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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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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위인특대전집 (12)이율곡.


  이율곡(1536∼1584)
  조선의 학자로 호는 율곡이다.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교훈을 받으
며 자라났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장원급제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9번이나 장원급제함으로써  9도 장원공 이라 불리었다. 이이는 대사간
직책을 9번이나 맡아 임금이 올바른 일을 해 나가도록 힘썼다. 특히 나라의 힘이 약한 것을
걱정하여, 10년 안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니 10만 군대를 키우자고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
지 못하였다. 34세에 청주 부사로 임명되자 백성들의 자치규약인  향약 을 마련하기도 하였
다. 뒤에 그가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이 향약 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이 심해지자 이를 화해시키려고 애쓰기도 하였으나 병으로 요양하
다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로는  격몽요결 · 성학집요 · 동호문답  등이 있다.


  1. 그리운 외갓집

   할머니, 할머니.
   오냐, 또 무엇이 궁금하니?
  외할머니 이씨 부인은 세 살 난 손자 현룡이 귀엽기만 했다.
  현룡은 남달리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한번 궁금하게 여기고 묻기 시작하면 언제까지나 꼬치꼬치 캐물었다.
  대개의 어른들은 이런 때 귀찮게 여기고 야단을 치기 일쑤이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현룡
의 질문에 만족해 할 때까지 대답을 해 주었다.
   저 꽃의 이름은 무엇이죠?
   석류란다.
  석류는 6월에 누런 빛깔이 섞인 짙은 홍색의 꽃이 피고, 그 꽃이 지고 나면 꼭지 부분에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10월에 익어 두꺼운 껍질이 터지며, 속에 알알이 빨갛게 익은 씨가
드러나 보인다.
   석류?
  현룡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소리쳤다.
   이제야 생각났어!
   무엇이?
  이번에는 할머니가 물었다.
   옛 사람의 시에 석류를 노래한 것이 있었어요. 이제보니 꼭 들어맞아요.
   어떤 시냐?
  현룡은 금년 봄부터  천자문 을 이모부에게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시를 알고 있다니 할머
니도 놀란 것이다.
   홍피낭리 쇄홍주.
   그래? 할머니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구나. 그 뜻을 알고 있니?
   네, 할머니. 붉은 껍질 속에 부스러기 구슬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오, 정말 그렇구나.
  외할머니는 기뻐하며 현룡의 볼기를 토닥거렸다.
  이것은  석류 문답 이라는 유명한 이야기다. 현룡은 글을 배우면서 어른들이 옛시를 읊는
것을 주의 깊게 들었던 것이다.
  보통 한시는 4언이나 7언으로 짓도록 되어 있고, 짝을 맞추어 나가는 게 원칙이다.
   할머니!
  조금 있다가 현룡이 물었다.
   응.
   엄마는 어디서 낳았지?
   이 집에서 낳았단다.
   그럼 나하고 같네.
  강릉은 동해 바닷가에 있는 아담한 도시로, 고대 한민족의 한 갈래였던 예나라가 있었다
고 한다. 이 강릉에서 동북쪽으로 7킬로미터쯤 가면 경포 호수가 있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가 있다.
  경포대에서 다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북평촌(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이란
마을에 오죽헌이란 집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해.
  현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말이니?
   엄마도 이 곳에서 낳고, 나도 이 곳에서 낳았다는 것이 참 이상해요.
  할머니는 방그레 웃었다.
   옛날에 이 곳 북평에 이사온이란 분이 터를 잡고 사셨단다. 그분은 자식이라곤 딸 하나
밖에 없었지. 딸이 커서 시집을 갔는데, 아들이 없어 계속 이 집에서 데리고 살았다. 그리고
네 어머니를 여기서 낳았지.
   그럼 그 딸이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온의  무남독녀 인 이씨는 평산 신씨 영화공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딸만 다섯을 낳
았는데, 사임당 신씨는 그 둘째 딸이었다.
   네 어머니는 꿈에 바닷가를 거닐다가 선녀로부터 아기를 받는 태몽을 꾸고 너를 갖게 되
었단다.
  우리 나라 8도 가운데 유일하게 영동 지방에만 자연적으로 생긴 호수가 있다. 그리고 그
호수들은 모두 신선들과 관계가 있었다.
  경포대는 작은 산기슭 하나가 동쪽을 향해 우뚝 솟은 곳에다 고려 때 세운 정자이다. 호
수와 솔밭, 물에서 노닐고 있는 고니 떼, 그리고 추석의 달맞이를 절경으로 꼽는다.
   그리고 너를 낳기 전날 밤, 동해에서 검은 용이 날아와 산실의 문 앞에 도사리고 있는
꿈을 꾸었지.
  동해의 선녀로부터 아기를 받는 태몽을 꾸고, 다시 검은 용이 날아온 꿈을 꾼 사임당 신
씨는 1536년(중종31) 12월 26일 새벽 4시(인시)에 아기를 무사히 낳았다.
   태어나면서 너는 울음소리도 꽤나 우렁찼었단다. 그리고 꿈 속에 용을 보았다고 해서 너
를 낳은 방을  몽룡실 이라 했고, 네 이름도 현룡이라고 지었단다.
   할머니, 내려 줘.
  그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현룡이 말했다.
   오냐, 갑자기 어미가 보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현룡은 어머니 사임당이 있는 방으로 갔다.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붓글씨와 글짓기·그림그리기에 뛰어났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렸다.
풀과 벌레, 포도, 꽃과 새, 물고기와 대나무, 매화, 난초, 산수 등을 그렸다. 그 중 포도와 산
수화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이렇듯 재주 많은 사임당은 열아홉 살 때 덕수 이씨 이원수와 혼인했다. 이원수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덕수 이씨 시조 이돈수로부터 헤아려 12대손이 되는 명문의 후손이었다.
선영(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 즉 대대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였다.
  그런데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 부인처럼 시집간 뒤에도 친정에서 오래 살았다. 혼인하고
나서 신 진사는 사위 이원수에게 말했다.
   내가 여러 딸을 두었네마는 자네 처만은 내 곁에 좀 두고 싶다네.
  물론 그 뒤 사임당은 시집이 있는 한양에서도 잠시 살았고, 또 평창군 봉평이란 곳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그리고 서른세 살 때 친정에 돌아와 율곡 이이를 낳았다. 율곡은 7남매 가
운데 셋째 아들이었다.
  현룡은 어머니 방에 들어가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말끄러미 어머니의 옆얼굴과 담담하게
움직이고 있는 붓끝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는 붓을 멈추고 현룡을 보며 미소지었다.
   형들은 어디 갔니?
  현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현룡의 맏형 선은 현룡보다 열두 살이나 많았고, 큰누님 매창은
일곱 살이 많았다. 또, 이밖에 둘째 형 번이 있었고, 둘째 누님이 있었다. 이들에 대해선 정
확한 생존 연대를 알 수 없다.
  또, 율곡에게는 바로 손아래에 이름도 나이도 알려지지 않은 누이동생이 있고, 막내동생
우가 있다. 우는 1542년(중종 37)에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나이 서른아홉 살에 낳은 막내아
들이다.
  참고로, 옛날에는  남존여비 라 하여 남자는 높고 귀하게 여기고 여자는 낮고 천하게 여기
는 그릇된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여자들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는 이름이 전하지 않고
성만 알려져 있다. 사임당이나 매창은 모두 호로서, 이분들의 재주가 뛰어나 그나마도 전해
졌던 것이다.
  사임당은 어진 어머니, 어진 아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임당도 사람이었던 만큼 남몰
래 걱정하고 고민하는 일이 있었다. 고민이란 가족이 함께 모여 살지 못하고 친정집에 와
있는 일이었다. 이원수는 언젠가 부인에게 말했었다.
   세상에 벼슬 못한 양반처럼 비참한 것은 없소. 과거에 급제하여 식구가 함께 살도록 합
시다.
  그런데 과거 급제가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사임당은 온갖 걱정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임당은 자리에 눕고 말았다.
  어느 날, 해질녘이었다.
   얘들아, 현룡이가 보이지 않는구나. 날도 저문데, 대체 어디를 갔을까?
  그 때, 현룡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사임당의 갑작스런 병환으로 온 집안 식구들이 아침부터 허둥거렸기 때문에 현룡이 언제
부터 없어졌는지 아무도 몰랐다. 할머니는 발을 구르며 하인들을 야단쳤다.
   어린 아이가 어디를 갔단 말이냐? 모두들 샅샅이 찾아봐라.
  그 때, 매창이 말했다.
   할머니, 제가 점심때 어머님 약을 달이고 있을 때 현룡이 뒤꼍으로 가는 것을 보았어요.
   설마 뒤꼍에 갔으려고?
  집 뒤꼍에는 조상들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그곳은 대나무가 우거져 있어 한낮에
도 컴컴했다.
  그런 곳에 다섯 살박이 현룡이 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고 넷째 이
모와 누나 매창은 뒤꼍으로 달려가 보았다.
  뒤꼍의 사당은 율곡의 외할머니에 대한 사연을 담고 있었다. 뒷날 율곡이 외할머니에 대
해 쓴 글을 보면
   말은 서툴러도 행동은 민활했고, 모든 것에 신중하되 옳은 일에는 과감했다.
고 설명했다. 말이 서투르다는 것은  교언영색 , 즉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말을 매끄럽게
하고 태도를 꾸미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꿋꿋한 태도와 남자 못지않은
결단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율곡의 외할머니 이씨 부인은 남편 신공과 16년이나 떨어져 살았다. 이씨 부인이 마흔두
살 때 친정어머니 최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사임당의 아버지 신 진사는 한양서 여주까지 내
려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여행 도중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식사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까닭에 횡계라는 곳까지 왔을 때에는 걸음조차 걷기 어렵고 목에서 피를 토하는
중환자가 되었다.
   장모도 부모인데, 그 초상을 치르지 못한다면 큰 불효이다.
  신 진사는 이렇게 생각한 나머지 중병의 몸을 이끌고 간신히 강릉 처갓집까지 왔다. 이씨
부인은 그런 남편을 위해 7일 밤낮을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천지 신명께 치성을 드렸다. 이
런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음인지 신 진사는 차츰 병이 나았고, 나라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정려를 내렸던 것이다.
  현룡은 그런 내력이 있는 사당에 가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두 손을 모으고 열
심히 빌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사임당은 며칠 후 건강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현룡의 효성이 하늘에 닿아 어머니
를 낫게 했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할머니께서 훌륭한 분이시니까 그런 효자가 생긴 것일세.
   옳은 말일세. 게다가 어머니도 부덕이 남다르다고 하네. 어머니가 교육을 잘 시키니 아이
도 절로 효도를 하게 마련일세.
  사실, 사임당은 직접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현룡은 이모부 권처균에게 글을 배웠지만
복습하는 의미로 어머니 앞에서 다시 그 날 배운 글을 반복해서 배웠다. 따라서 현룡의 글
은 날로 진보되었다.
   아버지께서 지금 한양에서 열심히 글공부를 하고 계신다. 너희들도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룡이 다섯 살 때 아버지 이원수는 이미 마흔한 살이었다. 나이가 사오십이 되고서도 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과거 급제는 그처럼 하늘의 별따
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님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내가 꼭 이루고야 말겠다.
  봄 내내 가물더니, 7월이 되면서 큰비가 내려 마을 앞에 있는 시냇물이 넘쳤다.
  마침 내를 건너던 나그네 하나가 센 물살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이모부에게 글을 배우
러 온 동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저것 좀 봐. 물에 빠져 생쥐꼴이 되었어.
  그러나 현룡은 웃지 않고, 기둥을 꼭 끌어안은 채 애를 태웠다. 그리고 넘어진 사람이 다
시 일어나 무사히 냇물을 건너자 비로소 안심하는 얼굴빛이 되었다.
  이런 현룡의 태도를 이모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모두 방
안으로 불러모아 놓고 조용히 말했다.
   너희들은 성현의 가르침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네, 효입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라는 게 공자의 가르침이다. 공자는 사회의 기초 단
위로 가족을 중요하게 여겼다. 가족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효가 필요
하다.
  이모부는 앵무새처럼 입을 모아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또 물었다.
   그 밖에는?
   네, 인입니다.
  권처균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그럼, 인이란 무엇이냐?
  아이들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희들은 아까 냇물을 건너다가 쓰러진 사람을 보고 웃었다. 그런데 현룡은 혹시 그 사
람이 물에 빠져 죽지 않을까 안타깝게 여기며 혼자 애태우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인이다.
  현룡이 여섯 살 때 한양 본가에서 기별이 왔다.
   아씨, 서방님께서 가족을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오시랍니다.
  하인의 전갈에 의하면, 연세가 많으신 현룡의 할머니께서 사임당에게 살림을 맡기기 위해
서였다.
   서방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시더냐?
  사임당이 물었다. 남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과거에 꼭 급제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
러나 그런 말은 전혀 없었다.
   네, 쇤네더러 속히 모시고 오라고만 하셨습니다.
   알았다.
  사임당은 늙으신 친정 어머니와 헤어져 시댁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었다.
  강릉을 떠나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는 대관령이라는 높은 고갯마루가 있었다. 아흔아홉 굽
이를 돌아야 오를 수 있는 험준한 고개였다. 이윽고 고갯마루에 이르자 사임당은 가마꾼들
에게 잠시 쉬어 가자고 말했다.
  가마꾼들이 쉬는 동안, 사임당은 친정 마을 쪽을 향하여 울먹이며 조용히 시를 읊었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한양으로 떠나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이 시는 사임당이 친정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대관령에서 읊었다 하여  유대관령 망친정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 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2. 소년 진사

  한양에 올라온 현룡의 식구들은 수진방(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 일대)에서 살았다.
  한양에 올라온 뒤, 현룡은 어머니에게 글을 배웠다. 글이란 어느 정도 기초를 튼튼히 닦으
면 독학을 할 수도 있다. 현룡은 사임당이 조금 일깨워 주자  사서 삼경 을 혼자서 읽고, 그
속에 담긴 진리를 깨달았다.
  어느 날, 사임당은 현룡이 써 놓은 글을 읽고 놀라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
   전입니다.
  전은 전기란 뜻이다. 사임당이 읽은 전은 이런 내용이었다. 물론 한문으로 씌어 있고, 현
룡이 쓴 것이었다.
   군자는 덕을 안으로 쌓기 때문에 마음이 늘 평화롭고, 소인은 악한 것을 안에 감추고 있
어 마음이 늘 불안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만, 이는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지?
   이웃에 사는 진복창 어른이죠.
  윤원형의 심복이던 진복창은 덕이 없고, 속이 매우 옹졸한 사람이었다. 현룡의 그의 사람
됨을 세밀히 관찰하고 이런 평전(비평을 겸한 전기)을 썼던 것이다.
  현룡이 여덟 살 때, 고향인 파주 율곡 촌(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에 급히 내
려가야 했다. 아버지가 파주 선영에 내려갔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현룡은 칼 끝으로 손가락을 베어,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
다. 그리고는 사당에 가 꿇어 엎드려 빌었다.
   제 아버님의 병을 낫게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아버지 대신 제가 앓도록
해 주세요.
  현룡은 이렇게 간절히 빌었다.
  이튿날, 그의 지성에 하늘이 감동을 하였는지 아버지는 눈을 뜨고 기력을 되찾아 일어났
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꿈에 어떤 신령이 나타나 너를 가리키며  이 아이는 동국(조선)의 큰 유학자가 될 인물이
니 잘 키우시오. 그리고 이름은 구슬 옥(玉)변에 귀 이(耳)자를 쓰시오. 이는 귀한 인물이라
는 뜻이오. 라고 하더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 때부터 현룡은 이름을 이(珥)라고 고쳐 불렀다. 이 일로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효자로
알려졌다.
  현룡은 아버지의 병이 낫자 몹시 기뻐했다. 율곡리에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며 즐겁게 지
냈다.
  그 때 본 율곡촌이 마음에 들어 뒤에 자기의 호를  율곡 이라고 지었다.
  율곡촌을 끼고 흐르는 임진강 가에는, 화석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는 율곡의 5대
조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지은 아담한 정자였다.
  그 때 나이 여덟 살이던 율곡은, 가끔 이 정자에 올라가 조상들의 생각을 하며 시를 지었
다.

  숲 속 정자에 가을도 깊어
  시인의 회포는 끝이 없네.
  물과 하늘은 마주 이어져 푸른데
  서리 맞은 단풍은 붉기만 하여라.
  산은 둥근 달을 토해 내는데
  강은 만 리나 부는 바람을 품었구나.
  변방의 저 기러기는 어디로 가느냐
  울음소리 저녁 구름 속에 끊어지누나.

  율곡은 어려서 이모부나 어머니 말고는 특별히 이름난 선생에게 글을 배우지 못했다. 한
양에 올라온 뒤로는 강릉 시절보다 오히려 더 가난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소년 시절 파주로, 강릉으로 옮겨 다녔다. 그렇게 때문에 혼자서 글을 배우며 깨
달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임당이나 다른 사람에게 묻곤 했다.
  율곡이 아홉 살 때였다.
  둘째 누나가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이 누나와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기 때
문에 친하기도 했지만, 싸움도 곧잘 했다. 율곡이 방에 들어가자, 누나는 읽던 책을 얼른 치
마폭에 감추었다.
   뭐야?
   아무것도 아냐!
  누나는 시치미를 떼었다.
   방금 치마폭에 감추었잖아. 책 같은데.
  율곡은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 때는 책의 종류가 많지 않아 매우 귀했다.
   나도 보여 줘.
   싫어 안 돼.
  누나는 율곡이 조르면 조를수록 책을 더욱 깊숙이 감추고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욱 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안 보여 줄 테야? 억지로라도 뺏겠어.
  율곡이 누나에게 덤벼들자, 누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책을 내밀었다.
   옆집 월희한테 빌려 온 것이니까 곱게 보아야 해.
  김안국과 조신이 지은  이륜행실도 였다. 본디 사람으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윤리로  오
륜 이 있다.
  1) 군신 유의 : 임금과 신하 사이엔 의리가 있을 것.
  2) 부자 유친 : 아버지와 아들 사이엔 친애가 있을 것.
  3) 부부 유별 : 부부 사이엔 서로 구별이 있을 것.
  4) 장유 유서 : 어른과 아이들 사이엔 차례와 질서가 있을 것.
  5) 붕우 유신 : 친구 사이엔 신의가 있을 것.
   이륜행실도 엔 그 중 장유 유서와 붕우 유신, 이 두가지를 글과 그림으로 알기 쉽게 설명
하고 있다.
  이 책에는 장공예라는 사람의 집안 내력이 실려 있었다.
   당나라의 장공예는 9대가 한 집에서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황제 고종이
그 집에 이르러 물었다. 어떻게 그 많은 식구들이 서로 싸우지도 않고 함께 살 수 있느냐고.
그러자 장공예는  참을 인 자를 써서 황제께 바쳤다.
  율곡은 이 대목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누나, 조금 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형제 자매는 서로 싸워선 안 돼.
  율곡의 생각은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형들과도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 즈음, 율곡은 여러 형제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정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
려서, 벽에 걸어 놓고 다짐했다.
   나도 이 다음에 형님들과 의좋게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지.
  그러나 율곡은 열 살 때 강릉에 내려가 있었다. 그 때 지은  경포대부 라는 시는 오늘날까
지 전해져 오고 있다.
   경포대부 는 모두 1056자나 되는 장편시였다. 이 시는 경포대의 절경을 찬미한 내용이었
다.
  이런 천재적 글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율곡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초시 진사과에 당당
히 합격했다.
  이 때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아버지가 평생을 두고, 또 너의 형들이 그렇게 애쓰고서도 뜻을 못 이룬 어려운 과거를
너는 당당히 급제했구나.
  과거는 크게 나누어, 초시(소과)와 복시(대과)가 있다. 그리고 과의 종류로는 문과·무과
·승과·잡과가 있었다.
  과거는 시대에 따라 제도가 달라져 일일이 그것을 설명하기는 번거롭지만, 조선조 시대에
는 문관을 귀하게 여기고 무인(무과)·승려(승과)·기술직(잡과)을 천하게 여겼다. 따라서
여기에선 문과에 대해서만 설명하겠다.
  초시는 지방(감영이 설치된 곳)과 한양에서 실시되었고, 시험 과목에 따라 생원과와 진사
과로 구별하였다.
  선비는 이 과거에 급제해야만 다시 복시(한양에서만 실시함)를 볼 수 있었다. 이 두 시험
에 합격해야만 관직에 나갈 수가 있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과거에 급제하려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러나 초시만 하더라도 엄정한 시험을 거쳐야 했고, 지원자는 많은데다가 일정한 제한
(정원제)이 있었기 때문에 급제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사임당은 그런 어려운 관문을 어린 아들이 통과했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
론 율곡이 혹시 만심(자랑하는 마음)을 가질까 걱정했다.
   그렇지만 얘야. 학문의 길은 아주 멀고도 높다. 어쩌다가 초시에 급제했다 하여 뽐내는
마음을 갖거나 교만해지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그리고…….
  사임당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학문은 꼭 벼슬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훌륭한 학문과 덕을 쌓아 나라를
위해 힘쓴다는 것은 백성된 도리다. 하지만 벼슬아치로 입신 출세하겠다는 생각은 버리도록
해라.
  어머니 사임당의 생각은 아들이 훌륭한 대학자가 되어 만인의 사표(학식과 덕행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될 인물)로 우러름을 받기를 바랐다. 그러는 한편 훌륭한 정치가로서 나라에
공헌하기도 바랐다.
  그러나 이것은  두 마리의 토끼 를 쫓는 격으로서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좀더 세상을 알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율곡은 학문의 최종 목표가  성리학 이었다. 성리학은 일명  주자학 이라고 하는데, 중국 송
나라의 주희(1130~1200)가 예로부터의 유교를 재정리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안유(1243~1306)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성리학을 들여 와 소개했다. 안
유의 제자로 백이정·권부·이조년 등이 있었다.
  백이정의 제자로 다시 익제 이제현(1287 ~ 1367)이 있었지만, 고려가 멸망함으로써 그 학
통은 끊겼다. 한편, 권부의 제자로 이각이 있었고, 다시 그 제자로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이 있었다.
   이분들은 성리학의 대가들이다. 비록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목숨은 잃었지만, 그 학문의
정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지금껏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느냐!
  율곡은 이런 분들을 존경했다. 이색은 당시의 쟁쟁한 정치가로 손꼽히는 정도전·윤소종
·이승인·김구용 등을 제자로 키워냈다. 또, 정몽주는 길재·권근·권우·변계량 등의 대학
자를 배출했다. 특히 야은 길재(1353~1419)는 김숙자를 가르쳤고, 김숙자의 제자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다.
   점필재 김종직이야말로 안유 정몽주 길재 김종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정통파였어.
점필재의 제자로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김굉필·정여창·남효온·유호인·조위
·김일손·이맹전·이심원·남곤 등 참으로 많구나.
  율곡은 점필재와 그 제자들의 문집 등을 읽고, 그 학문을 연구하면서 가벼운 흥분마저 느
꼈다.
  그러나 점필재와 그 제자들은 무오사화로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선비들을 그렇게 마구 죽이다니, 벼슬하기도 어렵구나.
  율곡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포악을 일삼던 연산군도  중종 반정 에 의해 쫓겨났다. 중종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
려고 힘썼다. 이리하여 김굉필의 학통을 이어받은 정암 조광조(1482~1519)가 등용되었다. 조
광조의 제자들로 성수침·조욱·백인걸·홍선·이연경·기준 등이 있었다.
  조광조는 도덕 정치, 유교의 이상적 정치를 펴나가려 했지만, 이 역시 홍경주·남곤 같은
소인배들의 참소로 많은 사림(선비)이 희생되었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중종은 1544년 재위한 지 39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세자가 그 뒤를 이었다. 제 12대 인종
이다. 그러자 인종의 외삼촌 대윤파 윤임이 권세를 잡았다.
  하지만 왕은 겨우 8개월 만에 승하했고, 대윤파는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이 때 겨우 열두 살인 명종이 왕위를 이었고, 생모인 문정 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며 정권
을 잡았다.
  문정 왕후는 자기의 동생인 윤원형과 손잡고 대윤파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 때 이원수의 당숙 이기는 영의정이 되었고,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진복창은 대
사헌이 되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권세를 누리기 시작했다.
  사임당은 남편에게는 물론이고 율곡에게도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잠깐 눈에 띄는 세력을 쫓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영의정은 세력은 그리 오래 가
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영의정은 우리와 가까운 친척이고,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줄지 모르잖소.
  그러나 사임당은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남편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분이 아무리 우리 문중 사람이라고 해도 옳지 못한 사람임을 알면 그 집에 발을 들여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어진 선비를 모함해서 악한 일을 많이 하고, 나라일을 돌보기에
앞서 다만 자기 권세만을 탐하고 있으니 오래 가지 못합니다.
  율곡은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이라 아무런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했다.
   권세 싸움은 참으로 추악하다. 그런 권세가 오래 갈 리 없다.
  그러나 어쨌든 아버지는 당숙의 도움으로  수운 판관 이라는 일자리를 얻었다. 수운 판관
이란, 각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배로 실어 올리는 일을 맡아 보는 종 5품
벼슬이었다.
  지방에서 한양까지 배로 곡식을 나르는 것을 조운이라고 한다.
  1551년(명종 6), 율곡이 열여섯 살 되던 해의 봄이었다.
   이번에는 평안도로 가는데, 너희들도 함께 가자.
  그리하여 맏아들 선과 율곡이 따라나섰다.
   배를 타고, 직접 황해도와 평안도를 여행하는 것도 산 공부가 될 게다. 백 번 듣는 것보
다 한 번 보는 게 더 낫다는 말도 있으니까.
  한양에서는, 서강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지나 강화섬을 왼쪽으로 끼고 해주까지 올라가
하루를 묵었다. 그리고 다시 옹진을 거쳐 장연에 이르렀고, 대동강 하구까지 갔다. 거기서
며칠 동안 볼일을 본 뒤 배에 놋그릇을 실었다.
  율곡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에 실은 놋그릇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버님, 놋그릇이 시꺼멓게 변했어요! 무슨 까닭일까요?
   글세, 바닷바람이 소금기를 몰고와 빛깔이 변한 것일까?
  아버지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으나, 율곡은 자못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여행을 떠난 뒤, 사임당은 병이 나 그만 자리에 눕게 되었다.
  율곡의 둘째 형 빈과 아우인 우가 정성껏 간호를 했다.
  그러나 사임당의 병세는 나날이 더 악화되었다.
   어머님의 병세가 심상치 않으니, 아버님께 연락을 해야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임당은 완강히 만류했다.
   안 된다. 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막중한 나라일이니라. 나라일을 하는 아버님께 사사로
운 걱정을 끼쳐서야 되겠니?
  사임당의 단호한 태도 때문에 아버지에게 연락도 못하고, 가족들은 애만 태우며 지냈다.
  그 해 5월 17일 새벽, 사임당은 마흔여덟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편, 바로 그 날 이원수는 평안도 지방에서 일을 마치고 두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돌아
오고 있었다.
  강화도 앞바다를 거쳐 배가 한강에 가까워지자, 율곡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제 곧 그리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한층 마음이 바빠졌다.
  그들이 서강에 도착하여 짐을 꾸리고 있을 때였다.
  하인은 며칠 전부터 물때마다 서강 나루터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운명하셨
다는 소식을 들은 율곡은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형과 하인이 달려들어 손발을 주무르자 간신히 깨어난 율곡은 통곡을 하며 말했다.
   이것이 생시냐 꿈이냐? 아, 제발 꿈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선과 율곡은 삼청동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 유해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였다.
  장례가 진행되는 3일 동안 율곡은 눈 한번 붙이지 않고, 식사도 전혀 하지 않았다.
   아우야, 그러다가 너마저 병이 나겠구나.
  맏형 선은 성격이 다소 우유 부단한 데가 있었지만 동생을 위해 주는 따뜻한 마음은 몹시
지극했다.
   나무는 가지를 쉬고 싶어도 바람이 멎어 주지를 않기 때문에 쉴 수가 없단다. 그와 마찬
가지로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할 때에는 이미 계시지 않는 것이다. 자, 너무 슬퍼하지 말아
라.
   아녜요, 형님. 저는 불효자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우리 7남매 가운데 너보다 더한 효자가 있었더냐?
   그렇지만 저는 어머님의 임종도 보지 못한 불효자입니다.
  율곡은 싸늘하게 식은 어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것이 못내 한스러웠던 것이다.
  사임당의 장지는 파주 두문리에 있는 자운사로 정해졌다. 형제들은 묘지 옆에 여막을 짓
고,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아침 저녁 상식을 올리며 곡했다.
  유교에서는 인·의·예·지라 하여 예를 중요하게 여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바로
예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예 가운데 상례가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하고 까다로운 예라
도 근본적인 정신은 성의였다.
   남처럼 무덤을 호화롭게 쓰지 못하고, 상식에 고괴와 어물을 올리지는 못해도 정성껏 받
들면 됩니다.
  율곡은 오히려 형님들을 위로하듯이 말했다. 형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이런 형제들을 보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참으로 효자들일세. 부모 상은 으레 3년을 여막에서 지내게 마련이지만, 개중에는 갖가지
핑계로 밤에는 집에 내려가 자는 사람도 꽤 있네. 그런데 저 형제들은 한 번도 산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
  형제들의 식사나 의복은 하인들이 가져다 주었다. 형제들은 가까운 냇물에 내려가 양치질
과 세수를 하는 일 말고는 3년 동안 여막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 온 율곡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너무나 큰 슬픔이었다.
  율곡은 이 때부터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율곡은 마음이 섬세하고 여렸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잔디밭에 혼자 앉아 있노라면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언젠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쇠고기죽을 끓인 적이 있었다.
   아버님께서 모처럼 돈이 생기셨다며 사 가지고 오신 쇠고기다. 어서 먹어라.
  가난한 생활에 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명절 때가 아니고선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율곡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님,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
   아니, 어째서?
   사람들이 소를 부려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잡아서 고기까지 먹는 것은 결코 어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임당은 비로소 아들의 착한 마음을 알고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이것은 율곡의 마음이 착하고 여렸음을 말해 주는 일화이다. 이 마음은 어려서 냇물을 건
너다 넘어진 사람을 보고 기둥을 끌어안은 채 안타까워했던 의로운 마음과도 통하는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율곡은 전혀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뒷날 국법으로 소의 도살을 금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국법으로 금하는 일이니 우리 집안은 더욱 그것을 지켜야 한다.
  율곡은 어머니의 산소에 엎드려 지난날 어머니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한참 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고 돌아서자, 맏형 선이 뒤에 서서 율곡을 지켜 보고 있었다.
   너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 지금 여막에 있는데,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구나.
   저를 말입니까?
  율곡은 이 때 열아홉 살이었다. 3년상도 거의 끝나가는 이른 봄이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인데 성혼이라고 하더라.
  우계 성혼(1535~1598)은 뒤에 율곡과는 막역한 친구가 된 사람이다. 두 사람은 이 때 처음
으로 만났다.
  율곡이 여막에 가 보았더니, 얼굴이 희고 키가 큰 젊은이가 서 있었다. 율곡보다 한 살 위
였는데, 오히려 어려 보였다.
   저의 집이 파평 우계에 있어 이렇듯 찾아왔습니다. 노형의 문명(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워낙 높으시니까요.
   그렇다면 혹시 청송 선생님의…….
  율곡은 놀라며 물었다.
   네, 저의 가친이십니다.
  율곡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청송 성수침(1493~1564)은 바로 조광조의 제자로, 아무
런 벼슬도 하지 않고 유유히 학문을 연구하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성 형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별로 하는 일 없이 글이나 읽고 있지요.
   그럼, 과거 준비를 하십니까?
  율곡이 묻자, 우계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우계는 열일곱 살 때 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몸이 약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율곡에 비한다면 집안 환경이 좋았다. 아버지 청송과 숙부 성수종이 모두 당당
한 당대의 학자였다. 또 우계 자신은 유명한 학자 백인걸에게 글을 배우고 있었다.
  우계가 돌아가고 난 뒤, 율곡은 한숨을 지었다. 결코 우계를 샘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
무 걱정 없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선·번·이의 3형제가 별빛 아래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막내동생 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윽고 맏형 선이 율곡의 눈치를 살피듯 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의 3년상도 곧 끝난다. 이제 살아 계신 아버님의 쓸쓸한 여생도 생각하는 게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
  즉 아버지에게 새어머니를 맞이하도록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의논이었다. 선은 그 문제로
둘째 번과는 이미 의논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셋째 율곡이 무슨 의견을 내놓을지 몰라
조심스럽게 물었던 것이다.
   물론 아버님이 생전에 어머님과 약속한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아버지 이원수는 사임당보다 세 살이 많았고, 아내가 죽었을 때 이미 쉰한 살이었다. 그리
고 사임당은 생전에 입버릇처럼 재혼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형님들이 알아서 아버님께 말씀하십시오. 저는 반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보다…….
   네가 찬성을 해 주니 우리의 마음도 한결 가볍다. 그런데 그것보다 무엇이 문제란 말이
냐?
   그것은 저 혼자만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형님들께 말씀드리는 게 순리인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말해 보렴.
   네, 저는 어머님의 3년상이 끝나면 입산 수도할까 합니다.
   무엇이라고!
  선과 번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럼 선비로서 중이 되겠단 말이냐?
  불교에 대한 선비들의 거부 반응은 뿌리 깊었다.
   꼭 중이 될 결심은 아닙니다만, 세상이 너무도 허망하기 때문입니다.
  율곡은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율곡이 입산을 결심했다는 소문은 당시의 선비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허. 그 사람 아주 돌아 버린 것이 아닐까? 진사 급제를 한 데다 뛰어난 글재주가 있어
장차 큰 인물이 될 텐데, 무엇 때문에 중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율곡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갑자기 인생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만은 틀림
없다. 그렇지만 꼭 중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친한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기는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을 잘 기르면 마음으로 부릴 수 있게 되
고, 잘못 기르면 마음이 오히려 기의 부림을 당한다. 마음으로 기를 부릴 수 있다면 몸의 주
체가 있어 성현도 될 수 있지만, 마음이 기의 부림을 당하면 모든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여
어리석은 미치광이가 되고 만다.
  율곡의 사상을 쉬운 말로 바꾸어 본 것인데, 맹자도  호연지기 란 말을 썼다.
  율곡은 그런 호연지기를 얻고자 금강산에 들어간다고 편지에 썼던 것이다.
   공자도 말했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말일세. 그
러나 산수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솟고 흐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세. 고요함이나 도도
함의 본체를 본받고자 하는 것일세. 그러므로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기를 기르는 것이
야말로 산수를 버리고 어디 가서 그것을 구할 수 있겠는가?
  율곡은 동대문을 지나 금강산으로 향하는 도중 곳곳에서 시를 지었다.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간 지도 어느덧 1년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깊은 골짜기를 홀로 걷
다가 조그마한 암자 하나를 발견했다.
  암자 안에는 노스님이 혼자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율곡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본
체도 하지 않고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율곡은 암자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궁이에는 불땐 흔적조차 없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시오?
  율곡이 묻자, 중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무엇을 먹고 사시오?
  그러자 중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게 내 양식이오.
  율곡은 흥미를 느끼고 중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공자와 석가모니 가운데 어느 분이 성인이오?
   선비는 노승을 놀리지 마시오.
   불교의 진리가 아무리 오묘하다 해도 유교를 앞서지 못하는데, 왜 굳이 불법을 찾으시
오?
  그랬더니 노승은 오히려 되물었다.
   유교에도  마음이 곧 부처 라는 말이 있소?
   맹자는 사람의 성품은 본디 착하다고 했는데 그게 곧 마음이 부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
겠소. 다만 우리 유교는 현실에서 그것을 찾고 있지요.
  중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노승은 다시 물었다.
   색도 공도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이오?
  색(물질)도 아니고, 공(이 세상의 변치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아니다는 불교의
진리로 아주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율곡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 또한 우리 눈 앞에 있는 경계지요.
  그제야 노승은 빙그레 웃었다. 불교의 이치와 맞는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율곡이 다시 반격했다.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가 못 속에 뛰는 것은 색인가요, 공인가요?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오. 그것은 곧 진리의 본체인데 어찌 그런 시구를 가지고 비겨 말
할 수 있단 말이오?
  율곡은 이 대답에 웃었다.
   이미 이름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이면 곧 경계인데, 어찌 본체라고 하시오? 만일 그렇다면
유교의 오묘한 대목은 그야말로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고 불교의 이치도 글자밖에 있다고
는 못할 것이오.
  율곡은 금강산에서 내려와 강릉 이모부 집으로 갔다. 노승과의 문답에서처럼 그는 불교에
서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여 하산한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율곡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정말 잘 돌아왔다. 이 곳에서 푹 쉬도록 해라!
   네, 알았습니다.
  율곡은 1년 남짓 외갓집에서 공부하며 지냈다.  스스로 경계하는 글 을 써 놓고, 매일매일
반성했다.
  1) 뜻을 크게 갖고 성인을 본받으며 조금이라도 어긋나지 않도록 한다.
  2)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말수가 적다.
  3) 말은 간단하고 분명하게 해야 된다.
  4) 일을 시작하면 온갖 노력을 다하라. 그러면 마음을 바로 갖는 공부가 된다.
  5) 혼자 있을 때 옳지 않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
  6) 모든 잘못은 홀로 있을 때 마음을 옳게 갖지 않는 데서 일어난다.
  7) 혼자 있을 때 삼갈 줄 안다면 자연을 참으로 사랑하여 즐길 수 있다.
  8) 새벽에 일어나선 아침에 할 일을 생각하고, 밥 먹은 뒤에는 낮에 할 일을 생각하고, 잠
자리에 들어서는 내일의 일을 생각하라. 만일 일이 있다면 그것을 적절히 처리한 다음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해서 실천에 옮기는 것인데, 만일 사물을
살피지 않고 건성으로 읽는다면 부질없는 학문이 된다.
  9) 재물·명예를 얻겠다는 생각은 비록 없앨 수 있더라도, 만일 일을 처리할 때 조금이라
도 편한 것을 찾는다면 그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되므로 더욱 살펴서 해야 한다.
  10)  꼭 해야 할 일은 정성껏 하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은 딱 잘라 버려 마음 속에서 옳고
그름이 서로 싸우게 해서는 안 된다.
  11) 맹자의  불의를 하여 무고한 한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 해도 이는 행하지 않는
다. 라는 말을 늘 명심한다.
  12) 불행이 닥쳐도 스스로 돌이켜보며 반성할 것.
  13) 가족이 불화한다면 이는 내 성의가 부족함이다.
  14) 잘 때나 아플 때가 아니면 눕지 말고, 벽에 기대지도 않는다. 늦은 밤일지라도 공부할
때 졸리면 눕지 말고 일어나 뜰을 거닐어라.
  15) 공부에 힘쓰되 늦추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라.





























  3. 학문과 벼슬

  1556년(명종11) 봄, 율곡은 한양 본집으로 돌아왔다.
  겨우 2년 남짓 집을 떠나 있었지만, 집안도 세상도 많이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첫째로 큰
형과 둘째 형이 장가를 들었다. 또, 집에는 새어머니 권씨가 들어와 있었다.
  맏형 선은 당시로선 매우 늦은 서른두 살에 선산 곽씨와 혼인했다. 둘째 형도 남양 홍씨
와 결혼하여 따로 나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큰 누님 매창만은 스물두 살 때 한양 조씨 대
남에게 시집을 갔다. 둘째 누님은 파평 윤씨의 윤섭에게 출가하여 멀리 황해도 황주에 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율곡은 골치가 아팠다. 맏형 선과 새어머니의 사이가 화목하지 못
하고 밤낮 다투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율곡은 중간에서 화목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도무
지 두 사람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런 때일수록 율곡은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새어머니 권씨는 사임당에 비하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났다.
  예를 들면, 새어머니는 부덕에 어긋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율곡은 마음이 답답하여 잠깐 글을 배운 적이 있는 어숙권이란 분을 찾아갔다. 문안 인사
를 간 것이다.
  이 때 장안에선 율곡이 한양으로 돌아온 것이 선비들 사이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가 정말로 상투를 잘라 버리고 중 노릇을 했을까?
  어숙권도 그것이 궁금하여 율곡이 절을 하고 나자,
   관을 벗어 보게.
하고 재촉했다. 그러나 율곡은 벗지 않았다. 그 방에는 많은 선비들이 있었고, 그런 것을 굳
이 증명해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어숙권이 직접 관을 벗겨 보더니,
   아, 상투가 그대로 있지 않는가! 이제 나는 자네가 중이 되지 않았다는 걸 여러 사람에게
알릴 수 있네.
  하고 몹시 기뻐했다.
   네가 돌아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그런데 지금 네가 머리를 깎았느니 깎지 않았
느니 하고 모두 의론이 분분하다. 그러니 너는 집에 들어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과거
를 보려고 많은 선비들이 한양에 모여 있다. 네가 그 곳에 가서 머리에 빗질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보고 그런 소문도 없어질 게 아니겠느냐?
  율곡은 웃으며 대답했다.
   누님, 걱정 마세요. 어숙권 선생님이 내 상투를 보셨으니 그 소문도 금방 없어지고 말겠
지요.
  율곡은 한양에서의 인사가 끝나자 파주로 갔다. 어머니 산소에 들렀다가 파평으로 우계
성혼을 찾아갔다. 그리고 화석정 아래 배를 띄우고, 그 동안 쌓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은 한 번 만나고, 두 번째 만났을 때에는 이미 절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율곡과 우계는 아직 젊은 나이라 경쟁심도 있었다.
  무슨 말 끝에 우계가 먼저 말했다.
   나는 한번에 겨우 여남은 줄밖에는 못 읽는다네.
  너무도 어이가 없어 율곡은 우계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윽고 어느 쪽부터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었다. 물결이 일면서 배가 심히 흔들렸고 물보라가 배 안까
지 휘몰아쳐 들어왔다. 그러나 율곡은 태연히 앉아 시상에 잠겨 있었다.
  우계는 겁에 질려 있었다.
   이렇듯 급한 때는 급한 대로 무엇인가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자 율곡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 설마 물에 빠져 죽기야 하겠나.
  이것은 우계의 제자 윤옥의 아들 윤선거의  노서기문 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율곡의
담력, 혹은 유머를 알 수 있다.
  율곡은 그 해에 한성시라는 과거에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 급제를 했다.
  1557년 9월에는,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성주에서 겨울을 보낸 율곡은, 이듬해 봄에 평소에 존경해 오던 퇴계 이황을 찾아서 예안
(지금의 경상 북도 안동)으로 갔다.
  때는 이른 봄이었지만 매화가 만발했고, 시냇물이 생명의 고동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때, 이황은 쉰여덟 살의 노인이었고, 율곡은 이제 스물세 살의 젊은이였다.
  이황은 고향에다 한서암이라는 작은 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고 있었다.
  율곡은 이황에게 큰 절을 올린 다음 말했다.
   선생님의 명성은 일찍이 들어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제야 찾아뵙게 됨을 송구스럽게 생
각합니다.
   나도 그대의 재주는 진작부터 들어오던 터이오. 그대를 이렇게 만나게 되니 무척 기쁘
오.
  이 자리에는 유성룡·김성일·조목 등 이황의 제자들이 있었다.
   이 공은 금강산에서 불법을 연구하셨소?
  조목이 물었다. 조목은 율곡보다 연장자였고, 학문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이다.
  퇴계는 젊은 사람들의 활발한 토론을 미소지으며 지켜 보고 있었다.
   불법이 유교보다는 못하지만 그런 대로 오묘하다고 느꼈습니다.
   허허, 마치 불법을 옹호하는 말씀 같구려.
  조목의 불교 비판은 격했다. 마치 율곡이 승려이기나 한 것처럼 불교에 대해 공격을 퍼부
었다. 하지만 율곡은 미소를 지을 뿐 토론에 말려들지 않았다.
  율곡은 퇴계와 작별하면서 최대의 찬사를 올리는 시를 지었다.

  선생님을 찾은 뜻은 가르침을 받고자 함이요
  한 나절을 한가로이 놀기 위함이 아니외다.

  그러자 이황도 시로써 답하였다.

  병들어 갇혀서 봄을 못 보던 나도
  그대가 와 주니 몸과 마음이 밝아졌도다

  율곡은 예안을 떠나 한양으로 가는 도중에 강릉의 외가에 들렀다.
  외할머니는 율곡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너를 보니 네 어머니를 보는 것 같구나.
  한양에 돌아온 율곡은 그 해 겨울에 과거의 일종인 별시에  천도책 이라는 글을 써서 장원
급제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스물한 살 때 한성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일이 있어 무려 세
번이나 장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소과에 해당되는 것으로 예비 시험이라 할
수 있었다.
  율곡이 한양에 돌아오자 퇴계로부터 간곡한 편지와 시 두 편이 보내져 와 있었다. 편지
내용은 앞으로도 학문에 더욱 힘쓰라는 것과 율곡의 학문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조목은 자기의 스승 퇴계가 율곡을 너무 과대 평가한다고 불평을 했다. 그는 율곡의 시를
트집잡기도 했다.
  퇴계는 조용히 조목을 타일렀다.
   그의 잘 지은 시도 그의 인품을 따를 수는 없다. 그는 명랑하고 시원스러우며, 온화하면
서도 결단력과 패기가 있는 젊은이야.
  퇴계는 율곡에 대해 너무 글재주에만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다. 또한 날카롭고 모난 성격
을 억누르고 원만한 인격을 양성하라고 했다.
  이런 퇴계의 훈계는, 율곡의 학문하는 데 큰 도움을 주어 인격 함양에 좋은 밑거름이 되
었다.
  그러나 율곡의 행동적인 성격은 퇴계의 소극적인 것과는 달랐다. 퇴계는 조심성이 많고
보수적인 데 비해, 율곡은 재주가 뛰어난 젊은이로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의심나는 일
이 있으면, 자기 스스로가 경험하여 해결할 정도로 모험심이 강했다.
  1561년(명종 16), 율곡이 스물여섯 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아버지의 나이 예순한 살이었다.
  어머니가 묻힌 자운산(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두문리에 있는 산)의 묘지에 아버지
를 합장하고, 그는 또 여막 생활을 하였다.
  율곡은 3년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율곡은 성혼·김계휘·안민학 등과 더불어  도의계 라는 것을 만들었다. 도의로써 맺어진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이 때 임제가 말했다.
   우리 모임에 귀봉 송익필을 넣어 줌이 어떤가?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상을 찌푸렸다.
  귀봉은 송사련의 서자로 당시의 신분 제도로선 천대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율
곡이 말했다.
   서자면 어떤가? 그는 글재주가 뛰어나고 덕행도 높다고 들었네. 함께 모여 학문을 논하
는데 적자, 서자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 때부터 율곡과 귀봉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율곡이 스물아홉 살 때는 1564년(명종 19)으로 갑자년이었다. 즉 식년과의 큰 과거가 있는
해였다.
   귀봉도 나하고 함께 과거를 보세.
   허허, 나야 어떻게 과거 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나?
  서자는 양반이라도 첩의 몸에서 난 자식이었다. 서자는 관직에 나갈 수 없음은 물론이고,
가정적으로도 매우 불행했다. 심한 경우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자네 같은 천재는 자네 개인의 것이 아니라네. 만일 자네가 과거를 보지 않는다면 나도
응시하지 않겠네.
  율곡은 너무도 순수했다. 세상의 때가 조금도 묻지 않았던 것이다.
  귀봉은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쫓아갔지만 접수조차 되지 않았다.
   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성현의 가르침 중에 적자와 서자를 가리라는 말씀이 있었
던가!
  율곡은 분개했지만 귀봉은 오히려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것이 인간사일세. 엄연한 현실이니 어찌하겠는가!
   아니야, 내가 꼭 시정하고 말겠네.
  율곡은 과거에 응시했다. 이 해 7월과 8월에 걸쳐 갖가지 과거가 있었다. 소과만 하더라도
명경과·생원과·진사과 등이 있었다.
  율곡은 진사과는 이미 급제했으므로 명경과·생원과에 도전했고, 다시 복시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했다.
  율곡은 모두 아홉 번의 과거를 보았는데, 그 때마다 모두 장원(수석 합격)하였다. 이런 일
은 일찍이 역사상 없었던 일이다.
  율곡의 장원 급제 방이 발표되었을 때 과거를 보러 모여들었던 수많은 선비들이  와아 하
고 그를 둘러쌌다. 그리고 율곡의 장원을 축하하면서 학문에 대한 문제를 여러 가지로 질문
했다.
   여러분, 저의 재주는 별것이 아닙니다. 저보다 학문이 훨씬 뛰어난 분이 있습니다.
   그게 대체 누굽니까?
   저기 있는 송귀봉이 나보다 학식도 높고 풍부한데,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과거를 볼 기
회조차 주지 않다니 딱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율곡은 이 서자 문제에 대해 관심이 컸다.
   유교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서자라 해서 아까운 재주를
썩혀 가며 일생을 헛되이 보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라 할까. 율곡의 부인 노씨가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리하여 율곡은
김씨와 이씨라는 두 소실을 두게 되었고, 그 몸에서 경림과 경정 두 아들을 낳았다. 바로 서
자이다.
  아무튼 이 큰 과거에서 율곡을 비롯한 33명의 새로운 인재가 등용되었다. 명종은 몹시 기
뻐하며 말했다.
   재주 있고 덕이 있는 신하를 구하려는 나의 지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그래서 경들
과 같은 인재를 얻었으니 나라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율곡은 호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예조 좌랑으로 전임이 되었다. 이 때의 정부
조직은 호조·이조·예조·병조·공조·형조의 6조가 있었다. 각 조에는 판서·참판·정랑
이 있고, 좌랑은 정6품 벼슬이었다.
  이 무렵, 율곡은 황장목 경차관이라는 특별 임무를 띠고 지방 시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엉망이었다. 또, 지방의 행정도 미비한 점이 많았다.
   농촌이 잘 살아야 나라 힘도 커진다. 그러자면 관리가 공정하게 일을 보고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
  때마침 농촌에선 한창 바쁜 모내기 철이었다. 율곡은 그 고을 현감에게 말했다.
   이 고을에서 일손이 제일 달리는 집이 뉘 집입니까?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모내기를 좀 도와 드리고 싶어서요.
   네, 이 공께서?
  현감은 깜짝 놀랐다. 양반이, 그것도 조정의 관리가 농민의 모내기를 도와 준다는 이야기
는 처음 듣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율곡은 웃었다.
   왜, 안 된단 말씀입니까? 나도 집이 빈한하여 어려서 모도 곧잘 심어 보았지요.
  율곡은 농민들과 더불어 땀을 흘려 가며 모를 심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농민의 노고를 알
았던 것이다.
  지방 출장에서 돌아오자, 율곡은 곧바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 정언 벼슬은 왕에게 잘
못된 점을 서슴지 않고 간언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그래서 율곡은 매우 감격했다. 직책이 너무나 무거워 사양했지만 왕의 특명이라 할 수 없
었다.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이를 솔직히 인정하고, 그를 과감하게 고친다면 어진 분이다. 이렇
듯 나를 이해해 주시는 임금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으리라.
  율곡에 대한 명종의 신임은 무척이나 두터웠다.
  서른한 살이 되던 해 겨울에는 율곡을 다시 이조 좌랑에 임명했던 것이다.
  이조 좌랑은 6조의 이른바 노른자위였다. 왜냐 하면 인사권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설명
하겠지만 이 자리를 두고서  당파 싸움 이 일어나게 되었다.
  율곡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관리들의 썩은 정신을 이 기회에 완전히 뿌리 뽑도록 하자. 사사로운 정을 이용해 벼슬하
는 자를 막고 능력있고 때묻지 않은 선비들을 등용하자!
  대윤파니 소윤파니 하고 그 동안 외척들의 횡포가 너무나 심했었다. 그래서 저 끔찍한 을
사사화도 일어나지 않았던가. 마침 명종이 분부를 내렸다.
   생원과 진사 중에서 관계에 물들지 않고 학덕이 높은 새로운 사람을 추천하라.
  왕명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많은 사람들이 율곡에게 모여들었다.
   나를 추천해 주게. 사례는 충분히 하겠네.
  집에까지 찾아와 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관 대작의 권력을 믿고서 명령조로 떼를
쓰는 사람도 이썽ㅆ다.
  그러나 율곡은 그런 것을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 공명정대하게 심사하느라고 밤잠마저 설
쳤다.
  율곡은 엄선하여 네 사람을 천거했다. 이항·성운·한수·남언경 등이었다. 명종은 율곡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들을 특채했다.
  이 때문에 율곡은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제가 뭔데 감히 내 청을 들어 주지 않아? 어디 두고 보자!
  이렇듯 율곡을 신임했던 명종은, 이듬해인 1567년 6월에 승하했고, 하성군 균이 왕위에 올
라 제 14대 선조가 되었다.
  선조는 이 때 열일곱 살이었다. 그래서 인순대비가 수렴 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왕대비의 친척으로 심통원이라는 사람이 권세를 누렸다. 율곡은 분개하고 6조의 낭
관급 연명으로 강력한 탁핵문을 임금께 올렸다. 율곡이 주모자로 글도 그가 썼다.
  이 때문에 심통원은 조정에서 쫓겨났다. 율곡은 이렇듯 행동하는 학자였던 것이다.
  선조도 율곡을 신임했다. 1568년(선조 1) 2월, 율곡의 나이 서른세 살에 사헌부 지평에 임
명되었고, 성균관의 직강을 겸했다. 직강은 성균관 학생을 가르치는 직책이다.
  이 해, 율곡은 너무도 바빴다. 4월에는 장인 노경린이 별세했다.
  임금이 새로이 바뀌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사실을 고하도록 되어 있다.
  이 해, 율곡은 사신인 천추사의 일행이 되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서장관은 외교에 관한 국서를 맡아 보는 직책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 발탁되
는 것이다.
  11월에 다시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 강릉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급한 전갈을 받았다.
율곡은 곧 왕 앞에 나아가 사직할 것을 청했다. 외조모는 이미 여든아홉살이었다. 율곡이 벼
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가자 사헌부에서는 그를 탄핵했다.
   옛날부터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는 일은 아름다운 풍속으로 얼마든지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외조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린다는 것은 아무리 법전을 뒤져 봐도
없는 일이므로 이이를 파면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러나 선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록 외조모일망정 정이 간절하면 어찌 가서 뵙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효도에 관계되는
일로 파직까지 시킬 수는 없다.
  율곡은 외할머니가 곧 어머니 사임당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정성껏 외할머니를 모시며
강릉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율곡을 찾는 소리가 높았다. 특히 선조는 율곡을 보기 위해 홍문관 부
교리로 임명하고, 급히 상경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홍문관은 대궐의 각종 문서를 다루고, 특히 임금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일도 맡고 있는 중
요한 자리였다.
   이이가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네. 참으로 빠른 출세야.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며 부러워했지만, 율곡의 생각은 달랐다. 몇 번이고 사직
할 것을 간청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율곡은 할 수 없이 관직에 있으면서  동호 문답 이란 책을 써서 임금에게 올렸다. 이것은
전부 11조목으로 된 글로, 정치의 기본 원칙과 개혁할 점을 건의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서른
네 살 되던 해 10월에 왕의 특별 휴가를 얻어 강릉으로 다시 내려갔다.
  외할머니는 아흔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율곡은 상제가 되어 장례를 극진하게 모셨
다. 그리고 다음해 4월, 이번에는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어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 해 8월에
는 맏형 선이 죽었다.
  율곡은 형님의 관을 붙들고 슬피 울었다. 율곡은 이 형님처럼 가엾은 분은 없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마흔한 살에 초시에 급제하시고, 진사가 되셨다고 기뻐하셨는데…….
  그 때, 동생인 율곡은 이미 이조 좌랑이었다. 그리고 마흔일곱 살 때 남부 참봉이라는 능
지기 말단 관리가 되었지만 그나마도 몇 달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율곡은 직접 제문을 지어 읽었고, 또 친히 묘지명을 썼다.
  율곡은 벼슬자리를 그만두고 해주 섬담으로 내려가 살았다.
   시골에 파묻혀 농사나 짓고 글이나 읽자.
  해주에서는 대장간을 직접 경영하며 호미를 만들어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당시의 양반들이 굶주려 가면서도 체면만 지키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생각이었다.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체면이 무슨 소용인가.
  해주에 있을 때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율곡은 영좌(궤연)를 마련하고 멀리 남쪽을 바라보며 곡하고 제문을 읽었다.
  서른여섯 살 때 율곡은 파주로 갔었는데 그 곳에서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왕께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신은 청소년 시절 한때 불교에 물들었던 몸이라 옥당의 중책을 맡을 자격이 없사옵니다.
신은 처음부터 벼슬에 뜻이 없사옵고, 글읽는 것으로 평생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아비가 신에게 보잘것없는 재주가 있다 하여 억지로 벼슬길에 나가도록 했사옵기에,
그 아비의 명을 어길 수 없어 과거를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 책임이 중한 옥당의 임명을 받
자옵고 생각건데 다시 초야에 묻혀 학문의 길로 나라에 봉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무
쪼록 신의 고충을 살펴 주시옵소서.
  조정에서는 다시 의정부 검상 사인, 홍문관 부응교 겸경연 시독관, 춘추관 편수관으로 불
렀지만 모두 병을 구실로 사양하고 해주로 돌아갔다.
  해주는 황해도의 감사가 있는 곳으로 수양산 남쪽에 있다. 바닷물이 두 산 사이로 살며시
들어와서 바로 앞산 뒤를 돌면서 하나의 큰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 곳에서 율곡은 자연을 벗삼아 글을 읽으며 나날을 보냈다. 선조는 이런 율곡을 원접사
로, 사간으로, 전한으로 임명하여 불렀으나 율곡은 번번이 사양했다. 선조는 탄식하며 말했
다.
   이이는 전부터 거만해서 내 명도 항상 거절하는 자이나, 그렇다고 아예 그대로 두어 썩
힐 수는 없는 인물이야.
  한편, 율곡은 해주에 오자 우계와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절친하여 농담도 잘했다.
   여보게, 율곡. 나처럼 벼슬을 아예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사양할 번거로움도 없을 게 아
닌가.
   음, 나도 자네처럼 좋아하는 학문을 연구하며 세월을 보내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계는 이렇듯 친밀했지만, 학문에서는 율곡과 의견을 달리했다. 율곡의 학문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율곡, 자네는 퇴계의  4단 7정 을 반대하는가?
   전혀 배격하지는 않지만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네.
  이처럼 율곡과 우계는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율곡은 경치 아름다운 곳을 골라  은병 정사 를 세웠다. 이것은 주희의  무의 정사 를 본뜬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율곡과 같은 인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다.
   율곡이 자꾸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니 지방관을 시키는 것이 어떨까? 한양에 오기
싫어하는 그이니까 승낙할지도 모르겠네.
  대신들은 의논하여 이번에는 청주 목사를 제수(임명)했다. 율곡도 자꾸만 사양할 수 없어
임시로 부임했다.
  율곡은 이 때  향약 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민들의 자치 능력을 키웠다.
  마을마다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사랑하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자는 미풍 양속이 향약의
목적이고, 내용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율곡의 감화는 큰 효과를 나타내었고, 청주 일대의 백성들 생활이 크게
안정되었다.

  4. 해동 공자

  1573년(선조 6), 율곡의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조정에선 정3품의 벼슬인 홍문관 직제학
으로 그를 불렀다. 이 때 그는 병을 구실로 사양했다. 선조 대왕은 크게 노하였다.
    이이가 이번에도 내 부름을 거절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가족과 친구들도 걱정하여 이번에는 왕명을 받들라고 충고했다.
   시골에 앉아 사양만 하면 황송하니 직접 전하를 뵙고 사양을 청하겠네.
  율곡은 그렇게 말하고 한양에 올라와 대궐에 들어갔다. 선조는 몹시 반가워했다.
   과인은 경을 보고 싶었소. 직제학의 일을 맡아 주시오.
  율곡은 할 수 없이 한 달 동안 직책에 머물러 있다가 또 사임을 청했다. 선조는 안 된다
고 했으나 결국 허락했다.
  그런데 율곡은 어째서 자꾸 벼슬을 사양했을까? 몸에 병이 있어서였을까?
   사람들은 오로지 과거만 생각하고 글을 읽는다.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 출세를 하려 하기
때문에 진짜 학문을 하지 않게 되고, 스스로 물러날 때가 되어도 물러나지 않으려고 한다.
  학문의 참목적은 과거 급제나 출세를 위한 도구는 아닌 것이다. 나라를 위해, 부모를 봉양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과거를 보며 벼슬하는 것까지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참으로
능력 없는 자가 단지 권세를 위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불충이고 큰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 가운데 덕행이 높은 분들은 벼슬을 자주 사양했던 것이다.
  그런데 선조는 한 달 있다가 직제학으로 율곡을 또 불렀다. 이번에는 율곡도 선뜻 나섰다.
  전국적으로 향약을 확산시키는 것에 대해 조정에서 의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문 탐구도
좋지만 율곡은 또한 조광조처럼 백성들의 생활 향상에도 관심이 컸다.
  율곡은 향약 제정에 많은 활약을 했다. 이어 그는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했다. 승정원은
왕명을 문서화하는 기관으로, 말하자면 왕의 비서실이었다. 율곡은 곧 우부승지로 옮겼다.
  이 때  만언봉사 라는 건의서를 올려 나라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즉 정치와 사회 풍
습에서 일곱 가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그 시정을 건의한 글이었다.
  1) 위와 아래가 서로 맞지 않고 있다.
  2) 신하가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는다.
  3) 모처럼 어진 인재가 있어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4) 재앙의 처리가 불충분하다.
  5) 경연에서 논의된 일이 실천되지 않는다.
  6) 백성을 위한 진정한 정책이 없다.
  7) 인심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 상소문은 정치의 근본을 지적한 것으로, 이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어 나라가 피폐돼 있
다는 것이었다.
   경의 글은 요순 시절의 임금과 신하의 뜻과 똑같은 참으로 좋은 글이오. 경과 같은 신하
를 가진 내가 좋은 정치를 못 해서야 되겠소.
  왕은 율곡을 칭찬했지만, 다른 관료들은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고치려 하지 않
았다.
  1574년(선조 7) 3월, 선조는 율곡을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했다. 그 때 율곡의 나이 서른아
홉 살이었다.
  대사간이 되었지만 율곡은 아주 가난했다. 그가 벼슬을 사양하며 파주에 있을 무렵의 일
이다.
  어느 날, 최황이란 사람이 율곡을 찾아왔다. 그럭저럭 점심때가 되어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밥상을 보니, 간장 한 종지가 덜렁 있을 뿐 반찬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최황은 젓가락을 들기는 했지만 집어먹을 것이 없어 마침내 한 마디 했다.
   이렇듯 곤궁하게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반찬도 없이 진지를 잡순대서야…….
  그러자 율곡이 껄걸 웃었다.
   나중에 해가 지고 난 뒤 먹으면 맛이 있네!
  비단 율곡뿐 아니라 당시의 선비들은 거의가 가난했다. 벼슬아치라도 청렴한 사람은 가난
하게 살았다.
  퇴계 이황도 그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선비로서 가난은 으레 있게 마련이다. 이 아비는 그것 때문에 남의 비웃음도 받았다. 하
지만 마음을 견고하게 가졌을 때 그런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율곡은 새어머니 권씨, 그리고 홀로 된 맏형수와 조카들까지도 부양하고 있었다.
  율곡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당시의 양반 풍습으로 첩을 두는 일은 보통이
었다. 그래서 첫 번째로 김씨를 소실로 맞았다. 그런데 김씨마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용인
이씨를 둘째 소실로 맞아, 율곡이 서른아홉 살 때 서자인 첫아들 경림을 낳았다. 또, 이어
딸을 낳았는데 자라서 신독재 김집의 소실이 된다.
  이 신독재는 율곡의 제자 사계 김장생의 아들로, 학자로 이름을 남겼다. 아무튼 노씨 부인
은 이런 두 소실을 누이처럼 대하며 가정 풍파를 일으킴이 없이 지냈다.
  그 해 10월에, 율곡은 황해 감사가 되었다. 그러자 재령 군수가 쌀을 보내 왔다. 군수는
최립이란 사람으로 뇌물로 보낸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의 친구였기 때문에 우정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호통을 쳐 쌀가미를 받지 않고 돌려보내 버렸다. 가족들은 양식이 다 떨어
졌던 차에 몹시 다행이라 생각했다가 율곡이 이를 쫓아 보내니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율곡은 가족들을 타일렀다.
   국법에 장물을 주고받는 죄는 아주 엄격한 것이다. 우리 나라 수령이 나라 곡식이 아닌
다음에야 따로 무슨 곡식을 얻을 수 있겠느냐? 더욱이 이 최 군수는 제것이 있는 사람이 아
니다. 분명 나라 곡식을 보내 주었을 터인즉 내가 어찌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대로 배
고픈 채 사는 것이 훨씬 낫다!
  율곡은 감사가 되면서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썼다. 또,
해안 경비를 굳게하여 국방과 치안을 강화했다. 그러는 한편, 스스로 교화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율곡은 도백(관찰사)이면서도 가난하게 살았다. 그의 생활은 아주 검소했고 엄격했다. 때
문에 탐관 오리들이 민폐를 끼치던 악습이 꼬리를 감추었다.
   이번 감사는 과연 명감사야! 이제 우리 황해도 사람들도 잘 살게 되었네.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잘 따르기만 하면 되네. 예전에는 거짓말이 많았는데, 지금은 감사
께서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안심일세.
  이러한 도민들의 존경심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율곡은 항상 백성들의 이익을 염
두에 두고 행정을 폈다.
   나라의 은덕, 임금의 은혜를 말로 한다고 백성들은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백성의
의식주부터 나라가 책임져 주어야 한다. 백성의 재물을 앗아 가는 나라를 어느 백성이 고맙
게 생각할 것인가.
  율곡은 세금을 감해 주고, 황해도에서 조정에 바치는 특산물도 그 종류와 수량을 줄이도
록 임금께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율곡은 두 가지 낙이 있었다. 한 가지는 황주에 사는 둘째 누님네
집을 찾아가 하룻밤 자면서 남매의 정을 푸는 일이었다.
  특히 이 누님과는 어려서 함께 싸우며 자랐기 때문에 정이 깊었다.
   동생은 이제 감사님인데, 워낙 누추해서 대접할 것이 있어야지.
  누님은 기뻐하면서도 그런 걱정을 했다.
   누님,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장차 벼슬을 내놓고 해주 수양산 석담에 집을 짓
고 우리 형제들이 모두 함께 모여 사는 게 소원입니다.
  율곡은 이렇듯 우애가 깊으며, 바쁜 공무를 틈타 수양산 골짜기 석담을 찾아가 그 곳 경
치를 둘러보는 것을 큰 낙으로 삼았다.
  이듬해 마흔 살 때 율곡은 관찰사를 그만두고 파주로 돌아가  성학집요 를 엮어 왕께 올렸
다. 이 책은 옛 성현의 말 가운데서 학문과 정치에 필요한 구절들을 뽑아 편찬한 것이었다.
왕의 정사에 참고가 되기 바라는 율곡의 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율곡은 전보다 더욱 벼슬자리에 있기 싫었다.
  1574(선조 7)에  당파 싸움 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제자 김효원은 학문이 높아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심의겸이 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이조 전랑 자리는 아주 중요한 직책인데, 공정치 못한 사람이 앉는다면 부당하오!
  전랑이란,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특별히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전랑이 조정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했다. 직책은 낮지만 3정승도,
판서도 가지지 못한 엄청난 인사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심의겸은 또 말했다.
   김효원은 일찍이 소윤파의 윤원형 집 사랑방에 자주 드나들었소. 선비로서 세도가의 비
위나 맞춘다면 그 인격이 의심되오.
  결국 김효원은 그 직책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몇 년 뒤, 이번에는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조 좌랑에 추천되었다. 그러자 김효원 등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했다.
  이래서 심의겸과 김효원은 원수지간이 되어 버렸다.
  김효원은 한양 동쪽의 낙산 아래 살았기 때문에 그 파를  동인 이라 불렀고, 심의겸은 집
이 한양 서쪽의 정동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 이라 불렀다.
   참 한심하다.
  율곡은 공정한 입장에서 당파 싸움을 말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당파는 자꾸 커졌고, 대
신들도 속속 여기에 가담했다. 또, 뜻있는 사람은 아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기도 했다.
  율곡은 우의정 노수신을 찾아가 의논했다.
   지금 심의겸과 김효원이 당파를 만들고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썽의 원인인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도록 하십시오.
  노수신도 율곡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왕께 상주하여 1575년(선조 8) 10월, 심
의겸은 개성 유수, 김효원은 먼 함경도의 부령 부사로 발령을 냈다.
  그러나 이것이 또 말썽이었다.
   어떤 사람은 한양에서 가까운 개성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함경도 두메 산골에 보내는
법이 있는가!
  율곡은 중간적 입장에서 선조께 건의했다.
   김효원의 임지를 바꾸어 주는 게 좋을 듯싶사옵니다.
  그래서 선조는 다시 김효원을 삼척 부사로 옮겼다. 그러나 율곡의 이런 노력은 허사였다.
  1576년 봄, 마흔한 살의 율곡은 벼슬을 그만두고, 해주 석담으로 낙향했다.
  석담은 율곡의 마음에 꼭 드는 곳으로, 산 좋고 물 좋고 세상의 온갖 잡념을 잊을 수 있
는 곳이었다.
  그는 그 곳에  청계당 이라는 집을 짓고, 다음해 정월 형제들과 가족 전부를 그 곳으로 오
도록 하였다. 어렸을 때 읽고 감명받았던  이륜 행실도 속의 주인공 장공예처럼 살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 형 번은 호가 정재였다. 시가 한 편 남아 있어 그의 학문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동생 우는 호가 옥산이었다, 율곡보다 여섯 살 아래로 덕산 황씨 집에 장가들었다.
스물두 살 때 생원이 되었고, 경기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여러 곳의 현감을 지냈다.
  율곡은 가족이 함께 살게 되자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가훈을 정했다.  같이
살며 서로 경계하는 글 이 그것이다.
  율곡은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언젠가 연시가 선물로 들어왔다. 부인이 손님과 함께 있는 율곡에게 연시 쟁반을 들여 보
냈다.
   한 개 드시지요.
  율곡은 손님에게 하나 권하고, 자기도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 종을 불러 일렀다.
   나머지는 노마님께 갖다 올려라.
  그런데 조금 있더니 안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율곡은 방문을 열고 귀를 기울였다. 새어머
니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먹고 싶은데 다 먹지, 왜 안으로 들여 보냈느냐!
  율곡은  아차!  싶었다.
  무슨 음식이고 어른에게 일단 보이고 그 허락을 맡고서 먹는 게 도리였다.
  율곡은 손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손님이 먹으려던 것과 자기가 먹으려고 집어들었
던 두 개를 가지고 안에 들어가서 새어머니께 공손히 말했다.
   제가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해 주시고 잡수시기 바랍니다.
  마흔두 살 되던 1577년 12월에,  격몽 요결 이라는 책을 지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읽히려
고 역사책과 예의 등을 풀이한 책이었다.
  한편, 율곡이 석담에 터를 잡고 살게 되자 많은 선비들이 몰려들어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
나 율곡의 집이 비좁아 그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
   선생님, 저희가 배울 학당은 저희가 세울 테니, 선생님은 터나 잡아 주십시오.
  이래서 율곡은 제자들을 데리고 석담의 아홉 굽이 골짜기를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곳을 정하였는데, 청계당 동쪽에  은병 정사 라는 학당이 세워졌다.
   나도 조금은 보태야 한다.
  그는 언젠가처럼 대장간을 경영하여 농기구를 만들고, 사창 제도도 실시하여 가난한 농민
들을 도왔다.
  이어 율곡은 마흔세 살 때 유명한  고산 구곡가 라는 시조를 지었다. 이것은 주자의  무이
도가 를 본떠서 지은 것으로, 학문에 임하는 그의 마음가짐을 노래한 것이었다. 또, 은병 정
사 뒤에 주자묘를 짓고, 율곡이 숭배하는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을 모실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갑작스런 조정의 소환이 있어 중지되었다.
  율곡이 석담에 있는 동안 당파 싸움이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특히 동
인은 젊은 벼슬아치들이 많았는데, 자기네들의 우두머리인 김효원을 먼 곳으로 보낼 때 적
극적으로 막아 주지 않았다 하여 노수신과 율곡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인이야. 그들이 정말 중립파라면 공평하지 못한 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게 아
닌가.
  그 무렵, 동인 이발이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또, 이 때 선조의 신임을 받는 신하로 수
찬 벼슬에 있던 학봉 김성일은 경연의 자리를 빌려 서인을 은밀히 공격했다.
   지금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욕심이 많고 타락을 하여 걱정이옵니다.
  그러자 초당 허엽이 옆에 있다가 한 술 더 떴다.
   윤두수는 진도 군수로 있으면서 이주라는 자가 주는 쌀을 뇌물로 받아 먹었답니다.
  이것은 완전히 인신 공격이었다. 이발은 이발대로 부추겼다.
   말씀 마십시오. 윤두수의 아우 근수와 그의 조카 현은 모두 음흉하고 간악한 자들입니
다.
  그러나 동인들의 서인 공격은 율곡의 친구 김계휘의 상소로 실패하고 말았다. 김계휘는
어진 사람으로 누구나 그 덕망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발은 공격 목표를 바꾸었다. 송강 정철을 탐관 오리로 몰았다.
  율곡은 석담에 있으면서 이런 동서의 당파 싸움을 걱정했다. 그는 이발과 송강 정철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두 분이 힘을 합하여 나라일에 힘쓰시오. 두 분이 싸우면 나라일이 어찌 되겠소?
  이런 편지를 10여 차례나 했다. 송강은 율곡의 간곡한 편지에 답장을 보냈으나 이발은 답
장조차 하지 않았다.
   율곡도 서인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그한테 편지를 해.
  이런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율곡을 마구 헐뜯었다. 1578년(선조 11) 3월, 율곡은 다시 대사
간으로 임명되어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율곡은 사양했지만 5월에 다시 부르자  만언소 라는
것을 임금께 올렸다. 1만 자에 이르는 상소문이란 뜻이다.
   상감마마께서 신을 쓸 만한 자라고 생각하시오면 마땅히 시국에 관한 일을 물어 주십시
오. 만약 쓸 만한 인품이 못 된다고 생각되면 다시는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뒤, 계속해서 6월에도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어도 취
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마흔네 살 되던 3월, 율곡은  도봉 서원기 를 지었다. 이 해에 5월에도 다시 대사간
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1580년 12월, 다시 대사간에 임명된 율곡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한양에 올라왔다.
  선조는 당파 싸움의 와중에서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이 무렵은 동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
지만, 율곡과 같은 중립적 인물이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주기를 바랐
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러 번 사퇴했지만 계속 율곡을 대사간으로 불렀던 것이다.
  선조는 이 때 중병을 앓고 난 뒤였다. 율곡을 보자 선조는 말했다.
   경을 오래도록 만나지 못해서 매우 섭섭했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말하
시오.
  선조는 그 동안 율곡의 말이 너무 솔직하고 강경했기 때문에 오해도 했고, 감정도 가졌었
다. 또한 소인들의 모략으로 그를 오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율곡의 말이 모두 옳았다.
   상감께서 보위에 오르실 때에는 백성들이 태평 성대의 어진 정치를 한결같이 믿고 따랐
습니다. 그러나 그 뒤의 정사에 있어 영단을 내리시지 못하셨기 때문에 조정은 당파 싸움으
로 혼란을 거듭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천하의 인심을
바로잡을 어진 정치를 베푸셔서 인심이 감격하여 분발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율곡은 당당한 대사간의 자격으로 임금의 귀에 아픈 말을 솔직하게 아뢰었다.
   경의 말을 명심하겠소.
  1581년(선조 14) 6월, 율곡은 사헌부 대사헌으로 특별 승진되었다. 그리고 10월에는 호조
판서, 이듬해 정월에는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율곡은 어느 자리에 앉아도 막힘이 없이 일을 해 나갔다. 또, 조정의 어느 관청이고 율곡
을 필요로 했다.
  그는 바쁜 공무의 틈을 타서 저술에도 힘을 기울였다.  인심도심설 · 김시습전 · 학교모범
및 사목  등이 이 무렵에 씌여졌다.
  이듬해 8월에는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었는데, 또다시
 만언소 를 올렸다.
  10월에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원접사가 되었다. 율곡은 압록강이 굽어보이는 의주까
지 가서 명나라 사신 황홍헌과 왕경민을 영접했다. 그들은 율곡의 이름을 듣자 깜짝 놀랐다.
   선생이 바로  천도책 을 쓰신 분입니까?
   네, 그렇소만…….
   선생의 학설이 너무도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지요. 그리고 선생의  기발 이승
도설 은 왕양명의  이기일원설 과 비슷한 데가 있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답니다.
  조선조 초기부터 명나라 사신이라면 교만하고 행패를 잘 부리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
들은 상국의 사신이라 뽐내면서 조선에 왔다가는 것을 한밑천 잡는 기회로 알고 있었다.
  왜냐 하면 금과 고려 인삼 등을 선물로 잔뜩 받아 가지고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홍헌은 율곡의 인격과 명성을 두려워했음인지 조금도 교만하지 않았다.
  율곡은 돌아오는 길에 둘째 누님 집에 들러 또 하룻밤을 즐겁게 보냈다. 누님과 조카들과
어울려 시간 보내는 것이 그로서는 어떤 고관 대작과 함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마음 편하고
즐거웠던 것이다.
  원접사 일을 무사히 끝내자,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병조 판서에 임명했다.
  율곡은 그 직책을 사양했다.
   저는 문관으로, 더구나 글을 읽던 선비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조 대왕은 말했다.
   경은 늘 모든 정치를 개혁하려고 주장하며 애써 오지 않았소? 지금 우리의 군비는 말뿐
이고, 미비한 점이 너무도 많소. 그러니 경이 꼭 맡아 주기 바라오.
  율곡은 왕의 이런 간곡한 부탁을 듣고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율곡이 병조 판서에 취임하고 보니, 국방 문제가 아주 시급함을 알았다.
  우리 나라의 국방은 주로 북쪽이었다. 남쪽은 별로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북방에는 예로
부터 여진족이 있어 그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일이 잦았다.
  이 때, 함경도 경원부 아산보 방면에는 오을진대, 종성에는 율보리, 회령에는 나탕계가 있
어 말썽을 피웠다.
  율곡은 병조 판서에 취임하자, 군사들의 조련을 실시하는 한편 무기를 점검토록 했다.
  그런데 군사들은 늙고 게을러 거의 쓸모가 없었다. 또 칼이나 창은 녹슬어 있고, 활은 시
윗줄이 끊어진 채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대체 전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술이나 마시고 군사들에게 호통만 치고 있
었는가?
  그러나 전임자를 나무라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폐단을 뜯어고치기 위해 자신이 병조 판
서가 되었던 게 아닌가.
  율곡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며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늙고 게으른 군사에게 엄격한 훈련을 시키는 것은 결국 늙
은 말에 채찍질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율곡은 각 고을에 의용군을 모집하는 방을 내붙였다.

   나라를 지키는 일을 위해 싸움에 출정하는 자에게는 종전에 금했던 서자 출신에게도 과
거를 볼 자격을 주겠다. 또, 종의 신분을 가진 자도 평민으로 신분을 올려 주겠다.

  이것은 물론 율곡이 짜낸 지혜로 임금의 허락을 받은 일이었다.
  이는 율곡이 평소부터 품고 있던 생각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1) 서자라도 사회 발전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2) 공사의 노비들에게도 유능한 자에게는 속량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율곡의 이 개혁안에 의해 일부 병력이 증강되었다. 동시에 인간 차별의 폐단도 많이 고쳐
갔다.
  율곡은 또 선조께  시무 육조 방략 이란 것을 건의했다. 이것은 시급히 개선할 6가지 정책
이란 뜻이다.
  1)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할 것.
  2) 군대와 백성을 교화할 것.
  3) 재정을 풍족하게 할 것.
  4) 병영 시설을 견고하게 고칠 것.
  5) 전쟁에 필요한 말을 준비할 것.
  6) 교환을 선명히 할 것.
  선조는 율곡의 이 건의를 흔쾌히 받아 들여 비변사(최고 군사기관)에 명하여 빨리 실시하
라고 지시했다.
   병조 판서의 육조 방략은 나라를 위한 지성에서 나온 현명한 정책이다. 위로 공경 대부
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사를 위해 힘쓰면 저
절로 나라가 다스려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니 악습을 고치려 해도
헛일이 될 것이다.
  선조 대왕의 말처럼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모든 사람이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
다.
  율곡이 병조판서가 되면서 눈에 띄게 국방력이 강화되었다. 신립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도
이 때 활약했던 분들이다.
  그러나 이런 국방 정책에 코방귀를 뀌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율곡은 그런 사
람들의 비웃음을 귓가로 흘려 버리고 맡은 일에 충실했다.
   이번에 오랑캐를 무찔러 군대의 사기가 전보다 오른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도 교대하는 예비병력이 없습니다. 또, 지금 있는 군대도 대우가 형편 없습니다. 이들의 대
우를 개선해 주고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전쟁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율곡이 지적한 폐단은 많았다. 예를 들면, 무과에 급제한 무반의 자제들이 군법
에 제정된 대로 일선에 나가서 근무하는 것을 꺼리고, 후방의 편한 군무만을 탐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율곡은 무반들의 미움을 샀다. 그러나 미움을 샀다고 주춤한다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특히 율곡은 유명한 국력 배양 10년 계획을 경연에
서 발표했다.
  이 계획은 이른바 10년 동안 산업을 부흥시켜 양곡을 비롯한 물자를 비축할 것, 국민의
문화와 도의심을 향상시키기 위해 10년 동안 교화 운동을 계속할 것,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10년 동안의 양병(군사를 기름)을 단행할 것 등으로 율곡은 이를 강력히 주장했다.
  율곡은 10년 저축, 10년 교화, 10년 양병의 3대 계획 가운데 자기의 소관인 10년 양병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지금 나라의 형편이 극도로 피폐해서 말이 아닙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10년을 못 가서
파멸되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나라의 힘이 약해지면 외국에게 침략할 기회를 주게
됩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10만의 정병을 양성·훈련시켜 국방을 튼튼히 하는 것이 무엇보
다 시급합니다. 10만의 정병을 양성하여 2만명을 한양에 두고, 8만 명은 8도에 각 1만씩 배
치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측할 수 없는 변란을 미리 예방하고 대처함은
긴급한 일이옵니다.
  선조는 율곡의 계획을 옳게 여겼다. 그러나 이 때 서애 유성룡이 율곡의 계획을 반대했다.
   지금 같은 태평 성대에 그와 같은 대군을 양성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화근을 만들 염려가
있습니다. 또, 국가 재정상 그렇게 많은 돈을 충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율곡의 이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일을 시행하려면 우선 임금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 대왕은 애당초 당
쟁을 강력히 제압하는 결단력이 없었던 것처럼 매사에 우유 부단했다.
   유성룡의 말도 그럴 듯하다. 나중에 또 의논토록 하겠소.
  이렇게 되자 율곡은 병조 판서를 사임하려고 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판서직에 머무르며 병무 행정을 개혁하는 데 온 정력을 기울였다.
  이윽고 율곡은 또다시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정치 개혁에 대한 내용이었다.
  1) 동서 양당을 조절하여 화합하게 할 것.
  2) 과거에 급제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사라면 대간(사헌부나 사간원의 벼슬아치)으로 임명
할 것.
  3) 공안(나라에 바치는 곡물 제도)을 개혁할 것.
  4) 군적(군인들의 인사 기록)을 정비 개량할 것.
  5) 고을을 합쳐 행정 구역을 줄일 것.
  6) 각 도의 감사를 자주 바꾸는 폐단을 없애고 일정기간 이상 유임할 것.
  7) 서자라도 과거 볼 길을 열어 줄 것.
  8) 천한 사람이라도 무예와 용기가 있는 젊은이는 군인으로 쓸 것.
  율곡은 이밖에  찬집청 이라는 관청을 새로 설치했다. 이것은 왕조의 지난 역사를 편찬하
는 기구였다.
  그는 또 선조에게 글을 올려 쓸데없는 벼슬자리로 녹봉만을 축내는 여섯 관직을 가려 내
어 폐지하도록 했다.
  비록 결단력이 약한 왕이었으나 선조 대왕의 율곡에 대한 신임은 두터웠다. 유독 율곡에
게만은 밤중이라도 특별히 만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율곡을 시새워 공격하는 소인배도 있었다. 율곡이 너무도 총명하고 강경하여
미워했던 것이다.
  마흔여덟 살 때의 6월이었다.
  함경도 변경에 오랑캐들이 침입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율곡은 즉시 한양에서 활 잘 쏘
는 장정을 뽑아 급히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 군사들을 먼 함경도까지 급히 보내자면 말이 필요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말
이 많이 부족했다.
  율곡은 너무도 급하고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병조판서의 직권으로 특별한 명령을 내렸
다.
   군마를 헌납하는 자에게는 그 대가로 병역 면제의 특전을 주겠다.
  임기 응변의 방법이다. 율곡은 이 방법으로 부족한 군마를 조달하여 군사들을 급히 출정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병조 판서 이이는 무단으로 법을 어겼고, 월권 행위를 했습니다. 그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합니다.  하고 소인배들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삼사(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대간들이 모두 동인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율곡을 탄핵했다. 선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율
곡은 마침내 인책 사임을 받았다.
  율곡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대궐에서 물러나오다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며 졸도하
고 말았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놀라며 달려왔다. 곧 율곡을 업어 방 안에다 눕히고 시의를 불러 응
급 조치를 했다.
  선조도 이 소식에 깜짝 놀랐다.
   나라의 위급한 일로 밤잠을 못 자고 과격한 업무에 시달려 피로한 까닭이다. 곧 전의를
보내서 진맥토록 하라. 그리고 깨어나거든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도록 하여라.
  율곡은 파주로 갔다가 다시 해주 석담으로 갔다.
  그런데도 율곡에 대한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지난날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율곡의
탄핵을 받았던 송응개·허봉·박근원 등이 공격에 앞장섰다.
  선조는 이런 탄핵 상소에 교서를 내렸다.
   요즘 이이에 관한 일로 대간들이 과격한 탄핵을 하며, 그는 나라를 그르치는 자라고 하
나 그것은 심한 비난이다. 이이가 신진(젊은 세력)을 억누르려고 했다고 하지만, 이는 그의
참뜻이 아니다. 다만 신진들이 작당하여 세도를 잡으려는 것을 미워했을 따름이다. 다시는
그를 헐뜯지 마라.
  이이를 공격하는 무리 못지않게 율곡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계 성혼은 삼사의 잘못을 들어 상소하였고, 태학생·호남 유생·해서(황해도) 유생들이
물밀 듯이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정에서도 율곡을 그냥 물러나게 할 수가 없어 9월에
는 판돈령부사 겸 이조 판서에 임명했다.
  하지만 율곡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듬해인 1584년(선조 17) 1월 16일, 한양 대사동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그의 나이 불과 마흔아홉 살이었다.
  그는 10일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북방으로 가게 된 서익이 그를 찾아왔다. 율곡은
아픈 몸을 일으켜 그를 맞았다.
  서익은 간곡히 청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방략을 가르쳐 주십시오.
  율곡은 생각나는 대로 띄엄띄엄 방략을 일러 주었고, 옆에서 가족이 이를 받아 썼다. 서익
은 기뻐하며 그것을 받아가지고 돌아갔는데, 이 때문에 병이 더해졌다고 한다.
  또, 정철이 문병을 오자 율곡은 간곡히 부탁했다.
   송강, 사람을 쓰는 데 있어 결코 편파적으로 해서는 안 되네.
  송강은 술을 잘 마시고 호탕한 성격이었다. 그는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이 공, 내 걱정은 마시고 어서 병석에서 일어나시구려.
  율곡은 정철이 다녀간 다음 날 새벽,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의관을 바로 한 뒤에 조용
히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의 애통해하며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그뿐 아니라 사흘 동
안 조회를 보지 않았고, 친히 제물을 내려 율곡의 장사룰 후히 지내도록 분부하였다.
  제문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정성을 다 바쳤으니 그대 무엇이 슬프리오. 물 가운데서 노를 잃으니 나야말로 애통하도
다.
  왕뿐 아니라 각지에서 선비들이 모두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비통하게 여겼다. 또, 아래
로 군인들과 시골 농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눈물을 흘렀다.
  뿐만 아니라 태학생들은 물론이고, 삼의(내의원·전의감·혜민서) 생도들과 각 관청 관리
들도 모두 와서 조상했고, 혹은 길에 모여서 슬피 울기도 했다.
  그의 상여가 한양을 지나 파주로 가는 동안, 거리를 가득 메운 백성들의 울음소리는 하늘
에 닿았다. 또 금군(대궐 호위병)과 시민들이 모두 와서 횃불을 들었는데, 불빛이 도성 바깥
수십 리에 걸쳐 이어졌다.
  율곡 이이는 그의 부모님이 묻혀 있는 파주의 자운산에 고이 묻혔다.
  율곡이 만년에 살았던 해주 석담 구곡은, 해주에서 서쪽으로 40리쯤 떨어진 풍경이 아름
다운 곳이다.
  수양산의 한 가닥이 서쪽으로 달려 선적봉이 되었고, 봉우리의 서쪽 수십 리에 걸쳐 진암
산이 있는데, 거기서 물이 흘러나와 아홉 번이나 굽이굽이 꺾여 4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
다.
  굽이마다 못물이 깊고 우연히도 중국의 주자 유적지인 무이 구곡과 비슷하다 하여 옛 선
비들이 구곡이라 불렀다.
  고산면 석담은 바로 다섯 번째 굽이의 이름이며, 제자 박연룡 등을 시켜 그 곳에 정사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중국 무이산 대은병의 뜻을 빌려  은병 정사 란 이름을 지었는데, 이 곳
은 조선조 시대 도산 서원과 더불어 선비들이 동경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특히 이 정사 뒤쪽에 사당을 지어 벽에는 주자를 모시고, 양면에는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 두 분을 모시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다가 율곡이 돌아간 2
년 뒤인 1586년 제자들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받들었다.
  율곡 이이의 제자로는 김장생·조헌·정엽·이귀·이정립·최전·최선·서성·안민학·박
여룡·조광현·유삼등을 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사계 김장생이 가장 뛰어났고, 아들인 김집을 비롯해 우암 송시열·송준길·윤
선거·남구만·민유중 등이 빼어났다.
  율곡은 해동의 공자라 일컬어질 만큼 퇴계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큰 자랑이다.
  이렇듯 위대한 분이었으나 가난했던 가정 형편은 율곡이 별세하던 날 뚜렷이 드러났다.
높은 벼슬을 지낸 그였건만, 남은 재산은 아무것도 없었다.
  율곡이 죽은 뒤 남은 처자들은 집이 없어 이리저리 이사를 다녔고 끼니도 잇지 못해 친구
들과 유지들이 돈을 모아 남은 가족을 위해 한양에 집을 한 칸 마련해 주어 정착시켰다.
  더욱이 율곡에게는 적자가 없었으나, 율곡이 생전에 남긴 덕행으로 나라에서도 특별히 편
의를 보아 주었다.
  노씨 부인은 남편의 궤연을 모시고 3년상을 치렀고, 그 뒤 해주에 가서 살았다.
  율곡이 별세한 지 8년 뒤, 국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한양을 향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은 노씨 부인은 자녀들과 조카들을 불러 모은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디 병이 있는 사람이라 말을 타지 못할뿐더러, 왜적들이 전국에 퍼져 올라오니
어디 가서 살 곳을 찾겠느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타향에서 쓰러지는 것보다 차라리 파
주 산소 옆에서 세상을 마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너희들은 내 걱정 말고 모두들 피난했다
가 뒷날 평정된 뒤에 파주 산소 곁에 뼈나 잘 묻어 다오.
  가족들이 극구 말렸으나 부인은 웃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임진년 4월 그믐, 선조 대왕
이 의주로 파천한 뒤 부인은 자기 뜻대로 신주를 모시고 파주 묘소로 갔다.
  거기서 마침내 왜적들을 만났다. 부인은 자기의 결심대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왜적
들에게 항거하다가 놈들의 잔인한 손에 죽임을 당했다. 5월 12일로, 노씨 부인의 나이 향년
쉰두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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