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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승훈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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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위인특대전집 (22) 이승훈.


  제목 : 이승훈(1864∼1930)
  교육자이며 독립 운동가. 호는 남강. 평북 정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
모님을 여의고 16세 때 유기상 점원이 되며 상업에 눈을 떴다. 10년 뒤 큰돈을 벌어 평양을 중심
으로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실업가가  되었다. 32세 때 오산면 용동으로 이사하고, 교육에 뜻을
두어 서당을 차렸다. 그  뒤 러.일 전쟁으로 재산을 잃고, 평양에서의 안창호 강연에 감동을 받아
오산 학교를 세웠다. 또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에 힘쓰다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
를 귀양갔다. 이 해 다시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4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3.1 운동 때는 민
족 대표로 활약하다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22년 가출옥하자 자면회를 창립했고,
1924년에는 동아 일보 사장을 맡아 물산 장려 운동 등을 벌였다. 1930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오산 학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 떠오르는 해

  평안도 청천강 북쪽에 정주라는 고장이 있다. 서해 바다 가까이에  있는 이 곳은 농산물과 더
불어 광산물도 풍부하게 나는 곳이다.
  정주는 역사적으로 볼 때  홍경래의  난’으로 유명하다. 조선 시대에는 서북(평안도를 가리킴)
사람들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따라서 벼슬길이 막혀 있었다. 홍경래는 이런 지방 차별을 불만으
로 여겨 1811년에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은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정주는 이 때 크게 파괴되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남강 이승훈은 1864년 음력 2월  28일, 평안 북도 정주에서 가난한 선비인
이석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보, 이 아이는 떠오르는  해처럼 우리 집안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승일이라고 이름을   지
읍 시다.”
  “네, 당신 뜻대로 하세요.”
  어머니 김씨는 남편의 뜻에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승일의 아버지 이석주는 본디 시골 선비였다. 평생을 글 읽는 일에만 전념해 왔기 때문에 노동
이라는 것을 몰랐다. 배운 한문으로  남의 편지나 서류 등을 대서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고작이
었다.
  따라서 두 내외와 늙은 어머니, 그리고 아들 형제의 생활은 김씨 부인이 품팔이를 하여 근근히
꾸려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김씨 부인은 승일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승일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이따금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네 어미가 불쌍했지.  남의 집 김매기.빨래.방아찧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지.
그래서 제명을 채우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게야.” 어린 승일은  할머니의 그런 넋두리를 자주 들
으며 자랐다.
  할머니의 푸념처럼 승일이네 집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만큼  가난했다. 승일이 태어난 무렵
은 안동 김씨의‘세도 정지가 막을 내리고  흥선 대원군이 어린 왕의 섭정으로 온갖 개혁을 꿈꾸
던 때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이 추진한  개혁은 너무 무리였다. 경복궁을 새로 짓는 일로 인하여 나라의
경제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대원군은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당오전 이니 ‘당백전 이니 하는 새 엽전을 발행했다.
  당오전이나 당백전은 글자  그대로 그 당시 통용되던 엽전보다 다섯 배, 백 배의 가치를  갖게
한 것이다.
  따라서 물가는 그만큼 치솟았다.  남의 대서나 품팔이를 하여 생계를 이어 가는  승일이네 집
은 그런 경제 변동에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김씨 부인은 열심히 일했다. 밤잠을 설치면서 전보다 두 배, 세 배나 더 열심히 일했다.
  이 때문에 결국 과로하여 승일을 낳은 지 여덟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이래서 승일은 젖먹이 때부터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모른 채 할머니 품에서 자라야만 했던
것이다.
  승일은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곤 이런 가난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 녀석, 늙은 할미의 젖을 줄기차게 빠는구나.” 그러면서 할머니는 쭈글쭈글 말라붙은 젖꼭
지를 승일에게 물리곤 했던 것이다.
  이런 어렸을 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 승일은 문득 그때가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단편적이고,  그나마 어렴풋하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기억
은 강하게 머릿속에 박혀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다.
  승일은 여섯 살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머님, 아무래도 이 곳보다는 시골이 살기가 낫겠지요? 그래서 납청정으로  옮겨 볼 까 합
니다.”
  “늙은 어미야 무엇을 알겠어. 아범이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 때 철모르는 승일은 기뻐하며
말했다.
  “아버지, 정말이야? 빨리 이사하고 싶어.”
  아버지 이석주는 어린 아들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승일은 어린 마음에도 가난한  집안 살림이 답답하여 무언가 변화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래서 이사 간다는 말에 가슴이 설레고 부풀었던 것이다.
  납청정 마을은 동네에 납청정이란 정자가 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그 곳은  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터마을로, 메밀국수와 유기 공업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아버지는 이 곳으로 옮긴 뒤 생활에 좀 여유가 생겼던지 승일과 형 승모를 글방에 보내 주었
다.
  승일은 머리가 좋아 서당 훈장이 가르치는 글을 남보다 먼저 깨쳐 학력이 날로 높아졌다. ‘천
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등을 배웠다.
  글씨쓰기도 익혔다. 목판 같은 것에 고운 모래를 담아 평평하게 하여 그 위에 글씨를 썼다. 지
울 때에는 목판을 흔들어 모래를 다시 고르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작은 행복마저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승일이가 열 살 되던 해 여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두 달 뒤에는 아버지마저 병으로 시름
시름 앓다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승일 형제 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승모, 승일 형제는 하루 아
침에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고아가 되고 말았다.
  “쯧쯧, 불쌍도 하지!  저 어린것들이 어떻게 살지?” 마을 사람들은  어린 형제의 딱한 처지를
보고 모두 마음 아파하였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지 살아가게 마련이다. 어떻게 사
느냐가 문제이지만…….
  형 승모는 유기 공장의 머슴이 되었고, 승일은 글방훈장의  소개로 임일권이라는 사람의 ‘방
사환’이 되었다. 방사환은 주인의 잔심부름을 해 주는 소년을 말한다.
  훈장은 승일을 불러다 놓고 말했다.
  “네가 가서 살 곳은  임 박천 댁이다. 그분은 이 지방의 제일 가는 부자이며, 학문과  덕행도
높으신 분이시다. 너만 똑똑하게 군다면 장자 네 앞 길이 열릴 것이다.” “훈장님, 명심하겠습니
다.”
  승일은 방사환으로 있으면서  남보다 열심히 일했다. 주인 영감의 타구(가래침을 뱉는 그릇)나
요강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같이  일어나 깨끗이 닦아 놓았다. 임일권의 집에는 노비도 있고,
방사환도 승일 말고도 또 있었다.  그 무렵에는 시골 부자는 벼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도 돈으로
박천 군수라는 직함을 샀기 때문에 임박천이라 불렸고, 노비도 부릴 수 있었다.
  어느 날, 같은 방사환인 상태가 승일에게 말했다.
  “넌 왜 더러운 타구나 요강을  부시니? 그런 것은 이댁 여자 종이 할 일이야. 우리  방사환은
주인 나리의 심부름이나 하면 돼.”
  그러나 승일은 싱긋 웃을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승일은 글방에 다닐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 학문을 한다는 것이 글자나 알고  지식을 얻는게 전부일까? 그것보다 남이 보든 보지
않든 열심히 공부하여 내 인격을 닦는 데 있을 것이다.’ 승일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걸음걸이에
도 신경을 써 똑바로 걷고, 몸을 벽에 기대지도  않았고, 물건을 다룰 때에도 늘  조심했다. 이런
그를 어여삐 본 글방 훈장이 임박천 집 방사환으로 추천해 주었던 것이다.
  주인 임 박천은 이런 승일이를 기특하게 여겼다.
  “그 녀석, 똑똑하면서도 착실한 데가 있어. 시키지 않아도 남이  싫어하는 궂은 일을  도맡아
하거든.”
  더욱이 승일은 밖에 나가 노는 일도 없었다. 틈만 나면 책을 읽거나, 헌 종이에 글씨를 쓰곤 하
였다. 주인영감은 못 본 체하고 있었지만, 이런 것을 눈여겨 보아오던 터였다.
  어느 날, 임 박천은 승일에게 종이와 먹과 붓을 사다주며 말하였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고 살든 배워야만 한다. 글을 모르면 사람 노릇을 할 수가 없는  법이다.
여기 네가 쓸 종이와 붓이 있다.  이것으로 글씨를 쓰도록 해라.” “주인 어른, 고맙습니다. 그렇
지만 이렇게 좋은 종이를…….
  승일이는 너무 고마워서 어찌할 줄 몰라했다.
  임 박천은 큰 유기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승일은 주인의 심부름으로 공장에  자주 드나들면
서 유기(놋그릇)제조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세월이 흘러 승일은 어느덧 놋그릇 만드는 방법을 모두 익히게 되었다.
  1878년, 이승일은 열다섯 살에 이도제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 때, 이름도 승훈으로
바꾸었다. 승일은 어렸을 때 인환이라고도 하였고, 자라서는 남강이라는 호를  가졌다. 이제부터
는 승일 대신 ‘남강이라는 호를 쓰기로 한다.
  임 박천은 남강을 신임하여 유기 공장의 서기 일을 맡겼다.  공장에서 쓰는 원료나 제품의 출
납 장부와 수금을 맡는 중요한 자리였다. 주인의 신임이 없고선 맡을 수 없는 직책이었다.
  어느 날, 남강은 선천으로 놋그릇 값을 받으로 갔다. 돈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같은 마
을에 사는 한 노인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여 평지원이란 곳에 이르
렀다.
  “여보게, 이 서방. 이 곳에 내 친구 김 첨지가 살고 있는데, 마침 오늘이 그 사람 생일이라네.
목도 컬컬한데 잠깐 들렀다 가세.”
  “그렇다면 노인 어른이나 들렀다가 천천히 오십시오. 저는 집에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
니 곧장 가겠습니다.”
  이런 남강의 마음가짐이 주인에게 알려져, 더욱 신임이 깊어졌음은 물론이다. 하루는 주인이 말
했다.
  “나는 자네를 어려서부터 눈여겨보아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네. 자네는 반드시 큰
그릇이 될 인물일세. 내가 밑천을 조금  대어 줄 테니 자립해 보도록 하게.” 이리하여 남강은 전
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놋그릇 행상과 장터에 물건을 펴 놓고서 파는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조선조 시대를 통해 우리 나라처럼 상업을 멸시하고 또 발달하지 않은 나라는 좀처럼 드물다.
  그런 이유로, 전국 각지에는 ‘장’이라는 것이 있어 서로 물물 교환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장은 보통 5일마다 장날이 따로 정해져 있고, 상업행위로 좌상과 행상이 있었다.
  좌상은 앉아서 물건을 판다는 뜻이고, 행상은 돌아다니며 장사한다는 뜻이다. 물론 남강의 소년
시절만 해도 상점(가게)은  없었고, 사람들은 장날을 기다렸다가 곡식이나 가축을 가지고 장터에
가서 자기가 필요한 물건과 바꾸었다.
  그런데 장터에는 미리 터를 잡아 놓고 언제나 같은 곳에서 같은 물건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한자리에서 낫이나 호미를 파는 농기구 좌상이 있는가 하면, 농기구를 전문으로  파는
좌판(한곳에 물건을 펴 놓고 팔고 있는 자리)도 있었다.
  그런데 장날이 오기 전에 물건이 필요할 때도 있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마을의 집집을 돌아
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이 생겨났다.
  남강은 스물네 살까지 이런 행상을 계속했다.
  “놋그릇 사시오. 놋그릇.”
  남강은 평안도는 물론이고, 멀리 황해도까지 다니며 놋그릇을 팔았다. 이런 행상은 몹시 고달픈
일이었다. 놋그릇 행상이 남강 하나뿐이 아니었고, 또한 놋그릇이 사람들의 생활 필수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린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을 살 수 없어요. 그리고 놋그릇은 없어도 생활에 큰 불편 이 없잖
아요?”
  “돈이 없다면 외상으로 들여놓으세요. 놋그릇은 처음에  살 때에는 비싼 것 같지만, 한  번 들
여놓으면 몇십년이고 사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외상으로요?” 사람들은 외상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물건을 사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그렇습니다. 지금 들여놓으시고 가을에  추수해서 곡식으로 주시면 됩니다.” 이 때는 돈으로
장사 매매가 이루어지는 것보다 물물 교환이  더 많았다. 또 외상 거래도 많았다. 필요한 만큼 물
건을 가져다 쓴 다음에 추석이나 명절 때 두 번으로 나누어 갚는 것이었다.
  남강은 임 박천이 물건을 대 주어 외상으로 놋그릇을 많이 팔 수 있었다. 신용이  있어 물건은
얼마든지 끌어 댈 수 있었다. 이런 신용은 일이 년에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몇 년이고 꾸준
히 노력해야 되는 일이었다.
  남강은 이렇게 10년 가까이 행상을 하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
  어느 날, 부인이 말했다.
  “서방님께서 밤낮없이 객지로만 다니면서 행상을  사시니 아이들이 아버지 얼굴조차 모를 정
도예요.”
  이 무렵, 남강은 딸 숙렬과 아들 택로를 두어 모두 네식구인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나들 그것을 모르겠소. 이제는 행상을  그만두고. 남청정에 작은 좌판이라도 하나 가지고 싶
소.”
  “그것보다 차라리 유기 공장을 차리시는 게  어떻겠어요?” 부인이 무심코 한 말에 남강은 퍼
뜩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던가?  유기를 받아다가 파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 파는 게 이
익이 훨씬 더많지 않은가?’
  전에도 유기 공장을 차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럴 만한 밑천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남강은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게 약간의 돈이 있으니 공장을 차리고, 모자라는 돈을 빌려서 쓰면 될 게 아닌가 !’ 이것
은 간단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만도 않다.
  알기 쉬운 말로,  사업가는 은행에서 돈을 융자받아 사업을  일으키고 그것을 경영한다. 그리고
이익을 내어 빚도 갚고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공헌도 하는 것이다.
  남강에겐 다행히 신용과 경영  능력이 있었다. 그는 평안도에서 제일 가는 부자로 알려진 철산
의 오삭주라는 사람에게서 모자라는 돈을 빌려 유기 공장을 차렸다.
  유기 공장은 나날이 번창하여, 빚을 모두 갚고도 공장을 늘려갈 만큼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남강은 공장을 경영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앞선 생각을 가졌다.
  ‘사업을 크게 일으키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대우해 주어야 한다.’ 이  역시 간단
한 생각 같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남강은 공장의 건물에 큰 창문을  만들어 햇볕과 바람이
잘 통하게 했다. 놋그릇을 만드는 곳은 먼지가 많이 나고  쇳가루도 많이 날리는데 인부들이 그
것을 들이마시게 되면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남강은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1) 작업장에 먼지가 나지 않도록 깨끗한 환경을 만들것.
  2) 일할 때 입는 옷과 일을 마치고 나서 입는 옷을 따로 마련할 것.
  3) 일정하게 쉬는 시간을 줄 것. 그리고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인부들에게 한 자의 글이라도
깨우쳐 줄것.
  이런 규칙을 정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남강이 유기 공장을 경영하던 시기에 우리 나라는 크게 격동하고 있었다.
  상업 관계만 해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일본 상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게 되자 상업이나 소비도 달라졌다.
  일본 상인들은 석유,,성냥, 비누, 포목 등을 마구 들여와 자급 자족하던 우리의 경제를 무너뜨
린 것이다.
  그리고는 금, 흑연 같은 광물 자원, 쌀, 콩 등의  농산물, 소, 돼지 등의 축산물,  그리고 수산
자원까지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산업으로 겨우 명맥을 잇고 있었던 것은 유기 산업과 닥나무를 원료로 한 제지 산업,
그리고 한약재 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데 이럴 즈음, 남강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1894년에 일어난 청일 전쟁 때문이었다. 이 전쟁으로 그의  공장은 모두 불타 버리고
잿더미만 남았다.
  그는 잿더미 속에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죽일 놈들! 남의 나라에 와서 저희들끼리 전쟁을 하여 이 꼴을 만들다니!”  그 때까지만 해
도 상업 행위는 서울의 큰 상인에게 지방의 산물을 위탁하여 파는 일이 보통이었다. 이런  큰 상
인을 ‘물상 객주라 하였다. 이를테면 지금의 도매상이나 소개업이다.


  2. 스스로 깨닫다

  남강이 납청정에 돌아왔을 때는 공장도 돈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납청정의 다른 기
업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남의  빚을 얻어 사업을 하던 중에 공장이 불에 타 버린 것이
다.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어디론가 종적을 감춰 버린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남강의 생각은 달랐다.
  ‘남의 도움을 받았으면 갚아야 한다. 힘이 없어 못 갚는다면  그 까닭이라도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그는 공장을 조사하여 타다 남은 물건을 일일이 기록하고,  빌려 온 자본에 대한 손해 액수와
이자를 모두 계산한 명세서를 새로 만들어 철산의 오삭주를 찾아갔다.
  오삭주는 남강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명세서를 내놓자 놀란 듯이 말했다.
  “내 돈을 가져다가 장사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 넘으나, 이번 난리가 나자 모두 숨어 버리고
내 집에는 얼씬도 않네. 이렇게 찾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는데 자네는 명세서까지 자
세히 적어 왔으니 얼마나 정직한 사람인가.” 그는 하인에게 술상을 차려 오게 한 뒤, 그에게 다
시 가게와 공장을 일으키려면 자본이 얼마나 들겠느냐고 물었다.
  남강은 한참 계산한 뒤 필요한 금액을 말했다. 그러자 오삭주는 벼루를 꺼내더니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혔다. 그리고는 남강이 새로 만든 명세서의, 남강이 갚아야 할 부채 금액란에 가위표를 그
었다.
  “난리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없던 것으로 하겠네.” 그리고  전보다 더 많은 자본을 빌려주
었다. 그뿐만 아니라 안주 사람 김인오, 평양 사람 윤성운이 남강에게 자본을 대 주었다.
  남강은 납청정의 유기 공장을 조카 자경에게 맡기고, 자신은  서울과 인천을 다니면서 외국에
서  수입하는 석유와 약품의  총대리점을 열었다. 남강은 차츰 석유와 약품뿐 아니라 종이류, 도
자기, 건축 자재, 광목,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건까지 취급하여 큰 사업가가 되었다.
  이렇듯 몇 년이 지나는 사이, 청년 실업가 이승훈의 이름은 관서(평안도) 일대에 널리 알려졌
다. 그리고 자본금도 그 당시 돈으로 70만 냥을 넘어섰다.
  남강이 큰 사업가로 성공한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 장사의 기회를 보는 데 남보다  한 발 빨랐다. 둘째,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결코 주먹 구
구가 아닌 정확한 계산에 의해서 장사를  해 나갔다. 셋째, 신의가 있었다. 넷째, 고용인을 믿었고
또한 그들을 가르쳤다.
  남강의 나이 서른여덟 살 때였다. 그는 한양에서 엽전 만 냥을 인천으로 운반하여 배에  싣고
부산을 향해 찰발했다. 그런데 바다에서 일본 배와 부딪쳐 그만 엽전을 실은 배가 침몰되는 사건
이 발생했다.
  남강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손해 배상을 받으려 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직접 왜놈의 공사관에  고소하여 배상을 받으리라!” 일본 공사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시일을 끌었다. 그러자 남강은 일본 공사를 만나 당당히 따졌다. 끈질긴 노력과 누구
에게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로 결국 남강은 일본측으로부터 본전 만 냥을 받아 내는 데 성공
했던 것이다.
  남강은 경인선, 경부선 등의 철도가 개통되자 운수 회사를 만들고,  평양과 서울에 지점을 두었
다. 이것이 우리 나라 운수 회사의 시작이다.
  그는 외국에 수출하려고 황해도와 옥수수와 함경도의 명태를 대량으로 사들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어 주지만은 않았다.
  ‘사업을 크게 하려면, 우선 국내 정세가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튼튼 한 정부
가 세워지고 나라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다. 그러나 외국과 경쟁 할 수 있는 민족 재벌은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 는게 아니겠는가.’ 남
강은 김인오, 윤성운, 그리고 진남포 사람 김정민과 여러 가지를 의논했다.
  “임금께서 아라사 공사관에 파천하고 계신 동안, 나라의 이권이 아라사에 많이 넘어갔네. 또,
함경도의 경성·종성 광산은  아라사 사람 니시첸스키에게, 평안도  운사 금광  채굴권은  미국
인 모리스에게, 무산, 압록강 유역 및 울릉도의 목재 벌채권은 아라사 사람 푸리넬에게, 강원도의
금성, 당현 금광은 독일 사람  오르다에게로 넘어갔네. 이러다가는 우리의 자원을 다른  나라 사
람에게 몽땅 빼앗기로 말 것이 아닌가!” “남강의 ‘관서 자문(재벌)론’이 또 시작됐군.” “그
렇다네. 나라가 문호를 열어  외국의 상사와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마당이니 우리 쪽에서도 이
런 적은 자본이 아닌 몇 자본을 한데 합친 대자본이 있어야  하네. 이런 대 자본을 만들자면 먼
저 철산의 오삭주와 안주의 김인오, 황해도의 김홍량의 자본을 합쳐야 하네. 이렇듯 관서에선 관
서 재벌, 관북(함경도)에선 관북  재벌, 호남·영남에선 각 각 호남, 영남 재벌을 만들고, 모아진
이 민족 자본의 힘으로 외국 상사와 맞서야 하는  것일세.” 1904년, 남강의 나이 마흔한 살 때였
다. 이 해,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 남강은 쇠가죽을 중 국 상인과 거래하기로 약속했으나, 일
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는 바람에 큰 손해를 보았다.
  이 때, 남강은 만주에 건너가서 광활한 땅을 둘러보았다.
  “이 곳이 고구려의  옛 영토로, 바로 우리의 땅이로구나. 이렇듯  넓은 대지를 빼앗기로  좁은
반도에 우리 민족이 웅크리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푸순에는 중국에서 제일  큰
탄광이 있다. 그것도 산전제가 그대로 석탄 덩어리라 파 내기만 하면 됐다.
  남강을 안내하던 교포가 설명했다.
  “얼마나 무진장으로 널려  있는 석탄입니까? 이 탄전도 우리 민족이  고려 때 벌써 개발 하여
도자기 굽는 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남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  속에는 이미 도자기 회사를 세우겠다는 청사진이 펼쳐
져 있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남강은 윤성운을 찾아가서 말했다.
  “나는 이제 상업계를 떠나 고향에 돌아가서 조용히 살고 싶네. “아니, 상업계를 떠난다고? ”
  “장사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어서 고향으로 가겠다는 것일세.” 그는 다시 고향  정주로 내려
갔다. 그리고 안악에 있는 연등사라는 절에서 얼마 동안 쉬기로 했다. 연등사에서 낮이면 숲 사이
를 거닐었고, 밤이면 만주 다롄에서 구해온 ‘월남 망국사’를 읽었다.
  남강은 지난 10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겪었고, 그 때마다 생각은
언제나 한 가지 결론으로 모아졌다.
  ‘남들이 내 집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보통 집의 주인처럼 주인인 우리의 힘이 약했기 때문
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강이 기거하는 옆방에 새로이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  보니, 안중
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었다.
  “아, 당신이 바로 안 선생이구려. 그래, 지금 나라 형편은 어떻습니까?” “차츰  일본 세력이
밀려들어와 이 강산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 할 것입니다. 그것을 막는 길은 새로 학교를  세워
애국 사상을 국민에게 불어넣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직접 행동으로 일본의 힘을
꺾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남강은 감겼던 눈을 번쩍 뜨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
다. 마침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보였던 것이다.
  며칠 뒤, 연등사에서 내려와  평양에 돌아온 남강은 마산동에 나가 물과 토질을  자세히 조사
하고 도자기 회사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남강은 유기 공장을 경영한 경험이 있었고, 또 우리 국
민  사이에 아직도 고려 자기를 만들던 기술이 전해 내려옴을 알고 있어, 이런 계획을 세웠던 것
이다.
  이어 그는 서울과  평양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서는 것을 보았고, 안명근에게  들은
말도 있는 터인지라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장소로 어디가 좋을까? 평양성 밖?  황해도 안악? 정주의 납청정? 아니면 요즘  새로
이사 간 오산은 어떻까?’
  오산은 정주의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동리로, 남강은 그  곳에 자기의 문중인 여주
이 씨를 모여 살게  하고, 서숙(사설 학당)을 설치하여 문중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남강은 제석산에 올라 오산 일대를 굽어보았다.
  산에서 내려온 남강은 자기가 세운 서숙에도 들렀다. 아이들이 열심히 글을 읽고 있었다. 남강
은 이 서숙에서 코흘리개 아이들과 함께 자기가 옛날에 미처 다 배우지 못한 ‘논어 ,‘맹자를 배
웠다.
  그리고 그는 용동  시골집에서 살며‘대한 매일 신보 를 열심히 구독하고 있었다. 이  신문은
한국에 와 있던 영국 사람 베셀이 사장이었는데, 박은식, 양기탁  같은 사람들이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일본의 침략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신문을 통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졌다는 것과 민영환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는
것, 이갑과 정운복이 ‘서우 학회’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었다
는 소식 등을 알았다.
  1907년, 남강은 우연히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안창호의 연설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찌르는 듯이 감동적이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새로운 교육을  일으
켜 2천만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덕과 지식과 기술을 익혀 건전한 인격을 갖추도록 하는 것입
니다.”
  이 연설은 남강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나는 상투를 자르고, 이 순간부터 술과 담배를 끊겠다.” 그리고  3일 뒤, 남강은 도산 안창
호가 보낸 사람을 따라 그의 숙소로 찾아갔다. 거기서 남강은 이갑이라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세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서로 뜻이 맞아 굳은  동지가 되
었 다.
  남강이 용동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은 물론이고, 온 동네 사람 모두가 깜짝 놀랐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상투를 자르다니,  영감도 이떻게 되었구먼.” 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
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안팎을  깨끗이 쓸고 정돈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데  평양에서 돌아온 뒤로는 더 일직 일어나  자기 집뿐만 아니라 마을 어귀까지 쓸고, 풀도 뜯
고, 길도 넓혔다.
  남강은 사람들이 차차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 뜻을 따르려는 기미를 보이자, 마을 사람들을 모
아 놓고 도산의 연설 내용을 그들에게도 들려 주었다.
  남강은 자기가 세운 서숙을 새롭게 고친 다음, 칠판을 마련한  뒤 김덕용을 교사로 초빙하여
신 교육을 시작했다.
  이것은 남강이 평양에서 도산을 만난 지 겨우 2주일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서숙 이름을 ‘강명 의숙’이라 붙였는데, 도산이 자기  고향에 세운 ‘점진 학교’처
럼  평안도에서 처음 생긴 사립 소학교였다.
  남강은 다시 도산을 만나러 서울까지 갔다. 이 때, 그들은 ‘신민회’조직에 대한 의논을 했다.
  신민회는 비밀 단체로, 남강은 평북  총관의 책임을 맡았다. 도산은 신민회의 목적에 대해 설명
했다.
  “지금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남의 힘을 빌려  한때를 모면하려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자주와 독립을 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힘을 기르기 위해 신민회를 만들고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민족 앞날의 대업의 기초를 닦아
야 합니다.”
  도산은 또 신민회의 강령을 설명했다.
  1) 애국적 선구자들은 자기 수양에 힘써 역량을 키우고 민중의 모범이 될 것.
  2) 이런 동지들이 굳게 단결하여 힘을 더욱 크게 할 것.
  3) 그 힘으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힘써 전 민족적 역량을 준비할 것.
  4) 그리하여 앞으로 오는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주적 역량으로 민족 재생의 큰 사업을
이룩할 것.
  남강은 처음엔 민족이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기를, 그리고
굶주리는 헐벗는 사람이  없기만을 원했다. 그런데 나라가  다른 나라에 억압당하는 것을  보면
서  차츰 그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
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민족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것은 이 나라 백성을 너무도  불쌍히 여긴 점이었다. 남강은 못살고 못 먹고 남에게  눌려
지 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불쌍해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로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덕스럽고 넉넉히 사는게  목적이었지, 나라의 제도나 명목은
문 제가 아니었다.
  이런 뜻에서 남강의  운동은  민족주의라기보다 인도주의 또는 종교적 사상에 가까운 것 이었
다.
  “왜 우리의 산들은 메마르고, 사람들은 얼굴에 핏기마저 없을까?” 하고 그는 곧잘 한탄했다.
  언젠가 한 아이가 소를 끌고 그의 앞을 지나갔다. 소도 말랐고, 끌고 가는 아이도 여위었다.
  “조선은 소까지도 저렇게 말랐구나!”
  짧은 이 한 마디! 그 속에는 이 나라와 이 백성, 심지어는 하찮은 짐승과 벌레까지도 불쌍히 여
기는 그의 착한 마음이 깃들여 있다.
  남강의 민족 운동은 그의 개화 사상과도 관계가 있다.
  남강은 해외에 나가 서구의 문물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접해 보지는 못했다.
  “유길준의 ‘서유 견문’이란 책이 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나의 개화 사상은 그 책에
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얻으셨지요?”
하고 큰아들 택로가 물었다.
  이 무렵, 남강은 둘째 아들 택호, 둘째 딸 숙경을 얻어 자녀가 모두 넷이었다.
  “도산 선생을 만나 얻은 것이다.”
  “그럼, 아버지의 개화주의는 어떤 것들이지요?”
  “대강 세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첫째는 겉으로 나타난 모양을  바꾸는 일이다. 예를  들어,
긴  머리를 짧게 깎고, 긴 담뱃대를 쓰지 않는 게 그런 일에 속한다.” “긴 담뱃대를요?” 남강
은 이야기를 잠시 멈추더니, 방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긴  담뱃대를 들고 와서는 작은 칼을  꺼
내어 한 뼘도 못 되게 여러 토막으로 잘랐다.
  “보아라. 긴 담뱃대로 피우느니보다 이렇게 짧게 해서 피우는 것이 얼마나 편하겠느냐 ?” “
알겠습니다. 그 다음은요?”
  “개화주의의 둘째는 생활 태도를 바꾸는  일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히 일 하는 것
이다. 셋째는 마음을 새롭게 가지는 일이다. 사사로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물리치
고,  나라를 위해 몸바치는 일이 그것이다.” 이 무렵에는 안경을  개화경’, 신사들이 짚고 다니
는  단장을 ‘개화장’,양복을 입은 사람은 ‘개화파’라고 불렀다.
  남강은 그것을 예를 들어 말했다.
  “눈에 개화경을 쓰고 개화장을 휘두르며 개화파가 되었다 해서 진짜 개화는 아니다.
  참된 개화는 겉으로 나타난 모양보다도 그 바뀐 생활 기풍에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
의  새로운 자세에 있는 것이다.”
  마음의 새로운 자세가 생활의 새로움을 가져오고, 생활의 새로운  자세가 겉모양의 새로운 변
화 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남강이 바란 것은 겉이 달라지는  일이 아니고, 겉과 함께 내면이 바뀌어 국민 모두의  가슴
속 에 새로운 힘과 벅찬 희망이 부풀어올라, 그들 자신이 덕스럽고  부지런한 활기 있는 새 사람
으로  거듭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강의 민족 운동과 개화주의는 따로따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인 셈이다.
  남강은, 민족을 낡고 컴컴한 동굴에서  밝은 곳으로 이끌어 내는 게 개화주의이고, 그런 개화주
의의 횃불을 높이 드는 게 민족 운동이라고 굳게 믿었다.
  “용동 글방이 신교육 학교가 되었대.”
  “그리고 칠판이런 것이 있는데, 백묵으로 글씨를 쓴대. 그런데 그 백묵이란 것이 쓰고  지우는
데 아주 편리하다는군.”
  남강은 간판을 새로 달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신교육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일부
노인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옛 글을 배우지 않고 어쩌자는 게야”  남강은 학교에 종각을 만들고
종 을 달았다. ‘딸랑딸랑’하고 종 소리가 맑게 울렸다. 이 종 소리가 학생들의 등교와 하교 시
간을  알려 주었다.
  매일매일 시간표에 따라 배우게 하고, 작은 손종을 울려 시간이 바뀌는 것을 알렸다.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긴 것은 산술과 체조였다.
  아라비아 숫자로 1, 2, 3, 4.....  쓰고 그것으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참, 신기하군그래.”
  또 체조라 하여 운동장에서 줄을 서서 앞으로, 옆으로, 뒤로 돌아가며 행진하는 모습도 무슨 구
경거리처럼 신기하게 여겼다.
  또 그는 학생들에게 모자를 씌웠다. 모자는 ‘삽보’라고 불렀는데, 검은 테두리에 위는 붉은색
이었다. 학생들은 바지저고리 차림에 이 삽보를 쓰고 자못 뽐내며 다녔다.
  남강은 강명 의숙에다, 사업을 할 때  쏟았던 정열 이상의 것을 쏟았다. 틈만 나면 강명 의숙의
주위를 돌아 보며 기둥을 어루만지고 문을 열어 보고 방 안의 물건을 정돈하곤 했다.
  남강이 직접 학생들에게 훈시하는 일도  있었다. 그 훈시는 크게는 나라일에서, 작게는 앉고 서
는 일, 웃고름을 단정히 매는  것, 아무 데나 침 뱉는 일을 삼가는 데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
는  대목이 없었다.
  남강은 이 즈음, 중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용동에서 서북쪽으로  3마장쯤 떨어진 곳에 ‘승천재’라  불리는 건물이 있었다. 이것은  고
려  때 향청 자리에 평안 감사  민병석이 세운 건물이었다. 여기서는 한학을 가르쳤었으나, 러일
전쟁 을 거치면서 황폐화되어 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남강은 승천재 자리에  중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건물을 수리하여 교장으로는  백이행이란 분
을  모셨다.
  그리고 학생을 모집하는 한편, 서울로 가서 여준과 서진순이라는 두 선생을 모셔 왔다.
  1907년 12월 24일, 마침내 오산 학교가 개교되었다.  모인 학생은 모두 7명으로, 이윤영·이찬
제 ·이중호·이업·김자열·이인수·김도태 등이었다.
  개교식에서 남강은 말했다.
  “나라가 날로 기울어 가는 지금,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 다. 그
러 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를 누르는 자
를 무 작정 나무라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못났으니 남의 업신여김을 받 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들은 선생과  학생들의 가슴 속에서는 어떤 새로운 희망이 타올랐다.  그것은 신학문을  닦
아 나라의 참된 일꾼이 되자는 것이었다.
  오산 학교가 세워지면서 남강은 더욱  바빠졌다. 학교일도 보아야 하고, 신민회 활동도 해야 했
기 때문이다.
  신민회는 각 도에서 인물을 골고루 뽑았고, 굳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조직되었다. 도산을 중
심으로 해서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전덕기, 주진수, 이동휘, 이강, 최광옥, 이승훈, 안태국, 김동
원, 이덕환, 노백린, 김구, 이갑, 유동렬, 유동작, 양기탁, 신채호, 김홍량, 이종호, 조성환, 김홍서,
임치정, 김지간 등의 회원이었다.
  신민회는 중앙 기관으로 총감독(양기탁), 총서기(이동녕), 재무(진덕기) 등을 두었고, 의결 기관
으로 의사원을 두었는데, 비밀이 철저히 지켜졌다. 왜적의 탐지와 탄압에서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서였다.
  신민회는 비밀 단체였지만, 사업은 공개했다. 평양 대성 학교, 자기 회사, 평양, 서울, 대구의
태극 서관 등이 있었다.
  남강은 신민회의 산업 분야를 맡았기 때문에 자기 회사 사장이 되었고, 태극 서관의 출판과 서
적 판매의 책임을 맡았다. 이어 서울에도 제2의 태극 서관이 생겨 그 관장이 되었지만, 실제 업무
는 안태국이 맡았다.
  신민회에서는 다시‘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청년의 수양을 지도하는 한편,  최남선으로 하
여금 서적 출판과 잡지 발행을 하도록 했다.
  1909년, 통감으로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물러나면서 순종 황제를  모시고 관서 일대를 돌아
본 일이 있었다. 남강은 이 때, 학생들을 데리고 고읍 역에 가서 황제를 환영했다. 열차가 잠깐
쉬는 동안, 남강은 순종을 배알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소.”
  순종은 남강에게 위로의  말을 내렸다. 남강은 감격했다. 그러나 그  옆에 이토가 서 있는 것을
본 순간, 가슴에선 격분이 끓어올랐다.
  ‘이럴수록 우리는 빨리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그 뒤 얼마  안 되어 이토는 하얼빈에서 안
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어 1910년, 데라우치 마사타케라는 자가 통감으로 왔다. 이 자는 이 해 8월  29일, 순종 황제
를 협박하여 합방을 강행했다.
  이보다 앞서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연해주로, 또는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도산은 1910
년 4월, ‘거국가’라는 노래를 남기고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남강의 오산 학교는 위치
관계로 해외 망명 독립 지사들이 들렀다 가는 중계 지점처럼 되어 버렸다.
  이 무렵,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 회의 소집통고가  있었다. 남강도 물론 참가했다.
이  때, 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앞으로의 일을 결정했다.
  “왜적이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도독부’를 두어 나라의  맥을 잇도록 합시다.
그리고 국민들을 끊임없이 깨우쳐 나가야 합니다.” 이 때, 평안 북도 책임자로 남강 이승훈이 뽑
혔다.




  3. 민족 운동

  일본의 우리 나라 침략은 이토 히로부미가 계획했고, 그 하수인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데라
우치는 일본 육군 대장 출신으로 우리 민족의 가장 악랄한  원수였다. 그는 한국을 합방하자 ‘
조 선 총독부’를 두었고, 그 첫번째 총독이 되었다.
  이 무렵, 남강은 오산 학교를 키우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산 학교는 도산이 세운 평
양의 대성 학교와 마찬가지로 신민회의  정신과 이상을 이어받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첫째는 민
족 운동을 할 인재를 양성하고, 둘째는 국민 교육의 스승을 양성한다는 목적을 가졌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학과도 오늘날의 중학교와는 달랐다.
  수신(도덕),역사,지리와 같은 과목이 있는가 하면 국가학,헌법 대의도 있어  민족 정신을 길 러
주는 데 힘이 되었다.
  이윽고 조선 총독부는 우리 민족을 서서히 죄어 왔다.
  예를 들면, 1910년 11월에는 한국인이 저술한 교과서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12월에는 한국 사람
이 회사를 세울 때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 무렵, 안명근은 안 의사가 순국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무고나 학교를 설립하고, 왜적과 무력
투쟁할 군사를 훈련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그 자금을 모으기 위해 황해도  일대의 부자들
을  찾아다녔다.
  왜경의 앞잡이가  이것을 탐지하여 신천역에서  안명근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했다.  이리하
여  김홍량,김구,최명식,이승길,김용제,도인권 등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이것이  바로 ‘안악 사 건
’이다.
  1911년 2울, 남강은  서울의 태극 서관에 볼일이 있어 평양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가 수색역에
닿자, 일본헌병이 승객들을 검문하기 시작하였다.
  “소지품을 전부 내놓아!”
  왜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 안명근과 한패요?”
  왜경은 거칠게 말했다.
  “한패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잔말 말고 조사할 것이 있으니 내리시오!”
  남강은 한 마디 변명도 못한 채 왜병에게 끌려갔다.
  헌병은 남강을 포승줄로 묶고 총독부 경무 총감부 구치감으로 끌고 가서 다짜고짜 고문을 시작
했다.
  “순순히 불어. 안명근과는 어떤 관계지?”
  “한두 번 만나 아는 사이오.”
  “무슨 소리야! 너는 안명근과 공모하여 사람들을 권총으로 협박하고 돈을  빼앗았지?” “여
보 시오! 아무리 사람을 취조한다 해도 내가 강도질  할 사람으로 보이시오!” 남강은 호통을 쳤
으나  왜경은 코웃음을 치며  남강의 두 팔을 뒤로 비틀어  묶고 거꾸로 매달아 때렸다. 남강은
고통에  못 이겨 몇 번이고 까무라쳤다. 취조를 받고 나면 감방까지  걸어오지도 못해 업혀 들어
올 정도였 다.
  모진 고문은 거의 석 달이나 계속  되었다. 왜경은 ‘강도 및 강도 미수죄’, 또는 ‘내란 미수
,모살 미수죄’로 안명근 이하 17명을 재판에 넘겼다.
  그리하여 안명근은 무기  징역, 김홍량 등 17명에게는  최고 15년에서 5년에 이르는  형이 각
각  언도되었다.
  남강은 안명근의 명함을 가지고  있었을 뿐, 사건에는 직접 관련이 없어 다른  40명의 관련자
와  함께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왜경은 더 큰 사건을 꾸미고 있었다.
없는 죄를 만들어 민족 지도자들을 아주 뿌리째 뽑아 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남강은 일본 헌병대  구치감에 있을 때 김용제와  같은 감방에서 고생했다. 김용제는  김홍량
의  숙부로, 양산 학교의 설립자였고 안악 지방의 민족 운동 지도자였다.
  남강은 이 때 기독교 신자였다. 나라를 빼앗긴 직후,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
를 듣고 감명을 받아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김 형, 이것을 잡수시오. 나는  이제 조사가 끝난 사식을 먹을 수 있으니 내  걱정은  마시
오.

  남강은 고문을 받을  때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용제는 남강이 고문을 받고  돌아와
서  컴컴한 감방 구석에 엎드려 기도드리는 것을 여러 번 보아 왔다.
  “하느님, 저들의 조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짓는 죄를 모르고 있는 ,  불쌍 하게
도  길을 잃은 양이옵니다.”
  1911년 4울, 남강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은 그나마 감옥에서보다는  자유가 있었
다.
그는 제주교회 앞에 작은 집을 빌려 낮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일을 도왔고, 밤에는 침침한 등잔
불  아래서 성경 공부와 기도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여기서도 그의 독특한 개화주의 운동을 폈다. 그는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기회
가  있을 때마다 용동 마을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민족주의 고취와 민족성 개조에 대한 말을
잊지  않았다.
  “모두들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거리를  비로 씁시다. 깨끗한  환경
에 서는 병도 덜 생기고, 무엇보다 마음이  밝아져 하는 일이 잘 될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기
전 만 하더라도 우리 민족은 위생  관념이 부족했다. 돼지를 놓아 길렀고, 거리에는 가축들의 분
뇨나  아이들의 똥오줌이 그대로 버려진 채로 있어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남강의 생각은, 이런 것들을  깨끗이 치우자는 것이었다. 남강은 코흘리개들의 코를  닦아 주
고,  옷고름을 단정하게 매어 주었다.
  “여러분! 집을 깨끗이 치우는  일과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일, 부지런히  일하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도와 주는 일, 그것이 바로 나라를 위하는 일이며 개화입니다.”  남강의 이런 말
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것이  너무
도  절실한 문제였다.
  부모들이 게을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개중에는 집이 가난하여 아이
를  학교에 보낼 돈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부모가 진실로 자녀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고, 노름 따위
를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아이를 공부시킬 수 있었다.
  “술담배를 하지 말고, 노름을 하지 맙시다.”
하고 말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깨달아 부지런하고 깨끗한  국민이 되어야지,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은 참다운  고침이
아 니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한편, 오산에서는 남강이 서울로 상경했던 길에 왜경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걱 정을 했다. 그뒤, 제주도로 유배된 다음에야 확실한 소식을 알고 조카 이윤영이 멀리 제주까지
남 강을 찾아왔다.
  “삼촌,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윤영은 남강을 보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나 남강은 첫마디로 이렇게 물었다.
  “오산 학교는 잘 운영해 가고 있겠지?”
  “네.”
  “그럼 되었다. 무슨  일이고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성장하게  마련이다. 학교가 잘 운 영되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다.”
  남강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는 가족들의 안부보다도 학교 일이 더 궁금했던 것이다.
  이 무렵, 오산  학교에는 이광수,윤기섭,장지영과 같은 실력을 갖춘 선생들이  학생들을 가르
치고 있었다. 특히 춘원 이광수는 이  때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벌써 교장 대리 역할을 맡을
만큼 학문이 뛰어났었다.
  조카가 돌아가고 얼마 뒤였다.
  어느 날, 갑자기 제주도의  일본 헌병대에서 10여 명의 헌병들이 몰려와 남강을  다시 포승으
로  묶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로 또 잡아가는 거요?”
  “총독 각하를 암살하려던  음모의 주모자이기 때문이다.” 남강은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
었 다. 이 즈음, 왜경은 민족 지도자의  뿌리를 뽑으려고 혈안이 되어 600여명이나 되는 애국 인
사를  체포했다. 1911년 9월의 일로, 유동렬,윤치호,양기탁,안태국,임치정 등도 이때 검거되었다.
  왜경은 총독 암살이라는 엉뚱한  죄목을 만들어 애국 지사를 체포하고 고문했던 것인데,  이
과 정에서 전혀 모르고 있던 조직을 알아 낸 것이다. 바로 ‘신민회’이다.
  “아니, 조선인들이 언제 이런 조직을 만들었지? 벌써 몇 년 전부터 이 조직이 있었다 니, 그럼
우리는 그 동안 허수아비였단 말인가?”
  왜경들은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는 남강을  부랴부랴 서울로 압송한 것
이 다.
  다시 무서운 고문이 매일처럼  계속되었다. 잡혀 온 몇몇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
해  불행히도 옥사했다. 결국 105명이 기소되었고 그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여
졌다.
  남강은 주모자로 몰려 더욱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젊어서 오
랫 동안 유기 행상을 하며 단련된 탓에 몸도 튼튼했지만, 그보다 뛰어난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이
다.
  “나에게 자백을 하라니 무엇을 자백하란 말이오. 나는 죽을지언정 거짓 자백은 못 하 오.” 남
강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악독한 형리들도 남강의 인격에는 그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받아 몸에서 피가  흐르고 몸이 퉁퉁 부었지만 감방에 돌아오면 단정히 꿇어
앉아 기도를 올렸다. 그는 유동렬을 비롯하여 일곱 사람과 같은 감방에 있었는데, 언제나 방 청소
는 혼자 도맡다시피 했다.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뻬놓고는 늘 손에 걸레를 들고 있었다.
  “남강, 몸을 편하게 가지구려.”
  “아니외다. 걸레질하며 이것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  음
이  편하다오.”
  1912년 10월, 비로소 공판이 열렸다. 남강은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찍혀 10년 형이 언도되었다.
  남강은 그 해 겨울을 대구 감옥에서  보내고, 이듬 해 봄에 마포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는 감옥
에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노끈꼬기,봉투붙이기 등의 일을 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정성을
들였고, 감옥 안의 규칙을 잘 지켜 모범수로 소문이 났었다.
  남강은 감옥에 있을 때 신앙심이 더욱 굳혔다.
  1915년 2월, 남강은 모범수라는 이름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 길로 오산으로 돌아온 남강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감옥이란 이상한 곳일세. 그  곳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을 보면 강철같이 굳어져서   나오
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껍질을 벗긴 삼대)처럼 흐트러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 거든.” 남강
은 오산 학교로 돌아와 오직 학교와 교회 일에만 몸과  마음을 바쳤다. 기독교적 믿음이 더 욱
굳건해져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학생들과  협력하여 교회당을 지었다. 학생들은
돌을 날랐고, 겨울에 땔 장작을 마련하여 쌓기도 했다.
  남강은 오산 학교 선생들의 강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남에게 숨기
지  않았다.
  “젊은 학생들과 함께  배우자면 창피스럽지 않소?” “창피하다니요?  배우는 데 늙고 젊음이
어디 있소.” 그가 뒤늦게 평양 신학교에 입학한 것도 이런 마음가짐에서였다.
  오산 학교는 처음에  향교 재산으로 출발했었다. 그것이  나중에 문제가 생기자 남강은  그것
을  돌려 주고, 형님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땅을 몽땅 팔아  학교의 기본자금으로 삼았다. 윤성
운 등  몇몇 친구들의 도움도 받았지만, 그래도 학교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아무개 선생님 집에 쌀이 떨어졌대요.”
하는 부인의 말에 남강은 말했다.
  “선생님을 굶게 해선  안 되지. 우러급을 넉넉하게 드리지 못해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 이오.
여보, 우리 집 뒤주의 쌀을 퍼다가 당신이 아무도 모르게 갖다 주고 오구려.”  또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 교실에 비교 샙니다.”
  남강은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날이 개자  자기 집 기와를 벗겨 비가 새는 교실의 지붕을 덮었
다.
  그래도 학교 운영이 어렵자, 남강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팔려고까지 했다.
  “사는 집까지 팔 수는 없잖아요?”
  “우리 재산으로 우선 학교 경영에  도움을 주고, 우리는 학교 옆에서 학생들 밥이라도   해
주 며 살면 되지 않겠소?”
  남강의 말에 가족들은 아무런 불만도 말하지 못했다.
  이토록 남강이 정열에  쏟는 학교인 만큼 교사들도  우수했다. 단재 신채호도 해외로  망명하
기  전에 오산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그의 역사 강의는 듣는 사람에게 애국심을 일깨워 주
었다.
이 곳에서 배운 학생들 중에는 뒷날 훌륭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 많다.
  1909년 7월 제 1 회 졸업식 날, 11명의 학생이 졸업했다.
  그 첫 번째 졸업생인  김도태는 뒷날 역사와 지리 학자로 많은  재자를 길러 낸 교육자가 되었
다.
  또 춘원 이광수가  이 학교에 교사로 있었을 때  시인 김소월도 그에게서 배웠다. 춘원은  오
산  학교 교가로 비롯한 갖가지  노랫말을 짓고, 작곡을 하기도 했다. 춘원이 떠난 뒤,  1913년에
는 고 당 조만식이 이 학교 선생으로 부임해 왔다.
  남강은 출옥 후, 고당 조만식에게 교장직을 맡겼다. 남강과 고당은 오산 학교를 기독교 정신 아
래 이끌어 나갔다. 서양 선교사가 세운 학교도 아니건만, 실로 시독교 정신이 왕성했다.
  12월 24일은 개교 기념일, 그리고  25일은 크리스마스라 학교에서 큰 잔치가 열렸다. 해마다 이
때는 학생들의 연극이 공연되기도 했다.
  그런 연극은 학생과 신자들이  힘을 모아 지은 예배당에서 열렸다. 졸업생과 재학생은  물론
이 웃 마을의 사람들도 찾아와 함께 즐겼다. 그들은 연극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서로
즐겁 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졸업생이 재학생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어떤가? 이 교회당이 마음에 드는가? 어쩌면 이 육중한 돌은 내가 학생 때 절골에서  낑낑거
리며 운반한 것인지도 모르네.”
  남강은 졸업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여러 선생님들이 힘쓴 보람이 있어 벌써 5회째의 졸업식을 맞 았습니
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 일이고, 나라를 찾아 영광스 런 나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선 해외에 나가는 일도 필요하 고, 밖에서 군대를 길러 쳐들
어오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밖에서 국민 모두가  깨어  일어나 밝고 덕스럽고 힘있는  사람이 되기 전에는  그런
일도 헛된 수고가 될 것입니다.  나는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 방방곡곡에 흩어져 국 민  속에 들
어 가 그들을 깨우치고 그들의 힘을 길러 민족 광복의 참된 기틀을 마련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
랍니 다.”
  감옥에서 나온 이훅로 남강은 오산 학교를 일본에 대한 진격 기지로 만들려고 힘썼다.
  그러기 위해 새로운 교사를  지었고, 또 좋은 선생을 모셔 왔다. 이 때,  서울에서 조철호,남궁
벽 같은 사람들이 부임해 왔다.
  오산 학교 제 1 회 졸업생부터 제 5 회까지의 졸업생은 모두  합해 70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
나  비록 숫자는 적었으나 그들은 모두 사회의 훌륭한 지도자나 독립 투사가 되었다.
  1918년, 남강의 나이 쉰다섯 살이었다. 이 해, 제 1 차 세게  대전이 끝나면서 나라 안팎의 독
립  운동은 세차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 하나가 한밤중에 남가을 찾아왔다. 그는 오산 학교 졸업생이었다.
  남강은 오산 학교에 다녔던 학생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저는  지금 간도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래, 나에게  무슨
연 락이 있나?”
  “네, 그렇습니다. 전에 학교 선생님으로 계셨던 여준을 대표로 39명의 독립 지사들이  독립 선
언을 발표했습니다.”
  “허허, 마침내 해냈군그래.”
  이 독립 선언은 ‘기미 독립 선언’에 대하여 ‘무오 독립 선언’이라 불리는 것이다.
  남강은 곧 학교 사무실에서 밤이 늦도록 불을 켜고 이해외 소식을 토의했다.
  1918년 12월, 오산 학교 제 3  회 졸업생 서춘이 도쿄에서 비밀리에 돌아왔다. 서춘은 유학생으
로, 하나의 모임을 만들었다. 송진우,김성수,이광수,장덕수, 그리고 서춘이 중심 인물이었다.
  서춘은 도쿄의 우리 나라 유학생들의 움직임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의논한 뒤 돌아갔다.
  이어 남강은 조만식,조철호,남궁벽 등을 불러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그들은 밤을 꼬박 새
며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밖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금 연해주와 간도, 그리고 도쿄의 동지들이 독립선언을 발표하려고 준비하고 있네.
  국내의 우리도 무엇인가 우리 민족이  살아 있다는 표시를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그   방법
은 …….”
  남강은 동지들과 헤어져 잠깐 눈을 붙였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학교 뒤에 제석산이 우뚝 솟아 있다. 노인 하나가 큰메를  가지고 제석산 봉우리를 힘껏 내리
쳤 다. 그러자 우렁찬 소리가 멀리까지 메아리치는 것이 아닌가.
  “허, 참 이상한 꿈이다. 이런꿈을 내 일찍이 꾼 적이 없는데…….” 이어 같은 해 12월, 상해에
서 선우혁,서병호,여운형 세 사람이 독립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내다보니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선우혁
이 서 있었다.
  “자네가 웬일인가? 여기까지 올 때는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선생님, 우리도 독립
선 언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도 찬성하시겠지요?” “좋은  생각일세. 이 이승훈이가
해  놓은 일 없이 죽는가 했더니, 이제야 떳떳하게 죽 을 자리를 찾았네.”  남강은 그렇게 말하
고는 기쁜 듯이 웃었다. 그는 곧 며느리에게  닭을 잡고 저녁밥을 지으라 이 른 뒤, 덧붙여 조카
자경을 불러 오도록 했다.
  자경이 오자, 남강이 말했다.
  “급한 일이 생겨 그러니, 네가 가지고  있는 논 여덟마지기를 팔아야 하겠다. 독립 운 동엔 돈
이 필요하게 될 것이니 나부터 내놓아야 하지 않겠니?” 남강은  이튿날부터 평양으로, 서울로
뛰 어다니며 독립 운동에 대한 계획을 짰다. 기미년 독립 만세는  누구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
진 것 은 아니지만, 이럿듯 선각자들의 숨은 이야기가 있었다.
  1919년 2월, 김도태가 서울에서 오산으로 내려와  급히 남강을 찾았다. 남강은 이 때 마침 선천
에서 열리고 있는 기독교 노회(장로교 각 교구의 목사와 장로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
었 다. 김도태는 이 학교 졸업생 박현환에게 부탁했다.
  “육당(최남선)이 오산 학교 경영 문제로 남강 선생을 급히 뵈려 한다는 말을 전해 주 게.” 박
현환은 선천에 가서 남강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러자 남강은 무척 기뻐했다.
  “됐다. 됐어!”
  이것은 암호로, 남강은 이미 서울의 민족 지도자들과 어떤 비밀스런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만세 운동을 일으킬 준비는  척척 진행되었다. 3월 1일에 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선언하
기로 한 것이다. 억눌렸던  민족의 함성 소리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져  일본일들뿐 아니
라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분은 민족  대표 손병희를 비롯하여 33명이지만 실제로 재판은 48명
이 받았다.
  김도태의 암호 연락을 받은  남강은 즉시 서울로 올라가 송진우를 만났다. 송진우는  계획과
준 비에 대해 말하고 기독교측의 협력을 청했다.
  “기독교는 걱정 마시오. 우리 민족으로선 얼마나 기다렸던 기회요.” 남강은 그 자리에서 쾌히
승낙하고, 밤차로 선천에 돌아와 마침 노회에 참석한  임전백이명룡,유여대,김병조 목사의 천성
과 동의를 얻어 냈다.
  “우리는 모두 찬성이오.  남강이 우리를 대표하여 수고를 해  주시오.” 남강은 다시 평양으로
달려가 손정도 목사를 만나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참가를 요청했다.
  “물론 찬성입니다. 하지만  나는 며칠 뒤 상해로 건너가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행사에   직
접  참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음 날, 손정도는 길선주,신홍식 목사와 몇몇 장로들을 데리고 왔다.
  남강이 계획을 설명하자, 그들은 주저하는 빛을 나타냈다.
  “우리는 종교인인데, 그런  일에 관여하는 것은 아무래도 …….”  그말을 들은 남강은 책상을
치며 호통을 쳤다.
  ‘나라가 망해서 없는데 당신들만 천당에 가  있을 참이오? 이 나라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
데, 당신들만 천당에 올라가  내려다보겠다는 게요?’ 마침내 길선주와 신홍식 목사도  참가를
약 속했다. 남강은 2월 16일  저녁, 서울로 다시 갔다. 그리고 함태영,이갑성과도 만나  그들의 동
의 를 얻었다.
  이 때, 송진우,최린,현상윤 등이 일선에서 뛰며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들 의
행동이 전보다는 열성도 적고  주춤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20일 아침, 남강을 찾아온
최남선과 함께 최린을 찾아가 따졌다.
  “혹시 천도교측에선 이번 계획을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오? 만일 그렇다면 우리 기독 교 단독
의 힘만으로 실행하겠소!”
  최린은 처음 계획대로  두 종교가 협동하여 일을  밀고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숙소로  돌아오
자  박희도가 남강을 찾아왔다. 박희도는 기독교 청년회 간사로 다른  종파의 지도자들과도 아는
사이 였다.
  “마침 잘 되었소. 감리교의 중심 인물과도 만나게 해 주시오.”  그 날 밤, 남강이 약속한 장
소 에 가 보았더니, 거기엔 오화영,정춘수,오기선 등이 와 있었다.
  남강은 이들에게 그 동안의 경과를 설명해 주고, 기독교의  장로교와 감리교가 손잡기로 약속
했 다. 2월 24일, 기독교는  정식으로 천도교와 손을 잡았고, 앞으로는 남강,최린,함태영  등 세
사 람이 모든 일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용운을 통해 불교이 참가를 기다렸다.
  2월 27일, 정동 교회에서  기독교측의 마지막 모임이 있었다. 이 때,  천도교측에서 만든 ‘독
립  선언서’의 문안을 검토했고, 거기에 서명할 민족 대표를 뽑았다.
  1919년 3월 1일 오후, 남강을 비롯한 민족 대표 33명은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 선언문’을
낭 독했다.
  “대한 독립 만세!”
  이들은 목이 터져라 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전화로 왜경에게  통고하여
붙 잡혀 갔다.
  이들은 별로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조서가 작성되는 대로  검사국에 넘겨져 서대문 감옥
에  갇혔다. 이어  처음부터 이 사건에 관계한  현상윤,송진우,정노식,김도태,함태영,김세영,김 지
환,임규,안세환,최남선,박인호,노헌용,김흥규 등이 잡혀 왔다.
  이 때는 ‘예심제’라는 게  있었다. 예심 판사가 검사처럼 피고를 취조하고 기소  여부를 결
정 한다.
  3,1운동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독립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경들은 내란죄로 몰아붙였
다.
  거기다 수안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내란죄가 된다면서 ‘수안  사건’관련자 이경섭,한병익 두
사람을 추가시켜 피고는 모두 48명이 되었던 것이다.
  1920년 7월 12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남강은 주모자로 낙인 찍혀 손병희 등 민족 대표 33
인 가운데에서 형량이 가장 긴 징역 3년이 언도되었다.
  감옥 안에선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손병희,이승훈,최린은 최고 주모자라 사형당할 게 틀림없어.” 그런  소문을 듣고도 남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기가 죽어 있는 동지들을 보고 호통을 쳤다.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이 죽을 줄 모르고 했단 말이오?” 판결이 나자 서대문에서 마포로 옮
겨졌는데, 남강은 솔선하여 작업을 했고 변기 청소를 도맡아 했다.
  그는 감독 안에서도  독립 운동을 했다. 1921년 3월  1일을 기하여 수감다 모두가 ‘대한  독
립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수감중에 남강은 슬픈 일을 맞게 되었다.  1921년 6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
이다. 남강은 성경을 읽으며 모든 슬픔을 이겨 냈다.
  남강은 감옥에 있는 동안 구약 성서를  10번 읽었고, 신약 성서는 40번을 읽었다. 그 밖에 기독
교 서적 7만여 페이지를 독파하였다.
  “장차 내가 할  일은 나의 몸을 몽땅 하느님께 바쳐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내가   일
할  교회는 일반 세상 목사나  장로들의 교회는 아니다. 온전히 하느님께서 한민족에게   복을
내리시 려는 그 뜻을 받아, 동표의 교육과 산업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
안  남강은 수없이 잡혀 오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가 되었다.
  간수들은 이런 남강에게 갖가지 협박을 하며 학생들에 대한 격려를 막으려고 했다.
  “쇠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남강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간수는 그 손을 회초리로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어떤가, 또 그런 짓을 하겠는가?”
  “하겠소. 그것이 이번 독립 운동을 일으킨 책임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오.” “무엇 어쩌고
어째?”
  일본인 간수는 약이  올라 회초리를 마구 휘둘러 남강을  때렸다. 그 때도 남강은 고통을  참
아  가며 마음 속으로 기도를 했다.
  “어때, 이만하면 정신이 들었겠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맹세해라.” “나는 거짓말을 못 하
오. 앞으로도 가엾은 학생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겠소.” 일본인  간수는 약이 올랐다. 그는 남
강 의 손가락 사이에 긴 막대기를  꽂고 비틀었다. 뼈가 ‘으드득’소리를 냈다. 살갗이 터지고
피가  흘렀건만 그는 온화한 얼굴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남강은 그런 뒤에도 여전히 학생들을 격려했다.
  도쿠다라는 일본인 간수는 마침내 남강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당신은 정말 놀라운 정신력을  가졌소. 아마 당장 이자리에서 죽인다 하더라도 뜻을   굽히
지  않을 것이오.”
  사실 정신력이 약한  사람도 있었다. 48명 중의 한  사람인 안세환은 독방에 갇혀 있다가  정
신  발작을 일으켰고, 양한묵은 옥고를 못 이겨 죽고 말았다.
  남강은 옥중에서 수없이 기도를 올렸다.
  그는 자신이 옥에 들어와 있는 것도 그리스도의 뜻이며, 가르치고  뉘우치게 하여 장차 크게
쓰 시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몸과 마음이 고달퍼도 자신은 주의 은혜속에 있다고늘 감사드렸
다.
  그리고 찬송가도 불렀다.
  남강은 감옥에 있을 때 오산 학교가  불탔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정주에선 기미년(1919년) 3
월 5일에 학생들과 군민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왜경들은 조만식 교장과 선생 여럿을 잡아 갔고, 학교  건물에 석유를 끼얹어 불질러
버 렸다.
  “오산은 ‘불련 선인(불만을 가진 조선 사람이란 뜻)’의 소굴이다. 그런 자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불을 질러 없애 버려야 한다.”
  총독부의 헌병 경찰은 눈이 뒤집혀 있었다. 그래서 오산 학교를 밤낮으로 감시했었다.
  남강은 이 소식을 옥중에서 듣고 크게 탄식했다.
  “아, 잿더미만 남았겠지. 지난번에 감옥에서  나갔을 때 선생들과 학생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지은 학교가 아니었던가. 돌 하나, 기왓장 하나에도 선생들과 학생들의 땀이 서 려 있는데 한순간
에 잿더미가 되어  없어지고 말았구나.” 남강으로선 오산  학교의 없어짐이 자식을 잃은  것만
큼  이나 슬픈 일이었다.
  오산에 남아 있는 졸업생이나 선생들은 이 오산 학교를  살리고자 애를 썼다. 이윤용,김이열,
김기홍 등이 발벗고 나섰다.
  그리하여 학교 문을  닫은 지 1년이 지난 1920년 봄에는  타다 남은 기숙사를 손질하여 흩어진
학생들을 다시 모아  글을 가르쳤다. 이 해 가을에 부흥  개교식도 가졌고, 김이열이 교장 대리로
학교를 꾸려 나갔다.
  이어 조만식도 돌아와  전에 교회당이 있던 자리에  가교사를 짓기로 했다. 이번에도  학생들
이  선생들과 함께 돌과 재목을 날랐다.
  교실 세 칸을 지었는데, 지붕은  이엉으로 덮어 놓아 수업중 지푸라기가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
러나 학생들은 배우는 기쁨에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1922년이 되면서 김기홍은 본교사를  짓기로 했다. 이리하여 불탄 학교의 네 갑절이  되는 말
쑥 한 교사가 완성되었다. 남강은 옥중에서 면회온 사람을 통해 그 소식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
했다.
  이 무렵, 조만식은  총독부가 발령을 내 주지  않아 교장직을 떠났고, 유영모가  교장이 되었
다.
이 무렵의 선생으로 기억될 만한 분은 뒷날의 소설가 염상섭과 시인 김억 등이 있었다.
  학생도 2백 명이 넘었는데, 멀리 함경도,경상도와 전라도에서도 모여들었다.
  남강은 1922년 7월 21일에야 비로소 석방되었다. 그는 수감된  48명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석
방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오히려 취재하러 온 ‘동아 일보’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은 사람이 모두 출옥하고 나만 남아 있었는데, 나는 진실로 아침 저녁 기도하기를,  이렇게
나오게 되지말고 하루라도 거기에 더 머무르면서 우리 형제들의 마음을 위로코 자 하였소.” 남
강은 민족 지도자로서, 아직도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혀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
아팠던 것이다. 그의 말은 아무런 꾸밈이 없었지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그는 서울에서 며칠 쉬고는  오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번듯하게 세워진 오산 학교의  새 교
사 를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때가 1922년으로 남강의 나이 쉰아홉 살이었다.
  남강은 유영모 교장을 비롯해 여러 선생들을 만나 보고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앞 으로의 학교 발전에 대해서도 의논했다.
  “오산 학교는 악독한  왜적의 총칼 아래서도 결코 죽지  않아.” “그렇습니다. 학생들은 오산
학교를 무척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기숙사들의 학생들은 이른  아침에 구보를 하며 우렁
차 게 교가를 불렀다.

  네 눈이 밝구나 엑스빛 같다.
  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
  온가지 진리를 캐고 말련다.
  네가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
  그리곤 학교 앞을 흐르는 시냇가에 나와 줄을 지어 세수를 했다.
  남강은 용동에 돌아온 첫밤을  감격스럽게 보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들려 오는  학생들의
교 가를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들었다.
  둘째 딸 숙경이 옆에서 말했다.
  “아버지, 옛날 생각 나세요?”
  “그래, 내가 오산 하교를 처음 세우던 때가 생각나는 구나. 덞은 청년들이 있는 한 이  나라에
는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단다. 나는 오산을 이상촌으로 만들고 싶 었다. 다행이도 많
은 인재들이 길러져  내마음도 흐뭇하구나.” 이 무렵의  학생으로는 강기봉,함석헌,홍종인,백 인
제,주기용,박동진,주기철,이택호,한경직,김홍일 등이 있었다.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가치제로 생활했다.
  학교는 마치 하나의 가정 같았다.
  기숙사 생활도, 시험 보는 것도, 동문회 모임도, 학생들의  풍기 단속도 모두 자치적으로 이루
어 졌다. 기숙사 규칙도 학생들이 만들어  지켰고, 시험도 선생이 문제만 내놓고 나가면 제각기
답안 을 싸서 내놓았다.
  동문회 모임도 화평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진행했고, 고집을  부리거나 문란하게 떠드는 학
생 도 없었다. 편을 나누어 토론회를 할  때에도 서로 질서 있게 이론을 토론하였고, 결코 남을
헐뜯 거나 말꼬투리를 잡아 따지거나 하지 않았다.
  이런 전통은 남강이 학교를  세우면서 만든 것이었다. 그는 선생과 학생이 함께  기거하고 같
이  일하는 전통을 세웠다. 그것을 고당 조만식이 더욱 튼츤하게 다져 놓았다.
  고당은 교장으로 있을 때, 아침 6시에 일어나 학생들과 함께 체조를 하고 구보를 했다.
  또 오산 학교에는 사환이 없어 선생과 학생이 자청하여 난로를 피우고 장작을 팼다.
  한경직 목사가 오산 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는 저녁 자습 시간에 공부를  하다가 피곤하
여  그만 하품을 길게 했다. 그 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학생이 문을 열자,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교장 선생님인 고당이 서 있었다.
  “방금 하품을 한 학생이 누구지?”
  “접니다.”
  “아직 어린 학생이 공부 시간에  하품을 하다니. 남이 볼 때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할 게   아
니 냐?”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오산의 학생들은 이렇듯 훌륭한 지도자 아래에서 씩씩하게 자라고 있었다.
  고당은 학생들에게 늘 말했다.
  “검소한 생활을 합시다.”
  그래서 학생들도 무명옷을 즐겨 입고, 팥비누를 썼으며 소금으로 이를 닦았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역사선생으로 이상정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늘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는
멋 쟁이였다.
  하는 조회 시간에 고당이 말했다.
  “오늘은 이상정 선생께서 여러 학생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고당이 내려가고
이 상정이 단에 올라서서 말했다.
  “나는 여러 학생들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빌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더니 두루마기를
벗 었다. 이상정은 안에 비단 조기를 입고 있었다.
  학생들이 수군거리더니 곧 조용해졌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학생들에게 검소하라고  가르치면서, 나 자신은 집에서 비단옷도 입 고, 담
배도 피웠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야  그런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알았습니다.” 이상정은 비단 조
끼를 벗어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찢어 버렸다.
  이런 검약 정신은 도산,남강,고당을 통해 흐르는 하나의 생활  철학이 되었다. 선생들과 학생
들도 자연히 그런 것을 본받아, 낭비하지 않고 검약하며 사는 정신을 배웠다.
  한편, 남강은 옥중에서 쇠약해진 몸을 쉬기 위해 해운대로 갔다. 예전과는 달리 남강도 이제 나
이가 많아 숨이 차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남강은 해운대뿐 아니라 창원,마산,진주,순천 등지를 돌아다녔다. 어디를  가나 그는 외롭지  않
았다. 오산 학교의 졸업생들이 각지에 흩어져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2년, 일본이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교묘한 방법으로 강화시키고 있었다. 교육령을 새로 정하
여 일본인과 한인의 교육을 차별했고, 일본 아이들의 학교는 소학교,중학교라 하고, 조선 아이의
학교는 보통학교,고등학교라 구분했다. 따라서 오산 학교는 ‘오산  고등보통학교’가 된 셈이었
다.
  그리고 대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대학교 과정으로 전문 학교가  있었지만 완전한 종합 대학교
는  아니었다.
  “민족의 앞날을 위해선 우리  나라에도 대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인들과 경쟁하  여
이 길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는 또 이 무렵, 덴마크의 ‘국민 고등학교’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 국민이 잘 살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언가 한 가지씩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
남강은 이런 ‘실과 교육’에도 마음을 두고 자나깨나 그런 것을 생각했다.
  1922년 가을, 유영모가 교장직을 그만두고 이구하가 새 교장으로 부임했다.
  남강은 해운대에서 올라온 뒤에  산천 사람 오치은을 찾아갔다. 오치은은 그 옛날  남강을 믿
고  도움을 주었던 철산의 오삭주의 아들로 부자였다.
  그는 돈이 많을  뿐 아니라, 민족 운동에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도산이
대성 학교를 세울 때 많은 돈을  내놓았으며, 선천 전기 주식 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이것은 최
초의 한국인 소유의 화력 발전소였는데, 총독부 정치 아래 문을 닫아야만 했다.
  “남강 선생, 잘 오셨습니다.”
  “나를 좀 도와 주셔야겠소.”
  그러자 오치은은 웃으면서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을 하실 생각입니까?”
  “우선 오산 일대에 이상촌을 만들고 싶은데, 그러자면 튼튼한 재단이 있어야겠소.” 남강은 열
심히 설명했다.
  오산 학교를 모체로 하여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도 만들고, 기독교적 수양을 위한  수도원도
만 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비록 우리의 적이기는 하지만 배울 점이 있을 테니 일본에  다녀오시
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오.”
  1922년 12월, 남강은 일본 시찰길에 올랐다. 통역으로 유동렬의 아들 유용턱을 데리고 갔다.
  “선생님께선 외국 나들이가 처음이십니까?”
  “처음일세. 마치 소년처럼 가슴이 설레는군.”
  그래서 그들은 한바탕 웃었다.
  그들은 시모노세키에서 기차를 타고 줄곧 바닷가를 끼고 여행했다.  차창 밖을 내다보던 유용
탁 이 또 물었다.
  “선생님, 주위의 경치가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음, 아름답기는 하지만 웅대한 자
연미가 없군.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네.” 그런데 남강이 일본에 여행하면서 칭찬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허, 참으로 부지런한 백성이로군.”
  “무엇을 보시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기차를 타고 오면서 줄곧  생각했네. 보게나, 저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층계식으 로 밭을
일구고, 과수나 차나무를 심어 놓지 않았는가. 한 치의 땅도 놀리지 않고 있 네.” ‘역시 남강
선생은 보는 눈이 다르구나.’
하고 유용탁은 생각했다.
  남강은 도쿄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교육 시설, 대학교를 견학햇다. 도쿄 말고도 요코하마,오사
카,교토,고베,히로시마,후쿠오카 등의 농촌과 공장 지대를 돌아보았다.
  “교육이나 공업은 많이  발달돼 있군.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앞으로의 일본을 망하게   하
고  말 것일세.”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는 저 군도를 차고  다니는 일본 군일일세. 그들의 모습을 보게나. 자못 교만하  고, 눈
에 는 살기가 가득하네. 성경에도 칼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네.” 유용탁은 고개를 끄덕였
다.
  “또 한가지는 무엇입니까?”
  “미신이 너무 많네.”
  한길 옆 나무에는 웃긋불긋한  헝겊이 매달려 있고, 온갖 신사와 사찰과 사당들이  곳곳에 있
었 다. 그리고 모시고 있는 신도 가지각색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남강은 그런 것이 미신으로 여겨졌고 못마땅했다.
  남강은 히로시마를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귀국했다. 그는 이번 시찰  결과를 혼자 곰곰이 생각
하 며 정리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은 너무나 차이가 많다. 일본의  푸른 산과 한국의  헐벗
은  산들……. 그러나 그것은 산의 탓이 아니고  사람들 탓이다. 사람이 잘 가꾸기만  하면 메마
른 산 도 푸른 동산이 될 수 있으리라.’
  남강은 해운대에서 쉴 계획이었지만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 곧장 오산으로 돌아
갔다. 선천의 오치은과 약속한  재단을 하루바삐 만들어 이상촌을 건설할 꿈에 불타  있었던 것
이 다.








  4. 사회 활동

  재단은 선천의 오치은 말고도 박천의 이경린, 의주의 한정규, 그리고 역시 선천 갑부 전봉현 등
이 많은 돈을 희사하여 만들어졌다.
  남강은 교육 재단의 성격을 몇 가지로 정리했다.
  1) 재단 법인을 만든다. 이 무렵으로서는 상당히 앞선 생각이었다. 법인은 공공성을 띤   것으
로  어떤 개인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오산 학교의 제2교사를 새로 짓는다.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이것은 곧 착수되었다.
  3) 덕과 학문이 높은 교사를 데려온다. 남강은 이 계획에 따라 이윤재,임규 같은 유능 한 선생
을 오산 학교로 모셨다.
  4) 운동장과 학교 농장을 넓히고, 연습림(학생들이 실습을 하는숲)을 둔다.
  5)  병원,교원 사택,목욕탕을 짓는다.
  6) 동민과 학생들을 위한 협동 조합을 만든다.
  7) 절골에 뽕나무를 심고, 학교 부속 직조 공장을 만든다.
  이리하여 1924년 봄. 벽돌로  된 제2교사가 준공되었다. 이제 오산 학교는 학생7,8백  명을 충
분 히 수용할 학교로  발전되었다. 병원,교원 사택,목욕탕도 벽돌로 지어져 근대식  건물의 모습
을  자랑했다.
  남강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전처럼 직접 학교 종을 울리거나  자주 학생 앞에 나서거나 하
지  않았다.
  남강의 말은 구수했고 유머가 넘쳤다.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았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
여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또 3,1운동 후, 감옥에서 나온  뒤로는 양복을 자주 입었다. 양복이 활동하기에 편리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학교에만 있을 때에는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남강은 키가 호리호리하게 컸으며 깨끗한 인상을 풍겼다. 눈이 맑고 부드러웠으며, 자세는 언제
나 반듯했다. 그리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양복 주너미에 손을 넣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말을 타고 다니지 않았고 꼭 걸어다녔다.
  이것은 고당이 평양에서  벌이고 있는 신생화 운동과도  관계가 있었다. 고당은 동지들과  손
을  잡고, “우리 물건을 씁시다.”
하는 ‘물산 장려 운동’을 벌였으며, ‘관서 체육회’를 조직하여 동포들을 일깨우고 있었다.
  1924년 5월, 남강은  ‘동아 일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동아  일보는 발행 초부터 민족주의를
내걸고 국민을 일깨우려고 힘을  썼으며, 이 대문에 총독부의 비위를 거슬려 여러  번 정간당하
는  시련을 겪었다.
  “나더러 신문사 사장이 도라니  참으로 황공한 일이오. 신문사의 모든 업무와 재정은   김성
수  씩 맡고, 편집은 설의식 씨가 맡도록 하시오. 나는 사장으로서 책임이나 지겠소 !” 남강은
어떤 명예를 위해 신문사  사자이 될 것을 승낙한 것은 아니었다. 오산 학교나  동아 일 보를 맡
는 것이 그의 생각으로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입 밖에 드러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속으로 이런 결심이 있었다.
  ‘민족의 신뭉으로서 국내 투쟁을 하다가 잡혀가는 일이 있다면, 내가 감옥에 들어가면 된다!’
남강은 서울과 평양, 또 정주를 오가면서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는 동아 일보 사장
실보다도 가독 청년 회관과 조선 교육 협회 사무실에 나가는 일이 더 많았다.
  이 때,  ㅈ로 접촉한 사람들로는 이상재,유진태,최린,이돈화,박희도,이갑성,안재홍  등이  있었다.
  이상재(1850∼1927)는 ‘갑신정변’ 때 개화파로 활약한 사람이었다.
  그 뒤, 월남 이상재는 윤치호,이승만 등과 ‘독립 협회’를 이끌었고, 1908년에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많은 활약을 했다. 그리고 1924년에는 ‘조선  일보’사장으로 추대되어 왜적의
총 독 장치에 대항했다. 이때, 월남 이상재는 이런 말을 했다.
  “조선 일보는 동아 일보와 경쟁하지 말고,  함께 마음을 합하여 민족 계몽에 앞장 서야  하오.

  월남은 교육 사업에도 힘쓰고 있었다. 월남은 ‘조선 교육 협회’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우리 조선에도 대학이 있어야 하오.”
  “물론입니다. 문제는 저들이 대학 설립의 허가를 내줄지…….” “그렇다면 싸워서라도 허가를
받아 내야지요.”
  월남은 남강을 늘 같은 말을 했다.  ‘민간 대학의 설립!’그것은 남강도 진작부터 생각해 오던
목표였다.
  그래서 ‘만립 대학  설립 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월남,남강,유진태 등이  중심이 되
어 총독부와 활발한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예상했던 대로 허가하지 않았다.
  기록을 보면 1922년 12월부터  이 대학 설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1923년 4월에는 민립  대학
기 성회 총회도 열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갖가지 구실을 붙여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아직 대학 교육을 받을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소.  또 경제적으로도 대 학을
유 지해 나가지 못할 것이오.”
  월남과 남강 등은  분개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총독부는 이것에 자극을  받았는
지  1924년 5월에 경성 제국  대학 예과라는 것을 만들었다. 예과는 전문학교 과정으로  거기서
2년을  마치면 본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경성 제국 대학(지금의 서울  대학)도 일본인 학생을 우한 대학으로, 우리 조선 사람
은 극소수밖에 입학시키지 않았다. 경성 제국 대학이 생기자, 민립 대학 설립은 가망이 없게 되었
다. 어느 날, 월남,남강,유진태  세 사람은 교육 협회 사무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남강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는 간판도 보기 싫으니 떼어 버립시다.”
  “아니오, 간판이라도 걸어 두고 봅시다.”
  월남 이상재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남강은 홧김에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결코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대학 과정의 교육을 젊은 청년들에게 꼭 시키고 싶었다.
  ‘이름이야 어떻든 우리 청년들에게 고등 교육을  시켜야 장차 우리가 독립을 되찾았을  때 나
라를 건설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남강은 총독부와 도청을 자주 찾아가 일본인 관리를  만났다. 남강의 마음을 모르는 일
부  사람들은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요즘은 남강 선생이 많이  변했어. 어째서 원수 같은 왜놈들을 찾아다니며 굽신거리고   계
실 까?”
  그러나 남강이 독립 정신을 잃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최창학이라는 사람은  ‘조선의 금광왕’이라 불렀다. 금광에서  노다지를 만나 큰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남강이 최창학을 찾아갔다. 그와는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여보게, 나하고 어디 좀 가세. 그런데 지갑에 돈을  두둑하게 넣고 나와야 하네.” “알았습
니 다.”
  최창학은 영문은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남강을 따라나섰다. 남강은  차를 잡아타고 어느 조그
만  골목에 이르자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산 밑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이르러 주인을 찾았다.
  그러자 안에서 예순 살쯤  되어 보이는 노부인이 나왔다. 얼굴은 기품이 있어  보였으나 가난
과  고생, 그리고 늙음과 병으로 찌들어 있었다.
  “아, 이승훈 씨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아주머니 들어가 저의 절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최군,  들어오게.” 노부인은 극구 사양했지
만  남강은 큰절을 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자, 최 군. 자네가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이분에게 드리게.” 최창학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러고는 돌아오는 길에 남강에게 물었다.
  “대체 그 부인이 누구입니까?”
  “자네는 운강 양기탁(1871∼1938) 선생을 알고 있나?” “네, 이름만은…….” 운강은 평양 사
람으로,  ‘대한 매일 신보’주필로 있으면서 한말의 언론계를  주름잡으며 일본 의 침략을 통렬
히 비판했다. 그 뒤  ‘국채 보상금’모금에 앞장을 섰고, 그 당시 벌써 ‘민립 대 학 설립’운동
을 벌였었다.  또 신민회 부회장으로 ‘105인  사건’때에는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1916년에는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 운동을  했고, 일경에 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에 다시 국
외로 탈출하여 독립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남강은 말했다.
  “그런 독립 투사의 부인이 지금 온갖 고생을 겪고 있는데 돕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나.
  또 그런 훌륭한 부인들이 그토록 구차하게 살고 있으니 어지 이 백성이 흥할 수 있겠는 가!”
1926년 4월, 순종 황제가 승하했다.  순종의 인산(국장)을 기하여 독립 만세가 또 불려졌는데, 3
,1운동에 비한다면 훨씬 국민의 호응이 적었다. 이것은 그만큼  독립 정신이 약해진 탓이기도 했
다.
  국외에서도 계속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선 좀 다르게 독립 운도을 하고 있었다.
  ‘총칼로 직접 왜적과 맞서  싸우는 독립 운동도 필요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지혜와   굳
은  정신으로 일제와 싸워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민족 지도자가 모두 국외로 탈출하여  왜적
과 싸 운다면, 국내에 남아  있는 동포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이 월남,남강 같은  지
도자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또 1910년대와 1920년대는  국내외 정세가 여러 가지로  달랐다. 일본은 이미 한반도를  완전
히  점령하고 대륙을 넘겨다보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점령했다는 것은, 군사력으로 영토를 점령했다는  뜻만이 아니라 우리
민 족의 마음마저도 갉아먹고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의 마음마저 왜적에게 빼앗긴다면 우리가  저들의 노예가 된 것이나 다를 게  무엇
인가!’
  그것을 이겨 내는 길은 굳은 정신력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고당이 평양에서 ‘관서 체육회’
와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고,  국민에게 계몽한 것도 왜적에게  굽히지 않는 정신력을 길러
주기  위해서였다. 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무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남강은 이런 고당을 다시 오산 학교 교장으로 오게 했다. 이것은 1925년의 일로, 고당은 여전히
검정 두루마기에 머리는 까까머리였고, 말총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 저고리와 두루마기
에 고름을 달지 않고 단추를  달아 입었다. 바지는 양복바지처럼 아랫도리를 좁힌 것이었다. 우리
의 전통을 지키되 활동에 불편한 점은 고쳤던 것이었다.
  1926년 여름, 남강은 기어이  일본인 관리를 움직여 전부터 신청했던 황무지 개간  허가를 얻
어  냈다. 황무지는 안주에 있는 갈대가 우거진 갯벌로 3백 정보나 되었다.
  남강은 이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오산 협동 조합’을 만들었다.  물론 협동 조합은 농지
개 간과는 직접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오산을 하나의 이상촌으로  만들겠다는 남강의 계획에는
학교 의 교육도, 농지 개간도, 협동 조합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었다.
 협동 조합은 처음에는 오산의 학생들과 주민을을 위해 만들었다.
  협동 조합은 쌀과  옷감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과  학생들이 쓰는 학용품을 공급했다.  주민들
과  선생들을 조합에 들게 하고, 이사와 평의원회를 두어 운영케 했다.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은  학부모가 돈을 부쳐 오면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고 학교에 맡기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담임 선생의  승낙 아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금전 출납부에 쓸  용도를
기 입하면, 이것을 가지고 조합에 가서 물건을 살 수 있게 했다.
  이것은 퍽 까다로운 절차 같지만, 절도 있는 생활과 낭비를 막는 데 효과가 있었다.
  “돈은 있으면 쓰기 마련이야.  그 쓰고 싶은 것을 조금만 참으면  저축도 할 수 있고,  정말로
요긴할 때 쓸수가 있네.”
  남강은 평소 그런 말을 학생들에게 자주 했다.
  남강의 이런 생각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상적인 사회를 영어로 ‘유토피아’라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들 모두가 평등하고, 교
육과 신앙의 자유가 있다.
  또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무릉 도원’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로,
살기 좋고 근심이나 걱정이 조금도 없어 신선의 생활을 즐길 수 잇는 곳을 뜻한다.
  그러나 남강의 이상향은 유토피아나 무릉  도원과도 달랐다. 그런 사회는 있을 수도 없지만, 사
람들이 게을러지고 정말 사람다운 생활도 할 수 없게 된다.
  땀 흘려 일하여  먹을 것을 얻고, 늘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 없는 곳이라면, 남강으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이 무렵, 마침 좋은 본보기가 있었다. 덴마크의 그룬트비히(1783∼1872)의  교육 사상이 우리
나 라에도 들어왔다. 그룬트비히는 신학자로,  국민 고등 학교 교육을 부르짖고, 황폐한  덴마크
를 이 상적인 농업 국가로 만드는 데 이바지한 사람이었다.
  “우리에겐 정신과 함께 기술이 필요하다. 남녀 노소가 저마다 한  가지씩 기술을 익혀  부지
런 히 일하고, 물건을 만드는 일이 소중하다.”
  남강은 이런 덴마크의 ‘실과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알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
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대위   박사를 만나 얘기를 들었고, 또  평양의 이훈구 박사를 찾기도 했다.
이훈구는 미국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숭실 전문 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이 박사, 이 늙은이는 민립 대학을 설립하려다가 끝내 저들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 실 패했소.

  “그야 내 주지 않겠지요. 하지만 농과 대학을 설립한다고 하면 혹시 허가해 줄지도 모 르지요.

  남강은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영감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 법과나 문과 계통의 대학을 만들겠다고 했기 때문에 허가를 해 주지 않았구 나. 그러
나 농사꾼을 만드는 농과 대학을 세운다면 그들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농 업은 조선의 독
립  운동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래서 나강은  이쿠다라는 일본인 지사를
찾아 다니며 농과 대학 설치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이런 남강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바로 고당 조만식 같은 사람들이었다.
  “남강 선생, 지금 왜적들의 식민지 정치가 극에 달한 이 때에 무엇  때문에 그들의 굴 레 속
으 로 드러악려 하십니까?”
  그러나 남강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들에게 아부한다고 욕을  먹어도 좋소. 하지만 나 하나를 희생시켜 숨낳은  청 년들
이  앞선 농업 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이런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남강은
열심 히 뛰었다. 때마침 황해도 신천에 ‘농민 학교’가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남강은 곧 신천으로 달려가 그 학교의 교육 내용과 교육 과정에 대해 알아보았다.
  신천 노민 학교는  왕재덕 여사가 일생 동안 모은  재산을 희사하고, 안정근 김선양 두  사람
이  추진하고 있었다. 안정근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었고, 김선양은 남강과 함께 옥고를 치렀었
던 김 용제의 아들이었다.
  남강이 이 학교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가는, 그가 신천을 일곱 번이나 찾아갔고, 편지를 30여
통이나 보낸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무렵, 왜적과 싸우는 독립 지사들 사이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지는 움직임
이  나타났다.
  남강의 오산 학교에도 그런  사상에 물든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남강의 ‘자기
를  버린다’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인과 협력한다고 손가락질을 하였다.
  어느 날, 곽산에 사는  박균이라는 청년이 남강을 찾아왔다. 박균은 공산주의자로,  남강에게
자 신의 생각을 주장했다.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공산당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특히 일본  공산당과 손을 잡으 면 유
리 할 것입니다.”
  이 말에 남강은 조용히 타이르듯이 말했다.
  “아무리 독립이 급하다 하더라도 러시아나 일본 공산당의 힘을 빌려  하는 것은 잘못이 야.
더 욱이 공산당은 종교도 무시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네. 나는  그런 사상에 는 절대로
찬성 할 수 없네.”
  “그것은 낡은 사상입니다.”
  하고 박균은 우겼지만, 남강은 그들과의 협력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나 이 당시,  일제의 총칼 아래 민족의 앞날을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젊은
청년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았고, 그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그  쪽으로 이끌리
고  있었다.
  1926년 가을, ‘신간회’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이것은 민족 진영과 좌익 진영이 합쳐져 만들어
진 단체였다. 남강도 여기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아  참가하지 않
았 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선생은 어째서 참가하지 않습니까?”
  “나는 정치 운동보다 교육 운동에 남은  여생을 바치고 싶기 때문이오. 또 한 가지는,  민족주
의자와 공산주의자는 물과 기름 같은 관계로, 서로 융합될 수 없어 오래  가지 않 아 분열되고
말  것이오. 그러므로 참가하고  싶지 않소.” 남강의 이런 행도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남
강의  말은 옳았다. 신간회는  내부 싸움이 잦았다. 공산주의자는 민족  진영을 이용하려고만 했
던 것이 다. 남강은 오로지 교육 사업에만 열중했다. 오산에 여학교와 농과 대학을 세우는 것이
그의 소원 이었다.
  남강의 생각은 이스라엘 예언저들의 자기 동족에 대한 생각과 비슷했다.
  남강은 민족에 대해 세 가지를 생각했다.
  1) 가난과 멸시에서 벗어나야 한다.
  2) 민족의 나쁜 점을 고쳐 거듭 태어나듯 깨닫도록 해야 한다.
  3) 지상에 있는 여러 겨레는 하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의 신앙에서  비롯된 신념이다. 남강도 젊었을 때,  특히 국권이 강탈되었을 당시에는
절망에 바져 마음을 정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교회가 눈에 띠어  무심코 들어갔다. 평양 산정현 교회로, 특별 설교가 있다는
방이 있었다.
  ‘십자가의 고난’
  남강은 교회 안으로 쭈뼛쭈뼛 들어갔지만 사람이 별로 없어  휑뎅그렁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목 사의 설교가 시작되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렸다.
  ‘왜 그런지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이 보이는 것 같다.’ 남강은 학교에
돌아오자, 선생과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나는 오늘부터 예수를 밑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는 누구든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예
배 를 보고 기도를 합시다.”
  이리하여 학교는 조그만 교회를  겸하게 되었고, 신앙을 가진 선생과 학생들이 모여  목사 없
는  예배를 이끌어 나갔다.
  남강은 마태 복음의 한 구정을 열심히 읽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들을 쉬게 하리라.’ 남강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 아래 신음하는 우리 백성들이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잇게 하기 위해 교회를 짓기로
결심했다. 이래서 1910년 10월, 오산 학교에 교회당 겸 강당을 세웠다.
  1915년, 감옥에서 나오면서 남강의 신앙심은 더욱 굳어졌다.
  “교회를 위해 일하려면 교리와  성경을 더욱 많이 알아야 한다.” 이런 결심으로  남강은 평
양  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배워  감사합니다.” 남강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 적은 사람들에
게도 꼭 ‘감사합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감사 선생’이란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남강이 신학교에서 배울 때, 함태영은 그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이 때문에 3,1운동을 함께 추
진했고, 일생을 통해 변함없는 신앙과 민족 운동의 동지가  되었다. 또 백영업과도 친했는데, 그
는  나이로는 남강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산책을  하며 신앙에 대해 의견
을 나 누었다. 배우는 데는 나이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남강은 1년 남짓밖에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나, 1916년에 장로가 되면서 신앙심을  더욱 불
태 웠다. 그로선 학교가 교회였고,  교회가 학교였다. 그는 교회의 장로로 직접 종각의 종을  울
려 가 며 교회를 이끌어 갔다.
  “학교는 민족 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는 곳이지, 그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새 사람, 새  백성을
만드는 정신적 가정일세.”
  남강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주일 예배와  삼일 예배를 경건하게 보도록 했고, 모든 집회는 시간
을 꼭 지키도록 부탁했다. 예배는 믿음을 첫째로 하였고, 집회는 민주주의적 방식을 택했다.
  “하느님을 믿은 것은  좋지만 너무 지나치게 바져서도 안  됩니다. 특히 미신과 낡은 옛  날
의  풍습은 버리도록 합시다.”
  말하자면 남강은 교회도 민족 개종의 한 학교로 생각했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남강의 신앙은 더욱 다져졌다.
  감옥에서 나오자 그는 맨 먼저 불탄 학교와 교회의 터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먼저 교회를 재건하자!”
  남강은 1923년에 교회를 다시  지었다. 남강이 두 번째 세우는 교회 재건에는  신자들과 더불
어  그도 직접 돌을 나르고 재목을 날랐다. 그리고 교회가 완성되자, 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열
성적 으로 말했다.
  “우리의 교회는 민족의 광복과 이어지는 신앙과 불을 켜는 곳입니다.  또 천당이나 가려는 그
런 것이 아니라 민족의  교육과 발전을 위해 만나는 곳입니다.”  1928년이  되면서 함석헌, 교
신 등이 ‘성서 조선’이란 잡지를 통해 그 때까지의 교회를  비판하는 일을 시작했다. 남강은
이  잡지를 읽어 보고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함석헌은 오산 학교의 선생으로 와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개혁일세. 교회가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쳐 주어야   하
는 데, 요즘의 교회는…….”
  남강은 함석헌을 만나 그런 말을  하기도 했으나, 시간은 그를 이승에 더 이상 머물게  하지
않 았다.
  1930년 5월8일, 갑작스럼 병으로 남강은  이튿날 새벽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의 나이 예순일
곱이었다. 졸업생들은 생전에 그가 남긴 공로를 기려 동상을 세우고, 그가 나라를 위해 바치던 순
수한 열정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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