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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순신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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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위인특대전집(13) 이순신 1.

 



  이순신(1545∼1598)
  조선 시대의 장군으로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1576년에 무과에 뽑혀 한동안 북쪽 국경의 수비를 맡
아 보다가 상관의 모함으로 쫒겨났다.  1591년 유성룡의 추천으로 진도 군수 등을 지내다가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에 승진 되었다.  이 때부터 일본이 침략할 것을 예견하여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추었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고안하였다.  1592년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대를 이끌고 옥포, 사
천, 한산도, 부산등지에서 왜적의 함대를 격파하였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을 맞아 54세의 나이
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1. 용의 아들

  때는 인종 원년, 서기 1545년 4월 28일, 축복받은 화창한 봄날에 서울의 남산 북쪽 기슭 건천동(지금의
인현동)의 한 선비의 집에 귀여운 아기가 태어났다.  이 아이가 이순신으로 네 형제 중 셋째 아들이다.
  아버지 이정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때문에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이순신의 부모는 자
식 교육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집안이 화목했다.
  이순신의 조상에는 높은 벼슬 자리에 있으면서 깨끗한 관리로 지낸 훌륭한 분들이 있었다.
  증조 할아버지 이거는 병조 참의와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할아버지 이백록은 평시서 봉사 벼슬을 지냈
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벼슬을 지내던 무렵, 나라에서는 당파 싸움으로 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
롯한 많은 충신이 억울하게 죽거나 벼슬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도 옳은 일을 하려
다 오히려 누명을 쓰고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이정은 권력 다툼에서 벗어나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
며 지냈다.
  이순신은 남달리 근엄하고 자애로운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영특하고 씩씩하게 성장해 갔다.
  어느날 서울의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건천동 냇가에서 두 아이가 마주 앉아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
홉 살 난 유성룡과 여섯 살 난 이순신이었다.
  유성룡이 불쑥 물었다.
   네가 촉이 없는 화살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것은 나쁜 어른들을 쏘기 위해서라며?
   왜? 그러면 안돼?
  이순신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로잡히지는 않아.  너만 혼나게 될 뿐이야.  그런 생각은 마음 속에서 사그라뜨리고,
세상을 바로잡을 수양을 쌓아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유성룡의 말에 이순신은 시무룩해졌다.  이순신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스친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
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도 바로 그렇게 옳은 일을 하려다 오히려 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내 말 알아듣겠니? 이제 나쁜 어른이라고 해서 함부로 화살을 쏘아대지 않겠지?
   응, 알았어.
   알았으면 됐어.  소나기가 오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지금 동구 밖에는 아이들이 모여 들고 있을거야.  성 쌓기놀이를 하기로 했거든.
   금방 소나기가 쏟아질 텐데?
   나와 약속했으니 다른 아이들은 비가 내리더라도 올거야.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해.
  유성룡은 잠깐 놀라는 얼굴이 되더니 곧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했다.
   이 아이는 앞으로 크게 될 거다.  나도 순신에게 결코 뒤지지 말아야지.
  이 때의 결심이 밑바탕이 되어 유성룡은 훌륭한 스승을 찾아 글공부를 배우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바로 그 유명한 퇴계 이황 선생의 서당이었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은 깊었으며, 어린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크게 일깨워 주었다.
   요즘의 우리 나라에선 조금이라도 사람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바르게 걷고자 뜻하는 이는 큰 해를 입
  게 된다.  그 까닭은 땅덩어리는 좁고 사람은 많으며, 경박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탓만은 아니다.
  그에 덧붙여 스스로 해야 할 일에 모자람이 있기 때문이다.
    모자람이 무엇이냐? 모자람은 아직 학문이 채 익기도 전에 남을 얕보거나, 시절이 어떤가를 생각지도
않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 호기를 부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생각하여 배우고, 나라를 위해 일할 때에는 백성들의 걱정
거리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 말고는 함부로 나서지 말라.  언제나 한 발짝 물러나서 겸손한 몸가짐으로 학
문에 뜻을 두어야만 한다.
  퇴계 선생의 이런 가르침 속에서 유성룡의 학문은 깊어져 뒷날 큰 사람이 되었고, 이순신과는 떨어질래
야 떨어질 수 없는 좋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순신이 동구 밖으로 가는 도중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순간, 순신의 머릿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스쳤다.
   옷을 더럽히면, 안 해도 될 빨래를 해야 한다.
  그러나 순신은 동네 아이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비를 피한다면 그것이 더 어머니의 노여움을 살 거라고
생각했다.
  순신의 어머니는 평소에는 매우 다정하고 자애로우신 분이었으나, 아이들의 교육만은 엄격하게 시키셨다.
특히, 아들들에게는 늘 남자다움을 잃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사내란 목이 달아나도 제 입으로 한 말은 지켜야 하며, 또한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온 집안의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순신은 소나기 속을 뛰어가며, 어머니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은 느티나무 밑에 모여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순신과 함께 있으면 늘 어깨가 뿌듯했고, 웬일인지 의젓한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자, 성을 쌓자.  이미 옷은 젖었으니 상관 없어.  그리고 전쟁을 할 때는 날씨를 가릴수는 없으니까.
  놀이를 할 때에도 순신의 말과 표정은 진지했다.
  이순신은 이렇게, 마을 아이들과 모여서 놀 때에는 흔히 군사들이 싸움터에서 진을 쳐서 싸우는 전쟁놀
이를 하며 놀았다.  이 때 순신은 언제나 대장이 되어 아이들을 지휘하고 호령하였다.
   다 모였느냐?
   네!
  20여 명의 아이들이 이순신 앞에 나란히 모여 서서 씩씩하게 대답을 했다.  등에는 모두 활을 메고, 손에
는 각자 막대기로 만든 창 또는 칼을 만들어 쥐고 있었다.
  그 모습들은 너무도 당당하여 흩트러짐이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싸움터에서 진을 치는 법을 익히겠다.  모두 장사진을 벌여라!
  이순신이 싸움터에서 명령을 전하는 기인 영기를 오른쪽으로 번쩍 치켜 들자, 모여 있던 아이들은 하나
같이 재빠른 동작으로 움직이며 한 줄로 늘어서서 장사진을 쳤다.
   좋다! 이번에는 진을 치고 적을 무찔러라!
  이순신이 다시 영기를 둥글게 휘두르자, 아이들은 원을 그리면서,
   야아!
하는 우렁찬 함성 소리와 함께 중앙으로 쳐들어갔다.  언덕 아래에서 이 광경을 지켜 보던 동네 어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어린 것들이 정말 제법이야.  군사들 뺨치겠는걸.
   암, 그게 다 순신의 통솔력 때문이지.  그 녀석 아주 엉뚱한 데가 있단 말이야.
   그 아이는 필시 장군이 될 거야.
라며 이순신의 뛰어난 슬기와 기품을 칭찬하였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훌륭한 장군이 될 바탕을 지니고 있었다.
  아이들은 전쟁놀이에서 뿐만 아니라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순신에게 와서 의논을 하고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럴 때마다 이순신은 언제나 지혜로운 생각을 내어 그들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순신은 글공부에도 남달리 뛰어나서 열 살때, 벌써  중용 이나  대학  같은 어려운 책의 뜻을 깨달
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절대로 뽐내는 일이 없었고, 같은 글방의 아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특히 이순신은 이웃 마을에 사는 유성룡과 가까이 지냈다.  유성룡은 한양에서 벼슬을 하는 아버지를 따
라와 묵사동에 살고 있었는데, 이순신보다 세 살 위였다.  묵사동은 이순신이 사는 건천동과 가까운 마을이
어서 자주 오고 갈 수 있었다.
  유성룡과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어른이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건천동에서 이렇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이순신의 가족은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방화산 기슭
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곳은 이순신의 외가가 있는 곳으로 이순신의 아버지께서 세상을 등지며 살기로 마음먹고 이사를 한
것이었다.  그 곳에서도 이순신은 열심히 글을 읽고 무술을 닦았다.
  방화산 기슭에 뿌연 흙먼지가 일어 뭉게뭉게 부풀다가 흩어지면서 저만큼 사라졌다.
  말 위의 젊은이는 말등에 가슴을 대다시피 납작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윗몸을 일으키더니 왼발을 등자까
지 쑥 뺐다.  다음 순간 어느 새 오른발까지 말등에 올라서 있었다.  손은 고삐를 잡고 있었지만 금방이라
도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젊은이는 한 손을 놓았다.  왼손만으로 고삐를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젊은이의 오른팔과 윗몸이 재빠르게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에잇.
  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농부들이 호미를 놓고 입을 딱 벌렸다.
   이씨 댁 셋째 도련님 아냐!
   또 말타기 연습이로군.
   유학책들은 뒷전으로 두고 늘 병서만 읽는다지?
   하지만 글을 지어도 두 형님들에게 절대로 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솜씨를 가졌다더군.
  그 때, 갑자기 말 위에 있던 젊은이의 몸이 사라져 버렸다.  어느 새 젊은이는 말의 배 밑에서 오른팔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말은 젊은이를 감춘 채 순식간에 까만 한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이 젊은이가 이씨 댁 셋째 도련님 이순신이었다.
  두 형 희신, 요신은 햇볕을 못 쬐어 얼굴빛이 하얘질만큼 공부에 열중했다.  이순신도 따라서 공부를 안
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고구려의 명장인 을지문덕 장군을 비롯하여 고려 때의 강감찬 장군, 그리고 수군을 강하게 길
러 바다에서 왜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최영 장군 등 이름난 장수들에 관한 위대하고 용감했던 이야기
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중국의 역사책인  자치통감 과  사기 도 되풀이 해서 읽었다.
  이 책들은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다스려졌으며, 어떻게 망했는가를 쓴 책이었
다.
   이 책들을 보아도 한 나라에서 군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군대의 힘이
약하면 언젠가는 다른 나라에 침략당하고 만다.  제아무리 학문이 높이 발달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많다고
해도 내리쳐오는 칼을 피할 수 없고 찔러오는 창을 막을 수 없으며, 질풍처럼 쳐들어오는 말머리를 돌리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생각이 들수록 이순신은 무과 시험을 보아야겠다는 결심이 점점 더 굳어 갔다.  더구나 당시 조
정의 관리들은 당파 싸움에만 정신이 팔려 나라일은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런 선비들이 몹시 못마땅하였다.
   나는 병서를 읽겠습니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이순신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몇 날 밤을 지새워 가며 자신의 앞날을 생각해
보다가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이순신은 그 동안 읽던 유학책을 덮었다.  그리고  손자 병법 ,  오자 병법 을 읽기 시작했다.
   전쟁은 국민의 삶과 죽음,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와 관련된 중대한 일이다.
  이순신은 이와 같은  손자 병법 의 첫구절을 가슴 깊이 새겼다.


  2. 뼈저린 실패

  이순신의 나이 스물두 살, 다른 사람 같으면 이미 과거를 볼 나이였다.
  당시에는 문관을 우대하고 무관을 업신여기고 있어, 과거라면 당연히 문과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순신의
형들도 문과를 치르려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형들처럼 문과에는 흥미가 없었다.  문관이 되어 당파 싸움에 휩싸이느니 여러 가지 무
술과 병법을 익혀서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무관이 되고자 하는 결심이 더욱 굳어져 갔다.
  이순신은 입신 출세를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방화산 활터에서 활쏘기를 익히는가 하면 아산 땅을 샅샅
이 누비며 말과 함께 재주를 익혔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이순신은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
   이젠 싸움터에 나가도 어떤 어려움도 물리치고 적을 이길 수 있으리라.
  이순신은 스스로 익힌 무예의 재주를 믿었다.
  형들도 마을 어른들도 벌써부터 과거를 보라고 권해 왔다.
   이제 네가 한 부대의 대장으로 군사를 거느림에도 남보다 뛰어날 테니 과거를 보거라.
  그렇게나 무과 과거를 말렸던 요신 형까지도 권했다.
  이순신은 한양으로 올라갔다.
   틀림없이 급제를 하겠지?
   그럼요, 순신이 아니면 누가 되겠습니까.
  희신, 요신은 순신이 과거에 떨어지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나직이 말했다.
   모든 일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자 요신이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 때라니요.  순신은 이미 때를 넘겼습니다.  어머니도 순신이 들에 나가 말 달리는 것을 보셨잖
습니까? 활터에도 나가 보셨지요? 열 대 쏘아 열 대 모두 과녁에 꽂히지 않았습니까? 말을 타고 등으로 배
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날개라도 달린 듯했습니다.
   재주가 그리 모자라지 않는다 해도 예로부터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왕 무관이
될 바에야 천군 만마를 호령하는 큰 장수가 되어야 하고, 큰 장수가 되려면 그만큼 병법을 익히는 세월이
길어야 한다.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한다는 거다.  공든 탑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어머니, 우리 순신은 오랜 세월 동안 오히려 지나치게 공을 들인 것이 아니옵니까?
   그야 말 부리는 재주, 병기 쓰는 재주야 뛰어나겠지.  그러나 아직 큰 장수가 될 재목의 밑바탕은 이루
어지지 않았다.  내 눈에는 보인다.  하늘이 순신을 작게 쓰고 작게 버릴 작정이면 모르되, 하늘인들 뜻이
없겠느냐? 또한, 하늘이 순신의 큰 마음을 모르겠느냐?
  희신, 요신은 어머니의 깊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이순신이 과거를 치르고 돌아올 날이 되었다.  그런데 저녁 노을이 빨갛게 물들고 해가 서산에 걸려도
이순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자 희신, 요신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요신은 이튿날 아침 일찍 천안으로 갔다.  천안에서 무과 과거를 치르러 갔던 사람을 찾아 소식을 묻기
위해서 였다.  다행히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이번 과거에 떨어졌다고 하는 키가 입곱 자는 됨직한
엄청난 몸집의 남자였다.
   이순신? 이순신? 방에는 나붙어 있지 않았소.  그렇다면‥… 그 때 그 사람인가?
   그 사람이라니요?
  요신은 다급히 묻고 숨을 죽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얼굴이 훤하고 키는 여섯 자쯤 되고…….
   맞아요.  바로 그 사람이오.
   참 아까웠소.  그 사람 재주가 굉장히 뛰어납디다.  화살을 쏘면 쏘는 것마다 맞았지요.  그런데 마지막
말달리기에서 그만…….
   실수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남보다 뒤쳐졌단 말인가? 날개라도 달린 듯이 빠르게 달리는 말에서도
재주를 부리던 순신이 아닌가?
   떨어졌소.  쏜살같이 달리던 말에서 떨어졌소.
   정말이오?
  요신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왜 헛소리를 하겠소.  일어서려고 하다가는 한쪽 다리를 꺾고 푹 주저앉습디다.
  요신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말등에 서서도 달릴 수 있는 동생이 말달리기에서 떨어지다니.  왜 그런 실수를 하게 되었을까?
   그 사람 대단하더군요.  정말, 놀라운 사람이었소.
   대단하다니오? 무슨 일이 또 있었소?
   말에서 떨어지자 옆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부러진 다리에다 척 갖다 대더니 옷을 찢어 묶는 거
였소.
   네? 그래서요?
   그러더니 다시 말에 올라타 끝까지 달렸습니다.
  요신은 무엇에 홀린 듯이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순신이 왜 말에서 떨어졌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요신은 그날 늦게야 순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순신은 아버지, 어머니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내 재주에 어디 빈틈이 있으랴 싶을 때, 또는 이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직 모자라는 법이다.  사람이 지닌 재주란 커지면 커질수록 오만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며, 또한 깊어지
면 질수록 마음이 텅 비어지는 법이다.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다.  이순신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요신은 순신이 아버지의 방에서 물러나오자 물었다.
   너답지 않구나.  네가 말에서 떨어지다니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어떻게 된 일이냐?
   부끄럽습니다.  재주의 재에도 이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에 자주 하던 버릇
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쏜살같이 달리면서 말 위로 올라서려는 동작이 저절로 시작되었지요.   아차! 이건
그것이 아니다! 라고 깨닫고 동작을 멈췼을 때, 그 어정쩡한 자세에서 그만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 곳
에 나의 빈 구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말을 쏜살같이 모는 데만 너무 열중해서 그랬던 모양이구나.
   형님, 지금의 내 무예 실력은 창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일개 병졸만도 못한 것 같습니다.
  다리가 아물자 이순신은 얼마 동안 병서를 읽는 것으로만 나날을 보냈다.  틈틈이  노자 ,  장자  등도학책
도 읽었다.
  요신이 이순신을 찾아간 어느 날, 그의 책상 위에 색다른 책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불교책으로 제목을 보니  대반야바라밀다경 이었다.  흔히  반야경 이라고 부르는 책인데, 불교의 경
전 가운데서 그 어느 경전보다도 내용이 깊은 책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런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아무런 형태도 없는
텅빈 것이라는 이치를 설명한 책이었다.
   마음의 현혹됨을 없애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반야경 을 읽고 선(불교에서 도를 닦는 것)으로써 태산이
무너져 내려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부터 갖추려 합니다.
   네 말을 듣지 않아도 안다.  그러나 내 듣기에 도학이란 깊이 캐고 들어갈수록 그 오묘한 경지에 취해
서 좀처럼 헤어날 수 없다더구나.  사람들이란 진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불교
의 선이 예로부터 무(군사에 관한 일)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여 무인들이 참선을 했다니…….
  목숨이 위태로운 싸움터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 무사라면 어쩌면 선이 병법에 앞서 필요할지도 모른다
고 요신은 생각했다.
  이순신은 나무를 보거나 바위를 보거나 그저 부끄러운 생각만 들었다.  바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무게가 있다.  나무는 거스름이 없이 바람에 조화한다.  그런데 말등에서 떨어진 자신은 무엇인가를 생각하
였다.
  이순신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자 병법 도 다시 깊이 익혔다.   손자 병법 에 보면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는 다섯 가지 근본이 되는 법이 있다.
  첫째,  도 이다.  도란 올바른 길인데, 백성의 뜻과 다스리는 사람의 뜻을 하나가 되게 만든다.  이 도가
있어야만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함이 없이 백성은 임금과 생사를 함께 한다.
  둘째,  천 이다.  천은 하늘이다.  날씨, 계절, 시기 등을 이르는 말이다.  적과 싸울 때에는 궂은 날, 갠
날, 바람이 부는 날 들을 가려서 대처해야 하고, 추운 겨울, 무더운 여름의 전투법도 익혀야 한다.  또는 아
침, 낮, 저녁, 밤의 어느 시간에 공격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하고, 적이 방심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기가 높은
가 등 적의 기세도 살펴서 싸워야 한다.
  셋째,  지 이다.  지는 땅이다.  거리, 험함, 넓음, 높음 등 땅의 이롭고 해로움을 이른다.
  넷째,  장 이다.  장이란 대장이다.  대장은 뛰어난 슬기가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용기
가 있어야 하고, 위엄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법 이다.  군대는 조직이 되어 있어야 하고, 규율이 있어야 하고, 병기를 갖추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기본 조건 가운데 무엇 하나도 빠져서는 싸움에 이길 수 없다.
  손자의 글 한 줄 한 줄이 이순신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오자 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나라가 안전하려면 무엇보다도 경계를 잘 해야 한다.  충분히 경계하면 나라의 난을 피할 수 있다.
  군대를 부림에 있어 적의 빈틈을 충분히 관찰하고, 그 약점을 칠 것.
  예를 들어, 적이 멀리에서 막 이르러 아직 대형을 갖추지 않았을 때, 식사가 막 끝나 싸울 준비를 미처
못 갖추었을 때, 서둘러 장소를 옮기고 있을 때, 지쳐 있을 때, 땅의 이로움을 얻지 못할 때, 하늘의 때를
따르지 않을 때…….
  이순신은 이미 외운 것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그 깊은 뜻을 새겼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지 글을
익히고 재주를 닦는 데에만 열중한 것이 아니다.  비록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흔들림이 없는 사
람이 되기 위해 마음의 수양에도 한층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그 4년은 병법을 익히고 병기를 다루는 데 힘썼던 지난 6년보다 이순신에겐 훨씬 더 길게만 느껴졌다.













  3. 대쪽 같은 사람

  그렇게 고된 나날로 이어진 4년이 흐른 뒤, 서른두 살 때 이순신은 무과에 병과 4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의 나이에 비해서는 퍽 늦은 벼슬길이 시작된 것이다.
  이순신은 지형이 너무 험해 새들도 드나들지 않는다는 함경도 삼수 땅의 권관(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되
었다.
  그는 그로부터 3년을 압록강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 보내야 했다.
  서른다섯 살 때에야 비로소 한양 훈련원 봉사로 옮겨 왔는데, 며칠이 지나자 벌써 그의
 훌륭한 사람됨이 훈련원 안에 쫙 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도통 말이 없고 맡은 일은 재빨리 끝냈으며, 다른 벼슬아치와 쓸데없이 어울려 다니며 놀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가 맡은 바 책임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다.  그래서 윗사람들조차도 그를 어려워했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부탁이 통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한결같이 모든 일을 곧고 바르게 열심히 해 나갔다.
   웃지도 않는다네.  그가 웃는 얼굴을 본 사람이 없어.
   누가 아니라나.
   정말 보통 인물이 아니야.
  한번은 이순신의 직속 상관이 이순신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전
해 들은 훈련원 지사는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부하로서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사람이 과연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알아보니 사실이었다.
  훈련원 지사는 김귀영 병조 판서(지금의 국방부 장관)와 한자리에 어울렸을 때, 이순신에 대해 자랑을 늘
어놓았다.
   아무튼 이 나라의 병조에 뛰어난 군관(장교)도 많겠지만 아무리 눈을 커다랗게 뜨고     찾는다 해도
우리 훈련원의 이 봉사만한 사람은 없을 거요.
  김귀영은 자세한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아니 대감, 봉사 벼슬이라면 겨우 종8품이 아니오.  말단 벼슬아치나 다름없는데 감히 상사의 명령에 고
집을 피우다니, 그 사람 바보면 아주 큰 바보이고, 인재면 아주 큰 인재일 거요.  언제 한번 보고 싶구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김귀영의 마음은 점점 그 봉사에게로 쏠렸다.  그래서 결국 한번 보러 가기로 했
다.
  마침 이순신은 훈련원의 습독관들을 불러세워 놓고 꾸짖고 있었다.
   내 보니, 도무지 하는 일이 틀렸소.  병서를 연구함은 병서에 있는 병법을 배움과는 다른 것이오.  병서
에 씌어 있는 병법만을 배운다면 어찌 싸워서 꼭 이기기를 바라겠소.  병서를 익혀 그 모든 병서에 있는
병법을 앞지르는 새로운 병법을 연구하고, 그 모든 병장기를 앞지르는 새로운 병장기를 연구함이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이 말을 엿듣고 있던 김귀영은 크게 감탄했다.
   인재로구나! 이건 큰 인재로구나.  나라의 장차 큰 재목이 될 사람이야.
  병조 판서 김귀영은 자기 낯이 화끈할 정도였다.
   이러고도 내가 이 나라 군사의 맨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병서를 어떻게 읽었던가.   손자 ,
오자 ,  육도 ,  삼략 의 가르침을 신통히 여겨 익히고 익혔지 않은가. 그랬음에도…….
  김귀영은 이순신을 한 번 본 것으로 그의 사람됨을 알아차렸다.
  어느날, 병조 판서 김귀영은 눈앞에 이순신의 모습과 얼굴을 보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인재야! 그 주위까지 다 환해질 듯한 얼굴, 그 어디에 검고 음흉한 구석이 있겠는가.
그 커다란 몸집에 신중한 태도, 어디에 소인배 같은 옹졸함이 있겠는가?
  아랫자리에 앉은 남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스쳐 지나갈 때면 웬일인지 내 마음이 다 굳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말수마저 적다면서?
   적다기 보다는 없다는 편에 가까울 것입니다.
   저, 자네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에겐 딸이 하나 있잖나.  그 애도 이젠 출가시킬 때가 되었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압니다만 그 사람에겐 이미 부인이…….
  그러자 김귀영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알고 있네.
  그 남자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소실(둘째 부인)로 말입니까?
   그렇지.  왜 안 되나? 내 딸애도 제대로 시집가기엔 흠이 있는 아이일세.
   아무리 인물이 탐난다지만 어찌 따님을 소실로 보내시려고…….
   난 내 딸을 꼭 그에게 맡기고 싶네.  힘이 돼 주게나.
  김귀영의 부탁을 받은 사람은 이순신에게 너무나 기쁜 소식을 전해 준다는 흥분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활짝 웃음진 얼굴을 보리라고 생각했던 그는 바위같이 굳은 표정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뜻은 고맙습니다만 사양토록 해 주십시오.
   아니? 뭐라고 하셨소?
  종8품의 말단 벼슬아치가 하늘의 별처럼 높은 판서의 딸을, 더구나 정실도 아닌 둘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는 것은 하늘의 해를 잡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나이가 두 부인을 둠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병판 대감님의 따님을 얻음은 더욱 피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권세가의 집안과 인연을 맺으면 싫어도 뒤에서 밀어 출세를 하게 됩니다.  남의 힘을
입어 벼슬이 올라 감당 못할 높은 자리에 앉아 일을 하게 되면,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저는 제 힘으로
올라가서 제가 해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심부름 온 남자는 더 이상 말붙일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나중에 보고를 받은 김귀영 판서는 무릎을 쳤다.
   재목이야! 큰 재목이야!
  그의 얼굴엔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크게 떠올랐다.
  이순신이 장무관이란 벼슬을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훈련원은 원래 병조와는 다르지만, 같은 무인들이고 또 병조에서 훈련원으로, 훈련원에서 병조로 사람들
이 서로 옮겨서 벼슬을 하기 때문에 품계가 위면 바로 상관이 된다.
  병조에서 정랑이라는 정5품 벼슬을 하는 서익은 이순신보다 벼슬이 몇 단계나 높았다.
  서익은 훈련원에서 낮은 벼슬을 하고 있는, 자기와 친한 어떤 사람으로부터 계급을 올려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병조 정랑쯤 되면 말단 군사를 한두 계급 올려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서익은 자기의 계급을 올려 달라는 사람에게 선뜻 약속을 하였다.
   부탁이 뭔가 했더니 겨우 그쯤의 일인가? 걱정 말게.  내가 올려 주지.
  서익은 곧 훈련원에 있는 판관에게 부탁했다.  훈련원 판관은 종5품으로 서익보다 한 품계 낮았으나 이
순신보다는 위였다.
   서정랑의 부탁인데…….
  판관은 장무관인 이순신에게 서익이 부탁한 사람의 계급을 올려 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그런
부탁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이 건너뛰어 먼저 벼슬이 오르면, 당연히 올라야 할 사람이 못 오르게 됩니다.  그
것은 법과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순신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 뒤로도 서익이 몇 번인가 말을 건네왔지만 이순신은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자기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부탁이라 하더라도 그의 대쪽 같은 성격으로 그런 일을 용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서익은 노여움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며 이순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자네가 뭔가? 판관이 하라면 할 것이지…….
   판관이 훈련원 벼슬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서익은 말문이 막혔다.
  병조의 낮은 벼슬아치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서익은 병조에서도 호랑이로 불릴 만큼 무서운 사람이
었다.  한 번 말을 꺼내면 끝내 해내고야 마는 고집도 있었다.  그의 윗사람들조차 그의 성질을 알고 조심
하여 웬만한 일로는 맞서지 않았다.
   한낱 장무관 따위가 어쩌자고…….
  모두들 서익의 방으로 불려간 이순신이 불호령에 쫓겨날 때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서익이 이순신에게 말했다.
   자네는 돌아가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벌써 윗사람의 허락을 맡은 것이니 여러 소리할 거 없네.
   어느 분이십니까? 윗사람이라시니.
   자네가 알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나.  돌아가게!
   못 갑니다.  정랑께서 그 부탁을 거두시기 전에는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점잖게 호령을 하던 서익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다 휙 나가 버렸다.  이순신은 그 자리에서 꼼짝
도 하지 않았다.  반 각(1시간)쯤 뒤에 돌아온 서익은 그 자리에 돌부처처럼 앉아 있는 이순신을 보고 깜짝
놀라 우뚝 멈춰 섰다.
   자네! 내 공무를 방해할 텐가?
   저도 올바른 공무를 보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순신은 서익이 뜻을 꺾을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결심이었다.
  날이 저물어 퇴청할 때가 되자, 서익은 이순신의 고집에 놀라며 자신의 뜻을 꺾었다.  이순신은 설사 목
에 칼날을 댄다 하더라도 물러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내가 잘못했네.  돌아가게.
  그러나 서익은 끝내 이 일을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꺼림칙해.  일찌감치 멀리 보내 버리는 것이 좋겠어.
  서익은 자기의 부탁을 거절한 이순신을 훈련원에서 내쫓기로 하고, 좀더 높은 윗사람을 움직여 그 해 겨
울에 이순신을 충청 병사의 군관으로 보냈다.
  평화로운 때의 지방 병영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훈련 정도였다.  이순신은 못마땅했다.  그
러나 한마디 불평의 말도 없이 충청도로 떠났다.
  병영은 충청도 해미 고을에 있었다.
  충청 병영으로 온 이순신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집에 가게 되었다.  군대에서는 휴가 동안 집에서 먹
을 쌀을 주어 보낸다.
  며칠 집에서 쉰 뒤, 이순신은 병영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그만 자루를 들고 있었다.
   아니, 그게 뭔가?
   쌀입니다.
   쌀?
   네, 집에서 먹고 남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안 가져 와도 되는데…….
   이건 나라의 쌀이 아닙니까.  나라의 쌀을 군관의 집안 식구가 먹을 수는 없습니다.
  이순신은 굳이 병영에 그 쌀을 바쳤다.
  조정에서는 이와 같이 충직한 이순신에게 한 부대를 맡겨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이듬해 이순신
을 종4품의 벼슬인 만호로 승진시켜 남쪽 바닷가에서 수군을 지휘하여 그 곳을 지키게 하였다.
  지금의 고흥읍에서 40리쯤 떨어진 발포 고을이었는데, 남쪽 바다를 지키는 벼슬이므로 수군 사령관의 명
령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 때 전라 좌수사(전라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지키는 수군 사령관)는 성박이었다.
  어느 날, 성박이 발포에 순시를 나왔다.
   허어, 저 오동나무는 정말 좋구려.
  성박은 객사 앞뜰에 있는 나무를 보며 칭찬하였다.  순시를 마친 그는 그냥 돌아갔으나, 곧 발포로 사람
을 보냈다.
   발포에 가서 그 객사 앞뜰의 오동나무를 베어 오너라.  거문고를 만들어야 겠다.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당장 심부름꾼을 호통쳐 돌려 보냈다.
   객사 뜰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재산이다.  어찌 사사로이 거문고를 만들겠다는 게냐!
  심부름꾼은 이순신의 말을 전해 듣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의 상관이다.  건방지게! 윗사람 말을 어기다니.  어디 좋은 일이 있나 봐라.
  그러나 트집을 잡아 이순신을 해치려던 성박은 다른 벼슬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뒤를 이어 이용이 전
라 좌수사로 오게 되었다.
  성박으로부터 이순신에 대해 전해 들은 이용은
   병조 정랑도 그에게 욕을 보았다면서요? 내가 혼을 내주리다.  그게 어디 용서할 일이오?
라며 화를 냈다.  그리고는 곧 발포로 몰래 사람을 보내 무엇이든 벌을 줄 트집거리를 찾게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빈틈이 없었고 발포의 군사나 백성들은 모두 그를 우러르고 있었다.
  이용은 여러 모로 트집을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좀처럼 쉽게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한 벼슬아치가 발포로 들이닥쳤다.  각 군영의 무기를 점검하라는 명령을 받고
온 것이 었다.  그 검사관은 바로 서익으로 예전에 자기가 병조 정랑으로 있으면서 아는 사람의 벼슬을 올
려 주려다가 이순신에게 창피를 당한 사람이었다.
   오냐, 이순신! 너 잘 만났다.  전에는 나를 잘도 욕보였겠다.
  서익은 단단히 앙갚음을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병기고에 들어갔다.
  그런데 무기들은 모두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고, 부러지거나 녹슨 무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화살 수도
다른 군영의 곱절은 되었다.
  그러나 서익에게는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이 없었다.  발포에 들이닥치기 전부터 조정에 올릴 보
고서에 쓸 글이 이미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맡은 병기고에는 온통 녹슬고 부러진 창뿐이며, 숫자도 모자랍니다.  군사들도 훈련을 시키지
않아 모두 농부들보다 기력이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런 엄청난 거짓 보고를 믿었다.
   이순신을 당장 파면시켜라.
  이순신은 파면장을 받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벼슬아치로서 파면이란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인 것이었다.
   서익 같은 자들이 군대의 높은 자리를 맡고 있으니, 당장 외적이라도 쳐들어오면 이 나라는 어찌 될 것
인가? 나 한 몸이야 파면당하든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든 괜찮지만,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로구나.
  이런 생각에 이순신의 가슴은 산산조각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하늘이 이순신 같은 인재를 그냥 버려 둘 리가 없었다.  조정에서 다시 명령이 내려왔다.
   훈련원 봉사로 일하여 나라를 위해 지난날의 잘못을 갚으라.
  비록 벼슬은 전보다 터무니없이 낮았지만 다시 벼슬자리가 주어졌다.
  이를 테면, 이순신은 종4품 벼슬인 만호에서 종8품 벼슬인 봉사로 떨어졌으니 4계급이나 내려간 셈이다.
  군관으로서는 밑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분하고 억울하기 짝
이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불만을 호소하거나, 거짓 보고한 병조 정랑 서익의 모
함을 밝혀 줄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를 맡아 보는 동안 병기서에서 여러 가지 병기에 대한 연구를 열심히 했다.
  이것이 뒷날 임진왜란 때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전에서 사용한 여러 가지 화포, 즉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 등
과 이런 화포에서 발사되는 여러 가지 탄환인 장군전·수철연의환·조란탄 등을 연구하고 생산하게 되었
다.
  이 중에 조란탄은 새알만한 쇳덩어리로 많은 적을 한번에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였다.
  어느 날, 활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순신은 병조 판서를 만났다.  병조 판서 유전은 이순신의 인사를 받
을 때, 그 등에 맨 화살통을 보았다.
   그거 참 아름다운 화살통이로구나.
  햇빛에 반사되어 거울처럼 빛나는 화살통은 누구라도 탐낼 만했다.
   그 화살통을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
  유전은 속으로 그 화살통은 이미 자기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대감님, 이 화살통이 좋아 보이기는 하나 그다지 값비싼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대감님께서는 저의 웃
어른이십니다.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보잘것 없는 화살통 하나 때문에 대감님께서는
부하의 화살통을 받는 옳지 못한 윗사람이라는 욕된 말을 듣게 되고, 저는 뇌물을 바쳐 출세하려는 치사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병조 판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느 날, 이조 판서 율곡 이이가 유성룡과 만났다.  이조 판서란 육조의 모든 판서 가운데서도 으뜸인 판
서로 벼슬아치의 임명, 승진, 보직 등을 맡고 있어 권세가 매우 큰 자리다.
   내 들으니 이순신과 잘 안다면서요?
   네, 어릴 때 이웃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몇 마디 들은 바로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곧고 올바른 사람이라더군요.  한번 만나 보고 싶소.  꼭
만나도록 해 주시오.
  율곡은 이순신을 만나 본 뒤 그를 좀더 높은 자리, 큰 일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앉혀 줄 생각에서였다.
  유성룡은 자기 일처럼 기뻤다.  곧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그 심부름꾼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조 판서 대감님은 덕수 이씨입니다.  동성 동본인 내가 그 어른을 만나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훌륭하신 어른이라 나도 꼭 만나 뵙고 싶지만, 그분이 벼슬자리에 계시는 동안은 찾아뵙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성룡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순신이다.  내 어릴 때부터 순신과 이웃해서 자란 것이 자랑스럽구나.  지금 무인 가운데 누가
이순신을 따르랴.
  이순신의 사람됨을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던 유성룡은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성룡으로부터 자기가 벼슬 자리에 있는 동안은 찾아보지 않겠다는 말을 전해 들은 이이는 크게 놀라워
했다.
   허어 인재로다.  인재야.
















  4. 북녘 바람

  어느 날 갑자기 이순신은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함경 병사가 꼭 자네를 부하로 보내 달라고 간절히 청한 걸세.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이순신은 결심했다.
   무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말없이 부임하자.
  함경 병사는 이용이었다.  그는 전라 좌수사로 있을 때, 두 번씩이나 이순신을 해치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용 밑으로 이순신이 가고 싶을 까닭이 없었다.  이순신은 전라도에서의 일을 아뢰어 다시 생각
해 달라고 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피하는 것은 잘못한 사람 쪽이다.  왜 내가 피하는가.  가자.  가서 이용 병사의 마음을 바로잡도록 힘쓰
자.
  그 때 이용의 마음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이용은 뒤늦게야 이순신이 병조 정랑과 맞섰던 것도 그가 옳
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 자기 일만 해도 이순신에게서 직접 어떤 창피를 당한 것이 아니라, 성박
의 말만 들었을 뿐이었음을 깨달았다.
  전라 좌수사로 있을 때는 그 곳이 싸움이 없는 곳이라 뛰어난 부하가 아쉽지 않았으나, 함경도 남병사로
오고 보니 명장이 필요했다.
  북청 고을에 있는 병영은 얼마 안 되는 압록강 건너에서 늘 오랑캐가 노리고 있었다.
  언제 오랑캐가 강을 넘어 쳐들어올지 몰랐다.  그는 이순신의 질서 정연한 부대를 떠올렸다.  그래서 병
조에 이순신을 청했고, 병조에서 이를 허락한 것이다.
  이 때, 이순신은 서른아홉 살이었다.
  북청에 간 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병조에서는 갑자기 이순신에게 함경도 북병사의 지휘를 맡겼다.
  선조 15년, 서기 1582년 10월에 이순신은 함경도 북쪽 경흥에 자리잡고 있는 건원보의 권관으로 부임하
게 되었다.
  권관이라는 벼슬은 이순신이 과거에 합격한 뒤 처음으로 받은 것이다.  무려 칠 년이나 흐른 다음의 일
이었으므로 이순신은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계급도 올가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무인이란 적이 영토를 자주 침노하는 전방에 나아가 직접 실전을 쌓아 공을 세워야 하는것이 본분일 것
이다.  이번에 국경 경비를 맡게 된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새로운 결심을 하고 여태껏 갈고 닦았던 무술과 병법을 살려 볼 기회가 왔음을 기뻐했
다.
  이순신이 건원보에 당도해 보니 군사들은 몇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적은 숫자로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건 도저히 어려운 일이었다.
  건원보는 산이 빽빽하게 높이 치솟아 있는 곳으로 들이라곤 두만강 가의 좁디좁은 풀밭뿐이었다.  죄 지
은 신하도 귀양 보내지 않는, 험하고 험한 이 세상 끝 같은 곳이었다.
  북녘 땅은 10월이면 한겨울로 접어들게 된다.  건원보에 부임한 이순신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군대
를 정비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진영을 방비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이순신은 부대 군사들을 늘 비상 대기시켰다.
   두만강이 얼면 반드시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할 것이다.
  이순신의 생각이 옳았다.
  두만강 건너에는  울지내 라는 오랑캐 추장이 있었다.  사납기로 소문난 사람으로 늘 우리 북녘 군사들을
괴롭혀 왔는데 도저히 그를 토벌 할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울지내가 부하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 쳐들어 오도록 꾀를 써 울지내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함
경도 북쪽 지방의 군사로서는 매우 큰 공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직속 상관인 함경 부병사 김우서는 한 군관이 이순신을 칭찬하자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사또, 울지내를 잡은 것이 기쁘지 않습니까?
   그 자는 군법을 어겼다.  쳐들어온 적을 막아 싸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쪽에서 먼저 군을
움직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군율로써 다스려야 한다.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울지내를 잡아 큰 공을 세웠으나, 군율을 무시하고 군사 작전을 폈다는 죄로 벌
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병조에서는 이순신의 공을 생각하여 벌만은 면하게 해 주었다.
  다음 해 1월, 이순신은 너무나 놀라운 소식을 받았다.
  아버지 이정이 지난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벼슬을 내놓고 아산 땅으로 내려가
근신하며 삼년상을 지냈다.
  서기 1586년 봄,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이순신은 어느 새 나이 마흔두 살이었다.
  이 나이는 벌써 한 도의 병사가 되었을 나이였고, 아무리 늦은 사람이라도 정5품 정도는 되었을 나이였
다.
  그러나 이순신은 대궐 안의 수레와 말을 맡아 보는 사복시의 종6품 벼슬인 주부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
다.
   사복시 주부라니,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따로 있지.
  모두들 수군거렸다.  나라에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16일 만에 다시 발령이 내렸다.
  이순신은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가 되어 함경도로 떠났다.  조정에서는 오랑캐들이 자주 넘나드는 이 곳
조산보에 전략이 뛰어난 이순신을 보내어 오랑캐를 막자는 뜻에서 다시 변방으로 보낸 것이다.
  그 곳에 도착한 날로부터 이순신은 진영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군사 훈련에 힘썼다.
  또한, 이순신은 그 이듬해에 조산보에서 20리쯤 떨어진 두만강 어귀에 있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둔전관이란 군졸로 하여금 그 곳 백성들과 함께 농사를 짓게 하고 거두어들인 군량미를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그런데 녹둔도는 강 하나를 건너면 오랑캐가 우글거리는 곳이어서, 언제 어느 때 그들이 쳐들어올지 모
르는 형편이었다.  거기에다 군사의 수효가 적어서 방비하기에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함경도 북쪽의 방위를 맡고 있는 북병사 이일에게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아첨할 줄 모르고 고지식하기만 한 성격을 못마땅히 생각해 오던 이일은 현재의 군사로
도 충분하다 하여 이순신의 요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녹둔도에 풍년이 들어 막 추수를 끝낼 때쯤, 수백 명의 오랑캐가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마침 그 곳을 순시하러 왔던 경흥 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사를 지휘하여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
에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순신의 군사도 10여 명이 죽고 몇십 명의 부상자를 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북병사 이일은, 이 기회에 이순신을 아주 없애 버려야겠다는 속셈으로, 이순신에게 북쪽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지도 않았고, 지휘를 잘못했다는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이일은 조정에다 이순신의 잘못을 알리는 장계를 띄웠다.
   조산보 만호 이순신은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하여 오던 중 수비에 소홀했던 결과로 오랑캐 무리에게 섬
을 노략질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오랑캐가 침입한 후에도 출동이 늦었기 때문에 6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
고, 재산상의 피해도 막심하온즉 만호 이순신을 처벌함이 마땅하올 줄로 아옵니다.
  나라에서는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이순신의 벼슬을 빼앗고 백의 종군시켜라.
  너무도 억울한 명령이 이순신에게 내려졌다.  백의 종군은 병졸도 아니었다.  전복(군복)조차 제대로 입
지 못하고 군적에도 이름이 없는 잡병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라를 위함에 계급이 무슨 상관이랴.
  이순신은 그에 대해 한마디 변명의 글도 올리지 않았다.  다만 흰 옷을 입고 병영에서 묵묵히 자기의 일
만을 하였다.


  5. 햇빛은 찬란히

  이순신은 그 해 겨울, 백의 종군하면서 오랑캐와 싸워 공을 세우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벼슬을 받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와 쉬고 있다가, 서기 1589년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순신의 인
품과 재능을 알아보고 자기의 군관을 삼았다.
  여기에서도 이순신은 열심히 일하였으므로 조정에서도 그를 인정하게 되어, 그 해 12월에 이순신은 전라
도 정읍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당시 현감의 권력은 매우 컸다.  한 고을 전체가 현감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과거에 합격한 지 어언 14년, 이순신의 나이는 이미 마흔다섯 살로 너무나 기나긴 쓰라림 뒤의 조그만
출세였다.
  그는 비로소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다.  또한, 이미 세상을 떠난 형님의 아들들도 정읍으로 데려왔다.
  그럴 때, 정언신 대감이 역적으로 몰려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언신은 그 때 좌의정(부총리)이
었다.  이순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어 그를 특별히 아끼는 재상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정여립이란 사람이 나라를 뒤엎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했다.  그 한 패에 정언신도 끼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계획한 일을 전에 황해 감사였던 한준이 미리 알아 내어 나라에 보고했다.  따라
서 정언신도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것이었다.
  조정은 발칵 뒤집혀 역적 모의를 한 사람들을 전부 붙잡아들였다.
  역적으로 몰린 사람은 비록 가까운 친구라도 찾지 않았다.
   정언신 대감을 뵙고 싶다.  그분은 역적 모의를 하실 분이 아니다.  정여립과 9촌 사이라 하여 누군가가
  모함을 했으리라.
  이순신은 이런 간절한 마음이었으나, 고을을 다스리는 일을 버리고 한양으로 갈 수는 없었다.
  하늘이 알아 준 것일까.  때마침 전라 감사가 한양으로 보내는 사자로 이순신을 뽑았다.
   됐다.  이제 정 대감을 뵈올 수 있겠다.  옥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실까.
  이순신은 부랴부랴 한양으로 올라갔다.  한양에 닿자 그 길로 의금부(죄인을 다루는 곳)로 갔다.  그런데
의금부 옥 앞의 광경을 보고 그는 분노를 터뜨렸다.  의금부의 벼슬아치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장난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아니, 이게 무슨 짓들이오! 한 나라의 대신이 옥에 계신데 그 앞에서 이 무슨 방자한 짓이오!
  의금부 벼슬아치들은 그 무서운 호통에 취기가 달아나 입을 다물었다.
  그 때 전라도에 사는 사람이 그 사건과 관련되어 옥에 갇혀 있었다.  이순신과는 서로 뜻이 통해 늘 가
까이 지내는 사이였던 조대중이었다.
  의금부 도사는 조대중의 집을 뒤질 때, 이순신의 문안편지를 발견했다.  의금부 도사는 이순신을 존경하
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편지를 그대로 내놓았다가는 큰일날 것 같아 이순신을 찾아갔다.
   조대중과 편지 한 통이라도 주고받은 사람은 모두 잡혀 들어갈 지 모릅니다.  이공의 편지는 빼 드릴까
  요?
  의금부 도사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이순신은 차분하게 꾸짖는 듯한 말투로
   조정의 명령은 조대중의 집에 있는 것을 모조리 뒤져서 바치라는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 어찌 내 편지
  만을 빼어 버리겠소!
하고 말했다.
  이순신은 자기가 잡혀 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로서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거짓을 고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곧은 성격은 이미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도 거의 알려져 있었다.
   한낱 문안 편지일 뿐이겠지.
  그들은 모두 그 편지를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겨 버렸다.  남의 모함만 받아 오던 이순신에게는 정말 큰
다행이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는 조선 초기부터 외국의 잦은 침공과 위협을 받아 왔다.
  그 중 우리 나라의 골칫거리가 남해안과 서해안에 나타나는 왜구들이었는데, 세종 때 그들의 소굴인 대
마도(쓰시마 섬)를 정벌한 이후에 잠잠하다가 선조 때 이르러 다시 극성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변사라는 군사 사무 기관을 세워 이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 임금 대에 접어들면서 벼슬아치들은 당파싸움으로 갈라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다.
  한 나라의 조정이 동인과 서인 두 파로 갈라져 서로 헐뜯고, 벼슬 자리를 놓고서 서로 자기네 파를 앉히
려고 싸웠다.  또 반대파를 몰아 내기 위해 어떤 모함도 서슴치 않았다.
  그 무렵 이이(이율곡)는 그 어느 당파에도 휩싸이지 않고 당파 싸움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조정이 어지러울 때,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자가 나타나서
일본을 통일하고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 나라를 침공하여 중국 명나라를 침략하는 전초 기지로 삼으려 하였다.
   아무래도 왜국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곧 몇 뼘 안되는 바다를 건너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우리도 그
  에 대한 방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본에 다녀온 사람이 이런 말을 아뢰자,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의논했다.
  일본은 쳐들어올 것인가 아닌가.  그러나 조정에 앉아서 제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 보았자 속시원
히 알길이 없었다.
   사신을 보내어 살피게 하자.
  결국 정사에는 서인 황윤길, 부사에는 동인 김성일을 통신사로 일본에 보내어 일본의 상황을 살펴 오게
하자고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일본에 다녀와 자신들이 본 바를 보고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의견은 각각 달랐다.
  먼저 황윤길은 이렇게 보고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란 자는 야심이 활활 타고 있는 자입니다.  눈빛이 번쩍번쩍 빛나고 엄청난 일을 저
  지를 담력도 있는 듯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함을 많이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다를 건너올 준
  비가 틀림없습니다.  왜국은 머지않아 우리 나라에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런데 동인 김성일의 보고는 그와 완전히 반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려워할 자가 못 됩니다.  눈은 쥐와 같고 얼굴은 꼭 원숭이 같았습니다.  그런
  소인배의 모습을 한 어리석은 자가 어찌 감히 바다 건너 우리 땅을 넘보겠습니까? 왜국은 절대로 쳐들
  어오지 못합니다.
  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의견으로 말미암아 조정은 다시 한 번 뒤죽박죽이 되었다.
  일본이 쳐들어오거나 말거나 나라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더구나 왜적이 침입
해올 것에 대비해서 10만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이율곡도 말했는데,  이러한 태평 세월에 군사를 길러 무
엇하느냐 고 반대한 신하들이 있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서인은 황윤길이 제대로 보았다고 주장했고, 동인은 김성일 옳다고 주장했다.
  말다툼 끝에, 그 무렵 조정에서 더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던 동인의 주장이 서인의 주장을 눌렀다.
   일본은 쳐들어오지 않는다.
  이렇게 결론이 나자, 그나마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준비하던 여러 방비는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의 일본의 움직임은 여느 때와 달랐다.
   아무래도 왜국의 움직임이 수상하옵니다.
  그 무렵, 임금이던 선조는 일본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말이 계속 들리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는 비변사에 명령하였다.
   전국에 널리 알아보아 쓸 만한 장수를 추천하라.
  조정은 이제서야 조금씩 깨우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임금의 명을 받은 비변사에서는 곧 여러 대신에게
장수를 추천하라고 일렀다.
   잘 되었다.  지금 이 때다.
  유성룡은 가슴이 뛰었다.  그 무렵 좌의정이었던 유성룡은 서슴치 않고 이순신을 천거하기로 결심했다.
  유성룡은 병조 판서에게 이순신에 대한 말을 상세히 전했다.
   이순신은 나와 어릴 때 한 동네에서 자랐소.  그는 어려서부터 말이 없었소.  게다가 담력은 컸지요.
  그 동안 파직도 두 번이나 당했지만 내가 알기에 그것은 모두 모함에 의한 것이오.  그를 높이 쓰면 반
  드시 큰 일을 할 것이오.
  그래서 병조 판서는 곧 임금에게 이순신을 천거했다.
   이순신? 그런 인물이 있었던가?
  선조는 그 이름을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도원수의 일까지도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낮은 벼슬로는 군사를 맡길 수는 없
  는 일이오니, 우선 병사나 수군 절도사쯤은 맡겨도 훌륭히 해낼 것이옵니다.
   유 정승의 추천이니 틀림없겠지.
  선조는 선뜻 승낙했다.
  그 때 이순신은 진도 군수로 발령을 받았는데, 진도로 부임해 가기 전에 다시 가리포(완도) 첨사로 발령
이 나 있었다.
  이순신이 가리포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을 때, 수 명의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어명이오.  이순신은 어서 나와 어명을 받으시오.
  이순신은 버선발로 뛰어나가 뜰 앞에 꿇어 앉았다.
   그대를 전라 좌수군 절도사로 임명한다.
  선조 임금은 좌의정과 병조 판서의 천거를 받아들여 이순신을 전라 좌수군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정읍 현감으로 어진 정치를 베풀던 이순신은 선조 24년, 서기 1591년 2월 13일에 전라도 좌수
사가 되어 여수에 있는 좌수영으로 가게 되었다.
  이순신이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맡은 수군 사령관이 된 것이다.
  전라 좌수사는 순천·보성·광양·흥양·사도·방답·여도·녹도·발포·낙안 등 다섯 고을과 다섯 포구
를 다스렸다.  그 권한은 병마 절도사(병사)와 거의 비슷한 정도였다.
  마침내 이순신에게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6. 거북선

   곧 관하를 순시하겠다.
  이순신이 좌수사로 부임한 뒤, 곧바로 내린 첫 명령이었다.  부하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누구든 새로 부임하면 축하 잔치로 몇 날 며칠을 떠들썩하게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부임한 그 이튿날 관하를 순시한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돌아본 좌수영은 말이 아니었다.  무기고에 있는 창칼은 모두 녹슬어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 화
살도 한두 번 싸우면 없어질 만큼 아주 부족하였다.
  또한, 배라는 배는 모두 바다 위에 뜨면 멀리 가지도 못 하고 당장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곧이어 이순신은 자기 관하에 속해 있는 10개의 고을과 포구를 돌았다.
  아무 예고 없이 들이닥친 순천 고을의 무기고도 좌수영과 마찬가지였다.  다른 고을 포구도 더 나을 게
없었다.  무기고는 못쓰게 된 무기를 처넣은 쓰레기장었고, 군사들은 군사인지 일반 백성인지 모를 만큼 규
율이 없었고 행동 또한 느렸다.
  또, 각 고을의 포구마다 군사들이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르는 실정이었다.
   이래서는 왜적이 아니라 한낱 도둑 떼가 쳐들어와도 막지 못하겠구나!
  이순신은 너무나 한심하고 어지러운 현실에 마음이 괴로웠다.
   무기고의 무기는 항상 빛이 나도록 손질하고 화살을 많이 만들어라.  지금까지 사용해 온 배는 다시 수
  리하고 또 새로 만들어라.
  이순신의 명령은 서릿발같이 위엄이 있었다.
  좌수영 군사들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새벽이면 각 병영마다 군사들의 훈련받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낮
에는 나무를 깎고 쇠를 다듬는 소리가 울렸다.  밤에는 밤대로 야간 훈련을 했다.
  이순신은 갑자기 조련장에 불쑥 나타나기도 했기 때문에 군사들은 언제 이순신이 나타날지 몰라 게으름
을 피울 수가 없었다.
  어는 날, 좌수영 군사는 저희끼리 소곤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 봐, 요즘 극성스러운 좌수사님이 좀 이상하신 것 같지 않아?
   맞다, 웬일일까?
   요 며칠째 포구 순시도 안 나가시고 본영 조련도 다른 부장들이 하잖나.
   필시, 무슨 계획을 세우시는 거야.
  그들의 말대로였다.  새로 부임한 이순신 좌수사는 벌써 나흘 밤낮을 꼬박 들어앉아 있었다.
  이순신은 각 포구와 고을에 제대로 규율이 잡히게 되자 한 가지 연구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보면 태종 15년에 철선(쇠배)으로 왜구를 물리쳤다고 씌어 있다.  철선이란 어떤 배일까? 쇠로
  만든 배가 어떻게 물에 뜰 수 있을까?
  옛 기록에서 본 한 구절이 떠올라, 이순신은 그 철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의 군선은 모두 나무로 된 목선이다.  나무배란 부서지기 쉽고 불타기도 쉽다.  철선만 있다면 들이
  받기만 해도 그것으로 포타 몇 발을 명중시킨 이상의 힘을 낼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쇠로 만든 배가
  어떻게 물 위에 뜰 것이며 어떻게 달려간단 말인가?
  며칠을 골몰하면서 여러 가지 배 모양을 그리던 이순신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그것이다.
  이순신은 정신 없이 붓을 놀렸다.  그렸다가는 찢고 다시 그렸다가는 찢었다.
  점심상이 들어왔을 때도 한 번 흘끗 보았을 뿐, 국이 식어 버릴 때까지 도면만 쏘아 보았다.
  한참 후에 밥상을 물리러 사람이 왔을 때서야 이순신은 생각이 난 듯, 그 사람을 잠깐 기다리게 해 놓고
겨우 몇 숟가락 뜬 다음 밀어놓았다.  너무나 연구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철선을 만들려는 생각으로 이순신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 날이 밝기도 전인 새벽녘, 이순신
은 부장인 나대용을 불렀다.
   좌수사께서 날 부르신다고?
  부장 나대용은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수사 처소 앞에 대령해 섰다.
   들어오시오.
  방 안에 들어선 나대용은 이순신 앞에 펼쳐진 그림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곳에는 밑바닥은
배인데 몸통은 거북 모양인 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대용은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배를 만드는 데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이상한 배로군요.
  그러나 틀림없는 배였다.
   이런 배가 불에 뜰까요?
   뜨고말고, 틀림없이 뜨네.  만들 수 있겠는가?
   만들 수는 있습니다.
  군선만한 크기, 그 배 위에 거북등이 얹혀 있고, 뱃머리에는 용의 머리가 높이 솟아올라 입을 딱 벌리고
금방이라도 바닷물을 집어삼키지 않으면 불길을 내뿜을 것만 같았다.
   굉장합니다.
  이순신이 도면에 쓴 배의 기능을 본 나대용은 크게 감탄했다.  거북등 위에는 쇠못이 촘촘히 박혀 있어,
적군이 도저히 그 곳으로 뛰어내리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또, 그 쇠못 사이로 열십 자의 길이 나 있었는데, 그것은 거북선에 탄 아군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포문이 22개씩 있었다.  그 포문으로는 천자포, 지자포, 황자포 등 그 어떤 대포라
도 쏠 수 있었다.
   왜군은 틀림없이 쳐들어올 걸세.  엄청나게 많은 배를 몰고서 말일세.  그런데 우리의 반쯤 썩은 군선으
  로 그배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 수군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게 되네.  그러나 이 배만 만들어
  놓으면 능히 10척, 20척도 대적할 수 있지.
   정말 왜군이 올까요?
   분명히 올 걸세.  나는 황윤길 사신의 말이 옳다고 믿네.  이 도면을 보고 자세한 설계도를 만들어 주
  게.
   알겠습니다.
  나대용은 도면을 들고 이순신의 방에서 나왔다.
  보면 볼수록 바다 위의 조그만 성이었다.  적군이 화살을 아무리 쏘아대도 거북선 안에 탄 우리 군사는
다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대포까지 쏘아댈 수 있다.
  그 뿐인가.  거북선은 용의 머리로 불길을 내뿜거나 해서, 뱃머리를 적의 배에 바싹 붙여 적의 군사들을
뒤로 물러나게 할 수 있고, 검은 연기를 내뿜어 한 치 앞이 안 보이게 할 수도 있다.
  나대용은 곧 이순신이 그린 도면을 들여다보면서 배의 자세한 구석구석까지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를 밝힌 설계도를 만들었다.
  그 설계도에 의하면,
  배 길이 64자 8치(약 19.5미터)
  배 이물 너비 12자(약 3.6미터)
  배 허리 너비 14자 5치(약 4.4미터)
  배 고물 너비 10자 6치(약 3.2미터)
  양쪽 현판은 각각 널빤지 7장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높이가 7자 5치(약 2.3미터), 맨 밑 널의 길이는 68자
(약 20.5미터), 맨 위 널의 길이는 113자(약 33.9미터)에 두께가 4치(약 12센티미터), 그리고 노판은 널 4장
을 이어 높이가 4자(약 1.2미터)였다.
  대포 구멍은 양쪽에 각각 22개, 출입문이 양쪽에 각각 12개, 오른쪽과 왼쪽에 노가 10개씩 있었다.
  위에는 장교들의 방이 있고, 아래에는 24개의 방이 있는데 병사들의 휴게실, 무기를 보관하는 방, 대충
이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나대용은 완성된 설계도를 이순신에게 보였다.  이순신은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피고 나서 만족하다는 듯
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생각지 못한 점까지 잘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곧 명령을 내렸다.
   이 배를 급히 만들어라.
  그 날부터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거북선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다.
  우선 급한 것은 거북선 등을 덮을 쇠였다.  좌수영 바닷가에 대장간이 만들어지고, 여기저기서 쇠를 모아
왔다.
  나대용의 지휘를 받는 목수들이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여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바닷가로 모여들었다.
   야, 배를 만들 모양이지.
   수백 척 만들려나 봐.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시작했다.
  이상한 여섯 모 꼴의 납작한 쇠판이 자꾸 만들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늘어놓으니 꼭 거북등 무늬
같았다.  사람들은 또 용머리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매일 바닷가로 나왔다.
  좌수영 앞바다를 비롯하여 다섯 포구에서는 거북선을 만드느라 분주한 날이 계속되어 갔다.
  그런 중에도 군사들은 해전 연습을 하고, 종고산 봉우리에는 봉화대르 쌓는 등 이순신은 어느 한 곳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드디어 배가 짜맞추어지던 날, 사람들은 그 때까지의 궁금증을 풀었다.
  이순신은 배 만드는 일은 부장 나대용에게 맡겨 놓고, 다른 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웃에 있던 경상 우수사 원균의 진영도,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진영도 모두 조용한데, 전라 좌수영에 속
한 곳에서만 금방 난리라도 날 것 같은 법석이었다.
   거북선이로구나!
   용머리를 가진 거북이야! 바다의 성이로군!
  곧 돛이 만들어졌다.  26필의 베를 말아서 만든 큰 돛까지 달면, 바람을 바로 받을 때의 속도는 20개의
노를 젓는 힘과 합해져 함께 대단해질 것이었다.
  나대용의 가슴은 흥분으로 부풀었다.
   얼마나 빨리 달리고 얼마나 튼튼할까? 닥치는 대로 적군의 배를 들이받아도 괜찮을까?
   싸움에 나갈 때에는 거북등에 거적을 덮고 나간다.
  이순신은 엄청난 배를 쳐다보며 나대용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왜 그러시는지를…….
  적군이 멋모르고 거적을 덮은 배의 등으로 건너뛰면 못에 찔리므로 쉽게 적을 해치울 수 있는 것이다.
   내일 배를 띄운다!
  이순신은 마지막 점검을 하고 결정을 내렸다.
  임진년(서기 1592년) 2월 8일.
  조그만 성과도 같은 용머리의 거북선은 만 두 달 반 만에 바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날, 돌산도 대섬
에는 거북선을 구경하려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드디어 여러 척의 전선에 이끌려 나온 거북선이 바다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뜬다! 뜬다! 만세!
  바닷가에서 함성이 터졌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큰 함성 속에서 거대한 괴물은 둥실 떠 있는 것이
었다.
  잠시 후, 거북선을 끌던 전선들이 떨어져 나가자 넓은 바다에는 거북선만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배 한 척을 만드느라고 얼마나 오랫동안 갖은 노력을 다했던가?
  나대용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북선의 노 구멍에서 20개의 노가 쑥 나왔다.  일제히 10개씩의 노가 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물 위로 쑥 올라왔다가 앞쪽 물에 담겨 뒤로 힘차게 밀려갔다.
  마치 한 사람이 노를 젓는 것 같았다.
   쿵! 쿵!
  북 소리를 신호로 거대한 거북선은 큰 물보라를 내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좌수영 곳곳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와! 만세!
   만세, 만만세!
  구경꾼들의 눈은 용머리를 높이 쳐든 이 괴물에게 못 박힌 듯이 쏠렸다.
   후루룩, 후루룩.
  산과 바다를 울리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용머리에서 나더니 시커먼 연기가 바다 위를 덮었다.
   쾅!
  거북선의 대포가 크게 울리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불길이 확 솟으면서 수없이 많은 불화살이 별똥별처럼
바다 위와 하늘로 쏟아져 나왔다.
  이 때, 북 소리가 빨라지면서 좌우에 뻗은 20개의 노가 일시에 물을 힘차게 당겼다.  무겁게 보이던 거북
선은 금세 바람과 물결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좌수영 앞바다로 내달았다.
  거북선은 선장이 울리는 북 소리를 따라서 속도를 바꿔 가며 좌수영 앞바다를 몇 바퀴 돌았다.
  구경하던 백성들은 경탄의 환호 소리를 질렀다.
   야, 거북에 날개가 돋힌 듯하구나!
  잠시 후, 요란한 소라 소리가 거북선에서 울렸다.  그러자 거북선 좌우의 포 구멍에서 일시에 포신이 나
오면서 불을 뿜었다.
   꽝 꽝 꽝!
  좌수영의 모든 바다와 산에 포성이 메아리쳤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40여 척의 군선을 모두 합치더라도 거북선 하나의 위력을 당해 내긴 어려울 듯싶었다.  그 이유는
  첫째, 거북선의 속력은 다른 배의 두 배나 된다.
  둘째, 거북선은 병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아군이 적을 쏘아 죽이기는 해도 적이 아군
을 쏘아 맞힐 수는 없다.
  셋째, 거북선은 뱃전 좌우에 각각 10개씩의 포 구멍이 있고, 뱃머리에도 4개의 포 구멍이 있기 때문에 그
것이 일시에 포를 쏘거나 불화살을 쏘면 적선이 감히 접근할 수 없다.
  넷째, 몸체가 워낙 큰데다가 배를 지은 재목이 든든하고, 배의 중요한 곳에는 철갑을 씌웠기 때문에 적선
과 마주 부딪치면 적선은 부서지고 만다.
  다섯째, 바람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노를 저어 갈 수 있고, 갑판에는 철판을 덮고 날카로운 못을 촘촘
히 거꾸로 박았으니, 적이 불을 놓으려 하더라도 불을 놓을 수 없다.  또한, 적병이 배에 뛰어오르더라도
쇠못에 찔려 죽게 된다.
  여섯째, 입에서 황과 염초를 태워 만든 연기가 나와 몸을 감춘다.
  일곱째, 배가 크기 때문에 물과 양식을 많이 실어서 오래 항해할 수 있다.
  여덟째, 바람이 불 때 등에 돛을 달고 달릴 수 있다.
  진수식에 이어 항해 시험이 끝난 뒤에 순천 부사 심유성이 이순신에게 인사말을 했다.
   과연 장하오.  사또는 신묘한 재주를 지녔구려.
  이 말에 이순신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와 같은 거북선 20척만 만들어 놓은 뒤면 왜병이 오더라도 염려가 없소마는 그렇게    할 시간이나
있을는지 알 수 없소.
 하고 멀리 남해를 바라보았다.
   왜병이 감히 쳐들어올라고요.  김성일의 말을 들으면 왜국의 도요토미란 자는 큰 일을 할 위인이 못된
  다고 하더군요.
  순천 부사 심유성은 자신이 앞을 더 잘 내다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풍랑을 만나 왜국으로 흘러갔다가 돌아온 어부의 말을 듣고, 왜군이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조선으로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국은 온 나라의 힘을 총동원하여 조선과 명나라를 치려는 준비를 거의 마무리짓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이순신 혼자만이 거북선을 만드는 등 왜국의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을 뿐, 조선의 조정은
무방비 상태였다.
  거북선의 진수식을 마친 뒤, 순천으로 돌아온 순천 부사 심유성은 그 길로 호군 신립에게 이순신이 거북
선 20여 척을 건조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
  신립은 이 보고를 받고서 몇몇 서인파의 선배들 의견을 물었다.
  조정의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있었던 때인만큼, 서인파들의 의견은 한결같이 이순신으로 하여
금 큰 공을 이루게 하는 것은 동인파인 유성룡의 세력을 크게 해 주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그는 성공이 미지수인 거북선 건조를 금지할 것을 왕에게 진언했다.
   청컨대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만 힘을 쓰게 하소서.
  이 보고를 받은 선조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립 및 그 당파들은 수군을 없애자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지금 조정 대신들의 의견은 수군을 없애자고 모아졌사옵니다.  설사 왜병이 침입한다 하더라도 왜국은
  사방을 바다로 둘러쌓인 섬나라이기 때문에 백성이 모두 물에 익숙하므로 도저히 바다 싸음으로는 왜병
  을 이기기 어려우니, 차라리 육지에 끌어올려서 대번에 씨도 없이 무찔러 버리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선조는 거북선의 그림과 아울러 그 놀라운 시험 결과를 보고 혼자 기뻐하고 있던 때였으니 당황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유성룡은 거북선의 성공으로 해서 조정에 일어난 풍파를 자세하게 이순신에게 편지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나라를 생각함보다 제 몸을 생각함이 많고, 남의 잘함을 시기함이 많으므로
  그대도 눈에 띄게 수군을 늘여 너무 사람들의 미움을 받지 말도록 하시오.
  이것은 이순신을 좌수영 수사로 추천했던 유성룡으로서는 이순신을 염려하여 보낸 글이었다.
  이순신은 곧 분향하고 엎드려 임금께 올릴 장계(보고서)를 지었다.
  그는 요즘 일본 쪽으로부터 나뭇조각이 많이 떠온다는 것과, 일본으로 표류했던 어민의 말을 들으면 머
지않아 왜군이 조선과 명나라를 치기 위해 30만 대군을 몰고 올 것이며, 포구마다 군선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정성들여 썼다.
   ……바다로 오는 도둑을 막는 데는 수군밖에 없사오니 수군이나 육군 어느 것 하나도 폐할 수 없나이
  다.
  이순신은 이렇게 글을 맺었다.
  선조 임금은 몸소 이순신의 장계를 읽고, 그의 문장이나 글씨가 뛰어남에 감탄하고 무릎을 쳤다.
  그 뒤, 수군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서인파 대신들에게 그 장계를 돌려 보이고 다른 의견을 더 묻지 않고
이순신의 장계에는
   옳다.
  신립의 장계에는
   옳지 아니하다.
는 명을 내렸다.
  그 일로 해서 이순신은 전보다도 더 심각하게 서울에서 세도 잡은 벼슬아치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세도가 당당한 신립이 한낱 이름도 없던 이순신에게 졌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신
립은 이를 갈았다.



















  7.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우리 나라에서는 당파 싸움으로 정신이 없었던 16세기 말경에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분열되었던 나라를 통일하였는데, 강력한 통일 국가를 세우기 위해 필요했던 무사들이 이제는 도요토미 히
데요시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과 중국을 칠 계획을 세웠다.
  얼마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비켜 달라.
  이 글을 전해 받은 조정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곧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는 왜국의 속
셈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구실입니다.  우리 나라를 치려는 것입니다.
   도요토미의 속셈은 이제 뻔합니다.  황윤길 정사의 말이 옳았던 것을…….
   먹고 자고 싸움만 해 온 자들이니 우리가 어찌 이들을 당하겠소.
  조정의 신하들은 하얗게 질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이라도 어서 방비책을 세워야지, 치려는 것이라느니 길을 빌리자는 것이라느니 우리끼리 말해 보았
  자 소용없습니다.
   그렇소.  병조 판서께서 좋은 생각이 있으면 어서 말해 보시오.
  어전 회의에서 대신들은 그저 갈팡질팡이었다.  좌의정 유성룡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방비도 방비지만,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영의정 이산해가 이 의견에 반대하였다.
   명나라에 알리는 것은 좋으나, 알렸다가 우리가 왜곡과 내통하고 있다고 꾸짖으면 어찌하겠습니까?  모
  르는 체하는 것이 차라리 좋지 않을까 합니다.
   알려 주는 데 꾸짖기야 하겠습니까?
   내통하지 않고서는 어찌 그런 말이 오갔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알려야 합니다.  숨긴다면 명나라와 우리 나라의 우정에 금이 가게 됩니다.  왜국이 우리 나라와
  명나라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수를 부린다면 더욱 큰일입니다.
  유성룡의 말이 옳았다.  명나라에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에 잡혀 있던 명나라 백성이 이
미 말했고, 또 난세이 제도(유구)의 세자 상녕이 그 정보를 듣고 알렸는데도 우리 나라에서 보고가 없자 의
심하고 있던 참에, 우리 나라 사신이 이르러 의심을 풀었다.
  어전 회의가 끝났으나,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단지 왜국에게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전쟁 준비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나마 능력이 있는 장수를 남쪽으로 내려보내 대비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경상 감사에 김수, 전라 감사에 이광, 충청 감사에 윤선각 등을 임명하여 내려보냈다.
  세 사람이 각자 자기가 맡은 곳에 가서 군비를 살펴보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성벽마다 허물어
진 곳 투성이고, 고을을 지켜야 할 중요한 곳에 성이 없었다.  창은 녹슬고 화살도 별로 없었다.
  그들은 곧 군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대충 성을 쌓고, 성벽을 수리하였다.  화살도 급히 만들고, 창날의
녹도 닦아 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조금씩 달라져 가기는 해도, 그것은 강물을 흙
몇 줌으로 막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왜국이 쳐들어오면 맞서 싸운다.
  방침은 굳어졌다.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알았으나, 그래도 못 막아 낼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원균이 있고 박홍이 있으니 바다에서 막아 내리라.
  조정은 경상 우수사 원균, 경상 좌수사 박홍을 믿었다.  부산 땅에 왜군이 몇몇 올라온다 해도 경상 병사
의 군대가 있지 않은가.
   명나라는 우리 나라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륜으로 맺어진 나라다.  길을 내줄 수는 없다.
  조정에서는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즉시 무장들을 모았다.
  살기 등등한 얼굴들이 모였다.  수십 년을 자나 깨나 싸움으로만 살아 온 그들이다.  싸움이 없으면 오히
려 따분해할 자들이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우리 나라를 치자는 데 뜻이 모아졌다.
   일본 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공이 지켜 주시오.  그리고 후방 예비군이 되어 뒷일에 대비하시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사는 11만 명이었다.
   조선 원정군의 장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침략군의 무장들을 지명해 나갔다.
   육로로 진군하는 한편, 군량은 바닷길로 간다.
  작전도 짜여졌다.
  쓰시마(대마도) 항구에 여러 무장의 깃발이 펄럭이고 배들이 큰 물결을 이루며 바다를 덮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땅을 빌려 줄 수 없다는 회답을 보냈으면 마땅히 정보 얻기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옳았다.
  일본 서쪽 포구에 어떤 배들이 모여들고 있는가.  또 군사는 어느 정도 모여들고 있는가를 살펴야 했고,
병조판서는 경상 좌우 수사에게 명령하여 쓰시마 포구가 보이는 곳까지 군선을 띄워 감시케 해야 했다.
  그러나 조정은 경상, 전라, 충청 감사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성을 수리하고 쌓게 하는 데에 그쳤다.
  쓰시마에서 왜국의 군선 선단이 곧 떠나게 되어 있을 때, 부산 포구를 지키는 부산 첨사인 정발은 무엇
을 하고 있었는가? 원균과 박홍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원균과 박홍은 늘 하듯이 연회를 베풀고 있었고, 정발은 사냥을 즐기며 여유 만만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거북선 만들기에, 그리고 한 척의 군선이라도 더 만들기에 밤잠을 잊고 있었다.
  선조 25년, 서기 1592년 4월 13일, 그 날도 정발 첨사는 사냥터에서 짐승을 쫒고 있었다.
   아니 저게 뭡니까?
  해가 기울 무렵, 부장 하나가 다급히 소리치며 숲 사이로 부산포 앞바다 저 먼 곳을 가리켰다.  시꺼먼
배가 온통 수평선을 뒤덮고 있었다.  정발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변했다.
   왜선이닷! 왜군이닷!
  한참만에야 제정신을 차린 정발은 쏜살같이 말을 성으로 몰았다.
   곧 한양으로 파발(연락) 준비를 해라!
  성문으로 달려 들어가며 명령을 내리고, 방으로 들어가 급히 붓과 종이와 벼루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곧
장계를 썼다.
  정발은 곧 성문을 굳게 닫고 적병을 막아 낼 대책을 세웠다.
  군사 200명을 성 위에 벌여 놓아 성 밖으로 모여드는 적을 활로 쏴서 막게 하고, 다른 군사는 나누어서
성문을 지키게 하거나 무기를 정리하게 하였다.
  성 안은 싸움 준비로 발칵 뒤집혔다.  성 바깥도 아우성이었다.  백성들은 너도나도 피난 가기에 바빴다.
  정발은 또한 말을 풀어 다대포 첨사 윤홍신, 경상 좌도 수군 절도사 박홍,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 이각,
동래 대도호 부사 송상현에게 파발을 보냈다.
  그 내용은 자신과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부산성을 지킬 터이니 만일 부산진의 힘만으로 적군을 막아 내
기 어려울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고 달려와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왜군은 전선 700여 척의 대군을 거느리고 우리 나라로 쳐들어왔다.  이것이  임진왜란 이다.
  부산포 앞바다에 이른 왜선은 닻을 내리고 숨을 죽여 밤을 맞이했다.  놀러라도 온 듯이 퍽이나 느긋한
정박이었다.
  다대포에 수군 군영을 둔 박홍은 700여 척의 군선단을 보고 감히 공격할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배를
두고도 군영 단속만 하고, 원균에게 급히 알려 구원을 청할 뿐이었다.
  4월 14일 새벽 6시, 날이 밝자 죽은 듯이 바다 위에 떠 있던 왜군 선단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들은 텅 빈 바닷가에 잇달아 배를 대고 왜군들을 풀어 놓기 시작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모토 등의 왜장이 거느린 선발군은 순식간에 부산성을 에워쌌다.
   탕! 탕탕탕!
  성을 지키던 병졸들이 여기저기서 피를 흐리며 푹푹 쓰러졌다.
  마구 터지는 조총 소리에 겁을 먹어 화살조차 제대로 못 쏘는 우리 군사를 보고, 왜병들은 성벽에 새까
맣게 달라붙어 기어올랐다.
  우리 군사들은 정신 없이 날아드는 조총탄 때문에 기어오르는 적병들을 막아 낼 길이 없었다.
  드디어 부산진 성문이 부수어지고 왜군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정발은 칼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왜군 몇 명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부산진성은 하루도 넘기지 못하
고 왜군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왜군 선단을 맞아 가장 앞서 싸워야 할 박홍의 행동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식량과 무기를 바다에 처넣어라.  왜병의 손에 쥐어주면 안 된다.
  이런 명령만 내리고 그는 군영을 비우고 도망쳤다.  왜병들은 텅 빈 땅을 거침없이 넘어와 다대포와 서
생포를 휩쓸었다.
  부산 일대의 가장 중요한 성인 동래성 부사 송상현은 좀 달랐다.  성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왜병을
맞아 싸울 준비를 서둘렀다.
  이각이 동래성으로 쫓겨 들어왔다.
   잘 오셨습니다.  이 성에서 죽기를 무릅쓰고 왜적을 막읍시다.
  송상현 동래 부사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이 조그만 성으로 어찌 그들을 당해 내겠단 말이오?
  이각은 그 손을 뿌리치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 때 이각은 경상 좌병사로 지금의 경상도 사령관이었다.
  송상현은 성 남문에 올라서서 메뚜기처럼 성벽을 타넘어 들어오는 왜병을 맞아 싸웠다.
남문 문루로 왜병들이 몰려왔다.  우리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송상현은 대궐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단정히 앉았다.  성루로 달려 올라온 왜장 다이라가 그 모
습을 보았다.
   어서 피하여 목숨을 지키십시오.
  왜장 다이라는 송상현의 높은 인품에 감동하여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송상현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때 한 왜병이 갑자기 달려들어 송상현의 목을 쳤다.  이를 본 왜장 다이라는 목이 터질 듯 고함을 질
렀다.
   저 녀석을 잡아라.
  송상현의 목을 친 부하를 잡으라는 것이었다.
   충신 열사는 하늘이 알아 주는 것이거늘!
  왜장 다이라는 그 부하의 목을 쳤다.  그리고 송상현을 정중히 관에 넣어 성 동문밖에 예의를 다하여 장
사지내 주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으나,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는 왜군을 겨우 2만 명의 병력으로 대적하기란 너무도 무리한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사들은 수많은 적을 맞아 죽음을 각오하고 참으로 용감히 잘 싸웠다.
  마침내 동래성마저 빼앗긴 4월 15일, 그 날부터 왜군의 진격은 질풍 같았고, 소용돌이치는 파도 같았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아우인 흥제와 함께 왜군과 싸우다 죽었다.
  밀양 부사 박신은 동래성을 구하러 가던 길에 황산에서 왜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고니시 유키나가 이끄
는 대군에게 패하여 군사 300여 명을 잃고 밀양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밀양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군기와 창고를 불사르고 다시 산으로 달아났다.
  동래를 버리고 달아난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 이각은 동래가 떨어지자, 자기 운명이 경각에 달린 것을
느끼고 자기 병영으로 급히 돌아갔다.
  정신 없이 병영으로 돌아온 그는 사졸과 말을 풀어 사랑하는 첩과 무명 1천 필을 서울 집으로 먼저 실려
보냈다.  그는 이 일을 반대한 자기 부하 무관을 칼로 벤 뒤 새벽을 타서 성을 버리고 자기도 달아나려 했
다.
  이 때 병영에는 13읍의 군사 5만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만한 병력이라면 서울을 향해 북진해 오는 왜
군의 선봉을 어느 정도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각은 자신의 목숨만 건지려고 했으니, 당시 벼슬아치들의 정신이 얼마나 썩어 있었
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각이 달아나려는 것을 보고 안동 판관 안성이 이를 말렸다.
   절도사께서 먼저 몸을 피하신다면 여기 모인 5만 명이 넘는 군사들을 누가 지휘할 것입니까? 아니 될
처사입니다.
  그러자 이각은 눈을 꿈벅거리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이 성을 지키고 그대의 정병을 나에게 달라.  나는 서산에 진을
쳤다가 왜군이 오거든 협공할 것이니라.
  안성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정병을 골라 그에게 주었다.
  이각은 정병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나아가 태화강을 바라보고는,
   이놈들아, 왜군이 벌써 저기 온 줄도 모르느냐!
하고 정병만을 이끌고 말에 채찍을 가하여 쏜살같이 달아났다.
   절도사란 자가 저게 무슨 꼴이람!
  안성은 이각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칼자루를 만지며 분개했다.
  얼마 뒤, 총지휘관을 잃은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모두 술렁거렸다.  서로 눈치만 살피다가 적의 공격을
받았다.  곳곳의 병영에서 모였던 13읍의 5만 대군이 왜군과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일이 이 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김해 부사 서예원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 조대곤은 영문을 버리고 달아났다.
  경주성은 언양으로 질러온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에게 포위되었는데 부윤 윤인은 마침 없었고, 판관 박의
와 장기의 현감 이수일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  따라서 왜군은 거침없이 북으로 진격했다.
  고을마다 싸움 한 번 변변히 못하고 무너졌다.  왜병이 이르는 고을마다 우리 군사는 이미 달아나고 없
었다.
  조정에서 왜군 침입의 보고를 받은 것은 4월 17일이었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왜군을 당할 장수가 없소? 우리 나라에 그렇게도 장수가 없단 말이오?
  선조 임금은 안절부절 못했다.
   이일이 좋을까 하옵니다.
  대신들이 이일을 추천했다.  함경도에 있을 때는 날뛰는 오랑캐를 물리친 명장으로 소문나 벼슬에 올랐
으나, 이순신을 모함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음! 이일 장군을 순변사(군사 감독관)로 임명하여 내려 보내시오.
  왕명이 내려졌다.  순변사는 큰 권한을 쥐고 있었다.
이일은 상주 땅을 향해 떠나갔다.
  이일이 서울을 떠나자 조정이나 백성들은 잠시 안심을 하였다.  이일이라는 명장의 이름을 믿은 것이었
다.
  그러나 종남산 봉수대에 세 자루의 봉화가 들리지 않는 날이 없자 서울의 인심은 물끓듯 하였다.
  대궐은 무척 어수선하고 불안했다.  장계를 가진 파발꾼이 하루에도 몇 명씩 들이닥쳤다.
   어느 고을이 떨어졌습니다.
  적군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대구를 점령한 왜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서 가토 기요마사가 죽령을, 고니시 유키나가가 문경 새재를, 구
로다 나가마사가 추풍령을 넘었다.
  곳곳에서 조그만 항전이 있었고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대항하였지만, 조총이란 신무기로 무장한 왜군의
바람 같은 진격 속도를 막을 길이 없었다.
   이일 장군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고을 군사들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적을 막게 하지 못하는가!
  조정에서는 이일에게 짜증을 냈다.
   누구 다른 장수가 없소?
그 때,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던 유성룡이 신립 장군을 불렀다.
   적군을 막을 방법이 없겠소?
그러자 신립 장군은 자신 있게 웃으며 말하였다.
   명장 신립이 있질 않소이까?
  이번에는 신립 장군이 추천되었다.  함경도에서 사나운 오랑캐와 싸워 그 때마다 승리한 장수로, 한양으
로 올라올 때 백성들이 성문까지 나가 맞이한 장수였다.
   신립을 도순변사(군사 총감독관)로 임명하라!
  선조 임금은 신립을 불러 손수 보검을 내리며 말했다.
   누구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이 칼로 목을 베시오.
  신립은 충주로 내려갔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한양으로 오는 가장 큰 길은 문경 새재를 넘는 길이었
다.  그래서 이일도 신립도 그 길로 내려갔던 것이다.
  이일은 상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상주 고을의 몇몇 군졸을 모았을 뿐으로 쳐올라오는 왜군을 막을 길이
없었다.
  고을을 에워싼 왜군들이 조총을 쏘아대며 쳐들어오자 이일은 말을 버리고 도망쳤다.
  한편,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  배수진을 친 것으로 강을 등지고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면 적군
을 무찌를 수 있다는 전략을 본뜬 것이었다.  군사들은 강물로 밀려서 죽기보다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결사대의 작전으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져 왔었다.
  그러나 사용하는 무기가 다르기 때문에 전술이나 전략도 소용없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조총탄 속에
서 칼을 휘두르며 화살 몇 대를 쏘아 보았자, 그것은 회초리를 들고 칼과 맞싸우는 격이었다.
  왜병들이 탄금대로 몰려 올라오자 신립은 벼랑 밑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립 장군께서 강물에 투신하셨습니다.
  이 보고는 나라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과도 같았다.  오랑캐 대군을 무찌른 명장 두 명 가운데 하나는 도
망치고 하나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누가 군사를 지휘하여 왜병 앞에 버티고 설 것인가.
  이리하여 문경 새재 관문이 뚫리고 충주가 무너졌다.  이제 한양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왜적의 무리는 세 갈래로 나누어서 계속 서울로 진격해 왔다.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마을에 불을 지르
고 재물을 빼앗아 갔으며, 백성들은 사정 없이 밀려오는 왜적을 피해 집을 버리고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망극하오나 파천할 준비를 하셔야겠사옵니다.  왜군이 벌써 충주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해 오고 있
  다 하옵니다.
  선조 임금 앞에 꿇어 엎드려 아뢰는 영의정, 우의정 등의 말은 목이 메어 곁에서도 잘 들을 수가 없었다.
   오! 태조 대왕의 사직이 과인에 이르러 끝이 나다니! 저승에 가서 어찌 역대 선왕을 뵈올 수 있겠는가!
  선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4월 30일,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선조는 대신들을 거느리고 한양을 빠져 파천길에 올랐다.
   일단 사직이 끊기더라도 뒷날을 위해 함경도 땅으로 가서 의병을 모으라.
  선조는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 쪽으로 보내고, 평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제 나라가 살아남을 단 하나의 길은 명나라 구원군이 와서 왜적을 물리쳐 주는 길뿐이었다.
  5월 3일, 왜군은 한양성 안으로 들어왔다.
  부산포에 상륙한 지 스무 날도 채 안 되는 동안에 천리 길을 휩쓴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한양에 잠시 머물다가 5월 27일 임진강 방어선을 뚫었다.
  이어 개성을 휩쓴 뒤, 숨조차 돌리지 않고 임금의 파천 행렬을 쫓아 평양으로 치달았다.
  왜군들이 바싹 뒤를 따르자 선조의 파천 행렬은 잠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왜군들이 평양 문턱에 이르
자, 선조 임금은 또다시 의주를 향해 떠났다.
  의주는 우리 나라의 맨 끝으로, 바로 압록강을 건너면 남의 나라 땅이었다.
  6월, 평양성의 항전도 보람없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대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는 한양에서 함경도 쪽으로 휩쓸며 올라왔다.
  그는 함경도에 피난 중이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은 뒤, 회령까지 단숨에 쳐들어갔다.
  평양과 의주만 빼놓고는 온 나라가 왜병의 총칼 아래로 들어갔으며,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죄 없는 우리
백성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며칠만 뒤쫓으면 의주도 그들의 손에 들어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니시 군이 평양성에서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닷새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평양성 북문 밖으로 왜군의 행렬은 나오지 않았다.
  평양성을 바라보며 진을 친 우리 군대가 강해서였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그 방어선쯤은 한나절이면 뚫
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고니시 군은 평양성에 머물고 말았는가.
  고니시는 평양성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화만 버럭버럭 내고 있었다.
  왜군의 진격 계획은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공격의 힘이 되는 보급로가 끊어졌다.  군량미가 떨어진 것
이었다.
  한편 남해안 전라 좌수영에서는
   음! 왜적이! 기어코 왜적이!
  이순신은 공문서를 꽉 쥐었다.  그것은 경상 우수사 원균이 보낸 공문서였다.
   왜군의 배 90여 척이 부산포 앞 절영도에 이르렀소!
  4월 15일 저녁때였다.  이미 동래성도 빼앗기고 왜군이 물밀 듯이 대구에 이를 무렵이었다.
  잇달아 문서가 날아들었다.
   왜군의 군선이 350척이나 와 닿았소.
  왜군이 쳐들어온 것은 4월 13일,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그 거대한 배에서 지자포 등의 대포를 쏘아
본 것이 4월 12일.  하루, 단 하루의 차이였다.
  4월 16일, 원균에게서 또 공문이 왔다.
  원균의 경상 우수영은 거제도 가배량에 있었다.  원균은 왜군이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곧 군선단
을 거느리고 부산포 쪽으로 출전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가장 중요한 요새인 경상 좌수영이 쉽게 무너지자, 경상 우수영 장병들이 거의 흩어
져 버린 뒤였다.  그래서 원균은 얼마 남지 않은 장병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이 있는 여수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 위에 여러 척의 배가 나타났다.
   왜군의 배가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빨리 뱃머리를 돌려라!
  원균은 남해섬 노량으로 피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나라 어부의 고깃배였다.
   안 되겠다.  어서 파발을 놓아서 전라 좌수영 이순신 수사에게 원병을 청하도록 하라.
  그래서 원균은 이순신에게 공문을 띄운 것이었다.
  이순신은 곧 전라 좌수영에 속한 각 포구의 수군장을 불러 모으는 한편 나대용에게 명령했다.
   밤낮없이 거북선 만들기에 있는 힘을 다하라.
  5월 1일, 각 포구의 수군장들이 좌수영에 모였다.
  이순신은 자리잡은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왜군의 힘이 워낙 엄청난지라 경상 우수사 원균 장군이 원병을 청해 왔소.  구원하러 가야 하느냐 마느
  냐에 대해 의논하고자 모이라 했소.
  출전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군관 송희립은 출전을 주장했다.  녹도 만호 정운도 찬성이었다.  그는
   도둑을 대문 안에 들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대문 안에 들어온 다음에 잡자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라고 말했다.
  방답 첨사 이순신(이순신 장군과 성과 이름이 같다)도 나가서 왜군을 침이 옳다고 했다.
  좌수영 각 포구는 출전 준비를 서둘렀다.  이 때 여도의 한 수군인 황목천이 도망쳤다.  싸움터에 나가는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곧 그의 집으로 가서 잡아다가 그의 목을 쳐서 본보기로 병영 안에 높이 매달았다.
  5월 4일 새벽 2시, 바다는 먹물을 뿌린 듯했다.  그 어둠을 뚫고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는 소리없이 여수
포구를 떠났다.
  판옥선(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모두 85척의 함대였다.
  그러나 싸울 수 있는 배는 판옥선 24척 뿐이었다.  나머지는 조그만 부속선일 뿐이었다.
  왜군 함대 수백 척과 싸우러 24척이 떠난 것이었다.
  뭍에서는 이미 한양이 왜병에게 짓밟혔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왜 이렇게 늦었을까?
  왜군 육군은 4월 13일에 부산포에 이르렀지만 모두 뭍으로 올라가 싸웠고, 왜군 수군은 4월 27일에야 우
리 나라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5월 5일, 이순신의 함대는 당포에서 합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균의 배는 보이지 않았다.
  원균의 함대가 한산도에 나타난 것은 다음 날인 6일이었다.
  원균의 함대를 본 이순신은 어이가 없었다.  한 나라 수군 사령부의 함대가 판옥선 4척, 협선 2척, 포작
선 6척 뿐이라니!
  더구나 원균 함대는 대규모의 왜군 함대에 밀려 쫓기고 있었다.
   한심하구나!
  이순신의 입에서 막을 길 없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원균의 함대는 있으나마나였다.  이순신의 함대만으로 왜군 선단과 맞부딪쳐 싸울 작전을 짜야 했다.
  5월 7일 한낮, 왜군 선단이 거제도 옥포에 이르렀다.  옥포는 쑥 들어간 후미진 만이었다.
  지휘관은 도토 다카토라로 머리가 좋고 용감하기로 저희 나라에서 이름난 장수다.  뒷날 도쿠가와 이에
야스를 섬겨 일본 천하를 떵떵거리며 호령한 인물이다.
  이순신은 옥포 앞바다에 이르기 전에 작전 회의를 열었다.
   여러 대장들은 들으시오.  지금 왜군들은 동래성을 무너뜨리고 대구에까지 거의 이르렀다고 하는 소식
  이오.  참으로 남감한 일이오.
  이 말에 수군 대장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의 수군은 왜수군에게 당하지도 못할 것이므로 이를 없애고 왜군을 육지에 끌어올려 씨도 남기지
  않고 무찔러 보이겠다고 호언 장담하던 육군이 고작 그 모양입니까?
  젊은 대장들은 크게 분개하였다.
  이를 지켜 보던 이순신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태가 이러하니 우리 수군의 임무가 더욱 무거워졌소.  그러므로 이번 우리 수군의 첫 출전에서는
기필코 이겨야 하오.  죽을 각오를 다지고 모두 용감히 싸워 주기를 바라오.
   네!
  일제히 대답한 대장들의 눈은 굳은 결의로 빛났다.  이순신의 함대는 조용히 옥포를 향해 나아갔다.



  제목 : 유리카한국위인특대전집 (14) 이순신 2.
  출판사 : (주)학원출판공사, 1996년도판.
 

  1.  바다에서의 첫 승전

  왜군 선단의 지휘관 도토 다카토라는 자신 만만했다.
  그가 거느린 직속 선단은 30여 척,
  그 배에 탔던 왜적들은 모두 옥포 마을로 쳐들어가 울며불며 달아나는 우리 백성들을 죽
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했다.
  이 때, 이순신 함대는 멀리서 옥포 앞바다로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순신은 차분한 목소리로 척후장 김완, 김인영을 불렀다.
   앞서 가서 적의 선단을 찾아라. 적이 보이거든 신호화살을 쏘아 올려라.
  시간은 자꾸 흘렀다, 숨 한 번 쉬는 동안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 때,  한 군교가 소
리쳤다.
   신호 화살입니다!
  이순신도 보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은 숨을 죽이고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가벼이 굴지 말고 산처럼 조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
  이순신 장군의 입에서 첫 명령이 떨어졌다.
  이 말은 첫 싸움에 불안해하는 수군들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되었다.
  옥포만에 이르자 함대는 만 어귀를 둘러싸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저 배들이 어디에서 나타났지?
   조선에 저런 질서 정연한 함대가 있다니?
  갑자기 바다를 덮은 이순신의 함대를 본 왜병이 소리 쳤다. 그들로서는 못 믿을 일이었다.
그것도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뱃머리를 포구로 향해 그물을 치듯 옥포만 어귀를 막고 들어
왔다. 바다를 덮어 누르는 듯한 그 위세에 왜병들은 기가 꺾였다.
   어서 배에 오르라, 후퇴다!
  왜선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터졌다. 뭍에 올라 노략질하던 왜병들이 개미 떼처럼 배로 기
어올랐다.
   산기슭으로 바싹 붙어 배를 몰아라,
  왜장이 이런 명령을 선단에 내린 것은 만일 바다로의 도망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 배
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쳐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을 가만히 보고있을 이순신이
아니었다.
   발포!
  왜군의 선단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졌다.
   펑, 펑, 펑!
  대포와 불화살이 소나기처럼 왜선 쪽으로 날아갔다. 왜군의 배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
작했다.
  쏘아대는 대포 때문에 바닷물이 기둥을 이루며 높이 치솟았다.  자욱히 피어오른 연기가
하늘을 가려, 바다는 마치 땅거미가 질 때처럼 어두워졌다.
그 연기 속에 숨어 있던 왜선 몇 척이 빠져 달아났다.
  그 몇 척 가운데  호랑이 라는 별명을 듣는 왜군 장수 도토 다카토라가 타고 있었다.
  왜군의 배는 가볍고 얕아서 바다 위를 달리는 속도는 우리 배를 앞질렀다. 우리 배는 두
텁고 단단하긴 하나 그만큼 움직임이 둔해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도망친 적의 배는 겨우 5척, 침몰시킨 배는 26척이나 되었다. 우리 수군의 첫 승리였다.
  갑자기 바다와 육지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 왔다.
  산 속으로 도망쳤다가 뛰쳐나온 옥포 사람들의 만세소리와 우리 군사들이 외치는 승리의
함성이었다.
  우리 수군이 배를 기슭에 대고 뭍에 내리자, 눈물로 범벅이 된 백성들이 매달렸다. 그들은
목이 메어 말을 못했다.
  이순신은 세 겹, 네 겹으로 둘러싼 백성들 때문에 한 발짝도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시신이 여기저기 있으리라. 먼저 시신을 거두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 겠느냐.
  이순신 장군은 침착했다.
  우리 수군이 다시 배에 오르자, 백성들은 아우성쳤다.
   사또, 저희들도 데려가 주옵소서!
  모두들 봇짐을 들고 몰려들어 배에 오르려 했다.
   우리는 지금 바다로 싸우러 나가는 것이오. 모두 힘을 합하십시오. . 곧 왜놈을 남김없이
무찌를 것이오.
  갈팡질팡하는 백성들을 그대로 두고 떠나는 이순신의 가슴은 날카로운 칼에 저며지는 것
같았다.
  옥포를 떠난 이순신 함대는 마산포를 향하여 나아갔다. 왜군의 주력 함대가 합포에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수군이고 육군이고, 우리 쪽에서 왜적을 찾아간 것은 이순신 함대가 처음이었다.
  합포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앞서 가던 척후선이 되돌아왔다.
   적선 5척이 보입니다. 큰 전선입니다.
  대함대가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실망이 앞섰으나 그대로 놓아 둘 수는 없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쳐부수어라!
  순식간에 왜적을 무찌른 이순신은 유유히 남포 앞바다로 와 닻을 내렸다. 그리고 장하게
싸운 군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칭찬을 하였다.
   정말 수고했다. 오늘 우리의 승리는 모두 너희들의 공이다.
  모든 공을 부하들에게 돌리는 이순신을 보고 군사들은 감동하였다.
  다음 날 새벽, 또 적의 배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고성 적진포에도 대선단이 있다
는 것이었다.
  이순신 함대는 숨돌릴 틈도 없었다. 합포에서 선단을 곧바로 적진포로 몰았다. 왜군의 작
은 함대가 있었다.
   쏴라! 모조리 쳐부수어라!
  멀리 동이 트는 이른 새벽에 우리 군사들의 함성이 바다를 덮었다.  싸움은 치열하였다.
총을 쏘고 대포를 터뜨렸으며, 불화살이 오고 갔다.  바다 위는 온통 왜적이 흘린 피로 빨갛
게 물들어 갔다.
  이순신은 순식간에 전선 9척, 소선 2척을 바다에 가라앉혔다.  우리 군사들 중에는 단 두
사람만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이순신이 첫 번째로 바다에 나아가 세 번의 승리를 거둔 이 싸움을 통틀어  옥포 해전 이
라고 부른다.
  이순신은 쉴 줄을 몰랐다.  이제 부하 수병들의 사기도 하늘을 찌를 듯했다.  왜선을 마치
올챙이 떼 몰아잡듯이 잡지 않앗는가.
  모두들 어디 또 왜선이 없나 하고 바다를 살폈다.
  뭍에서 왜군의 깃발만 멀리 흘끗 보여도 도망쳐 버린 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왜선은 그림자도 없었다.
   일단 본영으로 돌아간다.
  이순신 함대는 첫 출전에서 적선 42척을 격침시켰다.  홰군의 배에서 뺏은 물건은 다섯
간짜리 곳간을 채우고도 남았다.  옷, 무기,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산더미 같았다.  쌀
만도 3백 섬이나 되었다.
  여수 본영에 이르자 이순신은 선조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썼다.
  그 때 선조는 평양성에 있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장계가 올라왔다는 보고를 듣자, 선조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모두
얼굴이 흐려졌다.  들어오는 보고마다 왜군이 쳐들어와 어대로 물러났다는 말과 어서 구원
병을 보내 막아 달라는 내용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장계는 승전 소식이었다.
   왜군이 만일 뱃길을 따라 전라도로 침입한다면 이 몸은 목숨을 걸고 바다    에서 싸워
막겠습니다.
   이순신이!  이순신이!
  선조 임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처음 받는 승전 보고였다.  그것도 이쪽 배는 한 척도 파손됨이 없이 적의 군선 42척을
부순 것이다.  더구나 전라 좌수영 관할 지역이 아닌 거제도에서였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대신들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경상 우수영, 경상 좌수영은 어떻
게 되었던가!
  선조는 눈을 비비고 장계를 다시 보았다.  다시 비비고 또 보았다.
   이순신에게 종2품 가선 대부로 벼슬을 내려라.
  선조의 어명이 내려졌다.
  가선 대부란 종2품 참판(차관)과 같은 높은 별슬이고, 한 도의 병마사(육군 사령관)와 같
은 벼슬이었다.
  이순신!
  조정 신하들의 머릿속에는 임진왜란의 첫 승리를 거둔이 이름이 또렷이 들어와 박혔다.









  2.  무서운 장님배

  이순신은 다음 싸움에 대비해서 부서진 배도 고치고, 새로 만들기도 하면서 밤잠을 잊고
바닷가에서 지냈다.  이즈음 거북선은 2척이 완성되어 바다로 나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1척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6월 3일에 합세하여 왜군 선단을 찾아 바다로 나가게 되
어 있었다.
  수군들은 6월 3일의 출전을 위해서 푹 쉬며 병장기 손질을 하고 있었다.   6월 3일까지는
거북선 1척을 더 만들어 3척을 앞세우고 나아가야 한다.
  과연 거북선이 실제 전투에서 얼마만한 힘을 발휘할 것인가.  이순신의 마음에는 한 가닥
불안이 스쳤다.
  5월 27일, 경상 우수사 원균의 사자가 달려왔다.
   왜군 전함 10여 척이 사천, 곤양 바닷가로 쳐들어와 배를 기슭에 대고 마    을을 불사
르고, 노략질하며 우리 백성을 죽이고 있소.
   아니 왜놈들이 벌써 사천만까지 왔단 말인가?
  이순신은 좀 놀랐다.  왜군들이 이미 거제도를 뚫고 사천만까지 왔다면, 이순신 장군이 맡
고 있는 바다에까지 쳐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천만에서 남해의 수로만 지나면 전라도였다.  왜군을 막는 수군이 없었으니 거침없이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사태가 급하니 나는 먼저 곤양만으로 떠나오.  곧 뒤따라와서 도와 주기    바라오.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에게 파발을 보냈다.
  이순신은 새삼 전투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장군부터 병졸까지 완전한 싸움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사공 군관이 좌수영 수비를 맡으라.
  이순신의 명령에 부장들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군대의 상식으로 대장이 출전할
때는 바로 밑 부장수가 진을 맡게 마련이고, 부장수를 내보낼 때는 대장이 진을 지키게 마
련이다.  그런데 군관에게 수비를 맡기면 이언량 부장수는 어찌 되는 것인가.
  이내 그 의문은 풀렸다.
  곧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이번에는 거북선 2척이 참전하게 되었다.
   모든 위치는 옥포 출전 때와 같다.  다른 것은 돌격장이 있을 뿐이다.
  돌격장!  그제서야 모든 것을 알았다.  돌격장이 곧 임명되었다.
   제 1 거북선 돌격장은 이언량, 제 2 거북선 돌격장은 이기남을 임명한다.
  부장수 이언량에게 거북선 지휘를 맡겨 적진 속에서 힘껏 싸우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순신 함대는 옥포 출전 때처럼 조용히 바다 저 멀리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함대의 선봉에 서서 파도를 가르는 거대한 2척의 거북선, 그 뒤를 당당하게 따르는 선단!
바닷가에 몰려든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 만세를 불렀다.
  거북선 2척, 판옥선 23척이 사천만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깁니다.
  옆에 서 있는 부장이 가리킨 곳을 보니.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 옆 선창에 왜선들이 즐비
하게 떠 있었다.
  산 위에 진을 친 왜군 진영에 무수한 깃발이 펄럭였다.  그 때의 왜군 숫자는 약 400여
명이었지만 한 1000명은 왜 보였다.
  장군막 같은 장막이 보였는데, 그 둘레에는 칼을 빼든 왜병들이 득실거렸다.  모두 살기
등등했다.  세어 보니 왜군의 배는 큰 누각선 13척이었다.
  배에는 왜군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썰물 때로구나.  어귀로 나가자.
   아니, 장군.  그럼 물러난단 말입니까?
   가벼이 굴지 말라.  이 모두가 전술이다.
  우리 수군이 배를 버리고 뭍까지 가서 싸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적군이 뭍에서 온갖 몹
쓸 짓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그 때 왜군 진지와 왜선에서는 여기저기 웅성거림이 일었다.
   앗!  저것이 뭐야?
   아니, 저 괴물은?
   꼭 거북 같네!  저런 배도 뜰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함대 앞장을 선 용머리에 거북 모양의 큰 배를 보았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구나.
  바닷가에 있던 왜병들은 잠깐 잃었던 정신을 되찾아, 산마루 자기네 진지 쪽으로 달려 올
라갔다.
  이순신 함대는 놀라는 적병을 본체만체 대호 한 방 쏘지 않고 물러났다.
  거대한 거북선이 선대를 이끌고 천천히 사천만 바깥쪽으로 움직여 가자, 갑자기 산에 있
던 왜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려와 기슭에 한 줄로 진을 쳤다.
   뱃머리를 돌려라.
   전속력으로 몰아라.
  이순신 함대는 번개같이 다시 뱃머리를 돌려 뭍 쪽으로 달렸다.
  왜병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바닷가에 엎드린 채, 총알 소나기를 퍼부어 댔다.  그 속을
이순신 함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다가갔다.
  거북선은 용머리에서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를 토해냈다.  다른 함대에서도 포성이 터
졌다.
  조총탄 소리, 포성 소리, 거북선이 토해 낸 시꺼먼 연기, 유황 냄새…….
  거북선은 그야말로 바다의 불사신이었다.  화살이고 총알이고 거북의 몸통 속에 들어 있
는 우리 군사를 맞힐 수는 없었다.
  거북선을 왜군 전선 옆에 바싹대자 왜군 몇몇이 거북선 등으로 뛰어올랐다.  탄환으로도
화살로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뛰어오른 왜군마다 모두 이리저리 뒹굴며 비명을 지르다가는 그대로 바다로 떨어
졌다.  거북선은 철판으로 감싼 그 위에 쇠못을 박아 두었기 때문에 탄환도 화살도 박히지
않았고, 또 뛰어오를 수도 달라붙을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불화살이나 다른 무엇으로 불을 지르려해도 헛일이었다.  두텁고 웅장한 거
북선 앞에 왜군 전선들은 종잇장처럼 맥을 못 추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튼튼한 성.  거북선은 왜선을 닥치는 대로 들이받았다.  거북선 2척이
이리저리 들이받으며 바다 위를 휘젓자, 13척의 왜군선은 나뭇잎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다가 훌렁훌렁 뒤집히고 말았다.
  거북선의 옆구리의 포에서는 포탄이 튀어 나와 뭍의 산마루 진지로 떨어졌다.  현자포, 지
자포의 포탄이 떨어진 적의 진지는 수라장이 되었고, 도망가는 왜군들로 갈팡질팡하였다.
   저놈의 장님배!
  왜장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렇게 외쳤다.
  왼쪽, 오른쪽 앞 뒤 없이 들이받으며 바다 위를 휘젓고 다니는 거북선의 모양이 꼭 겁없
이 휘두르는 장님 매질과 같았다.
   정말 장님배입니다!  조선에 저런 괴물이 있었다니, 정말 기가 막힐 일입    니다.
  불기둥과 연기 속을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거북선을 보며 왜군들은 땅을 쳤다.
  싸움은 끝났다.
  이순신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순신이 탄 배는 함대의 한복판에서 전라 좌수영 깃발을 자랑스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이번 싸움에 나타난 거북선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순신이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환도를 가져오너라.
  명령을 받은 군관이 이상해서 살펴보니 이순신의 어깨가 벌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사또!
  이순신은 낯빛 하나 달라지지 않고 말했다.
   떠들지 마라.  대단치 않다.  칼끝으로 총알을 도려 내다오.
   언제 부상을?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입은 부상을 적이 전멸할 때까지 감추고 싸움을 지휘한 것이
었다.
   거북선이 쓸 만해!
  칼끝이 살을 파고들 때 이순신은 이렇게 말하며 잠깐 어금니를 악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날 밤, 함대는 사천 모지랑게에서 밤을 밝혔다.
  6월 1일 한낮, 함대는 천천히 움직여 거제도 쪽으로 향했다.
  1일 밤을 사량도 (통영시 원량면)에서 보내고, 2일에는 당포(통영시 산양면)로 함대의 머
리를 돌렸다.
  왜적들이 당포에 모여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뭍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바다에서만은 왜적들을 이 잡듯이 찾    아다니면서
잡으리라.
  이순신의 결심은 굳었다.
  함대는 당포에 이르렀다.
   정보가 틀림없습니다.  보십시오.
  당포 바다에 왜선이 떠 있었다.  큰 전선이 9척, 중간 배와 작은 배가 12척이었다.
  왜군들은 이미 뭍에 올라, 당포의 진지를 빼앗고 닥치는 대로 우리 민가에서 약탈하고 있
었다.
  전선 9척 가운데 유난히 큰 누각을 가진 배가 있었다.  누각 높이는 서른 자쯤 되어 보였
다.
   저것이 대장선임에 틀림없다.  저것을 부숴라.
  이순신의 명령이 거북선 돌격대장에게 떨어졌다.
  산 위의 왜군들은 당당하게 당포만으로 들어오는 우리 함대를 보았다.
   저것이 장님배로구나.
   저건 괴물 아냐?
  처음에 그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맞아 싸울 준비를 하지못했다.
  사천의 패잔병이 당포에 이르러 장님배의 무서운 능력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조금은 알고 있었으나, 눈으로 직접 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의 괴물이요, 당당한 바다의
성곽이었다.
   정신 차렷!
   쏴라!  쏴!
  지휘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비로소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총알이 이순신의 함대를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웬만한 함대면 주춤했으리라.
  그러나 이순신 함대는 대형 하나 흩어짐 없이 당당하게 대장선을 둘러싸고 있는 왜선단으
로 다가갔다.
  배에서도 조총탄이 쏟아져 왔다.  화살도 날아왔다.
  누각선은 적장이 탄 배임이 틀림없었다.  거리가 좁혀졌을 때 보니, 누각 위 붉은 휘장 안
에 일산을 받쳐 쓴 찬란한 옷차림의 무장이 있었다.
  거북선을 보고서도 그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손에 든 지휘채로 침착하게 명령
을 내렸다.  꽤 지위가 높은 자임에 틀림없었다.
  거북선은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곧바로 적장선의 뱃전으로 달려들었다.  거북선 뒤
를 순천 부사 권준의 배가 따랐다.
  그 곁을 사도 첨사 김완의 배가 뒤떨어질세라 속력을 내고 있었다.  마침내 거북선이 왜
군 대장선을 들이받았다.
  크게 흔들리는 적장의 배에 표범처럼 날쌔게 권준이 뛰어오른 순간, 벌써 그의 손을 떠난
화살이 적장의 몸에 박혀 적장은 누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몸집이 권준 앞에 쿵 소리를 내자마자 그 옆에 있던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의
칼이 적장에게로 번쩍 날았다.
  왜장이 누각에서 떨어지자 왜선들은 산 위에 있는 자기 편 군사들을 버려 둔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북선은 왜선 뒤를 따르며 현자포, 지자포를 쏘아 불기둥을 오르게 했고, 판옥선은 앞길
을 막으며 저 유명한  당파  전술을 썼다.
  당파 전술이란 배로 배를 들이받는, 이순신이 목숨을 걸고 행한 대담 무쌍한 전술로 선체
가 가벼운 왜선에겐 안성맞춤의 전술이었다.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마다 거의  당파로써 라는 글이 나온다.  아무리 우리 배가 왜
선보다 단단하고 두텁다고 하더라도 깨질 수도 있다.  우리 수군이 바다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순신이 얼마나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을 섬멸하려 했는지 그 결의의 정도를 잘 알 수 있
다.
  판옥선이 왜선을 몇 번 들이받으면 왜선은 뒤집혀졌다.  우리 판옥선에 부딪쳐 침몰할 듯
이 기우뚱하는 왜선, 왜군이 참패하는 꼴은 정말 속이 후련했다.  적선 21척은 단 1척도 도
망치지 못했다.
  이순신 함대는 아직도 연기와 불길이 솟아오르는 바다를 뒤에 두고 천천히 당포를 떠났
다.
  그 때, 왜 수군의 제 2부대인 함대 20척이 부산포쪽에서 당포로 들어오고 있었다.
  바다를 마음대로 휩쓸며 뭍에 올라 노략질한 물건을 배에 싣고는 다음 마을을 찾아 다니
는 왜적 떼 같은 20척의 왜군 선단은 당포에서 나오는 이순신의 함대를 보고 자기 편 배인
줄 알았다.
  첫눈에 보아도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함대였다.  그들은 조선에 그런 수군 함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함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왜선마다 외마디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게 뭐얏!
  함대 앞에서 바닷물을 가르고 있는 괴물 두 마리!  전선보다 두세 배는 더 커 보이는 용
머리를 한 거대한 거북!
  눈을 부릅뜨고 딱 벌린 입에서는 불길과 연기를 내붐고 있지 않는가?
   벌써 명나라 수군이 구원을 왔는가?  명나라에 저런 배가 있었던가?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의 놀란 눈은 얼어붙고 말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쓰인, 살
아 꿈틀대는 듯한 힘찬 글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전라 좌수영의 깃발!
   조선 배인가!
  20척의 왜의 수군장은 여우에 홀린 듯이 바다의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직도 바다
를 이리저리 휘젓는 장님배에 대해서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배이든 명나라 배이든 그 괴물을 당해 내기 힘들 거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
렸다.
   뱃머리를 돌려라!
  왜군 함대는 있는 속력을 다 내어 부산포 쪽으로 서둘러 도망쳤다.
  뭍에서는 왜군 깃발만 보고도, 말발굽 소리만 듣고도 도망치던 우리 군사들이었는데 지금
은 그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함대는 창선도에서 6월 2일 밤을 새웠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이순신은 추도에 적선이 있나 없나 샅샅이 뒤졌다.  적선이 없음을 알
자 6월 4일 당포로 함대를 몰았다.
  당포 바다는 다시 옛날처럼 푸르고 잔잔했다.  이순신의 함대가 당포 포구에 다가가자 갑
자기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포구며 바닷가에 하얗게 몰려선 우리 백성들이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
고 있었던 것이다.
  피난을 떠났다가 쑥밭처럼 된 마을로 되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이순신이 뭍에 오르자 백
성들은 그의 발아래 꿇어 엎드리기도 하고 그의 손을 잡기도 했다.
  강탁이라는 사람이 장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또, 초이튿날 싸움이 끝난 뒤 왜적들이 죽은 녀석들의 머리를 모두 베어 무더기로 쌓
아 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배가 모두 가라앉자  그들은 육지로 달아났는데, 그저 울
면서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당포를 벗어난 곳에 있던 자기네 배에 올라 거제도 쪽
으로 갔습니다.
   거제도로?
  쉴 틈이 없었다.  왜적을 남해 바다에 얼씬도 못하게 하겠다는 결의는 이순신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가슴 속에도 깊이 스며 있었다.
  뭍에서 하룻밤 편히 쉬지도 못하고 서둘러 출전 준비를 했다.  부서진 배를 고치고 물과
식량을 싣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함대가 옵니다.
  파수병의 전갈이 날아왔다.  왜군인가?  모두 긴장했다.
  바다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검은 점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왔다.
  누가 보아도 터져 오를 듯한 기세가 숨어 있는 함대임을 곧 알 수 있었다.
   승선 명령을!  어서 승선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언량이 재촉했다.
   아니다.  기다려라.
  이순신의 판단은 옳았다.  가까이 다가온 배 위에 펄럭이는 깃발은 전라 우수영의 것었다.
   왜놈들의 깃발과 그 세운 모양이 다르지 않았느냐?
  이순신은 이언량 돌격장에게 설명했다.
  만세 소리가 터졌다.  전라 좌수영 군사들은 바닷가에 서서 두 손을 흔들며 우수영의 배
를 환영했다.
  이억기 수사가 거느리고 온 전선은 25척이었다.
   준비가 늦어 이리 늦게 도착했소.  미안하고.  그 동안 외로이 싸우느라고    정말 수고
가 많았소.
  드디어 우리 아군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 우수사 원균이 합세하여 처음으로 세 수
영의 연합 함대가 이루어졌다.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거북선 2척, 전선 23척.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전선 25척.
  원균의 경상 우수영 전선 3척.
  그 때, 왜의 대군이 고성 당항포(고성군 마암면)에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겁을 먹었을 때는 몇 명 안 되는 적군도 대군처럼 보이는 법이다.  왜선이 새까맣게 어귀
에 들어와 모두 뭍에 올라가 당항포를 피바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항포로!
  연합 함대는 고성 반포 앞바다를 누비며 당항포에 이르렀다.
   저게 뭡니까?
  부장 하나가 진해 쪽의 산을 가리켰다.
  군사 1000여 명쯤 되어 보이는 부대가 숲처럼 깃발을 세우고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
다.  곧 척후선이 손살같이 달려갔다가 돌아왔다.
   우리 군사입니다.
  척후장은 감격으로 목이 메어 보고를 했다.
   함안 군수 유종안이 적군을 무지르고 이 곳가지 뒤쫓아와 진을 쳤다고 합니다.
   뭍에서도 바닷가까지 적군을 몰아 낸 장수가 있구나.
  이순신은 자신도 모르게 감격의 말을 입밖에 냈다.
   함대를 유 군수의 진으로!
  이순신은 명령을 내렸다.
  사실 원균이 선임자인 만큼 연합 함대의 총지휘관은 당연히 원균이어야 했으나, 실질적
사령관은 이순신이었다.  이억기도 원균도 그의 명령에 따랐다.
  이순신의 명령에 연합 함대는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
  이순신은 함안 군수를 만났다.
   적선이 당항포에 있다고 하는데, 당항포는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깊숙한 만이라 걱정되는
바가 있소.  능히 배로 싸울 만하오?
   만의 길이가 10여 리쯤 됩니다.  그러나 함대가 들어갈 수는 있는 넓이입니다.
  이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대가 들어갈 수 있다면 쳐들어가서 싸우는 것이 좋다고 판
단하고 출격 명령을 내렸다.
  원균도 이억기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순신의 전술에는 아직 실패가 없었기 때문이다.
  10여 리쯤 들어간 만의 어귀를 메워 버리면 왜선단은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이순신은
먼저 2척의 전선을 들여보냈다.
  왜군들이 뭍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당항포 어귀로 끌어내어 모두 격침시키려는 작전이었
다.
   적과 싸우다 못 이기는 척하고 도망쳐 나오라.
  이순신은 미끼 배를 보내 놓고, 또 전선 4척을 따로 떼어 놓았다.
   뒤에서 왜군 함대가 나타날지 모른다.  당항포만 어귀의 궁도, 양도 두 섬    에 두 척씩
숨어 있가가 적선이 오면 막으라.
  싸울 태세가 갖추어졌다.  얼마 있으려니 척후선에서 신호 화살이 올랐다.
  본함대는 만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져서 기슭을 따라 나아갔다.
  이순신 함대가 소수강에 이르자 왜군의 배가 보였다.  왜선은 큰 배가 9척, 중간 배가 4
척, 작은 배가 13척으로 모두 26척이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큰 전선 1척이 있었다.
   대장선이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높은 누각이 있는데, 울긋불긋하게 칠한 것이 마치 절간 같았
다.  배 둘레는 흰 꽃무늬의 검은 비단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 휘장 안에 적군이 셀 수 없
을 만큼 많았다.
  얼마 후, 어디선가 왜선 4척의 배가 더 합세를 하였다.  모두 검은 깃발을 세우고 있었다.
   장님배다!
   저것이 바다의 괴물이로구나!
  이미 말을 들어 알고 있는 왜군들은 단 2척의 괴상한 배에 놀라 탄환을 퍼부어댔다.
  불소나기 속을 거북선은 쏜살같이 달려가 천자포, 지자포, 현자포가 불을 뿜었다.  거북선
에서 쏜 포탄이 대장선에 맞아 대장선이 흔들리자 왜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미 적 함대로 다가간 거북선은 왼편 배를 들이받고 오른편 배를 들이받으며 닥치는 대
로  당파  전술을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바다는 아우성 소리외 피비린내와 불길과 연기로 뒤범벅이 되었다.  견디다 못
한 왜군들은 반쯤 부서진 배를 기슭으로 몰고 가 산으로 도망쳤다.
  거북선은 용처럼 몸부림치며 왜선을 닥치는 대로 바다에 가라앉혔다.
  한편, 우리 전선들은 뭍으로 도망치는 적을 무찌르기위해 기슭에 바싹 다가가 붙었다.  배
에서 달아나던 왜군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군사의 창칼에 찔리고 화살에 맞았다.
  적선 30여 척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1척만 남겨 두어라.
  이순신의 명령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부장들은 까닭을 묻지 않았다.
   뱃머리를 돌려라.
  함대는 천천히 바다 쪽으로 빠져 나갔다.
  그러자 얼마 뒤 왜선 1척, 바로 남겨 두었던 그 배가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려 나왔다.
   으음, 살아남은 왜병들이 뭍으로 도망치지 않고 저 배를 타고 나오게 해    서 전멸시킬
생각이셨구나!
  그제서야 모두 이순신의 작전을 깨달았다.
  배 1척을 상대하기엔 거북선 1척이면 넉넉했다.  패잔병을 싣고 도망나오던 왜선은 조총
한 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다음 날, 왜선 7척이 율포에서 가덕도로 도망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순신 함대는 곧
장 가덕도로 향했다.  왜선7척을 거북선 2척으로 손쉽게 해치웠다.
  당포 해전은 이 율포의 싸움으로 끝이 났다.
  우리 함대가 거둔 전과는 격침 61척.
  그러나 당포 해전에서는 우리 쪽도 희생자가 있었다.
  전사자 10명, 부상자 34명이었다.
  적군 137명을 사살하거나 물에 빠져 죽게 한 데 견주어 보면 별 것 아니지만, 옥포 싸움
때보다는 희생이 컸다.
  산에 숨었던 피난민들이 바닷가로 나와 외쳐대는 만세 소리에 가덕도가 들먹이는 것 같았
다.
  모든 것을 왜군에게 빼앗긴 우리 백성들에게 이순신장군은 쌀과 옷감을 골고루 나누어 주
었다.
   여수 이웃의 장생포로 가시오.  그 곳에서 살 수 있도록 돌봐 줄 것이오.
  이순신은 적을 무찌르는 일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구제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6월 10일, 이순신은 연합 함대를 해체했다.
  전라 좌수영의 전선단만 이끌고 여수 좌수영으로 개선했다.
  이 때, 뭍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평양성 문턱까지 진격해 있었다.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포 대승전!
  선조가 장계를 받은 것은 의주에서였다.
   전라 좌수만이 이기는구나!  이순신만이 이기는구나!
  선조는 계속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에게 정2품 자헌 대부를 내리리라.
  정2품은 판서(장관)와 같은 품계였다.  그리고 한 도의 군사령관인 병마 절도사보다도 한
계급 높았다.
  그러나 이순신에게는 정2품의 벼슬보다는 화살 한 대가 더 중요했다.
  이순신은 다음 싸움에 대비해서 여전히 밤잠을 잊었다.
  한편, 왜군의 작전 계획대로 한다면, 그들의 대함대와 막대한 군량미를 평양 옆 남포 바닷
가에 이르도록 되어있었다.
  뭍으로 그 많은 군량미를 실어 나르려면 많은 산과 강이 있어서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날
짜도 많이 결렸다.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나타나는 우리 나라 의병이나 패전병에게 공격당
할 수도 있었다.  몇몇 결사대만 있으면 군량미를 실은 수레에 불을 붙이기는 쉬운 일이었
다.
  그래서 구키 요시타카, 도토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왜군 선단의 수군장이 거느
린 수백 척의 배가 보급품을 싣고 평안도 바닷가로 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왜군의 수백 척의 수군 선단은 남해와 황해를 지나 평안도에 이르기는커녕 남해조
차도 지날 수 없었다.  부산포 앞바다를 떠나면 이순신의 선단에 의해 곧 철벽처럼 앞이 막
히는것이었다.
  그래서 왜군들은 보급품 부족으로 큰 고생을 겪었다.  이것이 모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크나큰 공이었다.



  3.  한산도 대첩

  육지에서 우리 나라 깊숙이까지 쳐들어온 왜군은, 바다에서 이순신에게 번번이 지자 크게
당황했다.  우리 나라를 거쳐 중국 대륙까지 정복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왜적의 수군은 거의 전멸 상태가 되어, 병력과 물자보급이 끊어진 것은 고사하고, 자기들
이 일본으로 도망갈 길도 막히고 말았다.
  이 때,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수십 명의 조선 사람을 매수하여, 의주에 이르
기까지 각처에 염탐꾼을 늘어놓아 밤낮으로 정보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 안에 가
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평안도 각 읍의 사정을 빠르게 알고 있었다.
  의주까지 밀고 올라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같았다.  하지만 이 작전을 개시하려면 두
가지 위험을 생각하지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명나라의 원군이 벌 떼처럼 몰려들 것이 걱정이었다.
  둘째는 자기네 수군이 실어올 군량미가 조선 남해를 거쳐 서해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걱정거리였다.
  이것은 조선 수군 이순신 때문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짜증을 내며 술상을 차려 놓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수군은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모두 허수아비 같은 녀석들만 모였단 말이냐! 와
키자카 야스하루는 뭘 하고 있지!
  그는 두렵고 외로웠다.
  평양성까지는 거침없이 쳐들어갔으나, 마치 무인도에 홀로 덩그렇게 떨어져 있는 듯한 느
낌이었다.
   일본 수군 10여 만 명이 지금 서해로 올라오고 있소.  그들이 이 곳까지    이르면 대왕
께서는 이제 어디로 도망치시려오?
  얼마 전에 이런 오만하기 짝이 없는 편지까지 선조에게 보낸 일이 있는 그였다.  모든 작
전은 그렇게 짜여져 있었고, 또 서해 뱃길쯤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대함대가 쉽게 뚫으리
라 생각하고 이렇게 큰소리쳤던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던 소식이 늦어지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들을 들볶았다.
   수송 선단이 왜 안 오느냐! 왜 못오느냐 말이다!
   거제도를 제대로 지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장님배 때문에…….
   그놈의 장님배!  몇 척 안 된다면서 수백 척의 선단으로도 못 부순단 말이냐?  무적의
우리 수군이!
   우리 배는 장님배가 나타났다 하면 뱃머리를 돌려 도망치는 모양입니다. 부딪쳐 싸워 봐
야 당해 낼 수 없다고 합니다.
   이순신!  이순신이 그 배를 지휘한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용병술도 귀신 같다고 합니다.
   적의 배 겨우 이삼십 척에 우리 배 수백 척이 패하다니, 원!
  고니시 유키나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순신이라는 자가 우리 배 몇 척을 부수었지만 그것은 작은 함대였다. 와키자카의 본함
대에게야 고양이 앞의 쥐 꼴이지 별수 있겠느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와키자카 함대는 그 때 어디에 있었는가?  평양에서 의주 사이의 겨우 한 뼘만한
땅을 칠 구원 군사와 식량, 병기를 싣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유난히 짜증을 내던 그 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견내량 어귀로 들어
가고 있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순신 장군의 장님배 소문을 듣고 겁이 나서 20척, 30척의 척후 함
대를 내보냈으나, 그 함대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서해 뱃길을 뚫을 테다.  비록 이순신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또 그가 장님배인가 거북
선인가를 몇 척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우리를 당하랴!
  이렇게 생각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견내량 포구에 들어가 서해 북쪽 평양 앞바다로 올라
갈 준비를 했다.
   적선들이 10척, 20척씩 선단을 짜서 바다 위를 빙빙 돌고 있다고 합니다.
  왜군의 행동을 살피던 군사들이 보고를 가지고 전라 좌수영으로 달려왔다.
  그 적선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척후선들이었다.
  이순신은 곧장 전라 우수영 이억기에게로 파발꾼을 보냈다.
  우수사 이억기는 당장 함대를 이끌고 여수 어귀로 들어왔다.  경상 우수사 원균도 몇 척
안 되는 함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전선 56척의 연합 함대는 여수를 떠났다.
  당포에 이르러 그 곳에서 밤을 새웠다.
   당포에 사는 김천손이란 머슴이 여쭐 일이 있다면서 찾아왔습니다.
  부장의 보고를 받고 세 장군은 그 머슴을 만났다.  그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큰 것, 작은 것 합쳐서 70척이 넘는 왜놈 배가 견내량에 머물고 있습니다.
  70척! 이순신으로서는 처음 맞서는 큰 합대였다.  그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수군 왜장
가운데서도 가장 세력이 있는 장수였으므로 그 본대에 70척은 많은 것도 아니었다.
  7월 8일, 드디어 56척의 연합 함대는 70여 척이나 되는 적의 함대와 싸우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순신의 명령이 내려졌다.
   이번 왜병은 우리 연합 수군을 부수려는 목표로 뛰어난 군사들을 보냈을    것이다.  이
번 싸움에 지면 우리 나라는 마지막이다.  나라가 망하느냐, 살아남느냐는 이번 싸움에 달려
있다.  공을 서로 탐내지 말라.  가벼이 굴지 말라.  산처럼 조용하고 무겁게 하되, 적군을
한 녀석이라도 더 베어라. 너희의 싸움은 내가 다 보고 있다.
  연합 함대는 견내량을 향해 바닷물을 가르며 달렸다.견내량 어귀에서 보니 적선은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3척, 모두 73척이 머물고 있었다.
  왜군 함대 사령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호랑이 장수로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그 밑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나운 이리 같은 장군들이 수두룩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척후선을 보내 이순신 함대의 움직임을 살피도록 했다.  그는 이순
신과 거북선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그까짓 조선 수군쯤이야 범 앞의 하룻강아지 꼴이지.  내가 앞장 서서 뱃길을 트겠소.
대문 밖도 못 나서서 앞이 막히곤 하는데, 그것도 뚫지 못하다니 말이 되오?  그대들은 바
다 경치나 구경하면서 뒤따라오시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같은 수군 장수인 구키 요시타카, 가토 야스오 등에게 큰소리를 쳤
다.
   장군, 너무 얕보지 마시오.  장님배가 바다의 용처럼 날뛰어 당해 낼 길이  없다고 합니
다.
  두 장군은 조심시켰지만 그는 여전히 큰소리를 쳤다.
   글쎄, 조선 배의 뱃조각이 바다에 둥둥 뜨는 것을 구경이나 하면서 따라 오라니까요.
  그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순신을 얕본 것은 아니었다.  빈틈없는 싸움의 태세를 갖
추도록 지휘하면서 견내량에 머문 것도 우리 수군을 얕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견내량 앞바다에 이른 이순신은 모든 전선에게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니 이 수사!  왜 멈추시오.  그냥 쳐들어갑시다.  적의 콧대부터 꺾어야 하지 않소.
  원균은 성급하게 다그쳤다.
   사또, 견내량은 바닷목이 아주 좁습니다.  함부로 쳐들어갔다간 우리의 큰 배끼리 서로
부딪칠지도 모릅니다.  또, 후미진 곳마다 적선이 숨어 있을    수도 있고, 불리해지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가 우리 백성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한산도 넓은 바다로 끌어내서 쳐야
합니다.
   이 수사의 말이 옳습니다.
  이억기도 원균도 이순신의 예리한 판단력에 감탄했다.
  이순신은 먼저 미끼 배 몇 척을 들여보냈다.  싸움을 걸어 한참 싸우다가 도망치는 듯이
보여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미끼 배들은 꽤 거리를 두고 현자포, 지자포 등을 쏘아대고 불화살을 날렸다.  이내 요란
한 조총 소리가 맞서 날아왔다.
  그 총 소리에 못 당하겠다는 듯이 미끼 배들이 도망치니 왜선들이 쏜살같이 뒤를 쫓았다.
  견내량 바깥 바다로 나와서야 왜군들은 우리 함대를 보았다.  모두 56척이었다.
   이까짓 함대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피가 끓었다.  숫적으로 앞서 있어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바싹 다가와 조총을 쏘아댔다.  그 때, 요란한 대포 소리 한 방이 바다를 울렸다.
  신호였다.  우리 전선들은 한꺼번에 불화살과 대포를 쏘아대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있는
함대로 몰려들었다.
   별 것 아니다.  조선 수군은 까마귀 떼에 지나지 않는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목이 쉬어라 호령하며 바다 위의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
내 그의 입에선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  저게 뭔가!  으음!
  자세히 보니 학익진이었다.
   과연 이순신 이로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감탄하는 사이에 한 줄로 쭉 뻗었던 이순신 연합 함대 전선들은 왜
군 함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거북선이 천천히 왜군 함대로 다가갔다.
   거북선부터 쳐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총알의 소나기 속에서도 거북선은 겁먹을 줄을 몰랐다.
  총알이 날아오든 화살이 날아오든 왜선단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장님배가 무섭다더니 과연!
   저건 정말 당해 낼 길 없는 배로구나!
  총알도 불화살도 먹혀들지 않자,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소문으로만 듣던 장님배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비로소 알고 겁을 먹기 시작했다.
  용머리의 입에서 불길과 연기가 뿜어 나오기 시작하자 더욱 무시무시하게보였다.
  왜군들이 겁을 먹자 왜선단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쿵!
  거북선이 첫 번째 왜선을 들이받자, 기우뚱 하고 크게 기울었다.  다시 들이받자 왜선 뱃
전에 와지끈 금이 가며 옆으로 쓰러진 채 물 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미 말을 들어 알고 있는지라 왜병들은 거북선 등에 뛰어오르지도 못했다.
  왜선을 에워싼 우리 전선의 현자포, 지자포, 천자포에서 포탄이 날아가 적의 배에 구멍을
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소리치는 왜병들의 비명이 대포 소리만큼이나 요란했다.
  이 틈을 타서 우리 전선들이 왜선으로 다가갔다.  왜선의 뱃머리를 길이가 열 자나 되는
갈고리로 걸어 잡아당겨서 우리 배에 붙이고는 하나둘 왜선으로 뛰어올라 이윽고 치열한 싸
움이 벌어졌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옥포 해전과 당포 해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했던 말이 결코 엄살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다.
   전술에서 불리할 때에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도 있다.  우선 피하자.  뱃머리를 돌
려라!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치욕적인 후퇴 명령을 내렸다.  반쯤 가라앉아 가는 배들, 또 바닷속
에서 비명을 질러대며 허우적거리는 왜병들을 버린 채 대장선은 쏜살같이 도망길을 찾았다.
  한산도 앞바다의 싸움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연합 함대의 승리로 끝났다.  왜 수군의
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기의 목숨만 겨우 건져서 도망쳤다.
  우리 함대가 부숴 버린 왜선은 59척, 도망친 것은 겨우 14척뿐이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내리라.
  모든 왜장들과 왜병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도 이순신 함대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번 싸움에서 이순신은 56척이란 적은 전선으로 적선 73척을 무찌른 것이다.
  그 날,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왜병을 쫓아낸 견내량에서 쉬었다.
  이런 큰 싸움이 있었던 것을 미처 알지 못한 평양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수송 선단이 안
온다고 화만 내고 있었던 것이다.
  김해 쪽으로 달아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안전한 곳에 이르자 그제서야 비로소 치를 떨
었다.
   장님배!  이순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소리만 자꾸 되풀이했다.  자기의 오른팔과 다
름없는 맹장 와키자카 자에모도도 바닷귀신이 되어 버렸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겨
우 뭍으로 기어오른 한 왜장은 스스로 배를 갈라 목숨을 끊고 말았다.
  참으로 통쾌한 승리였다.
  7월 10일, 견내량을 떠난 연합 함대는 또다시 안골포로 뱃머리를 잡았다.
  그 늠름한 함대는 바닷가 어부들의 만세 소리를 뒤로하고 안골포 어귀에 이르렀다.  안골
포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뒤를 따르는 수군 함대가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출동한
것이었다.  정보는 옳았다.
  큰 배 21척, 중간 배 15척, 작은 배 6척, 모두 42척이 머물러 있었다.
  이 함대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주력 함대가 몰살당하다시피 되자 겁이 나서 안골포로 들
어가 숨소리를 죽이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안골포에 있는 왜장은 배 3척을 어귀 밖으로 내보내 이순신 함대를 망보게 했다.
  안골포는 견내량처럼 바닷목이 좁은데다가 바닷물마저 얕아서 해전을 벌이기 어려운 곳이
었다.
   견내량처럼 미끼 배를 보내 끌어내야겠소.
  그러나 안골포에 있는 왜군은 속지 않았다.
   와키자카 장군께서 저 꾀에 넘어가 큰 화를 당했다.
  왜장은 이렇게 말하고 절대로 이순신의 배를 뒤따르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음, 그러면 다른 전술을 써야겠소.  우리 함대는 재빨리 들어가 치고 재빨리 물러나고,
또다시 재빨리 들어가 치고 또 물러나는 것이오.  그러면 적은 꼼짝 못할것이오.
  원균도 이억기도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명령을 내렸다.  우리 함대는 최대한 속력을 내어 안골포로 밀고 들어갔다.
  적을 유인하려 했으나 적들이 속지 않자, 과감히 돌격을 한 것이다.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길 없이 어귀를 꽉 메우고 들어오는 함대!  그 앞에서 불길과 연기
를 뿜으며 달려오는 거북선, 바다의 용과 같은 괴물!
  왜병들은 정신 없이 총을 쏘아댔다.
  우리 함대에서도 포탄이 날고 불화살이 날았다.  이미 왜군 함대에 바싹 다가붙은 거북선
은 왼쪽 오른쪽으로 적선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번 적선들을 휘저어 검은 연기를 뿌려 놓고는 썰물 빠지듯이 싹 물러나왔다.
왜군들이 한숨 돌릴 때, 대기하고 있던 다른 함대가 쏜살같이 쳐들어가 포탄과 불화살의 소
나기를 퍼부어댔다.
  몇 번 우리 함대가 들락날락하는 동안 왜군의 배는 한 척도 바다에 남아있지 못했다.  몇
명 살아남은 왜군들은 뭍으로 올라 도망쳤다.
  안골포의 가토 수군도 완전 섬멸당한 것이었다.
  일본을 다스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처음에 이순신이라는 전라 좌수사 때문에 패전
했다는 보고를 받자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조선에도 쓸 만한 장수가 있군.  바다에는 말이야.
  그러나 장님배라는 괴물배가 이순신 함대에 갑자기 끼여들어 일본 배를 가라앉히며, 총알
도 불화살도 통하지 않고 달라붙을 수도 없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순신 함대를 만나면 싸우지 말고 피하라.
  결국 이런 명령밖에는 내릴 수 없었다.
  그러던 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서는 첫째가는 수군 장수라고 생각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마저 전멸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뭍으로 평양까지의 머나먼 길을 우리 나라의 의병들과 살아남은 군사들의 유격전 때문에
그 많은 식량들을 나를 수가 없었다.  바닷길은 이순신이라는 수군 사령관 때문에 막혀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삼도 연합 수군은 이번 안골포와 한산도 앞바다 싸움에서 왜선 100여
척을 무찌르고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산도 대첩 이다.
  이러한 해전의 놀라운 전략은 세계 해전 사상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참으로 만고에 빛날 큰 전과를 올린 이순신은 7월 13일, 한산도에서 일단 삼도 연합 함대
를 해체하고 여수 본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월 15일, 선조 임금께 한산도에서의 큰 승리를 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7월 하순경, 의주에 있던 임금의 행재소에서 한산 대첩의 승리를 보고 받은 선조는 뛸 듯
이 기뻐하였다.
   과연 훌륭하도다!  이순신에게는 정헌 대부(정2품 벼슬)를, 이억기와 원균에게는 가선 대
부의 벼슬을 내리겠노라.
  이순신은 다시금 무기를 손질하고 군량미를 모으며 배를 만드는 등 모든 준비를 빈틈없이
해 나갔다.
  이리하여 한산도 대첩 이후, 채 한 달도 안 되는 동안에 50여 척이나 되는 배를 새로 만
들고, 그밖에 화약과 무기를 충분히 마련해 놓았다.
  물론, 이러한 일이 이순신 혼자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뜨거운 열성과 뛰
어난 인품에 감화된 많은 사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배를 만드는 데 있어서 진심으로 성의를
다해 협력해 준 녹도 만호 정운을 불러 그 공을 높이 칭찬해 주고, 모든 병사들을 위로하기
도 했다.
   이번에 우리가 얻은 전과는 너무나 큰 것이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여 열
심히 싸웠기 때문이오.  앞으로도 이 나라를 위하여 우리 모두     힘을 모으도록 합시다.
  이 말을 듣고 정운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사또께서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모    든 전공이
사또의 힘으로 이루신것이지 저희들이야 그저 사또께서 시키신    대로 한 것 이외에 무슨
일을 했겠습니까?
    아니오.  아무리 장수가 뛰어난들 아랫사람이 따르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하겠소?
  이순신은 이처럼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충성심이 뛰어났고, 부하를 사랑할 줄 아는 위대
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4.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다

  한편, 부산포는 이미 왜국의 땅처럼 되어 있었다.
  왜군이 상륙하여 동래성을 빼앗은 뒤, 그 곳을 자기들의 전진 기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
다.
   다른 땅은 다시 내주더라도 부산포만은 한사코 지켜내야 한다.
  왜군들은 부산포를 점령하고 있는 한 언제든지 저희배를 마음대로 우리 나라에 댈 수 있
고, 다시 우리 땅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산포에는 왜놈들의 집이 들어서고, 무기고가 들어섰다.  마치 왜국의 한 고을을 옮겨 놓
은 것 같았다.
   거제 바다에서 왜선들을 부숴 보았자 부산포가 적의 손에 있는 한 그들은 끊임없이 닥쳐
올 것이다.  화근은 뿌리부터 뽑아야 한다.  부산포를 치리라.
  이순신 장군은 큰 결심을 했다.  부산포를 치기 위해서는 함대의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왜군의 숨통인 부산포를 끊으면 뭍의 육군도 독 안에 갇힌 꼴이 되어, 명나라의 원군이
오기만 하면 저절로 무너져 버릴 것이다.
  이순신은 이억기에게 파발꾼을 보냈다.
  8월 1일, 전라 좌수영, 우수영의 전선들이 모두 여수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20일 동안 합동 훈련을 했다.
  전선이 74척, 협선이 92척 모두 합쳐서 166척이었다.
   먼저 적 함대를 둘러싼다.  그리고 몇 개 전선단으로 나누어 한 전선단이 쏜살같이 쳐들
어가 휘젓고는 물러난다.  동시에 다른 선단이 쳐들어간다. 적이 그것을 맞이하여 싸우는 동
안 또 갑자기 물러나면 이번엔 세 번째  선단이 쳐들어간다.
  합동 훈련에 참가한 전라 우수영 수군들은 고개를 내 두르며 감탄했다.
   좌수사께서는 과연 하늘이 내리신 명장이시다!
  그러나 이순신은 우연히 만들어진 명장은 아니었다.오직 남보다 덜 자고 덜 쉬고 노력한
결과의 열매였다.
  군비를 재정비하고 난 이순신은 8월 24일, 좌수영 침벽정에서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략을 짠 다음, 드디어 진군의 북을 울렸다.
  그리고 그 이튿날에는 사량 앞바다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함대와 만나 삼도 연
합 함대를 이루어 합동 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우리 수군의 연합 함대는 모두 180척에 가까운 전선으로 위풍도 당당하게 한려 수도의 물
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9월 1일, 우리 땅이건만 이미 왜적의 소굴이 되어 버린 부산 땅을 멀리 바라보는 이순신
의 눈에는 불꽃 같은 노여움이 치밀어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왜선을 남김없이쳐서 모두 무
찌르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그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순신은 먼저 명령을 내려 적의 동정을 살펴 오도록 척후선을 내보냈다.
   부산포로 들어가라.  적선이 몇 척인가, 바다 위의 배치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육지의
진지 구축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조사하고 급히 돌아와 보고하라.
  적진을 살피고 온 척후선의 보고는 놀라웠다.
   500척에 가까운 적선이 부산 선창에서 동쪽 산기슭 아래까지 진을 치도     있고, 선봉
에 선 4척의 배가 초량목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뒷산에는    6군데의 진지가 있어 싸
울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함대의 3배.
  순간 이런 생각이 이순신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었다. 이순신은 곧 수군
장들을 모았다.
   적선은 500여 척이다.  우리가 먼저 기습을 하여 혼란이 일어나면 저희들끼리 서로 길을
막고 부딪쳐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다.  정운 장군은 앞장 서서 공격길을 트라.  바로 그 뒤
를 이언량이 거북선으로 뒤따르라.  정운장군이 튼 길로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왜선을 들이
받아 혼란을 일으켜라. 그리고 곧 돌아서서 나오라.  거북선이 물러나오면 전부장 이순신(방
답 첨사)이 틈을 주지 말고 들어가 치고 순천 부사 권준이 함께 쳐들어가 도와    라.
  이순신의 공격 명령은 떨어졌다.  둥둥둥!  북 소리가 바닷물을 출렁일 정도로 울려 퍼졌
다. 앗, 장님배다!
  왜군 군선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제 거북선은 그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활약을 해내게 되었다.
  500척이 문제가 아니었다.  왜군 수병들은 그 순간 싸울 힘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왜선 500척은 어지럽게 흔들리며 저희 배를 들이받기도 했다.  우리 군선 166척은 왜선
500척 사이로 길을 뚫으며, 여기저기에서 불길을 올리고 배를 뒤엎었다.
  부산포 앞바다는 격렬한 포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왜병들의 비명 따위는 포 소리에 먹혀 들리지조차 않았
다.
  왜적의 저항도 대단하였다.  왜군은 배와 성과 산 위의 굴 속 등에서 조총과 대포를 쏘아
댔다.  특히, 산 위에서 여섯 군데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의 조총과 대포는 마치 비와 우박
을 퍼붓는 듯하였다.
  양쪽 군사들은 무서운 기세로 맞붙었다.  거북선이 용의 입에서 불을 뿜고 포탄을 퍼부으
면서 이리 치고 저리 치니, 거북선이 지나갈 때마다 적선들은 몇 척씩 박살이나곤 하였다.
  계속해서 하늘을 찢고 오고 가는 포탄과 불화살, 그리고 병사들의 아우성 소리가 뒤범벅
이 되면서 적선에는 불길이 치솟고 왜적들은 수없이 고꾸라져 갔다.
  부산포의 치열한 접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날은 저물어 적선에서 타오르는 불꽃만 바
다에 비칠 뿐 주위는 온통 어둠의 그림자로 희미해졌다.
  저녁때까지 아군이 부순 적선이 100여 척.
   이 정도의 손실이면 왜선도 당장은 출동을 할 수 없겠지.
  이렇게 생각한 이순신은 부하 군사들을 쉬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뱃머리를 돌려라!
  그런데 녹도 만호 정운의 배가 홀로 적선 가운데 뛰어들어 피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녹도, 정운 장군!
  이순신은 계속 북을 울리며 소리를 높여 정운을 불렀다.  그러나 정운은 계속해서 부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끝까지 싸우라!  적을 앞에 두고 물러갈 수는 없다.
  왜선들은 정운의 배를 둘러싸고 점점 포위망을 좁혀들면서 화살과 조총을 소나기 퍼붓듯
하였다.  그러나 정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소리쳤다.
   내가 앞장 서서 이 원수놈들의 배를 깨뜨리겠다.
하면서 나아가는 순간 적의 총알 하나가 정운의 머리를 꿰뚫고 말았다.
  이 때, 비호같이 달려든 거북선이 삽시간에 적선 7척을 들이받아 깨드리면서 정운의 배를
구출해 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용감히 싸워 이름이 드높았던 녹도 만호 정운은 전사하
고 말았다.
   장군께서 총탄을 맞으셨습니다!  전사하셨습니다.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정운의 배에서 터져 나왔다.
   전사!
  이언량은 우뚝 선 채 속을 부르짖었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물론 이순신도 정운의 죽음앞에 눈물을 흘렸다.
  이 부산포 해전에서 우리 쪽 피해는 전사가 겨우 5명, 부상자 26명으로 정운 장군이 죽지
만 않았다면 그다지 큰 피해는 아니었다.
  이순신 함대는 싸움에 대승을 거둔 개선이라기보다는 녹도 만호 정운의 죽음을 슬퍼하듯
소리 없이 여수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곧 선조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썼다.
  한편, 육지에 올라온 왜적들이 온 강토를 짓밟고 있을 무렵 전국 각지에서는 뜻있는 용감
한 의병들이 벌 떼같이 일어났다.
  강원도에서는 조방장 원호, 영천에서는 권응수와 정대임, 경주에서는 경상 좌병사 박진 등
이 의병을 모아 적을 무찔렀고, 전라도에서는 김천일과 고경명, 경상도에서는 곽재우와 김면
과 정인홍, 경기도에서는 우성전·정숙하·최홀·홍계남 등이 의병장으로 싸워 공을 세웠다.
  또한, 사명 대사도 금강산 표훈사에서 승병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승병장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의병장 조헌은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또,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왜군을 대파하였다.
  이렇게 나라 안이 온통 벌집 쑤셔 놓은 듯 어지럽던 선조 25년 12월에 명나라 군사 4만여
명이 이여송을 대장으로 하여 구원차 우리 나라에 출동하였다.
  명나라 군사와 합세한 우리 육군은 다음 해, 1월 6일, 평양성을 공격하여 3일 만에 평양성
을 되찾고, 25일에는 개성부도 되찾았다.  이리하여 평양성을 버린 고니시 유키나가는 남쪽
으로 쫓겨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오던 명나라 군사는 임진강을 건너 박석 고개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다시 평양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사무치는 울분을 참으며 기다리던 한양 탈환의 길은 자꾸 멀어져만 갔
다.  왜군들은 이런틈을 타서 바닷길로 보급로를 트려고 남해 일대에 전선을 집결시키기 시
작했다.
  그러나 모든 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과 함께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남해에 내가 있는 한, 너희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보급로는 열어 주지 않    는다.
  선조 26년 2월, 이순신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3월 초에 이르기가지 1개월 동안에 적이 근
거지로 삼고 있는 웅포를 7차례에 걸쳐 공격함으로써 그 기세를 꺾고 뱃길을 막아 한결같이
바다를 지켰던 것이다.
  한편 육지에서는, 보급로가 막히자 왜군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군사들을 먼저 치
려고 하였다.
  이 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전라도 군사 1000여 명과 승병장 처영의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왔다.  권율은 지원해 온 의병들과 힘을 합세하여 행주 산성에 진을
쳤다.
  행주 산성은 한양을 서쪽으로 좀 벗어난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한강 가에
있는 조그만 산에 지어진 산성이다.
  왜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행주 산성은 바다와 한양을 잇는 길목이며 한양 문턱에 있는 중요한 성이다.그 곳이 막
혀 있으면 곤란하다.
  호랑이가 대문 앞을 지키고 앉은 셈이다.
   내가 빼앗겠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았다.  한양에 있는 왜군, 평안도에서 쫓겨 내려
온 고니시 유키나가 산성의 우리 군사는 겨우 1만여 명이었다.
  권율은 성의 허술한 곳을 고치고 나무 울짱을 둘러쳐서 왜군의 내습에 대비했다.
   뒤는 강이다.  삼면은 왜군이 둘러쌀 것이다.  왜군에게 죽느냐, 강에 빠져 죽느냐 둘 가
운데 하나다.  살길은 오로지 하나, 왜군을 쳐부수는 길뿐이다.
  권율은 군사들과 성 안으로 피난해 들어온 백성들에게 외쳤다.
   만약 우리가 비겁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내 땅을 왜놈에게 짓밟힌 터에 어디 가서 살 수
있겠는가?  왜군을 부수느냐 죽느냐 두 길이 있을 뿐이다.
  권율의 피맺힌 목소리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가슴 속에까지 목숨을 걸고 싸울 뜻
을 심어 주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단숨에 행주로 달려왔다.
  먼 곳에서 바라보니 행주 산성은 한강으로 빠져든 손바닥만한 산에 쌓인 하찮은 성이었
다.
   저까짓 성!
  이렇게 생각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단숨에 성을 부수고 한양으로 쳐들어가 저녁은 성 안에
서 먹으리라고 생각하며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행주 산성 안에서는 아녀자들까지 치마를 짧게 걷어올려 거기에 돌을 날라다가 성
벽을 기어오르는 왜병들을 내리쳤다.  왜병이 불을 지르면 그 즉시 물을 부어서 껐다.
  젊은이들은 활을 쏘았고, 노인들은 돌을 성벽 아래로 굴렸다.  왜병들은 도저히 성벽으로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노인들과 아녀자들이 벌이는 돌 싸움.  그 위세가 그렇게 크리라고는 권율 장군도 미처
몰랐다.
  고니시 유키나가 군들은 9차례에 걸쳐 공격해 왔으나 9차례 모두 성벽을 넘지 못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니 적도 무섭지 않구나.
  드디어 고니시 유키나가는 권율을 못 당해 내리라고 판단하였다.
   우선 전사자를 태워라.  퇴각이다!
  왜병들은 시체를 네 곳에 모아 불을 지르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왜군들은
저희들끼리 부딪치고 자빠지며 도망쳤다.
  한편, 왜군들이 바다에 나타나지 못하자, 이순신은 바닷가에 진을 친 왜군들을 치기 위한
계획을 짰다.  스님들을 모아 승병대를 조직했고, 경상도 전라도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모
아 궁시대(화살 부대)를 조직했다.
  간단한 훈련을 마쳤다.
  그러나 이순신의 깊고 큰 충성심과 애국심이 짧은 시간에 그들을 그 누구도 당해 내지 못
할 용감한 군사들로 탈바꿈시켰다.
  10여 척의 배에 의병들을 나누어 태우고 기슭에 대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모여
든 그들은 일당백의 기세로 왜군 진지로 달려갔다.
  이순신은 배에서 천자포, 지자포를 쏘아대며 응원했다.  의병들은 왜군 진지를 벌집 쑤시
듯 쑤셔 놓고는 바닷가로 쏜살같이 물러나와 배에 올라탔다.
  왜군은 때를 가리지 않고 불쑥 나타나 태풍처럼 휩쓸고 가는 기습병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쫓기기 시작한 왜병의 도망길은 빨랐다.
  서울에서 물러난 왜적은 그 세력을 남쪽으로 돌려, 6월에는 벌써 남해 바다 가까이까지
쫓겨가 있었다.  왜군들은 모두 진주성 둘레에 모였다.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 가토 기요마사 군대, 우키다 히데이에 군대는 진주성밖에 진을 쳤
다.  모여든 왜군병력은 10만 명, 우리 나라 총병력보다도 많은 숫자가 남강 가 한 고을 둘
레에 모여든 것이엇다.
  그 때, 진주성 수비 군사는 겨우 수천 명이었다.
  백성은 육칠만 명이 있었으나,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몇천 명뿐이었다.
  권율 장군은 행주 산성의 승리에 힘입어 왜군을 뒤쫓아 의령까지 내려왔으나. 왜군의 기
세에 눌려 그 곳에서 주춤했다.  10만의 적군을 칠 엄두를 못낸 것이었다.
  진주성엔 창의사 김천일, 의병장 고종후가 겨우 수천 명의 군사로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6월 20일, 왜군은 첫 공격군 5만 명으로 진주성을 쳤다.  지난 해 진주 목사 김시민에게
대패한 분풀이라도 하듯 거세게 공격을 했다.
  열 배가 넘는 적군을 맞아 싸우며 진주성의 모든 병사와 백성들은 9일 동안 버텨 냈다.
  그러나 6월 28일, 왜군은 결국 진주성벽을 넘었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 군사는 벌 떼처럼 성벽을 넘어오는 왜군을 보자 뿔뿔이 흩어졌다.
진주성 안은 수라장이 되었다.
  하늘을 치솟는 불길, 아녀자들의 비명 소리.  왜군은 북쪽에서 쫓겨 온 분풀이를 진주 고
을에 쏟아 부었다.  눈에 띄는 대로 마구 죽이고 노략질을 하였다.
  장군들은 용감히 적진으로 뛰어들어 싸우다 죽었다.  김천일, 최경희 등은 남강에 몸을 던
졌다.  왜군들에게 죽음을 당한 우리 백성은 6만여 명!
  그것뿐이가.  소, 말, 닭 등 목숨이 있어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죽였다.
  2차 진주성 싸움은 임진왜란 가운데 가장 처참한 싸움이었다.
  최경희 장군의 애첩 기생 논개는 촉석루에서 왜놈 장수들이 벌인 축하연 때, 적장 게다니
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10월 4일, 선조 임금은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 하루 전 10월 3일, 이순신은 한산도 수영에서 삼도 수군 통제사라는 영광스러운 어명
을 받았다.
  어명을 내린 것은 8월 15일이었으나, 그 어명이 20일 만에 한산도에 이른 것이었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판서(장관)와 같은 계급이었다.  연합 함대를 출동시키게 되니 연합
함대를 지휘할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래서 특별히 만든 벼슬 자리였다.
  이 때, 이순신에게는 작전 지휘권, 감독 통솔권만이 아니라, 삼도 수군 통제사의 지휘 아
래에 있는 각 도의 수군 절도사에 대한 처단권까지 함께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및 명나라 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이렇다 할 싸움은 없었다.  그 때 명
나라와 일본 사이에 평화 교섭이 오고갔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조선을 돕고, 이순신의 활약으로 바닷길이 막히게 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
단 전쟁을 중단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야심 만만한 그는 결코 조선 침략을 포기하지 않았다.
   때가 오면 보자.  아니 때가 오기를 기다릴 것도 없다.  때를 어서 만들어 기어이 큰 뭍
에 발판을 마련하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병사들을 모두 허수아비처럼 여겼으며 명나라 군사도 별로 두
려울 것이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군이 평양성을 내놓고 후퇴한 것은 명나라 군사를 무
찌를 수 없어서가 아니라 후방 보급 때문이었다.
   먼저 바다를 누르고 있는 이순신을 없애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뜻을 이룰 수 없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장들은 돌처럼 굳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녀석 때문에!  이순신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분통을 터뜨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5.  또 다시 백의 종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을 모함하여 조선 임금의 명령으로 죽게 하리라는 음흉한 꾀를
짜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나라와 잘 내통하고 있는 요시라를 불렀다.
   조선에서는 너를 어느 정도 믿고 있지?
   제 말이라면 뭐든 믿고 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와 단둘이 오랫동안 소곤거렸다.
  경상 우병사 김응서의 군영에 요시라가 나타난 것은 그 얼마 뒤였다.  요시라와 김응서와
는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요시라는 자기 나라의 필요 없는 정보를 우리에게 건네 주고 몇 푼의 재물을 얻곤 했었
다.
  요시라는 말머리를 꺼냈다.
   이번 이야기는 아주 중대합니다.  많은 돈을 주셔야겠습니다.
   어서 이야기나 해 보아라.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를 아주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는 마치
개와 원숭이 같습니다.
   나도 그 말은 듣고 있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번에 가토 기요마사를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어떻게?
   가토 기요마사가 곧 바다를 건너올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오는 날을 알아서 통지해 드
리고 가토 기요마사가 탄 대장선을 가리켜 드릴 테니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
사를 바닷귀신이 되게 해 주십시오.
  김응서는 요시라의 말을 믿고 곧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또한 권율 도원수(총사령관)에게
도 이 중대한 정보를 보고했다.
  전쟁이 얼마 동안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이순신은 한산도에 본부를 설치하고 500여 척의
전선을 만들고, 식량 생산을 장려하여 양식 문제를 해결하면서, 항상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
었다.
  또한, 달 밝은 밤에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누각에 앉아 시조를 읊기도 하였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피리 소리)는 남의 애를 끊나니.
  정유년(1597년) 1월 21일, 권율 도원수가 직접 한산도까지 왔다.  권율은 이순신에게 명령
했다.
   요시라의 정보는 귀중한 것이오.  가토 기요마사는 왜장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하여 함경
도까지 단숨에 휩쓴자요, 꼭 잡으시오.
  그러나 이순신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왜놈들은 본디 간사합니다.  간첩, 그것도 왜놈의 말을 믿고 함대를 출동 시키란 말입니
까?  반드시 뒤에 음흉한 흉계가 있을 것입니다.  복병을 두어 우리 수군을 쳐서 뱃길을 틀
속셈일 것입니다.
  이순신은 요시라의 정보가 거짓이며 어떤 계교가 있어 꾸며진 것이라는 것까지 꿰뚫어보
았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를 없애려는 음모임은 몰랐다.
  권율이 한산도에 이르러 이 명령을 내린 것은 1월 21일이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1월 15일, 즉 그보다 엿새 전에 우리 나라 포구에 들어와 배를 대고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출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 요시라는 뛰어오를 듯이 기뻐했다.  곧 김응서를 찾
아갔다.
   가토 기요마사를 잡을 단 한 번의 기회를 알려 드렸는데 이순신이 출동하    지 않아 가
토 기요마사는 무사히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그물 안에 잡힌 호랑이를 풀어준 꼴이 되었
습니다.
  김응서도 그렇게 여겨졌다.
   이순신이 출동했더라면 가토 기요마사의 배를 뒤집어 엎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선만도
500여 척을 가진 대함대가 아닌가.
  김응서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이순신의 죄를 물어야 합니다.  어명과 도원수의 군령을 어겨 적장을 무사히 상륙시킨
것은 용서될 수 없습니다.
   잡아올려 목을 베어 군령의 엄함을 만천하에 보여야 합니다.
  선조는 어쩔 수 없었다.  유성룡도 변명해 줄 도리가 없었다.  이순신의 판단이 아무리 옳
았더라도 가토 기요마사가 이 땅에 상륙해 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뒤집어 엎을 수는 없었
다.
   조정을 속이고 적을 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이런 죄명으로 수군 통제사를 파면당하고 엄청난 죄인이 되었다.  의금부 도사
가 10여 명의 나졸을 거느리고 한산도로 떠났다.
  이순신은 의금부 도사가 한산섬에 이르렀을 때, 함대를 이끌고 부산포 가까운 가덕도 쪽
에 출동해 있었다.
  속력 빠른 배 1척이 한산섬을 떠나 가덕도로 갔다.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잠깐 하늘을 쳐다보았다.
   뱃머리를 돌려라.
  조용한 명령을 곧 내렸다.  부장 한 명이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의금부 도사에게 끌려가시겠습니까?
  이순신은 통제영에 이르러 제승당 앞에 꿇어앉아 왕명을 받았다.
  선조 30년, 서기 1597년 정월에 명나라와의 평화 교섭이 깨지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또다시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니, 이것을  정유재란 이라고 한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 이순신은 뜻밖에도 누명을 쓰고 서울로 잡혀가게 되었다.  선조 30
년, 서기 1597년 2월 26일의 일이었다.
  여기저기에서는 군사와 백성들의 원통해하는 울음소리가 들려 왔지만 이순신은 오히려 침
착한 태도로 새 통제사가 된 원균에게 모든 사무를 넘겨 주고 조용히 함거에 올랐다.
  통제영 군인들은 원균 앞임에도 아랑곳없이 함거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백성들은 길을
메우고 통곡했다.
   어쩌다가 출동하지 않아 왜장을 상륙시켰소?
  뜻있는 사람들은 한탄했다.
  이 소식을 듣고 도체찰사 이원익은 누구보다도 크게 놀랐다.  이원익은 극형에 처할 죄인
을 두둔하다가는 자신도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를 생각할 때,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놈들은 명나라 대군보다도 이순신 한 사람을 더 무서워합니다.  이순신을 가두시면 안
되옵니다.
  한음 이덕형도 눈물로써 이순신에게 바다를 맡겨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있던 정경달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었다.
   전하께서 이순신에게 사죄(사형)를 내리신다면 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    니다.
  선조도 잇달아 상소가 올라오자 일부 대신들의 주장대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곧 성균관
사성 벼슬을 하는 남이신을 불렀다.
   한산도로 가서 한산도 통제영 사정이 어떤지 자세히 알아 가지고 오라.
  남이신은 한산도로 갔다.  그러나 그의 보고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배가 바다를 건너오다가 돌섬에 걸려서 이레 동안 꼼짝    못했는데도
이순신은 그것을 잡지 못하였나이다.
  남이신의 보고가 이렇듯 이순신에게 불리한데다가 또 권율 도원수까지도 이순신의 처벌을
주장했다.
   어명과 군령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적군을 상륙시켰으니 군법으로 다스려    법도가 엄
함을 밝혀야 하옵니다.
  도원수의 경경한 아룀에 선조도 어쩔 수 없었다.
   이순신을 죄로 다스리라.
  어명은 떨어졌다.
  좌찬성 윤두수가 이순신의 죄를 묻게 되었다.
  윤두수는 서인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남인과 서인 두 패가 있어 서로 아귀다툼을 벌
이고 있었다.  이순신은 남인으로 점찍혀 있어, 윤두수가 심문하게 된 것은 불운에다 더 큰
불운이 겹친 일이었다.
   이순신은 틀림없이 가토 기요마사가 보낸 뇌물을 받고 못 본 체 놓아 두    었을 것입니
다.  그렇지 않고서야 출동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이런 서인들의 말을 듣고 윤두수는 남인의 거물을 어떻든 죄로 몰아야 했다.
   네가 왜놈과 내통했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바른대로 아뢰어     라!
   비록 목이 달아난다고 할지라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     다.
  살갗 튀는 소리가 났다.  나졸들은 팔이 아파 매질 속도가 느려질 때까지 내리쳤다.
   독한 녀석이로군.  우선 옥에 가두어라.
  윤두수는 이순신의 숨이 멎을 것 같자 다급히 명령했다.  이순신 장군이 고문당해 정신을
잃었다는 소문은 곧 퍼져 나갔다.
  이순신이 이와 같이 죄를 뒤집어쓰고 옥에 갇히게 된 것은 조정 대신들의 당파 싸움으로
빚어진 반대파의 모략, 그리고 왜적의 흉계 때문이었다.
  죄목은, 다른 사람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공로를 내세워 행패가 심하며, 평안
하기만 좋아하여 싸우려 하지 않고, 왜적과 내통하며, 민심을 모아 나라에 반역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죄상을 들어 죽여야 된다는
의견이 더 많아서 그의 목숨은 그야말로 풍전 등화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태연하게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문초가 계속되었다.  여러 날을 두고 죄를 실토하라는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이순신은 자
기가 했던 일들을 사실대로 말할 뿐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온몸이 마디마디 안 아픈 데 없
이 쑤시고 으실으실 한기조차 들었다.
   아, 나라의 운이 왜 이다지도 비색할가?
  그는 자기의 걱정에 앞서 날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일을 걱정했고 또 병들고 늙으신 어머
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잡혀간 아들 때문에 무한한 근심에 쌓여 있을 어머니를 생
각하면 그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 때, 판중추부사 정탁은 이순신의 소식을 듣고 깜짝놀랐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선조
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소신은 전에 왕명을 받들어 죄수를 다루는 것을 본 일이 있사온데, 모진    고문을 하면
대개는 목숨이 끊어졌나이다.  지금 이순신이 한 차례 고문으    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옵는데, 또다시 고문을 한다면 목숨이 살아남    을지 근심스럽습니다.  이순신은 참으로
장수된 자의 모범이며, 그러한 인    물은 쉽사리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왜놈들
은 모두 이순신을     무서워하고 있나이다.  지금 이순신은 조정의 공론이 얼마나 엄한지
잘 알    고 있으며, 형벌의 두려움도 잘 아는 사람이기에 살아날 생각을 품지 않고    있
을 것이옵니다.  이러할 때 은혜를 베푸시어 특별히 용서해 주어, 다시    공을 세워 죄를
벗도록 하시면 상감께서 나라를 다스리심에 어찌 도움이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탁의 상소문은 그 때까지 올린 어떤 글보다도 사리가 분명하였다.  선조 임금도 몇 번
이고 고개를 끄덕였고, 서인들도 헐뜯어 반대할 구실이 없었다.
   지난날의 공을 생각하여 이순신을 권율 밑에서 백의 종군하게 하라.
  어명이 떨어졌다.  이순신에게는 두 번째 백의 종군이었다.  우리 나라 수군을 다스리던
최고 총사령관 이순신이 또다시 만간 잡병의 몸으로 싸움터에 나가게 된 것이었다.
  이순신이 옥문을 나선 것은 4월 1일, 옥에 갇힌 날로무터 28일 만에 그는 다시 햇빛을 보
게 되었다.
  옥에서 풀려 나온 이순신은 그 날 밤, 윤간이란 사람의 하인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 날, 이순신은 영의정 유성룡에게 인사를 갔다.  유성룡은 그 때 영의정 벼슬에 있었
다.  선조 임금을 빼놓고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순신을 어릴 때부터 잘 알았고, 늘 뒤에서 조심스럽게 보살펴 준 사람이었
다.  두 사람은 나라일을 걱정하다가 닭이 울 때야 헤어졌다.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막하(부하)로 들어가기 위해 경상도 초계를 향해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고향 아산에 들러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나던 중, 변흥백의 집
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전라도 순천 고을에 피난해 있었는데,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스고 옥에 갇힌 아
들을 보려고 여든세살의 병든 몸으로 곧장 배를 내어 고향 땅 아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풀려났다는 소식도 못 듣고 배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앞이 캄캄하였다.  곧 해암(충남 아산시 인주면)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닿아
있었다.
  이순신은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을 억누르며, 어머니의 시신을 모셔 집에 안치하고 곧 상
을 차렸다.
  이튿날이 되자 금부 도사가 길을 재촉하였다.
   빨리 가야 하오. 초계에 가는 것은 시간을 다투는 나라일이오.
  이순신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 명령에 따랐다.  어머니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나게 된 이순신의 가슴은 밀려오는 슬픔으로 터질 것 같았으나, 나라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이러한 탄식을 하며 또 길을 걸어, 4월 27일에 순천 고을에 이르렀다.
  6월17일에는 드디어 초계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게 되엇다.
  권율은 이순신을 반가이 맞이하여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과 함께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그 용맹스러움과 뛰어난 전략을 묵혀 둔 채, 왜적의 무도한
횡포를 안타까워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 때, 권율도 원균의 무능하고 방탕함을 알고 그가 막강한 수군을 지휘하게 된 것에 불
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즈음에서 왜군도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언제든지 공격을 하려
하고 있었으니,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6.  명량 해전

  이순신의 뒤를 이어 수군 통제사의 자리에 오른 원균은 날이면 날마다 잔치를 벌여 허송
세월을 보냈다.
  그 동안 이순신이 이루어 놓은 막강했던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한산섬의 튼튼
했던 수군 통제영은 글자 그대로 쑥밭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조 30년 7월 15일에는, 원균이 이끄는 우리 수군은 칠천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으나 크게 피하여, 전선 500여 척이 모두 부서지고 군사 1만여 명이 전사하는 등
기막힌 일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은 겨우 몸을 숨겨 고성땅 추원 포구에 배를 대고 뭍으로
올라와 뒤쫓아오는 왜적과 맞서 싸웠으나, 결국은 왜적의 칼에 맞아 죽었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정 수사 최호도 끝까지 군사를 지휘하며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
다.
  한산섬으로 도망쳤던 배설은 통제영의 식량 창고와 무기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왜
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이순신이 4년 가까이 피땀 흘려 마련한 귀중한 식량과
무기는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너무나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통제영은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하고, 우리 수군은 거의 전멸당했으며, 남해는 완전히 왜
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렸다.
   남쪽 바다가 뚫려 전라도가 짓밟히게 되었나이다.  남쪽 바다, 서쪽 바다    에는 왜군
함대를 막을 장수도 배도 없나이다.
  너무나 비참한 보고가 조정으로 올라왔다.
  선조 임금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의논하다가 병조 판서 이항복의 진언으로 이순신
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게 되었다.
  8월 3일,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순신은 선전관 양호가 가지고 온 왕명을 받
기 위해 밖으로 나가 꿇어앉았다.
   지난 번 경의 직책을 빼앗아 경에게 죄인이란 누명을 씌운 채 백의 종군    케 한 것은
과인이 어리석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라.  그래서 오늘날 이처    럼 크게 패한 욕됨을 당했
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대를 또다시 삼    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하니 막중 소임
을 다해 주기바라노라.
  선조의 글은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이순신은 왕명을 받자마자 급히 서둘렀다.  왜의 함대가 거제도를 뚫고 이미 여수 앞바다
를 지났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바다에서 왜의 보급로를 막아 왜의 수군이 육군에 군량미와 보급품을 대어 주지
못했는데, 왜의 수군이 강화도에 도착한다면 육지의 왜병은 마음 놓고 북으로 진군을 계속
할 것이다.  왜의 선단이 강화도에 이르면 모든 것은 끝장이었다.
  8월 18일, 통제사 이순신 일행이 회령포(장흥군 회진리)에 이르렀을 때는 여기저기 흩어졌
던 그의 부하들이 다시 모여들어, 그 수가 12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회령포는 진을 세울 만한 곳이 못 되었다.  그래서 다시 이진(해남군 이진리)으로
갔다.
  그 때까지 이순신이 바다에서 모은 배는 배설이 한산도에서 가지고 도망나온 12척뿐이었
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이 12척의 배로 왜선 1000여 척에 대적
할 결심을 굳히면서 이진, 어란진을 거쳐 8월 29일 진도의 벽파진에 진을 친 다음, 적의 동
정을 살폈다.
  이 무렵, 조정에서 다시 명령이 내려왔다.
   수군은 배도 없으니 뭍에서 군사를 모아 싸우라.
  이 명령에 대해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신에게 전선이 오히려 12척이 있습니다.  죽기로써 싸운다면 아직도 감당    할 수 있습
니다.  전선이야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사오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순신은 진도와 해남 사이에 있는 명량(울돌목) 해협의 지세를 자세히 살피고 난 다음,
작전을 짰다.
   전라 우수영을 본진으로 삼는다.
  이순신 장군은 그를 따르는 부하들과 선단에 명령했다.  우수영 바로 아래에는 좁은 바다
의 여울목이 있었다.  이 여울목은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를 가르고 있는 바다로  명량 해
협 이라 불렀고  울돌목 이라고도 했다.
  적의 함선단이 남쪽 바다를 지나 서해로 나오려면 이 울돌목을 지나야 한다.
  그 곳은 바닷물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거세게 흘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배를 몰
기에는 두 배의 힘을 들여야 한다.
  더구나 울돌목은 좁기 때문에 왜의 선단이 옆으로 나란히 늘어서서 한꺼번에 많이 올라오
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12척으로도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무
서운 끈기와 용기가 필요하였다.
  이순신은 마음 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제 언제든지 오너라.  이순신이 다시 바다로 돌아와 바다를 지킨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
게 해 주리라.
  가을도 깊어 가는 9월 14일, 마침내 적선 130여 척이 어란포 근처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곧 척후선을 보내어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군사를 모아 놓고 목숨을
다해 싸워 줄 것을 당부했다.
  9월 16일, 그 유명한  명량 해전 이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먼저 300여 척이나 되는 백성들의 피난 어선으로 하여금 전선처럼 꾸미어 깃대
를 꽂고, 전선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명령에 따라 활을 쏘는 시늉을 하게 하였다.  전
선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해서 적의 기세를 꺾자는 전략이었다.
  전투 준비를 끝낸 다음, 이순신은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울돌목의 거센 물결 위를 거침없
이 헤쳐 나아갔다.  곧 적선 133척이 우리 전선을 에워싸기 시작하였다.
  왜군의 선단 앞머리에 우리 배들이 바싹 다가서자 갑자기 바다를 뒤엎을 듯한 포 소리,
총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기가 피어올라 바다 위에 서리기 시작하였다.
  불화살이 불줄기를 그으며 소나기처럼 오갔다.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 왜군 선단으로 파고들자, 왜군 전선들은 겹겹이 에워쌌다.
  외로이 왜군 공격선들에 둘러싸인 이순신의 대장선!
  이 때, 바닷가 산에는 우리 백성들이 이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수많은 왜선
에 둘러싸인 대장선을 보고 모두들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하였다.
   아,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이순신 장군이었는데, 저런 상황이면 그분이라    도살아나지
못하겠구나.
  이순신은 전군 돌격 명령의 깃발을 세우게 했다.  싸움터에서 상관의 명령을 어기면 목을
벤다.
  도망치려던 중군 김응함은 이순신의 호령에 놀라 죽기를 무릅쓰고 왜선들을 헤치며 대장
선으로 다가왔다.  거제 현령 안위의 전선도 다가왔으나, 포위선 바깥에서 주춤거렸다.  이
것을 본 이순신은 소리쳤다.
   안위야!  네가 정녕 죽고 싶으냐?  군법에 의해 목이 베이고 싶으냐?  물러가면 살 데가
어디 있느냐!
  파도가 흔들릴 정도의 우렁찬 목소리에 왜군들까지 흠칫했다.  안위는 왜군 적선들을 향
해 불화살과 포탄을 쏘아대며 파고들었다.  왜선 2척이 안위의 배를 좌우 양쪽에서 끼고 포
와 총을 쏘아댔다.
  안위의 수군 대여섯 명이 바다에 떨어졌다.
  이것을 본 이순신은 포위를 뚫고 안위의 배로 맹렬히 돌진했다.  잠깐 동안에 왜선 2척을
바닷물 속에 가라앉히고 기세를 몰아 왜군 대장선까지 격파해 버렸다.
  이 때,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붉은 비단옷의 왜군이 있었는데, 그가 왜의 수군 대장
마타시라는 것을 알아 낸 이순신은 그를 갈고랑이로 건져 올리게 한 후, 돛대에 높이 매달
았다.
  이것을 본 우리 수군의 사기는 더욱 솟구쳐올라 현자포, 지자포를 쏘아대고, 북을 치며 함
성을 질렀다.
  왜군들은 자기네 대장이 돛대에 매다려 있는 것을 보고 모두들 겁에 질려 뱃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를 쫓는 우리 수군과 거센 물살에 밀려 적선들은 서로 부딪쳐 깨지는가 하면,
바다 밑에 쳐놓은 쇠줄에 걸려 모조리 뒤집히고 말았다.
  이것으로 명량 해전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바다 위에 자욱했던 화약 연기와 배가 타는 불길이 사라지고 바닷물이 다시 잔잔해졌을
때, 바다 위에 두둥실 떠 잇는 배는 우리의 12척뿐!
  가슴 조이며 전투를 지켜 보고 있던 산 위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고 눈을 비벼
댔다.
   만세!  만세!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소리에 답하듯 백성들의 만세 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이순신 장군 만세!  만세!
  만세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12척으로 133척의 대함대를 물리친 싸움!
  이것은 세계 해군 역사상 실로 없었던 일이었다.
  이순신의 장한 함대가 진으로 모여들었다.  12척 모두 약간 파손된 곳은 있었으나, 왜선과
스칠 때 생긴 정도일 뿐 늠름한 그 모습을 자랑하였다.
  12척으로 133척을 무찔렀다는 장계를 받은 조정에서는 얼핏 믿을 수 없었다.
   어찌 믿을 수 있는가!
  조정은 흥분하였다.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여 그런 전과를 거두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한편, 울돌목의 대패전 소식을 들은 왜군은 이순신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집에 있는 물건
들을 모두 노략질하고 불질렀다.  다행히 가족들은 산 속으로 피신했으나, 셋째 아들 면은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죽음을 맞이했다.
  이 소식은 10월 14일에 이순신에게 전해졌고, 이순신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바랬다.
  이 글은 이순신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 주고 있다.


























  7.  노량 해전

  이듬해 이순신은 본진을 고금도로 옮기고 전력 증강에 힘써 무기와 전선을 늘리고 군사도
8000명을 길러 수군 본거지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즈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 소식은 우리나라에 있는 왜장들에게 비밀리에
전해졌고, 자기네 나라로 철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비밀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이순
신만은 속일 수 없었다.
  이러한 왜군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인과 함께 함대를 이끌고
우수영을 떠나 목포 보하도(고하도)로 진지를 옮겼다.  후퇴를 하는 왜군을 치기 위해서였
다.
  11월 17일 밤,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지에서 불화살 하나가 하늘 높이 올랐다.
   틀림없이 가까운 고성이나 남해 사천 등지에 있는 왜군에게 연락하는 신호이리라.
  곧 그에 응답하여 또 다른 곳에서도 불화살이 하늘로 올랐다.
   지체할 수 없다.  나가자.
  이순신은 명령을 내겼다.
   수군에게 하무를 물리고 북도 눕혀 놓아라.  노질도 소리 안 나게 하라.
  우리 나라와 명나라 연합 함대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노량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노량
바다로 가는 동안 섬과 포구마다 전선 몇 척씩을 숨겨 놓았다.
  왜군은 노략질을 마치자 500여 척의 선단으로 온 바다를 휘덮다시피하며 노량 바다로 몰
려들었다.  그 500여 척의 대선단이 노량 바다에 이른 11월 19일 새벽.
   쾅!
  바다에서 물기둥이 솟아오르고 온 천지가 진동할 듯한 소리가 터졌다.  왜군은 미처 싸울
진형도 갖추기 전에 포탄과 화살의 소나기를 만난지라 갈팡질팡 저희 배끼리 부딪쳐 부서졌
다.
   장작에 불을 붙여 던져라!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수군은 왜군의 탄환을 뚫고 배에 바싹 다가가서 장작불을 던져 넣었다.  당황한 적
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어느 새 불길은 배의 장막에 달라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견디다 못해 왜군들은 여기저기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포 소리, 화약 연기,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 바다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왜군은 날이 환히 밝아올 때까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싸우다가 끝내 관음포 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관음포는 뭍이 앞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쫓겨 들어간 꼴이 되
었다.
  왜군들이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앞은 뭍이고 위에는 우리 수군 함대가 포구를
꽉 메우고 있었다.
  왜군들은 그대로 있어도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고 죽기를 무릅쓰고 공격해 왔다.
   저 배를 총공격하라!
  왜군들은 다른 전선들은 본체만체하고 이순신의 대장선을 에워쌌다.
  진인이 그것을 보았다.
   통제사를 구하라!
  진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명나라 수군이 왜선의 포위망을 바깥에서 공격하자, 왜군은 뿔
뿔이 흩어졌다.  이 날의 싸움은 처절하였다.
  부수고 가라앉힌 왜선이 200여 척.
  왜군은 200여 척의 배를 잃자, 싸울 힘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원수를 한 놈도 놓치지 말라!
  이순신 장군의 수염이 바람에 나부꼈다.  전복 자락이 펄럭였다.  그 눈은 오직 나라에 대
한 충성으로 불타고 있었다.
   대장선을!  집중 공격하라!
  왜군 장수가 소리치자 모든 총탄은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이순신이 탄 대장선은 마치 불사신처럼 더욱 속력을 내며, 화약 연기 속을 뚫고 나아갔다.
별똥별 같은 불길이 이순신의 몸 둘레를 쉴 새 없이 스쳤다.  이순신의 몸은 마치 사격 훈
련장의 과녁 같았다.
   승리는 우리 눈앞에 와 있다!
  그 총탄의 소나기 속에서도 이순신은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지휘채를 휘둘렀다.
  이순신은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순간 몸이 약간 휘청거렸으나, 곧바로 몸을 세우고 지휘
를 계속했다.  여전히 대장선은 바다 위를 달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노량 바다에서 도망치는 왜군 선단을 질풍같이 쫓던 그 때, 쫓기면서 적
군이 쏜 유탄에 맞았다.  순간 이순신은 쓰러졌다.
   아버님!
  옆에서 함께 싸우던 아들 회와 조카 완이 달려왔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회는 내 갑옷을     입고 계속
싸워라.
  이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왜군이 만일 이순신이 저희 총탄에 쓰러진 줄 알았다면 뱃머리를 돌려 300여 척이란 많은
세력으로 다시 반격을 하여 역사는 조금 다르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순신, 그는 갔지만 우리의 땅과 바다는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평온을 되찾았다.
  그 날 해가 머리 위에 떠올랐을 때에야 싸움은 끝이났다.
  명나라의 진인은 군진에 당도하자마자 대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이순신을 찾았다.
   통제사!  어서 나오시오!
  그러나 나타난 것은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었다.
   숙부님께서는 전사하셨습니다.
  이완의 말은 목메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진인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통제사가 전사하시다니…….  통제사가…….
  그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주위에 있던 장병과 백성들도 이 소식을
듣고 애통의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선조 임금은 이순신 장군에게 12월 4일 우의정 벼슬을 내렸고, 6년 뒤에는 좌의정 벼슬을
내렸다.
  45년 뒤, 인조는 이순신에게  충무공 이란 시호를 내렸고, 200년 뒤 정조 때는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영의정이란 벼슬을 내렸으며, 덕흥 부원군이란 작호를 내렸다.  비록 살아서 그
벼슬을 못 누렸다고 하나 이순신에게는 벼슬 자리의 높고 낮음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오직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불사른 크고 큰 위인 이순신!
  그는 우리 나라와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고, 세계 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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