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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안티 오이디푸스

by Casey,Riley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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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강좌 : 안티 오이디푸스. 1강


욕망하는 기계들: 영역판 서문, 1장 




  ?안티 오이디푸스?의 문제틀:

  “어떻게 욕망은 자신의 힘을 정치의 영역에서 전개할 수 있고, 또 전개해야 하는가? 어떻게 욕망은 확립된 질서의 전복 과정에서 강도를 높일 수 있고, 또 높여야 하는가?” 
  ?안티 오이디푸스?의 적들: 
  1) 금욕적 정치인들, 우울한 활동가들, 이론의 테러리스트들, 즉 정치적 담론과 정치의 순수한 질서를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들. 혁명의 관료들과 대문자 진리의 관리들.
  2) 가련한 욕망의 기술자들-각각의 기호와 징후를 기록하고, 욕망의 다양한 조직을 구조와 결여의 이항 법칙으로 환원하는 정신분석학자들과 기호학자들.      
  3) 파시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역사적 파시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파시즘, 우리의 일상적 행동과 영혼을 따라다니는 파시즘, 권력을 사랑하게 만들며,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바로 그 권력을 욕망하게 만드는 파시즘.
  그러므로, ?안티 오이디푸스?는 비파시즘적 삶에 대한 입문서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혁명적 활동가라고 여기고 있을 때 조차, 또 특히 그럴때 파시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의 담론, 행위, 심장과 쾌락으로부터 파시즘을 제거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태도 속에 박혀 있는 파시즘을 격퇴할 것인가?’    
  이는 다음과 같은 같은 일상적 삶의 지침을 갖는다.
  -정치적 행동을 모든 형태의 단일하고 전체화하는 편집증으로부터 해방하라.
  -행동, 사유, 욕망을 피라미드적인 하위분할과 위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증식, 병치, 분기에 의해 증대시키라.
  -서구의 사유가 권력의 형식과 실재에 대한 접근양식으로 오랬동안 신성시한 대문자 부정(법/법칙, 한계, 거세, 결여, 결핍)으로부터 해방되라. 긍정적이고 다양한 것을 선호하라. 균일성 보다는 차이를, 통일체/단위 보다는 흐름을, 시스템보다는 유동적인 배치를 선호하라. 생산적인 것은 정착적인 것인 아니라 유목적인 것임을 고려하라.
  -우리가 싸우고 있는 대상이 끔직하다고 할지라도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슬퍼야 한다고 상상하지 말라. 혁명적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실재에 대한 욕망의 연계이다. 
  -정치적 실천을 사유를 강도있게 만드는 것으로서 이용하고, 분석을 정치적 행동의 개입영역과 형식의 증식자로서 이용하라. 
  -철학이 정의한 개인의 권리들을 재확립해야 된다는 것을 정치(학)에 강요하지 마라. 개인은 권력의 생산물이다. 필요한 것은 다양화에 의한 ‘탈개인화’이다. 집단은 위계화된 개인들의 유기적 연계가 되어서는 안되며, ‘탈개인화’를 끊임없이 발생시켜야 한다.        
  -권력에 대한 사랑에 빠지지 말라.
                                               -미셀 푸코, ?안티 오이디푸스?영역판 서문 中


 1. 들뢰즈 가따리의 ‘욕망하는 생산’ 
  
  들뢰즈 가따리의 욕망이론의 핵심적 테제는 다음과 같다: 욕망은 결여가 아니라 생산이다. 흔히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 대상에 대한 심리적 소망이나 선망, 주관적 감정, 결핍에서 비롯된 욕구 등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집, 사랑, 직업적 성취 등을 욕망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상과 묙표들은 아직 우리가 보유하고 있지 못한 것이므로, 우리는 바로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그러한 실재적 대상들의 획득과 충족을 희구하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 가따리는 이와 같은 욕망의 개념에 정면으로 맞선다. 이들에 의하면, 욕망은 스스로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것이며, 또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생산 자체이다. 이들은 욕망을 현실적 대상의 결여로서 정의하고 욕망을 생산이 아닌 획득 쪽에 위치시키는 관점 들뢰즈 가따리는 이러한 관점을 플라톤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본다. cf. Deleuze & Guattari, Anti-Œdipe, Minuit, 1972, p.32.
과, 욕망을 실재가 아닌 실재의 표상의 차원에서만 다루면서 실재적 생산이 아닌 환상적 생산으로 다루는 관점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이는 칸트의 입장이다. 칸트는 욕망을 ‘표상들을 통하여 이 표상들의 대상들의 현실성을 생기게 하는 능력’이라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욕망을 결여로 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는 공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예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집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늑한 집에 대한 표상을 심리적으로 생산하고, 그러한 표상에 입각해 현실 속에서 이 표상이 실재화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욕망이 생산하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이고, 욕망은 표상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힘의 흐름 그 자체이다. 신체의 개념은 유기체의 개념과 다르다. 신체의 개념은 서로 작용하고 작용받는 능동과 수동의 특정한 관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들의 집합을 가리키며,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단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그러나 신체의 개념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집합체에 대해서 사용하는 것은 사회유기체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생물유기체의 법칙, 구조, 기능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신체성의 개념은 구래의 유물론이 정의하고 있는 바의 물질성의 개념과 구분된다. 그것은 물질로부터 사물성 이상의 결정을 추출해낸다. 그것은 물질은 단지 주어진 자연적 대상으로서, 정지되어 있는 객체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되기’에 의해서 끊임없이 유동화되고 언제나 과정의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개념화하고자 한다. 즉 그것은 감각가능한 고체-형식으로서의 물질이 아니라 흐름이자 힘으로서의 물질인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질료-운동, 질료-에너지, 질료-흐름, 물질-힘’ 등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관계들로 배치되고 또 그러한 배치로부터 빠져 나오는 변동중의 질료이다. Deleuze &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p.507참조 
 또한 이 힘은 사회적 실천과 행위에 직접적으로 투여된다.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실재적인 것을 생산한다. 욕망이 생산자라면, 그것은 실재상으로, 그리고 실재의 생산자일 수 있을 뿐이다. 욕망은 부분대상들, 흐름들과 신체들을 기계적으로 조립하고(machinent), 생산의 단위로서 작동하는 수동적 종합의 집합체이다. 실재적인 것은 그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율-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의 결과이다. 욕망은 아무 것도 결여하지 않는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Anti-Œdipe, p.34
  

  따라서, 욕망은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나 표상이기 이전에 다른 신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신체적 힘에 의해 촉발되는 신체적 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이루며, 이 관계들의 집합체 속에서 타인들과 영향력을 주고 받고 있다. 그리고 개인은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아를 뒤흔드는 집단적 힘에 의해 끊임없이 촉발된다. 그러한 힘이 실재적인 효력을 갖는 방식으로 현실화된 것이 정동(affect)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강렬한 기쁨, 분노, 의지는 관념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이나 심리적 상태 이전에 바로 그와 같은 신체들간의 촉발작용(affection)을 통한 신체적 에너지의 분비이다. 예컨대, 우리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어떤 단체를 구성했다고 치자. 그것이 친목단체이건, 활동가 단체이건, 우리는 열렬히 그 집단에 동화되어 능동적으로 공동-활동을 구성해나갈 수도 있고, 습속화된 의레와 의무에 따라서 마지 못해 참여할 수도 있다. 활력과 기쁨, 기진맥진한 불모성과 무기력한 습속 등은 무엇보다도 집단적 힘에 대한 신체의 반응 자체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고, 신체에 직접적으로 등기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는 본다’, ‘나는 생각한다’ 보다 더 심오한 차원에 있는 ‘나는 느낀다’이며, 이 느낌은 심리적 상태이기 이전에 신체적인 힘이다. 이러한 신체적 차원에서의 에너지의 생산은 가시적이지 않을지라도 실재적인 것의 생산이다.   
  다른 한편, 출발점을 구성하는 것은 결여나 부정이 아니다.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욕망은 끊임없이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하고 생산하려는 긍정적인 힘이다. 그것은 막힌 곳을 뚫고 뻗어나가려는 힘이다. 이로부터 탈주하는 힘의 선차성이 도출된다. 언제나 일차적인 것은 지배로부터 탈주하는 흐름이며, 권력은 매듭과 촛점들을 통해 이 흐름을 막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고정된 질서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권력이 자신의 지배 기술과 장치들을 고도로 발전시키고 끊임없이 재생산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권력은 그러한 힘을 부정하고 체계의 질서 속으로 통합, 복속시키려는 반작용의 심급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일차적으로 신체에 충만해 있는 긍정적 힘이다. 지배권력은 끊임없이 이 긍정적 힘이 변이와 생성의 힘으로 투여되는 것을 봉쇄하며, 타자를 지배하기 위해 타자의 신체에 구현되어 있는 긍정적 힘을 부정하고, 이러한 자신의 부정적 의지에 타자의 의지를 복속시킨다. 역으로 욕망의 위치에서 부정과 거부가 존재한다면, 이는 체계로부터 탈주하는 힘의 통접 속에서, 타자들과 소통하면서 ‘차이 속에서 공생하는 꼬뮌’을 구성하고자 하는 힘의 긍정적 투여를 억압하고 봉쇄하는 지배권력에 대한 거부이자 파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려는 긍정적 힘에 의해 추동되는 부정이며, 생산을 가로막고 생산에 끊임없이 결여를 도입하는 권력을 돌파하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의 발현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라깡의 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라깡은 욕구에 앞서 결여가 존재하며, 이 결여로부터 욕구가 유발되고 욕망은 욕구 다음에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욕구는 궁극적인 충족이 불가능하므로 끊임없이 대상을 옮겨 다니게 되며, 상징계의 기표연쇄 속에서의 요구를 통해 이 기표에서 저 기표로 끝없이 욕망을 미끄러지게 한다. 이렇듯 기표 속에서 소외된 욕구가 욕망이다. 욕망은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옮겨가면서 스스로를 충족시키고자 하지만, 그것은 결코 엄마의 탯줄로부터 분리된 최초의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결여를 메울 수 없으며, 엄마와의 결합이라는 충족상태를 완성할 수 없다. 한편, 어머니와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주체는 전능한 남근이 되고 싶어하지만 이것 또한 근본적인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욕망이 상징계 속에서 요구의 차원으로 이전됨과 동시에 주체의 근원적 욕구는 소외되고, 발화 속에서 표명될 수 있는 합법적인 욕망으로 치환된다. 욕망을 변형시키는 대체물인 상징에 의해서 어머니에게 결여되어 있는 남근이 되려는 욕망, 즉 어머니와 결합하고 싶은 욕망은 억압되고 대체된다. 이제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어머니와 결합하고 싶은 욕망을 대체한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방되는 법과 규범의 체계에 순응한다. 결국 라깡은 끊임없는 치환의 연속성을 제시함으로써 폐쇄적이고 평형적인 체계가 아닌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욕망의 체계를 제시하였지만, 이 욕망의 말로(末路)가 결국 상징적 질서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에 복종하는 예속된 주체성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그는 욕망의 생산적 장에 절대적 결여와 절대적 대타자를 끌어들여 이 대타자가 주체를 일원적으로 포섭한다는 구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구도 속에서 욕망은 자기-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지배와 억압의 벽을 돌파하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여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결핍으로부터 출발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회의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부정하면서 동요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지배적인 법률과 규칙에 예속화되는 길로 인도된다.    
  이에 대해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욕망이 욕구들에 의하여 떠받쳐지는 것이 아니고, 이와 반대로 욕구들이 욕망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X와 결혼을 하고 싶은 욕구는, 근본적인 결여로부터 유발된 엄마와의 결합 욕구의 대체적 상징물로서 그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즉 소외된 욕구)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X라는 타자와 더불어 새로운 관계와 삶의 양식을 구성하고 생산하고 싶은 욕망에 의해 파생된 욕구에 다름 아니다. 즉, 그것은 X라는 타자와 나라는 주체의 명확한 경계 속에서 아직은 나의 소유물이 아닌 것, 나에게 결여된 것을 나의 것으로 전유하거나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무한한 소통과 인접성 속에서 확대된 공생과 공감의 관계를 타자와 더불어 공동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다. 또한 내가 나만의 아늑한 집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면, 그것은 생산에 앞서 존재하는 결여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체가 욕망의 생산적 흐름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양식에 따라서, 사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9세기 부르주아는 생산적 노동력을 확보하는데 위협이 되었던 빈곤과 위생을 퇴치하기 위해 박애주의 전략을 탰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주택을 지어 주고 노동자들이 매달 월급에서 이를 갚도록 했는데, 이는 노동자들의 집단성이 내포하고 있었던 폭동이나 혁명의 항상적 폭발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노동자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쾌적한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박애주의 전략은 노동자 자신이 집을 소유하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가정적 안락함에 영토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집이라는 소유뮬에 영토화하는 것이다. 그것도 노동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근면한 노동과, 금욕적 검약, 개미같은 저축으로...  이런 점에서 19세기 박애주의는 노동자를 새로운 욕망의 배치 속으로 유혹한다. 깨끗하고 쾌적한 자신의 집을 갖고자 하는 욕망, 자신이 사는 집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자신의 소유인, 혹은 자신이 소유하게 될 저 집을 지키려는 욕망, 그것을 포근한 가족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그리하여 그것을 “무정한 세계의 안식처”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박태호,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여기에서도 우리는 노동자들의 집합성, 공적 조직화, 이웃, 동료들과의 연대 등 사회의 질서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욕망하는 생산이 우선하며, 이들의 욕망의 흐름을 포섭하여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회적 조직화에 의해서 결여와 결여에 따른 소유욕이 파생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결여는 사회적 생산 속에서 조정되고 조직된다. 그것은 생산력 위로 포개져서 이것을 전유하는 반생산의 심급에 의한 역-생산물이다. 그것은 절대로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산은 결코 그것에 앞서는 결여에 따라 조직되지 않는다. 오히려 결여가 그에 앞서는 생산의 조직화를 따라서 자리잡고 공포화(空胞化)되고 번식하는 것이다. Anti-Œdipe, p.35.
 

  또한 욕망은 분자적인 무의식의 차원에서 정의된다. 들뢰즈 가따리는 힘의 흐름에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질서를 부여하고, 전체화를 지향하는 운동을 몰적인 것으로 개념화하고, 이러한 운동에 앞서 존재하는 힘들의 자유롭고 개방된 상태를 분자적인 것으로 개념화한다. 몰(mole)이 동질의 입자가 하나의 집계로서 존재하는 단위라면, 분자(molecule)는 최소단위의 입자이다.
 분자적인 것은 몰적 집계로 수렴되지만, 결코 안정적인 상태를, 몰적 질서를 침윤하며 몰적 체계를 헤치고 빠져 나간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분자적 다양성들을 통계학적인 집계로 조직화하는 운동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형성된 유기체를 가로지르면서 그로부터 탈주하는 운동이 있는 것이다. “큰 수 들과 큰 집합들은 선별적 압력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을 분쇄하고 제거하여 규칙적인 것으로 만드는 선별적 압력을 통해서 탄생한다...순서는 군집→선별이 아니고, 반대로 분자적 다양성→선별을 행사하는 군집의 형태→몰적 집합체인 것이다. Anti-Œdipe, p.410.
 욕망의 분자적 흐름들은 몰적인 힘에 의해 통제되거나 저지되면서 고정된 질서와 구조로 조직되지만, 끊임없이 이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흐름들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들뢰즈 가따리에게 있어서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것이다. 아무리 지엽적이고 미약한 것일지라도, 욕망은 확립된 사회질서를 위협하고 뒤흔든다. 그러므로, 사회체는 필사적으로 이 욕망을 억압하며, 억압보다도 나은 것을 찾아 억압, 위계, 착취, 예속이 그 자체 욕망되도록 한다. Anti-Œdipe, p.138.
 사회체는 끊임없이 욕망을 치환함으로써 욕망의 거짓 이미지를 부여하고, 대중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예속을 욕망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구원의 문제이듯 자신의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의 중요성이 도출된다. 라이히가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도둑질하지 않는다는 것,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파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파시즘도 이데올로기적 기만이 아니라, 대중의 욕망 차원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라이히의 한계는 실재적인 사회적 생산의 합리성과 환상적인 욕망의 비합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되돌아가서 사회적 장과 욕망에 공통되는 척도 혹은 공외연성을 발견하는 것을 포기해버린 것). 
  욕망하는 생산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욕망을 가정, 노동, 인종 등의 게토 속에 영토화하고, 욕망의 혁명적 투여를 끊임없이 단절시키려고 한다. 억압은 욕망의 치환을 작동시킴으로써 탈주의 선을 순수한 폐지의 선으로 대체시킨다. 그것은 집단적이고 제도화된 메저키즘, 억압에 대한 욕망을 대중 속에서 증식시키고, 탈주의 선상에서의 욕망의 투여를 자살, 죽음 본능, 약물중독, 알콜 중독, 인종주의, 테러리즘 등의 자기 파멸적인 욕망의 투여로 치환시킨다. 욕망의 미시정치학의 중요성은 이로부터 도출된다. 거시적인 사회적 집합체 수준에서의 계급의 위치와 그와 연관된 계급의식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푸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혁명의 객관적 이익을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반동적인 전의식적 투여를 고수하고 있는가? 그리고 좀 드문 일이지만 어떻게 객관적으로 반동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혁명적인 전의식을 공급하게 되는가? 후자의 경우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고, 정당하고 좋은 관점으로서의 정당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취하고 있고, 전자의 경우에는 이데올로기적 기만과 신비화로 인해 눈이 어두워진 탓이라 할 것인가?” Anti-Œdipe, p.412.
 대중은 의식적이고 전의식적인 이해관계나 계급의식에 따라서만 행동하지 않는다. 대중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의무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욕망 때문이며, 대중이 예속화된 주체성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도 이데올로기의 문제 이전에 욕망의 문제인 것이다. 또한, 어떤 집단은 계급이익과 그 전의식적 투여에 있어서는 혁명적일 수 있지만, 무의식적인 투여의 관점에서는 파시즘적이고 편집증적인 투여를 고수할 수도 있다. 혁명적인 활동가 집단이 욕망을 사회적 장 속에 침투 시키고 권력을 욕망하는 생산에 종속시키지 않고, 반대로 권력 자체를 욕망하며 위계화와 전체화를 작동시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의 미시정치학은 분석 대상을 분자화하여, 의식적 전의식적 차원과 더불어 무의식적 욕망의 수준에서 대중운동을 분석해야 하며, 분자적인 욕망 기계들이 어떻게 사회기계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분열증적 혁명적인 욕망의 투여는 어떻게 행해지고 있으며, 사회체는 어떻게 이를 포획하고 (재)영토화하는지, 어떻게 탈주의 선이 폐지의 선과 교차하면서 상호 이행하는지, 어떻게 분열증적 극이 편집증적 극과 교차하면서 상호이행하는지를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탈주의 선에 내재한 욕망의 혁명적 투여가 포획된 채로 머무르지 않고, 편집증적 투여로 전화되지 않고, 게토로부터 흘러 나와서 다른 혁명적 흐름들과 통접할 수 있는 잠재력을 어디에서 구성하고 있는지를 신중하게 탐색해야 한다.   
               
   
  2. 욕망의 내재적 평면
  
  우리는 앞서 욕망하는 생산의 개념을 고찰하였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의 극한임과 동시에 전제이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모든 역사의 1전제는 인간은 역사를 만들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생활할 수 있어야 하며, 생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물질적 욕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수단의 산출, 즉 물질적 생활 자체의 생산이며, 두번째 전제는 충족된 최초의 욕구 자체의 그 충족행위와 이미 획득한 충족 수단이 새로운 욕구를 낳는다’고 서술한 바 있다. 욕망이 생산적인 동력으로서 사회적 생산을 추동하고, 또 역으로 새로이 확립된 생산의 배치가 새로운 욕망하는 생산을 확장된 형태로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사회적 관계로부터 초월해 있는 자연적이고 자연발생적 힘이 아니다. 이는 들뢰즈 가따리에게 흔히 가해지는 비판인데, 이에 대해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 바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욕망을 결여와 법칙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자연상태인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욕망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우리는 정반대로 이야기한다. 배치되고 기계화되지 않는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정되어 있는 배치 밖에서는 욕망을 파악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 Deleuze, Dialogues, Flammarion, 1977, p.115.
   
  
  욕망은 사회적 장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에 직접적으로 투여되며, 사회적 관계들 내로 배치된다. 욕망은 사회적 배치 속에서 순환하며, 사회적 힘들과 교차하면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코드와 영토성을 둘러싼 힘들의 상이한 벡터를 따라서 흐르거나 봉쇄된다.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탈주 및 탈영토화 운동에 대한 재영토화 운동이 있고, 욕망의 흐름을 특정한 방식으로 코드화하는 운동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의 흐름은 권력의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재영토화되면서 또 끊임없이 극한을 향해 치닫는다. 절대적 극한에 이르러서 욕망은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통접을 수행하고 사회체를 폭파한다.  
  그러나 이 극한은 ‘내부의 외부’, 즉 특정한 사회적 생산양식 내에서 그 생산양식의 근본적 탈구조화와 재구성의 잠재력을 지니고서 특정한 마주침의 계기가 있을 때마다 이 잠재력을 분출시키는 것이다. 욕망은 그러한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즉 욕망의 흐름은 처음부터 사회적 장 내부에서 사회적 장을 횡단하는 벡터들과 더불어 사회적 장을 편력하며, 이 과정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는 질서로 통합되거나 복속되지 않는 탈주의 선을 끊임없이 절대적 극한을 향해 연장하는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코뮤니즘. 즉, 극한으로서의 욕망은 유기체적 질서와 고정된 권력관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근원적 상태나, 역사의 종국을 지시하는 초준거체계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초월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내재적 유토피아이며, 어디에도 없는 것no where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now here 창조하는 것이다. 
   한편, 극한으로서의 욕망하는 생산은 과정으로서의 생산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과정의 재개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동일자의 무한한 반복이나 동질적인 것의 재생산이 아니라, 끊임없는 차이화의 과정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이질적인 것과의 접속을 통해 관계를 변모시키고, 관계의 양태에 따라서 매번 특이적인 효과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피드백 고리를 함축하고 전체화와 평형을 유지하는 구조와는 달리, 특정한 효과가 출현하자마자 그 출현이 또다른 붕괴와 대변동에 의해 추월되는 과정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욕망하는 생산은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 등기되고, 계열화되며, 코드화, 영토화되고, 그 속에서 소비되지만, 또한 언제나 새로운 과정으로서 재개되어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 예컨대, 입은 그냥 입이다. 입이 먹는 기계 들뢰즈 가따리는 ‘기계’개념을 통상적 의미의 기술기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의 연속성 위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흐름을 생산하고, 다른 기계들과 연결하면서 흐름에 대해서 절단과 채취를 행하는 모든 것을 기계로 개념화한다. 이들이 제시한 예를 따르면, 입은 젖의 흐름, 공기의 흐름, 고리의 흐름과 관계맺으면서 이 흐름들을 절단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입, 공기, 소리 등은 서로 접속하고 연결되는 입-기계, 공기-기계, 소리-기계로 개념화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사회에 대해서도 사회기계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사회 또한 생산의 흐름들, 생산수단의 흐름들,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흐름으로 이루어지며, 이 흐름들에 대한 다양한 절단을 행하고, 이 흐름을 코드화하는 한에서 문자그대로 하나의 기계라는 것이다.     
, 살인 기계, 말하는 기계, 키스하는 기계가 되는 것은 욕망의 강도가 생산되고(먹고 싶다, 물어 뜯어서 죽이고 싶다, 말하고 싶다, 사랑을 나누고 싶다...), 신체가 이 욕망의 강도를 등록하여 입을 먹는 기계, 살인 기계, 말하는 기계, 키스하는 기계 등으로 코드화할 때이다. 예를 들어 <양들의 침묵>에서 렉터 박사의 입은 살인 욕망이 등기된 살인 기계 또는 식인기계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특정한 코드화에 따른 실천의 방식에 따라서 입-음식물, 입-물어뜯는 상대방의 육신, 입-음성, 입술-입술의 계열이 발생하며, 이 계열은 다른 무한한 항들로 확장될 수 있다. 예컨대, X와 Y가 키스를 할 때, 그 계열은, X-X의 입술-Y-Y의 입술-침실-섹슈얼리티-섹슈얼리티를 특정한 방식으로 등기하는 사회체... 그리고 욕망의 흐름은 키스하는 입에 고정된 채로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어떤 것들을 생산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등록과 소비는 다시 새로운 생산으로 재개된다. 들뢰즈 가따리는 “등록과 소비를 생산 자체 속에 집어 넣고 동일한 과정의 생산들로 만드는 것”이 과정의 첫번째 의미라고 보았다. 
  세번째 의미는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과정이 목적이나 종국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정은 헤겔에게서럼 정신이 외화되었다가, 다시 외화의 지양을 통해 절대이념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종국적 진리에 이르는, 중국에 도달하여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으로 재개된다. 따라서, 욕망하는 생산은 어떤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거나 그러한 상태를 성취하고나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실천과 관계의 양상에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운 효과를 산출하는 차이화의 지속이자, 특정한 효과가 현실화되자마자 또다른 되기의 과정에 의해 그 현실화된 결과가 반현실화되는 과정을 특징으로 한다.   
  두번째 의미는 인간 자연이 서로 독립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두 개의 항이나, 인과관계 혹은 포함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고정된 극점들 또는 대립항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자연-인간-비인간이 동일한 생산의 과정 속에서 공동-구성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 가따리는 인간을 이성적인 주체이자 만물의 왕으로서 고정시키고,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이분법을 비판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온갖 형태 혹은 온갖 종류의 깊은 생명과 접촉하고, 별들, 동물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기관-기계를 에너지 기계에, 나무를 자기에 신체에, 젖을 입에, 태양을 엉덩이에 연결시킨다.” 이들은 이를 맑스의 ‘유적 삶’이라는 개념과 관련시키고 있다. “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은 생산 혹은 산업으로서의 자연 속에서, 다시 말해서 인간의 유적 삶 속에 동일화된다. 이 때 산업은 더 이상 유용성의 외재적 관계에서 파악되지 않고, 인간의 생산 그리고 인간에 의한 생산으로서의 자연과 근본적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첫번째 종합. 접속적 종합. 생산의 생산. 욕망하는 생산: 계속되는 흐름의 연속성 위에서 흐름에 대한 절단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모든 대상은 하나의 흐름의 연속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단편화를 전제.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생산되는 것에 접목되어 있다. 모든 기계가 기계이듯, 욕망하는 생산은 생산의 생산.


  3. 기관없는 신체

  기관없는 신체는 하나의 잠재적 극한. “그것은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천, 실천의 집합이다. 당신은 기관없는 신체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당신은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 당신은 영원히 그것에 도달하려는 중이다. 그것은 극한이다.”(MP)
  기관없는 신체: 강도만이 지나가고 순환. 그것은 지층화되지 않고, 형태를 갖지 않는 물질, 강도의 모수, 강도=0. 실재적인 것의 생산은 영점에서 출발하는 강도의 크기. 
  기관없는 신체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 욕망의 내재적 극한. 기관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와 상극을 이룸.
  기관없는 신체의 실체(모든 기관없는 신체의 잠재적 집합체), 속성(매저키스트의 기관없는 신체, 약물중독자의 기관없는 신체...), 양태(기관없는 신체의 각 유형 위에서 일어나는 것, 그것을 지나가는 강도들, 파동들).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없는 신체 사이에 분명한 충돌이 생긴다. 생산과 반생산. 에로스와 타나토스. 죽음 충동. 
  -척력과 편집증 기계. 욕망하는 생산에 대한 반발. 
  -전유 혹은 인력과 기적기계. 자본은 자본가라고 하는 존재의 기관없는 신체. 잉여생산물을 전유하고, 생산의 진행 전체가 그로부터 나오는 듯이 보이게 된다. 모든 생산력과 생산의 기관들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고 이것들에다가 외견상의 운동을 전달함으로써 준원인으로서 작용하는 등기 혹은 등록의 마법의 표면. 기관없는 신체는 욕망하는 생산에 포개져서 그것을 끌어당기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전유한다. 인력기계가 척력기계의 뒤를 잇고, 그것과 공존. 
  -두번째 종합. 이접적 종합. 등록의 생산. 생산적 접속들이 기계들로부터 기관없는 신체로 옮아갈 때, 그것들은 분배를 표현하는 다른 법칙 아래 들어간다. 생산의 과정으로서의 과정이 등기의 절차로서의 절차에로 연장된다. 
  -독신기계. 등기의 표면에 주체의 질서 속에 속하는 어떤 것이 나타남. 그것은 고정된 동일성/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기묘한 주체. 그것은 기관없는 신체 위를 헤매며, 욕망하는 기계들 곁에 늘 있으며, 생산된 것에서 그것이 취하는 부분에 의하여 규정되며, 어디서나 생성이나 변신에서 프리미엄을 따며, 그가 소비하는 상태들로부터 탄생하며 또 매번 다시 탄생한다. 
 -세번째 종합. 통접적 종합. 소비의 생산.        
  욕망하는 기계와 기관없는 신체의 대립. 이 양자간의 척력은 기적을 행하는 기계 속에서 하나의 인력으로 바뀐다. 그러나 인력과 척력 사이에는 대립이 존속. 이 대립의 화해는 새로운 기계의 수준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독신기계, 즉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없는 신체 간의 새로운 결합을 형성하여 새로운 인간 혹은 유기체를 탄생시킨다.    
  독신기계가 생산하는 것은 강도들. 강도량들.
  인력과 척력의 대립에서 생기는 순수한 강도들.
  요컨대 인력과 척력의 대립은 모두 플러스인 강도적 요소들의 열린 계열을 생산. 이 요소들은 결코 체계의 최종적 균형상태를 나타내지 않고, 주체가 지나가는 무수한 준안정적 정지상태를 나타낸다. cf.등록의 생산과 소비의 생산 자체는 모두 생산의 생산에 의하여 생산됨. 
  주체는 중심에 있지 않다. 기계가 중심을 차지하며, 주체는 가장자리에 있고, 고정된 자기동일성을 가지지 못하며, 언제나 탈중심화되어 있으며, 자신이 지나가는 상태들에 의하여 귀결된다.
  기관없는 신체에 대한 척력과 인력의 계열들이 독신기계 속에 강도 0으로부터 출발하는 일련의 계열들이 상태들을 산출한다. 주체는 그 계열의 각 상태로부터 태어나며, 한 순간 자신을 결정하는 다음 상태로부터 언제나 다시 태어나며,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다시 또 태어나게 하는 모든 상태들을 소비한다.    


  4. 욕망하는 기계

  첫째, 흐름과 절단. 일반화된 기계주의. 모든 기계는 기계의 기계이며, 하나의 기계는 그것이 접속되어 있는 기계에 대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그것에 접속되어 있는 기계에 대해서는 흐름의 자체 속은 흐름의 생산. 생산의 생산.
  둘째, 모든 기계는 그 기계 속에 기계화되어 있고, 저장되어 있는 일종의 코드를 지닌다. 이 코드는 신체의 상이한 영역 속에서의 그 코드의 등록 및 전달과 불가분의 관계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영역이 다른 영역들과 어떻게 등록되는가 하는 것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셋째, 기계 곁에 하나의 주체를 생산하는 잔여-절단, 소비의 생산. 자기동일성을 결여한 준안정적 주체. 
  욕망은 기계적이다. 욕망은 각각의 기관들을 기계적으로 작동시킨다. 신체는 흐름과 절단을 생산하고, 접속과 채취를 행하는 수많은 욕망하는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 먹는 기계로서의 입. 식욕이라는 욕망의 강도가 생산되고, 신체가 이 욕망의 강도를 등록하여 입을 먹는 기관으로 코드화하고 유기체로 질서화. 이것이 욕망이 신체의 표면위에 등록된다는 의미이다. 전체 생산의 과정 속에서 일정한 흐름들이 이접하여 특정한 관계들의 집합으로 계열화되는 것. 그리하여 식욕이라는 욕망의 강도를 소비하는 ‘먹는 주체’가 탄생. 그러나 ‘먹는 입’으로의 이접적 종합이나 ‘먹는 주체’로의 통접적 종합은 배타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욕망이 생산되고, 새로운 과정이 재개됨으로써. 

  기계의 의미: 생산적, 관계적, 변이/생성적. 
  흔히 우리가 기계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을 들뢰즈와 가따리는 기술기계라 하고 기계의 의미를 훨씬 더 확장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회는 사회기계. 사회를 기계로 개념화하는 것은 구조의 개념과 대비됨. 기계가 끊임없이 흐름을 생산하듯, 힘들의 흐름과 관계는 평형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생성을 계속한다. 또한 미리 결정되어 있는 접속의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요소들과 흐름들은 다른 어떤 것과도 접속가능함. 
  사회는 기계의 속성을 그대로 보유하며, 사회의 작동방식은 기계의 작동방식과 다르지 않다. 기계는 연속적인 물질의 흐름 및 이 흐름의 절단들과 관계하며, 기계장치를 이루는 코드를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 또한 생산의 흐름들, 생산수단의 흐름들, 생산자와 소비자의 흐름들로 이루어지며, 이 흐름들에 대한 다양한 절단을 행하고, 이 흐름들을 코드화하는 한에서 문자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기계인 것. 그러나 사회를 기계로 정의하는 것은 기계론적인 사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기계들로부터 하나의 구조적 통일체를 추상하거나 기계적인 인과체계를 수립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회와 인간들간의 관계를 물상화하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에 의하면 기계는 기계적mechanic이거나 물상화된 것이 아니라, 인격, 인간적 부품들과 장치들로 구성된 복잡한 사회적 배치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장의 구성과 작동을 힘의 역동성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지 이 힘들의 작용을 물상화하거나 힘들간의 관계를 기계론적인 메커니즘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를 흐름 및 이 흐름들의 등기의 체계로서 정의하는 것은, 정채적인 구조나 고정된 질서로부터 누수하고 범람하는 힘 혹은 에너지의 흐름과 이 흐름이 형성하는 항상적인 불균형상태의 체계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 흐름들에 통계적인 질서와 위계적인 체계를 부여하려는 힘과, 그러한 통제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접속과 환경을 만들어내는 힘들간 관계의 역동성과 운동에 주목하는 것이기도 하다. 
  cf. 기계와 구조: 구조는 피드백 고리를 함축하고 전체화의 개념을 작동시킴. 영원함에 대한 욕망. 그러나 기계는 폐지의 열망에 의해 형성됨. 출현은 붕괴, 대변동에 의해 추월됨.
 동질화하는 구조의 원리와는 달리 끊임없이 이질적인 것과의 접속과 이접을 통한 관계의 변모. 
 기계적 자동생산에 의해 공급되는 차이는 불균형에 기초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존재론적 재전환과 관련됨. 기계는 항상 외재적인 요소에 의존. 그것은 기계를 제작하고 작동시키고 파괴시키는 인간만을 보완물로서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잠재적 또는 현행적 기계들과의 변화의 관계를 갖는다.  
 

  5. 전체와 부분들 

  전체는 부분들의 총합이나 부분들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들 곁에서 구성됨. 부분들 전체의 통일체이기는 하나 그것들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구성된 부분들로서 지금까지의 부분들에 첨가되는 것.
  cf. 의미의 논리의 루크레티우스 부분. 자연은 다양성과 그 다양성의 생산으로서 사고되어야 한다. 다양성의 생산 원리는 그 자신의 요소들을 하나의 전체로 결합시키지 않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est>가 아닌 <et>. 자연은 하나의 전체가 아니라 합계somme. 자연은 역능이지만, 그것은 사물들이 동시에 하나의 전체로서 결집되거나, 자신의 전체를 한번에 표현하는 조합 속에서 통일화되지 않는 역능, 사물들이 une a une로 존재하는 역능. 














1999년 10월 13일, 강사 : 권혜원  
수유연구실 강좌 : 철학강좌 : 안티 오이디푸스.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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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2장1-5절

  
권 혜 원



    1. 오이디푸스 제국주의

  정신분석학은 전-오이디푸스, 외-오이디푸스, 대항-오이디푸스의 관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의 좌표들에 포개 버린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욕망하는 생산, 욕망하는 기계들을 억압하고, 사회적 정치적 무의식을 가족 삼각형 속에 가두어버린다.    
  계열의 오이디푸스: 남녀 주체 각각의 성별화된 오이디푸스 계열. 
  “한편으로, 그는 남녀 두 성의 각 주체에 있어서의 충동들, 정동들, 및 관계들의 강도적 계열을 고려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긍정적 형태를 그 역인 부정적 형태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자아와 이드?: 남아는 어머니에 대한 대상 리비도 집중을 개발시키는데, 이 아이는 자기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 문제를 처리한다. 일정 기간 동안 이 두 관계가 나란히 지속되다가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이 더 강렬하게 되고 아버지는 그 욕망에 대한 장애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와 동일시하려는 아이의 소망은 적대적인 색채를 띠게 되고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그를 제거하려는 욕망으로 바뀐다. 그후부터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는 양가적이다. 아버지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와 어머니에게 애정만을 느끼는 대상 관계는 남아에게 단순하고 긍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내용을 형성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면서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대상 리비도 집중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 자리는 어머니와의 동일시나 아버지와의 동일시 강화, 이 둘 중의 하나로 채워질 수 있다. 우리는 보통 후자의 결과가 더 정상적이라고 본다. 이런 식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것은 남자아이의 성격에 남성성을 강화시켜 준다. 이것과 정확하게 유사한 방식으로, 어린 여자아이의 오이디푸스적 태도는 어머니와의 동일시 강화로 결말이 나고 그 결과 그 여자아이의 여성적 성격이 확립될 것이다... 좀 더 면밀히 연구해 보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라는 이중성을 띠고 있는 양성 소질 때문에 나타나는 <좀 더 완전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어린아이들에게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남자아이는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고 어머니에 대해서 애정적 대상 선택을 할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그는 또한 여자아이와 같이 행동하여 아버지에 대해서 애정어린 여성적 태도를 취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질투심과 적개심을 보인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한쪽 끝에는 정상적인 긍정적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남고 다른 쪽 끝에는 거꾸로 된 부정적인 것이 남는 형태를 취하는 반면, 이것의 중간단계는 양쪽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두 구성요소를 갖춘 완전한 형태를 드러내 보인다. 아버지-동일시는 긍정적 콤플렉스에 속하는 어머니에 대한 대상관계를 보존하는 반면 거꾸로 된 콤플렉스에 속하는 아버지에 대한 대상관계를 대치시켜 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 <필요한 변화를 준다면>, 어머니-동일시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집단의 오이디푸스: 방계친척, 자손들, 조상들을 통합. 오이디푸스적 연관이 명백히 부재할 경우에는, 조부모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다시 오이디푸스 성좌 속으로 주체를 침잠시킨다. ‘오이디푸스의 제곱을 만든다.’  

  구조의 오이디푸스: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구별은 장소들과 기능들의 체계로서의 외디푸스적 구조를 끌어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사회형성체 혹은 병리학적 형성체 속에서 그 자리와 기능을 점유하게 될 자들의 가변적 형상과 뒤섞이지 않는다.” “3+1의 오이디푸스구조”
  구조주의에서 공간내의 자리들은 그것들을 점유하게 되는 실재적인 사물들과 존재들에 비해 일차적이다. 구조주의의는 장소들이 그것들을 채우는 것보다 앞서는 새로운 선험 철학과 분리될 수 없다. 라깡에게 있어서 이 장소들은 상징적 질서 속의 자리들이다. 그에 의하면, 주체는 상징계로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주체로서 구성된다. 이 때 그 주체는 동시에 자신의 진정한 존재가 실재계로 떨어짐으로써 결코 의미화될 수 없는 소외된 주체이기도 하다. 
  cf.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분: ?주체기능 형성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 거울단계에서 유아는 파편화된 신체의 고뇌에서 벗어나 최초로 자신의 신체를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 → 동일시: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와 이를 통한 동일성(identity)의 확립. 그러나 이는 실제의 자기가 아니라 이미지에 불과하므로 허구적 구성물이자 오인. 소외된 동일성. 이런 오인의 구조 때문에 상상계 및 그 기초를 이루는 동일시는 상상적인 동시에 환영적. 
  거울을 이용한 라깡의 첫번째 실험(Seminar 1):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거울에 비친 상상적 꽃병일 뿐이고 상자 속에 있어서 직접 볼 수 없는 실제 꽃병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실재계. 에고의 경계가 되는 이미지가 야기하는 주체의 소외. 이러한 간극과 좌절은 오직 상징적 질서에 의해서만 통제될 수 있음. 거울을 이용한 라깡의 두번째 실험(Seminar 1): 주체는 곡면거울과 실재의 꽃병 모두를 볼 수 없고, 꽃병의 반영의 반영을 본다. 이 때 평면거울은 타자에 대한 관계를 함축. 여기서 라깡이 말하고자 한 것은 이미지와의 상상적 관계에는 항상 상징적 질서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체성의 형성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라기 보다 처음부터 이 두가지 질서가 구조적으로 접합되어 있는 것. 결국 보는 존재로서의 주체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은 상징적 관계. 이미지와의 동일시는 상징계의 규제를 받는 것.  
  주체화의 과정을 불안정하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설명하지만, 그것은 결국 타자의 질서에 대한 동일시. 이 때 타자의 질서는 기표적이고 상징적인 질서이며, 여기서 특권적인 기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남근, 즉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 법이다. 상징적 아버지. 법과 규범. 오이디푸스적인 금지와 억압. 주체는 거세 공포 때문에 남근, 즉 아버지의 이름에 복종하게 되며, 이렇게 예속된 주체로서 상징적 질서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이 주체화인 것. 결국 라깡은 절대적인 대타자를 끌어들여 이 대타자가 주체를 포섭한다는 구도를 제시.        

  들뢰즈 가따리는 자신들이 앞서 수행한 바 있는 오이디푸스 비판은 상상적인 오이디푸스만을 문제삼고 구조 및 상징적인 장소와 기능들의 질서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한 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문제는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구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진정한 차이는 상상적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이기도 한 오이디푸스와 모든 오이디푸스가 짓누르고 억압하는 욕망하는 생산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욕망하는 기계들은 구조나 인물들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다 같이 넘어서, 혹은 그 아래에서 실재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 
  이들에 의하면, 욕망하는 생산은 실재적인 것의 생산.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라캉의 명제를 비판.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고 이 타자의 담론은 상징적이고 언어적인 표상의 구조라는 라캉의 주장에 반하여 들뢰즈 가따리는 무의식은 물질적인 흐름이고 실재적인 생산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일종의 신체적 힘이자 정동, 순수한 강도들의 생산이다. 그것은 표상이나 환상적인 것의 생산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체험되고 느껴지는 것. 환각이나 환청(나는 본다, 듣는다), 환상(나는 생각한다)보다 심오한 ‘나는 느낀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정서나 감정이 아님. affect는 항상 무리, 복수성, 다른 신체와의 관계 속에서 촉발되는 것이다. 또한 욕망의 흐름들은 특정한 양태로 계열화되고 배치되지만, 그러한 배치 속에서 고정된 채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누수하고 흐르면서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창조해낸다. 탈영토화의 극한으로서의 분열증적 흐름을 생산. 
 그러므로 욕망은 실재적인 물질적 흐름들을 생산한다. 욕망이 기계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하나의 기계가 흐름의 연속성 위헤서 다른 기계들과 연결되고, 다른 기계들과 연결되어 있는 한에서만 흐름을 절단하듯이, 욕망은 무수한 접속과 연결, 분기에 의해 작동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통일된 구조, 안정적인 질서의 구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욕망의 기계적 작동은 카오스적인 이질적 흐름들이 횡단적 통일체(카오스모스)를 구성하는 과정인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연결은 미리 정해져 있는 위치와 방향, 구조적인 질서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과도 접속될 수 있으며, 하나의 위치로 고정되지 않는 유목적인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는 구조로 환원될 수 없는 것.  
     

   2. 프로이트의 세 텍스트

   ?편집증 환자 쉬레버?: 쉬레버는 자기를 괴롭히고 다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그를 치표했던 의사 플렉지히. 프로이트는 환자의 망상 속에서 박해자라고 미워하는 대상이 전에는 사랑하고 존경하던 사람이라고 분석. 쉬레버는 플렉지히에 대한 성욕과 동성애적 리비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며, 수동적인 동성애자, 여성적이기를 바라는 자신의 환상에 대해서 쉬레버의 의식이 반발하여 그 피해망상 속에서 그가 열망하던 사람이 박해하는 사람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쉬레버의 망상 속에서 박해자는 플렉지히와 신으로 나뉘어지고, 플렉지히는 상위와 가운데 플렉지히로, 신은 하위와 상위 신으로 나뉜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플렉지히는 쉬레버의 형을, 신은 쉬레버의 아버지를 대체하는 형상이라고 말한다. 즉,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에게 그토록 심한 반발을 일으켰던 여자다움의 환상은 성애적 사랑으로까지 발전한 아버지와 형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이 감정이 형에 대한 것일 때에는 전이과정을 통해 그의 의사인 플렉지히에게 옳겨갔고, 그것이 아버지에게 옮겨졌을 때 그것은 전이과정을 통해 신으로 향해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또한 태양도 아버지를 나타내는 승화된 상징이라고 분석.
  들뢰즈 가따리: “그토록 풍부하고 특유하고 ‘신적’인 망상을 어떻게 당치도 않게 아버지의 주제에 환원시키는가? ... 쉬레버의 막대한 정치적, 사회적 및 역사적 내용에 관해서는 마치 리비도가 이런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양, 한마디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다만 성적 논의와 신화학적 논의만이 원용되고 있는데, 전자는 성욕과 가족 콤플렉스의 용접을 작동시키고, 후자는 무의식의 생산적인 힘과 신화들 및 종교들의 교화하는 힘들의 합치를 정립하는 것이다.” 이어서 들뢰즈 가따리는 프로이트와 융이 모두 무의식을 신화의 척도로서 측정하고, 또 처음부터 생산적 형성체들을 단순한 표현 형태들로 대체하고 있다고 비판. 또한 이들은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를 정신분석에 있어서 성욕의 기준, 더할 나위 없는 정통성의 시금석으로 삼음으로써 사회적 관계들 전체를 나중에나 있는 것, 혹은 피안에나 있는 것으로 정립하였고, 욕망은 이 관계들을 직접적으로 투여할 수 없다고 보았다고 비판. 

  ?매맞는 아이?: ‘아이가 매를 맞는다’는 환상이 즐거움을 수반하고 그 결과는 자기성애적 만족행위로 표출되는 사례들. 이를 유아기(2세-5세)의 경험으로 환원하여 설명. 매맞는 환상은 이 시기가 끝날 무렵이나 끝난 뒤에야 나타나지만, 그 환상은 원초적 발현이 아니라 결코 단순하지 않은 발달과정을 거친 최종적 산물이라는 것. 여아의 경우, 이 환상의 첫번째 단계는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때리고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 단계는 ‘내가 아버지에게 맞고 있다’는 것이며, 세번째 단계는 ‘선생님 등의 아버지를 대체하는 인물이 여러명의 아이들을 때리고 있다’는 것. 그런데, 두번째 단계는 환자에 의해서는 절대로 기억되지 않고 의식되지 않는 단계. 프로이트는 해석 과정에서 부모 콤플렉스를 끌어들임. 어린 여아의 애정은 아버지에게 쏠려 있는데, 그렇게 해서 여아는 어머니를 미워하고 어머니와 경쟁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태도는 어머니에 대한 의존경향과 나란히 존재. 아이는 매를 맞는다는 것은 사랑을 빼앗긴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때리고 있다는 첫번째 단계의 환상은 아버지가 나만을 사랑한다는 관념과 결부된 것이다. 그런데 근친상간적 애정은 억압당할 수 밖에 없다. 그 새로운 단계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근친상간적 애정충동의 어떤 정신적 산물도 의식으로 떠넘겨지지 않고, 모두 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억압과 함께 죄악감이 나타난다. 그것은 무의식에 계속 남아 있는 근친상간적 소망에 의한 죄악감이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두번째 단계는 여아가 느끼는 죄악감의 직접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환상은 피학적인 것이 된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는 관념이 억압을 받게 되어 < 아버지가 나를 때리고 있다>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은 금지된 성기적 관계에 대한 처벌일 뿐 아니라 그 관계를 대신하는 퇴행적인 대리표상이기도 하며, 그 대리표상에서 리비도의 흥분을 끌어낸다는 것. 매를 맞다는 환상이 생산하는 리비도의 흥분은 자위행위로 배출구를 찾아내는데, 그것은 마조히즘적인 쾌락이기도 하다. 환상의 세번째 단계에서는 환상을 일으키는 아이는 언제나 구경꾼이고 아버지는 선생님이나 권위를 지닌 다른 어떤 사람의 형태를 띠고 존재. 이 환상은 외견상으로만 가학적이고 실재로는 피학적. 왜냐하면 그것은 억압된 부분의 리비도 집중과 그 부분의 내용에 속하는 죄악감을 모두 대신 떠 맡은 것이기 떄문. 선생님에게 매를 맞고 있는 불특정 다수의 아이들은 모두 아이 자신을 대신한 것에 불과. 그런데, 이 단계에서 아이들은 모두 남자아이들. 그 이유는 여아가 아버지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정으로부터 방향을 돌리면 여자다운 역할을 쉽게 포기하고 남성 톰플렉스를 가지게 되어 남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 
  남아의 경우 환상은 어머니에게 매를 맞는 것. 그리고 두번째 단계가 의식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여아와 다르다. 남성들의 경우, 이러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피학대 음란증 환자들. 그들은 환상에서나 실행에서나 언제나 자신을 여자의 일부로 바꾸고, 벌을 내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여성들. 남아의 어린시절에 매를 맞는 환상: 어머니에게 매를 맞는다는 내용의 의식적이거나 의식적이 될 수 있는 환상은 일차적이 것이 아님. 그것은 <나는 아버지에게 맞고 있다>는 내용을 지닌 무의식적인 선행단계를 지님(여아의 두번때 단계와 일치). 그런데, 남자에게는 매를 맞는다는 환상은 언제나 사랑받는 것을 뜻함. 따라서, 남아의 환상은 처음부터 수동적이며 아버지에 대한 여성적 태도에서 끌어내어진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착에 기원을 둔다. 여아의 경우 무의식적인 가학적 환상은 정상적인 오이디푸스적 태도로부터 시작되지만, 남아의 경우는 그 환상이 아버지가 애정의 대상으로 선택된 성대상 도착적인 태도에서 시작된다. 여아는 무의식적 환상을 대신하는 의식적 환상으로 옮겨가면서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므로 때리는 사람의 성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지만, 매를 맏는 사람의 모습과 성은 바뀐다(남자가 남아를 때린다). 그와는 반대로 남아는 아버지의 자리에 어머니를 대신 앉힘으로써 때리는 사람의 모습과 성을 바꾸지만, 그 자신의 모습을 유지한다(여자가 남아를 때린다). 여아의 경우는 원래 피학적 상황이었던 것이 억압이라는 수단에 의해 가학적인 것으로 바뀌고 그 성적 특징은 거의 지워진다. 그러나 남아의 경우에는 그 상황이 그대로 남아 있고, 때리는 사람과 매를 맞는 사람의 성이 다르다는 점에서 성기적 중요성을 지닌 원래의 환상과 더 큰 유사성을 보인다. 남아는 무의식적 환상을 억압하고 변경함으로써 동성애를 피하는데, 나중에 생겨나는 의식적 환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반응 내용으로 동성애적 대상선택이 없는 여성적 태도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아는 같은 과정을 거쳐 환상 속에서 자신을 남자로 바꾸고, 성적인 행위를 대신한 모든 일을 방관하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프로이트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서 남성적인 성적 특징 뿐만 아니라 여성적인 성적 특징도 발견되며, 그것은 모두 억압을 받아 무의식적이 될 수 있다고 주장. 남아와 여아의 사례 모두에서 매맞는 환상은 여성적인 태도에 해당하고, 양성 모두 그러한 환상을 억압함으로써 그 태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적 주장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여아의 경우뿐. 남아의 경우에는 여성적인 경향이 포기되지 않는다.      
  이 텍스트에 대한 들뢰즈 가따리의 비판: 프로이트는 환상의 집단적 성격을 개인적인 차원에 환원. 매를 맞는 어린이들은 환자 자신의 대리인이고 때리는 사람은 아버지의 대리인이거나 아버지.“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이것은 전형적으로 집단 환상. 욕망이 사회적 장과 그 억압적 형태들 자체를 투여. 욕망하는 기계들을 추상적으로 생각하여 소년과 소녀를 분리하고 마치 각자 자기의 아빠, 자기의 엄마와 자기만의 문제로 씨름하는 작은 나로 보아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집단 환상을 조직하는 사회체 전체가 놓여 있다. 
  다른 한편으로 환상의 여러가지 다른 형태들은 엄밀하게 배타택일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이접들로 조직되어야 한다... 여자의 환상은 세 시기를 가지며 그 마지막 시기는 소년들이 선생에게 매를 맞는 시기요, 남자의 환상은 두 시기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마지막 시기는 내 어머니가 나를 때리는 시기이다. 오직 하나 공통된 시기는 아버지의 지배를 분명히 단정하지만, 이 시기는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시기.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사태는 항상 이렇다. 남녀 두 성에 공통된 어떤 것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두 성에다가 다 같이 결여를 주고, 대칭적이지 않은 두 계열에다 결여를 분배하여 ‘너는 소녀이든가 아니면 소년 둘 중에 하나이다!’라고 하는 이접들의 배타택일적 사용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이다. 오이디푸스와 그 해결은 소년들과 소년들에게 있어서 서로 다르지만,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두 경우 모두 거세와 오이디푸스에 관련된다. 거세는 공동의 운명, 즉 지배적이고 초월적인 남근인 동시에, 소녀들에게 있어서는 페니스 선망으로서, 소년들에게 있어서는 거세 공포로서 나타나는 배타택일적 분배이다. 
 
  cf. 프로이트에 따르면, 클리토리스는 ‘작은 페니스’, ‘불완전한 페니스’일 뿐이다. 여아의 클리토리스를 통한 자위행위는 남아들보다 더 작은 페니스를 가지고 남아들과 똑같이 자위행위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단계의 여아는 남아만큼이나 강렬하고 왕성하며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충동을 갖는다. 이 능동성은 ‘어린 남자’에 불구한 여아의 ‘작은 페니스’가 갖는 능동성이다. 그런데, ‘진짜’ 페니스를 보고 나서 여아는 자신의 클리토리스가 얼마나 초라하고 결핍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제 여아는 자신이 남아와는 달리 이미 거세된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아는 “남아와 비교하여 자신이 어떤 성기(sexe)도 없다는 것, 혹은 적어도 그녀가 가치있는 성기로 믿었던 것은 절단된 페니스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거나 인정해야만 한다.” Luce Irigaray, Ce sexe qui n'en est pas un, Editions de Minuit, 1977, p39.
 여아는 자신이 거세된 존재라는 자각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나르시즘적 상처’를 입고 끊임없이 페니스를 선망하게 된다. 
 
 “어린 여자 아이가 남성 생식기를 보고 자신의 결함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 반갑지 않은 사실을 주저하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인다...그녀는 언젠가는 자신도 남성과 똑같은 성기를 가질 수 있다는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며, 그와 같은 희망이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페니스에 대한 선망을 간직하게 된다.” 프로이트, 김정일 옮김, ?여성의 성욕?,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 (열린책들), 1996, p.208.
  

  그렇기 때문에 남아가 거세 공포때문에 어머니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포기하고 사회의 규범에 순응하게 되는 발달과정을 겪는 것과 달리, 여아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상의 거세를 운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포기한다. 이제 여아는 작은 페니스를 지닌 어린 남자로서 어머니에게 부여했던 욕망과 사랑을 포기하고, 그녀에게 페니스를 제공하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강한 적대감과 증오를 가지게 됨과 동시에 그녀가 결여한 것을 아버지로부터 얻기를 원하면서 그녀의 욕망을 아버지에게로 전환한다. 이러한 페니스 선망이야말로 정상적/규범적 여성성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이 때 정상적/규범적인 여성성은 수동성을 의미한다. ‘작은 남자’의 작은 페니스가 갖는 능동적 욕망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자신의 결핍을 아버지/남자의 페니스로 채우려는 욕망, 아버지/남자로부터 페니스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서며, 클리토리스의 능동성은 수동적인 질의 수용성으로 대체된다. “여성성의 확립에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수동성의 발아”! ibid, p.41.
 

 “어머니에게서 돌아서는 것은 어린 여자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단계이다. 그것은 단순히 대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어머니에게서 벗어남과 더불어 대개는 클리토리스 자위행위도 사라진다. 그리고 어린 소녀가 이전의 남성성을 억압할 때 그녀의 일반적인 성적 경향도 상당 부분 영원한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아버지-대상으로 전이되는 것은 큰 재난을 피할 수 있는 한, 수동적인 성향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여자아이가 자신이 극복한 전오이디푸스 단계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의 흔적에 의해 구속당하지 않는 한, 여성성의 발달로 가는 경로가 이제 그 여자아이에게 열린 셈이다.” ibid, p. 217.


   다시 들뢰즈 가따리의 비판으로 돌아가보면.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해석은, “욕망 속에 결여를 끌어들이고 배타적인 계열들을 생기게 하여 이 계열들에다가 하나의 목표, 하나의 기원, 하나의 체념의 길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들뢰즈 가따리는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두 성은 횡단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소통하는데, 이 방식에 있어서는 각 주체가 두 성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들이 구분되어 있고, 또 다른 한 주체의 이 성 혹은 저 성과 교통한다. 이와 같은 것이 부분적 대상들의 법칙이다. 어떤 것도 결여하고 있는 것이란 없고, 하나의 결여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의식 속의 이접 들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포함적인 것.” “무의식은 오이디푸스도 모르지만 거세도 모른다. 여성해방 운동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옳은 일이다. 우리는 거세되어 있지 않다. 엿먹어라.”
  
  ?종결된 분석과 종결할 수 없는 분석?: 치료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 욕망의 경제학 속에는 질적 인자들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치료의 장애가 된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이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고 반성. 들뢰즈 가따리는 프로이트가 이를 치료의 미비점으로 보지 않고 단지 장애물로 보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 이들은 리비도의 질적 경제학이 보여주는 것은 분열증적 흐름이 결코 오이디푸스로 영토화될 수 없다는 것. 흐름들은 언제나 누수하고, 삼각형을 건너지르며 삼각형을 폭파한다. 오이디푸스는 부재하면서도 완벽한 대상, 거세의 남근 아래 부분적 대상들을 포획하고, 흐름-절단들을 신화적 장소에 투사하여 일대일 대응시키며, 다성적인 기호의 연쇄들을 하나의 대문자 기표에 매달리게 하며, 접속적 종합을 전체적이고 특수적인 사용에, 이접적 종합을 배타적 사용에, 통접적 종합을 분리차별적이고 인물적인 사용에 가둔다. 그것은 ‘따라서 그것은 이것이다’를 오이디푸스와 거세 위에 짓누른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마개는 결코 욕망의 질적 흐름들을 막을 수 없다.     

  3. 세가지 종합

  하나의 항과 다른 항, 하나의 계열과 다른 계열들 간의 접속, 이접, 통접. 이것은 각각 다시 두가지 방식(초월적 용법과 내재적 용법)으로 재분할될 수 있다. 

  <생산의 접속적 종합>

  접속의 경우, 부분대상들이 부분대상들이 구성하는 계열들간의 횡단적 소통이 개방되어 있고, 하나의 부분대상 또는 계열이 다른 어떤 부분대상 및 계열과도 연결될 수 있는 반면, 하나의 초월적 항을 설정하고 모든 계열들간의 접속을 변형하여 이 하나의 배타적이고 특정한 항이나 계열에 연결시키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들뢰즈 가따리는 이를 접속적 종합의 두가지 용법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전체적(global)이고 특정한 용법이고, 다른 하나는 부분적이고 특정하지 않은 용법이다.  

 부분적이고 특정하지 않은 용법: 그 예를 들뢰즈 가따리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발견하고 있다. 들뢰즈는?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프루스트의 저작이 로고스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로고스는 한 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그 면모 때문에 지성은 항상 앞서 온다. 그것 때문에 전체는 미리 존재하고 있으며 법칙은 법칙을 적용할 대상보다 앞서서 먼저 인식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다시 발견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사물 속에 집어 넣은 것만을 사물로부터 끄집어낸다(?프루스트와 기호들?, p.156).” 반면, 프루스트의 책은 “더 이상 다시 붙을 수 없는 파편들, 동일한 퍼즐로 짜 맞추어지지 않으며, 미리 선행하는 전체성에 귀속되지도 않고, 잃어버린 어떤 통일성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지도 않는 조각들과 관련되어 있다. 작품은 이 조각난 부스러기들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다... 기호들의 언어는 저 혼자서 말하기 시작하고 불행과 거짓말의 원천이 된다. 이 언어는 잔존하는 로고스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다...이것은 바로 마주침이나 우연의 순수성을 보장해주고, 지성을 뒤로 물러나게 하여 앞서서 오는 것을 방해하는 수법이다. 부분들 각각이 전체를 미리 결정하고, 전체가 부분들을 결정하는 유기적인 총체로서의 예술작품을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발견하려고 애써봐야 헛수고다.”(171-172) 
 들뢰즈 가따리에 따르면, 프루스트는 유기적 전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분명히 거부. 부분들간의 부조화, 불균형, 조각남으로부터 출발하여, 유기적이고 로고스적인 통일성과는 전혀 다른 통일성을 창조. 그것이 바로 부분대상들이 횡단선을 따라서 궤도를 벗어나서 소통하는 횡단적 통일성. “?찾기?의 부분들은 함께 모여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부분들은 각기 자기가 어떤 전체로부터 떨여져 나왔는지도 표시해주지 않는다.(187)”...“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막힌 부분들 사이엔 어떤 통행 체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통행 체계를 직접적 소통방식이나 전체화 방식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의 사이에서처럼, 작품 전체의 임무는 <횡단선>들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 횡단선은 우리를 알베르틴의 한쪽 모습에서 다른 쪽 모습으로, 하나의 알베르틴에서 다른 알베르틴으로,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건너뛰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이 횡단선들은 결코 다자(mulitple)를 일자(Un)로 환원시키지 않고, 다자를 하나의 전체로 그러모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다자의 매우 독특한 통일성을 확립하고, 전체로 환원할 수 없는 이 <모든> 파편들을 합병하지 않은 채 긍정한다.”(194)
 동성애의 테마와 n개의 성. 
 “남자-여자의 사랑의 통계적 성운과 몰적 집합체로부터, 저주받은 유죄의 두 계열이 드러난다. 이 두 계열은 서로 배제하는 소돔의 계열과 고모라의 계열인데, 이것들은 서로 포개질 수 없는 두 양상 아래 하나의 동일한 거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식물의 테마, 꽃들의 무죄는 우리에게 하나의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의 다른 코드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꽃들 하나하나는 양성이어서 두개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두가지 성은 나뉘어져 있어서 소통하지 않는다...따라서 기본적 결합의 차원에서는 두 남성과 두 여성을 참가시켜, 하나의 다양양성을 구성하여 그 다양성 속에서 횡단적 소통들, 즉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의 접속을 생기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남성의 남성 부분은 한 여성의 여성 부분과 소통할 수 있지만, 또한 한 여성의 남성 부분과도, 혹은 다른 한 남성의 여성 부분과도, 또 혹은 다른 남성의 남성 부분과도 소통할 수 있다. <...이거나, ...이거나>의 양자택일에 차이들이 끊임없이 차이이기를 그치지 않으면서도 동일자가 되는 조합과 치환의 <...이든>이 대립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프루스트가 제시하는 동성애의 계열에는 유죄성이 나타나지만, 또 다른 점에서 이는 식물의 성과 관련해 순결의 테마와 섞인다. 그에 의하면, 프루스트에게는 세가지 층위가 있다. 첫번째 층위는 전체 이성과의 사랑이 대조되고 반복된다. 두번째 층위는 동성애의 두 방향(소돔과 고모라)과 관련된 층위로서 이 층위는 유죄성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나 이 때 유죄성은 도덕적 혹은 내면적인 것이라기 보다 사회적인 것으로 체험된다. 세번째 층위는 횡단적 섹슈얼리티의 층위. “자웅동체 안에서 두 성은 서로 인접해 있지만, 마치 칸막이 친 듯 격리되어 있어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식물의 테마는 거대 동물-로고스와 대립되는 자신의 완벽한 의미를 획득한다. 자웅 동체는 동일한 식물 안에서 두 성이 현실적으로 따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다. 주어진 하나의 성을 가진 개인은 자기 안에 다른 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개인은 자기 안의 그 다른 성과 직접 소통할 수 없다. 이 세번째 경우는 성의 횡단이며, 그것은 개인 속에서 두 가지 성이라는 두 파편의 공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분적 대상들의 공존을 가리킨다... 두 성 사이에 놓여 있는 횡단적 차원에서 비정상정인 소통이 이루어진다. 한 몸 전체가 다 남자라고 규정된 한 개인이, 그 자신과는 소통할 수 없는 자기의 여성 부분을 수정시키기 위해, 한 몸 전체가 다 남자인 다른 한 개인을 찾으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경우에는, 한 몸 전체가 다 남자라고 규정된 한 개인은 남자에게서만큼이나 여자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는 부분적인 대상으로 자기의 여성부분을 수정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바로 이 경우에 근본적으로 성의 횡단이 일어난다. 이런 성의 횡단은, 성의 두 계열이 분리되어 남남자는 남자에게로 보내지고 여자들은 여자들에게로 보내지는 전체적이고 특수한 동성애가 아니라, 국부적이고 비특수적인 동성애이다. 여기서는 남자는 여자에게서 남성적인 것을 찾으려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서 여성적인 것을 찾으려 한다.”(209-212) cf.태그 해그의 예. n개의 성. 이성의 계열에서 출발하여, 두 동성애의 계열들이 분리되어 나오고, “그 다음에 이 동성애의 계열들은 성의 횡단이라는 우주에 이르게된다. 이 우주에서는 서로 칸막이 친 듯 분할되어 있고 또 서로가 서로 안에 밀봉되어 있는 성들이, 타인의 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횡단적 통로들을 따라서 각기 다시 편성된다.(표면적 정상성-고통, 불안, 죄의식 등의 신경증-광기에 사면 기능을 부여함으로서 식물적 순수성을 복원)”        
  
  전체적이고 특정한 용법: 이 용법에서는 앞서의 예와는 달리, 욕망이 하나의 고정된 주체, 즉 남녀의 어느 한 성에 특정화된 <나>와 전체적 인물들로서 결정된 완전한 대상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욕망의 대상들을 전체적 인물들에 관련시키고, 욕망을 특정한 주체에 결부시키는 삼각형화. 이 삼각형화는 욕망의 등록에 간섭하여 욕망의 모든 생산적 접속을 변형시킨다. 여기서 부분 대상들은 부분대상들에 앞서는 전체성의 직관에 의해 파악된다. 이러한 전체성은 부분대상들과 주체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서만 정립된다. 초월적이고 특권적인 어떤 것을 외주설정하는 정신분석의 조작. 그런데 이 어떤 것이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것은 오로지 욕망 속에 결여를 도입하고, 그 부재의 이러저러한 양상 하에서 인물과 자아를 고정시키고 특정화하며, 성의 이접에 배타적 의미를 강요하기 위해서이다. 이 공통적이고 초월적인 부재하는 어떤 것이 바로 남근, 법. 그것은 기표 연쇄 전체에 의미작용의 효과를 분배하고, 배제를 도입하는 특권적 기표. 외주설정. 이 외주설정이 삼각형화의 형태와 재생산을 가능케 함. 3+1(엄마, 아빠, 나+초월적 남근)이라는 오이디푸스 정식. 이 일자가 없으면 관련된 항들이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지 못한다. 다성적인 글과 분리가능한 단편들로 이루어진 기표 연쇄로부터 초월적이고 특권적인 기표를 추출. 이때부터는 연쇄 전체가 전제군주 기표의 법률 아래 매달리게 됨. 그것은 욕망의 위치마다 결여를 배정하고, 욕망을 법에 용접시킴. 분리될 수 있는 부분적 대상들로부터 분리된 완전한 대상으로의 이행. 모든 흐름들-절단들의 하나의 동일한 신화적 장소로의 투사, 모든 기호들의 하나의 특권적 기표로의 투사. 그러나 욕망하는 생산의 흐름들-절단들은 하나의 신화적 장소로 투사되지 않으며, 욕망의 기호들은 하나의 기표 속에 외주설정되지 않으며, 횡단적 섹슈얼리티(trans-sexualite)는 국지적이고 특정하지 않은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 아무런 질적 대립도 생기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이론과 실천은 무의식 전체를 욕망하는 생산의 무오이디푸스적 형식과 내용으로 복귀시키지 않고, 그것을 오이디풋로 변환시키는 일을 추진. 정신분석은 접속적 종합을 전체적이고 특정하게 사용함으로써 이 변환을 추진한다. (접속적 종합의 초월적 용법)      

  <등록의 이접적 종합>

   이접의 경우에도 배타적이고 제한적인 방식과 긍정적이고 포함적인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전자는 분기 혹은 이접을 극복할 수 없는 거리로서 규정하여 계열들간의 양립불가능성을 정초하는 방식인 반면, 후자는 계열들간의 차이를 동일자로 종속시킴으로써 거리를 무효화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 자체를 긍정하면서 차이를 소통의 수단으로 구성하는 방식. 전자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양자택일을 강요. 프로이트의 두번째 텍스트 참조. 
  차이는 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생산을 구성하는 기계적인 것의 실재적 요소와 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구조 전체 사이에 있다. 차이는 오이디푸스의 두가지 용법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함적이고 무제한적인 이접들의 무오이디푸스적 용법과 배타적인 이접들의 오이디푸스적 용법에 있다. 과도 연결될 수 있는 반면, 하나의 초월적 항을 설정하고 모든 계열들간의 접속을 변형하여 이 하나의 배타적이고 특정한 항이나 계열에 연결시키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들뢰즈 가따리는 이를 접속적 종합의 두가지 용법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전체적(global)이고 특정한 용법이고, 다른 하나는 부분적이고 특정하지 않은 용법이다.  
  

두번째 오류추리: 이중구속.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욕망을 강요하여 구별된 인물로서의 부모를 대상으로 삼게 하고, 나에 대해서는 인물에 대한 욕망의 충족을 금한다. 구별을 요구하면서 미분화상태를 위협으로 내세움. 배타적인 양자택일을 강요. 엄마-아빠-나라는 세 항을 구별하고 구조화하는 삼각형의 노선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미분화상태의 깜깜한 밤에 떨어질 것이다. 상상적인 극과 상징적인 극에 갇힌 욕망. 어느 쪽이든 출구는 없으며, 결국 오이디푸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고 사회인이 되면 다시 권위의 형상 속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체험. 출구는 막혀 있음. 상징적 질서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어서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거나 상징적 질서가 일으키는 증대하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감.  신경증적 일체화 아니면 규범의 내면화. 
  세번째 오류추리: 적용(일치application). 사회적 장의 결정과 가족의 결정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의 집합체를 설정하고 리비도를 언제나 엄마-아빠에게 포개는 것. 상징적이거나 구조적인 요소는 여전히 가족의 요소. 닫힌 소우주로서 가족적 관계가 처음에 있고, 사회적 관계들은 나중에 마치 피안처럼 출현. 이 <나중에>는 언제나 오이디푸스와의 관계에서, 오이디푸스의 틀 안에서 해석됨.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생산의 행위자들과 관계들, 그리고 리비도적 투여는 모두 가족적 재상산의 형상들 위로 포개짐. 집단적 행위자들은 부모의 형상의 파생적 혹은 대용물로 해석되는 것이 강요됨. 사회적인 생산, 재생산, 반생산의 agents들과 가족적 재상산을 일대일 대응시키고, 전자(4+n)을 후자(3+1)위로 포개어 접는 application의 조작.   

  마찬가지로 이접의 경우도 
    
  마지막으로 통접의 경우, 유목적이고 다성적인 통접의 방식과 분리차별적이고 일대일 대응적인 방식. 전자의 경우는 계열들의 수렴을 통해 계열들의 계열, 기계들의 기계, 즉 통일체를 구성하지만, 이는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 횡단적 통일체로서 어떠한 결정도 궁극적인 것이 아니고, 계열들은 언제나 새롭게 분기될 수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권력의 적분을 통하여 모든 미분적 차이들을 억압하고 동질화하며, 모든 것을 하나의 방향과 질서, 유기적이고 위계화된 통일체로 귀착시킨다.  
  cf. 기관없는 신체.    























1999년 10월 20일, 강사 : 고병권  
수유연구실 강좌 : 철학강좌 : 안티 오이디푸스.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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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의 다섯가지 거짓추리”


고 병 권



1. 외디푸스 제국의 신화와 무의식

아버지의 이름, 그것은 신의 이름이며,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전 역사를 제물로 헌납해왔다. ‘신의 죽음’이라는 최대의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광인의 외침’은 아직 그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나는 너무 일찍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번개와 천둥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니체, ?즐거운지식? s125). 그러나 다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신의 죽음은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 그 자리는 여전히 우리를 엄습한다(“빈공간의 한숨을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 더 추워지는 것은 아니겠지?” ?즐거운 지식?, s 125). 그러나 신이 죽은 그 사건은 항상적인 것, (앞으로도 뒤로도)영원한 것이다. 그는 “죽은 채로 계속 있었다”. 다시 말해서 신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항상적이고 영원한 죽음). 스탕달의 말대로 “신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음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그러나 신에 관한 이야기(신화)는 여전히 지배한다. 모든 것들은 그 신화로 환원된다. 모든 자연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외디푸스는 사실 ‘인간’의 이야기고, 모든 장치들은 인격(personality)의 연극으로 환원된다. 따라서 푸코의 말대로 신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 될 것이다)! 니체는 “인간과 세계(man and world)”라는 말에 폭소를 터뜨렸는데, 그것은 ‘과(and)’라는 그 작은 단어가 인간을 세계와 구분시키는 무슨 숭고한 특권을 가진 것처럼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외디푸스의 신화는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으로의 이행, 상상적인 것으로부터의 상징적인 것으로의 이행, 그리고 법과 질서, 문명으로의 이행이다. 저 옛날에 자신의 추악함으로 신을 죽인 인간들(니체), 욕망을 금하는 아버지를 죽인 형제들(프로이트),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발명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아버지의 대체물(“토템을 살해말라”)과 족외혼(터부)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법과 질서와 문명의 발명자란다!
그러나 무의식은 “아버지를 모르는” 고아이다. 그것은 세계로부터,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자연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고아가 아니라 ‘아버지에 무관심한’ 고아다. 정신분석가들은 “우리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외디푸스”라고 말한다. 다양한 톤으로 말하지만 모든 것들은 외디푸스 제국주의에 복무하고 있는 경찰관의 목소리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되지 못한 자’, 질서를 어지럽히는 ‘좌익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움직인다.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도 사회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지배자들의 목소리는 “외디푸스로 인해 우리가 때로는 우울함, 병적 상태에 빠져들고 때로는 치유할 수 없는 고독을 느끼게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자유를 위해 치뤄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는 정신분석가들의 목소리로 울려퍼진다. 그들은 니체가 사제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구원”을 해주겠다는 이유로, 삶에 “고통을 개발하는 자”다. 충분히 고통스럽지 않으면 구원의 의미가 없다! 사제들, “삶에 고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자, 그들은 삶에 대한 해석자들이다. 그들은 존재의 모든 완전함을 신에게 부여하고 그로 통하는 통로를 틀어쥐면서 인간에게는 모든 존재의 불충분함, 죄책감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의미화한다.
그러나 무의식은 의미에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보다는 작동을 중시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욕망하는 기계들의 작동방식이 사회적 기계들과 대면하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종합들(접속적, 이접적, 통접적인 접속들의 종합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용된다. 외디푸스적인 초월적 사용에 맞선 내재적 사용! 그것은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지만 생산하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작동한다. 니체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인가?”라고 물어야한다고 말했다. 분열자분석은 이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초월적 물음을 던지지 않고,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이 초월성에 맞서는 초험성 Deleuze, G., 서동욱 역, ?칸트의 비판철학?, 서광사. 참조. 칸트는 형이상학과의 대결을 통해 그것이 갖는 초월적(transcendent) 성격을 비판하면서도, 경험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내재적인 상위원리, 바로 초험적(transcendental)인 성격을 중시하였다.
(선험성), 그리고 유물론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무의식이고, 외디푸스적인 것이 아니라 분열증적인 것이며, 비형상적이고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무의식이며, 몰적이기보다는 분자적인 무의식이다.
정신분석학은 과학의 지위를 취하려 했으나, 니체가 말했듯이 “과학이야말로 신앙의 마지막 피난처”(“금욕주의의 가장 현대적 형태”, ?도덕의 계보학?)이며, 그것이 법칙(법률)에 욕망을 결부시키면서 금지와 범죄(금지가 범죄자를 만들어낸다)가 생겨난다. 그러나 무의식과 욕망은 법률의 기회이기 보다는 능력(puissance)의 기호다.


2. 다섯가지 배리(거짓추리, paralogy)

외디푸스를 통한 종합들의 초월적 사용으로부터 세가지의 배리가 나오며, 외디푸스의 정당화를 위해 억압된 것으로부터 욕망을 도출하는 치환(전치, displacement),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디푸스기를 나중(afterward)에 겪는, 그로부터 진행과 퇴행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등 모두 다섯가지의 배리를 확인할 수 있다.

① 접속적(connective) 종합의 사용에서 - 부분적이고 불특정한 사용을 전체적이고 특정한 사용으로 바꾸어냄. 이것은 두 측면에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부모의 측면으로 외디프스 삼각형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두 번째 측면은 혼인으로 이 형태가 재생산되는 것이다. 시니피앙의 전제적 지배로부터 생겨난 욕망의 결여들(cf. Lacan, ‘결여로서의 욕망’).
② 이접적(disjunctive) 종합의 사용에서 - 포함적이고 비제한적인 사용을 외디푸스적이고, 배타적이며, 제한적인 사용으로 대체. 양자택일의 문제. “상상계에 머물 것인가, 상징계로 나아갈 것인가?”
③ 통접적(conjunctive) 종합의 사용에서 - 유목적이고, 다의적인(polyvocal) cf. univocal / bivocal
인 사용 니체의 ‘가면의 철학’은 모렐(G. Morel)의 해석에 따르면 이름을 능동적으로 잃어버리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주체들을 여행할 수 있었다. 짜라투스트라, 비제, 바그너, 쇼펜하우어, 스탕달, 괴테, 그리스도...... 그것은 더 이상 일대일로 정의되는 주체가 아니다.
을 분리차별적이고 일대일대응적인(biunivocal) 사용으로 대체시킴. 주체는 아빠-엄마-나로 구성되는 삼격형의 꼭지점을 통해서 정의됨 Guattari, F., 윤수종 역, ?분자혁명?, 푸른숲 중 ?반정신의학 운동?의 “메어리 반스” 사례를 참조.
. 그것은 인종의 이름으로, 혹은 국가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구성. 리비도의 여행은 삼각형 안에 갇힌다.
④ “그것이 금지된 것은 그것이 욕망되었기 때문이다”는 치환의 배리 - 프로이트는 프레이져의 논의를 빌어온다. “법은 단지 인간들의 본능이 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만을 금지시킨다(즉, 하지도 않을 것을 굳이 금지시킬 필요가 없는 것). 따라서 근친상간을 사람들이 혐오하는데 그것을 금지시켰다기 보다는 바로 사람들이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금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금지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금지된 것의 본성을, 심리적 억압으로부터 억압된 것의 본성을 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허구적인 것을 금하고 그것을 욕망의 대상으로 조작하는 작용. 우리는 억압을 표상하는 작용과 그 내용, 그리고 치환되어 버린 이미지를 구별해야 한다. 정신분석가들은 억압된 것을 다른 것으로, 즉 모조품으로 치환한다. “사실은 너 엄마하고 자고 싶지?” 그러나 욕망은 그것을 알 수 없다. “아버지가 기차이고 어머니가 정가장이라니...”, “단지 우리 기계들이 움직이는 것을 그대로 두시오”
⑤ ‘욕망하는 생산의 현재성’을 외디푸스의 <나중에>(현재의 <결핍>)으로 대체: 현실적 요인(actual factor)은 나중에 생기며 이로부터 전진과 퇴행이 정의. 현실적 요인을 결여에 의해 작동하는 것, 그래서 나중에 생기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외디푸스주의자들이 ‘결핍이나 욕구불만’으로 욕망을 정의하는 것과 같다. 현실 요인을 완전히 외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외디푸스와 관계된다고 필연적으로 인식되는 내적 갈등의 두 매듭 안에서 배타적 선택 강요. 그런데 정신분석의 전통에서 관념적인 다른 노선도 있음. 융(Jung)은 현실요인을 결여나 <나중에>로 파악하지 않았는데, 그는 종결할 수 없는 분석의 치료를 짧게 줄이는 것, 그리고 외디푸스의 훨씬 이전으로, 근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두가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 그가 “원형”이라고 부른 것! 그러나 이것 역시 결핍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음. 왜냐하면 <나중에>, 혹은 <피안>은 분석적 의존이기 보다는 신비적인 의미화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 그는 다시 <나중에>를 재도입.
문제는 다시 외디푸스를 둘러싸고 이중 매듭이 생김. 외디푸스 이전으로 퇴행할 것인가, 아니면 전진할 것인가? 그러나 사실 현실적 요인은 욕망하는 생산 속에 있음. 현실요인은 사회적 생산과 함께 고려되는 한에서 욕망하는 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외디푸스처럼 결핍도 아니고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처음부터, 그리고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오히려 외디푸스가 이것에 의존. 외디푸스는 이것에 대한 반동적 형성물임. ‘현실적’과 대비되는 말은 ‘잠재적(virtual)’! 외디푸스는 잠재적인 것.


3. 사회적 억압(repression)과 심리적 억압(refoulement)

심리적 억압은 사회적 억압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곳에서 외디푸스의 역할은 무엇인가? 정신분석가들은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 로렌스의 비판은 근친상간의 금기가 무의식의 활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근친상간의 동기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연역된 것이다. 이성의 논리적 연역이 바로 정념의 영역에 들어와 행동원리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능동적인 무의식, 여행하는 무의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전혀 관념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개념적인 것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의 논리학이 접근할 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격과는, 인간적인 관계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 그 욕망에 대한 아버지의 검열이 바로 사회 질서의 토대라고 말한다. 법률은 외디푸스에 끼워맞추기 위해 우리의 욕망의 대상을 조작하고 그것이 가진 범죄성을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다. “법률이 유죄로 추정하는 자”.
지배자들은 항상 외디푸스의 이름으로 경고한다. “외디푸스적 욕망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사회가 어떻게 될 지 상상해보라!”. 좀더 신중한 비판도 있다. “근친상간은 사회가 성립하는데 기본적인 교환을 방해한다”(cf. 레비스트로스). 그러나 허구로부터는 어떤 위험도 생산되지 못한다. 실제적인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욕망의 혁명성에 있다. 욕망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일단 접속하고 작동되기 시작하면 사회의 기존 질서를 의문시한다. 그렇다고 욕망이 비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다. 그러나 욕망은 폭발적이다. 사회 질서는 그것을 통제하고 착취하며 예속시키는 구조가 없다면 유지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한 구조로서의 사회를 생각해보자. 왜 욕망을 두려워하는지 금방 드러난다. “욕망은 어머니와 동침하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회를 위협한다”. 욕망은 별도로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망함으로써 그 자체로 혁명적인 것이다.
라이히는 사회적 억압과 심리적 억압의 관계를 훌륭하게 그려냈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무의식 속에서 작동하는 억압을 욕망하는 대중들의 성격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라이히에 따르면 파시즘은 평균적 인간의 마음 하나하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권력의 형태이다. 따라서 그것은 국가에서 강제하기 보다는 개인들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은 대중들의 정신적 노예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라이히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참된 욕망’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속과 억압조차도 ‘욕망’하기 때문에.... 정신분석은 심리적 억압(외디푸스적)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보고 사회적 억압의 문제를 이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정신분석을 둘러싸고 우리는 최소한 세가지 요소를 확인한다. “욕망하는 생산의 혁명적 요소”, “외피푸스 극장”, “돈과 잉여가치가 판치는 공갈단”. 라이히의 강점은 정신분석에서 보인 두 억압의 차이를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그 중요성을 역전시킨 데 있다. 그는 심리적 억압이 어떻게 억압하는 사회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심리적 억압이란 사회가 온순한 주체를 생산해내기 위해 가족을 통해서 지배하는 방식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가족적 억압을 사회적 생산의 억압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가족이야말로 인간사회의 ‘중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것이 하는 일은 보수주의 사회 경제구조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라는 상부구조 간의 컨베이어 벨트 노릇을 하는 것이다”.(라이히, ?성혁명?))
우리는 심리적 억압이 두가지 조작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억압적 사회권력이 가족이라는 기구에 권력을 위탁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심리적 억압을 억압된 욕망에서 생기게 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에서 억압이 갖는 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때, 그렇다면 욕망하는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 억압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분명치는 않다. 욕망의 등록의 표면에 작용하고 그것에 등기될 수 있는 결정기관인 가족, 그와 다른 극에서 기관없는 신체들의 욕망하는 생산의 등록(즉 가족적이지 않은 욕망의 등록)에서는 부모는 단지 부분적 대상들일 뿐이며, 흐름들과 기호들의 동인일 뿐이다. 그러나 욕망은 금방 부모의 틀을 넘어버린다. 이때 다시 그물에 들어가 간섭하고 소외시키며, 흡수하는 가족이 등장한다. “잘보자... 신은 아빠야!”


4. 분열자의 여행과 혁명 기계

프로이트는 신경증과 정신병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실재성(reality)의 상실을 내세웠다. 신경증 환자는 실재성의 요구를 따라고 충동을 억제할 태세가 되어 있는 반면, 정신병 환자는 이드에 사로잡혀있고 현실과 단절한 준비가 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외디푸스가 예상과 달리 신경증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정신병에 있어 가족은 단순 자극일 뿐이다. 그것은 조작자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욕망의 투여는 전혀 다른 것(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장)과 관계한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고백했듯이 정신병은 치유되기 힘들다. 그는 의사의 조작적 작업에 통 관심이 없다!
자폐로 곧잘 나아가는 정신병의 실재성의 상실은 정신분열증의 ‘과정(process)’의 결과인가, 아니면 이 ‘과정의 중단(interruption)’에서 오는 결과인가? 정신분열자 그는 자아의 분열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고통받는 것은 그가 이미 떠난 곳으로 다시 이끌려오기 때문이다. 강도가 기관없는 신체(=0) 수준으로 떨어지면 자폐증이다. 억압의 체계가 그들의 여행을 중단시킬 때 실재성은 상실되고 만다.
가족의 삼각형, 그것은 예리한 잣대이다. “저기에 있는 것은 아빠다, 저건 엄마다”, “...하지마”, “...해”. 신경증 환자는 이 삼각형 안에서 내부적 식민지를 만든다. 나르시스적 외디푸스 기계. 그러나 분열증 환자는 욕망하는 기계다. 그것이 삼각형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들을 진동시킨다. 그것은 공명(resonance)한다. 가족은 이미 만들어진 사회적 생산에 욕망이 공명하기를 바란다.
삼각형이 가하는 압력과 삼각형에 가하는 압력! 그 경계선은 어디로든 기울어질 수 있다. 따라서 외디푸스는 엄밀하게 결정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신경증으로 변하거나 정신병으로 기운다. 그러나 우리는 신경증과 정신병이 사실은 본성상 모두 욕망하는 생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현실적 요인(actual factor)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 현실적 요인은 정신분석학에서 끊임없이 오해되어왔다. 그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언제 작동하는가? 정신분석가들은 이것인 현재 결핍되어 있다는 것, <나중에(afterward)> 생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관계에 욕망의 투여 양식이 있다고 할 때, 현실 요인은 욕망하는 생산이다. 그것은 <이미> <처음부터> 작동하고 있다. 외디푸스야말로 욕망하는 생산에 의존하는 반동적(reactive) 생산물이다. 정신분석가는 외디푸스를 통해 사람들의 욕망을 가두고 그 울타리를 기준으로 퇴행과 진전을 규정한다. 그러나 퇴행적인 환자에게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욕망에게는 그 자신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중요핟. 그러면 그것은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생산성의 차원을 알게 된다.
따라서 분열자의 여행, 그것은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자유인, 명랑한(때론 고독한), 책임을지지 않는 사람의 여행이다. 그것은 결여를 모르며 아무 것도 결여하지 않는 욕망의 여행이다. 그들은 ‘환자’인가? 그러나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별해야 한다. 광기는 꼭 붕괴(breakdown)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돌파(breakthorough)를 의미할 수도 있다. ‘광기’는 우리가 그려낸 기괴한 캐리커쳐일 뿐이다(“어느 사회나 그 적대자를 캐리커쳐에 이르기까지 깎아내려서 굶어죽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 캐리커쳐는 <범죄인>이다. 로마적 귀족에서는 유태인이 그랬고, (지금은 자유인이)” 니체, ?권력의지?, s 374). 그러나 ‘정상’이라는 우리 자신이야말로 기괴한 캐리커쳐에 다름 아니다(“인간은 오류라는 쇠우리에 갇힌 인간의 캐리커쳐다”(?권력의지?, s 397). 그것이 돌파되지 않고 붕괴될 때 우리는 그를 ‘환자’라고 부른다. 그는 ‘여행하기를 멈춘자’이다.
그것은 그림과 문학 등 모든 영역에서 외디푸스적 장벽을 만난다. 기성 문학이야말로 시니피앙의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이다. 그것은 정신분석의 보다도 더 해로운 초자아다! 그것은 바로 장사꾼과 사기꾼의 문학이다. 신경증 환자는 읽고 쓰고 번역되는 데도 돈을 지불하지만, 그들은 잉여가치를 챙긴다.
엥겔스는 위대한 작가는 전제군주 시니피앙을 무너뜨리고 필연적으로 지평선에 혁명의 기계를 키우는 흐름들을 묘사하여 흐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문학은 언어를 흐르게 하고 말들을 흐르게 해야 한다. 그것은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이지 표현이 아니다. 문학은 그 작품에 폭발물을 설치하여 표현형식인 초자아와 내용형식은 시장가치를 폭파시켜야 한다. 문학에 대한 모든 의고적인 기준들은 폭파되어야 한다. 로자룩셈부르크가 ‘규율(discipline)’이라는 단어의 상이한 용법에 불만을 표하듯이 우리는 ‘과정의 지속’과 그것의 ‘실패’를 동시에 표현해서는 안된다. ‘과정’ 그것에는 ‘혁명 기계’라는 이름이 적합하다.






















1999년 10월 27일, 강사 : 권혜원  
수유연구실 강좌 : 철학강좌 : 안티 오이디푸스.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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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3장 1절-5절: 원시영토기계  

                                  
권 혜 원



  1. 등기를 행하는 사회체  

 -보편적인 것은 자본주의에 의해 결정된 기관없는 신체와 욕망하는 생산. 
  역사는 필연의 역사가 아니라 우연(contingence)의 역사이다.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라 절단과 극한의 역사. 
  역사적 사건은 가변적인 힘관계들의 마주침의 효과로서 출현하는 것이므로 결코 일반적인 법칙으로부터 추론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지속되는 역사적 시간의 차원은 심층의 구조로 통합되는 연속적이고 동질적인 운동이나 진화의 완만한 리듬이 아니라 언제나 역사적 조건들의 집합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역사적 상태를 산출하는 생성과 차이화이 과정이다. 
  이른바 ‘정통’ 맑시즘은 역사적 과정을 사회발전의 일반적인 법칙에 의해 고찰함으로서 ‘역사는 필연적으로 공산주의에 이르게 된다’는 예언적 추상에 머무를 뿐이며, 사회역사적 상황을 그 고유한 힘관계들의 마주침과 분산, 계열들의 접속, 이접과 통접 속에서 다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역사의 절단과 변이, 변환과 생성을 그 구체적인 장 속에서 포착할 수 없게 된다. 즉 ‘특정한 역사적 변환이 다른 장소, 다른 시대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데, 왜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에만 출현하였는가‘에 답할 수 없음. 
  조건과 우연의 조합. 주사위 던지기. 조건: 코드와 영토성. 아무렇게나 실천하고 아무렇게나 인식하고 말하는 것이 아님. 사회체는 언제나 특정한 코드화와 영토화를 작동시킴. 그러나 인간은 되기를 향하여, 즉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하여 조건들의 집합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역사적 조건은 불변의 층위를 이루지 않는다. 언제나 예기치못한 통접, 때아닌 사건들의 표출이 일어나며, 이는 조건과 우연이라는 임의의 조합을 통해 역사를 새로운 변이로 이끈다. 언제나 동일자에 맞서는 외부의 사유와 실천이 잠재적 극한으로서 존재하며, 특정한 순간, 특정한 장소에서 힘들의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이 잠재력이 현행화됨으로써 새로운 것이 창조됨.     
  자본주의가 왜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에서 출현하였는가. 사적소유와 상품생산의 마주침. 사유화와 추상화라는 두가지 다른 형식의 탈코드화. 또한 사적 소유의 관점에서는 자본가들 소유의 부의 흐름들과 노동력만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흐름들의 마주침(탈영토화의 두가지 다른 형식).  
  
 -영토기계, 기술기계, 사회기계
  욕망과 생산의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단위는 대지. 충만한 신체로서 대지는 생산력들 위에 포개져 이 생산력들은 전유하며, 그 표면 위로 생산의 모든 과정이 등기되고, 노동의 대상들, 수단들 및 노동력이 등록되고 행위자들과 생산물들이 분배된다. 영토기계는 사회체의 최초의 형태, 원시적 등기 기계. 그것은 기술기계와 혼동되지 않는다. 기술기계는 손을 사용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들에서도 작용하고, 전달하고, 가동시키는 비인간적 요소를 갖는다. 사회기계는 인간들을 부품으로서 갖는다. 인간들이 기계들과 함께 고찰된다고 할지라도. 기술기계는 기술기계의 조건을 만들고 기술기계를 조직하며, 또한 기술기계의 발전을 제지하거나 제한하는 사회기계들로 소급된다.   사회는 기계이며, 이것은 은유가 아님.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은 정확히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는 연속적인 물질의 흐름 및 이 흐름의 절단들과 관계하며, 기계장치를 이루는 코드를 내장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생산의 흐름들, 생산수단의 흐름들, 생산자와 소비자의 흐름들로 이루어지며, 이 흐름들에 대한 다양한 절단을 행한다. 그것은 제멋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코드화의 양식을 가지며, 사회적 코드를 형성하고 유지한다. 그러므로 사회는 물질적 흐름들을 사회의 각 영역에 특정한 방식으로 등록하고 전달하며 분배하는 코드를 갖는 하나의 거대기계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기계는 메커닉하거나 물상화된 것이 아니라, 인격, 인간적 부품들과 장치들로 구성된 복잡한 사회적 배치로 구현된다. 
   사회기계의 최고의 임무는 흐름들을 코드화하는 것. 원시영토기계는 생산의 흐름들, 생산수단의 흐름들, 생산자와 소비자의 흐름들을 코드화하는 한에서 이미 사회기계. 그것은 부족 신체들의 기관들을 대지와 결합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구성. 대지라는 충만한 신체는 생산수단들 및 생산자들을 자신에게 부속된 기관들로서 등기, 등록. 

 -사회는 교환이 장이 아닌 등기의 사회체
  사회기계의 근본적인 역할을 ‘흐름들의 코드화’로서 간주하는 한, 사회는 순환하고 순환시키는 것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표시하고 표시되는 것(각인하고 각인되는 것)을 본질로 하는 등기의 사회체이다. 순환은 등기가 그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할 때에만 생긴다.        
  레비스트로스식의 교환주의적 사회관을 비판. 레비스트로스는 친족관계와 혼인규칙을 연구하면서, 기본적인 것은 고립된 항으로서의 가족이 아니라, 이 항들 사이의 관계라고 보았으며, 이 관계는 여자의 교환을 매개로 호혜적 교환의 체계를 이룬다고 보았다. 반면, 들뢰즈, 가따리는 사회는 개인들이 서로 여자와 재화, 서비스와 메시지를 교환하고 계약 의무사항들을 주고받는 네트워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에 의하면, 원시영토기계는 기관들을 집합적으로 투여하는 방식의 코드화를 작동시킨다. 원시사회는 구성원의 계약과 교환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지에 소속됨으로써 구성된다. 인간은 대지의 주권자처럼 대지로부터 떨어져나가거나 분리된 존재로 간주되거나 취급되지 않는다. 부족은 분할되거나 구분되지 않은 상태인 대지의 생산적 표면위에서 거주하며 공동으로 사냥과 채취를 하는 집단이다. 대지에 부속된 기관들의 집합적 투여. 여기서의 단위는 본래의 의미에서나 사적인 의미에서나 결코 인물들이 아니고, 기관들의 접속, 이접들 및 통접들을 결정하고 있는 계열들. 
  “원시영토기계는 흐름들을 코드화하고, 기관들을 투여하고, 신체에 표시를 한다. 대지에 속해 있는 이 신체에다가 표시를 하는 이 임무에 비할 때 순환시키고 교환한다는 것은 얼마나 이차적인 활동인가. 등록하고 등기하는 것인 사회체가 생산력들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고 생산의 행위자들을 분배하는 한에 있어서, 그 본질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문신을 새기는 일, 절제하고 째고, 자로고, 난절하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일, 명확하게 구분하고, 사회체에 입문시키는 일.” 
  원시사회에서 개인은 통과의례를 치르고 사회에 진입. 통과의례식에서 그는 표지를 갖게 된다. 문신을 새기거나 피부에 상처를 내거나 구멍을 뚫는다든가 할례를 받거나 신체의 일부분 혹은 음핵을 절제당하기도 한다.(라니족 중 독수리 족은 입문자의 귀를 뚫어 독수리 깃털을 끼우는데 이것은 그가 독수리가 사는 높은 낭떠러지에 속한다는 표시. 카푸아쿠족들 사이에서는 콧구멍 경막을 뚫고 멧돼지 송곳니를 끼우는데 이것은 그가 깊은 숲에 속하는 것을 나나내는 것, 아즈맷 족에서는 입문자의 귀 가장자리를 뚫고 악어 이빨을 끼워 그가 늪과 강에 속한다는 표지를 남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입문자의 남근 귀두를 잘라 뒤집어서 남근 밑뿌리까지 절개하여 여자처럼 소변을 보게 하는데 이것은 대지의 비옥한 신체에 속한다는 표시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은 아무런 빚을 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냥을 가거나 맹수나 적에게 공격을 받을 때, 혹은 야영지를 이동할 때 똑같은 표지를 가진 이들에 대해 의무가 있다. 의무의 주체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행위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신체에 표시가 새겨지고 각인되며, 신체의 일부가 절개되고 할레를 받거나 문신이 새겨집으로써 사회의 코드로 가입된 나의 신체이다. 
  cf. 니체, ?도덕의 계보학?. 니체는 문화의 운동을 ‘습속의 도덕’이라고 부른다. 문화는 언제나 인간에게 습관을 부여하는 문제, 그를 법에 따르도록 하는 문제, 그를 훈련시키는 문제. 폭력, 훈련, 기율을 통해 반동적 힘들을 습속화(니체와 들뢰즈에게서 ‘반동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립하기 보다는 타자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정립하는 행위. 능동적 힘의 자극이 왔을 때, 그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사되는 힘). 문화는 의식에 기억을 부여. (사회기계는 기억을 형성). 이를 통해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길러냄. 이 기억은 신체에 부단한 고통을 줌으로써 각인됨.(“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제는 인간에게 기억을 만드는 것이다...그것은 잔인성의 체계요, 무서운 알파벳이요, 기호들을 신체에 아로새기는 조직이다. 그것은 신체들 속에서 작용하고 신체들 위에 아로새겨지고, 신체들을 상처투성이가 되게 하는 문화의 운동이다. 이 문화는 이데올로기의 운동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생산을 강제로 욕망 속에 집어 넣고, 또 역으로 욕망을 강제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속에 집어 넣는다. 문화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기관들을 사회기계의 부품들과 톱니바퀴들로 만든다. 기호는 욕망의 위치정립이다. 그런데, 최초의 기호들은 그것들의 깃발들을 신체들 속에 꽂는 영토적 기호들이다.”)        
   

  2. 원시영토기계     

  원시사회체는 유일한 영토기계. 원시자본의 두 형태는 친자관계(filiation)와 결연관계(alliance)인데, 결연관계는 단순히 친자관계 혹은 친자관계적 가계나 혈통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들뢰즈 가따리는 결연관계를 언제나 친자관계에 종속시키고, 전자를 보완적 혈통으로만 간주하는 입장을 비판한다. 
   ‘친자관계의 수직적 연속성은 부계의 이름이 부계 친족에 전해짐으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결연관계의 횡적인 연속성은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경제적 관계들의 연쇄에 의하여 유지된다. 결연관계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것은 공공연한 부채의 존재이다. 친자관계는 행정적이고 위계적이지만, 결연관계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요, 위계와 뒤섞이지 않고 이로부터 연역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 권력을 표현하며, 행정과 뒤섞이지 않는 한에서 경제를 표현한다. 이는 두가지 자본형태인데, 고정자본은 친자관계적 스톡이고, 순환자본은 결연관계적 부채의 유동적 블록이다. 생산은 사회체 위의 친자관계적 이접들의 관계에 의해서 등록되지만, 역으로 이 친자관계적 이접들은 결연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생산을 등기한다. 예. 어린이의 생산.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결연관계는 부자관계로부터 파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양자가 열린 순환과정을 구성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원시사회에서 친족관계가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경제적 및 정치적 인자들 떄문에 지배적이게끔 결정되었다고 말하는 데, 들뢰즈 가따리가 보기에 이는 옳다. 친자관계가 결정되어 있으면서 지배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면, 결연관계는 ‘결정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지배의 결정된 체계 안으로의 ‘결정하는 것’의 회귀를 나타낸다. 이런 까닭에 주어진 영토적 표면 위에서 결연관계가 어떻게 친자관계와 더불어 구성되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조주의 비판: ‘리츄는 친자관계의 가계들과 구별되는 지역적 가계들을 끄집어 냄. 이는 같은 장소나 가까운 장소에 살면서 결혼을 기계적으로 조립하고 구체적인 현실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그룹. 그러므로 친족관계는 하나의 구조가 아니라 하나의 실천, 프락시스, 절차이자 전략. 원시공동체의 친족관계들은 정신 속에서 전개되는 구조에 따라서 해석하면, 큰 선분의 이데올로기에 빠진다. 이 이데올로기는 결연관계를 친자관계에 종속시키지만, 이는 실천에 의해 부인된다.’
  cf. 레비스트로스: 사회생활의 다양한 형태를 정신의 무의식적 활동을 지배하는 보편적 법칙의 의식적-사회적 사고면에서의 투영으로 간주. 따라서 그는 다양한 제도와 사회생활의 이면에 있는 무의식의 구조를 발견하고자 함. 그에 의하면,정신의 무의식적 활동은 어떤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며, 이 형식이 근본적으로 고대적, 근대적, 원시, 문명의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정신에게 동일한 것이라면, 하나하나의 제도나 관습의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적 구조를 밝히지 않으면 안되며, 또 밝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AS) 이는 다양한 외부로의 발현 밑에 있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변하지 않는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이다. 따라서 민족지적 분석의 목표는 인간사회의 경험적 다양성을 뛰어넘어 상수에 도달하는 것이다.(PS) 방법론적으로, 그것은 여러 규칙, 여러 습관의 혼돈된 배후에서 하나의 도식-갖가지 장소적 시대적 맥락 속에서 현존하며 작용하고 있는 도식-을 찾아내는 것. 
  이같은 관점에서 그는 친족관계와 혼인의 규칙을 연구한다. 그에 의하면, 사회의 다양한 혼인규칙은 이질적이며 여러 가지 명칭을 갖는 범주로 분류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규칙은 사회집단 내에서의 여성의 순환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 즉, 생물학적 기원을 갖는 혈족관계의 체계를 결연관계라고 하는 사회학적 체계로 바꾸어 놓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친족관계를 분석하는 입장을 비판. 그에 의하면, 친족체계는 부모와 자식이라든가, 피를 나눈 형제라든가 하는 개체간의 객관적인 관계 속에는 없다. 따라서 참으로 기본적인 것은 고립된 항으로서의 가족이 아니라., 이들 항들 사이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여자의 교환이라는 호혜성에 의한 교환의 체계를 통해서 드러나며(이 교환은 언어의 교환이나 재화의 교환과 형식적 상동성을 갖는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것은 자연, 즉 생물학적 친자관계로부터 문화, 즉 사회학적 결연관계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또한, 그에 의하면, 친족 연구에 있어서 사회학자는 음운론을 연구하는 언어학자와 형식상으로 유사한 입장에 있다. 친족의 명칭은 음소와 마찬가지로 의미작용의 요소, 체계 속에 편입되지 않는다면, 각각의 요소는 의미작용을 가질 수 없는 것. 마찬가지로 친족체계는 음소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 사고의 수준에 있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기존의 친족연구가 택하고 있는 개체주의적 원자론적 해석을 비판, 거부. 이러한 해석은 친족 명칭 체계의 세부 항목의 하나하나, 혼인에서의 특별한 규칙의 하나하나를 각기 다른 풍습에 결부시키는 것.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공시적인 총체로서의 친족체계는 이질적인 몇가지 제도의 자의적 결합이면서, 보다 중요하게는 규칙성을 가지고 기능하는 것이다. 근친결혼 금지는 가장 근원적인 규칙. 이 규칙은 자연과 문화의 교차점에서 자연적 질서를 대치하는 인간의 규칙 중 가장 근원적인 것. 혈통이라는 자연적 현상으로부터 결혼이라는 사회적 현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이면서, 사회를 형성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그러나, 들뢰즈 가따리는 선확립되어 있는 생물학적 친자관계로부터 사회적인 결연관계로 이행한다는 관점이나, 이 이행을 가능케하는 보편적 규칙을 정신적 활동의 무의식적 구조에서 찾는 관점을 모두 비판한다. 이들에 의하면, 친자관계는 닫힌 좌표가 아니라, 결연관계가 구성하는 경제적 및 정치적 좌표들에 애초부터 개방된 것이다. 결연관계는 다른 결연항들과의 생산적 접속으로부터 이탈하여 친자관계적 연쇄에 등록되는 것이지만, 이 등록이 가능하려면 이미 친자관계적 이접이 인물들의 혼인이라고 하는 결연관계적 접속을 전제해야 한다. 
  또한 이들에 의하면, 원시공동체는 역사 외부의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여기서도 사회체에 의한 흐름들의 코드화 전체가 행해진다. 흐름들로부터의 채취는 친자관계의 스톡을 구성하고, 연쇄로부터의 이탈은 결연관계의 유동적 부채를 형성한다. 이 부채들은 흐름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면서 흐름을 통제한다. 가족의 저장물인 식탁보 위에서 사람들은 결연의 돌들, 즉 조개들을 순환시킨다. cf. 쿨라. 의례의 목적으로 사용될 뿐인 물건들(재산이나 교환수단, 소비소단으로 간주되지 안고 명예와 지위만을 나타내는 물건들)을 의례적 형식과 경로를 통해 교환. 예를 들면, 조개껍질 목걸이와 팔찌가 각각 시계 방향과 그 반대방향으로 교환됨. 이러한 교환은 세밀한 부분까지 규칙과 관습에 의해 조정되었으며, 일부 행위에는 의식과 제례가 함께 거행됨. 쿨라의 파트너 관계는 상호의무와 강제를 포함. 이 상호의무와 강제가 결연관계의 유동적 부채를 뜻함. 그리고 이것은 흐름을 특정한 방식으로 코드화. 그런데, 이 순환은 어떤 장소에서 어떤 경우에 정지되어 다시 스톡을 형성. “생산적 접속들을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친자관계의 이접들이 없이는 생산적 접속이 없으나, 결연관계와 인물들의 결합을 통하여 횡적인 접속들을 재구성하지 않는 친자관계의 이접도 없다.” 
  이러한 코드화의 과정은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 연쇄로부터의 각각의 이탈은 생산의 흐름들의 이쪽과 저쪽에 과잉과 결핍, 결여과 축적의 현상을 생산하는데, 이 현상들은 위신의 획득이나 분배된 소비와 같은 교환불가능한 유형의 요소들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므로, 원시공동체는 여자와 재화 등의 교환의 호혜성으로 특징지워지는 상응적이며, 균형적이고 폐쇄된 체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 가따리는 이런 맥락에서 원시적 경제를 뜨거운 경제에 대비되는 차가운 경제로 개념화하는 것을 비판한다. 원시사회기계 내에서도 불균형은 병리학적 결과이기는 커녕 기능적이고 주요한 것이다. 먼저 폐쇄되어 있던 것이 외연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개방이 우선하며, 그것은 급여를 구성하고, 불균형을 치환함으로써 불균형을 보상하는 이질적 요소들에 기초를 둔다. 결연관계를 따라서 유동적 부채를 이루는 것은 흐름 속에서 코드의 잉여가치를 낳는다. 그리고 이로부터 친자관계의 가계들 간에 지위의 차이가 생긴다.(여자를 주는 자와 취하는 자의 신분의 차이등) 그러므로, 원시사회기계도 전적으로 역사의 내부에 있다. 불안정하면서 언제나 보상되는 기능적 불균형과 동요하는 균형의 상태, 제도화된 갈등만이 아니라, 변화, 반란, 단절과 절단을 발생시키는 갈등 또한 지니고 있는 사회의 역동적이고 개방된 실재를 역사라고 부른다면, 원시사회들은 전적으로 역사에 속한다. 원시사회는 만장일치의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사회가 아님. 사회기계는 삐그덕거리고, 뒤틀리고 고장나면서, 작은 폭발들을 일으키면서만 작동한다. 역기능은 그 기능 자체의 일부를 이룬다. 


  3. 오이디푸스 문제

  결연관계는 친자관계로부터 파생되거나 연역되는 것이 아니다. 두가지 관점의 구별 要. 하나는 결연관계가 언제나 이미 친자관계와 더불어 구성된다고 보는 정치, 경제적 관점. 다른 하나는 신화적 관점. 이 관점은 어떻게 체계의 외연이 강도적인 최초의 친자관계의 가계들에서 출발하여 형성되고 제한되는가를 밝힘. 이때 최초의 친자관계적 가계들이란 인물들의 구별이나 성의 구별을 내포하지 않고, 전인격적이고 비개체적인 강도들만의 변이만을 내포한 것.(쌍둥이, 수컷이면서 암컷인 완벽한 충만한 신체, 알, 생물적-우주적 기억의 대상)  cf. 특이성들의 초험적 장. 
  이는 종합의 포함적이고 비제한적인 사용. 그러나 이것이 외연으로 펼쳐져서 인물의 구별과 부모의 호칭의 구별의 성좌위로 포개지고, 남성이거나 여성, 어머니이거나 아버지, 자식이거나 부모 등의 플러스나 마이너스의 기호로 전환하며(이것이든, 저것이든....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배타적 이접으로 전환), 결연관계가 자질과 관련된 관계가 되어, 이 관계가 외연적인 친자관계를 전제하는 만큼 이 친자관계가 이 관계를 전제하는 상황으로 이행함으로써 포함적이고 비제한적인 사용은 상실됨. 문제는 친자관계로부터 결연관계로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혹은 후자를 전자로부터 도출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강도의 질서로부터 외연의 체계로 이행하는 것.  
  도공족 신화의 예. 훔친 태반 속에 깊숙히 들어가는 유루구. 어머니와 하나가 됨으로써 어머니의 형제와 같음. 여기서 등장하는 어머니, 아버지, 아들, 어머니의 형제, 아들의 자매 등의 인물은 사실 인물이 아니라, 강도적 변이들, 포함적 이접들, 쌍둥이자 양성이 상태들. 우주적 알. 모호한 기호들, 포함적 분할들, 양성화된 상태들의 세계. 
  외연적 체계는 강도적 조건들에서 생겨나지만, 이것에 반작용하고, 이것들을 무효화하여 억제하여 신화적으로만 표현하게 한다. 동시에 기호들은 모호하기를 그치고 외연적 친자관계와 측면적 결연관계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름들, 호칭들은 더 이상 강도적 상태들을 가리키지 않고 식별가능한 인물들을 가리킨다. 식별가능성이 금지된 배우자로서의 어머니와 자매에게 정착한다. 강도적 배종의 친자관계의 기억은 억제되고, 펼쳐진 친자관계들과 이것들이 전제하는 결연관계들로 형성된 외연적 육체적 기억이 새겨진다. 
  따라서, 강도적 친자관계 속에서의 아들과 어머니의 융합은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이 아님. 거기서는 아들과 어머니는 구별된 인물이나 가족적 성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강도적 변주들이기 때문. “근친상간은 불가능하다. 근친상간이 가능하려면 아들, 자매, 형제, 아버지라고 하는 인물들과 이름들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근친상간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욕망되고 있다는 본성을 도출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강도적 배종의 흐름은 욕망을 표상하는 것이고, 억제는 바로 이 흐름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외연적인 오이디푸스 형상은 이 흐름의 치환되어져서 표상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근친상간 금지는 오이디푸스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구성하는 코드화되지 않은 흐름들, 또 이흐름들은 표상하는 것인 전인격적인 강도적 흐름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사회기계는 탈코드화된 흐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러한 강도적 배종의 유체를 억제한다. 이것이 코드화되지 않는다면, 기표의 연쇄는 아무런 코드도 형성하지 않고 모호한 기호들만을 발산한 것이고, 대지의 충만한 신체 위로 흘러가는 것은 기관없는 신체 위를 미끄러져 가는 코드화되지 않은 흐름만큼이나 사슬에서 플릴 것이다. 따라서 어떤 흐름들은 흘러가지만 다른 흐름들은 저지된다. 그리고 이는 식별가능한 인물들, 결정된 기호들, 배타적 이접들, 접속적 종합을 혼인에 관하여 사용하는 외연을 가진 체계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원시사회체는 사회체 전체의 극한과 부정을 함축하는 하나의 극한으로서 강도의 배종적 유체를 갖는다. 이는 절대적 탈코드화의 흐름으로서의 욕망을 표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사회체는 이 극한을 억압하기 위해서 이 ‘표상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 이 억제는 외연적 체계에 있어서 유체로부터 무엇이 지나가고 지나가지 않는지, 펼쳐진 친자관계에 있어서 무엇이 저지되고 저장되는지, 결연관계들을 따라 무엇이 움직이고 흘러서 체계적 코드화를 실현하는가를 결정한다. 오이디푸스는 억제된 표상, 즉 욕망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며, 억제하는 표상도 아니다. 그것은 욕망이라는 억제된 ‘표상하는 것’에 대한 억제하는 표상의 소급효과일 따름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극한이지만, 치환된 극한일 뿐이다. 

  4. 정신분석과 인류학

  야생적 가족들은 결연관계와 친자관계의 실천, 정치, 전략을 수행한다. 그러한 가족은 소우주가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 자매는 거기서 언제나 가족적 기능과는 다른 기능도 가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인척이 있다. 이 인척은 능동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을 구성하며 가족적 관계들을 사회적 장과 공외연적인 것이 되게 한다. 문제는 사회적 형성체를 가족 형성체 위로 포개서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가족 속의 개인은 사회적 역사적 경제적 및 정치적 장을 직접 제공한다. 이 장은 어떠한 정신적 구조나 감정의 성좌로도 환원될 수 없다. 
  느뎀부 족의 치료. 외견상으로는 거기서도 오이디푸스가 발견되는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분석. 정치적 경제적 장에 투여된 욕망의 분석. 오이디푸스적으로 보이는 출발점은 단지 서구인들을 위한 출발점. 그러나 느뎀 족의 분석은 사회의 조직화와 탈조직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이름이나 외조부의 이름에 포개지지 않고, 역사의 모든 이름들에 개방됨. 모든 것이 거세의 기괴한 절단에 투사되는 대신, 모든 것이 족장제, 가계, 식민화 관계들의 수천의 흐름-절단 속에 분산되어 있다. 
  식민화의 과정은 피식민자들을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 끌어 들여 닫으려고 한다. 그러나 피식민자들은 이에 저항한다. 오이디푸스는 또한 서구인 자신 속에 형성된 내부의 식민지이기도 하다. 서구인들은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치료를 정신분석적 치료보다 미개한 것으로 보지만, 느뎀 족의 치료는 오히려 정반대로 욕망을 사회적 장에 더 강렬하고 적절하게 투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인은 미개적인 전통과 오이디푸스를 대비시키지만, 오이디푸스 역시도 서구의 전통적인 규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 한번, 억제되는 것은 욕망하는 생산. 이 생산으로부터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으로 이행하지 않는 것이 억제된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에 혁명을 끌어들이기 쉬운 욕망의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억제된다. 오이디푸스는 어디까지나 코드화할 수 없는 것을 코드화하고, 코드를 벗어나는 것을 코드 속에 집어 넣는 하나의 방식, 혹은 욕망과 그 대상을 치환하고 이것을 덫에 빠지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문화주의자들과 상징주의자들의 공통공준(오이디푸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공통 공준: 1. 가족주의의 완고한 고수. 제도를 일차적인 것으로 보지만, 이 때 제도는 어디까지나 가족 제도로 이해됨. 그렇게 이해하면, 가족 콤플렉스가 제도들과 함께 변환다고 말하는 것이나, 오이디푸스가 중핵을 이루는 불변의 상수이고, 그 주위를 가족들과 제도들이 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 2.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는 오이디푸스의 강력한 거점. 이 거점에서 출발하여 도처에서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다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에 대한 공격은 가장 강한 고리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한다. 즉, 바로 가부장적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오이디푸스가 욕망하는 생산을 변형하고 치환하는 방식을 밝혀내야 한다. 어떤 점에서는 오이디푸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정당하지만, 이는 그것이 무의식의 불변적 상수나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만이기 때문.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극한이지만 이때 극한이라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욕망하는 생산이 사회의 절대적 극한이라면, 자본주의는 이를 끊임없이 내재화하고 상대화하는 상대적 극한이다. 사회형성체는 전력을 다해 욕망하는 생산의 혁명성을 억압하고, 극한을 회피하려고 한다. 이것은 실재적 극한이다. 또한 유루구의 신화에서 처럼 사회체를 침범하는 코드화되지 않은 흐름에 대한 상상적 극한이 있을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극한이라는 의미는 치환된 극한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보편적이라면 이는 그것이 모든 사회를 따라붙는 극한의 치환, 치환된 ‘표상된 것’이기 때문. 그것은 모든 사회가 그들의 공포이자 절대적 극한인 욕망의 탈코드화된 흐름을 변형하고 치환한 것이다. 
 분열분석: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짐. 해석하지 않고, 기계적 무의식의 용법을 분석한다. 즉, 욕망하는 기계들이 사회기계들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탐색한다. 몰적 기능주의와는 다른 분자적 기능주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연쇄와 연결들을 통해 어떠한 기계과 조립되고, 어떠한 흐름과 절단들이 다른 흐름들과 절단들과 관계되는지를 분석. 욕망이 사회적 장 속에서 현존하는 방식, 욕망이 사회적 장과 관계하는 방식을 분석. 분자적, 미의식적 무의식이 어떻게 몰적 형성체 속에 투여되고,  욕망의 부품들과 톱니바퀴들은 어떻게 사회기계 속에서 작동하고 기능하는가를 묻는다. 미시/거시의 이분법을 해체.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공외연성. 

  
  5. 영토적 표상 

  레비스트로스의 교환주의적 사회관 비판. 사회는 교환자가 아니라 등기자이다.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표시를 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부채로서의 결연관계는 맨 살에 새겨넣는 잔인한 기억술에 의하여, 생물적-우주적인 기억을 억제하고, 그 위에다가 말들의 기억을 강요. 그러므로 부채는 보편적 교환의 간접적 수단이 아니라, 원시적 등기의 직접적 결과.
  기계와 구조의 차이: 1. 교환주의적 구조주의는 친족의 구조에 있어서는 결연관계들이 친자관계들의 가계들로부터 파생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횡적인 결연관계들과 부채가 외연으로서의 체계에서 펼쳐진 친자관계를 조건짓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2. 구조주의는 외연적 체계를 물리적 체계가 아니라 논리적 결합장치로 간주. 그러나 그것은 그 중 어떤 것은 흐르게 하고 다른 것은 무효화하고 흐르는 것을 막는 물리적 체계이다. 3. 구조주의는 그 원리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균형, 등가, 혹은 동등성을 요청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균형은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자체에 내재적인 것이다. 불균형성은 이질적 요소들 속에 기초하고 있으며, 결연관계를 통한 경제적 정치적 거래에 의해 야기된다. 4. 구조주의는 통계학적으로 닫힌 폐쇄적 체계를 내세우고, 구조를 심리적 확신으로써 뒷받침한다. 그러나 결연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경험적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5. 구조주의는 사회적 재생산을 순환에 환원시키고, 사회체 위에서 나타나는 가시적인 객관적 운동에는 유의하지만, 이 운동을 등기하는 현실적 심급과 이 운동을 등기하는데 쓰이는 경제적, 정치적 힘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 차이들은 언제나 보편적 상수라는 일자로 환원하며, 강도적 연속체를 이루는 불안정하고 역동적인 힘관계들을 교환관계들의 상응성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를 정적인 균형체계로 인식한다. 예컨대, 레비스트로스는 구조가 피드백 고리를 함축하고 있어서 평형을 회복한다고 봄. 그러나, 기계적 생산에 의해 공급되는 차이는 불균형에 기초하며, 평형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기계의 출현은 붕괴, 대변동에 의해 추월되며, 다른 기계에 의해 대체되고, 각 기계는 특이적인 효과를 산출한다. 그것은 단지 형식적 균형과의 단절이 아니라 근본적인 존재론적 재전환과 관련된다.     
  야생적 형성체들은 구두에 의존. 그러나 그것은 문자의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님. 춤, 그림, 신체 위의 표식은 모두 하나의 문자체계. 그러나 야생적 형성체들이 음성에 의존하는 것은 음성에서 독립해 있는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 이 문자체계는 음성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영토적 표상의 세가지 요소:음성-청취, 손-표기, 눈-고통. 이 체계에서는 모든 것이 능동적. 
  니체: 등기, 코드, 표시라고 하는 원시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 어떻게 인간에게 집합체의 기억을 새길 것인가? 이 기억은 음성, 표시가 각인된 신체, 그리고 즐기는 눈이라는 복합체를 통한 부채에 의해서 형성된다. 부채는 교환이 취하는 외견이기는 커녕, 토지의 등기와 신체의 등기의 직접적 결과 혹은 수단. 
    
  





1999년 가을 수유연구실 강좌                      앙띠 오이디푸스 3장 6-8절: 전제군주기계 


  6. 야만적 전제군주기계

  새로운 결연관계와 직접적 친자관계. 신과의 직접적 친자관계. 편집증. 
  새로운 결연관계의 범주와 직접적 친자관계의 범주가 동원될 때마다 우리는 야만적 제국의 형성체, 즉 전제군주기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제국적 형성체는 모든 변천들을 가로질러 원시적 영토적 코드화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코드와 등기의 유형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 새로운 결연관계와 직접적 친자관계는 새로운 사회체를 입증하는 특수한 범주들로서, 원시기계가 결부시켰던 횡적 결연관계와 펼쳐진 친자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편집증을 규정하는 것은 이 투사능력, 제로에서 다시 출발하여 완벽한 변환을 객체화하는 능력. 이 주체는 결연-친자관계의 교차점 밖으로 뛰쳐나가 극한에 자리잡는다. 이 주체는 탈영토화된 지식의 주체. 이 지식은 주체를 신에게 직접 다시 결부시키고 또 그 민족에게 접속시킨다. 
  야만적 형성체: 동일한 류의 다른 형성체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원시적 야생형성체와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원시적 야생형성체의 자리를 빼앗지만, 원시적 야생형성체는 계속에서 야만적 형성체를 쫓아 다닌다. 맑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국가의 상위의 단위는 원시적 전원공동체의 기반 위에서 확립하며, 이 공동체들은 토양의 소유권을 보유한다. 한편 외견상의 객관적 운동은 잉여생산물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큰 작업들 내에서의 생산력을 국가에 결부시키며, 국가를 그 자체 전유의 집합적 조건의 원인으로 보이게 하므로, 이 운동에 비추어보면 국가야말로 토양의 진정한 소유자이다. 사회체로서의 충만한 신체는 대지이기를 그치고, 전제군주의 신체, 전제군주 자신 혹은 그의 신이 된다. 전제군주: 외견상의 운동의 유일한 준원인, 원천, 그리고 하구. 기표 연쇄의 유동적 이탈 대신에 이탈한 하나의 대상이 연쇄 밖으로 뛰쳐나감(cf. 라깡, 아키라). 흐름으로부터의 채취 대신에 모든 흐름이 하나의 큰 강으로 수렴되는데, 이 강은 군주의 소비를 구성한다. 중요한 것은 군주라는 인물이 아니라, 사회기계 차원에서의 심오한 변화. 영토기계 대신에, 국가라는 거대기계, 기능적 피라미드가 등장. 정점에는 전제군주. 측면에는 전달기관으로서의 관료기구, 저변에는 노동부품으로서의 마을사람들. 스톡은 축적대상이 되고, 블록은 공물형식으로 무한한 관계가 된다. 코드의 잉여가치는 전유의 대상. 
  야만적 형성체: 진화론적 발전이 아님. 원시영토기계 죽음은 외부로 부터 오고, 우연한 마주침의 역사. 그러나 동시에 원시영토기계의 죽음은 안으로부터도 올라온 것이기도 함. 결연관계의 친자관계로의 환원불가능성, 결연집단들의 독립성, 이 집단들이 경제적 정치적 관계들에 대해 전도적인 요소를 수행하는 방식, 원시적 등급의 체계, 잉여가치의 메커니즘, 이 모든 것이 이미 전제군주의 형성체들과 카스트 질서를 소묘하고 있었다. 
  야만적 형성체에서 말살되는 것은 횡적 결연관계와 펼쳐진 친자관계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결정적 특성. 이것들은 전제군주기계에 의해 다소 변용되고, 다소 정비되어 존속. 잉여가치의 질료를 제공하기 때문. 이것이 아시아적 생산의 특수한 성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토착의 전원공동체들이 존속하여, 생산하고 등기하고 소비하기를 계속. 국가는 이 공동체들하고만 관계. 영토적 가계기계의 톱니바퀴 장치는 존속하지만, 이제는 국가기계의 작동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들, 기관들, 인물들 및 집단들은 적어도 그 내속적 코드화의 일부를 보존하지만, 이 낡은 체제의 코드화된 흐름들은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초월적 통일체에 의해 초코드화됨. 낡은 등기는 그대로 존속하지만, 국가의 등기에 의해 그리고 이 등기 속에 벽돌처럼 끼워져 있다. 블록은 존속하지만, 끼워넣어진 벽돌들이 되어, 조종의 유동성 밖에 지니지 못한다. 영토적 결연관계들은 다른 결연관계들로 대체되지 않고, 다만 새로운 결연관계와 결연을 맺는다. 영토적 친자관계들도 다른 친자관계에 의해 대체되지 않고, 다만 직접적 친자관계에 합병된다. 친자관계의 스톡은 축적의 대상이 되고, 결연관계의 부채는 무한한 관계가 된다. 원시적 체계전체는 상위의 권능에 의하여 동원되고 징발되며, 외부의 새로운 힘들에 의하여 정복되어 다른 목적들에 봉사하게 된다. 
  국가는 주거를 고정시키는 영토 법령과 사소한 부채들을 폐기하는 해방법령에 의해 시작된다고 이야기된다. 영토 법령은 영토화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지를 분할하고 사람들을 새로운 제국적 등기에 종속시키는 탈영토화의 원리를 따른다. 대지에 부속된 기관들을 대지로부터 분리. 이 때 탈영토화는 대지의 기호를 추상적 기호로 대체하고, 대지 자체를 국가의 소유 혹은 국가의 가장 부유한 관리들의 소유 대상이 되게 한다. 부채들의 폐기는 토지를 재분배하는 수단, 그리고 토지문제를 혁명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영토기계의 등장을 막는 수단. 채권의 순환은 국가가 확립한 새로운 형태-화폐-아래 유지된다. 전제군주기계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에 대한 공포, 즉, 국가의 독점, 국가의 격자화와 그 마개로부터 뺘져나가게 될 생산의 흐름뿐만 아니라, 교환과 교역의 상업적 흐름에 대한 공포를 원시영토기계와 공유한다. 국가에 의한 상업의 통제. 국가장치의 유지비로서의 세금. 화폐와 세금의 전제군주적 유대. 국가에 의한 과세와 분배: 이와 같은 화폐의 순환은 부채를 무한하게 하는 수단. 따라서 국가의 주거와 영토성은 원시적 친자관계를 전제군주기계에 종속시키는 탈영토화 운동의 발단이 된다. 부채의 폐기 혹은 부채를 계산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원시적 결연관계를 스스로에게 종속시키는 국가에 대한 무한한 의무의 길을 열게 된다. 유동적인 부채 블록 대신에 무한한 채권자, 무한한 채권이 들어섬. 부채는 생존의 부채가 되고, 채권자가 아직 꾸어주지도 않았는데, 채무자는 끊임없이 갚아가는 때가 온다. 
  ∴ 전제군주기계의 두가지 상관적 양상: 1) 영토기계를 대체하고 탈영토화된 새로운 신체를 형성. 2) 낡은 영토성을 유지 존속시키고, 이것을 새로운 기계의 부품 혹은 기관으로 통합. 
낡은 결연관계들와 새로운 결연관계의 접속적 종합. 낡은 친자관계들을 직접적 친자관계들로 내뻗게 하여 모든 주체들을 새로운 기계 속에 결합시키는 이접적 종합. 국가에 의한 이러한 등기는 낡은 영토적 등기들을 새로운 표면 위의 벽돌들로 존속. 이로부터 소유권을 가진 상위의 통일체와 점유자인 공동체들, 초코드화와 내재적 코드, 전유되는 잉여가치와 사용되는 용익권, 국가기계와 영토기계라는 두 부분의 통접적 종합이 나온다.
  제국적 등기는 모든 결연관계와 친자관계를 재절단하고, 이것들을 연장시키며, 이것들을 신과 전제군주의 직접적 친자관계, 전제군주와 인민의 새로운 결연관계에 집중시킨다. 원시기계의 코드화된 흐름들은 이제 모두 하구에까지 밀려가, 거기서 전제군주기계에 의하여 초코드화된다. 이 초코드화야말로 국가의 본질을 이루는 조작이고, 국가가 낡은 형성체들과 연속하는 동시에 단절하는 일을 조정하는 조작이다. 여기에는 코드화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욕망의 흐름에 대한 공포감만 아니라, 또한 초코드화하고, 욕망을, 그것이 죽음 본능이라고 할지라도, 군주의 것이 되게 하는, 새로운 등기의 설립이 있다. 

  
  7. 야만적 혹은 제국적 표상

  전제군주의 이중의 근친상간. 먼저 자매와 결혼.(그 의미는? 신과 전제군주의 직접적 친자관계. 고로 전제군주가 맺는 결연관계는 자매와의 근친상간?) 그러나, 동족 결혼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종족 밖으로 나가서 결혼(낡은 결연-친자관계의 교차점 밖으로 뛰쳐나감. 원시영토기계와의 공간적 간극을 표시).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있는 동일한 규칙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근친상간을 명령하고 있다. 이족 결혼은 종족 밖의 남자들의 지위를 정립하는데 귀착한다. 모든 흐름은 이런 남자에게로 집중되며, 모든 결연관계는 이것들을 초코드화하는 이 새로운 결연관계에 의해 재절단된다.” 종족 밖에서의 동족 결혼은 이 영웅을 종족 내의 모든 족외혼을 초코드화하는 상황에 놓이게 한다(전제군주와 인민의 새로운 결연관계). 어머니와의 결혼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번에는 종족 속에 침투해 들어가서 발견하거나 되돌아가서 재발견하는 어머니가 문제이다. 이 영웅은 첫번째 결혼 후 자기의 종족 속에 침투해 들어가(어머니와의 결혼, 세대차, 즉 원시영토기계와의 시간적 격차를 표시) 펼쳐진 친자관계들을 직접적 친자관계(신과 전제군주의 직접적 친자관계)로서 재절단. 이 이중의 근친상간은 현존하는 모든 흐름들을 초코드화하고, 어떠한 내재적 코드도, 어떠한 밑바닥의 흐름도 전제군주의 초코드화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은 낡은 결연관계들을 종결시키고, 결연관계의 모든 부채를 자기의 부채가 되게 함으로써 새로운 결연관계의 기초를 다진다. 그 다음에 그것은 스톡의 일반화된 축적을 작동시킴으로써 새로운 결연관계로부터 흘러 나오는 직접적 친자관계를 구성. 

  표상체계 전체가 영토적이기를 그치고 제국적인 것이 됨.          
  심층에서의 표상 요소들의 이동: 제국적 형성체에서는 근친상간이 욕망의 치환된 ‘표상된 것’이기를 그치고 억제하는 표상작용 자체가 되어 있다. 전제군주가 근친상간을 하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은 억제-억압의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반대로 그 방식은 이 장치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이 장치의 부품들을 바꿀 뿐. 총계로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되고, 억제하는 장치에서의 새로운 경제, 새로운 표시의 각인, 경직성이 더해진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은 여전히 치환된 ‘표상된 것’의 자격으로서 억제하는 표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왕의 야만적인 근친상간은 욕망의 흐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초코드화하는 수단일 뿐. 

  표상작용의 표면에서의 변화: 음성과 표기법의 관계. 
  원시사회: 구두적. 표기법을 결여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표기법이 음성으로부터 독립해 있고 신체 위에 기호들을 표시하기 때문. 이 기호들은 음성에 대응하고 음성에 반응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율적이어서 음성에 그대로 동조하지 않는다. 
  원시사회에서의 음성은 서사시, 설화, 구전의 문화이고 언어는 축제를 조직하는 능력, 즉 조상과 부족의 역사, 길운과 축제, 영웅적 행위와 고난을 회상하고 축제의 긴 밤 동안 청중을 사로잡는 힘과 관계됨. 반면, 표기는 회화적인 능력과 관련하며, 신체의 표면(동굴, 벽, 몸)에 각인하는 행위. 이 각인은 음성과 연결되지 않는다. 표기의 각인 능력, 회화능력은 표의 문자나 의미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손의 기교 및 감응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
  반면, 야만적 제국사회에서 음성과 문자표기의 관계가 매우 변화. 글(ecriture)을 만드는 자는 전제군주. 표기법을 글이 되게 하는 것은 제국적 형성체. 입법, 관료제, 회계, 징세, 국가의 독점, 제국적 정의(justice), 공무원의 활동, 사료편찬...이것들은 모두 전제군주의 수행행렬 속에서 적힌다. 
  문자의 기원은 전제군주기계의 성립과 때를 같이 하며, 입법, 관료제, 회계, 징세, 국가의 독점, 법률을 위해서 고안되고, 이 속에서 모든 것은 글로 쓰여진다. 야만적 문명은 글로 쓰여지는 문명이지만 음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표기법의 체계가 독립성과 고유한 차원들을 잃고, 음성에 그대로 동조하고, 음성에 종속됨. 이 체계는 탈영토화한 추상적 흐름을 이 음성으로부터 추출하여 글의 선형적 코드화 속에 이 흐름을 보존하고 반향시킴. 요컨대 표기법이 음성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또 표기법에 의존하게 되는 천상 혹은 피안의 말없는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이다. 
  
  원시영토기호와 제국적 표상의 차이: 
 -원시영토기호는 다양한 접속 속에 있는 욕망의 위치. 선형적 종속을 모름. 그것은 리듬이지 형태가 아니며, 지그재그이지 직선이 아니며, 가공물이지 관념이 아니며, 생산이지 표현이 아니다. 음성은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하고 있는 신체들 속에서 반향되고 무엇인가를 되살리며, 회상시키고, 청중 속에서 공명하며 청중과 결합한다. 표기는 머리 속에 있는 관념을 표현하거나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각인하며, 표지나 연장을 만든다. 원시영토기계에서 음성(횡적인 결연관계 속에서 구성된 단어들의 표상)과 표기(펼쳐진 친자관계 속에서 확립된 사물의 표상)라는 이질적 요소는 서로 작용하고 반작용한다. 이 두 요소의 이질성과 간극은 눈이라는 시각적 요소에 의해 보완된다. 손이 신체에 각인할 때 눈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움칫하면서 고통을 감지한다. 그러므로 눈은 바라는 보되, 둘러보고, 탐색하고, 파악하지 않는다. 원시인의 각인은 생살을 파고들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 표지는 기나긴 축제에서 이루어진다. 눈은 기호를 읽는 것이 아니라, 표지를 보고, 움찔하면서 고통을 감지한다. (함축의 체제. 잔인성의 체계. 음성-청취, 표기-신체, 눈-고통이라는 세변을 가진 삼각형. 이 삼각형에서는 단어가 본질적으로 지시하는 것이지만, 표기 자체가 지시되는 사물과 함께 기호를 이루며, 또 눈은 낱말에서 표기에 옳아가, 표기의 고통에서 낱말의 가시성을 끌어내고 측정. 이 체계에서는 모든 것이 능동적이고, 작용을 받고 반작용한다. 모든 것이 사용되고 있고 작동하고 있다. 영토적 기호들의 연쇄는 한 요소로부터 다른 요소로 끊임없이 비약한다. 즉 모든 방향으로 발산되며, 채취할 흐름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탈을 생기게 하며, 이접들을 포함하며, 잔여물들을 소비하며, 잉여가치들을 추출하며, 단어들과 신체들과 고통들을 접속시키며, 공식들과 사물들과 정동들을 접속시킨다. 음성, 표기, 눈을 언제나 다성적 용법 속에서 함축.)
 -전제군주기계와 제국적 표상: 1)표기가 음성을 충실히 따르고, 음성에 포개져서 글이 됨. 동시에 그것은 더이상 결연관계의 음성으로서 음성을 이끌어내지 않고, 새로운 결연관계의 음성으로서 음성을 이끌어낸다. 이 음성은 피안의 허구적 음성인 바, 직접적 친자관계로서의 글쓰기의 흐름 속에서 표현된다. 전제군주의 표기는 음성에 종속하는 동시에, 음성을 종속시키고 음성의 자리를 빼앗는다. 음성은 더이상 노래하지 않고, 명령하고 공포한다. 표기는 더이상 춤추지 않고 신체에 생기를 주기를 그치고, 판이나 돌이나 책에 적혀 굳혀진다. 눈은 읽기 시작한다. 마술적 삼각형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기 보다는 피라미드의 저변이 되어 벽돌로서 존속. 이 피라미드의 세 측면은 음성적인 것, 표기적인 것, 시각적인 것을 전제군주의 현저한 통일체로 수렴시킨다. 더 이상 함축의 체제가 아닌 종속의 체제. 따라서, 2) 표기의 음성위로의 포개짐은 초월적 대상을 연쇄 바깥으로 비약해나가게 함. 이 초월적 대상은 연쇄 자체가 거기에 의존하고,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선형화되는 말없는 음성이다. 
  눈은 종이 위의 글자를 단지 볼 뿐. 눈은 종이의 조직이나 각인의 상처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단지 스쳐지나가는 추상적 패턴의 흐름 앞에서 수동적일 뿐. 원시사회에서 음성은 듣기와 상호보완적. 음성은 말하고, 듣고 대답한다. 그 움직임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리듬을 타면서 노래하고, 반향한다. 이제는 초월적인 음성이 다성적 기호들의 전체 연쇄로부터 이탈하며, 글을 통해 명령하고 공표한다. 이제 표기는 그림이나 표지, 각인이 아니라 문자이며, 언어적 법칙 및 이 법칙을 규제하는 전체 전제국가의 법칙에 따라서 의미를 나타낸다. 사람들은 이러한 법칙에 순응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그에 따른다.     
  기표제국주의: 포개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집합, 이탈한 초월적 대상과 이 대상으로부터 이끌어지는 연쇄의 선형화. ‘그것의 용법은 무엇인가’라는 작동과 가능, 용법에 대한 질문→‘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의미에 대한 질문. 언제나 이탈가능한 연쇄의 선분들 대신에, 연쇄 전체가 거기 의존하는 하나의 이탈한 대상. 직접적으로 실재적인 다성적 접속 대신에 하나의 선형성이 거기서 나오는 초월자를 형성하는 일대일 대응관계의 수립. 영토적 연쇄망을 구성하는 비기표적 기호들이 아니고, 모든 기호가 균일적으로 하나의 글쓰기의 탈영토화된 흐름으로 흐르는 전제군주적 기표.         
  기표란 그 자신 탈영토화한 기호. 문자가 된 기호. 욕망은 더이상 감히 욕망하지 않는다. 욕망은 욕망의 욕망, 전제군주의 욕망의 욕망이 된다. 전제군주와 전제국가의 초코드화에 포획된 욕망.  
  전제군주 기표의 효과: 전제군주 기표는 그 효과로서 영토의 연쇄를 초코드화한다. 결연관계의 모든 부채는 새로운 결연관계의 무한한 부채로 전환되고, 모든 펼쳐진 친자관계는 직접적 친자관계에 포섭된다. 함축의 체계 대신에 들어선 종속의 체계와 의미작용의 체계. 
  제국적 표상이 영토적 표상보다 더 온건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기호들은 이제 맨살에 등기되지 않고, 돌, 양피지, 돈, 명부 위에 등기된다. 눈은 이제 더이상 고통의 광경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끌어내지 않는다. 눈은 감지하기를 그친다. 오히려 눈은 예방하고, 감시하며, 잉여가치가 전제군주기계의 초코드화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앞으로  새로운 XX국가의 시민은 매달 X량의 금화를 세금으로 내어야 한다”는 글을 읽을 때, 이 글을 보는 주체는 이 기호들이 종이 위에 표기될 때의 고통을 느끼면서 눈을 움찟하지 않는다. 그 주체는 이 기호들이 지닌 의미와 관계를 맺는다. 그 의미들을 표상하는 이 문자들은 초월적이며, 비인격적이며, 간접적인 음성과 제휴한다. 이 음성은 입법, 관료제, 사법체계, 회계 등에서 수행되는 바의 글쓰기에 의해 표현된다. 역으로 이 초월적 음성으로부터 이 모든 기호들의 연쇄가 선형적으로 이끌려져 나온다. 연쇄들 전체가 연쇄 바깥으로 이탈해 나온 신의 음성 및 신과 직접적 친자관계를 맺는 전제군주의 초월적 음성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그는 언어의 의미를 규제하는 전제군주와 전제국가의 명령에 종속되며, 모든 코드를 초월적인 정점에 의해 초코드화하는 메커니즘 속에 포섭되고 감시된다.    
   그러므로, 이 체제는 온건하지 않다. 공포의 체계가 잔인성의 체계 대신에 들어선 것. 옛 잔인성은 존속하지만, 국가장치 속의 벽돌이 된다. 이 국가장치는 이 잔인성을 때로는 조직하고, 때로는 묵인, 제한하여, 자기의 목적들에 봉사하게 하며, 더 끔찍한 법률의 상위의 통일체 아래 포섭한다. 법률의 본질은 초코드화하는 것이고, 신체의 새로운 고통의 기원이다. 


  8. 원국가

  원국가의 가설. 국가는 아주 완벽하고 완성된 채로 항상 존재해 왔다.
  국가는 생산력의 발전이나 정치적 힘의 분화 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대규모 프로젝트를 떠맡고, 잉여를 구성하며, 이에 상응하는 공적 기능들을 조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국가. 국가는 일거에 제국적 형식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며, 점진적 요인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추상적 기원으로서의 국가. 모든 국가가 그렇게 되고자 욕망하는 영원한 모델.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하나의 구별적 형성체가 아니라, 기반을 이루는 형성체이자 모든 역사의 지평을 이루는 것. 매번 더 진화된 국가는 양피지처럼 전제군주적 등기를 덮고 있다. 망각과 회귀. 고대의 도시국가, 게르만 공동체, 봉건제는 대제국을 전제하며, 이것들의 지평을 이루는 원국가와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형태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자기들의 새로운 구별적 결정들의 요구들을 참작하여 가능한 한 원국가를 재구성하는 것. 
  구체적인 시초와는 다른 추상으로서의 전제군주 국가. “초코드화의 기계를 실현하는 재영토화의 구조.” 국가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구별적인 다양한 형태를 취하지만 도처에서 원국가를 새로운 사물들의 상태에 거듭 불어넣는다. 이 추상은 언제나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 잠재성에 침식되어 있지만, 그 추상에 구체적 존재를 부여하는 후속 국가들 속에서 다시 튀어오르고 되돌아온다.   국가-되기의 두가지 양상: 1)물리적 체계를 형성하면서 더욱더 탈코드화된 사회적 힘들의 장 속에 그것을 내재화하는 것. 2)형이상학적 체계를 형성하면서 더욱더 초크드화하는 초지상적인 장 속에 국가를 정신화하는 것.
  cf, 자본주의 국가: 탈코드화된 흐르들의 통접, 이 흐름들의 미분적 관계 및 이 흐름들의 분열들은 하나의 전면적 조절을 요구하는데 이 조절의 주요기관이 국가. 흐름들의 조절자. 자본주의 국가는 초월적 통일체로부터 사회적 힘들의 장에 내재하게 되고, 이 힘들에 봉사하며, 탈코드화되고 공리계화된 흐름들에 대해서 조절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현대 국가의 기능이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한 흐름들을 조정하는 것이라면, 이 기능의 주요한 양상들 중의 하나는 재영토화를 행하고, 그리하여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사회의 공리계의 모든 극단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을 막는 일. 
 근대국가는 내재적으로 되기를 완수하고 코드와 초코드화를 공리계로 대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 오직 하나의 국가, 아시아적 전제군주적 형성체인 원국가 밖에 없었고, 지금도 이 국가만이 있다. 근대적 사회 공리계 조차도 두 극 중의 하나로 원국가를 소생시킴으로서만 작동. 자본주의는 재영토화하기 위해 원국가를 이용한다. 


99 가을 수유연구실 강좌                                                  안티 오이디푸스


8강(10.6) 분열분석의 임무: 4장 4-5절 




  분열분석의 부정적, 파괴적 임무 
   
  안티(Anti)? 오이디푸스(Oedipus)?...오이디푸스에 대한 반대, 대항, 적대? 
  그렇다. 들뢰즈?가따리의 작업은 무의식에 대한 청소로부터 시작된다. 분열분석이라고 명명된 작업의 적극적이고 긍정적 과제는, 의식과 욕망에 거짓 이미지를 부여하고 욕망의 흐름들을 치환하는 ‘삼각형화’에 대한 파괴, 무의식이 숨쉬고 있는 모든 모공을 틀어 막고서 질식시키고 있는 마개의 제거와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삼각형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로운 접속에 개방된 채로 도처에서 새어 나가고 있는 욕망의 흐름들을 아빠-엄마-나라는 삼각형으로 몰아 넣으면서 흐름을 차단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이로써 욕망하는 생산은 가족적-오이디푸스적 영토에 가두어진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들의 가족드라마가 부르주아의 사유화된(privatise) 가족 속에서 다시금 연출된다. 폐위되고 쫓겨난 왕이 아빠-엄마-나의 핵가족 속에서 고안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그리고,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라인의 자리에 신화, 비극, 꿈, 환상이 난입하여 생산과정을 중단시킨다. 
  반대로,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가족의 소우주로 축소될 수 없는 주체 생산의 사회적 배치에서 출발한다. 욕망하는 생산은 사회적 생산과 공외연적인 것이며, 가족은 애초부터, 그리고 언제나 사회적 장에 열려져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편으로서만 존재하며, 무의식을 표상할 수 있는 동시에 집단의 갖가지 행위자들을 그 속에 표상할 수 있는 하나의 형상 속에서도 하나의 구조 속에서도 절대로 조직되는 일이 없다. 반대로, 그것은 마치 몸과 몸이 부딪칠 때처럼 항상 이 행위자들과 접촉하고, 대결하고 대립하거나 화해하는 단편들로 폭파된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의 요소들, 즉 병사, 경관, 점령자, 협력자, 반체제주의자, 저항자, 고용주 및 고용주의 처와 직접 대결하고 있으며, 직접 결부되어 있다. 이들은 매 순간 모든 삼각형화를 깨부수고, 상황 전체가 가족적 콤플렉스에 포개지고 그 속에서 내면화되는 것을 방해한다. 요컨대 가족은 설사 더 큰 원(circle) 속에 등기되어 이것을 병합하고 표현한다 해도, 자율적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하나의 소우주가 아니다. 가족은 그 본성상, 중심을 떠나 있고, 탈중심화되어 있다.”(AO: 115-116) 
  그런데, 정신분석학은 닫힌 소우주로서의 가족적 관계를 언제나 처음에 있는 것으로서 설정하고, 사회적 관계들은 <나중에> 나타나는 것, 피안처럼 저 너머에 있는 것으로서 다룰 뿐이다. 이것은 언제나 오이디푸스와의 관계에서, 오이디푸스의 틀 안에서 해석된다. 먼저 가족이 있고, 사회적 구조나 상징적 질서는 나중에 나타나서 가족 위로 포개짐으로써 가족과 일대일 대응관계를 맺는다. 이 일대일 대응관계 속에서 해석된 사회적 관계들은 여전히 가족적 요소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고용주, 교사, 군대의 지휘관 등은 모두 아버지의 형상 위로 포개진다. 사회적 규범과 법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환원된다. “도처에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를 재발견하는 등가적 체계에서는 집단적 행위자들이 부모의 형상의 파생적 혹은 대용물로 해석되는 것이 강요된다.”(AO:120) 
  이에 대해서 들뢰즈 가따리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다시금 대비시킨다. “가족은 가족적인 것이 아닌 절단들에 의해여 절단된다: 파리 꼬뮌, 드레퓌스 사건, 종교와 무신론, 스페인 전쟁, 파시즘의 대두, 스탈린주의, 베트남 전쟁, 68년 5월... 이런 것들이 모두 무의식의 복합체들을 형성하는데, 이것들은 늙어빠진 오이디푸스보다 훨씬 더 큰 영향들을 끼친다.”(AO: 116)   
  그러나 이와 같은 유물론적 정신의학의 정식은 단순히 반-가족주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 비극과 신화적 요소들을 부르주아의 가족 무대에서 재연출함으로써 무의식을 끊임없이, 그리고 한결같이 가족적 콤플렉스 속으로 몰아 넣고 동여매는 정신분석학의 이 기묘한 ‘오진’(誤診)에 맞서 사회적 역사적 생산의 무의식적 투여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것은 가족에 의해 병합된 오이디푸스적 표상적 무의식을 깨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분석을 통해 생산적 무의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제 무의식에 대한 정의도 변한다. 프로이트에게서 무의식은 언제나 어린 시절의 좌절된 소망과 관련된다. 그러한 어린시절의 기억은 억압되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고 망각되는데, 이러한 침전물이 바로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들뢰즈 가따리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억압되어 있는 기억의 문제도, 환상의 문제도 아니다. 무의식은 만들어야 할 실체, 흐르게 해야 할 실체이자, 정복해야 할 사회적 정치적 공간이다.”(D:96) 즉, 무의식은 물질적인 흐름이자 실재적인 생산으로서의 욕망, 다른 신체들과의 관계속에서 분비되고 구성되는 힘, 정동, 순수한 강도들과 관련된다. 이는 사회적 배치 속에서 순환하며, 또 직접적인 사회적 정치적 힘으로 투여되어 기존의 배치를 변환하고 새로운 배치들을 창조한다. 이를 가따리는 ‘무의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에 의하면, “만약 사람들이 무의식이 과거에 묻힌, 의미화 연쇄 형태로 결정된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면, 몇몇 열쇠만으로도 무의식을 구성하는 기질이나 수학소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오로지 기표에 의해 구조화되지 않고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횡단-기호적 무의식에서, 새로운 대상들, 새로운 현실들을 다루는 능력을 지닌 무의식에서 출발한다면 모든 것은 변합니다. 무의식은 건설되어야 하고 창안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미래를 구성하는 잠재력으로서의 무의식을 끊임없이 과거 속의 엄마-아빠-나로 회귀시킨다. 이 회귀의 효과는, 새로운 변이의 잠재력으로서의 무의식이 실재적인 사회 정치적 실천으로 투여되는 것을 차단?분쇄하고, 밤 낮 아빠-엄마라는 대답을 끌어냄으로써 무의식을 나만의 내밀한 가족적 영토 속으로 식민화한다. 이는 정신분석학자들에 대한 이리가레(Irigaray)의 다음과 같은 통렬한 비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만일 무의식이 특정한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되는 검열들, 억압들의 결과인 동시에 또한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 아직 오직 않은 것의 저장고라면, 당신들의 반박이나 검열, 몰인식은 미래를 과거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아직 예속되지 않은 것을 이미 예속된 것으로, 언어의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언어가 이미 벙어리로 만들거나 침묵시킨 것으로 계속 환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아마도 무의식적으로?-현존하는 질서의 산물들이자 수호자들, 이러한 질서가 마치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질서인 것처럼 존속하는 것을 보증하는 검열과 억압의 대리인들이 아닌가? 이미 발생한 것 이외에는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말이나 욕망, 언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부장제적 담론의 일인 독재체제 이외에는 당신들에 의해 권한이 부여된 어떤 문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는 검열과 억압의 대리인들이 아닌가?” 뤼스 이리가레, 권현정 역, ?정신분석학의 빈곤?, ?성적차이와 페미니즘?, 공감, 1997, p.225.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이디푸스라는 불변의 좌표축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형성물일 뿐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신체적이고 사회적 관계들은 오이디푸스적 심리적 관계들 이후에 생기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다루어질 뿐이지만, 유물론적 정신의학에서는 반대다. 언제나 사회적 장 속에서 다른 신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무의식과 욕망의 흐름들이 있는 것이고, 이 흐름들은 사회적 실천과 행위에 직접적으로 투여됨으로써 자신의 잠재력들을 끊임없이 현행화한다. 오이디푸스는 변이를 구성해나가고자 하는 이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힘의 집합적이고 혁명적인 투여를 봉쇄하여, 오이디푸스 좌표축 위로 포개 버림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무의식을 가족 삼각형 속에 가두어 버리는 반동(反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하는 생산을 치환하고, 욕망하는 생산에 반동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의식은 이러한 오이디푸스적 해석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삼각형으로부터 빠져 나가 도처에서 삼각형을 폭파한다. “무의식은 언표의 사적 소유 뿐만 아니라 욕망의 사적 소유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욕망은 항상 영토외적이며, 탈영토화되고 탈영토화하며, 모든 장벽 아래 위로 빠져 나간다.”(RM: 23) 그러므로,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오이디푸스와 같은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적 도식의 투입에 맞서 지속적인 전투를 수행해 나가면서 이미 소묘되고 있는 탈영토화의 선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즉, 균열과 저항의 지점들을 발견하고, 집합적인 정치적 실천과 언표행위의 배치를 구성 속에서 그 각각의 지점에 대한 욕망의 정치적 개입을 가속화 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가족주의, 정신분석
  
  정신분석은 어떤 경우에도 자본주의와 가족주의를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하는 생산을 억압하고 욕망의 가족주의적 투여로의 치환을 작동시키는 한에서, 혁명적 욕망을 보다 강력한 투여로 대체함으로써 절대적 극한을 끊임없이 내재화, 상대화하는 자본주의와 보조를 맞춘다. 
  자본주의는 흐름들의 일반화된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통접 위에서 구성된 유일의 사회체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한 손으로 탈코드화한 것을 다른 손으로 공리계화하면서 흐름을 자본의 신체에 결부된 상태로 유지한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의 절대적 극한을 향해 치닫는 절대적 탈영토화의 흐름들을 차단하고, 이 절대적 극한을 자본주의 자체의 상대적이고 내재적인 극한으로 대체한다. 이는 모든 사회기계들을 잉여가치 법칙을 실현하는 착취기계에 연결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욕망하는 기계를 사유화함으로써, 즉 욕망하는 생산의 집합적이고 사회적인 투여를 사적인 투여로 대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런 식으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는 자아, 가족, 그리고 사회질서에 의한 욕망의 전유와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RM: 19)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는 사회기계 속에서 득실거리고 있지만, 항상 감시당하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보내지고 구획된다.(RM: 21) 
   한편, 자본주의는 경제적 영역 안에서, 계급 지배를 통해서 실행될 뿐만 아니라, 가족, 학교, 군대와 공장등 모든 권력 장치와 권력의 테크놀러지를 통해서 실행될 뿐만 아니라, 기호, 발화, 담론등의 모든 배치로부터 집합적 투여를 제거하고, 말하고 쓰고 표현하는 모든 행위들을 승인된 전문가나 대표자에게 위임함으로써 이들이 그 행위들을 독점하는 양식 속에서도 실행된다. 특정인에게 권력이 위임되고, 그 인물이 집단을 대표해서 발화함으로써 언표(言表)를 개인화하는 것은, 비단 거시정치와 정당 및 의회제도, 미디어 정치와 조합정치의 수준에서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학자의 진료실과 침대 위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욕망하는 생산의 내재적 유토피아는, 집단적 배치 속에서 협력과 자율적 결정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관점들이 통제의 목적을 갖지 않는 네크워크의 창안 속에서 경직된 집중화와 위계화를 배제한 공동의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욕망의 혁명적 잠재력을 끊임없이 현행화함으로써 기존 질서의 전복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가의 침대 위에서는 이러한 욕망의 집합적 정치적 투여가 봉쇄될 뿐이다. 분석자는 권위있는 해석자로서 환자의 무의식을 가족주의적 틀에 꿰맞추고 이 해석을 강요할 뿐인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공식적으로 인가된 스테레오타입에 욕망을 순응시키고, 이런 식의 상투적인 해석적 코드로 모든 삶의 경험을 규제한다. 그것은 언제나 다성적(多聲的, polyvoque)인 욕망의 흐름들을 하나의 대문자 진리, 하나의 말씀, 하나의 이성 속에 가두고, ‘고아’(孤兒)인 무의식에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가족적 형상을 분배하고, 무의식의 생산적 힘을 거세하여 결여를 분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무의식과 언표행위의 집합적 성격은 사라지고, 나라는 자아와 이 자아의 내밀한 소우주로서의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이 분석자-피분석의 위계적 질서 속에서 재생산된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이런 식으로 욕망을 각자의 작은 영토 속에 가두고 억제하는 것은, 욕망을 사적인 것으로 치환하여 욕망의 혁명적 투여를 막는 한에서 자본주의의 필사적인 억압-억제의 메커니즘의 부품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욕망으로의 모든 접근을 차단하는 가족주의적 거세. 모든 욕망 형태를 특수한 형성체에 불과한 가족으로 환원하는 것.  
  한편,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가족주의는 명백히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정신분석학은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의 보편성을 그 금지의 보편성으로부터 곧바로 도출해낸다.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입증되는 무의식의 진리이며, 이 진리는 전역사적(前歷史的) 신화를 통해서도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오이디푸스가 근원적 욕망인 것은 그 금기의 보편성에 의해 입증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기로부터 금지된 것의 본성을 결론으로서 도출하는 것은 욕망의 치환과 왜곡에 다름 아니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야생인이나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욕망하는 기계들을 형성하고 작동시키며, 흐름들을 흐르게 하고 절단을 행하는 것이다. 법은 우리에게 말한다. 너는 어머니와 결혼해서느 안되며, 아버지를 죽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 순종적인 주체들은 우리들 스스로에게 말한다. 아!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었구나!...사람들은 마치 억제로부터 억제된 것의 본성을, 또 금지로부터 금지되고 있는 것의 본성을 직접 결론지을 수 있는 듯이 행동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전형적인 거짓추리가 있다. 왜냐하면, 법률이 욕망 혹은 본능들의 질서 속에 완전히 허구적인 어떤 것을 금지하고는 [그 법의 지배를 받는] 주체들이 이 허구에 상응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그 주체들을 설득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AO: 136)   
  나아가서 오이디푸스적 욕망은 분명한 역사성을 갖는 것이다. “엄마는 멀고, 아버지는 무관심했으며, 아이들은 일찍부터 성인으로 취급되고 종종 도제로 보내지던 중세와 달리, 근대의 부르주아 가정은 분리되고 고립되며, 내밀성의 공간 안에서 부부 및 아이와의 근접성이 증가한다. 19세기의 의사나 위생가들의 눈에 비친 그 근접한 내밀성의 공간 안에는 갖가지의 성욕이 가득차 있으며, 의학적 시선의 대상이 된 위험한 병적 성욕이 넘쳐 흐르고 있다. 이제 근접성은 넘쳐흐르는 숱한 병적 성욕이 불꽃을 일으키며 접속되기에 충분한 공간으로 간주된다. 19세기 위생가들이 끔찍하게 두려워햇던 것이 근친상간이었으며, 이 때문에 부모의 방과 아이의 방,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방을 별도로 분리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공간 분할의 원칙이 되었다. 아이들의 근본적 욕망으로서의 오이디푸스가 발견되고, 끊임없이 금지의 형태로 선동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가 아닐까?” 박태호,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 1998년 8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 논문, p.267.
 모든 욕망의 가족으로의 재영토화는 가족의 사유화(privatisation),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분리를 수반하는 욕망의 사유화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정신분석은 모든 욕망을 가족주의화함으로써 가족이라는 사적 영토에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적용시키는 기술을 실행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분석학이 이미 확립된 질서의 수호자로서 기능한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자본주의는 탈영토화 운동에 대한 재영토화를 수행하고, 낡은 표상들을 사적 소유와 사적 가족의 형태로 재건하여 이용한다. 정신분석학의 작동은 정확히 이러한 재영토화의 과정을 촉진한다. 신화와 비극은 이제 사적인 인간의 꿈으로서 다루어지고, 사적인 재영토화의 표현으로서 거론된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들의 드라마가 부르주아의 사유화된(privatise) 가족, 아빠-엄마-나의 핵가족 속에서 고안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빠-엄마라는 대답을 되풀이하게 하고, 욕망의 생산, 등록, 소비를 모두 삼각형화함으로써 욕망의 탈영토화하는 흐름들을 가족 위로 재영토화한다.     


  구조, 결여, 대문자 기표,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권력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무의식은 전적으로 긍정성이며, 정신분석이 그것에 투입한 표상체계에 의해 결정되거나 통제되지 않는 흐름 및 강렬도 기계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전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것에 부정성과 결여를 끌어들인다.(RM: 40) 전이는 분석과정에서 환자가 자신에게 중요했던 경험양식을 분석가에게 전치시키는 것이며, 분석자는 그 속에서 피분석자의 숨겨진 충동, 무의식 속에 감추어졌던 기억과 원망들을 간취하여 이를 재표상, 재경험토록 한다. 이 과정에서 피분석자가 심하게 저항할 수록 분석자는 그것을 심오하게 억압되어 있는 결정적 진실로 간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이 자체가 분석자의 표준화된 표상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는 한에서 그것은 피분석자의 무의식에 대한 억압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피분석자의 무오디푸스적 욕망은 분석자의 오이디푸스적 해석에 저항한다. 그런데, 이 저항을 해석자는 진실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이고, 더욱더 기존의 해석의 정당성을 확신한다. 그것은 진정한 발화의 조건을 철수시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신들이 느끼는 대로, 자신의 열정으로 직접 말하고 표현하면서 욕망의 사회정치적 투여를 실천하고, 타자들과의 공생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정신분석학은 유일한 해석과 언표행위의 권위를 분석자 개인에게 위임토록 하면서 피분석자들을 소외시키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전이 과정에서 무엇이 전치되고 있는가? 다시 한번 그것은 욕망하는 생산의 가족주의적 치환이자, 긍정적 무의식에 대한 부정과 그것의 결여로의 치환이다. “정신분석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착이요, 마약이요, 욕망의 현실을 비롯하여, 현실과의 근본적 단절이요, 하나의 나르시시즘이요, 끔찍한 자폐증이다. 정신분석학은 그 극한에 있어서 더 이상 어떠한 현실에 비추어서도 측정되지 않고, 더 이상 외부에 대해 자기를 열지도 않는다. 그렇지 않고 그 자체가 현실의 증거가 되고, 자기 자신의 증거를 스스로 보증한다. 거기서의 현실은 결여로서의 현실이요, 외부와 내부, 출발점과 도달점 모두 이러한 현실로 되돌아오게 하기 마련이다.(AO: 373) 이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자들에게 던지는 이리가레의 비판적 질문을 다시 참조할 수 있을 듯하다. “당신들의 피분석자가 말하기 시작하기 전에 당신들의 귀는 적절하게 틀지워지고 구획되어 있다는 것을, 적절한 지점에서 열리거나 닫힌다는 것을, 편리하게 망가져 있다는 것을, 정통적인 보철기구에 적당히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혹은 그녀의 독특한 것은 당신들의 보편적인 것의 정당성을 입증해주는 증거에 불과하다...이미 확립된 체계-이미 표현되고, 위치지어지고, 고정된 하나의 코드-가 당신들이 피분석자의 언어로부터 기대하는 것 또는 듣는 것을 결정한다면, 실천 속에서 그러한 체계는 어떻게 피분석자의 욕구-욕망들을 끌어모으고 그것들을 형식적인, 비어있는 엑스터시(ec-stasy)로 유예시키지 않을 수 있는가?” 이리가레, 앞의 책, pp.227-229.
 
  분석자는 피분석자가 말하기 전에 이미 피분석자의 욕망으로의 모든 접근을 자기 식대로 제한하고 구획짓는다. 그것은 지배적인 사회적 규범,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모델을 전제하고, 욕망에 대한 표준화된 표상 체계 또한 전제한다. 그리하여 피분석자를 이 표준적 모델과 표상적 체계로 끊임없이 적응시키고, 그것에 복종케 한다. 그것은 피분석자에게 법률이 금지하고 있는 허구적 욕망을 진정한 욕망으로 받아들이게끔 강요하고 나서, 그러한 금지된 욕망에 대한 죄의식과 죄책감, 불안감을 심어 놓는다. 그러한 콤플렉스의 극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극복이 아니라, 그 죄책감의 내면화이다. 초자아에 의한 이드의 제어와 승화의 개념을 통해 제시되는 것은 결국 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들이고, 거세되고 결핍된 존재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무한히 감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성에게 있어서는 남근에 대한 자기의 욕망을 남편과 아이에 대한 욕망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남성에게 있어서는 수동적 태도를 취하여 아버지의 대리물인 사회적 권위에 굴복하는 것. 이렇듯 정상적/표준적 주체성은 예속화된 주체성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정신분석학은 오이디푸스를 벗어날 수 없게끔 만든다. 욕망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갇혀 있다가, 그 컴플렉스를 지나쳐서는 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대리인에 의한 금지와 억압에 복종하여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하고 죄책감을 내면화한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유아기때부터 오이디푸스적 틀 속으로 분류되어, 욕망을 감시당하고 훈육당하게 된다.    
  기존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정신분석학.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메커니즘이자 권력으로서의 정신분석학. 그것은 한편으로는 온갖 치료기술과 마케팅 속에 잠겨서 확장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학과의 동맹을 통해 저 높이 있는 프로이트로 회귀를 통해서 경직된다.(D: 100) 우선, 정신의학은 엄마-아빠-나라는 가족의 성좌를 넘어서서 남편-아내라는 부부관계, 연인관계 사이에서 자리잡게 된다. 정신분석학자는 이제 사회의 모든 모공 속에서 자리 잡고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을 수행한다. 그것은 사회의 모든 부문으로 침투한다. 다른 한편, 이론상으로 그것은 라깡을 통한 프로이트로의 회귀에 의해 구조주의와 접목된다. 
  라깡은 3+1의 공식을 내세운다. 아빠, 엄마, 나라는 삼각형에 이제 남근이라는 초월적이고 특권적인 일자가 덧붙여진다. 그것은 구조적 항이다. 그는 무리한 오이디푸스화로부터 정신분석을 구출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무의식을 법, 기표, 남근이라는 전제군주적 장치에 의해서 해석함으로써 다시 퇴행하게 된다. 욕구는 궁극적 충족이 불가능하므로 끊임없이 대상을 옮겨 다니게 되며, 상징적 질서의 기표 연쇄 속에서의 요구를 통해 욕망을 이 기표에서 저 기표로 미끄러지게 한다. 그런데, 이 상징적 질서에 결여의 기표이자 특권적인 대문자 기표로서의 남근이 등장한다. 그것은 마치 초월적 전제군주처럼 모든 관계의 교차점 밖으로 뛰쳐 나가서 완전한 변환을 일으킨다. 이제 모든 욕망의 흐름들은 이 하구로 몰려 들어가며, 기표 연쇄의 유동적 이탈 대신에 이탈한 하나의 대상이 연쇄 밖으로 뛰쳐 나가 모든 연쇄가 자신에 의존토록 한다. 오이디푸스 제국주의의 기표 제국주의로의 전환, 그리고 기표 제국주의 속에서의 오이디푸스의 보존.
  이러한 3+1의 공식에 대해서 들뢰즈 가따리는 4+n의 공식을 내세운다. 사회적 생산의 집단적 행위자들과 관계들은 가족적 관계나 가족적 인물의 대용물이나 파생물이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는 언젠 가족적 기능과는 다른 기능도 가지고 있으며, 가족 속의 개인은 사회적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장을 직접 투여한다. 그러므로 이 4+n의 공식은 3+1로 포개어 접는 합치의 조작은 거짓추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욕망은 그 자체로 다양한 것(n)이고, 다양한 흐름들을 생산한다. 그것은 어느 것 하고도 접속할 수 있으며, 다른 흐름들과 하나의 동일한 욕망하는 기계를 형성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일련의 부분 대상들의 연쇄로부터 분기하여 특정한 관계 속에 등기되고 배치될 수 있다. 그리고 욕망의 흐름은 이 배치로부터 빠져 나와서 다른 배치의 생산으로 재개된다. 여기에는 어떠한 초월적 항(1)도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의 수동적 종합은 내재적 종합에 다름 아니다. 라깡의 오류는 욕망의 내재적 장에 하나의 초월적이고 특권적인 기표를 외주설정하는 것이다. 이 때부터는 연쇄 전체가 전제군주 기표의 법률 아래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은 욕망의 위치마다 결여를 배정하고, 욕망을 법에 용접시킨다. 이는 모든 자유로운 접속을 변형하여 하나의 배타적이고 특정한 항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동한다. 욕망은 부분들, 파편들, 단편들로부터 출발하여 이들 간에 상궤를 벗어나는 횡단선을 설치하는데, 이 횡단선들은 결코 다자를 일자로 환원시키지 않고, 다자를 하나의 전체로 끌어 모으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 다자의 매우 독특한 통일성을 확립하고, 전체로 환원할 수 없는 이 모든 파편들을 합병하지 않은 채 긍정한다.(AO: 194) 
  다른 한편, 라깡의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분은 이중의 집게발처럼 욕망을 부여잡고 모든 출구를 봉쇄한다. 그것은 엄마-아빠라는 구별된 인물로서의 부모를 대상으로 삼게 하고, 나에 대해서는 인물에 대한 욕망의 충족을 금한다. 그것은 구별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미분화상태를 위협으로 내세우면서 배타적인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엄마-아빠-나라는 세 항을 구별하고 구조화하는 3+1의 노선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미분화 상태의 깜깜한 밤에 떨어질 것이다. 상상적인 극과 상징적인 극에 갇힌 욕망. 어느 쪽이든 출구는 없으며, 결국 오이디푸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정신분석에서 그 해결은 아버지의 이름, 즉 사회적 규범, 법, 권위에 복종하는 것)하고 사회인이 되면 다시 권위의 형상 속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체험한다. 따라서 그것은 오이디푸스의 극복이 아니라 내재화이며, 아이에게 오이디푸스를 이행하는 것이다. 상징적 질서 속에서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거나 상징적 질서가 일으키는 증대하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 신경증적 일체화 아니면 규범의 내면화, 둘 중의 하나이다. 그 어느 쪽도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과 투여와는 상관없다. 
   들뢰즈 가따리는 이를 이를 이중구속의 오류라고 부르면서, “차이는 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생산을 구성하는 기계적인 것의 실재적 요소와 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구조 전체 사이에 있다”고 강조한다. 즉, 상상적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이기도 한 오이디푸스와 모든 오이디푸스가 짓누르고 억압하는 욕망하는 생산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다 같이 넘어서서, 혹은 그 아래에서 실재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실재적인 생산적 무의식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분열분석의 목표가 된다.        
  
    <제도분석, 분열분석>
    분열분석은 무의식을 탈오이디푸스화하여 진정한 문제들에 도달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분석 자체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정신 분석 밖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기계를 혁명장치의 불가결한 부품이 되게 하는 내부에서의 역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광기를 단순한 사회적 소외현상으로 환원하거나 정신의학적 억압에 대한 반대를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항하는 사회투쟁의 일 열로 축소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RM: 148) 
   이와 같은 것이 가따리의 제도분석의 근본적 구상을 이룬다. 그것은 ‘전문가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독점된 무의식’, ‘물, 공기, 에너지, 그리고 예술 같이 모든 사람에게 의심할 여지없이 속하는 것들은 산업적이고 상업적인 분야의 소유로 만드는 정신분석학’에 맞서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무의식’에 관심을 돌린다. “그것은 전문가들의 무의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고민이나 특별한 준비없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다.”(가따리, ‘정신분석적 무의식을 넘어서’, pp.108-109) 마찬가지로, “분석은 전이와 해석을 통해 개인화된 정신 속에 이미 프로그램화된 긴장들과 갈등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을 철저하게 바꿔야만 한다. 오히려 분석은 다음 두가지 사이의 항상 증가하는 사회적 모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언표행위들을 생각할 것이다. (1) 신체, 성, 사회적 육체적 생태학적 환경과 그리고 특히 정보, 전자공학, 이미지를 통해 기술-과학적 변이에 의해 만들어진 타자성 및 유한성의 다양한 모습들과 관계하는 지각과 민감성의 표상들 및 양식들과 (2)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구조들, 법률적이고 규율적인 체계들, 국가장치들, 도덕적 종교적 미학적 규범들 등등...(가따리, ‘포스트모던 정치학’)  
  이는 의미를 해석하고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 판결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승인받은 전문가로서의 분석가, 주체의 대변자로서의 의사와 연을 끊으려고 한다. 그것은 분석자/피분석자의 이분법 속에서 피분석자를 스스로의 자율적 권력의 구성으로부터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열망을 표현하고 사태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임함으로써 누군가 대신해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해 주는 대표 층위에 호소하게 된다. 반대로, 제도분석은 병원이든 학교든, 투쟁이 일어나는 장소에서 욕망의 집합적인 발화와 투여의 배치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문성을 삼키고 횡단하는 발화의 집합적 배치 속에서 아무리 움츠려들고 소리가 작은 사람도 자신이 바랄 때에 발언수단을 갖게끔 하는 것이며, 일상의 욕망이 부과된 직접적 발언 속에서 소통의 망들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는 관료, 지도자, 활동가가 권력을 구현하는 한에서의 부르조아 권력의 즉각적 폐지와 미시적 수준에서의 일종의 꼬뮈니즘으로의 직접적 이행을 표현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공동의 집단적 분석을 해 나가면서 모든 수준에서 권력의 전복과 미시 파시즘과의 투쟁을 수행하는 집합적 배치의 구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직접적 공외연성에서 출발하는 것, 이 속에서 사회기계 내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 즉, 욕망의 사회적 역사적 투여 방식과 그 생산물 및 역-생산물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의 전의식적 투여를 넘어 생산적 욕망의 무의식적 투여에 도달하는 것을 직접적 목표로 삼는 것이다. 또한, 분석의 과정에서 다성성을 제거하지 않는 하나의 집단적 신체를 구성해 나가는 것, 그리고 그 집단의 주체들이 스스로의 욕망을 표현하는 속에서 자율적 권력을 구성해 나가는 것, 어느 누구에게도 판결과 해석의 권력을 위임하지 않는 발화의 집단적 배치를 구성해 나가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특정인이 발언과 권력을 독점하고 언표를 개인화하는 메커니즘을 깨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적 언표행위는 오직 그것이 사회적 투쟁에 현실적으로 개입된 집합적 언표행위에 접속될 수 있는 한에서만 중요하다.    
   바로 이와 같은 배치를 만들어 나감으로써만, 분석기계와 혁명기계는 외재적 관계에 머무르면서 억압-억제의 틀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반화된 폭발을 위해 조심스럽게 불붙인 수많은 국지적 불들이 될 것이다.”  즉 “하나의 동일한 욕망하는 기계를 양육하는 흐름 속에서 서로 부품과 톱니바퀴가 될 것이다.”  


  분열분석의 첫번째 긍정적/적극적 임무
 
  -모든 해석으로부터 독립하여 주체에게서 그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본성, 형성, 기능을 발견하는 것. 욕망하는 기계들은 상상적 동일시와 구조적 통일체를 존속시키지 않는 분산의 문턱으로부터 출발할 때에만 도달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부분적 대상들을 부품으로 가지고 있다. 부분적 대상들은 작동하는 기계working machine 혹은 작동 부품들을 정의하는데, 한 부품이 끊임없이 전혀 다른 기계의 부품과 관계하는 분산의 상태에서만 그렇게 한다. 부분대상들은 멜라니 클라인이 정의한 것처럼 상실된 전체성이나 도래할 전체성으로 환상적으로 기능하는 유기체로 소급되지 않는다. 그것들의 분산은 결여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것들이 단일화하거나 전체화하지 않고서 형성하는 다양성 속에서 현존의 양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부분대상들은 무의식의 분자적 함수들/기능들이다. 분열분석-미시적 기능주의. 
  -이 분산의 조건들 속에서 정의된 부분적 대상들은 어떻게 기계들 및 기계적 배치를 형성하는가? 답은 종합들의 수동적 성격에 있다. 모든 부분 대상이 하나의 흐름을 유출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흐름은 또한 하나의 다른 부분 대상들에 결부되어 있으며, 이 대상에 대하여 그 자체 다양한 잠재적 현존의 장을 정의한다. 
  -이 종합들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CsO의 정립을 내포. CsO와 부분대상들-기관들은 유기체에 대해서 함께 대립하고 있다. CsO는 하나의 전체로서 산출되지만, 부분들 곁에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산출된다. 이 전체는 부분들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으며,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하나의 새로운 부분으로서 부분들에 첨가된다.
  부분대상들은 해체된 전체성이나 하나의 전체로부터 해방된 부분들은 전제하는, 폭파되고 파편화된 유기체의 표현들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부분들을 넘어서서 재접합되고 탈분화된 유기체의 표현들도 아니다. 결국, 부분-기관들과 기관없는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것, 하나의 동일한 다양성이다. 부분대상들은 CsO의 직접적인 능력들이고, CsO는 부분대상들의 가공되지 않은 질료이다. CsO는 이러저러한 강도로 공간을 항상 채우고 있는 질료이며, 부분대상들은 강도의 정도들로서, 강도=0으로서의 질료로부터 출발하여 공간 속에서 실재를 생산하는 강도적 부분들이다. CsO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이다. 부분대상들은 이 실체의 속성들과 같다. 부분대상들과 CsO는 분열증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의 두가지 물질적 요소들이다. 하나는 작동하는 부품들이고, 다른 하나는 부동의 동자이다. 하나는 미시-분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거대한 분자이다.    
  기관없는 신체와 부분대상들의 연쇄: 이 연쇄는 코드와 공리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흐름들을 탈영토화하고 흐름들로 하여금 기표의 벽을 통과하게 하는 것 이외의 기능은 갖지 않는다. 즉 코드를 해체하는 것 이외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연쇄의 기능은 대지, 전제군주 혹은 자본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흐름들을 코드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관없는 충만한 싵에 위에서 흐름들을 탈코드화하는 것이다. 코드의 연쇄가 아닌 탈주의 연쇄.
  따라서 분열분석은, 모든 공리계와 코드로부터 동시에 구별되는 특수하고 준안정적인 연쇄의 어떤 상태를 함축하는 한에서 그 고유한 적극성/긍정성 속에 있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기능을 파악해야 한다. 욕망 속에서 모든 코드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모든 대지들을 해체하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오이디푸스적 조작은 가족적 영토성 및 거세의 기표와 더불어 정신분석을 단순한 코드의 지위로 다시 인도한다. 더 나아가서 정신분석학은 더 이상 가족적 무대에도 관계하지 않고, 자기만의 진리와 성공을 보증한다고 여겨지는 정신분석적 조작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욕망의 흐름들을 이처럼 재코드화하거나 공리계화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은 기표적 연쇄를 몰적으로 사용하여 무이식의 모든 종합들을 오인하는데 이르게 된다.
  -CsO는 죽음의 모델. 죽음의 모델은 CsO가 기관들을 밀어내고 버릴 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sO와 부분대상들로서의 기관들간에는 실재적 대립이 없다. 실재적 대립은 공통의 적인 몰적 유기체와의 대립이다. 욕망하는 기계에서는 동일한 긴장병자가 부동의 동자에 의해 고무되어 그 기관들을 버리고 부동화하고 침묵하게 하며, 작동하는 부품들에 의해 촉진되어 기관들을 재활성화하고 국지적 운동들을 다시 불어넣기도 한다. 문제는 배치 자체이며, 기계적 배치를 이루는 부품들간의 관계(공존과 차이, 공존 속에서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삶의 욕망에 질적으로 대립되는 죽음의 욕망은 없다. 죽음은 욕망되지 않는다. 기관없는 신체의 자격으로 욕망하는 죽음이나 작동 기관의 자격으로 욕망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척력은 기계 기능의 조건이고, 인력은 기능 자체. 기능이 조건에 의존한다는 것은 기계가 삐그덕거리면서 작동하는 것 속에서 볼 수 있다. 욕망하는 기계의 싸이클은 죽음의 모델을 죽음의 체험으로 끊임없이 전환하는 것이다. 안으로부터 올라오는 죽음을 외부로부터 도달하는 죽음으로 전환하는 것. 
  죽음의 체험은 무의식 자체의 가장 일상적인 것.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이행이나 되기, 되기와 이행으로서의 모든 강도 속에서, 삶 속에서, 그리고 삶을 위해 행해지기 때문이다. 강도의 고유함은, 정도의 무한성 하에서 증대하거나 감소하는 것으로서 어느 한 순간 자신이 생산되는 지점에서 출발하여 자기 자신에게 강도-0을 투여하는 것이다. 인력과 척력의 관계는, 새로운 에너지 전환을 함축하고, 통접의 종합을 형성하는 이와같은 상태들, 감각들, 감정들을 생산한다. 실재적인 주체로서의 무의식은 자신의 싸이클의 둘레 전체에 포함적 이접에 상응하는 모든 되기들을 통과하는 잔여적이고 노마드적인 주체를 분봉(分蜂)시킨다. 죽음은 모든 되기 속에서 끊임없이 도달하고 도달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강도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 속에서 죽음의 체험을 이끌고 그것을 감싼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죽지 않는다. 죽음의 모델 자체는 ‘나’라는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CsO. 언제나 모델로부터 체험으로 나아가고, 재출발하고, 모델로부터 체험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것이 욕망하는 기계들이 행하는 것이다. 체험으로서의 영원회귀. 그리고 욕망의 모든 싸이클의 탈영토화된 회로.   
  -정신분석은 삶의 노래이어야 하는데,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죽음의 노래. 프로이트는 처음부터 충동에 관한 그의 이원론에 의해 끊임없이 리비도로서의 욕망의 생명력 넘치는 본질의 발견을 제한하려 하였으며, 이 이원론이 에로스에 대항하는 죽음 본능으로 이동했을 때, 그것은 리비도의 제한에 그치지 않고 리비도의 청산이 되었다. 죽음의 욕망에 대립할 수 있는 유일의 심금으로서의 문명의 신성화. 숭고한 체념. 삶의 평가 절하, 양심의 가책의 내면화.
   프로이트는 죽음을 초월적 원리로 삼고 있지만, 죽음은 추상적 원리로서 평가될 것이 아니다. 죽음본능이란 것은 없다. 죽음은 욕망하는 기계의 한 부품이며, 이 부품은 기계의 기능과 그 에너지 변환 체계 속에서 판단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프로이트의 에로토스와 타나토스 이원화 시도는 욕망의 기계적 요소, 욕망하는 기계를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cf. 프로이트에게서 본능은 변화와 발전을 위한 추진력이 아니라, 이전의 상태를 복원하려는 유기적 신축력이고, 유기적 생명체 속에 있는 관성의 표현. 본능은 보수적이고 역사적으로 습득되고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생명체의 목표는 아직 달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 상태, 즉 생명체가 떨어져 나왔던 과거의 최초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려는 것. 삶의 특성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무생물 속에 나타난 것이라면, 그때까지 무생물체였던 것 속에 생겨난 긴장은 긴장 그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무생물상태로 돌아가려는 첫번째 본능이 생긴다는 것. 이와는 대극적으로 영원히 갱생을 기도하고 성취하는 성적 본능, 삶의 본능, 에로스가 존재. 각 세포의 활동적 생명 본능은 다른 세포들을 대상으로 삼아 그 세포들 속에 있는 죽음본능을 부분적으로 중화시켜 생명을 보존. 삶 자체는 이러한 두 경향 사이의 갈등이자 타협이며, 정신생활의 지배적 경향은 자극 때문에 생기는 내적 긴장을 줄이거나 일정 상태로 유지하거나 제거하는 것. 쾌락원칙은 이러한 기능에 봉사. 이러한 기능은 모든 살아 있는 물질의 가장 보편적인 노력, 즉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과 관련될 것이다. 생명 본능은 항상 긴장을 유발시켜 이것의 방출을 쾌락으로 느끼게 하지만, 죽음 본능은 그 자신의 일을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쾌락원칙은 죽음 본능에 봉사하는 듯하다.   
  -분열분석가는 해석자도 연출자도 아니다. 기계기사. 문제는 어떤 사람들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어떤 것이며, 그것들이 어떠한 종합들, 어떠한 과속과, 어떠한 구성적 고장들, 어떠한 흐름들, 연쇄들, 그리고 매번 어떤 되기들과 함께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임무는 기계의 작동을 방해하는 몰적 집합체, 구조와 표상의 불가결한 파괴와 분리될 수 없다. 

   
  분열분석의 두번째 적극적/긍정적 임무

  -분열분석의 첫번째 명제: 모든 투여는 사회적인 것이고, 어느 모로나 사회적 역사적 장을 대상으로 한다. 
  -두번째 명제: 사회적 투여들은 집단 혹은 욕망의 무의식적 리비도 투여와 계급 혹은 이해관계의 전의식적 투여로 구별된다. 후자는 사회의 큰 목표들로 행해지며, 또 유기체와 그 기관들 전체와 관계하는데, 이 기관들에 배치된 결여의 공포들도 포함된다. 
  계급의 전의식적 투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즉 왜 혁명의 객관적 이익을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반동적인 전의식적 투여를 고수하고 있는가? 그리고 좀 드문 일이지만 어떻게 객관적으로 반동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혁명적인 전의식적 투여를 수행하는가? 혁명가들은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의무 때문이 아니라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가끔 잊어먹거나, 혹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해의 전의식적 투여 속의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것은 무의식적 리비도 투여 속의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적인 전의식 투여는 새로운 목표들, 새로운 종합들, 하나의 새로운 권력을 겨냥한다. 그러나 무의식적 리비도의 적어도 일부는 계속해서 낡은 신체, 낡은 권력형태, 이 권력형태들의 코드들과 흐름들을 투여한다. 리비도가 전의식의 관점에서 실제로 혁명적인 종합들에 대응하는 새로운 신체, 새로운 권력과 결합할 때에도, 무의식적 리비도 투여가 그 자체 혁명적인 것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무의식적 욕망들과 전의식적 이해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절단들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적 집단은 설사 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이 권력 자체가 욕망하는 생산을 예속시키고 파괴하기를 계속하는 한, 어디까지나 예속집단인 채로 있다. 이와 반대로 주체집단은 그 리비도 투여들 자체가 혁명적인 집단이다. 이 집단은 욕망을 사회적 장 속에 침투시키고, 사회체나 권력형태를 욕망하는 생산에 종속시킨다. 사람들은 어떤 형이 집단에서 다른 형의 집단으로 이행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주체집단들은 단절을 통해 예속집단으로부터 끊임없이 파생된다. 주체집단들은 욕망을 통과시키고, 항상 더 멀리서 욕망을 다시 절단하여, 경계선을 넘고, 사회기계들을 욕망의 기본적 힘들에 관계시킨다. 그러나 거꾸로 이 집단들은 또 끊임없이 자기들을 폐쇄시키고, 예속집단들의 이미지를 따라 자기를 재편성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분열분석의 임무는 사회적 장의 무의식적 욕망의 투여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해의 전의식적 투여들과 구별되고, 또 이해의 전의식적 투여와 대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립하는 양상을 띠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 이 무의식적 욕망의 투여에 도달하는 것.
  -분열분석의 세번째 명제: 사회적 장의 리비도 투여는 가족적 투여에 앞선다.
  -네번째 명제: 사회적 리비도 투여의 양극. 반동적이고 파시즘화하는 편집증적 극과 혁명적 분열증적 극. 
 











1999년 11월 10일, 강사 : 고병권  
수유연구실 강좌 : 철학강좌 : 안티 오이디푸스.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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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기계?


고 병 권



1. 문명 자본주의 기계

1) 문명 자본주의 기계의 탄생
자본주의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러나 먼저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 구분이 그것을 정의해줄 수 있을까? 화폐나 시장의 그것을 정의해줄 수 있을까? 착취가? 만약 자본주의 체제를 그렇게 정의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자본주의를 발견할 수 있게된다”(Guattari, ?자본주의 체계, 구조, 과정?). 화폐, 상품, 재산, 도시, 시장들의 탈영토화는 결코 자본주의를 정의해주지 못한다. “로마만 하더라도 재산의 사유화에 의한 부동산 흐름의 탈코드화, 큰 재산 형성에 따른 화폐 흐름의 탈코드화, 상품 생산에 의한 탈코드화, 재산상실과 프롤레타리아화에 의한 생산자들의 탈코드화”가 있었고, “봉건제만 하더라도 사유재산, 상품 생산, 화폐의 축적, 시장의 확장, 도시의 발전, 지대, 계약 노동 등이 발견된다”. 그러나 로마는 자본주의를 낳기는커녕 노예제도를 낳았고, 봉건제 역시 더 과거로 돌아가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전의 다양한 체제들과 역사적인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기계가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이상의 요소들을 나열하거나 그 요소들이 탈영토화 운동을 시작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든 요소들, 산업 및 상업, 그리고 과학기술 등이 통접(conjuntion)되면서 이 요소들을, 그리고 결국 사회를 독특하게 변형시켰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다양한 요소들의 통접, 적분(integration, 통합)을 분석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이 통접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전 체제로부터 탈코드화/탈영토화된 흐름이 만들어져야 한다. 흐름들이 충분히 자유롭게 흘러야하며 그것이 또한 마주쳐야 한다(“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봉건체계의 해체가 우선한다. “자본주의가 봉건제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봉건제의 해체가 자본주의를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흐름들의 마주침은 우연일 뿐이다. “세계사는 우연의 역사요, 이 밖에 다른 역사는 없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탈영토화된 노동자들”의 흐름과 “탈코드화된 화폐들”의 흐름의 마주침으로 설명했다(cf. 알튀세 알튀세 역시 이러한 마주침이 어떤 역사의 내재적 법칙에 의한 것이라는 시각에 대해 철저히 반대했다. 그것은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이다. 가령 프롤레타리아가 대공업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프롤레타리아를 낳기 위해 대공업이 준비된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다. 오히려 영국에서 일어난 전체 농촌 주민으로부터 생산수단의 박탈이라는 현상, 그러나 그 원인과 결과와 그 효과들과는 무관한 현상이 산출된 것으로 설명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마주침의 유물론?, ?철학과 맑스주의?, 새길).
). “처음에 그것들은 외적으로 통접되지 않았다. 자유 노동자들과 화폐-자본은 실질적으로 따로 떨여져 존재 “이 두 요소는 서로 각기 다른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를 수행했다. 자유노동자의 경우에는 사유화에 의한 탈영토화, 전유에 의한 생산도구들의 탈코드화, 가족와 협동조합의 해체에 의한 소비재의 상실, 노동 자체나 기계의 도움이 되는 노동자의 탈코드화. 자본의 경우에는 화폐의 추상에 의한 부의 탈영토화, 상업자본에 의한 생산 흐름의 탈코드화, 금융과 공공 부채에 의한 국가의 탈코드화, 생산수단의 탈코드화 등”(338쪽).
하였던 것이고, 이 양자의 만남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것이 실패한 예는 무수히 많다. “얼마나 많은 우연 요인들이 이 통접을 도왔던가?”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의 형성(가격혁명, 풍부한 노동력의 확보, 원료에 대한 용이한 접근, 도구와 기계들의 생산에 유리한 각종 조건들)”.
자본주의적 통접이 이루어지면서 관계들과 의미들이 달라진다. 화폐는 이 통접 하에서 비로소 충만한 신체로서의 자본이 된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화폐와 상품은 추상에 의해 흐름들의 탈코드화를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품의 외견상의 운동의 이접적 종합을 형성”하는 수준. 화폐가 “<일반적 등가물>이 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이 추상물의 지배 아래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조건하에서 노동 역시 진정으로 추상적 성격을 갖게 된다(“아담스미스와 리카아도의 공적은 부의 본질 혹은 본성을 더 이상 객관적 본성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탈영토화한 주관적 본성, 즉 생산활동 일반으로 규정한 것이다”(cf. 둘의 구분도....). “추상적 노동은 근대 자본주의 기계 속에서만 그런 것으로 나타나며 현존한다”-Marx. 
추상화된 화폐인 자본은 이제 그 내적 운동을 전개한다. 그 운동은 어떤 외재적 코드도 참조하지 않으면서 그 스스로를 정의한다. 자본은 자신은 부자관계(filiation)를 통해서 정의된다(cf. alliance). “자본은 화폐를 낳고, 가치는 잉여가치를 낳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자신의 정의를 획득한다. “100 파운드는 10파운드의 잉여가치에 의해서만 자본이 되기 때문이다”. △G가 G에 새로운 정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G는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사회적 장을 규정하고 추상적 실체에 그 구체성의 경향을 부여해주는 “미분적 관계”이다. 물론 이 미분적 관계가 추상을 완전히 멈추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추상적 실체는 가변적 비로서 단순한 양이 된다. 자본이 그 추상적 성격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은 라는 미분적 관계에서다. 이때 는 각각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유동을 나타낸다. (사실 이 식의 의미는 바로 자본의 ‘가치구성’이다. 자본의 통접이 가리키는 것은 또한 ‘구성’이다). 이 수학적 표현은 자본주의 공리계에서 흐름의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것을 가리키며, 코드의 잉여가치 코드는 사회체로부터 나오는 흐름들을 제한적이고, 간접적이고, 경제 외적인 방식으로 조직화 하는 것으로 외부적인 법률이나 종교, 관습 등의 다양한 표상체계를 동원한다. 역사상 다양한 코드화 방식이 전개되어왔지만, 자본주의는 새로운 유형의 코드화 사회라기 보다는 탈코드화된 흐름에 기초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코드화된 흐름들의 질적인 성격에 대해 무차별적이며 직접적인, 기능적이고 경제적인, 양적 관계로 표현되는 공리계(axiomatic)를 통해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가치를 생산하고 착취한다. (신현준, ?들뢰즈/가타리: 분열증 분석과 욕망의 미시정치학?, ?탈현대 사회사상의 궤적?, 새길, 1995, 369-370쪽 참조).
가 변형되었음을 보여준다.

-cf. 자본주의 체계, 구조, 과정 
가타리는 과정과 구조, 체계라는 세 가지 구성 요소들을 분석함에 있어 사회 선분화 구조는 국가로, 일반적인 경제적 기호 체계는 시장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보고, 이 세 가지 구성 요소들의 배열에 따른 여섯 가지의 조합을 보여 준다(SSP; 280). ①국가 → 생산 → 시장, ②시장 → 생산 → 국가, ③시장 → 국가 → 생산, ④생산 → 국가 → 시장, ⑤생산 → 시장 → 국가, ⑥국가 → 시장 → 생산. 이 여섯 가지 조합들은 자본주의 일반적 유형학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조합들은 일반 유형학이 불가능하다는 것, 세 가지 구성 요소의 배열만으로도 얼마나 다양한 자본주의가 가능한지에 대해서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국가가 우선적인 ①의 경우는 각각 아시아적 생산 양식과 나찌의 전시 경제가 해당된다. 국가가 생산을 조절하고 그에 따라 시장이 제한된다. 역시 국가가 우선적인 ⑥의 경우에는 (현실 사회주의의 많은 국가들이 해당되는) 국가 자본주의로 국가가 시장을 장악함으로써 생산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시장이 우선적인 ②와 ③은 각각 상업적 원시 자본주의 혹은 도시간 네트워크에 중심을 둔 세계 경제, 그리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해당한다. 이들 체제는 시장 상황이 가장 우선적인 지배력을 가지며 국가의 역할에 따라 구분이 된다. 생산이 우선적인 ④와 ⑤에서 ④는 식민지 독점 경제가, 그리고 ⑤는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가 해당한다. 생산이 국가로 하여금 또 다른 시장을 찾아 나서게 만든 것이 식민지 독점 경제라고 할 수 있다(?자본주의 체계, 구조, 시장?).

2) 화폐의 이중성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서 생긴 논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
은 화폐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화폐는 크게 지불 수단(임금)과 금융(융자)이라는 이중적 형식을 갖는다. “봉급생활자의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돈과 기업의 장부에 등기되는 돈은 같은 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전자는 교환가치에 무력한 화폐 기호들로 소비재와 사용가치에 대한 지불수단들의 흐름이고후자는 자본의 권력의 기호로, 금융의 흐름들, 추상량의 공리계로 작동하는 생산 미분계수의 체계”이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에서 화폐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 참조
. 은행의 역할은 여기서 결정적이다. 은행은 “상업상의 신용인 경우 지불수단으로서 화폐가 전개하는 단순한 순환 속에 근거를 갖는다(지불기일이 있는 어음-> 유한부채의 통화형식), 그러나 거꾸로 은행 자신의 신용의 경우. 은행은 화폐의 순환 대신 어음의 순환에 근거를 두고 독자적 회로를 통과. 이때 화폐는 교환도구로서의 가치를 획득한 다음에 가치를 상실. 이것은 무한 부채에 자본의 형식을 준다. 특히 중앙은행. 국가가 이것의 조정자이며 보증자다). (cf. 아글리에타)
화폐의 이 두가지 형식은 전혀 다른 질서를 갖는 것으로 공통된 척도가 없다. 이 두 형식의 부조화는 잉여가치의 공식을 수정하게 한다. (이것은 아래에서 말하게 될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를 참조하면 더 분명해질 것이다).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정의될 수 없다.” “잉여가치는 두 흐름이 나타내는 부조화에 의하여, 또 이 두 흐름의 비에 대해서 외적 극한이 부재한다는 것에 의하여 정의될 수 있다.” 베르나르 슈미트(Bernard Schmit)는 이것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그는 “무한부채의 흐름을 특징 짓기 위해 순식간의(양자 점프) 창조적 흐름이라는 말을 생각해냈다. 이 흐름은 은행들이 자기자신들에 대한 부채로서 자발적으로 창조하는 것으로 이는 무로부터의 창조다. 이 창조는 지불수단으로서 미리 준비된 통화를 이동시키면서, 충만한 신체의 한쪽 끝에는 마이너스통화(은행의 채무로 등기), 다른 쪽에는 플러스통화(은행이 보증하는 신용장)를 내어놓는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변이의 힘을 지닌 흐름인데, 이 흐름은 소득에는 들어가지 않고 구매에도 할당되지 않는다. 이것은 순수한 유동자금으로 점유물도 부도 아니다.” “통화의 다른 양상은 환류(reflux). 화폐가 노동자들과 생산요소들에 분배되어 소득이 되고, 이것이 구매력을 획득하자마자 재화와 관계하고, 재화를 갖자마자 그 관계를 상실하는 양상”. flux와 reflux 과정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노동자들의 소득.

cf.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
모리스 클라벨 “기계들 역시 노동하고 가치를 생산하며 항상 노동해왔고, 인간에 비하면 더욱더 많이 노동하고 있으니, 인간은 생산의 진행의 구성부분이기를 그치고 이 진행에 그저 곁붙이기로 붙어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 어떻게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를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가?”(346쪽) 
대공업이 발달한 시기에는 “어떤 관계 속에서도 기계는 개별노동자의 노동수단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노동자의 활동을 대상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의 활동이 기계의 작업, 기계의 활동을 원료에 전달한다고 할 수 있으며, 노동자는 그것을 감독하고 중단을 방지하는 것일 뿐이다”(?요강?, MBM: 261) 기계가 생산자이며, 노동자는 그것의 관리자 일 뿐이다. “기계장치에서, 대상화된 노동은 직접 생산물의 형태 혹은 노동수단으로 사용된 생산물의 형태를 띨 뿐만 아니라 생산력 자체의 형태로 나타난다”.(?요강?, 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 262쪽)

3) 자본주의 공리계와 국가
그러나 기계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진정한 공리계는 그곳에 없다. 진정한 공리계는 사회기계 자체의 공리계다. “혁신은 그 투자가 생산비를 얼마나 줄임으로써 얼마나 이윤을 올리게 해주는가의 관점에서 채택된다. 이윤율이 크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현재 있는 장비를 그대로 두고, 이와 동시에 다른 영역의 장비에 투자한다”. “공학적이고 과학적인 형식을 취한 코드의 특수한 흐름들은 사회적 공리계에 종속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는 (여전히)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혁신 자체는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와 마찬가지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따로 고찰된 수익성도 아니다. 항상 시장과의 관계, 상업-금융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수익성에 끼치는 효과”에서 고려된다.
맑스는 ?요강?에서 “이제 생산과정은 더 이상 노동자의 숙련에 의존하지 않게 되며, 오히려 사회적 생산력들, 특히 과학의 기술적 적용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와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가 (서로 구분해서 계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인간에 의한 것이건, 기계에 의한 것이건 잉여가치의 ‘양’을 측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인간의 것과 기계의 것을 더 이상 구분하기도 힘들다”. 인간이 더 이상 기초적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인격체로서의 개별 노동자가 생산의 단위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눈, 손, 발 등등은 각각 분할되어 접속되어 있고 이것들이 생산에 참여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의 노동이 기계적으로 조직화되어 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기계가 됨으로써, 이를테면 우리가 감시 기계, 조절 기계 등이 되어 생산을 해 낸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 우리의 분절화된 각 단위들은 기계가 되어 다른 기계와 접속되며 생산에 참여한다”(?권력구성체의 적분으로서의 자본?, ?자본주의 체계, 구조, 과정? 등 참조).
 여전히 차이가 있는) 흐름의 잉여가치 전체를 구성한다. “지식, 정보, 자격을 부여하는 교육은 이 흐름의 잉여가치에서 기본적 노동 못지 않게 중요하다”(지식자본, 349쪽). 자본은 이윤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혁신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치의 생산 자체가 잉여가치를 현실화하거나 흡수하는 데 절대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와 투자 이외에도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다양한 방식이 필요하다. 광고선전, 시민 행정,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 등”. (cf. 네그리, “비물질적 노동”)
여기서 국가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국가는 자본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떼내는 것이 아니고 그거셍 보탬을 주는 것이다. 국가, 경찰, 군대 등은 반생산(antiproduction)이지만 그것은 바로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운동을 조절하고 한정하면서 최대한의 잉여가치를 최대한 안정하게 흡수할 수 있도록 기능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잇어 반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 체계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자세한 것은 아래 ‘자본주의 표상’ 참조)

cf. 자본주의 공리계에서 대립하는 극들
①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표면적으로나마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극으로서 사회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던 시기에 지구화라고 하는 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주의라고 하는 대립적인 극은 사실상 자본주의의 공리계 위에서, 자본주의의 평면 위에서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외부에 자본주의적 세계 시장을 전제하고 있었고, 이 세계 시장이 생산 요소와 생산 관계들을 좌우하고 있었던 것이다(?자본주의 체계, 구조, 과정?, 286쪽).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사실상 몰락하기 전부터―초국적 자본은 매우 빠르게 적응해 가며 자신의 공간을 창출했던 것에 대해서 하나도 의아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형성 안에 흐르고 있는 동형성에 대해 충분히 주목해야 했던 것이다.
② 이와 비슷하게 대립하고 있는 또 하나의 극이 있다면 남-북 문제, 혹은 주변부와 중심부의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 월러스틴(I.Wallerstein)이 주장한 자본주의 세계 체제론의 테제와 아민(S. Amin)이 주장한 중심 공리와 주변 공리의 차이가 중요하게 등장한다.중심에서 작동하는 자본의 논리와 주변에서 작동하는 자본의 논리는 분명한 이형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에 못지 않게 다양성 밑을 흐르는 동형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제3세계의 광범위한 부분에서―심지어 제3세계 전체를 통해서도―일반적 생산 관계는 대문자 자본이고, 이는 사회화된 부문도 자본이라는 생산 관계를 채택한다는 의미에서다.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를 설명하면서 가따리는 이제 이러한 극이 하나의 추상적 용어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세계 체제론에서 말하는 ‘중심/주변/반주변’ 등의 술어들이 분명 단위 국가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지역적 기초 위에 놓여 있다. 가따리가 ‘제3세계’나 ‘남쪽’이라는 용어들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지역적 기초 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심부 안에 주변부가 생겨나고 있으며, 제1세계 안에 제3세계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주변부로 빠져나가 투자를 하기도 하며, 중심부는 역으로 주변화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아민의 테제는 강화되면서도 상대화된다(?천의 고원?, 영어판, pp. 465-469).

2. 자본주의의 표상

1) 흐름의 언어학: 내용과 표현
글은 결코 자본주의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제군주 시니피앙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다. 글이 아니라면 자본주의의 표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코드의 질서를 깨고 탈코드화의 흐름들에 위치한다면 “자본주의의 언어 사용은 당연히 달라야 할 것이다”.
맥루한의 주장 -“초코드화의 시니피앙에 대항하는 탈코드화된 언어의 흐름”. 비시니피앙적 질서에서는 음성이나 문자, 몸짓 어느 것도 특권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어떤 흐름이 다른 흐름과 관계할 때 그 흐름들은 내용을 규정하는 것과 표현을 규정하는 것으로 나뉜다. 내용과 표현의 통일로 이루어지는 것은 형상(figure)이다. 형상은 비시니피앙적 기호들이며, 여러 차원의 기호-점들이고, 흐름의 절단들, 분열들이다. 그것은 시니피앙적인 질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동일성과 차이를 갖지 않는다. “어느 방향에서 들어왔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어느 지점에 있어도 다른 방향들의 어느 것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바로 시니피앙의 언어학과 흐름의 언어학의 대비. 시니피앙의 언어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소쉬르의 언어학의 경우. 시니피앙의 요소들은 “코드화된 간격(coded gaps)”에 의해 차이와 자기동일성을 갖는다.
엘름슬레브의 언어학에 힌트를 얻어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흐름의 언어학을 내용과 표현의 측면에서 나누고, 그것을 각각 실체와 형식으로 구분했다. 시니피앙-시니피에의 종속적 관계는 표현-내용의 상호 전제적 관계로 대체된다. 내용과 표현은 서로 독립적인 탈영토화된 흐름들로 서로는 상응하는 관계를 가질 뿐이다. 각각의 형식은 그 형식 안에서의 배치에 의해서 고유함을 갖는다.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을 구성하는 것은 시니피앙의 어떤 효과도 없으며, 내용과 표현의 관계 속에서 분열들이고 기호-점들이며, 흐름의 절단들인 형상들에 이를 수 있다.
리오따르는 자기동일성이 없는 이러한 분열-흐름, 흐름-절단, 즉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 <형상-매트릭스>를 욕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는 과정을 중단시키고 다시 코드화되거나 초코드화된 영토에 분열을 포갠다는 인상을 준다. 그는 무엇보다도 욕망을 근본적인 긍정에 결부시키려 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거세의 법과 시니피앙을 가져와 결와와 부재를 만들어낸다).
cf.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의 예: 감옥의 죄수에서.... 내용 형식은 학교와 공장 등과 구분되는 감옥, 내용의 실체는 죄수를 가두는 것(죄수를 가두는 공간이 감옥). 그러나 감옥이 범죄자를 가두는 곳이라면 그것은 또한 범죄자에 대한 규정을 미리 전제하고 있는 것.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형법(표현형식). 형법은 위반이나 형벌의 주체 등을 표시(표현실체)하고 있음. (?천의 고원?)

2) 코드와 공리
자본주의의 표상을 흐름의 언어학의 관점에서 이해해 볼 때,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탈코드화/탈영토화의 운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때, 자본주의 흐름과 정신분열증의 흐름은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근친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흐름들과 분열증의 흐름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자본주의는 분명 정신분열증의 흐름들을 흐르게 하고, 그것을 통해 예술과 과학 등에도 생기를 불어넣지만 그것이 혁명적 잠재력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을 억압하고 억제한다. 자본주의는 정신분열자들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열자를 “병자로 취급하고, 항상 세심하게 감시해야 할 대상으로” 사고 있다. 
자본주의는 코드화되고 초코드화되었던 흐름들을 탈코드화하는 사회 전체의 극한이지만 그 ‘극한’은 항상 <상대적> 극한이다. 자본은 그것을 금방 엄격한 ‘공리계’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분열자는 <절대적> 극한이며, 기관들 없는 신체 위의 자유로운 상태로의 이행이다. “자본주의는 한 손으로는 탈코드화시키면서 다른 한펴으로는 공리계화” 하는 것이다. 피해야할 오해는 자본주의의 공리계 출현이 탈코드화 뒤에 나온다는 생각이다. “사실 그것은 동시에 출현한다”. 자본주의는 공리계로 흡수할 수 있을 때 탈코드화/탈영토화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탈영토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재영토화를 수행한다. 그것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중적 운동이다. 이 점에서 절대적 탈코드화/탈영토화를 가리키는 “분열증은 자본주의의 죽음이다”.
자본주의가 분열-흐름, 흐름-절단을 규정하는 방식은 분명히 분열증과는 다르지만, 그것은 분명 탈코드화/탈영토화 운동 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이 공리계는 코드들에 대립한다. 그것은 크게 다음의 네가지로 볼 수 있다. ① M-C-M 의 정식.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순환은 그 자체에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운동에 대한 외적 한계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외적으로 규제하려는 시도에 대해 화폐의 도입은 코드들의 기초를 충분히 파괴했던 것이다. ② 앞서의 것과 연관된 것으로 화폐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이 되기 위해 미분 관계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직접적인 경제적 계수가 되는 것이다. 즉 경제 외적 계수인 코드의 비경제성과는 맞지 않는다. 잉여가치는 식을 구성하는 두 항(자본과 노동)의 권력의 불균형성 자체에서 오는 것이며, 별도로 그것을 확복하기 위한 코드는 불필요. ③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극한이 부재한다. 이때 반생산 장치(가령 국가)는 전제군주의 초월성을 (일부) 버리고 생산 전체에 침투해서 내재적으로 작동한다. ④ 공리계는 코드들과 달리 사람들의 신체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앞서 가타리가 말한바대로 -기계에 대해서) 인물에 매달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네 자본 혹은 네 노동 능력”이지 나머지는 중요치 않다.

3) 국가
공리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국가! 국가는 “처음에는 초월적 통일체였는데(원국가), 점차 사회적 힘들의 장에 내재하고, 이 힘들에 봉사하며 탈코드화하고 공리계화된 흐름들에 대해서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조정하는 것이 국가(원국가와 분열적 흐름 사이에 있는 국가 384쪽도 참조).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국가가 공리계를 만들거나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공리계가 이러한 국가를 만들어낸다. 처음부터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은 아주 컸다. “자유로운 자본주의란 있어본 적이 없다”. 항상 국가가 “적절하게 행동한다는 조건 아래서는” 국가에 의한 통제에 대한 투쟁은 없었다.(불만은 그 행동 방식이나 양상에 대한 것이었을 뿐).
cf. 케인즈주의(네그리)
cf. 국가의 조정기능의 변화는 노동계급의 구성과도 연관된다.

4) 계급 투쟁의 안과 밖
국가의 조정기능은 계급들 간의 어떤 중재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명백하게 지배계급에 봉사한다. 계급이란 카스트 신분의 음화이며, 탈코드화한 카스트 신분이다. 계급투쟁을 통해서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탈코드화이며, 탈코드화된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의 역사를 읽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코드들에 투쟁을 벌이고, 탈코드화와 일체를 이루는 유일한 계급이다.
그러나 탈코드화한 흐름들의 통접, 초월성의 부정, 생산 자체 내의 반생산의 전파로 규정되는 부르주아의 내재의 장은 비길 데 없는 노예상태를 세운다. “주인도 없고 다만 노예들이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cf. 헤겔). 부르주아는 “가장 천한 노예보다도 천한 노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공리계 안에서 말할 권리가 있다. 다른 계급은 X. 따라서 하나의 계급(반론에 대한 재반론에 대해서는 377쪽).
오히려 이론적 대립은 계급의 바깥에 있다. 기계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들과 기계나 톱니바퀴를 폭파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기계의 체제와 욕망하는 기계들의 체제 사이에. 그리고 상대적 내적 극한과 절대적 외적 극한 사이에...
cf. 사회주의 국가들의 문제
cf. 융합된 집단들과 당에 의해 대표되는 계급들.


3. 자본주의와 외디푸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사회적 장 밖에 놓였으나 이것은 가장 큰 사회적 행운. 그것은 사회적 장 전체를 가족에 일치시킬 수 있었기 때문. 
-가족과 사회: 가족은 하나의 전략이 아니라 전술에 불과. 사회적 장은 모든 차원에서 재절단을 수행. 가족은 사회의 이미지들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일종의 시뮬라크라를 갖는다.
-모든 출발점들의 다양성은 도착지점의 극한에서 만난 외디푸스 삼각형으로 흡수. 
-외디푸스는 자본주의에서 자신의 할 일을 가지며 실질적으로 작동(원시 기계에서는 텅빈채로, 전제군주구성체에서는 상징적 일만을(천상에서), 자본주의에 이르러 그것은 실제적으로 욕망을 가족적 이미지에 포개고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냄. 그것은 물신들, 우상들, 이미지들, 시뮬라크라들. 그것은 각 개인들에게 내재화됨(양심의 가책). 외디푸스는 자본주의의 산물(398쪽). 













1999년 11월 17일, 강사 : 고병권  
수유연구실 강좌 : 철학강좌 : 안티 오이디푸스.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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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적 무의식” 제4장 1절-3절)


 고 병 권



1. 사회적 장

1) 사회적 투여와 가족적 투여

외디푸스적 신경증은 아이가 갖는 것이지만 부모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은 아이에서 시작해서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무한한 소급을 진행한다. 이 무한 소급은 아버지의 우위를 억지로 전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이 어린 시절의 감정이기 이전에 편집병에 걸린 어른의 관념이라는 사실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의미에서 <아버지가 먼저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투여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회적 장, 다시말해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교육적, 종교적 장의 투여가 가족적 투여보다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아버지건 자식이건 모두 사회적 장 속에 동시에 던져져있다(“아이는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미 사회적 장 전체의 절단들과 흐름들에 가족, 어른, 어린이가 모두 내던져져 있는 셈.(ex. 마르케사스인들에 대한 카디너의 분석 -풍토성의 기근에 결부된 성인의 식량불안과 어머니의 돌봄 부족에 대한 어린이들의 불안. 그러나 어머니의 돌봄 부족 역시 여성의 희소성이라는 사회적 장의 공급과 관련).
이로부터 우리는 세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정신분석의 경우 아이로부터 시작되는 듯이 말하지만(외디푸스를 부모에 대해 갖는 아이의 환상으로 이해) 이것은 부당한 것. 아들을 외디푸스화하는 것은 편집병자인 아버지. 둘째, 절대적 소급은 우리를 단순한 생식이나 재생산에 가두어 둔다. 문제는 소급이 아니라 순환(circuit). 무의식은 순환운동을 통해 자신을 재생산하며 이 순환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우선성 문제는 무의미. 그들은 모두 사회적 장에 내던져진 존재. (cf. 성욕(sexuality)과 재생산(reproduction)의 분리). 셋째, 정보나 커뮤니케이션의 일차성.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되는 것(transmission) 보다 공동체의 사회적 장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우선. 부모아 아들의 무의식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가족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의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것. 결국 가족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가족은 소용돌이처럼 휘저어지고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끌려가, 외부에서 가족을 횡단하는 전혀 다른 본성의 지시에 따라 외디푸스화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게 되기도 한다”).

2)사회적 투여의 두 극: 편집증과 분열증

사회적 투여는 크게 두 개의 극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차별적(segregative) 형태로 파시즘화하는 편집증적 극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노마드적(nomadic) 형태로 혁명적-분열증적 극이라고 할 수 있다.

①편집증적 극
?중앙주권의 구성체(formation) 투여(invest) / 이 구성체를 다른 모든 역사적 형태들의 영원한 목적으로 초[과잉]투여(overinvest) / 욕망의 자유로운 소수지대(enclaves)와 주변(the periphery)에 대해서는 역투여(countervest) / 욕망의 자유로운 형상(figure)에 대해서는 탈투여(disinvest, 흡수). “나는 당신들과 같은 종이요. 상류사회에 속해있고, 우등 인종의 피를 이어받았소”.
?외디푸스의 경우는 편집증의 한 영역이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편집증형의 사회적 투여를 전제한다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분열증이 그렇듯이) 편집증도 가족적인 것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사회적 장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으로 그것을 인물적 심상에 적용하거나 그것으로 환원할 때 생기는 것.

②분열증적 극
?욕망의 탈주선을 따라가며, 벽을 돌파하고, 흐름을 통과시키며, 그것의 기계들과 융합 그룹들(groups-in-fusion)을 소수지대와 주변들에서 조립. “나는 당신과 다른 종이요. 나는 영원히 열등 인종에 속하고, 짐승이고, 흑인이오.” 그것이 체계를 조각내고 돌파한다는 한에서 탈주하는 것, 도망, 변덕(변종)도 혁명적인 것. “탈주하지만 그 도중에 나는 무기를 찾는다!”
?포개지지 않는 탈인물화한 부분 대상들(partial objects). 여기서 가족의 규정은 매트릭스(family-as-matrix).

이 두 개의 극은 사람들의 욕망을 예속시키는 <예속집단(subjugated group)>의 투여인지, 욕망을 가지고 있는 횡단적 다양성들 속의 <주체집단(subject group)>의 투여인지에 따라 구분된다. 그것은 또한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아래 내용 참조)의 구분에도 상응한다. 이 투여들은 충만한 기관없는 신체 위에서 행해지며, 각 사회체(대지, 전제군주, 화폐-자본)에 따라 가변적으로 분배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적 투여가 이차적인 것이라는, 사회체가 기관없는 신체의 하나의 투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논리상 기관없는 신체가 마치 기원에 위치해 있고 사회체가 그 이후에 출현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관없는 신체는 사회체의 기원이라기 보다는 그것의 극한이다. 모든 사회체들에는 기관없는 신체가 극한으로 붙어있다. 기관없는 신체에서 분열증적 투여나 편집병적 투여를 말하는 것은 각 사회체(가령 자본주의의 조건들)의 궁극적 산물, 극한적 경계로서의 의미다(국역본 417쪽 위 그림). 
또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서로 다른 사회체들을 돌파해가는 탈주선을 표시하고 그 선이 기관없는 신체에 도달하는지, 아니면 붕괴되거나 되팅겨 다시 재영토화되는지에 따라 표현할 수도 있다(국역본 417쪽 아래 그림).


2. 분자적 무의식

1) 생기론과 기계론의 대립을 넘어서

우리는 욕망의 영역에서 어떻게 기계들을 말할 수 있을까?(욕망하는 기계). 기계들로부터의 구조적 통일성을 추상하는 것을 통해 유기체의 기능을 설명하는 기계론(mechanism) vs. 생물에 고유한 개체적 통일을 끌어대고 모든 기계가 이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하는 생기론(vitalism). 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유기체는 가장 완전한 기계들일 따름이고, 후자의 입장에서 볼 때 기계들은 유기체의 연장일 뿐. 이 둘 모두에서 욕망은 기계들과 외적인 관계에 머무른다.
이 두 대립을 넘어서기 위한 버틀러(S. Butler)의 전략은 대립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극한의 지점, 무차별(indifference)의 지점, 산포(dispersion)의 지점으로 밀어붙이는 것. 극한으로 이행시키는 이중의 운동을 통해서 유기체에 고유한 개체적 통일을 의문시하여 생기론 폭파(기계들이 유기체의 연장이라고 하는 것은 충분치 않으며, 그것들은 기관 없는 신체 위에 존재하는 사지들, 기관들. 인간들의 권력과 부에 따라 그것을 전유. 가난한 자는 그 사지들과 기관들을 빼앗김 -> 개체적 통일 꽝!), 기계의 구조적 통일을 의문시 하여 기계론 폭파(유기체들이 기계라고만 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그것은 수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부분들은 서로 다른 기계들의 부품이라고 할 정도. 구조적 통일성 꽝!).
기계들이 인간을 매개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재생산할 수 없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꿀벌의 매개하는 빨간 클로버의 재생산의 경우 빨간 클로버 자체는 재생산 체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꿀벌은 오히려 클로버의 재생산 체계의 일부를 이룰 뿐(클로버는 꿀벌을 유혹). 우리 역시 기계들의 재생산 체계의 일부를 이룰 수 있음. 우리의 오해는 복합 기계 전체를 단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그래서 복합 기계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고 개별화. 우리 자신의 사지들과 기관들을 보며 그것은 단일한 중심에서 나왔다고 생각.
구조적 통일성과 개체적 통일성이 모두 폭파되는 지점에서 기계는 기관들이라거나 기관은 기계들이다고 하는 말이 성립. (“인간은 기계화된 척추동물, 혹은 기게들에 진드기 같이 기생하는 기생충”). 구조적 통일성과 개체적 통일성이 깨지면 욕망은 기계와 직접적 유대 관계를 맺는다. 이제 욕망은 더 이상 개체 단위가 아니라 기계의 단위에서 고려되며 “기계는 욕망하는 것이 되고, 욕망은 기계화 된다”. 
따라서 진정한 차이는 생물과 기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의 두 상태이기도 한 기계의 두 상태 사이에 있다. 구조적(혹은 개체적) 통일에 갇힌 기계, 몰적 기계 / 기계 전체 속에 흩어져 있는 작은 기계들, 유기체 전체 속의 작은 조직들의 상호 침투, 직접적 커뮤니케이션, 분자적 기계.

2) 몰적 기계와 분자적 기계

① 몰적 방향과 분자적 방향  
몰적방향은 큰 수들의 법칙(통계에서 N을 키우면 편차를 줄일 수있다)을 따르며 분자적 방향은 통계적 법칙들을 따르지 않는 특이성들의 상호작용과 접속들의 미시물리학. 이 두 방향의 구분은 집합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구분이 아니다. 미시적인 것이 독창적인(original) 것일지라도 그것은 개별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며, 오히려 조정들, 연결들, 상호작용들을 (몰적인 것보다) 적게 보여주는 것이 아님. 오히려 개별적인 인물들의 형태는 몰적인 무의식의 통계학적 배분 법칙들에 속한다. 이 두 경우 모두 투여는 집합적(“모든 투여는 집합적이요, 모든 환상은 집단적이다”). 이 두 방향의 구분은 집합적-개별적인 것도 아니고 규모의 차원에서 대규모-소규모의 문제도 아니다(“기관없는 신체, 그것은 우주의 알과 같은 것으로 거대한 분자다”). 문제는 투여 방식이고 기능이고, 작동이다. 몰적인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누르고 억제하는 예속 집단(subjugated group)의 투여이고, 분자적인 것은 욕망을 가지고 횡단적 다양성들 속에서의 주체 집단(subject group)의 투여이다.

② 몰적 기계와 분자적 기계
진정한 차이가 생물과 기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몰적인 기계와 분자적 기계 사이에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 주요한 특징들을 대비시켜볼 수 있다. 먼저 분자적 기계(욕망하는 기계)의 경우 그것은 첫째로 기능(function)과 형성(편성, formation)이 분리되지 않았다. 둘째로 조립에 참여하는(몽따쥬, montage) 시간적(chronogeneous) 기계. 위치를 특정화할 수 없는(비국지적인) 커뮤니케이션. 다른 기계의 코드의 단편을 받아들여 자신을 재생산하는 데 이용(야생난의 경우). 셋째로는 본래적 의미의 기계로 흐름들과 절단들, 결합된 파동들과 입자들, 결합 가능한 흐름들과 부분 대상들. 이것들에 대한 횡단적 접속, 포함적 이접, 다의적 통접을 하는 것. 몰적 기계의 경우에는 흐름들을 기술과 제도들의 구조적 차원에서 통일시킨다. 각 생물들은 그 특성과 종류, 변종과 서식지 등이 통계적으로 처리되어서 하나의 단일한 대상과 주체로 특징지워짐. 이때 접속은 전체적(global)이고 특정한 것(specific, 종 고유의 것)이 되고, 이접은 배타택일적, 통접은 일대일대응으로 된다.

③ 규정조건과 기능주의
한편에는 분자적 질서를 갖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유기체 기계들, 기술기계들, 사회기계들(이 기계들은 일정한 규정 조건들 아래서는 동일한 기계들이다)이 있다. ‘규정조건(determinate condition)’이란 그것을 큰 집합으로 이루어 통일시키고 구조화시키며 안정화하는 통계학적 형식을 말한다. 그것은 어떤 부품은 그대로 두고 어떤 부품은 배제하여 군집들을 조직하는 선별적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기능주의(functionalism)는 분자적 차원, submicroscopic 차원에만 있는 것이다. 그 차원에서만 기능과 형성, 사용과 조립, 생산물과 생산이 분화되지 않기 때문이다(formation은 곧바로 기능을 말해주며, 조립되는 방식이 곧 사용방식이고 생산을 통해서 산출된 것은 곧바로 자기자신이다). 몰적인 기계들(가령 규정 조건하에서 유기체 기계나 기술기계, 사회기계 등)은 기능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지 않으며, 사용되는 것처럼 조립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생산활동은 구분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구분에서만이 의미나 목표, 의도가 나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기계들은 항상 자기 바깥에서 부여되는 ‘무엇을 위한’ 기능, ‘무엇에 대한’ 생산으로 평가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고, 기호화하지 않고,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재료이고 도구이며 생산이다. 이 점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은 몰적 기계들에서 볼 수 없는 종합 방식을 보인다. (ex. 알로스테릭 단백질과 리간드 -제어들의 선택에 있어 자유를 부여하는 작동원리, 체계들의 무근거성, 마르코프 사슬-분자적인 것의 비유기적 영역에서 시작하여 기관화되는(조직화되는) 커다란 구성물(configuration)로 나아갈 때도 역시 주사위 던지기 작동)

3) 횡단 성애(trans sexuality)

인간의 심층에는 이드(Id)가 있으며, 그곳에는 정신분열증적 세포, 분열분자들, 이것의 연쇄들과 은어들이 있다. 이러한 분자의 질서의 기계적 연결들과 기관 없는 신체 위의 강렬도의 지도 위에서 이것들의 배분을 고려하기도 하고, 그것의 통계적 집적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분열증에 대해 분자생물학적인 접근을 시도해볼 수 있다. 
손디(Szondi)는 프로이트의 개인적 무의식, 융의 집단적 무의식과 다른 유전적(genic) 무의식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가족적 질서에 그다지 갇히지 않는 것. 여기서 상속 유전자들의 역할은 단순한 자극에 그치며, 역사적 사회적 장을 가로지르는 벡터들에 따라 이 자극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 분자적 무의식은 재생산의 단위에 한정되지 않음. DNA만이 재생산 되는 것이며, 생산의 단위이며 생산물이기도 한 단백질은 재생산되지 않는 것. 그것은 재생산을 뚫고 고아적 순환운동 속에서 자기자신을 재생산. 
재생산을 뚫는 욕망의 흐름. 여기서 성욕은 생식(재생산)과 독립. 그것은 통계적 해석을 물리치며 내용을 넘어서 기능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 참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네게 속해 있는 네 충동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종합 속에서 작동하는가?” “너는 욕망하는 기계들을 무엇에 사용하는가?” 
이 사용을 우리는 분자적인 것 혹은 몰적인 것과 관련시켜 고찰. 이때 성적 에너지는 이것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라이히는 리비도를 분자적 관점과 몰적 관점의 연속상태 속에서 역학적 장동과 전기적 작동을 결합시켜 이해했다(라이히의 실험- 역학적 긴장과 전기의 충전, 전기의 방전과 역학적 이완). 그는 성욕과 성적 에너지를 우주적 흐름들과 관련시킴.
사랑을 특정 인물들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욕망은 항상 유목하며 이동하는 것. 또 리비도를 사회적으로 투여할 때는 승화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잘못. 그것은 직접 대중, 큰 집합들 미치 유기체의 터전을 마련. 성욕이 가족주의에서만 작동하며 더 큰 집합에서는 변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C. Fourier). 성욕은 어디에나 있다. 관료가 서류를 애무하는 것, 재판관이 재판하는 것, 사업가가 돈을 유통시키는 것, 자본가가 노동자를 퍽킹하는 것. 따라서 히틀러는 파시스트들을 실제로 발기시킨 것. 깃발, 국가, 군대, 은행은 많은 사람들을 발기시키며, 혁명 기계가 이 만큼의 절단과 흐름의 힘을 획득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은 횡단적인 것. 따라서 리비도를 억제하여 그것을 부부나 가족, 인물들, 대상들의 좁은 세포에 가두는 것은 억제나 저지, 포개는 일을 통해서 가능한 것.  “우리의 사랑이 사랑받는 존재의 리비도적 특성에 따라 자기 속에 갇히던가, 아니면 더 넓은 세계를, 즉 대중과 큰 집합에 대해 자신을 열 것인가하는 문제가 결정된다”. 
사랑의 인간학적 형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 아닌 것의 성”(Marx). 그것은 바로 욕망하는 기계들, 이것들의 분자들의 기계적 요소들, 이것들의 배열들과 종합들. 성욕이 몰적 집합들에 투여되고 있다면, 그것은 그 규정 조건들 아래에 분자적 요소들의 활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분자적 요소의 활동이 없다면 큰 집합들 속의 남녀 어느 하나로 특정화되는 인간의 성도 없을 것이고, 인간의 성욕도 없을 것이다 cf. ?헤겔법철학비판? (국역: 홍영두 옮김, 아침. 129-130쪽). 남극/북극의 문제와 극/비극의 문제: 첫 번째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북극과 남극은 둘다 극이다. 그들의 본질은 동일.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 양자도 하나의 유, 하나의 본질, 즉 인간적 본질이다. 북과 남은 하나의 본질의 대립적 규정들, 즉 동일한 본질의 최고로 전개된 수준에서의 구별. 그것은 분화된(differen-zierte) 본질(차이적 본질). 참된 실재적 극단들은 극과 비극, 인류와 비인류. 앞서의 것은 실존의 구별, 뒤의 것은 본질의 구별.
. 성이 하나인지(남근과 거세) 둘인지(여성의 성에 대한 적극적 규정)에 대한 주장은 여전히 인간학적이고 몰적인 표상.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를 이루는 것도 둘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수천 수만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나의 성도 아니요, 두 성도 아니다. n 개의 성이다.”


3.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1) 정신분석과 표상-신화

욕망이 생산이라면(욕망하는 생산) 정신분석이 하는 일은 생산을 표상(representation) 속으로 옮겨놓는(표상의 치환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믿기’ 보다는 표상의 질서(그에 따른 의미)라고 ‘믿는다’. 여기서 사회적 생산은 신앙들 속에서 소외되며, 욕망하는 생산은 표상들 속으로 유인된다. 생산은 그것을 질식시키는 표상의 심급들 아래서 계속 윙윙 거리고 그것을 파괴 한계점까지 몰고 간다. 표상은 이 지점에서 신화와 비극을 제시한다. 신화와 비극은 생산의 단위들의 자리를 차지한 이데올로기의 형태들일 뿐이다. 정신분석은 분석가들은 신화와 비극을 믿었다(cf. 엥겔스)
정신분석가들은 왜 그렇게도 신화와 비극적 표상에 몰상식한 특권을 주었던가? 왜 그들은 생산의 장인 작업장, 공장에 하나의 극장을 세웠는가? 극장의 계열에 의한 생산계열의 대체. (cf. “왜 니체는 자신의 ?비극의 탄생?과 손을 끊었던가, 왜 니체는 비극적 표상을 믿기를 그만두었던가 ?자기비판의 시도?(1888)에서....“이 새로운 영혼을 말하지 말고 노래했어야 했다”. “이 책은 모든 현상의 배후에 있는 예술적 의미”에 관계. 그러나 이 의미는 ‘신’이라고 할수 있으나 그것은 “현상 속에서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 가장 분열된 자....영원히 변전하는 자”이다.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비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던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그는 비극을 “모든 비극적 감정을 고양시키는 특별한 힘을 부여하는 것은 세계와 인생은 아무런 만족도 줄 수 없고, 따라서 세계와 인생은 우리에게 집착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인식의 획득”. (이상은 Nietzsche, F., 김대경 역, ?비극의 탄생?, 청하출판사 중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
푸코는 생산이 더 이상 표상 속에 자기를 포함시키기를 거부하고, 모든 측면에서 표상을 꿰뚫고 횡단하는 시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표상의 고전주의적 세계는 어떻게 파탄을 맞이하였던가?(?말과 사물?). 
19세기 근대로 들어서면서 생산은 표상에 종속되지 않고, 모든 표상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 리카아도와 아담스미스의 차이. 리카아도는 표상 가능한 모든 가치의 원천으로 주관적이며 추상적인 노동을 발견하였다. “추상이 실재적으로 참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근대적 사회 범주하에서다”(맑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주관적인 추상적 욕망 자체를 찾아낸 최초의 사람이었다. 추상적 노동과 추상적 욕망, 경제학과 정신분석학. 
“이전의 노동과 욕망은 개별적으로 한정되어 표상의 틀 속에서 특정한 인물이나 대상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추상적 욕망은 이러한 (어느 정도의) 탈영토화 운동과 관계하는 것으로 이러한 탈영토화 운동에는 더 이상 개별적 대상에 얽매이지 않는 여러 기계들의 작동과 욕망하는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억압과 억제의 장치들이 몰적 조직체를 이루고 있다. 이것들이 구성하는 분석의 장은 신화와 비극의 표상들이 욕망을 여전히 외적 조건이나 특수한 객관적 코드들에 되돌아오게 해서 욕망의 추상적 혹은 주관적 본질을 방해하기 때문에 이것과 갈등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트가 욕망하는 기계들, 사회 기계들, 제도와 메커니즘들에 대해 고찰할 때 신화와 비극에 대한 관심은 감소하는 경향).
상징적 표상의 경우에는 욕망의 본질을 파악할 때 그것을 큰 대상체에 관계시켜서 파악하며, 욕망의 대상들, 목표들 및 근원을 고정시키게 된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방법은 리비도로서의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보편적 본질에 관계 시킨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 해독은 더 이상 신화나 비극, 사회조직체, 꿈, 환상 등등을 모두 꿰뚫는 리비도의 양적 및 질적 흐름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 방식의 탈코드화. 신화의 코드 방식과 충돌. 또한 자본주의에서 추상적 노동이 탈코드화/탈영토화와 관계하듯이 자본주의 기계 속에서 리비도의 흐름 역시 자유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표상의 한정된 체계를 넘어선다.
자본주의가 욕망과 노동의 주관적 본질을 발견하고, 그것을 탈코드화의 흐름에 위치시키지만 그것은 항상 코드를 대체하는 공리계 속에 묶어두는 한에서만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억압기계 속에서 금새 소외된다. 자본주의는 토지와 전제군주의 표상을 파탄낸 흐름에 위치하지만 그것은 이미지를 표상의 자리에 세우고 억압을 다시 재건하고 말았다. 그래서 맑스는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이 자본주의에서 발견되는 것은 다시 쇠사슬에 묶이고 소외되기 위해서이고, 이렇게 되는 것은 대상체로서의 외적이고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주관적 영역에서다”고 말했다.
사실상 공리계의 조건이 되는 것은 사유재산의 형태다. 사유재산은 자본주의의 재영토화의 핵심이며, 여러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사유재산의 형태다. 자본주의는 보편적 본질로서의 생산을 위해 커다란 객관적 표상을 붕괴시키지만, 표상을 떠난 것은 아니고 광대한 전환을 해서 무한한 주관적 표상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찾는다.
정신분석 역시 신화와 비극을 객관적 표상으로서는 파괴하고 주관적 리비도의 형상을 발견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다시 신화와 비극의 주관적 표상을 찾는데, 그것은 바로 사적 인간(private person), 가족인(Homo familia)의 꿈이나 환상이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죽었지만 신앙(믿음)은 어떻게 유지되었는가? 그들은 신화학이나 신화학자들에 반대하고 외디푸스를 폐위시키고 추방했지만 그것을 다시 주관적인 보편자의 위치로 옮겨놓는다. “한손으로는 신화와 객관적 표상들의 체계를 파괴하고 다른 손으로는 이 욕망하는 생산을 주관적 표상들의 체계로 옮긴다”. 여기서 남는 것은 이미지들 뿐이다. 그것도 주관적으로 상상된 이미지들....
그렇다면 극장의 계열은 어떻게 특권적 지위를 갖는 것인가? 만약 표상이 객관적이기를 그치고, 무한히 주관적인 것만이 된다면, 다시말해서 그것들이 하나의 ‘구조’에 의해서 지탱되지 않는다면 실제로 모든 정합성이 상실될 것이다. 구조는 이미지들로 표상되는 대상들 및 주체와 대상들 간의 관계를 규정해야 했고, 우리는 표상과 이미지들의 가변적 관계에 숨어있는 어떤 보편구조를 찾아야만 했다. 객관적으로 표상의 세계에 환원될 수 없는 기계의 사회적 생산이 발견되지만, 그것은 금새 구조적인 극장적 표상(Darstellung, 나타냄, 상연)과 동일시. 이제 이 객관적 구조가 외삽되고, 적용된다. 가족관계는 모든 관계의 은유가 되고, 분자적 요소들은 탈주선을 봉쇄당한다. 기계들에 대한 하나의 구조적 통일이 강요됨. 구조적 조작. (cf. 알뛰세). 어떻게 신앙을 버린 후에도 신앙이 계속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심상을 믿는 힘을 구조의 밑바닥에서 되찾음으로써다. “토지들이 무너지자 구조가 재영토화를 수행한다”.

2) 외디푸스의 자기비판의 지점

라캉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상상계와 상징계를 다람쥐처럼 왔다갔다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외디푸스적 상상계에서 외디푸스로 구조화된 상징계로 이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구조의 이면에 있는 욕망의 현실적 생산을 이해. “구조가 그 이면으로서 욕망의 현실적 생산을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미지들로부터 구조로 올라간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 이면은 분자적 요소들이 실재적으로 비유기화된 영역. 여기에는 부분대상들과 순수한 다양성들, 욕망의 기호들이 있다. 라깡은 이 구조의 이면을 기계로서의 'a'와 인간의 것이 아닌 성으로서의 'A'로 발견하고 있다.
구조는 어떻게 도출되었을까? 그것은 구조와의 평면, 선택의 선들을 따라 통계학적 큰 집합들, 몰적 조직체들에 대응하여 연계를 규정하고 생산을 표상에 포갬으로서다. 이접들은 배타택일적으로 되고, 접속은 전체적인 것으로, 통접은 일대일 대응으로 된다. 동시에 토대는 구조적 통일 아래 명확히 한정되고 기호들은 시니피앙이 된다. 그러나 욕망의 기호들이 곧바로 시니피앙이 될 수는 없으므로 그는 그것을 결여에 위치시킨다. 어떤 연결선도 없다. 부재의 시니피앙과 관련해서만 그것은 표상 속에서 시니피앙이 된다. 큰 타자(A)는 이제 항상 결여하는 항으로서의 시니피앙에 자리를 내준다. 이 시니피앙은 이제 너무나 인간적인 성, 바로 몰을 이루는 거세된 남근이다.
그러나 라캉의 이론이 복잡해지는 것은 그가 무의식을 외디푸스 구조 아래 가두어두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사실상 그는 이미지들이 외디푸스화하는 구조에 의해서 생겨났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 구조가 거세의 요소를 재생산하는 한에서만 작동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라캉이 보여준 것은 외디푸스의 자기비판의 지점이 된다. (외디푸스가 상상적인 것이고, 하나의 심상이며,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구조는 거세의 요소를 재생산하는 한에서만 작동한다는 것). 루디네스코에 따르면 라캉에게 있어서 무의식이 언어라고 하는 가설은 무의식을 언어적 구조 속에 가두어두는 것이기 보다는 ‘어떻게 시니피앙들의 구조적 조직이 여전히 고풍주의로 작동하는 전제군주 시니피앙에 의존하는가를 밝힘으로써 언어학을 그 자기비판지점에 이르게 했다’는 것).
자기비판의 지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지들과 (구조를 좌우하는)상징계를 넘어서 구조를 용해시키는 비조직화의 원리로서 구조의 이면을 발견하는 지점이다. 욕망이 생산의 질서로 다시 돌아오고 분자적 요소들이 관계한다. 그것은 인물들, 집합들, 법률들을 모르고, 이미지들, 구조들, 상징들을 모른다. 무의식은 무정부주의자요, 고아이며, 역사상의 이름들의 강도에서 자신을 생산한다. 그것은 구조도 상징도 아니다.

3) 분열자 분석의 소극적 임무

정신분석이 사회적 억압에 봉사하고 있다는 점을 고발한 라이히가 그 과업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던 것은 정신분석과 자본주의의 유대를 주로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파악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과 자본주의의 유대는 훨씬 깊은 것이다. 정신분석이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존하고(정신분석과 돈), 자본주의 공리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탈코드화 흐름들은 필연적으로 가족적 장에 포개지며, 이 장에 자본주의 공리계가 실재로 적용된다고 하는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관료기구나 군사기계에 못지 않게 정신분석도 잉여가치를 훕수하는 메커니즘이다. 정신분석 자체가 거대한 도착이고 마약이고, 나르시즘이고 자폐증이다(그는 자신만을 참조하고 자기에만 준거한다). 그것은 현실에 자신을 열지 않는다.
분열자 분석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것은 바로 파괴하는 일이다. 분열자 분석은 전력을 다해 파괴에 집중해야 한다. 신앙과 표상들, 극장의 무대들, 아무리 파괴해도 지나침이 없다. 무의식을 청소하고 깨끗이 소화하는 것. 외디푸스를 파괴하는 것. 자아라는 착각을, 초자아의 꼭두각시를, 죄책감을, 법률을, 거세를 파괴해야 한다. 환자가 신화의 노래나 비극의 구절을 뇌까릴 때마다 난폭하게 멈추고 공장으로 데리고 가라.
라깡의 뒤를 이어 르클레르가 내세운 실천적 규칙. 즉 연결줄의 부재에 못지 않고 그것의 무의미함에 대해서도 상기하라. 우리가 어떤 연결줄을 찾으려 하거나 회복하려는 한 당신은 결코 어떤 것에도 도달하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실재적인 것을 드러내겠다고 주장하면서 결국엔 몰의 구멍으로 빠져든다.
탈주선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분석이 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식으로다. 거세의 상처에 있는 결핍이 아니라 수천의 작은 접속들, 이접들, 통접들이 중요하다. 그것을 흐르는 흐름들-분열들, 절단들-흐름들.
그러나 우리는 현실 속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다시금 정착하는 곳을 보게 된다. 영토는 다시금 세워진다. 재영토화하는 도착의 극. 결국 우리는 정신분열증적 욕망의 흐름들의 탈영토화 운동이 전체적인 혹은 국지적인 재영토화를 수반하지 않고서는 생기자 않는다는 것, 그리고 탈영토화의 힘을 평가하는 것도 이 탈영토화를 표상하는 재영토화의 형들을 통해서라는 것.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는 붙어있다. 탈영토화는 어떤 것도 그 자체로 파악되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복합물이고 혼혈(뮬레토, mulatto)이다.
차이는 정신분석은 재영토화의 상상적이고 구조적인 표상에 집착하지만, 분열자 분석은 탈영토화의 기계적 지표들(indices)을 추구한다는데 있다.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스’에서 주인공은 수동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으며, 동조적이지도 반항적이지도 않다. 그는 단지 설계도를 그리는 첨단이고, 그 선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빨리 사라진다. 설계도의 선을 그은 것이다”. “탈주자는 스스로 탈영토화하면서 대지에 금을 그으면서 전진한다).
분열자 분석은 파괴에 빨리 착수해야 하지만 조심스러워야 한다. 왜냐하면 환자 개인에게는 경험을 통해 안에서 생기거나 외부에서 강요된 많은 지층들과 평면들이 있다. 정신분열증의 과정은 창조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새로운 대지’를 만들때만 자기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낡은 대지를 새로운 대지로 바꾸는 것.... 그러나 항상 과정을 되찾고 다시 여행을 떠나는 것. “자기가 창조하는 대지를 위하여 다른 모든 대지들을 파괴하는 강렬도의 여행”.
정신의학의 효과적(effective) 정치화(politicization)- 우리는 회로들이 인위적이고 억압적인 대지들을 다시 형성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을까? 정신의학 혹은 반정신의학의 참된 정치는 두가지 일로 성립한다. 첫째는 광기를 정신병으로 변형시키는 모든 재영토화를 파괴하는 일. 둘째는 모든 흐름에서 탈영토화하는 정신분열증적 운동을 해방시키는 일. 광기가 더 이상 광기로 존재하지 않는 것(‘광기가 사라질 시대’ -푸코)은 광기의 외곽을 긋는 경계선이 모든 측면에서 관리를 벗어나고 우리를 선도하는 다른 흐름들에 의해 돌파되는 것. 광기가 과하과 예술을 포함하여 모든 다른 흐름들의 지지를 받는 것. 과정의 경향을 부활시키고, 새로운 대지의 지표가 될 때까지 이미지들과 환영들을 밀어붙이는 것.  이때 도래하는 대지는 미리 존재하는 약속된 대지가 아니라 자기의 탈영토화 운동에 따라 창조되는 대지. 그리고 이 대지를 실현하는 것은 ‘잔인성의 극장’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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