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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안창호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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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호(1878∼1938):독립운동가,교육자,호는 도산. 평안남도 강서 출신. 1898년 서울 종
로에서 이상재·이승남·윤치호 등과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근대 학교인
점진 학교를 설립하였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이갑·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신민회 를 조직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
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연통제를 수립하고, 각 지역
독립 운동가들의 상하이 소집 등을 실행하였으며,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
탄 투척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가 서울로 송환, 옥살이를 하다가 가출옥하여 숨어
살았다.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병보
석으로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1. 도롱섬

  대동강 물은 모란봉의 낭떠러지를 씻으며 능라도를 감싸안고 양각도로 흐른다. 양각도를
지나면 강서 땅, 온갖 역사의 아픔이 새겨지고, 자랑이 새겨진 고적과 영혼마저 아련히 취하
게 만드는 명승지가 강 양쪽으로 즐비하다.
  강물은 이 강산의 아픔을 달래듯이 흐르다가 하류에서 조그만 섬을 포근히 안는다. 이 섬
이 도롱섬이다. 강의 정기가 흠뻑 스민 이 도롱섬에 초겨울의 추위가 몰아쳤다.
  서기 1878년 11월 9일, 이 섬 어느 농가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농가라지만 본디는 선비
의 집안이었다.
  문성공 안향의 아득한 후손 안흥국은 태어난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안씨 가문은 대대로
평양 동촌에서 살았다. 동촌에는 순흥 안씨만이 50여 호 떼지어 있어 가문의 훌륭함을 자랑
했었다. 그러나 세월은 선비들에게도 쟁기를 쥐게 했다.
  살기 위하여 도롱섬에 땅을 구한 안흥국은 어지러운 나라일을 잊은 채 농부로서 흙과 함
께 살았다. 그 흙 냄새가 밴 집에서 셋째 아들을 얻은 것이다.
  안흥국은 그 아이를  창호 라고 이름지었다.
  창호는 검푸른 대동강의 세찬 강바람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도도히 흐르는 강의 넋을
느끼며 자란 그는 일곱 살 무렵에 대동강가 국수당 마을로 이사를 갔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창호는 가난 속에서 어렵게 자라야 했다.
  그러나 가난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마음껏 뛰노는 그에겐 하루하루가 그
저 즐겁기만 했다.
   어머니! 어머니!
   웬 수선이냐! 할아버지께서 와 계시다. 조용히 해라.
   어머니 대식이가 쫓아와요.
   대식이가? 또 그 아이 것을 빼앗았느냐?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으면 못쓴다. 어서 돌려
주어라.
   네 알았어요.
  어머니를 가장 무서워하는 창호는 종아리를 맞을까봐 겁이 나서 얼른 주머니에서 무엇인
가를 내놓았다. 구슬이었다.  뒤쫓아오던 대식이가 구슬을 돌려 받고는 그제서야 창호 어머
니께 꾸벅 절을 했다.
  이 때만 해도 구하기 힘들었던 왕구슬은 창호의 호기심을 끌 만한 물건이었다. 어머니의
호통으로 구슬을 돌려 주었지만 창호는 자기 것을 줘 버린 것처럼 못내 아쉬웠다.
  그 때까지 잠자코 보고만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 녀석, 듣던 대로 어지간한 개구쟁이로구나! 그래, 네가 몰래 참외 따먹던 이야기를 나
에게 해 줄테냐!
   네?
  창호는 뜻밖이라는 듯이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노내미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께서 그것을 어떻게 알고 계실까?
  창호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상하였다.
   할아버지께서 묻고 계시지 않느냐! 사실대로 말씀드려라.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그것을 알고 계시죠?
   내가 모두 말씀드렸다.
   그럼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잖아요?
   아니다.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구나.
   올여름이었어요.
  창호는 자기 말이 쑥스러운지 씨익 웃었다.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목이 몹시 말랐어요. 그래서 원두막으로 뛰어갔지요. 원두막 주인
은 헐레벌떡 뛰어 오는 나를 보더니 왜 그러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데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말했지요.
  할아버지께서는 웃음 띤 얼굴로 말씀하셨다.
   제법 꾀가 있구나.
   나는 아저씨에게 참외밭 덩굴 속에 숨어도 되느냐고 물었어요.
  할아버지는 창호의 뛰어난 말재주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허허 참외밭 주인이 너를 내쫓지 않았단 말이냐?
   네. 그래서 참외 덩굴 속에 숨어서 참외를 실컷 따먹었어요.
  창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는 갑자기 호통을 쳤다.
   에끼, 이 녀석!
  창호는 이런 할아버지가 이상하기만 했다.
   어째서 할아버지는 재미있게 들으시고 나서 야단을 치시는 걸까?
  할아버지는 무엇인가 잠시 생각하시더니 다시 말씀을 하셨다.
   창호야, 공부하고 싶지 않느냐?
   공부요?
   그래, 너를 노내미로 데려가 공부를 가르치고 싶구나. 하지만 거기에 가서는 못된 장난을
하거나 꾀를 부려서는 안 된다.
   …….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던 창호에게는 뜻밖의 말이다. 사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
은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운지라 말을 못 꺼냈는데, 노내미 할아버지께서 직접 공부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나는 잘못하는 녀석에게는 사정없이 종아리를 때린다. 아마 네 어머
니보다도 더 아프게 때릴 게다. 그래도 나를 따라 노내미로 가겠느냐?
   …….
  창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공부를 하기 싫은 모양이로구나. 가기 싫다면 그것은 네 마음이다. 그러나 생각
해 보아라. 평생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쟁이가 되어 기껏해야 남의 집 머슴살이나
하다가 죽고 싶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할아버지는 창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네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너도 알고 있을테지. 네 아버지가 죽고 난 뒤로 네
어머니는 너희들을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다. 그래도 공부하기가 싫단 말이냐?
  창호는 금방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공부는 꼭하고 싶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말처럼 꼭
붙잡혀서 공부만 하고 놀지도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고생이라는 말에 창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여 창호는 일곱 살 때에 할아버지를 따라 안씨 가문이 모여 사는 대동군 남곶면
노남리로 갔다. 이 노남리가 순수한 우리말로  노내미 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는 창호에게 한문의 기초인  천자문 과  동몽 선습 을 가르쳤다.
  한자의 기초를 익힌 창호는 아홉 살 무렵부터 글방에 다녔다. 이석관, 김현진과 같은 선생
에게 글을 배웠는데, 열일곱 살때까지 한문 공부를 계속하였다.
  안창호가 글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같은 글방에 이엄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창호는 글을 읽다가 문득 옆에 앉아 있는 이엄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너 울고 있잖아?
  이엄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흐느껴 울었다.
   왜 우니?
   선생님이 나가실 때, 통감 첫째 권의 첫 장을 잔칫집에 갔다가 돌아오실 때까지 다 외우
라고 하셨어.
   다 외우지를 못했니?
   처음 배우는 것이라 보고 읽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 외울 수가 있겠니?
  창호는 이엄을 돕고 싶었다.
   어떻게 하지? 내가 대신 외울 수도 없고…….
  옛날의 글방은 한 방에서 여러 명이 함께 배우더라도 각자의 실력에 따라 배우는 책이 각
각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자습을 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미 해질 무렵이었다. 잔칫집에 갔던 선생님이 곧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이엄은 종아리
를 맞게 된다.
   옳지, 좋은 수가 있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하던 창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 선생님께 종아리를 맞지 않을 거야.
   정말?
  창호는 선생님이 앉는 아랫목 보료 뒤에 둘러친 병풍 뒤로 갔다. 거기에 벽장이 있었다.
그는 벽장에서 돗자리를 꺼내 오더니 바닥에 폈다.
   이 돗자리에 드러누워.
   어떻게 하려고?
  이엄은 망설였으나 다급한 상황이라 창호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창호는 그를
반듯이 누이고 돗자리를 똘똘 말았다.
   자, 모두들 도와 주지 않겠니?
  아이들은 재미있어 하며 창호를 도와 통나무처럼 된 돗자리을 일으켜 세웠다. 창호는 그
것을 눈에 띄지 않는 글방 구석에 세워 두었다.
  조금 뒤에 선생님이 돌아왔다. 아이들은 차례로 선생님 앞에서 그 날 배운 것을 읽어보기
도 하고 외우기도 했다. 창호도 그가 배우는 논어 한 구절을 외웠다.
  아이들이 공부한 내용을 모두 살피고 난 뒤, 선생님을 한번 휙 둘러보시고 물었다.
   그런데 이엄이 보이지 않는구나. 어딜 갔느냐?
  선생님이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하는 아이가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들 가거라. 나는 좀 눕겠다.
 그러자 긴장해 있던 아이들은 안도의 눈빛을 보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술을 마신 선생님은 이엄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자, 그대로 잊어버린 것이었다.
  2. 개화 물결

  안창호는 열세 살 때, 처음으로 필대은을 만났다.
  나이가 안창호보다 너댓 살 위인 그는 본디 황해도 안악이 고향이었지만, 집이 이사를 하
여 안창호가 다니는 글방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번은 필대은이 안창호에게 심각하게 말했다.
   너는 지금 우리 나라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어떤 상태라니요?
  안창호는 너무도 뜻밖의 말이라 어리둥절했다. 필대은은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세 마리의 맹수가 우리 나라를 집어먹으려 하고 있어.
   세 마리의 맹수라니요?
   그래, 그 첫번째 맹수는 청나라야. 이것은 늙고 병든 사자인데 제 살은 서양의 승냥이에
게 뜯어먹히고 있으면서도 조선만은 절대 놓아 주지 않으려고 하고 있지.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북극 곰 아라사(러시아)야. 이 곰은 무서운 발톱과 힘을 가졌고, 한 번 먹었다
하면 게워 놓는 법이 없지.
   …….
   마지막으로 남쪽의 여우인 섬나라 일본이야. 이 세 나라가 지금 서로 으르렁거리며 우리
강산을 탐내고 있어.
  안창호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필대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심각한 표정을 지었
다.
  필대은은 이 밖에도 서양의 많은 승냥이들이 우리 나라를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필대은을 통해서 안창호는 처음으로 개화 사상에 대하여 듣게 되었던 것이다.
  개화 사상은 나라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의 애국심에서 출발했고, 당시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어, 개화파는 그들이 설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흥선 대원군은 서기 1872년, 부산 초량에 있던 왜관을 폐쇄시켰으며, 일본과의 교섭을 완
전히 끊었다.
  그는 통상을 거부를 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본을 오랑케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기 1873년, 대원군도 마침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익현이 상소문을 올려
대원군을 탄핵한 것이다. 최익현은 그 때문에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지만 대원군도 물
러나고 말았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조선을 쳐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 나라가 이
웃 나라와의 외교를 끊고, 일본의 새 정권 수립을 통고하는 사신마저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
러나 이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서기 1875년에 일본 사신이 국서를 가지고 왔다.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뒤라 우리 조정에
서는 그것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초지리 앞바다에 나타나 멋대로 우리 바다를 측량하던 일본 군함에게
우리 포대가 포격을 했다. 이것이 운요 호 사건인데 이 때문에 다음 해 2월에는  강화도 조
약 을 맺었고, 수신사 김기수가 일본에 다녀왔다.
  또 이듬해에는 일본 장사꾼들이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가족과 함께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고, 고종 15년에는 부산에 세관을 두어 일본 상품에 관세를 매겼으나, 그
들의 항의로 폐지되었다.
  또 일본은 자기네 상품을 팔아먹기 위해 다시 인천을 개항하라고 요구했으나, 조정에서는
인천이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원산을 개항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이 고종 16년의 일이다.
  고종 17년에는,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리고 이 해 인천항을 개항 할 것을
결정하고, 그 개항 날짜를 20개월 뒤로 미루었다.
  다음 해에는 어윤중, 조준영, 박정양 등이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이들이  신사 유람
단 이라고 불리는 개화의 선각자들이다.
  신사  유람단의 책임자로 일본에 갔다 온 어윤중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그 벼슬이 선
혜청 제조까지 올라 있었으며, 일본에 건너가 그들의 정부 형태, 특히 재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그는 뒤에 재정 전문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고종 19년, 서기 1882년 6월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무위영, 장어영 두 감영의
군사들이 봉급인 쌀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정치적 이유는 대원군과 명성 황후(민비)의 세력 다툼이었다.
  정권에서 물러난 대원군은 조금씩이나마 개화되고 있는 나라 안 형편이 못마땅했다. 더욱
이 그 전 해에는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역모를 꾸몄다가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화가 난 대원군은 불만에 찬 군사들을 부추겼다.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은 일본 공사관과 대궐을 습격하여 대원군의 형인 이최응과 민겸호
등을 죽였다. 명성 황후도 죽을 뻔했으나, 궁녀로 변장해 탈출하여 충주로 난을 피해 갔다.
  이 때 활약한 사람이 어윤중이다. 마침 청나라에 가 있었던 그는 고종의 특명을 받아 김
윤식과 함께 청나라를 움직여 군사 5000명을 출동하게 했다.
  이리하여 임오군란은 가라앉고 대원군은 청나라에 잡혀갔다.
  또, 출동했던 청나라 병사가 우리 나라에 머무르자 일본도 청나라 군사가 서울에 있으므
로 일본군도 거류민 보호를 위해 주둔해야 한다고 우리 정부에 요구해 왔다.
  이런 일본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결국, 일본과  제물포 조약 이 맺어졌다.
  제물포 조약의 내용은 일본의 피해에 대해 50만 원의 배상금을 물라는 것이었다.
  필대은은 그 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때 박영효는 김옥균, 서광범 등과 같이 일본으로 갔네. 이들은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
서 태극기를 만들었지. 서기 1882년 8월 14일에 이 태극기가 수신사의 숙소에 게양되었고,
이듬해에는 이것을 우리 나라의 국기로 세계에 공포했다네.
   아주 훌륭한 일을 했군요.
   그렇지. 또 미국과는 서기 1882년 3월에 수호 조약을 맺었고, 이듬해 4월에는 초대 공사
인 푸트가 서울에 왔네. 우리도 민영익을 미국에 파견하였는데, 그 사신 일행에 개화파인 홍
영식과 서광범이 끼여 있었네. 그들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본 뒤에 우리도 하루빨
리 개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귀국했다네.
  필대은은 말을 끊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답답하고 어지럽기만 한 나라 형편이 걱정스
러웠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건너갔던 김옥균은 일본의 힘을 빌려 명성 황후를 둘러싸고 있는
수구파를 단숨에 없애려는 뜻을 품었네. 더욱이 서울에 있던 청나라 군사가 대부분 빠져 나
가자 그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걸세. 마침 그 때에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세워진 우체국인
우정국의 준공식이 있었지, 그 축하 잔치가 베풀어졌네. 우정국의 총판이 홍영식의 이름으로
수구파의 대신은 물론이고 서울에 있는 외교 사절도 초대되었네. 기생의 노래와 춤이 흥을
돋우었고, 술잔이 돌아가면서 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지. 그런데 난데없이 밖에서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지 뭔가. 그 소리에 우영사 민영익이 맨 먼저 뛰어나갔네. 잠시 후에 뛰어
나갔던 민영익이 피투성이가 된 채 연회장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오는 게 아닌가. 개화파
세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조정을 뒤엎고 말았네. 그러나 개화파의 혁명은 겨우  3일 천하 로
끝나고 말았지. 그렇게 쉽게 혁명이 끝나 버린 이유는 명성 황후의 재빠른 활약으로 청나라
군대가 출동했고, 더구나 믿었던 일본군이 개화파를 배반했기 때문이었네.

  3. 큰 포부를 키우며

  안창호는 열여덟 살 때, 신학문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왔다.
  그는 남대문 근처에 숙소를 정하자 서울 장안 구경부터 시작했다.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서대문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안창호는 그 중 한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등짐 장수인 듯싶은 그 사람은 안창호를 힐끗 쳐다보고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영은문을 때려 부수러 가는 걸세.
   영은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왜 때려 부숩니까?
   허허 이 사람 소식 불통이로군. 가 보면 알 거 아닌가!
  안창호는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영은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부숴라!
   부숴 버려! 독립국의 수치니까!
  중종 32년, 서기 1537년에 명나라 사신의 숙소인 모화관 앞에 붉은 단청칠을 한 영소문을
세웠다. 그리고 2년 뒤에 이름을  영은문 이라 고쳤다.
  사람들은 바로 이 영은문을 부수려 하는 것이다. 이 영은문 자리에는 그 뒤 독립문이 세
워졌다.
  지붕이 얹혀 있는 문이기는 했지만 밧줄을 걸고 몇 사람이 힘껏 잡아당기자 그대로 넘어
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달려들어 마구 짓밟았다.
  안창호는 그 사람들의 지휘자인 듯싶은 사람을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다. 말쑥한 양복
차림에 금테 안경을 쓴 20대 신사가 유난히 돋보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 말이오? 서재필이오.
   아, 서재필!
  안창호는 숙소에 돌아와서도 서재필의 모습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서울에 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안창호는 배움의 길을 찾지 못했다. 이젠 노자도 다 떨어
져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정동 교회 골목에 붙여진 글귀를 읽게 되었다.
   배우고 싶은 사람을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학비
는 전부 교회에서 대 줍니다.
  앞일이 막막하던 안창호에게는 오랜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기쁜 소식이었다. 그는 이것
저것 가릴 것도 없이 무작정 그 곳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서양 사람을 만났다. 그를 맞이해 준 사람은 언더우드 선교사
밑에서 일하는 미국인 밀러 목사였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길도 가르치고 공부도 가르쳐 드립니다. 오늘부터라도
기숙사에 들어오십시오.
  안창호는 밀러 목사의 배려로 예수교 장로회에서 세운 구세 학당에 들어갔다. 구세 학당
은 뒷날 경신 학교가 되었다.
  그는 교회에도 나갔고 곧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안창호는 열심히 공부했다. 일 년이
못되어 반장이 되었고 장학금도 받았다.
  그런데 어느날, 뜻밖에도 필대은이 안창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허허, 반가운 친구를 여기서 또 만났구먼.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나라일을 걱정하고, 조금씩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다.
  하루는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
   너에게 꼭 의논할 일이 있으니 집에 좀 내려오너라.
  할아버지의 엄격한 분부가 적힌 편지였다.
   무엇 때문에 편지를 손수 써 보내셨을까?
  안창호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할아버지의 분부이니 만큼 모든 일을 젖혀 놓고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 안창호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음, 너더러 갑자기 내려오라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선생의 따님과 정혼을 했기 때문이
다.
   넷?
  너무도 일방적인 할아버지의 말씀에 안창호는 어리둥절하였다. 할아버지께 함부로 말대꾸
도 못하고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담? 나한테는 의논 한마디 없이, 그것도 사주까지 보내셨다고 하니.
  안창호는 잠자리에 들었으나 전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께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했지만, 결혼은 일생에 관계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안창
호는 깊은 생각 끝에 파혼을 하리라고 결심했다.
  이튿날, 안창호는 옛 스승이면서 할아버지께서 사돈을 맺은 이석관을 찾아갔다.
   아니, 자네 언제 내려왔나? 어서 들어오게.
  이석관은 사위를 보듯 반갑게 안창호를 맞아 주었다.
  안창호는 먼저 절을 올리고 나서 용건을 말했다.
   오늘은 선생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무슨 말인지 해보게나.
   다름이 아니라 저의 조부님께서 보내셨다는 사주를 찾으러 왔습니다.
  안창호는 파혼이란 말을 일부러 피했다. 그러자 이 선생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이석
관은 감정을 억눌렀지만, 노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가?
  본인의 뜻을 물어 보지 않고 어버이끼리 정한 청혼이라 해도 그 당시 파혼이란 것은 큰
충격적인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사정? 그 사정이 무엇인지 자세히 말해 보게. 내 딸이 어디가 모자라면 모자란다고 말을
하게나.
  이 점도 안창호는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아직 장가들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면 상
대편의 감정만 상하게 할 것이 뻔했다.
   어서 말해 보게.
   저는 예수교를 믿습니다. 그런데 유고를 믿고 계시는 선생님 댁과 어떻게 혼약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뭣이?
  이석관은 안창호의 말에 당황한 빛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일 안창호가 다른 이유를 내세
웠다면 그는 당장 호통을 쳤을 것이다.
   괘씸한 녀석 같으니! 감히 파혼을 하자고 덤벼들어? 하고 당장 안씨 가문과 인연을 끊겠
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뜻밖인 안창호의 거절 이유를 듣자 그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이 선생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자네, 정말 예수교를 믿고 있나?
   네.
  이 선생은 다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
다.
   할 수 없지. 내 딸도 자네처럼 예수교를 믿게 하면 되지 않겠나!
  이번에는 안창호가 당황했다. 완고한 시골 선비인 이석관이 설마 거기까지 양보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왜 대답이 없나? 그래도 싫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또? 이번에는 무슨 문제인가?
   저는 큰 뜻을 품고 있습니다. 나라 형편을 볼 때, 아무래도 신학문을 공부하여 이 시대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이지요.
   그래서?
   그런데 선생님 따님은 신식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신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 혼인하는 게 서로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내 딸도 그 신학문인가 하는 것을 배우면 되지 않겠나.
  안창호는 보기 좋게 또 얻어맞은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또 뭔가?
   저희 집은 가난해서 따님의 교육까지는…….
  이 말에 이석관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학비 정도라면 내가 대 줄 테니 걱정 말고 혼인하도록 하게.
  안창호도 더 이상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따님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게. 자네를 믿고 딸을 내주었으니까 자네가 어떻게 하든 나는 상관 않겠네
  결국 파혼을 결심했던 안창호는 도리어 약혼녀와 함께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곧 안
창호는 혜련과 동생 신호까지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신호도 함께 오게 된 것은 혜련 혼
자로서는 아무래도 외롭고 쓸쓸할 거라며 집안 식구들이 권했기 때문이었다. 두 소녀는 서
울에 오자 역시 기독교 계통인 정신 학교에 들어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필대은이 싱글싱글 웃으며 안창호를 놀렸다.
   그래 장가든 맛이 어떤가?
   장가는요, 아직 약혼만 했을 뿐이지 장가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정말 그럴까? 색시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망설여지는게 아닌가?
   형님도 별소릴 다 하십니다. 그건 그렇고 지방에서는 동학의 위세가 대단하던데요. 동학
의 세력이 그토록 강해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서기 1892년, 전라도 삼례에서 동학 교도들이 모여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죄
명을 벗겨 달라고 요구했지. 아울러 교도에 대한 지방 관리나 포졸의 횡포를 막아달라고 했
네.
   그들로서는 당연한 요구가 아닙니까?
  안창호의 물음에 필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듬해에 동학 교도들은 박광호, 손병희 등을 대표로 하여 서울까지 올라와 임금께 상소
문을 올렸네. 조정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고 강제로 해산을 시켰네. 그뿐 아니라
대표는 곤장까지 때려 쫓아 버렸지. 이 때부터 그들은 그 무엇과도 맞서 싸우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네. 결국 동학은 서양인과 왜인을 다 같이 몰아내자는 깃발을 세운 거지.
  손병희는 뒷날 3·1 둥동의 지도자가 된 사람으로 최시형의 사위였다.
   마침내 서기 1894년 정월에 동학 혁명이 일어났네.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 전봉준의 지도 아래 농민들이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지. 이 해에는 커다란 사건
이 많았네. 2월에는 상하이에서 김옥균이 암살되었고, 3월에는 그 시체가 우리 나라로 운반
되어 다시 능지 처참을 당했지. 그리고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키자, 조
정에서는 청나라 구원을 청했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지.
  청나라와 일본은 1885년  텐진 조약 이라는 비밀 조약을 맺고 있었다. 조선에 이권을 갖고
있는 청나라와 일본이 만일 조선에 군대를 보낼 때에는 두 나라가 서로 의논한다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조선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한 사실을 안 일본은 텐진 조약을 구실로 음흉한 계략을 꾸미
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늙고 병든 사자다. 이 기회에 조선을 일본의 세력 아래 두자!
  이리하여 서기 1894년 5월, 청나라 군사가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은 그 몇 갑절이나 되
는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키고 서울까지 들어와 버렸다.
  갑신정변 때, 일본은 병력이 적어 내쫓김을 당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재빨리 대병력을 동
원한 것이다.
  청나라 대표 위안 스카이(원세개)가 일본 측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 때, 일본 공사는 조선에서 이 기회에 내정 개혁을 하라고 요구해 왔다. 고종은 대원군
에게 다시 정권을 맡겼다. 대원군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민씨 일파를 몰아 내고 김홍집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그리고 김홍집은  갑오 개혁 이라는 내정 개혁안을 착수시켰다.
  그러나 이 개혁안이 제대로 실시되기도 전에  청·일 전쟁 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 무렵
두려운 것이 없었으나 다만, 청나라의 북양 함대만은 겁을 냈다. 그래서 인천항에 와 있던
청나라 군함을 선전 포고도 없이 기습하고, 달아나는 것을 풍도 앞바다에서 격침시켰던 것
이다.
  일본군은 육지에서도 승리를 거듭했다. 8월에는 평양에서 크게 이겼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 동학 교도들은 애국심을 발휘했네. 동학군은 자기들의 혁명
으로 청·일 양국의 군대가 우리 땅에 들어오자 전주성을 스스로 내주고 해산까지 했던 것
일세. 정부가 그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요구 조건만 내걸고서…….
  안창호는 비통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것을 조정에서 배반했군요?
   그렇지! 아니 우리 조정이라기 보다 일본이 그렇게 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것일세. 일본으
로서는 동학도들이 스스로 해산하고 나라가 안정을 찾으면, 청나라와 싸울 구실이 없어지지
않나? 그러면 자기들이 한반도에서 세력을 잡을 수도 없게 되고…….
   아, 분하다!
  안창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공중에 휘둘렀다. 그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우리에게 힘이 없는 탓이야!
  필대은도 잠시 말을 끊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조정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자 동학 교도들은 다시 일어났네. 그러나 쉽게 진압되고 말았
지. 이번에는 기관총과 대포까지 갖춘 일본군이 동학군을 일제히 공격했기 때문일세.
  안창호는 대꾸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맨주먹으로, 혹은 칼이나 죽창을 가지고 싸
우다가 쓰러져 간 동학 교도들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4. 독립 협회

  을미년인 서기 1895년에 일본군 육군 중장 미우라가 일본 공사로 새로 부임해 왔다.
  미우라 공사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차지하려면 명성 황후를 없애야 한다며 명성 황후와
세력 다툼을 하는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이 무렵 서울에는 일본의 수비대와 영사관 경찰이 있었다. 또, 우리의 군대인 시위대는 대
원군과 가까울 뿐 아니라 제1대대 및 제2대대는 일본군에게 매수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10월 7일 대원군을 앞세우고 대궐로 쳐들어갔다. 궁궐을 지키는 시위대와 격
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싸움은 20분도 못 되어 끝이 났다. 명성 황후는 궁녀들 속에 숨어 있다 끌려
나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쓰러졌고, 일본인들은 명성 황후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살라 버
렸다. 이것이  을미사변 이다.
  장안에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중전 마마께서는 이번에도 무사히 충주로 피난가셨대.
   진주 옥천 암자에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신 것을 본 사람이 있대요.
  이와 같은 소문은 명성 황후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소박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고종의 칙서가 세상에 알려졌다.
   명성 황후는 본디 그 행동이 옳지 못하여 서인으로 강등한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사람을 거의 없었다.
  민심이 어지러워졌다. 곧 을미사변의 진실이 밝혀지자, 여러 곳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의병이 일어났다.
  일이 이쯤되자 일본 정부도 시치미를 떼고만 있을 수 없었다. 형식적이나마 미우라를 다
시 일본의 소환하여 재판을 열고, 그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다.
  조정에서도 이듬해 음력 8월 20일 정식으로 왕비가 승하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왕비
시해 사건의 하수인으로 군무 협판 이주희 등이 처형되었다.
  대원군 역시 일본에게 이용만 당하고 서기 1898년에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명성 황후 시해로 전국의 민심이 극도로 약화되었을 때,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
이 된 법이 공포되었다.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 이다.
  당시 우리 민족은 유교적인 관습을 따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효를 매우 중요하게 여
겼다. 그래서 많은 예의를 갖추게 되었는데,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조상들께 큰 불효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도 머리를 자르지 않고 상투를 틀어 올렸다.
  이런 문화 속에서 단발령은 백성들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아니,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어버이가 주신 귀한 것이거늘, 어찌 그것을 자르란 말이냐!
   이것도 왜놈이 시킨 것이 뻔해.
  이래서 더 많은 의병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무렵에 이범진·안경수·이완용 등은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대감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돌아가신 중전 마마도 늘 말씀이 계셨지만 이젠 친일파를
몰아 내고 아라사(러시아)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건 그렇지만 아라사가 우리에게 협력할까요?
   물론 협력합니다. 그 방법은 나에게 맡겨 주십시오.
  이범진은 두 고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들의 음모란 아라사 공사 베베르를 부추겨 아
라사 수병 100명을 인천으로부터 상경시켜 공사관을 수비케 하고, 왕과 왕세자를 아라사 공
사관에 옮긴다는 계획이었다. 이것이  아관 파천 이며 음모는 성공했다.
  이렇게 되자 김홍집 내각은 발칵 뒤집혔다. 그는 조정에서 정사를 보다가 뒤늦게 이 사실
을 알게 되었다.
   상감께서 아라사 공사관으로 가셨다 하니 우리도 거기로 가야만 하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은 김홍집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가시면 안 됩니다. 이번 일은 이범진과 이완용 등의 음모이므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입
니다.
   그래도 가야 하오. 대신이 죽음이 두렵다 하여 임금께 가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불충이 아니겠소.
  결국 김홍집은 농상공부 대신 조병하와 함께 경복궁을 나섰는데, 광화문에서 이완용의 지
시를 받은 보부상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그는 51세의 나이로 친일파의 우두머리라는 누
명을 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더욱이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로 백성의 증오를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 시체는 백성들에 의해 온 장안으로 끌고 다녔다.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박원양이 총리 대신이 되었고 이완용은 학무 대신, 이범진은 법
무 대신이 되었다. 마침내 친일파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 내각이 세워진 것이다.
  이 무렵, 서재필은 미국에서 돌아온 뒤 배재 학당의 선생으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아직 무너지기 전, 서재필은 내무 대신 우길준을 찾아갔다.
   유 대감, 5000원만 후원해 주십시오.
   신문을 낼까 합니다.
   신문?
   그렇습니다. 신문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는 것이 힘을 기르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
합니다. 유 대감 꼭 도와 주십시오.
  유길준은 친러파 내각의 성립으로 일본에 망명을 했지만 서재필에게 5000원을 주도록 다
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고 떠났다.
  서재필은 일본에서 인쇄기를 주문하여 정동에 있는 빈집에 신문사를 차렸다. 그러나 따로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서기 1896년 4월 7일,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지  독립 신문 이 창간호를 내놓았
다. 더욱이 신문은 한자를 쓰지 않고 순 한글로만 발행했으며, 거기에 영문판이 붙어 있었
다.
  처음에는 300부 정도 나가던 것이 500부, 700부로 늘어나 나중에는 3000부까지 나가게 되
었다.
  그리고 이 해 7월 독립 협회가 결성되었다. 이것은 서재필을 중심으로 윤치호·이상재·
남궁억·안경수 등 30여 명이 힘을 모아 만든 것이다.
  독립 협회는 중국 사신이 오면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던 모화관을 수리하여  독립 회관 이
라 이름 짓고, 이곳을 본부로 삼았다.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안창호와 필대은은 주저 않고 가입했다. 그리고 회원끼리의 토론회,
강연회 신문 구독자의 확대 등 국민 계몽 운동을 추진시켜 나갔다.
  독립협회는 또한 서기 1896년 11월, 영은문이 헐린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것은 아
라사 사람인 사바진이 설계하고, 그 당시의 돈으로 3825원을 회원들로부터 거두어 세운 것
이다.
  이 무렵 서재필은 아라사 공사관을 찾아가서 고종을 만났다. 그리고 간곡하게 말했다.
   대궐로 돌아가십시오. 이 나라는 상감 마마의 땅이고, 이 나라의 백성은 상감 마마의 백
성입니다. 이 땅과 이 백성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땅과 이 나라를 버릴 수는 결코 없습
니다. 어서 환궁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궁궐에 계시지 못하고 외국 공
사관에 계시면 체면이 손상되고 외국의 비웃음을 살 뿐입니다. 어서 대궐로 돌아가시옵소
서.
  서재필이 말을 마치고 물러가자 친러파 이범진은 고종을 찾아가 서재필을 헐뜯었다.
   서재필은 역적입니다. 이 위험한 때에 어서 대궐로 돌아가시라니, 당치도 않은 말입니
다.
  친러파 세력의 모함으로 독립 협회에 대한 정부의 미움은 싹트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서기 1897년 2월, 고종은 마침내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은 고종의 환궁을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임금이 외국 공사관에 거주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
었던 것이다.
  독립 협회의 활동과 더불어 나라의 움직임도 새로워졌고, 8월에는 연호를  광무 로 고쳤다.
고종을  광무 황제 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10월이 되자, 황제 즉위식 준비가 시작되었다. 남별궁(지금의 조선 호텔이 있는 곳)에
둥글고 높은 흙산이 쌓아올려졌다. 이것이  원구단 인데, 황제가 직접 올라가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즉위식에는 우리 나라에 와 있는 각국 공사는 물론이고 독립 협회 회원들도 참석하였다.
   이제 우리도 당당한 독립 국가야.
   얼마나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인가. 이럴수록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실속 있는
독립국으로서 그 위상을 다져 나가야 할 걸세.
  독립 협회 회원들은 서로 어깨를 끌어안고 굳은 맹세를 하였다.
  고종 황제는 나라 이름을  대한 이라 했고, 왕후 민비를  명성 황후 라 추증했으며, 왕세자
를 황태자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다.
  이 무렵, 독립 협회는 서울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도 그 지부가 생겼다.
  서기 1897년 여름에는 관서 지부에 속해 있던 쾌재정에서 웅변회가 열렸다.
  정자 위에는 평양 감사, 진위대 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앉아 있었다. 또, 정자 옆에 마련
된 연단에는 독립 협회 관서 지부장 한석진, 나중에 우리 나라 최초의 목사가 된 길선주 등
독립 협회 간부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관중들은 어린이들을 앞에 앉히고 쭉 둘러앉아 있었
다.
  먼저 한석진이 인사를 하였다.
   우리 독립 협회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에는 대한 제국이 새롭게 들어서고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십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독립! 독립! 우리도 독립 협회 아
래 굳게 뭉쳐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잘 살아 봅시다.
   옳소! 옳소!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만세를 불렀다. 관중들의 흥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별로 크지도
않은 몸집에 두루마기를 단정히 차려 입은 한 젊은이가 연단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았다.
   아니, 저 사람 머리 깎은 총각인데 무엇 때문에 나왔을까?
   웅변하러 나왔겠지.
   허허, 저런 애송이가?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울 만큼 바뀌고는 있다지만 놀라운 일인데?
   쉿!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용히 들어나 봅시다.
  젊은 연사는 연단에 올라서자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랫배에 힘을 모으고 호흡을 가다듬는 모양이었다.
   여러분! 독립, 독립하는데 아직도 케케묵은 생각에 얽매여 정신을 못차리는 사람이 많습
니다, 그런 사람이 평민보다는 양반이, 무식한 농부들보다 배웠다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 같
으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사람들은 젊은 연사의 첫마디에 모두 놀라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우렁차 귓속에
쏙쏙 잘 들어왔다.
   예전에는 신임 사또가 오게 되면 백성들은 으레 돈보따리를 가져다 바쳤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없는 죄도 있는 듯 붙들려 가서 주리를 틀리고 볼기를 맞는 억울함을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금은 얼마나 달라지고 고쳐졌는지 나는 소리 높이 외치면서
묻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는 감사나 진위 대장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다
옳은 말이라 씁쓰름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2년 전 가을에 이 모란봉 보통문 근처 성벽에 박힌 총알 자국을 보았습니다. 철없
는 아이들이 쇳조각을 주워 좋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나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 거리
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이 싸우려면 저희들 나라인 일본 땅이나 청
나라 땅에서 싸울 일이지, 왜 조선 땅에 와서 싸우는가! 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미처 엄두도 내지 못했던 생각이다. 청·일 전쟁 때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평양에서 치열
한 싸움을 벌였다. 그 때 많은 평양 사람들이 까닭 없이 전쟁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던 것이
다.
   여러분은 분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저 남
의 집 불 구경하듯 하고, 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한숨만 쉬고 계시겠습니까? 왜 우리
가 이렇게 눈을 뜨고도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다 힘이 없기 때문에 이런 수모를 받는 것
입니다. 그 힘을 기르기 위해, 이름뿐인 독립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독립 협회를 만들었
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연설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손뼉치는 것마저 잊고 조용하기만 했다. 너
무나도 감동이 컸기 때문이다.
  조금 뒤, 진정이 되었는지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너도나도 쑤군대며 떠들기
시작했다.
   거 참, 똑똑한 청년이야! 대체 뉘집 자제일까?
   이름이 안창호래요.
  안창호의 이름은 곧 온 평양에 알려졌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안창호 이야기로 떠들썩
했다.
  이 쾌재정의 웅변은 그가 열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당시 독립 협회는 정부에서도 독립 협회의 주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백성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그래서  중추원 이라는 것을 만들고, 독립 협회의 간부를 의원으로 임명하기도 했
다.
  그러나 서기 1898년 독립 협회는 그들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황국 협회의 모함에 걸려
들고 말았다.
  보부상으로 조직된 황국 협회는 독립 협회에서 왕정을 뒤엎고 대통령을 둔다는  공화제 를
주장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화가 난 고종은 마침내 독립 협회를 해산시키라는 칙
서를 내렸다.
  그러자 독립 협회의 회원들과 격분한 백성들은 종각 앞 광장에 모였다. 이것이 바로  만민
공동회 이다.
  안창호는 이 만민 공동회에서 열변을 토했다.
   지금, 황제 폐하께서 우리 독립 협회를 해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폐하
의 참뜻이 아닐 것입니다. 오로지 폐하를 둘러싸고 있는 간신들의 짓입니다.
   옳소! 옳소!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종로 네거리에 울려 퍼졌다.
   우리 독립 협회는 대한 제국을 알차고 훌륭한 나라로 만들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의 일부 대신들은 케케묵은 생각을 지금껏 버리지 못하고 남을 모함하는 짓을 일삼고
있습니다. 우리 독립 협회가 역모를 꾸몄다고 말입니다.!
  그 때였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였다. 돌멩이 하나가 안창호가 서 있는 연단까지 날
아와 떨어졌다. 황국 협회에서 보낸 보부상들이 돌팔매질을 한 것이다.
   등짐 장수 패다!
   망나니들이다!
  여기저기서 외치는 고함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보부상들은 몽둥이까지 휘두르며 횡포
를 부렸다.
  그러나 독립 협회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더욱이 이쪽은 젊은 학도들이 많았다. 보부상
들과 독립 협회 회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여러 날 계속되었다. 독립 협회는 종로 일대를 중심으로, 황국 협회는 마포 일
대를 근거지로 하여 밀고 밀리는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은 드디어 김정근을 파면시키고 한규설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체포했던 독립 협회 간부 17명을 석방함과 동시에 조병식·민종묵·이기동 등을
파면시켰다.
  5. 청운의 뜻

  독립 협회도 마침내 황국 협회와 마찬가지로 해산당하고 말자, 안창호는 고향으로 돌아왔
다. 이 때,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무엇을 할까?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안창호는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렇지, 학교를 세우자. 농부들이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을 가을의 수확을 위해
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배움의 길을 열어 가는 것이 우리 국민의 나아갈 길이다.
  안창호의 이와 같은 생각은 그 무렵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고, 이미 전국 방방
곡곡에 수많은 사설 학교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안창호는  점진 학교 를 세웠다.
  안창호가 세운 점진 학교는 다른 사설 학교들과는 좀 색달랐다. 초등 교육과정을 가르치
는 학교라는 데는 별 이상할 것도 없었으나, 남녀가 같이 배운다는 점이 특이해서 고향사람
들을 놀라게 했다.
  그 때는  남녀칠세부동석 이라는 유교적 도덕 관념이 깊이 뿌리박혀 있어 남녀 유별이 엄
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그와 같은 낡은 생각을 과감하게 물리
쳤다.
  안창호는 또 학생들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못마땅히 여기며 헐뜯었다.
   점진 학교는 남녀 공학이라 해서 아이를 보내기가 꺼림칙했는데, 이제 아이들에게 일까
지 시킨다는군요,
   그럼 학교가 아니라, 노동판이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안창호는 이런 예를 들어 설득을 했다.
   옛날에 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부인이 마당에 피를 한 멍석 널어놓고  서방님, 글읽기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두서너 번 뒤채어 다시 널도록 하세요. 그리고 혹시 소나기라도 올지 모
르니 조심하세요. 하고 단단히 부탁했습니다. 남편은 그저  응,응  코대답만 하고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부인은 멍석에 피가 없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하고 물었습니
다.  아니, 서방님! 멍석의 피를 담아 들였어요?  그러나 그 선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아
니 난 이제껏 글만 읽고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나?  부인은 털썩 마당에 주저앉아 울었어
요. 소나기가 와서 피 한 멍석이 다 떠내려갔던 것입니다.
  안창호는 잠시 말을 끊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은 그 선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기에 소나기 오는
것도 몰랐을까? 하고 오히려 칭찬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틀린 생
각입니다. 선비라고 해서 땀흘려 일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자 안창호의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따지듯 물었다.
   그렇지만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 일하는 곳은 아니잖소!
   바로 그런 점이 저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옛날에는 글을 무슨 특권처럼
생각하고 양반의 자제나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것이나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고
했지요. 그러나 글공부에 양반과 상것의 차별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
까? 글공부는 공평한 것입니다. 누구든 배워야 하고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리고 노동도 공부입니다. 땀흘려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귀중한 것인지를 깨
닫게 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 점진 학교에서는 한 푼의 월사금도 받지 않고 있잖습니
까!
  배운다는 것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깨우치게 한다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안창호의 바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안창호는 교가를 작사 작곡
했다.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문하되 낙심 말고
  하겠다 하네 우리 직무를 다.
  점진은  차례대로 차츰 나아간다. 는 뜻이다. 공부도 껑충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고, 높은
산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듯이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야 한다.
  안창호는 이 교가를 아침마다 학생들이 꼭 부르도록 하였다. 노래를 우렁차게 부름으로써
학교 사랑하는 마음과 공부에 대한 흥미도 높아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번에는 점진 학교가 노래 학교냐며 입을 삐죽거렸다.
   쇠돌 엄마 , 저 노래를 들어봐요. 저것은 소리 학교지 글 배우는 학교가 아니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우. 안 선생이 예수쟁이가 되었다더니 혹시 예수쟁이 노래를 가르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안창호는 이런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년이 지났다. 힘들었던  황무지 개간도 끝이 났다.
  안창호는 학교 운동장에 화단을 만들고, 개간한 밭 일부를 꽃밭으로 만들었다.
   선생님, 이번에는 꽃장수를 하시렵니까?
  나이 지긋한 학생 하나가 물었다.
   아니네, 두고 보게.
  안창호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 이유를 굳이 밝히지 않았다. 꽃을 돈 주고 사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봄이 되어 개나리며 진달래가 만발했다. 학교가 온통 꽃으로 파묻혀 있는 듯했다.
  어느 날 안창호는 개나리와 진달래를 꺾어 한 묶음씩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
했다.
   이 꽃을 가지고 가서 방마다 예쁘게 장식하도록 해라. 꽃이 있으면 집이 한결 아름답고
깨끗해 보일 게 아니냐.
  나눠 주는 꽃은 철따라 바뀌었다.
  사람들은 점진 학교를  꽃학교 라 불렀다. 그리고 안창호의 뜻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깨끗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남이 보아 기분 좋고, 자기도 또한 기쁜 마
음이 드는 게 청결입니다.
  안창호는 늘 입버릇처럼 청결을 강조하였다. 깨끗한 집, 깨끗한 마을, 깨끗한 학교를 만들
자고 말하였다.
  안창호는 점점 깊은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생의 목표를 어디다 둘 것이냐 하는 고민이었다.
   예수교의 전도자가 될 것인가?
  그것은 그가 다닌 학교의 교육 방침이었고, 언더우드나 밀러 목사의 희망이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 더 급한 것이 있다. 이 나라, 이 국민을 깨우치는 일이다.
  안창호는 마침내 교육자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이 무렵, 약혼자 이혜련은 삼 년 동안의 여학교 공부를 마치고 시골집에 와 있었다. 안창
호는 빨리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는 어른들의 성화를 제쳐 놓고 혜련을 찾아가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만 하겠소. 그래서 미국으로 갈까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언
제 돌아올지 모르오. 적어도 십 년은 있다가 돌아와서 당신과 결혼하겠으니 그리 아시오.
  약혼을 한 뒤, 결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혜련에게 안창호의 말은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 뒤, 혜련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말하였다.
   저는 죽으나 사나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당신이 말이오?
  안창호는 놀랐다.
   네, 미국 아니라 세상 끝이라도 따라가겠어요.
  그 목소리는 약간 떨렸으나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결심이 깃들여 있었다.
  안창호는 혜련의 결심을 말리려고 애를 썼지만 모두 허사였다.
  마침내 조촐하게 식을 올린 신혼 부부로 그들을 태평양을 건너게 되었다.
  이 때, 안창호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뚜…… 뚜…….
  고동 소리와 함께 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안창호와 혜련은 갑판의 난간을 잡고 움직일 줄 몰랐다.
   마침내 가는 거야.
  안창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조국 강산이 힘차게 그들의 앞날을 밝혀 준다고 느꼈다.
  미국까지의 항해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는 일이 결코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심한 배멀미로 고생을 해야
했고, 낯선 문물들에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안창호는 혜련을 보호하며 무사히 이국땅을 밟
을 수 있었다.
  40일이 넘는 긴 항해 중에 낯설기만 하던 서양 문화에도 조금은 적응할 수가 있게 되었
다.
  하와이를 지나는 도중 안창호는 하와이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인 마우나케어를 보게 되
었다. 그는 그 화산을 보고  도산 이라는 아호를 생각해 냈다.
  도산은  섬의 산 이란 뜻이다.
  그러나 거기엔 그것 이상의 뜻이 있었다. 망망한 바다 위에 섬처럼 우뚝 솟아 있는 희망
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6. 새 지도자가 왔소!

  안창호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물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도 아름답기로 이름난 도시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
하며, 해안과 비탈진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구조가 매력적이었다.
  이 도시에는 동양계의 중국인·일본인·필리핀 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 교포도 몇십
명 살고 있었으나, 그들은 대개 인삼 장사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안창
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렵게 학교에 입학하여 중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나, 어느 곳에라
도 풍족함을 없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한 두 인삼 장수가 서로 멱살을 붙잡고 싸우고 있는 것을 보
았다.
   이자식, 건방진 자식!
   흥, 누가 할 소리인데.
  그들은 마침내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런 욕까지 하면서 상대편의 상투를 거머잡았다.
  안창호는 그들에게로 달려가서 싸움을 말렸다.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서양 사람들이 보고 비웃고 있지 않습니까?
  안창호의 점잖은 말에 상투를 잡았던 손은 놓았으나 그들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서로 상대
편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일로 싸우셨습니까?
   저 사람이 남의 구역에 들어와 장사를 해먹으니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흥! 남의말하네. 처음 내가 가짜 인삼을 가지고 다니면서 판다고 일러바친 건 누구였지!
  겨우 싸움을 말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안창호는 우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러세요?
  안창호의 우울한 얼굴빛을 보고 혜련이 물었다.
   우리 동포인 인삼 장수들이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소. 정작 깨우쳐 주어야 할
사람들이 그들이라고 생각하니 한심하기만 하오.
   그러면 그들을 깨우쳐 주시면 되잖아요.
   내가?
  안창호는 의아해하며 되묻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무릎을 쳤다.
   당신 말이 옳소. 내가 지금 멀리 미국까지 와서 배우려는 것도 우리 국민을 계몽하려는
뜻에서가 아니오? 배워야 할 사람이 당장 눈앞에 있는데, 그들을 가르치지 않고 누구를 가
르치겠소!
  혜련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부디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집안일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우리 두 식구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
   고맙소. 당신이 그렇게 뒷바라지해 준다면 내 마음놓고 일할 수 있으리다.
  이튿날, 안창호는 대나무 비를 몇 자루 마련하였다. 그리고 교포들이 사는 구역의 길을 쓸
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새벽 청소를 남몰래 일 주일쯤 하자 서서히 반응이 나타났다.
  그 날도 안창호가 빗자루를 들고 길을 열심히 쓸고 있으려니까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고개를 들어 보니 서로 상투를 거머잡고 싸우던 인삼 장수 둘이 빗자루를 들고 쑥스러운
듯이 서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집이 서로 근처였군요.
   부끄럽습니다. 서로 가까이 살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싸움까지 했으니…….
  그들은 안창호와 함께 길을 쓸기 시작했다.
  혼자 쓸던 것을 셋이서 하니까 청소는 금방 끝이 났다.
   선생님, 저는 이종철이고, 이 사람은 김종오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저희들이 청소를 할
테니 선생님은 하시지 마십시오.
   제가 하는 일이 못마땅합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황송해서 그럽니다.
   그렇다면 저도 청소를 계속하게 해 주십시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면 밥맛도
좋고, 또 만리 타국에서 동포들과 만나니 외롭지 않아 좋거든요.
  이튿날 새벽, 여느 때처럼 청소를 하러 밖으로 나간 안창호는 깜짝 놀랐다. 그 구역에 사
는 교포 20여 명이 모두 나와 청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가 끝나고 안창호는 교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청국인도 일본인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 곳에 온 지 일 년도
안 되었지만, 청국인은 청요리 장사로, 일본인은 정원가꾸기와 꽃장수로 우리보다는 잘 사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들보다 못사는 것일까요? 그들보다 머리가 나
쁩니까, 게으릅니까? 절대로 그들보다 못한 점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수그리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청국인과 일본인이 우리를 뭐라고 비웃고 있는가
를! 그들은 우리가 단결심이 없고 상대방을 서로 헐뜯는다고 비웃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리 청소나마 모두 나와서 하고 보니 얼마나 기분 좋고 대견스럽습니까? 우
리에게도 단결심은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힘을 합하면 무서울 것이 없는 법입니다.
이튿날, 안창호는 늦게서야 그 구역에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수레에는 수십 개의 화분과 몇
필의 비단이 실려 있었다. 그 날도 사람들은 모두 나와 청소를 이미 끝마치고 있었다.
    모두들 나와 계셨군요.
  안창호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하자, 사람들은 그의 둘레로 모여들며 물었다.
   선생님, 그것들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선물할 커튼과 화분입니다. 이 커튼을 창문마다 달고, 화분을 창가에 놓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서양 사람들도 우리를 달리 보게 될 것입니다.
  안창호는 서양인들의 마음을 바로 본 것이었다. 커튼을 달지 않아 방 안이 길에서 환히
들여다보인다면 그들은 한국인을 야만인이라고 깔보게 되리라. 그러나 커튼을 달고 꽃을 가
꾸는 것을 보면 그들은 한국인을 문화 민족이라고 존경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는 사람들도 안창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은 눈에
뛸 만큼 달라졌다. 배에는 선장이 있어야 항구를 찾아갈 수 있듯이 사람도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다.
  하루는 우리 교포에게 집을 세 주고 있는 미국인이 안창호를 찾아왔다.
   당신이 안창호입니까?
  그 미국 사람은 안창호가 아직 젊은이라는 데 놀라움을 나타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사회가 크게 달라져 나는 은근히 감탄하고 있었지요. 세든 집을 자
기 집처럼 아껴주고, 집세도 밀리는 일 없이 꼬박꼬박 지불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당신들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왔소? 하고 물었지요.
   뭐, 사람들이 당연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안창호가 이렇게 말하자 그 백인은 더욱 감탄하였다.
   아닙니다. 일본인에게도 중국인에게도 집을 빌려 주고 있지만 당신네 한국인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감사의 뜻으로 지도자인 당신에게 제의를 하러 왔습니다. 무엇이
든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안창호는 잠깐 생각
한 뒤 대답했다.
   그렇다면 사무실을 하나 빌려 주십시오. 물론 집세는 드리겠습니다.
  안창호는 교포들의 연락 장소로 사무실을 하나 마련할 작정이었다. 그것은 나중에 교포
회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좋습니다. 무료로 제공해 드리지요. 그리고 한인의 집세를 5퍼센트 줄여 드리겠습니다.
수리비가 훨씬 덜 든다는 점에서 나는 오히려 이익이 되니까요.
  욕심 많기로 소문난 유대계 미국인이었으나, 그는 싱글벙글하며 돌아갔다.
  며칠 뒤, 안창호는 그 사무실에  한인 친목회 를 설치했다.
  이 무렵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차로 12시간쯤 걸리는 리버사이드로 이사갔다. 귤
농장이 많은 그 곳에서 귤을 따 주며 생활을 꾸려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인 노동자에
게는 귤 따는 막일도 좀처럼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모처럼 일을 하게 되어도 임시 인부
로 쓸 뿐 노는 날이 더 많았다.
   우리 교포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인데,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면 큰일이다.
더욱이 일본인 노동자는 꾸준히 일을 하고 있다. 그것도 백인 농장주들의 차별 때문일까?
  안창호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 점을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일본인은  노동자 알선소
라는 조직을 가지고, 그 조직을 통해 농장주와 계약을 맺고 있었으며, 농장주가 요구하는 노
동자를 공급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일본인 알선소에 부탁하더
라도 저희 나라 사람을 먼저 쓰고, 그래도 부족할 때 겨우 임시로 써 주고 있었다.
   우리도 노동자 알선소를 만들어야 한다.
  안창호는 결심했다. 미국에서는 어떤 일을 할 때 반드시 계약을 맺는다. 노동자는 계약서
에 약속한 것만큼 충실하게 일해 주고 보수를 받는다. 적당히 시간이나 채우고, 또는 한 번
들어가면 잘 하거나 못 하거나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다는 그런 생각은 통하지가 않는 것이
었다.
  그런데 노동 알선소를 만들자면 자본이 필요하다. 이 때도 안창호의 근면 성실함을 평소
부터 알아 주는 미국인이 있었다. 그는 안창호를 찾아와 물었다.
   왜 당신들은 일을 하지 않고 놀고 있는 거요?
   일본인 노동자 알선소가 저희들 일꾼만 우선적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자본을 빌려 줄 테니 독립해서 스스로 해 보겠소?
   해 보겠습니다.
  안창호는 곧 세밀한 계획서와 함께 돈을 언제까지 갚는다는 계약서를 만들어 미국인에게
보였다.
   좋소.
  그 미국인은 1500달러의 자금을 선뜻 빌려 주었다. 미국인은 안창호가 꼼꼼한 사람이고,
한 번 약속하면 꼭 지킨다는 것을 믿고 돈을 빌려 주었던 것이다.
  이 때 리버사이드에는 한인 노동자가 8명 있었으나 곧이어 18명으로 늘어났다. 안창호는
그 18명의 인원으로 농장주와  계약을 맺고 열심히 귤을 땄다.
  빚은 약속한 석 달 만에 깨끗이 갚았다. 일거리가 계속적으로 생기자, 리버사이드의 우리
교포들은 차차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안창호는 교포들의 안정만이 목표는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동포들
의 계몽과 단결이었다. 그리하여 리버사이드에서 18명의 동지가 모여  공립 협회 가 만들어
졌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한인 조직이다. 회원은 곧 34명으로 불어났다.
   우리 회원은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를 테면 속옷 바람으로  밖에 나
간다거나 여자들이 긴 담뱃대를 물고 다니는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공립 협회의 목적은 회원 사이의 친목과 권익 옹호 외에도 나쁜 풍습을 고치자는 데 그
뜻이 있었다.
  하루는 회원들이 말했다.
   선생님, 여기는 이제 우리끼리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은 귀중한 시간을
좀더 큰 일에 써 주십시오.
  이리하여 안창호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거기서도 공립 협회를 설립하였다. 이제 교
포의 조직도 안정된 위치로 굳혀 갔다. 서기 1905년 11월 14일에 당당한 3층 건물인  공립
회관 을 마련했고, 11월 20일에는 순 한글판인  공립 신보 라는 신문도 발행하였다.
  캘리포니아 일대에 사는 우리 교포들은 모두 공립 협회 아래 굳게 뭉쳤다. 미국의 관청도
한인에게 용건이 있으면 공립 협회를 통해 문의해 왔다.
  한편, 하와이에도 교포들이 친목 단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설립 목적은 공립 협회와 거
의 같았다.
  서기 1906년, 안창호는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 큰아들 필립이 태어났다. 안창호의 생활은
여전히 가난했다. 교포들의 계몽과 권익 옹호에 앞장 서며, 바삐 뛰어 다니는 그에게는 가족
을 돌볼 여유마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서기 1906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하룻밤 사이에 전 시내가 폐
허로 뒤바뀌고 공립 회관마저 무너져 버렸다.
  교포들은 넋을 잃고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때도 안창호는 교포들을 격려하고 다녔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주저앉아 버리면 그 동안의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런 때일
수록 더욱 단결하고 서로 힘을 내어 꿋꿋이 살아갑시다.!
  안창호의 말에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다. 교포들은 벽돌을 추리고, 잿더미를  정리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재건에 너도나도 나섰다.
  그해 11월, 안창호는 귀국할 결심을 하였다.
  사람들은 일본의 행패를 두려워하며 안창호의 귀국을 만류했다. 그러나 안창호의 결심을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감옥에 넣기밖에 더하겠소!
  안창호는 조국이 자기를 부르고 있다고 느꼈다.
   조국은 무너지려 하고 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조국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겠지만, 1천만
국민이 단결만 한다면 희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안창호가 이러한 결심을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송병준·윤시병 등 친일하는 무리들이 유신회
를 조직하는가 하면, 이용구가 동학에서 갈라져 나와 진보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 두 단체
가 힘을 합해 일진회를 만들었다고 하잖는가! 우선 일진회부터 무너뜨려야 한다.
  안창호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태평양보다도 더 넓고 깊은 것이었다.
  7. 인생의 황금기

  사람이 태어나 삶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활동이 왕성한 때가 있다. 그것을  인생의 황금
기 라고 한다. 도산은 자신의 황금기를 꺼져 가는 조국의 마지막 불길을 돋우려는 데 바치기
로 결심을 했다.
  서기 1907년 2월, 고국으로 오는 도중 도산은 일본 도쿄에서 배편을 기다리기 위해 일 주
일쯤 머물렀다.
  그 때 도산은 유학생 김지간을 통해 장응진을 알았다. 이들은  태극 학회 라는 것을 조직
하여 활약하고 있었다. 도산은 귀국하자 교회 관계 동지들과 손을 잡고 서울 남대문에 있는
상동 교회에 자주 나갔다.
  이 곳에 모여든 동지로는 전덕기·이갑·이화영·이동녕·이승훈·노백린·양기탁·김구
등이 있었다. 그들은 이 때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 를 조직하였다.
  신민이란  새 백성이 되자 는 뜻이다. 이것도 도산에게서 나온 사상으로 새로운 자각을 가
진 국민, 다시 말해서 깬 국민이 되어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붙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이 때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종 황제의 특명을 받은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사람이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
해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갔다.
   을사조약은 황제의 뜻이 아닌 일본의 협박과 강제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다.   라는 것
을 세계 만방에 폭로하기 위해 아라사의 대표를 만나 협조를 청했으나, 그것마저 실패로 돌
아갔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일본은 당황했다. 그러나 곧  오히려 잘 되었다. 이번 기회
에 고종 황제를 몰아 내자. 라고 하며, 고종에게 왕위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했다. 고종은 눈
물을 머금고 순종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 사실이 국민에게 알려지자, 격분한 군중들은 일본 헌병대를 습격했고, 친일파인 이완용
의 집에도 불을 질렀다.
  일본은 고종의 퇴위에도 만족하지 않고  정미 7조약 을 맺어 우리 군대를 해산시켰다.
  유난히 무덥고 긴 여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대장님!
  밀정 하나가 일본 헌병대 본부로 뛰어들어갔다.
   상동 교회에서 지금 안창호의 연설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일본 헌병 대장은 황제의 강제 퇴위와 조선 군대의 강제 해산 등으로 요즈음 기분이 좋았
다. 약간의 충돌 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저희들 뜻대로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좋아, 내가 듣고 조금이라도 불온한 내용이라면 뿌리째 뽑아 버려야겠다.
  그는 의기 양양하여 상동 교회로 갔다. 거기에는 벌써 안창호의 연설을 듣기 위하여 수많
은 청중이 모여 있었다. 안창호의 연설이 뛰어나다는 것을 이미 알고 모여든 사람들로 연설
회장은 벌써부터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산은 청중석 뒤에 군도를 찬 헌병 장교가 나타난 것을 보았으나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
고 열변을 토했다.
   우리 민족은 3대 파산에 맞닥뜨려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적 파산이요, 둘째는 지식적 파
산이요, 셋째는 도덕적 파산입니다.
  경제적 파산은 일본 상품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와 우리의 상품이 발붙일 곳조차 없어졌
음을 뜻한다. 더욱이 공업 상품이 없고 농산물밖에 없는 우리 국민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식적 파산은 우리가 너무도 뒤떨어졌다 하여 개화 사상을 열심히 받아들인 데서 시작되
었다. 왜냐 하면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때문에 민족의 넋마저 잃어버린 결과가 되
었기 때문이다.
  도덕적 파산은 유교의 도덕과는 좀 다른,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의심의 부족이
다.
   이 파산을 구하는 길은 무엇이냐? 그것에 대한 처방이 민족 3대 자본 동맹 저축론입니
다. 그렇다면 민족의 세 가지 큰 밑천이란 무엇이냐? 첫째는 금전의 자본, 즉 경제적 자본이
요. 둘째는 지식의 자본, 즉 정신적 자본이요. 셋째는 신용의 자본, 즉 도덕적 자본입니다.
우리 겨레는 이 자본이 적기 때문에 힘이 없고, 힘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게 당하고만 있는
것이고, 불행과 가난에 빠진 것입니다.
  도산은 파산을 막는 힘을 설명하고 결론을 내렸다.
   민족의 자립과 번영을 얻으려면,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민족의 힘은 어디서 생기는
가? 민족의 3대 자본은 자본을 저축하는 데서 생깁니다. 저축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 목표를 세워 동맹 저축해야 합니다.
  도산이 여느 독립 운동자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독립 지사임과 동시에
국민의 계몽을 부르짖는 교육자였고, 민족의 살길을 제시한 사상가였다.
  우렁찬 박수 속에서 일본인 헌병 대장은 오히려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도산의 연설에서
트집을 잡을 아무런 실마리도 찾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트집을 잡을 수 없지만 무섭게 찔러 오는 힘을 가진 연설이다. 만일 안창호의 사상이 조
선 사람 하나하나의 가슴에 횃불처럼 타오른다면 우리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그 불을 끌 수
없을 것이다.
  헌병 대장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밀정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장, 왜 안창호를 체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헌병 대장은 시무룩한 얼굴로 앞장 서서 연설 회장 밖으로 걸아 나갔다.
  도산은 온 나라를 돌면서 새로운 교육이라는 사상을 가슴 속 깊이 심어 주었다.
  서기 1905년, 조선의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 나라의 통감이 되어 있었다.
  나라 안팎의 정세는 급히 돌아갔다.
  이러한 난국에서 어떻게 나라를 구할 것인가. 선각자들의 가슴 속에는 오직 나라를 걱정
하는 마음으로 불타 올랐다.
  도산은 우리 나라 국민을 교육시키고 일깨워 가며, 조직하고 훈련시켜 나라의 기틀을 잡
으려고 했다.
  이러한 도산의 생각을 젊은이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우리 나라는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당장 나라가 망해 가는 판에 어찌 조직하고 훈
련시킬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 애국 청년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흥정하여 정국을 우리 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도산 선생, 이토와 만나 주십시오.
  도산은 이토 통감과 만나는 것은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년들의 의견대로 이토와 의
논하여 무엇인가 꾸밀 생각은 털끝 만큼도 없었다.
   어리석은 생각들이다. 이토와의 흥정이라니 당치 않는 일이다.
  청녀들은 이토의 힘을 빌려 청년 내각을 조직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토와 정치적인 흥정을 하자는 것이었다. 도산은 이토와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도산이 이토를 만나려는 목적은 청년들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었다. 도산이 이토를
만나려고 하는 것은 몇 가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이지 정권을 잡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첫째, 침략의 원흉을 만나 봄으로써, 앞으로 일본과 우리 나라와의 관계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점쳐 보자는 생각이었다.
  둘째, 남의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원흉이 어느 만큼이나 큰 야심을 품고 있고, 어떤
수법으로 집어삼키려는가를 살펴보려는 생각이었다.
  서른 살인 도산이 이토를 방문했을 때, 이토는 밖에까지 나와 그를 정중하게 맞았다.
  그 때 이토의 나이 예순여섯 살.
  일본의 정치를 한손에 쥐고 흔들며 우리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정계의 거물이 실권이
없는 젊은이를 이렇게 맞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회견에 이갑이 통역을 맡았다.
  이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한 연설을 들었소. 그러나 그 목적이 매우 궁금하오. 그대
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그 누구 못지않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는 일본을 다시 일으켜 세
운 유신 공로자의 한 사람이오. 나는 조선도 일본처럼 좋은 나라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
소. 그러니 우리 가슴 속을 탁 털어놓고 이야기 해 봅시다.
  도산은 당당하게 이토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일본에서 한 그 일을 나는 지금 우리 나라에서 하려 합니다. 당신 말대로 당신이
우리 나라를 위한다면 왜 우리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어찌 그것이 우리 나라를
위하는 길입니까?
  도산의 질문은 날카로운 송곳 같았다.
   조선만을 위한다기 보다 우리 동양 사람들이 한데 뭉쳐 잘 해 가자는 것이오. 백인들을
막으려면 동양의 세 나라가 힘을 합쳐 한 나라처럼 되어야 하오.
   그 말은 그럴 듯합니다. 세나라가 힘을 합쳐 바깥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막자는 데, 마다
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한 사람의 생각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지
궁금합니다. 일본을 머리라고 칩시다. 우리 나라는 목이요, 중국은 몸뚱이입니다. 그런데 지
금 머리, 목, 몸뚱이가 한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떨어져 서로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 아
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믿고 힘을 모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서로 의심하다니  그건 무슨 뜻에서 한 말이오?
   한 가지 사실을 말씀드릴까요? 일본이 우리 나라의 이동휘, 강윤희 두 분을 죄 없이 잡
아 가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교육자인 그들을 잡아 가둔 것은 조선에겐 교육이 필요 없
다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 우리더러 어찌 일본을 믿고 따르라고 합니까?
   누가 갇혔다고? 나는 처음 듣소. 아래 관리들이 그랬다면 알아보고 곧 풀어 주도록 하지
요.
  도산은 이토가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말을 하자, 마침 기회가 좋다고 판단하여 일본의 침
략 행위을 꼬집었다. 도산이 하나하나 일본의 욕심을 꼽아가며 말하는 동안 늙은 이토는 눈
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도산이 잠깐 입을 다물자 이토는 눈을 떴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생
각을 가다듬어 가며 말하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의 평생 소원은 세 가지요. 첫째는 우리 일본을 세계 여러 강대국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현대 국가로 만드는 일이오. 둘째는 조선을 그렇게 만드는 일이오. 셋째가 중국, 즉 청
나라를 그렇게 만드는 일이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나도 알고 있소. 우선 우리 나라는
거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소. 그러나 우리 일본만으로는 서양 세력을 막을 수가 없
소. 조선과 중국이 강대국이 되어 우리 일본을 도와야만 서양 강대국들의 아시아 침략을 막
아 낼 수가 있소. 지금 우리 일본은 한국에 여러 가지 시설을 하려고 있는 힘을 다 기울이
고 있소. 아쉬운대로 이 일만 끝나면 청나라로 가겠소.
  이렇게 말한 이토는 도산의 손을 힘껏 잡았다.
   어떻소? 뜻있는 한국 사람인 그대가 나와 손을 잡고 이 크나큰 아시아의 사업을 경영합
시다. 내가 청나라로 갈 때 함께 들어갑시다. 그리고 우리 세 나라의 정치가가 손잡고 일을
해 동양의 평화를 이룩합시다.
  조용히 듣고 있던 도산은 이 말을 받았다.
   동양 평화를 이룩하자는 일에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또, 당신이 우리 나라를 도와 강대
국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 말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그런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우리 나라에게 가장 알맞는 힘을 빌려 줄 길이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그 길이 어떤 것이오?
   일본을 오늘날처럼 강국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일본 사람이었듯이 우리 조선도 조선 사람
의 힘으로 혁신케 해 달라는 말입니다. 바꿔 생각해 봅시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일본 사
람이 아닌 미국 사람이 했다면 당신네 일본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보고만 있었겠
느냐 이 말입니다. 미국 사람이 유신을 성공시킬 수가 있었을까요?
  도산이 말을 끊었으나 이토는 다문 입을 열지 못했다. 도산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산은 이토가 침묵을 지키자 말을 이었다.
   일본은 우리 나라와 청나라에게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일본에게도 불행한 일일
뿐 만 아니라 우리 동양 세 나라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일본이 애써 막으려는
서양 세력을 끌어오려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세계 강국들은 일본이 지나치게 강
해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요청을 들어 줄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벌어지면
일본은 세계 강대국의 적이 되며 뿐만 아니라 동양 여러 나라의 적이 됩니다.
  당신의 말대로 당신이 우리 나라를 진정 도와 주기 위해 우리 나라에 왔다면 나는 당신을
스승으로 모셔 배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당신이 우리 나라를 다스리러 왔다면 당신과 등
을 지겠습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여러 번 말했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도 우
리 나라를 위해 한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크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도와 준다던 일본이 전쟁이 이긴 뒤에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박탈하려 들자 지금 우
리의 원망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이러한 상태에서 일본이 우리의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당신은 청나라를 위하여 우리와 힘을 합치자고 합니다만 우리 나라를 우선 자주 독립
시키고 힘을 합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청나라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보호국으로 두고 있
는 한 절대로 일본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불행한 관계를 당신의 힘으로 해결하여
주십시오.
  도산의 말에 이토 같은 음흉한 대정치가도 뭐라고 반박할 수 없어 우물우물 넘겼다.
  도산이 돌아간 뒤 이토는 이갑에게 한마디했다.
   그 사람 곧기가 대나무 같군. 큰 인물이 되겠어.
  도산이 이토를 만난 것은 결코 헛되게 끝나지 않았다. 이 회견으로 이동휘 등이 풀려 났
던 것이다.
  한편, 도산은 여전히 민족의 교육에 힘썼다. 태극 서관을 만들어 출판업에 힘썼고, 평양에
자기(사기 그릇) 회사를 만들어 민족 산업을 키우는데 힘썼다.
   일본의 상품은 사지도 말고 쓰지도 맙시다.
  그러나 그 무렵 우리는 성냥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처지였으므로, 무조건 일본 것
을 배척하는 것보다 옛날부터 있었던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손을 대야 했다. 이리하
여 설립된 것이 평양의 자기 회사였다.
  예로부터 대동강 상류에는 사기 그릇을 만드는 데에 알맞는 좋은 질의 찰흙이 있었다. 그
재료를 사용하는 한국인 최초의 주식 회사로 자기 회사가 생겨난 것이다.
  또한, 도산은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웠다. 비록, 그가 학생들과 더불어 지낸 시간은 3년
남짓밖에 안 되었지만, 인재 양성을 위한 그의 열성은 많은 학생들에게 훌륭한 교훈이 되었
다.
  서기 1909년, 이토의 뒤를 이어 소네 아라스케가 새로이 통감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 이어
중국을 집어삼키려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하얼빈에서 사살되었던 것이다.
하얼빈의 총 소리는 한반도에 새로운  위기를 몰고 왔다. 일본 통감부는 이 기회에 우리 나
라 독립 운동가들을 뿌리뽑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되었다 싶은 인물이나 우리 나라 민족 지도자는
모조리 검거되어 감옥에 갇혔다. 도산도 10월 30일, 학교를 포위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
었다.
   앗, 선생님이 왜놈들에게 잡혀 가신다.
  학생들이 하나 둘 뒤따르기 시작하였다.
   해산해라! 해산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체포한다.
  일본 헌병은 엄포를 놓았으나 학생들은 오히려 더 많이 모여들었다. 도산은 조용히 학생
들을 타일렀다.
   여러분, 내 걱정 말고 돌아가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하시오. 여러분은 지금 공부를 열심
히 하며 학교를 지키는 것이 애국하는 길입니다. 자, 어서 돌아가도록 해요.
  학생들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들은 태연히 끌려가는 도산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도산은 그 길로 곧장 기차에 태워져 서울로 압송되었고,
용산의 일본 헌병대에 갇혔다.
  서울에도 도산을 따르는 청년들이 많았다.
   도산 선생이 용산 헌병대에 와 계시대
  이 소문을 전해 들은 젊은이들이 밤이면 감옥 근처에 모여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애
국가이기도 했고 권학가이기도 했다.
  첫째는 감방 안의 지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로는 우리 청년 학도의 의기를 보
여 주기 위해서였다.
  일본 현병은 도산에게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했지만 트집잡을 것이 없었다. 그러
자 간사한 일본인은 달콤한 말로 도산을 꾀었다.
   당신은 조선인의 지도자다운 지도자요. 어떻소, 이 기회에 우리를 돕는 것이 …….
  심지어 도산에게 내각을 조직하라는 제의까지 했다. 그러나 도산은 한 마디로 거절했다.
이 해 12월, 일본 헌병대는 더 이상 도산을 가두어 둘 이유가 없어 석방했다. 다른 지사들도
함께 풀려 나왔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의 국권 침탈의 각본을 짜고 친일파 내각을 내세워 은밀히 그 공작
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결국 서기 1910년 8월 22일에 국권 침탈이 조인되고, 29일에 발표되었다.
  이보다 앞서 4월 8일에 도산은 신채호, 김지간과 함께 서울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8. 흥사단과 상하이 임시 정부

  압록강을 건넌 도산은 북경에서 며칠 묵은 뒤, 청뚜로 갔다. 거기서 동지들과 만나 앞으로
의 투쟁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청뚜 모임에는 도산말고도 유동열·신채호·이종오·김지간·조성환·이강 등이 참석하였
다. 이 때 도산은 말했다.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한시도 절망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서·북간도, 아라사, 만주, 미주 등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의 산업을 일으키고 교육을 보급시
켜 탄탄한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들 중에는 이 말에 반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라가 망해 가는 이 때에 산업이 다 무엇이고 교육이 다 무엇이오! 당장이라도 총칼을
마련하여 왜놈들과 싸워야 하오.
  도산을 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싸울 힘이 있었다면 망명길에 오를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닌가? 사람들은 어째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 것일까?
  도산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 이종오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만주 길림성 밀산현에 미국 사람이 경영하던 농장이 있다고 합니
다. 그 농장을 사서 개간을 하고 무관 학교룰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자
금은 내가 대겠습니다.
  이리하여 모두들 별수없이 그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종오는 이때 아라사 시민권을 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금 마련을 위해 먼저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고, 도산과 이갑, 이강 세
사람은 여권 관계상 뒤늦게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서기 1910년 9월 무렵이었다.
  도산은 이곳에서 국권 침탈 소식을 들었다.
   올 것이 마침내 왔구나.
  도산을 끓어오르는 울분을 걷잡을 수 없었다.
   아, 금수 강산 삼천리는 이제 빛을 잃었구나! 2000만 동포는 갈 데 없는 고아가 되어 버
렸구나!
  도산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도산에게 있어 절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
산은 미국에 있는 동지에게 전보를 쳤다.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부탁한 것이다. 그 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산은 북만주 일대를 돌아다녔다.
  교포가 많이 사는 팔면통이란 곳에 가서 안중근 의사의 유가족을 만나 본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 무렵, 중국인 사회에 있어 안중근 의사는 자기들 나라를 구해 준 영웅과 같은 존재였
다.
  서기 1911년 봄, 미국에서 여비가 송금되어 왔다.
   마침내 미국으로 돌아가시게 되었군요.
  망명 이래 줄곧 도산과 행동을 함께 한 이강이 말했다. 이강은 노동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였으나, 도산에게 조촐한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다른 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우리 민족성 개조를 제일 먼저 생각해야겠네. 조국의 광복을
우리 아들 대에 못 이루면 손자 대에 가서 할망정, 민족의 성격부터 고치지 않고는 도저히
앞선 여러 나라와 어깨를 겨룰 수 없을 걸세. 그래서 이번에 미국에 사면 민족성 개조 운동
의 단체를 조직하고 싶네. 이름은  흥사단 이 어떨까!
  이강은 도산의 말에 찬성하는 빛을 띠며 말했다.
   흥사단, 인물을 일으키는 단체란 뜻이군요. 그런데 그 이름은 이미 1907년에 유길준 선생
이 하다가 그만둔 단체인데 괜찮을까요?
   좋은 일을 하는데 좋은 이름이면 그만이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나!
  도산은 무실 역행으로 자아 개조와 민족 개조를 힘써서 민족 번영의 기초를 만들자는 뜻
이다. 이것이 흥사단의 바탕이 되는 사상이고, 도산의 모든 사상이 합해진 것이었다.
  도산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것은 1912년, 그의 나이 서른네 살 때였다.
  6년만에 가족과 다시 만난 것이다.
  그 동안 그의 가족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헤련은 삯바느질과 남의 집
세탁부 노릇이며 청소를 해 주며 꿋꿋이 가정을 지켜 왔다. 도산은 아내의 손을 잡고 단 한
마디의 말을  할 뿐이었다.
   미안하오.
  그 말 속에는 독립 운동가로서 가족을 희생시키고 있는 비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도산은 막노동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그가 독립 운동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지도자랍시고 편한 행활을 하기 싫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송종익이란 사람이 도산을 찾아왔다. 경상 북도 대구 사람으로 나이는 도
산보다 아홉 살이나 아래였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도산이 묻자 송종익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도산 선생님, 제발 막노동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선생님께서 하실 일이 너무나 많습니
다. 주제넘은 소리 같지만 제가 생활비를 모두 대드릴 테니 국민회 일을 지도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지금 국내에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쓴
우리 애국 지사들이 무자비하게 탄압받고 있습니다.
  도산은 눈을 감았다. 송종익이 말하는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이란  105인 사건 을 말한다.
  도산이 주동이 되어 만든 신민회는 오랫동안 일제가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이번 대대적인
한인 애국 지사 체포로 일제는 비로소 신민회의 존재를 알아 낸 것이다.
  도산이 만일 국내에 있었다면 주모자 가운데 한 명으로 중형을 선고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서기 1911년 7월 11일, 일본인 재판부는 신민회 부회장으로 지목된 양기탁을 비롯
하여 윤치호·안태국·임치정·유동열·이승훈에게 각각 10년의 징역을 선고했다. 김구도
이 사건으로 7년의 징역을 언도 받았다.
  이 밖에도 분한 일이 또 있었다. 그가 만든 청년 학우회가 해산되고, 잡지  소년 도 서기
1911년에 폐간되었던 것이다.
   알았소, 함께 일합시다.
  도산은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다. 서기 1912년 11월 8일의 일이었다.
도산은 압도적인 신임 아래 초대 총회장으로 뽑혔다.
  도산은 국민회의 운영 방침으로 두 가지 큰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동포의 권익 옹호이고,
또 하나는 동포의 생활 개선이다. 해외 교포의 최고 기관인 국민회는 자체 제도로 해 나갈
것과 입회금이나 회비는 없지만 형편에 따라 성의껏 돈을 납부할 것 등을 정했다. 그리고
 신한 민보 를 창간했다.
  다은 해인 서기 1913년, 미국에서는 배일 토지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률은 일본인 이민은 토지를 구입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인은 아직 그 수가 수
백 명 정도였으므로 별로 큰 영향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한인과 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했다.
  취업을 거부당한 11명의 교포는  우리는 코리언이다. 잽이 아니다. 라고 항의했으나 소용
없었다.
  국민회는 곧 대책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전문을 국무 장관에게 보냈다.
   우리 한인과 일본인은 엄연히 다르다. 더욱이 재미 한인은 한일 합방이 되기 전에 한국
을 떠났고, 한일 합방을 인정치 않는다. 앞으로는 전시나 평화시를 막론하고 일본인과 같은
취급은 하지 말 것이며, 한인에 대한 일은 국민회를 통해 처리해 주기 바란다.
  이 전문에 대해 그 때의 국무 장관 브라인언은 이렇게 회답해 왔다.
   귀측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되므로, 한인은 앞으로 일본인과 다르게 취급될 것이며 각종
행정 연락도 국민회를 통할 것이다.
  국민회를 한인 사회의 공식 기관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리하여 나라 없는 설움을 받던 재
미 교포가 미국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활동할 터전이 생긴 셈이었다.
  국민회는 나라 없는 교포들의 유일한 보호 기관이 되어 미국 안에서 정부 구실을 하게 되
었다. 태극기와 애국가가 지켜질 수 있었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 수 있었
다. 또, 한인증이 발급되어 한인의 신분과 권익을 보호받았다.
  국민회의 활동은 미국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하와이,멕시코,쿠바, 그리고 시베리아까
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
  시베리아에서는 이강이 국민회 원동 지회를 두고 그 일을 맡아 보고 있었다. 국민회 원통
지회는 기관지로  정교보 를 발행했다.
  아라사 정부도 한인을 일본인과 구별하여 일본인 영사의 간섭을 받지 않게 대우해 주었
다.
  또한, 도산은 흥사단 설립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서기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교포 강영소의 집에 사람들이 모였다. 도산은
지방색을 없애기 위해 8도 사람들을 골고루 흥사단 창립 위원으로 뽑았다.
  이어 이듬해 10월 5일에는  흥사단보 가 정기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단우들
의 활동과 도산의 격려사가 실리곤 했다.
  서기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삼천리 강산을 진동케 하고 간악한 일제의
총뿌리가 평화로운 시위자를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있을 때, 미주의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
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때 몇 가지를 결의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이러했다.
   상하이 대표를 파견하여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봉사하게 한다.
  이 결의로 도산은 상하이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국민회 북미지방 특파원으로 정인과 황
진남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4월 5일 뱃길로 캘리포니아를 떠났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다.
  상하이는 이 때 수많은 독립 지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수효는 10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4월 11일에는 벌써 임시 정부 요원들이 선출되고 있었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 총장 안창호, 외무 총장 김규식, 재무 총장 최재형, 법무 총장 이시
영, 군무 총장 이동휘, 교통 총장 신석우.
  도산은 4월 25일에야 비로소 상하이에 도착했다.
  맨 처음 임시 정부는 도산이 움직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는  연통제 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연통제라 함은 국내 여러 곳에 비밀 조직을 두어 임
시 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제도였다.
  국내에는 일본 총독의 압제 아래 헌병과 경찰의 총검이 우리 민족을 무섭게 감시하고 있
었다. 그런 가운데 연통제를 비밀리 설치한 것이다. 그 조직을 통해 독립 운동의 정신을 국
민에게 끊임없이 불어넣고, 앞날의 민중 운동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함과 동시에 임시 정부
의 운영 자금을 모아들이자는 것이었다.
  도산의 계획과 조직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연통제는 실시한 지 반 년 만에 경상 남북도
와 강원도를 제외한 10개 도에서 조직을 완료했다고 한다.
  압록강 건너편 안동에는 안동 교통 지부가 설치되었다. 연통제를 통해 국내에서 탈출하는
애국 지사나 국민들의 헌금과 부녀자들이 선 뜻 뽑아 바친 금반지 등이 안동 교통지부를 통
해 임시 정부에 전달되었다.
  임시 정부는 또 특파원을 자주 국내에 들여 보내 연통제의 조직을 후원하고 지도했다. 수
많은 독립 지사들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에 침투했다.
  도산은 우리 주위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계획성과 실천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서기 1919년 8월, 도산은 임시 헌법 개정안을 만들어 의정원(임시 정부의 국회)에 제출하
였고, 그것이 통과되었다.
  개정안은 대통령직을 새로 마련하여 독립 운동자의 단결을 꾀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 결과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 총리에 이동휘가 임명되었고, 도산은 스스로 한 급수 낮은
노동국 총판이라는 자리를 맡았다.
  도산의 활동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는 중국과 한국을 방문하여 실정을 알아보려는 미국
의원들을 만나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였고, 우리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또 흥사단  원동 위원
부 를 상하이에 설치하였다.
  실질적으로 임시 정부를 이끌던 도산은 1921년 5월에 모든 직책을 내놓고 물러났다. 그러
나 도산은 활동을 멈춘 게 아니었다. 김규식 등과 더불어  국민 대표회 를 만들이 위해서였
다.
   내가 상하이에 처음 왔을 때 신민회를 부활시키는 말이 있었지만, 단결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하여 거절했소.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이렇듯 아무런 기초가 없고서는 일해 나가기가
어렵소. 지금이라도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 앞으로의 일에 대비했으면 하오.
  이 무렵, 독립 운동가들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 갈라지고 있었다. 도산은 어쩌면 이
때 이미 공산주의자와 대항할 민족주의 정당을 구상했는지도 모른다. 그후, 서기 1928년의
일이지만 도산은  한국 독립당 을 창설했기 때문이다.
  서기 1922년, 국민회의가 구성되어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안창호가 뽑혔다. 그러나 국
민회의 운동 역시 순탄하지 못했다.
  서기 1924년 무렵, 도산은 북경에 있었다. 춘원 이광수가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그 곳으로
왔다.
  이 때 도산은 이광수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고국 동포에게 주고 싶은 글이 있는데 받아써주시오.
  이 글이 나중에  동아 일보 에 연재되고, 다시  동광  잡지에 실린  갑자 논설 이다. 그 글
속에서 도산은 아홉 가지 조목을 들어 강조했다.
  첫째, 국민의 책임감
  둘째, 협동 생활의 원칙
  셋째, 지도자의 선택
  넷째, 착실주의(일을 착실하게 해 나가는 것)
  다섯째, 실천론
  여섯째, 개업론(국민 모두가 일해야 한다는 것)
  일곱째, 학생의 갈 길
  여덟째, 젊은이의 용기
  아홉째, 정의 돈수
  흥사단의 기본 정신이기도 한, 정의 돈수를 도산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무정한 사회는 대한의 사회다. 부모 자식 사이, 부부 사이, 시부모와 며느
리 사이, 형제 사이, 관리와 민간의 사이, 남녀 교제나 집회, 교회 등 어느 것을 보아도 화목
한 정이 없고 쓸쓸한 것뿐이다. 정의를 기르기 위해서는 남의 일에 간섭 말 것, 성격이 다른
것을 이해할 것, 자유를 침범하지 말 것, 물질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 것, 정의를 혼동하
지 말 것, 신의를 지킬 것 등을 실행해야 한다. 정의로 바탕이 이루어지면 모든 일이 잘 되
고 정의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 우리는 화목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  갑자 논설 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도산은 그 뒤 남경에 동명 학원을 세웠고, 흥사단 대회를 그 곳에서 열기도 했다.
  도산이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서기 1924년 12월 16일, 마흔일곱 살 때이다.
  도산은 그리운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역시 바빴다. 그는  이상촌  계획의 동
지를 얻고 동명 학원과 국내에서 발간되는 잡지  동광 의 자금 마련에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
녔다.
  마침내 도산은 1만 달러 남짓의 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서기 1926년 5월,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는 도산을 위해 교포들이 베푸는 송별연이 열렸다.
도산이 인사를 할 차례가 되었다. 도산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앉은 부인과 자식들인 필
립, 필선, 필영, 수산, 수라를 천천히 둘러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여기 내 아내가 앉아 있습니다만…….
  도산은 잠시 말을 끊었다. 도산이 가족에 대해 말하는 적은 좀처럼 없었다.
   나는 평생을 두고 아내에게 치마 한 벌, 저고리 한 감을 사줘 보지 못한 부족한 남편입
니다.
  도산은 또 말을 끊었다. 그의 눈은 자녀들의 모습을 더듬고 있었다.
   저기 필립과 그 애 동생들이 앉아 있습니다만…….
  도산은 말투를 바꾸어 말을 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국민 학교에 다니고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안에도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을 제대로 사줘 본 일이 없다. 부족한 아버지다.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도산은 배에 오르기 전 마치 마지막 작별이라도 하듯이 큰아들 필립에게 말했다.
   필립아, 나는 나라를 위해 떠나기는 한다만은 어린 너에게 가족을 맡기는 것은 하늘에
대해서 죄가 되는 것 같구나.
  필립은 아버지의 말씀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9.봄은 꼭 오리

  도산은 상하이로 돌아오자 잡시 쉴 틈도 없이 만주로 떠났다. 만주 벌판에다 우리 교포의
집단 거주 구역을 만들고 민족의 힘을 길러 보자는 것이, 도산이 늘 품어 오던 이상촌 건설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만주도 우리 교포의 안전한 땅은 되지 못했다. 만주를 주름잡는 마적왕
장작림이 일본군과 손을 잡고 우리 애국 지사들을 체포하여 그들 손에 넘겨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산은 만주에서의 이상촌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자 남경로 돌아갔다.
  서기 1928년, 도산은 김구 등과  한국 독립당 을 만들었고  대공주의 라는 것을 새로이 주
장했다.
  대공주의는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인류에 대한 의무를 완수하
는 것이다. 라는 도산의 애국 사상이다.
  그 동안에도 일제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서기 1931년 9월,  만주 사변 을 일으켜 만주를 집어삼키더니 그들은 다시 이듬해에  상하
이 사변 을 일으켰다. 마침내 중국 본토까지 침략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4월 어느 날이었다. 봄이건만 상하이의 봄 날씨는 변덕스럽기만 했다. 따뜻해지는가 싶으
면 곧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바깥에 나갔다가 도산이 숙소에 돌아와 보니 쪽지 하나 와 있
었다.
   도산 선생,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으니 당분간 피신하십시오.
  그 쪽지는 김구가 보낸 것이었다.
  서기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날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일본군 사령관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들이 살상되었다.
  그런데 도산을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마침 상하이 지구 우리 교포 거류민 단장인 이유필을 찾아 그의 집으로 향했다. 거
리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지만 며칠 전 이유필의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걸음을 재촉
하고 있었다. 그는 걸으면서 백범의 남긴 쪽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일본의 영사관 경찰, 헌병들은 눈이 뒤집혀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
되었지만,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있다고 본 그들은 맨 먼저 한인 거류민 단장의 집을 습격
했으나 이유필은 이미 피신한 뒤였다.
   그래도 되돌아올지 모른다. 숨어서 기다리자!
  잔뜩 벼르고 있던 그들 앞에 도산이 나타난 것이다. 안창호는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안창호를 체포하자 그들은 거물을 잡았다고 기뻐 날뛰었다. 도산은 곧 국내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과 악랄한 조사를 받았다.
  도산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으나, 그들은 다른 죄목을 뒤집어씌워
4년의 징역을 선고했다. 그리고 서기 1935년 2월 10일, 도산은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서기 1936년, 두산은 평양 서쪽 대보산 중턱에 있는 송태 산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도산을 존경하는 한 유지가 무료로 제공해 준 산장이었다.
  그러나 도산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서기 1937년 6월 28일, 느닷없이 일본 경찰대가
몰려와 도산을 연행했던 것이다.  동우회 사건 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도산은 다시 기소되었으나 워낙 건강이 악화되어 있어서 병보석으로 대학 병
원에 옯겨졌다.
  날이 갈수록 도산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누가 보아도 다시 소생할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
였다. 때로는 방문자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어느 날, 선우 훈이 찾아왔다. 그 날은 이상하게도 도산의 정신이 맑았다.
   나는 죽는 데 두려움이 없다……. 나는 죽겠지만,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듯 많은 괴
로움을 당하니 오직 그것이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선생님…….
  선우 훈도 목이 메었다.
   그러나 일본은 힘에 겨운 전쟁을 시작했으니 반드시 이 전쟁으로 패망하네. 어떤 어려움
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면 우리의 봄은 꼭 올 걸세.
  서기 1938년 3월 10일, 혼수 상태에 빠졌던 도산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듯 경련을 하며 말
했다.
   목인(국권 침탈을 한 일본 완 이름)아, 목인아! 네가 큰죄를 지었구나.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밤중이 가까웠다.
  이갑의 딸이고, 도산의 양녀이기도 한 이정희는 급히 병석으로 다가가 도산의 귀 가까이
에 입을 대고 말했다.
   아버님, 저 왔어요. 정희예요.
  그러자 가날프게 남아 있는 청력으로 가까스로 그 말을 알아들은 도산의 눈에서눈물이 주
르르 흘러내렸다. 좀처럼 흘리지 않던 도산의 눈물이었다.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종을 땡땡 치기 시작하였다. 그 시게 소리가 멎었을 때, 겨레의 애
국적 정치가이고 교육자이며 위대한 사상가였던 도산의 심장도 멎었다.
  그의 나이 60세. 도산이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장례식을 서둘러 치루도록 간섭했다. 장지
는 망우리 공동 묘지로 정하고, 참가 인원도 20명 안팎으로 제한시켰다.
  신문에도 발표가 금지되었으므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도산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이로부터 7년 후, 아시아를 송두리째 손아귀에 넣으려던 일본은 끝내 미국과 전쟁을 시작
해 우리 국민들을 더욱 탄압했다. 그러나 서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우
리 나라는 해방되었다.
  일본의 지나친 욕심은 마침내 패망의 구덩이를 파게될 것이라고 도산은 일찌감치 알고 있
었다. 그래서  우리의 봄은 꼭 오리.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7년 만에 진정 우리
의 봄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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