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1879∼1910)
항일 독립 투사, 황해도 해주 출신, 1907년 국채보상 기성회 관서 지부장이 되어 항일 운동을
하기 시작, 이 해에 한. 일 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한 뒤, 그 곳에서 이범윤을 만나 독
립 운동의 방법을 논의하였다. 1909년에는 11명의 동지와 함께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 1909년 이
토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쏘아 죽이고 체포되어, 이듬해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한편,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1. 북두칠성
때는 조선 말,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이 우리 나라에 눈독을 들이며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였다.
잠을 자던 안 진사는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북두칠성이 떨어지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꿈이었다. 더구나 북두칠성이 떨어지면서 마을 앞 수양산에서 큰 호랑
이 한 마리가 안 진사 앞으로 달려와 넙죽 절을 하는 것이었다.
안 진사는 이름은 태훈이고, 명문 집안으로 16대조 할아버지가 그 유명한 안향이었다. 안향은
주자학을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소개한 대학자였다. 그리고 안 진사의 아버지는 진해 현감을 지
낸 분이었고, 천석꾼의 큰 부자로 이 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안 진사가 담배를 연거푸 피우며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새벽이 되자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
가 들려 왔다.
안 진사의 아내인 조씨 부인이 아기를 낳은 것이다.
나리, 마님께서 아드님을 낳으셨어요.
사랑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안 진사에게 종 삼월이가 헐레벌떡 달려와 알려 주었다.
그래, 틀림없는 아들이냐?
그렇습니다. 나리마님.
안 진사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 날이 서기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독립
투사 안중근 의사가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에서 태어난 날이다.
한참 후에야 안 진사는 부인과 아기를 볼 수 있었다.
안 진사가 방으로 들어가자 누워 있던 부인이 일어나려고 하였다.
아니, 그대로 누워 있구려, 얼마나 수고가 많았소?
안 진사는 부인의 손을 꼭 잡으며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는 아기를 들
여다보았다.
허허허, 그놈 잘도 생겼구나. 허허허.
안 진사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지금 금방 목욕을 시켰더니 잠이 들었어요.
부인, 이 아이는 틀림없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오. 꿈에 수양산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내 앞
에 넙죽 절을 하지 않겠소.
그래요? 첨 그러고 보니 아기의 등에 검은 점이 일곱 개나 박혀 있더군요.
뭐요, 검은 점이?
부인이 아기의 웃옷을 걷어올리며 검은 점 7개를 가리켰다.
아니, 이건 북두칠성이 아니오?
안 진사는 더욱 놀랐다.
부인,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님이 틀림없소. 그 날밤에 북두칠성이 우리 집 안으로 떨어지
는 꿈도 함께 꾸었다오.
아니, 그럼?
부인도 몹시 놀랐다.
아기는 북두칠성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고 하여 응칠 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응칠은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할아버지 인수공은 이 무렵 살아 계셨는데, 돌도 지나기 전부터
응칠과 함께 자기를 좋아했다.
이 녀석은 풍운을 타고났어. 우리 안씨 가문을 빛내 줄 게야.
응칠이 태어난 해는 고종 16년이었다. 대원군의 10년 정치가 끝나고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을 때였다.
당시 대원군은 과 간한 정책을 폈다. 당파를 초월한 인제 등용, 서원 철폐, 세제의 개혁, 경복궁
재건 등 그 때까지의 낡고 썩어빠진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천주교를 탄압하
여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신도를 학살하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외국 군함을 물리치고는 곳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대원군이 물러가고 민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일본 세력이 우리 나라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서기 1876년에 병자 수호 조약을 강제로 맺었고, 이 일로 인하여
부산항이 처음으로 개항되었다.
일본도 무사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대에는 쇄국주의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개항을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나라 안의 싸움이 일어나다가 마침내 천황을 중심으로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개국
을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메이지 유신 으로 서기 1868년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 나라보다 개
항을 10년쯤 먼저 한 셈이다. 이 10년 동안에 그들은 놀랄 만큼 성장하였다. 벌써 남의 나라에
군함을 보내어 무력으로 협박 할 만큼 강해진 것이다.
아버님, 왜인이 이번에는 원산항을 개항하도록 했답니다.
응칠이 태어난 지 한 달쯤 뒤의 일이었다. 안 진사는 현감을 지낸 응칠의 할아버지 인수공에게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인천을 개항해 달라고 조르는 것을 원산을 열어 준거지. 우리도 하루빨리 힘을 길러 저들을
이겨야 할텐데…….
애당초 서양의 배들이 찾아온 것도 통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오랑캐라 상대할 수 없다
하여 두 차례에 걸친 양요마저 겪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왜인이 먼저 들어와 장사를 하고, 조선
의 단물을 빨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야 한다. 왜인들이 장사를 해서 돈벌이에 눈알이 벌개져 있다고 해서 그
들을 흉내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예로부터 도의를 중하게 여겨왔다. 손자들도 그런 도의심이 있
는 꿋꿋한 아이로 자라도록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응칠은 무럭무럭 자랐다. 장난꾸러기로 커 가면서도 몹시 총명하고 귀여워, 모든 사람들의 사랑
을 받았다.
응칠이 태어난 세상에는 몹시 어지러운 혼란기였다. 당시는 19세기로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드는 시대였던 것이다.
일본 세력뿐만 아니라 청국, 영국, 미국, 프랑스, 기리고 러시아가 우리를 넘어다보고 있었다.
서기 1882년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정에서 무위영과 장어영의 군인들에게 봉급
을 여러 달 미뤄가며 주지 않는데다가 그나마 모래가 섞인 쌀을 지급하여 일어난 폭동이었다. 그
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왜인들이 급격하게 몰려와 장사를 한 것에 대한 반발에서였다. 이 때가 응
칠이 세 살이었다.
임오군란으로 우리 나라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소란으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충
돌하게 되었다. 또,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어 일본의 세력이 우리 나라에서 더욱 날뛰게 되었
다.
일본에 이어 미국, 영국, 독일과도 차례로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
11월에는 통리기무아문에 다시 통리내무아문을 두었다. 12월에는 양반도 상업에 종사할 수 있
게 하였고, 상민의 자제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였다.
서기 1883년에는 태극기를 국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10월에는 최초의 근대식 신문 한성 순보
가 발간되었다.
또, 서기 1884년엔 우정국이 처음 문을 열었다. 그리고 5월에는 이탈리아, 러시아와 수호 조약
을 맺었다.
이런 것이 모두 개화의 발자취였다. 그런데 개화를 좀더 서두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옥균, 박
영효, 홍영식, 등으로 이들을 개화당 이라 불렀다.
서기 1884년 10월,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당의 대신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고작 3일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본디 안 진사는 박영효와 가까웠다. 그러나
정변에 실패로 개화당은 하룻밤 사이에 역적이 되었고, 가담자는 일본으로 도망가거나 붙잡혀 처
형되었다.
안 진사는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해주에서 살기가 거북하여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아래에
있는 청계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응칠은 청계동에서 신나는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글을 배우면서도 말타기, 활쏘기와 같은
무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청계동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사철의 경치가 모두 아름다웠다.
봄에는 개나리가 집들의 울타리를 아름답게 장식하면 앞 냇가에도 졸졸 물이 흘렀다.
얏, 송사리다.
냇물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 아이가 외쳤다. 그리고 아이는 송사리를 잡으려고 바짓가랑이를 걷
어올리고는 맨발로 성큼성큼 물 속에 들어갔다.
아이, 차가워!
그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아이들은 웃으며 그 어이를 놀려댔다.
덕쇠, 너는 바보야. 눈 녹은 물이 차가운 것은 뻔하잖아.
응칠은 다른 아이들처럼 웃지도 않고 흐려진 냇물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
지 송사리들이 물 속을 빠르게 움직이며 헤엄쳐 다녔다.
송사리를 보고 있니?
하고 용수가 물었다.
송사리는 떼를 지어 다니며 헤엄친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늘 보아온 일이었으나, 아이들은 새로운 발견이나 한 것처럼 신기하게 여겼다.
송사리들도 대장이 있을 거야. 그래서 친구들에게 위헌을 알려 주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
도 할 거야.
아이들은 응칠의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대장이 있어야 해.
그제서야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수가 말했다.
그렇지만 누가 대장이 되지? 내가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 대장은 나야.
안 돼. 찬 냇물 속에 들어가 가장 오래 견디는 사람이 대장이다.
응칠은 벌써 바지를 걷어올리고 있었다. 용수도 지고싶지 않아 맨발이 되었다. 응칠과 용수는
물 속에 들어갔다. 1분, 2분, 3분 ……용수가 참지 못하고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갔다. 차갑기는
응칠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다리를 칼로 에는 것만 같았다.
용수가 참지 못하고 뛰어나가자, 그는 물 속에서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
움직이면 물이 덜 차갑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새끼손, 너는 정말 참을성이 많구나. 네가 우리 대장이야.
내가 대장이라면 이제 새끼손이라고 부르지 마라.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만 쓰시는 말이니까.
알았어.
응칠은 조금 운동을 하여 다리에 혈액 순환이 되자 냇물에 들어가 대장이 된 기념으로 아이들
에게 모두 가재를 한 마리씩 잡아 주었다. 때문에 바지와 저고리는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응칠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다.
어디서 그렇게 흙투성이가 되었니?
응칠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소에는 응칠에게 매우 다정했다. 그러나 응칠네 식구는 종
까지 합쳐서 80여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었으므로, 그런 살림을 안주인으로 다스려 나가는 어머니
는 다정할 때에는 다정했지만 엄할 때에는 한없이 엄하셨다.
고집이 세구나. 종아리를 맞아야겠다.
응칠은 싸리 회초리로 종아리에 피가 맺히도록 많이 맞았다. 그래도 응칠은 옷을 더럽힌 이유
를 말하지 않았다.
사내로 제일 나쁜 일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하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응칠은 꼬마 대장이 되고 싶어 옷을 버렸다고 말하기는 싫
었고, 거짓말도 할 수 없어 아무 말 없이 매를 맞았다.
응칠의 나이 열네 살, 그는 이제 의젓하고 침착하며 생각이 깊은 지도자다운 면모가 벌써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타기, 활쏘기, 총쏘기 등을 익혔고, 그 때의 총은 구식 화승총이었다.
겨울이 되고 사냥철이 되면 응칠이네 짐에는 많은 사냥꾼들이 모여들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도 그러했지만, 안 진사 역시 이 지방의 유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
다. 천석꾼의 부자이기도 했지만 사냥꾼들을 재워 주고 술과 밥도 아낌없이 주는 등 인심이 후했
기 때문이었다.
이번 겨울에는 멧돼지를 10마리만 잡아야지.
이 사람, 욕심도 많군.
사냥꾼들이 호탕하게 웃었다. 응칠은 이런 사냥꾼들이 좋았다. 응칠은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알
았지만 사냥꾼들은 몹시 의리가 있었다. 이들은 단결력이 강하고 한번 신세를 졌다 하면 반드시
은혜를 갚는 사람들이었다.
사냥꾼 우두머리로 털보가 있었는데, 해마다 응칠네 집에 와서는 응칠을 보면 덥석 안아 올리
면서
도련님, 도련님.
하고 매우 귀여워해 주었다.
털보 아저씨,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응칠이가 화승총을 몇 번 쏘아보았던 것도 이 털보 아저씨 덕분이었다.
도련님은 눈이 좋아 총도 잘 쏘실 것입니다.
안 진사는 응칠이가 열 다섯 살이 되자 양총을 사 주었다. 양총은 서양식 총이라는 뜻으로 화
승총과는 달랐다.
털보가 응칠의 양총을 보고 말했다.
참 좋은 총을 가지고 계시군요. 멧돼지 사냥을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응 꼭 데려가 줘.
그러나 한 가지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사냥은 여러 사람이 합동해서 하는 것입니다. 짐승을
몰이하는 몰이꾼과 길목을 지켜 총을 쏘는 사람으로 나눠지지요. 마치 전투를 하는 것과 똑같습
니다. 군대를 장군이 지휘하듯 사냥도 도포수의 명령을 꼭 따라야 합니다.
응칠은 직접 사냥을 해 봄으로써 털보 아저씨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2. 어지러운 나라
서기 1884년, 갑신정변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주인은 따로 있는
데 저희들끼리 남의 나라에서 으르렁거렸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국민이 아직 깨지 못하고 나라
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기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은 텐진 조약 이란 비밀 약속을 하였다.
조선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 군대를 파견하게 되면 양국은 미리 의논하여 결정할 것 등의 내
용이었다.
또한, 청나라와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장사하기에 바빴다. 청국인은 비단 같은 고급 옷감을 팔
았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많은 양의 쌀을 빼내어 갔다.
당시의 함경 감사 조병식은 방곡령을 내려 쌀이 일본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우리 조선에서도 먹을 것이 모자라는데 모리배들이 왜놈과 짜고 쌀을 원산항구로 빼돌리고 있
다네.
어디 쌀뿐인가? 콩, 팥은 물론이고 소, 돼지, 생선까지 좋은 것은 왜놈들이 다 가져간다네.
이런 불만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조병식은 일본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여 서기 1890년 1월에 취소되었다.
경제 침략은 다른 열강도 마찬가지였다. 평안도의 운산, 충청도의 직산 등은 금광이 있어 저마
다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응칠은 어느덧 열 다섯 살이 넘어 중근 이라는 다른 이름을 썼다.
도련님은 황해도 제일의 명사수가 되실 겁니다.
아냐, 그래도 털보 아저씨만은 못 해.
그럼 시합을 해 보면 어떨까요?
다른 포수들이 옆에서 부추겼다.
시합은 청계동 앞 냇가에서 벌어졌다. 백 보 거리를 두고 나뭇가지에 실로 매단 엽전 다섯 개
를 쏘아 맞히는 것이었다.
먼저 털보 포수가 쏘았다.
털보는 거리를 눈대중하고 화약을 다졌다.
탕! 탕! 탕!
털보의 납탄은 보기 좋게 엽전 두 개를 맞혔다. 나머지 한 방은 빚나갔다.
이번은 도련님 차례입니다.
안중근 역시 빠르게 총을 쏘았다. 사람들은 그의 총 쏘는 자세가 모두 다른 데 놀랐다. 처음에
는 서서, 두 번째는 한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만 마지막에는 엎드려 총을 쏘았다. 총알은 세
방 모두 명중하여 남아 있던 엽전 셋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과연 황해도 제일가는 명사수야!
사람들은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안중근은 자만하는 빛 없이 말했다.
지금 남쪽에서는 큰 난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때일수록 흔들리지 말고 신중
히 행동해야 합니다.
웃음소리로 떠들썩하던 술좌석이 별안간 조용해졌다.
털보 포수가 일동을 대표하여 안 진사에게 물었다.
진사님, 대체 무슨 난리가 난 겁니까?
전라도 땅 고부에서 전봉준이 난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들은 동학을 받드는 사람들이라 하
네.
동학의 근본적 주장은 서양과 왜국 배척을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사교라 하여, 서기 1864년에
교주 최제우가 처형당한 후로 동학은 한때 교세가 꺾였지만, 제2대 교주 최시형의 열성으로 다시
신도들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걸쳐 불길처럼 일어났다.
서기 1894년 1월, 전봉준은 마침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농민을 이끌고 봉기하
였다. 이것이 곧 동학 혁명이었다.
동학이 일어나자 전국 곳곳에서는 못된 도둑 떼들이 동학군의 이름을 팔며, 착하게 살고 있는
백성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괴롭히는 일이 자주 생겼다.
가짜 동학군 무리는 홍 장군을 우두머리로 하여 안중근이 사는 황해도 신천 지방에까지 밀려왔
다. 그들은 한낱 화적 떼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가 혼란한 틈을 노려서 한 재산을 꾸려 보자는 음
흉한 속셈을 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을과 고을을 지나가며 양반이나 부자의 집은 물론이고 양민들의 집에까지 마구 침입
하여 금품을 빼앗아 갔다.
눈이 내려 산과 들이 하얗게 덮인 어느 초겨울 밤, 눈길을 무릅쓰고 안중근이 살고 있는 두라
면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안 진사의 집에 다다르자, 청지기에게 말을
했다.
나는 풍천 마을에서 온 조 진사의 아들이네만 안 진사 어른께 위급한 소식을 알리러 왔네.
방으로 안내받은 젊은이는 안 진사 앞에 이르자 정중히 절을 했다.
이 추운 밤중에 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네. 그래, 위급한 소식이란 무엇인가?
진사 어른, 그 홍 장군이라고 하는 자가 이끄는 가짜 동학군 무리가 저희 마을로 몰려왔습니
다. 내일이면 아마 이 두라면에도 몰려올 것입니다.
으음, 그 도둑의 무리들이 이 곳까지......,알겠네.
이튿날 새벽, 안 진사는 젊은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곳에 와 있던 포수들을 비롯하여 마을 젊은
이들이 200여 명 정도 모여들었다.
잘 듣거라! 너희들도 풍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가빠 동학군들이 신천군 풍천 마을에 어젯밤
들어왔다고 한다. 오늘이면 이 두라면으로 몰려올 것이다. 우리고장은 우리 흠으로 지켜야 한다.
이제부터 출동하여 산세가 험준한 청계동 일대에 진을 치고 그들 일당을 공격하여 이 두라면에는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도록 무찔러야 한다. 박 포수를 총대장으로 삼을 테니 그의 지시를 받도
록 하라. 알겠느냐?
네!
이 때, 안중근이 나서며 말했다.
아버님,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너는 아직 어려서 안 된다.
아닙니다. 제 총으로 그들 두목의 가슴을 쏘아 거꾸러뜨리겠습니다.
어허, 안 된다고 하는데도.......
이 때, 박 포수가 나서서 말하였다.
진사 어른, 도련님의 총 솜씨는 우리 포수들도 따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총지휘는 제가 맡겠
습니다만 도련님을 포수 부대의 대장으로 삼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하던 안 진사는 조용히 입을 떼었다.
음, 그렇다면 총대장 박 포수의 말을 믿고 그렇게 하도록 하게. 중근아, 네가 포수 부대의 대
장이 된 만큼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 되느니라.
안 진사는 특별히 엄하게 아들에게 일렀다.
네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곧 출발하라!
총대장 박 포수와 어린 대장 안중근을 앞세운 향토군은 청계동을 향해 떠났다.
청계동은 울창한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고, 이 청계동 앞에 두
라면으로 향하는 길이 나 있다.
홍 장군이 이끄는 가짜 동학군은 틀림없이 이 길을 지나갈 것이다. 이 곳에 숨어 있으면 밖에
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숨어서 가짜 동학군을 기다려라.
총대장 박 포수의 지시에 따라 부대는 총알이 충분히 닿을 만한 산기슭에 숨어서 기다렸다.
동이 틀 무렵, 길 저 멀리에 가짜 동학군의 선봉 부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총대장 박 포수가 다시 명령하였다.
모두들 잘 듣거라. 적의 선봉 부대는 그대로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선봉 부대를 절대
로 공격해서는 안된다. 그 뒤를 이어 적의 홍 장군이 나타날 것이다. 그 때, 맨 먼저 포수 부대가
공격한다. 다음은 내 명령에 따라 일제히 습격한다. 적의 두목을 사로잡는 자에게는 큰 상을 줄
것이다. 알겠나?
네!
가짜 동학군들은 청계동의 산허리와 산기슭에 안중근의 향토군이 매복하고 잇는 것도 모르고
그 앞 길을 지나가기 시작하였다. 선봉 부대가 거의 지나갈 즈음에 말을 탄 우두머리인 듯한 사
람 다섯 명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안중근이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먼저 쏜 다음, 두 번째 발포를 신호로 일제히 쏘세요. 표적은 말을 탄 우두머리들입니다.
다른 졸개들은 쏠 필요가 없어요.
알겠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탄 자들이 안중근의 눈앞으로 점점 다가왔다.
탕!
안중근이 쏜 총 소리가 아침 하늘에 크게 울렸다.
앗!
총알은 보기 좋게 명중하였다. 둘째 번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툭 떨어졌다. 맨 앞의 홍
장군은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총 소리가 어디서 울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적이다! 관군이다! 후퇴하라, 후퇴!
홍 장군은 말머리를 급히 돌려 달아나려 하였다.
탕!
안중근이 쏜 두 번째 총 소리가 울렸다. 뒤따라 포수 부대가 일제히 사격을 하였다.
으앗!
홍 장군만 남겨 놓고 말 탄 사람들은 모두 땅에 툭툭 떨어졌다.
후퇴! 후퇴!
홍 장군은 말을 돌리자 후퇴 명령을 내리면서 쏜살같이 먼저 도망쳤다.
공격! 공격하라!
총대장 벅 포수의 명령이 떨어졌다. 향토군들이 숲 여기저기에서 함성을 지르니 몇천이나 되는
군세 같았다.
적들은 검에 질려 손에 든 무기를 모두 땅바닥에 던지고 항복하였다.
이 싸움에서 크게 이긴 향토군은 적이 버리고 간 금·은·귀중품·식량 등 많은 전리품을 얻
어, 두라면 안 진사댁으로 돌아왔다.
열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안중근의 용기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도둑 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안중근은 많은 것을 느꼈다.
온 나라가 이렇게 쑥대밭이 된다면 장차 이 나라는 어찌 될 것인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도대체 이렇게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란 말인가?
안중근은 저절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위태로운 나라가 걱정되었다.
이 무렵 우리 나라에는 천주교가 들어와 전파되었다.
안중근은 프랑스에서 온 빌헬름 신부로부터 많은 설교를 들었다. 프랑스 신부는 교리뿐만 아니
라 쓰러져 가는 나라를 우리 백성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비롯해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
다.
이 즈음 안중근은 어른들이 맺어 준 김아려라는 처녀와 결혼하였다. 김아려는 천주교 신자로
덕을 갖춘 아름다운 처녀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들의 힘이 모아진 동학군은 5월 8일 부안을 점령하고, 이어 황토현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웠다. 그리고 5월 31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조정에서는 처음에 동학군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황토현에서 관군이 패하자
매우 당황하여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청나라가 텐진 조약을 파기하고 조선에 군대를 보내자 일본은 이를 구실로 인천에 7000명의 군대
를 파견했다. 일본은 이 기회에 조산을 침략하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 때, 전주성에 있던 전봉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왜적과 서양 오랑캐를 몰아 내려고 했는데, 우리 때문에 일본군이 들어왔다면 안 될
일이다. 관군과 싸워서는 안된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애국심이었다. 전봉준과 동학군은 스스로 전주성을 관군에게 내주고 물
러났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물러가지 않았다. 오히려 풍도 앞 바다에 머물고 있는 청나라의 배를 먼저 기습
공격하여, 마침내 남의 땅에서 청·일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청일 전쟁은 청나라가 평양에서 대패하면서 각 곳에서 일본이 우세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군대는 대궐에까지 침입하여 조정의 중요 자리에 친일 세력을 앉히고 그들 마음대로 조정을 움직
였다.
또한, 일본 군대는 동학군을 토벌한답시고 우리의 죄없는 양민을 마구 학살하였다. 이에 전봉준
은 다시 일어났지만 그들의 앞선 무기에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전봉준을 비롯한 많은 농민들과
교도들이 죽었고, 결국 동학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기 1895년 4월, 청·일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을 맺고 자기 나라
로 돌아갔다.
동학 혁명과 청·일 전쟁의 폭풍은 지나갔지만, 나라의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그리고 이 해 가을,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고종의 왕비인 명
성 황후(민비)가 시해되었던 것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 반도를 차지하는 등 기세가 등등해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갑작스런 세력 확장을 기뻐하지 않는 나라가 있었는데 바로 러시아, 프랑스, 독
일이었다. 이 세 나라가 일본에 압력을 가했다.
아무리 전쟁에 이겼다고는 하나 요동 반도까지 일본이 차지하는 것은 욕심이다. 요동 반도를
다시 청 나라에 돌려주어라.
명성 황후는 이러한 국제 정세를 보자 일본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조선의 러시아 세력
을 움직여 일본의 세력을 이 나라에서 몰아 내려고 힘썼다.
민비 때문에 모처럼 조선에서 얻은 이권도 잃고 말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일본은 공사 미우라를 시켜 명성 황후를 없앨 음모를 꾸몄다.
그 당시 한성에는 일본의 수비대와 영사관 경찰이 있었다. 여기에 왜인 건달들이 수십 명 있었
다.
서기 1895년 10월 8일, 왜인 건달들은 일본 수비대와 영사관 경찰이 주력이 되어 왕궁으로 쳐
들어갔다. 훈련 대장 홍계훈은 호령을 하였다.
누구냐! 밤중에 왕궁을 침범하는 놈들이!
홍계훈은 끝까지 버티었으나, 마침내 그는 왜인 건달이 휘두른 일본도에 맞아 죽었다.
이 때. 왕궁을 지키던 시위대와 일본 수비대는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병력이 적었고
상대는 신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이었다.
시위대는 거의 전멸하였고, 명성 황후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왜인들은 명성 황후를 죽였을 뿐
아니라, 시신에 석유를 끼얹어 불태워 버렸다.
이것을 을미사변 이라 한다.
일본은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은 자기네들의 짓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였다. 더구나 고종은 일본
공사의 협박에 못 이겨 거짓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민 중전이 갑자기 병으로 승하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이듬해 정월에서야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사무치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깊이 생각한 끝에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결심하고, 아버지인 안 진사께 이를 말씀드렸더
니, 안 진사는
왜놈의 짓은 천인 공노할 일이다. 그래서 지금 각지에서 분노하여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너는 지금 천주교에 입교할 결심이라고 했느냐.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나는 네 결
심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싸우는 일도 굳은 신앙심을 가지고 마음을 단련하는 일
도, 모두 사람으로서 신념 있게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안 진사는 기쁘게 승낙하였다.
명성 황후 시해 사건으로 사람들은 몹시 격분해 있었다. 그러던 1895년 11월 15일 김홍집이 단
발령 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몸소 상투를 잘랐다. 그와 동시에 순경들
은 가위를 가지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사람들을 마구 붙들어 상투를 잘랐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나고 부모에 대한 불효라고
믿고 있었다.
이 일로 사람들은 김홍집이 왜인의 앞잡이라고 하여 미워하였다.
서기 1896년이 되면서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은 널리 알려졌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러나 고종은 명성 황후가 시해된 뒤, 무서워 벌벌 떨고만 있었다. 평소에도 일본을 싫어했던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에는 더욱 왜인을 싫어하였다. 왕의 이런 마음을 이용한 것이 친러파 로 러
시아 세력을 등에 업으려는 사람들이었다.
2월 1일, 고종은 친러파의 도움으로 갑자기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아관
파천 이다.
김홍집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한 나라의 임금이 외국의 공사관으로 피신하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라사(러시아) 공사
관에 가서 임금님을 다시 대궐로 모셔와야 한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거리에는 친러파의 부추김을 받은 보부상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홍집은 듣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광화문에서 폭도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의 시체는 종로에서 사흘이나 버려져 있었는데, 누구하나 무서워 장례를 치러 주지 못했다.
왜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감정이 그만큼 험악했던 것이다.
3. 나라 잃은 슬픔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결심한 안중근은 신천에 있는 홍 신부를 찾아갔다. 홍 신부는 프랑스 선
교사로, 한국 이름을 홍석구라고 했다.
당신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신부님, 저는 첫째로 제 마음을 가지고 싶습니다.
오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어지러운 세상에서 좀더 나 자신을 지키고 이웃을 위해 살려면 무슨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을 가져야 합니다. 천주님의 가르침은 첫째로 사랑, 다음은 너그러
움, 감사, 그리고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안중근은 홍 신부에게 교리와 프랑스 말을 배웠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인류 모두를 사
랑하는 박애였다. 또, 너그러움은 이웃 사람의 잘못도 용서하는 것이었다. 감사는 우리가 살아가
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의 뜻을 알고 고맙게 여기는 일이었다. 끝으로 유혹은 악마의 꾐이었
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악마의 유혹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이런 꾐을 이겨내는 것
이 중요했다.
이 네 가지를 신앙심으로 굳게 가졌을 때, 비로소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안중
근은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이 천주교에서 열심을 보이자 어머니와 아내는 무척 기뻐하였다.
홍 신부는 안중근에게 교회를 세우도록 권하였다.
하느님을 믿는 교회는 많이, 그리고 널리 퍼져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조선에도 당신
같은 젊은 지도자가 많이 생겨야 합니다. 그러면 조선의 교회도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갈 수 있고
발전하게 되겠지요.
안중근은 홍 신부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다.
서양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교회는 발전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다운 믿음
이 이 땅에도 뿌리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청계동에도
성당을 세웠다.
안중근은 홍 신부의 도움으로 성당에서 강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의 문물에 대해서도
홍 신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서양의 역사와 과학에 대한 홍 신부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버님, 저는 요즘 와서 새삼 느끼는 일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우물 안의 개구리 같습니
다. 그래서 견문을 넓히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지금 이 나라에는 무엇보다도 젊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하다.
안 진사는 언제나 안중근의 좋은 선생이었다. 엄격하고 인자한 아버지인 동시에 아들의 앞길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길잡이기도 하였다.
내가 늘 말하지만, 사람이란 각자 해야 할 일이 다른 법이다. 의적과 왜병과 싸우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또는 교육자, 의사, 종교인이 되어 사람들을 재우쳐 주는 젊은이도 많이 있어야 한
다.
네.
며칠 전, 해주의 이 생원이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해주의 김창수라는 젊은이가 국모(명
성 황후)의 원수인 일본인 장교를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김창수는 뒷날의 백범 김구 선생으로, 안중근보다는 세 살 위였다. 김창수는 남달리 피가 끓는
젊은이로서 서기 1893년에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700명의 동학군을 거
느리고 일본군과 싸웠다.
김창수는 평안도 강계에서 활약 하다가 고행으로 내려오는 도중 명성 황후 시해의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안악 치하포에서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일본인 장교 쓰치다
를 때려 죽였다. 그 일본인 장교는 명성 황후를 직접 죽인 자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국모의 원수
를 조금이나마 갚은 셈이었다.
안 진사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다. 세상의 젊은이가 모두 김창수처럼 될 수는 없지 않
겠느냐? 나는 아비로서 그런 점을 너에게 가르쳐 주고 싶구나.
네 아버님의 가르침을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은 놀랍게 바뀌고 있었다. 고종의 아관 파천이 있었던 서기 1896년에 서재필이 미국
에서 돌아와 순한글과 영문으로 된 독립 신문 을 발간하였다.
실제로 우리 민족은 여러 면에서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했다. 정치적 독립만이 아니라
독립 정신, 자립 정신이 적었다. 서재필은 신문을 통해 그것을 부르짖고 싶은 것이었다.
또한 서재필은 독립 협회 를 만들었다. 중국 사신을 마중했던 영은문을 때려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또, 모화관을 고쳐 독립 협회 사무실로 썼다.
독립하자, 자립하자!
모든 젊은이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것을 간절히 바랐다. 안중근도 마찬가지였다.
신부님, 저는 장차 이 나라의 교육자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일깨워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
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마침 서울에 올라갈 기회가 있으니 함께 갑시다.
서기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일 년 가까이나 있었던 고종이 비로소 경운궁(덕수궁)으
로 돌아왔다.
이 무렵, 우리 나라 최초의 한성 은행이 설립되었다.
3월에는 경인선 철도 공사가 인천에서 기공식을 가졌고, 다시 7월에는 진남포와 목포가 개항되었
다. 그리고 10월에는 황제 즉위식이 원구단(지금의 조선 호텔 뒤편)에서 올려졌고, 국호를 대한
제국 이라고 했다. 연호도 새로이 광무 를 썼다. 죽은 민비의 관위를 높여 명성 황후라 했고 흥릉
에 이장했다.
안중근과 홍 신부는 서울에 올라가 명성 성당을 찾아갔다. 주교가 그들을 만나 주었다.
안중근은 자기가 품고 있는 교육 기관 설립에 대해 의견을 말하였다.
좋은 생각이지만 아직 시기가 이릅니다.
주교님, 어째서입니까?
그것은 조선 사람들이 공부를 하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 일을 게을리할 염려가 있습니다.
이 말에 안중근은 적지 않게 실망하였다.
주교님, 학문을 공부하면 어째서 하느님 믿는 일을 게을리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히려
학문을 배우고 깬 사람이라야 하느님을 더 깊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안중근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양 사람이 동양 사람을 깔
보는 마음이 바닥에 깔려 있다고 느꼈다.
홍 신부는 실망한 안중근의 마음을 알고 위로하였다.
안도마,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고 단번에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신부님,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슬플 뿐입니다.
홍 신부는 또 말하였다.
내가 소개장을 써 줄 테니 이번 기회에 외국 문물을 널리 견문하도록 하십시오. 교육 기관 설
립 문제는 나중에 또 생각해 봅시다.
안중근은 먼저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는 중국 제일의 개항장으로 대도시였다. 그런데 그 곳에
가자 안중근은 또 한 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인들이 중국 땅에 와서 중국인을 마치 자
기의 종을 부리듯 하고 있었다.
조계라는 그들의 거주 구역이 따로 있었는데, 그 곳은 중국의 힘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과학이 좀 앞섰다고 동양인을 우습게 보는구나.
안중근은 그 곳에서 다시 북경(베이징), 심양(선양)을 거쳐 간도에도 갔다. 여행하는 동안 중국
말도 조금 배웠고, 그 곳에 사는 교포들과도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어떤 교포에게 안중근은 물었다.
서양의 과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학은 확실히 편리한 점이 있습니다. 증기의 힘으로 기차나 배를 달리게 할 수 있고, 전기의
힘으로 수백리 밖의 사람 목소리를 듣거나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힐 수가 있지요. 그러
나 서양의 문명은 너무 물질만 앞세우는 것 같아요. 또, 서양 사람들은 너무 돈만 따집니다.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러한 점이 있었다. 그 사람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에 비한다면 동양의 인심은 후한 편이지요. 가난하더라도 인정이 있어 서로 도와 가며 살
지요. 서양의 물질주의가 들어오면서부터 인심이 박해지는 것 같아 야단입니다.
일 년 가까운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자 안 진사가 물었다.
그래, 많은 것을 보고 배웠느냐?
네
어떤 것들이 제일 마음에 남았느냐?
외국의 문물을 처음으로 보니 신기하고 낯선 것도 많았고, 조국에 대한 애착이 더욱 생겼습니
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히 외국과 우리 나라를 비교하게 되
는 것이다.
저는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개화를 너무 부르짖는 나머지 우리의 좋
은 전통마저 파괴해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 진사는 안중근의 말에 기뻐하였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널리 여행한 보람이 있었구나. 무슨 일이고 극단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나
는 천주교에 대하여 잘 모른다마는 진리는 같다고 생각한다. 유교에서는 중용 이라 하여 언 쪽에
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으뜸의 덕으로 여긴다. 또, 불교에서도 중도 라는 같은 가르침이 있다
천주교에는 정의가 있습니다. 불의를 미워하는 것만이 정의는 아닙니다. 지혜, 용기, 절제가 완
전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개화와 보수 사이에서 격심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서기 1898년 2월, 서재필의 독립 협회 등은 종로에서 정부의 한러 은행 설치 및 러시아인 재정
고문의 초빙을 반대하는 연살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는 젊은 연사 이승만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독립 협회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특히 독립 신문의 기자가 고종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래서 서재필은 그의 미국인 아내와 딸을 데리고 다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 협회는 서재필의 뒤를 이어 이완용이 잠시 맡았으나, 다시 좌옹 윤치호가 이를 맡았다.
독립 협회 회장이 된 윤치호는 서기 1898년 10월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 를 열었다. 이것은 조
정의 관리와 시민의 공동으로 연설회를 갖는다는 뜻으로 만민 공동회라 했던 것이다.
이 때, 윤치호는 주장하였다.
우리도 서양 여러 나라처럼 의회를 가져야 합니다.
만민 공동회의 개최로 인해 독립 협회의 간부 이상재, 남궁억 등 17명이 체포되었다.
조정에서는 다시 황궁 협회 라는 것을 조직하여 독립 협회와 맞서게 했다. 그러나 독립 협회의
만민 공동회 연설 모임은 지방에도 널리 파급되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다시 가 버렸지만, 그가 심어 놓은 독립 정신은 살아 있었다.
독립 협회와 황국 협회는 매일처럼 충돌이 있었고, 서울 장안은 자주 시끄러웠다. 마침내 독립
협회에 대한 해산 명령이 내려졌고 간부들은 체포되었다.
그 때, 윤치호와 이승만은 아펜젤러의 집으로 피하여 체포를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곳에 계속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동지들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저만 평안하게 숨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그를 말렸다.
그렇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적당한 기회를 보기로 하고 지금은 숨어 계십시
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당당히 내발로 잡혀 들어가겠습니다.
이승만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펜젤러의 집을 나섰다. 그가 경무청에 다달았을 때에는
수백 명의 애국 청년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독립 협회 만세!
이승만은 경무청 앞에서 즉석 연설을 하였다.
체포된 독립 협회 간부들은 애국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음으로 즉시 석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체포되고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승만은 이 때 옥중에서 독립
정신 이라는 책을 썼다.
서기 1899년 경성 의학교가 설립되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이 교장
이 되었다.
또, 서울의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가 놓여졌다. 이것은 고종 황제가 홍릉에 있는 명선 황
후의 능에 자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 해 9월, 인천에서 노량진 사이에 철도(경인선)가 개통되었다. 한강 철도가 아직 완성되지 않
아 기차는 검은 연기를 뿜어대며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를 달렸다.
또, 인천에 새로이 담배 공장이 건설되어 궐련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서기 1900년이 되었다. 2월에 일본 원양 어업 회사에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의 고래잡이 허가
를 내주었다.
당시 우리 나라 연해에는 풍부한 수산 자원이 있었다. 어떤 기록을 보면 부산 앞바다에도 명태
떼가 몰려와 발에 밟힐 정도였다고 한다. 고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원들을 외국인, 특히 일본
인이 휩쓸어 가고 있었다.
7월에는 한강 철교가 완공되어 경인선은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까지 개통되었다.
개화가 되어 기차와 전차가 달리고, 전등이 켜지고 전화가 가설되는 등 생활이 편리해졌지만,
우리는 나라의 소중한 자원을 수탈해 가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안중근은 스물두 살이었다.
그래, 진남포(남포)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
갑자기 진남포에 가겠다는 안중근을 안 진사는 못마땅 한 듯이 되물었다.
물산을 하고 싶습니다.
물산이라면? 그러면 그것은 장사가 아니냐?
네.
당시에는 안 진사 같은 넓은 생각을 가진 분도 상업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러나 안 진사는
마침내 허락을 하였다.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내 고집만을 내세울 수는 없겠지. 사나이로 태어나 한 번 마음먹었다면
해 보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당부하겠다.
네.
상업을 하더라도 남의 손가락질 받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정정당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
고 실패했다고 여겨졌을 때는 깨끗이 단념해야 한다. 이익에 얽매여 자꾸 매달렸다가는 아주 실
패하고 말게 된다.
알겠습니다.
안중근은 진남포에 가서 석탄 가게를 차렸다. 진남포에 드나드는 배에 석탄을 파는 일이었다.
생각보다는 사업이 순조로웠다. 사람들은 안중근을 신용하여 만인계의 책임을 맡게 했다.
안중근은 천석꾼의 아들이야. 그러면 믿을 수 있지.
이리하여 상인들은 안중근을 중심으로 만인계를 조직했다. 만인계는 수백 명의 상인이 서로 돕
고, 푼돈을 모아 목돈을 마련하는 조직이었다. 은행이나 신용 금고가 없던 시대라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만인계는 며칠에 한 번 제비를 뽑아 당첨자를 정했다. 계원들이 워낙 많아 제비 뽑는 날이면,
넓은 광장을 이용하여 실시했다.
안중근은 책임자로 사람들에게 외쳤다.
자, 질서를 지킵시다. 한 사람이 한 장씩만 뽑으셔야 합니다.
알았오. 빨리 시작합시다.
그리고 제비를 뽑기 전에 반드시 번호표를 내놓으셔야 합니다. 번호표가 없는 사람은 뽑지 못
합니다.
그런데 안중근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20명쯤 제비를 뽑았을 때 한꺼번에 몇 장씩
겹쳐진 것이 나왔다.
이것은 속임수다. 제비뽑기는 엉터리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광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나무통에 제비뽑기를 할 종이를 넣고 섞은 다음, 제
비뽑기를 하는데 아마도 나무통을 돌릴 때 종이가 골고루 섞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용히 하십시오. 조용히 하십시오!
안중근은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번 혼란에 빠진 군중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
다. 계원들의 아우성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누군가 이렇게 외치는 자도 있었다.
안중근이 우리를 속였다!
그를 계주라고 믿은 우리가 바보다!
죽여라 죽여!
안중근은 눈을 감았다.
그 때 탕! 하고 총 소리가 들렸다. 이 느닷없는 총 소리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웬 젊은이가
육혈포를 높이 쳐들고 추첨대 위로 뛰어올라왔다.
조용히, 조용히 하시오.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제비뽑기고 뭐고 할 수 있을게 아닙니
까?
이것으로 사람들의 흥분은 가라앉았다. 그리고 군중을 진정시켜 준 젊은이를 찾아가 정중히 인
사했다.
노형이 아니었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뻔 했습니다. 성함을 가르쳐 주십시오!
뭐, 별것도 아닌 일에 제가 나서서 주제넘게 소란을 떨었습니다.
아닙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노형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젊은이는 함경도 북청 사람인 허봉이었다. 안중근은 그와 술을 함께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
누었다.
그래, 형씨께서는 무슨 일 때문에 이 곳 진남포까지 오셨습니까?
쫓겨다니고 있지요.
네?
이야기를 하자면 길지요. 벌써 오륙 년 전의 일입니다. 청일 전쟁이 있기 바로 전의 일이니까
요.
안중근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당시 청나라 사람들의 기세는 대단했지요. 제 고향에도 못된 청나라 사람이 한 명 있었습
니다.
허봉은 잠시 말을 끊고 막걸리 사발을 들어 쭉 들이켰다. 그리고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있
었다.
안중근은 아무 말 없이 허봉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허봉은 눈을 떴다. 묵묵히 자기
말을 들어주는 안중근의 태도가 그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청국인은 한의사였는데 저의 아버님께서 약을 지으러 가셨다가 그만 그 자에게 봉변을 당
했습니다. 느닷없이 발길로 걷어채여 쓰러지셨던 것입니다. 아버님은 결국 그 때문에 돌아 가셨지
요.
그는 눈을 감았다. 허봉의 눈에 이승이 맺혀 있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집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버님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불
효자이지요.
허봉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저의 고향 선배로 일성 이준 선생이 계십니다. 저는 그 무렵 일성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고향에서 하인이 급히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청국인에게 맞아 돌아가
셨다는 외삼촌의 편지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그 때, 일성 선생은 편지를 읽으시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돈 백 냥을 주셨습니다. 편지에는 이미 아버님의 장례식도 끝났다고 씌여 있었지요. 저는 선
생님의 뜻을 갚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수를 갚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래서 원산으로 가서 어떤 러시아 사람한테 육혈포를 샀습니다.
허봉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안중근에게 털어놓았다.
허봉은 술을 단숨에 또 마셨다. 오랫동안 말을 하다보니 목이 컬컬했던 모양이다.
즉시 저는 청국 의사를 찾아갔지요. 몇 마디 말이 오가자 그는 벌써 내 눈치를 알아챘습니다.
느닷없이 책상 밑에 숨겨 두었던 칼을 들어 저를 찌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그런 것
을 계산하고 있었지요. 재빨리 손등으로 청국인의 칼 잡은 손을 힘껏 치고 육혈포를 꺼내 그 자
를 쏘았습니다.
그제서야 안중근은 입을 열었다.
형씨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허 형이 지금 하신 말씀은 제가 안 들었던 것으로 하겠
습니다.
제 말을 안 들었던 걸로 하시다니요?
그렇습니다. 즉 형씨가 과거에 어떠한 일을 하셨든, 저에게는 다만 고마운 분이십니다. 아무쪼
록 저의 집에 일 년이고 몇 년이고 있어 주십시오!
정말입니까?
허봉은 감격하였다. 덥석 안중근의 손을 감싸쥐었다. 허봉은 안중근의 집에서 머무른 지 석 달
쯤 지나자 연해주로 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안중근은 많은 여비를 마련하여 허봉에게 주면서, 아무쪼록 이 돈을 받아 주십시오. 제 성의
입니다.
허봉은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지만 한사코 전하는 안중근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어 받았
다.
고맙소. 언젠가 이 돈은 꼭 갚을 날이 있을 것이오.
허봉이 떠난 뒤로도 안중근은 석탄 가게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만인계만은 아무리 권해도 다시
는 하지 않았다.
4. 러·일 전쟁
서기 1903년이 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서기 1903년 5월, 러시아는 압록강 하구 용암포를 멋대로 점거하고 나무를 마구 베내고 있었다.
때문에 지식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국내 정세를 토론하였다.
섬나라 일본이 러시아와 과연 싸울까? 갑오년에는 그들이 운이 좋아 청국을 이겼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을 거야.
누가 보아도 일본은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는 세계 제일의 육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구로 보나 영토의 넓이로 보나 일본의 힘은 러시아에 비해 너무나 약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와 결국 싸울 걸세. 하고 안중근은 말하였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운다고?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은 모처럼 차지한 조선에서의 자기네들의 이권을 위해 싸울 걸세.
그 말에는 누구나 의견이 같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대꾸하였다.
싸운다면 자포자기 되어 덤벼들겠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일세.
그러나 일본도 믿는 데가 있어. 바로 영국일세.
당시 러시아가 세계 제일의 육군을 가졌다면, 영국은 세계 전역에 걸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
다. 따라서 해군이 막강하여 당시의 어느 나라도 이에 맞서지 못하였다.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하
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남하한다는 것은 얼지 않는 항구를 차지하여 강력한 해군을
갖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은 서기 1902년 일본과 영·일 동맹 이란 군사 동맹을 맺었
던 것이다.
실제로 영국은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일본의 전쟁 비용을 런던의 주식 시장에서 모
아 주고, 또 정부 보증의 차관도 주었다. 일본은 그 돈으로 영국에서 최신 군함이나 무기들을 사
들였다.
안중근은 말하였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네. 그러나 분한 것은 우리 삼천리 강산의
운명이 걸려 있는 전쟁을 다른 나라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멋대로 벌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
일세.
안중근은 전쟁이 일어나면, 지난 청·일 전쟁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거라고 걱정하였다.
러시아가 이기든 일본이 이기든 우리는 관계없지만, 전쟁이 우리 땅에서 일어나는 것만은 막
아야 하네.
어떻게?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우선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뭉쳐야 하네. 우리
국민이 단결할 때, 아무리 강한 외국 세력이라도 우리를 넘보거나 우리 땅에 전쟁을 일으키지 못
할 걸세.
안중근의 이 말은 당시의 뜻있는 사람들 모두의 한결 같은 마음이었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안중근은 굉장한 독서가였다.
그는 많은 책을 읽을뿐더러 당시의 국내 신문을 빠짐없이 읽었다.
서기 1904년 2월, 신문을 보던 안중근은 깜짝 놀랐다. 신문에 주먹만한 활자가 박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 국교 단절, 일본 육군 인천 상륙, 서울에 들어옴!
안중근은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때, 인천에만 상륙한 것이 아니었다. 남양(화성군), 군산, 진남포, 원산 같은
곳으로 동시에 상륙하였고, 그와 동시에 인천에서는 마침 월미도 앞바다를 지나던 러시아 군함
두 척을 공격하여 이를 격침시켰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안중근의 석탄 가게는 물건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석탄 가게는 밑천
이 많이 들기 때문에 김씨라는 사람과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곧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네.
김씨는 싱글벙글했지만 안중근은 낯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갑오년과는 달리 조선 땅에서는 큰 전쟁은 없을 듯싶네.
그야 그렇지, 싸우더라도 러시아 군은 서울과 용암포에 조금 있을 뿐이니까.
그러나 서울에 있던 러시아 군은 공사관을 지키는 경비대라 맥없이 항복하여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2월 10일, 정식으로 양국의 선전 포고가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는 선전 포고가 있기 전,
배를 타고 요동 반도의 뤼순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 때, 서울에 들어온 일본군 병력만도 5만 명이
나 되었다고 한다.
아관 파천으로도 알 수 있듯이 고종은 일본을 극도로 싫어했었다. 그러나 믿었던 러시아 공사
가 달아나고 일본군의 대병력이 서울에 들어오자 그만 기가 눌리고 말았다.
이 무렵, 친일파인 송병준, 이용구 등이 일본을 등에 업고 날뛰고 있었다.
폐하, 일본 공사를 불러 친선의 뜻을 나타내십시오.
고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일본 공사 하야시가 궁중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친일파들은 장차 나라야 어찌
되든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군대에 드나들며 물자를 납품하고 인부를 모집하기도 하며, 떼돈을
벌고 있었다.
일본 공사 하야시는 고종 황제를 협박하여 한·일 의정서 를 체결하였다.
이 한·일 의정서는 모두 6개항인데, 일본은 대한 제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해 주는 대신 일
본의 전쟁 수행에 협력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겨우 한 달 전, 고종이 절대 국외 중립을 선언한 것과 정반대의 약속이었다. 이로써 우리 나라
의 주권은 크게 침범당하게 되었다.
그 해 4월, 탁지부에 양지국이 생겼다. 양지국은 토지를 측량하는 관청이었다. 일본에서는 경부
선과 경의선을 서둘러 놓으면서 우리 농민의 땅을 마구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조선 팔도 곳곳을
측량하며 광물 자원까지 미리 알아두었던 것이다.
이 때, 이용익이라는 대신이 있었다. 이용익은 함경도 명천에서 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어서 보부상이 되어, 각지로 행상을 하며 다니다가 금광을 발견하였다. 함경도 단천에서 많은
사금을 캤고, 이것을 고종에게 바침으로써 벼슬을 얻어 출세길이 열렸다.
임오군란 때, 그는 큰 공을 세웠다. 충주에 숨어 있는 명성 황후와 고종을 몰래 연락해 주었던
것이다. 그의 걸음은 하루에 수백 리를 걸을 만큼 빨랐다. 명성 황후의 소식을 고종께 알렸을 때,
충주와 서울 사이를 하룻동안에 왕래했다고 한다.
이렇듯 이용은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내장원 경과 탁지부 대신을 지냈다. 내장원은 왕실
재산의 관리처였다. 그는 내장원경이 되자 왕궁 직속의 인삼밭과 광산을 잘 관리하여 왕실 경비
를 넉넉하게 하였다. 또, 탁지부 대신을 겸임하자 백동화를 대량 발행하여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였다.
일본은 그러한 이용익을 일본으로 잡아갔던 것이다.
이 일을 백성들은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똑똑한 대신을 왜 잡아갔을까?
일본인들은 그가 친러파라고 경계하여 탁지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막대한 돈을 착복했다는 구
실을 붙여 데려갔다네.
그러나 이용익은 청렴하였다. 그는 몸집이 컸으나 고기 반찬을 일체 먹지 않았고, 해어져 몇 번
이고 기운 옷도 태연히 입고 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도 신임하고 재정을 맡겼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용익을 심문하였지만 워낙 청렴하여 부정한 재산이 없음을 알고는 도로 내보내
주었다.
한편, 이보다 앞서 일본군과 러시아 군은 평안도 정주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하였고, 전장은 압
록강 건너 만주로 옮겼다. 일본이 뜻밖에도 육전에서 승리하자 친일파들을 더욱 날뛰었다.
송병준, 윤시병 등은 유신회 를 만들었고, 이용구는 진보회 를 만들었다. 다시 이 두 단체가 합
쳐 일진회 가 되었다.
일본도 승리할 기미가 보이자 재정, 외교 등에 외국인 고문을 두게 하는 협정을 강요했다. 이것
이 바로 제 1차 한·일 협약 이다. 이리하여 탁지부(재정) 고문에는 일본인이, 외교 고문에는 미
국인 스티븐스가 임명되었다.
한편, 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은 기가 꺽이어 있었다.
요동 반도 끝에 있는 뤼순은 군항으로 러시아 함대의 기지였는데, 일본군은 이 뤼순을 포위하
고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수만 명이 죽었다.
러시아는 뤼순을 둘러싼 산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당시 최신식 무기인 기관총으로 일본군
을 수없이 쓰러뜨렸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초조해졌다. 일본의 육군 병력을 다 보냈으나, 아직도 뤼순은 버티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전쟁의 신은 일본에게 행운을 주었다. 뤼순을 지키는 러시아군의 사령관 스테셀은 서기
1905년 1월 일본군에게 항복하였다. 병력과 무기는 많았지만, 러시아 군은 포위되어 있어 외부와
의 연락이 되지 않자 끝까지 싸울 결심이 서지 않았다. 또,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백
기를 들고 만 것이다.
일본은 이리하여 위기를 넘겼다.
안 진사는 이 무렵 몹시 위독하였다. 중근, 정근, 공근 등 삼 형제가 안 진사의 머리맡에서 병
세를 지켜보며 걱정했으나, 병은 점점 무거워졌다.
안 진사는 잠시 정신이 들자 안중근에게 물었다.
일본이 전쟁에 이기고 있다면서?
네.
아, 나라가 장차 위태롭구나.
안 진사는 이렇게 죽는 순간까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여보!
어머니가 먼저 흐느껴 울었다. 안중근도 동생들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광무 9년(서기 1905년) 정월부터 일본군은 우리 조정에 또 새로운 요구를 해 왔다. 서울과 부근
의 치안 경찰권을 일본군 헌병대에서 맡겠다는 것이었다.
자기네 거류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자기네 거주 구역에서 경찰권을 갖겠다는 것도 주권 침범이
다. 그런데 하물며 남의 나라 수도의 경찰권을 갖겠다니 말도 안 될 소리였다. 하지만 무력을 앞
세우고 요구하기 때문에 고종도 이를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면암 최익현은 대원군 집권 시절에 대원군을 탄핵하여 섭정에서 물러나게 한 분이다. 그 때 그
는 국왕의 아버지를 탄핵했다는 죄로 귀양까지 갔었다.
그 당시 면암은 이미 일흔두 살의 고령으로 몸에 병도 있었으나, 왜인들의 횡포를 보다못해 상
소하였다.
폐하, 외국에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외국의 빚은 독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함부로 얻
어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또 이런 상소를 하였다.
친일하는 자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입니다. 이 자들을 목베어 죽이도록 하십시오.
일본 헌병대는 면암을 체포하여 감방에 가두었다.
그러나 워낙 노인이고 유림의 존경을 받는 분이기 때문에 그들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그
래서 면암의 집이 있는 정산(지금의 충청남도 청양)으로 추방하였다.
3월에는 일본군이 대궐을 지켜 준다고 하였다. 궁궐을 지키는 우리의 시위대를 없애려는 수작
이었다.
이 무렵, 일본군은 3월10일 봉천 싸움에서 러시아 육군을 크게 무찔러 자못 콧대가 높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큰 걱정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쳐들어오고 있었다. 만일 그
들이 극동에 도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간다면 만주의 일본군은 보급로가 끊겨 얼어죽거나
굶어 죽을 판이었다.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 해군이 발틱 함대의 항해를 감시하며 온갖 방해를 하고는 있었지만, 일
본과 함께 싸워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5월 27일, 대한 해협과 동해에서 일본 해군에 의해 발틱
함대는 전멸되었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에 대한 정보를 영국 해군의 협력으로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안중근은 석탄 장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지금처럼 호경기에 왜 석탄 장사를 그만두려고 하는가?
양심의 가책이 들어서입니다.
또 그 소리를 하는군. 일본군이 미워 석탄 장사를 못하겠다는 말인가?
결국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좀더 크게 생각해 보십시오. 일본은 지금 우리 나라를 먹
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런 징조가 많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석탄 장사를 계속하면 지금
당장은 돈벌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처자식을 고생시키지 않고 자기 한 몸도 편하겠지요. 그러나
일본이 마침내 우리 나라를 먹어 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그러나 김씨는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나는 자네처럼 어려운 이치를 따져 가며 말할 줄 모르네, 자네가 석탄 장사를 그만둔다면 언
제든지 자네의 권리를 내가 사겠네.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안중근은 김씨와 헤어진 후 성당으로 갔다. 거기에서 안중근은 홍 신부를 통해 지금 당장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산업과 교육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구체적인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
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석탄 가게의 권리를 동업자 김씨에게 넘겨주고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던 안중근은 좀더 쓸모
있는 일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산에게 의논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산은 이 때 스물여덟 살이었다. 안중근이 처음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 곳에는 일성 이준도
함께 있었다.
안중근은 도산과 인사하고 일성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안중근은 도산에게 말하였다.
도산 선생,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도산은 안중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오히려 되물었다.
안 선생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중근이 얼떨떨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자 도산은 미소를 짖고 말하였다.
안 선생은 일본인 졸개를 하나쯤 때려눕힌다고 기울어진 나라가 갑자기 바로잡혀진다고 생각
하십니까?
안중근은 도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제일 급한 것은 교육과 산업의 육성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민족의 울분으
로 의병이 되어 왜적과 싸우는 것도 좋겠지요. 그러나 사람은 저마다 갈 길이 있습니다. 의병으
로, 종교로, 교육으로, 산업으로, 걷는 길은 각각 달라도 목표는 하나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
는 길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요.
도산의 생각은 아버님의 생각이나 홍 신부와 똑같구나.
하고 안중근은 감탄하였다.
도산 선생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저는 교육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학교를 세우면 일성 선생도 도산 선생도 꼭 오셔서 학생들을 위하여 강연을 해 주십시오.
남포로 돌아온 안중근은 곧 학교를 세웠다.
교육 사업도 훌륭한 독립 운동이다. 내가 세운 학교에서 많은 애국 청년들이 태어난다. 하는 생
각으로 학교 이름을 삼흥 이라고 지었다.
첫째, 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가르친다.
둘째, 기술을 가르쳐 산업을 일으킨다.
셋째,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다.
삼흥은 이 세가지를 불길처럼 일으키게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학교를 세우자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어린아이도 있었고 갓을 쓴 어른도 있었다.
안중근은 좋은 선생을 데려오는 한편, 자기도 교단에 섰다.
여러분, 배우는 게 곧 힘이라고 했습니다. 한 자라도 더 배우고 한 가지라도 기술을 손에 익혀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일성 역시 도산을 만나자 교육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일성은 북청에 돌아가자 국민 교
육회 를 만들었다.
또한, 서울로 올라와서는 돈화문 앞에 야학으로 보광학교 를 세웠다. 낮에는 일을하고 밤에 공
부하는 사람들을 휘한 학교로 물론 수업료 같은 것은 받지 않았다.
일성은 학교만 세운 게 아니라 함경도 출신 유학생 장학회인 한북 흥학회 라는 것을 조직하고,
같은 함경도 출신 유지에게 권하여 돈을 거두었다.
일성의 장학회에 자극되어 많은 장학회가 생겼다. 기호 학회, 교남 학회, 서우 학회, 호남 학회,
관동 학회등 이들은 모두 자기 고장 후배들을 위해 설립된 장학단체였다.
한편, 도산 안창호는 그 나름대로 바빴다.
그는 이 무렵, 이갑, 양기탁, 신채호, 이승훈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신민회 를 조직하고 있었
다. 또 가지에 학교를 세워 민족의 얼을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었다. 평양의 대성 학교는 특히 유명
하였다.
안중근은 삼흥 학교를 돈의 학교 라고 이름을 고쳤다. 도산이 강연을 하러 온다고 알려 주자
학생들은 물론 어른까지 모여들었다.
안창호 선생의 연설은 한 번 들었다 하면 10년 묵은 체증이 뚫리는 듯이 시원하네.
나도 그런 소문은 들었지, 아마도 그는 우리 나라 제일가는 웅변가일 걸세.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리며 도산이 연단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연설회는 학교의 운동장이 좁
아 장터를 이용하였다. 도산이 입을 열자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때는 서기 1907년 초였다.
지금 여러 고장에서 국채 보상 운동 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산의 이 낯선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지금 일본의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님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들의 횡포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이 총칼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있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국채 보상 운동의 뜻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 운 동은 당시의 대한 매일
신보 가 앞장섰다. 이 신문의 사장은 영국인 베델이었고, 주필은 운강 양기탁이었다.
양기탁은 거침없이 통감부를 공격하였고 민족 정기를 사람들에게 불어넣었다. 일본인들은 이를
갈았으나, 영국인이 사장이라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부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제일 힘이 센 자는 사람이 아니라 신문이다. 내가 백 마디 말하는 것보다도 신문의
기사 한줄로 한일들은 감동하고 있거든.
이토 히로부미는 눈엣가시처럼 미운 대한 매일 신보 를 꺽기 위해 사장 베델을 한국에서 추방
하려고 애썼으나, 그것이 실패하자 양기탁을 구속하였다.
신문사에 들어온 국채 보상금을 가로챘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것이다.
도산의 연설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로 우리의 애국심은 꺽지 못합니다. 남자들은 술과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내 놓
았습니다. 여자들은 아끼던 금비녀와 은비녀를 뽑아 내놓았습니다. 애국심은 별다른 게 아닙니다.
이런 조그마한 일이 애국심이고 이 나라를 살리는 것입니다.
도산의 이 연설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주머니를 털어 국채 보상 운동에
참가하였다.
우리 남포 사람이라고 애국심이 없겠는가?
암, 나도 당장 술과 담배를 끊겠네.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도 놀라운 결심을 하였다. 그날 늦게 안중근이 집에 돌아오자 부인은 시
집올 때 가져온 패물을 남편 앞에 꺼내 놓았다.
이것을 국채 보상 운동에 보태 쓰도록 하세요.
안중근은 놀랐다.
당신이 어떻게…….
저도 도산 선생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남자분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고 계신데, 여자
들이 자기 몸치장이나 하려고 패물을 가지고 있어서 될 말입니까?
정말 훌륭한 생각이오.
안중근은 즉시 그것을 신문사 지국에 맡겨 국채 보상 운동의 보탬이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
다.
이런 운동에도 불구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각본대로 한국을 집어삼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 해 6월, 그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헤이그 특사 사건 이었
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일성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세사람이 네덜란드의 헤이그(헤아)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 에 고종 황제의 특사로 간 일이다. 고종은 특사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일본측의 방해와 우리 나라에는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이
거절되었다. 마침내 일성은 7월 14일, 분을 참지 못하고 할복 자결하고 말았다.
이것이 국내에 알려지자 이토 히로부미는 대궐을 일본군으로 포위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
다. 그 뒤를 황태자 순종이 이었다.
사람들은 격분하여 곳곳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들과 충돌했다. 맨주먹 또는 돌멩이로 일본군의
총칼과 싸웠다.
특히, 시위대 병사들은 일본군과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정부에 강요
하여 새로운 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정미 7조약 이다.
이 조약의 내용은 사법, 행정의 모든 분야에 걸쳐 중요한 안건은 모두 통감의 감독과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나라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중근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통곡하며 부인에게 말하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행동으로써 일본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렇지만 당신이 떠나면 어머님과 가족들이…….
그런 것을 생각하다가는 언제까지나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오. 나는 이미 목숨을 던질 각오를
했으니 당신도 그렇게 아시구려.
김 부인은 남편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
다. 그것이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어머니에게도 이 결심을 말하였다.
어머님, 저는 결심했습니다. 아무쪼록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무섭게 다부진 분이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니까.
어머님, 고맙습니다.
그는 동생 정근에게 어머니와 가족을 부탁하였다.
안중근은 돈의 학교 학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사나이로 이 나라에 태어났다면 무언가 보람찬 일을 해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찾아 여러분과
헤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몸은 여러분과 헤어져도 마음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겁니다.
그의 시는 이때의 결심을 잘 말해 준다.
남아가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났는데
어찌 죽어 뼈를 선산에 묻기를 바라겠는가?
살아 성공하지 못하면 죽을지언정 돌아오지 않겠다.
인간이 묻힐 곳은 어디고 있는 법이다.
5. 독립군의 활약
안중근은 처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 뚜렷한 결심을 세우지 못하였다. 당시는 고종이 강제 퇴위
되고 또한 우리 나라 군대가 해산된 뒤였다.
안중근은 서기 1907년 10월이 지나서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는 연해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무슨 일이 있거든 연해주로 오라고 하던 허봉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배를 타고 청진을 거쳐 북간도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우리 한국인들
이 많이 사는 용정 마을이 있는데, 안중근은 그 곳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다.
청국말을 할 수 있었던 안중근은 청국옷을 한 벌 사입고, 천국인 행세를 하였다.
이름도 안중근 대신 안도마라고 했다.
안중근은 간도 일대를 다니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였다. 장차 동지를 모아 항일 투쟁을 하
려면 근거지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신흥평, 구자가, 복사평, 조양천, 우적동, 두도구 등 주요한 곳에는 모두 일본군의 헌병 분견대
가 설치되어 있었다.
교포들은 안중근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친절히 맞아 주었다.
간도와 연해주는 거리상 가깝다. 안중근은 연추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당시 블라디보
스토크(해삼위)에는 한인이 5000명쯤 살고 있었다.
또한, 독립을 위해 뜻을 세워 싸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름난 독립 지사로는 이동휘, 문창범,
이범윤 등이 있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트크의 신한촌에 있는 대한 청년 교육 연합회 라는 곳을 찾아가 자기의 이
름과 이 곳에온 목적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혹시 북청 사람으로 허봉 씨를 아십니까?
네,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는 떠돌이라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이 말을 듣자 안중근은 앞길이 막막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청년회의 소개로 계동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이 곳에 온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생활에 차츰 익숙해졌지만 안중
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
이 곳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칠 바에는 고국에 남아 교육 사업을 하는 게 차라리 낫다. 무엇 때
문에 이곳에 왔는가? 애당초의 목표와는 다르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청년회를 찾아가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부탁하였다.
저는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청년회의 감찰은 어떻겠소.
감찰은 청년 단원의 규율을 감독하고 단속하는 직책이었다. 안중근은 감찰을 맡은 지 며칠 후,
어떤 단원이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규율을 어겼다. 안중근은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아니, 네가 감찰이면 감찰이지 언제부터 이 곳에 왔다고 나를 훈계하지?
하며 느닷없이 안중근의 뺨을 때렸다. 안중근은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그러자 상대는 더욱더
날뛰며 안중근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마침 청년단 총무가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이 광경을 보았다.
조도선! 감찰에게 무슨 행패인가?
이 자가 건방져서…….
무슨 소리인가? 근 단에서 임명한 감찰일세. 자네는 단의 규율을 어길 작정인가?
총무는 이어 안중근에게 물었다.
안 선생은 어째서 맞고만 계셨습니까?
저는 사소한 일로 단원끼리 불화가 생길까 염려되어 참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천주교 신자입
니다.
그 때, 허봉이 나타났다. 안중근을 보더니 너무나 반가워하며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안 선생, 이게 꾸이오 생시오? 안 선생이 이 곳에 와 계신줄은 꿈에도 몰랐소.
허 선생이 사흘 후에 오신다는 말만 믿고 있었는데 벌써 석 달 남짓이나 지났습니다.
하하핫, 내가 그런 말을 하였던가? 아무튼 이게 얼마만이오.
이봉은 이 곳에 온 지가 오래 되어 아는 사람이 많았고, 간부 대우를 받는 듯하였다.
백 총무, 당신과는 이미 통성명을 했겠지만, 안 선생은 놀라운 영웅이오. 총 솜씨가 황해도 제
일가는 명사수였으니까.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운 눈초리로 안중근을 바라보았다. 안중근의 뺨을 때린 조도선이란 젊은
이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뺏다.
허 형, 늦게 나타난 죄로 어딘가 청요리집에 가서 술을 한 잔 사셔야겠습니다.
그럽시다.
이들은 청년단 총무 백낙길과 함께 가까운 청요리집으로 갔다. 요리를 시키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안중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나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이 곳에 왔습니다. 그 싸울 방법을 두 분께서 가르쳐 주셨으면 합
니다.
허봉과 백낙길은 서로 마주보았다.
안중근은 굳게 결심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저는 목숨까지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왜놈을 한 놈 거꾸러뜨리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싶습니다.
안 선생, 이범윤 선생을 아십니까?
그분이 누구십니까?
이 곳의 한인 지도자로 가장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이범윤에 대해서는 수수께끼가 많다. 대원군의 신임을 받던 훈련 대장 이경하의 아들이고, 친
러 내각에서 법무대신과 경무사를 지낸 이범진의 동생이다.
청나라가 간도 땅을 자기네 영토라 주장하자, 서기 1902년 정부에서는 이범윤을 간도로 파견하
였다.
관리사로 부임해 온 이 선생은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에 거주하는 교포를 방문하고, 노인들을
위로하며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전하기도 했었지요.
안중근은 언제나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선생은 간도 일대를 다니면서 우리 교포가 얼마나 설움을 받고 사는가를 알았습니다. 이
때는 일본인들은 아직 없었으나, 청나라 사람들의 횡포가 심했었지요. 그래서 이 선생은 교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백낙길은 열심히 설명하였다. 자기의 말에 흥분되어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범윤 선생은 정부에 보호 병력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를 허
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시켰던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세 사람은 요리를 먹고 술을 마셨다. 안중근은 이범윤의 이야기를 재촉하였다.
그래서요?
이범윤 선생은 정부에서 병사를 보내주지 않자, 스스로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조직하였
습니다.
이범윤의 부대는 사포대 라고 불렀다. 그는 서울에서 연발총을 사들여 군대를 훈련시켰다. 병영
은 모아산·마안산·두도구의 세 곳에다 마련하였다.
이범윤은 회령·무산·종성·온성·간성·양수천자·화룡곡·육도구에 병영 분소를 두어 자치
적 방어를 하게 했다. 이 고장은 본디 마적의 소굴로, 청나라 사람들이 제멋대로 약탈을 하고 있
어, 그들은 이 마적 떼들과 싸우며 우리 교포의 자위대 노릇을 하였다.
이 선생은 자위대를 만들었습니다. 교포의 호구를 조사하여 10호를 1통, 10통을 1촌으로 조직
하고 통장과 촌장이 있어 모든 일을 상호간에 돕도록 했었지요. 이런 자위대가 조직되자 청국인
들도 우리 교포를 얕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도의 우리 민족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백낙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안중근은 부탁하였다.
백 선생, 저를 이범윤 선생에게 소개시켜 주십시오. 이제야 제가 바라던 지도자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이리하여 안중근은 이범윤과 만났다. 그는 안중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국내에서는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아쉽게도 우리
의 희생만 컸지, 적에게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하나 죽이는 데 우리는 20
명 내지 30명씩 희생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이 안타까워 이 연해주로 온 것입니다. 다행히도
선생님은 일본군과 실전을 하신 경험이 있습니다. 저를 독립군의 병사로 써 주십시오.
이범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도의 훈련을 받고 최신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싸우자면 애국심
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우리도 그들 못지않은 훈련과 무기가 있어야 했다. 이범윤 자신도 뼈저린
경험을 하였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고종이 일찍이 하사했던 마패가 있어, 부하 500명과 더불어 러시
아 군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마패는 관리의 신분증이나 러시아 군도 자격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이범윤을 아주 싫어하였다.
간도에서 한인 세력이 커지면 자기들 세력은 그만큼 약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청나라는 고종에
게 항의하여 이범윤을 불러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범윤은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던 것이다.
연해주는 이 때부터 항일 투쟁의 기지가 되었다. 이범윤 이외에도 이범진·이위종·이상설·장
지연·홍범도·장영운 같은 애국 지사들이 있었다.
안 선생의 잘 알았습니다. 다행히도 안 선생은 총쏘기와 말달리기에 익숙하니 우리 독립군의
대장이 되어 훈련을 맡아 주십시오.
안중근은 독립군 중대장이 되어 의병을 맹훈련시켰다. 안중근에 대한 이범윤의 신임은 날로 두
터워 갔다.
당시 일본군은 각지에 대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웬만한 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헌병 분
견대가 있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도 허리에 군도를 차고 있었다.
무력으로 우리 민족을 억누르겠다는 정책이었다. 특히, 소만 국경과 연해주, 간도에 이웃한 함
경 북도 두만강 일대에는 그들의 대부대가 있었다.
청진 교외에 그들의 군사령부가 있었다.
또, 웅기에도 그들의 부대가 있었다. 말하자면 일본군의 전방 사령부였다.
일본군 사령관은 이범윤 부대를 때려잡으려고 온갖 모략을 다 썼다.
서기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쳐 국내에서의 국채보상 운동이 연해주에서도 활발히 일어나 교포
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이리하여 이범윤에게 30만 원이 모아졌고, 의병도 300명에 이르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범윤과 한인들 사이를 이간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그가 모금한 돈을 제멋
대로 쓰고 있다고 선전하는 게 상책이다.
넷, 각하! 곧 첨자들을 풀어 소문을 퍼뜨리겠습니다.
불행히도 간사한 일본군의 모략은 들어맞았다. 교포들은 헛소문을 곧이듣고, 이범윤을 의심하였
던 것이다.
이범윤은 모금된 30만 원으로 무기를 구입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일본의 항의를 받
은 러시아나 청나라 정부는 선뜻 무기를 내주지 않았다.
이범윤은 많은 돈을 주며 밀수 상인을 통해 무기를 사들였고, 그 일부를 생활이 어려운 의병의
가족들에게 쓰기도 했다. 이것이 교포의 의심을 샀고, 많았던 의병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범윤으로서는 위기였다. 이럴 때, 안중근이 나타나 얼마 남지 않은 의병을 맹훈련시키게 된
것이다.
선생님, 이제 우리 의병도 일본군과 싸울 만합니다. 전초 기지를 우리 교포가 많이 사는 합습
마구에 두고 적과 교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과 싸운다는 것은 실전 경험을 쌓는 좋은 기회이지
요.
이범윤은 안중근과 자세한 작전 계획을 세우고 합습마구에 전초 기지를 설치하였다.
우리는 적은 병력으로 적을 기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행동이 은밀하고 기습에 성공할 수 있
습니다.
좋습니다. 100명의 부대로 국경선에 있는 초소 하나를 없애 버립시다.
안중근이 지휘하던 의병이 일본 헌병 분견대 하나를 전멸시켰다. 이어 안중근은 토문강 연안의
홍의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1개 중대를 습격하여 통쾌하게 무찔렀다.
그뿐 아니라 독립군 300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 있는 일본 경찰대를 격파하였다. 그
러나 놀랍게도 안중근이 이끈 의병은 희생자가 거의 없이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다.
안중근은 지친 부대를 이끌고 무사히 두만강을 다시 건너오자 대원들에게 휴식을 명하였다. 잠
시 쉬고 있을때에 동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의병 여러분, 빨리 피하십시오. 지금 일본의 기마대가 고개 아랫마을에 들이닥쳐 수색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뒷담을 넘어 도망쳐 당신들께 이 일을 알리러 왔지요.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런 일이 일본군에게 발각된다면 그 자리에서 총살이다. 아니, 야만스런 일본군은 그의 가족과
집도 함께 불질러 모두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동포는 의병을 위해 필사적으로 빠져
나와 알려 준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안중근은 적의 병력을 묻고 다시 작전을 세웠다. 그는 의병들을 고갯마루 양쪽에 매복시켜 놓
고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절대로 서둘러 쏘아서는 안 되오. 적의 병력이 완전히 독 안의 쥐가 되었을 때, 이들을 공격하
여 섬멸시키는 것이오.
이윽고 적의 기마대가 고갯길을 올라왔다. 10여 명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우리 동포
20여 명을 결박하고 끌고 오지 않는가?
안중근은 이를 갈았다. 그는 총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가며 사정권 안에 그들이 들어오기
를 기다렸다.
이윽고 일본군은 의병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잠시 후의 운명도 모르고 저희들끼리 웃
으며 떠들고 있었다.
안중근은 선두에서 두 번째의 지휘자에게 조준을 맞추었다. 그는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 심장
을 겨냥한 그의 총탄은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
그가 총을 쏘자, 의병들도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한 놈도 놓치지 말라!
총성이 나자 끌려오던 우리 동포들은 재빨리 엎드렸고, 맨 뒤의 일본 병사는 말을 돌려 달아나
려 하였다.
안중근은 재빨리 맨 뒤에서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고 오던 적병의 뒷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
다. 도망치던 적병은 군모를 날리며 그대로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사격중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100여 명의 의병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던 만큼 살아남은 일본군은
한 명도 없었다.
기지로 돌아온 얼마 후, 부대에 다시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회령에 침
투하여 적을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이 곳에는 적의 대부대가 있다는 정보였다.
그러나 회령 공격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적은 5000명의 병력을 가진 큰 규모였고, 성능이
좋은 대포도 가지고 있었다.
피는 흘러 내가 되고 시체는 쌓여 산이 되는 혈투가 벌어졌다. 더구나 의병에게 불리하였던 탄
약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부대를 교묘히 지휘하며 산 속으로 후퇴하였다. 그들은 산 속에서 사흘을 굶
었다.
안중근은 부하들을 데리고 합습마구 전초 기지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
었다.
안중근은 이번 전투에서 귀중한 체험을 얻었다. 그리고 값진 수확이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
면서 진실로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를 얻었던 것이다. 김기열·백낙길·박근식·김태련 등
모두 11명이었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어느 날이었다. 11명의 젊은이들은 청년 교육 연합회 사무실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안중근은 말하였다.
옛날의 영웅이나 지사들은 피를 내어 서로 마시며 결의 형제를 맺었다고 하오. 즉 서로 태어
난 곳과 날짜는 다를지언정 죽을 때는 한날 한시에 죽기로 맹세를 한다는 말이오.
11명은 이 말에 모두 찬성하였다. 그러자 백낙길이 태극기를 가져왔다.
이들은 모두 안중근이 이끄는 대로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이윽고 그들은 왼손의 무명지를 잘
라 태극기에 혈서를 썼다.
안중근이 맨 먼저 손가락을 잘랐고 서약서에 피도장을 찍었다.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피의 서
약을 하였다.
안중근은 다시 태극기를 펼치고 대한 독립 이라는 넉자를 썼다. 대한 독립이야말로 그의 평생
소원이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이 모임을 단지회 라고 불렀다. 안중근은 말하였다.
두고 보시오! 내가 3년 안에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말겠소!
그 순간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이토 히로부미! 그는 우리 민족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의 이
름이었다.
6. 하얼빈의 거사
서기 1909년 10월 20일, 우연히 신문을 펴든 안중근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만주에 오다!
안중근은 그 신문을 들고 대동공보 신문사로 뛰어갔다.
이강 선생! 아 기사가 정말입니까?
이강은 말없이 책상에 놓인 다른 신문 요동보 를 주었다. 그 신문에는 이토의 얼굴과 나란히
러시아 정부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의 얼굴이 실려 있었다.
마침내 때가 왔구나! 민족의 한을 풀 기회가!
이 강은 그런 안중근의 모습을 보더니 명함에 뭔가를 썼다.
안 선생, 이것은 우리 신문사 하얼빈 통신원에게 쓴 선생의 소개장입니다. 하얼빈에 가시거든
이들의 도움을 받도록 하십시오.
이 강은 이어 대동공보 사장 유진률과도 만나게 해 주었다. 유진률은 이강의 설명을 듣더니, 안
중근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안 선생, 당신은 우리 민족의 의사입니다. 아무쪼록 성공을 빌겠습니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없앨 것을 다짐하였다. 블라디보스크를 떠나던 날 유
진률, 양성춘, 이강 등 몇몇 유지들이 이들의 장한 출발을 송별해 주었다. 안중근은 술이 조금 취
하자 거사가 를 불렀다.
장부가 세상에 살아 있음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만들도다.
천하를 꿰뚫어보니 어느 날에 큰 일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차가우나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분연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뜻을 이루리라.
쥐 같은 도둑아, 쥐 같은 도둑아,
어찌 즐겨 목숨을 누리려 하느냐.
어찌 이에 이를 줄을 알겠느냐.
네 목숨은 이미 끝났다.
동포, 동포여, 속히 큰 일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 만세로다.
만세, 만만세, 대한 동포로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에 도착하여 김성박 집에서 이틀 밤을 자며 치밀한 계획을 세웠
다.
하얼빈은 경비가 엄중하니 결행 장소를 딴 곳으로 정하는 게 좋겠소.
그러자 김성박이 청년 하나를 데려왔다,
두 분 선생, 러시아 말을 잘 하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 조 군을 데려왔소.
안중근은 청년을 보자 반가워하였다. 언젠가 안중근의 뺨을 때렸던 조도선 이었다. 조도선은 안
중근을 보자 다시 한 번 사과를 하였다.
안 선생, 그 때는 철이 없어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조 동지,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무슨 말씀을 하시오. 그것보다 지금 하얼빈 역의 경계가 엄하
니 다른 거사 장소를 빨리 찾아봐야 하겠소.
그렇다면 채가구가 좋습니다. 그 곳에 물탱크가 있어,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는 반드시 정지
할 것입니다.
우 동지,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 열차가 그 곳에 정지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 한다면 우리의 계
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럴수도 있겠군요.
만일을 위해 우 동지와 조 동지는 채가구에 남아 계십시오. 이토 히로부미의 열차가 그 곳을
그냥 지나치면 내가 하얼빈에서 원수를 쏘아 죽이겠습니다.
안중근은 거사를 하기에 앞서 역에 가서 역원에게 정보를 알려고 애썼다.
그는 검은 외투에 챙이 없는 납짝모자를 쓰고 일본인처럼 변장하고는 역원에게 물었다.
이 곳에 기차가 매일 몇 차례씩 오갑니까?
어느 쪽 말이오?
아, 실례했습니다. 나는 일본 사람인데 남쪽에서 오는 기차를 탈까 해서입니다.
아, 일본인이십니까?
역원은 그제서야 의심을 풀고 묻지 않는 말까지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매일 세 번씩 오가오. 당신은 일본이라 특별히 가르쳐 주지만 오늘 밤은 하얼빈에서 우리 철
도국의 특별 열차가 장춘으로 가서 일본 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태우고 모레 아침 6시에 이 곳에
도착할 예정이오.
이것은 중대한 정보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역 근처에서 계속 서성이며 곳곳의 동정을 살폈다.
10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안중근은 역 구내 식당에서 홍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그는 이따금 시
계를 들여다 보았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도 기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식당 창 너머로 보이는 하얼빈 플랫폼의 경비는 삼엄하였다. 털모자를 쓴 러시아 카자흐 기병
이 있는가 하면, 작달막한 키에 누런 군복을 입고 팔뚝에 완장을 두른 일본 헌병의 아니꼬운 모
습도 더러 보였다.
30분이 더 지났어도 기차는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채가구에서 일이 성공한 것일까?
이보다 앞서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역으로 갔었다. 그러나 역 근처에서는 러시아 군
인들이 정렬하고 있었으며 통행을 금지하였다.
우리는 볼일이 있어 역 구내에 들어가야 하오.
조도선이 러시아 말로 사정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삐! 하고 기적을 울리며 기차는
달려왔다. 그러나 특별 열차는 채가구에 정거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9시 가까이 되자, 하얼빈 역 구내가 혼잡해졌다. 플랫폼에는 러시아 및 청나라의 의장대, 군악
대가 나왔고, 하얼빈의 일본 거류민도 손에 작은 깃발을 들고 환영하러 나와 있었다.
안중근은 가슴에 품은 육혈포를 만져 보았다. 이 육혈포는 8연발로 대동공보 사장 유진률이 안
중근에게 준 것이었다.
군악대가 시끄럽게 환영의 곡을 연주하였다. 안중근은 유유히 플랫폼을 걸어갔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증기 기관차가 하얀 수증기를 내뿜고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오자, 모두들 그것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각국 대표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마침내 열차가 섰다.
안중근은 주머니 속에 한 손을 찌르고 육혈포를 잡았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열차가 멈추자 코코프체프와 몇몇 고관들이 일등 찻간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틀림없는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이 승강구에 나타났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을 거사 전에 몇 번이고
본 일이 있었다.
아, 저 자로구나. 모자를 쓰고 힌 수염을 나부끼며 나타난 저 자가 우리의 원수로구나!
이토 히로부미는 승강구에서 모자를 벗어 들어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답례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승강구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병 쪽으로 발을 옮겨 놓기 시작하였다. 의장대를
사열하려는 이 순간, 그것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안중근은 권총을 뽑아 들어 날쌔게 몸을 날렸
다.
이토 히로부미가 의장대를 사열하기 시작했을 때, 군악대가 나팔을 불어대고 북을 울렸다. 일본
거류민단의 환영 인파가 작은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호랑이처럼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
었다.
권총은 사정 거리가 짧다. 먼 데서 쏘면 효과가 없고 빗나가기 쉽다. 안중근은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한 걸음이라도 다가가 쏠 생각이었다.
러시아 군인들이나 일본 헌병은 바람처럼 달리는 안중근의 모습을 못 보았을까? 그것은 극히
한 순간의 일로 그들은 총 소리가 들리는 순간까지 멍청해져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다만, 이토 히로부미만이 그 순간 멈칫 놀라며 우뚝 섰다. 그는 이 때, 러시아 의장병이 늘어선
대열 중간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문득 어떤 예감이 있었던 것처럼 달려오는
안중근을 보았다.
안중근은 달려오면서 주머니의 권총을 뽑아 곧장 내밀고 있었다. 거의 20미터쯤은 거리가 좁혀
졌을 때,
탕! 하고 첫 발이 발사되었다.
그의 총 솜씨는 이미 알려진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눈앞에서 배를 움켜잡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는 침착하게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을 쏘았다.
그 때까지도 군악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음악을 연주하였다.
안중근이 발사한 총탄은 모두 명중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슴과 배에 총탄을 맞고 비틀거리자, 비로서 주위가 소란해졌다. 안중근은 다
시 침착하게 총부리를 돌리며,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쏘았다.
안중근은 다시 4발을 쏘아 일본의 하얼빈 총영사 가와야마, 비서관 모리, 남만주 철도 이사 다
나카를 차례로 쓰러뜨렸다. 한 방만이 빗나간 셈이다. 안중근은 비로서 권총을 내던지며 만세를
외쳤다.
까레이 우라, 까레이 우라, 까레이 우라!
까레이는 러시아 말로 한국이고, 우라는 만세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을 한국 동포뿐 아니라 러시
아 인, 청국인, 그리고 일본인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윽고 러시아 경비병들이 우르르
안중근에게 몰려들었다.
그 사이 역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15분만에 죽었다.
안 의사의 의거는 당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사건이었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한 장면을 때마침 현장에 있었던 사진사가 촬영했다. 이 사진은 러시아의 각 영화관에서 상영되
었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우리 교포들은 이것을 보고 대한 독립 만세 를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전보로 세계 각국에 알려졌다.
7. 민족의 별 안중근
안 의사는 처음에 러시아측의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틀 뒤, 10월 28일 조서
와 함께 일본측에 넘겨졌다.
사건은 러시아의 세력 안에 있는 하얼빈에서 일어났으므로 당연히 러시아가 조사하고 재판을
하여야 했다. 그런데도 안 의사는 일본측에 넘겨지고 말았다.
이 때, 우리 독립 단체들은 안 의사를 일본측에 넘기지 말라고 러시아에 진정했다. 그러나 코코
프체프의 강력한 주장으로 안 의사는 일본측에 넘겨진 것이다.
안 의사는 일본 헌병의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요동 반도 끝에있는 뤼순 감옥으로 보내졌다.
일본측은 이 때, 많은 우리 교포들을 체포하였다. 우덕순, 조도선도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악
독한 고문으로 체포자들을 심문하였다. 안 의사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안 의사는 심문관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담하였다. 그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번 거사를 실
천한 것이었다.
어찌하여 이토 공을 죽였나?
그것은 이토에게 15가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결코 용
서할 수 없는 원수라 하늘을 대신하여 심판을 내린 것이다.
그 15가지 죄악이란 대체 뭐지?
안 의사는 그것을 하나하나 들어 설명해 주었다. 그 15가지 죄악 가운데에는 명성 황후의 시해,
5조약의 강제 체결, 고종의 폐위, 갖가지 이권의 강탈, 재정 갈취, 나라 빛을 억지로 만듦, 교육·
언론 탄압, 의병 학살, 외국 유학 금지 등이 있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려고 했다. 지금 서양에서의 세력들이 극동에 몰
리고 있는데 일본은 자기 혼자만이 이득을 누리려 하고 있다. 진정한 동양 평화란 한국과 청나라
그리고 일본이 손잡고 평화롭게 사는 길이며, 이것이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역사적 사실이 아닌
가? 그런데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다시 청나라를 침략하려 하니, 이는 동양 평화를 어지럽히는
일이고 마침내 일본도 패망할 것이다.
심문관은 이런 안 의사의 주장에 코웃음을 쳤다.
우리 일본 제국은 망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가!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자는 그렇게도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일본인 심문관들도 날이 갈수록 안 의사의 인격에 감화되었다. 안 의사는 아무리 악형
을 당해도 남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항상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선생, 어떻게 얼굴이 늘 그렇게 평화롭습니까? 감옥 밖에있는 우리도 때로는 짜증나는 일
이 있어 상을 찌푸리는데, 안 선생은 늘 웃는 얼굴이십니다.
하고 일본인 간수가 말했다.
기도의 힘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
다.
일본 정부는 안 의사의 변호를 신청한 한국인 안병찬, 그리고 러시아 인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
글러스의 변호신청을 모두 물리쳤다. 그리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 두 명만을 형식적으로 변호하도
록 했다.
서기 1910년 2월 1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마나베였고 검사는 미조부치, 또 두 변
호사는 미즈노와 가마다였다. 방청석에는 워낙 큰 사건이라 기자들도 많았고 외국인의 모습도 많
이 보였다. 안 의사는 초췌한 모습으로 재판장에 들어왔지만 그 태도는 당당하였다.
안 의사는 재판장에서 당당히 자기 주장을 말하였다.
나는 암살자가 아니다. 나는 대한 의군 참모 중장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군인의 자격으로 심리해 주기 바란다.
안 의사는 또 이렇게 주장하였다.
내가 이번에 거사한 목적은 동양 평화를 위해서였지.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총을 쏜 것
이 아니다.
안 의사는 모두 11회의 공판을 받았다. 그리고 서기 1910년 2월 14일, 마침내 형을 언도 받았
다.
안중근 사형
우덕순 징역 2년
조도선,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
안 의사는 담담한 심정이었다. 하느님께 밤낮으로 기도드리는 마음은 오히려 평안,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재판이 끝나자 일본측도 안 의사에게 가족과의 면회를 허락해 주었다.
면회실로 안내되자, 그 곳에 부인이 와 있었다. 부인은 안중근을 보자 벌써부터 눈물을 짓고 있
었다.
오 부인. 어머님은 안녕하시오. 그리고 아이들도?
네.
부인은 슬픔에 앞서 목이 메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오. 하느님께 기도 드리면 모든 것이 평안하오.
몇 마디도 채 못 하여 5분간의 면회 시간이 끝났다면서 간수는 안 의사를 끌고 나갔다. 그제야
김 부인은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홍석구 신부도 면회를 했는데, 홍 신부와의 면회는 밤중에 마나베 재판장의 집에서 특별히 이
루어졌다. 마나베는 안 의사의 고결한 인격에 감동했던 것이다. 안 의사는 그 날 저녁, 홍 신부와
의 만남을 기뻐하며 줄곧 유쾌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며칠 뒷면 죽을 사람이 정말 태연하구나. 과연 한국의 의사이다.
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안 의사의 사형 집행일은 서기 1910년 3월 25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날은 순종 황제의 탄
신일 이었으므로 26일로 연기되었다.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장에 들어온 안 의사는 조용한 태도였다. 얼굴빛 하나 달라진 데가 없
었다. 전옥과 검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하시오.
달리 유언할 것은 없고 본디 나의 거사는 오로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오. 오늘 이 곳에 입
회하신 여러분도 나의 참 뜻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오. 마지막으로 동양 평화 만세 를 삼창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소?
좋습니다.
안 의사의 말은 정말 뜻밖의 말이었다.
안 의사는 사형을 며칠 앞두고 동양 평화론 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논문을 다
마치기 위해 15일 간의 형 집행 연기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안 의사는 깊은 종교적 바탕에서 인간의 평화, 정의, 너그러움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동양 평화
를 주장하려고 했다.
안 의사의 순국이 알려지자 우리 민족은 모두 통곡했다. 안 의사의 재판은 국내에 보도가 금지
되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모든 사람이 울분을 터뜨렸다. 그리고 안 의사가
입버릇처럼 말한 자유와 독립을 가슴 속 깊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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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한국위인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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