버리자 게일은 옴쭉달싹 않고 서 있었다. 기세좋게 흘러들어오는 물에 정신이 팔려 발이 젖어 기분이 나쁜 것도 잠깐 잊고 있었다. 왜 이런 기분이 되는 것일까― 일종의 공허한, 허공에 뜬 것과 같다고나 할까? 낡은 파이프가 그녀를 구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없이 안도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행여 그렇지 않다면… 얼굴이 화끈해지고, 그녀는 쥴리어스가 넌지시 한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곧 그것을 머리에서 쫓아냈다.
그녀는 때를 잘 맞춘 운명에 힘입어 구원이 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더욱 안도감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몸도 마음도 왜 더 편안해지지 않는 것일까? 쥴리어스가 돌아오자, 그녀는 그의 눈썹 언저리에 아직도 깊은 주름이 져 있는 것을 깨닫고 목을 갸우뚱하며 그를 보았다.
"빌어먹을 꼭지 같으니라구. 밖에 있는 게 틀림없어."
그는 자기가 방을 나간 뒤 줄곧 그녀가 그냥 그대로 거기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문께를 가리키고 그는 말했다.
"양복을 입는 동안 밖에 있어 줘요. 당신도 몸단장이 끝나면 부엌에서는 바빠질 거요. 냉장고에는 내가 갖고 온 베이컨과 계란이 있소. 물을 끊어 버리기 전에 두세 개의 콘테이너에 물을 가득 채워 두는 게 좋을 거요."
"네, 그렇게 하죠."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쳐 쥴리어스는 웃었다.
"밖에 있어 줘요."
그는 기분좋게 명령했다. 게일은 밖으로 나와 손을 뒤로 돌려 살짝 문을 닫았다. 한 시간 남짓 지난 후, 두 사람은 의자에 걸터앉아 아침을 들었다. 그때까지의 시간은 물을 대걸레로 내보내고 깔개를 밖에 매달아 말리기도 하면서 보냈다. 두 사람은 주방의 조그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게일이 준비한 베이컨과 계란을 먹었다.
"요리도 제법 하는군."
쥴리어스는 재미있는 듯 감상을 말했다.
"아름다운 여자란 집안일이라면 대개 형편없는데."
그는 양념이 든 그릇에 손을 뻗쳐 소금과 후추를 쳤다.
"만약 나 자신도 요리는 서툴지 않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놀랄 테지."
"틀림없이 그건 놀라운 일이죠."
게일은 이제 충분히 자신을 되찾아 애교를 부리며 미소지어 보였다.
"남자는 우월하니까 몇 세기나 되는 동안 여자의 일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에 정성을 들일 수는 없다고 그리스인은 생각하고 있는 듯해요."
"일반적으로 그렇소. 그리스 남자는 정말로 자기들 쪽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는 토스트 랙을 집어들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게일은 토스트를 집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당신은 별난 사람이군요, 쥴리어스."
그가 잠자코 버터를 토스트에 바르고 있는 동안 게일은 앉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지금까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은 전연 없어요?"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되는 것은 그러고 싶은 여성이 나타났을 때뿐이지."
"그렇다면 지금까지 적당한 여성과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군요?"
"명쾌한 추론(推論)이군."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은근히 빗댄 말에 그녀가 얼굴을 붉히고 당황하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약간 나사못이 빠져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녀는 아래를 보고 식탁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당신은 어떻소,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정하고 있는 거요?"
"네, 절대로."
"어느 남자가 당신을 버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결심했다는 거요? 매우 어리석군, 게일. 남자가 모두 같다고는 생각지 말아요."
그녀는 잠시 주저한 후 갑자기 용기를 내어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있어요. 거기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도 이혼한 사람들이 몇 사람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결혼이란 위험을 무릅쓰고 할 만한 일은 아니지요."
"결혼이 도박이라는 점에서는 동감이군."
쥴리어스가 조용하면서도 얼마간 무거운 느낌으로 말하는 것을 게일은 느꼈다.
"하지만 신중하게 충분히 조사한 뒤의 일이라면 이상적인 결혼생활도 꿈은 아니지."
게일은 놀라서 눈을 치떴다. 지금 그는 아주 진지했다. 조금 전, 그와 같은 행동을 하려던 남자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게일을 가벼운 마음으로 농락할 심산이었다― 이 경우 역시 가볍게 헤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관계는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아마도 일이 개월이나 기껏해야 일 년이겠지. 만약 동의했더라면 나는 깨끗한 채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인가?
게일은 그 해답에서 자기 스스로가 도피하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쥴리어스!"
게일은 길게 컬한 속눈썹 밑으로 살짝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도 결국에는 그 이상적인 생활로 들어가고 싶으신 거죠?"
그의 눈은 무거운 빛을 띠고 있었지만 입술은 삐뚜름했다. 이 심각한 분위기를 게일은 더없이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내게 결혼하고 싶으냐고 묻고 있는 거요?"
그녀는 당황해 하면서도 미소지으며 끄덕였다.
"그래요. 실은 그것을 묻고 싶었어요."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게일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별다른 이유없이 바비큐 파티가 있던 날 밤, 오빠가 그녀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들의 그리스인 친구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힌 것 같은데. 네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던걸.'
육체적인 욕망 때문이겠지, 틀림없이.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야. 게일은 그렇게 판단하고 눈을 들어 테이블 너머로 그를 살짝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나는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생각지 않았었는데…"
그는 말하다가 머뭇거리더니 한순간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쭉댔다.
"요즈음의 여자들은 싼값에 살 수 있기 때문에 남자들에게는 별달리 그럴 필요가 없지. 여자가 필요하면 거의 언제나 별로 힘 안 들이고 손에 넣을 수 있지."
"당신은 정말 무례하군요."
즉시 대꾸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있었다. 제비꽃 색의 그녀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잠시 주저한 후 게일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여자를 정복하는 것은 신물이 나도록 간단하다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는 거죠?"
"당신은 어디서 그 말을 들었소?"
"생각 안 나세요?"
그녀는 매끄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는가 보죠."
그의 눈은 위험한 빛을 발했다. 하지만 온건하게 말했다.
"어디서 그 말을 들었느냐고 묻고 있지 않소."
"요전날 밤의 파티에서죠."
잠시 후 그녀는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침내 얘기를 해 버린 것을 후회했다.
"그랬었군."
그는 생각을 더듬듯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들은 얘기의 전부는 아닌 것 같소."
게일은 도전하는 듯한 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 남자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네, 그게 전부는 아니죠."
침착하게 말했다.
쥴리어스는 침묵했다. 그는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듯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고 얘기를 시작했을 때, 그 목소리에는 비난이 담겨져 있었다.
"당신은 엿듣는 버릇이 있소?"
그녀는 한층 더 얼굴을 붉혔다.
"장미의 울타리 반대쪽에 당신들 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었어요."
변명 비슷한 어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당신은 그곳에 있었소. 엿듣기 위해서였단 말이오?"
그는 노려보는 듯한 표정이었으며 목소리는 날카로왔다.
말을 마치자 입술은 굳게 다물어졌다. 그의 얼굴에 험하고 냉담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게일은 보았다. 가무스름한 피부에 거의 검정색이라고 할 수 있는 눈동자는 그야말로 그리스인다운 것이라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들려왔을 뿐이에요. 하지만 더 듣기 위해서 일부러 그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예요."
"그렇지만 명확히 듣고 있었던 게 아니오?"
그것은 미묘한 질문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게일은 자기의 접시에 눈을 떨구었다.
"당신은 내가 쟁취하는 편을 더 좋아한다는 말도 들었소?"
게일이 끄덕이자, 그는 비웃듯이 말했다.
"그럼 그 뒷말도 들었겠군?"
그녀는 방금 그가 자기 가슴에 손을 댔던 것을 뚜렷이 생각해 내면서 그를 보았다.
"당신들은 무례하고 거기다 오만해요. 신사가 할 얘긴 아니죠."
그러자 그는 웃으며 무언가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건 남자끼리의 얘기요. 여성의 귀에 들어가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 않소."
그녀는 경멸의 기색을 띠었다.
"여성의 일을 그런 식으로 얘기하다니, 천박하군요."
"여성은 남자에 대한 얘기를 안한단 말이오?"
"그런 식으로는 얘기 안해요. 당신들은 한결같이 여자를 유혹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자랑하거나, 여자는 경박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성격적으로 강인한 점이 없다든가 하고 멋대로 얘기하는군요. 우리들의 경우는 사실밖에 얘기 안해요."
"당신이? 얘기를 전부 들었다면 몇 분간 극히 불쾌한 기분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텐데."
"분개했죠."
그녀는 수긍했다. 그는 그녀가 느낀 기분에 대해 그냥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때 나서서 두 사람에게 내가 생각한 것을 말할 수도 있었죠."
화가 치민 김에 그녀는 커피 포트를 집어올렸다.
"더 드시겠어요?"
그는 흥분하여 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끄덕였다.
"게일, 고맙소."
그의 어조에는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
"그것을 전부 들었다니, 미안하게 되었소. 당신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나?"
의향을 묻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발랄하게 대꾸했다.
"당신께 대한 나의 의견이 중요한가요?"
"그렇소.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중요하오."
커피 포트를 스탠드에 도로 갖다 놓으면서 그녀는 의아스러운 듯한 얼굴을 했다.
"조금 전까지 당신은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으셨어요. 또한 결코 품위있는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죠. 당신이… 그 여성을 그렇게…"
게일은 말을 더듬다가 또 한번 고쳐 말했다.
"당신은 또 그 술수를 쓰려고 했던 것이죠?"
그러나 결국 그녀가 한 말은 단지 그를 웃겼을 뿐이었다.
"당신이 내게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크게 틀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그는 솔직히 말했다.
게일은 복잡한 생각을 하며 그를 살짝 흘겨보았을 뿐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그에게는 싫지 않은 기분좋은 쾌감을 주고 있는 듯했다.
"대단히 운치있는 클라이맥스였지."
재미스럽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한 듯한 복잡한 표정으로 그는 계속 말했다.
"더욱 속상한 것은 다른 방에 당신이 와 있었던 것이오. 그것도 밤새껏. 너무도 유감스럽군!"
의혹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앞서의 이유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당신은 분명히 나를 놀리고 있었군요, 쥴리어스. 정말로 나를 유혹할 작정이었는지 아닌지도 의심스러워요.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겁주려고 그랬을 뿐인가요?"
이 말을 듣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게일!"
그 부르는 소리는 온건하고 성실함이 있었다.
"당신을 모욕할 셈이 아니었소. 매력적이라고 나는 몇 번이나 당신에게 말했는데, 그것은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인 거요. 당신의 매력을 더욱 알고 싶어서 그대로 보낼 수가 도저히 없었던 거요."
그는 얘기를 도중에서 중단하고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가 되었다.
"이번에는 그 괘씸한 파이프의 파열 때문에 당신은 구조되었지만, 또다시 이런 기회가 굴러들어온다면 그때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요."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리 없어요."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쥴리어스도 동의하듯 끄덕였다.
"당신은 결혼에 관한 나의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어요."
게일은 자기에 관한 화제를 바꾸기 위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참! 그렇군. 최근까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내가 말했었지."
게일은 그가 할 말을 찾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가 한동안 말을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한층 더 놀랐다.
그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겨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화제를 바꿉시다, 게일. 나의 결혼관 따위는 재미있는 얘기가 못 되오."
4
오두막집에서의 사건을 잊을 무렵, 트레비스는 트리셔에게 편지로 파혼의 의사를 알려왔다. 모든 것을 그가 알게 된 것은 명백했다.
트리셔 이외에 아무도 이와 같은 일을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부인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오두막집에 있었던 여성은 친구라는 확신이 있으므로, 만약 규명이 되면 그 여성은 난처해질지도 모른다고 씌어 있었다. 트리셔는 눈물을 흘리며 그 편지를 읽어서 들려줬다.
"그것은 예상했던 일이 아닐까? 그는 운좋게 난을 면했지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이 이상은 아무 말도 안해 올 거야."
게일은 자신을 가지고 말했다.
"거기 있던 게 너라는 걸 모르니 다행이다."
트리셔는 미간을 찌푸렸다.
쥴리어스는 결코 그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테니까 트레비스가 알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게일은 쥴리어스가 그 점에 관해서는 입이 무거운 신사라고 믿고 있었다. 거기다 그는 그리스로 돌아가고 없으며, 늦가을이 될 때까지 영국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오빠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삼 개월이나 뒤의 일이고, 그 즈음에는 아마 트레비스가 결혼했을 것이고, 그 사건은 잊어버리겠지. 따라서 게일은 태연했다.
그런데 그 편지가 온 지 불과 일주일 후, 캔버랜드의 오두막집에서 게일이 외국인 남성과 한 밤을 지냈다는 전화를 트리셔의 약혼자에게서 받았다고 어머니가 얘기하는 것을 듣고 게일은 아연해졌다.
"정말이니? 그날 밤은 친구의 별장으로 간다면서 집을 나갔지 않니?"
뭔가에 홀린 듯이 딸을 빤히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저, 전, 그날…"
이런 보복이 올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어머니의 귀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이나마 들었다면 게일은 트리셔의 계획에 협조하는 것을 거절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녀의 이름을 안 것일까. 야위어서 파리해진 어머니의 얼굴에는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표정이 깃들여 있었다.
게일은 마음을 정하고 어머니에게 내용을 얘기했다. 쇼크를 주겠지만 의심을 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해도 소용없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예요. 저와 쥴리어스는 딴 방에서…"
"쥴리어스? 쥴리어스 스필든이라면 그리스인 아니냐? 에드워드가 그 사람 얘기를 했었는데. 바비큐 파티 때는 줄곧 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면서?"
"그것은 오두막집 일과는 관계 없어요."
"있을 텐데. 그 그리스인과 함께 있었다고 방금 말했잖니?"
"함께라고는 할 수 없어요. 어머니의 상상과는 틀려요. 다른 방이었어요."
게일은 모든 것을 낱낱이 얘기했다. 긴장해서 굳어진 어머니의 표정이 어느 정도라도 완화되리라고 기대했지만, 반대로 공포에 가까운 표정이 어머니의 얼굴에 천천히 퍼졌다. 게일은 숨이 가빠졌다.
"어쩌면 태연히 그런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하니!"
부인은 잠시 흐느끼더니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아빠에 그 딸이군… 그토록 닮지 말라고 기원했는데. 거짓말쟁이― 그이도 거짓말을 시키곤 했지. 젊은 시절… 거짓말쟁이 건달이었지. 그러나 나에게는 너하고 에드워드가 있었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너까지 날 배반하는구나…"
어머니는 딸의 얘기에서 떠나 혼자 중얼거렸다.
게일은 자기의 행동을 힐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쥴리어스가 범죄 행위라고 단정했듯이 정말 그대로라고 이제 와서 시인하는 것이었다.
야단맞을 것을 각오하고 변명하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그녀의 얘기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거짓으로 단정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남자와 지내려고 나가다니… 거기다 하필이면 그리스인과!"
부인은 얼굴을 들었다. 게일은 그 표정을 보고 주춤해지며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안 지 어느 정도 되니?"
어머니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했다.
"길지는 않을 테지. 한번도 그 사람 얘기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어머니는 크게 숨을 쉬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밤을 함께 지내다니."
"그런 일 없다니까요!"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게일의 마음은 아팠다.
"제가 말하는 것을 믿어 줘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노여움과 짜증과 깊은 쓰라림이 번갈아 가며 게일을 괴롭혔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얘기했다.
"너희 두 사람이 결혼할 가능성은 있니? 그렇지 않으면 그냥 놀아본 거냐?"
게일은 놀라서, 자기들은 친구조차 아니며 결혼 따위는 문제 밖이라고 대답했다. 단지 얼굴이나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떳떳치 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되풀이 말했다.
어머니는 지겨운 듯 말했다.
"아마 너는 몰랐겠지만, 그 사람의 얘기를 하는 동안 줄곧 네 얼굴은 빨갰었어.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얼굴이 빨개졌다 그것은 쥴리어스에게 자기를 범할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만약 방해가 없었고, 그의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얘기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설득력이 없는 얘기가 이것으로 한층 더 약해지고 말았다.
"절대로 용서 못해. 그러나 만약 너희들에게 결혼할 의사가 있다면 용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 그런 사정이라면 납득할 수도 있지… 하지만 생각 좀 해봐라. 나중에 가서야 그 남성과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다니!"
게일은 어머니를 혼자 두고 드라이브했다. 머릿속은 혼란해지고, 마음은 어머니 때문에 아팠다. 오빠는 게일에게 언젠가 후회한다고 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잘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태까지의 경우와 매우 달랐다.
도대체 누가 트레비스에게 알렸단 말인가. 짐작이 가는 것은 쥴리어스지만, 그는 영국에 없었다. 쥴리어스― 매력적인 철회색 머리를 가진 자존심이 강하고 위풍당당한 남자. 처음 대면 때부터 게일에게는 뭔가 느낌이 있었다. 뭔가 잡히지는 않고 깨어났을 때 꿈의 실마리처럼 허망한데, 실제로 존재하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의 일은 저항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아무리 발버둥쳤댔자 그의 힘 앞에는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허락한 것은 아니다… 또한 교묘히 위험을 모면했지만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은, 만약 그가 강제로 육박해 오면 그녀로서는 저항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틀림없었다. 결백하다고 어머니에게는 주장했지만 운이 좋았을 뿐인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는 그 이후 공허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실망 때문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일은 수치심이 엄습했기 때문에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해 보려고 애썼지만, 여전히 쥴리어스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그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아 교양은 있었지만 유럽 사람과는 전혀 다른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성격이나 외모도 달랐다. 즉, 그는 이교도인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리스인이 갖는 불같은 정열적인 기질도 다분히 있었다. 그것은 고대 이교(古代異敎)의 신들 시대부터 있던 소유벽(所有癖)과 연관지어 있었다. 그리스의 여자는 전통적으로 남편의 명령에 절대 복종했고. 모든 면에 있어서 여자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따르고, 남편의 말을 규율로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쩌면 그다지도 시대에 뒤떨어져 있을까, 하고 게일은 생각했다. 그녀는 쥴리어스가 말한 두 가지 일을 떠올렸다. 첫째는 적당한 여성이 나타나지 않는 한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것, 둘째는 결혼에 관해서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그때는 결혼에 관한 것이 머리에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게일은 그가 결혼하는 것을 상상하고 자기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왜 자기가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일까? 그의 생활방식도, 그가 무엇을 선택하는가도 그녀에게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게일은 기를 쓰고 문제점을 생각해 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쥴리어스의 모습이 나타났다가는 초점이 흐려지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가니 언제나처럼 아버지는 없었다. 또한 놀랍게도 어머니가 외출한 것이다. 저녁때는 언제나 집에 계셨는데, 도대체 무슨 용무가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자 게일은 조바심이 났다. 실제로 어머니는 쇼핑하러 가도 한 시간 남짓이면 끝나고 그 이상 길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십 분 후에 게일은 메모를 찾아냈다.
<기다릴 것 없다. 늦어질 테니까.>
그 말밖에 씌어 있지 않았다. 신경이 곤두섰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돌아온 뒤에도 어디 갔었는지 말하려 하지 않았다.
"왜 기다렸니, 기다리지 말라고 써 놨었는데."
어머니는 톡 쏘듯 말했다. 아마 몸이라도 불편한지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었다.
"걱정스러웠어요. 당연한 일이지만… 어디 나가거나 하시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하지만 이제부터는 외출할 거야. 너도, 아버지도 행선지를 알려고 하지 마!"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한 어머니는 게일을 남겨 놓은 채 이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게일은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새벽 2시 반에 모습을 나타냈다.
"어찌 된 일이냐?"
아버지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가 어디 아프니? 그렇지 않다면 무슨…"
"만약 그렇다면 걱정되시나요?"
게일은 냉담하게 말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는 취해 있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마시고 있었을 리는 없다.
"무슨 일이지?"
걸어서 소파 쪽으로 가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머니께선 오늘 밤 12시가 지날 때까지 집에 안 계셨단 말예요."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갔었는데?"
"얘기를 하지 않으세요."
약간 주저한 후, 게일은 체념한 듯 생각지도 않게 알려지고 만 그 사건을 얘기했다.
"그래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나가셨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이 돼요."
게일은 또다시 후회스러워지는 마음으로 말했다.
"너는 캔버랜드까지 가서 그리스인과 함께 잤단 말이냐?"
아버지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웃었다.
"나를 딱 닮았구나. 그렇잖아?"
"그만둬요!"
게일은 발을 굴렀다.
"방금 사실을 얘기했잖아요."
"나도 네가 한 말을 믿지 못해."
아버지는 그녀의 날씬한 몸매를 곁눈질하고 나서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스스로 깨닫기 바란다. 뭐 그렇게 화낼 것도 없겠는데. 어쨌거나 좀 즐겼다 해서 뭐가 나빠. 네 어머니는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야."
게일은 제비꽃 색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를 때려서라도 그 징글맞은 웃음을 거두게 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고지식하다구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하고 계신 짓을 어머니가 시작하면 뭐라고 말할 작정이세요?"
아버지의 입가는 즉각 굳어지고 추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시각까지 도대체 어디를 쏘다녔다는 거냐?"
아버지는 목청을 돋웠다. 게일은 화가 났다. 자기는 놀아나도 되지만 아내는 정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거기다 자신은 그 말을 무시하고 있다.
"말했잖아요. 저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다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리고 동네 사람과도 왕래가 없으니 이웃에 갔었을 리도 없고."
"그래요. 이웃집에 잘 가시지 않죠."
게일의 어머니는 예의바르고 상냥했지만, 매우 소극적이라 누가 병이 나거나 출산, 혹은 결혼식 등의 꼭 필요한 방문 이외에는 특별한 왕래가 없었다.
"어머니 일이 걱정스러워요. 저 때문에 몹시 당황하셨어요… 그 얘기를 믿어 버리신 것 같아요."
아버지는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지키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어쩌면 혼자 걸어다니고 있었겠지. 그렇지, 그런 타입의 여자야. 생각에 잠기거나 고민하면서 길거리를 걸어다녔겠지. 훨씬 이전에도― 너와 에드워드도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지만, 너의 엄마는 곧잘 그런 짓을 했었지."
"혼자서 헤매었다구요? 어째서였죠?"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아버지의 나쁜 버릇 때문이지."
"결혼하자마자 그런 식으로 살았나요?"
의아한 듯 게일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네 어머니와 나는 안 맞는 것 같아. 처음부터 쭉 그랬어…"
"그래도 어머니는 애를 둘씩이나 낳지 않았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냐? 냉담한 여자라도 아기는 낳을 수 있지."
게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런 대화가 견딜 수없이 싫었지만 계속했다.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지만, 그건 저속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예요."
아버지는 그 말에 동의하듯 품위없이 웃었다.
"남자는 모두 두 사람 이상의 아내를 가져야 하는건데."
딸의 얼굴에 떠오른 경멸의 표정을 무시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동양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거든. 매너트리너의 농부만 하더라도 아내를 다섯이나 거느릴 수 있었지. 썩 잘 된 일이지."
그녀는 자기와 아버지 사이에 지금껏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게일은 아버지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두 사람 다 그런 것에 대해 밝혀 내기를 지금까지 고의로 피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든 가식은 벗겨졌다. 아버지는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도 아니었다. 그녀 편에서는 양친의 결혼생활에 관해 많은 것을 안 이상 듣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오래된 옛날 얘기를 함에 따라 게일은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일을 생각했다. 이렇게도 오랫동안 한 남자와 생활을 같이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천성적인 바람둥이의 아버지에게도 정절(貞節)을 지키고, 그리고 결혼생활에 있어서 신성한 모든 것을 지켜온… 어머니는 성녀(聖女)였다. 게일은 지금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저 같으면 그 옛날에 나가 버렸을 거예요. 아버지 같은 사람은 포기해 버리죠."
"그럴 테지, 너 같으면 그랬겠지. 그러나 너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어. 앞으로도 끝까지 나의 반려자노릇을 할 거야.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그래서 아버지는 이런 일을 계속할 작정이세요?"
게일은 이렇게 물으면서도 조금 전에 아버지가 한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틀림없이 어머니는 최후까지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너무 늙어서, 이를테면 저… 할 수 없을 때까지는 말이야."
아버지는 중간에 머뭇거리다가 또다시 그 웃음을 띠었다.
"그렇게 되면 안정이 되지. 어머니와 함께 말이지. 행복하고 평온한 말년이 되겠지."
"늙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어머니는 행복해질 수 없어요?"
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생활방식을 바꿔 볼 수 없어요? 한번 더 어머니를 사랑해 드리지 않으면 안 돼요."
"한번 더라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요컨대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너는 모른다, 게일. 너희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여우에라도 홀린 듯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역시 밤마다 어머니를 혼자 두고 다니실 거예요? 만약 제가 일주일 중의 삼사 일 밤을 함께 있어 드리지 않으면, 어머니는 그 많은 밤을 혼자서 보내게 되세요."
아버지는 하품을 했다. 이제 그 얘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파에 기댄 아버지의 눈꺼풀은 졸음에 감겨지려 했다.
"주무시는 게 낫겠군요."
게일은 의자에서 일어나 재촉했다.
"왜 자지 않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너는 얘기하지 않았어."
아버지는 또 한번 하품을 삼키며 말했다.
"어머니 얘기를 할 참이었어요. 어디 가셨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요. 아주 걱정스러웠어요."
"이제 알았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왔을 뿐인 거야…"
아버지는 집게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너희 어머니를 괴롭힌 것으로 이번에는 네가 책망을 들어야 할 차례다. 말하자면 밖에 나가서 그런 일을 하고 즐겨야 된다면, 제발 부탁이니 들통나지 않도록 해라."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 같은 그런 짓 하고 즐기지 않았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다 고백해라, 게일. 아버지에게 거짓말할 필요는 없다. 절대로 꾸짖거나 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을텐데."
"저속해요!"
게일은 그렇게 말하고 홱 돌아서서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은 아버지를 거기 남겨 둔 채 방을 나와 버렸다.
5
어머니는 일시적인 흥분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고, 또다시 전과 다름없는 생활이 계속될 것으로 게일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게일의 어머니는 한 주일에 네 번쯤 집을 비우게 되었다. 그간 뭘 하고 있는지 게일도, 남편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어디를 돌아다니는 거야?"
삼주째였다.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던 아버지는 매우 화가 나서 물었다.
"할 말이 없으실 텐데요. 아버지도 지금까지 행선지를 말하고 나가신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눈을 번득였다.
"문득 남자와 함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되어서 그래."
게일의 얼굴에 경멸하는 기색이 확 떠올랐다.
"만약에 어머니에게 남자친구가 있다 해도, 아버지와 관계가 있나요?"
"난 남편이란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조금 늦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검붉어질 정도로 얼굴에 홍조를 띠고 노려보았다.
"이것 좀 보게. 여전히 삐뚤어져 있구나, 응? 멋대로 남자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다 해서 어머니를 선동해도 괜찮은 건 아니야. 너희 어머니가 남자하고 같이 있기라도 해봐라."
아버지는 음성을 낮췄다.
"목을 졸라 죽이겠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라요.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게일은 흥분하고 있었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것처럼도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삼주째 남자가 찾아온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도 잘 짜여져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뒤를 따라가 보겠어요!"
"너희 어머니는 단순할지도 모르지… 네가 보기엔 말이야. 하지만 미행을 허락할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을걸."
몇 번이나 시계를 들여다본 후 게일의 아버지는 겨우 외출했다.
'만나기로 되어 있군.'
게일은 아버지의 모습을 못마땅한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의 행동이 집안에 불러일으킨 균열을 생각했다.
우울해진 게일의 기분은 현관의 초인종 소리로 중지되었다.
"쥴리어스!"
게일은 문을 열자마자 뒷걸음치며 가쁜 숨을 쉬었다.
"어떻게…?"
쥴리어스는 다정하게 웃으며 좋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게일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들어가도 괜찮겠소? 당신 혼자일 테니까 즐겁게 우호적인 얘기를 나눌 수 있겠군."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 게일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옆으로 비켜서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게일이 거실의 문을 열자, 그는 앞서서 들어갔다.
"앉으시죠."
"고맙소. 차는 밖의 노상에 뒀는데, 괜찮겠소?"
"물론이죠."
게일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전번의 사건에 구애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쥴리어스? 당분간은 영국에 오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요."
"어째서 당신이 혼자 집에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지 묻지 않소?"
"너무 놀라서 당신이 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어요. 어떻게 혼자 있는 것을 알았어요?"
그는 유쾌한 듯 입가에 웃음을 피웠다.
"당신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소."
"어머나!"
게일은 놀라서 눈을 치떴다.
"언제 어머니를 만나셨죠?"
"요즈음 들어 몇 번."
게일은 시선을 떨구었다.
"트레비스란 남자는 몰라. 당신은 만약 내가 말했다고 들었으면 그대로 믿겠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누군가가 트레비스에게 일러바쳤어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중대한 것은 당신의 온당치 못한 행위가 어머니에게 쇼크를 준 것이오. 물론 당신도 익히 알고 있겠지. 그리고 어머니의 단호한 의견을 듣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처음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게일은 날씬한 다리를 꼬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재촉했다.
넘치는 햇빛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에 비쳐 얼굴의 윤곽과 표정을 밝게 빛내 주었다. 제비꽃 색 눈동자는 궁금한 듯 크게 떠지고, 풍만한 입술은 유인하듯 살짝 열려 있었다. 쥴리어스는 게일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의 변화를 눈치채자, 뺨이 장미빛으로 확 물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일은 수도관이 파열될 때까지 침실에서의 장면이 뚜렷이 떠올라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그 후 내내 아쉬운 마음으로 있었는데… 정말로 실망한 것일까? 지금 그 남자는 저기에 걸터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게일은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자칫 엿보여서는 안 될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시선을 떨구었다. 날카롭고 빈틈없는 그리스인인 그에게 간파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몹시 불안해졌다.
"우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가 진 강렬한 느낌의 얼굴에서 사려 깊은 표정이 사라지고, 그는 곧 설명하기 시작했다. 게일은 어머니가 그에게 전보를 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내용은 딸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각 찾아왔지. 어머니는 몹시 마음 아파하고 계셔…"
"어머니는 아무래도 내 얘기를 믿어 주지 않아요."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는 거요. 당신 얘기는 전혀 신빙성도 결여되어 있으니까."
약간 비꼬듯 그는 재미있게 말했다.
"사실인데 어째서 신빙성이 결여되는가요?"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마음 아파 하시더군."
"그렇다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일을 당신에게 전부 얘기했나요?"
게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전부랄 것까지는 없지만, 어머니가 실제로 얘기하신 것으로 미루어 충분히 이해했소. 어머니는 우리들이 결혼하는 길 이외에는 평온한 기분이 되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셨소. 만약 내가 당신을 성실한 여자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못된 행동을 용서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소. 약간 보수적이지만 어머니가 관대한 심정으로 우리들 편이 되어 주신다니까 수긍이 되는 얘기요."
그는 거의 표정없이 평온하게 말했다. 게일은 잠시 어이가 없었다.
"왜 당신은 이곳에 왔죠?"
겨우 그녀는 말했다.
쥴리어스는 타이르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우한테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당신답지 않군, 게일. 내가 온 이유는 이제 충분히 알았을 거요."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군요."
게일은 머리를 흔들어 봤다. 그녀의 마음은 이상스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심장은 터무니없이 빨리 고동치고 있었다.
쥴리어스는 소리내어 웃고,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보증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상한 거죠."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자, 그는 큰소리로 웃었다. 현무암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눈꼬리에 주름을 모으며 웃고 있는 그는 뛰어나게 매력적이었다. 거기다 숱 많은 철회색 머리― 대부분 짙은 회색이었지만 관자놀이 부분의 머리는 약간 색이 엷기 때문에 갈색의 피부와 대조를 보여 매력적이었다.
"당신의 대답은 어떻소?"
그는 등을 뒤로 기대며 긴 다리를 뻗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듣고 싶어요."
"로맨틱한 말로 말이오? 그렇지만 당신은 자신이 로맨티스트가 아닌 것을 언제나 나에게 일깨워 주려고 하지 않았소."
그의 눈동자가 활짝 밝아졌다. 그러나 로맨틱이라는 말에 게일이 야유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거기에 정신이 팔려 그는 잠시 침묵했다.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소, 게일?"
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취할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다. 모든 것을 웃어넘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쥴리어스는 매우 진지했다. 그는 결혼을 신청하러 일부러 온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심려를 가라앉히기 위해 구혼하는 것은 아닐 테지.
"서둘러서 구혼하는 이유가 뭔지 흥미가 있군요."
게일은 기어코 말했다.
"당신은 괘씸할 정도로 냉담하군, 게일. 그것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프로포즈를 받는데 이토록 태연한 여자가 또 있을지."
그는 명확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찬탄의 기분을 나타내며 게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 프로포즈의 얘기와 관계가 없어요."
게일은 자존심을 지키며 대답했다.
"이건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되오. 거기다 어느 여자도 지금의 당신 같은 입장에 놓여진 적은 없소."
게일은 아무 말도 안했다. 잠시 그녀는 쥴리어스가 갖가지 장면에서 한 말을 분주하게 생각해 내고 있었다. 마음이 움직여 손에 넣고 싶은 기분이 된다. 극히 최근까지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그는 말했던 것이다.
자기와 만날 때까지란 말인가?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녀의 육체가 주는 쾌락뿐이었다. 그리스인은 그런 것이다. 애정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극히 적은 수다. 따라서 성급한 프로포즈를 결정한 것은 애정이 아니다.
게일은 그를 태연히 바라보며 말했다.
"결혼할 이유를 아직 듣지 못했어요."
"의협심이오."
그녀의 어깨너머로 정원의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는 즉시 대답했다.
"그리스인은 그것을 높이 평가하오."
시선을 딴곳에 둔 채 덧붙였다.
"말도 안 돼요! 당신은 조금도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 있진 못해요."
"알고 있지 않다고? 그렇다면 내가 결혼하는 이유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요?"
"당신은 질문의 대답을 일부러 피하고 있어요."
"결혼을 원하는 데 있어서는 실로 정당한 이유을 말했다고 나는 믿고 있소. 여기 관해서는 당신의 어머니가 가장 진지하셔. 어머니의 눈에 당신은 부도덕한 딸인 것이오."
"즉흥적인 말은 하지 말아요! 그러면 무엇이건 조금은 뚜렷해지죠. 가령, 내가 오두막집에 있었던 것을 누가 어머니에게 알렸나요?"
"생각나오? 남자가 호통치러 왔을 때, 내가 당신 이름을 불렀지 않소."
마술의 장난이라도 밝힌다는 듯, 그는 양 손을 벌려 보였다.
"그 남자가 그 이름을 트레비스에게 말했을 거요. 그는 이전부터 트리셔에게서 당신의 얘기를 들어서 이름쯤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자연히 당신이 누군지 알았을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그것을 단서로 조사했겠지. 잠깐 조사하면 당신의 성은 곧 알게 될 것이오. 그리고는 전적인 복수심으로 그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 것이오. 따라서 당신과 나는 이 모양이 된 거요."
"이 모양?"
게일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당신이 난처해진 것은 아니잖아요."
"엄밀하게는 그렇소. 그러나 당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고 있소. 몇 년간이나 어머니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쉽게 짐작이 되었소. 두 아이에게서 위로를 얻는 수밖에 없었소. 특히 당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이번의 불상사로 어머니는 의기소침해지신 거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들이 결혼하는 이외에 아무것도 어머니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할 수는 없다고 하셨소.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나는 당신에게 프로포즈할 것을 약속했던 거요."
게일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속으로는 언뜻 보기에 이 투명하게 보이는 상황 속에 금이 가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어머니에게 진실을 말해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시려는 생각은 안하셨나요? 우리들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결단코 없었다고.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말 안했어요?"
얼굴이 빨개져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눈에 재미있다는 듯한 빛이 떠 있는 것을 깨닫자, 게일은 노여움으로 머리를 뒤로 발딱 젖혔다.
"확실히 그럴 생각도 했소.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아무 도움도 안 될 거라는 것을 잘 알게 된 것이오. 다분히 당신과 짜고 속이려 든다고 나를 비난했을 거요. 안 돼, 게일. 그것은 절대로 잘 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오."
쥴리어스의 얘기는 거침이 없고 그럴듯했으나 예의 허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선 어머니가 그에게 딸과의 결혼을 신청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원래 남달리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특히 남성에 대해서는 한층 더하다. 거기다 쥴리어스는 극히 일반적인 남성은 아니었다. 그의 사람됨이라면 세상사에 능숙한 여성일지라도 압도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용기를 내어 그런 신청을 했을 리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어머니가 얘기했다 해도, 보편적인 경우 그 얘기는 여지없이 거절되었을 것이었다. 이것이 게일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상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은 전혀 양상이 달랐다.
"모를 것이 산더미처럼 있어요."
게일은 한숨을 쉬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면 자기의 의문을 어려움없이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감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해 보인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일이오, 게일. 당신 어머니 마음의 평온은 우리들의 결혼에 달려 있소, 정말로 밤을 함께 지낸 걸로 알고 계시니까. 나는 어머니의 마음이 편안해지신다면 기꺼이 결혼할 작정이오. 그렇게 되면 나머지는 당신에게 달렸소."
게일은 입술을 빨았다. 흥분하여 혈관이 크게 물결치는 느낌에 스스로 몹시 놀랐다. 그리고 그리스의 신처럼 당당한 체격의 이 남성과 결혼할 것을 상상해 봐도 싫은 느낌이 아닌 것을 깨닫고 매우 놀랐다. 그뿐 아니라 뺨이 달아올라 무의식적으로 찬 손을 대고 있었다. 숨기려 해도 허사였다. 그가 그녀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일 역시 그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이유로 결혼을 감행할 수 있단 말인가. 게일에게는 그와 결혼할 의사는 없었다. 한번 그가 그녀와 이별을 고하면 이 욕구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나는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어요. 당신은 내 심정을 알고 있을 텐데요. 오 년 전 마음을 작정했어요. 그리고 나의 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마침내 그녀는 말했다.
극히 약간이었지만 그의 턱이 당겨진 이외는 그녀의 대답이 그를 실망시킨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갸우뚱하고 잠시 후 그녀의 결의를 태연히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두툼하고 관능적인 입을 일그러뜨리더니 재미있다는 표정을 띠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는 뜻하지 않은 어조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판단이 어떤 결과가 되어 돌아올는지 모르는 것 같군. 당신 어머니는… 만약 내가 당신을 온당한 여자로 만들지 않으면, 당신도 당신 아버지도 버리고 제멋대로 할 작정이오.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가출하여 남자친구와 동거하게 될 것이오."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긴장된 침묵이 방안에 가득찼다. 게일은 망연해져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신경은 방금이라도 터질 듯 팽팽해졌다.
"거짓말예요."
입술까지 새파래지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그런 짓을 하다니! 우… 우리 어머니에겐 남자친구 따위가 있을 수 없어요."
그녀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가 내내 남자와 만나고 있는 것 같은 눈치는 그녀도 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만약 어머니가 그렇다 하더라도."
게일은 띄엄띄엄 말했다.
"그런 일, 어머니가 누구에게도 말할 리가 없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동거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결코. 어째서예요? 어머니는 그런 일에 관해서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계시다고 당신은 방금 말했잖아요."
게일의 얼굴에서는 완전히 핏기가 가셔 있었다. 쥴리어스가 이토록 중대한 일로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타인의 부도덕을 보고 언제나 어머니는 두려워하셨거든요."
쥴리어스는 손목시계를 힐끔 보았다.
"실례해야겠소. 당신 어머니의 의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화를 가져 보는 게 어떻겠소?"
쥴리어스가 떠난 후, 게일은 오래도록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떠나간 듯싶었다. 게일은 그가 어째서 그렇게 급히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나의 대답이 좋다고였다면 오늘 밤 내내 이곳에 있었을 것이 아닐까, 하고 본능적으로 그녀는 생각했다.
게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성급한 프로포즈를 한 그 남자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이 쓸쓸했다. 그의 출현은 게일이 여지껏 몰랐던 무엇인가를 그녀의 내부에서 눈뜨게 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혐오하면서 게일은 그 사실을 부인하려 했다. 여자는 남자하고는 다르지만 남자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욕구를 느끼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런 원시적인 충동은 남성에게밖에 없다고 그녀는 자기에게 설득하려 했다.
그가 떠난 후, 일상적인 동작이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힐 것 같아서 내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게일은 주방으로 가서 차를 끓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쥴리어스 스필든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야기시켰다. 그것은 오 년 전 말컴과의 사이가 깨어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일은 두번 다시 남성에게 마음을 움직이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 결심이 무너질 줄이야… 거기다 하필이면 그리스인에 의해서일 줄이야…
그것을 깨닫자 게일은 쇼크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어떤 남성과도 매우 달랐다. 초연한 태도, 그녀 자신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그 강압적인 남자다움, 가령 자기가 굴복되고 말지라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흥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거실로 차를 갖고 되돌아오자, 그녀는 또다시 의자에 걸터앉아 쥴리어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이리저리 생각해 봤다. 아마 자기에 관한 것을 생각하고, 그녀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상태를 상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라고 할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녀에게는 결혼할 마음 따위는 전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잠시 동안이라도 두 사람이 언쟁을 할 것은 뻔하다… 아냐… 전혀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지…
돌연 게일은 스스로의 상상에 몸서리쳤다. 이런 결혼생활이라니! 껴안고 있거나 다투고 있는… 그렇게 생각하자 짜증스런 기분이 들기조차 했다.
찻잔을 놓고 그녀는 방안을 서성거렸다. 전에 동물원에서 본 우리 속의 곰 같았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쥴리어스가 말한 것보다 좀더 상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게일은 또다시 방안을 돌아다니다 차를 한 잔 더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
이대로 시간이 영구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열쇠가 문의 자물쇠에 꽂히는 소리가 나고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 방에서 게일은 몇 시간이나 오직 혼자서 난처해 하고 결심을 하지 못해 괴로와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마침내 그녀는 인정했다. 거짓없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쥴리어스와의 결혼, 그것은 언쟁과 화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격렬한 감정적인 생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중에는 제각기 자기가 선택한 길을 걸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은 정열이라는 약한 유대 이외에는 없으니까, 정신적인 사랑이 없으니까.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틀림없이 쇠퇴해 가는, 단지 육체적인 매력뿐인 것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면 당연히 공유(共有)해야 할 서로의 관심도 그들에게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는 방 한가운데 서서 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유령이라도 보았단 말이냐?"
"어디 가셨댔어요?"
쏘아대듯 물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입술을 떨었다.
"네가 알아서 뭐 해. 어머니는 어디 있니?"
만약 침착하게 '남자친구와 만나고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몰라요. 저도 기다리고 있어요.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무슨 얘기지?"
거친 어조로 대꾸하며 참나무로 만든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마침 12시를 울리고 있었다.
"밤 이 시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니, 올바른 짓은 하지 않고 있겠군!"
"아버지 자신도 방금 돌아오셨잖아요."
게일은 화가 나는 듯 아버지를 보았다. 그녀는 문을 열어젖히고 아버지의 입김과 의복에서 발산하는, 비위가 상할 것 같은 맥주 냄새를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그 냄새에는 담뱃내가 섞여서 아버지의 옷과 머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갑자기 어머니의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했다. 쥴리어스처럼 청결하고 건강한 타입일까? 그는 담배는 피우지 않고, 알콜은 약간 마시는 정도였다. 거기다 언제나 샤워를 방금 하고 나온 것처럼 깨끗했다. 와이셔츠는 양복과 마찬가지로 한 점의 티도 없었다.
그의 머리는 항상 빛나고 잘 닦여진 강철 같았으며, 좋은 느낌의 애프터 셰이브 로션을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의 고향에 있는 섬이나 산들, 그곳에서 자라나는 들풀의 냄새가 나서, 게일에게 바다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선들바람을 연상시켰다.
"집을 비우고 밖을 쏘다녀도 괜찮다는 권리는 없어! 함께 자지 않고 기다리다가 혼내 주겠다!"
아버지는 소파 쪽으로 비틀대며 걸어가서 쿠션 속으로 무너져 버리듯 쓰러졌다.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어머니에게 손가락 하나도 대지 못하게 할 거예요!"
"손가락 하나라도? 내가 너의 어머니에게 지금껏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니?"
초조해져서 게일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것이 장한 일인가요?"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그녀는 말했다.
"남성은 결코 힘으로써 여자를 다스리지 말지어다. 언제나 그것을 지켜왔지. 원칙은 굳게 지켜왔지. 내 딸아, 아마 너도 뺨을 한대 맞아야만 그토록 괘씸하게 설치지 않을 텐데. 그런 식으로 어딘가의 엉터리 판사처럼 나를 보고 곧추서 있는 게 아니야! 아버지라구! 무슨 일이 있어도 기다리라고 말하면 앉거라!"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혼자서 어머니와 얘기하고 싶어요."
"무슨 얘기야?"
"개인적인 거예요."
아버지의 눈은 감겨져 있었다.
"이층에 올라가시면 어때요? 아침에 기분이 좋을 때 얘기할 수 있잖아요?"
"취기가 없을 때라는 의미냐?"
아버지는 웃고 나서 또 한번 앉으라고 명령했다.
"전 자겠어요."
그녀는 아버지를 남겨 놓고 방을 나왔지만, 만약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쟁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신경이 쓰여서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어머니가 현관문을 닫는 기척에 게일은 침대 속에서 몸을 사렸다. 말소리는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소파에서 잠자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침대를 나와 부모의 침실로 살짝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니?"
어머니는 미간을 찌푸렸다.
게일에게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머니가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슨 일이 있이라뇨? 아무것도 모르세요?"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고는 코트를 벗어 옷장 문을 열고 옷걸이를 찾았다.
"어머니는 그다지 고민하고 계신 것도 아니군요."
"무엇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있니? 너도, 네 아버지도 좋을 대로 하는 거지. 문제가 있으면 남의 도움을 빌리지 말고 자신이 처리하면 되지."
"쥴리어스가 여기 왔었어요."
"그래… 만나러 오겠다고 했었지."
"그 사람이 말하더군요, 어머니가…"
게일은 말하려다 머뭇거렸다.
"어머니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면서요… 정말인가요?"
옷장 문을 닫고 어머니는 뒤돌아섰다. 어머니는 열 살쯤이나 젊어 보였다. 게일은 놀라서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래, 친구가 있다."
"남자?"
"남자친구란다."
명확히 수긍하는 바람에 딸은 망연해졌다.
"안 지 얼마나 되세요?"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하지만 말해 두지. 삼 년이야. 그 사람이 같이 살자고 했지만 거절했어. 나에게는 너라는 보살펴야 할 딸이 있기 때문이었지. 너의 신뢰를 잃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상관없지. 너 같은 딸이 신뢰를 해준다 해도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까."
게일은 당황했다. 이런 모습은 전혀 어머니답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침묵한 채 얼굴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게일은 통한(痛恨)의 눈물이 솟아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생각하고 계신 것 같은 짓을 저는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쥴리어스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정직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더라. 결혼을 신청하든?"
게일은 끄덕였다. 확실히 어머니는 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일까? 결국 어리석은 얘기라고 생각하고 게일은 그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그 의문은 희미하게 의식 속을 정처없이 맴돌고 있었다.
"그가 저와 결혼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저를 버리고 그 남자와 살겠다고 말했어요?"
"그래,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태연히 대답했다. 이것이 아버지가 언제나 말하고 있는 소극적이고 엄격한 어머니란 말인가? 잠시 말을 잃었다.
"진심으로 말한 게 아니죠?"
"정말 그럴 작정이야. 아버지와 너, 두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과 뭐가 좋아 한지붕 밑에서 살아야만 하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내 사랑해 왔다."
약간이긴 했지만 슬픈 여운이 있었다.
게일은 가슴 언저리가 갑자기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일순간 덮어놓고 어머니에게 행운을 빌어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돌렸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만약 제가 쥴리어스와의 결혼을 승낙하면, 어머니는 그 사람을 체념하겠어요?"
게일은 가까이서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장은 그렇게 안 되리라고 생각되지만, 집을 나가진 않겠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제게 겁을 주는군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협박이에요."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하렴. 너의 행동은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고 쥴리어스에게 말했단다. 결혼해 준다면 어느 정도라도 내 마음이 안정될 거라고도 말했지. 너에게도 말했지. 생각나니?"
"그저 알고 지내는 정도의 사람과 결혼하라니, 말도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시키고 싶으세요?"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어머니는 귀담아 듣는 기색이 없이 화장수를 묻힌 화장지를 얼굴에 대었다.
"난 뭔가 잘 모를 게 있다고 쥴리어스에게 말했는데, 역시 그렇군요! 이 얘기에는 뭔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점이 있다고 어머니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를 도저히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원치 않으시죠?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게일의 말 끝부분 때문에 어머니는 입을 열려다 말았다.
일순간, 어머니는 마음을 풀고 뭔가 얘기하려 했다. 그러나 입에서 새어나오지 못하고 도로 들어갔다. 게일은 그것을 어머니에게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납득이 갈 대답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만약 얘기하고 싶다면 어머니는 말했을 것이다. 게일은 한숨을 쉬었다.
"뭔가 아주 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어머니와 쥴리어스만이 알고 있는 것 같은 일이."
어머니가 입을 열어 주기만 하면! 게일은 조바심이 나서 또 한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결혼은 않겠어요. 결혼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럼 나는 집을 나가 재크와 살도록 하겠다."
게일은 당황하여 뺨이 확 붉어졌다. 남자의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그 남자와 어머니와의 관계가 역연한, 혐오스러운 현실의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진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그럼 잠시 기다려 보는 거야. 피곤하구나. 너도 그렇지? 쉬렴."
"하지만 어머니…"
"잘 자라, 게일!"
"그것이 마지막 인사예요? 정말로 아버지와 저를 버리고 가실 셈인가요?"
어머니는 침을 꼴깍 삼켰지만 게일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짧은 옷길이에 눈길이 멎었다. 어머니의 다리 모양은 좋았다. 갑자기 게일은 어머니가 아직 마흔네 살인 것을 깨달았다.
"그래, 파렴치한 사람이 둘씩이나 있는 집에서는 도저히 함께 살아갈 마음이 나지 않아. 혼자만으로 충분하다. 네가 여기 있겠다면 내가 나가 버리겠다."
어머니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달라는 시늉을 했다.
게일은 상처받고 분한 마음으로 빤히 어머니를 볼 뿐이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도, 트리셔에게도, 그리고 모든 일의 원인인 트레비스에게도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결혼을 승낙한 쥴리어스에게도.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이상하게도 노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제고 그 이유를 알게 될 것 같았다.
6
게일은 나무가 무성한 아치형의 안마당에서 차가운 달빛을 받고 있는 화산 지대를 미간을 찌푸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화성암(火成岩)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산덩어리는 태고적에 분화(噴火)에 의해 생긴 것이었다. 이 불모의 일대에는 숨막힐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높은 대지 위에 있는 남편의 저택에서 보이는, 모래사장까지 계속되는 푸른 풀이 무성한 구릉(丘陵)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뒤돌아보자 생각에 잠겨 있는 남편의 시선과 부딪쳐 그녀는 앞으로 홱 돌아섰다.
"이제 됐어요? 당신만 좋다면 나는 언제라도, 굳이 말하자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요.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나를 기다리게 하셨어요?"
쥴리어스는 티 하나 없는 까만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게일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살그머니 말했다.
"일 개월 전의 결혼식 때부터 나는 당신에게 줄곧 말씨에 신경을 쓰라고 주의를 주었었는데, 게일. 바보가 아니라면 주의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생활은 즐겁지 않은 게 될 거요."
그는 한 팔을 그녀의 팔에 돌려 한쪽 손으로 그녀를 싸안았다. 그녀는 억지로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팔에 둘려진 그 손은 힘껏 그녀의 몸을 죄고 있었다.
"말다툼을 하려면 차 안에서 합시다. 상대방의 안마당에서는 안 돼. 이곳도 안 되지. 누가 들을 테니까. 이리 와요."
할수없이 게일은 뒤를 따라갔다. 차는 안마당으로 통하는 샛길 끝에 세워져 있었다. 그의 팔은 그곳에 닿을 때까지 늦춰질 것 같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기다리게 했어요? 십 분 이상이나. 아주 잠깐이라고 말씀하시더니!"
그가 곁에 앉자마자 그녀는 다그쳤다.
"일단 그렇게 말해 두었던 거지."
엔진이 소리를 내고, 차는 달빛에 드러난 샛길을 차도 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어도니스와 다른 친구들이랑 사업 얘기를 잠깐 한다는 것이 그만 깜빡했군."
"사업을 위한 만찬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잖아요. 거기다 그렇게 지루한 얘기도 처음예요!"
"얘기 상대가 될 여성도 있었을 것 아니오?"
게일은 화가 나서 숨을 크게 쉬었다.
"왜 결혼했을까 모르겠어요!"
그는 흘긋 그녀를 보았다. 입가가 올라가 있었다.
"거짓말이야."
조용하게 그는 말했다.
"나와 같은 이유로 결혼한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거요."
그녀는 빨개졌지만 턱을 내밀고 곧 부정했다.
"아니예요, 어머니 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쥴리어스는 껄껄 소리 높여 웃었다. 그것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웃음이었지만, 왜 웃는지는 말을 꺼낼 때까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 무엇을 인정해 버렸는지 잘 생각지도 않고 말하고 있지만, 부정하는 것으로써 실은 욕망 때문에 나와 결혼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거요. 처음부터 쭉 그랬었지. 그만둬요,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여자도 남자도 같다고 인정하라구."
"어머니 때문에 당신과 결혼했어요."
"게일, 당신은 고집이 센 여자군. 머지않아 나의 참을성이 한계에 달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 같은걸!"
"당신의 위협 같은 건 겁 안 나요."
그녀는 자신이 있는 듯 말했다. 왜냐하면 예상과는 달리 쥴리어스는 완고하지도 성급하지도 않고, 오히려 참을성 있으며 이해심도 있었던 것이다. 보통 남자 이상으로 그는 다루기 쉬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도가 지나치게 그를 애타게 하면, 당연하지만 말다툼이 되었다. 그리고 이따금 경고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경고도 곧 잊게 되기 쉬웠으므로 게일은 남편을 우습게 알고 있었다. 요컨대, 결혼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그와의 생활은 줄곧 평온한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결혼 전의 일을 곧잘 생각해 왔다. 그때에는 문자 그대로 새파래지도록 어머니와 입씨름을 했다. 그 동안 아버지는 마음내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내를 욕하고 불평을 말했지만, 내심으로는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원래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어머니에게 함께 다닐 친구가 생겨 좋다고까지 말했다.
여전히 어머니는 게일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게일은 쥴리어스와의 결혼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두 번이나 그 오두막집에서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번은 쥴리어스가 또다시 집에 왔을 때였다. 그는 게일을 안고 그녀가 저항하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그 오두막 집에서와 같은 정열과 격렬함으로 그녀에게 키스했던 것이다.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하오."
정열적으로 말했다.
'가슴 언저리에 손을 가져가는…' 짓까지는 안했지만 그는 게일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능숙한 구애동작에 그녀의 감정이 기쁨으로 떨려오는 것을 자신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의 능력을 알고 있어서 반은 그것을 무기로 하여 승리로 이끌어 간 것이었다. 생김새며 체격이며 여성과의 경험이며, 만만치 않은 매력을 갖고 그는 자신에 차 있었다.
"그렇소. 당신은 나와 결혼하는 거야, 게일. 당신은 자신을 구할 수가 없소."
그는 게일의 몸을 놓아 주며 창백해져 떨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즉각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눈동자에 비친 것을 간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황했다. 그는 살짝 웃었을 뿐이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좋겠는데…"
그것은 평시의 어조였다.
두 번째로 그의 힘에 눌리고 만 것은 파티 때였다. 게일은 밖에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살짝 인파 속에서 빠져나왔었는데, 쥴리어스는 그녀를 보더니 정원의 어둑한 곳까지 따라왔었다. 집으로 달려가 도망칠 수도 있었다고 나중에서야 게일은 생각했다. 그때 그녀는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그의 그 매력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매력에서 도망칠 길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스스로 인정했다. 언제고 두 사람은 멀어져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들에게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체념하고 생각했다. 그와 결혼하도록 하자. 쥴리어스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만약 프로포즈를 받지 않았다 해도 이런 식으로 그의 유혹에 부딪치면 나는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때도 있었다.
쥴리어스가 차를 단층 저택의 앞마당에 대었으므로 게일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달은 하늘 높이 물에 뜬 얼음처럼 빛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벌레 우는 소리와 들풀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키가 크고 늘씬한 남편 곁에 나란히 서서 등을 쭉 폈다.
"밤에는 꽃이 멋지군요. 그리고 매미도. 이 마술에 걸린 것 같은 분위기는 모두 매미 때문인지!"
그녀는 황홀한 듯 자신을 잊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태도는 l80도 달라져 있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흥분이 물결치고 있었다.
차의 문이 덜커덩 닫히고 쥴리어스는 그녀를 번쩍 안아올려 베란다로 데려갔다. 모든 것이 또다시 정적으로 되돌아왔다. 베란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아폴로가 켜 놓은 것이다. 그는 그리스인의 하인으로서, 게일이 올 때까지는 가사 일체를 맡고 있었다. 게일의 시중은 당분간 카트리나 케이트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대로 침실로 모실까요? 그렇지 않으면 가벼운 식사라도?"
득의에 차서 그가 말했다.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가벼운 식사를 들겠어요."
그는 게일을 내려놓고 얕보는 듯한 표정을 띠며 그녀를 보았다.
"그렇다면 우선 식사를 해요. 시간이 흐르면 당신의 정열도 뜨거워질 테니까."
"차가와질지도 모르죠."
게일은 눈은 번쩍이고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본심은 그가 하라는 대로 하고 싶었다. 차 옆에 있었을 때부터 그는 그것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다. 게일은 자신이 싫어져 지금은 단지 고집을 피워 그를 골탕먹이고 싶었다. 그녀는 의심한다는 것을 몰랐던 열여덟 살 때의 자기가 말컴을 사모하던 모습을 생각해 내어 마음에 그려 보았다.
우선 마음이 매혹되고, 다음에 육체의 욕구가 일어났다. 그녀는 그것이 부끄러워 마지못해 겨우 인정했다가는 다시 지워 버리려 했다. 그런 욕구는 말컴과 결혼할 때까지는 결단코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단지 육체적인 욕구 때문에 결혼해 버린 것이다. 남편과의 사이에는 푸근한 인간관계조차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결혼의 이유를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상대방을 내심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느 정도 오래 계속될 것인가? 그녀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쥴리어스는 이 결혼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그녀에게 경고했다. 그리스인은 극단적으로 이혼을 싫어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욕구가 드디어 포화점에 달하고 혐오감밖에 남지 않았을 때 우리들은 헤어질 거라고 예측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이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마음속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이었다.
얼굴을 들자 남편의 눈은 그녀를 보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안 가겠소? 필요한 것은 나중에 케이트에게 말하면 괜찮지 않소?"
무표정으로 있는 남편이 짜증스러웠다. 언짢은 기색이라도 보인다면 기분전환이 되어 좋을 텐데, 하고 게일은 생각했다. 아무리 곯리려 해도 아무 변화가 없어 그녀는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십 분쯤 뒤 저녁식사의 쟁반이 들어왔다. 게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보았다. 쥴리어스의 친구 집에서 먹은 식사는 호화로운 것이었다. 앞으로 일주일쯤은 식사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다시 샌드위치 한 조각과 커피쯤은 같이 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안 들겠소?"
쓸데없는 간섭이다.
"안 됐지만 생각이 없는걸."
그는 언제나 적은 듯하게 먹었다.
"안 됐지만 나는 자러 가겠소."
그는 한 손을 입에 대고 하품을 했다.
게일은 어쩐 일인지 마음이 흥분되었다. 닫힌 문을 노려보고 쟁반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먹음직스럽게 담아 놓은 음식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초인종을 눌러 케이트에게 쟁반을 가져가도록 말했다. 그리스 여자는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보고 가볍게 어깨를 움츠리고 지시대로 했다.
게일이 두 사람의 침실로 들어간 것은 한 시간 후였다. 침대는 비어 있었다. 시트는 밖으로 접혀 있었고, 그녀의 나이트 드레스는 란제리의 가게에 장식되어 있는 것처럼 한쪽에 베개 맡에서부터 아름답게 펼쳐진 채 늘어져 있었다. 한눈으로 오늘 아침 그대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케이트가 그렇게 해놓는 것이다.
놀랍게도 게일은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쥴리어스는 옆방의 자기 침대에서 자고 있다. 그녀는 이곳저곳 둘러보고 나서 반쯤 열린 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편은 숨소리를 내며 잠자고 있었다. 혼자 자게 내버려 두자, 내일 아침은 그 보다 빨리 일어나자.
"잘 잤소, 게일?"
졸리운 듯한 눈으로 감정하듯 게일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을 보니 원기왕성한 모양이군. 잠을 잘 자지 못했소?"
눈가에 잔주름이 보기 좋게 잡히고, 철회색의 머리와 윤기 흐르는 갈색 피부에는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게일은 베란다의 난간에 기대서서 소아시아까지 뻗쳐 있는, 호수처럼 잔잔한 청록색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이 긴장됨에 따라 내심으로는 언짢아졌다.
"그와 반대죠. 평시보다 더 잘 잤는데요."
믿어 줬으면 좋겠는데. 잠을 설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으면, 그래서 그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순간 혼자 자서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일렀지만, 다음 순간에는 남편이 없었던 것을 쓸쓸하게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상한걸, 나도 그러니. 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좀더 시험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
흔쾌하고 온화한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침묵이 흘렀다. 게일은 난간에 올려놓은 손가락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덩굴이 쇠살대에 엉켜 붙고 지붕의 지주(支柱) 위까지 온통 무성해져 눈부신 태양빛을 차단하여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 침묵은 계속되고 있었다. 쥴리어스는 그녀에게 무엇을 테스트하려는 것일까? 새로운 생활방식을 시도해 본다…라니.
어젯밤, 그녀는 남편이 다른 방에서 잤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겨우 두세 시간 후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불안한 기분이 되었다. 마음을 속이는 것은 불성실한 일이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녀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전에 쥴리어스가 말한 대로 그녀는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존심 때문에 생각지도 않던 것을 입밖에 내고 말았다.
"훌륭한 생각이에요, 쥴리어스. 그러는 편이 편안하죠. 당신도 알았군요. 이곳 기후는 너무나 덥고, 게다가 당신도 나도 혼자 자는 데 익숙해 있어요."
미소지으며 말했지만 목소리의 구석구석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남편은 거만한 태도로 재미있는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때 게일은 어쩔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익숙한지 모르지만, 나도 그러리라고 어떻게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단 말이오."
게일은 당황했다. 그의 말에 포함되어 있는 가시로 가슴을 찔렸다. 그녀는 목 언저리가 경련하고 맥박이 몹시 빨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침 일찍인 것에 비해서는 당신의 농담도 아주 상당한 것이오. 하지만 좋은 취미라고는 할 수 없소."
"왜죠? 부부 사이에서 과거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은 지금 유행이 아닌가요?"
"이 경우 전혀 일방적이군."
"그래서 당신은 한대 맞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군요?"
그녀는 노려보았다. 그는 베란다의 기둥에 아무렇게나 기대서 있었다. 여유있게 가늘게 뜬 눈, 사람을 깔보듯이 비스듬히 휘어진 눈썹, 그의 그 태도 자체가 그렇지 않아도 곤두선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식사하러 갈까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을 게 틀림없어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는 신경이 쓰이는 듯 게일을 보았다.
"기분이라도 나쁜 것 아니오?"
게일은 화가 날 대로 났다.
"쥴리어스, 오늘 아침은 특히 쏘아 주기만 하시는군요."
그녀는 맥이 없어 보였다.
"무엇이 목적인지 생각조차 할 수 없군요. 나는 당신과 싸울 기분은 아니예요. 만약 실망시켰으면 미안해요. 안 됐긴 했지만 도리 없군요."
그는 웃으며 그녀가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퇴각하는 거요? 아무리 보아도 용감한 당신답지 않군. 하지만 습관으로 삼지는 말아요. 욕지거리의 시합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으니까. 좋은 기분전환거리지. 그렇게 못하면 지루해질 것 같소."
"지루하다고… 벌써요?"
정체 모를 두려움이 그녀의 목덜미를 눌렀다.
"나와의 생활이 지루해졌나요?"
"그렇게 될 것 같다고 나는 말했소."
게일은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인 것이 미웠다. 그가 로맨스는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싫었다.
"무리한 결혼을 강요하기 전에 이렇게 될 것을 잘 꿰뚫어봤어야 했어요!"
"강요했다고?"
그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이봐요, 게일. 당신은 나와 기꺼이 결혼한 거요."
"당신은 어쩌면 그다지도 자만심이 강한가요!"
그녀는 화가 발칵 났다.
"너무 화나게 만들지 마세요. 이 결혼에는 애정 따윈 없었어요. 잊지 마세요. 나는 마음을 정하고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곧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재미있어 하는 듯한 여운이 있었다. 그의 태도는 여전히 자신에 차 있었다. 게일이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한테로? 아내된 자 마땅히 남편과 함께 있어야 된다고 틀림없이 말씀하실 거요."
"어머니가?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지고 싶었던 거예요. 다른 남자와 살기를 원하셨던 거죠."
아주 잠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지만, 쥴리어스는 곧 시선을 돌렸다. 손잡이 위를 기어가는 도마뱀붙이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그리고는 또 한번 시선이 마주쳤다. 결혼에 얽힌 수수께끼가 아직 있다고 생각하는 게일의 표정에 그도 무엇인가를 상기한 듯했다.
"당신 어머니는 아마도 결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싶으셨겠지… 어쨌거나 아버지와 헤어질 구실은 있으셨던 거지. 당신 아버지는 몇 년간이나 성실치 못하셨으니까."
"난 어째서 어머니가 당신에게 고백할 마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절대로 어머니답지 않으셔요. 어머니는 몹시 내성적인 분이시죠."
또한 게일은 오두막집 사건 이후 믿을 수 없을 만큼 변모해 버린 어머니를 상기했다. 그리고 또 집을 나가 남자친구와 함께 살겠다고 자기를 위협한 밤, 어머니가 쥴리어스와 결혼 얘기에 어떤 역할을 맡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도 생각이 났다.
"식구들에게 얘기하는 것보다 타인이라든가 친구에게 얘기하는 게 편한 적도 있는 거요. 마음을 열고 나에게 괴로움을 고백하시고 나자 어머니는 상당히 마음이 가벼워지신 것 같았어."
"더욱더 수수께끼를 풀 수 없군요."
게일은 자기에게밖에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결벽증이 지나칠 정도인 사람이에요. 누군가 다른 남자가 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쥴리어스는 웃으려다가 아무 말도 안했다.
"당신에게 그 정도의 확신이 있었다면 나와 결혼할 필요없었을 것 아니오?"
그의 미묘한 물음은 뚜렷한 의견이기도 했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게일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없으면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을 알고 당신은 결혼했소. 얼마 있지 않아 당신도 순순히 인정할 것이오."
게일의 그 목소리에 분노가 담긴 것같이 느껴졌다. 이 노골적인 말에 게일은 얼굴이 한층 더 빨개져서 물러서기로 했다.
"말했잖아요. 오늘은 싸울 기분이 아니라고요. 곧 식사할 작정이에요. 갑시다."
"또 빠져나가는군 그래. 그렇다면 당신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겠소."
그 후 두 사람은 해변으로 가서 잠시 함께 헤엄쳤다.
쥴리어스는 붙임성 있게 웃고 있었지만, 게일은 언제나처럼 쌀쌀했다. 대체로 그녀는 남편에게 고의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별이 찾아왔을 때 불필요하게 후회의 괴로움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란… 사랑이 있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에 후회할 일이 있단 말인가?
게일은 모래사장에 앉아 저 멀리 앞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에 잠겨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 깊고 인상적인 보기 드문 강렬한 성격으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던 그 남자였다. 어쩌면 그의 헤엄은 저다지도 호쾌(豪快)한 것일까!
그는 무엇이든 쉽게 해냈다. 일 역시 그랬다. 아무것도 두통거리는 아닌 듯했다. 매일 그는 점심 후 두 시간을 서재에서 보냈다. 그리고 언제나 더없이 만족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따금 그는 자기 손으로 정원 손질을 했다. 지난 주의 어느 날, 아폴로가 고향에 돌아가고 없는 사이에 유리창 청소까지도 떠맡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의 그림자가 쥴리어스가 있는 곳으로 곧장 헤엄쳐 갔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나른한 듯 서서히 물을 헤치며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게일은 흥미가 생겼다. 그 여성이 머리를 크게 흔들자 긴 금발이 남편의 갈색 피부에 닿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물에서 올라와,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는 부드러운 백사장 위로 게일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오래된 친구지간인 듯한 태도로 얘기하고 있다. 그 여성이 뭔가 얘기하자 남편은 웃으며 장난치는 몸짓으로 여성의 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 모습엔 게일이 남편에게서 상상하고 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인상이 있었다.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태도에 자기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남편이 여러 여자와 관련되어 있던 것을 갑자기 생각해 냈다. 이 여자도 그 여자들 중의 한 사람일까?
얼마 후 게일은 그 여성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상대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찬찬히 상대방을 관찰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내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에 약간 흥미를 느낀 태도를 보였지만 타월을 집어들고 몸을 닦기 시작했다.
"쥴리어스가 결혼했단 말을 듣고 무척 놀랐어요."
더후네는 손으로 아름다운 머리를 자연스럽게 만지면서 봇물이 터진 것처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어쩜 그리도 대담하고 분방(奔放)한지!"
더후네의 시선은 순간적으로 남편에게 던져졌다. 그 태도에선 남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고 싶어하는 욕망이 느껴졌다.
"이 근처에 살고 계세요?"
게일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눈은 더후네의 아름다운 몸매를 더듬고 있었다. 스물여덟 살쯤 되었을까. 팔다리는 호리호리하고 맵시가 있었다. 어떤 남자라도 자기도 모르게 되돌아서서 바라볼 것이다. 더후네는 게일과 같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게일의 것은 가슴께가 약간 드러난 것이었지만 그녀의 것은 온통 드러나 있었다.
갑자기 게일은 내심 혐오감이 일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질투 같은 감정은 한순간일지라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 밑에 있는 집에 살고 있어요. 이삼 주간 어디 가고 없었기 때문에 못 만났었죠."
더후네의 목소리에는 심술궂은 기색이 담겨져 있었으며, 쥴리어스를 살짝 보는 눈초리는 확실히 비난의 눈초리였다.
"미혼인 친구를 내버려 둔 채, 돌아와 보니 결혼했다고 하잖아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말해 주었지만 믿지 않았었지요."
"믿지 않았다구요? 그럼 이번에는 믿어 주셔야 되겠는데요."
웃음 띤 얼굴이었지만 게일의 목소리에도 가시가 있었다.
남편이 힐난하는 듯한 눈초리로 보고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자, 게일은 남편의 시선을 피했다. 더후네는 의식적으로 쥴리어스에게도 들릴 정도로 크게 숨을 헐떡였다.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이라도 했나요?"
염려스러운 듯한 눈으로 그녀는 악의 없이 물었다.
"쥴리어스, 말해 줘요. 어쩌면 나는… 실례를 했는지요?"
"내가 미처 몰랐었어, 더후네. 부인들, 앉아요. 뭐 마실 것 좀 가져오면 어떻겠소? 그렇지 않으면 물이 더 나을는지?"
쥴리어스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게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점심 시간이에요, 쥴리어스.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녀는 도전하듯 그를 보았다. 그 눈은 이곳에 있게 되면 더후네를 불쾌하게 만들고야 말 것 같은 기세였다. 쥴리어스는 온화하게 동의하고 매점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말했지만, 더후네는 찌르는 듯한 눈으로 게일을 본 채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쥴리어스."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게일은 미소지었다. 먼저 쥴리어스가 걷기 시작했다. 너무도 난폭한 동작이었으므로 두 여자는 놀라서 그가 큰 타월을 어깨에 걸치는 것을 눈으로 더듬었다.
더후네는 비단같이 매끄러운 목소리로 살짝 속삭였다.
"마음대로 다루고 있는 것 같군요. 어쩜 그리 영리하세요! 여자친구들이 모두 놀라겠군요. 까다로운 쥴리어스가 잠자코 하라는 대로 하다니… 당신에겐 내게 없는 것이 있군요. 나는 한번도 지금과 같은 짓은 못했어요.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는 예전에는 얌전히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게일은 얼마간 자랑스러운 듯 생긋 웃었다.
"충고해 주셔서 고마와요, 만약 그렇다면.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없어요. 안녕히 가세요. 또 만나요, 이웃 사이니까요."
쥴리어스는 멈춰 서서 게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서서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려고 얼굴을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얼어붙었다.
"뭐 잘못되었나요?"
게일은 방금 더후네가 한 말이 생각났다.
"당신 화난 것 같군요."
그녀는 당황하여 말했다.
"집에 데리고 갈 때까지 기다려. 그때쯤이 되면 알게 되겠지."
그의 목소리는 타오르는 노여움을 억누르려는 것 같았다. 게일의 목덜미에 위에서 아래까지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나, 난 모르겠어요. 무언가 당신에게 불쾌한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독선적인 자신의 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알게 된 이래 처음으로 그녀는 남편의 눈에 격렬한 노여움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타월을 쥔 남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손은 손가락 사이로 잇닿는 관절이 팽팽하고 거무스름한 피부를 뚫고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굳게 움켜쥐어져 있었다.
"불쾌하다구! 나에게 망신을 주고도 무사하리라고 태연하게 생각하는 거야?"
게일은 목이 기분나쁘게 꼭 조이는 것을 느꼈다. 수도관이 파열한 운명적인 그날 아침의 일이 떠오르고, 자기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게 한 것은 지금까지 쥴리어스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또다시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라는 더후네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사죄하는 게 현명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될 듯싶지 않았다.
"당신은 멋대로 여러 가지 상상을 하시는군요. 왜 내가 당신에게 망신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의 말은 누그러지려던 그의 노여움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그녀는 입밖에 낸 말을 후회했다.
"잘 기억해 둬. 나에게 지시하는 것은 치명적이 된다는 것을…"
"지시라니요? 아뇨, 달라요!"
그의 노여움을 진정시키려고 그녀는 애를 썼다.
이런 기분인 채로 함께 집에 돌아간다는 것이 불안했다.
"더후네 앞에서 당신의 지나친 자만심을 뭉개 버리든가 지시를 따르든가…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었단 말이오. 지시를 받게 될 줄이야!"
그는 치를 떨며 되풀이했다. 그의 노여움은 갑자기 격렬함을 더하고, 걸음걸이는 한층 더 빨라졌다.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게일은 종종걸음을 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과장이 심하군요."
말하기 시작했으나 곧 저지되었다.
"해변에서는 그런 얘기 하지 맙시다. 여기선 안 돼."
그녀는 정말로 무서워졌다. 남편은 자기를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다, 당신은 나를 위협할 셈인가요?"
차 있는 데까지 오자 쥴리어스는 난폭하게 문을 열었다.
"타."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의 목소리는 어느 만큼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게일이 신경을 건드리는 태도를 보이면 그는 냉담한 태도로 나왔고, 오히려 화를 내줬으면 하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화라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격노(激怒)였다. 그의 몸은 크고 단단하며 우뚝 솟아난 것 같았다. 그녀는 기분이 나쁠 정도로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쥴리어스!"
신경질적인 음성이었다. 다음 한마디를 말하기가 바쁘게 그녀의 팔이 잡히고 차 앞의 좌석에 난폭하게 밀어 넣어졌다. 순식간에 차는 노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 속에는 소름이 끼칠 것 같은 침묵이 가득찼다. 집이 가까와짐에 따라 그녀의 심장 고동은 빨라져 갔다. 폭풍 전의 고요함인가. 공포가 엄습해 온다.
"쥴리어스!"
두려운 나머지 그녀는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다. 가만히 있자니까 상상이 앞질러 침실에서 멋대로 다뤄질 광경이 머리에 떠오르고 말았다.
"마, 만약 지시처럼 들렸다면 저는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죠.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생각이었는데…"
집에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으로 정한 뒤 하기 싫은 말을 그래도 겨우 입밖에 냈다. 그러나 그의 옆얼굴은 굳어 있었고, 핸들에 걸린 손가락은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마치 그녀의 목을 조르려고 벼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으로 말했을 뿐예요. 이미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죠."
차는 이미 저택으로 통하는 샛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당신은 지시를 했다구! 더후네를 빗대놓고 말이야! 그녀가 당신의 신경을 건드리니까 당신다운 복수를 했던 거야!"
게일은 잠시 동안 경고를 잊고 화를 냈다.
"나를 모욕하면 반드시 복수해 줄 거예요. 그래요, 나는 다분히 더후네를 모욕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가 먼저 시작했죠…"
"나는 당신이 더후네에게 한 말을 갖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는 맹렬한 기세로 가로막았다.
"변명하지 마. 알겠어? 앞으로 또 지시하는 것 같은 짓을 하면 나중까지 후회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해줄 테니까. 지금 곧 알게 해주겠어."
게일은 창백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를 협박할 셈인가요, 쥴리어스!"
그는 차를 세우고 그녀의 턱을 잡아 얼굴을 위로 젖히고 거칠게 비틀었다.
"나에게 그 따위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여자는 누구든지 재앙을 불러들이게 될 거야. 당신은 그 동안 아슬아슬한 곳에 있더니, 이번에는 어리석게도 경계선을 넘어 버린 거야. 지금까지 겨우 참고 당신의 변명을 용서해 준 것이 오히려 당신을 잘못되게 한 것 같아. 몇 번이나 위험한 게임이라고 주의를 주었을 텐데. 만약 내 말뜻을 알고 있었다면 당신은 그 동안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있었을 텐데."
그는 손을 놓고 또다시 엔진을 걸었다.
"대단히 재미없는 일이 생길 테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두도록."
난폭하게 다루지 말아 달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뒤돌아보고 이번에는 다정하지만 매우 살기를 띠고 말했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지금부터라도 따끔한 맛을 보게 될 거야."
게일은 드러날 정도로 몸서리를 치고 반사적으로 타월을 집어서 무릎에 걸쳤다.
"그것으로 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그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때 게일은 이미 집에 도착한 것을 알았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겨우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양 다리는 몸을 지탱할 기능을 잃은 것 같았다.
"들어가."
그의 명령대로 집에 들어가려니까 다리가 휘청거렸다. 게일은 허덕이면서 겨우 혼자서 계단을 올랐다.
"쥴리어스!"
그녀는 반쯤 뒤돌아보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나, 난 정말 잘못했어요…"
그러나 굳은 표정을 한 그 이교도적(異敎徒的)인 얼굴과 까만 눈동자 속에는 한 가닥의 연민도 없었다. 이거야말로 책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그리스인의 얼굴이었다. 사람을 고문하고, 불구로 만들고 살해한, 조상 때부터 이어받은 이교도의 본능이 불러일으킨 냉혹, 비정의 얼굴이었다.
"사과하는 게 늦은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밀어 그녀를 거실로 들어가게 했다.
"이층으로 가. 결혼식 당일부터 당신은 줄곧 스스로 재앙의 씨를 뿌려 온 거야. 이제 알게 해주겠어."
7
게일은 격노(激怒)하는 남편에게서 물러섰다. 그는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고는 등을 댄 채 서 있었다. 격심한 노여움을 눈에 담은 채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그 눈은 핏기가 가신 그녀의 얼굴에 멎었다. 남편에게서 멀어지려고 게일은 뒷걸음질쳤지만 다리가 침대에 닿아 멈춰 섰다. 남편의 검은 눈동자 속에 만족감 비슷한 것이 비치고 있다.
"그래 이제야 무서워졌다는 거요?"
평온한 목소리였지만 노기 때문에 떨리고 있다.
"이리 와."
그는 손가락으로 양탄자 위의 한 곳을 가리켰다.
게일은 그 자리에 선 채 지적된 곳을 보았다.
"손가락 하나라도 내 몸에 닿으면…"
그는 뜻을 굳힌 듯 서너 발짝 다가와서 게일의 팔을 사정없이 잡아챘다. 그녀는 숨이 막혀 말이 잘 안 나왔다.
"무엇을 겁내고 있는 거요? 자, 대답해."
그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날카로운 숨소리가 들린다.
쥴리어스는 그녀를 흔들면서 대답하라고 되풀이했다.
"당신이 무얼 하려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말하지 말라니까!"
거칠게 뒤흔들려 그녀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잠시 동안 그녀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신을 회초리로 호되게 때려 주리라고는 생각 못했겠지?"
게일의 얼굴에는 붉은 기가 돌았다. 그녀는 차 속에서 폭행하면 곧장 경찰서로 간다고 했던 자기의 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비웃듯이 웃고는, 남편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이 나라에서는, 만약 어리석게도 그녀가 그렇게 한들 즉각 남편 곁으로 가라고 말해 주는 게 고작일 것이라고 말했다.
게일은 잠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치뜨고 있다가 두려움을 넘어선 노여움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녀는 잡힌 손을 결사적으로 빼내려고 하였지만 허사였다. 그 손은 몹시 아파서 그녀는 나중에는 큰소리를 쳤다. 그는 고문이라도 하듯 잡은 손을 힘껏 죄었다. 그리고 화가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그녀를 죄어댔다.
"앞으로 마음대로 혀를 놀리고 싶을 때에는 그 전에 한번 더 잘 생각하게 되겠지. 그리고 신경질도."
겨우 손을 놓으면서 그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의외로 옆의 침실 문은 조용히 닫혀졌다.
게일은 상심한 채 아직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녀는 이토록 격정적인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삼십 분쯤 지나면 점심 들러 내려와!"
쥴리어스의 말이 아직 귓가에 쟁쟁했다.
절대로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거야! 아폴로와 케이트가 곁에 있는 곳에서 도저히 태연히 있을 기분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은 민감했다. 눈물로 충혈되고 지금은 맥이 빠져 생기가 없는 얼굴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세수를 한 후 몸단장을 하고 머리를 빗었다.
쥴리어스는 자기 방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게일은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와요."
"식사는 필요없어요."
그의 한쪽 눈썹이 의아한 듯 약간 치켜올라갔지만 게일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촉촉히 배어 있었다. 그에게 대항할 기력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쥴리어스가 어느 정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사실을 그에게 인정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그녀는 반항적인 시선을 던졌다.
"좀더 혼내 줘야 되겠소?"
그것은 온화한 어조였다.
게일의 얼굴은 진홍빛 장미처럼 빨개졌다. 하지만 굳이 반항하여 그를 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보다 더 불쾌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눈물이 또다시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왜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을까?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고 왜 이렇게 파리하고 생기가 없는가, 하고 생각했다. 어째서 결혼 같은 걸 했을까…? 변명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를 냉혹하고 무서운 남자라고, 그리고 그와 결혼하는 상대는 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단언하고 있던 것은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러면서도 그녀 자신이 도망칠 길 없는 그의 매력에 포로가 되어 결혼해 버린 것이다. 상대를 사로잡고야 마는 육체의 매력에… 지금에 와서조차 그의 애무 없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이것을 인정하자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져 왔다.
마지못해 게일이 식당에 내려가니, 쥴리어스는 베란다에 있었다. 그는 선뜻 자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앉아 그의 눈을 보았다. 그는 냉소라고도 할 수 있는 표정을 띠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서는 노여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얼마간 냉담해 보였지만 침착하고 어딘지 울적한 모습이었다.
게일은 양손를 깍지끼고 무릎에 올려놓은 채 이국적인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 꽃들의 향기는 베란다에 차 있고, 멜텔이라고 불리는 섬 특유의 바람에 실려와 식당 안까지 들어오는 것 같았다. 화려하게 피어 어우러진 꽃에 섞여서 지면(地面)을 기는 포복(匍蔔) 식물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심어져 있어, 격자 울타리로 뻗은 덩굴 사이에서 벽을 따라 테라스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 이젠 온순하게 내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겠구려."
쥴리어스가 말했다. 확실이 방금 이층에서의 사건 뒤, 그는 이 따른다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고 게일은 생각했다.
"그게 좋겠소. 나를 더 노하게 하면 당신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만큼 혼이 날 거라고 생각하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니! 그가 한 짓을 잊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냐, 평생 몸에 새겨서 잊을 수는 없다. 그리고 결코 그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녀는 굳게 맹세했다. 그는 정원에서 바닷가로, 그리고 올리브나무가 무성한 구릉 지대로 눈길을 옮겼다. 멀리 앞쪽, 반짝반짝 빛나는 감벽(紺碧)의 바다가 안개 낀 검은 지평선 끝까지 천천히 물결치며 뻗어 있었다.
게일은 남편의 옆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콧날이 선 높은 코와 훌륭하게 정돈된 생김새, 그에게는 초연(超然)한 풍격이 있다. 거기에 숱이 많고 곱슬곱슬한 철회색 머리는 갈색의 관자놀이께에서 약간 흐려져 있어 빼어난 외모로 보였다.
그녀의 시선에 쥴리어스는 되돌아봤다.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까만 눈동자를 크게 떴으므로 갑자기 탐색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 게일을 당황하게 했다. 그는 드러난 그녀의 팔을 보았다. 그녀의 상상일까, 그렇지 않다면 실제로 그의 표정이 흐려진 것일까? 미간에 모아진 주름은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었다. 게일은 아직도 만지면 아픈 팔의 부위를 일부러 손가락으로 눌러봤다. 하지만 그의 표정변화로 그녀는 자기의 오산임을 알았다. 그는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재미있는 듯 모멸의 표정을 띠었을 뿐이었다.
"초인종을 눌러 주지 않겠소, 게일?"
그는 울적한 듯 그녀 가까이 있는 초인종을 가리켰다.
게일은 벌을 받고 심한 꾸중을 들은 어린애가 된 기분으로 지시에 따라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게일이 옆을 지나가자 쥴리어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뜻하지 않은 그의 동작에 그녀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는 강제로 그녀의 입술을 빼앗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어떠한 적의를 품고 있건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게일은 자신을 억제했다. 그녀는 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때려 줬더라면 좋았을걸. 당신 같은 여자에게는 그 길밖에 없소."
그의 양 팔이 그녀의 몸에 둘러졌다. 그 순간 그의 눈이 아픈 부분에 멈추고, 목 언저리가 움직였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나의 키스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봐야 할는지?"
말과는 정반대로 그는 더없이 자신있어 보였다. 밉살스러운 사람!
그녀를 완전히 굴복시킬 자신이나, 거기다 자기가 우위(優位)의 입장에 있는 것을 승리나 한 듯 휘둘러대지만 말아 줬으면! 거만하고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아주 불쾌하군요!"
"이건 놀라운데!"
천천히 잡아끌 듯한 어조로 말하고 갑자기 활기 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언제나 나의 키스와 나의… 구애(求愛)가…"
그가 말을 시작하기 전부터 게일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그는 재미있는 듯이 그녀를 살짝 보고 계속했다.
"당신에게 더없는 기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당신은 겸손이라는 미덕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전에도 말했었는데요."
게일은 남편의 손의 감촉을 민감하게 느끼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냉담한 시늉을 해 보였다.
"그때 나에게는 불성실이라는 악덕도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을 텐데. 당신은 나 없이는 견디지 못해, 게일. 그러면서도 당신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요."
"당신 없이도 살 수 있어요."
게일은 그의 팔 안에서 몸을 비틀고 빠져나오면서 말했다.
"누가 그런 것을 믿을라구? 당신 자신은 어떻소? 나는 믿지 않아. 당신은 나 없이는 살지 못해요. 자! 식사나 합시다. 식사가 끝나면 조금은 기분이 좋아지겠지."
그녀는 남편이 오늘 밤도 자기 침실에서 자리라는 것을 낮부터 알고 있었지만, 침대로 들어가서도 조금 열린 문의 틈새에서 달빛이 비쳐 들어오는 것을 오랫동안 긴장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움직여 남편이 들어오고, 그가 잠자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가운을 벗는 것을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일은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얕은 잠에 빠졌다. 밤중에 아쉬운 채 눈을 뜨고 남편의 침실로 들어가 얘기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무엇을 얘기한단 말인가? 남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는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게일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개의 다른 성 사이에는 여전히 서로 동떨어진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쥴리어스는 그녀 있는 데로 올 수가 있다. 하지만 그녀 편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갈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대접을 받게 될 것인가?
만약 그녀를 원한다면 쥴리어스는 들어올 것이다. 고의로 그는 자기를 시험하고 있을 것일까? 그녀는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그리고 그의 키스와 애무가 그녀에게 더없는 기쁨을 주고 있다고까지 그는 말했다. 틀림없이 그의 말은 옳았다. 역시 그는 자기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돌연 게일은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러자 화가 나서 속상한 생각조차 들었다. 이런 보복을 하다니! 꼭 후회하도록 해줄 거야! 그가 들어오면! 들어올 것이다. 틀림없이 온다. 그녀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그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지. 이 상태를 계속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에게 있어 여자란 굴욕감을 주고 얕잡아서라도 예속시키는 존재다. 그리스 여자는, 남자는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도록 키워졌으므로 남편에게는 맹목적으로 복종한다. 게일은 그리스인이 아니다. 만약 쥴리어스가 그것을 원하다면 그와 같은 그리스인의 여자와 결혼했어야 했다.
아침에 샤워를 하고 몸단장을 끝내자, 게일은 바로 옆 남편의 침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너무도 조용했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남편은 이미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게일은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계단에 서 있었다. 예의가 바른 쥴리어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녀보다 먼저 식사를 시작한 일은 없었다.
"당신은 내내 밑에 내려와 있었소?"
게일이 테이블에 앉자, 그는 물었다. 그녀는 어색해져서 한번도 그를 보지 않고 스푼을 들고 그레이프 프루츠를 들기 시작했다.
"그래요. 당신은?"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부정(否定)은 아니었지만, 안타까움이 더욱 심해진 것 같은 당혹한 느낌이었다.
"나는 좀처럼 불면증으로 괴로와하는 일이 없는 패들과 같은 부류지. 어젯밤에는 아주 잘 잤소."
그는 내심으로는 게일을 비웃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이상 말을 나누지 않은 채 식사를 끝냈다.
계속되는 사흘간, 그는 별로 달라진 낌새도 없고, 게일은 게일대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매일 아침 두 사람은 헤엄치러 갔지만 남남끼리라고도 할 수 있는 태도였다. 한 번 더후네와 어울리게 되었는데, 쥴리어스는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예전의 여자친구의 농담에도 다정하게 웃어 보였고, 마침내 그 이튿날 더후네를 점심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사양하겠어요!"
돌아오는 차 속에서 느닷없이 게일은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초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군요. 그녀를 가까이하다니, 나를 망신시킬 셈인가요?"
남편의 입가가 갑자기 긴장하는 것을 보고 게일은 침묵했다.
이런 장면의 재현(再現)은 그녀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신중하게 그녀는 바꿔 말했다.
"더후네를 데려오는 것은 별로 환영 못해요. 내가 어색해질 것을 당신은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요."
"단순한 인사치레일 뿐이오. 그녀도 우리를 초대해 줄 것이고."
그는 좀처럼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나는 가지 않겠어요!"
"그것은 당신 자유요. 하지만 나는 가겠소."
"내일 그 사람이 온다니, 싫군요."
돌아보니 그는 언젠가의 경우처럼 눈이 빛나고 콧구멍도 부풀어 있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조심해, 게일. 나의 노여움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이제 알았을 텐데. 두번 다시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으려니 여겼는데."
"더후네의 방문이 싫다고 말하면 폭력으로 나를 협박할 작정이에요?"
"방금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지 않소. 더후네는 내일 점심때 올 거요. 정중하게 맞도록, 알았소?"
"그런 일 나는 못해요!"
놀랍게도 게일은 눈에 눈물이 괴는 것을 느꼈다.
"난 더후네를 아주 싫어해요! 어째서 정중히 맞으라는 건가요?"
"아주 싫다고… 그것은 약간 지나친 말이군. 그렇지 않소?"
"물론 싫어요. 왜냐하면 당신과 과거에 관계가 있던 사람 중의 한 사람과 동석하는 따위 아무래도 기분좋을 리가 없어요."
쥴리어스는 차에서 내리자 재미있다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중의 한 사람?"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그녀의 팔에 올려진 그의 손은 이상스레 다정하여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원할 때에도 그는 다정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나타낸 적이 없는 다정함이었다.
"몇 명의 여성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당신은 인정했어요."
게일의 말에 그는 마치 새로이 그것을 인정하듯 끄덕여 보였다.
"아내가 상대방의 여성에 대한 일을 모르고 있는 것과는 경우가 달라요."
그는 다가서서 턱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뜻을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갸웃하여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게일은 눈을 내리깔았다. 왜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탐색하는 듯한 표정에 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의 과거가 당신을 괴롭힌다는 말이오, 게일?"
그는 손가락으로 무심히 그녀의 팔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때 게일은 더없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자, 당신은 질문에 대답 안했소."
남편은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들자 눈에 촉촉히 눈물이 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남편의 과거가 화제에 오르고 있는 지금 그를 매도(罵倒)해도 당연한데, 어째서 나는 그렇게 못하는 것일까.
"단지 더후네가… 난 그녀와 만나 버렸기 때문에…"
잠시 동안 그가 뭔가 말하기를 기다리며 게일은 침묵했다.
그러나 쥴리어스는 그냥 유심히 그녀를 내려다볼 뿐, 그녀가 계속해 주기를 안타까운 듯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옛날의 남자친구 중의 한 사람을 초대하면 당신은 어떤 심정이 될 것 같아요?"
그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표정은 갑자기 변했다. 게일은 악마와 같다고 생각하고 몸서리쳤다.
며칠 전의 광경이 박진감 있게 되살아왔다. 그러자 그녀의 팔에 걸쳐진 다정한 손의 감촉은 아픔으로 변하여 게일은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영구히 그가 만들어 내는 상처에 견디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고 게일은 멍하니 생각하는 것이었다. 다른 남성들의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를 한층 더 상처받게 한 것은 틀림없었다.
"잘못했소, 게일.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아니었소."
놀랍게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게일은 자기의 마음과는 딴판인 말을 충동적으로 해버렸다.
"아직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요, 쥴리어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게일의 뺨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찔렀다.
"당신의 목이라도 졸라 줄까?"
그의 목소리는 오만스러웠다. 게일은 못박힌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내가 더후네를 초대하리라고 생각하세요?"
"남자에게는 옛날의 우정을 계속할 수 있는 특권이 허용되지만, 그것에 대해서 여자는 보다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하오."
남편이 좀더 다른 표정으로 말했다면 게일은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농담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더후네를 정중하게 맞이한다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튿날 손님을 맞이하기 직전에 또 한번 게일은 말했다.
"사실을 말하면, 당신들을 단둘이 있게 해드리고 싶을 정도의 기분이에요."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혼자서 식사하는 편이 낫다면 제발 그렇게 해요."
게일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제발 말해 줘요. 사실은 나에게 무엇을 시험하려는 거죠?"
차갑고 의아스러운 시선이 게일에게 향해졌다.
"더 확실히 말해 줘야지, 못 알아듣겠소."
그의 눈에는 강한 호기심이 엿보였다.
"당신은 그런 속셈이 아닌가요?"
"무슨 뜻이오?"
그녀는 말이 궁해져 눈썹을 모았다.
"아아… 요즈음…"
진실로 남편이 특히 별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자, 게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떻게 된 거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거요?"
"당신은 자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계실 텐데요."
왜 이런 식으로 말해 버리는 것일까? 그가 게임을 시도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가 자기 침실에 혼자 틀어박혀 있어도 자기는 전혀 상관없다고, 어째서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단 말인가? 쥴리어스가 자기 스스로 시작한 이상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의 상태일지라도 각오하고 있다고 확실히 얘기하지 않는 것은 어찌 된 셈일까?
"당신은 표면상의 태도와는 달리 내 키스나… 그… 요구가 없는 것이 쓸쓸하다, 이 말 아니오?"
그는 약간 빈정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틀리죠! 그런 건 아니라니까요!"
거짓말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그는 남달리 예민했다.
"그렇지 않소?"
그는 하품을 삼키면서 시계를 살짝 봤다.
"지금쯤 더후네는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요. 걸어서 올 테니까 마중을 나가야 되겠소. 당신은 케이트가 빠짐없이 준비했는지 어떤지 테이블을 꼭 좀 살펴봐요. 그리고 더후네와 나, 이렇게 두 사람이 식사할 거라면, 당신의 자리가 치워져 있는지 어떤지도 확인해 둬요."
그녀는 쥴리어스가 좌우로 열리는 문을 빠져나가 중간마당으로 나가자 운동 선수처럼 뛸 듯이 가볍게 걸어가는 것을 노려보았다.
"당신 같은 사람 아주 싫어해요!"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폭이 넓고 반듯하게 뻗은 등에 대고 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과 결혼 안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마음속으로부터 생각해요!"
그녀는 혼자서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은 없었다. 왜 그들 두 사람을 함께 둘 필요가 있단 말인가? 옛날 얘기를 하기 위해서인가? 만약 두 사람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다른 장소에서도 약속할 수 있는 것이다. 게일은 이런 것을 생각하고 테이블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만약 남편과 더후네가 또다시 교제하게 된다면 매우 비참한 기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일은 이 새롭게 떠오른 생각을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다른 여성에게 질투한 일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후네는 허리와 단에 장식이 둘러진 끈 없는 면 드레스를 입어 아주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또한 세트로 된 보석이 달린 팔찌와 귀걸이를 하고 쥴리어스의 눈앞에서 자신을 과시했다. 그 태도로 보아 그녀의 아름다운 값비싼 장신구는 그가 보낸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게일은 생각했다… 그것은 호의의 표시로써였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게일의 가슴은 아프고, 넓은 이마에 약간 주름이 생겼다.
그 순간 쥴리어스가 그녀의 표정을 포착하고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고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더후네는 최근에 참석했던 파티와 그밖의 여러 가지 모임의 얘기를 하고, 쥴리어스가 이따금 말참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또한 그녀로 하여금 신이 나게 하는지 열심히 대수롭지 않은 얘기들을 계속하고 있었다.
"모임의 반 정도도 당신은 참석을 안하시는군요, 쥴리어스. 결혼하니까 이제 흥미가 없어졌어요?"
더후네가 말했다.
"지금까지도 당신만큼은 흥미가 없었던 것이오, 더후네."
이 사람은 아마도 몹시 한가로운가 보다고 게일은 짓궂은 상상을 했다. 하지만 쥴리어스가 영구히 그녀 곁으로 가 버리면 자기는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기들의 결혼에는 굳은 유대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느 날 틀림없이 그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육체적인 욕구 이외의 실질적인 기초 위에 이룩되어 있지 않는 이상은 필연적으로 붕괴하여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겠지.
게일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조그만 소리를 내고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에 놓았다. 어쩐 일이오? 남편의 의아한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게일은 포크를 한번 더 집어 접시의 고기를 건드렸다. 쥴리어스를 잃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을 번개처럼 뚫고 지나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더후네의 얘기로 차단되지 않았다면 게일은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근일중에 선상(船上) 파티를 할 예정이에요. 물론 나와 주시겠죠?"
더후네는 마스카라를 칠한 속눈썹의 효과를 알고 있는 듯 가장 효과적으로 움직였다.
"네, 불러 주신다면 참석하죠."
더후네는 반드시 초대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번에는 쥴리어스가 얘기할 차례였다. 자기 자신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게일은 두 사람의 대화 흐름에 맡겼다. 두어 번 얘기에 끌어들이려고 쥴리어스는 그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묘하게도 듣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기보다는 멍청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쥴리어스와의 이별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 처음에는 자기들의 정열은 언젠가는 퇴색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언제든 헤어질 각오는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찍이 말컴과의 약혼 시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여덟 살 때부터 그 생각은 그녀에게 있어서 아무런 매력도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사랑하는 것은 비참한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믿어왔다. 상처가 아문 자리를 드러내놓고 있으면 남자들은 천성적인 잔인성으로 용서없이 몇 번이고 또다시 상처를 내었다.
게일은 두번 다시 스스로 이런 위험을 범하지는 않았다. 쥴리어스로서도 그녀를 갖고 싶다는 정열뿐이었다. 그는 오두막집에서의 아침, 게일이 느낀 것은 깊고 가슴이 아플 정도의 실망이었던 것을 그녀는 아무 주저없이 인정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쥴리어스는 그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몸을 맡기고 있었으면 결국에 가서는 어떤 결과가 되어 있었을 것인가? 결과는 결혼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었다. 그리스인은 자기가 유혹한 여자와는 결코 결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이 아니고 불장난으로 끝났을 것이다. 나중에 가서는 그렇게 생각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비친 적이 있다. 그때 그의 말은 옳았다. 그것을 게일은 지금에 와서야 알았다.
하지만 불장난의 관계라면… 쥴리어스가 자기에게 싫증낼 때까지 얼만큼 지속되고 있었을까? 누군가 다른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렇게 생각하자 게일의 관심은 점심식사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성에게로 옮겨갔다.
쥴리어스는 틀림없이 그녀에게 싫증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다. 만약 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두번 다시 쥴리어스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리라. 쥴리어스를 유혹하여 그를 자기에게서 빼앗은 여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도저히 그녀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자고 말하며 세 사람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은 더후네의 팔꿈치에 닿아 있었다. 게일은 어금니를 꼭 물었다. 식당의 문지방을 넘어 정원까지 나가는데 어찌하여 부축해 줘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더후네는 확실히 기뻐하고 있는 태도였다. 그의 손이 거기서 떨어지는 것을 방해하기라도 하듯 자기의 손을 포갰다.
"게일, 다른 의자를 갖고 와요. 당신은 저쪽에 있는 저 조그만 테이블에 앉는 게 어떻소."
그녀는 살짝 쥴리어스를 보았다. 남편은 자기에게 전혀 관심을 나타내고 있지 않았다. 의아스러운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또 한번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우울한 듯 어깨를 움츠렸을 뿐이었다. 더후네가 돌아갈 때가 되니 그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도로로 통하는 나무 그늘진 길을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안마당에서 빤히 바라보며 게일은 노여움보다도 더 깊은 무엇인가가 자신의 속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천근처럼 무겁고 묘하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써, 그러면서도 일종의 공허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무엇일까? 그녀를 사로잡은, 이 처음 느끼는 고약스런 감정은? 두 사람은 꺾어지는 길목까지 닿자 거기 서서 얘기하고 있었다. 게일은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일은 아름다운 얼굴을 보기 흉하게 일그러뜨렸다. 왜 멈춰 서는 것일까? 걸으면서 얘기는 할 수 있을 텐데.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쥴리어스가 살짝 뒤돌아보는 것을 보았으므로 게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상대방의 팔 밑으로 손을 미끄러뜨리고 또다시 걷기 시작하여 모퉁이를 꺾어들자, 두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게일은 입술을 축였다. 아까도 느낀 쑤시는 듯한 마음의 아픔이 왔다. 이번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였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마음의 아픔은 불안 탓이라고 게일은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것은 남편이 옛날 애인 쪽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8
집에 돌아오자마자, 쥴리어스는 사업차 이주일쯤 뮌헨에 출장을 가겠다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뉴스를 아내에게 말했다.
"그렇게 오랫동안요?"
그녀는 오싹해져서 말했다.
"함께 갈 수 없어요?"
그는 고개를 흔들고, 일에 줄곧 매달려야 하므로 함께 가도 지루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식사하면서 얘기를 하는 식으로 저녁때 당신과 함께 지낼 수는 없게 되었소. 그러니까 당신은 섬 일주를 하는 게 어떻겠소?"
그는 그다지 관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말했다.
"잠시 둘러보았을 뿐 섬 전부를 보지 못했으니까, 아폴로에게 운전을 시켜 어디든 재미있는 곳으로 가보면 좋을 거요."
이튿날 아침 그는 출발했다. 항구까지 아폴로에게 운전을 시켜서, 거기서 페리를 타고 로즈에 가서 다시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이주간…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전에도 그는 그 정도 오래 영국에 와 있었던 것이다. 게일은 생각했다. 자기 혼자만의 시간에 무엇을 하면 좋을까?
영국으로 갈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다. 열흘 남짓 되는 동안 집에 가 있자!
아폴로가 로즈에서 뜨는 비행기의 시각까지 알고 있어서 하나에서 열까지 도와주었다. 케이트가 짐을 꾸려 줬으므로, 그가 뮌헨을 향해 출발한 지 이틀 후, 어머니에게 정확한 도착 시간을 알리는 전보까지 치고 게일은 영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집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할수없이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게일은 두 시간 정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5시 반에 아버지는 돌아왔다.
"어머니는 여행중이다."
아버지는 열쇠를 채 꽂기 전에 느닷없이 말했다.
"전보는 내가 받았지만, 대학에 볼일이 있어서 네가 도착하는 시간 안에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었어."
"어머니가 여행중이라고요?"
아버지에 앞서 혼자 걸어들어가며 게일은 반쯤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어디 놀러 가시거나 하지 않으셨었잖아요!"
아버지는 이를 간 것 같았다. 그때는 확실히 몰랐지만. 그러나 문이 탕 하고 소리를 내고 강하게 닫혀짐으로써 아버지의 노여움을 눈치챘다. 집안이 온통 흔들렸다.
"너의 어머니는 이전에는 하지 않던 짓을 태연히 하고 있단 말이야."
두 사람이 거실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몸짓까지 해 보이며 정신없이 설명해 줬다.
"떠나 버린 뒤 쓰레기 하나 없단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지!"
"어디 가셨어요?"
게일은 가방을 내려놓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언제 가셨어요?"
"오늘로써 일주일이나 되지! 콘월에 갔단다!"
아버지는 내의를 넣는 상자를 소파 위에 던지면서 딸을 노려봤다.
"너를 만나 기쁘다고 말할 기분도 아니다. 이번에는."
아버지는 신음하듯 말하고,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것은 오직 게일 탓이라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즐기고 싶었다면 어째서 감쪽같이 하지 않았느냐!"
노여움 때문에 그녀의 뺨은 불그레해졌다. 서둘러 집에 온 것을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일을 감쪽같이 하시나요?"
아버지를 경멸하듯 보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외도에 관한 얘기일랑 하지 마! 그런데 너는 어찌 된 거야? 결혼생활이 순조롭지 않으냐?"
그녀의 뺨은 한층 더 붉어졌다.
"쥴리어스가 출장갔어요. 그래서 왔죠. 어머니와… 그리고 아버지도 만나보았으면 해서요."
나중에 아버지에 대한 것을 첨부하여 말하자, 아버지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나야 만나지 못해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속이 들여다보이는 말일랑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잠시 동안 주위를 걸어다니고 나서 아직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서 있는 게일에게 다가와 멈춰 섰다.
"자랑스럽게 생각해라. 너는 우리들의 생활을 망쳐 놨으니까!"
"아버지두! 제 탓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들추시나요? 만약 전과 같지 않으셨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아버지는 알고 계실 텐데요."
"어머니는 체념해 버렸지. 네가 배반하는 행위를 해냈을 때부터지. 어머니가 변심한 것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게일은 양복 웃저고리의 단추를 천천히 빼고 벗었다.
"어머니의 행선지와 주소를 알고 계세요?"
"몰라! 가르쳐 주려 하지 않았지. 멋대로 나다니는 건 결코 용서 못해."
그는 악을 쓰듯 말했다.
"너는 남자와 함께일 거라고 생각하니?"
"가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 나가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얘기했지. 그러니까 아무 대꾸도 안하길래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지. 하지만 이틀쯤 지난 후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메모가 놓여져 있었어. 이주일쯤 콘월에 다녀오겠다는 거지! 기가 막혀서! 이주일이나 여행할 정도로 저축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생활비를 그렇게 주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는 게일을 바라보았다. 잠깐 동안 그녀가 입고 있는 값비싼 양복과 이름의 머릿글자가 금으로 부각(浮刻)된 부드러운 가죽 제품인 여행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을 잘했는걸, 절대로 안하겠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더니…"
아버지는 도중에서 얘기를 중단하고 집게손가락을 그녀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뭔가 수상쩍단 말이야, 그 사건은. 그 남자가 너와 결혼한 것이 아주 이상해. 결혼하지 않아도 널 수중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어깨를 움츠렸다. 게일은 아버지의 숨결이 무겁게 느껴져 모르는 사이에 자기까지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물론 노기 때문이었지만, 게일은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싫어졌다.
"여기 있을 거라면 차라도 끓여 주지 않겠니?"
아버지는 재촉했다.
게일은 끄덕였지만 주저되는 기분이었다. 의자의 등에 상의를 걸면서 말했다.
"기분이 안 좋아요. 저 얼굴색이 나쁘지 않아요?"
아버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고, 엄지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켜 보였다.
"매우 건강해 보이는데! 편치 않은 것은 마음 쪽이야. 아무 거나 먹을 것을 준비해 줘. 너는 주방이 어디 있는지 알겠지?"
"오늘 밤에도 나가실 건가요?"
냉장고에 들어 있던 얼마 안 되는 재료로 그녀가 준비한 식사를 함께 먹으면서 게일은 물었다.
"그래! 그 일로 뭔가 할 얘기가 있다는 거냐?"
아버지는 달려들듯이 말했다. 아버지는 싸울 태세였다.
"그럴 생각은 없어요."
게일은 온화하게 말했다.
"그냥 물었을 뿐이죠. 왜냐하면 나는 혼자서 여기 앉아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너도 밖에 나갈 작정이냐? 남자친구라도 만나러 가는 거니?"
그녀는 그 말을 무시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소동이 나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그리스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만나고 싶었다. 어머니는 일주일쯤 지나면 돌아온다. 사흘간은 어머니와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그 사이 아버지와 다투기라도 한다면 집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기다리지 말고 자거라, 늦을 테니까."
아버지는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상의의 단추 구멍에 카네이션을 달고 외출했다.
게일은 닫혀진 거실의 문을 보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친정에 와 보니 이게 뭔가! 부모의 어느 쪽도 환영해 주지 않다니!
아무도 없는 집의 구석구석에는 무거운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게일은 무심히 방안을 휘둘러 보고, 자기와 쥴리어스가 베란다에 나가지 않고 식당에 있지도 않을 때 앉아서 보내는 그리스의 방과 비교했다. 그리고 또 한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열심히 손질해 왔지만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검소한 생활이었다. 남편이 월급의 태반을 다른 여자들에게 써 왔기 때문에 사치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일의 생각은 자연히 이번 어머니의 휴가 여행으로 기울어졌다. 그 여행을 위해 어머니는 저축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리벙벙해져서 어머니가 휴가를 얻어 다른 남자와 다닌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러 봤다. 도대체 어머니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란 누구일까? 게일이 아는 한 어머니가 남자친구를 만든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게다가 어머니에게는 언니도, 동생도, 사촌도 없었다.
'이상하다.'
그녀는 일어나서 문께로 갔다.
'게다가 만약 어디 가신다면 편지라도 보내 주셨을 텐데.'
게일은 이층에 올라가 집에 있었을 때 자기가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밤새 혼자 집에 있을 작정은 아니라고 했지만, 도대체 어디를 가야 좋단 말인가? 트리셔가 있다. 거기다 예전의 친구가 한 사람인가 두 사람 있긴 한데… 게일은 막막해져 전적으로 외토리가 된 것 같은 고독한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오두막집의 사건으로 집안에 그 같은 단절을 불러일으키기 전에 흔히 그랬듯이 어머니와 얘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또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일은 자기가 쥴리어스와 결혼하면 그것으로 어머니와의 관계는 원상복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의 편지는 정말로 애정에 찬 것이며, 편지마다 게일이 남편과 함께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씌어 있었다.
집에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울적해졌으므로 애써 기분을 전환하려고 게일은 세수를 마치고 살짝 화장을 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택시를 불러 타고 가다 공중전화 있는 데서 차를 세우고, 트리셔가 집에 있는지 알아보고는 심즈 댁까지 달리게 했다. 트리셔와 트리셔의 어머니는 잔디밭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게일을 환영해 주었다.
"게일, 너와 만나게 되다니 너무나 멋진 밤이구나! 전화해 줄 때까지 네가 영국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몰랐어. 자, 앉아. 어떻게 왔는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는지 얘기해 줘. 일요일은 트리셔의 스물네 번째 생일이야. 그때까지 돌아가야 하는지? 파티를 열려고 해."
리셉션의 얘기에 게일의 마음은 들떠서 미소지으며 권하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니예요, 그때까지 있을 거예요. 꼭 참석하죠."
게일은 남편과 함께가 아니고 혼자 온 이유를 설명했다.
몇 번이나 트리셔 쪽으로 눈길을 보냈지만 그 그늘진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아직 약혼자를 잃은 충격에서 재기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날 트레비스에게 망신을 시켰으면 하는 계획을 비쳤을 때보다는 훨씬 침착해져 있었다.
저녁 전 트리셔가 이층에서 몸단장을 하고 있는 몇 분 동안 거실에서 단둘이 되자 트리셔의 어머니는 게일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실은 어떤 사람과 트리셔는 알게 되었어. 아버지와 나, 두 사람 다 마음에 아주 들었는데, 트리셔는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아. 만일 트레비스가 나타나서 옛날로 돌아가자고 부탁이라도 한다면 그 애는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트리셔가 어머니에게 오두막집의 사건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확했다.
게일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파혼의 아픔을 뛰어넘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마음의 상처에다 자존심의 문제도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남성이 아내로서 자기를 선택해 놓고 갑자기 다른 여성에게 마음이 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심한 열등감을 갖게 되니까요."
부인은 잘 알겠다는 듯 끄덕여 보였다.
"딱한 얘기구나, 게일. 게다가 저 아이는 자기의 매력에 자신을 갖지 못하는 타입이니까. 스테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따금 함께 어울려 다니는 청년인데, 그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또다시 트레비스가 한 것과 같은 꼴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단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설득해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아버지의 말도 내 말도 통 들으려고 하지 않는단다."
"저도 그런 심정이었어요."
게일은 자기도 그랬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오랫동안… 응, 그렇겠구나. 하지만 지금은 결혼해서 행복해 보이는구나. 우리들 전부가 얼마나 놀랐었는지? 다른 사람 아닌 게일이었으니. 나는 주인에게 말했었거든. 절대로 결혼 안하겠다던 게일이라고. 하지만 너의 쥴리어스는 대단한 미남자라고 들었다."
"네, 그래요."
게일은 부끄러워졌다. 그것은 어느 편이냐 하면, 그녀에게는 희한한 체험이었다. 그녀의 놀리는 듯한 시선에 약간 당황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너의 집에 관한 얘기를 좀 들려 주렴."
부인은 독촉했다. 부인의 흥미는 타의가 없는 것이었다.
"남편은 상당한 부자라면서? 소문이 자자하다.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문이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까."
"깨끗한 정원이 있고, 언덕의 산기슭과 해변의 웅대한 경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집이죠."
"너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정말로 트리셔가 안정을 되찾았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겠죠, 뭐."
게일은 자신을 갖고 명확하게 말했다.
"그 스테판이라는 사람은 트리셔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갖고 있나요?"
"그는 나에게 그런 마음을 고백하더라."
"그 사람은 트레비스에 관한 일을 알고 있나요?"
"그럼, 알고 있지. 트리셔를 배반하다니, 트레비스는 어리석다고 말하더군."
게일의 입가는 약간이긴 했지만 씁쓰레한 듯 일그러졌다.
"트리셔에게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아요."
"같은 말을 너도 들었던 게로구나."
"그런 말 들었어요.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게일은 그 일을 상기하듯 잠시 침묵했다.
"그때 얼마만큼 깊게 자신이 상처받았나를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이제 두번 다시 그와 같은 일은 극복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겠지만 그래도 이겨낼 수 있어요."
"그렇지. 가족 중의 누군가가 죽은 것과 같은 셈이지. 전남편이 세상을 떴을 때, 나는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 그러나 때가 되자 스스로도 놀랍게 또 한번 사랑을 알게 되었어. 너와 마찬가지로, 게일. 그래서 그 아이에게도 설득해 보았단다. 그래도 젊었을 때란 그것을 믿는 게 어렵지."
게일은 기묘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왠지는 뚜렷이 설명할 수 없지만, 그녀는 트리셔 어머니의 말에 강한 쇼크를 받고 있었다. 게일이 느낀 것은 어떤 죄악감이었다.
자기가 쥴리어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트리셔 어머니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리고 자기는 그것을 부정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 꺼림칙해졌다.
저녁식사때 트리셔는 너희 어머니도 안 계시다니까 우리집에 와서 이삼 일 함께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너희 아버지만 좋으시다면."
하고 트리셔는 말했다.
"신경 안 쓰실 거라고 생각해."
자기 음성이 매정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게일은 대답했다.
"그럼 와 줄 거지?"
"그래, 초대해 줘서 고맙다. 그럼 언제 오는 게 좋겠니?"
"금주의 주말은… 하지만 너의 사정만 허락되면 언제라도 좋아."
트리셔 어머니가 궁금하다는 듯 게일을 보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에 다른 친구한테도 가봐야지?"
"한 두어 사람요."
결혼해 버리면 갑자기 교제가 뜸해지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대답을 했다.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 중에서 한두 사람과는 편지 왕래가 있었지만 어느덧 차차 열이 식어갔다.
결국 금요일 오전 중에 트리셔의 집에 가서 월요일이나 화요일까지 거기 있기로 하였다. 파티는 버튼의 로우백 호텔에서 열리게 되어 있다. 게일은 정장의 옷을 전혀 갖고 오지 않았으므로 그 기회에 기꺼이 새 드레스를 장만했다. 그녀는 또한 스잔에게 줄 조그만 선물과 트리셔 어머니에게는 초대해 준 답례의 선물을 쇼핑하러 다녔다.
초대된 것을 아버지에게 얘기하자, 놀랍게도 의외로 아버지는 반대하는 것이었다.
"나다니고 나를 혼자 놔둘 작정이냐? 그런 게 어디 있니! 거절해라. 잠시밖에 이곳에 안 있을 것 아니냐. 초대받아 갈 것 없다."
"내가 어떻게 하든 아버지는 상관 안하실 줄 생각했는데요. 만약 거절하면… 함께 집에 있어 줄 작정이세요?"
게일은 트리셔 어머니에게 거절하겠다는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집에 있을 거냐고?"
아버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절대로 집에는 있지 않을 거다."
"그러시다면 내가 없어도 쓸쓸해지실 일은 없지 않으세요?"
게일은 부드럽게 말했다.
"아침식사와 차 말이다. 난 제대로 된 식사를 준비해 주는 것을 좋아하거든."
그녀는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찬찬히 아버지를 훑어보았다.
"저는 어머니가 아니예요, 아버지."
그녀는 다정하게 말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 게일. 너는 아버지를 존경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았겠지. 초대를 받을 거냐,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거냐?"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하루종일 무엇을 하고 있으면 되나요? 거기다 이곳에 혼자 있다 보면 어떤 밤을 보내야 되리라고 생각하세요?"
"집안일을 무엇이든 하고 있으면 바빠지겠지…"
"집안일이요?"
오만한 태도로 아버지를 노려보며 말을 가로막았다.
"멀리서 집안일이나 하기 위해 돌아오진 않았어요. 놀러온 거라구요."
"꽤나 고압적이군. 지금은 돈 많은 남자와 산다 해서 그러느냐?"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언제나처럼 돕겠어요. 하지만 안 계시니까 트리셔나 그녀의 집식구들과 함께 보낼 작정이에요."
"집안은 일주일 동안이나 치우지 않은 채인데!"
"아버지가 그 차이를 잘 아시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어머니가 아무리 깨끗하고 기분좋게 하기 위해 일하셔도 수고한다는 말 한마디 어머니에게 해주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외출하고, 그녀는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었다. 게일은 설거지를 끝내고 택시로 다른 친구 집으로 갔다. 하지만 오래 있지 않았으므로 밤 9시 반에는 침대에 들어가 있었다.
쥴리어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드러누워 있었다. 아마도 즐기고 있겠지. 남자의 출장이란 위안 여행이 주(主)라는 것을 그가 영국에 와 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납득하려고 했다. 그는 그때 모든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뮌헨에도 누군가 친구가 있겠지. 아마도 잉검 교수 같은 친구가 있어서, 그 사람이 이곳 모임에 남편을 소개한 것과 비슷한 모임에도 또 소개하겠지.
'함께 데리고 가려면 데리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만 한다면 될 수 있는 일인데…'
확실히 남편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게일은 목요일 하루를 집안 청소로 보내 버렸다. 아버지의 저녁 귀가를 위해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는 그녀가 만든 식사에 아무 말도 안했으며, 그녀가 집안 일을 해놓은 것에도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없었고, 아버지 침대 위에 세탁한 잠옷을 놔둬도, 또한 내의나 그밖의 의류도 전부 빨아서 다리미질을 해놔도 달리 관심을 두는 기색이 없었다.
"그럼 며칠 후 또 보자."
아버지는 금요일 아침, 출근하면서 말했다.
"즐기고 오도록. 양심에 찔리는 짓은 하지 말고!"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는 아버지는 제멋대로 자란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는 되지 않아요."
게일은 말대답을 했지만 그것은 다정한 목소리였다.
거기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떨떠름했다.
"너는 어머니의 딸이구나… 틀림없어."
아버지는 손을 뒤로 돌려서 문을 탕 하고 닫더니 나가 버렸다.
게일은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아버지를 위해 차 준비를 하고는 침대를 정돈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모든 걸 말끔히 해놓았다.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그녀가 해놓은 일들에 관해 일체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은 뻔했지만, 그래도 게일은 만족했다.
트리셔의 생일 파티는 성대한 만찬이었다. 게일은 스테판과 만나자, 그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들과 함께 춤춘 뒤에 트리셔에게 스테판과 친구가 되어서 기쁘다고 전했다. 청년들 속에서 스테판의 모습을 찾고 있던 트리셔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게일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안했다. 트리셔는 트레비스를 잊으려 하고 있었다. 꽤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데비드 잉검과 출 때, 그가 쥴리어스의 안부를 물었다.
"사업차 뮌헨에 가 있어요."
"그래서 친정에 돌아와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거로군요?"
"처음에는 어머니를 만날 작정이었는데, 운이 나쁘게도 어머니는 여행중이세요. 그래서 트리셔와 함께 있는 중이에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게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레비스와 만나시나요?"
"이따금 만나죠."
그는 신중히 대답했다.
오랫동안 주저했지만 게일은 또 물었다.
"아직도 그분은 오두막집에 가곤 하시나요?"
"틀림없이 그러리하고 생각되는데요."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으므로 게일은 자연히 그 다음까지 얘기를 진전시키는 것을 단념했다. 그러나 뭔가 억누를 수 없는 힘에 밀려 오두막집을 트레비스가 가지 않을 때라도 아직 친구들이 사용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물었다.
게일은 말하면서 상대방의 얼굴을 살짝 보고 놀랐다. 그의 입가는 묘한 웃음으로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이 남자와 쥴리어스가 경멸하는 듯한 태도로 여자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엿듣고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은 심정이 되었던 것인데, 갑자기 게일은 그날 밤의 일을 상기했다.
"트레비스는 확실히 친구들에게 오두막집을 쓰게 하고 있어요."
자기의 미묘한 질문에 대해서 하등의 단서가 될 해답을 얻지 못해 그녀는 안타까운 듯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묵묵히 파트너의 스텝을 따라 댄스의 즐거움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의 경기 선수가 갖는 고고(孤高)한 기품을 갖고 실로 멋지게 춤추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지셨군요."
잠시 후 파트너가 말했다.
재미있어 하는 듯한 어조였다.
"당신의 대답은 너무 간단해서 종잡을 수가 없어요. 얘기해도 소용이 없죠."
솔직하게 말하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고 계신 것은, 즉 질문은 시간의 낭비라는 말이군요?"
게일은 얼굴이 빨개졌다.
"화제를 바꿀까요, 디브?"
"아뇨, 바꿀 필요는 없죠.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녀는 할수없이 웃으며 말했다.
"쥴리어스와 내가 어떤 경위로 결혼하게 되었는지 아시죠? 말해 주세요."
입밖에 내자마자 곧 게일은 후회했다.
아까부터 말을 돌려서 간접적으로 그것을 묻고 있었는데, 입밖에 내자 이번에는 버릇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데비드는 남편이 믿고 있는 오래된 친구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들고나오는 것은 아니었는데.
"쥴리어스가 무언가 나에게 털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묻고 계신 거죠?"
게일은 즉시 대답을 하지 않고 우선 그의 표정이 어떤지를 살피려 했다. 의아한 듯한 느낌이 살짝 엿보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아무 얘기도 안하던데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게일을 보았다.
"나는 당신 때문에 얼떨떨해지는군요, 게일. 남의 눈에 비친 것처럼 평범한 결혼이 아니었나요? 우리들은 모두 어느 쪽이냐 하면, 쥴리어스 때문에 놀랐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것은 쥴리어스가…"
그는 입을 다물더니 싱긋 웃고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약간 미안해 하는 듯한 느낌이 살짝 엿보였다.
"그는 악명 높은 독신 남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그의 결혼은 마땅히 화제를 불러일으켰죠. 그리고 아주 조촐하게, 그것도 갑자기 식을 올렸으니 내 자신은 그가 당신에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뭔가 석연치 않은 게 있다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지요. 그렇지만 생각을 해봐야 하겠군요. 당황하게 되는데요. 뭔가 털어놓을 얘기라도 있는가요?"
게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가 질문을 던져서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결과를 초래한 것에 대해 스스로 화가 났다.
"아뇨, 없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째서 쥴리어스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교수는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그것은 명백해요. 그는 언제나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우리들의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쥴리어스가 자기에게 마음이 끌려 있다고, 그리고 또한 그날 밤 줄곧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고 오빠가 똑똑히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게일은 잉검 교수가 한 말을 신중히 생각했다. 친구가 게일에게 품은 감정이 애정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데비드는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에게는… 쥴리어스가 자기를 원하게 된 매력의 정체에 대해서 데비드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게일은 신경이 팽팽해지는 것 같아 전신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바비큐 파티의 밤, 정원에서 둘이 주고받았던 대화가 다시 한번 귀에 살아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여자 얘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교수는 여자란 성격적으로 강인함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실로 간단하다고도 말하고 있었다. 쥴리어스는 친구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지만, 쟁취하는 것이 자기 취미라고 말하고 있었다. 게일을 몹시 흥분시키고야 만 얘기를 그가 한 것은 그때였다.
'여자의 가슴에 손을 대기만 하면 즉시 수중에 넣을 수 있어.'
음악이 끝나자 플로어에서 테이블로 안내된 게일은 겨우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녀는 당혹과 수치심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그 키 큰 매력적인 그리스인은 철저한 독신주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저 단순한 육체적인 욕구 때문에 게일과 결혼해 버렸다고, 데비드도 그리고 다른 사람도 다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 언제까지나 구애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게일은 그런 생각을 머리에서 떨어낼 수가 없었으므로 그날 밤의 즐거움은 깨지고 말았다.
그녀는 이따금 주위를 둘러보고는 누구든 자기 쪽을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파티가 끝나갈 무렵, 게일은 방구석의 화분에 심어진 야자수나무 밑에서 트리셔와 함께 음료수를 마시면서 잡담하고 있었다. 게일은 다시금 잉검 교수가 얘기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되었다.
상대방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트리셔가 그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라고 게일에게 알려 주었다.
두 남성은 반대쪽 벽의 가려진 장소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녀들은 잉검 교수의 목소리가 날 때까지 그토록 가까이 있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파리에서 만났다구요? 확실해요? 부인에게는 뮌헨에 간다고 했다는 것 같은데."
"물론 확실하지. 그와 만난 일이 있어서 잘 알고 있지. 파리에 나도 갔었으니까. 그는 금발의 여성과 함께 있었지. 틀림없는 영국 여자야."
"쥴리어스가 파리에서 금발의 여자와 함께 있었다니! 이건 도무지…"
여기까지 들은 그녀들은 두 사람 다 숨을 죽였다. 그러나 곧 트리셔가 말했다.
"저쪽으로 가자."
게일은 입술까지 새파래져서 비틀거리며 겨우 말했다.
"그래, 가… 가볼까?"
아까의 장소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오자 트리셔가 말했다.
"게일, 신경쓰지 마. 그건 거짓말이야. 남자들이 하는 얘기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지…"
위로하려고 말하다가 트리셔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끊어지고 말았다.
"물론이지."
게일의 목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정말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아서 집에, 자기의 방으로 데려다 줬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곳이라면 몸을 숨긴 채 굴욕감에 싸인 몸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있을 수 있다.
쥴리어스가 파리에― 소설이나 노래에 나오는 번화한 거리에 있다. 줄리어스가 파리에서… 금발의 여자와 지내고 있다.
그 여자는 더후네일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다른 여자일 것이다.
게일은 아버지를, 말컴을, 그리고 쥴리어스를 생각했다. 세 사람 다 미웠다.
"어느 남자나 모두 건달들이야."
게일은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고 몸서리를 쳤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즉각 그녀는 여기가 친구네 파티인 것을 생각해 냈다. 어떻게든지 눈물을 참으려고 손가락으로 누르듯 하며 눈을 비비고 참았다.
"안 됐구나.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트리셔도 마음이 혼란해진 모양이었다.
"아무 말도 할 필요는 없어. 잊어버리자! 한 잔 더 마실 것을 주문할까?"
"틀림없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아."
트리셔가 주장했다.
"가서 저 사람에게 얘기해서 사실이 어떤지 알아보지 않을래?"
"잘못된 게 아닐 거야. 얘기를 하러 간다는 것은… 나는 도저히 못하겠어."
게일은 눈이 빨개져서 트리셔를 봤다.
"어떤 상황에서 결혼했는지 알고 있지? 그러니까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트리셔는 당황하여 눈을 치떴다.
"그럼 왜 쥴리어스와 결혼했지? 너의 어머니 일이라면 죄다 들어서 알고 있어. 어머니가 어떤 상태였는지도 그때 네가 다 얘기해 줬었지. 그렇다고 너와 그가 꼭 결혼해야만 할 필요는 없었어. 그러니까 뭔가 이끌리는 게 있었을 것 아냐. 그가 열심히 너를 보고 있었던 것은 누구든지 눈치채고 있었지. 어느 파티에서 단 한 사람 매력적인 여성이 있는데, 그것은 너라고 쥴리어스가 잉검 교수에게 말한 것은 나도 알고 있어. 네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에게는 너와 결혼할 뚜렷한 이유가 있어."
트리셔는 게일을 위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게일은 트리셔도 얘기를 들은 이상에는 달리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남편이 자기에게 느끼고 있는 것은 육체적인 욕구뿐이라고 말해 버렸다. 그말을 듣고 트리셔는 자기가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눈치챘다.
"그리스인에게는 그렇게 나쁜 평판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라에서 살게 된 후 알게 되었어."
게일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스인은 애정 때문에 결혼하는 일은 좀처럼 없어. 순전히 섹스를 위해서뿐이고, 다른 아무것도 아냐. 말하자면 그리스의 남성은 세계에서도 가장 욕정이 강한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그게 유일한 대답이야."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나는 전보다 더욱 죄악감을 갖게 되는구나."
트리셔는 한숨을 쉬고 염려스러운 듯한 눈으로 용서를 빌듯 게일을 보았다.
"네 탓이 아니야."
게일은 성의를 전해야겠다는 심정에 못 이겨 뚜렷이 말했다.
"나도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트리셔는 게일이 스스로 얘기한 말의 진실을 측정하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를 사랑하고 있었니, 줄곧?"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두번 다시 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었잖니? 그렇게 생각한 것은 언제였니?"
게일은 입술을 빨았다. 한두 사람 자기들 쪽을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눈초리에는 희미하긴 했지만 야유하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게일은 영국에 돌아온 것을 진실로 후회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남편의 배신 행위를 알고 있는 편이 낫다고도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의 배반을 모르고 있는 아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을 알고 있는 편이 훨씬 좋다.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앞으로 남편의 요구에 대한 태도를 정해 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눈앞에 앞날의 일조 보이자, 마음은 울적해지고 어쩔 수 없는 비참함이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이미 사랑의 몸짓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쪽에서 그것을 거절할 테니까. 이것은 물론 파국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쥴리어스는 틀림없이 다른 곳에서 쾌락을 구하게 되겠지.
트리셔가 질문의 대답을 재촉하듯 몸을 조금 움직였으므로 게일은 퍼뜩 정신이 났다.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어. 우리들 두 사람 다… 두 사람이 다 같은 이유로 결혼했어."
"그런 말 믿지 못하겠어!"
그녀는 큰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그런 이유로 결혼할 수도 있을 거야. 그것은 네가 말한 대로라고 인정하겠어. 다분히 대부분의 그리스인 남성이 그럴는지는 몰라. 하지만 여성은 결코 그렇지는 않아!"
게일은 비참했다. 하지만 생긋이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그다지 현실적이 아니구나, 트리셔. 여성도 그렇다구. 그렇지만 여자는 좀처럼 그렇다고 말을 안할 뿐이지."
"너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트리셔는 게일을 무시하고 말했다.
"만약 매력적이고 멋진 쥴리어스가 아주 조금이라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다면 나 역시 사랑에 빠졌으리라고 생각해. 여자애들이 모두 그에게 열중하고 있었던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니!"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 두 사람 다 서로 육체적인 매력에 이끌려 결혼한 거야. 그러니까 우리들은 처음부터 오래 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게일은 쥴리어스를 위해서도, 또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내가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도 빨리 끝났어. 그래서 지금은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야. 하지만 신경쓰지 마."
게일은 겨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빨리 좌절하면 할수록 재기하는 것도 빨라지지. 그건 그렇고, 뭐 마실 것 좀 있었으면."
9
트리셔만이 알고 있는 명랑함을 가장한 채 게일은 그 주말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고, 후에 가서 이따금 이상한 심정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게일은 작별을 고할 때가 와도 딸이 집에 있건 말건 신경도 안 쓰고 매일 밤 나다니는 아버지한테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밤도 이제 이틀만 지나면 어머니는 돌아오는 것이다.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는 말했다.
"기분내키는 대로 하겠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기대했던 대로가 아니었던 모양이지?"
갑자기 아버지는 침묵했다. 아버지가 기침을 하며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게일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어디가 특별히 나쁜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아무 말도 안했다.
"집에 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어머니가 돌아올 때쯤에는 너도 슬슬 돌아갈 때가 되겠구나."
그녀는 끄덕였지만, 아직 사흘 남아 있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더후네가 섬에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계획보다 빨리 돌아갈까 하고 마음이 조급했다. 만일 더후네가 없으면 쥴리어스가 동반한 여성이 누구인가는 확실해진다. 그녀가 있으면 남편에게는 또 다른 여성이 있는 셈이 된다. 그 여성도 금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게일은 섬으로 가고 싶다는 충동을 눌렀다. 그녀가 멀리까지 온 것은 어머니와 만나기 위한 것이다. 설령 이틀 동안이라도 어머니와 함께 지내지 않고 돌아가 버리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어머니가 전보다는 마음을 열고 얘기해 주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재크라는 남자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고, 그 사람과 내내 함께 있었는지 어쩐지도 알아내고 싶었다.
게일이 기다리던 소망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딸이 자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으며, 그 놀라움이 지나자 얘기를 털어놓았다. 콘월에서는 재크와 함께였지만 옆의 호텔에서 묵었다는 것이다.
"비용은 그분이 지불했나요?"
"응, 전부 다. 나를 비난하는 거니?"
어머니는 신경이 쓰이는지 약간 변명하는 투로 말했다.
"나는 어머니에 관한 일을 좋다 나쁘다 하고 판단할 입장은 아녜요. 지금까지의 어머니는 성녀(聖女)와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각기 다른 호텔에서 유숙했단 말이죠?"
"그럼, 그건 사실이야. 재크는 예의바른 사람이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이해해 준단다."
속으로 게일은 웃었다. 그는 남자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어머니가 말하고 있는 이해를 그는 표시할 것인가?
남자라는 것만으로 배신을 생각케 하는 데는 충분했다. 게일은 어머니의 달아오른 얼굴을 들여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딸이 의심하는 것조차 몰랐다. 틀림없이 마음 아파할 일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어머니를 위해 울어 줄 것이다.
"무엇이든 좀더 그분에 관한 얘기를 해줘요, 네?"
게일은 재촉했다.
"어떻게 생겼어요? 독신, 그렇지 않으면 홀아비인가요?"
어쩌면 아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고집스러워진 게일의 마음이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젊음이 넘치고 있었다.
"팔 년 전에 아내를 잃고, 삼 년 전 나를 만나게 될 때까지 한번도 여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나 봐."
"그 사람, 몇 살인가요?"
"마흔여덟 살이야. 쥴리어스만큼 매력적이야, 거의 같을 정도로. 키가 크고 당당하고… 그런데다 술을 안 마신단다."
"자기 아내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나요?"
"한 번 있었어. 나에게는 아주 멋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어머니는 소녀 같은 미소를 띠고 계속했다.
"그 사람은 애정이 담긴 어조로 말했어. 두 사람 다 최후의 최후까지 서로 사랑했대. 부인은 일 년 전부터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재혼하도록 약속시켰대. 그냥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고 약속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대… 나하고 만나게 되기까지는. 그래도 물론, 우리들은 절대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해."
낮고 다정한 음성은, 나중에는 끊어지고 슬픈 듯한 침묵이 되었다. 어머니의 목 언저리가 긴장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게일은 두 사람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물어봤다.
"우리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어."
게일은 짧게 끄덕이고 나서,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만났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로맨틱하거나 하지는 못했어!"
어머니의 목소리는 또다시 밝아졌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이 가득 담긴 봉투를 두 개나 갖고 나왔지. 왜냐하면 큰 바구니를 버스에 놓고 내렸기 때문이었어. 그런 종류의 봉투가 얼마나 찢어지기 쉬운지 너는 알고 있지? 길거리로 전부 굴러가 버렸어! 모두들 보고만 있었어.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이 되지?"
게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싱긋 웃었다. 그토록 수줍음이 많은 어머니가! 그것은 어머니의 인생에서 가장 곤란했던 한순간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몇 개인가 도랑 속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어. 야채도 샀기 때문에 옥파나 토마토가 모두 굴러다녔지."
두 사람 다 마치 오랫동안 웃은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함께 웃어댔다.
"얘기하세요. 물론 그 재크라는 사람이 도와줬군요."
웃음을 그치고 게일은 재촉했다.
"그 사람은 차를 세웠어. 그래도 그때까지는 여러 사람들이 뛰어다니며 주워 줬지. 그래도 그것을 넣을 것이 없었어. 그러자 재크는 곧 차에서 튼튼한 종이 봉투를 갖고 와서 그 속에 넣으라고 말해 줬지. 그리고 집까지 차로 바래다 주고 차를 한 잔 마실 동안 집에 있었어. 그리고 이튿날 전화를 걸어 내가 어떠냐고…"
"어머니가 어떠냐고? 그럼 다치기라도 하셨나요?"
그러나 지금껏 어머니가 몸이 불편했던 일은 없었다.
"그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어! 너도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그러고는 으레 찾아오게 되었지. 하지만 이삼 주간쯤 지나자 이웃에 대해서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어. 여자란 얼마나 오해하기 쉬운가 너도 알고 있지. 거기다 나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 틀림없이 그 사람에게 호의 이상의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어. 간단한 얘기야, 게일. 너무 오랫동안 남편의 애정에 굶주리고 있을 때는 말이지."
어머니는 얘기를 그치고 호소하듯 딸을 보았다.
"알겠어요."
게일이 다정하게 말하자, 어머니는 자기 마음의 갈등을, 그리고 이별을 결심하고 두번 다시 와서는 안 된다고 그에게 선언한 것을 얘기했다.
"그것은 최후란 뜻으로 말했던 거지. 그러나 우리들은 하지 못했어. 재크는 집에 오지 않는 것에는 동의했어. 그리고 밖에서 만나면 어떠냐고 말했어. 그때는 단호히 거절했어. 하지만 너는 이미 알고 있겠지."
"그러고 나서도 계속 만나고 있었군요."
게일에게는 그 남자가 성실한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그래, 서로 자주 전화했어."
"서로라니, 어떻게 어머니가 전화할 수 있었어요?"
"약속한 시간에 매점에 가 있었지. 그곳으로 전화를 걸어 줬어. 내가 돈을 안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얘기하고 있었으므로 자기 쪽에서 전화를 해왔어. 또한 내쪽에서도 했지. 그 사람으로부터의 전화가 없을 때나 우울할 때는 말이지."
어머니는 얘기를 끝내고, 두 사람은 제각기의 생각에 잠겨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랫동안 그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군요."
"그때까지는… 네가…"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차 작아져서 사라져 버렸다. 뺨이 붉어진 어머니가 사랑스럽다고 게일은 생각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육체적인 욕구 따위의 얄팍한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은 만 삼 년 동안이나 정신적인 애정만으로 계속해 온 것이다…
"내가 쥴리어스와 오두막집에서 함께였을 때까지란 말이군요."
게일은 그 뒤를 계속하게 했다. 어머니는 한층 얼굴을 붉히고 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게일은 자기들의 결혼에 어머니가 큰 역할을 해낸 것이 아닌가 하는 확신을 얻었다.
"그때 네가 그런 행동을 할 때까지는 말이야."
어머니는 딸의 응시를 피한 채 토해내듯 말했다.
"그 뒤로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이 정당화된 것 같은 마음이 들었어."
"그래서 언제나 만나게 되었군요."
"그대로야."
"말해 줘요, 제가 쥴리어스와 잤다고 아직도 생각해요?"
게일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게일, 부탁해. 그런 요즘 말투는 그만둬 줘!"
어머니가 가로막았으므로 게일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가 그렇게 요즘 말투인가요? 오십 년이나 시대에 뒤떨어졌어요. 사랑스런 우리 엄마, 대답해 줘요."
"나,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구나… 엄밀하게는."
"몰라요?"
어머니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게 하고 싶었지만 허사였다.
"자기 딸이 어떤 인간인가는 아실 텐데."
어머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일은 자기가 뭐라고 말하든 어머니는 결코 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더 의문은 깊어질 뿐이었다. 화제를 바꾸어 그녀는 재크와 만나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도 그렇게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 사람은 너와 에드워드를 내내 만나고 싶어해. 물론 에드워드는 만나게 할 마음은 없다. 그 아이는 나와 아주 닮은 데가 있어서 이런 것은 싫어할 테니까."
어머니는 딸의 눈에 비친 재미있어 하는 듯한 표정을 힐난하듯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말하는 의미 알겠지?"
"물론이죠. 그 일을 주선해 주세요."
"오늘 밤 내가 전화하겠다. 어디서 저녁이라도 하자. 너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아주 좋아할 거야. 휴가 때 너희들 있는 데 가는 것이 어떠냐고, 쥴리어스와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까지 했지."
어머니는 생각난 듯 말했다.
"언제나 그 사람과 식사하러 가나요?"
어머니의 생활 변화를 생각하고 쾌히 그것을 받아들이리라고 마음을 정했다.
"그래, 우리들은 계속… 난 정말로 재간이 없어 놔서."
"그 소동 이후 계속이군요― 소동이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어머니의 일을 웃고 있구나, 게일. 너답지 않다!"
"어머니 역시 전혀 어머니답지 않아요. 그것은 차치하고 앞으로 사흘밖에 없어요."
게일은 말대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쥴리어스보다 먼저 돌아가 있고 싶어요."
어머니의 얘기를 추궁해 봤자 아무것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내일 밤 나가 볼까?"
"그분은 달리 뭔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요?"
"있다 해도 취소하겠지."
자신만만했다.
"대단한 자신이군요. 아주 행복해 보여요."
"행복하지. 모든 게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을 내게 주신 운명에 감사한다. 그 사람 덕택에 참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듣고 있는 동안에 게일의 눈은 흐려졌다. 이번에는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처량해진 것이었다. 결혼에 의해서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깊은 마음과 마음의 유대를 갖는 정신적인 애정이야말로 결혼의 참된 초석이라는 것을. 틀림없이 육체적인 사랑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애정 위에서만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필연적으로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다.
게일이 생각에 잠기곤 하는 것을 깨닫고 어머니는 갑자기 물었다.
"게일, 너는 쥴리어스와 함께라면 행복하지? 틀림없이 그럴 거야!"
어머니는 찢어지기라도 하는 듯 충동적으로 큰소리를 내었다.
게일은 얼굴을 발딱 들었다. 당황한 듯한, 뭔가 묻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네, 행복해요."
별로 흥분하는 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어머니의 눈가가 정말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게일이 거기 있는 것도 잊은 듯 어머니는 얘기했다.
"쥴리어스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너는 행복할 거야. 만약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너무나 가혹해. 그만큼의 일을 했는데도 그렇다면 나 자신을 용서 못해. 나의…"
어머니는 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게일은 눈과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결혼에 앞선 불가사의한 사건을 풀기 직전까지 와 있다고 분명히 생각했다.
"계속해서 얘기해 주세요, 어머니."
그녀는 부드럽게 재촉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머니는 즉각 이성을 되찾아 고개를 흔들고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곧 어머니는 또다시 당황한 모습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유심히 게일의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지금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다는 걸 알아. 그러나 후에 가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렇다고 말해, 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두번 다시 행복해지지 못할 거야."
"결혼하고 나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게일은 단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대답할 작정이었는데 어느덧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뚜렷하게 보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서도 망연해질 정도로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아담한 그 식당은 울창한 숲속에 있었다. 현대적인 손님들은 별로 없고 시골집 같은 정다운 느낌의 식당이었다. 크고 까만 난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맹렬한 불길이 색다른 천장을 따라 복잡스런 벽으로 사라져 갔다. 조명은 벽에 붙은 등불뿐으로, 적당히 어두웠으며 차분한 느낌이었다. 곳곳에 화분이 놓여 있고, 구석 쪽에서는 왈츠의 선율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같은 테이블을 잡아 놨어요, 부인."
웃음을 띤 웨이터가 바아 쪽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마실 것을 먼저 하시겠어요?"
"네."
그다지 자신있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게일을 놀라게 하는데는 충분했다. 어머니는 어쩌면 저렇게도 달라질 수 있을까. 눈동자를 빛내는 이상으로 사랑이 성숙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난로 주위에 걸터앉자 갑자기 어머니의 눈동자가 밝아졌다.
"밖에 도착한 차는 그 사람 차야. 엔진 소리로 알 수 있거든."
게일은 창을 보았다. 어둠이 깔려 있었다. 커다란 차 속에서 키가 큰 사람의 그림자가 내리는 것이 보였을 뿐이었다.
그 그림자는 성큼성큼 건물 옆으로 걸어가서 안 보이게 되었다. 게일은 잠깐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내가 이곳에 앉아 뺨을 붉히며 수줍은 듯 남자친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만약 아버지가 들어와서 본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하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게일은 젊고 매력적인 얼굴을 쳐다봤다. 오랜 세월에 걸친 방랑생활의 자취를 감출 길이 없는 아버지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결백한 생활이 전신에 나타나 있었다. 팽팽한 청동의 조각 같은 피부에는 주름도 없고, 의복에서는 구토증이 날 알콜과 니코틴의 냄새도 없었다.
오히려 면도 후의 로션과 갓 세탁한 내의의 건강한 냄새가 풍겼다. 머리도 흰 이도 반짝이고 있었다. 회색 우스테드의 양복은 티 하나 없었고, 스웨드의 구두도 깨끗하다. 그는 부동산의 대리인으로, 혼자서 열두 개가 넘는 대도시의 지점을 상대로 일을 하고 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만나게 되서 반갑군요, 게일."
이 싱긋 웃는 표정이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의 화술은 세련되어 있었으며, 그녀의 손을 잡은 손은 믿음직하고 친근감이 있었다.
"그것은 게일 역시 마찬가지죠."
부인은 딸의 표정에 신경을 쓰면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참견을 했다.
"글쎄, 어떨까?"
그는 게일을 내려다보고 잠시 후에 말했다.
"게일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겠소?"
"뵙게 되어 기쁩니다."
게일은 미소짓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어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을 보고 웃으며 어머니 옆에 앉아 웨이터를 불렀다.
"승인해 줬다고 생각해도 괜찮을는지?"
어딘지 쥴리어스를 닮은 듯한 냉소적이며 도전하는 듯한 느낌이 그 눈에 떠올랐다. 그녀가 받아들이기를 원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부탁할 셈은 전혀 없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마음을 움직인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는 남자로서 위에 서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어느 정도와 오만함까지 고루 갖추고 있었다.
게일은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제가 인정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가요?"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만약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신경쓸 테니까."
게일은 고개를 흔들고 자연스럽게 말을 했다.
"마음에 안 들다니, 그럴 리가 있나요."
그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
"고마와 게일. 나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어요. 당신의 얘기는 죄다 들었어요."
도중에서 얘기를 그만두고 애정 어린 표정으로 어머니를 봤다.
"당신과 오빠는 온 세상에서 가장 잘난 애들 중의 두 사람이죠."
"재크, 무슨 말을!"
"좋소. 이제 두 사람을 난처하게 할 얘기는 그만두죠."
갑자기 재크는 매우 진지해져서 말했다.
"장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행복을 위하여…"
그러나 행복이라고 불리는 알 수 없는 짓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걸까? 그것은 붙잡을 수는 있어도 붙잡기 전에 도망쳐 버리며, 도망치면서 사람을 비웃을 것이다. 이 아늑하고 정다움이 있는 식당에서 세 사람이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뭐가 행복하다는 걸까? 게일은 생각에 잠기면서 이 비밀의 장소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이 떠올랐다. 약간 어두운 조명의 칸이 막힌 다섯 개의 테이블이 주로 밀회를 위해 디자인 된 것 같았다.
"게일,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남편의 일이오?"
재크의 목소리로 제정신이 들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나의 일을 어느 정도까지 얘기한 것일까, 하고 게일은 생각했다. 아무 얘기도 안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혼자 돌아와 있는 이유는 어머니가 전화로 이미 얘기한 것 같았다.
"네, 그래요."
거짓말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약간 빨개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나는 행복이란 것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게일은 어머니의 시선을 찾았다. 어머니는 감사하며 만족조차 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상대의 남성으로 옮겨갔다. 수많은 여성이 쥴리어스에게 마음을 두었듯이 이 남성에게도 이끌리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장난삼아 사랑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쥴리어스가 여자와 놀아나고 있는 것을 떠올리고 몹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어제 스스로 인정한 것을 부인했다. 남편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자기는 그토록 어수룩하지 않다고, 두번 다시 약한 입장에는 서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오 년여나 그러한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쓰디쓴 생각이 울컥 치밀어왔다. 이런 덧없는 저항을 억누르고 그녀를 현실로 직면시키는 것은 진실의 힘이었다. 그녀는 쥴리어스를 사랑해서… 그리고 또다시 배반당한 것이었다.
아기자기한 만찬의 밤으로부터 이틀 후, 게일은 쥴리어스를 기다리기 위해 파트머스로 돌아갔다.
그에게서 저녁 6시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있었다고, 게일이 집안에 들어서자 아폴로는 곧 전해 주었다. 그녀는 아폴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교묘히 질문을 던져 더후네도 집을 비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파리한 얼굴이긴 했지만 게일은 남편에게 자기 의사를 전하려고 결의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도착하면 즉시 이 결혼은 종국에 온 것을 알려 줄 작정이었다. 더후네를 아내로 맞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언제나 그녀와 파리에서 보낼 수가 있을 테니까… 하고, 자기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그에게 말할 셈이었다.
그는 항구에서 택시로 돌아왔다. 택시는 천천히 저택의 골목길을 달려, 다가오는 어둠 속을 그녀가 서 있는 안마당 가까이에까지 와서 섰다. 쥴리어스는 언제나처럼 세련된 몸짓으로 차에서 내려 운전수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짐을 내리게 한 후, 아내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야유조의 놀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아내의 파리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쓸쓸했소?"
그녀의 눈동자는 불타올랐다.
"왜 쓸쓸했겠어요?"
게일은 금방이라도 폭발하여 모든 것을 다 불태워 버릴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며 대꾸했다.
"뮌헨은 즐거웠었나요?"
"놀러갔던 게 아냐. 알고 있지 않소?"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목소리는 활달한 어조로 바뀌었다.
"어찌 된 거요? 나는 열렬히 환영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람. 번개구름 같은 얼굴을 한 아내와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로 쓸쓸했던 것 같군. 이제 겨우 알게 된 거요?"
게일은 손을 굳게 쥐었다. 노여움이 복받쳐 왔다. 그것은 쓰디쓴 고뇌와 환멸에서 오는 감정이 눈물로 변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조차 그는 어쩌면 이렇게도 매력이 넘쳐흐르는 것일까. 독특하고 멋지게 정돈된 거무스름한 윤곽, 위압적인 풍모. 거기다 광대뼈 밑의 우묵한 곳이 그의 얼굴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 눈동자는 전보다 더 거뭇거뭇하고 거의 까만색에 가까왔다.
그의 팔이 둘려져 손이 자기 가슴께를 만지자 수치심이 왈칵 몰려왔다. 그러나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실망시켜서 미안해요, 쥴리어스."
그녀는 어떻게든 명랑함을 가장했다.
"나도 집에 없었어요. 집에 갔었죠."
"친정에 가 있었소?"
가시 돋친 어조였다.
"그랬었죠."
쥴리어스는 이 말에 흠칫하는 것 같았다.
내가 쓸쓸해 하는지 어떤지 시험했던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그런 이유로 나갔다 온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당신에게 안부 전해 달래셨어요."
그녀는 남편을 찬찬히 살피면서 말했다. 그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가면 같았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다.
"그러십디까? 요번 편지 쓸 때 고맙다고 전해 줘요."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활달한 어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묘하게 피로한 기색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피로하다… 그것은 예측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누를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더후네도 어디 갔더군요."
그는 눈을 크게 치뜨더니 얼떨떨한 기색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티끌만큼도 죄악감은 보이지 않고, 또한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곧장 경계의 태세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이다지도 잘 넘기는 것일까!
"그 사람은 줄곧 파리에 가 있었던 것 같아요."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그에게 동요를 일으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를 그리워 애타는 마음이 더욱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만약 지금 그에게 그 얘기를 끄집어 내면 두번 다시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 두번 다시. 그 탄탄한 몸에 짓눌리는 감촉을 맛보는 것도, 그리고 그 입술을 교묘히 사용해서 뜻대로 설복시키고 요구하며, 탈취하는 듯한… 그 애무도 두번 다시 맛보지 못할 거라고 경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원하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미쳐 날뛰는 것 같은 갈등을 느꼈을 때, 실로 그는 묘한 말을 했다.
"무언가 특별한 뜻이 있어서 일부러 더후네 얘기를 하고 있소?"
그것은 시원스럽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신경이 쓰이는 듯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대답이 즉각 입가로 나오려 했으나, 결국 그녀는 대답을 삼켰다. 눈물이 나올 것 같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었다. 남편이 자기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덩굴이 늘어진 안마당에서 어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없이 고마왔다.
"아녜요, 쥴리어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자기 편에서 그 앞까지 따지고 들어온다면 두 사람 다 도망칠 곳이 없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두려워졌다. 이제는 자기에게 싫증이 나 있다면 일이 폭로되었다 해도 그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그녀를 천천히 보고 있었다. 그는 더후네와 파리에 있었던 사실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고의로 그 일을 폭로한 것은 그의 속마음을 찌른 것이다.
게일은 말해 버린 것을 후회하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그냥 흥미삼아 말했을 뿐예요. 왜냐하면 언제나 파리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게일은 그가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일순간 찔끔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는 안도하는 듯한 태도가 되었으므로 그녀는 구원된 것 같은 생각조차 드는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안도는 그녀가 바란 대로 순수하고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쥴리어스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규명하던 얘기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차분한 마음이 아니었다. 또한 이것은 그가 아직 그녀에게 싫증이 안 나고 욕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결국 한때나마 구원이 된 것이다. 기뻐해야 할 일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뭔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고 쥴리어스를 보았다. 속눈썹에 배어든 눈물 자국이 신경쓰였다. 하지만 만약 보았다면 틀림없이 그는 어찌 된 거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는 온화하게 물었다.
"더후네가 파리에 있었던 것을 어떻게 알았소?"
그 질문에는 준비한 대답이 있었다.
"아폴로가 말했어요. 휴가로 더후네가 집에 없다고 말한 것은 그예요."
"그랬었군…"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아폴로는 파리의 '파'자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혹 그에게 물으면 어쩌나 하여 불안해졌다. 그러나 불안은 곧 사라졌다. 하인에게 이런 것을 그가 물을 리는 없는 것이다.
10
쥴리어스와 게일은 청교도들이 걸었던 길을 더듬어서 사도(使徒) 요한이 묵시록을 쓴 동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 궁정의 안마당에 서서 유람선으로 찾아온 사람들에게 검은 턱수염을 기른 그리스 정교(正敎)의 승려가 얘기를 걸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본령(本領)을 발휘할 수 있어서 승려께서는 행복하시겠군."
쥴리어스는 여행에서 돌아온 이래 사흘간이나 줄곧 서먹서먹한 채 타인처럼 행동했다.
"관광객은 수도원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지."
게일은 살짝 그를 봤다. 그가 수공이 많이 든 금 십자가를 걸고 있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많은 그리스인이 그러한 종교적인 연유가 있는 장식품을 몸에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극히 현실적인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게 생각되었다.
"수도원에는 돈이 많은가요?"
그녀 자신도 그의 태도에 맞춰 몹시 어색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마음 아팠다. 두 사람 사이에 다정한 감정이 들어와만 준다면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욕망까지 없어진 것 같았다. 적어도 쥴리어스는…
그는 돌아온 후 한번도 그녀 곁으로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동경의 생각은 보답이 없는 사랑보다 그녀를 훨씬 덜 괴롭혔다. 그 강함은 스스로의 욕망 때문에만 그와 결혼했다고 믿고 있던 게일의 신념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때에는 아직 사랑은 그녀의 마음속에 솟아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힘찬 매력이 그녀 속에 욕망보다 뭔가 훨씬 힘찬 것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나서 그녀는 더후네의 일을 종종 생각했다. 격렬한 질투가 무럭무럭 솟아나 알고 있는 일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아무래도 알고 싶어졌다. 또한 더후네가 그에게 있어서 얼마만큼의 의미를 갖는 존재인가도 규명하고 싶었다.
"대단한 부자지. 그리스에 몇 갠가의 섬에 토지를 갖고 있고, 키프로스에도 있어."
쥴리어스는 테라스 쪽으로 가서 멋진 경치를 바라보자고 제의했다. 그가 지루한 모양이라고 생각되어 그녀는 입술을 아플 정도로 깨물었다. 하지만 자기의 매력이 그렇게 빨리 사라진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파리나 더후네의 기억에 자신을 잊고 있는 것일까? 다른 여자들 쪽이 아내 이상으로 즐거운 것일까… 또한 만약 그렇다면 왜 자기와 결혼했단 말인가? 그것은 유혹한 여자와는 결코 결혼하지 않는다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것이 가장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라고 생각된다. 한숨을 쉬고 게일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기억이 갑작스레 되살아온다. 확실히 뭔가 불가사의한 일이 엉켜 있어 결혼으로 이끌어 간 것이라는 확신이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왜 한숨을 쉬는 거요?"
남편의 낮고 듣기 좋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표정까지도 남편은 놓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게일은 알고 있었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는 것 같군?"
"아녜요, 고민 같은 것 없어요."
그녀는 말하려다 쥴리어스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오른 것을 깨닫고 침묵했다. 그는 특히 그녀의 대답에 관심을 나타내고 납득이 간 것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 기분이 좋으시죠?"
마침내 그녀는 말해 버렸다. 그는 기분을 잡쳤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지극히 호의적으로 말했다.
"기분좋게 보일 줄은 미처 몰랐는걸. 당신은 나의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당신의 질문이라뇨?"
또 한번 그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관심이 그녀 대답의 내용에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는데…"
두 사람은 테라스에 도착해서, 게일은 북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훌루니 제도(諸島)가 밝은 태양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한층 큰 이카리아의 윤곽이 꼼짝 않고 정박해 있는 큰 배처럼 보였다.
남편의 관심이 아직 계속되고 있고 대답이 좀처럼 없는 것에 안타까와하고 있는 것을 깨닫자, 게일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대답을 들을 작정인 것이다.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지금 심정으로는 그가 더후네와 파리에서 함께 있었다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다고 고백해 버리든가, 그것을 눈치채게 하기 직전이었다. 쥴리어스는 더후네가 아직 자기에게 강하게 이끌리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혼을 파국으로 몰고가는 장면조차 야기시킬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는 게일에게 약간이라도 자존심이 있다면 가능한 한 당당히 떠나는 것 이외에 길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영국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아버지는 비웃겠지만 어머니는 비탄에 잠길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딸의 행복을 바라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안 된다…
그와 같은 사태를 스스로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던 것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급히 말했다. 자기가 그럴듯한 거짓말을 찾아서 대답하면, 그가 의심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고민하고 있어요… 저, 어머니 때문이에요."
"어머니?"
그녀의 대답은 정말로 그를 낙담시킨 것일까? 그의 얼굴에서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이 사라진 것은 확실했다. 그녀가 괴로와하고 있다고 그는 진정으로 믿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물론 그는 옳았다. 이 새로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 남편이 자기들의 결혼에 관해서 얘기라도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여 갑자기 심장의 고동이 높아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혼에 관해서 얘기하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인가 변화를 가져 보자는 것일까?
그러나, 그가 더후네와 파리에 있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중 이혼하는 길 외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를 잃는… 두려움이 커져 그녀의 심장고동은 방망이질 했다.
"어머니의 일은 전부 당신에게 얘기했죠. 휴가에 관한 얘기도, 모두 만나본 것도."
눈물을 억지로 참고 게일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어머니가 행복하시지 못해 걱정스러워요."
잠시 동안 그는 잠자코 그녀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녀가 깊은 고민이 있는 듯 한숨지은 이유를 그녀가 위장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조사라도 하려는 듯 찬찬히 살피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것이 거짓이 없는 것으로 납득이 간 듯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나에게는 그다지 불행한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결혼은 안 될 거라고 체념하신 것 같았어. 그렇지만 재크를 알게 되어 감사하고 계신 듯했어."
그것은 사실이었다. 게일 자신도 같은 결론이었지만 지금 그것을 남편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모든 일이 몹시 슬프군요."
그녀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 빠져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깐 동안 두 사람 일을 잊고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진 채 생활해 가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슬프지.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자기들을 지탱해 줄 애정이 있어."
그는 말했다.
그녀는 흘깃 그를 쳐다보고 쓰라린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자기들의 생활에서도 애정을 희구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육체적인 매력만으로 족하다는 인상을 언제나 그녀에게 주어온 이 사람에게?
그는 방향을 바꾸어 경치를 바라보고 레로스의 방향을, 그리고는 알키와 푸시의 두 작은 섬을 가리켰다.
대화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차가운 내용뿐이었다. 그리고 저택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두 사람 똑같이 서로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사모님께 온 거예요."
케이트는 전보를 건네주면서 불안한 듯한 얼굴을 지었다.
"나가시자마자 곧 배달되었는데, 차로 나가 버리셔서 찾을 수가 있어야죠."
게일이 떨리는 손으로 전보를 뜯고 짧은 전문을 읽는 것을 그는 선 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요?"
그녀의 얼굴이 파리해지는 것을 보고 그는 물었다.
"어머니인가…?"
"아버지예요. 발작을 일으키셨다구요."
그녀는 그에게 전보를 내밀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요."
어머니와 만나고 싶어서 집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던 그때처럼 그녀는 어쩔 줄 몰랐고, 그리고 고독했다. 쥴리어스가 함께 영국에 간다고만 해준다면… 하지만 그렇게는 말하지 않겠지. 어쩌면 그녀가 없는 것을 기뻐할지도 모른다. 더후네와 함께 보낼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그녀는 줄곧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때까지는 누르려고 애썼지만 이제 와서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물러가라, 케이트."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긴장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울면 뭐하오."
그는 다정하게 말하고 뜻밖에도 그녀의 어깨에 팔을 돌려 거실로 데리고 갔다.
"거기 앉아요. 뭔가 마실 것을 만들어 주겠소."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 절박한 듯 그를 보았다.
"비행기의 출발 예정을 물어봐야겠어요… 이 전문 보셨죠. 아버지가 위독해요…"
"당신은 하라는 대로 해요, 게일. 우리들이 비행기로 가는데 필요한 준비는 전부 내가 할 테니까."
그는 침착하고 믿음직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떨구고 게일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함께 가 주시겠어요?"
그는 비난하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물론이지. 나도 같이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오?"
게일은 어리둥절해 고개를 흔들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뻐근해서 아무 말도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을 달려나간 안도감 때문이었다.
예상을 뒤엎고 그는 이 기회에 더후네와 보낼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마실 것을 가져와서 그녀를 자리에 앉게 한 후 전화 있는 데로 갔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이튿날 피레메프스로부터의 배편이 있다고 알려 줬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두 시간 안에 출발하는 페리를 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벽에 배를 타게 되지만 그래도 겨우 선실을 잡았는걸."
"정말 고마와요, 쥴리어스!"
가져다 놓은 브랜디에 그녀가 손도 대지 않았으므로 그는 마시라고 말했다.
"기분이 나아질 테니까."
게일은 스스로도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아버지는 생명을 건져 어머니의 여생에 짐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는…
게일은 격렬하게 몸서리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혼자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방탕하셨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쥴리어스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또다시 솟아나왔다.
"아버지인걸요… 그리고 아빠와 내가 아직 어렸을 때는 게임을 같이 해주시기도 했어요."
쥴리어스는 아무 말도 안했지만 게일의 아버지가 부모다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표정이 변한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게일은 모든 것을 잊고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그는 다정하고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다.
"생명이 위험하리라고는 생각지 말아요.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모르니까."
"어머니는 결코 과장된 말은 안하세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만사를 어둡게 생각해서는 안 되오. 멋대로의 상상을 해서는 안 되오, 게일. 만약 당신의 몸이 불편해지기라도 하면 나는 화낼 거야. 알았소?"
무거운 말씨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단호한 울림이 있었다.
그녀는 끄덕이고 나서 이런 식으로 엄하게 지시받고 주눅이 들어 있는 것에 왠지 마음이 놓였다. 멋대로 다루어지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빈 잔을 집고 부드러운 쿠션을 등에 대주고 그녀를 쉬게 했다. 초연하고 거만한 이 사람에게 이런 다정함이 있는 게 아주 이상했다.
그 까다롭고 접근하기 어려운 얼굴 속에 깊은 배려가 엿보였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마음은 아버지한테로 옮겨갔다.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인가 아버지의 숨결이 괴로운 듯하던 것이 생각났다. 좀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고 그녀는 후회했다. 양심에 찔린 그녀는 이 얘기를 쥴리어스에게 했다. 그러자 잠깐 동안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나서 말했다.
"당신이 자책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거야, 게일.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고민하는 것은 그만둬요! 당신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소."
"의사에게 가보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었는데."
"그 충고를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하오?"
아버지는 듣지 않았을 거라고 그녀는 하는수없이 인정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주의를 주시라고 말씀드릴 수는 있었는데."
그는 기분나쁠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해 둬요, 게일. 불행한 일이 생기면 으레껏 자책을 하려 들지. 그럴 필요도 없는데. 고민하다가 몸이라도 상한다면 화내겠다고 지금 말하지 않았소."
남편이 험상궂은 눈초리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약간이라도 점심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을 마치자 불과 몇 분 후에 아폴로가 운전하는 차로 스칼라까지 가서 거기서 페리를 탔다. 안으로 들어갈 때 게일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문을 닫았다.
"괜찮소?"
그는 곁눈으로 게일을 보았지만, 그녀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당신과 함께 있는 편이 좋아요."
자기의 말을 오해하지 말아 줬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마음이 안정돼요."
그는 약간 미소지었으나 아무 말도 안했다. 후에 그녀가 침대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는 담요를 잡아당기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자신도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불을 껐다.
아버지는 멍하니 흐린 눈을 한 채 입도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게일은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아버지의 변한 모습을 이상하게조차 생각했다. 아버지의 얼굴 반쪽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어서 게일은 놀람과 걱정으로 떨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곧장 이리로 오실 거야."
어머니의 음성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얼굴은 새파랗고, 눈은 죄의식으로 흐려져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자신이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나간 것이 원인이 되어 이렇게 되었다고, 모든 것은 자기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버진 줄곧 괴로와하고 있었던 거라구."
하지만 게일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고민하고 계셨다면 그대로 계속 나다니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부인은 딸의 말이 안 들리는 듯 말했다.
"재크의 일은 체념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쥴리어스도 그 방에 있었지만 전날 오후 게일이 자책의 생각에 시달리고 있을 때처럼 어머니에게도 엄격한 태도를 취할 것 같았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에도 죄는 없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장인어른의 지금 상태는 자신의 생활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우리들의 몸은 용인되는 한계를 넘게 혹사하면 당연히 쓰러지게 마련이죠."
이 이야기는 이론이 서 있었다. 어머니도 나중에는 이걸 인정했다. 그것은 발작이 일어난 날에 의사에게서 들은 얘기이기도 했다.
"발작이 전부 과도한 무절제에 의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경우에는 주인께서 자초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군요."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게일은 지금 침대 곁에 어머니와 함께 서서 한 남자가 거기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면서 이 말을 천천히 생각해 봤다.
게일이 알고 있는 한, 매일 밤 아버지는 밖에서 마시고 있었다. 새벽 4시에 귀가하는 것도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대학에 나가 있지 않으면 안 될 시간에조차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난 나가 있을까요?"
의사가 문에서 방안으로 들어서자, 게일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니야, 제발 있어 줘."
십 분 후 의사는 아버지의 수명은 앞으로 한두 시간 정도 남았을 뿐이라고 전하고, 게일과 부인을 남겨 놓고 사라졌다.
"아주 친절히 대해 주었어, 쥴리어스. 의지할 사람이 있어서, 그토록 요령있게 일을 처리해 줘서 어찌나 고마운지. 나는 우리 딸이 최고로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해."
장례를 치른 지 일주일이 지났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깊은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게일은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가 그 같은 지경이기 때문에 과연 자기가 행복한지 어떤지 확신이 없었다. 확실히 남편은 이 기회에 더후네와 지내지는 않았다.
그는 다정하게 마음을 써주었지만, 자기와 함께 영국에 오기로 한 것은 단순한 의무감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위축되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그가 언짢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지만, 어머니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비밀 때문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을 했다구요. 이런 때라도 도움을 드렸으면 합니다."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위해 해주었으니 너무나 고마왔네, 쥴리어스."
어머니는 사위가 한 손을 들었으므로 얘기를 도중에서 그쳤다.
"알겠네, 이제 더 말 안하지. 어쨌거나 잊지 못할 것이야."
세 사람은 아담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모두 함께 재크와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장례식이 끝난 나흘 후에 재크가 전화했기 때문이었다. 부인은 거절하려던 참이었는데, 즉시 수화기를 들고 자기들이 귀국하기 전에 모두 만나게 되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아닌 쥴리어스였다.
두 사람은 두 가지 이유로 아직 영국에 머물고 있었다. 우선 첫째로, 그녀가 어머니를 혼자 놔두고 헤어지기 싫었던 것. 이 점에는 쥴리어스도 당연히 찬성이었다. 둘째로, 그가 영국에 있는 동안에 일을 좀 보기로 하고 장례식을 치른 후 이틀 간의 예정으로 런던에 갔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튿날, 쥴리어스는 친구를 찾아보고 다음 날 새벽에 떠날 예정이었다.
이미 재크는 와 있었다. 두 남성이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일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 몸집이나 태도가 닮은 것에 놀랐다. 서로 매우 닮은 두 사람은 어느 쪽도 다 자신과 풍격을 갖추고 있었다. 즉시라도 다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헤어지기 전에 쥴리어스는 집에 와서 함께 지내도록 초대했다.
"특별히 날짜를 정하지 않은 초대입니다. 즉각 오실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요."
그는 말을 덧붙이고 게일을 살짝 봤다. 그의 눈에는 약간의 놀라운 기색이 엿보였다. 게일은 장래를 염려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그런 것은 생각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그는 아직 이혼은 생각지 않고 있다. 잠시 동안 게일은 스스로를 경멸했다. 자존심이 있다면 부정을 저지른 남편 곁에는 머물러 있지 않을 텐데… 그래도 결코 자기 쪽에서 먼저 그의 곁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게일은 결심하고 있었다.
그 이튿날, 그가 저녁때까지 오겠다고 말하고 외출했으므로 게일은 어머니와 둘이서 지낼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요 며칠 사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때가 때이니만큼 긴장된 마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가 되어 두 사람이 마주앉게 되자, 어머니는 이전에도 물었던 것을 또 한번 되풀이해서 묻는 것이었다.
"게일, 쥴리어스와는 사이좋게 지내고 있니?"
어머니는 전에 보였던 것과 같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또다시 의문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만약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걱정이세요?"
어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게일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이 말에 약간 창백해졌다.
"그야 물론이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돼. 너는 행복하다구! 그렇게 말해 봐!"
어머니는 애원하듯 말했다.
만약 그녀가 진실을 알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녀가 아니라고 하면 어머니는 행복하지 않게 되는가? 그것을 말하면 어머니는 마음을 정하고 더 많은 것을 게일에게 얘기해 줄 것인가? 단지 그것만이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을 말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하지만 역시 이와 같은 때에 어머니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게일은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말했다.
"행복해요. 그러니까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도대체 왜 그런 것을 묻나요?"
어머니는 살짝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곧 밝아졌다.
"네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구나. 행복한 신부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만약, 네가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면 나는 견디지 못할 테니까… 나중에 가서…"
"그래서요?"
게일은 부드럽게 재촉했다.
"그러니까… 참 그래. 내가 강제적으로 결혼을 밀고나간 후의 일인데… 하지만 네가 결혼을 후회하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지금 행복하다면 그 일을 더 이상 얘기하는 것은 그만두도록 하자."
어머니는 자꾸만 화제를 바꾸려 했다.
"재크와 내가 너와 쥴리어스랑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가면 안 될까?"
"물론 대환영이죠. 어째서 함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있겠어요? 두 사람 다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요."
게일은 다정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조금도 자책하실 필요는 없어요. 언제나 선량하고 성실한 아내였고,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버지와 함께 있으실 작정이셨으니까요. 두 분이 함께 못 오실 이유가 없죠."
"저, 언젠가는… 우리들, 결혼할 작정이다."
"물론 찬성해요."
"에드워드는 내가 재크와 함께 가는 것을 좋다고 말하지는 않을걸."
"어머니두. 그럼 마치 혼전(婚前) 여행 같잖아요. 그렇진 않겠죠."
"게일! 정말로 좀더 말을 조심하면 좋으련만!"
집안에는 우울한 공기가 차 있었지만 큰소리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구식이군요. 다분히 재크 아저씨가 변화를 가져오게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대로가 좋은걸."
"쥴리어스는 어머니를 구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저는 이상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어머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쥴리어스는 내 마음에 꼭 들어, 게일.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는 너는 정말 행복해."
어머니는 딸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눈치채고 얘기를 중단했다. 게일이 어머니에게 막 고백하려 할 때 초인종이 울리고 재크가 나타났다. 가서 물건을 조사하고 있다가 들렀다는 것이었다. 그는 함께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가 나가려 할 때에 쥴리어스가 택시로 들이닥쳤다. 요번에야말로 어머니와 정면으로 얘기를 나누려던 차에 산통이 깨져 버렸다. 게일은 한숨을 쉬었다.
식사 시간중, 특히 눈에 띈 것은 남편의 표정이었다. 그녀를 보는 태도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식사가 끝나 모두 거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래도 그가 계속 묘한 태도를 하고 있는 것을 게일은 민감하게 느꼈다. 그녀를 보는 시선에는 명확히 뭔가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았다.
침실로 가기 위해 게일이 어머니에게 인사한 후, 두 사람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쥴리어스가 말했다.
"당신은 또다시 데비드 잉검이 얘기하는 것을 들은 게 아니오?"
그는 다짜고짜 물었다.
"오늘 그 사람과 함께였나요?"
"당신에게 묻고 있소, 게일. 무슨 말을 들었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치켜들고 또 한번 질문을 되풀이했다.
"나는, 그분의 친구가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녀는 고개를 비틀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쥴리어스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려 그와 마주서게 했다. 그의 턱은 탄탄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무스름하고 단정한 얼굴에는 조금도 죄의식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왜 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거요? 이유는 하나밖에 없소. 즉, 무서운 거요! 당신은 진실을 알고 나면 우리들의 결혼이 파탄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거요. 만약 내가 틀린 말을 했다면 그렇다고 말해 봐요."
그녀는 얼굴을 들고 새파래져 떨면서 끄덕이고, 사실을 밝혀내고 싶지 않았다고 갈라진 목소리로 인정했다.
"그것을 똑똑히 얘기해 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모르고 있소? 나에게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 알고 있소?"
당황해서 게일은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은 수수께끼 같군요, 쥴리어스."
"당신은 잉검 교수와 그의 친구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들었소. 파리에서 금발의 여성과 함께 있더라고 말하는 걸 말이오."
"상대방이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데비드는 재미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을 뿐이에요. 말하는 어조로 알았어요."
쥴리어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당신이 누구에게서 그 얘기를 들었거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오."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그랬다고 생각했던 거요?"
그의 어조에는 가슴이 철렁하는 게 있어, 그 때문에 게일의 심장고동은 빨라졌다.
"사실이 아닌가요?"
그의 입술은 꽉 닫혀지고 게일의 양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가해져서 아팠다.
"내가 파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야. 거기다 여성과 함께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 여성은 더후네도 아니고, 뭔가 연유가 있는 여성도 아닌 거요. 그 사람은 사업상 아는 친구의 아내인데, 그날 아침 두 사람 다 시내에 가기로 되어 있어서 그녀의 차로 함께 나갔었지. 그리고 주차한 뒤 그녀는 미장원으로, 나는 사업상의 약속이 있는 사무실로 가기까지의 2백 미터 남짓의 거리를 함께 걸었을 뿐이오."
그는 그녀를 노려보듯 보았다.
"그밖에 또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하오?"
표정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이 있었다. 누명이 벗어져서 그는 적어도 기뻐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뮌헨에 간다고 말했어요."
그녀를 잡은 손이 느슨해졌으므로 떨어지면서 게일은 마침내 그에게 그 일을 상기시켰다.
"사실 나는 뮌헨에 갔었소. 파리행은 업무상 그렇게 된 거요. 나는 사업을 위해 여행하고 있소, 게일. 돌아다니는 것이 나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오."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져 게일은 잠시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당신과 같은 무렵 더후네도 어디 갔더군요. 묘하게 일치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비난하는 듯한 기색이 되었다.
"나에게는 전혀 짐작이 안 되는데."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눈을 무섭게 번득이며 말했다.
"당신은 거짓말을 시켜서 더후네가 파리에 있었다고 아폴로가 말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는데, 나는 오늘 데비드가 함께 있던 금발의 여성 때문에 나를 놀릴 때까지 몰랐었소. 더후네가 파리에 가 있었다고 당신이 말하던 것과 이 일과의 사이에는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되었지. 트리셔의 파티에서 내 얘기가 화제에 올랐었다는 결론에 간단히 도달한 셈이지. 누구도 남편이 다른 여자와 파리에 함께 있었다고 노골적으로 말할 리는 없으니까. 당신이 엿들은 게 분명해."
"확실히 거짓말을 했어요! 하지만 남자란 성실하지 않다면 아무 가치도 없어요!"
그러자 그는 소리를 내고 웃었다.
게일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던 대상으로서 그녀의 번들번들한 멸시를 감수하고 있는 듯했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되었군."
뜻밖의 다정함이 그의 목소리에 나타나고, 게일은 자신도 모르게 허덕일 정도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의 당신의 태도에는 정말 놀랐소. 처음 나갈 때는 당신이 쓸쓸해 하는지를 알고 싶었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큰소리로 말했다.
"만약 당신이 쓸쓸한 생각을 했다면…"
그녀가 계속 말하려는 것을 무시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요."
그는 담담하고 침착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그 애정에 보답하고 있었을 거요."
게일은 자기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입술은 얼떨떨한 김에 소리를 지르려는 듯한 입모습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미있는 듯한 눈을 하고 흘깃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눈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또 한번 입을 열고 사죄했을 것이다. 그가 정말로 지금 말한 대로 그럴 작정이었는지 아닌지를 숨도 쉬지 않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담담한 어조로 그냥 계속 얘기했으므로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당신은 자신의 빠른 센스 때문에 무엇을 잃었는지 알고 있겠지? 내가 금발의 여성과 파리에서 함께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소. 그래서 더후네가 어디 갔던 것을 아폴로를 통해 알아냈지… 어디 가서 집을 비웠다는 것을. 주의해요! 아무도 그녀가 파리에 있었다고는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당신은 여자 특유의 시기심으로 2+2의 덧셈을 하고 자기에게 납득되는 이야기를 창작해 냈소. 부정한 남편은 아내에게 뮌헨에 간다고 말하고 사실은 파리에서 옛날 여자친구와 함께였다는 생각에 당신은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괴로와했겠지.
결의를 하고 사실을 폭로하려 했던 것이 상상되오. 사실 당신은 그렇게 하려다가 마음이 변했던 것이오. 왜냐하면, 게일, 당신은 나를 잃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오. 아냐, 굳이 부정하지 마! 나 자신도 확실히 당신을 잃는 게 무서웠소. 그것을 부정할 셈은 아니오. 따라서 추궁하지 않았던 것이오. 만약 당신이 내가 돌아왔을 때 좀더 다르게 마중해 줬더라면…"
이 가슴 아픈 얘기를 중지해 달라는 듯 게일은 몇 번이나 애원하는 듯한 몸짓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그랬다면 어째서 당신과 결혼했는지를 얘기했을는지도 모르겠소."
"어째서죠?"
그녀는 의안한 듯 쳐다보았다.
"그것은… 그것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던가요?"
쥴리어스는 잠잠히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지극히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첫눈에 반해 버렸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결혼 문제는 그 즉시는 생각하지 못했었다는 것도 정직하게 덧붙였다. 처음에는 그녀와 관계를 갖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그녀가 얼굴을 붉히자,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그날 그가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가 격렬하게 원하고 있던 정열적인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녀에게서 겨우 입술을 떼고 쥴리어스는 말했다.
"조금 전의 나의 질문에 당신은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소. 얘기해 봐요."
그녀는 가슴이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묻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질문이 있었지만, 얼굴을 들고 그의 키스를 재촉했다. 그러자 쥴리어스는 검은 눈동자를 의기양양한 듯 빛냈다. 그것은 그녀의 몸 깊숙이까지 떨리게 하는 승리의 빛이었다. 서로 호응하는 사랑의 승리였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가 하는 질문 말인가요?"
"시간을 끌려는 거요?"
쥴리어스는 매우 유쾌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흘깃 그녀를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교태를 부리는 거요? 그럴 필요가 있소?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게 된 지금에 와서도?"
게일의 뺨은 장미빛으로 물들었다. 당당히 자신을 얻은 지금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폭로하지 않은 이유는 전혀 틀려요. 우리들은 욕망 때문에 결혼했어요. 기억하고 계시죠. 그래서 그것이 없어지면 만사가 귀찮아져서, 결국 결혼이 파탄될지도 모른다…"
그가 거칠게 그녀를 뒤흔들었으므로 얘기는 도중에서 차단되고 말았다.
"욕망이라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사랑인 거요. 나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욕망을 위한 결혼이란 무슨 말이오? 애정 때문에 당신과 결혼했다고 방금 말했지 않소."
"물론…"
그녀는 생각에 잠기듯 침묵했다.
"이제 알았어요, 쥴리어스. 나 자신도 애정 때문이었어요."
그는 끄덕였다. 그리고 훨씬 전부터 확신을 얻었으면 하고 생각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알겠소. 당신이 나에 대해서 조금도 진실한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고 불안해져서 스스로 자제(自制)해 버린 거요. 그러나 사실 나는 자기 스스로 얘기를 끄집어 낼 수가 없었던 거요. 당신이 나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지 않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말이오."
거뭇거뭇한 머리를 낮게 숙이고 그는 다정하게 키스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두 사람은 호젓한 방 속에서 가만히 기대서 있었다.
"어머니 얘기인데요."
게일은 마침내 뜻을 정하고, 확실히 느끼고 있던 결혼에 얽혀 있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는 전혀 어머니답지 않은 행동을 하시며 결혼을 독촉하셨어요."
쥴리어스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진실을 알기 위해 나를 부르고, 정말로 오두막집에서 함께 보냈는지를 확인했었소. 나는 어머니에게 진실을 얘기했지. 어머니는 당신을 오해하고 결혼할 작정이 아니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후회하고 계셨어. 그래서 나는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요. 그때 가령 내가 당신에게 결혼을 신청했다 해도 신통한 해답은 나올 것 같지 않았으니. 기억하고 있소? 당신은 독신으로 있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걸."
그의 목소리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그것을 듣고 간지러운 작은 웃음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기억하고 있어요, 쥴리어스!"
"나는 몇 번이나 어머니와 만나서 얘기하고, 내가 미친 듯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지."
"아녜요."
그녀는 단호히 가로막았다.
"미칠 지경이라니! 당신은 절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정말 그랬었소. 가장 사랑하는 나의 생명, 가로막지 말아요. 몇 번이고 설득을 되풀이한 결과 마침내 어머니의 협력을 얻었소."
"그래서 그렇게 되었던 거로군요! 공모(共謀)였군요. 이제야 다 알겠어요."
"그렇소? 그럼 더 이상 내가 할 말은 없겠구려."
"아녜요, 나머지도 들려 주세요."
"재크와 도망치겠다고 말하여 협박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더니 어머니는 승낙하셨어."
"당신이 제안했나요? 그리고 어머니가 찬성하셨어요? 쥴리어스, 그런 일을 어머니에게 동의시키다니, 마술이라도 부린 게 틀림없어요!"
"서로 공모하고 한 일이라고 어머니에게는 잘 납득시켜 드렸어. 나를 사랑하게끔 만들겠다고 나는 약속했소. 어머니에게는 당신 인생의 모든 행복이 그 수중에 있다고 내가 말했지. 만약 협력을 거절하면― 언제고 당신이 불행한 결혼을 하든가, 고집을 피우고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어머니의 과실이 되는 거라고."
"아아, 당신은 어쩜 그런 일을! 불쌍한 어머니에게. 너무 심하고 불쌍해요. 어째서 그런 일을 했는지 알 수 없군요."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좋았다고 말하려는 거요?"
"네… 아, 아뇨…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는 웃고 또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런 어리석은 짓은 두번 다시 안하기로 하지.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그 불쌍한 어머니를 내가 괴롭혀 드린 것을 당신은 더없이 감사하고 있을 텐데."
"대단한 자선가이군요, 당신은.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나머지의 말은 그의 키스로 막혀 버렸다.
"어머니는 매우 소극적인 성미시라, 당신에게 나와 결혼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 같은 것을 도저히 못할 분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겨우 입을 열 수 있게 되자, 게일은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의 생각이 아닌 것을 곧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전부터 뭔가 수수께기에 싸여 있다는 것을 느껴 왔지만 그 수수께끼를 풀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한때 내가 행복하지 않은가 하여 몹시 괴로와하시는 것 같았어요."
"행복하지 않다고 어머니에게 얘기하지는 않았겠지?"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말 못했어요. 그러나 나는 줄곧 매우 고민하고 있었어요!"
"여자의 천성적인 호기심 때문인가?"
그는 웃었다.
"당신은 걱정해 주고 있는 사람에게 누구를 막론하고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걸. 억지로 나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를 의미하지만."
"네, 나는 그랬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머니에게는 한번도 화낸 적이 없어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에게 결혼을 강요당한 것을 기뻐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돼요."
쥴리어스는 어깨를 움츠릴 뿐이었다. 게일은 갖가지 일들을 상기하면서, 그날 해변에서 그녀가 더후네에게 무례한 태도를 취했을 때 왜 그 자리에서 화를 내지 않았는가, 하고 갑자기 그에게 물었다.
"더후네에게 말이오? 말썽을 일으키게 된 것은 내게 지시를 했기 때문이야!"
게일은 끄덕이고 얼굴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쥴리어스는 오랫동안 그녀를 혼자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더니 마침내 말했다.
"당신을 더후네의 면전에서 모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오. 남자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굴욕감을 맛보게 하는 것은 잘 생각하고 나서 한다는 것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쥴리어스!"
그녀는 미안한 듯 말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가 침묵했으므로 그녀는 계속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모욕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도 나는 내내 장님이었군요."
"맞는 말이오. 당신과 만날 때까지 결혼에 관해서는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일은 없었다고 처음 만났을 무렵 얘기했지 않소. 그때 당신은 깨달았어야 했소."
"조금 뒤에 나는 그 말을 생각해 냈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단지…"
"그렇지 않소! 나는 당신을 애인인 동시에 동반자로서 또한 친구로서 원했던 거요."
이 말에 게일은 떨리는 것 같은 기쁨을 느꼈지만 역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때 그 파이프가 파열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아주 재미있는 듯이 웃었다.
"그 사건을 생각해 내다니, 아주 여자답군! 사실 확실히 파열은 일어났었지. 그래서 당신은 죽음보다 더 불행해지는 운명에서 벗어난 거요."
그녀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그가 아직도 우스운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답하여 말했다.
"그래도 역시 당신은 나와 결혼하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나도 당신이 말하는 대로라는 생각이 드는걸."
그는 끄덕이고 또다시 그녀를 자기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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