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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

by Casey,Riley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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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
― 알튀세르와 라캉의 주체 이론

_양석원



1 이데올로기적 주체

슬라보이 지제크는 그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알튀세르와 라캉의 논쟁을 화두로 삼으면서 하버마스와 푸코의 논쟁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알튀세르와 라캉의 논쟁이 사실상 하버마스와 푸코의 논쟁보다 이론적으로 더 큰 파급 효과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1)
그렇다면 지제크가 말하는 알튀세르와 라캉의 논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가 아는 한 알튀세르와 라캉은 공식적으로 논쟁이라 할 만한 토론을 공개적으로 가진 적이 없다. 그리고 알튀세르와 라캉이 교환한 서신과 전기적 사실들을 고려해볼 때 이들의 관계를 논쟁적 관계로 보기도 어렵다.2) 오히려 이들의 관계는 알튀세르가 정신분석 이론을 자신의 마르크시즘 이론에 차용하면서 라캉에게 보여준 일방적인 관심의 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알튀세르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먼저 알튀세르가 자신이 라캉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했었다는 점을 시인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1964년에 발표한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하여 약 2년 후 그의 친구 프랑카Franca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이 논문을 쓸 무렵 라캉의 중요성을 이해했지만 라캉이 의미하는 바는 이해하지 못했음을 시인하면서 자신의 오해를 지적해주지 않은 라캉에 대한 원망을 표현했다.3)
이 편지에서 알튀세르는 이제 비로소 자신이 라캉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발언은 크게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편지가 씌어지기 얼마 전에 르네 디앗키네Ren Diatkine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그가 설명한 라캉의 이론도 「프로이트와 라캉」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와 라캉의 관계에서 주목을 요하는 또 다른 사건은 이로부터 10여 년이 더 지난 1976년에 그가 발표 논문의 초고로 작성했던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라캉에 대한 전례 없는 비판을 시도했고, 이 원고에 대한 동료들의 비판을 받은 후에 이 논문을 철회하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라는 논문으로 대체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철회한 논문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을 얼마큼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 논문에서 알튀세르가 라캉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논의되겠지만, 이 철회된 비판에서 주체에 관한 알튀세르와 라캉의 이론적 차이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두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알튀세르의 라캉 이론 수용에는 한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한계가 무엇인가를 검토하고 이 두 사상가의 이론적 차이점을 조명해보는 것이 알튀세르와 라캉의 논쟁을 가설적으로 재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지제크가 이 두 사상가 사이의 논쟁이라고 명명한 것도 바로 이 둘간의 이론적 차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이론적 차이의 한복판에 주체의 문제가 놓여 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첫째로 알튀세르의 주체와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론을 그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어떻게 응용하고 있는가에 주목하면서 살펴보고 이 과정에서 어떤 문제점들이 드러나는가를 검토한 후, 둘째로 라캉의 주체 개념에 대한 논의를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라캉의 주체 이론이 알튀세르의 이론과 어떻게 다른가를 규명하는 데 있다.4)

주체에 관한 알튀세르의 논의는 그가 1973년에 존 루이스John Lewis에게 보낸 답변에서 변호한 ?역사는 주체나 목적이 없는 과정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진술로 요약될 수 있다.5) 이 명제에서 알튀세르가 의미하는 주체의 위상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적 실천을 수행하지만 이는 오로지 사회의 생산 관계가 이데올로기적 사회 관계를 통해서 인간을 주체로 만드는 과정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진다. 즉 인간은 행동을 하지만 이 행동이 직접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인간 행위는 이데올로기적 사회 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이 이데올로기적 사회 관계는 궁극적으로 생산 관계에 종속된다. 따라서 인간은 역사 속의 행위자이지 역사의 주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가 역사를 만드는가? 알튀세르는 이런 질문 자체가 이미 인간 중심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낳은 질문임을 지적하면서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는 존 루이스의 명제 자체를 계급 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명제로 대치함으로써 폐기해버린다. 인간의 행위는 이데올로기(적 사회 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이데올로기는 생산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면 이 생산 관계는 곧 계급 투쟁에 의해서 생겨난다. 따라서 역사의 주인이라는 범주 자체는 역사를 개별 주체 혹은 집단적 주체 (계급)의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본질주의적 오류를 낳으므로 이를 폐기하고 역사의 동력은 개인 주체도 계급도 아닌 계급 투쟁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6)

이렇듯 알튀세르 이론의 출발점은 인간 중심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비판에 놓여 있고 주지하다시피 그는 「마르크시즘과 휴머니즘」에서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철저히 해부하였다. 알튀세르가 1845년에 일어났다고 선언한 마르크스의 인식론적 단절의 핵심 중의 하나가 휴머니즘 이데올로기와의 결별이다. 이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과학(즉 사적 유물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기존 개념의 헤겔적인 지양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 철학의 구성 요소들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인간의 본질이라는 개념은 사회 구성체?생산력?생산 관계?상부 구조?이데올로기?경제에 의한 마지막 심급에서의 결정 등의 개념들로 대치된다. 이런 인식론적 단절은 인간의 본질에 기초한 휴머니즘은 곧 이데올로기라는 마르크스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즉 마르크스의 반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을 이데올로기로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마르크시즘과 휴머니즘」에서 알튀세르는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인식, 즉 휴머니즘이라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과 극복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어느 주어진 사회에서의 역사적 존재와 역할을 부여받은 (이미지, 신화, 이념이나 관념 등의) 재현들의 (나름대로의 논리와 엄밀성을 지닌) 체계?로서 ?그 자체로 모든 사회적 총체의 유기적인 부분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역사적 삶에 본질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가 이데올로기를 필연적으로 갖는 이유는 인간이 역사적 존재 조건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로지 이데올로기라는 재현 체계의 매개를 통해서 역사적 존재 조건과 관계를 맺는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인간들과 그들의 존재 조건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이런 ?관계를 살아가는 방식?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자신의 실재 존재 조건과 맺는 관계를 살아가는 상상적인 방식이다. 즉 인간과 실재 존재 조건의 관계는 항상 이데올로기라는 상상적 재현 체계를 매개로 이루어진다.7) 

알튀세르는 1969년에 발표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서 자신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한층 더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전에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의 궁극적 역할이 생산 관계의 재생산이라는 점을 먼저 설명한다. 생산의 궁극적 조건은 생산 조건의 재생산이며, 사회 구성체가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생산 수단과 노동력뿐 아니라 생산 관계도 재생산해야 하고 이 생산 관계의 재생산은 경찰?법원?감옥 등의 억압적 국가 기관뿐 아니라 종교?교육?가정 등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도 필수적이라는 분석,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적 의식이 아니라 이런 기구들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물적 성격을 지닌다는 분석은 모두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에 대한 논의의 배경을 이룬다.

즉 알튀세르는 개별 주체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부여된 자신의 사회적 위치(즉 생산 관계에서의 위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주체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지만 이는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을 주체로 구성하는 조건하에서만 그러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을 이데올로기적 주체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개인-주체의 변형의 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의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알튀세르의 지적이다. 즉 개인은 자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호명됨을 인식한 후에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적 주체라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개인이 항상 이미 주체라는 것, 즉 주체는 처음부터 이데올로기 안에 있다는 점을 예시하기 위해 거울 단계에 관한 라캉의 이론을 차용한다.8) 그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예로 들면서 인간이라는 주체와 신이라는 대문자 주체 사이에는 거울과 같은 반영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은 인간을 종교적 주체로 호명하고 인간은 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신이 부른 이름을 자신으로 받아들인다. 대문자 주체인 신은 자신이 호명한 소문자 주체들에게서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거꾸로 인간 주체들은 신의 모습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런 거울적 복제 관계는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보장한다.?9)

이런 이데올로기의 ?거울 구조?의 결과는 주체가 대문자 주체에 철저히 종속되는 것이다. 즉 주체는 거울 구조의 메커니즘에 사로잡혀서 거울 이미지를 자신으로 인식한다. 주체에게 허락된 자유가 있다면 이는 거울 이미지를 자신으로 여기고 자발적으로 대문자 주체에 종속될 자유뿐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행위자로서의 주체는 항상 종속된 주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일되어 있고 지배 이데올로기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임을 밝힌다. 이렇게 보면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도구이며 궁극적으로 계급 관계를 영속화시키는 생산 관계를 재생산함으로써 지배 계급의 이익에 봉사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거울 구조를 지니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는 주체가 (생산 관계의 재생산은 모든 계급의 재생산을 포함해야 하고 지배 계급도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지배 계급으로 구성되어야 하므로) 피지배 계급뿐 아니라 지배 계급도 포함한다면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지배 계급의 도구가 아니며, 「마르크시즘과 휴머니즘」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행동의 수단으로, 도구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데올로기를 사용하고 자신들이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주인이라고 믿는 순간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로잡히고 연루된다.?10)

2 이데올로기와 무의식

이데올로기의 편재성과 구속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은 그가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을 무의식의 개념과 연결시키면서 더욱 강화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시즘과 휴머니즘」에서 인간이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세계와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게 된다는 마르크스의 발언을 인용하면서도 이 의식이 곧 무의식적임을, 이데올로기의 재현들이 무의식적임을 지적한 바 있다.11)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서도 그는 이데올로기의 초역사적 영구성을 무의식의 영구성과 곧바로 병렬시킨다.12) 그러나 정신분석에 관한 알튀세르의 본격적인 주장은 「프로이트와 라캉」이라는 논문에서 전개된다. 이 논문에서 알튀세르는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라캉의 모토를 재천명하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인식론적 단절을 발견함으로써 청년 마르크스에서 성숙된 마르크스를 구분해내야 하는 것처럼, 프로이트로의 회귀도 심리주의나 실용주의에 물든 초기 프로이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된 프로이트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성숙된 프로이트의 이론은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과학적 대상을 발견함으로 이루어진 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이고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과학성을 재삼 강조했을 뿐 아니라 라캉의 공헌도 바로 프로이트 이론의 과학성을 간파한 데 있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에서 인간적 존재, 즉 주체로 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효과가 무의식이며 이 무의식과 그 효과는 정신분석 고유의 대상이다. 생물학적 존재에서 주체로의 통과는 문화의 법, 질서의 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아이가 타자 (처음에는 엄마,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와 상상적?일차적?나르시스적 동일시를 하게 되는 단계이고, 두번째 단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단계로서 이 단계에서 아버지라는 제삼자가 개입해서 아이와 엄마의 이자적 합일 관계가 깨어지고 아이는 마침내 ?나? ?너? ?그? 등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음으로써 언어의 세계, 즉 상징 질서에 들어선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사회화의 2단계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 두 단계가 궁극적으로는 모두 상징계의 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계기는 하나의 법, 즉 상징계의 법에 의해 지배, 통제, 각인된다. 〔……〕 라캉은 질서와 법의 효과가 아이의 탄생 이전부터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려 아이가 첫 울음을 우는 순간부터 아이를 포획하여 그 아이에게 위치와 역할 따라서 강요된 운명을 배정해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가 통과하는 모든 단계는 법의 지배하에 이루어진다.?13)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서 거울 구조의 메커니즘을 예로 들면서 이데올로기적 인식을 상상적이고 거울적인 것으로 설명한 반면, 여기에서 그는 상상계적인 나르시스적 동일시와 상징계적인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구분한 다음 라캉 이론의 핵심은 상상적 동일시도 궁극적으로는 상징계의 법에 종속된다고 주장한다는 점, 즉 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를 혼합해서 모두 상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레이엄 록이 지적하고 있듯이 라캉이 (상상적 동일시를 통한) 자아의 형성과 (상징적 동일시를 통한) 주체의 형성을 구분하는 반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서 자아와 주체의 구별을 하지 않고 인간이 곧바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 구성되고 있다고 주장한다.14)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와 라캉」에서도 상상계적인 것과 상징계적인 것을 구분하면서도 곧이어 상징계적인 것이 상상계적인 것을 지배한다고 말함으로써 상징 질서의 법이 인간의 탄생 이전부터 인간을 구성된 주체로 통제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데이빗 메이시도 지적하고 있듯이,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분류에서, 이데올로기와 가장 밀접한 범주는 상징계이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서 이데올로기를 상상적인 관계로 파악한 것은 바로 그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크게 구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알튀세르는 라캉의 이론을 차용하면서 자아와 주체,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주체가 얼마큼 철저히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고 종속되는가를 정신분석 이론을 빌려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이데올로기를 무의식과 연결시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인간을 지배, 구속하는 것이 상징계의 법이고 상징계의 법은 타자의 담론, 즉 무의식의 담론이며, 무의식과 이데올로기가 결국 같은 것이라면 인간은 처음부터 무의식에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무의식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는 그가 후에 자신의 정신분석가가 될 르네 디앗키네가 1964년에 발표한 「공격성과 공격의 환상」이라는 논문에 관하여 1966년에 디앗키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더 자세히 전개된다.
첫번째 편지에서 알튀세르는 디앗키네가 무의식에 관하여 생물학이나 심리학 등의 학문들과 이론적 타협을 범했다고 주장한다. 디앗키네는 생후 5개월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무의식이 출현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논리에 따르면 생후 5개월까지는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 시기까지는 생물학적?행동생물학적?심리학적 설명이 가능한 것이 된다.

또한 디앗키네는 무의식을 기억으로 생각하고 무의식의 언어적 차원을 고려하지 못한다. 디앗키네의 이론적 타협과 오류는 바로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로잡히는 현실의 명백한 요소?를 간과한 것이고 라캉은 반대로 이 요소를 ?빠트리지 않고 심각하게 다루었다.? 디앗키네가 유아의 발달 단계 속에서 무의식의 ?시간적 기원?을 찾으려 한 데 반하여 라캉은 무의식의 ?비시간성atemporality?을 인식했고 이 비시간성은 바로 언어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16) 

알튀세르는 자신의 첫번째 편지에 대한 디앗키네의 답변에 대한 반론으로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무의식의 비시간성을 마르크스 이론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새로운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출현이 기존의 봉건주의 생산 양식 속에 씨앗?예정?초안의 형태로 담겨 있다는 식의 진화적 발생론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낡은 구조가 배태한 요소들이 새롭게 배합되고 조직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음을 지적하고, 생산 양식이 영원하다는 마르크스의 발언은 일단 새롭게 출현한 구조는 시간성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비시간적 양식 속에서, 무의식과 똑같이, 끊임없이 자신을 재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방식으로 알튀세르는 무의식의 ?비시간적 ?공시적? 재생산?을, 즉 무의식이 ?비시간적이고 영원한 구조?를 지녔음을 강조한다. 아이가 언어를 배울 때까지는 언어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디앗키네의 반론을 다시 반박하면서 알튀세르는 무의식이 영원하다는 논의를 이데올로기적 언어와 관련시켜 더욱 발전시킨다. 아이가 언어 속에 포획된다고 했을 때 언어는 아이가 배우는 구체적인 말parole이 아니라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속하는 언어적 상황으로서의 상징 질서를 의미한다. 이 상징 질서는 가정(친족) 구조,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형식, 그리고 언어langue를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언어langage인 것이다.

?아이가 그의 부모의 무의식의 법 아래에서, 혹은 그들을 결속하는 친족 구조의 법 아래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조건과의 관계를 살아가는 이데올로기의 구조 아래에서 산다고 말하거나, 혹은 아이가 상징계의 법 아래에서 산다고 말하는 것은 똑같은 말이다. 〔……〕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언어 속에 사로잡힌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히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는 ?상징계적 〔……〕 우주에 처음부터 종속되며? ?무의식의 출현에 언어(즉 상징계)의 구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알튀세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는 라캉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면서까지 무의식과 이데올로기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무의식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모든 무의식적 구조는 항상 기존하는 이데올로기적 형식들 속에서 거주하는 경향이 있고 〔……〕 가정 환경의 인물들의 역할이 경험되는 이데올로기적 형식들은 〔……〕 무의식의 구조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알튀세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라캉의 공식을 수정하여 ?무의식은 이데올로기적인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선언한다.17) 

그렇다면 무의식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에서 주체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가?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분명해진 것은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주체는 상징 질서 혹은 이데올로기에 전적으로 종속되는 한에서만 주체로 존재한다. 둘째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논의를 빌려 통일된 행위자로서의 주체를 해체한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이론의 유사성을 ?갈등적 성격?에서 찾으며 프로이트에게서 유래하고 마르크스에 의해 예견된 중층 결정이란 개념을 역시 헤겔적인 단순 모순과 차별화하고 있다.18)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란 개념은 부르주아 철학이 가정한 통일된 자기 의식적 주체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마르크스가 사회적 개인 혹은 개인의 역사적 형태를 다룬 반면 프로이트의 발견은 사회나 사회 관계가 아니라 개인에 관계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자기 동일적인 통일된 주체를 해체했다는 점에서 이 둘은 공통된다.
마르크스는 인간 중심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계급 투쟁이라는 모순을 은폐하고 있음을 갈파하고 역사적 과정의 (기원적) 주체로서의 개인에 관한 관념론적 부르주아 이론을 비판하고 개인을 단지 역사의 동력인 계급 투쟁의 정치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기능의 지탱물?로, 혹은 ?수많은 결정들의 종합?으로 파악함으로써 부르주아적 주체의 개념을 전복, 대체했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이 무의식?전의식?의식으로, 혹은 이드?자아?초자아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정신이 의식에 중심을 둔 통일체의 모델 위에 구조화된 것이 아니라 단일 원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상이한 체계들?을 포함한 기구?임을 밝혔다.

즉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을 ?여러 층위가 갈등적 기능을 제외한 다른 어떤 통일성도 갖지 않는, 중심 없는 지형학적 모델?로 파악했다.19) 이는 알튀세르가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인간 주체는 ?자아?의 상상적 오류 〔……〕 속에서만 ?중심?을 갖는 구조에 의해서 구성되고, 탈중심화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선언한 것을 다시 확인시켜준다.20) 

지금까지 살펴본 이데올로기와 주체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는 주체의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밀접히 연관된 심각한 문제점들을 야기시킨다. 첫째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주체에 대한 구속성을 강조한 나머지 주체의 범주 자체를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환원시켰다. 즉 주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데올로기적이다.
알튀세르의 궁극적 주장은 바로 이데올로기적 인식이 결국 오인이며 이데올로기적 오인을 파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과학적 지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21)

이데올로기의 오인을 넘어서는 것이 과학이고 알튀세르의 주장처럼 과학은 인간의 본질에 기초한 휴머니즘과 결별하는 ?주체 없는`subjectless? 방법이라면 이 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과학적 지식은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 주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알튀세르는 「청년 마르크스에 관하여」에서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의 두터운 벽을 뚫고 과학적 지식에 도달했다는 것을 애써 증명하려 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종속된 주체에게서 가능하단 말인가? 폴 리쾨르가 지적하고 있듯이 알튀세르의 주장대로 모든 인식이 이데올로기적 오인이라는 생각은 주체의 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환원에 기인하며 이 환원에 의해 인식의 변증법은 애초에 차단된다.22)
둘째, 미셸 바렛과 데이빗 메이시가 지적하고 있듯이, 비록 알튀세르는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을 빌려 이데올로기적 인식이 결국 오인이라는 점을 밝히고는 있지만,23) 라캉이 거울 이미지를 자신으로 착각하는 상상적 동일시가 오인이고 소외라는 점을 강조한 반면 알튀세르는 거울의 복제 관계를 강조하면서 주체가 거울 이미지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24)

앞으로 자세히 논의되겠지만 알튀세르가 거울 구조를 통해서 인식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반면, 라캉은 거울 구조를 통해서 오인과 소외의 구조, 그리고 이 구조의 불안정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셋째,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무의식적 주체는 알튀세르가 주장한 바처럼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무의식이 이데올로기적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은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라캉의 발언을 주체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구속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위하여 일방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이는 무의식에 대한 라캉의 논의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모두 알튀세르가 주체의 개념을 해체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앞서 지적했듯이 알튀세르는 (무의식적) 주체의 존재를 부정했고 반대로, 앞으로 논의되겠지만, 라캉은 무의식적 주체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 두 이론가의 차이는 분명해진다.

3 무의식적 주체

라캉의 이론에서 주체는 무엇인가? 주체에 대한 라캉의 정의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주목할 것은 라캉이 주체와 자아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라캉에게 있어서 자아는 상상계에 속하고 주체는 상징계에 속한다.25)
앞서 지적했듯이 알튀세르는 상상계와 상징계를 구분하지 않고 거울의 복제 관계를 직접적으로 이데올로기 이론에 차용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이데올로기적 인식의 구조를 예시하기 위해 라캉에게서 차용한 거울 이미지와의 동일시가, 라캉에 의하면 상징계에 속하는 주체가 아니라 상상계에 속하는 자아에 관한 것임을 혼동하고 있다.

라캉은 그의 유명한 초기 논문인 「정신분석적 경험에서 드러난 ?나?의 기능 형성으로서의 거울 단계」에서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모습에 매료되며 이러한 거울상과의 동일시에서 자아가 최초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즉 아직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없고 따라서 파편적인 움직임으로만 자신의 신체를 경험하던 유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이 앞으로 성취할 통일성을 발견하고 이 거울상에 나르시스적으로 사로잡힘으로써 자신을 통일된 총체로서 경험하게 된다. 이 ?현상은 개인이 자아의 최초의 형성이 관찰될 수 있는 단계로 이행했음을 증명해준다.?26)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런 거울의 복제 관계에서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인식을 설명하려 했다면, 라캉이 거울 단계에 대한 논의에서 강조하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오인이다. 거울상의 형태는 자아를 ?허구적인 방향?으로 위치시키며 자아는 자신의 현실에 영구히 ?점근선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27)
즉 아무리 자아가 자신의 현실과 ?변증법적 종합을 성취하려 해도 자아와 진리와의 결합은 기껏해야 점근선적인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28) 오히려 ?자아의 본질적인 기능은 현실에 대한 체계적인 오인m럄onnaissance이고? 거울상은 ?자아를 스스로로부터 소외시킨다.?29) 라캉은 거울상과의 동일시에 의해 생긴 자아의 통일성이 오인이며 소외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자아의 허구성을 명백히한다.

이렇듯 본질적으로 오인과 소외의 산물인 거울상과의 나르시스적 상상적 동일시는 따라서 자아와 거울상과의 근본적인 균열의 가능성을 지닌다. 라캉은 이런 거울상과의 나르시스적 동일시의 이면에 공격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공격성은 거울상과의 나르시스적 동일시에 항상 구조적으로 동반되는 것임을 밝힌다.
거울상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로 자신을 구성한 자아는 거울상과의 동일시를 통해서 거울상의 타자성 혹은 이질성을 자신에게로 종속시켜 자기 동일적이 되려 하며 항상 동일한 존재로 남고자 하는 ?불활성inertia?을 지닌다.30)

즉 자아의 자기 동일성은 거울상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억압한 결과이며 자아의 자율성은 타자에 구조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이렇게 차이의 억압을 통해서 형성된 자아는 여전히 자신과 거울상과의 차이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거울의 이상적 형상을 나르시스적으로 소유하려는 주체는 ?충일함이 아니라 부족을, 총체가 아니라 불일치와 혼란을 경험하며? 이상적 형상과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파편화된 신체에 대한 환상으로 경험한다.31)

라캉은 이를 신체의 ?거세, 절단, 해체, 탈구, 적출? 이마고 등과 같은 ?파편화된 신체의 이마고들?에 대한 경험이라 명명한다.32) 즉 통일된 거울상이 위장하는 신체의 분열은 ?신체적 해체의 환상 속에서 회귀한다.?33) ?이런 환상은 완전하다고 상상되는 타자에 대한 극단적인 공격적 감정을 이끌어낸다.?34)

다시 말해서 자아는 자신이 동일시한 통일된 거울상과의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 이 통일된 거울상에 대하여 공격적이 되고 이상적인 총체로서의 거울상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35)
나르시스적 상상적 동일시와 공격성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구조적으로 맺어져 있으며 이는 곧 거울상과의 동일시가 궁극적으로 모호하고 불안전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캉은 정신병에 대한 세미나에서 나르시시즘을 논하면서 거울상과의 관계에는 항상 ?그? (거울상) 아니면 ?나?라는 배타적인 관계에 의해 유발되는 공격적인 긴장이 내재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아는 결코 통일된 정체성 속에 안주할 수 없고 자아와 ?타자와의 순수히 상상적인 균형은 항상 근본적인 불안정의 표식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36)

이런 점에서 나르시시즘과 공격성에 대한 라캉의 논의는 상상적 동일시의 성공이라기보다는 실패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는 라캉의 주체에 대한 이해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오인과 소외, 모호성과 불안정성으로 점철된 거울 단계가 앞서 살펴보았던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인식의 복제 관계에 대한 모델로는 적합하지 않은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는 점이다. 

라캉은 주체와 자아 사이의, 즉 ?무의식의 참된 주체와 그 핵심에 있어서 일련의 소외적인 동일시에 의하여 구성된 자아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을 명확히하고 있다.37) 자아는 거울상과의 상상적 동일시에 생긴 이상적인 자기 모습들이 침전된 결정체로서의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며 주체는 이 ?이상적인 나Ideal I?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38)

그렇다면 상상적 동일시의 침전물인 자아와 근본적으로 다른 주체는 무엇인가? 라캉의 정의에 따르면 주체는 ?언어의 효과?이고 거꾸로 언어는 ?주체의 원인?이다.39) 언어?상징계?이데올로기를 전적으로 동일시할 수 없지만, 기표의 사슬 체계라는 의미에서 언어를 상징적 이데올로기적 구조와 같다고 본다면,40) 라캉의 주체에 대한 정의는 알튀세르의 주체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석과 밀접한 유사성을 보인다.

실제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언어의 상징적 법에 종속된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은 라캉의 주체에 관한 발언에 기초한다. 「정신분석에 있어서 말과 언어의 기능과 영역」이라는 글에서 라캉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은 후의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언어, 즉 ?상징들이 인간의 삶을 그물망 속에 너무 철저히? 구속한다고 주장했다.41)
즉 ?언어와 언어의 구조는 개별 주체가 그의 정신적 발달의 어느 시점에서 언어로 진입하게 되는 순간 이전에 존재하며? 따라서 언어는 개별 주체에 앞서 존재하는 주체의 존재 조건이고 주체는 ?언어의 노예?이다.42)
이렇게 보면 언어에 의해 철저히 구속받는 라캉의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철저히 구속된 알튀세르의 주체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알튀세르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주체라고 말하거나 무의식의 주체를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캉이 무의식적 주체를 주장했음을 비판했던 것과 달리 라캉은 무의식적 주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할 뿐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 주체는 무의식적 주체를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알튀세르와는 정반대로 무의식적 주체는 다름아닌 프로이트의 발견이었다고 주장한다.

흔히 라캉의 가장 유명한 공식인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은 무의식이 주체가 없는 기표의 사슬이라는 등식으로 여겨지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알튀세르의 오해는 바로 이런 등식에 연유한다. 주지하다시피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의 기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의식의 과정은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결합임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의 주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주체라는 개념이 심지어는 모든 ?주관주의?를 배제하는 산술을 지닌 (근대적 의미에서의) 전략과 같은 과학의 작동에조차도 필수 불가결하다?고 선언한다.43) 
돌러가 지적하듯이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무의식이 주체 없는 과정이라면 ?라캉은 무의식을 주체가 있는 구조로 보았으며 〔……〕 라캉에게 있어서 〔……〕 주체 없는 과정이나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44)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발견했다고 라캉이 주장하는 무의식적 주체는 무엇인가? 라캉은 놀랍게도 주체의 발견은 데카르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주체를 발견해낸 것이 프로이트가 아니라 데카르트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주체는 데카르트적인 주체이며 ?데카르트적인 주체는 무의식의 전제 조건?이라고 선언한다.45)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면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주체가 데카르트적이냐를 묻는 것이다.46) 라캉의 대답은 바로 데카르트의 코기토, 즉 생각하는 주체는 모든 생각의 내용을 의심한 후에 남은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주체라는 점에서 혁명적이며 바로 이것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주체라는 것이다.

이 주체는 ?나는 의심한다?라고 말하는 행위 속에 존재하며 결코 말해지는 내용에 담겨져 있지 않는 주체이다. 즉 코기토는 생각의 내용 일체를 제거한 후에 남아 있는 ?발화 행위의 최소한의 제스처에서만 유지되는, 대응물이 없는 순수한 소실점?이다.47)

그러나 라캉은 동시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는 순수한 발화 행위에서 ?나는 존재한다?는 존재의 실체를 이끌어내는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한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생각을 택함으로써 주체가 조그만 존재의 조각을 확보했다고, 즉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로서의 ?나?의 확실성을 획득했다고 가정한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데카르트는 〔……〕 철저한 의심의 잔존물로서의 주체는 실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 없는 주체성의 순수한 점point이라는 것, 즉 실증적 규정적 존재에서의 어떤 지탱도 결여하고 있는 주체, 라캉이 (기의의 주체와 반대되는) 기표의 주체라고 명명한 일종의 사라지는 틈에 불과한 점point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48)

데카르트는 코기토가 사물의 질서에 속할 수 없는 ?존재의 사슬에서의 틈이고 공백?임을 간과하고 순수한 형식인 주체에 내용을 부여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생각하는 주체를 현상적 실체로 만든 것이다.49)
반대로 프로이트는 생각에서 ?무의식의 확실성?을 이끌어낸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생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 프로이트와 데카르트간의 불균형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 이 불균형은 주체가 무의식의 영역에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50)

주체가 무의식에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사유로부터 존재로의 데카르트적 논리적 이행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와 사유는 상호 배타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공식을 전복하고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며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선언한다.51) 사유와 존재 사이에서 주체는 분열된다.

그렇다면 이 무의식적 주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라캉은 이 무의식적 주체는 발화의 내용이 아닌 발화의 행위에서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화행 nonciation의 주체와 발화 nonc 주체를 구분한다.52) 발화의 주체는 발화된 내용에서의 구체적인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나?라는 지시사shifter이지만, 화행의 주체는 이 ?나?라는 지시사가 지시하기는 하지만 나타내지 못한다.
라캉은 화행의 주체와 발화의 주체의 구분을 기표의 주체와 기의의 주체의 구분으로도 설명하고 있다. ?내가 기표의 주체로서 차지하는 장소가 내가 기의의 주체로서 차지하는 장소와 동심(同心)적인가 이심(離心)적인가? 〔……〕 이것은 〔……〕 내가 나의 말의 대상으로서의 나와 같은가를 아는 문제이다.?53)

즉 나의 말의 대상으로서의 나는 발화의 내용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발화의 주체, 즉 기의의 주체이며 말하는 주체는 발화 속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화행의 과정 속에서 명멸하는 주체이다. 즉 기의의 주체가 ?언어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의미의 담지자이고, 적극적인 행위자?라면 기표의 주체는 언어의 의미 속에 실현되지 못하는 공백의 주체이고 ?불확정으로서의 주체?이다.54)

지제크가 지적하듯이 ?라캉의 출발점은 상징적 재현이 항상 주체를 왜곡하고 항상 환치이고 실패이며, 주체는 자신 고유의 기표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기표의 주체는 바로 이 결여, 자신의 고유의 기표를 찾을 수 없는 불가능성이다.?55) 기표의 사슬인 ?S1 → S2는 주체가 기표 속에서 특수한 정체성, 절대적 재현, 자신 고유의 진실된 이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표의 대타자는 무의식적 주체에게 이름을 제공하지 않는다.?56)

따라서 라캉은 ?담론에서의 틈?에 주목하며 ?분석 시간 동안의 담론은 그것이 잘못되거나 중단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고 지적한다. 즉 무의식의 주체는 기표에서가 아니라 주체의 담론의 의미 사슬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으로서의 틈, 정신분석 중에 말이 끊어지거나 방해받는 지점에 드러난다.
라캉은 이런 화행의 주체가 불어에서의 허사(虛辭)인 ?ne?와 같은 기표에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베버가 지적하듯이 문장 속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허사는 표면적으로는 담론의 틈새를 메우는 환상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담론의 흐름을 방해한다. 영어의 경우에 발화의 주체가 ?I?라면 무의식적 화행의 주체는 담론의 결여를 나타내는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 ?uh~? 같은 허사에서 나타난다.57)

라캉은 상징 질서, 즉 기표의 사슬 속의 균열에서 나타나는 이 무의식적 주체를 실재의 주체라 부른다. ?의미 사슬 속에서의 균열은 실재에서의 불연속성으로서의 주체의 구조를 확증한다.?58) 상징적 의미 사슬의 기표에서 자신을 확보할 수 없는 실재의 무의식적 화행적 주체는 의미 사슬의 틈에서 존재를 확보한다.

그리고 이 실재의 주체는 당위적 주체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유명한 공식 Wo es war, soll Ich werden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주체가 당위적 존재를 확보하는 것을 설명한다. 이 공식은 영어로는 Where the Id was, there the ego shall be 라고 번역되어, (환자의) 이드가 있던 곳에 (분석가의) 자아가 들어설 것이라는 의미로, 즉 자아의 강화를 통한 무의식적 이드의 통제라는 의미로 자아심리학자들에 의해 해석되었지만, 라캉은 이 해석을 전면 부인한다.59 독일어 원문의 es와 Ich는 통상 선행하는 정관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라캉은 es는 영어로 주체를 뜻하는 subject의 첫 글자 S와 발음이 같으므로 참된 무의식적 주체의 장소를 뜻하고, soll이란 단어는 영어의 must로 번역되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나타내고 werden은 ?된다`become? 혹은 ?출현한다emerge?의 뜻을 지닌다고 말하면서 ?그것(무의식)이 있었던 곳에서 나는 출현해야 한다? 혹은 ?그것이 있었던 곳에서 내가 생겨나는 것은 나의 의무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라캉은 주체가 진정 있어야 할 장소가 무의식임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의 의식으로부터의 ?탈중심성eccentricity?를 강조함과 동시에 주체가 무의식 속에서 출현하는 행위의 윤리적 당위성을 선언하고, 또한 이 무의식을 ?존재의 장소?라고 말함으로써 주체가 무의식 속에서 존재를 확보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60)

핑크가 지적하듯이 무의식적 주체와 의미 사슬로서의 무의식은 동일하지 않다. 라캉에게서 무의식이 의식적 담론, 즉 의미 사슬의 균열을 통해 분출되는 ?또 다른 무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또 다른 ?기표들의 사슬?이고 따라서 상징계에 속한다면 무의식의 주체는 이 의미 사슬의 틈새에서 출현하는 실재에 속한다. 라캉은 ?그것이 있었던 곳?을 ?실재?라고 명명한다.61)
즉 무의식적 주체는 무의식적 기표들의 연쇄인 무의식적 사고에서도 배제되어 있다가 순간적으로 출현하는 실재의 주체이다. 위에서 언급한 프로이트의 공식에서 ?그것?이라는 비인칭적, 즉 무의식적 의미 사슬의 장소에 ?나?라는 주체가 출현해야 한다는, ?그것?에서 ?나?로의 전환은 바로 주체의 개입 없이 자동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의식적 사고, 즉 의식적 담론의 균열을 통해서 분출된 실언이나 실수에 대하여 주체가 출현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무의식적 주체는 윤리적인 것이다.62)

라캉은 자신이 말하는 ?존재being는 ?있다`to be?라는 동사의 공백 속에서 일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방금 있었던 곳, 그것이 잠시 있었던 곳, 아직 타오르는 소멸과 지연된 탄생 속에서, ?나?는 생겨나고 내가 말하는 것으로부터 사라진다?고 주장한다.63) 
즉 실재의 무의식적 주체는 의미 사슬의 틈새에서 순간적으로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명멸의 순간 속에서만 존재를 확보하는 주체이다. 이 주체는 따라서 사물의 질서에 속하는 존재론적 존재가 아니라 ?있어야만 하는 것의 자취?로서의 당위적 주체이다.64)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주체가 이데올로기적인 언어, 즉 상징 질서에 철저히 예속된 구조적 효과에 불과하다면 라캉에게 있어서 주체는 의식 혹은 무의식의 기표의 사슬의 구속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나 의미 사슬의 틈새에서 존재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무의식적 주체인 것이다.

▨각주내용

1) Slavoj i 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 Verso, 1989, pp. 1~2.

2) Louis Althusser, Writings on Psychoanalysis, ed. Olivier Corpet and Fran ois Matheron, trans. Jeffrey Mehlman, New York: Columbia UP, 1996, pp. 145~73; Elisabeth Roudinesco, Jacques Lacan, trans. Barbara Bray, Cambridge: Polity, 1997, pp. 293~308 참조.

3) Writings on Psychoanalysis, p. 10.

4) 필자는 ?왜 인간은 주어진 질서에 궁극적으로 순응만 하는 존재가 아닌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라캉의 이론이 갖고 있으며 라캉이 ?주체 범주를 폐기하려고 했던 데리다, 료타르, 들뢰즈, 푸코, 알튀세르 같은 다른 현대 프랑스 철학자와 구분되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홍준기의 지적에 동의한다(홍준기, 『라캉과 현대 철학』, 문학과지성사, 1999, p. 234, p. viii). 그러나 이렇게 주체에 관한 알튀세르와 라캉의 입장 차이를 밝히고서도 홍준기는 알튀세르와 라캉의 주체에 관한 이론적 차이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라캉이 ?왜 인간은 주어진 질서에 궁극적으로 순응만 하는 존재가 아닌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답한 반면, 알튀세르는 이런 질문 자체를 분명히 제기하지 못했다. 홍준기 자신도 『햄릿』에 대한 라캉의 논의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를 담고 있다?는 것을 지젝을 인용하면서 지적하고 있다(p. 197). 홍준기의 글이 ?알튀세르와 라캉과의 연결을 입증하려고 했던? 시도라면 이 글은 이 두 사상가의 이론적 차이를 조명하려는 시도이다(p. 235). 

5) ?Reply to John Lewis,? Essays in Self-Criticism, trans. Grahame Lock, London: NLB, 1976, p. 99.

6) 같은 글, p. 95, pp. 46~54 참조.

7) ?Marxism and Humanism,? For Marx, trans. Ben Brewster, London: Verso, 1996, pp. 231~34.

8) 알튀세르는 여기에서 라캉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지만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거울적speculary,? ?상상적imaginary? 등의 용어들이 시사하듯이 그는 라캉의 거울 단계에 관한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 Mich le Barrett, The Politics of Truth, Stanford: Stanford UP, 1991, pp. 101~03; Paul Ricoeur, ?Althusser's Theory of Ideology,?Althusser: A Critical Reader, ed. Gregory Elliott, Oxford: Blackwell, 1994, pp. 64~65; Grahame Lock, ?Subject, Interpellation, and Ideology,? Postmodern Materialism and the Future of Marxist Theory: Essays in the Althusserian Tradition, ed. Antonio Callari and David F. Ruccio, Hanover: Wesleyan UP, 1996, pp. 78~79.

9)?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Lenin and Philosophy, trans. Ben Brewster, New York: Monthly Review, p. 168.

10) ?Marxism and Humanism,? p. 234.

11) 같은 글, p. 233.

12)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p. 152.

13) ?Freud and Lacan,? Writings on Psychoanalysis, pp. 26~27.

14) Lock, p. 79.

15) David Macey, ?Talking With Borrowed Concepts: Althusser and Lacan,?Althusser: A Critical Reader, p. 150.

16) ?Letters to D.,? Writings on Psychoanalysis, p. 47, p. 53.

17) 같은 글, pp. 63, 72, 73~76. 

18)?On Marx and Freud,? Writings on Psychoanalysis, p. 108.

19) 같은 글, pp. 117~21.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정의하는 것조차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실천적 지시의 기능 이상을 하지 못한다는 알튀세르의 인간 개념에 대한 철저한 거부는 그가 철회한 논문인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프로이트가 말한 ?자아의 분열? 현상을 오해하여 라캉이 ?무의식의 주체? 혹은 무의식을 ?주체?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하는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The Discovery of Dr. Freud,? Writings on Psychoanalysis, p. 100). 즉 알튀세르는 무의식을 주체로 파악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주체 개념을 모두 해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주체는 탈중심화된, 철저히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구조의 효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논의되겠지만 라캉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로 환원될 수 없는 무의식의 주체가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라캉의 무의식적 주체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라캉의 이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통찰력을 엿보게 해준다. 홍준기는 철회된 논문을 근거로 후기 알튀세르가 라캉을 비판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류임을 지적하고 있지만(홍준기, p. 195) 그레이엄 록이 주장하듯이, 이 논문은 라캉과 프로이트에 대한 알튀세르의 태도를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Lock, p. 86). 특히 이 글은 라캉의 이론 특히 무의식적 주체에 관한 언급에 대한 알튀세르의 불편한 심기를 보여주며 알튀세르가 주체의 문제에 있어서만큼 라캉의 입장을 수용할 수 없었음을 은밀히 드러낸다. 

20) ?Freud and Lacan,? p. 31.

21)?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p. 62.

22) Ricoeur, p. 65.

23)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두 가지 기능을 인식과 오인으로 밝히고 있으며 거울 구조의 메커니즘의 현실이 오인되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라고 말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궁극적으로 오인임을 지적한다(?Ideology,?pp. 161, 170). 그러나 문제는 그가 거울 구조를 통해서 밝히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인식의 메커니즘이지 오인의 메커니즘이 아니라는 점이다.

24) Barrett, p. 103; Macey, p. 150.

25) 예를 들어 Mladen Dolar,?Cogito as the Subject of the Unconscious,? Cogito and the Unconscious, ed. Slavoj i ek, Durham: Duke UP, 1998, p. 12; Dylan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London: Routledge, 1996, pp. 51, 195.

26)?Some Reflections on the Ego,?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Vol. 34(1953), p. 14.

27) ?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as revealed in psychoanalytic experience,? Ecrit: A Selection, trans. Alan Sheridan, New York: Norton, 1977, p. 2.

28) Anika Lemaire, Jacques Lacan, trans. David Macey, London: Routledge, 1977, p. 178.

29)?Some Reflections on the Ego,? p. 12; ?Aggressivity in psychoanalysis,? Ecrit: A Selection, p. 19.

30) ?Aggressivity,? p. 15.

31) Kaja Silverman, The Threshold of the Visible World, New York: Routledge, 1996, p. 39.

32)?Aggressivity,? p. 11.

33) Samuel Weber, Return to Freud: Jacques Lacan's Dislocation of Psychoanalysis, trans. Michael Levine, Cambridge: Cambridge UP, 1991, p. 105. 

34) Silverman, pp. 39~40.

35) 물론 프로이트는 이런 타자에 대한 양가적 감정과 공격적 경쟁심을 아버지에 대한 남아의 오이디푸스적 감정으로 이미 이론화했다. 라캉 이론의 공헌은 프로이트가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최초의 동일시라고 본 것과 달리 최초의 동일시를 거울상과의 동일시라고 파악하고 이 나르시스적 공격성에 바탕을 둔 거울상과의 최초의 상상적 동일시가 타자와의 오이디푸스적 동일시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데에 있다. Malcolm Bowie, Lacan,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P, 1991, pp. 32~33; Teresa Brennan, History After Lacan, London: Routledge, 1993, p. 40을 참조할 것.

36)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III The psychoses 1955~1956, trans. Russell Grigg, New York: Norton, 1993, p. 93.

37)?The Freudian Thing, or the meaning of the return to Freud in psychoanalysis,? Ecrits: A Selection, p. 128.

38) ?The mirror stage,? p. 2.

39) ?Position of the Unconscious,? Reading Seminar XI: Lacan?s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ed. Richard Feldstein, Bruce Fink, Maire Jaanus, trans. Bruce Fink Albany, New York: SUNY P, pp. 265, 260.

40) 언어는 물론 상징계와 상상계를 모두 포함하지만 상상계가 기의의 차원을 나타낸다면, 상징계는 기표의 차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Evans, pp. 98, 187, 202 참조. 또한 대타자는 곧 상징계이기 때문에 기표의 사슬로서의 언어는 상징계이고 대타자이며, 기표의 조합과 같이 우리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법칙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라고 볼 수 있다.

41) ?The function and field of speech and language in psychoanalysis,? Ecrits: A Selection, p. 68.

42)?The agency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 or reason since Freud,?Ecrits: A Selection, p. 148.

43) 같은 글, p. 165.

44) Dolar, pp. 13, 38.

45) Jacques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trans. Alan Sheridan, New York: Norton, 1978, pp. 44, 48;?Position of the Unconscious,? p. 268.

46) Colette Soler.?The subject and the Other,? Reading Seminar XI, p. 40; Dolar, p. 14.

47) The Four Fundamental, pp. 44와 Dolar, p. 15. Slavoj i ek, ?Introduction: Cogito as a Shibboleth,? Cogito and the Unconscious, Durham: Duke UP, 1998, p. 4도 참조할 것.

48) Slavoj i ek,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Enjoyment as a political factor, London: Verso, 1991, p. 147.

49) Dolar, p. 16.

50) The Four Fundamental, p. 36.

51)?The agency of the Letter,? p. 166.

52)?The subversion of the subject and the dialectic of desire in the Freudian unconscious,? Ecrits: A Selection, p. 298; The Four Fundamental, p. 139. nonciation과 nonc 영어로 각각 enuncation과 statement (혹은 utterance)로 번역된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주체를 현상적 실체로 간주한 반면 칸트는 생각하는 형식으로서의 주체와 생각하는 실체로서의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했고 이 구별은 라캉에게서 발화 행위, 즉 화행의 주체와 발화의 주체 사이의 구별로 나타난다. 화행의 주체가 사물의 질서에 속할 수 없는 순수한 공백이고 결여인 주체, 즉 3라면 발화의 주체는 이 공백을 메우는 실체이다.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Durham: Duke UP, 1993, pp. 14~15.

53) ?The angency of the letter,? p. 165.

54) The Four Fundamental, p. 26.

55)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p. 175. 

56) Jacques-Allain Miller, ?Another Lacan,? Lacan Studies Notes 6~9, 1988, p. 270.

57) ?The subversion of the subject,?pp. 299, 298; Weber, p. 113. 라캉은 ?Je crain qu'il ne vienne(I am afraid he may 〔not〕 come)? 같은 문장에서?ne?가 억압된 무의식적 소망이 발화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것으로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인negation의 차원과 같다고 지적한다.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VII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Norton, 1992, p. 64.

58)?The subversion of the subject,? p. 299.

59)?Position of the Unconscious,? p. 270; The Four Fundamental, p. 44

60) ?The Freudian thing,? pp. 128~29.

61) The Four Fundamental, p. 45.

62) 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P, 1995, pp. 41~48; Bruce Fink, ?Alienation and Separation: Logical Moments of Lacan?s Dialectic of Desire,? Newsletter of the Freudian Field 4. 1~2, 1990, pp. 109~10. 무의식이 기표의 사슬이고, 대타자와 상징계 역시 기표의 사슬이라면 무의식은 대타자인 상징계에 속한다는 등식이 성립되고 따라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라는 명제가 말해주듯이 일반적으로 무의식은 전적으로 상징계에 속한다고 여겨지지만(Evans, p. 202), 셰퍼드슨이 지적하듯이 무의식과 무의식적 주체를 순순히 상징계에 속한다고 볼 수 없고 실재계에도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Charles Shepherdson, ?The Intimate Alterity of the Real: A Response to Reader Commentary on ?History and the Real??, Postmodern Culture 6. 3, 1996, pp. 17~18 문단. 라캉도 무의식의 상태를 윤리적이라고 지적하는데 이때 그는 ?그것이 어디에 있든, 나는 그곳에 가야 한다?라는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체와 연관시켜서 말하고 있다. The Four Fundamental, pp. 33~34. 

63) ?The agency of the letter,? p. 168; ?The subversion of the subject,? p. 300.

64) ?The subversion of the subject,? p.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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