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유리카한국위인특대전집 (5) 왕인.
왕인(
백제 시대의 학자로,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일본에 보내 줄 것을 청하자, 백제
왕의 명령으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간 그는 일본 왕
오진의 태자를 가르치며, 일본에 한문학을 일으키게 해 주었다.
그의 자손들은 일본 서쪽 도시 고치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의 이름은 일본의 고지키(고사기) 에
는 와니키시라 적혀 있고, 니흔소키(일본서기) 에는 와니(왕인)라 적혀 있다.
1. 세상을 밝히는 학문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연장 망태를 짊어진 한 사내가 잡목들이 우거진 풀숲을 헤치며 산비탈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 곳은 명산의 기운을 자연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월출산의 주지봉 아래로, 안개가 짙게 드리
워진 산 속의 새벽 공기는 더없이 맑고 신선하였다.
사내는 어듬 속에서 흰 뱀처럼 졸졸 흐르는 냇물 가까이에 다다르자, 구유처럼 생기 바위에 망
태를 벗어 놓고는 냇물을 향해 절을 하였다.
오!성스러운 물님이시여, 저희 부부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두 손을 모으고 연신 냇물에 절을 하고 나서는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꿀꺽꿀꺽 마셨다. 물의
찬 기운이 창자속까지 스며들었다. 이 사내는 성지골(전라 남도 영암군 서면 성기동)에 사는 왕순
이란 사람이었다.
성지골에서 남쪽으로 반 마장쯤 가면 불무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에는 질이 좋은 흙이 나
오기 때문에 언제부터인지 옹기 가마가 생겨나, 많은 옹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왕순도 그 곳에서
옹기를 굽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를 맞았을 때, 다짐을 하듯이 아내에게 말했다.
조상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훌륭한 자녀를 갖는 일이라고 생각하오.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알겠어요. 당신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는 그대로 따르겠어요.
이 때부터 젊은 부부는 날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이 산으로 올라와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에
서 흘러나오는 냇물에 절하며, 정성을 다하여 신에게 소원을 빌고 그 물을 마셨다.
이윽고 아내가 아기를 잉태하여 첫아들을 낳게 되자, 젊은 부부는 매우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
은 잠깐이었다. 낳은 지 이레도 못 되어 아이는 죽고 말았다. 왕순은 마음이 아프고 슬펐지만 실
망하지 않았다.
우리의 정성이 모자랐던 탓이오. 다시 정성을 다하여 훌륭한 아기를 점지해 달라고 기도를 드
립시다.
슬퍼하는 아내를 이렇게 위로하고는 다시 새벽마다 성스러운 냇물 마시기를 계속하였다. 그래
서 다시 아들을 하나 얻었지만, 이 아들 역시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아내는 몹시 슬퍼하며 말하였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자식 복이 없나 봅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였는데…….
무슨 말이오. 낙심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정성껏 기도를 드려 봅시다. 이번에야말로 월출산의
산신령께서도 우리의 정성을 아시고 튼튼하고 훌륭한 아기를 점지해 주실 것이오.
왕순도 마음이 아팠지만 슬픔에 빠진 아내를 위로하려고 이렇게 말하였다.
부부는 다시 정성을 들였다. 마침내 왕순은 세 번째로 아들을 얻게 되었고, 그 아이를 강 이라
고 불렀다.
옛날에는 개똥이니 쇠똥이니 하는 아명을 지어 불렀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기르는 아이는 귀신
도 샘내지 않고 잡아가지 않는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강 이란 말은 튼튼한 개하는 뜻으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 달라는 아들에 대한 왕순의 바람
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강은 무럭무럭 자라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아버지나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보고 방실방실 웃을
정도가 되었다.
귀신이 언제 또 샘을 내어 우리 아이를 잡아갈지 모른다. 이럴수록 더욱 정성을 들여야지.
이미 두 아들을 잃었던 왕순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온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날마다 이
른 새벽이면 그 성스러운 냇물에 절을 하고 나서야 일터로 갔다. 참으로 지극한 부모의 사랑이고
정성이었다.
이렇게 태어난 강이 바로 왕인 이다. 왕인은 뒷날 뛰어난 학문과 덕으로 만인이 우러러보는 성
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마을을 성기동(성지골) 이라 했고, 왕순이 절을 하던 냇물도 성
천 이라 불리었다.
왕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체로 백제 제 14대 근구수왕과 제 16대 진사왕 무렵의 사
람이라고 추측된다.
왕인은 어려서 무척 총명했으나,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하여 아버지인 왕순을 당황하게 만들곤
하였다.
아버지, 우리 나라는 어떤 나라지요?
우리 나라? 갑자기 그런 것을 왜 묻느냐?
우리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
허허, 녀석 나라일에 관심을 갖는 걸 보니 다 컸구나. 우리 나라는 백제 라고 한단다.
백제의 역사는 고구려에서 시작된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 즉 동명 성왕이 아직 동부여에 있을 때, 그는 예씨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
나 그의 뛰어난 인품을 시기하던 무리들이 주몽을 죽이려 하자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천 부근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졸본부여의 왕녀와 다시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비류와 온조가 성장했을 때, 주몽이 동부여에서 결혼한 예씨 부인의 소생 유리 가 아버지 주몽
을 찾아오게 되어 태자에 오르게 된다. 이에 비류와 온조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
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렀다.
거기서 비류는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갔고, 온조는 위례성(현재의 광주 부근)에 도읍을 정하
여 열 신하의 보필을 받았는데 나라 이름을 십제 라 했다. 얼마 후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
례성으로 모여들자,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동명 성왕의 묘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백제는 처음에 말갈족과 낙랑의 침입을 자주 받아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단다. 그리고 남쪽으
로 마한(지금의 익산) 땅을 정복하기 시작했지.
왕순은 한참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자기의 이야기를 듣다가 졸고 있는 왕인을 보고 꾸짖었다.
이 녀석,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더니 벌써 졸고 있느냐?
싸워서 서로 죽였다는 이야기는 싫습니다.
좋다. 그럼 싸움 이야기는 그만두고 다른 이야기를 해 줄 테니 졸지 말고 잘 들어야 한다.
네, 이젠 잘 듣겠습니다.
백제는 제8대 고이왕 27년에 비로소 6좌평과 16관등을 두게 되었단다. 이것으로 국가의 틀이
되는 기본 제도가 마련된 셈이지. 또, 제9대 책계왕 때에는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했는데, 그 때
책계왕은 대방의 왕녀를 아내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원병을 보내어 대방을 도왔단다. 이 때부터
백제와 고구려는 틈이 벌어졌던 거란다.
그래서요?
제13대 근초고왕 때 고구려는 마침내 백제를 공격해 왔지. 근초고왕 24년인 서기 369년에 고
구려의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지금의 백천)에 와서 민가를 약탈하자, 백
제에서는 태자를 보내여 이를 크게 무찔렀단다. 그리고 백제는 마한의 옛 땅인 남해안 일대를 모
두 차지했단다.
아버지로부터 백제의 역사를 듣고 있던 왕인은 곧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잇을 때에는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모를 만큼 깊이 빠져드는 버릇이 있었다. 왕순도 이런
왕인의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하던 이야기를 멈추었다.
잠시 후, 그제서야 깊은 생각에서 깨어난 듯 왕인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는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글을?
아버지가 되물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를 보면 백제는 나라를 세운 이후로도 문자의 기록이 없었는데, 이 무렵
에야 비로소 박사 고흥에 의해 문자의 기록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문자가 건너온 것은
이보다 앞섰지만 널리 퍼지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는 학문과 덕이 높은 금성 교수가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그분께 학문을 배우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왕인은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자, 곧 금성 교수를 찾아갔다.
금성 교수는 흰 수염이 배꼽까지 길게 드리워진 분이었다.
글을 배우고 싶으냐?
네.
글을 배워 무엇을 하고 싶으냐?
글은 어둠을 비추는 불빛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배움으로써 스스로의 어두운 마음을 비추고
세상도 비추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왕인은 금성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문산재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인은 스승의 큰 희망이 되었다.
나는 이제껏 수십 년을 두고 글을 읽었다마는, 너만큼 똑똑한 아이는 처음이구나. 너는 틀림없
이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을 거다.
금성 교수는 왕인의 총명함을 크게 칭찬하였다.
한문은 특히 기억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한문이 어떤 수준에 이르면 응용할 수 있는 방법도
열리기 마련이다. 왕인은 글공부를 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서 한문이 가지고 있는 원리를 터득하
여 어떤 글도 모두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소년이던 시절, 백제는 고구려와 심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이 당시 백제의 세력은 북쪽으
로 패강(지금의 대동강)까지 미치고 있었다.
근초고왕 26년에는 고구려군이 남쪽으로 쳐들어오자 백제에서는 군사를 패강 기슭에 잠복시켜
고구려군을 무찔렀고, 이 기세를 몰아 백제군은 태자 수의 지휘 아래 3만 명으 군사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 태자인 소수림이 왕위에 올랐다.
이 무렵의 백제는 그 세력이 절정기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5호 16국이라 하여 북방의 유목 민족들이 차례로 나라를 세웠다가 흥망을 거듭하
고 있었으나, 백제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듬해 고구려에는 전진의 승려 순도가 처음으로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백제
는 아직 불교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이보다 앞서 동진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동진은 진나라가 흉노족에 쫒겨 양쯔 강 이남으로 달아나 세운 나라로 중국의 강남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백제와는 배로 왕래를 할 수 있었으므로 동진의 육조 문화가 가장 먼저 백제에 들어왔다. 왕인
에 배운 학문은 바로 이 육조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한때 백제에 밀렸던 고구려는 서기 375년 백제의 수곡성(지금의 황해도 신계)을 점령하였다. 이
해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죽고 태자 수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제14대 근구수왕이다.
근구수왕은 서기 377년에 3만 명의 병사로 반격을 했고 다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백제와 고
구려는 이 전쟁에서 치열한 혈전을 거듭하였다.
그 후 근구수왕 6년에는 백제 전역에 몹쓸 전염병이 나돌았다.
베첩골(지금의 상대포)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어요.
중국에서 들어온 병인가?
아무튼 위로는 토하고 밑으로는 설사를 하는데 몸이 마치 불덩어리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
집마다 우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지요.
워낙에 무서운 병이라 이름난 의원들도 전혀 손을 못대고 있답니다.
큰일났군. 우리 마을에는 들어오지 말아야 할 텐데.
그 당시 전염병은 아주 무서운 병이었다. 당황한 백성들은 무섭게 번져가는 이름 모를 병에 사
랑하는 가족을 잃으면서도 그저 병마가 빨리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걱정은
나라 안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온 나라가 울음바다가 된 셈이었다.
이 슬픈 역사는 왕인이 살던 성지골에도 찾아왔다. 수십 명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너무
도 엄청난 일이었다. 왕인의 아버지 왕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왕인은 전염병으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너무도 슬퍼서 울고 또 울었다. 이처럼 위세를
떨치던 무서운 병은 찬바람이 나면서야 차츰 수그러졌다. 아마도 그 전염병은 지금의 콜레라인
듯하다.
몇 년 후, 또 다시 큰 재앙이 백제를 휩쓸었다.
이번에는 가뭄이었다. 봄부터 가뭄이 시작되어 6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벼농사는 물
론이고 밭곡식도 모두 말라 죽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왕인은 기운이 없어 누워 계시는 어머니를 위해 산에 올라가 풀뿌리를 캐고 나무 껍질을 벗겼
지만 주린 배는 채워지지 않았다.
하루는 왕인이 문산재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손님이 와 있었다. 쉰 살이 넘어 보이
는 남자였다.
사나이의 이름은 호원장으로, 반남에 있는 옹기 가마의 책임자였다. 어머니는 왕인에게
발라군(지금의 나주)의 반남에서 오신 분이다. 돌아가신 아버님과는 아주 친하게 지내신 분이
란다.
왕인이 절을 올리고 나자 호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네가 왕인이냐? 그 동안 어머님을 통해 네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 문산재에서 하는 공부는
재미가 있느냐?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것이 돌아가신 아버님께 대한 효도하는 길이느니라.
왕인은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물었다.
아저씨, 무슨 새 소식이 있으면 가르쳐 주십시오.
새 소식? 어떤 소식 말이냐?
이 곳 성지골은 두메 산골입니다. 아저씨가 계신 곳은 큰 고을이라 도읍의 소
식도 가끔 들으시지요?
그거야 그렇지. 너는 정말 믿음직스럽게 생겼구나.
그렇다면 들은 대로 몇 가지 전해 주마.
하고 호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년 4월에 임금님이 돌아가시고 태자께서 왕위에 오르셨단다. 그것보다 9월에 동진에서 마라
난타라는 중이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왔는데 지금 그 믿음이 굉장하다는구나.
믿음이라니요?
호기심이 많은 왕인의 눈이 빛났다.
부처님을 믿는 것이지. 부처님은 중생의 늙음과 병과 죽음의 괴로움을 초월할 수 있는 깨달음
을 여신 분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임금님과 왕비님도 불법을 궁중에 받아들여 정성을 다하여 섬
기신다는구나.
그렇게도 훌륭한 가르침인가요?
글쎄, 나도 잘은 모른다마는 석가모니는 대성이라고 하더라.
호원장은 이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왕인의 얼굴을 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왕
인의 관상을 보고 그의 총명함과 의젓함을 흡족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마가 넓고 인중이 뚜렷
하며 살결이 매우 희였다.
음, 귀공자처럼 시원스럽게 생겼구나. 수명도 길고 반드시 이름을 후세에 남길 인물이다.
이렇게 생각한 호원장은 왕인에게 당부하였다.
찰흙을 이길 때는 수없이 내리치고 발로 밟는다. 그래야만 좋은 그릇이 된단다. 그러니 너도
그와 같이 학문을 단련해라.
호원장이 가고 난 후, 어머니는 왕인의 궁금증을 풀어 주려는 듯 말했다.
왕인아, 그분과 아버님은 생전에 굳은 약속이 있었단다. 그분에게 따님이 있는데 너를 사위로
삼으시겠다는구나.
네,저를요?
그래, 그 어른께서 너를 아주 마음에 들어하시더라.
어머님, 저는 아직…….
뜻밖의 말을 들은 왕인은 당황해서 미처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그러나 혼인에 대한 문제는 그
리 심각하게 여겨지질 않았다. 왕인은 다시 공부에 열중하였다.
왕인은 가끔씩 문산재 근처의 숲을 거닐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렇다. 나는 학문으로 이름을 남겨야 한다. 학문으로 다른 사람을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왕인은 요즘 공부보다도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철이 들면서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하시던 말씀이 자주 떠올랐다.
사람은 태어난 근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배우고 닦기에 따라 사람은 달라진다.
이 무렵 왕인은 공자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였다.
공자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생하면서 자랐다.
흙장난을 하면서도 하늘과 조상에 대한 제사 흉내를 내었고,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을 키웠다.
공자의 제자 증삼은 효경을 썼다. 왕인은 효경을 배우면서, 사람에게 있어 효도가 얼마나 중요
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달았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계시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어머니는 지난 가을부터 갑자기 시력이 약해지셨다.
왕인아, 왜 내 눈이 이렇듯 갑자기 침침해지는지 모르겠다. 마치 콩커풀을 뒤집어씌운 것처럼
뿌옇기만 하구나.
어머니는 너무 고생을 많이 하여 자주 병석에 누웠다.
그런데다가 봄이 되면서는 통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왕인은 아침 저녁으로 직
접 밥을 짓고, 빨래는 물론 집안일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그러자니 왕인은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
만 몸이 몹시 고달팠다. 생활이 힘들자 때로는 짜증스럽기도 하였다.
하루는 아침밥을 짓고 있다가 뒤꼍에 있는 감나무에서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자,
저놈의 까마귀!
하고 부지깽이를 잡고 뛰어나갔다. 그러다가 그는 금방 후회를 하였다.
아, 나는 까마귀만도 못하구나.
까마귀는 보기에는 흉악스럽게 생겼지만 효도하는 새라고 한다. 까마귀는 어려서의 은혜를 갚
기 위해서인지 자라서는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것이다.
내 학문은 아직도 멀었다. 입으로는 효도니 뭐니 하면서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고 있지 않은
가?
왕인을 밥상을 차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님, 진지 잡수세요.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크게 뜨며 눈물을 흘렸다.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누워 계세요.
어머니는 아들과 자꾸 말을 하고 싶어했다.눈이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 고통은
이루 말할수 없이 컸다.
반남의 어른께서는 그 뒤 별소식이 없었느냐?
호원장은 그 뒤에도 왕인의 모자가 반남으로 아주 이사하여 살면 어떻겠냐 하고 제의해 왔었
다. 그 때마다 왕인을 다음과 같은 말로 대답을 대신했던 것이다.
저는 아직도 학문이 부족합니다. 어른의 뜻은 고맙지만 몇 년 더 공부를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대답을 않자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하기야 네 학문이 더 중요하지, 늙은 어미가 공연한 소리를 했구나.
어머니는 쓸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반드시 더 높은 학문을 쌓은 뒤, 어머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 해 가을 어느 날, 호원당이 왕인의 집을 찾아왔다.
오늘은 월출산에 오르고 싶네. 자네가 나를 위해 안내를 좀 해 주겠는가?
네, 아저씨.
왕인은 월출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몸이었다. 집 뒤에는 붓끝처럼 생긴 월출산의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그것은 주지봉으로 일명 문필봉이라고 했다.
자네는 이 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테지?
그럼요. 저는 이따금 이 산에 올라 푸른 바다를 굽어보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있습니다.
유교는 공자에서 비롯하여 증삼을 거치고 다시 공자의 손자 자사에게 전해졌다. 자사는 증용
이란 책에서 정성이야말로 곧 천지와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자사의 제자로 다시 맹자가 나타나 인·의 ·예·지의 네 가지 덕이 인간의 본디 성격이고, 인
간은 낳으면서 모두 착하다는 주장을 폈다.
또한, 맹자는 사람이 덕을 갖추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찰 만큼 큰 마음이 생긴다고 하
면서 호연지기를 강조하였다.
사람이 학문을 닦는 것도 이렇듯 크고 깨끗하며 남에게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
를 가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산을 오르면서 왕인은 설명하였다.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바위가 3개 있지요. 아주 큰 바위지만 사람이 혼자서 흔들 수가 있습니
다. 그래서 그 바위 때문에 이 고장에서 큰 인물이 난다는 전설이 있었답니다. 중국인들이 그것을
두려워하여 밤중에 몰래 와서 바위를 굴러 떨어뜨렸는데, 아침에 보니 바위 하나가 다시 본디의
자리로 돌아와 있더랍니다.
오,그런가!
호원장은 빙그레 웃었다. 그 신기한 바위 때문에 영암이란 고을 이름이 생겼다는 것가지도 이
미 알고 있었지만 호원장은 잠자코 있었다.
겨을을 넘기기 전에 혼사를 치뤄야 할 텐데…….
호원장은 왕인을 만나볼수록 그의 학문과 사람됨이 탐났던 것이다. 왼편으로 올라가자 문산재
가 안개 속에 희미하게 나타났고, 뒤쪽에는 병풍처럼 죽순봉이 웅장한 윤곽을 드러냈다.
아저씨, 발 밑을 조심하세요. 이 곳은 제가 수학하는 문산재입니다.
호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왕인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지만, 그 역시 젊었을 때 왕순과 곧
잘 월출산에 올라다녀서 이곳 저곳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내 걱정은 말고 빨리 서두르세. 산 위에서 보는 해돋이는 정말 장관이 아니겠나?
문산재에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주지봉의 우뚝 솟은 모습이 보인다. 짙은 안개에 쌓여서 그 모
습을 자세히 볼 수 없는 새벽이지만 그들은 주지봉의 웅장함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주지봉에 다다랐다. 천왕봉 쪽에서부터 불그스름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쉬세.
두 사람은 편평한 바위를 골라 앉았다.
힘들지 않나?
아닙니다. 저는 괜찮지만, 저보다 아저씨께서…….
왕인은 오히려 나이 많은 호원장을 염려하였다. 호원장을 망태기에서 조롱박을 꺼내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왕인에게 건네 주었다. 물이 꿀처럼 달았다.
주지봉 주위에도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산허리에도 골짜기
에도 짙은 안개가 구름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자, 향로봉에 가서 쉬기로 하고 다시 올라가세.
주지봉에서 향로봉까지는 널따란 억새밭이 펼쳐져 있었다. 억새풀은 꽃술이 하얗게 피어 그들
의 키를 넘을듯이 자라 있었다.
그들은 억새풀밭을 헤치며 나아갔다. 이윽고 향로봉의 꼭대기 바위에 올랐다. 멍석처럼 편평한
바위에는 아홉군데의 우묵한 곳이 있었다.
옛날 이 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네. 그래서 이 곳을 구정봉이라고 하기도 하지.
호원장의 말에 왕인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저씨는 이 산에 대해서 나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내게 안내를 부탁하셨구나.
호원장 앞에서 이것저것 설명을 하던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호원장은 구정봉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면 하늘에서 아홉 선녀가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했다네. 한번은 이림(지
금의 영암)에서 사는 나무꾼이 선녀의 옷 한 벌을 감추어 버렸지. 이 때문에 하늘로 돌아가지 못
한 막내둥이 선녀는 나무꾼과 혼인하여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네.
호원장은 북서쪽에 있는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기 2개의 암석이 보이나? 그리고 오른쪽 암석 허리에 반달 모양의 돌이 걸려 있지? 저 반달
모양의 돌은 금방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네. 그래서 저 바위를 신령스런 바위라는
뜻에서 영암 이라고 부르는 거라네.
이들은 험한 산길을 걸어 향로봉 정상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망태기에 담아온 주먹밥을 먹고,
조롱박을 꺼내어 물을 마셨다.
그들은 일단 다시 산을 내려와 용추 폭포에서 은천 담수라는 여울목을 지나 천황봉 아래에 이
르렀다.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천황봉에 오르세!
그들은 그 곳 통천문이라는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모닥불에 몸을 녹여 가며 다리를 죽 펴
고 앉자, 하루종일 걸었던 산행의 피로감이 밀려왔다.
어머님은 진지나 제대로 잡수셨는지…….
왕인은 문득 중얼거렸다. 이웃 할머니께 어머니를 부탁해 놓았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호원장은 이 말을 듣고 왕인의 사람됨에 또 한 번 감탄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천황봉의 정상에 올랐다.
산은 오르는 고달픔만큼 보답을 해 주었다. 정사에서 바라보는 통쾌한 기분! 동남쪽에는 사자봉
과 갓봉의 우람한 봉우리들이 발 아래 꿇어 엎드리듯 웅크리고 있고 남서쪽으로는 바다와 섬과
산들이 보였다.
두 사람은 천황봉에서 해돋이를 맞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내려오는 길은 아주 험난하여
바위에 몸을 바짝 붙여야 했다.
조심하게. 산이란 오르기보다 어쩌면 내려오기가 더 어려운지도 모르네. 세상 사는 이치도 마
찬가지지.
칼끝 같은 바위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낭떠러지 모퉁이의 길을 내려왔다. 그리고 광암터의 전망
바위에 올라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다가 보이지? 저 바다 건너에는 중국도 있고 왜국도 있네. 대장부로 태어났다면 저 바다를
건너갈 용기도 있어야지!
왕인은 이 날 호원장과의 산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수 있어 매우 기뻤다.
자연의 조화는 정말 신비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저는 오늘에야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이 자연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겠나?
그 후, 왕인은 다시 문산재에서 열심히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월출산을 다녀온 뒤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짜증을 내는 법이 없었다.
인간은 자연에 비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 작은 존재라도 이 세상에 목숨을 받았다면, 노
력하고 또 노력하여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왕인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근본적인 인간됨을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
때는 백제 제16대 진사왕 초기였다. 제15대 침류왕은 일 년 남짓 왕위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백
제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한산에 절을 지었으며 승려 10명을 관에서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진사왕은 침류왕의 동생으로 사람됨이 굳세고 날래며 총명하고 인자하고 지혜로웠다. 그는 침
류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태자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진사왕은 왕이 되자 국방에 힘을 썼다.
그는 열다섯 살 이상의 장정을 뽑아 청목령(지금의 개성)에서 북으로 팔곤성까지 국경 경비를
엄중히 했고, 서쪽으로는 바다에까지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때, 왕인이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왕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다만 여러 가지로 추측만 할 뿐이다.
이럴 즈음 문산재의 글벗 사이에는 왕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왕인은 아침 일찍 문
산재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어느 틈에 자리를 비우곤 했다. 그리고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다시
문산재에 나타났다.
이런 왕인의 태도를 글벗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는 하루 종일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루는 글벗인 임구석이 왕인의 뒤를 밟았다.
왕인은 뒷동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임구석은 나무줄기에 몸을 숨겨 가며 뒤를 따랐다. 이윽고
왕인은 덤불이 우거진 바위 앞에 이르자 몸을 구부려 모습을 감추었다. 임구석은 발소리를 죽여
가며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가 왕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임구석은 어리둥절해졌다. 자세
히 살펴보니 우거진 덤불 사이로 동굴이 보였다.
그것은 천연적 동굴로, 이 동굴이 바로 책굴이었다.
왕인이 이런 곳을 알고 있었다니…….
임구석은 왕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기
를 기다리기로 했다. 왕인이 없을 때를 틈타서 동굴을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 날 밤, 임구석은 횃불을 들고 왕인의 비밀 석굴을 찾아갔다. 석굴 안은 넓고 시원했으며 이
루어진 형태도 참으로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커다란 바위가 서로 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굴 안에 들어가 보니, 사방은 자연석으로 벽을 이룩 큰 바윗덩이 하나로
덮여 있었는데, 편평한 바닥에는 부드러운 모래가 깔려 있었다.
남쪽으로 난 출입구는 사람이 하나 겨우 비집고 들어갈 정도의 것이었고, 한쪽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있어 환기통 구실을 했다.
왕인은 여기서 혼자 조용히 공부하고 싶어 문산재를 빠져 나왔구나.
임구석은 이러한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왕인에 대한 글벗들의 궁금증은 날로 더해 갔다.
왕인은 도술 공부를 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밤낮 모습을 감출 리가 없지 않는
가?
글벗들 사이에는 이런 말들이 사실처럼 퍼져 있었다.
도술은 신선도이다. 이것은 자기를 수련하여 도를 깨닫고 신선이 되는 것이다. 신선은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혹은 연기처럼 모습을 감추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선도는 유교의 가르침에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임구석이 불쑥 말했다.
스승님,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여 자꾸 졸음만 옵니다. 바람도 쐴 겸 뒷동산에 오르는 게 어떨
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이리하여 문산재의 서생들은 임구석을 따라 나섰다.
임구석은 오늘 왕인의 비밀 석굴을 폭로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생들을 석굴 앞으로
인도했다. 임구석은 처음 보는 것처럼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이상한 바위가 있어요. 이리들 와 보세요.
임구석의 말에 서생들이 바위 언저리를 기웃거렸다.
석굴 안에서는 왕인이 그런 것도 모르고 오로지 글읽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니, 이 곳에 굴이 있어요!
임구석은 짐짓 놀란 체했다. 서생들도 저마다 왁자지껄하며 떠들었다. 그제서야 왕인도 읽던 책
을 덮고 석굴에서 나왔다. 모여 있던 서생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왕인의 모습을 보고 또다시 놀랐
다. 그 곳에는 금성 교수도 올라와 있었는데 까닭을 몰라 의아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 보아라.
스승은 꾸짖듯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스승님, 저는 이 곳에서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글을?
네,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이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금성 교수는 이런 왕인의 생각을 이해했다.
그랬었구나. 그래, 이 굴은 네가 만들었느냐?
아닙니다. 얼마 전 반남의 호원장 어른과 산에 오르다가 발견한 곳입니다.
평소 왕인을 믿음직스럽게 여겨 오던 금성 교수는 기쁨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하였다.
공부를 위해서라면 잘못이 아니다.
머지않아 곧 나라에서는 인재를 뽑는 시험이 있을 모양이다. 그 때를 대비하여 꾸준히 노력하
도록 해라.
네.
이 때부터 왕인은 좀더 어려운 오경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오경은 유교에서 성인들이 만든 책으로 중요한 다섯가지 경서를 말한다.
즉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가 그것이다.
오경을 공부한 왕인의 학문은 날로 성숙해 갔다.
오경박사
진사왕은 서기 387년에 진가모를 달솔로, 두지를 은솔로 삼았다. 이것은 각각 대신급인 좌평 아
래의 벼슬로 2품관과 3품관이었다. 이어 진사왕 5년에는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쪽 국경 지대
를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도 백제는 고구려의 도곤성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이 공로로 진가
모는 병관 좌평에 올랐다. 병관 좌평은 오늘날 국방 장관과 같은 직책이다.
진사왕은 이렇듯 전쟁에서 승리를 거듭하자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
대궐을 증축하고 연못과 산을 만들고 진기한 새와 이상한 꽃들을 감상하였다. 그리고 왕은 자
주 사냥을 하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데 진사왕 8년, 서기 392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4만 명의 군사로 쳐들어와 석현 등 10
여 성을 빼앗았다. 이 충격으로 진사왕은 그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침류왕의 왕자였던 제17대 아신왕이 왕위에 올랐다. 아신왕은 성격이 호탕했고 특히
말과 매를 좋아하였다.
말이나 매는 사냥에 쓰는 것이었지만 군사 조련에도 필요한 것이므로 크게 장려되고 있었다.
왕인이 혼인한 것은 이 무렵일 것으로 추측된다.
호원장은 왕인을 자주 찾아왔다. 그리고 학문에 열중하는 왕인과 앞을 볼 수 없는 왕인의 늙은
신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호원장이 왕인을 아끼는 마음은 왕인이 학문을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깊은 것이었다.
호원장은 왕인을 찾아올 때마다 당부를 하였다.
한번 반남에 오지 않겠나. 공부도 중요하지만 견문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네.
네, 한번 가보겠습니다.
왕인은 늘 자기를 돌봐 주고 걱정해 주는 호원장이 너무 고마웠다. 더구나 어머님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던 터라 차츰 자신의 결혼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내 호원장의 딸과의 결혼을 결
심하게 되었다.
어머님, 이제 호원장 어른의 뜻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그것이 부모님에 대한 효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 고맙구나. 잘 생각했다. 이제 이 어미는 당장 죽어도 원이 없구나.
어머님, 마음 약한 말씀 마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이젠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오냐, 정말 고맙다.
가을이 되었을 때, 왕인은 반남으로 갔다. 처음 보는 반남의 모습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놀러 갔었던 불무동의 모습과 거의 비슷했다.
여기저기에 거대한 옹기 가마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것은 흙으로 입구를 막아 놓았고, 어떤 것
은 굴뚝에서 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또, 어떤 가마에서는 막아 놓은 벽을 뜯어 내고 구운 오지그릇을 꺼내고 있었다. 장인이 오지그
릇을 하나씩 집어들어 모양과 빛깔을 살피고는 작은 메로 살짝 두들겨 보다가 어떤 것은 세게 두
들겨 버렸다.
쨍!
하고 쇳소리가 나며 그릇은 깨졌다.
왕인으로서는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았으나, 장인은 열의 일고여덟은 메로 두들겨 깨어 버렸다.
왕인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런 왕인의 궁금증을 알아채기라도 한듯 가마를 안내하던 호원장이
설명을 해 주었다.
비록 흙으로 만든 그릇일망정 장인의 얼이 들어 있다네. 그래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시원찮으
면 깨뜨려 버리는 것이지. 그릇에도 마음이 있다고 할까? 잡스런 것이 있으면 안 되니까.
하지만 저에게는 모두 훌륭한 그릇으로 보입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그릇을 깨어 버리다니 아
깝습니다.
그렇겠지. 처음에는 누구나 자네처럼 생각한다네. 그러나 대대로 이어오는 장인 정신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만 비로소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일세.
왕인은 옹기를 굽는 것에도 바른 길이 있음을 생각하며 새삼 감탄하였다.
이런 그릇들은 중국이나 왜국으로 건너간다네. 부모가 딸을 시집보내듯 훌륭한 작품이 아니면
내놓지를 않는 것이 장인들의 고집일세.
이렇게 말하면서 호원장은 왕인에게 은근히 딸 백희의 사람됨을 자랑하였다.
왕인이 호원장의 집 뜰에 이르자 오씨 부인은 반색을 하며 맞아 주었다.
이림의 도련님이 오셨군요. 누추한 곳이지만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방에 들어가 앉자, 잠시 후 오씨 부인은 딸을 데리고 들어와 인사를 시켰다. 왕인도 맞절을 했
지만, 금방 그녀의 아름다움과 예의바름과 그 밖의 모든 사람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이는 왕인보다 한 살 많았지만, 호원장의 딸은 바느질, 길쌈, 음식솜씨 그리고 예법에 있어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왕인은 그녀를 보았을 때,
정말 요조 숙녀로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요조 숙녀란 행동이 차분하고 말할 수 없이 정숙한 여인을 말한다. 시경 에는 그런 숙녀야말로
군자의 배필로서 어울린다고 하였다.
호원장의 딸 백희가 물러간 뒤, 왕인은 주인 내외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내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을 푹 놓고 지내도록 하게.
네, 감사합니다.
그래, 이 곳의 인상은 어떤가?
그의 말은 마치 딸을 본 소감이 어떠냐고 묻고 있는것 같았다.
네, 너무도 불무동과 닮은 것 같아 놀랐습니다. 산천의 모습도 사람들의 인정도 모두 푸근합니
다.
하하하, 사람 사는 곳의 인정은 다 같지. 그것은 그렇고 내년에는 천거에 응해 볼 계획이라고
했던가?
네.
호원장은 이런 왕인이 더욱 믿음직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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