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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안개속의 미로

by Casey,Riley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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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미로  

헬렌 B. 헉스 지음



 정체불명의 괴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신디. 21세 생일을 앞둔 어느날. 자동차 사고로 사랑하는 세 사람을 한꺼번에 잃는다. 세 번째 삶을 시작해야 할 그녀. 

                   
1장

 그는 창문 너머 거대한 푸른 소용돌이 속에 내던져져 하염없이 구르고 또 굴렀다. 
그리곤 긴 정적. 잔인한 무거움에 짓눌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그리고 끔찍했다.
 나는 고통의 신음 속에 미친 듯이 흐느끼며 그것에 저항했다. 한 그림자와 맞닥뜨렸다. 나는 내 전신을 압박하려는 무시무시한 그 검은 형체를 보려고 온 몸을 비틀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찌르는 듯한 공포의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돌연 나는 눈을 떴다!
 승무원이 내 팔을 만지며 굽어보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지어 보였다. 자상한 표정이었지만 당혹의 빛이 역력했다. 
 "무어 양,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나쁜 꿈을 꾸시는 것 같아서요." 나는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어쨌든 이젠 일어나셔야 해요. 린드버그 필드에 거의 도착했거든요." 나는 여전히 멍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의 승객들은 한결같이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조심스럽게 내 녹색 눈동자를 피했다. 옆자리에는 나이도 지긋한 회색 머리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결연히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앉음새를 수습하고 이마 위에 드리운 무거운 금발머리를 뒤로 제쳤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캘리포니아행 제트 여객기에 타고 있었고 잠이 들었었다. 잠을 잘 생각은 없었는데도.
 다시는 잠을 잘 일이 없길 원했다. 잠이 들면 항상 약속처럼 그 꿈이 찾아왔기에 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한, 불안스럽고 기운을 송두리째 빼놓는 저 식은땀 나는 악몽 말이다.
 나직하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안내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거기에 따랐다. 드디어 공항 대합실로 통하는 경사로에 섰을 때, 내 속에선 공포가 솟구치고 있었다. 온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내 앞에 물결치는 수많은 얼굴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검고 찌푸린 얼굴은 아무 데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안도감을 느꼈으나, 곧 두려움이 뒤따라왔다.
 '그가 여기에 날 마중나와 있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는 갑작스런 공포를 느끼며 생각했다.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지만 이 두려움은 곧장 해소됐다.
 키가 크고 머리가 검은, 30세쯤 되는 남자가 사람들 틈에서 나타나 내게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구릿빛 얼굴에 미소가 희게 번득였다.
 "신디, 신디 무어예요? 태양과 즐거움의 땅, 샌디에고에 온 걸 한영해요!" 그는 내 가방을 받아들고 자기 팔 아래 내 팔을 밀어넣었다. 그는 따뜻하고 친절했다. 나는 조금 진정되었다. 그는 수하물 구역에 득실대는 사람들 틈으로 능란하게 나를 이끌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빈의자에 앉히고는 내 수하물 청구증을 갖고 갔다.
 나는 그 두려워했던 만남이 이토록 빠르고 또 고통없이 끝났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피터 데인과 결혼하던 날, 난 그를 보았었다. 그 얼마나 무서운 만남이었던가. 나는 그때 겨우 l0살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제 내게 캘리포니아에 오라고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는 전갈을 보냈다. 어린 시절의 그 무서운 인상과 함께 나는 그에 대해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의식했다. 그런데 이렇게 편안하고 부담없는 사람이었다니…
 누군가가 도착한 다음의 세부적인 일들을 처리해 준다는 것 또한 다행스러웠다.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 최근의 내 병세 중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예컨대, 그의 이름이 계속 아리송했다는 점. 물론 그건 로이스였다.
 '로이스 크리스토퍼…'
 하지만 불안이 일었다. 그와 어떤 점은 매우 달라 보였다. 그는 내 가방 세 개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웃었다. 나는 햇빛에 그을린 그 얼굴이 희게 번득이는 빛을 다시 보았다.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뭐든 이 게이브에게 부탁해요."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빤히 바라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금빛 섞인 갈색이었다.
 '계곡물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푸른 빛이어야 하는데.' 나는 혼란 속에서 생각했다.
 "게이브?"
 나는 생소해서 더듬거렸다. 그는 곧 뉘우치는 빛이었다.
 "미안해요."
 그는 내 옆에 쭈그리고 차갑게 식은 내 두 손을 잡았다.
 "내 소개를 하지 않았던가요? 가브리엘 뒤솔트, 로이스의 사촌이지요. 로이스가 사과한다고 했어요. 급한 볼일이 생겨서요. 하지만 우리가 목장에 도착하면 거기 있을 거예요. 난 로이스 대신 선택된 운 좋은 사람이죠."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실망이, 그리고 분노가 뒤따랐다. 이 유쾌한 남자가 '로이스 크리스토퍼'가 아니라면, 그 두려운 만남은 이직 남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나를 오도록 한 것은 로이스였다.
 "미안해요, 저 혼자서도 택시나 뭐 다른 걸 타고 갈 수도 있었는데."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는 웃으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못돼요. 페어헤이븐까지 적어도 50마일이고, 목장은 거기서도 몇 마일 더 가야 해요. 어떻든 난 궁금했어요. 알겠지만 당신이 6살 때던가 그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잖아요."
 공항을 떠나 그의 차로 갔을 때, 나는 재빨리 그를 몇 번 곁눈질했다. 그는 내가 자기를 기억하기를 기대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잘생긴 모습만 보고서는 나는 실날같은 기억도 회복할 수 없었다. 게이브는 내가 은밀히 뜯어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피곤해요?"
 그는 동정적으로 물었다.
 "약간이오."
 난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거의 입밖에 내뱉을 뻔했으나, 참았다.
 '아직은 안 돼, 낯선 사람에게는.'
 "우리는 사실 낯선 사람들이 아니죠."
 그는 내 생각에 대답하기나 하는 것처럼 말했다. 
 "난 당신에게 말을 태워 주곤 했죠. 내 말 이름은 미드나잇이었고, 당신은 항상 그놈에게 각설탕을 먹였어요. 생각나요?"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희미하게 가리고 있는 질긴 안개로부터 커다란 검은 말을 불러내려고 애썼다.
 "미안해요. 난 엄마와 내가 와이오밍으로 이사가기 전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어요. 난 7살에 태어난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에요." 나는 그의 시선에 호기심 이상의 무엇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내 생각에는 그건 그렇게 유별난 일은 아니예요. 어디서 읽었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은 친근한 장소에 머무를 때 강화된다고 해요. 당신이 다시 여기에 왔으니까 아마 기억이 되살아날 거예요."

 "올드 타운이 뭐죠?"
 "샌디에고가 시작되는 곳이죠. 거기로 당신을 점심식사에 데려가려고 계획했었는데,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군요. 다음에 언제 가도록 해요." 나는 약간 당황했다. 나는 계속 우울증에 빠진 미혼의 중년여인처럼 굴었던 것이다. 
나는 없는 열의를 짜내어 대답했다.
 "그러고 싶어요. 샌디에고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그는 찬성하는 뜻의 미소를 보냈다.
 "당신을 보면 페어헤이븐 전체가 연애 분위기로 들뜰 것 같아요. 지금 몇 살이죠? 열여덟? 열아홉?"
 "스무 살이에요."
 나는 기계적으로 답했다.
 "두 달 있으면 스물한 살이 돼요."
 나는 갑자기 목이 잠기는 걸 느꼈다. 고통스러웠다. 데이빗…! 데이빗이 아닌 다른 남자를 어떻게 생각이라도 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내 뺨에 닿는 그의 뺨의 감촉, 그의 수줍은 입맞춤의 부드러운 위력을 거의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데이빗이 없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게이브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눈물을 말려 줄 때까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오? 당신을 위해 파티를 열어야겠군요."
 "멋있을 거예요."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리고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페어헤이븐이라고 했죠. 그건 목장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이 아닌가요? 바다에서 가까운가요?"
 그는 그 마을이 몇 마일 내륙으로 들어가며, 비옥한 산비탈로 거의 완전히 둘러싸인 계곡에 안락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보카도 나무로 덮여 있기 때문에 사철 내내 푸르죠." 듣기 좋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가 계속 이야기할 무렵, 우리는 드디어 무료 고속도로를 벗어나 겨자꽃으로 덮인 언덕 사이 구부러진 2차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나는 무서운 방향상실감 속에 고통스럽게 몸을 떨며 눈을 떴다. 또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문명으로부터 수 마일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갈 때, 나는 암설로 메워진 둑 사이를 살처럼 흘러가는 '컴컴한' 시내를 볼 수 있었다. 다시 공포가 엄습했다. 나는 게이브를 흘깃 보았다.
 "저건 쉐도우 크릭(Shadow Creek)이죠. 목장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샛강이죠. 자,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는 내 무언의 질문에 답하여 달래는 듯이 덧붙였다.
 "당신은 페어헤이븐을 놓쳤어요. 그건 불과 몇 블록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기가 쉽죠. 언제 곧 거기로 한번 데려다 주겠어요."
 공포가 조금 누그러졌다. 게이브의 친절에 감사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조금만 감정을 드러내도 곧 눈물이 치솟으려 했다.
 나는 다시 풍경으로 도피했다. 개울을 딱라 거대한 참나무들이 드문드문 박힌 작은 집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 말하려 했을 때 길과 강 사이 빈터에 멋진 2층 목조건물이 나타났다.
 나는 외쳤다. 
 "오, 게이브! 잠깐 멈출 수 있어요?"
 재빨리 나를 일별한 후 그는 그 집 맞은편 길가에 차를 세웠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죠?"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냥 참 흥미로운 고건물이죠? 풍경도 무척 아름답고요." 그는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오래 된 집들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특히 이 집이 좋은 건가요?"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게 놀라워요." 나는 계속 그 집을 응시했다. 그 집은 단순한 구조였지만, 위층에 침실이 많이 있는 듯 매우 컸다. 또 집 뒤론 경사진 공터가 있어 보였는데, 틀림없이 개울로 이어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먼 곳에 세워졌을까요?"
 잠시 후에 그는 말했다.
 "저건 오래 된 호텔이에요. l860년대 언제쯤 버스노선이 여기를 통과했을 때 세워진 거죠. 지금은 비어 있지만 로이스가 보존해 두고 있어요. 목장 재산이니까요." "그래요?"
 나는 그 장소를 향한 일종의 슬픈 그리움을 느꼈다.
 "아마 언제 그가 나를 안으로 들어가 보게 해주겠죠. 목장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게이브는 트랜스암 자동차에 천천히 기어를 넣고 차도로 되돌아갔다.
 "저기 언덕 위에 있는 집을 봐요!"
 그는 멀리 손짓했다.
 "바로 저거예요. 란쵸 오로 베르데. 푸른 황금 목장. 아주 어울리는 목장이죠. 로이스는 아보카도로 큰 돈을 모았어요."
 나는 응시했고 곧 그 오래 된 호텔을 잊었다. 멀리서도 언덕 위의 크고 길다란 집의 형체, 붉은 타일로 된 구불구불한 지붕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아름다워요. 하지만 너무나 고립되어 보여요, 너무도…" "너무 외로워요?"
 게이브는 손을 뻗쳐 내 손을 가볍게 쳤다.
 "걱정 말아요. 여기선 아무도 몇 마일 운전하는 데 대해선 어떻게도 생각하지 않아요. 로이스는 틀림없이 당신이 차를 마음대로 쓰게 해줄 거예요. 운전할 수 있죠?" "네, 운전해요."
 그러나 데이빗과 양친을 죽게 한 사고를 당한 뒤로는 운전하지 않았다. 의사들은 그것을 과잉반응이라고 했지만, 내가 빠져들었고 아직도 완전히 회복하고 있지 못한 무서운 의기소침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마치 부모와 약혼자를 한꺼번에 잃는 것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데 충분치 않은 것처럼' 나는 익숙한 분노가 되살아나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하지만 분노를 통해서조차 나는 어렴풋이 알았다. 그들이 옳다는 것을, 비록 그 죽음들이 비극적이긴 했지만 내 문제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자면 그 사고 자체는 내 무의식의 가장 깊은 부분에 휘감겨 있는 어떤 어둡고 위협적인 기억을 자극한 촉매제 정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집 앞의 넓고 둥근 차도에 닿았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빽빽히 조각된 스페인식 문들이 먼저 열어젖혀졌다. 내 나이 또래의 매력적인 흑발 소녀가 밖으로 나와서 좁은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나는 한눈에 그녀의 디자이너 진, 덴들톤 셔츠 그리고 값비싸 보이는 굽 높은 카우보이 부츠를 샅샅이 보았다. 그녀는 내 편의 차 쪽으로 와서 문을 열었다.
 "안녕, 신디!"
 그녀는 아주 활달했다. 
 "널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멋져! 난 킴이야, 로이스의 여동생! 게이브가 운전하는 식으로는 벌써 한참 전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오, 무슨 소리야, 나는 계속 신사처럼 운전했는데. 그렇죠, 신디?" 게이브가 말했다. 
 "하긴, 신디는 거의 내내 잠들어 있었으니까."
 그는 나가서 트렁크를 열었다.
 "정말이야?"
 킴의 생기에 찬 푸른 눈동자는 잠잘 필요를 거부하는 듯했다. 픽시 스타일로 자른 검은 머리조차 숱이 많고 굽슬굽슬했으며 원기왕성했다.
 "피곤했던 게 틀림없어! 집으로 들어와, 콜라나 뭐 시원한 걸 갖다 줄게. 게이브가 짐을 날라다 줄 거야. 그렇죠, 게이브?"
 "오, 네, 미스 킴, 늙은 게이브는 저 짐을 들고 바로 뒤따라가요." 게이브는 익살스레 말했다. 그의 어조의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갑자기 그를 뒤돌아보게 했다.
 장시간 뜨거운 햇빛 속을 달려온 탓인지 집의 시원한 내부는 춥게 감각될 정도였다. 
떨면서 나는 킴을 따라 현관으로부터 넓고 천장이 높은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서는 즉시 멋지게 차려입은 매혹적인 여성이 우아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마치 모델처럼 유연하고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걸이로 내게 건너오더니 부드럽게 손을 잡았다.
 "신디, 오기로 결정했으니 얼마나 좋아!"
 그녀의 뺨이 나방의 날개처럼 내 뺨을 스쳤다.
 "아, 고마워요."
 나는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고 덧붙이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이 여자가 누구였지? 로이스가 그 짧고, 냉정하게 동정적인 편지 속에서 이 여자에 대해 언급했었던가? 기억이 안 났다. 나는 다시 머리를 쳐드는 혼란의 감정이 드러날세라 흘깃 킴을 보았다. 
 "내 의붓어머니, 로라."
 킴은 무심하게 말했다.
 로라는 킴의 무례한 태도에도 아랑곳 않는 것 같았다.
 "식사했어? 먹을 것 좀 가져다 줄까?"
 "비행기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나는 거짓말했다. 나는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다.
 "수고스럽지 않다면 물이나 뭐 한 잔 마시고 싶은데요." "물론 괜찮지. 킴, 쥬아니타에게 준비하라고 말해 주겠어? 레모네이드가 좋을 것 같아."
 킴은 로리에게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로라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킴은 방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를 지나칠 때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 샐쭉하던 표정은 동지애가 담긴 웃음으로 변했다. 나는 가까스로 로라의 말에 주의를 되돌렸다.
 "여행은 어땠어? 하지만 당연히 네가 지금 무얼 즐긴다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그녀는 내 손을 두드렸다.
 "네가 지금 당장 여기 오는 것을 꺼렸다는 걸 알아. 하지만 로이스가 장소를 바꾸는 것이 네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마 옳을 거야. 그는…" 부엌 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녀는 말을 중단했다.
 "… 마지막으로, 킴!"
 단호한 남자 목소리가 성급하게 소리쳤다.
 "너의 그 멍청이 친구들은 뒷길에서 떨어져 있어야 해! 그애들이 4륜차로 모든 걸 잡아빼고 다니는데 어떻게 우리가 모든 걸 자연 상태로 보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 그들의…"
 "날 비난하지 마!"
 킴의 목소리는 똑같이 성급했다.
 "난 그들의 관리인이 아냐! 네가 싫다면 그들에게 그렇다고 직접 말해!" 그 남자 음성이 처음 들렸을 때, 나는 다시 어떤 손이 내 목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다시금 화난 푸른 눈동자를 올려다 보는 10살이었다. 나는 굳어져서 소파의 끝으로 슬그머니 가 앉았다.
 
 그들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킴이 그녀의 오빠보다 한두 걸음 앞에서 걸어왔다. 
그녀를 뒤따라 온 사람이 로이스 크리스토퍼라는 걸 난 곧 직감했다. 그와 게이브와의 유사점이란 단지 피상적인 것, 단순히 혈색의 문제에 불과했다. 내가 기억했던 엄한 표정과 검고 찌푸린 눈썹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방어하듯 일어났다.
 그의 계모는 즐기는 듯한 경고의 어조로 말했다!
 "로이스…"
 그는 갑자기 내 존재를 깨닫고 얼어붙었다. 그가 나를 봤을 때, 그는 얼굴에서 성마름과 성가심을 지워 버리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신디?"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긴장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 떨어져서 돌연히 멈춰 섰다. 그의 노여움은 완전히 풀려서, 이제 그는 엄숙하고 약간은 야릇하게 보였다.
 "가까이 가고 싶은데…"
 그는 말했다.
 갑자기 나는 그 얼음처럼 푸른 눈동자 속에 숨어 있는 장난기를 보았다.
 "하지만 먼저 다시는 내 정강이를 차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해!" 나는 홍당무가 되었고, 곧 일제히 터진 웃음에 끼어들었다. 나는 그 부분은 잊어 버렸었다. 로이스가 내가 어머니의 결혼식을 망치지 못하도록 강압적으로 나를 교회에서 끌어냈을 때의 그 두려움과 분노만을 기억했다. 비록 나중에 내 어머니의 새 남편을 좋아하게는 되었지만, 그 당시엔 그가 내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간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로이스가 교회의 뜰에 나를 내려놓았을 때, 나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내 좌절감을 발산했었다.
 "약속해요. 그리고 사과해요. 상처가 아직 남았나요?" 나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유우머에 응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다가왔을 때 나는 그가 약간 절뚝거린다는 걸 알고 소스라쳤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그,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로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사과할 건 없어. 트랙터에 엉겨서 남은 상처야. 곧 나을 거야." 그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에 내 손을 맡겼다.
 "환영해."
 그리고 덧붙였다.
 "미 까사 에 수 까사(Mi casa es su casa)."
 '내 집은 너의 집' 그 말은 따뜻하고 위로를 주게끔 들렸다. 갑자기 나는 긴장이 풀렸고, 수 주 만에 처음으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2


 곧 게이브의 음성이 낭하에서 들려왔다.
 "이건 사적인 상봉인가?"
 그의 말투는 짐짓 애처로웠다.
 "아니면 누군가 끼어들어도 되나!"
 "지난 한두 시간 동안 신디를 독차지했었잖아."
 머뭇거리며 로이스는 내 손을 놓았다. 내가 소파의 내 자리로 돌아갔을 때 그는 덧붙였다.
 "네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점수를 얻지 못했다면, 이젠 운이 다한 거야." 게이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신디의 짐은 동쪽 침실로 가져다 놨어. 신디가 그 방을 쓸 거지?" "맞아요."
 킴이 말했다.
 잠시 묘한 침묵이 실내를 감쌌다. 멕시코 여자가 몇 잔의 레모네이드가 실린 트레이를 갖고 나타나 그 침묵을 깼을 때,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을 다탁에 내려놓고 다시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 쥬아니타. 우리 손님을 소개할게요. 신디 무어 양이에요." 로라가 말했다.
 그 여자는 내 쪽으로 돌아서서 수줍게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캘리포니아에 오신 걸 환영해요." "고마워요, 쥬아니타."
 그녀는 다시 미소짓고 밖으로 나갔다.
 "쥬아니타와 그녀의 아들 에밀리오는 2년 동안 죽 함께 지내왔지." 로라가 말했다. 그녀는 차가운 유리잔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레모네이드는 달콤하면서도 짜릿했다.
 "그 사람들이 없다면 어떻게 해나갈지 모르겠어. 게이브, 무얼 좀 들겠어요?" "괜찮다면, 좀 강한 걸로 들겠어요."
 빈번한 방문객의 익숙한 태도로, 게이브는 위스키 같은 것을 고풍스런 잔에 따랐다.
 게이브는 로이스 곁으로 갔다. 쥬아니타와 그녀의 아들에 관한 로라의 가벼운 화제 사이로 그가 조용히 말하는 걸 들었다.
 "잘 됐어?"
 로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잠시 후에 게이브가 다시 말했기 때문이다.
 "너의 정탐꾼들이 길 양쪽에서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나?"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로이스의 어조는 말보다 단호했다.
 "그건 아마 단지 약간 운이 나빴던 것뿐일 거야."
 주도면밀하게 화제를 바꾸면서, 그는 말했다.
 "킴, 신디는 아마 수영하고 싶을지도 몰라. 방을 보여 주고 옷을 바꿔 입도록 하는 게 어때?"
 "그러고 싶어, 신디?"
 "수영?"
 다시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게이브의 이야기로는 여기서 바다까지는 수 마일이라던데." 풋풋하고 따스한 웃음이 물결쳤다.
 "그래, 하지만 푸울이 있어. 바로 바깥이야."
 킴은 방 끝에 있는 창 쪽으로 갔다. 나는 내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곁으로 갔다.
 집터의 일부인 언덕은 뒤쪽으로는 약간 가파르게 경사져 있었다. 역시 스페인 식으로 꾸며진 푸른 안뜰은 창문 아래로 꽤 떨어져 있었다. 뜰 너머로는 푸른 잎이 무성한 비탈과 계곡이 놀랄 만치 넓게 뻗쳐 있었다.
 "아름다워라!"
 나는 솔직하게 감동했다.
 "물이 따뜻해?"
 "그럼. 태양열 난방기가 있어. 자, 2층으로 가. 수영복이 없으면 내 걸 빌려줄게." 
 동켠 침실은 카페트가 두껍게 깔리고 욕실과 벽장이 딸린, 매우 멋진 방이었다. 그러나 킴은 아늑한 맛은 없다고 지적하며 미안해 했다.
 "전망이 좋아서 대개 객실로 사용돼. 그리고 물론 푸울로 가는 계단에 가깝기도 하고. 네 방문 바로 밖에 있어."
 "아래층에 침실들이 또 있어?"
 킴은 내 시선을 쫓았다.
 "그래, 저기 있는 건 주인용 침실이야. 그건 정말 로이스가 써야 하는데 로라는 그걸 내주지 않으려고 해. 아빠가 돌아가신 지 2년이 넘었는데도. 로이스가 바로 밑방을 쓰고, 내 방은 여기, 네 옆방이야."
 그녀는 키득거렸다.
 "나이든 사람들이 아래층을 쓰는 게 불문율이지. 내 생각엔 계단을 오르내리기엔 너무 늙어서 그런 것 같애. 하지만 사생활이 보장되니까 난 좋아. 으스대는 오빠와 참견 잘하는 계모라니!"
 나는 호기심에 차서 그녀를 주시했다.
 "넌 로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괜찮아. 하지만 난 스무 살이고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쯤 결혼했거든. 그녀가 계모 티를 내는 건 거슬려. 왜 물어? 내가 더 좀 공손하지 못한 게 놀라워?"
 나는 여행가방 하나를 침대 위에 놓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야."
 갑자기 나는 말을 쏟아놓고 있었다.
 "난 내 어머니만큼이나 의붓아버지를 사랑했어. 내가 누굴 더 그리워하는지 잘 모르겠어."
 얼마간 침묵이 흐른 다음, 킴은 말했다.
 "네 남자친구도 그 사고로 죽었지? 캐낼 생각은 없지만, 때로는 이야기하는 게 도움이 돼."
 나는 힘겹게 자제하고, 옷장 서랍에다 속옷을 챙겨 넣었다.
 "그래, 그도 그 사고로 죽었어. 사실, 그는 내 약혼자였어. 수 의대학 졸업을 1년 남겨 놓고 있었는데."
 그리고 우리는 결혼할 계획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가 사무실을 열면 책정리를 할 수 있게끔 비서 과정을 등록하고도 있었다.
 "짐 푸는 걸 도와 줄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킴은 두 번째 가방을 침대 위로 끌어올려서 열고는 내 옷들을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꺼번에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잃는다는 건 끔찍했을 게 틀림없어. 데이빗은, 이름이 맞지? 어떻게 네 부모님과 한 차에 타게 되었어?" "부모님을 공항에 태워다 드리는 중이었어."
 나는 나머지 옷들을 꺼내서 무턱대고 서랍 속에 쑤셔 넣었다.
 "여기로 오려고 모든 준비를 다 했었어. 근데 마지막 순간에 내가 아팠지. 독감인 것 같았어. 그래서 부모님이 먼저 가시고 내가 며칠 뒤에 따라가기로 했어. 그리고는 산을 내려가는 길에, 브레이크가…"
 나는 더 계속할 수 없었다.
 킴은 내 옷을 가지고 옷장으로 갔다.
 "만일 위로가 된다면… 나도 네가 겪고 있는 슬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 그녀의 음색이 변했다.
 나는 내 생각에서 깨어났다. 주저하며, 나는 물었다.
 "저, 네 어머니도 잃었니?"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는 이미 말했다.
 "어머니는 5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어. 오래 앓으셨지. 그건… 더 나빴어." 한아름이나 되는 옷들을 안은 채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나는 내 자신 외에 다른 사람 때문에 슬픔을 느꼈다. 그건 이상하게도, 세상과 나 사이의 커튼이 걷어올려진 것처럼 좋은 느낌이었다.
 "미안해. 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는 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애."
 그녀 특유의 급작스런 기분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킴은 옷들을 침대에 던지고는 소리쳤다.
 "우린 문제들에 대해 토론해서는 안 돼! 로이스는 네가 네 걱정들을 잊으려고 여기에 온다고 했어! 저녁식사 후에 짐 챙기는 걸 도와 줄게. 지금은 옷을 갈아입고 푸울에서 만나는 게 어때?"
 나는 무력하게 서랍장을 바라보았다. 킴은 내 시선을 쫓았고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우리 둘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얼 어디다 뒀는지 희미하게라도 생각나? 음, 염려 마. 당분간 내 걸 하나 써." 
 빌린 비키니는 퍽 작았지만, 나는 충분히 수영을 즐겼다. 한참 후 마지막 일광 속에 긴 의자에 몸을 뉘었을 때, 나는 내가 여기 오도록 한 데 대해 로이스가 옳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그가 우리에게 합류한 후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왜 나를 걱정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나는 내 목소리에 다시 의혹의 빛이 되살아나는 걸 의식했다.
 "어머니 결혼식 때의 그 무서운 사건 외에는 당신도 나를 전혀 모르잖아요." "첫째로, 아버지가 그렇게 하길 원하셨을 거야. 우리 아버지와 네 아버지는 제일 가까운 친구셨어. 또 동업자였고. 형제보다 더 가까운 처지라고 항상 말씀하셨어. 그 결혼식에 간 것도 아버지가 그렇게 고집하셨기 때문이야. 아버진 당시 심장발작을 일으키고 있어서 어머닌 그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으셨어. 그래서 내가 가족을 대표하게 됐던 거야."
 그의 맑은 눈동자가 내 눈을 직시했다.
 "정말이지, 거기 가고 싶진 않았어. 난 절망적으로, 고통스럽게도 네 어머닐 사랑하고 있었거든."
 나는 충격을 들켰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웃음을 터뜨리곤 덧붙였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 난 l8살도 되지 않았고, 그녀는 30살인가의 아름답고 도달할 수 없는 여인이었지. 난 내가 그녀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어. 하지만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본다는 건 정말 상처였지."
 그는 약간 수줍어하며 미소지었다.
 "그날 내가 네게 그렇게 거칠게 군 건 그 때문일 거야." "난 당신이 나를 와락 붙잡아서 흔들어대던 걸 기억해요. 그때 이후론 당신 이름만 들어도 움츠러들었어요."
 그는 뉘우치듯 말했다.
 "미안해. 어떻든 네 행복이 아버지껜 매우 중요했어.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그는… 신디,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는 갑자기 메말라 버린 입술을 빨았다. 귓속이 윙윙거렸고 가슴엔 무거운 압박이 왔다.
 "난, 난… 잘 모르겠어요. 아마 피곤한 거겠죠. 아니면 배가 고프던가 라라미에서 아침을 먹은 게 백만년이라도 된 것 같아요."
 킴은 오빠의 목소리에 갑작스런 근심이 깃든 걸 듣고 뛰어 일어났다.
 로이스는 그녀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서둘러. 오렌지주스 한 컵 가져와."
 그녀는 두말 않고 달려갔다.
 로이스는 내 옆에 꿇어앉아 내 얼음장 같은 손을 부벼서 따뜻하게 했다. 그동안 게이브와 로라가 집에서 달려나왔다.
 "뭐가 잘못된 거야, 로이스?"
 로라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이 보였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종잇장처럼 창백해졌어요."
 "제발, 아무 일도 아니예요."
 나는 재빨리 말했다. 
 "난 아팠었고, 그래서 때때로…"
 나는 미안했고 무섭게 당황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어?"
 그렇게 말할 때 게이브의 목소리는 기묘하고 기운없이 들렸다. 로이스도 그걸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사촌을 보았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고 잠시동안 그러고 있었다.
 "그게 아냐. 그저 그녀 어머니의 결혼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그녀 아버지의…" 로이스는 내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나는 그가 갑자기 소스라치는 걸 보았다.
 "오, 신디, 난 정말 바보야! 그건 아주 오래 전이지만, 그럼에도 난 그게 어떻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그는 내 옆에 앉아서 내게 팔을 둘렀다. 그 감촉은 따뜻하고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용서해 줄 수 있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그가 내 부모님의 사고를 상기시켰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사실, 나는 우리가 무얼 이야기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또 기억하려 애쓰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킴이 가져온 오렌지주스 잔을 들어서 들이켰다.
 잔을 비우고 났을 때 나는 명랑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자, 훨씬 나아진 것 같아요. 점심 먹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어요." 로라가 즉각 나섰다.
 "킴, 쥬아니타에게 치즈 좀 가져오라고 해. 그리고 저녁은 좀 일찍 준비되는 대로 곧 먹겠다고 해."
 그녀는 내게 미소지었다.
 "바비큐가 어떻겠어? 캘리포니아에 오면 맨 처음 할 일이 그거야." 나는 로라에 대한 킴의 적의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킴을 흘깃 보았을 때, 그녀는 여전히 심술나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계모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급히 나는 로라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저 온화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나는 킴의 눈으로 그녀를 보려고 애썼다. 놀랍게도, 그 유쾌한 표정이 가면임을 난 깨달았다. 비밀스러운 감정 위를 철 같은 결단으로 덮고 있는 가면. 나는 재빨리 하품과 연극적인 기지개로 이 발견을 감추었다.
 
 바비큐란 와이오밍에서도 분명 드문 음식은 아니었지만, 이국적 배경 탓에 매우 달라 보였다. 밝게 불켜진 푸울과 뜰은 환상의 세계처럼, 모여드는 그림자 속에 떠 있었다. 나지막한 대화, 잔 속의 얼음이 사각사각 부딛치는 소리, 가운 자락의 감각적인 버스럭거림, 이 모든 것이 이상하고도 달콤한 비현실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우리가 거대하고 번뜩이는 거품 속에 함께 갇 힌 것과도 같았다.
 그 생각은 흥미를 자아냈다. 그래서 나는 저 손짓하는 듯한 산정을 향하여 거대하고 어두운 심연을 넘어 내 자신이 둥둥 떠내려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잠자러 가지 않을 거죠?"
 게이브가 내 곁에 와서 앉았다. 나는 그에게 내 덧없는 환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뒤로 기대서 소파를 따라 팔을 뻗쳤다. 근처의 불빛으로 그의 눈동자 속의 황금빛 반점들을 볼 수 있었다.
 "아, 이게 사는 방식이야."
 그는 느릿느릿 말했다.
 "필요한 것이란, 자상하게 죽어서 많은 돈을 남겨 줄 아버지지." 나는 움찔하지도 안색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과하는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건 단지 신 포도죠.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는데. 로이스는 다른 사람들만큼 열심히 일하고, 유산을 잘 돌보고 있어. 그리고 당신 것도."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크리스토퍼 가에 위탁된 재산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게 내가 여기 와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로이스가 내 생일 때까지 그걸 관리하기로 돼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피터의 예기치 않은 죽음이 일을 온통 엉키게 했을 때, 내 변호사는 내가 헤어날 수 있도록 일부분을 양도해 주도록 로이스에게 요구했었다.
 로이스는 대신에 내가 얼마간 캘리포니아에 와 있도록 요청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변호사 웰슨 씨는 새로운 환경이 나를 낙담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느꼈다. 
나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온 것에 대해 유감이 없다. 결국, 불행한 기억밖에는 와이오밍에 내게 남아 있는 게 무언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난 사실 그것에 대해선 잘 몰라요." 난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순간, 화난 듯한 표정이 게이브의 얼굴을 억눌렀다. 그것이 사라지자, 그는 가볍게 말했다.
 "그게 좋을 거야.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나는 한푼을 벌기 위해 미친놈처럼 뛰어오고 있으니까."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는데요?"
 "아, 모든 일을 조금씩 하지. 사실상, 난 부동산 중개인이오. 하지만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것이라면 거의 무엇에나 손을 대지. 투자, 보험, 이름만 대요. 난 그걸 해요."
 그건 불완전한 생활방식으로 들렸다.
 "일정한 직업을 원하지 않나요?"
 "9시에서 5시까지 하는 일?"
 게이브는 조롱조로 말했다.
 "뒤엎어 버리고 바쟈 해안을 따라 미끄러져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누구의 허락도 구하고 싶지 않소!"
 "바쟈?"
 "바쟈 캘리포니아, 멕시코, 하얀 모래톱, 따뜻한 해안, 나는 언젠가 거기다 저택을 지을 거요."
 그는 거의 경멸하듯이 뜰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웃었다.
 "내 거창한 꿈이 우습게 들리겠죠?"
 "아뇨, 왜요? 내 의붓아버지는 항상 말했어요,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분하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꿈꿀 수 있다는 것이라고."
 "아, 그건 중요해요. 정말 중요해."
 게이브는 낮았지만 열띠게 말했다. 그리고는 나를 흘깃 보고는 기묘하게 웃었다.
 "신디 무어 양, 당신에게 눈에 띄는 것 이상의 무엇이 이 인생에 있소. 정말, 그건 대단한 거요."
 로라가 우리 곁에 서 있었다. 그녀의 불꽃같은 스커트는 뜰을 쓸고 지나가는 미풍에 약간 종 모양으로 부풀었다. 그녀의 눈의 음울한 표정으로 그녀가 게이브의 마지막 말들을 들었음을 알았다. 게이브 역시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았지만 그가 그녀에게 던진 시선은 엷게 가리워진 무관심일 뿐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주빈이 갈비를 먼저 고르는 법이죠."
 달리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나는 그에게 내 손을 맡겼다.
 "게이브, 당신은 이렇게 신디를 독점해선 안 돼요. 우리 모두는 그녀를 알게 될 기회를 원해요."
 장난스럽게 꾸짖는 어조였지만, 킴은 왠지 냉담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게이브에게서 내 손을 뗐다.
 "제발, 나를 두고 싸우지 말아요. 난 당신들 모두가 진심으로 질릴 정도로 여기 오래 머물게 될 걸요."
 나는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고 말했다.
 "나는 완전히 그녀를 독점할 작정이오. 내일부터 시작해서." 게이브는 내가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로라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의미가 너무도 분명했음이 틀림없었다. 순간, 습관적인 반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서 걷혔다. 마치 게이브가 그녀를 때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때요, 신디? 내일 샌디에고 관광을 하고 싶어요?"
 내 일생에 있어서 그토록 불편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정중하게 거절할 방법을 찾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말문을 잃은 채, 그저 두 사람을 응시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킴이 근처의 의자로부터 말했다.
 "당신 차례를 기다려야 할 거예요, 게이브. 신디와 난 내일 계획이 있어요." 그녀는 일어나 우리에게로 왔다.
 "목장 둘레로 말을 타고 도는 게 어떨까 싶은데. 말 탈 줄 알지, 신디?" "와이오밍의 라라미에서 온 내게 그걸 묻는 거야? 물론 타지." "과도하게 하지 않도록 해."
 로라가 말했다. 반 웃음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눈동자만은 음울하고 피곤하게 주위를 온통 경계하고 있었다.


                   3


 "게이브는 네게 꽤 반했어."
 킴과 나는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냈다. 로이스는 목장의 외딴 곳에 나를 데려가선 안 된다는 엄한 명령을 내렸다.
 열을 내어 티격태격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어길 배짱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꼬불꼬불한 큰 길만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난 완전히 결딴나 있었고, 어젯밤에도 하등 매력적으로 보일 이유가 없었는데 그에겐 아직 애인도 없단 말야?" 나는 조심스레 킴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게이브와 그녀의 매 력적인 계모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있는지? 그 점에 대해 킴은 즉각 나를 안심시켰다.
 "로라 외에 말야?"
 그녀의 목소리는 조롱조였다.
 "아니, 그녀 말곤 상대를 바꿔 가며 교제해."
 그녀는 자기 팔로미노(갈기와 꼬리가 흰 담갈색의 말)를 내 곁에 나란히 세웠다.
 "넌 어젯밤 그 상황을 꽤 빨리 이해하더라. 여기 머물 작정이라면 나머지 부분도 알아 두는 게 좋아. 게이브는 로라가 자기와 결혼했으면 해. 하지만 로라는 그러려고 하지 않아."
 나는 놀라움을 감추려고 애썼다.
 "그녀는 게이브보다 나이가 많지 않아!"
 "딱 5살. 그녀는 아빠보다 많이 젊었었지. 게다가…"
 킴은 나를 곁눈질했다.
 "게이브는 너보다 l2살 많고, 그게 그의 사랑을 가로막진 못할 거야. 너도 마찬가지고. 만일 그가 네가 바라는 사람이라 결정한다면 말이지." 나는 내 마음으로부터 데이빗의 이미지를 몰아내려고 애썼다.
 "로라는 분명히 그렇게 느끼지 않을 거야."
 "하! 로라가 그와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게 아니야. 게이브는 한나절 일해도 한푼 못 벌어. 그가 그녀를 원하는 만큼이나 로라는 크리스토퍼 가의 토지에서 얻는 연 삼만 달러를 원하고 있어."
 나는 말없이 이 정보를 숙고했다. 내 계부는 전임교수직에 있었고, 필수품 외에도 어느 정도 호사를 누릴 돈도 있었다. 하지만 투자 같은 것에 쓸 만큼 몫돈이 남아 돌거나 한 편은 아니었다. 양친은 돈에 대한 얘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에 전적으로 만족하는 듯했다. 그러나 여기 캘리포니아에서는 명백히 돈이야말로 일차적인 관심사였다.
 나는 다시 말을 꺼냈다.
 "로라가 로이스에게 자기를 부양하게 한단 말이니?"
 "그 여자는 우리가 자길 먹여 살리게 해. 목장의 4분의 l은 내 거야. 로이스는 로라가 아빠의 미망인이고, 그녀가 원하는 한 머물 권리가 있다는 의견이야." 킴은 거의 야만적으로 고삐를 끌어당겼다.
 "로이스의 그런 점 때문에 미치겠어. 로라가 아니라도 그에겐 일생 매달린 문제가 충분한데."
 나는 나 역시 그 문제 중의 하나는 아닌지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주저하면서 킴에게 그런 말을 했다.
 "네가? 물론 아니야. 넌 애초부터 여기에 속한 사람이야. 결국 넌 이 목장에서 태어났잖아."
 갑자기 아침 태양이 너무도 따뜻하게 보여서 움찔 놀랐다.
 "그래? 기억이 안나."
 나는 바보스럽게 얼버무렸다.
 킴은 이마에 흘러내린 곱슬곱슬한검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넌 여기서 살던 때 일을 거의 기억 못하지! 그건 이상해. 왜냐면 난 우리가 항상 함께 놀던 걸 기억하는걸! 게다가 난 너보다 나이도 적잖아." "게이브는 같은 장소에서 오래 살면 기억이 되살아날 거라고 말했어…"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기 있는 오래 된 건물은 뭐야?"
 나의 주의는 넘어질 듯한 목조 건물에 돌려졌다. 그것은 개울을 따라 자란 거대한 참나무 숲에 가리워 잘 보이지 않았다. 그 건물 뒤로 나무와 로프로 된 인도교가 보였는데, 협곡을 가로질러 위태하게 뻗어 있는 것 같았다. 
 "저거? 이리 와, 보여 줄게."
 그녀는 팔로미노를 차서 달리게 했다. 내 밤색말도 곧 그 동료를 따라서 달렸다.
 내가 가까이 갔을 때 킴은 열렬히 말했다.
 "말쑥하지 않니? 이건 오래 된 역마차 정류장이야. 우스운 작은 감옥이랑 온갖 게 다 있어."
 그녀는 말에서 내렸다.
 "이리 와, 부랑자들이 못 들어오게 폐쇄되어 있어. 하지만 난 들어가는 길을 찾을 수 있어."
 나는 말 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목조건물은 도로에서 약간 물러나 있었다. 사방으로 좁은 베란다가 뻗어 있었고, 녹슬어 가는 맹꽁이 자물쇠가 달린 넓은 정문 양쪽엔 벤치가 두 개씩 놓여 있었다.
 "아니, 들어가고 싶지 않아."
 나는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킴은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이건 역사적인 경계표야. 1865년인가에 세워졌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빈 창문들을 보자 안장에 못박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킴의 표정은 밝아졌다.
 "아, 침입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건 우리 목장 재산이야. 게다가 우리뿐이 아닌걸. 불법 체류자들이 많이들 비오는 밤에 여기서 지내." 살갗에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들어가고 싶으면 넌 들어가. 난 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나는 도로 쪽으로 말을 달려 나왔다.
 나는 날카로운 경적소리와 타이어가 내는 새된 소리에 맞닥뜨렸다. 윤기있는 작은 트라이엄프가 전방의 도로 오른쪽에 미끄러지며 멈췄다.
 "야, 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
 두 명의 승객이 내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운전사는 햇빛에 그을린 금발의 젊은이였는데, 차 밖으로 나와서 문을 꽝 닫고는 내게로 걸어왔다.
 "브라이언, 혼내줘!"
 승객중의 한 명이 열이 나서 소리질렀다.
 나는 거의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브라이언이라 불린 사람에게 시선을 못박고 있었다. 그는 우뚝 솟은 내 시선에서 보아도 무서워 보였다. 그가 내 말 고삐에 막 손을 뻗쳤을 때, 나는 말을 뒤로 끌어당겼다. 그는 말발굽으로부터 황급히 뒷걸음질쳤다.
 "무얼 하는 거야!"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썼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놀라게 했다고!"
 그는 여전히 성이 나 있었지만, 내 말에 감히 가까이 오진 못했다.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어!"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만해, 브라이언, 네가 시속 90마일로 도로를 질주한다는 걸 신디가 어떻게 알았겠어?"
 "90이라고! 40을 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저 여잔 보이지도 않았어." 그의 항의는 도중에서 끊겼다. 그는 킴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성난 표정이 흥미를 느끼는 빛으로 바뀌었다.
 "아, 이 사람이 네가 말한 몬태나에서 온 친구야? 괜찮은데!" "와이오밍, 이 바보야! 신디에게 무례하게 군 게 미안하지도 않아?" "아니! 그건 내 잘못이었어. 정말 미안해요."
 나는 서둘러 말했다.
 트라이엄프의 승객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명이 말했다.
 "자, 브라이언, 그만 가지! 아가씨들은 저기 저수지에서 만날 수 있잖아." "우리 저수지에서?"
 킴이 물었다.
 "로이스에게 잡히지 않는 게 좋을걸! 허락없이 미개간지에 들어 온다고 어제 내게 노발대발했단 말야."
 "그게 재미있는 거지!"
 브라이언은 내게 웃으며 윙크했다.
 킴은 비난하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언제든지 와서 푸울에서 수영하는 건 환영이야."
 "너무 단조로워."
 브라이언은 내게 가까이 와서 내 말의 목을 두드렸다. 브라이언의 웃음과 태평스러운 태도엔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순간 나의 뇌리엔 또다시 상냥하고 부드러운 데이빗의 영상이 꽂혀 오기 시작했다.
 차로 되돌아가며 그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마음이 변하면 어디서 우릴 찾을 수 있는지 알지?"
 차는 큰소리를 내며, 자욱이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저 괴짜!"
 킴은 꾸짖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 어조에는 애정이 깔려 있었다.
 "누구야?"
 "브라이언 하트라고 해. 저 셋은 모두 오랜 학교 친구야. 브라이언은 나와 함께 샌디에고 주립대학에 있어야 하는데, 코뮤니티에서 하도 낙제를 많이 한 통에 l년 더 다녀야 해."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넌 대학에 다니고 있니?"
 "3학년이야. 지금 여름학기 강의를 두 개 듣고 있어." 그녀는 유감스러운 듯 덧붙였다.
 "네가 얼마간 머물 줄 알았더라면 신청 안했을 걸. 내가 없으면 심심하지 않겠니?" "아, 괜찮아."
 최근 들어 내 문제 중의 한 가지가 그것이었다. 아무도 나를 단 몇 분을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난 혼자 있는 시간, 내 인 생의 변화와 맞붙어 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아니, 갈망했다.
 "난 그저 푸울 주변에 누워서 부자라는 게 어떤 건지 음미해 볼 참이야." 나는 명랑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킴은 곧 내게 이상한 시선을 던졌다.
 "룩아웃 플랫에 가보자. 거기라면 목장을 거의 한눈에 볼 수 있어." 그녀는 화제를 완전히 바꾸며 소리질렀다. 나는 목장 전체를 보고 싶었지만 의심스럽게 말했다.
 "거기가 로이스가 가지 말라고 한 데 아냐?"
 "아, 사고가 일어난 뒤 그는 하찮은 일에 공연히 법석을 피워! 트랙터가 고장을 일으켰던 것뿐인데. 하지만 버트가 그렇게 죽은 걸 보니…" 그녀는 돌연히 말을 끊고 나를 돌아다보았다. 나는 목젖이 맹렬히 고동치는 걸 억눌렀다. 사고는 언제나 일어났다. 그런 것들을 듣는 데 익숙해져야만 했다.
 "버트가 누구니!"
 "우리 목장의 감독이었어. 씨를 뿌리려고 가파른 비탈을 개간하기 시작했었거든. 로이스가 마침 거기에 있었고, 트랙터가 조종 불능이 된 걸 보았어. 그건 결국 뒤집혔고, 버트는 깔려 죽었어. 로이스가 다리만 부러진 건 운이 좋았지." 그녀는 내 얼굴을 살펴보고는 덧붙여 말했다.
 "저, 네 부모님 장례식 때 그가 와이오밍에 가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야. 막 병원에서 나왔을 때거든."
 나는 거대한 나무 밑둥 위로 말을 유도하는 데만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건 우리가 목장을 돌아보는 것하곤 별 상관이 없는 일 같은데?" "글쎄…"
 킴은 주저하며 로이스를 두둔했다. 
 "버트가 그렇게 트랙터를 제어할 수 없었던 건 이상했어. 처음에는 그가 심장발작을 일으켰으리라 생각했는데 검시결과는 그게 아니었어. 그리곤 기계에 뭔가 이상이 있었다는 게 판명됐어. 로이스는 말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손을 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하지만 그건 이상해. 여기서는 누구나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인데! 왜 누군가가 가엾은 버트를 해치려 했을까?"
 그녀의 어조는 이상했다. 마치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나도 그 느낌을 잘 알았다. 피터와 어머니에겐 내가 아는 한 적이란 없었다. 하지만 겨우 며칠 전에 점검한 차의 브레이크가 왜 갑자기 고장을 일으켰느냐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불안은 단지 내 우울과 충격의 산물로만 간주되었다. 내 생각에도 의사들이 아마 옳았을 것 같았다. 로이스의 의혹은 그의 과잉반응이 틀림없어 보였다.
 킴과 나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 이를 때까지 말없이 말을 몰았다.
 "계속 가도 목장 소유질 거야. 거의 이천 에이커가 돼."  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자부심도 깃들어 있었다.
 "전부 아보카도 나무야?"
 "아니. 낮은 계곡에는 시트러스가 있고, 많은 부분은 손도 대지 않았어. 로이스는 항상 새로운 식물을 갖다 심지. 물과 나무가 있으면 언젠가 살 사람에게 더 비싼 값을 부를 수 있을 테지."
 "하지만 왜 팔길 원해? 게이브는 아보카도가 녹색의 황금이라고 하던데." "아, 게이브."
 킴은 사촌을 일축했다.
 "아보카도로는 물세와 조세를 대부분 치러. 가격이 오를 때까지 소유지를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돼. 하지만 진짜 돈은 토지 투기에 있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을걸." 해는 거의 중천에 있었다. 나는 길 양켠에 있는 나무 그늘 쪽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숲 속으로 달리면 안 될까? 더 시원할 텐데."
 킴은 나를 한번 보고는 안장에 걸려 있는 꾸러미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자, 이것 좀 마셔. 로이스가 이걸 꼭 가져가라고 했지." 그것은 오렌지 주스였고, 시원하고 달콤했다. 내가 들이키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계속 말했다.
 "숲으로 말을 모는 건 금지야. 말발굽이 뿌리 부패증을 퍼뜨린다고 생각해. 그외에도 고양이만큼 큰 아보카도 쥐들이 있어.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그녀는 몸을 떨었다. 쥐라는 말을 듣자, 나는 서둘러 도로 한복 판으로 달려 나왔다. 킴은 소리내어 웃었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숲을 양분하는 흙길 중의 하나를 지나고 있었다. 길 저 끝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나를 보고 그 중 한 명은 북미산 토끼처럼 나무 밑으로 달아났다. 
다른 한 명은 우리를 지켜보면서 그대로 서 있었다.
 "저 사람들 오늘 이 숲에서 열매따기 하는 거니! 저기 멕시코인 두 명이 있어." 나는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한 사람밖에 안 보이는데!"
 킴은 태양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에밀리오, 쥬아니타의 아들이야."
 그녀가 말했을 때 그는 손을 흔들고 그늘진 숲 속으로 동료를 따라갔다.
 "그가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네. 로이스가 알면 혼날 텐데. 하지만 그가 고자질하지 않는다면 나도 말 안할 거야."
 그녀는 천진스럽게 웃었다. 뜨거운 7월의 태양은 나를 기진하게 했다. 마침내 고원에 도착했다는 건 구원이었다.
 "여기서 멈추자."
 정상에 도달했기에 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말에서 내렸고 바위 그늘에 말을 세워 두었다.
 전망은 굉장했다. 뒤로는 무성한 나무들이 짙고 푸른 강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저수지 너머로 작은 언덕과 계곡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곳곳에 수목이 울창했다.
 서쪽으로는 멀리 푸르스름한 덩어리가 보였는데, 킴은 그게 태평양이라고 주장했다. 
동쪽의 계곡들은 바위가 많고 건조했으며, 우리가 서 있는 곳처럼 엷은 분홍빛 흙으로 덮혀 있었다.
 "소유지가 저기 작은 언덕까지, 또 우리집을 지나서 북쪽까지 뻗쳐.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로이스는 언젠가는 이대로 유지하기엔 너무 비용이 많이 들 거라는 의견이야."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 언덕들이 죄 집으로 덮인다는 걸 상상할 수 있어?" 비록 광활한 공간에 익숙해 있었긴 해도, 이 모든 걸 실제로 소유한다는 생각은 나를 아찔하게 했다.
 "이걸 소유한다는 건 상상 못해."
 나는 내 어조에서 부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광활한 언덕과 계곡들을 계속 바라보았을 때, 나는 침묵이 부자연스럽게 길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상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 정직하게 말해서, 모른다는 거니?"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무얼?"
 뜨거운 태양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한기가 나를 스쳤다. 나는 그녀가 대답하기를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어조는 기묘하게도 사무적이었다.
 "이 목장의 반은 네 거야."


                   4


 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록 그녀가 자기 아버지의 내 아버지에 대한 감정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어머니와 내가 이익을 나눠 가져야 한다고 고집했던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지만, 나는 내가 믿을 수 없을 만치 부자라는 사실을 정말 실감할 수 없었다.
 "사실, 넌 우리보다 더 부자야."
 우리가 집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을 때 그녀는 지적했다.
 "이윤을 쪼개기 전에 우선 로이스가 상당한 봉급을 갖긴 하지만 우리 몫으론 생활비, 집유지비, 로라의 연금을 충당해야 해. 네 어머니는 일센트도 취하지 않으셨으니, 네 몫은 고스란히 있지. 돈을 불려 가면서 말야."
 "그건 거의 정당하지 못한 것 같아."
 "왜?"
 킴은 그 상황에 대해 아무런 악의를 품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네 어머니는 그걸 다 쓸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업에도 네 돈도 우리 것과 같은 양을 투자해. 그래서 이윤도 동등하게 나누는 거고." 생각해 볼 게 많았다. 내가 자라날 때 돈이 좀더 많았더라면 좋았을지 몰랐다. 하지만 피터에 대한 배려 때문에 어머니는 자기의 유산을 조금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피터가 베풀어 주는 것만으로도 철저히 만족하고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피터도 그런 태도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왜 로이스가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까지 내 돈에 대 한 책임을 계속 져 나가려 했는지는 미지수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나는 로이스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내 유산을 취급하는 데 대해서 물었다. 우리는 푸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버진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라고 하셨지. 난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 게다가 내가 네 어머니에게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벌써 말했지. 내가 거기서 벗어난 후에도, 난 여전히 각별한 관심만은 가지고 있었어."
 그는 내게 잔잔히 웃어 보였다.
 "그리고 넌 귀여운 아이였어. 그 얼굴을 그렇게 일찍 잃은 건 유감이야." 나는 푸울에 손을 넣어 물방울을 튕겼다. 때때로 내가 그를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될 때 그가 나를 지켜본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가 나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도 느꼈다. 나는 그렇기를 바랬다.
 비록 다른 관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로이스와 같이 잘생기고 풍채 좋은 사람을 매혹시킨다는 건 결코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게이브 역시 나를 매력적이라 여기는 것 같다는 데 대해 이제 나는 그렇게 기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로라와의 관계가 내게는 싫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쉽사리 낙담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킴과 말을 타려는 계획을 바꾸게 하려고 전화를 걸었고, 저녁 외출에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를 피했지만, 내 예민한 건강이 영원한 핑계가 될 순 없다는 점을 불안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저녁식사 후 곧 그가 목장에 나타났을 때도 난 놀라지 않았다.
 "들어와요, 게이브. 쥬아니타에게 커피나 후식을 가져오게 할까요?" 로라의 인사는 항상 그러하듯 침착하고 친근했다.
 "커피만, 고마워요."
 로라에 대한 게이브의 태도는 새삼 씻은 듯 초연했다.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노련한 가면이었다.
 게이브는 킴에게 하는 것처럼 내게도 아무렇게나 인사했고, 곧 로이스를 데려가선 낮은 어조로 뭔가 속살거렸다.
 얼마 후에 로이스는 킴과 나를 날카롭게 곁눈질했다. 내 가슴은 불편하리만치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밀고자야.'
 나는 킴의 단어를 빌려서 생각했다. 게이브는 오늘 오후 우리가 멋대로 구는 모습을 발견했고, 지금 그것을 로이스에게 고자질하는 것이었다.
 
 게이브가 가고 우리가 서둘러 그러나 품위있게 물러나려고 했을 때, 로이스는 한마디로 우리를 멈춰 세웠다.
 "기다려!"
 그는 명령했고 우리 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덧붙였다. 주저하며 우리는 홀에서 되돌아왔다.
 "너희들 오늘 아침 저수지까지 말을 타고 갔었다면서?" "그 고자질쟁이!"
 킴은 내 심중을 대변하듯 침을 튀기며 말했다.
 "게이브는 그만큼 너희들에 대해서 염려하기 때문인 거야. 너희들이 지금 숲 속으로 가는 게 위험하다는 점에 대해선 그는 나와 생각이 같아." "오, 로이스, 편집광적으로 굴지 마! 버트의 트랙터에 누군가 고의로 손을 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게 아냐!"
 로이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약간 긴장이 풀어져 킴 옆에 앉았다.
 "진작 말했어야 하는 건데. 우린 요즘 거기서 열매를 따는 중인데, 누군가 계속 엄청나게 도둑질을 해가고 있어. 누군가가 트럭을 몰고 와서 한번에 천 파운드쯤 되는 아보카도를 실어가고 있단 말야. 밤에만 그러는 게 아냐. 만일 너희들이 도둑질을 방해한다고 느끼기라도 하는 때엔…"
 킴의 망설이던 태도는 분개로 변했다.
 "그래,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도움이 될 만한 걸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그걸 갖고 도망갈 수 있지?"
 로이스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언제 무얼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아. 누군가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킴과 내 눈이 마주쳤다.
 "에밀리오가 거기 있었어. 그리고 신디는 누군가가 숲 속으로 달려가는 걸 보았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로이스는 사납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 다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믿을 수 없을 만치 끔찍한 것이었다.
 "그 두 놈들! 그것들은 산 채로 가죽을 벗겨야 돼! 틀림없군. 그놈들이 염탐질을 하는 거야! 지금 당장 에밀리오와 이야기를 해야겠어."
 "대단하시군. 그건 날 게이브만큼이나 대단한 밀고자로 만드는 거야." 킴이 말했다.
 로이스는 방을 나가다 말고 멈춰 섰다.
 "어린애같이 굴지 마, 킴. 달러를 위해서라면 멕시코 아이의 생 명을 끊는 일쯤 식은죽 먹기로 덤벼드는 놈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킴과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많은 말을 나누진 않았다. 나는 앞으로 행동을 매우 주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난 로이스의 마음속에 철부지로 찍히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킴은 다음날 아침 수업이 있었고, 로라는 분명히 늦잠을 자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식사는 혼자 해야 했다. 나는 쥬아니타에게 그녀를 불편하게 하는 데 대해 사과했다.
 "아니예요. 로이스 나리는 동이 트자마자 숲으로 가시고, 킴은 학교에 가기 위해 매우 일찍 일어나야 해요. 학교가 거의 도심 쪽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쉬고 건강해지기 위해 여기로 왔으니까, 가능한 한 오래 잠자는 게 중요하죠. 곧 맛있는 아침을 가져다 줄게요."
 아침식사는 훌륭했다. 그녀는 버섯, 피망, 치즈, 간 감자, 향기로운 쏘세지를 넣은 오믈렛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마말레이드를 바른 토스트와 차가운 오렌지 주스를 곁들여 그걸 모두 먹어치웠다.
 나는 비참했어야 했는데, 대신 유쾌한 원기로 가득차 있었다. 마침내 혼돈과 무기력으로부터 회복되고 있는 표시로 봐도 좋은가.
 나는 정원으로 나왔다. 그리고 산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뒷쪽 도로에 대한 로이스의 경고를 명심하면서, 나는 고속도로로 내려가는 굽이진 아스팔트길을 택해서 낡은 호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열쇠를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볼 생각도 안했지만,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것쯤 해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 장소는 역마차 역처럼 불안감을 주지는 않았지만 버려진 느낌이었고 고적해 보였다. 호텔은 잘 관리돼 온 것 같았다.
 나는 네모난 창문 중의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방 내부가 보였다. 한때 로비와 대합실로 쓰였던 게 틀림없었다. 양쪽에 두 개의 의자가 있는 커다란 석조 벽난로가 벽 한 켠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싸 놓은 소파가 창문 맞은편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고, 정문 근처에 우아한 층계가 위층을 향해 솟아 있었다.
 방의 분위기는 나를 따뜻한 감정으로 휘몰아갔다. 그건 마치 내영혼, 혹은 나의 어떤 중심부가 부드러운 융단에 싸이듯 안온한 만족함이었다.
 나는 크고 뜨거운 눈물이 창턱에 기대고 있던 손등에 튈 때까지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자동차 한 대가 도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창문으로부터 재빨리 비켜나서 내 뺨의 눈물을 닦았다. 
 운전자는 게이브였다. 그는 내가 인도에 서 있는 걸 보자 차를 멈췄다. 바로 그 순간엔 그나 다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차에서 내려 내 쪽으로 왔다. 
내 얼굴을 살펴본 즉시 쾌활하던 미소도 싹 사라졌다.
 "무슨 일이지? 울고 있었던 건가?"
 어리석게도 나는 부인했다.
 "건초열인 것 같아요. 지금도 무언가 꽃을 피울 수 있나요?" "페어헤이븐에선 무언가가 항상 피고 있지. 사철 다른 종류의 아 보카도가 펴요." 게이브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믿지 않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당신은 홀로 나다녀선 안 돼요. 함께 드라이브하지 않겠소?" "오, 아니예요. 난 혼자 있고 싶어요."
 나는 불편했다. 그의 금빛 섞인 눈동자는 내 말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날 피하고 있는 거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게이브는 계속 말했다. 
 "왜, 신디! 공항에서 오는 길에서 나는 우리가 친구가 될 거란 생각을 했었는데." 잠시 쉬었다가 그는 말했다. 
 "로라 때문이오?"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부분적으로는요."
 "로라와 난 때때로 데이트를 해요. 하지만 그녀는 심각해지길 원 치 않고 나도 그래요. 적어도 그녀가 마음쓰는 부분에서는. 따라서 그게 당신과 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방해가 돼서는 어리석다고 보는데."
 킴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게이브와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하지만 내 약혼자는 부모님과 함께 그 사고에서 죽었어요. 전혀 데이트 같은 걸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예요."
 적어도 그건 진실이었다.
 "그리고 게이브, 만일 당신이 괜찮다면, 난 오늘 아침 정말 혼 자이고 싶어요." 곤혹스럽거나 짜증스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들에게 거절당하는 데 그가 익숙치 않다는 걸 짐작케 했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회복했다.
 "좋아, 알 수 있어요."
 그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되돌아왔다.
 "아마 오늘 오후 집에서 보게 될 거요."
 그는 활기있게 차 쪽으로 가서 내게 재빨리 인사하고는 자갈에 박차를 가하며 떠났다.
 나는 노변으로 걸어나왔다.
 나는 그 고옥을 돌아다보았다. 게이브가 와서 내 은밀한 기분을 깨뜨려 놓긴 했으나, 그토록 강하게 느꼈던 달콤한 소속감을 잊지는 않았다. 나는 거의 창문 쪽으로 돌아갈 뻔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 순간의 안도감이 돌아오지 않는 걸 감수하기보다는 그걸 기억하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목장의 자동차길을 향해 천천히 거닐 때, 나는 거의 최초로 왜 내가 어린 시절을 완전히 기억할 수 없는가에 대한 강한 의혹을 가졌다. 나는 그 점이 유별나다는 걸 항상 의식해 왔지만, 어린애가 약간의 언어장애나 손재주 없음을 받아들이듯 그냥 그것을 받아들였었다.
 사실,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더라면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여기, 모든 일이 일 어났던 곳에 다시 있으므로, 나는 설명할 길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 과거에 대해 결코 이야기해 본 적이 없으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자갈이 깔린 도로변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건 마치 내가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과도 같았다.
 두려움의 물결이 나를 쓸고 지나갔고 곧이어 공포가 뒤따랐다. 어떤 끔찍한 일이었길래 그 오랜 세월 내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사 라질 수 있었을까? 온통 혼란에 빠진 채 나는 비틀거렸다. 고개를 들어 내 바로 맞은편 역마차 역을 보고서야 오래 전에 목장으로 가는 찻길을 지나친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건물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문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 름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달아나고 싶었어도 공포가 그걸 가로막았다.
 나는 알고 싶지 않았고,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피해 버릴 수는 없었다. 천천히, 내키지 않는데도 나는 길을 건너 그 건물 앞에 섰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를 제외하곤 완전히 고요했다.
 내 발은 땅바닥에 완전히 붙어 버린 것 같았다. 나는 포오치와 길 사이의 황폐한 땅을 힘들여 걸었다. 주저하면서, 그늘진 포오치 위에 올라섰다.
 방은 거의 비어 있었다. 한쪽 다리가 부러진, 길고 조잡하게 만든 벤치가 한 켠에 놓여 있었다. 한 모퉁이로 빗장을 지른 문이 보였는데, 아마도 킴이 얘기했던 감옥으로 통하는 길인가 보았다.
 곰팡이가 핀 듯한 담요 뭉치가 다른 켠 구석에 쌓여 있었고, 그걸 보았을 때 나는 팔을 따라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다른 때 바로 정확히 여기에 섰던 일이 있다. 하지만 내 어두워진 눈꺼풀 뒤에서 상을 끄집어 낼 수가 없었다. 대신 마치 아직도 내가 그 속에 빠져 있는 듯한 순전한 공포감이 쏟아져 왔다. 내 귀는 끔찍한 흐느낌으로 벙벙 울렸는데, 그것은 점점 커다란 비명소리로 변해 갔다. 그것은 나 자신 또한 흐느끼고 소리지르며 그 방에 있는 악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며 달아날 때까지 나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로이스가 차를 멈추며 내는 타이어 소리를 난 듣지 못했다. 내 가 감히 기억하지 않는 먼 과거로부터 정신없이 달려 나오는 동안, 그가 차에서 뛰어내려 쫓아오고 있다는 걸 나는 깨닫지 못했다. 그 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성소로 나를 데려가면서 나를 토닥이며 달 래고 있다는 것만을 희미하게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로이스나, 어디서 불러왔는지 모를 의사에게 말할 수 있었던 건 극히 적었다. 
내가 느낀 공포란 묘사할 수 없는 성격의 무엇 이었다.
 진정제는 나를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 나는 닥터 웨어의 지시를 따라 누워 있었고, 전기담요의 온기에 감사하고 있었다. 로이스는 근심스런 얼굴로 내 곁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좀 나아?"
 로이스는 동정적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집으려고 했다. 그는 재빨리 그걸 집어들고 내 마른 입술에 대 주었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한 확신을 담아 말했다.
 "모두에게 폐를 끼쳐 미안해요."
 "잊어 버려. 하지만 무엇이 혹은 누가 널 그토록 놀라게 했는지말해 줬으면 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게."
 나는 머리를 저었다.
 "로이스, 그건 그런 일이 아니예요. 단지 내가 무언가를 기억할수 없다는 게 문제예요."
 나는 말을 끊었다가 힘들여 물었다.
 "역마차 정류소가 내 아버지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아니, 왜?"
 내 질문에 대한 로이스의 놀라움은 곧 어렴풋한 이해로 바뀌는 듯했다. 
 "이 공포가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나?"
 "난… 잘 모르겠어요."
 나는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할 수 없는 답답함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어렵게, 내가 아버지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내가 무얼 기억한다는 건 아녜요. 하지만 내가 그 모든 걸 내 머릿속에서 몰아내 버린 데는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일 거예요."
 "가엾게도."
 로이스는 손을 뻗쳐 내 이마에 흩어진 머리 다발을 뒤로 쓸어넘겨 주었다. 몹시 감촉이 좋았다. 부드러웠으며, 확고하고 따뜻했다.
 "그건 참 끔찍한 일이었어. 하지만 너는 영원히 잊을 수 있을 거야. 네 아버지의 죽음은 사고였어, 신디. 그는 시내로 차를 몰고 오다가 벼랑을 넘어 굴렀고, 죽었어." 그의 말은 전기충격처럼 내게 와 닿았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격렬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그가 어머니와 피터, 데이빗과 똑같은 끔찍한 방식으로 죽을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다시 격렬히 떨기 시작했다.
 로이스는 내 손을 잡고 달래며 말했다.
 "그게 믿기 힘든 우연의 일치로 보일 거라는 건 알아." 그는 주저했다. 
 "넌 네 아빠와 함께 그 차를 타고 있었어. 네가 죽지 않은 건 기적이야. 우리가 마침내 그 차를 찾아냈을 때 짐은 죽어 있었고, 너는 쇼크 상태에 있었어. 와이오밍을 향해 떠날 때도 거기서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었지. 사실, 그게 네 어머니가 널 거기로 데려간 이유지. 그 사고에 대해 질문을 받기만 해도 히스테리를 일으켰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라라미에서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있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어느 면으로는 도움이 되었어요. 나는 스스로도 더 이상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 사고를 깊이 묻어 버렸으니까요."
 "아마도… 역마차 정류소보다는 호텔이 신디의 기억을 움직이게 했을 거야." "호텔이오?"
 "그래 넌 거기에 갔었다고 했지. 그건 한때 네 집이었어. 우리는 네가 거기 살 때 그대로 거길 보존해 두었어. 아버지는 항상 네가 언젠가 여기 머무르기 위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셨어."
 로이스는 내 손을 꼭 쥐어주고 일어섰다.
 "쉬도록 해. 그 사고는 끔찍한 경헝이었지만, 네가 어떤 식으로 든 비난받을 점은 없었어. 자, 좀 자도록 해 봐."
 
 진정제를 진하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달아났다. 게이브가 그 호텔이 한때 우리집이었다는 걸 말해 주지 않은 건 이상했다. 내가 그것에 그토록 마음을 빼앗겼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 호텔에서 배어나던 다정한 온기를 기억했다. 그것이 내 기억을 움직였다는 점에 대해선 로이스가 옳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역마차 정류소에 느꼈던 공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것은 무언가 전적으로 사악한 것에 대한 인식이었다.
 나는 떨면서 담요 속으로 몸을 묻었다. 이제 적어도 내 반복되는 악몽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 사고를 겪었고, 꿈은 틀림없이 데이빗과 부모님의 유사한 죽음에 의해 야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모든 심리학 논문에 따른다면, 내가 그 숨은 원인을 이해했으므로 이제는 그 악몽이 사라져야 했다.


                   5


 그러나 그날밤 악몽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건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생생하고 위협적이었다.
 내 병의 증세를 되돌려 온 것은 역마차 정류소에서의 경험이라기보다는 꿈의 재발이었을 것이다. 혹은 양자가 결합된 결과이거나. 이유가 무엇이건, 다음 며칠 동안 나는 마치 마개가 꼭 채워진 유리 항아리에 갇혀 있는 것처럼 지냈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대화를 하는 걸 볼 수 있었으나, 어느 것도 나와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킴이나 로라는 항상 내 의식의 주변 어딘가에 떠돌고 있었고, 로이스는 번번이 내게 말하려 애쓰며 계속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게이브도 전보다 자주 그 집에 왔고, 나는 그의 근심스럽고 질문하는 듯한 표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사실, 마침내 유리 감옥이 해체되는 듯했을 때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은 게이브였다. 
나는 푸울 근처의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한바탕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게이브를 흘낏 보았는데, 그의 긴 갈색 몸이 내 곁의 의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고, 그의 담갈색 눈동자는 따뜻하게 응답해 주었다.
 "안녕, 이제 돌아온 거요?"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내가 어딜 갔었어요?"
 하지만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당신이 어딜 갔었는지는 정학히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없었어요. 이제 돌아왔으니까, 한동안은 머무를 직정이오?"
 "난… 그러길 바래요."
 나는 갑자기 수줍음을 느꼈다.
 "난 이… 병에 대해 별 통제력이 없는 것 같아요."
 그는 동정에 차서 머리를 흔들었다.
 "로이스는 역마차 정류소의 무언가가 당신을 놀라게 했다고 말했는데." 게이브가 이 말을 조용히 했다. 그러나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덧붙였다.
 "나는 그에게 그곳을 헐어 버려야 한다고 말했지. 너무도 많은 좋지 않은 친구들이 거기서 방황하거든."
 나는 그가 그 화제를 그만두기를 절박하게 바랬으나, 그는 그러 지 않았다.
 "로이스가 꼭 해야 할 일은 그걸 국가 유적지 기록부에 올리는 거요, 호텔 역시 그렇고. 그것들은 백년 이상 여기 있었고, 이 지 역 역사의 일부거든. 그는 그곳을 관광여행거리로 만들 수도 있을 텐데."
 나는 호텔에서 느꼈던 따뜻함을 기억했고 여행자들이 거기를 배회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코를 찡그렸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게이브가 덧붙여 말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소? 호텔이 당신 집이었기 때문이오?" 주저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브, 내가 그 앞에 서 있었을 때 당신은 왜 그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죠?" 그는 주저하다가, 고백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당신이 당황할까 두려웠어…"
 그랬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가 옳았다.
 "그렇게 괴로운 표정 짓지 말아요."
 게이브는 손을 뻗쳐 위로하는 듯이 내 손 위에 겹쳤다.
 "당신에겐 무언가 변화를 줄 새로운 게 필요해. 오늘 오후에 나랑 샌디에고에 가는 게 어때요?"
 나는 게이브를 좋아했다. 하지만 오후 내내 그와 단둘이 있을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단지 로라와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늦추지 않을 태세였다. 그때 다행히 킴과 로이스가 합류했다. 
 로이스의 눈은 곧 내 얼굴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안도감으로 넘쳤다.
 "나아졌군."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어?"
 킴의 밝은 눈동자는 호기심에 빛났다. 그녀는 내가 질투를 느낄 정도로 생생하고 활기에 넘쳤다.
 "게이브가 내게 올드 타운에 가자고 얘기했었어."
 "멋진 생각이야! 모두 함께 가는 게 어때? 우리들 모두 몇 년 동안 가보지 못했는데."
 킴은 머뭇거리며 나를 보았다.
 "만일 네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말이야."
 "물론이지. 외출해서 무언가 다른 걸 보고 근심을 털어 버리는 건 좋은 거야. 하지만 난 집단 초대를 한 게 아냐, 킴. 신디와 나 만을 이야기한 거야." "내 생각에는 좋지 않을 것 같아."
 로이스가 갑자기 말했다.
 "신디는 요 며칠 동안 거의 신경이 서 있었으니까,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해."
 게이브는 침착하려 애를 썼으나, 어느 틈에 화를 내고 있었다.
 "왜 신디에게 맡겨 두질 않지? 결국 이건 그녀 삶의 문제야." "신디는 지금 당장 그런 결정들을 할 정도로 감정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로이스는 완강했다.
 마치 그는 갑자기 내 적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소리치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안 나왔다.
 게이브는 일어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우뚝 서 있었다. 게이브는 이제 공공연히 화를 냈다.
 "용서해, 닥터 크리스토퍼! 언제부터 심리학 학위를 갖고 있었지?" "그만둬. 신디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몰라?"
 그들은 둘 다 나를 보았다. 내 얼굴에 고통의 흔적이 명백했던 게 틀림없다.
 "좋아. 네 방식대로 해, 로이스. 하지만 신디, 이 온실에서 나와서 즐기고 싶을 땐 언제나 내게 전화를 해."
 게이브는 테라스 밖으로 걸어나갔고, 집의 어두운 내부로 사라졌다.
 그가 가고 난 뒤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킴이 어설프게 웃으면서 침묵을 깼다.
 "게이브는 무엇에 대해서도 저렇게 화를 낸 적은 없었는데." "아마 내가 너무 강하게 나왔나 봐."
 로이스가 인정했다.
 "킴, 자리 좀 비켜 주겠어? 신디에게 잠깐 할 말이 있어." "아뇨, 기다려 줄 수 없나요, 로이스?"
 나는 일어날 것처럼 움직였다.
 "난 더워요. 지금은 수영하고 싶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로이스는 킴에게 다시 한번 시선을 던졌고, 그녀는 곧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내 맞은편 의자 끝에 앉았다.
 그의 눈은 내 얼굴을 살폈다.
 "화가 났군. 미안해."
 "화내면 안 돼요?"
 나는 쏘아주었다.
 "당신은 마치 내겐 아무 분별력도 없다는 듯 멋대로 행동해요! 내가 특별히 게이브와 가고 싶었다는 건 아녜요. 하지만 결정은 내 게 달려 있었어요." 이 말은 나 자신도 놀랄 만치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로이스 역 시 놀라는 것 같았다.
 "신디, 난 결코 널 그렇게 느끼게 할 의도는 없었어! 난 단지 게이브가 네게 너무 빨리 뭔가를 강요한다고 생각했어."
 "그는 내게 강요했어요!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왜 당신들 모두는 날 가만 내버려 두질 못하죠? 왜 당신은 백만년 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걸 그만두지 못해요? 난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이해 못해요? 난 기억하길 원치 않아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로이스가 갑자기 내 곁에 앉아서 나를 끌어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나는 계속 흐느꼈고 그는 위 로의 말을 속삭이며 부드럽게 내 머리를 만졌다. 하지만 내 울음 이 마침내 가라앉았을 때, 그는 다시 내가 가장 잊고 싶어하는 그 늘진 부분들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그러나 사정없이.
 "넌 우리 모두가 네 기억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어. 또 누가 거 기에 대해 널 괴롭혔지? 게이브?"
 "아니, 게이브가 아녜요. 그는 단지 호기심이 있을 뿐이에요. 그건…" 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로라는 분명 아니겠지? 킴이야?"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태양 볕에 따가운 눈을 감았다.
 "그럼 라라미에 있는 누구였음이 틀림없군. 아마 정신과 의사였다고 생각되는데. 그 사람 이름이 뭐지? 데이튼?"
 "데이비스, 맬콤 데이비스 박사."
 단지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눈으로 뒤덮인 산처럼 멀 리, 책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그가 기억났다.
 "그는 내가 나아지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기억하길 원치 않는 무언가를 직면해야만 한다는 점을 계속 암시했어요."
 다시 눈물이 솟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나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수습하고는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계부와 나의 관계에 무언가 잘못된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예요! 피터는 내게 잘해 줬고, 난 어머니와 데이빗을 사랑한 것만치 그를 사랑했어요."
 로이스는 자기 의자로 돌아가 누웠다. 그는 그의 마지막 말을 설명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다. 망설이며 나는 물었다.
 "왜 그렇게 말해요?"
 "여기서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건 분명해. 처음에 난 네 아버지와 겪은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그 이상의 뭔가가 있을 거야. 신디, 꿈에 나타나는 것 말고 그날 있었던 게 기억나? 전이나 후에 일어난 무슨 일이라도?" 내 가슴은 불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기억 못한다고 했잖아요! 로이스, 내게 왜 이러죠?"
 나도 모르게 나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정말 날 미치게 하려는 건가요?"
 그는 재빨리 일어났다. 
 "그건 내가 가장 원치 않는 일이야. 하지만 진실을 아는 편이 낫지 않겠어? 신디, 내 생각에는 오래 전에 무슨 일이 네게 일어났어. 널 너무도 놀라게 해서 스스로 깊숙이 묻어 버린 무슨 일이. 만일 네가 그걸 끄집어 내지 않는다면, 그 파편들이 일생 네 정신의 표면으로 계속 떠오를 거야. 그리고 넌 결코 다시는 완전히 좋아질 수 없을 거고."
 그는 내 얼음같은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게 무슨 일이었든, 그건 여기, 쉐도우 크리크에서 일어났어." 그의 말은 내 몸을 바람속의 나뭇잎처럼 떨게 했다.
 "아마도 라라미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나아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기억은 계속 네 무의식 속에 남아서 널 괴롭힐 거야. 그러나 여기, 그 일이 일어난 곳에선―"
 그는 설득하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여기서, 네가 의도적으로 네 자신을 연다면, 모든 것이 네게 돌아올지도 몰라. 그러면 너는 자유롭게 돼, 신디. 진정 자유롭게 돼."
 그의 그을린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음처럼 푸른 눈동 자는 거의 최면적 효과를 발하며 내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좋아요. 하지만 난 그 역마차 정류소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로이스. 그러라고 하진 마세요."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 외엔 무얼 하라고 요구하진 않겠어. 할 수 있을 것 같아, 신디?"
 여전히 그 눈의 힘에 사로잡힌 채, 나는 속삭였다. 
 "노력할게요."
 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에 동의했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게이브는 다음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도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때문에 로라가 내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는 그녀가 집을 매우 효율적으로 꾸려가고 있으며 가족이 요 구하는 것을 조용하고도 능력있게 돌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 점에 대해서 킴이 로라의 공을 인정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녀와 의붓자식들 간에는 항상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내 상태가 나아지고 다시금 내 자신을 넘어선 것들을 의식하게 됐을 때, 그녀가 나만 치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어헤이븐에 친구가 많이 있나요?"
 어느 날 오후 나는 과감히 말을 걸었다. 우리는 수영을 한 후 의자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왜 묻지?"
 그녀가 내게 던진 시선은 멀고도 차가왔다. 나는 단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으나, 그건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녀에 대해 점점 호기심을 느꼈다. 만일 게이브와의 로 맨스가 부분적으로는 그녀 자신이 선택해서 아무런 결과도 이루지 못한다면, 앞으로 남은 삶을 그녀는 어떻게 하려는 건가? "읍내로 자주 나가지도 않고, 누굴 불러내지도 않는 것 같아서요." 나는 다소 서투르게 말했다.
 "그리고 그게 저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요. 누군가가 항상 나와 함께 있을 필요는 정말 없거든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로이스는 자기의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지금으로는 그 책임에는 너도 포함돼. 하지만 이제 네가 훨씬 나아진 것 같으니까, 내일쯤 시내로 가서 오랜 친구를 만날 수도 있겠지. 함께 가고 싶어?"
 나는 그 초대가 예의상의 제스쳐라는 걸 알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안도의 빛이 그녀의 부드러운 표정을 희미하게 스쳤다. 그래서 나는 '오랜 친구란 게이브가 아닌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쥬아니타가 테라스로 나왔다.
 "전화입니다, 신디 양. 게이브 씨가 통화하고 싶다는데요." 나는 로라를 일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한 표정은 사라졌고 입술이 일그러져 있었다. 머뭇거리면서 나는 안쪽으로 갔다.
 "신디! 어떻게 지내요?"
 게이브의 목소리는 보통 때의 땅땅 소리나는 열광을 담고 건너 왔다.
 "나아졌어요, 게이브."
 같은 어조로 대답하지 않기란 힘들었지만, 로라가 망을 댄 문을통해 들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의식하고 있었다.
 "회복하는 데 더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에 대해선 로이스가 옳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 지금은 괜찮지?"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해변으로 저녁 먹으러 가는 게 어때요? 당신도 이젠 샌디에고의 밤공기에 좀 길들여질 때가 되었는데."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즉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테 라스에서 로라가 듣고 있는 한.
 "다음 기회를 주세요, 아마 며칠 후면 가능할 거예요."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그는 그러자고 말했다. 어조는 평정했으나 노여움이 깔려 있었다. 
 "며칠 후에."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나는 천천히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고 밖으로 나왔다.
 로라는 여전히 의자 위에 누워 있었다. 가느다란 갈색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 죄의식을 느꼈다.
 "게이브예요. 내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어했어요."
 나는 의자에 앉으며 불필요하게 변명했다.
 "그는 얼마나 열심인지! 그리고 어느 쪽이 유리한가를 벌써부터 알아차리고 있으니 얼마나 게이브다워!"
 나는 그녀의 악의에 깜짝 놀랐다.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녀의 적나라한 질투의 시선은 나를 의자에서 옴쭉달싹 못하게 했다.
 "넌 젊어. 그리고 매력적이지. 또 몇 주일 후면 돈더미에 앉을 거구. 장래를 똑바로 볼 줄 알다면 어떤 남자가 그 모든 걸 소유한다는 생각을 물리칠 수 있겠어?" 나는 아직 나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생각한 다음, 비록 그리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이브는 삶의 물질적인 부분에 대한 불타는 욕망을 결코 숨긴 적이 없었다. 만일 킴이 말했던 대로 그가 연금 때문에 로라와 결혼할 의향이 있었다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진정 인상적인 유산에 대해서 얼마나 더 큰 욕망을 품고 있을 것인가? "그 생각을 한번도 안해 봤어? 아직 어린애군 신디!"
 내 표정을 보고 로라는 웃었다. 그 소리는 추했다.
 "거기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걸! 오직 부유한 남자만이 네 결혼 상대자로서 의심을 면할 수 있어. 하지만 자신을 충분한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난 결코 본 적이 없어."
 나는 항의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뿐이다.
 "로이스가 있잖아요!"
 "로이스! 그는 크리스토퍼 가 재산을 불리느라 연일 눈코 뜰새없이 일해. 더불어 네 것도 말야. 너와 결혼만 한다면 문제는 얼마나 간단해지겠어. 하룻밤 새 소유물이 세 배가 될 텐데 말야."
 그녀는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충격받은 얼굴 하지 마. 그의 의도가 그렇다는 이야긴 아냐. 탐욕에 굴복하기엔 그는 정말 너무 순수하지."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좋은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이란 너를 절벽에서 굴러떨어지게 하거나 뭐 그런 걸 테지. 네가 생일이 되기 전에 죽는다면, 그와 킴이 그걸 전부 상속하게 될 거야."


                   6


 로라는 로이스에 대해서 한 말에 거의 즉시 미안함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또한 내가 그 말을 로이스에게 옮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점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난 즉각 그녀의 말을 시샘 탓으로 돌렸고 내 머릿속에서 제거해 버렸으니까. 그렇지만 로라의 암시는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나는 이 세상에 나 외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차갑고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 사고 이래로, 이런 고립감은 한 차례 우울의 전조였다. 그 느낌을 물리치려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으나, 덤불 숲에서 일어나는 아침 안개는 벌써 계곡을 떠나고 있었다. 진주 분홍빛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고, 공기는 시원하고 촉촉한 것 같았다.
 갑자기 말을 타고 싶어졌다. 일순도 주저하지 않고, 나는 옷을 껴입고 부츠를 잡아당겨 신었다. 그리고 쫓기는 사람처럼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래층으로 살금살금 내려가는 동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쥬아니타는 벌써 부엌에 있었다.
 "신디 양!"
 그녀는 놀라서 소리쳤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몸이 좋지 않은가요?"
 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 보였다.
 "기분은 좋아요, 쥬아니타. 단지 너무 일찍 잠이 깨어서, 너무 더워지기 전에 말을 타려구요."
 그녀는 공감하듯 미소지었다. 
 "어서 아침식사를 마련해 줘야겠군요."
 "토스트 한 조각만 부탁해요. 그리고 오렌지 주스 한 잔. 말을 타고 난 다음 진짜 아침을 먹겠어요."
 쥬아니타는 나를 걱정해서 약간 투덜대기는 했지만 토스트와 주스를 준비해 주었다. 
나는 카운터에 서서 그걸 먹고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나왔다.
 
 마구간과 목초지에 이르는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갔을 때, 아직 진주빛 광채를 띤 작고 부푼 구름이 동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꼴을 한 목초지에는 말 네 마리가 나와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은 풀을 뜯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기대하듯 나를 보았다. 내가 부드럽게 휘파람을 불자 그들은 갈기를 휘날리며 울 타리를 넘어와 내가 주는 각설탕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내가 전에 탔던 밤색 말 미스터는 마구간에서 가져온 재갈과 고삐를 온순하게 받아들였지만, 킴의 팔로미노와 다른 두 놈들은 선택받지 못한 데에 대한 실망 탓인지 사납게 히힝거렸다.
 나는 덤불 숲으로 이르는 흙길을 따라 달렸다. 내 마음 한 켠에는 역마차 정류소를 지나서 달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아침의 광휘를 망칠 어떤 것도 상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집과 평행해 있는 첫째 교차로에서 선회했다. 나는 무겁게 잎이 달린 아보카도 나무가 어떤 감시자로부터도 나를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미스터와 내가 나무들 사이로 조 용히 움직일 때, 마치 우리가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피조물인 것 같았다.
 내 방의 창으로부터, 덤불숲이 목장 뒤로 끝없이 뻗어 있는 것을 나는 보았었다. 그래서 그 한계가 너무도 빨리 온 것에 대해 나는 놀랐다. 완만하게 경사진 길도 끝났다. 그러나 그 너머로 작은 언 덕으로 이르는 험하고 바퀴자국 난 통로가 있었다. 미스터는 그 길로 가는 데 익숙한 것처럼 오솔길을 향해 갔다. 
 해는 오래 전에 동쪽 산맥의 정상에 올라 있었고, 엷은 안개자 락을 흩어 놓고 있었다. 나는 이미 불편할 정도로 더위를 느끼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킴이 협곡이라 부른 깊은 계곡에 이르는 오솔 길을 따라갔다. 가파른 협곡의 경사면이 내 몸을 가릴 만큼 깊어졌을 때, 나는 플란넬 셔츠를 벗었다. 허리 둘레에 소매로 셔츠를 묶은 다음, 보온병을 풀어 오렌지 주스 한 컵을 마셨다. 미스터는 그의 몫이 어디 있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오렌지 주스가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드문드문한 군엽과 바위 땅을 둘러보았다. 아침의 침묵 속에서 잔잔히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처음에는 나의 상상에 틀림없으리라 여겼다. 이 건조한 땅에는 물을 파이프로 끌 어들여야 한다고 킴은 말했었고, 가장 가까운 숲이나 관개시설로부터도 적어도 반 마일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미스터를 조용히 세웠을 때, 희미하지만 틀림없이 콸콸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작은 샘물을 발견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약간 흥분을 느끼면서 나는 말을 협곡 속으로 더 재촉해 갔다. 콸콸하는 소리는 조금 커졌는데, 녹회색 잡목 숲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말에서 내려 무성한 숲 속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쑥은 거의 가슴 높이로 컸고, 그 뻣뻣한 가지가 내 벗은 팔을 할켜댔다. 도저히 그 숲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겠다고 포기했을 때, 가지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고 나는 거기에 시선을 집중했다. 전방 몇 피트에, 플라스틱 관개 파이프의 짧은 조각이 붉으레한 땅으로부터 불쑥 솟아 있었다. 그 열린 구멍으로부터 물줄기가 작지만 꾸준히 흘러나왔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리고는 눈을 돌려 물이 가는 길을 따라갔다. 그것은 잎이 크고 짙은 녹색 식물 주위의 깊은 웅덩이 속으로 바로 흘러들었다. 거기 서 물은 작은 소로를 통해 다른 식물과 웅덩이로, 또 다른 것에게로 흘렀다.
 이 숲의 중심부에는 전혀 낯선 식물이 심겨 있었다. 그리고 이 식물들은 그 앞의 것에서부터 방출되는 물을 연쇄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사실상 교묘하고 정교한 관개시설이었고,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나는 오싹해졌다.
 다음에 떠오른 생각은 이곳은 내가 더 이상 지체할 장소가 아니 라는 것이었다. 나는 돌아서서 미스터에게로 갔다. 한두 걸음 걷자 딱딱 하는 큰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내 부츠가 뭔가 무거운 것을 살짝 민 것을 느꼈다. 내려다보고 나는 얼어붙었다. 기분 나쁘게 보이는 짐승용 덫이었다. 나는 거의 치일 뻔했고, 이내 진땀이 솟았다.
 쑥에 긁히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미스터에게로 힘들여 나아갔다. 고삐를 잡으려 손을 뻗쳤을 때, 자갈들이 후두둑 하며 계곡의 가파른 경사를 따라 굴러 내려왔다. 말은 놀라서 울며 뒷걸음쳤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흥분해서 간신히 말고삐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바위가 많은 가장자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위의 공간은 텅 비어 있었으나, 나는 바로 조금 전에 검은 머리가 비쳤었다는 분명하고 무서운 느낌을 받았었다.
 내 가슴은 심하게 뛰었고 공포로 목이 죄었다. 나는 미스터의 등에 뛰어올라 그를 돌려세웠다. 울퉁불퉁하고 바위 투성이인 땅을 아랑곳 않고 우리는 계곡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목장에 이르는 오솔길로 미친 듯이 뛰었다.
 말의 갈기 위로 낮게 엎드렸을 때, 내 등에 총알이 박히는 끔찍한 연상이 엄습해 왔다. 뒤를 흘낏 보았지만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두려움이 그 어둡고 불길한 이미지를 생각해 낸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애썼다. 그러면서 마구간 쪽 언덕에 이르는 비포장 교차로에 거의 닿을 때까지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있는 곳과 집 사이에 있는 아보카도 나무들 그늘 속으로 미스터를 끌어들인 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려 애썼다. 내가 발견한 것의 결과를 충분히 생각할 시간은 없었지만 누 구에게도 그걸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결국 그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던 데는 크리스토퍼네 땅이었고 거기에 물을 대고 있었던 것도 틀림없이 크리스토퍼네 물이었다. 당연히 돈이 들어갈 곳도 크리스토퍼네 금고 속일 것이다. 나는 로이스의 친절한 태도와 그의 짙은 푸른 눈동자의 솔직한 표정을 생각했다. 나는 그가 이 문제에 관련되었을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겨우 6시 30분이었고, 아직 나를 찾지 않을 만 큼 충분히 이른 시각이었다. 가능한 한 나무들에 가려지도록 하면 서 경사를 재빨리 올라가 어두운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미스터의 안장을 벗겨냈을 때, 그 몸이 지나치게 뜨겁고 거품으로 얼룩져 있는 걸 깨닫고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목초지에 그를 풀어놓기 전에 몸을 식혀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쥬아니타가 내가 말 타러 갔었다는 걸 알고 있는 바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단지 내가 어디에 갔었는지 아무도 모르기만을 바랐다.
 미스터를 충분히 돌봐 주었을 땐 거의 7시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두드리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거기 있었군, 신디! 널 찾으러 사람들을 보낼 참이었는데." 나는 죄책감에 떨며 몸을 돌렸다. 로이스가 마구간 문 쪽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로 보아 반쯤 농담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요! 내가 그렇게 오래 나가 있었나요?"
 '그는 내가 들어오는 걸 봤을 리 없어.'
 나는 재빨리 결정했다.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공포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 전날 이후로…" 그는 내 어깨를 짚으려고 손을 내밀다가 소리질렀다.
 "아니, 너 떨고 있잖아! 뭐가 널 또 놀라게 했어?"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내 생각으로는 극히 자연스럽게.
 "말을 타고 나니 너무 배가 고파서 말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태예요. 아침식사에 너무 늦진 않았죠?"
 "지금 쥬아니타가 준비하고 있어."
 그는 내 팔을 끼고 문 쪽으로 데려갔다.
 "스테이크와 달걀을 먹을 수 있을 거야. 그거면 될까, 아니면 가 까운 애완동물 상점으로 연한 암망아지살을 사러 보낼까?"
 나는 몸을 떨고는 힘없이 말했다.
 "제발, 내 식욕을 온통 잃게 만들겠군요."
 
 식당에는 상이 차려져 있었다. 로라는 보이지 않았지만 킴은 벌 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 그녀는 코를 흥흥거리 고는 내 옷에서 나는 말 냄새에 코를 찌푸렸다.
 "오우! 냄새를 맡으니, 굉장히도 말을 탄 게 틀림없어. 대체 어딜 갔었어?" 그녀는 김이 나는 비스킷 하나를 쪼개서 버터를 발랐다.
 "아, 호텔 뒤로 개울을 따라서."
 나는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좀 당황했다.
 "냄새가 나서 미안해. 올라가서 어떻게 처리할게."
 "오래 걸리면 안 돼. 이 비스킷은 지금 딱 좋아."
 계단을 향해 달려갈 때 그녀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내 방에 닿자 나는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잠시 서 있었다. 내가 거짓말한 걸 킴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옷을 벗고 잠시 사워를 할까 생각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대신 비키니를 입고 서둘러 얼굴과 손에 덮인 먼지를 씻어낸 후 허 벅지까지 오는 테리 천으로 된 겉옷을 걸쳤다. 곤두선 신경을 달래는 데는 수영만한 것이 없다는 걸 이미 배웠기에 식사 후에 바로 수영하기로 정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쥬아니타는 식탁에 달걀 접시를 놓고 있었다. 식욕이 나기엔 너무 지친 상태였으나, 열성을 가장하고는 스테이크에 달겨들었다. 처음 몇 입을 먹고 나자, 나는 정말로 탐욕스럽게 먹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로이스는 만족스러운 듯 보다가 말했다. 
 "좋아. 그렇게 계속 먹는다면 킴처럼 원기왕성해지겠어." 그는 시계를 보았다.
 "참, 킴, 너 늦지 않겠니?"
 킴은 나태하게 기대앉아서 주스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오늘은 안 갈 거야. 오늘 아침은 수업이 하나뿐이고 오후 강의는 취소됐거든. 그래서 집에 머물러 신디와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어.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은 깔끔한 레스토랑이 시내에 있어. 점 심 먹으러 거길 갈까 해."
 "점심이라고!"
 나는 일부러 놀란 듯 신음했다.
 "이렇게 먹고 난 다음 어떻게 점심을 생각할 수가 있어?" "샐럿은 먹을 수가 있어."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샐럿 전문이거든. 게다가 지금부터 점심 시간까지는 많이 남았잖아. 또 푸울에서 아침 먹은 걸 소화시키면 될 테고. 네가 페어헤이븐을 구경할 마침 좋은 때야." 나는 빠져 나갈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쉐도우 크리크를 따라 말을 달렸다고 거짓말했을 때 킴이 나를 갑작스레 올려다보던 걸 잊지는 않았다.

                   7


 킴 역시 그 순간을 잊지 않았다. 비록 나는 얼마 동안 그녀가 잊었으리라 생각했었지만.
 우리는 일광욕을 하고 푸울의 찬물 속에서 수영을 했다. 그녀는 대학의 강의, 거기서 사귄 친구들, 브라이언과 그녀 표현에 따르면 그의 머저리 친구들에 대해 연신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로라가 녹색 린넨 옷차림으로, 외출한다는 걸 알리고 떠난 다음엔 그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헐뜯는 어조는 아니었다.
 "어떻든 그녀는 마지막 2년간 아빠를 행복하게 해주었어. 어머니를 사랑하듯이 아빠가 그녀를 사랑한 건 아냐. 하지만 내 생각엔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아." 나는 나보다 1년 이상 어린 킴에게서 퍽 성숙한 체취를 느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동안 로라가 게이브와 빈둥거리고 다녔다곤 생각지 않아."
 나는 로라가 급기야 게이브와 함께 점심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었다. 어제의 그 전화 사건 후 로라는 계속 내 시선을 피 하고 있었다.
 "네가 그녀를 무조건 비난할 순 없다고 생각해. 결국 누구든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해. 네가 꺼리는 점은 그가 네 사촌이기 때문 이니?"
 "사실 그는 우리 사촌도 아냐. 그는 육촌이나 팔촌 뭐 그 정도야. 그는 양친이 이혼하는 통에 자기 할머니인 우리 아주머니와 살려고 여기 왔던 거야. 거기 혼자 있는 건 좀 외로웠나 봐. 그래서 여기 와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 지금도 그렇고." 그녀는 내 곁의 긴 의자에 누웠다.
 "아니, 날 괴롭히는 문제는 로라가 여전히 여기 산다는 거야. 다른 남자와 사귀면서 내 아버지의 아내라는 것에 따르는 모든 걸 누리면서 말이지. 왜 나가서 스스로 새 삶을 만들지 않니?"
 나는 눈을 감았다. 혼자 힘으로 새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은 말만큼 그렇게 쉽지는 않다. 킴은 잠자코 있었고,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버릇없는 아인가 봐. 난 항상 누가 날 돌봐 줄 거라는 걸 당연히 생각해. 로이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의 말이 갑자기 너무도 외롭게 들려서 나는 짐짓 힘이 넘치는 양 일어나 앉았다. 
 "자, 우리가 이제 뭘 해야 할지 난 알아."
 나는 활달하게 말했다.
 "네가 말한 그 굉장한 식당을 방문해야 해. 난 벌써 샐럿 생각이 나기 시작했어."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나서야 그날 아침의 발견에 대해 되씹어 볼 여유가 생겼다. 
틀림없이 쑥 아래 용의주도하게 가리워진 식물은 마리화나였다.
 그걸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최근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은 누구나 그 식물에 익숙했다. 비록 사진으로나마 가장자리가 톱니 모 양인, 손가락처럼 잎이 갈라진 그 식물, 그건 틀림없이 마리화나였다.
 나는 라라미에 있는 내 친구들 중 몇몇이 비밀리에 작은 보호용 기에 그걸 심어 놓고 있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특별 히 나를 괴롭히진 않았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내가 본 식물은 상 업용으로 재배되는 게 틀림없었다. 바로 그 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걸 기르는 사람이 로이스일 가능성이 있을까? 내 마음은 그런 가능성을 거부했다. 
그러나 누구든 덤불숲과 미개간지로 들어가지 말라던 그의 주장은 이걸로 설명되어야 할 것 같았다. 아보카도 도둑들에 대한 그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나는 재판도 없이 그를 정신적으로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이내 몸서리를 치며 나는 이 생각을 지웠다.
 '아마 그는 그 소구획이 거기 있는지조차 모를 거야.' 나는 자책했다. 나는 혹시나 킴은 마리화나에 대해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킴의 작고 흰 토요타를 타고 우리는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처음 몇 마일을 가는 동안 그녀는 잠자코 운전에만 주의를 쏟았다. 나 또한 조용히 있었다. 왜냐하면 그 오래 된 호텔을 지나칠 때 전날 거기를 방문했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느꼈던 온기의 기억에 힘입어, 나는 긴장을 풀고 로이스가 부탁했던 대로 먼 기억을 향해 나 자신을 열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은 채 쉐도우 크리크를 지나쳤고, 나는 내가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퍼뜩 의식했다.
 "여기 어딘가에서 그 일이 일어났던 게 틀림없어."
 나는 한참 지나서야 내가 큰소리로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로이스는 그 사고에 대해서 네게 이야기했다고 말하던데!" 킴은 시선을 길에다 두었다.
 "네가 전혀 기억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서?"
 "응…"
 길의 경사가 불쑥 높아졌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킴은 나를 쳐다보고는 재빨리 약간 속력을 늦추었다. 
 "네가 탄 차가 뒤집힌 지점에 거의 다 왔어."
 그녀답지 않게 초조로운 어조였다.
 "안 돼!"
 그 말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날카롭게 터져 나왔고, 난 그녀가 다시 나를 흘깃 쳐다보는 걸 알았다.
 '로이스가 그녀에게 귀띔을 한 거야. 그래서 그녀도 나만큼이나 불편한 거야.' 나는 생각했다. 마지못해 나는 그에게 한 약속을 생각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한번 더 생각해 봤어. 잠깐만 멈추자."
 우리는 커브를 또 하나 돌았다. 다음 길은 아래로 내려갔다. 물 론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오르막일 때는 브레이크가 고장을 일으키지도 자동차가 통제할 수 없게 되지도 않는다.
 다행히도 킴은 곧 속도를 늦추어 길 바깥측의 일종의 회전지점에 차를 세웠다. 가장자리에 바짝 대지도 않았는데 나는 비명을 억누르느라 입술을 꽉 다물었다.
 나는 억지로 계곡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무 기억도 안 났지만 내 몸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우리 트럭이 굴러떨어졌을 게 분명한 그 언덕을 나는 바로 내려다볼 수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주저하며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어지러움증을 참아야 했다. 그건 완전한 낭떠러지는 아니었지만, 수백 피트 아래 있는 계곡 밑바닥까지 서서히 그러나 깊게 경사져 있었다.
 나는 갑자기 다시 저 무섭게 되풀이되는 악몽의 소용돌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나중까지 내가 킴의 팔을 멍들 정도로 심하게 붙들었다는 걸 몰랐다.
 나는 내가 두려움으로 얼어붙어 벼랑 끝에 여전히 서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다시 넘어지고, 창문 너머 넓고 푸른 공간 속으로 계속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꿈 속에서처럼 나를 짓누르고 질식시키는 굉장한 무게를 느꼈다. 오직 이번에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았고, 나는 지옥같은 비명을 질렀다.
 "오, 아빠, 아빠, 안 돼요!"
 나는 공포와 절망에 차서 소리질렀다.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며, 나는 자갈길에 무릎을 꿇었고, 킴은 내 곁에 꿇어앉아 나를 달래려고 애썼다.
 "죽었어, 아빠가 죽었어! 오, 아빠, 살려 주세요! 죽지 말아요. 오, 제발 죽지 말아요."
 킴은 놀랐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 무릎 꿇고는 마침 내 내 울음이 그치고 현실로 돌아올 때까지 나를 꼭 붙들어 주었다.
 그녀는 내 뺨에 자기 뺨을 대고 있었으며, 내가 진정했을 때 그녀의 얼굴 역시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나는 떨리는 먼지투성이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의 뺨에는 인디안처럼 분홍빛 진흙 자국이 남았고, 나는 갑작스레 목이 메인 소리로 킥킥 웃었다. 킴은 이제 내가 정말로 미쳐 버린 것이나 아닌가 겁을 먹고 있었다.
 "너 괜찮니?"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너, 기억이 난 거야?"
 그녀의 푸른 눈은 너무도 로이스와 닮았는데, 동정으로 크게 떠 있었다.
 "난, 난 잘 모르겠어, 마치 다시 꿈꾸고 있는 것 같았어. 항상 꾸는 끔찍한 악몽을. 
단지 이번엔 잠자고 있지 않았던 것뿐이지."
 "같은 거였어?"
 "정확히."
 나는 다시 몸을 떨고는 덧붙였다.
 "끝만 빼 놓곤. 이번에 난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꿈 속에선 몰랐어, 적어도 모르는 것처럼 보여. 그리고 또 다른 게 있어… 꿈 속에선 항상 누군가가, 무서운 누군가가 트럭 창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봐."
 "오, 신디, 얼마나 끔찍해! 네가 오랫동안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무리가 아냐." 충동적으로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일어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겠어? 아님 식사하지 말고 그냥 집에 돌아갈까?" 나는 일어서서 나 자신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탈진한 느낌이었으나, 이상하게도 평화로웠다.
 "괜찮아. 사실 난… 더 나아진 것 같아. 하지만 이런 꼴로야 어떻게 시내로 갈 수 있겠니?"
 나는 내 먼지앉은 옷과 눈물 자국 얼룩진 얼굴을 가리켰다.
 "문제없어. 난 젖은 수건도 있고, 필요하다면 갈아입을 옷도." 그녀는 내게 싱긋 웃고 윙크를 했다. 내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기억한다는 충격적인 경험은, 그날 아침 마리화나를 발견한 것을 한동안 완전히 내 머릿속에서 몰아냈었다. 그러나 차를 탔을 때 나는 한기를 느끼며 다시 그걸 상기했다. 그때 킴이 말했다.
 "오늘 아침 네가 돌아오는 걸 창에서 봤어. 너 쉐도우 크리크로 내려갔던 게 전연 아니지?"
 "그래…"
 나는 지나치는 풍경을 계속 내다보며 짧게 말했다.
 "그렇게 켕기는 얼굴 하지 마."
 나는 그녀의 어조가 가볍고 개의치 않는 듯한 투에 내심 안도했다.
 "물어도 괜찮다면, 왜 그 길로 갔니?"
 만일 로이스가 마리화나를 기르고 있다면, 분명 동생에게 털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단지 역마차 정류소를 지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건 적어도 진심이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덤불 숲에 반쯤 가려진 순찰차를 지나쳤고 나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여기서 경찰이 뭘 하는 거니?"
 "국경순찰대야. 목장을 지나면 황량한 지역이 있어. 때때로 밀입국 멕시코인들이 이 길로 와서 국경 검문을 피해 들어오려고 해."
 그녀는 내 의아한 표정을 보았다. 
 "불법 체류자들 말야. 그들 대부분은 일자리를 찾아서 로스앤젤 레스로 가. 그러나 어떤 이들은 목장주와 농부들을 위해 일하면서 여기 머물러. 그들을 고용하는 건 불법이야. 하지만 아주 싸게 일 하니까 많이들 고용해."
 커브를 돌 때 그녀는 덧붙였다.
 "자, 페어헤이븐이란 멋진 마을에 도착했어."
 나는 페어헤이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는 작은 계곡에 세워져 있었고, 가게들 뒤에는 바로 나무들과 집들이 점점이 흩어진 가파른 언덕들이 있어서 그림같은 지중해적 인상을 풍겼다.
 "어때?"
 킴은 물었다. 그녀는 좁은 거리를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아가면서 몇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림엽서처럼 예뻐. 와이오밍에도 이런 데가 있어, 단지 좀 거 친 개척시대풍이긴 하지만."
 킴은 모퉁이를 돌아 나무 그늘이 드리운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저기 있는 게 그 식당이야."
 그녀는 길 건너편의 커다란 이층 건물을 손짓했다.
 "정말 오래 된 집이야. 백년도 넘었을 거야. 작년에 사람들이 이사와서 복구했어. 
음식도 괜찮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분위기야."
 주차장을 가로지를 때, 우리는 둘 다 게이브의 트랜스암을 발견 했다.
 "음, 게이브는 사업상 점심 약속이 있는 게 틀림없어. 난 그가 모션사이드에서 로라를 만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가 우리를 못 보기를 열렬히 바랐다. 어제 그를 거절한 뒤에 그를 만나는 건 어색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는 보았고 그 마주침은 예상했던 것만큼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두 남자와 함께 자리한 식탁에서 그저 흘낏 쳐다보고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대화에 몰두해 있는 것 같았다.
 웨이트리스는 포오치의 한쪽으로 우리를 안내해서 둥근 참나무 식탁에 앉게 했다.
 "봐, 가구도 고풍이야. 오래 된 책들을 봐, 그리고 벽에 걸린 고풍 그림도." 그 장소는 흥미로웠고,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꾸며지지도 않았다. 푸른 식물이 도처에 걸려 있어 약간 어둠침침한 실내장식에 은은한 분위기를 주었다. 긴 스커트와 고풍스런 블라우스를 입은 웨이트리스가 유리 단지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왔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앉아 있는 데선 게이브와 그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보카도를 좋아하는 게 식욕을 돋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음식에 따라 나왔으므로. 나는 게와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왔을 때, 나는 그것이 거대한 프렌치 롤빵에다 적어도 3인치 높이는 되게 쌓여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킴은 내 표정을 보고 즐겁게 웃었다.
 "그거 전부 먹어야 돼. 이 지역은 세계에서 아보카도의 수도야. 만일 네가 조금이라도 남긴다면 우린 매우 모욕감을 느낄 거야."
 킴은 활달하게 말했다.
 샌드위치는 아주 훌륭했고, 나는 가까스로 거의 대부분을 먹었다. 킴은 내 것만큼 커다란 바비큐 비프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그녀는 아보카도를 주문하지 않았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그녀는 항변했다. 
 "정말이지 난 안 먹어! 너도 만일 일생 동안 매일 그걸 본다면, 식당에선 그걸 주문하지 않지."
 식사를 마쳤을 때, 킴은 내가 화장실에 가봐야 한다고 주장했다.나는 그녀가 계산을 하기 위한 계획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으나, 일 단 거기에 가자 그녀가 예스런 멋이 나는 세면기를 보여 주려 했음을 깨달았다.
 화장실을 나오면서 나는 정원을 감상하기 위해 베란다에 멈춰 섰다. 그건 밝은 빛깔의 꽃들로 다채롭게 꾸며져 있었다. 라라미에는 꽃 피는 계절이 매우 짧기 때문에 덩굴과 꽃들의 무성한 숲은 나를 기쁘게 했다.
 나는 베란다를 떠나 시골풍의 작은 다리로 이르는 거친 돌길을 걸었다. 수국 더미를 지나기 시작했을 때 낮은 남자 목소리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즉시 식당으로 되돌아왔다. 그토록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는 두 사람이 게이브와 브라이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 생각은 그의 초대를 거절하고 킴과 점심을 먹으러 나왔기 때문에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서둘러 돌아올 때 다른 무엇이 나를 괴롭혔다. 두 사람의 이상한 태도가.
 그때 킴이 베란다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고, 나는 그 때에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지 않았다.

                   8


 "그래, 둘이 오늘 어디에 간다고?"
 다음날 아침 킴과 내가 아래층에 내려갔을 때 로이스는 막 아침을 끝내는 참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뭔가 아주 재미있는 일에 틀림없겠구나, 킴."
 그는 내게 싱긋 웃고 윙크를 보냈다. 나는 되받아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그의 시선을 받기가 힘들었다. 난 여전히 그와 마리화나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무슨 뜻이야?"
 킴의 푸른 눈은 화가 나서 번득였다.
 "아빠가 항상 귀를 잡아 끌어야 했던 건 내가 아니라 오빠야. 강에 피크닉을 가. 그리고 오빠의 그 덤불 숲은 조금도 밟지 않을 테니 걱정 마. 우린 쉐도우 크리크를 따라 갈 거라구."
 킴은 내가 갑작스레 당황하는 것을 보았음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괜찮아, 신디. 역마차 정류소를 지날 때까진 길 이쪽 편으로 갈 거니까." 로이스는 커피잔을 내려 놓고 식탁에서 일어섰다.
 "그 일로 무슨 문제가 더 있었어, 신디?"
 그때 그를 똑바로 보는 걸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자상함으로 따뜻이 빛나고 있었다.
 "아니, 별일 없어요."
 난 킴이 어제 시내로 가는 길에 내가 겪었던 일을 아마 로이스에게 이야기했으리라 추측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로이스는 분명히 그걸 알았다. 왜냐하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지나서 문 밖으로 나갔기에.
 킴은 천장을 향해 눈을 굴렸다.
 "다행이야. 난 뭔가에 대해 강연을 들어야 할 거라고 확신했어. 최근에 로이스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그는 그런 하찮은 일에 소동을 피우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는데."
 그녀는 부엌으로 갔다.
 "쥬아니타, 아침으로 무얼 준비했건 난 조금만 들겠어요. 넌 어 때, 신디?" 나는 머뭇거렸다. 
 "얼마나 오래 가 있을 거야? 엄청나게 식욕이 는 것 같아. 마치 내가…" "걱정 마, 난 그걸 눈치챘어. 그래서 어젯밤 쥬아니타에게 점심을 잔뜩 싸 달라고 부탁했지. 안 그래요, 쥬아니타?"
 쥬아니타는 스페인어로 부드럽게 동의했고, 킴은 장난기로 눈동자를 빛내며 웃었다.

 킴과 내가 도로에 이르렀을 즈음, 안개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날도 따뜻하고 햇살 밝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오래지 않아 더워질 것이었다. 나는 보온병 두 개를 가져온 게 기뻤다. 킴도 두 개를 갖고 있었고, 안장 뒤에 커다란 버들세공의 바구니를 매달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그 바구니가 가득차 있다면, 너 정말 점심을 엄청나게 싸 온 모양이야. 내게 말해 주지 않은 게 뭐니?"
 킴은 어깨너머로 내게 웃어 보였다.
 "무엇이 아니라 누구야. 브라이언과 랜디를 만날 거야. 그 바닥 없는 구덩이 둘을 채우자면 많이 있어야지."
 나는 말을 천천히 걷게 했다. 뱃속이 미묘한 공포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내가 네게 말 안한 건 바로 그 때문야, 신디. 데이트 같은 큰일이 아냐. 브라이언과 랜디는 재미있어."
 답답하게 들릴 거란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내가 잘 맞을 것 같지 않아, 킴. 그들은 너무 어려 보여." "글쎄, 그들은 실제론 너보다 나이가 많아. 하지만 약간 미친 것 같고 경솔하단 뜻이라면 젊지. 그러나 네가 지금 필요로 하는 건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몰라." 그녀는 머뭇거렸다. 
 "네가 데이빗을 사랑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는 이젠 없는 사람이야." 나는 눈을 감았다. 데이빗이 가진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분별력 있는 관대함이었다.
 "네가 옳아."
 킴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서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길 건너편에 역마차 정류장이 있는 데까지 왔다. 겁내지 않고 지나가려 애썼지만, 웃입술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나 심장이 느리고 불길하게 뛰는 걸 어쩌지 못했다. 킴이 나를 돌아다봤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걱정스런 표정을 무시했고, 그곳을 지나칠 때까지 튀어오르는 바구니에 결연히 시선을 못박았다.
 로이스에게 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나를 삼키려 위협하는 그 공포를 분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비록 그렇게 할 때까지 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지만.
 역마차 정류소를 지난 후 곧, 우리는 길 저편으로 건너가서 쉐도우 크리크에 이르는 좁은 길을 따라갔다. 힘찬 개울 위로 뻗친 커다란 참나무 그늘 속은 몇 배 시원했다. 
나는 브라이언과 그 친구가 있을 거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즐거워졌다.
 나는 로이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무관심하게 킴에게 물었다.
 "아니, 이야기 안했어. 내게 강연할 거리를 또 하나 줘선 곤란하.지 브라이언은 그에게 보탬이 되는 거라곤 한 가지도 가진 게 없고, 로이스는 내가 그와 사랑에 빠질까 봐 두려워 해.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어. 난 브라이언 같은 사람하고 엉기려 하진 않아."
 잠시 후, 우리는 개울 옆 오솔길을 떠나야 했고, 도로의 넓게 자갈이 깔린 측면을 따라 말을 달렸다. 태양은 이미 뜨겁게 내리쬐어 나는 숨이 가빴다. 우리 옆의 깊은 협곡을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다른 쪽으로 갈 수 없니?"
 "산쪽으로는 별로 폭이 없어."
 킴이 지적했다. 
 "커브를 돌아오는 차가 우리를 보게 될 때 이미 늦게 될 거야." 그녀는 호기심에 차서 나를 보았다.
 "너 항상 높은 데를 두려워했니?"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너무도 화가 나서 뭐라고 그녀에게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룰론 항상 높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지금도 두렵진 않았다. 그러나 말이 얼마나 놀라기 잘하고 얼마나 쉽게 놀라서 발 디딜 데를 잃어 버리는가를 모르는 건 바보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 모든 행동이나 말은 내게 일어났던 일과 내 반응이 정상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비추어 검토되었다. 갑자기 나는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으로 취급받는 데에 신물이 났다. 내 얼굴의 무언가가 킴에게 경고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조르지 않았고, 잠시 후 나는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침묵은 불편했기에 강이 갈라져서 두 개의 개울을 만드는 지점 바로 너머의 넓은 모래밭에 닿자 기뻤다. 다행히도 브라이언의 작은 트라이엄프가 거기, 길가 보호수 아래 세워져 있었다. 
 
 킴은 모래 위로 말을 끌고 가서 내렸고, 나는 그녀를 따랐다. 킴은 아리송한 표정을 하고는 브라이언의 차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스운데, 그들이 벌써 여기 와 있으리라곤 생각 안했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녹색 얼음 상자가 커다란 바위 그늘에 놓여 있었고, 닳아빠진 부츠 두 켤레가 그 곁에 있었으며, 뭉쳐진 옷가지들이 둥근 화강암 위에 던져져 있었다.
 "하지만 저기에 그들의 물건이 있잖아."
 그때 어어이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랜디와 브라이언이 넓은 개울의 굽이를 따라 걸어서 건너왔다. 물이 겨우 무릎까지 오는 걸 나는 보았다. 랜디는 작은 삽을 흔들고 있었고, 브라이언은 무얼 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건 광부용 냄비였다.
 "킴, 그들은 사금을 채취하고 있었어!"
 나는 소리쳤다.
 "이 강에서 정말 금을 찾을 수 있니?"
 킴은 그들을 바라보며, 엉덩이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녀는 어 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들 해. 하지만 쟤들이 하는 식은 아냐."
 강에서 금을 건져 낸다는 생각은 나를 흥분시켰다.
 "재미있을 것 같아."
 "그래, 하지만 브라이언은 심각해. 지나칠 정도로 열성을 보이 거든."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날 괴롭히는 건 그의 일확천금을 꿈꾸는 심리야."
 나는 브라이언과 랜디가 강을 떠나 모래 위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걸 보았다. 킴은 말 등에서 보온병들과 바구니를 내려오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그을린 얼굴 위로 환한 웃음을 머금고, 성큼성큼 뛰어왔다. 나는 갑자기 자의식을 느꼈고, 내 동요를 감추려고 밝게 물었다.
 "우리에게 금괴를 보여 주지 않을 거예요?"
 "믿는 게 좋을걸!"
 그는 포켓에서 마개가 막힌 작은 유리병을 꺼내어 흔들고는 내게 내밀었다. 놀랍게도 작은 금조각들이 바닥으로 가라앉기 전에 잠시 물 속에 떴다.
 나는 그걸 쥐고 다시 흔들었다. 작은 금부스러기는 다시 햇빛에 반짝였다.
 "황철광 대신 이게 진짜 금이라면 얼마나 값이 나갈지 상상해 봐요." 나는 무관심하게 말했다. 킴은 브라이언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모두 누가 바보인지 알지! 자, 너희들 두 사람, 말에게서 안장을 벗기는 걸 도와 줘."
 "물론이지."
 랜디가 말하고 미스터의 안장끈을 풀기 시작했다. 랜디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며 붉은 모랫빛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금을 채취해서 부자가 될 준비가 다 됐단 말야!"
 브라이언이 킴의 머리칼 한 가닥을 홱 잡아채며 말했다.
 "멍청한 소린 집어쳐! 난 말이 몸이 좀 식으면 물을 먹이러 갈 거야. 신디에게나 그걸 어떻게 하는지 보여 주지 그래."
 브라이언의 회색 눈동자는 약간 가늘어졌다. 나는 그가 실망했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정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운동화를 벗고 그를 따라 강가로 내려갔다. 랜디는 뒤에 남아서 킴이 말을 돌보는 걸 도왔다. 강의 이 부분은 매우 넓고 얕았으며, 강이 두 개의 지류로 갈라지는 곳인 한가운데는 흰 모래톱이 솟아 있었다. 나는 물에 발을 넣기 전에 망설였지만, 물은 맑고 깨끗했으며, 바닥은 진흙이 아니라 안정된 모래땅이었다.
 브라이언이 따라오라고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기 검은 모래가 있어. 색깔을 발견하려면 검은 모래여야 돼." 그가 소리쳤다.
 그는 돌출한 바위 언저리로 사라졌고, 나는 뒤따랐다. 물은 내 뜨거운 발과 다리에 상쾌한 느낌을 줄 정도로 충분히 시원했다. 손바닥을 찻잔 모양으로 해서 나는 얼굴과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더운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동작을 되풀이하고는 머리를 뒤로 제껴서 물이 머리카락으로부터 셔츠의 등으로 흐르게 했다. 그렇게 했을 때, 나는 눈을 뜨고 킴과 내가 달려온 높은 길 저 가장자리를 보게 되었다.
 암녹색 브론코 한 대가 길가에 세워져 있었고, 거기 타고 있는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르고 있다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발견하는 것은 항상 좀 오싹한 일이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 느낌이 어리석다는 것은 알았다. 
그는 내게 해를 끼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킴과 남자애들은 부르기만 하면 곧 달려올 만한 거리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를 응시하면서 얼어붙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마치 우리의 눈이 마주쳐 얽혀 버린 것 같았다. 그 접촉에서 벗어나 브라이언에게 가까이 가는 데는 극도의 노력이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산등성이를 쳐다보았을 때 브론코에 탄 남자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리고 내가 식별할 수 있는 한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강 굽이를 돌아오자, 브라이언이 쳐다보았다.
 "여길 봐요, 바로 여기가 검은…"
 그는 말을 끊고 나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지? 당신… 또 아픈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니죠."
 나는 웃으려 애썼다.
 "그저 산등성이에 누가 있는 걸 봤어요… 브라이언, 녹색 브론코를 모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모르겠는데, 왜?"
 "길에 한 대가 세워져 있었어요. 남자 한 명이 타고 있었고… 그 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무 말없이 그는 얕은 물 속을 첨벙거리며 달려나가 높은 바위 둑 둘레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왔다 
 "지금은 아무도 없는데. 아마 미개간지에서 온 어떤 녀석일 거야. 경치를 감상하려고 멈췄겠지."
 나는 소리내어 웃고, 햇빛에 그을린 그의 벗은 몸통에 물을 약간 끼얹었다. 그는 차가워 비명을 울렸고, 곧 우리는 금을 채취하는 진지한 작업에 착수했다. 재미는 있었지만, 조금도 찾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태양은 바로 머리 위에서 믿을 수 없을 만치 강하게 내리쪼였다. 브라이언은 삶은 바닷가재처럼 축 처지기 시작했으며 나는 하도 덥고 힘이 빠져 강 표면이 가물거려 보였다.
 "먼저 물 속에 뛰어들어야겠어. 그리고는 쥬아니타의 피크닉 바구니 속에 뛰어들어야지."
 "찬성이야."
 그는 열렬히 동의했다. 우리는 한가운데의 수로로 걸어나가 시원한 물 속으로 머리를 박았다. 그건 멋졌고, 우리의 신바람난 외침소리를 듣고 킴과 랜디도 달려와 합류했다. 몸이 상당히 식을 때까지 서로에게 물을 튀기고 물 속으로 담그며 한동안 법석을 피웠다.

 우리는 브라이언이 거대한 바위 그늘에 펼쳐 놓은 담요에 앉았다. 여전히 축축한 옷이 에어컨 역할을 해서 아주 편안했다. 킴이 바구니에 든 걸 풀었고, 브라이언이 상자에서 차가운 소다수와 맥주를 꺼내 돌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배가 꽉 찰 때까지 먹고 마셨다.
 "자, 이제 무얼 하지?"
 브라이언이 물었다. 
 "우린 이제 집에 가야 돼. 너 로이스를 알잖아,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를 찾아서 민병대라도 보낼 거야."
 킴은 남은 음식을 바구니에 담으며 뚝 잘라 말했다.
 "이걸 싸는 동안 누가 말을 끌고 가서 물 좀 먹여 주지 않을래?" "내가 할게."
 나는 일어서서 말을 몰고, 물가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이 나를 따라와 내 손에서 고삐를 하나 받아 쥐었다. 나는 다른 두 사람을 돌아다보았다. 그들은 담요를 집어들어 먼지를 떨고 있었다.
 개울에 닿아 말이 물을 마시는 걸 기다리고 서 있는 동안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킴이 브라이언을 좋아한다고 했던 걸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마침내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넌 자신을 어떻게 평가해?"
 그의 웃음은 뒤틀렸다.
 "플라이급!"
 팔로미노가 머리를 들고, 무얼 묻는 듯이 우리를 돌아다보았다.
 브라이언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의 목 언저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너도 그걸 아는구나. 하지만 한 번 플라이급이면 언제나 플라이급이지." 그의 웃음 이면에는 불행감이 깔려 있었다. 나는 말했다.
 "꼭 그렇다고 보진 않아."
 "난 잘 몰라. 일단 어떤 틀에 박히면 거기서 빠져 나오기란 굉장히 어려워." 그는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는 팔로미노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억지로 기운차게 말했다. 
 "우리가 뭣에 대해서 이렇게 심각해지고 있지?"
 브라이언과 랜디는 우리가 안장을 얹는 걸 도와 주었다. 우리가 다리를 건너 긴 경사를 올라가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홍빛 혜성처럼 우리를 지나쳐 쏜살같이 달렸다. 킴의 말은 신경질적으로 껑충껑충 뛰었지만, 그녀는 숙련된 솜씨로 말을 잘 다루었다.
 그녀는 말을 살짝 밀어 우리 사이의 거리를 넓혔다. 나도 모든 생각을 흘려 버리고 그 순간을 그저 즐겼다.
 잠시 동안 나는 사고와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을 잊었고 단순하고 태평한 즐거움 속에 푹 파묻혀 있었다. 산등성이 꼭대기에 근접했을 때, 나는 넓은 길 가장자리에서 말고삐를 늦추었다. 잔잔한 강물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차 한 대가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까 거기에 주차되어 있던 녹색 브론코임을 당장 알아차렸다. 내 속 깊숙이 다시 공포감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차는 우리 쪽으로 언덕을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나는 상당히 앞서 있는 킴에게 소리질렀다.
 "서둘러! 차가 와!"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미스터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가능한 한 길 가장자리에 바짝 붙으려 애쓰며 그녀를 뒤따라갔다. 그동안 죽 나는 혹시라도 넘어질 경우를 대비해 경사가 완만한 장소를 살폈다.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비탈은 완전한 낭떠러지는 아니었지만, 거의 모래로 된 강바닥까지 가파른 경사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멀지 않은 아래쪽 한 지점에 거대하게 돌출한 바위 주변에 붉은 흙이 깔린 장소가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위에 멈춰 섰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목이 죄는 걸 느끼며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모퉁이 길에서 브론코의 엔진이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나는 고삐를 꼭 붙들었다. 왜냐하면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운전자가 무얼 하려고 하는지 나는 알았기 때문이다.
 길고 유연하게 움직이며, 차는 길 가장자리로 넓은 호를 그리며 회전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겨우 몇 인치 떨어져 지나갔다. 날카로운 공포의 울음소리를 내며, 미스터는 엄청나게 큰 소음으로부터 격렬하게 피했다. 나는 말을 붙들려고 애썼다. 하지만 내가 그를 제어하기 전에, 그의 뒷발굽이 비탈 가장자리를 미끄러져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9


 만약 내가 노련한 기수가 아니었다면 나와 미스터는 영락없이 둘 다 죽었을 게다. 
아니면 적어도 심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의 뒷발굽이 미끄러지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내 발꿈치로 사정없이 그의 옆구리를 후벼팠다. 그리고 고삐를 채찍삼아 그의 목과 어깨를 연거푸 내리쳤다. 말은 뒷발굽으로는 암석 찰흙을 딛고 사납게 기어오르면서 몸체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도로의 평평한 가장자리에 다시 단단히 올라섰다.
 기뻐할 시간도, 어딜 다쳤나 살펴볼 시간조차 없었다.
 "난 괜찮아! 계속 가!"
 나는 우리를 향해 되돌아오던 킴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즉시 팔로미노를 돌려서 언덕 밑바닥을 향해 질주했다.
 "거기로 그가 다시 올지도 몰라!"
 내가 소리쳤다. 킴의 말은 길 한가운데로 갔고, 나는 그녀의 바로 뒤를 바짝 붙어달렸다. 이제 우리는 천천히 달렸지만 도로와 오솔길 사이를 가득 채운 빽빽한 덤불 숲이 우리를 가려 주어서 좀 안심은 되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우리가 고작 몇 야드도 가지 못해 킴은 무얼 보았는지 고삐를 늦추고 말에서 내렸다. 그녀는 말의 고삐를 잡고 한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고 신호한 다음 도로가 보일 때까지 덤불을 헤쳐 나갔다.
 우리는 기다렸다. 그녀가 재빨리 손짓해 알려 주지 않아도 다시 그 차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브론코의 차가 언덕 위로 되돌아가면서 부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 소리가 사라졌을 때,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꼭대기에서 다시 멈출 거야. 내가 거기 밑에 있는지 볼려고 들 테지." 킴은 길가 쪽으로 더욱 다가갔다. 그녀가 나를 다시 봤을 때 그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말 지독한 놈이로군.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자."
 옷을 잡아채는 가시나무도 아랑곳없이 덤불을 뛰어넘어 안장에 앉았다. 그 오솔길을 계속 가는 대신 그녀는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난 집으로 가는 다른 길을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이 길을 가로질러야만 해."
 나는 킴에게 바싹 다가갔고, 그녀는 오솔길 입구에 멈춰 서서 살펴보았다.
 "그는 갔어. 자, 가자!"
 포장도로를 지날 때는 말발굽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그가 어디에 있든 그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잠자코 킴을 따라갔다. 잠시 후 그녀는 커다란 두 개의 둥근 돌 사이의 좁은 틈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런 곳에 길의 입구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전속력으로 바위 협곡 속을 나아갔다. 밖에서 보기에 우리의 모습은 거의 완전히 차단되었다.
 "계속 내려가자."
 그녀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잠시 후면 밖으로 나가게 될 거야."
 나는 미스터의 목을 잡고 낮게 엎드렸다. 물이 마른 모래협곡을 지나자 오래 된 아보카도 숲이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는 땅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무성하게 늘어진 가지들 때문에 천천히, 그리고 아 주 조심스럽게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낙엽이 만들어 준 두터운 카펫 덕분에 말발굽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내 가슴은 좀 진정되어 킴에게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우리는 작은 덤불숲을 하나씩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마지막 덤불숲을 벗어났을 때, 빨간 지붕의 하얗게 빛나는 집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킴은 테라스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에밀리오에게 스페인어로 인사를 건네었다.
 "아, 집에 돌아오는 건 정말 신나!"
 곧 에밀리오가 멕시코 찰흙으로 쌓은 낮은 벽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달려왔다.
 "그렇구말구요, 킴 아가씨! 제가 말을 풀밭으로 데려가죠." 말의 고삐를 건네받으면서 에밀리오가 약한 엑센트의 영어로 말했다.
 "열이 식을 때까지 물을 먹이지 말아. 그리고 호세를 찾아서 같이 좀 씻겨 줘. 나중에 나가서 한번 볼 테니까."
 "걱정 마세요. 잘 돌보겠어요."
 그는 말을 마구간으로 데려갔다. 킴과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테라스에 다다르자 나는 그만 맨 윗계단에 털푸덕 주저앉고 말았다.
 킴은 이런 나를 보고 헐레벌떡 문을 열고 크게 소리질렀다.
 "쥬아니타! 오렌지 주스를 가져와요, 빨리!"

 로이스가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킴은 그에게 조금 전의 사건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녀의 눈은 노여움으로 번득이고 목소리는 딱딱 끊겼다. 그녀는 브론코를 탄 수수께끼의 인물이 어떻게 내 생명을 뺏으려 했는가, 게다가 가증스럽게도 그는 자기가 한 짓을 확인하려고까지 했다는 점을 설명했다. 
 로이스는 놀란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그 사람이 너를 해치려 했다고 확신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실해요. 날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리려 했어요."
 나는 다시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난 그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았어요. 그건… 날 쳐다볼 때 벌써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 언덕 꼭대기에 주차해 있을 때 말이에요."
 로이스는 일어났다.
 "경찰을 부르기 전에 내게 더 할 말은 없어?"
 그는 킴을 보다가 또 나를 보다가 했다.
 "차량 번호판이나 그 비슷한 것이라도…"
 "번호판은 진흙으로 가려져 있었고, 게다가 그 악당은 검은색 스키 마스크를 쓰고 있었어."
 킴이 마지못한 듯 말했다.
 로이스는 전화기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그가 누군가에게 통 화하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나는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눈을 감자 그녀는 내 옆으로 달려왔다.
 "신디, 그런 표정 짓지 마! 요즘 같은 때 어디에나 그런 비열한 녀석들은 있기 마련이야.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놈들 말야. 어쩌다 네가 걸려든 것뿐이지."
 그녀는 나를 위해 갖가지 위로의 말을 했고,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믿으려고 애를 썼다.

 그날 밤 저녁식사 분위기는 꽤 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짐짓 수다를 떨기도 했다. 나는 몇 숟갈 들자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더 먹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진 것 같았다.
 마침내 로라가 입을 떼었다.
 "식사는 그만 끝내고 테라스에 나가서 커피나 마시는 게 어때? 술을 한잔 해도 좋겠구…"
 우리는 모두 의자를 뒤로 밀고 편안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로라는 쥬아니타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킴이 말했다.
 "둘이 먼저 나가. 난 잠시 후에 갈게."
 그리고 그녀는 윗층으로 올라갔다.
 로이스는 내게 손을 내밀면서 달래듯이 말했다.
 "자, 나가자. 바깥은 쾌적할 거야."
 나는 내 손을 그에게 내맡겼다. 그의 손은 따스했고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친절히 나를 테라스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팔로 내 허리를 감싸안았다. 우리는 낮은 담을 따라 함께 걸었고 계곡 너머를 바라보았다. 나는 로이스에게 몸을 기댔다. 나의 머리가 로이스의 어깨에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일 너를 샌디에고로 데려가면 어떨까? 네게 바다와 마을을 보여 주고 해변가 어디에서 저녁도 먹을 수 있을 텐데. 신디, 어떻게 생각해?" 로이스는 내 머리칼 사이에 입술을 묻으면서 속삭였다. 근사한 제안이었다. 
 "네, 그러고 싶어요."
 그리고 그는 나에게 키스했다. 나는 그 순간이 계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때 로라가 테라스로 나왔다. 우리는 굳이 태연한 양 멀찌막이 서로 떨어졌다.
 
 가족들은 내가 조금 안정을 회복했다고 믿으면서 그 사건에 대해서 조용히 논의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사고가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고 극구 주장했다. 나는 그들이 아무렇게나 생각하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브론코의 운전자는 그가 누구이든, 분명히 나를 죽이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진 살인자였다! 잠들기가 쉽지 않으리라 느끼면서도 나는 핑계를 대고 일찍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면서 나는 도대체 누가 나를 죽이려 하는지를 계속해서 곰곰 생각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크리스토퍼 가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 브라이언과 랜디가 있었지만 그들은 나와 함께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는 내게 적대감을 가졌단 말인가? 무슨 이유로, 어떤 사람이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길 원하고 있단 말인가? 또 내가 죽음으로 해서 그는 무슨 이득을 얻을까? 순간, 나는 크고 차가운 바이스가 내 가슴을 쥐어짜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로라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크게 되울려 왔던 것이다.
 '그는 다만 네가 절벽 같은 데서 굴러떨어지게 하기만 하면 돼. 만약 네가 너의 생일날 전에 죽는다면 그와 킴이 너의 재산 전부를 상속받게 되지.' 그란 물론 로이스였다. 내 생일로 말하자면, 그건 불과 몇 주 후로 임박해 있다…  나는 다시 온 몸에 바늘이 돋았다. 몸 전체가 얼음덩어리가 된 듯 싸늘해졌다. 부들부들 떨면서 누워 있다가 절망감 속에서 전기 담요의 온도를 끝까지 높였다. 그러나 담요의 열기조차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지배하는 그 소름끼침을 없애 주진 못했다.
 로이스라니, 맙소사? 미소짓는 눈과 부드러운 태도. 그의 태도는 나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연민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로이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나의 데이빗이 죽은 후 굳게 감금해 온 감정의 해일을 비로소 봇물 터지게 한 첫 장본인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 안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단언했던 욕망의 깊이를 건드려 주었던 그이가… 오, 하느님! 그가 나를 죽이려는 끔찍한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니!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손을 뻗쳐 전기 담요를 껐다. 냉기는 가셨고 따뜻한 기운이 전신에 녹아들자 나는 조금 흥분했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던 바로 그 순간 로이스는 내게 매혹되었다. 
게다가 로이스는 오늘 저녁 테라스에서 키스를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기꺼이 그에게 내 인생을 걸려고 했다.
 
 마음속에서 로이스에 대한 혐의는 풀었지만, 그러나 그러면서도 대체 누가 그 차를 몰았나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꼬박 그 문제를 생각하면서 나는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식탁은 세 사람 몫으로 차려져 있었지만 킴도 로이스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로라가 있었는데 눈 주위에 긴장의 기미가 역력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킴은 벌써 학교 갔어요?"
 나는 굳이 쾌활한 척 말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빈 접시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눈 밑에 흐린 보랏빛 셰도우를 곱게 바르고 있었다.
 "난 어젯밤 한잠도 못 잤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 내가 로이스에 대해서 네게 한 말 말인데…"
 눈을 내리깔면서, 또 입술을 물면서 그녀는 계속 말했다.
 "난 정말 부끄러워. 로이스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친절하고도 정직한 사람인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돌았나 봐."
 그녀는 잠시 말을 끊더니 계속할 용기를 찾으려는 듯 완벽하게 메니큐어한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고선 계속 말했다.
 "난 갑자기 네게 질투심이 생겼어. 너의 돈과 미모, 너의 젊음에 대해서 특히. 내 젊음은 어디에선가 다 낭비해 버린 것 같아."
 "당신은 아직 젊어요!"
 그녀는 너무 섬약해 보여 나는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아주 아름답구요!" 
 그러자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것은 내가 그녀에게서 본 몇 안 되는 진실한 미소 중 하나였다.
 "그런 말을 하다니, 참 귀엽구나. 그래 맞아, 난 늙지 않았어. 단지 지난 일들에 대한 후회 같은 것일 뿐이지. 어쨌든 로이스에 대해서 내가 한 말,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지? 그렇지?"
 "물론 아니예요. 난 사실 다 잊어 버린걸요."
 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물었다.
 "그런데 로이스는 어디 있죠! 목장에 나갔나요?"
 하지만 속으로는 오늘은 그가 집안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경찰에 알리러 시내로 갔어."
 킴이었다. 그녀는 막 식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평소의 감정이 격한 모습과는 아주 달랐다.
 "오늘 아침 일찍 나갔는데 아직 안 돌아왔나?"
 킴은 의자를 끌어내어 앉으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마 어제 그 일에 관해 뭔가 좀 알아냈을 거야."
 그녀는 핫케이크를 먹으면서 말했다. 
 "어젯밤에 브라이언에게 전화를 했었어. 브라이언 말로는 자기가 랜디하고 같이 오늘 벽촌으로 차를 타고 가서 어떤 실마리를 찾아보겠다는 거야. 브라이언이 그 녀석을 따라잡으면 한대 먹여줄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오, 안 돼, 킴! 위험해."
 "아냐, 브라이언은 해낼 수 있어."
 킴은 핫케이크에 버터를 바르고 시럽을 듬뿍 부었다. 
 "누군가가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해, 신디."
 바로 그때 앞마당에서 차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출입문이 열리더니 닫혔다. 로이스는 곧바로 식당으로 들어왔다. 표정을 보아서는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다급하게 물었다. 
 "로이스, 경찰이 그 녀석을 잡았어?"
 그의 얼굴의 희미한 미소는 그러나 이내 사라졌다.
 "아니, 아직은. 경찰은 그걸 우발적인 사고로 생각해." "하기야 샌디에고에서는 여름엔 모두들 스키 마스크를 쓰니까. 햇빛에 타지 않으려구 말야."
 킴이 천천히 말했다.
 그때 로이스는 주의를 주려는 듯 얼굴을 조 금 찌푸리더니 킴의 말을 가로막았다.
 "야, 오늘 아침은 맛있어 보이는데!"
 대답은 상관없다는 듯이 앉아서 접시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쥬아니타더러 새로 차려오라 할까? 그건 이제 식었을 텐데…" 로라가 즐거워하며 물었다.
 "괜찮아요. 커피나 좀 주세요."
 쥬아니타가 이 말을 들었는지 로라가 작은 은종을 울리기도 전에 김이 나는 냄비를 들고 왔다.
 "그것 봐. 내가 뭐랬어. 아침도 먹지 않고 그렇게 일찍 가지 말랬지? 아침식사가 제일 중요한 거야."
 로라가 나직나직 로이스를 꾸짖었다. 
 "자, 난 이제 가야겠어. 오전수업을 또 빼먹었네. 하지만 오늘 오후엔 시험이 있어. 
그것까지 빼먹을 자신은 없는데!"
 "킴, 잠깐 네게 할 얘기가 있어."
 나는 로이스가 킴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걸 보았다.
 "신디, 2층에 가서 우리 데이트 준비를 하는 게 어때? 재킷은 꼭 입어. 늦게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나는 따돌림당하는 기분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좋아요, 곧 내려올게요."
 일어서서 그 방을 나오기까지 짧은, 그러나 묘한 쓰라림이 내 가슴을 눌렀다.
 샤워는 이미 했었지만 나는 준비하는 데 늦장을 부렸다. 그건 분명 어리석은 짓임을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로이스가 분명히 내가 듣지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얘긴가 하고 싶어한다는 걸 생각하면 괴로운 분노가 치솟았다.
 '로이스는 아마도 경찰에게서 들은 얘기를 전하려는 걸 거야. 내겐 알리고 싶지 않은 얘기겠지. 날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게 분명해.'
 나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게다가 우리는 오늘 오후와 저녁 내내 함께 있을 작정이다. 그걸로 봐서도 나는 딱돌림당하고 있지 않은 건 분명하다. 적어도 로이스로부터는 나는 어젯밤 그의 황홀했던 키스를 생각했다. 달콤한 흥분이 넘쳐 흘렀다.
 마침내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모두들 내 모습에 한 마디씩 찬사를 보냈다. 나는 폭이 넓은 민트그린의 선드레스에다 짧은 소매 재킷을 받쳐입고 있었다. 화장도 정성스럽게 했고, 머리는 하도 빗어 반짝거릴 정도였다. 피부는 캘리포니아의 햇빛에 곱게 그을러 있었고 머리칼은 부드러운 금빛이었다.
 킴과 로라의 칭찬에 이어 로이스도 감탄하면서 한 마디를 더 했다.
 "음, 그러고 보니 아이스크림 가게의 민트샤베트 같은데. 햇빛에 녹아 버리면 어쩔려구 그래!"
 로라가 그의 농담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말했다.
 "출발하지 그러니! 샌디에고에 가면 할 일이 많을 거야." "신디는 바다가 보고 싶을 거예요."
 킴이 맞장구쳤다.
 나는 로라와 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은 반쯤 미소 짓고 있었지만 모종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반면에 로이스는 지극히 자연스런 태도였다.
 "신디, 그 재킷보다 좀더 딱뜻한 걸 입는 게 좋아. 스웨터는 없니?" "내가 가져올게! 내가 갖고 있는 게 꼭 좋을 거야!"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킴이 이층으로 뛰어갔다.
 "자, 이걸 입어."
 그녀는 내게 섬세하게 짜여진 우아한 흰 캐시미어 스웨터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건 네 지갑이야. 우리 함께 나가자."
 킴의 행동은 좀 유별났다. 로라의 태도도 그랬다. 그들은 우리가 현관문으로 나가 포오치에 이를 때까지 죽 따라왔다.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때 앞에 있는 차를 보았다.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집앞에 세워진 차는 접는 포장이 달린 빛나는 하늘색 새 차였다.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로이스는 내 팔을 잡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는 다시 멈춰 섰다. 아차하는 표정으로 호주머니를 두어 번 두드렸다.
 "자동차 열쇠를 집에 놓고 온 것 같은데… 먼저 타고 있어. 금방 갖고 올게." 나는 킴과 로라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그 차가 로이스가 평소에 몰고 다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 로이스는 차가 두 대인가 봐.'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부자들은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햇빛으로 인해 따뜻해진 가죽 시트에 앉아 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건 분명히 새로 산 차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런데 운전석 쿠션 위에는 흰 사각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거기엔 내 이름이 흘림 글씨체로 씌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걸 집어들고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깨끗하고도 활달한 필체로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쓴 두툼한 흰 카드가 들어 있었다.
 카드 밑에는 금도금을 한 자동차 열쇠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10


 처음에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당황한 채 카드와 빛나는 열쇠와 또한 포오치에 나란히 선 세 사람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그들은 모두 내 반응을 보며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킴을 선두로 그들은 내게 몰려왔다.
 "어때? 마음에 들어?"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쾌활한 어조로 물었다.
 "색깔이 마음에 들어? 아이디어는 로이스가 냈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준비한 거야." 나는 쥐고 있던 열쇠를 잠깐 보고선, 차 안을 둘레둘레 들여다봤다.
 "아니, 이게 내 거란 말이야?"
 나는 어리벙벙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내 생일은 아직 몇 주나 남았어!"
 "미리 앞당긴 셈이지. 아침에 시내에서 이걸 봤는데 생일날까지 미루고 싶지 않았어. 솔직히 좀이 쑤셔 기다릴 수가 없더라구. 어때, 상관없지?" 킴처럼 로이스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멋지고 세 련된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잠시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비쌀 텐데… 난 도저히 받을 수가 없군요." 어느 새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이토록 즐거운 일은 지금껏 없었어요, 하지만 이런 폐를 끼치는 건…" "폐라뇨, 당치 않으십니다, 아가씨."
 로이스는 일부러 한껏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익살을 떨었다.
 "그냥 받기만 해, 이 차는 네 거야."
 그는 차에 기대서서 내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신디 무어 양,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좀 이르긴 하지만." 킴과 로라도 내게 키스했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로이스가 디슈를 건네줬다. 나는 곧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모두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예요." "그건 우리가 널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 이유뿐이야." 놀랍게도 이 말을 한 사람은 로라였다. 나는 더욱 눈물이 솟구쳤고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나를 보고 킴이 서둘러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아, 난 이제 정말 가봐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시험을 못 보게 될 거야. 둘이 재미있게 놀다 와!"
 로이스가 자동차의 운전석으로 왔다.
 "자, 이제 머리칼이 휘날리도록 달려볼까?"
 "아, 제발!"
 나는 깜짝 놀라 신음했다. 부모님과 데이빗의 사고 이후 나는 한 번도 운전을 한 적이 없었다. 로이스는 그 느낌을 이해하는 듯했다. 나는 금으로 된 열쇠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아, 아니야, 내게 스페어 열쇠가 있어. 그건 특별히 나만을 위한 거야. 우리네 농부들은 보통 놋쇠열쇠면 충분하지."
 곧 시동이 걸렸고 우리는 커브 길을 돌아 출발했다. 뒤를 돌아보니 로라가 계단에 서서 손을 흔들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또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설마, 로라가…?"
 나는 망설이며 로이스에게 말문을 열었다.
 "로라가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 거야."
 그는 노련하게 커브를 돌며 말했다.
 "나도 처음엔 놀랐어.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자기자신 속에만 꼭꼭 숨어 있었거든."
 나는 곧 화제를 돌려 차의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로이스도 차의 특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곧 언덕을 지나 페어헤이븐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로이스가 나를 보며 물었다.
 "이제 네가 운전할래?"
 "아직은 안할래요. 좀 더 있다가. 그래도 괜찮죠? 너무 오래 안해놔서 좀 떨리거든요. 난 그냥 쉬면서 가고 싶어요."
 "좋아. 오늘은 너의 날이니까 무엇이든 좋을대로 해." 
 샌디에고로 향하는 해안도로를 따라 가면서, 우리는 인파가 붐비는 해변도시를 지나게 되었다. 그곳은 캐주얼하게 차려 입은 관광객들이 들끓고 있었다.
 "좀 더 한적한 길로 올 걸 그랬나?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젖어보는 것도 괜찮지." "그럼요! 난 지금 해변을 따라 걷고 싶어요."
 "좋은 데가 있어!"
 그는 마음에 찍어 둔 장소가 있었던지 고속도로로 꺾어지기 전에 몇 마일을 더 갔다. 곧 인적이 드문 해변이 나타났다.
 그의 제안을 따라 나는 샌들을 차 안에 벗어 두었다. 그는 나를 들어안고 뜨거운 백사장을 지나 젖은 땅에 내려 놓았다. 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안은 그의 탄탄한 팔과 그에게서 나는 향기로운 콜롱냄새로 온통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황홀한 기분이었는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리더니 굽이치는 파도를 따라 나와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파도가 우리에게 물보라를 튕겼다. 그러다가 나는 멈춰 서서 청신한 공기를 호흡하며 내 입술에 남은 소금기를 맛보았다. 그때 그가 나를 끌어당겨 안았고 내게 키스했다.
 그렇게 아주 오래 있은 다음에야 그는 나를 풀어주었다. 
 "신디, 난… 난 자꾸만 하고 싶어."
 쉰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요."
 나는 덜덜 떨었다. 
 그가 내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칼을 뒤로 쓸어주었다. 그리고 투정하듯 물었다. 
 "내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난 모르겠어요. 나도 좋아요, 하지만… 왠지 죄책감이 생겨요. 당신이 키스할 때뿐만 아니라 내가 즐거울 때면 언제나. 왠지… 내가 배신하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구? 데이빗?"
 그는 나를 돌려 세워 자기 얼굴을 마주보게 했다.
 "아무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그 생각이 널 괴롭힌다면…" 그의 푸른 눈 속에는 따뜻한 이해가 넘쳤다.
 "내가 기다리겠어. 하지만."
 그의 이 말과 동시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우리가 얘기하던 내내 파도가 우리 발과 발목을 스치고 지나가곤 했지만 그때 그야말로 아주 큰 파도가 불시에 덮쳐 왔던 것이다. 내 스커트 단까지 물방울이 튀었고 무릎까지 말아올린 로이스의 바지도 젖고 말았다. 그가 곧 나를 들어올려 우리는 뭍으로 올라와서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괜찮아?"
 "상관없어요. 하지만 너무 추운데요. 어떻게 여기서 수영을 했어요?" "나중에 직접 해 봐. 자, 이젠 뭘 보고 싶어? 씨 월드? 동물원? 해양 마을?" "모두 다요!"
 우리는 샌디에고의 모든 구경거리를 답사하지는 못했지만 바지런히 쫓아다녔다. 씨 월드를 구경하기도 했고 해양 마을을 산책하며 선창가의 작은 카페에서 해산물을 맛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또 포인트 로마로 차를 몰고 가서 등대에서 전망을 즐기기도 했으며, 코로나도 섬에서는 호텔의 우아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또 무엇을 하든 그날은 찬란히 빛나는 행복감이 늘 함께 하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기분 좋을 정도로 피곤한 가운데 우리는 그 호텔을 떠났다. 로이스는 엠바르카데로를 따라 차를 몰았다. 탁 트인 전망이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서 그는 멈추었다.
 우리는 검은 물결 너머 달이 뜨는 것을 보았다. 공기는 습했다. 팔을 두르고 있었는데도 좀 추웠다. 로이스는 나를 가까이 끌어당겨 팔로 감쌌다. 나는 그에게 편안히 기댔다.
 그의 몸에서 전해 오는 온기가 내게 스며들자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다시 내게 키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기를 바랬다. 밤이었고 그 순간이 내게 그걸 요구했으므로. 하지만 그는 다만 나를 안은 채 조용히 앉았다. 가볍게 부드럽게 그의 손길이 나를 어루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달빛에 내 얼굴을 들어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내게 키스했다. 로이스와 금빛 조각달과 소용돌이치는 별들 이외에 이제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긴 시간 동안 우린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마법을 말로써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말은 다른 때 언제고 할 수 있으므로. 그리고 그때 로이스는 내가 데이빗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마음을 들었으리라.
 집에 도착한 것은 늦은 시각이었다. 집안은 깜깜했다. 로이스는 내게 다시 한번 한층 길고 못내 아쉬운 듯한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흥분으로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영광스럽고, 중량이 없으며, 꿈조차 없는 해맑은 수면 상태를.

 나는 늦게 일어났다. 따뜻하고 편안한 침대에 누워 믿기 어려울 정도로 행복한 기분이었다. 다시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넘쳐 흐를 것 같은 기쁨의 힘을 옮겨 나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갔다.
 아래층은 텅 비어 있었다. 식당에도 거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테라스의 긴 의자에 검은 머리가 보이는 듯했다. 나는 로이스가 아닐까 생각하고 서둘러 나갔다.
 문 열리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실망스럽게도 그는 게이브였다. 나를 보자 그는 정중하게 일어섰다.
 "안녕하셨어요, 게이브?"
 나는 실망의 빛을 감추며 말했다. 그는 건강하게 보였다. 목에는 금빛 목걸이, 담갈색 눈동자… 그의 그 눈이 잠시 나를 살펴보았다. 나는 확 얼굴이 붉어졌다.
 "난 좋아요, 그런데 당신에겐 그 말을 물을 필요조차 없어 보이는데. 마치 활짝 핀 백합꽃 같은데…!"
 나는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내가 고맙다고 얼버무리려 할 때 로라가 레모네이드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긴장된 걸로 미루어 그녀는 게이브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보자 그녀의 굳은 표정은 곧 사라지고 대신 눈치빠른 미소가 나타났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 있는 걸 보니, 어제 무척 재미있었나 보구나." 로라가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당황한 빛을 감추려고 그녀가 내민 잔을 집었다.
 "아, 네, 정말이지 샌디에고에 그렇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을 줄 몰랐어요." 로라가 게이브를 곁눈으로 흘끗 훑어보았다.
 "게다가 로이스는 근사한 안내자였지?"
 "네, 그랬어요."
 나는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한껏 마셨다.
 "로이스가 생일선물 차를 운전하는 걸 가르쳐 주든?"
 로라의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었지만, 순간 나는 로라의 화제는 게이브에게 보이기 위해 꾸며지는 것임을 깨달았다.
 "로이스가 그 차를 생일선물로 줬어?"
 게이브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내가 보기엔 좀 질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로이스 혼자가 아니라 로라와 킴이 같이 선물해 준 거예요." "그래? 참 멋있군."
 그는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차를 받은 것이 멋있다는 건지 아니면 준 것이 그렇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당신 생일은 아직도 먼 걸로 알고 있는데!"
 "생일은 다음 달이야. 하지만 신디는 지금 차가 필요해. 다시는 말을 타게 하고 싶지 않거든. 그 미치광이가 아직 어디엔가 숨어 있을 것 같아서…" 로라가 탁자에 유리잔을 놓으며 말했다.
 "그건 그래.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끔찍해! 누가 고의로 그런 짓을 했다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당신은 그렇게 믿어?"
 게이브는 관심을 보이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난 확신해요."
 그날의 소름끼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화제를 바꾸고 싶어서 나는 로라에게 말했다.
 "어제 차를 몰 걸 그랬어요. 지금 몰고 나가고 싶은데. 그런데 로이스는 언제 와요?"
 "오후가 돼야 올 거야. 사업상 전화를 받고 급히 샌디에고에 갔어.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
 나는 실망감을 숨길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게이브는 이내 눈치챘음이 분명했다.
 "나와 같이 가지 않겠어? 기어 변속은 할 줄 알지? 이 차는 금방 익숙해질 거야." 나는 망설였다. 정말이지 나는 로이스를 통해 자신감을 얻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단지 같이 있어 주기를… 하지만 게이브의 제의를 거절할 마땅한 구실도 없었다.
 "좋아요, 게이브,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
 그는 곧 일어섰다. 나는 로라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녀는 여전히 잔잔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로라?"
 "괜찮구말구. 조심하기만 해."
 금빛 열쇠를 끼우자 내 손은 떨렸다. 그 떨림이 신경을 거슬렸으나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16번째 생일날 면허를 땄고, 그 후 정기적으로 운전을 했었다. 그것도 아주 숙련되게 하지만, 그 사고 이후에는 왠지 운전석에 앉기조차 싫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또 다시 '게이브 대신 로이스가 내 곁에 앉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일었다.
 하지만 게이브는 참을성 있고 세심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마을로 나가는 길에 접어들자 나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게 되었고 운전을 즐길 수 있게까지 되었다. 핸들을 꽉 쥐고 있던 손가락도 자연스레 풀리기 시작했다.
 "아주 좋아, 프로급이야! 마을까지 계속 몰고 가겠어?" "물론이에요."
 나는 날아갈 것 같았다. 내가 차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또 그것이 내 작은 동작에도 섬세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내가 영영 잃어 버릴 뻔했던 자신감을 되돌려 주었다. 내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찼다.
 그때 게이브가 말했다. 
 "여기 바로 앞에 자동차 대피소가 있어. 그 위로 몰고 가, 할 수있지?" 그곳은 아버지와 내가 낭떠러지로 떨어진 바로 그 지점이었다!
                   11


 나는 기계적으로 그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자갈길로 들어서서 브레이크를 밟자 핸들이 내 축축한 손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땀방울이 맺혔다. 나는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을 감았고, 저 아래 펼쳐져 있는 황폐한 계곡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이곳 경치야말로 일등급이지. 몇 마일 너머까지 보이잖아."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대답이 없자 그는 나를 돌아보고는 소리쳤다.
 "왜 그래, 신디. 무슨 일이야? 당신이 즐거워할 줄 알았는데!" "난 여기가 싫어요."
 나는 이를 악물고 겨우 대답했다.
 그러자 게이브의 목소리는 놀라움에서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세상에, 신디, 정말 미안해. 미처 생각을 못했어!"
 나는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삼켰다.
 "괜찮아요, 하지만 여길 떠나고 싶어요."
 "물론, 가자구! 내가 운전할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까스로 차를 빼자 나는 곧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신디,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내가 그걸 생각했더라도 당신이 거길 기억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을 거야."
 "나도 몰랐는데 일전에 킴이 가르쳐 줬어요."
 "킴이! 왜?"
 그는 놀란 것 같았다.
 "그게 오히려 좋은 치료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나 봐요." "정말 그래?"
 "차 안에 있었다는 것만 생각나요. 꿈속에서처럼."
 "꿈이라구?"
 내 손에는 다시 땀이 배기 시작했다.
 "정말 많이는 모르겠어요. 난 아버지와 함께 트럭 속에 있었고 자꾸만 밑으로 떨어졌죠. 무성영화처럼 조용하다는 것만 빼놓고 모든 게 그저 꿈속 같죠. 나는 땅바닥에 있었고, 아버지는 내 위에 있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그때 나는 숨이 막혔고 그래서 심호흡을 했다.
 "거짓말 같죠? 하지만 어떤 때는 누군가가 트럭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침묵이 길어졌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건 정말 믿기 어려워, 그렇찮아? 로이스에게 그 사람이 누구일까를 물어본 적이 있어!"
 "아뇨,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할걸요."
 "널 발견한 사람이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해?" 그의 말이 전기 충격처럼 나를 스쳤다.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건 우리가 떨어진 직후의 일이고, 로이스 말로는 우린 한참 뒤에야 발견됐대요.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내 생각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건 그렇고, 자, 페어헤이븐에 도착할 때쯤엔 기분이 나아졌으면 좋겠어. 아직 식사 전이지? 거기 가면 멋진 멕시코 식당이 있어. 내가 데려갈게. 어때?"
 그가 화제를 바꾼 것이 나로선 반가웠다. 내가 뭔가를 먹을 수 있을지는 이직 미지수였지만. 하지만 우리가 그 식당에 도착하자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음식이 오자 나는 탐욕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음, 맛있어요."
 "생일 선물로 차를 준비했다니 정말 놀랐어. 진짜 멋쟁이들이야. 그렇게 생각 안해?"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치이즈와 연한 고기로 속를 넣은 엔칠라더라는 멕시코 요리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돌아가신 로이스 씨는 늘 너그럽고 생각이 깊은 분이셨지."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목장에서 한푼이라도 더 얻어낼려고 심사숙고하셨지.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식이었어. 그런 아버지가 죽고 나서 목장의 반이 당신의 몫이라는 걸 알고 로이스는 정말 놀랬을 거야."
 갑자기 입맛이 싹 달아났다. 
 "그가 그걸 몰랐나요?"
 "몰랐어. 하지만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래서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이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더군. 그건 그에게 넘겨 줘야 할 거야. 그가 그 땅을 아주 유용하게 쓸 거야."
 나는 그 땅이 버려진 협곡에 숨겨진 녹색 식물까지 포함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는 그걸 의무로 생각하나 봐요."
 게이브는 관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게서 그를 감쌀 필요는 없어. 만약에 나 같으면 전부 챙겨서 멕시코로 갔을 거야. 로이스가 영리한 거지. 멀리 내다볼 줄 알거든."
 그는 마가리타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나를 응시했다.
 "어제 이후로 당신은 그에게 푹 빠진 것처럼 보여. 우리는 다시는 데이트도 못하겠지?"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졌고 당황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그래요. 그렇다고 화를 내진 마세요."
 "옛사랑 게이브라? 할 수 없지. 딴 작전을 세울 수밖에." 그는 냅킨을 접었다. 
 "준비됐어? 돌아가기 전에 아마 페어헤이븐 근처를 구경할 수 있을 거야." 페어헤이븐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게이브는 으쓱대며 자기가 판 집이랑 중개한 토지 등을 가리켰다. 그곳을 둘러본 뒤 나는 목장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게이브, 로라가 걱정할 거예요. 첫 번째 드라이브 치곤 너무 길었어요." "로이스도 집에 왔을 거구 말이야."
 내 눈치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좋아, 좋아. 안 그럴게! 하지만 남자라고 해서 질투하면 안 되나?" 
 목장에 도착하자 킴이 집에 있었고, 또 놀랍게도 브라이언도 같이 있었다. 그들은 막 푸울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남자들은 서로 무덤덤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나도 수영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서둘러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그들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전날에는 레스토랑의 정원에서 친하게 이야길 나누지 않았던가. 그러나 곧 나는 모든 걸 자꾸만 의심하는 나 자신을 꾸짖었다. 하지만 한차례 수영을 하고 긴 벤치에 누워 일광욕을 할 때 나는 기운이 빠지면서 좀 불안하기까지 했다. 아침 나절의 즐겁던 기분은 분명 사라졌다. 게이브와 보낸 피상적으로만 즐겁던 시간 속에서 달아나 버린 것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어젯밤 로이스와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다. 킴과 브라이언은 타월을 깔고 일광욕을 하면서 재미있게 장난치고 있었다. 로라가 테라스로 나오더니 게이브와 함께 그늘에서 음료를 마시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로라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보였다.
 나는 다시 이층으로 기서 짧은 바지로 갈아입었다. 혼자 잠깐 동안 드라이브할 작정이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가까스로 빠져 나오자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오래 된 호텔의 숲 그늘에 멈춰 서서 잠시 쉬려고 했다.
 그곳은 포도넝쿨과 관목이 더 우거진 것 외에는 지난번과 똑같이 평화롭고 고요했다. 나는 다시 정겨운 마음이 들었다. 차에서 내려 그 앞에 다가갔다.
 네모난 창틀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호텔 안은 여전했다. 갑자기 나는 열쇠 생각이 간절해졌다. 계단을 올라가 지난날의 따스한 기억들을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았으나 굳게 잠겨 있었다.
 나는 현관에서 나와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창문을 통해 더 잘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땅은 급히 경사가 진 데다가 창문은 너무 높았다.
 나는 작은 돌디딤길을 따라 뒷문으로 갔다. 거기에도 창문이 있없는데 안이 더 잘 보였다. 나는 이마를 바싹 대고 안을 살펴보았다. 구식의 식당이 보였다. 큰 식탁과 밝은 색의 티파니 램프가 있었다. 벽난로도 있었다.
 다른 창문으로는 사무실이 보였는데 큰 책상과 유리문이 달린 책장이 두 개 있었다. 
세 번째 작은 창문으로는 귀엽고 다소 구식인 듯한 주방이 보였다. 모든 방들이 마음에 들었지만 첫날 본 큰 방이 그 중 제일이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나는 좁은 포오치를 따라 계단으로 되돌아갔다.
 뒷문을 지나칠 때, 나는 무심코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손잡이가 쉽게 돌아가더니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기회는 온 것이다. 얼마나 원했던가. 안으로 들어가서 그 오랜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기를! 하지만 갑자기 둑이 터졌을 때처럼, 홍수처럼 기억의 수문이 열려 오히려 혼란만 가중된다면?
 오래, 아주 오래 망설인 뒤에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동안 입구에 서 있었으나 거기엔 아무 기억도 없었다. 주방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어머니가 거기서 일하던 기억만은 떠올랐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서자 과거의 섬광이 나를 스쳤다. 첫 번째 기억은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다. 젊고 화사한 미소를 지은 어머니가 커다란 생일케이크를 테이블 중간에 내려 놓던 일이 생각났다. 나의 다섯 번째 생일날이었고 케이크는 내가 좋아하는 코코넛케이크였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서 등이 긴 참나무 의자를 하나 당겼다.
 거기에 앉자 또 다른 그림이 섬광처럼 다가왔다. 머리를 숙이고 앉은 한 쌍의 남녀…! 어머니의 숱 많고 곱슬거리는 머리가 얼굴 윤곽을 따라 드리워져 있었지. 그 남자는 내 아버지였나?― 다갈색 머리칼을 지녔다. 머리맡의 불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식탁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모두들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 고통스런 기억이 내 마음을 스쳤다. 어머니는 라라미에서는 한 번도 감사 기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천천히 걸어다녔다. 기억들이 속속 되살아났다. 난로 앞에서 내가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던 일, 또 동화를 듣던 일, 넓은 어깨에 나를 메고 이층으로 올라가시던 아버지… 특히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거실에서 내가 계단 참에 숨어 있는 줄 알면서도 모른 척 두 분이 열렬한 키스를 나누었던 일이다. 달콤한 기억이었고 행복한 기억이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이층은 다소 낯선 느낌을 풍겼다. 침실이 대여섯 개 있었는데 그 중 세 개에만 가구가 있었다. 하나는 분명히 객실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큰 침대와 오래 된 참나무 가구로 미루어보아 부모님의 방인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가 긴 실크 가운을 입고 체경 앞에 서서 매무새를 가다듬는 모습을 보았다. 그 환영이 얼마나 생생한 것이었는지 나는 어머니의 향수냄새를 맡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지막 방 앞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것은 내 방이었던 것이다. 그 방은 작은 소녀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안식처였다. 천장은 흐린 분홍빛이었고, 벽지는 살아 있는 것 같은 덩쿨장미 그림이었다. 가구와 두 개의 침대는 희고 가는 세공제품이었고 안락의자와 흔들의자의 쿠션은 장미가 프린트된 수제품이었다. 침대 맞은편 벽에는 흰 칠을 한 선반이 있었는데 그 위엔 먼지가 앉은 인형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는데 내 마음 속에서 쾌활하고 잘 웃는 검은 고수머리의 여자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킴이었다. 내가 어떻게 킴을 잊었을까? 더 머물고 싶었지만 나는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마음의 문은 내 과거를 드러내기 위해 열렸지만, 내겐 좋았던 기억만 떠올랐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따스하고 행복했던 기억만. 나는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내 마음속 깊은 그늘 속에 숨어 있는 어떠한 무서운 기억도 여기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더욱이 여기서 일어난 일은 아니라고.
 
 나는 왔던 길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는 좁은 베란다에서 후면을 살폈다.
 '이 테라스에 꽃과 나무를 심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에는 의자와 탁자도 놓고. 게이브의 말대로 이곳을 이처럼 황량하게 방치해 두는 것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상상을 하며 나는 베란다로 내려섰다. 그림자가 벌써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기다릴 식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돌 연못 같은 것이 보였다. 나는 저것만 보고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니 그것은 푸울이었다. 바닥에는 1피트쯤 늪같이 괸 물이 있었다. 시내가 가까운 걸로 봐서 시냇물을 끌어다 채워 넣었을 것 같았다. 푸울을 보고 나서 나는 시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내는 아주 매혹적이었다.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도 퍽 경쾌했다. 나는 시내 둑을 따라 참나무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아래를 내려다본 후, 냇물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는 시내 속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마치 딴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이곳에서는 시내의 폭이 넓어져 냇물은 느리고 조용하게 흘러내렸다. 뒤쪽의 시냇물들은 여전히 졸졸거렸지만 이곳은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내 발목에 부딪치는 작은 물결소리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갑자기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이곳은 혼자 올 곳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림자가 짙어지고 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고 있는 이런 오후에는 말이다.
 그때 내가 움직일 때 내는 물 튕기는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빠르고 얕은 내 숨소리 외에는 다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고 쑤시는 듯한 감각이 날 덮쳐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너편 둑은 내 머리보다 훨씬 높았다. 거기서 누가 날 내려다보자면 그는 가장자리로 곧바로 와야만 할 것이고, 나도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텔 옆으로 시내와 길 사이에 숲과 덤불이 있었고, 거기엔 늙은 참나무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누군가 거기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불안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했지만, 자꾸만 목덜미가 쑤셔왔다.
 로이스는 이 언덕에 아직 퓨마나 코요테가 있다고 말했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침을 삼켰다. 고양이과의 큰 짐승이 그늘 속에서 날 덮치려 한다는 생각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순간적인 위기감으로 둑을 살폈다. 하지만 거기에 짐승의 크고 노란 눈은 없었다. 무서움은 좀 가라앉았다. 나는 시내를 건너서 호텔 쪽으로 갔다.
 그때 나는 다시 누군가가 내 맞은편 숲에서 몰래 움직이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비명을 지르며 호텔 쪽으로 물을 건너 뛸까 하는 충동도 일었다. 그러나 곧, 바로 이 경사 때문에 범인은 먼저 거기에 닿아 있다가 나를 가로막을 것이라는 직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비명을 질러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비명소리를 들을 사람은 그 범인밖에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전혀 아무것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내가 왔던 길로 경쾌하게 되돌아가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생각보다 훨씬 힘이 들었다. 내 목표는 우선 호텔 뒤의 넓은 공지에 가서 좀 쉬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몇 분간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긴 시간이었다. 한 발자국 떼놓을 때마다 안전한가를 학인하면서 나는 시내를 따라 걸었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따라 누군가 움직이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아주 희미하고 은밀했다.
 나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나 도주를 각오하며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둑까지 가기 위해서는 필히 거쳐야 하는 커다란 참나무에 가까이 왔다.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멎었다. 나는 멈추어 서서 아까 시냇물에서 건져낸 돌에 마음을 빼앗긴 척했다. 그러나 긴장한 내 두 귀에 들려오는 것은 불길한 정적의 소리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움직였다. 내 모든 신경은 공격에 대비해서 팽팽히 곤두서 있었다.
 이제 참나무 맞은편까지 왔다. 나는 그것을 돌아 정원계단 쪽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동작으로 나는 참나무 옆 둑을 향했다.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명확했고 틀림없었다. 그 소리는 커다란 참나무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감히 그쪽을 보지도 못하고 잔디 위를 달렸다. 이제 그는 내 바로 뒤에 있었다. 나는 숨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그의 손이 거의 내 머리칼을 잡아채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쏜살같이 달렸다. 킴이 호텔 현관에서 나왔다. 나는 거의 구를 듯 그녀를 붙잡았다.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무조건 길 쪽으로 끌었다.
 "어서, 어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바로 내 뒤에 있어!"
 "누가 네 뒤에 있다는 거야?"
 킴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우리는 방치된 정원으로 함께 갔다.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그곳은 완벽히 텅 비어 있었다.

                   12


 나는 킴에게까지도 내 공포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덤불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 내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는 것, 그리고 그 숲 속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바로 나를 해치려는 자가 있다는 의미라는 걸 그녀에게 이해시킬 방법이 없었다. 대신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 후 약간 진정을 하고 말했다.
 "덤불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 로이스 말대로 퓨마가 있나 봐." "퓨마! 그걸 보았단 말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었어… 아마 내 착각이었겠지…" "그걸 가지고 널 비난할 생각은 없어."
 킴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집으로 가자. 로이스가 돌아오면, 어두워지기 전에 여기 와서 살펴보려 할 거야."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킴, 제발 로이스에게 이 일을 말하지 말아 줘. 그는 또 과거와 연결지어 생각할 거야. 난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싫어…"
 나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킴은 대강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무엇이 있는지도 몰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퓨마든지 아니면 불법체류자가. 그들은 잘 그러지는 않지만… 신디, 그전 날의 그 이상한 녀석일 거란 생각이 들었니? 저 앞에 주차해 있는 네 차를 본 게 아닐까…" 길고 차가운 뱀이 내 배를 감는 것 같았다. 생각해 낼 순 없었지만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난 저 차를 막 받은 거잖아, 킴. 그는 그게 내 차인 줄 모를 거야!" 소름이 돋았다. 만일 그가 페어헤이븐에서 날 알고 있는 몇 사람 중의 하나라면! 킴이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갑자기 떨며 말했다.
 "어쨌든 여기서 나가자. 운전할 수 없겠으면 내 차로 돌아가자." 나는 그녀의 차가 내 차 뒤에 세워져 있는 것도 깨닫지 못했었다.
 "난 괜찮아. 네가 가려던 곳으로 가."
 나는 가능한 한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 날 차까지 데리고 왔다.
 "난 널 찾으러 왔어. 게이브는 오래 전에 떠났고, 로라와 함께 있는데 네 걱정이 되지 뭐야."
 우리는 내 차로 다가갔다. 내가 열쇠를 빼서 차에 끼었을 때 킴이 말했다.
 "신디, 아무래도 로이스에게 말해야겠어."
 절망감이 엄습했다. 
 "그렇다면 말해. 하지만 난 정말로 그에게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킴." 
 집에 도착했을 때, 로이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었다. 나는 곧 내 방으로 갔다. 나는 로이스에게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킴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도 딱히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정신병에 걸리기 쉬운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침대에 누워 끔찍한 경험들을 떨쳐 버리려 했으나, 의문이 계속 내 머리를 맴돌았다. 숲 속에 숨어 있던 사람이 검은 스키마스크를 쓴 그 사람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는 누구라도 해쳤을까, 아니면 그는 호텔 앞에 세워 둔 차가 내 차다는 걸 알았을까? 알았다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마지막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그는 내가 그 차를 타는 걸 보았거나 내가 그 차를 선물받은 걸 아는 사람일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을 꼽아 보았다. 킴과 로라. 
킴은 그 얘기를 브라이언에게 했을 거고, 그는 랜디 및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물론 게이브와 로이스도 있다. 그밖의 사람으로는 농장의 일꾼들이 있겠지만 나는 그들은 제외시켰다. 나는 그들을 본 적도 없고,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할 이유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스키마스크를 쓴 사람이나 방금 시냇가에 있었던 사람이나, 그 들이 같은 사람이든 아니든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왜? 내가 무얼 했으며 무얼 알기에? 누가 어떤 동기에서 나를 제거하려는 것일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갔다. 나는 거기서 오랫동안 목욕을 했다. 보이지 않는 막으로 나를 덮고 있는 듯한 점액을 씻어낼 수 있는 것처럼.
 
 킴이 로이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저녁식사 중에 그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 후 내가 석양을 보는 척 테라스를 거닐고 있을 때 로이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곁으로 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알리고 싶지 않아한다고 킴이 말하더군." 그는 내게 바싹 다가왔다.
 "식사 전에 숲에 가보았더니 덤불 속에 확실히 누군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어." 그는 팔로 나를 안았다. 하지만 내가 굳어지자 팔을 풀었다.
 "와이오밍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나는 굳어진 입술로 겨우 말했다.
 "날 그렇게 생각해? 돈 때문에 내가 너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나?" 그는 갑자기 내 두 팔을 잡았다.
 "이 바보야. 난 널 사랑해! 그리고 너도 그러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어.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넌 가야 한다고 말해야겠지. 하지만 난 너를 죽이려 한 적이 없어. 외이오밍으로 돌아가는 건 너를 지키는 방법이 아니야. 네 부모님이나 데이빗도 지킬 수 없었잖아?"
 나는 충격으로 눈이 둥그래졌다.
 "그들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의 반응에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해. 신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의문스럽게 죽었어. 나는 그 일들이 오래 전부터 여기서 일어난 일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그 열쇠야."
 나는 몸을 떨었다. 
 "그럼 내가 깨닫지 못하는 일 말인가요?"
 "아니면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누군가가 네 기억이 되살아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현재의 행복한 햇빛을 가리려는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 뻗쳐오고 있었다. 무력감이 나를 휩쌌다.
 "그럼 그게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하는 한 난 어디서든 안전하지 못하겠군요!" 그가 대답하지 않은 것이 바로 대답이었다.
 
 그 다음주에 나는 킴이나 로라와 함께가 아니면 외출하지 않았고, 또 그럴 경우 페어헤이븐에만 갔었다. 로이스는 그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로이스의 말대로 와이오밍에서 차 사고의 목표가 나였다면, 세 사람의 무고한 죽음도 억제책이 될 수는 없었다.
 "너도 거기 타려고 했었지! 감기만 아니었다면 말야. 내 생각엔 누군가 네가 살아서 여기로 오는 걸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것 같아."
 "하지만 내가 온다는 걸 누가 알았겠어요?"
 로이스는 쓸데없다는 몸짓을 했다. 
 "지방 신문에 실렸어. 페어헤이븐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어." 나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능한 한 집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하는 것밖에는.
 아무런 할 일이 없어 나는 오전 늦게까지 침대에 머물러 있기 시작했는데, 그건 내게는 부자연스러웠다. 그건 내 정신 상태에도 좋지 못했다. 나는 잠을 깨고서도 거기 누워서 내가 처한 무서운 상황에 대해 두고두고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로이스를 다시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단순히 달리 혐의를 둘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마리화나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있긴 했지만, 나는 그 발견을 무시해 버렸다. 이 일의 근저에 무엇이 있건, 그것은 그날 아침의 승마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는 점에 대해 나는 로이스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처음 며칠이 지난 뒤, 내 안절부절한 상태는 거의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제 나는 겁에 질리고 화가 났으며 불안한 기운으로 가득차서 그걸 어떻게 발산시켜야 할지 몰랐다. 잠깐 말을 탈까도 생각했지만, 무모한 생각을 곧 떨쳐 버렸다. 하지만 부엌에 들어가 쥬아니타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걸 발견하고, 나는 차를 사용할 구실을 찾아냈다.
 "에밀리오 때문이에요."
 무슨 일로 그러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한참을 조르자, 그녀는 주저하며 말했다.
 "오늘 아침 일찍 나가 버렸어요. 아주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는 편지를 남기고." 그녀의 얼굴은 근심으로 긴장되어 있었다.
 "로이스님이 화를 낼 거예요. 시로 나가기 전에 오늘 에밀리오가 무슨 일을 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거든요. 에밀리오가 나가 버렸다고 그때 말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에밀리오는 그 사실을 모르죠! 틀림없이 로이스는 그 점을 고려할 거예요." 나는 조리에 맞게 지적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스런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사실상 그녀는 손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에밀리오는 로이스님이 금지한 탐정노릇을 다시 시작한 것 같아요. 로이스님은 에밀리오 때문에 걱정하고 있고, 나도 그래요." "하지만 지금 걱정할 일이 뭐 있어요? 로이스는 아보카도 줍기는 당분간 끝난 거라고 말하던데요?"
 그녀의 얼굴에서 긴장이 약간 풀렸다.
 "그래요. 하지만 여전히… 어디에나 나쁜 놈들은 있어요." 비록 말은 안했지만 그녀가 나를 습격하려 했던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몸이 오싹했다. 만일 내가 그의 특정한 목표가 아니었고 그 남자가 순전한 미치광이였다면, 힘없는 어린 소년에게 테러를 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를 만족시킬지도 몰랐다.
 "난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차를 타고 잠시만 언덕을 돌아보겠어요. 아마 에밀리오를 찾아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을 거예요."
 그때 그녀는 정말 놀란 것 같았다.
 "아, 안 돼요! 로이스님이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에밀리오보다 아가씨 때문에 더 두려워하는걸요. 가족 말고는 아무도 집에 들여놓지 말라고 내게 주의를 줬어요."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대로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거기서는 틀림없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나 차고에서 차를 꺼내 미개간지를 향해 셰도우 크리크를 따라 내려갈 때, 나는 점점 겁이 났다. 
 잠시 후 나는 수색을 단념했다. 나는 도로의 넓은 곳에서 속력을 줄이고 U턴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50피트 전방이 못되는 곳에서 에밀리오가 숲으로부터 돌진해 나왔다. 그는 나를 보고 갑자기 멈췄다가 덤불 속으로 숨었다. 하지만 내가 그의 얼굴을 볼 시간은 있었다. 그는 정말 놀란 것 같았다.
 "에밀리오!"
 나는 부질없이 소리쳤다. 기어를 넣고 그가 사라진 지점에 닿을 때까지 차를 전진시켰다. 그러나 그의 자취는 없었다. 나는 결단을 못 내리고 앉아 있다가 엔진을 끄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내 신체의 전 신경이 저 뒤엉킨 숲 속으로 그를 따라가지 말라고 내게 말했지만, 나는 에밀리오의 겁에 질린 표정을 마음속에서 지워 버릴 수 없었다. 그 표정은 나를 보았다는 이유 때문일 수는 없었다. 그 표정은 그가 덤불 숲 밖으로 달려나왔을 때 이미 그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왜 내게로 달려오지 않고 달아났을까? 우리는 즉시 여기를 떠날 수가 있었을 텐테.
 나는 차를 돌아서 수풀 가장자리에 갔다.
 "에밀리오!"
 나는 최대한 크게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무 밑의 어두운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덤불과 나무의 어두운 형체 사 이에서 그의 가는 몸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심지어 숲으로 통하는 희미한 오솔길로 몇 발짝 들여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발견되길 원치 않는다면 그 뒤엉킨 덩어리 속에서 결코 그를 찾아낼 수 없으리란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차를 향해 돌아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목장으로 돌아가서 그를 어디서 보았는지 한시바삐 알려 주는 것뿐이었다.
 공포나 혹은 고통에서 나오는 찌르는 듯한 외침이 나를 멈춰 세웠다. 에밀리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그 일이 현명한가 생각할 틈도 없이 나는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고양이처럼 좁은 길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길 어디쯤에서, 나는 끝이 갈라진 무거운 가지를 발견하고 그걸 줏어 들었다. 그렇게 단단히 무장을 하고는 숲 속 빈터의 한 가운데로 바로 뛰어들었다.
 최소한 l2명은 될 듯한 더럽고 피부가 거무스레한 남자들이 서 있거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판자, 나무, 텐트로 된 임시변통의 차폐물 아래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를 보자, 그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누군지를 깨닫자, 놀라움은 곧 노여움으로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급히 한 걸음 물러서서 경고하듯이 나뭇가지를 들어올렸다. 어디에도 우호적인 태도라곤 조금도 없었고, 이해할 만했다. 그 집단의 후미에 선 예쁜 소녀의 얼굴조차 폐쇄적이고 은밀히 엿보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내 생각에 야비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스페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씻지 않은 몸에서 나는 악취가 질식시낄 듯 코를 찔렀다.
 나는 또 넘어질 뻔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 들고 땅딸막한 남자가 내 팔을 잡아, 넘어지는 걸 막아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내 힘없는 손에서 가지를 잡아채서 던져 버렸다. 그는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고, 내내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사포의 스페인어로 떠들었다. 나는 그의 악취가 불러일으키는 구토를 겨우 참으면서 그의 눈을 직시했다.
 "날 놔요."
 나는 차갑게 명령하고, TV 서부극을 흉내내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연방 수사국에 알릴 거예요."
 그는 분명 내가 떨고 있음을 느꼈고 내가 하는 말이 으름장이라는 걸 안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거칠게 나를 밀어젖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나는 넘어져서 잎으로 뒤덮인 땅에 뻗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앞으로 몰려와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들의 위협적인 얼굴을 보고는 모든 겉치레를 잃었다.
 "에밀리오! 누가 제발 좀 살려 줘요!"
 알아들을 수 없는 연극적인 스페인어로 명령을 하며, 위풍있는 목소리가 내 비명을 가로질렀다. 머뭇거리며 사람들이 물러섰고 브라이언 하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 곁에 무릎을 꿇었다.
 "세상에, 신디! 괜찮아?"
 나는 안도감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 같아. 하지만 브라이언, 난 너무 놀랐어!"
 그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들이 우릴 가게 해줄까!"
 나는 두려워하며 멕시코인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여전히 화가 난 듯 중얼거리며 불편하도록 가까이 모여 서 있었다.
 "걱정 마."
 그는 다시 날카롭고 딱딱 끊어지는 스페인어로 그 사람들에게 말했다. 변명하는 듯한 어조로 그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그는 그들을 무시하고 내 팔을 잡았다. 
 "자, 여기서 나가자."
 나는 그와 함께 가려다가 멈춰 섰다.
 "기다려! 에밀리오는 어떻게 해!"
 "에밀리오?"
 그는 놀람과 경악을 뒤섞어 그 이름을 말했다.
 "좀전에 바로 여기에 있었어. 그래서 내가 차를 멈춘 거야. 한순간 그는 도로로 달려 나왔고 난 그의 얼굴을 봤어. 브라이언, 그는 겁에 질려 있었어. 정말 그랬어." 나는 멕시코인들을 흘낏 보았다. 
 "내 생각엔 그가 저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아주 유창하게 들리는 스페인어로 브리이언이 다시 말했다. '에밀리오'와 '무챠코'란 말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쑥스럽게 웃기 시작했고, 한 사람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큰소리로 웃었다. 그는 짧게 대답하고 날카롭게 손뼉을 쳤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듯 웃었다. 나는 그들이 재미로 가엾은 에밀리오를 겁준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브라이언 역시 무뚝뚝하게 말을 뱉더니만 도로로 되돌아왔다.
 숲에서 나오자, 내 차 뒤에 캠프용 방이 달린 회색 트럭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주위에 있는 유일한 다른 차량이었기에, 나는 브라이언이 그걸 몰고 왔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내 차로 날 데려가면서 아무 말도 안했다. 
 "괜찮겠어? 아니면 내가 집까지 운전해다 줄까?"
 그가 물었다. 
 "난 괜찮아."
 난 여전히 심하게 놀란 상태였다. 나는 내 차를 들여다보고는 엔진이 꺼져 있고 열쇠가 없다는 걸 알았다.
 브라이언이 그의 포켓에서 열쇠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도대체 무얼 하고 다니니? 로이스는 네가 집을 떠나는 걸 바라지 않았을 텐테." 그의 질문이 하도 날카로워서 나는 화가 치밀었다.
 "에밀리오를 찾고 있었어. 그가 일찍 집을 나가서 쥬아니타가 걱정하고 있었단 말야."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들이 그를 봤대지? 그들이 뭐라고 했어!"
 "그가 토끼처럼 도망치더라는 것뿐야, 신디. 넌 저기서 심한 곤경을 겪었을 거야." "알아."
 그 생각을 하자, 화가 가라앉았다.
 "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나를 공격했을 거야."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의미하는 방식은 아냐. 저 사람들은 불법 체류자야. 그들은 네가 엿보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설사 그렇지 않았더라도, 네가 그들을 발견했으니까 당국에 알릴 거라고 생각한 거지."
 나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러지 말까! 당국에 알리는 것 말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없어. 어물쩡거리다가 잡혀서 추방되려 하지 않겠지." 나는 나를 괴롭히던 질문을 했다. 
 "브라이언? 넌 거기서 뭘 하고 있었니? 마치 넌 그들을 아는 것 같더라." "난 미개간지에 가던 중이었는데, 네 차를 봤어."
 이번에는 그의 말이 변명처럼 들렸다.
 "새 차에 열쇠가 꽂힌 채 시동이 걸려 있을 땐, 머리가 좋지 않아도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네 비명소리가 들렸어."
 그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저 밀입국 멕시코인들, 아주 놀라워. 권위있게 얘기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그대로 순종한다구."
 그의 설명은 그럴 듯했지만, 완전히 믿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은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여기 근처의 어떤 목장에서 일하는 건가?"
 "내가 어떻게 알아?"
 그의 말에는 갑작스레 짜증이 담겼다.
 "중요한 건 네가 무사히 빠져 나왔다는 거야. 정말 괜찮다면 나는 가볼게. 마음 편하게 먹어."
 그는 회색 트럭으로 돌아가서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내 차를 출발시켜 그를 지나치며 U턴을 했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도 답례로 손을 들어 보였다. 트럭은 내가 도로의 커브를 돌아 시야가 가리워질 때까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13


 로이스가 돌아오자, 나는 즉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주었다. 나는 그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꽉 다문 입가의 근육이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쥬아니타도 아나?'라고 물었을 뿐이었다.
 "다는 몰라요. 괜시리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멀리서 그를 보았다고만 했어요." "그가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들이 그가 스파이짓하는 걸 붙들어서 그에게 겁을 준 것 같아."
 그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았어요. 그들은 그 일을 굉장히 재미있어 했어요. 그런데 그는 왜 날 보고 도망쳤을까요?"
 "가책 때문이겠지. 집 근처에선 난처하리라는 걸 알았을 거고."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경찰을 부를 필요는 없겠어."
 내가 불안스러운 듯이 보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적정 마, 신디. 그는 괜찮을 거야. 오늘 네가 그런 일을 겪고서는 믿기 어렵겠지만 그 외국인들이 자주 말썽을 일으키는 건 아니야."
 그는 집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머뭇거림이 그를 멈추게 했다. 그의 맑은 눈이 나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무슨 일이 더 있군. 오늘 또 다른 일이 있었나?"
 "오늘 일은 아니예요. 우선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당신은 불법 체류자를 고용하나요? 그들이 거기 있는 게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안도감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게 걱정이었나? 이곳의 많은 농장주들이 그들을 채용하지. 그들은 그런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어. 그러나 도덕이나 윤리를 제쳐 놓고도, 법을 어기는 일이긴 하지. 
나는 그 법을 어기진 않아."
 그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고, 나는 조금 긴장이 풀렸다.
 "마리화나 재배도 포함해서 말인가요?"
 "마약?"
 나는 의혹을 떨쳐 버리면서 승마중에 감추어진 마리화나를 발견한 일과 관개 시설을 본 일을 말했다.
 "왜 이제야 그 얘길 하는 거지?"
 내가 잠자코 있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어떤 생각이었는지 알겠어. 지금까지 모든 것에 대해 날 의심해 왔군." 누구를 사랑할 땐 그를 기꺼이 믿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죄진 것처럼 말했다.
 "미안해요, 로이스. 잘 알지도 못하고."
 그는 당장 기분이 바뀌어서 부드럽게 날 끌어당겼다.
 "미안한 건 나야. 네가 날 꼭 믿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결국 네가 정말 나에 대해 아는 게 뭐지? 하지만 내가 모든 걸 변화시키겠어."
 그는 머리를 숙여 내게 키스했다. 그때 나는 그에게 내 목숨이라도 맡겼을 게다.
 쥬아니타와 간단히 이야기하고 나서, 로이스는 내게 마리화나 밭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게 아직 거기 있다면, 나는 당국에 알려야 해. 그들이 스스로 그걸 찾는다면 좋지 않을 거야. 내 생각대로라면 마리화나 재배가 내 부업이 아니라는 걸 이해시키기가 힘들 거야."
 나는 로이스에게 점점 더 미안해졌다. 로이스에게 비밀로 한 일 때문에 그에게 곤란을 끼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우리는 농장의 트럭으로 협곡의 꼭대기에 갔고, 거기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건조하고 붉은 흙이 있는 숲의 빈터에 다다르자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고 나는 떨기 시작했다.
 "거기 가면 조심해야 해요. 전에 나는 덫에 치일 뻔했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덫은 없었다. 쑥과 몇 개의 빈 땅으로 헛되이 물을 쏟고 있는 관개시설 외엔.
 "꽤 영리하군. 그들은 근처 숲에서 여기까지 PVC 파이프를 설치했어. 내가 숲에 보내는 물을 끌어 마약을 키우는 거야."
 그는 내 팔을 잡았고, 우리는 골짜기로 되돌아왔다.
 "이상하군. 왜 수확을 얼마 안 남기고 대마초를 파내 버렸을까?" 나는 내가 이곳을 발견하던 날 느꼈던 시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내가 당신에게 말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그처럼 어리석지 않았다면 진작 말했었겠죠."
 우리가 트럭 앞에 도착하자, 그는 나를 끌어당겼다.
 "별일 아니야."
 그는 나를 안고 나의 얼굴을 그의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들이 널 해치지 않았던 게 감사할 뿐이야."
 그는 내게 키스했고, 나는 잠시 그에게 안겨 있었다.
 "이 일이 브론코를 탔던 사람과는 관계 없다고 생각해요, 로이스?" "아니, 살인자는 마약재배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있어." 그는 나를 트럭에 태우고 그도 탔다.
 "나는 누가 배후에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빌어먹을 에밀리오가 어디에 갔는지가 더 걱정스러워."
 
 저녁식사 때, 로이스는 쥬아니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우리는 모두 근심에 빠졌다.
 "가르시아에게 말해 봐야겠어. 그들은 그를 못 봤다지만, 내 생각엔 호세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
 쥬아니타가 말렸지만, 로이스는 밖으로 나갔다.
 쥬아니타는 울먹였다. 
 "로이스님이 내 아들 때문에 저녁식사를 망치다니 이런 죄송할 데가!" 킴이 일어나 그녀를 위로했다. 
 "그 일에 대해 조금도 걱정 말아요. 아줌마와 에밀리오가 식은 푸딩보다 훨씬 중요해요. 당신도 그걸 알잖아요."
 놀랍게도 로라도 말했다.
 "킴 말이 맞아요. 그리고 부엌 치우는 일보다두요. 쥬아니타, 가서 쉬어요. 킴과 내가 치울 테니까."
 "아냐, 그렇게는 못해요. 그보다도… 바쁜 게 낫잖아!" 그녀는 로이스가 손도 안 댄 접시를 치웠다.
 "로이스님이 돌아올 때까지 치우겠어요."
 식사 후, 로라는 다음주 메뉴를 짠다고 방으로 가고, 킴과 나만 거실에 남아 서성였다.
 킴이 말했다. 
 "도대체 우리가 안절부절못하는 이유가 뭐지? 애는 오늘 오후까지도 무사했잖아?" "그의 비명을 들은 후 나는 그를 못 봤어, 킴. 내게 일어나는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어떻게 그런 일이… 난 정말이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 한참 후 로이스가 돌아왔다.
 "가르시아는 그를 못 보았대고, 호세는 하루 종일 정원에서 일했대." 그는 심각해 보였다. 
 "가르시아와 나는 네가 오늘 발견했다는 캠프로 갔었어, 신디. 내 예상대로 말끔하더군. 에밀리오의 자취는 없었어."
 내키지 않는 듯 그는 계속 말했다.
 "쥬아니타에게 말하는 게 낫겠어."
 그가 부엌으로 갈 때, 나는 거의 눈에 띄지 않던 그의 절름거림이 다시 현저해진 걸 알았다.
 킴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그도 역시 걱정하고 있어." 

 다음날 아침 쥬아니타가 잠을 못 잔 얼굴로 에밀리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는 누구도 근심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로이스는 서재로 전화를 걸러 갔다가 어두운 얼굴로 돌아왔다.
 "바로 내가 두려워했던 일이야."
 그는 소리쳤다.
 "실종 24시간 전에는 신고를 받지 않으려 해. 오늘 오후까지 경찰은 움직이지도 않을 거야."
 그는 침착하려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멕시코 소년 하나 없어진 게 대수가 아닌 거겠지."
 전화벨이 울리고, 로이스가 받으러 갔다. 그는 간단히 대답만 했다. 에밀리오와 관계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킴이 서성이다가 소리쳤다. 
 "잠시 말이라도 타고 와야겠어."
 로이스는 전화를 끊고 거칠게 말했다.
 "안 돼, 학교에 가야 돼. 너에 대해서까지 걱정하지는 않게." 그리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신디, 넌 집 밖엔 코빼기도 내밀지 말아. 알겠지?" 우리는 아연실색한 채 서 있었다.
 그는 우리를 돌아다보더니, 한숨을 쉬고 두통이 있는 것처럼 이마를 비볐다. 그는 좀 조용하게 말했다.
 "녹색 브론코 말인데, 리버사이드 주에서 며칠 전에 도난당했다는 거야. 테나하 근처 계곡 바닥에서 텅 비어 있는 채 발견됐대."
 침묵이 흘렀다. 나는 킴도 나나 로이스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누가 차를 훔쳤건 목적은 하나 나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나 갈래. 나중에 봐, 신디."
 킴이 나갔다.
 로이스가 나를 보았다.
 "에밀리오를 찾으라고 전 농장 일꾼들에게 명했어. 그를 찾지 못하면 이웃 농장주에게 도움을 청해야지. 그러나 납득시키기가 어려워. 그들은 재수없는 일이라 생각할 거고, 또 그게 맞아. 귀신이 곡할 노릇이니 알 수가 있나." 그가 나간 후 나는 집안일을 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누가 왜 나를 죽이려 하며, 그것이 에밀리오의 갑작스런 실종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킴이 돌아왔을 때 나는 유리닦기를 마치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테이블 위에 던지더니 의자에 주저앉았다.
 "소용없어. 난 한 시간 내내 교수의 말을 한 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어. 에밀리오에 관한 것과 너를 둘러싼 이 끔찍한 상황만 떠오르고…"
 "나 역시!"
 "이건 너무 불공정해."
 킴은 화난 듯이 방을 왔다갔다 했다.
 "그놈이 너를 놀라게 하고 우리 생활을 망쳐 버렸어.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 나는 그녀가 무얼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테라스의 문을 날카롭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킴과 나는 비명을 울리면서 서로를 껴안고는 소리나는 곳을 보았다. 마른 멕시코 소년이 우리를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킴이 웃음을 터뜨리며 불안하게 말했다. 
 "오, 호세야."
 그리고는 덧붙였다. 
 "저애가 왜 저러지?"
 내가 조심시키기 전에 킴은 달려가 문을 열었다.
 "괜찮아, 얘는 에밀리오의 친구야. 들어와, 호세. 너 그를 보았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겁먹은 얼굴, 그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뭘 봤어요."
 꼬마가 말했다.
 "그의 엄마에게 말해야 될 것 같아요."
 킴은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무얼 보았니?"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를 다그쳤다. 
 "에밀리오와 관계 있는 일이니!"
 "그의 엄마에게만 말할래요."
 그는 고집스레 말했다.
 "맙소사! 좋아, 쥬아니타를 데려오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곧 쥬아니타가 나타났다. 그녀는 호세를 보자 멈추어 섰다. 
마침내 그녀가 물었다. 
 "그앨 보았니?"
 그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걸 발견했어요."
 그는 무언가 쥔 손을 펴서 쥬아니타에게 내밀었다. 쥬아니타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나는 그것이 얇은 체인에 달린 십자가상임을 알았다.
 쥬아니타는 한숨을 쉬었다.
 "에밀리오 것이야."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가슴에다 가져갔다.
 "나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킴과 나는 호세를 바라보았다. 
 "이걸 어디서 발견했니?"
 킴이 물었다.
 "에밀리오가 어디 있는지 짐작이 가니?"
 그가 놀라는 것 같아 나는 킴을 제지시키고 그를 달랬다.
 "쥬아니타는 에밀리오 때문에 근심하고 있어. 우리도 그렇고.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니?"
 우리는 모두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몰라요."
 그는 발작적으로 침을 삼켰다. 
 "만나기로 했는데 그가 나오지 않았어요. 난 단지 저걸 발견했을 뿐이에요." 킴이 또 말하려 했지만, 내가 막았다. 나는 달래면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어제 그를 본 후에도 넌 그를 보았지?"
 그는 쥬아니타에게 미안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걔가 내 창에 돌을 던졌어요… 하지만 로이스님께 거짓말한 건 아녜요. 그가 왔을 땐 난 아직 에밀리오를 보지 못했었으니까요. 걔는 내게 뭘 엿보는 걸 도와 달라고 했지만, 엄마 아빠가 주무시길 기다리다 내가 먼저 잠들어 버렸어요." "오늘 아침에야 난 만나기로 한 곳에 갔어요… 그런데 아무도 없었죠." "그렇다면 적어도 어젯밤까지 그는 무사했던 거야."
 킴이 말했다. 
 "호세야. 이걸 어디서 주웠는지 말해 다오."
 그는 킴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쥬아니타가 그에게 스페인어로 몇 마디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불법 체류자들 캠프 곁 쓰레기 속에서요."
 나는 갑자기 맥이 풀렸다. 
 "그렇다면 그건 내가 그를 보았을 때 떨어뜨린 걸 거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거기가 아니예요. 에밀리오는 그들을 따라 새 캠프로 갔었어요. 그리고는 나에게 온 거예요. 하지만 난 그때 나갈 수 없었던 거죠." 호세는 그의 친구에 대해 아주 미안해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좀 가여워졌다. 
 "알았어."
 킴이 갑자기 말했다.
 "너희 둘이 장난치는 거지. 밤새 밖에 서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게 뭐가 있었겠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호세가 말했다. 
 "에밀리오는 어제 이분이 캠프에서 겪고 있는 일을 보았대요." 그는 나를 가리켰다. 
 "이분이 위험했던 것은 걔 때문이었고, 걔는 로이스님이 매우 화내실 걸 알았죠. 그는 캠프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그걸 알아낸다면 로이스님의 화도 좀 누그러질 거라고 생각했대요."
 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킴은 여전히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캠프에서 무언가 일어난다는 건 무슨 뜻이지? 왜 그걸 로이스 오빠가 알고 싶어한다는 거야?"
 "그건 몰라요."
 "좋아. 아무튼 로이스가 네가 이걸 가져왔다는 걸 알아야 할 거야." 킴이 말했다.
 "네 아버지 이 근처에서 일하시니?"
 "에밀리오를 찾고 계세요. 여기 없어요."
 "그럼 내가 그를 찾으러 가야겠다."
 "그럴 수 없다, 킴."
 킴의 마지막 말을 들었는지 로라가 끼어들었다.
 "로이스는 너나 신디 모두 나가지 않기를 바랄 거다." 킴은 불쾌한 듯했으나, 그 말에 수긍했다. 
 "하지만 그들이 엉뚱한 곳을 찾고 있는데 내가 그 소식을 듣고도 여기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소식?"
 킴은 자초지종을 말했다. 로라도 로이스에게 곧 이 일을 알려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브라이언과 그 친구들이라면 도와 주지 않을까?"
 "하지만 집에 오는 길에 들렀더니 그들 모두 집에 없었어요." 킴이 말했다.
 "게이브에게 부탁하려고도 했었지만, 그가 방해받는 걸 원치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말해 볼게."
 로라가 말했다. 그녀는 그 일로 게이브에게 전화 걸 핑계가 생긴 걸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전화하러 간 후 호세가 가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그 캠프가 어딘지 말해 줘."
 킴이 말했다. 
 "어디서 에밀리오를 만나려 했지?"
 그는 킴에게 약도를 말했다. 나는 그 장소가 내가 발견했던 장소와 대개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가 간 후 로라가 전화를 끝내고 왔다.
 "이상해."
 로라가 말했다.
 "아무도 게이브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아."
 쥬아니타가 낮게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가 들고 있던 십자가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아침에 그녀가 부엌에서 '에밀리오는 내 생명이야'라고 중얼거리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면, 내가 로이스를 찾아볼 테야."
 킴이 말했다. 
 "나도 같이 가겠어."
 "안 돼! 그건 너의 안전에 도움이 안 돼, 신디."
 "너에게도 마찬가지야."
 로라가 말했다.
 "내가 게이브에게 다시 전화하든지 경찰을 부르지. 로이스는…" "혼자 가게 하진 않아."
 내가 말했다. 
 "내 책임도 있어. 내가 어제 거기 가지 않았더라면…" 킴은 내 결심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는 듯했다.
 "좋아, 난 말을 준비하겠어."
 로라의 근심스런 목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내 침실문을 닫아 버렸다. 내가 진과 스웨터로 갈아입었을 때 나는 로이스의 경고와 나 자신의 본능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가야 한다고 느끼는지 생각하려 했다. 마치 악마가 날 붙들고 있어서 내가 그 마법을 쳐부수기 전에는 내 인생을 놓아 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면, 내가 에밀리오에게 느끼는 죄의식 그리고 그의 어머니 얼굴에 어리던 절망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아래층으로 가자 킴이 말했다.
 "경찰을 부르겠어. 누군가를 보내주겠지."
 나는 미스터에 올라타 킴을 따라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
 내가 그녀를 따라잡으며 물었다.
 "호세가 말해 준 캠프에 가면, 로이스를 만날 확률이 많을 거야. 호세 말에 따르면 네가 본 그 캠프와 가까운 곳이라던데."
 "호세는 그 캠프에 아무도 없다고 했어."
 내가 말했다.
 "하지만 뭔가 단서가 있을 거야. 에밀리오도 어딘가 있을 거고."

                   14


 숲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적이었다. 
 우리는 찌는 듯한 더위 속으로 단둘이서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나는 전율을 참았고, 킴까지도 무시무시한 정적에 대해 이상한 느낌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황량한 곳은 처음 봐."
 킴이 보통때보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에밀리오를 찾아다니고 있나 보지…"
 킴은 그녀가 탄 팔로미노를 뛰게 했고, 미스터는 얌전하게 따라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조를 지속할 수 없었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길은 열기로 가득했다. 내가 입은 셔츠는 땀에 젖었고, 말의 목덜미도 땀으로 얼룩덜룩했다.
 "이리 와."
 킴이 말했다. 
 "우리가 그날 집으로 간 대로 숲을 가로지르는 게 낫지. 좋은 시간을 보낼 순 없겠지만, 그게 더 시원할 거야."
 나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 숲을 나누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늘을 찾는 그녀의 심정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길로 다시 갈 것인가 망설였다. 그 생각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큰 길로 나가는 게 어때? 거기에도 그늘은 있어. 거기가 더 나을 텐데." "아니야."
 킴은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이 길이 나쁜 기억을 되살린다는 건 알아. 하지만 우린 지금 보이지 않을수록 좋아. 그리고 우린 에밀리오를 찾고 있는 중이야. 그는 길에서 나를 봐주슈 하고 서 있지는 않을 거 아냐."
 나는 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낮은 가지를 헤치며 작은 숲에 들어갔을 때, 나는 내 목구멍에서 치받치는 공포와 싸우느라 깊은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나는 점점 킴에게 감탄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말을 탔을 때, 그녀는 숲으로 가는 걸 아주 꺼렸었다. 그러나 이제 숲으로 가야 할 필요가 생기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두꺼운 이파리를 통해 비치는 햇빛은 푸르렀고, 두꺼운 풀밭은 말굽소리를 효과적으로 감추었다. 가끔 익은 아보카도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아마도 아보카도 쥐들이 내는 소리가 정적을 깰 뿐이었다. 나는 내가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무서운 느낌에다, 킴이 에밀리오를 부르는 소리가 이상하게 메아리쳐 왔다. 마치 먼 곳에서 우리에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또 두리번거렸지만 누구 하나 지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킴이 말했다.
 "이것으로 충분해."
 다음 갈림길에서, 그녀는 고속도로 쪽으로 향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다시 햇살 아래로 나온 것이 기뻤지만, 나는 트인 길에서는 노출되고 공격당하기 쉽다는 걸 느꼈다. 킴도 그걸 느꼈는지 될 수 있는 한 길가로 말을 몰려고 했다.
 우리는 몇 분 동안 침묵 속에서 말을 몰았다. 그때 갑자기 킴이 그녀의 말을 세웠다.
 "들어봐!"
 그녀가 말했다.
 "뭐가 들려?"
 나도 내 말을 세웠다.멀리 새 우는 소리 외엔 들리지 않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무슨 소리?"
 내가 속삭이듯 물었다.
 "몰라."
 킴 역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정말 무슨 소리를 들은 건 아니야. 하지만 팔로미노의 귀를 좀 봐."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미스터의 귀 역시 숲을 향해 쫑긋거리고 있었다. 
 "말들이 아는 누군가가 저기에 있는 거야."
 킴이 빠르고 낮게 말했다.
 "에밀리오 말야."
 그녀는 말에서 내렸다.
 "신디, 여기 내 고삐를 잡아. 내가 살짝 저기에 가서 그를 놀라게 할 수 있는지 보겠어."
 나는 고삐를 받지 않고 말에서 내렸다. 
 "내가 대신 가면 어떨까?"
 그녀가 놀라는 걸 보며 내가 덧붙였다.
 "여기 서서 기다리고 싶지 않아, 킴. 난 마치 지금 내가… 손쉬운 목표라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이해했다.
 "좋아.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달려와, 알았지?" 그건 하기 어려운 약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내가 희미한 숲 속으로 들어가자, 내가 옳게 선택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제 정적은 아까보다 훨씬 깊어진 것 같았고, 숲에 사는 쥐의 움직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짙은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신은 테니스화는 두터운 풀밭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몇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점점 숲 깊숙이 들어갔다. 내 등과 팔에 또다시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축축하고 유해한 곳으로부터, 뜨겁고 생명력 있는 태양이 비치는 곳으로 돌아가고픈 욕구와 싸워야 했다.
 '어쨌든 소용없어.'
 나는 생각했다. 
 그때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뛰었다. 나는 소리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에밀리오니?"
 나는 희망에 차서 속삭였다.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가까운 나무 쪽으로 갔다. 에밀리오의 말끔한 얼굴을 볼 것을 기대하면서… 
 구슬같은 두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큰 쥐였다. 나는 비명을 억누르며 뒷걸음질치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러나 내가 몸의 중심을 잡고 뿌리를 언뜻 보았을 때 무언가 새로운 물체가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가까이서 물체를 보았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손바닥을 아래로 한 손이었다. 나뭇잎 더미 아래 숨겨진 무언가에 연결된 게 분명한 작은 손.
 잠시 동안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몇 분의 일 초 사이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되었다. 처음에 온 것은 공포였다.
 '오 하느님, 에밀리오가 아니길!'
 그리고는 희망이 생겼다.
 '그는 날 보고 숨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인정했다.
 '이건 에밀리오의 손이 아니야.'
 나는 전에 반점으로 뒤덮인 손을 본 적이 있었다. 가까이 보자, 그 기억이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 손은 그 피크닉 날에 내 말의 등을 쓰다듬었었다.
 '시뻘겋게 탄 것 같지?'
 랜디가 말했었다.
 나는 전신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돌려 소리지르며 킴과 말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마지막 희망의 조각이 날 붙들었다. 충동과 싸우면서, 나는 몸을 굽혀 늘어진 팔목을 잡았다. 맥 박이 뛰지 않았다. 나는 신중하게 그 손을 부드러운 땅에 내려 놓았다.
 새로운 공포의 물결이 나를 휩쌌다. 온몸에 땀이 배었다. 늘어진 손목, 랜디는 좀전에 죽었다. 그렇다면 살인자는 이 숲 어느 그늘엔가 숨어 있을 것이다. 나는 나뭇가지가 내 얼굴을 할퀴고 내 머리를 잡아당기는 것도 잊고 달렸다.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지만 나는 일어서서 그대로 달렸다.
 킴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랜디야!"
 내가 중얼거렸다.
 "오, 킴, 그가 죽었어. 나뭇잎 밑에서 그를 발견했어!" "뭐라구?"
 그녀의 푸른 눈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정말이야. 정말이야!"
 몸이 너무나 떨려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고삐를 잡고 말을 탔다. 
 "킴, 어서 가자. 살인자가 아직 숲에 있는 것 같애!"
 킴은 말에 올라타서 농장을 향해 달렸다. 나도 그녀를 따랐다. 그러나 몇백 야드 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길 건너편의 덤불숲에서 뛰어나왔다. 나는 공포로 말을 제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킴은 급히 말을 세웠다. 
 "기다려, 신디!"
 그녀가 소리쳤다. 
 "소녀야!"
 그녀의 말이 나의 충격받은 머리를 꿰뚫었다. 나는 말을 세워 되돌아갔다.
 내가 불법 체류자 캠프에서 본 일이 있는 멕시코 소녀였다. 머리는 마구 헝클어졌고 엷은 핑크 블라우스가 찢겨져 매끈한 갈색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그녀가 애원하듯 두 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녀의 손목이 두꺼운 끈으로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공포로 둥그래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끝없는 비명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나는 멍청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킴이 빠른 스페인어로, 그녀의 광란적인 울부짖음을 멈추게 하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갑자기 말을 달려 예전의 역마차 정류장으로 향했다. 나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즉, 그 모든 일이 일어났던 곳, 망각의 베일 아래 감추어졌던 그 무시무시한 것이 있는 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악몽 속으로 무턱대고 달리면서, 나는 무서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들끓는 기억의 화산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마침내 내가 역마차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말에서 내려 현관으로 달렸다. 창문 바로 밑에 있는 벤치 위에 무릎을 꿇고 나는 먼지 낀 창문을 통해 어두운 방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어린이의 키만한 높이로부터 나는 명확히 열리고 있는 과거를 들여다보았다.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그 건물 앞에 트럭을 세우고 나에게 기다리라고 한 다음 문으로 화난 듯 갔는지 나는 몰랐다. 문이 열리지 않자 아버지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문을 발로 찼다. 그것이 내가 고통스런 공포를 느낀 첫 번째 순간이었다. 나는 트럭문을 비틀어 열고 나가 이 창을 들여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무서운 광경이 보였다. 아버지는 창문에 등을 지고 있는 남자 앞에 서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분노와 혐오로 붉으락했다. 나는 그가 소리치는 것을 들었으나 무슨 소리인지는 몰랐다.
 옷을 벗어가던 상태로 방에 서 있던 젊은이들의 얼굴이 공포와 당황과 죄책감으로 덮인 것이 보였다. 그 중의 하나가 뒷문으로 달아나자,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가까이에서 울고 고함치던 반라의 멕시코 소녀에게 공포 어린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보자, 그녀는 그녀가 누워 있던 더러운 담요에서 일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녀의 손목은 묶여 있었고 그녀의 거무스레한 몸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가서 스페인어로 달래듯 말했지만, 그녀는 점점 더 큰 비명을 지르더니 그들이 나간 뒷문으로 가버렸다. 그때 아버지는 돌아서서 내게 등을 지고 있던 검은 머리 남자에게 고함을 쳤다. 아버지의 얼굴이 하도 무서워서 나는 트럭으로 돌아와 무서움에 떨었다. 
 잠시 후 아버지는 트럭으로 왔다.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문을 닫았다. 그의 얼굴은 아직도 노해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게 나와 관계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시동을 걸고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커다란 소리로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나는 몸을 돌려 뒷창을 보았다. 다른 트럭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곧 그 트럭과 우리 트럭의 거리가 좁혀졌고, 그 트럭은 우리 곁으로 오더니 우리를 절벽으로 몰았다.
 나는 눈을 감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의 고함은 처음에는 멕시코 소녀의 비명과 섞여 내 머리를 울렸고, 다음에는 브레이크 거는 소리와 금속이 서로 마찰하는 소리에 섞였다. 갑자기 나는 내 꿈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르고 또 구르고 있었다.
 내 뒤의 도로에 차가 멈추는 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으나, 과거의 무서운 기억에 사로잡힌 채로 나는 벤치에서 내려왔다.
건물 뒤에 있는 미지의 지역으로 나는 달렸다. 풀이 우거진 좁은 길이 시냇가로 뻗어 있었다. 나는 나를 휘어잡는 들장미나 늘어진 덩굴도 아랑곳 않고 달렸다. 마침내 나는 여러 길이 갈라진 넓은 터까지 왔다. 한 길은 쉐도우 크리크가 있는 깊은 계곡으로 이르는 경사길, 다른 길은 이백 피트가 넘는 낡은 흔들다리로 통하는 것이었다.
 맹목적인 광기에 사로잡혀 나는 그 다리 위를 질주했다. 불길하게 삐걱이는 소리나 널판지가 썩어 버려 틈이 난 곳에 주의하지도 않고서 중간쯤에서 널판지 한 곳이 부서져 나갔지만, 나는 로프 난간을 지탱하는 금속 기둥을 가까스로 잡았다. 게다가 나는 무릎을 다쳤다. 적어도 60피트 아래에 맹렬한 기세로 흐르는 시내와 그 바닥에 거대한 바위들이 있었다. 나는 마비된 듯 그 어지러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의 가슴이 새로운 공포로 쿵 내려앉았다. 나는 달리고 싶었지만 무서운 추락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것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나를 불렀다. 나는 그 목소리가 낯익은 것이라는 걸 희미하게 깨달았다. 나는 그 사람 쪽으로 겨우 몸을 돌렸다. 그는 참나무의 어두운 그늘 속에 반쯤 가려져 있었지만, 밀려오는 안도와 함께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제발!"
 나는 애원했다.
 "도와 주세요!"
 그는 나무 아래서 나와 햇살을 받았다. 갑자기 내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전에도 산등성이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날 내려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리 쪽으로 몇 걸음 옮겨 놓았을 때, 다리가 갈라졌다는 공포도 잊고 나는 그를 주시했다. 광기와 싸우면서 나는 그게 빛의 장난일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다리에 다다르자 빛이 그의 등 뒤에서 비추었고,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갑자기 나는 악몽 속의 남자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트럭의 창으로 날 들여다보던 얼굴. 나는 내 혈관 속으로 얼음물처럼 흐르는 확신을 갖고 내 과거의 수수께끼의 마지막 부분이 마침내 확실한 모습으로 제 자리에 떨어진 것을 알았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일어서려고 애썼다. 그가 다리로 올라섰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때 그는 내 얼굴에 나타난 깨달음을 알아보았다.
 "마침내 기억해 냈군."
 그가 말했다.
 "이제는 너무 늦었어."
 그는 내게로 다가왔다. 다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는 로우프로 된 난간을 붙들었다. 나는 달리고 싶었지만 뱀의 마력에 사로잡힌 새처럼 그의 눈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나의 무기력함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을린 피부 사이로 흰 이가 빛났다. 
 "내가 얼마나 널 미워했는지!"
 그가 말했다.
 "짐작도 못했을 거야. 안 그래? 처음엔 네가 네 아버지의 트럭 속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널 미워했어.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아니면 내가 널 죽였을 거야. 네가 기억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네가 살아 있는 데 대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리고 네가 라라미에 살러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모든 게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넌 돌아오려고 계획함으로써 모든 걸 망쳤어." 그는 가까이 왔다. 미소는 갑자기 미친 듯한 분노로 바뀌었다.
 "네가 얼마나 말썽의 원인이었는지 알아? 나는 네가 되돌아오게 내버려 둘 수 없었어. 너는 알 수 있지. 안 그래? 네가 기억을 되살릴 기회는 많았어. 게다가 너는 폭발하는 차 속에도 없었던 거야! 네가 세 사람의 죽음의 원인이었다는 걸 알아? 이 다리에서 뛰어내려 모든 걸 끝내고 싶지 않아?"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나는 말했다. 
 "랜디도? 그의 죽음도 나 때문인가요?"
 "오, 랜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너무 참견을 잘해. 마치…"
 그는 말을 멈추었다. 내 가슴이 내려앉았다.
 '에밀리오?'
 나는 속삭이려 했지만 갑자기 나는 말을 삼켰다. 죽음이란 것이 실감나자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이 흘렀다. 너무나 계속 살고 싶었다! 그는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그를 멈추게 하려고 내가 물었다.
 "누구처럼!"
 잊었던 이름이 생각났다.
 "버트처럼?"
 살해당한 농장의 감독만이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보다는 지울 필요가 있는 게 많군."
 미소가 사라졌다.
 '이때다.'
 가까스로 위험을 모면하려고 나는 재빠르게 계속했다.
 "버트와 랜디가 무엇에 대해 참견했죠? 그, 그…"
 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영감이 떠올랐다.
 "마리화나요?…"
 그러나 나의 의도는 효과가 없었다. 분노가 가면처럼 그를 뒤덮었다.
 "상관 말아. 이 작은…"
 그는 썩은 과일을 씹는 것처럼 불결한 욕설을 뱉었다.
 "너는 이미 내 인생에 지나치게 끼어들었어!"
 그는 또 한 발자국 다가왔고, 광기가 날 사로잡았다. 그러나 내가 달리기 전에 나는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소리를 들었고,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그도 역시 그걸 들었다. 그가 소리를 들으려고 몸을 돌린 순간, 나는 몸을 일으켜 반대편 둑을 향해 질주했다. 나는 거기 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다리의 심한 흔들림으로 나는 그가 바로 내 뒤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손이 내 셔츠자락에 닿는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가까운 기둥을 잡았다. 내가 지른 비명소리는 멕시코 소녀의 비명과 맞먹었을 것이다.
 "닥쳐!"
 그가 명령했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때렸다. 별이 보일 정도였지만 나의 비명소리는 더 커졌다. 그는 내 몸을 기둥에서 떼어내려 했다.
 "소용없어!"
 그는 헐떡였다. 
 "너는 없어져야 해. 나는 사람들에게 네가 미쳐서 뛰어내렸다고 말하면 되는 거야!" 그는 다시 날 떼어놓으려 했다. 철기둥을 잡은 손에 힘을 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한번 날 떼어내려 하기 전에 나는 그의 사타구니를 힘껏 찼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동안 나는 온 힘을 다해 빠져 나가려 했다. 그는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다리가 다시 흔들렸고, 나는 다리가 휘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는 몸과 몸이 부딪치는 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는 다리 끝까지 달렸다. 거기서 나는 돌에 걸려 딱딱하고 먼지나는 땅에 넘어졌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나는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었다.
 마침내 내가 다시 일어나 다리를 돌아보았을 때, 게이브와 로이스가 다리 가운데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15


 게이브가 로이스를 쳐서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나는 발을 굴렀다. 로이스는 쓰러지면서 재빠른 동작으로 게이브의 발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게이브가 낡은 널판지 위에 나동그라졌다. 로이스는 넘어진 게이브를 덮쳤다. 그러나 게이브는 로이스에게 강한 펀치를 날렸다. 고통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로이스가 몸을 구부리자 게이브는 그에게 돌진했다.
 나는 두 사람이 엉겨붙은 채 흔들다리 위에서 싸우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나는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내가 걸려 넘어졌던 돌을 들고 흔들다리 위로 달려갔다.
 내가 거의 두 사람에게 다가갔을 때, 얽힌 형체가 가장자리로 굴러가더니 허공으로 떨어졌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때 튼튼한 갈색 손이 하나 올라와 쇠로 된 난간 기둥을 잡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 둘이 모두 떨어져 버린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나머지 한 손도 올라갔다. 매달려 있던 사람이 다리 위로 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들어올렸다. 만일 범인이 올라온다면, 나머지 한 사람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때, 그는 다리 가로 올라와 거기 누웠다. 내 손에 잡혀 있던 돌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소리쳤다. 안도의 눈물이 그의 곁에 앉아 있는 내 무릎에 떨어졌다. 협곡으로 떨어진 시체는 부서진 인형처럼 널부러져 있었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로이스가 부드럽게 나를 끌어당겼다. 
 "다 잘 됐어."
 그는 몸을 떨고 있었지만, 나를 안은 그의 팔은 강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모두 끝났어. 그는 다시는 널 해치지 못할 거야."

 우리는 모두 게이브의 극악한 범죄에 놀라고 있었다.
 "난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어."
 내가 말했다.
 "게이브는 정확히 무엇에 관련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날은 게이브의 장례식 오후였다. 물론 나는 거기 가지 않았지만, 킴이 지적했듯이 누군가는 참석해야 했고, 크리스토퍼 씨 일가 세 명이 유일한 친척이었으므로 그들은 참석했다. 하지만 장례식에서 돌아온 그들은 모두 창백하고 긴장해 있었으며, 로라는 바로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나는 경찰에게 여러 번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들은 내가 아직 쇼크 상태라 생각하고 될 수 있는 한 질문을 생략하려 했다. 
그러나 내 기분은 훨씬 나아져 있었다.
 로이스는 다리가 아파서인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가 늘 말했던 그대로 그는 돈 될 일은 뭐든지 한 거야. 그가 한 일의 절반 이상이 불법이었다는 걸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지. 그는 영리했거든. 그는 그를 돕는 누구에게도 그의 일을 다 알게 하지는 않았어. 경찰이 전모를 파악한 것은 브라이언과 에밀리오의 도움 덕택이었지."
 "그렇다면 브라이언은 이유가 있어서 불법 체류자 캠프에 있었군요. 나는 그들이 그를 아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맞아. 그와 랜디는 외국인들을 뒷길로 해서 국경을 통과시키는 일을 맡았었지. 브라이언에 따르면 그나 랜디 모두, 자기들이 로 스엔젤레스로 데리고 간 이주자들이 게이브를 위해 마약을 밀수하는지는 몰랐다는 거야. 에밀리오가 그걸 알아냈지. 그는 네가 캠프에서 그를 본 날 멕시코인이 이야기하는 걸 엿들은 거야." "그래서 에밀리오가 밤새 밖에 있었어요? 더 무얼 알아내려고?"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엾은 녀석. 그는 내가 네 일로 자기에게 화낼 거라 생각하고는 영웅이 되어 돌아오려 한 거지. 그는 누가 그 배후인지 알아낼 수 있다고 믿은 거지." 로이스는 소름이 끼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알아낸 거고."
 "그렇지만 그는 어디 있었던 거예요?"
 나는 그가 안전하다는 걸 거의 즉시 알아차렸다. 쥬아니타의 표정이 그가 집으로 왔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로이스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갑자기 침착해졌다.
 "정말 웃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에밀리오는 이제 탐정질에는 흥미가 없어졌을 거야. 좋은 일이지. 그가 랜디와 같이 이파리 덤불 속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지."
 소름이 끼쳤다. 그 손이 나와 있던 숲 속이 생각났다. 
 "이해할 수 없어요."
 내가 말했다.
 "왜 바로 당신에게 와서 말하지 않았대요?"
 로이스는 목소리를 애매하게 유지했다. 
 "네가 내게 마리화나에 대해 얘기 안한 것과 같은 이유지. 그는대마초도 발견하고 그 배후가 나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그가 멕시칸들의 새 캠프에 따라간 것도 그걸 확실히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게이브가 트럭을 타고 캠프에 왔을 때, 그는 에밀리오를 알 아보았고, 에밀리오는 숨을 곳이 그가 타고 온 트럭뿐이라 생각한 거야. 
그 선택은 좀 안 좋았지. 그 안엔 팔려가는 돼지처럼 묶인 멕시코 소녀도 있었고. 그가 그녀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기 전에게이브는 트럭을 몰고 숲으로 랜디를 만나러 간 거지."
 의자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킴이 갑자기 이 대목에서 충격을 받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게이브가 랜디를 죽일 때 에밀리오가 거기 있었단 말이에요, 그럼?" 나는 그녀의 느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내 피를 싸늘히 했다.
 "거의."
 로이스가 말했다.
 "그는 떨어진 곳에서 둘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는 멕시코 소녀와 함께 도망쳤지. 그는 너무 겁을 먹어 오후 내내 숨어 있었어."
 "그래 그 소녀는 우리를 볼 때까지 덤불에 숨어 있었어." 킴이 덧붙였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보았던 그 멕시코 소녀를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게이브가 잡히지도 않고 인신매매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게이브가 내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날 괴롭히고 있다면 우스운 일이리라. 그러나 내가 그때 아버지와 함께 죽었더라면 적어도 엄마와 피터, 데이빗은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남아 있었다.
 "게이브가 어떻게 내가 역마차 정류장에 있는 걸 알았지?"  내가 갑자기 물었다. 
 "내가 말했어."
 킴이 화를 내며 대답했다.
 "소녀는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덤불에 다시 숨었어. 하지만 미련한 나는 네가 간 곳을 그에게 말하면서 널 찾아 달라고 했지! 소녀가 내게 그가 자기를 묶었다고 이야기하고 나서야 나는 그가 랜디를 죽였으리란 걸 깨달았어. 나는 소녀를 뒤에 태우고 널 찾으러 갔지. 그러나 너무 늦었어. 그때 마침 로이스가 온 거야."  모두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가장 슬픈 것은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게이브는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외모, 지능, 성격. 내 고통을 제쳐 둔다면, 나는 그것이 가장 슬픈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로라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지난날 그녀가 테라스에서 게이브와 함께 있을 때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를 기억해 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자였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일임이 분명해." "생각보다는 나아."
 로이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샌디에고로 떠나려고 결심했나 봐. 오늘 아침 내게 그랬어. 지금이 새 삶을 찾을 적당한 때인 것 같다고."
 나는 킴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마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마 라라미에라도 돌아가야겠지. 내가 없으면 모든 게 좀 더 빨리 잊혀질 거야." 킴이 웅얼웅얼했고 로이스는 일어나 내게로 왔다.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웠을 때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너는 이미 새 삶을 시작했어."
 그는 거의 무뚝뚝하게 말했다.
 "바로 지금부터 말야."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의 입술은 열렬했다.
 "나와 결혼해 주겠어?"
 "내일 바빠요?"
 나는 흥분과 또 다른 무엇에 들떠 숨이 가빴다. 
 "우린 내일 멕시코에서 결혼할 수 있어요."
 그는 다시 내게 키스했다. 그의 키스는 깊고 중부하고 감격적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내가 돈 때문에 너와 결혼한다고 말할까? 아니야, 나는 단지 네가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뿐이야. 네 유산은 혼전의 계약으로 묶어둘 수 있어.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난 거기 손도 갖다대지 못하게 말야." "어쨌든 당신은 내게 손 댈 수 있어요."
 내가 말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킴이 일부러 싫은 척하며 그 침묵을 깼다.
 "둘에게 할 말이 있어. 나는 요번 가을에는 기숙사에 있기로 했어. 주말에만 집에 올 거야. 브라이언도 그리로 갈 거구, 그가 날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해. 그밖에도 말야. 나는 여기서 달콤한 분위기가 감도는 걸 참을 수가 없기도 하고!" 우리는 키스를 계속했다. 나는 꿈처럼 생각했다. 킴의 말이 확실히 옳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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