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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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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위인특대전집 (30) 이승만



  이승만 (1875∼1965)
  독립운동가, 정치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황해도 평산 출신.
  1894년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이듬해 8월, 이 학교의 영어 선생이 되었다. 1896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과 함께 협성회, 독립협회를 조직했으며, 1898년 황국협회의
음모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민영환의 도움으로 출옥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공부하면서 동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으며,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을 맡아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 1948년 4·19 혁명으
로 대통령직을 물러난 뒤 하와이로 망명하여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1. 국민이 원한다면

  역사적인 아침이 밝아 오고 있는 서기 1960년 4월 26일, 서울 세종로 일대에는
밤을 뜬눈으로 새운 데모 군중이 들끓고 있었다.
   독재 정권 물러가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데모 군중은 이승만 대통령이 살고 있는 경무대를 향해 계속 함성을 질러댔다.
  경무대로 들어가는 효자동 길은 수천 명의 무장 군인들이 겹겹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지키고 있었다.
  아침 8시가 되자, 데모 군중은 10만여 명을 넘어섰고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잠시 집에서 눈을 붙이고 새격같이 달려 나온 시민들이 데모 학생들과 합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재 정권 물러가라!
   선거를 다시 하라!
  데모 군중의 함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졌다. 그들은 이미 총칼을 든 군인들
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경무대에 새벽부터 불려 나온 장관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안절부절못하고 서성
대고 있었다. 장관들 중에는 하루 전인 25일 저녁에 시국 수습을 위해 불려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수석 국무위원이 된 외무부 장관 허정도 지난 밤, 경무대
에서 밤을 지새웠다.
  허정은 대통령의 간청으로 수석 국무 위원의 자리를 맡으면서도 이번 선거는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데모 군중들이 요구하는 대로 선거를 다시 하고, 부정 선거를 저지른 이기붕
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면 사태가 수습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
던 것이다.
  대통령 이승만도 부정 선거를 저지른 자유당에서 손을 떼고 대통령의 직무에만
충실 하면 국민들도 화를 가라앉힐 줄로 생각했다.
  또  이승만 물러가라! 고 외치는 데모 군중은 많았지만 대통령이 정말 물러날 것으
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3,15 부정선거를 이승만을 당선시키기 위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었다. 야당 후보였
던 조병옥이 선거운동중에 심장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이미 당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선거를 관리하는 장관들과 자유당이 눈에 불을 켜고 온갖 못된 짓으로
부정 선거를 저지른 것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미리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은 무더기 표를 투표함에 넣었다. 그것도 모자
라 3인조, 6인조, 9인조 등 조를 짜고 서로 감시하면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
기부을 찍도록 했다. 투표함 뒤쪽에서 경찰이 감시하기도 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부정선거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선 곳이 경상남도 마산이
었다.
   선거를 다시 하라!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데모를 일으킨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경찰은 총을 쏘아댔다.
뿐만 아니라 데모에 나선 사람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모조리 잡아들였다.
  마산에서 일어난 데모에 용기를 얻은 국민들이 여기 저기서 데모에 나섰다.
  4월 9일에는 부산과 서울에서 많은 군중이 데모에 참가해서 부정 선거를 지탄했
다. 경찰은 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고, 몽둥이로 해산시켰다.
  그런 중에 4월 11일에 마산 앞바다에서 얼굴에 최루탄 파편이 박힌 김주열 군의
시체가 떠올랐다.
  데모에 참가했다가 무참하게 죽어 바다에 던져진 고등학생의 시체를 보자, 국민들
의 노여움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도시마다 데모가 다시 일어났다.
  몽둥이와 돌멩이를 든 노한 데모대는 경찰서를 습격했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데모대에 경찰의 총도 소용이 없었다. 데모대는 경찰서를 불지르고, 관공서를 때려
부쉈다.
  4월 18일, 서울에서 평화적인 데모를 끝내고 돌아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종로
4가에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깡패들의 습격으로 수십 명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깡패들의 몽둥이와 쇠갈고리에 학생들은 무수히 얻어맞고 쓰러졌다.
  이 사건은 학생들과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학생들과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늙인이와 여자들까지 데모에 참가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대통령이 사는 경무대로 향했다.
   선거를 다시 하라!
   독재 정권 물러가라!
  데모 군중은 함성을 질렀다.
  경찰은 이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실탄을 쏘았다. 장갑차로 데모 군중을 밀어붙였
다. 흡사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싸움이었다.
  경찰의 힘으로는 막아 내기 어렵게 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
했다. 탱크와 장갑차에 철모를 쓴 군인들이 데모를 막는 일에 나섰다.
  이런 일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대통령 이승만은 그 까닭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장관들의 거짓말만 듣고 3,15 정,부통령 선거가 온통 부정 선거로 치
뤄졌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모르
고 있었던 것이다.
  데모가 격렬해지고, 경무대 근처에서 수만 명 군중이 계속해서 데모를 하고 총 소
리가 나자, 비로소 그는 일이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부정 선거에 앞장 선 내무, 법무 장관의 목을 자르고 허정을 내세워 사태를 수습
하게 했지만, 그 정도로는 국민의 노여움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데모대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불어나기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드디어 데모대를 이끌고 있는 학생 대표들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요구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데모가 끝날 것인지 알아야만 하겠다
고 생각한 것이다.
   우양, 내가 직접 학생 대표를 만나겠어. 그러니 10시까지 학생 대표를 접견실로
불러 줘. 이렇게 가만 있어서는 안 되겠어.
  허정을 부른 이승만 대통령이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허정도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도 그 방법 말고는 시국을 풀어 낼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사태는
그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막바지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허정의 연락을 받고 학생 대표 5명이 경무대로 들어왔다. 죽음도 겁내지 않을
만큼 용기 있는 학생들이었다.
  오전 10시, 대통령이 접견실로 들어와 학생들 앞에 앉았다. 허정이 대통령 옆에
입회했다.
   그래, 그대들의 요구가 무엇인가?
  대통령은 습관대로 약간 떨리고, 느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눈 가장자리에서
경련이 일고 있었다. 여러 날 잠을 자지 못해 더욱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각하, 이번 선거는 부정 선거입니다. 선거를 다시 하셔야겠습니다.
  한 학생이 먼저 말했다. 이미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라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부정이 있었다면 선거를 다시 해야지. 그리고 또 계속해 보게.
   각하, 각하께서 물러나셔야겠습니다.
   나더러 물러나라고?
  대통령의 눈이 꿈틀했다. 학생의 당돌한 말에 허정은 가슴이 철렁했다.
   국민은 각하와 자유당 정권이 물러나기 전에는 노여움을 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온 국민의 ...
   그만, 그만 두게. 알고 있네.
  이승만 대통령은 열변이라도 토할 듯한 학생의 말을 가로막고 허공을 쳐다보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그런 결심까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학생 대표의 입에서
그런 말이 거침없이 튀어 나오자 가슴에서 노여움이 솟아 올랐다. 짧지만 참으로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이승만 대통령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국민이 원한다면 .........
  긴장한 학생 대표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승만의 입으로 쏠렸다.
   물러나야지.
   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각하!
  학생 대표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학생 대표들은 그런 요구를 했지만, 고집 센 노인의 입에서 선뜻 그런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뿐 아니라, 국민 대부분도 거기까지는
감히 상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거에 부정이 있었다니? 부정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국민은 죽은 국민이야. 청년
학도들이 항거하고 일어날 만하지. 이제 알았으니 돌아가게. 돌아가서 국민들에게
내 뜻을 전하게. 물러난다고 말일세.
  학생들은 잠시 얼이 빠진 듯이 앉아 있었다. 너무 뜻밖이고, 너무 감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학생 대표들은 경무대에서 나와 이 사실을 데모 군중에게 알렸다.
   만세! 드디어 국민이 이겼다!
  데모 군중들도 감격했다. 이 소식은 곧 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 대표들과의 약속대로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지 12년만의 일이었다.
  전 국민의 존경을 받던 독립 투사요, 대한 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숭배받던 그의
마지막은 이렇듯 서글펐지만, 그가 아니면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깨끗하게
물러난 것이다.


  2. 귀한 외아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안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갓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이었다.
   고추를 달고 나왔구려. 얼마나 기쁠까!
  잠시 후 더운물을 가지러 방에서 나온 이웃집 할머니가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는
아기 아버지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기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방 안에서 금방 아기를 낳은 아기 엄마는 울고 있었다. 아들이라는 할머니의 말에
아기를 낳은 고통도 다 잊은 듯,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그 집안은 어찌 된 셈인지 5대째를 내리 외아들이라는 가느다란
실로 이어져 왔다. 그들 부부도 외아들에 딸만 둘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열 살도
되기 전에 죽어서 대가 끊기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마흔 살이 다 된 부인이 또 아기를 갖게 될 것 같지 않아 부부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대를 잇지 못하면 조상께 큰 죄를 짓는 셈이기 때문이다.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그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었다.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
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직계 후손인 것이다. 아우인 충녕 대군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하여 이 나라 제일의 성군인 세종대왕이 되게 한 왕자의 후손이 대가 끊어진다
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집에 6대 외아들로 태어나 모든 근심을 씻어 낸 아이, 그가 바로 이승만
이었다. 서기 1875년 3월 26일의 일이었다.
  당신 꿈이 정녕 신통하구려! 용꿈을 꾸고 가진 아기니까 이름을 승룡이라 합시다.
  아버지 이경선은 기뻐 어쩔 줄을 모르며,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승룡 이라 지었다.
  아내가 큰 용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가슴으로 뛰어드는 태몽을 꾸고 잉태한
아기이기 때문이다.
   너는 하늘을 나는 용의 모습으로 엄마 뱃속으로 들어온 아이야. 그리고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왕손이란다. 그러니 너는 절대로 남에게 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 이경선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커서 아직 철도 안 든 어린 아들을 안고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
  승룡은 이런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두 누이의 보살핌 속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
을 보냈다.
  모든 가족이 그만을 위했고, 그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들어 주려고 했다. 훗날,
그가 고집이 세고 자기 중심적이며 독선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가정 환경
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승룡이 세 살이 되던 해인 서기 1877년에 아버지는 서울 남대문 밖 염동으로 이사
를 했다. 살림이 너무 어려워져 시골에서 살아갈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아버지는 승룡을 서당에 보내 한문을 배우게 했다. 서당 공부
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직접 가르치는 열성도 보였다.
   너는 왕손이야. 귀한 혈통을 타고 났단 말이다. 그러니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많
이 배워서 과거에 급제하여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 하는 거야.
  글을 가르치면서도 승룡이 지친 표정을 보이면 아버지는 이런 말로 아들을 닦달
했다. 승룡이 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무서운 돌림병인 천연두가 서울을 휩쓸었다.
아이를 둔 부모들은 모두들 걱정이 태산 같았다. 승룡이 부모는 승룡이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다.
  그런 염려에도 아랑곳없이 천연두는 승룡을 덥쳤다. 승룡은 여러 날 자리에 누워
신음했다. 온몸이 불에 덴 것처럼 펄펄 끓었다.
  그러다가 열이 내리면서부터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쇠꼬챙이로 눈을 찌르
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 엄마, 나 죽어요! 나 죽어요 엄마!
  승룡은 이리저리 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울고불고했다.
  눈을 쥐어뜯으며 볼떡 일어났다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 아들을 보고 승룡이
부모는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번갈아 유명한 한의원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나
달여서 마시는 내복약은 아무 효력도 없었다.
   저러다 영영 장님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6대 독자가 장님이라니 이렇게 원통
할 수가 .......
  승룡의 부모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친천 한 사람이 서양 의사에게 보일 것을 전했다. 그 즈음만 해도
양반들은 서양 사람과의 접촉을 몹시 꺼렸다. 예의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멸시했으며,
 서양 악마  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사정이 워낙 다급한 때라 그런 거슬 따질 경황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승룡
을 가마에 태우고 양의를 찾아갔다.
  이경선이 찾아간 양의는 그 해 미국에서 건너온 장로교 선교사를 겸한 호레이스
알렌이라는 의사였다.
   이 물약을 사흘 동안 매일 세 번씩 넣어 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나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찰을 마친 서양 의사가 물약을 주며 말했다. 너무 쉽게 말해서 믿어지지 않았지
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사흘이 지났다. 그 사흘째 되는 날이 우연히도 승룡의 열 살 되던 생일날이었다.
  어머니 김씨는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고, 승룡은 창문을 등지고 앉아
공상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 이경선을 창문 옆에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상을 정성껏 차려 들고 와서 손에 숟가락을 쥐어 주었다.
   이게 죽이고, 이게 나물이야. 이건 생선이고 .......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들에게 밥상에 놓인 반찬을 일일이 짚어 보이며 설명
했다. 어머니의 손길을 따라 눈을 움직이던 승룡은 상 위의 음식이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걸 깨닫고 기쁨에 몸을 떨었다.
   어머니, 이건 콩나물이고, 이건 깍두기고 ........ 아! 어머니, 눈이 보여요!
  승룡은 기뻐 어쩔 줄 모르고 소리쳤다.
   아니, 그게 정말이냐?  눈이 보인다고?  그럼 이것도 보이냐?
  어머니는 얼른 간장 종지를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간장 종지요!
  어머니는 아들을 얼싸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경선도 체면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감사의 뜻으로 계란 한 꾸러미를 들고 서양 의사
를 찾아갔다. 그러나 의사는  나보다는 당신의 아들이 더 계란을 먹어야 합니다.
하며 굳이 계란을 사양했다.
  호레이스 알렌, 이 서양 의사는 승룡이 만나 본 최초의 서양 사람이었다.
  승룡의 미국인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이 인연은 우남 이승만의 생애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3. 과거에 실패하고

  승룡이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또 집을 이사했다. 우수현 고개 아래에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집이었다.
  승룡은 그 곳에서 가까운 도동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판서를 지낸 이근수 씨가
은퇴하여 제자를 모아 가르치는 서당이었다.
  승룡은 그 곳에서  자치통감  15권을 완전히 배우고  맹자 ·  논어 · 중용 · 대학
을 배우면서 글씨 공부를 했다.
  승룡이 열 세 살이 되던 해였다. 나라에서는 과거령을 내리고 왕세자와 동갑인
열네 살짜리까지를 특별히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승룡의 아버지는 아들이 한 살 어리지만 남다른 재주로 보아, 과거에 응시하면
반드시 급제할 것으로 믿었다.
 네 실력이면 급제할수 있어. 그러니 나이를 한 살 올려서 과거에 응시하도록 해라.
  아버지의 조급한 마음 때문에 승룡은 결국 과거에 응시하게 되었다.
  과거에 나가기 앞서 승룡은 어엿한 선비로서 체통을 갖추기 위하여, 어릴 때 이름
인 승룡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본명을  승만 으로 고쳤다. 그리고 선비로서 격을 높이
기 위하여  우남 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어 불렀다.
  우남 이승만은 이렇게 하여 평생 쓰게 되는 그의 호와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과거를 볼 날이 되었다.
  날이 밝자, 이승만은 선비가 입는 도포를 입고 관을 썼다. 가죽신을 장만할 돈이
없어서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었다.
  나막신이란 비가 와서 땅이 질 때 신는 신발로 보통 때에는 신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당시의 양반들은 격식에 어긋나는 차림을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나막신이라니, 이 일을 어쩌지 원 .......
  어머니가 몹시 마음 아파하며 걱정했다.
   아무 일 없습니다, 어머님. 나막신을 신으면 키도 커보이고 위엄도 있어 보일
테니 괜찮아요.  이승만은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과거장인 근정전으로 들어가려던 이승만은 결국 그 나막신 때문에 문지기의 제지
를 받았다.
   여보 젊은 선비, 그렇게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어찌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오?
그런 신을 신고는 들어갈 수가 없고.
  이승만은 사정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통과했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실망과 부끄러움을 안고 집에 돌아오자, 그의 부모는
아들의 표정만 보고도 금방 낙방한 것을 알고 몹시 낙심했다.
   내년에는 꼭 급제할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이승만은 그런 부모를 위로했다.
  첫 경험의 아픈 상처를 안고 이승만은 서당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서당에서 돌아오면 오두막에서 밤이 늦도록 책을 읽고 글을 지었다. 그처럼 열심
히 공부했지만, 그 다음 해도 역시 보기 좋게 낙방했다.
   허, 내 아들이 저토록 머리가 둔하단 말인가?  왕손의 체면이 이게 뭐람!
  아버지는 상심한 나머지 한숨을 쉬며, 아들을 마주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승만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과거 따위는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서는 출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해에도 역시 낙방이었다.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꼭 과거에
급제해야 하는데, 계속 실패만 하게 되니 이승만은 우선 부모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늘 말이 없고, 표정이 어두웠다.
  이런 아들을 염려한 아버지가 그 때의 풍속에 따라 열 다섯 살인 아들을 두 살
이나 위인 박씨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시켰다.
  결혼 후 2년 뒤에는 태산이라는 아들을 낳아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지만 이승
만은 조금도 마음의 위안을 얻지 못했다. 처자를 거느린 사람이면서도 계속해서
과거에는 실패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낙방하면서도 끈질기게 과거에 마달렸다. 7년을 한결같이 되풀이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실망은 분노로 바뀌어 갔다. 당시의 과거 제도가 유능한 선비를 뽑는 등용문
이 아니라 높은 벼슬아치의 자제와 돈을 바친 선비를 뽑는 자리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력이 있다고 해도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그가 뽑힌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서기 1894년, 갑오개혁으로 끝내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망할! 부패한 관리들 때문에 내 꼴이 이게 뭐란 말인가.  이승만은 무능하고 부패
한 조정에 대한 원망으로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훗날 이승만이 조정에 반기를
들고 개혁 운동에 앞장 서게 된 것도 이러한 감정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과거 제도가 없어진 그 해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여보게 우남, 자네도 그 쓸모 없는 한문 공부에만 매달릴게 아니라 나와 함께
배재 학당에 들어가세.  글방 선비인 신긍우가 낙심하고 있는 이승만에게 말하였다.
   네? 배재 학당이라니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은 서양 문명
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가 아닌가? 그러니 앞으로 나라에 쓰일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서양 학문을 배워야 한단 말일세.
   그렇긴 하지만 .......
   망설일 것 없네. 우리 백성들이 미국 사람들을 가리켜 서양 오랑캐니 뭐니 하며
얕보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너무 세상을 모르기 때문이지.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을 보게. 그들은 학교를 지어 새 학문을 가르치고 병원을 차려 가난
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지 않나 말일세. 그게 어디 예삿일이던가? 조정에서도
엄두도 못내는 일을 그들은 하고 있어. 망설이지 말고 내 말대로 하게.
  이승만은 신긍우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자칫하면 장님이 될 뻔한 그를 구해
준 사람도 서양 의사이자 선교사였다.
  이승만은 신긍우의 말에 금방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문제는 부모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절대로 동의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걱정이 되거든 당분간 비밀로 하였다가 나중에 말씀드려 허락을
받게나.  신긍우의 말대로 이승만은 부모의 허락 없이 배재 학당에 입학했다.
  입학한 첫날 이승만은 노블 박사의 강의를 들었다. 화학을 담당하고 있던 노블
박사는 첫 시간에 이승만에게  아버지는 그에게 배재 학교에 가서 화학을 배우라고
말했다.  라는 긴 말을 영어로 말하고 풀이해 주었다. 처음 영어를 배우게 되는 학생
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렵고 긴 영어였다. 그것은 이승만을 처음 만난 노블
박사가 그의 똑똑함에 반해 제자로 삼고 싶어 일부러 그랬던 것이다.
  배재 학당의 학생이 된 이승만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사들이 가르치는 책이 모두 영어로 된 책이어서
영어를 못하면 장님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과거 공부보다도 더욱 열심히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그의 영어 실력은
놀랍도록 발전해서 영어를 공부한 지 9개월 만에 후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마침 미국에서 갓 건너온 제중원 여의사 화이팅 양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
  화이팅 양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한지 한달이 되는 날이었다. 공부가 끝나고
일어서면서 이승만은  정말 빨리 배우십니다. 아주 성적이 좋아요, 미스 화이팅.
하고 웃으며 말했다.
   모두 이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녀도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 또 뵙겠습니다.
   아, 이 선생님, 잠깐만 ......
  화이팅 양은 이승만을 불러 세우고 준비한 하연 봉투를 내밀었다.
   오늘이 공부를 시작한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입니다. 이것을 받으십시오.
  봉투 속에는 한국어를 가르쳐 준 대가로 받게 되어 있는 은화 20달러가 들어 있었
다. 그것을 받고 이승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으로 번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저녁, 그는 어머니께 그 봉투를 내밀며 조용히 말하였다.
   어머님, 저는 그 동안 서양인 선교사가 세운 배재 학당에 다니고 있었어요. 새로
운 학문을 배워서 우리도 어서 개화된 문명을 받아들이고 나라의 힘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을 용서하시고 이걸 받
으십시오.  이승만의 말에 어머니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돈은 제가 배운 영어 실력으로 미국인 의사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주고 받은
첫 월급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번 돈이니 받아 주십시오.  어머니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아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알아서 하는 일 .... 큰 뜻을 품고 새로운 것을 배워야겠다니 낸들 어찌 말리겠
느냐. 아무쪼록 대장부다운 뜻을 지녀야 한다. 알겠니?
   네, 어머님!
  이승만은 생각보다 쉽게 어머니의 승낙을 받게 되어 무척 기뻤다.


  4. 개혁의 횃불을 들다

  이승만이 배재 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이자 학생이 된 그해에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일이 일어났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가
정식으로 서구 교육을 받고 박사가 된 젊은 서재필이 배재 학당의 교사로 부임한
것이다.
  서재필은 급진 개혁주의자였다. 그는 미국 국적을 갖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고쳤지만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개혁해서 바로 세워야 한다는 개혁 의지는 대단
하였다.
  서재필 박사는 시대에 앞선 젊은이답게 배재 학당 안에  협성회 라는 단체를 만들
었다. 미국의 의회 제도와 민주주의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이 뽑은 대표들이 법률을 만들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실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이 토론회에 참가하였다.
  협성회는 배재 학당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안에서 토론이 이루어졌지만
차츰 개혁을 찬성하는 일반인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학교 당국에서 토론회의 활동이 학교의 입장을 곤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토론회를 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협성회는 딴 곳으로 옮겨 이름도 독립 협회로
바꿔야 했다. 서기 1896년 6월 6일의 일이었다.
  그보다 2년 전에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삼키기 위해 눈이
시뻘개져 있었다. 청·일 전쟁 다음 해인 서기 1895년에 일본은 저 끔찍한  을미사변
을 일으켰다.
  을미사변이란 일본인 자객들이 대궐을 침범하여 고종 황제의 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운 사건이다.
  명성황후가 조정의 실권을 쥐고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고 일본을 우리 땅에서
밀어내려고 하자,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온 나라 백성들은 일본의 횡포에 치를 떨었다. 하물며 이승만과
같은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분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 정신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특히,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조정 대신들이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바로 세울 생각보다
외국의 힘을 끌어들여 개인의 이익을 챙기고 세력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절대로 외국의 힘을 끌어들여서는 안 되고,
썩어빠진 조정 대신들이 물러나고 새롭고 유능한 인물들이 나서서 나라를 바로잡아
야만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스물한 살의 청년 이승만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로 당당하게 조정 대신
들을 공격했다.
  이승만은 독립 협회의 젊은 지도자로 자리를 굳혔다. 그는 군중들 앞에서 계속
독립 정신을 부르짖고, 썩은 대신들을 공격했다.
  이러한 일로 독립 협회는 임금과 대신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특히, 서재필이
발행하던  독립신문 이 임금을 노엽게 하여, 미국 공사를 통해서 서재필을 미국으로
쫓아 보냈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당하자 독립 협회도 새로운 길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서기 1898년 10월, 이승만은 민중을 일깨우는 가두연설에 주력하기 위해 독립
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 공동회 를 조직하였다. 그는 이 만민 공동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열변가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2000만 명의 동포 가운데서 1999만 9999명이 다 죽어
없어진 후라도, 나 하나만은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각자 가슴속
깊이 맹세하고, 다시 맹세하고 천만 번 맹세합시다. 그리하여 이 나라를 외국의 침략
이 없는 자주 독립 국가로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웁시다.  그의 이런 부르짖음에 군중
들은 열렬한 박수 갈채를 보내었다.
  그러나 만민 공동회가 열릴 때마다 몽둥이를 든 훼방꾼들이 나타나 소란을 피웠
다. 그런데도 뜻을 굽히지 않고 서대문 광장에서, 종로 보신각에서 집회가 열렸다.
  만민 공동회의 세력이 커 가는 것에 위협을 느낀 대신들은 보부상(봇짐 장수와
등짐 장수)들을 중심으로  황국 협회 를 만들고 이 세력에 대항했다. 연설회 때마다
나타나는 훼방꾼들은 바로 이 황국 협회의 보부상들이었다.
  황국 협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독립 협회가 황제를 몰아 내고 대통령 제도를 만들
려고 한다고 거짓말을 꾸며 임금에게 고했다.
  그 일로 독립 협회에 대한 해산 명령이 내려지고, 남궁억, 이상재 등 독립 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다. 이승만은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만민 공동회 이름으로 군
중들과 함께 잡혀간 독립 협회 간부들의 석방을 위해 싸웠다.
  이승만의 이러한 투쟁 때문에 황국 협회의 말이 거짓임이 들어나 간부들은 석방
되었다.
  그 후에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나라는 독립 협회와 황국 협회의 싸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자 고종은 개혁파와 수구파(옛 제도를 그냥 두어야 한다는
조정 대신들의 파) 대표들을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하고 나라일을 의논하게 했다.
미국의 국회와 같은 제도였다.
  이승만도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추밀원 첫 회의가 열리는 날, 이승만은 일본에 가 있는 개혁파 정치 망명객들을
용서하고, 개혁파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박영효를 추밀원 의장으로 임명하라고
주장했다.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임금의 사위)였으나, 김옥균·서광범 등과 어울려
개화당을 조직한 개혁주의 자였다. 그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던
중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를 제정한 일은 유명한 일이다. 그 후, 개화당의 인물들
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므로 박영효를 추밀원 의장으로 임명하라는 것은 역적을 두둔하는 것과 같은
발언이었다. 이승만의 제안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고종은 당장 추밀원을 해산하고,
독립 협회 출신 의원들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승만은 체포되었다. 이승만과 함께 독립 협회 간부들도 다시 체포되었다.
재판 끝에 최정식은 사형 당하고, 이승만은 종신형을 언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독립
협회도 황국 협회도 모두 해산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젊은 포부를 펴보지도 못한 채 서소문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가로서 첫 시련을 맞은 것이다.

  5. 독립을 위해

  이승만의 감옥 생활은 많은 사람의 염려와 보살핌 속에 큰 고통없이 보낼 수 있었
다. 미국인 선교사나 의사가 자주 면회를 와서 약과 필요한 물건을 넣어 주었고,
책도 넣어 주었다. 영어로 된 책이어서 이승만은 그 곳에서도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런 이승만을 간수장 김영선과 차장 이중진은 속으로 존경하게 되었고, 자주
이승만을 만나 위로하고 보살펴 주었다.
  감옥에는 7명의 독립 협회 동지들이 갇혀 있었다. 이승만은 그들과 만나면 우리
백성들에게 독립 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자신의 신념을 말하고 하였다.
   나라가 바로 서자면 임금 이하 모든 백성이 독립 정신을 자져야 하오. 정부의
썩어빠진 관리들은 깨끗이 물러나야 하고, 나라의 제도를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위할 수 있게 고쳐야 하는 게요.
  이승만이 이런 주장을 거침없이 말하자 동지들은 그 생각을 말로만 할 게 아니라
글로 써서 국민들에게 알리라고 권하였다.
  동지들의 권유를 받고 이승만은 자기 주장을 펴는 논설을 써서 비밀리에 감옥 밖
으로 내보냈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꿔 독립 운동의 원칙을 체계적으로 밝혀 민중을
계몽할 수 있는 책을 쓰기로 했다. 그 책이 바로 훗날 미국에서 간행된  독립정신 이
었다.
  어느 날, 새로 선교사로 부임한 헤이로드 여사가 영어로 된  신약성서 를 보내 주었
다. 이승만은 외롭고 고달픈 감옥 생활을 이  신약성서 를 열심히 읽음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찾고 영어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승만은 독실한 크리
스트교 신자가 되었다.
  그의 옥중 생활은 애국심과 기독교의 박애 정신에 힘입어 동료 죄수들을 계몽하고
보살피는 일로 언제나 활기에 차 있었다.
  서기 1903년 3월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감방 안에도 환자가 잇달아 나오자, 이승만
은 선교사 애비슨 박사에게 약을 얻어 환자 치료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는 동안에 감옥 바깥 세상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끈질기게 권세를 쥐고
있던 대신들이 물러나고, 뒤를 이어 민영환 등 혁신파가 정권을 잡았다.
  서기 1904년 2월 9일, 이승만은 혁신파의 주선으로 6년 동안의 길고 긴 감옥 생활
에서 풀려났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였다.
  감옥에 있는 동안 바깥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독립 협회 동지들은 감옥에
갇혔거나 해외로 도망쳐 버려 독립 협회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회원이던 이완
용은 완전히 생각이 달라져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나오던 해에 러·일 전쟁이 터졌다. 그 때문에 한성 거리는
일본군의 군화 소리로 요란했다.
  군인의 힘을 빌려 곳곳에서 일본인이 주인 행세를 하는 판이었다.
   이러다가 장차 이 나라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가?  이승만은 분노에 앞서 한숨이
나왔다. 일본과 맞서 싸울 동지도 없었고, 그럴 힘도 없었다.
  그는 걱정하다 못해 정부의 대신을 지내고 있는 민영환과 한규설을 찾아갔다.
   지금 형편으로 보아 일본이 전쟁에 이길 것이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삼켜버릴 것입니다. 이런 위급한 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겁니까?
  이승만의 안타까운 호소에 두 사람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심정도 우남과 다를 바가 없소. 그러나 우리의 힘이 너무도 미약하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구려.  이윽고 한규설이 말했다.
   우남과 같은 애국 지사를 만났으니, 이 자리에서 무슨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민영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밤이 늦도록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였다.
  세 사람은 우리나라의 억울한 사정과 일본의 횡포를 미국 등 국제 사회에 알려,
여론의 힘으로 일본을 내쫓아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야졌다.
   우남, 이 일은 선생이 맡아 주어야 되겠소. 우남은 민간인 신분이라 행동이 자유
롭고, 나라일을 맡은 것도 없어 문제될 것이 없으니 말이외다. 그러니 유학을 간다는
핑계로 미국으로 건너가구려.
   그래요. 우남이 떠나겠다면 미국에 있는 한국 공사에게 소개장을 써 주리다. 그것
을 가지고 미국 정부의 요인들도 두루 만나 보고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해 주시
오. 우남은 영어에 능통하니까 누구보다도 잘 해낼 것으로 믿소.
  민영환의 말에 한규설도 덧붙여 권하였다. 두사람의 설득에 이승만은 어깨가 무거
워졌다.   제게는 너무 과중한 임무입니다. 그렇지만 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승만은 두 사람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고맙소. 나라를 위하여 우남의 건투를 비오. 그럼 하루빨리 출발할 준비를 서둘러
주시오.
   네, 곧 서두르겠습니다.
  이승만은 옥고가 채 풀리기도 전에 떠날 차비를 하였다. 미국 유학생 자격의
여권과 워싱턴 한국 공사관에 보내는 비밀 문서를 준비하여 트렁크의 가짜 단추
속에 감추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이승만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님!
 그의 아버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외롭게 사시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차마 떠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서기 1904년 11월 4일, 그는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드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인천
으로 떠났다. 그 곳에서 미국 배 오하이오 호를 타고 떠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6. 가난한 독립 투사

  부산항을 떠난 오하이오 호는 며칠 후 일본 고베 항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미국인
로간 목사와 일본에 있는 동포들이 나와 그를 마중했다.
    이 선생, 반갑습니다. 연락을 받고 기다렸습니다.  로간 목사는 이승만과 이중혁
을 반갑게 맞았다.
  11월 13일 일요일, 이승만은 로간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우
들에게 연설을 하고 기부금을 받았다. 미국까지 갈 여비였다. 이승만이 조국을 떠날
때는 일본까지의 여비만 달랑 준비해 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로간 목사의 교회에서 받은 기부금으로는 하와이 호놀룰루까지의 배표밖에는 끊을
수 없었다. 미국 본토까지 가는 여비는 호놀룰루에 가서 다시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호놀룰루로 가는 배는 시베리아 호였다. 그 배에는 하와이로 이민 가는 조선 사람
노동자가 많이 타고 있었다. 사탕수수밭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은 좁은 선실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보다는 낯선 땅
으로 품팔이 노동자로 팔려 가는 불쌍한 동포들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모두자 조국이 가난하고 힘이 없어 당하는 일이기에 그는 더욱 큰 책임을 느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감리 교회 집사인 에드먼 박사의 마중을 받았다.
   지금 교회에는 조선 사람 교우들이 이 선생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환영
행사를 열려고요.  에드먼 박사가 말했다.
  교회 환영회에 참석한 이승만은 그 곳에서 12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한국인 농장으
로 갔다. 200여 명의 교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들 앞에서 기울어져 가는 나라 형편을 이야기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이승만의 연설을 들은 동포들은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30달러나 되는 돈을 마련해
주어, 샌프란시스코까지 갈수 있는 표를 살 수 있었다.
  시베리아 호는 12월 6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이승만은 산 안셀
모 신학교의 학장 매킨토쉬 박사로부터 3년간의 장학금 지급과 생활비를 줄 테니
그 곳에서 공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승만의 초라한 처지를 보고 그를 동정해서
한 말이었지만 자신이 맡고 있는 중대한 임무 때문에 이승만은 이를 거절하였다.
  로스앤젤레스로 간 이승만은 그 곳에 먼저 와 공부하고 있던 신흥두를 만났다.
신흥두는 배재 학당에서 함께 공부했고, 여러 해 함께 애국 동지로 활동한 친구였다.
남캘리포니아 대학에 다니는 신흥두는 이승만을 열렬히 환영하며, 며칠 동안 푹
쉬게 했다.
  드디어 12월 31일, 이승만은 임무를 다하기 위해 미국 수도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신태무 공사를 만나 자신을 소개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신 공사는
비관적으로 말하였다.  서울에서 확실한 지령이 없는 한 우리가 미국 정부에 대해
진정을 할 권한이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 보아도 아무 소득도 없을 거고요.
  이승만은 신 공사의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이 부족한 사
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로부터 받은 비밀 지령을
신 공사에게 보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공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딘스모어 상원의원을 찾아갔다. 딘스모어
상원 의원은 한때 서울 주재 미국 공사를 지낸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민영환이나 한규설과도 아주 친한 사이였다.
  딘스모어는 옛 친구 민영환과 한규설이 보낸 비밀 편지를 읽고 무척 반가워하며
도와 줄 것을 약속했다.
 우선 국무 장관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자세히 알리도록 합시다. 내가 주선하리다.
  며칠후, 이승만은 딘스모어 의원과 함께 국무 장관 존 헤이를 만났다. 이승만은
나라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 하고 일본이 야욕을 부리지 못하도록 미국이 힘써 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내 힘이 닫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만나 의견을 나누도
록 합시다.
  존 헤이 장관은 한국을 동정하고 이승만에게 무척 호의적으로 대했다.
  국무성을 나오는 그의 발걸음은 나는 듯이 가벼웠다. 쓰러지려는 조국의 운명에
한가닥 회생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이승만은 이런 기쁜 마음으로 민영환과 한규설
앞으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딘스모어는 그것을 서울 주재 미국 공사 앞으로
가는 우편 주머니 속에 넣어 보내 주었다.
  그러나 존 헤이 장관의 약속은 그 해 여름 존 헤이 장관이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직접 탄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승만은 지체하지 않고 하와이에서 온 윤병구 목사와 함께 탄원서를 만들었다.
그것을 다시 독립 협회 일로 미국으로 쫓겨와 있던 서재필을 만나 탄원서 내용을
함께 고쳤다.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정부에서 보낸 공식 대표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다.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동양의 조
그마한 나라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찾아온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서 기쁩니다. 여러분의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도와 드렸
으면 좋겠습니까?
   대통령 각하, 여기 각하에게 드리는 우리 동포의 탄원서가 있습니다.
  이승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온몸이 긴장되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루스벨트는 탄원서를 죽 훑어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의 애국심에 나도 감동을 느낍니다. 나도 힘이 되어 드리고 싶지만 그럴
러면 이 탄원서가 공식적인 경로를 거쳐서 접수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루스벨트는 한국 공사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탄원서를 보내 주면 곧 열리는 포츠머
스 강화 회의에 제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가슴이 뛰었다. 다시 희망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공사가 된 김윤정을 만난 두 사람은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본국 정부로부터 명령이 없는 일은 내 마음대로 할 권한이 없소.
  김윤정은 딱 잘라 거절하였다.  아니, 김 공사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승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본국에서 그런 명령을 기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참고 여러 차례 공사를 만나 설득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에 매수당한 김 공사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처럼 애를 태우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을 때, 끝내는 조국으로부터
슬픈 소식이 날아왔다.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을사조약이 맺어졌다는 것이다.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
을 맺은 것이다. 서기 1905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아, 끝내 내 조국이 이 꼴이 되고 말다니!   이승만은 눈앞이 캄캄했다. 그가 그토
록 염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다. 함린 목사의
주선으로 수업료를 내지 않는 장학생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이승만은 스스로 조국 독립에 큰 힘이 될 수 있는 큰 인물
이 되기로 결심하고 학업에 열중했다.
  공부에 열중하면서 이승만은 방학을 이용하여 조국을 알리고 독립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강연을 했다. 강연은 얼마간의 수입을 얻을 수 있는데다 한국을 이해하는
많은 미국인 친구를 사귈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서기 1907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그 이듬해에 하버드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헐 목사의 소개로 프린스턴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면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특히, 이승만은 윌슨 총장과 친하게 지냈다. 윌슨은 이승만에게 연설할 기회를
자주 마련해 주었고  장래 한국 독립의 구세주가 될 유능한 젊은이 라는 소개를 하곤
했다.
  서기 1910년 7월 18일, 드디어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 중립론 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무렵 조국 대한은 일제의 무력적
위협 속에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이어서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차례로 빼앗겼다.
마침내 8월에는 국권을 강탈당하였다.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이 슬픈 소식에 이승만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굳게 맹세하였다.


  7. 고국에 돌아와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에 돌아가 조국 독립을 위해
할 일을 찾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 청년회의 국제적인 지도자인 모트 박사가 그에게 한국 청년의
조직적 교육 및 전도의 책임을 맡아 달라고 권했다. 이어서 서울 기독교 청년회
간부인 이상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승만 박사, 지금 조국은 그대를 필요로 하고 있소, 하루 빨리 돌아와 조국 기독
교 청년회의 교사가 되어 주시오.
  이승만은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조국을 떠난 지 6년만의 귀국이었다.
  그가 탄 발틱 호는 뉴욕 항을 출발했다.  다시 조국을 찾게 되는 그의 가슴은
벅차 올랐다. 이승만은 일본 땅을 밟기 싫어서 리버풀을 거쳐 런던으로 갔다가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거쳐 10월 말경에 만주를 통과했다.
  한국과 만주의 국경인 압록강을 건너면서 이승만은 깊은 감회에 젖었다. 이제는
일본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며 신음하는 조국 강산이라 그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 이경선은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가 되어 아들의 귀국을 기뻐했다.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
  6년만에 아들을 만난 아버지의 첫 당부였다.
   네, 아버님. 다시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승만은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약속했다. 그냥 하는 약속이 아니라 다시는  조국
과 가족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이승만은 조선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YMCA-와이엠시에이)를 중심으로 후진들을
양성하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젊은이들을 기독교 신앙의 힘으로 깨어나게 하는
것이 잃은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교회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반대하거나 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감옥 생활
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참으며, 기독교 청년회 연합
회의 전도 사업에만 정신을 쏟았다.
  그러한 열성으로 그는 곧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가 운영하는 학당의 교장이 되었다
   이 박사, 지금 당신의 뒤에는 항상 일본 관헌의 감시의 눈이 따라붙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러니 앞으로도 저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상재가 염려가 되어 당부하는 말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게 저들의 함정으로 빠져들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망해 버린 나라의 청년 운동을 하면서 적에게 반감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승만의 강연과 강의가 조금만 이상해도 헌병대에 불려가 꼬치 꼬치 심문을
받아야 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오?
   국제 도의가 무슨 뜻이오?
  그들은 이승만의 강연 내용을 하나하나 트집잡아 캐물었다. 이승만은 점잖게 대답
했다. 그러다가 종내 화가 나면 책상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승만의 그런 행동에 일본 헌병들은 비위가 거슬렸지만 감옥에 넣지는 못했다.
이승만이 미국 친구들도 많고, 그 곳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보통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불안한 나날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서기 1910년 12월, 안명근
이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던 사건이 터지자, 일본 헌병들은 이것을 빌미로 민족
주의자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일제는  기독교 음모 사건
이라는 터무니없는 사건을 조작해서 청년 운동을 하는 인사들도 잡아들였다.
  이승만은 모트 박사를 비롯한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간부들의 재빠른 제보로 다행
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 정계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만약 그를 감옥에 가두면
미국 언론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이렇게 들고 일어나 항의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나다닐 수는
있었지만 활동할 수는 없는 몸이 되었다.
  그 즈음,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세계 감리교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 때, 한국
의 감리교에서도 이승만과 두 사람의 선교사와 한국인 목사 한 사람을 대표로 파견
하게 되었다.
  당시 북아시아의 감리교를 대표하고 있던 해리스 감독의 노력으로 이승만에게도
출국 허가가 나왔다.
  그런데 아버지 이경선이 펄쩍 뛰며 이를 반대하였다.
   또 내 곁에서 떠난다고? 안 돼, 이제는 안 떠난다고 했잖느냐?
   아버님, 저는 곧 돌아옵니다. 지난번처럼 여러 해 있을 것도 아닌데 허락해 주십
시오.    네 나이가 지금 몇이냐? 이러다가는 네 대에서 가문이 끊기고 말겠다. 새로
장가를 들든지 해서 대를 이어야 할 사람이 어찌 외국으로 떠돌기만 한단 말이냐?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걱정했다.
  그 즈음 이승만은 어릴 때 결혼한 부인과 만나지도 않은 남남이 된데다 아들 태신
이까지 잃고 독신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만 마치면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이경선도 나라일에 몸바친 아들의 간절한 청을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
다. 이승만은 또다시 사랑하는 조국 강산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 이별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가 고국을 떠난 2년
뒤에 아버지는 그리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외롭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8. 하와이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이승만은 해리스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 선생, 당신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면 매우 위험합니다.
   해리스 씨, 저는 결코 일본의 가도짓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뿐더러 일본의 통치
밑에서 신음하는 나의 사랑하는 조국과 동포를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박애정신이 당신이 일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바라고 있습니다.
  일본을 이해하는 것은 참다운 박애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약한 민족을 억누
르고 지배하는 것이 박애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지요. 일본으로부터의 한국 독립은
전 기독교인의 양심의 발동으로써 원조되고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감리교 대회에서도 해리스와 같은 종교인들을 수없이 만
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승만이 일본을 비난하고 한국 독립을 원조해야 한다고 주장
할 때마다 조심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이승만 박사, 당신의 주장이 아무리 옳아도 지금 그런 주장을 펴는 것은 위험합
니다. 당신의 조국에도 별로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일본을 비난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본회의 석상에서  존경하는 각국 대표 여러분! 기독교나 민주주의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고
한국인을 노예와 같이 부려먹고 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는 먼저 약소 민족의
해방이 필요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의 자주 독립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정신은 먼저 이러한 평화 옹호에 있어야 할진대, 세계의 양심적인 기독교도
들은 마땅히 이를 위하여 단결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압박받는 민족
을 해방시키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고 나아가서 세계 평화를 유지하도록 이바지
해야 합니다.  하고 당당하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비위를 거슬려 선교 사업을 위태롭게 한다
는 비난만 받을 뿐, 그의 주장에 동조하고 박수를 보내는 사람은 지극히 적었다.
  한 달 가까이 계속된 회의는 결국 선교 활동을 위해 일본과 밀접하게 협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과 한국의 선교 사업을 보호한다는 결론을 지은 채 끝났다.
  이승만이 바라고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승만은 실망했다.
이승만은 아버지가 기다리는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회의에
서 그가 계속해서 일본을 비난하고, 일본의 조선 통치를 강도짓으로 욕했기 때문에
귀국하기만 하면 체포당해 감옥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서 옛 친구들을 만나고 한국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특히, 대학 총장을 물러나 대통령 후보가 된 윌슨을 다시 만나 조국의 사정을 자세
히 설명하고 그의 지원을 요청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당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열의에 무엇이라 치하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내가 대통령
이 되면 당신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도록 애써 보리다.
  윌슨은 이승만을 따뜻이 대해 주며 이런 약속을 했다. 이승만은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로 주저앉아 조국의 독립을 돕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하와이로부터 지난날 함께 감옥 생활을 했던 박용만의 편지가 날아왔다.
   우남, 이 곳으로 오게. 이 곳에 와서 나와 함께 일을 하세. 이 곳에 살고 있는
많은 동포들이 자네와 같은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네.
  편지와 함께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총회 가 보낸 초청장이 들어 있었다. 하와이로
와서 동포들의 교육과 출판 사업을 맡아 광복 운동의 기초를 마련토록 하라는 것이
초청 이유였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 곳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승만은 그 곳 교포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어린이와 교포에 대한 계몽
과 교육에 열성을 쏟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하와이 생활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그 하나는 기독교의 분열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장로 교회의 세례를 받았으나, 하버드 대학 시절에
는 감리 교회의 신자로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어느 한 종파를
지지하는 것보다 종파를 초월하여 동포의 단결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것이 양 교파
로부터 미움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감리 교회 선교부와의 불화는 끊일새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대한인 국민회
와의 마찰이었다. 대한인 국민회는 안창호가 서기 1912년에 미국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였다.
  이 단체의 하와이 지부의 간부들인 교포 지도자들은 박용만의 주장인 독립 광복
운동의 방안으로서 무력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교포 2세 어린이와
청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 독립을 위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승만의 생각은 이들과 전혀 달랐다.
   무력으로 일본과 싸우자면 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를 흘려야 합니다. 게다가 무력
을 기르는 일은 1, 2년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본은 이미 세계에서 몇째 안에
드는 막강한 군대를 가졌는데, 우리가 언제 그들과 맞설 군대를 기른단 말입니까?
게다가 우리는 군대를 기를 만한 자금도 없고, 땅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곳에
서 군대를 기른다고 떠들썩하게 소란을 일으킨다면, 미국 국민들은 우리를 좋지
않게 볼 것입니다.
  이승만은 2세들을 훌륭히 교육시키면서 외교적인 활동을 통해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우리의 억울한 사정과 일본의 횡포를 고발함으로써
국제 사회로부터 여론의 지원을 받아 일본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국제 정세를 잘 아는 이승만으로서 당연히 내세울 수 있는 주장
이었다.
   박용만은 자신의 주장대로 하와이에 국민 군관 학교를 세우고 규모는 작아도
사기가 왕성한 군대의 양성과 훈련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에게 학원과 군사 학교를 통합하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의견에 반대했고, 그가 간행하고 있던  태평양 의 사설을 통해
국민회의 잘못을 비난했다.
  박용만도 자신이 발행하는  코리아 헤럴드 에 이승만을 공격했다. 친구였던 두 사람
이 이처럼 분열되어 서로 비난하는 바람에 동포 사회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박용만
의 한인회는 안창호라는 더 큰 지도자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외롭고 고독
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서기 1919년 3월 1일, 조국에서는 3,1 만세 사건이 터졌다. 윌슨 대통령
의 민족 자결주의에 힘입어 일어난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갔다.
   조국을 찾을 때는 이 때다!
  해외에 있던 동포들은 모두 독립을 찾을 기회가 왔다고 들떴다.
   국내에서 바야흐로 독립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때에 해외 교포들은
한층 합심 단결하여 이에 호응할 것이며, 주권 회복을 위하여 총궐기할 것을
호소한다.
  이승만은 미국 전역에 있는 교포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교포들의 힘을 하
나로 묶어 조국 독립에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9. 임시 정부 대통령이 되다.

  민족 대표 33인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3,1 운동의 불길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
져 나갔다. 외국에 나가 있던 많은 동포들도 이에 큰 자극을 받았다.
  이 3,1 운동에 참가했던 인원은 약 110만 명 정도로 추측하고 있으며, 운동 기간은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약 두 달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평화적인 시위와 만세 운동을 일본은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총칼
로써 무자비하게 짓 밟았다.
  이 때 사망한 우리 동포가 약 7500명, 부상당한 사람이 약 1만 6000명, 감옥에
잡혀간 사람이 약 5만 명에 이른다. 그 밖에 시위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불태운 집과
건물이 수백 채에 이르며, 수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가 잔인한 고문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희생의 보람도 없이 3,1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3,1 운동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온 겨레가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각오가 더욱   새
로워졌고, 많은 애국자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더욱 활발히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필라델피아로 가서 서재필을 만나 의논한 끝에 전 한인 회의를 열기
로 합의했다. 국내의 독립 운동에 발맞추어 나갈 새로운 독립 운동의 방향을 모색
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1919년 4월 14일, 이승만의 노력으로 수많은 교포들이 필라델피아로 모여들었다.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이 회의를 이끌면서 연설했다. 그의 연설에 교포들은 뜨거
운 박수를 보냈다.
  이 회의에는 필라델피아 시장, 상원 의원 노리스, 스펜서 등 미국 정계의 거물들이
참석하여 격려와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참석자들은  구라파 열강은 일본에 강점된 한국을 즉시 독립시키는 조치를 취하여
줄 것 을 결의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수많은 미국 시민들의 동정적인 박수속에
미국 독립 회관까지 행진했다.
  이 일로 이승만은 미국에 사는 한국 교민의 가장 뚜렷한 지도자로 떠올랐다. 한국
의 독립 지도자로 그만큼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람도 없었다.
  그 때문에 같은 해 4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이승만
을 국무 총리로 뽑았다. 내무 총장은 안창호, 외무 총장은 김규식 등으로 미국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쟁쟁한 지도자들이 모두 임시정부의 각료로 뽑혔다.
  서울에서도 13도 대표가 비밀리에 모여 한성 임시 정부를 수립했는데, 이승만은
그 곳에서도 집정관 총재라는 자리에 뽑혔다.
  임시 정부 국무 총리가 된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 위원부 사무실을 열고 한성 정
부의 집정관 총재로, 상하이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서 그의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이승만은 맨 먼저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임시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
했다. 그러나 윌슨은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의
요구를 거절했다.
  윌슨 대통령의 인정을 얻지 못한 이승만은 한국의 사정을 이해하는 미국인 친구들
을 설득해서  한국 우호 연맹 을 조직했다.
  이러한 외교적인 활동을 펴면서 이승만이 스스로 임시 정부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쓰는 데 대해 상하이 임시 정부는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내각 책임제인 임시 정부에
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 사실을 지적하며 대통령 호칭을 쓰지 말라는 임시 정부 국무 총리 대리인
안창호 명의의 전문을 받고, 이승만은 즉시 그의 입장을 설명하는 전문을 보냈다.
   1919년 8월 26일 워싱턴.
  상하이 임시 정부 안창호 씨, 우리가 정부 승인을 얻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는데,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사정을 발표한 까닭
에 지금은 대통령 명칭을 변경할 수는 없소.  만일 우리끼리 그런 하찮은 명의 때문
에 떠들어서 행동 통일이 되지 못한다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될 것이니 그 일로
더 이상 떠들지 말기 바라오.
  이런 질문을 보낸 이승만은 계속해서 대통령 명의로 독립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이러한 그의 외교 활동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
에서 인정받고 있는 일이라 안창호는 부랴부랴 한성 임시 정부와 상하이 임시 정부
를 통합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개헌 작업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9월 6일 실시된 개헌으로 이승만은 통합 임시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통합 정부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은 구미 위원부를 이끌고, 상하이 임시
정부는 자신의 결재를 받아 국무원이 업무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처럼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외교적인 독립 운동에 매달려 있게 되자, 상하이에서
는 그를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국무 총리가 된 이동휘가 무력 항쟁을 주장하며,
이승만의 외교를 통한 독립 운동을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대통령에서 물
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시 정부는 이 일로 지도자들끼리 심한 반목과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구미 위원부를 서재필·김규식·노백린 등 여러 동지들에게 맡기고 상하이
로 가서 임시 정부의 소란을 수습하기로 했다. 대통령인 그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소란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떳떳이 여행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그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기 위해 눈이 시뻘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비서인 임병직만 데리고 먼저 하와이로 가서 중국으로 바로 가는 배를
구해 타기로 하였다.
  그 곳에서 오랜 친구 보드윅의 도움으로, 중국인 교포 시체를 싣고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다. 이승만은 그 배의 선원으로 꾸며 갑판에서 비서 임병직과 일을
하였다.
  한 달도 더 걸리는 항해중에 이승만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물 따라 하늘 따라 떠도는 이 몸
  만리 길 태평양을 몇 번이나 오갔던가!
  어느 곳의 명승도 보잘 것 없고
  꿈 속에서도 언제나 못 잊는 건
  내 나라 한양의 남산뿐일세.

  그 중의 한 편인 이 시는 그가 얼마나 조국을 그리워 하고 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기나긴 항해 끝에 드디어 상하이에 도착했다. 대통령을 맞는 상하이 임시 정부의
망명객들은 논쟁을 중단하고 그를 환영했다. 기관지인  독립 신문 은 사설에서 그를
맞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썼다.
   국민아, 우리 대통령 이승만 각하 상하이에 오셨도다 ·····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수하기에 일심하자. ····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진실로 우리 대통령을 환영할 때에
우리가 그에게 바칠 것은 꽃다발도 아니고 축하 노래도 아니며, 오직 우리의 목숨이
니,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  하고 전장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네 하고 나서자.
(1921년 1월 1일자 독립 신문)

  이런 환영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자신의 방식대로 독립
운동을 이끌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무력 투쟁
으로 일본을 내쫓아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부는 소련 공산당의 힘을 빌려 독립 운동을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또 일부는
일본을 반대하는 중국 정당과 손잡고 같이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러한 강경론을 모두 반대했다. 그것은 일본을 자극하여 고국 동포를
더욱 괴롭히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더구나 공산당과 손을 잡고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은 또 다른 노예 생활을 스스로 부른다고 설득했다. 그는
광복이 되면 조국을 민주주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이승만의 국제 외교를 통한 독립 운동 방안은 많은 애국 투사들의 반대에 부딪
혔다. 국무 총리 이동휘는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하다 스스로 사직하고 시베리아로
떠나 버렸다. 뒤따라 안창호, 김규식 등 총장들도 사임했다.


  이승만은 우울했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나라를 되찾자는 같은 목표
를 두고, 그 방식의 차이 때문에 다투기만 하는 것이 서글펐다.
  당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북간도에 북로 군정서와 서간도에 서로 군정서를
두어 독립 무장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무장 활동을 하는 것도 많은 제약이 있었고, 1920년에 일제
가 간도에 병력을 보냄으로써 서,북간도의 군정서 조직이 파괴되었다.
  결국 서기 1921년 5월 20일, 이승만은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워싱턴에서 열리는 열강들의 군비 축소 회의에 가서 외교 활동을 펼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지만, 상하이에 더 머물 필요가 없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다.
  임시 정부 요인들과 많은 교포들의 환송을 받으며, 이승만은 미국 기선 칼럼비아
호에 올라 워싱턴으로 향했다.


  10. 숨가쁜 외교 활동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친구인 윌리암스의 주선으로 기자 회견을 했다. 기자들
에게 파티를 베풀고 한국인의 영웅적인 3·1 독립 운동과, 독립을 위한 임시 정부
활동을 소개했다.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이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이승만의 주장보다 이승만을 비난하는 일본 대표의 주장을
더 크게 취급하였다. 어떤 신문은 이승만을 가리켜 한국인을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
며, 영도권을 잡으려는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꼬집기까지 하였다.
  군축 회의는 결국 한국 문제는 의제로도 채택되지 않았다. 대표들은 일본의 주장
에만 귀를 기울였다.  군축 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 활동은 끝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망할! 너희들이 방해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끈질기게 너희들과 대항해 싸울 것이
다.
이승만은 이런 결심으로 워싱턴에 임시 정부의 외교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조직을
발판으로 서양 각구에 대한 외교 공세를 펴자는 뜻이었다.
  이럴 즈음 상하이 임시 정부는 또다시 극심한 분파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서기 1922년 6월, 임시 정부 의정원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했다.
또, 서기 1925년 3월에는 임시 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올려 통과
시켰다. 이처럼 끝없는 분파와 모략에 이승만은 우울했다. 서로 헐뜯고 싸움질하는
모습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에서는 밀려났지만 구미 위원부를 통해서 외교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서기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 연맹 총회가 열렸다. 국제 연맹
총회는 당시 만주에서 벌어진 중국과 일본의 전쟁 문제를 토의 의제로 삼고 있었다.
이른바  만주 사변 에 대한 토의였다.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급히
미 국무 장관 스팀슨을 만나 일본의 침략을 그대로 인정해서는 안 되며, 한국이
독립하여 전쟁을 막는 완충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팀슨은 이승
만의 주장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실망한 이승만은 곧장 제네바로 떠났다.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직접 호소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제네바에 도착한 이승만은 호텔 드 루시에에 여장을 풀고, 곧장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을 접촉했다.
  그런 노력 끝에 스위스 신문에 일본인의 학정 밑에 가혹한 학대를 또다시 받게
된 만주의 한국 망명 이주자들에 대한 그의 긴 담화문이 크게 실렸다. 신문들뿐만
아니라 방송도 그의 주장을 크게 보도해서 각국 대표의 관심을 끌었다.
  각국 대표들은 한국의 입장에 무척 동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국제 연맹 사무 총장 드러몬드에게  한국의
독립 회복을 통하여 아시아에 있어서의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 정책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계획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복잡한 국
제 정세 속에서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할 뿐 남의 사정에 끼여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이승만은 개인적으로 인생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그와 평생
을 함께 하게 되는 프란체스카와 만나게 된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와 출신의 여성으로 그 당시 어머니와 함께 제네바에 머물
고 있었는데, 마침 식당에서 이승만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
를 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조국은 일제의 압박 아래 신음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국의 독립을 호소
하러 국제 연맹 회의에 왔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끝까
지 저들과의 싸움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승만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프란체스카는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박사님의 주장은 신문에서 읽었어요. 조국을 잃은 박사님의 아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요.  나라를 위해 싸우시는 박사님을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된 것은 정말 영광
이에요.
  프란체스카는 진심으로 이승만을 존경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만남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갑자기 가까워졌다.
  오랜 망명 생활 속에서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위하여 홀로 싸워 온 이승만은 따뜻
한 여성의 깊은 정에 이끌렸다.  그래서 우정은 사랑으로 바뀌고, 사랑은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어 더욱 굳어져 갔다.
  이승만은 얼마 후, 소련의 도움을 받으려고 모스크바로 갔다가 그 곳에서 쫓겨
나오다시피 되돌아왔다.  나라를 잃은 민족 지도자의 설움은 그 어느 곳에서나 마찬
가지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프란체스카가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고,
프란체스카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이민 수속을 밟았다.
  서기 1934년 10월 18일,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그로부터 프란체스카는
부인으로서는 물론, 비서로서, 가정부로서, 또 동지로서 이승만을 돕고 따랐다.
참으로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국경을 넘은 사랑과 결혼은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물의를
일으켰다.  교포들은 그가 서양여자와 결혼한 것에 대하여 깊은 실망을 표시하고
크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비난과 물의 속에서 더욱 뜨거워져 갔다.

  11. 태평양 전쟁

  서기 1937년 F.D. 루스벨트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
턴으로 갔다. 대통령은 바뀌지 않았지만 정부 조직이 바뀌었으니 대외 정책을 바꿀
것으로 기대 하고, 관리들의 협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무성 관리들은 여전히 이승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완고하고
타협할 줄 모르고 야심만 가득 찬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워싱턴의 국립동물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
그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국무성 관리들을 원망하며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쓸 결심
을 했다.
  서기 1940년 한 해 동안 이승만은 비서를 통해 구해온 자료들을 근거로  일본
내막기 라는 책을 썼다.
  이듬해 리벨사에서 나온 이 책은 모두 15장으로 된 두툼한 책이 되었다. 일본의
침략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머지않은 장래에 틀림없이 일본은 세계 대전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견하는 내용이었다.
   연기한다는 것은 해결이 될 수 없다.  산불은 저절로 꺼지지 않는다.  매일매일
가까이 온다.…… 지금 사태는 편안하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신들은 그래도
아직  한국인과 만주인과 중국인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싸움을 싸우게 하라.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승만의 이런 주장이 쓰인 책이 출간되자 미국 사람들은  전쟁을 부추기려는
미친 소리  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소설가 펄벅 여사는  아시안
매거진 에 이 책을 추천했다.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나도 진실
이기에 무서운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공포를 쓴 것이 아니며, 분명히 일어날 사건의
진상을 지적하고 증거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 이것은 미국인을 위해 쓰여
진 책으로 미국인들은 읽지 않으면 안 될 책이며, 지금이야말로 읽어야 할 때이다.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 에 예언한 일이 그 해 12월에 드디어 터졌다.
  서기 1941년 12월 8일(현지 시간 7일 오전 7시), 정복욕에 사로잡힌 일본이 선전
포고도 없이 하와이 오아후 섬 진주만(펄하버)에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 기지를 기습
공격했던 것이다.
  이 기습 공격에 참가한 일본 해군의 항공기와 특수 잠항정은 출항중인 항공 모함을
제외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켰고, 미국은 즉각 대일 선전 포고를 발하여 태평
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렇게 되자 지금껏 이승만을 믿지 않고, 그를 꺼려했던 미국의 정치인들은 그제야
그를 놀라운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마치 성서의 선지자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정치가는 이렇게 그를 칭찬했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임시 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다. 임시 정부가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미국과 손잡고 전쟁에 참여해야 일본의 쇠사슬에서 풀려났을 때
진정한 독립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 국무성 관리들은 그 때까지도 일본과 러시아의 눈치만 보며,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았다.  다만 국방성만은 이승만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에게 협조를
구했다.
  이승만은 육군성의 요청에 따라 한국과 일본에 몰래 보내어 사회를 혼란시킬 특공
대원이 될 한국 청년들을 모집했다. 일본인과 닮은 한국인이라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조국의 동포들을 격려하는 방송을 했
다.
   나의 사랑하는 2000만 동포들이여! 조국의 해방은 이제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친구인 미국은 머지않아 일본을 항복시키고, 조국 땅을 우리에게 찾아
  줄 것 입니다. 그러니 국내외의 동포 여러분들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일본군의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철교와 다리를 부숴 버리십시오.
  이승만의 이런 방송은 국내외에 있는 많은 동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연합국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면서 미국·영국·중국·소련 등은 전쟁이 끝난
후의 한국 문제를 중요 안건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각은 상당 기간 동안
신탁 통치를 하다가 때가 되면 독립시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승만과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우리의 힘은 약할 뿐이
었다.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열리게 되는 국제 연합 총회에 참석하여 한국
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
하고 연합국은 한국 문제를 전쟁에 승리한 자기들 멋대로 처리하려고만 했다. 한국은
전승국의 전리품으로 인정될 뿐이었다.
  마침내 서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은 35년의 기나긴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 감격적인 해방이 곧바로 우리의 완전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에 따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군사 분계선이 설정
되고, 미·소 양국의 군대가 우리나라의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하였기 때문이다. 소련군
은 서기 1945년 8월에 북한에 진주하였고, 미군은 9월 초에 남한에 진주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얄타에서 자기들끼리 협정한 대로 이뤄진 일이었다.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찾지
못한 탓에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분통스러운 일이었다.



  12.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조국이 해방되었지만 이승만의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뒤늦게 조국이 허리가
잘린 것을 알고 이승만은 매일같이 국무성을 드나들며, 그 부당한 결정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한반도의 주인은 엄연히 한국 국민들입니다. 한국을 둘로 쪼개어 외국의 군대가
다스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소련군을 북쪽에 주둔시키게 되면 그
들은 반드시 남쪽까지 공산화하려고 할 것입니다. 일본으로부터 되찾은 조국을 이번
에는 다시 소련에 넘겨 줄 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의 엉큼한 뱃속을 꿰뚫어보는 이승만의 주장을 미국 관리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듣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한국 독립에 방해가 되는 고집쟁이 인물이라고
따돌렸다.
  이승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고,
그들은 약속대로 38도선을 군사적 경계선으로 하여 남과 북에서 각기 군정을 펴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들의 결정을 반대한 이승만의 귀국을 주선하지 않았다. 그렇게 2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의 도움으로 겨우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초가을의 서울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김포의 넓은 들판
에 익어 가는 벼이삭이 미풍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는 김포 공항에는 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남쪽 하늘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남쪽 하늘에서 미국 군용기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모습을 나타냈다.
   드디어 오시는군!
   이승만 박사가 오신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이윽고 비행기가 활주로에 멈추어 섰다.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사다리가 내려지자,
비행기 안에서 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대한 독립 만세!
   이승만 박사 만세!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다.
  트랩에서 내려선 이승만은 귀여운 소녀로부터 한아름의 꽃다발을 받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피잉 돌았다. 한국 독립의 최고 지도자이며 투쟁자인 이승만이 33년 만에 조국
땅을 밟으며 감격에 겨워 흘린 눈물이었다.
  그의 가슴이 메어질 듯했다. 이승만은 환영 나온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튿날 오후 7시 30분,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귀국 인사를 했다.
   ..... 고국을 33년 만에 다시 돌아와 고국 삼천리를 또다시 보고, 사랑하는
남녀 동포를 또다시 볼 수가 있으니, 기뻐서 웃고도 싶고 슬퍼서 울고도 싶습니다.
예정대로 중국으로 가서 임시 정부 당국과 협의를 하고 김구 씨와 같이 오려고 했는
데, 잘 되지가 않아서 부득이 혼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모든 정당과 당파를 협동
하여 한 개의 덩어리로 만들어 가지고 우리 한국의 완전 무결한 독립을 찾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 또 한 번 부탁할 것은 우리 남녀들이 뜻을 하나로   일심 노력하
여 이번의 기회를 영원히 놓치지 맙시다. 지금 우리는 뭉치면 살고 흩어 지면 죽는다
는 것을 명심해 두십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말은 그 후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며, 새 민주 정부를 세우기까지 우리 국민에게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이 때, 서울에는 이미 50개가 넘는 정당이 만들어져 서로 새 정부의 정권을 맡으려
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공산주의자들도 끼여 있었다.
  당을 만든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승만을 찾아와 자기네 당의 당수가 되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런 청을 모두 거절했다. 자칫 잘못하면 당파 싸움의 수렁
에 빠져들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곧 그를 따르는 동지들과 손잡고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를 만들어 많은
정당을 이 속에 끌어들였다.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는 독립 촉진을 위한 통일된 진로
를 모색하기 위해 조직된 협의 기구로 대부분의 정당이 이 기구 속에 통합되었지만
공산주의자들만은 끝내 그의 지휘권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 해 12월 26일에 모스크바에서 이른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들은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를 결의하
였다. 한국인은 당장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이후 5년 동안 미국·영국·중국·소련의
4개국이 공동으로 한국을 다스린다는 내용이었다.
  이승만은 상하이에서 돌아와 있던 김구와 손잡고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조직을
통해 반탁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왜 우리의 장래를 외국에 맡겨야 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소련 공산 집단은 세계 정복을 꿈꾸는 무리들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겼다가는 이번에는 소련의 식민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신탁 통치를 반대해야 합니다.
  이승만은 전국을 돌며 반탁 운동을 일으켰다. 서울에서 시작된 반탁 시위는 전국
으로 번져 갔다.
  한편, 공산당은 스스로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신탁 통치를 찬성하는 데모를 벌였다.
  이리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반탁과 찬탁 데모가 벌어져 민주 진영과 공산주의자
사이에 서로 피를 흘리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공산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반탁
데모는 무서운 기세로 번져 나갔다.
  그러자 미국 정부에서도 생각을 바꾸어 한국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시키기로
했다. 세계 각국 대표가 모인 유엔 총회에서는 한국 국민의 뜻대로 자유 선거를 하여
지도자를 뽑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독립 정부를 세우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제야 이승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38도선 이북에 군정을 펴고 있던 소련과 북한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유엔 한국 위원
단의 입국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남북을 공산주의 나라로 만들려는 음모를 달성하
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자 유엔은 자유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하고 독립
정부를 세우도록 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국토 분단이라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서기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국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5,10 총선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민주 선거였다. 이어서 소집된 제헌 국
회에서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되어 초대 국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제헌 국회에서는 이승만의 사회로 나라의 기틀이 되는 헌법을 제정하여 7월 17일에
공포하였다. 그리고 그 헌법에 따라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압도적인 표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서기 1948년 7월 24일 이승만은 중앙청 광장에서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나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고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국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선서를 읽는 그의 목소리는 자꾸만 떨려 나왔다. 평생 소원이었던 독립된 나라를
세우고, 첫 대통령이 된 그로서는 목소리가 떨리고, 뜨거운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어, 광복 기념일인 8월 15일에는 한국 독립의 은인인 맥아더 장군이 참석한 가운
데 대한 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독립국의 기틀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셈이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의 가슴 한구석에는 아직 텅 빈 허전함이 남아 있었다. 한반도의
반쪽만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3. 오로지 북진 통일

  대통령의 길은 결코 영광의 길만은 아니었다. 가난한 나라 형편도 그랬지만 가장 그
를 괴롭힌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파괴 공작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대한
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일어난 제주도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이었다.
  이들 사건은 우리의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평온과 질서를 되찾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지나야만 하였다.
  그런데다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쪽 김일성 정권은 엄청난 수의 군인과 군비로
언제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비를 서둘렀지만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 미국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정세를 잘못 판단한 미국은 군비 지원도 없이 남한
에 주둔해 있던 미군을 철수해 버렸다.
  서기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은 드디어 39도선의 전 지역에 걸쳐 불법 남침을
감행하였다. 마침내 염려했던 사태가 터진 것이다.
  공산군에 비해 군사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국군은 계속 남으로 남으로 밀리기만
하다가 미국을 비롯한 유엔 군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 해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26일에는 국군이 압록강까지 다달았다.
   아, 이제야 나와 온 국민이 그토록 바라던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구나!
  이승만은 암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직 질서도 잡히지 않은 평양까지 방문하여
북한 동포를 위로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은 오늘날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는 격전이 벌어졌다. 양쪽은 모두
지치고 수없이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중 먼저 공산군이 휴전을 제의
하자 유엔 군도 이에 동조하여 휴전 회담이 열렸다.
   휴전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되오! 우리는 오직 북진 통일뿐이오.
  이승만은 기어코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 국민과 함께 휴전 반대 운동을 벌이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단 중 서기 1953년 6월 8일, 휴전 회담에서 포로 교환 협정이 이루어졌다.
  휴전을 반대하던 이승만은 6월 18일 2만 7000명이나 되는 반공 포로를 석방해 버림
으로써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우방의 원수들이 눈이 휘둥
그레진 사건으로, 그의 대담성과 투철한 반공 정신을 잘 나타내 준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해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
되고 말았다. 분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자주 국방의 능력이 없었던 가난한 나라의 설움
을 되씹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피난지 부산에서 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피해 복구 사업에 온 힘을 쏟았
다. 유엔은 유엔 한국 재건 위원단을 파견하여 우리의 피해 복구 사업을 도왔다.
  우방의 도움을 이끌어 내기 위한 그의 뛰어난 외교 활동이 잿더미가 된 나라를 부
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을 반대하는 정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고집스러움과 그의
눈치만 살피는 추종자들이 벌이는 일이 그로 하여금 독재자라는 욕을 먹게 만들었다.
  자유당이 이승만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의 명성만 이용해서 오랫동안 권세를 쥐려
고 했기 때문에 국민들까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추종자들은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
에 있어야만 자기들의 권세와 영화가 계속된다는 생각으로 2대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도 전에 억지로 3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헌법까지 뜯어 고쳤다.
  이승만은 80평생 오로지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는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렇지만
부하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말리지 못함으로써, 그의 빛나는 생애에 더러운 얼룩을
남기는 실책을 저질렀다.
  서기 1956년 5월 15일, 이승만은 고쳐진 헌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에서 무난히 대통
령에 당선되었다. 국민들은 그래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큰 문제 없이 다시 4년이 흘렀다.
  서기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또다시 대통령에 출마
하였다. 이 선거에서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 사람들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 시키
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자유당과 이기붕에 대한 미움
이 극에 달한 국민들은 드디어 들고 일어섰다. 끝내는 이승만도 자유당이 저지른 그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로 했던 것이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
로 돌아갔다. 시민들은 이승만의 불행한 만년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그가 이화장으로 옮겨 온 다음 날, 부정 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던 이기붕과 그
가족 모두가 경무대의 비서 숙소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화장 정원에서 제멋대로 자란 나뭇가지를 자르며 울적함을 달래고 있던 이승만은,
그 소식을 듣자 갑자기 온몸의 힘이 죽 빠졌다.
   아, 인생이 어찌 이토록 허무한가......
  이 때부터 이승만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여든 살이 넘은 노인인데다 심장병까
지 겹쳐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졌다.
  그 해 5월 29일, 이승만은 과도 정부의 수반을 맡고 있던 허정의 주선으로 세상
사람의 눈을 피해 조용히 하와이로 떠났다. 그 곳에서 요양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나라 안은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승만을
반대하던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일 년 만에 군사 정변이 일어나 무너져 버리고,
민주당 대신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의 병세는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자주 혼수 상태에 빠졌다. 병상을 지키는
프란체스카에게   프란체스카, 나를 한국으로 데려다 주오.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 집
에 가 죽는다는데..... 나를 한국 땅에 묻히게 해 주구려.  하고 매달리곤 했다.
  서기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은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91세의 나이로 영영 눈을 감고 말았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7월 23일, 그의 주검은
비행기에 실려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7월 27일, 이승만의 유해는 이화장을 떠나 국립 묘지에 묻혔다. 조촐한 가족장이었
으나, 수많은 국민들이 영구차가 지나가는 큰길로 몰려 나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마지
막 길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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